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 「제임스 밀에 대한 논평」
- 저자 : 맑스
- 원문 : 「제임스 밀에 대한 논평」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 맑스의 「제임스 밀에 대한 논평」(1844)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글이 큰 장점을 가지고 있음을 새로 발견했다. 이 글은 사적 소유가 어떻게 소외를 낳고 화폐가 어떻게 권력이 되는지를, 사적 소유에 기반을 둔 경제가 왜 인간적인 경제일 수 없는지를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말미의 소외되지 않은 경제에 대한 상상적 서술은 매우 짧지만 커머닝, 공유, 공통적인 것에 기반을 둔 대안경제를 사고하는 데 기초가 되는 생각이 들어있다. 『자본론』 독서가 간혹 자본의 논리에의 함몰을 의도치 않게 유발한다는 점을 놓고 볼 때 이 글은 그럴 염려가 없는 매우 건강한(!) 양식(마음의 양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백수의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내용정리를 다시 다듬어서 여기에 올린다. 맑스의 글을 읽을 때는 서술대상을 여러 측면으로 나누어 그 측면들의 관계를 치밀하게 서술하는 과정을 잘 따라가는 힘도 필요하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의 일을 공동체적인 것(이 당시 맑스의 어휘로는 ‘유적 존재’)으로 보는 시각, 그리고 국가와 자본에 의해 장악당한 근대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우리’ 근대인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되는 것이 여기서는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분석되기 때문이다.
맑스, 제임스 밀에 대한 논평(1844년)
Karl Marx, Comments on James Mill, Éléments D’économie Politique
[법칙과 현실]
밀은 (리카도 학파가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추상적 법칙을 이 법칙의 변화 혹은 지속적인 지양 없이 진술하는 잘못을 범한다. 법칙은 변화 혹은 지속적인 지양을 통해서만 현실화되는데도 말이다. 예컨대 생산비용이 궁극적으로― 더 정확하게는 (가끔씩 우연하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수요와 공급이 평형을 이룰 때―가격(가치)을 결정한다는 것이 불변의 법칙이라면, 수요와 공급이 평형을 이루지 못하고 따라서 가치와 생산비용이 결코 필연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 또한 불변의 법칙이다. 최근의 정치경제학은 현실적 운동(법칙은 이것의 추상적이고 우연하며 일면적인 요인일 뿐이다)을 우연하고 비본질적인 어떤 것으로 만든다. 그들에 따르면 정치경제학에서 법칙은 그 반대인 법칙의 부재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이다.
[화폐가 어떻게 권력이 되는가]
밀은 화폐를 교환매체라고 특징지음으로써 사태의 본질을 잘 표현한다. 재산이 화폐 안에 소외(외화)되어 있다는 것이 화폐의 우선적 본질이 아니라 매개하는 활동,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행동이 인간으로부터 소외되어서 화폐의 속성, 즉 인간 외부의 물질적 사물이 되었다는 것이 화폐의 본질이다. 인간은 이 매개활동 자체를 소외당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잃은 사람으로서만 활동하며 비인간화된다. 사물들 사이의 관계 자체, (그리고) 사물들을 가지고 인간이 행하는 바는 인간의 외부에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어떤 것의 작동이 된다. 이 이질적인 매개자(인간이 인간에 대한 매개자가 되지 못한 상황)로 인해서 인간은 자신의 의지, 자신의 활동,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인간으로부터 독립한 힘으로 본다. 따라서 그의 노예상태는 절정에 이른다. 이 매개자가 이제 실질적 신이 됨은 분명하다. 이 매개자는 그것이 나에게 매개해주는 것을 통제하는 실질적 권력이기 때문이다. 이제 매개자를 숭배하는 것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이 매개자로부터 분리된 대상들은 그 가치를 잃었다. 대상들은 매개자를 재현하는 한에서만 가치를 가진다. 원래는 매개자가 대상들을 재현하는 한에서만 가치를 가지는 것 같았는데 말이다. 원래의 관계의 이러한 역전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이 매개자는 사유재산의 상실된, 외화된 본질이며, 외화된, 자신의 외부에 있게 된 사유재산이다. 이는 그것이 인간의 소외된 유적 활동, 인간의 생산과 인간의 생산 사이의 외화된 매개인 것과 같다. 따라서 이러한 활동에서 생기는 모든 성질들은 이 매개자에게 귀속된다. 따라서 인간은 이 매개자가 더 부유해질수록 인간으로서는, 즉 이 매개자로부터 분리된 상태로는 더 가난해진다.
그리스도는 원래 1) 신에게 인간들을 2) 인간들에게 신을 3) 인간에게 인간들을 재현한다. 이와 유사하게 화폐는 원래 1) 사유재산에게 사유재산을 2) 사유재산에게 사회를 3) 사회에 사유재산을 재현한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외화된 신이며 외화된 인간이다. 신은 그리스도를 재현하는 한에서만 가치를 가지고 인간도 그리스도를 재현하는 한에서만 가치를 가진다. 화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사유재산의 화폐 체계로의 발전의 필연성]
왜 사유재산은 화폐 체계로 발전하기 마련인가?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 계속 교환을 하기 때문이고 교환은 (사유재산이 전제되면) 가치를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교환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매개과정은 사회적 혹은 인간적 과정이 아니다. 인간적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사유재산이 사유재산과 맺는 추상적 관계이다. 이 추상적 관계의 표현이 가치이며 가치의 가치로서의 실질적 존재가 화폐를 구성한다. 교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서로 사람으로서 관계를 맺기 않기 때문에, 사물들은 인간적, 사적(personal) 재산의 의미를 잃는다. 사유재산의 사유재산에 대한 사회적 관계는 이미 사유재산이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관계이다. 이 관계의 대자적 존재형태인 화폐는 따라서 사유재산의 소외, 사유재산의 특수하고 사적인(personal) 본성으로부터의 추상이다.
[일반인의 미신과 경제학자의 세련된 미신]
일반인의 미신(정확하게는 the crude economic superstition of the people and governments) : 귀금속 화폐가 부의 유일한 실재이다.
경제학자의 세련된 미신 : 경제학자는 추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모든 상품들에 존재함을 인식한다는 점에서 전자와 다르지만, 결국 같다. 교환가치 = 화폐 = 귀금속.
양자는 뿌리가 같기 때문에 후자의 미신은 전자의 미신을 대체하지 못한다.
[화폐의 본질로서의 추상성]
화폐의 화폐로서의 개체적 존재는 더 추상적일수록, 다른 상품들과 자연적 관계를 덜 가질수록 화폐의 본질에 더 상응한다. 따라서 종이화폐와 종이로 된 화폐 재현물들이 화폐로서의 화폐의 더 완벽한 존재양태이며 화폐 체계의 발전에서 필연적 요인이다.
[신용과 인간 소외]
은행에서 완벽하게 표현되는 신용 체계에서는 낯선 물리력의 힘이 깨지고 자기소외의 관계가 폐지되며 인간과 인간의 인간적 관계가 다시 들어서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쌩시몽주의자들은 이 외관에 속아서 지폐, 신용, 은행의 발전을 분리(인간의 사물로부터의 분리, 자본의 노동으로부터의 분리, 사유재산의 화폐로부터의 분리, 화폐의 인간으로부터의 분리)의 점진적 폐지로 보았다. 따라서 조직된 은행 체계가 그들의 이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외 폐지는 겉모습일 뿐이다. 자기소외는 그 원소가 더 이상 상품, 금속, 종이가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실존, 인간의 사회적 실존, 그의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이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의 인간에 대한 신뢰라는 외관 아래 드높은 불신과 완전한 소외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더 파렴치하고 극단적으로 된다. 무엇이 신용의 본질을 구성하는가? 여기서 신용의 내용, 즉 화폐는 제쳐놓기로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이 일정한 양의 가치를 선대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이러한 신뢰 메커니즘의 내용은 제쳐놓기로 한다.
[신용의 두 가지 관계와 두 가지 상이한 조건]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
정치경제학의 낭만적, 감상적 부분. 일탈, 과도, 예외. 규칙이 아님. 그렇더라도 이러한 경우 가난한 사람의 삶, 재능, 활동은 빌려준 부자에게 상환의 보장으로서 복무한다. 그 가난한 사람의 사회적 덕과 그의 활발한 활동의 내용, 그의 실존 자체가 부자에게는 그의 원금을 관습적 이자와 함께 상환하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의 죽음이 채권자에게 가장 안 좋은 일이다. 원금과 이자의 죽음이다. 우리는 신용관계에서 일어나듯이 인간의 가치를 화폐로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비열한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
돈이 많은 사람에게 신용이 제공되었을 때 |
신용은 단지 교환을 촉진하는 매개물이다. 즉 완전히 관념적형태로 끌어올려진 화폐이다. 신용은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경제적 판단이다. 신용에서는 금속이나 종이가 아니라 인간 자신이 교환의 매개자가 된다. 다만,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원금과 이자의 존재양태로서이다. 따라서 교환매체는 그 물질적 형태를 벗어나 돌아와서 다시 인간의 형태를 띤다. 그러나 이는 인간 자신이 자신의 외부에 놓여서 그 자신이 물질적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신용관계 내에서는 화폐가 지양되어 인간이 되는 게 아니라 인간 자신이 화폐로 된다. 혹은 화폐가 인간에 통합된다. 인간의 개인성, 인간의 도덕성 자체가 사업의 대상이 되고, 화폐의 질료가 된다. 화폐의 정신의 물질적, 신체적 형태를 구성하는 것은 이제 나의 개인적 실존, 나의 피와 살, 나의 사회적 덕과 중요성이다. 신용은 더 이상 화폐의 가치를 화폐로 용해(현실화)하지 않고 인간의 살과 인간의 심장으로 용해(현실화)한다. 바로 이런 정도로 거짓된 체제 내의 모든 진보와 모든 비일관성들은 극단적 퇴보와 사악함의 극단적 귀결이 된다. |
[소외된 신용의 본성의 이중적 작동 방식]
신용 체계에서, 인간의 극단적으로 경제적인 평가라는 외관을 띤, 인간으로부터 소외된 신용의 본성은 이중적 방식으로 작동한다.
1) 자본가와 노동자, 대자본가와 소자본가 사이의 틈이 더 벌어진다. 신용은 새로운 축적의 기회를 이미 가지고 있거나 부자인 사람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혹은 부자의 임의적 재량과 부자의 빈자에 대한 판단이 빈자의 실존 전체를 확인 혹은 부인하고 그의 실존은 전적으로 이러한 우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2) 상호기만, 위선, 거짓 경건이 극단화되어서, 신용이 없는 사람에게 가난하다는 단순한 판결이 내려질 뿐만 아니라 이에 덧붙여 신뢰가 없다는, 인정받지 못한다는, 따라서 사회적 천민이요 악인이라는 폄하적인 도덕적 판단이 내려진다. 빈자는 자신의 궁핍에 덧붙여서 이러한 굴욕을, 부자에게 신용을 구걸해야만 하는 굴욕을 겪는다.
3) 위조는 인간이 자신의 인신을 위조화폐로 만듦으로써 일어난다. 이러한 신용관계가 상업의 대상, 상호기만과 오용의 대상이 된다. 여기서도 극명한 것은 불신이 경제적 신뢰의 기초라는 점이다. 신용을 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불신하는 계산. 신용을 구하는 사람의 사적 삶의 비밀을 파고들기. 경쟁자의 신용을 갑자기 파괴함으로써 그 상대를 전복시키기 위해 일시적 궁핍을 폭로하기 등등. 파산, 유령 기업 등의 체계 전체. 정부 대부의 경우에는 국가가 사람이 차지했던 바로 그 자리를 차지한다.
4) 신용 체계는 은행 체계에서 완성된다. 은행가들의 창출, 은행의 정치적 지배, 은행에의 부의 집중, 이 국가의 경제적 아레이오스파고스(Areios Pagos)[옛 그리스에서 형사 및 민사 항소재판소가 있던 곳 — 정리자]가 화폐 체계의 훌륭한 완성이다.
신용 체계에서는 인간의 도덕적 인정이 신용의 형태를 띠기 때문에, 도덕적 인정의 거짓에 담긴 비밀, 이 도덕성의 비도덕적 사악함이 분명해지고 여실히 드러난다.
[인간의 본성과 공동체, 그리고 교환]
교환은―생산 내에서의 인간 활동의 교환과 인간적 산물 사이의 교환 모두―유적 활동 및 유적 정신에 해당한다. 유적 활동 및 유적 정신의 현실적, 의식적 존재양태가 사회적 활동과 사회적 향유이다. 인간 본성이 인간의 진정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 본성을 발현함으로써 개별적 개인과 대립하는 추상적인 보편적 힘이 아니라 모든 개인의 본질적 본성인, 그 자신의 활동이요 삶이요 정신이며 부(富)인 인간 공동체를, 사회체를 창출·생산한다. 따라서 이 진정한 공동체는 성찰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으며 개인들의 욕구와 이기주의로 인하여 등장한다. 다시 말해서 삶의 활동 자체에 의해서 직접 생산된다. 이 공동체가 존재하느냐 아니냐는 인간에게 달려있지 않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을 인간으로서 인정하지 않는 한, 따라서 세계를 인간의 방식으로 조직하지 않는 한, 이 공동체는 소외된 형태로 나타난다. 그 주체인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들, 추상이 아니라 살아있는 특수한 실제 개인들이 바로 공동체 자체이다. 따라서 공동체는 이들이 존재하는 대로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 소외된 인간의 사회는 그의 진정한 공동체의 희화라고, 그의 진정한 유적 삶의 희화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따라서
그의 활동은 그에게 고문으로서 나타나고
그 자신이 창조한 것은 이질적인 힘으로서 나타나며
그의 부는 가난으로서 나타나고
그를 다른 사람들과 연결시키는 본질적 유대는 비본질적 유대로서 나타나며
다른 한편 그의 동료들로부터의 분리가 그의 진정한 실존양태로서 나타나고
그의 삶은 그의 삶의 희생으로서 나타나며
그의 본성의 실현은 그의 삶을 비현실적으로 만드는 것으로서 나타나고
그의 생산은 그의 무의미함의 생산으로서 나타나고
대상에 대한 그의 힘은 대상의 그에 대한 힘으로서 나타나며
그의 창조물의 주인인 그 자신은 이 창조물의 하인으로서 나타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인간의 공동체, 혹은 인간의 본성의 발현, 진정으로 인간적인 삶인 유적 삶을 낳는 인간들의 상호보완 ―이러한 인간의 공동체를 정치경제학은 교환과 무역의 형태로 파악한다. 드 트라시(Destutt de Tracy) : 사회는 일련의 상호교환으로 이루어진다. 아담 스미스 : 사회는 상업 사회이다. 구성원 모두가 상인이다.
정치경제학은 실제 과정이 그렇듯이 재산소유자와 재산소유자의 관계로서의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만일 인간이 재산소유자로서 전제되면, 사유재산의 상실 혹은 양도는 인간 자체의 소외이다. 내가 나의 사유재산을 나와의 관계에서만 포기하면 나는 나의 사유재산을 포기하면서 자연에 되돌려 주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사유재산이 되기를 그치고 다른 사람의 사유재산이 될 때, 나의 사유재산은 소외된(alienated) 사유재산이 된다. 폭력의 경우를 제외하면 나의 사유재산을 남에게 양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정치경제학은 ‘필요, 욕구’라고 정확하게 대답한다. 나에게 없으면 안 되는 어떤 것을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두 재산소유자를 서로 묶어주는 유대는 그들의 사유재산의 질료를 이루는 특수한 종류의 대상(객체)이다. 이 두 대상에 대한 욕망, 즉 욕구는 ① 사적 소유 말고 다른 본질적 관계가 있음을 ② 자신이 개별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생산물(다른 사람의 노동 포함)에 대해 내적 소유(inner ownership)의 관계에 있는 총체적 존재(a total being)라는 것을 각 재산소유자들에게 보여주고 의식하게 해준다. 어떤 사물에 대한 욕구야말로 그 사물이 나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을, 그것이 나를 위해 존재함을, 그 속성(property)은 나의 본질의 속성(독특성)이라는 것을 가장 명백하고 반박 불가능하게 증명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산소유자들은 자신의 사유재산을 내놓도록 추동되는 것이다. 다만 동시에 사적 소유를 확정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즉 사적 소유의 관계 내에서 사유재산을 포기한다. 따라서 각자는 자신의 사유재산의 일부를 다른 이에게 양도한다(alienates).
따라서 두 재산소유자의 사회적 관계는 소외 속에서의 상호성이다. 양쪽에 소외의 관계를 정립하거나, 두 재산소유자들의 관계로서의 소외를 정립한다. 이와 달리 단순한 사적 소유에서는 소외(양도)가 자신과 관련해서만, 일면적으로만 일어난다.
따라서 교환 혹은 물물교환은 사적 소유권 내에서의 사회적 행동, 유적 행동, 공동체, 사회적 교섭 및 통합이며 따라서 외적인, 소외된 유적 행동이다. 바로 이 때문에 물물교환으로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바로 이 때문에 사회적 관계의 반대이다.
사유재산의 상호양도로 인하여 사유재산 자체가 소외된 사유재산의 범주로 떨어진다. 1) 이제 그 소유자의 노동의, 그의 뚜렷한 개인성의 생산물이 더 이상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생산자에게서 분리되어서 생산자가 아닌 다른 사람 개인에게 특수한 중요성을 띠기 시작했다. 2) 다른 사유재산과 동등한 위치에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상이한 종류의 사유재산들이 서로 자리를 교환한다. 서로가 서로를 재현하고 대체한다. 따라서 사유재산의 실존방식은 대체물, 등가물의 방식이 되었다. 자신과의 직접적 통일성 대신에 그것은 이제 다른 어떤 것과의 관계에서만 존재한다. 등가물로서의 존재방식은 더 이상 사유재산의 특수한 존재방식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사유재산은 가치가 되었고 곧 교환가치가 되었다. 가치로서의 그것의 존재방식은 자신의 직접적 존재와는 다른 자신, 그 특수한 본성의 외부에 있는 자신을 소외된 방식으로 나타내는 것이며, 단지 상대적인 존재방식이다.
이 가치가 어떻게 정확하게 결정되는가, 그것이 어떻게 가격이 되는가는 다른 곳에서 서술될 것이다.
[소외된 노동]
교환관계가 전제되면, 노동은 직접적으로 생계를 벌기 위한 노동이 된다. 소외된 노동의 이러한 관계는
1) 생계를 벌기 위한 노동과 노동자의 생산물이 그의 욕구나 노동자로서의 기능과 아무런 직접적 관계가 없고, 양 측면이 노동자에게 이질적인 사회적 결합에 의해서 결정될 때에만
2) 생산물을 사는 사람은 그 자신 생산자가 아니고 다른 어떤 사람이 생산한 것으로써 교환할 때에만
그 정점에 도달한다.
조야한 형태의 사적 소유(물물교환)의 경우에는 생산자들이 잉여 생산물만 서로 교환했다. 노동이 그의 직접적인 생존의 원천이었던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의 개인적 실존의 표현이었다. 교환을 통해 그의 노동은 부분적으로 소득의 원천이 된다. 이제 노동의 목적이 노동의 존재방식과 다르다. 생산물은 가치, 교환가치, 등가물로서 생산되며 생산자와의 직접적, 개인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생산이 더 다양해지고 따라서 욕구가 더 다양해지고, 다른 한편으로 생산자의 활동이 더 일면적이 될수록, 그의 노동은 더욱더 생계를 벌기 위한 노동의 범주로 떨어진다. 그러다 마침내 생계를 벌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만이 남는다. 생산자와 생산물의 관계가 직접적 향유와 개인적 욕구의 관계이냐 아니냐, 또한 그의 노동활동이 그의 개인성의 향유와 그의 자연적 능력과 정신적 목적의 실현이냐 아니냐는 매우 우연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이 된다.
[생계를 벌기 위한 노동]
생계를 벌기 위한 노동이 함축하는 것은
1) 노동과 노동주체의 괴리와 우연한 연관
2) 노동과 노동대상 사이의 괴리와 우연한 연관
3) 노동자의 역할은 노동자에게 이질적인 사회적 욕구들과 노동자가 이기적 필요로 인해서 승복하는 강제에 의해 결정된다. 사회적 욕구는 노동자의 긴급한 욕구를 충족하는 수단일 뿐이며 노동자는 그 욕구의 노예로서만 존재한다.
4) 노동자에게는 그의 개인적 실존의 유지가 활동의 목적으로 나타난다. 그가 실제로 하는 일은 오로지 수단으로 간주된다. 그는 생존수단(means of subsistence)을 벌기 위해서 자신의 삶의 활동(life’s activity)을 수행한다.
따라서 사회적 힘이 사적 소유의 관계에서 더 크고 발전된 것으로 나타날수록 인간은 더 이기적이고 비사회적이며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소외되게 된다.
생산물의 상호교환이 교역으로 나타나듯이, 활동 자체의 상호보완과 교환은 분업으로 나타난다. 이는 인간을 가능한 한 추상적 존재로, 기계도구와 같은 것으로 변형시킨다. 정신적·물리적 괴물(a spiritual and physical monster)로 변형시킨다.
사람들이 분업이라고만 생각하는 바의 것은 다름 아닌 인간 노동의 통일성이다. 분업으로만 간주되는 것은, 사회적 본성이 그 반대의 것으로서, 소외의 형태로 실현되기 때문이다. 분업은 문명이 발달할수록 증가한다.
분업이 전제되면, 생산물(사유재산의 물질적 존재)은 개인에게 점점 더 등가물로서의 의미를 띤다. 이제는 더 이상 잉여만을 교환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생산 대상은 그에게 무관한 문제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즉각 필요로 하는 어떤 것과 바꾸지도 않는다. 등가물은 화폐의 형태로 등가물로서 등장한다. 이제는 생계 및 교환매체를 얻는 것이 노동의 즉각적인 결과이다.
소외된 사물이 인간을 완전하게 지배하는 것은 화폐에서 명백해진다. 화폐는 질료의 본성과 소유자의 인격에 완전히 무차별적이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였던 것이 이제 사물의 인간에 대한, 생산물의 생산자에 대한 일반적 지배가 되었다. 등가물(가치) 개념이 이미 사유재산의 소외를 함축했듯이, 화폐는 이러한 소외의 감각적, 대상적 현존이다.
말할 나위도 없이, 정치경제학은 이러한 전개 전체를 사실로서만, 우연한 필연성의 결과로서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노동의 자기로부터의 분리, 노동자의 자본가로부터의 분리, 노동과 자본의 분리―그 본래적 형태는 토지 재산과 동산의 분리로 구성된다. 사유재산의 본래적 결정요인은 독점이다. 따라서 그것이 창출하는 정치체제는 독점의 정치체제이다. 완전한 독점은 경쟁이다.
경제학자에게 생산, 소비, 그리고 양자를 매개하는 교환 혹은 분배는 분리된 활동이다. 생산과 소비의 분리, 행동과 정신의 분리는 (개인들 사이에서든 한 개인에게서든) 노동의 그 목적으로부터의 분리이며 무언가 정신적인 것으로서의 자신으로부터의 분리이다. 사적 소유는 분배를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노동, 자본, 토지재산의 상호분리는
노동의 노동으로부터의 분리, 자본의 자본으로부터의 분리, 토지재산의 토지재산으로부터의 분리처럼
노동의 임금으로부터의 분리, 자본의 이윤으로부터의 분리, 이윤의 이자로부터의 분리처럼
토지재산의 지대로부터의 분리처럼
자기소외를 자기소외의 형태로, 그리고 동시에 상호소외의 형태로 보여준다.
(밀로부터의 발췌 부분 생략)
여기서 밀은 사적 소유에 기반을 둔 교환을 분석한다.
가지기 위해서 생산하는 것이 사적 소유의 기본적 전제이다. 인간이 생산하는 대상은 그의 직접적인 이기적 욕구의 대상화이다. 따라서 미개와 야만 상태에서는 인간의 생산의 양이 그의 직접적 욕구의 범위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 내용은 생산된 객체(대상) 그 자체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욕구의 한계가 생산의 한계를 이룬다. 수요와 공급이 정확히 일치하고, 생산은 욕구에 의해 측정된다. 교환은 일어나지 않거나, 자신의 노동을 그 노동의 산물과 교환하는 것으로 축소된다. 이런 교환은 실질적 교환의 잠재태, 맹아이다.
교환이 발생하자마자 직접적 소유의 한계 너머 잉여가 생산되지만, 이 잉여생산은 이기적 욕구를 넘어가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생산을 통해 간접적으로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식이다. 생산은 생계를 버는 수단, 생계를 벌기 위한 노동이 되었다. 앞의 경우에는 욕구가 생산의 척도인데, 지금의 경우에는 생산 혹은 생산물의 소유권이 욕구가 얼마나 충족되는가의 척도이다.
나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생산하고 당신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생산의 결과물은 당신과 거의 관계가 없다. 우리의 생산은 인간으로서의 인간을 위한 생산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회적 생산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산물에 대하여 인간으로서 향유의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각자의 생산물에 관한 한 우리는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의 교환 또한 나의 생산물이 (당신의 본성의 대상화이기에) 당신을 위한 것이 되도록 매개해주는 과정이 될 수 없다. 인간의 본성이 우리가 서로에게 만들어주는 생산물들 사이를 연결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교환은 우리가 서로의 생산물에 대해서, 따라서 상대방의 생산물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의 성격을 가동시킬 뿐, 확인할 뿐이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생산물에서 자신의 고유한 이기적인 욕구의 대상화를 볼 뿐이며, 따라서 상대방의 생산물에서 또 하나의 상이한 이기적 욕구의 대상화를 볼 뿐이다.
물론 당신은 나의 생산물과 인간적 관계를 맺는다. 나의 생산물은 당신의 욕망과 의지의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당신의 욕구, 욕망, 의지는 나의 생산물에 관하여 무력하다. 당신의 인간적 본성이 이 생산물을 장악하는 힘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의 생산물에서 당신이 인정하는 것이 인간 본성의 힘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의 욕구, 욕망은 오히려 당신이 나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끈이 된다. 나의 생산물에 의존하는 위치에 놓이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직접 쓸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대상을 생산한다면, 나의 잉여 생산은 교묘하게도 당신의 욕구에 맞추어 계산된 것이다. 이 대상의 잉여를 내가 생산한다는 것은 외관상으로만 그렇다. 실제로 나는 그것과는 다른 대상, 당신의 생산의 대상을 생산한다.((맑스는 여기서 (그의 나중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사용가치(“외관”)와 함께 교환가치(“다른 대상”)를 생산하는 과정을 말하고 있다. 『자본론』에서 맑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상품에 담긴 노동의 이중적 성격을 비판적으로 입증한 것은 내가 처음이다.”(Diese zwieschlächtige Natur der in der Ware enthaltenen Arbeit ist zuerst von mir kritisch nachgewiesen worden.))) 이것을 나는 이 잉여물과 맞바꾸고자 하는 것이다. 이 교환을 나는 마음속에서 미리 완성한다. 따라서 내가 당신과 맺는 사회적 관계, 당신의 욕구에 맞추어진 나의 노동이란 단지 가상이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보완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한갓 가상이다. 이 가상의 토대는 상호약탈이다. 약탈의, 기만의 의도가 필연적으로 배경에 존재한다. 우리의 교환은 당신 쪽에서나 내 쪽에서나 이기적인 것이기에, 그리고 각자의 이기심이 서로 상대를 누르려고 하기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서로를 기만하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나의 대상에게 귀속시키는, 당신에 대해 가지는 힘은 그것이 실제적 힘이 되기 위해서는 당신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대상들 각각이 가지는 힘에 대한 상호인정은 투쟁이다. 이 투쟁에서 승자는 열정, 힘, 통찰, 명민함을 더 가진 자이다. 만일 내가 충분한 물리력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당신을 직접 약탈할 것이다. 만일 물리력이 사용될 수 없다면 우리는 허풍으로 상대를 속이려 한다. 더 명민한 쪽이 상대를 속인다. 관계의 총체를 놓고 말하자면, 누가 누구를 속이는가는 우연의 문제이다. 모두가 속이려는 생각, 의도를 가지고 있다. 모두가 자신의 판단으로는 상대를 속인다.
따라서 양측 모두에서 교환은 필연적으로 양측이 생산하고 소유한 대상에 의해 매개된다. 물론 우리가 각자 생산한 대상에 대한 관념적 관계는 우리 서로의 욕구이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나는 현실적인 관계는 각 생산물에 대한 상호배제적인 소유((상호배제적인 소유와 반대되는 것이 공유(sharing)이다. 지금은 공유 자체가 자본의 착취(사유 재산으로의 전유)를 위한 조건을 이루기도 한다.))일 뿐이다. 나의 물건에 대한 당신의 욕구에 나의 주목을 끌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나의 대상의 등가인 당신의 대상뿐이다. 따라서 우리 각자의 생산물은 우리 서로의 욕구의 수단, 매개자, 도구, 인정된 힘이다. 따라서 당신의 요구(수요)와 당신이 소유한 등가물이 나에게는 동일한 중요성과 타당성을 가진 조건들이며, 당신의 요구는 나와의 관계에서 의미와 효과를 가질 때에만 그 효과로 인해서 의미를 획득한다. 이 도구가 없이 맨 손의 인간으로서 당신이 요구를 한다면, 그 야망은 충족되지 못하는 야망이며 그 생각은 내가 거들떠보지도 않는 생각이다. 따라서 나 자신이 나의 대상과 인간적 관계를 맺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당신도 나의 대상과 인간으로서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수단이 바로 대상을 지배하는 진정한 힘이며, 따라서 우리는 서로 각자의 생산물들을 상대를 지배하고 자신을 지배하는 힘으로서 간주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의 생산물이 우리에게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소유물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가 그것의 소유물이다. 우리 자신이 진정한 소유(property)에서 배제된다. 우리의 소유가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유일하게 알 수 있는 언어는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의 대상들로 구성된다. 우리는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인간의 언어는 효력을 잃은 채로 남아있을 것이다. 한 측에 의해서는 그것이 청원, 탄원으로, 따라서 굴욕으로 인식되고 느껴질 것이며, 결과적으로 수치, 격하의 느낌으로 말해질 것이다. 다른 측에서 의해서는 그것이 뻔뻔스러움, 혹은 광기로 간주될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것으로서 거부될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본질적 본성으로부터 매우 소외되어서, 이 본질적 본성의 직접적 언어는 우리에게 인간의 존엄성의 위반인 것처럼 보이고, 반면에 물질적 가치의 소외된 언어는 자신만만하고 스스로를 의식하는 인간의 존엄성의 잘 정당화된 주장인 것처럼 보일 정도가 된다.
당신의 눈에는 당신의 생산물이 나의 생산물을 취해서 당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도구, 수단이지만, 나의 눈에 그것은 우리의 교환의 목적이다. 나에게 당신은 나의 목적인 이 대상을 생산할 수단이고 도구이다. 당신이 나의 대상에 대하여 그렇듯이 말이다. 그러나 1) 우리 각자는 실제로 상대방이 자신을 취급하는 대로 행동한다. 당신은 나의 대상을 손에 넣기 위해서 실제로 자신을 수단으로, 도구로, 당신 자신의 대상의 생산자로 만든 것이다. 2) 당신 자신의 대상은 당신에게는 나의 대상의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덮개, 숨겨진 형상일 뿐이다. 그것의 생산이 나의 대상의 획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상 당신은 당신의 대상의 수단, 도구가 된 셈이다. 당신의 욕망은 당신의 대상의 하인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대상에 대한 우리 모두의 종속은 이제 실제로 주인과 노예의 관계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우리의 본질적 관계의 거칠고 정직한 표현이다.
우리의 상호적 가치는 우리의 대상의 상호적 가치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인간 자신은 상호적으로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소외되지 않은 경제에서라면]
우리가 인간으로서 생산을 수행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들 각각은 두 가지 방식으로 우리 자신과 타인을 긍정한 것이 된다. 1) 나의 생산에서 나는 나의 개성(individuality)을, 그 고유성을 대상화한 것이 되며 따라서 활동을 하는 동안 나의 삶이 독특하게 표현된 것을 향유하게 될 뿐만 아니라 대상을 바라볼 때에는 나의 개인성이 대상화되어 감각에 감지될 수 있다는 것을, 나의 개인성이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의 힘임을 아는 독특한 즐거움을 가지게 될 것이다. 2) 나의 생산물을 당신이 향유하거나 사용할 때 나는 나의 일로써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켰다는 것을, 즉 인간의 본질적 본성을 대상화했다는 것을 아는 직접적 즐거움을 누리고 그와 동시에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의 본질적 본성에 따른 욕구에 상응하는 대상을 창출했다는 것을 아는 직접적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3) 나는 당신에게 당신과 유[인류] 사이의 매개자가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당신 자신에 의해서 당신 자신의 본질적 본성을 보완해주는 존재로서, 그리고 당신 자신의 필요한 부분으로서 인정받고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 자신이 당신의 사고에서나 당신의 사랑에서나 긍정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4) 내가 개인적으로 나의 삶을 표현하는 가운데 나는 직접적으로 당신의 삶이 당신 방식으로 표현되도록 만든 것이 될 것이며, 따라서 나의 개인적인 활동에서 나는 나의 진정한 본성을, 나의 인간적 본성을, 나의 공동체적 본질을 직접 확인하고 실현한 것이 될 것이다. (* 이 단락은 전체 번역)
우리 생산물들은 우리의 본질적 본성을 비추는 거울들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이 관계는 상호적이 될 것이다. 내 쪽에서 일어나는 것이 당신 쪽에서도 일어난다.
나의 노동은 삶의 자유로운 표현이 될 것이다. 따라서 삶의 향유가 될 것이다. 사적 소유를 전제하면, 나의 노동은 삶의 소외이다. 살기 위해서, 나의 몫의 삶의 수단을 획득하기 위해서 노동하기 때문이다. 나의 노동은 나의 삶이 아니다.
둘째, 나의 개성의 고유성이 나의 노동에서 긍정될 것이다. 노동이 나의 개인적 삶의 긍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은 진정한, 활동적 속성(property)이 될 것이다. 사적 소유를 전제하면, 나의 개성이 소외되어 이 활동은 나에게 증오스러운 것이 되고 고문이 된다. 활동의 가상이다. 따라서 강제된 활동, 내적이고 본질적인 욕구를 통하지 않고 외적인 우연한 욕구를 통해서 나에게 부과된 활동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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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되지 않은 상태 |
소외된 상태 |
생산 |
인간으로서의 인간을 위한 생산(이라는 의미에서의 사회적 생산), 사용가치의 생산 |
교환을 위한 생산, 교환가치의 생산 |
생산물 |
생산자의 본성의 발현. 생산자의 존재가 생산물에서 확증된다. |
욕구의 대상. 생산자는 생산물에 의존한다. |
생산자들의 상호관계 |
공동생산, 공동향유. |
교환. 사유재산의 소유자들로서의 관계, 상인 대 상인의 관계 |
매개 (사회화) |
인간에 의한 매개 |
화폐에 의한 매개 → 인간의 노예화 |
공동체 (사회) |
인간의 본성의 발현 |
교환과 무역이 이루어지는 곳 |
삶의 활동 |
삶의 자유로운 표현 |
생계를 벌기 위한 노동, 교환가치를 벌기 위한 노동 |
사유재산 |
생산의 자연적 조건, 생산자의 ‘비유기적인 몸’ |
등가물, 가치 |
소유 |
공유 |
상호배제적인 사적 소유 |
욕구 |
내적이고 본질적인 욕구 |
외적인 우연한 욕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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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생활을 하나 보죠?’
‘그래요. 나는 항상 사람들 중 누군가를 찾아보아야 하고, 무언가를 돌보아야 해요. 그러나 나는 일을 좋아해요.’ 조금 더 빨리 가면서 팽크스가 말했다. ‘사람이 일 말고 무얼 하러 생겨났겠어요?’
‘일만을 위해 생겨난 걸까요?’ 클레남이 말했다.
팽크스는 되물었다. ‘다른 뭐요?’
(찰스 디킨즈, 『리틀 도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