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립토경제와 가치를 되찾기


  • 저자  :  Uriah Marc Todorof, Erin Manning, Brian Massumi
  • 원문 : “Interview with Erin Manning and Brian Massumi” (2018.3)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마쑤미(Brian Massumi)의 『가치의 재가치화에 대한 99개의 테제』(99 Theses on the Revaluation of Value: A Postcapitalist Manifesto)의 일부를 이 블로그에서 소개한 바 있는데(과 이곳으로 가면 된다), 아직 중요한 부분의 소개가 안 된 상태이다. 그 사이에 토도로프(Uriah Marc Todorof)가 『가치의 재가치화에 대한 99개의 테제』의 내용을 놓고 마쑤미 및 그의 동료 매닝(Erin Manning)과 한 인터뷰를 접하게 되었다. 이 인터뷰의 내용을 보면 ‘99개 테제’ 기획의 대략적인 취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에 여기 그 인터뷰의 일부를 소개한다. 이 인터뷰의 일부는 https://thenewinquiry.com/a-cryptoeconomy-of-affect/ 에도 실려 있다. 마쑤미는 들뢰즈·가따리의 『천 개의 고원』의 영역본(A Thousand Plateaus, 1987)의 역자이며 매닝은 정치철학자로서 최근에는 The Minor Gesture(2016)라는 책을 냈다. 이들은 집단적 교육을 실험하는 연구실험실인 쎈스랩(SenseLab)(몬트리올)에서 같이 작업한다. <세 생태학 연구소>가 여기서 나온 기획 가운데 하나이다.

 

토도로프

— 암호통화의 바탕에 있는 가치 개념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본주의적 가치 개념과 어떻게 다른가?

 

마쑤미

— 암호화폐 설계자들은 전통적 정의(교환수단, 가치저장, 회계단위)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화폐에 대한 전통적 시장 정의는 실제로 화폐가 자본주의 경제에서 작동하는 방식에 상응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경제는 잉여가치의 생산을 바탕으로 돌아간다. 자본의 정의 자체가 ‘현재 투자한 일정한 액수의 화폐로부터 미래에 더 많은 액수를 생성할 잠재력’이다. 비트코인의 설계의 배후에 있는 자유주의(개인주의)적 시장근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의 가장 큰 특징인 자본 자체를 간과했다. 자본이 비트코인을 따라잡았고 투기적 수단으로 비트코인을 사용함으로써 그 전통적인 화폐 기능이 거의 총체적으로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비트코인에 설계해 넣은 경제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초기의 자유시장에 기반을 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이다. 이는 특히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오늘날 자본이 작동하는 방식에 상응하지 않는다. 블록체인이 혹은 블록체인으로부터 발전되어 나온 기술이 진보적인 사회 혁신을 낳으려면 경제에 대한 훨씬 더 복잡한 비전이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금융자본과의 씨름이 필요하다.

 

매닝

— 우리의 크립토 경제 작업인 <3E 과정 씨앗은행>(the 3E Process Seed Bank)에서는 가치에 대한 낡은 정의로 시작하지 않는다. 우리는 가치의 문제에 대해 더 넓은 물음을 던진다. 가치란 무엇인가? 가치가 스스로를 표현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가치는 어떻게 힘의 관계에 진입하는가? 가치는 힘의 관계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가? 금융적 가치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이렇게 광범한 것은 교환수단으로서의 화폐 너머에 있는 화폐 형태들―파생상품, 옵션, 선물(先物) 같은 형태들―과 씨름하지 않는다면 잠재력 있는 대안경제 전략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을, 혹은 이런 경제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활동가로서의 우리의 작업이 침식되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리자] 쎈스랩의 한 웹페이지에 나와있는 ‘3E Process Seed Bank’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3E 과정 씨앗은행>은 <세 생태학 연구소>의 대안대학 기획을 위한 ‘창조적 과정 발동기’로서 기능할 것이다. <3E 과정 씨앗은행>은 오픈소스가 될 것이다. 다른 협동체들에 제공되어 그들의 욕구에 맞추어 쓰는 템플릿이 되도록 할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경제공간연구소(Economic Space Agency , ECSA)(http://ecsa.io) 및 홀로체인(https://holochain.org) 같은 혁신적 단체들과의 협동을 열심히 모색하고 있다.”

 

마쑤미

— 우리는 화폐 가치의 경우처럼 가치를 양적으로만 전제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질적인 것으로 사고하고 싶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가치의 질적 토대가 가시화되는 지점들이 있다. 그럴 경우 이 질적 토대는 ‘외부성’(externalities)이라 불린다. 즉 가격에 영향을 미치지만 그 자체로는 수량화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 고전적 사례는 (녹지 혹은 좋은 학교 혹은 지역의 문화 등의 이유로) 삶의 질의 인식이 동네마다 부동산 가격에 서로 다르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 삶의 질 요인은 가격에 반영되지만 그 자체로는 수량화될 수 없기 때문에 도심지의 미친 듯이 높은 가격과 젠트리피케이션 공세에서 볼 수 있듯이 시장의 왜곡을 낳게 마련이다. 가치의 화폐적 표현은 바로 이것이다. 즉 무언가 다른 것을 숫자로 표현하는 것이다. ‘무언가 다른 것’은 질적인 것이기에 항상 포획의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이것이 시장을 왜곡하거나 시장에 의해 왜곡된다. 그래서 우리가 묻고 싶은 것은 ‘가치에 대한 질적 관념을 다시 경제의 중심으로 되돌리는 방법이 있는가?’이다.

 

마쑤미

— 여기서 우리는 가장 큰 문제에 직면했고 이 문제는 우리를 상상의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안경제가 작동하려면 상호작용의 질들을 어떻든 기록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생각으로 우리가 ‘정동측정기’(affect-o-meter)라고 부르는 것을 발명하려고 시도했다.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안경제에 열쇠가 된다. 우리는 말 그대로 정동 경제를 발명하고 싶다. 관계의 내연성(intensities)을 바탕으로 돌아가며 개별 생산물보다는 그 내연성을, 그 과정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경제이다. ‘정동측정기’는 디지털 방식으로 협동적 상호작용의 질적 분석을 수행한다. 우리는 창조적 활동의 기록을 사용하여 우리의 플랫폼을 화폐화하는 데 사용하고 싶다.

[정리자] ‘intensities’에 대해서는 이곳의 2번 각주 참조.

 

매닝

— 더 세부사항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어떤 종류의 활동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지 말해야 할 듯하다.

 

마쑤미

—쎈스랩(SenseLab)은 집단의 질적으로 상이한 경험들을 양성하는 창조적 협동의 형태들을 실험하는 실험실이다. 이 경험은 우리가 ‘삶의 잉여가치’(surplus values of life)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 잉여가치의 생산은 집단적이어서 개별 부분들이나 투입물들로 분해되면 그 경험의 내연성의 의미를 잃는다. 우리는 이것을 창발적 집단성(emergent collectivity)이라고 부른다. 이 창발적 집단성이라는 과정이 우리의 생산물이며, 창조적 활동의 전파가 우리의 목적이다. 우리는 <3E 과정 씨앗은행>을 씨앗 집단의 창조적 실천을 돕도록 고안된 창조적 과정 발동기로 간주한다.

대부분의 집단적 행동은 단지 그 개별 부분들의 총합이라고 생각된다. 모든 것이 개별적 투입 그리고 궁극적으로 개별적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아는 것 이상을 욕망한다고 말하는 것, 그리고 개별 이익을 넘어서 미지의 내연성으로 가는 것이 우리의 기획의 에토스이다.

이것은 다른 것을 알기가 아니라 다르게 알기, 지식의 새로운 양태를 발명하기이다. 이는 집단 에너지를 그 어떤 개인이나 개인들의 단순한 집합이 미리 그릴 수 없는 창발로 상승시킴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여기에는 항상적인 조율과 돌봄이 필요하다. 이것이 프로그래밍에, 그리고 우리가 오프라인에서 서로 상호작용하는 데 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확신이다.

 

토도로프

— 쎈스랩에서 개발하고 있는 모델이 다른 조직 형태로 옮겨놓아질 수 있는가?

 

매닝

— 우리는 모르지만 이런 종류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 즉 같이 일하는 방식들을 창조하고, 새로운 형태의 협동을 발명하며, 복잡한 생태학적 조우 모델에 관여하는 사람들, 새로운 형태의 가치를 발명하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 존재한다. 우리의 물음은 스타트업들이 보통 가지고 있는 ‘어떻게 규모를 키울 것인가?’가 아니라, ‘기록되지 않는 것을 기록하는 기술을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이다.

<3E 과정 씨앗은행>은 <세 생태학 연구소>(the Three Ecologies Institute)의 자매 기획에서 나온 것으로서, 학습과 삶이 지금과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와 깊은 연관을 가진다. 우리는 이 연구소에서 펠릭스 가따리(Félix Guattari)의 세 생태학 정의―개념적인(심리적인, 정신적인) 것, 환경적인 것, 사회적인 것―에서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세 생태학을 가로질러 가치를 횡단적으로 사유하는 데에는 금융적 차원의 가치를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겨우 2년 전이다.

우리는 <세 생태학 연구소>를 나이, 배경, 학습스타일과 무관하게 우리가 계속 함께 학습할 수 있는 방법들을 발명하는 데 바쳐진 사유와 삶의 양태들을 강화하는 곳으로 본다. 우리는 이 연구소가 대학에 반대되는 곳으로 보지 않는다. 대학에 기생하는 곳(“a parasite”)으로 본다. 여기서 ‘곳’(site)에 강조를 둘 수도 있다. 대학 제도와의 관계를 유지하지만 다른 논리로 작동하는 부차적 장소(para-site), 부차적 기관(para-institution)이다.

[정리자] ‘기생충/기생물’이라는 의미의 단어 ‘parasite’의 뒷부분 ‘site’를 영어 철자 그대로 단어로 보아서 ‘장소’라는 의미로 활용했지만, 사실 ‘parasite’의 ‘site’는 어원상 ‘음식’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σῖτος’(sitos)이다.

자본주의를 그냥 걸어서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우리는 순진하지 않다. 신자유주의는 우리의 자연 환경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전략적 이중성(strategic duplicity)이라고 부르는 태도로 움직인다. 우리는 무턱대고 반대하지 않고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과 함께 움직이되, 매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이질적인 논리를 양성하면서 그렇게 한다. 대학이 잘 하는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참으로 흥미있는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는 점이다. 대학은 삶을 바꾸는 모임들을 촉진할 수 있다. 그러나 체계로서는 실패하고 있다. 이 체계적 실패는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상상하는 것은 <세 생태학 연구소>가 <3E 과정 씨앗은행>의 도움을 받아서 대학의 일부가 되지 않으면서도 (혹은 대학의 논리에 포섭되지 않으면서도) 대학이 잘 하는 것들의 일부와 중첩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마쑤미

— 가치의 문제로 되돌아가서, 우리는 통상적인 경제적인 원칙들을 하나도 따르지 않는 플랫폼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를 창조하고 싶다. 개별적 소유나 몫도 없을 것이고 내부적으로는 회계단위도 통화나 토큰도 없을 것이다. 거래가 활동모델이 되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이익이 인센티브로서 사용되지도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경험의 내연성을 함께 창조하여 단독으로 혹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일하면서 창조했던 것을 창발적으로 초과하는 복잡한 관계공간만이 존재할 것이다. 자기조직적이 될 것이며 분리된 행정구조나 위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심지어는 형식적인 의사결정 규칙들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아나키즘적이다. 그러나 조직의 결여보다는 조직 잠재력의 잉여를 가동함으로써 그렇게 된다. 또한 그 어떤 개인적 가치도 유효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코뮤니즘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커먼즈이다.

 

매닝

— 언더커먼즈이다.

 

마쑤미

— 그렇다. 언더커먼즈(undercommons)는 프레드 모튼(Fred Moten)과 스테파노 하니(Stefano Harney)가 창발적 집단성을 가리킨 단어로서 우리에게 온 영감들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창발과 과정을 양성하고 싶지만, 동시에 그것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들을 찾고 싶다. 이는 전략적 이중성(duplicity)이 현재 우리가 아는 바의 경제로 확대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경제에 완전히 생소한 논리에 따라 움직이면서도 자본주의 경제에 기생해야 한다.

[정리자] “··· 언더커먼즈는 우리가 거기서 반란을 일으키고 비판을 하는 영역이 아니다. 언더커먼즈는 우리가 ‘환난의 바다에 맞서서 무기 들고 대적해서 끝장내는’ 장소가 아니다. 언더커먼즈는 항상 여기 있는 공간이자 시간이다. 우리의 목표는―여기서는 항상 ‘우리’라고 말하는 것이 제대로 된 방식이다― 환난을 끝장내는 것이 아니라 저 특수한 환난을 대적해야 할 것으로서 만들어내는 세계를 끝장내는 것이다···”(Jack Halberstam, from “The Wild Beyond: With and for the Undercommons” (Introduction to The Undercommons: Fugitive Planning & Black Study by Stefano Harney and Fred Moten).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협동적 과정이 근본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인 원리들에 따라 플랫폼 기능을 거치게 만들고 삶의 잉여가치의 집단적 생산에 중심을 두며 그러한 생산을 막(膜)으로써 지배적인 경제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막은 분리를 창출하는 동시에 통과하는 운동을 허용한다. 막에는 구멍들이 나있다. 우리는 창조적 과정이 문턱을 넘어갈 때, 그리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왔다 갔다 할 때 일어나는 질적인 이동을 기록하는 방법들을 찾으려고 한다. 기록되는 것은 삶의 잉여가치의 생산의, 그 썰물과 밀물의, 정동적 내연성이다. 막이 하는 일은 그 질적 흐름들을 숫자적 표현으로 옮겨놓는 것인데, 이것이 암호화폐에 새겨질 것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협동적 창조의 에너지로 크립토를 채굴할 것이다. 창발적 집단성을 화폐화할 것이다. 암호통화는 창조적 과정을 진행시키고 다른 기획들로 분기시키는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가 구축할 수 있는 믿음에 의해서 ‘뒷받침될’ 것이다. 대안교육의 실험인 <세 생태학 연구소>의 활동이 그 증거이다.

막이 두 면 가운데 화폐경제와 접하고 있는 면에서는 인정받을 수 있고 수량화될 수 있는 가치 운동의 산출이 이루어질 것이다. 플랫폼 내부에서 진행되는 창조과정이 화폐 경제의 논리에 의해 식민화되는 것을 막이 막아줄 것이다. 우리는 두 세계의 가장 좋은 것을 취하려고 한다. 통화가 단지 투기수단이 되지 않는 것이 필수적일 것이다. 우리의 경제 공간은 다른 경제 공간들의 생태계에 거하면서 블록체인/포스트블록체인 자율적 조직을 협동적 노력들에 맞추는 실험을 할 것이다. 여기서도 열쇠가 되는 것은 어떻게 질적인 분석을 사용하여 창조적 내연성의 운동을 기록할 것인가의 문제―어떻게 숫자를 살살 달래서 경험의 질과 연대를 맺게 하는가의 문제―에 실행 가능한 해법을 찾는 것이다. 노라 베잇슨(Nora Bateson)이 개발한 ‘웜 데이터’(warm data)란 새로운 개념이 있다. 이는 우리의 목표와 유사한 목표를 가진 데이터이다.

 

토도로프

— 당신들은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하는 막을 가진 체계를 창출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 외부로 걸어 나갈 만큼 순진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당신들의 웹사이트 어딘가에서 ‘추상을 점령하기’라는 어구를 본 적이 있다. 그럼 당신들이 개발해내는 이 경제는 추상적인 것을 ‘점령하는’ 것인가?

 

매닝

— 만일 우리가 추상적인 것을 점령하고 있다면 우리는 영토와 무관한 방식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유 실험이다. 우리가 그 씨앗을 심지만 다른 이들에 의해서 그리고 다른 이들과 함께 계속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어찌어찌해서 과정 씨앗을 산출했는데 그것이 우리를 떠나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넘어서게 된다면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브라이언은 뭐라고 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에 우리가 무언가를 점령하고 있다면, 점령 대상은 상상이다. 탈자본주의적 상상.

 

마쑤미

— 종종 임시적 자율지대(a temporary autonomous zone, TAZ)라고 불렀던 것을 창출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우리가 모두 자본과 공모자라는 것을 알면서, 그리고 그저 걸어서 자본주의를 유유히 빠져나올 수는 없다는 것을 알면서 그렇게 한다. 만일 자본을 유유히 빠져나온다면 그것은 검토되지 않은 전제를 지니고 나오는 것이 될 것이고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다. 우리는 전략적 이중성을 구사하면서 자본과의 공모관계로부터 출발하고 그 공모관계와 함께 움직이고 싶다. 기만적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동시에 두 영역에서 움직인다는 말이다.

우리는 아나코-코뮌주의적 논리를 따라 임시적 자율지대를 창출하는 동시에 그것을 기존의 신자유주의 경제에 접목시킬 수 있으면 한다. 좋든 싫든 신자유주의가 오늘날 우리의 삶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의 촉수는 사방팔방으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까지 뻗쳐서 그 장악력을 느슨하게 하기 위해서는 힘들게 노력해야 하고 좋은 기술이 필요하다. 현재에 사는 방법들을 찾아야 하는 한편, 장차 올 탈자본주의적 세계를 미리 보여주는 미래성의 불꽃들을 발산해야 한다. 따라서 함께 살기라는 의미의 점령이다. 임시적 자율지대는 따로 떨어진 세계가 아니다. 현재 있는 그대로의 세계 속에 있는 구멍이며, 거기서 무언가가 자랄 수 있다. 이 지대는 기존의 세계를 떠난다는 기만적인 생각이 없이 들어설 수 있는 관계적 공간이다. 즉각적인 대체를 목적으로 삼기보다는 보완함으로써 시작한다. 이 보완이 자라서 우리의 ‘함께 살기’를 더 많이 끌어들여 마침내 지배적인 경제와 맞설 수 있었으면 한다.

우리의 ‘추상을 점령하기’는 ‘월가를 점령하라’가 하려는 일을 다른 식으로 하려는 것이다. 즉 화폐를, 금융을 점령하고 가치를 되찾으려는 것이다. 월가와 금융 세계는 현재의 지배적 경제 부분이다. 이들과 씨름하지 않고서는 자본주의에 맞설 수 없다. 파생상품이나 신용파산스왑(credit default swaps) 같은 지배적인 금융도구들은 고도로 추상적이다. 이 도구들은 모두 자본주의적 형태의 잉여가치생산을 바탕으로 돌아간다. ‘더 많이’를 향한 투기적 에너지를 바탕으로 돌아간다. 만일 우리가 금융을 점령하기를 바란다면, 함께 사는 새로운 삶의 양태를 창조하기 위해서 이 투기적 에너지를 되찾아 와야 한다. 우리는 상상을 점령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집단적 상상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