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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 협동조합주의에 대한 트레버 숄츠의 새 보고서


저자: David Bollier 

원글: “Trebor Scholz’s New Report on Platform Cooperativism” (2016.2.15) /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 

옮긴이:  정백수


 

기업의 ‘공유경제’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고 있는데 거기서 주된 작용을 하는 것 하나는 ‘플랫폼 협동조합주의’(platform cooperativism)를 발전시키는 운동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의 뉴욕사무소는 ‘공유경제’를 비판하고 그 대안들을 서술하는 보고서를 냈다. 그 제목은 「플랫폼 협동조합주의―기업의 공유경제에 도전하며」(“Platform Cooperativism: Challenging the Corporate Sharing Economy”)이며, 뉴스쿨(The New School)((뉴욕 시티 소재의 진보적인 대학이다.))의 부교수인 트레버 숄츠(Trebor Scholz)가 작성했다.

 

숄츠는 이 주제에 대한 역사적 발화점 역할을 한 2015년 11월 컨퍼런스를 저널리스트 네이선 슈나이더(Nathan Schneider)와 공동으로 조직했다. 사람들은 우버(Uber), 에어비앤비(Airbnb), 태스크래빗(TaskRabbit), 미캐니컬터크(Mechanical Turk)가 나타내는 ‘긱 경제’(gig economy)의 많은 반사회적 효과들을 깨닫기 시작했으나 가동 가능한 대안들의 발전이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이 보고서의 전반부는 이른바 공유경제의 많은 결점들을 다룬다. 우선, 공유경제의 핵심은 공유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온디맨드식 서비스 경제’(on-demand service economy)로서 종래의 자본주의에서 사용된 것과 같은 착취 기술에 여전히 의존하면서 여기에 향상된 강력한 테크놀로지가 추가된다.

 

공유경제 시스템은 놀라운 편의와 효율을 제공하지만, 보수가 좋은 안정된 직업을 획득할 수 없는 사람들을 잡아먹기도 한다. 이 시스템은 삯일을 대대적인 규모로 다시 도입하는데, 이번에는 세련된 컴퓨터 알고리즘을 사용하여 임금을 서서히 최소로 내리면서 그렇게 한다. 모두가 명목상으로는 독립된 계약자로 간주되기에, 기업 플랫폼들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작업환경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밀턴 프리드먼의 고전적인 말을 어깨를 으쓱하고 되풀이하며 자신들에게 책임이 없음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임금이 낮고 노동자보호가 잘 되어있지 않은 나라로 일자리가 많이 이동하게 되면 그 자리를 채운 노동자들은 많은 경우 철저한 전지구적 경쟁의 제물이 된다. 기업 플랫폼들은 일반 기업이 지출하는 경비―자본 기반 시설, 규칙적 보수지급, 피고용자에게 주는 혜택―를 지출할필요가 없는 수지맞는 중개인 역할을 한다.

 

이 보고서에서 숄츠는 긱 경제가 이전에는 시장 외부에 있던 자원들을 금융화하는 것에 주목한다. 우리의 차들, 아파트들, 개인 시간 등 모든 것이 이제 기업 플랫폼들을 통해서 화폐화될 수 있으며 시장의 힘에 종속될 수 있다. 실상 이 새로운 시스템은 “사회적 상호작용에 (이윤)추출과정을 끼워넣고” 있으며 “규제완화된 자유로운 시장을 이전에는 사적이었던 삶의 영역들로 확대하고” 있다고 숄츠는 쓴다.

 

법을 전복하지는 않지만 우회하는 것이 긱 경제의 핵심 요소라는 점이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비합법성이 우버 같은 회사들의 사업모델의 핵심 요소라고 숄츠는 설명한다. 우선 그들은 ‘피고용인들’이 아니라 ‘독립 계약자들’에 의존하는 새로운 종류의 네트워크기반 시장을 창출함으로써 노동자 및 소비자 보호를 위한 연방법 및 주(州)법을 무시한다. 그런 다음 그들은 점증하는 고객을 거론하며 일자리를 창출하는 자신들이 ’낡은‘ 규제들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입법자들을 설득한다. 실상 그러한 (노동자 및 소비자) 보호를 좌절시키거나 철회시키기 위해 로비활동을 하는 것이 우버, 에어비앤비, 아마존의 사업전략의 핵심요소이다.

 

숄츠는 긱 경제에 대한 인간적 대안인 플랫폼 협동조합주의가 다음의 세 가지 전략에 의존한다고 설명한다.

 

1. 우버, 에어비앤비 등의 테크놀로지의 핵심을 복제하는 것.

2. 플랫폼들의 소유와 관리에서 사회적 유대를 발전시키는 것.

3. 혁신과 효율이라는 아이디어를 소수에게 이윤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관점에서 다시 짜는 것.

 

나아가 숄츠는 여러 유형의 협동적 플랫폼들과 이 플랫폼들이 돌아갈 수 있는 혹은 실제로 돌아가는 방식들을 도입한다. 여기에는 지금 대한민국 서울에서 발전되고 있는 무니비앤비(Munibnb) 같은 도시 소유의 플랫폼들이 포함된다. 무니비앤비는 에어비앤비 같은 플랫폼이지만 돈을 흡수해서 투자자에게 바치거나 관광객들에게 ‘유령 동네’를 임대하는 것을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 서비스의 재원을 마련하고 아파트 소유자들에게 더 나은 임대료를 주는 데 이윤을 이용한다.

 

또한 숄츠는 사용자들(users)이 생산자들(producers)이 되는 (따라서 프로듀저‘produser’이다) ‘프로듀저 소유의 플랫폼들’을 서술한다. 예를 들어 스톡 사진(stock photography) 사이트들 혹은 스트리밍 음악을 제공하는 사이트들은 협동조합으로서 소유되고 관리될 수 있다. 또 다른 사례로서, 노동조합들이 자신들이 통제하는 가상의 고용실2을 두어서 이윤을 사회적 혜택으로 바꿀 수 있다.

 

숄츠는 플랫폼 협동조합들을 위한 10개의 기본 원칙들을 제안한다. 이 원칙들은 소유, 어엿한 보수와 소득 안정, 투명성과 데이터 관리, 노동의 진가의 인정, 보호를 위한 법적 틀, 이동 가능한 노동자 보호 및 혜택3에 초점을 둔다. 이 비전은 그것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분명히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서 협동조합에 재정을 대는 새로운 형식들―크라우드에쿼티4와 소액 투자자들 등―이 필요한 것이다.

 

이 플랫폼 협동조합주의 보고서는 민주적으로 소유되는 가동 가능한 대안들로 ‘공유경제’에 반격을 가하는 절실한 과제를 개괄하는 중요한 일을 한다. 물론 남아있는 큰 과제는 실제로 이 협동적 사회적 경제를 건설하는 일이다. ♣

  1. 뉴욕 시티 소재의 진보적인 대학이다. [본문으로]
  2. hiring hall : 이는 보통 노동조합의 후원 하에 노동조합과 집단교섭을 하는 새로운 사용자 인력을 조달하는 일을 담당하는 조직이다. 일단 ‘고용실’로 옮긴다. [본문으로]
  3. 이동 가능한 노동자 보호 및 혜택 : 노동자 보호 및 혜택이 하나의 사업장에 국한되어서는 안 되고 어떤 노동자가 사업장을 바꾸더라도 연속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취지이다. [본문으로]
  4. crowdequity : ‘Equity crowdfunding’(지분투자형 크라우드 펀딩)과 같은 말이다. ‘equity’(지분)를 크라우드펀딩 방식으로 투자자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도시를 구축하라’―예술, 문화, 커머닝의 중대한 역할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2015년 12월 23일 게시글 ““Build the City”: The Critical Role of Art, Culture & Commoning”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몇몇 고유명사의 옮김은 실제 발음과 다를 수 있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도시를 구축하라’―예술, 문화, 커머닝의 중대한 역할

 

 

새로운 글모음집 『도시를 구축하라―커먼즈와 문화를 보는 관점들』(Build the City: Perspectives on Commons and Culture)은 ‘커먼즈로서의 도시’가 부상하고 있음을 강력하게 확인시켜준다. 38개의 글이 담겨있는, 이 세심하게 편집되었고 아름답게 디자인된 모음집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생각의 깊이와 범위를 보여준다. 이 책은 <크리티카 폴리티츠나>(Krytyka Polityczna)와 유럽문화재단(the European Cultural Foundation)에 의해서 유럽문화재단의 아이디어캠프 모임의 일환으로서 9월에 출판되었다.

 

내가 보기에 도시를 커먼즈로서 생각하는 것은 매우 강력한 것이다. 도시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정치적 요구들을 말하는 구조화된 틀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 틀은 종획의 재앙만이 아니라 우리가 커머너로서 가진 권리들을 가시화하는 것을 돕는다. 이 둘은 점잖은 정계(政界)에서는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 주제들이다.

 

이 책의 글들은 보통 사람들―세입자들, 가족들, 예술가들, 프리캐리아트, 이주자들, 공동체 집단들, 활동가들―이 자신의 도시에 참여하는 데서 정당한 역할을 가진다는 생각을 찬양한다. 메트로폴리스는 부유층, 산업가들, 투자자들, 지주들의 특권화된 보호구역이 아니다. 그곳은 커머너들이 의미있는 힘을 가지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에 접근하는 장소이다. 이 책은 이러한 주제를 발전시키면서 9월에 볼로냐에서 열린 ‘커먼즈로서의 도시’ 컨퍼런스를 적시에 보완한다.

 

이 책의 pdf 파일은 여기서 다운받을 수 있다. 인쇄본은 여기서 구입할 수 있다. 이 책은 유럽문화재단 및 <크리티카 폴리티츠나>나 이외에도 스위덴의 <썹토피아>(Subtopia), 프랑스의 <레 떼뜨 드 라르>(Les Tetes de l’Art), 몰도바의 <오베를리트>(Oberliht), 크로아티아의 <컬처2커먼즈>(Culture2Commons), 스페인의 <플라토니크>(Platoniq)와의 협동의 산물인데, 이 단체들은 모두가 행동연구 네트워크인 <커먼즈를 위한 연대행동>(Connected Action for the Commons)에 참여하고 있다.

 

이 책에서 자주 반복되는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더욱 개방되어 있고 수용적이며 참여적인 도시 민주주의 모델을 위한 수단을 커머너들이 고안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예술 및 문화 프로젝트들이 이 길에 앞장설 수 있다는 것이다.

 

“극히 개인화된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모델에 도전하는 문화적 기획들을 더 자세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라고 <커먼즈를 위한 연대행동>의 비스니에브스카(Agnieszka Wiśniewska)는 쓰고 있다. “이 기획들은 사회적 유대와 타인에 대한 신뢰를 다시 수립하는 것을 촉진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질적 과제는, 거버넌스를 증진시키고 사회적 연대를 구축하며 권력을 민주화하는 데서 커머너들에게 힘을 실어줄 효과적인 새 구조들을 어떻게 고안할 것인가이다.

 

이 책은 이 이슈를 여러 상이한 각도―예술, 문화, 경제, 정치, 테크놀로지―에서 탐구한다. 그 다양한 기고자들 가운데에는 P2P재단의 미셸 보웬스, 런던 정치경제학교와 뉴욕대학교에서 강의하는 유명한 사회학자 리처드 쎄네트(Richard Sennett), 유럽의회의 의원인 줄리 워드(Julie Ward)가 있으며, 기타 유럽 전역의 많은 예술가들, 비평가들, 문화활동가들이 기고했다.

 

몇몇 글들은 공적 공간들이 민주주의 자체의 기능에 중요하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민주주의는 이스탄불에서 바르셀로나까지, 프라하에서 부다페스트까지, 사유화 및 ‘발전’을 주도하는 세력이 도시로부터 생명력을 짜내고 있는 많은 도시들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실린 글 가운데 하나에서 몰도바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이며 활동가인 비탈리 스프린세아나(Vitalie Sprinceana)는 2012년 치시나우(Chisinau)에서 시민들이 시정부가 시민들이 사랑하는 유럽광장(Europe Square)―공원과 국립 기념물들이 있는 장소이다―을 다시 만들려는 비밀계획에 반대하여 들고 일어난 일이 미치고 있는 지속적인 영향을 평가하고 있다. 시민들의 노력으로 공적 공간들은 실질적으로 공중에게 속해야 하며 정치인들과 관료들이 그 공간들의 운명을 정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다른 많은 글들은 시민이 이끄는 예술과 문화가 어떻게 도시의 공간들을 살리고 있는지, 그리고 이 활동들이 유럽에서 민주적 과정들을 증진하는 데 어떻게 필수적인지를 탐구한다. 폴란드의 예술가이지 활동가인 이고르 스톡피제브스키(Igor Stokfiszewski)는, “전문 예술가가 아닌 사람들의 예술을 통해 풀뿌리 자기표현을 장려하는 목적을 가진 예술 활동에 특별히 주목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했다. “공동체에 맞추어진 실천들이 장려되며, 공감과 상호성을 발전시킴으로써 말 이외의 수단으로 유대를 창조하는 방식을 고안해낸다.” 사람들이 도시에 바치는 예술은 그 장소를 정의하는 공유된 내러티브들과 형상들을 고안해내는 것을 촉진한다.

 

이 책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들 가운데 하나는 <트랜지션 타운> 네트워크의 창립자인 롭 홉킨스(Rob Hopkins)가 <반란의 상상력 실험실>(Laboratory of Insurrectionary Imagination)의 공동창립자들과 한 인터뷰이다. <실험실>은 도시의 삶에서 상상의 새로운 공간들을 열기 위해서 활동가들과 함께 작업하는 예술가들의 단체이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의 G8 정상회담에서 있었던 시위에서 이 단체는 “반란 광대 부대”를 만든 적이 있는데, 이 부대는 립스틱을 바르고 경찰의 방패에 계속해서 입을 맞추었다. 이 단체는 또한 ‘은행가들에게 눈을 뭉쳐 던지기’를 조직했으며 수백 개의 버려진 자전거들을 시민불복종의 기계들로 개조했다. .

 

<실험실>의 구성원인 이사벨 프레모(Isabelle Frémeaux)는 그런 전술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좌파는 욕망과 신체를 사용하기를 매우 두려워합니다. 자본주의와 우파는 영특하게 잘 하지요.” 그녀의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많은 활동가들이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에 행동하지 않는다”라는 전제 위에서 정신을 바꿀 사실들과 통계들을 정리하려고 하지만, 사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합리적 사고가 아니라 가능한 것’(what could be)에 대한 욕망과 환상인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그녀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삶의 구조를 이루었던 사물들과 가치들을 고수합니다”라고 말한다. 예술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진실을 다시 깨닫게 해줄 수 있으며 우리에게 새 방향을 가리켜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험실>은 예술과 공공 극장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합리적인 ‘왼쪽’ 뇌에만이 아니라 정서적 삶에도 다다르고자 한다. “어떤 의미에서 예술은 마법입니다”라고 <실험실>의 존 조던(John Jordan)은 말한다. “그것은 마법의 한 형태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그 힘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면 실제로 바라는 일들이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예술은 이 순간 우리가 필요로 하는 마법을 직조해내는 일을 매우 잘 합니다.”

 




데이빗 볼리어와의 인터뷰

  • 다음은 데이빗 볼리어가 최근에 나온 책 『커머닝의 패턴들』(Patterns of Commoning)에 관하여 웹진 ≪셰어러블≫(Sharable)의 캣 존슨(Cat Johnson)과 인터뷰한 기사를 옮긴 것이다. 다소 모호한 부분들이 있어서 세부의 정확성보다는 내용전달의 손쉬움에 초점을 두었다. 정확하고 세밀한 이해를 원하는 사람은 아래 원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셰어러블≫의 기사에는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Unported 라이선스가 적용된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www.bollier.org)에도 일부가 올려져있다.

 

 

(문) 셰어러블 : 이 책에서 당신과 질케(Silke)는 커머너로서 생각하고 배우고 행동하는 것을 커먼즈 운동의 핵심으로 보고 그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요?

 

(답) 볼리어 : 그것은 우리가 당연시해왔던 몇몇 이분법들을 무너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집단과 개인, 합리와 비합리 등등의 이분법들이죠. 커먼즈에서는 이것들의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유기적 온전체로서의 커먼즈에 대해 말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커먼즈를 부품들로 해체하거나 해부할 수 있는 기계인 것처럼 보면 안 됩니다. 커먼즈는 살아있는 유기체이며 바로 이것, 즉 그 살아있음이 우리가 연구할 바인 것입니다.

 

전통적인 근대 과학은 살아있음을 탐구하기를 거부합니다. 근대 과학은 살아있는 인간이 되는 것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대지에서 살아있는 인간이 되는 것의 본질에 도달하지 못하는 많은 환원론적 범주들을 만들어 냅니다. 내 생각에 커먼즈는 살아있는 종류의 관심사들에 응하고 싶어하며, 특히 진부한 학술계 사람들이 사용하고 싶어하는 많은 전통적인 지식의 상자들에는 부합하지 않습니다.

 

(문) 이 책에서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되는 점 하나는 하향식으로 움직이는 정책입안자들과 전문가들은 커먼즈를 디자인하고 구축하지 못하며 커먼즈가 번성하리라고 기대하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유기적 커먼즈는 하향식으로 제조된 커먼즈와 어떻게 구분되나요?

 

(답) 기성 제도의 후원을 받는 커먼즈들에서는 아래로부터의 헌신·공유·공동창조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 만큼 이런 커먼즈들은 외부에서 연출되는 다른 누군가의 드라마에 출연할 뿐이며, 사람들 스스로에게서 나오며 사람들의 이익, 욕구, 내적 삶에 복무하는 창조적 분출의 표현과는 반대됩니다.

 

제도들은 민중의 내적 욕구와 열망에 응하지도 못하고 그것을 표현하지도 못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지만, 커먼즈는 그럴 수 있고 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말한 살아있음의 본질입니다. 커먼즈는 스스로를 복제하는 고유한 에너지와 열망을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섬광처럼 매력을 발휘합니다. 이는 매우 특별합니다. 이는 커먼즈가 민중의 실질적 욕구를 표현하는 그 순간에 살아있는 특유한 사회적·역사적·문화적 현상이라는 사실에 담겨 있습니다.

 

이는 몇몇 사람들이 커먼즈를 이해하기 위해서 행하는 자원할당 유형의 분석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자원분석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문) 이  책에는, 삶 혹은 생산에서 커먼즈로서 작동하도록 구축될 수 없는 부분은 거의 없다는 흥미로운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당신은 지난 두 책1을 통해 커먼즈 기획의 놀라운 스펙트럼을 제시해왔습니다. 커먼즈 기반의 경제 혹은 세계는 당신이 보기에 어떤 것입니까?

 

(답) 이건 어떤 면에서는 3살짜리 아이가 50살이나 80살이 되면 어떻게 보일지를 묻는 것과 같군요.

 

삶의 경험 가운데에는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우발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이런 것을 예측하려면 긴 전개과정이 펼쳐져야 합니다.

 

 

일단 이 말을 해두고요. 내 생각에 이것은 어떤 중앙의 권위가 그것을 디자인하고 그런 다음에 예산을 얻고, 그 다음에 구축하기 시작하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내 생각에 이는 생물학적인, 혹은 진화적인 전개과정에 더 가깝습니다. 많은 소규모의 원칙들과 동학이 이 과정을 활성화할 것입니다.

 

이 과정은 거대한 펼쳐짐이자 드라마입니다. 혹자는 커먼즈의 규모를 키워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규모’라는 단어는 실제로 위계구조를 표현하는 용어임이 지적된 바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복제하고 연합하는 것이 더 핵심이 되고 있습니다. 이는 전과는 다른 구조인데,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지역에 헌신하면서도 더 넓은 유대와 지원을 천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상이한 디지털 부족들이 있는 인터넷에서 이런 것을 봅니다. 거기에는 중앙 권위가 없습니다. 비록 때로는 다음 수준으로 가는 것을 돕는 기반시설을 필요로 하지만 말입니다.

 

많은 부분을 한데 묶어줄 것은 새로 출현하여 서로를 발견하기 시작한 특정의 윤리와 문화일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많은 활동가들, 커머너들의 모임에 참가하면 서로를 발견하고 서로를 아는 데서 오는 쾌활함과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상이한 영역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윤리적 원칙들과 문화적 관심사들을 공유합니다.

 

(문) 패턴의 관점에서 커먼즈를 보는 접근법은, 커먼즈들이 복합적이고 살아있는 시스템들임을 인정하며, 커먼즈들이 생겨나고 성장한다는 사실을 존중합니다. 이 접근법은 또한 이 패턴들이 우리의 문화적 유산이라는 사실을 수용합니다. 이런 각도에서 커먼즈를 연구하는 것이 주는 이익은 무엇일까요?

 

(답) 이 접근법은 커먼즈의 실질적인 인간적 복합성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힘에 도달하지 못하는 환원론적인 범주들이나 모델들로 분해하지 않고 포착하게 해줍니다. 나는 양자택일적 태도를 취하고 싶지 않습니다. 커먼즈에 관한 많은 학술적 연구가 필요하긴 합니다. 하지만 모델구축이 포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풍부한 실재가 존재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원래 그대로의 일화(逸話)와 과도하게 추상적인 모델들 사이에 스윗스팟이 있습니다. 패터닝(patterning)은 이 반복되는 형식들 가운에 일부를 포착하는 한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적 작업의 결과를 위에서 아래로 실재에 부과하는 것과 정반대의 것으로서, 아래로부터 위로 작동합니다.

 

(문) 이 책은 커머닝과 커먼즈의 더 풍요로운 패턴 언어의 발전이 개시되기를 바라면서, 커머닝의 패턴들을 서술하는 첫 걸음으로서 짜여 있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며, 커먼즈의 패턴 언어는 과연 어떤 것인가요?

 

(답) 질케는 이 책에서 자신이 집필한 부분에서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에서 툭 튀어나와서 반복될 수 있는 특정 테마들을 얻는 것이라는 식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떻게 커먼즈를 보호하는가?’, ‘커먼즈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떻게 특정의 법적 혹은 사회적 시스템들을 창조할 것인가?’와 같은 테마들이 있죠.

 

또 다른 패턴으로는 ‘당신은 어떻게 그야말로 커먼즈를 스스로 깨닫게 되는가?’, ‘비가시적인 커머닝의 차원들을 어떻게 가시화하는가?’가 있습니다. 질케는 우리 책의 많은 이야기들을 관통하며 반복해서 튀어나오는 황금의 실들과 같은 테마 패턴들 가운데 일부를 포착하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기존의 경제적 분석틀의 일부인 경합과 배제2

에 갇히지 말고 이 패턴들을 보고 커먼즈의 내적 기능을 더 세련되고 더 리얼리스틱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문) 이 책은 계획된 3부작 가운데 둘째 권입니다. 셋째 권은 어떤 책이 될까요?

 

(답) 아직 극히 초기 단계에 있는 다음 책은, 거시적 차원에서의 커먼즈가 가지는 의미, 즉 정책, 경제, 국가에 대해서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게 될 것입니다.

 

이번 책은 커머닝의 내적 차원과 몸으로 겪는 실재에 소규모로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다음에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 거시적인 차원에서 함축되는 것들을 보고자 합니다. 법이 어떻게 변하여 커먼즈를 포용하게 될 것인가? 국가가 커먼즈 중심의 사회를 허용하려면 그 역할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이것은 국제관계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것들이 우리의 셋째 권의 내용이 될 것입니다. ♣

  1. The Wealth of the Commons와 Patterns of Commons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2. 경합과 배제 : 이는 이른바 전통적 경제학의 근본적 원칙인 ‘희소성’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희소성을 전제하면 한 사람이 어떤 재화를 차지할 때 다른 사람은 그 재화를 차지할 수 없게 된다. 이 희소성의 원칙은 무한히 복제할 수 있는 디지털 생산물이 등장하면서 근본적인 위기에 봉착하는데, 자본은 지적 재산권으로 재화에의 접근을 막음으로써 (‘제2의 종획’) 가상의 희소성을 창출하는 식으로 위기를 넘겨가고 있다. [본문으로]

출처: http://minamjah.tistory.com/108?category=452913 [百手의 블로그]




퍼블렙 랩과 풀뿌리 맵핑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David Bollier)와 질케 헬프리히(Silke Helfrich)가 편집한 Patterns of Commoning(2015)에서 트리스턴 코플리-스미스(Tristan Copley-Smith)가 집필한 ‘Public Lab’에 관한 부분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잘 모르는 영역을 소개하는 내용이라서 번역어의 선택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이미 출판되어 저작권이 부여된 자료들을 제외하면 Creative Commons Attribution-ShareAlike 4.0 International License가 적용된다.

퍼블릭 랩

퍼블릭 랩(Public Lab)은 저렴한 오픈소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도구들을 만들어내어 시민들이 함께 환경문제들을 문서화하고 조사하는 것을 돕는 단체이다. 퍼블릭 랩은 일군의 느슨하게 연결된 활동가들이 BP의 기름유출 이후에 루이지애나로 떠났던 2005년에 시작되었다. 거기서 활동가들은 연을 사용하는 로우테크(lowtech) 기술을 사용하여 해안 기름 오염을 문서화하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이 단체는 국제적 공동체로 성장했으며 그 회원들은 자연환경을 더 과학적인 정확성을 가지고 이해하고 환경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퍼블릭 랩은 스스로를 비영리 조직에 의해 지탱되는 공동체로 본다. 그 상점에서 저비용의 오픈소스 감시키트들을 판매하는데, 이는 법적으로 기부로 간주된다. 이것이 퍼블릭 랩으로 하여금 그 감시 제품들의 판매에서 수입을 얻으면서 기본 자금을 확보하게 해준다. 퍼블릭 랩은 오픈소스 하드웨어의 개발자로서 누구라도 집에서 무상으로 도구들을 만들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안내를 제공한다.

퍼블릭 랩의 진정한 가치는 도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도구로 무엇을 하느냐에 있다. 예를 들어 풍선 매핑 키트는 사용자들로 하여금 대단히 낮은 비용으로 (기름 오염이나 해안 부식을 매핑하기 위한) 대단히 높은 해상도의 항공사진들을 찍을 수 있게 해준다. 이미지들은 퍼블릭 랩의 웹사이트에 업로드될 수 있으며, 거기서 사용자들이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를 활용하여 이미지들을 하나하나 연결할 수 있고 지도들이 공동체 사람들에 의해서 분석될 수 있다. 그 결과로 나오는 이미지들은 (만일 충분히 좋다면) 심지어 구글에 의해서 수집되어 구글의 매핑 서비스에 추가되기도 한다. (이는 오픈플랫폼 기업들이 커먼즈들에서 산출된 것을 종종 자신의 이윤창출을 목적으로 전유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왜 많은 디지털 커머너들이 지금 커먼즈 기반 상호 라이선스로 선회하고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한 사례이다.)

퍼블릭 랩은 유용한 오픈소스 도구들을 갖춘 충실한 공동체가 어떻게 디지털 커먼즈를 가치 있는 데이터로 채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이다. 그 웹사이트는 마치 거대한 공적 위키와 노트북의 혼종체인 양 편집이 매우 자유롭게 가능해서 모든 사람의 작업이 문서화된다. 공동체는 호기심 혹은 관심사에 의해 동기화되며, 퍼블릭 랩 웹사이트는 조사를 돕는 데 필요한 도구들과 정보에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그 결과로 나오는 발견들은 문서화·공유될 수 있고 정치적 변화를 위한 압력행사에 사용될 수 있다.

퍼블릭 랩의 공동창립자들 가운데 하나인 제프 워런(Jeff Warren)은 이것을 “힘의 언어를 말하기”(speaking the language of power)라고 부른다. 전통적인 항의의 수단을 통해 변화를 탄원하는 대신에―이런 탄원은 당국이 존중할 수도 있고 무시할 수도 있다―공식적인 조사가 개시되도록 압력을 넣을 수 있게 하는, 사실에 입각한 강력한 정당성을 퍼블릭 랩 공동체가 산출한 확연한 데이터가 부여해주는 것이다.

퍼블릭 랩은, 오픈 데이터, 오픈 하드웨어, 오픈소스 소프트웨어가 가진, 정부의 정책입안과 시행에 영향을 미치는 힘에 기반을 둔 새로운 형태의 중요한 공동체 행동주의를 자신들이 발전시키고 있음을 깨달은 일군의 활동가들로부터 유기적으로 진화해 나온 기획이다. ♣

* 위 글에 이어 http://unterbahn.com/thesis/에 있는 제프리 워런(Jeffery Warren)의 글 “Grassroots Mapping : tools participatory and activist cartography”의 1장을 우리말로 옮겨본다. 잘 모르는 영역을 소개하는 내용이라서 번역어의 선택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밑줄은 번역자의 강조를 나타낸다. 제프리 워런(Jeffery Warren)의 이 글에는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license가 적용된다.

풀뿌리 매핑―참여 지향의 도구들과 행동주의적 지도제작

1장 서론

1.1 풀뿌리 매핑의 정의 ― 도구들, 실천들, 혹은 공동체?

풀뿌리 매핑(Grassroots Mapping) 프로젝트를 구성하는 것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그것은 MIT 오픈소스 라이선스에 따라 http://github.com/jywarren/cartagen 에서 구할 수 있는 일단의 코드인가? 페루의 리마 혹은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사용된 바 있는, 일단의 매핑 실행들 혹은 도구들인가? 아니면 실행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그리고 이들을 묶어주는 웹사이트, 위키, 메일링리스트인가?

근본적으로 이 프로젝트는 지도제작(cartography)에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서 일반 사용자들이 매핑을 더 쉽게 할 수 있게 만들어주려는 시도이다.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지도들은 국가와 산업이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통제력을 표현하는 도구로서 간주될 수 있다. 내가 만든 도구들과 기술은, 데이터의 수집에서 디지털본 지도들과 인쇄본 지도들의 편집과 출판에 이르기까지, 지도를 만드는 수단을 단순화함으로써 지도제작의 민주화를 촉진하기 위해서 고안되었다. 이로써 내가 바라는 것은, 광범한 대중이 적당한 비용으로 지도를 만드는 능력이 아래로부터의 지도제작 행동주의에 힘을 실어주고 기존의 지도제작의 권력구조를 우회했으면 하는 것이다.

풀뿌리 매핑 프로젝트의 핵심은 기술들의 새로운 결합을 특수한 각 공동체들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 기술들은 풍선들과 연들을 사용하는 저비용 항공 이미지생성 기술과 그 결과로 나오는 이미지들을 하나하나 연결하여 지도로 만드는 새로운 온라인 도구로 구성된다. 이 도구들의 성공은 페루 리마의 공동체들에서 그리고 멕시코만의 기름 유출 위기 시에 이 새롭고 낯선 도구들을 기꺼이 사용하고자 했으며 자신들의 사용 잠재력을 보았던 단체들과 개인들의 노력과 신념에 기인한다. 여기에는 만자니타 ‘A’의 카를라 델 카르피오(Carla del Carpio of Manzanita ‘A’), 약물남용 방지를 위한 정보 및 교육 센터(CEDRO)의 에르네스토 페르난데스(Ernesto Fernandez)(이 둘은 페루의 리마에서 활동했다), 또한 리마의 에스쿠에랩(Escuelab)의 대니얼 미라클(Daniel Miracle)을 비롯한 몇 명이 포함된다. 또한 뉴올리언스에 있는 루이지애나 버킷 브리게이드(Louisiana Bucket Brigade)의 크리스 안신(Kris Ansin), 섀년 도스마건(Shannon Dosemagen), 앤 롤프(Anne Rolfes)가 포함된다. 이 외에도 지치지 않고 연과 풍선을 날리고 날마다 수마일 길이의 끈을 풀고 감았던 수십 명의 참여자들이 포함된다. 아마 가장 중요한 점은, 도구들이 참여자들에 의한 지속적인 사용에 응하여, 그리고 그것을 사용한 사람들의 결과 입력과 협동을 통해 발전하고 진화했다는 점일 것이다.

1.1.1 항공 이미지의 사용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환경감시, 토지 보유권, 저널리즘, 상업적 이용 등 다양한 목적으로 지도를 만들었다. 청년들의 워크숍에서 실제로 해보는 학습과 공동체 계획을 강조하며 많은 지도들이 제작되었다. 그리고 위기 상황과 갈등 지역에서는 주문에 맞추어 지도를 제작하는 도구들 특유의 능력이 탐구되었다. 이 기술은 낮은 비용 때문에 저소득 혹은 개발도상 지역에서 그리고 지역 수준의 도시계획에서 더 광범하게 사용될 잠재력을 가진다. 자신의 집을 새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은 공동체·환경 및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사유와 토론을 개시할 수 있다. 지역 공동체들에 관여하면서 그 공동체들로 하여금 그 도구들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침으로써 매핑은 원격감지가 특징인 노력들―사람들을 데이터로 취급하고 지도제작의 인간적 측면을 그럴듯하게 가리는 노력들―보다는 인간관계에 더 적절한 연관성을 띠게 되었다.

1.1.2 교육으로서의 풀뿌리 매핑

이 프로젝트가 널리 사용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나와 도구를 소유하고 있는 다양한 참여자들은 다양한 교육자료들― 설명서, 온라인 비디오, 워크숍―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프로젝트를 발전시켰다. 이 자료들은 페루 리마의 10-15살짜리들에서부터 웨스트버지니아와 켄터키의 환경활동가들에 이르는 광범한 청중을 대상으로 했다. 이러한 문서화 작업은 지난해에 수십 개의 워크숍들에서 내가 참여자들과 협동하고 그들을 가르치면서 발전했으며, 프로젝트 위키도 여기에 포함되는데, 이는 참여자들이 그들의 작업, 비디오들, 메일링리스트들을 모아놓은 블로그로서 여기서 새로운 아이디어들과 프로젝트들이 토론되고 비판된다.

조지아주의 쌘트레디아에서 풀뿌리 매핑 워크숍에 참여한 학생들

1.1.3 공동체로서의 풀뿌리 매핑

카타겐 맵 렌더링 틀(the Cartagen map rendering framework)과 항공 이미지를 보정하는 카타겐 니터(the Cartagen Knitter)와 같은 디지털 도구들조차도 결국 광범한 매핑 공동체에서 동료들과 기여자들의 도움과 지원으로 구축되었다. 테크놀로지 프로젝트에서 이것이 규범이 되었다는 것이 이 작업의 많은 부분이 그러한 기여 없이는 불가능했으리라는 사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가장 큰 강점 가운데 하나는 특수한 욕구를 가진 공동체들과의 협동에서 발전했다는 점이라는 사실의 의미를 깎아내리지는 못한다.

도구들을 구축하는 것은 더 추상적인 테크놀로지를 발전시키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사용자들과의 지속적인 소통만이 아니라 일련의 타협과 실용적 결정이 디자인 과정을 이끌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풀뿌리 매핑 프로젝트는 특수한 욕구들에 대한 반응으로서 발전했으며, 고립되고 순전히 학술적인 작업으로 검토되기보다는 그것이 염두에 둔 특수한 이용의 맥락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캡처

보정

출판

2-3명의 사람들이 하루에 수평방킬로를 매핑할 수 있다.

사진들을 분류하는 데 1시간 이상, 최대 하루까지 걸릴 수 있다.

카타겐 니터에서 내보낸 것이 TMS 혹은 인쇄 가능한 GeoTiff를 생성한다. 웹으로 접근하기만 하면 된다.

1.2 도구들, 테크놀로지들 그리고 청중

풀뿌리 매핑 기획의 일부로서 개발된 도구들은 경험과 전문지식이 거의 없어서 단순하고 직접적인 지도제작 도구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강력하고 효율적인 매핑 테크놀로지를 필요로 하는 열렬한 참여자들의 욕구에도 응한다. 따라서 도구들 가운데 일부는 사용하기가 간단하면서도 ‘파워 사용자들’ 혹은 코드를 자유롭게 쓰고 편집하는 사람들에 맞추어져 있다. 카타겐 틀이 이 범주에 속한다. 항공 이미지를 캡처하는 풍선 및 연 플랫폼들과 같은 도구들은 더 광범한 청중에게 맞추어져 있다. 카타겐 틀의 특수한 응용프로그램인 카타겐 니터도 그렇다. 다양한 도구들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풀뿌리 매핑 키트(Grassroots Mapping Kit)는 최초의 항공 이미지를 캡처하여 가공하고 결과를 조합하여 디지털본 및 인쇄본 지도들을 출판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이 절은 필요한 도구들과 관련된 틀짜기, 의도, 청중에 초점을 맞추며, 도구들에 대한 전문적 논의는 6장에 들어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지도제작자들이 연, 풍선, 헬륨 탱크, 디지털 카메라, 최소 200미터의 끈 및 기타 각종 기자재들을 가지고 지도를 제작하려는 장소를 방문한다. 끈을 묶은 풍선이나 연에 카메라를 부착하여 1-10초의 주기로 사진을 찍도록 카메라를 설정하고 지역의 규정에 따라 고도를 200에서 2000미터 사이로 올려서 이미지를 캡처하도록 한다. 지도제작자들은 묶은 끈을 감아서 카메라를 회수하며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를 사용하여 가장 좋은 이미지들을 카타겐 니터 웹사이트에 업로드한다. 이 웹사이트에서 새로운 온라인 지도를 만들어내는데, 오픈스트리트맵(OpenStreetMap) 벡터 데이터나 바둑판식 기본 레이어를 준거로 삼아 각 이미지가 보정될 수 있고 최종적으로 지도로 조합될 수 있다. 그 결과는 사용 의도에 따라서 온라인에서 보기 위해서 다른 웹사이트에 끼워넣어질 수 있고, 바둑판식 지도 서비스(a Tiled Map Service, TMS)로 내보내질 수도 있으며 지리TIFF(Geographic TIFF, GeoTIFF) 파일로 인쇄될 수도 있다.

풀뿌리 매핑 키트 및 그와 연관된 기술들은 프로젝트 위키인 http://wiki.grassrootsmapping.org에 완벽하게 문서화되어 있으며 추가적인 지원과 토론은 프로젝트 메일링리스트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이는 세계 전역에서 과거에 진행되었고 현재 진행 중인 매핑 노력들의 광범한 문서화와 함께 http://grassrootsmapping.org에서 볼 수 있다. 인쇄물 문서 역시 각 키트에 딸리도록 고안된 5쪽의 삽화를 넣은 설명서와 몇 가지 체크리스트의 형태로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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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해방될 노래 <해피 버스데이>

* 다음은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에 게시된 2015년 8월 12일자 글 “The Impending Liberation of “Happy Birthday””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곧 해방될 노래 <해피 버스데이>

 

만일 문화산업체들이 사람들이 왜 저작권법을 별로 존중하지 않는지 궁금해 한다면, 그들은 워너뮤직그룹(Warner Music Group)이 노래 <해비 버스데이>에 대해 저작권을 주장한 일을 보기만 하면 된다. 이는 저작권법의 공언된 원칙들에 대한 기괴한 장난질이며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온, 대중에 대한 사기이다. 그러나 하루 5천 달러, 한 해 2백만 달러의 수입이 흘러들어오는 까닭에 워너뮤직은 ‘그들 소유의’ 노래를 부를 권리에 요금을 부과하기를 중단하지 않을 작정이다.

 

그러나 한 용감한 영화제작자 덕분에 이 희화(戲畫)는 곧 종말을 고할 듯하다. 제니퍼 넬슨(Jennifer Nelson)은 노래 <해피 버스데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었는데, 그때 워너뮤직이 영화에서 이 노래를 사용하는데 1500불을 내야할 것이라고 했다. 넬슨이 이에 반발하여 2년 전에 소송을 낸 것이다. 이는 그 자체로 저작권 소유자들에 의한 통상적인 법적 으름장에 대한 주목할 만한 도전이었다. 많은 보수를 받는 법률가들을 거느린 거대한 기업과 전투를 하거나 음악, 영화, 출판회사들로부터 받은 지원금 때문에 이미 그 생각이 정해진 의원들에게 로비를 할 돈과 배짱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대부분의 텔레비전 프로들은 사회자들이나 공연자들에게 <해피버스데이>를 부르지 말도록 금지했으며 여러 레스토랑들은 라이선스 비용이 들지 않도록 다른 노래를 대신 사용했다.

 

지금 넬슨의 법률 팀이 <해피 버스데이>의 저작권의 효력이 정지된 지 몇 년 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아낸 것 같다. 법률가들이 피츠버그 대학이 사용하는 저장시설에서 <해피 버스데이>의 가사가 <굿모닝과 생일 노래>(“Good Morning and Birthday Song”)라는 제목의 노래에 들어있는 1922년의 노래책을 발견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그 노래에 저작권 표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표시는 그 당시의 법으로는 저작권 보호의 필수요건이었다. 그리고 1923년 이전에 출판된 것은 모두 공적 도메인에 진입하여 누구나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다.

 

물론 워너뮤직의 법률가들은 극히 전문적인 법적 대응들을 한다. 이것이 이런 경우에 보통 일어나는 일이다. 역사적 기록과 법 규칙들은 비싼 법률가들만이 빠져나오는 어두운 동굴을 닮았다. 이런 경우에, 판사는 이 건을 지금 결정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있는지 아니면 공판이 필요한 것인지를 판정해야 한다. 이것이 어떻든, 많은 이들이 1922년 노래책을 ‘명백한 증거’(“smoking gun”)로 간주하고 있다.

 

불가해한 법 문서들이 어떻게 작용하든, 흑인 민속문화에서 나왔으며 힐 자매(Patty and Mildred Hill)가 1858년에 ‘쓴’ 노래가 ‘원작’이 창작된 지 172년 후인 2030년까지 공적 도메인에 진입하지 못한다는 것은 명백히 불합리한 일이다. 이 긴 저작권 독점이 힐 자매가 그 노래를 ‘창작하기’ 위해 필요로 한 ‘인센티브’라는 식이다.1

 

넬슨과 넬슨의 소송에 참여한 다른 예술가들 덕분에 <해피 버스데이>라는 이름과 연관된 값비싼 저작권 장난질은 곧 종말을 고할 듯하다. 그런데 저작권법이 사회적 커먼즈의 실제적 생성력과 ‘원작자로서의 존재’를 고려하기 시작하는 것은 언제일까? 내 생각에 이를 위해서는 법 분야에서의 훨씬 더 큰 혁명이 필요할 듯하다.

 

[<해피 버스데이>의 저작권을 다룬 로버트 브로니스(Robert Brauneis)의 2010년 글이 이 주제를 가장 엄밀하고 포괄적으로 다룬 글이다. 이는 여기서 구할 수 있다. 글렌 플라이시먼(Flenn Fleishman)의 이보다는 짧지만 여전히 광범한 설명이 최근에 보잉보잉(Boing Boing)에 실렸다.]

 

  1. 저작권은 원래 창작자에게 인센티브를 준다는 취지에서 생겼다. 창작자가 아닌 자들이 저작권을 오래 독점하는 우스꽝스러운 현실을 볼리어가 풍자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커먼즈로서의 도시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에 2015년 11월 14일자로 게시된 글 “The City as Commons: The Conference”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커먼즈로서의 도시

옮긴이 : 정백수

 

지난 주 이탈리아의 볼로냐에 매력적인 200여 명의 커머너들이 모인 걸로 미루어 판단하건대, 커먼즈 옹호의 새로운 주된 전선이 도시라는 집중점에 모였다고 선언해도 무방하다. 개최된 행사는 “커먼즈로서의 도시: 도시 공간, 공통재, 시 거버넌스를 다시 생각하기”(The City as a Commons: Reconceiving Urban Space, Common Goods and City Governance)라는 제목의 컨퍼런스(학술대회)였으며, 이 컨퍼런스는 랩겁(LabGov, LABoratory for the GOVernance of the Commons), 국제커먼즈연구협회(IASC, 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the Study of the Commons, ), 포드햄로스쿨 도시법 센터(Fordham Law School’s Urban Law Center), LUISS 로마법학교1에 의해 개최되었다.

 

여러 해에 걸쳐 여러 주목할 만한 도시커먼즈(urban commons) 기획들이 있었지만, 이 행사는 창조적 에너지, 사람들과 생각들의 다양성, 열정과 목적의식이 돋보였다.

 

볼로냐 시는 이 행사의 완벽한 주최자였다. 이 시는 오랫동안 이 분야에서 개척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 역할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도시커먼즈를 위한 협동에 관한 조례>(Regulation on Collaboration for the Urban Commons)인데, 이 조례는 동네들과 시민들로 하여금 도시 공간들―텃밭(정원), 공원, 유치원, 낙서 청소―을 위한 자신들의 기획을 제안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이 컨퍼런스를 매우 생동감 있는 것으로 만든 것은 세계 전역에서 온 커먼즈 혁신가들의 다양성 그 자체이다. 도시 퍼머컬처 농업가, 오래된 공항들을 메트로폴리스 커먼스로 전환시키는 것을 연구해온 연구자, 도시 개발의 모델인 ‘작은 가정 생태 마을’(tiny home eco-villages) 전문가, 한국의 협동적 도시 서울에서 온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활동가들, 시리아의 이주자들이 피난처가 될 가정들을 이탈리아에서 찾는 것을 소셜미디어를 사용하여 돕는 ‘유목적 커먼즈’를 서술하는 전문가 등등.

 

우리는 바르셀로나의 한 시 공무원으로부터 ‘바르셀로나 엔 꼬무’(Barcelona en Comú)에 대한 발제를 들었다. 이는 시 정부가 움직이는 방식을 다시 만들려고 시도하는 시민 플랫폼으로서 사회 정의와 시민 참여에 강조를 두고 있다. 바르셀로나 시 정부는 도시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비전의 일부로서, 에어비앤비(Airbnb)가 임대료를 올리고 튼실한 동네들을 공동(空洞)화시켜 밤을 새우는 관광객들을 위한 죽은 지대로 만든 이후에 에어비앤비를 금지시켰다.

 

브룩클린에 터를 둔 기획인 ‘596 에이커즈’(596 Acres)는 비어 있는 공공지의 거대한 목록을 만들어서 동네들이 일정한 땅을 공동체 텃밭, 오락, 학습을 위해 기능하는 커먼즈로 만드는 것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유비쿼터스 커먼즈’ 기획은 사람들이 수많은 장치들로부터 자신들이 생성하는 개인 데이터들이 특히 도시 맥락에서 사용되는 방식을 통제하는 것을 돕도록 고안된 본보기적인 법적/기술적 툴킷이다.

 

이 컨퍼런스가 국제커먼즈연구협회가 도시커먼즈를 다룬 제1회 주제 컨퍼런스였기 때문에, 꽤 많은 학자들, 특히 젊은 학자들이 참석했다. 따라서 자원으로서의 커먼즈와 관련된 전통적인 원칙을 적용하는 많은 학술논문들이 발표되었다.

 

커먼즈 활동가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이탈리아의 디자인 전략가인 에지오 만지니(Ezio Manzini)가 주목할 만한 기조발제를 했다. 헬프리히는 자신의 「2040년의 도시(골) 커먼즈를 상상하기」(“Imagining the (R)Urban Commons in 2040”)에서 커먼즈로서의 도시가 2040년에는 어떤 모습일까에 대해 자신의 전망을 피력했다.

 

대학 기반의 디자인 랩들의 네트워크인 ‘지속 가능성을 위한 사회적 혁신 디자인’(Design for Social Innovation for Sustainability, DESIS)의 창립자 만지니는 또 하나의 생각 깊은 기조발제에서 도시들이 관계들의 세계로 간주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도시커먼즈는 “유동적인 형태들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커먼즈들을 실제로 가동시키기 위해서는 고정된 디자인들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법, 이론, 도시 거버넌스에 대해 진지한 독서를 일정하게 하고 싶은 사람은 『예일 법 및 정책 평론』(Yale Law and Policy Review)에 곧 실릴 포스터(Sheila Foster)와 이아이오네(Christian Iaione) 공저의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 글은 커먼즈로서의 도시라는 생각을 체계적이고 상세하게 개괄하고 있으며, 도시들을 위한 일련의 협동적·다중심적 거버넌스 전략들을 제안하고 있다.

 

바우엔스(Michel Bauwens)와 나는 ‘개방적 협동조합주의’와 특히 우버(Uber), 에어비엔비와 같은, 사회 공동체들을 착취만 하지 거기에 재투자하거나 혜택을 공유하지는 않는 ‘죽음의 별’ 플랫폼들2에 대항하는 ‘플랫폼 협동조합주의’ 모델들을 고안하려는 새로운 노력에 대해 단상에서 대담을 했다.

 

이 컨퍼런스가 아주 많은 에너지를 뿜어냈기에, 나는 미래에 도시커먼즈에 대해서 더 많은 기획들이 나올 것을 기대하고, 도시를 커먼즈로서 관리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새롭고 더 집중된 대화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해본다. 다행히도, 도시커먼즈를 다루는 국제커먼즈연구협회의 제2회 주제 컨퍼런스가 2017년으로 이미 계획되어 있다.

 

  1. http://www.luiss.edu/university [본문으로]
  2. ‘죽음의 별’(Death Star)은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조그만 행성 정도의 크기를 가진 거대한 이동 구조물이다. ‘Structure3C’(http://www.structure3c.com/phone/index.html)의 빌 존스턴(Bill Johnston)이 우버, 에어비앤비 등을 이 ‘죽음의 별’에 빗대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오픈 플랫폼에서 디지털 커먼즈로의 이동

* 아래는 카탈로니아 개방대학(Universitat de Oberta Catalunya)의 블로그에 「열린 사유」 시리즈의 일부로 게시되었으며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에 2015년 11월 5일자로 게시되기도 한 볼리어의 글 “The Shift from Open Platforms to Digital Commons”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카탈로니아 개방대학의 블로그는 여러 형태의 자율생산(peer production)의 장점과 한계를 탐구하는 곳이다. 전문 용어의 옮김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의 옮김과 다를 수 있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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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플랫폼에서 디지털 커먼즈로의 이동

옮긴이 : 정백수

오픈액세스 플랫폼에서 관리되는 디지털 커먼즈로―이는 네트워크 기반의 자율생산1이 자신에게 잠재한 엄청난 가치를 실제로 창출하려면 감당해야 하는 주된 과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오픈 플랫폼이 가져다주는 미망

 

우리는 오픈 플랫폼을 더 많은 자유 및 혁신과 동의어로 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구글, 페이스북 등 첨단 거대기업들의 부상에서 보았듯이 대기업들이 지배하는 오픈 플랫폼은 시장 규범들과 일정한 사업모델들의 경계 내에서만 ‘무상이다’(free). 그렇다, 오픈 플랫폼은 사용자들에게 그 어떤 (화폐 형태의) 경비도 지출하지 않게 하면서 많은 가치 있는 서비스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어떤 재화나 서비스가 무상으로 제공될 때, 그것은 실제로 사용자가 바로 생산물임을 의미한다. 이런 경우 우리의 개인 관련 데이터, 관심, 사회적 태도, 삶의 스타일, 행동방식, 심지어 우리의 디지털 신원까지도 플랫폼의 소유자들이 ‘소유’하려고 하는 상품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많은 플랫폼들은 그렇게 자애롭지 않다. 다수가 멱법칙(power law)2의 구조적 동학에 의해 강화되어 있는 기술-경제적 요새들로서, 지배적인 기업들로 하여금 온라인 활동의 일정한 부문을 독점하고 화폐화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 플랫폼에 기반을 둔 시장력(market power)3은 그 다음에 사용자의 삶을 감시하는 데, 때로는 개방된 상호운용성(interoperability)과 공유에 반(反)경쟁적 방식으로 장벽을 치는 데, 그리고 사용자들이 그러한 플랫폼에서 가질 수 있는 내용과 ‘경험’을 소리 없이 조작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4

 

‘오픈 플랫폼’이 가져오는 그런 결과가 전적으로 놀랍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결과는 우리가 자본주의 시장들에서 익히 보아온, 배타적 자산의 획득을 도모하여 그 자산을 화폐화하려는 노력들을 나타낸다. 이 경우에 자산의 원천은 우리의 의식, 창조성, 그리고 문화이다. 앞을 더 길게 내다보는 자본가들은 (정해진 참여조건으로) ‘플랫폼을 소유하는 것’이 내용에 대한 배타적 지적 재산권을 소유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 시장들이 제공하는 협소한 상업주의적 ‘자유’를 넘어서) 기본적인 인간적·시민적 의미에서의 자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물음은, 양도될 수 없는 인간의 자유와 공유된 문화적 공간들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이다. 만일 네트워크의 지배적 장소들이 투자자들, 기업 중역진, 시장연구기관의 요구를 우선적으로 충족시켜야 한다면, 우리의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서로 연결하고 혁신할 자유가 번성할 수 있는가?

 

우리가 시장 너머의 삶과 연관된 인간의 자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표준적인 형태의 ‘사적인’ 기업통제를 넘어서는 ‘플랫폼 협동조합주의’의 새로운 양태들을 개발하는 데 나서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사용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온라인 공유의 혜택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게 하는 기술적·조직적·재정적 형식들을 개척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개인정보와 디지털 신원을 그런 정보의 신뢰할 만한 지킴이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제3자에게 강압에 의해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양도하는 것을 피할 수 있어야 한다.

 

커먼즈 기반의 플랫폼으로 이동해야 하는 다른 이유들도 있다. 리드(David P. Reed)가 1999년에 발표된 독창적인 글5에서 보여주었듯이, 네트워크에 의해 창출된 가치는 ‘최고의 콘텐츠’에 기반을 둔 방송모델에서 P2P거래 네트워크로 이동하면서 상호작용이 증가함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방송모델에서는 가치가 시청자들의 수인 n이지만, P2P거래 네트워크에서는 가치가 ‘최대 회원수’에 기반을 두며 수학적으로 n2으로 표시된다.

 

그러나 가장 가치 있는 네트워크들은 공유된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집단으로의 결집을 촉진하는 네트워크들이다. (나는 그런 집단들을 커먼즈라고 부른다.) 리드는 “집단 형성 네트워크들”(group forming networks)―여기서 사람들은 “공통의 목적을 위한 자유롭고 책임 있는 결사(結社)”에 쓰일 도구들을 갖추고 있다―의 가치는 2n임을 발견했는데 이는 환상적으로 큰 숫자이다. 그의 분석이 시사하는 바는, 페이스북, 트위터 등의 사유(私有) 네트워크 플랫폼들이 창출하는 가치는 참여자들이 서로에 대한 신뢰와 확신을 발전시키는 데서 제한된 도구들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픈소스 도구들을 사용하면 사업 모델을 전복시킬 것이다) 극히 초보적인 것으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커먼즈의 잠재적 가치가 고의적으로 억눌려 온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우리의 상상력과 포부는 그 초점을 오픈 플랫폼에서 디지털 커먼즈로 이동해야 한다. 자율적으로 조직된 커머너들이 자신들의 상호작용과 거버넌스의 조건들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들의 협동과 공유의 결실들을 수확할 수 있어야 한다.

 

 

카피페어 라이선스(CopyFair license)를 향하여

 

커머닝의 수단으로서 오픈 플랫폼이 가진 구조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다양한 법적·기술적 혁신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기획들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지만, 매우 유망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기획들은 디지털 커머너들에게 시장의 포획에 저항하고 집단적으로 창출된 내용, 공동체 규범, 그리고 신원의 종획에 저항하는 힘을 부여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 기업의 플랫폼들은 생산자/소비자 관계로만 이루어진 단일한 사회적 문화(social monoculture)6에, 그리고 플랫폼 소유 회사의 사업모델(혹은 더 일반적으로는 시장 관계들)에 맞춘 사회적 행동에 특권을 부여한다. 이와 달리, 자율적으로 조직된 커먼즈는 더 풍요롭고 더 다양하며 의미 있는 유형의 자유와 문화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기본적 문제는, 디지털 커먼즈들이 성장하고 유지되기가 힘든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이 커먼즈들은 적절힌 조직적 구조와 거버넌스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적절한 재정지원을 받지도 못한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의 혁신들이 이 문제의 해결을 도울 수 있다.

 

현재 탐구되고 있는 하나의 가능한 기획은 예를 들어 때로는 ‘카피페어’(CopyFair)라고 알려진 ‘커먼즈 기반의 상호 라이선스’이다. 저작권 소유에 기반을 둔 이 라이선스는 커먼즈의 구성원들 사이에는 무상의 공유를 허용하지만, 공동체의 작업의 결과를 상업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용료의 지불을 요구한다. 이 아이디어는 현재 P2P 재단의 보웬스(Michel Bauwens)와 개방-농업 하드웨어 개발자들 등에 의해 계속 다듬어지고 있다. 일정 계열의 정보나 창조적 작품의 상업적 발전을 완전히 정지시키는 비상업적인 크리에이티브커먼즈 라이선스와 달리, 카피페어 라이선스는 상업화를 허용하지만, 필수적인 (화폐화된) 상호성을 기반으로 해서 허용한다.

 

 

블록체인의 잠재력

 

오픈 플랫폼들을 디지털 커먼즈로 전환시키는 또 하나의 도구는 비트코인의 중심부에 놓여있는 소프트웨어 혁신의 사례인 블록체인 원장(元帳)이다. 비록 비트코인 자체는 익숙한 자본주의적 기능들(세금회피, 투기를 통한 사적 축적)에 복무하도록 고안되었지만, 블록체인 원장은 개방된 네트워크들에서 극히 다양하고 신뢰할만한 집단행동이 가능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이는 디지털 객체(digital object)(현재로서는 비트코인이다)의 진정(眞正)성을 은행이나 정부와 같은 제3의 보증자 없이 확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는 특히 어려운 집단행동 문제를 개방된 네트워크의 맥락에서 해결한다. 당신은 일정한 디지털 객체―비트코인, 법문서, 디지털 증명서, 데이터군, 투표한 표, 혹은 어떤 개인이 주장하는 디지털 신원―가 위조된 가짜가 아니라 ‘진짜’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블록체인 기술은 모든 거래들(즉, 비트코인들)을 계속적으로 추적하는 검색 가능한 온라인 ‘원장’을 사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한다. 이 원장은 방대하게 분산된 수평적 네트워크에 의해 유지되는 일종의 영속적인 기록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기록은 중앙집중화된 장소에 보관되는 데이터보다 훨씬 더 안전해진다. 네트워크의 수많은 접속점들에 등록되는 특정 비트코인의 진정성을 부패시킨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능력 때문에 최근에 발표된 한 보고서는, 블록체인 기술이 ‘분산된 협동 조직들’(distributed collaborative organizations, DCO, 때로는 ‘분산된 자율적 조직들’이라고도 불린다)이라고 불리는 것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기반시설을 제공해줄 수 있으리라고 보고 있다.7 이 조직들은 본질적으로 자율적으로 조직된 온라인 커먼즈이다. DOC는 블록체인 기술을 사용하여 그 구성원들에게 조직 내에서의 명시된 권리를 부여할 수 있는데, 이는 블록체인에 의해서 관리되고 보장될 수 있다. 이 권리들은 다시 기성의 법체계에 연결되어 그 권리들을 법적으로 인지되고 시행될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블록체인이 어떻게 커먼즈를 촉진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본적 사례 하나를 들어보자. 미국 전 연방소통위원회(Federal Communications Commission) 의장인 헌트(Reed Hundt)는 블록체인 기술을 사용하여 태양광 발전을 사용하는 주택들을 커먼즈로서 연계시킨 분산된 네트워크들을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 블록체인 원장이 특정의 주민이 얼마만큼의 에너지를 생성하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며 소비하는지를 추적하게 된다. 사실 이 체계는 탈중심화된 태양광 그리드들8의 조직화를 가능하게 하고 태양광 미시그리드들 혹은 네트워크들 내에서 교환 매체 역할을 할 ‘녹색 통화’(green currency)를 가능하게 한다.9 그러면서 태양전지판의 채택을 추진하게 되는 것이다. 블록체인은 커먼즈 기반의 거버넌스를 가능하게 하는, 네트워크 기반의 아키텍처(architecture)10에 해당하는 것이다.

 

 

스마트거래(Smart transactions)

 

이러한 실험의 장은 디지털 커먼즈를 만드는 데 사용될 또 하나의 획기적 도구를 산출할 수 있다. 바로 스마트계약(smart contracts)이다. 이는 (TCP/IP or http 같은) 공유된 프로토콜의 아키텍처에서 작동하는 동적 소프트웨어 모듈들로서, 오픈 네트워크 플랫폼들에서 새로운 유형의 집단 거버넌스, 의사결정, 규칙 시행이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이미 이런 생각의 초보적―이며 기업지향적인―형태에 익숙하다. 예를 들어 디지털 권리 관리(Digital Rights Management, DRM)가 그 하나인데, 이는 사용자들이 합법적으로 구매한 테크놀로지(DVD, CD 등)를 사용하는 방법을 제한하는 능력을 회사에 부여하는 암호화/인증 시스템이다. 그러나 네트워크 협동의 힘이 분명해지자, 이제 진정한 과제는 디지털 인공물들을 잠그고 사유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오픈 플랫폼들에서 (특정의 기여자 집단이나 모두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서) 합법적으로 시행 가능한 방식으로 신뢰할만하게 공유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임을 많은 기술 혁신자들이 인식하고 있다.

 

기존의 법 아래에서도 시행 가능한 법 업무를 보는 ‘스마트한’ 법무 대리인을 배치하는 기술 시스템들을 고안하려는 많은 활발한 노력들이 현재 진행 중이다. 물론 이 ‘업무’는 새로운 유형의 시장들을 발명하는 데 사용될 수 있지만, 새로운 유형의 커먼즈를 창출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두 영역은 서로 혼합되어 공동체를 위한 일과 시장 활동을 결합하는 사회적 혼종들을 창출할 수도 있다.

 

이와 연관된 소프트웨어 혁신 영역에서는 잘 알려진 협동 구조들을 오픈 네트워크 플랫폼들과 혼합하여 온라인 시스템을 통한 집단적 협의와 거버넌스―‘커머닝’―를 가능하게 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목할 만한 실험들로는 루미오(Loomio), 민주주의OS(DemocracyOS), 리퀴드피드백(LiquidFeedback)이 있다. 이들 각각은 온라인 네트워크들의 구성원들이 직접적이고 지속적이며 다소 복잡한 논의를 수행할 수 있게 하고 그 다음에는 집단이 생각하는 바를 드러내서 참여자들이 구속력 있고 정당하며 의미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결정들에 도달할 수 있게 한다.

 

 

자율생산자들의 네트워크들

 

그런 능력의 자연스러운 확대인 ‘열린 가치 네트워크들’(open value networks, OVN)은 경계가 확연히 지워진 네트워크들의 참여자들로 하여금 크라우드펀딩, 지식의 크라우드소싱, 공동예산마련을 신원 확인이 가능한 구성원들 사이에서 실행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들이다. 엔스피랄(Enspiral), 센소리카(Sensorica)와 같은 ‘열린 가치 네트워크들’은 “새로운 종류의 조직을 위한 운영체제”이며 “새로운 경제를 위한 파일럿 프로젝트”라고 불려왔다. 경계가 뚜렷한 공동체들의 구성원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탈중심화되고 자율적으로 조직된 사회적 거버넌스, 생산 및 생계의 새로운 양태들을 촉진하는 디지털 플랫폼들이 OVN들을 구성한다. 누구든 기획에 기여하고 그 기여에 기반을 두어 보상을 받도록 허용하는 방식으로 네트워크들이 조직된다. 보상은 실질적 기여, 경험 및 기타 집단적으로 결정되는 기준에 의해 측정된다.

 

시장 기반의 활동을 피하는 ‘전형적 커먼즈’와는 달리 열린 가치 네트워크들은 시장에 관여하는 데 단서를 두지 않는다. OVN들은 커먼즈 기반의 자율생산자들로서의 조직적·문화적 온전성을 유지하고 싶을 뿐이다. 여기서는 개방적이고 수평적인 대규모의 협동과 연계가 이루어지고, 개인이 자원에 접근하고 자원을 사용하고 저자로서의 지위와 소유권을 가지도록 허용되면서도 공유된 부와 자산의 책임 있는 파수(把守)가 이루어지며, 공통의 원장 체계를 통한 개인적 ‘투입과 산출’의 세심한 계산이 이루어지고, 개인적 기여에 기반을 둔 공정한 보상의 분배가 이루어진다. OVN들의 특징을 나타내는 몇몇 주목할 만한 키워드들은 ‘잠재력의 동등성’(equipotentiality)11, ‘반(反)자격증주의’(anti-credentialism)12, ‘자기선택’(self-selection), ‘공동의 확인’(communal validation), ‘홀옵티즘’(holoptism)13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플랫폼 협동조합주의를 위한 새로운 기술적·조직적·재정적 형식들을 창출하고자 하는 이 기획들은 아직 출현 단계에 있으며 곧 뉴욕에서 열릴 예정인 것과 같은 모임들에서 토론되고 있다. 이 기획들은 그 기능의 온전함과 규모의 확대를 기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실험들과 발전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기획들은, 기업들에 의해 추동되는 플랫폼들―이것들은 참여의 조건을 정하며, 커머너들 사이에서 혜택을 주고받는 것을 촉진하지 않는다―에 대한 매력적이고 잠재적으로 획기적인 대안들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전망된다. 이 새로운 형식들은, 진정한 커머닝과 사용자 주권 및 통제권을 위한 더 신뢰할 만한 시스템을 제공함으로써 디지털 커먼즈―그리고 사용자가 추동하는 혼종화된 형태의 시장들―가 기존의 오픈 플랫폼들의 가치창출 능력을 곧 능가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1. 이 글에서는 ‘peer production’을 ‘자율생산’으로 옮기기로 한다. 이에 대해서는 http://minamjah.tistory.com/53#footnote_53_25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2. [한글 위키피디아] 멱법칙(冪法則, power law)은 한 수(數)가 다른 수의 거듭제곱으로 표현되는 두 수의 함수적 관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특정 인구수를 가지는 도시들의 숫자는 인구수의 거듭제곱에 반비례하여 나타난다. 경험적인 멱법칙 분포는 근사적으로만, 또는 제한된 범위에서만 적용된다. [본문으로]
  3. 시장력(market power)은 경제학적으로 엄밀하게는 “한 기업이 재화 혹은 서비스의 시장가격을 한계비용 이상으로 올려 이윤을 남길 수 있는 능력”(위키피디아)이다. 여기서는 그냥 어떤 기업이 시장에서 가지는 힘으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본문으로]
  4. 네이버를 보라!! [본문으로]
  5. [원주1] 또한 David Bollier and John H. Clippinger, The Next Great Internet Disruption: Authority and Governance 참조. [본문으로]
  6. ‘monoculture’는 원래 농업에서 한 가지 작물만을 재배하는 ‘단작’(單作)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확대되어 지금처럼 사회적 관계에도 사용되고 컴퓨터에도 사용된다. 컴퓨터의 경우에는 일정한 공동체를 이루는 컴퓨터들이 모두 동일한 소프트웨어를 돌리는 것을 말한다. 컴퓨터 보안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컴퓨터 공동체는 공격에 취약해진다. 공격이 성공하면 한꺼번에 다 무너진다. [본문으로]
  7. [원주2] 스웜 펀드(Swarm.fund), 하바드 버크먼센터(the Berkman Center for Internet and Society), 뉴욕 로스쿨(New York Law School), MIT 미디어랩(the MIT Media Lab)과 관련된 사람들이 낸 보고서 『분산된 협동 조직들― 분산된 네트워크들과 규제틀들』(Distributed Collaborative Organizations: Distributed Networks & Regulatory Frameworks) 참조. 또한 Rachel O’Dwyer, The Revolution Will (Not) Be Decentralized 및 Morgen E. Peck, The Future of the Web Looks a Lot Like Bitcoin 참조. 블록체인 및 이와 연관된 법적 문제들은 필리피(Primavera De Filippi), 최(Constance Choi), 클리핑거(John Clippinger)가 주최하는 일련의 워크숍 「블록체인 혁명/진화」(“Blockchain (R)evolution”)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이 일반적인 주제에 대한 더 광범한 해설로는 John H. Clippinger and David Bollier, From Bitcoin to Burning Man and Beyond: The Quest for Identity and Autonomy in a Digital Society (ID3, 2014) 참조. [본문으로]
  8. grid : 여기서는 전기를 공급자에게서 소비자에게 전달하기 위한 상호연결된 네트워크를 가리킨다. 발전, 변전, 송전, 배전으로 구성된다. 이 방면의 전문가들은 일본에서처럼 ‘(전력)계통’으로 옮기는 것 같다. 여기서는 그냥 음역한다. ‘grid’는 원래 우리나라의 석쇠처럼 금속선(금속막대)이 격자모양을 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이 나중에 전기 분야에서 축전지 안의 활성물질의 지지물·도선으로서 쓰이는 금속판을 가리키게 된다. 여기에 다시 추가된 것이 위에서와 같은 전기 흐름의 네트워크라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9. 자신이 소비한 양보다 많은 태양광 에너지를 생성한 사람이 그 차이만큼을 코인의 형태로 가지게 된다. 태양광 에너지 발전에서 생기는 코인을 ‘SolarCoin’이라고도 부른다. [본문으로]
  10. 컴퓨터나 네트워크에서 말하는 아키텍처란 “컴퓨터 시스템의 기능성, 조직, 실행을 서술하는 일단의 규칙들과 방법들”을 말한다. 특정의 실행이 아니라 컴퓨터의 능력과 프로그래밍 모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정의도 있다. (영어 위키피디아). “정보기술에서, 특히 컴퓨터나 최근의 네트웍에서 말하는 아키텍처란, 프로세스와 전체적인 구조나 논리적 요소들 그리고 컴퓨터와 운영체계, 네트웍 및 기타 다른 개념들 간의 논리적 상호관계 등을 생각해내고 정의하는 등, 모든 곳에 적용되는 용어이다.”(http://www.terms.co.kr/architecture.htm) [본문으로]
  11. 이는 원래 심리학자이자 행동주의 과학자인 래슐리(Karl Spencer Lashley)의 개념으로서, 뇌의 한 부분이 손상을 입으면 다른 부분이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12. ‘자격증주의’(credentialism)는 실제 능력이 아니라 자격증을, 즉 ‘대한민국’식으로 말하자면 ‘스펙’을 중요시하는 사고방식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13. 이는 ‘팬옵티즘’(panoptism)과 대립된다. 팬옵티즘은 지식이 위계적으로 분산되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만 조직에서 진행되는 일의 전체를 보는 것을 가리킨다. 이에 반해 홀옵티즘은 구성원들 누구나 수평적으로 다른 구성원들 모두가 하고 있는 일을 볼 수 있고 수직적으로도 기획의 목적과 연관된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pan’이나 ‘hol’이나 ‘전체’(whole)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원의 접두사이며, ‘opt’는 눈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op’(ὀπ), ‘보이는’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optos’(ὀπτός)에서 왔다. [본문으로]

 




강추!! 카프라와 마테이의 『법의 생태론』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에 2015년 10월 9일자로 게시된 글 “Highly Recommended: Capra & Mattei’s The Ecology of Law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강추!! 카프라와 마테이의 『법의 생태론』 

옮긴이 : 정백수

커먼즈 기반의 법에 관한 비전을 제시하는 중요한 새 책이 막 나왔다! 『법의 생태론―자연 및 공동체와 조화되는 법체계를 위하여』(The Ecology of Law: Toward a Legal System in Tune with Nature and Community)』는, 앞으로 많은 환경 문제들을 풀려면 법 자체를 다시 개념화해야 하며 커머닝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과학과 법 분야에서 각각 모험적 정신이 돋보이는 카프라(Fritjof Capra)와 마테이(Ugo Mattei)의 작업의 결과이다. 카프라는 물리학자이자 체계이론가(systems thinker)로서 1975년에 그의 책 『물리학의 도』(The Tao of Physics)로 처음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는데, 이 책은 근대 물리학과 동양 신비주의를 연결하고 있다. 마테이는 이탈리아의 잘 알려진 커먼즈 법이론가이자 국제적인 법학자이며 커먼즈 활동가로서, 샌프란시스코의 헤이스팅스 법과대학과 투린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그는 또한 이탈리아 북부지역에 있는 키에리(Chieri) 타운의 부시장이다.

 

『법의 생태론』은 법의 역사를 과학적·기계론적 세계관의 산물―만일 우리가 생태적 재난을 비롯한 많은 현대의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극복해야 하는 유산―로서 야심차고 거시적으로 서술한다. 이 책은, 근대적 사고방식(사유의 템플릿) 자체가 오늘날의 세계에서 심각한 근본적 문제라고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근대적 사고는 개인들이 집단의 안녕과 생태적 안정에 가하는 해악에도 불구하고 개인에게 지고의 행위자라는 특권을 부여한다. 근대는 또한 세계를 관찰 가능한 인과관계에 의해 지배되는 단순화된 기계론적 관계들에 의해 지배되는 것으로 보며, 주체성·돌봄·의미와 같은 더 섬세한 삶의 차원들을 무시한다.

 

카프라와 마테이는 이에 대한 교정으로서 법에 의해 인정되는 일단의 새로운 커먼즈 기반 제도들을 제안한다. (이때 법은 그 자체로 전통적인 국가법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될 것이다.)

 

두 세련된 재야 이론가들이, 커머닝에 기반을 두며 새로운 종류의 ‘생태법’(ecolaw)에 의해 보호받는 세계에 대한 비전을 개관하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멋진 경험이다. 카프라와 마테이는 자연과학과 법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유사점들을 스케치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예를 들어 과학과 법 모두 인간과 자연에 대한 공유된 개념들을 반영하고. 우리는 여전히 로크, 베이컨, 데카르트, 그로우셔스(Hugo Grotius)1, 홉스가 그려낸 우주론적 세계에 살고 있는데, 이들 모두는 세계를 원자론적 개인들과 기계론적 원리들이 지배하는 합리적이고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질서로 보았다. 이런 세계관이 경제학, 사회과학, 공공정책, 그리고 법에서 계속적으로 우세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법의 생태론』이 가진 대담함은 근대의 병리학이 어떻게 오늘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설명하겠다고 주장한 데 있다. 이 세계관이 많은 생태적 재난들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어떻게 막고 있으며, 현재 사람들이 생각하는 법학이 어떻게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의 핵심 요소인가를 설명하겠다는 것이다. 카프라와 마테이에 따르면, 근대는 사유재산과 국가 주권의 신성함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실재의 ‘객관적인’ 자연적 재현으로 간주되는 질서이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구분, ‘개인’과 ‘집단’의 구분 또한 실재의 자명한 서술인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커먼즈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것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서 극히 환원론적이며 우리를 오도한다는 것을 안다. 커머닝은 인간들이 세계에서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이해하는 데 더 통합된 범주들을 적용할 것을 제안한다. 실제 경험상으로 개인들은 집단 내에 삶의 자리를 잡고 있으며 다른 개인들과 협력함으로써만 발전하고 번영한다. 마찬가지로 주관적 경험과 객관적 사실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서로 혼합되어 있어서 그것을 가르는 경계가 모호하다. 근대에 전형적인 양자택일의 구도(‘이것이냐 저것이냐’)는 일종의 합의된 사회적 허구이다.

 

근대 사회에서 법은 사유의 (오도하는) 범주들을 긍정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들 가운데 하나이다. 예를 들어 법은 개별 시민에게 부과되는 외적 한계는 없으며, 개인 각각은 ‘합리적 행위자’로서 자연으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추출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이는 자연을 향상시키며 가치를 창조하고 인간의 진보를 더 진척시키는 것으로 가정된다. 이는 미친 듯 날뛰어 지구를 파괴하기에 이른 사회적 DNA이다. 근대의 세계관에서는 역사도 없고 사회적 참여도 맥락도 없는 고립된 행위자들인 개인들이 변화의 주된 동인으로 간주된다. 이것이 개인들에게 마음껏 자신만을 생각하고 쾌락을 즐길 허가증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는 계속적으로 깊은 영향력을 미치는, 위험한 자본주의적·자유방임적 망상이다.

 

그렇다면 탈자본주의적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단지 새로운 법을 통과시키거나 새로운 일단의 정책을 입안하는 문제가 아니다. 세계관에 대한 우리의 심층적 전제들과 대면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과 법에서 전과 다른 자연관과 인간관을 반영하는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카프라와 마테이는 주장한다. 우리는 세계를 기계로 보는 패러다임에서 세계를 상호의존의 네트워크로 보는 체계론적이고 생태론적인 패러다임으로 옮겨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법은 ‘저 외부에’ 객관적 실재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법은 사회적으로 구축된 질서이며, 우리가 되찾아야 할 힘이다. 카프라와 마테이는 법은 항상 커머닝의 과정이다라고 쓰면서 법이 커머너들의 공동체들에서 출현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이 통찰이 우리가, ① 법을 권력과 폭력(국가)으로부터 분리할 것, ② 공동체들을 주권자로 만들 것, ③ 소유권을 생성적인(generative) 것으로 만들 것이라는 세 가지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새로운 ‘생태적 질서’를 구축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법의 생태론』을 관통하는 풍성한 통찰의 가닥들을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여기서는 저자들이 한 주장의 풍미를 같이 맛보는 데 머물기로 하자.

최종적인 무질서로 달려가는 데 대한 가장 중요한 구조적 해결책은 법을 공동체들의 네트워크들에 되돌려줌으로써 인간의 법과 자연의 법 사이에 일정한 조화를 복원하는 것이다. 만일 법의 본성이 지역의 조건들과 근본적 욕구들을 반영하면서 진화하는 공통적인 것임을 사람들이 이해한다면,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관심을 쏟을 것이다. 사람들은 법이 너무나도 중요하기에 조직된 유관 집단의 손에 계속해서 쥐어져 있을 수가 없다는 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바로 법을 만들고 사용하는 주체들인 것이다.

 

문화와 진정한 시민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한 혁명인 법에 대한 생태론적 이해는 위계와 경쟁을 법적 질서의 ‘올바른’ 내러티브로 보는 사고를 극복한다. 이 생태론적 이해에서는 네트워크라는 은유, 하나의 목적을 공유하는 개방된 공동체라는 은유를 통해 부분들과 전체 사이의―개별적인 권리들·의무들·권한들·힘과 법 사이의―복합적인 관계들을 포착하려고 한다.

 

커먼즈의 참여자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법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지 않고 자신들의 법을 입법하고 시행한다. 그들은 모든 집중된 권력으로부터 초연해 있으며/있거나 폭력을 독점하고 있다는 모든 주장으로부터 초연해 있다. 그들은 삶의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 사이의 인위적 구분을 극복한다. 여기서 법의 해석은 전문가들이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집단적 의미를 공유하는 일로서 수행한다. 법은 권력과 폭력에의 의존으로부터 분리되면 언어, 문화 혹은 기예와 같은 것이 된다. 법은 집단이 서로 소통하고 스스로에 대해 결정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1. Hugo Grotius : 네덜란드의 법학자로서 국제법의 기초를 마련했다. [본문으로]

 




누가 왕의 삼림을 사용할 수 있는가

* [옮긴이]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에 게시된 2015년 9월 14일자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내용전달 위주로 서둘러 옮겨야 했기 때문에 정밀하게 옮기지 못한 부분들이 있을 수 있다. 주석은 모두 옮긴이의 것이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누가 왕의 삼림 사용할 수 있는가?

–우리 시대에  마그나카르타가 가진 의미, 커먼즈 그리고 법

옮긴이 : 정백수

 

나는 요즘 법과 커먼즈의 관계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에 전략 메모 「커먼즈를 위한 법을 재발명하기」를 4회에 걸쳐 게시하기도 했다. 다음 강연은 9월 8일 베를린의 하인리히 뵐 재단에서 한 것으로서 예의 메모와 짝을 이룬다. 테마는 ‘마그나카르타 800주년 축하와 그것이 오늘날 커머너들에게 가지는 의미’이다.

 

이 강연의 비디오 판은 여기서 볼 수 있다. 더불어 나의 동료 미셸 보웬스의 P2P개발에 대한 강연도 볼 수 있으며, 질케 헬프리히가 사회를 본 청중과의 토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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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나카르타 800주년과 커먼즈에서 법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오늘밤 강연을 할 수 있도록 초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8세기 전에 일어난 일을 누군가가 아직도 경축한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 사건에 대한 우리의 기억 이외에도 매우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이 역사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잊은 것에 대해서 기억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점입니다.

 

마그나카르타 800주년에 우리가 경축하는 것은 1215년 잉글랜드 러니미드(Runnymede) 들판에서 있었던 평화협정의 조인입니다. 이 협정으로 많은 경멸을 받은 존 왕과 왕에게 반란을 일으킨 국왕봉신들(barons)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종식되었습니다. 휴전으로 의도되었던 것은 곧 거버넌스의 적합한 구조에 대한 더 큰 공식적 진술로 간주되었습니다. 마그나카르타는 중세인들의 생활방식을 많은 고어 단어들로 서술하는 가운데서도 이제 왕의 제한된 권력과 보통 사람들의 권리 및 자유권들에 대한 획기적인 진술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긴 내전 이후에 존 왕이 마그나카르타를 받아들인 것은 믿을 수 없이 아득한 옛날 일이기에 쉽사리 망각될 일로 보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우리 현대인들과 관련이 있을 수 있을까요? 마그나카르타의 지속성과 반향은 집중된 힘에 대한, 특히 왕권에 대한 우리의 경계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왕의 권위가 법의 지배에 의해 제한되고 이것이 인간의 역사에서 문명이 더 높아지는 새로운 순간을 나타냄을 상기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억눌린 사람들과 동일시하기를 좋아하고, 개인들의 권리와 자유권들을 보호한다고들 말하는, ‘법’이라고 불리는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왕들조차도 존중해야 한다고 선언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정신으로 미국 법조협회는 1957년에 “법 아래에서의 자유”라는 말이 새겨진 화강암 대좌(臺座)를 러니미드에 세움으로써 마그나카르타를 경축했습니다. 거대한 공적 행사들에―특히 올해에―판사들, 정치인들, 법학자들 및 저명한 비공식적 유력 인사들이 모여서 헌법에 기반을 둔 통치와 대의민주주의가 마그나카르타의 원칙들을 어떻게 계속해서 떠받치고 있는지를 공언하기를 좋아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이따가 말하겠습니다.

 

오늘 저는 마그나카르타와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더 풍부하고 더 복잡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사실 서로 연결되어있지만 구분되는 두 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1번 이야기는―이것을 ‘근대 시장/국가의 승리’라고 부릅시다―지금 제가 막 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보통 유명한 엘리트들이 입헌민주주의, 이른바 자유로운 시장과 마그나카르타의 긴밀한 연관, “법 아래에서의 자유”라는 이념을 경축하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1번 이야기는 입헌민주주의와 대의제가 마그나카르타에 담긴 권리들을 방어해줌으로써 실제로 자유와 법의 용감한 성채로서 기능한다고 우리를 안심시켜 줍니다. 물론 대헌장은 왕정, 부족 제도, 그리고 홉스가 말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것들은 세계의 많은 지역들에서 한때 우세했던 것들입니다―너머로의 주목할 만한 전진을 나타냅니다.

저 자신은 마그나카르타 이야기의 무시된 측면, 그다지 이야기되지 않는 이야기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을 2번 이야기라고, 아니면 ‘커먼즈를 위한 법’(Law for the Commons)이라고 부릅시다.1 이 무시된 두 번째 이야기는 800년 전에 일어난 마그나카르타의 조인을 핵심으로 한다기보다 그 원칙들을 민중의 삶 속에 현실화하는 지속적이고도 끝나지 않는 투쟁을 핵심으로 합니다. 2번 이야기에는 공직적인 주류 이야기가 가진 지적인 화려함이나 성스러움이 없습니다. 그것은 더 세속적이고 보통 사람들에게, 즉 커머너들에게 더 집중되어 있습니다.

2번 이야기의 본질적 핵심은 민중의 일상적 생존욕구를 충족시키고 인간의 권리를 실현하는 데서 마그나카르타가 가진 기능적인 법적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서 물려받은 공통의 부에 모두가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그 핵심입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2번 이야기는 ‘누가 왕의 삼림2을 사용할 수 있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1200년대 초의 커머너들은 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의 삼림’이 무슨 말이냐? 삼림은 우리 것이다! 수 세기에 걸쳐 우리 것이었다.‘ 커머너들도 권리를 가지고 있었음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 바로 이것이 마그나카르타의 망각된 유산입니다. 삼림을 사용할 권리, 자치 규칙들을 스스로 조직할 권리, 왕의 자의적인 권력 남용에 맞서서 스스로를 보호할 자유권들3과 권리들.

이 모든 것이 성문법이라는 생각보다 앞서 존재했습니다. 이 권리들은 근본적인 욕구와 기나긴 전통에 기반을 둔 권리들로 간주되었습니다.

우리는 13세기의 커머너들이 거의 모든 것을 숲에 의존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요리와 난방을 위한 나무를 숲에서 해왔습니다. 식탁에 올려놓을 고기를 숲에서 잡았고 물고기를 강에서 잡았습니다. 소나 돼지에게 먹이기 위해 숲에서 도토리와 여러 식물들을 채취해왔습니다. 숲이 곧 우주였습니다. 봉건 영주들이 소유한 장소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사용 관습에 의해서 커머너들에게도 권리가 부여된 장소였습니다. 숲은 또한 그들의 상상력, 문화 그리고 그들의 존재 자체에 형태를 부여한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존 왕이 삼림에 대한 통제권을 점점 더 많이 전유하기 시작하자, 이것이 봉건 귀족들에게만 심각한 압박을 준 것이 아니라―물론 봉건 귀족들은 곧 반발하여 반격했습니다―커머너들의 생존도 위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왕이 숲을 탈취한 것은―이는 왕의 주장관들(sheriffs)에 의해 무자비하게 시행되었습니다―가축들이 숲에서 방목될 수 없음을 의미했습니다. 돼지들이 도토리를 먹을 수 없었고, 커머너들이 나무를 해와서 집을 고칠 수도 없었으며, 과일과 물고기도 채취하고 잡을 수 없었습니다. 댐이나 개인이 만든 방죽길 때문에 배들이 강을 오갈 수도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고 다른 많은 것이) 잉글랜드에서 길고 격렬한 내전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마그나카르타라고 알려진 휴전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평화의 조건은 왕의 절대 권력에 일련의 법적 제한을 가하고 커머너들을 포함한 민중에게 일련의 정해진 법적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마그나카르타의 이야기에서 보통 잊혀지는 것이 2년 뒤에 마그나카르타에 통합된 자매 문서인 삼림헌장(the Charter of the Forest)입니다. 이 문서는 커머너들의 관습적 권리들을 명시적으로 보호하고 있습니다. 삼림헌장은 커머너들에게 숲의 특수한 사용을 보장하는 일종의 인권 협정입니다. 돼지방목권, 에스토버4로서 땔감을 채취할 권리, 개방된 숲 사용권, 토탄채굴권 등 다수의 권리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요컨대, 삼림헌장은 사유화에 가해진 최초의 법적 제한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그나카르타를 공식적으로 경축하는 자리에서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실로 커머너들을 이렇게 인정한 것이 마그나카르타의 위대한 성취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삼림헌장은 커머너들에게 인간의 생존에 근본적인 집단적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공식적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이 헌장은 왕의 주장관들이 왕의 자의적인 종획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체포, 상해, 고문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함으로써 오늘날 ‘국가의 테러’라고 부를 수 있는 행동들로부터 커머너들을 보호했습니다.

 

불행하게도 마그나카르타는 당시 그 원칙들을 스스로 시행할 수단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왕은 초월적 법5을 자기 마음대로 정지시킬 수 있었으며 정지시킨 결과로 나올 사회적·정치적 항의에 의해서만 제한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지난 수 세기에 걸쳐 일어났고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1536년에 헨리 8세는 잉글랜드의 수도원들을 없앴습니다. 라인보에 따르면 이는 “국가가 후원한 대대적인 사유화 행동”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계급 즉 종획을 수단으로 하여 땅을 취하고 땅을 수익을 내는 데 사용할 젠트리6가 들어설 문을 열어주었다”라고 라인보는 쓰고 있습니다. 수도원들의 해체는 잉글랜드의 토지를 상품으로 전환시킨 “국가가 후원한 대대적인 사유화 행동”이었습니다. 당시의 한 저널리스트에 따르면 “토지가 마법적 성격을 상실한 것”이었습니다. 

17, 18세기에 의회는 출현하는 젠트리 계급을 위해서 4천 건 이상의 종획을 승인했으며, 그리하여 젠트리들에게 잉글랜드의 공유지 가운데 약 15%를 사적으로 강탈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 종획들은 많은 커머너들이 토지와 맺고 있는 깊은 연관을 파괴했으며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파괴하고 산업화로 가는 길을 닦았습니다. 임금노동자들, 소비자들, 거지들로 구성된 새로운 민중 계급도 창출되었습니다. 커먼즈를 박탈당한 민중은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기 위해서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 새로운 세계에서 마그나카르타의 원칙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문서화된 법의 지고함은 법에 더 큰 지속성과 존엄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진전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우리는 성문법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성문화된 형식적 법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거버넌스 규칙들이 더 영속적이고 심지어는 영원한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분명 왕을 포함한 마그나 카르타의 옹호자들은 이런 생각을 장려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법이 그 법에 의해 통치되는 사회적 공동체로부터 분리될 때―능동적 합의가 전문적 법률가들, 정치가들, 판사들에 의해 유린될 수 있을 때― 이는 새로운 종류의 폭정으로 향하는 첫 걸음이 됩니다. 성문법은 이러한 문제점으로 항하는 문을 열어줍니다. 합법성(legality)과 정당성(legitimacy)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자가 다르다는 것은, 프랑스의 법인류학 교수 에띠엔느 르 로이Étienne Le Roy가 주장한 바입니다.) 성문법은 법을 인쇄된 단어들로 이루어진 인공물―이는 전문적 법률가들과 법학자들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일단의 규칙들로 간주할 수 있는 어떤 것입니다―로 만듦으로써 합법성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통치 영역을 창출했습니다. 법 자체가 해석과 조작이 가능한 외적 대상, 민중들로부터 분리된 어떤 것이 되었습니다. 법은 절대적이고 자립적인 것으로 떠받들어지는 우상, 엄격한 준수를 의무화하는 어떤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문화된 법은 법률가들과 판사들이 법을 해석하는 성직자들이 되면서 문구들의 조작과 속임수가 훨씬 더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왕은 단지 합법성이라는 외피를 주장하면 되었습니다. 그 외피가 형식적이고 문서화된 법과 일정한 그럴듯한 관련이 있는 한에서 말입니다. 다른 식으로 얻어지는 ‘정당성’은 축출되었습니다. 왕이 선언하는 바의 ‘법’은 자기충족적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법’을 마음대로 시행할 강제력에 대한 독점권을 왕 개인이 (정말로 “개인”입니다) 편리하게 보유하게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왜 마그나카르타의 거대한 원칙들이 인권의 보증자로서 줄곧 신뢰할 수 없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저는 이미 잉글랜드에서 왕이 카톨릭 수도원들을 종획한 것과 17, 18세기의 종획운동을 언급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 시대에 와서는 입헌 민주주의가 특히 9/11 이후에 법의 적정 절차, 공정성, 인권과 커머닝7의 용감한 방어자가 아님을 목도해왔습니다. 

우리 시대의 주권자―초국적 기업들과 손을 잡은 국민국가―는 입헌 민주주의와 사법 심사제의 제한장치로 간주되는 것들을 회피하는 많은 길들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미국 정부의 자칭 국가안보가 어떻게 인신보호영장의 권리를 압도해왔는지를 보았습니다. 마그나카르타에도 불구하고 미국 군대와 CIA는 수많은 개인들에게 고문을 가했고 수인들로 하여금 적정 법절차를 거치게 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많은 중동 지역에 수천 번의 드론 공격을 가했는데, 이는 사법 심리를 거치지 않은 무법의 사살행위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말고도 더 나열할 수 있습니다. 요점은, 이미 수립된 입헌 통치와 민주주의의 제도들이 이를 말없이 방조했으며 마그나카르타의 원칙들을 능욕하는 극악무도한 행동들을 찾아내고 처벌하는 데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현대의 주권자들인 국민국가들과 기업들―시장/국가―이 마그나카르타를 경축하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에는 거대한 양의 불협화음이 일고 있습니다. 국민국가들과 기업들은 우리의 계몽된 근대적 질서를 관리하는 데서 수행하는 인정 많은 역할로 인해서 머리 위에 광륜(光輪)이라도 얹어놓을 필요가 있는 모양입니다. 올해 초에 영국의 웨스트민스터에 유력한 정치인들과 골드만삭스, 바릭골드8 및 기업화된 로펌들에서 온 기업계 고위 인사들이 모여서 한 일이···다름 아닌 ‘법의 지배’(the rule of law, 법치)를 경축한 것은 바로 그러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읍니다.9 수 세기에 걸쳐서 우리가 마그나카르타에 매료된 것은 주로 염원의 표현이었다고 혹은 더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유용한 표지기사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권력이 정말로 길들여져 있으며 인류에게 복무한다고 우리를 안심시키고―혹은 그렇게 다른 이들을 납득시키고―싶어 합니다.

 

물론 사실 국가에 의해 도움을 받는 신자유주의적 시장질서는 커먼즈를 종획하는 데 있어서 존 왕만큼이나 무자비하고 맹렬하다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국가와 기업계는 우리의 공통의 부를 ‘합법적으로’ 사유하는 데 법을 사용하기 위해 공모하기 일쑤입니다. 이는 전지구적 금융부문의 약탈행위에서 가장 두드러집니다. 지구의 대기가 주요 산업들, 특히 화석연료를 파는 산업들에 의해 무상의 쓰레기 처리장으로 사용되며 이에 대해 국가는 거의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바이오테크 회사 및 제약회사들은 유전자에서 박테리아를 거쳐 양(羊)에 이르는 생명체들을 특허법을 통해 사적인 상품으로 전환시키도록 허용받습니다. 투자자들과 국부펀드들10이 전지구적 토지수탈의 일환으로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거대한 넓이의 땅을 사들여서 커머너들을 축출하고 미래의 기근(飢饉)을 위한 기초를 다지고 있습니다. 회사들은 바다에서 생선과 광물들을 약탈하고 있습니다. 광산회사들과 임업회사들은 야만스런 자국 자원추출11의 기획들을 통해 라틴아메리카의 풍경들을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단어, 색깔에서 냄새까지 모든 것이 상표로 등록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2초 지속되는 소리 조각들도 저작권으로 보호될 수 있습니다.

존 왕의 시대에는 종획이 거의 숲에 대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에는 생명 자체를 포함한 모든 것이 종획의 대상입니다.

 

앞에서 제기한 ‘누가 왕의 숲을 사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오늘날 법은, 헌법·선거·법정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커머너들이 스스로를 다스리거나 주권자에 맞서서 자신들의 권리를 옹호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을 정도로 현대의 주권자들에 의해 포획되고 부패되었습니다. 주권자의 위치에 있는 시장/국가는 시장교환의 논리에 의해 거의 모든 것을 집요하게 통제하고자 합니다. 

이로 인해서 커머너들이 자신들의 공통의 부를 사용하거나 자신들의 관리규칙들을 고안할 여지가―법적·문화적·경제적으로―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정계와 재계의 엘리트들과 그들 산하의 공복들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도덕적·사회적 정당성을 참칭하는 형식화된 합법성의 체계를 관리합니다. 내가 ‘토착법’(vernacular law)이라고 부르는 것―보통 사람들의 도덕적·정치적 권위, 거리의 규범들과 가치들―을 압도하기 위해서 합법성이 종종 사용됩니다. 한때 마그나카르타에 의해서 선언된 ‘커먼즈의 법’은 시장/국가의 권력의 도구가 되었으며 인간들의 전(前)정치적 주권의 표현이 되지 못했습니다. 시장/국가가 커머너들에게 속하며 국가에 선행하는 인간의 권리를 가로채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미국에서 기업들은 법적으로 인격으로 인정되어 실제의 개인들처럼 모든 시민권과 자유를 부여받습니다. 그러나 커머너들과 지구는 감정이 없고 존엄이나 권리도 없는 자원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마그나카르타를 경축하나요? 마그나카르타에 포함된 삼림헌장이 커머닝의 정당성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삼림헌장은 커머닝을 범죄의 범주에서 떼어내어 합법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역사적 사실은 그 자체로 중요합니다. 사실 민중이 마침내 스스로를 다스릴 자유를, 공정하고 정당하며 그들의 상황에 효과적으로 보이는 규칙들을 고안할 자유를 형식적 법의 형태로 현저한 정도로 인정받은 것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커머닝 덕분에, 그리고 그것이 삼림헌장에 의해서 형식적으로 인정 받은 덕분에 왕은 절대적 권위를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형식적 성문법 아래에서 커머너들은 주요한 도덕적 권리, 인간적 권리, 경제적 권리를 보유했습니다. 영원한 관습적 권리가 ‘보장된’ 것입니다. 혹은 적어도 왕이 커머너들의 권리를 인정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거버넌스에서 이루어진 주요한 전진이었습니다.

  

 

커먼즈를 위한 법을 재발명하기 

그런데 여기서 마그나카르타가 우리에게 다음의 과제를 남기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합법성을 정당성과 다시 통합할까요? 어떻게 우리 시대의 주권자인 시장/국가로 하여금 커머너들의 권리를 인정하도록 만들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내 생각에 성문법을 커머너들의 살아있는 공동체의 토착법과 다시 통합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마그나카르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법적 구조를 다시 발명하고 그럼으로써 마그나카르타를 현대에 실현하려고 할 필요가 있습니다.

 

커먼즈를 위한 새로운 법을 다시 발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우리는 마그나카르타와 국가법의 전통에 의존해야 하면서도 민중이 자신들의 고유한 규칙들을―민중이 보기에 공정하고 적절하면서도 정치체의 더 큰 원칙들을 따르는 규칙들을―만들 공간들을 의도적으로 분배해줘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민중이 커머닝에 참여하도록 허용되어야 합니다. 민중은 “자신들의 숲”을 스스로 관리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하면서 그 숲의 헌신적인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민중은 자신들의 통찰과 상상력에, 그리고 관습적인 사회적 관행에 의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민중은 공유된 공동체에 대한 감각을 개발하고 사물을 관리하는 고유한 관습들과 전통들을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법은 지리학자 니러 씽(Neera Singh)이 민중의 ‘정동 노동’(affective labor)이라고 부른 것을 존중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는 자신의 커먼즈를 관리하는 일과 병행하여 생기는 주관적 감정들, 정서들, 자긍심, 즐거움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물론 우리로 하여금, 인간을 항상 자신의 공리주의적 자기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계산하는 합리적 물질주의자들로만 보는 기존의 주류 경제학의 세계관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커머닝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형식적 합법주의를 넘어서는 유형의 법이라는 점입니다. 커머닝은 자신들의 계속 변하는 지역 상황들과 씨름하는 커머너들로부터 출현합니다. 커먼즈 기반의 법은 내재적인 실천적 현실이지 고정되고 영원한 초월적 이상이 아닙니다. 라인보가 쓰듯이,

 

커머너들은 먼저 권리증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 땅을 어떻게 경작할 것인가? 거름을 줄 필요가 있는가? 거기에 무엇이 자라는가? 그들은 탐구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자연적 태도라고 불러도 좋다. 둘째, 커머닝은 노동과정에 심어져있다. 그것은 밭, 고지, 숲, 습지, 연안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실천 속에 내재한다. 공통권은 노동에 의해서 가지게 된다.12 

이는 법 자체에 대한 매우 상이한 존재론적 이해입니다. 커먼즈를 위한 법은 번쩍이는 추상들이나 문자로 된 문서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커머너들이 경험하는 바의 껄끄러운 개별적 현실들에서 시작하며, 커먼즈들이 자치의 체계를 고안하는 경험에서 나옵니다. 마그나카르타는 형식적 성문법으로 도약하면서 어떤 원리들을 문명의 기억에 소중히 안치했을 수도 있으며, 이는 작은 성취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도약은 대가를 치르고 이루어졌습니다. 기억과 커머닝의 점진적 상실이라는 대가를.

마그나카르타를 채택한 이후 여러 해 동안 존 왕은 종종 의구심을 가진 커머너들과 국왕봉신들에게 자신이 계약을 실제로 지킬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수고를 들여야 했다는 점은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가 많습니다. 존 왕은 민중의 우려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종종 마그나카르타를 화려하게 재공표하여 마그나카르타가 여전히 나라의 법이라고 모두를 안심시켰습니다. 물론 종이 한 장으로 된 마그나 카르타는 사회의 문화와 정치가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만큼만 강했습니다. 그리고 추상으로서의 마그나카르타는 지배자의 권력남용(abuses)을 중지시키는 데서 제한된 가치만을 가진다는 것을 역사는 계속해서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마그나카르타의 원칙들을, 특히 삼림헌장을 우리 시대에 부활시키는 데서 진정으로 중요한 과제는 커머닝을 인정하고 보호하는 새로운 법체제를 고안하는 것입니다. 커머닝을 위한 공간들을 뒷받침하는 법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커머닝은 중세에 사라졌으며 지금은 단지 골동품과도 같은 것으로 남아있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커머닝은 늘 갱신되고 있으며 점점 더 풍요롭고 튼실해지고 있는, 오래된 사회활동입니다. 지금 세계 전역에서 커머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사실 커머닝이 얼마나 널리 퍼져있는가를 기록하기 위해서 제 동료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저는 최근에 새로운 선집 『커머닝의 패턴』(Patterns of Commoning)을 같이 엮는 작업을 완료했습니다. 이 책은 10월에 영어와 독일어로 동시에 출판될 것입니다. 50편 이상의 독창적인 에세이들로 구성된 이 책은, 일상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서 협동하고 공유하려는 억누를 수 없는 민중의 욕망을 탐구합니다.

이 책은 토착 농업 커먼즈들과 공동체 숲들, 하이테크 팹랩들(FabLabs, fabrication laboratories)13과 케냐의 대안통화들, 오픈소스 농장설비 커먼즈들과 커먼즈들의 공동 맵핑(mapping), 기타 많은 것들을 서술합니다. 이 책은 또한 주류 경제학의 존재론적 전제들에 대한 대안으로서 커머닝이 가진 내적 동학에 초점을 맞춥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인간은 단순히 이러저런 형태의 ‘경제인’(homo economicus)이 아니라 매우 특수한 지리, 역사, 문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복합적이고 진화하는 존재입니다. 이 선집은 2012년에 출판된 선집 『커먼즈의 부』(The Wealth of the Commons)의 자매편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지난 2년에 걸쳐 『커머닝의 패턴』을 엮는 작업을 하면서 저는 이런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만일 커머너들이 국가법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커먼즈를 믿음직하게 보호할 고유한 법을 발명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더 엄밀한 형태의 ‘커먼즈를 위한 법’이 있다면 어떨까요? 물론 저는 마그나카르타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 커머너들이 과연 오늘날에 맞는 새로운 형태의 커먼즈 기반 법들을 발명할 수 있을까요?

 

커먼즈 세계의 많은 부분들에서 실제로 법 혁신이 지금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릴 수 있어서 기쁩니다. 국가법 안으로 들어가서 커먼즈 법을 일구어낸14 초기의 사례들 가운데에는, 소프트웨어 관련으로는 GPL(General Public License)이 있고 내용 관련으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가 있습니다. 양자 모두 공유된 부를 보호하는 법으로서 기가 막힌 묘수들입니다. 이 라이선스들은 누구라도 공유된 코드, 글, 이미지 혹은 음악을 탈취하는 것을 방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구를 해나가면서 저는 커머너들의 권리를 보호하도록 의도된, 말 그대로 수십 가지의 매력적이고 영리한 법의 묘수들을 만났습니다. 예를 들어 토착민들의 농경제적 지식과 전통을 보호하도록 의도된 ‘바이오문화 프로토콜들’(biocultural protocols)이 있습니다. 협동의 원칙들에 제정을 대어 사회적으로 쓰이도록 하기 위한 협동조합법의 새로운 형태들도 존재합니다. 수압균열법(hydro-fracking)15, 유전자조작 농산물들 및 기타 기업에 의한 종획들에 반대하는 지역 공동체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있는 새로운 법적 기획들도 있습니다. 이해관계자 트러스트들(stakeholder trusts)로 하여금 대기에서 광물을 거쳐 지하수에 이르는 공통재를 보호하도록 하는 제안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기업 활동, 이윤을 목적으로 하거나 관료적 성격의 활동에 맞서는 것으로서16 커머닝을 후원하는 목적으로 발명되고 있는 새로운 조직형태들도 있습니다.

 

바로 지난주에 저는 하인리히 뵐 재단의 지원을 받아서 커먼즈를 위한 법적 혁신의 사례들 60개 이상을 개관하는 긴 전략메모를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P2P 재단>의 보웬스(Michel Bauwens)와 트론코소(Stacco Troncoso) 덕분에, 사람들로 하여금 커먼즈 기반 법의 수십 개의 사례들에 접근하게 해주는 온라인 위키도 존재합니다. 이 자료들은 ‘커먼즈를 위한 법’에 관한 새로운 대화를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마련되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대화는 마그나카르타의 역사에서 적집 나오며, 인권과 커머너들의 욕구를 깊이 존중하는 마그나카르타의 원칙들에 의존합니다. 

그런데 마그나카르타처럼 이 원칙들도 정치적 투쟁을 통해서만 현실화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커먼즈를 위한 법’을 단지 선언하기만 하면 된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커먼즈를 위한 법’이라는 발상 및 그 발상의 변주된 형태들이 우선 우리 시대의 맥락에 맞게 정식화되어야 하며, 그 다음에는 그것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기존의 법과 거버넌스의 체제들이 엉망인―대중의 존중을 받지 못하며, 민중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지구를 파괴하고 있는―때에 커머닝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법은 밝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커먼즈는 공정하고 개방적이며 효율적인 방식으로 민중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으며, 시장/국가 질서가 제대로 성취하지 못하고 있는 존엄·존중·평등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커먼즈는 또한 민중과 더 밀착된 관계를 만들어내고 민중으로 하여금 책임감을 갖도록 요구함으로써 앞으로 생태계를 지키는 데서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존 왕이 강압에 의해 커머너들의 권리를 인정하게 되었다는 점을 상기합시다. 우리시대의 지배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권리를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 시대의 진정한 과제는 창조적인 법적 묘수, 새로운 사회적 실천들과 정치적 투쟁을 통해 커먼즈를 위한 법을 다시 발명하는 일입니다. 법 형태의 장대한 언표만이 우리를 거기로 데려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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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특별히 유망한 법 기반의 커머닝의 한 영역은 디지털 영역입니다. 이는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오픈 디자인과 제작, 팹랩스 및 해커공간들, 비트코인의 블록체인 원장, 그리고 도시들을 바꾸고 있는 개방된 데이터 네트워크들의 세계입니다. 이는 커먼즈 기반의 수평적 자율생산(peer production)의 세계입니다. 여기서는 코드 자체가 법의 한 형식이 되며, 커머너들은 (종종은 국가의 법에 항의하며) 자신들의 주권을 주장하게 됩니다. 이를 더 논의하기 위해서, 저는 연단(演壇)을, <P2P 재단>의 창립자이자 <커먼즈 전략그룹>(the Commons Strategies Group)의 일원인 동료 보웬스에게 기쁜 마음으로 넘기겠습니다. ♣

 

 

 

 

 

 

  1. ‘law for the commons’를 어색함을 감수하면서 굳이 “위한”을 넣어 “커먼즈를 위한 법”이라고 옮긴 것은 볼리어가 서두에서 말한 전략 메모에서 ‘law of the commons’라고 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볼리어는 법은 커머닝(common)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말한다. [본문으로]
  2. ‘삼림’은 ‘forest’를 옮긴 것이다. 볼리어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당시 ‘forest’는 ‘woods’와 의미가 다르게 사용되었다. ‘woods’는 말 그대로 자연적 숲을 가리키며, ‘forest’는 법적 개념으로서 ‘woods’ 이외에 목초지, 연못 등이 더해진, 울타리 친 소유지를 가리킨다. 이렇게 어떤 숲을 법적으로 소유지를 만드는 것 ‘forestation’이라고 하며, 반대로 소유지를 푸는 것, 그리하여 커머너들의 접근을 허용하는 것은 ‘deforestation’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피터 라인보 지음, 『마그나카르타 선언』, 갈무리, 2012 참조. [본문으로]
  3. ‘자유권들’은 ‘liberties’를 옮긴 것이다. 당시 ‘liberty’는 주상적인 ‘자유’가 아니라 실제로 실행되는 구체적인 권리들을 가리켰다. 그래서 복수형으로도 사용되었다. [본문으로]
  4. 『마그나카르타 선언』에서 라인보는 ‘에스토버스’(estovers)―복수형이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정확하게 말해서 에스토버스란 관습에 따라 숲에서 채취하는 것을 가리키며 종종은 생계자급 일반을 가리킨다.”(69쪽) [본문으로]
  5. ‘초월적’이란 말은 커머너들 자신에 의해 만들어져 시행되지 않고 국가의 법으로 커먼즈의 외부에서 만들어져 커먼즈에 부과됨을 나타낸다. [본문으로]
  6. ‘젠트리’는 일반적으로 작위를 갖지 않은 지주들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7. ‘커머닝’(comnoning)은 동사 ‘common’의 동명사이다. 동사 ‘common’은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커머닝’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 강연 내에서 설명이 될 것이다. [본문으로]
  8. 바릭골드(Barrick Gold Corporation)는 금광을 채굴하는 미국의 광산기업이다. [본문으로]
  9. 지금 볼리어는, 웨스트민스터에 모인 자들은 마그나카르타의 원칙들을 어기는 자들인데 이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마그나카르타의 원칙 가운데 하나인 ‘법의 지배’를 경축하고 있다는 점을 꼬집고 있다. [본문으로]
  10. 국부펀드(Sovereign Wealth fund, SWF)는 정부 자산을 운영하며 정부에 의해 직접적으로 소유되는 기관을 말한다. 사실 데이빗 볼리어는 “sovereign investment funds”라고 했는데 이는 국부펀드의 발전된 형태이다. 양자의 차이는 이 맥락에서는 무시할 만하고, “sovereign investment funds”는 아직 번역어가 정착되지 않았기에 이미 정착된 ‘국부펀드’를 사용하여 옮겼다. [본문으로]
  11. ‘자국 자원추출’은 ‘neo-extractivism’을 옮긴 것이다. ‘extractivism’에는 ‘채굴주의’라는 번역어가 쓰이는데, 문제가 있다. 영어의 접미사 ‘-ism’은 우리말로 ‘-주의’ 혹은 ‘-론’로 옮겨지는 의미만 가지지 않는다. 우리말 ‘-주의’나 ‘-론’은 이론, 학설, 주장, 견해 등에 쓰인다. 영어 ‘-ism’에는 이런 의미도 있지만 이 이외에도 여러 다른 의미가 있으며 이는 ‘-주의’나 ‘-론’으로 옮길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비판’ 혹은 ‘비평’으로 옮기는 ‘criticism은 완료된 행동이나 결과를 나타낸다. ‘exorcism’도 이 범주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야만’으로 옮기는 ‘barbarism’은 특정 집단의 행동이나 행위를 나타낸다. 산업화 혹은 자본주의와 연관된 ‘extractivism’은 자연자원을 대량을 추출하여 가공하지 않은 채 혹은 제한된 정도로만 가공하여 수출하는 활동을 가리킨다. 이는 식민주의 및 신식민주의적 약탈과 연관된다. ‘neo-extractivism’은 기본적인 성격은 그대로 유지한 채 자원추출 및 수출의 주체만 후진국 자국의 정부(라틴아메리카의 진보적 정부들)로 바뀐 것이다. ‘extractivism’이나 ‘neo-extractivism’의 번역어는 이런 활동을 나타내는 말이어야 한다. 여기서는 ‘-주의’를 빼고 전자는 ‘해외 자원추출’로, 후자는 ‘자국 자원추출’로 옮긴다. 만족스런 번역어는 아니지만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을 찾기 전까지는 임시로 여기에 만족하기로 한다. ‘채굴’은 광물에만 국한되는 말인데, ‘extraction’은 광물자원에만 국한되지 않으므로 (원래는 사탕수수에 쓰였던 말이라고 한다) ‘채굴’을 쓰지 않고 더 넓은 ‘추출’을 택하기로 한다. [본문으로]
  12. 『마그나카르타 선언』 75쪽. [본문으로]
  13. 디지털 장치들을 제작하는 소규모 작업실들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14. 볼리어는 사실 “Some of the earliest legal hacks of state law”라는 말을 썼다. 이는 만일 직역한다면 ‘국가법의 법적 해킹의 초기 사례들 가운데 일부’ 정도가 된다. 이를 이해하려면 여기서 “hack”이란 단어가 맥켄지 워크가 그의 『해커 선언󰡕에서 제시한 ‘해킹’ 개념을 (‘hack’을 ‘hacking’과 같은 의미의 명사로 사용한다) 받아서 쓴 말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는 일단 직역하지 않고 맥락에 따라 의역해놓기로 한다. 워크의 ‘hack’에 대해서는 http://trustsun.net/xe/bookreading/100965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15. 이는 압축된 액체를 바위에 나있는 구멍에 주입하여 바위에 균열이 가게 함으로써 생성되는 틈들을 통해 가스나 석유 등이 더 잘 흘러나오게 하는 기술이다. 일본 위키피디아에서는 ‘수압파쇄법’이라 옮겼는데, 바위를 부순다기보다는 균열을 내는 것이기에 일단 ‘수압균열법’으로 옮기기로 한다. ‘htdro-fracking’ 말고 ‘Hydraulic fracturing’, ‘hydrofracturing’, ‘fracking’, ‘fraccing’으로 적기도 한다. [본문으로]
  16. 원문에는 “as opposed to business, bureaucratic or nonprofit activities”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nonprofit”은 “for-profit”의 오기인듯 하다. [본문으로]

 




폭스바겐 스캔들, 사유(私有) 코드(proprietary code)1의 위험을 확인해주다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에 9월 25일에 게시된 글 “Volkswagen Scandal Confirms the Dangers of Proprietary Code”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내용전달을 위주로 거칠게 번역된 것이며, 전문용어의 경우에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과 번역어가 달리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폭스바겐 스캔들, 사유(私有) 코드(proprietary code)1의 위험을 확인해주다

옮긴이 : 정백수

 

폭스바겐의 배출가스 조작 스캔들에는 거의 모든 논평자들이 언급한 바 없는 주목할 만한 측면이 하나 있다. 만일 오염통제 장비의 소프트웨어가 오픈 소스였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던 것이다.

 

폭스바겐은 소프트웨어가 비공개이고 사유물이며 외부의 검사로부터 법적으로 보호를 받는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소비자들을 속이고 규제자들을 기만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의 누구도 소프트웨어가 회사측이 주장하는 대로 돌아가고 있는지를 쉽게 확인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집요한 검사자들이라면 실제적 가스배출량과 인공적인 규제 테스트에서의 배출량을 노력을 들여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로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폭스바겐측의 조작행위가 폭로되었다. 그러나 이는 조작자들을 밝혀내는 방법으로서는 비싸고 문제도 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왜 공중보건 및 환경과 엄청난 연관을 가진 소프트웨어가 애초에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는 것이어야 하는가?’이다. ‘잠긴 상자’(locked box, lockbox)2는 기업의 무법적이고 무책임하며 지저분한 행위를 불러온다. 그것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거의 누구도 볼 수 없게 보장해준다. 폭스바겐은 다른 할 수 있는 일보다도 비밀이라는 가리개를 사용하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이 교훈은 『뉴욕타임즈』의 칼럼니스트 짐 다이어(Jim Dwyer)가 프리 소프트웨어 법률가 이븐 마글런(Eben Moglen)―<프리소프트웨어 재단>(the Free Software Foundation)의 전 법무총책임자며 <소프트웨어 프리덤 법 센터>(the Software Freedom Law Center)의 창립자―을 “예언자”로서 반갑게 맞이했을 때 절실하게 다가온다. 다이어는 마글런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우리 모두가 20세기 초부터 알아왔듯이, 승강기들이 검사 가능하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고 승강기의 제조업자들이 승강기들을 검사가 가능하게 제조하도록 하는 규정을 만드는 것이 현명한 공공정책이다. 만일 폭스바겐측이 차를 사는 모든 고객들이 차량의 모든 소프트웨어의 소스 코드를 읽을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고 알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잡힐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속임수를 쓸 생각을 생각조차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코드가 사유화된 것이기에 속일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것을 자동차 제조업자들은 안다. 코드가 해독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미국 환경보호국(the U.S. 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이 새로운 차량의 10-15%를 테스트할 수 있는 기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자동차 제조업자들은 알고 있다. “셀프증명”이 법집행의 주된 수단이라는 말이니, 완전히 우스갯소리가 아닐 수 없다.

 

더 나쁜 것은, 알고 싶어 하는 소비자들이 스스로 소프트웨어를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다. ‘디지털 밀레니엄 저작권법’(the Digital Millennium Copyright Act)에 따르면 저작권이 있는 소프트웨어의 암호화된 상태를 풀고 그 소스 코드를 들여다보는 것은 범죄행위이다. 지난해에 몇몇의 오픈 소스 옹호자들이 “기능불량, 안전상의 결함이나 취약점들을 정직하게 검사하고 밝혀내고 드러내고 고치기” 위해 저작권이 있는 소프트웨어의 조사를 합법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시도했다고 『와이어드』지(誌)(Wired)는 전하고 있다. 물론 정치적으로 힘이 있는 자동차 업계는 이 아이디어를 짓눌러버렸다. 코드에의 공개적 접근은 “안전과 무사에 심각한 위협”을 가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폭스바겐 스캔들은 안전에의 실질적이며 더 큰 위협은 대기업들이 통제하는 사유 코드로부터 오지 코드의 공개로부터 오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왜 우리는 기만술책을 숨기기 위해서 ‘잠긴 상자’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기업들을 단속하는 일에서 정치적으로 타협적이고 예산부족으로 절절 매는 정부기관들에 의존해야 하는가? (폭스바겐의 사기행위는 여러 해 동안 진행되어 왔다.) 왜 극도로 효과적이고 투명하며 실질적으로 무상의 단속형태인 ‘오픈 소스 코드의 의무화’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가?

 

2008년 금융 사태 이후에 몇몇 총명한 사람들이 <증권감독위원회>(the 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가 수행하는 은행과 금융기관들의 감독에 대하여 마찬가지 주장을 했다. 왜 핵심적인 금융 통계들의 공개를 의무로 정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공개적 데이터 분석법을 사용하여 금융시장에서의 위험한 경향들을   <증권감독위원회>보다 더 빠르게 포착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폭스바겐 사태는 왜 오픈 코드가 자동차를 더 안전하게 만들고 더 환경친화적으로 만드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면 비행기, 의료기기, 자동차의 ABS(잠김방지제동체계)와 스로틀 통제에도 오픈 코드를 쓰는 것이 어떤가 하고 마글런은 묻는다. 오픈 소스야말로 범죄적 해킹과 기업의 사기행위를 공히 막아주는 최고의 방책인 것이다

 

어디에나 있는 정부의 규제자들에게 보내는 메모 : 공공의 안전과 환경에의 순응을 현재의 비용의 몇 분의 1을 들여서 그리고 문제가 일어나기 전에 증진하고 싶은가? 중요한 테크놀로지에 대해서 오픈 소스 코드를 의무 규정으로 하라. ♣

 

  1. [위키피디아] 사유 소프트웨어(영어: proprietary software) 또는 클로즈드 소스 소프트웨어(영어: closed source software)는 저작권 소유자의 예외적 법적 권한 하에 허가된 컴퓨터 소프트웨어이다. 또,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의 반대말로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저작권을 갖는 프로그램을 일컫는다. 특정한 조건으로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권한이 주어지는데, 수정, 다른 곳으로의 배포, 역공학과 같은 기타 이용은 제한된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는 소프트웨어를 기술적으로 변형하거나 변조할 수 없도록 저작권을 통해 소스 코드로 접근하는 것을 막고 이진 파일 형태로만 제공되는 프로그램을 가리킨다. 보통 그러한 프로그램의 소스 코드는 제작사의 기업 비밀로 간주된다. 제 삼자가 소스 코드를 사용해야 할 때에는 비공개 협약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본문으로]
  2. 여기서는 어떤 대상이 기업의 사유재산으로 규정되어 다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