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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먼즈 이행과 P2P (1)



 

1. 커먼즈란 무엇이고 P2P란 무엇이며 양자는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가?

구상이자 실천으로서의 커먼즈가 새로운 사회적·정치적·경제적 동학으로서 출현했다. 시장 및 국가가 사회 조직화의 두 방식이라면, 커먼즈는 그와 병행하는 사회 조직화의 셋째 방식이다. 커먼즈와 P2P(Peer 2 Peer)가 함께, 시민사회의 욕구와 실천 그리고 시민사회가 거하는 환경에 기반을 둔 체계를 형성한다. 이 체계는 중앙집중적으로 계획된 낡은 체계들이나 경쟁을 명령하는 시장경제로부터 벗어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런데 커먼즈란 무엇이고 P2P란 무엇이며 양자는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가? 이제부터 이 개념들을 탐구할 것이다.

커먼즈란 무엇인가?

데이빗 볼리어가 서술한 바로 커먼즈는 사용자들의 공동체가 그 공동체의 규칙과 규범에 따라 공동으로 다스리는 공유된 자원을 가리킨다. 커먼즈에는 물과 땅 같은 자연의 선물들만이 아니라 문화적 산물이나 지식 같은 공유된 자산들 혹은 창조적 작품들도 포함된다.

커먼즈의 영역은 두 사람이 동시에 가질 수 없는 경합적 재화와 자원을 포함할 수도 있고 사용해도 고갈되지 않는 비경합적 재화나 자원을 포함할 수도 있다. 재화나 자원의 두 유형은 물려받거나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

커먼즈 학자이자 활동가인 헬프리히(Silke Helfrich)에 따르면 커먼즈는 적어도 다음 네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1. 집단적으로 관리되는 자원. 여기에는 물질적 자원과 비물질적 자원 모두가 속하며 보호가 필요하고 많은 지식과 노하우가 요구된다.
2. 번영관계들을 조성하고 심화시키는 사회적 과정. 이 과정들은 지속적으로 파수(把守)되고 재생산되며 보호되고 커머닝을 통해 확대되어야 할 복잡한 사회생태학적 체계들의 일부를 구성한다.
3. 새로운 생산적 논리와 과정에 초점을 둔 새로운 생산양식.
4. 커먼즈와 커머닝을 세계관으로 보는 패러다임 전환.

“커머닝 없이 커먼즈 없다”고 말한다. 커먼즈는 자원도 아니고 자원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도 아니며 자원을 파수하기 위한 프로토콜도 아니다. 커먼즈는 이 모든 요소들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이다.

한 사례가 위키피디아이다. 자원(보편적 지식), 공동체(저자들과 편집자들), 공동체가 마련한 일단의 규칙들과 프로토콜들(위키피디아의 내용과 편집 지침들)이 있다. 위키피디아 커먼즈는 이 셋 모두로부터 출현한다. 근본적으로 다른 맥락에 속하는 다른 사례는 미국 오리건 주의 싸이유슬로 국유림(Siuslaw National Forest )이다. 여기서도 자원(숲), 공동체(벌목꾼들, 생태학 과학자들, 삼림 감시원들, ‘분수령 위원회’) 그리고 일단의 규칙들과 준칙들(숲을 지속 가능하게 공동 관리하기 위한 헌장)이 발견된다.

한 공동체가 어떤 자원을 공동으로 관리하기로 결정할 때 커먼즈가 발생하므로, 커먼즈 전체를 총괄하는 목록이란 없다. 커먼즈 전체는 전 세계에 존재하는 개별 커먼즈들―어장에서 어번 커먼즈에 이르는, 공유된 부의 많은 형태들을 포함한다―의 방대한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여 번영한다.

P2P란 무엇인가?

커먼즈가 ‘무엇을’이라면, P2P는 ‘어떻게’로 간주될 수 있다.

P2P―—“peer to peer”, “people to people”, or “person to person”—는 지위가 동등한 사람들(peers)이 서로 자유롭게 협동하여 공유된 자원의 형태를 띤, 그리고 커먼즈의 형태로 유통되는 가치를 창조하는 관계의 동학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컴퓨팅 용어로서 P2P는 ‘동등한 지위를 가진 네트워크 참여자들’(peers) 사이의 합의를 통한 연관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컴퓨팅체계를 가리킨다. 이는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는 컴퓨터들이 서로 상호작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맥락에서 오디오·비디오 파일 공유가 P2P 파일공유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인터넷의 심층적 기반시설의 일부―예를 들어 데이터 송신 기반시설―가 P2P라고 불려왔다.

이 컴퓨터들 뒤에 인간 사용자들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사용자들은 일정한 테크놀로지적 도구를 사용하여 서로 더 쉽게 그리고 전지구적 규모로 일대일로 상호작용하고 관여할 수 있다.

P2P 용어들 및 정의들에 대한 언어적 혼란이 테크놀로지 기반시설(서로 통신하는 컴퓨터들)과 관계 동학(소통하는 사람들)의 상호의존성으로부터 종종 발생한다. 그러나 테크놀로지 기반시설이 P2P 인간관계를 촉진하기 위해서 완전히 P2P적일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이나 비트코인을 위키피디아나 프리 혹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기획들과 비교해보라. 이들 모두가 P2P 동학을 이용하지만, 그 방식과 정치적 지향은 서로 다르다.

P2P 협동은 종종 허가 없이 이루어진다. 즉 기여하기 위해서 다른 참여자의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다. P2P 체계들은 일반적으로 모든 기여자들과 기여에 열려있지만, 작업의 질과 포괄성은 보통 위키피디아의 경우처럼 일군의 유지자들과 편집자들에 의해서 ‘사후에’ 결정된다.

또한 P2P는 개인들 사이의 특별한 상호성은 없고 개인들과 집단적 자원 사이의 상호성만을 포함하는 자원할당 방식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당신은 널리 사용되는 GNU GPL 라이선스 아래 배포되는 기존의 소프트웨어에 기반을 두어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수 있지만, 당신의 최종적 생산물이 동일한 종류의 라이선스 아래 사용될 수 있다는 조건에서만 이것이 가능하다.

협동하는 인간이 사용하는 상호연결된 컴퓨터들의 P2P 네트워크들은 활발한 공유된 기능들을 커먼즈에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P2P는 디지털 영역과 첨단테크놀로지하고만 연관된 것이 아니다. 그 핵심은 비(非)강제적이고 비(非)위계적인 관계들이며 그 자질들은 인간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잠재력을 가진다.

* 아래는 원 문서의 이 위치에 삽입된 그림입니다.


 

P2P와 커먼즈, 이 둘은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가?

P2P와 커먼즈의 관계는 전자가 커먼즈에 기여하는 행동들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으로서 작동하는 관계이다. P2P는 공동으로 관리되는 공유된 자원(커먼즈)의 창출과 유지에 기여하는 능력을 구축함으로써 ‘커머닝’ 행동을 촉진한다.

요컨대 P2P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의 두드러진 패턴을 표현하며, 커먼즈는 이 관계 동학으로 작동하는 구체적인 ‘무엇’(자원), ‘누가’(자원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 그리고 ‘어떻게’(미래 세대를 위해 윤리적이고 지속 가능하게 자원을 파수하는 데 사용되는 프로토콜)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시민사회의 기반을 P2P 동학과 커먼즈 실천에 두면 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안정된 환경의 사회를 실현할 수 있다. 이것이 커먼즈 이행의 목적이다.

1장 끝




괴물 시대의 커먼즈 (2) / 完



 

괴물 시대의 커먼즈―P2P 정치가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

 

<이전 게시글에 이어짐>

어번 커먼즈의 발생

 

2014년 봄, 유럽 의회에서 뽀데모스가 거둔 성공에 자극을 받은 한 활동가 집단이 마드리드에서 가장 유명한 점거된 사회 센터들 가운데 하나인 엘 빠띠오 마라빌라스(el Patio Maravillas)에서 만났다. ‘우리는 이 도시를 쟁취하려고 합니다’라고 그들은 선언했다. 그들은 전례 없는 수준의 시민 참여를 조직하고 현실화하기 시작했으며 이전에는 무관하게 흩어져 있던 정치적 행위자들을 위한 공통의 공간을 마련하는 일을 촉진하기 시작했다. 기본 원칙들에 동의하고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완전히 참여에 열린 선거 목록에 자신을 후보자로서 제시할 수 있었다.

한 달 정도 전에 바르셀로나의 활동가들은 다음의 네 가지 근본적인 목표를 중심으로 모일 것을 기존의 사회운동들과 정치조직들에 권유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1. 모두에게 시민의 기본권과 어엿한 삶을 보장하기,
2. 사회 정의와 환경 정의를 우선으로 하는 경제를 양성하기,
3. 제도들을 참여민주주의 방향으로 바꾸기,
4. 시민들에 대한 윤리 서약을 지키기.

합류 요청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으며, 반(反)철거 및 주거권 운동가인 아다 꼴라우(Ada Colau)가 공적으로 대표하는 구아녬 바르셀로나(Guanyem Barcelona(([옮긴이] Guanyem Barcelona : 이는 카탈로니아 말로 ‘바르셀로나를 쟁취하자’(Let’s win back Barcelona)라는 의미라고 한다.)))가 바르셀로나 엔 꼬무(Barcelona en Comú)로 일정한 시간에 걸쳐 변이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바르셀로나 엔 꼬무는 사회운동에서부터 비주류 정당들에 이르기까지 도시를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다양한 행위자들을 포함하는, “도구로서의” 선거연합이다.(([옮긴이] 스페인에는 네 개의 선거가 있다. ① 첫째는 총선(Elecciones generales)이다. 이는 일국 수준의 의회의 의원들을 뽑는 선거이다. 한국의 총선과 같다. 다만 스페인에는 하원과 상원이 모두 있다. ② 둘째는 자치지방의 입법선거(Elecciones autonómicas)이다. 스페인의 13개 자치공동체들―Aragon, Asturias, Balearic Islands, Canary Islands, Cantabria, Castile and León, Castile–La Mancha, Extremadura, La Rioja, Madrid, Murcia, Navarre and Valencia―의 의회의 구성원들을 뽑는 선거이다. 이것을 현 텍스트에서는 ‘the regional (election)’이라고 부른다. ③ 셋째는 지방자치체 선거(Elecciones municipale)이다. 이것을 현 텍스트에서는 ‘the city (election)’라고 부른다. ④ 넷째는 유럽의회 선거(Elecciones al Parlamento Europeo)이다. 스페인의 ‘지방자치체’(municipality)는 ‘자치지방’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자치도시’로 옮기기로 한다. ‘municipalism’은 도시들의 연대로 국가를 넘어서는 뚜렷한 목적과 문제의식을 지닌 운동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이는 ‘자치도시주의’로 옮기기로 한다. 자치도시(지방자치체) 선거에 후보를 내는 바르셀로나 엔 꼬무와 같은 ‘municipalist coalitions’는 ‘자치도시 연합’으로 옮기기로 한다.))

주류 미디어에 의해서는 무시되거나 비난을 받은 이 연합은 15-M이나 오큐파이 운동처럼 구체적인 장소들에서 연대를 형성하고 공유된 가치 및 믿음을 중심으로 모여서 스스로를 복제했다. 그 과정은 부잡스럽고 열띠고 분주했다. 이전에 그 누구도 이 일을 시도해 본적이 없으며 교범도 없었다. 실상 교범은 운동과 함께 작성할 수 있을 뿐이었다. 모든 선거 예측, 적대적인 미디어, 확고한 기성 정치세력과 맞서는 불리한 상황에서 이 연합은 스페인의 주요 도시들에서―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만이 아니라 발렌시아, 아꼬루냐(A Coruña), 사라고사, 카디스에서도―승리를 거두었다. 뽀데모스는 이 많은 연합들 가운데 다수에 참여했지만 자치지방 입법선거(the regional)는 (지방자치체선거에서와 달리) 단독으로 후보를 내는 것을 선택했다. 그 결과는? 연합이 승리한 모든 곳에서 하나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동일한 유권자 집단이 지방자치체(아오라 마드리드Ahora Madrid가 후보를 낸 곳)와 자치지방 입법선거(뽀데모스가 후보를 낸 곳)에서 모두 투표를 할 수 있는 마드리드 시의 선거에서 뽀데모스는 아오라 마드리드가 얻은 표의 겨우 반만큼을 얻었다.

스페인의 자치도시연합은 문화, 사고방식, 권력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변화를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여러 운동들의 결과였다. 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15-M이며 뽀데모스가 아니라 연합이 그 진정한 정치적 부산물로 간주될 수 있다. 2014-15년 이전의 선거들에서 15-M은 주거, 공중보건, 교육,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운동들을 횡단적으로 연결하는 관계를 발전시키기도 했다. ‘라스 마레아스’(las mareas) 혹은 ‘시민들의 파도’(citizen’s tides)라고 알려진 이 운동들은 노동조합과 정당들과 같은 전통적인 조직들을 포함하면서 진정으로 다수적 구성의 성격을 띠는(truly multi-constituent in nature) 자기조직된 항의들과 능력구축을 특징으로 했다. 예를 들어 공중보건 마레아는 공중보건 서비스의 지지자들만이 아니라 건강관리 전문가들, 환자들, 보건개혁가들, 병원 직원들, 특수한 질병에 초점을 맞춘 연대조직들, 협조 기관들 등을 포함하고자 했다. 15-M 자체도 기존의 경향들―디지털 행동주의, 자유문화(free culture) 운동, 탈성장, 커먼즈, 기타 많은 운동들―의 산물이었다.

오늘날 자치도시 플랫폼들은 서로 연계하여 자원과 최선의 실행들을 공유하면서 초지역적 친화 네트워크들로서 기능하고 있다. 연합들[=플랫폼들]은 비록 선거구에서의 현실적 해결책들을 제공하는 데 주로 초점을 두지만 여러 두드러진 특징들을 공유한다. 가장 신선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정치적 담론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더욱더 여성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제도권 정치에서 전형적으로 발견되는 보수적이고 남성적인 태도와 대조된다.

자치도시연합이 많은 거리집회들을 통해 연마된 참여/급진 민주주의에 초점을 두는 것은 공유된 ‘윤리 코드’(“código ético”)로 더욱 정련되었다. 이 코드가 제도들 내에서의 플랫폼들의 행위에 형태를 부여한다. 이 코드는 참여자들을 한데 모으는 아교이자 끌개 역할을 하는데, 당원들에게 국한되지 않고 참여를 원하는 모두에게 적용된다. 주된 항목은 다음과 같다.

· 회전문 인사 금지 (민영 기업과 공직 사이를 오가는 인사 금지)
· 봉급 삭감
· 시민의 참여에 열린 프로그램
· 오픈 프라이머리―당 쿼터가 없이 모두에게 열려 있음
· 자발적/시민 자기금융과 제도 혹은 은행을 통한 금융 거부

모든 자치도시 플랫폼들은 지역 관심사들과 초지역적 연대를 넘어서 초국적 차원에 시선을 두고 있다. “반란 도시들‘(Rebel Cities)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P2P 생산공동체들의 실천이 지역에 뿌리를 두지만 전지구적으로 네트워크화되어 있다는 점을 반영한다. 덧붙이자면, 시민의 파도 운동에 들어있는 다수적 구성 접근법이 연합들 내에 반영되어 있는데, 이는 비록 기존의 정당들을 포용하지만 특정 정당의 노선을 위주로 하지믐 않는다. 시민사회의 광범한 범위의 행위자들의 이익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럼 이들은 그 이후에 행복하게 살았는가? 물론 아니다. 활동가가 된 정치 대표자들은 변함없이 적대적인 미디어 환경과 대면하는데, 미디어는 이들의 성과는 묻어버리면서 이들의 실수는 과장한다(혹은 필요하다면 없는 실수를 만들어낸다). 이들은 4년 동안의 불안정성 및 치열한 활동 이후에 1주일에 60시간 이상의 작업조건을 맞는 한편 사회노동당과의 연대라는 틀 내에서 소수 의석을 유지하며 수평주의적 관료주의(horizontalist bureaucracy)(([옮긴이] 보통 관료주의는 수직적 위계구조를 특징으로 한다. ‘수평주의’는 이와 달리 구성원들의 평등한 관계를 가리킨다. 이어지는 내용으로 보아 ‘수평주의적 관료제’는 구성원들의 평등한 관계는 인정되지만 과제의 실제적인 해결로는 나아가지 못함으로써 관료주의에서 보는 것과 같은 무능에 빠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듯하다.))의 굳어진 현실과 충돌하게 된다. 시민 연합들의 다원주의적 성격은 당연하게도 비일관성과 과실을 낳았으며 가장 나쁜 것은 직접 행동 전술과 대항권력 구축 노력의 폐기가 두드러진 점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버텨나가고 있으며, 초국적기업들과의 공공 계약의 취소, 시민참여 예산책정, 젠더의 균형을 더 잘 맞춘 문헌 및 재현, 공공지출의 증가, 반(反)젠트리피케이션 전략, 기본소득 파일럿 프로젝트, 직접민주주의 메커니즘들 등 많은 이익과 전진을 가져왔음은 모두가 보기에 명백하다.

진짜 좋은 소식 가운데 최고는 자치도시연합이 스페인에서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 세계의 진보적인 도시들이 커머닝을 가능하게 하고 커머닝에 힘을 부여하고 있다. ‘반란 도시들’(Rebel Cities)―혹은 앞으로 있을 행사에서 부르는 바로는 ‘대담한 도시들’(Fearless Cities)―은 시민들이 자신과 환경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시 정부가 지도하기보다는 커머너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며 보통 사람들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자신들에게 관련되는 일을 직접 관리하는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 벨기에의 헨트(Ghent), 이탈리아의 볼로냐,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영국의 프롬(Frome), 브라질의 벨로오리존테(Belo Horizonte), 이탈리아의 나폴리, 캐나다의 몬트리올, 미국의 잭슨, 프랑스의 릴, 영국의 브리스틀, 칠레의 발빠라이소(Valparaiso)가 그 사례들이다. 이 도시들의 시민들은, 각 지역 맥락에서 적절한 많은 행동들 외에도, 투명성을 높이고 시민들이 참여하는 예산책정을 가능하게 하며 공터를 공동체 정원으로 바꾸고 기술과 도구를 공유하는 프로그램들을 공동창출하며 사회적 돌봄 협동조합들의 창출을 촉진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새롭게 상상된 관점을 통해 시장과 국가로부터 스스롤 해방시키려는 커먼즈 운동에 필요한 상호 인식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면서 도시 수준을 넘어서 커머닝의 실천을 제도화하려는 범유럽적 노력 또한 존재한다. 2016년 11월에 유럽 전역에서 온 150명의 커머너들이 함께하는 강한 운동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브뤼셀에 모였으며 유럽커먼즈의회(the European Commons Assembly, ECA)가 탄생했다. 정책을 제안하는 여러 주 동안의 집단적 작업을 바탕으로 ECA는 유럽의회 안에 자리를 잡고 ECA를 플랫폼으로 삼고 커먼즈를 정책입안의 강력한 패러다임으로 삼는 방안을 탐구하게 되었다.

 

커먼즈 이행 : 아래로부터의 사회적 거버넌스의 정치적 어휘를 구축하기

 

이 자치도시연합, ‘반란 도시들’, 초국적 의회들이 형성되고 고유한 거버넌스를 표현하게 된 과정에는 커머닝의 어휘와 실천이 명백하게 들어있다. 이 연합들, 도시들, 의회들은 투명성과 시민 참여에 초점을 두고 오픈소스 P2P 테크놀로지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더 나은 미래의 정치의 여러 측면들을 예시한다. 앞에 놓인 과제는 스페인에서 그토록 성공적이었던 네트워크 논리를 오큐파이와 15-M의 잠재력을 되찾아 복원력 있고 더 여성적이며 윤리적으로 일관된 초국적 정치운동을 구축하는 데 적용하는 것이다.

예시적 전략들이 사회적·환경적 우선사항들을―시장이나 국가가 이 ‘외부성들’을 다루기를 기다리지 않고―그 비공식적 재도들에 통합시키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자치도시연합의 윤리적 코드도 커먼즈 지향적 연합의 원리들로 온전히 전환되어 현재의 정치에 새로운 책임성(accountability)(([옮긴이] ‘accountability’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는 설명(account)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에서 이 ‘accountability’의 가장 저급한 수준을 경험한 바 있다.))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일단의 정치적 지침들의 핵을 형성할 수 있다.

잠재적 성공을 위해서는 중요한 것을 현실적이고 이야기 가능한 것으로 유지하는 것 또한 관건이다. 구좌파는 전통적으로 추상태들로 소통을 했는데, 이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만들어내는 경향을 가진다. 시리자, 뽀데모스, 볼리비아 사회당의 포퓰리즘적 ‘신’좌파도 시민참여적이고 실행 가능한 행동들을 제안하는 대신에 거창한 온정주의적 약속들을 제시하는 데, 그리고 비난 던지기에 호소하는 데 만족하는 듯이 보인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이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친연 집단(affinity groups)을 스스로 조직하고 비공식적인 참여 공동체들이 출현하여 부패하는 복지국가의 단점들을 문제 삼는 문화에서는 사람들이 세상을 운영하는 데 자신도 발언권을 가지고 싶어 함을 당당히 밝힌다. 사람들은 자신이 버는 것보다 엄청나게 많은 보수를 받고 자신들을 대신해서 발언을 해주는 누군가의 존재를 원하지 않는다. 커먼즈 정치가 과연 자기조직화로 향하는 이러한 전환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가?

새롭게 출현하는 커먼즈 및 P2P 정치 운동을 국지적 장소의 현실적인 동학의 특징들을 보존하면서도 높은 복잡성의 수준―지역적(regional)(([옮긴이] ‘지역’(region)이란 국가보다 작고 구체적인 국지적 장소보다는 넓은 규모에 쓰이기도 하지만 ‘동아시아’처럼 몇 개의 국가들이 모여서 이루는 규모를 가리키는 데 쓰이기도 하므로 유의해야 한다. 물론 여기서는 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일국적, 초국적 수준―으로 발전시키겠다는 것이 우리의 비전이다. 커먼즈 기반의 실천들은 정치적 과정에 의해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공동체들의 창조성과 참여에 관여함으로써 효과적인 정치 행동에 쓰일 수 있는 일체감을 양성할 수 있다. 커먼즈의 통합적 내러티브는 시장국가와 시장경제의 협소한 관료주의 외부에서 시민들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를 권유한다.

근본적으로 다시 개편되고 민주적으로 책임성 있는 구조를 상상해보자. 복지국가의 바람직한 특징들―사회적 복지 및 공중보건, 거대한 기반시설의 관리와 유지―을 보존하면서도 그것들을 근본적으로 민주화한 구조를. 이 구조는 국가의 시장과의 아늑한 공생을 제거하는 한편, 화폐의 창출과 교환, 재산과 법적 권리에 대한 국가의 해로운 독점을 해제할 것이다. 그 다음의 일련의 조치들은 불평등의 구조적 발생을 금지시키고 해방적 대안들에 대한 종종 폭력적인 억압을 금지시킬 것이다. 이 구조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경제에서 재단들이 기능하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기능할 것이다. 협동 및 커먼즈의 창출과 유지를 위한 기반시설을 제공하면서도 사회적 가치의 창출과 분배의 과정을 위에서 이끌지는 않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커머닝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고 보호할 것이다.

이렇게 커머닝을 가능하게 하는 메타구조(metastructure)―이는 종종 ‘파트너 국가’(The Partner State)라고 불린다―는 이미 존재하는 P2P/커먼즈 실천에서 도출되는 새로운 기능들을 취할 것이다. 이 가운데에는 욕구 지향적인 실질적인 기업가활동/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의 증진이 속하는데, 이 활동/정신은 개방형 협동조합들, 무선 네트워크망, 혹은 공적 영역과 커먼즈의 파트너관계를 통해 개발되는 공동체 재생에너지원과 같은 상향식 생산 기반시설의 뒷받침에 의해 강화된다. 이는 커머너들로 하여금 사용되지 않고 있거나 덜 사용되고 있는 공공건물들을 사회적 목적으로 재활용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한편, 카피레프트에 의해 영감을 받은 재산법 개혁에 의해서든 커머닝을 점진적으로 제도화하는 더 긴 과정을 통해서든 커머닝 활동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그 풀뿌리 민주주의적 에토스는 새로운 금융 메커니즘들과 부채로부터 자유로운 공적 화폐를 창출할 것이다. 이 화폐는 사회적 통화들과 나란히 존재하면서 환경을 재생성하는 일이나 새로운 분산된 오픈소스 기반시설을 만드는 데 기금을 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위에 서술된 유형의 노동을 선호하는 세제 계획에 의해 뒷받침되는 한편, 투기와 기생적 지대와 사회 및 환경에 부정적인 외부성들을 처벌할 것이다.

널리 확산된 참여정치 문화―이는 병행되는 교육에 의해 현실적으로 가능해진다―를 통해서 정치적·입법적 이슈들과 예산책정을 숙의하고 실시간으로 의논하는 데 새롭게 권리를 얻은 시민들을 포함시키도록 전체 체제를 통제해야 한다. 권력의 문제에서 파트너 국가는 유체적인 촉진자로 전환하여 국가를 통제하는 상향식 대항권력을 돕고 해방시킨다.

이 이야기가 유토피아적인가? 오큐파이와 15-M의 제안들을 ‘그들의 요구는 무엇인가···?’ 식으로 제시한 것에 불과한 것인가? 실상 위에서 말한 파트너 국가 실천들이 ‘대담한 도시들’에 의해서 이미 많이 실행되고 있다. 유토피아주의라는 비난은 상상력의 커먼즈를 종획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불가피한 갈등과 자기이익 말고도 인간의 본성에 있는 더 좋은 것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용기(와 격려)가 필요하다. 역사는 관찰될 수 있는 패턴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론적이지 않다. 그 무엇도 정밀한 개념들에서 갑자기 온전히 형성된 실재로 현실화되지 않는다. 15세기 플로렌스에서 일단의 현명한 사람들의 집단이 둘러앉아서 “···우리는 자본주의를 창출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창조적 파괴를 통해서 전진할 것이다! 우리는 고빈도 알고리즘 트레이딩(high frequency algorithmic trading)을 할 것이다!” 등과 같은 허튼 소리를 선언한 일은 없다. 그렇지만 잘 보면 상인계급의 발생, 인쇄기, 복식부기를 포함한 다양한 사회·테크놀로지적 트렌드들을 포착해낼 수 있다. 이 트렌드들은 모두 18세기부터 우리가 ‘자본주의’라고 인식하는 것을 형성하게 될 것이었다.

현재 우리가 처한 카오스 상태에서는, 정치의 영역에 커먼즈 이행을 적용하는 것은 세 구별되는 진보적 경향들의 최선의 실천들을 활용하는 새롭고 포괄적인 내러티브를 창출하는 것을 수반한다. 개방성(해적당들), 공정성(신좌파), 지속 가능성(녹색당들)이 그 셋이다. 우리 시대의 과제에 부합하는 새로운 정치적 비전을 구축하는 최적의 플랜은 이 세 경향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을 포함한다. 바로 자치도시주의자들이 성취했고 정치적·입법적 힘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새로운 정치를 위한 이 비전은 인종, 젠더, 재생산과 관련된 정의(正義) 같은 뒷전으로 밀린 관심사들 그리고 균형에 대한 증가된 관심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크게 다양화하는 정치적 대의 또한 증진해야 한다. 대표적인 상이 항상 그리고 유일하게 ‘백인 이성애 남자들’인 것은 아니라는 (특히 지도자 역할의 경우에) 점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여성들이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에서 승리한 자치도시연합 후보들로서 선봉에 섰다는 점을 생각해보라.

P2P 동학이 실행 가능한 해결책들을 도입할 수 있고 토대가 있고 바이오지역에 기반을 둔 정치 참여를 도입할 수 있는 시골 및 탈산업화된 지역들에 더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커먼즈는 본성상 포용적이기 때문에 정치에 적용되었을 때 해당 개인들과 공동체들에 의한 풀뿌리 수준의 정치참여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내러티브는, 기존의 제도들만이 아니라 변화를 만드는 사람들과 시민사회 조직들이 접근할 수 있는, 이미 존재하는 (규모를 키울 수 있는) 최고의 실천들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

요컨대 자치도시주의(municipalism)가 권력구조를 성공적으로 점거한 데서 우리는, 커먼즈 논리가 P2P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는 민주적·참여적 관계들과 결합되면 오늘날의 정치 장(場)에서 새로운 목적의식을 되살리고 불어넣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커먼즈 정치를 포함하는 커먼즈 지향적 미래를 상상할 수 있다면, 이 더 나은 미래를 현실로 가져오는 데 가진 모든 힘을 다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윤리적 책무가 된다. 괴물 시대의 이 싸움. 다윗과 골리앗의 이 싸움에서 다윗이 되지 말란 법이 있는가?(([원주] 이 아이디어는 원래 수압균열법 반대 활동가인 쌘드러 스타인그레이버(Sandra Steingraber)가 제시한 것이다. [옮긴이] 수압균열법에 대해서는 http://minamjah.tistory.com/search/fracturing#footnote_101_15 참조. 쌘드러 스타인그레이버에 대해서는 http://www.truth-out.org/news/item/16033-sandra-steingrabers-war-on-toxic-trespassers 참조.)) 다윗은 결국 이겼으며, 자치도시운동의 승리 경험을 볼 때 우리 또한 이길 수 있지 않을까. ♣




괴물 시대의 커먼즈 (1)



 

괴물 시대의 커먼즈―P2P 정치가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

 

커먼즈가 정치적으로 성숙해지고 있다. 그 방법과 원칙들이 더 가시화되고 있으며 참여자들이 유럽의 여러 도시들의 선거에서 승리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으며,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우선 현재의 정치적 맥락을 보고 그 다음으로 커먼즈 정치의 이 새로운 물결의 탄생과 궤적에 대해 평해보기로 하자.

현재 우리가 처한 정치 풍경이 얼마나 나쁜지 점검해보자. ‘차악주의’(lesser-evilism)의 번성? 맞다. 대안 우파(Alt-right)의 전 세계적 확산? 맞다. 한때 찬란했던 (시리자Syriza나 뽀데모스Podemos 같은) 좌파 정당들이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무능력 등으로 인해 이제는 녹슬었다? 맞다. 전체적으로 보아 매우 나쁜 상황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무도한 행태들이 그 지적 신뢰성의 남아있는 흔적마저 싹 부식시켰는지도 모른다. 이 무도함은 그것이 아무리 끔찍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편안한 것이 되어서, 안전에 대한 그리고 예측할 수 있는 행동의 여지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제공한다. 장기화된 긴축정치와 복지국가에 대한 약탈이 많은 사람들을 좌절시키고 절망에 빠뜨리고 분노시켰으며 발흥한 우파 포퓰리즘 운동이 이것을 이용하여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눈에 띄는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정치 참여는 의미 없는 선택에 국한된 듯이 보일 수 있다. 흘러내리는 바위들 위를 기어서 익숙하지만 변하고 있는 지구화된 자본주의라는 땅을 넘어갈 것인가, 아니면 21세기의 오만(즉 브렉시트, 트럼프주의, 대안 우파 혹은 극우)을 가득 싣고 곤두박이로 달리고 있는 화차에 편승할 것인가? 대의 민주주의의 실험을 버릴 때인가? 더 인간적이고 참여적인 정치를 위한 적극적인 모델들이 존재하는가?

이러한 정치적 맥락은 많은 책들과 글들에서 개괄되었으나 슬프게도 불가피한 파멸을 저지할 실행 가능한 대안들은 거의 제시되지 않고 있다. 이 글은 롤러코스터 같은 시장과 관료제로부터 해방된 정치체제를 다시 상상하는 시도를 서술한다. 여러 장소에서 선거에서 승리한 현존하는 효과적인 정치운동에 기반을 둔 이 글은 거버넌스, 생산, 돌봄 노동, 문화적·자연적 유산의 파수에서 이루어진 발본적인 혁신에 대한 서술이며 아래로부터의 체계 구축을 위한 반석을 놓는 정치에 대한 서술이다. 이는 커먼즈와 P2P의 정치로서, 공통자원의 공유된 창조와 관리를 확장한 것이고 자치도시 선거에서의 최근의 성공적 분출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괴물 시대의 커먼즈

그람시가 말했듯이 (아니면 말하지 않았듯이(([원주] 그람시가 실제로 그 말을 했는가? 사실 여부가 뜨겁게 논란이 되는 이 발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세계정세를 포착해준다.))) “낡은 세계는 죽어가고 있고, 새로운 세계가 태어나려는 몸부림을 치고 있다. 지금은 괴물들의 시대이다.” 신자유주의화와 사회적 해체가 점진적으로 진행된 지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 정치는 자신의 증오정치를 국가권력 장치에 연결시키는 데 골몰하는, 여성 혐오적이고 외국인 혐오적이며 금융 면에서 특권을 쥔 ‘뉴 라이트’에 의해 매우 공공연하게 뒤엎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내부로부터의 변화가 국가주의 정치와 선거 무대가 부과하는 구조적 제한에 의해 효과적으로 봉쇄된다면, 행동의 여지는 어디에 있는가? 민중이 동의하든 안 하든 국가권력을 먼저 쟁취한 다음 공정하고 지속적인 사회변화를 추구한다는 레닌주의적 사고는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다음 체제는 그저 레버를 당기기만 하면 생기는 것이 아닐 것이다.

점점 더 황량해지는 이러한 정치 풍경 안에서도, P2P 동학을 사용하여 커먼즈를 구축하는 친화성 기반의 네트워크들과 공동체들이 행동을 취해왔다. 많은 분야에서 이루어진 소규모 혁신들이 참되고 지속 가능한 자원관리와 토대를 가진 사회적 결속으로 나아가는 길을 닦고 있다. 공동체에 의해 가능해진 이러한 전개과정들은 거버넌스, 작물 재배, 서비스 공급, 과학, 연구 및 개발, 교육, 심지어는 금융과 통화(通貨)에서 어떻게 우리의 삶이 다르게 조직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장소에 기반을 둔 이러한 노력들 다수가 문서로 기록되고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에 복제되고 있다. 끌어다 쓸 지식 커먼즈의 씨앗을 다시 뿌리는 과정인 것이다. 이는 커먼즈를 가능하게 하는, 일명 P2P(peer-to-peer, person-to-person, people-to-people) 테크놀로지를 통해 이루어지며, 이 테크놀로지는 건설적 변화의 추동력이 되고 있다. 이 테크놀로지는 소규모에서 이루어지는 동학이 더 높은 수준의 복잡성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게 하며, 힘을 되찾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 힘으로 사람들은 생산, 공개 회계, 자연적·문화적 공통재의 파수에서 혁신을 창출할 수 있으며, 또한 거버넌스에서도 그럴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다 합해지면 진정으로 아래로부터 구축되는 체계의 기초적 요소가 된다. 이 모든 것이 정말로 합쳐져서 ‘탈자본주의’라고 불릴 수 있는 것으로 전환될 수 있는가? 이는 스스로를 커머너라고 의식하는 사람들이 이 체계들을 알아보고 증진하고 발전시키며 그 문화적인 영향력과 중요하게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증가시킬 때에만 가능하다. 물론 커머너들은 유사한 수단을 사용하여 매우 다른 목적을 추구하는 다른 세력들이 이미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시적인(prefigurative) 접근법들이 합리적인 대안들을 구축하는 핵심적 요소들 가운데 일부이다. 그러나 이 접근법들이 단독으로 발전되지는 않는다. 이 접근법들은 기존의 체계들의 제한 내에서 구축된다.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가 부과하는 종획(([원주] 1776년에서 1825년까지 영국 의회는 주로 정치적으로 연결된 토지소유자들을 위해서 커머너들로부터 공유지를 사유화하는 데 필요한 4000개 이상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레이먼드 윌리엄즈(Raymond Williams)에 의하면 공유지(커먼즈)의 이러한 종획은 영국에서 모든 경작지의 약 25%에 대해 행해졌으며 그 소유권을 소수의 인구에 집중시켰다. 이러한 ‘합법적’ 종획은 또한 수백만 명의 민중을 땅에서 축출했고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말살했으며 산업화, 직업의 전문화, 대규모 생산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경제를 강제적으로 도입했다. 오늘날 우리는 ‘종획’이라는 말을 지적 재산의 사유화, 아프리카 등지에서 일어나는 대대적인 토지강탈, 디지털 콘텐츠를 관리하는 디지털 권리의 부과, 씨앗과 인간 유전자의 특허내기와 같은 끔찍한 행동들을 비판하는 데 사용한다. 종획, 인간관계들을 서비스로 전환시키기, 커먼즈를 상품으로 전환시키기와 같은 근대의 경향은 커먼즈 학자 데이빗 볼리어에 의해서 “우리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비극”이라고 지칭된 바 있다.))을 통해서든 권위적이고 배타적인 증오 정치를 통해서든 사람들이 기대하거나 바라는 ‘정상적인’ 조건은 틀림없이 위축될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영향을 미칠 것인데, 일자리 보장, 연금, 실업, 합리적인 노동시간과 조건, 공정성이 여기에 속한다. 그 결과로 저 생산적인 공동체들의 작동에 필수적인 ‘바꿀 수 있는 여지’가 불가피하게 줄어들 것이다.

서구의 맥락 바깥에서 보자면, 이 바꿀 수 있는 여지는 ‘특권’으로 간주될 수 있다. 시장을 최대화하는 브뤼셀(유럽연합)의 명령 아래에서 그러한 특권은 사라지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2008년에 커튼 뒤의 조종자가 드러났으며, 갑자기 타오른 대항적 정치활동이 2011년에 세인의 주목을 최고로 받는 정점에 도달했다. 2017년에 물음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실용적인 것이 되었다. ‘낡은 세계의 껍데기 안에서, 이 껍데기가 압착되어 닫히기 전에,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구축할 것인가?’

2011년 이후의 항의운동은 우파로부터 일어 오르는 증오의 파도에 충분히 잘, 혹은 빨리 맞서는 일을 정치적으로 잘 해내지 못했다.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한 포퓰리즘적 반발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로의 회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현재 유럽의 정치 풍경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외국인 혐오적 행태들은 능숙한 인터넷 기술 및 소셜 미디어 기술만이 아니라 P2P 전술도 사용하여 그 사회적 기반을 구축했다. 대체로 P2P 전술과 도구들은 더 포용적이고 정당한 세계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 의해 장려되었지 배제하고 ‘타자화’하는 세력에 의해 장려되지는 않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상처에 소금을 뿌린 셈이다.

우리는, 금융세력이 항상 그들의 이익을 지켜줄 극우 혹은 파시스트 노선을 선호하리라는 점을, 그리고 재분배를 추구하는 그 어떤 정치 노선도 인정사정없이 공개적으로 조롱당하거나 아니면 그보다 더 심한 취급을 받으리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30년대의 해로운 정신이 되돌아오면서 지체할 틈이 사라졌다. 지금 인내는 치명적인 전략이 될 것이다. 이제는 설득력 있고 실질적인 정치적 대안들로 집단적인 문화적 상상력을 채우고 신자유주의의 정상화가 죽은 선전임을 폭로할 때이다. 우리를 아연케 하는 광경(브렉시트, 트럼프 등)이 또 하나의 약물중독임을 폭로할 때이다.

바로 그래서 지금은 커먼즈 운동이 더 공개적으로 정치적인 활동성을 띨 때이다. 자기조직된 생산, 돌봄 노동, 생태 파수를 넘어서, 심지어는 윤리적인 생성적(generative) 시장을 넘어서, 더 효과적인 정치적 참여가 들어설 때이다. 복지국가 모델의 정수를 보호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 창출과 공동체에 의해 조직되는 실천들을 촉진하는, 발본적으로 다시 상상된 정치로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커먼즈 지향적 정치 참여의 모델들이 스페인의 자치도시 운동(municipal movements)에 들어있다. 지금부터는 이 운동을 개략할 것이다. 분명히 해둘 것은, ‘정치적’이라는 말이 대의정치만이 아니라 정치적 결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들의 실행 가능한 권리 또한 포함한다는 점이다. 즉 공론장(public sphere, 공공영역)을 포함한다. 지금 새로운 대안들을 구축하려는 노선과 기존의 정치적 채널들을 해킹함으로써 변화를 가능하게 하려는 노선을 분리시키는 이분법은 잘못된 것이다. 두 접근법―예시적 접근법과 제도적 접근법―이 모두 동시에 작동할 수 있다.

전위주의 ―21세기에 우리를 조심시키는 교훈적 이야기

이제 유달리 주목을 받은 한 당의 기원을 되돌아볼 때이다. 이 당은 포용적이고 커먼즈 지향적인 정치적 과정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해주었으나 그 기대에 부응하는 데 결국 실패했다. 그래도 그 초기의 공개집회들에는 커먼즈 정신이 존재했다. 이는 나중에 이루어진 자치도시 당들의 발생을 고찰하면서 유념해야할 요소이다.

2014년 1월 마드리드 자율대학의 일단의 정치학 교수들이 스페인의 국영 방송에서 꽤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이들은 새로운 정당의 형성을 선언했는데, 이는 “거리로 돌아가는 정치, 겪을 것을 다 겪은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말하는 정치”를 요구하는 당이었다.

대표자들의 더 큰 관대함, 더 큰 수평성과 투명성, 공적 미덕과 사회정의라는 공화주의적 미덕들의 부활, 다민족적이고 다문화적인 현실의 인식에 대한 우리의 요구는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우리 자신이 결정을 하고 우리의 문제에 우리가 응답하고자 하는 욕망이 절절해진 지 수십 년이 되었다. (모베르 피차 선언(([옮긴이] 이 선언은 뽀데모스 당의 것이다. ‘모베르 피차’(Mover ficha)는 말 그대로는 장기판의 말을 움직인다는 의미이다.)))

몇 달 후의 유럽 의회 선거에서 이 새 당은 120만 표 이상을 얻어 유럽 의회에서 5개의 의석을 차지한다.

우리는 지금 뽀데모스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당의 궤적은 커먼즈 지향의 정당이 할 수 있는 것―더 정밀하게 말하자면,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알려준다. 이 당의 초기의 활동은 긴급한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실행 가능한 것을 알려주며 민중의 욕구와 욕망을 표현하면서 민중의 희망에 호소하는 데 쓸 수 있는 힘을 보여준다. 뽀데모스의 초기의 성공은 그들의 작업이 구별되면서도 연관되는 두 수준―대중매체와 네트워크 미디어―에서 공히 이루어진 데 기인한다.

TV토론에서 첫 경험을 쌓은 뽀데모스의 가장 유명한 인물들은 (주로 남성들이다) 그들이 ‘라 카스타’(영어로 ‘the cast’라는 말로서 특권계급이라는 조롱을 담고 있다)라고 칭한 해묵은 정치 계급의 주장을 두들겨 팸으로써 사람들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했다.

모든 것이 쇼 비즈니스는 아니었다. 뽀데모스는 15-M 운동의 네크워크화되고 수평적인 정치를 포착할 만큼 충분히 영민했다. 지리적 위치와 관심별로 형성된 어마어마한 수의 모임들(‘시르쿨로스’circulos(([옮긴이] 영어로는 ‘circles’라는 의미이다.))라고 불렀다)이 레디트(Reddit), 루미오(Loomio) 같은 온라인 도구들을 통해 현실화되고 강화되었다.

뽀데모스는 수많은 전술을 통해 많은 유형의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 토템이 되었다. 그 한 유형은 한때 정치적으로 무관심했던 사람들로서, 이들은 뽀데모스의 대표인 빠블로 이글레시아스(Pablo Iglesias)에게서 중산층에 대한 자신들의 경멸을 모아 ‘라 카스타’를 파괴하는 반역의 아바타를 본다. 그 다음 유형은 신자유주의와 긴축정치에 헌신하는 사회노동당(PSOE)(([옮긴이] 텍스트에는 ‘Social Democrat’라고 되어 있으나 원어로는 ‘Partido Socialista Obrero Españo’이고 우리말로 옮기면 ‘스페인사회주의노동자당’이다. 여기서는 조금 줄여서 ‘사회노동당’으로 옮긴다.))에 환멸을 느낀 오래된 좌파들이다. 이와 유사하게, 스페인 공산당의 부산물인 더 좌파적인 정당을 지지했다가 환멸을 느낀 사람들도 있다. 마지막으로 빤하지만 언급할 만한 유형은 15-M과/이나 그 이전의 대안지구화 운동 동안 광장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목소리를 (재)발견한 활동가들이다.

물론 뽀데모스의 이야기가 이 글의 핵심은 아니다. 이 이야기는 시간이 가면 어두워지고 칙칙해진다. 한때 선거에서 높은 인기와 리더십을 맛보았던 뽀데모스의 중앙위원회는 뒤에 쳐진 사람들을 위해 권력을 잡는 전위주의적 ‘선거기계’가 되는 쪽으로 기울었다. 뽀데모스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선거에서 이겨서 침묵하는 대중에게 해방을 가져다주고자 하는 듯이 보였다. 대중이 이렇게 위에서 부과되는 것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관계없이 말이다.

3년 후 그 결과는 명백했다. 사회노동당과 이유가 무엇이든 늘 제1당인 국민당(프랑코의 옹호자들과 브뤼셀에 아첨하는 자들의 소굴)에 뒤쳐진 뽀데모스는 한때 자신들의 주장대로 “두려움으로 하여금 편을 바꾸게” 만드는 데 실패했다.

그러는 사이에 지중해 건너편에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전해져왔다. “‘아니오’라고 말한 작은 나라”의 당인 시리자이다. 이제는 자신들을 권력의 자리에 올려놓은 사회운동들로부터 분리된 이 작은 나라의 정치적 대표자들은 ‘아니오’라고 말한 후에 새로운 게임을 구축하기보다 조작된 게임을 계속하고 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마지막 유형의 주도 아래 2014년과 2015년 사이에 새로운 정치 환경이 형성되었다. 15-M을 거친 활동가들이 한층 성장하여 정치로 진입한 것이다. 이들은 대의정치의 수용자들이 아니라 창조자들이 되고 싶었으며 다른 많은 목소리들을 포용하는 촉진자들로서 행동하고 싶었다. 스페인의 자치도시연합(municipalist coalitions)의 발생이 바로 이 새로운 이야기로서, 피부로 느끼는 변화를 창출하는 성공적인 커먼즈 기반의 정치 전략에 열쇠가 되는 점들이 여기서 이야기된다.

운동의 죽음, 과장되게 선언되다

이 다른 이야기의 기원은 15-M의 표면상의 쇠퇴에 있다. “표면상의”라는 말이 여기서 핵심이다. 가시성에 관해서 말하는 한 우리는 오큐파이 운동을 이 사라지는 과정의 일부로서 인정해야 한다.

2011년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은 도널드 트럼프가 아니라 시위자였다. 이는 뒤로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서 야영을 하며 미디어의 주의를 끌고자 하는 네트워크화된 운동의 정점을 찍었다. 이는 주류 미디어에 걸맞은 배경을 바탕으로 하나의 응집된 인간 형상군을 제시했다. 여기서 우리는 15-M과 오큐파이 운동이 어떻게 해산했는가와 어떻게 해산되었는가를 구분해야 한다.

스페인에서 활동가들은 『손자병법』의 한 대목을 취하여 대규모 점거들을 동네 집회들로 탈중심화하는 식으로 자발적으로 분산시켰다. 미국에서 FBI는 국토안전부, 통합 테러리즘 태스크포스, 민간부문 기관들(특히 은행들), 해당 지역 법집행기관, 몇몇 저명한 시들의 시장들과 연계하여 우선 점거자들 사이로 침투하고 그 다음에 격렬하게 점거를 분쇄했다. 만일 우리가 오큐파이 운동의 의의를 미디어의 높은 주목을 받은 이 광장에서의 몇 달에 국한시킨다면 우리는 이 운동이 “사망한” 것이라기보다는 암살당했음을 알 수 있다.

스페인과 미국 모두에서 미디어는 (마치 지리적 가까움이 네트워크들의 친화적 관계를 유지시키는 유일한 것인 양) 이 운동 및 그와 비슷한 모든 전 세계의 운동들이 사망했다고 서둘러 선언했다. ‘2011년의 올해의 인물에 대해서는 이제 그만!’ 이는 자연사가 아니라 큰 운동을 실종처리 하려는 잔인한 시도였다. 그러나 마크 트웨인의 말을 좀 바꾸어 쓰자면, ‘운동의 죽음에 대한 선언은 크게 과장되었다.’(([옮긴이] 마크 트웨인은 사촌이 아픈 것이 와전되어 자신이 죽은 것으로 보도된 것을 놓고 과장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the report of my death was an exaggeration”))) 그런데 만일 이 운동들이 아직 살아서 숨을 쉬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의 공모와 동의로 이 운동들이 ‘실패’로 낙인찍혔는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각설탕을 생각해보자. 각설탕을 손에 들면, 실팍하고 알아볼 수 있는 모양과 짜임새를 하고 있어서 측정하고 서술하기 쉽다. 이것을 커피 잔에 넣어 저으면 마법이 일어난다. 각설탕은 사라지지만 커피를 한 입 마시면 설탕 맛이 그대로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는가!

이 비유가 15-M/오큐파이/신타그마타(Syntagma) 및 기타 다양한 지역 운동들이 살아서 잘 움직이고 있다는 주장을 간결하게 표현한다. 비록 분산되어 있고 직접적으로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말이다. 보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 운동들의 효과가 쉽게 포착될 것이다. 점거활동들 이후 6년이 채 지나지 않았음을 기억하라. 이는 히피가 여피가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구속력 있는 계약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운동에 관한 이야기이다.

미국에서는 오큐파이가 어떻게 버니 쌘더스의 선거운동(이 또한 단단히 자리를 잡고 있는 기성의 세력에 의해 침식되었다)에 활력을 불어넣었는지를 인식할 수 있으며, 최근에는 <여성의 행진>(Women’s March)에서, 파업들에서 그리고 반(反)트럼프 운동의 일부들에서 그 영향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는 절절한 기억과 몸으로 겪은 산 경험을 가진 활동가들이 정치적으로 조직하는 것을 택했으며, 실제로 승리했다. 여러 지역에서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을.
<계속>

 




어떻게 추출(extractive) 경제에서 생성(generative) 경제로 나아갈 것인가?



 

어떻게 추출(extractive) 경제에서 생성(generative) 경제로 나아갈 것인가?

 

오늘날 우리의 정치경제학에서 답변되지 않은 커다란 질문들 가운데 하나는 “무엇이 가치를 구성하는가?”이다. 전통적인 경제학은 가치란 시장 교환에서 발생하며 가격으로 표현된다고 간주한다. 이는 가치에 관한 매우 단순한, 그리고 조야한 정의이다.

가치가 이런 것이라면, 본질상 무형적이며 사회적이거나 생태적인 그리고 가격이 없는 많은 종류의 가치, 예컨대 육아와 노인부양, 생태계 지킴이 활동, 온라인에서의 피어생산(peer production) 그리고 커머닝(commoning)과 같은 활동의 가치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러한 형태의 가치를 우리의 정치경제학과 문화에서 뚜렷하게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에 착수해야할 긴급한 필요가 있다.

이러한 복잡하지만 긴요한 주제에 뛰어든 두 개의 새로운 보고서가 있다. 첫 번째는 아래에서 논의될 것으로, 「커먼즈 경제에서의 가치: 공개적이며 사회기여분에 기초한 회계의 발전상황」(Value in the Commons Economy: Developments in Open and Contributory Value Accounting)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미셸 보웬스(Michel Bauwens)와 바실리스 니아로스(Vasilis Niaros)에 의해 작성된 이 49쪽짜리 보고서는 디지털 네트워크에서 사회적으로 창조되는 가치에 초점을 맞춘다. 이 보고서는 <하인리히 뵐 재단>(Heinrich Boell Foundation)과 <P2P 재단>(P2P Foundation)에 의해 어제 공동 발행되었다.

가치를 어떻게 새로이 개념화할 것인가에 관한 또 다른 중요한 보고서 ̄이 주제에 관해 3일간 이루어진 <커먼즈전략그룹>(Commons Strategies Group) 워크숍의 결산물 ̄는 며칠 내에 배포되어 이 블로그에 소개될 것이다.

<P2P 재단>의 보고서는, “사회는 (노동과 자본에 의해) 시장 체제에서 생산되는 가치에 기반한 시스템에서” 온라인 커뮤니티에 의해 생성되는 사회적이며 창조적인 가치와 같은 “한층 더 넒은 가치 흐름들을 인정하는 시스템으로 변동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새로운 종류의 가치의 부상, 즉 전형적인 시장 구조의 외부에서 활동하는 커머너들에 의해 생성되는 사용가치의 부상은 우리로 하여금 ‘가격=가치’라는 단순한 등식 너머로 향하도록 강제한다.

미셸 보웬스와 사회학자 아담 아르비드쏜(Adam Arvidsson)은 이것을 우리 시대의 “가치 위기(value crisis)”라고 부른다. 오픈 플랫폼에서 이루어지는 커먼즈에 기초한 피어생산은 사람들이 새로운 형태의 가치를 창조할 수 있도록 한다. 예컨대 오프소스 소프트웨어, 위키(wiki)들, SNS를 통한 공유, 그리고 창조적 협업 등등을 보라.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가치를 포획하고 그것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은 이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가운데 오직 소수뿐이다. 페이스북, 구글, 트위터와 같은 기업들은 그들의 사유화된 플랫폼을 사용하여 공유의 조건을 엄격히 통제하고, 개인에 관한 대량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판매하며, 이러한 가치를 원천적으로 생산한 커머너들에게는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는다.

이는 매우 추출적이며 (재)생성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오픈 플랫폼을 커먼즈를 지원하고 재생성적인 사회적 힘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변형할 수 있을까?

<P2P 재단>의 이 보고서는, “공유 경제”와 같은 기만적인 용어와 디지털 협업의 구조적 현실에 관한 각종 신비화에 의해 종종 불명료하게 되는 주제에 떨어진 반가운 한 방울의 맑은 물과 같다.

보웬스와 니아로스의 보고서는 우리가 겪고 있는 “가치 위기”의 이론적 성격을 분석하는 장으로 시작하여, <엔스파이럴 네트워크>(Enspiral network), <센소리카>(Sensorica), <백피드>(Backfeed)에 의해 개척된 대안적인 가치체제에 관한 세 개의 강력한 사례연구로 나아간다. 보고서의 결론은 경제·정치적 기반구조의 변화를 위한 일련의 정책 제안으로 끝난다.

 

가치 위기

 

보웬스와 니아로스에 따르면 “가치 위기”의 진짜 뿌리는 “현대 자본주의의 가치화 활동(value-practices)이 더 이상 가치가 무엇인지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주지하듯이 주식 시장에서의 가치평가를 통해서는 어떤 기업이 얼마큼의 신뢰할만한 (금융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를 결정할 수 없다. 너무나 많은 가치가 사회적인 무형자산, 예컨대 소비자의 호감도, 브랜드 평판, 사람들 사이의 공유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증권 애널리스트들은 공장건물, 설비 및 사무실 집기 등의 전매 가치를 합산하려고 할 수 있겠지만, 기업을 가치 있게 만드는 모든 사회적 믿음들과 활동들에 각각의 가치를 할당할 수 있는 믿을만하고 합의된 방법은 없다.

기분좋은 아이러니가 아닌가! 현대 자본주의는 소프트웨어 코드, 개인에 관한 데이터, 사용자가 생성한 정보, 비디오 등등 인류가 이제껏 본 적 없는 공유 가능한 문화적 풍요를 자유롭게 전유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그러나 투자자들은 이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고 상품화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풍부한 사회적 가치를 인위적으로 희소하게 그리고 따라서 판매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커머너들이 자신이 창조한 사용가치를 지키고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 사용가치를 기업들이 추출적인 시장의 생산 및 소비의 회로로 끌어들이고자 공격적으로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로를 “추출적”이라 하는 것은 회사들이 이 가치를 공짜로 쓰길 원하며 사회 공동체에 보상하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대한 추출의 힘(많은 자본, 지적재산권법, 서비스 제공 계약 등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대 기업들은 안정적인 이윤의 흐름을 창출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가치 주권(Value Sovereignty)을 향하여

 

<P2P 재단> 보고서의 초점은 어떻게 추출적인 디지털 경제에서 재생성적인(regenerative) 디지털 경제로 이동할 것인가에 있다. 따라서 초점은 세 개의 디지털 커뮤니티가 어떻게 자본주의 시장의 압력을 넘어서 그들의 “가치화 활동”을 지키고 “가치 주권”을 만들어내려 노력하고 있는지에 놓인다. 이 커뮤니티들은 낡은 경제에서 새로운 경제로의 가치 흐름을 생성해냄으로써 그리고 사회적 기여분을 올바르게 존중하는 새로운 회계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을 통해 “역 포섭(reverse co-optation)”을 이루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한 프로젝트는 <엔스파이럴>으로서 이는 대부분 뉴질랜드에 기반을 둔 기업가들 및 다른 독립체들로 구성된 고도로 참여적이고 사회적 사명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체이다. 보웬스와 니아로스에 따르면 “<엔스파이럴>은 자신이 커먼즈의 생산과 공통선(common good)에의 지향 둘 모두에 헌신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열린 협동조합’으로 부른다”. 그것이 사용하는 혁신적인 방식 가운데 하나는 “수익 상한선 제한제(capped returns)”인데 이는 <엔스파이럴> 기반시설의 투자자가 수익으로 받을 수 있는 양에 한계를 두는 것이다.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회사가 주식을 발행하면 거기에는 그에 동반되는, 미리 협의된 가격에 그 주식을 재매수할 것을 요구하는 콜옵션이 걸린다. 일단 그 회사가 이 주식들 모두를 재매수하고 나면, 모든 미래의 이윤을 자신의 사회적 사명에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통해서, 외부적이고 어쩌면 추출적이될 수도 있었을 자본은 ‘포섭되고(subsumed)’ 훈육되어 ‘협력적 자본’이 된다.”

<센소리카>는 커먼즈와 시장형태를 결합하는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는 열린 협동 네트워크이다. 그것은 구성원들이 시장기반 프로젝트에 기여한 정도를 추적하기 위한 정교한 “회계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이 시스템은 수입을 각각의 구성원이 한 역할에 비례하여 할당하는 데 사용된다. <센소리카>는 새로운 종류의 (시장에 의해 추동되는) 포섭(co-optation)의 사례가 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타입의 (사회적 사명에 기초한) 커먼즈의 사례가 될 것인가? 아마도 양자가 혼합된 형태일 것이다.

세 번째 사례 연구는 탈중심적인 생산의 기반구조로 블록체인 원장(ledger)에 의지하는 <백피드>를 향한다. <백피드>는 커먼즈보다는, 함께 일해 시장에 판매하는 개인들의 집단에 가깝다. 그러나 그 협력적인 조직구조는 그것을 “가치 주권”을 가진 커뮤니티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해줄 잠재력을 갖고 있다. 다른 많은 조직들 또한 블록체인을 통해, 시장에서 팔기 위해서건 내부의 사용가치를 위해서건, 커뮤니티의 자원을 협력적으로 통제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정책 제안

 

이 <P2P재단>의 보고서의 결론은 이러한 사례 연구에서 묘사된 종류의 가치 체제(value regimes)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될 일련의 정책을 제안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생계 수단을 창조하기 위한 열린 협동조합(open cooperatives)을 제안하고 자본주의 기업의 가치 포획(value capture)에 맞서며 생성적 연합체들 사이에 연대를 키워내기 위한 “호혜에 기반한 면허제(reciprocity-based licensing)”의 사용을 제안한다. 이 보고서는 또한 오픈 소스 “순환 경제”의 촉진에 도움이 될, 열린 공급망과 공통적 네트워크 자원에 관한 계획수립을 요청한다. (“디자인은 전지구적으로, 생산은 지역적으로”)

보웬스와 니아로스는 낡은 경제에 대항할 수 있는 힘과 자율적 협력생산 공동체에 대한 지지를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정치적 협력을 그린다. 그들은, 새로운 형태의 초국적 협력은 말할 것도 없고, 지역적 수준의 “커먼즈 회의소”와 “커먼즈 지향적 기업가 연합” 또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정치적 좌파가 케인즈 경제학 모델과 신자유주의 위기의 관리라는 틀을 넘어서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보웬스와 니아로스는 교전 수칙을 변형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커먼즈에 기반한 피어생산의 새로운 모델을 가리키고 있다. ♣

 




가치창출의 새로운 생태계 (그림 설명)



 




커먼즈와 P2P (그림설명)



 




모든 것이 공통적이다(Omnia Sunt Communia)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마씨모 데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의 책 Omnia Sunt Communia : On the Commons and the Transformation to Postcapitalism의 서설(Introduction)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서설 모든 것이 공통적이다(Omnia Sunt Communia)

 

우리 시대

우리 시대는 파괴적인 위기들이 결합하여 기존의 많은 슬픔에 새로운 슬픔을 더하는 시대이다. 개인들로서 우리는 엄청난 힘들이 사물을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안다. 다른 한편, 그 힘들에 대한 우리의 의존과 우리의 불안정한 상태에 정비례하여 두려움과 걱정이 형성되며 이는 종종 외국인혐오와 인종주의로 투사된다. 이런 상황에서 따는 자가 있고 잃는 자가 있다. 기후변화와 관련해서도 소수는 이윤을 얻어내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재)생산하는 방식에 발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고통을 받을 것이다.

침묵과 환상이 짝으로 진보라 불린다. 저들은 놀랄 필요가 없다고 한다. 언제고 엔지니어들을 고용하여 거대한 진공청소기를 만들어서 잉여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여 옛 유전에 가두고 큰 벽을 지어서 부유한 도시들을 방어하면 된다고 한다. 물론 저들은 안전을 보장받을 것이다. 후쿠시마의 핵발전소가 처음에는 안전하다고 공언되었듯이. 어떤 과학자들은 나쁜 소식들을 전해서 소셜 네트워크들에 증폭시키고, 또 다른 과학자들은 우리가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불리는 시기로 진입했다고 하면서 모든 문제의 원흉으로 인간을 비난한다. 사실 우리 시기는 자본세(capitalocene)라고 불려야 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계(생물다양성에서 어족자원량까지, 숲에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기후 및 수자원까지)를 심히 파괴하는 것은 자본이고 많은 인간들은 투쟁과 대안적 실천을 통해서 지구를 구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발전의 옹호자들은 바이오테크놀로지 연구개발에 적절한 규모의 투자를 하면 지구상의 생명이 공학적으로 재생될 수 있다는 우화를 말한다. 자본의 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환경 위기는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다. 파괴를 통해 새로운 것을 일정한 수익을 올리며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한 지속 가능성 접근법’(weak sustainability approach)이 만든 신화에서는 인간이 만든 자본이 자연 자본을 수익을 남기면서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 슘페터가 이미 자본주의를 ‘창조적 파괴’라고 정의한 바 있으며, 이제 자본은 새 생명을, 축적의 욕구와 더 양립 가능한 인공적 생명을 실험실에서 창조할 계획으로 생명을 파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또 다른 위기 요소는 2007-8년의 위기와 그 뒤를 이은 영속적인 긴축이 미친 영향이다. 복지, 임금이 대폭 삭감되고 불평등이 크게 심화되었으며 중산층이 내파되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토지강탈과 같은 새로운 종획의 파도가 일었으며 신자유주의 정부들이 전지구적 금융체계를 붕괴로부터 막아주었다. 은행들은 이런 혜택에 대해 보답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정부들이 은행에 진 빚을 상환할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긴축이 영속적인 체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책을, 전쟁이 강타한 지역들로부터의 대대적인 엑서더스가 일어나는 와중에 썼다. 시리아의 갈등, 가자에서의 반복된 민간인 폭격, 종종 관으로 바뀌고 마는 지중해의 난민보트들. 아프리카와 중동의 이주자들이 안전과 희망을 찾아 이 보트를 타고 여행을 시도하지만, 많은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유치장, 외국인혐오, 가장 낮은 임금이다. 이주자들과 난민들의 흐름을 규제하기 위해서, 혹은 아예 못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유럽에 벽들이 세워졌다. 이들은 과거는 파괴되었고 미래는 없으며 현재는 불안전한 실존의 변방에 방치되어 있다. 사회적 재생산의 어느 차원을 보든―삶의 수단(일용노동계약, 낮은 임금, 온갖 형태의 부채), 식품, 주거조건 및 주거권, 점증하는 인종주의와 외국인혐오―불안정성이 만연해있다. 신자유주의적 계획은 우리처럼 사회적 관심사들과 사회적 재생산을 집단적 관여의 중심으로 삼는 사람들을 위한 계획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적 플랜 아래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을 경쟁을 유지하는 데 바쳐야 한다. 자원은 점점 더 제한되고 목적은 부패한 상황에서 말이다. 신자유주의적 계획은 삶의 모든 측면의 불안정의 증가에 바쳐진다. 자본에게 이윤을 남겨주면서.

이 위기 현상들의 심화는 지배세력과 그 제도들의 적어도 일부의 관심사 가운데 하나가 된다. 현재의 불안정한 조건과 다면적인 위기들로부터 빠져나갈 출구를 찾을 가능성의 부재는 그들에게 ‘리스크 평가’의 문제가 된다. 이는 조건들이 이윤체계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제시하기 위해서 군사나 금융 기관들에서 사용하는 특수한 회계시스템이다. 예를 들어 미국 국방부는 기후변화가 가져올 리스크를 ‘긴급하고 점증하는’ 것으로 본다. 미 국방부는 기후 관련 안보 리스크에 이주와 전쟁 같은 사회적 귀결도 포함됨을 인식하고 있다.

기후변화를 ‘현존하는 안보 위협’이자 ‘엄밀하게 보아서 장기적이지 않은 안보 리스크’로 인식하는 미국의 군사기관들은 금융 및 증권 붕괴도 원인과 관계없이 고려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기관들은 전지구적 봉기와 급진화의 위협에도 맞추어진 새로운 감시 및 안보 시스템을 준비하고 있다. 2007년과 2013년 사이에 미국 국가안보국(NSA)은 이메일, 채팅, 비디오, 사진, 저장된 데이터, VoIP 통신, 파일전송, 화상회의, 로그인기록,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들에의 접근권을 얻었다. NSA는 또한 표적으로 설정된 통신에 서비스 제공자에게 요청하지 않고 직접 접근할 수 있다. 이럴게 얻을 수 있는 방대한 양의 자료를 가지고, 과거의 그리고 새로 출현하는 사회운동들과 급진화의 파도들이 ‘미네르바 이니셔티브’―국방부의 한 부서가 후원하는 사회과학 연구프로그램으로서 2008년에 시작되었으며 ‘미국 국가안보정책에 전략적 중요성을 가진 지역들에 초점을 둔’다―와 같은 수백만 달러의 프로젝트들에서 연구되고 있다. 여기에 남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 서아프리카, 중앙유라시아에서의 사회적 동원에 관한 연구가 포함되었다. 국방부와 코넬 대학이 행하는 한 프로젝트는 예를 들어 2011년 이집트 혁명, 2011년 러시아 듀마 선거, 2012년 나이제리아 연료보조금 위기, 2013년 터키의 가지파크(Gazi Park) 시위의 ‘디지털 흔적들’을 연구함으로써 사회적 접촉의 ‘임계 질량(임계점)을 규정하기를 희망한다. 국방부와 여러 대학들이 행하는 또 다른 프로젝트에서는 ’누가 테러리스트가 되지 않으며 왜 그런가?‘라는 문제를 다룬다. 또 다른 한 프로젝트는 급진적 대의들에 공감하는 NGO 회원들의 개인이력을 연구하여 ‘급진화의 사회적 생태학’에 초점을 맞추고 범죄학의 지식과 방법을 이용하여 급진화를 촉진하는 장소들과 과정들을 연구한다.

위기들이 특정 종류의 동원 및 사회적 갈등과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conomist Intelligence Unit)에 따르면 2014년에 150개국 가운데 65개국이 사회 불안의 리스크가 높음 혹은 매우 높음이었다. 이는 5년 전의 보고와 비교하면 높음의 범주에 19개국이 증가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된 사회운동의 효과보다 흥미로운 것은 이에 대한 미디어의 발언의 대부분의 벤처 자본가 심층에 깔린 공포였다. 벤처 자본가 해노어(Nick Hanauer)는 자신의 1% 계급에게 ‘쇠스랑들이 오고 있다’고, ‘혁명이란 조금씩 오다가 그 다음에는 갑자기 온다’고 경고한다. 런던의 더 텔레그래프(The Telegraph)는 한 ‘신용평가사가 미래의 세금인상과 지출 삭감이 여러 나라들에서 사회불안을 점화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다’고 보도한다. 사회불안은 기성 지배세력에게는 정말로 종말을 맞을 가능성과 같다. 그래서 그것을 억압할 준비를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미시건의 경찰력이 미국에서 첫째로 군대처럼 장비를 갖춘 최초의 사레인 한편, 2014년 8월 미주리의 퍼거슨(Ferguson)에서는 중무장한 경찰과 무장트럭이 마이클 브라운의 총격 사건으로 시위대와 충돌했다.

이렇게 의심을 받고 있는 민중의 에너지가 지배세력에 새로운 공간을 열고 새로운 제도와 새로운 사회적 규범 그리고 새로운 가치의 체제를 수립할 것인가? 아니면 지배세력이 새로운 이 에너지를 제한하고 흡수할 충분한 수단을 만들어 내고 있는가? 지배세력 혹은 오늘날 부르는 식으로 하자면 전지구의 1%―구학파의 용어인 ‘부르주아지’를 회계기호로 대체한 것이다―는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며 그 힘은 위기의 시기에 더욱 커지고 있다. 옥스팜(2016)에 따르면 세계에서 최고 부자 62명이 세계 인구의 아래쪽 절반(35억 명)이 소유한 부의 총량과 동일한 양의 부를 소유하고 있다. 이는 388명의 최고 부자가 필요했던 2010년 이래 전지구의 불평등이 놀라운 속도로 증가했음을 말해준다. 부의 이러한 집중은 신자유주의 국가의 ‘면허받은 절도’―종획, 강탈, 약탈, 금융을 통한 추출, 조세회피―를 통해 일어났다. 1%의 손에 집중된 부의 규모는 이들이 99%의 분열을 강화하고 새로운 분열을 창출하면서 자신들을 오랫동안 보호할 금융자원을 가동하는 엄청난 능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들 대부분에게 진정한 문제는 축적과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이 부패한 체제, 생태문제, 생물다양성,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자원의 양과 질, 노동의 조건에 관심이 거의 없는 이 체제에 우리가 물질적으로 의존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너무 긴 신자유주의 시기의 현재적 국면에 상응하는 우리 시대다. 이것이 재분배와 공생공락(共生共樂)을 ‘불로소득’으로 범죄시함으로써 가장 파괴적인 자본 세력을 발전시키려는 자본주의의 체제의 플랜A이다. 이보다 훨씬 더 나쁠 수도 있었다. 투쟁이 많은 지역으로 확산되지 않았더라면, 플랜A는 계속 전진하여 민중의 남은 권리를 폐지하고, 자본의 경비를 삭감하기 위해 환경 관련 규제들을 더 말소하며, 점점 더 디스토피아적이 되는 억압수단을 개발하기 위해 감시를 강화했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아래쪽에 속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투쟁한다는 사실에 기뻐하라. 그들은 그럼으로써 신자유주의의 계획에 마모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점증하는 사회운동이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를 가져올 수 있을까, 아니면 더욱 밀어붙여서 탈자본주의로 나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탱크들, 최루가스, 경찰봉에 의해 진압당할 가능성이 더 큰 것인가? 물론 자본주의 체제의 플랜B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지배 세력의 일부가 존재한다. 이들은 기후변화를 다루는 데 더 강한 정책을 채택하는 것과 함께 재분배의 전도, 빈부격차 해소, 은행 및 금융부문 규제 회복 및 강화를 제안한다. 기본소득 같은 효과적인 재분배 정책이 대안이 될 것이지만, 자본이 발생시킨 문제를 자본가적 관점에서 다루기에는 이것으로써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플랜B는 경제적 위기, (세계 대전과 같은) 파괴와 대학살이 선행하여 자본과 임금을 대대적으로 평가절하하지 않고서는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재투자를 하기에 충분히 높은 이윤율이 허용되기 때문이다. (지금 역사상 가장 낮다.)

플랜B에 대해 기억해야 할 다른 것이 있다. 지난 번(1945-1970년대)에는 사회적 임금의 증가가 생산성의 증가를 동반했다. 이는 생산에 대한 통제를 노동자들이 관리자들에게 맡김으로써 일어났다. 이른바 “생산성 딜”(productivity deals)이다. 이것이 성장하는 경제 내에서 동일한 몫의 임금/이윤을 자본가와 노동자가 나누어 갖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예전의 뉴딜은 또한 특정의 젠더와 인종을 배제하여 노동에 임금과 비임금(예를 들어 여성의 가사노동)의 분할을 산출함으로서만 일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플랜B도 배제하고 위계를 재생산하고, 훈육과 통제를 촉진하고 보안을 심화할 필요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플랜B가 자본을 위해 작동하기 위해서는 딜이 사회적 임금만이 아니라 수익성에도 긍정적 효과를 미쳐야 한다. 사회적 임금율의 성장(시간 당 임금)과 생산성의 성장(시간 당 산출) 사이에 상응관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시간 당 이윤이 같은 수준으로 중가하고 전반적인 임금/이윤 비율이 다소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이 보장될 것이다.

오늘날 딜은 이런 것일 수 있다. 모두에게 기본소득이 주어지고 일부 핵심 서비스와 권리(건강, 교육 등)가 부여된다. 그 대신에 노동의 완전한 쌍방향 유연성이 들어선다. 만일 자본과의 이런 딜이 강력한 경제성장(자본의 궁극적 욕망)을 허용할지라도, 엄청난 환경측면의 귀결들―생물다양성에서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에 이르는―을 다루는 일이 남아있다. 자본축적이 최우선사항인 체제를 탄소를 비롯한 자원추출을 대폭 줄이고 생물다양성을 증가시키면서 유지한다는 것은 원을 네모나게 만드는 것과 같아서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어려운 일이다. 전지구적인 중산층의 증가라는 경제인(homo oeconomicus)의 꿈은 우리에게는 집단적 악몽이다.

자본과 국가가 우리의 시간과 공통의 부를 그토록 많이 장악하고 있는 사회의 맥락 내에서 대안적 체계 구축의 문제를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플랜C

자본주의적 생산과 권위주의적이며 부패한 국가시스템으로부터 체제변화(system change)를 통해 퇴장하기 위한 집단적 경로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한가?

나(마씨모 데 안젤리스)는 나의 책 The Beginning of History(2007)에서부터 커먼즈자본의 가치실천(value practices)에 대한 대안이며 커먼즈 네트워크들에 의해 서로 연결된 가치실천―의 관점에서 대안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대체로 커먼즈는 다수의 사람들(공동체)이 자원을 공유하고 다스리는 것, 그들의 관계 및 커머닝을 통한 (재)생산 과정을 의미한다. 비록 커먼즈는 인류의 역사에 깊이 새겨진 제도로서, 얼핏 보기에는 사회운동과는 구분되지만, 지난 몇 년 동안에 우리는 사회운동이 커먼즈와 하나로 이어지는 몇몇 경우들을 목격했다. 이는 거대한 잠재력을 제공하는 ‘커먼즈 전회’(a commons turn)이다. 우리는 몇몇 사회운동들이 커먼즈의 방어(예를 들어 2013년 5월 이스탄불의 게지 파크Gezi Park 시위), 그리스 위기와 대면할 새로운 커먼즈의 창출(위기는 2010년에 시작되었으며 연대solidarity는 그리스에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커먼즈를 투쟁의 조직모델로 사용하기(2011년 5월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인디그나도스, 2011년 9월에 시작된 미국의 오큐파이 운동···)와 직접 연결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는 몇 개의 사례들만 예로 든 것이다. 정치적 원리로서의 커먼즈는 바야흐로 확대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물 사유화에 맞선 투쟁에서 도시행정의 원칙들(바르셀로나, 나폴리)까지, 오래된 성당의 점거(로마의 테아트로 발레)에서 세계 전역의 다국적기업들에 의한 토지와 어장의 종획에 맞선 풀뿌리 운동 및 투쟁, 그리고 동남 멕시코의 사빠띠스따가 장악한 지역에서의 토착민 자치까지.

이 운동들이 가진 일반적 의미는?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이 ‘액체적 근대’(liquid modernity)라고 부른 것의 내부에 존재하는 심층적으로 재구성적인 어떤 것, 아나키즘, 코뮤니즘, 사회주의 같은 고전적 이데올로기들로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어떤 것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시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내가 보기에는 사회 혁명이 진행 중인데, 이는 만일 널리 인식되어 더 많은 에너지를 사람들로부터 끌어올 수 있다면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향한 변형과정에 착수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줄 수 있다. 나의 혁명관은, 사회혁명(즉 대안적 생산양식의 성장)을 정치적 혁명을 위한 물질적 조건으로서 보는 맑스의 혁명관과 상응한다. “우리 세계의 발본적 변형이란, 사람들이 모여서 자본주의의 논리에 대한 대안을 발전시키고 이 대안들을 증식시키고 서로 연결하는 공동체들을 이루는 것을 함축한다. 나는 커먼즈가 그러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커먼즈는 단지 공동으로 유지하는 자원이나 공통의 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통의 부, 커머너들의 공동체, 커머닝―이는 지속적인 상호작용들, 의사결정의 국면들, 그리고 공통적인 노동과정들을 합쳐서 부른 것이다―이라는 요소들로 구성되는 사회 체계이다. 다른 사회 체계들처럼 커먼즈도 힘의 장소이며, 이 책에서 나의 주장은, 이 사회적 힘들은 만일 그것이 발전되고 확대되어 커먼즈 생태환경(commons ecologies)이라는 더 큰 영역들의 창출로 나아간다면 자본주의적 과정과 국가의 신자유주의 정책들에 대한 의미 있는 도전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커먼즈는 어디에 있는가? 많은 커먼즈들이 이미 사회에 잠재해 있으며, 우리의 삶과 지식을 재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도움과 자원의 많은 부분을 공급하는 수로 역할을 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의 커먼즈 안에 태어난다. 비록 그것이 부모들 혹은 보호자들, 형제들, 친구들과의 상호작용만으로 구성된 것일지라도 그렇다. 사회화 과정이 시작되면서 우리는 사회적 협동을 통해 주체성을 정신과 육체 모두에서 재생산한다. 사회적 협동을 통해 우리는 이윤에 종속된 삶에 대해 진정한 대안이 되는 가치실천들과 측정들을 발전시킬 필요를 만나게 된다. 우정, 공생공락, 상호부조, 도움, 돌봄, 투쟁 같은 가치실천들이 커먼즈 안에서 발전된다. 이러한 사회적 협동의 네트워크들이 근린연합들, 협동조합들, 사회센터들, 식품 네트워크들, 사회운동들에서 체계적 패턴으로 발전하자마자 이 커먼즈 기반의 사회협동 형태들은 그 경계를 확대하고 재형성하며 그 사회적 구성을 갱신하고 수평성의 다문화를 발전시키며 공식적인 과학(official science)―특히 산업적 농업이나 핵공학이 증진하는 공식적 과학―을 무력화시키고 커먼즈 생태환경을 발생시킬 잠재력을 가진다. 커먼즈 생태환경이란 다수의 협동하는 커먼즈들이 지금은 예측할 수 없는 제도들을 갖추고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배열되는 것을 말한다. 이렇듯 커먼즈는 경험적 발견이나 커먼즈 이론의 해석으로 축소될 수 없다. 커먼즈는 사회적으로 정당한 체제에 대한 그 어떤 낭만적이거나 급진적인 모델에도 맞지 않는다. 커먼즈가 자본 및 국가 체계들을 포함한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제한을 만나게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커먼즈는 고유한 정치를 개발하여 이러한 제한을 밀어내려고 해야 한다. 그것이 씨앗공유금지법과의 투쟁이든 기본소득 권리이든, 고속철로나 도로나 댐이 특정 영토 내에 건설되지 못하게 결정할 공동체들의 권리이든 말이다.

커먼즈의 더 나아간 발전과 상호교직은 자본 및 하향식 국가 논리와의 관계에서 커먼즈의 자율을 증폭시킴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불가피한 자본의 위기와 기후재난에 대응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광범한 커먼즈 활동이 있는데,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삶을 재생산하는 것을 직접적인 목적으로 하는 활동들이다. 이 재생산 커먼즈들은 이미 세계 전역에서 많은 커머너들에 의해서 건강한 식품, 주택, 물, 사회적 돌봄 및 교육에 접근하려느 ㄴ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창발적으로 수립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욕구 충족 이외에도 이런 커먼즈들의 발전은 여러 영역에서의 새로운 커먼즈 르네상스의 물적 토대를 형성하리라는 점에서 결정적인 전략적 자산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 새로운 공동체들, 새로운 문화, 새로운 복지수립방법들, 안전과 신뢰를 주기 때문만이 아니라 금융 시장의 변덕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특히 자본주의적 시장의 착취를 거부할 힘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안적 재생산 수단을 가질수록 자본의 논리를 거부할 힘이 커진다.

이 책에서 나는 커먼즈를 생태계들만이 아니라 국가나 자본 같은 사회 체계들도 작동하는 환경 안에서 작동하는 다양한 사회체계들로 보는 접근법을 다듬어낸다. 나는 커먼즈 이론을 비판적으로 논의하고 유용한 요소들 몇 개를 추출한다. 나는 커먼즈의 체계로서의 특징들, 더 큰 규모로 체계들을 형성할 상호작용, 커먼즈 생태환경의 발전, 커먼즈를 다루는 자본의 전략, 사회운동과의 관계, 커먼즈가 우리를 탈자본주의적 생산방식으로 데려갈 헤게모니적 힘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한다.

이 책의 제목 ‘Omnia Sunt Communia’(‘모든 것을 공동으로’)는 독일의 개신교 개혁자인 뮌쩌(Thomas Müntzer)의 전투표어일 수 있다. 또한 뮌쩌를 잡아 고문한 사람들이 얻어낸 ‘고백’에서 밝힌 그의 목적―‘모든 것을 공동으로 관리하며 분배는 각자의 욕구에 따라 이루어진다’(all things are to be held in common and distribution should be to each according to his need)―일 수도 있다.[이는 뮌쩌의 실제 생각이라기보다는 그를 잡은 자들이 두려워한 바를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 정리자] 여기에 ‘각자는 그 능력에 따라’를 추가하면 고타 강령에서 맑스가 말한 근대 코뮤니즘의 정의가 된다 : ‘각자는 그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그 욕구에 따라.’ 그러나 이 책은 코뮤니즘 교리에 관한 책이 아니다. 코뮤니즘의 지평을 밝힐 뿐이다. ‘Omnia Sunt Communia’라는 지평이다. 그리고 여정에 오를 준비가 가장 잘 되어있는 사회세력을 논의할 뿐이다. 민중도 아니고 개인적 주체들의 다중도 아니라 커먼즈의 다양한 다중이며, 이들 내에서 개인적 주체들은 커먼즈로 사회화된 주체들 즉 커머너들이다.

 

나는 커머너다

나는 커머너이며 따라서 나의 작업을 공통의 대의에의 기여로 본다. 공생공락하는 집단이 씨를 뿌리고 추수를 하는 것이 삶의 공통의 대의에의 기여이듯이 말이다. 우리가 작물을 키우는 기술과 행동에 이르는 집단적 결정을 논의할 수 있듯이, 나의 작업은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 너머로의 사회적·경제적 변형에 대한 논의이다. 그 탈자본주의 사회의 형태는 지금 말할 수 없다. 이는 힘의 장들(power fields)에서의 수십억 개의 상호작용들의 결과일 것이고, 이것을 우리가 예측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힘의 장들을 구축하고 가장 적절한 길을 선택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그 길은커먼즈를 강화하고 국가와 자본으로부터의 커먼즈의 자율을 극대화하는 한편필요하면 국가 및 자본과 상호작용하고 심지어는 그 변형을 시도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나는 에밀리아 아펜니노 산맥의 내가 속한 단체에 고대 품종의 밀을 생산하고 그 밀로 빵을 만들 지역공급망을 구축하는 계획을 제시했다. 기계화된 다국적 산업적 농업에서 재빨리 빵, 파스타, 피자 반죽, 비스킷 등으로 변형하기에 필요한 높은 글루텐 수준을 가진 현대의 밀이 우리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한 논의가 1년 동안 이루어졌다. 우리는 현대의 제분방식은 밀겨를 버리고 밀의 가장 영양가 있는 부분인 밀눈을 파괴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한 우리는 산업적 방식으로 우리에게 공급되는 밀가루에 기반을 둔 생산물을 소비하는 것은 거의 씹는 껌을 먹는 것과 같으며, 배의 질병, 알레르기, 글루텐 민감성을 증가시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역의 대안을 창출하는 계획이 논의되었고 비판되었고 결국에는 지지되었다. 우리가 그 계획을 버리기로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말이다. 나는 이 책에서의 나의 기여를 같은 방식으로 본다. 이 책의 내용은 계획이라고 말할 만큼 상세한 것은 아니다. 사회 변형의 복잡성은 밀을 생산하는 것보다 훨씬 더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복잡성을 높은 추상 수준에서 다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초점을 두는 대안들의 경로와 자본주의적 생산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동학에 대한 나의 생각은 나의 작은 단체의 밀 복원 계획에 내재하는 깊은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예의 계획은 미래의 우연한 일들을 고려하지 않는다. 강력한 폭풍, 야생 곰, 혹은 배고픈 사슴이 작물을 망칠 수 있다. 이는 더 심화되거나 확대된 억압과 규제가 더 많은 커먼즈를 지하로 밀어 넣을 수 있는 것과 같다. 극심한 기후변화와 전쟁은 작물만이 아니라 커먼즈를 유지하는 사회적 관계들도 파괴할 수 있다. 정치적 억압은 커먼즈로부터의 피난자들을 증가시킬 수 있으며, 이는 시간이 걸려서야 새로운 형태로 재구축될 수 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시나리오 구축에 관여하지는 않는다. 이 책에서 내가 다루는 것은 오직 탈자본주의를 향한 커먼즈 기반의 사회변형의 토대를 이룰 원칙들이다.

더욱이 이 책의 독자는 이탈리아의 나의 동료들보다 수가 훨씬 많을 것이며, 현재의 작업을 새로운 방향으로 확대할 통찰들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 책을 유토피아를 그리지 않는 유토피안, 조건들 및 힘의 장에의 관심을 버리지 않는 관념론자, 어려운 일과 억압을 낭만화하지 않으며 옛것을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려 하지 않고 다만 옛 것이 새로운 용어로 우리에게 말하도록 할 뿐인 낭만주의자의 저작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나의 태도는 일상생활에 초점을 둘 뿐만 아니라 광범한 사회의 회로들 내에서 커먼즈 대안들의 경계를 확대하는 데도 집중하는 유형의 커머너들의 태도이다. 이 책을 추류판하는 순간부터 나는 이 책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우리의 공통의 부의 일부로서 간주해달라고 호소할 따름이다. 모든 것이 공통적인 세상을 향하는 우리의 집단적임 움직임에서 그저 작은 하나의 기여로서.

 

각 장의 내용

모든 것이 공통적인 지평을 말하는 데는 예언도 신화도 없다. 움직이는 원리만이, 사회적 힘을 특수한 맥락에 작용할 때의 메타방향성에 대한 인식만이 존재한다. 다른 한편, 이 운동의 주체들은 개별적 주체들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체계적인 주체들systemic subjects이며, 개별 주체는 이 체계적 주체들 내에서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이미 공통적인 삶에 사회화되어 있다.

 

1장

바로 이 때문에 나의 1장 서두는 맑스의 『자본론』의 1장 서두와 공명한다. 다만 아래로부터 읽은 것이다. 맑스에게 상품이 자본주의적 부의 기본적 형태라면, 나에게는 공통재(common goods)가 탈자본주의 세계의 부의 기본적 형태이다. 그런데 상품이 교환가치와 사용가치로 이루어진 모순적 형태이듯이, 나도 공통재를 이중적 형태를 띠는 것으로, 체계로서의 커먼즈라는 논의에 열린 것으로 설정한다. 그리하여 나는 다른 현재의 커먼즈 이해들과는 대조되는 견해를 제시한다.

나는 계속해서 1장에서 공통재에 대한 고전적 및 현대적 이해들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며 그것들이 가진 의미를 사회 체계로서의 커먼즈라는 개념 내에서 다룬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나는 커먼즈(commons)와 공통재(common goods, commonwealth)를 구분한다는 점이다. 두 개념을 융합하는 입장이 널리 퍼져있는데, 나는 확연히 이로부터 거리를 둔다. 공통재는 커먼즈의 한 요소일 뿐이며, 커먼즈는 공통재에 더하여 커머너들과 커머닝도 포함하는 특수한 사회 체계들이다. 또한 나에게는 ‘commonwealth’(공통의 부, 공통체)라는 말이 일반적인 정치적 진술과 무관하다. 이는 개별 커먼즈들의 실존조건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다른 조건들은 커머너들, 공동체, 커머닝이다.) 따라서 나는 ‘commonwealth’라는 용어를 하트와 네그리가 사용한 의미와는 다르게 사용한다. 하트와 네그리는 생산된 모든 것을 ‘commonwealth’의 일부로 본다. 공통적으로 생산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저작에서 ‘공통적인 것’(the common)은 신자유주의에 맞선 많은 투쟁들을 해석하는 정치적 원리이다. 나의 접근법은 다르다. 비록 나는 지구상에 생산된 모든 것은 사회적 노동에 의해 생산되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commonwealth’로서 주장할 수 있다는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공유하지만, 사실상 이 주장은 국가와 자본이 강제하는 소유권의 장벽과 마주친다. 이 장벽을 우리는 사회적 운동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 그러한 장벽은 또한 현재적 생산양식들의 실제적 구조와 주체성들 안에 존재하며, 이는 우리가 아직은 모든 사회적 협동에 의해 생산된 부를 ‘commonwealth’로서 주장할 수 있는 시점에 와있지 않음을 시사한다. 이 시점에 도달하는 것이 대안들과 투쟁을 구축하는 데 실제 힘을 발하는 사회적 힘으로서의 커먼즈의 과제이다. 커먼즈 체계들의 확대와 커먼즈들의 커먼즈 생태환경으로의 통합이 사회운동과 함께 미래의 어느 시점에 그러한 ‘commonwealth’ 주장에 효과적인 힘을 부여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나는 공통적인 것을 커먼즈 운동의 인식 지평(a sense horizon)으로서만 사용할 것이다. ‘omnia sunt communia’에 대한 나의 이해에서처럼. 그러나 전략적 사고는 맥락에 토대를 두어야 하며, 커먼즈의 확대는 커먼즈 외부에서 생산된 요소들을 내부로 포획하여 그 형태를 발전시키고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

 

2장

커먼즈를 체계로 설정하였기에, 2장에서는 체계와 관련된 기초적인 개념적 도구들을 살펴본다. 개념도구들이 중요한 것은, 구멍을 뚫을 때에는 부삽을 사용하지 않고 주머니칼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 것과 같다. 예를 들어 권력(power)을 정의할 때, 나는 통상적인 급진주의자들이 거의 사용하지 않는 정식화―커트 루인(Kurt Lewin)의 것―에 준거한다. 베버, 푸꼬, 만, 룩스(Lukes) 같은 권력 연구자들에도 별로 준거하지 않는다. 그들의 권력 연구가 커먼즈 이해에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나의 많은 단상들과 발표된 글들에서 그들은 명백하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커먼즈가 사회적 힘으로 전환하여 계속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나의 직관을 설명하기 위해 효과적이며 신속하게 사용할 수 있는 도구들이 필요했다. 루인의 힘의 장(force field)이라는 생각은 나의 선생님이자 친구인 해리 클리버가 내가 대학원생이었던 1980년대에 『자본론』의 모든 범주는 계급투쟁의 범주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에게 말한 것과 비슷하다. 뉴턴 물리학자인 그는 종이타월 위에 상이한 방향을 향하는 두 화살표를 그려서 갈등하는 사회세력을 나타냈는데, 화살표의 길이는 그 힘을 나타내고 화살표의 방향은 지향 혹은 목적 혹은 욕망이나 야망을 나타낸다. 루인의 힘의 장이 가진 장점은 또한 가치, 권력, 목표 개념을 힘의 장과 연관시켜서 동일한 질료(substance)에 변이, 변조, 일탈을 준다는 점이다. 이어지는 장들에서 나는 이 ‘질료’를 노동의 관점으로 옮겨놓는다. 커먼즈를 위한 커머닝이라는 사회적 형태로든 자본을 위해 착취되는 추상적 노동의 형태로든. 나는 루인의 개념화를 가능한 한 느슨하게 사용하여 자본과 커먼즈 모두를 질적으로 대립하는 사회적 힘으로 이해하며 따라서 세계를 상이한 방식으로 구축할 수 있는, 종종 대립하고 상충하며 또 다른 때에는 서로 타협을 하는 사회적 힘으로 본다.

 

3장

3장에서 나는 커먼즈를 구성하는 세 요소 가운데 둘, 즉 공통재와 공동체(커머너들과 그들의 관계들의 다원성)의 일반적 특징들을 논의한다. 결정적 요소인 커머닝에 대한 더 본격적인 논의는 6장과 7장으로 넘긴다. 즉 커먼즈의 다른 체계적 속성들을 풀어낸 다음으로 넘긴다.

 

4, 5장

4장과 5장에서는 두 중요하지만 서로 연관되지는 않은 저자들로부터 온 커먼즈에 대한 통찰들을 논의한다. 4장에서는 오스트롬(Elinor Ostrom)을 논의하고, 5장에서는 맑스의 자본 연구를 논의한다. 나의 분석은 커먼즈를 자본 및 국가(신자유주의에서 국가는 자본의 이익의 옹호자일 뿐이다)와 대면하면서 힘의 관계의 장들 안에 삽입된 체계로서 정립하기 때문에 오스트롬과 맑스를 논의함으로써 두 저자가 자신의 저작에서 배제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오스트롬은 자본과 국가를 포함하는, 위협적이기 일쑤인 환경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결하고 있고, 커먼즈를 발생시키는 커머너들의 능력에 대한 입장을 결하고 있다. 맑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조차도 커먼즈가 구성하는 (재)생산적 힘을 배제한다.

커먼즈 이론을 창립한 오스트롬의 위대한 작업은 자본주의 경제이론을 창립한 아담 스미스나 리카도의 작업과 같다. 4장에서 나는 또한 개념적 도구들을 더 발전시켜서 오스트롬의 자원 개념을 수정하고 공유재(common resources) 개념을 확대하여 전통적인 경제학이 ‘사유재’(private goods)라고 부른 것을 포함도록 한다.

5장에서 나는 커먼즈의 공식을 도출한다. 맑스의 자본의 회로를 모델로 한, 체계의 성격을 가진 비축과 흐름의 회로이다. 여기서 나는 맑스가 노동력의 재생산 회로를 무시했다고 비판한 1970년대 페미니즘 논쟁들에 기반을 둔다. 나는 이 노동력 재생산 회로를 재생산하여 그것이 더 광범한 회로 즉 커먼즈의 (재)생산의 한 계기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5장에서 나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체계들과 결합된 우리의 일상생활로부터 커먼즈가 생겨나오는 것으로 드러낸다. 여기서 나는 경제 체계를 맑스가 『자본론』 1권에서 도입한 두 회로 사이의 마디결합으로서 논의한다. ① 커머너들의 사기 위해 파는 체계와 ② 자본의 이윤 논리의 팔기 위해 사는 체계이다. 이를 통해 나는 커머너들과 자본가들의 상호작용을 불러일으키는 행동 및 소통 고리들의 행위자들을 도입한다. 그 다음에 두 회로를 분해하여 그 뒤의 생산 현실을 드러낸다. 자본 회로의 분석적 분해는 맑스가 가르친 것(착취) 이상을 별로 드러내지 않지만 첫째 회로를 분해하면서는 커먼즈의 다양한 세계를 발견한다. 이 사기 위해 파는 회로는 커먼즈와 자본주의 체계들 사이의 교류의 막에 다름 아니다. 커먼즈를 자본으로부터 분리하는 경계이다. 더 큰 커먼즈 회로의 부분집합인 이 사기 위해 파는 회로는 우연적으로만 필요한 것으로 나타나며, 자본의 화폐 회로에 의존하는 정도에 따라 상이한 커먼즈들이 구분된다.

 

6, 7장

커먼즈 거버넌스의 문제는 자주관리 수평성 및 참여의 문제이며, 이는 커머닝의 한 계기이다. 나는 6, 7장을 커머닝에 할애한다. 나는 6장의 대부분을 2010년 안식년으로 에콰도르, 볼리비아, 페루의 여러 지역을 4개월 동안 돌고난 직후에 썼다. 이 장은 사회적 노동을 커머닝에 가동하는 기술들을 서술한다. 이 지역에서 나는 사회적 노동을 커먼즈를 위해 가동하는 두 주된 방식이 있음을 발견했다. ① 상호성의 네트워크의 한 계기로서 (상호 노동) ② 모든 공동체가 참여하는 네트워크로부터의 요구(공동체 노동). 각 경우마다 밀도 있는 문화적·사회적·정동적 격자가 활동에의 참여 혹은 불참의 경비와 혜택을 규정한다. 그런데 나에게 주목할 만했던 것은 표면상으로는 이 가동의 양태들이 유럽과 북미 문화들에서도 작동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관점에서 볼 때 토착성은 먼 사회의 이국적 현상이 아니라 모든 곳에 있는 커먼즈 현상이다. 상이한 문화적 형태로 표현될 뿐.

나는 또한 인지 사회학자인 존 피스케(John Fiske)의 범주들 가운데 몇 개를 사용하여 측정 및 평가 과정을 논의한다. 여기서 나는 자본주의가 추상적 노동을 자본주의적 가치의 질료로서 부과하는 데 반하여 커머닝은 가치들의 춤(dance)의 생산이라는 가설을 제안한다. 다양한 가운데 합의를 찾는 커머너들이 상이한 맥락과 조건에서 상이한 유형의 사회적 협력을 서로 협상하기 때문에 춤이다.

7장에서 나는 자율과 관련하여 아래로부터의 커먼즈 역사를 검토하며 자기창조적 체계들에 대한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작업을 커먼즈 체계에 통찰을 주는 관점에서 원용한다. 또한 나는 자율과 자기창조라는 이 커먼즈 속성들을 경계와 감각(sense, 인식)의 생산과 연결시킨다. 그리하여 커머닝은 커먼즈의 힘을 창립하는 원천이 된다. 자율과 자기창조에 형태를 부여하며 커먼즈 체계들의 경계들의 유형을 형성하고 커머너들의 ‘감각’을 형성한다.

 

8장

8장에서 커머닝은 커먼즈들을 연결하여 더 큰 체계를 창출하는 사회적 힘이 된다. 나는 이것을 ‘경계 커머닝’(boundary commoning)이라고 부른다. 커먼즈 체계들의 경계에서 일어나서 어떤 규모를 가지든 사회적 형태들을 창출하고 경계를 열며 연관을 수립하고 커먼즈 생태환경을 유지하는 커머닝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제도를 공통화(commonalization)를 통해 토대로부터 다시 형성할 수도 있고 새로운 제도들을 수립하기도 한다. 나는 게누이도 클란데스티노(Genuino Clandestino)의 경우를 논의하는데, 이는 이탈리아에 있는 소농장주들과 소비자들의 네트워크로서 식품 주권의 조직화를 발전시켰다. 나는 어떻게 대안들이 경계 커머닝을 통해 발전할 수 있는지 입증한다. 경계 커머닝의 발전은 커먼즈 체계들의 확대와 커먼즈 생태환경의 창출을, 상이한 커먼즈들 사이의 교환과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이 장에서 나는 또한 사회 혁명에 대한 나의 생각을 개진한다. 내 생각에 사회 혁명은 커먼즈 체계들의 확대에 의존하고 그것을 정치 혁명과 탈자본주의적 변형으로 연결시킨다.

 

9장

9장에서 나는 커먼즈 운동, 커먼즈 포섭, 커먼즈와 공적인 것의 문제를 논의한다. 마투라나·바렐라와 루만 같은 체계 이론가들은 체계들 사이의 구조적 결합(structural coupling)이 하나의 체계가 다른 체계들의 복합체에 접근하여 그것을 활용하게 한다고 본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자본이 커먼즈를 자기편으로 포섭할 수 있지만, 그 반대도 맞다. 커먼즈도 자신의 발전을 위해 자본 체계들의 복합체에 접근할 수 있다. 그 다음에 나는 사회 운동의 체계와 커먼즈 사이의 관계를 논의하면서, 각자 나름의 과제를 가진 양자가 선순환 형태로 교직될 때 사회 변화에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사회 운동의 경우에는 국가와 자본이 가하는 주체적·객체적 제한들을 밀어내는 것이 과제이고, 커먼즈의 경우에는 그렇게 해서 새로 생긴 공간에서 새로운 커먼즈 기반 생산양식으로 확대되는 것이 과제이다. 또한 나는 경계 커머닝이 공적 영역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록 그 공통화의 정도는 지역 조건들 및 커먼즈에 의해 가동되는 사회세력에 의존하지만 말이다.

 

10장

10장에서는 탈자본주의를 향한 사회 변형의 문제틀의 복잡성을 검토한다. 이 변형은 진공에서 일어나지 않으며, 커먼즈 발전의 성공은 가동되는 사회적 힘들에 의존한다. 나는 현대 사회 운동의 커먼즈로의 변이의 일반화를 상정한다. 여기서 나는 이 커먼즈 운동들이 성공적으로 사회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일반적 조건들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 소박한 질문은 우리가 그것을 복잡성 이론과 애쉬비(Ashby)의 ‘필수 다양성의 법칙’(The Law of Requisite Variety)―안정된 체계에서는 통제하는 요소들의 수가 통제받는 요소들의 수보다 많다는 법칙―의 맥락에서 제기한다면 더 근거 있는 질문이 된다. 이 법칙이 말해주는 바는, 규제자들(가령 자본과 국가)이 커먼즈도 들어있는 사회를 규제할 수 있으려면 사회의 복잡성에 맞먹는 복잡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와 자본이 날로 커지는 사회의 복잡성에 대응하는 수단은 두 가지이다. 억압을 통해 사회의 복잡성을 죽이거나 국가와 자본에 이미 들어있는 복잡성과 양립 가능한 형태의 복잡성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경우에 복잡성의 요소들은 사회 혁명이 정치 혁명의 선결 조건이라는 맑스의 제안과 상응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운동과 커먼즈의 동기화를 통해서 자본과 국가가 단기적으로는 관리할 수 없이 복잡성을 증가시키고 새로운 커먼즈 생태환경에서 이 새로운 복잡성의 자치를 이루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는 이론적인 제안이지만,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도 이론적 제안이면서 자본가들로 하여금 봉건적 특권들을 대체할 때 방향을 정할 수 있도록 해주지 않았던가.

나는 사회과학 및 정치과학의 기획들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개념들에 의존한다. 어려움은 이 개념들과 이론들을 잇는 데만이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자본주의적 생산에 대한 대안들을 실제로 창출하고 확대하는 데 있다. 사회적 변화의 경로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편법들’로 발라져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우리 서로와 언제나 되찾기를 주장해야 하는 공통의 부와 공생공락적 커머닝의 삶 밖에는 없다.




푸꼬, 주체와 진실의 관계


  • 저자  :  미셸 푸꼬
  • 옮긴이 : 정백수
  • 설명 : 푸꼬의 일련의 꼴레즈 드 프랑스 강의 중 맨 마지막 강의(1984년 3월 28일)에서 강의안에는 있으나 강의를 하지는 못한 부분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진실의 용기』(Le Courage de la Véité), 309-11(영어본 The Courage of truth 338-340)에 각주로 달려있다. 푸꼬의 문제의식을 압축적으로 제시한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주체와 진실의 관계

(가) 고대에서의 주체와 진실의 관계 연구. 더 정확하게는 고전 그리스에서 우리가 후기 고대라고 부르는 시기 혹은 기독교의 출발까지 걸쳐있는 긴 기간이 대상. 여기서 문제는 철학사가들에게 친숙한 사건―존재와 진실의 관계가 형이상학의 방식으로 정의된다―의 다른 측면이다.

(나) 나는 이 관계를 형이상학과의 관계로부터의 상대적 자율성(=관계의 존재를 함축하기도 하는 독립성)의 측면에서 연구하려고 하였다. 나는 이 관계를 자기를 대상으로 하는 실천(la pratique de soi)의 관점에서 연구하려고 하였다.

① 즉 분석의 방향을 주체를 영혼으로 정의하는 것과는 가능한 한 다른 방향으로 잡음으로써, 그리고 자기의 문제, 자기와의 관계의 문제에 초점을 둠으로써. 물론 이 자기와의 관계는 종종 영혼과의 관계의 형태를 띤다. 그러나 여기에 머무는 것은 다소 환원적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프쉬케’(psukhe, 영혼)라는 용어에 주어지는 의미들의 다양성은, 영혼과의 관계는 사실 삶(bios)과의 관계, 신체와의 관계, 정념들과의 관계, 사건들과의 관계로 구성되는 집합의 일부라는 점을 이해할 때 이해 가능하다. 혹은 적어도 더 명확해진다.

② 그리고 나는 이 관계들을 실천의 테마로서 분석하려고 하였다. 즉 기술(技術)적 과정들에 따라 다듬어지는(정교해지는) 것들로서, 우리가 그것들에 대해 성찰하거나, 변경·완결시키거나, 가르치거나 사례들을 통해 전달하는 그러한 실천들이다. 우리의 실존 전체에 걸쳐서 그 어떤 특권적이고 선별된 순간에서든 아니면 규칙적이고 연속적으로든 실행하는 실천들이다. 이 실천들은 자기에의 몰두(la préooccupation de soi-même), 자기 돌봄(le souci de soi)에 다름 아닌 근본적인 태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실천들의 목적은 어떤 에토스를 구성하는 것이다. 즉, 일정한 합리적인 원칙들에 상응하여 존재하고 행하는 방식, 행동하는 방식을 구성하는 것이며 그러면서 자립으로 이해되는 자유의 발휘를 창출한다. 따라서 자기를 대상으로 하는 실천을 연구하는 것은 자기 돌봄이 그 에토를 창조하는 역할에서 취하는 구체적 형식들, 처방들, 기술들을 연구하는 것이다.

(다) 자기와의 이러한 관계들이 필요로 하며 지주로 삼는, 그리고 이 관계들이 기대하는 특수한 효과들을 낳는 진실 게임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 문제에는 몇 가지 응답들이 있다. [첫째] 자기를 윤리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주체 자신과 이러저러한 거리에 있으며 이러저러한 외연을 가진 도메인들과 관련되는 이러저러한 수의 이러저러한 정도로 복잡한 지식들의 획득을 전제한다. 세상, 삶, 인간 등에 대한 근본적 진실이다, 이러저러한 상황에서 행하기에 적합한 것에 대한 실천적 진실들이다. 요컨대, 배워야 할 모든 것, 즉 마테마타(mathemata)이다.((그리스어로 ‘ta mathemata’는 ‘배울 수 있는 (따라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이다―정리자))

그러나 [둘째] 자기를 윤리적 주체로서 구성하는 일은 또한 또 다른 진실게임을 함축한다. 이제는 배우고 가르치는 도제관계의 게임이 아니다. 삶과 그 사건들에 대비하여 갖출 진실한 명제들의 획득이 아니다. 자기에게,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에, 자신이 획득한 자립의 정도에, 자신이 이루어야 할 그리고 이루게 될 진전에 주의를 집중하는 게임이다. 이러한 진실게임은 마테마타에 해당하지 않는다. 가르치고 배워야 할 것들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에게 행하는 연마행동들이다. 자기검증, 인내력의 시험, 재현을 확인하는 기타 방식들―요컨대 수련(askesis)의 차원이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자기에 관한 진실의 이러한 연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진실의 용기(le courage de la vérité))라는 태도가 있어야 가능하고, 거기서 그 토대를 발견한다. 아무 것도 숨기지 않으면서 낳을 수 있는 위험에 관계없이 진실을 말하는 용기.

그리고 바로 여기서 우리는 파레시아(parrhesia)라는 개념을 만나게 된다. 원래는 정치적 개념인 파레시아는 이 의미를 잃지 않으면서 자기 돌봄이라는 원칙과 합류하여 변화하게 된다. 파레시아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파레시아적 게임은 다음의 두 모습으로 나타난다.

– 어떤 사람이 윤리적으로 자기를 형성하는 일을 내가 돕거나 이끌고 싶을 때 그 사람에게 진실을 말하는 용기.

–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에 관한 진실을 발현하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용기.

이 지점에서 견유주의자가 등장한다. 견유주의자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뻔뻔한 용기를 지녔다. 그는 진실을 말하는 대담함을 지녔다. 견유주의자는 규칙들·관례들·관습들·습관들을 비판하고 주권자들(왕들)과 권력자들을 거리낌 없이 공격적으로 대하면서 정치적 파레시아의 기능들과 철학적 삶을 전도시키며 또한 극화한다.

이런 식으로 제시하면 고대 윤리학에서 견유주의에 결정적 위치를 부여하며 견유주의를 중심적 형상으로 만든다는 인상을 줄 것이라는 점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견유주의는 적어도 어떤 관점에서 보면 경계에 존재하는 주변적 형상으로 남아있는데 말이다.

사실 나는 견유주의를 가지고 자기 돌봄과 진실의 용기라는 두 테마가 배치되어 있는 영역의 두 경계 가운데 하나를 탐구하고 싶었을 뿐이다.

다음과 같이 제시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고대 철학은 자기 돌봄의 원칙(자기를 돌볼 의무)과 진실을 말할, 진실을 발현할 용기의 필요를 연결하였다.

사실 자기 돌봄과 진실의 용기를 연결하는 상이한 방식들이 여럿 있었는데, 이 가운데 두 개의 극단적 형태들, 서로 반대되는 두 양태들을 확실하게 식별해낼 수 있다. 이들은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쏘크라테스의 에피멜레이아(epimeleia, 자기 돌봄)와 파레시아(진실 맣하기)를 취하고 있다.

 

– 플라톤적 양태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방식으로 마테마타의 중요성과 넓은 범위를 강조한다. 이는 자기에 관한 지식을 자기에 의한 자기에 대한 명상으로 보며, 영혼의 본래적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으로 본다. 이는 이중적 구분을 수립하는 경향이 있다. 영혼과 신체의 구분, 그리고 진실한 세계와 현상 세계의 구분. 요컨대 이 양태가 가진 상당한 중요성은 그것이 그런 형태의 자기 돌봄을 형이상학의 창립으로 연결시킬 수 있었다는 데 있다. 다른 한편 비교(秘敎)적 교습과 모두에게 주어지는 교습 사이의 구별은 그 정치적 영향력을 제한했다.

 

– 견유주의적 양태

이는 마테마타의 영역을 가능한 한 엄밀하게 축소한다. 자기에 관한 지식을 무엇보다도 연마, 시험, 인내력의 연습으로 본다. 인간 존재를 군더더기를 다 벗겨낸 동물적 진실에서 발현시키고자 한다. 비록 형이상학과의 관계에서 뒤로 물러나 있었고 형이상학의 위대한 역사적 후예들에게 낯선 것으로 남아있었지만, 견유주의는 특이한 삶의 양태를, 특이한 비오스(bios)를 서양의 역사에 유산으로 남겼으며, 이는 여러 상이한 양태로 결정적 역할을 해왔다.

자기 돌봄과 진실의 용기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플라톤주의와 견유주의는 서로 마주보고 있고 각각이 상이한 계보를 낳은 두 주된 형태들을 나타낸다. 한쪽에는 프쉬케, 자기에 대한 지식, 정화 작업, 다른 세상에의 접근, 다른 한쪽에는 비오스, 자신을 시험하기, 동물성으로의 환원, 이 세상에서의 세상과의 전투.

그런데 이 결론에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다. 진실의 수립에는 타자성의 정립이 절대 필수적이다진실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다른 세계와 다른 삶‘(l’autre monde et ··· la vie autre)의 형태로만 진실이 존재할 수 있다. ♣

 

 




대량멸종사태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기사는 한 미국 과학자팀의 연구 결과를 소개하고 있다. 연구를 이끈 사람은 폴 에를리히(Paul Erlich) 교수(스탠포드 대학, 인구 연구, 생물학)이며, 연구 결과는 학술지 Science Advances에 발표되었다. 연구의 결론은 “연구는 별다른 의문의 여지없이 우리가 지금 여섯 번째 대량멸종사태(mass extinction event)에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에를리히의 말로 요약된다.

그 동안 일어났던 다섯 번의 대량멸종사태(five great extinction events)는 다음과 같다.

① 오르도비스기 말 대량멸종(End-Ordovician mass extinction)

4억4천만 년 전에 일어났으며, 다섯 중 둘째로 가혹한 것이었다. 당시 모든 생명체들은 실질적으로 바다에 살았는데, 이들 종 가운데 85% 정도가 사라졌다.

② 데번기 후기 대량멸종

약 3억7천5백만 년에서 3억5천9백만 년 전에 일어났으며 큰 환경변화가 오랜 시간에 걸친 멸종사태를 빚었다. 주요 물고기 집단들이 말살되었으며 새로운 산호초 형성이 1억년 동안 중지되었다.

③ 페름기 말 대량멸종(대멸종 the Great Dying)

지구 생태계에 가장 심대한 영향을 미친 최대의 멸종사태로서 2억5천2백만 년 전에 일어났다. 97%의 종들이 화석을 남기고 영원히 사라졌다.

④ 트라이아스기 말 대멸종

공룡들이 트라이아스기 초에 처음 등장했지만, 거대한 양서류와 포유류 같은 파충류가 당시에 육지를 지배하는 동물들이었다. 2억1백만 년에 일어난 급속한 대량멸종이 이런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

⑤ 백악기 말 대량멸종

6천6백만 년 전에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하였으며, 이 사태가 공룡들의 지배를 종식시킨 원인으로 종종 지목되고 있다.

연구진이 여섯 번째 대량멸종사태에 진입한다고 보는 이유는 종들이 정상 속도보다 100배 빠르게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이번 연구가 인간이 생물다양성에 미치는 영향의 현실적인 최소한을 설정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위기의 중대함을 낮게 잡은 것임을 강조한다.) 1500년 이래 척추동물 320종 이상이 멸종했다. 남은 종의 개체수는 평균 25%의 감소를 보이며, 비척추동물의 경우에도 상황은 마찬가지로 암울하다. 척추동물 전체에 걸쳐서 모든 종들의 16-33%가 전지구적으로 위협을 받거나 위험에 처한 것으로 추산된다. 코끼리, 코뿔소, 북극곰 및 기타 세계의 수많은 다른 종들을 포함하는 대형동물군(megafauna)이 최고의 감소율을 보이는데, 이는 이전의 멸종사태에 맞먹는 수치이다. 현재의 상태라면 오늘날 지구상의 종들의 75%가 단 두 세대 만에 사라질 것이라고 연구진은 우려하고 있다. 국제자연보존연맹(International Un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에 따르면 현재 모든 양서류 종들의 약 41%와 모든 포유류의 26%에 멸종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현재의 상태가 계속되도록 방치되면 지구의 삶은 회복하는 데 수백만 년이 걸릴 것이며, 인간 종 자체는 일찌감치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가령 동물 종들이 사라지면 곤충들이 행하는 농작물의 가루받이(pollination)나 습지에서의 물 정화 같은 결정적인 생태계 ‘서비스들’이 위험에 처하기 때문에 인류에게 실질적 위협이 된다. 현재의 속도라면 인류는 세 세대 만에 생물다양성이 주는 많은 이익을 잃을 것이라고 한다.

이전의 멸종은 자연 재난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번 것은 인간에 의한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인간이 생물다양성 상실을 전지구적으로 가속화하고 있으며 위협받는 종들을 보존할 기회가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인구의 증가, 1인당 소비의 증가, 경제적 불평들이 자연 서식지들을 바꾸었거나 파괴했는데, 주된 영향은 다음과 같다.

· 농업, 벌목, 정착을 산림 벌채

· 외래 침입종의 도입

· 기후변화와 해양산성화를 낳는 탄소방출

· 생태계를 바꾸고 오염시키는 독소

이런 암울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게 전진하는 방법이 있다고 연구진은 말한다. 여섯 번째 멸종을 피하려면 이미 위협받는 종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서식지에 대한 압박―특히 서식지 파괴, 경제적 이들을 위한 과도한 착취, 기후변화 문제―을 완화시키는 노력이 한층 더 강화되어야 한다고 한다. 연구진은 자신들의 연구가 종 보존과 생태계 유지 서비스 및 공공정책에 영향을 미치기를 바란다. ♣

 




트럼프에 관한 10개의 테제


  • 저자  :  미셸 바우엔스(Michel Bauwens)
  • 원문 : Ten Theses on Trump (2017.3.20) /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
  • 분류 : 상세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이 글은 완결된 것이 아니라 진행 중인 노트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여기 제시된 개념들도 일부는 아직 미완성이다.

 

트럼프의 승리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기의 종말을 나타낸다. 이 시기에 서양의 노동계급 및 중산층은 신자유주의 전략의 불가피한 결과인 탈산업화로 인해서 침체와 쇠퇴를 겪었다. 물론 비극은 이에 대한 대응이 과거를 바라보며 다른 소수자들을 희생시키는 일국 보호주의로의 귀환이라는 형태를 띤다는 점이다. 사회정의 및 생태의 지속 가능성과 양립할 수 있는 생산을 조직하는 새로운 형태들을 발견할 수는 없을까? 초국적 협동의 형태들을 유지·확대할 수는 없을까? 그러한 방향 재설정과 이행을 상상하는 것이 실로 가능하며 여기서 커먼즈의 역할이 결정적이라는 것이 우리의 대답이다. 트럼프 국면이 인간 해방을 위한 새로운 전략들을 어떻게 다시 활성화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자.

 

1. 자본주의의 심층적 동학

트럼프의 승리와 그에 대한 계속 이어지는 지지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그 심층에 있는 자본주의 동학의 위기를 반영한다. 이 동학은 자원 생산 정점과 기후 변화와 같은 환경적 요인들만이 아니라 사회적 요인들―무엇보다 서양 노동계급과 중산층의 빈곤화와 이것이 예를 들어 이주에 대한 태도에 미치는 영향―을 포함한다. 자원이 생산 정점에 이르렀다는 계산이 현재의 석유 공급과다와 모순되기는커녕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 일부라는 점을 알아두기 바란다. (Nafeez Ahmed, Failing States, Collapsing Systems : Biophysical Triggers of Political Violence 참조)

 

2. 제국 대 국민국가

따라서 다음의 투쟁이 출현한다. 친(親)신자유주의 세력은 자국 인구와 일국적 성격이 강한 산업을 희생시키고 제국의 이익을 유지하려고 한다. 트럼프를 미는 세력은 자신들이 더 이상 제국을 지배하지 못함을 받아들이며 국민국가로서의 미국을 구하기 위해 제국을 위험스럽게 할 태세를 갖춘다. 월가와 화석연료 산업은 트럼프와 연합하여 사회복지와 환경에 드는 비용을 줄임으로써 이윤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다른 우익 포퓰리즘 세력도 자국의 현실에 대해 대체로 유사한 계획들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일국적 성격이 더 강한 재계 지도자들과 기후변화 비용과 규제를 꺼리는 에너지 부문이 트럼프를 지지하는 것이다. 그들의 생각은 국민국가로 후퇴하는 것이며, 자국 자본에 위협을 가하지 않는 교역만을 받아들이고 ‘제국적인’ 초국적 기업들을 통해 해외에 은닉된 수조 달러를 다시 본국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신자유주의 엘리트들은 트럼프에 반대하는 것이다.

 

3. 계급 타협

신자유주의의 계급 타협은 점차로 작동 불가능하게 되어왔다. 이 타협은 1968년 봉기에 의해 표현된 문화적 측면들 및 욕망들을 (따라서 문화, 젠더 및 기타 소수자들의 권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하며, 이 봉기를 지지하는 (그러나 다른 한편 적극적인 탈산업화로 서양의 산업노동자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 탈근대적인 포스트노동 좌파(the postmodern, post labor left)와의 상대적 연합을 포함한다. ‘신자유주의적 경제 성향’이 ‘자유주의화된 문화 성향’과 연합했다고 말해도 좋다. 노동 좌파의 제도들이 뉴딜/복지국가 모델에 포섭되었듯이 정체성 정치가 대표하는 권리 지향적 좌파의 상당 부분이 여기에 포섭되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이것을 연구한 Boltanski/Chiapello의 책 The New Spirit of Capitalism 참조). 이와 달리 트럼프 세력은 백인 노동계급 및 특정의 노동주의적 혹은 생산주의적 가치들을 공유한 사람들과의 연대를 표방하며 나머지를 타자화(otherization)한다. 이것이 적들을 합류하게 만들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재계 엘리트와 문화 엘리트의 결속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친신자유주의 정치와 문화 좌파의 연대는 미국에서 클린턴-오바마 연합이 나타냈던 바이며 다른 곳의 사회민주주의자들 또한 산업 노동자들로부터 더 특권을 가진 ‘창조적’ 노동자들로 이동하여 복지의 신자유주의적 축소를 행하고 산업노동자들을 실질적으로 저버려 우익 포퓰리즘의 조작대상으로 익어가도록 방치했다.

 

4. 문화와 타자화

문화적 권리에 초점을 두는 문화 좌파는 트럼프 연합이 행하는 타자화와 공공연한 인종차별/젠더차별에 반대한다. 문화 좌파는 문화적 권리와 개혁을 허용하는 신자유주의 정권에 일정 정도의 지지를 보내야 한다는 부채감을 느낀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타협이 붕괴함에 따라 이는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이제 필요한 것은 산업 노동자들과 다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제단에 블루칼라 노동자들의 이익을 더는 제물로 바치지 않는 대연합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 일에서 커먼즈가 바로 새로운 아교풀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5. 보호주의적 국민국가로의 귀환

진보적 노동자들과 문화 좌파 사이의 시너지를 재창출하는 데 초점을 두고 새로운 연합을 구축하는 데 집중하는 좌파 부문들을 더 현실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샌더스 세력이다. 샌더스는 트럼프에게 표를 던진 노동자들과의 유대를 유지하려는 노력으로 온건한 언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는 뉴딜 원칙을 복원하는 데로 향하는 방향의 유지와 케인즈 정치에 대한 지지를 의미하며, 결정적으로 트럼프처럼 재산업화와 국민국가의 복원을 향함을 의미한다. 우익 포퓰리즘이나 좌익 포퓰리즘이나 그 크고 의미심장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강한 국민국가에 대한 향수를 공유하며 그것을 ‘넘어’가는 비전을 결여하고 있다. 이러한 방향성은 또한 여려 국민국가들의 노동자들을 서로 충돌하게 만든다. 제안되고 있는 보호주의적 국민국가로의 귀환과 재산업화는 전지구적 차원의 문제들과 이 문제들을 다루는 데 필요한 초국적 협동의 욕구를 충분히 감당하지 못한다. 국민국가 보호주의로의 귀환은 세계 전역의 커머너들(commoners) 사이의 초국적 유대의 욕구를 제대로 포용하지 못한다.

 

6. 모순에 찬 연합

각 연합에는 고유한 모순들이 있다. 예를 들어 트럼프는 노동자들과 노동조합들의 지지를 필요로 하지만, 또한 과세에 반대하는 공화당원들의 지지로 필요로 한다. 이는 그가 예산을 깎아야 하는 동시에 기반시설 투자에 들일 수조 달러를 필요로 함을 의미한다. 그는 제국으로부터 후퇴할 필요가 있지만, 또한 기존의 방위 세력을 달랠 필요도 있다. 그는 많은 석유를 필요로 하지만 이는 환경을 파열시킨다. 그는 수익성을 증가시키고 싶지만 이는 사회와 환경의 파열을 대가로 치르며 결국은 자신을 지지하는 산업계를 달래기 위해서 자신의 노동자 기반을 소외시킬 위험에 처하게 된다. 급진 우파가 ‘노동’을 운위할지 모르겠으나 여전히 그들의 주요 기반은 생산비용을 감소시키는 데 열심인 몰락하는 화난 중산층이다.

 

7. ‘정상’의 해체

오바마 연합과 샌더스 연합도 각자 모순을 가지고 있다. 해체되는 신자유주의 지구화와 복원하는 것이 불가능한 국민국가의 현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이다.

 

8. 세계-지역화(cosmo-localization)와 전체 노동자

새로 출현하는 P2P/커먼즈 접근법이 샌더스 연합을 더 현실적으로 만들어주는 데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 접근법은 옛 생산모델로 돌아가지 않고 세계지역적(cosmo-local) 생산모델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재산업화를 위한 새로운 전략을 제공한다. 세계-지역적 생산모델에서는 ‘모든 가벼운 것은 전지구적이며, 모든 무거운 것은 지역적이다.’ 물질적 생산의 이러한 보완원칙을 옹호하는 것, 심도 있는 전지구적 협동을 기반시설의 심도 있는 상호화(mutualization, 공동 이용)와 결합하는 것이 대대적인 고용 기회와 생계를 재창출할, 생태론을 발판으로 하는 전지구적 재산업화의 유일한 처방이다.

이 모델은 미국과 유럽 노동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세계 전역의 인구에게 해결책을 제공한다. 이를 위해서는 커머너들 자신이 지식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에게, 그리고 인구 전체에 초점을 두는 방향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이는 도시들과 그 바이오지역적(bioregional) 맥락들을 중심으로 한 지속 가능한 생계의 관점을 제공함으로써 이루질 수 있다. 현재 출현하고 있는 전지구적 생산 공동체들, 전지구적 윤리적 기업연합들, 그것을 지원할 공적 서비스의 공통화(commonification)를 바탕으로, 기업의 신(新)지구화[오바마-클린턴]와 신(新)국가주의[트럼프] 양자가 낳을 결함을 보완할 수 있는 초국적 제도들이 창출될 필요 또한 있다.

 

9. ‘파트너 국가’ 접근법

커먼즈 운동에서 큰 문제는 이 잠재적 해결책들 가운데 다수가 아직 실현되기에 때가 이르다는 점이다. 그래서 커먼즈는 원리상 자립적이면서도 진보적 국민국가 복원자들과의 연합에 의존하게 된다. 거대한 이행은 국가제도의 지원 없이는 실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것을 ‘파트너 국가’ 접근법이라 부른다.) 따라서 전략 가운데 우선되어야 할 것이 노동 좌파(샌더스나 코빈 같은 사람), 문화적 권리 운동들그리고 커먼즈 운동 사이의 대화이다. 잠재적인 엘리트 세력으로서 유일하게 연합할 수 있는 사람들은 생태적 이행을 완전히 지지하고 노동과 커먼즈의 과실을 놓고 대다수 인구와 ‘페어딜 정책’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다른 한편, 시장경제에서처럼 가치추출에 의존하지 않고 가치의 상호발생에 기반을 두는 다수의 풀뿌리 세력도 커먼즈의 한 부문으로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

 

10. 예시적(prefigurative) 커먼즈 경제

그러는 사이에 아서 브락(Arthur Brock) 등이 시사한 대로 우리는 지식의 공유(자유로운 오고 감), 사회적 잉여의 정당한 분배(연대경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킬 생태적으로 건강한 생산(정치적 생태론)을 존중하는 예시적 커먼즈 경제의 구축을 가속화해야 한다. 이것이 커먼즈의 미시-연합으로서,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현재 펼쳐지고 있는 더 광범한 사회적·정치적 기동(機動)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