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地上)의 소금: 공통주의에 대하여 ― 네그리 인터뷰 (2)
- 저자 : Antonio Negri, Pascal Gielen, Sonja Lavaert
- 원문 : “The Salt of the Earth. On Commonism: An Interview with Antonio Negri,” in Commonism: A New Aesthetics of the Real, ed. Nico Dockx, Pascal Gielen, Valiz, 2018, pp. 91-116.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윤영광
- 설명 : 『공통주의: 실재적인 것의 새로운 미학』(2018)의 저자들인 벨기에의 사회학자 Pascal Gielen과 철학자 Sonja Lavaert가 네그리를 상대로 2018년 8월 18일에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정리자의 판단에 따라 생략한 부분이 있으며 나머지도 엄밀한 의미의 번역은 아닌 내용 정리지만, 가독성을 위해 인터뷰의 형식과 어투는 유지했다. 분량을 고려해서 세 차례에 걸쳐 나누어 게재한다.
- 1편 : http://commonstrans.net/?p=1817
- 3편 : http://commonstrans.net/?p=1853
문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커먼즈의 리더쉽이 다중의 전략과 리더의 전술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리더는 다중의 일반적 전략 내에서 자신의 전문성에 따라서 오직 일시적으로만 일정한 전술적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죠. 이러한 리더쉽은 어떻게 조직될 수 있습니까? 또한 다중에게 전략을, 리더에게 전술을 할당하는 당신의 이러한 전도(顚倒)는, 마찬가지로 지도자들이 단지 일시적으로만 임명되는 대의민주주의와 얼마나 다른 것입니까?
답 : 나는 우리가 운동과 지도자 사이에서 작동하는 정치적 리더쉽이 제거되거나 약화되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결정 권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정당들의 공식은 무엇이었습니까? 당은 일정한 정치적 노선을 따라 다수의 사람들을 결집합니다. 이때 정치적 노선은 리더나 지도부에 의해 결정되어 하향식으로 사람들에게 말 그대로 부과되거나 교육되는 것이지요. 오늘날 운동들은 기존의 제도들을 거부하고 있으며, 『어셈블리』에서 마이클과 나는 운동들의 이러한 비판을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리더쉽은 거부하되, 제도 그 자체를 반드시 거부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현재 우리는 제도의 문제를 마주하고 있고, 함께 연구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더 정확히 바꿔 말하자면, 리더쉽을 운동으로 다시 가져오되, 리더쉽의 헤게모니적 전략은 반드시 운동 내부에서 발전되어야 합니다. 리더로부터 결정 권한을 분리해야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리더로부터 결정의 추상성과 초월성을 제거해야 합니다.
문 : 하지만 리더는 어떻게 선택되는 것입니까? 커먼즈는 대의민주주의와 어떤 점에서 다릅니까?
문제는 어떻게 선택하느냐가 아닙니다. 선택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진짜 문제는 리더에게 주어지는 힘의 성격입니다. 오늘날 운동들에서 리더는 꽤 자주 다중으로부터 자발적으로 나타납니다.
리더의 힘은 전술적 차원에 국한되어야 하며, 이는 보통 제안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합니다.
근래의 운동에서 활동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군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리더가 되는 현상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현상은 운동이 직면한 현실적 필요 및 문제에 대해 리더로 나선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통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떻게 한 리더의 힘이 일정한 시점에 인정되고, 개시되며, 잘 작동하고, 결과적으로 하나의 현실이 되는지를 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죠. 1917년 혁명 때 레닌은 당시 제기되었던 두 가지 문제에 대한 답 ― 지금 당장 평화를, 그리고 농장노동자들에게 토지를 ― 을 즉각, 직접적인 방식으로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술적 리더가 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군대와 농민을 대표하던 권력들은 병사들도, 농장노동자들도 이러한 변화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때문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역설적인 상황이었죠. 레닌은 리더로서 저 지배제도들을 향해 ‘아니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힘이 되는 전술의 사례입니다.
리더는 언제나 일시적이고 전술적입니다. 그는 요구와 필요를 갖고 있는 사람들, 주체들의 투쟁에 자신의 능력을 보태기 위해 나서는 사람입니다.
문 : 그렇다면 리더는 사람들의 요구와 필요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게 되는 것입니까? 그가 사람들로부터, 그들 가운데서 나왔기 때문인가요?
바로 그렇습니다. 리더는 그 자신이 사람들이 제기하는 요구와 필요의 일부이고, 그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는 것입니다. 공식적인 역사에 따르면, 레닌은 민중과 게임을 벌인 정치선동가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정반대가 진실이라는 것을 압니다. 혁명이 성공했던 것은, 레닌이 평화와 토지가 민중의 진정한 요구이자 필요임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리고 의회 시스템이 만들어낸 온갖 타협들, 문제를 망가뜨릴 뿐인 우회로와 제도들 없이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답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많은 지도자들의 경우에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가령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독일과 맞서 싸우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다수/공통적인 것의 욕구 및 필요와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리더, 바로 이것이 요점입니다.
문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제도 혹은 리더가 반드시 중앙집중적인 지배구조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며, 다중에 의해 민주적인 방식으로 현실화될 수 있다는 가설을 옹호합니다. 당신이 운동들의 미래로 제시하는 사례들 ― 가령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 은 이러한 가정의 연장선에 있지요. 하지만 이러한 관념과 사례들은 ‘수평적 리더 부재’(horizontal leaderless)에 대한 당신의 비판에 잘 들어맞지 않거나 심지어 그것에 반대되지 않습니까?
답 : 많은 운동들이 리더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적인 것, 혹은 이 운동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제도입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운동들이 리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제도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운동들이 제도를 가지지 않는다면, 제도적 틀을 채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수일 것입니다. 그러나 마이클과 나는 운동들 내부에서 제도를 형성하고 그로써 수평적 헤게모니를 현실화하는 경향이 존재한다고 확신합니다. 우리의 작업은 주권적이지 않고 소유와 연결되지 않는 유형의 제도를 물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형의 제도가 실천에서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가 바로 우리가 토론하고 고민하고 시험해야 하는 바일 겁니다.
문 :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연결되는군요. 당신은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 적대적 개혁주의(antagonistic reformism) 그리고 헤게모니라는 세 가지 정치전략들의 상호보완성을 이야기합니다. 기존 제도들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비(非)주권적 제도들이 만들어질 때, 기존 제도에서 폐기되어야 할 것은 정확히 무엇입니까?
답 : 우리는 현재 19세기와 20세기에 정치적 사유와 실천을 지배했던 개념들이 죽음을 앞두고 벌이는 마지막 싸움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 죽어가는 개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국가주권과 소유(공적 소유와 사적 소유 모두를 포함하는 소유)입니다. 민족국가주권은 지구화된 자본주의에 의해 약화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적 자본주의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상호 지지하는, 저 근근히 생존을 유지하고 있는 두 개념들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민족국가주권이 기초하는 개념 혹은 원리, 특히 ‘국경’은 현재 정말 부조리한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끊임없이 국경을 초월하고 넘나듭니다. 우리의 두뇌는 이미 지구화되어 있고 더 이상 국경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국경과 같이 빈사 상태의 원리와 개념들을 가차없이 다루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이론적 작업입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모두 아우르는 소유의 문제 역시 마찬가집니다. 소유는 국경과 동일한 논리에 기초해 있으며, 그것만큼이나 현실에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개념입니다.
반대로 공통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소유의 개념이 아닙니다. ‘공유재(common goods, beni comuni)’와 ‘공통체(commonwealth)’에 있는 것으로서의 ‘공통적인 것(the common, il comune)’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전자는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후자는 하나의 생산, 내부로부터 공통적인 것 자체에 의해 늘 새롭게 형성되는 무언가이며 따라서 결코 소유될 수 없는 것입니다.
문 : 새로운 ‘비주권적’ 제도들이 어떤 모습을 갖게 될지에 대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무언가를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세 가지 정치적 전략들, 즉 예시적 정치, 적대적 개혁주의, 제도들에 대한 헤게모니는 정확히 어떻게 함께 작동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세 가지 전략들이 따라야 하는 순서가 있습니까, 아니면 나란히 진행되어야 합니까?
답 : 나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 세 가지 정치적 전략은 정치적 실천에 관한 문제입니다. 책상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닙니다. 그건 불가능한 동시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나의 작업은 연구하고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것, 일반적 틀들을 비판적 방식으로 제공하는 것, 담론의 토대를 탐사하는 것, 원칙과 개념들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것입니다. 투쟁의 실천은 이것과 다른 문제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토론과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바로 그 투쟁 내부에서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하고자 하는 야심을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미래가 스스로를 알리고 발생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나에게는 이것이 핵심적인 이슈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미래는 실천 속에서 만들어질 것입니다. 반면 나는 나의 작업이 방향을 가리키고, 아이디어와 구조의 원칙들에 대한 비판을 정식화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문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다음과 같은 헤겔의 말을 인용합니다. “모든 것은 참(眞)을 실체로서뿐만 아니라 동일하게 주체로서도 파악하고 표현하는 것에 달려 있다.” 주체성이란 당신에게 정확히 무엇입니까? 오늘날 주체성은 다른 형태를 띨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입니까?
답 : 헤겔에게 주체성은 종합과 극복을 의미했습니다. 주인-노예 변증법에 대한 알렉상드르 코제브(Alexandre Kojève)의 해석을 생각해보세요. 노예는, 주인을 섬기는 동시에 주인을 주인으로 구성하는 한에서 주인을 극복합니다. 젊은 시기 맑스의 작업에서 자본주의와의 관계에서 규정되는 프롤레타리아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 사회에 완전히 통합된 부분이 되는 한에서만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로 형성하고 자신의 기획을 실현합니다. 그러나 『자본』에는 더 이상 이런 해석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늘날 노동자들의 현실에 대한 우리의 분석 또한 그러한 해석을 따르지 않습니다.
현 시기 노동자의 주체성은 특이성입니다. 특이성은 공통적인 것이 구성되는 가운데 생산됩니다. 역으로 특이성은 공통적인 것의 구성에 참여합니다. 오늘날 주체성은 혁신이자 초과라는 의미에서, ‘존재’의 생산입니다. 그것은 자유의 실천이며, 따라서 주체성의 생산은 어떠한 동일성-정체성도 넘어서는 무언가입니다. 주체는 동일성-정체성이 아니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제시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주체는 협력 속에서, 사회적 존재 속에서 형성되며, 그러한 한에서 역사적인 것입니다.
문 : 어셈블리의 조직화에서 예술과 예술계의 역할을 어떻게 보십니까? 한편으로 우리는, 오늘날 예술계가 전시회와 비엔날레 등에서 주류 미디어가 제공하지 못하는 교류와 토론의 공간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역할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계가 결코 한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전시회와 비엔날레들은 종종 홍보 수단으로 쓰이며 토론을 상품으로 바꿀 뿐이라고 결론 짓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정을 염두에 둘 때, 당신이 보기에 예술계 혹은 예술 그 자체는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커먼즈를 형성하고 강화하는 데 그것이 담당할 수 있는 역할이 있기는 한 걸까요?
답 : 『예술과 다중』(1989)에서 이야기한 바 있듯이, 예술은 언제나 그것이 생산하는 방식과 연결되어 논의될 수 있습니다. 예술은 생산입니다. 예술의 존엄성은 그것이 ‘존재’의 생산, 의미있는 이미지들의 생산이라는 사실로부터 나옵니다. 여기서 이미지는 ‘존재’를 형성하는 이미지, 숨겨진 조건으로부터 ‘존재’를 끄집어내서 그것을 개방된 조건으로 변형하는 이미지를 말합니다. 이런 일은 언제나 생산의 과정에서 발생합니다. 일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재화 일반이 생산되는 방식과 예술이 생산되는 방식 사이에 유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예술에서는 언제나 무언가를 구축한다는 의미의 ‘만듦(making)’이 이루어집니다. 예술은 언제나 일정한 형태의 짓기, 조립하기, 생산적 제스처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일정한 구분이 존재한다는 것은 명확합니다. 자신을 상품으로 마케팅하는 예술이 있는가 하면, 생산적인 예술적 만듦의 형태도 있는 것이지요.
언어와 마찬가지로 예술은 소통을 생산하고 연결을 만들어냅니다. 특히 오늘날 예술은, 연결을 구성하고 사건이 된다는 점에서 언어의 실천과 유사합니다. 예술은 점점 더 물질성을 제거하고 비물질적 생산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예술은 비물질적 생산과 동일한 흐름을 따르며, 유동적이고 불안정하며 새로운 이미지들과 예기치 못한 형태와 형상들 속에서 연결들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방식으로 예술은 스스로를 현재의 생산양식과 결합하며, 이 생산양식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사건 및 정념들과 관련된 행위들을 해석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술의 변신(metamorphosis)을 목격하는 국면에 있습니다. 노동이 스스로를 완전히 변형하는 생산양식의 국면에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예술과 관련하여 나는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첫째, 예술은 ‘만듦’의 한 형식이며, 따라서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의 생산양식과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둘째, 예술은 ‘존재’를 생산하는 능력을 갖습니다. 물론 모든 예술이 언제나 진정한 ‘존재’를 생산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이 존재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시장에 복무하며 시장 내에서 생산되고 유통되는 예술과 ‘존재’를 생산한다는 의미에서 절대적 생산으로서의 예술은 분명히 구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 : 1년 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사람들은 맑스를 읽었습니다. 아테네에서 열린 <documenta 14>에서는 매우 강한 의미의 정치적 예술이 선보여져서 네덜란드의 전국신문인 <NRC Handelsblad>가 ‘혁명을 위한 무대’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죠. 그러나 동시에 이 혁명적 플랫폼들은 비엔날레와 도큐멘타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으며, 이는 발터 벤야민이 정치의 ‘미학화’라고 칭했던 것 ― 벤야민에 따르면 이것은 파시즘의 징후이기도 하지요 ― 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습니다. 예술이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파시즘 그 자체를 긍정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분명 신자유주의를 강화하며 예술을 상품으로 전환하는 제도들로부터 예술이 벗어날 수 있을까요?
답 : 탈출의 길은 언제나 있습니다! 말씀하신 공간들은 명확히 전장(戰場)으로, 대결과 충돌, 갈등과 균열의 장소로 간주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엔날레와 도큐멘타가 대표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국가 혹은 시장의 이 거대한 예술제도들은 통제 메커니즘으로 기능하는데, 이러한 통제기능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늘 가능하며 또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예술가들은 노동자들과 정확히 같은 조건에 있습니다.
내 생각에 예술제도들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것들은 경기장,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진리를 위한 싸움이 벌어지는 경기장, 이데올로기 비판과 생산의 경기장입니다. 권력의 담론이 드러나는 곳인 동시에 또한 언제나 시장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국가와 시장에 의한 이 통제의 우리(cage)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며, 이러한 탈출은 언제나 예술의 발전의 일부를 이루어 왔습니다. 예술은 매번 다른 방식으로, 다수의 상이한 형태로 스스로를 드러내 왔습니다. 가령 한때는 오늘날 예술제도들과 동일한 역할을 담지했던 예술의 후원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도 문제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조건들에 맞서 예술이 수행해온 끊임없는 저항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나는 예술이 어떤 식으로든 권력의 편에 선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대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화가들과 조각가들이 그랬고, 네덜란드 ‘황금기’의 화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술에는 그 예술적 생산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단절의 지점들이 언제나 존재해 왔습니다. 저 화가와 예술가들이 그들의 특정한 사회적 맥락의 분리불가능한 부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이 단절의 지점들 때문에 우리는 예술을 진리를 밝히는 하나의 방법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절의 지점들이 예술에 진리의 양식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죠.
나는 종종 예술가 친구들-동지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들은 점점 더 시장에 대해 비판적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시절 계급투쟁을 강하게 신뢰하거나 그것에 공감하는 동지들의 행위에는 시장에 대한 일반적인 저항이 존재합니다. 시장에 대한 거부는 점점 더 근본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부와 항의는 타협 없는 근본적인 비판을 낳습니다.
물론 종종 ‘무(nothing)’의 강한 유혹, 행위하지 않고 만들지 않으려는 유혹, 혹은 ‘하지-않음(not-doing)’/‘만들지-않음(not-making)’을 표현하는 예술작품을 제시하려는 유혹 또한 존재합니다. 나는 이러한 이슈들에 대해서 신중한 편이며, 모든 행위에는 ― 따라서 예술 행위에도 ― 물질적 구성이 요구되고, 그러므로 현실과 관련을 갖는 구성 역시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순수성을 추구하거나 힘을 악마화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