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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유될 수 없는 것을 제도화하기

 


  • 저자  : Pierre Dardot, Christian Laval, Tran. Matthew MacLellan 
  • 원문 :  “Instituting the Unappropriabl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Common : On Revolution in the 21st Century의 III부 마지막 장 “Post-Script on Revolution in the Twenty-First Century”의  맨 마지막 부분으로서 “Instituting the Unappropriable”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대목을 비교적 상세히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저자들은 원리로서의 공통적인 것의 핵심 특징들을 10개 단락으로 압축하여 제시하고 있다.

  1. 우리는 ‘common’의 형용사 형태(‘공통적인’)보다 명사 형태(‘공통적인 것’)의 중요성을 책 전체에 걸쳐서 체계적으로 주장했다. 이런 생각에서 우리는 심지어 책의 제목―Common : On Revolution in the 21st Centruy―에서 관사를 빼고 쓰기까지 했다. 우리의 목적은 공통적인 것을 사물이나 실체, 혹은 (사물에 속하는) 성질로 보지 않고 원리로 보는 우리의 관점을 아예 처음부터 나타내는 것이었다. 우리가 말하는 원리란 출발 시에 존재해서 그 이후에 오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또한 처음 사용되고 나면 쇠잔해지다 사라지는 ‘시초’도 아니고, 일단 떠나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단순한 ’출발점‘도 아니다. 원리란 진정한 시작, ‘항상 다시 시작하는 시작’, 즉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다스리고 이끄는 시작이다. 그리스어 ‘아르케’(ἀρχή)는 ‘시작’과 ‘명령’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아르케는 그로부터 모든 다른 것이 파생되는 원천이다. 공통적인 것은 이후의 모든 정치활동을 명령하고 지휘하고 다스린다는 의미에서 정치적 원리이다. 만일 이 용어의 논리적 의미를 더 좋아한다면, 원리란 합리적 명제나 입증의 전제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 이 용어에 부여했던 의미가 이에 부합한다. 9개의 정치적 명제― 본 블로그의 글 커먼즈의 구성을 위한 9개의 정치적 명제 참조―는 미래의 합리성을 이끌도록 계획된 전제들이며 더 나아가 공통적인 것 자체가 어떻게 하나의 정치적 원리로서 간주되어야 하는지를 가리키도록 언표된다는 의미에서 논리적 원리들로서 제시되었다.

 

  1. 공통적인 것은 대부분의 다른 원리들과는 다르다. 공통적인 것은 정치적 원리,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진정한 정치적 원리이다. ‘정치’라는 말로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시민들이 ‘정당한 것’을 집단적으로 규정하는 활동과 이 집단적 활동으로부터 나오는 [의사]결정 및 행동이다. 따라서 정치는 소수의 전문가들에게 할당된 활동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전문가의 능력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며, 전문직이나 경력도 아니다. 정치는 지위나 직업을 막론하고 공적 숙의에 참여하기를 바라고 욕망하는 사람들 모두의 일이다. 정치는 공적 숙의와 ‘단어들과 아이디어들을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그 핵심으로 한다. 과학적 증명이나 증거에 토대를 두고 있는 정치의 꿈이 아직도 살아 있기는 하지만, 과학적 진실에 기반을 둔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는 기본적 진실을 기억하는 것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숙의와 민중의 판단력의 발휘 없이는 정치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과학적 정치’는 정치의 한 형태가 아니라 기껏해야 과학을 통한 정치의 (말살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정이다.

 

  1. 정치적 원리로서 공통적인 것은 동일한 활동에의 참여를 정치적 의무의 토대로 삼는다. 공동-의무로서의 공동-활동이다. 우리는 ‘common’이라는 용어의 뿌리에 놓여있는 ‘munus’라는 용어가 의무와 활동을 모두 의미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그 어떤 형태의 소속―민족, 국민, 인류 등―도 그 자체로 정치적 의무의 기반을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정치적 의무는 신성한 종교적 특징을 가질 수 없다. 이는 그 어떤 초월적 원천도, 활동 외부의 그 어떤 권위도 거부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정치적 의무는 전적으로 공동의 행동에서 나온다. 그것은 자신들의 활동을 다스리는 규칙들을 집단적으로 다듬어낸 모든 사람을 구속하는 실천적 헌신으로부터 그 모든 힘을 끌어낸다. 그것은 바로 이 활동에의 공동참여자들과의 관계에서만 타당하다.

 

  1. 그렇기에 공통적인 것은 대상이 될 수 없다. 적어도 욕망이나 의지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의 대상은 될 수 없다. 공통적인 것은 모든 형태의 대상화에 저항한다. 심지어 공통적인 것이 어떤 대상이 욕망함직한 것으로 인식되게 만드는 성질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공통적인 것은 우리가 획득하고자 하는 목표가 아니다. 우리는 공통적인 것을 종종 ‘공동선’(common good)이라고 불리는 것과 혼동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정치철학 담론에서 공동선은 함께 추구하고 함께 규정하는 바의 것을 지칭한다. 따라서 공동선은 그것이 모든 형태의 집단적 숙의가 달성하려고 하는 공동의 편익과 일치하는 경향이 있는 한에서 종종 정당한 것과 혼동된다. 이런 의미에서 공동선은 탁월하게 욕망함직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가 ‘공동선’의 내용을 어떤 식으로든 결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선’은 항상 공동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공통적인 것이 대상으로서의 ‘공동선’의 추구를 이끄는 원리이다. 공동선의 진정한 추구에는 공동의 숙의활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공통적인 것이 항상 ‘공동선’에 선행한다.

 

  1. 공통적인 것이 대상이 아닌 한, 그것은 사물(res)도 아니고 사물의 본질적 속성이나 특징도 아니다. 우리는 공통적인 것을 이러저런 자연적 혹은 내재적 속성 덕분에 공통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어떤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빛이나 공기가 ‘커먼즈(공통재)’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공통적인 것 되기’(being the common)와 같지 않다. 또한 공통적인 것은 법적 커먼즈(공통재)의 다양한 형태들―이는 물질적일 수도 있고(대양, 여러 국가에 걸쳐 흐르는 강, 인류의 공동유산으로 지정된 곳들) 비물질적일 수도 있다(아이디어들, 과학적 정보, 발견, 공적 도메인에서의 지적 생산물 등)―과 혼동되어서도 안 된다. 법적 범주인 ‘공통적 사물’(res communis)은 공통적 대상들을 활동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분리해내게 마련이다. 공통적 사물이 진정으로 공통적인 되는 것은 활동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공통적인 것을 대상으로 보는 접근법은 내버려야 한다.

 

  1. 다른 한편, 우리는 ‘나눔’(sharing)이나 ‘한데 모으기’(pooling)를 통해 공통적이 된 대상들을 지칭하기 위해서 커먼즈를 말할 수도 있다. 본래적으로 공통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집단적 실천만이 어떤 사물 혹은 일단의 사물들의 공통적 성격을 결정한다. 따라서 커먼즈는 그 커먼즈를 관리하고 보존하는 일을 활동적으로 담당하는 사람들이 제도화하는 활동의 유형에 따라서 매우 다양하다. 물론 공통적 대상/자원의 자연적 속성들이 그런 대상/자원을 공통적으로 만드는 활동의 유형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바로 이 활동이 주어진 대상을 ‘공동화하고’ 그렇게 공동화된 상태의 유지에 관여되는 특수한 규칙들의 산출을 통해 그 대상을 제도적 공간에 각인한다.

 

  1. 공통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제도와 거버넌스의 문제이다. 공통적인 것은 일반적으로 항상 제도적 행동으로부터 생성된다. 공통적인 것이 원리라는 사실만으로 이 원리가 현실적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일 공통적인 것의 원리가 제도화될 필요가 없고 인식되기만 하면 된다면, 모든 커먼즈는 이미 공통적인 것이 되어 있을 것이다. 공통적인 것은 특정의 작동 규칙들을 정하는 실천들에 의해서만 제도화되어 존재한다. 그리고 이 제도화는 공통적인 것을 창조하는 시초적 행동을 넘어서 진행되어야 한다. 애초에 제도의 규칙들을 수립한 바로 그 실천들이 그 규칙들을 변경하면서 장기적으로 제도화를 지속해나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제도화하는 프락시스’(instituent praxis))라고 부른 것이다. ‘제도화하는 프락시스’는 결정의 힘으로부터 분리된 행정력이라는 의미의 ‘관리’의 한 형태가 아니다. ‘관리’라는 환상은 사실 공통적인 것에 대한 자연주의적 견해―만일 공통적인 것이 사물들의 자연적 속성들의 함수라면, 그것이 가진 공통적인 것으로서의 지위는 사회적 공간을 가로지르는 실제적인 사회적 갈등들로부터 분리된 관리적 합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견해―와 연결되어 있다. ‘거버넌스’는 ‘관리’와는 달리 사회적 갈등을 포용하며 공통적인 것을 다스리는 규칙들에 대한 집단적 결정을 통해 그 갈등을 다룬다. ‘제도화하는 프락시스’란 이렇듯 공통적인 것을 수립하는 집단들이 커먼즈를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1. 정치적 원리로서 공통적인 것은 공적인 정치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 영역에도 적용된다. 커먼즈는 생산과 교환의 영역 전체를 사적 이익집단들의 싸움이나 국가독점에 내맡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이 시장과 국가 사이의 ‘제3의 길’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며, 사적인 것 및 공적인 것과 함께 병존하는 경제의 ‘제3부문’으로 간주되어서도 안 된다. 공통적인 것의 우선성은 사유재산의 폐지를 함축하지도 않고 더 나아가 시장의 폐지를 함축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공통적인 것의 원리는 시장의 공통적인 것에의 종속을 요구하며 이런 의미에서 소유권과 시장의 제한을 함축한다. 상업적 교환의 영역으로부터 특정 대상들을 단순히 빼내어 공동의 사용을 위해 보존함으로써가 아니라, 어떤 사물이 소유자의 이기적 의지에 전적으로 맡겨지는 것을 허용하는 남용권을 폐지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1. 만일 공통적인 것이 정치 영역과 사회 영역을 가로지르는 횡단적인 정치 원리라면, 그리고 커먼즈들이 특정의 대상들(그 유형이야 어떻든)과 연관된 특정의 실천들에 의해 열리는 제도적 공간들이라면, 사회적 커먼즈만이 아니라 정치적 커먼즈도 있다는 말이 된다. 정치적 커먼즈는 ‘공적 일들’에 모든 수준에서, 즉 지역에서 일국을 거쳐 전지구적 수준까지 관여한다. 사회경제적 영역은 사회적 활동이 연합의 논리에 따라 확대되는 어느 곳에서든 그 활동의 기준에 의해서만 조직된다. 정치적 영역은 마찬가지로 연합의 논리에 따라 조직되는 여러 수준들을 통해 엄밀하게 영토적인 기반 위에서 조직된다. 지방자치는 정치 영역에서 기본적인 형태의 자치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정치 영역에서의 공통적인 것의 세포적 형태이다. 일원적이고 중앙집중적이며 주권의 원리에 의해 질서지어지는 국민국가 모델은 이 논리에 의해 엄밀하게 금지된다. 공통적인 것의 정치적 원리는 이렇듯 이중의 연합에 기반을 둔다. ① 사회전문적인(socio-professional) 기반에 도태를 둔 사회경제적 커먼즈들의 연합과 ② 영토적 기반에 토대를 둔 정치적 커먼즈들의 연합이다. 이 두 영역이 함께 공통적인 것의 민주주의를 이룬다.

 

  1. 원리로서의 공통적인 것에는 전유될 수 없는 것의 규범이 소중하게 담겨 있다. 공통적인 것의 원리의 근본적 목적은 이 규범에 따라 사회적 관계를 변형하는 것이다. 여기서 비전유(Unappropriation)는 전유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유되어서는 안 되는 것, 즉 공동의 사용에 의해 보호되기 때문에 전유가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무엇이 전유될 수 없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제도화하는 실천의 몫이다. 전유될 수 없는 것이란 제도화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오직 전유불가능성 그 자체에 기반을 둘 수 있을 뿐이라는 반대의견이 있을 수 있다. 이 의견에 따르면 전유불가능성을 제도화려는 의지는 이 전유불가능성이 정의상 전유 행동에 관여하는 하나 혹은 다수의 주체들에 의존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는 집단적 주체가 사실상 공통적인 것을 제도화하는 행동에 의해 산출되는 것이지 이 행동에 선행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두 종류의 전유―어떤 것이 소유의 대상이 되는 ‘귀속으로서의 전유’와 어떤 것이 특정의 목적을 향하도록 하는 ‘목적지향으로서의 전유’(특히 사회적 욕구의 충족)―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다는 점을 망각하는 것이다. 전유불가능성을 제도화하는 것은 특정 형태의 ‘목적지향으로서의 전유’를 더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전유로부터 무언가를 빼내는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어떤 사회적 목적을 위해 더 효과적으로 ‘전유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 식량의 불안정성을 해결하기 위해 땅을 전유하는 것) ‘전유’를 금지하는 것이다. 공통적인 것의 원리는 재산을 창출하지 않고, 커먼즈의 임자인 양 커먼즈를 처분하는 힘을 스스로에게 부여하지 않으면서 사용을 규제한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공통의 재화’(common goods)에 대해 말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이 용어가 계속되는 투쟁을 위한 단합의 구호로서 전략적인 효용을 갖는다는 점을 이해하지만 말이다. ‘공통의 재화’란 없다. 오직 제도화해야 할 커먼즈, 혹은 공통적이 되어야 하는 커먼즈만 있다.(Th ere are no “common goods”: there are only commons to be institutionalized, or commons to be made common.)




커먼즈의 구성을 위한 9개의 정치적 명제

 



앞서 올린 글(([옮긴이] 현재는 원문의 링크가 깨져있다.))에서 나는 우리가 공통적인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다도와 라발의 입장을 요약했다. 이제 나는 공통적인 것―그들의 사유가 그들을 공통적인 것으로 인도한다―을 구축하는 방법에 관한 9개의 핵심적인 정치적 명제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불가피하게 나는 그들의 글을 압축하고 다수의 주요 참고문헌을 생략해야했으나 그들 제안의 골수를 충실히 전달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명제 1 : 공통적인 것의 정치를 건설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통적인 것의 정치가 19세기 사회주의적 연합주의, 20세기 노동자평의회 전통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해도 더 이상 단순히 장인(匠人)의 맥락이나 산업현장의 맥락에서 사유될 수는 없다. 자본주의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어떤 포위로부터, 또는 자본주의로부터의 어떤 집단적 이탈로부터 공통적인 것의 정치가 출현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토지와 자본 및 지적 재산권과 연관된 소유권을 재고하지 않는다면 공통적인 것의 정치는 존재할 수 없다. 소유권이 아닌 사용권이 사회변형을 위한 법적 핵심이 되어야 한다.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자치제도를 창안함으로써 사회의 공통적 생산에 적합한 형태를 찾아야 한다. (자치제도의 역할은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공통적 원리가 존재한다고 해서 상이한 사회경제적 영역들, 공적 또는 사적인 영역들, 혹은 정치적 영역들 사이의 구분이 철폐될 것이라 생각하면 결코 안 된다. 공적 숙의가 어떤 하나의 사회적·전문적 범주에 속하는 이해집단들에 의해 포획되는 것을 막으려면, 생산 교환의 영역이 커먼즈의 자치를 중심으로 완전히 재조직돼야 한다. 또한 각각의 커먼즈는 그 활동의 모든 ‘외부성’을 고려해야 하는데, 이는 커먼즈의 거버넌스가 그 활동과 관련을 가지는 사용자들, 시민들을 포함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사회경제적 영역은 공통의 의사결정 능력을 단련하는 학교가 된다.

명제 2 : 소유권에 도전하기 위해 사용권을 가동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사회경제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의 절합은 로마법에서 연원하는 도미니움(배타적인 사적 소유)과 임페리움(주권의 포괄적 권력)의 이중원리로 구성되어왔다. 공통적인 것의 정치는 이러한 이중적 절대주의에 도전해야 한다. 전통적 재산권은 재산에 대한 완전히 자유로운 사용을 소유자들에게 허락하며 그리하여 소유자가 타인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공통적인 것의 사용자는 공통적 사용을 관장하는 규칙을 공동생산하는 식으로 다른 사용자들과 결부되어 있다.

자본주의 자체가 물질적 사물과 결부되어 있는 전통적 소유모델에서 벗어나 점점 더―재화의 판매가 아닌―써비스의 제공으로 변해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써비스 사용자들은 점점 더 자산 대신 접근권을 구매하는데, 접근권은 새로운 공동사용 모델을, 권리유형의 다각화(사용권, 임대수익권, 상이한 권리들에 대한 구매권과 판매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공간보다는 시간과 관련되는 새로운 형태의 인클로저로 향해가고 있다. 사용자가 무언가를 계속 사용하는 한 지불해야만 하는 것이다. 동시에 기업은 개인들이 상호작용하는 네트워크를 계속해서 소유하며 통제한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사용권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유일하게 가지는 상위기관의 의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공허한 권리이다. 진정으로 공통적이려면 사용에 대한 결정이 집단적 심의로 이뤄져야 한다. 이는 공통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과 동등한 것이며 그래서 가령 한 뙈기의 땅을 모두가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단순히 공유된 사물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이 존재하려면, 공동활동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두를 포함하기 위하여 재산권을 확장한 형태의 소유권을 개발하는 대신, 소유권에 반하여 가동될 수 있는 사용권이 있어야 한다. 공통적인 것에 대한 관리는 국가가 아니라, 공통적인 것을 공동 사용하는 이들에게만 위임될 수 있다.

명제 3 : 공통적인 것이 노동해방으로 가는 길이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과 함께 일을 한다. 또한 우리는 타인을 위해 일을 한다. 언제나 일을 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문화적이며 때로는 미학적 차원을 가지는, 공유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일은 공동체나 동료 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긍정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노동자가 노동에 계속해서 의미를 부여한다면, 이는 단순히 소외나 자발적 굴종, 경제적 제약 때문이 아니다. 이는 일이 개인들이 자신들을 집단적으로 사회화하는, 타인과의 유대를 유지하는 활동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노동자를 모아놓음으로써 진정으로 협력적인 현장의 자연발생적 출현을 어떤 식으로든 허용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자유주의적 기업은 강제된 협력을 실행한다. 노동자를 단순직공으로 축소시키면서 기업이 요구하는 것은 노동자의 적극적 동원이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등한시된 현장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우리 활동의 핵심에 다시 놓여야한다. 노동자의 과업의 질을 ‘고양하거나’ 현장의 조건에 대해 이따금씩 ‘조언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노동자들은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규칙과 결정을 다듬어내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진정으로 협력적인 공간이 되기 위해 기업은 자본의 지배에서 해방된 민주적 기관이 되어야 한다.

명제 4: 공통의 기업을 수립해야 한다. 

자본주의적 통제로부터의 노동의 해방은 기업이 경영독재, 주주독재가 지배하는 섬이기를 그치고 민주적 사회의 기관이 될 때에만 가능할 수 있다. 마크 샹니예(Marc Sagnier)의 유명한 말처럼, “기업에 군주제가 존재하는 한 사회에 공화국은 있을 수 없다.” 어떤 현장민주주의도 자본주의가 자신의 배타적 소유물로 보는 것을 통제하는 체제와 양립할 수 없다. 그렇다고 국가통제가 더 나은 것은 아니다. 국가통제는 역사적으로 사회주의를 고꾸라뜨린 장애물이다. 소위 사회적 혹은 집단적 소유는 중앙집권화되고 관료적이며 비효율적인 경영형태 말고는 실행할 수 없는 국가소유로 환원되어왔다. 이런 맥락에서 전통적 노동자 협동조합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경영자를 선택하고 회사가 취할 방향을 투표에 부치며―회사의 자본이 그들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회사의 자본을 그들의 결정에 종속시키는 흥미로운 대안적 모델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모델은 대안적 모델을 위한 중요한 시험대였음에도 전통적으로 자본주의적 경쟁과 국영기업 사이에 줄곧 갇혀있던 사소한 대안이었다. 어떻든 현장에 공통적인 것을 자율의 섬으로서 제도화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회적인 것 안에 경제를 재통합하고 민주적인 현장거버넌스 내에 관점의 복수성(노동자, 소비자)을 도입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시장 자체에 대한 이해가 재고될 필요가 있는데 이는 개별적 소비자의 결정의 자유를―특히 지역 수준에서의―집단적 결정의 틀 안에 다시 새기기 위함이다. 이로써 오늘날처럼 소비자와 노동자가 서로 맞서는 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명제 5 : 경제영역 내의 연대가 공통적인 것의 사회로 가는 길을 닦아야 한다. 

제3부문 또는 비수익경제가 때로 대안 경제로 혹은 심지어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제3부문은 그것을 정의하는 용어와 실제 모두 나라마다 다양하고, 서로 다른 논리를 가지는 제도를 보통 포함한다. 제3부문은 특정 직업이나 사회집단의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지원을 제공하는 조합적인 것일 수도 있고, 종교적 전통을 바탕으로 하는 자선단체적인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이러한 다양한 집합체를 제시하기는 어려운데 이는 특히 이 집합체의 활동이 자본주의기업과 국가기관 양자로부터의 상당한 압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현재 조합부문은 대안경제를 촉진하기는커녕, 보호를 거의 받지 못하는 저임금노동자 수가 증가하면서 복지국가를 위한 저비용 하도급 역할을 맡는 경향이 있는 반면 국가고용주는 이 수가 정체 혹은 감소되어왔다고 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상황에서 사회적 경제는 총익의 정의를 국가가 독점하고 가치의 정의를 시장이 독점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촌락·마을·이웃 수준에서의 새로운 연대를 포함하는, 앙드레 고르(André Gorz)와 이반 일리치(Ivan Illich)가 설교한, 일종의 지역에 기반을 둔 공생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하면 결코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이 공통적인 것의 정치를 그 자체만으로 창출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명제6 : 공통적인 것은 사회민주주의(([옮긴이] 사회민주주의 : 우리에게 이미 알려진 그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로 사용된 용어이다.))를 수립해야 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진보정치의 목표가 근본적으로 복지국가의 재건일 것이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이 국가에 의해 왜곡되고, 이제 국가가 다른 무엇보다 더 복지의 범위를 줄이고 복지를 경쟁력이라는 제약 아래 두려한다는 것을 결코 잊으면 안 된다. 사회(복지)국가는 사회구성원의 공동활동인 공통적인 것을 부정한다. 기업 안에서의 모든 실질적인 경제적 시민권을 포기하고 새로운 노동조직 형태의 가장 가혹한 규범에 복종하는 대가로 복지국가의 사회적 보호와 경제적 재분배를 받는 것이다. 따라서 공통적인 것의 정치가 먼저 추구해야 하는 것은 호혜와 연대의 제도에 대한 통제권을 사회로 되돌리는 것이다.

명제 7 : 공공써비스가 공통적인 것의 제도가 되어야 한다. 

19세기 조합사회주의와 20세기 노동자평의회는 사회주의가 취해야하는 제도형태가 국가관료에 의한 경제경영과는 달라야한다고 봤다. 그러나 이 운동은 공공써비스의 미래 규모를 예측하는 데에는 일반적으로 실패했다. 공공써비스는 갈등과 투쟁의 장이기 때문에 부르주아 지배에 복무하는 ‘국가장치’로 보아서도 안 되고 사회에 완전히 복무하는 제도로 보아서도 안 된다. 따라서 제기되는 물음은 어떻게 공공써비스를 공통적 사용권을 중심으로 조직되며 민주적으로 통치되는 공통적인 것의 제도로 만들 것인가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가 더 이상 중앙집권화된 거대한 행정체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집단적으로 필수적이라고 판단되는 욕구들을 충족시키는 것을 궁극적으로 보장하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써비스 행정은 국가의, 노동자의 그리고 시민사용자의 대표가 포함된 기관에 위임돼야 한다. 써비스는 지역적으로 시행되어야 하지만 국가는 헌법이나 기타 기본법을 통해서 공통적인 것에 대한 접근을 권리로 만들어야한다. 이러한 종류의 해결책은 국가중심주의의 위험에 맞서기 위해서도 지역주의·지방주의의 반동적 활용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명제 8 : 전지구적 커먼즈를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매우 다양한 형태·크기를 가지는 ‘커먼즈’의 환원불가능한 복수성을 보존한다는 조건하에서 공통적인 것을 지역 커먼즈부터 전지구적 커먼즈로 이어지는 전체 사회의 재조직을 위한 정치적 원리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각각의 커먼즈가 없으면 의미 있는 공통의무가 없으며 그리하여 진정으로 공통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각각의 커먼즈의 자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커먼즈들의 연계를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양한 유형의 해결책이 제안되어왔다. 몇몇 해결책은 ‘반인도적 범죄’나 ‘세계유산’이 ‘인류’가 권리를 가진 주체로 점진적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보고, 인권을 새로운 세계의 법적 질서의 기초로 긍정하는 데서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았다. 하지만 우리는 국가가 무력을 계속해서 독점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그러한 권리체계의 발전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협력의 원리나 사회정의의 원리가 아닌 경쟁, 약탈적 전략, 호전적 논리의 규범에 따라서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조직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관행이 어떻게 세법·상법·고용법 영역에서 ‘법률쇼핑’(가장 유리한 조건을 위한 쇼핑)을 낳았는지를 주목한다. 이 관행은 법 자체를 자본주의적 경쟁의 영역이자 상업의 대상으로 만든다. 건강에 관한, 문화에 관한, 물에의 접근에 관한, 오염에 관한 문제에 있어 강요된 논리는 자유교환의 논리이며 (사적) 소유권에 대한 절대적 존중의 논리이다. 자본에 의하여 그리고 자본을 위하여 만들어진, 지구화되었으며 지구화를 행하고 있는 전체 법률장치가 ‘지구자본’(cosmocapital) 제도를 생산하고자 가동되고 있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국제법의 본격적인 사유화이다.

또 다른 담론은 ‘전지구적 공공재’를 촉진하고자 고전경제학적 수단을 사용하려한다. 1990년대 초에 지배적인 신자유주의적 경로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였던, 마부브 울 하크(Mahbub ul Haq), 아마티아 센(Amartya Sen) 같은 인물에 영향받은 UN은 기대수명, 문해력 같은 기준이 포함되도록 발전에 대한 정의(定義)를 확장했다. ‘좋은 전지구적 거버넌스(global good governance)’라는 생각이 등장하여 ‘전지구적 공공재’(global public goods)의 생산과 연결됐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UN개발프로그램(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me, UNDP) 경제학자들은 전지구적 공공재를 다음과 같이 세 범주로 분류했다. 전지구적으로 분리불가능한 (과다사용된) 재화(오존증·기후), 인간이 만든 (과소사용된) 전지구적 공공재(과학지식·인터넷), 통합된 전지구적 정책이 낳은 재화(평화·건강·안정성). 이러한 재화의 정의가 가지는 한 가지 문제는 그 정의가 시장이 ‘자생적으로’ 생산할 수 없는 것에 적용된다는 점에서 부정적이고 주변적인 성격의 것이라는 점이다. 또 다른 문제는 누가 혹은 무엇이 이 재화의 생산을 보장하는가이다. 전지구적 국가가 보장하는 것일까?

UNDP가 제시하는 한 가지 대답은 전지구적 CO2 배출거래 사례처럼 필요할 경우 시장메커니즘, 소유권 강화를 통해 사적 행위자들이 저 재화에 책임지도록 동기부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적 결과는 주요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존하는 전지구적 질서에 대한 모든 실질적 도전을 무력하게 만들 것이다. 한편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진보적 색채를 띠는 자본주의는 사실 정부·자선단체·NGO가 자본주의에 처분을 맡기는 모든 ‘외부성’에서 이윤을 끌어내야 한다. 기업은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환경을 누리기 위해 정치적 안정, 도시기반시설, ‘잘 기능하는’ 대학체계, 심지어 저임금노동자를 위한 자선지원, 범죄자를 위한 감옥을 필요로 한다.

분명한 것은 지배적인 신자유주의 논리는 전지구적 공공재를 방어하라는 요구가 반드시 물화된 공통재 경제영역으로 향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인데, 이는 공통재에 대한 장악을 제한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달리 진보적 정치투쟁은 공통재를 기본권에 결합시킴으로써 그 범위를 확장하려 하는데 이는 단순히 재화만이 아닌 써비스와 제도에 대한 접근을 공통재에 포함하기 위함이다. 신자유주의 국가들이 탈민주화를 적극적으로 유발해온 상황에서 지구화 반대론자 같은 정치적 진보주의자가 시민에 기반을 둔 복지권이었던 것을 보편적 인권으로 변형하고 그럼으로써 옛 복지국가의 보편주의적 폭넓음을 전지구적 커먼즈의 문제틀에 접목하려는 것은 이해할만한 일이다.

허나 심히 인위적이라는 점과는 별도로 이런 움직임은 낡은 서구사회 모델을 발본적으로 변화한 맥락에 이식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논리가 지배하는 현존국가들이 전지구적 커먼즈에 힘을 보탠다거나 공통재를 배분하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반면 시민권은 쟁취할 가치가 있다. 시민권은 근대적인 정치적 주체성의 핵심 요소를 형성한다. 그러나 시민권이 의미가 있으려면 시민이 복지에 대한 권리만 들먹이는 사회적 시민, 써비스 소비자여서는 안 된다. 시민은 정치적으로나 시민으로서나 능동적인 시민, 공통적인 것을 의식적으로 공동생산하게 해주는 제도를 발명할 수 있는 그런 시민이어야 한다.

어떤 큰 변화가 없는 한 미래가 질서 잡힌 다원주의의 그것일 것 같지는 않다. 미래는 알랭 수피오(Alain Supiot)가 거론한 일종의 재봉건화일 가능성이 더 높다. 국가의 사회적 기능이 줄어들고 억압적 기능이 커지며 국민국가가 지역국가로 분열될지 모르는, 다면적 분열의 논리를 따라 지역권력과 초국가권력이 증식하는 재봉건화 말이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낡은 베스트팔렌 국민국가 체계가 어디서나 성장할 위험이 있는 광범위한 반동적·민족주의적·외국인혐오적 운동에 삼켜지지 않은 채 여전히 고쳐 쓸 수 있는 것일 수 있을까? 물어야 하는 것은 아마도 중앙집권적인 국가조직 방식과 이와 연관된 종속화의 형태는 이제 끝난 것이 아닌가일 것이다. 그 다음 자문해야 하는 것은 어떤 형태의 정치적 조직이 전지구적 커먼즈의 공동 생산에 제도 형태를 부여할 수 있는가이다.  

명제 9 : 커먼즈들의 연합(a federation of commons)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방정부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유일한 정치적 원리는 연합원리이다. 연합은 하나의 꼬뮌이나 몇몇 꼬뮌 혹은 꼬뮌집단이 하나의 목적이나 몇몇 목적을 위해 상호 책임지는 관계를 맺는 계약이나 협약 혹은 협정이다. 그 본질적 특징은 국가가 행사하는 종류의 주권과는 직접적으로 대조되는 방식으로, 어떤 집단에 대한 다른 집단의 일체의 종속을 배제하는 상호 책임이다. 

여러 상이한 연합주의 모델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과제는 어떤 특정 모델이 사회적 삶의 모든 수준에서 공유되는 사용 관행에 적합한지를 식별해내는 것이다. 여기서는 맑스주의 전통보다는 프루동 사상이 앞으로 나아가는 최선의 방안을 제공한다. 맑스가 국가권력을 정복해야 하는 프롤레타리아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프루동은 이중적인 연합모델―한편으로는 생산단위의 연합, 다른 한편으로는 꼬뮌 단위의 연합―을 설파했다.(([옮긴이] 생산단위는 헌재로서는 주로 자본주의적 기업에 속하는 것이고 꼬뮌은 지역공동체 혹은 커먼즈에 해당할 것이다.)) 이 모델은 꼬뮌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어떻게 현장의 산업민주주의와 결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프루동이 보기에 이 두 유형의 공통적인 것을 연계시킬 수 있는 공유된 원리는 계약조항들에 간직된 상호성과 상호적 책임이었다. 하지만 상호성의 이러한 확장은 법을 계약으로 대체하려는 프루동의 기획과 조화를 이루더라도 본질적으로 경제적 개념을 정치영역에 적용하는 것을 함축했다. 더 적합한 통합원리는 사회경제적 영역과 공적·정치적 영역의 거버넌스에 공히 적합한 정치원리인 공통적인 것임이 분명하다. 이 여러 커먼즈들의 연계와 관련해서는, 심급이 높아질수록 더 큰 권력을 행사하는 피라미드적 위계가 없을 것이다. 특히 국가나 초국가기관도 그저 다른 기관들과 같은 지위를 차지하며 특권이나 우선권이 없을 것이다. 

더 낮은 수준은 공유된 활동에 기초를 두고서 수평적 방식으로 서로 상호작용할 수 있을 것이며, 더 높은 수준을 통해 작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회경제적 커먼즈(생산·소비·종자은행 등)는 어떤 영토논리와도 무관하게 구성될 것이며, 그 구성목적에 해당하는 활동을 책임져야할 필요에 따라서만 구성될 것이다. 가령 예컨대 강 커먼즈(a river common)는 몇몇 지역경계나 심지어는 국가경계를 가로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달리 정치적 커먼즈는 전지구적 수준까지 규모가 확장되는 영토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상승논리에 따라 구성될 것이다. 

전지구적 커먼즈 연합에 대한 이러한 제안에 조응할 수 있는 시민권의 유형은 무엇일까? 국민국가 모델을 따라 사고된 어떤 ‘전지구적 시민권’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것은 복수적(複數的)이고 탈중심화된 시민권이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시민권이 영토적 범위가 더 확대될수록 그 정치적 밀도를 더 소실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 그리하여 결국 일종의 공허한 세계시민주의적인 인간으로서의 자질과 일치해버리고 만다는 점이다. 우리는 단순히 ‘도덕적’인 것, ‘상업적’인 것 혹은 ‘문화적’인 것으로 후퇴하지 않으면서 국가적이지도 민족적이지도 않은 시민권을 개발해야 한다. 비국가적·초국가적 시민권은 매우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모든 소속관계로부터, 소속에 들러붙은 권리로부터 분리된 시민권은 형식적 권리의 승인이 아니라 실천과 관련하여, 공유된 활동과 관련하여 사유되어야만 할 것이다.

주로 현장민주주의와 관련된 일단의 유사한 제안은 여기(([옮긴이] 현재는 원문 링크의 자료가 삭제되어 있다.))를 참조하라. 공통적인 것에 관한 다도와 라발의 인터뷰는 여기를 참조하라.




퍼더필드 — 예술과 게임이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다

 



공상적이지만 거의 현실적인 시나리오가 여기 있다. 여러분의 지역사회 공원에 있는 꿀벌들, 다람쥐들, 거위들, 곤충들, 나무들 등등의 종(種)들이 인간의 침범과 학대를 충분히 겪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들은 더 이상 참지 않고 들고 일어나 인간이 가진 것과 동일한 권리를 요구할 작정이다. 종들 간의 일련의 회합을 통해 지역 생태계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번성을 보장하는 협정/협약이 타결된다.

이 시나리오는 <퍼더필드>(Furtherfield, 런던에 기반을 둔 예술공동체)가 빅토리아 시대 핀즈베리 파크의 일부 지역에 대한 파수의 일환으로서 고안한 ‘라이브 액션 롤플레잉’(live action role-playing, LARP)게임이다. 앞으로 3년에 걸쳐 <퍼더필드>는 프로젝트의 이름인 <핀즈베리 파크 2025 협정/협약>(The Treaty of Finsbury Park 2025)을 진행해나갈 때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각각 일곱 가지 종들의 역할을 하도록 요청할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풍뎅이와 다람쥐 종의 대표자들로서 <종(種)간 회의>에 참석하도록 함으로써 LARP게임이 목표로 하는 것은 사람들이 “놀이를 통해 인간이 아닌 생명체들에 공감하는 경로들”을 발전시키도록 돕는 것이다. 서로 다른 종들이 소통하도록 돕는 직감 다이얼(Sentience Dial)도 있다. 누가 알겠는가? 이 과정이 실제로 핀즈베리 파크를 더 무성하고 활기 넘치는 장소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 진기한 애니미즘 경험은 <퍼더필드>가 지난 25년 동안 주최해온 프로젝트들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이 프로젝트들 대부분은 예술, 디지털 기술 및 사회적 행동을 일정한 창조적인 방식으로 섞는다. 최근 『커머닝의 프런티어』(Frontiers of Commoning) 팟캐스트(에피소드 #24)에서 나는 세상에 대해 새로이 생각하는 방식으로서 참여예술에 대한 <퍼더필드>의 독특한 접근법에 관하여 루스 캐틀로우(Ruth Catlow)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술가, 큐레이터이자 <퍼더필드>의 공동대표인 캐틀로우는 1996년에 <퍼더필드>를 시작한 이래로 많은 예술 프로젝트들을 이끌어 온 비전을 가진 사람이다. 그녀는 지역적, 일국적 및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다양한 파트너들과의, 특히나 평범한 사람들과의 협동작업을 조직하는 것을 돕는다. <퍼더필드>의 많은 예술작업과 테크놀로지 기획들의 핵심은 우리가 세상을 다르게 보도록 하려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위해 새로운 미래를 그리는 경우 예술이 하는 역할을 존중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퍼더필드>의 프로젝트들 대부분은 런던 소재 핀즈베리 파크에 있는 녹지 공간 및 미술관에서 그리고 예술가들•기술자들•활동가들을 불러 모으는 다양한 디지털 공간에서 열린다. 지역 공무원들이 <퍼더필드>의 예술 프로젝트들을 펼칠 참여적인 무대로서 공원을 사용하도록 <퍼더필드>측에 청했다. 전통주의자들은 이 단체를 예술의 센터라고 부르겠지만 <퍼더필드>측은 자신들의 활동이 외부 지향적이고 네트워크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재미있게도 ‘디-센터’(de-center, 탈-중심)라고 부른다.

<퍼더필드>는 흥미를 유발시키며 장난기가 다분한 기발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예술적 실험들의 주최자라고 자임한다. 이 탐구적 실험들은 오픈소스 테크놀로지와 철학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퍼더필드> 자신들의 말로는) “현존하는 권력들을 파열시키고 민주화”하며 “지형을 새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일례로 <흑인의 삶도 중요하다> 시위들이 무수히 일어나 미국과 전 세계 도시를 흔들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노예소유자 사업가들과 군장성들이 공원에 청동 조각상으로 세워지는 영광을 입은 이유를 문제삼기 시작했다. <퍼더필드>는 공원에 있는 받침대 위에 지금 있는 것 대신에 누가 또는 무엇이 놓여서 기념되어야 할지에 대하여 공개 토론을 열기로 결정했다.

예술가들은 ‘시민 공원 받침대’ 프로젝트(The People’s Park Plinth project)측으로부터 공원에서 기념하게 될 새로운 사람들이나 물건을 제안하도록 요청을 받았다. 이 과정의 매개체는 스마트폰이었다. 공원에서 산책하는 사람들이 나무나 동상 받침대에 부착된 QR코드를 스캔하면 공원 내의 해당 장소에 관한 영상을 즉각 볼 수 있었다. 사실상, 이 프로젝트가 스스로를 설명했듯이, 이 프로젝트는 “공원 전체를, 여러분이 여러분의 공원에 원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하는, 디지털 예술작품을 위한 공공 플랫폼으로” 바꾸었다.

누구나 제안된 예술품 몇 개에 투표할 수 있었다. 1위를 차지한 작품—에이샤 탄 존스(Ayesha Tan Jones)가 제작한 <나무 이야기에 바탕을 두어>(Based on a Tree Story)—은 나무에 있는 QR코드를 사용하여 그곳에 사는 나무 요정의 영상을 호출하는 예술작품이었다. (“장소 특유의, 청각적 증강현실을 통해 나무의 과거•현재•미래의 이야기를 하는 디지털 나무 요정과 조우하기”)

예술작품을 선정하기 위한 공개적인 투표는 그 자체로 상당히 새로웠다. 각 참가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하나의 예술작품에 투표권을 한 번 행사하는 식이 아니었다. 그들이 원하는 만큼 많은 예술작품들 각각에 투표할 수 있는 다수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제곱 투표”(quadratic voting)라 불리는 이 방식은 어떤 프로젝트가 과반수를 얻는지를 그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떤 것에 가장 열광하는지를 보여주는 쪽이다. 이 시스템은 소수의 목소리를 무효화하는 “다수의 횡포”라는 문제점과 파당성이 강한 집단들이 방해물로 작용하는 상황을 극복할 목적으로 구상되었다.

<퍼더필드>의 더 흥미로운 역할들 중 하나는 어떻게 블록체인 소프트웨어가 네트워크 시대에 예술을 재발명하는 것을 도울 수 있는지에 관하여 실험실을 열고 예술가들과 기술전문가들 간 일련의 토론들을 주최한 것이었다. 핵심은 문화 부문이 어떻게 “피어 생산방식으로 생산된, 예술•문화•사회를 위한 탈중심화된 디지털 인프라에 이르는 길”을—특히 탈중심화된 자율조직들(Decentralised Autonomous Organisations, DAOs)을 통해서—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퍼더필드>는 “예술계에서 게이트키핑과 엘리트주의를 끝내”고 “규모에 제한이 없는 상호의존과 상호협력을 위한, 회복력 있고 변화도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한 가지 길로서 이 깊고 근본적인 우애의 정신을 가져오기”를 원했다. <퍼더필드>는 또한 기술 부문에서 아주 많은 탈중심화된 자율조직들을 활기 띠게 하는 자유의지적인 개인주의를 넘어가기를 원했다.

<퍼더필드>의 회합들의 결과로 두 권의 책이 나왔다. 하나는 『블록체인을 다시 생각하는 예술가들』(Artists RE:thinking the Blockchain, 2017)—예술가들이 블록체인에 비판적으로 참여하는 활동에 관한 책—이고 다른 하나는 2022년 5월에 출간되는 『급진적인 친구들』(Radical Friends)—예술계에서의 디지털 자율조직들(DAOs)의 위험 및 이 조직들에 대안이 되는 커먼즈 기반 디지털 자율조직들에 관한 선집—이다. “<퍼더필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안적 조직들에 “DAOs with Others”를 나타내는 두문자어 ‘DAOW’라는 이름을 붙인다.”

루스 캐틀로우와 나눈 팟캐스트 대화는 여기서 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