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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주의와 커먼즈



커먼즈가 국제적 협치(governance)와 원조의 ‘다자주의 시스템’에 어떻게 적절한 연관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유엔―특히 국제의원연맹―에 몇 명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

 

2월 22일(금요일)에 있었던 「대중의 눈으로 본 다자주의 시스템: 매스컴의 영향」이라는 컨퍼런스 소모임에 참여해 도움을 줄 수 있어서 기뻤다. (컨퍼런스 자체의 제목은 「다자주의가 새로이 직면한 문제들―의회의 대응」이다.)

 

이 소모임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매체, 특히 인터넷이 유엔 같은 다자 기구들의 효율성, 신뢰도, 그리고 평판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내가 컨퍼런스에서 거둔 분명한 수확은 유엔에 있는 특정 활동주체들이 우리 시대의 긴급한 문제들을 해결할 다자 기구들의 능력에 대해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타당한 우려이다. 수많은 문제들이 세계 질서―기후변화, 불평등, 사이버전쟁, 데이터감시 등등―를 흔들어 댐에 따라 유엔이 문제를 논의할 포럼이 되고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할 권한도 제한되어 있고 협치의 내적 구조와 과정이 다루기 힘들기 때문에, 누구도 과감하고 시기적절한 행동이 가능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참여 기반 온라인 미디어의 부상은 유엔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유엔은 그 우려를 공개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커머닝을 매력적인 옵션으로 보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어떻든 조금이라도 존재함을 알게 되어서 기뻤다. 아쉽게도, 유엔 토론자들은 커먼즈를 매우 깊게 혹은 진지하게 탐구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것이 나의 느낌이다. 이는 썩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유엔에서 이루어지는 심의들에 참가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결국 그들 국가정부의 대표자들이고 국가권력과 종래의 정치의 거품에 푹 잠겨있다. 정책, 입법 및 기타 하향식 조치들이 문제를 다루는 가장 의미 있고 효과적인 방식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물론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다른 중요한 접근법들이 있다. 중앙집권적인 국가 및 다자 구조들 그 자체가 많은 경우 문제의 일부이다. 그 구조들은 권력을 너무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어서 정치적 술수, 미디어광학, 부패를 조장하여 현장에서의 실질적인 결과를 희생시킨다. 그 구조들은 자본친화적인 ‘시장 해법’에 특권을 부여하고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한 상향식의 창조적인 혁신을 손상시킨다. 국가관료들의 입장에서는 종종, 스스로의 이익과 자급자족을 주장하는 지역 기반의 안정적인 커먼즈가 자신들을 위협한다고 느낀다. 기타 등등.

 

아래는 그 모임을 위해 준비한 발표내용이다. 이 발표는 동영상에서 제시된 바로는 각 발표자에게 허용된 5분 제한에 맞추기 위해 축약되었다. 동영상은 여기서 볼 수 있다. 나의 발표는 11:50에서 16:40까지이다.

 

 

다자주의와 커먼즈

 

얼마 전만 해도 시민들이 보고 들을 수 있는 뉴스·정보·문화의 유형들을 국민국가가 엄격히 통제했습니다. 지금은 달라졌지만요. 어떤 독재 정권들은―인터넷의 존재에도 불구하고―여전히 자국 내의 커뮤니케이션을 엄밀히 통제하고 있지만, 머클루언(Marshall McLuhan)이 1960년대에 예견한 상호연결된 지구촌이 실현된 지는 꽤 되었습니다. 쉽고 값싼 초국적 커뮤니케이션이 세계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일반화되었습니다. 다른 문화나 나라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우리의 매일의 삶에 늘 영향을 미칩니다.

 

사람들이 승인되지 않은 새로운 외국의 정보를 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들 나름으로 뉴스, 비디오, 팟캐스트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름의 소프트웨어 코드를 작성할 수 있고 나름의 위키들을 개발할 수 있으며 별로 많지 않은 자원으로 새로운 운동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전과는 달리 이제 사람들이 전지구적인 청중을 상대로 말할 도덕적·정치적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것을 전통적 국가와 미디어 당국은 통제할 수 없습니다. 분산된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각각의 국가들의 정치적·문화적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으며 전지구적 문화를 종종 심오하게 변화시켰습니다.

 

물론 국민국가들과 다자 기구들은 이러한 사태전개가 혼란을 초래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권위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들의 의지를 부과하기에 충분한 강제력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우는 적법성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정당성과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닙니다. 후자가 좀더 열려 있는 문제이지요. 국가정부들이 이 문제에 영향을 미치려 시도할 수는 있지만 결국에는 시민들만이 이 문제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 긴장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것은 현재 원격통신·경제·정치의 구조 자체에 내장되어 있습니다. 사실 트럼프 행정부는 대체로 새로운 미디어와 종래의 국가 기구들 사이의 긴장을 활용하는 데 기반합니다.

 

내가 보기에 이 문제의 특징은 다음 둘 사이의 심대한 구조적 갈등입니다. 즉 ① 이전 시기의, 전문가가 주도하는 위계적이고 중앙집중화된 기구들과 ② 개방된 네트워크들과 다양한 앱들이 가능하게 하는, 참여에 기반을 둔 자기조직적인 상향식 공동체들 사이의 갈등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양한 새로운 대중집단과 하위문화를 쉽게 나름대로 창출할 수 있을 때에는, 중앙집권적 국가권력이라는 생각, 그리고 하나의 국민으로서 공유한 정체성이라는 생각도 수세에 몰리게 됩니다.

 

소셜 미디어가 입증된 위험들―가짜뉴스, 페이스북 알고리즘, 권위적 포퓰리즘과 혐오의 장소들―을 많이 가지기는 하지만 개방된 네트워크들이 (특히 커먼즈로서 조직되었을 때에는) 매우 중요한 힘 즉 창조적·생산적·민주적인 힘을 가지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나에게 문제는 국가권력과 다자 기구들이 과연 커먼즈의 이러한 건설적 힘을 인지하고 지원할 수 있느냐입니다.

 

저는 활동가이자 정책전략가로서 지난 20년 동안 세계 전역에서 커먼즈와 함께 연구하고 일해 왔습니다. 저는 하딘(Garrett Hardin)의 1968년 에세이에서 유명하게 되고 오래 회자되어온 ‘커먼즈(공유지)의 비극’이라는 어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딘의 주장과 반대로, 커먼즈는 주인이 없는 자원으로 구성되지 않습니다. 커먼즈는 당신이 원하는 만큼 취할 수 있는, 누구에게나 공짜인 것이 아닙니다.

 

커먼즈는 공유된 부를 장기적으로 파수(把守)하기 위한 자기조직화된 사회시스템입니다. 커먼즈에서는 시장이나 국가에서와는 뚜렷하게 다른 형태의 운영과 자급이 이루어집니다. 커머너들은 그들의 특수한 맥락과 문화에 적합한 나름대로의 규칙, 사회적 관행, 전통 그리고 의식(儀式)을 고안해냅니다. 그들은 무임승차자들을 자율적으로 감시하고 규칙을 어기는 사람들을 처벌합니다.

 

커먼즈는 2009년에 자신의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한 고(故)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이 연구한 작은 규모의 자연자원들(농지·어장·삼림·관개용수 등)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커먼즈는 또한 고등교육, 도시, 다양한 사회적 환경들, 그리고 디지털 공간들에 존재하는 시스템들의 공유된 관리로 구성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례들에서 즉 ① 프리소프트웨어, 오픈소스소프트웨어, 그리고 위키피디아 ② 과학과 학술을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만드는 오픈액세스 학술지들 ③ 교과서와 커리큘럼이 학생들에게 더 쉽게 제공될 수 있게 하는 오픈교육자원 ④ 지적재산권 산업이 부과하는 독점렌트(monopoly rent, 독점에 기반을 둔 초과이익)를 무시하고 모든 것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아래 공유하기에서 특히 튼실한 형태의 커먼즈를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곧 언급할 다른 많은 커먼즈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기본 요점은 커먼즈가 ‘비극’이 아니라 생성적이고 가치창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와 다자 기구가 커머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커먼즈는 이들에게 엄청난 파트너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정치적 의미에서나 경제적 의미에서나 더 큰 포용과 참여 그리고 더 큰 자유가 실현되는 세계를 원한다면, 우리는 커먼즈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렌트(Hannah Arendt)의 힘 개념을 기억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녀는 󰡔인간 조건󰡕에서 힘이 “사람들이 같이 행동할 때 그 사이에서 생겨나고 사람들이 흩어질 때 사라지는” 어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달리 말해, 힘은 우리의 기구들 자체에 내재하지 않습니다. 힘은 끊임없이 사회적으로 창조되고 재창조되어야 합니다. 많은 국가들과 다자 기구들은 힘과 인식된 정당성을 유지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으나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의 긴급한 요구에 대해 믿을 만한 효과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국가기관들이 다양한 커먼즈와 파트너십을 이루어 아래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 커먼즈가 제공할 수 있는 생성적·창조적 힘을 높이기.

2)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책임감 있는 자치에 힘을 실어주어 온전한 참여를 양성하고 간접적으로는 국가의 정당성을 높이기.

3) 이해관계자들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지역적으로 적절하고 안정적이고 자활적인 해결책들을 지원하기.

4) 생태적 문제들에 대해 경계를 가로지르는 협력을 가능하게 하기.

 

달리 말해, 국가와 다자 기구들은 더 큰 맥락에서 소셜 미디어의 도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능란한 메시지 교환과 더 좋은 트윗만이 핵심이 아닙니다. 커먼즈의 인식되지 않은 큰 힘으로 더 심층적인 삶의 양태를 발전시키는 것이 핵심입니다. 사실 이것은 프랑스 개발청이, 아프리카와 프랑스어권 국가들에서 커먼즈가 그들의 개발 전략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면서 최근 해온 일들입니다.

 

따라서 확장된 사례로서 ‘소외 질병을 위한 이니셔티브’(DNDi)를 상상해봅시다. DNDi는 의약품 연구개발과 유통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 커먼즈, 국가 기구 및 민간 회사가 협동하여 만든 조직입니다. 이 조직은 의학적으로 중요한 약품을 로열티 없이, 비(非)독점적인 라이선스로 개방합니다. 그래서 이 의약품을 어디서나 값싸게 구할 수 있게 합니다.

 

또는 ‘인도주의 오픈스트릿맵 팀’(Humanitarian OpenStreetMap Team, HOT)이 아이티에서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이후 다양한 국가들을 어떻게 돕고 있는지 그려보십시오. HOT는 응급의료요원과 피해자들이 병원, 물 및 여타 필수품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웹지도를 만들기 위해 자원봉사 해커들을 한데 모읍니다. 이 주목할 만한 해결책은 커먼즈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지 관료주의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곡증대시스템’(SRI)은 전세계적인 오픈소스 커뮤니티로서, 쌀을 재배하는 농경학에 관한 조언과 지식을 교환합니다. 오로지 기존의 다자 채널 밖에서만 활동하는 SRI는 쌀 수확량을 2~3 배로 증가시키기 위해 스리랑카·쿠바·인도·인도네시아에 있는 농민들을 한데 결집시켜왔습니다.

 

우리는 ‘공동체 토지신탁’(Community Land Trust, CLT)이 어떻게 토지를 탈상품화해서 보통사람들이 더 많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저렴한, 라이선스가 없는 보철물을 생산하는 ‘오픈 보철 프로젝트’(Open Prosthetics Project)에 대해, 그리고 지식과 디자인은 오픈소스 방식으로 전세계적으로 공유하고 물리적인 것들(농장 설비, 가구, 주택)은 지역적으로 생산하는 ‘세계-지역적 생산’(cosmo-local production)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네덜란드의 ‘초원의 왕 프로젝트’(King of the Meadows project)는 문화적 유산과 연결된 생물다양성을 파수하기 위해 시민들을 결집해온 커먼즈입니다. ‘벵갈-페사’(Bangla-Pesa)는 케냐의 지역 통화인데 이것은 법정통화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이 가치를 교환하고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제 내 생각을 아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분산된 앱과 디지털 기술에 의해 가능해진 새로운 세상에 다자 기구들이 적응하려면, 긴급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커먼즈의 위대한 약속을 탐구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제어할 수 있게 하고, 관료적 국가시스템과 시장의 본래적 한계를 보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




상황은 삐께띠가 서술한 것보다 더 나쁘다

 



삐께띠의 통계의 문제는 그것이 세상이 얼마나 불평등한가를 매우 낮추어 말하고 있다는 데 있다. 소득에만 시야를 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부자들은 소득을 벌지 않는다. 그들은 자본 이득(capital gains)을 거두어들이며, 자본 이득은 소득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보고는 되는데, IRA가 10년 정도마다 자본 이득에 대한 연구를 할 뿐이다. 영국을 비롯한 많은 유럽 나라들은 아예 자본 이득에 대해 세금을 매기지 않으며 그래서 통계에 나타나지 않는다. 삐께띠의 작업의 중요한 결과들 가운데 하나는―이는 그의 책을 잘 읽는다면 알 수 있다―부의 격차가 소득의 격차보다 훨씬 더 크며 이는 부자들의 조세회피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는 기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에서, 아니 세계에서 제일 큰 기업들이 구글과 애플인데, 애플의 소득 전체가 미국이 아니라 아일랜드에서 이루어진다.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바로 이런 점이 삐께띠에게는 빠져있다. 소득 통계에서 빠져 있는 또 하나는 재산이 실제로 범죄와 사기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이다. 삐께띠에게 좋은 점은 그가 프랑스 소설가들이나 영국 소설가들이 경제학보다 부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이나 발자끄의 19세기 소설들이 재산을 버는 방법은 결혼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러나 발자끄는 모든 큰 재산의 뒤에는 큰 절도가 있다는 말도 했다. 『포브스』(Forbes)에 그 목록이 나온 러시아, 중국, 우크라이나의 최고 부자들은 장담컨대 소득을 저축해서 이런 부를 만들지 않았다. 더 높은 소득을 번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사기와 내부 뇌물수수로 재산을 훔쳤다. 미국에서 큰 재산이 형성되는 방식과 같은 방식이다. 마이어스(Gustavus Myers)가 쓴 『미국의 거대한 재산의 역사』(History of the Great American Fortunes)는 철도건설용으로 불하된 토지에서, 의회 의원에게 뇌물을 줌으로써 그리고 토지를 사유화함으로써 큰 재산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큰 재산은 자연자원, 토지, 공적 도메인을 사유화함으로써 형성된다. 부와 소득의 집중이 실제로 일어나기 시작한 1980년 이후의 시기, 삐께띠가 보여주는 이 시기는 바로 새처, 레이건, 옐친이 대표하는 사유화의 시기이다.

삐께띠는 격심한 불평등의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토론을 출발시켰다. 이제 필요한 것은 어떻게 이런 불평등이 생겼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나를 설명하는 것이다. 단지 재산 일반에 세금을 매기는 해결책은 (이것은 실행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인데) 치는 면이 너무 넓은 해머와 같다. 특정 종류의 부, 특정 종류의 재산 형성이 약탈적인데, ‘경제적 렌트’(economic rent)―지대(land rent), 자연자원 렌트(natural resources rent), 독점 렌트(monopoly rent), 혹은 금융부문이 벌어들이는 종류의 돈―가 바로 그것이다.[J is for Junk Economics에서의 허드슨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경제적 렌트’는 시장가격이 본래적 경비(가치)를 넘어서는 초과분이다. 비용을 들이지 않고 얻는 불로소득은 모두 경제적 렌트이다.―정리자] 삐께띠의 책은 이것을 논의하지 않고 마지막에 부에 과세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할 뿐이다. 맞지만, 어떻게 과세를 할 것인가, 무엇이 경제를 성장하게 만들기에 최고로 좋은 종류의 세금인가는 미래의 또 하나의 책의 주제로 남아 있다. 삐께띠가 논의하지 않은 것 가운데 하나는, 재산을 형성하는 데서 부채가 하는 역할이다. 1980년 이래 형성되기 시작된 부의 대부분은 1980년 이후 이자율이 낮아지면서 증가된 부채 레버리지 때문에 생겼다. 점점 더 많은 은행신용이 투입되어 부동산 가격, 주식 가격, 증권 가격, 모든 종류의 가격을 올렸다. (미술품 가격 상승도 이와 병행했다.) 소득에 대한 부의 비율의 증가와 함께 소득에 대한 부채의 비율의 증가가 일어났다. 이 부채상태와 순가치(net worth)는 매우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가구들이 가지고 있는 주된 자산은 집인데, 이 집 또한 큰 액수가 대출 담보로 잡혀 있으며, 기본적으로 99%가 1%에게 이자를 지불한다. 내가 보기에 금융 부문에서 가속화되어 온 것은 1%가 99%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빚지게 만드는 능력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보라, 집을 사고, 교육을 받고, 기타 기본적인 생활필수품을 사는 데로 접근하는 지점을 우리가 통제한다. 우리가 빌려주지 않으면 당신들은 집을 사지 못하고 교육을 받지 못하고 심지어 차도 사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들에게 충분한 이자를 매길 것이다. 당신들이 버는 돈을 사실상 다 우리에게 이자로 지불하게 될 것이다. 이와 동일한 논리로 기업사냥꾼들은 기업을 공격하여 더 많은 돈을 배당금으로 지불하라고 말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사실상 실질적 부가 해체되고 가공자본(fictitious capital) 혹은 가공적 부(fictitious wealth)라고 불리던 것―모두 기본적으로 부채 레버리지를 통한 부이다―이 증가한다.

도금시대(Gilded Age)[원래 미국의 1880년대와 1890년대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그 의미가 일반화되어 사업가들·은행가들(‘강도남작들’robber barons)이 경제를 망치면서 부를 축적하는 시대를 가리킨다.―정리자]가 막 시작되었다는 삐께띠의 결론은 맞지만 그의 논리는 내가 따르는 논리가 아니다. 그는 아담 스미스(Adam Smith)가 말한 것의 정반대를 말하고 있다. 스미스는 가장 빨리 망해가는 나라에서 이자율이 가장 높은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즉 높은 이자율로 망할 수도 있고 낮은 이자율로 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삐께띠는 수익률(rate of return)을 말하는데,[삐께띠가 말하는 자본수익률(rate of return on capital)은 이윤, 배당금, 이자, 지대 및 기타 자본에서 나오는 소득을 말한다.―정리자] 미국 및 여러 나라들에서 가장 큰 부문은 부동산 부문이다. 1945년부터 지금까지를 보면 부동산 부문은 소득을 올리지 않는다. 억만장자들이 부동산을 개인적 자선으로 운영한다는 식이다. 소득을 올린다면 소득세를 내야 할 것이고 신고를 해야 할 것인데, 그들은 소득을 올리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거두어들이는 렌트(임대료)가 거의 모두 이자로 지불되거나 감가상각 비용으로 책정된다. 그래서 삐께띠가 준거하는 것은 ‘이자, 세금, 감가상각비, 무형자산상각비 차감 전 이익’(Earnings Before Interest, Tax, Depreciation, and Amortization)이 아니라 그 한 부분, 즉 세금 빼고 이자 빼고 감가상각비와 무형자산상각비를 빼고 신고된 수입이다. 부동산 다음으로 부를 많이 축적한 곳은 석유산업이다. 이들도 소득을 신고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세금을 면하게 해주는 감모공제(depletion allowance)가 있거나, 아니면 이들의 모든 소득은 해외에서, ‘편의치적선’(flags of convenience)[상선의 소유주가 자신의 나라와는 다른 나라에 선박을 등록하는 것―정리자] 나라들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자본 이득을 포함한 실질적 총수입은 삐께띠가 보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둘째, 가령 미국의 국민소득계정(National Income and Product Account : NIPA)을 보면 1년 전 미국의 모든 기업이윤의 40%가 은행들, 즉 금융부문에서 거둔 것이다. 이 수익은 기본적으로 ‘이전 지불’(transfer payment)이다. 성장에 실질적으로 보탬이 되지 않는다. 금융서비스는 서비스가 아니다. 노상강도가 현금자동인출기 앞에 있는 당신에게 다가와서 ‘돈을 내놓거나 목숨을 내놓아라’라고 말하는 것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는 실제로 당신의 돈을 빼앗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금융 활동과 부동산 투기가, 월가에, 은행 경영자들 및 기업경영자들에게 지불되는 이 모든 돈이 정말로 성장인지 아니면 가공자본의 형성과 병행하는 일종의 가공적 성장인지의 문제가 있다. 지금 통계는 점점 더 허구적인 성격을 띠어가고 있는데, 자신들의 소득에 세금이 매겨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에 엄청난 액수의 돈을 지불하는 기업 세금담당 회계사들에 의해 통계가 작성되고 있을 정도이다. 호주의 탄광 부문에서는 호주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이 1년에 수십억을 거두어들이면서도 자신이 소득을 한 푼도 벌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만들기 의해 많은 돈을 지불한다.

크루그먼(Paul Krugman)은 신고전주의 경제학자이다. ‘신고전주의’는 ‘반(反)고전주의’를 의미한다. 그는 경제적 렌트 같은 것이 있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는 또한 은행들이 신용을 창출하지 않는다고 한다. 모든 은행들이 하는 일은 저축을 대출하는 것이라고 한다. 은행들이 신용을 창출하거나 자산가격을 부풀리는 일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고 한다. 그래서 크루그먼은 대체로 우파 쪽에 의해서 그들이 총애하는 자유주의 경제학자로 찬양된다. 그가 경제를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경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경제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했다면, 그는 노벨상을 타지 못했을 것이다. 노벨상은 경제적 렌트 같은 것이 없고 불로소득 같은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상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크루그먼은 회사의 경영자들이 훨씬 더 많이 받고 훨씬 더 많은 소득을 버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심지어 통계에 대해서도 틀렸다. 그가 전문적인 은행 로비스트임을 기억하라. 그는 은행에서 돈을 받는다. 그는 은행들을 규제하려는 정부에 대항하는 싸움에 은행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아이슬란드로 갔다. 은행들이 그를 좋아하는 것은 물론 그가 은행의 로비스트이기 때문이다. 그가 지적하는 월가의 소득을 보자. 미국의 조세법 아래에서는 월가의 소득은 실질적으로 일을 해서 벌어들인 소득이 아니다. 그들은 스톡옵션과 증권투기로 대부분의 돈을 번다. 이는 자본 이득으로 간주되며 정상적인 소득처럼 과세되지 않고 훨씬 더 낮게 과세된다. 이는 가공적인 관점, 무엇이 소득이고 무엇이 소득이 아닌가를 회계사의 눈으로 보는 관점이다. 세금담당 회계사들은 정부에 엄청난 돈을 먹여 납세(소득세)신고서의 범주들을 왜곡하고 마치 부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금융 형태의 부를 가시적인 부동산과 대조적으로 비가시적 부라고 부른다. 부유한 자들의 생각은 그들의 부를 비가시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만일 눈에 뜨인다면 세금이 매겨질 것이고 사람들의 원망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삐께띠가 한 것은 이 부를 가시화한 것이다. 적어도 그는 부 통계에 의해 ‘보라, 저기 부가 있고 우리는 그것을 측정할 수 있으며 우리가 얼마나 불평등한지를 볼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어떻게 이 부를 획득했는가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이 부에 대응하는 몫이 소득에서 발견되는 정도를 반영하는 소득세 명세서뿐이다. 이는 마치, 열쇠를 떨어뜨렸는데 떨어뜨린 곳을 보지 않고 빛이 있는 곳을 보는 것과 같다. 그가 작업할 통계자료는 소득세 기록뿐이며 그는 기술적으로 엄청난 작업을 해놓았다.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작업이다. 그러나 그 통계를 다시 처리하여 풀어내고 무엇이 그 뒤의 실제 현실인지를 찾아내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 이 월가와 금융 경영자들로 하여금 소득을 거두는 것을 가능하게 한 자본 이득이 무엇인지를 말해야 한다. 그들의 계약은 매우 분명하다. 기업경영자의 소득은 주식 가격에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보너스를 받거나 아니면 스톡옵션을 받는다. 만일 그들이 주식가격에 기반을 둔 보너스를 받는다면 그들은 기업의 수입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은 기업의 소득을 받고 새로운 장비와 설비에 투자하는 대신에, 새로운 시장을 개발하는 대신에, 더 많이 생산하는 대신에, 자본 투자 대신에 단지 자기 회사의 주식을 매입하는 데 돈을 사용할 것이다. 주식을 매입하면 주식 가격이 올라가고 그들은 ‘보라, 나의 회사 경영이 어떻게 주식가격을 올렸는지를, 그러니 나에게 더 높은 보수와 스톡옵션과 보너스를 달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자본 이득, 이 공짜 점심(불로소득)에 과세하지 못하는 것은 경제의 왜곡을 낳고, 이것이 삐께띠가 다룬 통계를 산출한다.

▷ [삐께띠의 책이 맑스의 『자본론』을 계승한 것(“a retake of Marx’s Das Kapital”)이라는 견해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홍보상으로는 그렇게 부를 수 있으나 이 책은 맑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맑스의 『자본론』은 감가상각(depreciation)에 기반을 둔다. 사유화와 사기를 의미하는 ‘시초 축적’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사람이 맑스이다. 삐께띠의 분석은 (그의 부모가 트로츠끼주의자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맑스와는 완전히 다르다.

[① 감가상각은 자본 투자, 건무, 장비 기술에 들어가는 비용을 다시 채우기 위해서 신고되는, 소득에서 공제하는 회계항목이다. 이는 원래 투자된 자본의 양을 다시 회수하는 것으로서 투자된 자본에 추가되는 이윤과는 다르다. 허드슨의 책 J is for Junk Economics의 ‘감가상각’ 항목의 한 대목은 이렇다. “감가상각은 칼 맑스에 의해 처음 가치이론에 추가되었다. 맑스는 께네Quenay의 경제표를 비판하면서 께네가 곡물 가운데 종자로 따로 떼어 자본비축고를 유지하고 다음 해 파종에 쓸 몫을 무시했음을 지적했다.” ② 흥미롭게도 허드슨의 아버지도 트로츠끼주의자이며, 허드슨이 태어난 미니애폴리스는 당시 미국 유일의 트로츠끼주의 도시였다.― 정리자]

▷ [맑스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적 법칙이 이윤율 저하 경향이라는 말에 대해서]

그보다 더 오해된 것은 없다. 맑스가 말한 것은 자본이 생산을 기계화함으로써 노동에 비해 증가할수록 이윤보다는 감가상각의 형태로 회수되는 자본이 양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맑스는 비용회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중농주의자들과 께네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께네의 경제표는 경제에서 소득의 순환, 지주들이 받은 지대의 순환을 말한다. 지주들은 일부는 소비하고 일부는 지출하는데, 여기서 빠진 것은 지대소득에서 새 종자 곡물을 사는 데 지출되어야 하는 양이다. 맑스는, 공장제 생산을 하는 산업자본주의에서는 기계가 있는 공장을 짓는 데 백만 달러를 쓰고 그것으로 이윤을 창출할 것이라면 투자된 백만 달러에 대한 이윤(5%, 즉 1년에 5만이라고 치자)만 얻는 것이 아니라 백만 달러도 회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공장과 장비가 마모되거나 노후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정되는 가격에는 이윤분만이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투자된 자본의 회수분도 포함된다. 그래서 맑스가 이윤율 저하를 설명하는 대목을 직접 읽지 않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잘못된 이해를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나의 책 『거품과 그 너머』(Bubble and Beyond, 2012)에서 설명했다. 그런데 맑스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맑스에 대해서, 그리고 이윤율 저하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그냥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것을 이해할 단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서 허드슨이 말하는 것은 경제학이라는 전문분야의 틀 내에서의 것이다. 여기에 추가되어야 할 것이 있다. 맑스는 『자본론』 3권 14장 「법칙 그 자체」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반적 이윤율의 점진적인 저하경향은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의 점진적 발달의 표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특유한 표현―에 불과하다.” 이윤율 저하 경향이란 생산자의 생산능력이 높아지는 과정의 자본주의적 표현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생산자의 생산능력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서는 소외의 형태로 즉 자본의 힘으로 나타나고, 이것이 자본(화폐자본)의 물신화를 낳는다. 자본주의 너머의 세계에서는 생산자의 생산능력이 높아지는 과정이 이와는 다른 식으로 표현될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아직 자본을 넘어가는 과정이 현실적 과제로서 주어져 있는데, 맑스가 늘 말한 대로 우리로 하여금 자본을 넘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게 할 조건도 생산자의 높아진 생산 능력 이외의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맑스는 ‘사회적 개인’과 ‘일반지성’을 말하는데, 전자는 생산능력이 높아진 주체성(생산자)의 특성을 가리키고 후자는 그 능력이 기계(맑스의 시대에는 컴퓨터가 없었지만, 지금이라면 디지털 장비들이 여기서 말하는 ‘기계’의 주된 구성부분이 될 것이다)를 통해 구현되는 측면을 가리킨다. 이에 관해서는 네그리와 하트가 『다중』, 『공통체』등의 저작에서 이미 충분히 말해놓았다.―정리자]

[감가상각에는 과세가 되지 않는 것에 대해]

부동산의 경우에는 더 기괴하다. 미국에서는 부동산의 가치가 상승하는 동안에도 건물이 실제로 가치를 상실하는 척할 수 있다. 건물에 수명이 있어서 건물주가 자본을 회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부동산(이는 실제로 토지를 의미한다)이 기계처럼 마모되거나 컴퓨터처럼 노후화되는 양 말이다. 이것은 말이 안 된다. 내가 사는 뉴욕시에는 건물이 오래될수록 더 가치가 있다. 닳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지관리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건물주들은 소득의 약 10%를 건물의 유지보수에 지출한다. 그런데 건물주들은 건물이 닳아 없어지는 양 감가상각을 적용하고 그 때문에 그들은 이윤을 버는 것이 아니라 자본을 회수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건물을 완전히 감가상각한 다음에 그것을 서로 팔거나 자신이 다시 사서 전체 과정을 다시 시작한다. 그래서 같은 건물이 계속해서 닳아 없어지는 양 계속해서 감각상각한다. 계속 교체되는 소유주들은 이에 대해 세금을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 [허드슨이 이윤율 저하 경향이 부의 격차에 대한 분석으로서 아직도 타당하다고 보는 것 같다는 말에 대해]

맑스는 캐시플로(cash flow) 일부의 구성에 대해서 말했다. (캐시플로는 ‘이자, 세금, 감가상각비, 무형자산상각비 차감 전 이익’이다.) 캐시플로 내에서는 자본이 기계를 사용하여 더 자본 집약적이 되는 정도로 감가상각의 역할이 이윤에 대비하여 상승한다고 맑스는 말했다. 따라서 핵심은 자본의 회수와 노동고용 등에 지출된 것의 수익의 관계이다.[여기서 끊겨서 다소 불명확한데, “자본의 회수”라고 했을 때에는 불변자본의 회수로 이해하고, 노동고용 등에 지출된 것의 수익은 가변자본이 낳은 이익인 이윤을 포함한다고 이해하면 될 듯하다―정리자]

 

① return of capital  자본의 회수  투자한 자본양이 회수되는 것. 부채의 경우라면 원금이 회수되는 것에 해당한다.
② return to capital  자본 수익 투자한 자본양보다 증가한 양. 부채의 경우라면 이자에 해당한다.
③ capital gains 자본 이득 ‘자본’(capital)이라는 말이 들어갔으나 사실은 생산에 자본으로서 관여하지 않은 자산의 가격이 오름으로써 얻은 이득을 가리킨다.
* 여기서 ‘자본’의 두 유형/두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생산과정에 투입되는 자본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과정에 개입하지 않고 증식되는 자본이다. 전자의 전형은 산업자본이고 후자의 전형은 대부자본이다. (산업자본도 화폐의 형태로 차입되므로 ‘화폐자본’이라는 말은 너무 넓다.) 흥미롭게도 위의 ‘자본 이득’의 경우처럼 ‘자본화’(capitalization)도 생산과는 무관한 과정을 나타낸다. 이는 이미 맑스의 『자본론』3권에 나온다. “가공자본의 형성은 자본화(capitalization)라고 불린다.(Die Bildung des fiktiven Kapitals nennt man kapitalisieren.) 모든 규칙적인 주기의 수입은, 평균이자율로 대출된 자본이 낳을 수입이라고 간주함으로써, 평균이자율을 기초로 자본화될 수 있다. (···) 이리하여 자본의 현실적인 가치증식 과정과의 모든 연관은 그 최후의 흔적까지 모두 없어지고, 자본은 자신의 힘에 의해 저절로 증식된다는 관념이 확고하게 된다.” 한 달에 2백만 원을 받는 노동자가 있고 당시 이자율이 5%라면 2백만 원을 이자로 계산했을 때 원금은 2백만 원에 20을 곱한 4천만 원이다. 이제 이 노동자는 4천만 원을 가진 자본가로 탈바꿈한다. 모든 개인을 기업가로 만드는 것은 오르도자유주의(독일에서 발생한 신자유주의적 경제사상)의 목표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우리 시대가 이런 ‘자본화’에 기반을 둔 사고가 만연되어 있고 ‘자본화’ 세력이 주된 정치적 권력을 가진 사회라면 이 점에 관한 한 우리 시대는 맑스가 본 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른 ‘자본’주의―가치증식(생산과정)으로부터 분리된 것―의 시대일 것이다. 허드슨이 일반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측면이다.

## 이 세상에 현재 존재하는 화폐들의 양을 직관적으로 가시화한 사이트를 보려면 http://money.visualcapitalist.com/worlds-money-markets-one-visualization-2017/로 가보라.




쓰레기 경제학


  • 저자 : Michael Hudson
  • 원문 : J is for Junk Economics : A Guide to Reality in an Age of Deception (2017)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마이클 허드슨의 저서 J is for Junk Economics : A Guide to Reality in an Age of Deception (2017)에서 ‘쓰레기 경제학’(Junk Economics)을 다룬 부분을 몇 개 발취하여 그 내용을 옮기거나 정리한 것이다.

[서언 : 갈림길에 선 경제와 경제이론]

우리는 2008년의 경제 위기 시에 미국과 유럽이 경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은행들과 증권소유자들을 구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정부들이 구제금융과 ‘양적 완화’에 수조 달러를 지출하여 거대 채권자들과 투기자들을 악성 대출과 도박으로 손해를 입을 처지에서 구해주었지만, 공공 및 민영 기반시설은 붕괴되도록 방치되었고 중위임금(median wage, 근로자 임금 중간값)은 하강하고 있다. 연금 저축은 거덜이 났고 사회보장을 삭감하는 압박이 일고 있다.

‘쓰레기 경제학’(Junk Economics)이 이 모든 것의 커버스토리이다. 이 쓰레기 경제학은 자신이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면서 금융세력의 후원을 받아 소득과 부를 상층부에 몰아주는 식으로 재분배하며 19세기 고전경제학자들과 진보 시대(Progressive Era, 1890-1920)의 개혁가들이 주장한 정책들을 전도시키고 있다. 이 이데올로기는 진보적 과세는커녕 1%가 아니라 99%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옹호한다.

그 효과는 중산층을 부채에 빠뜨리면서 경제로부터 화폐가 빨려나가 1%에 흡수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생기는 긴축 상태가 공공 자산과 자연자원을 사유화하는 데 구실로 사용된다. (고전경제학자들은 이 공공 자산과 자연자원이 정부의 제대로 된 기능들을 운영하기 위한 조세기반을 제공하기를 바랐다.) 부채에 묶인 지방 및 일국 정부들은 채권자들에게 공공 기반시설을 팔아넘길 수밖에 없다.

이런 사유화의 핑계는 이것이 기본 서비스의 경비를 낮추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팔아넘겨진 공공 기반시설은 새로운 소유주들이 독점 가격을 매길 기회를 제공했으며 이는 제공 가능한 기본 서비스의 감소를 낳았다. 미국에서 강제적으로 사유화된 오바마케어(Obamacare)는 가구들의 예산을 쥐어짜내고 있으며, 다른 한편 영국에서는 사유화된 철도와 물이 가장 심한 사례이다.

오늘날 사회는 봉건제의 유산과 귀족들·은행업자들·독점가들의 세습적 특권들로부터 해방되어 약속된 풍요로운 여가 경제로 나아가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늘날의 금융 엘리트들은 사회를 희생시키면서 그들의 유서 깊은 ‘공짜 점심’(불로소득)을 증가시키기 위해 ‘쓰레기 경제학’을 장려하고 있다. 그들이 경제 일반에 창출하는 부채 간접비용은 한 세기 전에는 피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금융 계층은 빚을 지는 것이 마치 자산 가격을 부풀림으로써 경제를 풍요롭게 하는 양 미화했다. 임금, 이윤, 지대(임대료)는 기하학적으로 늘고 있는 이자를 지불하는 데로 들어간다. 한편 국가 통계는 사람들의 주의를, 부채 서비스가 어떻게 가구 및 사업 소득을 빨아들이고 있는지로부터 다른 데로 돌린다.

그 결과 나오는 금융 긴축 상태가 야기하는 고통은 결코 자연법칙의 결과가 아니며, 피해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 시장’이라는 고전적인 이상의 이러한 전도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이중어(Doublespeak)의 새로운 어휘를 통해 장려된다.[오웰의 『1984년』에서 ‘Newspeak’(신어)는 가상의 초국가 오세아니아Oceania의 공식 언어이다. ‘doublethink’(이중사고)와 합하여 이렇게 표현한 듯하다. ‘이중사고’는 서로 모순되는 것을 동시에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고방식이다. ―정리자] 예를 들어 ‘개혁’이라는 말은 오늘날 사용되는 바로는 미국과 유럽의 부유한 중산층을 창출하는 것을 촉진했던 진보 시대의 개혁과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20세기를 위대하게 만들었던 것이 진보적 과세, (기본적인 경제적 서비스 비용을 낮추기 위한) 공공 기반시설 지출, 뉴딜 및 기타 (화폐와 금융을 약탈적 독점이 아니라 공공 유틸리티로 만드는) 입법이라는 점은 잊혀졌다.

더 현실에 기반을 둔 분석과 정책입안을 부활시키기 위해서 이 책은 경제학을 (그 어휘와 기본 개념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나의 온전한 학문분야로서 재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서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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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발췌 정리1]

「사기로서의 경제학」(“Economics as Fraud”)을 쓴 이래 나[허드슨]는 현실을 다루는 경제학과 ‘쓰레기 경제학’ 사이의 차이가 훨씬 광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새로운 글 「경제학 방법론은 이데올로기이며, 정책을 좌우한다」(“Economic Methodology is Ideology, and Dictates Policy”)는 어떻게 방법론이 내용을 결정하는지를 설명한다. 방법론이 오늘날의 주류가 규정하는 범위, 수학, 그리고 심지어는 통계조차도 만들어낸다. 쓰레기 경제학의 본질은 ‘경제’를 ‘시장’의 관점에서만 협소하게 개념화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현상유지를 의미할 뿐이다. 그 결과로 나오는 경제모델들은 오늘날의 자산소득자(rentier) 경제에서 부채가 가져오는 정치적·환경적·법적 파급효과들을 배제한다.

[기타 발췌 정리2]

쓰레기 경제학과 이 경제학이 사용하는 완곡어법 어휘들은 사람들의 주의를 원인으로부터 (따라서 필요한 치유책으로부터) 다른 데로 돌림으로써 사고의 도구들을 제한하는 것이 목적이다. 가령 낙수 이론은 현실을 숨기는 어휘로 짠 외투로 자산소득자의 기생적 존재를 가린다. 많은 채무자들의 삶은 그들의 피를 빨아먹는 드라큘라의 경제적 화신에 의해 장악되는 듯하다. 정치가들은 이주민들 또는 다른 소수민족들이 일자리를 뺏어간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로비스트들은 임금노동자들과 중산층에게 그들이 빚에 구속된 상태에 있는 것은 높은 주택비용, 모기지에 의해 금융을 제공받는 교육 및 생활, 학자금 융자, 신용카드 빚 때문이 아니라고 설득하려고 한다. 1%에게 높은 세금을 징수하고 사업체들을 ‘과도하게 규제한다’(특히 맑은 공기, 건강한 식품, 정직한 회계를 증진하기 위한 규제)는 비난이 정부에게 가해진다.

[기타 발췌 정리3]

기만을 핵심으로 하는 ‘쓰레기 경제학’은 진보 시대의 실질적인 개혁을 전도시켜 신자유주의적 협정을 법, 과제, 무역규칙에 대한 ‘개혁’으로서 내세운다. 이른바 ‘전문가들’(기업의 로비스트들)은 경제를 민주적 정부의 손으로부터 빼내서 세계의 금융 중심들에 안겨주는 것이 유일한 방안이고 그에 대한 합리적 대안은 없는 양 진보를 재정의한다. 이 이데올로기적인 신냉전(New Cold War)은 미국의 통제 아래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orld Bank) 그리고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에 의해 집행된다. 월가와 그 위성(외곽) 금융기관들을 위하지 않는 정책들을 시행하는 나라들은 비(非)자유로 가는 길을, ‘타자’의 길을 좇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1세기 전에는 진보로 생각되었던 것을 전도시킨 것은 자유의 희화화이며 저열한 거짓말이다.

[기타 발췌 정리4 : ‘쓰레기 경제학항목의 설명]

‘쓰레기 경제학’이란 기득권 세력이 자신들의 행위를 착취적인 제로섬 자산소득사냥 행위로서 서술하지 않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서술하기 위해서 증진시키는 홍보활동을 가리킨다. 쓰레기 경제학은 자산소득자들(rentiers)이 영웅으로 등장하는 유토피아적 평행우주에 적절한 전제들을 바탕으로 하는 일종의 공상과학소설이다. 좋은 소설이나 희곡에는 일관되게 행동하는 등장인물들이 나오지만, 이 유사과학의 기준은 단지 그 전제들의 내적 일관성이지 세계의 리얼리즘적 형상화가 아니다. 많은 가장 칭송받는 경제학자들은 가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세계에 관해 선험적인 공리들로 논리적으로 사고한다. 금융 포퓰리즘의 ‘낙수’ 전략은, 상위 1%에게 유리한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 나머지 99%에게 가장 좋다는 것을 대중에게 설득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려면 생산적 활동과 약탈 행동을 구분하는 자산소득(rent, 금리, 임대료, 지대)이라는 고전적 개념을 삭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카고학파의 ‘합리적 시장’ 이론이나 래퍼 곡선(Laffer Curve), 한계효용이론 같은 자유 시장 경제학은 단기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 장기적인 것을 무시하고 개인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 경제의 큰 그림을 무시한다. 부채는 나중보다는 지금 소비하고 싶어 하는 성급한 소비자들이, 또는 장기적인 자본투자를 위해 차입함으로서 이윤을 만들어내려는 사업가들이 맺는 계약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준거틀에는 하나의 경기 주기에서 다음 주기로 이전되는 부채의 상승하는 총액을 분석할 여지가 없다. 공공 기반시설 지출 또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 한다. 그래서 정부 차입은 단지 경제적 이익 없는 조세로서, 경제에 짐이 될 뿐인 것으로서 나타난다. 정부 지출은 단지 소비자물가를 상승시키는 것으로 간주된다. 고용을 증가시키거나 사업체와 가구들에게 기반시설 서비스의 경비를 낮추어 주는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건전한 화폐’는 정부가 아니라 은행들에 의해서만 창출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전제들의 목표는 화폐 정책과 주류 경제사상을 장악하여 그것을 계급 전쟁(99%와의 싸움)의 무기로 삼는 것이다.

오류가 반복되는데도 성공이 널리 이루어진다면 그 뒤에는 항상 특수한 이해관계가 도사리고 있게 마련이다. 가장 넓게 보면 (맑스가 말했듯이) “과학적인 부르주아 경제학은 ··· 이제 더 이상 이런 혹은 저런 정리(theorem)가 참인가 아닌가를 묻지 않고, 자본에 유리한가 해로운가, 편한가 불편한가, 정치적으로 위험한가 아닌가만을 묻는다···. 사심 없는 탐구자 대신에 고용된 논객들이 들어섰다. 진정한 과학적 연구 대신에 현재의 상태를 옹호하려는 흑심과 사악한 의도가 들어섰다. ”[원주: Marx, “Afterword” to the 2nd German edition of Capital (Vol. I, [1873], London, 1954), p. 25.]




다큐멘터리 <숲을 바라보기>


1990년대에 중부 오리건 주의 많은 지역 사회가 ‘삼림 전쟁’으로 인해 분열됐다. 환경운동가들은 미국 산림청을 관리법 위반으로 고소했다. 수십 년간 벌목 회사들에게는 공유림(公有林)을 모두 베어 내고, 나무 단일재배를 시작하고, 산간에 생태학적으로 해로운 길을 건설하도록 허용되었다.

연방법원 판사가 미국의 태평양 연안 북서부 지역에서 시행 중인 벌목 작업을 사실상 중지시킨 명령을 내린 1991년에 환경운동가들이 승소했다. 멸종 위기에 처한 점박이올빼미가 많은 논쟁의 초점이었던 동안, 알을 낳기 위해 상류로 헤엄치는 태평양의 연어를 포함한 전체 생태계가 위험에 처해있었다.

종종 소송과 정부의 명령 외엔 다른 방도가 없고 1991년 소송은 분명히 필요했다. 그러나 정말 흥미로운 것은 그 여파다. 산림청은 숲을 단순히 사람이 출입할 수 없는 야생 보호 구역으로 지정하는 대신에 주목할 만한 협력적 거버넌스 실험을 착수시켰다.

이 지역의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은 의회 정치, 산업 로비 활동, 분열을 초래하는 공적 태도 등에 의해 움직이는 관료주의적 절차의 표준적인 체제에 의지하지 않고 싸이유슬로 국유림(Siuslaw National Forest)을 관리하는 ‘유역 협의회’(watershed council)를 만들었다. 20년 뒤, 이러한 열린 커머닝 과정은 숲 생태계를 주목할 만하게 복원했는데, 이는 정치와 형식적인 법률 제도에 의해 추진된 이전의 숲 관리 체제에 대한 암묵적인 고발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작가이자 감독인 앨런 호닉(Alan Honick)이 ‘환경윤리를 위하는 산림청 직원 모임’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제작한 30분짜리 훌륭한 다큐멘터리 <숲을 바라보기>(“Seeing the Forest”, Alan Honick, 2015)에 나온다. 호닉은 어떻게 보호구역 외부에 남아 있는 오래된 숲 대부분을 오리건 주의 공유지(公有地)가 포함했는지를 기록한다.

이 숲들은 복잡하고 아주 오래된 생태계였다. 특히 캐스케이즈(Cascades) 서쪽 지역이 그러한데, 그곳에서는 태평양 폭풍우가 가져다주는 습기가 풍부하고 다양한 온대성 우림을 만들어냈다. 수백 종의 동식물들이 생존을 위해 이 서식지에 의존했다.

40년 동안 이 숲들은 산업체들이 사유지에 사용한 것과 동일한 방법을 사용하여 벌목되었다. 어마어마한 넓이의 자리가 싹 베어진 다음에 가장 빨리 자라는 나무들의 단일재배로 빽빽하게 채워졌다. 그 나무들이 충분한 크기가 되면 모두 베어지고 다시 다른 나무들이 심어질 예정이었다. 이런 식으로,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지속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한에서, 계속 반복된다.

1991년 소송의 여파로 들끓는 적대감과 소송이 다시 폭발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일자리 대 환경’이라는 낡고 친숙한 서사에 바탕하고 있는 것으로서, 정부가 중재하고 해결해야 할 분쟁이었다.

그러나 오리건 주는 새로운 공간과 공유된 서사를 개시하는 ‘북서부 숲 계획’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싸이유슬로 유역 협의회’(The Siuslaw Watershed Council)는 숲에 관심이 있는 누구라도 열린 원탁회의에 초청하여, 숲을 어떻게 관리하고, 벌목 회사, 환경운동가, 레저어획인, 지역공동체, 여행자 등의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어떻게 해결하거나 완화할지 논의하도록 했다. 결과는 모두의 동의에 기반을 뒀다.

어떤 환경운동가는 벌목 산업의 대표와 결코 같은 테이블에 앉고 싶지 않았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하나의 집단으로서 앉아서 이야기하는 과정은 모든 이들에게 중요한 행동 경험이었다. 그것은 서로에 대한 의심을 극복하고, 신뢰를 구축하며, 과거의 차이는 차치하고, 새로운 아이디어에 위험을 무릅쓰는 과정이었다. 협의회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산림청 직원이 설명했듯이) 어떻게 기금을 쓸지를 포함하여 싸이유슬로 숲과 관련하여 ‘법에 버금가는 구속력이 있는’ 의사결정권을 가진다.

이 과정은 하천에서 연어를 복원하는 공유된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참가자들 사이에 입장의 차이가 남아있지만 모든 이들은 형식적인 절차로 이루어진 정치나 법률 제도를 통해 ‘승리’하기보다는 실행가능한 해결책 찾기를 지향한다.

이 과정의 한 장점은 일을 하는 데 있어서 관료적·법률적인 한계를 건너뛰기 위해서 비공식적인 합의를 해왔다는 것이다. 연어의 일생은 시내의 상류에서부터 바다에 이르는 전체 유역을 가로지르는데, 그 넓이는 산림청의 토지를 훨씬 넘어서 많은 사유지와 공동체 토지를 포함한다. 유역 협의회는 이런 관할 문제 중 일부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사람들이 관료적으로 운영되는 과정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유연하고 광범위한 계획을 개발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그 계획에는, 흔히 법적 폭력, 많은 돈, 문화 양극화가 만연한 규제적인 과정들에 들어있다고는 말하기 힘든 내장된 합의와 정당성이 있다.

유역 협의회는 산림청이 전형적인 관료체계로서 행동하지 않게 할 가능성이 높은 모든 종류의 해결책을 착수시킬 수 있었다. 협의회는 도로의 사용을 최소화하고 오래된 벌목 도로를 사용중지시키는 한편 선택적이고 생태학적으로 책임감 있는 방법으로 숲의 간벌(間伐)(([역자 주] 한국 산림청 산림임업용어사전 참고 http://www.forest.go.kr/newkfsweb/kfi/kfs/mwd/selectMtstWordDictionary.do?&pageIndex=1&searchWord=&searchType=&wrdType=&searchWrd=&mn=KFS_02_08_06_05_01&wrdSn=93))을 감독했다. 협의회는 연어가 상류로 이동할 수 있도록 시내를 닮은 지하수로를 만드는 등 시내와 유역의 생태적 기능을 회복시켰다. 물고기들이 죽은 나무들이 있는 서식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죽은 나무들은 시내 바깥으로 끌어내지 않고 그대로 둔다. 기타 등등.

2012년에 큰 폭풍이 숲을 강타했을 때 시내와 도로에 미친 영향은 극히 적었다. 실제로 대단히 강력했던 1996년 폭풍의 충격보다 훨씬 적었다. 물론 이러한 효과적인 숲 관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뉴스’로서 자격을 얻을 만한, 파괴된 모습을 보여주는 종말론적 사진이 없기 때문에 더 어렵다.

호닉의 절제되고 잘 만들어진 영화는 열린 협력의 잠재성에 관해 강력히 주장한다. 열린 협력은 숲만큼 크고 생물물리학적인 것도 성공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미국 문화의 시장 개인주의자들도 커머닝을 통해 근본적인 변형을 이룰 수 있다. ♣




금융·보험·부동산 부문의 공생관계


  • 저자 : Michael Hudson
  • 원문 : The Bubble and Beyond : Fictitious Capital, Debt Deflation and Global Crisis (2012)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정리자 설명]

아래는 마이클 허드슨의 책『거품과 그 너머 ― 가공자본, 부채 디플레이션 그리고 전지구적 위기』(The Bubble and Beyond : Fictitious Capital, Debt Deflation and Global Crisis) 3장의 한 절―“The Symbiosis between the Financial, Insurance and Real Estate (FIRE) Sectors”―의 내용을 상세히 정리한 것이다. 『부채 : 첫 5000년』(Debt: The First 5,000 Years)을 쓴 인류학자 그레이버(David Graeber)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추천한다.

살아있는 사람들 가운데 마이클 허드슨보다 나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준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책을 구성하는 예리하고 훌륭한 에세이들은 정말이지 경제학을 배우는 모든 1학년 학생들에게 과제로서 부여되어야 할 것들이다.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 경제학이 자신의 고결한 전통―허드슨이 여기서 그토록 훌륭하게 구현하는 바의 전통―을 배반하고 권력의 한갓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의 궁극적 증거이다.

허드슨은 우리나라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검색을 해보니 그의 존재를 인지한 두 블로그(, )가 잡힌다. (더 있을 수 있지만 계속 검색할 여유가 없다.) 그의 책은 한국어로 번역된 것이 없고, 신문들에서 그를 다룬 기사도 거의 없는 듯하다. 이는 어쩌면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한편으로 맑스에서 정점에 이르는 고전경제학에 비탕을 두어 현재의 경제상황을 분석하는 경제학자는 점차 사라지고 있으며(이는 내가 과문한 탓일 수도 있지만, 경제학을 공부하는 학자 지망생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면 『자본론』 같은 책은 읽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의 언론은 그 주요 광고주가 오늘 소개할 내용의 표적인 금융·보험·부동산 부문이니 허드슨을 소개하면 주요 광고주들의 ‘적’을 소개하는 셈이 된다. 사실 허드슨은 여러 경제 이론들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이런 방대함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① 맑스에서 정점에 이른 고전경제학의 문제의식(경제 영역에서 봉건적 특권의 완전한 제거를 통한 자유로운 생산의 실현)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② 그러한 관점에서 현대 자본 세력의 가장 주도적인 부분이 어떻게 경제의 핵심인 생산활동에 해로운 짐이 되고 있는가를 폭로하고 ③ 아울러 그 해결책의 주요한 부분으로서 부채의 탕감이 불가피함을 (부채탕감의 역사에 대한 서술과 함께) 역설한다는 점이다. 사실 나는 허드슨이 맑스의 자본 분석에 기반을 둔다는 점이 마음에 들고 이에 덧붙여 그가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현실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그에게서 많이 배우려고 하지만, 내가 공통적인 것(the common)에 초점을 두는 것과 달리 그는 공적인 것(the public)에 초점을 두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이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밖에 없지만, 사실 여기에는 여러 중요한 논점들이 포함된다.) 물론 그의 책들을 막 읽기 시작한 상태이기에 이런 생각은 현재로서는 어설픈 가설 상태의 것이고 일정한 양의 독서가 이루어지고 나서야 조금이라도 확연해질 것이다. 혹 이러한 차이가 있더라도 그에게서 배울 것이 매우 많다는 점에는 변화가 없다. 그래서 (이전 블로그의 글에서도 시사했듯이) 허드슨의 저서, 인터뷰 가운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부 내용들을 틈틈이 소개할 생각이다.


금융·보험·부동산 부문의 공생관계

산업혁명이 동력을 얻자 경제학자들은 은행업과 보험이 산업 시스템에 흡수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경제 이론가들의 시선은 여전히 산업 테크놀로지와 혁신에 맞추어져 있고 인구는 농업에서 도시 산업으로 이동한다. 교과서들(과 로비스트들)은 은행가들이 산업자본가들에게 신용을 제공하여 새로운 공장을 짓고 노동자들을 고용하게 함으로써 더 많은 재화를 생산할 수 있도록 한다고 말한다. 대출은 자본 투자에 의해 생성되는 이윤에서 상환될 수 있으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한다. 교과서의 이런 매력적인 이야기가 금융기관들에게 세제 혜택을 줘야 한다는 주장에 사용된다. 금융기관들의 신용창조가 경제적 복지를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이자는 (기업사냥꾼이 약탈적인 신용을 사용할 때조차도) 세금이 감면되어야 할 지출로 간주된다.

그런데 지난 세기에 걸쳐서 주로 금융·보험·부동산 부문 사이에 공생관계가 출현했다. 현대 경제에서는 부동산이 자산의 큰 비중을 차지해왔다. (그래서 대출의 담보물이 된다.) 미국과 영국의 상업은행 대출의 약 70%는 모기지 신용의 형태를 띤다. 미국 전체에서 부동산의 추정되는 시장가치는 모든 공장 및 장비의 감가상각된 가치를 초과한다. 은행의 대출담당 직원들은 그들이 일하는 은행의 대출 포트폴리오 증가치의 대부분이 모기지론으로 구성되리라는 것을 안다. 그런 신용이 급속히 창조되면 될수록 더 많은 기금이 새로운 모기지 금융으로 흘러들어가서 부동산의 가격을 올린다. 그리하여 적어도 단기나 중기적으로는 그러한 대출이 정당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금융화되는 재산 가운데 토지(장소의 가치)가 일반적으로 전체의 반 정도를 차지하며 그 재산이 팔렸을 경우 발생하는 자본 이득의 전체를 차지한다. 산업 기계가 손모될 경우 보통 기술 발전에 보조를 맞추려면 철거되어야 하기 때문에 감가상각액(자본감모충당금, capital consumption allowances)의 대부분은 부동산 부문에서 신고된다. 그런데 건물들은 계속적으로 감가상각될 수 있고, 따라서 그 소유주에게 (특히 이자가 소득에서 공제될 수 있는 만큼) 소득세 부담을 덜어준다. 그 결과 조세제도는 (특히 미국에서) 산업보다 부동산에 훨씬 더 유리하다. 부동산을 담보로 돈을 빌리기가 쉬우며 총수익(세후 소득 + 자본 이득)이 더 높다. [자본이득 capital gains : 구매한 자산의 가격이 올라서 얻은 이득. 허드슨의 J is for Junk Economics에 따르면 미국은 정치가들에게 돈을 대어 자본이득에 부과하는 세율을 일반적인 소득세의 반으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정리자]

금융업은 세금징수원에게서 해방된 돈이 이자를 지불하는 데 쓰일 수 있음을 알고는 부동산에 대한 특별한 세금우대조치를 지지했다. 부동산 소유주들에 의한 정치후원금과 로비활동의 뒤를 금융 부문의 정치후원금과 로비활동이 이었으며, 이에 비하면 제조업 부문의 정치후원금과 로비활동은 초라했다. 그런데 부동산 부문이나 금융 부문은 (보험 산업의 지원을 받아서) 자본 이득에 부과되는 세금의 감면을 위해 로비를 하면서 이 이득이 혁신의 결과로서 산업에 귀속되는 양, 그리고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의 특징인 양 제시한다. 현실은 이와 다르다. 대부분의 자본 이득은 부동산에 귀속된다. 미국의 국민대차대조표를 보면 대략 1996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증권시장 수익이 처음으로 부동산 수익 증가분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마찬가지로 해로우며, 이러한 사태전개의 이유는 8장에서 설명된다.

왜 경제학자들은 사실을 말하지 않는가? 부(富)가 제조업의 성장보다 토지가격 이득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부동산은 결코 산업처럼 낭만적이지 않다는 사실에서 그 설명을 찾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혁신가들과 창조자들을 찬양하고 지주들은 원망한다. 또한 은행가들과 보험회사들을 창조적이기보다 기생적이라는 이유로 원망한다. 모기지 대출의 성장으로 토지의 공급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며, 토지의 장소 가치는 공공 기반시설 투자와 번영의 일반적 수준에 의해 창출된다는 명백한 사실도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어떻든 재산을 담보로 하는 대출의 대부분은 이미 존재하는 토지와 건물을 담보로 한다. 부동산 대출의 성장분은 이렇듯 대출받는 사람들에게 서로 경쟁하여 가능한 한 많은 재산을 구입할 신용을 제공하는 데 들어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토지가격을 올린다. 그 결과는 산업의 붐이 아니라 거품인 것이다.

금융업의 대변인들은 이런 종류의 자산 기반 대출이 생산적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이 부동산 소유주들에게 이자를 지불할 수 있고 결국에는 자본 이득을 얻게 하는 재산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 거대한 신용시장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미국 금융업의 로비스트들은 부동산업의 로비스트들과 손을 맞잡고 부동산에 대한 세제상의 우대조치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

은행들은 세금으로 납부되지 않은 돈은 모두 이자를 갚는 데 들어가리라는 것을 안다. 개발자들이 대출자에게 내놓을 모기지의 크기를 놓고, 따라서 그들이 임대료(rent)로부터 은행에 갚을 모기지 부채서비스액[일정 시기 동안 이자 및 원금의 상환에 들어가는 돈의 액수―정리자]의 크기를 놓고 서로 경쟁을 한다. 이 경쟁이 계속되어 크기가 상승하면 모든 순 임대소득이 이자로 지불되는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모기지 대출은 보통 재산 구매가격의 80%에서 100%를 (혹은 2008년 9월의 붕괴에 이르는 시기 동안의 거품경제에서 보듯이 이보다 훨씬 더 많이) 제공한다. 이는 자기자본에 비한 부채의 비율로서 매우 높은 것이다. 이러한 식의 모기지 부채의 점차적 증가가 1980년대에 기업사냥꾼들이 사용하는 정크본드 금융에 모델을 제공했으며, 영국, 유럽 대륙, 제3세계에서 공공 자산이 사유화되는 시류에 모델을 제공했다. 이미 존재하는 부동산·기업·공기업들을 그렇게 구매할 경우의 변별적 특징은 새로운 실질적인 투자를 창출하지 않고 새로운 대출이 추가된다는 것이다. 자본의 새로운 실질적 형성이 이루어지는 대신에 일반적으로 정리해고와 기업분할이 일어난다. 수입에서 이자와 분할상환금을 갚는 데 들어가는 액수가 최대일 경우 운영경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탈산업적’ 관행이 낙관론자들이 산업혁명이 시작할 때 그렸던 것과는 사뭇 다른 이러한 동학을 낳은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의 은행시스템은 저축한 돈을 새로운 생산수단의 기금으로 사용하지 않고 경제의 자산에 부채라는 짐을 지우고 있을 뿐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은 산업화 이전의 대출방식과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산업화 이전의 고리대금업이 개별 가문 대출자들에 의해 지배되었다면, 지금 새로운 산업화 이후의 부채 시스템은 대규모로, 기업 규모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대출이 산업과 융합하여 금융 부문이 제조업체들을 지배하게 되었고 제조업체들을 마치 가능한 한 많은 임대소득을 짜내고 그 다음에는 자본 이득을 취하고 팔아버릴 부동산인 양 취급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