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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전지구적 봉기



저자는 글을 이렇게 시작한다.

무언가가, 누군가가 계속 문을 두드린다. 이미 추운 바깥은 더욱더 추워지고 있다. 그러나 안에 있는 사람들은 TV를 켜놓고 무릎 위에 담요를 올려놓고 소파 위에 아늑하게 앉아있다. 또 두드린다. 앞문을 두드린 다음 옆문을 두드리고 다시 뒷문을 두드린다. 바람이 그러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창문도 두드리고 지붕도 두드리며 벽도 두드린다. 이것들이 이토록 얇다는 것을 누가 알았던가. ··· 어떻게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문을 두들길 수 있는가?

집은 바로 신자유주의체제(혹은 이 체제에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고 문을 두드리는 것은 바로 전지구적으로 벌어지는 항의운동들이다. 지난 9월부터 지구의 거의 전역에서 투쟁이 일어나고 있다. 알제리, 볼리비아, 칠레, 콜롬비아, 에콰도르, 이집트, 프랑스, 독일, 기니, 아이티, 온두라스, 홍콩, 인도, 인도네시아, 이란, 이라크, 레바논, 네덜란드, 스페인, 수단, 영국, 그리고 짐바브웨 등. 이 투쟁들은 서로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고 명분이나 구성의 면에서 서로 이질적이어서 그런지 저자는 이것들을 통합된 현상으로서 보려는 진지한 시도는 아직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개인 돈지갑 문제“pocketbook issues”를 원인으로 본 『뉴욕타임스』의 해석은 제외해 버린다.)

표면상으로는 이 운동들을 연결시키는 것이 없는 듯하다. 이란에서는 50% 유가 인상이 원인이었다.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에서는 농민들이 환경규제에 항의하여 고속도로를 봉쇄했다. 홍콩에서는 범죄자를 중국 대륙으로 송환할 수 있도록 한 법안이 불을 붙였다. 칠레에서는 교통비 인상이 불을 붙였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억압적 범죄 법안이, 레바논에서는 모든 품목에 부과하는 새 조세 공지가 촉발제였다.

항의운동의 조직화는 일부는 조합과 정당에 의한 것이지만 다수는 지도자가 없는 수평적 종류의 것이다. 전체를 포괄하는 혁명적 이데올로기는 없으며 전위당이 전면에 나선 것도 아니다. 지난 세기의 대부분 동안 세계를 가르고 있던 ‘좌우’라는 축은 ‘항상 도움이 되는 것’이 더 이상 아니다. 일반적으로 다른 곳의 민주적 열망을 조롱하거나 무시하는 우익들과 미국 정부도 홍콩, 이란, 볼리비아의 시위들이 보인 민주적 열망에는 응원을 보냈다. (볼리비아의 경우는 어쨌든 모랄레스를 전복시킨 쿠데타 이전에는 그랬다.) 좌파 가운데 더 교조적인 사람들은 홍콩과 이란 항의운동 뒤에 제국주의적 개입이 있다고 보면서도 지구상의 모든 다른 민중운동의 유산을 긍정했다.

바리케이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너머를 보면 공통성들이 부각되기 시작한다.

칠레에서는 지하철요금 3% 인상―이로 인해 교통요금이 최저 임금을 받는 노동자의 월급의 21%가 되었다―에 대한 분노로 인해 민중이 개인돈지갑 문제에 발끈한 데 불과한 것이 아니라, 긴축으로 진이 빠져있고 저임금, 긴 노동시간, 부채에 의해 쥐어짜이고 부유층의 탐욕과 맹목성에 신물이 나 있어서 모든 것을 태워버릴 태세가 되어있다. 

이집트에서는 9월에 수천 명의 시위자들을 체포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재무부장관이 “이집트 경제개혁의 과실이 보통 사람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라고 탄식했다. 국제통화기금에서 부과한 조치로 인해 실제로 인플레가 3년에 걸쳐 60% 상승했으며 수백만 명을 가난에 빠뜨렸다. 

엘리트 집단의 인식과 대중의 경험 사이의 분리는 근본적인 만큼이나 광범위하다. 최근에 민중봉기가 일고 있는 나라들 모두와 지구상의 거의 모든 나라들은 모두 단 하나의 경제모델에 의해서 수십 년 동안 지배되어왔다. 이 모델에서 성장은 다수에게는 궁핍화를 의미했고 자본은 하수(下水)가 아래로 흘러가는 것만큼 확실하게 미국과 유럽으로 흘러들어갔다.

칠레가 악명 높은 최초의 실험실이었다. 피노체트 암살단이 시카고학파 경제학자들과 팀을 이루어 운좋은 자, 신중하지 못한 자, 눈이 먼 자들이나 좋다고 할 ‘경제적 기적’을 창출하는 일을 했다. 볼리비아에서 민중이 11월 10일의 쿠데타를 좌절시키는 데 실패한다면 이와 유사한 신의 행동(즉 기적의 창출)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힘의 압도적 불균형을 보존하는, 전지구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방법―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가 의미하는 바이다. 이는 미시적으로는 도시 수준에서 작동하고(가령 공공교통체계의 쇠퇴), 거시적으로는 전지구적 규모로 작동한다(각국 엘리트 집단이 다국적기업 및 국제금융기관들과의 공모하여 노동력을 저렴하게 유지하고 부를 기성의 세력에게 한정시키는 것).

2000년대 초에는 중국 자본과 석유·광물·농산물 같은 상품의 높은 가격으로 인해서 가난한 나라들에게도 선택지들이 있었다. 국제통화기금과 연결된 ‘개혁’의 덫들―공공 부문의 삭감으로 이루어지는 긴축 정책, 국가 소유 자원의 사유화, 노동보호를 위한 제도들을 ‘자유화’라는 이름으로 철폐하기―을 잠시라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좌파 정부들이 승리했고 가난과 불평등이 감소되었다. 그러나 상품 붐은 꺼졌고 중국 경제는 멈추었으며 국제통화기금이 똑같은 해결책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각국의 엘리트 집단은 화폐의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국의 국민을 난도질하는 방식으로 행복하게 지내왔다. 3월에 에콰도르의 대통령 모레노(Lenín Moreno)는 42억 달러의 대부를 받기로 국제통화기금과 계약했으며 10월에는 그 요건으로서 공공부문 임금과 연료보조금을 삭감했고 그 결과 경유 가격이 두 배로 올랐다. 이것에 촉발되어 주로 에콰도르 토착민들로 이루어진 수천 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모레노는 곧 자본을 도피시키고 긴축재정안을 폐지하는 데 동의했다. 레바논에서는 수상 알하리리(Saad al-Hariri)가 110억의 대부금을 확보하기 위해서 외국 대부자들이 요구하는 적자감축 종합대책의 일부로서 (연료, 담배, 인터넷 메시징 서비스를 통해 전화하기에 매기는) 새로운 소비세들을 공지했다. 레바논 인구의 무려 4분의 1이 참가한 12일 동안의 항의 투쟁 이후에 하리리는 사임했다. 그러나 투쟁은 그치지 않고 있다.

이와 동일한 모델이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이 사업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된 곳에서도 적용된다. 이란은 40년 동안 미국의 제재에 의해 타격을 입어서 긴축 조치를 시행하는 데로 돌아섰다. 그들은 그들이 약속했던 경제적 만병통치약을 제공하는데 실패했으나, 적어도 엘리트 집단을 보호하고 소모품으로 간주되는 계층에 고통을 전가할 수는 있었다. 저항에 부딪히기 전까지는 말이다.

항의자들의 요구는 원래 촉발제가 되었던 것을 훨씬 넘어서 거의 모든 방면으로 확대되었다. 홍콩에서 시위자들은 범죄자 송환법의 철회로는 ‘충분’ 근처에도 못 온다고 보았으며 보편적 참정권(universal suffrage) 또한 원했다. (시의회 의석의 반수는 은행가들, 제조업자들, 개발업자들로 이루어진 ‘직능 선거구의 유권자들’functional constituencies에 의해 직접 선출된다. 불평등과 주택비용은 세계 어느 곳보다 높다.) 칠레에서 항의자들의 요구는 교통요금 인상을 철회하는 데서 피노체트 시기의 헌법을 폐지하는 데로 확대되었다. (두 요구 다 이룰 듯하다. 피녜라는 요금인상을 철회했으며 새로운 헌법을 위한 국민투표에 동의했다.)

레바논에서 항의자들은 그들의 운동을 혁명으로 간주할지 말지를 가지고 토론하고 있다. (베이루트, 홍콩, 칠레는 지구상에서 가장 심하게 사유화된 곳에 속한다.) 수단에서 오마르 알-바시르(Omar al-Bashir) 정부가 “국제 대부(貸付) 기관들의 제안으로”(『뉴욕타임스』) 밀 및 연료 보조를 삭감했을 때 시작된 봉기가 30년 동안 지속되어온 정권을 뒤엎는 결과를 낳았으며 아직도 싸움을 멈추지 않고 있다. 아이티에서도 항의운동은 1년도 더 전에 모이즈(Jovenel Moïse) 대통령이 국제통화기금의 마음에 들기 위해 연료 가격을 인상했을 때 시작되었는데, 항의자들은 곧 미국이 후원하는 모이즈의 사임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지금까지 줄곧 이 요구를 해오고 있다.

아이티에서만이 아니라 에콰도르에서 짐바브웨에 이르는 적어도 12개 나라에서 항의운동은 휘발유 가격의 인상에 의해 점화되었다. 기후변화 때문에 우리가 화석연료 사용을 즉시 중지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이제 비밀이 아니지만, 이 나라들에서의 연료 가격 인상이 이산화탄소 방출의 삭감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국제통화기금은 종종 대부를 에너지보조금 삭감과 연동시키며, 연료세는 공공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채택하는 역행적이지만 쉬운 방법이다. 이 두 가지는 가난한 사람들의 돈을 뜯어서 가진 자들을 구제하는 전술들이다.

한편 유럽의 부유한 나라들에서는 항의운동이 기후정책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영국의 경우처럼 정부가 하는 것이 너무 적기 때문이거나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의 경우처럼 취하는 정책들이 고통이 고르게 분담되도록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와 독일의 경우 농민들은 살충제와 질소 방출에 대한 제한 조치에 수천 대의 트랙터로 고속도로를 봉쇄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프랑스의 경우 환경에 대한 고려로 제정된 연료세가 부자들을 위한 세금감면과 결합되어 1년 이상의 거리투쟁이 일게 되었다.

어느 쪽을 보든 교훈은 매우 분명하다. 첫째, 기후위기를 다루려는 시도일지라도 주민들의 압도적 다수의 기본적 욕구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라면 실패하게 되어있다. 둘째, 이 기본적 욕구에는 음식, 건강관리, 주택만이 아니라 존엄과 유대도 포함된다. 현 체제는 존엄과 유대를 파괴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는 체제이다.

이렇게 한꺼번에 일어나는 많은 봉기들은 TV 뉴스에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이달 초에 소설가 에데(Dominique Eddé)는 레바논에서 일어난 민중봉기들에 대해, “마치 수십만의 외로운 사람들이 끝이 없는 듯한 겨울잠을 자고 난 후 깨어서 자신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동시에 발견한 것”과 같다고 썼다. 보려고만 한다면 우리는, 이같이 민중이 깨어 주위를 둘러보고 서로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음을 발견하는 일이 지구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미래주의가 아니라 유토피아: 불가능한 것을 하는 것이 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일인가


  • 저자  :  Murray Bookchin
  • 원문 : Utopia, not futurism: Why doing the impossible is the most rational thing we can do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민서
  • 설명 : 아래는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의 1978년 연설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연설에서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은 자신을 환경론자•미래주의자가 아닌 생태론자•유토피언으로 소개하며 환경론과 생태론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으로 연설을 시작한다. 그는 환경론은 자연을 장악하고 자연에 생산을 강요하는 반면에, 생태론은 자연과 인류의 진정한 조화를 믿으며 이 조화는 근본적으로 인간 서로간의 조화에 의존한다고 설명한다. 내용 정리이지만, 읽기에 편하도록 연설투를 그대로 유지했다. 이 연설은 여기를 클릭하면 들을 수 있으며, 이 연설의 편집된 텍스트는 ‘원문’에 걸린 하이퍼링크를 클릭하면 볼 수 있다. (편집자는 Constanze Huther이다.)

  1. 미래주의란 무엇인가?

미래주의란 오늘날 존재하는 바의 현재가 미래로 투사된 것입니다. 이러한 투사는 양적인 관점에서만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다국적 기업들이 다우주적 기업들이 되기를 원하고, 그 다우주적 기업을 우주에서 키우고 싶어 하며, 달을 식민화하고 화성은 물론 목성에까지 가보고 싶어 하는 것, 이런 것이 바로 미래주의입니다. 이러한 미래주의를 저는 믿지 않습니다. 미래가 오늘 존재하는 현재와 아주 다르게 보이도록 현재를 바꾸어야 합니다. 이렇게 현재를 바꾸어 미래가 양적으로가 아니라 질적으로 달라지게 만드는 것이 바로 유토피아주의입니다.

우선 저는 지구를 우주선으로 보는 사고방식에 반대합니다. 지구는 우주선(([편집자주] ‘우주선 지구(호)’는 1960년대를 시작하는 유행어로 스티븐슨(Adlai Stevenson)이 UN에서 한 연설로 유명해졌고 유명한 발명가이자 사상가인 풀러(R. Buckminster Fuller)가 종종 이 용어를 사용했다. 그 당시 생태론적 의식이 증가하면서 이 용어가 나왔는데,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의 유한성과 세계평화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 북친은 풀러가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직접적으로 언급했을 수도 있으며 풀러는 그 당시에 강연장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이 아닙니다. 지구에는 밸브나 지구가 나아갈 방향을 잡는 온갖 종류의 레이더 장비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지구가 우주선처럼 발사체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며 배관시스템(plumbing)도 없습니다. 지구는 살아있는 유기체이며 성장하고 발전하는 중입니다.

둘째로 제가 보기에 전자기술의 언어는 생태론의 언어와 대조됩니다. ‘입력’(input), ‘출력’(output), ‘플러그인’, ‘피드백’ 등의 어휘로 구성되는 전자기술의 언어는 미래주의의 언어이며 유토피아적이지 않은 언어이고, 조작의 언어이자 대중사회의 언어입니다. 사실 문제는 언어라기보다는 그 뒤에 자리한 감성입니다. 미래주의 언어의 뒤에 있는 감성이 저를 괴롭힙니다. 미래주의의 언어와 감성에서는 사람들이 분자화되고 원자화되며 종내는 원자보다 작은 입자들로 축소됩니다. 생태계도 에너지를 돌리고 필요할 때 밸브를 틀고 잠그는 배관시스템이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에너지가 생태계를 통해 이동하는지를 알아야 하므로 저는 이것의 유용성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생태계의 전부는 아니라고 말씀드립니다. 식물에게도 고유의 삶이 있고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미묘한 상호작용의 메커니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메커니즘은 에너지만의 문제로 축소될 수 없기에 우리는 이것을 죽은 것(무생물)과 구별되는 살아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식민화해야 한다고 느끼는 곳으로 우주선을 타고 나가거나 혹은 어떤 식으로든 먼 우주와 관계하거나 별들에게 귀를 기울이면서도 우리 자신의 감정이나 우리 자신의 지역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시작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지구가 폐허가 되어 침몰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저 바깥에 우주정거장을 쏘아 올리는 방법과 지구촌(a global village)(([편집자주] 북친은 현대 대중매체로 인해 우리가 ‘지구촌’에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맥루언(Marshall McLuhan)의 주장을 가리키고 있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어떤 공동체도 없이 원자화 상태에서 살면서 전지구적으로 전자적으로 서로 소통하기를 기대합니다. 이는 좋은 물리학, 좋은 기계학, 좋은 역학일 수 있고 우리가 원하는 그 어떤 유용한 것일 수도 있지만 생태론은 아닙니다.

 

  1. 생태론이란 무엇인가?

생태론적인 것은 발달과 성장입니다. 발달과 성장의 경우에는 그 지향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그리고 나중에 그 목표로 발달•성장해 나아갔는지 아닌지가 중요합니다. 물론 성장은 사업적인 의미에서의 성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잠재력의 성장, 인간정신의 성장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접촉이 성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태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단순한 입력•출력•피드백 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진짜 문제는 토론과 대화, 개성의 인정, 성장과 발달입니다.

지구가 우주선이라고 믿는다면, 우주선이 배관시스템인 것처럼 세상이 시계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뉴턴 식의 사고방식인 것이죠. 더군다나 지오데식 돔(geodesic dome)을 들어올릴 수 있는 헬리콥터를 타고 이동하거나(([편집자주] 역시 풀러를 비꼰 것인데, 풀러는 지오데식 돔(geodesic dome)을 미래의 주택 모델로서 종종 홍보했다. [옮긴이] 지오데식 돔은 다면체의 면을 분할해서 구면에 가까운 형태로 만든 돔을 말하는데 표면이 삼각형의 구면 격자로 이루어져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누군가에게, 결코 볼 수도 없는 누군가에게 연락하기 위하여 어떤 유형의 전자통신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오늘날 변화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발달과 성장의 의미에서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 있는 것이며 오히려 사태를 더욱더 악화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생태론의 출발점은 장소를 사랑하기,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사람들과 우리가 살고 있는 직접적인 생태계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깊은 이해입니다. 우리가 뿌리내릴 자연이 없는데도 우주의 일체성과 우주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기만이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 땅, 공동체 및 집과 일체감을 느끼지 못하면서 생태계를 이야기하는 것도 기만입니다. 그런 공동체가 없고, 집에 대한 감각이 없고, 유기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1. 생태론이 아닌 것은 무엇인가?

생태론과 관련한 저의 고민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생태론적이지 않은 것이 생태론적인 것으로 둔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태론적인 문제들이 단순히 기술적인 문제들로 축소되는 정도가 심하다는 것입니다. 온갖 부류의 기술자들이 전자기술의 지식을 통해, ‘노하우’를 통해, 그들의 ‘피드백’과 ‘입력’을 통해 우리가 가는 곳을, 우리가 해야 할 것을 결정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결정된 것이 생태론으로 오인될 때 매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는 우리가 처한 조건은 이미 정해진 것이라는 일종의 편견이 미래주의와 함께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상태를 전제하고 그것을 미래로 투사합니다. 그리고 숫자게임을 합니다. 이러한 숫자게임, 인구게임(population game, 개체수게임), 구명보트 윤리(lifeboat ethic)등 독일 파시즘과 거의 구별할 수 없는 견해들이 오늘날 생태론의 이름을 달고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런 비생태론적∙비유기적인 인구생태학적 발상들은 전체주의적인 미래 비전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1. 인간적으로 생각하라

중요한 것은 ‘작게 생각’하는 것(think small)만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것(think human)(([편집자주] 이것은 슈마허(E. F. Schumacher)가 집필한 대단히 인기 있는 책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 A Study of Economics As If People Mattered, 1973)에 대한 언급이다. 이 책은 1973년에 출판되었다.))입니다. 아름다운 것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생태계들입니다. 그리고 그 생태계들의 온전함입니다. 또한 우리가 다른 모든 생명체들과 공유하는 흙, 특히 그중에서도 우리가 일정한 파수(把守)의 책임을 느끼는 흙이 아름답습니다. 작은 것만이 아니라 생태론적인 것이고 인간적인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테크놀로지의 적합성만이 아니라 해방적인 것과 생태론적인 것입니다. 죽은 물질을 다루는 물리학자처럼 되어서, 사람들을 우주선에서 조작되거나 다양한 형태의 전자기기를 통해 연결되는 물건들로 보거나, 또는 사람들을 뗏목이나 구명보트를 타고 표류하면서 자신을 위협하는 사람들을 발로 차서 쫓아버리는 존재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에코파시즘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해방적인 것과 생태론적인 것을, 이런 가치를 담은 단어들 혹은 개념들을 숙고해야 합니다.

 

  1. 유토피언이 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우리는 유토피아 전통으로, 단어의 가장 풍부한 의미에서의 유토피아 전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유토피언이 되는 것의 의미는 ‘상상력에게 권력을! 실용적이지 않은 것을 하라, 불가능한 것을 하라’는 프랑스 학생들의 발언에 들어있습니다. 불가능한 것을 왜 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불가능한 것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에는 상상할 수 없이 끔찍한 것, 즉 지구 자체의 파멸로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불가능한 것을 한다는 것은 생태론적인 사회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 진정으로 해방된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아주 분명한 개념을 창출하거나 그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을 하는 것은 미래주의가 아니라 유토피아주의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하는 것이 실천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생태론적인 사회뿐만 아니라 비교적 소수의 그룹들로 구성된 생태론적인 공동체를 개발하는 것, 땅을 재개방하고 유기적인 텃밭을 만들기 위해 땅을 재사용하며, 우리 모두가 참가해서 원예를 할 수 있는 새로운 농업을 개발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② 서로를 알 수 있는 공동체, 즉 한 눈에 들어올 수 있는 공동체를 추구하는 것. 이런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에서, 주민회의에서, 유토피아주의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제도적 구조들에서 둘러앉는 것이 선행되어 합니다.

③ 우리 고유의 테크놀로지들을 개발하는 것.

④ 수도꼭지를 수리하는 법을 스스로 알고, 나아가 스스로 공동체를 창출하는 법을 아는 것.

⑤ 풍부하게 다양한 인간존재가 되는 것. 우리는 농부-시민이 되어야 하고 시민-농부가 되어야 합니다.

⑥ 벤 프랭클린(Ben Franklin)도 18세기에 믿었던 그 이상(理想), 즉 우리가 인쇄할 수도 있고 인쇄한 것을 읽을 수도 있는 바로 그러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

⑦ 단지 변화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성장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

⑧ 단어들의 마법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기 위해서 그리고 개념의 마법과 풍부함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기 위해서 생태론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 아름다운 울림이 있는 대화 및 창조적으로,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는 로고스(이성)가 필요합니다. 대화를 통해 성장하고 소통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 유토피아입니다.

⑨ 푸리에의 전통으로, 뉴잉글랜드 마을회의의 풍성한 전통으로, 그 안의 건강한 모든 것으로 돌아가는 것. 그 전통을 되찾고 새로운 유형의 연합주의를 배우는 것.

⑩ 미래 운동들을 지도자와 피지도자 사이가 아니라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 사이의 새롭고 풍성한 의사소통을 중심으로 구축하는 것.

⑪ 전자적으로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생각하기. 시계와 물리학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생명(삶)과 생물학의 관점에서 생각하기. 단지 작고 큼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인간이 무엇인지의 관점에서 생각하기.

⑫ 미래주의자•환경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생태론자•유토피언•예술가가 되기.

 

* 북친은 질의응답시간에 청중들로부터 다음 두 가지의 질문을 받았고 이에 답했다.

  1. 기술에 반대하는가?

저는 테크놀로지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테크놀로지의 쓸모가 아주 크다고 봅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테크노크라시, 다시 말해 기술자들에 의한 지배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사람에게 비인간적이고 그 규모에서 비인간적이며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다양한 유형의 과학기술 장치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생태론적인 테크놀로지의 아름다움—생태테크놀로지, 해방적인 테크놀로지, 또는 대안적인 테크놀로지—은 사람들이 이해하려고 노력을 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생태론적인 테크놀로지의 아름다움의 핵심은 단순성과 소규모입니다. 저는 모든 곳에서 이 단순성과 소규모가 가능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 구석기시대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1. 정치적 입장은?

모호한 철학적 원칙들이 아니라 아주 철저하고 확고하게 제 생각을 말하겠습니다. 저는 비위계적인 형태의 공동체들, 식품 협동조합들, 동호회들, 이런 유형의 모든 조직들, 마을모임들이 미국 전역에서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이런 조직체들이 처음에는 지역에서, 그리고 전국적으로, 어쩌면 국제적으로 빠르게 성장하여 연합할 때, 바로 이 조직체들이 직접적으로 본보기가 되거나 교육을 통하는 등 여러 방식으로 대다수 사람들이 이 감성을 갖도록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이렇듯 먼저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요구를 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직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하지 못할 경우 그 이후에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대안은 반동이라는 이름의 관료체제뿐만 아니라 현상유지라는 이름의 관료체제와 더불어 진보라는 이름의 관료체제로 편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관료체제 형태로 편성된다면 지구 자체의 파멸이라는 궁극적으로 같은 결과로 끝날 것이므로 우리가 태양열 발전을 사용하든 신경가스를 사용하든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사실, 화석연료 대신에 태양열에너지•풍력•메탄이 사용되고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오늘날 존재하는 바로 그 다국적•기업적•위계적인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변명거리가 될 뿐일 것입니다.




도시커먼즈와 공동의 회복탄력성


  • 저자  :  Sebastien Maire, Tom Llewellyn,
  • 원문 : Transitioning from competition to collective resilience: Q&A with Sebastien Maire, chief resilience officer for the City of Paris (2019.09.17) / Attribution 4.0 International (CC BY 4.0)
  • 분류 : 번역
  • 옮긴이 : 에스페라
  • 설명 : 아래는 Shareable.net에 올라있는, 톰 레웰린(Tom Llewellyn)의 세바스찬 메어(Sebastien Maire)와의 인터뷰(2019. 9. 17)의 내용(팟캐스트)을 편집·요약한 텍스트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인터뷰 전체는 위 글 제목 링크를 클릭하면 들을 수 있다. ‘resilience’(회복탄력성)는 원래 의학 등의 분야에서 쓰이던 것이 생태이론에서도 쓰이게 된 것인데, 더 자세한 설명은 한국어 위키피디아를 참조하라. 여기서는 맥락에 따라 다소 변화를 주어 옮기기도 했다.

[레웰린의 설명]

21세기에 점점 더 확대되고 있는 물리적·사회적·경제적 난제들에 대해 도시를 더욱더 회복탄력적(resilient)으로 만드는 데 헌신하는 전 세계적인 도시자치운동의 선두에는 파리가 있다.

도시와 모든 도시 거주민들이 더욱 회복력을 갖출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시행된 조치들은 매우 필요하다. 6월과 7월은 각각 가장 높은 지구 평균 기온을 기록했으며, 그 사이에 파리는 역사상 가장 더운 날을 겪었으며 천오백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프랑스 전역에서 폭염으로 사망했다.

나는 파리의 회복탄력성 담당 책임자인 세바스찬 메어(Sebastien Maire)와 기후 위기를 직면한 상태에서 회복탄력성을 구축하기 위해 도시가 어떤 일을 해오고 있는지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의 대화는 여섯 가지 주요한 회복탄력성에 관한 문제들, 그러한 문제들에 대응하는 3축 접근방법 그리고 어떻게 그 방법들이 주민들에게 직접 참여할 권한을 주는지 — 많은 경우에 그 과정을 이끌 권한을 주는지 — 에 대한 것이었다.

대화 과정에서 우리는 100개 회복탄력성 도시 프로그램, 공동체 냉장고, 사회적 단결의 역할, 그리고 기후 변화와 사회적 불평등 사이의 불가분한 관계에 대한 그의 의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서부터 팟캐스트 내용]

 

질문 (톰 레웰린)

파리가 직면하고 있는 독특한 문제들 중 일부에 대해서,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을 대처하기 위해 실행해 오고 있는 프로젝트들 중 일부에 대해서 좀 말씀해 주시겠어요?

 

답변 (세바스찬 메얼)

우리는 파리의 여섯 가지 주요한 회복탄력성 관련 문제들―사회적 단결의 부재, 공기 오염, 기후 변화, 거버넌스의 부재 등―을 확인했습니다. 이 주요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세 개의 주요한 축을 구축했습니다. 첫 번째 축은 시민들입니다. 공공 기관, 정치권, 사적 부문뿐만 아니라 시민들을 믿는 것입니다. 각각의 주민들은 힘을 가지고 있고, 우리의 역할은 이러한 주민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민들을 교육하고 파리에 대한 정보를 알리는 것을 목표로 일해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후 변화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해 언제나 행동할 준비가 된 주민들의 자발적 네트워크를 만들고 있습니다.

두 번째 축은 건물, 도로, 공공장소, 공원, 교통수단 등과 같은 기반시설입니다. 만약 우리가 더욱 회복탄력적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공공장소를 만드는 방법을 근본적으로 다시 상상해 보아야 합니다.

세 번째 축은 거버넌스입니다. 만약 우리가 첫 번째 축과 두 번째 축이 성공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지역의 거버넌스를 변화시키고 개선해야 합니다. 즉, 공공 부문과 사적 부문 그리고 주민들이 서로 협력하는 것입니다.

 

질문

이 축들이 실행되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답변

우리는 나무를 심고 있습니다. 20년 후에 그 나무들이 자라서 그늘을 제공할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모든 도시에서 그와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나무들이 20년 후의 기후 변화 속에서 살아남을까요? 대부분의 도시들은 그 부분을 생각하지 않고 있고, 기후가 완전히 바뀔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자라지 못하고 죽을 나무를 지금 심고 있습니다. 한편, 파리에서는 오늘의 기후와 내일의 기후 모두에서 생존할 수 있는 나무의 종(種)을 찾는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단순히 파리의 경계 안에서만 정책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비전을 확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모든 주요 문제들 — 공기 오염, 홍수, 테러 공격, 기후 변화 등 — 은 더 넓은 범위에서만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당연하게도 교외 지역과 더욱 협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시골 지역과도 협력해야 합니다. 시골지역이 도시를 부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파리에서도 도시 농작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파리는 인구가 밀집해 있고 한계가 있어 결코 파리의 농작이 사람들을 부양할 만큼 충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속가능한 농업을 발달시키고 싶다면, 그리고 공기 오염을 줄이고 싶다면, 파리 주변에 새로운 농작지 창출을 지원해야 합니다. 미래에 그것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질문

6월과 7월은 이전의 기록을 산산이 깨뜨릴 만큼 전 세계적으로 기록상 가장 더운 두 달이었습니다. 그리고 7월에는 파리에서 역사상 가장 더운 날이 있었습니다. 지구 온난화로부터 야기된 시련들에 대처할 수 있도록 시민들이 서로 협력하고 지원하는 것을 돕기 위해 파리시는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답변

이러한 종류의 충격에 대한 대부분의 대응은 먼저 시민들 자신들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점점 더 자주 이러한 종류의 위기들을 겪을 것이기 때문에 공공 당국과 비상시 서비스는 (이런 일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압도될 것입니다. 폭염 사태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일상적인 결속력을 만들어 내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훌륭한 사례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공적 지침들에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노인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웃집의 문을 두드려 주세요. 당신 주변에 돌봄이 필요한 임신한 여성이나 아기들이 있는지 알아보세요.’

또 다른 사례로, 우리는 파리에 모든 곳에 자발적 네트워크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폭염 기간 동안 우리는 이웃에게 줄 수 있는, 본인의 집 근처에 어디가 가장 가까운 시원한 장소인지에 대한 정보 등을 포함한 자료들을 자원봉사팀에 보냈습니다.

저는 이것이 위기와 관련한 공공 정책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민들을 믿는 것이죠. 프랑스에서 이는 완전히 새로운 일입니다. 행정문화는, 특히 정부에서 내려오는 문화는 시민들이 위기를 다루는 방법을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만약 우리가 시민들을 참여시키면 더 큰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공 당국만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당국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 우리는 시민들을 믿어야 합니다.

 

질문

별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해보자면, 같은 자원을 가지지 못하고 재난이나 혼란에 부정적인 영향을 더 크게 받는 소외된 공동체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소외는 많은 경우 우리의 경제 구조에 의해 만들어진 불평등에 기인합니다. 회복 탄력성 담당 책임자의 직위를 가지고 계신 분으로서, 도시의 전체적인 회복력을 낮추는 불평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답변

기후 문제와 불평등 문제는 그 영향뿐만 아니라 해결책에 관해서도 서로 완전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가게 앞 거리에 냉장고를 설치해 놓을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그 지역의 가게 주인들과 협력하여 ‘단결 냉장고’를 설치했고, 이것이 해결책의 한 사례입니다. 주인들은 하루 장사를 끝내고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아 팔 수 없는 모든 음식을 이 냉장고에 남겨 둡니다. 다른 사람들도 또한 본인들의 음식을 이 냉장고에 채워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노숙자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냉장고에 있는 음식을 마음껏 꺼내 먹을 수 있습니다.

작년에 시범적으로 운영을 해보고 우리는 매일 각각의 냉장고에 약 120킬로(265파운드)의 음식이 보관된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이 냉장고가 아니었다면, 이 120킬로의 음식은 아마도 쓰레기로 버려져서 트럭에 의해 수거되고 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태워졌을 것입니다. 음식은 이렇게 태워지지 않고 어디로 수송될 필요도 없었으며, 사람들은 현장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쓰레기를 줄이고, 공기 오염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음식이 필요한 사람들을 먹일 수 있습니다. 냉장고라는 그저 하나의 단순한 물체에 대한 이 전체론적인 접근이 핵심입니다. 단순하고, 로우테크이고, 비용도 저렴합니다. 그저 사고방식의 변화일 뿐이며, 문제와 해결책을 생각해 보는 방식의 변화인 것이죠.

 

질문

장소감각(a sense of place)을 만드는 것은 공동체와 사람들 사이의 결속력을 구축하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파리 사람들이 장소감각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서 언급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답변

파리는 전 세계에서 가장 작은 수도 중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파리를 생각할 때 아마도 그저 220만 명의 주민들이 있는 시라고만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파리는 그 이상입니다. 파리의 대도시권에는 7백만 명의 사람들이 있고, 예를 들어, 채소를 기를 수 있는 시골을 포함한 파리의 지역에는 1,400만 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파리와 가까운 많은 다른 지역에도 의존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를 단지 우리들만의, 시로서의 파리만의 문제로 상정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경쟁에 기초한 비전으로부터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더욱 경쟁적이어야 되고,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고, 더 많은 사업을 창출해야 한다는 등의 생각은 새롭게 출현하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는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해야 합니다. 당신이 아마도 경쟁에서 이길 수도 있겠지만, 이는 반대쪽에 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다른 영토에서 무언가를 잃고 있다면, 결국에는 나중에 자신의 영토에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직면할 문제들을 고려해 볼 때 이러한 경쟁 구조는 정말 위험합니다.

이러한 회복탄력성 전략과 파리시에서 개발한 다른 프로젝트들 안에서 우리가 시행하고 있는 것은 주민들 그리고 사적 부문 등과 함께 도시 수준에서 협력, 공유, 그리고 함께 돕자고 하는 생각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이는 매우 새로운 방향입니다. 20세기는 이와는 반대였기 때문에 특히 그렇습니다. 20세기는 경쟁에 기초한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시대를 바꾸고 있고, 저는 이것이 정말로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위험들 — 우리는 다가오는 수십 년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 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누구도 지금까지 알아내지 못한 몇몇 위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회복탄력성이 있는 도시는 시민들, 적절하게 작동하는 거버넌스, 알맞게 설치된 기반시설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것과도 맞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도시는 강해질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