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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먼즈와 미래

 


  • 저자  :  Leila Dawney, Samuel Kirwan, Julian Brigstocke
  • 원문 :  Introduction : The Promise of the Commons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Leila Dawney, Samuel Kirwan, Julian Brigstocke가 편집한 책  Space, Power and the Commons : The Struggle for Alternative Future (Routledge 2016)의 “Introduction: The Promise of the Commons”에서 책 전체의 내용을 대략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우리의 일은 태양에 의해 신성화된다. 가령 겨울날이나 땅 파는 날에 비하면 이날[추수하는 날]은 만족스러운 날이다. 같이 일하는 친구들 때문에 더 그렇다. 그런 날이면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모든 얼굴들이 (내가 알지만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 사람들도 함께) 한 공간에 모여서 공동의 도랑과 집단적 희망에 의해 한데 묶여 있기 때문이다. 사슴이 덫에 걸려 탕으로 만들어 달라고 울어대는 소리를 듣거나 딱따구리가 파이로 장사를 지내 달라고 졸라대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들고 숲을 쳐다본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기라도 하면 우리는 일제히 몸을 곧추세우고 꾸짖는 듯이 태양을 쳐다본다. 우리의 낫과 손 연장은 합창하듯 소리를 낸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은 누구나 듣는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모두가 듣는다. 우리에게는 개방성과 즐거움이 있다.

Jim Crace, Harvest (2013)

1968년에 봉기에 참여하고 있던 활동가가 시간 여행을 하게 되어 2015년 급진적인 좌파의 집회 현장에 뚝 떨어지게 되었다면 그녀는 거기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그녀는 아마도 계급·노동·저항의 언어가 강화되었으리라고 기대할 것이지만, 이런 기대와는 달리 그녀가 실제로 발견하는 것은 제사(題詞)에 나온 목가적 장면과 유사한 토론 즉 토지에의 공통의 접근과 사유(思惟)의 개방성 및 그것에 수반되는 삶의 양태를 놓고 벌어지는 토론일 것이다. 그녀는 이전에는 신맬서스주의자들(neo-Malthusians), 토지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운동들 그리고 사회사가들 및 법역사가들의 도메인이었던 것, 즉 커먼즈의 언어를 발견할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커먼즈에 관한 관심은 주로 제한된 자원, 늘어나는 인구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새로운 형태의 물질적 가난 등의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었다. 커먼즈는 경제학, 인류학, 환경과학에서 중요한 관심 영역이 되었다. 인구 과잉에 대한 맬서스의 저작과 함께 자원과 토지의 사적 소유에 대한 조지(Henry George)의 비판, 경쟁하는 행위자들이 제한된 자연자원에 접근할 때 생성되는 긴장들에 관한 하딘(Garret Hardin)의 저작들이 그 준거점들이 된다. 커먼즈 관련 문헌들이 다루는 문제들은, 왜 이러한 위기들이 출현하고 있는가, 이런 상황은 언제 위기점에 도달할 것인가, 개별 국민 국가들이 어떻게 이것을 막기 위해 대응해야 하는가이다. 이 문제들은 커먼즈에서 실제로 행해지는 일, 커먼즈를 구축하는 일, 커먼즈가 의미하는 바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정책 변화와 거시경제적 자원관리를 지향하는 추상적 논의들이었다.

이 텍스트에서 (그리고 커먼즈 연구분야를 발전시키고 있는 정치학자들·지리학자들·사회학자들 사이에서) 말하는 커먼즈는 이 문제들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을 다르게 표현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 책의 글들은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식민화나 불로소득자들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규제와 보호를 필요로 하는 자원의 관점에서 정의되기를 거부하는 커먼즈를 표현한다. 이 글들이 말하는 커먼즈는 공간일 수도 있고 경험일 수도 있고 자원일 수도 있으며 기억이거나 혹은 ‘희소성의 관리’ 외부에 있는 공유하기와 살아가기의 형태들일 수도 있다. 저자들의 전문분야는 도시계획학, 지리학, 정치학, 사회학, 문화이론 등을 포함하는 사회과학과 인문학 전반에 걸쳐 있다. 이는 새로이 일기 시작한 커먼즈 연구가 여러 분야들을 망라하고 있으며, 학계를 가로지르는 동시에 학계를 넘어서는 논의들에 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커먼즈를 신자유주의적 시장에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 삶의 사유화와 개인주의화에 저항하는 함께 살기의 방식들을 핵심으로 하는 시공간적이고 윤리적인 형성체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커먼즈의 언어·이념·상상계의 출현을 고찰할 때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신자유주의적 힘들과 연관되어 있고 그 힘들을 통해 작동되는 방식을 인식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힘들은 공통의 삶을 위한 가능성들을 제한하는 동시에 산출한다. 급진적으로 사유를 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확장의 논리 및 과정과 이 확장에 대한 저항을 점점 더 종획과 커머닝의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다름 아닌 자본주의적 축적의 논리를 통해 커머닝이라는 특수한 저항 형태의 가능성이 출현하는 것이다. 자본이 세계의 더 많은 지역을 상품화 과정으로 끌어들이면서 새로운 종획이 일어난다. 자본은 신자유주의적 소유와 가족 관계를 통해 삶을 사유화하는 동시에 인구에 기반을 둔 통치[푸꼬가 분석한 바의 새로운 형태의 권력의 특성이다―정리자]를 구사한다. 이것이 대안권력인 커머닝으로 향할 가능성의 조건들을 생성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비(David Harvey)의 작업이 매우 중요한데, 특히 후기 자본주의가 계속적인 종획 과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 중요하다. 자본은 이전에는 상호책임이라는 사회적 관계에서 관리되고 조직되고 산출되었던 자원·인구·활동·토지를 통합하면서 확장한다. 하비는 이를 ‘강탈(dispossession)에 의한 축적’이라고 정의한다. 여러 분야를 가로지르는 연구들은 종획의 여러 형태들을 통해서 자원의 사유화가 일어나고 있는 많은 공간들을 보여주었다. 지구상의 후진 지역에서의 토지강탈, 금융자본의 자산거품, 유전자·물·토착지식 등의 사유화―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종획들은 그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세상이 폐쇄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커먼즈가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의 중요한 자원이 된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전통적인 대의민주주의의 방식을 통한 변화의 가능성들은 감소하고 있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의 주요 정당들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은 유럽연합의 트로이카가 장악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활동가들은 집회·조합·투표소의 공간들을 넘어서 정치를 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탐구하고 있다. 아나키스트들의 DIY 전통에서 나온 새로운 형태의 집단적 행동은 거주와 점령이라는 형태를 집회와 시위라는 형태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며, 저항의 예시적 공간들의 출현을 향하는 새로운 길을 닦고 있다. 그 주목할 만한 사례는 오큐파이 운동, 15M 그리고 인디그나도스이다. 이렇게 커먼즈의 정치는 종획에 대한 공간적 대응으로서 일어난다. 커먼즈 이념은 개념적·물리적 공간을 집단적으로 생산하고 주장하기를 촉발하는 정치적 어법을 제공한다. 저항과 항의의 새로운 형태들―관리와 의사결정에서의 플랫시스템들[누구에게나 접근이 허용된 시스템을 말한다―정리자], 요구 없는 정치[원주 : 낭씨Jean-Luc Nancy가 정치의 이러한 재구상에 대한 더 나아간  논의를 제공하고 그것을 더 정교화한다(James, 2006; Nancy, 1991, 2000)],((James I, 2006, The fragmentary demand: An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Jean-Luc Nancy (Stanford University Press, Stanford, CA). / Nancy J-L, 1991, The inoperative communit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Minneapolis, MN and London / Nancy J-L, 2000, Being singular plural (Stanford University Press, Stanford, CA). ).)) 대안적 세계의 구축에 초점두기―이 출현함으로써 공통적으로 살기, 공통적으로 만들기, 공통적으로 존재하기라는 새로운 활동들이 종획과 강탈에 대한 직접적 대응으로서 일어나고 있다.

커먼즈의 언어는 무엇보다, 투쟁과 무력함 너머 희망과 약속을 부각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언어와 성향을 제공한다. 이 언어는 능동적인 정치를 환경에 대한 관심과 결합시키고 도시 운동을 시골에서의 저항과 결합시키며 지역에서의 투쟁을 전지구적 정치와 결합시킨다. 그 역사적 문화적 반향들이 때로 문제점을 보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다르게 살고 다르게 존재할 것인가를 생각할 자원을 제공해 준다. 지금과는 다른 세계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미래들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커먼즈의 이념은 낭만적 서사를 제공하며 이 서사를 통해 앞으로 나아갈 길(실망스런 정치적 내러티브들, 생태계 파괴, 양극화와 강탈―이것들의 외부에서 사유하는 길)을 제공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내러티브에 대안이 되는 대항내러티브를 제공한다. 무엇보다도 커먼즈 이념은 변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날 수 있으며 조그만 행동들도 중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희미하게나마 제공한다.

그러나 이 책의 글들이 분명히 하듯이 이 낭만적 서사를 넘어서 사유할 필요, 커먼즈가 출현하는 곳, 커먼즈에 담겨 있는 긴장들, 커먼즈가 행할 수도 있는 새로운 사물화들을 평가할 필요 또한 존재한다. 특히 블렌코우(Claire Blencowe)의 글은 공통적 삶의 유혹적인 상태들이 해방적 충동들을 덫에 가두고 그런 움직임들을 자본축적의 관계들로 재영토화시킬 위험을 일깨워준다. 커먼즈 이념의 매력과 미래의 가능성을 이해할 때 우리는 우리가 ‘종획 이야기들’라고 부르는 우울한 장르를 고려에 넣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이야기들은 영국 의회의 종획 역사들과 이 역사들을 문학이나 구비 전통에서 다시 이야기하는 민속 관행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볼리어 같은 커먼즈 옹호자들이 제시하는 커먼즈 이야기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상실감, 그리고 비록 파열되었으나 폐쇄되지는 않았던 그리고 어느정도는 가난했던, 종획 이전의 삶의 환기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특정 지역에 속하면서도 이리저리 퍼져서 운동들과 지역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데, 흩어진 사건들과 행동들을 한데 모으는데 도움이 된다. 커먼즈의 이러한 다양한 갈래들에 대한 주목이 이 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자본주의 이전의 목가적 사회의 낭만적 상상태들과 테크놀로지·소통·사회성의 가없는 가능성들을 결합하는 ‘커먼즈’라는 용어의 가능성들만이 아니라 문제점도 또한 주목하는 것이다.

이 책의 3부에 실린 글들이 분명히 하듯이, 커먼즈 이념이 정치적·학술적 담론에서 널리 퍼지고 있다면 이는 커먼즈를 구성하는 것이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책은 도시 커먼즈,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디지털 커먼즈가 일상 언어에 진입한 상황에서 커먼즈의 더욱 새로운 유형들을 탐구한다. 어떤 저자는 비인간 존재의 참여를 다루고 또 어떤 저자는 공유된 기억의 전지구적 커먼즈를 다루며 다른 어떤 저자는 공통적인 것의 법 공간을 다루고 또 다른 저자는 시간의 측면에서 커먼즈를 다룬다. 3부에서 서술된 집단들과 행동들의 공통적 특징은 (박탈에 대한 저항 말고도) 물리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커먼즈를 다루기보다 공통적인 것을 실천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다루는 태도이다 이런 식으로 정치적 커머닝의 새로운 실천들은 신자유주의적 풍경 내부에 ‘다른 세계’를 실행하고 있으며 그렇게 하면서 주체성들·관계들·공간들을 바꾸고 있다.

실로 2000년대 초에 심대한 전환이 일어났다 커먼즈를 어떤 장소나 자원으로 생각하는 데서 실천의 한 형태로서의 커머닝을 생각하는 데로 전환한 것이다. 집단화를 지역적 규모로 생각하는 수단으로서 그리고 비자본주의적 형태의 사회조직과 경제조직을 실현하는 방식으로서 커머닝 이념이 번성했다. 라인보(Peter Linebaugh)의 작업이 이 전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커머닝과 종획의 역사에 대한 그의 서술들은 이 책에서 논의되는 바의 커먼즈 이념을 우리의 관심사로 만드는 데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커먼즈의 이념과 커머닝의 정치를 이해하고 활성화하는 몇 가지 방식들로 하여금 서로 대화하게 하려고 한다. 이것들은 개념적 작업과 경험적 사례들 사이에서 움직이는데, 법, 역사, 그리고 일상적 활동에서 이 개념을 고찰함으로써 이 개념이 정치적·이론적 설득력을 획득하는 여러 가지 방식들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주고자 한다. 이 책의 글들은 특히 실제로 존재하는 바의 커먼스와 커머닝에 초점을 둔다. 여기서 커먼즈는 법, 정치적 행동주의, 그리고 일상적 활동의 테크놀로지들을 통해 엄연한 객체들로서 출현한다. 이런 서술들은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를 방해하거나 그것들을 우연한 것으로서 폭로하는 능력을 공유한다. 그리하여 커먼즈는 대안들이 직접 탐색되고 실험되며 희망의 정치에 되먹여지는 개념적 공간이 된다. 희망의 정치는 이미 실제로 존재하는 비자본주의적 삶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역사의 종식’(이는 자본주의 이후의 미래를 개념화하는 데 있어서 막다른 골목에 해당한다)을 돌파할 가능한 미래들을 제안한다.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는 이러한 움직임을 ‘역사의 시작’이라는 주제로 논의했다. 이렇듯 커먼즈의 이념은 현재의 경제적 구조의 우연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성장과 사적 소유의 필연성이라는 담론을 무너뜨린다. 에스떼바(Esteva)가 지적하듯이 커머닝과 커먼즈 운동은 ‘대안적 경제’가 아니라 ‘경제에 대한 대안’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커먼즈에 대해서 쓰고 사유하고 커먼즈를 실행하는 것은 이러한 ‘세계 만들기’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며, 우리는 커먼즈를 중심으로 하는 문헌들에서 커먼즈 고유의 수행성―경험과 주체성을 사적 소유와 자본의 불가피성에 맞세워 재구조화하는 데서의 수행성―을 감지한다.

이어지는 절에서는 커먼즈 연구의 다섯 분야를 살펴본다. 첫째로 우리는 커먼즈가 환경자원의 한계에 대하여 사유하는 수단으로서 이해되는 방식을 고찰한다. 둘째로 우리는 도시 커먼즈에 대한 그리고 도시에서의 공간적 커머닝과 전유의 실천들에 대한 더 최근의 연구들을 살펴본다. 셋째로 우리는 비판적 법연구 분야에서의 작업에 기대어 커먼즈와 법과의 관계를 이해한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신맑스주의의 성취에 시선을 돌려 커먼즈 이념이 현재의 급진적인 정치사상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왔는가를 개괄하고, 마지막으로 커먼즈 논의의 틀을 커머닝 개념을 중심으로 다시 짜고자하는 저자들에 주목한다.

[참고]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Introduction: the promise of the commons
     LEILA DAWNEY, SAMUEL KIRWAN AND JULIAN BRIGSTOCKE

PART I
Materialising the commons
1 Building the commons in eco-communities
     JENNY PICKERILL
2 A politics of the common: revisiting the late nineteenth-century Open Spaces movement through Rancière’s aesthetic lens
     NAOMI MILLNER
3 A spirit of the common: reimagining ‘the common law’ with Jean-Luc Nancy
     DANIEL MATTHEWS

PART II
Commoning
4 The more-than-human commons: from commons to commoning
     PATRICK BRESNIHAN
5 ‘Where’s the trick?’: practices of commoning across a reclaimed shop front
     MARA FERRERI

PART III
An expanded commons
6 Expanding the subject of planning: enacting the relational complexities of more-than-human urban common(er)s
     JONATHAN METZGER
7 Occupy the future
     JULIAN BRIGSTOCKE
8 Imaginaries of a global commons: memories of violence and social justice
     TRACEY SKILLINGTON

PART IV
The capture of the commons
9 The matter of spirituality and the commons
     CLAIRE BLENCOWE
10 Controlled natures: disorder and dissensus in the urban park
     SAMUEL KIRWAN




네그리와 함께 네 개의 손으로 쓰다

 


  • 저자 : Michael Hardt
  • 원문 : Vierhändig schreiben mit Toni Negri https://taz.de/80-Geburtstag-des-Theoretikers/!5062133/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네그리의 80세 생일을 맞아 마이클 하트가 둘의 공동작업에 대해 쓴 글이다. Genre, Volume 46, Nr 2, 2013에 처음 발표됐고 Thomas Atzert가 영어 텍스트를 독일어로 옮겼다. 아래의 정리에는 독일어본을 참고했다. 번역에 가까운 부분들이 있으나 엄밀한 의미의 번역은 아니니 인용이 필요한 경우 원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원문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표현에서 하트의 1인칭 관점을 유지했다.

 

나는 항상 네그리의 넓은 마음이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그는 나를 지적으로 진지하다고 보았으며 나의 눈높이에서 나를 만났다. 처음에는 그가 나를 동등하게 대하는 것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그런 태도를 바꾸지 않았으며 마침내 그것이 우리의 공동작업의 토대가 되었다.

나는 공동의 집필이라는 놀라운 경험은 동등한 사람들 사이의 그러한 특수한 관계를 필요로 한다고 확신한다. 우리의 만남과 공동작업에 관해 몇 가지 생각해 보는 것이 토니의 80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나는 1986년 여름 파리에서 토니를 만났다. 그가 파리로 망명해있던 14년 가운데 세 번째 해였다. 일주일 동안의 방문은 스피노자를 다룬 그의 책 『야만적 별종』을 번역하던 중에 생긴 몇 가지 물음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느 날인가 그는 나에게 나중에 오래 머물 생각으로 파리에 오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그러면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뤽상부르 공원을 산책하며 철학적 사유도 좀 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이었다.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고 있던 시애틀로 돌아와서 논문자격시험을 접었다.

다음 해 여름 나는 아무런 재정수단 없이, 장학금이든 직업이든 숙소든 아무것도 없이 파리로 갔다. 다행히 나는 네그리의 뒷받침과 일부 이탈리아 정치 망명자들의 도움으로 근근이 살아갈 수 있었다.

내가 파리로 간 지 얼마 안 돼서 새로운 잡지 『전미래』를 위한 계획들이 구체화되었다. 네그리와 장 마리 뱅상(Jean-Marie Vincent)이 주도했으며, 랏자라토(Maurizio Lazzarato)와 나도 편집진에 들어와서 같이 활동하자고 초청받았다. 잡지 편집 모임은 공동작업과 집단집필을 훈련하는 중요한 장이 되었다.

 

집단작업

네그리는 이미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는 내가 파리에 오기 전에 가타리와 함께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집필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집단작업 능력을 갈고 닦은 것은 무엇보다도 6-70년대 이탈리아의 여러 정치 잡지들과 관련된 활동에서였을 것이다.

그때부터 네그리와 나는 공동으로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이후 지속된 공동작업의 시작이었으며 우정의 토대가 될 것이었다. 『전미래』 같은 정치 잡지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듯이, 공동집필의 방법은 집단실천이라는 형태에 기초한다.

과제들의 분배가 작업의 기초를 이룬다. 본질적인 지적 분석이 집단의 정치적 논의에서 이루어지고, 주장들이 논의되며, 모든 기고들이 상세하게 스케치되고 공동으로 배치된다. 잡지의 계획된 출간 전체가 이렇게 일정한 방향으로 구체화된다. 그때 비로소 개별 구성원들 사이에 과제가 분배된다. 누구는 이것에 대해 쓰고, 누구는 저것에 대해 쓰고, 또 다른 누구는 제3의 주제에 대해 쓰고 등등.

이렇듯 집필은 정확하게 윤곽지어진 활동이 된다. 토론을 통해 이미 전개된 생각들과 주장들이 집단의 일부로서 지면에 오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집필이 전적으로 의미가 있다. 많은 정치 잡지들과 팸플릿에서 기고문들이 익명으로 남더라도 말이다. 집단적 논의로부터 과제를 끌어내는 방법이 공동의 집필과정을 창출하는 것이다.

네그리와 내가 함께 책을 집필할 때, 우리는 생각들을 모아서 오랫동안 논의한다.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집필과정이―이 단계에서 책의 체제와 개요가 그려지며 이는 다시 더욱 다듬어지고 세밀하게 전개되게 된다―논의를 더 진전시킬 기회를 제공한다.

윤곽이 더 뚜렷하게 드러나고 논의의 진행이 모든 본질적인 논점들에서 명확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 비로소 우리는 분업을 시작하여 실제로 글을 쓰는 단계로 넘어간다. 각자 맡은 부분들은 짧은 토막들이며 많은 경우 단지 몇 쪽 정도이다.

그 후에 우리는 그렇게 해서 초고를 놓고 토론하고 편집하며, 보완할 것은 보완하고 퇴고 작업으로 넘어간다. 최초의 원고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여러 번, 그리고 여러 단계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공동의 논의 이후에 집필에 착수하는 방식은, 본질적인 지적 노동이 논의 과정에서 이루어지고 나중의 집필은 기계적인 작업일 뿐이라는 느낌까지 준다. 마치 “당신은 무엇을 말할지를 정확히 알고 그것을 단순히 글로 적는다”는 모토처럼 말이다.

그러나 모든 글 쓰는 이들은 말해야 할 것의 대부분이 집필과정에서야 생성된다는 것을 안다. 하나의 주장을 글로 정식화해내려는 노력에 이르러서야만 예기치 못한 장애를 만나기도 하고 또한 새로운 접근법이 생겨나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테마가 미리 얼마나 뚜렷하게 설정되었는가와 무관하다. 글쓰기의 행복(과 고통)은 글쓰기가 늘 창조적 해결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나온다.

 

해방으로서의 글쓰기

우리가 함께 하나의 주장을 글로 다듬을 때 일종의 연금술이 일어난다. 협동하면서 (맑스가 말했듯이) 개인적인 한계들이 제거되고 새로운 것이 생성된다. 공동집필에서 개인적인 한계들의 제거는 해방으로서 일어나며, 개별적인 부분들의 총합을 넘어서는 새로운 것의 발견에는 마법적인 무엇인가가 깃들어있다.

협동의 생산력은 내용과 관련하여 인식되는데, 그것은 집필 내용의 어조와 스타일을 모두 특징짓는다. 다른 많은 집단집필의 저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공동 텍스트는 개인적으로 작성한 텍스트들과 미미한 정도로만 같은 울림을 가진다. 이는 단순한 어조의 변화가 아니며 융합도 아니다. 공동집필은 오히려 제3의 목소리를 발생시키며 이는 우리에게 속하는 만큼이나 그 자체로 자립적이다 .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게 하려면 많은 것과 결별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자신만의 단어나 특정 어구에 너무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상대가 사물을 정식화하는 방식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지고 더 다듬어야 한다. 종종 상대의 단어를 받아들이고 그런 상태에서 새로 생성되는 텍스트의 일관성과 정확성을 주시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아마도 네그리와 나에게 도움이 된 것은 우리가 여러 언어를 한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는 이탈리아어로 토론한다. 우리가 원고를 각자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로 쓰든 영어로 쓰든 말이다. 언어의 상이성은 어떤 열린 공간을 창출하고 일정한 자율을 제공한다.

퇴고 과정에서 이탈리아어로 쓰인 것과 영어로 쓰인 것이 혼합된다. 물론 둘 모두 텍스트를 편집할 때에는 가능한 한 전체가 통일되도록 노력하지만 말이다. 최종 단계에서 비로소 원고는 통일된 언어를 얻는다. 이는 보통 영어인데, 이 경우 내가 책임을 지게 된다.

내용의 차원은 더한 노력을 요구한다. 우리가 특정의 주장을 공유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는 일이 별로 없다. 현실적인 차이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물론 상대방의 생각을 나에게로 끌어들여 사유하고 그것을 더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볼 때 공동집필은 일종의 계속적인 상호표절 과정이다. 물론 이는 근본적으로는 맞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생각들이란 결코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동의 지적 작업은 무엇보다도 사이영역(Zwischenbereich)을, 즉 모두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생각들을 창출한다. 아마 이것이 때때로 그 영역에 마법적인 어떤 것이 깃드는 이유일 것이다. 생각들이 고유한 것이 되기를 멈추며 공통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상이한 사유방식의 상호작용

공동저술이 동등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필요로 한다고 할 때, 이는 각자의 몫이 같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실상 상이한 사유방식, 재능, 스타일, 기질이 공동의 과정에서 상호작용하는 바로 그 가운데에서 본질적으로 잉여가 산출된다.

각자가 집필한 부분들을 합하여 회계원처럼 면수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계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집필과정에서의 동등성이란 그러한 계산이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물론 함께 하는 작업이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다. 성패의 시금석은 엄밀한 의미에서 스피노자적이다. 즉 ‘다른 사람과 함께 작업을 하는 것이 자신의 고유한 사유능력을 촉진시키느냐 아니냐’이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심지어는 대부분의?) 만남들이 사유를 촉진하거나 세계를 더 잘 이해하게 하는 데, 또한 주장을 명확하게 정식화하고 개념을 창출하는 능력을 확대하는 데 기여하지 않는 것 같다.

자신의 능력을 성장시켜 주는 사람과의 만남은 놓치지 말아야 하고 소중히 해야 할 행운이요 선물이다. 공동집필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동등함이란 양자가 동등한 정도로 이 경험을 한다는 데 있다.

공동집필에 요구되는 특수한 상황과 노력을 고려하건대, 그러한 공동집필을 보기가 매우 드물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네그리와 함께 한 나의 경험은 모든 노력에 값하는,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혜택을 나에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