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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먼즈로서의 버닝맨(Burning Man as a Commons)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가 그의 블로그에 올린 2014년 10월 8일자 글 「커먼즈로서의 버닝맨」(“Burning Man as a Commons”)에서 소개하는 피터 허쉬버그(Peter Hirshberg)의 “Burning Man: The Pop-Up City of Self-Governing Individualists”의 일부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허쉬버그의 글은 새로 나온 책  From Bitcoin to Burning Man and Beyond:  The Quest for Identity and Autonomy in a Digital Society의 5장이다. 허쉬버그는 애플의 중역을 역임한 하이테크 기업가로서 현재는 Re:imagine Group의 의장이며 Gray Area Center for Arts and Technology in San Francisco의 공동창립자이다. 그는 수 년 동안 버닝맨의 참여자였다. 아직 디테일을 잘 몰라서 잘못 전달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읽는 이들의 양해를 바란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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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맨 ― 스스로를 다스리는 개인주의자들의 팝업 도시 (Burning Man: The Pop-Up City of Self-Governing Individualists)

피터 허쉬버그

 

허쉬버그가 1990년대에 들은 이야기 : 물도 전기도 그늘도 대피할 곳도 없는 곳에 간다. 무로부터 도시를 만들어낸다. 자신들이 상상한 도시를. 무로부터! 규칙과 습속과 전통과 원칙이 있는 세계를 만들어내고는 살아간다.

 

생긴 지 28년 후에 버닝맨은 도시 규모의 실험을 하는 특이한 화판으로 부상하였다. 지구상에서 가장 창조적인 사람들을 끌어 모으며 규모가 크다. 2013년에 6만8천 명이 참가했다. 비록 단 일주일만이지만, 화폐를 통한 거래에 기반을 두지 않고 선물(膳物)과 후함(generosity)에 기반을 둔 경제를 체험하게 만든다. 버닝맨에서는 예술, 공연, 철저한 자기표현이 사회에서 가장 소중한 활동이다. 버닝맨은 통치는 최소화되고 자유는 최대화된 지구상의 별스런 곳이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테마캠프, 예술기획, 흥청대는 음악마을, 불춤 패거리, 공연집단, 토목 부대들, 순찰조들로 조직한다. 임시공항도 짓는다.

 

버닝맨은 해마다 처음부터 다시 짓는 도시이기에 우리 세계에, 직업에, 이 세계에서 부과된 ‘역할’에 가해지는 제한들을 푸는 기회를 제공한다. 버닝맨의 창립자인 래리 하비(Larry Harvey)는 이렇게 말한다. “개인의 행위가 관건이다. 자신이 사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관건이다. 우리는 마음을 여는 행동들을 통해 세계를 리얼한 것으로 만든다.”

 

버닝맨은 대규모의 자기조직화 거버넌스가 실제로 작동하는 사례이다. 그 4반세기의 역사는, 어떤 종류의 정치적·조직적 사상과 도시 설계가 계속 남아있고 어떤 것들이 버려졌는지를 보여준다. 버닝맨에서 우리는 중앙집권화된 조직과 가장자리에서 출현하는 활동 사이의 항상적 긴장을 목격할 수 있다. 이곳은 극단적 자유와 공동체의 균형을 실험하는 실험실이다. 혹은 그 원칙들을 빌어 말하자면, 한편으로는 “철저한 자기표현”(radical self-expression) 및 “철저한 자립”(radical self-reliance )과 다른 한편으로는 “철저한 포용”(radical inclusion), “시민으로서의 책임”(civic responsibility), “공동체적 노력”(communal effort) 사이의 균형이다.

 

버닝맨은 세계 전역에서 온 수천 명의 사람들과 캠프들이 스스로 조직한다. 그러나 그 핵심 방향은 소수의 창립자들로 구성된 팀이 정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판단을 민주적 국가의 지도자들이라기보다는 플라톤의 ‘철학자-왕’으로서 실행한다. 이들이 버닝맨의 사이즈를 정하고, 토지접근권에 관해서 국가 및 연방 기관들과 협상하며, 도시의 윤곽을 설계하고, 표를 팔고, 예술가들을 선별할 권한(?)을 부여하며, 전지구적 버닝맨 공동체를 위한 교육과 소통의 틀을 창출한다. 참여자들 사이의 그리고 창립자들과의 대화는 『연방주의자 논집』(The Federalist Papers)에서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새로운 사회 질서에 적절한 거버넌스 원칙들에 관하여 토론한 바 있는 푸블리우스(Publius)를 상기시킨다. 차이는, 버닝맨은 이 탐구를 오래 전에 마른 소금 호수바닥에서 다채로운 의상과 음악이 물결치는 가운데 항상 변하는 실험으로서 행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몇 가지 기본적인 사실들] 버닝맨은 네바다의 블랙락(Black Rock)사막에서 해마다 일주일 동안 열리는 행사이다. 이곳은 북미에서 신이 버린 가장 가혹한 환경을 가진 곳들 중 하나이다. 용암층과 소금밭으로 된 방대한 반(半)건조한 사막이다. 38만 에이커의 황야에 7평방 마일(약 3.35km×3.36km)의 블랙락 시티(Black Rock City) 즉 버닝맨이 세워지는 것이다. 행사가 끝나면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땅을 대여하는 미국 토지관리국에 버닝맨이 약속한 조건은, 뒤에 휴지 한 장, 신발 한 짝. 옷 핀 하나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철저한 자립’이라는 버닝맨 철학에 따른 것이다. 참여자로서 이 도시를 짓고, 다 싸서 나간다. 나중에 와서 청소해줄 정부는 없다. 조명이나 동력 그리드를 제공해줄 곳도 없다.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과 당신의 캠프가 모든 문제를 스스로 다 풀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시스템, 자원공유, 자기조직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들에 관하여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비록 행사는 일시적이지만 그 경험과 통찰들은 나중까지 오래 남는다. 버너 공동체(the Burner community)― 참여자들은 스스로를 이렇게 부른다―는 종종 1년 내내 계획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렇게 자유롭게 해방된 사고방식이 그 이후에도 사람들의 삶, 이력, 계획, 시민사회에서의 참여에 영향을 끼치곤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버닝맨에 대해서 말하기를 ‘사람들이 예술을 위해서 오고 공동체를 위해서 머문다’고 한다. 허쉬버그 개인의 경우. 자신이 처음 갔던 2005년에 받은 인상을 이렇게 서술한다. “수마일 줄을 이은 환상적인 차량들과 구조물들이 버닝맨의 중심부를 둘러싸고 플라야(playa, 스페인어로 ‘해변’을 의미함) 깊숙이 확산되어 뻗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수많은 시간을 들여서 희한한 차량들과 ‘건물들’을 만들어냈다. 불을 내뿜는 촉수를 가진 거대한 문어를 닮은 차량···사막 위로 반쯤 모습을 보인, 18미터짜리 돛대를 단 해적선···땅과 비스듬한 각도로 뛸 듯이 선, 풍금 소리를 울리는 작은 마을 교회···”

 

그 모든 것의 중앙에 거의 30미터 크기의 상인 ‘Man’이 서 있다. 이 상은 도시가 닻을 내리는 지점 역할을 하다가 행사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밤에 태워진다. 세계무역센터가 한때 뉴욕 사람들이 맨해튼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잡는 것을 도왔듯이, ‘Man’은 사막에서 방향을 잡는 준거점이 되어준다.

 

버닝맨은 규모와 볼거리에서 세계박람회(엑스포)와 맞먹는다. 다만 기업들과 국가들에 의해 지어지지 않고 ‘모두’(everybody)에 의해 지어졌을 뿐이다. ‘참여’가 버닝맨의 핵심 원칙 가운데 하나이다. 깊은 개인적 관여를 통해 혁신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믿음이다. 이는 어떤 농부가 자신에게 필요한 구조물을 짓는 데 모두가 뛰어들어 도왔던 ‘헛간 짓기’(barn-raising)의 전통, 혹은 공동체 전체가 집이 필요한 사람에게 집을 지어주는 데 함께 했던 ‘해비타트’(Habitat for Humanity) 전통을 잇는다.

 

도시연구가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는 고전이 된 책 『미국 대도시들의 삶과 죽음』(The Death and Life of Great American Cities)에서 이러한 생각의 중요성을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도시는 오직 모두에 의해서 창조되기 때문에, 그리고 모두에 의해 창조되었을 때에만, 모두에게 무언가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그녀는 1960년대의 도시 부흥의 맥락에서 이 말을 하고 있는데, 이 당시 시 정부들은 주민들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주택지역들(neighborhoods)을 구축했지만 주민들의 참여를 통한 것은 아니었다. 버닝맨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원칙이 존중된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짓는 데 참여할 때 개인적으로 더욱 깊이 관여하게 되고 다른 경우에는 가질 수 없는 감각 즉 우리가 주체적으로 무언가의 원인이 되어 작용하고 있다는 감각을 가지게 된다. 제이콥스는 또한 버닝맨의 놀라운 괴이함을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1961년에 그녀는 이렇게 썼다. “메트로폴리스는 그 본성상 다른 경우라면 여행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것, 즉 낯선 것(the strange)을 제공한다.”

 

버닝맨은 이렇게 환상적이면서도 미국에 깊이 뿌리내린 가치들을 구현한다. 버닝맨은 그 핵심에 있어서 토크빌(Tocquevill)적이다. 즉 자발적인 어쏘시에이션들(associations)의 가장 이질적인 집합체가 크게 한데 모여서 다양한 집단들로 활동하면서도 공유된 도시에 대한 사회적 신뢰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다. “어쏘시에이션은 과학의 어머니이다”라고 토크빌은 말했다. 다른 모든 진보는 어쏘시에이션이 만든 진보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진정한 공동체들에 시간을 덜 쓰고 있다고 비난을 받는 때에, 버닝맨은 공동체로서의 강렬한 의식과 사회적 자본의 눈부신 모습을 보여준다.

 

멀리서 보면 버닝맨은 마법에 의해 저절로 생긴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버닝맨은 오직 핵심적인 일단의 공유된 원칙들이 있기 때문에 작동한다. 이 원칙들은 거의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며 공동체에 의해서 스스로 실행된다. 그리하여 최소량의 통치와 최대량의 자유를 산출한다. 자기조직화된 거버넌스의 동학은 (2009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고(故) 엘리너 오스트롬이 밝혀낸 것과 놀랄 정도로 유사하다. 2013년 기준으로 ‘6만8천 명의 주민들을 가진 7평방 마일의 땅’이라는 ‘공유재’(common-pool resource)를 관리하면서 버닝맨의 주민들(버너들, Burners)은 자신들이 의식적 공동체의 일부임을 깨닫는다. 따라서 모두가 서로 감독하고 규칙을 시행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공유한다.

 

2004년에 래리 하비는 공동체의 가이드라인으로 ‘버닝맨의 열 가지 원칙’을 발표했다. 세계 전역의 도시들과 함께 혁신 및 창조적 경제 (만든 사람 위주의 경제) 장려와 관련된 작업을 해온 허쉬버그는 이 원칙들이 더 지속 가능하고 더 의식적이고 덜 물질주의적인 세계를 개념화하는 데 광범하게 적용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 원칙들은 거대한 도시를 잘 돌아가도록 만드는 데 개인적 헌신이 필요함을 스스로 더 잘 깨닫게 해준다는 것이다.

 

원칙 가운데 넷―철저한 자기표현, 철저한 자립, 직접성, 참여―은 개인이 어떻게 더 의식적으로 참여하는 삶을 살 수 있는가와 관련된다. 다른 넷―공동체적 노력, 시민 참여, 철저한 포용, 흔적 안 남기기―은 공동체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가장 주목할 마지막 둘은 선물주기와 탈상업화이다. 버닝맨의 선물경제는 보상을 바라지 않고 주는 즐거움을 찬미한다. 이는 물물교환이 아니다. 대가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브랜드도, 스폰서도, 광고도 없다는 점 때문에 버닝맨은 참여자들의 노력에 대한 찬사로서 계속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버닝맨의 열 가지 원칙

 

철저한 포용(Radical Inclusion)

누구라도 버닝맨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낯선 사람을 환영하고 존중한다. 우리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한 선행조건은 없다.

 

선물주기(Gifting)

버닝맨은 선물주기 행동에 온 마음을 쏟는다. 선물의 가치는 절대적이다. 선물주기는 동등한 가치를 가진 어떤 것과의 교환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탈상업화(Decommodification)

선물주기의 정신을 보존하기 위해서 우리 공동체는 상업적 후원, 거래, 광고 등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사회적 환경을 추구한다. 우리는 그러한 착취로부터 우리 문화를 보호할 태세가 되어있다. 우리는 참여 경험을 소비로 대신하는 것에 반대하고 저항한다.

 

철저한 자립(Radical Self-reliance)

버닝맨은 개인들이 자신의 고유한 내적 힘을 발견하고 발휘하고 그 힘에 입각하기를 장려한다.

 

철저한 자기표현(Radical Self-expression)

철저한 자기표현은 개인의 특유한 선물들에서 나온다. 개인이나 협동하는 집단 이외에 그 누구도 그 내용을 결정할 수 없다. 자기표현은 선물로서 다른 이들에게 제공된다. 이러한 정신으로 주는 사람은 받는 사람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

 

공동체적 노력(Communal Effort)

우리 공동체는 창조적 협력과 협동을 소중하게 여긴다. 우리는 그러한 상호작용을 지원하는 사회적 네트워크, 공적 공간, 예술작품들, 소통 방법들을 산출하고 증진하고 보호하려고 노력한다.

 

시민으로서의 책임(Civic Responsibility)

우리는 시민사회를 소중하게 여긴다. 행사를 조직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은 공적 안녕에 책임을 져야 하고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참여자들에게 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지역, 주, 연방 법에 저촉되지 않게 행사를 치를 책임도 져야 한다.

 

흔적 안 남기기(Leaving No Trace)

우리 공동체는 환경을 존중한다. 우리는 우리가 모이는 모든 곳에서 우리의 활동의 물리적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성심으로 노력한다. 우리는 있던 자리를 깨끗이 치우며, 가능할 때마다 우리가 있던 곳을 원래보다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떠나도록 노력한다.

 

참여(Participation)

우리 공동체는 철저하게 참여 윤리를 지킨다. 우리는 변형시키는 변화(transformative change)가 개인의 경우든 사회의 경우든 깊은 개인적 참여를 통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행동(doing, 함)을 통해 존재(being, 있음)를 획득한다. 모두가 일하도록 권유받는다. 모두가 놀도록 권유받는다. 우리는 마음을 여는 행동들을 통해 세계를 리얼한 것으로 만든다.

 

직접성(Immediacy)

직접적 경험이 여러 면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의 시금석이다. 우리는 우리의 내적 자아와 우리 주위의 현실에 대한 인식을 가로막고, 사회 참여를 가로막으며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자연 세계와의 접촉을 가로막는 장벽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 어떠한 이념도 이 경험을 대신할 수 없다.

 

오늘날 버닝맨은 전지구적인 행사로서, 200개 이상의 도시에서 참여자들이 오고 65개의 공식적으로 연관된 행사들이 있다. 버닝맨의 전지구적 영향력은 자원자들의 거대한 네트워크에서 나온다. 여러 해 동안 여러 지역의 버닝 공동체 구성원들이 해마다 샌프란시스코로 와서 컨퍼런스를 열어 사업관리, 예술을 위한 모금, 허가 얻기, 노하우 교환의 기술을 배운다. 2년 전에 버닝맨은 이 모임의 틀을 <버닝맨 글로벌 리더십 컨퍼런스>로 다시 재편했다. 버닝맨은 그 네트워크를 단지 버닝맨을 가동하는 사람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버닝맨의 문제해결 능력과 공동체 지향적 작업을 세계에 전할 수 있는 전지구적 자원자들로 구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창립자 래리 하비가 말하는 버닝맨의 요체는, ‘당신이 살고 싶은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규정된 일단의 규칙들과 역할들 아래에서 삶을 살아간다. 우리는 이미 정해진 직업을 좇는다. 우리는 이미 정해진 도시에서 산다. “이 지점에서 당신은 이전에 시도하지 않았던 시도를 하게 됩니다.” 버닝맨에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종종 개인이 변하고 변형되는 이야기들이다. 예를 들어 허쉬버그의 친구 스티브 브라운(Steve Brown)은 버닝맨에 관한 영화를 만들 때 캐릭터들 전부가 일정한 변화를 겪고 있음을 발견했다고 한다. 예술가 케이티(Katie)는 유모로서의 직업을 그만두고 예술적 열정을 따랐으며, 케이시 펜튼(Casey Fenton)은― ‘경제 공유하기’의 최초의 기획들 가운데 하나인―‘CouchSurfing’이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정리 끝

 

정리자의 시시한 덧말

  1. 도시 중심에 세우는 인간상이 거대한 이유는?

사막에서 방향을 잡기 위한 용도가 당연히 우선이겠지만, 인간이 개개인으로서는 조그마할지 모르지만 협동하는 공동체로서는 늘 새로운 삶의 터를 만들 잠재력을 가진 거인이라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1. 그럼 마지막에 왜 태우는가? (아마 도시 이름 ‘Burning Man’이 여기서 왔을 텐데···)

일차적으로는 흔적을 남기면 안되기 때문이겠지만, 상징적으로는 다시 새롭게 태어나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

추가

이 글을 정리하다 로렌스의 한 글의 어느 대목이 생각나서 아래 옮겨놓습니다. 이 글을 앞부분까지 보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100년 전에 산업의 증진자들은 감히도 나의 고향 마을에 추함을 저질러 놓았다. 더욱 극악한 것은, 오늘날의 산업의 증진자들은 영국 땅 위의 여기저기에 이제는 붉은 벽돌로 된 “집들”(homes)을 휘갈겨 놓아 마치 상처의 딱지들이 더덕더덕 붙어 있는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이 작고 붉은 쥐덫 속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덫에 걸린 쥐들처럼 더욱 절망적으로 되고 있고 더욱 굴욕스러워 하고 있으며 더욱 불만스러워 하고 있다. 단지 보다 저급한 부류에 속하는 여성들만이 남자에게는 쥐덫에 지나지 않는 이 작은 집을 계속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없애버리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것을 바꾸기 시작하자. 임금이나 노사분쟁엔 신경쓰지 말자.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자. 나의 고향 마을을 마지막 벽돌 하나까지 무너뜨리자. 핵심부를 계획하자. 초점이 되는 부분을 정하자. 그리고 그 초점으로부터 아름다운 발산(radiation)의 몸짓이 나오도록 하자. 그런 다음에 도시의 중심부까지 방대하게 펼쳐지는 큰 건물들을 예쁘게 짓자. 그리고 이 건물들을 아름다움으로 채우는 것이다. 처음부터 깨끗하게 다시 시작하자. 지역별로 차츰차츰 해나가자. 새 잉글랜드를 건설하자. 작은 집들을 없애버리자. 휘갈겨 놓은 사소함과 보잘 것 없음을 없애버리자. 땅의 윤곽을 보고 이에 맞추어 짓되 충분하게 고결하도록 만들자. 영국인들은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는 개발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찬란한 도시의 시민들로서는 토끼들보다도 더 미천하다. 그들은 항상 정치와 임금 등등에 대하여 저열하고 속좁은 아내들처럼 잔소리를 해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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