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 가능한 탈성장 사업으로 가는 열두 단계


  • 저자  :  더글러스 러시코프(Douglas Rushkoff)
  • 원문 : “12 Steps to Post-Growth Sustainable Business (2018.1.08) /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
  • 분류 : 번역
  • 옮긴이 : 정백수
  • 설명 : 저자  러시코프는 저술, 강연, 팟캐스트, 다큐멘터리 제작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활동하고 있는 미디어 이론가이다. 『사이버리아』(Cyberia), 『미디어 바이러스』(Media Virus), 『카오스의 아이들』(Playing the Future), 『당신의 지갑이 텅 빈 데는 이유가 있다』(Coercion), 『거꾸로 본 혁신적 발상』(Get Back in the Box), 『보이지 않는 주인』(Life Inc.) 등 미디어와 사회를 주제로 한 책 여러 권을 출간했다.

 

지속 가능한 탈성장 사업으로 가는 열두 단계

 

어떻게 우리가 이런 상태에 도달했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함정에서 나올 해결책을 원할 뿐이다. CEO들은 오직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고 지역 경제를 고갈시키며 비용을 외화하기 위해 프로그램된 기업들을 위한 가치를 창출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있다.

 

그래서 나는 내 강연들을 마무리할 때마다 모든 사이즈와 단계의 회사들이 현재의 환경에서 어떻게 더 지속 가능하게 될 수 있는가에 대한, 행동에 옮길 수 있는 몇 개의 구체적인 제안을 제시해왔다. 이는 ‘성장 중독’을 벗어나기 위한 12단계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자신의 생존에 성장이 필수적이라고 본다면 그런 식으로 하는 사업은 진정한 사업이 아니다. 부채에 브랜드 이름을 붙여놓은 것일 뿐이다.

 

내 강연을 듣거나, 내 책 『구글 버스에 돌 던지기』(Throwing Rocks at the Google Bus)(([옮긴이] 저자는 2013년 12월 어느날 아침 샌프란시스코의 미션 디스트릭트(Mission District)의 주민들이 구글의 직원들을 집에서 회사로 수송하던 버스 앞을 몸으로 가로막으며 항의한 일을 언급하면서 이 책을 시작한다.))를 읽거나 혹은 나의 팀휴먼(TeamHuman)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거두어들이게 될 조언들의 정수를 여기 제시한다. 물론 그 책을 읽으면 이 전략들이 왜 효과를 발휘하는가, 그리고 이 전략들이 우리가 몇 세기 동안 가져온 잘못된 전제들을 어떻게 폭로하는가에 대한 논증을 접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그 기본 원칙들을 제시한다.

 

1. 모든 의사결정을 자본축적보다 화폐의 속도를 위해 최적화하라. 어떻게 화폐를 쌓아두지 않고 계속 움직이도록 만들 것인가? 만일 당신이 가동될 수 없는 화폐를 깔고 앉아있으면, 당신은 시스템으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빼내고 있는 것이다.

 

2. 부유하게 만들라. 고객들도, 공급자들도, 동업자들도, 심지어는 경쟁자들까지 부유하게 만들라. 만일 시장에서 가치를 빼내버리면 당신의 고객들은 당신에게 쓸 화폐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공급자들로부터 마진을 짜낸다면, 그들은 당신 대신 누구라도 다른 사람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게 것이다. 만일 당신과 접촉하게 되는 모든 사람을 부유하게 만든다면, 그들은 계속해서 당신과 같이 일하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

 

3. 경계가 있는 투자전략을 채택하라. 철강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건설 프로젝트들에 퇴직금을 투자한 미국 철강노동자들을 생각해보라. 혹은 이들의 그 다음 결정이 자신들의 부모를 위한 요양소를 건설하는 데 철강노동자들을 고용하는 프로젝트들에 투자하는 것이었음을 생각해보라. 이 이중, 삼중의 자기출자는 이해관계의 갈등이 아니라 경계가 있는 투자가 가져오는 지레 작용이다. 경계가 설정되면 화폐의 속도를 향상시키는 데 필요한 ‘사이클론 효과’를 생성할 수 있다. 한 번에 10달러를 벌지 말라. 1달러를 열 번 벌라.

 

4. 자본이득보다는 소득을 증진하는 조세정책을 추진하라. 주주들이 주가의 상승에 중독된 이유는 배당금에 더 높은 세금이 매겨지기 때문이다. 성장보다 흐름이 우세하게 되도록 세법을 역전시키라. 배당금과 봉급에는 세제혜택이 주어져야 하고 수동적인 자본이득은 억제되어야 한다.

 

5. 플랫폼 협동조합으로서 조직하라. 운전자들이 회사를 소유하는 우버를 생각해보라. 비록 그들이 자율주행차에 의해 대체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노동이 연구개발과 기계학습(machine learning) 역할을 한 회사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노동은 단지 일이 다 지난 후에 세금을 통해 재분배를 받을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의 소유에 참여해야 한다. 윈코(Winco) 같은 협동조합들이 월마트 같은 주식회사들을 경쟁하는 어디서나 이긴다.

 

6. 지역 크라우드펀딩. 만일 당신이 은행이나 신용조합을 운영하면서 소기업에 대부를 한다면, 10만 달러를 대부하기보다 공동체로부터 사전예약 판매 할인쿠폰 등을 통해 5만 달러를 모으는 능력을 조건으로 5만 달러를 대부하라. 고객들은 확장이 완료된 레스토랑에서 120 달러짜리 피자를 100 달러에 사먹게 된다. 지역인들은 투자를 S&P(Standard &Poor’s)에 아웃소싱하여 지역 재정을 고갈시키기보다 공동체와 그 중심지(‘시내’)에 투자하라.

 

7. 호의은행(favor banks)과 지역 통화를 개발하라. 경제란 욕구를 가진 사람들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의 결합에 다름 아니다. 교환 수단이 결여되어 있다고 해서 이 결합이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지역 통화와 호의은행들은 중앙 금고에서 이자를 내고 돈을 빌리지 않고도 가치를 교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또한 같은 망 안에 있는 지역 사업체들이 작위적인 성장의 요건에 구애받지 않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8. 협동적인 사업체들은 협동하라. 모든 것을 오픈소스, 오픈 API의 방식으로 하고 ‘사업 기밀’이 없도록 하라. 기밀을 유지한다는 것은 회사의 최고의 혁신이 과거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기밀을 공유하는 것은 최고의 혁신이 앞에 놓여있다는 것을, 그리고 모두가 더 똑똑해지는 것에서 혜택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당신은 당신의 영역에서, 학습과 혁신의 문화를 증진하는 데 헌신하는, 능력의 중심으로서 위치하게 될 것이다.

 

9. 큰 회사들은 지역에서 제한된 규모로 경제적 실험들을 시도해볼 수 있다. 배 전체의 방향을 바꿀 필요는 없다. 이 아이디어를 CEO나 중역진에게 홍보수단으로 팔고나서 그 성공을 활용하여 회사 전체에 걸쳐 그것을 장려할 수 있다. 월마트는 지역에서 생산하는 것들을 파는 코너를 도입할 수 있다. 슈퍼마켓들은 일요일마다 주차장을 농산물시장에 개방해줄 수 있다. 은행들은 지역 크라우드펀딩 앱을 제공할 수 있다. 파열적인 아이디어들을 게임을 바꾸는 근본적인 혁신이 아니라 마치 그저 일회적인 것인 양 장려하라.

 

10. 회사를 가족 사업체처럼 운영하라. 가족 사업체들이 모든 수치에서 주식회사들보다 낫다. 장기적으로 더 많은 돈을 벌며 직원들은 보수를 더 잘 받고 더 안정적이며 공동체나 환경으로 외화되는 피해가 적고 등등. 가족 사업체들은 이어받은 유산, 가족의 명성, 가족들이 사는 공동체와의 관계에 신경을 쓰며, 회사 자체가 이후 세대들에게 물려줄 유산이다.

 

11. 성장 말고 다른 성공 계량법을 개발하라. 그것을 종이에 적으라.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번영은 어느 정도인가? 얼마나 많은 청하지 않은 이력서들이 자격 있는 후보자들로부터 들어오고 있는가? 우리의 공급자들의 재정 형편은 어떠한가? 우리의 최전선 직원들은 회사에 의해 지원을 받는다고 느끼고 있는가?

 

12. 당신의 재화와 서비스는 당신의 생산물이지 당신의 스톡(stock)이 아니다. 다른 누군가에게 팔기 위해 회사를 세우지 말라. 직접 운영하기 위해 세우라. 회사는 처분 할 수 있는 물품이 아니다. ‘출구 전략’이란 폰지 사기에나 해당되는 것이다. 세상은 연결되어 있다. 환경은 제한되어 있다. 경제는 순환적이다. 달려갈 다른 곳은 없다.

 

이 모든 제안들에 대한 참고 문헌을 알아보기 위해 나에게 이메일을 보내기 전에, 내 책 『구글 버스에 돌 던지기』에서 모든 것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을 알기 바란다. 이 책은 도서관에서도 볼 수 있으며, 원하는 대답들을 찾기 위해서 색인을 사용할 수 있다.




사회적 가치를 포획하는 금융


  • 저자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새 책 Assembly(2017)의 10장 가운데 4개의 절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0장 금융은 사회적 가치를 포획한다  

 

금융은 추상(abstraction)과 중앙집중화의 도구들을 제공한다.

 

금융자본은 공통적인 것에서 가치를 추출한다. 땅에 묻힌 물질의 가치들과 사회에 담긴 가치들 모두를 추출한다. 그러나 이 가치들은 실제로 역사적으로 생산되며 그 추출(extraction)은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킨다.

 

 

위로부터 본 금융과 아래로부터 본 금융

  

1970년대에 금융이 경제 및 사회 전체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 금융의 발생은 (지구화에 상응하기는 하지만) 사회적 저항과 봉기의 힘의 결과이자 그에 대한 대응으로 볼 때 더 잘 이해된다.”

국가 재정 위기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공공 부채를 민간은행으로 넘기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공공 거버넌스 메커니즘에 대한 지배권을 금융시장이 쥐게 되었다. 부채의 구조가 공적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이동하자 경제발전과 사회 정의가 전지구적 시장과 금융에 종속되게 된다. 신자유주의적인 행정이 금융메커니즘들을 사용하여 국가를 재조직하고 공공 부채와 국가 거버넌스의 이중 위기를 관리하게 된다. 금융화로 이르는 과정은 일반적으로 아래와 같이 진행된다.

 

   저항과 반란 →정부 지출 → 재정 위기 →금융화

 

이러한 진행의 더 작은 버전이 미국의 주요 도시들에서 특히 명확하게 드러난다. 1960년대 다양한 형태의 사회저항과 도시봉기들은 1967년 뉴어크(Newark)와 디트로이트의 봉기에서 그리고 마틴 루터 킹 2세의 암살 이후 널리 퍼진 봉기에서 정점에 이른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일련의 봉기들을 뒤이은 것이 도시의 극적인 재정위기였다. 도시에서 재정 위기들은 증가된 지출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다음에 주로 기인했다 : 공적 자원(자금)을 대도시 중심들로부터 먼 곳으로 옮긴 것, 도시로부터 빠져나오는 부유한 백인 인구들에 의해 세금 기반이 급속하게 감소된 것, 그 결과 건강에서 주택, 안전, 물 공급에 이르는 모든 종류의 사회적 서비스들이 극적으로 감소한 것. 이 위기들은 민간 은행들, 금융펀드들의 개입으로써만 ‘해소’되었으며, 은행들과 펀드들은 ‘비상사태’를 활용하여 공적 재화의 큰 부분을 전유하고 공공 기관들의 민주적 기능을 무너뜨렸다.

1970년대의 뉴욕은 이 과정의 고전적 사례였다. 데이빗 하비 : “뉴욕 재정 위기의 관리가 신자유주의적 과정으로 가는 길을 개척했다. 이 과정은 미국에서는 레이건 정권에서 국제적으로는 1980년대에 IMF를 통해서 진행되었다.” 금융기관들에 의한 디트로이트와 플린트의 재정 위기의 ‘해소’가 오늘날 이 과정을 계속하고 있으며 비극적인 사회적 결과를 낳고 있다.

 

[금융에 대한 통상적인 비판]

① 가치의 생산과 무관하다. 기존의 가치의 소유를 이동시킬 뿐이다. 선진국들은 현재 아무 일도 안 하며 ‘진짜’ 생산은 중국에서만 이루어진다. 금융은 도박이다.(카지노 자본주의).

② 어떤 학술적 주장들은 금융을 도박이 아니라 박탈(dispossession)의 장치로 본다. (금융이 한 역할을 하는 이러한 ‘시초 축적’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논의할 것이다.)

— 이런 견해들은 다 일리가 있다. 그런데 이 두 유형의 견해는 부의 발생이 아니라 부의 이전에만 초점을 둔다.

 

아래로부터 보면 금융이 도박에 덧붙여 사회와 자연 세계로부터 (종종은 숨겨진) 가치들을 포획하는 장치로 기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무게중심은 오늘날 공통적인 것의 추출에 있다. 금융이 자본에서 헤게모니적 역할을 하는 것은 오직, 공통적인 것이 탁월한 생산력으로서 그리고 가치의 주된 형태로서 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추상/추출

  

금융자본은 근본적으로 추상적 성격을 띠며 따라서 생산하는 사람과 생산을 통제하는 사람 사람의 거리가 증가한다.

 

추상은 중앙집중화를 함축한다.

힐퍼딩, 레닌: 중앙집중화는 경쟁을 제거하고 통제를 몇 개의 은행에 집중시키는 경향을 가진다.

금융은 독점을 낳는다. 생산을 지배하는 화폐의 독점.

 

화폐의 그리고 생산에 대한 통제력의 은행에의 집중은 이윤율 균등화 경향을 낳는다. 이윤율 균등화는 ① 더 높은 이윤을 찾아다니는 회사들의 이동을 통해 이루어지고 ② 그보다 더 낮은 정도이지만 일과 더 높은 임금을 찾아다니는 노동자들의 이주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동은 지리적, 문화적, 정치적 요인들에 의해 제한된다. 맑스는 이를 “이러저러한 정도로 중요한 지역적 차이들을 산출하는 실질적 마찰들”이라고 부른다.(([원주] Karl Marx, Capital, trans. David Fernbach, Penguin, 1981, volume 3, p. 275.)) 그런데 화폐의 이동은 회사나 노동력보다 제한을 덜 받는다. 따라서 금융과 신용제도가 균등화 과정에서 훨씬 더 효과적이다. 금융자본이 최대한의 수익을 찾아 여기저기 흘러다니면 울퉁불퉁한 지형을 흐르는 물처럼 평평한 표면을 창출하는 경향이 있다. 소수의 은행들에 통제력이 집중되는 것 그리고 이윤의 비교와 균등화를 향한 경향이 세계 시장의 창출에 기여하는 요인들이다.

 

금융자본과 그것이 지배하는 생산은 산업자본만큼이나 리얼하다. 주된 차이는 생산과 특히 생산적 협력이 지금은 자본의 직접 관여의 외부에서 조직되는 경향을 가진다는 것이다. 금융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는 부로부터 어떻게 가치를 추출하는가이다. 이것이 추상과 추출 사이의 연결고리이다.

 

금융과 사회적 생산이 1970년대부터 나란히 우세한 지위에 이르게 된 방식을 보게 해주는 창문 하나를 파생상품들의 작동이 제공한다. 특히 파생상품들이 척도와 측정의 메커니즘들을 창출하는 방식. 파생상품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어떤 기초자산(underlying assets)), 지수(index), 증권으로부터 가치를 도출하는 계약이다. 파생상품은 보통 미지의 미래를 참조하며 따라서 리스크를 방지하거나 투기의 수단으로서 사용된다.

 

파생상품들은 수 세기 동안 존재해왔다. 1960년대까지는 주로 쌀, 돼지, 밀 같은 상품들의 선물(先物)시장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훈육에 기반을 둔 산업질서와 재정국가가 붕괴하면서 그리고 사회적 생산과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 경제에서 주된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서 파생상품 시장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기초자산의 범위가 점점 더 넓어졌다.

 

파생상품은 매우 복잡하여 여기서 그 작동에 대해 적절한 분석을 제시하는 것은 이 책의 범위 훨씬 너머에 있다. 우리의 논의의 핵심은 파생상품들의 척도로서의 역할에 집중된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자본이 더 이상 가치를 (적어도 이전의 방식대로는) 적절하게 측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맑스와 리카도가 이론화했던 것처럼 노동시간의 양으로 가치를 측정하는 것은 분명히 더 이상 불가능하다. 노동이 더 이상 부의 원천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여전히 노동은 부의 원천이다. 그러나 그것이 창출하는 부가 이제는 (혹은 더 이상) 측정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지식, 정보, 돌봄이나 신뢰의 관계, 교육이나 건강서비스의 기본적 결과—이것들의 가치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은 사회적 생산성과 가치의 측정을 여전히 필요로 한다.

 

파생상품이 측정 문제에 대한 자본의 반응의 일환이다. 파생상품은 기초자산으로부터의 추상이기 때문에 이 추상성으로 인해서 부의 광범한 형태들 사이의 전환의 복잡한 그물망을 형성할 수 있다. 여러 형태의 파생상품들은 통화의 미래 가치나 수확의 결과와 같은 미지의 휘발적인 자산을 파악하여 거래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든다.

 

[Bryan and Rafferty]

이러한 거래의 수립 덕택에 파생상품들은 미지의 가치에 대한 시장 벤치마크를 제공한다.(([원주] Dick Bryan and Michael Rafferty, Capitalism with Derivatives, Palgrave Macmillan, 2006, p. 37.)) 모든 파생상품은 자본의 형태 전환의 패키지이다. 이 상품들이 모두 합쳐지면 자본형태전환의 복잡한 그물망 즉 파생상품들의 체계(a system of derivatives)를 형성한다. 이 체계에서는 자본의 어떤 조그만 부분이든 다른 조그만 부분에 대비하여 지속적으로 측정될 수 있다.(([원주] Dick Bryan and Michael Rafferty, “Financial Derivatives and the Theory of Money,” Economy and Society, 36:1, p. 141.))

 

이렇듯 파생상품과 파생상품 시장은 계산의 계속적 과정을 작동시키고 동일 척도로 계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수립하여 이미 존재하거나 미래에 존재할 엄청난 범위의 자산들을 시장에서 서로 대비하여 측정 가능하게 만든다.

 

[Randy Martin]

파생상품들이 핵심적으로 하는 일은 미래를 현재에 묶고 상이한 위치, 부문, 특징을 가진 모든 종류의 자본들을 서로 동일한 척도로 측정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원주] Randy Martin, “After Economy? Social Logics of the Derivative,” Social Text, 31:1, Spring 2013, p. 88. 또한 Lawrence Grossberg, “Modernity and Commensuration,” Cultural Studies, 24:3, 2010, pp. 295−332 참조.))

 

그 가치들이 정확하냐고 반문할 수 있는데, 이는 제대로 된 물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중요한 사실은 이 맥락에서 측정(치들)이 정밀하고 효과적이냐이다. 오늘날 사회적 생산의 가치들은 미지의 것, 측정될 수 없는 것, 수량화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시장들은 그것들에 수량을 각인시킨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의적이지만 실제로 효과를 발하는 수량이다.

 

금융은 (파생상품은 더욱더) 허구적이고 기생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사회적 부의 총체를 놓고 자본주의적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혹은 측정한다고 주장하는) 유일한 자들인 금융의 대장들과 중개의 군주들은 ‘맘대로 해봐’라고 코웃음을 친다. 이들은 공통적인 것으로부터의 추출을 통해 방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한 웃을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그런 금융 메커니즘은 위기를 방지하는 것이 아니라 심화시킨다는 것을. 곧 살펴보겠지만, 금융의 휘발성이 영속적인 위기를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주된 양태로 만드는 한 요소이다.

 

추출의 여러 얼굴들

  

특히 자연자원의 추출의 중요성이 증가하면서 자본은 시계를 되돌린 듯하다. 오늘날의 토지수탈과 무자비한 자원 사냥은 뽀또시(Potosi)의 은광과 요하네스버그의 금광 그리고 토착민으로부터의 토지절도를 상기시킨다. 실로 정복·식민주의·제국주의의 역사는 부를 추출하려는 탐욕에 의해 추동되었다. 인간 역시 노예로서 추출될 수 있었다. 토지에서 인간까지 모든 것이 식민주의자들에게는 그들의 노력의 보답인 선물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추출이 점점 더 중심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은 역사적 회귀를 나타내는 것만이 아니다. 공통적인 것이 추출되고 변형되어 사유재산으로 되므로, 오늘날의 추출을 이해하려면 추출이 의존하는 공통적인 것의 형태들을 추적하는 것이 좋다.

추출은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다.

① 지구와 생태계의 부

② 사회적 부

이 두 형태가 추출주의(extractivism)의 여러 얼굴들을 이해하는 데 첫 가이드가 될 수 있다.

 

① 지구와 생태계의 부로부터의 추출

지구와 그 생태계는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이다. 인간이 지구를 지배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돌봄과 지속 가능한 사용의 관계를 함께 수립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재생 불가능한 자원의 추출은 불의(不義)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심지어는 파국적인 파괴를 낳을 수 있다. 자본주의적 산업과 상품화는 오랫동안 파괴적 영향을 미쳐왔다. 추출주의는 어떤 점에서 이 파괴의 과정을 돌이킬 수 없는 지점으로 몰고 가고 있다. 자본 대 지구— 둘 가운데 하나만 생존할 수 있다. 둘 다 생존하지는 못한다.

 

추출산업, 특히 에너지 산업 환경과 사회를 파괴한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처음부터 그랬고 점점 그 파괴의 크기와 빈도가 증가하고 있을 뿐이다 : Galicia, the Gulf of Mexico, Uzbekistan, Kuwait, Angola 등등. 석탄채굴과 금속 채굴도 광부의 건강과 환경을 계속적으로 파괴했다. 추출이 더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고 (페르시아만의 국가들, 러시아, 베네수엘라 등) 많은 나라들이 화석연료 회사처럼 행동하게 됨에 따라 어떤 측면에서는 스밤파(Maristella Svampa)가 경제의 ‘reprimarization’[채광, 석유, 목축과 같은 1차 부문이 다시 경제의 중심이 되는 것—정리자]이라고 부른 것이 발생했다.

 

새로운 것은 추출주의 전선의 극적 확대이다. 지구의 어느 구석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채굴]

디지털 장비를 위한 금속 채굴. 새로운 기술의 발전이 석유 채굴을 위한 새로운 지형을 열었다(캐나다 앨버타의 타르샌드(([정리자] 타르샌드 →오일샌드(oil sands) : 신기술로 사용할 수 있게 된 석유자원 가운데 하나로서 점토나 모래 물 등에 중질 원유가 10% 이상 함유된 것을 말한다. 원유가 굳어져 반쯤 고체 상태로 땅 표면 가까이 부존하는 경우 이를 역청(瀝靑)이라 부른다. 역청이 모래진흙 등과 섞여 있는 것이 바로 석유모래다. 석유모래에서 역청을 분리한 뒤 이를 가공하면 기름샘에서 뽑아 올린 원유와 성분이 같아진다. 이렇게 생산한 원유를 보통 원유(conventional crude)와 구분해 합성원유(synthetic crude)라 부른다. 오일샌드가 가장 많이 매장된 국가는 베네수엘라이며, 그 다음이 캐나다이다. [한국어 위키피디아에서])) 유정, 미국의 fracking수압균열법) 이 방법은 새로운 지진 지대를 발생시키고, 대기와 지하수를 오염시켜서 전통적인 방법보다 더 위험하고 파괴적이다.

 

[농업]

대규모 농업도 여러 측면에서 추출 산업이 되었다. 옥수수나 콩이 식품이나 사료로 쓰이지 않고 에탄올과 플라스틱의 생산에 직접 투입될 때, 옥수수 밭이나 콩 밭은 유정과 다르지 않데 된다. 땅으로부터 부를 에너지와 산업자원으로서 흡수한다. 삼림파괴에서 농약의 사용까지 이것이 가져오는 환경파괴는 다른 추출과정의 경우와 맞먹는다.

 

[기후변화]

추출주의의 환경파괴 효과는 기후변화의 전망에 의해 한 등급 더 높아진다. 과거에는 사고로 인해, 유정과 탄광으로 인해 생기는 오염과 파괴가 비교적 지역에 국한되고 잠재적으로는 역전 가능한 현상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반적이고 불가역적인 파괴의 전망이 내재한다.

맥키븐(Bill McKibben) : 지구 기온이 평균 섭씨 2도가 넘지 않으려면 석탄 및 석유 매장량의 80%가 땅 속에 그대로 묻혀 있어야 한다. 화석연료 산업은 악당 산업이다. 공공의 적 제1호이다.

 

② 사회적 부로부터의 추출

현대의 추출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구로부터 박탈한 가치만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다른 범주인 사회적 생산 및 사회적 삶으로부터의 가치 포획도 알아야 한다.

 

㉠ 기업들은 인간 신체 자체를 부의 저장소=추출 대상으로 본다. 신체에 담긴 유전자 정보도 재산으로 추출되어 특허로 보호될 수 있다. 기업들은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 등이 ‘생물약탈’(biopiracy)이라고 부른 것을 통해 전통적인 지식—이는 오래 전에 전통적인 공동체에 의해 개발되어 공동으로 유지되던 것이다—으로부터 가치를 추출할 수 있다.

 

㉡ 데이터 채굴 혹은 데이터 추출. 오늘날 디지털 골드러시가 존재한다. 데이터의 채굴과 추출이란 거대한 데이터 풀(pool)에서 패턴을 찾음으로써 그리고 그 데이터들이 저장되고 팔릴 수 있도록 구조화함으로써 가치를 포획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데이터 개념은 가치가 생산되고 포획되는 방식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앞에서 우리는 구글의 PageRank 같은 알고리즘이 사용자들의 지식과 지성에 의해 산출된 가치를 포획하는 방식을 서술한 바 있다. 소셜 미디어도 사용자들 사이의 관계와 연결로부터 가치를 포획하는 메커니즘들을 발견했다. 달리 말하자면, 데이터의 가치 뒤에는 사회적 관계사회적 지성 그리고 사회적 생산의 부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 추출의 다음 얼굴은 사회 영토 자체이다. 예를 들어 메트로폴리스는 건설된 환경 이상의 것으로서 공통적인 것이 생산되는 가마솥이다. 여기에는 문화적 동학, 사회적 관계의 패턴들, 혁신적 언어, 정동적 감성 등이 포함된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은 도시 영토 자체에 함입된 공통적인 것을 추출하는 과정으로 파악될 수 있다. 혈암에서 석유를 끌어내는 것과 유사하다. 금융이 지배하는 부동산 시장은 도시 및 시골 영토들을 가로질러 사회적 가치를 추출하는 방대한 장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 추출의 그 다음 얼굴은 협력적 사회적 생산의 여러 형태들이다. 이는 다른 여러 측면들을 조합하는 측면이다. 예를 들어 애너 칭(Anna Tsing)은 야생버섯이 오리건에서 채취되어 일본에서 팔리기까지 과정을 추적하면서 자본이 자율적으로 생산되는 가치를 포획하는 능력을 짚어낸다. 자본가의 통제 없이 생산되는 가치를 이용하는 것을 그녀는 ‘salvage’(상품 수집[←고물 수집: 정리자])라고 부른다.(([원주] Anna Tsing, 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5, p. 63. [정리자] 애너 칭은 이 저서의 한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전지구적 공급망은 진보에 대한 기대를 종식시켰다. 선도적 기업들로 하여금 노동을 통제하는 일에 집중하지 않아도 되도록 허용했기 때문이다. 노동을 표준화하는 것은 교육과 정규직 일자리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이윤과 진보가 연결되었다. 이와 달리 공급망에서는 여러 경로로 모아들인 재화가 선도적 회사를 위한 이윤을 낳을 수 있다. 직장에의 헌신, 교육, 복지는 더 이상 수사적으로라도 필요하지 않다. 공급망은 특정 종류의 상품 수집(salvage)의 축적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는 한 구획에서 다른 구획으로 넘어오는 과정이 포함된다. 미국-일본 관계의 근대적 역사는 이러한 관행을 세계 전역으로 퍼뜨리는 요청과 응답의 대위법이다.”)) ‘상품 수집’은 실로 사회적 생산과 사회적 삶의 생산에서 산출되는 가치를 자본이 포획하고 추출하는 방식을 탁월하게 서술한 것이다.

 

이러한 추출은 공통적인 것의 자국을 좇는다. 추출은 산업과 달리 상당한 정도로 자본의 관여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부의 형태들에 의존한다. 자동차는 공장에서 생산되지만, 석유와 석탄은 땅 속에 이미 존재한다. (물론 추출 자체도 생산과정이며 추출된 재료는 정련되고 분배된다.) 이 구분은 사회적 지성, 사회적 관계, 사회적 영토와 관련하여 훨씬 더 명확해진다.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자본가가 부과하는 시간표와 규율에 따라 협력하지만, 여기서는 가치가 자본에 의해 직접 조직되지 않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사회적 협력을 통해 생산된다.

 

이렇듯 부활된 추출의 중심성은 이윤에서 지대(임대료)로의 역사적 이행이라는 맥락에 위치한다. 이윤이 목적인 산업자본가들과 달리 임대소득자(rentier)는 공통적인 것을 추출하며 생산에 거의 관여하지 않고 기존의 부를 축적한다. 임대소득자의 부활된 중심성은 단지 과거의 잔존이거나 역사적 순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추출주의의 여러 얼굴을 밝혀낸 것이 우리로 하여금 자본주의적 발전과 역사적 진행을 더 잘 이해하게 해준다. 이 발전과 진행은 단순히 직선형도 아니고 순환적이지도 않다. 다양한 지리적·문화적 차이들을 통해 복잡한 혼종적 시간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금융은 현대의 추출주의와 이중의 관계를 맺는다.

① 토지와 장비를 구입하기 위해 엄청난 액수의 초기 지출이 필요하기 때문에 금융이 추출 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추출 회사들과 그 기획들이 점점 더 커지기 때문에 금융의 통제력도 점점 더 커진다. 이는 앞에서 말한 사회적 장과 및 생물학적 장을 ‘채굴’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② 금융은 또한 직접 추출한다. 사회적 생산의 결과들로부터의 가치추출을 다양한 방식으로 관리한다.

 

[부채]

부채는 사회적 삶으로부터 가치를 추출하는 메커니즘 가운데 하나이다. 가령 홈 모기지, 임대사업, 폐쇄(foreclosures), 퇴거는 빈민과 중산층으로부터 부를 포획하고 추출하는 장치들이다. Matthew Desmond : 가령 페이데이론(payday loan)[월급을 기반으로 한 소액의 대출—정리자]은 빈민의 호주머니로부터 돈을 끌어내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금융 테크닉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그러한 장치들을 통해 추출된 사회적 가치는 비활성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 협력의 회로들의 결과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Veronica Gago :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의 이주민 공동체들을 연구하면서 가치의 사회적 생산과 그 상대적 자율성을 강조한다. 이는 금융이 때때로 소비를 목적으로 한 미시대출을 통해 민중의 삶으로부터 가치를 추출할 때 드러난다. “위로부터 추동되는 금융화는 민중의 자율적인 생산·재생산 실천 형태들을 독해하고 전유하고 재해석하는 방식으로서 작동한다.”(([원주] Veronica Gago, “Financialization of Popular Life and the Extractive Operations of Capital,” South Atlantic Quarterly, 114:1, January 2015, pp. 11–28, quote on p. 16. 또한 Veronica Gago and Sandro Mezzadra, “Para una critica de las operaciones estractivas del capital,” Nueva sociedad, no. 255, January−February 2015, pp. 38–52 참조.))

 

금융은 그 자체가 추출적 산업이다. 추상과 중앙집중화의 힘일 뿐 아니라 사회적 생산으로부터 가치를 직접 포획하고 추출하는 장치이다. 아래에서 보면 이 과정은 사회전역에 걸친 수많은 상호작용과 협력에 의해 구성되는 공통적인 것을 가리킨다.

 

추출을 위로부터 이해하고 싶으면 화폐를 따르라. 그러나 아래로부터 포착하고 싶으면 공통적인 것을 따르라.

 

 

사회적 생산에서 금융으로

 

아래에서 보면 사회적 생산을 앞에서 말한 이중적 의미에서 인식하게 된다. 즉 ① 사회적 상호작용의 결과이며 ② 사회를 생산한다. 우리가 또한 볼 수 있는 것은, 현재 우리가 목격하는 금융의 우세가 사회적 생산의 점증하는 중심성에 대한 반응으로서 생겼다는 것, 궁극적으로 금융은 (산업과 훈육의 체제의 기반을 파괴한) 저항과 봉기의 축적에의 대응이라는 점이다. 이렇듯 이는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의 이행이 나타내는 자본과 노동의 새로운 관계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포디즘 시기에 자본주의적 생산이 산업노동의 계획된 협력에서 생성되는 이윤에 의해 추동되는 훈육체제 및 축적에 의해 구조화되었다면, 포스트포디즘 시기에는 생산적 지식과 협력의 사회적 능력이 사회에 점점 더 널리 퍼지게 됨에 따라 금융이 사회적 생산을 통제하고 동시에 사회적 생산이 발생시키는 가치를 지대(임대소득)의 형태로 추출하는 데 복무한다.

 

추출의 우세함이 착취의 성격을 변화시킨다. 이는 새로운 기준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맑스의 착취 개념이 가진 시간적 분석틀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맑스는 노동자가 노동일의 일부 동안 생산된 가치에 대해 임금을 받고 노동일의 나머지 시간 동안 생산된 가치는 자본가가 전유한다고 설명한다. 이 설명은 착취와 생산조직화 사이의 긴밀한 연관을 드러내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착취와 생산조직화의 메커니즘들은 서로 갈라지는 경향이 있다. 멀리서 가치를 추출하며 생산주체들을 추상적으로 덩어리로 보는 자본주의 기업가들은 사회적 생산의 결과를 자연이 주는 선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파생상품 시장과 중개거래(arbitrage) 전략에 눈독을 들이는 그들은 더 이상 생산을 조직하고 새로운 결합을 만들어내며 노동협력을 발생시키는 주인공들이 아니다. 반대로 가치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협력하고 생산을 계획할 능력은 점점 더 커진다.

 

그렇다면 하나의 열쇠는 사회적 생산의 일반성과 그것을 활성화하는 노동 형상을 인식하는 것이다. 현대의 노동은 종종 지식, 지성, 인지 능력의 측면에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사회적 생산은 디지털 세계의 정점―가령 구글의 Alphabet―에서만이 아니라 경제 전체에 걸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노동의 상이한 층이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러시아 인형처럼 차곡차곡 안에 넣어져 있다—건강, 교육, 가사 돌봄을 담당하는 핑크칼라 안에 공장의 블루칼라 안에 사무실 칸막이 안의 화이트칼라 안에 키보드를 두들기는 칼라 없는 노동자—는 생각을 버릴 필요가 있다.

 

더욱이 오늘날 산업들 사이의 시차란 없다. 산업은 1930년처럼 기능하고 농업은 1830년대처럼 기능하는 식이 아니다. 나라마다, 그리고 전지구적 시장 전체에 걸쳐서 분명히 다르게 나타나는 노동조건들과 과정들은 동시대적인 방식으로 불규칙적으로 교차하고 혼합된다. 금속노동자가 디지털 도구로 극히 전문화된 작업을 수행하고 인지노동자가 일관작업의 방식으로 데이터를 조작하며 건강 및 교육 노동자가 첨단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함께 지식과 돌봄, 지성과 정동을 사용한다.

Carla Freeman : 바르바도스의 데이터프로세싱 시설에 대한 연구에서 이러한 교차의 탁월한 사례를 제공한다. 여기서 여성 노동자들이 미국 보험회사를 위해 의료(보험)청구 양식에 데이터를 입력하는 것과 같은 상투적인 디지털 과제를 수행한다. 이 시설은 노동이 멍하게 만들 정도로 반복되는 블루칼라 공장의 특징을 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성들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처럼 하이힐을 신고 있다. 그리고 디지털 작업은 상투화되었을지라도 칼라 없는 노동자의 경우처럼 지식과 지성을 필요로 한다. 마지막으로 노동은 핑크칼라로서 명시적으로 여성화되어 있다.(([원주] Carla Freeman, High Tech and High Heels in the Global Economy, Duke University Press, 2000. See also Andrew Ross, No Collar, Basic Books, 2003.))

 

오늘날 스펙트럼으로 펼쳐진 노동—델리의 법률사무소들에서 스톡홀름의 편의점들까지, 상파울로의 자동차공장들에서 오리건의 반도체 공장들까지—은 모든 노동 체제들의 교차로 특징지어진다. 우리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 전체에 걸쳐서 사회적 생산이 생산활동(지식과 협력의 사용)에서나 생산물(사회적으로 공유되는 구성요소들)에서나 점점 더 중심적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열쇠는 금융으로 하여금 부를 추출하고 모으게 하는 사회적 생산의 특징들 바로 그것이 또한 저항과 봉기의 씨앗과 토대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맑스의 논의의 도움으로 이 두 날을 가진 성격이 세 단계의 논리적 과정— ① 추상에서 ② 사회적 생산을 거쳐 ③ 주체성으로—을 거쳐 발전함을 파악할 수 있다.

 

① 추상

맑스 : 자본과 노동의 경제적 관계는 노동이 예술/기예의 모든 특징을 잃는 데 비례해서 더 순전하게 발전한다. 그 구체적 숙련이 더 추상적인 어떤 것이 되면서. 점점 더 “순전히 추상적 활동”이 되면서.(([원주] Marx, Grundrisse, p. 297.))

사회적 생산에서 추상은 여러 면에서 극적으로 증가한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이 지식을 내화하고 협력에서 그것을 발전시킬 때 그들의 노동과 그 노동이 생산하는 가치는 더 추상적이 된다. 그러나 맑스는 ‘예술’의 상실을 향수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특수한 예술이나 기술의 상실은 이득이기도 하다.

맑스 : “노동은 이런 노동, 저런 노동이 아니라, 순전한 노동, 추상적 노동이다. 그 특정의 규정성에 절대적으로 무관심하지만 모든 규정성이 가능하다.”(([원주] Marx, Grundrisse, p. 296.))

그렇다면 노동의 추상은 공허한 것이 아니라 생산의 사회적 성격으로 완전히 꽉 찬 것이다. 생산과정과 가치의 추상성이 더 높아지면 자본에 대한 저항과 자본으로부터의 자율의 이례적 잠재력이 생긴다.

 

② 사회적 생산

노동의 점점 더 일반화되는 능력은 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전제한다. 특수한 개별 노동은 처음부터 사회적 노동으로 정립된다. 맑스: “생산의 사회적 성격이 전제되며, 생산물들의 세계에의 참여, 즉 소비에의 참여는 서로 독립된 노동 혹은 노동생산물의 교환을 통해 매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개인이 활동하는 사회적 생산조건들을 통해서 매개된다.”(([원주] Marx, Grundrisse, p. 172.))

그렇다면 생산과정의 점증하는 추상은 사회적 관계망에 의존한다. 달리 말하면, 공통적인 것에 의존한다. 공통적인 것에는 공유되는 지식, 문화, 협력의 회로들이 포함된다.

 

③ 주체성

셋째 단계는 이 사회적 토대를 주체적으로 가동시키는 것이다. 자본이라는 총체성에 노동의 총체성이 맞선다.

맑스: “노동은 물론 특수한 노동으로서는 특수한 자본을 구성하는 특수한 물질에 상응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자본 그 자체는 모든 물질의 특수성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특수성들 모두로부터의 추상인 동시에 그 특수성들의 총체이기 때문에 자본에 맞서는 노동도 주체적으로는 동일한 총체성과 추상성을 자체 내에 지니게 된다.”(([원주] Marx, Grundrisse, p. 296.))

노동이 추상적이고 사회적이라는 사실에 주체화의 잠재성이 담겨 있다. 다만 여기서 동질적이고 획일적으로 통일된 주체성을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생산의 사회적 성격은 주체성들이 협력하고 갈등하는, 차이들의 열려진 장을 함축한다. 공통적인 것은 사회적 생산의 이 수많은 이질적인 주체성들로부터 구성된다.

 

공통적인 것에의 자본의 접근과 공통적인 것의 아래로부터의 자율적 조직화는 서로 갈라진다. 이는 사회적 복지의 부분 즉 교육, 주택, 건강, 아이들 및 노인 돌봄, 과학적·의학적 연구에서 명백하다. 이 모든 활동들은 자본주의적 척도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적 가치들을 함축한다. 이 부문들에서 우리는 생산성에 대한 자본의 이해와 사회적 이해 사이의 점증하는 간격을 인식할 수 있다. 이 간격은 다시 공통적인 것에 대한 접근에서의 차이를 알려준다. 자본의 입장에서 공통적인 것은 그로부터 최대의 이윤이 추출될 수 있는 것이고, 사회의 입장에서 공통적인 것은 인구가 사용하고 인구에 복무할 수 있도록 열려진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주체적으로 적대의 선을 구성한다. 

맑스: 한편으로, 자본은 부의 창출을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노동시간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시키기 위하여 과학과 자연의 모든 힘을 살리고 사회적 결합과 사회적 교류의 모든 힘을 살린다. 다른 한편, 자본은 그렇게 창출된 엄청난 사회적 힘들이 노동시간에 의하여 측정되기를 바라고 그 힘들을 이미 창출된 가치를 가치로서 유지하는데 필요한 한계 내에 가두기를 바란다. 생산력과 사회적 관계들―사회적 개인의 발전의 두 상이한 측면들―은 자본에게 단순한 수단으로 나타난다. 단순히 그 제한된 토대 위에서의 생산을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실상 이 힘들은 그 토대를 하늘로 날려버릴 물질적 조건들이다.(([원주] Marx, Grundrisse, p. 706.))

 

주체성의 다수성과 이질성을 강조하게 되면, 상황은 훨씬 더 폭발의 잠재력을 갖게 된다.

 

사회적 생산의 다수적 차원이 일정한 폭발성(휘발성)을 함축한다면, 이런 형태의 노동력이 생산에서 헤게모니적 위치를 차지하는 경향이 있다면, 이 생산과정에 들어있는 추상이 공통적인 것의 여러 형태들의 출현을 함축한다면, 그리하여 자본가로서는 생산자들의 종속(subjection)이 필요하고 생산자들에게는 주체화(subjectivation)의 잠재력이 열린다면—그렇다면 자본은 딜레마에 처하게 된다. 만일 자본이 사회적 생산에 긴밀하게 관여한다면, 이는 완전히 생산과정을 봉쇄하는 데로 이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자본은 화폐라는 극단적이고 격렬한 형태로 ‘거리를 두고’ 멀리서 명령을 부과해야 한다. 이로써 가치의 금융적 추상이 구현된다.

 

이러한 사태전개는 전복적 주체의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다소 확연한 계급 분할의 진행이며 계급적대의 원천이 된다. ① 한쪽에는 금융시장에서 생성되는 이자로 먹고 살며 자신들이 축적한 사유재산에의 배타적인 접근을 보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② 다른 쪽에는 집단적 지식과 지성 및 사회적 소통 능력, 돌봄 능력, 협력 능력을 통해 사회적 부를 생산하며 공통적인 것에의 자유롭고 열려있는 접근을 통해 안전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전선은 이렇게 형성되어 있다.




번역으로서의 ‘말 잡기’


  • 저자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새 책 Assembly(2017)의 9장의 뒤에 딸린 “Taking the word as translation”의 내용을 상세히 정리한 것이다. 

 

 

Taking the word as translation 

  

모든 사회·정치적 운동의 중심 과제는 새로운 주체성들이 발언권을 잡는 것, 혹은 프랑스인들이 말하듯이, 말을 잡는 것(prendre le parole, 발언하다)이다. 예를 들어 2011년 이래 계속적으로 샘솟아오른 다양한 야영 및 점거 투쟁들은 난점과 결점을 안고도 효과적으로 ‘말 잡기’(taking the word)의 장소들을 구축했다. 그러나 말 잡기는 그저 자신을 표현하도록 허용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표현의 자유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말 잡기는 말 자체를 변형시키는 것, 말에 새로운 사회적 행동논리와 결합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 잡기는 또한 당신의 자아로부터 빠져나오는 것, 고독으로부터 탈출하는 것, 타인들과 만나는 것, 그리고 공동체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두 가지 의미에서 말 잡기는 번역의 과정이다.

 

첫째 의미에서의 말 잡기는 우리의 정치적 어휘목록에 있는 핵심적 용어들이 마치 우리가 오늘날 살고 행동하는 방식에 맞추어 번역할 필요가 있는 외국어인 양 취급한다. 이는 때로 새로운 용어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포함하지만 더 많은 경우 그것은 기존의 용어들을 돌려잡아서 그것들에 새로운 의의를 부여하는 일이 된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유롭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예를 들어 ‘공화주의적’이라는 말이 18세기에 유럽과 북미에서 변형된 것, 혹은 1871년 이후 ‘코뮌’이라는 말이 유럽 전역에서 ‘사회적 혁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번역된 것, 혹은 ‘소비에트’라는 말이 1905년과 1917년 이후에 혁명과 민주주의의 밀도 있는 이론을 위한 이름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이 용어들의 정치적 번역은 추상적으로 혹은 진공에서 발명된 것이 아니라 집단적 실천 속에서 실현되었다. 이런 식으로 발언권 쥐기, 말 잡기는 현실에서 출현한다. ‘현실 잡기‘(taking of reality)를 산출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이러한 번역 작업이 정치 현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왜곡하는 데 전략적으로 복무한 적이 많다는 점에 주목하자. 예를 들어, 1997년 노동당선언은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지지하기 위해서 정치적 어휘를 수정했다. ‘사회적’이란 말이 완전히 중립적인 방식으로 제시되었고, ‘사회주의’는 ‘사회 서비스’와 혼동되었으며, ‘자유’(freedom) 개념은 사회적 투쟁과의 연결이 없는 ‘자유권’(liberty)으로 제시되었고, ‘당’ 개념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공통체에의 준거를 다 잃고 그저 개인들의 단체가 되었으며, 계급투쟁 개념은 소수와 다수의 대립이 되었다.(([원주] Paolo Donadio, “La nuova lingua del New Labour,” doctoral thesis, Universita Federico II, Naples, 2001)) 토니 블레어와 신노동당 지도자들은 정치적 목적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전통의 언어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오늘날 우리는 주류 어휘 목록의 일부 결정적 용어들의 통상적 의미와 결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번 장에서 기업가정신을 재정의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사회주의 어휘 목록의 개념들을 번역해야 하는데, 신노동당과는 반대로 움직여서 계급투쟁개혁복지 그리고 혁명에 오늘날의 현실에서의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한때 전복적이었던 어떤 용어들은 분명 의미가 잘못 사용되었거나 흐려졌거나 텅 비어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이 이전에 가졌던 활력을 복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 의미심장하고 유용한 것은 전통적인 개념들을 우리의 새로운 현실로 옮겨놓고, 단어들을 사회적 실천을 구성하는 관계로 가져와서 열정과 운동을 활성화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열쇠로 만드는 노력이다. 정치적 사유에서의 모든 발본적인 기획은 우리의 정치적 어휘를 재정의해야 한다.

 

말 잡기는 또한 둘째 의미에서의 번역을 의미한다. 항상 다수의 말을 하는 주체성들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 누구도, 모두가 구토가 나올 정도로 반복해야 하는 당 노선을 말하기 위해서 발언(말 잡기)하는 것을 바라거나 상상해서는 안 된다. 이는 완전히 죽은 언어, 목석의 언어가 될 것이다. 살아있는 방식의 말 잡기는 이질적인 목소리들과 (나오키 사카이의 용어를 쓰자면) ‘이질언어적’(heterolingual) 공동체들에 힘을 주어야 한다. 이 목소리들과 공동체들은 각자 마치 외국어로 말하는 듯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번역하고 소통할 수 있다.(([원주] See Naoki Sakai, Translation and Subjectivit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7; Sandro Mezzadra, “Living in Transition: Toward a Heterolingual Theory of the Multitude,” http://eipcp.net/transversal/1107/mezzadra/en; and Sandro Mezzadra and BrettNeilson, Border as Method, Duke University Press, 2013.)) 이는 자멘호프보다는 조미아(Zomia)의 세계이다. 즉 자멘호프가 발명한 에스페란토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제임스 C. 스콧이 근대에 대한 대안적 내러티브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는 동남아시아 고원지대의 문화가 혼합된 지역이다.(([원주] James C. Scott, The Art of Not Being Governed, Yale University Press, 2009.)) 여기서 필요한 번역 과정은―이는 언어적인 동시에 문화적·사회적·정치적이다―특이성들을 공통적인 것 안에 위치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일종의 커머닝이다. 그런데 앞에서 되풀이해서 말했듯이,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공통적인 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며 획일성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로 그 반대다! 공통적인 것은 이질성을 위한 플랫폼이며, 구성적 차이들 사이의 공유된 관계들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예를 들어 이주자들을 보자. 국경들과 나라들, 사막들과 바다들을 가로지르고, 게토에서 불안정하게 살면서 생존을 위해 가장 굴욕적인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며, 경찰 및 이주반대 군중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면서 현대 세계를 형성하는 데 그토록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 이 이주자들은 번역 과정과 ‘커머닝’의 경험 사이의 핵심적 연관들을 입증한다.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로 구성된 다중이 옮겨갈 때나 정지했을 때나 서로 소통하는 새로운 수단, 같이 행동하는 새로운 양태, 서로 마주치고 모이는 새로운 장소들을 발명한다. 요컨대, 이들은 특이성들을 잃지 않으면서 새로운 공통적인 것을 구성한다. 특이성들이 번역의 과정을 통해 함께 다중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주자들은 장차 다가오는 공통체이며, 가난하지만 언어가 풍요롭고, 피곤에 짓눌리지만 신체적·언어적 사회적 협동에 열려 있다. 오늘날 정당하게 말을 잡으려 하는 모든 정치적 주체성들은 이주자들처럼 말하는 (행동하는·살아가는·창조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레비아탄』의 원래 속표지 그림은, 홉스 자신이 직접 맡긴 것인데, 왕의 신체가 영국의 모든 남성 신민들의 신체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국민, 국가, 주권자(왕) 사이의 통일성을 우아하고 정교하게 묘사한 것이다. 이제 이 이미지를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인종들과 젠더들의 특이한 신체들로 재창조할 수 있는지 상상해보자. 더 나아가, 움직이고 서로 마주치고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그러면서도 공유된 관계에서나 갈등하는 관계에서나 협동할 수 있는 그런 신체들로 재창조할 수 있는지 상상해보자. 그런 다중의 이미지가 번역의 과정― 말 잡기―이 어떻게 주권의 구조를 전복하고 공통적인 것을 구축할 수 있는지를 묘사하는 것이 될 것이다.(([원주] Adolfo Munoz’s video installation “Midas” presents such an animated visual representation that transforms the frontispiece of Hobbes, Leviathan (http://amunyoz.webs.upv.es/blog/midas/).))




기업가로서의 다중


  • 저자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새 책 Assembly(2017)의 9장 가운데 맨 뒤에 달린 “Taking the word as translation”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9장 다중의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 of the multitude)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은 무엇보다도 다중에 속한다.(([정리자 주] ‘entrepreneurship’은 가장 포괄적으로는 기업가로서의 존재를 가리키며 ‘존재’에는 정신, 의지, 행동, 사고방식 등이 모두 포함된다. 이 용어의 잘 알려진 우리말 옮김은 ‘기업가정신’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는 맥락에서는 이를 채택하지만 이 옮김이 잘 안 맞는 맥락에서는 가령 ‘기업가활동’과 같은 식으로 변화를 주어야 할 것이다.)) 이는 다중이 가진 협력을 통한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능력을 가리킨다. 다른 많은 용어들처럼 이 말도 왜곡되었다.

 

다중의 기업가정신을 두 경로 즉 간접적 경로와 직접적 경로를 통해 살펴본다. 전자는 징후적 독해로서 슘페터의 기업가론을 다루어 다중의 협력적 힘을 자본이 계속 강탈함을 밝힐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적 기업가를 기업가라고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 사실 우리에게 더 흥미로운 점은 자본주의적 기업가가 다중의 잠재력을 어떻게 드러내는가 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로는 존재론적 독해로서 다중의 생산적인 힘을 직접 살펴보면서 다중의 리더십이 얼마나 발전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고 리더십이 의미하는 바에 이런 맥락에서 물음을 던질 것이다.

 

어떻게 기업가가 되는가

 

기업가는 일이 되게 한다. 슘페터에 따르면 기업가의 본질은 기존의 노동자들, 아이디어들, 기술들, 자원들, 기계들 사이에 새로운 결합(new combination)을 창출하는 것이다. 즉 기업가는 새로운 기계적 배치(machinic assemblages)(([정리자 주] ‘기계적 배치’는 들뢰즈, 가따리의 개념이다.))를 창출한다. 이 배치는 역동적이다. 이에 반해서 자본주의적 기업가들은 단지 ‘변화에 적응하는 대응’만을 추구한다. 진정한 기업가는 ‘창조적 대응’을 수행한다.

 

결합의 본질은 협력이다. 생산성 증가의 열쇠가 기계 체계들과 연계된 노동자들의 협력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슘페터는 맑스에 가깝다.

 

맑스는 협력이 생산성을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노동을 변형하고 새로운 사회적 생산력을 창조하는 힘을 가진다고 설명한다. “노동자가 계획된 방식으로 다른 노동자들과 협력할 때, 그는 그의 개인성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그의 유적 능력을 발전시킨다.”(([원주] Karl Marx, Capital, trans. Ben Fowkes, Penguin, 1976, volume 1, p. 447.)) 인류의 힘은 협력 속에서 실현된다. 새로운 사회적 존재가, 새로운 기계적 배치가, 인간·기계·아이디어·자원 등등의 새로운 구성이 이 과정에서 창출된다.

 

슘페터가 잘 알고 있듯이, 기업가는 보수가 지급되는 협력 즉 노동자들의 협력 이외에 보수가 지급되지 않는 협력 즉 방대한 사회적 장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 이 후자의 협력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무력 혹은 폭력이 필요하다. 맑스도 협력을 감독하는 자본가를 전략을 지시하는 전쟁터의 장군에 비유한 바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협력은 항상 무력의 위협 아래에서 성취된다. 그런데 슘페터의 비유는 기업가가 부과하는 협력이 공장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전체에서 (보수를 받든 안 받는 모든 인구에게) 효과를 발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더 나아간다. 사회적 노동은 보수를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특수한 생산 목표에 종속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포디즘 모델의 위기 시에 외부화(+ 공장의 분산, 복합산업지대들의 구축)로 이어졌던 가설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인도의 소프트웨어 테크놀로지 파크들까지, 북부 이탈리아와 바바리아의 혁신적 생산센터들에서 멕시코와 중국의 자유무역지대들 및 수출가공지대들까지, 방대한 사회적 장의 생산력을 관할하는 이 기업가적 ‘결합들’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기업가들은 누구인가? 『경제발전의 이론』(Theory of Economic Development)의 1911년 초판에는 들어있으나 나중 판에서는 삭제된 대목에서, 슘페터는 새로운 결합 및 기업가정신에 기반을 두어 사회를 세 집단으로 나눈다. ① 관습적인 방식으로 살아가고 ‘쾌락주의적’인 대중은 새로운 결합의 잠재력을 보지 못한다. ② 예리한 지성과 민활한 상상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은 새로운 결합의 잠재력을 볼 수 있지만 행동으로 옮길 힘이 없다. ③ 더 적은 수의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행동한다. 이들은 쾌락주의적 평형을 싫어하며 용감하게 위험을 감수한다. 중요한 것은 행동하려는 성향이다. 그것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종속시키고 활용하는 힘, 명령하고 지배하는 힘, 그리하여 ‘성공적인 행동’으로 이르는 힘, 특별히 빛나는 지성이 없이도 그렇게 하는 힘이다. 여기서 슘페터가 기업가정신은 리스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강조한 것에 모순되는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은 흥미롭지만 별로 중요하지는 않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말하는 ‘행동인’(Man of Action), 즉 복종을 요구하는 인격체이다.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려면 그런 지도자들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에 따라 슘페터는 노동자, 농민, 장인 등으로 이루어진 대중을 쾌락주의적이고 수동적이고 새로운 것에 저항하는 존재로 제시하는 것이다.

 

슘페터의 ‘행동인’의 인간학은 분명 조야하지만, 미디어가 주도한 오늘날의 기업가 열풍에서, 특히 닷컴들과 스타트업들의 디지털 세계에서 분명하게 공명된다.

 

그러나 그가 1934년 『경제발전의 이론』을 개정했을 때 그는 기업가라는 영웅적 형상을 버린다. 그는 이제 기업가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계획의 바람직함을 납득시키고 자신의 지도에 대한 확신을 창출하는 식으로 새로운 결합을 창출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한다. 그는 그에게 돈을 대줄 은행가만 납득시키면 된다. 금융의 점점 더 강력해지는 지배가 기업가를 대중의 동의를 얻는 지도자에서 은행가에게 청구하는 사람으로 전락한 것이다. 화폐, 금융, 재산의 힘 및 그것이 배치하는 경제적 강요가 전통적인 권위와 동의의 방식을 대체했다.

 

40년대에 들어와서 슘페터는 대기업에 조직된 재산과 소유조차도 사회적 생산에 관여하는 모든 이들의 동의를 더 이상 얻을 수 없음을 확신하게 된다. 그는 이렇게 탄식한다. “자본주의적 과정은 재산이라는 관념으로부터 생명력을 빼낸다···. 탈물질화되고 탈기능화된 부재자 소유는 재산의 활력적인 형태처럼 인상을 강하게 주어 도덕적 충의를 끌어내는 식이 아니다. 결국 진정으로 사업을 지지하고자 하는 사람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이다. 거대 기업의 안에든 바깥에든.”(([원주] Joseph Schumpeter,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 Harper, 1942, p. 142.)) 이 시점에서 슘페터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전진하는 유일한 길은 중앙집중화된 계획임을 마지못해 인정한다.

 

그러나 슘페터가 보지 못한 점이 있다. 그는 대중을 근본적으로 수동적으로 보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과정에서 생산적 협력이 분산된 다중심적 회로들의 형태로 사회적 장 전체로 확대되면서 새로운 결합들이 생산자들 자신에 의해서 점증적으로 조직되고 유지되고 있다. 고정자본을 재전유할 잠재력과 함께 다중이 생산적 협력의 생성과 실행에서 점점 더 자율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사회적 생산이라는 전장에 장군들은 더 이상 필요 없다. 군대가 스스로를 조직할 수 있으며 자신들의 고유한 방향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생산자들이 스스로를 조직하는 상황에서 자본가들이 택할 수 있는 옵션

① 내적 지배 : 노동기율로 환원,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에 순응하도록 강요, 가령 디지털 테일러주의 같은 것으로 민중의 지성·창조성 및 사회적 능력의 삭감.

② 외적 지배 : 상대적 자율성을 띠며 사회가 생산하는 가치를 외부에서 추출. 금융.

 

 

다섯 번째 요청 : 다중의 기업가정신

 

슘페터의 생각에는 다중의 기업가, 즉 사회적 협력의 자율적 조직화가 잠재해있다.

 

생산양식이란 삶형태를, 아니 더 정확하게는 삶의 형태의 생산을 다른 식으로 말한 것이다. 이는 점점 더 그렇게 된다. 사회적 생산에서는 상품보다도 사회 및 사회적 관계들이 생산과정의 직접적인 대상들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생산한다는 것은 사회적 협력을 조직하고 삶형태를 재생산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사회적 노동의 생산양식이 바로 다중의 기업가정신이 등장하는 장(場)이다.

 

다중의 기업가정신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으려면 잡초를 제거해야 한다.

① 신자유주의는 모두에게 기업가가 되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 빠져있는 것은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을 활성화하는 협력의 메커니즘들과 관계들이다. 개인적으로 당신 자신의 삶의 기업가가 되라는 신자유주의적 명령은 이미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다중의 기업가정신이 가하는 위협을 내화하고 순치하려는 시도이다.

② 또 하나 제거해야 할 신비화는 사회적 기업가정신이다. 이는 때로는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중도좌파 정치가들에 의해 지지된다. 사회적 신자유주의. 자선. 아래로부터의 신자유주의

“사회적 신자유주의와 사회적 기업가정신의 연계는 공동체 네트워크들과 자율적 협력양식들을 파괴한다.”

 

다중의 기업가는

① 자본으로부터 자율적이다.

② 고정자본을 재전유한다.

③ 사유재산의 영역으로부터 빠져나와 공통적으로 되어야 한다.

 

생산적 협력의 네트워크들, 생산·재생산의 사회적 성격, 다중의 기업가로서의 능력들—이것들이 전략적 힘의 견고한 토대들이다.

 

 

사회적 생산→사회적 연합 → 사회적 파업(social strike)

 

생산은 두 가지 의미에서 사회적이다.

① 과정이 협력적이다.

② 생산의 결과가 사회적 관계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삶 자체이다. ‘인간생성적’(anthropogenic) 혹은 ‘삶정치적’(biopolitical)

 

이 두 의미에서 생산의 사회적 성격은 곧바로 공통적인 것을 가리킨다. 사적 소유는 ① 그것이 생산을 낳는 협력의 관계를 봉쇄하고 ② 생산의 결과인 사회적 관계를 무너뜨린다는 두 가지 의미에서 사회적 생산에 점점 더 족쇄가 된다. 그러나 사회적 생산에서 공통적인 것으로 가는 경로는 직접적이거나 필연적이지 않다. 공통적인 것에의 권리를 천명하고 방어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행동 기획들이 필요하다. 특히 사회적 생산이 창출한 잠재력은 사회운동들과 노동투쟁의 결합이 실현될 것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다중의 기업가정신의 핵심적 형태이다.

  

노동조합과 사회운동들이 연대하거나 사회적 연합(social union)이라는 형태의 혼합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정의가 극히 모호하다는 것을 알면서 우리는 ‘사회적 연합주의’(social unionism’, sindacalismo sociale)라는 용어를 사용한다.”(([원주] Alberto De Nicola and Biagio Quattrocchi, “La torsione neoliberale del sindicato tradizionale e l’imagginazione del ‘sindicalismo sociale’: Appunti per una discussione,” http://www.euronomade.info/?p=2482. 또한 Alberto De Nicola and Biagio Quattrocchi, eds, Sindacalismo sociale, DeriveApprodi, 2016, especially their introduction 참조.)) 노동투쟁과 사회운동의 교차 혹은 교직을 구성하는 사회적 연합주의는 한편으로는 노동 조직화의 힘을 회복하고 일부 기존 노조들의 보수적 행동을 극복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운동의 수명과 효과를 강화할 희망을 제공한다.

 

사회적 연합주의는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사이의 해묵은 관계를 전복한다. 통상적인 견해에 따르면 경제투쟁(노조 투쟁)은 부분적이고 전술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당이 이끄는 정치투쟁과 연대하여 지도를 받아야 한다. 사회적 연합주의가 제안하는 양자의 연대는 전술과 전략의 관계를 뒤섞는다. 경제적 운동이 구성된 힘이 아니라 구성하는 힘과 연결되기 때문이며, 정당이 아니라 사회운동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대를 ① 사회운동으로 하여금 안정되고 발전된 조직 구조에 입각할 수 있게 하며 ② 노조의 투쟁을 임금과 직장을 넘어서 노동계급의 삶의 모든 측면으로 확대할 뿐만 아니라[사회적 영역의 확장] 노조들의 경직된 위계구조와 낡은 투쟁방식을 사회운동의 동학으로 부수게 해준다[방법의 쇄신].

 

영어권에서 사회적 연합의 고전적 사례는 1900년 남아프리카의 반(反)아파르트헤이트 3자 연합이다 : ① Congress of South African Trade Unions, ② the African National Congress (ANC) ③ the South African Communist Party.

· 1997 : Reclaim the Streets와 Liverpool 부두노동자들

· 1999 시애틀: Teamsters and Turtles(환경단체들) 사이의 짧은 협력

· Federation of Metal Workers(FIOM)과 교육, 건강 등의 부문의 풀뿌리 연합들(COBAS) 같은 이탈리아의 일부 역동적 노조들, 그리고 미국의 the Service Employees International Union이 계속 사회운동 연합을 실험해왔다.(성공의 정도는 각각 다르다.)

 

그런데 이제는 사회적 연합주의도 변해야 한다. 이전에는 노조와 사회운동의 사이의 외적 연대 관계를 추구했는데, 이제는 사회적 생산과 공통적인 것을 중심으로 내적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노동조직화와 사회운동을 단지 친밀한 유대를 가진 것으로서만이 아니라 상호적으로 구성적인 것으로 보고 노동의 지형이 점점 더 삶형태의 지형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회적 연합주의를 이렇게 새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공장과 직장을 넘어가는 넓은 틀에서 사회적 생산·재생산을 이해해야 한다. 메트로폴리스 자체가 이제는 공장이다. 더 정확하게는 공동으로(in common) 생산된 공간이며 미래의 공통적인 것의 생산·재생산의 수단으로서 복무하는 공간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사회에서 공통적인 것은 생산수단과 삶형태에 동시에 붙여지는 이름이다.

 

오늘날의 생산 및 재생산에서 공통적인 것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구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양자가 불가분하게 엮이어 있음을 보여준다. 투쟁들은 ‘공통적인 것에의 동등하고 개방된 접근 + 공통적인 것의 집단적 자주관리’를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의 구축의 전제조건으로 삼는다. 이는 탈자본주의적 경제를 구축하는 데도 필요하다. 예를 들어 스페인에서 2013년 헬스케어 예산삭감에 대항한 “marea blanca”(‘white wave’) 시위와 2015년 자치도시 선거에서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등 여러 큰 도시들에서 헬스케어 및 기타 사회적 서비스들을 공통적인 것으로 만드는 목적을 가진 선거연합들이 승리한 것 사이에는 분명한 연결선이 존재한다.

 

사회적 연합주의의 주된 무기는 사회적 파업(social strike)이다.조직된 노동거부는 처음부터 노동조합의 힘의 기반이었다. 노동이 공급되지 않으면 자본주의적 생산이 멈추기 때문이다. 이 지형에서 역사적이고 영웅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 전통적인 틀 안에서는 비고용 노동자들, 비임금 가사노동, 불안정 노동자들 및 빈자가 힘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노동 공급의 중단이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운동은 오래 전에 거부의 전략이 모든 사회 집단은 아니더라도 광범한 집단에게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도 적어도 순종을 더 이상 공급하지 않을 수는 있다. 궁극적으로 누구나 자발적인 노역의 공급을 중단하고 사회 질서를 파열하는 위협을 가하는 힘을 행사할 수 있다.

 

삶정치적 생산의 시대 즉 공통적인 것이 사회적 생산·재생산의 기반이 되고 생산적 협력의 회로들이 사회 전역에 확대된 시대인 오늘날에는 거부의 힘이 사회적 지형 전체를 가로지를 수 있다. 사회 질서의 파열과 자본주의적 생산의 정지는 구분 불가능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연합주의가 여는 잠재력이다. 두 전통 즉 ① 노동운동의 산업생산 차단 ② 사회운동의 사회 질서 파열의 전통이 합쳐져서 화학변화를 일으켜 폭발적 혼합물을 창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총파업이라는 생각이 새로운 의미, 더 강력한 의미를 얻는다. 그러나 총파업은 거부일 뿐만 아니라 긍정이기도 해야 한다. 즉 협력의 회로들과 사회적 생산의 잠재적으로 자율적인 관계들—이 관계들은 임금노동의 내부와 외부에 공히 존재하며 공유하는 사회적 부를 사용한다—을 드러내는 기업가정신의 행동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다중이 필요로 하는 무기는?


  • 저자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새 책 Assembly(2017)의 15장 1절 “A Hephaestus to arm the multitude”의 내용을 상세히 정리한 것이다.(([정리자주] 헤파이스토스는 아킬레스를 무장시켜 주었다. 고유명사에 부정관사를 붙인 “a Hephaestus”는 여기서는 다중을 무장시켜줄 ‘우리 시대의 헤파이스토스’라는 의미이다.))

 

무장한 자기방어의 두 사례

① 1871년 파리 사람들은 프랑스 군대가 몽마르트르의 포대를 가져가지 못하게 한다. 그것을 꼬뮌을 방어하기 위해 사용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② 1967년 5월 26명의 흑표범당원들이 장전된 총을 들고 캘리포니아 주의회 의사당에 들어와서 경찰의 폭력으로부터 흑인 공동체들을 방어할 권리와 의도를 선언한다.

 

다중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무기는 무엇인가? 오늘날 총알과 포탄이 당신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하다. 이런 무기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종종 패배를 불러오고 심지어는 자살행위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무슨 무기를 쓸 수 있는가?

 

만일 방어적 무기의 문제를 제기하는 데서 시작하면 곧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정치 투사들이 그 무기로 인해서 한갓 범죄자들로 변형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무기의 사용을 포기하는 것을 옹호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 반대이다. 우리는 게르니카와 같은 일이 또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안전을 원한다. 승리를 원한다. 우리는 무기 사용의 포기가 아니라 무기의 문제가 다른 식으로 제기되기를 바랄 뿐이다.

 

두 방향의 무기

① 외부를 향함. 적에 대한 방어

② 내부를 향함, 주체 자신의 변형

방어적으로는 전쟁의 거시적 폭력과 금융·가난·재산·젠더 억압의 미시적 폭력에 맞서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무기는 또한 내적으로 자율을 구축하고 새로운 삶형태를 발명하고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창출하는 데 복무해야 한다.

 

이 두 기능의 순위를 전도시키는 것이 열쇠다. 무기의 생산적 사용이 우선권을 가지고, 방어에의 적용이 그 뒤를 따라야 한다. “정치적 힘은 총열에서 나온다”(마오)라는 말은 우선순위를 잘못 잡은 것이다. 진정한 무기는 사회적·정치적 힘, 우리의 집단적 주체성의 힘에서 나온다.

 

꼬뮌의 진정한 힘은 그 대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일상적인 활동, 그 민주적 거버넌스에 있었다. 로스(Kristen Ross)가 훌륭하게 기록했듯이, 정치적 혁신은 코뮌의 수립에 선행한 시기 동안 파리 인근 지역들의 친목모임들과 클럽모임들에서 준비되었다.(([원주] Kristen Ross, Communal Luxury, Verso, 2015, pp. 11–29.)) 마찬가지로 흑표범당의 힘도 총의 과시에 있지 않고 무료 아침식사나 무료 건강클리닉과 같은 사회적 프로그램들의 구축에 있었다. 사빠띠스따는 그들의 힘이 EZLN(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의 무기와 군사적 명령구조에 있지 않고 공동체 평의회들과 거기서 일어나는 정의와 민주주의의 실험들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선순위가 중요하다. 우선 우리를 방어하기 위해서 전투를 해야 하고 일단 이렇게 평화와 안전을 수립한 다음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자유로운 공간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전쟁으로 시작하면 전쟁으로 끝날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폐허에서, 현재의 혼돈과 폭력에서, 우리의 방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종속시키면서 구축작업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자기방어를 위한 무기의 효율성은 무엇보다도 구축하는 투쟁에 어떻게 복무하느냐를 놓고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가들은 몽마르트르의 대포나 흑표범당의 총이나 심지어 EZLN의 방어적 무기들을 이 기준으로, 즉 무기가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복무했느냐 그것을 방해했느냐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관심사는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요점은, 우리가 오늘날 다중에게 적합한 무기를 찾을 때 무기의 주체성 측면의 능력에, 새로운 삶형태를 창출·유지(혹은 파괴)하는 데서 무기가 내는 효과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맥락에 따라서는 무기와 군사적 행동에 우선권이 주어져야 하지 않느냐는 이의제기가 가능하다. 그런데 이는 부분적으로만 옳다. 영감을 고취하는 무장투쟁의 사례들은 민주적 형식들을 발명하는 일을 동시에 해낸다. 예를 들어 쿠르드족 운동은 2014년에 IS 전투원들의 전진에 맞서서 로자바(Rojava, 시리아령 쿠르디스탄)의 코바니(Kobane)를 방어하기 위해 총과 폭탄을 필요로 했다. 쿠르드족은 미국으로부터 제한적으로 도움을 받고 터키의 빈번한 방해를 받으면서 전통적 군사적 무기로 전투에서 이겼다.

 

이 승리를 전장의 관점에서만 보는 것은 잘못이다. 로자바의 쿠르드 공동체들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새로운 사회적 관계들을 창출하고 있었으며 ‘민주적 자율’의 한 형태를 발명하고 각 포스트마다 두 명(남성 한 사람, 여성 한 사람)의 대표들로 이루어진 자치 평의회들을 수립했다. 이렇듯 극단적인 혼돈과 폭력의 조건에서도 진정한 힘이란 낡은 사회질서를 변형하고 새로운 민주적 삶형태를 창출하는 공동체의 능력에 있는 것이다. 이 경우들에 주체성의 생산은 단순히 의식고취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존재론적 침전으로서 사회적 존재를 지질학적인 침전의 양태로 층층이 구축한다. 이것이 삶정치적 변형이다.

 

해방된 지역에서 민주적 사회조직(종종은 직접 민주주의의 사회조직)의 구축을 무장투쟁과 병행했던 반파시즘 저항운동의 사례들이 있다.

 

시인 르네 샤르(René Char)가 말하는 사례

샤르는 프롤레타리아 집단을 이끌고 나치 군대와 프랑스의 파시즘 협력자들을 저지시킨 바 있다. 그는 어떻게 게릴라 잡색부대(a motley crew)가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민주적 동학을 창출했는지를 설명한다.

 

시인 프랑코 포르띠니(Franco Fortini)가 회상하는 사례

1943년 8월 이탈리아 게릴라들이 발도쏠라(Val d’Ossola)에서 공화국을 창립하여 그 지역을 무장투쟁의 기지로 활용하는 동시에 민주적으로 조직했다. 이들은 짧은 시간 동안만 성공했으며 곧바로 압도적인 적에게 굴복했다. 그러나 그 경험은 발명의 환상적인 도가니였다.

 

저항투쟁의 끔찍하면서도 진실한 측면을 나타낼 말이 없다. 이 측면은 혼란스럽게 만들면서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를 나타낼 유일한 말은 시의 말이다. 시의 말은 단테부터 지금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졌다. ··· 역사학은 저 투쟁의 저 가장 끔찍하지만 또한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측면들을 허용한다. 당신의 마음에 절절하게 다가간 유일한 진짜 게릴라 노래의 가사는 “중위도, 대위도, 대령도, 장군도 없었네”라는 것을 역사학은 누락한다. 이는 강렬한 아나키의 외침으로서 저 순간들에는 완전한 진실이었다.(([원주] Franco Fortini, Un dialogo ininterotto, Bollati Borighieri, 2009, pp. 63–64.))

 

이 노래가 공화국을 창립했다. 이탈리아와 스위스 사이 프랑스 알프스 저지대와 발도쏠라의 해방된 지역들에 게릴라들이 무기를 들고 민주주의의 구축을 경험한 것이다. 우리는 이를 ‘코바니 경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알제리 독립전쟁 동안 프랑스로 이주한 알제리 노동자들의 저항 사례

1961년 10월 항의하는 알제리 민간인들 수백 명이 파리에서 프랑스 국가에 의해 학살된 데 대한 저항으로 정치적 공동체들이 구축되었으며 이 공동체들이 한동안 해방된 알제리의 윤리적·정치적 심장부를 구성했다. 여기서도 무장전위들을 산출하는 다중의 저항과 다중을 고취하는 무장 전위들이라는 두 벡터들이 동등하게 교차하고 혼합된다. 그리하여 민주적 다중의 구성과 전투적 주체성들의 산출 사이의 견고하고 효과적인 관계를 창출한다.

 

그러나 반(反)파시즘 저항의 영웅주의에 너무 빠지지는 말자. 아무리 극심한 조건에서도 새로운 민주적 형태들을 발명해낼 수 있는 것은 맞지만, 오늘날 우리들 대부분은 파시즘 체제와 대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황에서 전통적인 무기에의 호소는 반(反)생산적이고 자살적이다. 무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무력과 무기의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무기의 내적 효과와 주체성 산출의 측면에 초점을 두면 무기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수정하게 된다. 무기를 구성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넓혀야 한다. 예를 들어 기계와 공고하게 결합되는 지식, 정보와 같은 고정자본이 오랫동안 자본에 효과적 무기로서 복무해왔다. 맑스: “노동계급의 반란에 대응할 무기를 자본에 공급할 목적으로 1830년 이래 이루어진 발명의 온전한 역사를 쓰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원주] Karl Marx, Capital, trans. Ben Fowkes, Penguin, volume 1, p. 563.))

 

그 사례들

1970년대에 도입된 표준 컨테이너는 조직된 부두노동자들(전통적으로 가장 반란적인 노동부문)의 힘을 무너뜨렸다.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거대 기업들이 채택하는 알고리즘들이 지성과 사회적 관계를 강탈함으로써 사용자들에게 일종의 폭력을 가한다. 구글의 PageRank 알고리즘. 이 알고리즘은 사용자들이 모르는 사이에 지성을 고정자본의 형태로 추출하고 축적한다.

 

기계적(Machinic) 고정자본(([정리자주] ‘기계적’(machinic)은 들뢰즈·가따리에서 온 개념이다. 여기서 ‘기계적(Machinic) 고정자본’은 지식, 정보, 이미지 형태의 고정자본을 가리킨다. 이것은 여기서는 부정적으로, 즉 ‘고정자본’을 수식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지만, 긍정적으로 다중의 주체성을 수식하는 말로서 사용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 책의 7장 “We, Machinic Subjects” 참조.))은 단지 중립적인 힘이 아니다. 산 노동을 통제하고 산 노동에 명령을 내리기 위한 수단으로 재산소유자들이 행사하는 힘이다. 만일 우리가 고정자본을 재전유한다면,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것을 되찾는다면, 우리는 지식과 지성을 축적한 기계를 산 노동의 손에 쥐어줘서 죽은 자본의 명령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이 무기들을 쥐어서 중립화시킬 수 있다. 더 좋은 것은 새로운 목표를 위해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훨씬 더 좋은 것은 그것들을 공통적이고 모두의 사용에 열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디지털 알고리즘과 같은 삶정치적 무기들이 현대의 투쟁에서는 가장 중요한 급소들일 것이다.

 

헤파이스토스가 아킬레스에게 만들어준 방패의 전면에는 공동체 전체와 그 세계의 구성이 동심원들의 모양으로 정밀하게 그려져 있다. 아킬레스는 사실 공동체 전체에 의해 보호된다. 다중의 방패의 동심원들은 새로운 문명, 새로운 삶형태, 인류의 새로운 형상을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살아있는 생명체들, 지구, 우주 사이의 돌봄의 새로운 관계들을 표현해야 한다.




‘아래로부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 저자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새 책 Assembly(2017)의 77-83쪽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아래로부터 볼 때 더 완전하게 볼 수 있다.

‘아래로부터’(from below)는 실로 광범한 해방 기획들의 입각점이며 우리의 분석에서 발전시킬 관점이다.

베버 : 권력(Macht, power)은 지배(Herrschaft, domination)와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 그래서 전자는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반면 후자는 명령이 복종되어야 한다. 여기서 정당화의 문제 혹은 어떻게 명령이 동의에 의해 구속되어야 하는가의 문제, 명령이 복종자들의 이해를 대변할 필요가 나온다. 이것이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이라는 생각과 (마키아벨리의 사상에 역행하는) ‘현실주의적’ 버전의 마키아벨리주의를 형성한다.

결국 베버는 관계로서의 권력이라는 정의를 무너뜨린다. 명령이 복종의 예시(豫示, prefiguration)로 찬양되면 저항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아렌트 또한 유기적 권력관을 반박하려고 시도한다. 열려있는 정당성. 이 열려있음이 민주주의를 특징짓는다. 폭정은 마키아벨리의 사상에 토대를 두지 않는다. 마키아벨리는 혁명, 항상적 변이, 구성적 힘을 말한 사람이다. 이에 반해 국가이성은 폐쇄된 권위의 기능이자 그것에 대한 해석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렌트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긍정적 언급을 반복적으로 하며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은 사라지는 듯이 보인다. 권력은 주체들의 손에 쥐어지며 아렌트에게 ‘진정한’ 실천은 공적, 정치적 행동이다. 능동적 삶은 시민적 삶에 완전히 관여하며 그 관계에서 무력해지지 않고 “inter-esse”(상호 존재하기/관심)를, 인간의 상호작용을 향한다.

근대적 권력정의로부터 나오는 데에는 베버와 아렌트로 충분하지 않다. 궁극적으로 일자와 초월이 승리한다. 아렌트가 제시하는 것은 군주에의 조언자로서의 마키아벨리라기보다는 ‘섭리의 꽁피당’(레이몽 아롱)이다. 베버가 제시하는 것은 권력의 정당화 메커니즘들이며 대안적 가능성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관료적 기능의 기계적·객관적 성격이 나름의 주체성 생산 형태를 띠지만, 베버는 정동, 열정, 혁신조차도 추방한다.

마키아벨리의 본질적 요점은 권력을 관계로서 볼 뿐만 아니라 아래로부터 탄생하는 것으로 보는 데 있다. 이는 인식론적 입장일 뿐만 아니라 아래로부터 위를 행하여 구축하는 정치적 궤적이다. 이것이 다중의 경로이다. 이 경로는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 말했듯이 민주주의를 자유의 도구로서 해석하는 동시에 자유를 민주주의의 산물로서 제시한다.

푸꼬가 근대의 지배적 권력관에 대한 도전을 현대적 세계의 조건으로 옮겨놓을 수 있게 해준다.

1979년 강의(『생명관리 정치의 탄생』)에서의 방법론 설명: 주권자, 주권, 민중(민), 신민, 국가, 시민사회(the sovereign, sovereignty, the people, subjects, the state, and civil society)와 같은 관념들을 우선적이고 본래적인, 그리고 이미 주어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이것이 매우 철저한 아래로부터의 경로를 정의한다. 진실은 새로운 존재를 생산하는 창조적(poietic) 지형에서 구축된다. 예를 들어 해방 투쟁은 자유의 자동사적인 실천, 진실을 창조하는 장이다.

촘스키와의 토론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행동이 정의에 기반을 둔다는 촘스키의 발언에 대한 푸꼬의 대답 : “저는 스피노자 식으로 당신에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프롤레타리아가 지배계급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그 전쟁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프롤레타리아가 지배계급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역사상 최초로 정치적 힘을 갖기(take power)(([옮긴이] ‘take power’는 일반적으로 ‘권력을 잡다’라고 옮기는데, 내용에서 보다시피 푸꼬가 지향하는 것은 ‘권력’이 아니다. 그래서 이를 부각시키기 위해 ‘정체적 힘’이라고 옮겼다.))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배계급의 권력을 전복할 것이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는 그런 전쟁이 정당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론가들이 푸꼬의 아래로부터의 힘(권력)이라는 인식론의 선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푸꼬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것과 같은 전체주의적인 권력관―여기서는 주체가 저항을 허용받지 않는다―을 제안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푸꼬의 1960년대와 70년대 저작과 관련해서도 사실이 아니다. 푸꼬는 이 시기에 강한 구조주의적 틀에도 불구하고 점차적으로 구조주의적 제한들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첫째, 그는 모든 개체화하는 작업, 데카르트적 주체성을 되풀이하는 모든 작업에 맞서 논쟁을 수행함으로써, 그리고 그 다음에는 주체(subject)의 ‘해체’(destitution, 탈구성)를 통해 이를 성취했다. 이는 ‘우리’—나와 우리의 관계—를 생성(becoming)으로서만이 아니라 다양체(multiplicity)의 실천으로서 탐구하는 것으로서 제시된다. 푸꼬가 70년대에 미시권력 개념을 발전시킨 것이 권력 개념을 일반화하는 새로운 차원을 연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그것에 전체주의적인 형상을 부여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 형상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관계에 기반을 둔 권력관이라는 점이다.

푸꼬의 작업은 1970년대의 주된 정치적 긴장이라는 상황에 위치시켜 파악해야 한다. 그의 작업은 공장에서 광범한 사회적 지형으로의 사회적 적대의 확대를 쫓았으며 투쟁의 주체화의 새로운 형태들을 분석했다. 푸꼬는 완전히 이 작업에 몰입되어 있었으며 이를 통해 맑스를 넘어갔다. 물론 (일부 활동가들이 채택하는 바대로) 맑스주의의 경제주의적 버전들을 넘어가고 맑스주의를 사회적인 것 안에서 변용시켜 회복하는 것이 필요했다. 바로 이것이 ‘삶정치’ 개념이 궁극적으로 나타냈던 것이다. 경제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양태들에서, 주체적인 것에서, 주체화에서 다시 채택하는 것이다. 1970년대의 운동에서 발전했던 것은 푸꼬의 강의들에서, 혹은 그것과 병행하여 반영되었다. 이 강의는 권력을 바라보는 구조주의적이고 경제주의적인 틀과의 단절을 명시적으로 나타냈다.

그러면 ‘아래로부터’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위”에 있는 자들과의 투쟁을 통해서 그 지식이 변형되는 종속민의 입장에서 권력을 정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래 있는 사람이 사회 전체에 대해서 더 온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는 공통적인 것을 구축하는 다중의 사업의 토대가 될 수 있다. 둘째, ‘아래로부터’는 또한 정치적 궤적을 지칭한다. 즉 명령을 전복할 힘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대안적 사회를 건설할 능력을 가진 제도적 기획을 지칭하는 것이다.

 




공통적인 것


  • 저자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새 책 Assembly(2017)의 97-105쪽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공통적인 것'(the common)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Third response: the common is not property 

 

공통적인 것은 생산에 열쇠가 되고 사유재산은 생산 능력에 족쇄가 된다.

공통적인 것은 공적이든 사적이든 재산(소유)과 반대된다. 새로운 재산 형태가 아니라 비재산(nonproperty)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통적인 것은 공유를 위한 사회적 구조이며 사회적 테크놀로지이다.

사적 소유는 인간 본성에 내재적인 것이거나 문명사회에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현상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근대에 들어와서 생겼으며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가부장적 위계적 분할 및 통제 방식을 가지고 있는 전자본주의적 공유 공동체 형태를 되돌아볼 필요는 없다.

공통적인 것의 이해는 사회적 부를 향한 것이지 개인이 가진 것들을 향한 것이 아니다. 당신의 칫솔을 공유할 필요는 없다. 또한 당신이 만든 대부분의 것들에 대해서 남들에게 권리를 줄 필요도 없다.

공통적인 것의 형태들

① 지구와 생태계들

② 비물질적 부의 형태들―생각, 코드, 이미지, 문화산물들

③ 점증적으로 협동적으로 생산되는 물질적 상품들로서 공통의 사용에 열려야 하는 것. 그 계획이 가능한 한 민주적으로 결정되어야 하는 것들.

④ 메트로폴리스와 시골의 사회적 영토들. 환경 + 문화.

⑤ 건강, 교육, 주택, 복지가 목표인 사회 제도들 및 서비스들.

공통적인 것의 이해에 결정적인 것은 그 사용과 접근이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공통적인 것이 민주적 참여의 제도들을 통해 관리되어야 한다는 오스트롬의 주장을 진심으로 승인한다.” 그러나 우리[네그리와 하트]는, 접근과 의사결정을 공유하는 공동체는 작아야 하고 안팎을 구분하는 명확한 경계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과는 생각을 달리한다. 우리는 더 큰 포부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이들에게 열린 더 확장적인 민주적 경험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표: 공통권과 사회권의 차이

사회권, 사회법

공통권(rights of the common)

정태적

생산적, ‘함께 있음’의 새로운 제도 구축

총체적 동원

아래로부터 관리되는 민주적 협동관계의 사회

개인들의 덩어리가 그 대상

특이성들의 협력

사회법은 신자유주의에 의해 인간자본 관리로 변형

공통적인 것은 법의 매개 없이 전진하며 다중으로서 출현한다.

 

Fable of the bees; or, passions of the common 

오늘날 소유에 대한 열정이 사라지고 공통적인 것의 열정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안전]

재산은 당신을 구해주지 못한다.

사회주의 전통은 재산이 아니라 국가가 안보를 제공한다고 주장해왔다.

진정한 안보는 (스피노자에 따르면) 두려움을 물리치는 희망이다.

오늘날 안보는 특이성들이 공통적인 것에서 누리는 자유와 협동에서 나온다.

레베카 솔닛: 재난이 사회적 욕망과 가능성을 보게 해준다.

[번영]

사적 소유가 경제적 혜택을 가져다준다는 말은 이데올로기로서나 사용된다.

사적 소유는 욕구의 빈곤을 낳는다. 맑스가 말하듯 향유 능력 자체가 생산력이다. 생산성의 척도이다.

현대 사회에서 삶은 일자리에서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국면에서 불안정하게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불안정한 삶 또한 부의 결정적인 자원(resource)을 드러낸다.

주디스 버틀러: 취약성(vulnerability)은 강함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

[자유]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둘 다 억압적이다. 사적인 것은 자유를 파괴하고 공적인 것은 사회적 유대를 멸절시킨다.

특이성들은 자유와 협동이 내적으로 연결될 때에만 탄생한다. “한편으로 자유의 확장만이 협력을 구축하고 공통적인 것을 조직하며 사회적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 다른 한편, 협력의 규칙들과 민주주의의 규범들만이 자유롭고 능동적인 주체성들을 구축할 수 있다. 공통적인 것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라는 낡고 파괴적인 짝을 넘어서 자유로운 인간의 공생공락(conviviality)을 구축한다.”

근대 주체론은 소유 개인주의(possessive individualism)에서 나왔다. C. B. MacPherson: 개인은 그가 가진 것에 의해 정의된다.

소유 논리는 사랑에 대한 생각에도 주입된다.

주체성은 공재에서 발생한다. “주체성은 가짐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에 의해, 더 정확하게는 같이-존재하기, 같이-행동하기, 같이-창조하기에 의해 정의된다. 사회적 협력에서 주체성이란 것 자체가 발생한다.”(Subjectivity is defined not by having but being or, better, being-with, acting-with, creating-with. Subjectivity itself arises from social cooperation.)

“그렇다면 이 모든 측면에서우리는 오늘날 공통적인 것의 열정이 가진 덕을 알아보아야 한다. 비록 재산의 지배가 사회복지와 발전에 족쇄로 작용하는 것으로 점점 더 명확하게 인식되고 공통적인 것이 현실적인 대안으로서 등장하는 역사적 시점에 도달했지만 사유재산은 (토머스 그레이Thomas Grey가 생각한 것과는 반대로) 스스로 해체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고 마테이Ugo Mattei가 올바로 말했듯이 공통적인 것은 ‘자신의 공간을 되찾기 위해 길고 진한 전투를 치를 준비가 된 대중운동의 물리적 존재로써만 방어되고 다스려질 수 있다.’ 인류가 절벽을 뛰어넘어 공통적인 것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미는 힘이 필요하다.”




당신이 마그나카르타만큼 중요한 삼림헌장에 대하여 결코 들어보지 못한 이유



 

지탄을 받던  존 왕이 사망하고 링컨 전투에서 프랑스의 침략을 물리친 이후인 800년 전 11월, 영국 정체(政體)의 주춧돌 중 하나가 마련되었다. 바로 삼림헌장(the Charter of the Forest)인데, 이는 2년 전에 비해 짧아진 (나중에 ‘마그나카르타’라고 불리게 되는) 자유헌장(the Charter of Liberties)과 나란히 1217년 11월 6일에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조인되었다.

삼림헌장은 통치권에 강제된 최초의 환경 헌장이었다. 삼림헌장은 재산 없는 사람들의 권리, 커머너의 권리 및 커먼즈의 권리를 가장 먼저 강력하게 천명했다. 삼림헌장은 또한, 생계자급 수단에 접근하고 재혼하는 것을 거부할 상부(孀婦)의 권리를 인정하는 페미니즘의 정신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과 관련하여 얼마간의 진보를 이룩했다.

삼림헌장은 다른 어느 법안보다도 오랫동안 법령집에 올라 있던 영예를 갖고 있다. 삼림헌장은 754년 후인 1971년에 토리당 정부에 의해 폐지되었다.

2015년, 마그나카르타 기념일을 축하하는 데 돈을 아낌없이 쓰고 있던 정부는 상원이 제출한 서면 질의에서 올해 삼림헌장을 기념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법무부 장관인 폭스 경(Lord Faulks)은 삼림헌장이 중요하지 않다고, 세계적인 의의가 없다고 말하며 그 의견을 가볍게 일축했다. 

그러나 올해 초 <미국 법조협회>(American Bar Association)는 삼림헌장이 미국헌법의 토대였었고 헌장은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더욱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옳았다.

우파가 삼림헌장을 무시하고 싶어 하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삼림헌장의 핵심은, 재산 없는 사람들의 경제적 권리를 위해 사유재산권을 제한하고 토지 종획을 철회하여 커먼즈에 광활한 땅을 돌려주는 것이다. 삼림헌장은 놀랍게도 전복적이었다. 슬프게도 모든 어린 학생들이 마그나카르타에 관해 배우는 데도 삼림헌장에 대하여 들은 학생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 동안 삼림헌장이 마그나카르타를 주도했다. 삼림헌장은 일 년에 네 번 영국에 있는 모든 교회에서 낭독되었다. 삼림헌장은 왕, 귀족계급 및 신흥 자본가 계급에 의한 커먼즈의 종획과 약탈에 대항하는 투쟁을 고취했다. 잘 알려진 대로 17세기에 디거파와 수평파들의 투쟁에, 그리고 18세기와 19세기에 종획에 항의하는 투쟁에 영향을 미쳤다.

쓰임이 사라져 버린 단어들이 해석되지 않는 한 이해하기 힘든 삼림헌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커먼즈이다. 즉 커먼즈를 보호하고 커머너의 손실을 배상할 필요성이다. 남아 있는 커먼즈를 민영화하고 상업화하고 있는 정부가 커먼즈를 모르는 체하고 싶어 하는 것이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니다.

1066년에 정복자 윌리엄은 자신이 몰고 온 패거리들에게 공유지(커먼즈)의 일부를 분배했을 뿐만 아니라 드넓은 커먼즈 지대를 ‘왕의 삼림’ 즉 자신의 사냥터로 만들어 버렸다. 토지 대장(the Domesday Book)이 작성된 1086년에 그러한 삼림이 25개였다. 윌리엄의 계승자들은 왕의 삼림을 확장했고 전쟁자금을 조성할 수익 지역으로 전환시켰다. 1217년에 왕의 삼림은 143개였다.

삼림헌장은 역전을 이루어냈고 자유민들이 숲에서 생계를 추구할 권리를 군주가 인정하도록 만들었다. 삼림의 개념(([옮긴이] ‘삼림’(forest)은 ‘숲’(woods)의 의미 차이는 http://minamjah.tistory.com/search/마그나카르타 참조))은 오늘날보다 훨씬 더 넓었으며 다트무어(Dartmoor)와 엑스무어(Exmoor) 같이 나무가 거의 없는 마을과 지역을 포함했다. 삼림은 커머너들이 협력해서 살며 일하는 곳이었다.

삼림헌장에는 17개의 조항들이 있다. 그 조항들은 자유민들이 커먼즈에서 생계자급을 위한 모든 요소들을 산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의지대로 일할 영원한 권리를 천명한다. 이 권리에는 과일을 딸 권리, 건물을 짓는 등의 목적을 위해 나무를 할 권리, 도구와 집에 필요한 땅을 파고 흙을 사용할 권리, 방목할 권리, 낚시할 권리, 연료용 토탄을 가져갈 권리, 물을 관리할 권리, 심지어 꿀을 딸 권리와 같은 기초적인 것들이 포함된다.

삼림헌장은 원료와 생산수단을 획득하는 커머너들의 권리를 천명하고 노동할 권리에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했으므로 우리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삼림헌장은 특히 삼림사법관(Verderer) 제도를 통해 지방 의회 및 사법제도의 발전을 준비했는데, 이 삼림사법관 제도가 치안판사 재판소로 가는 길을 다졌다. 현대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삼림헌장은 종획을 반대함으로써 제도상의 자유를 확대했을 뿐만 아니라 커먼즈의 관리와 관련하여 커머너들에게 발언권을 부여함으로써 행위상의 자유도 확대했다.

삼림헌장은 공동 출자된 자산과 자원의 공동체적 파수라고 현재 불리고 있는 것의 토대를 마련했다. 삼림헌장의 에토스는, 자연 커먼즈를 자본화하고 거기서 수익을 내려고 하는 정부의 과시적인 <자연자본위원회>(Natural Capital Committee)와 대조를 이룬다. 커먼즈는 이윤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위해서 존재한다.

수 세기에 걸쳐서 삼림헌장의 에토스는 지속적으로 공격을 받아왔다. 천만 에이커의 땅을 몰수해서 총신들에게 분배한 헨리 8세가 속해 있던 튜더 왕가가 가장 지독했는데, 이 총신들의 후손들은 여전히 수십만 에이커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 1845년의 종획법은 사유재산권의 주장을 모방하는 또 다른 대규모 토지수탈이었다. 1760년과 1870년 사이에 토지를 소유한 엘리트층이 도입한 4천 개가 넘는 의회의 법령에 의해 700만 에이커의 커먼즈가 몰수되었다. 오늘날 영국의 토지소유권 구조는 조직화된 절도의 결과라고 말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수백 년에 걸친 박해를 견뎌왔음에도 불구하고 삼림헌장의 에토스는 여전히 살아있다. 하지만 최근 정부들의 바탕이 된 신자유주의적 경제패러다임의 한 가지 특징이 커먼즈를 무시하는 태도인데현 영국 정부는 긴축정책이라는 용어를 핑계 삼아 이제는 무시의 태도에서 약탈의 태도로 전환했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정부가 수만 에이커의 연방 커먼즈를 석유가스 산업 관련 기업들에게 거저 나누어 주기 위한 준비를 조용히 해오고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커먼즈는 가격이 없고 따라서 가치도 없다. 그래서 커먼즈는 뜬재물처럼 팔리거나 신자유주의자들의 지지자들에게 넘어갈 수 있다. 삼림헌장은 커먼즈에서 생계자급을 할 권리를 천명함으로써 기성 체제에 대안이 되는 원칙을 인정했는데, 우리의 조상들이 바로 이 원칙을 용감하게 지켰던 것이다. 우리도 이제 그렇게 해야 한다. 커먼즈의 약탈에 저항하고 커먼즈를 부활시켜야 한다.

한 단체가 그런 일을 하는 일련의 행사들을 조직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전국 수준과 지역 수준의 <커먼즈 헌장>들을 만들어내는 일이 기념일에 발표될 훌륭한 <나무•숲•인민 헌장>과 함께 진행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우리 나름의 노력들은 삼림헌장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는 환경원칙들을 강조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오늘날 기본소득 운동을 뒷받침하는 생계자급권리가 이 전복적인 헌장의 핵심에 놓여있음을 강조할 것이다.

캠페인은 상징성을 담은 한 행사, 즉 9월 17일에 윈저에서 러니미드까지 가는 템스 강 바지선 왕복여행으로 시작되었다. 러미니드에서는 <커먼즈 헌장>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공식 행사가 2500년 수령의 어마어마한 앵커위크 주목나무(Ankerwycke yew) 밑에서 개최되었다. 러니미드 목초지는 커먼즈를 상징한다. 이전에 토리당 정부가 그곳을 사유화하려고 했으나 영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조직한 점거운동이 성공적으로 경매를 막아냈다.

바지선 여행의 상징성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마가렛 새처는 1989년에 식수를 민영화했다. 그녀는 아홉 개의 기업들에게 지역 독점권을 주었고 커먼즈에 속한 40만 에이커 이상의 땅을 그들에게 양도했다. 오늘날 대부분 소유주가 외국인인 이 기업들은 영국의 상위 50대 토지 소유자들에 속한다. 그들은 삼림헌장의 원칙들을 조롱한다. <템스 워터>(Thames Water)는 외국인 주주들에게 16억 파운드를 배당금으로 지불하면서도, 하수 14억 톤을 처리하지 않고 템스 강에 흘려보낸 것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 혼이 좀 났고 또한 새는 곳을 수리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 거의 없다. 삼림헌장은 커머너들에게 물에 대한 권리가 있음을 천명했다. 물은 공공재가 되어야 하며, 가장 우선적으로 재(再)국유화되어야 한다.

프래킹[수압균열법]((Fracking에 관한 설명은 http://minamjah.tistory.com/101?category=452913 참조.))을 규탄하는 셔우드 숲에서의 행사뿐만 아니라 두 개의 헌장 초안 중 하나가 보관되어 있는 더럼(Durham)에서도 행사가 열린다.

그리고 11월 7일에 영국 하원의 한 회의에서 <커먼즈 헌장> 초안을 논의할 것이다. 다른 원본 헌장이 보관되어 있는 링컨 시에서는 노동당(the Labour Party)이 11월 11일에 열릴 행사를 조직하고 있다.

자세한 정보는 www.charteroftheforest800.org에서 얻을 수 있다. 아직 접촉하지 않은 조직으로서 자신들의 어젠다가 이러한 행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면 알려주기 바란다. 우리는 모든 목소리가 들리기를 바라며, 모든 커머너들이 일어나길 바라며, 커먼즈를 부활시키는 것이 미래를 회복하는 데 핵심임을 우리 모두가 기억하기를 바란다.




가이 스탠딩의 『자본주의의 부패』



 

나는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의 이전 저작을 읽은 바도 있고 또 그는 노동조직가이자 경제 분야에서 프레카리아트(precariat)의 역할에 대한 이론가로 알려져 있으므로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다. 실망스럽지 않았다.

서두에서 스탠딩은 ‘임대소득자 자본주의’(rentier capitalism)가 무슨 뜻인지를 설명한다.

그들은 ‘자유시장’에 대한 믿음을 천명하며 경제정책들이 자유시장을 확장하고 있다고 우리가 믿기를 원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지금껏 창출된 가장 자유가 없는 시장체계를 갖고 있다. (···)

경쟁을 차단하는 특허권이 20년간 독점수입을 보장하는데 어떻게 정치가들은 TV카메라를 바라보며 우리에게 자유시장 체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저작권 규정에 따라 저작자 사후 70년 동안 저작자에게 보장된 소득을 지급하는데 어떻게 정치가들은 자유 시장들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보조금을 받는 개인이나 회사가 있고 받지 못하는 개인이나 회사가 있는 상황에서, 우리 모두에게 속하는 커먼즈를 특전을 누리는 개인이나 회사에 헐값에 팔아넘기는 상황에서, 그리고 우버•태스크래빗 같은 기업들이 규제받지 않는 노동 브로커들로서 다른 사람들의 노동에서 이윤을 취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정치가들은 자유 시장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정부들은 자유 시장을 부정하는 이런 것들을 막고자 노력하기는커녕 그것을 허용하고 장려하는 규정들을 만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핵심이다.

지대(rent)는 현대 사회에서 중세 지주제도의 소멸과 함께 감소하기보다 오히려 이전보다 금권주의적 소득에서 더 중심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극소수의 사람들과 기업들은 주택과 토지뿐만 아니라 다른 다양한 천연과 인공의 자산들로부터 생겨나는 임대소득에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축적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임대소득자들’이 전대미문의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고 신자유주의 국가는 그들의 탐욕을 채워주지 못해서 안달이다.

임대소득자들은 실제로 희소하거나 인위적으로 희소해진 자산의 소유, 점유나 통제로부터 소득을 끌어낸다. 토지, 부동산, 광물 채굴이나 금융 투자로부터 발생하는 임대소득이 가장 흔하지만 다른 원천들 또한 증가했다. ① 대출자(기관)들이 부채 이자에서 얻는 소득, ② ‘지적 재산’(예를 들어, 특허권, 저작권, 브랜드와 상표)의 소유권에서 발생하는 소득, ③ 투자에 대한 자본 이득, ④ ‘평균 이상의’ 회사 수익 (회사가 높은 가격을 부과하거나 조건을 좌우할 수 있는 우세한 시장지위를 지닐 경우), ⑤ 정부 보조금으로 나오는 소득 그리고 ⑥제3자 거래에서 파생하는 금융 및 다른 중개기관들의 소득이 여기에 해당한다.

정책통(通)들이 ‘자유무역’이라고 높이 평가한 전지구적 신자유주의 경제는 ‘자유시장’이라기보다는 실제로는 “엘리트들이 그들의 임대소득을 최대화할 수 있는 제도 및 규제의 전지구적 틀”이다. 오늘날 서구 기업 이윤의 31%는, 90년대에 확립된 신자유주의 협정체제하에서 시행되는 특허권•저작권•등록상표 같은 인위적인 희소성에 바탕을 둔 임대소득이 이윤이 되는 산업들에서 추출된 것인데, 이 비율이 1999년에는 17%였다고 스탠딩은 말한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애플사는 (특허권•저작권•등록상표 덕택에) 아이폰과 관련된 총수익이 40%에 달한다. 신약 연구의 2/3가 납세자들의 세금으로 이루어지는데도 특허권은 미국의 연간 약품 가격을 1400억 달러 증가시킨다.

그리고 스탠딩은 이른바 ‘지적 재산’을 정당화하는 선전 신화를 간단하게 처리한다. 특허권의 실제 주된 목적은 혁신에 대한 보상보다 다른 사람들이 혁신하는 것을 차단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특허권에 영향을 받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제품들 대부분이 세금에서 나온 거액의 연구개발 보조금으로 개발되고 나서 사적인 이익을 위하여 종획된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특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아이디어의 인위적 희소성에 바탕을 둔 임대소득과 함께 국가는 토지와 자연자원 커먼즈의 종획을 통하여 유산계급에게 막대한 지대(임대소득)를 제공한다. 이러한 커먼즈 종획은 초기 근대 유럽에서의 소작농 토지의 종획,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같은 이주민 사회에서의 (주인이 없거나 토착민들이 차지하고 있는) 토지의 독점, 라틴아메리카의 대농장 시스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의 식민지 권력에 의한 소작농 토지권의 무효화 그리고 석유와 광물 자원의 약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모든 형태의 약탈당한 토지와 자원들에 대한 재산권이 신자유주의하에서는 줄곧 서구 자본의 수중에 있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하에서 국가의 한 가지 주요한 기능은 정당한 소유자들이 반환요구를 시도할 경우 그에 맞서서—‘사유재산권을 방어한다’는 명목으로—그러한 재산권을 집행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희소성을 통한 임대소득의 원천들 이외에 세금에서 나온 보조금도 임대소득자 계층에게 또 다른 소득 원천이다. 스탠딩은 통상적인 것들, 이를 테면 구제금융, 특정 산업에 대한 기업지원정책 및 복지국가가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사회화함으로써 축소된 임금에 보조금을 주는 방식을 거론한다. 하지만 그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국가가 자본 전체의 주요 운영비를 사회화하는 방식을 간과한다. (제임스 오코너는 이 방식을 『국가의 재정 위기』The Fiscal Crisis of the State에서 논의한 바 있다.)

1980년대 이래 기업 이윤이 실질 달러로 세 배 증가했고 임금은 정체되었으며 탈산업화로 인해 노동인구에서 프레카리아트의 비율이 급상승했다. 프레카리아트화 추세는 긱(gig) 경제의 부상과 함께 지난 단 몇 년 사이에 더욱 가속화되었다. 산업화된 국가들에서 대략 1980년대부터 임금과 생산성 사이의 연동관계가 사라졌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분수에 넘치는 생활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붕괴의 원인이며 높은 공공 부채가 성장을 저해한다고 허위로 주장을 하며 2008년 이후로 긴축재정이라는 선전노선을 밀어붙였다고 스탠딩은 말한다.

이 내러티브를 공격할 때 그의 의견은 꽤 정확하다. 사실 신자유주의 자체가 붕괴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분수에 넘치게 살았”던 것은, 자신들의 자산이 80년대부터 정체되었고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소비자 부채나 주택담보로 돈을 빌리는 것에 점점 더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고등교육 분야에서는 학력 인플레이션과 등록금 비용의—대체로 행정직에 들어가는 임금에 의해 유발되는—폭발적 증가가 병행됨으로써 엄청난 학자금 부채가 발생한다.

임대소득자 엘리트들의 소득이 급등하는 데 반해 노동계급의 구매력이 부진하다는 사실은, 과잉 축적과 과도한 투자라는 자본주의의 만성적인 위기가 수익성이 있는 배출구 없이 계속해서 악화되었고 유산계급이 파이어 경제(FIRE economy)(([옮긴이] 금융(Finance), 보험(Insurance), 부동산(Real Estate) 부문에 주로 기반을 둔 경제를 말한다.))에서 버블에 점점 더 의존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1929년에 붕괴를 유발했던 바로 그것과 거의 동일하다.

공공 부채는 실제로 경제를 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과잉 자본과 과소 소비로부터 생겨날 붕괴를 지연시킨다. 정부의 재정적자는, 임금이 정체된 대중의 지출 부족분의 일부를 정부의 재정으로 메꾼 데서 온다. 그리고 정부 부채는 수익률을 보장하는 정부채권 형태로 몇 조 달러의 투자 자본을 흡수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달러는 과잉 공급된 자본의 일부가 되어 민간경제에서 투자에 대한 수익률을 낮출 것이다. 정부 부채는 농산물 가격 지원 제도(a farm price support system)(([옮긴이] 1933년 대공황으로 농부들이 손해를 보자 미국정부는 농산물가격의 하락을 방지하기 위해 농산물의 생산을 제한하고 이에 대한 정부의 보상을 결정한 AAA(Agricultural Adjustment Act 농사조정법)를 제정했다.))를 자본에 적용한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긴축재정 선전기계는 금융 엘리트들이 투기했다가 날려버린 자산의 액면 가치를 떠받치기 위해, 더 낮은 임금과 대폭 줄인 사회적인 안전망을 활용하는 것이 붕괴를 다루는 적절한 방식이라고 대중들을 설득하려고 한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 스탠딩은 뉴딜이나 사회민주주의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다른 책들에서 보여준 비판, 즉 사회민주주의에 수반되는 ‘노동자주의’에 대한 비판을 되풀이한다. 노동자주의는 룸펜프롤레타리아를 희생시켜서 전일제 임금을 받는 산업프롤레타리아에게 특권을 주고, 사회적 경제를 훼손시키면서 산업을 치켜세운다.

그것은 사회민주주의의 정점이었다. 하지만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옮긴이]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저서. 폴라니는 시장이 교환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즉 경제를 사회의 일부분으로 본다. 데이빗 볼리어는 “Commoning as a Transformative Social Paradigm”에서 이 책의 내용을 짧게나마 언급하고 있다. http://minamjah.tistory.com/search/폴라니 참조))을 뒷받침했던 모델은 모든 형태의 일(work)이 아니라 ‘노동’(labour)을 중추적으로 만들었다. 사회주의자들∙코뮤니스트들∙사회민주주의자들은 모두 ‘노동자주의’를 지지했다. 정규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실질 임금이 상승했고, 일련의 ‘분담식’ 비임금 혜택들이 증가했으며 자기 자신과 가족들이 사회보장을 받을 자격을 획득했다. 이 모델에 맞지 않은 사람들은 버려졌다. 후자가 소수이면서 자산 조사에 기초한 사회안전망 서비스의 지원을 받는 한, 시스템은 그런대로 작동했다. 그 소수의 수가 증가하기 시작하자 속담 속의 지렁이가 꿈틀하기 시작했다.

노동자주의의 핵심은 노동권—더 정확하게는 자격(entitlements)—이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대개는 남자들)과 그들의 배우자 및 자녀들에게 부여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이 이전에 사회보장을 거의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은 진보적인 한 걸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성차별적이고 위계적이었으며, 노동시장 외부에서 보수를 받지 않고 다른 형태의 노동(예를 들어 육아노동과 공동체에서의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제치고 정규 유급 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특권을 주는 것이었다.

노동자주의는 노동자들이 노동을 많이 할수록 특권을 많이 가지고 노동을 적게 할수록 특권을 적게 가져야 한다는 견해를 확산시켰다···. 노동자주의는 또한 복지국가의 역기능적 측면을 초래했다. 정규직에게 노동에 기반을 둔 보장을 해주기 위하여 임금에서 비임금 혜택(회사연금•유급휴가•출산휴가•질병수당 등)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이것이 안정적인 정규직에 고용된 사람들과 안정성이 없는 임시적인 직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거나 유급노동보다 무보수 일을 더 많이 하는 사람들 사이의 구조적인 불평등의 형태를 강화했다.

스탠딩은 이른바 ‘공유 경제’는 이런 종류의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버 및 그와 유사한 플랫폼들은 운전자들이 소유한 물리적 자본에 대한 임대료를 징수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온디맨드(on-demand) 경제는 자본의 진언(眞言, mantra)을 역전시킨다. 자본가들이 주요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대신에 작업자들(tasker) 즉 프레카리아트들이 주요 생산수단을 ‘소유한’다. 플랫폼들은 특허권 및 기타 형태의 지적 재산권의 보호를 받는 기술적인 장치의 소유와 통제를 통해서 그리고 태스킹(tasking)과 무보수 노동을 통한 노동 착취로 이윤을 최대화한다. 고객들에게 서비스를 소유한 ‘독립 계약자들’을 소개하는 테크놀로지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라는 노동 브로커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더라도, 그들은 일을 거의 하지 않고 돈을 많이 버는 임대소득자들이다.

예상대로 ‘프레카리아트’의 최초 이론가인 스탠딩은 맑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에 저항하고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창조하는 ’혁명적 주체’라고 부른 바로 그 계층으로 프레카리아트를 제시하면서 결론을 맺는다. 전통적인 산업 프롤레타리아는 스탠딩이 이전 책들에서 주장한 것처럼 급진적인 정치에 대체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프레카리아트들만이 그 규모, 성장과 구조화된 불리한 조건의 측면에서 임대소득자 자본주의와 그 부패에 대한 진보적인 대응을 구체적으로 현실화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 최하층 계급인 룸펜-프레카리아트는 (2011년에 그랬듯이 그 일부가 항의운동에 참여할 수 있겠지만) 행동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말 그대로 구걸하는 존재로서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반란은 프레카리아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승산이 있으려면 다음 세 가지 특징을 가져야 한다. ①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신념을 중심으로 한 일체감, ② 기존의 사회구조의 결점•불평등•지속불가능성에 대한 지속가능한 이해, ③ 실행할 수 있는 목표에 대한 합리적으로 분명한 비전이 그것이다.

임대소득자 경제의 부정적인 분배효과를 제한하기 위해서 임금 노동자들을 비롯한 민중 전체가 지대와 이윤에 누적되는 소득의 일부를 받는 새로운 분배 체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임금 자체만으로는 생활수준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20세기에는 임금협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의미가 있었지만, 그것은 이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투쟁은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어야 한다. 임금이 계속해서 정체되어 있을 동안에 임대소득을 제한하고 공유하며 이윤을 공유할 혁신적인 방식들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평등은 추한 사회적•정치적 결과를 낳으면서 계속해서 증가할 것이다.

스탠딩은 한 가지 중요한 저항 수단으로서 오큐파이와 M15 운동을 모델로 한 ‘사회적 파업’—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장기간 동안 거리에 나서는 것—을 제의한다.

그는 해야 할 과제들의 상세한 리스트를 아래와 같이 일일이 열거한다.

· 공적 지출로 개발된 테크놀로지에 대한 특허 시스템 폐지, 그리고 다른 특허권의 경우 의무적인 라이선싱과 아울러 시행되는 기간을 철저하게 축소하기

· 모든 기업 보조금의 폐지

· 정치 자금 없애기

· 의무적인 고용주 보험으로 긱 경제 규제

· 공공안전이 논거가 되는 직종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전문 직종의 경우 법적 라이선싱 체제를 집단의 자율적 거버넌스로 교체하기

· 합리적인 온콜페이(on-call pay)(([옮긴이] 온콜페이(on-call pay)는 정규 근무 시간 이후에 호출이 있을 경우 고용인이 언제든 바로 호출에 응할 수 있도록 대기하면서 보낸 시간에 대해 받는 보수를 말한다.))

· 사회적 배당금이나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국부펀드를 창출하기 위하여 임대소득과 천연 자원 추출에 세금을 부과해서 발생하는 세입을 활용하기

그의 방침들 가운데 긱 경제를 규제하자는 제안은 내가 볼 때 가장 완고한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과거에 나는 국가의 주요한 개입에서 비롯되는 특권 남용에 규제가 이차적인 제약을 가한다면 (예를 들면 망중립성(([옮긴이] 망중립성이란 인터넷망 사업자와 정부가 모든 콘텐츠를 동등하게 취급하고 어떠한 차별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지칭한다. 즉 망중립성이 성립하려면 비차별, 상호접속, 접근성이라는 3가지 원칙이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이라는 특수한 경우에) 규제를 자유를 위한 순이익으로 보는 개방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우버나 에어앤비 같은 가짜 ‘공유 경제’ 플랫폼을 가능케 하는—즉 사유(私有)에 기반을 둔, 월드가든형 앱들(walled garden apps)(([옮긴이] walled garden은 공개적인 인터넷 환경이 아니라 사적으로 통제된 환경에서 존재하는 콘텐츠나 서비스를 말한다. walled garden에 대한 설명은 http://minamjah.tistory.com/117 참조))을 규제하는 법을 시행하는 것을 중단하는—주된 국가 개입을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긱 경제 노동자로 이루어진 급진적인 노동조합의 설립을 유도하고 해당 앱들을 탈옥하여 기존의 자본주의적 긱 경제를 진정으로 협력적인/P2P 방식의 대안 생태계들로 바꾸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할 것이다. 우리가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는 다른 중요한 혁신은 프리랜서와 긱 경제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부활된 길드 시스템을 통해서 조직되는 협력적인/P2P 방식의 사회 안전망들이다.

나는 과도기적인 방안들로서 지대나 부정적인 외부효과들(탄소세)에 부과되는 세금으로 재원을 마련하는 사회적 신용/시민배당금/기본소득 제안에 일반적으로 우호적이다. 다시 말해 국가가 계속해서 존재하면서 독점과 인위적인 희소성을 강제하고 세금으로 재정을 마련하는 한 인위적인 희소성에서 파생된 소득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착취의 순전한 감소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위한 무조건적인 생존소득(subsistence income)으로써 (프랜시스 피번Frances Piven과 리차드 클로워드Richard Cloward의 말대로) 노동을 규제하는(“regulating the poor”, “regulating the labor”) 실제 목적을 가지고 개입하는 복지 국가로 전환하는 것 또한 적절한 방향으로의 조치이다.

기본소득이 실현되려면—적어도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소득에 매기는 세금으로 재원을 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임대소득자 계급의 재산과 관련하여 사회적 형평성을 창출해야 한다.

나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사유유형의 한 사례로서 (스탠딩의 나머지 저작과 더불어) 이 책을 추천한다. 좌파가 새로운 경제에 적합하게 되려면 좌파에게 필요한 것은 공룡이 된 구좌파 조직과 정책 모델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유형의 사유이다.




벌집은 공장이 아니다



현재로 돌아가다

‘1852년 이래 양봉에서 일어난 가장 의미 있는 혁신’이라고 떠벌려진 플로우하이브(Flow Hive)는 2015년에 한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에 양봉업자의 꿈의 제품으로 선전되었다.

“꼭지를 돌리고 순수하고 신선하며 깨끗한 꿀이 벌집 밖으로 바로 흘러나와 단지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세요,” 그 웹사이트는 떠벌린다. “지저분하지 않고, 요란 떨 것 없고, 비싸지 않은 설비—게다가 벌들을 괴롭히지도 않습니다.”

『포브스』(Forbes), 『와이어드』(Wired), 그리고 『패스트컴패니』(Fast Company)에 실린 열렬한 제품평의 도움으로 인디고고(Indiegogo)(([옮긴이] Indiegogo: 앞에서 말한 크라우트펀딩 싸이트이다.))에 선전된 플로우하이브는 꿈처럼 작용했다. 제품을 론칭하기 위해 7만 달러를 목표로 했는데, 글을 쓰는 시점에 6백만 달러 이상이 모였다.(([옮긴이] 2017년 11월 24일 현재 $13,287,603이다.))

너무 좋아서 사실처럼 들리지 않는가? 슬프게도 사실이다.

플로우하이브에 대한 소식이 퍼지자 자연 양봉업자들은 플로우하이브의 접근법을 ‘벌에 적용된 밀집사육(battery farming)’이라고 불렀다. 플로우하이브의 설계의 핵심부에 있는 모듈형 플라스틱 벌집(comb)은 벌을 사랑하는 인간들에게는 편리할지도 모르지만, 이럴 경우 벌들의 복지는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커스턴 브래들리(Kirsten Bradley)가 설명했듯이, 플로우하이브의 벌집은 벌들이 스스로 만드는 것들보다 훨씬 더 깔끔하고 정연하다. 그냥 맡기고 놔두면 벌들은 계절과 그 당시 군체의 특정 욕구에 따라 벌집을 구성하는 방들의 사이즈를 정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벌집은 공장이 아니다. 그 안에서 방들이 중앙 기관의 기능을 하는 초유기체의 일부인 것이다. 벌집은 벌들의 집이며 화학적으로 실현되는 그들의 소통체계를 뒷받침해준다.

환경에 적응하는 밀랍 벌집을 인공 플라스틱 벌집으로 대체하면 기능이 고갈된, 때로는 유독한 환경이 만들어진다. 표준화된 방들을 강요하면 벌들은 벌집 전체에 걸쳐서 수벌들을 기르지 못하게 된다. 이로 인해 주위의 벌 개체군들 사이에 유전적 다양성이 감소되고 복원력이 감소된다.

플로우하이브의 발명자들은 벌 군체를 살아있는 복잡한 체계로 생각하지 않고 생산기계의 구성요소들로, 그래서 그 기계 안에서 이윤과 효율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조작되는 존재로 상상한 듯하다.

플로우하이브는 살아있는 건강한 체계들에서 요소들과 전체 사이의 상호연관을 방해하는 설계법에서 나온 수많은 인간의 발명품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부단히 질서와 통제를 추구하면서 추상적인 것을 살아있는 것보다 우위에 놓고, 건강한 살아있는 체계들이 실제로 움직이는 방식과 어긋나는 이상화된 해결책들을 부과한다. 우리는 역동적이고 항상 변하는 현실 세계의 생태와는 종류가 다른 완전하고 정태적이며 유토피아적인 해결책들을 찾으려고 한다.

이러한 사고습관은 물리적 체계들의 엔지니어링에 국한되지 않는다. 자연 자체에 대한 일부 비전들이 이런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이었다.

최근까지 보존연구는 연구단위로서의 개별 종들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었다. 예를 들어 서식지 파괴가 개체의 상황에 미치는 영향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종들의 상호작용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증가하고 있다.

생태학자 제인 메멋(Jane Memmott)이 설명했듯이, 모든 유기체들은 적어도 다른 하나의 종에 중요한 방식으로 다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혹은 포식자나 먹이로서 혹은 꽃가루 매개자나 씨앗 전파자로서 연결되어 있다. 각 종은 복잡한 상호작용의 네트워크에 함입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의 종의 멸종은 생태적 네트워크에서 연달은 이차적 멸종을 유발할 수 있는데, 어떻게 그런지를 우리는 이제야 막 이해하기 시작하는 중이다.

1980년대 이래 과학적 발견들이 그 어떤 유기체도 진정으로 자율적이지 않다는 명제를 확인했다.

가이아 이론, 체계론적 사고, 복원력 과학에서 연구자들은 우리 지구가 상호의존하는 생태계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그물망임을 보여주었다. 근대 시기의 대부분에서 과학적 사고를 형성해왔던 죽은, 기계론적 대상은 잘못 이해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초현미경적 바이러스들, 효모들, 개미들, 이끼들, 점균(粘菌)들 그리고 균근(菌根)들에서 나무들, 강들, 기후체계들에 이르는 모든 것에 대한 연구로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출현했다. 모든 자연현상이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현상의 본질이 바로 우리를 포함한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분자·원자·바이러스의 수준에서 인류와 ‘환경’은 말 그대로 서로 융합되어 당연하게도 생물학적 연합체를 구성한다.

비록 우리의 문화는 이 숨겨진 연관들을 파악하도록 우리를 잘 준비시켜주지는 않지만, 이 지식은 말 그대로 삶에 긴요하다.

프리초프 카프라(Fritjof Capra) 같은 과학자에게 우리 시대의 가장 큰 과제는 살아있는 것들—그리고 비(非)생물들—사이의 숨겨진 연관에 대한 인식을 널리 퍼뜨리는 것이다. 카프라가 제기한 문제를 훌륭하게 이어받은 스테판 하딩(Stephan Harding)은 그의 책 『살아있는 지구』(Animate Earth)에서 세계가 거시적 수준—대기, 대양, 지각(地殼)—에서만이 아니라 미시적 수준에서도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서술한다. 플랑크톤과 박테리아는 물방울의 핵 역할을 함으로써 구름의 형성에 기여한다. 균근은 척박한 토양에서 자라는 식물들과 협동한다. 페로몬이라는 화학물질 신호는 개미 군체로 하여금 초유기체로서 행동하게 한다.

공진화(co-evolution), 즉 바이오문화적 파트너관계의 형성이 바로 우리의 풍요로운 지구가 번성하는 방식으로 판명되었다고 하딩은 말한다. 우리가 이 관계들을 파열해오긴 했지만, 지금 다리를 놓아서 지구가 다시 한 번 건강하고 자기규제적일 수 있게 만들기에 늦지는 않았다.

이 과학적 발견들은 다른 누구보다 줄곧 철학자들의 화두였던 물음, 즉 ‘정신이 어디서 끝나고 세계가 어디서 시작되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준다.

최근까지 우리는 신경체계를 신체를 두뇌에 연결시키는 일단의 메시지 전달 케이블들의 집합으로 생각하며 그것을 미화하는 경향이었다. 그런데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정신과 세계의 경계는 구멍이 숭숭 나있는 것으로 판명된다.

인간 정신은 신경과 연관된 만큼이나 호르몬과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우리의 사고와 경험은 두개골 안의 두뇌의 활동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피부에 의해 울타리 쳐져 있지도 않다. 우리의 물질대사와 자연의 물질대사는 분자·원자·바이러스 수준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정신적 현상인 우리의 사유는 두뇌의 활동으로부터만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티드 락웰(Teed Rockwell)이 “신경체계신체환경을 포용하는 단일한 통합된 체계”라고 부른 것에서도 출현한다.

이 새로운 관점이 가진 중요성은 심대하다.

만일 우리의 정신이 우리의 두개골 상자 안에 똑딱거리는 시냅스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물리적 환경들에 의해서도 형성된다면 사유 자체와 자연 세계 사이의 분할—이는 바로 근대적 사상 전체를 뒷받침했던 분할이다—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근대 시기 전체에 걸쳐서 우리 자신을 자연 ‘위에’ 세우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우리는 지금 근대 과학으로부터 인간과 자연은 궁극적으로 하나라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유물론

생태적 네트워크에는 사물들도 포함된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주위의 사물들이 생명이 없고 거칠며 활기가 없다고 인식하도록 배웠다. 자연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소풍 가기에 좋은 곳이다. 우리는 이런 세계상을 머릿속에 갖고 있으면서 우리의 삶·땅·바다를 다시 생각해보지도 않고 쓰레기로 채운다.

그러나 전혀 다르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사물들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처음 ‘물활론(物活論)자들’(hylozoists)이라고 알려진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천명되었다. ‘물질이 살아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생물과 무생물,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지 않았다.

로마의 현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대작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시인 루크레티우스는 물질과 에너지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저 깊은 곳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고대 중국의 철학자들 또한 세계의 궁극적 실재는 본래 역동적이라고 믿었다. 『도덕경』에서 우주에 있는 모든 것은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연속적인 흐름과 변화에 함입되어 있다.

불교 텍스트들에는 ‘흐름’과 ‘머물지 않음’의 이미지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 이미지들은 무상(無常)과 부단한 운동의 상태에 있는 우주를 환기시킨다.

17세기 유럽에서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는 실존을 연속체로서, 신체·정신·생각·물질의 분리될 수 없는 얽힘으로서 파악했다. 그리고 바로 70년 전에 모리스 메를로뽕띠는 세상 안에 존재하기만이 아니라 세상에 속하기, 세상과 관계를 갖기, 세상과 상호작용하기, 세상을 모든 차원에서 인식하기를 옹호했다.

물질이 중요하다는 믿음은 말하자면 열-산업 경제(thermo-industrial economy)의 불[火]과 연기에 의해 흐려진다. 화석 연료가 19세기 이래 경제성장을 그토록 강력하게 추동하였기에 우리는 이 모델이 자원제한으로 인해서 한정된 지속기간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시야에서 놓쳤다.

이제 이 제한이 피부에 느껴지는 때이므로 이러한 생각들 가운데 다수가 표면으로 부상하고 있다. ‘새 유물론’ 운동의 사유가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사물들의 세계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 일부임을 깨닫기만 한다면 물질세계와 우리의 관계는 더 존중되고 기쁜 것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티모시 모턴(Timothy Morton)은 우리의 세계를 구성하는 “확연한 중심이나 가장자리가 없는 방대한 상호연관의 분산된 그물망”에서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사물들’에 들어있다고 완강하게 주장한다.

철학자 제인 베넷(Jane Bennett)도—그녀의 말로 하자면 “우리의 쓰레기의 부름”에 응답하면서—물질의 진동이라고 부르는 것에 그리고 인간의 신체의 외부와 내부에서 작동하는 비인간적 힘들에 끈기 있게 그리고 감각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옹호한다.

만일 우리가 모든 내버린 것들, 쓰레기, 오물을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낀다면 우리의 낭비적 소비패턴은 바뀌리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철학자 피터 그래턴(Peter Gratton)은 “때로는 모래에 머리를 파묻는 사람들이 무언가 깊은 것을 찾고 있다”고 해학적으로 말한다. 그는 묻는다. 주위의 모든 것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이해될 때 어떤 정치적·윤리적 귀결이 따르는가? 박테리아는 생명체로 간주되는가바이러스는로봇은생태체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체인가?

이 물음들에 대한 대답이 ‘그렇다’이거나 심지어 ‘그럴지도 모른다’라면, 우리 인간들이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세계를 착취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는 무너지기 시작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혁신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변화와 혁신은 더 이상 정밀하게 구축된 ‘비전들’을, 그리고 어떤 미래의 장소와 시간에 대한 거창한 디자인으로 그려지는 더 나은 현실에 대한 약속을 핵심으로 하지 않는다. 변화는 사람들이 현실 세계의 풍요로운 맥락에서 서로서로 그리고 생물권과 다시 연결될 때 일어날 가능성이 더 높다.

어떤 독자들에게는 이 제안이 순진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들릴 수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복잡계들이 변하는 방식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따르자면, ‘큰 것’을 형성하는 ‘작은 것’의 힘에 대한 나의 확신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

심대한 변형은 다양한 변화들, 개입들, 그리고 종종은 작은 파열들이 일정 시간에 걸쳐 축적되면서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체계론적 사고로부터 배웠다. 예측하기는 불가능한 어떤 순간에 체계가 변곡점 혹은 상전이 지점에 도달하게 되고 체계 전체가 변형되는 것이다.

이는 역사가 거듭거듭 확인해주는 가르침이다. 프랑스 철학자 에드가 모렝(Edgar Morin)은 이렇게 썼다. “모든 거대한 변형은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신념체계가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실이 그것이 변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아니다.”

생태철학자 조애너 메이씨(Joanna Macy)는 이 새 이야기의 등장을 ‘거대한 전환’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인식에서의 심대한 전환이며 우리가 식물·동물·공기·물·흙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의 각성이다.

이 이야기에는 영적 차원이 존재한다. (메이시는 불교학자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말하는 ‘거대한 전환’은 최근의 과학적 발견들과도 일치한다. 스테판 하딩(Stephan Harding)이 말한, 세계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생기 있게 살아있다”는 생각이다.

시·예술·철학에 의해서만큼 과학에 의해서도 이런 식으로 설명되면, 지구는 더 이상 우리에게 죽어있는 자원의 저장소로 다가오지 않는다. 반대로 궁극적으로는 건강한 토양, 살아있는 체계들, 그리고 우리가 이것들이 재생성되도록 도울 수 있는 방식들 사이의 상호의존이 우리가 결여하고 있는 경제활동의 ‘근거’를 나타낸다.

이 새 이야기는 설계(디자인)에 대한 진취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으며, 한 체계의 요소들 사이의 연관들과 상호작용들에도 이산(離散)된 구성요소들에 기울이는 것과 적어도 같은 정도의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의미한다.

플로우하이브에서 보았듯이 생산물에만 초점을 맞추는 접근법에 들어있는 위험은, 그것이 (벌 군체나 초유기체와 같은) 공동체가 만일 건강하고 복원력을 갖춘 상태로 남아있으려면 항상 변해야 하는 상황에 너무 경직된 틀을 부과한다는 점이다.

점증하는 세계적 운동은 인간이 만든 세계를 새로운 렌즈를 통해 보고 있다. 자연적·사회적 생태들의 가치를 알아보는 이 운동들은 새로운 구성요소들을 처음부터 만들기 위해 원료를 추출하는 것을 맨 먼저 생각하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자산—이른바 ‘순 현재자산’(net present assets)—을 보존·파수·복원하는 방식들을 찾고 있다.

설계자들과 제조자들은 이 운동에서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 설계자들은 어떤 상황에 참신하고도 존중하는 시선을 집중하여 그 상황에 사는 사람들의 눈에는 명백하지 않을 수도 있는 물질적·문화적 자질들을 드러내는 매우 유용한 일을 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재생성적 설계는 지어진 세계를 얼어붙은 대상들의 풍경이 아니라 상호작용하고 서로 의존하는 생태들의 복합체로서 다시 상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