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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P 커먼즈는 급진과학 역사에서 ‘세 번째 운동’인가?

 



 

P2P 커먼즈는 급진과학 역사에서 ‘세 번째 운동’인가?

 

4년 전 처음 게리 워스키(Gary Werskey)의 ‘세 운동’(three movements)을 다룬 2007년 논문을 읽었을 때 나는 회의적이었다. 게리는 1930-40년대와 1970-80년대에 과학을 둘러싸고 일어난 두 개의 영국 급진주의자들의 운동을 다루었고 환경적인 파급력을 가질 수 있을 세 번째 운동의 가능성을 예측했다.

나는 그것이 다른 두 운동과 마찬가지로 맑스주의적 운동일 가능성에 대해 별로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2018년인 지금 나는 진정 P2P 커먼즈 운동이 실로 세 번째 운동의 자리에 서있다고 본다. 적어도 그러리라고 전제하고 나아가는 건 가치 있을 것이다. 활동가들에게는 부차적이더라도 과학기술연구(STS)((STS :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분야에선 중대한 함의를 가지니 말이다. 나는 P2P 커먼즈가 내 활동가 삶에서 봐온 가장 중요한 것임을, 그리고 지식과 기술의 정치를 지향하는 자유의지론적 사회주의자로서 내가 지난 50년 간 공들여온 걸 가동시키는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루시 가오(Lucy Gao)와 나는 막 STS 학문연구분야의 연차 모임인 <4S 시드니 2018>((4S : Society for Social Studies of Science))에서 이루어질 발표를 연구하고 짜는 프로젝트를 마무리했다. 학회세션의 주제 ‘일련의 실패한 정치적 실험으로서의 STS 안에서의 삶’은 게리가 했던 언급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었고 루시와 나는 그가 말하는 ‘세 운동’을 두 ‘STS 안에서의 삶’ -그녀의 10년의 삶과 나의 45년의 삶- 에서 이루어진 실험과 실패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를 진술하기 위한 틀로 삼았다. 학회발표는 유튜브에 게시되고 (훅튜브(hooktube)에는 사본이 게시된다) 급진과학 및 급진적 전문직주의(professionalism)와 관련된 일단의 자료가 이제 웹사이트 ‘STS 안에서의 삶’(Lives in STS)의 ‘4 역사’(4 History) 범주에 게시되어있다. 이 자료에는 두 가지 이야기에 관한 한 쪽짜리 요강과 몇 시간짜리 인터뷰 녹취가 포함되어 있다. 길이를 맞추기 위해 그 발표의 일부가 생략돼야 했다. 생략된 건 포디즘/포스트포디즘이라는 분석틀, 차세대 생산양식으로서의 P2P, STS 학계와 급진과학 액티비즘, 전문관리계층(PMC)((PMC : Professional-Managerial Class)) 안에 있는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유기적 지식인’ 액티비즘이었다. 나는 학회 이후에 ‘감독판’을 만드는 걸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다른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현재의 이 블로그 게시물을 부재하는 긴 영상의 개요로 생각해 달라.

내게는 세 가지가 이 ‘STS 안에서의 삶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그리고 내가 루시와 함께 그 작업을 하면서 도달한 장소와 관련하여 중요하다. 루시는 중국 과학원의 STS 부교수이다. 그녀는 나보다 40년 후에 태어났고 1980년대 후반 중국문화계에서 만개한 학문분야에서 일하는데, 거기에는 분명히 정치적인 (두 운동의) 역사가 서구주의, 관리주의, 전문직화의 번쩍번쩍한 표면 아래 묻혀 부글거리고 있었다.

첫 번째 것은 내 생각엔 1970년대의 ‘급진과학’에서는 본질적으로 과학이 핵심이 아니었으며 내가 급진과학으로 도달한 것도 본질적으로 ‘과학’을 핵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급진적 전문연구가들의 넓고 깊은 여러 세대에 걸친 운동 속에서 여러 문화적 형성물을 보았으며 지금도 본다.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한때 (40년 전에!) ‘후기 자본주의’라 불린 틀 안에서 PMC의 역사로 이론화되었다. 지난 세대에 심오하고 역사적으로 새로운 정치가, 지식을 거대하며 전지구적으로 분산된 규모로 생산하고 동원하는 체제가 출현했는데, 나는 이를 자본과 자본에 대항하는 힘이 포스트포디즘적으로 재편성되는 과정의 한 측면이라고 말하고 싶다. 1950년대에는 ‘거대과학’이, ‘군산복합체’를 뒷받침하는 일이 핵심 이슈였다. 1960년대에는 ‘과학정책’ 및 연구생산물의 공적 성격 혹은 사유화 가능성에 관한 논의들이 우세했다. 컴퓨터화가 진행된 1980년대에는 ‘지식경제’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며 1990년대에는 ‘지식집약사업서비스’, ‘혁신서비스’ 가 ’국가혁신시스템‘ 안에서의 연구주제였다. 1990년대에는 STS 연구자인 나도 그 일부였다. (적절한 시기에 더 많은 게시글을 올리겠다.)

하지만 내 생각엔 그러는 내내 저류를 이루었던 건 ‘유기적 지식인’적 생산(1920년대와 1930년대 이탈리아 맑스주의자 그람시의 용어이다), 그리고 지식생산을 대규모로, 계급규모로 조직할 수 있는 점점 더 분명한 가능성과 그래야할 필요였는데, 이는 매우 상이한 생산양식, 삶형태 그리고 전문연구가들과 일반인들 사이의 관계를 촉진하기 위함이었다. ‘유기적 지식인’적 실천에 관한 이러한 지속되는 이야기는 여기 FopRop의 ‘4 역사’ 범주의 관심사이다. 그것은 또한 ‘2 커머닝’(2 Commoning) 범주의 패턴언어를 위한 분석틀이 왜 ‘앎의 춤’의 안무를 핵심으로 하는지 또 왜 역사적으로 변화된 노동력의 생산에 관한 문제를 핵심으로 하는지를 말해준다. FopRop에서 나는 이를 P2P 커먼즈 생산양식과 일상적 삶의 역사적 진화에 관한 그리고 그 생산양식과 삶의 계속적인 활동가적 생산에 관한 문화유물론적 ‘접근법’을 구성할 수 있는 리터러시(literacy)의 세 영역 중 하나로서 제안하고 있다. (여기를 보라)

내가 주목하는 두 번째 것문화유물론 안에서 나 자신이 40년간 탐구를 해왔다고 내가 생각함에도 다른 어떤 종류의 공인된 맑스주의보다 더 커먼즈 운동이 의미심장하게도 ‘문화적’이며 심오하게 ‘유물론적’이라는 점인데, 이는 내가 FoP RoP에서 특히 ‘2 커머닝’ 범주에서 또렷이 말하려 하는 종류의 (탈맑스적인 아닌) 신맑스적인, 세심하게 혼종화된 틀에 의해 촉진될 수 있고 명확히 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러하다. P2P 커먼즈 운동의 유물론적 성격은 명백하게도 앱의 개방형 구조, 프리코드의 P2P 생산, 분산된 웹 인프라, 공개 데이터, 링크드 데이터/데이터 소유권/문서 소유권, 라이선싱 그리고 분산된 행위의 장을 조정하는 인프라 기술들에 주된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에 존재하는데, 이 분산된 행위의 장에는 암호화폐, 신용회계 메커니즘, 해시체인, 공개가치 공급체인 회계시스템, 공개원장 알고리즘과 구조가 포함된다. 

문화적 역사적 지향성은 조금 덜 눈에 띈다. 하지만 그 지향성은 예컨대 미셸 바우엔스로 하여금 커먼즈의 역사-진화적, 탈/반(反)자본주의적 중요성을 알아보게끔 하고 P2P 재단을 발족시키는 데로 이끈 인간학적 관점 안에 명백히 존재한다. 또한 그 지향성은 바우엔스 및 그의 파트너들(데이빗 볼리어, 질케 헬프리히)로 구성된 커먼즈전략그룹의, 과거와 현재의 커머닝에 대한 문화적·역사적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한 학술적·활동가적 연구와 개발 활동의 저변을 이루는데, 이 이야기들은 그들의 에세이 모음집 『커먼즈의 부』와 『커머닝의 패턴들』에 제시되어 있고, 현재 진행 중인 『커머닝의 패턴언어』에서 분석되고 있다. 이 분석과 여기 FoPRoP에서의 나의 패턴언어 작업 사이의 관계에 대한 주석은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내가 인식한 세 번째 것은 내 생각에 P2P 커먼즈 운동이 1970년대의 ‘두 번째 급진과학 운동’ 안에서 분명해지기 시작한 ‘유기적 지식인’적 동력을 추진시키고 확장시키는 방식이다. 이 둘째 운동의 주체는 베이비부머들이었다. 이들이 여전히 현장에 있기는 해도 지금은 다른 세대가 ‘유기적 지식인’적 양태를 다르게 발견하고 실행하고 있다. 나는 기껏해야 18개월 전에 그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유기적 지식인’적, ‘자유의지론적 사회주의’적 액티비즘의 지속적 실천을 이론화하면서 나는 베이비부머와 20대 활동가들이 (그리고 그 중간의 사람들이) 세대를 가로지르는 ‘유산’에 관한 대화에 참여할 수 있을 어떤 종류의 ‘대학’을 창조한다는 생각을 다듬어오고 있었다. 나는 『겸손한 기원들 3 – 활동가들과 집으로 가는 행진』(Humble Origins 3– Activists and the long march home)에서 그 아이디어를 구상했다. 나는 (‘보이지 않는 대학’을 위한 공간을 구성하는) 일종의 온라인 플랫폼을 요구하는 기획을 하기로 결심했고 이를 신중히 검토하기 위해 루미오 플랫폼(www.loomio.org)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내 귀가 쫑긋했던 건 여기서 루미오가 나라와 문화를 가로지르는 폭넓고 확장적인 자발적 부문을 활용하는 잘 짜인 소프트웨어였다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내가 그 설계의 기저에 놓인 그룹 프로세스의 촉진(facilitation)이 강조된다는 점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1970년대에 내 세대가 가진 공동체지향적인 액티비즘이 발견한 것들과 그 헌신성으로 거슬러가는 분명한 역사적 선이 존재했다. (4 역사’ 범주의 ‘급진적 문화적 연구개발’과 『로케이션』(Location)의 서언과 서문을 보라.)

플랫폼 앱 루미오로부터 개발자들로 이루어진 노동자협동조합 루미오를 거쳐 나는 오큐파이 운동 이후 활동가이자 해커인 개발자들과 협동조합 기업가들의 연합(가족?)인 엔스피럴(Enspiral)에 도달했는데, 이 개발자들과 기업가들에게는 촉진은 활동가 문화의 당연한 측면이었다. 그 이후 나는 쎈소리카(Sensorica)(([옮긴이] 쎈소리카는 IT 장비들 및 특수한 거버넌스를 사용하여 그들의 작업들을 함께 조정하고 운영하는 프리랜서들의 개방형 네트워크이다.))에 그리고 팽창하는 아나키즘적-해커적 정치 세계에, 스커틀벗(Scuttlebutt)(([옮긴이] 탈중심화된 소셜 플랫폼인 스커틀벗은 유저들이 그들의 데이터들을 통제하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이다.)) 인프라에, 코드 페디버스(fediverse)(([옮긴이] 페디버스는 소셜 네트워킹, 블로깅, 웹사이트 같은 웹 출판 및 파일 호스팅에 사용되는 서버들의 집합이다.))에 (그리고 P2P 방식으로 코드와 프로토콜을 만들어내는 생산자들에) 도달했다. 또 나는 오큐파이 이후의 반(反)과두적·직접민주주의적 연구와 개발, ‘오픈 밸류’ 가치연쇄 회계, ‘신속한’ 포스트포디즘적 문화형태들로 이루어진 더 폭넓은 형성체에 도달했다. 이는 (일본과 이탈리아의 유연생산시스템이라는 포스트포디즘적 발견을 도둑질하는 것이 자본주의 공급체인 개혁에서 내 동료들의 양식이었던) 1990년대의 나의 경영대학원 경험과 그 모든 종류의 기묘하고 모순적인 공명을 이루었다. 분명 역사들은 너무도 뒤섞이고 혼합되고 파문을 일으키고 파두(波頭)들이 서로 간섭하고 있었다. 분명 기업가 정신과 공동체 사이, 연대와 효율 사이, 액티비즘과 테크놀로지 사이, 정치와 돌봄 사이에 동일한 종류의 선을 긋지 않은 소수의 젊은 급진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는 더 기업적이기도 하고 전문성이 더 뚜렷이 구획되어 있기도 하며 경력을 중시하고 해결책을 ‘해킹’하기보다는 ‘설계’하는 데 더 경도돼 있는 환경에서 자란 이전 세대에게는 문제적이었을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처음 할 때 제대로’라는 기업적·경쟁적인 문화가 우세했고, 지금은 ‘일찍 실패하고 계속 고치고 계속 갈라지고 모인다’라는 문화가 우세하다.

P2P 커먼즈는 ‘급진과학’보다 훨씬 더 크다. (포스트포디즘이 급진과학보다 훨씬 더 나아가 있다.) 가장 직접적으로 P2P 커먼즈는 에너지 독립형의 아나키즘적인 도시-장인의 삶에 전념하는 대안에너지 공동체로부터 ‘인간중심적’·참여적 노동운동을 지향하는 기업적·산업적 환경에서의 디자인운동까지 이르는 저 모든 운동의 급진적 테크놀로지 무기의 계승자이다. 다른 것들―‘4 역사’ 범주의 ‘급진과학’사, ‘3 플랫포밍’(3 Platforming) 범주의 ‘플랫폼 협동주의적’ 액티비즘 세계에서의 조직화―에 관한 작업이 내가 ‘2 커머닝’ 범주에서 커머닝의 패턴언어를 파악하는 데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기는 하다. 하지만 나는 1970년대 『급진과학저널』(Radical Science Journal)에서의 신맑스적 노동과정 이론화가 1970년대 급진적 전문직주의와 밀접히 연관됐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론화하는 모험이 (동일한 문화유물론적 기초 위에서) 오늘날의 P2P 커먼즈 운동과 밀접히 관련된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치 않는다. 다만 이제는 활동의 장이 더 크고 걸려있는 것이 더 커졌으며 다양한 문화적 도전이 더 분명하고 결정적으로 드러나 있다. 1970년대 말에 베이비부머들이 대면했던 ‘단편들을 넘어서’라는 과제가 많은 새로운 형태들을 출현시켰다. 상황은 변하고 있다. ‘세 번째 운동’이 중국에서 어떨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중국에서 나의 STS 동료인 루시 가오는 40년 후에야 ‘두 번째 운동’ 없이 체제화된 무익한 첫째 운동만이 존재하며 1980년대 후반의 ‘위대한 계몽’의 여파로 모든 포디즘의 파도들이 역사와 경제의 쓰나미로 붕괴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태를 맞이하고 있다.

여하튼 그렇다, 게리. 맑스주의를 계승하는 세 번째 급진과학 운동이 있다! 그건 더 나은 것일 수밖에 없다.




위기에 맞서 일어서는 공동체

 



2017년 9월 20일 허리케인 마리아(Maria)가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를 강타했을 때 주디스 로드리게스(Judith Rodriguez)는 자택에서 자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잠을 자려고 하였으나 무시무시한 폭풍이 섬을 덮치는 소리가 그녀를 깨웠다.

 

로드리게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 소리는 제가 살면서 들어 본 것 중 가장 끔찍한 것이었어요. 그 소리는 결코 조용해지지 않았어요. 그건 끝이 없었죠. ··· 저는 제 집이 좋은 상태라고 생각했어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새벽 2시 반에 일어났을 때 저는 덜컥 겁이 났어요. 가장 처음 겁이 난 건 뒷문이 날아가 버렸을 때에요. 부엌에 달린 금속으로 된 문이 말이에요.”

 

그 섬의 많은 부분처럼 로드리게스가 사는 카예이(Cayey) 읍도 시속 175마일로 불어오는 폭풍에 송전선이 망가졌고 지붕이 날아가 버려서 몇 달간 어둠 속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미 심한 부채 위기로 허덕이고 있고, 즉각적인 구호가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카예이와 같은 지역 공동체들은 그들이 가진 얼마 안 되는 자원으로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우리 집에는 접시가 많이 있습니다. 제가 집구석에 널려 있는 접시들을 기부하면 어떨까요?”라고 로드리게스가 말했다.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카예이에서 카구아스(Caguas)와 우마카오(Humacao)를 거쳐 라스 마리아스(Las Marias)까지, 소도시나 대도시 할 것 없이 섬 전역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접시 기부는 ‘공동체 주방’(community kitchens)으로 성장했고 이것은 ‘공동체 센터’(community centers)로 성장했으며, 이 공동체 센터가 성장하여 하나의 운동이 되었다. 맹렬한 소리를 내며 불어온 허리케인 마리아가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에게서 무언가를 일깨웠다. 이 무언가는 폭풍우, 불, 지진 등 모든 종류의 재해와 참사가 전 세계의 지역 공동체들에게서 일깨웠던 바로 그것이다.

 

로드리게스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중국에 있든지, 푸에르토리코에 있든지, 또는 일본에 있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이곳 푸에르토리코에서 서로를 도와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배에 비유합니다. 만약 이 배가 가라앉는다면, 우리 모두가 가라앉습니다. 저 혼자 가라앉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가라앉는 거죠.”

 

2007년, 네이오미 클라인(Naomi Klein)은 그녀의 획기적인 책 『쇼크 독트린』(The Shock Doctrine)에서 재해자본주의라는 명제를 세상에 밝혔다. 클라인의 생각은 전 지구에서 일어났던 일, 그리고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완벽하게 설명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재해자본주의의 기본 생각은 매우 간단하다. ‘재해로부터 시장 기회를 창조하라’는 것이다. 클라인은 강력한 기업들이 어떻게 정치적·경제적 위기를 이용하여 공공 영역을 약화시키고, 그리하여 민간 자본의 이익을 강화시키는지를 잘 보여준다. 재앙 이후 나타나는 ‘쇼크’는 강력한 기득권 세력이 이익을 얻기 위해 혼란에 빠진 공동체를 이용할 완벽한 기회를 제공한다.

 

클라인의 명제는, 허리케인 카트리나(Katrina) 이후 뉴올리언스(New Orleans)의 공립학교 시스템의 해체부터 허리케인 마리아 이후 푸에르토리코의 기반시설 민영화까지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많은 부분을 서로 연관짓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해 자본가’(disaster capitalist)가 위기 상황에서 나타나는 유일한 캐릭터는 아니다.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재해자본주의가 전체 이야기의 일부일 뿐임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 또 다른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바로 이타주의, 연대주의,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기초로 한 이야기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다른 이야기가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바로 ‘재해공동체주의‘라는 이야기다.

 

폭풍으로 인해 상호부조의 홍수도 밀려들어왔고 산불이 결속력의 씨앗을 뿌렸고 지진이 공동체적 가치를 강화하고 지역 공동체를 더 가까이 결속시킨 사례들은 셀 수가 없이 많다. 우리는 관대함이 이렇게 폭발적으로 표현되는 모습을 매우 자주 본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덮친 이후, 자원봉사자들이 운영하는 케이준 해군(Cajun Navy)(([옮긴이] 루이지애나와 그 인근 지역의 구조·조사 활동을 돕기 위한 개인 보트 소유자들의 비공식적 임시 자원봉사 모임―『영어위키피디아』))의 여러 대의 보트들이 좌초된 생존자들을 구하기 위해 침수된 동네들로 내려왔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났다. 2017년 11월 남부 맨해튼에서도 작은 규모지만 이런 모습을 다시 한 번 보았다. 비계 구조가 무너져 내렸을 때 그 속에 갇힌 생존자들을 파내기 위해 수십 명의 뉴욕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달려가서 도왔던 것이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하는 걸까? 왜 우리는 자기희생적이고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지도 모르는 영웅적 행동들을 그렇게 자주 보는 걸까? 이것은 분명히 많은 주류 서사들을 지배하는 인간성에 대한 이야기와 일치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 이야기는 인간을 이기심과 경쟁심으로 특징지어지는 종류인 호모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로 묘사한다.

 

뉴욕시의 존제이대학(John Jay College)의 경제학과 부교수 크리스천 파렌티(Chritian Parenti)는 이렇게 말했다. “예를 들면, [허리케인 하비(Harvey) 이후] 휴스턴(Houston)에 홍수가 일어난 것처럼 재해가 닥쳤을 때, 당신은 사람들이 매일 이 모든 너그러움과 결속력을 쏟아 내는 것을 보았을 겁니다. 모든 것에는 가격이 붙어있다는 생각, 그리고 이기심과 경쟁심은 좋은 것이라는 생각, 이 모든 생각들이 갑자기 멈추게 됩니다. 갑자기, 모두가 협력·결속력·용기·희생·관대함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작가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의 저명한 책에서 강화되었다. 『지옥에 지어진 낙원』(A Paradise Built in Hell)에서 그녀는 설명한다. “지진, 폭격, 또는 심각한 폭풍이 일어난 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타적이 되고 자신들과 주위의 사람들(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친구들뿐만 아니라 낯선 이들과 이웃들)을 돌보는 일에 즉시 관여하게 됩니다.”

 

우리는 최근 6월에 일어난 과테말라에서의 푸에고(Fuego) 화산 폭발 이후에 전개된 일에서 이것을 목격했다. 정부의 대응이 부적절한 가운데, 사람들은 매일 서로를 돕기 위해 모였다.

 

당시 위기 상황에 그 곳에 연구차 나와 있던 뉴욕주립대학 알바니 캠퍼스(University at Albany at the State University of New York)의 인류학자 월터 리틀(Walter Little)은, 화산이 폭발한 저녁, 마을 근처의 한 교회가 “지역 사람들에게 교회로 오라고 알리는 종을 즉각 울리기 시작했고, 교회에서 그들은 물자, 음식, 의류 및 기타 다양한 것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이 울리는 것을 들었을 때 두 번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의 폭격을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일어난 홍수·토네이도·지진·폭풍우 등 재해가 일어날 때의 행동에 대한 수십 년 간의 꼼꼼한 사회학적 연구가 이것을 입증했습니다”라고 솔닛은 말했다.

 

 

폭풍이 지나간 후

 

그러나 어떻게 재해가 특별히 그러한 이타적인 행동을 일으키는 걸까? 여기 이 질문을 둘러싸고 솔닛, 파렌티 등과 같은 작가들에 의해 제시된 명제가 있다. 명제는 대략 다음과 같다. ‘우리는 호모에코노미쿠스를 사실로 인정하기에 이르렀고, 항상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꿈을, 그리고 상상을 따라 다닌다. 그것은 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제한하고 생태계와 지역 공동체를 여러 국민국가들로 분할하는 임의의 경계를 만들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 왔듯이, 인공적인 경계들은 동물, 식물 그리고 인간의 관대함의 흐름을 봉쇄할 수 없다.’

 

2017년 산타로사(Santa Rosa)의 북부 캘리포니아 도시에 거센 불이 타올랐을 때, 공동체는 특히 불법체류자들을 위해 고안된 펀드를 조성하기 위해 모였다. ‘언도큐펀드’(Undocufund)는, 나중에 알려진 대로, 현대 정치 풍토의 주요 품목이었던 분할정복이라는 수사(修辭)와 정 반대 위치에 서 있다.

 

언도큐펀드의 이사 오마르 메디나(Omar Medina)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처음에 우리는 5만 달러 또는 10만 달러를 모을 수 있을지 몰랐어요. 지금까지 600만 달러를 모을 거라곤 정말로 예상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재해가 일어나고 불이 계속 타오르자 사람들의 관대함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우리에 대해 알게 되[면서] 우리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습니다. 최근 전국적으로 우리가 경험했던 모든 것에 기초하여 시민증이 없는 불법 주민들에게도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한 것이죠.”

 

이런 종류의 인간의 친절은 주류 제도에 의해 영속화된 호모에코노미쿠스라는 신화에 의해 종종 갇혀 있지만, 출현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틈이 생기면 그 틈으로 폭발한다. 재해 중 또는 그 후에 발생하는 정상적인 상태의 붕괴가 우리 내면 깊숙한 곳의 무언가를 깨운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러한 순간들이 새로운 형태의 시민 참여와 공공의 삶을 위한 공간을 (그것이 아무리 짧게 지속되더라도) 열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역으로 이루어진 일상생활에서는 그러한 기회들은 거의 없거나 아주 드물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연결하고자 하는 깊은 욕구가 있다. 학술지 『미국 사회학 평론』(American Sociological Review)에 게재된 연구에 따르면 25퍼센트의 미국인들이 가까운 친구 또는 터놓고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혼자 사는 개인의 수도 최근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일상 속에서 우리가 점점 더 고립되어지고 원자화되면서, 관계에 대한 갈망이 증가할 뿐이다. “인간은 집단 종(種)입니다. 우리 안에는 종(種)으로서 뭉치려고 하는 깊고 매우 본능적인 무언가가 있습니다”라고 파렌티는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연결을 향한 본능적인 욕구가 발생하는 것을, 2012년 10월 29일 뉴욕시를 강타하여 53명의 사상자를 내고 도시 전역에 320억 달러의 피해를 입힌 허리케인 샌디(Hurricane Sandy) 이후 복구과정에서 보았다. 롱아일랜드의 퀸스(Queens) 자치구에 돌출된 반도인 로커웨이스(Rockaways)와 같은 장소들은 특히 심한 타격을 받았다. 뉴욕은 종종 유독 사람들과 단절되고 이웃과 잘 지내지도 않을 것처럼 보이는 대도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해 공동체주의가 온전히 나타났다.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에 의해 발전된 네트워크와 전략에서 파생된 풀뿌리 구호 네트워크인 ‘샌디를 점령하라’(Occupy Sandy)가 발휘한 노력은 이러한 종류의 공동체적 접근을 보여주는 한 주요한 사례이다. 당국의 대응 이후 남겨진 공백을 메우기 위해 ‘샌디를 점령하라’ 자원봉사자들은 지역사회 단체들 및 활동가 네트워크와 협력했다. 그들의 노력은 지역의 가난한 주민들과 노동자들에게 힘을 주는 것에 중점을 두었고 자선보다는 상호부조에 기초했다. 가장 많을 때에는 6만 명에 달하는 자원봉사자들과 아마존 구호 등록소, 법무팀, 의료팀, 처방약 배달, 일일 식사 배달을 통해, 재해가 일어난 후 몇 날, 몇 주 동안 주목할 만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뉴욕시에 오래 거주한 살 로피조(Sal Lopizzo)는 일군의 자원봉사자들이 그의 침수된 비영리 직업훈련원에 나타나 그 장소를 복구 허브로 전환할 수 있을지 물었을 때, ‘샌디를 점령하라’ 복구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로피조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그냥 나타나서, 사무실을 치우고, 모든 것을 거리로 가지고 나갔어요. 우리는 탁자를 설치하기 시작했고, 물품들을 실은 트럭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생각할 수 있는 물품들은 죄다요. 홈디포(Home Depot)나 타겟(Target)점에 가면 볼 수 있는 것들 말이에요.”

 

로피조의 건물은 초강력폭풍(Superstorm)이 타격을 가한 이후 몇 날, 몇 주 동안 발생했던 많은 허브들 중 하나이다. 로피조의 건물은 심한 타격을 받지 않은 지역에 위치한 12개 남짓한 배급허브들에 의해 식량을 공급받았다.

 

로피조는 이렇게 말했다. “브루클린(Brooklyn)에 있는 교회들이 물품들을 모아 트럭과 밴에 실어서 이곳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한번은 어떤 그리스 정교회의 신부님이 여러 명의 아이들을 태운 미니 밴으로 백 개 정도의 피자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 신부님은 그저 불쑥 등장하신 거예요. 저는 ‘어머나’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죠. 정말 대단했습니다.”

 

폭풍 샌디가 지나간 후 발생한 큰 규모의 풀뿌리 구호 활동에 참여한 로커웨이스 주민인 로레나 히론(Lorena Giron)도 그녀가 목격한 것에 비슷한 감동을 받았다.

 

히론은 이렇게 말했다. “이웃들이 옆집에 사는 이웃들을 걱정하는 것을 보는 즉시 저는 정말 감동 받았습니다. 또한 교회가 신속히 움직여 기꺼이 사람들을 부르고 구호품들을 나누어 주는 모습도 감동적이었어요. 그 어떠한 종류의 도움도 다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를 돌보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느낀 것이죠.”

 

로피조의 개조된 직업훈련원이 위치한 곳에서 불과 몇 마일 떨어져있는 도시 곳곳에, 아번순례교회(Arverne Pilgrim Church)를 포함한 여러 복구 허브들이 생겨났다. 교회 소유자인 데니스 론크(Dennis Loncke) 목사는 어떻게 허리케인 샌디가 전례 없는 방식으로 지역 공동체가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는지 설명했다.

 

론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말이지 폭풍이 장벽을 없애는 데 협력한 셈이죠. 우리 대부분은 개인의 의견 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제 떡보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은 나의 도움이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폭풍이 닥쳤을 때 모든 사람들의 그러한 의견은 곧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폭풍이 지나간 후 많은 사람들에게 경제적·재산적 손실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문제들이 생긴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마을사람들에게 그들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바로 이웃으로서 우리가 가진 마음을 일깨워 준 것이죠.”

 

한 번 다른 세상으로의 문이 열리면, 그 문을 닫는 것은 종종 어렵다. 재해가 일어난 직후 형성된 유대감과 공동체적 비전이 일시적인 재해 구호를 넘어 더 광범위한 프로젝트로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 많다.

 

예를 들어, ‘샌디를 점령하라’ 구호 활동에 의해 그리고 마찬가지로 뉴욕에 기반을 둔 ‘일하는 세상’(The Working World)과 같은 단체들에 의해 장려된, 공동체 강화에 중점을 둔 노력은 히론과 같은 사람들이 현재 ‘노동자 협동조합 육성 프로그램’을 편성하도록 고무했다. 이 프로그램은 뉴욕 시에 4개의 협동조합을 도왔다.

 

히론은 이렇게 말했다. “폭풍이 오기 전에도 로커웨이스와 파로커웨이스(Far Rockaways)는 매우 가난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 일은 매우 중요하고 흥분되는 일이었습니다. 다른 식으로 일을 장려하고 고용을 촉진한다는 생각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그래서 제 삶이 바뀐 것 같습니다. 제게 중요한 건 제가 우리 공동체를 돕고,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풀뿌리 재해 구호가 더 큰 계획을 낳을 수 있는지를 분명히 설명해주는 또 다른 사례는 푸에르토리코의 허리케인 마리아 이후에서도 볼 수 있다. 카구아스 마을 자원봉사자들이 운영하는 ‘공동체 주방’으로 시작한 것이 곧 섬 전체 공동체 센터들의 네트워크인 ‘상호부조센터’(Mutual Aid Centers)로 바뀌었던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센터들은 간단한 식사뿐 아니라 예술, 교육, 치료와 관련한 여러 종류의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카구아스의 ‘상호부조센터’의 창립 회원 중 한 명인 히오반니 로베르토(Giovanni Roberto)는 지역 주민들을 위해 주말 침술 클리닉을 조직하는 것을 돕는다.

“클리닉은 매주 화요일마다 열립니다. 우리는 귀침술을 합니다. 스트레스와 외상 후 증후군, 중독 등 건강과 관련된 문제들을 다룹니다.” 로베르토는 이 모든 서비스가 무료로 제공된다고 덧붙였다.

 

허리케인 마리아에 의해 초래된 혼란은 사망, 부상, 재산 파괴를 훨씬 푸에르토리코 사람의 정신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영향은 지속적이고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섬에는 소리 없이 퍼지는 정신 건강 위기에 대한 보고들이 점점 많아졌다. 특히 푸에르토리코의 이미 망가진 보건관리 시스템이 폭풍 이후 더욱 약화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적절한 보건 관리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재앙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호부조센터’에서 일하는 로베르토의 일이 알려지자, 공동체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이 병을 해결하기 위해 모이고 있다. 로베르토는 우울증과 재해 후 트라우마를 치료하고 있던 센터의 정규 자원봉사자들 중 한 명의 이야기를 했다.

 

“그녀가 이곳에 처음 온 날, 그녀는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거의 울고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녀는 하루도 자원봉사 일을 빼먹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변했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울지 않았습니다. 잠도 더 잘 자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이곳에 왔을 때 그녀는 낙원에 온 기분이었다고 오늘 제게 말하더군요.”

 

라스마리아스(Las Marias)에서 떨어진 마을에 있는 또 다른 상호부조센터의 창립자인 오마르 레예스(Omar Reyes)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센터를 공동체 주방으로 시작했습니다. 급박한 순간에 일이 그렇게 진행되더라고요. 사람들은 먹을 게 필요했죠. 그런데 문제가 바뀌니, 도구도 바뀌었습니다. 변형된 것이죠. 그리고 지금은 교육, 오락, 문화기술, 기회들의 발전을 위한 센터가 되었습니다.”

 

우투아도(Utuado) 마을에 있는 상호부조센터 창립자인 아스트리드 크루즈 네곤(Astrid Cruz Negón)도 같은 소감을 표현했다. “우리 상호부조센터는 허리케인 마리아에서 살아남는다는, 긴급상황에서 형성된 태도에 머물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이 새로운 세상, 더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기를 원합니다.”

 

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공동체가 빛을 유지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보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는 광범한 운동을 형성하기 시작하는 힘, 대체로 요구를 거절해 온 정부에 대해 진지한 요구를 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공동체에 있음을 확실히 하는 것이다. 그때까지 공동체들은 사태를 자신들의 손으로 장악해야 한다.

 

여기에서 나타난 재해 공동체주의의 사례들은 진공 상태에서 일어난 일들이 아니다. 이 사례들은 재해자본주의 세력과의 지속적인 긴장 속에서 종종 발생한다. 뉴욕시는 샌디가 몰아친 이후 수년간 지역 공동체들과 권력 대리인들이 서로 매우 다른 종류의 복구를 두고 싸운 전쟁터이었다. 즉, 서로 반대되는 힘들의 전투장이었던 것이다. 푸에르토리코의 상호부조센터들은 일단의 세력들(미국 정부, 푸에르토리코 정부 그리고 기업들)과 대립하고 있고, 그들의 힘은 상호부조센터 프로젝트의 미래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재해 공동체주의가 구호와 복구 과정에 필수적인, 지역·주·전국 수준의 정부의 작고 큰 규모의 지원을 받아 형성되는 것이 가장 좋은 시나리오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책을 추동하는 결정권이 점점 소수의 권력자들의 수중에 쥐어지게 되면서, 당국의 재해 대처는 사회·정치적 개입 없이는 인종과 계급에 따라 형성된 기존의 계층화를 반영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재난의 시기에 공동체 사람들이 서로를 보살피고 종종 정치적 참여를 낳을 수도 있는 새로운 연대를 만들기도 한다고 기록한 역사의 방대한 저장소는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복구 허브들은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다. 종교 단체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즉석 주방들이 출현하여 단지 식사만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삶의 새로운 비전을 마련해주기도 한다.

 

이 혼란스럽고 분열적인 시대에, 그리고 사회가 심각하고 만성적인 위기에 직면한 가운데 우리는 가물거리는 희망의 빛을 본다. 그것은 바로 공동체 내의 가장 상처 입기 쉬운 것을 돌보기 위해 우리가 모일 수 있는 가능성이다.

 

‘언도큐펀드’ 창립자인 데빈 카드내스(Davin Cardenas)는 이렇게 말한다. “혼란 속에서도 유대를 창출하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목적과도 같은 것을 창출하려고 하는 것이죠.” 캘리포니아에 난 산불 이후, “‘아,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어떻게 내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까?’와 같은 느낌을 모든 사람들이 받았습니다. 우린 이런 말들을 수도 없이 계속 들었습니다. [‘언도큐펀드’가] 사람들에게 목적의식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의식은 혼란 속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사랑을 보여주려고 하고 보살핌을 입증하려고 하고 연대감을 보이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본능인 것이죠.”

 

깊어지는 분열과 기후 변화로 특징지어지는 불확실한 미래이지만, 공동체 구호 및 복원 활동의 많은 사례들은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고 근본적인 복원력을 가지고 재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청사진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사례들은 또한 더 많은 연결, 목적의식, 의미로 채워진 힘을 가진 공동체를 특징으로 하는 ‘다른 세계’를 힐긋이나마 보여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