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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의 새로운 정렬?

* 아래 글은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에 게시된 2015년 2월 19일자의 게시글 “A New Alignment of Movements?”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세부에 정확성을 기하진 못했다. 

운동의 새로운 정렬?

2014년 9월 <커먼즈전략그룹>(the Commons Strategies Group)은 독일 마이센(Meissen)에서 그룹의 정책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여러 경제 및 사회운동들에 참여하는 활동가들 25명을 놓고 3일 동안 워크숍을 열었다. 주제는 ‘심층 잠수’(Deep Dive)이며 이는 다음의 물음들로 이루어졌다. 주도적인 대안적 경제·사회 운동들이 더 긴밀하게 함께 작업하는 길들을 찾을 수 있는가? 신자유주의의 병리적 현상들과 싸우는 데서 더 큰 합류와 협동을 할 수 있는가?

 사회연대경제(the Social and Solidarity Economy), 탈성장, 협동조합, 이행도시(Transition Towns), 공유 및 협동 경제, 수평적 네트워크 생산, 환경정의, 커먼즈 등을 지향하는 운동들로부터 활동가들이 왔다. 대부분 유럽에서 왔지만, 캐나다, 미국, 브라질, 아일랜드, 영국에서 온 참가자도 있었다. 워크숍은 <커먼즈전략그룹>이 조직했는데, 그룹은 독일 하인리히 뵐 재단과 프랑스 및 스위스의 샤를 레오폴드  메이에르 재단의 의 긴요한 지원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이 워크숍 이전에 대략 12명의 참여자들이 며칠 전에 미리 베를린에서 별도의 모임을 갖고 ‘개방된 협동조합주의’라는 주제에 대해서 토론했다. 이 토론에 대한 종합보고서인 「개방된 협동조합주의를 위하여」(Toward an Open Co-operativism”)가 세 주전에 발표되었으며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아래는 보고서 「운동의 새로운 연대?」(A New Alignment of Movements?”)의 서론으로서, 마이센 워크숍의 두드러진 논점들을 종합하고 있다. 데이빗 볼리어(David Bollier)와 팻 코너티(Pat Conaty)가 쓴 39쪽짜리 보고서는 여기서 pdf 파일로 다운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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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신자유주의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운동들의 단결된 반응 혹은 새로운 합류를 촉진시킬 명료한 대안적 비판이나 철학적 접근법들이 출현하지 못했다. 실로 전통적 좌파는 진행되는 위기로부터 정치적으로 이익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중의 지지도가 눈에 띄게 감소했다. 그리스의 두드러진 예외를 제외하면, 최근 유럽의 선거들은 유럽 선거구의 주요 부분들에서 과격한 우익화의 움직임을 보여줘 왔다. 

그러나 저항의 고전적인 정치적 표현들이 결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긍정적인 발전들이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긍정적인 발전들 가운데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탈성장 운동 및 다른 환경/지속 가능성 지향적 운동들의 ‘성장’. 이탈리아 같은 나라들에서의 정치그룹들 사이에 커먼즈 지향성의 출현, 그리스와 스페인에서 이루어진 수천 개의 대안적 유대 메커니즘들의 창출, 경제적·사회적 대안으로서의 협동조합의 부활, ‘사회연대경제 운동’에 의한 계속적인 작업, 이행도시들에서 ‘공유 가능한 도시들’(“shareable cities”)을 거쳐 향토 음식에 이르는 운동들.

 흥미로운 정치적 표현들에는 스페인의 15M ‘실질적 민주주의’ 플랫폼을 중심으로 한 젊은이들의 대대적인 움직임, 그리스의 시리자와 스페인의 포데모스(Podemos)와 같은, 사회변형 과제를 가진 좌파 정당들의 성공, (24개국 이상에서의) 해적당과 같은 디지털 문화를 표현하는 당들의 출현, 스페인의 X당(the Partido X)처럼 직접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플랫폼 정당들이 포함된다. 이러한 노력들은 불안정 고용된 젊은이들이 그들의 생계를 위한 대안들을 창출하려는 많은 건설적인 노력들― 이는 ‘공유 경제’의 출현에서도 표현된다―과 병행되었다.

 

건설적인 사회적·정치적 운동들을 혼합하여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라는 생각을 진전시키는 방식으로 운동의 실천과 목표들이 한데 모이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가능한가? 지역, 일국, 유럽 수준에서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다수들의 재건을 상상하는 것이 가능한가?

 ‘심층잠수’ 워크숍은 사회 운동들 사이의 강렬한 형태의 탐구적 대화와 협동을 뒷받침하려는 시도이다. 참여자들은 협동조합, 탈성장 경제, 사회연대경제, 피어 생산, 트랜지션타운, 생태 지속가능성, 커먼즈에 헌신하는 운동들과 연관되어 있다. 참여자들은 각 운동에서 두드러진 발전들을 공유하면서 그들의 운동의 변별적인 강점와 약점에 대해서, 체제 변화에 기여한다는 광범한 과제에 대해서, 그리고 협동적 합류를 촉진하는 전략들에 대해서 성찰했다.

 

제기된 핵심 물음은, ‘커먼즈 패러다임이 다양한 운동들을 변화라는 공유된 과제 주위에 모으는 것을 도울 수 공유된 담론, 비판, 윤리로서 기능할 수 있는가?’였다. 유럽에서 산업노동계급의 상대적인 정치적 영향력이 꾸준하게 감소함에 따라 애초에 복지국가 모델을 뒷받침했던 정치적 세력균형 및 타협들이 상실되고 있다는 견해가 가능하다. 우리가 새로이 출현하는 불안정 지식 노동자들의 노동문화를 다른 대중화된 부문들과 함께 놓고 보면, ‘커먼즈 지향적 정치변형’―이는 그리스에서 생생하게 긍정되고 있는 제안이다―을 중심으로 하는 잠재적인 사회적·정치적 연합의 출현이 시야에 들어올 수 있다.

 이 전략적 물음은 워크숍의 둘째 목표로 이어진다. 운동 간 협동 및 활동을 배치하고 조정하는 것을 도울 커먼즈 패러다임의 특수한 잠재력을 탐구하는 것이 그것이다. 공동의 목표를 중심으로 사회·정치적 운동들의 합류를 촉진할 다른 공통적인 틀이 있는가?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미래에 협동적 행동을 탐구하고 활용할 수단들을 탐구하는 것이 모임의 셋째 목표였다. 어떤 특수한 종류의 수단들. 기획들, 사회적 혹은 경제적 이슈들, 제도적 파트너들 등이 건설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더욱이, 이 일이 어떻게 조직되고 긴 시간 동안 지탱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위의 문제들에 대해 동의가 이루어졌다고 보고, 워크숍은 운동의 합류를 성취할 다음 단계들에 관해서 일정한 합의에 이르고자 했다. 지속 가능성 지향의 사회변화를 위한 정치적·사회적 다수를 재창출할 어떤 방법이 있는가? 우리의 운동들 각각의 능력을 어떻게 확대할 수 있고, 어떻게 새로운 상승효과를 낳을 수 있으며, 인류가 직면한 생태·기후·사회·경제의 위기에 대한 새롭고 더 통합적인 해결책들을 어떻게 제공할 수 있는가?

 

* 보고서 목차는 번역 생략함.

Contents of the Report

 

Introduction

I. The General Challenge

   A. The Co-operative Movement

   B. The Social Solidarity Economy

   C. The Degrowth Movement

   D. Peer Production

   E. The Sharing and Collaborative Economy

   F. The Commons Movement

 

II. Strategies for a Convergence of Movements

 

Do These Movements Overlap – or Not?

 

Notable Exploratory Projects

 

Strategies for Alliance Building

 

Suggested Action points for Moving Forward

 

Conclusion

 

Appendix A: Workshop Participants

 

Appendix B: Roadmap – 2015 Events that Offer Opportunities for Convergence

*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됩니다. 

 

출처: http://minamjah.tistory.com/89?category=452913 [百手의 블로그]




그리스의 새 정부, 커먼즈 기반의 수평적 네트워크 생산을 해결책으로 승인하다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에 2015년 2월 12일자로 올라온 글의 내용을 번역에 가깝게 정리한 것이다. 인명과 지명의 발음이나 기타 세부에 완벽을 기하지는 못한 상태이나 내용의 공유를 위해 서둘러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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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새 정부, 커먼즈 기반의 수평적 네트워크 생산을 해결책으로 승인하다

 이해할 수 있는 바이지만, 그리스와 전지구적 금융계에서는 모든 시선이 새 그리스 정부와 무자비한 유럽 채권자들 사이에 벌어질 맹렬한 대립에 모아져 있다. 그보다는 덜하지만, 커먼즈와 수평적 네트워크 생산(peer production)1에 기반을 둔 새로운 탈자본주의적 질서를 낳는 것을 도울 새 정부의 계획에도 시선이 던져지고 있다.

 

커먼즈 동지인 존 레스타키스가 1월 25일의 선거 약 일주일 전에 이 가능성에 대해서 쓴 바 있다. 이제 새 부수상 드라가사키스(Gianni Dragasakis)가 지난주에 그리스 의회에서 연설을 하면서, 그리스는 민중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종류의, 커먼즈에 기반을 둔 아래로부터의 수평적 네트워크 모델을 발전시킬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밝혔다.

 

그리스 이오아니나(Ioannina)에 본부를 둔, P2P재단 소속 P2P랩의 코스타키스(Vasilis Kostakis) 박사는 그리스의 상황을 면밀하게 추적해왔다. 에스토니아 탈린(Tallin)의 <락나르 누크세 혁신 및 거버넌스 학교>(the Ragnar Nurkse School of Innovation and Governance)의 연구교수인 코스타키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시리자는 교육, 거버넌스 및 연구개발과 관련하여 ‘파트너국가 접근법’(the Partner State Approach)을 닮은 방식으로 정책을 선택하고 특정의 법들을 개혁하려는 듯하다. 몇 가지를 거론해보면,

 

· 공적 데이터의 개방

· 납세자의 돈으로 생산된 지식을 개방하여 활용할 수 있게 하기

· 중소기업가들과 협동조합들을 위한 협동 환경을 창출하는 한편 오픈소스 테크놀로지와 그 실행들에 기반을 둔 기획들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해주기

· 정책입안에의 시민참여를 위해 참여과정을 개발하기 (그리고 기존의 과정들을 강화하기)

· 공적 행정과 교육을 위해 개방적인 기준과 패턴을 채택하기

 

이 계획들/기획들은 새로운 경제발전모델의 씨앗들로서 그리고 기존의 정치-경제적 혹은 ‘구조적’ 문제(부패, 느슨한 징세 등)들에 대한 해결책들로서 간주될 수 있다. 프로그램에서 실행까지 여러 단계들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첫 단계는 이미 밟은 듯하다. 시리자는 프리/오픈소스 테크놀로지들의 유리한 점들에 대해서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새로 출현하는 생산 원형의 잠재력과 그것이 낳을 새로운 정치경제도 깨닫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시리자가 온전한 양태의 커먼즈 기반 수평적 네트워크 생산을 향해 이행할 수 있는 조건들을 창출할 (그리고 창출하도록 허용 받을) 것인가?’이다. 

코스타키스는, 시리자의 디지털 정책 분야 싱크탱크 구성원이며 의원 후보였던 (당선되진 못했다) 카리치스(Andreas Karitzis)가 선거 전에 <허핑턴 포스트>의 그리스판에 글 하나를 기고한 것을 거론한다. 카리치스는 자신의 당이 프리/오픈소스 테크놀로지, 투명성, 참여민주주의에 헌신하고 있음을 언급했다. 시리자는 또한 오픈 하드웨어를 위한 새로운 카피페어(CopyFair) 라이선스들을 개발하고 분산된 마이크로-공장들―fablabs/makerspaces―의 네트워크의 창출을 지원할 의도를 분명하게 가지고 있다.

 

‘hackerspace.gr’와 같은 커먼즈 기반 집단의 구성원이며 커먼즈의 강력한 지지자인 아마추어 번역가 코스마스(Eleftherios Kosmas)는 부수상 드라가사키스의 연설문을 번역하여 제공했으며 다음 대목을 가장 관심이 가는 것으로 꼽았다.2

저는 대통령의 허락을 얻어서 일반적인 발언으로 연설을 마치고 싶습니다. 종종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모두 그 중요성이 나중에 생각해봐야 분명히 알 수 있는 일들을 겪습니다. 현재 우리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위기와 낡은 모델들의 붕괴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역사적 시기에서 살 뿐만 아니라,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궁극적으로 새로운 모델들을, 새로운 사회조직 모델들을 낳을 위기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은 과거의 결손을 처리할, 이 근대화의 결손을 마감할 기회입니다. 다만 실업, 사회보장, 사회적 배제라는 현재의 사회적 문제를 다룸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진전된 형태의 민주주의, 능동적인 사회적 행동, 공통의 이익이라는 강한 토대에 기반을 둔 사회 정의를 결합함으로써 그리스와 기타 유럽의 후진 지역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회에 존엄과 자신감을 심어주고, 민중에게 희망을 주며, 새로운 세대에게 낙관적 사고를 부여할 사회중심적 모델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는 긴축과 파괴의 모르모트가 되지 않고 선구적 아이디어들과 정책들의 터가 될 수 있으며 그 혜택은 단순히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세계는 비보장의 지역에서 보장의 중심을 얻게 될 것이며 ‘나이든’ 유럽은 내부의 상이한 발전 모델들의 공생을 통해 다시 활력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들이 유토피아적이라고 성급하게 말하지 맙시다. 리얼리스틱한 유토피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초자연적인 힘들에 의존하여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그리스의 그리고 전 세계의 보통 사람들의 단결과 집단적 행동에 의한 유토피아가 있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코스마스는 고맙게도 그리스어 연설원문의 링크를 제공하고 있다. 클릭.

 

시리자의 임원들과 접촉을 해온 많은 식견 있고 헌신적인 커머너들이 국제적으로 존재한다. 여기에는 일련의 그리스 커머너들과 P2P 활동가들이 포함된다. 가장 두드러진 두 명은 P2P재단 그리스 지부의 담당자들인 코스타키스와 파파니콜라오우(George Papanikolaou)이다. 그리스 정부는 원하면 <커먼즈 이행 계획>(Commons Transition Plan)에 제시된 많은 구체적인 커먼즈/P2P 접근법들을 도움의 받을 수도 있다.

 

커먼즈와 수평적 네트워크 생산에 대한 공식적인 관심이 증가하면서, 많은 그리스인들은 (그리고 국제적 지원자들은) 2015년 5월 15-17일에 아테네에서 열릴 세 번째 연례 <커먼즈페스트>(CommonsFest)를 고대하고 있다.

*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됩니다.

출처: http://minamjah.tistory.com/88?category=452913 [百手의 블로그]




‘살림’의 과학과 커먼즈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에 2013년 5월 28일자로 게시된 글 “The Science of “Enlivenment” and the Commons”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내용의 전달을 위주로 했으며 세부에 완벽을 기하지는 못했다. 일부 중요한 용어들의 우리말 번역어는 잠정적으로 택한 것으로서 해당 분야의 전공자들이 사용하는 것과 다를 수도 있다.

 

‘살림’의 과학과 커먼즈

 

2013년 5월 28일

 

지난주에 열린 <경제학과 커먼즈 컨퍼런스>에서 있었던 도발적인 논의 가운데 하나는 사회적 다윈주의와 자유시장경제학을 혼합한 ‘바이오경제학’ 내러티브에 대한 안드레아스 베버의 비판이다. 바이오경제학은 현재의 경제사상, 공공정책, 정치학에 기본이 되는 세계관이다. 문제는 최근의 생물학 발전에 비추어 볼 때 이 내러티브가 심각하게 잘못되었다는 데 있다.

 

더 나쁜 것은 그것이 자연계와 삶 자체에 대한 더 정확한 설명의 출현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과의 새롭고 더 존중할만한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위축시키고 있다. 베버는 그 대신에 ‘인간 이상(以上)의 세계’(more than human world)라는 상이한 비전을 가리키고 우리의 정치경제를 조직하는 커먼즈 기반의 방식을 가리키는 ‘살림’(enlivenment)이라는 새로운 이야기를 제안한다.1

 

베를린에 기반을 둔 독립 연구자 안드레아스 베버는 이론생물학자이며 생태철학자이다. 그는 ‘의미로서의 삶’(life as meaning)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탐구하는데, 이는 ‘바이오기호학’(biosemiotics)이라고 알려진 생물과학들에서 하위 분야에 해당한다. 그 아이디어는 이렇다. 살아있는 유기체들은 외부의 다양한 비인격적인 힘들에 반응하는 단순한 자동기계들이 아니라 본래적으로 창조적이고 의미를 만들어내는 유기체들이며, 여기서 그 주체성과 의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실로 우리의 주체성이야말로 생물학적 진화의 불가결한 부분이라고 베버는 주장한다.

 

베버의 「살림― 자연, 문화, 정치라는 개념들의 근본적인 전환을 위하여」(“Enlivenment: Towards a Fundamental Shift in the Concepts of Nature, Culture and Politics”)가 막 하인리히 뵐 재단에서 출판되었다. 이는 여기서 다운받을 수 있다. (털어놓기 : 나는 이 텍스트에 대해서 베버에게 편집상의 조언을 좀 주었다.)

 

전통적 생물학에 대한 베버의 불만은. 그것이 다름 아닌 삶(life)을 연구하기를 거부하는 데 있다. 전통적 생물학은 개인, 합리성, 경쟁이라는 계몽주의의 범주들에 너무 집착하고 있으며 삶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대답을 주는 것은 고사하고 그 문제를 다룰 수조차 없는 환원주의적 논리를 고집한다는 것이다. 베버는 유기체가 “주체적 경험을 가지고 있고 의미를 생산하는, 물리적 차원 이상의 차원에 있는 정감을 가진 존재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현재의 생물과학들은 다음의 물음들을 묻지 않는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우리의 내적 욕구는 무엇인가? 자연의 질서와 우리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아니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직접적인 욕구를 위해서 혹은 시장을 위해서 어떻게 물건들을 생산하는가? ······ 삶이란 무엇이고 거기서 우리는 무슨 역할을 하는가?”

 

다윈주의와 자유시장경제학을 결합한 ‘바이오경제학적 세계관’은 개인들, 경쟁, 효율, 성장이 자연의 전부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베버는 이 기본 전제는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생물권(biosphere)은 효율적이지 않다. 온혈동물들은 97퍼센트 이상의 에너지를 오직 신진대사를 유지하기 위해서 소비한다. 광합성은 7퍼센트라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낮은 효율을 달성한다. 물고기, 양서류, 곤충들은 수백만 개의 알을 낳는데 이 가운데 매우 소수만이 생존한다.”

 

생물권은 항상 증가하지도 않는다. 생물매스(biomass)의 양은 상당히 불변적이다. 경쟁이 새로운 종의 발생에 박차를 가한다는 것이 입증된 적도 없다. “종들은 우연에 의해 탄생한다. 종들은 뜻밖의 변이를 통해, 그리고 공생과 협력을 통해 개체군으로부터 한 집단이 두드러지는 것을 통해 발전한다······” 바이오경제학자들이 말하는 바처럼 자원의 희소성이 종의 창조적 다양화를 낳는 것이 아니다. 자원의 희소성은 다양성과 자유의 궁핍화를 낳는다.2

 

그런데 만일 표준적인 다윈주의적 내러티브가 불완전하고 그 방향이 비뚤어져 있다면 어떻게 우리는 진화와 삶 자체를 더 정확하게 설명하기 시작할 수 있을까? 베버는 자신의 대안을 ‘살림’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깊이 뿌리를 내린 ‘계몽’의 형이상학을 ‘업그레이드’한 것임을 의미한다. 우리는 개인의 합리성과 경쟁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그가 ‘의미로서의 삶’이라고, 혹은 ‘바이오시학’(biopoetics)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이야기로 보강해야 한다. 새로 출현하는 생물학의 새로운 상(像)에서는 (점점 더 경험적 연구에 의해 확인되는 바이지만) “유기체들이 더 이상 유전자 기계로 간주되지 않으며 기본적으로 스스로를 산출하는 물질적으로 구현된 과정들로서 간주된다. 각 세포는 ‘하나의 정체성을 창조하는 과정’이다. 가장 단순한 유기체도 자신을 손상 받지 않게 유지하고 성장하며 발전하여 스스로 더 충만한 삶을 창출하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물질적 체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삶은 움직일 수 있을 뿐 수동적인 물리적 물질(inert physical matter that is animate)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에 해당한다. 그 요체는 “스스로를 산출하는 의미심장한 자아”이다. 삶은 특수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한 주체적/물질적 과정에 해당한다. “스스로를 손상 받지 않게 유지하고자 하는 체계는 자동적으로 관심들, 일단의 관점들을 발전시킨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자아를 발전시킨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신체를 가진 주체가 된다.” 삶 자체는 주체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결합시킨다는 점에서 역설이지만, 그 역설이 삶의 본질에 핵심적이다.

 

진화와 살아있는 체계들에서 중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힘으로서의 주체성―이것이 ‘살림’ 뒤에 있는 근본적인 아이디어이다. 우리의 내적 삶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내적 삶은 진화의 거대한 서사에서 주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본질적인 추동력이다. 만일 시장경제학과 근대가 우리의 주체성과 정신성을 마치 흔적기관처럼 주변적 관심의 대상으로서 제쳐놓았다면, 바이오시학은 우리의 주체성이 진화하는 유기체로서의 우리의 창조성과 자유에 핵심적이고 삶 자체의 거대한 전진에 핵심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가 경제학을 개념화하는 방식에 광범하게 영향을 미치는 함축을 가진다. 자연을 우리가 원하는 목적을 위해 조작할 수 있는 수동적인 죽은 물질로 보면 안 된다. 우리는 ‘자연’이 타자가 아니라, 즉 인간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전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어떤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자연은 오픈소스 커먼즈에 해당한다. 배타성이나 재산권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인 것이다. 실로 ‘개인’과 ‘집단’의 이분법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 둘은 서로 통합되어 있고 경계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인간 자신은 더 작은 유기체들이 하나로 뭉쳐진 ‘초유기체’에 해당한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깊이 심어져 있는 것이다.

베버는 이런 생각들로부터 ‘사이존재'(interbeing)이라는 생각을 발전시킨다. 이는 자연보호주의자 존 뮤어(John Muir)가 말한 대로 “모든 것은 서로 얽혀 있다”는 생태학적 원리를 나타낸다. 물질적 자원은 우리의 통제 너머에 있는 별도의 분리된 차원에서 외적인 힘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존재들이 늘 정밀하게 다듬고 있는 (비물질적) 의미에 연결되어 있다.

 

‘살림의 경제'(enlivened economy)는 살아있는 자연과정들 사이에 이러한 종류의 관계들을 증진시키는 경제이다. 베버는 이렇게 쓴다. “자연이 실제로 커먼즈라면, 자연과의 안정되고 장기적인 관계를 얻는 유일하게 가능한 길은 커먼즈의 경제를 구축하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은 인간과 자연을 가르는 전통적인 이분법을 용해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자연이 가진 인간 이상의 측면들에 관여하게 해줄 존중할만하고 지속 가능한 모델로 향하게 할 수 있다.”

 

‘살림’에 대한 베버의 설명은 확실히 논쟁적이다.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의 핵심적 전제들 가운데 일부에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설명은 과학, 정치, 경제, 그리고 커먼즈를 가로지르며 그 방식은 분명 많은 문제들을 제기한다. 그의 글은 또한 오해될 가능성이 높고 그 함축들이 거부될 가능성이 높다. 예의 컨퍼런스에서 한 질문자가 “우리는 동물이 아닙니다!’라고 말한 것이 그 한 사례이다. 물론 우리는 많은 중요한 의미에서 동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우리의 실질적인 생물학적 실존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 의식, 도덕성, 그리고 세계에 대한 인식은 살아있고 숨을 쉬는 물질적 유기체들에서 구현된다. 표준적인 바이오경제학 내러티브는 이 영역에 대해서 해 줄 수 있는 말이 거의 없다.

 

내가 보기에 베버의 설명은 경제인(homo economicus)이나 계몽주의의 범주들에 대한 표준적인 설명들보다 훨씬 더 많은 설명력을 지니고 있다. 생물과학들의 최근의 발견들은 커먼즈와 ‘인간 이상의 세계’가 삶 자체의 또 다른 측면들임을 확인해주는 듯하다. 한편 근대 문명의 형이상학은 자연을 ‘죽은 물질’로 본다. 이제 살아있는 것들의 내적 주체성을 인정하고 되찾음으로써 이 죽은 물질을 ‘살릴’ 때가 되었다.

 

이 게시글로는 71쪽이나 되는 논증을 담은, 매우 복잡하고 심오한 베버의 글을 제대로 소개할 수 없다. 당신이 그의 글 전체를 다 읽는다면 세상을 결코 전과 같은 식으로 보지는 않게 될 것이다.

 

덧붙임

이 글을 읽으면서 로렌스의 무의식의 판타지아(Fantasia of the Unconscious, 1922)의 몇 대목이 떠올랐다. 로렌스는 과학자가 아니라 소설가임을 염두에 두고 읽어보기 바란다.

다만, 내가 보기에는 아직은 우리에게 그다지 열려있지 않은 거대한 과학의 장이 존재한다고 말하도록 하자. 내가 말하는 것은 삶의 관점에서 진행되며 살아있는 경험과 확실한 직관의 데이터 위에 수립된 과학이다. 이것을 주관적 과학이라고 부르고 싶으면 불러라. 근대의 지식을 낳은 우리의 객관적 과학은 현상하고만 그리고 현상의 인과관계하고만 관여한다. 나는 우리의 과학[즉 객관적 과학]에 대해서 반대하고 싶은 게 없다. 그것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 그러나 앎에 있어서의 인간의 가능성의 전체 범위를 과학이 다 포괄한다고 보는 것은 나에게 미숙할 뿐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과학은 죽은 세계의 과학이다. 생물학조차도 삶을 고찰하지 않고, 삶의 기계적 기능과 도구만을 고찰한다.

삶 자체에 거대한 양극성이 있다. 삶 자체가 이원적이다. 그리고 이원성이란 삶과 죽음이다. 죽음이란 그냥 그림자나 신비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음성적 실재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보다도 ‘물질’(Matter)과 ‘힘’(Force)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삶은 개체적이다.3 늘 개체적이었고 항상 개체적일 것이다. 삶은 살아있는 개체들로 구성되며 항상 모든 것의 시작에는 그랬다. 제1의 실재가 살아있는 온전한 개체들이 아닌 그러한 우주, 코스모스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제 관념론자들이나 과학자들 ― 이들은 정말 똑같다―이 원자니 삶의 기원이니 우주를 이해하는 기계론적 단서니 하는 것들에 대한 허튼 전문용어들을 늘어놓기를 멈출 때이다. 그런 것은 없다.

나로서는 삶이, 삶만이 우주의 단서임을 안다. 그리고 살아있는 개체들이 삶의 단서임을 안다. 그리고 항상 그러했고 항상 그럴 것임을 안다.

*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됩니다.

 

  1. ‘enlivenment’는 뒤에 나오는 ‘Enlightenment’와 대조된다. ‘인라이븐’과 ‘인라이튼’으로 두운과 각운이 서로 다 맞는 단어들이다. 양자의 관계는 조금 뒤에서 설명한다(베버의 글을 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동사 ‘enliven’은 ‘life’의 동사형이므로 말 그대로 하면 ‘살게 하다, 살리다’의 의미이다. 일반적으로는 ‘활기를 띠게 하다, 활기를 부여하다’의 의미로 사용되지만 베버에게서는 말 그대로의 의미가 더 맞다. 그래서 여기서는 ‘Enlivenment’를 ‘살리다’의 명사형인 ‘살림’으로 옮겼다. (여기에 맞추자면 ‘Enlightenment’는 ‘밝힘’이 사실상 ‘계몽’의 뜻― 어둠을 깨다―이 이와 유사하다.) ‘살림살이’의 ‘살림’이 어원상으로는 ‘살리다’의 ‘살림’과 같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살림살이’의 ‘살림’은 이 글에서 비판하는 바의 ‘바이오경제학’에 종속된 말이 되어버렸다. 원래의 의미를 되찾는, 아니면 그 온전한 의미를 돌려주는 일이 ‘살림’의 경제학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2. ‘biopoetics’는 어원대로라면 ‘삶의 창조’라는 의미를 가진다. [본문으로]
  3. 로렌스에게 ‘individual’이란 말은 명사로 사용하든 형용사로 사용하든 ‘특이성’(singularity)의 의미를 필수적으로 포함한다. [본문으로]

출처: http://minamjah.tistory.com/86?category=452913 [百手의 블로그]




시민의 힘과 그리스가 나아갈 길

* 다음은 데이빗 볼리어가 지난 1월 24일에 자신의 블로그에 약간의 설명과 함께 올린 존 레스타키스(John Restakis)의 글 “Civil Power and the Path Forward for Greece”를 세부에서의 완벽은 기하지 못하고 내용을 전달하는 수준에서 옮긴 것이다. 볼리어는 그리스 선거 하루 전날에 이 글을 소개했으나 이 글은 그보다 열흘 전인 1월 14일에 쓰였다. 이 글이 선거의 결과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쓰였다는 것은 이 글의 효용에 아무런 흠집도 내지 못한다. 글을 읽어보면 알지만 레스타키스는 한국에서 많이 보는 ‘기술자’ 정치평론가들처럼 누가 선거에서 이기느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에서의 사회적 삶의 흐름에 관심이 있고 바로 그것이 글에 표현되어 있어서 우리가 그리스를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볼리어가 이 글은 “그리스 위기의 평가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커먼즈 기반의 수평네트워크 생산과 사회적 대안들을 주류로 만드는 거대한 과제를 위해서도 읽을 가치가 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볼리어가 자신의 게시글에서 밝혔지만 이 글은 원래 Commons Transition에 실렸다. 존 레스타키스는 (볼리어의 소개에 따르면) 밴쿠버의 <브리티시 콜롬비아 협동조합 연합>(BC Co-operative Association)의 전 이사장이며 여러 해 동안 공동체 조직화, 성인 및 대중교육, 협동조합의 발전에 힘 써왔고, 지구화, 지역발전, 대안경제에 대해서 강연활동을 널리 행해왔다.–전달자

 

시민의 힘과 그리스가 나아갈 길

 

 

존 레스타키스

 

시리자(Syriza)가 정권을 잡을 가능성이 생기면서, 그리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두 궁금해 하고 있다. 재난이든 구원이든 아니면 그냥 정상적인 혼란이든, 시리자 정부가 게임을 바꿀 반발을 할 잠재성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거리에는 과거의 정부들이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체제를 바꾸지 못한 데 낙담하여 시리자로부터 큰 것을 기대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냉소주의와 숙명론의 분위기가 짙게 깔려있다. 시리자는 얼마나 다를 것인가?

 

한 가지는 분명하다. 만일 시리자가 말한 것을 행한다면 이는 유럽에서 절실하게 요구되는 용기 있는 길을 닦는 것이 된다. 나라를 황폐하게 하고 있는 긴축정책에 대한 반대로서만이 아니라 이 정책들의 원천이자 자양분인 신자유주의적 사고, 제도들, 그리고 자본 세력에 대한 반대로서 그렇다. 그런 길이 성공하려면 경제발전, 시장의 역할, 그리고 국가와 시민의 관계에 대한 전적으로 다른 견해가 필요하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사회적 경제가 ‘경제 다시 만들기’를 위한 시리자의 계획의 중요한 측면이 되었다. 유럽의 모든 좌우를 포함하는 정당들처럼 시리자도 사회적 경제가 현재의 위기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알고 있다. 유럽 신자유주의의 진앙지인 영국의 캐머런 정부조차도 사회적 경제를 일자리를 창출하고 공공서비스를 증진시키며 정부의 역할을 개혁하는 데서 전략적 역할을 할 부문으로서 장려해왔다. 지난 선거에서 상호주의(Mutualism)와 ‘큰 사회’가 그 슬로건들이었다.

 

이 슬로건들은 멋지게 들린다. 사회적 경제가 어떤 것이고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우파 정부들이 거의 모르거나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캐머런 정부에게 협동조합들 혹은 더 일반적으로 사회적 경제는 공적 부분의 사유화, 직업안정성의 약화, 정부 역할의 축소를 실행하는 수단이요 위장막이 되었다. 수천 명의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직업을 구하기 위해서 사이비 협동조합들에 가입하도록 강압되었다. 그리스에서도 똑같은 일이 새롭게 구성된 KOINSEP1들과 함께 시작되고 있다. 이는 협동조합의 성격과 본성에 대한 희화(戱畵)이다. 협동조합의 조합원 가입은 항상 자발적인 것이어야 하며 그 운영은 민주적이어야 하고 그 목적은―정부의 이데올로기적 목적들이 아니라―조합원과 공동체의 공통의 이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 점을 거의 모든 정부들이 배우지 못하고 있다.

 

우파는 사회적 경제를 사회의 버려진 층과 자본주의 경제의 희생자들이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피난처로 종종 간주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파는 자선을 빈민에 대한 적적할 대응책으로서 옹호한다. 유대라거나 평등은 끼어들지 못한다. 더 최근에는 사회적 경제의 수사(修辭)와 원칙들이 자본이 시민적 공간으로 손을 뻗치는 데 사용되어왔다. 이런 이유로 영국 및 기타 지역에서 협동조합들과 사회적 경제 단체들이 사회적 경제의 원칙들이 지배세력의 이익을 위해 왜곡되고 있음을 비난해왔다. 그런데 이 원칙들이란 무엇인가?

 

사회적 경제는 공통의 이익에 복무하는 상호주의와 호혜주의 원칙들에 의해 추동되는 시민 조직들과 네트워크들로 구성되며, 일반적으로 사회가 자본을 통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사회적 경제를 구성하는 것은 사회적 협동조합들, 비영리단체들, 재단들, 자원봉사그룹들 등으로서, 시장 내에서만이 아니라 (많은 성공적인 협동조합들과 공정무역 단체들이 여기 속한다) 재화와 서비스가 생산되는 비(非)시장 영역에서도 작동하는 제반 조직들이다. 여기에는 문화생산물, 건강 혹은 사회적 돌봄의 제공, 그리고 궁핍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식량·주거 및 기타 필수품들을 제공하기가 포함된다. 사회적 경제란 그 본질상 사회가 경제적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가 사회적 목적에 봉사하는 영역이요 실천이다.

 

 

오늘날 그리스가 그 사회적 경제의 규모나 다양성에서 전례 없는 성장을 하고 있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다른 곳처럼 여기서도 협동조합들과 사회적 이익 기업들(social benefit enterprises)이 경제 불황과 긴축에 대한 사회적 자기방어의 형태로 생겼다. 많은 젊은이들에게는 협동조합 혹은 사회적 기업의 설립이 일정한 자율성과 존엄을 지닌 직업을 확보하는 유일한 길이다. 식당에서 관광객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보다 더 보람 있는 일인 것이다.

 

사회적 경제가 성장하고는 있지만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그리스는 멀리 뒤쳐져 있다. 그 원인은 많다. 사회적 투자의 재원 마련과 같은 제도적 뒷받침의 미비, 전문가를 계발시키고 훈련시키지 못한 것, 대표 조직들이 단결하여 발전하고 해당 부문의 목소리를 내는 데 이르지 못한 것이 그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노후하고 단편적이며 부적절한 입법이 또 하나의 원인이다.

 

더 복합적인 셋째 이유는 그리스에서 시민사회와 국가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와 관계가 있다. 근대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제도들의 싹을 심은 계몽 및 산업혁명의 과정들을 겪은 다른 서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그리스는 오스만 지배 동안 이러한 전개과정에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아왔다. 오늘날 그리스는 오스만 시대 직후부터 지배해온 정치체제를 특징짓는 독재적 은고주의(clientelism)를 넘어서는 정치문화를 수립하기 위해 여전히 발버둥치고 있다.2 독재는 위계, 개인주의, 의존관계를 낳지 상호주의와 사회적 유대를 낳지 않는다. 건강한 시민사회, 민주적 제도들, 그리고 민주적 문화의 출현이 이로 인해서 장애를 만나게 된다.

 

은고주의의 유산은 그리스에서 치명적이었다. 협동조합의 경우에서 드러난 것처럼, 그것은 사회적 경제의 건강한 발전에 재난급의 악영향을 미쳐왔다. 우파가 사회적 경제를 자본과 시장의 증진을 위한 매개물로 삼듯이 좌파도 늘 사회적 경제를 국가의 목적을 진전시키는 도구로 본다. 여기에 은고주의 문화가 추가되면 대규모의 실패를 낳는 처방이 된다. 이것이 협동조합에 대한 국가지원이 부패를 낳았던 PASOK3 시기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이로 인해서 정당한 경제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쁜 결과로서 협동조합의 이미지와 평판이 훼손되었다.

 

오늘날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위한 실행 가능한 전략으로서 협동조합을 장려하는 일을 하려면 협동조합이 본래 부패한 것이라는 이 잘못되고 부정적인 대중적 이미지와 맞서야 한다. 그리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이는 ‘좌파’ 정부들이 협동조합 모델을 정부의 목적을 추구하는 데 사용하려 한 모든 곳에서 일어난 일이다. 협동조합이 그 목적과 본성상 자율적인 시민 연합조직이며 그 주된 역할은 그 구성원들과 공동체들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점은 내팽개친 채 말이다. 그리스에서처럼 과거에 정부들이 협동조합을 그리고 더 넓게는 사회적 경제를 정부의 권력을 확장시키는 도구들로 보았던 나라들―이전에 소련에 속했던 모든 나라들,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전역― 에서는 협동조합 모델이 그 만신창이가 된 평판으로부터 복구되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협동조합의 이미지와 평판을 훼손하는 데 가장 기여한 것은 협동조합 모델을 조작적으로 ‘지원한’ 좌파이다.

 

그 이유는, 좌파가 전통적으로 국가를 사회적·경제적 개혁의 유일하게 정당한 엔진으로 보아온 데 있다. 이런 점에서 좌파는 경제적·사회적 발전의 정당성을 시장에서만 보는 우파의 거울이미지이다. 양자 모두, 현재의 패러다임에 대한 어떤 대안이 성공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발본적인 변화를 실현하는 데 필수적인 바로 그 시민사회 제도들을 무시하거나 조작하는 비극적 실수를 똑같이 저지른다.

 

이것이 (만일 시리자가 권력을 잡는다면) 시리자의 성격이 어떤지를 가늠할 진정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시리자는 그리스의 경제적·정치적 체질을 재편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광범한 시민사회와 그리고 사회적 경제의 햇병아리 같은 조직들 및 제도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좌파의 전통적 국가주의, 즉 명령과 통제에 기반을 둔 통치로 되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좌파의 변화프로그램을 확장하고 다시 상상하여 시민사회 제도들과 사회적 경제를 나라 건설의 의미심장한 파트너로 가동시킬 것인가? 더 나아가, 협동, 상호주의, 공통의 이익이라는 사회적·경제적 원칙들을 경제 및 사회 재건에 핵심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활용할 것인가? 요컨대, 시리자 당은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시민사회의 힘의 방대한 잠재력을 인정하고 가동시킬 것인가? 만일 그런다면 이는 유럽에서 최초로 그렇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시리자가 사회적 경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좋은 신호다. 사회적 경제는 그리스에서 매우 적은 밝은 지점들 가운데 하나이다. 수백의 새로운 집단들이 형성되어 전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위계구조를 거부하고 포용성과 민주적 의사결정을 증진하며 서비스를 이윤보다 중시하는 이 조직들은 자신들을 새로운 경제적·정치적 질서를 위한 모델로 본다. 실제로 그렇다. 그러나 또한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이 집단들 가운데 다수가 정당이나 국가와는 거의 혹은 전혀 관계를 갖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는 새로운 정치 경제를 향하는 비전과 방법을 구체화해 내려고 노력하는 좌파 정당들에게 좋은 소식이 아니다. 만일 새로운 시대를 구축하는 좌파적 비전이 건설되려면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 정당과 국가통제라는 낡은 방식은 신뢰를 잃었고 거부당했다.

 

오늘날 정말로 효율적인 좌파 정당에게는 사회적 경제가 결정적인 자원이자 동맹군으로서 나타난다. 여기서는 공통의 이익에 봉사하는 경제적 민주주의의 원칙들이 실행된다. 가장 혁신적이고 기업가적이며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젊은 지도자들이 여기서 활동하고 있다. 또한 폐쇄적이고 관료적인 정부의 역기능을 개혁할 잠재력을 가진 조직화 형태들과 실천들 또한 여기서 개발되고 있다. 이곳에서 공동체들은 지난 세월 동안 상실했던 것의 일부를 회복하기 위해 함께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공동체 진료소들, 식품 시장 및 농민들과 소비자들 사이의 상호부조, 이웃의 전기나 물이 차단되는 것을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막기 등. 이는 이 위기의 와중에도 뜻하지 않은 인정이 존재함을 가리킨다. 이 어려운 시절이 공동체와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인간관계의 부활에 불을 댕겼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들은 사회적 경제에서 번성한다.

 

진보적인 정부라면 사회적 경제와 관련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좌파의 전통적인 국가주의를 넘어서서, 민주화하는 법, 시민들과 권력을 공유하는 법을 이해하는 정부의 역할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는, 비(非)온정주의적이고 비(非)은고주의적인 패러다임에서 정부의 주된 역할이 사회적 가치의 생산―사적 이윤보다 사회적 필요를 우선시하여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것―을 위해 시민사회를 힘있게 만들고 지원하는 것임을 이해함을 의미한다.

 

둘째, 권력을 잡은 그 어떤 정당과도 무관하게 사회적 경제의 발전과 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법적·사회적 제도들을 창출해야 한다. 이는 협동조합 및 사회적 경제와 관련된 입법을 개혁하는 것, 사회적 경제 조직들을 사회적·윤리적으로 재정지원하는 재정도구들의 창출, 새로운 정치경제의 근본을 이루는 협동·상호주의 및 공통의 이익에의 봉사와 관련된 이론과 실제를 연구하고 교육시키는 기관들의 설립을 의미한다.

 

셋째, 이 원리들을 비영리 및 공동체 서비스 부문을 넘어서 더 넓은 경제로 특히 국민경제의 기반을 이루는 중소기업들로 확대·적용해야 한다. 사회적 경제를 활성화하는 원칙들은 경제 전체의 회복과 개혁을 위한 틀이다.

 

넷째, 통제권, 투명성, 책임성, 의사결정권을 공공서비스의 사용자들에게 부여함으로써 공공서비스를 개혁해야 한다. 관료층의 고립되고 독재적인 권력은 분쇄되어야 한다.

 

그리스는 그 사회적·경제적·정치적 문제들을 풀기 위해서는 새로운 접근법들을 시도하는 수밖에 없다. 거시적 수준에서 시리자 정부는 채무구조조정, 무역관계 및 수출정책, 자본을 표적으로 한 조세정책을 통한 세입증가, 농업 및 산업 생산의 부활,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된 위기와 같은 근본적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 경제가 이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는 그 자체로는 회복의 엔진으로서 작동할 수 없을 것이 명백하며, 자신의 강점과 한계를 동시에 이해하는 기민한 정부의 지원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 경제에 대한 잘못된 기대가 실패와 실망의 무대를 마련할 위험이 존재한다. 과거에 사회적 경제 조직들이 어떻게 어떤 목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모르는 데서 나오는 비현실적인 기대들이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의 ‘비효율’과 ‘유토피아주의’를 비판하고 싶어 하는 자들에게 엉뚱하게 탄약을 제공해준 일이 있다. (이 자들은 협동조합의 생존비율이 사적인 기업들의 생존비율의 두 배 이상이라는 사실을 편리하게 무시한다.)

 

사회적 경제가 제공하는 것은 대안적 패러다임이 구축될 수 있는 생각들, 방법들 및 모델들이다. 사회적 경제는 새로운 정치경제의 실험장이며, 그 조직들은 더 인간적인 미래를 탐지하는 사회적 안테나이다. 오늘날 다른 패러다임을 이렇게 미리 그려보는 것이 아마도 사회적 경제가 그리스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여일 것이다. 그리스에는 기본적인 제도적 뒷받침이 여전히 결여되어있기 특히 그렇다.

 

이 제도들을 건설하는 것이 결정적이다. 이는, 새로운 정부가 채무와 유럽 정부들과의 관계를 재협상하는 데 성공하든 아니든 사실이며, 성공을 못하면 더욱 긴요해진다. 그리스가 더 인간적이고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경제를 향하여 나아가기 위해 취해야 하는 변화들이 현재의 유로존 내부에서 과연 전개될 수 있는가에 대해 심각한 의문들이 던져진다.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제도적 타성이 개혁의 전망들을 질식시키고 있다. 그렇더라도 그리스는 사회적 경제가― 특히 위기의 시기에―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촉진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다른 나라에서 이미 축적된 풍요로운 경험에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는 이 분야에서는 후발주자이다. 그러나 그래도 장점이 없지 않다. 다른 나라들의 경험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이탈리아의 에밀리아 로마냐(Emilia Romagna) 지역에서는 바로 협동과 상호부조의 원칙들에 입각한 중소기업들이 전지구적 시장에서 번성하고 있다. 이 지역은 유럽에서 상위 10개의 우수한 경제지역에 속한다. 이탈리아의 4만 개의 사회적 협동조합들은 지방자치체들과의 긴밀한 파트너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사회적 돌봄을 재편하고 확장하는 데 성공하였다. 여기에 28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고용되어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그리스가 지금 겪고 있는 것과 거의 동일한 2001년의 경제위기 이후에 300개 이상의 버려진 공장들이 그곳의 노동자들에 의해 인수되어 생산을 재개했다. 거의 모든 공장들이 아직 가동 중이다. 학교들, 어린이집들, 진료소들, 도서관들, 커뮤니티센터들 또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인수되어 운영되었다. 국가 사회주의의 원형인 쿠바에서도 정부가 자율적인 협동조합들의 성장을 지원하여 농업부문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새로운 기업과 새로운 서비스들의 성장을 자극하고 있다.

 

정부 개혁이 이 운동에서 중심적 테마이다. 브라질, 콜롬비아, 스페인.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그 숫자가 점점 늘고 있는 세계 전역에 걸친 나라들과 도시들에서 시민이 참여하는 예산작성, 공유된 정책입안, 시민에 의한 예산 및 공공프로그램 감시가 정부들의 작동방식을 개혁하는 데서 사회적 경제가 맡은 핵심적 역할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를 통해 정부들을 더 투명하고, 더 책임성 있고, 더 민주적이며, 시민들의 실질적 욕구에 더 잘 반응하도록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다음이 핵심적 요점이다. 사회적 경제는 경제적 민주주의를 통해 자본을 사회에 봉사하도록 만드는 정치경제의 모델이다. 그리스 채무위기의 기원에 대해 많은 글들이 쓰였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가 유로존에 진입하면서 싼 돈을 쓸 수 있게 되고 비윤리적인 대여가 발생한 것을 지적한다. 다른 어떤 이들은 감시의 결여와 느슨한 규제를 지적한다. 또 다른 어떤 이들은 부패와 공적 기금의 엄청난 낭비를 지적한다. 물론 모두가 그리스를 절벽으로 몰아가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민주주의와 공적 책임성의 근본적 결여를 지적한 이는 거의 없다.

 

오늘날 가장 필요한 것은 정치, 사회,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제의 영역에서 민주적 문화를 건설하는 것, 그리고 민주주의를 생성하고 확장할 시민 제도들을 강화하는 것이다. 계몽된 국가가 시민들과 손을 잡고 해야 할 역할은 바로 이것이다. 특히 그리스와 같은 정치문화를 가진 곳에서는 무언가를 바로잡는 것은 미묘하고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이 일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는 과거에 보았던 범죄적 소홀함과 비행을 영속화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그리스의 지배자들, 그들에게 봉사하는 정치계급들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유럽 열강들의 정치와 처방이 그리스를 개혁하고 다시 만드는 데 가장 필요한 바로 그 제도들을, 즉 그 공적·시민적 제도들을 파괴하고 있으니 참으로 비극적이고 근시안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저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공적 제도들과 시민의 힘이 파괴되는 것이 저들에게는 맞는 일이다. 사회적 가치들이나 민중의 복지를 자본의 이익보다 우선시하는 것은 저들의 도식에 맞지 않는다. 저들의 도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자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는 인구의 방대한 대다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일부 세력을 위해서 잘 작동하는 체계의 영속화이다.

 

2014년 1월 14일

*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됩니다.

 

  1. ‘The Social Enterprise’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Κοιν.Σ.Επ’을 영어알파벳으로 이라고 표기한 것이다(‘Koin.S.Ep’ → ‘KOINSEP’). [본문으로]
  2. 히로세 준(廣瀬純)은 그와 <꼴렉띠보 씨뚜아씨오네스>와 대화를 엮어 낸 책 『투쟁의 아쌈블레아』(闘争のアサンブレア)의 해설에서 은고주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삐께떼로운동의 조직화 단위인 ‘바리오’와 관련하여, 대다수의 삐께떼로 조직은 이른바 은고주의(恩顧主義, clientelismo)를 거부한다는 점을 중요하게 지적해 두고 싶습니다. 은고주의란 한마디로 말하면 선거인에 대한 정당의 일상적인 매수공작입니다. 아르헨티나에는 은고주의의 오랜 역사가 있고, 특히 빈민지역은 항상 은고주의 공작의 주된 영역이었습니다. 은고주의는 공적 부조와 공공사업을 남발함으로써 정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한 여당뿐만 아니라, 좌파 정당들도 포함하여 모든 정당에게 매우 중요한 선거전술이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은고주의에는 선거전술이라는 측면과 더불어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능동적으로 되는 일을 저지하는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각 정당은 은고주의 공작을 통해서 자신들과 사람들 사이에 후원자(patron)-수혜자(client) 관계 혹은 배우/관객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사람들이 정치적 행위자로 될 가능성의 싹을 잘라내려고 시도해 왔습니다. 은고주의는 사람들을 정치적 수혜자 또는 정치적 관객으로 환원하고 각 정당이 ‘정치 무대’을 독점하기 위한 중요한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표를 모으기 위한 전술임과 동시에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수동적으로 만드는 장치이기도 한 이중적 기능을 통해서, 은고주의는 각 정당의 ‘대표’로서의 정당성을 지탱해 왔습니다./ 이러한 ‘은고주의’에서 바리오를 해방시키는 것은, 각 정당이 가지는 ‘대표’로서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일임과 동시에 각각의 바리오를 ‘정치 무대’ 그 자체로 삼는 일이기도 합니다. 즉 각 정당의 은고주의적 기획에 저항하는 투쟁이란 각각의 바리오에서 자율적인 정치공간을 구축하는 투쟁 바로 그것입니다.” [본문으로]
  3. PASOK는 그리스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다. The Panhellenic Socialist Movement (Greek: Πανελλήνιο Σοσιαλιστικό Κίνημα에서 첫 알파벳을 따서 만든 말이다. [본문으로]

출처: http://minamjah.tistory.com/85?category=452913 [百手의 블로그]




탈성장운동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가 그의 블로그에 올린 2014년 12월 13일자 글 “Degrowth, the Book”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나’는 볼리어이다. 

 

『탈성장』(Degrowth)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경제성장을 인간 진보의 본질로 보는 산업사회에서는 성장을 고의적으로 거부한다는 것이 미친 짓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지금 지구의 생태계는 세계 경제에 대하여 이와 같은 거부의 말을 던지고 있다. 그것은 또한 확대되는 ‘탈성장’(Degrowth) 운동―이는 특히 유럽과 지구상의 후진 지역에서 강하다―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몇 달 전에 나는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열려서 세계 전역에서 3천 명이 참가한 대대적인 탈성장 컨퍼런스에 대해 볼르그에 글을 올린 바 있다. (유튜브에 있습니다―정리자) 거기서 이루어진 논의의 기본적 요점은, 어떻게 성장이라는 물신(物神)을 이론적·실천적으로 넘어서느냐, 그리고 어떻게 ‘경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변형시켜서 그것이 민주주의, 사회적 복지, 생태적 한계와 같은 중요한 가치들을 포함하도록 만드느냐였다.

 

운동의 지도적 인물들 가운데 몇몇이 글모음집인 『탈성장―새로운 시대를 위한 어휘』(Degrowth: A Vocabulary for a New Era, Routledge)라는 책을 펴냈다. 이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에 있는, 탈성장에 관한 모색의 결과를 포괄적으로 개관하는, 영어로 된 첫 번째 책이다. 이 책에 대해서 더 알아보려면 책의 웹사이트로 가서 재미있는 3분짜리 비디오를 보면 된다.(클릭)

 

편자(編者)들―자코모 달리사(Giacomo D’Alisa), 페데리꼬 데마리아(Federico Demaria), 히오르고스 칼리스(Giorgos Kallis)―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자율대학의 학자들이며 <연구 및 탈성장>(Research & Degrowth) 그룹의 구성원들이다. 편자들은 탈성장을 “성장이라는 환상을 거부하고 경제주의의 상투적 어구에 의해 식민화된 공적 논쟁을 다시 정치화하자는 요구”라고 설명한다. 그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사회 정의와 생태의 지속 가능성을 이루기 위해서 민주적인 방식으로 생산과 소비를 줄이는 것”을 달성하는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다. 

 

책 표지에는 이 책이 이렇게 소개되고 있다.

 

우리는 경기침체, 급속한 빈곤화, 상승하는 불평등과 사회-생태적 재난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회에서 우세한 담론에 따르면 이것들은 경제적 위기의 결과, 성장의 결핍이나 저개발의 결과이다. 이와 달리 이 책은 바로 성장이 이 문제들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며, 성장이 비경제적이 되었고 생태적으로 지속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내적으로 정의롭지 못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사용되는 언어가 간절하게 표현되어야 할 것을 표현하기에 부적절하다면, 새로운 어휘가 필요한 때이다. 프랑스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세계 전역으로 퍼진 활동가들과 지식인들의 한 운동은 공적 토론이 경제주의의 상투적 어구로부터의 해방되고 경제성장을 사회적 목적으로 삼던 관행을 폐지할 것을 요구한다. ‘탈성장’(Degrowth, [프]‘décroissance’)이 그들에게는 자연자원을 더 적게 사용하고 발본적으로 다르게 살기 위해 스스로를 조직하는 사회가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을 의미하게 되었다. ‘소박’(Simplicity), ‘공락(共樂)’(conviviality)1, ‘자율’, ‘돌봄’(care), ‘커먼즈’, ‘데빵스’(dépense)2가 탈성장 사회가 어떤지를 표현할 단어들 가운데 일부이다.

 

이 책은 성장과 관련된 기본 용어들의 ‘사전’으로 조직되었으며, 4부로 나뉜다. 1부는 발전, 환경 정의, 삶경제학(bioeconomics) 그리고 반(反)공리주의와 같은 사고의 방향과 관련된 주제들을 다룬다. 2부는 자본주의, 상품화, 엔트로피, 돌봄노동 등과 같은 중심적 용어들을 다룬다. 3부는 도시 정원(urban gardens)과 협동조합에서부터 생태공동체와 노동공유(work sharing)에 이르는 현장의 포스트성장적 대안들을 개관한다. 4부는 ‘연대’가 주제로서 탈성장 프로젝트와 함께할 수 있는 사상조류들, 활동가들, 개념들로서 부엔비비르(Buen Vivir), 영구 경제학(Economy of Permanence), 페미니즘 경제학, 우분투(Ubuntu)를 다룬다.

 

팀 잭슨(Tim Jackson), 크리스 칼슨(Chris Carlsson), 줄리엣 쇼(Juliet Schor), 조수아 팔리(Joshua Farley), 아르투로 에스꼬바르(Arturo Escobar), 쌔뮤얼 알렉산더(Samuel Alexander), 호안 마르티네즈-알리에(Joan Martinez-Alier)가 책의 기고자들에 포함되어 있다. 나와 질케 헬프리히(Silke Helfrich)도 커먼즈에 관한 글 하나를 기고했다. ♣

12월 16일 볼리어의 업데이트 : 편집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부터 책이 매진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한편 2015년에는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번역본이 나올 것이다. 

*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됩니다. 

  1. 이반 일리치(Ivan Illich)의 개념으로서, 단순히 즐거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구들을 그 도구들을 통제하는 전문가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모두가 공유하며 사용하는 사회(“a society in which modern tools are used by everyone in an integrated and shared manner, without reliance on a body of specialists who control said instruments”)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2. 삶의 재생산과 보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를 넘어서 지출되는 과잉 에너지를 가리킨다. 인간을 동물의 수준(보존을 위한 자원획득의 지평)을 넘어서 비로소 인간으로 만드는 에너지. [본문으로]

출처: http://minamjah.tistory.com/81?category=452913 [百手의 블로그]




블록체인(blockchain) : 온라인 커먼즈를 위한 새로운 인프라

* 아래는 2015년 3월 4일자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 게시글 The Blockchain: A Promising New Infrastructure for Online Commons를 거의 번역에 가깝게 정리한 것이다.

블록체인(blockchain) : 온라인 커먼즈를 위한 새로운 인프라

비트코인(Bitcoin)은 투기와 일부 통화교환 회사들의 문제 있는 행동들로 인해 참패를 맛보았다. 그러나 비트코인의 단점이 무엇이든, ‘분산된 원장(元帳)’(distributed ledger) 혹은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로 알려진 그 ‘엔진’에는 상대적으로 거의 주의가 기울여지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비트코인에 대한 피상적인 논의들을 넘어선다면, 우리는 개방된 네트워크 플랫폼에서 이루어지는 커머닝(commoning)의 미래에 엄청나게 중요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상의 약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블록체인 테크놀로지가 의미심장한 것은 그것이 개별적인 비트코인의 진정성을 은행이나 정부 단체와 같은 제3의 보증자 없이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개방된 네트워크 맥락에서의 골치 아픈 집단행동 문제(집단 내에서 개인들의 행동으로 인해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해준다. 어떻게 어떤 비트코인이 가짜가 아닌지를 알 수 있는가? 혹은 이 생각을 더 확대하면 어떻게 어떤 문사, 증서, 데이터집단이―혹은 투표나 어떤 개인이 주장하는 ‘디지털 신분’이―날조된 가짜가 아니라 ‘진짜’임을 알 수 있는가?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는 비트코인들의 모든 거래를 계속 추적하는 검색 가능한 온라인 ‘원장’을 사용함으로써 이 문제를 풀 수 있다. 원장은 시간당 약 6회 업데이트되며 업데이트될 때마다 ‘블록’(block)이라고 알려진 새로운 일단의 거래들을 원장에 통합한다. 블록체인의 대단히 혁명적인 측면은 그 정보가 네트워크에 있는, 비트코인을 사용하는 모든 이에 의해서 공유된다는 점이다. 원장은 방대하게 분산된 수평네트워크에 의해 유지되는 영속적인 기록과 같은 것으로 작동한다. 이것이 이 기록을 중앙관리되는 장소에 보관되는 데이터보다 훨씬 더 안전한 것으로 만든다. 네트워크상의 그토록 많은 접속점들(nodes)에 분산되어 있는 원장을 손상시키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떤 비트코인이 진짜임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커먼즈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고 물을 수있을 것이다. 최근에 발표된 한 보고서는 블록체인 테크놀로지가 ‘분산된 협동 조직들’(distributed collaborative organizations)라고 불리는 것을 구축하는 중요한 인프라를 제공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 (‘탈중심화된 자율적 조직들’decentralized autonomous organizations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분산된 조직이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그 구성원들에게 그 조직 내에서의 특수한 권리들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며, 이것이 블록체인에 의해서 관리되고 보증되는 것이다. 이 일단의 권리들이 다시 이 권리들을 법적으로 인정될 수 있게 만드는 기존의 법체계들에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분야를 탐구하는 보고서에는 「분산된 협동적 조직들 : 분산된 네크워크들 및 규제 틀들」(“Distributed Collaborative Organizations: Distributed Networks & Regulatory Frameworks.”)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이 보고서는 코인센터()에서 발표했으며 Swarm, the Berkman Center at Harvard, New York Law School 그리고 the MIT Media Lab과 관련된 사람들이 기고했다. (볼리어도 초고에 논평을 한 바 있다고 한다.) 이 파일은 여기서 다운받을 수 있다.

블록체인 테크놀로지의 사용은 디지털 통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테크놀로지는 시장에서든, 커먼즈에서든, 혹은 다른 상황에서든 일군의 사람들이 네트워크 플랫폼에서의 상호관계를 관리하는 신뢰할만한 체계를 원하는 다양한 상황들에 적용될 수 있다.

시드니 엠버(Sydney Ember)가 며칠 전에 <뉴욕타임즈>에 기사로 썼듯이,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를 새로운 장소로 가져가려고 시도하는 새로운 세대의 비트코인 2,0 프로젝트가 존재한다.

전 세계의 기업가들은 지금 그 테크놀로지를 비트코인 거래를 넘어서 다른 영역에서 사용하려고 작업하고 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블록체인은 궁극적으로 전통적인 금융체계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주식 같은 금융자산들, 계약서들, 재산권증서들, 특허장들, 결혼허가서들을, 즉 확인을 위해서 신뢰할만한 매개자를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보내고 기록하는 방식을 수립할 수 있다.

“블록체인의 능력을 확대하는 경쟁이 진행되고 있다”고, 개발자들이 비트코인 앱을 구축하는 것을 돕고자 하는 신설기업인 체인닷컴(Chain.com)의 공동창립자인 애덤 루드윈(Adam Ludwin)은 말한다.

많은 블록체인 앱들이 금융 및 화폐에 관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테크놀로지를 특허장, 권리증서, 금융데이터와 같은 문서들의 진정성을 확인하는 테크놀로지로 사용하고자 하는 많은 다른 사업들이 존재한다. FCC의 전 회장인 리드 헌트(Reed Hundt)는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를 주택에서 태양광 에너지의 분산된 네트워크들을 창출하는 방식으로 사용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원장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어떤 가정이 발생시켜 공유했는가 혹은 소비했는가를 추적하고 그것이 분산된 태양광 에너지 그리드들의 효율적인 조직을 가능하게 하리라는 것이었다.

헌트와 그의 두 동료들은 최근에 이렇게 쓴 바 있다. “분산된, 분해된 원장에 의해 가동되는 통화(通貨)는 재생 가능한 에너지 크레딧과 기타 정부 보조금으로 전환될 수 있다. 심지어 그것은 태양광 에너지 미시그리드들이나 네트워크들 내에서 교환매체 역할을 할 수도 있으며, 그린 통화의 튼실한 생태계가 창출하는 네트워크 효과들은 태양전지판의 채택을 유기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 거래들은 거의 즉각적일 것이며, 거래비용은 최소가 될 것이다.

당연하게도, 주류 세계는 대부분 이익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세대의 닷컴 기업들을 위한 토대로서의 블록체인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커먼즈 기반의 응용들 역시 매우 풍부하다. 다만 우리가 기회를 잡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기민해야 할 것이다. 며칠 전에 블로그에 게시한 글에 대한 논평에서 블록체인 테크놀로지 분야의 주도적인 기술/법 전문가 가운데 하나인 프리마베라 데 필리피(Primavera de Filippi)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의 연구는 블록체인 테크놀로지가 제공하는 새로운 기회들에 초점을 두는데, 특히 공동체 거버넌스와 관련된 데 초점을 둔다. CBPP 생태계에 큰 혜택을 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커먼즈 기반 거버넌스를 실행하는 것을 블록체인이 도울 수 있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오랫동안 커먼즈 기반의 공동체들이 중앙집중화된 혹은 연방제 형태의(federated) 구조 주위에 제도화되어 왔는데, 이 제도들은 민주적 거버넌스, 유연성, 발전능력의 측면에서 중앙집중에 치우쳤던 것을 균형잡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대체로 이 제도들은 서로 떨어져 있는데 적절한 연계 메커니즘이 없거나 규모가 안 맞아서 서로 연계하기가 힘든 집단들의 연계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이 제도들은 또한 충분히 자주 반복적으로 상호작용을 하지 못하는 집단들 사이의 신뢰를 수립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오늘날 공유된 공유재와 관계된 전통적 문제들(블로소득자 문제나 공유지의 비극)을 블록체인 기반의 거버넌스의 실행하여 투명한 의사결정 절차와 협동과 협력을 장려하는 탈중심화된 인센티브 제도의 도입을 통해 다룰 수 있다. 블록체인의 투명하고 탈중심화된 성격이 중소 공동체들이 합의에 도달하고 자치의 혁신적 형태들을 실행하는 것을 쉽게 만든다. 모든 상호작용을 부패될 수 없는 공적 원장에 기록할 수 있는 가능성과 일단의 특정한 규칙들을 코드화하여 이 상호작용들을 특수한 거래들에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 (암호화된 토큰의 할당과 같은) 새로운 세련된 인센티브 제도를 고안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 새로운 인센티브 제도는 전통적인 시장 기반의 메커니즘들과는 현저하게 다를 수 있다.

탈중심화된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는 신뢰와 연계를 공유된 자원에 부여하여 비(非)위계적 거버넌스의 새로운 모델을 가능하게 하는데, 이 모델에서는 지성이 네트워크의 중심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의 가장자리로 퍼져나간다. 탈중심화된 유연한 조직들이 전적으로 현행의 중앙집중화된 형태들의 위계적인 포맷을 완전히 대체하여 커먼즈 기반의 공동체들로 하여금 더 탈중심화된 방식으로 작동되게 할 수 있다. 블록체인은 전통적인 하향식 의사결정에 의존하지 않고 의사결정이 크라우드소싱의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게 하며, 공동체의 집단지성에 자신의 성취를 스스로 감시하고 평가할 책임을 맡긴다.

온라인 공동체들이 이러한 새로운 장치를 실험할 최초의 공동체겠지만, 온라인 공동체들은 쉽게 오프라인으로 옮겨가서 물리적 세계에서 작동할 새로운 조직들을 창출·구축할 수 있다.

지금까지, 커먼즈 기반의 수평적 네트워크 생산 공동체들이 많은 분야에서 번성해왔지만, 관료적이고 중앙집중화된 제도들로 전환되지 않고서는 규모를 키우는 데 어려움이 있어왔다. 내 희망은, 블록체인 테크놀로지가 제공하는 새로운 기회를 잡아서 이 공동체들의 더 분산되고 탈중심화된 방식의 작동을 (온라인과 오프라인 모두에서) 뒷받침할 수 있는 새로운 응용법들을 창출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의 비전이다. 볼리어는 새로운 세대의 블록체인테크놀로지들이 전통적인 제도들에 의해서는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많은 집단행동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다는 프리마베라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래도 굳어버린 관료들의 권력, 힘의 불평등 그리고 거대한 규모의 집단적 동의를 오프라인에서 조직하는 문제를 극복하기란 어렵다.

또한 2008년 금융위기에서 목격했던 대로 (예를 들어 SEC, 평가기관들 그리고 다른 감시 당국들의 신뢰 불가능성처럼) ‘평판 있는’ 제3의 보증자의 신뢰성조차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감시하는 자들은 누가 감시하는가?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는 현행의 많은 부패될 수 있는 제도들보다 더 진전된 것이다. 집단 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관리하는, 부패될 가능성이 덜한 알고리즘들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알고리즘들이 전문가가 아닌 사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을 때 그것을 공동체가 평가하는 문제가 있다.)

블록체인 시스템을 어떤 마법의 해결책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의 교활함과 속임수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는 커먼즈의 주위를 더 잘 보호하고 커머너들이 자신들이 운명을 결정하는 데 힘을 더해줄 더 굉장한 도구들을 제공한다. 미래에 분산된 협동적 조직들의 내적 관계들이 소프트웨어에 의해 가능한 스마트 계약, 신뢰할만한 심의 및 투표제도, 공동체 통화(通貨)들과 기타 협동적 제도들을 통해서 개선된 모습을 상상해보라. Web 2.0보다도 훨씬 더 다채롭고 안전한 블록체인 기반의 사회적 네트워크들은 오늘날 훨씬 더 큰 규모의 커머닝을 위한 새로운 인프라가 될 수 있다.

볼리어는 분산된 협동적 조직들 즉 커먼즈들이 전통적 제도들에 만연한, 기능장애를 일으킨 정치와 대중을 배신하는 관료제를 타고 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고 한다. 기술을 통한 문제해결이 아니라 대안적 정치를 위한, ‘속임수의 가능성’이 덜한(less gameable)한 새로운 플랫폼인 것이다. 점점 더 네트워크 플랫폼에 의해 매개되는 세계에서, 블록체인테크놀로지는 우리가 어떤 참신한,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유형의 커먼즈를 구축하는 것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이 세계는 아직 한참 떨어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탐구할 가치가 있는 풍요로운 지평이다. ♣

*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됩니다.

출처: http://minamjah.tistory.com/90?category=452913 [百手의 블로그]




커먼즈로서의 버닝맨(Burning Man as a Commons)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가 그의 블로그에 올린 2014년 10월 8일자 글 「커먼즈로서의 버닝맨」(“Burning Man as a Commons”)에서 소개하는 피터 허쉬버그(Peter Hirshberg)의 “Burning Man: The Pop-Up City of Self-Governing Individualists”의 일부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허쉬버그의 글은 새로 나온 책  From Bitcoin to Burning Man and Beyond:  The Quest for Identity and Autonomy in a Digital Society의 5장이다. 허쉬버그는 애플의 중역을 역임한 하이테크 기업가로서 현재는 Re:imagine Group의 의장이며 Gray Area Center for Arts and Technology in San Francisco의 공동창립자이다. 그는 수 년 동안 버닝맨의 참여자였다. 아직 디테일을 잘 몰라서 잘못 전달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읽는 이들의 양해를 바란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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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맨 ― 스스로를 다스리는 개인주의자들의 팝업 도시 (Burning Man: The Pop-Up City of Self-Governing Individualists)

피터 허쉬버그

 

허쉬버그가 1990년대에 들은 이야기 : 물도 전기도 그늘도 대피할 곳도 없는 곳에 간다. 무로부터 도시를 만들어낸다. 자신들이 상상한 도시를. 무로부터! 규칙과 습속과 전통과 원칙이 있는 세계를 만들어내고는 살아간다.

 

생긴 지 28년 후에 버닝맨은 도시 규모의 실험을 하는 특이한 화판으로 부상하였다. 지구상에서 가장 창조적인 사람들을 끌어 모으며 규모가 크다. 2013년에 6만8천 명이 참가했다. 비록 단 일주일만이지만, 화폐를 통한 거래에 기반을 두지 않고 선물(膳物)과 후함(generosity)에 기반을 둔 경제를 체험하게 만든다. 버닝맨에서는 예술, 공연, 철저한 자기표현이 사회에서 가장 소중한 활동이다. 버닝맨은 통치는 최소화되고 자유는 최대화된 지구상의 별스런 곳이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테마캠프, 예술기획, 흥청대는 음악마을, 불춤 패거리, 공연집단, 토목 부대들, 순찰조들로 조직한다. 임시공항도 짓는다.

 

버닝맨은 해마다 처음부터 다시 짓는 도시이기에 우리 세계에, 직업에, 이 세계에서 부과된 ‘역할’에 가해지는 제한들을 푸는 기회를 제공한다. 버닝맨의 창립자인 래리 하비(Larry Harvey)는 이렇게 말한다. “개인의 행위가 관건이다. 자신이 사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관건이다. 우리는 마음을 여는 행동들을 통해 세계를 리얼한 것으로 만든다.”

 

버닝맨은 대규모의 자기조직화 거버넌스가 실제로 작동하는 사례이다. 그 4반세기의 역사는, 어떤 종류의 정치적·조직적 사상과 도시 설계가 계속 남아있고 어떤 것들이 버려졌는지를 보여준다. 버닝맨에서 우리는 중앙집권화된 조직과 가장자리에서 출현하는 활동 사이의 항상적 긴장을 목격할 수 있다. 이곳은 극단적 자유와 공동체의 균형을 실험하는 실험실이다. 혹은 그 원칙들을 빌어 말하자면, 한편으로는 “철저한 자기표현”(radical self-expression) 및 “철저한 자립”(radical self-reliance )과 다른 한편으로는 “철저한 포용”(radical inclusion), “시민으로서의 책임”(civic responsibility), “공동체적 노력”(communal effort) 사이의 균형이다.

 

버닝맨은 세계 전역에서 온 수천 명의 사람들과 캠프들이 스스로 조직한다. 그러나 그 핵심 방향은 소수의 창립자들로 구성된 팀이 정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판단을 민주적 국가의 지도자들이라기보다는 플라톤의 ‘철학자-왕’으로서 실행한다. 이들이 버닝맨의 사이즈를 정하고, 토지접근권에 관해서 국가 및 연방 기관들과 협상하며, 도시의 윤곽을 설계하고, 표를 팔고, 예술가들을 선별할 권한(?)을 부여하며, 전지구적 버닝맨 공동체를 위한 교육과 소통의 틀을 창출한다. 참여자들 사이의 그리고 창립자들과의 대화는 『연방주의자 논집』(The Federalist Papers)에서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새로운 사회 질서에 적절한 거버넌스 원칙들에 관하여 토론한 바 있는 푸블리우스(Publius)를 상기시킨다. 차이는, 버닝맨은 이 탐구를 오래 전에 마른 소금 호수바닥에서 다채로운 의상과 음악이 물결치는 가운데 항상 변하는 실험으로서 행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몇 가지 기본적인 사실들] 버닝맨은 네바다의 블랙락(Black Rock)사막에서 해마다 일주일 동안 열리는 행사이다. 이곳은 북미에서 신이 버린 가장 가혹한 환경을 가진 곳들 중 하나이다. 용암층과 소금밭으로 된 방대한 반(半)건조한 사막이다. 38만 에이커의 황야에 7평방 마일(약 3.35km×3.36km)의 블랙락 시티(Black Rock City) 즉 버닝맨이 세워지는 것이다. 행사가 끝나면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땅을 대여하는 미국 토지관리국에 버닝맨이 약속한 조건은, 뒤에 휴지 한 장, 신발 한 짝. 옷 핀 하나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철저한 자립’이라는 버닝맨 철학에 따른 것이다. 참여자로서 이 도시를 짓고, 다 싸서 나간다. 나중에 와서 청소해줄 정부는 없다. 조명이나 동력 그리드를 제공해줄 곳도 없다.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과 당신의 캠프가 모든 문제를 스스로 다 풀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시스템, 자원공유, 자기조직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들에 관하여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비록 행사는 일시적이지만 그 경험과 통찰들은 나중까지 오래 남는다. 버너 공동체(the Burner community)― 참여자들은 스스로를 이렇게 부른다―는 종종 1년 내내 계획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렇게 자유롭게 해방된 사고방식이 그 이후에도 사람들의 삶, 이력, 계획, 시민사회에서의 참여에 영향을 끼치곤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버닝맨에 대해서 말하기를 ‘사람들이 예술을 위해서 오고 공동체를 위해서 머문다’고 한다. 허쉬버그 개인의 경우. 자신이 처음 갔던 2005년에 받은 인상을 이렇게 서술한다. “수마일 줄을 이은 환상적인 차량들과 구조물들이 버닝맨의 중심부를 둘러싸고 플라야(playa, 스페인어로 ‘해변’을 의미함) 깊숙이 확산되어 뻗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수많은 시간을 들여서 희한한 차량들과 ‘건물들’을 만들어냈다. 불을 내뿜는 촉수를 가진 거대한 문어를 닮은 차량···사막 위로 반쯤 모습을 보인, 18미터짜리 돛대를 단 해적선···땅과 비스듬한 각도로 뛸 듯이 선, 풍금 소리를 울리는 작은 마을 교회···”

 

그 모든 것의 중앙에 거의 30미터 크기의 상인 ‘Man’이 서 있다. 이 상은 도시가 닻을 내리는 지점 역할을 하다가 행사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밤에 태워진다. 세계무역센터가 한때 뉴욕 사람들이 맨해튼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잡는 것을 도왔듯이, ‘Man’은 사막에서 방향을 잡는 준거점이 되어준다.

 

버닝맨은 규모와 볼거리에서 세계박람회(엑스포)와 맞먹는다. 다만 기업들과 국가들에 의해 지어지지 않고 ‘모두’(everybody)에 의해 지어졌을 뿐이다. ‘참여’가 버닝맨의 핵심 원칙 가운데 하나이다. 깊은 개인적 관여를 통해 혁신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믿음이다. 이는 어떤 농부가 자신에게 필요한 구조물을 짓는 데 모두가 뛰어들어 도왔던 ‘헛간 짓기’(barn-raising)의 전통, 혹은 공동체 전체가 집이 필요한 사람에게 집을 지어주는 데 함께 했던 ‘해비타트’(Habitat for Humanity) 전통을 잇는다.

 

도시연구가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는 고전이 된 책 『미국 대도시들의 삶과 죽음』(The Death and Life of Great American Cities)에서 이러한 생각의 중요성을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도시는 오직 모두에 의해서 창조되기 때문에, 그리고 모두에 의해 창조되었을 때에만, 모두에게 무언가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그녀는 1960년대의 도시 부흥의 맥락에서 이 말을 하고 있는데, 이 당시 시 정부들은 주민들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주택지역들(neighborhoods)을 구축했지만 주민들의 참여를 통한 것은 아니었다. 버닝맨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원칙이 존중된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짓는 데 참여할 때 개인적으로 더욱 깊이 관여하게 되고 다른 경우에는 가질 수 없는 감각 즉 우리가 주체적으로 무언가의 원인이 되어 작용하고 있다는 감각을 가지게 된다. 제이콥스는 또한 버닝맨의 놀라운 괴이함을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1961년에 그녀는 이렇게 썼다. “메트로폴리스는 그 본성상 다른 경우라면 여행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것, 즉 낯선 것(the strange)을 제공한다.”

 

버닝맨은 이렇게 환상적이면서도 미국에 깊이 뿌리내린 가치들을 구현한다. 버닝맨은 그 핵심에 있어서 토크빌(Tocquevill)적이다. 즉 자발적인 어쏘시에이션들(associations)의 가장 이질적인 집합체가 크게 한데 모여서 다양한 집단들로 활동하면서도 공유된 도시에 대한 사회적 신뢰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다. “어쏘시에이션은 과학의 어머니이다”라고 토크빌은 말했다. 다른 모든 진보는 어쏘시에이션이 만든 진보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이 진정한 공동체들에 시간을 덜 쓰고 있다고 비난을 받는 때에, 버닝맨은 공동체로서의 강렬한 의식과 사회적 자본의 눈부신 모습을 보여준다.

 

멀리서 보면 버닝맨은 마법에 의해 저절로 생긴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버닝맨은 오직 핵심적인 일단의 공유된 원칙들이 있기 때문에 작동한다. 이 원칙들은 거의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며 공동체에 의해서 스스로 실행된다. 그리하여 최소량의 통치와 최대량의 자유를 산출한다. 자기조직화된 거버넌스의 동학은 (2009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고(故) 엘리너 오스트롬이 밝혀낸 것과 놀랄 정도로 유사하다. 2013년 기준으로 ‘6만8천 명의 주민들을 가진 7평방 마일의 땅’이라는 ‘공유재’(common-pool resource)를 관리하면서 버닝맨의 주민들(버너들, Burners)은 자신들이 의식적 공동체의 일부임을 깨닫는다. 따라서 모두가 서로 감독하고 규칙을 시행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공유한다.

 

2004년에 래리 하비는 공동체의 가이드라인으로 ‘버닝맨의 열 가지 원칙’을 발표했다. 세계 전역의 도시들과 함께 혁신 및 창조적 경제 (만든 사람 위주의 경제) 장려와 관련된 작업을 해온 허쉬버그는 이 원칙들이 더 지속 가능하고 더 의식적이고 덜 물질주의적인 세계를 개념화하는 데 광범하게 적용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 원칙들은 거대한 도시를 잘 돌아가도록 만드는 데 개인적 헌신이 필요함을 스스로 더 잘 깨닫게 해준다는 것이다.

 

원칙 가운데 넷―철저한 자기표현, 철저한 자립, 직접성, 참여―은 개인이 어떻게 더 의식적으로 참여하는 삶을 살 수 있는가와 관련된다. 다른 넷―공동체적 노력, 시민 참여, 철저한 포용, 흔적 안 남기기―은 공동체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가장 주목할 마지막 둘은 선물주기와 탈상업화이다. 버닝맨의 선물경제는 보상을 바라지 않고 주는 즐거움을 찬미한다. 이는 물물교환이 아니다. 대가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브랜드도, 스폰서도, 광고도 없다는 점 때문에 버닝맨은 참여자들의 노력에 대한 찬사로서 계속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버닝맨의 열 가지 원칙

 

철저한 포용(Radical Inclusion)

누구라도 버닝맨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낯선 사람을 환영하고 존중한다. 우리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한 선행조건은 없다.

 

선물주기(Gifting)

버닝맨은 선물주기 행동에 온 마음을 쏟는다. 선물의 가치는 절대적이다. 선물주기는 동등한 가치를 가진 어떤 것과의 교환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탈상업화(Decommodification)

선물주기의 정신을 보존하기 위해서 우리 공동체는 상업적 후원, 거래, 광고 등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사회적 환경을 추구한다. 우리는 그러한 착취로부터 우리 문화를 보호할 태세가 되어있다. 우리는 참여 경험을 소비로 대신하는 것에 반대하고 저항한다.

 

철저한 자립(Radical Self-reliance)

버닝맨은 개인들이 자신의 고유한 내적 힘을 발견하고 발휘하고 그 힘에 입각하기를 장려한다.

 

철저한 자기표현(Radical Self-expression)

철저한 자기표현은 개인의 특유한 선물들에서 나온다. 개인이나 협동하는 집단 이외에 그 누구도 그 내용을 결정할 수 없다. 자기표현은 선물로서 다른 이들에게 제공된다. 이러한 정신으로 주는 사람은 받는 사람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

 

공동체적 노력(Communal Effort)

우리 공동체는 창조적 협력과 협동을 소중하게 여긴다. 우리는 그러한 상호작용을 지원하는 사회적 네트워크, 공적 공간, 예술작품들, 소통 방법들을 산출하고 증진하고 보호하려고 노력한다.

 

시민으로서의 책임(Civic Responsibility)

우리는 시민사회를 소중하게 여긴다. 행사를 조직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은 공적 안녕에 책임을 져야 하고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참여자들에게 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지역, 주, 연방 법에 저촉되지 않게 행사를 치를 책임도 져야 한다.

 

흔적 안 남기기(Leaving No Trace)

우리 공동체는 환경을 존중한다. 우리는 우리가 모이는 모든 곳에서 우리의 활동의 물리적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성심으로 노력한다. 우리는 있던 자리를 깨끗이 치우며, 가능할 때마다 우리가 있던 곳을 원래보다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떠나도록 노력한다.

 

참여(Participation)

우리 공동체는 철저하게 참여 윤리를 지킨다. 우리는 변형시키는 변화(transformative change)가 개인의 경우든 사회의 경우든 깊은 개인적 참여를 통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행동(doing, 함)을 통해 존재(being, 있음)를 획득한다. 모두가 일하도록 권유받는다. 모두가 놀도록 권유받는다. 우리는 마음을 여는 행동들을 통해 세계를 리얼한 것으로 만든다.

 

직접성(Immediacy)

직접적 경험이 여러 면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의 시금석이다. 우리는 우리의 내적 자아와 우리 주위의 현실에 대한 인식을 가로막고, 사회 참여를 가로막으며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자연 세계와의 접촉을 가로막는 장벽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 어떠한 이념도 이 경험을 대신할 수 없다.

 

오늘날 버닝맨은 전지구적인 행사로서, 200개 이상의 도시에서 참여자들이 오고 65개의 공식적으로 연관된 행사들이 있다. 버닝맨의 전지구적 영향력은 자원자들의 거대한 네트워크에서 나온다. 여러 해 동안 여러 지역의 버닝 공동체 구성원들이 해마다 샌프란시스코로 와서 컨퍼런스를 열어 사업관리, 예술을 위한 모금, 허가 얻기, 노하우 교환의 기술을 배운다. 2년 전에 버닝맨은 이 모임의 틀을 <버닝맨 글로벌 리더십 컨퍼런스>로 다시 재편했다. 버닝맨은 그 네트워크를 단지 버닝맨을 가동하는 사람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버닝맨의 문제해결 능력과 공동체 지향적 작업을 세계에 전할 수 있는 전지구적 자원자들로 구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창립자 래리 하비가 말하는 버닝맨의 요체는, ‘당신이 살고 싶은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규정된 일단의 규칙들과 역할들 아래에서 삶을 살아간다. 우리는 이미 정해진 직업을 좇는다. 우리는 이미 정해진 도시에서 산다. “이 지점에서 당신은 이전에 시도하지 않았던 시도를 하게 됩니다.” 버닝맨에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종종 개인이 변하고 변형되는 이야기들이다. 예를 들어 허쉬버그의 친구 스티브 브라운(Steve Brown)은 버닝맨에 관한 영화를 만들 때 캐릭터들 전부가 일정한 변화를 겪고 있음을 발견했다고 한다. 예술가 케이티(Katie)는 유모로서의 직업을 그만두고 예술적 열정을 따랐으며, 케이시 펜튼(Casey Fenton)은― ‘경제 공유하기’의 최초의 기획들 가운데 하나인―‘CouchSurfing’이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정리 끝

 

정리자의 시시한 덧말

  1. 도시 중심에 세우는 인간상이 거대한 이유는?

사막에서 방향을 잡기 위한 용도가 당연히 우선이겠지만, 인간이 개개인으로서는 조그마할지 모르지만 협동하는 공동체로서는 늘 새로운 삶의 터를 만들 잠재력을 가진 거인이라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1. 그럼 마지막에 왜 태우는가? (아마 도시 이름 ‘Burning Man’이 여기서 왔을 텐데···)

일차적으로는 흔적을 남기면 안되기 때문이겠지만, 상징적으로는 다시 새롭게 태어나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

추가

이 글을 정리하다 로렌스의 한 글의 어느 대목이 생각나서 아래 옮겨놓습니다. 이 글을 앞부분까지 보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100년 전에 산업의 증진자들은 감히도 나의 고향 마을에 추함을 저질러 놓았다. 더욱 극악한 것은, 오늘날의 산업의 증진자들은 영국 땅 위의 여기저기에 이제는 붉은 벽돌로 된 “집들”(homes)을 휘갈겨 놓아 마치 상처의 딱지들이 더덕더덕 붙어 있는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이 작고 붉은 쥐덫 속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덫에 걸린 쥐들처럼 더욱 절망적으로 되고 있고 더욱 굴욕스러워 하고 있으며 더욱 불만스러워 하고 있다. 단지 보다 저급한 부류에 속하는 여성들만이 남자에게는 쥐덫에 지나지 않는 이 작은 집을 계속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없애버리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것을 바꾸기 시작하자. 임금이나 노사분쟁엔 신경쓰지 말자.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자. 나의 고향 마을을 마지막 벽돌 하나까지 무너뜨리자. 핵심부를 계획하자. 초점이 되는 부분을 정하자. 그리고 그 초점으로부터 아름다운 발산(radiation)의 몸짓이 나오도록 하자. 그런 다음에 도시의 중심부까지 방대하게 펼쳐지는 큰 건물들을 예쁘게 짓자. 그리고 이 건물들을 아름다움으로 채우는 것이다. 처음부터 깨끗하게 다시 시작하자. 지역별로 차츰차츰 해나가자. 새 잉글랜드를 건설하자. 작은 집들을 없애버리자. 휘갈겨 놓은 사소함과 보잘 것 없음을 없애버리자. 땅의 윤곽을 보고 이에 맞추어 짓되 충분하게 고결하도록 만들자. 영국인들은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는 개발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찬란한 도시의 시민들로서는 토끼들보다도 더 미천하다. 그들은 항상 정치와 임금 등등에 대하여 저열하고 속좁은 아내들처럼 잔소리를 해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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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코인’은 최초의 커먼즈 통화

* 이는 커먼즈 활동가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에 올라있는, 2014년 9월 30일자 글 “Faircoin as the First Global Commons Currency?”를 상세히 정리한 것이다. 용어들의 경우 우리말 옮김이 다른 곳에서와 다를 수 있다. http://www.bollier.org/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스페인에 있는 CIC – 카탈로니아 통합 협동조합(the Catalan Integral Cooperative) ―와 같이 실질적 세련됨과 상상력 있는 포부를 가진 협동조합을 보기는 어렵다. CIC는 스스로를 “자주관리, 자기조직화, 네트워킹을 통한 아래로부터의 사회변형을 위한 과도적 기획‘이라고 설명한다. CIC는 국가는 시장 자본주의와 깊게 얽혀있기 때문에 공익을 증진시키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은행체계와 국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실제적 대안들을 구축하는 데 착수했다는 것이다.

CIC는 2010년 5월에 창설된 이래 30개의 지부와 함께 300개의 협동 프로젝트들을 실행해왔으며 여기에 4,000~5,000명이 참여했다. CICI의 작업이 어디까지 걸쳐있는지를 알려면 『셰어러블』(Shareable) 잡지의 2014년 3월호에 나온 엔릭 듀런(Enric Duran)과의 인터뷰를 보면 된다. CIC가 새로운 전지구적 경제를 구축하는 데 진지하게 몰두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결코 수사(修辭)적 진술이 아닌 것이다. CIC는 실제적으로 작용을 하는 대안들을 구축하며 정치, 법, 경제, 디지털 플랫폼에 관한 정밀한 지식을 보여주고 있다.

CIC가 막 ‘Fair.Coop’을 시작했다. “우리의 경제적 관계에서 협동·윤리·유대·정의를 증진”시킬 일단의 무상의 경제적 도구들을 구축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이다. ‘Fair.Coop’ 비전의 핵심 요소는 암호화폐(cryptocurrency)인 ‘Faircoin’(일단 ‘페어코인’로 옮깁니다―정리자)인데, 이는 비트코인(Bitcoin)의 블록 사슬(block-chain) 테크놀로지를 더 사회적으로 건설적인 기획에 맞추기 위해 고안되었다. (‘Faircoin’은 새로운 주화를 ‘채굴’하는 데 의존하기보다 그것들을 더 생태적으로 책임 있고 공정한 방식으로 ‘주조’하는 데 의존한다.)

많은 회의적인 사람들이 이 기획에 깃든 무모하고 유토피아적인 분위기를 조롱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러 면에서 보아 ‘Faircoin’이야말로 궁극적 리얼리즘이다. CIC는 불평등을 줄이고 모든 사람에게 생산적 노동과 부를 보장하는 데 넘기 힘든 장벽을 치는 것이 바로 기존의 화폐 체계와 민영은행들임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기존의 명목통화들(fiat currencies)과 외환에 대한 유일한 ‘리얼리스틱한’ 대안은 새로운 화폐 체계를 발명하는 것이 아닌가! 다행히도, 비트코인 및 기타 암호화폐들의 개척자적 사례들과 소프트웨어의 발전하는 힘 덕분에 그러한 생각은 오늘날 실제로 실행 가능한 것이 되었다.

최근 ‘Fair.Coop’이 보낸 공개서한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새로운, 탈중심화된 경제 체계를 창출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산된 방식으로 구축된 다수의 자율적 경제 체계들을 지탱하고 부양하고 연결시키는 메타체계말입니다. 암호화폐들을 사고파는 외환시장이 지난 2년 사이에 급속히 확장했습니다. 공동체들은 ‘지구상의 모든 후진 지역’(Global south)라는 개념으로 자신들을 규정할 수 있고 멀리 떨어진 세계의 이 구석 저 구석으로부터 서로 지원할 수 있습니다. 이제 네트워크를 이룬 전지구적 시민들이 중개자들이 없는 공정한 경제 체계의 일부로서 스스로에게 힘을 부여하여 위로부터는 성취하지 못했던 변화를 창출할 때가 되었습니다.

CIC의 의도는 ‘Faircoin’을 사용하여 앞으로 경제 제도들의 더 큰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을 돕는 것이다. 엔릭 듀런의 생각의 배경을 설명한 비디오를 보려면 여기로 가보라.

‘Fair.coop’은 ‘Fair.coin’ 이외에 몇몇의 다른 수단들로 구성된다. 여기에는 다음의 것들이 포함된다.

Faircredit(공정신용), 페어코인를 통해 재화와 서비스를 교환하기 위한 세계적인 상호신용제도

Fairfunds(공정기금), 여러 유형의 프로젝트들에 페어코인을 기부하기 위한 일단의 수단들. 현재 이 기금들에는 the Global South Fund(지구상의 후진 지역 기금), the Commons Fund(커먼즈 기금), the Technology Infrastructure Fund(기술 기반시설 기금)가 포함된다.

Fairsavings(공정저축), “6개월의 최소 저축기간을 두는 다중 서명(multi-signature) 디지털 지갑”

Faircoop wallet, 연결된 P2P 다중서명 지갑

      Fairmarket(공정시장), 페어코인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공정신용(faircredit)의 한 원천  

‘Fair.coop’의 주목할 만한 야심은 지역 프로젝트들을 연결하는 전지구적으로 연계된 네트워크들의 체계가 되는 것이다. 그 기본 생각은 “전지구적 경제의 정의(正義)를 위한 도구로서 협동 바이러스를 삽입함으로써 외환 시장을 해킹하는 것”이다.

전체 체계는 ‘프랙털’의 성격을 띠는 것이 목표인데, 무슨 말이냐 하면 “그 체계는 루트 플랫폼(the root platform)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이동하여 지구 전역에서 전체 생태계를 위해 상이한 규모로, 상이한 수준에서 상호 작동되면서 복제될 수 있다······ 그것은 결국에는 협동, 공통의 이익, 공정 경제의 씨앗을 지구상의 가능한 한 많은 곳으로 퍼뜨리는 것을 관건으로 하게 될 것이다.”

물론 새로운 전지구적 화폐 체계를 발명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20년 동안 네트워크 문화에서 살아온 경험으로 볼 때 “전문가들”은 리눅스, 위키, SNS, 비트토렌트(Bittorrent), 공개 디자인 및 제조(open design and manufacturing), 3D인쇄, 비트코인 같은 미친(^^) 생각들을 아예 떠올리지 못한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수백만 명의 사용자들이 놀랄 만한 속도로 그러한 혁신을 채택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정말로 조정이 필요한 것은 우리의 상상과 용기이다.

공정함, 인간적 발전, 생태 돌봄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커먼즈 기반의 화폐와 금융체계가 없으란 법이 있는가?

디지털 도구들 대부분이 가용하다. 이 도구들은 충분히 지혜롭게 사용되어오지는 않았다. 충분한 사회적 참여의 규모로 사용되어오지도 않았다. 비(非)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사용되어 오지도 않았다. 도중에 분명 발을 잘못 디디기도 하고 오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핵심이다. 더 빠르게 실패함으로써 더 빠르게 성공하는 것(to succeed faster by failing faster)이. 만일 많은 대안 경제 운동들이 D.I.Y. 화폐체계에 대한 이 실험에 참여한다면, 많은 것을 빨리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커먼즈, 사회정의, 자유로운 지식, 생태 회복, 정치 참여를 위한 진지한 이득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부패한 정치·정책 체계에 그러한 기본적 권리를 (성공하지도 못하면서) 구걸할 필요도 없이 말이다.

‘Faircoop’은 누구라도 가입하여 포럼들, 그룹 샌드팀들(group sand teams)에 참여할 것을 권유한다. 참여하는 몇 가지 방식은 다음과 같다.

 ** ‘Fair.coop’ 프로젝트들에 시간을 내어 참여하기

** 온라인 포럼들에서 평을 달아서 ‘카르마’ 평가(‘karma’ reputation)를 발전시키기.

** 페어코인 구조를 지탱하는 것을 돕기. 특히 새로운 페어코인을 주조하기.

** 페어코인 기금에 기부하기. 

다시 예의 공개서한의 한 대목 : “‘Fair.Coop’ 홍보자로서의 우리의 비전은, 이 소셜 네트워크가 커먼즈가 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의 질이 담보되고, 공개적 협동주의, 통합적 혁명, 공정한 협동, 자주관리, 공동체 강화, 디지털 커먼즈 등의 실천 및 개념들과 연관된 프로젝트들의 구축이 담보된다면 말이죠. 우리가 지구와 함께 서로 협력적으로 힘을 상승시키면서 공존할 수 있게 돕는 수천 가지의 적절한 테크놀로지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바로 지금이 우리가 아는 것을 공유하고 우리의 최고의 생각들을 실천에 옮길 때입니다.” ♣




사회적 협동조합의 큰 가능성

* 이 글은 커먼즈 활동가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에 올라있는, 2014년 7월 1일자 글 “The Great Promise of Social Co-operatives”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http://www.bollier.org/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사회적 협동조합의 큰 가능성

종종 긴축이 불가피한 것처럼 제시된다. 이는 실상은 통합주의자들(corporatists)과 보수주의자들이 토론이나 논의를 막는 책략일 뿐이다. “대안은 없다!”라고 그들은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그러나 <영국 협동조합 연합회>(Co-operatives UK)가 훌륭한 새 보고서에서 보여주듯이, 재정적으로도 실행 가능하며 사회적으로도 효과적인 매우 실천적인 대안들이 점점 더 늘고 있다. 이 대안들은 ‘다중이해관계자 협동조합’(multi-stakeholder co-operatives) 또는 단순히 ‘사회적 협동조합’(social co-operatives)이라고 알려져 있다.

소비자 협동조합(소비조합)이나 노동자 협동조합은 우리들 대부분에게 친숙한데, 사회적 협동조합은 이것들과 조금 다르다. 우선 사회적 협동조합은 자원봉사자들과 보수를 받는 직원에서부터 서비스 사용자들 및 가족 회원들 그리고 사회적 경제 투자자들에 이르는 여러 유형의 회원들을 받아들인다. 많은 협동조합들이 손익에 열심히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기업들이나 다름없이 보이고 느껴지지만, 사회적 협동조합들은 건강돌보기, 노인돌보기, 사회적 서비스, 전과자들을 노동력에 편입시키기 같은 사회적 목표들을 성취하는 것에 집중한다. 사회적 협동조합들은 시장 활동, 사회적 서비스 공급 및 민주적 참여 모두를 일거에 합칠 수 있다.

팻 코너티(Pat Conaty)가 예의 보고서인 「사회적 협동조합 : 영국에서 돌봄 서비스를 위한 민주적 공동생산 과제」(“Social Co-operatives: A Democratic Co-Production Agenda for Care Services in the UK”)의 작성자이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다중이해관계자 협동조합의 문화적 정신과 함께 그 법적·조직적 구조가 어떻게 모든 종류의 이점들을 낳는지를 설명한다. 이 협동조합들은 많은 종래의 기업보다 더 효과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이 협동조합들은 많은 정부 프로그램들보다 더 적응력과 반응력이 높다. 그리고 이 협동조합들은 회원들의 욕구를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회원들이 능동적이고 포괄적으로 참여하여 자신들의 지식과 에너지를 기여하도록 권유한다.

 

이 보고서는 건강 및 사회적 돌봄 서비스에서의 최고의 실행사례들을 검토하며, 무엇보다 이탈리아, 일본, 프랑스, 스페인에서, 그리고 캐나다의 퀘벡 주에서 이루어진 사회적 협동조합의 성공을 개괄한다.

이탈리아에서의 사회적 협동조합의 경험이 특히 인상적이다. 1991년에 사회적 협동조합을 승인하고 조합들을 공공정책으로 지원하는 법이 통과된 이래, 이탈리아인들은 1만4천5백 개의 사회적 협동조합들을 출범시켰는데, 여기에 36만 명의 임금노동자들이 고용되어 있고 그 외에 3만4천 명의 자원봉사자 회원들이 속해 있다. 일반적으로 협동조합은 노동자 회원이 30명 미만이며 노인들, 장애자들, 정신질환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 일부 협동조합은 신체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기타 사회적 약자 집단들에게 ‘숙소가 딸린 일자리’를 제공한다.

현재 이탈리아에서 사회적 협동조합들은 거의 5백만 명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 조합들은 해마다 90억 유로를 벌고 쓴다. 5년 후의 생존율은 89%이다.

퀘벡에서는 ‘연대 협동조합들’(solidarity co-operatives)이 1995년 이래 ‘사회적 연대 경제’(social solidarity economy)를 구축해오고 있다. 이 협동조합들은 사람들의 욕구를 효과적이고 공감적인 방식으로 충족시키면서 협동조합운동, 노동조합 그리고 공공부문 사이를 잇고 있다. 퀘벡 운동의 주된 초점은 일자리 창출과 가사 돌봄이지만, 농촌의 상점들·우체국들·사회서비스들을 살리는 것을 도움으로써 ‘농촌의 부활’에도 활용되고 있다고 코너티는 쓰고 있다.

사회적 협동조합들이 가진, 우리를 들뜨게 하는 측면은, 시장 세력의 지배를 허용하지 않고 커먼즈 기반의 실천들을 시장 활동과 창조적으로 혼합하는 능력이다. 더욱이, 이 조합들은 단지 전형적 비영리단체의 스타일로 ‘서비스를 공급’할 뿐만 아니다. 이 조합들은 회원들에 의해 이끌어지며 회원들에게 책임을 진다.

“사회적 협동조합 모델은 사회적 돌봄의 사용자들을 노동자들과 같이 하는 파트너로 만들며, 양자 모두 사업에의 이해관계와 성공에서의 몫을 가질 권리를 부여받는다”고 협동조합 경제를 장려하는 영국 단체인 <영국 협동조합 연합회>의 사무총장 엣 메이오우(Ed Mayo)는 말한다.

사회적 협동조합이 작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계몽된 공공정책들에서부터 국민문화 및 윤리적 헌신에 이르는 많은 요인들이 있음이 분명하지만, 이 사회제도를 추동하는 강력한 엔진은 바로 공동생산(co-production)이라는 생각이다. 영국의 두 학자인 새러 카(Sarah Carr)와 캐서린 니덤(Catherine Needham)은 이렇게 설명한다.

공동생산이라는 용어가 영국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유형의 공공서비스 공급― 여기에는 성인대상 사회적 돌봄(adult social care)에의 새로운 접근이 포함된다―에 점점 더 적용되고 있다. 공동생산은 전통적으로 서비스를 공급해온 사람들만이 아니라 ― 혹은 그들보다도―서비스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한 능동적 참여에 준거한다. 공동생산은 서비스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단순히 충족되어야 할 욕구를 가졌다기보다는 그 서비스를 개선하는 것을 도울 수 있는 자산을 가졌음을 강조한다. 이 자산들은 보통 금융적 형태를 띠지 않으며, 공공서비스에 기여할 수 있는 기술, 전문 지식, 상호지원의 형태를 띤다.

말할 것도 없이, 대부분의 시장(市場)들과 정부 관료들은 그러한 참여적인 ‘연합 민주주의’(associative democracy)와 참여를 양성하는 대안적 제도들의 구축이라는 생각의 근처에도 가기 힘들다. 캠브리지 대학의 헨리 탬(Henry Tam)은 시장 및 정부와는 다른 공동체 모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수용적 공동체들이 인간의 연합의 형태로서 더 효과적이다. 이러한 공동체들은, 모든 시민들/구성원들/이해관계자들이 모두의 행복을 촉진하기 위해 어떻게 권력을 행사할 것인가를 숙고함에 있어서 동등한 존재로서 서로 상호작용할 수 있게 하는 일의 본래적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동체적 모델은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의 오언주의자들(the Owenites) 및 협동적 민주주의자들이 이룬 협동적 사유의 발전을 직접 계승한다.

코너티의 보고서는 성공적인 사회적 협동조합을 수립하는 데서 핵심적인 조직화·법·재정에서의 과제들을 깊게 파고들며 가능한 해결책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벤처 펀딩(venture funding)과 사회적 금융 같은 새로운 유형의 재정마련 방식뿐만 아니라 사회적 협동조합들을 지원할 새로운 종류의 공공정책들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렇듯 사회적 협동조합들이 이전에는 충족되지 않았던 긴급한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한편 민주적 문화를 재구축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중이해관계자 협동조합’이 가진 큰 가능성에 전보다 훨씬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의 보고서는 매력적이고 입증된 대안에 관한 새로운 대화를 개시하기 위한 중요한 사실 분석을 제공해주고 있다. ♣




스페인 15M 운동 : 민주주의 헌장

* 이 글은 커먼즈 활동가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http://www.bollier.org/)에 올라있는, 2014년 6월 26일자 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스페인의 15-M 운동 : 「민주주의 헌장」

마드리드에 자리한 <게릴라 번역>에서 활동하는 스타꼬 트론꼬소(Stacco Troncoso)와 그의 동료들은 스페인에서 나온 중요한 성명서인 「민주주의 헌장」(“Carta por la Democracia”)을 영어로 옮겼는데, 이 성명서는 세계 전역에 있는, 소문자 ‘d’의 민주주의자들(democrats)에게 큰 관심을 끌 것으로 본다. 트론꼬소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성명서 뒤에 있는 그룹인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Movimiento por la Democracia)은 스페인의 15-M 운동이 전개되고 발전된 흐름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이 그룹은 스스로 당이 되기를 욕망하지 않으면서 명확하게 정치적 무대를 표적으로 한다. 그들의 「민주주의 헌장」은 정치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감동적이고 면밀한 텍스트이다. 이 헌장은 민중을 위한 정치를 제안한다. 환경 현실과 사회 정의에 확실하게 근거를 두고 있으며, 커먼즈에 기반을 두고 있고, 기업의 이익과 신자유주의적 명령들로부터 방어되는 정치를.”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은 다음과 같이 스스로를 소개한다. “우리는 그 부패로 인하여 우리를 더 가난하게 만들고 도시와 마을로부터 쫓아낸 경제적·정치적 모델이 파괴되던 시기에 등장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우리의 손에 쥐고자, 체제가 우리에게 가하는, 민주주의를 탈취하려는 항상적인 위협에 맞서 그것을 지키고자 여기에 섰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이다. 우리는 ‘그렇다, 우리는 할 수 있다!’라고 수천 번이라도 말하고자 탄생했다.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해낼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진실로서 확신하기에,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우리에게 말하는 그 누구에게나 도전할 것이다.”

「민주주의 헌장」은 “공공 정책과 대의민주주의의 변형을 목적으로 하며 대중의 도전과 참여에 열려있는 매우 상세한 계획”이라고 트론꼬소는 말한다. 트론꼬소가 속한 번역자 네트워크는 영어로 번역하는 가운데 “자발적 그룹들이 생산한 저작을 모으고 편집하는 사람들”로서 행동한다. 번역자들인 하론 로완(Jaron Rowan), 하이메 빨로메라(Jaime Palomera), 루시아 라라(Lucía Lara), 로따(Lotta), 디에고(Diego) 및 트론꼬소와 편집자인 제인 로스 립턴(Jane Loes Lipton)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나는 이 헌장에 끌리스몬(Clismón)이 직접 그린 삽화들이 들어가 있는 점이 마음에 들며, 여기에 그 가운데 하나를 올려놓는다.

이 감동적인 문서의 서두 몇 단락을 여기 소개한다.

이 헌장은 전망의 결핍, 대량 실업, 사회적 권리와 혜택의 감소, 철거, 정치적·금융적 부패, 공공 서비스의 붕괴로 이루어진 깊은 병에서 탄생했다. 이 헌장은 정당성과 듣는 능력을 결핍한 정치 체제가 내놓은 약속에 대해 사회적 대다수가 확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반응으로 작성되었다.

양당제도, 널리 퍼진 부패, 긴축정책이 부과하는 금융독재, 공공재의 파괴가 자신의 고유한 한계로 인해 오랫동안 고통을 겪어온 민주주의에 마지막 타격을 가했다. 이 한계는 1978년 헌법에 이미 존재했었다. 이는 사회를 권력의 집중으로부터 보호하지도 않고 비(非)대의적 정치계급의 공고화로부터 보호하지도 않는 정치적 틀로서 요약될 수 있다. 이 정치적 틀은 시민의 참여를 거의 허용하지 않으며 우리의 보호와 공동의 발전을 위한 집단적 권리의 새로운 체계를 구축할 수 없는 체제를 수립했다. 이는 몇몇 매우 중요한 대중 시위들에도 불구하고 방대한 다수의 요구가 계속해서 무시되었다는 사실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제도적 방해와 지배자-피지배자 사이의 점증하는 분리라는 상황에서 출구는 하나밖에 없는 듯하다. 바로 정치적·경제적 권력에 대한 시민의 통제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의 심오한 확장이다. 물론 그나만 남은 민주주의마저 계속 위축되고 있으며 내적 개혁의 시도들은 동일한 잘못을 반복함을 의미할 뿐이므로, 우리는 게임의 규칙을 변화시킬 기회를 잡아야 한다. 모든 관심사에 대한 효과적인 의사결정 능력을 사회에 돌려주기 위한 민주적 변화이다.

현재의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이 카오스와 독재 사이의 양자택일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민중 사이에서 창출된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단순히 투표로 환원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참여, 시민의 통제, 평등한 권리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이다.

이 헌장은 이러한 민주화 과정에 기여하려는 욕망으로부터 출현했다. 이런 의미에서 이 헌장의 기여는 기쁨의 장소로부터, 시민을 움직이는 에너지로부터, 정당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정치로부터 이루어진다. 이 헌장은 1인칭 복수로 말하며, 모든 사람에게 살 가치가 있는 삶의 구축이 그 목적이다. 물론 추동력은 민주주의 자체이다. 민중은 지금과는 다르게 스스로를 다스리고 같이 살아가는 형태를 발명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헌장은 오늘날의 투쟁들이 장차 올 민주주의의 기반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이 헌장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토론과정의 개시를 요구하며 그것이 삶, 존엄,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정체적·경제적 재구조화를 낳기를 요구한다. 이 헌장은 새로운 사회적 계약의 수립에의 기여로서, 민중이―‘누구나’가―진정한 주인공이 되는 정치개혁 과정에의 기여로서 여기 제시된다.

이제 시민들이 공적 제도들과 자원들을 전유하여 그것의 보호, 통제, 공정한 분배를 보장할 때이다. 광장들에서 그리고 네트워크들에서 우리는 세상에서 존재하는 방식을 영원히 바꿀 단순하고 결론적인 무언가를 배웠다. 우리는 ‘그렇다, 우리는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헌장 전문은 여기서 읽을 수 있다. 이 헌장이 민주주의의 부활을 가져오기 위해 싸우는 많은 세력들이 모이고 협동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