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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글로벌 커먼즈 포럼

제1회 글로벌 커먼즈 포럼

21세기 거대한 전환
: 자립적 친환경 공동체로서의 커먼즈를 향하여

– 일시 : 2019년 10월 2일(수) 09:30~18:00
– 장소 : 서울혁신파크 공유동 2층 다목적홀
– 신청 : 사전신청시 도시락 제공(무료)
– 문의 : 02-383-3457(칼폴라니연구소)
– 주최·주관 :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협동조합, P2P Foundation
– 후원 : 서울특별시


*** 프로그램  상세 안내 및 사전 신청(아래 클릭)  ***

http://www.kpia.re.kr/?p=14654

 

 




홍콩의 항의운동은 이주노동자들을 더 이상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 저자  : Promise Li
  • 원문 : Hong Kong’s protest movement must stop ignoring migrant workers(2019.8.23) / 이 글은 독립온라인잡지 www.opendemocracy.net에서 최초로 발행되었다.
  • 분류 : 번역
  • 옮긴이 : 채희숙
  • 설명 : 이 글의 저자 프라미스 리(Promise Li)는 <연대>(Solidarity[U.S.])의 회원이자 전직 상근 조직가이고, LA 차이나타운에 있는 <평등한 발전을 위한 차이나타운 공동체>(Chinatown Community for Equitable Development, CCED)의 입주자 조직가다. 그는 현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과정 중에 있다. 이 글에 사용된 이름들 ‘클라리스’와 ‘홉’은 신분 보호를 위해 변경된 것이다.

 

8월 5일, 35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홍콩에서 여러 세대 만에 처음 일어난 총파업에 참여했다. 항공편이 모두 취소됐고 도시의 교통체계는 혼란에 빠졌다. 이 파업은 최고 행정관이 입법부를 건너뛰고 범죄인 인도 결정을 지시하는 전례 없는 권력을 승인하는 홍콩의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수 주간 항의운동의 정점이었다. 이 항의운동은 노동자와 학생 사이 결속을 인상 깊게 보여주었으며 최근 잇따른 도시의 대중 집결에서 중요한 진전이었다. 그러나 총파업에서는 드물게 노동조건에 대한 분명한 요구가 없었다. 중국으로부터의 자치권 운동은 수백만의 사람들을 거리에 집결시켰지만, 그 파업이 드러냈듯이 이 운동은 몇몇 연대의 길들을 간과하고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온 이주가사노동자들은 이 도시의 현재 투쟁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다소 도외시되고 있다. 대부분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 온 (총파업의 규모보다 더 큰) 거의 40만의 이주노동자들이 홍콩에서 극히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한다. 대부분은 더 좋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도시에 오지만, 거의 80%는 빚을 지고 있고 채용기관의 착취적인 관행에 묶여있다. 최근의 보도에 따르면 이주노동자들은 홍콩경제에 126억 달러 이상 기여하고 있다.

이 노동자들 중 많은 이들이 항의운동을 찬성하고 있으며, 홍콩의 민주화를 지지하는 <홍콩노동조합연맹>(Hong Kong Confederation of Trade Unions, HKCTU)에 소속되어 있기도 한 몇몇 이주자조합은 조합원들이 거리로 나가도록 강력하게 북돋았다. 그러나 다양한 압력이 그들의 참여를 제한하고, 항의운동의 요구들은 이주 노동자들의 중요한 관심사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일부는 취업비자가 취소되는 것이 두려워서 참여할 수 없었다. 필리핀영사관은 이주노동자들의 항의운동 참여를 단념시키는 안내문을 보냈다. 필리핀 이주노동자인 클라리스(Clarisse)는 많은 고용주들이 항의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탐탁찮아하며 그중 일부는 법적으로 의무화된 휴일을 갖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말한다. 게다가 그녀는 이주자들이 주로 모이는 지역들은 경찰과 시위대 사이 충돌의 핵심장소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국제가정노동자연맹>(International Domestic Workers Federation, IDWF)의 지역 코디네이터인 피쉬 입(Fish Ip)에 따르면, ‘위챗’(WeChat)과 ‘왓스앱’(Whatsapp)과 같은 이주노동자의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 가짜 정부안내문과 심지어 죽음 위협까지도 익명으로 떠돌고 있다. 한 메시지는 그중 상당수가 심지어 가사노동자도 아닌 네팔, 인도, 파키스탄 사람들이 항의운동에 참여하면 그들을 공격하겠다고 구체적으로 위협했는데, 그 메시지는 홍콩 내에 얼마나 다양한 소수인종들이 섞여있고 표적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홍콩경찰이 총파업 전날 필리핀 댄서를 괴롭히고 체포했다는 보도는 이런 공포를 더욱 악화시켰다. 다른 위협들은 위안랑(Yuen Long)에서 있었던 시위대에 대한 공격에 일부 소수민족들이 연루되었다는 소문에서 비롯된 보복으로서 표현되었다.

 

이주자에 대한 광범위한 무관심

홍콩은 취업과 관련된 여러 기본적인 권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두바이와 같은 다른 주요 중심지보다 이주노동자에게 일하고 조직하기에 더 좋은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1996년부터 홍콩에서 일해 온 필리핀 사람 홉(Hope)은 범죄인 인도 법안이 이주자와 지역민 모두에게 마찬가지로 범죄인 인도 법안이 적용되어 더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책의 길을 열어줄 것을 우려한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 및 집회의 자유를 위한 권리가 위태로워질 것을 걱정한다. 홉은 필리핀영사관으로부터 시위는 가사노동자들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클라리스는 “우리는 홍콩에 살면서 일하고 있으며, 이곳은 우리의 제2의 고향이고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는 영향을 받을 것이다”라며 그런 입장을 거부한다.

홍콩 이주노동자들의 곤경에 대한 무관심이 만연해있으며, 그들의 목소리는 대체로 민주화 운동과 정부 모두에게 무시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주노동자들과의 인터뷰들은 이주자들이 홍콩을 제2의 고향으로 보는 복잡한 시선을 드러낸다. 그리고 최근 보고서는 이주가사노동자들이 더 많은 동아시아 여성(특히 엄마들)이 노동인구에 포함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제한된 참여에도 불구하고 이주자들은 이미 시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의 노동은 더 많은 가족들이 관여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항의운동은 일반 대중들로 하여금 그들의 도시의 구조적 이슈에 대한 이해를 재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지만, 이주노동자의 권리는 사각지대로 남아있다. 예를 들어 경찰의 치안활동에 대한 불신이 증가하는 것은 급진화를 위한 새롭고 결정적인 진전이다. 그러나 이주노동자의 상황에 대한 침묵은 시위대의 요구들이 가진 지속적인 약점을 드러낸다. 그 약점은 홍콩의 고난이 지구화된 착취경제 및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화의 구조적 영향과 깊게 연관되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사노동자이자 항의운동을 전반적으로 찬성하는 <인도네시아이주노동자동맹>(Indonesian Migrant Workers Alliance, IMWA)의 회원인 스링 아틴(Sring Atin)은 그 운동의 요구들이 이주자의 이슈를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녀가 집결의 주요 초점으로 보는 새로운 범죄인 인도 정책에 대항하는 싸움은 “가장 소외된 지역사회에 양질의 어엿한 노동조건을 보장하라는 노동자의 요구를 포함해야 한다.”

이 이슈를 둘러싼 근시안적인 견해는 종종 지역주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배타적이고 외국인혐오증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홍콩 정체성’과 연관되어 있는 민족국민주의 감각은 중국 본토인 전체에 대한 노골적이고 무비판적인 외국인혐오증을 촉진한 <홍콩 토착민>(Hong Kong Indigenous)과 같은 많은 지역 집단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이런 배타적인 감정은 홍콩의 투쟁에 보조적으로 보이는 이주노동자의 문제에 와서 더욱 미묘하고 다양하게 나타난다.

 

계급과 인종: 운동의 사각지대들?

홍콩은 중국과 미국의 지정학적 투쟁 사이에 끼어있다. 윌프레드 챈(Wilfred Chan)은 『반대』(Dissent)에서 이 도시가 “이런 중간지대의 관점에서 생존을 위한 반자본주의, 반권위주의 정치를 다시 상상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지 묻는다. 그 해답은 도시의 노동자계급운동에 있고 새로운 연합들에 대한 상상을 필요로 할 것이다. 초국적인 반자본주의 정치의 잠재성이 이미 여기에 있다. 즉, 이주자 및 지역민이 전지구적 금융 허브로서의 홍콩 정체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거의 모든 곳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도시에 말이다.

그러나 항의운동 내의 민족 간 분열은 도시의 노동경제 및 제도적 구조의 식민지적 유산에 대한 이해의 심화를 방해한다. 홍콩의 불완전한 탈식민화 과정이 낳은 결과들 중 다수를 감당하는 것은 동남아시아의 여성 가사노동자들이다. 홍콩은 젠더특정적인 착취적 노동관행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식민지시기에 부유한 가정들은 종종 무임금 또는 저임금의 중국 여성 가사노동자들인 ‘무이 짜이’(mui tsais)에게 의존했다.

오늘날 자국에 존재하는 젠더 및 경제 불평등과 같은 요소들 때문에 자신들의 나라에서 밀려난 동남아시아의 디아스포라 여성들이 필수적인 돌봄노동을 지속하고 있다. 이주자 연구 학자인 라셀 파레냐스(Rhacel Parreñas)는 이것을 “재생산노동의 국제적 분업”이라고 부른다. 그녀는 자신의 책 『지구화의 하인』(Servants of Globalization)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가사노동을 다른 나라로 공급하거나 받는 국가 모두에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젠더평등주의적인 가사노동의 분업을 달성하지 못했다. 대신 그들은 인종 그리고/또는 계급 특권을 이용해서 덜 특권적인 여성들에게 재생산노동의 책임을 이전시켰다.

이주민과 초국적 네트워크가 홍콩의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소속에 대한 무비판적이고 배타적인 생각은 인종적 분할을 계속 강화시키고 있다. 홍콩의 극심한 부정의에 진정으로 도전할 수 있는 급진적인 운동은 보편적인 참정권에 대한 요구를 넘어서서 반드시 서로 다른 소외된 집단 간의 연결을 구축해야 한다.

이주노동자의 요구를 강조하는 일이 중국의 권위주의로부터 주의를 딴 데로 돌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반대로 그것은 노동을 그 모든 복잡한 역학 속에서, 즉 탈식민주의 홍콩 내부와 홍콩 너머 모두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게 한다. 왜 홍콩의 동남아시아 여성들의 임금이 그렇게 낮으며, 고국에서는 그보다도 더 낮은가? 홍콩과 중국의 정부는 이런 억압의 네트워크에 어떻게 연루되어 있거나 어떻게 적극적으로 이 네트워크를 촉진하는가? 소외된 집단들은 이 항의운동에 얼마나 참여 가능한가? 이것들은 시위대들이 홍콩 전체의 해방과 민주주의를 원한다면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질문들이다.

이주자노동조합들과 단체들은 이런 이슈들을 눈앞에 보이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수년간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그들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에 대항하는 대중적 연대 행동을 집결시킬 수 없었다. 현재의 항의운동을 좀 더 폭넓게 만들자는 그들의 요구는 그 운동에 도전을 제기하고 있다. 항의운동을 지지하는 자기조직화한 전업주부들의 최근 청원이 시사하듯, 가사 돌봄노동은 합법적인 노동일뿐 아니라 광범위한 투쟁의 조건을 분명히 하는 종류의 노동이다.

누가 시위대의 구호 ‘오직 자기만이 자기의 홍콩을 구할 것이다’(自己香港自己救)의 ‘자기’(自己)에 포함되는가? ‘자기’ 중 일부에 지역적인만큼 초국적이기도 한 디아스포라 집단들이 포함될 때, 우리의 행동주의와 분석은 어떻게 되는가? 이런 질문들은 그저 학문적인 것이거나 사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홍콩 해방투쟁의 구체적인 한계를 결정한다.

중국의 권위주의적 자본주의 아래 있는 홍콩에서 온갖 억압과 전투를 벌이는 일은 중화사상, 홍콩 민족국민주의와 같은 배타적인 이데올로기의 짐을 덜어내는 것을 반드시 수반해야 한다. 그리고 중국의 식민주의적 야망과 싸우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자기 내부를 봐야만 한다. 자유는 검은 가면을 쓴 전위만이 아니라 전선에 없는 많은 이들에게도 있다. 우리는 지역민에 누가 포함되어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지역적인 것이 초국적인 것과 연관되어 있는지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홍콩의 경우, 자본주의에 맞서 전지구적으로 벌어지는 풀뿌리들의 싸움과의 결정적 연결고리는 홍콩의 이주노동자다.♣




[맑스] 경쟁과 자본


  • 저자  :  Karl Marx
  • 원문 :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자본론』(Das Kapital)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10년 쯤 전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경쟁의 계보학’이라는 제목으로 8회에 걸쳐서 이루어진 일련의  강의(각각 다른 강사들이 담당했다)  가운데  3강 ‘맑스의 경쟁 비판’의 강의안을 조금 고쳐서 올린 것이다. 


  1. 오늘의 강의는 맑스의 다음의 저작들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실제로 거론이 안 될 수도 있다.)

『1844년 경제철학수고』(『수고』로 줄임)

『임금노동과 자본』(1849)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1857)(『요강』으로 줄임)

『가치, 가격, 이윤』(1865)

『자본론』1, 2, 3권 (1867, 1885, 1894)

 

  1. 경쟁과 시장

맑스가 비판대상으로 하는 경쟁은 시장에서 사적 이익의 추구를 위해 일어나는 행위, 즉 상품의 구매와 판매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행위이다. 경쟁의 토대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이다.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고유한 특징은 인간의 생산능력 즉 노동력이 사유재산으로 된 것이다. 사유재산이 상품의 형태로 시장에서 매매될 때 경쟁 행위가 일어나게 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력 역시 상품이므로 노동력이 소유자인 노동자들 역시 판매자로서 노동시장에 진입하게 되며, 따라서 경쟁의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경쟁은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① 판매자들 사이의 경쟁―이는 격화되면 물건의 가격을 낮추는 효과를 가진다. ② 구매자들 사이의 경쟁―이는 격화되면 물건의 가격을 높이는 효과를 가진다. ③ 판매자들과 구매자들 사이의 경쟁―여기서는 수요와 공급의 양적 차이에 따라 가격이 변동한다.

 

  1. 경쟁과 자본

개별 자본가들이나 ‘속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경쟁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시장의 자동조절기능’이라는 말에 이러한 환상이 담겨 있다. 맑스는 이러한 환상을 논파한다. 개별 자본가들이나 ‘속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경쟁이 자본의 외부에서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맑스는 경쟁이 자본과 내적인 연관을 맺는 것으로 본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에서 맑스는 “개념적으로 경쟁은 자본의 내적 본성, 그 본질적 성격이 다수의 개별 자본들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나고 실현된 것에 다름 아니다. 내적 경향이 외적 필연성으로서 나타나고 실현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같은 저작의 다른 곳에서는 이럴게 경쟁과 자본의 관계를 설명한다.

 자유로운 경쟁은 자본이 다른 자본 속에 있는 자신과 맺는 관계이다. 즉 자본이 진정으로 자본으로서 하는 행동이다. 이 시점에서만 자본의 내적 법칙들―이는 자본의 발전에서 역사적으로 초기에 해당하는 단계에서는 경향들로서 나타난다―은 처음 법칙으로서 정립된다. 자본에 기반을 둔 생산은 자유로운 경쟁이 발전하는 한에서 그만큼 그것에 적절한 형태로 스스로를 정립한다. 자유로운 경쟁이란 자본에 기반을 둔 생산방식의 자유로운 발전이기 때문이다. 즉 그 조건의 자유로운 발전이며, 이 조건을 항상 재생산하는 과정의 자유로운 발전이기 때문이다. 자유경쟁에 의하여 자유롭게 되는 것은 개인들이 아니라 자본이다. (…) 경쟁은 자본의 본성 안에 있는 것을 실재로서 표현하고 외적 필연성으로서 정립한다. 경쟁은 다수의 개별 자본들이 자본의 내적 규정요인들을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강제하는 방식에 불과하다.

 

『자본론』1권에서는 같은 취지로 (그러나 표현을 조금 바꾸어서) “자유경쟁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적 법칙들을 모든 자본가에게 힘을 미치는 외적인 강제적 법칙의 형태로 드러낸다”고 말한다. 여기서 내적 법칙은 무엇이고 강제적 법칙은 무엇인가?

 

  1. 가격의 변동과 경쟁

우리가 경험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경쟁의 효과는 가격을 계속적으로 변동시키는 것이다. (어떤 상품의, 시장에서 그때그때 변동하는 가격이 시장가격이다.) 그런데 이 변동은 아무렇게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가격을 구심점으로 변동한다. 바로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지점에서의 가격이다. 이 가격이 전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을 생산가격이라고 한다. 생산가격이란 상품을 생산하는 데 들인 비용의 가격(비용가격)에 평균 이윤을 더한 가격이다. 따라서 생산가격의 형성은 곧 평균 이윤의 형성을 의미한다. 평균 이윤을 산정하는 이윤율을 맑스는 일반 이윤율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경쟁이 하는 일은 바로 이 일반 이윤율의 형성이다. “이 상이한 이윤율들이 경쟁에 의하여 단일한 일반 이윤율로 평준화된는데, 이는 이 모든 상이한 이윤율들의 평균이다.”(『자본론』1권)

 

  1. 경쟁이 만들어내는 환상

그렇다면 경쟁이 이 일반 이윤율을 창조하는 것인가? ‘속류 부르주아 경제학자’ 혹은 시장의 조절 기능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맑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경쟁이 상이한 직종에서 이윤율의 차이를 평준화하거나 하나의 평균 수준으로 환원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경쟁이 그 수준 자체를 혹은 일반 이윤율을 결정하지는 못한다.”(󰡔가치, 가격, 이윤󰡕) 󰡔자본론󰡕 3권에서도 이와 거의 유사하게 설명하는 대목들이 있다. “경쟁은 기껏해야 일반적 이윤율을 특정의 수준으로 환원시킬 뿐이다. 그러나 이 수준 자체를 결정할 수 있는 요소를 담고 있지 않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더 큰 이윤은 (···) 경쟁에 의해 평균으로 낮추어진다. 그리고 다른 부문에서의 잉여가치의 부족은 그곳으로부터 자본이 빠져나옴으로써 (···) 평균 수준으로 회복된다. 경쟁은 이 수준 자체를 낮추지 못한다. 단지 그러한 수준을 창출하는 경향을 가질 뿐이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또 다른 대목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부르주아 경제의 본질적인 추동력인 경쟁은 그 법칙들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칙들의 실행자이다. 무한경쟁은 따라서 경제적 법칙들의 진실을 위한 전제조건이 아니라 결과이며, 그 필연성이 실현되는 외관이다. 리카도처럼 경제학자들이 무한경쟁이 존재한다고 전제하는 것은 부르주아적 생산관계가 그 특수하고 독특한 성격 속에 충만하게 실재하고 실현된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쟁은 이 법칙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가시화할 뿐 생산하지는 못한다.”

『자본론』3권에는 경쟁이 하지 못하는 일과 하는 일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은 대목이 있다.(12장) 여기서 맑스는 경쟁은 생산가격의 바탕에 있으면서 가격들을 최종 심급에서 결정하는 가치들을 보여주지는 않고,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준다고 한다.

1) 평균이윤

2) 임금수준의 변화가 야기하는 생산가격들의 상승과 하락(이는 처음 얼핏 보면 상품들의 가치관계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3) 시장가격들의 변동

이 모든 현상은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결정과 부불잉여노동으로 구성되는 잉여가치의 성격에 어긋나는 듯하다고 한다. 이렇듯 경쟁에서는 모든 것이 전도되어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맑스는 환상(전도되어서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한다.

이 환상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개별 자본들과 그것들이 생산하는 상품들의 실제적 운동에서는 상품들의 가치가 그 분할의 전제조건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분할된 결과의 구성부분들이 상품의 가치의 전제조건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자본론』 3권)

이것이 우리를 가치와 가격의 관계의 문제로 데려간다.

 

  1. 가격과 가치

맑스가 노동가치론을 창안한 것은 아니지만, 가치분석이야말로 맑스의 돋보이는 독창적 기여라고 할 수 있다. 그 스스로 “상품에 구현된 노동의 이중적 성격[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구성된 것을 말한다.―인용자]을 지적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한 것은 내가 처음이다”라고 하고 있다.(『자본론』 1권) 실제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가치를 모르거나 불충분하게 알고 가격의 관점에서만 사태를 이해하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환상이나 전도된 인식이 나온다. (이는 가령 만유인력의 법칙이 땅으로 떨어지는 사과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은 외관상으로 상반되는 현상에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맑스는 가치가 바로 가격의 변동에 구심력을 제공하여 변동이 일정한 한계 내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가치를 구성하는 실체는 어떤 물건의 재생산에 필요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다. 가치는 비물질적이고 잠재적인 실재이다. 따라서 양적인 속성(노동시간의 양)을 가지지만 그 자체로 가시화되지 않는다. 오로지 가격으로서만 가시화된다. 가격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양이다.

가치와 가격은 일치하지도 않고 양적으로 비례하지도 않는다. 양자가 일치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낮은 단계의 경제발달에서이다. “따라서 상품들이 가치대로 또는 거의 가치대로 교환되는 것은, 상품들이 생산가격에 따라 교환되는 것 ― 이를 위해서는 일정한 정도의 자본주의의 발전이 필요하다 ― 보다는 훨씬 낮은 단계의 발전에 대응하고 있다.”(『자본론』3권)

본격적인 자본주의 경제에서 가치는 (생산)가격의 진동의 중심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가격이 가치와 일치하는 경우는 맑스의 말대로 우연하다. 우리는 이것을 가격(생산가격)의 가치로부터의 괴리라는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상품들이 가치대로 또는 거의 가치대로 교환”되었던 단계의 경제에서와는 달리 그 이후의 단계에서 생성된 생산가격(비용가격 + 평균이윤율)은 가치로부터의 괴리를 품고 있는 것이다.

가치를 가격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바로 경쟁이다. 경쟁은 이윤율을 평준화함으로써 가치를 가격으로 전환시킨다. 사실상 경쟁이란 산출된 잉여가치의 총량을 개별 자본들이 나눠먹는 과정에 다름 아니며, 나눠먹을 대상은 이미 잉여가치의 형태로 정해져 있는 것이지 나눠먹는 과정인 경쟁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상품의 가치는 다음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이 대목에 대해서는 『자본론』3권 50장 참조]

① 불변자본을 대체하는 가치

② 가변자본으로 가는 가치(임금)

③ 잉여가치(이윤과 지대)

수입의 세 형태인 ②와 ③은 새로 추가된 가치라는 점에서 ①과 다르다. 그런데 임금, 이윤, 지대는 새로 추가된 가치―이는 투여된 노동시간으로 구성되므로 생산과정에서 이미 결정된다―를 분할하는 것이지 이것들로 그 가치가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임금, 이윤, 지대가 모여서 상품의 가치를 구성하는 듯이 보이게 만드는 것이 바로 경쟁이다.

 

  1. 사회적 필요와 생산―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변별적 특성

가치의 존재는 단순한 경험적인(가시적인) 차원에서는 파악될 수 없다. 상품의 가치로서의 객관성(대상성)에는 물질의 원자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이 객관성은 상품이 물리적 대상으로서 갖는 조야하게 감각적인 객관성의 정반대이다.(『자본론󰡕 1권 1장) 경험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의 실제적 과정은 바로 가치의 존재를 가린다. 그래서 “경쟁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은 자본의 내적 성격을 파악하고 난 후에 비로소 가능하다. 이는 마치 천체의 눈에 보이는 움직임은 그 실질적인 움직임―이는 감각에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을 파악하고서야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과 같다.”(『자본론』1권)

사실상 가치 즉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란 특정 시점의 특정 생산력 수준에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특정 재화의 양(즉 어떤 사회에서 1년에 필요로 하는 쌀의 양)을 생산할 수 있는 시간을 말한다. 만일 시간을 더 들이면 생산량이 높아져 공급 과다가 되고 시간을 덜 들이면 생산량이 낮아져 공급부족이 된다.

그런데 “자본의 목적은 어떤 필요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을 산출하는 것이므로, 그리고 생산의 덩어리를 생산의 규모에 맞추는 방법에 의해 이 목적을 달성하지 그 반대가 아니므로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소비의 한정된 크기와 이 내적 장벽을 초과하려는 경향을 언제나 가진 생산 사이에 간극이 계속적으로 발생하게 마련이다.”(『자본론』3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이 장벽을 돌파하고 그 목적을 계속적으로 달성하는 식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본의 축적 즉 자본의 크기의 증가이다.

 

  1. 자본의 축적과 집중

이렇듯 자본주의의 발전은 가치의 측면에서는 축적의 확대 즉 그 크기의 증가이다. 그러나 이는 다른 요인들을 동반하며 이는 경쟁에 의해서 가속화된다. 첫째는 자본의 집중이다. 자본들 사이의 경쟁은 소수 개별 자본의 손에 자본을 몰아주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나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은 자본의 축적량을 증가시키는데, 자본의 축적이란 소수의 손에 자본이 집중되는 것이다. 그것이 자본이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치는 한 불가피한 결과이다. 자본의 본성이 가는 길은 경쟁에 의해 트인다.”(『1844년 경제철학 수고』) 맑스가 자본 집중의 지레로서 경쟁과 함께 거론하는 것은 신용이다. “자본주의적 생산 및 축적에 비례하여 집중의 가장 강력한 지레들인 경쟁과 신용이 발전한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 경쟁의 심화가 가져오는 부정적 효과

다른 하나는 새로운 방법의 채택 즉 기계화이다. 기계화는 생산력의 증가를 낳으며 기계에 의한 인간노동의 대체는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심화시킨다. 그리고 이는 임금의 하락을 낳는다. 경쟁에서 탈락한 자본가들의 합류로 인해 노동자계급은 더욱 증가하고 경쟁은 더욱 심화된다. 단속적 혹은 지속적인 실업으로 인하여 노동자계급의 일부는 빈민화된다.

시장론자들은 경쟁(즉 시장)이 생산을 위한 매우 효율적인 메커니즘이라고 선전하지만, 맑스가 보기에는 반대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한편으로는 각 개별 사업에 절약을 강요하지만 다른 한편 그 무질서한 경쟁 체제에 의해 노동력과 사회적 생산수단의 가장 극악무도한 낭비를 낳는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유통의 과정 및 경쟁의 과도함과 분리시켜 놓고 보면 자본주의적 생산은 상품에 구현된 노동에 대해서는 매우 검약(儉約)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은 다른 어떤 생산방식보다도 인간의 삶 혹은 산 노동을 낭비한다. 피와 살만이 아니라 신경과 뇌도 낭비한다. 사회의 의식적 재조직화 직전의 역사 시기에 인류의 발전은 오로지 개인적 발전의 가장 터무니없는 낭비에 의해서만 확보되고 유지된다.”(『자본론』3권)

 

  1. 경쟁의 심화가 가져오는 긍정적 효과?

맑스는 자본주의적 발전(=경쟁의 심화)에서 부정적인 측면만 보지 않는다. 그 아래 숨어있는 긍정적 측면을 보는 것이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의 특이한 장점이다. 부정적인 측면을 제시하는 데 집중하는 『임금노동과 자본』을 끝맺을 때에도 맑스는, 자본이 급속히 성장하면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은 훨씬 더 급속히 증가하지만, 즉 일과 임금은 그에 비례하여 훨씬 더 급속히 감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급속한 성장은 임금노동에 가장 유리한 조건이라고 평한다. 이 측면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과 『자본론』에 더 상세히 개진되어 있다.

물론 맑스가 경쟁 자체를 긍정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생산력의 증가, 사회적 부의 확대 등으로 귀결하는 자본주의적 발전은 자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사회의 토대를 자본주의 안에 마련한다는 것이 맑스의 통찰의 핵심이다.

 

  1. 계급투쟁

경쟁이 자본의 본성이 발휘되는 방식이자 앞에서 말한 대로 인간의 창조적 힘의 가장 극악한 형태의 낭비이므로 자본과의 싸움의 핵심은 곧 경쟁과는 다른 원리에 입각하는 데 있다. 바로 협동 혹은 협력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의 견해와 반대로 맑스의 입장에서 협동(협력)이 바로 자유의 원천이다.

따라서 다른 한편으로 자유경쟁을 인간의 자유의 궁극적인 발전으로 보고 자유경쟁의 부정을 개인의 자유의 부정 그리고 그러한 자유에 기반한 사회적 생산의 부정에 상당하는 것으로 보는 일의 불합리성이 나온다. 그것은 단지 자본의 지배라는 한정된 기반 위에서 가능한 종류의 발전일 뿐이다. 따라서 동시에 이러한 유형의 개인의 자유는 모든 개인적 자유의 가장 철저한 폐지에 해당하며, 객체적인 힘의 형태를 띠는 , 아니 실로 위압적인 사물들―서로 연관된 개인들로부터 독립된 사물들―의 형태를 띠는 사회적 조건들에 개인들을 가장 완전히 종속시키는 것이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지금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는 맑스가 분석한 고전적 자본주의와는 분명 다르다. 따라서 맑스의 분석들 중 현대 자본주의에는 곧바로 적용되지 않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자들의 행태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경쟁의 원리가 아니라 협동의 원리가 자본주의의 극복에서 핵심적임은 변함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네트워크 모델이 주된 패러다임이 된 현대 자본주의에서 경쟁과의 싸움의 가능성은 어떠한가? 무한경쟁을 전면화하는 듯한 신자유주의의 지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고민해볼 문제들이다.

 

  1. 정리 : 세 차원의 구분

① 내적 법칙 : 잠재적, 비가시적

② 외적 현상(경쟁) : 가시적, 강제적 (* 법칙의 실행)

③ 결과 : 축적의 확대, 기계화에 따른 생산력의 증가, 자본가의 수의 감소(경쟁약화), 노동자들의 수가 증가(경쟁강화), 노동계급의 일부의 빈민화, 계급투쟁.

[맑스의 경쟁 비판 끝]

 

[부록]

1. “만일 임금노동자 계급 전체가 기계에 의해 말살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는가! 임금노동 없이 자본은 자본이기를 그치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임금노동과 자본』)

2. “그렇다면 경쟁은 모든 종류의 노동에서 노동할 수 있는 시간을 다 노동하도록, 즉 잉여노동시간을 노동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3. “자본들 사이의 경쟁은 총 이윤을 나누는 관계만을 바꿀 수 있다. 총 이윤과 총 임금의 관계는 바꾸지 못한다. 이윤의 일반적 수준은 총 이윤과 총 임금의 관계이며, 이는 경쟁을 통해 변하지 않는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4. “로마 황제들의 전제가 로마의 자유로운 ‘사법(私法)’의 전제이듯이, 자본의 지배가 자유경쟁의 전제이다. 자본이 약할 때는 이전 생산방식들 혹은 자본의 등장으로 사라질 생산방식들의 버팀목들에 의존한다. 자본이 자신이 강하다고 느끼면 이 버팀목들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법칙들에 상응하여 움직인다. 자신이 발전에 장벽이라고 느끼고 자신을 그렇게 의식하기 시작하자마자 자본은, 자유경쟁을 제한함으로써 자본의 지배를 더 완전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형식들에서 도피처를 찾으며 동시에 자신의 해체와 자본에 의존하는 생산방식의 해체를 알리는 전령이 된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5. “경쟁은 자본의 내적 법칙들을 실행하고 개별 자본에 대한 강제적 법칙으로 만들지만 법칙들을 창안하는 것은 아니다. 실현할 뿐이다. 그 법칙들을 단지 경쟁의 결과로서 설명하는 것은 자신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함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6.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규정의 법칙, 개별 자본가로 하여금 사회적 가치 아래로 자신의 재화를 팔도록 강제함으로써 새로운 생산방법을 적용하는 개별 자본가들을 지배하는 법칙, 바로 이 법칙이 강제적 경쟁의 법칙으로 작동하여 경쟁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방법을 채택하게 만든다.”(『자본론』1권)

7. “노동의 도구는 기계의 형태를 띠면 즉각적으로 노동자 자신의 경쟁자가 된다. 기계에 의한 자본의 자기확대는 그때부터 그 생계수단을 기계에 의해 파괴당한 노동자들의 수에 정비례한다.”(『자본론』 1권)

8. “따라서 성과급은 개별 임금들은 평균 이상으로 올리지만 이 평균 자체는 낮추는 경향을 가진다.”(『자본론』 1권)

9. “고용된 노동자들의 과잉노동이 산업예비군의 숫자를 불리며, 반대로 산업예비군의 존재가 고용된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더 큰 압박으로 인해 고용된 노동자들은 과잉노동에 굴복하고 자본의 명령에 종속되게 된다.”(『자본론』 1권)

10. “경쟁이 옛 노동도구들을 그 자연적 수명이 다하기도 전에 새로운 도구들로 갱신하도록 강제한다. 특히 결정적 위기가 일어날 때 그렇다.”(『자본론』 2권)

11. “개별적인 것들은 여기서 사회적 힘의 부분으로서만, 덩어리의 원자로서만 중요하다. 경쟁이 생산과 소비의 사회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형태로이다.”(『자본론』 3권)

<부록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