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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는 노동을 일과 동일시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 저자  :  가이 스탠딩(Guy Standing)
  • 원문 : “Left Should Stop Equating Labour With Work” (2018.3.13)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Social Europe(socialeurope.eu)에 실린 원문의 내용을 정리하고 여기저기에 정리자의 논평을 삽입한 글이다.

 

좌파는 노동을 일과 동일시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노동’은 인간의 활동이 자본의 일부(가변자본)로 변형된 것이다. 따라서 노동의 신성화는 곧 자본의 신성화이고, 자본이 권력이라면 노동도 그 권력의 일부이다. 이러한 자본 중심적 도식에 따르면 ‘일자리’는 자본(불변자본)에 대해서는 ‘을’의 자리이면서 일자리 바깥의 인간 활동에 대해서는 ‘갑’의 자리가 된다. ‘너희는 을 속에서 갑을 추구하라’—이것이 바로 자본이 내리는 명령이다. 스탠딩은 이 글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social democrats)이 이러한 자본의 명령을 사회에 널리 퍼뜨리고 전도사로서 기여해 왔음을 비판하고 좌파의 새로운 출발점의 필요를 제시하고 있다.

이 글에서 ‘work’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한편으로는 임금을 버는 활동인 노동(labour)이 아닌 활동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을 의미한다. 노동만이 진정한 ‘일’로서 대접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스탠딩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20세기 내내 해온 일이 “일(work)의 의미를 노동(labour) 혹은 소득을 버는 활동에 국한시킨” 것이라고 한다. (정리자는 앞으로 이것을 ‘일을 노동에 종속시킨 것’ 혹은 ‘노동의 규범화’로 바꾸어 표현할 것이다.)

그는 노동이 아닌 일과 노동인 일의 차별과 그 불합리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이 지긋한 친척을 돌보는 데 하루 6시간을 쓰면, 이는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어휘에서는 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임금을 받고 누군가 다른 사람의 나이 지극한 친척을 돌보는 데 하루 3시간을 쓴다면 이는 일로 계산되며, 당신은 ‘취업자’로서의 어엿한 위치로 격상된다. 그리고 노동 및 사회안전법에 의해 보호를 받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불합리하다.

스탠딩은 일의 노동에의 종속 혹은 노동의 규범화는 19세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고용안정성이라는 사회민주주의적 목표는 원래 19세기에 고용주들이 옹호했던 것이지 노동자들의 대표들이 옹호했던 것이 아니라고 한다. ‘취업 중’(in employment)이란 말도 수십 년 동안 낮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었으며 부르주아지나 귀족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는 미혼 여성에게 주로 적용되는 말이었다고 한다.

노동의 규범화와 관련하여 스탠딩의 비판의 주요 표적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지만 노동의 규범화는 사실 매우 광범하게 일어났다. 소련 헌법에서는 ‘노동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아야 한다’라는 레닌의 문구로 노동이 병리적 필연성이 되었다고 하며 모든 형태의 사회민주주의에서 반(反)해방적인 형태를 띠었다고 한다. (예의 레닌의 문구는 한때 한국의 노동운동에서 노동의 당당함을 주장하기 위해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무노동 무임금’이라는 말로 바뀌어 주로 노조활동을 탄압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노동의 규범화가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것은 배제의 논리이다. “고용주를 위해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 혹은 노동을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스스로를 낮추는 방식으로 보이는 사람들, 혹은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과 결혼한, 이차적인 위치의 사람들, 혹은 그런 서비스를 오래 수행해온 사람들”에게만 사회적 안전의 어엿한 권리가 부여된다.

스탠딩은 노동의 규범화를 논리적 결론으로 다듬은 “사회민주주의의 영웅들” 가운데 웹(Beatrice Webb)과 베버리지(William Beveridge)를 거론한다.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어머니인 웹은 ‘징역소’(labor camp)를 (필요하면 강제력의 사용도 포함) 공개적으로 옹호하여 블레어 같은 수상들이 수 세대 이후 워크페어를 옹호하는 것을 정당화해주었다. (한심한 한국의 주류 언론은 워크페어를 “일을 통한 적극적 복지”라고 추켜세우지만 스탠딩이 보기에는 ‘강제노동’의 메커니즘이다.) 자유주의자 베버리지는—현재 런던정치경제대학교(LSE)에서 그를 기념하여 축제를 벌이고 있다(([정리자] 그런데 흥미롭게도 2018년 2월 20일의 강연의 제목은 “Beveridge Rebooted: a basic income for every citizen”이다.))—‘기아의 채찍’이 노동자들로 하여금 노동하도록 강제하리라고 믿었다. 스탠딩은 이런 관점은 기껏해야 온정주의적(paternalistic)이고 최악이면 반(反)해방적이라고 본다.

스탠딩이 노동의 규범화에 기여한 것으로 또 지적한 것은 ILO—이를 스탠딩은 “사회민주주의 모델의 화신”이라고 부른다—의 1952년 조약이다. 이 조약은 “‘돈을 버는 남성 가장들’(breadwinners), 그에 딸린 아내들 그리고 보호의 권리를 버는 노동 ‘서비스’에 대해 말”함으로써 노동의 규범화를 낳은 “편견들”을 정식화하고 있다. 이는 사실상 “1930년대로의 후퇴”인데 어처구니없게 2001년에 와서도 유럽의 노동조합들과 사회민주주의 정부들은 이 조약이 현대적인 국제조약 가운데 하나로 보존되기를 요구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고 한다.

스탠딩은 사회민주주의의 흔한 뻔뻔스러움은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누군가에게 ‘존엄’, ‘지위’ 그리고 사회에의 소속감을 부여한다는 주장이라고 하면서 개인적 차원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 “뻔뻔스러움”에 응대한다.

그런데 나는 일자리를 가지기를 중단한 이후에 비로소 더 존엄이 생겼고, 사회에 더 통합되었다는 느낌을 가졌다.

그리고 이를 개인 너머로 확대하여, 하수구에 내려가 파이프를 고치는 사람에게 그런 일을 하면 존엄을 얻고 사회에의 소속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면 돌아오는 것은 달가워하지 않는 대답일 것이며, 아침에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환자용 변기를 청소하러 가는 여성에게 당신은 사회에 통합되고 있으며 일자리 가진 것에 감사하라고 말하면 잔소리를 한 바가지는 들을 것이라고 한다.

요컨대 직업(노동)을 다른 형태의 일보다 더 높일 정당한 이유는 없는데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바로 이 ‘높이는 일’을 해왔다는 것이다. 이는 진보적 입장이 아니라고 그는 확언한다. 노동을 ‘소외된 활동’이라고 부른 맑스가 옳았다는 것이다.

스탠딩이 이렇게 ‘소외된 활동’이라는 원론적 측면에만 기반을 두어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노동주의(노동을 규범으로 보는 사고방식)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노동주의를 낳았던 현실을 구성하는 두 이분법 — ① 작업장(일터)과 기타 장소의 구분 ②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의 구분—이 이제 사라지고 없는데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 이분법들이 여전히 규범으로서 적용되는 것처럼 계속 주장함으로써 사태를 왜곡하고 있다고 본다. 오히려 점증하는 프레카리아트는 이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고 한다. 바로 이 때문에 프레카리아트는 구식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포퓰리즘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새로운 진보적 운동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노동의 규범화가 더 이상 타당하지 않은 현실에서는 규범화된 노동만을 통계로 잡는 관행이 왜곡적이 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사회정책을 관찰된 노동에 의거하는 것도 옹호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가시적인 노동만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의 길을 가장 멀리 간 것은 (스탠딩이 보기에는) 책임 없는 권리는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 가난한 사람은 직장을 가짐으로써 그것을 입증하라고 주장한, 제3의 길 사회민주주의이다.

스탠딩은 워크페어를 노동주의 모델의 끝판으로 본다. 이는 자산조사나 노동시장유연성을 받아들인다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스탠딩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렌지(Matteo Renzi)가 가장 최근에 이 길을 간 사람이며 그의 사회민주당이 가장 최근에 내파의 대가를 치르고 좀비가 된 당이다. 제3의 길을 만들어낸 빔 코크(Wim Kok)은 네덜란드 노동당이 나락에 빠지는 길을 마련했으며, 하르츠 IV 개혁은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긴 쇠퇴의 길로 내몰았다. 자산조사와 워크페어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가진 신노동당(New Labour)은 영국 프레카리아트를 잃고, 보편적 신용(Universal Credit)이라는 유령이 출현하도록 허용했다(2013년 도입).

스탠딩은 노동주의에 헌신하는 한 사회민주주의의 정치세력으로서의 수명은 끝날 것이 확실하다고 본다. 그 이유가 노동주의를 뒷받침하는 이분법들이 이제는 사라졌다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훨씬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다가오는 생태적 위기의 대처하기 위해서는 노동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슬프게도 좌파 일반, 그 가운데 특히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생태학과 관하여 나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일자리 창출과 환경 사이의 갈등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일자리에, 이른바 ‘노동계급’ 일자리에 우선권을 주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지속 가능한 발전 전략을 옹호하기보다는 ‘외부성’과 오염통제를 다루는 군소 정책에 관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스탠딩은 좌파의 새로운 출발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새로운 좌파는 비노동주의적 접근법을 택해야 할 것이다. 그에 따르면 노동주의적 접근법은 인간의 활동의 다른 형태들은 무시하고 노동만을 가시화하기에 자원고갈을 낳는 활동들에 큰 강조를 두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비노동주의적 접근법을 택한다면 노동이 아닌 일의 가치(보통 사용가치라고 불리는 것)가 적어도 노동의 가치와 동등한 무게를 부여받게 될 것이다.

스탠딩은 이 접근법이 새로운 좌파—‘녹색 좌파’(Green-Left) —에게 놀라운 호소력을 가질 것으로 본다. 스탠딩은 ‘탈성장’의 정치는 가급적 피하고자 한다. 그것은 세련된 녹색주의자에게는 덕 있고 기율 있는 것으로 느껴지겠지만, 일반적인 투표자에게 먹힐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탈성장은 평균적인 생활수준을 낮추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원을 보존하고 우리 자신들·공동체들·커먼즈를 재생산하도록 설계된 활동들이 자원을 고갈시키는 활동들인 노동과 동등한 가치를 부여받는다면, 후자의 활동에서 전자의 활동으로 이동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탈성장’으로 다가오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만일 통계에서, 진보적 담론에서, 진보적인 사람들이 쓴 글과 책에서, 노동이 아닌 일에 동등한 (바람직하기로는 더 많은) 무게와 관심이 주어진다면 모든 사람이 ‘성장’을 더 생태적으로 분별력 있는 방식으로 측정할 수 있을 것이다. 성장이 그저 더 빠른 자원 고갈, 지구온난화, 노동의 선호에 따른 일의 상실을 의미할 뿐이라면 좌파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준케인즈주의자들과 좌파에 속한 다른 이들이 더 많은 성장을 요구하는 것에 불편해할 것이 틀림없다.

사회민주주의 덫에 갇히면 탈출할 수 없다. 전통적인 사고방식에서는, 만일 당신이 매일 사무실에 가는 따분한 일을 하다가 동일한 시간을 나이 지긋한 친척들이나 지역공동체를 돌보는 데 쓰게 된다면, 그것은 경제성장을 낮추는 ‘나쁜’ 일로 간주된다. 그런데 만일 돌보는 일이 사무실에서의 일보다 가치가 더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면 돌보는 일로 이동하더라도 성장은 낮추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 일부는 이보다 더 급진적이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것이 큰 출발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