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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선 슈나이더와 협동조합 운동의 미래

 



어떻게 하면 협동조합이 사회 변화를 위한 수단으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특히 온라인 공간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떠한 실질적 개입이 IT 대기업들의 반사회적 행동을 저지할 수 있을까? 이 두 질문은 내가 콜로라도 볼더 대학교(the University of Colorado Boulder)의 미디어학 교수인 네이선 슈나이더(Nathan Schneider)와 함께 나의 팟캐스트 「커머닝의 새로운 영역들」(“Frontiers of Commoning”)의 에피소드 8편에서 최근 탐구한 것들이다.

네이선은 저항운동·비폭력운동·체제변화운동에 초점을 맞춰 오랫동안 활동해 온 언론인 겸 학자이다. 그의 연구 중 많은 부분은 협동조합과 디지털 기술이 오늘날의 세상에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특히 플랫폼 협동조합을 우버, 에어비엔비 그리고 태스크래빗과 같은 착취적인 사업 모델을 뛰어넘는 수단으로 만들기 위해 활동해 왔다.

슈나이더에게 협동조합의 역사는 큰 영감과 실질적인 가르침의 원천이다. 그는 영국인으로부터 인도인들을 해방하기 위한 전략적 도구로서 협동조합을 수용한 간디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협동조합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세상을 형성해왔지만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일을 하는 한 형태입니다. 가령, 사람들은 협동조합이 시민권 운동의 큰 요소였다는 것을 종종 잘 알지 못하죠.”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신용조합을 시작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열심히 도왔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협동적인 은행업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로 하여금 억압적인 지역 상황으로부터 더 독립적이 되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네이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미시시피 지역의 한 원로 시민+권+운동가를 인터뷰했고 그에게 협동조합이 1960년대에 있었는지 여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죠. ‘당신은 누가 사람들에게 유권자 등록을 하라고 했다고 생각하세요?’”

소작인들은 감히 시민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정치적인 활동을 하면 언제든지 땅에서 쫓겨날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협동조합의 구성원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운동에 참여하기에 충분할 만큼 안전했다. 그는 말했다. “이것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우리 세상의 지형(地形)이다.”

슈나이더는 이 지형을 전면에 내세우려고 노력하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이윤보다 사람을 우선하는 것, 지역 사업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 그리고 공동체에 의한 통제를 강화하는 것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합니다.” 협동조합은 당연한 대응인 것이다.

네이선은 협동조합을 미국의 대세에 진입시키기 위해 두 가지 주요한 전략을 본다. 하나는 1880년대와 1890년대 정치체제의 기반을 흔들기 위해 협동조합을 이용했던 민중주의자들의 방식으로 알려진 솔직하게 정치적인 접근이다. 다른 하나는 소유권과 같은 전 국민이 공유하는 신화를 바탕으로 하는, 덜 적대적이며 합의에 의해 추동되는 접근이다. 그는 루이스 켈소(Louis Kelso)의 ‘우리사주신탁제도(ESOP:Employee Stock Ownership Plan)’의 창안을 사례로 인용했다. 우리사주신탁제도는 직원들이 직장에서 개인의 지분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합법적이고 구조적인 혁신이었으며 동시에 전반적인 노동 문화를 개선하기도 했다.

슈나이더는 협동조합이 자본의 힘을 위협할 수 있을 경우에만 궁극적으로 강력한 운동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은행들에게 경쟁 도전장을 내민 신용협동조합들과 공익사업으로부터 사업을 인수한 지방전기협동조합은 고전적 사례들이다. 네이선에게 다른 협동 기획들보다 플랫폼 협동조합의 미래 힘에 대한 낙관론을 심어준 것은 견고한 대항을 극복한 바로 이러한 풍부한 협동조합의 역사인 것이다.

그러한 목표를 밀고 나가기 위해 슈나이더는 여러 핵심적인 운용기획을 만들어 오고 있으며, 그 기획 중 일부는 미디어 조직에서의 공동체 소유권과 거버넌스를 위한 실천 지향적인 연구 센터인 <미디어 기업 디자인 랩>(Media Enterprise Design Lab)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 <미디어 기업 디자인 랩>은 새로운 금융 제도, 소프트웨어 도구, 교육 전술을 찾아내기 위해 기업가들, 스타트업 프로젝트 그리고 활동가들과 협동한다.

슈나이더는 온라인 프로젝트에서 민주적인 소유권과 거버넌스를 확장시키는 새로운 방법들을 찾는 데 개인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한 노력 중 한 가지는 그렉(Greg)과 하워드 브로드스키(Howard Brodsky)를 포함하는 여러 협동조합 리더들에 의해 만들어진, 협동조합 ‘가속장치’인 <스타트.코업>(Start.Coop)이다. 이 프로젝트는 스타트업 회사들이 투자자들을 찾고 프로젝트 개발에 관한 도움을 얻으며 협동조합 관행과 문화를 더 많이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젝트이다.

네이선은 ‘공동체로 가는 출구’(Exit to Community)라고 알려진 새로운 금융 전략을 개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보통 전통적인 스타트업의 성공한 창립자들은 회사를 월가(Wall Street)나 IT 대기업에 매도하지 않을 수 없다. ‘공동체로 가는 출구’는 실질적인 대안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더 나아가길 원하거나 더 많은 돈을 마련하기를 원하는 기업가들이 그들의 회사를 지역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매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사업을 더욱 목적 지향적이고 사회 지향적이며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으로 유지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슈나이더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커뮤니티 내의 거버넌스 상태를 보고 실망한 바 있는데, 그는 그 상태를 참여 거버넌스가 형식적인 형태로라도 거의 없는, ‘봉건제를 내포한’ 체제라고 부른다. 그는 이런 상황의 개선을 돕기 위해 디지털 커뮤니티들에 기본적인 ‘거버넌스 도구모음’을 제공하는 <커뮤니티룰>(CommunityRule)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통제가 중앙에 집중되고 설립자들이 ‘영원한 독재자들’처럼 행동하는 함정을 피하는 한편 자치를 위한 더 공정하고, 더욱 계몽된 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돕자는 것이 그 취지이다.

 




바이든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려 한다

 


  • 저자  : Jimmy Dore
  • 원문 :  “Biden Won’t Solve Your Problems, But Will ‘Understand Your Problems’(2020. 12. 10)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Jimmy Dore Show>의 한 에피소드(유튜브 동영상)의 내용을 우리말로 정리한 것이다. 내용 정리이지만 읽기 좋도록 간략한 자막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지미 도어는 미국의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자 정치평론가이다. 그는 현재 하원이 ‘모두를 위한 의료보험’(Medicare for All)을 채택하는 투표를 하도록 밀어붙이는 ‘#Force the Vote’ 운동을 하고 있으며 미국 민중당(People’s Party)―정확하게는 ‘민중당 건설운동’(Movement for a People’s Party)―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조 바이든이 꼭 뉴트 깅리치(Newt Gingrich)와 밥 돌(Bob Dole)처럼 말하며 다시 그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파이며 보수적인 공화당원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아는지 모르겠군요. 제가 그에게 투표하지 않은 이유가 이것인데 말입니다. 저는 전쟁장사꾼인 월가의 꼭두각시에게 투표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은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계속 그에게 표를 던지더라도 저는 하지 않겠습니다.

[바이든의 트윗을 보여주며] 조 바이든이 이렇게 트윗을 했군요.
<아버지가 말씀하시곤 했다. “아들아, 이 아버지는 정부가 내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단다. 아버지는 내 문제를 이해해주기를 기대한단다.”>
저는 정부가 제 문제를 이해하든 못하든 전혀 신경쓰지 않습니다. 저는 정부가 제 문제를 해결해주길 원합니다. 우리에게 정부가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죠. 우리는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무리의 사람들로 모입니다. 월가 사람들도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수조 달러를 얻어내려고 정부에게 가잖아요.

당신이 만일 누군가의 사업을 봉쇄하고 그래서 아무도 돈을 벌 수 없다면 그것은 바로 당신이 초래한 문제입니다. 당신이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알지 못했다면 대통령의 정책 제안자가 되려고 출마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놀랍군요. 다음 문단을 보세요. 그가 이렇게 썼군요.
<사람들은 구호금(handout)을 기대하지 않는다. 도움을 필요로 할 뿐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잘못 때문에 곤경에 빠진 것이 아니며 우리는 그들을 이해해 줄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당신의 이해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경기부양지원금(stimulus check)이 필요하고 모두를 위한 의료보험이 필요하며 보편적인 기본소득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당신은 죽기 직전의 정신이 나간 노인네이기 때문에 이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기업화된 미디어에는 정신 나간 자를, 그리고 당신을 규탄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봐요, 조, 정부가 당신에게서 도둑질하리라 예상하라고 당신 아버지가 당신에게 말해줬나요? 팬데믹 시기동안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나니 말이죠. 재난지원금 말이에요. 이봐요, 월가에 돈을 주기위해 우리가 매년 세금을 낸다고 당신 아버지가 당신에게 말해줬나요? 오늘날 우리 세금이 그리로 가니 말이죠. 당신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해줬나요, 조?

우파가 이것에 ‘국민은 구호금(handout)을 기대하지 않는다’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있는 것이 보입니까. 당신이 바로 전 세계 최고 부자들에게 5조 달러를 건네주었죠, 조. 그런데도 당신은 여전히 레이건의 용어인 ‘구호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군요.

[기사 헤드라인을 보여주며]
<취업난은 진정한 국가적 위기이다. 미국을 지배하는 무능한 범죄자들이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을 끔찍한 금융 절벽으로 밀어버리려고 하고 있다.>
이것은 <인터셉트>지에 실린 내용입니다. 미국을 지배하는 무능한 범죄자들이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을 벼랑으로 내몰고 있다는군요.

[CNN 웹페이지의 한 사진을 보여주며]
“텍사스에서는 음식을 가지러 가는 수천대의 자동차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저런 헤드라인을 보면 저는 조 바이든의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관해서는 신경을 끕니다.

[신문기사를 보여주며]
<“이렇게 계속 할 수는 없어요”―소상공인들이 포기하고 있다>
<의회는 코로나재난지원금 문제를 놓고 교착상태에 빠져 있지만 펜타곤에 7천4백억 달러의 자금을 대기 위해서는 한데 뭉쳤다>
이런 식이죠, 그리고 진보파는 그것에 반대투표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민주당원 37명만 반대투표를 했죠. 결과적으로 찬성투표한 진보파 의원들이 63명인 셈입니다.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조 바이든은 “도움이 곧 갈 것이다”에서 사흘 만에 “미국인들은 도움을 원치 않는다”로 바뀌었다.>
사흘 만이라···. 그래서 저는 1월까지 조 바이든이 바이든다운 짓을 다 한 후 원점으로 돌아올 것이고 사람들이 다시 트럼프에게 투표를 하겠다고 말하기 시작할 것이라 추측하는 중입니다.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짐 얼(Jim Earl)은 이렇게 트윗을 했네요.
<당신의 아버지는 멍청이었군요. 정부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의 노력 없이 이해만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요? 그리고 ‘복지여왕’과 함께 모욕적인 상투어를 담는 쓰레기통으로 들어갔어야 하는 구호금이라는 단어를 당신이 지금 꺼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멋진 조지 칼린(George Carlin)의 말을 빌자면요, “아빠가 말씀하셨지, 아빠를 욕하라고.”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사람들은 바이든의 취임에 찬성하고 소득공제를 받는 경우 말고는, 구호금을 바라지 않는다.>
누가 구호금을 바랄까요? 바로 조 바이든이죠!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조 바이든의 (인수위)팀은 취임식을 치르기 위해 개인들로부터는 50만 달러까지, 기업들로부터는 100만 달러까지 기부금을 받을 것이다.>
제 아버지가 항상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구호금을 원하니? 정계에 들어가거라.” 그래서 그들이 돈이 필요할 때 우리에게 돈을 조금씩 내달라고 말하는군요. 이것 말 그대로 그들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조 바이든입니다.

[바이든의 트윗을 보여주며]
<이렇게 합시다.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 패배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인수를 미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취임식에 자금을 대야 해서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바이든-해리스 인수위를 위해 돈을 기부해주시겠어요?”>
와우! ‘당신들은 도움이 필요할 때 무엇을 나눠주고 싶어요?’라고 바이든의 아빠가 말하는 군요. 놀랍지 않나요?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한때 아돌프 리드 주니어(Adolf Reed Jr.)는 자유주의자들이 더 이상 정치를 진정으로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통받는 것을 목격하는 것’을 믿을 뿐이다. 나도 그 생각을 많이 한다.>
그들은 ‘고통받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 샴페인과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군요.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이것 좀 보세요.
<내 새 셔츠가 도착했어요!>[트윗에는 이 셔츠에 인쇄된 사진이 첨부되어 있는데, 「바그다드 위로 폭탄을」이라는 노래가 실린 아웃캐스트(Outkast)의 앨범 사진과 똑같이 연출해서 찍은 바이든과 카말라의 사진이다.]
조 바이든과 카말라 해리스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는, 전쟁기업의 도구들인 이들이 악당처럼 굴려고 하네요. 그녀는 평범한 사람들을 감옥에 보냈고 그는 파산한 사람들을 쥐어짜면서 규칙적으로 수감자들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켰습니다. 이것이 이 사람들의 실체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보이는지 아십니까? 비밀경찰들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죠.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대대적으로 상품을 팔아보려는 헛된 생각에 이들이 ‘바그다드 위로 폭탄을’이라는 노래가 실린 앨범 사진에 한 점의 아이러니도 없이 등장한 것은 대단히 재밌다.>
와우!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이것은 트럼프 지지자들의 빨간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모자를 흉내 낸 파란색 ‘마가’ 모자군요. 사람들이 파란색 모자를 썼습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여러분들은 단지 트럼프를 해고하고 백악관에서 그를 쫓아냄으로써 이미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바이든의 파란색 모자를 쓰세요. 바이든이 트럼프를 감옥에 보낼 것이기 때문에 이미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모자는 아마존에서 판매중입니다.>
와우! 조 바이든에게 맞도록 정해진 훌륭한 기준입니다. 축하합니다, 승리하셨습니다. 이미 승리했으니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군요.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이 말은 매우 중요하다. 조 바이든이 자신의 행정부와 우리의 정치에 상호존중•존경•이해에 대한 그의 타고난 감각을 주입할 수 있다면 그는 이 나라를 위해 무언가 훌륭한 것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액슬로드(David Axelrod)의 트윗입니다. 맙소사, 그가 열정에 대해 말하고 있군요. 그가 그 동안 해온 나쁜 짓만큼이나 멋지게 트윗을 한다면, 또 한명의 백만장자인 놈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것은 겨우 그 트윗뿐일 것입니다.

[여기서 스탭이 끼어들어 한 마디 한다]
이 말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데, 입에 발린 말이기 때문에 중요하죠.

[다시 지미 도어]
맞아요.
이봐요, 조 바이든에게 투표한, 잘 속는 여러분들, 축하합니다. 저는 바이든 안 찍었습니다.

 

[덧붙임 :  미국 역사 속의 ‘민중당’―정백수] 

미국에 이미 1890년대에 ‘민중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정당이 있었다. <농민연합>(Farmers’ Alliance)에 뿌리를 둔 민중당(People’s Party, 혹은 Populist Party)이 1892년에 창립되어 당시의 금융세력에 맞서 싸웠다. 이 민중당은 189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과 함께 민주당의 브라이언(William Jenning Bryan)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브라이언이 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붕괴되었다. 다소 넓게 말하자면, 민중 자신의 힘보다도 대통령(및 그에 딸린 제도)의 힘을 더 믿었을 때, 아니 자신의 힘을 정당정치라는 제도에 맡겼을 때의 문제점, 활력이 권력으로 전환되었을 때의 문제점이 드러난 것이 아닐까 싶다.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 민중당이 이런 문제점을 얼마나 잘 극복할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공화당과 민주당의 ‘민낯’이 다 드러난 시기이니만큼 우려만이 아니라 기대도 섞인 시선으로 이 운동을 지켜보지 않을 수 없다.

엘런 브라운(Ellen Brown)에 따르면 1차 대전 전 미국에는 두 경제 세력이 미국의 지배를 놓고 경합하고 있었다. 하나는 월가에 기반을 두는 세력이다. 당시 월가에서 중요한 주소가 ‘월가 23’번지였는데 이는 ‘House of Morgan’으로 알려져 있다. J. P. Morgan은 강력한 영국 은행업 세력의 에이전트였다. 다른 하나는 필라델피아에 기반을 둔 세력으로서 이들은 벤저민 프랭클린에게로 소급하며 산업화와 토목공사에 중점을 두었다. 필라델피아파는 국가가 화폐를 관장하는, 펜실베이니아 지역에 수립된 시스템을 선호했다. 남북 전쟁 당시 링컨 대통령은 정부가 화폐를 발행하는 시스템으로 되돌아갔는데, 그는 암살되었고 은행가들이 화폐기계의 통제를 다시 요구했다. 월가파의 “조용한 쿠데타”는 1913년에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의 통과에서 정점에 달했다. 이 법의 통과는 1896년 대선 후보였던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을 비롯한 여러 “부주의한”(unwary) 의원들로 하여금 민간기업인 ‘Federal Reserve’(연방 준비제도, 연방준비은행)를 ‘연방적’ 성격을 가진 기관으로 잘못 알게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상 Ellen Brown, Web of Debt: The Shocking Truth About Our Money System and How We Can Break Free, Third Millennium Press, 2010)

민중당이 민주당과 함께 대통령 후보로 지명한 브라이언은 민중주의적 지향을 가진 민주당원이었다. 당시에는 월가의 금융세력과 공화당이 한 패였고, 그 반대편에 민주당이 있었으며, 민중당은 민주당과의 통합 대선후보지명을 주장하는 통합파(fusionists)와 독자성을 주장하는 제3당파(mid-roaders)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120여년이 지난 지금의 구도를 보면 민주당이 월가의 금융세력과 ‘공화당보다 더’ 한패가 되었으니(이는 오바마 때 그 정점에 이르렀으며 바이든은 그 연장선 위에 있다) 결국 월가가 공화당, 민주당을 ‘다 먹은’ 최고의 패자(霸者)가 된 셈이다. (지금 미국 민주당 내에 ‘진보파’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미국 민중을 위해서 싸우기보다 민중의 에너지를 저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이 탄생하고 있는 민중당은 단순히 양당 체제에 새 당 하나(그것이 아무리 진보적일지라도)를 추가시키는 식이 아니라, 민중들 자신들의 연합(coalition)이라는 형태로 미국 민중이 한데 모여 양당체제에 대한 실체적·삶정치적 대안으로서 구축되었으면 한다.

(이 외에 1971년에도 여러 개인들과 소정당들이 모여서 만든 민중당(People’s Party)이 있었으나 1972년과 1976년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낸 이후 느슨한 연합으로 변한 후 사라졌다.)




커먼즈의 비가시성

 


  • 저자  : Peter Linebaugh
  • 원문 : “The Invisibility of the Commons”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피터 라인보의 저서 『섯거라, 도둑아!』(Stop, Thief!, 2014)의 15장 「커먼즈의 비가시성」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에서 라인보는 세 개의 사례를 소개한다. 하나는 1930년대의 것이고, 또 하나는 1790년대의 것이며 마지막 하나는 1940년대의 것이다.

첫째 사례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에쎄이 「마라케시」(“Marrakech”, 1939)이다. (마라케시는 모로코 중앙부의 도시이다.) 갈색 피부를 가진 사람, ‘천한’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 그리고 여성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 이 글의 주요한 논지이다. 가령 장작단을 지고 앞을 지나가는 나이든 여성들의 대열을 보면 오웰 자신의 눈에는 장작단만 지나가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생산물만을 보는 제국주의자의 눈이라고 라인보가 정리해준다. (이렇게 정리해주기 이전에 라인보는 이 글에서 오웰이 인종주의와 비가시성을 주제로 다룬다고 말해놓은 바 있고, 여기에 여성혐오도 추가해야 한다고 덧붙인 바 있다.) 그렇다면 오웰은 제국주의 국가에 속하고 백인에 속하며 남성에 속한 자신의 ‘보지 못하는’ 눈을 스스로 고발한 셈이니 라인보는 오웰의 솔직함을 칭찬하고 말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는다. 그에게 빠져있는 것을 지적한다.

그런데 이 장작은 어디서 오는가? 오웰은 묻지 않는다. 무슨 권리로, 어떤 관습에 의해서 장작을 해오는가? 어떤 투쟁들이 이 관행을 보존했는가?

이어서 라인보는 마그나 카르타의 7장에 나오는 ‘상부한 여성의 에스토버스’(왕이 상부한 여성들에게 부여한, 나무에 대한 권리)((‘에스토버스’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478 참조.))를 언급하고 이는 수 세기에 걸친 투쟁으로 지켜낸 관습임을 지적한다. 오웰은 아마도 비가시성이 가장 높을, 갈색 피부에 육체노동을 하며 나이든 노파를 만난 에피소드를 말한다.

어느 날 키가 120센티가 넘지 않을 여성이 짐을 잔뜩 지고 내 앞을 기다시피해서 지나갔다. 나는 그녀를 세우고는 5수짜리 동전(1 파딩을 조금 넘는다)을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새된 울부짖음으로 대답했다. 고마움의 표현도 들어있었지만 주로 놀라움이었다. 내 생각에 그녀의 관점에서는 내가 그녀의 눈길을 끎으로써 거의 자연법칙을 위반하는 것 같았으리라. 그녀는 노파로서의, 다시 말해서 짐을 나르는 짐승으로서의 그녀의 지위를 받아들였다.

라인보는 오웰이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음을 지적한다. ‘고마움’도 들어있었다는 말이 얼마나 제국주의적인가도 지적한다. 라인보가 보기에 오웰은 인종주의, 여성혐오를 자신의 서술에 투사하지만, 커머너들과 대화할 기회를 갖지는 않는다. 나무는 어디서 해오냐고, 그 나무로 어떤 불을 피우냐고, 그 불이 어떤 어린아이나 나이든 부모를 따뜻하게 하냐고 묻지 않는다. 왜 오웰은 그녀와 대화하지 않은 것일까?라고 라인보는 묻는다.

라인보는 이 에피소드가 보여주는 것이 “제국주의 체제에서 써발턴 역할을 하는 다수에게 특징적인 태도, 자신은 원래 기본적으로 짐승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민중과 대화하기를 거부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고 덧붙이고, 마지막으로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눈을 가지고 볼 때에는(when we see with, not through, the eye) 거짓을 믿게 마련이다.”

둘째 사례는 워즈워스의 자서전적 장시 『서곡』(Prelude) 9권의 한 대목이다. (이 시는 시인의 정신이 혁명과 반혁명의 와중에서 성장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이 대목은 1792년 워즈워스가 프랑스의 보쀠(Michel de Beaupuy)라는 공화주의자를 방문했을 때의 일을 제시한다. 보쀠는 당시 블롸(Blois) 지역의 정치논의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 논의의 핵심은 제한된 제헌군주제에서 급진적인 공화주의 및 왕정의 몰락으로의 이행과 관련된 것이었다. (보쀠는 공화주의를 지지했으며 나중에 혁명을 방어하는 전투에서 죽어 영웅이 된다.)

라인보는 이 대목을 직접 인용한다. 여기 원문 그대로 소개하지만 옮기지는 않고 내용만 설명하도록 하겠다.

And when we chanced
One day to meet a hunger-bitten girl,
Who crept along fitting her languid self
Unto a heifer’s motion—by a cord
Tied to her arm, and picking thus from the lane
Its sustenance, while the girl with her two hands
Was busy knitting in a heartless mood
Of solitude—and at the sight my friend
In agitation said, ‘Tis against that
Which we are fighting! I with him believed
Devoutly that a spirit was abroad
Which could not be withstood; that poverty,
At least like this, would in a little time
Be found no more; that we should see the earth
Unthwarted in her wish to recompense
The industrious and the lowly child of toil
(All institutes for ever blotted out
That legalized exclusion, empty pomp
Abolished, sensual state and cruel power,
Whether by edict of the one or few);
And finally, as sum and crown of all,
Should see the people having a strong hand
In making their own laws. whence better days
To all mankind.

[단어 및 어구 설명]

    • chance + to부정사 : 우연히 ~하다 (= happen + to부정사)
    • hunger-bitten : bitten by hunger
    • languid : (움직임이) 힘없고 느릿느릿한
    • fitting her languid self Unto a heifer’s motion : fit A (un)to B
    • heifer : 어린 암소
    • its sustenance : ‘자기(어린 암소)가 먹을 것’
    • heartless : 낙담한, 풀이 죽은
    • in a little time : ‘시간이 조금 지나면’
    • withstand A : A의 끌림, 영향력, 설득력 등을 뿌리치다 [이 의미로는 주로 부정문으로 쓰인다.]
    • sensual : 세속적인, 물질적인
    • edict : 칙령, 포고령
    • as sum and crown of all, : 여기서 ‘sum’은 ‘최종결과’라는 의미고 ‘crown’은 어떤 과정의 정점을 의미한다.
    • whence : 그 원인으로 → 그 결과(as a result)

 

워즈워스를 포함한 젊은이들은 너도밤나무 숲을 말을 타고 지나던 중 어떤 굶주린 소녀를 만난다. 이 소녀는, 소녀의 팔에 줄로 묶인 상태에서 길에서 먹을 것을 집어먹고 있는 어린 암소의 몸짓에 맞추어 느릿느릿 지나가면서, 의기소침한 상태에서 바쁘게 뜨개질을 하고 있다. 이 모습을 보고 격동한 보쀠는 ‘바로 저런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싸우는 것이야’(‘Tis against that/ Which we are fighting!)라고 말하며, 이에 워즈워스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어떤 [혁명의] 기운이 퍼져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그리고 이런 가난은 이제 곧 볼 수 없게 될 것이며 대지가 노역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주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모든 억압적인 제도가 폐지될 것으로 믿으며 심지어 민중이 자신들의 법을 만드는 데 강한 힘을 발휘하여 인류에게 더 나은 날들이 오리라고 믿는다.

이렇듯 암소지기 소녀의 굶은 모습에서 시작한 워즈워스는 가난의 폐지와 민중의 자치정부의 달성에 대한 이상주의적 희망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오웰의 경우처럼 이 젊은 혁명가들도 그 소녀에게 말을 걸지 않음을 라인보는 지적한다. 동정심에 들떠서 거창한 결론들에 이를 뿐인 것이다. 라인보는 이렇게 쓴다.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 모두 땅에 대한 관습적인 권리를 공격했으며 이는 커머너들이라는 하나의 계급의 자원을 다른 계급, 즉 사유자들이 대대적으로 훔쳤음을 나타낸다. 워즈워스는 그 소녀를 가난하다고만 생각하지 커머너로 보지는 않는다. 그는 의존상태를 보는 것이다. 그 소녀와 대화를 했더라면 워즈워스는 그녀의 자립성을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왜 그러지 않았을까?

라인보가 지적하는 것은 부르주아 혁명이 왕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긍정적 측면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토지와 커머닝 관습의 대대적인 강탈이라는 부정적인 측면도 가진다는 점이다. 당시에 퍼진 ‘정신’에는 바로 이런 맹점이 들어있다. 그래서 라인보는 묻는다. 보쀠가 워즈워스한테 ‘바로 저런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싸우는 것이야’라고 말했을 때 ‘저런 일’은 무엇인가? 굶주림? 기계와 경쟁하기 위해서 맹렬히 뜨개질하는 것? 토지와 오래된 관계를 맺고 있는 커머너? 할스베리(Halsbury)의 『영국의 법』(Laws of England)에 따르면 “커머너가 공유지에서 가지고 있는 몫은 법적 표현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가축의 입으로 풀을 먹는 것이다.” 워즈워스는 바로 이 점을 탐구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제임스(C.L.R. James)의 사례이다. 그의 『변증법에 관한 단상』(Notes on Dialectics)은 1948년 디트로이트의 동지들에게 큰 의미를 가졌었다. 『단상』은 레닌과 트로츠끼가 시작한 것, 즉 헤겔의 변증법(특히 대립물의 통일)의 노동운동에의 적용을 완성하고자 한 저작이다. 노동운동은 역사의 매 단계에서 자신이 극복할 대립물을 만난다는 것이 그 핵심 취지이다. 『단상』은 유럽, 미국 등지에서 2차 대전 후에 발전한 맑스주의 혁명가들의 소그룹들에게 큰 중요성을 가졌으며, 1955년-68년 시기에 제3세계 해방운동과 제1세계 노동운동의 반란을 환영하는 저서였다. 그런데 여기에도 맹점이 있다. 1981년에 『단상』을 공부한 라이보가 보기에 이 책에서 해방적인 것은 164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의 노동운동의 개념의 통일성이었다. 제임스는 이 통일성을 부르주아 실증주의의 단계론적 범주들(봉건주의-자본주의-사회주의)에 대립시켜 파악했다. 이러한 강력한 사고에도 불구하고 커먼즈는 제임스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네바다의 레노에 주거지를 확립하기 위해 가 있을 때(주거지 확립의 목적은 이혼을 위한 것이었다) 레노 근처의 목장에서 지냈다. 이 목장은 원주민 부족에게 속해 있었으며 상업화되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잡역부로 일했는데, 그의 동료 노동자들은 선원들, 카우보이들, 필리핀인들, 멕시코인들, 중국인들, 중서부에서 온 유럽 출신의 백인들이었다. 그는 토착민들보다는 이들에게 끌렸다. 그가 본 중에 가장 잘 생긴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달리 이곳의 토착민들은 땅딸막했다. 그는 이 모든 사람들과 많이 사귀지는 않았다. 1948년 8월에서 11월까지 게링(Guerin)의 『프랑스 대혁명』을 번역했고 『단상』을 집필했다. 목장은 피라미드 호수(Pyramid Lake) 옆에 있었다.

그가 집필하고 있을 때 그의 주변에서는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전쟁, 파이우트족(the Paiutes)이 자신들의 공유지를 되찾기 위해 벌이는 게릴라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네바 다대학교의 사회역사가인 둬킨(Denis Dworkin)은 이렇게 썼다.

맑스주의자이자 대영제국의 백성으로서 제임스가 파이우트족을 그 자신이 속한 것과 같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라는 세계사적 과정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확실히 타당했다. 그러나 목장이 원주민보호구역에 있었다는 점을 그가 인정한다는 점은 제쳐놓고, 제임스가 토지분쟁은 말할 것도 없고 그곳의 주민들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증거가 한 조각도 없다.

이어서 라인보는 파이우트족의 삶을 그린 책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이곳의 토지가 종획된 역사(보호구역은 그 결과이다)를 이런저런 책들을 들며 말해준다. 그러는 가운데 일자리를 찾는 백인노동자와 먹을 것을 찾는 원주민의 차이를 짚어주기도 한다. “일자리를 찾는 사람은 사장에게서만 임금을 발견하지만, 파이우트족은 보존되는 한에서만 자원을 발견한다.”

제임스가 네바다를 떠난 후 1년 뒤에 뉴욕시민 작가인 리블링(A.J. Liebling)이 같은 목적으로 피라미드 호수 목장에 오는데, 음식 및 스포츠 담당 작가인 리블링은 제임스와 달리 파이우트족의 분쟁에 완전히 빠져들어서 여러 요구들의 합법성과 파이우트족과 관련된 제반 사항들에 관심을 갖고 뉴욕으로 돌아온다. 그는 파이우트족과 “미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는 원주민 전쟁”에 대한 일련의 글들을 써서 1955년에 출판한다.

파이우트족의 주된 적(敵)인 맥캐런(Pat McCarran) 상원의원은 조 매카시(Joe McCarthy)의 측근이었으며 1952년의 맥캐런법―코뮤니스트들, 체제전복자들, 동반자들[코뮤니즘에 공감하는 비코뮤니스트들]]이 미국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 법―의 후원자였다.

1985년에 미국대법원은 자신들이 천년 동안 살아온 토지에 대한 파이우트족의 모든 권리주장을 부인하는 판결을 내린다.

제임스는 1950년의 국가안보법(Internal Security Act)으로 엘리스 아일랜드에 투옥되었다. 그의 항소는 그가 코뮤니스트라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라인보는 제임스는 코뮤니스트가 아니라고 정중하게 바로잡는다. 그가 맑스주의 혁명가이기는 하지만, 코뮤니스트는 아니라는 말이다. 양자의 차이는 그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도 모르고 판사도 몰랐다고 하면서.

맥캐런 상원의원은 원주민 커먼즈를 파괴하고자 했으며 코뮤니스트들이 미국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했다. 제임스는 자신이 공산당의 당원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코뮤니스트가 아니라고 불만을 표할지 모르지만, 그는 분명 자본주의의 반대자였으며 노동자혁명의 옹호자였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파이우트족의 삶의 방식에 내재한 커머닝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 투쟁의 한가운데에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라인보는 이 세 사례를 한데 모아 정리한다. 그는 다른 면에서는 날카로운 이 세 사람의 눈을 방해한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 라인보는, 자신은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진정한 변증법인 대화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만 제시할 수 있다고 한다. [라인보 자신은 그런 말을 안 했지만, 정리자가 보기에는 여기서 헤겔의 변증법이 바흐친의 ‘대화적 상상력’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그러면 또한 물어야 할 것은 그들이 못 본 커먼즈를 우리는 어떻게 볼 수 있는가이다. 많은 연구가 숲의 나무를 땔감으로 취할 권리를 발굴해냈고 이것이 우리를 이른바 커머닝의 한 형태로서의 ‘나무 절도’에 민감하게 만든다. 토착민 커먼즈는 이제 국제법의 주제가 되었다.

[땔감 채취, 먹을 것 채취, 땅]을 커머닝으로 보는 것이 무슨 이득을 가져오는가? 강탈의 보편화(universality of expropriation)에서 그 답이 나오며, 이 범죄들을 바로잡는 방법은, 상실되고 박탈된 것에 대한 배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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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자 논평]

라인보는 여기서 글을 맺지만, 우리는 “강탈의 보편화에서 그 답이 나”온다는 말을 (그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라도) 좀더 숙고해야 할 듯하다. 우리가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자본주의적 관계는 지구 전역에서 일어나는 커먼즈의 강탈(사유화)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이른바 자본의 시초축적 단계나 노동의 자본에의 ‘형식적 포섭’의 시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 포섭’의 시기에도, 즉 지금도 계속된다. 자본은 끊임없이 공통적인 것을 (예전에는 주로 이윤의 형태로, 얼만 전부터는 주로 자산소득의 형태로) 사유화하여 자신을 불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너무나 익숙한 현실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를 세상의 법칙인 양 당연히 여기며 더 나아가 선망하고 욕망한다.

자본주의적 관계가 그 자체에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를 포함한다는 점을 정밀하게 분석한 사람은 역시 맑스이다. 맑스는 『자본론』 3권 15장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세 개의 주요한 사실”을 제시한다. 그 첫째와 둘째는 다음과 같다.

(1) 소수인의 수중에 생산수단이 집중된다. 이를 통하여 생산수단은 직접적 노동자의 소유로서 나타나지 않게 되며, 그 반대로 사회적 생산능력으로 전환된다. 비록 생산수단은 처음에는 자본가의 사유 재산이긴 하지만 말이다. 자본가들은 부르주아 사회의 수탁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수탁의 모든 과실을 혼자 취득한다.
(2) 노동 자체가 사회적 노동으로 조직된다. 협력, 분업, 노동과 자연과학의 결합을 통하여.
 이 두 가지 점에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사적 소유와 사적 노동 모두를―비록 대립적인 형태로이긴 하지만―지양한다.

(1)은 비록 자본가의 사유재산이 되었기는 하지만 생산수단이 사회적 생산능력으로 전환된 측면을 지칭하며, (2)는 노동이 비록 자본가의 처분에 맡겨진 것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노동으로 조직된 것을 지칭한다. “자본가는 부르주아 사회의 수탁자인데도 불구하고 이 수탁의 모든 과실을 혼자 취득한다”―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생산이 사회적이므로 그 과실은 잠재적으로는(virtually) 사회 전체의 것, 즉 공통적인 것인데 실제적으로는(actually) 자본가가 (이윤의 형태로) 사유화한다는 말이다. (‘과실’은 생산된 총 가치에서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과 투자된 자본의 재생산 비용은 뺀 것이다.) “사적 소유와 사적 노동 모두를”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과실은 잠재적으로는 자본가의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노동자의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사회 전체의 것이다. 이 잠재적인 측면에 바로 커먼즈가 숨어 있다. 그런데 자본가는 언제나, 혹은 상황이 안 좋아지면 과실(이윤)을 증가시키기 위해 임금을 삭감하여 그 일부를 자신의 이윤으로 취하려고 하고, 노동자들은 당연히 노조를 만드는 등의 방식으로 방어하려고 한다. 고정된 양의 과실을 놓고 이윤과 임금이 자신이 몫을 더 크게 하려는 싸움이 벌어진다. 여기서 커먼즈는 보이지 않는다.  자본가의 사유재산 증식 욕심이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침탈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약자인 노동자의 입장에서 방어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커먼즈가 숨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자본이 판을 그렇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공장을 떠나 생산과정 바깥에서 공통적인 것을 착취하는 금융자본(월가가 대표하는 유형의 자본)이 자본의 주된 세력이 되었을 때 그 변증법적 대립의 상대를 잃은 노동자는 더욱더 힘이 약화된다. 노동자의 힘의 약화는 그 자체로 공통적인 것의 약화이다. 인간의 생산능력이야말로 진정한 부의 핵심적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공통적인 것을 침탈하고 훼손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는 지금 인류를 강타하고 있는 팬데믹이 (특히 자본주의의 발달 정도가 높은 만큼이나 공통적인 것의 침탈 정도가 높은 미국의 경우에) 잘 보여주고 있으며, 앞으로 점점 더 악화될 기후위기는 이를 더욱더 높은 정도로 보여줄 것이다. 이제는 삶의 번성을 위해서는 물론이요 다가오는 위기를 잘 극복하기 위해서도 커먼즈(공통적인 것)의 가시화와 번성이 몹시 필요하다. [정백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