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 변화에 효과적인 12 지점
- 저자 : Donella Meadows
- 원문 : Leverage Points: Places to Intervene in a System (1997)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설명]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원칙적으로 독립적인 그런 운동/활동이 무슨 힘이 있는가?’라는 취지의 질문을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받는 경우가 있다. 아마 질문을 직접 하지는 않은 많은 사람들도 공유하는 의문일 것이다. 기업의 형태를 띠거나 국가의 권력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무언가 현실적인 것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머리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에 자본과 국가가 지배력을 행사하지 않는 ‘다른 세계’를 만든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아무래도 낯설고 이질적일 것이며, 심지어는 우스꽝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자본과 국가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당연시될수록 자본과 국가의 존재는 더욱 강화되고 그 영향으로 다시 사람들의 머릿속에서의 존재도 더 강화된다. 이른바 ‘자기강화적’ ‘양성 피드백’이다. 이는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는 ‘양성 피드백’이다. 환경학자이자 시스템 이론가인 메도우즈(Donella Meadows)는 이 피드백이 우세한 신자유주의적 시스템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기업에 의해 설계되고 기업에 의해 그리고 기업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는 규칙들을 가진 시스템이다. 이 규칙들은 사회의 다른 부문으로부터 오는 거의 모든 피드백을 배제한다. 그 회의들의 대부분은 심지어는 언론에게도 닫혀있다(정보의 흐름도 없고 피드백도 없다). 이 시스템은 국가들에게 ‘바닥으로 경주’하는 양성 피드백 고리들 강제하여 국가들이 기업투자의 유치를 위해 서로 앞 다투어 환경적·사회적 안전장치를 약화시키게 한다. 이는 ‘성공한 자에게 성공을’이라는 고리들을 풀어놓는 처방이며 그 결과로 권력의 엄청난 축적이 이루어지고 소련처럼 혹은 그와 유사한 시스템 상의 이유로 스스로를 파괴할 중앙집중화된 거대한 계획시스템들이 창출되었다.(“Leverage Points ― Places to Intervene in a System”)
메도우즈는 1990년대 초 무조건적 성장을 목표로 하는 거대한 새로운 시스템을 구상하는 한 회의에서 이 시스템이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있음을 직감하고 그 즉석에서 9개의 지렛점들, 즉 거기 개입할 경우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지점들을 효과 순으로 정리하고, 그 후 다시 “Leverage Points: Places to Intervene in a System”(1999)에서 12개로 늘려 정리한다. (여전히 변경될 수 있을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에 최종 정리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근대라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형태를 실현할 대안근대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들은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는 자기강화적 양성 피드백으로부터 탈출하고 또 다른 이들이 탈출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메도우즈의 정리를 전체적으로 참고할 필요가 있으며, 가장 효과적인 개입지점들 몇 개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듯하다.
[내용 정리]
이 12개를 효과가 낮은 것에서 높은 것으로 가는 순으로 살펴보자.
12. 상수들, 매개변수들, 숫자들 (지원금, 세금, 표준)
가장 효과가 낮은 것인데, 주목의 90%, 아니 95%, 아니 99%가 보통 여기로 향해진다. [이것들이 가장 ‘힘’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이리라.] 국가부채의 증감, 임금의 증감. 가격의 증감, 최저임금. 직원의 해고, 정치인들의 교체 등이 그 사례이다. 가령 밥 돌 대신 클린턴을 뽑은 것은 다르긴 다르지만 그렇게 다르지는 않다. 모든 대통령은 동일한 시스템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매개변수들이 행동을 바꾸는 경우는 드물다. 선거운동 후원금에 어떤 상한선을 설정하든, 정치를 깨끗하게 만들지 못한다. 매개변수들은 더 효과가 있는 항목들을 발동시키는 범위에 진입할 경우에만 효과적인 지렛점들이 된다. 대체로 숫자는 땀을 흘릴 가치가 없다.
11. 흐름에 비례한 버퍼( 및 기타 안정화하는 비축)의 크기
‘버퍼’란 안정화하는 효과를 가진 비축(stock)이다. 은행에 저금을 하는 것이 바로 비축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 비축의 능력을 증가시킴으로써 종종 시스템을 안정화할 수 있다. 그러나 비축은 물리적인 것이기에 바꾸기가 어렵다.
10. 물질적 비축 및 흐름의 구조(교통망, 인구연령구조 등)
어떤 시스템에서 물리적 구조는 결정적이지만 지렛점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것을 간단하게 바꿀 수 있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지렛점은 그 구조의 원래의 설계에 들어있다. 즉 설계 단계에서 바꾸어야 한다. 일단 구조가 구축되면 그 한계 등을 이해하는 데 그친다. [이른바 ‘알박기’는 구조가 한 번 결정되면 바꾸기 어려운 점을 이용한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일이라면 그 설계가 충분히 길어서 그 단계에서 많은 수정과 보완이 가능해야 한다.]
9. 시스템 변화 속도에 비례한 지체(delay)의 길이
온수가 지하에서 끓여지는 호텔에서 4층 욕조에 뜨거운 물이 올라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1층까지 올라오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길다. 지체가 더 길어지는 것이다. 장기적 지체를 가진 시스템은 단기적 변화에 대응할 수 없다. 그래서 소련이나 제너럴모터스 같은, 결정에서 실행까지 오래 걸리는 거대한 중앙계획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그것을 넘어가면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일어나는 위험지점인 ‘문턱’(threshold)을 가진 시스템에 지나치게 긴 지체가 일어나면 그 문턱을 넘어가서 붕괴를 낳을 수 있다. 지체는 종종 쉽게 바꾸지 못한다. 아이가 성장하는 데 걸리는 시간, 숲이 형성되는 데 걸리는 시간 등은 바꿀 수 없다. 그래서 경제성장을 늦추는 것이 기술발전을 빠르게 하는 것이나 시장가격을 더 자유롭게 하는 것보다 더 큰 지렛점이다. 시스템의 성장을 늦추고 기술과 가격이 이를 따라잡도록 하는 것이 더 큰 지렛점이다.
8. 음성 피드백 고리가 어떤 영향력을 수정하는 힘
(여기서부터는 시스템의 물리적 부분에서 정보와 통제 부분으로 이동한다. 후자의 부분에서 더 많은 지렛점들이 발견된다.) 음성 피드백 고리는 시스템의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가령 에어컨의 온도조절. 기업들과 정부들은 가격이라는 지렛점에 치명적으로 끌려있다. 물론 잘못된 방향으로 이 지렛점을 밀고 있다. 이들은 정보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비틂으로써 시장 신호들의 피드백 능력을 약화시키려 하고 있다. 의회민주주의도 그 한 사례이다. 이 민주주의는 중앙집중화된 매스컴의 세뇌능력이 출현하기 전에 더 잘 작동했다. 어장은 레이더 탐지와 저인망으로 인해서 음성 피드백 능력이 사라지고 고갈되었다.
7. 양성 피드백 고리들이 가진 힘
음성 피드백 고리가 자기수정적이라면, 양성 피드백 고리는 자기강화적이다. 양성 피드백에서 오는 이득을 감소시키는 것(성장의 늦춤)이 보통 음성 고리들의 강화보다 더 강력한 지렛점이며[무절제로 난 탈을 고치는 것보다 절제로 탈을 줄이는 것이 좋다는 말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양성 피드백 고리가 폭주하도록 놔두는 것보다 더 좋다. 인구와 경제성장률이 지렛점인 것은, 그것을 늦추는 것이 많은 음성적 고리들(기술, 시장 등등)이 기능할 시간을 주기 때문이다. 급속하게 돌아가는 양성 피드백 고리들이 촉발하는 가장 흥미로운 작용은 혼란(chaos)[유기체로 따지자면 사망에 해당할 것이다]이다. 신자유주의의 ‘성공한 자에게 성공을’ 고리( “success to the successful” loop [부익부 빈익빈]).
6. 정보 흐름의 구조(정보에의 접근 가진 경우와 가지지 못한 경우)
전기계량기가 현관에 설치된 가구들과 지하에 설치된 가구들이 경우 다른 변화가 없어도 전자의 가구들의 전기 소비가 후자의 가구들이 선기소비보다 30% 낮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전에 정보가 안 가던 곳에 정보를 보낸 것만으로 사람들이 다르게 행동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는 매개변수 조정도 아니고 기존의 고리의 강화나 약화도 아니라 ‘새로운 고리’이다. 실종
1986년 미국의 ‘Toxic Release Inventory’(유독물질 방출 목록)는 공장들이 방출하는 대기오염물질을 매년 보고하는 제도이다. 방출을 규제하는 법도 없고 벌금도 없고 안전수준을 정한 것도 아닌데 방출양이 1990년 경에 40% 감소했다. 그 이후로도 계속 방출했는데 시민들이 분노해서가 아니라 기업들이 부끄러워서였다. 이 명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방출량을 90% 주인 회사도 있다.
실종 피드백 고리가 시스템 기능장애의 가장 흔한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정보를 추가하거나 복원하는 것이 이에 대한 강력한 개입이 될 수 있으며 보통 물리적 기반시설을 재구축하는 것보다 더 쉽고 저렴할 수 있다. 물고기 개체수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 때, 잡을수록 개체수가 줄고 줄면 비싸지며 따라서 더 잡으려고 하고, 이런 식으로 왜곡된 피드백이 계속되면 어장이 붕괴된다.
피드백을 강제할 수도 있다. 납세자가 세금이 쓰일 곳을 적어내기. 도시나 회사에 유입되는 상수관을 방출되는 하수관보다 하류에 두게 하기. 핵발전에 투자한 사람들의 마당에 폐기물을 저장하기. 선전포고하는 정치가들을 전선에서 복무하게 하기.
인간은 결정에 대한 책임을 피하려는, 시스템에서 오는 경향을 가진다. 이 때문에 실종된 피드백 고리들이 많은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이런 종류의 피드백이 대중에게 인기가 있고 권력에게는 인기가 없다. 권력으로 하여금 이런 피드백이 일어나도록 허용하게 만들 수 있다면 효과가 있다.
5. 시스템의 규칙 (인센티브, 처벌, 제한 등)
시스템의 규칙은 그 범위, 경계, 자유의 정도를 규정한다. 헌법은 사회적 규칙 가운데 강력한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 같은 물리적 법칙은 절대적이다. 법률, 처벌, 인센티브, 비공식적인 사회적 동의는 나열된 순서대로 약한 규칙들이다.
규칙의 힘은 규칙을 바꾸는 것을 상상할 때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학생들이 선생을 평가하면 어떨까? 학위가 없으면 어떨까? 무언가 배우고 싶으면 대학에 오고 배웠으면 나가고. 교수들에게 학술논문보다도 실제 세계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능력에 따라 정년보장을 해주면 어떨까? 이렇게 가정해 볼 때 우리는 규칙의 힘을 이해하게 된다. 규칙은 높은 지렛점이다. 규칙을 장악하는 힘이 진짜 힘이다. 새로운 무역체제는 기업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설계하고 운영하는 규칙들이 작동하는 체계이다. 그래서 위험하고 스스로 파괴될 수 있다.
4. 시스템 구조를 추가하거나 변화시키거나 진화시키거나 자기조직화하는 힘
이는 새로운 구조와 행동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 힘은 생물학에서는 진화라고 부르고 인간사회에서는 기술발전 혹은 사회혁명이라고 부른다. 시스템 이론의 용어로는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이다. 자기조직화란 현재 목록의 더 하위에 있는 항목들(12-5)을 어느 것이든지 바꾸는 것(완전히 새로운 물리적 구조의 추가, 새로운 음성·양성 고리들의 추가, 새로운 규칙들의 작성)을 의미한다. 자기조직화의 능력은 가장 강한 형태의 시스템 복원력이다. 진화 능력을 갖춘 시스템은 스스로를 바꿈으로써 거의 모든 변화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인간의 면역 체계는 이전에는 마주치지 못한 상해에 대한 새로운 대응을 개발해낼 힘이 있다. 인간의 두뇌는 생로운 정보를 받아들여 완전히 새로운 생각을 내놓을 수 있다.
자기조직화의 힘은 매우 놀라워서 우리는 그것을 하늘이 준 신비로운 양식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경제학자들은 종종 테크놀로지를 말 그대로 하늘이 준 음식으로 간주한다. 수세기 동안 사람들은 자연의 놀라운 다양성을 한결같이 경외감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신적인 창조자만이 그러한 창조물을 산출할 수 있을 것이었다. 더 연구한 결과 신이 진화의 기적을 산출할 필요가 없었음이 드러났다. 신은 그저 자기조직화를 위한 놀랍도록 현명한 규칙들을 작성하기만 하면 되었다.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어디서, 그리고 무엇을 시스템이 추가하거나 제거할 수 있는지를 기본적으로 제어하는 규칙들이다. 단순한 알고리즘에서 복잡한 패턴들이 파생될 수 있다. (실제 현실의 알고리즘이 단순하다는 말은 아니다.)
자기조직화는 기본적으로 진화의 원료(비축된 정보)와 실험수단(새 패턴의 선발 및 시험)의 결합이다.
진화의 원료 | 다양성의 한 원천 | 선택 메커니즘 | |
생물학 | DNA | 자연발생적 변이 | 다윈적 선택 |
기술 | 축적된 이해 | 인간의 창조성 | 시장과 정부가 보상해주는 것/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모든 것 |
자기조직화의 힘을 이해하면 왜 생물학자들이 생물다양성을 숭배하는 것이 경제학자들이 기술을 숭배하는 것보다 훨씬 더한지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종들이 멸종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시스템 차원의 범죄이다. 이는 마치 특정 과학 학술지 전부 혹은 특정 종류의 과학자들 전부를 제멋대로 제거하는 것과 같다.
문화는 사회적 진화가 일어날 수 있는 비축고이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다람쥐들의 모든 유전자 변이의 소중함을 이해하면서도 문화가 가진 소중한 진화적 잠재력은 훨씬 덜 알아본다. 이는 모든 문화가 자신의 문화가 가장 우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단일한 문화에 대한 강조가 학습을 폐쇄한다. 실험을 경멸하고 혁신의 원료를 제거하는 시스템은 장기적으로 보면 몰락하게 되어 있다.
3. 시스템의 목적
유전자 조작은 그것이 어느 목적에 복무하는지를 모르면 좋은지 나쁜지를 말하기 힘들다. 모든 피드백 고리들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더 크고 덜 분명한 지렛점으로서의 목적이 있다. 전체 시스템의 목적이다. 전체 시스템의 목적은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한다는 의미에서의 목적이 아니다. 누군가가 말하는 데서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체계가 행하는 것에서 파생되는 목적이다. 생존, 복원, 차이화, 진화가 시스템 수준의 목적이다.
시스템 내의 사람들조차도 종종 그들이 복무하고 있는 시스템 수준의 목적을 모른다. ‘이윤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대부분의 기업들은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저 하나의 규칙, 게임에 남아있기 위해서 필요한 하나의 조건일 뿐이다. 게임의 핵심은 무엇인가? 주주들의 부의 증가이다. 이것이 기업의 행동을 형성하는 강력한 목적이다. 그러나 훨씬 더 큰 것이 있다. 공식적으로는 누구도 지지하지 않지만, 체계의 실제적 행동을 보면 명확한 것이다. 성장하는 것, 시장 점유율을 증가시키는 것, 세상을 더욱더 기업의 지배 아래 놓는 것. 모든 것을 삼키는 기업의 목적. 이는 바로 암세포의 목적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는 모든 살아있는 개체군의 목적이지만, 나쁜 목적이기 때문에 더 높은 수준의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음성 피드백 고리들에 의해서 균형이 잡혀야 한다. 시장을 경쟁적인 상태로 두는 목적이 경쟁자들을 제거하려는, 그리고 소비자들을 세뇌하고 공급자들을 삼키려는 각 기업의 목적을 제압해야 한다. 이는 생태계에서 개체군들을 균형상태에서 진화하는 것으로 두는 목적이 각 개체군이 무한정 생식하고자 하는 목적을 제압해야 하는 것과 같다.
이 이후에 메도우즈는, 사람을 바꾸는 것은 낮은 수준의 개입이라고 말한 것에 예외가 있는데, 한 사람이 체계의 목적을 바꾸는 힘을 가지는 경우가 그렇다고 한다. 메도우즈는 미국과 나치 독일의 지도자들을 예로 드는데, 특히 레이건을 길게 설명한다. 레이건은 정부가 국민을 돕거나 국민이 정부를 돕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정부를 국민의 등에서 떨어내는 것이 목적이라고 계속 말했는데, 그것이 먹혔다는 것이다. 거대한 시스템 변화와 기업권력이 정부보다 우월해진 상황으로 인해서 그가 그럴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도넬라 본인의 주장도 이쪽이다), 레이건 이후 미국의, 심지어는 세계의 담론이 철저하게 변한 점이 새로운 시스템의 목적을 표명하고 반복하고 지지하고 강조하는 높은 지렛점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한다.
2. 시스템(그 목적, 구조, 규칙, 지체, 매개변수 등)을 발생시킨 사고방식이나 패러다임
거대한 진술되지 않은 전제들이 한 사회의 패러다임을 구성한다.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가장 깊은 믿음들이다. 이런 믿음들을 사례들은 이렇다. ① 명사와 동사 사이에 차이가 있다. ② 화폐는 무언가 실질적인 것을 측정하며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따라서 보수를 덜 받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가치가 덜하다). ③ 성장은 좋은 것이다. ④ 자연은 인간의 목적으로 전환될 자원의 비축고이다. ⑤ 진화는 호모사피엔스의 등장과 함께 멈추었다. ⑥ 토지는 ‘소유’될 수 있다.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생각을 조금만 확장해도 외부 사물들의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를 낳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보여준 코페르니쿠스든 물질과 에너지가 변환 가능함을 가설화한 아인슈타인이든 시스템에 패러다임의 수준에서 개입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시스템을 총체적으로 변형하는 지렛점을 건드린 것이다.
한 개인의 경우에는 이것이 1/1000초 만에 일어날 수 있다. 머릿속에서 한 번만 딸깍하면 눈에 씌운 콩깍지가 떨어져 나가고 세상이 새롭게 보인다. 그러니 낡은 패러다임의 이상(異常)과 실패를 지적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더 크고 확신 있게 말하라.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들을 공적이고 힘 있는 위치에 배치하라. 수구적인 자들에게는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활동적으로 변화를 낳는 행동가들, 그리고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하라.
1.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힘
이는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보다 상위의 지렛점이다. 아무런 패러다임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 그 어떤 패러다임도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모든 세계관은 방대한 우주에 대한 제한된 이해임을 깨닫는 것이다. 패러다임들이 있다는 패러다임 자체가 하나의 패러다임임을 보는 것이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몰라’(Not Knowing)의 상태[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그저 깨어만 있는 상태, 공적영지(空寂靈知)의 상태]에 드는 것이다. 패러다임보다 우월한 이 경지에서 사람들은 집착을 벗어던지고 상락(常樂) 속에 살며 제국을 무너뜨리고 갇히거나·화형당하거나·사살당하거나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며, 수천 년을 지속하는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도넬라는 마지막으로 주의를 준다. 마법적인 지렛점들에는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고.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어떤 시스템을 엄밀하게 분석하는 일이 되었든 아니면 자신의 패러다임을 내려놓고 ‘몰라’의 상태에 들어가는 일이 되었든. 그녀의 마지막으로 “지렛점들을 미는 것”보다는 “전략적으로, 깊숙이, 미친 듯이 내려놓는 것”(strategically, profoundly, madly letting go)을 더 우위에 놓으며 글을 맺는다.
[논평]
이러한 지렛점들의 효과에 따른 순위를 볼 때(물론 메도우즈는 이 순위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논의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 두 가지 특성이 잡힌다. ① 현실적인 것(the actual)에서 잠재적인 것(the virtual)으로 갈수록 효과적이다. (들뢰즈가 이미 실재의 변화는 잠재적 차원에서 잉태되어 현실적 차원에 현실화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점을 철학적으로 명확히 한 바 있다.) ② 달리 말하자면, 객체적인 것에서 주체적인 것으로 갈수록 효과적이다.③ 또 달리 말하자면 좁은 의미의 정치적인 것에서 문화적인 것(삶정치적인 것)으로 갈수록 효과적이다.
이러한 특성은 1980년대에 청년들의 변혁운동을 지배했던 레닌주의의 이른바 ‘객관주의’―객관적 현실의 인식과 그에 따른 객관적 현실의 변형, 가장 핵심적으로는 국가권력의 장악―와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푸꼬, 들뢰즈, 네그리의 철학에서 이러한 객관주의(자연과학으로 보자면 전통적 물리학에 상응하는 사고방식)는 시원하게 극복된다. 네그리·하트는 『공통체』에서는 주체의 강화를 현실변형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제시하고 있다. (레닌의 객관주의에 기반을 둔 전술이 이른바 상대의 ‘약한 고리’의 타격을 중점으로 삼는다면, 네그리·하트에게서는 주체의 ‘강한 고리’의 강화가 핵심이다.)
두 번째 기준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것은 어떤 무기와 어떤 형태의 폭력이 다중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영향을 미치는가이다. 전쟁의 수행은 언제나 주체성의 생산을 수반한다. 그리고 종종 적에 대해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투쟁을 수행하는 이들 자신에게 가장 해로운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 여하튼 혁명적 투쟁에서 무기와 폭력의 형태를 평가함에 있어서, 적에게 미치는 효과의 문제는 언제나 다중과 다중의 제도를 건설하는 과정에 미치는 영향의 문제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공통체』 503-4)
나는 몇 년 전 커먼즈 운동을 주제로 하는 한 강연에서 이 글의 서두에서 말한 유형의 질문을 받고 김수영의 시 한 구절,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 한 잎의 꽃잎 같고”(「꽃잎(一)」)의 도움을 받아 대답한 적이 있다. 이 시에서 ‘꽃잎’은 하나의 의미로 환원할 수 없지만, 인간의 정신적 성취와 관련이 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한 잎의 꽃잎”을 ‘한 편의 시’로 바꾸어 생각해보자. 어떻게 한 편의 시가 바위 같이 단단한 것―국가와 자본의 권력 등등―을 ‘뭉갤’ 수 있을까? 이 점을 생각해보자는 것이 내 대답의 (그 디테일은 다 기억이 안 나지만) 취지였다. 내가 그 당시 메도우즈의 ‘12개의 개입지점’을 알았더라면 더 잘 대답할 수 있었으리라는 하는 아쉬움이 든다. 당시 그 질문을 한 분은 내 대답에 설득이 되었다기보다 ‘당황’한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옳든 그르든, 적실하든 부적실하든, 자신이 만든 것이든 주입받은 것이든, 어떤 목적, 패러다임, 의도 등이 인간의 행동을 결정한다. 따라서 이 목적, 패러다임, 의도 등의 변형이 세상의 변형에 가장 핵심적일 수밖에 없다. 현대의 자본과 국가가 자신들의 힘으로 위력을 떨친다고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그저 하나의 생각일 뿐이다. 다른 많은 생각이 가능하다. 예컨대 나는 자본이 ‘자본주의적 주체성’(가따리의 말)을 구축함으로써 생존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이 주체성을 강화시키는 동시에 그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자본의 목적과 욕망을 자신의 목적과 욕망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없다면 자본은 생존하지 못한다. 자본과 국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실질적으로’ 할 수 없다는 생각, 수많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 어느 사이인지도 모르게 스며들어가 자리잡은 바로 이 생각이 자본과 국가를 떠받치는 가장 큰 힘이다.
자신의 활력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외부에 있는 권위에 의존하는 것을 스피노자는 ‘노예상태’라고 불렀다. 예컨대 “주권을 한 사람에게 이전함으로써 증진되는 것은 노예상태이지 평화가 아니다. 이미 말한 대로 평화는 전쟁의 부재가 아니라 정신들의 연합과 조화이기 때문이다.”(『정치론』) 노예가 노예로서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행동은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일밖에 없다. 이미 해방된 자유인만이 새로운 삶형태를 생산한다.
메도우즈가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한 ‘내려놓음’(공적영지, 혹은 견성의 경지)은 신비화된 어떤 것으로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마음을 비운다’고 할 때의 그런 상태이다. 어떤 새로운 사유나 행동을 하기 이전에 이전의 사유방식과 행동방식을 털어내는 것에 해당한다. 공적영지의 상태 그 자체를 추구하는 소승적 태도에 그치지 않고 공적영지를 새로운 창조의 원천으로 삼는 대승적 태도로 나아가는 것이 관건이다. 니체가 수동적 허무주의(passive nihilism[아무런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능동적 허무주의(active nihilism[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다])로 나아간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네그리도 ‘진공’이라는 말로 이러한 ‘내려놓음’을 포착한다.
그래서 사건의 문제로 즉 차이들과 특이성들의 다중이 어떻게 자신을 결정의 진공(眞空, vuoto) 앞에 제시하는가의 분석(인정)으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 공통적인 결정의 진공은 존재의 진공이다. 그것은 절대적 결핍이다. 다중은 때때로 이 진공을 내화할 수 있다. 철학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부정적 사상을 낳는다. 실존에 이런 일이 일어나면 우리를 슬픈 감정의 세계에 빠뜨린다. 그러나 이와 달리 아주 많은 인식들, 소감들, 경험들, 개념들이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 진공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극복하라고, 채우라고, 심연 위로 약하나마 다리를 세우라고 권고한다는 것을. 요컨대 결정에 관하여 결정하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이러한 활력을 허용해줄 사건을 기다리는 것은 그것이 타성을 수반할 때에는 참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기다림은 명백하다. 이 위기국면의 가장 중요한 표시이다. (네그리, 『도자기공방』, 「아홉째 공방 : 결정과 조직화」)
마지막으로 김수영의 산문 한 대목을 소개하면서 논평을 맺는다.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되지만, <내용의 면에서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말은 사실은 <내용>이 하는 말이 아니라, <형식>이 하는 혼잣말이다. 이 말은 밖에 대고 해서는 아니될 말이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다>는 <형식>을 정복할 수가 있고, 그때에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간신히 성립된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계속해서 지껄여야 한다. 이것을 계속해서 지껄이는 것이 이를테면 38선을 뚫는 길인 것이다. 낙수물로 바위를 뚫을 수 있듯이, 이런 시인의 헛소리가 헛소리가 아닐 때가 온다. 헛소리다 ! 헛소리다 ! 헛소리다 ! 하고 외우다 보니 헛소리가 참말이 될 때의 경이. 그것이 나무아미타불의 기적이고 시의 기적이다. 이런 기적이 한 편의 시를 이루고, 그러한 시의 축적이 진정한 민족의 역사의 기점이 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는 참여시의 효용성을 신용하는 사람의 한 사람이다.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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