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평행폴리스로서의 커먼즈버스

 



[볼리어의 설명]

아래의 글은 내가 2023년 5월 31일 베를린에서 열린 워크숍 「자유주의를 넘어: 커먼즈, 입헌정치 그리고 공동선」에서 발표한 것을 약간 손본 것이다. 이 워크숍은 <막스 플랑크 비교 공법 및 국제법 인스티튜트>, 뷔르츠부르크 대학 법학과 그리고 <뉴 인스티튜트>(독일, 함부르크)가 주관했다.

발표 비디오는 여기서 불 수 있다. 내 발표는 타임코드 5:32에 시작한다.

 

평행폴리스로서의 커먼즈버스: 기회와 도전

이 워크숍에 의해 촉발된 대화는 시기적절하고 필수적이다. 이는 정치경제 및 문화와 관련하여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그 많은 것들이 우리 눈앞에서 서서히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그토록 많은 거대 서사들—시민권•자유•재산권•경제성장•가치이론—이 요즈음에 문제시되었다고 말해야 온당할 것이다. 기존 사회제도와 사고 범주들이 그다지 잘 작동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한편으로 구조변화 및 필요한 대안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이는 그런 이야기가 괴물들과 카오스가 든 판도라의 상자를 열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기후변화, 권위주의적 민족주의, 야만스런 불안정성 및 불평등 그리고 사회제도 붕괴라는 위험지대들로 더 깊이 들어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선택할 것이 거의 없다. 우리는 몇몇 고착된 습관들을 버릴 필요가 있다. 우리는 새로운 북극성과 한층 안정적이고 유익한 질서를 필사적으로 찾을 필요가 있다.

오늘 나는 커먼즈라는 생각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아주 많은 것들—자본주의적 정치경제, 국가권력, 사회적 관계 및 위계들, 지구와의 관계, 우리의 내적인 삶들—을 다시 상상할 엄청난 가능성이 이 생각에 담겨있다는 제안을 하고 싶다. 확실히 이것은 당찬 제안이고 장기적인 기획이다. 문제가 있는 시스템에 고착되어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기존의 것과는 매우 다른 사회적 논리들 및 제도적 형태들을 개발해야 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식민주의, 그리고 우리가 내면화했거나 억제한 규범들을 가진 중앙집권화된 국가권력이라는 해결되지 않은 트라우마들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발표문에서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커먼즈와 커머닝이 우리에게 공동선의 비전을 재발명할 발판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비전은 우리가 세포 수준에서 한층 인간적인 사회관습들과 윤리적 행동들을 발전시키는 것을 촉진할 수 있으며, 이 관습들과 행동들이 확장하면서 우리는 자본축적, 소비주의, 성장을 통한 진보의 세계 너머로 이동할 수 있게 된다.

확실히 오늘날 대다수의 커먼즈는 중요한 의미를 갖기에는 너무 소규모이고, 지역적이며, 캐시푸어(cash‐poor)인 것으로 일축된다. 주류에게 커먼즈는 군내나는 괴짜다. 주류들의 ‘점잖은’ 의견에 따르면 “일을 해내기” 위한 본격적인 체제로 시장과 국가가 유일한 것으로 가정된다. 사적부문과 공적부문이 있고 그 밖에 것은 실제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허울만 좋은 주장이거나 적어도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매우 편협한 프레임을 씌운 것이다. 시장과 국가는 둘 다 경제성장을 찬양하고, (서로 다른 역할을 가지고 있더라도) 자유주의적인 정치적•경제적 질서를 촉진하는 데 있어서 긴밀하게 동맹한다. 국가는 속박되지 않은 시장들이 성장, 세수(稅收), 시민들의 사회적 이동성을 발생시키기를 원한다. 반면에 기업들과 투자자들은 국가가 안정된 통치, 법적 특권들과 기업활동을 위한 보조금을 제공해주고, 금융위기, 생태적 재난, 시장 악용 및 기타 ‘시장 외부효과들’ 이후 상황정리를 해주기를 원한다. 국가와 시장은 우선사항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공생한다. 시장국가 체제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말이 될 만큼 충분히 말이다.

커먼즈는 국가와 시장이라는 바로 이 체제에 대안이 되는 비전이다. 정치가들과 경제 전문가들은 커먼즈를 손짓으로 간단하게 묵살할 수 있지만 커머너들은 더 심오한 진실을 즉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전제들이 비록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더라도 뿌리 깊숙이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2008년 금융 위기는 전 세계 금융세력과 자본주의의 오만한 힘을, 그리고 그 힘의 남용을 영속시키는 일에 자유주의 국가가 공모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브렉시트의 도래,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COVID, 긴축재정 정치, 도널드 트럼프, 보수적 민족주의 그리고 인종적•민족적 타자화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강화할 뿐이었다.

나는 경제성장이 유토피아적 환상임을 폭로하고 있는 기후변화의 잔혹한 현실—홍수, 가뭄, 산불/들불, 기상이변—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경제성장을 위한 자원 추출 및 탄소 에너지 자원에의 의존은 지속될 수 없다. 전 세계 비(非)백인들—식민주의와 강제적인 자본주의적 개발의 희생자들—이 배상금, 생태복원 및 기후정의를 요구하므로 자본주의적 개발을 이 세계에 강요하려는 충동은 지속될 수 없다.

새로운 정치가들, 정책들 또는 법들이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그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구조적인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자전거가 우리를 달로 데려갈 수 없듯이 시장‑국가 체제는 그 문제들을 극복할 어포던스(affordance, 행동가능성)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정치공백기에 빠졌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오래된 질서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며 새로운 질서는 아직 태어날 준비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체코 극작자인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에게서 영감을 얻고 그를 길잡이 삼는다. 1970년대에 그를 비롯한 문화계의 반정부 인사들이 전체주의적인 억압 시스템—그의 경우에 체코 정부—에 직면했을 때 하벨의 전략적 반응은 그가 평행폴리스(parallel polis)라 부른 것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평행폴리스는 공동체가 만든 안전 공간으로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로 지원하고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직접 생산하며 일종의 그림자 사회(shadow society)를 구축한다.

평행폴리스라는 발상은 여러 목적에 복무한다. 사람들은 공식적인 선전의 허위를 폭로하고 가능한 것에 관한 자신들의 상상력을 확장할 공간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은 예시(豫示)적인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면서 수평적이고 공락(共樂)적인 상호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그들은 진실을 말할 수 있고 건전한 가치들을 표현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엄성, 사회적 유대 및 희망을 다시 주장할 수 있다.

나는 커먼즈버스(Commonsverse)를 일종의 평행폴리스로 본다. 커먼즈버스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시스템 변화를 가져오는 방법으로서의 커머닝에 복무하는 무수한 기획들, 조직들, 사회운동들이다. 나는 이미 존재하는 엄청나게 다양한 커먼즈들을 소개하기 위해 『커머너의 변화만들기 목록』(The Commoner’s Catalog for Changemaking)을 2년 전에 출간했다. 여러분이 몇몇 참조점을 확인할 수 있도록 간략한 개요를 제시할까 한다.

커먼즈로서의 토지. 토지를 탈상품화하는 것은 토지를 지역의 농사용, 주택용 및 보존용으로 접근가능하고 제공가능도록 만드는 중요한 하나의 방법이다. 이 점에 있어서 한 가지 중요한 수단은 시장에서 토지를 빼내어 그것을 영구히 커먼즈로 만드는 공동체 토지 신탁(community land trusts)이다.[주석1] 토지 신탁은 풍경을 보존하고 부의 불평등을 줄이며 영양이 풍부한 식량을 지역별로 키우는 것을 더 적합하게 만드는 일을 촉진한다. 공동주택, 주택 협동조합 또는 독일 신디케이트(Mietshäuser Syndikat) 같은 연합체의 ‘피어(동료) 주도 프로젝트들’(Peer-directed projects)은 국가나 지역 공동체에 의한 기획들과 나란히 사회적 주택을 제공할 수 있다.

서양에서의 지역 식량 주권. 유럽과 북미에는 지역농업과 식량 공급망을 재발명하는 운동들이 많다. 유기농 지역경작이 50년 전에 처음 이 운동을 시작했고 이는 지금은 퍼머컬처, 농업생태학, 슬로우푸드 운동 및 심지어 슬로우피쉬 운동에서 나타난다. 푸드 협동조합들은 농부들과 소비자들을 한데 모아 상호적으로 부양하는 관계를 맺도록 하기 위한 — 가격을 낮추고 한층 안정적인 지역 식량 공급을 보장하며 친환경 농경을 보증하는 것을 돕는 — 긴 시간에 걸쳐 입증된 모형이다.

커먼즈로서의 도시. 바로셀로나, 암스테르담, 서울, 볼로냐, 그리고 수십 개의 주요 도시 및 소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협력적인 거버넌스의 새로운 형태들을 실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커먼즈-공공부문 파트너십은 메이커스페이스(makerspace)[주석2], 도시농업 시스템, 시민 정보 커먼즈 그리고 근린지역 개선 및 서비스를 창출하고 있다. 이 파트너십은 시민들에게 권한을 주고 사회 기본구조를 다시 짜며 부유한 개발자들과 투자자들로부터 도시에 대한 시민대중의 통제권을 되찾는 길이다. 또한 도시에는 많은 독립적인 커먼즈 기획들, 예를 들어 공동체 텃밭(community garden), 에너지 생산 커먼즈, (카탈로니아의 Guifi.net 같은) 지역 와이파이 시스템 등이 있다.

전통적이고 토착적인 커먼즈. 어림잡아 전 세계 20억 명의 사람들이 어장농지목초지야생 사냥감의 파수를 통해 일상 생계를 커먼즈에 의존하고 있다. 전통적인 공동체와 토착민들에 의해 수행되는 커머닝은 그것이 산업형 농업에 대한, 지역에 기초를 두는 친환경적인 대안임을 입증하고 있다. 전 세계 생물 다양성의 대략 70%가 토착민들이 운영하는 땅에 존재한다.

대안적인 지역 통화. 전 세계 많은 공동체들이 그들 고유의 지역 통화를 만들었다. 그 목적은 금융가치가 주요 금융기관들로 빨려 들어가도록 두지 않고 그 가치를 지역에 잡아두는 것이며 그래서 지역 시장, 일자리 창출,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을 활성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태어난 서부 메사추세츠에서 버크셰어즈(BerkShares) 통화는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대안 통화가 되었다. 타임뱅킹(Timebanking)은 또 하나의 가치 있는 통화혁신—많은 돈 없이 나이 든 사람들과 일반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하는 서비스‑교환 시스템—이다.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와 피어 생산. 프리 소프트웨어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의 지난 25년간의 폭발적 증가는 커머닝의 강력한 상징이다. 프리 소프트웨어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는 코드를 탈상품화하고 스스로 조직된 개방적인 공동체의 창조성을 고양시킴으로써 리눅스, 인터넷을 위한 필수적인 하부구조, 위키피디아 그리고 (그룹 심의, 그룹 예산안 작성 및 클라우드에의 파일저장을 위한) 많은 세계 규모의 소프트웨어 시스템들을 구축했다.

코즈모로컬 생산. 한 가지 강력한 오픈소스 파생물은 코즈모로컬 생산 즉 전지구적으로는 디자인과 지식의 공유를, 지역적으로는 사물들의 물질적 생산을 관장하는 시스템이다. 이 과정은 자동차•가구•주택•전자기기•농장시설에 이미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는, 상업적인 의료용 제품보다 더 싸고 더 정교한 자동인슐린주입 장치를 생산한, 당뇨병환자로 이루어진 전지구적인 공동체도 있다. 농업기계의 코즈모로컬 생산은 <팜핵>(Farm Hack)과 <오픈소스 에콜로지>(Open Source Ecology)에서 볼 수 있듯이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세계 일류 디자인을 갖춘 저가의 농장 장비를 생산하는 것을 돕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와 공유 가능한 콘텐츠. 20년 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의 발명은 돈을 지불하거나 허가없이 글쓰기, 음악, 이미지 및 기타 창조적인 장르들을 법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자유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자율적인 공공 라이선스는 이제 전 세계 170개가 넘는 법시행 관할구역에서 인정을 받고 있으며 다른 상황에서라면 저작권법 하에서 ‘저작권 침해’로 여겨질 방식으로 엄청난 양의 콘텐츠가 공유될 수 있다.

* * *

이 커먼즈들 각각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것들이 항상 그 맥락의 특이성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나는 비상업적인 극장에, 오픈소스 테크놀로지로 구축되는 최고 품질의 과학 현미경에, 인도주의적인 구조를 돕는 온라인 지도에, 그리고 난민들과 이주자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일에 주력하는 커먼즈를 발견해서 깜짝 놀랐었다. 각각의 경우에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독특한 재능, 지리, 역사, 전통, 자급활동, 가치 그리고 상호주체성을 통해 자본주의적인 시장이나 국가의 통제 없이 욕구를 만족시키고자 한다.

‘내부에서 볼 때’ 각 커먼즈는 독특할 뿐 아니라 ‘세상 만들기’를 위한 학습이기도 하다. 그것은 상호주체적인 일련의 감정들•경험들•가치들•전망들이다. 우리가 겪는 상호주체적 경험들의 생생한 실재는 우리에게 세계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고착된 단일문화로서가 아니라 탄탄한 ‘다원적’ 세계로서 더 잘 이해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러나··· 각 커먼즈가 독특하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그 커먼즈에 관하여 일반화하기 시작하는가? 최소한도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기존 공동체가 일정 유형의 공유된 부를 집단적으로 운영할 때마다 공평한 접근법, 사용법, 장기간에 걸친 지속가능성이 강조되면서 하나의 커먼즈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다양한 맥락에 있는 매우 다양한 커먼즈들에 공통된 규칙성들을 실제로 설명하지 못한다.

작고한 나의 동료 질케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나는 이 문제가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현재 우세한 근대적 세계관은 커먼즈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그야말로 너무 환원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이다. 그것은 전체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들에게 너무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리의 근대적 세계관은 커머너들이 여전히 경제적 개인―합리적이고 자기주권적이며 자신의 물질적 이익을 최대화하는 데 전념하는 개인―이라고, 다만 시장을 통해서보다 그저 협동을 통해서 이 목표를 추구할 뿐인 그러한 경제적 개인이라고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커머닝을 그 나름의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조건에 기반해서, 그리고 진화사 및 생물학의 맥락에서 이해하고자 한다면 나는 우리가 커먼즈를 철저히 관계적이고 사회적인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전 세계 커먼즈에 대한 나의 아마추어적인 민족지학 연구로부터 증명할 수 있다. 커먼즈는 경제학자들이 보고자 하는 것처럼 단순히 자원들이 아니다. 커먼즈는 살아있는 사회 유기체들이다. 최근의 생물학 연구는 선구적인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가 보여준 것처럼, 어떻게 식물과 나무와 균류들 모두가 상호의존적이며 연결되어 있는지, 어떻게 세포 수준에서조차 생명이 심층적으로 공생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간 커머너들의 경우에도 그렇다. 우리는 서로와의 관계 속에서, 지구 그리고 지구에 존재하는 인간보다 큰 생명계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과거 및 미래 세대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커먼즈는 단지 사람들의 타산적인 합리성이 아니라 그들의 충만한 감정적, 윤리적 그리고 영적 힘에 의해 활기를 띤다. 질케와 나는 커머닝이 사실상 사회적이고 생태적인 관계맺음을 통해 창출되고 지속되는 역동적인 살아있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감수성은 문화 역사가 토마스 베리(Thomas Berry)의 다음 말에 의해 잘 표현된다. “우주는 객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주체들의 교감이다.” 나는 또한 생물학자이자 생태철학자인 안드레아스 베버(Andreas Weber)의 다음 문장을 좋아한다. “과학과 경제학은 창조적인 살아있음을 현실의 존재론적인 토대로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질케와 나는 공동 출간한 책 『자유롭고 공정하며 살아있는』(Free, Fair and Alive)[주석3]에서 커먼즈 안에서 살아있음이 어떻게 실제로 작동하는지 설명해보려 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에 답하고 싶었다. 관계성이 핵심이라면 다양한 개성들과 선호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조율이 되어 일관성 있는 커먼즈가 되는가? 화폐교환 없이 어떻게 중요한 것들이 이루어지고 돌봄이 제공되는가? 어떻게 피어(동료)가 주도하는 협동 시스템들이 생성되고 스스로를 유지하는가?

운 좋게도 우리는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 교수의 앞선 성취들과 그녀가 선구적으로 포착한 성공적인 커먼즈의 ‘설계원칙들’을 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오스트롬은 명확하게 명시한 경계들의 필요성과 자체적으로 만들어 낸 거버넌스 규칙들의 필요성을 확인했다. 그녀는 어떻게 커머너들이 규칙을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어야 하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규칙들이 시행되는 방식을 감시하는 데 참여해야 하는지를 알아냈다. 분쟁이 있다면 커먼즈는 그것을 저비용으로 신속하게 해결할 자체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커먼즈는 국가 당국으로부터 자립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커먼즈에 관한 이 전통적인 사고방식은 경제의 표준적인 틀과 그 방법론인 개인주의 내부에 대체로 머물러 있다. 그것은 커머너들의 내적인 삶 또는 정치경제[즉, 집단적 공동체의 경제]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커먼즈의 실제적 작동방식을 우리가 보다 명확하고 깊이 있게 보도록 돕는 ‘관계틀’을 개발했다. 우리는 ‘패턴언어’라는 아이디어를 개발한 급진적 도시계획자이자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의 작업에서 길잡이를 찾았다.

알렉산더는 빈발하는 문제들에 대한 특정의 해결책들이 긴 시간 동안의 역사와 문화를 가로질러서 소소하게 변동하면서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것을 자신의 분야에서 관찰했다. 그는 이 해결책들을 ‘패턴’이라 불렀다. 패턴들은 사회적 관행에서 나타나는 디자인이고 행동이다. 패턴들의 유효성은 그 패턴들이 반복적으로 사용됨으로써 승인된다.

패턴언어 방법론을 활용하면서 질케와 나는 15년간 우리가 목격했던 많고 많은 수의 커먼즈 형태에서 관계를 나타내는 수십 개의 패턴들을 포착해냈다. 우리는 이 패턴들을 ‘사회적 삶’, ‘피어 거버넌스’ 그리고 ‘자급’이라는 세 영역—이는 각각 사회적, 제도적, 경제적 영역이라 할 수 있다—으로 나누었다. 이 세 영역들을 합치면 우리가 ‘커머닝의 3인조’라 부르는 바의 것이 구성된다. 이 3인조는 ‘어떤 사회적 실천들과 윤리적 행동들이 커머닝의 성공적인 관계들을 창출하고 유지하도록 돕는가?’라는 물음에 우리가 답할 수 있게 한다. 나는 우리가 찾은 25개 이상의 패턴들을 다 살펴볼 수는 없고 여러분에게 패턴에 대한 감각을 전하는 데 집중하고자 한다.

커먼즈의 ‘사회적 삶’에서 한 가지 중요한 패턴은 공유된 목적과 가치들을 계발하는 것이다. 이 실천이 없다면 커먼즈는 붕괴된다. 사람들이 긴밀히 연결된 활력 있는 집단으로 남아있으려면 그들은 경험을 공유할 필요가 있고 집단적으로 그들의 커머닝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된 패턴은 함께함을 의례(儀禮)화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만나야 하고 서로 공유해야하며 하나의 집단으로서 그들의 성취와 친연성을 축하해야 한다. 함께 어울리는 것이 중요하며, 의식(儀式)들, 전통들, 축제행사들을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커먼즈의 사회적 삶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기여하는 것—똑같은 가치를 직접적 혹은 즉시 되돌려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고 주는 것—을 필요로 한다. 커먼즈가 시간을 두고 실제 혜택을 내줄지라도 말이다.

커머닝 3인조 중 둘째인 피어 거버넌스의 핵심은 타자들을 동등한 존재로 보는 것이자 집단적인 의사결정의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것이다. 커머너들은 피어 거버넌스로 위계와 중앙집권화된 권력시스템을 피하고자 한다. 그 시스템이 권력 남용과 책무성 문제를 낳을 배치일 수 있기 때문이다. 피어 거버넌스는 무엇보다도 ‘지식을 아낌없이 공유하기’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집단지성을 생성하는 결정적인 방식이다. 지식은 공유될 때 늘어나지만 이런 일은 정보가 자유롭게 유통되고 쉽게 접근 가능할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패턴은 ‘투명성을 신뢰의 영역에서 존중하기’이다. 투명성은 명령될 수 없다. 사람들이 어렵거나 난처한 정보를 공유할 만큼 충분히 서로 신뢰하지 않는다면, 투명성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커머닝의 세 번째 영역인 ‘자급’은 커머너들이 어떻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생산하는가가 그 핵심이다. 시장경제에서처럼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는 일은 없다. 기본 목표는 사람들의 경제적 욕구를 개인적인 삶의 여타의 부분들과 통합하는 것이다. 커머너들은 시장에서 팔 것을 생산하지 않는다. 사실 커머너들도 자신들의 커먼즈의 온전함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시장과의 상호작용이 조금이라도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그 상호작용의 방식을 구조화하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급의 한 가지 기본 패턴은 ‘함께 제작하고 함께 사용하라’이다. 참여하고 책임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함께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자신들의 능력•재능•욕구에 따라 기여한다. 함께 생산하기는 ‘함께 하라’(‘Do It Together,’ DIT)라고 불릴 수도 있는 것의 핵심과정이다. 커먼즈에서 일반적으로 자급이 확실하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방식을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이 되는 많은 다른 패턴들이 있다.

일단 커머닝의 패턴들로 들어가기 시작하면—일단 관계성이 어떻게 지구에서 삶의 근본적인 현실인지를 보기 시작하면—근대적 세계관과는 다른 세계관, 즉 내가 존재론적 전환 또는 ‘OntoShift’(존재전환)이라 부르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지금 당장 철학적 차원을 논의할 필요는 없다. 다만 세계관을 전환하는 것은 우리의 내적 삶과 관점을 바꾸게 될 새로운 사회적 실천들과 커머닝의 경험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한다라고만 말해두자. 우리는 시장문화의 핵심요소들인 이기적인 개인주의와 장사꾼 사고방식을 버리고 가기 시작하는 것이며 세상을 촘촘한 망으로 이루어진 공생 및 협력관계로 움직이는 통합된 전체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커먼즈버스에서 ‘공동선’은 어떤 고정된 이상화나 눈에 잡히지 않는 목표점이 아니다. 이 공동선은 수평으로 그리고 아래에서부터 확장하고 출현하는 협동 윤리로서 발현되는 역동적인 살아있음이다. 이 공동선은 유기적 연결성과 온전성으로 발현되며 이는 사실 살아있는 유기체들의 생물학적 충동이다. 우리의 내적 삶에서 이 공동선은 배려하는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 안전하고 공정하다는 느낌, 그리고 소속감으로 발현된다. 이 공동선은 체계 차원의 다양성과 회복탄력성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것에서 나는 공동선에 대한 프란치스 교황의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Praise Be to You)의 비전이 생각나는데, 이 비전은 우리의 영적 삶, 인간보다 큰 세상, 그리고 우리의 (하나의 종으로서의) 공통의 부와 운명 사이의 상호연결에 관하여 많은 비슷한 점들을 강조한다.

* * *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문턱에 서있고 사태는 흥미로운 방식으로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커먼즈와 커머닝은 지난 10년간 급증하면서 국가권력, 자본주의 기업 및 신자유주의와 점점 더 충돌하게 되었다. 시장‑국가 체제는 그 나름의 우선사항들과 비전에 공격적으로 전념하는데 이 우선사항들과 비전은 커먼즈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영국에서 벌어진 종획 운, 몇 백 년에 걸친 식민지 정복 그리고 인공적인 나노물질과 유전자에서부터 수학 알고리즘과 (금융증권으로 전환되는) 물의 흐름까지, 가치가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사유화하고 화폐화하고자 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발전’에서 나타나듯이, 역사는 성장경제가 일반적으로 공동자산을 전유하고 사유화하며 커머너들을 그 공동자산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시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커머너들에게 긴급한 실질적인 물음은 어떻게 그들이 공유된 부의 종획을 막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커머닝을 보호하기 위해 법을 사용할 수 있는가이다. 이것이 실제로 가능한가? 자유주의 헌법 질서가 긍정적으로 커머닝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비자본주의적인 사회 형태로서 커머닝의 온전함을 존중할 수 있는가? 그 질서가 커머닝을 보호하기를 원하는가? 커먼즈의 토착적인 법과 서구의 법을 미봉적인 긴장완화로서만이라도 영리하게 섞는 것이 가능한가? 또는 자유주의 철학은 너무 경직되고 공격적이며 정치적으로 고루해서 커먼즈와 커먼즈가 만들어 내는 살아있는 가치를 지지하지 못하는 것인가?

분명히 해두자. 커먼즈는 시장가격과는 매우 다른 가치 이론을 구현하는데, 우리 시대에 시장가격은 가치의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측정규준으로 간주된다. 이와 달리 커먼즈는 살아있는 시스템을 생성적인 것으로서, 즉 일반적으로 사유화되지도 않고 사유화될 수도 없으며, 화폐화되지도 않고 화폐화될 수도 없고, 상업적으로 거래되지도 않고 거래될 수도 없는 가치로서 인식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시장‑국가 체제는 재산법, 계약법 및 통상법의 매개를 통해 삶을 객관화한다. 국가권력으로서는 자본과의 동맹을 통해 그 힘을 공고히 할 기회를 환영한다. 일반적으로 국가권력은 사람, 자연, 여타 생명체들에 대한 행정적인 통제를 중앙집권화하고 규칙화하기를 원한다. 정치 과학자 제임스 스콧(James Scott)이 다음과 같이 분명히 했듯이 말이다.

근대국가는 … 감시하고 수를 세고 평가하고 관리하기에 가장 쉬울 바로 그러한 표준화된 특징을 지닌 지형과 인구를 창출하는 것을 시도하는데 성공의 정도는 경우에 따라 다르다. 근대국가의 허망하고 근시안적이며 끊임없이 좌절되는 목표는, 그 밑에 있는 무질서하고 혼란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현실을, 그 현실을 관찰하는 행정망을 더 많이 닮아있는 어떤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국가들이 디지털 감시 테크놀로지와 빅테크와의 연합으로 무장하고 있으므로 이 동향의 논리적인 종점은 권위주의적인 통제이다. 국가법과 자유주의가 얼마만큼 이 방향을 향할지 불분명하다.

결국 자유주의는 국가권력에 깊이 예속되어 있고 커머너들의 관습에 따른 관행의 역할이나 그들의 집단적인 정체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시장처럼 자유주의 국가는 개인주의, 재산권, 계약의 자유, 및 물질적 ‘진보’에 깊이 전념한다. 이것은 분리―인간이 서로 분리되고 지구로부터 분리되며 역사적 기억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의 사고방식을 조장한다.

세르게이 거트워스(Serge Gutwirth)가 설명했듯이, 자유주의 국가에는 법인격 없는 역동적인 공동체에 권리를 부여할 수단이 없다. 물론 경제성장—주주들의 집단적 의무—이 자유주의 국가에 크게 잘 들어맞기 때문에 기업들은 예외다. 대략 800년 전에 커머너들의 많은 특정한 권리들이 획기적인 <삼림헌장>[주석4]—마그나카르타와 연결되어 있는 법적 선언문—에서 존중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것은 대부분 잊혀졌다. 민족(국민)국가의 발생과 심지어 자유주의로 인해 커머닝에 대한—생존에 필수적인 것들에 접근할 사람들의 권리에 대한—법적인 인정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이것이 나에게 시사하는 바는 현재 실행되는 바의 자유주의는 철학적으로 커먼즈에 적대적이거나 최소한 커먼즈의 실제 가치와 역동성을 모른다는 것이다. 국가는 권력 행사의 합법성을 한시도 늦추지 않고 주장한다. 그것이 법과 국가 기관을 통해 공식적으로 수행되는 바대로 말이다. 그러나 국가는 커먼즈에 기반을 두는 체제에 의해 주장되는 사회적, 윤리적 정당성에는 일시적인 관심만을 보인다. 권력은 자신이 선택한 인식 체계를 떠받침으로써 스스로를 유지한다.

자유주의와 커머닝을 논할 때 우리는 합법성과 정당성 사이의 단절에 직면한다. 시장‑국가 체제는 그 행정질서의 합법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형식적 법체계와 관료조직에 의지한다. 그 체제는 커머너들—커머너들은 그들 고유의 인식론적 질서, 법과 정당성에 대한 그들 고유의 비전을 가지고 있다—의 역동적인 거버넌스와 일상적인 관행 및 경험에 별 관심이 없다.

나는 이것을 우리가 기획한 「자유주의를 넘어」라는 제목의 워크숍이 탐색해야 하는 영역으로 여긴다. 국가의 합법성과 커먼즈의 정당성 사이의 차이는 취약성, 위험성 및 가능성의 차이이다. 이 차이를 메우려고 했던 몇몇 인상적인 혁신들이 있고 현재로서 최선의 효과를 내는 혼합안을 개발하려고 했던 몇몇 흥미진진한 실험들이 있다. 그것들 중 세 가지만 간략하게 언급해보자.

1) 새로운 사회적 규범들 및 관행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법적 해킹 활용
2) 커머닝을 지원하는 새로운 조직형태들의 개발
3) 일반적으로 보통 지자체 수준에서 커머너들과 국가 공무원들을 협력에 이르게 하는 커먼즈‑공공부문 파트너십

법적 해킹은 국가법을 원래 입법자에 의해 상상되거나 의도되지 않은 방식으로 개편하는 것이다. 법적 해킹의 핵심은 현행법 내부에서부터 합법성의 새로운 구역을 개척하는 것이고 그런 다음 새로운 사회적 규범과 정치 활동으로 이 구역을 채우는 것이다. 핵심은 ‘새로운 합법성’을 수립하기 위해 민중에 기반을 둔 정당성과 공동체 실천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법적 해킹은 국가법 하에서 불법일 수 있는 커머닝(예를 들어 씨앗공유하기 및 인도적인 구조救助)을 탈범죄화하거나 커머닝이 번성할 보호받는 적법한 공간들을 만들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사례들로는 창조적인 작업을 합법적으로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듦으로써 저작권법을 해킹하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Creative Commons licenses)가 있다. 이와 유사하게 강•산•풍경을 보호하는 한 방식으로서 이것들에 공식적인 법인격을 부여하고자 하는 다양한 ‘자연권’ 법들도 법적 해킹이다.

기업들, 협동조합들, 비영리단체들에 권한을 부여하는 지배적인 법구조가 커머닝이 작동하는 방식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적어도 서구 나라들에서는 새로운 조직 형태들을 만드는 것이 종종 필요하다. <지속가능한 경제법 센터>(Sustainable Economies Law Center), <민주 및 환경 권리 센터> 같은 몇몇 법 옹호단체들은 풀뿌리에서부터 성장할 수 있는 탈중심화된 구조를 설계하기 위해서 혁신적인 정관(定款)과 금융구조를 개발하고 있다. 그들은 커먼즈로서 운영되는 자율적인 운영자공동체 그리고 법인격을 가지고 있는 ‘스스로를 소유하는’ 토지를 창출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커먼즈‑공공부문 파트너십(실제적인 것이든 제안된 것이든)은 바로셀로나, 암스테르담, 볼로냐, 방콕, 서울 같은 도시들에서 그리고 공동도시들(Co-Cities) 운동[주석5]과 연관된 도시들에서 불쑥불쑥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지자체 공무원들과 커머너들 사이에 새로운 유형의 유연하고 비관료적인 협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노인 돌봄, 아이 돌봄, 근린지역 개선, 공공 장소와 공공 건물들, 디지털 정보 커먼즈, 그리고 오픈소스 테크놀로지가 이 파트너십에 포함된다. 오픈소스 참여가 공무원식 사고방식과 얼마나 성공적으로 잘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는 열린 문제로 남아있다.

바라건대 나의 발표가 분명히 하듯이 자유주의적 입헌주의의 세계에서 ‘공동선’에 대한 생각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정의되어야하고 이해되어야 하는지 전적으로 분명하지는 않다. 공동선을 발생시키기 위해 어떤 사회적 관계가 요구되는지, 공동선을 보호하기 위해 법을 포함해서 어떤 종류의 정치제도들과 절차들이 요구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국가권력이 다시 만들어질 필요가 있는지 전적으로 분명하지는 않은 것이다.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논점은 공동선에 대한 일정한 비전 뒤에 인간의 번성하는 영적 삶에 대한 무슨 암묵적인 비전이 자리 잡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당연하게도, 커먼즈와 커머닝을 지향하는 활동이 자본주의적인 근대성의 한계를 비판하고 조직화된 협력과 공유하기의 근대 이전 전통—그리고 전적으로 현대적인 전통—을 탐색함으로써 공동선 논의에 공헌할 여지가 많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또한 체제 변화에 복무하는 다양한 국제적인 사회운동들—탈성장, 협동조합 운동들, 피어 생산, 코즈모로컬 생산, 농업생태학, 슬로우푸드를 비롯한 농업 및 식량 운동들, 토착적이며 전통적인 공동체들, 탈식민과 인종 정의 운동들, 재지역화 기획들, 도넛 경제학[주석6], 페미니스트 경제학, 그리고 기타 많은 것들—에도 이 더 큰 프로젝트에 기여하는 그 나름의 중요하고 보완적인 관점들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재의 긴급한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연계된 집중적인 대응을 개시할 수 있는가? 이것은 아쉽게도 여전히 열린 문제로 남아있다. 

==== 주석

 [주석1] 토지 신탁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1574 참조.
[주석2] 메이커스페이스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1369 참조.
[주석3] 이 책과 관련해서 http://commonstrans.net/?p=2418http://commonstrans.net/?p=2095참조. 
[주석4] <삼림헌장>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974, http://commonstrans.net/?p=478 참조.
[주석5] 공동도시들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2560 참조.
[주석6] 도넛 경제학(Doughnut Economics)은 영국의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Kate Raworth)가 창안한 21세기 경제학 이론이다.

 

 




페미니즘과 커먼즈의 정치

 


  • 저자  :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
  • 원문 :  “Feminism and the Politics of the Commons”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나는 2023년 1월 26일 목요일에 에코페미니즘연구센터 달과나무에서 기획한 심화강의 제2강에서 커먼즈 운동을 대안근대로의 이행의 관점에서 소개했는데, 여기서 페미니즘과 커먼즈 운동의 연관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런데 강의자료를 다 작성하고 나서 강의를 기다리는 하루 정도의 시간에 아래 소개된 페더리치의 글―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커먼즈의 정치를 살펴보는 글―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강의 후 토론시간에 이 글을 거론하기도 했다. 물론 미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번역까지는 아니더라도 상세히 내용을 정리해서 이 블로그에 올리기로 마음 먹고 당장 실행에 옮겼다. 아래 글은 마치 번역처럼 보이는 어투를 사용했지만, 원주 혹은 본문의 어떤 디테일들을 생략하기도 했고 또 어떤 부분은 비교적 자유롭게 내용을 풀었기 때문에 완성된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고 그저 매우 상세한 내용정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원문은 The Wealth of the Commons: A World Beyond Market and State (Levellers Press)의 9장이며 https://wealthofthecommons.org/essay/feminism-and-politics-commons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사이트의 글들은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의 적용을 받는다. (※ 이 글은 원래 『더커머너』(The Commoner, 2011년 1월 4일)에 발표된 에쎄이를 조금 고친 것이다.) [정백수]


재생산이 사회적 생산보다 앞선다. 여성을 건드리는 것은 반석을 건드리는 것이다.
– 피터 라인보((Linebaugh, Peter. 2008. The Magna Carta Manifesto: Liberty and Commons for All.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년 12월 31일 사파티스타들이 에히도(ejido)[공동체가 땅의 소유권이 아닌 용익물권을 갖는, 농업에 사용되는 공동 토지]를 해체하는 입법에 반대하는 투쟁을 한 이후 커먼즈라는 개념이 널리 퍼지고 있다. 이 고물처럼 보이는 생각이 현재의 사회운동에서 정치적 논의의 중심에 오게된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다음의 둘이 두드러진다. 첫째,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구축하는 급진적 운동들의 노력을 수십 년 동안 흡수했던 국가주의 혁명모델이 종식되었다. 다른 한편, 종획에 맞서  커먼즈를 방어하려는 투쟁들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사라졌다고 믿었거나 사유화로 위협받기 전에는 가치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던 공동체적 재산들 및 관계들의 세계가 가시화되었다. 커먼즈가 사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 인터넷 같은 예전에는 없던 삶의 영역에서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협력이 항상 산출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종획으로 인해서 드러났다. 커먼즈라는 생각은 많은 사람들이 창출하려고 하는 협력적 사회를 예시하는 통일적 개념으로서 이념적 기능에 복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을 해석하는 데서는 애매함들과 의미심장한 차이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커먼즈의 원리를 일관성있는 정치적 기획으로 옮겨놓으려면 이것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가령 무엇이 커먼즈를 구성하는가의 문제가 있다. 땅, 물, 공기 커먼즈(공통재), 디지털 커먼즈가 있다. 사회보장연금과 같이 우리가 획득한 권리도 종종 커먼즈로 지칭되며 언어, 도서관, 과거 문화의 집단적 산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모든 커먼즈가 그 정치적 잠재력의 관점에서 볼 때 동등한가? 모두 호환 가능한가? 그리고 그것들이 구축되어야 할 통일성[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향하는 데 모두가 함께하는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정리자]을 기획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우리는 ‘commons’(커먼즈)라고 복수형으로 말해야 할까, 아니면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자들이 제안하는 것처럼 ‘the common’(공통적인 것)이라고 말해야 할까? (‘공통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포스트포디즘 시대에 우세한 생산형태의 특징을 이루는 사회적 관계들을 지칭한다.)

이 글에서 나는 이 물음들을 염두에 두면서 커먼즈의 정치를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 페미니즘적 관점이란 성차별에 대항하고 재생산 노동을 둘러싼 투쟁에 의해 형성된 관점을 가리킨다. 재생산 노동은 라인보의 말처럼 사회의 반석이며 이것을 시금석으로 하여 모든 사회조직화 모델이 평가되어야 한다. 재생산 노동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커먼즈의 정치를 더 잘 규정하고 커먼즈 원칙이 반자본주의 프로그램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조건들을 분명히 하는 데 필요하다. 두 가지 문제가 이 과제들을 특히 중요하게 만든다.

첫째, 적어도 1990년대 초부터 커먼즈 담론이 예를 들어 세계은행 같은 기관에 의해 전유되어 사유화를 위해 사용되었다. 세계은행은 생물다양성을 보호하고 전지구적 커먼즈를 보존한다는 핑계로 열대우림을 생태보호구역으로 바꾸어 수세기 동안 열대우림에서 생계를 유지해 온 주민들을 추방하는 한편, 예를 들어 생태관광(eco-tourism) 같은 것을 통해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접근을 보장했다. 이밖에도 다양한 동기에 따른 커먼즈의 재가치화가 주류 경제학자와 자본주의 계획가들 사이에서 유행이 되었다. 커먼즈에 대한, 그리고 그와 유사한 사회적 자본, 선물 경제, 이타주의와 같은 주제들에 대한 학술 문헌이 증가하는 것을 보라.

사회적 공장[사회 전체가 공장이 된 것]의 구석구석까지 상품형태를 확장하는 것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에게는 이상적인 일이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장기적 재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실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은 기획이다. 자본주의적 축적은 시장에 외부성(externalities)으로 나타나게 마련인 엄청난 양의 노동(예를 들어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하며 여성들이 제공하는 무보수 가사노동)과 자원의 자유로운 전유에 구조적으로 의존한다. 따라서 월스트리트 붕괴 훨씬 이전에 다양한 경제학자 및 사회이론가들이 삶의 모든 영역의 시장화가 시장의 원활한 기능에 해롭다고 경고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장도 신뢰, 선물 제공처럼 화폐가 매개하지 않는 관계의 존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자본이 공통적 이익(공동선)의 미덕에 대해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위기에 처한 자본가 계급이 지구 환경의 수호자인 척하면서 되살아나는 것을 돕는 방식으로 커먼즈에 대한 담론을 만들어내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두 번째 문제는 ‘커먼즈가 어떻게 비(非)자본주의 경제의 기초가 될 수 있는가’라는, 아직은 답이 없는 물음이다. 라인보(Peter Linebaugh)의 저작, 특히 『마그나카르타 선언』(The Magna Carta Manifesto, 2008)에서 우리는 커먼즈가 계급투쟁의 역사를 우리 시대로 연결하는 끈이었으며 실제로 커먼즈를 위한 투쟁이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을 배웠다. 메인 주(州)의 주민들은 기업 함대의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어장에 대한 접근을 유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애팔래치아 주민들은 노천 채굴로 위협받는 산을 구하기 위해 조직화하고 있다. 오픈소스와 프리소프트웨어 운동은 지식의 상품화에 반대하고 소통과 협력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열고 있다. 또한 칼슨(Chris Carlsson)이 그의 『나우토피아』(Nowtopia, 2007)에서 설명한 것처럼 북미에서 많은 보이지 않는 커머닝 활동과 공동체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칼슨이 보여주듯, ‘버추얼 커먼즈’의 창출, 그리고 화폐/시장 경제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에서 번창하는 형태의 사회적 관계들의 창출에 많은 창조성이 담겨 있다.

아프리카, 카리브해 지역, 또는 미국 남부에서 이주해온 공동체들 덕분에 나라 전역에 퍼진 도시 텃밭 가꾸기 운동이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어왔다. 이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도시 텃밭은 우리가 식량 생산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고 우리의 환경을 재생성하며 생계를 위해 자급하려면 없어서는 안 될 러바니제이션(rurbanization)((rurbanization : rural + urban +-ization)) 과정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텃밭은 식량 안보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것을 훨씬 넘어서 사회성, 지식 생산, 문화 및 세대 간 교류의 센터들이다.

도시 텃밭은 그것이 상업적 목적보다는 동네에서의 소비를 위해 생산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점으로 인해서 도시 텃밭들은 다른 재생산 커먼즈들―메인 주의 ‘가재 해안’(Lobster Coast)((“Lobster Coast”는  지명이 아니라 가재를 잡는 해안을 말한다. 메인 주의 어업 공동체들의 역사를 다룬, 콜린 우다드(Colin Woodard)의 The Lobster Coast: Rebels, Rusticators, and the Struggle for a Forgotten Frontier 라는 책이 있다.))의 어장들처럼 시장을 위해 생산하거나 열린 공간을 보존하는 토지 신탁처럼 시장에서 구입되는 것들―과 구분된다. 그러나 문제는 도시 텃밭이 자생적인 풀뿌리 운동으로 남아 있으며 미국에서 벌어지는 운동에서 텃밭들의 존재를 확장하고 토지에 대한 접근을 투쟁의 핵심 영역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여성과 커먼즈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방어되고 있고 발전되고 있으며 투쟁으로 지켜지고 있는 많은 번성하는 커먼즈들을 어떻게 한데 모아서 결집력 있는 총체를 형성하여 새로운 생산방식의 토대를 제공할 것인가의 문제를 좌파는 제기한 적이 없다. 커먼즈에 대한 페미니즘적 관점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과거의 역사에서나 우리 시대에서나 여성들은 재생산 노동의 주요 주체로서 공동체의 자연자원에의 접근에 남성보다 의존해왔고 이 자원의 사유화 과정에서 가장 많은 불이익을 당했으며 이 자원의 방어에 가장 헌신적이었다는 깨달음과 함께 이 페미니즘적 관점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내가 『캘리번과 마녀』(Caliban and the Witch, 2004)에서 썼듯이,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 국면에서 여성들은 영국과 남북아메리카에서 공히 토지 종획에 맞서는 투쟁의 최전선에 섰으며 유럽 식민화가 파괴하려고 했던 공동체적 문화의 가장 완강한 방어자들이었다. 페루에서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마을을 장악했을 때 여성들이 높은 산으로 도망쳐 집단적 삶형태들을 다시 창출했고, 이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여성에 대한 세계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공격이 행해졌다. 여성을 마녀로 몰아 박해한 것이다. 오늘날 새로운 형태의 시초 축적 과정에 직면한 여성들은 자연의 완전한 상업화를 가로막고 비자본주의적 토지 사용과 생계자급 지향적인 농업을 지탱하는 주요한 사회적 힘이다. 여성들은 세계의 자급농부들이다. 아프리카에서는 세계은행 및 기타 기관들이 여성들의 활동을 환금경작으로 전환하도록 설득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사람들이 소비하는 식량의 80%를 생산한다. 1990년대에는 많은 아프리카 도시에서 식량 가격 상승에 직면하여 공유지(公有地)의 땅뙈기들을 전유하였고 길가를 따라, 공원에, 철로를 따라 옥수수, 콩, 카사바를 심었으며, 아프리카 도시들의 경관을 바꾸고 그 과정에서 도시와 농촌 사이의 분리를 허물었다. 인도, 필리핀에서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여성들은 황폐해진 숲에 나무를 다시 심고, 힘을 합해 벌목꾼을 쫓아냈으며, 광산 작업과 댐 건설을 봉쇄하고, 물 사유화에 반대하는 투쟁을 이끌었다.

재생산 수단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을 위한 여성들의 투쟁의 다른 유형은 캄보디아에서 세네갈에 이르기까지 제3세계 전역에서 화폐커먼즈로 기능하는 신용연합의 형성이다.(Podlashuc 2009)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톤틴’(the tontines)이라고 불리는 이 신용연합은 여성들이 만든 자율적이고 자주적으로 관리되는 뱅킹시스템으로, 은행에 접근할 수 없는 개인이나 집단에 현금을 제공하며 순전히 신뢰를 바탕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신용연합은 세계은행이 장려하는 소액융자 시스템과 완전히 다르다. 이 소액융자 시스템은 상호감시와 수치심을 바탕으로 작동되는데, 예를 들어 니제르에서 이러한 방식이 융자금을 상환하지 못한 여성들의 사진을 공공장소에 게시할 정도로 극에 달해서 몇몇 여성들을 자살로 몰아가기도 했다.

여성들은 또한 재생산 비용을 절약하고 서로를 가난·국가폭력·남성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재생산노동을 집단화하려는 노력을 주도해왔다. 두드러진 사례는 1980년대에 칠레와 페루에서 여성들이 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더 이상 혼자서는 물건을 살 경제적 여유가 없었을 때 세운 ‘올라스 코무네스’(ollas communes, 공동밥솥)이다.(Fisher 1993; Andreas 1985) 토지 재전유나 톤틴의 형성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실천은 공동체적 유대가 아직 강한 세계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정치 이전의 것으로, ‘자연적인’ 것으로, 혹은 단순히 ‘전통’의 산물로 보면 잘못이다. 식민화 국면들이 거듭되고 난 지금, 자연과 관습은 민중이 투쟁하여 보존하고 재발명한 곳에서 말고는 그 어디에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레오 포들라슈크(Leo Podlashuc)가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날 풀뿌리 여성들의 공동체주의는 새로운 현실을 창출하며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집과 공동체에서 대항권력을 구성하며 자기가치화와 자기결정의 과정을 연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많다.

이 투쟁들에서 우리가 얻는 첫 번째 가르침은, 물질적인 재생산 수단의 커머닝이 집단적 이해와 상호유대가 창출되는 주된 메커니즘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또한 노예화된 삶에 대한 저항의 최전선이며 우리의 삶에 대한 자본의 장악력을 안으로부터 무너뜨리는 자율적 공간을 구축하기 위한 조건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내가 설명한 경험은 이식할 수 없는 모델이다. 북미에 사는 우리에게 재생산 수단의 탈환과 공통화(commoning)는 필연적으로 다른 형태를 취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자원들을 한데 모으고 우리가 생산한 부를 재전유함으로써 우리의 재생산을 상품의 흐름들―이 흐름들이 세계 시장을 통해 세계 전역을 흘러다니면서 수백만 명이 삶의 터전을 박탈당하게 하고 있다―로부터 떼어내기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살림을 세계시장으로부터만이 아니라 (현재 미국 경제가 의존하고 있는) 전쟁기계와 감옥시스템으로부터도 떼어내기 시작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운동에서 그토록 자주 보이는 특징인 추상적 연대―이는 우리의 헌신, 견딜 수 있는 우리의 능력, 우리가 기꺼이 감수할 위험을 제한한다―를 넘어설 수 있다.

사유재산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무기로 보호되고 3세기에 걸친 노예제도가 사회에 심오한 분열을 낳은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커먼즈/공통적인 것을 재창출한다는 것이 장기적인 실험, 연대구축 및 피해회복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엄청난 과제인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제가 지금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워보일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자율의 공간을 넓힐, 그리고 우리의 재생산이 세계의 다른 커머너들과 커먼즈들을 희생시키면서 일어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유일한 가능성이다.

 

페미니즘적 재구축

마리아 미스(Maria Mies)가 이 과제를 강력하게 표현한 바 있다. 그녀는 공통적인 것의 창출이 첫째로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분업이 분리한 것들을 재결합하기 위해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심대한 변형이 일어나는 것을 필요로 함을 지적했다. 생산이 재생산 및 소비와 분리됨으로써 우리는 ① 먹는 것, 입는 것, 일하는 도구가 생산되는 조건들을, ② 그 사회적·환경적 비용을, 그리고 ③ 우리가 산출하는 폐기물을 떠안게되는 사람들의 운명을 무시하게 되기 때문이다.(Mies 1999) 우리는 우리의 행동의 결과에 대해 무책임한 상태―이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분업이 조직되는 파괴적인 방식들의 결과이다―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만일 이에 미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의 생산은 불가피하게 다른 이들에게는 죽음의 생산이 될 것이다. 지구화는 이 위기를 악화시켜서 생산되는 것과 소비되는 것 사이의 거리를 벌렸으며 그럼으로써 (전지구적 연결성이 증가되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먹는 음식, 우리가 사용하는 석유, 우리가 입는 옷, 우리가 서로 소통하는 데 쓰이는 컴퓨터들이 피의 희생을 치르고 생산된 것임을 보지 못한다.

페미니즘적 관점은 우리에게 이러한 망각의 상태를 극복하는 데서 커먼즈를 재구축하는 일을 시작하라고 가르쳐준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기초해서 우리의 삶과 우리의 재생산을 이루기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그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기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공통적인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커머닝은 우리 자신을 공통적 주체로 산출하는 활동이 되어야 의미를 가진다. ‘공동체 없이 커먼즈 없다’라는 슬로건은 바로 이런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공동체는 종교나 민족을 기반으로 형성된 폐쇄적인 곳이 아니라 관계의 질, 협력의 원칙, 서로에 대한 그리고 지구·숲·바다·동물에 대한 책임의 원칙을 의미한다.

물론 그러한 공동체의 달성은 우리의 일상적인 재생산 노동의 집단화와 마찬가지로 시작일 뿐이다. 그것이 더 광범한 반(反)사유화운동 및 공통의 부를 되찾기를 대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집단적 통치(자치)에 대한 우리의 교육과 역사를 집단적 기획으로 인식하는 일의 필수적 부분이다.

그래서 가사의 공동체화를 우리의 정치적 의제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의 풍부한 페미니즘 전통을 다시 살려야 한다. 이 전통은 ①19세기 중반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실험들에서부터 ②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초까지 ‘유물론적 페미니스트들’이 보인, 집단적 살림을 통해 가사노동을 재조직하고 사회화하려는, 그럼으로써 집과 동네를 재조직하고 사회화하려는 시도들―이 시도들은 안타깝게도 1920년대에 ‘적색공포’로 종식되었다―까지에 걸쳐있다.(Hayden 1981 and 1986) 이러한 실천들에서 보이는, 재생산 노동을 인간 활동의 중요한 영역으로, 부정될 것이 아니라 혁명적으로 변혁되어야 할 영역으로 볼 수 있는 과거 페미니스트들의 능력이 다시 논의되고 다시 가치를 부여받아야 할 것이다.

집단적 삶형태를 창출하는 결정적 이유 하나는 인간의 재생산이 지구상에서 가장 노동 집약적인 일이며, 대체로 기계화로 환원될 수 없는 일이라는 데 있다. 육아, 환자 돌보기 또는 신체적·정서적 균형을 재통합하는 데 필요한 심리적 작업은 기계화할 수 없다. 미래주의 산업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서는 돌봄을 로봇화할 수 없다. 특히 어린이와 환자를 돌보는 사람 가운데 간호사봇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서비스 제공자의 건강을 희생하지 않고 책임을 분담하고 협력하는 것이 적절한 치료를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수세기 동안 인간의 재생산은 집단적 과정이었다. 그것은 확대된 가족과 신뢰할만한 공동체들의 일이었다. 특히 프롤레타리아 동네에서 그랬으며, 사람들이 혼자 살았을 때에도 그랬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오늘날의 노인들처럼 외롭거나 의존적이지 않았다. 재생산이 완전히 사유화된 것은 자본주의에 와서의 일이다. 이 사유화 과정은 지금 우리의 삶을 파괴할 정도로 심해졌다. 이러한 추세는 역전되어야 하며 지금이 그러한 기획에 유리한 때이다.

자본주의 위기가 미국을 포함하여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재생산의 기본 요소들을 파괴함에 따라 우리의 일상 생활의 재건이 가능한 일이자 긴요한 일이 된다. 파업과 마찬가지로 사회적/경제적 위기가 임금 노동의 규율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성을 우리에게 강요한다. 바로 이런 일이 대공황 중에 일어났는데, 그때 화물열차를 커먼즈로 전환하여 이동성과 유목 생활에서 자유를 추구한 호보들(hobos, 떠돌이 일꾼들)의 운동이 일었다.(Caffentzis 2006) 그들은 철로가 교차하는 곳들에서 자치 규칙과 연대에 기반을 둔 호보 정글들을 조직했는데, 이는 많은 호보들이 믿었던 공산주의 세계의 예시였다.(Anderson 1998, Depastino 2003 and Caffentzis 2006) 그러나 소수의 박스카 베르타(Boxcar Bertha)들을 제외하면((<박스카 베르타>(Boxcar Bertha, 1972)는 마틴 스코세시(Martin Scorsese)가 벤 라이트먼(Ben Reitman)의 『도로의 누이―박스카 베르타의 자서전』(Sister of the Road: Sister of The Road: The Autobiography of Boxcar Bertha )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이것은 주로 남성들의 세계였고 남성들의 형제애였으며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없었다. 경제 위기와 전쟁이 끝나자 호보들은 노동자들을 고착시키는 두 개의 큰 엔진인 가족과 집에 길들여졌다. 대공황 동안 보여진 노동계급 재구성의 위협을 유념한 미국 자본은 ‘생산 지점에서의 협력, 재생산 지점에서의 분리 및 원자화’라는 원칙을 경제 생활을 조직하는 데 탁월하게 적용했다. 레비타운(Levittown)((‘Levittown’은 윌리엄 레빗(William J. Levitt)과 그의 회사(Levitt & Sons)가 만든 거대한 주택개발사업의 이름이다.))이 제공한 원자화되고 직렬화된 가족 주택은 탯줄로 연결된 부속물인 자동차와 결합하여 노동자를 정주하는 삶에 고착시켰을 뿐만 아니라 호보 정글들이 나타냈던 유형의 자율적 노동자 커먼즈를 종식시켰다.(Hayden 1986) 오늘날 수백만 명의 미국인의 집과 자동차가 회수되고 압류·철거·대량실직이 다시 자본주의 노동 규율의 기둥을 무너뜨리고 있음에 따라 해안에서 해안으로 뻗어 있는 천막 도시들 같은 새로운 공통 기반이 다시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시적인 공간, 일시적인 자율지대들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재생산의 토대가 될 커먼즈들을 구축해야 하는 주체가 바로 여성들이다.

집이 경제의 기반이 되는 오이코스(oikos)라면, 역사적으로 가사노동자이며 가옥 수감자들인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집을 (다양한 사람들과 협력형태들이 가로지르는) 집단적 삶의 중심지로 되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고립과 고착이 없는 안전함을 제공하고 공동체 소유물의 공동사용 및 순환을 가능하게 하며, 무엇보다도 재생산의 집단적 형태들의 토대를 제공해야 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19세기의 유물론적 페미니스트들의 프로그램으로부터 이 기획에 대한 영감을 끌어올 수 있다. 이들은 집(home)이 ‘여성 억압의 중요한 공간적 구성 요소’라고 확신하고 공동 부엌을 조직하고 노동자들이 재생산을 통제하기를 요구하는 협동적 가구들을 조직했던 것이다.(Hayden 1981)

이러한 목표는 현재 매우 중요하다. 삶이 가정에 고립되는 상태를 분쇄하는 것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고 고용주 및 국가와의 관계에서 우리의 힘을 강화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생태적 재앙으로부터의 보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집이라고 부르는 재생산 자산과 폐쇄된 거주지의 ‘비(非)경제적’ 증가가 가져오는 파괴적인 결과, 즉 겨울에는 온기를 대기로 발산하고 여름에는 가차 없는 더위에 우리를 노출시키는 파괴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De Angelis 2007) 가장 중요한 것은, 재생산을 보다 협력적인 방식으로 재규정하지 않는 한,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분리 및 정치적 행동주의와 일상적 삶의 재생산 사이의 분리를 끝내지 않는 한 대안 사회와 강력한 ‘스스로 재생산하기 운동(a self-reproducing movement)을 구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성에게 재생산을 커머닝/집단화하는 임무를 이렇게 할당하는 것은 여성성을 자연주의적으로 보는 사고방식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당연히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굴복을 죽음보다 더 나쁜 운명으로 본다. 자본가들에 의해 전유된 자연의 부처럼, 여성이 남성들이 공유하는 부로서, 남성들이 자유롭게 전유할 부와 서비스의 자연적 원천으로 지정되었다는 생각이 우리의 집단의식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돌로레스 헤이든(Dolores Hayden)의 말을 풀어보자면, 재생산 노동의 재조직, 따라서 주택과 공적 공간의 재조직은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노동의 문제이며, (더 추가하자면) 권력과 안전의 문제이다(Hayden 1986). 여기서 브라질의 무토지 농민운동(MST)에 참여한 여성들의 경험이 떠오른다. 이들은, 공동체가 자신이 점유한 땅을 유지할 권리를 획득한 후, 새 주택들을 하나의 복합체를 형성하도록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투쟁의 과정에서 그랬던 것처럼 계속해서 (설거지와 요리를 함께 하는 등) 집안일을 공동으로 하고, 남자들에게 학대당할 때 서로를 도와주기 위해 달려갈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여성이 재생산 노동과 주거의 집단화에 앞장서야 한다는 주장은 가사노동을 여성의 천직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의 저항의 역사에서 본질적인 부분이었던 재생산 노동에 관해 여성들이 축적한 집단적 경험, 지식 및 투쟁을 지우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역사와 다시 연결되는 것은 오늘날 여성과 남성 모두가 우리 삶의 젠더화된 구조를 허물고 우리의 집과 삶을 커먼즈로 재건하는 데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단계이다.

References

Andreas, Carol. 1985. When Women Rebel: The Rise of Popular Feminism in Peru. Westport, CT. Lawrence Hill & Company.

Anderson, Nels. 1998. On Hobos and Homelessness.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arlsson, Chris. 2008. Nowtopia. Oakland, CA. AK Press.

Caffentzis, George. 2004. “Globalization, The Crisis of Neoliberalism and the Question of the Commons.” Paper presented to the First Conference of the Global Justice Center. San Migel d’Allende, Mexico, July 2004.

—————. “Three Temporal Dimensions of Class Struggle.” Paper presented at ISA Annual meeting held in San Diego, CA (March 2006).

De Angelis, Massimo. 2007. The Beginning of History: Value Struggles and Global Capital. London, UK. Pluto Press.

—————. “The Commons and Social Justice.” Unpublished manuscript, 2009.

DePastino, Todd. 2003. Citizen Hobo.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The Ecologist. 1993. Whose Commons, Whose Future: Reclaiming the Commons. Philadelphia, PA. New Society Publishers with Earthscan.

Federici, Silvia. 2011, “Women, Land Struggles, and the Reconstruction of the Commons.” WorkingUSA. The Journal of Labor and Society (WUSA), 14(61) (March 2011), Wiley/Blackwell Publications. Published in Spanish as “Mujeres, luchas por la tierra, y la reconstrucción de los bienes comunales,” In Veredas, No. 21, 2010. Issue dedicated to Social Movements in the 21st century. Veredas is the Journal of the Department of Social Relations of the Universidad Autonoma Metropolitana of Mexico City in Xochimilco.

—————. 2008. “Witch-Hunting, Globalization and Feminist Solidarity in Africa Today.” Journal of International Women’s Studies, Special Issue: Women’s Gender Activism in Africa. Joint Special Issue with WAGADU. 10(1) (October 2008): 29-35.

—————. 2004. Caliban and the Witch: Women, The Body, and Primitive Accumulation. Brooklyn, NY. Autonomedia.

—————. 2004. “Women, Land Struggles and Globalization: An International Perspective.” Journal of Asian and African Studies. 39(1/2) (January-March 2004).

—————. 2001. “Women, Globalization, and the International Women’s Movement.” Canadian Journal of Development Studies. 22:1025-1036.

Fisher, Jo. 1993. Out of the Shadows: Women, Resistance and Politics in South America. London, UK. Latin American Bureau.

Hayden, Dolores. 1981. The Grand Domestic Revolution. Cambridge, MA. MIT Press.

—————. 1986. Redesigning the American Dream: The Future of Housing, Work and Family Life. New York, NY. Norton.

Isla, Ana. “Enclosure and Microenterprise as Sustainable Development: The Case of the Canada-Costa Rico Debt-for-Nature Investment.” Canadian Journal of Development Studies. 22 (2001): 935-943.

—————. 2006. “Conservation as Enclosure: Sustainable Development and Biopiracy in Costa Rica: An Ecofeminist Perspective.” Unpublished manuscript.

—————. 2009. “Who pays for the Kyoto Protocol?” in Eco-Sufficiency and Global Justice, Ariel Salleh, ed. New York, London. Macmillan Palgrave.

Mies, Maria and Bennholdt-Thomsen, Veronika. 1999. “Defending, Reclaiming, and Reinventing the Commons,” In The Subsistence Perspective: Beyond the Globalized Economy. London: Zed Books, Reprinted in Canadian Journal of Development Studies, 22 (2001): 997-1024.

Podlashuc, Leo. 2009. “Saving Women: Saving the Commons.” In Eco-Sufficiency and Global Justice, ed. Ariel Salleh. New York, London: Macmillan Palgrave.

Shiva, Vandana. 1989. Staying Alive: Women, Ecology and Development. London. Zed Books.

—————. 1991. Ecology and The Politics of Survival: Conflicts Over Natural Resources in India. New Delhi/London. Sage Publications.

—————. 2005. Earth Democracy: Justice, Sustainability, and Peace. Cambridge, MA. South End Press.




퍼더필드 — 예술과 게임이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다

 



공상적이지만 거의 현실적인 시나리오가 여기 있다. 여러분의 지역사회 공원에 있는 꿀벌들, 다람쥐들, 거위들, 곤충들, 나무들 등등의 종(種)들이 인간의 침범과 학대를 충분히 겪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들은 더 이상 참지 않고 들고 일어나 인간이 가진 것과 동일한 권리를 요구할 작정이다. 종들 간의 일련의 회합을 통해 지역 생태계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번성을 보장하는 협정/협약이 타결된다.

이 시나리오는 <퍼더필드>(Furtherfield, 런던에 기반을 둔 예술공동체)가 빅토리아 시대 핀즈베리 파크의 일부 지역에 대한 파수의 일환으로서 고안한 ‘라이브 액션 롤플레잉’(live action role-playing, LARP)게임이다. 앞으로 3년에 걸쳐 <퍼더필드>는 프로젝트의 이름인 <핀즈베리 파크 2025 협정/협약>(The Treaty of Finsbury Park 2025)을 진행해나갈 때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각각 일곱 가지 종들의 역할을 하도록 요청할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풍뎅이와 다람쥐 종의 대표자들로서 <종(種)간 회의>에 참석하도록 함으로써 LARP게임이 목표로 하는 것은 사람들이 “놀이를 통해 인간이 아닌 생명체들에 공감하는 경로들”을 발전시키도록 돕는 것이다. 서로 다른 종들이 소통하도록 돕는 직감 다이얼(Sentience Dial)도 있다. 누가 알겠는가? 이 과정이 실제로 핀즈베리 파크를 더 무성하고 활기 넘치는 장소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 진기한 애니미즘 경험은 <퍼더필드>가 지난 25년 동안 주최해온 프로젝트들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이 프로젝트들 대부분은 예술, 디지털 기술 및 사회적 행동을 일정한 창조적인 방식으로 섞는다. 최근 『커머닝의 프런티어』(Frontiers of Commoning) 팟캐스트(에피소드 #24)에서 나는 세상에 대해 새로이 생각하는 방식으로서 참여예술에 대한 <퍼더필드>의 독특한 접근법에 관하여 루스 캐틀로우(Ruth Catlow)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술가, 큐레이터이자 <퍼더필드>의 공동대표인 캐틀로우는 1996년에 <퍼더필드>를 시작한 이래로 많은 예술 프로젝트들을 이끌어 온 비전을 가진 사람이다. 그녀는 지역적, 일국적 및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다양한 파트너들과의, 특히나 평범한 사람들과의 협동작업을 조직하는 것을 돕는다. <퍼더필드>의 많은 예술작업과 테크놀로지 기획들의 핵심은 우리가 세상을 다르게 보도록 하려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위해 새로운 미래를 그리는 경우 예술이 하는 역할을 존중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퍼더필드>의 프로젝트들 대부분은 런던 소재 핀즈베리 파크에 있는 녹지 공간 및 미술관에서 그리고 예술가들•기술자들•활동가들을 불러 모으는 다양한 디지털 공간에서 열린다. 지역 공무원들이 <퍼더필드>의 예술 프로젝트들을 펼칠 참여적인 무대로서 공원을 사용하도록 <퍼더필드>측에 청했다. 전통주의자들은 이 단체를 예술의 센터라고 부르겠지만 <퍼더필드>측은 자신들의 활동이 외부 지향적이고 네트워크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재미있게도 ‘디-센터’(de-center, 탈-중심)라고 부른다.

<퍼더필드>는 흥미를 유발시키며 장난기가 다분한 기발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예술적 실험들의 주최자라고 자임한다. 이 탐구적 실험들은 오픈소스 테크놀로지와 철학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퍼더필드> 자신들의 말로는) “현존하는 권력들을 파열시키고 민주화”하며 “지형을 새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일례로 <흑인의 삶도 중요하다> 시위들이 무수히 일어나 미국과 전 세계 도시를 흔들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노예소유자 사업가들과 군장성들이 공원에 청동 조각상으로 세워지는 영광을 입은 이유를 문제삼기 시작했다. <퍼더필드>는 공원에 있는 받침대 위에 지금 있는 것 대신에 누가 또는 무엇이 놓여서 기념되어야 할지에 대하여 공개 토론을 열기로 결정했다.

예술가들은 ‘시민 공원 받침대’ 프로젝트(The People’s Park Plinth project)측으로부터 공원에서 기념하게 될 새로운 사람들이나 물건을 제안하도록 요청을 받았다. 이 과정의 매개체는 스마트폰이었다. 공원에서 산책하는 사람들이 나무나 동상 받침대에 부착된 QR코드를 스캔하면 공원 내의 해당 장소에 관한 영상을 즉각 볼 수 있었다. 사실상, 이 프로젝트가 스스로를 설명했듯이, 이 프로젝트는 “공원 전체를, 여러분이 여러분의 공원에 원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하는, 디지털 예술작품을 위한 공공 플랫폼으로” 바꾸었다.

누구나 제안된 예술품 몇 개에 투표할 수 있었다. 1위를 차지한 작품—에이샤 탄 존스(Ayesha Tan Jones)가 제작한 <나무 이야기에 바탕을 두어>(Based on a Tree Story)—은 나무에 있는 QR코드를 사용하여 그곳에 사는 나무 요정의 영상을 호출하는 예술작품이었다. (“장소 특유의, 청각적 증강현실을 통해 나무의 과거•현재•미래의 이야기를 하는 디지털 나무 요정과 조우하기”)

예술작품을 선정하기 위한 공개적인 투표는 그 자체로 상당히 새로웠다. 각 참가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하나의 예술작품에 투표권을 한 번 행사하는 식이 아니었다. 그들이 원하는 만큼 많은 예술작품들 각각에 투표할 수 있는 다수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제곱 투표”(quadratic voting)라 불리는 이 방식은 어떤 프로젝트가 과반수를 얻는지를 그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떤 것에 가장 열광하는지를 보여주는 쪽이다. 이 시스템은 소수의 목소리를 무효화하는 “다수의 횡포”라는 문제점과 파당성이 강한 집단들이 방해물로 작용하는 상황을 극복할 목적으로 구상되었다.

<퍼더필드>의 더 흥미로운 역할들 중 하나는 어떻게 블록체인 소프트웨어가 네트워크 시대에 예술을 재발명하는 것을 도울 수 있는지에 관하여 실험실을 열고 예술가들과 기술전문가들 간 일련의 토론들을 주최한 것이었다. 핵심은 문화 부문이 어떻게 “피어 생산방식으로 생산된, 예술•문화•사회를 위한 탈중심화된 디지털 인프라에 이르는 길”을—특히 탈중심화된 자율조직들(Decentralised Autonomous Organisations, DAOs)을 통해서—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퍼더필드>는 “예술계에서 게이트키핑과 엘리트주의를 끝내”고 “규모에 제한이 없는 상호의존과 상호협력을 위한, 회복력 있고 변화도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한 가지 길로서 이 깊고 근본적인 우애의 정신을 가져오기”를 원했다. <퍼더필드>는 또한 기술 부문에서 아주 많은 탈중심화된 자율조직들을 활기 띠게 하는 자유의지적인 개인주의를 넘어가기를 원했다.

<퍼더필드>의 회합들의 결과로 두 권의 책이 나왔다. 하나는 『블록체인을 다시 생각하는 예술가들』(Artists RE:thinking the Blockchain, 2017)—예술가들이 블록체인에 비판적으로 참여하는 활동에 관한 책—이고 다른 하나는 2022년 5월에 출간되는 『급진적인 친구들』(Radical Friends)—예술계에서의 디지털 자율조직들(DAOs)의 위험 및 이 조직들에 대안이 되는 커먼즈 기반 디지털 자율조직들에 관한 선집—이다. “<퍼더필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안적 조직들에 “DAOs with Others”를 나타내는 두문자어 ‘DAOW’라는 이름을 붙인다.”

루스 캐틀로우와 나눈 팟캐스트 대화는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오늘날 이반 일리치가 여전히 중요한 이유

 


  • 저자  :  David Bollier
  • 원문 :  Why Ivan Illich Still Matters Today
  • 분류 :  번역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볼리어(David Bollier)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2021년 12월 1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이반 일리치(Ivan Illich)는 내가 되풀이해서 참조하는, 보기 드물고 영향력이 큰 사상가들 중 한 명인데, 이는 그가 다른 경우라면 무시되는 핵심 주제들과 두려움 없이 씨름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는 근대 제도들이 가진 전체주의화하는 권력, 정신적 삶을 부패시키는 자본주의의 영향 및 더 건전하고 반란적인 문화를 구축하는 토착적인 실천의 힘을 다루었다.

가장 최근 팟캐스트(에피소드 #21)에서 나는 일리치의 사상에 대한 해석이자 권위 있는 종합인 『이반 일리치: 지성 여행』(Ivan Illich: An Intellectual Journey, 2021)을 최근에 출판한 일리치의 절친이자 동료인 데이비드 케일리(David Cayley)를 인터뷰하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케일리는 캐나다 CBC(Canadian Broadcasting Corporation)사의 전직 방송인이자 독립연구자이며 문학, 정치 및 생태 관련 주제에 관한 수많은 책을 집필한 작가이다.

일리치는 인습타파주의적인 사회 비평가, 급진적인 기독교인이자 문화 역사가로 서구 근대성, 기독교, 보건의료(헬스케어) 및 사회 서비스 분야에서 돌봄의 전문업화에 대한 혹독한 비판으로 1970년대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로마 교황청과 자주 충돌한 오스트리아 태생의 가톨릭 사제인 일리치는 마침내 사제직을 그만두고 떠돌이 강연자, 사회 참여 지식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그의 생각은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다방면에 걸쳐 있지만 대부분은 우리의 기본적인 인간성을 부정하도록 고안된 것처럼 보이는 현대세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더 깊고 더 의미 있는 정신적 삶을 추구할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Ivan Illich. Photo by ‘Adrift Animal,’ CC BY-SA 4.0

지금 보기에는 일리치의 몇몇 관점들이 당대에 즉 주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의 생각은 근대 경제학 및 정치학을 따르지 않는 풍부하고 상세한 관점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현대의 삶과 크게 관련되어 있다. 지난 40년 내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일반 민중의 고통을 가중시켰으므로 그의 작업은 훨씬 더 유의미할 것이다.

일련의 저서들에서 일리치는 정규교육, 헬스케어, 교통기관, 법, 기타 시스템들이 이익보다는 해악을 더 많이 만들어내며 우리에게서 권리를 빼앗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그는 『병원이 병을 만든다』(Medical Nemesis, 1974)에서 어떻게 전문의료업이 사람을 과잉진료하고 평범한 삶을 병리화하는지를 보여주었다. 『학교 없는 사회』(Deschooling Society, 1970)에서는 어떻게 정규교육이 참된 호기심과 배움을 자극하기보다 자본주의적인 질서를 위해 사람들에게 자격증을 부여하는 것에 초점을 더 맞추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공생공락을 위한 도구들』(Tools for Conviviality, 1973)에서는 공생을 위한 창조적이고 열려있는 도구를 인간에게 갖춰주는 문화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일리치의 생각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요소는 ‘누가 우리의 현실 감각을 정의하게 되는가’였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자기조직화하는 “토착적인 영역들”—주류 경제가 무시하는 활동들인 커머닝과 돌보기라는 “그림자 노동”을 수행하는 비공식적인 공간들—과 운명을 같이 했다. 일리치는 또한 온갖 종류의 흔치 않은 역사적인 발굴―예를 들어 몸의 아픈 양태를 서술하는 것과 관련된 감각의 역사(([옮긴이] 일리치가 보기에 몸-감각(body-sense)은 문화 속에서 경험된다. 따라서 문화의 역사적 변천은 곧 몸-감각의 역사적 변천을 낳으며, 감각의 변화는 어휘의 변화를 낳는다.)), 커먼즈로서 침묵 그리고 도시 삶의 역사에서 ([]들의 매개체로서) 머리카락의 역할의 발굴―을 과감히 해냈다. (내가 일리치에 관하여 이전에 올린 게시글을 이곳이곳에서 참조하고, 또한 일리치가 현대에 끼친 영향에 관하여 내가 2013년에 한 강연을 참조하라.)

일리치의 저서들과 강연들은 실질적인 사회적 관행과 정신적인 욕구를 통해 아래로부터 세상에 접근함으로써 지난 20년간에 걸쳐 부상한 커머닝 세계를 위한 지적 토대를 세우는 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일리치는 시장/국가 지배권의 범위 밖에 존재하는 사회적이며 정신적인 삶—근대 의식의 세속적이며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공간—을 연구함으로써 현대의 커먼즈를 상상할 풍성한 공간을 긍정하고 분명히 했다. 케일리는 일리치를 “발전 이후 시대의 맑스”라고 불렀다.

케일리는 일리치가 슈마허(E.F. Schumacher)처럼 “규모 문제는 허식 같은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사상가였다고 말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핵심적인, 전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일의 규모가 너무 커질 때 그것은 전적으로 그리고 무조건 다루기 힘들어진다. 정의상, 즉 바로 그 특성상 통제될 수 없는 도구들이 있다. 그것들이 결국은 우리를 통제할 것이다.”

그래서 일리치는 인간의 힘과 독창성을 존중하는 공생공락적인 도구들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공생공락적인 도구들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즈 스타일로 폐쇄적이거나 독점적이지 않고 평범한 개인들과 공동체들의 욕구와 관심에 기여하는 열려 있는 유연한 도구들이다.

일리치는 표준적인 경제학 및 ‘발전’이라는 관념을 일찍부터 비판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이런 사고틀에 내장된 전제에 도전했고 무한 성장의 위험들을 강조했다. 그는 표준적인 경제학은 ‘충분함’에 대한 인식이 없다고 언급했다. 이것이 생태적 문제들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감정적이고 정신적인 혼란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이는 국가에 의해 지원을 받는 자본주의적 시장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는데, 자본주의적 시장은 상품과 시장거래에의 의존상태로 우리를 몰고 감으로써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를 주변화하고 서로 간의 관계를 분열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근대적 삶은 자급자족과의 500년 전쟁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근대적 삶에서는 우리가 사용가치와 욕구보다는 교환가치와 화폐를 위해 생산한다는 것이다. “경제는 오늘날 세상에서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구하지 못할 뿐더러 그들의 생계추구를 눈에 안 보이고 위엄이 없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라고 일리치는 썼다. 그는 “발전”의 근본적인 오류는 “인간의 자연 통제라는 생태적으로 실행할 수 없는 구상”이라고 말했다.

데이비드 케일리의 책은 비록 길지만—450페이지가 넘는다—일리치의 삶과 작업을 사적인 회고록, 전기, 지성사 및 문화적 논평이 결합된 형식으로 생생하게 종합한다. 이 책은 현대 독자들이 일리치를 설득력 있는 독창적인 사상가, 창조적인 불굴의 학자이자 매력적인 사람으로 인식하도록 돕는다. 일리치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을지라도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글을 쓰고 강연을 했다. 그는 교사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행동과 적극적인 자극을 통해 사람들을 깨우치고자 한 부류의 신학자였다. 그는 매우 병약한 자신을 이 과제에 완전히 투여했기 때문에 설득력을 얻었다. 케일리는 그를,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머리를 곧추세우는 깨어있는 새에 비유한 적도 있다.

내가 데이비드 케일리와 한 인터뷰는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지구의 지혜와 함께 하기

 


  • 저자  :  Daniel Christian Wahl
  • 원문 : Indigenous to Life: Being as Expression of Plac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KOSMOS에 실린 크리스천 월의 글 “Indigenous to Life: Being as Expression of Place”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의 주제는 ‘지구의 지혜와 다시 함께하기’(Realignment with Earth Wisdom)이다. 저자 대니얼 크리스천 월(Daniel Christian Wahl)은 서구의 분리 서사가 파괴와 불평등을 초래했지만 이에 대응하여 재생성적인 개발과 재생성적인 문화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으며 이 시점에서 재생성(regeneration)이 생명 자체의 고유 패턴이라는 것과 우리의 공통의 먼 조상들 모두는 생명을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 구성원으로 있는 재생성적인 공동체로서 이해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말한다.

인간으로서 생명을 영위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우리가 집이라고 부르는 장소들과 바이오지역들 안에서 서로 돌보며 살았다. 콜롬비아와 페루의 숲에서부터 태평양 연안 북서부와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르기까지 인간 거주자들이 수천 년에 걸쳐서 더 높은 다양성, 풍요로움, 생물‐생산성에 이르는 최고치의 생태계들을 함께 창조했고 양성했다는 증거가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모두 행성 차원의 과정으로서의 생명()에 토착하고 있다. 지구의 지혜 전통들 다수의 핵심적인 교훈은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생명의 재생성적 패턴들이 우리를 통해 흐르도록 하는 과정으로서의 생명과 함께하는 것이다. 크리스천 월은 이런 식으로 존재할 경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장소의 소유자가 아니라 표현자로서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땅이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땅에 속해 있는 것이며 땅과 바다는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위한 거름으로 돌아간 후에도 오랫동안 그곳에 있으리라는 것이다.

첫째, 지구의 지혜와 함께 하기란 무엇인가? 크리스천 월은 올바른 관계로 살아가는 것이 지구의 지혜와 함께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관계적인 존재들로 우리 각자는 특이하며 생명의 재생성적인 공동체 내부에 있는 친밀한 상호관계의 결합체이다. 따라서 지구의 지혜와 함께하기 위해 우리는 자연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서 배워야 한다. 우리가 자연으로서 배워야 할 것은, 예를 들어 재닌 베니어스(Janine Benyus)가 바이오미미크리(biomimicry, 생태모방)의 핵심적인 교훈으로 제시한 “생명은 생명에 도움이 되는 조건들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인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위해서 도움이 되는 조건들을 창출하기 위해 나서는 경우 생명체로서 우리는 지구의 지혜가 어떻게 우리를 통해 흐르게 하는가?

크리스천 월은 인류가 한 종으로서 살아온 최근의 기록을 살펴보면 우리가 이 물음의 핵심적인 중요성을 망각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우리가 한 행동들—더 정직하게 말해서 인간의 비교적 작은 부분에 속하는 행동들—이 모든 인류에게 종 차원의 ‘통과의례’를 강요했고 그 결과 우리는 현재 대량 멸종 사건의 일환으로서 우리 종의 이른 종말이라는 실질적이고 당면한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크리스천 월은 다시 물음을 제기한다. 우리는 생명의 공동체에서 성숙한 회원이 되어, 그리고 퇴행적이기보다 재생성적인 존재가 되어 적시에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발현하게 될 것인가?

인간이 사는 장소들에는 생명‐문화적 고유성이 있고 이 고유성을 멋들어지게 표현한 것이 다양한 재생성적인 문화들이다. 그는 우리가 이 문화들을 기초로 한 재생성적인 미래를 함께 창출하기 위해서 행동하기, 존재하기 그리고 사고하기에서의 변화는 물론이고 새롭고도 매우 오래된 세계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세상을 조직하는 데 투여되는 기존의 생각들과 문화적으로 지배적인 내러티브들은 생명의 과정을 개체들, 종들로 잘라놓았고 이런 식의 관점은 우리로 하여금 경쟁, 결핍, 죽을 운명에 초점을 맞추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가 내리는 판단이다. 크리스천 월은 이를 극복하고 생명을 다른 식으로 이해하기 위한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는 고대의 토착적인 지혜뿐만 아니라 최첨단 과학에 의지해서 생명을 우주에 존재하는 동향적(動向的) 힘—협동적 풍요를 통해 생명에 도움이 되는 조건들을 창출하는 힘—으로 이해할 것을 권하고 있다. 생명이 행성 차원의 과정임을 크게 강조하는 그는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의 1970년 논문 「형태, 물질 및 차이」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자신의 환경을 파괴하는 유기체는 그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생존의 단위는 환경 속에 있는 유동적인 유기체이다.”

그는 우리가 생명을 우주에 존재하는 동향적 힘으로 이해하기 위해 생명의 진화과정에 의식적으로 참여하는 경우, 존재는 부분인 동시에 전체라는 표면상의 역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관계적인 참여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독립적 존재’와 ‘전체의 상호적 표현으로서의 존재’사이의 양극성에서 발생하지만 우리는 둘 다이며 틱낫한(Thích Nhất Hạnh)이 소개한 사이존재(interbeing)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나바호족(Navajo)이 가진 지구의 지혜인 ‘아름답게 걷기’(‘Hózhóogo Naasháa Doo’)도 바로 이 점을 가리킨다. 그들은 이렇게 조언한다. ‘미래로 걷는다면 아름답게 걸어라.’ 아름답게 걷는 방법은 ‘전부 속의 하나와 하나 속의 전부(the One-in-All and the All-in-One)를 눈앞에 보는 것’이다.

크리스천 월은 재생성적으로 사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이를 설명한다. 재생성적으로 사는 것은 지역과 나라와 전 세계가 역동적으로 공존하는 중첩된 복잡성의 의식적인 표현자로서 그리고 이 복잡성에의 참여자로서 사는 것이다. 이 중첩된 규모들(그림참조)은 더 이상 쓸모가 없는 구조들 및 패턴들의 빠르거나 느린 붕괴 주기, 변형적인 혁신 그리고 새로운 패턴들을 일시적으로 공고히 하여 역동적이고 지속적으로 변형하는 온전체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통합된다. 그는 이러한 과정으로서의 재생성이 생명 자체의 진화적이고 발전적인 충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재생성적으로 행동하기의 핵심은 환경적 변화나 사회적 변화를 예측하고 변형할 수 있는 체계 차원의 치유와 복원력있는 공동체의 구축이다. 하지만 이를 위한 전제조건은 건강(성)과 복원력을 ‘되돌아갈’ 정적인 상태로서가 아니라 변화하는 맥락에도 불구하고 변형하고 활력을 표현하는 역동적인 능력으로서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재생성의 핵심은 ‘순(順)긍정적 영향’(net positive impact)이나 ‘좋은 일하기’ 그 이상이며 모든 개인, 공동체 및 장소의 특유하고 대체 불가능한 본래적 역능을 발현하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이 능력을 발전시켜야 하는가?

크리스천 월의 정의에 따르면 생명은 여러 규모들이 중첩된 재생성적인 공동체이다. 생명은 모든 유핵 세포들을 형성하는 세포기관들의 공동체에서부터 당신과 내가 ‘우리의 몸’이라고 부르는 재생성적인 공동체를 이루는 인간•박테리아•균류세포들의 생태계를 거쳐, 그리고 풍부하고 대단히 바이오 생성적인 생태계들의 기능적 다양성을 창출하는 종들의 공동체를 거쳐 바다 및 육지 생태계가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생명지원 시스템—이것이 지구의 기후패턴과 대기 구성성분을 조절하여 생명에 도움이 되도록 만든다—에 기여하는 살아있는 지구의 생리학까지 걸쳐 있다.

따라서 크리스천 월이 이 글의 주제로 삼은 지구의 지혜와 다시 함께하는 것의 핵심적인 의미는 이 재생성적인 공동체에 더 의식적으로 다시 거주하는 것이며, 중첩된 재생성적인 생명 공동체 내부에서의 우리의 역할로 즉 치유자로서의 역할로 겸허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미래는 우리 각자가 이 공동체에 다시 거주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바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는 어떻게 이 공동체에 다시 거주할 수 있는 것인가? 그는 시인인 스나이더(Gary Snyder)가 1976년에 제기한 발언을 인용해서 그 방법을 제시한다. “우리가 삶을 이어갈 수 있고 [···] 우리가 풀과 태양에 기대 살 수 있는 미래 행성을 상상하는 사람들은 거주하는 사람들(전 세계 토착민들과 농부들)을 지원하기 위해 과학이든, 상상력이든, 힘이든, 정치적 수완이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져오는 수밖에 없다. 그들과 함께 공동의 대의를 만들 때 우리는 ‘다시 거주하게’ 된다.”

크리스천 월이 주장하는 재거주(Re‐inhabitation)는 우리가 거주하는 장소들과 바이오지역들의 맥락에서는 행하기에서의 변화를 그리고 바이오지역들과 맺는 관계방식에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장소장소마다 건강한 생태계 기능들을, 번성하는 공동체들 및 활기찬 경제들을 재생성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재거주는 또한 존재의 변화를 의미하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생성의 과정들—우리를 산출하는 장소들, 공동체들 및 생태계들의 그 자체로 역동적인 표현들인 과정들—로서 다시 인식하는 법을 배울 때 의식의 지형에서 재거주가 활발해지기 때문이다. 현재의 순간에 담겨 있는 미래를 향한 잠재력은 (긴 ‘이행’이나 어떤 ‘거대한 전환’ 이후의 어떤 때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의 몸, 우리의 공동체, 우리의 장소와 바이오지역들을 집으로 삼아 거기에 거주하는 데 있다.

그러나 크리스천 월이 보기에 변화에 대한 우리의 현재 이론은 추상 쪽으로 그리고 문제들을 서로 분리하고 ‘해결책’을 실행할 장소로부터 분리하여 ‘해결하는’ 습관 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우리는 이런 사고방식 안에서 전략을 논의하는 것에 고착되어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제안하며 글을 맺는다.

우리가 바로 지금 다르게 존재하기에 초점을 맞춘다면 어떨까? 우리가 누구인지 재인식하고 사이존재의 행성적 과정으로서의 삶과 좀더 동일시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자신, 공동체 및 생명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어떨까? 우리가 개별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장소를 치유하고 육성하는 표현자들로서 존재할 또는 그런 표현자들이 될 잠재력에 초점을 맞추면 어떨까? 우리가 추상적인 전지구적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고 해결책들의 규모를 키우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습관을 떨쳐버린다면 어떨까? 우리의 존재의 터전인 장소들과 공동체들과의 (함께 진화하는) 상호성 속에서 생명에 도움이 되는 조건들을 창출할 잠재력에 초점을 둔다면 어떨까?




전 세계 LGBT들은 ‘백인 구원자’가 자신들을 구하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다

 

  • 저자 : 루 페레이라(Lou Ferreira). 루는 ‘2020~2021 백래시 추적(2020-2021 Tracking the Backlash)’의 국제 조사 연구원이다.
  • 원문 : LGBT people globally are not waiting for ‘white saviours’ to rescue them (2021. 6. 8) https://www.opendemocracy.net/en/5050/lgbt-people-globally-are-not-waiting-for-white-saviours-to-rescue-them/(This article is published under a Creative Commons Attribution-NonCommercial 4.0 International licence.)
  • 분류 :  번역
  • 옮긴이 : 채희숙
  • 설명 : 이 글은 넷플릭스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를 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피터 태철: 세상이 미워한 남자Hating Peter Tatchell>(크리스토퍼 에이모스Christopher Amos, 호주, 2021)에 관한 짧은 비평글을 번역한 것이다.

전 세계 LGBT들은 피터 태철 덕분에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지만, 넷플릭스의 신규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렇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엘튼 존(Elton John)의 후원으로 지난달에 개봉된 <피터 태철: 세상이 미워한 남자>는 유명하고 논란이 많은 영국의 LGBT 인권 활동가와 그의 반세기 넘는 캠페인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다양한 목소리와 결정적인 맥락을 제외함으로써 이 시기의 더 넓은 이야기를 반영하는 데 실패한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태철을 모든 곳에서 퀴어를 구하는 ‘백인 구원자’와 같은 인물로 보여준다.

이것은 훨씬 더 풍부하고 힘있는 작품일 수 있었다. 그러나 도리어 이 영화를 보면서 세 가지 주요한 이유로 나는 좌절했다.

1. 사라진 목소리들

유명한 게이 배우들인 스티븐 프라이(Stephen Fry)와 이안 맥켈런(Ian McKellen)을 포함에서 거의 전부 백인 남성 영국인인 인터뷰 출연자들은 영국 안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태철의 LGBT 권리를 위한 50년 넘는 캠페인과 시민불복종 활동을 돌아본다.

우리는 태철이 10개국 넘는 곳에서 벌인 시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그가 2018년 축구 월드컵을 앞두고 푸틴의 반LGBT 정책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러시아 여행을 준비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옹호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거의 듣지 못한다. 풀뿌리의 승리들은 당사자가 아닌 영국 유명인들의 이야기들에 가려진다.  

누가 푸틴의 러시아에서 성적 권리에 반대하는 백래시에 따르는 인적 희생을 설명하는가? 스티븐 프라이다. 러시아 LGBT는 체포와 동성애혐오 폭행을 담은 푸티지에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태철 이야기의 소품에 불과한 것처럼 배경에 있다. 우리에게 직접 이야기를 하는 유일한 러시아 활동가에게서 우리가 듣는 것은 태철의 도움에 감사하는 말뿐이다.

2. 사라진 맥락

태철은 영국의 LGBT에게 1980년대는 “악몽과도 같은 시기”[인용은 영화 자막을 따름-옮긴이]였다고 회상한다. 대처의 보수당 정부가 학교에서 동성애를 소위 ‘조장’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 28절을 내놓은 한편 에이즈바이러스(HIV,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의 확산은 반동성애 차별을 악화시켰다. 태철은 동성애자 및 양성애자 체포의 급증을 언급하면서 “경찰은 우릴 보호하지 않고 오히려 박해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사라진 것은 당시의 반인종주의 투쟁을 어떻게든 반영하는 것이다. 1980년대에 경찰의 보호를 기대하는 것은 모두가 누리지는 못하는 특권이었다. 흑인 시민권 운동은 태철이 그 운동에서 자신이 영감을 받았고 “그들의 이상, 가치, 방법을 [배워서] 나의 인권 운동에 적용했습니다”라고 말할 때 잠시 거론된다. 

반LGBT 차별이 어떻게 인종 또는 젠더에 기반을 둔 억압과 교차하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는데, 이는 특히 흑인 트랜스 여성을 폭력의 위험에 처하도록 계속 내버려둔다. 또 스크린에서 밀려나있는 것은 바로, 장애인의 권리에서 광부들의 노동쟁의에 이르기까지 1980년대에 떠오른 영국의 다른 시민권 투쟁들이다.

3. 백인 구원주의?

2001년 태철은 호텔로비에 매복했다가 짐바브웨의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Robert Mugabe)에 대해 고문‘죄’를 근거로 한 시민체포를 극적으로 시도했다. 그는 영화에서 “짐바브웨의 인권 운동가는 제가 국제적으로 무가베 정권의 만행을 알릴 행동을 취해줄 수 있겠냐는 부탁을 해왔습니다”라고 설명한다.

러시아에서 태철에 관해 보도된 바처럼 이 다큐멘터리는 짐바브웨 활동가들에게서 직접적으로 듣는 장면을 오직 하나만 제공한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것은 지역 운동원들이 백인 영국인에게 감사하고 있는 클립이다. 그들이 수년 동안 자국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싸워온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또 다른 장면에서 우리는 태철이 런던의 이슬람사원 바깥에서 캠페인하는 것을 본다. “[우리는] 무슬림 공동체와의 결속력을 다지고자 합니다”라고 그는 설명한다. 런던에는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서 그런 연대를 형성하고 있는, 유색인종이 이끄는 수많은 단체들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점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피터 태철: 세상이 미워한 남자>은 LGBT 권리운동의 전체 역사를 제시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이들의 목소리와 역할을 무시하고, 태철이 세계의 퀴어를 구하는 1인 시위 기계인 것처럼 그를 위치지은 것에 변명이 되지는 않는다.

전 세계 LGBT는 백인 영국 남성이 나서서 자신들을 구해주는 것을 기다리고 있지 않다. LGBT가 그러한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암시하는 것은 그릇된 이해를 낳으며 모욕적이다.  




커먼즈의 비가시성

 


  • 저자  : Peter Linebaugh
  • 원문 : “The Invisibility of the Commons”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피터 라인보의 저서 『섯거라, 도둑아!』(Stop, Thief!, 2014)의 15장 「커먼즈의 비가시성」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에서 라인보는 세 개의 사례를 소개한다. 하나는 1930년대의 것이고, 또 하나는 1790년대의 것이며 마지막 하나는 1940년대의 것이다.

첫째 사례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에쎄이 「마라케시」(“Marrakech”, 1939)이다. (마라케시는 모로코 중앙부의 도시이다.) 갈색 피부를 가진 사람, ‘천한’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 그리고 여성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 이 글의 주요한 논지이다. 가령 장작단을 지고 앞을 지나가는 나이든 여성들의 대열을 보면 오웰 자신의 눈에는 장작단만 지나가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생산물만을 보는 제국주의자의 눈이라고 라인보가 정리해준다. (이렇게 정리해주기 이전에 라인보는 이 글에서 오웰이 인종주의와 비가시성을 주제로 다룬다고 말해놓은 바 있고, 여기에 여성혐오도 추가해야 한다고 덧붙인 바 있다.) 그렇다면 오웰은 제국주의 국가에 속하고 백인에 속하며 남성에 속한 자신의 ‘보지 못하는’ 눈을 스스로 고발한 셈이니 라인보는 오웰의 솔직함을 칭찬하고 말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는다. 그에게 빠져있는 것을 지적한다.

그런데 이 장작은 어디서 오는가? 오웰은 묻지 않는다. 무슨 권리로, 어떤 관습에 의해서 장작을 해오는가? 어떤 투쟁들이 이 관행을 보존했는가?

이어서 라인보는 마그나 카르타의 7장에 나오는 ‘상부한 여성의 에스토버스’(왕이 상부한 여성들에게 부여한, 나무에 대한 권리)((‘에스토버스’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478 참조.))를 언급하고 이는 수 세기에 걸친 투쟁으로 지켜낸 관습임을 지적한다. 오웰은 아마도 비가시성이 가장 높을, 갈색 피부에 육체노동을 하며 나이든 노파를 만난 에피소드를 말한다.

어느 날 키가 120센티가 넘지 않을 여성이 짐을 잔뜩 지고 내 앞을 기다시피해서 지나갔다. 나는 그녀를 세우고는 5수짜리 동전(1 파딩을 조금 넘는다)을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새된 울부짖음으로 대답했다. 고마움의 표현도 들어있었지만 주로 놀라움이었다. 내 생각에 그녀의 관점에서는 내가 그녀의 눈길을 끎으로써 거의 자연법칙을 위반하는 것 같았으리라. 그녀는 노파로서의, 다시 말해서 짐을 나르는 짐승으로서의 그녀의 지위를 받아들였다.

라인보는 오웰이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음을 지적한다. ‘고마움’도 들어있었다는 말이 얼마나 제국주의적인가도 지적한다. 라인보가 보기에 오웰은 인종주의, 여성혐오를 자신의 서술에 투사하지만, 커머너들과 대화할 기회를 갖지는 않는다. 나무는 어디서 해오냐고, 그 나무로 어떤 불을 피우냐고, 그 불이 어떤 어린아이나 나이든 부모를 따뜻하게 하냐고 묻지 않는다. 왜 오웰은 그녀와 대화하지 않은 것일까?라고 라인보는 묻는다.

라인보는 이 에피소드가 보여주는 것이 “제국주의 체제에서 써발턴 역할을 하는 다수에게 특징적인 태도, 자신은 원래 기본적으로 짐승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민중과 대화하기를 거부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고 덧붙이고, 마지막으로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눈을 가지고 볼 때에는(when we see with, not through, the eye) 거짓을 믿게 마련이다.”

둘째 사례는 워즈워스의 자서전적 장시 『서곡』(Prelude) 9권의 한 대목이다. (이 시는 시인의 정신이 혁명과 반혁명의 와중에서 성장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이 대목은 1792년 워즈워스가 프랑스의 보쀠(Michel de Beaupuy)라는 공화주의자를 방문했을 때의 일을 제시한다. 보쀠는 당시 블롸(Blois) 지역의 정치논의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 논의의 핵심은 제한된 제헌군주제에서 급진적인 공화주의 및 왕정의 몰락으로의 이행과 관련된 것이었다. (보쀠는 공화주의를 지지했으며 나중에 혁명을 방어하는 전투에서 죽어 영웅이 된다.)

라인보는 이 대목을 직접 인용한다. 여기 원문 그대로 소개하지만 옮기지는 않고 내용만 설명하도록 하겠다.

And when we chanced
One day to meet a hunger-bitten girl,
Who crept along fitting her languid self
Unto a heifer’s motion—by a cord
Tied to her arm, and picking thus from the lane
Its sustenance, while the girl with her two hands
Was busy knitting in a heartless mood
Of solitude—and at the sight my friend
In agitation said, ‘Tis against that
Which we are fighting! I with him believed
Devoutly that a spirit was abroad
Which could not be withstood; that poverty,
At least like this, would in a little time
Be found no more; that we should see the earth
Unthwarted in her wish to recompense
The industrious and the lowly child of toil
(All institutes for ever blotted out
That legalized exclusion, empty pomp
Abolished, sensual state and cruel power,
Whether by edict of the one or few);
And finally, as sum and crown of all,
Should see the people having a strong hand
In making their own laws. whence better days
To all mankind.

[단어 및 어구 설명]

    • chance + to부정사 : 우연히 ~하다 (= happen + to부정사)
    • hunger-bitten : bitten by hunger
    • languid : (움직임이) 힘없고 느릿느릿한
    • fitting her languid self Unto a heifer’s motion : fit A (un)to B
    • heifer : 어린 암소
    • its sustenance : ‘자기(어린 암소)가 먹을 것’
    • heartless : 낙담한, 풀이 죽은
    • in a little time : ‘시간이 조금 지나면’
    • withstand A : A의 끌림, 영향력, 설득력 등을 뿌리치다 [이 의미로는 주로 부정문으로 쓰인다.]
    • sensual : 세속적인, 물질적인
    • edict : 칙령, 포고령
    • as sum and crown of all, : 여기서 ‘sum’은 ‘최종결과’라는 의미고 ‘crown’은 어떤 과정의 정점을 의미한다.
    • whence : 그 원인으로 → 그 결과(as a result)

 

워즈워스를 포함한 젊은이들은 너도밤나무 숲을 말을 타고 지나던 중 어떤 굶주린 소녀를 만난다. 이 소녀는, 소녀의 팔에 줄로 묶인 상태에서 길에서 먹을 것을 집어먹고 있는 어린 암소의 몸짓에 맞추어 느릿느릿 지나가면서, 의기소침한 상태에서 바쁘게 뜨개질을 하고 있다. 이 모습을 보고 격동한 보쀠는 ‘바로 저런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싸우는 것이야’(‘Tis against that/ Which we are fighting!)라고 말하며, 이에 워즈워스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어떤 [혁명의] 기운이 퍼져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그리고 이런 가난은 이제 곧 볼 수 없게 될 것이며 대지가 노역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주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모든 억압적인 제도가 폐지될 것으로 믿으며 심지어 민중이 자신들의 법을 만드는 데 강한 힘을 발휘하여 인류에게 더 나은 날들이 오리라고 믿는다.

이렇듯 암소지기 소녀의 굶은 모습에서 시작한 워즈워스는 가난의 폐지와 민중의 자치정부의 달성에 대한 이상주의적 희망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오웰의 경우처럼 이 젊은 혁명가들도 그 소녀에게 말을 걸지 않음을 라인보는 지적한다. 동정심에 들떠서 거창한 결론들에 이를 뿐인 것이다. 라인보는 이렇게 쓴다.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 모두 땅에 대한 관습적인 권리를 공격했으며 이는 커머너들이라는 하나의 계급의 자원을 다른 계급, 즉 사유자들이 대대적으로 훔쳤음을 나타낸다. 워즈워스는 그 소녀를 가난하다고만 생각하지 커머너로 보지는 않는다. 그는 의존상태를 보는 것이다. 그 소녀와 대화를 했더라면 워즈워스는 그녀의 자립성을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왜 그러지 않았을까?

라인보가 지적하는 것은 부르주아 혁명이 왕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긍정적 측면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토지와 커머닝 관습의 대대적인 강탈이라는 부정적인 측면도 가진다는 점이다. 당시에 퍼진 ‘정신’에는 바로 이런 맹점이 들어있다. 그래서 라인보는 묻는다. 보쀠가 워즈워스한테 ‘바로 저런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싸우는 것이야’라고 말했을 때 ‘저런 일’은 무엇인가? 굶주림? 기계와 경쟁하기 위해서 맹렬히 뜨개질하는 것? 토지와 오래된 관계를 맺고 있는 커머너? 할스베리(Halsbury)의 『영국의 법』(Laws of England)에 따르면 “커머너가 공유지에서 가지고 있는 몫은 법적 표현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가축의 입으로 풀을 먹는 것이다.” 워즈워스는 바로 이 점을 탐구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제임스(C.L.R. James)의 사례이다. 그의 『변증법에 관한 단상』(Notes on Dialectics)은 1948년 디트로이트의 동지들에게 큰 의미를 가졌었다. 『단상』은 레닌과 트로츠끼가 시작한 것, 즉 헤겔의 변증법(특히 대립물의 통일)의 노동운동에의 적용을 완성하고자 한 저작이다. 노동운동은 역사의 매 단계에서 자신이 극복할 대립물을 만난다는 것이 그 핵심 취지이다. 『단상』은 유럽, 미국 등지에서 2차 대전 후에 발전한 맑스주의 혁명가들의 소그룹들에게 큰 중요성을 가졌으며, 1955년-68년 시기에 제3세계 해방운동과 제1세계 노동운동의 반란을 환영하는 저서였다. 그런데 여기에도 맹점이 있다. 1981년에 『단상』을 공부한 라이보가 보기에 이 책에서 해방적인 것은 164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의 노동운동의 개념의 통일성이었다. 제임스는 이 통일성을 부르주아 실증주의의 단계론적 범주들(봉건주의-자본주의-사회주의)에 대립시켜 파악했다. 이러한 강력한 사고에도 불구하고 커먼즈는 제임스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네바다의 레노에 주거지를 확립하기 위해 가 있을 때(주거지 확립의 목적은 이혼을 위한 것이었다) 레노 근처의 목장에서 지냈다. 이 목장은 원주민 부족에게 속해 있었으며 상업화되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잡역부로 일했는데, 그의 동료 노동자들은 선원들, 카우보이들, 필리핀인들, 멕시코인들, 중국인들, 중서부에서 온 유럽 출신의 백인들이었다. 그는 토착민들보다는 이들에게 끌렸다. 그가 본 중에 가장 잘 생긴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달리 이곳의 토착민들은 땅딸막했다. 그는 이 모든 사람들과 많이 사귀지는 않았다. 1948년 8월에서 11월까지 게링(Guerin)의 『프랑스 대혁명』을 번역했고 『단상』을 집필했다. 목장은 피라미드 호수(Pyramid Lake) 옆에 있었다.

그가 집필하고 있을 때 그의 주변에서는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전쟁, 파이우트족(the Paiutes)이 자신들의 공유지를 되찾기 위해 벌이는 게릴라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네바 다대학교의 사회역사가인 둬킨(Denis Dworkin)은 이렇게 썼다.

맑스주의자이자 대영제국의 백성으로서 제임스가 파이우트족을 그 자신이 속한 것과 같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라는 세계사적 과정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확실히 타당했다. 그러나 목장이 원주민보호구역에 있었다는 점을 그가 인정한다는 점은 제쳐놓고, 제임스가 토지분쟁은 말할 것도 없고 그곳의 주민들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증거가 한 조각도 없다.

이어서 라인보는 파이우트족의 삶을 그린 책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이곳의 토지가 종획된 역사(보호구역은 그 결과이다)를 이런저런 책들을 들며 말해준다. 그러는 가운데 일자리를 찾는 백인노동자와 먹을 것을 찾는 원주민의 차이를 짚어주기도 한다. “일자리를 찾는 사람은 사장에게서만 임금을 발견하지만, 파이우트족은 보존되는 한에서만 자원을 발견한다.”

제임스가 네바다를 떠난 후 1년 뒤에 뉴욕시민 작가인 리블링(A.J. Liebling)이 같은 목적으로 피라미드 호수 목장에 오는데, 음식 및 스포츠 담당 작가인 리블링은 제임스와 달리 파이우트족의 분쟁에 완전히 빠져들어서 여러 요구들의 합법성과 파이우트족과 관련된 제반 사항들에 관심을 갖고 뉴욕으로 돌아온다. 그는 파이우트족과 “미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는 원주민 전쟁”에 대한 일련의 글들을 써서 1955년에 출판한다.

파이우트족의 주된 적(敵)인 맥캐런(Pat McCarran) 상원의원은 조 매카시(Joe McCarthy)의 측근이었으며 1952년의 맥캐런법―코뮤니스트들, 체제전복자들, 동반자들[코뮤니즘에 공감하는 비코뮤니스트들]]이 미국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 법―의 후원자였다.

1985년에 미국대법원은 자신들이 천년 동안 살아온 토지에 대한 파이우트족의 모든 권리주장을 부인하는 판결을 내린다.

제임스는 1950년의 국가안보법(Internal Security Act)으로 엘리스 아일랜드에 투옥되었다. 그의 항소는 그가 코뮤니스트라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라인보는 제임스는 코뮤니스트가 아니라고 정중하게 바로잡는다. 그가 맑스주의 혁명가이기는 하지만, 코뮤니스트는 아니라는 말이다. 양자의 차이는 그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도 모르고 판사도 몰랐다고 하면서.

맥캐런 상원의원은 원주민 커먼즈를 파괴하고자 했으며 코뮤니스트들이 미국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했다. 제임스는 자신이 공산당의 당원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코뮤니스트가 아니라고 불만을 표할지 모르지만, 그는 분명 자본주의의 반대자였으며 노동자혁명의 옹호자였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파이우트족의 삶의 방식에 내재한 커머닝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 투쟁의 한가운데에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라인보는 이 세 사례를 한데 모아 정리한다. 그는 다른 면에서는 날카로운 이 세 사람의 눈을 방해한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 라인보는, 자신은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진정한 변증법인 대화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만 제시할 수 있다고 한다. [라인보 자신은 그런 말을 안 했지만, 정리자가 보기에는 여기서 헤겔의 변증법이 바흐친의 ‘대화적 상상력’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그러면 또한 물어야 할 것은 그들이 못 본 커먼즈를 우리는 어떻게 볼 수 있는가이다. 많은 연구가 숲의 나무를 땔감으로 취할 권리를 발굴해냈고 이것이 우리를 이른바 커머닝의 한 형태로서의 ‘나무 절도’에 민감하게 만든다. 토착민 커먼즈는 이제 국제법의 주제가 되었다.

[땔감 채취, 먹을 것 채취, 땅]을 커머닝으로 보는 것이 무슨 이득을 가져오는가? 강탈의 보편화(universality of expropriation)에서 그 답이 나오며, 이 범죄들을 바로잡는 방법은, 상실되고 박탈된 것에 대한 배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정리자 논평]

라인보는 여기서 글을 맺지만, 우리는 “강탈의 보편화에서 그 답이 나”온다는 말을 (그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라도) 좀더 숙고해야 할 듯하다. 우리가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자본주의적 관계는 지구 전역에서 일어나는 커먼즈의 강탈(사유화)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이른바 자본의 시초축적 단계나 노동의 자본에의 ‘형식적 포섭’의 시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 포섭’의 시기에도, 즉 지금도 계속된다. 자본은 끊임없이 공통적인 것을 (예전에는 주로 이윤의 형태로, 얼만 전부터는 주로 자산소득의 형태로) 사유화하여 자신을 불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너무나 익숙한 현실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를 세상의 법칙인 양 당연히 여기며 더 나아가 선망하고 욕망한다.

자본주의적 관계가 그 자체에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를 포함한다는 점을 정밀하게 분석한 사람은 역시 맑스이다. 맑스는 『자본론』 3권 15장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세 개의 주요한 사실”을 제시한다. 그 첫째와 둘째는 다음과 같다.

(1) 소수인의 수중에 생산수단이 집중된다. 이를 통하여 생산수단은 직접적 노동자의 소유로서 나타나지 않게 되며, 그 반대로 사회적 생산능력으로 전환된다. 비록 생산수단은 처음에는 자본가의 사유 재산이긴 하지만 말이다. 자본가들은 부르주아 사회의 수탁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수탁의 모든 과실을 혼자 취득한다.
(2) 노동 자체가 사회적 노동으로 조직된다. 협력, 분업, 노동과 자연과학의 결합을 통하여.
 이 두 가지 점에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사적 소유와 사적 노동 모두를―비록 대립적인 형태로이긴 하지만―지양한다.

(1)은 비록 자본가의 사유재산이 되었기는 하지만 생산수단이 사회적 생산능력으로 전환된 측면을 지칭하며, (2)는 노동이 비록 자본가의 처분에 맡겨진 것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노동으로 조직된 것을 지칭한다. “자본가는 부르주아 사회의 수탁자인데도 불구하고 이 수탁의 모든 과실을 혼자 취득한다”―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생산이 사회적이므로 그 과실은 잠재적으로는(virtually) 사회 전체의 것, 즉 공통적인 것인데 실제적으로는(actually) 자본가가 (이윤의 형태로) 사유화한다는 말이다. (‘과실’은 생산된 총 가치에서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과 투자된 자본의 재생산 비용은 뺀 것이다.) “사적 소유와 사적 노동 모두를”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과실은 잠재적으로는 자본가의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노동자의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사회 전체의 것이다. 이 잠재적인 측면에 바로 커먼즈가 숨어 있다. 그런데 자본가는 언제나, 혹은 상황이 안 좋아지면 과실(이윤)을 증가시키기 위해 임금을 삭감하여 그 일부를 자신의 이윤으로 취하려고 하고, 노동자들은 당연히 노조를 만드는 등의 방식으로 방어하려고 한다. 고정된 양의 과실을 놓고 이윤과 임금이 자신이 몫을 더 크게 하려는 싸움이 벌어진다. 여기서 커먼즈는 보이지 않는다.  자본가의 사유재산 증식 욕심이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침탈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약자인 노동자의 입장에서 방어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커먼즈가 숨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자본이 판을 그렇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공장을 떠나 생산과정 바깥에서 공통적인 것을 착취하는 금융자본(월가가 대표하는 유형의 자본)이 자본의 주된 세력이 되었을 때 그 변증법적 대립의 상대를 잃은 노동자는 더욱더 힘이 약화된다. 노동자의 힘의 약화는 그 자체로 공통적인 것의 약화이다. 인간의 생산능력이야말로 진정한 부의 핵심적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공통적인 것을 침탈하고 훼손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는 지금 인류를 강타하고 있는 팬데믹이 (특히 자본주의의 발달 정도가 높은 만큼이나 공통적인 것의 침탈 정도가 높은 미국의 경우에) 잘 보여주고 있으며, 앞으로 점점 더 악화될 기후위기는 이를 더욱더 높은 정도로 보여줄 것이다. 이제는 삶의 번성을 위해서는 물론이요 다가오는 위기를 잘 극복하기 위해서도 커먼즈(공통적인 것)의 가시화와 번성이 몹시 필요하다. [정백수]

 




미국 대통령의 전쟁범죄들

 


  • 저자  : Noam Chomsky
  • 원문 : Noam Chomsky – The Crimes of U.S. Presidents https://www.youtube.com/watch?v=5BXtgq0Nhsc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2003년 미국의 언어학자이자 정치평론가인 촘스키가 한 대담에서 2차 대전 후 미국 대통령들의 저지른, 전쟁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들을 죽 열거하는 부분(유튜브 동영상)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질문자가 누군지는 동영상의 정보에 들어있지 않다. 처음에 ‘뉘른베르크 원칙’을 언급하면서 시작하는데, 뉘른베르크 원칙은 전쟁범죄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결정하는 일단의 가이드라인들이다. 이 원칙들은 2차 대전 이후 뉘른베르크 정의궁에서 진행된 나치당원들의 재판의 기저에 깔려있는 법적 원칙들을 법제화하기 위해 유엔의 국제법위원회에 의해 작성되었다. ‘뉘른베르크 원칙’의 제6원칙은 다음과 같다. 

    제6원칙 : 아래의 범죄는 국제법상의 범죄로 처벌된다.

    (a) 평화에 반한 범죄
    (1) 침략전쟁(a war of aggression) 또는 국제조약, 합의 또는 확약에 위반되는 전쟁을 계획, 준비, 개시, 수해하는 행위
    (2) 앞의 (1)에 언급된 행위의 완성을 위하여 공동의 계획 또는 음모에 가담하는 행위
    (b) 전쟁 범죄
    목적을 불문하고 점령지의 민간인에 대한 살인, 학대 또는 노예노동을 위한 강제이주, 전쟁포로의 살인 또는 학대, 공해상에서의 민간인의 살인 또는 학대, 인질의 살해, 공공 재산 또는 사유재산의 약탈, 도시 또는 촌락의 무분별한 파괴 또는 군사적으로 불필요한 초토화 행위를 포함하여 전쟁법과 전쟁 관습을 위반하는 여타 행위
    (c) 인도에 반한 범죄
    평화에 반한 범죄 또는 여타 전쟁범죄의 일환으로 또는 그와 연결되어 민간인에게 저질러진 살인, 절멸, 노예화, 강제이주 및 여타 비인도적 행위 또는 정치적, 인종적, 종교적 이유에 기인한 박해
    이상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udfks7&logNo=220136045897&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참조.

 


문: 진행자) 
뉘른베르크 원칙에 따르면 2차 대전 후의 대통령들이 범죄자일 수 있다고 말하셨는데요?
답: 촘스키)
십중팔구 맞습니다.

문)
어떤 죄를 지었는지 빨리 살펴볼까요?
답)
아이젠하워는 이란의 보수적인 민족주의 정부를 군사쿠데타로 전복시켰습니다. 그는 과테말라의 처음이자 마지막 민주정부를 군사쿠테타와 침공으로 전복시켰습니다. 이란에서는 그 결과로 25년 동안의 잔인한 독재가 들어섰고 79년에 결국 전복되었습니다. 과테말라에서는 그 결과로 대대적인 악행이 저질러졌으며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알려진 일입니다만, 인도네시아에서 그는 쿠바와 니카라과 때까지 전후 시기의 주요 비밀테러공작을 실행했습니다. 이는 인도네시아를 분열시키고 대부분의 자원이 몰려있는 외곽의 섬들을 탈취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 당시에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인도네시아가 민주화될 가능성을 붕괴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매우 자유롭고 개방되어 있어서 빈자의 정당이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입지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아이젠하워는 외곽의 섬들에서 군사반란을 지원하고 부추겼습니다.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은 기소되어야 할 범법들입니다.

문)
케네디는 어떤가요?
답)
케네디는 최악의 대통령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장 먼저 거론할 것은 월남 침공입니다. 그 이전에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1954년에 정치적 화해를 봉쇄하고 라틴아메리카 스타일의 테러 국가를 수립한 바 있는데, 이 테러 국가가 아이젠하워 임기 말에 6만 혹은 7만 명쯤 되는 사람들을 살해했습니다. 이에 대한 반응이 일었는데 케네디가 이해하기로 이 반응은 내적으로 통제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래서 침공했던 것입니다. 1962년에 남부에서 수행된 폭격의 3분의 1이 미공군에 의한 것이었습니다.[정리자―공식 역사에서는 미군이 1964년 8월부터 개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월남 휘장을 단 미국 비행기들이고, 미국 조종사들이죠. 케네디는 네이팜탄을 승인했습니다. 그는 농작물을 파괴하는 데 화학무기들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강제수용소나 다름없는 곳에 몰아넣는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정당한 이유 없는 침략이죠. 쿠바의 경우 그것은 대대적인 국제테러리즘 작전이었습니다. 이는 세계의 파멸을 가져올 뻔했고, 미사일 위기를 낳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열거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기소되어야 할 범법들입니다.

문) 
존슨은요?
답)
존슨은 인도차이나에서의 전쟁을 확대하여 결국 3백만 혹은 4백만 명의 사람들이 죽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도미니카 공화국을 침략하여 그곳에서 잠재적인 민주적 혁명으로 보였던 것을 봉쇄했으며 초기 단계에 있던 이스라엘의 중동지역 점령을 지지했습니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 전 세계를 돌며 사례들을 열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카터를 보세요.

문)
닉슨이 다음 순서입니다.
답)
닉슨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네요. 건너뛰어도 되겠어요.

문)
좋습니다. 그러면 포드는요?
답) 
포드는 대통령 자리에 얼마 안 있었지만,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략을 승인할 만큼 오래 머물러 있기는 했습니다. 동티모르는 현대 시기에 그 어떤 것 못지않게 대량학살에 근접한 것이 되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동티모르 침략에 반대하는 척하면서도 비밀리에 지원했으며, 사실 그렇게 비밀스럽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침략 직후에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유엔 안보리에서 이 침략을 규탄하는 대열에 끼었지만, 모이니핸(Moynihan) 주 유엔 미국대사가 친절하게도 우리에게 설명해주기로는, 그가 받은 지시는 유엔이 침략에 반대하여 취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완전히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 일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으며 그 다음 문장에서는 “그 다음 몇 달 동안 약 6만 명의 사람들이 살해되었다”고 말하고는 그 다음 주제로 넘어갔습니다. 그가 말한 “몇 달”이란 처음 몇 달을 말합니다. 살해당한 사람은 나중에 필시 수십만 명에 이르렀을 겁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무기의 보이콧을 선언했지만 비밀리에 무기공급을 증가시켰으며 여기에는 대(對)반란용 장비가 포함됩니다. 이로써 인도네시아의 침략이 정점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으로 재직한 짧은 시기에 이런 일이 있어났으며 이는 사실 중대하게 기소되어야 할 큰 전쟁범죄입니다.

문)
카터는요?
답)
인도네시아의 악행들이 증가하면서(1978년에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카터는 인도네시아로 흘러들어가는 무기의 양을 증가시켰습니다. 의회에서 인권 관련 제한을 부과하여―그 당시 의회에 인권운동이 있었습니다― 고급 무기가 인도네시아로 유입되는 것을 봉쇄했을 때 카터는 부통령 먼데일을 통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미국의 스카이호크를 인도네시아에 보내서 대량학살에 가까운 사건으로 드러난 것(대략 인구의 4분의 1이 살해되었을 겁니다)을 완성하도록 했습니다.

중동에서 카터는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최고의 성과는 캠프데이비드 협정(Camp David agreements)[1978년 9월 17일]입니다. 이 협정은 미국의 외교적 승리로서 제시됩니다만 사실 이 협정은 외교적 재난입니다. 캠프데이비드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은 1971년에 이집트가 한 제안을 마침내 받아들입니다. 이 제안은 1971년 당시에는 미국이 거부했는데 이제 이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포함했기에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점에서는 더 나쁜 것이었습니다. 큰 전쟁들, 악행들 등이 벌어진 후에 이스라엘로 하여금 1971년의 이집트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카터는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 및 기타 원조를 세계 전체에 대한 원조의 50% 이상으로 올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즉시 그 원조를 정신이 제대로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을 바로 그 방식으로, 즉 북쪽의 이웃을 공격하고(처음에는 1978년, 그 다음에는 1982년) 점령 지역의 통합성을 증가시키는 데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며, 우리는 계속 열거할 수 있습니다.

문)
레이건은요?
답)
이 사람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레이건은 국제사법재판소(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에 의해서 무력의 불법적 사용(니카라과와의 전쟁에서 보인 국제테러리즘을 말합니다)으로 규탄을 받은 최초의 대통령입니다. 이것도 시작일 뿐입니다. 유엔 안보리도 두 개의 결의안에서 국제범죄의 규탄을 승인했는데, 둘 다에 대해 미국은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문)
부시 1세는요?
답)
파나마 침공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파마나인들에 따르면 파나마 침공으로 약 3천 명의 사람들이 살해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조사된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수치가 맞는지 아닌지 누가 알까요. 미국이 파나마를 침공한 것은 그 최악의 악행들에 걸쳐서까지 미국이 지원해준 바 있는, 말 안 듣는 폭력배 노리에가를 납치하기 위해서입니다. (노리에가는 플로리다로 데려와져서 대부분 CIA의 돈을 받고 저지른 범죄들에 대해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 일은 이유 없는 침략에 해당됩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해 상세하게 말할 수도 있는데, 현실화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외교적 타결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외교적 타결을 고려하기를 거부했으며 언론도 단 하나의 예외인 롱 아일랜드의 <뉴스데이>(Newsday) 말고는 보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뉴스데이>는 전체를 속속들이 정확하게 보도했으며 미국에서 그렇게 한 유일한 신문입니다.

그래서 부시 행정부는 공격했으며 이 공격은 전시법 상으로 범죄에 해당하는 방식으로 수행되었습니다. 그들은 기반시설을 공격했습니다. 가령 누가 뉴욕시를 공격하면서 전력시스템, 하수시스템 등을 파괴한다면, 이는 생물학전이나 다름없습니다. 바로 이런 공격을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경제제재 체제가 옵니다. 이는 대부분 클린턴 때의 일이지만, 부시 때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적게 잡아도 수십만 명을 살해했습니다. 한편으로 사담 후세인을 강화시키면서 말입니다. 여기서 클린턴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시작이지 결코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죽 열거할 수 있는데, 그 한 사례로 충분합니다. 다른 사례들이 많습니다만.

문)
부시 2세는요?
답)
클린턴 이야기를 더 합시다. 클린턴의 사소한, 아주 사소한 탈선 가운데 하나는 크루즈 미사일 두세 개를 수단에 보내서 의약공장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을 파괴한 일입니다. 첩보상의 실패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접한 유일한 것인, 독일 대사와 수단에서 현장연구를 하는 근동재단(Near East Foundation)의 지역 책임자의 추산에 따르면, 한 방의 미사일 공격으로 수만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이는 매우 심각합니다. 만일 누군가 우리에게 그런 일을 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나쁜 짓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열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동에서 클린턴은 지난 유엔 결의안들이 (그의 행정부의 말로는) “낡고 시대착오적인” 것임을 선언함으로써 시작했습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더 이상 국제법은 없는 것이죠. 그런 다음에 평화프로세스라고 불리는 시기가 옵니다만 이 평화프로세스 동안 이스라엘인들의 정착―이는 미국의 납세자들이 돈을 지불하고 미국의 군사적 원조와 외교가 돕는 정착입니다―이 계속 증가했습니다. 극에 달한 때는 클린턴의 임기 마지막 해였습니다. 정착이 1992년 이래 최고 수준에 이르죠. 그러는 동안 점령 지역은 기반시설 프로젝트와 새로운 정착민을 갖춘 작은 지역들로 구획되었습니다. 이것을 뭐라고 부르는지를 모르겠는데, 여하튼 군사점령 아래 놓여있죠. 만일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전쟁범죄라고 부를 겁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는 싶은데··· [정리자―맨 마지막 말이 거의 들리지 않는데 자막 파일에는 ‘I don’t think we have to discuss.’(논할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부록>

[가장 극적으로 미국 민중의 뒤통수를 오바마가 빠진 것이 아쉬웠던 차에(2003년의 대담이라서 2009년에 대통령이 된 오바마는 빠질 수밖에 없다), 비록 국제범죄의 맥락은 아니고 다른 맥락에서지만 촘스키가 오바마를 거론한 짧은 동영상 Noam Chomsky on Why ‘Obama Sold Out Working People Within Two Years’을 발견했기에 여기 그 내용을 정리해서 부록으로 달아본다.]

===

[촘스키]
시기마다 다릅니다. 많이들 언급하는 60년대를 예로 들어봅시다. 시민권 운동 이후 이슈들은 많지만 당시 큰 이슈는 인도차이나 전쟁이었습니다. 당시에 인도차이나 전쟁에 항의하는 대중운동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60년대 말 2-3년 동안에는 있었습니다. 내가 살던 (자유주의적 언론이 존재하는, 필시 미국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인 도시일) 보스턴에서는 1966년에도 공개적 시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보다도 학생들에 의해서 과격하게 해산되었기 때문입니다. 굉장하죠. 뭐라도 움직임을 일으키는 것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67에 돌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다음에 엄청 커졌습니다. 불행히도 이 움직임은 70년대 초에 너무 일찍 사그라졌습니다. 물러나자마자 곧 반동이 잔뜩 몰려듭니다.

오바마의 경우에도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좌파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좌파에 속해있다는 것을 잊고는 ‘좋아, 여기 언변이 뛰어나고 놀라운 마케팅 기술을 가진 멋진 친구가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필시 기억하겠지만, 첫 선거에서 그는 ‘베스트 마케팅 캠프’ 상을 받았습니다. 어떻든 좌파는 자신들이 그의 멋진 말에 귀를 기울이고는 ’좋아, 우리는 그를 믿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2년 내에 오바마가 노동자들을 너무나도 완전하게 배반하여 좌파는 오바마를 포기해버렸습니다. 이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 2년 동안에 일이 잘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의회는 오바마 편이었는데, 빠진 것 하나가 좌파의 행동이었습니다. 만일 좌파가 행동했더라면 오바마와 민주당으로 하여금 멋진 말들의 일부라도 실현하도록 압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압박을 거둬들이는 순간, 끝입니다. 이전의 상태로 바로 돌아갑니다. 이는 결코 해서는 안될 실수입니다.




팬데믹 시대에 공동체를 양육하기

 


  • 저자  : Andreas Weber
  • 원문 :  “Nourishing community in pandemic times” (2020. 4. 22) /https://in.boell.org/en/nourishing-community-pandemic-times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하인리히 뵐 재단>의 싸이트에 올라있는 베버의 글 “Nourishing community in pandemic times”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내용정리이지만 잘 읽힐 수 있게 베버를 1인칭 화자로서 유지했다.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가 애니미즘의 핵심이다.”(([원주] Tim Ingold, in Graham Harvey, ed., The Handbook of Contemporary Animism, London & New York, Routledge, 2013, p. 224))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지구가 커먼즈이며 우리가 우리의 삶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생각은 합리적인 개념에서보다는 정서적인 욕구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접촉을 제한함으로써 고생스러움을 받아들인다. 인류는 상호성을 우선하기로 했다. 상호성, 즉 상호간의 돌봄은 추상적인 개념도 경제정책도 아니며, 공유관계의 경험이자 궁극적으로 삶의 공동체를 온전하게 지키는 경험이다. 이 삶의 공동체는 인류만이 아니라 인간 이외의 존재들도 포함한다. 생명활동에 관여되는 물질대사 과정이 다른 존재들과 공유하는 공동체를 양육하는 과정임을 이해해야만 우리가 타자들—인간과 비인간 존재들(human and non-human beings)—을 효율적인 취급이 필요한 대상들(객체들)로 다루는 데서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정치는 공동체 내부에 풍성한 삶을 창출하는 경험을,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을 친족으로 생각하는 경험을, 그리고 타자의 안녕을 우선시하는 경험을 포함할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애니미즘적’이라고 불리는 사회들이 이 입장을 받아들인 바 있다. 우리는 삶의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이 애니미즘 사회들이 주는 교훈들이 존재의 거대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행동을 상호성의 에티켓에 입각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이 교훈들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1. 코로나와 공동선

전 세계적으로 팬데믹이 돌고 있는 2020년 4월, 세계가 이동을 멈추었고 분주한 세계 경제도 멈춰 섰다. 멈춘 것은 전형적으로 서구적인 방식의 활동들 가운데 일부—세계 여행, 항공 교통,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교역과 소비 그리고 다수의 개인적인 활동들—이다. 비행기들과 자동차들이 거의 없어져 조용하고 평소와는 다르게 대기가 깨끗하며, 이 속에서 도시 거주자들은 오랜만에 처음으로 자신들과 함께 사는 야생동물들이 내는 소리를, 새와 벌레들이 내는 소리들을 듣는다.

인류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멈춰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락다운 조치는 개별 경쟁을 통해서 경제를 밀어붙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내려졌다. 락다운이 가져온 고요 속에서 더 광범한 공동체가 느껴진다. 밤에 빛나는 별들의 고요, 윙윙거리는 호박벌들 그리고 인도 구관조의 울음소리가 느껴진다. 그런데 이것은 낭만적인 순간이 아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 수백 만 명의 사람들에게 자가격리 명령은 빈곤이자 심지어 굶주림이라는 실존적인 위협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이주 노동자들에게는 머물 집조차 없으며, 폐쇄된 공간에 앉아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우울증과 ‘수용소 유행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고 가족들 내의 폭력이 급증했다.

락다운 상황은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개인은 자신이 모든 타자들과 함께 구성하는 집단이 번성할 수 있을 때에만 살아 갈수 있음을—드러냈다. 이 사회적 본성은 신자유주의가 계속해서 감추는 사실이다. 바이러스는 인류가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도록 하는 데, 다시 말해 자리에 앉아 조용히 하고 공동체에 속한 다른 사람들이 보호받도록 행동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인류는 사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노동을 통한 생계확보조차 멈출 각오가 되어 있지만, 이런 상황이 전체주의 체제에 의해 이용될 매우 실질적인 위험이 전 세계 많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 락다운에 의한 자유의 축소가 유럽 나라들을 포함해서 몇몇 나라들의 영구적인 규칙으로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자유가 축소되더라도 지금 인류가 순전히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오히려 인류는 연결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각자가 공동체적인 것을 대표한다는 경험에 기반을 두고 행동하고 있다.

바이러스가 일시적으로 인간 생태계를 바꾸었다. 우리는 속도를 줄였고 타자들에게 공간을 내주며 앉아서 귀를 기울인다.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더 약한 사람들, 더 취약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그리고 생태론적 관점에서는 심지어 인간이 아닌 다른 살아있는 존재들(식물들, 동물들, 개울들, 숲들, 바위들, 산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반응하고 있다. 잠깐 사이에 신자유주의 세계의 핵심 기둥이 무너져 버렸다. 실존적인 위협 하에서는 삶을 보호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할지에 관한 일종의 합의—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함입되어 있는 살아있는 관계의 망을 보호하자는 합의—가 등장한다. 이것은 취약한 타자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대한 답이기도 한데, 우리의 순수하게 경제적인 관점으로는 찾을 수 없는 답이다.

그런데 이제 Covid-19 하에서 많은 숙고를 하지 않고도 그 답이 나온 것이다. 기술과 관련된 계획이나 긴 토론을 이어가지 않고도 그 답은 이미 우리 눈앞에서 현실로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그런 계획이나 토론에 동의하거나 반대할 더 많은 기회를 갖지 않고도 우리는 취약하고 전염되는 우리 자신의 몸을 가지고 그 답을 제시한다. 이 몸들이 호흡하면서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입자들을 풀어놓거나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락다운 조치는 정치적인 답이 아니라 오히려 생태학적인 답이며 생태학 개념들이 정치학 개념들을 대체한 것이다. 락다운 조치로 우리가 살아있는 공동체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났으며, 우리의 공동체는 인류 집단보다 더 크며 지구 전제를 포함한다.

 

  1. 생태학적 스트레스 테스트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인류의 전지구적 대응이 전적으로 생태학적 사건이라는 점은 아직 널리 인식되지 못하고 있지만, 코로나바이러스의 발생은 그 자체로 생태학적인 사건이자 그 발생의 원인도 생태학적이므로 팬데믹은 생태학적인 재앙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질병은 단지 공중위생에만 관련되는 인간만의 문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가령 SARS-CoV2는 의심할 여지없이 인간에게 전파된 동물 바이러스로, 이런 종류의 교차 유전자형들은 인간이 주로 식용고기로 사냥되고 팔리는 희귀한 야생동물들과 너무 가까이 접촉하기 때문에 발생하고 또한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도 발생한다. 따라서 코로나 바이러스의 발생은 서식지를 파괴하고, 희귀종 동물들을 대량 소비한 결과이며, 인간이 인간적이지 않은 것에 침입한 결과이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팬데믹은 인간 생태계에, 우리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즉각적인 변화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이상의 살아있는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에도 즉각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적어도 당장은 타자들—인간과 비인간—에게 공간을 허용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볼 때 코로나바이러스 발생은 타자들(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에게 상호성과 공간 허용하기를 거부한 결과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은 지구화주의자들의 사고방식에 내장된, 대상화하는 그들의 태도를 나타낸다. 지구화주의자들은 저 타자들은 단지 사물들이므로 그 사물들에게 공간을 허용할 필요가 없으며, 시장의 힘으로 사물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재배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은 지구화주의자들의 이 생각이 틀렸음을 ‘상호성’으로 입증한다. 팬데믹은 상호성—우리 자신이 살 공간을 지키기 위하여 타자들에게 살 공간을 허용하는 것—이 핵심적인 생태학적인 특질이자 우리가 생태학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핵심으로서 우리에게 요청되는 바의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팬데믹은 상호성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필연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우리는 생태학적 상호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생태권(biosphere)의 일부로 생태권에 의해 영양분을 공급받고 생태권의 바이러스들을 통해서 사망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있기 전까지 우리는 이것을 간과했고 팬데믹을 겪으면서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집단적인 삶의 일부이고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처럼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그리하여 탄생과 죽음의 순환에 참여하고 결국에는 우리도 삶에 풍성함을 제공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 미생물이 서양 인지 제국을 파괴하다

타자들에게 삶—자신의 존재를 조직하고 사회를 만들어내라는 핵심 명령—을 허용하는 것은 결코 시장주의적 사고의 관심사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시장주의적 사고는 이것을 장애물로 여겼다. 시장주의적 사고에서 현실은 (홉스가 자신의 책 『레비아탄』Leviathan에서 묘사한 ‘자연 상태’에서는)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세상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런 식의 사고에서는 살아있는 세상과의 상호성이 순진한 꿈으로 비난받는다.

홉스를 추종하는 사회경제적 사고의 지배적인 전통에서 ‘사회계약’은 개별 인간들이 국가의 힘에 굴복함으로써 안정적인 생계를 확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 안정성은 삶에 필요한 공간을 타자들에게 허용하는 인간의 능력을 통해서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사회계약은 권력을 쥔 소집단의 사람들이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순전한 경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물질적 교환을 감독하고 허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홉스의 구도에서는 자연과 인간 사회가 서로 적대적이다. 자연은 죽은 것들로 구성되는 세계이며, 인간사회는 자연과 싸우기 위한 협약을 기초로 해서 세워진다. 이 구도의 특징은 서구식 사고방식을 여전히 깊게 형성하고 있는 고전적인 ‘이원론적 분할’에, 즉 문화를 자연과 분리하고 비인간 존재들을 ‘사물들’로 보는 데 있다. 포르투갈의 사회학자 싼또스(Boaventura de Sousa Santos)는 이런 분할이 이루어지는 서양을 ‘서양 인지 제국’(Western Cognitive Empire)이라 칭했고, 프랑스 사회학자 라투르(Bruno Latour)는 서양 인지 제국의 관행을 ‘괴물들’의 창조라고 부른다. 괴물은 우리가 살아있는 세계(상호성을 제공받음으로써 삶을 창조하는 세계)를 자연과 사회로 분할할 때 생겨난다. 그러나 이 분할을 달성하겠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사회는 결코 실질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인간을 자연에서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팬데믹이 발생하자 그 물질적 과정(바이러스 확산, 인체의 감염)이 문화와 사회를 바꾸고, 사회적 조치들을 바꾼다. 자연 즉 야생동물에서 비롯한 바이러스가 사회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하고 바이러스가 활동할 공간을 어떻게 제공할지를 결정한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저 바깥에 있는 사물들을’ 사회가 바라는 대로 다룰 수 있다는 근대주의적 주장을 무너뜨린다. 심지어 코로나바이러스는, 더 높은 효율성에 도달한 사회가 지속가능한 행동들을 실행함으로써, 그리고 사회와 ‘자연’ 사이에 더 큰 보존영역들과 완충지대들을 창조함으로써 근대주의의 문제들을 처리할 수 있다는 생각도 무너뜨린다. 지속가능한 행동들은 여전히 현실의 비인간적 부분들—비인간 존재들과 자연력들—을 행위자들로서가 아니라 사물들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팬데믹 하에서 우리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세상은 대상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합당한 만큼의 상호성으로 대할 필요가 있는 타자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서양 인지 제국은 (모든 비인간 존재들과 종종은 일부 사람들을 포함하는) ‘대상들’과 상호간에 사회적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사회 구성원들 사이를 가르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따라서 세워졌다. 이러한 인지 제국은 계약으로 사회에 진입하지 못하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대상들로 구성된 죽은 자연의 일부로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식민주의를 낳을 수밖에 없는데, 식민주의는 사회 바깥의 타자들(사회적 규범들을 고수하지 않는 사람들, 다른 민족들, 다른 존재들, 다른 자연력들)을 폭력적으로 대하게 마련이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이런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임을 우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준다. Covid-19의 출현은 인류세 사건의 전형으로 규정될 수 있다. 우리의 현 시대인 인류세가 Covid-19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비인간 존재가 뒤섞여 있는 혼합구성으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의 활동에서 비롯된 방사능 흔적들이 3야드 깊이의 북극얼음 안에 있다는 데서 이 혼합구성을 발견할 수 있지만, 또한 기술문명을 중지시킨 바이러스에서 (이 상황은 역병이 창궐한 중세시대의 도시들의 격리체제를 닮았다) 그리고 우리가 삼림을 파괴하고 거의 멸종에 이른 동물들을 고기 소비를 위해 거래하는 것을 통해서 만들어낸 바이러스(다른 것이 아닌 바이러스!)에서도 이 혼합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인류세의 출현은 서구의 인지 지배권의 최후를 나타낸다. 인류세는 사회가 ‘자연’ 위에 설수 없다는 것을 경험하는 시대이며, 훨씬 더 중요하게는 ‘자연’ 내부에 (삶의 한 부분으로서) 위치하는 데 수반되는 일단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가 바로 이 삶에 참여할 수 없게 됨을 경험하는 시대이다.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는 RNA에 기반을 둔 행위자이면서 인류세의 전형적인 행위자이다.

점점 더 많이 발생하는 자연 재해로도 우리가 하나로 상호 연결된 전체의 일원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지만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생한 산불이나 전 세계 많은 곳에서 일어나는 교란된 강우 패턴들, 사이클론들, 가뭄을 생각해보라) 그 재해들은 Covid-19만큼 그렇게 위협적이지는 않다. 바이러스의 이러한 위협을 통해 우리는 공동체 윤리를 얻게 되고 올바른 방식으로, 즉 타자에게 삶의 공간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법을 알게 된다. 이는 유명한 스와힐리어 단어인 ‘우분투’(Ubuntu, ‘당신이 존재하고 따라서 나도 존재한다’의 의미)로 요약된다. 우분투는 상호성이라는 생각 즉 우리가 집단적으로 창조하는 삶에 참여한다는 생각, 우리가 우리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타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풍성한 삶 그 자체를 위해서 집단적으로 삶을 책임진다는 생각을 나타낸다.

이 우분투의 심층에 깔려 있는 것이 애니미즘이다. 애미니즘의 관점에서는 세계가 대상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관심과 욕구를 가지고 있는 행위자들인 개인들(persons)로 이루어져 있다. 애니미즘적 접근법이란 우리가 이 개인들과의 상호적 관계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부여받기 위해 그리고 훨씬 더 중요하게는 삶을 계속적으로 생산할 자리를 부여하기 위해 이 개인들과 함께할 필요가 있다. 팬데믹 상태에서 우리 눈앞에서 명백해지는 것은 이 세상을 구성하는 다른 모든 개인들(인간 개인들 및 비인간 개인들)과 이 세상의 살아있음을 함께할 필요성이다.

 

  1. 존재(자들)의 가족

토착부족들의 우주론인 애니미즘은 인간 개인들과 비인간 개인들 사이에서 상호성을 생각하고 실행하는 가장 급진적인 형태이다. 애니미즘이 갖고 있는 이 급진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애니미즘이 무엇인지를 다시 발견할 필요가 있다. 애니미즘은 서양 인지 제국 내부에서 오랫동안 잘못 재현되었다. 순진한 ‘토착’ 인간들이 나무들, 강들, 산들에 깃든 영과 악마들을 추종하며 홉스적인 자연 상태에 살고 있다는 생각은 거짓 신화이다. 이 거짓 신화는 가령 소위 ‘원시인들’이 제사의식을 통해 나무-존재에게 감사를 표할 때 그들이 하고 있는 행위에 서구적 사고방식을 투영한 데서 비롯한 것이자 애니미즘이 관여되어 있는 급진적인 상호성을 포착하지 못한 데서 생겨난 것이다.

식민주의적 지식을 최고로 간주하는 바람에 배우지 못한 생태학적인 지식의 중심 원리에서는 서구적 의미에서의 지식이 핵심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하는 것이 핵심이다. 애니미즘은 끊임없이 삶을 산출하고 있는 세상을, 그리고 이 우주적 풍요로움이 계속 유지되도록 할 책임이 있는 세상을 모든 존재가 함께 창조한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애니미즘은 우주를 사물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 행위자들 모두는 우리처럼 삶을 갈망하고 자신들의 욕구를 표현하며 서로 상호작용하도록 요청받는다는 사실에서 인간을 닮아 있다. 종교학자이자 인류학자인 하비(Graham Harvey)는 토착적이고 애니미즘적인 우주론들에 대한 가장 훌륭한 최신의 정의로서 “애니미스트들은 세상은 개인들로 가득 차 있고 그들 중 일부만이 인간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이며, 삶은 항상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하비가 정의한 관계들의 우주에서는 번성하기 위해서 다방면으로 상호성이 요구된다. 관계들의 세계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적대적인 원자적인 개인들이 아니며 하나의 일관성 있는 삶의 과정을 집단적으로 창조한다. 개인만큼 중요한 집단은 인간들로 구성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와 모든 실재적 힘으로 구성된다. 생태학적으로 보자면 삶을 생산하는 데 요구되는 태도를 사회성에 기반을 두어 규정하는 것이 정확하다. 형태의 관점에서 본다면 생태계는 상호성의 구현태이다. 생태계는 무한한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는 많은 존재들로 이루어지며 이기적인 행위자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모든 참여자들에 의해 공유되고 생산되는 커먼즈이다. 생태학적인 삶이란 항상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사는 삶을 의미한다.

서양 인지 제국을 대체하는 것이 상호성의 에티켓이다. 상호성의 에티켓은 생태계들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실행되고 있고 (오랜 시간동안 저 생태계들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삶을 영위했던) 사회들에서는 문화적으로 제도화되어 있다. 하지만 이 견해를 탐구하기 위해서 우선 전제되어야 할 것은, ‘서구의 합리성’이 결국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이고 그밖에 모든 것은 약하거나 강력한 미신들이라는 서구 고유의 전제 밖으로 발을 내디딜 필요성이다. 과학적 인류학이 ‘토착민들이 숲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 대신에 에두아르두 콘(Eduardo Kohn)과 함께 ‘숲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물으면서 이 겸손한 입장을 시도하기 시작한 것이 이를 실천에 옮긴 한 사례에 해당한다.

애니미즘적인 태도는 서양 인지 모델의 기본 원칙들과 대립된다(표를 참조하라). 애니미즘의 핵심은 상호성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를 구성하는 것, 그리고 풍성한 집단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그 우주론에 통합하는 것이다.

서구 문화의 핵심 신념들 토착적인 사유의 핵심 신념들

1. 당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

1. 나는 당신 때문에 존재한다

2. 우리 존재의 핵심에 에고이즘이 있다.

2. 상호성이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

3. 실재는 궁극적으로 죽은 물질로 구성된다.

3. 모든 것은 살아있다.

4. 우리 개인의 죽음을 피할 필요가 있다.

4. 세상을 풍성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다.

이 서로 대립되는 원칙들은 인류세에서 결정적인 갈등 영역들인 다양한 핵심 분야들에서 작동한다. 인류세의 대부분의 갈등의 밑바탕에는 우주를 공유함으로써 좋은 관계들을 유지하려는 데서 맞닥뜨리는 어려움들이 깔려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1. 친족을 위한 커머닝

어떻게 좋은 관계를, 즉 타자들과 우리 스스로를 번성하게 하는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하는 핵심적인 문제에 대한 애니미즘의 답은, 살아있는 우주에 우리가 속해있음을 존재자들로 구성되는 방대한 공동체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서 여기는 것이다. 이를 더 근본적으로 표현하자면, 애니미즘에 따르면 비인간 개인들을 포함한 모든 개인들이 친족을 구성한다.

다른 개인들(인간과 비인간 개인들)과의 상호성은 두 가지 형태로 발생한다. 이 상호성은 물자의 분배를 생물권의 생산성을 공유하는 것으로 여길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이 요구는 우리로 하여금 이 공유를 감정적인 참여로서 경험할 수 있게 한다. 이 경험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살아있음과 다시 이어지고 이 살아있음을 성공적인 관계들에 대한 최고의 직관적 앎으로서 향유하게 된다. 아 새로운 이중적인 입장은 ‘살림’(enlivenment)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살림으로부터 ‘인류세를 위한 시학’(poetics for the Anthropocene)을, 다시 말해 우주적 생산성을 지탱하는 상호간의 풍성한 관계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예술을 구축할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을 이 생산성의 수용자들로서만이 아니라 그 원천으로서 경험할 수 있다.

개별 행동은 이 공동의 세상 만들기에 참여하는 만큼 결실을 맺는다. 물질적인 재화의 분배는 우리가 ‘커먼즈 경제’라고 부르는 것을 따른다. 커먼즈 경제에서 교환과 분배는 자본주의에서처럼 희소성에 대한 대응이 아니고, 모든 사람의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커먼즈는 자원이 아니라 일단의 관계들이다. 커먼즈는 모든 참여자들을 양성하고 모든 사람에 의해 지탱되며 결국 우주의 생산성에 다시 반영되는 집단적인 협동과정이다.

커먼즈 철학자이자 활동가인 볼리어가 설명한 커먼즈(([옮긴이] 커먼즈는 “유기적 통합성과 관계성으로 규정되는 삶의 영역들이다. 커먼즈는 전형적으로 분리—인간의 ‘자연’으로부터의 분리, 개인들의 서로로부터의 분리 및 우리의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세계와는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http://commonstrans.net/?p=2095 참조.))가 팬데믹 시대에 꽃을 피우고 있다. 팬데믹이 닥치자 고령자들을 위해 장을 보는 마을네트워크 자원봉사활동에서부터 재봉사들이 마스크 생산으로 전환하고 자신들이 생산한 마스크를 공동체에 무료로 나누어주는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자발적인 커머닝이 부활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볼리어가 말하듯이 이 이타주의적인 행동들은 한바탕 일시적으로 일어나고 마는 행동들을 넘어선다. 이 행동들은 공동체를 위한 배려심에서 자발적으로 나온 것인데, 서구적인 사고방식으로 보자면 이것은 다소 당혹스러운 일이다.

서구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재난 상황 하에서는, 홉스가 자연 상태에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듯이, 무정한 이기주의가 만연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였다.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재난 시기에 발휘되는 상호 신뢰에 관한 그녀의 고전적 저서(([옮긴이] http://commonstrans.net/?p=1397 참조.))에서 말했듯이, 힘든 시기에 생겨나는 증가되는 상호성은 관여된 사람들에게 심층적이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안도감을 준다.

애니미즘적인 관점에서는 상호성이 규범이지만 서구인의 눈에는 이것이 정말 놀라워 보일 수 있다. 이 상호성은 사람들이 비인간 친족—정원에 있는 식물들, 가정에 있는 애완동물들, 위험에 처한 종들—을 돌볼 때 경험하는 감정에도 해당되는데 이 감정들을 서구식 용어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애니미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감정들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필요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주의 풍요로움을 키우는 것은 심층적으로 애니미즘적인 경험이다. 기술적인 태도가 그 핵심이 아니라 타자를 환영하는 것을 통해 느끼는 환영받는 느낌이 그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 두 차원—모든 존재와의 상호성을 통해 세상을 커먼즈로 실행하는 차원 그리고 함께 어울리는 이 관계를 내 자신의 살아있음과 타자들의 살아있음으로서 따라서 우주의 진정한 특징으로서 느끼는 차원—은 분리될 수 없다. 우리에게는 물질대사 과정이 지속적인 삶에 참여하는 수단이 되지만 이 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들에게는 정서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야 비로소 우리는 대상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려는 시도를 버리고 진정으로 친족과의 교류에 참여하려는 시도로 나아갈 수 있다. 오직 그때에만 우리는 하나의 가족에 속할 수 있다.

자신의 나라와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받은 한 원주민이 “이 돌이 나입니다”라고 답하듯이 정체성은 서로 속해있음에서 나온다. 이러한 속해있음 때문에, 아름다움에 대한 인류의 경험은 가족의 일원으로 사랑받는 존재자의 경험으로서, 그 가족이나 가족의 개별 구성원에 대한 자기 나름의 사랑의 경험으로서 그리고 가족을 부양하고 (사랑을) 돌려주려는 욕구의 경험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애니미즘적인 지속가능성은 수행적이다. 이 지속가능성은 항상 실질적인 타자, 나무 개인, 재규어 개인, 강 개인과의 대화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행동들은 관계의 에티켓 없이는 그리고 상호성의 단순한 의식절차들을 실행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는 자리를 구하기 전에 호의로 우리를 받아달라고, 우리가 접촉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고마움을 표현할 필요가 있다.

종(種)들 사이의 상호성의 실행이자 문화인 애니미즘은 ‘자연 대상들’을 더 잘 다루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칠 수는 없지만 우주에 속한 모든 구성원들에게 생명을 주는 우주를 어떻게 지속시키는지를 보여줄 수는 있다. 애니미즘은 지속가능성과 관련된 전통적인 관행들을 재고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할 것이다. 미국의 식물학자이며 작가이자 아메리카원주민인 로빈 월 키머러(Robin Wall Kimmerer)는 애니미즘이 요구하는 것을 ‘명예로운 수확'(The Honorable Harvest)을 구성하는 원칙들 가운데 하나로 다음과 같이 탁월하게 제시한다. “당신을 지속시키는 것들을 지속시킨다면 지구는 영원히 존속할 것이다.”




새로운 애니미즘과 커머닝

 



내가 군락을 이루는 나무들의 사회생활에 대해서 그리고 토착민들이 다양한 생물형태들 및 강들과 맺고 있는 밀접한 유대에 대해서—서양인들에게 살아있음(aliveness)을 설명하는 최근의 생태철학을 꼼꼼하게 살피면서—배우고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정말로 애니미즘과 커머닝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적 합리주의와 경제주의적 사고는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힘들이지만 사회적 목적과 사회적 의미를 창출하는 일에는 별로 능하지 못하다. 이는 세상을 다시 매력적으로 만드는 방식으로서 새로운 애니미즘의 흔적이 (종종은 커머닝을 통해 그 목소리를 찾으며) 계속해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생태철학자 안드레아스 베버(Andreas Weber)는 생명의 생물학이 현실 그 자체가 커먼즈임을 짚어주기 때문에 이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라고 주장한다.

커먼즈는 유기적 통합성과 관계성으로 규정되는 삶의 영역들이다. 커먼즈는 전형적으로 분리—인간의 ‘자연’으로부터의 분리, 개인들의 서로로부터의 분리 및 우리의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세계와는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물론 애니미즘의 역사는 문제적이다. 초기 인류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세계관을 부족들에게 투영하여 그 부족들이 낙후되어 있다고 폄하했다. 확고한 데카르트주의자들이자 근대인들로서 그들은 육체와 정신을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동물들•산들•자연력에 살아있는 영(靈)이 깃들어 있다고 여기는 모든 사람을 다만 ‘원시적’이고 ‘미신적인’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구인의 눈으로 본 오늘날의 애니미즘은 이와는 다르다. 이 애니미즘은 생명(삶)의 경험을 지구상의 생물들과 자연체계들 간의 역동적인 대화로 여긴다. 종교학자 그레이엄 하비(Graham Harvey)가 말하듯이, 이것은 인간중심의 비전을 버리고 세상을 “개별 존재들로 가득하고 그들 중 일부만이 인간”이며 그 속에서 “삶이란 항상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핵심이다. 애니미즘은 “다른 개별 존재들과의 존중에 기반을 둔 관계에서 훌륭한 개별 존재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가 제안한, 존중하는 현존에 기반을 둔 ‘나-너’의 관계와도 유사하다.

내 경우에는 최근에 읽은 두 개의 글 때문에 애니미즘에 더 분명하게 관심이 쏠렸다.

하나는 영국의 자연 작가 로버트 맥팔레인(Robert Macfarlane)이 <가디언>지에 기고한 글(2019112일자)로 이 글에서 그는 상승세를 타고 있는 ‘새로운 애니미즘’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전 세계에서 제정된 많은 ‘자연 권리’ 관련 법들을 언급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에콰도르와 볼리비아가 가장 유명한 사례에 해당한다. 하지만 오하이오주 털리도 시(市)가 위험에 처한 호수에 ‘법 인격(legal personhood)’을 부여하는 투표를 2019년에 승인한 것을 알고 있었는가? 이리 호(糊)는 이제 인도의 갠지스 강과 야무나(Yamuna) 강 그리고 뉴질랜드의 황가누이 강(Whanganui River)과 함께 해당 국가에서 법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다.

맥팔레인은 <이리 호 생태계 권리장전>(Lake Erie Ecosystem Bill of Rights)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리 호는 일단의 생태계서비스(ecosystem services)(([옮긴이] 생태계서비스는 인간 사회와 생태계가 연결되어 있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과 인간이 자연환경에 끼치는 영향이 증가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가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라는 당찬 존재론적인 주장이 권리장전에 삽입되었다. 이 권리장전은 사실상 ‘새로운 애니미즘’—애니미즘은 영(spirit), 기운(breath), 활기(life)를 의미하는 라틴어 ‘anima’에서 유래한다—이라 불릴 수 있는 성과이다. 이 권리장전은 이 호수에 살아있음(liveliness)과 취약성(vulnerability) 둘 다를 다시 부여함으로써 오수지(汚水地)와 수원(水原) 같은 도구화된 역할에서 이리 호를 빼낸다. 그렇기에 이 권리장전은 전 세계 사법계에서 (‘자연권’ 내지 ‘자연의 권리’ 운동으로 더불어 알려지게 된) 일련의 더 광범위한 최근의 유사한 법적조치들—모두 살아있는 세계에서 상호의존성과 살아있음/활동성(animacy)을 인식하고자 하며 종종 토착집단들에 의해 주창되는 것들—의 일부분을 형성한다.

맥팔레인은 이어서 “‘급진적으로 다시 이야기하기’는 “법뿐만 아니라 문화•이론•정치•문학을 가로질러 현재 진행 중”이며, 이는 “<멸종반란>의 창조적인 항의들에서, 이저벨 스텐저스(Isabelle Stengers), 데이빗 애브럼(David Abram) 그리고 에두아르두 콘(Eduardo Kohn)의 ‘새로운 애니미즘적’ 연구” 그리고 로빈 월 키머러(Robin Wall Kimmerer)의 작업에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베버—『경이의 생물학』(Biology of Wonder, 2016), 『물질과 욕망』(Matter and Desire, 2018)—와 하딩(Stephan Harding)—『살아있는 지구』(Animate Earth, 2006)—의 생태철학을 여기에 추가하고 싶다.

맥팔레인은, 이 모든 노력들은 “우리가 외면했던 무언가를, 다시 말해 인간이 아닌 대화 상대들의 존재와 그들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아미타브 고쉬(Amitav Ghosh)의 말을 빌려 말한다.

나는 또한 콘의 2013년 저서 『숲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간 너머의 인류학을 향하여』(How Forests Think: Toward an Anthropology beyond the Human, 2013)(([옮긴이] 『숲은 생각한다』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본이 나와 있다.))에 상당히 매료되었다. 콘은 대담하게도 근대인들에게 이 책이 ‘자연’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 및 ‘자연’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해 겸손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다. 이 책은 우리가 인간 이상의 세계를 “바이오기호학”(biosemiotics)(( [옮긴이]바이오기호학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5참조.))의 살아있는 거대한 체계—서로 상호작용하면서 끊임없이 의미를 창출하고 있는, 신체를 가지고 살아있는 유기체들의 체계—로 보려고 노력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콘은 우리 근대인들이 “관계성에 관하여 생각하는 특정의 방식들에 의해 식민화되어 있다”고 경고한다.

우리는 별 의식이 없이 우리 고유의 속성들을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 부여하며, 이에 더하여 자기도취에 빠져서 우리 자신을 바로잡는 생각들을 제공해 줄 것을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 요구한다.

그 결과 분리된 근대세계에서 우리는 모든 생물학적인 삶의 주요 부분인 심층적 공생과 협력을 무시한 채, ‘자연’이란 개체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시장경쟁을 이겨내려고 몸부림치는 곳이라고 전제한다. 우리는 또한 자연세계란 불활성이고 감정이 없으며 의미가 없다고, 인류 드라마를 위한 무언의 배경막이라고 전제한다.

콘은 에콰도르에 있는 아마존 상류의 루나(Runa) 지역에서 4년간 민족지학적 현장연구를 했는데, 이는 그가 “실재”의 의미를 재고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경험이었다. 그는 우리 지구가 말 그대로 살아있고 따라서 우리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들로서 그가 ‘자아들의 생태학’이라 부르는 “복잡한 관계망”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고 멋지게 주장한다.

유기체가 다른 것들에게 위협으로서 나타나든 한때의 협력자로 나타나든 또는 풍경 속 저 멀리 있는 지원자로 나타나든, 살아있는 생물들은 항상 ‘자아’를 창조할 것이다. 살아있는 자아들을 발생시키고 유지시키는 과정 전체는 유기체의 형태•행동•표현에 구현되는 ‘의미’를 창출한다. 또는 콘이 주장하듯이, “모든 생명은 기호적이며 모든 기호작용은 살아있다.” 삶(생명)과 의미는 서로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콘의 책 제목이 설명될 수 있다. 콘의 주장에 따르면, 숲은 숲을 구성하는 살아있는 유기체들이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깊숙이 침투하여 식물들이든 동물들이든 미생물들이든 자아들의 생태계를 발생시킬 때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근대인들이 지구에 널리 퍼져있는 살아있음과 관계성을 이해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점이다! 살아있으며 생각을 하고 있는 존재가 단지 인간만은 아닌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종류의 유기체들은 인간의 관찰 및 활동과는 별개로 자아와 의미를 창조하고 있다. “열대우림은 서로를 구성하며 살아있고 자라나는 생각들이 창발적으로 팽창하는 다층적이고 시끌벅적한 망이다”라고 콘은 쓰고 있다.

문제는 이렇다. 우리는 그 주파수에, 근대 인식론과 앎의 방식들로서는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자아들의 거대한 생태환경’에 맞출 수 있는가? 우리 근대인들은 숲들이 생각하는 방식의 논리에 스스로 진입할 수 있는가? 우리는 가령 식물들과 토양 사이의 관계 또는 인간과 재규어 사이의 관계를 살아있는 재현과 의미의 형태들로서 (설령 이 형태들이 언어가 닿지 않는 곳에 있더라도) 보는 법을 배울 수 있는가?

우리는 (원하는 대로 ‘자연’을 재형성할 수 있는 정점의 포식자로서) 우리 자신을 자연과 분리되고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는 데 익숙해서 살아있는 지구의 흐름들 및 제약들 내부에 우리 자신을 위치시키는 데 문제를 안고 있다. 주제넘게도 우리는 스스로를 ‘자연’의 지배자라고 생각한다. 이는 언어 자체에 의해 인가되는 생각이다. 서구 문화들이 총칭적이고 추상적인 명사를 사용하는 것을 강하게 선호하지만, 토착문화들은 살아있는 체계들과의 관계 및 상호작용을 지칭하는 정확한 동사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토착어들은 “인간을 넘어서는 다른 종류의 사고하는 자아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반영한다.

나는 새로운 애니미즘에 공명하며 이는 이 애니미즘이 커먼즈처럼 관계성을 삶의 핵심적인 현실로서 존중하기 때문이다. 질케(Silke)와 내가 우리의 신작인 『자유로운, 공정한 그리고 살아있는』(Free, Fair and Alive)에서 부각시키려는 아이디어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커먼즈를 단지 ‘자원을 관리하기’ 위한 경제적인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관계들의 살아있는 사회적 체계로서 재개념화하기를 원했다.

커머닝은 우리가 살고 있는 다수의 생태계들과의 관계를 포함하는 여러 관계들의 P2P적 구축을 핵심으로 한다. 다행히도 자연 관련 법들이 보장하는 새로운 권리들, 애니미즘에 대한 학문적 연구들 그리고 무수한 커먼즈의 확산이 필요한 거대한 ‘OntoShift’(존재전환)에 동력을 제공하고 있으며 그것이 필요로 하는 살아있음과 관계성이 마땅한 인정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