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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에서 메트로폴리스로, 그리고 다시 공장으로


  • 저자  :  Antonio Negri
  • 원문 :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and Back Again” in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의 마지막 장인 17장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and Back Again”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을 구성하는 글들 가운데 이미 블로그에 올린 또마셀로(Federico Tomasello)와의 세 번의 대담을 포함한 이 모음집의 다른 글들은 1996년부터 2015년까지 여기저기 실렸던 것들을 영어로 옮긴 것이지만, 이 17장만은 네그리가 이 모음집을 위해 새로 쓴 글을 영어로 옮긴 것이다. 대담을 정리한 글들을 올릴 때에는 이탈리아어 원문을 구할 수가 있어서 (영어본의 애매한 부분을 이탈리아어본으로 확인하는 작업과 아울러) 어떤 용어의 원문을 병기할 때 이탈리아어를 병기했으나(이탈리아어와 영어 둘 다 병기하는 경우에는 이탈리아어 먼저), 이 글은 이탈리아어 원문을 구할 수가 없어서 원문을 병기할 때에는 영어를 병기한다. 이로써 이 책의 일부 내용을 정리하는 일단의 작업이 완료된다. 책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도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내용을 정리해 올리겠지만, 미리 장담할 수는 없을 듯하다.

공장에서의 잉여가치 추출에서 메트로폴리스에서의 잉여가치 추출로의 이행은 앞의 글들에서 이미 다룬 주제이다. 이 글에서는 메트로폴리스에서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는 이행을 다룬다. 이 이행이 의미하는 바와 관련하여 여러 물음이 가능하다. 생산주체 즉 산 노동의 담지자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 노동자는 어떤 존재가 된 것인가? 착취받는 메트로폴리스 노동자의 특징은 무엇이며 이 노동자는 어떤 점에서 공장노동자와 구분되는가? 메트로폴리스의 공통적인 것(the metropolitan common)은 새로운 형태의 착취와 새로운 유형의 프롤레타리아(인지노동자)의 함입을 허용하는가? 마지막 질문에서 시작해보자.

도시를 구축하고 정의하는 데 공통적인 것이 항상 존재했다는 점은 명백하다. 도시를 부르주아지의 탄생지이자 근대가 개념화되는 중심지로 보는 막스 베버의 도시 정의에서도 그 개념은 특이성들의 협동에, 즉 공통적인 것에 열려있었다. 도시는 탄생될 때부터 ‘연합한 생산하는 다중’의 표현이었다. 사적 소유나 공적 소유가 차지하지 못한 공간들에서만이 아니라 공존의 장소들을 가로지르고 도시의 정치상황에 따라 그 장소들을 채우거나 비우면서 그러했다. 그렇다면 공통적인 것이 도시의 제도적 체계에서 정치적인 것의 다른 얼굴로서 제시된다는 점이 분명하다. 정치적인 것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를 이동할 때 공통적인 것은 이 이동의 존재론적 토대를 구성한다. 여기서 ‘존재론적’이란 말은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변화하며 움직이는 현실을 의미한다. 공통적인 것의 고고학은 도시의 역사를 통과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계보학은 도시의 공통적인 것, 더 정확하게는 공통적인 것의 메트로폴리스(the metropolis of the common)의 투사(projection)에서만 획득될 수 있다.

지난 50년 동안 일어난 거대한 변혁에서 나에게 명확하게 보이는 첫째 점은 메트로폴리스의 삶의 양태가 이전 세대들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시간이 복수화(複數化)되었고 이전의 모든 관습과 규칙성이 파열되었으며 삶은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모든 파열의 순간에도 대체·부과·보완을 통해 도시의 움직임의 총체에 새로운 결합이 일어난다. 유동적이고 통제·조형 가능하며 총체화하는 결합이다. 예를 들어 노동일은 더 이상 8시간이 아니라 24시간이다. 이 24시간을 구성하는 모든 구간들은 증가할 수도 있고 감소할 수도 있다. 시간의 이러한 새로운 밀도는 비동기화(desynchronisation)를 통해 산출되며 여기서 발명하는 힘(능력)이 바로 메트로폴리스의 생산 주기를 재구성한다. 변한 것은 공장 안의 시간표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형태들의 시간표이며, 이는 전적으로 새로운 귀결을 낳는다. 가령 가사노동자들은 완전히 불연속적인 일정을 가진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 불연속성은 사회에 실질적으로 필요한 요소로서 등장한 이후에 재구성되며 사회적 대화의 필요와 삶정치적 비용의 계산이 고려되게 된다. 

공장이 된 순간부터 메트로폴리스는 ‘기계적 구조’(‘machinic structure’)에 의해 조직되게 되었다. 이 구조가 메트로폴리스의 몸체를, ‘도시적 총체’(urban whole)를 구성한다. 이 ‘총체’에 대한 인식을 둘러싸고 많은 환상들이 생겨났다. 그것은 때로는 기계적·포괄적·동심원적 총체로 정의되었고, 다른 경우에는 지적이고 확산된 신체적 총체로서 정의되었다. 이 정의들은 과학적이기는커녕, 도시의 통치를 위한 도구들로서 탄생했다. 이것들은 도시의 기술관료적 관리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메트로폴리스를 사이버 도시로서 그려낸다. 그러나 이것은 재주를 부리는 것일 뿐이다. 비판적 능력이 출중한 저자들(특히 애덤 그린필드Adam Greenfield)은 이런 식으로 도시를 보는 것이 일종의 완고한 논리적 실증주의임을 보여주었다. 이 각도에서 보면 일종의 산술적 (그리고 알고리즘적) 분석학이 복잡성을 이해하는 도구로 사용되게 되고 도시의 복수적이고 다양한 현실에 위로부터 부과되게 된다. 이것은 적절한 도구가 아니다. 메트로폴리스가 다양한 행동과 행위의 집합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적인 행동과 공적인 개입을 가로지르는 ‘공통적인 것’(이는 보이지 않지만 강력하다)이 그 안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공통적인 것의 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불변적 동반자이다. 그것은 체제 속에서 신비화되어 있고 사적으로 전유되며 공적인 것에 의해 소유되고 ‘일반 이익’으로서 제시되고 있지만, 사실상 공통적인 것은 파괴적일 수도 있고 건설적인 수도 있는 힘의 집단적 경험으로서 제시된다. 도시의 차원에서 공통적인 것의 욕망은 ‘좋은 삶’(good life)에 기여할 수 있는 공간들의 추구로서 탄생한다.

숨 막힐 정도의 복잡성 때문에 도시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집단적 행동을 통해서 말고는 즉 ‘공통적인 것의 반란’을 통해서 말고는 공동의 착취 상태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자립을 추구하기 위해서, 혹은 (더 나쁜 것이지만) 단지 소비를 제한하기 위해서 복잡성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는 없다. 복잡성을 재조직화하여 ‘공통적인 것’으로 되돌려야 한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기계적 체계는 특이성들을 가두는 억압적인 울타리치기의 한 양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갈등의 공간이고 투쟁 속의 향유의 공간이며 또한 착취받고 억압되고 패배하는 가운데 고통받는 공간이다. 바로 거기가 우리가 존재하는 곳이다. 권력이나 자본의 경우처럼 메트로폴리스의 기계적 체계 혹은 알고리즘도 이중적이다. 생산과 명령 사이에 밀접한 알고리즘적 연관이 있다. 노동자들 혹은 시민들이 의미있는 생산적인 관계들을 구축하고 거기서 나오는 가치가 자본에 의해 추출된다. 그런데 가치화(가치추출)의 과정이 깨질 때 저항이 발생하여 산 노동의 자립과 일관성을 회복한다. 산 노동이 저항을 통해 알고리즘을 깨고 새로운 의미의 네트워크들을 구축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산 노동에 의한 생산 없이는, 주체화 없이는 알고리즘도 없기 때문이다. 저항 없이는 자본주의도 없고 임금도 없으며 사회적 향상도 없고 삶의 향유도 불가능하다.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저항만이 시민들의 궁핍이나 명령에의 종속과 단절하면서 특이성들의 미래를 드러낸다. 우리는 기계적 몸체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사용하여 그것을 향유하는 데로 접근할 수는 있다. 여기서 ‘사용’이라는 범주가 핵심적이다.

자본주의적 발전에서 사용가치가 교환가치에 가려 그 의미가 축소된다는 점은 명백하다. 따라서 사용가치를 삶형태로서 회복한다는 것은 억압적 고리와 그에 달라붙어 있는 폭력을 부순다는 것을 의미한다. 메트로폴리스의 투쟁(사회적 파업)은 이 지형에서 효과적인 무기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현재의 도시 유토피아, 즉 건축 분야의 투사들이 그리는 유토피아에서 ‘닫힌 요새’―20세기 초에 노동자들이 비엔나에서 동네 지역에서 창출하려고 했던 것―와 같은 모델들을 선택하고 있다는 점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은 또한 콜하스(Rem Koolhaas)가 다중이 살 수 있고 스스로를 자율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장소를 위한 모델로서 발전시킨 ‘거대함’(Bigness)이라는 아이디어를 채택하고 있다. 피렌체의 아키줌Archizoom[‘Archizoom Associati’는 1966년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세워진 디자인 스튜디오이다.―정리자]의 노동자주의 건축가들이 이런 생각을 이어받아 작업을 하고 이어지는 논쟁의 중심에 줄곧 있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여기에 대응되는 주체적 차원이 존재한다. ‘테크놀로지를 도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싸센(Saskia Sassen)은 말한다. 이는 지성을 민주화해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메트로폴리스에서 공통적인 것의 차원을 실질적으로 찾아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공통적인 것의 차원이란 주체성의 생산이 아니고 무엇인가? 여러 형상의 노동들이 ‘일반지성’ 아래 집결되는 동학도 도시 행정의 전통적인 부문들이 변형되어 새로운 복합적인 유형의 서비스로 전환되는 것, 혹은 (더 낫게는) 메트로폴리스에서의 시민들의 협동을 생산하는 것으로 전환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사실 혁신의 움직임들이 영속적으로 도시를 가로지른다. 도시가 생산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기술할 것인가가 더 이상 아니라 그런 움직임들을 의식하고 체계를 다스리는 기능을 시민들 혹은 노동자들에게 아래로부터 맡기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하비(David Harvey)는 ‘추출적 착취’라는 개념을 다듬어내는 자신의 작업의 초기부터 르페브르(Henri Lefebvre)의 통찰을 이어받으면서 도시가 산 노동력의 생산물이라는 점을, 그리고 이 전반적 생산물이 자본에 의해 강탈되고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도시로 돌아가서 도시를 거기서 사는 사람들의 활동을 통해, 이런 식으로 해석되는 공통적인 것을 통해, 요컨대 지식으로 하여금 사회적 관계 전체를 투과하게 함으로써 다시 고찰할 때이다. 르페브르는 포디즘의 마지막 국면을 살았다. 이때는 도시가 산업이라는 외부 권력에 확연히 종속되어 노동일이 가차 없는 경직된 선형의(linear) 조직화가 이루어지기 직전이었다. 맑스가 연구했고 모든 19세기 후반의 위대한 소설가들이 말해준 노동일은 메트로폴리스에 기계적 명령을 부과한 후에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렇다고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메트로폴리스를 둘러싸면서 그 인접 생산기계를 구성한 노동계급의 도시들은 지위가 격하되어 쓰레기통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재정 위기’는 그 중심지들로부터 그 시대의 ‘창조적 계급’을, 즉 잘 사는 부르주아지를 밀어냈다.

르페브르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이 위기를 프롤레타리아의 저항이라는 시험을 거치게 하는 데, 그리하여 메트로폴리스의 중심성을 재발견할 뿐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 그 생산적 활력의 회복을 예견하는 데 있었다. 실제로 이 일이 일어났다. 도시가 (공장노동을 하도록 저주받은 궁핍화된 주변부들의 행정적 기능만이 아니라) 생산적 기능을 회복했을 때, 그리고 주체성의 생산의 중심지점이 되었을 때, 르페브르는 도시를 창조적 비등의 새로운 순간으로 간주했고 급진적인 민주적 가치를 대표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으로 간주했다. 계급투쟁은 도시에 다시 함입되었고 우리의 자유로운 시민적 삶의 운명에 새로운 결정적인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이제 부르주아지의 도시가 아니라 인지노동의 메트로폴리스, 젊은 불안정 프롤레타리아의 메트로폴리스였다. ‘공통적인 것’의 새로운 활력이 메트로폴리스로 진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르페브르의 예언의 성취를 목격하고 있는 것인가? 스쿼트(squat) 운동에서 2011년의 거리시위까지, 오큐파이(Occupy)에서 자치행정과 협동 그리고 ‘해방지대’(liberated zones)의 구축의 경험들까지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곧 반신자유주의적이고 생태론적인 공동체적 실천임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제 변형이 일어날 때 그리고 위기가 목전에 있을 때 상호부조와 협동이 항상 일어난다. 부동산 지대에 대한 투쟁이 시민들의 정치적 자기실현에서 중심적이 된다. 공통적인 것을 바탕으로 삼는 저항이 추출적 기업활동을 맞받아친다. 공통적인 것의 사용권이다. 소득, 복지, 시민권이 싸움터가 되며 이 싸움터에서 주택과 거주는 참호 역할을 한다. 종종 부채와 가난이 공존하지만, 이것들이 축출될 곳도 여기이다. 상호화(mutualisation)[자원의 공동이용―정리자] 기획들과 시민소득에의 요구가 반자본주의의 새로운 전선이다. 이는 ‘시민으로 존재하기’(‘being a citizen’)의 욕구에 맞추어진 요구들이다. ‘소유하기’가 아니라 ‘존재하기’이다. 소유가 아니라 일이요 활동이며, 사적 전유나 공적 사용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구축이다.

몇 가지 기본적 논점들을 요약해보면, ① 긴 이행의 시기가 지난 후 생산에서의 중심성이 다시 부활했다. ② 시민(혹은 노동자)이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었다. 시민은 종종 빈자이다. 그러나 오늘날 가난의 분석은 과거가 특권을 가지지 않는 지형에서 펼쳐져야 한다. 탈근대로 (포디즘에서 금융자본주의로, 테일러주의화된 노예에서 인지노동자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지형에서 움직이게 되었다. 메트로폴리스에서 다중은 지적 형태가 된 생산수단을 자신이 재전유했기 때문에 공통의 부를 직접 창출하면서 가난에 맞서 싸운다. 도시는 이러한 싸움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장소이다.

자본주의적 형태의 가난이란 길게 보면 자본의 ‘시초 축적’의 복잡한 과정이다. 이는 오늘날 메트로폴리스에서 과거와는 다른 형태로 다시 이루어지고 있다. 과거에 노동자들은 토지로부터 분리되고 모든 자립적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후에 이중적 의미에서 ‘자유로운’ 노동자가 되었다. ① 봉건적 농노제에 종속되어 있지 않아서 자유롭고 ② 재산이나 땅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자유롭다. 프롤레타리아가 빈자 다중으로 창출된 것이다. 오늘날 메트로폴리스에서 일어나는 산업노동에서 인지노동으로의 이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빈자 다중은 이제 인지노동자들의 다중이다. 그런데 맑스는 노동수단과 생계수단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노동능력은 절대적 가난이 된다고 한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참조―정리자] 그리고 그 단순한 인격화로서의 노동자는 맑스의 개념에 따르면 빈자이다. 그가 말하는 빈자는 단지 가난 속에서 생존의 경계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산 노동이 객체화된 노동(이는 자본축적을 위하도록 운명지어여 있다)으로부터 분리된 모든 노동자들이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의 메트로폴리스에도 해당된다.

여기서 맑스는 분명히 프롤레타리아의 가난을 그 활력과 연결시킨다. 산 노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적 부의 일반적 가능성이라는 의미에서이다. 이러한 연결은 사적 소유의 심장부에 놓여있는 치명적 위협이다. 탈산업 자본주의에서 노동의 명령으로부터의 분리(즉 자율적으로 되기)가 대대적으로 증가하며, 생산적 노동(지적, 인지적 노동)의 소외의 정도도 극히 높아져서 노동자들의 프롤레타리아화와 그들의 삶의 불안정성으로 구현되고 있다. 가난과 활력의 혼합은 점점 더 폭발적이 되고 있다.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이 모든 것이 거대하게 확대된다.

이 사회의 공통적 생산 외부에, 메트로폴리스에서 축적되는 가치의 추출 외부에 존재하는 가난이란 더 이상 없다. 예를 들어 빈자와 고용된 노동자들 사이에 질적 차이는 없다. 반대로 모든 다중에 점점 더 공통되어지고 생존과 창조적 활동에 모두에 적용되는 조건이 존재한다. 빈자의, 고용된 노동자의, 비정규직의, 이주자들의 창조성과 발명 능력은 사회적 생산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다. 오늘날 생산이 공장의 벽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외부에서도 일어나는 만큼, 생산은 임금관계의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생산적 노동자들과 이른바 비생산적 노동자들 사이에 사회적 장벽은 없다. 모두 메트로폴리스에서 이루어지는 생산과정에 참여한다. 이런 이유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이 낡고 애매한 맑스주의적 구분―은 단호히 거부되어야 한다. 가령 ‘산업예비군’이 나타내는 위계가 여기 해당되는데. 이 위계는 일반적으로 여성들, 고용되지 않은 노동자들, 그리고 빈자들을 중요한 정치적 역할에서 배제하는 데 사용되어왔다. 혁명적 기획을 포함한 주요한 역할은 대공장의 ‘손에 굳은살이 박인 노동자들’―탁월한 생산자들로 간주되는 사람들―에게 맡겨졌다. 그런데 오늘날 여성들, 고용되지 않은 노동자들, 그리고 빈자들을 메트로폴리스의 생산에서 어떻게 배제할 수 있단 말인가!

가난이라는 조건에 맞서는 빈자들의 투쟁은 투쟁형태일 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삶정치적 힘의 긍정적 양태들이기도 하다. 이 힘은 애처로운 ‘소유하기’(having)보다 훨씬 더 강력한 공동으로 존재하기(common ‘being’)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20세기에 세계의 유력한 지역들에서 빈자의 운동은 가난이 동반하는 단편화·낙담·포기·공황상태를 극복하는 힘을 보여주었으며, 부의 재분배를 요구하고 메트로폴리스들로 이주함으로써 해당 국가의 정부들에 도전했다. 메트로폴리스들은 전지구적 수준에서 이 투쟁들에 영토를 제공했다. 메트로폴리스는 공동의 생산과 그 생산물들을 한데 엮는 곳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계급투쟁이 돌아왔다. 이는 가난에 맞서는 투쟁이며 공통적인 것의 구축을 위한 투쟁으로서 메트로폴리스에서 펼쳐진다. 노동자가 메트로폴리스로 돌아와 공통적인 것을 명령에 대립시키는 것이다.




일반지성의 거처


  • 저자  :  Antonio Negri, Federico Tomasello
  • 원문 : “The Habitat of General Intellect” (2015) in Antonio Negri.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이탈리아어 원본 L’abitazione del general intellect. Dialogo con Antonio Negri sull’abitare nella metropoli contemporanea)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의 14장 “The Habitat of General Intellect: A Dialogue between Antonio Negri and Federico Tomasello on Living in the Contemporary Metropolis”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는 네그리와 또마셀로(Federico Tomasello)의 일련의 대담 가운데 마지막 세 번째이다.

문[또마셀로]

1년 전에 「사회적 협동의 꼬뮌」으로 시작했고 「메트로폴리스의 공통의 폐」로 계속한, 메트로폴리스에 대한 논의를 계속해보자. 메트로폴리스와 다중의 관계는 공장과 노동계급의 관계와 같다는 생각을 새롭게 분석해보자. 이 테마를 고정자본과 ‘노동의 장소’에 일어난 변형을 고려하여 논의해보자. 오늘날 일반지성을 발휘하는 노동의 일부가 재택노동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 되었다. 이는 메트로폴리스를 보는 당신의 관점에 어떻게 들어맞는가? 공장-메트로폴리스의 유비(가치창조 메커니즘이 전체 메트로폴리스로 확대되는 것)를 집이라는 미시적 차원에서, 삶과 거주의 기술에서 출발하여 추적하는 것이 가능한가?

답[네그리]

이런 일반적인 성격의 질문에 답하는 것은 항상 대략적인 근사치를 말할 수밖에 없지만 이것이 문제에 접근하게 해줄 수는 있을 것이다. 집은 가장 구체적인 살아가기와 노동하기(vivere e lavorare)가 가치의 새로운 형태가 되는 곳이다.  사회의 디지털화와 도시의 컴퓨터화의 출현과 함께 건축술적 요소들과 소통네트워크들이 주택의 짜임새에 삽입되면 집에서 일하는 것이 가능하다. 만일 도시가 노동의 패턴과 관련된 수천 가닥의 시간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노동력의 불안정성과 이동성 때문만이 아니라 통신이 거주지로 물질적으로 침투하고 사람들이 그 안에서 특이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반 지성이 집을 발견하여 어디선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집은 초라하다. 1973년의 위기 이래 도시의 리듬은 더 이상 포디즘의 리듬―8시간 노동, 여가, 휴식―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협동의 도시 규모로의 일반화와 노동자들 자신에 의한 노동의 관리와 연결되어 있다. 공장이 집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렇게 일의 장소가 공장에서 집으로 이동하는 것을 분석하는 것은 현대적 삶형태를 조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생산이 이제 삶형태와 전적으로 결부되어 있다면 말이다. 노동형태와 삶형태의 이러한 밀접한 연관은 엄청난 귀결을 가지는데 특히 일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집에서 독립적으로 일을 할 때에는 추상적 협동의 환경에서 일하는 것이며, 이는 공장에서 우세했던 물리적 근접성과 크게 다르다. 상사는 물리적 근접성에 규율(훈육)을 행사할 수 있지만, 추상적 협동에는 기껏해야 통제를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제 사람들은 자세하게 지시를 받고 이미 이루어진 결정을 받아서 일하지 않고 자유의 환경에서, 삶과 노동의 체제(una costituenza di vita e di lavoro)에서, 자율적 기획의 장치(un dispositivo di progettualità autonoma)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집에서 집의 보호를 받으며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집을 보호처(un riparo, a shelter)로 만드는 데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내가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매우 어렵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들뢰즈가 말한 ‘훈육에서 통제로’라는 이행 패러다임은 우리가 논의한 공장-메트로폴리스와 집이 노동의 장소가 되는 현상을 서술하고 정의하는 데 얼마나 유효한가?

훈육과 통제를 병치하는 것은 줄곧 사태를 보는 데 유용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지금 삶정치적 영역을 침범한 착취형태를 놓고 볼 때에는 좀 낡은 것이 되었다. 이른바 통제의 기능은 노동의 삶정치적 형상을 앞질러 나타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삶’(bios)을 강조하는, 즉 순전한 통제의 규정들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일련의 규정들을 강조하는 삶정치적 통제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뚜렷하고 확연한 구분해내기는 힘들다. 삶을 둘러싸고 있는 기계적(macchinici, machinic) 도구들과 복지구조들 및 화폐와 관련된 조건들이 하나의 과정으로 한데 엮여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 모든 것들을 산업적 훈육과 삶정치적 통제의 구분으로 매개 없이 환원하기가 어렵다. 여기에 덧붙여야 할 것은, 이런 경향이 가사활동에서 하나의 패러다임으로서 드러나고 있는 한편, 포스트포디즘적 가치창조가 삶정치적 차원과 결합되는 곳에서는 훨씬 더 복잡한 (그리고 어디에나 있는)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는 점이다 우리는 노동자가 불안정 노동형태에 종속되는 동시에 매우 낮은 임금의 조건에 종속되는 위기의 국면들에서, 그 공포와 불안의 분위기에서 이러한 특수한 종류의 통제의 가장 명시적 형태를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삶의 문제가 곧 생존의 문제가 된다. 집은 노동의 장소이자 도구에서 부채라는 끔찍하고 치명적인 금융적 착취의 장소가 될 수 있다. 삶정치적 영역은 욕망의 확장 공간이자 생산의 새로운 관행의 공간에서 감옥이 되고 삶을 파괴하는 힘이 된다. 여기서 한때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이라는 목표를 둘러싸고 모였던 페미니즘 투사들과 이론가들이 삶정치적인 영역의 이러한 모호성을 그리고 그것이 파괴적일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서술하는 데 있어서 훌쩍 앞서 나갔었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이 유용하다. 삶정치적 영역이 사회적 노동의 핵심적 열쇠가 되기 한참 전에 이 여성들은 노동계급 임금의 가부장적 구조에서 그리고 가사노동의 노예상태에서 삶정치적 영역이 행사하는 통제의 복잡성을 인식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임금의 분배가 사회 전 영역을 가로질러 재조직화되어 여성들의 노동이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그렇게 인정받아야 할 것을 투쟁을 통해서 요구했다. 이는 모든 것이 이윤에 맞추어진 사회에서 생존만이 아니라 해방 또한 보장하도록 의도된 임금이며 권리였다. 그 성공여부는 여기서 중요한 논점이 아니다. 나는 포스트포디즘(신자유주의) 시기에 착취와 삶정치적 통제의 조건들이 얼마나 복잡하고 적대가 그 아래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렸는지를 보여주려고 이 사례를 활용할 뿐이다.

 

① 현대 메트로폴리스의 이중성(양가성)이라는 생각이 한편으로는 개별화·착취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특이화·자율일 수도 있는 ‘장치’(dispositif)를 인지노동이 집에서의 노동이 되는 과정에서 포착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가? ② 메트로폴리스 노동자들에 의한 고정자본의 재전유 문제는 집 내부에서 일어나는 생산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어떻게 되는가?

노동자에 의한 고정자본의 재전유를 말할 수 있으려면 기술적 수단이 집에 있어야 하고 이 수단은 공장의 외부로 이동된 것이기에 일부든 전부든 노동자에 의해 전유된 것이어야 한다. 이는 건축물 구조가 기계가 된 문제일 뿐만 아니라 또한 집(거처)의 기계적 구조(una struttura macchinica dell’abitazione)의 문제이다. 여기에 일련의 귀결들이 따른다. ① 특수한 가사노동. ② 집의 기계화. 50년 전만 해도 집에 기계가 없었다. 모든 것이 사람에 의해 조직되었다. 그런 집에서 애정이라는 외관 아래 여성들이 힘들고 반복적인 일상노동을 강제로 해야 했다. 이런 상황이 오늘날 완전히 변했다. 기계화의 확산을 통한 변형으로 여성들이 해방되는 과정이 있었다. 따라서 이는 그 긍정적, 진보적 측면에서 봐야 한다. 이러한 이행이 공간과 가족관계의 실질적 변경을 낳았다. 이렇듯 여성해방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기계적 요소와의 관련에서이다. 물론 그것이 정치적 담론이 되기 전까지는 매우 제한된 방식으로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해방의 일정한 물질적 가능성이 이 과정에서 주어지고 집에서의 고정자본의 (여성에 의한) 재전유를 거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해방적 공간을 여는 한편 그 공간을 소비에 종속시킨 자본관계의 모호성을 숨기거나 신비화하고 싶지는 않다. 이 모호성은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 가는 과정 전체에서 작동하는 그러한 모호성이며 임금구조에 본질적인 것이고 노동과정에서의 집의 특수한 기능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공간은 탈본질화되었고(de-essenzializzato) 더 이상 단순히 젠더에 의해서, 여성이라는 사실에 의해서, 남편의 임금에만 종속되어 있다는 점에 의해서 결정되지만은 않는 관계의 잠재성(virtualità)에 열려 있다. 이는 자유의 영역은 아니며 단지 해방의 가능성일 뿐이다.

메트로폴리스는 또한 부채 메커니즘이 더 확연한 성격을 띠고 그 지형에서의 투쟁이 더 의미심장해지는 장소이다. 아다 꼴라우(Ada Colau)를 바로셀로나의 시장으로 만든 <‘주택담보대출 피해자를 위한 플랫폼>(la Plataforma d’Afectats per la Hipoteca) 같은 경험이 그 사례이다. 이런 투쟁에 대해서 논평을 해 달라.

이제 문제의 핵심에 이르렀다. 집이 노동장소가 되는 경우 (착취장소이지만 동시에 가능한 해방의 장소가 되는 경우) 그 집이 직접 관여되는 주체화의 문제이다. 여기에는 강한 이중성이 존재한다. 이는 자본이 가사노동을 착취에 종속시켰을 때의 그 이중성과 부합되는 이중성, 포스트포디즘 시대의 일반적인 이중성이다. 두 가지 방향의 착취가 있다. 하나는 이 기계화된 집에서 수행되는 노동의 착취이다. 다른 하나는 집을 주요 활동장소로 삼는 노동자들이 종종 부채상태에 빠질 때 이루어지는 가치추출 메커니즘이다. 첫째 경우에는 노동자가, 그리고 노동력의 가치가 소진(소비)된다. 둘째 경우에는 자본이 협동노동을 통해 생산된 가치를 금융수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출한다. 그런데 자본의 상대로서 기능하는 노동의 자율성은 항상 증가한다. 이렇게 볼 때, 노동해방을 위한, 그리고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투쟁은 이중적이다. (이전에도 늘 그랬지만, 오늘날에는 훨씬 더 강력하게 그럴 수 있다.) ① 한편으로는 노동장소에서 착취에 맞서는 특수한 투쟁이 있으며 ②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추출주의에 맞서는 일반적 투쟁이 있다. 착취와 추출의 새로운 형상이 등장하면서 문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더 복잡해진다. 이 형상은 생산하는 공통적 생산 활동을 배경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말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재화의 생산과 주체성의 생산이 맞물려 있다는 것, 집단적 가치와 생산적 특이성들이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만일 사태가 이렇다면, 오늘날 추출적 착취란 공통적인 것의 착취이다. 달리 말하자면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노동자들의 협동 네트워크들의 착취이다. 현재 새로운 메트로폴리스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적 투쟁은 이 새로운 지형에서 일어나는 듯하다. 현재 투쟁하는 메트로폴리스 프롤레타리아는 이것을 즉각적으로 파악한 듯하다. 한편으로는 사회적 노동(특히 집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의 인정을 요구하는 투쟁들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직접세와 간접세에 맞서는 싸움들이 여기 해당하는 데 이는 임금에 영향을 미치고 일반화된 소득[기본소득]을 요구한다. (이는 사회적 노동, 특히 가사노동의 인정을 함축한다.) 다른 한편 부채에 대항하는 싸움(특히 그것이 주택구매와 연관되는 경우)이 있다. 모기지 시스템에 맞서서, 달리 말하자면 갚지 못하는 채무자들에 부과되는 불이익에 맞서서 아다 꼴라우가 이끈 투쟁 같은 것들이다. 이는 직접 행동을 통해 수행된 거대한 투쟁이었다. 새로운 메트로폴리스적 감성이다. 이는 더 이상 단지 철거에 맞서 사람들을 지켜내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제도적 착취자들을 폭로하는, 철거 작전에 동원된 판사, 집행리(執行吏), 경찰, 은행가들의 계급적 성격을 폭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투쟁은 일반적인 성격을 띤다. 즉 특수한 재화의 방어에 더 이상 묶여 있지 많고 공통적인 것의 방어와 연결되어 있다. 이렇듯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서 공통적인 것의 도전이 가늠된다.

 

메트로폴리스는 또한 ‘공간 산출’의 특수한 ‘형태’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 점에서 최근에 널리 퍼진 도시 테크놀로지에 의한 식민화과정에 대한 논의와 교차한다.

내 생각에는 단지 개별적인 문제들을 부각시키는 것 위에 이론을 세움으로써 문제들이 보통 잘못 제시된다. 문제가 개별적이면 이론도 개별적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서는 (그리고 건축가들 대다수의 머릿속에서는) 도시가 투기와 부동산 수입에 내맡겨진 대규모 서비스로서 제시된다. 메트로폴리스, 혹은 도시 일반은 식민화 혹은 공간성 산출의 지형이 된다. 공간은 계급적 척도에 따라 위계적으로 배치되고 세분된다. 이런 움직임은 첫째로 ‘젠트리피케이션’의 여러 측면들에서 발현된다. 이는 도시 공간의/에서의 장소들(topoi)의 탈영토화 및 위계화의 계속적인 과정을 통해 일어난다. 이런 식으로 공간에 확산되는 시초 축적 같은 것이 추출적 폭력의 결정적 행사를 통해 발생한다. 이 모든 것은 메트로폴리스에서의 금융의 투기적 성향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둘째로 이 새로운 도시적 과정을 자본주의적 관점에서만 보지 말고 노동자의 관점에서도 보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내 생각에는 르페브르가 1970년대에 노동자들의 도시 진출을 정확하게 감지한 듯하다. ‘도시에의 권리’에 대한 그의 주장은 분명 포디즘 시기의 주장이기에 아마 오늘날에는 불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도시의 거시적 계획과 거주되는 공간의 미시사회학 사이에 얼마나 긴밀한 관계가 존재했는지를, 그리고 도시의 향유로부터 집의 향유, 주택의 향유, 주체성의 자율적 생산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점을 가졌다. 그 관계를 전도시켜서 ‘삶의 향유’를 도시 전체를 (메트로폴리스를) 가로지르는 목표로서 긍정하면서 말이다. 따라서 사회적 생산(이는 도시 공간 전체를 근본적으로 자본주의화하였다)의 이론들과의 관계에서 너무나도 자주 망각되는 개념을 르페브르는 극히 중요하게 내세운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집단성으로서의 도시, 조우·지식·즐거움의 장소로서의 도시라는 개념이다. 물론 항상 변하는 곳이며 또한 불완전한 곳이지만, 도시의 인간적 복잡성에 대한 이 인식은 집 난롯가의 기쁨으로부터 도시 전체로 투사되었다. 특히 새로운 메트로폴리스 프롤레타리아(유일하지는 않지만 특히 이주자들)의 거대한 층의 경우 그러했다. 이들은 근대적 스타일로 기계화되었고 어엿하게 설비가 갖추어진 공간을 누린 적이 없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최근에 읽은 로스(Kristin Ross)의 훌륭한 책 『꼬뮌의 상상계』(L’imaginaire de la Commune)를 언급해야겠다. 이 책은 빠리 꼬뮌의 72일을 다음 세기에 새로운 지식과 예술·교육·문학의 창조를 낳는 데 봉사한 사건으로서 기록하는 데 덧붙여서, 그 행위자들의 삶형태에 혁명적 행동이 반영되고 계속해서 번성하는 이레적인 경험을 기록한다. 상상과 행복은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랑시에르)를 낳는다. 이는 도시에서의 그리고 도시의 ‘혁명적 풍요화’라고 할 수 있다. 종속된 민중의, 노동하는 민중 일반의 관점에서 도시공간의 산출을 생각할 때에는 ‘다중의 프로그램’(una programmazione moltitudinaria)이라는 생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다중의 욕구와 특이성의 기쁨을 한데 모아놓고 이것들의 종합에 봉사하도록 도시를 조직하는 능력(una capacità di tenere insieme bisogni della moltitudine e gioie della singolarità, ed organizzare la città al servizio di una loro sintesi)을 가리킨다. 나는 또한 이러한 주장이 어떤 식으로든 나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권력의 중심들은 도시의 문제에 행복한 집단적인 해결을 보고자 하는 민중의 압박 혹은 욕망에 밀려서 이데올로기적 신비화나 억압적 프로그램을 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삶과 노동이 겹쳐질 때, 도시-메트로폴리스의 문제는 생태와 생산의 겹침의 문제로 나타난다. 여기에 도시 공간성의 중심적인 문제가 있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이로써 우리는 ‘스마트 시티’라는 개념에 이른다. ‘스마트 시티’ 개념은 유한계급의 도시 이미지를 서술하는 데 사용하는 이데올로기인 동시에 우리의 도시를 방대한 자본주의적 건설현장으로서 재형성하는 거대한 투자라는 물질적 벡터이기도 하다.

처음 ‘스마트 시티’에 대해서 말할 때 이는 처음에는 사이버네틱 시스템들, 그 다음에는 디지털 시스템들이 완전히 가로지르며 재조직화하는 도시를 의미했다. 이 ‘스마트한’, 지적인, 영리한 도시 공간이라는 정의 뒤에는 두 개의 극히 이데올로기적인 내러티브 요소가 작용하고 있다. 이는 낡은 실증주의적 전제들, 19세기의 기계론적인 지배자들의 실증주의인데, 이는 ① 도시가 위로부터 완전히 알 수 있고 소유될 수 있다는 생각과 ② 모든 도시적 관계들이 합리적이고 정보학-사이버네틱의 수단에 의해 조직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전제한다. 이 내러티브는 순전히 이데올로기적이다. 사실 이는 투기적이 아닐 때에는 상업적이다. 이는 좀 속임수이다. 생산물을 값보다 더 비싸게 팔려는 시도이다. 모든 것을 관통하고 가로지른다는 지성은 실은 통제일 뿐이다. 도시에서 펼쳐지는 노동에 대한 통제, 사회적 착취에 필요한 통제, 질서가 부여된 과정을 보장하는 데 필요한 폭력을 통한 통제이다. ‘스마트 시티’와 ‘스마트 사회’는 내 생각에는 순전한 신비화이지만, 이것들은 소통의 흐름들이 메트로폴리스의 구조에서 노동에 부여하는 새로운 중심성과 결부된 실재적 과정 속에 적대의 방식으로 융합되어 있다. 소통의 구조적 연관의 증가는 자본에 의해 직접 추출되는 잉여가치를 산출하는 동시에 저항을, 따라서 자본을 공격할 가능성을 산출한다. 이것이 높은 정도로 신비화되는 것이다. 이 저항은 의식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도시생활의 부정적 측면들과 연관된 일상적 파열 요소들의 연속(continuità di elementi di rottura quotidiani)으로, 분자적 행동으로 나타난다. 어엿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본이 20세기 초기의 1만 명 인구의 작은 시들의 고요함으로 축소시키고 싶어하는 메트로폴리스의 삶을 흔들어야 한다. 정신적 인도의 기능에서 교구 목사를 대신하는 텔레비전이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고요함이다. 그래서 ‘스마트 시티’는 역설적으로 도시의 ‘해커들’을 필요로 한다. ‘해커들’이 없으면 메트로폴리스에서 사는 즐거움을 구성하는 저항과 조우의 가능성은 결코 탄생하지 않을 것이다.

 

‘스마트 시티’의 반대쪽에 도시 주변부, 파벨라, 슬럼, 방리유들이 있다. 지난 번 인터뷰에서 당신은 이 공통의 노동 및 저항의 장소들이 가진 생산적 성격과 거기서 일어나는 갈등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여기서 이에 대해 덧붙일 말은?

이러한 주변부들에 대해 말할 때 가령 마이크 데이비스 같은 작가들이 발전시킨 분석·연구·견해들을 인용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이 연구들은 주로 도시에서 빈자들의 소외에 초점을 두고 있어서 그들의 사회적 위험성을 점점 더 철저해지는 통제에 맞서는 도발로 간주하고 소외된 장소에서의 해방을 위한 ‘장치’로 간주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프롤레타리아적이고 가난한 장소들은 소외가 아니라 도시 삶과 메트로폴리스 노동의 공통적 질을 강력하게 나타낸다. 따라서 삭제하기가 힘든 어떤 것이다. 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나 추방자들에 대해서 너무나도 많은 현상학들이 있으며 이것들 모두 방리유를 총체적 배제의 장소들로 본다. 방리유 연구자로서의 나의 경험은 항상 총체화를 피하도록 나를 이끌었으며 노동 능력의 풍요로움과 공존 및 협동의 능력(둘 다 창조적이다)이 항상 나에게 드러나도록 했다. 이 방리유들은 거대 자본주의 기업들에 의해 정기적으로 흡수되거나 정기적으로 거부된다. 기업들은 노동시장과 거기서 생산되는 재화(특히 문화적 재화, 음악, 삶형태 등) 둘 모두의 관점에서 이들을 포괄한다. 그래서 우리는 통합과 추방이, 흡수와 배제가 계속적으로 교대되며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축적된 비참과 반란의 결단 사이에서 방리유가 띠는 적대적 중심성을 부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벌거벗은 삶’이 아니다. 오히려 삶정치적 리듬은 갈등에 차 있으며 때로는 이율배반적이다. 삶이란 그 내부에서도 갈등으로 차 있으며 언제라도 폭발할 태세이다.

 

당신이 메트로폴리스에 대한 논의의 중심에 놓은 추출주의는 맑스가 ‘시초축적’이라고 부른 것의 부단함과 연관이 있다. 이 시초축적을 맑스는 잔인한 유혈의 수탈 과정으로 묘사한다. 현대 메트로폴리스에서 이와 유사한 폭력이 가치 추출 과정에 내재하고 있다고 서술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현대 메트로폴리스가 행사하는 고유한 폭력은 무엇인가?

신자유주의적 통제의 폭력을 강조하는 것이 현대 포스트포디즘 메트로폴리스의 일부 이미지들을 왜곡했다. 특히 종종 반복되는 시초축적과의 유비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한편으로 분명한 것은, 우리가 논의한 집의 특이화는 전적으로 추출 메커니즘들 내부에서의 일이며 금융자본의 순환에 메트로폴리스가 포섭된 상황 내부에서의 일이라는 점이다. 또한 분명한 것은 추출주의에 강하게 대립하는 다양한 반응들, 다양한 인식론들이 있다는 점이다. ‘대공장’ 체제에서 ‘실질적 포섭’이라고 불렸던 것―가치화 과정의 전일적이고 밀도 높은 부과―이 오늘날에는 해체되고 명백한 공간적 불연속성들과 다양한 시간적 리듬들로 다시 열리고 있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일반 지성의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새로운 ‘시초축적’에 대해서, 그리고 심지어는 ‘형식적 포섭’의 새로운 에피소드에 대해서 말할 때 매우 조심해야 한다. 만일 이런 것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자본의 구조의/구조 내에서의 최근의 이행이 부과하는 조건들 내에서의 일이다. 즉 원래적 의미의 시초축적 단계, 단순협업 단계, 그리고 대공업 단계 이후의 일이다. 만일 ‘시초축적’과 ‘형식적 포섭’을 상기시키는 현상이 있다면 이는 맑스가 150년 전에 서술했던 것의 반복이 아니라 그 구성요소들이 모두 변경된 새로운 과정임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결정적인 것은, 일반 지성의 메트로폴리스에서 당연하게도 자본주의적 폭력이 행사되기는 하지만, 이 폭력은 지역 현실에 의해서, 생산적 협력을 구축해야 할 필요에 의해서 제한되고 상대화되고 조건지어진다. 이 생산적 협력은 영토 위에 분산된 노동력으로부터 도구들을 끌어온다. 자본주의적 폭력은 일반지성과 대면할 때, 일반지성의 메트로폴리스에서의 노동 조직화와 대면할 때 가공할 한계를 만난다. 생산도구들 및 금융도구들과 아울러 치안도구들과 문화적 도구들을 통합적으로 이용하는 폭력의 행사를 통해 자본의 통제가 재조직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공포의 산출이다. 띨 수 있는 모든 형태를 다양하게 띠며 미디어를 통해 주입되는 이 공포가 필시 현대 메트로폴리스에 행사되는 가장 큰 폭력일 것이다. 타자에 대한 공포, 전염병에 대한 공포, 오염에 대한 공포 등등. 추출주의는 가장 최근의 폭력 형태일 뿐만 아니라 가장 고도의 폭력형태이며, 이전 단계의 발전에서 자본주의적 폭력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해볼 때에는 불균형적인 결과를 낳는 폭력이다. 요컨대, 이 폭력은 예전의 내러티브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현재에 이르게 된 과정에서 다중의 힘 또한 자본이 명령을 발휘하기에 점점 더 위험스러운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메트로폴리스에서는 특히 그렇다.

 

젊은 맑스는 『자본론』24장을 쓰기 전에 이미 자연 공통재의 수탈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때 공유지였던 땅에서 농민들이 나무를 훔쳐가는 것을 금지하는 법에 대해 쓰면서 맑스는 사용의 문제, 민중의 관습적 권리를 언급했다. 이 사용의 문제가 그것이 공통적인 것과 가지는 관계라는 시점에서 추출주의로 특징지어지는 현대 메트로폴리스의 짜임새에 어떤 시의성을 가질 수 있는가?

사회형성체는 생산과정을 생산하는 동시에 그 산물이다. 따라서 공통적인 것이 추출적 착취에 동반된다. 공통적인 것이 추출적 착취를 생산하고 또 그것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공통적인 것이 추출에 선행한다고 보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공통적인 것 없이는 착취란 없다. 사회의 자본에의 실질적 포섭이 노동을 공통화하는(comunalizzare il lavoro) 효과를 낳는다. 여기서 노동은 삶정치적 노동이다. 즉 얼마나 공통적이고 사회화되어 있으며 협동적인지에 비례하여 가치를 획득하는 종류의 노동이다. 우리는 맑스가 시초 축적 및 ‘자연’ 공통재의 수탈과 관련하여 분석한 것과는 정반대의 과정 속에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착취의 모순은 사적 부문의 명령을 받는 공적 부문을 통해서 공통적인 것을 수탈할 긴급한 필요 아래에서 조직된다는 데 있다. 공적 부문은 더 이상 사유화를 막아내는 방어벽이나 요새가 아니다. 지금 미국 대법원은 자본주의적 발전의 필요를 위한 수탈을 정당화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공적인 것(대법원)이 사적인 것(해당 다국적기업)이 발전하도록 허용하기 위해서 공통적인 것(공간, 활동)의 수탈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한때 공적 부문은 보완적이었고 사적 부문의 보조자가 될 수 있었다. 사적 부문이 손을 뻗지 않은 곳―건물 인프라, 철도, 공항, 학교, 병원 등―에서는 공적 부문이 앞서 나갔다. 오늘날 이 거대한 서비스 구조들―자연 공통재를 통합한 공통적인 것―은 공적 부문에서 제거되어 다시 사유화되게 된다. 공통적인 것이 더 강한가? 스스로를 방어하는 데 성공할 것인가? 사유화를 지향하는 명령에 맞서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가? 이것이 오늘날의 투쟁의 지형이다. 이미 크게 기울어져 있지만, 그래도 투쟁의 지형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이제 메트로폴리스에 대한 이 세 번의 대화의 결론짓는 물음이다. ‘메트로폴리스적 정치’의 특수성을, 이 ‘공통의’ 총체 내에서의 정치적 행동의 특수한 형식을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가?

오늘날 건축가들이 점점 더 ‘현장에서의 작업’에 대해 생각한다는 사실은 직접적으로 정치적이다. 노동자주의적 선택들을 사회적 관점으로 재해석하며 그들의 작업 속으로 옮겨넣으려고 하는 동지들이 건축 분야에 존재한다. 예를 들어 아우렐리(Aureli)와 그의 그룹이다. 이들은 해방의 필요(다중의 욕구와 정치적 투쟁이 욕구)와 관련하여 보조적인 혹은 힘을 부여하는 위치에 스스로 자리하도록 건축을 밀어붙이는 경향을 가진다. 지금까지 건축의 보조적 성격은 항상 거대 부동산 자본주의의 특권으로서였다. 이제는 그것이 전문적 수준에서조차도 공통적인 것의 규범에 따라 지을 (순진하지도 않고 유토피아적이지도 않은) 필요를 의미한다. 이것으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협동과 자유, 평등과 유대를 장려할 가능성, 자본이 도시에 부과하려는 강제된 동질화로부터 도시를, 그 특이성들의 다수성을 구할 가능성이다. 이러한 공간과 이러한 매개변수 내에서 예를 들어 생태적 싸움은 자연의 방어로부터 ‘삼림헌장’으로, 메트로폴리스의 공통적인 것의 방어와 구축으로 돌아간다.[삼림헌장에 대해서는 이 블로글의 세 글 참조―정리자] 자본주의적 계획에 대안을 제안하는 방법은 여기서 적대적인 성격을 띠어야 한다. 바로 이 지향 위에서 다중은 자신을 물리적이고 도시적인 캐릭터로서 조직한다. 훌륭한 옛 노동자주의의 관점을 따라서 나는 투쟁이 항상 자본주의적 구조화에 선행한다고 믿는다. 오늘날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이 (더 이상 변증법적이지 않고 적대적인) 관계가 중심적이 된다. 메트로폴리스는 계급투쟁의, 그리고 또한 사회적 투쟁의 특권적 지형이 되었다. 메트로폴리스는 실질적으로 공장인데, 다만 여기서 공장은 일반지성의 공장이다. 일반지성의 노동력은 노동계급의 노동력이 줄곧 그랬듯이 역동적이고 유동적이며 유연하고 힘차다. 필시 더욱 그러할 것이다.

마무리를 짓자. 나는 오늘날의 메트로폴리스에서 미시와 거시가 기능적 관계에서 서로 상응하며 동시에 거칠게 맞서고 있음을 부각하면서 시작했다. 그 다음에 나는 자본이 메트로폴리스에 부과하는 지배관계가 어떻게 저항을 받고 차단되고 대체적인 형태로 전환되는지를, 또한 고정자본에의 종속이 어떻게 전도되고 소외에 대한 저항이 어떻게 슬픈 감정보다 우위에 서는지를 여러 수준에서 보려고 했다. 이러한 고찰들의 결과 나는 도시-메트로폴리스에서 추출적 착취가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장소만이 아니라 저항의 정치적 재구성을 위한 가능한 공간 또한 보게 되었다. 기술적 변형에 의해 강화된 생산적 협동은 착취의 특별한 공간을 구성하면서도 다른 한편 그것이 강화되면 적대적 조직화와 근본적 대안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더 흥미로운 것은 ‘메트로폴리스의 시간’의 분석이다. 지금 인류의 3분의 2 이상이 극히 밀집된 메트로폴리스 지역에서 산다. 마키아벨리가 도시에 대해 말하면서 서술했던 인류의 변형―‘짐승’에서 ‘시민’으로―이 이 지역에서 실현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실현되었다. 이제 시민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장소의 생산자는 바로 자신들임을 발견하는 것, 도시에서 해석하고 건설하고 행동하는 데 대한 열쇠를 자신들의 손에 쥐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착취받는 생산자의 상태에서 창조하는 생산자의 상태로의 유턴은 자동적이지도 않고 자생적이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하거나 쫓기에 너무 어려운 것도 아니다. 이 길은 공통적이 되기(essere-comune)의, 공통적으로 살기(vivere in comune)의 근본적 변형 위에서만 지속될 수 있는 길이다.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이 길 자체가 혁명적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상호주의적 삶형태(forme di vita mutualistiche), 사회적 연합들, 조우와 행동의 실험실들을 건설할 필요가 있다. 어디서? 어떻게? 메트로폴리스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도시자치주의(자치도시들에서 조직하고 투쟁하는 프로그램)가 ‘어디서’를 가리켜준다. 이는 일반적이지만 종종 매우 유용하다. ‘어떻게’에 대해서는, 노동자들의 투쟁의 역사가 가야 할 길을 보여준다. 공장 투쟁과 옛 스타일의 사회주의 정치투쟁을 추출적 자본을 공격하는 양태로 옮겨놓기―이것이 메트로폴리스에서 내일의 꼬뮌주의로 가는 길이다. 만일 우리가 다음과 같은 맑스적 통찰을 기억한다면 그 일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노동시간이 노동의 척도가 되기를 그치고, 노동이 부의 척도가 되기를 그칠 때, 그때 부는 더 이상 교환가치의 관점에서 측정 가능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사상가들 각자에게 진정한 개인주의는, 각 개인의 공통의 부에의 기여를 필요로 하고 인정하는 꼬뮌주의 아래에서만 가능하듯이, 마찬가지로 공통의 호화로움만이 진정한 호화로움일 것이다. [영역자 주석: Kristin Ross, Communal Luxury: The Political Imaginary of the Paris Commune, Verso, London, 2015, p. 142.]

 

2015년 6월 파리

 

 




메트로폴리스의 공통의 폐(肺)


  • 저자  :  Antonio Negri, Federico Tomasello
  • 원문 :“The Common Lung of the Metropolis : Interview with Federico Tomasello” (2014) in Antonio Negri.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이탈리아어 원본 “Il polmone comune della metropoli. Intervista ad Antonio Negri in guisa di appendice a La comune della cooperazione social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의 13장 ““The Common Lung of the Metropolis”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는 네그리와 또마셀로(Federico Tomasello)의 일련의 대담 가운데 둘째이다.

「사회적 협동의 꼬뮌」에서의 대화를 계속하자. 로시(Ugo Rossi)는 메트로폴리스에 대한 당신의 주장에 대해 세 가지 점을 비판한다. 첫째로, 인지노동 및 고급 3차 부문(the advanced tertiary sector)[IT, 마케팅, 연구개발, 법·기술·금융 콘설팅–정리자]에 대한 당신의 강조가 현대 자본주의에서 생산형태의 다양한 성격을 놓치거나 과소평가하는 데로 우리를 이끌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자본주의적 메트로폴리스에 공존하는, 혹은 추출적 자본에 의한 포획에 노출된 삶의 양태들(dei modi di vita)과 관련된 사회적 다양성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명백하게도 다양하고 다채롭다. 문제는 이러한 차이들이 있음을 분명히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이 어떻게 경향적으로 발전하며 이들 가운데 어느 것이 현재의 경향을 나타내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맑스주의 방법은 항상 경향의 분석을 그 특징으로 했다. 현대 메트로폴리스에서 우리는 바로 고급 3차 부문을 경향의 요소로 추상할 수 있다. 다른 모든 차원들이 이것과 관계를 맺고 종국에는 이것에 의해 포획된다. 가령 시장들이 메트로폴리스에서의 축적이라는 자본주의적 공간 내에 공존한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분명한 것은, 이것들도 새로운 형태의 계산에, 가령 물류(logistics)의 새로운 체계와 연관된 새로운 은행업 및 시장 조건들에 더 단단히 연결되어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점에서 나는 로시에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메트로폴리스 수준에서의 차이들은 반드시 ‘혼돈스러운’ 것들은 아니고 경향적으로 더 상위의 서비스들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겠다.

 

그렇다면 자본의 가치화 메커니즘에서 착취의 많은 양태들에 공통적인 경향을 포착해야 한다는 말인가?

바로 그렇다. 우리는 인식론적으로 두 관점을 구분해야 한다. ① 하나는 현상학적이고 서술적인 관점으로서, 이는 관찰하고 기록한다. ② 다른 하나는 경향적 관점으로서 이는 귀납적·미래투사적이며, ‘지식에의 의지’를 주체를 정치적으로 재구성하는 데서 핵심 요소로서 긍정한다. 나는 언제나 이 두 관점, 즉 서술적 관점과 재구성적·실천적·정치적 관점에서 사물을 본다. 어떤 현상에 직면했을 때, 나는 ‘사태가 어떻지’만을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것을 바꿀 수 있지’도 묻는다. 그리고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현재의 조건을 열고 부수고 새롭게 생산하는 것이 항상 가능하다는 전제를 세워야 한다.

 

그러면 경향이라는 주제는 정치적 이니셔티브의 실천적 ‘장치’와 병행하는가?

그렇다. 이것이 푸꼬의 철학에서 ‘장치’라고 불리는 것이며, 칸트의 용어로는 ‘후험적 종합’이고, 맑스의 언어로는 ‘결정하는 추상’(astrazione determinata, determinate abstraction)이다.

 

가치추출방식으로서의 추출주의(estrattivismo)에 대해 좀더 말해 달라.

사회적 삶의 공간 전체로부터 가치를 자본주의적으로 추출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하비, 발리바르를 통해서, 그리고 자본주의적 착취의 이동적인 공간성에 대한 논의와 닐슨(Neilson)과 마짜드라(Mezzadra)의 시장 조직화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이것을 알게 되었다. 맑스에게서의 잉여노동과 잉여가치의 엄밀한 정의와 관련하여 초과로서의 협동의 생산이라는 요소를 강조하게 되는 만큼 이 이론적 요소들이 내게 중요하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 금융현상의 연구는 사회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가치를 참조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래서 생산적 사회의 특권적 형태가 메트로폴리스라면 금융을 통해 이루어지는 가치포획과 잉여가치축적은 추출적일 수밖에 없다. 가치포획은 장소(공장이 나타내는 것)보다는 공간(다중의 공간)에 준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광물의 추출’과 같은 추출활동(l’estrattività)을, 즉 새로운 원료의 추출을, 더 정확하게는 공통재의 추출과 착취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로시가 제기한 비판의 둘째 논점은 당신이 부동산 부문의 역할을 과소평가한다는 것이다.

부동산은 당연히 핵심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그리고 필시 경기순환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거나 작동해왔을 것이다. 특히 부동산 투자가 자본이 경기순환의 지난 주기에서 사용한 은행 파생상품들 및 기타 광적으로 투기적인 도구들을 통과할 때 그렇다. 그런데 조심해야 한다. 브라질이나 이스탄불 같은 곳에서는 부동산투자가 일종의 자본주의적 골드러시였던 것이 맞지만, 또한 극적인 한계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상파울로나 리우에서는 시민수송에 헬리콥터를 사용하는 정도가 세계의 다른 어느 곳보다 높다. 그리고 이스탄불은 도시에서 유럽에 속하는 부분이 수송의 관점에서 살기 좋도록 하기 위해서 보스포루스 해협 위로 점점 더 많은 다리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동산 부문은 풀 팩터(pull factor)[사람들을 어느 지역에 살도록 끌어당기는 이유나 상황―정리자]인 것이 맞지만, 지금 그것은 메트로폴리스의 짜임새에 매우 높은 ‘밀도’를 유발해서 도시를 때로는 여행하거나 거주할 수 없게 만들 정도이다. 따라서 나의 가설은, 도시 서비스들의 비용이 부동산의 가격을 곧 끌어내리리라는 것이다. 투쟁과 도시의 갈등이 무력으로 메트로폴리스를 ‘존중’하도록 만들거나 부동산의 가치와 독립적으로 도시의 자유롭고 즐거운 향유를 가능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래서 부동산의 비용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공통적인 것의 비용, 메트로폴리스 자체의 서비스들의 비용이다··· 더 나아가 부동산 그리고 젠트리피케이션의 문제 또한 메트로폴리스의 재생산 비용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이런 말인가?

바로 그렇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메트로폴리스의 사회적 연합주의’ 또한 부동산의 가치를 낮추고 파괴하는 ‘메트로폴리스의 비용’의 증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비용이 바로 사적인 것에 맞서서 표현된 공통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상파울로의 거주민들이 공공교통요금의 인하를 위해 싸울 때 그들은 명백하게도 메트로폴리스의 ‘자본주의적 비용’을 증가시키고자 싸우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극히 열려진 과정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말이다. 항상 투쟁을 통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경향이란 항상 투쟁이 자본의 관계를 확대다고 심화시키는 경향이다. 이는 그 자체로 적대적이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장치’(dispositifs)의 질서가 현상학적 질서에 맞세워지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항상 어렵다. 나는 리얼리즘이 실재적인 것의 반영(rispecchiamento)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적 협동의 꼬뮌」에서 브라질 상황에 대해 말했던 것에 더 덧붙일 것이 있는가?

내가 보기에 브라질에서 근본적인 것은 빈자의 관점에서 메트로폴리스의 짜임새에 스며드는 투쟁들의 ‘견인력’, 즉 빈자들의 투쟁이 다른 소수자들에게 발휘하는 견인력이다. 버스운전사들, 교사들의 투쟁이 폭발하는 데 기폭제가 된 것도 빈자의 투쟁이었다. 모든 옛 조합 범주들은 메트로폴리스에서 소수자가 되고 이제는 빈자들의 투쟁이 추동하고 있다. 이는 핵심적이고 질적인 요소이다. 공장노동자층을 추동요소로 보는 고전적인 사회주의적 전제가 여기서 붕괴된다. BRIC(Brazil, Russia, India and China) 나라들에서는 공장노동자들이 투쟁을 추동하는 일이 잘 일어나지 않으며 일어나는 경우 종종 중산층 요구들을 표현한다. 여기서는 빈자들의 투쟁이 추동력이다. 가장 배제된 사람들의 투쟁으로서가 아니라 메트로폴리스의 현실에 가장 깊이 포함된 사람들의 투쟁으로서이다.

 

이 ‘소수자들’의 문제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달라.

가령 보장소득이 메트로폴리스 생산성의 일반적이고 열려진 척도와 전제조건을 구성한다고 말할 때 이는 여성들의 권리, LGBTQ, 혹은 써발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도시에 사는 사람들로 보고 있는 것이다. 도시에 사는 것은 소수자로서 도시 안에 있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소수자들이 소수자로서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공통적인 것은 메트로폴리스의 다중의 생산물이며, 다중 자체는 소수자들의 배치(assemblaggio)이다.

 

로시가 제기하는 가장 흥미있는 비판점은, 공통적인 것과 도시에의 권리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인데, 그는 우리가 도시를 ‘재구성’보다는 통일체로 환원되지 않는 투쟁들과 차이들의 ‘배치’로 보는 것을 제안한다.

답:

매우 흥미로운 논점이지만, 이 논점은 다중 개념이 일원적인 일자(unum)라는 전제 위에서 제시된 것이다. 다중 개념은 이런 것이 아니다. 다중은 그 자체로 차이들의 기계이다. 나는 다중을 도시에서의 조우들과 협동의 순간들을 통해 생산에 참여하는 특이성들의 총체(un insieme di singolarità)라고 부른다. 이 협동의 순간들이 공통적인 것을 구성한다. 인지자본이 확고한 현실이 된 사회에서 메트로폴리스의 조건은 공통적인 것의 더 상위의 결합형태로의 단계적 이행을 전제한다. 자본은 공통적인 것에서 자양분을 취하며 사회적 협동의 공고화와 증가를 통해 전진한다.

‘도시에의 권리’는 훨씬 더 이전 단계의 메트로폴리스에서의 협동의 밀도에 상응한다. 메리필드(Merrifield)와 브레너(Brenner)가 도시화와 차이들 사이의 조우가 메트로폴리스에서 진정으로 생산적인 요소이며 ‘공통의 폐(肺)’를 구성한다고 주장할 때, 그들은 적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몇몇 오해를 풀 논점을 제시해야 할 듯하다. 메트로폴리스와 다중의 관계는 공장과 노동계급의 관계와 같다고 내가 말할 때, 나는 공장과 메트로폴리스에 관한 한은 유사성(둘 다 생산이 추출되는 무질서한 집합이다)을 말하는 것이지만, 다중에 관한 한은 은유이다.[이는 12장에서 말한 것을 조금 더 상세하게 나누어 말한 것이다―정리자] 만일 다중의 경우에도 유사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다중이 과거 노동계급처럼 무언가 잠재적으로 일원적이고 유기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중은 특이성들의 ‘장치’를 창출하기 위해서 발전된 개념이다. 특이성들은 주체성들의 실존-저항-조우-협동-생산의 순서로 작동한다. 우리가 모든 생산부문에서 가능한 보장된 최저임금이나 보장소득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차이들의 조우·협동·생산이 메트로폴리스에서 보장될 수 있는 토대가 될 출발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중처럼 메트로폴리스도 ‘도시학’(urbanistica)의 개념으로 이해되기보다 정치적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인데···

‘도시 배치’(assetto urbano)의 기술은 상이한 여러 방식으로 읽힐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시에의 기술 개입이 수많은 관점에서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메트로폴리스’라고 말했을 때 속속들이 삶정치적인 개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은 남는다. 여기에는 공간, 시간, 전통, 역사적 차원, 문화적 구현 등이 모두 포함된다. 여기 파리에서 창문 밖을 내다볼 때마다 나는 역사, 투쟁, 획득된 권리, 시민적 공고화의 겹들을 인식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인구가 메트로폴리스 지역에 산다. 메트로폴리스적 삶양태는 이제 완전히 독보적이다. 자본주의의 외부가 없듯이 메트로폴리스의 외부도 없다. 생산에서 연결 역할을 담당하는 메트로폴리스는 중심적인 경제적 요소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여전히 콜하스(Rem Koolhaas)가 제안한 메트로폴리스 구조―‘폐기물’의 축적을 수반하는 거대한 생산적 장치―를 읽는 데 애착을 가진다. (폐기물은 다시 도시 생산을 창출하는 데 쓰인다.) 그런데 우리가 경향의 방법을 따른다면 폐기물과 잔해의 무게를, 메트로폴리스의 연결 조직에서의 표류와 실패라는 점을 과장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생산적 기계들로, 역설적으로 메트로폴리스의 가장 높은 수준에서의 기계적 차이들로 보아야 한다. 자본주의에 더 이상 외부가 없다는 사실이 자본 내에 항상 저항이 있음을 (프랑크푸르트학파 사회학자들이 거의 반세기 동안 했던 것처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자본 개념 자체가 (특히 메트로폴리스적 자본이) 계급투쟁의 개념임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고전적인 사례가 브라질 파벨라의 높은 생산적 강렬도이다. 바로 이것이 현재의 투쟁의 충격을 창출했다. 모든 메트로폴리스 투쟁들을 집단적 실존, 특이성들의 삶양태들, 저항, 조우, 협동, 그리고 자본의 지배에 맞선 주체성의 생산에서의 차이들의 관계를 둘러싼 갈등 내에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것이 공통적인 것이라는 열려진 개념을 규정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로시가 공통적인 것이 차이들의 기계라고 말할 때 그에게 동의한다. 공통적인 것은 다중의 생산물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협동의 꼬뮌으로서의 메트로폴리스


  • 저자  :  Antonio Negri, Federico Tomasello
  • 원문 : “The Commune of Social Cooperation” (2014) in Antonio Negri.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이탈리아어 원본 “La Comune della cooperazione sociale. Intervista ad Antonio Negri sulla metropoli”)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의 12장 “The Commune of Social Cooperation”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는 네그리와 또마셀로(Federico Tomasello)의 세 번의 이어지는 대담들 가운데 첫째이다. 나머지 두 대담(13장, 14장)도 올릴 예정이다.

문 (또마셀로)

당신은 다중과 메트로폴리스의 관게는 노동자와 공장의 관계와 같다고 말했다. 다중과 메트로폴리스의 관계를 읽는 구도를 시험하고 업데이트할 필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네그리)

오늘날 우리는 메트로폴리스와 관련하여 완전히 열린 상황에 있다. 그래서 시험이 필요하다. 그러나 공장-메트로폴리스 관계는 계속 지속될 것이다. 다만 직렬적인(lineare) 관계로 해석될 것은 아니다. 메트로폴리스는 공장과 근본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지만, 공장처럼 탁월한 생산의 장소라는 점도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그러면 메트로폴리스의 시민들은 모두 공장의 노동자들과 같은 존재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이 점에 대해서도 논의가 넓혀지고 불필요한 범주들을 솎아내어 단순화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메트로폴리스가 오늘날 다중에게 과거에 노동계급에게 공장이었던 것에 해당한다고 말하는 것은 은유가 아니다. 그런 관계가 존재하고 있으며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공간성의 물신을 내세우면서 도시를 전적으로 차이와 분리의 관점에서 읽는 사회학들에 경각심을 가진다. 실상 이 다양성 뒤에는 전적으로 구체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착취의 메커니즘이 있다. 추출적 메커니즘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공장에서 메트로폴리스로, 계급에서 다중으로 가는 경로를 택하면 비유적이지 않고 실제적인 상황, 다만 착취의 새로운 범주들을 통해 해석해야 하는 상황과 대면하게 된다. 추출적 착취, 더 정확하게는 추출적 지배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이 추출주의(estrattivismo, extractivism)라는 테마를 강조해야 한다. 메트로폴리스의 사회학적 짜임새는 공장의 그것과 동일하지 않다는 점을 결코 잊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① 분업이 직접적으로 기능적이지 않고 휸육적이지 않으며 통제의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② 우리는 자본주의적 착취의 발전에서 전과는 다른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까를로 베르첼로네( Carlo Vercellone)가 인지자본과 인지노동의 관계를 말하면서 이미, 탈산업적이지 않고 결정적으로 정보적(informatica)이라고 부른 단계이다. 이 단계는 이제 평형을 찾기 시작하고 있는데, 여기서 착취 관계는 정의하기가 매우 어렵다. 고정자본과 산 노동 사이에 혼융과 혼종화(confusione ed ibridazione)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정자본이 주체들에 의해 재전유되고, 자율의 장치(un dispositivo di autonomia)로 보이는 사회적 협동의 형태가 출현한다.

 

공통적인 것의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메트로폴리스를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가?

메트로폴리스의 경제는 근본적으로 일원적(unitaria)이다. 물론 자율의 요소와 추출적 착취의 요소가 각자의 일관성 속에서 고찰되어야 하지만, 그 상호관계의 중심성(la centralità della loro relazione reciproca)을 보아야 한다. 그러면 다중과 메트로폴리스의 관계는 과거 노동계급과 공장의 관계와 같다는 테제를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자본은 이중적 개념이어서 착취자가 있으면 피착취자도 있으며 명령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저항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체들의 내포적 정의를 이러한 관계의 차원과 결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주체들 자신을 번갈아서 계속적으로 재정의하는 것이 된다. 나는 너를 정의하고, 너는 나를 정의하며 ··· 이런 식으로 무한히 나아간다. 이러한 상호작용 안에서 주체들의 질이 결정된다. (그리고 여기서 인간학적 발전이 도출된다.) 우리는 이런 관계를 유동적이지만 극히 강한 파도 혹은 조수(潮水)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마치 거대한 두 덩어리들이 서로 충돌하는 듯이 말이다.

이러한 거시적 수준에서 미시적 수준으로 이동하여 분석하는 것은 분명 복잡한 과제이다. 이러한 이동은 사회학(맑스주의 사회학, 즉 객체의 물신성을 전제하지 않고 주체를 역동적으로 보는 사회학이다)에서 열정들의 작동적 물리학(fisica operativa delle passioni)으로서의 정치학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참여하는 연구가 핵심이 아니라 연구를 정의하고 그 연구가 집단적 열정들의 구축에서 작동하는 기계로서 기능하도록 하는 능력이 핵심이다. 이는 우리가 마끼아벨리, 스피노자, 역사가로서의 맑스, 그리고 오늘날 푸꼬에게서 보는, 혹은 『천 개의 고원』에서 들뢰즈·가따리가 시도하는 방법과 유사하다. 비록 후자에는 현실로부터의 과도한 추상이라는 한계와 계급현실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말이다.

 

오늘날의 메트로폴리스에서 정치적인 것의 새로운 인간학적 차원을 암시하는 새로운 조건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만일 그렇다면 어떤 각도에서 이것이 고찰될 수 있다고 보는가?

인간학적 차원도 이중적으로 고찰되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탈산업적 인간학의 두뇌적 형태’(forma mentale dell’antropologia post-industriale)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다. 이는 인간이 고정자본을 재획득하는 것, 자본으로부터 기계 부분에 대한 전적인 명령권을 낚아채서 재전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고찰해야 할 중요한 요소는 지금은 자본주의적 명령이 더 이상 단순히 기술적 요소들의 인간 신체에의 주입으로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재전유의 자율적 능력과 기계 요소들이 인간의 구조물로 변형되는 것을 다루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회적 열정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테크놀로지의 수동적 소비와 연결된 열정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능동적 소비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후자가 먼저이다. 이러한 논의는 도덕주의나 순전한 인간 어쩌고 하는 인간학적 어리석음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인간은 결코 순수하지 않다. 결코 발가벗은 상태가 아니다. 이런 인간 형상은 항상 옷을 입고 있고 무언가 묻어 있다. 인간의 유일한 실재는 옷을 입고 일을 하는 방식에 의해 부여된다. 이는 욕구와 가난의 지평을 정의하는 경우에도 적용된다. 오늘날 가난은 1세기 전의 그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가난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소통의 도구들이나 협동 수준에서의 사회적 통합의 능력의 유무를 언급한다. 분명 우리는 가난을 음식이나 주택의 관점에서만 정의하지 않는다.

메트로폴리스에는 풍요로운 인간학적 직물이 주체들의 자율이 한껏 발전하는 수준에서, 공통적인 경향이나 행위와 연결된 수준에서 존재한다. 이 공통성의 요소는 수동적이든 능동적이든 메트로폴리스에서 근본적인 소여이며 연구가 예비적으로 포착해야 하는 것을 이룬다. 오늘날 메트로폴리스에는 중심과 주변 사이의 수천 개의 차이들, 특이성들의 수천 개의 수준, 극히 다양한 형상들이 존재하며 이것들이 내적 계획이나 프로그래밍만이 아니라 동일한 위상학조차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제 근본적인 인간학적 일관성이 불연속성들을 통해 재구축되어야 한다. 주체와 객체의 불연속성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발견법적 가치를 가진 방법(참여적 연구의 방법)에서의 불연속성과 파열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메트로폴리스라는 새로운 조건에서 인간학적 접근법은 산업노동자들을 저항능력을 가지고 있고 이것을 일반화된 형태로 발현할 줄 아는 주체로 보았던 바로 그 방법을 이어가야 한다.

 

당신은 소비와 가난을 언급했다. 어떤 이들은 가령 매우 높은 청년 실업율로 특징지어지는 서구 도시 공간에 대해서 말할 때, 작동 중심을 근본적으로 재설정한 생산·축적·착취 과정과의 관계에서의 주변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새로운 가난의 형태로서의 잉여(superfluità)이라는 상태의 출현을 지적한다. 이 관점이 현대 도시에 대한 효과적인 서술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가?

오늘날 자본은 생산적 수준에 위치한 주체들을 일의적으로 포착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통치하는 데는, 사목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데는 성공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성공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총체적 주변화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는 벌거벗은 인간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적어도 자본주의의 거대한 중심지에서는 그렇다. 우리는 ‘발전’이 도약의 형태로 일어난다는 점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발전애서도 모든 점에서 주변적인 지역들이 존재하겠지만, 이는 더 이상 직렬로 연속되는 형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단계에서 단계로 나아가는 형태로 일어난다. (가령 오늘날 모바일폰의 확산 정도가 가장 높은 지역은 아프리카에 있다.)

요컨대, 총체적 포함의 영토 같은 것이 없듯이 총체적 주변화 같은 것도 없다. 소비를 통한 포함의 신화화만이 아니라 주변화의 신화화와도 싸워야 한다. 총체적 배제의 신화화는 특권화된 정치적 항목을 구성하는 것 같다. 이러한 집단적 행동의 부재증명들―동정, 연민, 종교적 미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들―을 부수어야 한다. 우리가 가난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착취받는 사람들에게, 즉 다시 말해서 어떤 식으로든 추출적 메커니즘에 종속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조건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착취받는 사람들은 결코 총체적으로 가난하지 않다. 무언가를 추출하려면 생산하는 인간적 현실이 있어야 한다. 노예제 속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생산의 메커니즘에서 배제되어 있지 않다.

 

하비는 『반란의 도시』(Rebel Cities)에서 메트로폴리스라는 테마를 다룬다. 한편으로는 지대와 축적을 다루고 다른 한편으로는 투쟁을 다룬다. 그의 제안은 기본적으로 르페브르(Henri Lefebvre)가 말하는 ‘도시에의 권리’를 재개하고 재발명하고 현실화할 가능성을 타진한다. 그것을 사회적 실천의 커머닝에 접목시키기 위해서이다. 이 전략이 적절하다고 보는가?

이에 대해서는 더 신중하게 이야기하겠다. ‘도시에의 권리’는 역사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이는 예를 들면 꾸르뇌브(Courneuve)의 싸구려 아파트(barre)에 살면서 파리 중심지나 비양꾸르(Billancourt)[불로뉴 비양꾸르Boulogne-Billancourt는 프랑스에서 가장 부요한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정리자]로 일을 하러 가는 사람들이 도시에 대해서 가지는 권리이다. 못사는 방리유에서 와서 번잡하고 아름다운 도시를 가로질러 갈 수 있는 권리이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남쪽에서 와서 외곽 지대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토리노(Torino)를 차지할 노동자들의 권리이다. 요컨대 도시에의 권리는 포디즘 시기의 도시 재건설과 연결된 개념이다. 이것이 르페브르의 도시였다. 이는 오늘날에는 핵심적인 요소가 된,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라는 메커니즘을 아직 담고 있지 않았다. 하비 식의 테제는 메트로폴리스의 프롤레타리아 구획부분을 너무 강조한다. 그래서 연합, 내적 재조직화 그리고 반란의 능력에 대하여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비전을 제시한다. 이는 도시 프롤레타리아가 포스트포디즘 시대의 도시에서 보여주기 시작한 능력이다. 하비의 생각은 아직 자율적 운동들과 가령 인지노동자라는 새로운 주체에 반영된 새로운 정치를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

 

하비는 거대한 자본주의적 위기들이 도시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기본적으로 부동산 시장의 발전이 행한 결정적 역할을 분석하면서 말이다. 분명 2008년의 붕괴는 이러했다. 당신은 이런 방향의 사고가 미래의 발전을 연구하는 데에서도 결정적일 수 있다고 보는가?

나는 도시 지대(rent)의 문제가 계속 중심적인 것으로 남아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나는 이 영역에서 자본주의적 실질적 후퇴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도시 지대는 계속 일정한 중요성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수준만큼은 아니다. 나는 발전이 독일 도시 모델을 향해 나아가리라고 생각한다. 그곳에서는 소유 범주들의 혼합이 매우 광범위하다. 물론 베네치아, 피렌체와 같은 관광도시들은 항상 큰 가치를 가질 것이다. ‘주요 사건들’이 일어나는 곳들에 가까운 장소들도 그렇다. 그러나 더 일반적으로 볼 때 메트로폴리스는 하이브리드 도시가 되어야 한다. 이는 메트로폴리스 자체를 유지하는 비용의 관점에서 볼 때 불가피하다. 점점 더 중요해지는 요소는 공통적인 것의 비용(il costo del comune)이다. 나는 오랫동안 도시를 재생산하는 비용은 도시 지대의 생산 능력을 초과한다고 주장해왔다. 지대는 세금, 서비스 비용에 의해 직접 공격을 받는다. 이 비용들은 종국에는 부동산 소득보다 커지게 된다. 문제는 젠트리피케이션이라기보다는 도시 소비의 정상화이다. 이제 축적은 도시라는 기계의 생산적 사용을 통과한다. 이 기계는 포괄적으로, 일반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 아이디어·언어·잠재력·삶양태·네트워크들·지식을 생산하고 무엇보다 협동을 생산한다. 이것은 거대한 ‘결합’이며, 자본에 큰 비용이 들게 하고 엄청난 수입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이는 지대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구조와 관계되어 있다.

요컨대 내가 보기에 미래의 도시는 부동산 위에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들의 통합 위에 지어질 것이다. 이것이 도시를 규정하는 ‘장치’(dispositifs)이다. 도시를 공장으로서 규정하기 때문이다. 다중의 공장이다. 이 어구는 다중이 생산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늘 확대되고 있는 서비스들의 양과 관련되기도 한다. 만일 도시에 무료 광대역 인터넷망을 설치한다는 이야기가 돈다면 이는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하기 때문이며 요구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도시를 더 낫게 기능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며 그것을 전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도시 전역으로 확대되는 협동의 한 형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

 

이제 주체성과 불복종의 생산지로서의 메트로폴리스라는 주제로 가보자. 당신은 최근에 터키와 브라질을 여행할 기회를 가졌는데, 여기서 메트로폴리스적이라고 할 수 있는 운동들이 일었다. 이 경험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운동들과 예를 들어 오큐파이나 인디그나도스 같은 운동들 사이의 연관과 불연속점은 무엇인가?

브라질에서는 도시에 대한 권리라는 전형적인 문제, 즉 교통요금 문제를 놓고 투쟁이 시작된다. 이렇게 시작하지만, 그 다음에는 곧장 도시의 구조를 재생산하는 것처럼 보이고 거대한 건설프로젝트들과 연결된 개발정책들에 반대하는 봉기가 된다. 특히 리오에서 이 정책들은 월드컵이나 올림픽과 같은 거대한 행사에 대한 투자를 도시로부터의 배제와 파벨라(favelas, 빈민촌) 재개발 같은 관행과 연결시킨다. 파벨라는 비참이나 가난이 ‘총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살아있는 비판에 해당한다. 빈민촌들은 가난한 가운데에도 경제의, 생산적 행위의, 그리고 새로운 인간학적 형상들과 새로운 언어, 독특한 문화의 주된 구성부분을 이룬다. (토착 문화만이 아니라 높은 가치를 가진 메트로폴리스 고유의 문화이다.) 물론 거기에는 메트로폴리스 사회학자들이 (위기가 폭발할 때 말고는) 너무 조금 다루는 마약시장 같은 일탈적인 요소도 있는데, 이는 특히 윤리적-정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공동체들을 실질적으로 파괴한다.

브라질에서 투쟁은 이렇게 시작되었으나 그 다음에 도시의 재구조화라는 문제를 위험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도시가 노예제로부터 해방될 때 형성된, 백인의 메트로폴리스 의식의 상징들과 요새들도 위험에 빠뜨렸다. 파벨라는 메트로폴리스 내부에 있는 ‘다른 도시’이다. ‘다른’ 도시이지만 항상 메트로폴리스의 생산체계 안에 있다. 도시 개발을 주도하는 정치가들은 이 점을 잊고 파벨라를 공격하는데, 그래봐야 벽에 머리부딪치기이다. 사회주의 정부의 계획자인 노동자당(Partido dos Trabalhadores)은 개발을 산업생산과 잘못 동일시했다. 이러한 ‘낡은 산업주의’(archeo-industrialismo)의 어리석음은 풍성하고도 활발한 저항의 출현에 의해 곧장 드러났다. 저항은 매우 거셌으며 생태론적일 뿐만 아니라 메트로폴리스 내에서 살아있는 공동체적 공간을 유지하는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 지점에 인간학적 변이가 놓여있다. 산업노동자들은 도시를 공장과 동일시하고 그로부터 탈출하려 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메트로폴리스로 되돌아가는데, 거기서 사회적 생산의 꼬뮌(una Comune della produzione sociale)을 발견한다. 메트로폴리스의 특징은 생태론적인 데 있지 않고 생산적인 데 있다. 이런 바탕에서 게지 파크(Gezi Park)와 리우(Rio) 및 상파울로(San Paolo)의 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이 투쟁들은 당신이 보기에 개발 내에서 개발에 반대하는 투쟁인가?

이 투쟁들은 생산이 개발에 맞서는 투쟁이다. 생산을 개발과 근본적으로 구분해야 한다. 내가 최근에 논평을 한 적이 있는 「가속주의 정치 선언」(“‘Manifesto for an Accelerationist Politics’이 이에 대한 훌륭한 문서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개념에 맞서 생산 개념을 다시 찾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논하고 있는 것은 생산적 공동체를 인정하라는 요구인데, 이 공동체는 인지노동자들, 자본의 가치 추출의 원천인 사람들로 구성된다. 바로 이 애매하고 양가적이지만 매우 실재적인 지형에서 근본적 변형이 일어난 것이다.

오큐파이(Occupy)나 인디그나도스(Indignados) 같은 경험들도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이는 분명, 서구에서 일어난 위기(추출적 자본의 욕구에 맞추기 위해서 사회를 전반적으로 재조직화하는 과정을 포함하는 위기)에 대항하는 투쟁이다. 그 과정은 메트로폴리스와 분업을 재조직화하는 과정이며, 복지제도의 파괴와 새로운 위계의 구축을 노리는 과정이다. 이런 이유로 스페인에서 그리스까지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도 예를 들면 10월 19일의 시위의 경우) 복지를 둘러싼 투쟁은 모두 메트로폴리스의 지형에서는 일종의 ‘메트로폴리스의 사회적 연합주의’(sindacalismo sociale metropolitano, metropolitan social unionism)를 특징으로 한다.

 

그러면 오큐파이, 인디그나도스를 좀 이야기해보자. 이 운동들은 위기에서 태어나 위기에 대항하는 운동인데, 다른 한편 놀랍게도 이 운동들은 그들의 담론을 직접적으로 사회경제적인 관심사들보다는 급진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중심으로 조직하여 이 요구를 그들의 가장 의미심장하고 파열적인 표징으로 만들었다.

동의한다. 그런데 이 운동들을 이런 식으로 언급하면서 특수하게 메트로폴리스적인 측면으로부터 너무 멀리 벗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이 투쟁들이 나타내는 정치적 이행의 어떤 부분들이 받아들여지고 어떤 부분들이 비판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면적 수평성은 구성의 시기에서나 미래의 상상된 정치체제에서나 완전히 추상적인 정치구조 모델이다. 이는 격동의 시기에는 잘 작동할지 모르지만, 정치체제의 변형과정을 실제로 구축·관리하려고 시도할 때에는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다. 나는 대안권력(contropotere, counterpower), 더 정확히 말하자면 확산된 대안권력들이라는 모델을 더 선호한다. 이는 더 열린 개념으로서 구성적 과정의 양태들과 난점들을 더 효율적으로 매개할 수 있다. 전면적 수평성은 영토적·공간적 다양성―이는 그 어떤 정치운동일지라도 취하여 향상시킬 필요가 있다 ―을 무시하기 때문에 무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인디그나도스는 지역 공동체들에 다시 위치를 잡았을 때 실질적인 도약을 산출했다. 게지 파크의 반란은 실제 동네마을들에 뿌리를 내릴 때, 즉 모든 동네마을이 효율적인 대안권력을 조직할 때, 그리고 이 대안권력들이 명령 구조를 수직으로 공격할 수 있게 될 때 중요해진다.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새로운 메트로폴리스 구성 자체가 지속적인 기획 구축에서의 전면적 수평성 모델의 적합성을 사실상 부정한다.

 

미국의 경험도 마찬가지인가?

부분적으로는 상황이 다르다. 오큐파이는 복잡한 운동이다. 사람들을 집에서 쫓아내는 문제에서 발생했으니, 부채 문제로 출발한 셈이다. 부채 담론을 통해 월가로 이동하게 된다. 그런데 이 수준에서는 투쟁의 큰 상징성 말고는 산출한 것이 거의 없다. 미국에서 발생한 것인 한, 전 세계가 보게 되는 것이다. 효율성의 관점에서 측정하면, 이 운동은 최근의 것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약한 경험 가운데 하나이다. 사실 이 운동은 권력에 의해 가차 없이 해체되었다. 한편으로는 ‘쌍둥이 극단주의’―오큐파이 대 티파티(Tea Party)―를 비난하는 미디어 선전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당의 급진적 정책 변화로 인해 오큐파이 운동이 선거운동으로 흡수되면서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남는다. 이 운동이 부동산 지대에 대항하여 출현했다는 점, 즉 메트로폴리스 연합주의의 그 어떤 어젠다에도 핵심적인 요소를 중심으로 벌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지난 몇 년 동안의 중요한 도시 운동들과 투쟁에 대해 말해보았다. 이제 또 하나의 전형적으로 메트로폴리스적 현상이지만 정치적 관점에서는 다소 ‘허위적’으로 보이는 ‘봉기’에 대해 말해보기로 하자. 1992년 LA에서 2011년 런던, 2005년 프랑스 방리유들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사회적 행동들이 도시 지역에 뿌리를 내렸고 이것들은 거의 객관적인 특징을 나타내는 것 같다. 이 문제에 관하여 당신은 『공통체』(Commonwealth)에서 자크리에서 현대 동시 봉기에 이르는 긴 역사에 걸친 ‘반란의 계보’를 제시한 바 있다. “자크리, 재전유 투쟁, 메트로폴리스 봉기가 자본주의적 삶권력의 가장 주된 적이” 되는 한에서 봉기들은 불충분하지만 필요하다. 그런데 이 사건들은 때로 근대 정치학이 우리에게 제공했고 우리가 사회 현실을 읽는 데 흔히 적용하는 전통적 관념들을 통해서는 파악하기 힘든 ‘수수께끼’ 같은 측면을 가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사건들이 근본적으로 비정치적인 것으로 본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이런 사건들은 권력이 저지른 부당한 살해에 맞서 일어난다. 근본적인 권리인 삶에의 권리(un diritto fondamentale, quello di vivere)에 가해진 모독에 반대하여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비정치적’인 것으로 정의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자크리는 세금에 대한 공격이라는 확연한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세금에 대해 말할 때는 정치이지만, 빈자가 세금에 대해서 말하면 비정치적이라고 한다.

물론 대의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이 봉기들은 정치적이지 않다. 결국 문제는 ‘정치’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느냐에 달려있다. 맑스주의자에게라면 정치는 자본주의적 질서를 부수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면 도시 불복종 현상을 정치에서 배제하기 힘들다. 이는 사실 메트로폴리스의 사회적 지형에서 진정한 연합주의적이고 정치적인 투쟁들이다. 노동시장의 인종적 조직화나 노동력의 가변자본으로서의 훈육(inquadramento, disciplining)을 통해 일어나는 배제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투쟁의 자발성도 중요한 정치적 특징이다. 그러나 자발성은 출발점일 뿐이다. 나중에 발산, 표현, 반복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언제나 조직화가 관여된다. 나중에 안정된 구조로 발전될 수 있느냐 아니냐는 우리 대화의 범위를 넘어선다.

 

결국 당신은 공장으로서의 메트로폴리스라는 생각이 이러한 사회현상과 집단적 행동을 읽을 수 있는 틀이라고 보는가?

그렇다. 생산적인 포스트포디즘적 메트로폴리스가 이 현상을 온전히 이해하는 유일한 틀이다. 현대의 메트로폴리스에서 자본의 삶권력과 주체들의 삶정치가 서로 혼합되고 맞선다. 이 상황이 이렇게 명백하게 주어지는 다른 곳은 없다. 반란은 기본권(살 권리)의 침해에서 일어나서 확대되는데, 보통 가장 강한 억압요소들에 집중함으로써 그렇게 된다. 이는 종종 인종주의적 차원 및 그로부터 결과하는 배제와 연관된다. 소비로부터의 배제가 그 요소들 중 하나이다. 그래서 재화를 전유하는 봉기의 형태를 띠며 인종적 배제에 맞서는 투쟁은 계급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인종과 계급이 소비를 위한 전유의 충동에서 서로 엮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고통, 즉 가난, 착취의 측면을 드러내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당신은 메트로폴리스 현상을 이해하는 데 주된 열쇠들 가운데 하나로 출현한 ‘인종’ 문제를 언급했다. 이는 매우 많은 관점들로부터 사용되어온 다면적이고 다의적인 열쇠이다. 반동적이고 안보론적인 담론에서 인종문제를 탈식민적 봉기 문제로 보는 담론들까지, 그리고 여러 이유로 ‘인정’ 범주를 참조해온 모든 해석들까지···

··물론, 인정은 중요한 범주이지만 조심해야 한다.  인정 문제는 부르주아지가 명민하게도 메트로폴리스의 다인종, 다문화 대중들에게 주입하려고 하는 요소, 즉 항의의 봉쇄 그리고/혹은 흡수(내화)라는 요소와 연관된 애매성을 항상 일정 정도 가지고 있다. 우리의 관점에서는 논의를 인정이 아니라 강하게 인종적으로 특징지어지는 주체성과 연관시켜야 한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최근의 런던까지 그리고 오늘날 브라질에서처럼 말이다. 브라질에서는 인지노동자들과 파벨라의 아이들(이 아이들은 수 세기에 걸친 인종적 지배 이후에 자기표현의 권리를 얻고 있다)이 투쟁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있다. 인종주의적 함축을 가진 자본주의적 지배의 경직성의 이러한 분쇄는 이례적인 사건이다. 요컨대, 도시 봉기들의 원인과 특징은 다양하지만, 그 변별적 특징은 누구에 맞서 봉기하는가에서 찾아야 한다. 바로 자본주의적 질서에 맞서 봉기한다. 그래서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크게 중요한 것은 이 과정들 안에 들어가서 그것들이 순전히 인정(종종 정체성에 기반을 두거나, 고립된 자기재생산의 메커니즘들을 산출한다)의 관점에서만 주어질 때에는 종국에는 그 과정들을 부술 수 있는 것, 그리하여 개인의 다양성이나 착취 명령의 통일성이나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부과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도시는 ‘예외’의 공간인가?

예외상태는 자주 반복되지만 반복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것이 상수는 아님을 말해준다. 정치체제에서 발휘되는 독재라는 형태의 예외와 공공질서의 유지를 위해 시행되는 예외적 규범들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것은 제노아 2001년을 생각나게 한다. 이런 종류의 예외성이 정치체제에서의 예외보다 가능성이 더 높다. 둘을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예외라는 생각은 기본적으로 계급투쟁이 고조되는 순간들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갈등의 강렬도에 좌우된다. 아감벤 등이 형이상학적으로 세련되게 혹은 순진하게 아나키즘적으로 말하는 바와는 다르다. 이들은 다른 모든 것이, 아니면 적어도 여러 가지 것들이 잘 되고 있는 때에 왜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예외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지칭해야 하는지를 보지 않는다. 예외상태가 하나의 정책에서 독재상태로 언제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이해하려면 전쟁관계로서의 계급관계로 돌아가야 한다. 위대한 로마 역사가들, 키케로 같은 정치가들의 정치과학은 이 국면에서 매우 조심스럽다. 타키투스는 예외상태가 다른 수단으로는 풀 수 없는 갈등의 순간들과 연관되어 있음을 애써 보여준다. 예외상태는 전쟁상태가 존재할 때 발생한다. 체계가 일상적으로 행사하는 음성적이고 훨씬 더 효과적인 폭력과는 다른 예외상태의 폭력은 권력이 그것이 긴급하게 필요하다고 볼 때 폭발적으로 행사된다.

 

비비오르카(Michel Wieviorka)는 ‘갈등 없는 폭력’에 대해 말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갈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위기란 극단화된 갈등이 아니고 무엇인가? 1973년 최초의 탈근대 위기부터 갈등이 심화되어왔다. 40년 동안의 위기는 새로운 축적형태의 근본적인 조직화와 함께 아마도 자본에게 유리하게 끝나가고 있지만, 이러한 ‘축적의 자본주의’(임금 및 가변자본과의 관계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새로운 시초적 축적)의 장기적 재구성 국면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발전되고 해결 불가능한 위기라기보다는 굽힘 없고 사회적으로 확산된 저항이다. 인지노동자들의 생산적 ‘초과’(l’“eccedenza” produttiva)는 바로 이것을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갈등은 영속적인 조건으로 남아있다.

이렇게 볼 때 ‘갈등 없는 폭력’이란 말은 이상하게 들린다. 이는 폭력의 이름으로 갈등을 제거하는 저 표준적인 정식화들 가운데 하나이며 따라서 국가규범의 전적인 예외성이라는 생각처럼 들린다. 폭력이 없어도 갈등은 항상 존재한다. 그런 다음에 폭력이 온다. 왜냐고? ‘극단주의적’ 폭력을 보면, 그것은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행사할 수밖에 없는 폭력이었다. 힘이기는 하지만 그 목소리는 정치체제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197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큰 공포의 원인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들리기에 충분하도록 항의의 ‘초과’(eccedenza[네그리에게서 ‘초과’는 기존의 척도에 종속되지 않는 새로운 질의 생성을 가리키는 개념이다―정리자])를 행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공장투쟁, 사회적 투쟁에서 엄청난 비등의 상황이 정치체제에서 들릴 수 없게 되었을 때 사회적 지형에서 스스로를 강화하지 않고 군사주의로 달아난 것이었으며 그런 다음에 군사주의적으로 진압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갈등은 존재하며 우리는 그것을 바탕으로 작업을 해야 하고 ‘예외상태’를 봉쇄할 수 있는 ‘초과’를 펼쳐내야 한다.

 

『디오니소스의 노동』에서 ‘폭력에 대한 실천적 비판’을 제안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폭력-공포의 순환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라.

폭력 그 자체를 위로부터 규정하지 말아야 한다. ① 경찰을 주먹으로 때리는 것은 살인을 저지르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종류의 범죄(폭력)이든 주권에 거스르는 범죄로 간주되는데 이는 불합리하다. 모든 폭력행동을 살인과 동일시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주권의 메커니즘에서는 모든 것이 대패질되고 사회적 갈등이 위로부터 규정된다. ② 폭력은 항상 존재한다. 이는 억압되어야 할 요소가 아니라 조직되어야 할 요소이다. 폭력은 자연적인 소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의 구조와 연결된 요소로서 존재한다. 체제가 정당하다고 인식되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는 폭력이 아니라 폭력의 정당성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떤 유형으로든 전복적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정당성이란 명령의 행사와 명령 행사의 목적에의 동의 사이의 관계이다. 이 관계가 자본주의적 발전의 필요에 의해서만 지시될 때 정당성의 발휘가 작동하지 않거나 유실되거나 왜곡될 큰 여지가 생기게 된다. 이런 조건에서 부과되는 정당성은 사실 폭력에 해당한다. 국가의 이름으로 부과되는 자본주의적 질서에의 대응은 폭력적이고 정당한 것일 수밖에 없다. 더러운 폭력―자본의 권력을 지키는 법적 질서의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한 것인 만큼 그렇다. 그것은 폭력이 아니라 대항폭력이며 대항권력이다. 정당성의 대항적 표현이다. 부당한 질서에의 저항을 담은 모든 행동은 정당하다. 그런데 주어진 질서가 정당한지 아닌지를 누가 결정하는가? 한편으로는 각 주체의 양심이 결정한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발전에서 역사적으로 변화되어온 주체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명령의 행위가 결정한다. 정당성의 결정은 이 관계에서 발생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폭력이 권력을 규정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것인 주체들의 삶정치적 활력을 규정하기도 한다.

정당성은 항상 관계일 뿐이고 수단일 뿐이기 때문에 정당성을 보장하는 객관적인 방식은 없다. 그래서 벤야민 같은 작가들을 비판적으로 보아야 한다. 이들은 나치 정권의 폭력에 당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지를 몰라서 신학적 관점에서 그것을 보았으며, 종종은 1920년대 공산주의 정책들에 대한 자기비판을 회피했다.(이 회피는 벤야민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폭력의 비합리성이라는 생각이 부르주아 문화에 근본적인 것은 이 문화가 자본주의적 지배의 형테를 취하지 않은 민주적 명령을 실행하는 데 성공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인권이 형식적으로 인정(이는 시장의 지배를 의미한다)되지 않고 물질적으로 인정(이는 공통의 제도를 의미한다)된다면 민주주의는 지배의 반대가 될 것이다. 그래서 폭력은 동의될 때에만 존재한다는 맥락에서 합의의 고양이 있을 수 있다. 대의메커니즘을 통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 참여를 통한 동의이다. 우리가 폭력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자 하는가? 예를 들어 스피노자의 절대 민주주의 모델은 폭력의 최소화가 가능한 모델이다. 모두의 실질적 동의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모든 사람이 착하지는 않기 때문에 이 과정을 보장하는 기능을 하는 실질적 대항권력들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공포는 체제의 폭력을 창출하는 데 핵심 요소이다. 주권의 우월함은 바로 이것을 중심으로 구축된다. 공포는 항상 한 사람의 다른 사람에 대한 공포이며, 이것을 토대로 개인주의적 사회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라는 공포를 제거하기 위해서 주권이 구축된다. 이 모든 것이 거의 설득력이 없다는 것, 즉 개인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시민 질서에 대해서만 필수적 도구라는 점은 명백하다. 그런데 홉스의 틀에서 공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의 힘을 양도하고 주권적 권력을 조직하는 건설적 요소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 다음에 질서가 온다. 그런데 지금은 공포가 질서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정성을 조직하고 공포를 재생산한다. 공포는 우리 삶의 모든 장치들의 거대한 대륙이다. 욕망은 공포에서 안정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공포에서 공포로, 불안정성에서 불안정성으로 움직인다. 공포는 주권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를 확대한다.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을 겁낸다. 사람들은 밤에 나갈 수 없고 여성들은 모든 거리의 구석에 있는 강간범들을 조심해야 하며 텔레비전에서는 범죄물만 나온다. 이런 의미에서 공포는 자본주의적 사회형태들의 재조직화와 유지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요소이며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가장 어두운 지점들을 이룬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평온함이 쉽게 혁명적인 태도로 간주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