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추상적 파업에 대한 단상


  • 저자  :  Antonio Negri
  • 원문 : “Notes on the Abstract Strike” in Antonio Negri.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2018)의 16장 “Notes on the Abstract Strike”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은 원래 2015년 5월 8일 베네치아에서 열린 AB-STRIKE 컨퍼런스에서 네그리가 발표한 것이다. 이 책에 번역되어 실리기 전에 이미 이 글의 영어번역이 두 군데(①http://supercommunity.e-flux.com/texts/notes-on-the-abstract-strike/ ②http://www.euronomade.info/?p=5624)에 같은 제목으로 실려있는데(모두 Phillip Stephen Twilley의 번역이다), 이 책의 영어번역(Ed Emery의 번역이다)과는 부분적으로 제법 달라서 정리에 다소 애를 먹었다. 이 글의 이탈리아어 원문은 구할 수 없었다. 

과거 파업은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직접적 공격인 동시에, 명령자(boss)에게 손상을 주고 노동자들의 삶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파업에는 무언가 육신적인 것, 삶정치적인 것이 있었다. 경제적 행동을 정치적 재현으로 만들고 물러남의 행동을 자본으로부터의 탈주의 실천으로 만드는 폭력이었다.

이제 우리는 자본 관계의 성격이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안다. 노동자들의 특징이 단계마다 다르며 명령도 맥락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업도 변한다. 가령 산업노동자의 파업과 농업노동자의 파업은 매우 다른 경험이며 매우 다른 모험이다. 산업노동자들의 경우에는 사보타주와 오랫동안 노동으로부터 물러나 있는 상태의 연속이다. 농민 투쟁의 경우에는 육신적이고 집중적이며 매우 거친 폭력이 행사된다. 소에 먹이를 줘야 하고 추수를 하지 않으면 수확물이 썩어가는 등의 이유로 농업노동자들의 투쟁은 짧을 수밖에 없다. 산업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마지막 순간 필요임금의 한도에 의해서 제한되는 것 말고는 짧을 이유가 없었다. 명령자의 입장에서 파업은 어떤 것이든 하나의 단일한 실재(경제적으로는 가치화 관계의 단절이며 정치적으로는 종속의 단절)이며, 그 다양성은 억압의 행동에 의해 말소된다.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가 노동에서의, 생산에서의, 노동계급에 대한 정치적 통제에서의 변형의 일반적 플랜으로서 시작되었을 때, 대중노동자의 투쟁에 대한 해답이 공장의 자동화를 통해 그리고 사회의 컴퓨터화를 통해 이미 주어졌다. 신자유주의의 이러한 성공을 위한 토대는 바로 사이버네틱 기업활동이었다. 그러나 통제의 이러한 변형은 노동자들이 공격에 대항하는 방법을 사장들이 이제는 알고 있음을 말해주는 하나의 상징적·정치적 행동에 의해 도입되었다. 새처의 탄광노동자 파업 억압과 레이건의 관제사들에 대한 공격이 생산양식의 변형에 필요한 전제조건으로 발현되었다. 여기서 투쟁의 억압이 가지는 상징적 성격(이는 나중에 ‘삶정치적’이라고 불리게 된다)은 협상의 모든 가능한 여지를 몰아내는 그 극단적인 폭력에서 나타난다. 노동계급의 파업은 이제 ‘삶권력’과 대면하게 된 것이다.

분석을 전진시켜서 ‘추상적 파업’의 문제를 다루려면 ‘이제 누가 노동자이며 누가 노동과정에 대한 명령자(boss)인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첫째, 누가 노동자인가? 노동자는 노동자들 자신들에 의해 구성되지만 사장의 통제를 받는 비물질적 네트워크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이 네트워크는 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여주는 동시에 거기서 가치를 추출한다. 이 노동자들은 점점 더 심화되는 협력 내에서 성장하면서 점증하는 생산 능력을 발현하고 자신들의 노동력을 생산체계의 활력으로서 이해하는 노동자들이다. 협력 내에서 노동은 점점 더 추상적이 되며 따라서 생산을 조직하는 노동의 능력이 점점 더 커진다. 그러나 동시에 가치추출의 메커니즘에 점점 더 종속된다. 노동자는 협력의 측면을 점점 더 자율적으로 발전시키는 가운데 자신의 생산적 에너지를 조직한다.

여기서 자율은 노동의 자본에 의한 형식적 혹은 실질적 포섭의 이전 단계들에서의 자율과 같은 의미의 것이 분명 아니다. 현 단계에서 자율은 단지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차원의 것―자율적 일관성(consistency)―이기 때문이다. 비록 자본주의적 명령에 종속되어 있지만 말이다. 노동과정과 가치추출 과정이 분리되어 전자는 산 노동의 자율에 맡겨지고 후자는 순전한 명령에 맡겨지면, 이는 노동의 존엄과 힘이 착취의 형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수준에 도달했음을, 따라서 아직 명령을 받고는 있지만 자신의 자율을 발전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는 ‘알고리즘’의 지배에 대한 찬가를 점점 더 많이 듣는다. 그런데 IT 가치화를 통제한다고 하는 알고리즘이란 노동자의 협력의 산물인 것을 자본가들이 다시 협력에 부과하는 기계일 뿐이다. 오늘날 산 노동이 표현하는 바로 그 활력과 자율에 의해 생산되는 기계이다. 맑스가 연구한 노동과정과 오늘날의 노동과정 사이의 큰 차이는 오늘날의 협력은 더 이상 자본가에 의해 부과되지 않으며 노동력 내부로부터 산출된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는 진정으로 노동자들에 의한 고정자본의 전유에 대해 말할 수 있는데, 이로써 우리가 가리키는 것은 모든 방면에서 노동의 가치화를 향해져 있으며 노동이 부릴 언어들을 산출하는 과정(가령 인지 알고리즘의 구축)이다.

만일 사태가 이렇다면, 자본주의적 명령은 오로지 노동과정으로부터 점점 더 자신을 추상함으로써만 기능할 수 있다. 우리가 사회적 협력의 ‘추출적 착취’에 대해 말하고 노동조직화의 산업적 형태와 결부된 착취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후자 유형의 노동조직화와 가치화에서는 주체성의 생산의 두 측면(한편으로는 주체화를 통한 생산을, 다른 한편으로는 주체를 명령받는 상태로 축소시키려는 계속적인 노력을 의미한다)이 복잡하지만 기본적으로 직렬적으로 펼쳐진다. 여기서 보이는 이중성은 탈산업적 구조화에서 산 노동의 모든 형상의 이중성과 동일하다.[주체화의 이중성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글 「일반지성의 거처」를 참조하라―정리자]

둘째, 오늘날 명령자(boss)란 어떤 존재인가? 인지노동과의 관계에서 보면 명령자는 가치를 추출하는 금융자본의 형태를 띤다. 이 추출에서 오늘날 명령자의 기능이 기업가적 범주에서 순전히 정치적 범주로 점진적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 자본주의적 명령의 수직화는 점점 더 추상적인 방식으로 협력과의 관계를 가로지르고 생산적 주체화의 과정들을 가로질러야 한다. 결과적으로 이 수직화에서는 일종의 명령의 통치화―산 노동이 협력을 구축하는 기계적·알고리즘적 메커니즘들을 통제하려는 점점 더 복잡해지는 시도―같은 것이 표현될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금융자본은 ‘독재’로서 제시된다. 물론 파시즘적 독재가 아니라 (추상과정에 대한 권위의 수립을 시도하는, 요컨대 추출을 추상과 짝짓는) 명령의 추상화이며 그 통치의 획일화이다.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적 명령은 ① 추상적/추출적 명령으로 가치창출의 과정 전체를 장악하려는 측면(이는 정치적 명령의 준비이다)과 ② 신자유주의가 그 자체로 정치적으로 구성적이라는 측면을 가진다. 신자유주의는 명령(기본적으로 금융적이지만 국가권력의 지원을 받는다)일 뿐인 통치활동을 발전시키는 것에 덧붙여 통치성의 다양한 형태들을 가진 네트워크들을 통해 스스로를 펼치며 욕구와 욕망을 포괄하는 광범한 미시정치적 네트워크에 대한 참여적 명령으로 행동한다. 신자유주의적 구성은 산 노동으로부터 가치를 추출할 뿐만 아니라 소비와 욕망을 조직하여 그것을 자본의 재생산에 복무하도록 만든다. 생산과 소비를, 욕구와 자본의 재생산을 매개하는 것, 따라서 노동(생산하는 노동과 소비하는 노동)을 단 하나의 추상으로 동질화하여 모으는 것은 화폐이다. 생산하는 노동을 재전유함으로써 그리고 소비를 자본주의적 관리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이 복잡한 상황을 돌파해나가는 것이 가능한가?

20년 전 우리가 ‘비물질 노동’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무시당했는데, 이는 사실 모든 노동이 물질적인데도 우리가 ‘비물질적’이라고 말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비물질성’이라는 말로 우리가 의미했던 바가 단지 육체노동이 아니라 가치·지식·언어·욕망을 구성하는 행동들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오늘날에는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는다. 자본이 저 새롭고 매우 풍부한 맥락을 포착하여 자신이 명령 아래 둔 상황에 우리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한 것이다. 자본은 두 방향으로 행동했다. 한편으로 언어의 살아있는 생산에 명령을 맞추었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은 욕구와 욕망을 자본주의적 명령에 복무하도록 만들었다.

신자유주의에서 자본은 생산적 주체화의 힘이 주체로서 인정되기를 원한다. 말하자면 자발적 노역을 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극대화되면, 산 노동 없이 생산이 없듯이 소비 없이는 가치화(혹은 재생산)가 있을 수 없다는 데까지 나아간다. 케인즈주의가 신자유주의적 구성에 명시적으로 내화되어 갱신된다. 정직하지만 비판적 판단을 할 수 없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산출하거나 받아들이는 무력한 신비화가 여기서 등장한다. 이제 자본이 지배받는 사람들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노역의 부정이 진리로서 과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본 안에 사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본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오늘날 추상적 파업이란 무엇인가? 즉 산 노동의 새로운 성격과의 관계에서나 생산과 재생산의 신자유주의적 구성과의 관계에서나 파업으로서 가늠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체제에 손상을 입히고 다시 한 번 물질적·삶정치적인 실질적 활력으로 스스로를 발현할 능력을 가진 사회적 투쟁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다시 두 가지를 물어야 한다. ① 오늘날 산 노동은 가치화의 흐름을 파열시킬 수 있는가?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투쟁의 전통 전체(생산관계의 붕괴, 사보타주, 엑서더스 등)를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노동이 삶 전체에 삼투된 시기, 하루 종일 노동해야 하는 시기, 노동자의 생산 능력이 명령의 네트워크에 잡혀 있는 시기에는 협력의 공간적 연결의 지형에서나 시간적 연결의 지형에서 파업 행동이 요구하는 저 독립성을 다시 획득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지형이 흐름이 되어 버린 상황에서 말이다. 예를 들어 생산적이 된 메트로폴리스를 점령하고 봉쇄하는 것이 가능한가? 혹은 멈추지 않는 사회적 네트워크 생산성의 흐름을 파열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이에 대한 답을 하려면 다시. 오늘날 생산과 명령 사이의 알고리즘적 연관이 나타내는 특이한 구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즉 노동자들이 의미 있고 생산적인 관계, 자본에 의해 그 가치가 추출되는 관계를 구축하는 장소로 돌아가야 한다. 이 경우에 파업은 가치화의 과정을 부술 때만이 아니라 또한 산 노동의 자립성, 일관성(consistency)을 회복할 때, 즉 생산적 행위가 될 때 성공할 수 있다. 즉 새로운 의미작용 네트워크들을 구축하기 위해서 알고리즘을 부수는 것이다. 산 노동은 이것을 할 수 있다. 산 노동에 의한 생산 없이는, 주체화가 없이는 알고리즘이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산 노동을 이 일을 해야 한다. 자본주의에서는 저항 없이는 임금도, 사회적 향상도, 복지도, 삶의 향유도 없기 때문이다. 파업이 명령에 종속된 비참한 상태와 단절하며 미래를 드러낸다. 노동계급 전통을 삶의 전 지형으로 확대하여 회복하는 파업, 사회적 파업이다. 이것이 사회 전체에서 가치를 추출하는 자본주의적 기술에 대항하는 파업의 형상이다.

마찬가지로 혹은 더 중요한 두 번째 공격지점은 사회의 재생산 과정이 금융자본(과정의 화폐화)과 교차하는 지점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소비를 화폐 차원과 연결시키는 메커니즘을 새로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종의 재생산의 필요에서 소비를 할 수 있을 때의 소비는 항상 좋은 것이다. 자연적, 일반적 인간 종의 욕구라기보다는 노동계급 종의 욕구. 생산적 종의 욕구, ‘포스트휴먼’ 종의 욕구이다. 이는 파열의 계기로 간주되어야 할 종류의 소비이다. 이제 이는 투쟁으로 가로질러야 할 복지의 지형(서비스와 소비에 대한 지배를 조직화하는 장소)이 된다. 저항을 행할 곳이며 대안적 전망들을 발전시킬 곳인 것이다. 여기서 추상적 파업은 물질적 파업이 된다. 핵심은 산 노동이 소비에 대한 장악력을 회복하는 것이며 이윤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인간의 생산’을 구축하거나 [사회에] 부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추상적 파업에는 두 수준이 있다. ① 생산의 수준에서는 산 노동의 자립성을 다시 획득하여 가치화 과정을 부순다. ② 재생산의 수준에서는 욕구-욕망-소비의 새로운 연쇄를 구축하고 부과한다. 자본이 가치추출을 위해 가장 많이 침투하는 생산 네트워크들 내에서 작동하는 독립적 공간들을 구축하는 데 바쳐진 연구가 풍부하다는 것이 우리 시대의 특징이다. 상호주의의 부활과 디지털 네트워크들에서의 협력의 성장은 심화될 필요가 있는, 투쟁의 첫 단계들일 뿐이다. 욕망-소비 연쇄(와 그 강제된 화폐화)를 부수는 것과 관련해서는 비트화폐를 창출하고 자율적 소통네트워크들 및 자립적 소비네트워크들을 구축하기 위한 흥미로운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시도들은 부분적이지만 중요하다. 그런데 그 효과는 그 기획들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서는,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이 생산적 주체화를 주체들의 독재적 생산으로 변형시키는 중대한 지점을 공격적으로 장악하지 않고서는 결정적인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가 금융 자본의 독재와 양립 불가능함을 명백하다. 추상적 파업은 이런 전제 위에서 현재와는 다른 민주적인 세계를 제안하고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자립적 활력을 구축하기 위해서 개입해야 할 여러 지형들을 알려준다.

가치추출에 대항하는 파업과 사회적 착취의 자본주의적 추상이라는 수준에서 움직이는 파업은 동일하지 않다. 전자의 경우 투쟁은 이윤의 전유(혹은 이윤을 노동자들에게 더 유리하게 분배하는 것)를 목적으로 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사회 재생산 모델과 자본주의적 지배의 모델 및 기능적 화폐의 기존의 주조 모델을 전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오늘날 이 두 수준의 투쟁은 동일하지 않으면서도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나는 수평적이고 다른 하나는 수직적이다. 하나는 노동의 해방을 위한 투쟁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투쟁이다. 그러나 투쟁의 관점에서는 이 둘을 구분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양자가 혼동될 수는 없다. 하나는 싸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별개로 실행되지만 함께 실행되어야 한다. 이것이 목전의 과제이다. 분석은 여기까지로 충분하고 이제는 실천할 단계이다. 신자유주의가 금융자본의 독재를 부과하지만, 노동의 그리고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투쟁은 수평적 지형에서 추출적 착취에 맞서서 투쟁을 실행하고 자본주의적 관리에 대한 대안적 기획을 산출할 과제로 상승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연합들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우리는 독재에 맞선다. 오늘의 씨리자(Syriza) 동지들, 내일의 뽀데모스(Podemos) 동지들이 투쟁을 이 노동의 해방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사이의 교차로로 끌어왔다. 이탈리아는 이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노동자들의 연합을 구축하는 데 성공할 것인가?

2015년 5월 8일 베네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