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자 워커, 아마존 커먼즈의 교훈을 말해주다
* 아래는 2015년 7월 25일자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 게시글 “Anthropologist Harry Walker on the Lessons of Amazonian Commons”를 옮긴 것이다. 볼리어가 소개하는 인류학자 워커는 개념어들을 자주 구사하기 때문에, 이런 어휘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읽는 데 조금 불편할 수도 있으나, 끈기 있게 읽으면 전체 취지를 아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으리라고 본다. 몇몇 어휘들은 우리말로 옮기면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서 그냥 영어로 두고 주석을 달았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인류학자 워커, 아마존 커먼즈의 교훈을 말해주다
옮긴이 : 정백수
정말로 깊이 있는 물음들을 묻고 또 우리가 다른 세계를 상상하도록 돕는 데에는 때로 인류학자들이 필요하다. 이는 런던 정치경제대학교(London School of Economics)의 인류학자인 해리 워커 박사가 지난 5월 말 말리노프스키 기념홀에서 한 유명한 강연을 들은 이후 나에게 분명해졌다.
워커는 오랫동안 페루령 아마존(Peruvian-Amazonia)의 사람들을 연구하였는데, “자아의 성격과 자아가 개인들 사이에서 진행되는 정치적 과정들과 맺는 관계”에 특별한 관심을 두었다. 그의 도발적이고 깊은 통찰이 가득한 강연인 「등치 없는 평등 : 공통적인 것의 인류학」(Equality Without Equivalence: an anthropology of the common)은, 자유주의적 평등과 사적 소유라는 우리의 근대적이고 서구적인 생각들과 커먼즈에서 양성되는 그와는 다른 양태의 존재 및 앎 사이에 존재하는 심대한 상충을 다루고 있다.
이 강연에서 워커는, 원주민 커먼즈에 대해 자신이 내린 결론들을 대의제에 기반을 둔 통치(정부) 및 시장경제의 맥락과 대비시키면서, 자유주의적 정치체제에 끼워 넣어져 있는 독특한 인간성의 이상(理想)들이 드러나도록 한다. (이 강연의 팟캐스트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 미겔 비에이라Miguel Vieira에게 감사를!)
배경을 좀 알아보자. 워커는 Under a Watchful Eye: Self, Power and Intimacy in Amazonia 1의 저자인데, 이 책은 저자의 웹싸이트에 “아마존 사회들 어디에나 있는, 한편으로는 개인의 자율·고유함을 우선으로 하는 문화와 다른 한편으로는 만족과 자기실현은 타자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에 대한 마찬가지로 강한 인식 사이의 긴장”을 탐구한 책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 책은, 인간 경험이 가지는 본래적으로 공유되거나 타자를 ‘동반하는’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 아이 돌봄과 사회화에 대한 고려들,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의 관계, 그리고 힘 개념을 한데 모으며, 그리하여 행위(agency)와 자아 인식이 어떻게 일상적인 관행들―여기에는 친밀하지만 비대칭적인 양육과 의존의 관계들의 양성이 포함된다―을 통해 출현하는가를 보여준다.
한 시간 동안 진행되는 워커의 강연은 너무 길고 복잡해서 여기에 요약할 수가 없다. 따라서 나는 그의 결론적 통찰들 몇몇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는 아마존 커먼즈의 중심적 테마는 “잘 살기”(living well)라는 생각이라고 말한다. 즉 “삶이 의미, 목적, 방향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으로 가득 차도록” 자신의 삶과 생산적 노력들을 조직화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 목표는 필연적으로 공유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우리는 그저 혼자서 평안할 수는 없다. 언어나 좋은 아이디어가 그렇듯이, 집단적 자원으로서의 평안함(tranquility)도 더 많은 사람이 거기에 참여하면 실질적으로 더 향상된다. 소진되거나 배분되지 않는 것이다..”
워커는 아마존에서 커먼즈의 “신체적·생태적·정동적 차원들”이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음에 주목한다. 각 차원은 “생산과정의 산물이자 그 선행조건이다.” 그래서 사냥으로 잡은 동물들이 떨어지면 새로 보충하는 활동들, 기후를 보존하는 활동들, 사람들의 안녕을 돌보는 활동들은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커먼즈에 의해 창출되는 것은 “대상들이나 주체들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관계들이거나 심지어는 주체성 자체인” 이유를 설명한다고 워커는 말한다. “우리는 커먼즈를 단지 제도적이거나 재산과 관련된 일단의 권리들의 배열로 보기보다는, 상상된 공동체로서의 국민국가와는 판이하게 다른, 일종의 사회적 상상계로 볼 수 있다······커먼즈는 동일한 척도에 종속되는 것, 등치, 상호교체성, 교환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커먼즈는 자연과 인공, 물질과 비물질, 생산과 재생산, 노동과 삶의 구분을 부순다.”
워커는 아마존 커먼즈들이 ‘libertarian’2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의 근본적인 개인성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러나 아마존 커먼즈들이 ‘egalitarian’3하다고 하는 것, 즉 모든 사람이 일정한 경계를 가진 정치체제에의 참여자로서 형식적으로 평등한 세계라고 하는 것은 오해를 나을 수 있다고 한다.
자원의 균등한 분배라는 의미에서 ‘egalitarian’하다고 해도 오해를 낳는다고 워커는 말한다. 이 생각은 “희소성의 경제에 기반을 두는데” 커먼즈는 공유를 강조함으로써 이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물질적 평등을 강조하는 것은 사람들이 공통의 사업의 일원이 되는 관계보다 서로 이익이 배치(背馳)되는 방식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끝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4
희소성에 대한 거부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아마존에서는 가장 욕망의 대상이 되는 많은 재화―예를 들면 안녕 혹은 우애 혹은 소속되어 있음―들이 경합재(rival goods)가 아니다. 경합재는 경제학자들이 연구하는 재화로서, 한 사람이 향유하면 다른 사람에 의해 소유되거나 향유될 수 없는 재화이다.” 문화가 존재의 “공유 가능한” 상태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관심이 “사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것보다 공유될 수 있는 것의 향유를 향하게” 된다.
공통적인 것(the common)5의 논리는 권리와 본질들6의 형식화를 거부함으로써 근대 자유주의 국가의 존재론에 도전한다. 커먼즈는 산출되는 어떤 것으로 간주된다. “열려있고 다면적이며 대체로 외적이고 개인의 물질적·역사적 위치에 기반을 둔” 어떤 것이다. 커먼즈에서 사람들의 실제적인 이질적 다양성은 “등치의 연쇄”7로 결코 환원되지 않는다. 공동체가 다소 열려있어서 계속 진화하고 결코 완전히 구성되지는 않기 때문에, 커먼즈는 “결코 개인의 자유에 대립되게 되지 않는다.”
개인들을 근본적으로 특이성들로―“불투명하고 무한하며 궁극적으로 알 수 없는” 존재들로―파악하는 것이 아마존 커먼즈들의 전제라고 워커는 말한다. “공통의 인간성”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은 없다. “인간성은 거의 가능성으로만, 잠재력으로만 남으며, 결코 완전하게 실현되지는 않기” 때문일 뿐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인간성”은 (애니미즘이 입증하듯이)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포함한 누구에게나 계속 열려있다. 서양의 재산권 체제를 특징짓는 주체와 객체,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확고한 구분은 아마존 커먼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서양의 평등관이 종획 및 사적 소유의 발생과 일치함은 우연이 아닐 수 있다”고 워커는 말한다. “이는 개인 주체들을 형식적으로 평등한 것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산출하기 위해서 사적 소유와 법이 서로 손을 잡고 움직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터전―땅, 물―이 사유화되고 종획되었기 때문에, 이로 인해 공통적인 것이 보편적 인간성으로 위장하여 내화되고8 본질화되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사회적 관계에 기반을 둔 집단적으로 생산된 재화로서 공통적인 것을 향유하는 것이 특이한 차이들의 다양성을 포함한다면, 이와 반대로 공통적인 것이 부식되고 사유화되면 사람들은 그 공통적 존재의 원천을 다른 곳에서 찾을 수밖에 없게 된다.” 사람들은 “서로간의 점점 더 넓어지는 틈을 극복할 것으로서 등가물들 혹은 본질들을” 정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개별성과 특이성은 상실된다.
워커는 앞으로 나아가는 길로서 커먼즈를 강하게 역설하며 마무리를 한다. “고대 서양인들이 생각한 커먼즈는 매우 단순한 것으로서, 국가에 의해서도 시장에 의해서도 운영되지 않는 경제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절실하게 필요로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전 세계의 많은 산발적인 투쟁들을 연결하는 강력한 개념”이다. 그는 더 나아간다. “커먼즈를 복원·확장하며 자본에 의한 커먼즈 포획을 저지하려는 시도는 지금 그 어떤 급진적인 정치기획에서도 실제로 필요한 요소이다.”
워커는 레비스트로스를 원용하면서, 인류학이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것을 돕는 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함을 부각시킨다. “현재의 세계에서 인류학자들은 우리가 사는 방식이나 우리가 믿는 가치들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다른 삶의 양태들과 다른 가치체계들이 다른 인간 공동체들로 하여금 행복을 발견하도록 허용해왔고 또 계속 허용할 수 있다는 사실의 증인들이다.”
아쉽게도 워커의 강연을 웹에서 텍스트 형태로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공식적인 팟캐스트를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풍요로운 강연이다! ♣
* 볼리어가 강연에서 인용한 부분들 가운데에는 실제 강연과 조금씩 다른 곳들이 있다. 그러나 내용전달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고 워커의 강연은 (현재로서는) 텍스트가 없고 음성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완전한 확인도 불가능해서, 볼리어의 텍스트를 그대로 따라도 무방할 듯하다. ―옮긴이
- 책의 내용을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책의 제목을 옮기기는 어렵다. 일단 직역하여 『주의 깊은 시선 아래에서 : 아마존에서의 자아, 힘, 친밀함』이라고 옮겨놓기로 한다. “주의 깊은 시선”이란 피조물을 늘 보살피는 창조주의 시선, 또한 아기를 보살피는 어머니, 공동체의 일원들을 보살펴야 하는 지도자의 시선을 말하는 듯하다 [본문으로]
- libertarian : 옥스퍼드 사전에 등록된 의미는 셋이다 : ① 자유의지론적인 ② 자유를 옹호하는 ③ 자유방임론적인/자유주의적인. 여기서의 의미는 이어지는 설명대로 ‘개인주의적인,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에 가깝다. [본문으로]
- egalitarian : 프랑스어 ‘égalitaire’(equal)에 접미사 ‘-ary’를 붙인 것으로서 가장 평범한 옮김으로는 ‘평등주의적인’이라는 말이다. 여기서는 이어지는 설명대로 ‘인간이 형식적으로 평등하다고 보는’과 ‘자원을 균등하게 분배하는’의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본문으로]
- 물질적 이익이 평등하게 분배되더라도 그 이익들 사이에는 배치의 관계, 즉 한 사람에게 귀속되면 다른 사람에게는 귀속될 수 없는 배제의 관계가 존재하는 대에는 변함이 없다는 말이다. [본문으로]
- 이 글에서 ‘the commons’는 ‘커먼즈’로, ‘the common’은 ‘공통적인 것’으로 옮긴다. 볼리어가 명확하게 하지 않은 점이 있는데, 예의 강연에서 워커는 학술적으로나 대중적으로 관심을 많이 두는 ‘커먼즈’보다는―한국과는 참으로 다르다!―하트와 네그리의 ‘공통적인 것’(the common)을 자신의 작업의 단서로 삼겠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필시 볼리어에게는 ‘공통적인 것’도 커먼즈 패러다임 핵심적 구성요소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 워커가 ‘본질’을 말할 때에는,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본질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 A = B = C = ······ = Z [본문으로]
- 워커는 머릿속에서만 추상적인 생각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을 ‘내화된다’고 표현하는 듯하다. 그런데 예를 들어 ‘인권’이 이렇게 내화되는 것은 그것이 법형식이라는 추상적(객관적?) 형태로 존재하는 것과 상응할 터이므로, ‘내화’는 ‘형식화’와 병행하여 진행된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 나온, 워커가 커먼즈를 형용한 “대체로 외적인”(largely external)이라는 어구는, 이렇게 머릿속에서만 혹은 추상적으로 법전 같은 데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실천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