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에서 메트로폴리스로, 그리고 다시 공장으로
- 저자 : Antonio Negri
- 원문 :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and Back Again” in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의 마지막 장인 17장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and Back Again”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을 구성하는 글들 가운데 이미 블로그에 올린 또마셀로(Federico Tomasello)와의 세 번의 대담을 포함한 이 모음집의 다른 글들은 1996년부터 2015년까지 여기저기 실렸던 것들을 영어로 옮긴 것이지만, 이 17장만은 네그리가 이 모음집을 위해 새로 쓴 글을 영어로 옮긴 것이다. 대담을 정리한 글들을 올릴 때에는 이탈리아어 원문을 구할 수가 있어서 (영어본의 애매한 부분을 이탈리아어본으로 확인하는 작업과 아울러) 어떤 용어의 원문을 병기할 때 이탈리아어를 병기했으나(이탈리아어와 영어 둘 다 병기하는 경우에는 이탈리아어 먼저), 이 글은 이탈리아어 원문을 구할 수가 없어서 원문을 병기할 때에는 영어를 병기한다. 이로써 이 책의 일부 내용을 정리하는 일단의 작업이 완료된다. 책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도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내용을 정리해 올리겠지만, 미리 장담할 수는 없을 듯하다.
공장에서의 잉여가치 추출에서 메트로폴리스에서의 잉여가치 추출로의 이행은 앞의 글들에서 이미 다룬 주제이다. 이 글에서는 메트로폴리스에서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는 이행을 다룬다. 이 이행이 의미하는 바와 관련하여 여러 물음이 가능하다. 생산주체 즉 산 노동의 담지자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 노동자는 어떤 존재가 된 것인가? 착취받는 메트로폴리스 노동자의 특징은 무엇이며 이 노동자는 어떤 점에서 공장노동자와 구분되는가? 메트로폴리스의 공통적인 것(the metropolitan common)은 새로운 형태의 착취와 새로운 유형의 프롤레타리아(인지노동자)의 함입을 허용하는가? 마지막 질문에서 시작해보자.
도시를 구축하고 정의하는 데 공통적인 것이 항상 존재했다는 점은 명백하다. 도시를 부르주아지의 탄생지이자 근대가 개념화되는 중심지로 보는 막스 베버의 도시 정의에서도 그 개념은 특이성들의 협동에, 즉 공통적인 것에 열려있었다. 도시는 탄생될 때부터 ‘연합한 생산하는 다중’의 표현이었다. 사적 소유나 공적 소유가 차지하지 못한 공간들에서만이 아니라 공존의 장소들을 가로지르고 도시의 정치상황에 따라 그 장소들을 채우거나 비우면서 그러했다. 그렇다면 공통적인 것이 도시의 제도적 체계에서 정치적인 것의 다른 얼굴로서 제시된다는 점이 분명하다. 정치적인 것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를 이동할 때 공통적인 것은 이 이동의 존재론적 토대를 구성한다. 여기서 ‘존재론적’이란 말은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변화하며 움직이는 현실을 의미한다. 공통적인 것의 고고학은 도시의 역사를 통과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계보학은 도시의 공통적인 것, 더 정확하게는 공통적인 것의 메트로폴리스(the metropolis of the common)의 투사(projection)에서만 획득될 수 있다.
지난 50년 동안 일어난 거대한 변혁에서 나에게 명확하게 보이는 첫째 점은 메트로폴리스의 삶의 양태가 이전 세대들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시간이 복수화(複數化)되었고 이전의 모든 관습과 규칙성이 파열되었으며 삶은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모든 파열의 순간에도 대체·부과·보완을 통해 도시의 움직임의 총체에 새로운 결합이 일어난다. 유동적이고 통제·조형 가능하며 총체화하는 결합이다. 예를 들어 노동일은 더 이상 8시간이 아니라 24시간이다. 이 24시간을 구성하는 모든 구간들은 증가할 수도 있고 감소할 수도 있다. 시간의 이러한 새로운 밀도는 비동기화(desynchronisation)를 통해 산출되며 여기서 발명하는 힘(능력)이 바로 메트로폴리스의 생산 주기를 재구성한다. 변한 것은 공장 안의 시간표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형태들의 시간표이며, 이는 전적으로 새로운 귀결을 낳는다. 가령 가사노동자들은 완전히 불연속적인 일정을 가진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 불연속성은 사회에 실질적으로 필요한 요소로서 등장한 이후에 재구성되며 사회적 대화의 필요와 삶정치적 비용의 계산이 고려되게 된다.
공장이 된 순간부터 메트로폴리스는 ‘기계적 구조’(‘machinic structure’)에 의해 조직되게 되었다. 이 구조가 메트로폴리스의 몸체를, ‘도시적 총체’(urban whole)를 구성한다. 이 ‘총체’에 대한 인식을 둘러싸고 많은 환상들이 생겨났다. 그것은 때로는 기계적·포괄적·동심원적 총체로 정의되었고, 다른 경우에는 지적이고 확산된 신체적 총체로서 정의되었다. 이 정의들은 과학적이기는커녕, 도시의 통치를 위한 도구들로서 탄생했다. 이것들은 도시의 기술관료적 관리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메트로폴리스를 사이버 도시로서 그려낸다. 그러나 이것은 재주를 부리는 것일 뿐이다. 비판적 능력이 출중한 저자들(특히 애덤 그린필드Adam Greenfield)은 이런 식으로 도시를 보는 것이 일종의 완고한 논리적 실증주의임을 보여주었다. 이 각도에서 보면 일종의 산술적 (그리고 알고리즘적) 분석학이 복잡성을 이해하는 도구로 사용되게 되고 도시의 복수적이고 다양한 현실에 위로부터 부과되게 된다. 이것은 적절한 도구가 아니다. 메트로폴리스가 다양한 행동과 행위의 집합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적인 행동과 공적인 개입을 가로지르는 ‘공통적인 것’(이는 보이지 않지만 강력하다)이 그 안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공통적인 것의 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불변적 동반자이다. 그것은 체제 속에서 신비화되어 있고 사적으로 전유되며 공적인 것에 의해 소유되고 ‘일반 이익’으로서 제시되고 있지만, 사실상 공통적인 것은 파괴적일 수도 있고 건설적인 수도 있는 힘의 집단적 경험으로서 제시된다. 도시의 차원에서 공통적인 것의 욕망은 ‘좋은 삶’(good life)에 기여할 수 있는 공간들의 추구로서 탄생한다.
숨 막힐 정도의 복잡성 때문에 도시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집단적 행동을 통해서 말고는 즉 ‘공통적인 것의 반란’을 통해서 말고는 공동의 착취 상태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자립을 추구하기 위해서, 혹은 (더 나쁜 것이지만) 단지 소비를 제한하기 위해서 복잡성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는 없다. 복잡성을 재조직화하여 ‘공통적인 것’으로 되돌려야 한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기계적 체계는 특이성들을 가두는 억압적인 울타리치기의 한 양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갈등의 공간이고 투쟁 속의 향유의 공간이며 또한 착취받고 억압되고 패배하는 가운데 고통받는 공간이다. 바로 거기가 우리가 존재하는 곳이다. 권력이나 자본의 경우처럼 메트로폴리스의 기계적 체계 혹은 알고리즘도 이중적이다. 생산과 명령 사이에 밀접한 알고리즘적 연관이 있다. 노동자들 혹은 시민들이 의미있는 생산적인 관계들을 구축하고 거기서 나오는 가치가 자본에 의해 추출된다. 그런데 가치화(가치추출)의 과정이 깨질 때 저항이 발생하여 산 노동의 자립과 일관성을 회복한다. 산 노동이 저항을 통해 알고리즘을 깨고 새로운 의미의 네트워크들을 구축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산 노동에 의한 생산 없이는, 주체화 없이는 알고리즘도 없기 때문이다. 저항 없이는 자본주의도 없고 임금도 없으며 사회적 향상도 없고 삶의 향유도 불가능하다.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저항만이 시민들의 궁핍이나 명령에의 종속과 단절하면서 특이성들의 미래를 드러낸다. 우리는 기계적 몸체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사용하여 그것을 향유하는 데로 접근할 수는 있다. 여기서 ‘사용’이라는 범주가 핵심적이다.
자본주의적 발전에서 사용가치가 교환가치에 가려 그 의미가 축소된다는 점은 명백하다. 따라서 사용가치를 삶형태로서 회복한다는 것은 억압적 고리와 그에 달라붙어 있는 폭력을 부순다는 것을 의미한다. 메트로폴리스의 투쟁(사회적 파업)은 이 지형에서 효과적인 무기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현재의 도시 유토피아, 즉 건축 분야의 투사들이 그리는 유토피아에서 ‘닫힌 요새’―20세기 초에 노동자들이 비엔나에서 동네 지역에서 창출하려고 했던 것―와 같은 모델들을 선택하고 있다는 점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은 또한 콜하스(Rem Koolhaas)가 다중이 살 수 있고 스스로를 자율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장소를 위한 모델로서 발전시킨 ‘거대함’(Bigness)이라는 아이디어를 채택하고 있다. 피렌체의 아키줌Archizoom[‘Archizoom Associati’는 1966년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세워진 디자인 스튜디오이다.―정리자]의 노동자주의 건축가들이 이런 생각을 이어받아 작업을 하고 이어지는 논쟁의 중심에 줄곧 있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여기에 대응되는 주체적 차원이 존재한다. ‘테크놀로지를 도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싸센(Saskia Sassen)은 말한다. 이는 지성을 민주화해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메트로폴리스에서 공통적인 것의 차원을 실질적으로 찾아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공통적인 것의 차원이란 주체성의 생산이 아니고 무엇인가? 여러 형상의 노동들이 ‘일반지성’ 아래 집결되는 동학도 도시 행정의 전통적인 부문들이 변형되어 새로운 복합적인 유형의 서비스로 전환되는 것, 혹은 (더 낫게는) 메트로폴리스에서의 시민들의 협동을 생산하는 것으로 전환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사실 혁신의 움직임들이 영속적으로 도시를 가로지른다. 도시가 생산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기술할 것인가가 더 이상 아니라 그런 움직임들을 의식하고 체계를 다스리는 기능을 시민들 혹은 노동자들에게 아래로부터 맡기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하비(David Harvey)는 ‘추출적 착취’라는 개념을 다듬어내는 자신의 작업의 초기부터 르페브르(Henri Lefebvre)의 통찰을 이어받으면서 도시가 산 노동력의 생산물이라는 점을, 그리고 이 전반적 생산물이 자본에 의해 강탈되고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도시로 돌아가서 도시를 거기서 사는 사람들의 활동을 통해, 이런 식으로 해석되는 공통적인 것을 통해, 요컨대 지식으로 하여금 사회적 관계 전체를 투과하게 함으로써 다시 고찰할 때이다. 르페브르는 포디즘의 마지막 국면을 살았다. 이때는 도시가 산업이라는 외부 권력에 확연히 종속되어 노동일이 가차 없는 경직된 선형의(linear) 조직화가 이루어지기 직전이었다. 맑스가 연구했고 모든 19세기 후반의 위대한 소설가들이 말해준 노동일은 메트로폴리스에 기계적 명령을 부과한 후에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렇다고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메트로폴리스를 둘러싸면서 그 인접 생산기계를 구성한 노동계급의 도시들은 지위가 격하되어 쓰레기통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재정 위기’는 그 중심지들로부터 그 시대의 ‘창조적 계급’을, 즉 잘 사는 부르주아지를 밀어냈다.
르페브르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이 위기를 프롤레타리아의 저항이라는 시험을 거치게 하는 데, 그리하여 메트로폴리스의 중심성을 재발견할 뿐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 그 생산적 활력의 회복을 예견하는 데 있었다. 실제로 이 일이 일어났다. 도시가 (공장노동을 하도록 저주받은 궁핍화된 주변부들의 행정적 기능만이 아니라) 생산적 기능을 회복했을 때, 그리고 주체성의 생산의 중심지점이 되었을 때, 르페브르는 도시를 창조적 비등의 새로운 순간으로 간주했고 급진적인 민주적 가치를 대표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으로 간주했다. 계급투쟁은 도시에 다시 함입되었고 우리의 자유로운 시민적 삶의 운명에 새로운 결정적인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이제 부르주아지의 도시가 아니라 인지노동의 메트로폴리스, 젊은 불안정 프롤레타리아의 메트로폴리스였다. ‘공통적인 것’의 새로운 활력이 메트로폴리스로 진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르페브르의 예언의 성취를 목격하고 있는 것인가? 스쿼트(squat) 운동에서 2011년의 거리시위까지, 오큐파이(Occupy)에서 자치행정과 협동 그리고 ‘해방지대’(liberated zones)의 구축의 경험들까지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곧 반신자유주의적이고 생태론적인 공동체적 실천임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제 변형이 일어날 때 그리고 위기가 목전에 있을 때 상호부조와 협동이 항상 일어난다. 부동산 지대에 대한 투쟁이 시민들의 정치적 자기실현에서 중심적이 된다. 공통적인 것을 바탕으로 삼는 저항이 추출적 기업활동을 맞받아친다. 공통적인 것의 사용권이다. 소득, 복지, 시민권이 싸움터가 되며 이 싸움터에서 주택과 거주는 참호 역할을 한다. 종종 부채와 가난이 공존하지만, 이것들이 축출될 곳도 여기이다. 상호화(mutualisation)[자원의 공동이용―정리자] 기획들과 시민소득에의 요구가 반자본주의의 새로운 전선이다. 이는 ‘시민으로 존재하기’(‘being a citizen’)의 욕구에 맞추어진 요구들이다. ‘소유하기’가 아니라 ‘존재하기’이다. 소유가 아니라 일이요 활동이며, 사적 전유나 공적 사용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구축이다.
몇 가지 기본적 논점들을 요약해보면, ① 긴 이행의 시기가 지난 후 생산에서의 중심성이 다시 부활했다. ② 시민(혹은 노동자)이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었다. 시민은 종종 빈자이다. 그러나 오늘날 가난의 분석은 과거가 특권을 가지지 않는 지형에서 펼쳐져야 한다. 탈근대로 (포디즘에서 금융자본주의로, 테일러주의화된 노예에서 인지노동자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지형에서 움직이게 되었다. 메트로폴리스에서 다중은 지적 형태가 된 생산수단을 자신이 재전유했기 때문에 공통의 부를 직접 창출하면서 가난에 맞서 싸운다. 도시는 이러한 싸움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장소이다.
자본주의적 형태의 가난이란 길게 보면 자본의 ‘시초 축적’의 복잡한 과정이다. 이는 오늘날 메트로폴리스에서 과거와는 다른 형태로 다시 이루어지고 있다. 과거에 노동자들은 토지로부터 분리되고 모든 자립적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후에 이중적 의미에서 ‘자유로운’ 노동자가 되었다. ① 봉건적 농노제에 종속되어 있지 않아서 자유롭고 ② 재산이나 땅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자유롭다. 프롤레타리아가 빈자 다중으로 창출된 것이다. 오늘날 메트로폴리스에서 일어나는 산업노동에서 인지노동으로의 이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빈자 다중은 이제 인지노동자들의 다중이다. 그런데 맑스는 노동수단과 생계수단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노동능력은 절대적 가난이 된다고 한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참조―정리자] 그리고 그 단순한 인격화로서의 노동자는 맑스의 개념에 따르면 빈자이다. 그가 말하는 빈자는 단지 가난 속에서 생존의 경계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산 노동이 객체화된 노동(이는 자본축적을 위하도록 운명지어여 있다)으로부터 분리된 모든 노동자들이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의 메트로폴리스에도 해당된다.
여기서 맑스는 분명히 프롤레타리아의 가난을 그 활력과 연결시킨다. 산 노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적 부의 일반적 가능성이라는 의미에서이다. 이러한 연결은 사적 소유의 심장부에 놓여있는 치명적 위협이다. 탈산업 자본주의에서 노동의 명령으로부터의 분리(즉 자율적으로 되기)가 대대적으로 증가하며, 생산적 노동(지적, 인지적 노동)의 소외의 정도도 극히 높아져서 노동자들의 프롤레타리아화와 그들의 삶의 불안정성으로 구현되고 있다. 가난과 활력의 혼합은 점점 더 폭발적이 되고 있다.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이 모든 것이 거대하게 확대된다.
이 사회의 공통적 생산 외부에, 메트로폴리스에서 축적되는 가치의 추출 외부에 존재하는 가난이란 더 이상 없다. 예를 들어 빈자와 고용된 노동자들 사이에 질적 차이는 없다. 반대로 모든 다중에 점점 더 공통되어지고 생존과 창조적 활동에 모두에 적용되는 조건이 존재한다. 빈자의, 고용된 노동자의, 비정규직의, 이주자들의 창조성과 발명 능력은 사회적 생산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다. 오늘날 생산이 공장의 벽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외부에서도 일어나는 만큼, 생산은 임금관계의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생산적 노동자들과 이른바 비생산적 노동자들 사이에 사회적 장벽은 없다. 모두 메트로폴리스에서 이루어지는 생산과정에 참여한다. 이런 이유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이 낡고 애매한 맑스주의적 구분―은 단호히 거부되어야 한다. 가령 ‘산업예비군’이 나타내는 위계가 여기 해당되는데. 이 위계는 일반적으로 여성들, 고용되지 않은 노동자들, 그리고 빈자들을 중요한 정치적 역할에서 배제하는 데 사용되어왔다. 혁명적 기획을 포함한 주요한 역할은 대공장의 ‘손에 굳은살이 박인 노동자들’―탁월한 생산자들로 간주되는 사람들―에게 맡겨졌다. 그런데 오늘날 여성들, 고용되지 않은 노동자들, 그리고 빈자들을 메트로폴리스의 생산에서 어떻게 배제할 수 있단 말인가!
가난이라는 조건에 맞서는 빈자들의 투쟁은 투쟁형태일 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삶정치적 힘의 긍정적 양태들이기도 하다. 이 힘은 애처로운 ‘소유하기’(having)보다 훨씬 더 강력한 공동으로 ‘존재하기’(common ‘being’)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20세기에 세계의 유력한 지역들에서 빈자의 운동은 가난이 동반하는 단편화·낙담·포기·공황상태를 극복하는 힘을 보여주었으며, 부의 재분배를 요구하고 메트로폴리스들로 이주함으로써 해당 국가의 정부들에 도전했다. 메트로폴리스들은 전지구적 수준에서 이 투쟁들에 영토를 제공했다. 메트로폴리스는 공동의 생산과 그 생산물들을 한데 엮는 곳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계급투쟁이 돌아왔다. 이는 가난에 맞서는 투쟁이며 공통적인 것의 구축을 위한 투쟁으로서 메트로폴리스에서 펼쳐진다. 노동자가 메트로폴리스로 돌아와 공통적인 것을 명령에 대립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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