‘살림’의 과학과 커먼즈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에 2013년 5월 28일자로 게시된 글 “The Science of “Enlivenment” and the Commons”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내용의 전달을 위주로 했으며 세부에 완벽을 기하지는 못했다. 일부 중요한 용어들의 우리말 번역어는 잠정적으로 택한 것으로서 해당 분야의 전공자들이 사용하는 것과 다를 수도 있다.
‘살림’의 과학과 커먼즈
2013년 5월 28일
지난주에 열린 <경제학과 커먼즈 컨퍼런스>에서 있었던 도발적인 논의 가운데 하나는 사회적 다윈주의와 자유시장경제학을 혼합한 ‘바이오경제학’ 내러티브에 대한 안드레아스 베버의 비판이다. 바이오경제학은 현재의 경제사상, 공공정책, 정치학에 기본이 되는 세계관이다. 문제는 최근의 생물학 발전에 비추어 볼 때 이 내러티브가 심각하게 잘못되었다는 데 있다.
더 나쁜 것은 그것이 자연계와 삶 자체에 대한 더 정확한 설명의 출현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과의 새롭고 더 존중할만한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위축시키고 있다. 베버는 그 대신에 ‘인간 이상(以上)의 세계’(more than human world)라는 상이한 비전을 가리키고 우리의 정치경제를 조직하는 커먼즈 기반의 방식을 가리키는 ‘살림’(enlivenment)이라는 새로운 이야기를 제안한다.1
베를린에 기반을 둔 독립 연구자 안드레아스 베버는 이론생물학자이며 생태철학자이다. 그는 ‘의미로서의 삶’(life as meaning)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탐구하는데, 이는 ‘바이오기호학’(biosemiotics)이라고 알려진 생물과학들에서 하위 분야에 해당한다. 그 아이디어는 이렇다. 살아있는 유기체들은 외부의 다양한 비인격적인 힘들에 반응하는 단순한 자동기계들이 아니라 본래적으로 창조적이고 의미를 만들어내는 유기체들이며, 여기서 그 주체성과 의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실로 우리의 주체성이야말로 생물학적 진화의 불가결한 부분이라고 베버는 주장한다.
베버의 「살림― 자연, 문화, 정치라는 개념들의 근본적인 전환을 위하여」(“Enlivenment: Towards a Fundamental Shift in the Concepts of Nature, Culture and Politics”)가 막 하인리히 뵐 재단에서 출판되었다. 이는 여기서 다운받을 수 있다. (털어놓기 : 나는 이 텍스트에 대해서 베버에게 편집상의 조언을 좀 주었다.)
전통적 생물학에 대한 베버의 불만은. 그것이 다름 아닌 삶(life)을 연구하기를 거부하는 데 있다. 전통적 생물학은 개인, 합리성, 경쟁이라는 계몽주의의 범주들에 너무 집착하고 있으며 삶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대답을 주는 것은 고사하고 그 문제를 다룰 수조차 없는 환원주의적 논리를 고집한다는 것이다. 베버는 유기체가 “주체적 경험을 가지고 있고 의미를 생산하는, 물리적 차원 이상의 차원에 있는 정감을 가진 존재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현재의 생물과학들은 다음의 물음들을 묻지 않는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우리의 내적 욕구는 무엇인가? 자연의 질서와 우리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아니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직접적인 욕구를 위해서 혹은 시장을 위해서 어떻게 물건들을 생산하는가? ······ 삶이란 무엇이고 거기서 우리는 무슨 역할을 하는가?”
다윈주의와 자유시장경제학을 결합한 ‘바이오경제학적 세계관’은 개인들, 경쟁, 효율, 성장이 자연의 전부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베버는 이 기본 전제는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생물권(biosphere)은 효율적이지 않다. 온혈동물들은 97퍼센트 이상의 에너지를 오직 신진대사를 유지하기 위해서 소비한다. 광합성은 7퍼센트라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낮은 효율을 달성한다. 물고기, 양서류, 곤충들은 수백만 개의 알을 낳는데 이 가운데 매우 소수만이 생존한다.”
생물권은 항상 증가하지도 않는다. 생물매스(biomass)의 양은 상당히 불변적이다. 경쟁이 새로운 종의 발생에 박차를 가한다는 것이 입증된 적도 없다. “종들은 우연에 의해 탄생한다. 종들은 뜻밖의 변이를 통해, 그리고 공생과 협력을 통해 개체군으로부터 한 집단이 두드러지는 것을 통해 발전한다······” 바이오경제학자들이 말하는 바처럼 자원의 희소성이 종의 창조적 다양화를 낳는 것이 아니다. 자원의 희소성은 다양성과 자유의 궁핍화를 낳는다.2
그런데 만일 표준적인 다윈주의적 내러티브가 불완전하고 그 방향이 비뚤어져 있다면 어떻게 우리는 진화와 삶 자체를 더 정확하게 설명하기 시작할 수 있을까? 베버는 자신의 대안을 ‘살림’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깊이 뿌리를 내린 ‘계몽’의 형이상학을 ‘업그레이드’한 것임을 의미한다. 우리는 개인의 합리성과 경쟁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그가 ‘의미로서의 삶’이라고, 혹은 ‘바이오시학’(biopoetics)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이야기로 보강해야 한다. 새로 출현하는 생물학의 새로운 상(像)에서는 (점점 더 경험적 연구에 의해 확인되는 바이지만) “유기체들이 더 이상 유전자 기계로 간주되지 않으며 기본적으로 스스로를 산출하는 물질적으로 구현된 과정들로서 간주된다. 각 세포는 ‘하나의 정체성을 창조하는 과정’이다. 가장 단순한 유기체도 자신을 손상 받지 않게 유지하고 성장하며 발전하여 스스로 더 충만한 삶을 창출하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물질적 체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삶은 움직일 수 있을 뿐 수동적인 물리적 물질(inert physical matter that is animate)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에 해당한다. 그 요체는 “스스로를 산출하는 의미심장한 자아”이다. 삶은 특수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한 주체적/물질적 과정에 해당한다. “스스로를 손상 받지 않게 유지하고자 하는 체계는 자동적으로 관심들, 일단의 관점들을 발전시킨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자아를 발전시킨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신체를 가진 주체가 된다.” 삶 자체는 주체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결합시킨다는 점에서 역설이지만, 그 역설이 삶의 본질에 핵심적이다.
진화와 살아있는 체계들에서 중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힘으로서의 주체성―이것이 ‘살림’ 뒤에 있는 근본적인 아이디어이다. 우리의 내적 삶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내적 삶은 진화의 거대한 서사에서 주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본질적인 추동력이다. 만일 시장경제학과 근대가 우리의 주체성과 정신성을 마치 흔적기관처럼 주변적 관심의 대상으로서 제쳐놓았다면, 바이오시학은 우리의 주체성이 진화하는 유기체로서의 우리의 창조성과 자유에 핵심적이고 삶 자체의 거대한 전진에 핵심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가 경제학을 개념화하는 방식에 광범하게 영향을 미치는 함축을 가진다. 자연을 우리가 원하는 목적을 위해 조작할 수 있는 수동적인 죽은 물질로 보면 안 된다. 우리는 ‘자연’이 타자가 아니라, 즉 인간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전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어떤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자연은 오픈소스 커먼즈에 해당한다. 배타성이나 재산권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인 것이다. 실로 ‘개인’과 ‘집단’의 이분법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 둘은 서로 통합되어 있고 경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인간 자신은 더 작은 유기체들이 하나로 뭉쳐진 ‘초유기체’에 해당한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깊이 심어져 있는 것이다.
베버는 이런 생각들로부터 ‘사이존재'(interbeing)이라는 생각을 발전시킨다. 이는 자연보호주의자 존 뮤어(John Muir)가 말한 대로 “모든 것은 서로 얽혀 있다”는 생태학적 원리를 나타낸다. 물질적 자원은 우리의 통제 너머에 있는 별도의 분리된 차원에서 외적인 힘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존재들이 늘 정밀하게 다듬고 있는 (비물질적) 의미에 연결되어 있다.
‘살림의 경제'(enlivened economy)는 살아있는 자연과정들 사이에 이러한 종류의 관계들을 증진시키는 경제이다. 베버는 이렇게 쓴다. “자연이 실제로 커먼즈라면, 자연과의 안정되고 장기적인 관계를 얻는 유일하게 가능한 길은 커먼즈의 경제를 구축하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은 인간과 자연을 가르는 전통적인 이분법을 용해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자연이 가진 인간 이상의 측면들에 관여하게 해줄 존중할만하고 지속 가능한 모델로 향하게 할 수 있다.”
‘살림’에 대한 베버의 설명은 확실히 논쟁적이다.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의 핵심적 전제들 가운데 일부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설명은 과학, 정치, 경제, 그리고 커먼즈를 가로지르며 그 방식은 분명 많은 문제들을 제기한다. 그의 글은 또한 오해될 가능성이 높고 그 함축들이 거부될 가능성이 높다. 예의 컨퍼런스에서 한 질문자가 “우리는 동물이 아닙니다!’라고 말한 것이 그 한 사례이다. 물론 우리는 많은 중요한 의미에서 동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우리의 실질적인 생물학적 실존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 의식, 도덕성, 그리고 세계에 대한 인식은 살아있고 숨을 쉬는 물질적 유기체들에서 구현된다. 표준적인 바이오경제학 내러티브는 이 영역에 대해서 해 줄 수 있는 말이 거의 없다.
내가 보기에 베버의 설명은 경제인(homo economicus)이나 계몽주의의 범주들에 대한 표준적인 설명들보다 훨씬 더 많은 설명력을 지니고 있다. 생물과학들의 최근의 발견들은 커먼즈와 ‘인간 이상의 세계’가 삶 자체의 또 다른 측면들임을 확인해주는 듯하다. 한편 근대 문명의 형이상학은 자연을 ‘죽은 물질’로 본다. 이제 살아있는 것들의 내적 주체성을 인정하고 되찾음으로써 이 죽은 물질을 ‘살릴’ 때가 되었다.
이 게시글로는 71쪽이나 되는 논증을 담은, 매우 복잡하고 심오한 베버의 글을 제대로 소개할 수 없다. 당신이 그의 글 전체를 다 읽는다면 세상을 결코 전과 같은 식으로 보지는 않게 될 것이다.
끝
덧붙임
이 글을 읽으면서 로렌스의 무의식의 판타지아(Fantasia of the Unconscious, 1922)의 몇 대목이 떠올랐다. 로렌스는 과학자가 아니라 소설가임을 염두에 두고 읽어보기 바란다.
다만, 내가 보기에는 아직은 우리에게 그다지 열려있지 않은 거대한 과학의 장이 존재한다고 말하도록 하자. 내가 말하는 것은 삶의 관점에서 진행되며 살아있는 경험과 확실한 직관의 데이터 위에 수립된 과학이다. 이것을 주관적 과학이라고 부르고 싶으면 불러라. 근대의 지식을 낳은 우리의 객관적 과학은 현상하고만 그리고 현상의 인과관계하고만 관여한다. 나는 우리의 과학[즉 객관적 과학]에 대해서 반대하고 싶은 게 없다. 그것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 그러나 앎에 있어서의 인간의 가능성의 전체 범위를 과학이 다 포괄한다고 보는 것은 나에게 미숙할 뿐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과학은 죽은 세계의 과학이다. 생물학조차도 삶을 고찰하지 않고, 삶의 기계적 기능과 도구만을 고찰한다.
삶 자체에 거대한 양극성이 있다. 삶 자체가 이원적이다. 그리고 이원성이란 삶과 죽음이다. 죽음이란 그냥 그림자나 신비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음성적 실재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보다도 ‘물질’(Matter)과 ‘힘’(Force)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삶은 개체적이다.3 늘 개체적이었고 항상 개체적일 것이다. 삶은 살아있는 개체들로 구성되며 항상 모든 것의 시작에는 그랬다. 제1의 실재가 살아있는 온전한 개체들이 아닌 그러한 우주, 코스모스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제 관념론자들이나 과학자들 ― 이들은 정말 똑같다―이 원자니 삶의 기원이니 우주를 이해하는 기계론적 단서니 하는 것들에 대한 허튼 전문용어들을 늘어놓기를 멈출 때이다. 그런 것은 없다.
나로서는 삶이, 삶만이 우주의 단서임을 안다. 그리고 살아있는 개체들이 삶의 단서임을 안다. 그리고 항상 그러했고 항상 그럴 것임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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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됩니다.
- ‘enlivenment’는 뒤에 나오는 ‘Enlightenment’와 대조된다. ‘인라이븐’과 ‘인라이튼’으로 두운과 각운이 서로 다 맞는 단어들이다. 양자의 관계는 조금 뒤에서 설명한다(베버의 글을 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동사 ‘enliven’은 ‘life’의 동사형이므로 말 그대로 하면 ‘살게 하다, 살리다’의 의미이다. 일반적으로는 ‘활기를 띠게 하다, 활기를 부여하다’의 의미로 사용되지만 베버에게서는 말 그대로의 의미가 더 맞다. 그래서 여기서는 ‘Enlivenment’를 ‘살리다’의 명사형인 ‘살림’으로 옮겼다. (여기에 맞추자면 ‘Enlightenment’는 ‘밝힘’이 사실상 ‘계몽’의 뜻― 어둠을 깨다―이 이와 유사하다.) ‘살림살이’의 ‘살림’이 어원상으로는 ‘살리다’의 ‘살림’과 같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살림살이’의 ‘살림’은 이 글에서 비판하는 바의 ‘바이오경제학’에 종속된 말이 되어버렸다. 원래의 의미를 되찾는, 아니면 그 온전한 의미를 돌려주는 일이 ‘살림’의 경제학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 ‘biopoetics’는 어원대로라면 ‘삶의 창조’라는 의미를 가진다. [본문으로]
- 로렌스에게 ‘individual’이란 말은 명사로 사용하든 형용사로 사용하든 ‘특이성’(singularity)의 의미를 필수적으로 포함한다. [본문으로]
출처: http://minamjah.tistory.com/86?category=452913 [百手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