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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화폐와 커먼즈를 위한 자본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2016년 1월 15일 게시글 “Democratic Money and Capital for the Commons”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일반적인 금융 용어나 새로운 금융제도 및 기관을 지칭하는 용어는 전문적으로 사용되는 것과 다르게 옮겨졌을 수 있다.

 

민주적 화폐와 커먼즈를 위한 자본

 

 

대부분의 커먼즈들이 직면하는 가장 복잡하고 가장 해결하기 힘든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금융, 은행, 화폐의 지배적인 체제가 커머닝에 그토록 적대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커먼즈의 독립을 확보하는가이다. 커머너들은 지배적인 화폐체제의 구조적 문제를 반복하지 않고 (어쩌면 반복하더라도 해로움이 웬만큼 덜한 방식으로 반복하면서) 어떻게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가?

 

다행히도 이 문제에 대한 대답들을 조명해줄 수 있는 여러 매력적이고 창조적인 기획들이 세계 전역에 존재하고 있다. 협동적 금, 크라우드에쿼티[각주:1], 대안 통화(通貨), 비트코인에서 사용되는 블록체인 장부, 화폐창출에 대한 공적 통제를 되찾아 (은행만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양적 완화’를 가능하게 하기 등등.

 

이 문제들에 대해 새로운 대화가 개시되는 것을 돕기 위해서 <커먼즈전략그룹>(the Commons Strategies Group)은 하인리히뵐재단과 협동하여 지난 9월 베를린에서 ‘심층 잠수’(Deep Dive) 전략워크숍을 조직했다. 우리는 공적 화폐, 보완 통화, 지역발전 금융기관(community development finance institutions), 공공은행들(public banks), 사회적 및 윤리적 대출, 커먼즈 기반의 가상은행업, 그리고 “협동형 축적”(co-operative accumulation)―집단들이 자신들에게 중요한 자산에 대한 공정한 소유와 통제력을 확보하는 능력―을 가능하게 할 새로운 조직형태들과 같은 주제들과 관련하여 24명의 활동가들과 전문가들을 모았다.

 

나는 그 워크숍에서 다루어진 대화의 주요 테마들과 상충점들을 종합하는 보고서가 지금 나와있다는 소식을 기쁘게 알린다. 그 보고서는 「민주적 화폐와 커먼즈를 위한 자본―커먼즈 기반의 대안들을 통해서 신자유주의 금융을 변형하기 위한 전략들」(“Democratic Money and Capital for the Commons: Strategies for Transforming Neoliberal Finance Through Commons-Based Alternatives,”)(데이빗 볼리어, 팻 코너티Pat Conaty 작성)이라고 불린다.

 

이 54쪽짜리 보고서는 커머너들이 화폐, 은행업, 금융이 어떻게 커머너들의 이익에 복무할 수 있는지를 토론하기 위한 첫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빠르고 쉬운 해답은 없다. 기존의 화폐체제의 아주 많은 부분이 재래의 자본주의 경제에 복무하는 데로 향해져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일지라도 말이다. 기본적인 금융 용어들조차도 무자비한 경제성장, 자원추출 경제 및 그 병적 측면들 그리고 화폐 그 자체가 부(富)라는 생각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빗나가는 논리를 종종 그 안에 품고 있다.

 

그래도 커머너들이 이 주제를 가지고 씨름해야 할 많은 중요한 이유들이 있다. 보고서의 서론 부분에서 말했듯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논리는 적어도 즉각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세 가지의 상호 연관된 체계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 ① 생태계의 파괴, ② 시장을 통한 커먼즈의 종획, ③ 평등, 사회정의, 사회가 시민들에게 사회적 돌봄을 제공하는 능력에 대한 공격이다. 이 세 문제를 통합된 방식으로 다룰 수 있는 혁신적인 협동형 금융(co-operative finance) 및 화폐체제를 발전시킬 방법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 문제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극복될 수 없을 것이다.”

 

서론을 더 보기로 하자.

 

이 병적 측면들을 추동하는 주된 요소는 부채가 이끄는 성장과 규제가 완화된 금융이다. 이는 케인즈 패러다임의 후임자로서 대처와 레이건이 1980년대 초에 도입한 신자유주의 경제의 중심적 요소들이다. 신자유주의로의 이동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법정 금리 한도의 폐지 혹은 완화에 의해 특징지어지는데, 이것의 결과로 많은 기존의 대출이 고리대금업이 되었고 금리가 페이데이론(payday loan)[각주:2]의 경우에는 5,000%로 치솟기도 했다. 이런 약탈은 한때 주로 빈민층, 불안정 노동자들 및 지구상의 후진지역에 대해 실행되었지만, 1990년대와 200년대에는 다른 형태로 중간층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에게로 확대되었다. 이제 과도한 부채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조건이 되었으며 이는 2008년 이후 심화되어 세계 전역에서 경제를 질식시키고 있고 거대한 사회적 불의를 낳고 있다. 그러나 사업은 이전처럼 계속되고 주류 정치는 근본적인 개혁에 관심이 없다.

 

다행스럽게 체제 차원의 변화를 추구할 새로운 기회들이 생기고 있다. 자본주의적 금융의 내적 모순들이 더 명백해지고 더 해로워짐에 따라, 화폐체제에 대한 급진적 비판들이 실천적 대안들의 발전과 함께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협동형 금융의 거의 잊혀진 역사적 모델들이 DIY 신용시스템, 대안 통화들, 협동형 조직모델들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로서 다시 발견되고 있다. 우리는 금융과 화폐에 대한 포스트자본주의적 비전이 간헐적으로나마 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하나 조금씩 바꿔나가는 해결책들―대안적인 은행들, 통화들, 대출제도들, 협동적 디지털 플랫폼들, 정책제안들 등―을 대충 모아놓는다고 해서 일관된 새로운 비전으로 종합될 수 있는가? 이 산만한 영역에서 다양한 기획들과 행위자들이 서로를 발견하고 더 심층적인 협동을 개시하고 더 넓은 지원을 끌어낼 수 있는가?

 

이것이 ‘심층 잠수’의 목적이었다. 54쪽의 보고서는 pdf파일로 여기서 다운받을 수 있다. 그리고 7쪽짜리 핵심요약(Executive Summary)도 여기서 볼 수 있다.

 

공저자인 코너티와 나는 많은 중요한 주제들에 대하여 깊은 지혜를 공유하게 해 준 데 대해, 그리고 최종보고서의 텍스트를 다듬는 것을 도와준 데 대해 ‘심층 잠수’의 참여자들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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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가 다루는 내용이 더 잘 이해될 수 있도록 핵심요약의 나머지 부분을 여기 올린다.

 

  1. 왜 화폐, 은행업, 금융의 변형이 필수적인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특히 2008년 금융 위기 이후에 사회적으로 공정하고 생태적으로 책임 있는 방식으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능력을 명백하게 상실했다. 경제성장과 부의 사적 축적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집착은 약탈적이고 사회적으로 기생적이 될 정도에 이르렀고 전체 체제는 파국적으로 호황과 불황을 반복하는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화폐와 화폐체제가 사회공학과 질서의 보이지 않는 도구로서 작동하는 사회적 창조물이라는 점은 널리 인식되고 있지는 않다. 많은 사람들에게 화폐와 화폐체제는 일종의 자연적인 경제질서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화폐를 창출하는 능력에 대한 공적 (정부에 의한) 통제력을 민간부문으로부터 다시 되찾아서 화폐가 민영은행들 및 금융기관들의 협소한 이윤창출 목표에 복무하기보다는 민주적으로 결정된 공적 욕구에 복무하는 데 사용될 수 있게 하는 것이 전적으로 가능하다.

 

일반 대중은 화폐가 민영은행들에 의해서 새로운 부채―정부들이나 가구들에 의해 이자를 더해 상환될 수 있는 부채―의 창출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각주:3] 그런데 화폐를 정부가 은행으로부터 빌려야 할 어떤 것으로 보지 않고 공통재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세금을 통해서 세입을 늘리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통화를 공적으로 공급하여 (민간경제에의 투자를 포함한) 사회적으로 필요한 지출에 더 우선적으로 투입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공공기관이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는 데서 생기는 ‘적자’가 애초에 발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화폐는 단순히 새로운 통화의 공적 원천을 나타낼 뿐인 것이 될 것인데, 이는 민영은행들이 이미 화폐를 부채의 형태로 만들어내면서 수행하는 기능이다. 그러나 공적 통화는 이자가 없고 민주적으로 결정되는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민영은행들이 부채 형태로 만들어내는 화폐와 다르다. 이제 민영 대출업자의 상업적이고 이윤에 의해 추동되는 욕구를 우선적으로 충족시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공통의 이익을 위한 화폐가 공적 서비스로서 민주적으로 창출될 수 있으며, 공적 이익을 위해 할당될 수 있다.

 

  1. 커먼즈와 커머닝에 어떻게 재정을 지원할 수 있는가?

 

기존의 금융제도는 착취와 추출의 경제에 바쳐져 있다. 이 경제는 성장이라는 명령이 내장된 다단계 사기에 해당한다. 일반 대중은 이자―은행이 창출한 액수의 화폐에 추가로 붙는 것―를 상환하기 위해서 점점 더 많은 부채를, 경제가 성장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져야 하기 때문이다. 복리로 추동되는 이 부채의 수레바퀴는 반드시 투기와 경제적 위기들을 낳는다. 미국에서 케인즈주의적 개혁과 뉴딜을 낳았고 근대적 복지국가가 출현했던 1929년과는 달리 2008년 이후의 전지구적 은행업과 화폐체제는 그 어떤 근본적인 개혁도 없이 유지되고 있다. 현재 우리의 화폐 및 은행업 체제는 잉여를 창출하기 위해서 사유화, 분업, 공통의 자원의 종획을 이용하는 자사소득 추출(rent extraction)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과정은 사유화된 자원과 노동을 제한하고 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다양한 금융 도구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이러한 금융도구들은 공적이고 공통적인 사용을 위해 새로운 자본을 창출하는 것을 금지하며, 커머너들이 공통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고유한 가치와 자본을 창출하는 능력을 좌절시킨다. 기존의 생산 및 금융 체제는 모든 창출된 가치를 개인의 호주머니로 흡수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커머너들과 금융을 공적 이익을 증진하는 도구로 삼는 데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기존의 자산소득자 체제(rentier system)[각주:4]를 부수고 자연과 사회적 가치의 영역을 새롭게 개념화된 총체―여기서 자본은 사회의 집단적 목적에 복무하게 된다―로 재통합하는 데 있다.

 

요컨대 우리는 커먼즈 기반의 민주적이고 공평한 사회를 창출하려면 화폐와 신용의 역할을 다시 상상하고 다시 구축해야 한다. 이는 사람들이 공유된 자원을 공통재로 상상하고 표현하고 창출하는 과정을 통해 커머닝에 그리고 경제적·사회적 협동을 증진하는 데 참여할 수 있도록 금융을 사용함을 의미한다. 이는 기존의 대출의 주된 목적인 개인 자산의 열띤 구매 및 창출과는 매우 다른 정신적 태도이다. 그 핵심은 상호적으로 행하는 과정에 돈을 대는 것이다. 이는 화폐·신용·리스크를 관리하는 (그리고 상호적인 것으로 만드는) 지금과는 전적으로 다른 제도들, 법체계들, 사회적 관행들을 필요로 한다.

 

III. 금융을 변형시키는 아홉 가지의 혁신적 제도형태들

 

그런데 제로에서 시작할 필요는 없다. 좋은 소식은 신용과 리스크가 커먼즈에 복무하도록 새롭게 개념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이전에는 여러 제한된 방식으로 행해졌다. 이미 이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출현한, 매우 다양한 역사적으로 입증된 유망한 사례들이 있다. ‘심층 잠수’는 아홉 개의 금융혁신모델들을 탐구했다.

 

  1. 사회적·윤리적 대출

스페인의 피아레(Fiare)와 이탈리아의 방카 에티카(Banca Etica)와 같은 윤리적 사회적 은행들은 그들의 대부(貸付)가 사회와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활발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은행들은 공정무역운동, 기업의 사회적 책임, 지역에서 어엿한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지역사업들, 기타 협동적·사회적 관심사들과 연관된 대출자들에 집중한다. 방카 에티카는 400개 이상의 지방 정부들과 연결되어 있어 공적 부문 및 공동체 요소를 강력하게 가지고 있다. 이 협동적 은행의 자기자본은 현재 5천2백만 유로인데 3만5천 명의 주주들과 90개의 지역 그룹들이 소유하고 있으며, 이들은 은행의 생산물들과 서비스들을 개발하는 것을 활발하게 도우며 그 사회적 의무에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다.

 

  1. 지역발전 금융기관들

지역발전 금융기관들(Community Development Finance Institutions, CDFIs)[각주:5]은 협동적이고 상호적인 대출을 하는 기관들의 한 종류로서 미국에서 특히 인종차별에 맞서 신용에의 접근을 민주화하는 방법으로서 번성해왔다. 클린턴과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강력한 지원을 받은 덕택에 현재는 1천 개 이상의 사회적 임무에 의해 추동되는 기관들이 공식적으로 지역발전 금융기관들로서 인정되고 있으며, 2-3배가 되는 또 다른 기관들이 공인은 받지 못했으나 유사한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의 자산을 다 합하면 수백억 미국 달러에 달한다. 지역발전 금융기관들은 영국에서도 발전되어 유사한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다.

 

  1. 공공은행들

상업적 은행체제에 의해 가속되는, 호경기와 불경기를 반복하는 경제에 대한 매력적인 대안은 공공은행이다. 공공은행들은 공적 대출 경비를 즉각적으로 내릴 수 있고 이윤을 추출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적 욕구에 부응할 수 있는 자본을 제공할 수 있으며 그런 기획의 이자경비를 줄임으로써 기반시설 투자의 경비를 낮출 수 있다. 그 한 사례가 노스다코타 은행(the Bank of North Dakota)이다. 이 은행은 노스다코타의 60만 명의 주민들에게 10년에 걸쳐 3억 달러 이상의 배당금을 산출하면서도 소기업, 학생들, 농민들에게 낮은 이자의 대부를 제공한다. 1938년과 1974년 사이에 캐나다 은행(the Bank of Canada)도 공공 은행업을 담당하는 지부를 통해 전국 규모로 이런 식으로 영업을 했다. 캐나다에서 가장 큰 기반시설 프로젝트 가운데 일부―예를 들어 쎄인트 로렌스 씨웨이(St. Lawrence Seaway)[각주:6]―도 이런 식으로 재정을 확보했다. 시립은행들을 포함하여 세계 전역에 공공은행업의 좋은 사례들이 많이 있다.

 

  1. 이행지향적 신용

전통적 은행들이 가진 핵심적 문제는 성장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나 시장 금리가 낮을 때에는 허우적거린다는 점이다. 따라서 생태에 대한 의식을 가진 몇몇 공동체들은 성장과 무관한 상황에서도 잘 작동할 수 있으며 탄력 있는 지역 경제를 뒷밭침할 수 있는 신용 및 금융모델을 고안하려고 애쓰고 있다. 스웨덴의 쌈브루켓(Sambruket) 공동체는 자연자원 커먼즈와 이를 보완하는, 지속 가능하게 작동할 금융 커먼즈를 모두 수립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협동조합인 이 공동체는 지역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뒷받침하는 한 방식으로서 크라우드에쿼티 비영리 시스템을 실험하고 있다.

 

  1. 공동체의 기반시설로서의 블록체인 장부

비트코인이 투기에서 하는 역할에 대해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트코인은 그 혁신적인 ‘분산된 원장’ 혹은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로 인해서 금융상의 중요한 전진이다. 이러한 획기적인 시스템은 개방된 네트워크들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개인의 비트코인(혹은 디지털 증명서나 문서)의 진정성을 은행이나 정부기관 같은 제3자 보증인이 없이 확증할 수 있게 한다. 이는 널리 확산될 수 있다.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는 네트워크 플랫폼들에서 사회적 관계를 관리하는 데―예를 들어 디지털 네트워크들에 기반을 둔 ‘분산된 협동조직들’이나 한 집단의 공동 거버넌스를 위한 틀들을 수립하는 데―신뢰할만하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사용자들이 다른 사용자들의 신뢰성이나 신빙성을 확증할 일상적 수고를 덜 수 있다면, 개방된 네트워크 시스템들에서의 교류관계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에 제한이 없게 될 것이다.

 

  1. 보완통화들

<공동체 대장간>(Community Forge, communityforge.net)은 공동체들로 하여금 자신의 지역통화를 창출하게 하고 거래와 구성원들의 계좌를 관리하게 하며 개인 및 집단의 욕구를 선전할 수 있게 하는 소셜 네트워킹 플랫폼이다. 400개 이상의 공동체들이 드루팔(Drupal) 기반의 플랫폼을 사용하여 보완통화들(complementary currencies)을 관리한다. 2014년 말에 <공동체 대장간>은 프랑스에서 550개, 벨기에에서 113개, 스위스에서 63개의 LETS 프로젝트들[각주:7]과 150개의 시간은행들을 지원했다. 흥미로운 대안통화 가운데 하나는 유코인(uCoin)이다. 이는 프랑스에서 암호화폐(cryptocurrency)를 사용하여 기본소득을 시행하려고 하는 기획이다

 

  1. 커먼즈를 위한 크라우드펀딩

가장 혁신적인 크라우드펀딩 기획은 고테오(Goteo)이다. 이는 스페인에 기반을 둔 오픈소스 플랫폼으로서 커먼즈 기획과 원칙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코테오가 일반적인 크라우드펀딩 사이트들과 다른 점은, 프로젝트들을 개선하는 데 대중의 참여를 권유하고 기부자들에게 더 큰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고테오는 400개 이상의 프로젝트들에 재정을 지원했으며 기금마련 목표들을 충족시키는 데 있어서 60-70%의 성공률을 기록했다. 5만 명 이상의 사용자들이 있으며 2011년 창립한 이래 2백만 유로 이상을 모았다.

 

  1. 엔스피랄과 커먼즈 기반의 가상 은행업

엔스피랄(Enspiral)은 뉴질랜드에 본부를 둔, “비즈니스와 테크놀로지의 도구들을 사용하여 긍정적인 사회변화를 만드는” 기업가들·전문가들·해커들의 네트워크이다. 이 기업은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이용하여 새로운 유형의 자원의 집단적 자급(self-provisioning)과 금융을 주관할 새로운 조직구조를 창출한다. 그런 플랫폼 가운데 하나인 ‘my.enspiral’은 엔스피랄 서비스(Enspiral Services)의 프리랜서와 계약자 집단에게 자율성과 유연성을 가진 ‘월드 가든’(walled garden)[각주:8] 내에서 내부 은행업시스템의 사용을 허용한다. 엔스피랄은 또한 공동예산(Cobudget) 플랫폼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참여자들이 기여한 액수에 비례하여 집단적 예산책정에서 돈을 할당할 수 있게 해준다.

 

  1. 협동형 축적을 위한 새로운 조직형태들

몇몇 조직형태들은 ‘협동형 축적’―즉 상호이익을 위한 금융자원의 집단적 축적―의 새로운 형태들을 양성하는 데서 큰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 두드러진 사례가 특히 이탈리아, 캐나다의 퀘벡, 그리고 더 최근에는 뉴욕시에서 발전된(Solidarity NYC) ‘연대(連帶) 경제’(solidarity economy)와 다중이해관계자 협동조합(multi-stakeholder cooperative) 모델이다. 1990년대 영국의 공정무역 운동에서 발전된 협동조합 주식의 발행이 2008년 이래 매우 다양한 지역 및 공동체의 욕구―재생 가능한 에너지의 개발, 지역 상점들의 구제, 공동체에 의한 주점 구입, 지역 식품생산을 위한 토지 획득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를 위한 자본을 모으기 위해 부활되었다. 캐나다까지 확산된 영국의 공동체 주식운동은 어떻게 협동조합 형태의 자기자본(equity capital)이 공통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조달될 수 있는지를 부각시켜 준다.

 

  1. 전진을 위한 전략들

 

참여자들은 전진하기 위한 핵심 전략들 다섯을 아래와 같이 확정했다.

 

  1. 화폐를 민주화하라.

커머너들은 화폐창출체제를 포획하여 공적 목적을 위한 것으로 바꾸고 부채에 기반을 둔 화폐를 대체해야 한다. 아이슬란드 정부는 이 일을 하는 법을 보여주는 2015년 보고서를 낸 바 있다.

 

  1. 현행의 화폐를 넘어서라.

화폐는 (재화의 구매를 위한 가격에 기반을 두어 합의되는) 등가물들의 교환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관계를 증진하고 돈이 없는 사람들을 배제하는 행위들을 증진하는 경향을 가지므로, 많은 커머너들은 커먼즈의 간접적인 상호성을 존중함으로써 ‘화폐 너머’로 나아가고 싶어 하며, 공동체에 더 큰 자결능력을 줄 방법이 될, 상이한 맥락을 가진 상이한 유형의 화폐를 반갑게 맞이하고 싶어 한다.

 

  1. 미래로 돌아가라. (옛 것과 새 것의 혼합)

노동운동 및 좌파 정치와 연관된 옛 협동조합 모델들의 역사적 경험들과 지혜가 젊은 세대들이 발전시키고 있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기반을 둔 새로운 모델들과 혼합되어야 한다. JAK 수수료 기반 은행[각주:9], ‘음의 이자’(negative interest)가 적용되는 감가(減價)화폐(demurrage currency), 대공황 시기에 지역 경제를 촉발하기 위해서 개발한 WIR 통화 같은, 시간의 검증을 받은 많은 모델들이 화폐형태를 혁신하는 데 영감을 주고 있다.

 

  1. 협동형 축적을 위한 시스템을 설계하라.

‘협동형 축적’―즉 상호적으로 사용되고 민주적으로 관리·가동되어 공통의 부를 창출하는 자본 형태들을 발전시키고 유지할 수 있는 금융예비금이나 자산을 축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능력을 가진 새로운 조직 형태들을 (단지 금융제도만이 아니다) 고안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탈리아, 퀘벡, 일본 등지의 다중이해관계자 협동조합들은 커머너들, 협동하는 사람들, 그리고 지속 가능한 공동체 발전을 위해 공생(共生)적 법적 구조들을 발전시키는 방법에 관한 가이드를 제공할 수 있다.

 

  1. 새로운 화폐체제를 커먼즈로 구상하는 거시적 지도를 그려라.

우리는 사람들의 일상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실물 경제’와 기생적 ‘자산소득-금융’이 지배하는 ‘비실물 경제’를 구분해야 한다. 커먼즈 기반의 신용 및 금융 체제의 지도를 거시적으로 그리는 것이 새로운 경제를 구조짓고 작동 가능하게 만드는 관계들을 그려보는 것을 도울 수 있다.

 

다음 단계들

 

위의 목표를 넘어서 더 나아가기 위한 몇몇의 특수한 행동조치들이 확정되었다. 여기에는 다음의 것들이 포함된다 : 이론적·개념적 연구, 정책개발과 확대, 금융 및 커먼즈에 대한 더 풍부하고 광범한 담론의 개발, 협동과 행동주의를 위한 새로운 장(場)의 창출, 새로운 통화들에 대한 실험의 심화, 프로젝트 개발과 커먼즈 제도들을 위한 펀딩. 즉각적인 제안 하나는 나라를 황폐화하는 사회적·경제적 위기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법을 개발해내려고 몸부림치는 시리자와 그리스 민중에게 조언을 해주고 지원하자는 것이었다.

 

결론

 

‘심층 잠수’ 토론은 커먼즈 기반의 화폐체제와 민주적이고 공평한 원칙에 기반을 둔 자본이 전적으로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많은 기존의 혹은 새로 출현하는 모델들이 지배적인 부채 및 이자 체제를 극복할 수 있으며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변형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었다. 어려움은, 그토록 많은 복잡하고 겉보기에 분리된 측면들을 가진 체제 내에서 뿌리와 가지가 모두 바뀌는 근본적인 변화와 이행 제도들의 창출을 실제로 달성하는 데 있다. 현재의 체제를 변형하여 그것을 수용적이고 민주적으로 책임감이 있으며 사회적으로 건설적이고 생태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실제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 토론으로부터 마찬가지로 분명해진 것은, 많은 선택항들이 있으며 이는 양자택일적인 선택이 아니라 공존 가능한 과제들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자 없는 화폐, 부채에 기반을 두지 않는 공공부문 화폐, 여러 공적·사회적·협동적 은행업 형태들의 많은 역사적 사례들 및 현행의 사례들로부터 영감과 지침을 얻을 수 있다. 이 혁신들 각각은 서로 다른 욕구와 기능에 복무한다. 그러나 모두가 서로 보완적이며, 커머너들과 그 공동체들에 공평한 자본 및 기타 윤리적이고 유용한 금융서비스들을 제공할 수 있는 공생적 화폐체제로 통합될 수 있다. 오늘날 가능한 선택항들을 발전시키는 데서 명백하게 존재하는 문제는 기존의 개혁 기획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고 약하게 조직되어 있다는 점이다. 민주적인 동시에 지속 가능하고 인간적인 형태의 발전에 바쳐지는 화폐개혁운동에 활기와 통일성을 부여할 공유된 메타내러티브가 아직은 없다.

 

커먼즈의 원칙과 실제는 변화를 위한 역동적이고 통합된 과제를 수립하는 것을 도울 수 있으며, 많은 튼실한 도구들과 정책 제안들을 활용할 수 있다. 통일성을 부여하는 내러티브 또한 무책임한 민영은행들이 가진, 허공에서 부채 기반의 화폐를 창출하는 힘에 저항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 필수적이다. 국가와 국민은 은행가들로부터 이 주권적 힘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 협동적이고 민주적으로 책임감이 있는 형태의 조직들이 공통의 이익에 복무하는 실천들을 보호·유지하고 파수(把守)할 수 있는 가능한 대안적 사회구조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들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엄청난 압력행사가 필요하다. 화폐는 민주화되어야 한다. 부채의 구속은 폐지되어야 한다. 협동적 금융, 은행업, 그리고 공적으로 생성되는 통화의 새로운 체제들이 수립되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만 커먼즈는―특권을 가진 소수의 이익을 위해 종획되고 수탈되는 것이 아니라― 보호되고 증진되며 모두에게 복무하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 ‘Equity crowdfunding’(지분투자형 크라우드 펀딩)과 같은 말이다. ‘equity’(지분)를 크라우드펀딩 방식으로 투자자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 월급을 기반으로 한 소액의 대출을 가리킨다.
  • 조폐공사에서 지폐를 찍어내기 때문에 화폐를 조폐공사에서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지폐는 개념상으로 화폐가 아니라 화폐가 존재하는 한 양태이다. 은행에서 누군가에게 대출을 할 때, 대출자의 저금통장에 찍히는 대출금만큼 은행은 화폐를 만들어낸 것이 된다. 대출자는 이 화폐를 지폐로 교환할 수도 있고 다른 계좌로 이체할 수도 있다.
  • ‘rentier’(자산소득자)는 영어 위키피디아는 “특허, 저작권, 이자 등에서 파생되는 소득을 받는 사람 혹은 법인”(a person or entity receiving income derived from patents, copyrights, interest, etc)이라고 설명하고 옥스퍼드 사전은 “재산이나 투자로부터 소득을 끌어내는 사람”( A person who derives his or her income from property or investment)이라고 설명한다. 어떻든 생산에 직접 참가하는 기업가 유형의 자본가는 여기에서 배제된다. 
  • 웹을 검색해보니 ‘지역개발 금융기관’, ‘지역사회발전 금융기관’, ‘커뮤니티개발 금융기관’ 등 여러 가지가 번역어로 쓰이고 있다(띄어쓰기는 고려에서 배제하고). 나는 길이를 좀 줄이고 ‘개발’이 주는 어감이 싫어서 ‘발전’을 택했다.
  • ‘St. Lawrence Seaway’는 캐나다와 미국에서 바다를 오가는 배들이 오대호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갑문, 운하, 수로들로 이루어진 시스템이다. ‘쎄인트 로렌스’는 온타리오 호수에서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가는 강의 이름이다.
  • LETS : 지역교역시스템(local exchange trading system)은 지역 주도로 민주적으로 조직된 비영리 공동체 기업이다. 공동체 정보서비스를 제공하며 지역에서 만들어낸 통화를 사용하여 재화 및 서비스 거래를 기록한다. (Wikipedia)
  • 이는 클로즈드 플랫폼(closed platform)의 다른 이름이다.
  • 스웨덴의 협동조합형 은행이다. ‘JAK’은 고전 경제학에서 세 개의 생산요인인 토지, 노동, 자본을 의미하는 스웨덴어 ‘Jord Arbete Kapital’의 앞 자를 딴 것이다. 관리 및 개발 비용은 회비와 대여 수수료로 지불한다.

 




부채냐 민주주의냐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2016년 4월 1일 게시글 “Mary Mellor’s “Debt or Democracy”: Why Not Quantitative Easing for People?”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금융 용어는 전문적으로 사용되는 것과 다르게 옮겨졌을 수 있다. 밑줄과 글자 배경색은 옮긴이의 것이다.

 

메리 멜러의 “부채냐 민주주의냐”―왜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는 없는가?

 

“화폐를 찍어내는” 정부들이 모든 새로운 화폐의 원천이라고 널리 생각되고 있지만 사실은 이른바 민영부문이 유통되는 대부분의 새로운 화폐의 원천이다. 우리 시대에 커먼즈를 종획한 가장 성공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는, 상업적 금융기관들이 자신들의 재량으로 행하는 대출을 통해서 대부분의 새로운 화폐를 창출하는 힘을 장악한 것이다. 이 힘은 매우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일반화되어서 거의 아무도 상업적 대출이 창출되는 ‘새로운 화폐’의 95% 이상을 차지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공적 이익을 위해서 화폐를 창출하는 권한을 발휘하는 엄청난 힘을 사실상 포기해버린 것이다.

 

아마도 현재의 화폐체제를 개혁하는 데 주도적인 주창자는 영국 노섬브리아 대학(Northumbria University)의 명예 교수이며 최근에 출판된, 우리의 눈을 열어주는 책 『부채냐 민주주의냐―지속 가능성과 사회적 정의를 위한 공적 화폐』(Debt or Democracy: Public Money for Sustainability and Social Justice, Pluto Press, 2015)의 저자인 메리 멜러(Mary Mellor)일 것이다.

 

멜러는 최근에 영국 신문인『더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의 특집면에 글을 기고하여 그녀의 책의 핵심 테마들 가운데 일부를 요약했다. 그녀의 글은 “핸드백 경제의 신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 신화는 정부 예산이 가구의 예산에 비견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반을 둔다. 이 생각이 화폐공급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왜곡시키며 불가피하게 정부들로 하여금 재정긴축정책을 채택하도록 한다고 멜러는 말한다.

 

지난 해 9월 열린 한 정책워크숍에서 멜러는, 사람들이 잘 묻지 않는 중요한 정치적 물음은 ‘누가 화폐의 창출과 유통을 통제하는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녀는 정부가 주권자로서 새로운 화폐를 발행할 권한을 가진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권한은 ‘화폐주조세’(seigniorage)라고 알려진 오래된 권한이다. 그러나 실제로 정부들은 이 권한을 상업적 은행업 부문에 양도해버렸으며 이 부문에서 이루어지는 대출이 부채로서 유통되는 거의 모든 화폐를 창출하게 된 것이다.

 

은행들은 새로운 대여를 행함으로써 허공에서 화폐를 창출한다. 은행들은 대여하는 특정 액수의 화폐를 수중에, 금고실에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단지 ‘준비제도’(reserve banking)[각주:1] 기준이 요구하는 대로 대여되는 돈의 총 액수의 일부만을 가지고 있으면 된다. 이런 식으로 은행대출은 엄밀하게 사적이고 상업적인 기준―즉 대출받는 사람의 부채 상환능력에 대한 은행의 평가―에 기반을 두어 경제에 새로운 화폐를 말 그대로 공급한다.

 

멜러는 공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공적 통화의 힘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공적 통화’라는 말로 그녀가 의미하는 것은 “중앙은행과 정부지출에서 기원하는 공적 화폐 회로를 통해 창출되는,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승인된 공적 통화”이다. 사적으로 창출된 통화는 공적 통화라고 불리지만 은행 부문을 통해 대여의 형태로 발행되는 화폐이다. 은행가들이 대출을 할 때 공적 통화를 창출하며, 이로 인해서 국가는 은행들이 위기에 빠질 때 그 화폐의 유효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의 실정이다.

 

멜러는 화폐에 대한 이러한 단순하고 이기적인 이해를 ‘핸드백 경제’라고 부르는데, 이는 영국의 신자유주의자 수상인 마가렛 대처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유명한 핸드백을 빗댄 것이다. “핸드백 경제에 따르면 공적 화폐란 것은 없으며, 공적 화폐란 것이 있다 해도 그것은 사립은행들을 통해서 말고는 창출될 수 없다”고 멜러는 말한다.

 

화폐를 창출하는 정부들의 어리석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은행가들은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이 “화폐를 찍어냈던” 때 그 결과로 일어난 파멸적 인플레이션을 반사적으로 거론한다. 정부들은 정당하게 화폐를 발행하거나 부를 창출할 수 없으며 이는 은행 신용 혹은 대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 등등이 이들의 생각이다. 따라서 애초에 조세를 통해서 화폐를 모으지 않고 일어나는 공적 지출은 모두 무모한 ‘적자 지출’이라는 지탄을 받는다. 멜러는 사실 정부들은 항상 세수(稅收)에 앞서 미리 지출을 한다고 말한다. 국가들은 먼저 지출하고 나중에 세금을 거둔다는 것이다. 만일 국가들이 먼저 세금을 거둔다면, 적자는 결코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은행과 화폐에 대하여 시중에 퍼져 있는 일반적인 이야기 또한, 민영은행들이 계속 움직일 수 있도록 정부들이 으레 민영은행들에 ‘기본 화폐’를 공급한다는 사실을 편리하게 무시한다고 멜러는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시기에 매우 극적인 형태로 목격했다. 미국 정부는 수천 억 달러의 돈을 허공에서―‘공적 화폐’로서―창출하여 은행들에 구제금융을 제공하여 은행들이 (그리고 전지구적 경제가) 붕괴되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민영은행 시스템의 배후에 있는 것은 부채로부터 자유로운 공적 통화를 창출하는 공적 능력이다. 이는 부채 거품이 터지고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 사태)이 경제를 멸망시킬 위험을 보일 때마다 계속해서 입증되고 있다. 국가가 항상 최후 수단의 제공자로서 개입하게 된다. “모든 형식적 화폐체제들은 본질적으로 공적이며 공적 신뢰와 공적권한에 의존한다”고 멜러는 말한다.

 

이것이 멜러에게 흥미로운 점을 불러일으킨다. 왜 상업적 은행 부문이 공적 부문에 기생하도록 허용되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시민으로서 그리고 납세자로서 민영금융체제로 하여금 공적 부문을 통제하도록 허용하는가? 멜러는 민영은행들에 납세자들의 돈으로 구제금융과 보조금을 제공하는 것에 대한 명백한 응답은 “화폐를 창출하는 민주적 권리를 행사하고” 그것을 공적 목적에 부응하도록 사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매우 이단적인 생각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목을 컥컥대고 커피를 쏟으며 말도 안 된다고 외칠 것이다. (『인디펜던트』지의 멜러 글에 달린 댓글들을 보라.) 그러나 멜러는 위에서 언급한 워크숍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화폐를 창출하는 힘은 주권자들에게서 상업 부문으로, 지배계급에서 상인계급으로 이동했다. 필요한 것은 이 힘을 공공으로 이전시키는 것이다. 중앙은행은 부채로부터 자유로운 화폐창출이라는 주권적 특권을 국민의 이익을 위해 공적 자원으로서 국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화폐가 민주화되어야 한다. 특히 만일 우리가 사회적으로 정의롭고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자원조달체계(socially just and ecologically sustainable provisioning systems)―‘경제’보다 훨씬 더 나은 개념이다―를 창출하기를 원한다면 더욱 그렇다.

 

민주화된 화폐’라는 이 새로운 방향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화폐를 창출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바꾸어야 한다. 이는 현재 이해되고 있는 바처럼 ‘적자 지출’―즉 은행들에 상환되어야 하는 화폐―로 구성되지 않는다. 다 따지고 보면 정부의 화폐 창출은 공적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한 주권자의 특권이다. 중앙은행들이 문제가 많은 상업적 은행들을 구하기 위해서 이용하는 ‘양적 완화’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명목상으로는 공적 목적을 위한다는 의도를 가진 공적 통화의 발행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민영사업에 제공하는 보조금이었던 것이다.

 

재미있게도 우리는 그런 경우에는 정부가 “화폐를 찍어낼” 위험에 대하여 많은 은행가들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만일 상업적 민영금융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공적 화폐를 창출하는 것(‘양적 완화’)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 (그리고 환경, 기반 시설 등등을 위한 양적 완화) 또한 가능하고 책임 있는 정책의 하나로서 선택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왜 정부가 부채를 지지 않는 공적 통화가 모든 종류의 공적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창출될 수는 없는가?

 

멜러는 문제가 주로 이데올로기적 프레임 씌우기의 문제라고 설명한다. ‘핸드백 경제’의 옹호자들은 우리가 화폐를 순전히 상업적 자산으로서 간주하고 공적 자산으로서 간주하지는 말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화폐창출이 주로 민영은행들의 사적인 이윤생성(대여)을 통해 이루어지고 공적 목적에 복무하는 방식으로 정부를 통해 이루어지지는 말 것을 요구한다.

 

멜러는 “좌우를 막론하고 논평자들은 대체로 화폐의 민주적 잠재력을 무시한다”고 탄식한다. “그들은 ‘실물 경제’에 초점을 두는데, 이것이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적으로 생산적인 부문으로 간주된다. 화폐는 능동적이고 정치적으로 건설적인 동인으로서 간주되어야 하는데도 이차적 측면으로 간주된다. 모든 화폐는 그 보유자에게 권리를 나타내는 신용이다. 그러나 모든 화폐가 부채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선진국의 국민경제에서 화폐의 95% 이상은 은행계좌에 들어있고 소량만이 현금(동전, 지폐)으로 유통되기 때문에, 민영 부문의 부채 기반 화폐가 의문의 여지가 없는 규범인 듯이 인식된다. 그러나 멜러는 화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다시 개념화하는 것이 전적으로 필요하다고 한다. 화폐를 정부가 은행으로부터 빌려야 하는 어떤 것으로 보지 말고, 사회적으로 필요한 지출을 우선시하는, 조세수입이 선행되지 않는, 부채로부터 자유로운 통화의 공급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적자’가 날 필요가 없다. 화폐는 단순히 새로운 화폐의 공적 원천을 재현할 뿐이다. 이는 민영은행들이 이미 수행하는 기능이다. 차이는, 공적 통화들은 이자가 없고―민영 대출자들의 상업적 우선권이 아니라―민주적으로 결정되는 욕구를 지원한다는 점이다.

 

멜러는 현재의 화폐 체제와는 다른 논리에 따라 작동하는 ‘공적 화폐 회로’(public money circuit)의 존재에 대한 인정을 요구했다. 상업적인 금융 회로―여기서는 화폐가 상환되어야 할부채로서 창출된다―에 의하여 창출되는 화폐와는 달리, 공적 화폐 회로는 부채가 없는 화폐를 창출할 수 있다. 상환에의 유인(誘因])은 없다. 요구되는 것은, 그 화폐를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서―과세를 통해서,[각주:2] 정부 서비스에 경비를 지불하게 함으로써, 혹은 대중에게 투자기회를 제공함으로써―공적 회로로 충분하게 되돌려보내는 것이다.

 

이 목표를 위해 적절한 정책들을 수립하는 것은 공적 토론의 문제가 되리라는 데 멜러는 동의한다. 그녀는 “인플레이션의 압박을 피하면서도 모든 상업적이고 공적인 지불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기에 충분한 양을 남기기 위해” 회수되어야 하는 화폐의 전반적인 양을 평가하는 권한을 가진 독립적인 기관을 상상한다.

 

멜러의 생각은 오늘날 거대한 호소력을 가지지만, 우선 널리 이해되어야 하며 충분한 견인력을 가지는 정치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이 생각이 가진 큰 미덕 가운데 하나는, 이윤을 추구하는 상업적 금융이 고이윤·고부채 기준에 우선적으로 맞을 때에만 황송하게도 새로운 화폐를 창출해주시는 이런 시대에, ‘민주적 화폐’가 모든 종류의 공적 욕구를―특히 생태적·사회적 욕구를―충족시키는 자금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는 블로그의 글로는 감당할 수 없는 매우 긴 이야기이다. 그래서 나는 메리 멜러의 매력적인 책 『부채냐 민주주의냐』를 독자들이 추적하기를 추천하는 것이다. [이 글의 일부 내용은 워크숍 보고서인 「민주적 화폐와 커먼즈를 위한 자본」(“Democratic Money and Capital for the Commons”)에서 따왔다.] ♣

 

  • 부분지급 준비제도(fractional reserve banking) 
  • 멜러는 자신의 저서 『부채냐 민주주의냐』 3장에서 이 경우 세금이란 상업적 화폐 회로에서와 같은 금융도구(개인, 가구, 회사로부터 공공부문이 지출할 돈을 세금으로 거두는 것)가 아니라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화폐를 유통에서 회수하는 도구라고 한다. 납세자에게도 상황이 달라지는데, 이제는 어렵게 일하는 가구들이 어렵게 번 돈을 세금으로 내는 것이 아니라, 공적 혜택(의료비, 교량 건설, 환경사업 등)을 창출하는 일을 마친 화폐가 귀환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리자의 실패가 주는 교훈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2016년 4월 6일 게시글 “Lessons from SYRIZA’s Failure: Build a New Economy & Polity”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시리자의 실패가 주는 교훈 ― 새로운 경제와 정치체의 구축

 

지난 해 그리스 정부를 이끌어 채권자들 및 유럽의 거대 세력과 맞서는 일에 선출된 좌파연합당 시리자(SYRIZA)는 신자유주의와의 큰 대결에서 패배했다. 그리스는 사기를 저하시키는 더 깊고 위험한 사회적·경제적 위기에 빠졌으며 이는 시리아 난민들의 유입으로 더 악화되었다.

 

그렇다면 시리자의 경험이 경제적·사회적 변형을 가져올 민주적 정치의 잠재력에 관하여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시리자의 당원이었으며 그 중앙위원회와 정무비서실에 속했던 안드레아스 카리치스(Andreas Karitzis)는 OpenDemocracy.net에 올린 글 「‘시리자의 경험’―교훈과 응용」(“‘The SYRIZA experience’: lessons and adaptations”)에서 풍부하고 예리한 분석을 제공한다. 이 글은 왜 시리자가 실패했는지를 설명하는 명민하고 힘들게 얻은 정치적 통찰들과 사회변형에 필요한 미래의 전략들을 활기 있게 제시하고 있다.

 

시리자는 기존의 정치구조들과 절차들 내에서 움직이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적을 중지시키는 데 실패했다고 카리치스는 주장한다. 시리자의 생각과 달리 단장(斷腸)의 드라마가 보여준 것은, 국가 주권이 국제적 금융 세력에 의해 압도당하면 기존의 정치는 무용하다는 점이었다. 시리자가 결국 트로이카[각주:1]와의 협상을 받아들인 것은 “금융독재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과 민중계층의 희망과 열망을 드러냈다는 주장도 가능하지만”[각주:2] 이제 카리치스는 좌파에게 새로운 ‘운영 체제’ 혹은 몇몇 사람들이 ‘플랜 C’라고 부른 것을 개발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우리는 여러 민주적 제도들에 한때 깃들어있던 민중의 힘이 소진되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엘리트들로 하여금 결정적 의사결정들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용인하게 만들 충분한 힘이 없다. 똑같은 일을 계속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전투의 지형이 이동하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전략이 붕괴했다면 위태위태한 전투지형에서 더 능력을 갖추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지형을 다시 형성해야 한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적 관심을 대의정치에서 경제적·사회적 힘을 생산하는 자율적 네트워크의 수립으로 이동함으로써 해결공간(solution space)을 확대해야 한다.

 

이 새로운 해결공간은 어떤 것이 될 것인가? 카리치스는 우리가 “‘커먼즈’와 같은 개념들을 평가하고 탐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회적 경제와 협동적 생산활동의 역동적이고 탄력적인 네트워크들, 대안적 금융 도구들, 지방자치 중심지들, 민주적으로 기능하는 디지털 공동체들, 기반시설·에너지체계·분배네트워크들과 같은 기능들에 대한 공동체의 통제를 위한 강한 중추의 형성”을 그린다. “이것이 엘리트들이 우리 사회의 기본적 기능들을 통제하는 데 맞서기 위해 필요한 정도의 자율을 획득하는 방법이다.”

 

카리치스의 분석은, 명목적으로만 민주적인 제도들에 대한 신뢰가 곤두박질치고 있으며, 엘리트들이 자유롭게 법의 지배(법치)를 농락하고 (파나마 문건을 보라[각주:3]) 관료들이 약탈적이거나 무능한, 세계의 다른 모든 곳에 대해서도 명백한 연관을 함축한다.

 

이제 그리스의 (그리고 다른 곳의) ‘좌파’는 신자유주의적 긴축 정치의 실행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 대가로 도덕적 신망을 잃고 있기 때문에, 극우가 기꺼이 채우고자 하는 빈 공간이 열린다. “민족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이 민중의 분노와 원망의 유일한 ‘자연 숙주’(natural hosts)로서 남았다”라고 카리치스는 쓴다. 서구 민주주의를 가로질러 불어오는 메마른 바람은, 민주적 거버넌스를 억압하면서 사회적 비참을 유발하는 데 대해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는 무자비한 신자유주의적 과두세력으로부터 온다.

 

카리치스에 따르면, 이것이 사실상 민중의 절망의 핵심 원인이며, 좌파가 철저하게 새로운 전략적 접근법을 채택해야 하는 이유이다. “신자유주의적인 유럽연합과 유로존은 한때는 민족국가에게 속했던 것처럼 보이는 일련의 중요한 정책들과 힘을 민중의 힘이 미치는 범위 바깥으로 옮겨놓았다······선출된 정부는 더 이상 정치권력의 주된 담지자가 아니다. 그리스의 경우 민주적으로 선출하여 어떤 정부를 구성한다는 것은 금융 대부자들이 대(大)파트너들인 더 큰 규모의 정부에서 소(小)파트너들을 선출하는 것과 같다.”

 

시리자는 “엘리트들이 촉발한 싸움의 확대를 고려할 수 있는 우리의 힘을 다시 결집하고―미래에 신자유주의의 지배에 도전할 수 있는 자원을 구축할 더 효과적이며 탄력적인 ‘민중전선’을 형성”하려고 시도하기 위해서 ‘전술적 후퇴’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고 카리치스는 주장한다. 아쉽게도 시리자는 트로이카와의 협상을 시도하였고 실패했다.[각주:4] 이것이 주는 명확한 교훈은 “금융 독재와 민주주의 및 존엄 사이에는 그 어떤 절충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라고 카리치스는 결론짓는다.

 

선거정치를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기만하여 선거정치가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을 전복하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 때문에 전진하기 위한 전략적으로 가장 뛰어난 방법은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안적인 사회적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서 나올 것이다. 커먼즈 운동, 사회연대경제, 피어 생산 운동, 이행 운동, 탈성장 운동 및 기타 탈자본주의 운동들의 공동의 기획을 통해서.

 

카리치스의 글은 현재 진행되는 그리스의 트라우마에 대한 우울한 분석이다. 그러나 명민하고 분별력 있으며 전략적인 글이다. 좌파에게는 미래의 엄한 선택이 남겨지는 듯하다. “21세기의 불길한 전장으로 진입하면서, 좌파는 인간 사회를 방어하는 데 적절하거고 유용하게 되거나 아니면 노후하게 될 것이다.” ♣

 

  • the European Commission, the European Central Bank (ECB) and the 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
  • 볼리어가 이 대목을 부각시키고 그 직후의 대목을 생략한 것이 다소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시리자가 “민중계층의 희망과 열망을 드러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고 한 것은 일종의 양보절이다. 카리치스가 진정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다음에 한 말로서―볼리어는 이것을 생략하고 그 다음으로 넘어간다―시리자가 권좌에 남아있음으로써 자신들이 행한 반란을 ‘정상화’하였으며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이것이 곧 시리자의 패배인데, 이로써 시리자는 민중으로부터 대의정치라는 도구를 박탈했고 (볼리어도 나중에 언급한) ‘전술적 후퇴’의 가능성을 박탈했다는 것이 카리치스의 생각이다.
  • 파나마 문건(영어: Panama Papers 파나마 페이퍼스)이란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폭로한 파나마 최대 로펌 모색 폰세카의 돈세탁 관련 자료이다. (위키피디아)
  • 신자유주의를 실행하는 좌파 정당이 된 것이 바로 실패의 핵심 내용이다. 



안드레아스 베버의 “경이의 생물학” ― 진화와 커먼스의 힘으로서의 생동성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2016년 2월 25일 게시글 “Andreas Weber’s “Biology of Wonder”: Aliveness as a Force of Evolution and the Commons”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안드레아스 베버의 “경이의 생물학” ― 진화와 커먼스의 힘으로서의 생동성

 

사오년 전에 안드레아스 베버를 만났을 때, 나는 다윈주의의 정통 견해들에 도전하는 그의 대담함에 놀랐다. 그는 매우 근본적이지만 아직 설명되지 않고 있는 현상인 ‘살아있음’(aliveness)을 과학이 연구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삶(생명)이 세련된 진화하는 기계들의 집합이며 각자의 기계들은 자연이라는 자유방임적 시장에서 우위를 획득하기 위해 최대의 효율성을 가지고 무정하게 경쟁하고 있다는 신다윈주의적 설명을 거부한다. (이 주제에 관해서 더 알고 싶으면 ‘살림’Enlivenment에 대한 베버의 환상적인 에세이를 참고하라.)[각주:1]

 

베버는 풍성한 과학적 연구 자료를 활용하여 진화에 대한 기존의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개략적으로 제시하는데, 이 이야기에서는 살아있는 유기체들이 (경쟁과 협동을 공히 행하는 투쟁의 과정에서) 본래적으로 표현적이고 창조적이다. 베버의 주장에 따르면, 진화의 드라마의 핵심은 모든 살아있는 체계들이 자신들의 개별성을 펼쳐가면서 자신들이 느끼고 경험하는 것을 표현하고 세계에 적응하려는, 그리고 세계를 바꾸려는 탐구적 노력이다.

 

몇 개의 에세이들과 대중강연들을 제외하면, 베버의 글들의 대부분은 그의 모국어인 독일어로만 접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핵심적 아이디어들의 일부가 이제 영어로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짜릿한 기쁨을 준다. 뉴쏘싸이어티 출판사에서 막 출판된, 그의 서정적이면서도 과학적으로 엄밀한 책인 『경이(驚異)의 생물학―생동성, 의식, 그리고 과학의 변신』(Biology of Wonder: Aliveness, Consciousness and the Metamorophosis of Science)을 읽어보기 바란다. (사실을 말하자면,[각주:2] 원래의 독일어 글을 베버가 직접 번역한 ‘원산 영어’를 개선하도록 베버를 돕는 데서 나도 좀 역할을 했다.)

 

미래의 역사가들은 나중에 이 책을 생물과학에서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온 이론과 연구를 공고히 하고 설명하는 획기적 성취로서 돌아볼 것이다. 『경이의 생물학』은 로크, 홉스, 아담 스미스 같은 정치사상가들이 제공한 문화적 틀이 어떻게 생물학 연구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설명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표준적인 다윈주의 생물학 서사가 어떻게 자연선택 및 기계로서의 유기체에 대한 생각들을 인간 사회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투사했는지를 설명한다. 다윈주의와 ‘자유 시장’은 함께 성장했던 것이다.

 

베버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상황이 이제는 바뀌고 있다.

 

19세기 이래 자연에서 정서를 축출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노력을 했던 생물학은 이제 감정을 삶의 토대로서 재발견하고 있다. 지금까지 연구자들은 유기체들의 구조와 행동을 발견하고 싶은 열의로 인해 유기체의 내적 실재라는 문제를 얼버무려왔다. 그러나 오늘날 생물학자들은, 유기체가 어떻게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산출하며 발달경로들을 해부하려 할 뿐만 아니라 다시 상상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수많은 새로운 세부적 사실들을 배우고 있다. 생물학자들은, 테크놀로지가 미시적 수준에서 삶을 연구할 수 있게 하면 할수록 삶의 복잡성과 지성의 증거가 더 강해진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유기체들은 여기저기서 기계적 조각들을 모아 조립한 시계들이 아니다. 유기체들은 강력한 힘에 의해 통합되어 있으며 무엇이 자신들에게 좋고 나쁜지를 느끼는 통합체들이다.

 

진화의 거대 서사에서 감정, 정서, 도덕성, 심지어는 영성(靈性)(spirituality, 정신성)도 중요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랫동안 내버려져 있었다. 그런 경험들은 일반적으로 우주에서 벌어지는 주된 행위―진화를 진전시키는 냉혹한 수단인 추잡하고 무자비한 경쟁―에 비해 사소한 여흥 정도로 치부되어져 왔다. 실로 근대에 들어와서 ‘적자생존’이라는 생각은 ‘자유 시장 경제’에 대한 우리의 문화적 사고와 실질적으로 결합되었다.

 

베버의 과학자로서의 놀라운 주장은, 생물학이 살아있는 체계들을 마치 그것들이 유전적 청사진에 의해 (이러저러한 정도로) 추동되는 ‘작은 기계들’인 양 연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생물학은 감정 자체의 연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베버는 말한다. 그러나 이 증거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생물학이 먼저 계몽적 사고의 핵심적 전제들을 벗어던지고 살아있는 체계들을 다른 렌즈를 통해 보기 시작해야 한다.

 

현재 생물학은 분석의 주된 단위로서 개체에 특권을 부여하며, 명확한 인과관계 패턴을 찾는다. 생물학은 매우 짧은 시간 동안만 존재하는 우리의 소용돌이치는 내적 감정들, 의식, 의미 감각을 망각되어도 좋은 현상으로 본다. 비합리적이고 비가시적이며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그런 감정들은 측정될 수 없고 합리성과 무관하기 때문에, 우주의 거대한 지리-물리학적이고 생-물리학적인 힘들에 비해 사소한 것으로 상정된다.

 

이 책에서 베버는 “세포 수준에서 복잡한 인간 유기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에서 주관적 감정이 근본적인 동력”임을 균형 잡힌 확신을 가지고 논증한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인간을, 다소 설명 불가능하게 정신, 영혼 등으로 알려진 어떤 주체적 ‘x 인자’를 동반하는 생물학적 기계로서 이해해왔다. 그러나 이제 생물학은 주체성을 자연 전체에 걸친 근본적인 원리로서 발견하고 있다. 생물학은 박테리아 세포, 수정란, 저습지의 선충류(線蟲類)와 같은 가장 단순한 생명체들도 가치에 따라 행동함을 발견한다. 유기체들은 그들이 마주치는 모든 것을 그것이 그들의 육화된 자아의 더 나아간 정합성에 대해 가지는 의미에 따라 평가한다. 고도로 구조화된 질서를 연속적으로 유지하는 세포의 자기생식조차도 우리가 세포를 목표를 지속적으로 좇는 행위자로서 인식할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새로운 시점(視點)을 ‘시적 생태론’(poetic ecology)이라고 부른다. 감정과 표현을 유기체들의 실존적 실재의 필연적 차원들로 간주하기 때문에, 즉 단순한 부수 현상이라거나 인간 관찰자의 편견이라거나 아니면 기계 안의 유령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들의 실재에서 우리에게 필수적인 측면들로 보기 때문에, ‘시적’이라고 부른 것이다.

 

삶에 접근하는 방식을―과학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다시 짜면서 이 책은 계시의 힘을 얻기 시작한다. 그는 접근 가능한 생물학 연구 보고들을 그 자신이 일인칭으로 풀어내는 통쾌한 이야기들과 결합시킨다. 늑대들, 깊은 숲 및 기타 자연현상들과 마주치는 이야기들이다. 독자는 깨닫기 시작한다. 당연하게도 근대정신의 이원론은 환원적이고 방향이 잘못 되었음을. 당연하게도 우리는 모두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서로 그리고 인간 외부의 세계와도 또한 경험적이고 주체적인 방식으로 소통한다는 것을.

 

베버는 자연 세계가 생물학적 기계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을―과학적 사실로서―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우리에게 청한다. 자연 세계는 살아있는 창조적 행위자들의 감각적이고 맥동치는 망(網)이라는 것이다. 우리를 ‘자연’으로부터 떼어놓고 자연을 타자로서 따로 분리하는 정신적 경계들을 우리가 일단 녹여버릴 수 있으면, 우리는 다른 살아있는 존재들과, 그리고 살아있는 지구와 항상적이고 역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보기 시작할 수 있다.

 

철학자 토머스 베리(Thomas Berry)는 이 점을 “우주는 객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주체들의 친교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잘 표현했다. 환경 윤리를 발전시키는 것은 새로운 정책들을 입안하는 것 이상의 것이다. 그 핵심은 세상에 살고 있는 인류 자체를 다시 상상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관적 감정과 경험이 중요하다는 생각, 그것들이 생태론적으로 의미심장하다는 생각은 몇 가지 놀라운 결론들에 이르게 한다. 베버는 이렇게 쓴다.

 

만일 감정이 물리적 힘이고, 이 감정의 표현이 물리적 실재이며 이 실재의 의미가 유기체에게 행동의 동기를 부여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바이오영역(biosphere)에서 일어나는 일이 어떤 점에서는 예술적 표현을 닮은 것으로 상상할 때 살아있는 존재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또 다른 흥미로운 귀결이 나온다. 예술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더 이상 아니며, 오히려 예술은 우리 안에 가득한 삶의 목소리인 것이다. 아름다움이 아무런 기능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 메시지가 아니다. 아름다움은 오히려 실재의 본질이다······ 감정은 결코 비가시적이지 않다. 그것은 특정의 모습을 띠며 자연 어디에서나 형태로서 발현한다. 따라서 자연은 아직 펼쳐지지 않은 감정으로서, 우리 앞에 그리고 우리 사이에 있는 살아있는 실재로서 간주될 수 있다.

 

이 논리는 우리를, 합리적 개인을 지고의 존재로 간주하는 계몽주의 윤리의 한계를 보게 해준다. 이제 우리는, 감정을 가진 신체들이 다른 마찬가지로 감정을 가진 신체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 그리고 살아있는 유기체들의 주관적 감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새로운 생태론적 윤리의 토대이다. “느끼는 신체가 모든 도덕성의 그라운드 제로이며, 모든 좋고 나쁜 것의 기원이다”라고 베버는 말한다.

 

『경이의 생물학』은 커먼즈에 대한 이해와 깊은 함축된 연관을 가진다. 만일 감정이 결코 비가시적인 것이 아니며, 자연 어디에서나 형태를 띠고 발현된다면, 그렇다면 커먼즈가 우리의 생동성(살아있음)을 재발견하기에 가장 좋은 길일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상호관계를 더 해독 가능하게 만드는 길이며 전체(the whole)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길이다. 베버는 이렇게 말한다.

 

생태론적 커먼즈에서는 상이한 개인들과 다양한 종들로 이루어진 다중이 서로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경쟁과 협동, 동업관계와 약탈, 생산과 파괴. 그런데 이 모든 관계들은 하나의 상위법을 따른다. 길게 보면 전체 생태계의 생산성을 허용하며 그 자기생산을 차단하지 않는 행위만이 증폭된다는 법이다. 개체는 전체가 스스로를 실현하는 조건에서만 스스로를 실현할 수 있다. 생태적 자유는 이런 형태의 필연성을 따른다. 체계 안의 연관들이 깊어질수록, 그 체계는 거기 속한 개체들에게 더 많은 창조적인 생태적 지위들을 제공할 것이다.

 

이런 윤리는 이미 다양한 커먼즈들 내에서 작동하고 있다. 오픈소스 프로그램 GNU/리눅스의 한 버전인 우분투(Ubuntu)의 이름은 말 그대로 보면 ‘인간-됨’(human-ness)을 의미하는 반투(Bantu)어 단어에서 왔다. 그 정신은 또한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짧은 블로그 글로는 이 중요한 책의 풍요롭고 자극적인 통찰들을 제대로 다룰 수 없다. 『경이의 생물학』에는 매력적인 과학적 발견들과 베버 자신의 ‘바이오시적인’(biopoetic) 감성들이 가득하지만, 그는 자신의 학식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축축한 감상성으로 빠지지도 않는다. 그는 새로운 유형의 과학의 옹호자이다. 일인칭 주체성의 중요성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과학이다.[각주:3] 진지한 경험주의는 적어도 이만큼을 요구하는 것이다.

 

삶의 본성 자체에 대한 이 지극히 창의적인 명상은 시적인 동시에 과학적이다. 이것이 바로 요점이다. 앞으로『경이의 생물학』이 우리의 육화된 자아들 내에 세워진 오해의 벽들을 허무는 일을 돕기를 바란다. ♣

  1. 이 블로그에 번역되어 있다. http://minamjah.tistory.com/86 그런데 베버의 에세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볼리어의 소개글이다. 베버의 에세이는 다음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http://www.boell.de/en/2013/02/01/enlivenment-towards-fundamental-shift-concepts-nature-culture-and-politics
  2. 볼리어는 사실 “full disclosure”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는 소프트웨어의 취약점 분석을 가능한 한 빨리 발표하는 것을 가리키는 컴퓨터 용어인데, 왠지 이런 맥락에서는 ‘깔때기를 대자면’으로 옮기고 싶은 충동이 든다^^ 볼리어가 자신의 기여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3. 볼리어나 베버가 어느 정도 이것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푸꼬가 말년에 한 철학 작업의 주요 테마 가운데 하나가 ‘주체성의 일인칭 형태의 진실 말하기’이다



반란적 상상력의 부상

* 아래는 지난 글 「’도시를 구축하라’―예술, 문화, 커머닝의 중대한 역할」(http://minamjah.tistory.com/111)에서 소개한 글모음집 『도시를 구축하라―커먼즈와 문화를 보는 관점들』(Build the City: Perspectives on Commons and Culture)에서 이자벨 프레모(Isabelle Fremeaux)와 존 조던(John Jordan)의 롭 홉킨스(Rob Hopkins)와의 대담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대담은 원래 https://www.transitionnetwork.org/blogs/rob-hopkins/2015-04/isabelle-fr-meaux-john-jordan-and-rise-insurrectionary-imagination에 올려져있다. 이 웹사이트의 텍스트들은 일부를 제외하면 (이 글은 이 ‘일부’에 속하지 않는다) Creative Commons Attribution-Share Alike 2.0 UK: England & Wales License의 적용을 받는다. (Terms and Conditions 참조.) 롭 홉킨스는 활동가이자 작가이며 트랜지션 타운즈 네트워크의 창립자이다. 이자벨 프레모와 존 조단은 반란적 상상력 실험실의 공동창립자이다. 이 실험실은 이자벨에 따르면 “현실적 혹은 잠재적 공간들을 열고 예술가들과 활동가들을 한데 모아 작업하여 더 창조적인 형태의 저항과 시민불복종을 창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이다.

 

 

반란적 상상력의 부상

 

 

 

 

이자벨 프레모

우리가 하는 일은 여러 차원으로 구성됩니다. 우리는 많은 실험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실험기획들 혹은 실험꼭지들이라고 즐겨 부릅니다. 집단적으로 실험한다는 생각, 때로 실패할 수도 있고 실패의 능력을 수용함으로써 더 창조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생각을 우리는 좋아합니다. 나는 학자(an academic)로, 훈련가로 훈련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하는 일이 가진 훈련의 차원으로 더 들어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술가들 및 활동가들과 하루에서 2주일까지 많은 워크숍들과 훈련을 가집니다. 그리하여 예술과 행동주의 그리고 종종은 퍼머컬처(permaculture) 원칙 사이의 상승효과를 보고자하며 이 세 도메인이 융합할 때 우리가 어떻게 더 창조적이고 더 효과적이며 더 생산적이고 더 탄력 있는 기획들을 창출할 수 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기획들을 저항과 시민불복종의 형식들을 향한 것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존 조던

우리가 하지 않는 것은 ‘정치적 예술’입니다. 우리는 정치적 예술이라는 생각을 매우 비판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정치적 예술은 정치적 문제들을 다루는 예술을 말합니다. 우리는 때로 영화도 만들고 책도 냅니다만, 이를 우리는 ‘재현으로의 휴가’(holidays in representation)라고 부릅니다. 우리 작업의 대부분은 영화나 책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재현―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기후 변화에 대해서 공연을 하고 생물다양성의 상실에 대해 조각상을 설치하거나 기후 정의에 관한 영화를 만들 것이라는 생각―을 진정으로 비판하는 실험들을 실제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우 명확하게 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것 그리고 우리 생각에 매우 중요한 것은 실제로 예술가들과 활동가들을 한데 모으는 것이며, 세상에 무언가를 보여주기보다 세상을 직접 변형시키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정치의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예술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두 세계와 함께 작업을 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술가들은 풍부한 창조성, 고정된 틀 외부에서 사유를 하는 많은 능력, 사물을 시학으로 변형시키는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종종 에고가 강하고 사회참여에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

 

반면에 활동가들은―물론 이는 일반화입니다―사회비판을 많이 하고 집단적으로 작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상상력에서 실패하는 일이 잦습니다. 똑같은 행사를 치르고, 똑같은 종류의 시위를 하며, 똑같은 사회변형 도구를 사용하는 일이 흔합니다. 이 두 세계를 한데 모음으로써 우리는 무언가 다른 것을 실제로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우리는 항상 사회운동 내에 몰입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기후캠프>(the Climate Camp) 내에서 조직가로서 5년을 보냈으며 그 캠프를 조직하는 동시에 예술가들과 활동가들을 모으는 워크숍들과 행동들을 조직했습니다. 예를 들어, ‘대반란 뗏목경주’(the Great Rebel Raft Regatta)라고 불린 것을 만들어내는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우리는 <기후캠프>가 켄트의 킹스노스(Kingsnorth)에서 열리기 일주일 전에 한 숲에 보트들을 잔뜩 숨겨놓았습니다.

 

<기후캠프>는 기후재난에 대한 교육과 대안을 창출하기 위해 구성된, 자주관리되는 캠프였습니다. 그런데 캠프의 마지막에는 늘 행동을 했습니다. 킹스노스에서의 이 캠프[각주:1]는 실제로 이미 존재하는 발전소에 추가될 새 화력발전소의 건설을 중지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우리가 한 프로젝트인 ‘대반란 뗏목경주’는 이렇게 진행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친연그룹들로 모았습니다. 숲에 배를 숨겨놓으면서 럼 주 한 병도 숨겨놓았으며, 보물지도도 함께 놓았습니다.

 

사람들을 친연그룹별로 보물지도가 있는 숨겨놓은 보트를 찾으러 보냈습니다. 사람들은 보트를 찾아내고 숲에서 하룻밤을 자고는 오전 7시에 숲을 빠져나와 보트를 강에 띄우고 발전소를 찾아 봉쇄하러 갑니다. 우리는 모두 약 150명인데 보트 하나가 어찌어찌해서 발전소의 3분의 1을 봉쇄하고 약 3분의 1을 폐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각주:2] 우리에게 그것은 정말이지 실제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면서 재미있고 모험적인 행동 형태들을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보물지도와 럼주 병, 그리고 해적처럼 차려입은 사람들의 미학 전체가 행동주의에 유희의 요소를 도입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근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롭 홉킨스

당신들은 ‘반란적 상상력’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 조금 더 말해주실 수 있나요?

 

프레모

상상력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반란의 근본적 성분입니다. 우리는 예술에 종종 결여된 공격과 저항의 요소를 되찾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실험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상력이라는 단어에 대한 매우 부드러운 이해와 그 단어의 부드러운 함축과 무관하게 상상력을 생각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됩니다. 상상력은 매우 예쁘고 창조적이고 아이 같은 어떤 것으로 간주되는 일이 매우 잦잖아요. 우리의 요구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바인 저항의 실존을 실질적으로 되찾음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반란적’이라는 단어를 우리 단체의 이름 안에 넣은 것입니다.

 

조던

우리의 웹사이트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반란적 상상력 실험실>(ii랩)은 예술과 삶, 창조성과 저항, 제안과 반대를 융합합니다. 우리는 광대반란군(a rebel clown army)을 모집하며 영국을 돌아다니고 탈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강좌들을 운영하며 은행가들에게 눈뭉치를 던지고 수백 개의 버려진 자전거들을 불복종의 기계들로 바꾸며 석탄을 사용하는 발전소를 폐쇄시키기 위해서 반란 뗏목경주를 주최한 것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우리는 반란을 예술로 보며, 예술을 다가오는 반란을 위한 준비의 수단으로 봅니다. <ii랩>은 지금 브리트니(Brittany)에 있는 퍼머컬처 농장에 국제적인 유토피아적 예술/삶 학교를 세우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는 예술가들과 활동가들의 분리를 믿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두 용어를 믿지도 않습니다. 우리 생각에 예술을 일상생활에서 분리된 행동으로 보는 것은 서양 전통에서 매우 최근의 현상입니다. 대부분의 문화들에는 예술과 일상생활의 분리가 없습니다.

 

우리 생각에 행동주의, 즉 활동가들이 사회 변화를 독점한다는 생각은 예술이 창조를 독점한다는 생각과 똑같습니다. 사실은 모두가 능력을 가지고 있고 세상을 언제나 나름의 방식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변증법적 관계입니다. 우리는 두 생각을 모두 제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반란을 창조하거나 아니면 특정 종류의 혁명적 변화를 창조하려면 (이는 우리 생각에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자본주의와 기후재난에 대안을 제시하고 일어나고 있는 문제에 저항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 둘은 분리될 없습니다.

 

우리는 사회변형의 DNA가 두 가닥인 것을 압니다. <트랜지션 타운즈>처럼 대안들의 창조라는 가닥이 있고, 저항, 즉 화석연료 산업과 거기에 돈을 대는 은행들 등에의 저항이라는 가닥이 있습니다. 둘 가운데 하나만 있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저항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적이 누구인지를 잊을 것이고 우리의 기획들이 그저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인 녹색 자본주의를 위한 실험들이 되는 데 그치는 위험이 생길 것입니다. 한편 대안들을 창출하지 않는다면 저항의 문화만이, 그리고 항상 ‘아니오’라고 말하는 문화만이 존재할 것입니다. 이런 문화는 정신적 건강과 개인적 지속 가능성의 관점에서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타서 없어지듯이 소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두 운동들의 분리가 확연한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1970년대가 고전적 사례입니다. 우리의 모든 기획들에서 우리는 대안적인 삶형태의 모델을 만들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비행기를 타보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행기에서 인생을 보내는 국제적 예술계의 이력을 우리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생태적으로 삽니다. 우리는 우리가 세운 유기농 농장의 이동식 원형 텐트에서 삽니다. 그 농장에서 우리는 땅을 생산에 투입합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반드시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통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저항 작업은 항상 위계 없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기획들의 초기에 합의를 가르치며 일이 성사되게 만들기 위해서 퍼머컬처 원칙들을 사용합니다.

 

한 사례를 예로 들죠. 이 사례는 우리의 가장 최근의 기획이 이산화탄소 방출과 기후변화에의 적응 등에 개한 보편적 동의를 이루기 위해서 2015년 12월에 파리에서 열린 ‘COP 21’ 컨퍼런스(유엔 기후 정상회담)에 맞추어진 것이기 때문에 적절합니다. 2009년에 우리는 덴마크 코펜하겐의 ‘COP 15’ 무렵 두 미술관으로부터 프로젝트들을 해달라는 의뢰를 받았습니다. 브리스틀의 <아놀피니 화랑>(the Arnolfini Gallery)과 코펜하겐의 <현대예술센터>(the Centre for Contemporary Art)입니다.

 

우리는 이미 코펜하겐에서 얼마 동안을 보낸 후였습니다. 우리는 대안들에 관해 쓴『유토피아를 통과하는 경로들』(Paths Through Utopias)이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불행하게도 프랑스어, 한국어, 독일어로 말고는 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코펜하겐의 자주관리 공동체 크리스티아니아(Christiania)에서 얼마 동안을 보냈습니다. 그때 우리는 코펜하겐 전역에 버려진 수천 개의 자전거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저걸 재료로 쓰자고요. ‘쓰레기를 만들지 말라’라는 퍼머컬처 원칙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자전거들을 이용하여 코펜하겐의 쓰레기를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그것들을 시민 불복종의 도구들로 바꿔놓자고요,

 

전통적으로 간디, 소로우(Thoreau)의 전통에서 시민 불복종은 몸을 통한 것이며, 우리는 몸과 자전거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두 미술관에 제안했고, 둘 다 동의 했습니다. 그 프로젝트에서 우리는 <기후캠프>와 함께 작업을 했으며, <아놀피니 화랑>에서 모형을 만들자는 것이 우리 생각이었습니다. 이 화랑에서 우리는 50명의 사람들을 자유롭게 개방된 워크숍으로 모아서 퍼머컬처 원칙들의 기초 등을 가르치곤 했는데, 모형을 거기서 디자인한 다음에 코펜하겐으로 가져와 크기를 키우자는 것이었죠.

 

두 미술관 모두가 “미술관에서 용접을 하면 안 된다”고 말했을 때가 재미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아, 바깥에 컨테이너를 설치하고 그 안에 모형을 넣을 수 있으며 그곳이 어쨌든 더 공적일 테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문제가 바로 해결책인 것이었죠, 그런 후 코펜하겐의 큐레이터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이 큐레이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컨테이너가 있는데, 다만 작은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덴마크의 경찰하고 이야기를 막 했는데, 자전거의 정의에 관해서 일정한 규칙들이 있다고 합니다.”

 

자전거는 바퀴를 세 개 이상 가질 수 없다, 3미터를 넘으면 안 된다 등등. 만일 이 규칙에서 벗어나면 경찰에 알려야 하고, 디자인을 보여주어야 하며, 경찰이 다시 와서 도로에 나갈 권리가 있다고 말할 때까지 3주일이 걸릴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했습니다. “그거 매우 흥미롭군요. 그런데 우리는 시민 불복종을 실행합니다. 우리는 자전거들이 합법적이든 아니든 별로 개의치 않아요.” 여기서 잠시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 큐레이터는 마치 “그래서 당신들은 정말로 그 일을 하려는 거군요······”라고 말하는 듯 했습니다.

 

우리는 예술 세계에서 이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예술 세계의 많은 부분이 정치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매우 급진적인 텍스트들과 급진적인 제안들을 합니다. 아마 그 큐레이터는 우리가 이런 물건들을 만들어서 미술관에 세우고 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이 요점이 아닙니다. 요점은 실제로 행동을 취하는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다음에 미술관은 몸을 뺐지만, 우리는 코펜하겐에서 예전 스퀏 점유지였던 곳을 찾았습니다. 캔디 공장(the Candy Factory)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예술 및 문화 센터로서 우리는 거기서 프로젝트를 진행시켰습니다. 마지막에는 약 200명의 사람들이 동참하여 유엔 기후회담을 기업이 좌우하는 데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우리가 이른바 지금 유행을 크게 타고 있는 정치적 예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정치적’, ‘급진적’, ‘사회참여적인’ 등의 단어를 사용하는 수많은 2년 주기의 행사들, 미술관 전시회들, 극장 축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생각에는 이 가운데 많은 부분이 “정치를 재현한 그림들”(pictures of politics)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입니다.

 

홉킨스

당신들은 “좌파는 욕망과 신체를 사용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고 자본주의와 우파는 그것을 매우 잘 한다”라고 썼습니다. 이 말이 함축하는 것을, ‘트랜지션’(이행)에 대해 함축하는 바를 포함하여, 이야기해 주실 수 있죠?

 

프레모

좌파에는 어떤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이는 크게 일반화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태를 모르는 것이 문제이고 따라서 더 많은 사실들, 숫자들, 정보, 보고서들을 산출하여 사람들이 무엇이 진행되는지를 알게 하면 된다고 느끼는 경향입니다. 수치를 보여줄 수 있으면, 멸종되고 있는 몇몇 종에 대한, 혹은 영향을 받고 있는 몇몇 사람들에 대한 더 좋은 그림을 보여줄 수 있으면, 실업률 등의 수치를 보여줄 수 있으면, 그러면 사람들이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생각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그런 생각입니다.

 

이와 달리 우리 생각에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바가 매우 자주 문제가 됩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들의 삶의 구조였던 사물들과 가치들을 고수하는 거죠.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합리적인 생각이 아니라 욕망과 있을 수 있는 일에 대한 환상인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이 우리 생각입니다.

 

미국 작가인 스티븐 던컨(Stephen Duncan)의 멋진 말이 있습니다. “있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꿈”에 관해 아주 아름답게 한 말이지요. 있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꿈은 좌뇌에 있다기보다 정서에, 신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양자를 결합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목욕물과 함께 아이를 내다버리는 식으로 “모든 보고서를 멈추어라, 모든 연구를 멈추어라, 모든 과학을 멈추어라”라고 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자는 것이지요.

 

숫자는 뒷받침으로서, 목발로서 사용되어야 하며, 우리들 대부분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더 정의롭고 건강하고 편하며 즐거운 삶을 정서와 신체를 통해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합리적이기만 한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풀기에 매우 복잡한 매듭들 가운데 하나와 관련이 있습니다. 더 많으면 반드시 더 좋은 삶이 온다는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큰 거짓말이 바로 이 매듭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진실이 아님을 압니다. 그러나 이는 풀기가 어려운 어떤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가치를 말하고 그것에 호소해서 그 매듭을 풀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트랜지션 타운즈’ 같은 프로젝트에 새로운 가르침이 될 수 있는 생각 가운데 하나는 이 정서들은 있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긍정적 정서들이지만, 또한 우리가 알기에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의 잘못된 점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들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균형을 찾는 것, 그리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먹이면서도 그 다른 사람을 압도하지는 않는 것이 관건입니다. 때로 불의와 파괴가 낳는 분노와 좌절을 부정하고 가리고 싶은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정서들은 인정되어야 하며 저항의 연료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한편 있을 수 있는 것과 관련된 정서들은 대안을 향해 움직이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 두 정서들의 결합이 바로 사회운동들을 매혹적이고 파괴될 수 없는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매우 종종 운동들은 이 정서들 가운데 하나에 호소할 때에만 파괴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앞에서 말한 ‘네’와 ‘아니오’의 DNA 이야기로 되돌아갑니다만, 내 생각에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호소하는 종류의 정서와 관련하여 매우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홉킨스

퍼머컬처가 당신들의 작업의 큰 부분입니다. 이것에 대해 좀 이야기해주실 수 없나요? 왜 퍼머컬처는 당신들이 하는 일에 왜 중요한가요?

 

프레모

퍼머컬처는 매우 고무적이고 안정적인 틀을, 매우 안정된 가치틀을 제공해줍니다.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할 수 있기 위해 우리가 생각한 것은, 퍼머컬처의 세 주된 기둥이 사정이 실제로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이 이해하게 만드는 매우 효과적인 방식이라는 점입니다. 그 원칙들은 그 시스템을 향하여 작업해나아가는 정말로 좋은 로드맵이며 생산적이고 탄력적이며 자연을 존중하는 디자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자연을 선생으로 삼는다는 생각, 그럴수록 자연을 외부에 있는 사물로 덜 보게 된다는 생각에 매우 감동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퍼머컬처를, 우리가 줄곧 사물로 보도록 배웠던 자연에 우리 자신을 통합하는 도구로 점점 더 보게 됩니다······ 우리가 환경에 대해서 매우 자주 말한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명백하게도 우리는 우리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이 환경의 일부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퍼머컬처는 우리의 유일하게 실질적으로 일관적인 존재인 자연에 우리 자신을 다시 통합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원칙들을 우리의 실험들의 틀로서 사용하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퍼머컬처의 정신이 우리의 영감(靈感)입니다.

 

조던

우리에게는 ‘숲처럼 생각하라’라고 불리는 10일 훈련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지난 수년 동안 네다섯 번 했습니다. 이는 매우 영감에 찬 훈련입니다. 이는 예술, 행동주의, 퍼머컬처의 훈련입니다. 예술이 행동주의에 무엇을 가져오는지, 행동주의가 예술에 무엇을 가져오는지, 예술이 퍼머컬처에 무엇을 가져오는지, 퍼머컬처가 예술과 행동주의에 무엇을 가져오는지 등등을 보는 훈련, 세 세계로 이루어진 하나의 시스템을 보는 훈련입니다. 이 훈련은 실제로 아나코-페미니스트 마녀인 스타호크(Starhawk)가 행한 훈련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80년대에 평화운동과 대안지구화 운동에 깊게 관여했으며 우리 모두가 거친 ‘땅 활동가 훈련 코스’(Earth Activist Training Course)라 불리는 프로그램을 운영했습니다. 오래 전에 있었던 이 일이 우리에게 큰 영감을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퍼머컬처 요소가 있다는 점에서 그 코스를 우리의 훈련코스의 모델로 삼았다고 할 수 있지만, 마법의 요소는 예술로 대체했습니다. 스타호크의 것이 땅에 기반을 둔 정신성, 행동주의, 그리고 퍼머컬처였다면, 우리 것은 예술, 행동주의, 그리고 퍼머컬처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예술은 마법입니다. 마법의 한 형태입니다.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믿을 때 그 믿는 것이 실현된다는 것, 그것이 그 힘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술은 우리가 이 순간 필요로 하는 마법을 엮어내는 일을 매우 잘 합니다. ♣

  1. 조직명으로서 <기후캠프>(대문자로 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조직이 모이는 모임으로서의 캠프(소문자로 씀)를 말함. 단체 가운데 ‘회의’자가 들어간 단체가 가령 운영을 위한 정규적인 ‘회의’를 가지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됨.
  2. ‘봉쇄’와 ‘폐쇄’가 정확하게 무엇이고 서로 어떻게 다른지는 현재 번역자로서 알 수 없다. 전자에는 ‘block’이라는 단어를 후자에는 ‘shut dow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