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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신용과 자본의 한계


  • 저자  :  Karl Marx
  • 원문 :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자본론』(Das Kapital)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10년 쯤 전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자본과 그 한계 :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읽기’라는 제목으로 8회에 걸쳐서 한 일련의 강의 가운데 7강의 강의안을 조금 고쳐서 올린 것이다. 


이전 강의(6강)까지 논의된 자본의 장벽들

[생산]

  1. 잉여가치는 전체 노동일에서 필요노동을 뺀 부분이므로 필요노동이 그 장벽이다.
  2. 잉여가치가 증가하는 비율은 생산력이 높아질수록 낮아진다.

[유통(교환)]

  1. [사용가치의 측면] 생산물에 대한 욕구가 장벽이다. →유통영역의 확대, 시장의 개척.
  2. [교환가치의 측면] 교환되어야 할 잉여등가물이 필요하다. →생산부문의 확대가 필요.

[노동자]

  1. 이윤의 실현을 위해서는 임금으로부터 오는 소비능력 이상의 소비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없다.
  2. 생산력의 발전 등에 의한 필요노동의 감소는 노동자들의 교환능력(소비능력)을 떨어뜨린다.

[유통시간]

  1. 유통시간은 자본의 가치창출에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 시간에 의한 공간의 말살, 신용
  2. 유통시간을 없애려는 자본의 노력은 자본 자신의 기반인 교환을 제거하려는 노력이므로, 스스로를 지양하려는 노력이다.

신용과 자본의 한계

I.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신용에 관한 논의 (펭귄 영어본 659-660, 670-671, 한국어본 2권 후반부)

 

맑스는 이미 여러 군데에서 조금씩 신용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이 지점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논의한다.

 

  1. 신용과 유통시간

“따라서 유통 시간 없는 유통은 자본의 필연적 경향이다.” 지난번 강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유통시간(생산한 상품을 판매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제로에 가까워질수록 잉여가치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본의 경향이 신용을 발생시킨다. “이 경향이 신용 및 신용의 장치들을 근본적으로 규정한다.”

 

  1. 신용과 자본의 양적 한계 혹은 개별성의 극복

이와 동시에 맑스가 지적하는 것은 자본이 신용의 형식으로 “자신을 개별 자본들로부터 구분되는 것으로서 정립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맑스는 같은 말을 조금 바꾸어서 개별 자본이 신용의 형식으로 “자신을 그 양적 장벽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정립하려고” 한다고도 한다. (여기서 ‘자본’이란 ‘자본 일반’과 같은 말이다. 맑스는 자본 일반과 개별 자본을 개념적으로 구분한다. ‘자본에는 국적이 없다’라는 말은 전자에 해당하는 말이다.)

 

  1. 가공架空자본(의제擬製자본)과 자본의 집중

이어서 맑스는 이러한 경향의 최고의 결과로서

① 가공자본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는 영어로 그냥 ‘fictitious capital’라고 썼으나 자본론에서는 ‘Das fiktive Kapital’라고 되어 있다.]

② 자본의 집중, 즉 중앙집중화하는 개별 자본들에서 자본의 개별적 다수성이 부정되는 현상을 지적한다.

 

  1. ‘유통시간 없는 유통’의 두 형태

이어서 맑스는 ‘유통시간 없는 유통’의 두 형태를 설명한다.

① 신용은 화폐를 단순한 형식적 계기로 정립하려고 시도하며 그리하여 자본 즉 가치가 되지 않으면서 자본의 변태(형태변환)를 매개한다. 이렇듯 화폐 자체가 유통의 산물이듯이, 신용도 유통의 새로운 산물이다. [신용은 동시에 쌍방향으로 오고가는 교환이 아니다. 흔히들 하는 말로 ‘미리 당겨’ 쓰는 것이란 오고 감이 시간적으로 분리된 것을 말한다. 교환의 경우에는 화폐가 구매의 수단 즉 유통수단이지만 신용의 경우에 화폐는 지불수단으로서 기능한다.]

② 다른 한편, 자본은 유통시간 자체에 생산시간의 가치를 부여하려고 시도한다. 즉 유통(시간)을 매개하는 다양한 기관들이 생기게 된다. 이 모두가 화폐로서, 자본으로서 정립된다. [이는 상인자본(상품거래자본과 화폐거래자본)의 자립화를 낳게 된다. 그러나 상인자본은 잉여가치를 창출하지는 못하며, 다만 생산과정에서 창출된 잉여가치의 분할에는 참여한다. 이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는 분석되지 않고, 자본론 3권에서 논의되고 있다.]

 

  1. [정리] 생산시간과 유통시간

① 유통시간은 자본이 자본으로서 특수한 운동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유통시간 동안 자본은 형태의 변화(변태)를 거친다.

② 생산시간은 자본이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시간이다. 과정 중의 자본이며, “노동으로부터 그 산 영혼을 흡수하는 창조적 자본”이다.

 

  1. 자본의 분할운용

실제로 생산시간이 유통시간에 의하여 중단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데, 이는 자본이 분할되어 운용되기 때문이다. 한 부분이 생산국면에 있을 때, 다른 부분은 유통국면에 있게 된다. 결국 활동 중인 자본은 전체가 아니라 1/x이다. 혹은 특정의 자본이 예를 들어 신용에 의하여 두 배로 늘어나는 형태를 띨 수도 있다. 이 경우 (아마도 상품을 담보로) 돈을 빌린 원래의 자본에게는 유통시간이 마치 없는 듯이 보이지만, 대신 들어선 자본은 유통시간을 거쳐야 하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누가 소유주이냐를 별도로 한다면, 하나의 자본이 둘로 나뉜 것과 같다. a와 b가 각각 둘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a가 b를 흡수하고 나서 a와 b로 나뉜 것과 같다. “이러한 과정에 대한 망상들은 신용을 신비화하는 자들―이들이 채권자들인 경우는 드물고 오히려 채무자들이다―사이에 잦다.”

 

  1. 화폐, 유통시간 그리고 신용

우리가 자본과 그 유통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화폐의 도입이 발견이 아니라 전제인 사회적 발전단계에 있는 것이다. 화폐가 단순히 가치의 상징이 아니라 그 직접적인 형태 자체로 가치를 가지는 만큼, 그런 만큼 화폐는 자본의 유통을 가속화하기보다 지연한다. 화폐는 유통수단의 측면에서나 그리고 자본의 실현된 가치라는 측면에서나 공히 유통비용에 속하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유통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사용된 노동시간인 한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순환의 질적인 계기―자본의 자기자신으로의 복귀, 즉 독립적인 가치로의 복귀―를 나타내는 한에서 그렇다. 어떤 측면에서도 화폐는 가치를 증가시키지 않는다.

① 한 측면에서 화폐는 가치를 나타내는 귀금속 형태이다. 이는 노동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잉여가치의 공제를 나타낸다.

② 화폐는 유통시간을 절약해주는 기계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계가 노동을 들여야 되는 것 즉 노동의 산물인 한에서 화폐는 자본에 대하여 생산공비로 나타난다.

★ 여기서 맑스가 매우 정밀하게, 그러나 이해하기는 조금 어렵게 말하는 바의 골자는, 가치를 포함한 모든 물질의 흐름은 그것이 화폐와의 교환을 매개로 하는 한에서는 지연된다는 말이다. 신용은 바로 이 지연을 제거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신용과는 다른 맥락이지만, 가령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거래는 화폐와의 교환이라는 매개의 상당 부분을 제거한 것이다.

이렇듯 직접적인 형태의 화폐는 유통의 경비이기 때문에 자본의 노력은 화폐를 자신의 목적에 적합한 형태로 전환시키는 방향으로 향한다. 노동시간이 들지 않고, 그 자체로 가치가 없는 유통의 계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은 과거로부터 이월된 직접적 실재로서의 화폐를 지양하고 그것을 단지 자본에 의하여 정립된 것으로 그리고 마찬가지로 지양된 것으로, 순전히 잠재적인(rein Ideelles) 것으로 전환시키는 데로 향한다.” 직접적인 형태의 화폐가 자본의 유통에 장벽이었는데, 자본은 이를 신용을 통하여 지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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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자본론』에서의 신용에 관한 논의

[『자본론』 3권 27장, 30, 31, 32장 등에서 발췌 정리한 것이다. 직접 인용의 경우에는 김수행 번역본을 참고하되, 독어본을 기준으로 조금씩 고쳐서 옮겼다.]

 

1. 신용의 필연성  

이윤율균등화(운동)를 매개한다. 자본의 이동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자본들 사이의 경쟁을 일반화하고 따라서 이윤율의 균등화를 낳는 데 기여한다. 󰡔자본론󰡕 3권 10장 참조.

 

2. 유통비용 절감

1) 화폐는 그 자체가 가치인 한 유통비용의 하나가 된다. 화폐는 신용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3가지 방식으로 절약된다.

① 거래의 큰 부분에서 화폐가 전혀 사용되지 않음으로써.

②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가속화

ㄱ. 더 소량의 화폐 혹은 화폐상징이 동일한 역할을 하는 것(은행업의 기술)

ㄴ. 신용이 상품변태속도를 가속화하여 이에 따라 화폐유통속도가 가속화된다.

③ 지폐에 의한 금화의 대체

2) 신용은 유통(상품변태)의 개개의 국면을 가속시키며 그와 함께 자본변태 및 재생산과정 일반을 가속화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신용은 구매행위와 판매행위를 오랫동안 서로 분리시킬 수 있으며 이리하여 투기의 바탕이 된다.)

 

3. 주식회사의 형성

이로써 다음과 같이 된다.

1) 생산규모와 기업의 거대한 팽창

2) 자본 → “개인자본에 대립하는 사회자본(직접적으로 결합한 개인들의 자본)의 형태를 직접적으로 취”한다. 개인기업에 대립하는 사회기업으로서 등장.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자체의 한계 안에서 사적 소유로부터 자본을 지양하는 것이다.”

3) 기능자본가의 단순한 관리인으로의 전환. 그리고 자본소유자의 단순한 소유자―화폐자본가―로의 전환. 배당이 이자와 기업가이득을 포함하고 있다 할지라도 “이 총이윤은 오직 이자의 형태로서만, 즉 자본소유에 대한 단순한 보상으로서만 취득된다.” 자본소유는 이제 현실적인 재생산과정에서의 기능 및 관리기능으로부터 분리된다.

이리하여 이윤(···)은 오로지 타인의 잉여노동의 단순한 전유로서 나타나는데, 이는 생산수단의 자본으로의 전환으로부터 즉 생산수단이 현실적인 생산자들로부터 분리되는 것(소외)으로부터, 생산수단이 타인의 소유물로서 현실적으로 생산과정에서 활동하는 (관리인으로부터 최하의 일용노동자에까지 이르는) 개인에 대립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한다. 주식회사에서는 기능이 자본소유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고 그리하여 노동도 생산수단 및 잉여노동의 소유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최고의 발전이 낳는 이러한 결과는 자본을 생산자들의 소유그러나 이제는 개별 생산자들의 사적 소유로서가 아니라 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 또는 직접적인 사회적 소유로 재전환시키기 위한 필연적인 통과점이다. 더욱이 이러한 결과는 재생산과정에서 아직도 자본소유와 결부되어 있는 모든 기능들을 결합된 생산자들의 단순한 기능으로, 사회적 기능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통과점이다.

 

주식회사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안에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철폐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를 지양하는 모순인데 주식회사는 첫 눈에 명백하게도 새로운 생산형태로의 단순한 통과점으로서 나타난다. 주식회사는 현상에서도 그러한 모순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주식회사는 한편에서는 일정한 분야에서 독점을 낳고 이리하여 국가의 간섭을 불러일으킨다. 다른 한편에서 주식회사는 새로운 금융귀족을 재생산하고 발기인이나 창립자나 명목만의 임원의 형태로 새로운 종류의 기생층을 재생산하며 회사창립이나 주식발행이나 주식거래와 관련된 투기와 사기의 제도 전체를 재생산한다. 결국 주식회사는 사적 소유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사적 생산이다.

 

4. 주식회사 제도

이는 자본주의 체제의 바탕 위에서 자본주의적 사적 산업을 철폐하는 것이며, 이것이 확산되어 새로운 생산분야를 장악함에 따라 그만큼 더 사적 산업을 파괴하게 된다. 이와는 별도로 신용은 개별자본가에게 일정한 한계 안에서 타인의 자본과 소유, 그리하여 타인의 노동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제공한다. 자기자본이 아니라 사회자본에 대한 지배력은 자본가에게 사회적 노동에 대한 지배력을 준다.

어떤 사람이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자본―또는 세상 사람들이 그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본―은 신용이라는 상부구조를 위한 토대로 될 뿐이다. (···) 모든 척도들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안에서 다소간 인정되고 있었던 모든 해명근거들이 지금은 사라져 버린다. 투기상인이 도박에 걸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사회적 소유이다. 자본의 기원이 저축이라는 이야기도 역시 불합리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투기꾼은 바로 타인들이 자기를 위하여 저축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하나 절제라는 문구도 자본가의 사치―이것이 이제는 신용을 얻는 수단으로 되고 있다―에 의하여 완전히 반박되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상대적으로 덜 발달한 상태에서는 아직도 일정한 의미를 지녔던 관념들이 이제는 전혀 무의미한 것으로 된다. 성공이나 실패 모두가 자본의 집중을 야기하며 이리하여 최대의 규모에서의 수탈(Die Expropriation)을 야기한다. 수탈이 이제는 직접적 생산자들로부터 중소자본가들 자신에게까지도 미치고 있다. 수탈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출발점이며,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목표는 수탈을 완성단계까지 진행시켜 결국에는 모든 개인들로부터 생산수단을 수탈하는 것이다. 즉, 생산수단은 사회적 생산의 발달에 따라 사적 생산의 수단이나 생산물이기를 멈추며 결합된 생산자들의 사회적 생산물임과 동시에 그들의 수중에 있는 생산수단, 이리하여 그들의 사회적 소유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이러한 수탈이 대립적인 형상으로, 즉 소수가 사회적 재산을 전유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신용은 이 소수에게 순전한 사기꾼의 성격을 점점 더 부여하고 있다. 소유권은 이제 주식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소유권의 동향과 이전은 증권거래소의 투기의 결과일 따름인데, 증권거래소에서는 작은 고기들은 상어의 밥이 되고 양은 거래소 이리들의 밥이 된다. 주식회사제도에서는 낡은 형태즉 사회적 생산수단들이 개인적 소유로서 나타나는 낡은 형태와의 대립이 이미 존재한다. 그러나 주식이라는 형태로의 전환은 아직도 자본주의의 틀 안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전환은 사회적 부로서의 부의 성격과 사적 부로서의 부의 성격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기는커녕 이 대립을 새로운 형태로 전개시키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5. 협동조합공장(Die Kooperativfabriken, co-operative factories)

[이는 오늘날의 자주관리에 해당한다.]

“노동자들 자신에 의해 운영되는 협동조합공장은 ··· 기존제도의 모든 결함을 재생산하며 또 재생산하지 않을 수 없지만, 낡은 형태 내부에서 새로운 형태가 출현하는 최초의 실례”

“협동조합공장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부터 발생하는 공장제도 없이는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며,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부터 발생하는 신용제도 없이는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신용제도는 자본주의적 개인기업을 자본주의적 주식회사로 전환시키기 위한 주요한 바탕을 이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협동조합을 다소간 국민적 규모로 점차로 확장시키기 위한 수단을 제공한다. 자본주의적 주식회사는 협동조합공장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으로부터 연합에 기반을 둔 생산방식으로의 이행형태인데, 다만 전자에서는 그 대립이 소극적으로/음성적으로(negativ) 철폐되고 후자에서는 적극적으로(positiv) 철폐되고 있을 뿐이다.”

“신용의 발달―그리고 그것에 포함되어 있는 자본소유의 잠재적 지양”

 

6. 자본의 역사적 과제와 신용

이리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이 명백하게 된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의 대립적 성격에 바탕을 둔 자본의 가치화는 생산의 현실적인 자유로운 발전을 오직 일정한 정도까지만 허용하며 따라서 사실상 생산에 대한 내재적인 질곡과 장벽을 구성하고 있는데, 이 질곡과 장벽이 신용제도에 의하여 끊임없이 돌파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용제도는 생산력의 물질적 발전과 세계시장의 형성을 촉진하는데, 이러한 것들을 새로운 생산형태의 물질적 기초로서 일정한 수준에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역사적 과제이다. 동시에 신용은 이 모순의 격렬한 폭발즉 공황을 촉진하고 이리하여 낡은 생산양식을 해체하는 요소들을 강화한다.

 

7. 신용제도에 내재하는 이중적 성격

① 자본주의적 생산의 동기를 가장 순수하고 가장 거대한 도박과 사기의 제도로까지 발전시키고 사회적 부를 수탈하는 소수의 수를 점점 더 제한한다.

② 새로운 생산방식으로의 이행형태를 구성한다.

이를 맑스는 “사기꾼과 예언자를 잘 혼합시킨 성격”이라고 한다.

 

8. 생산과정의 발달, 신용, 투기

더욱이 최초의 거래가 상품가격의 등락을 노리는 투기에 의해 촉발되면 될수록 환류는 그만큼 더 불확실하게 된다. 그러나 노동생산성과 대규모 생산이 발달함에 따라 (1) 시장은 확대되고 생산지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며, (2) 따라서 신용이 장기화되지 않을 수 없으며, (3) 그 결과로 투기적 요소가 거래를 점점 더 지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은 명백하다. 멀리 떨어진 시장을 위한 대규모 생산은 생산물 전체를 상업의 수중에 맡긴다. 그러나 국민의 자본이 두 배가 되어 상업이 자기 자신의 자본으로 국민의 총생산물을 구매하여 그것을 다시 판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신용은 필수적이며, 신용의 규모는 생산의 가치량의 증대에 따라 증대하고, 신용의 기간은 판매시장이 멀어짐에 따라 연장된다. 여기에서 상호작용이 생긴다. 즉 생산과정의 발달은 신용을 확대하고, 신용은 또한 산업활동과 상업활동을 확대시키게 된다.

 

9. 공황의 궁극적 원인

실제로는 생산에 투하된 자본의 보충은 비생산적 계급의 소비능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소비능력은 부분적으로는 임금을 규제하는 법칙들에 의해 제한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그들은 자본가계급을 위해 이윤을 낳는 한에서만 고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 제한되고 있다. 언제나 모든 현실적 공황의 궁극적인 원인은, 생산력을 발달시키려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충동(마치 사회의 절대적 소비능력만이 생산력 발달의 한계를 설정하고 있는 것처럼 생산력을 발달시키려고 한다)에 대비한 대중의 궁핍과 제한된 소비에 있다.

 

10. 산업순환과 투기

불황국면에서 생산은 이전이 순환에서 도달하였던, 그리고 지금 그 기술적 토대가 마련되어 있는 수준 이하로 감소한다. 번영국면―중간단계―에서 생산은 그 기술적 토대 위에서 더욱 발전한다. 과잉생산과 투기의 국면에서 생산은 생산력을 그 최대한도로 긴장시키며 생산과정의 자본주의적 장벽을 넘어서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11. 모든 공황의 바탕

그리하여 첫눈에는 모든 공황은 단순히 신용․화폐공황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사실상 이 공황은 어음을 화폐로 전환시키는 문제일 따름이다. 그런데 이 어음들의 대부분은 현실의 매매를 대표하고 있으므로, 이 매매가 사회적 필요를 훨씬 능가하여 팽창하는 것이 결국 모든 공황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12. 진정한 축적과는 구별되는 화폐자본의 축적

그러나 화폐자본가는 모든 이윤(그가 얻어 자본으로 재전환시키는 모든 이윤)을 먼저 대부가능한 화폐자본으로 전환시킨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미 화폐자본의 축적―진정한 축적으로부터 파생된 것이지만 그것과는 구별되는 축적―을 보게 되며, 그것은 특수한 부류의 자본가들(화폐자본가․은행업자 등등)의 축적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화폐자본의 축적은 (재생산과정의 진정한 확대에 수반하는) 신용제도의 확장에 따라 증대할 수밖에 없다.

 

13. 화폐자본의 축적이 언제나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자본축적보다 클 수밖에 없는 이유

개인적 소비의 증대는, 화폐에 의해 매개된다는 이유로, 화폐자본의 축적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개인적 소비의 증대는 진정한 축적을 위한 화폐형태(새로운 자본투자를 개시하는 화폐)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정리]

자본의 분리, 분할, 특수화의 관점에서 본 자본주의의 전개 과정

① 시초 축적 : 생산수단의 생산자로부터의 분리(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주체와 객체의 분리)

② 생산적 자본(혹은 산업자본)의 내적 분할 :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③ 상품거래자본 혹은 상업자본(상인자본의 한 형태)의 분리 : 유통과정 중 상품의 화폐와의 교환(C-M)을 담당하는 기능이 특수화되어 산업자본으로부터 독립. 잉여가치를 창출하지는 않으나 잉여가치의 분할에 참여.

④ 화폐거래자본(상인자본의 한 형태)의 분리 : 유통과정 중 화폐의 지불과 수납, 차액의 결제, 당좌계정의 유지(부기), 화폐의 보관을 담당하는 기능이 특수화되어 산업자본으로부터 독립. 상품거래자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잉여가치를 창출하지는 않으나 잉여가치의 분할에 참여.

⑤ 화폐자본(이자 낳는 자본)의 분리 : 재생산과정(생산 +유통)으로부터의 분리.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잉여가치를 창출하지는 않으나 이자의 형태로 잉여가치의 분할에 참여. 은행.

⑥ 지대소득자 계층(rentiers) : 생산과정에 기여함이 없이 토지의 소유 자체를 근거로 잉여가치의 일부를 ‘지대’의 형태로 가져감. [현대에는 생산과정에 기여함이 없이 자산(부동산, 주식, 증권 등)의 소유 자체를 근거로 잉여가치의 일부를 가져가는 더 광범한 자산소득자(불로소득자) 층이 형성됨.]

⑦ 소유와 기능의 분리(주식회사) : 자본의 재생산과정에 기여함이 없이 자본의 소유 자체를 근거로 일종의 이자 같은 형태(배당금)로 잉여가치를 가져감.

→ 사회적 소유의 형성 :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한도 내에서 사적 소유를 철폐함.

⑧ 신용과 그 이중성 : 자본주의를 도박과 사기의 제도로 발전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생산방식으로의 이행형태를 구성함.




극장 커먼즈의 탄생: 하울라운드 2009-2017


  • 저자  : Alexis Frasz / Holly Sidford
  • 원문 :  The Birth of a Theatre Commons: HowlRound from 2009-2017
    (2018.10.03) /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4.0 International License (CC BY 4.0)
  • 분류 : 번역
  • 옮긴이 : 채희숙
  • 설명 : 이 글의 공동저자인 알렉시스 프라즈(Alexis Frasz)와 홀리 시드포드(Holly Sidford)는 헬리콘 협력체(Helicon Collaborative)의 공동디렉터다. 헬리콘 협력체는 창의성, 형평성, 그리고 환경의 지속가능성을 우리가 원하는 세계의 핵심적이고 상호관련된 요소들로 본다. 그들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창의적으로 표현하고 자신의 문화를 유지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문화적 평등은 건강한 사회에 필수라고 보며, 사람들이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고 한계를 넘는 아이디어를 개발 및 실현하는 것을 돕는다. 알렉시스 프라즈는 환경 문제를 해결하고 보다 공정하고 재생 가능한 사회로 전환하는 데 문화가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를 포함하여 문화, 환경 및 사회정의의 교차점에서 헬리콘의 연구를 이끌고 있다. 그녀는 문화 부문에 깊게 뿌리박힌 불공평성에 대항하기 위해 헬리콘의 작업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현재 그녀는 예술가 및 문화 지도자들이 사회경제적 정의를 위한 보다 광범위한 운동에 연대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홀리 시드포드는 관계들을 보고 부분들의 합보다 더 많은 것을 만드는 숙련된 시스템 사상가다. 그녀의 끝없는 호기심, 통찰력 있는 지성, 탁월함에 대한 의지는 헬리콘의 모든 작업을 떠받친다. 그녀는 역사가로서의 교육과 프로그램 개발자 및 자금 제공자로서의 경험을 이용해서 예술가의 역할을 증가시키고, 창의적 표현의 완전한 다양성을 인식하고, 예술 및 문화를 공동체의 생활에 좀 더 중심적인 부분으로 만들기 위한 헬리콘의 노력에 정보를 제공한다.

헬리콘 협력체에서 우리는 하울라운드가 그들의 이야기를 하는 우리를 도우려고 왔을 때 들떴다. 우리가 하울라운드를 사랑하긴 하지만 그것만이 들뜬 이유는 아니다. 마치 침술에서 침이 혈자리에 제대로 꽂힌 것처럼, 적절한 시기에 전해진 적절한 이야기는 시스템을 재등록하거나 바꾸는 것을 도울 수 있다. 우리는 하울라운드의 이야기가 특히 지금 이 순간과 공명하며, 극장 부문에서 그리고 그 외부에서 사고에 영향을 미치고 관행을 변화시킬 잠재력이 있다고 믿는다. 이 글은 왜 우리가 하울라운드의 이야기가 오늘날의 정치·경제적 맥락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에 관한 몇 가지 생각을 나눈다. (사례 연구 전문 읽기).

하울라운드는 비영리 극장 부문에서 형평성, 지속가능성, 타당성의 위기에 대응하여 2009년에 설립되었다. 그 해에 발표된 두 개의 연구조사인 토드 런던(Todd London)의 『충격적인 성쇠: 새로운 미국 연극의 삶과 그 시대』(Outrageous Fortune: The Life and Times of the New American Play)과 데이비드 다우어(David Dower)의 「기회의 문」(“The Gates of Opportunity”)은 아래의 것들을 찾아냈다.

* 거의 대부분의 지원금이 가장 크고 부유한 극장들로 가고 있었다. 그 극장의 관객들이 미국 인구 구성을 반영하고 있지 않음에도 말이다. (즉 그들은 나이 든 백인 부유층이었다.)

* 이러한 기관들은 최고 티켓값을 부과할 수 있도록 스타 출연자들로 블록버스터를 기획하는 식으로 그 기능이 상업적인 극장과 점점 더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 한편 엄청난 양의 활기찬 예술 창작 및 참여가 이런 기관들 바깥의 소규모 비영리 극장 또는 전국각지의 커뮤니티 환경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 전반적으로 연극은 예술적으로 성공적일 때조차도 자신의 작업으로 거의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던 예술가들의 ‘땀의 지분’에 힘입어 굴러갔다. 많은 곳에서 생활비가 증가하자 이런 메커니즘은 특히 다른 재산이나 수입원이 없는 예술가들에게 점점 더 유지될 수 없었다.

* 작품의 창작과 공유를 위한 재원, 정보, 플랫폼에 대한 접근은 주요 기관의 소수 ‘문지기’에 의해 엄중히 감시되었고, 다수의 예술가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이 보고서들은 몇몇 유용한 자료를 제공했지만 솔직히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이 부문의 사람들은 그러한 극장 모델이 예술적 가능성이나 공공이익을 실현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정치조직가이자 작가, 그리고 활동가인 조너선 매슈 스먹커(Jonathan Matthew Smucker)가 지적하듯이 “사회 시스템에 무슨 잘못이 있는지와 어떻게 시스템을 바꿀지에 대한 지식은 전혀 다른 범주의 지식이다.” 같은 해에 설립된 하울라운드는 바로 연극 분야의 문제에 대한 진단뿐만 아니라 가능성 있는 대안도 제공했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울라운드의 설립자들―칼(P. Carl), 다우어(David Dower), 가흐론(Jamie Gahlon), 매슈(Vijay Mathew)―은 비영리 극장이 직면한 문제가 단지 ‘연극 문제’가 아님을 알았다. 우리의 현 시대는 권력과 부의 소수에의 집중, 저임금을 통한 노동자 착취, 기회와 자원에의 접근을 막는 구조적 장벽이 계급 및 인종의 선을 따라 확대되는 것, 재정이 부족한 공적·사회적 재화 및 서비스, 그리고 기업이익을 위한 모든 것의 상품화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정치철학자이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의 저자 마이클 샌델은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사고 팔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난 30년 이상 시장(시장가치)은 전에 없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라고 쓴다. 비영리 극장 부문은 이 추세를 받아들였지만 극장은 문제의 근원이 아니었다. 극장 부문에서 잘못된 점은 자본주의가 미친 듯이 날뛰는 우리 사회가 가진 훨씬 더 큰 기능장애의 증상이었다.

자본주의가 고장났다고 주장하는 것, 적어도 다른 무엇보다 이익과 자유시장을 우선시하는 가장 공격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형태의 자본주의는 고장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 이상 급진적인 입장이 아니다. 교황이 그렇게 말했다. 미국 및 전 세계의 많은 저명한 경제 및 정치 지도자도 그랬다. 국제통화기금조차 지난 수십 년간 신자유주의 정책들이 득보다 해를 끼쳤으며,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동시에 지난 10년 동안 부자들 사이에서도 행복 및 웰빙의 감소가 있었다. 자본주의의 신조에 따라 우리는 하나의 종으로서 생존이 위협받을 정도로 우리의 자연 생태계를 파괴했다. 젊은 사람들이 특히 현 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 최근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2008년 대불황 시기에 성년이 된) 18세에서 29세 사이 미국인은 자본주의(45%)보다 사회주의(51%)에 더 긍정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고장’이라고 부르는 것 역시 오해의 소지가 있다. 자본주의는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안된 대로 정확하게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번영, 예술적 창조성, 생태적 건강, 문화적 전통, 또는 대부분의 다른 사회적 결과와 관련해서라면 자본주의 시스템은 중대한 설계 결함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하울라운드 팀 (왼쪽부터): 비제이 매슈, 베이미 가흐론, 라모나 오스트로우스키(Ramona Ostrowski), 아비게일 베가(Abigail Vega), 제이디 스토클리(JD Stokely). (사진: 안야 프루덴테(Anya Prudente))

체제를 개혁하는 데에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자본주의의 가치와 실천이 매우 일반화되어 있어서 종종 그것들이 ‘바로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으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고인이 된 훌륭한 어슐러 르 귄(Ursula Le Guin)은 이 역학에서 우리 자신이 하는 역할에 대한 중대한 오해를 일깨워주었다. “우리는 자본주의 안에 살고 있다. 그 힘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왕들의 신성한 권리도 그랬다. 어떤 인간의 권력도 인간에 의해 저항을 받고 변화될 수 있다.” 우리가 더 나은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우리의 현재 체제가 우리 외부에 본질적인 실재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인식해야만 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과거에 여러 번 해왔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체제에 변화를 일으킬까? 하울라운드의 설립자들은 버크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결코 기존의 현실과 싸워서는 상황을 바꿀 수 없다. 무언가를 변화시키려면 기존의 모델을 더 이상 쓸모없게 만드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그들은 연극 현장의 모든 문제들을 적어도 한꺼번에 전부는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모든 종류의 연극관계자들이 소통하고, 일을 공유하고, 생각을 교환할 수 있는 민주적인 플랫폼을 만들려고 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풀뿌리들의 목소리의 ‘소방호스를 열어서 우리 분야에서의 99%의 문제를 수렴함’으로써 분야 전체를 가시화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들은 그것이 연극계에서 새로운 종류의 민주적 조직화를 위한 기초이며, 다른 더 큰 변화를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믿을 수 없게 단순한 개입은 다음을 포함한다.

* 어떤 연극인이든 기고할 수 있는 저널

* 누구나 자신의 연극 관련 콘텐츠를 공유할 수 있는 무료 라이브스트리밍 TV 채널

* 미국 전역에서 공연되는 모든 새로운 연극들의 지도(地圖)

* 현장에 영향을 미치는 이슈와 아이디어들을 논의하기 위한 연극인 직접 회의

그것은 연극 분야를 위한 새로운 기반시설 실험이었다. 이는 이익·위계·경쟁을 극대화하는 것을 강화하도록 설계된 제도적 극장 구조와 달리 개방성·협업·공동체의 가치를 의도적으로 뒷받침하려 한 실험이었다.

혁명은 종종 자기 시대의 기술적 진보에 도움을 받는다. 2009년 하울라운드의 출현은 새로운 기술 도구 및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의 가능성에 의해 촉진되었고, 이는 제도 바깥에서 사람들이 조직하고 소통하고 규모 있게 일을 할 수 있게 했다. 이런 기술은 이미 언론에서 정치까지 정보와 콘텐츠에 대한 접근이 엄격하게 통제되던 많은 다른 장을 파열하고 있었다. 기술은 또한 점거운동 같은 일에 동력을 공급해서 개인들의 분산된 네트워크를 조직하고 집단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하울라운드는 무엇보다도 연극 분야에 유용한 도구세트가 되고자 했으며 그 목적을 실현했다. 수천 개의 글과 영상을 올렸고, 매달 45,000명 이상의 순방문자가 들어온다. 그러나 철학적인 차원에서 설립자들은 ‘커먼즈’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받았고, 그 생각을 발전시키려 했다. ‘커먼즈’란 다 소모되거나 열화(劣化)되지 않고 모두에게 사용되고 유익할 수 있도록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조차도 사적소유나 시장의 힘으로부터 반드시 보호되어야 하는 특정한 종류의 자원이 있다는 생각이다. 현재 우리의 맥락에서 보면 이 생각이 예스럽거나 대단히 이상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이는 우리가 이미 공기, 토양, 물과 같은 천연자원과 공원, 도로와 같은 공공재, 그리고 공익사업들을 관리하는 방법이다. (비록 이들 중 많은 것들 역시 사유화되고 있긴 하지만.) 커먼즈는 항상 사적소유와 시장을 합리적으로 점검하고 공공자원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하울라운드의 설립자들은 문화자원 역시 상업화와 사유화로부터 보호되는 커먼즈에 속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연극 분야의 기존 기반시설은 자원을 공유하거나 협업하거나 공동선 편에서 행동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하울라운드는 연극인들이 자원·작업·정보를 공유하고, 공유된 관심사와 목표를 중심으로 협력하는 것을 장려하며 가능케 하는 다른 종류의 기반시설이 되기를 추구했다.

하울라운드의 개입 결과로 연극 분야가 달라졌는가? 우리가 함께 이야기한 현장 리더들은 하울라운드가 짧은 활동기간 동안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고, 현장이 스스로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방식을 많이 변화시켰다는 데에 동의한다. 주류 극장의 문 바깥에 있는 목소리들의 ‘소방호스를 열’면서 하울라운드는 이전에 주변화되었거나 보이지 않았던 문제들과 관점들을 드러내는 것을 도왔고,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연결하고 조직하도록 해주었다. 하울라운드는 지식에 대한 접근을 민주화하여 인터넷에 접속하는 누구라도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연극 관련 자료의 국내 최대 아카이브 중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연극이 어떻게 그리고 어디서 가르침 받고 연구되는가에 영향을 미쳐서 전통적인 ‘연극 센터’ 바깥의 예술가들에게 가능성을 열었다. 장기적인 영향은 아직 모르지만 시스템 전문가들은 정보에 대한 접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변화시키고 사람들이 자기조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떤 체제에서든 변형을 창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두 지렛점이라고 말한다.

초기 하울라운드 회의: <교차로에서: 새로운 연극 부문에서 비영리 제작자와 상업적 제작자>(In the Intersection: Non-Profit & Commercial Producers in the New Play Sector), 워싱턴DC, 2011년 11월 4~5일

그러나 우리가 전반적으로 경쟁과 이익을 넘어 다양성·협력·참여를 중요시하고 지원하는 비영리 극장 시스템을 구현하기에는 아직 멀었다. 10~15년 전보다 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인식이 훨씬 커졌지만 이것은 아직 돈과 권력의 주목할 만한 재분배로 이어지지 않았는데, 돈과 권력이 여전히 극소수 기관과 개인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고 제한된 범위의 콘텐츠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향해 있다. 어떤 이들은 우리의 비영리 구조가 커먼즈의 가치와 실천을 규모 있게 지원할 수 있는지 의심한다. 커먼즈 이론가 데이빗 볼리어(David Bollier)는 우리가 이 가치들에 기반을 둔 ‘전혀 다른 일련의 기관, 법 체제, 사회적 실천’을 고안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다른 이들은 우애가 사회부문들에서 커먼즈 지향의 행위와 구조를 장려하고 지원하는 데 더 강한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우리에게는 제도화된 인종차별주의, 구조적인 부의 불평등, 추출적 경제 모델들, 커먼즈 자원의 광범위한 사유화 및 착취 등 극장을 둘러싸고 있는 더 큰 사회경제 체제의 불평등과 장애를 다루지 않고 연극 현장에서 상황을 바꾸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남았다. 이는 지난한 과제이지만 우리는 연극 및 문화 제작자들이 이러한 목적을 위해 일하는 많은 다른 새로운 경제 변화가들과 협력하여 좀 더 공정하고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미래 사회에 가까워지는 데에서 하나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벅찬 과제들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하울라운드가 지금까지 작업에서 충분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현장의 많은 이들이 하울라운드가 연극계와 전체 사회에 더 큰 구조적 변화들을 야기할 필요가 있는 어려운 대화를 위한 촉매제이자 조직자, 그리고 진행자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하울라운드가 미친 심대한 영향 때문이다.

하울라운드는 이미 다음 작업 단계를 논의하기 위해 현장의 이해관계자들을 모으기 시작하고 있다. 적절하게도 커먼즈의 다음 단계는 커먼즈 그 자체에 의해 정의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