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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네상에서 민주적인 거버넌스 구축하기

 



슈나이더(Nathan Schneider)는 인터넷 플랫폼상에서 거버넌스의 기본 형태는 ‘함축된 봉건제’라고 자신의 신작 『거버넌스 가능한 공간들』(Governable Spaces: Democratic Design for Online Life)에서 도발적으로 선언한다. 그는 함축된 봉건제는 “공동체를 봉건적 영지로서 구축하려는 문화적이고도 기술적인 편향”인데 여기서 창립자들은 “평생 자애로운 독재자”가 된다고 주장한다.

불행히도 권위주의적인 거버넌스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 국한되지 않는다. 동일한 경향들이 “현실 세계“로도 번지고 있는데 이는 온라인과 “현실 세계” 사이의 경계가 요즈음에 상당히 모호해졌다는 오직 그 점 때문이기는 하다. 놀랄 것 없이, 우리가 전제 군주 같은 IT 대기업 최고경영자들에 순응하다보면 독재적인 정치인들도 더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다. 민주주의의 실천을 담금질하는 장이 선진 자본주의하에서 위축된 것이다.

슈나이더는 ”온라인 공간이 창조적이고 급진적이며 민주적인 르네상스의 현장일 수 있다“는 대담한 생각을 해볼 것을 우리에게 권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인터넷을 반응하고 발명하는 유례없는 능력을 가진 더 민주적인 매체로 만들기 위해 과거의 거버넌스 유산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고 한다

이 돌풍과도 같은 참신한 선언에 흥미를 느낀 나는 팟캐스트 <커머닝의 프론티어> (에피소드 49)에 슈나이더를 초대했다. 우리의 대화는 온라인 문화의 몇몇 불쾌한 구역을 둘러보는 사뭇 진지한 여행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는 이상하리만치 고무적이기도 했다. 부상하는 새로운 플랫폼 기술들은 진실로 흥미진진한 몇몇 가능성들을 제공한다. 진보적인 행동주의가 상상력을 발견하여 그 가능성들의 현실화에 기여하기로 결심한다면 말이다.

슈나이더는 콜로라도 볼더(Colorado Boulder) 대학에 재직하는 미디어학 교수이다. 대학에서 그는 크립토 경제와 디지털 자율 조직들(digital autonomous organizations, DAOs)에서부터 다양한 형태의 디지털 커머닝과 그 너머까지 인터넷 문화를 연구하는 학술센터인 <미디어 경제 디자인 랩>(Media Economies Design Lab)을 이끌고 있다. 슈나이더의 연구를 아주 흥미롭게 만드는 점은 그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사와 탈식민 역사, 사회운동 전략들, 페미니즘 경제, 문화이론 그리고 초기 인터넷 역사의 유토피아적 비전들에 깊은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슈나이더는 이렇게 질문한다. “사회운동들이 인터넷의 레일 위를 그토록 자주 달리고 있는 시대에 어떻게 우리는 튼실한 힘을 창출하는가? 우리는 사회운동이 자신이 약속하고 널리 퍼뜨린 것들을 실행할 수 있게 하는 비판적인 관계들을 어떻게 창출하는가? 내 생각에는 디지털 공간에서 스스로를 다스리는 능력이이 가장 핵심적일 듯하다. 그러나 사회 운동은 튼실한 힘을 구축하도록 설계되지는 않은 네트워크들에 의존하고 있다. 이 네트워크들은 광고를 하고 사람들을 흥분시킬 목적으로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슈나이더는 소셜 미디어는 수동성과 기업들에의 의존을 조장하며 사용자가 주권을 갖고 통제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공간을 남겨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짚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이 새로운 온라인 공간을 작동시키거나 디스코드(Discord)에서 또는 여러분이 사용중인 어떤 플랫폼에서든 채팅을 하는 경우 그것은 바로 그 하향식 구조 안으로 여러분을 유인한다. 공간을 창출하는 사람은 누구나 본질적으로 그 공간에 대해 절대적인 힘을 갖는다. 갈등을 처리하는 여러분의 유일한 도구는 검열과 추방이다. 이것이 함축된 봉건제의 논리이고 나는 그것이 한층 민주적인 온라인 공간들을 구축하는 데 유리하지 않은 교육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스토돈(Mastadon)―사용자들이 협력적으로 서버를 운영하는 오픈소스 트위터 같은 마이크로 블로그 사이트―을 언급하며 이와 같은 많은 대안들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새로운 유형의 민주적 거버넌스 온라인을 구축하기 위해 슈나이더는 진보적인 사람들이 일련의 ‘거버넌스 스택들’—서로 다른 기술 수준에서 작동하는 일련의 상호운영성이 있는 프로토콜을 가리키는 소프트웨어 용어—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믿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크립토—블록체인 같은 분산된 원장(元帳) 기술—가 설계 가능성의 파열을 제공한다고 믿고 있다.

분산된, P2P 소통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크립토는 기업들이 일반적으로 통제하는 중앙 집중식 서버에 의존하는 웹사이트들의 구조보다 참여자들의 힘이 더 평등한 구조의 가능성을 연다. 적어도 실제적인 상상계로서 크립토는 “다른 상징적이고 신화적인 참조점들이 있는 다른 세상과 다른 정치에 이르게 하는 매체이자 통로”라고 슈나이더는 쓰고 있다.

사실 주목할 만한 거버넌스 혁신들이 크립토 공간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다고 슈나이더는 말한다. 이 혁신들에는 다음의 것들이 포함된다. 선호하는 것들을 거의 실시간으로 평가하는 의사결정 과정들, 알고리즘을 통한 분쟁 해결, 널리 공유되고 있는 책임(성)과 이익 분배, 쉬운 탈퇴 및 시스템 분기 능력, 스스로 시행하는 보안과 검열 저항성, 외부로부터 통제나 규제를 받지 않는 주권, 온체인 활동의 투명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버넌스 활동을 위한 참신한 인터페이스들.

이 실험들 모두가 장기간에 걸쳐 일반적 목적들을 위해 그 가치를 입증하지는 않을 것이다. 크립토 세계의 많은 부분이 사기, 도박 그리고 투기적인 통화 거품으로 넘쳐나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디지털 자율 조직들은 네트워크화된 조직화를 훨씬 더 쉽게 만들지만 조직화가 곧 민주적 거버넌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더 큰 ‘사용자 통제’는 상대적으로 더 직접적이며 마찰이 없는 시장들, 이를 테면 주식 교환 또는 새로운 유형의 비즈니스 파트너십 및 투자 시장들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민주적인 돌파구가 전혀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슈나이더가 역사 및 탈식민을 다룬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들을 활용한 것이 매우 도움이 되는 것으로 판명된다. 듀보이스(W.E.B. Du Bois)와 앤젤라 데이비스(Angela Davis) 같은 사상가들은 억압적인 제도들을—노예제도든, 짐크로 법이든 감옥이든—폐지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슈나이더는 말한다.

시민권, 소속감 및 참여를 실제로 산출하는 대안적인 민주적 구조들을 구축해야 한다. 듀보이스에게 이 일의 큰 부분은 협동조합이었다. 그는 흑인 해방의 한 가지 본질적인 실천으로서 일상의 민주주의를 깊이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평균적인 진보적 단체의 웹사이트에 가면 참여하는 버튼이 없”고 기부하는 버튼만 있다고 슈나이더는 불평한다. 웹사이트는 보통 상향식 회원 자격을 구축하거나 집단행동을 동원하는 것을 돕기 위해 설계되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봉사활동에서 리더십에 이르기까지 참여의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는 온라인 도구들을 우리가 디자인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사이트들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냥 의견만 교환하기보다는 힘을 발전시키도록 육성하고 북돋을 필요가 있다.”

슈나이더와 한 인터뷰에는 훨씬 더 흥미로운 것이 많다. 그 내용을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슈나이더의 책 『거버넌스 가능한 공간들』은 오픈 액세스 포맷으로 여기서 구할 수 있다. 또한 2020년 10월 슈나이더와 한 인터뷰를 이 팟캐스트 에피소드 7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에피소드는 이 블로그 게시글 http://commonstrans.net/?p=2258 번역되어 있다. 본문의 ‘에피소드 8’은 원문에 잘못 표기된 것을 옮긴 것이며, 실제로는 에피소드 7이다. — 역자]

 




평행폴리스로서의 커먼즈버스

 



[볼리어의 설명]

아래의 글은 내가 2023년 5월 31일 베를린에서 열린 워크숍 「자유주의를 넘어: 커먼즈, 입헌정치 그리고 공동선」에서 발표한 것을 약간 손본 것이다. 이 워크숍은 <막스 플랑크 비교 공법 및 국제법 인스티튜트>, 뷔르츠부르크 대학 법학과 그리고 <뉴 인스티튜트>(독일, 함부르크)가 주관했다.

발표 비디오는 여기서 불 수 있다. 내 발표는 타임코드 5:32에 시작한다.

 

평행폴리스로서의 커먼즈버스: 기회와 도전

이 워크숍에 의해 촉발된 대화는 시기적절하고 필수적이다. 이는 정치경제 및 문화와 관련하여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그 많은 것들이 우리 눈앞에서 서서히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그토록 많은 거대 서사들—시민권•자유•재산권•경제성장•가치이론—이 요즈음에 문제시되었다고 말해야 온당할 것이다. 기존 사회제도와 사고 범주들이 그다지 잘 작동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한편으로 구조변화 및 필요한 대안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이는 그런 이야기가 괴물들과 카오스가 든 판도라의 상자를 열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기후변화, 권위주의적 민족주의, 야만스런 불안정성 및 불평등 그리고 사회제도 붕괴라는 위험지대들로 더 깊이 들어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선택할 것이 거의 없다. 우리는 몇몇 고착된 습관들을 버릴 필요가 있다. 우리는 새로운 북극성과 한층 안정적이고 유익한 질서를 필사적으로 찾을 필요가 있다.

오늘 나는 커먼즈라는 생각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아주 많은 것들—자본주의적 정치경제, 국가권력, 사회적 관계 및 위계들, 지구와의 관계, 우리의 내적인 삶들—을 다시 상상할 엄청난 가능성이 이 생각에 담겨있다는 제안을 하고 싶다. 확실히 이것은 당찬 제안이고 장기적인 기획이다. 문제가 있는 시스템에 고착되어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기존의 것과는 매우 다른 사회적 논리들 및 제도적 형태들을 개발해야 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식민주의, 그리고 우리가 내면화했거나 억제한 규범들을 가진 중앙집권화된 국가권력이라는 해결되지 않은 트라우마들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발표문에서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커먼즈와 커머닝이 우리에게 공동선의 비전을 재발명할 발판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비전은 우리가 세포 수준에서 한층 인간적인 사회관습들과 윤리적 행동들을 발전시키는 것을 촉진할 수 있으며, 이 관습들과 행동들이 확장하면서 우리는 자본축적, 소비주의, 성장을 통한 진보의 세계 너머로 이동할 수 있게 된다.

확실히 오늘날 대다수의 커먼즈는 중요한 의미를 갖기에는 너무 소규모이고, 지역적이며, 캐시푸어(cash‐poor)인 것으로 일축된다. 주류에게 커먼즈는 군내나는 괴짜다. 주류들의 ‘점잖은’ 의견에 따르면 “일을 해내기” 위한 본격적인 체제로 시장과 국가가 유일한 것으로 가정된다. 사적부문과 공적부문이 있고 그 밖에 것은 실제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허울만 좋은 주장이거나 적어도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매우 편협한 프레임을 씌운 것이다. 시장과 국가는 둘 다 경제성장을 찬양하고, (서로 다른 역할을 가지고 있더라도) 자유주의적인 정치적•경제적 질서를 촉진하는 데 있어서 긴밀하게 동맹한다. 국가는 속박되지 않은 시장들이 성장, 세수(稅收), 시민들의 사회적 이동성을 발생시키기를 원한다. 반면에 기업들과 투자자들은 국가가 안정된 통치, 법적 특권들과 기업활동을 위한 보조금을 제공해주고, 금융위기, 생태적 재난, 시장 악용 및 기타 ‘시장 외부효과들’ 이후 상황정리를 해주기를 원한다. 국가와 시장은 우선사항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공생한다. 시장국가 체제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말이 될 만큼 충분히 말이다.

커먼즈는 국가와 시장이라는 바로 이 체제에 대안이 되는 비전이다. 정치가들과 경제 전문가들은 커먼즈를 손짓으로 간단하게 묵살할 수 있지만 커머너들은 더 심오한 진실을 즉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전제들이 비록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더라도 뿌리 깊숙이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2008년 금융 위기는 전 세계 금융세력과 자본주의의 오만한 힘을, 그리고 그 힘의 남용을 영속시키는 일에 자유주의 국가가 공모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브렉시트의 도래,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COVID, 긴축재정 정치, 도널드 트럼프, 보수적 민족주의 그리고 인종적•민족적 타자화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강화할 뿐이었다.

나는 경제성장이 유토피아적 환상임을 폭로하고 있는 기후변화의 잔혹한 현실—홍수, 가뭄, 산불/들불, 기상이변—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경제성장을 위한 자원 추출 및 탄소 에너지 자원에의 의존은 지속될 수 없다. 전 세계 비(非)백인들—식민주의와 강제적인 자본주의적 개발의 희생자들—이 배상금, 생태복원 및 기후정의를 요구하므로 자본주의적 개발을 이 세계에 강요하려는 충동은 지속될 수 없다.

새로운 정치가들, 정책들 또는 법들이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그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구조적인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자전거가 우리를 달로 데려갈 수 없듯이 시장‑국가 체제는 그 문제들을 극복할 어포던스(affordance, 행동가능성)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정치공백기에 빠졌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오래된 질서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며 새로운 질서는 아직 태어날 준비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체코 극작자인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에게서 영감을 얻고 그를 길잡이 삼는다. 1970년대에 그를 비롯한 문화계의 반정부 인사들이 전체주의적인 억압 시스템—그의 경우에 체코 정부—에 직면했을 때 하벨의 전략적 반응은 그가 평행폴리스(parallel polis)라 부른 것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평행폴리스는 공동체가 만든 안전 공간으로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로 지원하고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직접 생산하며 일종의 그림자 사회(shadow society)를 구축한다.

평행폴리스라는 발상은 여러 목적에 복무한다. 사람들은 공식적인 선전의 허위를 폭로하고 가능한 것에 관한 자신들의 상상력을 확장할 공간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은 예시(豫示)적인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면서 수평적이고 공락(共樂)적인 상호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그들은 진실을 말할 수 있고 건전한 가치들을 표현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엄성, 사회적 유대 및 희망을 다시 주장할 수 있다.

나는 커먼즈버스(Commonsverse)를 일종의 평행폴리스로 본다. 커먼즈버스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시스템 변화를 가져오는 방법으로서의 커머닝에 복무하는 무수한 기획들, 조직들, 사회운동들이다. 나는 이미 존재하는 엄청나게 다양한 커먼즈들을 소개하기 위해 『커머너의 변화만들기 목록』(The Commoner’s Catalog for Changemaking)을 2년 전에 출간했다. 여러분이 몇몇 참조점을 확인할 수 있도록 간략한 개요를 제시할까 한다.

커먼즈로서의 토지. 토지를 탈상품화하는 것은 토지를 지역의 농사용, 주택용 및 보존용으로 접근가능하고 제공가능도록 만드는 중요한 하나의 방법이다. 이 점에 있어서 한 가지 중요한 수단은 시장에서 토지를 빼내어 그것을 영구히 커먼즈로 만드는 공동체 토지 신탁(community land trusts)이다.[주석1] 토지 신탁은 풍경을 보존하고 부의 불평등을 줄이며 영양이 풍부한 식량을 지역별로 키우는 것을 더 적합하게 만드는 일을 촉진한다. 공동주택, 주택 협동조합 또는 독일 신디케이트(Mietshäuser Syndikat) 같은 연합체의 ‘피어(동료) 주도 프로젝트들’(Peer-directed projects)은 국가나 지역 공동체에 의한 기획들과 나란히 사회적 주택을 제공할 수 있다.

서양에서의 지역 식량 주권. 유럽과 북미에는 지역농업과 식량 공급망을 재발명하는 운동들이 많다. 유기농 지역경작이 50년 전에 처음 이 운동을 시작했고 이는 지금은 퍼머컬처, 농업생태학, 슬로우푸드 운동 및 심지어 슬로우피쉬 운동에서 나타난다. 푸드 협동조합들은 농부들과 소비자들을 한데 모아 상호적으로 부양하는 관계를 맺도록 하기 위한 — 가격을 낮추고 한층 안정적인 지역 식량 공급을 보장하며 친환경 농경을 보증하는 것을 돕는 — 긴 시간에 걸쳐 입증된 모형이다.

커먼즈로서의 도시. 바로셀로나, 암스테르담, 서울, 볼로냐, 그리고 수십 개의 주요 도시 및 소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협력적인 거버넌스의 새로운 형태들을 실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커먼즈-공공부문 파트너십은 메이커스페이스(makerspace)[주석2], 도시농업 시스템, 시민 정보 커먼즈 그리고 근린지역 개선 및 서비스를 창출하고 있다. 이 파트너십은 시민들에게 권한을 주고 사회 기본구조를 다시 짜며 부유한 개발자들과 투자자들로부터 도시에 대한 시민대중의 통제권을 되찾는 길이다. 또한 도시에는 많은 독립적인 커먼즈 기획들, 예를 들어 공동체 텃밭(community garden), 에너지 생산 커먼즈, (카탈로니아의 Guifi.net 같은) 지역 와이파이 시스템 등이 있다.

전통적이고 토착적인 커먼즈. 어림잡아 전 세계 20억 명의 사람들이 어장농지목초지야생 사냥감의 파수를 통해 일상 생계를 커먼즈에 의존하고 있다. 전통적인 공동체와 토착민들에 의해 수행되는 커머닝은 그것이 산업형 농업에 대한, 지역에 기초를 두는 친환경적인 대안임을 입증하고 있다. 전 세계 생물 다양성의 대략 70%가 토착민들이 운영하는 땅에 존재한다.

대안적인 지역 통화. 전 세계 많은 공동체들이 그들 고유의 지역 통화를 만들었다. 그 목적은 금융가치가 주요 금융기관들로 빨려 들어가도록 두지 않고 그 가치를 지역에 잡아두는 것이며 그래서 지역 시장, 일자리 창출,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을 활성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태어난 서부 메사추세츠에서 버크셰어즈(BerkShares) 통화는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대안 통화가 되었다. 타임뱅킹(Timebanking)은 또 하나의 가치 있는 통화혁신—많은 돈 없이 나이 든 사람들과 일반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하는 서비스‑교환 시스템—이다.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와 피어 생산. 프리 소프트웨어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의 지난 25년간의 폭발적 증가는 커머닝의 강력한 상징이다. 프리 소프트웨어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는 코드를 탈상품화하고 스스로 조직된 개방적인 공동체의 창조성을 고양시킴으로써 리눅스, 인터넷을 위한 필수적인 하부구조, 위키피디아 그리고 (그룹 심의, 그룹 예산안 작성 및 클라우드에의 파일저장을 위한) 많은 세계 규모의 소프트웨어 시스템들을 구축했다.

코즈모로컬 생산. 한 가지 강력한 오픈소스 파생물은 코즈모로컬 생산 즉 전지구적으로는 디자인과 지식의 공유를, 지역적으로는 사물들의 물질적 생산을 관장하는 시스템이다. 이 과정은 자동차•가구•주택•전자기기•농장시설에 이미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는, 상업적인 의료용 제품보다 더 싸고 더 정교한 자동인슐린주입 장치를 생산한, 당뇨병환자로 이루어진 전지구적인 공동체도 있다. 농업기계의 코즈모로컬 생산은 <팜핵>(Farm Hack)과 <오픈소스 에콜로지>(Open Source Ecology)에서 볼 수 있듯이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세계 일류 디자인을 갖춘 저가의 농장 장비를 생산하는 것을 돕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와 공유 가능한 콘텐츠. 20년 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의 발명은 돈을 지불하거나 허가없이 글쓰기, 음악, 이미지 및 기타 창조적인 장르들을 법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자유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자율적인 공공 라이선스는 이제 전 세계 170개가 넘는 법시행 관할구역에서 인정을 받고 있으며 다른 상황에서라면 저작권법 하에서 ‘저작권 침해’로 여겨질 방식으로 엄청난 양의 콘텐츠가 공유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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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커먼즈들 각각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것들이 항상 그 맥락의 특이성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나는 비상업적인 극장에, 오픈소스 테크놀로지로 구축되는 최고 품질의 과학 현미경에, 인도주의적인 구조를 돕는 온라인 지도에, 그리고 난민들과 이주자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일에 주력하는 커먼즈를 발견해서 깜짝 놀랐었다. 각각의 경우에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독특한 재능, 지리, 역사, 전통, 자급활동, 가치 그리고 상호주체성을 통해 자본주의적인 시장이나 국가의 통제 없이 욕구를 만족시키고자 한다.

‘내부에서 볼 때’ 각 커먼즈는 독특할 뿐 아니라 ‘세상 만들기’를 위한 학습이기도 하다. 그것은 상호주체적인 일련의 감정들•경험들•가치들•전망들이다. 우리가 겪는 상호주체적 경험들의 생생한 실재는 우리에게 세계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고착된 단일문화로서가 아니라 탄탄한 ‘다원적’ 세계로서 더 잘 이해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러나··· 각 커먼즈가 독특하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그 커먼즈에 관하여 일반화하기 시작하는가? 최소한도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기존 공동체가 일정 유형의 공유된 부를 집단적으로 운영할 때마다 공평한 접근법, 사용법, 장기간에 걸친 지속가능성이 강조되면서 하나의 커먼즈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다양한 맥락에 있는 매우 다양한 커먼즈들에 공통된 규칙성들을 실제로 설명하지 못한다.

작고한 나의 동료 질케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나는 이 문제가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현재 우세한 근대적 세계관은 커먼즈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그야말로 너무 환원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이다. 그것은 전체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들에게 너무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리의 근대적 세계관은 커머너들이 여전히 경제적 개인―합리적이고 자기주권적이며 자신의 물질적 이익을 최대화하는 데 전념하는 개인―이라고, 다만 시장을 통해서보다 그저 협동을 통해서 이 목표를 추구할 뿐인 그러한 경제적 개인이라고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커머닝을 그 나름의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조건에 기반해서, 그리고 진화사 및 생물학의 맥락에서 이해하고자 한다면 나는 우리가 커먼즈를 철저히 관계적이고 사회적인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전 세계 커먼즈에 대한 나의 아마추어적인 민족지학 연구로부터 증명할 수 있다. 커먼즈는 경제학자들이 보고자 하는 것처럼 단순히 자원들이 아니다. 커먼즈는 살아있는 사회 유기체들이다. 최근의 생물학 연구는 선구적인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가 보여준 것처럼, 어떻게 식물과 나무와 균류들 모두가 상호의존적이며 연결되어 있는지, 어떻게 세포 수준에서조차 생명이 심층적으로 공생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간 커머너들의 경우에도 그렇다. 우리는 서로와의 관계 속에서, 지구 그리고 지구에 존재하는 인간보다 큰 생명계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과거 및 미래 세대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커먼즈는 단지 사람들의 타산적인 합리성이 아니라 그들의 충만한 감정적, 윤리적 그리고 영적 힘에 의해 활기를 띤다. 질케와 나는 커머닝이 사실상 사회적이고 생태적인 관계맺음을 통해 창출되고 지속되는 역동적인 살아있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감수성은 문화 역사가 토마스 베리(Thomas Berry)의 다음 말에 의해 잘 표현된다. “우주는 객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주체들의 교감이다.” 나는 또한 생물학자이자 생태철학자인 안드레아스 베버(Andreas Weber)의 다음 문장을 좋아한다. “과학과 경제학은 창조적인 살아있음을 현실의 존재론적인 토대로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질케와 나는 공동 출간한 책 『자유롭고 공정하며 살아있는』(Free, Fair and Alive)[주석3]에서 커먼즈 안에서 살아있음이 어떻게 실제로 작동하는지 설명해보려 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에 답하고 싶었다. 관계성이 핵심이라면 다양한 개성들과 선호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조율이 되어 일관성 있는 커먼즈가 되는가? 화폐교환 없이 어떻게 중요한 것들이 이루어지고 돌봄이 제공되는가? 어떻게 피어(동료)가 주도하는 협동 시스템들이 생성되고 스스로를 유지하는가?

운 좋게도 우리는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 교수의 앞선 성취들과 그녀가 선구적으로 포착한 성공적인 커먼즈의 ‘설계원칙들’을 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오스트롬은 명확하게 명시한 경계들의 필요성과 자체적으로 만들어 낸 거버넌스 규칙들의 필요성을 확인했다. 그녀는 어떻게 커머너들이 규칙을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어야 하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규칙들이 시행되는 방식을 감시하는 데 참여해야 하는지를 알아냈다. 분쟁이 있다면 커먼즈는 그것을 저비용으로 신속하게 해결할 자체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커먼즈는 국가 당국으로부터 자립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커먼즈에 관한 이 전통적인 사고방식은 경제의 표준적인 틀과 그 방법론인 개인주의 내부에 대체로 머물러 있다. 그것은 커머너들의 내적인 삶 또는 정치경제[즉, 집단적 공동체의 경제]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커먼즈의 실제적 작동방식을 우리가 보다 명확하고 깊이 있게 보도록 돕는 ‘관계틀’을 개발했다. 우리는 ‘패턴언어’라는 아이디어를 개발한 급진적 도시계획자이자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의 작업에서 길잡이를 찾았다.

알렉산더는 빈발하는 문제들에 대한 특정의 해결책들이 긴 시간 동안의 역사와 문화를 가로질러서 소소하게 변동하면서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것을 자신의 분야에서 관찰했다. 그는 이 해결책들을 ‘패턴’이라 불렀다. 패턴들은 사회적 관행에서 나타나는 디자인이고 행동이다. 패턴들의 유효성은 그 패턴들이 반복적으로 사용됨으로써 승인된다.

패턴언어 방법론을 활용하면서 질케와 나는 15년간 우리가 목격했던 많고 많은 수의 커먼즈 형태에서 관계를 나타내는 수십 개의 패턴들을 포착해냈다. 우리는 이 패턴들을 ‘사회적 삶’, ‘피어 거버넌스’ 그리고 ‘자급’이라는 세 영역—이는 각각 사회적, 제도적, 경제적 영역이라 할 수 있다—으로 나누었다. 이 세 영역들을 합치면 우리가 ‘커머닝의 3인조’라 부르는 바의 것이 구성된다. 이 3인조는 ‘어떤 사회적 실천들과 윤리적 행동들이 커머닝의 성공적인 관계들을 창출하고 유지하도록 돕는가?’라는 물음에 우리가 답할 수 있게 한다. 나는 우리가 찾은 25개 이상의 패턴들을 다 살펴볼 수는 없고 여러분에게 패턴에 대한 감각을 전하는 데 집중하고자 한다.

커먼즈의 ‘사회적 삶’에서 한 가지 중요한 패턴은 공유된 목적과 가치들을 계발하는 것이다. 이 실천이 없다면 커먼즈는 붕괴된다. 사람들이 긴밀히 연결된 활력 있는 집단으로 남아있으려면 그들은 경험을 공유할 필요가 있고 집단적으로 그들의 커머닝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된 패턴은 함께함을 의례(儀禮)화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만나야 하고 서로 공유해야하며 하나의 집단으로서 그들의 성취와 친연성을 축하해야 한다. 함께 어울리는 것이 중요하며, 의식(儀式)들, 전통들, 축제행사들을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커먼즈의 사회적 삶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기여하는 것—똑같은 가치를 직접적 혹은 즉시 되돌려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고 주는 것—을 필요로 한다. 커먼즈가 시간을 두고 실제 혜택을 내줄지라도 말이다.

커머닝 3인조 중 둘째인 피어 거버넌스의 핵심은 타자들을 동등한 존재로 보는 것이자 집단적인 의사결정의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것이다. 커머너들은 피어 거버넌스로 위계와 중앙집권화된 권력시스템을 피하고자 한다. 그 시스템이 권력 남용과 책무성 문제를 낳을 배치일 수 있기 때문이다. 피어 거버넌스는 무엇보다도 ‘지식을 아낌없이 공유하기’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집단지성을 생성하는 결정적인 방식이다. 지식은 공유될 때 늘어나지만 이런 일은 정보가 자유롭게 유통되고 쉽게 접근 가능할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패턴은 ‘투명성을 신뢰의 영역에서 존중하기’이다. 투명성은 명령될 수 없다. 사람들이 어렵거나 난처한 정보를 공유할 만큼 충분히 서로 신뢰하지 않는다면, 투명성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커머닝의 세 번째 영역인 ‘자급’은 커머너들이 어떻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생산하는가가 그 핵심이다. 시장경제에서처럼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는 일은 없다. 기본 목표는 사람들의 경제적 욕구를 개인적인 삶의 여타의 부분들과 통합하는 것이다. 커머너들은 시장에서 팔 것을 생산하지 않는다. 사실 커머너들도 자신들의 커먼즈의 온전함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시장과의 상호작용이 조금이라도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그 상호작용의 방식을 구조화하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급의 한 가지 기본 패턴은 ‘함께 제작하고 함께 사용하라’이다. 참여하고 책임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함께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자신들의 능력•재능•욕구에 따라 기여한다. 함께 생산하기는 ‘함께 하라’(‘Do It Together,’ DIT)라고 불릴 수도 있는 것의 핵심과정이다. 커먼즈에서 일반적으로 자급이 확실하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방식을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이 되는 많은 다른 패턴들이 있다.

일단 커머닝의 패턴들로 들어가기 시작하면—일단 관계성이 어떻게 지구에서 삶의 근본적인 현실인지를 보기 시작하면—근대적 세계관과는 다른 세계관, 즉 내가 존재론적 전환 또는 ‘OntoShift’(존재전환)이라 부르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지금 당장 철학적 차원을 논의할 필요는 없다. 다만 세계관을 전환하는 것은 우리의 내적 삶과 관점을 바꾸게 될 새로운 사회적 실천들과 커머닝의 경험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한다라고만 말해두자. 우리는 시장문화의 핵심요소들인 이기적인 개인주의와 장사꾼 사고방식을 버리고 가기 시작하는 것이며 세상을 촘촘한 망으로 이루어진 공생 및 협력관계로 움직이는 통합된 전체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커먼즈버스에서 ‘공동선’은 어떤 고정된 이상화나 눈에 잡히지 않는 목표점이 아니다. 이 공동선은 수평으로 그리고 아래에서부터 확장하고 출현하는 협동 윤리로서 발현되는 역동적인 살아있음이다. 이 공동선은 유기적 연결성과 온전성으로 발현되며 이는 사실 살아있는 유기체들의 생물학적 충동이다. 우리의 내적 삶에서 이 공동선은 배려하는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 안전하고 공정하다는 느낌, 그리고 소속감으로 발현된다. 이 공동선은 체계 차원의 다양성과 회복탄력성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것에서 나는 공동선에 대한 프란치스 교황의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Praise Be to You)의 비전이 생각나는데, 이 비전은 우리의 영적 삶, 인간보다 큰 세상, 그리고 우리의 (하나의 종으로서의) 공통의 부와 운명 사이의 상호연결에 관하여 많은 비슷한 점들을 강조한다.

* * *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문턱에 서있고 사태는 흥미로운 방식으로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커먼즈와 커머닝은 지난 10년간 급증하면서 국가권력, 자본주의 기업 및 신자유주의와 점점 더 충돌하게 되었다. 시장‑국가 체제는 그 나름의 우선사항들과 비전에 공격적으로 전념하는데 이 우선사항들과 비전은 커먼즈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영국에서 벌어진 종획 운, 몇 백 년에 걸친 식민지 정복 그리고 인공적인 나노물질과 유전자에서부터 수학 알고리즘과 (금융증권으로 전환되는) 물의 흐름까지, 가치가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사유화하고 화폐화하고자 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발전’에서 나타나듯이, 역사는 성장경제가 일반적으로 공동자산을 전유하고 사유화하며 커머너들을 그 공동자산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시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커머너들에게 긴급한 실질적인 물음은 어떻게 그들이 공유된 부의 종획을 막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커머닝을 보호하기 위해 법을 사용할 수 있는가이다. 이것이 실제로 가능한가? 자유주의 헌법 질서가 긍정적으로 커머닝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비자본주의적인 사회 형태로서 커머닝의 온전함을 존중할 수 있는가? 그 질서가 커머닝을 보호하기를 원하는가? 커먼즈의 토착적인 법과 서구의 법을 미봉적인 긴장완화로서만이라도 영리하게 섞는 것이 가능한가? 또는 자유주의 철학은 너무 경직되고 공격적이며 정치적으로 고루해서 커먼즈와 커먼즈가 만들어 내는 살아있는 가치를 지지하지 못하는 것인가?

분명히 해두자. 커먼즈는 시장가격과는 매우 다른 가치 이론을 구현하는데, 우리 시대에 시장가격은 가치의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측정규준으로 간주된다. 이와 달리 커먼즈는 살아있는 시스템을 생성적인 것으로서, 즉 일반적으로 사유화되지도 않고 사유화될 수도 없으며, 화폐화되지도 않고 화폐화될 수도 없고, 상업적으로 거래되지도 않고 거래될 수도 없는 가치로서 인식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시장‑국가 체제는 재산법, 계약법 및 통상법의 매개를 통해 삶을 객관화한다. 국가권력으로서는 자본과의 동맹을 통해 그 힘을 공고히 할 기회를 환영한다. 일반적으로 국가권력은 사람, 자연, 여타 생명체들에 대한 행정적인 통제를 중앙집권화하고 규칙화하기를 원한다. 정치 과학자 제임스 스콧(James Scott)이 다음과 같이 분명히 했듯이 말이다.

근대국가는 … 감시하고 수를 세고 평가하고 관리하기에 가장 쉬울 바로 그러한 표준화된 특징을 지닌 지형과 인구를 창출하는 것을 시도하는데 성공의 정도는 경우에 따라 다르다. 근대국가의 허망하고 근시안적이며 끊임없이 좌절되는 목표는, 그 밑에 있는 무질서하고 혼란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현실을, 그 현실을 관찰하는 행정망을 더 많이 닮아있는 어떤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국가들이 디지털 감시 테크놀로지와 빅테크와의 연합으로 무장하고 있으므로 이 동향의 논리적인 종점은 권위주의적인 통제이다. 국가법과 자유주의가 얼마만큼 이 방향을 향할지 불분명하다.

결국 자유주의는 국가권력에 깊이 예속되어 있고 커머너들의 관습에 따른 관행의 역할이나 그들의 집단적인 정체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시장처럼 자유주의 국가는 개인주의, 재산권, 계약의 자유, 및 물질적 ‘진보’에 깊이 전념한다. 이것은 분리―인간이 서로 분리되고 지구로부터 분리되며 역사적 기억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의 사고방식을 조장한다.

세르게이 거트워스(Serge Gutwirth)가 설명했듯이, 자유주의 국가에는 법인격 없는 역동적인 공동체에 권리를 부여할 수단이 없다. 물론 경제성장—주주들의 집단적 의무—이 자유주의 국가에 크게 잘 들어맞기 때문에 기업들은 예외다. 대략 800년 전에 커머너들의 많은 특정한 권리들이 획기적인 <삼림헌장>[주석4]—마그나카르타와 연결되어 있는 법적 선언문—에서 존중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것은 대부분 잊혀졌다. 민족(국민)국가의 발생과 심지어 자유주의로 인해 커머닝에 대한—생존에 필수적인 것들에 접근할 사람들의 권리에 대한—법적인 인정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이것이 나에게 시사하는 바는 현재 실행되는 바의 자유주의는 철학적으로 커먼즈에 적대적이거나 최소한 커먼즈의 실제 가치와 역동성을 모른다는 것이다. 국가는 권력 행사의 합법성을 한시도 늦추지 않고 주장한다. 그것이 법과 국가 기관을 통해 공식적으로 수행되는 바대로 말이다. 그러나 국가는 커먼즈에 기반을 두는 체제에 의해 주장되는 사회적, 윤리적 정당성에는 일시적인 관심만을 보인다. 권력은 자신이 선택한 인식 체계를 떠받침으로써 스스로를 유지한다.

자유주의와 커머닝을 논할 때 우리는 합법성과 정당성 사이의 단절에 직면한다. 시장‑국가 체제는 그 행정질서의 합법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형식적 법체계와 관료조직에 의지한다. 그 체제는 커머너들—커머너들은 그들 고유의 인식론적 질서, 법과 정당성에 대한 그들 고유의 비전을 가지고 있다—의 역동적인 거버넌스와 일상적인 관행 및 경험에 별 관심이 없다.

나는 이것을 우리가 기획한 「자유주의를 넘어」라는 제목의 워크숍이 탐색해야 하는 영역으로 여긴다. 국가의 합법성과 커먼즈의 정당성 사이의 차이는 취약성, 위험성 및 가능성의 차이이다. 이 차이를 메우려고 했던 몇몇 인상적인 혁신들이 있고 현재로서 최선의 효과를 내는 혼합안을 개발하려고 했던 몇몇 흥미진진한 실험들이 있다. 그것들 중 세 가지만 간략하게 언급해보자.

1) 새로운 사회적 규범들 및 관행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법적 해킹 활용
2) 커머닝을 지원하는 새로운 조직형태들의 개발
3) 일반적으로 보통 지자체 수준에서 커머너들과 국가 공무원들을 협력에 이르게 하는 커먼즈‑공공부문 파트너십

법적 해킹은 국가법을 원래 입법자에 의해 상상되거나 의도되지 않은 방식으로 개편하는 것이다. 법적 해킹의 핵심은 현행법 내부에서부터 합법성의 새로운 구역을 개척하는 것이고 그런 다음 새로운 사회적 규범과 정치 활동으로 이 구역을 채우는 것이다. 핵심은 ‘새로운 합법성’을 수립하기 위해 민중에 기반을 둔 정당성과 공동체 실천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법적 해킹은 국가법 하에서 불법일 수 있는 커머닝(예를 들어 씨앗공유하기 및 인도적인 구조救助)을 탈범죄화하거나 커머닝이 번성할 보호받는 적법한 공간들을 만들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사례들로는 창조적인 작업을 합법적으로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듦으로써 저작권법을 해킹하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Creative Commons licenses)가 있다. 이와 유사하게 강•산•풍경을 보호하는 한 방식으로서 이것들에 공식적인 법인격을 부여하고자 하는 다양한 ‘자연권’ 법들도 법적 해킹이다.

기업들, 협동조합들, 비영리단체들에 권한을 부여하는 지배적인 법구조가 커머닝이 작동하는 방식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적어도 서구 나라들에서는 새로운 조직 형태들을 만드는 것이 종종 필요하다. <지속가능한 경제법 센터>(Sustainable Economies Law Center), <민주 및 환경 권리 센터> 같은 몇몇 법 옹호단체들은 풀뿌리에서부터 성장할 수 있는 탈중심화된 구조를 설계하기 위해서 혁신적인 정관(定款)과 금융구조를 개발하고 있다. 그들은 커먼즈로서 운영되는 자율적인 운영자공동체 그리고 법인격을 가지고 있는 ‘스스로를 소유하는’ 토지를 창출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커먼즈‑공공부문 파트너십(실제적인 것이든 제안된 것이든)은 바로셀로나, 암스테르담, 볼로냐, 방콕, 서울 같은 도시들에서 그리고 공동도시들(Co-Cities) 운동[주석5]과 연관된 도시들에서 불쑥불쑥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지자체 공무원들과 커머너들 사이에 새로운 유형의 유연하고 비관료적인 협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노인 돌봄, 아이 돌봄, 근린지역 개선, 공공 장소와 공공 건물들, 디지털 정보 커먼즈, 그리고 오픈소스 테크놀로지가 이 파트너십에 포함된다. 오픈소스 참여가 공무원식 사고방식과 얼마나 성공적으로 잘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는 열린 문제로 남아있다.

바라건대 나의 발표가 분명히 하듯이 자유주의적 입헌주의의 세계에서 ‘공동선’에 대한 생각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정의되어야하고 이해되어야 하는지 전적으로 분명하지는 않다. 공동선을 발생시키기 위해 어떤 사회적 관계가 요구되는지, 공동선을 보호하기 위해 법을 포함해서 어떤 종류의 정치제도들과 절차들이 요구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국가권력이 다시 만들어질 필요가 있는지 전적으로 분명하지는 않은 것이다.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논점은 공동선에 대한 일정한 비전 뒤에 인간의 번성하는 영적 삶에 대한 무슨 암묵적인 비전이 자리 잡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당연하게도, 커먼즈와 커머닝을 지향하는 활동이 자본주의적인 근대성의 한계를 비판하고 조직화된 협력과 공유하기의 근대 이전 전통—그리고 전적으로 현대적인 전통—을 탐색함으로써 공동선 논의에 공헌할 여지가 많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또한 체제 변화에 복무하는 다양한 국제적인 사회운동들—탈성장, 협동조합 운동들, 피어 생산, 코즈모로컬 생산, 농업생태학, 슬로우푸드를 비롯한 농업 및 식량 운동들, 토착적이며 전통적인 공동체들, 탈식민과 인종 정의 운동들, 재지역화 기획들, 도넛 경제학[주석6], 페미니스트 경제학, 그리고 기타 많은 것들—에도 이 더 큰 프로젝트에 기여하는 그 나름의 중요하고 보완적인 관점들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재의 긴급한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연계된 집중적인 대응을 개시할 수 있는가? 이것은 아쉽게도 여전히 열린 문제로 남아있다. 

==== 주석

 [주석1] 토지 신탁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1574 참조.
[주석2] 메이커스페이스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1369 참조.
[주석3] 이 책과 관련해서 http://commonstrans.net/?p=2418http://commonstrans.net/?p=2095참조. 
[주석4] <삼림헌장>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974, http://commonstrans.net/?p=478 참조.
[주석5] 공동도시들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2560 참조.
[주석6] 도넛 경제학(Doughnut Economics)은 영국의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Kate Raworth)가 창안한 21세기 경제학 이론이다.

 

 




커먼즈의 제헌권력 ― 공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의 관계에 대한 시론(試論)

 


  • 저자  : 윤영광
  • 설명 : 2022 커먼즈네트워크 포럼(10.28) 발표문이다.

 

제기되는, 제기되어야 하는 물음들

‘커먼즈’ 네트워크 포럼이 “공공성 회복을 위한 더 넓은 연대와 협력”이라는 제목하에 열리고 있다는 사실, 지금 이 세션의 제목이 “커먼즈와 공공성”이라는 사실은 즉각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는 왜 공공성이라는 익숙한 개념에 더해 커먼즈라는 새로운 개념을 필요로 하는가? 어째서 공공성이라는 개념이 이미 존재함에도 다시 커먼즈를 이야기하는가? 공공성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면 커먼즈라는 별도의 개념을 사용함에 따르는 잠재적 혼란을 감내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공공성의 어떤 문제, 한계 혹은 결여가 커먼즈라는 개념을 소환하는가? 그리고 커먼즈 개념을 소환토록 한 공공성의 그 모든 문제, 한계, 결여에도 불구하고 왜 간단히 공공성을 커먼즈로 대체하지 않고 ‘공공성 회복을 위한 더 넓은 연대와 협력’을 다름 아닌 커먼즈의 이름으로 논의하려 하는가?

요컨대 공공성과 커먼즈의 병치 자체가 이미 우리가 오늘 다루어야 하는 문제상황을 대략적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문제지형의 정확한 파악에는 아직 미치지 못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커먼즈와 공공성의 관계가 외적이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 관계의 양면성

모두 아시다시피 공공성은 두 가지 ‘공’을 품고 있습니다. 첫 번째 공(公)은 영어 ‘public’(공적인 것)에 해당하고 두 번째 공(共)은 ‘common’(공통적인 것)에 해당합니다. 공공성, 혹은 공공성과 커먼즈의 관계를 논하는 여러 연구자들이 이 두 가지 ‘공’에 대해 이미 많은 논의를 제출한 바 있습니다만, 오늘 제 이야기도 역시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숙고함으로써 시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공통적인 것 혹은 공통성(commonness)은 커먼즈의 구성적 속성 혹은 본질입니다. 커먼즈는 공통적인 것입니다(‘commons is common’). 이렇게 보면, 커먼즈는 공공성과 별도로 그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성을 구성하고 지탱하는 한 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커먼즈와 공공성의 관계는 내적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커먼즈와 공공성의 관계라는 애초의 문제는 공공성을 구성하는 두 축, 즉 공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의 관계라는 문제로 새롭게 제기됩니다.

발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공적’, ‘공통적’, ‘공공성’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봤습니다. 물론 지속적인 개념의 재규정을 요하는 이론적 작업에서 사전에 기대는 것은 일반적으로 부적절합니다. 사전의 본질이 한 단어의 침전된 의미, 그래서 가장 상투화된 의미를 전달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바로 그 때문에 사전적 의미는 개념을 둘러싼 ‘현실적인’ 사회·정치적 지형을 탐사하는 데 유용한 이정표가 되기도 합니다. 각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 공통적 : 둘 또는 그 이상의 것에 두루 통하고 관계된 것
  • 공적 : 국가나 사회에 관계된 것
  • 공공성 : 한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일반 사회 구성원 전체에 두루 관련되는 성질((국립국어연구원, 『표준국어대사전』, 두산동아, 1999.))

두 가지 점이 흥미롭습니다.

첫째, 공통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의미가 꽤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관적으로 구분됩니다. 공통적인 것의 정의는 ‘함께함’ 자체 ― 한국어 함께함은 being-together, living-together, doing-together를 모두 포괄할 수 있다는 강점을 갖습니다 ― 의 내용을 말하되 그 형식은 규정되지 않은 채로 남겨두고 있는 반면, 공적인 것의 정의는 현재 인류에게 함께함의 형식으로서 지배적인 ― 다른 정치적 상상이나 구상을 즉각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지배적인 ― 것으로 주어져 있는 ‘국가’와 ‘사회’를 소환합니다.((19세기 사회학이라는 분과학문의 출현, 국가와 시민사회의 역사적 분리에 대한 헤겔과 맑스의 분석, ‘사회적인 것’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 등이 서로 다른 맥락과 각도에서 방증하듯, ‘사회’, 적어도 한편으로는 국가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과 맞짝을 이루는 개념으로서의 ‘사회’는 국민국가와 마찬가지로 근대의 역사적 발명품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국가와 사회가 공통적인 것과 관련하여 동일한 논점을 제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는 국가보다 더 복잡하고 섬세한 논점들을 제기하며, 그래서 짧은 발표와 토론에서 다루기는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이후 논의는 국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닙니다만, 철학적으로 말해 이 맥락에서 공통적인 것은 질료에, 공적인 것은 형식에 해당한다고 해도 좋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문제는 저 형식과 질료의 관계가 필연적인가, 즉 공통적인 것은 필연적으로 공적인 것이라는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는가로 정식화될 수 있을 겁니다.

둘째, 공공성의 사전적 의미는 그것을 이루는 두 가지 ‘공’의 정의를 결합하고 있습니다. 공통적인 것의 정의에서 ‘(복수의 것에) 두루 관련됨’이라는 속성을 가져오고, 공적인 것의 정의에서 ‘사회’라는 요소를 가져오는 것이지요. 흥미로운 점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런 결합 자체라기보다, 공적인 것의 정의에서 맨 앞에 왔던 ‘국가’라는 요소가 이 정의에서는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한때 이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표현을 쓰자면 이는 ‘징후적’입니다. 이것은 공적인 것의 정의 속에 등장했던 함께함의 두 형식, 즉 국가와 사회가 그 성격과 위상에 있어서 같지 않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국가’의 누락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이한, 어떤 의미에서는 반대되는 설명이 가능해 보입니다. 하나는 “한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일반 사회 구성원 전체”가 당연히 국가를 함축한다는 사회적 무의식이 이런 누락을 초래했다는 설명입니다. 이렇게 보면 공적인 것 혹은 공공성에 대한 설명은 설령 그것이 ‘사회’라는 개념만을 동원하는 순간에도 잠재적으로는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국가로 수렴됩니다. 국가는 중요치 않거나 적절치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누락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두 가지 ‘공’이 공존 혹은 결합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삭제되거나 적어도 비가시적으로 되어야 함을 함축한다는 설명입니다. 아마도 사전편찬자의 본의, 나아가 사전편찬자가 기대고 있는 상식적인 언어/정치감각과는 거리가 있을 이 설명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정치적 상상과 사고를 자극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즉각 어려운 문제가 제기될 것입니다. 공적인 것에서 국가를 제거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때 공적인 것이란 무엇이 될 것인가?

물론 이는 단지 사전적 정의가 함축하는 바를 좀더 깊이 들여다보고 그 정의들 간의 관계를 따져본 것일 뿐입니다. 당연히도 이로부터 최종적인 이론적·실천적 입장을 도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가장 상식적인 언어와 사고의 수준에서도 공통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공존 내지 결합이 필연적인 것, 자연스러운 것, 평화로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 또 그런 한에서 공공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긴장과 갈등을 함축하는 문제적 개념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긴장과 갈등의 핵심엔 역시 국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커먼즈 운동이 국가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는 단순한 결론을 손쉽게 도입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국가가 공적인 것의 종합이자 최종심급이며, 그런 한에서 공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의 관계, 즉 공공성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국가라는 문제를 우회할 방법이 없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조금 추상적이고 거친 논의가 되겠지만 공통적인 것의 관점에서 본 국가의 성격을 짧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국가는 원리적으로 “둘 또는 그 이상의 것에 두루 통하고 관계된 것”을 전제하지만 그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 근대 국가와 주권의 본질은 공통적인 것의 내재적 지평을 초월하는 운동을 하면서도 다시 저 내재적 지평에 개입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때 초월성은 “둘 또는 그 이상”의 인간 존재들의 본성을 사적인 것으로 설정하는 데서 오는 필연적 귀결입니다. 사적 개인, 즉 사적인 것을 본질로 하는 인간은 원리상 자신들에게 “두루 통하고 관계된 것”을 그들 자신 간의 내재적 관계에서 오는 힘을 통해 다룰 수 없는 존재로 상정됩니다. 공통적인 것을 다룰 별도의 층위, 별도의 장치가 요구되는 것은 이 때문이며 그것이 바로 국가입니다. 국가는 공통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그것에 근거해야 하지만 결코 공통적인 것의 층위에 내재할 수는 없다는 역설을 본질로 합니다.

이렇게 보면, 국가를 정점으로 하는 공적인 것은 공통적인 것이 사적인 것의 지배하에 소외되고 왜곡된 방식으로 현상하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커먼즈의 관점에서 공적인 것은 양면성을 갖습니다. 한편으로 공적인 것은 사적인 것과 대립하는 외양에도 불구하고, 정확히는 바로 그 ‘대립’의 방식으로 사적인 것의 지배를 보완하는 한에서 공통적인 것과 갈등관계에 있습니다. 커먼즈가 공사 구분 혹은 대립을 넘어서며 또 마땅히 넘어서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공적인 것은, 비록 제한되고 훼손된 모습일지언정 ― “둘 또는 그 이상의 것에 두루 통하고 관계된 것”을 인간의 삶에서 완전히 제거하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 결코 완전히 소거될 수는 없는 공통적인 것이 사적인 것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형태입니다. 그런 한에서 커먼즈 운동은 공적인 것에 대해 단순히 거부나 외면의 태도로 일관할 수 없습니다. 공적인 것의 ‘합리적 핵심’인 공통적인 것을 만회하고 강화하려는 노력 역시 커먼즈 운동의 중요한 한 가지 벡터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커먼즈를 공적인 것 혹은 공공성을 재구성하는 계기로 보려는 활동가 및 연구자들의 노력은 이런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커먼즈가 공공성의 새로운 구성에 기여할 수 있다는 논의의 기저에는, 그 새로운 구성이 공공성의 양대 축인 두 가지 공 가운데 공통적인 것의 힘과 가치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커먼즈 운동은 공적인 것을 공통적인 것 쪽으로 견인함으로써 두 공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디어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공적인 것을 공통적인 것 쪽으로 끌어와야 한다는 사고뿐 아니라 반대로 공통적인 것을 공적인 것의 방향으로 유도해야 한다는 사고 또한 작동하고 있습니다. 공통적인 것은, 적어도 일정 규모 이상에서 현실성을 갖기 위해서는, 공적인 것의 수준으로 상승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적인 것에 의해 매개되거나 공적인 것의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인 것이지요. 다시 말해, 커먼즈에 의한 공공성의 재구성이라는 아이디어는 분명 커먼즈의 “구성적 힘”(홍덕화, 「커먼즈로 전환을 상상하기」, 2022)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 그 구성적 힘은 공적인 것에 의해 매개되지 않고는 제 발로 서서 확장할 수 없다는 진단이기도 한 것입니다. 커먼즈가 좁은 범위와 한계에서만 작동하는 ‘공동체 커먼즈(community commons)’를 넘어서 체제전환 ― 언젠가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혁명’이라는 말의 부드러운 대용품 ― 이라는 목표를 향하기 위해서는 ‘공적 커먼즈(public commons)’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런 진단의 불가피한 결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새삼 커먼즈와 공공성을 함께 논하는 것은, 커먼즈에 의한 공적인 것의 재구성이라는 아이디어에 분명 ‘현실적’ 설득력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현실성 자체가 곧바로 양자의 관계에 대한 만족할만한 답을 주지는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공적인 것을 공통적인 것 쪽으로 견인하는 일과 공통적인 것을 공적인 것 쪽으로 견인하는 일. 이 두 방향의 운동 사이에는, 단순히 “둘 중 하나에 치우칠 것이 아니라 양자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라는 식의 절충으로는 해결을 볼 수 없는 긴장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논의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저 긴장이 공공성을 이루는 두 가지 공 사이의 본질적 긴장에서 비롯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꽤 긴 이야기를 거쳐 우리는 다시 공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의 관계라는 문제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공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의 긴장이 해소되는 일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거나, 불가능하진 않더라도 오랜 역사적 과정을 필요로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논의해야 하는 것은 저 긴장을 당장 제거하기 위한 방안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고 다룰 것인가, 저 긴장을 적절히 ― 인식적 관점에서뿐 아니라 실천적 관점에서도 적절하다는 의미에서 ― 사고할 수 있도록 해줄 양자의 관계에 대한 관점은 무엇인가일 것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아직 시론 단계에 있는, 그래서 성숙과 정교화를 위해서는 많은 이론적 커머닝이 필요한 개념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커먼즈의 제헌권력이라는 개념이 그것입니다.

 

커먼즈의 제헌권력

앞서 언급했듯 여러 활동가·연구자들이 커먼즈에 의한 공공성의 재구성을 말하고 있으며 홍덕화 선생님은 이를 커먼즈의 ‘구성적 힘’이라는 표현으로 정식화하신 바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 표현을 직접 고안하셨는지 다른 맥락에서 가져오신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저에게 흥미로운 것은 ‘구성적 힘’이 헌법학, 법철학, 정치학에서 통상 제헌권력 혹은 헌법제정권력으로 번역되는 ‘Pouvoir Constituant/Constituent Power’의 번역어로 새겨질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단순한 우연 이상의 의미를 갖는데, 제헌권력이란 바로 국가와 헌법으로 표상되는 공적 질서를 창출하고 정초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공공성의 재구성을 가능케 하는 커먼즈의 ‘구성적 힘’이 법학과 정치학에서 제헌권력이라는 개념으로 논의되어 온 바와 내용상 본질적 연관을 보인다는 것, 바로 여기에 커먼즈의 제헌권력이라는 발상의 출발점이 있습니다.

커먼즈를 제헌 혹은 헌법의 문제와 연결한 것은 제가 처음이 아닙니다. 커먼즈 운동가이자 이론가인 우고 마테이(Ugo Mattei)는 한 공저 논문에서, 자신이 직접 참여한 이탈리아 커먼즈 운동을 주요 분석사례로 삼아 ‘제헌권력으로서의 사회운동’이라는 테제를 제출한 바 있습니다.(“Social Movements as Constituent Power: The Italian Struggle for the Commons”, 2013) 국내에서는 정영신 선생님이 우고 마테이의 논문 등을 주요 참조점으로 해서 커먼즈 정치의 제헌적 성격을 언급하는 논문을 쓰신 바 있습니다.(「이탈리아의 민법개정운동과 커먼즈 규약 그리고 커먼즈의 정치」, 2022) 저의 제안에 이런 논의와 다른 점이 있다면, 비단 커먼즈 운동·정치만이 아니라 커먼즈 혹은 공통적인 것 자체의 제헌적 역능을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제헌권력은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등장했으며 시에예스(E. J. Sieyès)가 처음 명시적인 형태로 사용한 이래 슈미트, 아렌트, 네그리 등의 재해석을 거치면서 그 성격과 본질을 두고 많은 논의와 논쟁이 있었던 헌법학·법철학·정치철학의 근본개념이자 한계개념입니다. 이 자리에서 세부적 논점과 맥락을 추적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또 우리의 관심사도 아닐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제헌권력이라는 개념의 핵심 아이디어, 그리고 그것과 커먼즈-공통적인 것 사이에 그려질 수 있는 연결고리입니다.

제헌권력은 말 그대로 헌법을 만드는 권력이며 헌법적 규범의 원천입니다. 헌법은 모든 실정법의 기초이자 국가의 기본적 짜임새를 규정하므로 제헌권력은 또한 국가를 정초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국가가 공적인 것의 종합이자 최종심급인 한에서, 국가를 정초한다는 것은 곧 공적 영역, 공적 가치, 공적 체계 등 온갖 공적인 것의 질서를 조직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커먼즈의 제헌권력을 말한다는 것은 커먼즈가 공적 가치·질서·영역·공간·재화 등을 재정의하고 재구성하고 재배치할 수 있는 역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헌권력의 상대개념은 ‘헌법적으로 조직된 권력(Pouvoir Constitué/Constituted Power)’인바, 말하자면 현재의 논의 맥락에서 공통적인 것이 제헌권력이라면 공적인 것은 그 제헌권력에 의해 조직된 권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적인 것은 공통적인 것의 제헌권력에 근거하며 그것의 표현형식입니다. 그러나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공통적인 것의 제헌권력에 의한 재구성과 재정의에 열려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합니다.(헌법개정권력/개헌권력은 제헌권력의 제한적 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커먼즈의 제헌권력은 아직 더 다듬어야 하는 아이디어인데다 불가피하게 상당한 추상성을 동반합니다. 때문에 보다 현실적인 논의를 위해서라면, 이 문제를, 커먼즈를 헌법적 원리와 가치로 사고하고 주장하는 일의 (특히 오늘의 주제인 공공성과 관련한) 유효성과 의의라는 문제로 바꾸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현재의 헌정질서를 가장 큰 틀에서 규정하는 것은 사적 소유의 논리입니다. 대한민국이 공화국(res publica=공적인 것)이라는 제1조 1항의 규정이 지금까지 저 사적 소유의 지배와 사유화의 진척을 막는 데 얼마나 무력했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커먼즈를, 즉 공적인 것이 아닌 공통적인 것(res communis)을 헌법에 틈입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사화(私化, privatization)에 맞서는 보다 강한 힘과 논리를 헌법 자체에서 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공공성을 방어하기 위한 개개의 투쟁에 개별적으로 커먼즈의 논리를 동원하는 것을 넘어 공공성을 바라보는 일반적이고 헌법적인 틀로 커먼즈를 전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요컨대, 자본이라는 사회적 관계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커먼즈 운동과 정치가 결국 계급투쟁의 성격일 띨 수밖에 없다면, 헌법 자체를 계급투쟁의 장(場)으로 만드는 것이 이 투쟁을 수행하는 한 가지 유력한 길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전유될 수 없는 것을 제도화하기

 


  • 저자  : Pierre Dardot, Christian Laval, Tran. Matthew MacLellan 
  • 원문 :  “Instituting the Unappropriabl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Common : On Revolution in the 21st Century의 III부 마지막 장 “Post-Script on Revolution in the Twenty-First Century”의  맨 마지막 부분으로서 “Instituting the Unappropriable”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대목을 비교적 상세히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저자들은 원리로서의 공통적인 것의 핵심 특징들을 10개 단락으로 압축하여 제시하고 있다.

  1. 우리는 ‘common’의 형용사 형태(‘공통적인’)보다 명사 형태(‘공통적인 것’)의 중요성을 책 전체에 걸쳐서 체계적으로 주장했다. 이런 생각에서 우리는 심지어 책의 제목―Common : On Revolution in the 21st Centruy―에서 관사를 빼고 쓰기까지 했다. 우리의 목적은 공통적인 것을 사물이나 실체, 혹은 (사물에 속하는) 성질로 보지 않고 원리로 보는 우리의 관점을 아예 처음부터 나타내는 것이었다. 우리가 말하는 원리란 출발 시에 존재해서 그 이후에 오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또한 처음 사용되고 나면 쇠잔해지다 사라지는 ‘시초’도 아니고, 일단 떠나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단순한 ’출발점‘도 아니다. 원리란 진정한 시작, ‘항상 다시 시작하는 시작’, 즉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다스리고 이끄는 시작이다. 그리스어 ‘아르케’(ἀρχή)는 ‘시작’과 ‘명령’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아르케는 그로부터 모든 다른 것이 파생되는 원천이다. 공통적인 것은 이후의 모든 정치활동을 명령하고 지휘하고 다스린다는 의미에서 정치적 원리이다. 만일 이 용어의 논리적 의미를 더 좋아한다면, 원리란 합리적 명제나 입증의 전제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 이 용어에 부여했던 의미가 이에 부합한다. 9개의 정치적 명제― 본 블로그의 글 커먼즈의 구성을 위한 9개의 정치적 명제 참조―는 미래의 합리성을 이끌도록 계획된 전제들이며 더 나아가 공통적인 것 자체가 어떻게 하나의 정치적 원리로서 간주되어야 하는지를 가리키도록 언표된다는 의미에서 논리적 원리들로서 제시되었다.

 

  1. 공통적인 것은 대부분의 다른 원리들과는 다르다. 공통적인 것은 정치적 원리,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진정한 정치적 원리이다. ‘정치’라는 말로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시민들이 ‘정당한 것’을 집단적으로 규정하는 활동과 이 집단적 활동으로부터 나오는 [의사]결정 및 행동이다. 따라서 정치는 소수의 전문가들에게 할당된 활동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전문가의 능력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며, 전문직이나 경력도 아니다. 정치는 지위나 직업을 막론하고 공적 숙의에 참여하기를 바라고 욕망하는 사람들 모두의 일이다. 정치는 공적 숙의와 ‘단어들과 아이디어들을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그 핵심으로 한다. 과학적 증명이나 증거에 토대를 두고 있는 정치의 꿈이 아직도 살아 있기는 하지만, 과학적 진실에 기반을 둔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는 기본적 진실을 기억하는 것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숙의와 민중의 판단력의 발휘 없이는 정치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과학적 정치’는 정치의 한 형태가 아니라 기껏해야 과학을 통한 정치의 (말살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정이다.

 

  1. 정치적 원리로서 공통적인 것은 동일한 활동에의 참여를 정치적 의무의 토대로 삼는다. 공동-의무로서의 공동-활동이다. 우리는 ‘common’이라는 용어의 뿌리에 놓여있는 ‘munus’라는 용어가 의무와 활동을 모두 의미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그 어떤 형태의 소속―민족, 국민, 인류 등―도 그 자체로 정치적 의무의 기반을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정치적 의무는 신성한 종교적 특징을 가질 수 없다. 이는 그 어떤 초월적 원천도, 활동 외부의 그 어떤 권위도 거부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정치적 의무는 전적으로 공동의 행동에서 나온다. 그것은 자신들의 활동을 다스리는 규칙들을 집단적으로 다듬어낸 모든 사람을 구속하는 실천적 헌신으로부터 그 모든 힘을 끌어낸다. 그것은 바로 이 활동에의 공동참여자들과의 관계에서만 타당하다.

 

  1. 그렇기에 공통적인 것은 대상이 될 수 없다. 적어도 욕망이나 의지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의 대상은 될 수 없다. 공통적인 것은 모든 형태의 대상화에 저항한다. 심지어 공통적인 것이 어떤 대상이 욕망함직한 것으로 인식되게 만드는 성질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공통적인 것은 우리가 획득하고자 하는 목표가 아니다. 우리는 공통적인 것을 종종 ‘공동선’(common good)이라고 불리는 것과 혼동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정치철학 담론에서 공동선은 함께 추구하고 함께 규정하는 바의 것을 지칭한다. 따라서 공동선은 그것이 모든 형태의 집단적 숙의가 달성하려고 하는 공동의 편익과 일치하는 경향이 있는 한에서 종종 정당한 것과 혼동된다. 이런 의미에서 공동선은 탁월하게 욕망함직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가 ‘공동선’의 내용을 어떤 식으로든 결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선’은 항상 공동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공통적인 것이 대상으로서의 ‘공동선’의 추구를 이끄는 원리이다. 공동선의 진정한 추구에는 공동의 숙의활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공통적인 것이 항상 ‘공동선’에 선행한다.

 

  1. 공통적인 것이 대상이 아닌 한, 그것은 사물(res)도 아니고 사물의 본질적 속성이나 특징도 아니다. 우리는 공통적인 것을 이러저런 자연적 혹은 내재적 속성 덕분에 공통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어떤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빛이나 공기가 ‘커먼즈(공통재)’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공통적인 것 되기’(being the common)와 같지 않다. 또한 공통적인 것은 법적 커먼즈(공통재)의 다양한 형태들―이는 물질적일 수도 있고(대양, 여러 국가에 걸쳐 흐르는 강, 인류의 공동유산으로 지정된 곳들) 비물질적일 수도 있다(아이디어들, 과학적 정보, 발견, 공적 도메인에서의 지적 생산물 등)―과 혼동되어서도 안 된다. 법적 범주인 ‘공통적 사물’(res communis)은 공통적 대상들을 활동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분리해내게 마련이다. 공통적 사물이 진정으로 공통적인 되는 것은 활동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공통적인 것을 대상으로 보는 접근법은 내버려야 한다.

 

  1. 다른 한편, 우리는 ‘나눔’(sharing)이나 ‘한데 모으기’(pooling)를 통해 공통적이 된 대상들을 지칭하기 위해서 커먼즈를 말할 수도 있다. 본래적으로 공통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집단적 실천만이 어떤 사물 혹은 일단의 사물들의 공통적 성격을 결정한다. 따라서 커먼즈는 그 커먼즈를 관리하고 보존하는 일을 활동적으로 담당하는 사람들이 제도화하는 활동의 유형에 따라서 매우 다양하다. 물론 공통적 대상/자원의 자연적 속성들이 그런 대상/자원을 공통적으로 만드는 활동의 유형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바로 이 활동이 주어진 대상을 ‘공동화하고’ 그렇게 공동화된 상태의 유지에 관여되는 특수한 규칙들의 산출을 통해 그 대상을 제도적 공간에 각인한다.

 

  1. 공통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제도와 거버넌스의 문제이다. 공통적인 것은 일반적으로 항상 제도적 행동으로부터 생성된다. 공통적인 것이 원리라는 사실만으로 이 원리가 현실적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일 공통적인 것의 원리가 제도화될 필요가 없고 인식되기만 하면 된다면, 모든 커먼즈는 이미 공통적인 것이 되어 있을 것이다. 공통적인 것은 특정의 작동 규칙들을 정하는 실천들에 의해서만 제도화되어 존재한다. 그리고 이 제도화는 공통적인 것을 창조하는 시초적 행동을 넘어서 진행되어야 한다. 애초에 제도의 규칙들을 수립한 바로 그 실천들이 그 규칙들을 변경하면서 장기적으로 제도화를 지속해나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제도화하는 프락시스’(instituent praxis))라고 부른 것이다. ‘제도화하는 프락시스’는 결정의 힘으로부터 분리된 행정력이라는 의미의 ‘관리’의 한 형태가 아니다. ‘관리’라는 환상은 사실 공통적인 것에 대한 자연주의적 견해―만일 공통적인 것이 사물들의 자연적 속성들의 함수라면, 그것이 가진 공통적인 것으로서의 지위는 사회적 공간을 가로지르는 실제적인 사회적 갈등들로부터 분리된 관리적 합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견해―와 연결되어 있다. ‘거버넌스’는 ‘관리’와는 달리 사회적 갈등을 포용하며 공통적인 것을 다스리는 규칙들에 대한 집단적 결정을 통해 그 갈등을 다룬다. ‘제도화하는 프락시스’란 이렇듯 공통적인 것을 수립하는 집단들이 커먼즈를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1. 정치적 원리로서 공통적인 것은 공적인 정치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 영역에도 적용된다. 커먼즈는 생산과 교환의 영역 전체를 사적 이익집단들의 싸움이나 국가독점에 내맡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이 시장과 국가 사이의 ‘제3의 길’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며, 사적인 것 및 공적인 것과 함께 병존하는 경제의 ‘제3부문’으로 간주되어서도 안 된다. 공통적인 것의 우선성은 사유재산의 폐지를 함축하지도 않고 더 나아가 시장의 폐지를 함축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공통적인 것의 원리는 시장의 공통적인 것에의 종속을 요구하며 이런 의미에서 소유권과 시장의 제한을 함축한다. 상업적 교환의 영역으로부터 특정 대상들을 단순히 빼내어 공동의 사용을 위해 보존함으로써가 아니라, 어떤 사물이 소유자의 이기적 의지에 전적으로 맡겨지는 것을 허용하는 남용권을 폐지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1. 만일 공통적인 것이 정치 영역과 사회 영역을 가로지르는 횡단적인 정치 원리라면, 그리고 커먼즈들이 특정의 대상들(그 유형이야 어떻든)과 연관된 특정의 실천들에 의해 열리는 제도적 공간들이라면, 사회적 커먼즈만이 아니라 정치적 커먼즈도 있다는 말이 된다. 정치적 커먼즈는 ‘공적 일들’에 모든 수준에서, 즉 지역에서 일국을 거쳐 전지구적 수준까지 관여한다. 사회경제적 영역은 사회적 활동이 연합의 논리에 따라 확대되는 어느 곳에서든 그 활동의 기준에 의해서만 조직된다. 정치적 영역은 마찬가지로 연합의 논리에 따라 조직되는 여러 수준들을 통해 엄밀하게 영토적인 기반 위에서 조직된다. 지방자치는 정치 영역에서 기본적인 형태의 자치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정치 영역에서의 공통적인 것의 세포적 형태이다. 일원적이고 중앙집중적이며 주권의 원리에 의해 질서지어지는 국민국가 모델은 이 논리에 의해 엄밀하게 금지된다. 공통적인 것의 정치적 원리는 이렇듯 이중의 연합에 기반을 둔다. ① 사회전문적인(socio-professional) 기반에 도태를 둔 사회경제적 커먼즈들의 연합과 ② 영토적 기반에 토대를 둔 정치적 커먼즈들의 연합이다. 이 두 영역이 함께 공통적인 것의 민주주의를 이룬다.

 

  1. 원리로서의 공통적인 것에는 전유될 수 없는 것의 규범이 소중하게 담겨 있다. 공통적인 것의 원리의 근본적 목적은 이 규범에 따라 사회적 관계를 변형하는 것이다. 여기서 비전유(Unappropriation)는 전유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유되어서는 안 되는 것, 즉 공동의 사용에 의해 보호되기 때문에 전유가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무엇이 전유될 수 없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제도화하는 실천의 몫이다. 전유될 수 없는 것이란 제도화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오직 전유불가능성 그 자체에 기반을 둘 수 있을 뿐이라는 반대의견이 있을 수 있다. 이 의견에 따르면 전유불가능성을 제도화려는 의지는 이 전유불가능성이 정의상 전유 행동에 관여하는 하나 혹은 다수의 주체들에 의존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는 집단적 주체가 사실상 공통적인 것을 제도화하는 행동에 의해 산출되는 것이지 이 행동에 선행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두 종류의 전유―어떤 것이 소유의 대상이 되는 ‘귀속으로서의 전유’와 어떤 것이 특정의 목적을 향하도록 하는 ‘목적지향으로서의 전유’(특히 사회적 욕구의 충족)―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다는 점을 망각하는 것이다. 전유불가능성을 제도화하는 것은 특정 형태의 ‘목적지향으로서의 전유’를 더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전유로부터 무언가를 빼내는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어떤 사회적 목적을 위해 더 효과적으로 ‘전유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 식량의 불안정성을 해결하기 위해 땅을 전유하는 것) ‘전유’를 금지하는 것이다. 공통적인 것의 원리는 재산을 창출하지 않고, 커먼즈의 임자인 양 커먼즈를 처분하는 힘을 스스로에게 부여하지 않으면서 사용을 규제한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공통의 재화’(common goods)에 대해 말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이 용어가 계속되는 투쟁을 위한 단합의 구호로서 전략적인 효용을 갖는다는 점을 이해하지만 말이다. ‘공통의 재화’란 없다. 오직 제도화해야 할 커먼즈, 혹은 공통적이 되어야 하는 커먼즈만 있다.(Th ere are no “common goods”: there are only commons to be institutionalized, or commons to be made common.)




상품이 아니라 커먼즈로서의 식량

 



오늘날 극심한 기아와 넘쳐나는 식량이 공존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글로벌 식량시스템이 정말 많이 생산하고 정말 많이 낭비할지라도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인 필수품들 중 하나인 식량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그토록 부족한 것인가? 이 질문들은 반(反)기아 활동가, 농업 지도자이자 식량을 커먼즈로 여길 것을 주창하는 호세 루이스 비베로 폴(Jose Luis Vivero Pol)을 오랫동안 괴롭혔다.

식량이 넉넉한 가운데 끊임없이 계속되는 기아의 이유를 연구하면서 비베로는 실질적인 문제는 우리 사회가 식량을 상품 즉 시장 가격으로 가치를 평가받고 전세계 시장에서 거래되는 물건으로 취급하는 데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식량이 상품이라는 생각은 사회들이 식량을 공유하는 방법을 그리고 먹을 것이 충분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확신시킬 방법을 찾은 수천 년의 인간역사를 벗어난다. 식량을 상품으로 여기는 것은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식량을 가질 여유가 없게 됨을 따라서 굶주리거나 영양학상으로 품질이 떨어지는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어야함을 필연적으로 의미한다.

나는 비베로 폴과의 인터뷰—커머닝의 한계(Frontiers of Commoning)에 관한 나의 최근 팟캐스트(에피소드 22)—에서 이 주제들을 살펴보았다.

비베로 폴은 벨기에에 있는 루뱅 가톨릭 대학교에서 식량이행 학술연구교수로 일한다. 그는 식량을 탈상품화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식량 시스템을 구조적으로 다시 생각하는 것을 필요로 하는 장기간에 걸친 기획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상품으로서의 식량은 생명체의 자연스런 질서가 아니라 인위적인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강조한다.

실로 식량 커먼즈는 인간 역사 내내 규범이었고 오늘날 과도하게 시장화된 세계에서조차 널리 퍼져있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 식량을 재배하기 위한 커먼즈로 여전히 관리되는 땅(토지)의 양은 20~30% 가량이다. 아이슬란드에서는 땅의 40%가 아직도 커먼즈로 관리되고 있다.

비베로 폴이 커먼즈로서의 식량이라는 바로 그 아이디어를 농업, 기아 및 생태지역의 생태학적 이슈들에 관여하는 활동 지향적인 많은 활동가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특히 학자들 사이에서 부각시킨 것은 선구적인 작업이었다. 그의 기본적인 목표는 대규모 농업기업(Big Ag)에 대한 실천적이고 실제적인 기능을 하는 대안으로서 많은 다양한 식량커먼즈를 가시화하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 획기적인 성과는 이 주제를 다루는 29명의 저자들과 39장으로 이루어진 2020년에 출판된 주요한 선집인 『커먼즈로서의 식량에 관한 루틀리지 안내서』(Routledge Handbook of Food as a Commons)이다. 비베로 폴, 토마소 페란도(Tomaso Ferrando), 올리비에 드 슈떼(Olivier De Schutter) 우고 마떼이(Ugo Mattei)가 이 책을 공동 편집했다.

비베로 폴이 공동 조직한 최근 웨비나에서 버몬트 대학의 건드 연구소(Gund Institute) 소속 쌤 블리스(Sam Bliss) 교수는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시장 외부의 활동들”이 비록 크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을지라도 널리 퍼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사에 의하면 정원가꾸기, 물고기 잡기, 식량모으기, 사냥하기, 물물교환하기, 공유하기, 선물하기, 쓰레기통 버려진 음식 수거하기가 버몬트 주에서 널리 실천되고 있다.

블리스는 시장에 포함되지 않는 식량원이 추출적인 상품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공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식량 커먼즈를 통해 사람들은 (종종 값비싼) 시장에 의존하는 것을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연의 한계를 고려할 수 있다. 이는 예를 들어 식량모으기나 사냥하기로부터 거둬들인 수확물은 가정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시장판매는 금지된다.

반대로 대부분의 국가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대규모 농업의 집중 시스템은 대기업들에 대한 대규모 정부보조금에 기초를 두고 있다. 미국,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 러시아, 중국, 인도는 모두 자유시장이 식량을 재배하고 분배하는 가장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방법이라는 이론에 따라 식량을 상품으로 취급하고 있다.

하지만 이 서사는 사회적 신화이다. 위에서 언급된 나라들의 농업은 아주 많은 보조금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 보조금은 공적 부를 기존의 부자들에게 거저 주는 현실을, 토양•서식지•물에 생태학적인 피해를 입히는 것을, 그리고 돈이 거의 없는 이들에게 생기는 굶주림을 고려하지 않는다.

대규모 농업기업들은 동등하지 않은 경쟁조건에서 게임을 하고 있다고 비베로 폴은 지적한다. 그들은 자유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식량시장은 화석연료 다음으로 가장 많이 보조금을 지원받는 시장이다. 기본적으로 이 기업들은 공적자금을 통해 보조금을 아주 많이 지원받기 때문에 이익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정치가들이 “항상 시장, 시장, 시장을 이야기하고 있을지라도 비밀리에 농업 시장들은 보조금을 받아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시장들은 완전한 재앙이 될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비베로 폴은 공적자금이 영세농가 농부들, 농업 커먼즈, 푸드뱅크, 학교 점심 프로그램 및 생태지역 프로젝트들을 돕는 데 더 유익하게 쓰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단 우리가 식량에 관한 서사를 바꾸면 국가 정책과 법적인 틀들은 긴밀히 협력하여 다른 방식으로 식량과 관련된 법규화를 실행할 것이다. 물론 식량을 분배하는 시장들이 여전히 있을 것이지만 건강한 식량이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가격으로 제공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새로운 형태의 시장 규제와 공적 개입 그리고 커머닝의 새로운 공간도 있을 것이다.




커먼즈와 미래

 


  • 저자  :  Leila Dawney, Samuel Kirwan, Julian Brigstocke
  • 원문 :  Introduction : The Promise of the Commons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Leila Dawney, Samuel Kirwan, Julian Brigstocke가 편집한 책  Space, Power and the Commons : The Struggle for Alternative Future (Routledge 2016)의 “Introduction: The Promise of the Commons”에서 책 전체의 내용을 대략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우리의 일은 태양에 의해 신성화된다. 가령 겨울날이나 땅 파는 날에 비하면 이날[추수하는 날]은 만족스러운 날이다. 같이 일하는 친구들 때문에 더 그렇다. 그런 날이면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모든 얼굴들이 (내가 알지만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 사람들도 함께) 한 공간에 모여서 공동의 도랑과 집단적 희망에 의해 한데 묶여 있기 때문이다. 사슴이 덫에 걸려 탕으로 만들어 달라고 울어대는 소리를 듣거나 딱따구리가 파이로 장사를 지내 달라고 졸라대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들고 숲을 쳐다본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기라도 하면 우리는 일제히 몸을 곧추세우고 꾸짖는 듯이 태양을 쳐다본다. 우리의 낫과 손 연장은 합창하듯 소리를 낸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은 누구나 듣는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모두가 듣는다. 우리에게는 개방성과 즐거움이 있다.

Jim Crace, Harvest (2013)

1968년에 봉기에 참여하고 있던 활동가가 시간 여행을 하게 되어 2015년 급진적인 좌파의 집회 현장에 뚝 떨어지게 되었다면 그녀는 거기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그녀는 아마도 계급·노동·저항의 언어가 강화되었으리라고 기대할 것이지만, 이런 기대와는 달리 그녀가 실제로 발견하는 것은 제사(題詞)에 나온 목가적 장면과 유사한 토론 즉 토지에의 공통의 접근과 사유(思惟)의 개방성 및 그것에 수반되는 삶의 양태를 놓고 벌어지는 토론일 것이다. 그녀는 이전에는 신맬서스주의자들(neo-Malthusians), 토지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운동들 그리고 사회사가들 및 법역사가들의 도메인이었던 것, 즉 커먼즈의 언어를 발견할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커먼즈에 관한 관심은 주로 제한된 자원, 늘어나는 인구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새로운 형태의 물질적 가난 등의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었다. 커먼즈는 경제학, 인류학, 환경과학에서 중요한 관심 영역이 되었다. 인구 과잉에 대한 맬서스의 저작과 함께 자원과 토지의 사적 소유에 대한 조지(Henry George)의 비판, 경쟁하는 행위자들이 제한된 자연자원에 접근할 때 생성되는 긴장들에 관한 하딘(Garret Hardin)의 저작들이 그 준거점들이 된다. 커먼즈 관련 문헌들이 다루는 문제들은, 왜 이러한 위기들이 출현하고 있는가, 이런 상황은 언제 위기점에 도달할 것인가, 개별 국민 국가들이 어떻게 이것을 막기 위해 대응해야 하는가이다. 이 문제들은 커먼즈에서 실제로 행해지는 일, 커먼즈를 구축하는 일, 커먼즈가 의미하는 바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정책 변화와 거시경제적 자원관리를 지향하는 추상적 논의들이었다.

이 텍스트에서 (그리고 커먼즈 연구분야를 발전시키고 있는 정치학자들·지리학자들·사회학자들 사이에서) 말하는 커먼즈는 이 문제들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을 다르게 표현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 책의 글들은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식민화나 불로소득자들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규제와 보호를 필요로 하는 자원의 관점에서 정의되기를 거부하는 커먼즈를 표현한다. 이 글들이 말하는 커먼즈는 공간일 수도 있고 경험일 수도 있고 자원일 수도 있으며 기억이거나 혹은 ‘희소성의 관리’ 외부에 있는 공유하기와 살아가기의 형태들일 수도 있다. 저자들의 전문분야는 도시계획학, 지리학, 정치학, 사회학, 문화이론 등을 포함하는 사회과학과 인문학 전반에 걸쳐 있다. 이는 새로이 일기 시작한 커먼즈 연구가 여러 분야들을 망라하고 있으며, 학계를 가로지르는 동시에 학계를 넘어서는 논의들에 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커먼즈를 신자유주의적 시장에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 삶의 사유화와 개인주의화에 저항하는 함께 살기의 방식들을 핵심으로 하는 시공간적이고 윤리적인 형성체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커먼즈의 언어·이념·상상계의 출현을 고찰할 때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신자유주의적 힘들과 연관되어 있고 그 힘들을 통해 작동되는 방식을 인식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힘들은 공통의 삶을 위한 가능성들을 제한하는 동시에 산출한다. 급진적으로 사유를 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확장의 논리 및 과정과 이 확장에 대한 저항을 점점 더 종획과 커머닝의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다름 아닌 자본주의적 축적의 논리를 통해 커머닝이라는 특수한 저항 형태의 가능성이 출현하는 것이다. 자본이 세계의 더 많은 지역을 상품화 과정으로 끌어들이면서 새로운 종획이 일어난다. 자본은 신자유주의적 소유와 가족 관계를 통해 삶을 사유화하는 동시에 인구에 기반을 둔 통치[푸꼬가 분석한 바의 새로운 형태의 권력의 특성이다―정리자]를 구사한다. 이것이 대안권력인 커머닝으로 향할 가능성의 조건들을 생성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비(David Harvey)의 작업이 매우 중요한데, 특히 후기 자본주의가 계속적인 종획 과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 중요하다. 자본은 이전에는 상호책임이라는 사회적 관계에서 관리되고 조직되고 산출되었던 자원·인구·활동·토지를 통합하면서 확장한다. 하비는 이를 ‘강탈(dispossession)에 의한 축적’이라고 정의한다. 여러 분야를 가로지르는 연구들은 종획의 여러 형태들을 통해서 자원의 사유화가 일어나고 있는 많은 공간들을 보여주었다. 지구상의 후진 지역에서의 토지강탈, 금융자본의 자산거품, 유전자·물·토착지식 등의 사유화―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종획들은 그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세상이 폐쇄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커먼즈가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의 중요한 자원이 된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전통적인 대의민주주의의 방식을 통한 변화의 가능성들은 감소하고 있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의 주요 정당들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은 유럽연합의 트로이카가 장악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활동가들은 집회·조합·투표소의 공간들을 넘어서 정치를 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탐구하고 있다. 아나키스트들의 DIY 전통에서 나온 새로운 형태의 집단적 행동은 거주와 점령이라는 형태를 집회와 시위라는 형태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며, 저항의 예시적 공간들의 출현을 향하는 새로운 길을 닦고 있다. 그 주목할 만한 사례는 오큐파이 운동, 15M 그리고 인디그나도스이다. 이렇게 커먼즈의 정치는 종획에 대한 공간적 대응으로서 일어난다. 커먼즈 이념은 개념적·물리적 공간을 집단적으로 생산하고 주장하기를 촉발하는 정치적 어법을 제공한다. 저항과 항의의 새로운 형태들―관리와 의사결정에서의 플랫시스템들[누구에게나 접근이 허용된 시스템을 말한다―정리자], 요구 없는 정치[원주 : 낭씨Jean-Luc Nancy가 정치의 이러한 재구상에 대한 더 나아간  논의를 제공하고 그것을 더 정교화한다(James, 2006; Nancy, 1991, 2000)],((James I, 2006, The fragmentary demand: An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Jean-Luc Nancy (Stanford University Press, Stanford, CA). / Nancy J-L, 1991, The inoperative communit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Minneapolis, MN and London / Nancy J-L, 2000, Being singular plural (Stanford University Press, Stanford, CA). ).)) 대안적 세계의 구축에 초점두기―이 출현함으로써 공통적으로 살기, 공통적으로 만들기, 공통적으로 존재하기라는 새로운 활동들이 종획과 강탈에 대한 직접적 대응으로서 일어나고 있다.

커먼즈의 언어는 무엇보다, 투쟁과 무력함 너머 희망과 약속을 부각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언어와 성향을 제공한다. 이 언어는 능동적인 정치를 환경에 대한 관심과 결합시키고 도시 운동을 시골에서의 저항과 결합시키며 지역에서의 투쟁을 전지구적 정치와 결합시킨다. 그 역사적 문화적 반향들이 때로 문제점을 보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다르게 살고 다르게 존재할 것인가를 생각할 자원을 제공해 준다. 지금과는 다른 세계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미래들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커먼즈의 이념은 낭만적 서사를 제공하며 이 서사를 통해 앞으로 나아갈 길(실망스런 정치적 내러티브들, 생태계 파괴, 양극화와 강탈―이것들의 외부에서 사유하는 길)을 제공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내러티브에 대안이 되는 대항내러티브를 제공한다. 무엇보다도 커먼즈 이념은 변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날 수 있으며 조그만 행동들도 중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희미하게나마 제공한다.

그러나 이 책의 글들이 분명히 하듯이 이 낭만적 서사를 넘어서 사유할 필요, 커먼즈가 출현하는 곳, 커먼즈에 담겨 있는 긴장들, 커먼즈가 행할 수도 있는 새로운 사물화들을 평가할 필요 또한 존재한다. 특히 블렌코우(Claire Blencowe)의 글은 공통적 삶의 유혹적인 상태들이 해방적 충동들을 덫에 가두고 그런 움직임들을 자본축적의 관계들로 재영토화시킬 위험을 일깨워준다. 커먼즈 이념의 매력과 미래의 가능성을 이해할 때 우리는 우리가 ‘종획 이야기들’라고 부르는 우울한 장르를 고려에 넣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이야기들은 영국 의회의 종획 역사들과 이 역사들을 문학이나 구비 전통에서 다시 이야기하는 민속 관행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볼리어 같은 커먼즈 옹호자들이 제시하는 커먼즈 이야기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상실감, 그리고 비록 파열되었으나 폐쇄되지는 않았던 그리고 어느정도는 가난했던, 종획 이전의 삶의 환기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특정 지역에 속하면서도 이리저리 퍼져서 운동들과 지역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데, 흩어진 사건들과 행동들을 한데 모으는데 도움이 된다. 커먼즈의 이러한 다양한 갈래들에 대한 주목이 이 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자본주의 이전의 목가적 사회의 낭만적 상상태들과 테크놀로지·소통·사회성의 가없는 가능성들을 결합하는 ‘커먼즈’라는 용어의 가능성들만이 아니라 문제점도 또한 주목하는 것이다.

이 책의 3부에 실린 글들이 분명히 하듯이, 커먼즈 이념이 정치적·학술적 담론에서 널리 퍼지고 있다면 이는 커먼즈를 구성하는 것이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책은 도시 커먼즈,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디지털 커먼즈가 일상 언어에 진입한 상황에서 커먼즈의 더욱 새로운 유형들을 탐구한다. 어떤 저자는 비인간 존재의 참여를 다루고 또 어떤 저자는 공유된 기억의 전지구적 커먼즈를 다루며 다른 어떤 저자는 공통적인 것의 법 공간을 다루고 또 다른 저자는 시간의 측면에서 커먼즈를 다룬다. 3부에서 서술된 집단들과 행동들의 공통적 특징은 (박탈에 대한 저항 말고도) 물리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커먼즈를 다루기보다 공통적인 것을 실천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다루는 태도이다 이런 식으로 정치적 커머닝의 새로운 실천들은 신자유주의적 풍경 내부에 ‘다른 세계’를 실행하고 있으며 그렇게 하면서 주체성들·관계들·공간들을 바꾸고 있다.

실로 2000년대 초에 심대한 전환이 일어났다 커먼즈를 어떤 장소나 자원으로 생각하는 데서 실천의 한 형태로서의 커머닝을 생각하는 데로 전환한 것이다. 집단화를 지역적 규모로 생각하는 수단으로서 그리고 비자본주의적 형태의 사회조직과 경제조직을 실현하는 방식으로서 커머닝 이념이 번성했다. 라인보(Peter Linebaugh)의 작업이 이 전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커머닝과 종획의 역사에 대한 그의 서술들은 이 책에서 논의되는 바의 커먼즈 이념을 우리의 관심사로 만드는 데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커먼즈의 이념과 커머닝의 정치를 이해하고 활성화하는 몇 가지 방식들로 하여금 서로 대화하게 하려고 한다. 이것들은 개념적 작업과 경험적 사례들 사이에서 움직이는데, 법, 역사, 그리고 일상적 활동에서 이 개념을 고찰함으로써 이 개념이 정치적·이론적 설득력을 획득하는 여러 가지 방식들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주고자 한다. 이 책의 글들은 특히 실제로 존재하는 바의 커먼스와 커머닝에 초점을 둔다. 여기서 커먼즈는 법, 정치적 행동주의, 그리고 일상적 활동의 테크놀로지들을 통해 엄연한 객체들로서 출현한다. 이런 서술들은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를 방해하거나 그것들을 우연한 것으로서 폭로하는 능력을 공유한다. 그리하여 커먼즈는 대안들이 직접 탐색되고 실험되며 희망의 정치에 되먹여지는 개념적 공간이 된다. 희망의 정치는 이미 실제로 존재하는 비자본주의적 삶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역사의 종식’(이는 자본주의 이후의 미래를 개념화하는 데 있어서 막다른 골목에 해당한다)을 돌파할 가능한 미래들을 제안한다.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는 이러한 움직임을 ‘역사의 시작’이라는 주제로 논의했다. 이렇듯 커먼즈의 이념은 현재의 경제적 구조의 우연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성장과 사적 소유의 필연성이라는 담론을 무너뜨린다. 에스떼바(Esteva)가 지적하듯이 커머닝과 커먼즈 운동은 ‘대안적 경제’가 아니라 ‘경제에 대한 대안’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커먼즈에 대해서 쓰고 사유하고 커먼즈를 실행하는 것은 이러한 ‘세계 만들기’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며, 우리는 커먼즈를 중심으로 하는 문헌들에서 커먼즈 고유의 수행성―경험과 주체성을 사적 소유와 자본의 불가피성에 맞세워 재구조화하는 데서의 수행성―을 감지한다.

이어지는 절에서는 커먼즈 연구의 다섯 분야를 살펴본다. 첫째로 우리는 커먼즈가 환경자원의 한계에 대하여 사유하는 수단으로서 이해되는 방식을 고찰한다. 둘째로 우리는 도시 커먼즈에 대한 그리고 도시에서의 공간적 커머닝과 전유의 실천들에 대한 더 최근의 연구들을 살펴본다. 셋째로 우리는 비판적 법연구 분야에서의 작업에 기대어 커먼즈와 법과의 관계를 이해한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신맑스주의의 성취에 시선을 돌려 커먼즈 이념이 현재의 급진적인 정치사상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왔는가를 개괄하고, 마지막으로 커먼즈 논의의 틀을 커머닝 개념을 중심으로 다시 짜고자하는 저자들에 주목한다.

[참고]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Introduction: the promise of the commons
     LEILA DAWNEY, SAMUEL KIRWAN AND JULIAN BRIGSTOCKE

PART I
Materialising the commons
1 Building the commons in eco-communities
     JENNY PICKERILL
2 A politics of the common: revisiting the late nineteenth-century Open Spaces movement through Rancière’s aesthetic lens
     NAOMI MILLNER
3 A spirit of the common: reimagining ‘the common law’ with Jean-Luc Nancy
     DANIEL MATTHEWS

PART II
Commoning
4 The more-than-human commons: from commons to commoning
     PATRICK BRESNIHAN
5 ‘Where’s the trick?’: practices of commoning across a reclaimed shop front
     MARA FERRERI

PART III
An expanded commons
6 Expanding the subject of planning: enacting the relational complexities of more-than-human urban common(er)s
     JONATHAN METZGER
7 Occupy the future
     JULIAN BRIGSTOCKE
8 Imaginaries of a global commons: memories of violence and social justice
     TRACEY SKILLINGTON

PART IV
The capture of the commons
9 The matter of spirituality and the commons
     CLAIRE BLENCOWE
10 Controlled natures: disorder and dissensus in the urban park
     SAMUEL KIRWAN




지역화폐, 사회적 자본 및 기본소득에 관한 토론

 


  • 저자  : Valentin Seehausen, Julio Linares, Inte Gloerich
  • 원문 :  Discussion on Community Currencies, Social Capital & Basic Income https://networkcultures.org/moneylab/2021/04/16/moneylab-11-discussion-on-community-currencies-social-capital-basic-incom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대선의 열기가 서서히 오르는 모양이다. 대의민주주의가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흡수하는 시즌이 오고 있는 것이다. 대의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삶의 문제가 아닌 권력의 문제로서, 삶의 외부에서 삶을 제한하는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배어들도록 만드는 무대이다. 이 무대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 ‘할 일’은 시야가 이 무대 안에 갇힌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시야는 민주주의가 다시 삶 전체로 돌아온 세상을 향해있다. 우리가 보기에 민주주의의 문제는 단지 좁은 의미의 정치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영역들 전체와 관련된다. 화폐의 영역도 여기에 포함된다. 화폐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의 표현일 뿐인데, 이것이 사회적 삶에 외부에 존재하며 사회적 삶을 제한하는 것이 됨으로써 곧 권력이 되었고 더 나아가 물신(物神)이 되었다. 대안근대를 지향하는 우리로서는 화폐를 권력이 아니라 다시 삶의 힘으로 되돌려놓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바로 이것이 화폐의 민주화의 핵심이다. 이번 글에서는 다른 곳에서 이 화폐의 민주화를 어떻게 고민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기본소득이나 지역화폐는 이미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것이기에 내용이 새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실제적 노력의 사례들을 들어보는 것도 우리에게 좋은 경험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소개하려는 텍스트는 2021년 3월 27일 있었던, 머니랩(MoneyLab)의 11차 워크숍 ‘지역화폐, 사회 자본 및 기본소득에 관한 토론’(Discussion on Community Currencies, Social Capital & Basic Income)을 녹취한 것이다. 실제 토론의 동영상은 이곳에 가면 볼 수 있다. 토론자인 훌리오는 <써클즈> 소속이고 발렌틴은 <쏘셜코인> 소속이며 진행을 본 인테는 <머니랩> 소속이다. 내용정리이지만 대화체를 유지했으며, 녹취록에서 발견한 몇 개의 오류는 동영상을 보고 수정했다. [정백수]

인테
우리가 왜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까요? 지역화폐(공동체화폐)와 기본소득은 초창기부터 <머니랩>(Moneylab)의 주제였습니다. 지금 시기(팬데믹 기간)에 적절한 것은 무엇일까요? 제가 여러분 둘 다의 프로젝트에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동체에의 헌신입니다.

홀리오
저는 과테말라 출신 경제인류학자이며 사회활동으로서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기본소득을 어떻게 실현할지, 그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지에 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저를 인류학으로 이끌었습니다. 화폐를 다시 생각하는 방식으로서 화폐의 인류학, 가치의 인류학으로 말이죠.

<써클즈>가 가지고 있는 주요 아이디어들 중 하나가, 국가가 기본소득을 제공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기본소득의 창출과 관련된 패러다임 전환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민주적 화폐 이론’(DMT)이라 부릅니다. 이에 따르면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약속의 징표를 발행하여 은행 또는 국가와의 관계와 무관하게 상호적으로 빚을 지고 빚에서 벗어납니다.

제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힘의 느낌, 돈을 창출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느낌을 갖게 해주는 것이고, 돈을 창출하는 힘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화폐 취득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을 화폐발행자로서 느끼게 만들고 경제가 어떻게 조직되는지에 대한 통제력과 발언권을 갖도록 만드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발렌틴
당신의 말이 이해가 됩니다. 저에게는 지역화폐(공동체화폐)가 사회/경제 이론에서 실천성을 얻는 한 가지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화폐시스템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시작했고 정치에 입문할까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나름의 소규모 대안적인 금융시스템을 시작하는 것은 어떤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종종 지역화폐를 추동하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하는 요인입니다. 우리, 즉 민중을 위한 세상이죠. 물론 이것은 제 주관적인 견해이지만요.

우리는 지역화폐를 아래로부터 창출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에 지역화폐들이 있고 그 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만약 우리가 화폐시스템(monetary system)을 아래로부터 창출한다면 어떻게 될까를 보여주는 본보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써클즈>(Circles)와 <쏘셜코인>(Social Coin)은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로 실험을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지역화폐들이 화폐를 실험하는 작은 실험실인지도 모르죠.

인테
우리는 야심찬 생각들에서 출발하지만 지역화폐가 그 생각들을 실천에 옮기는 한 가지 방식입니다. 그런데 또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가령 제가 ‘쏘셜 코인’을 사용하기 위해 <써클즈> 커뮤니티에 참여할 기회가 있다면 그 동기는 무엇일까요? 제가 무엇을 살 수 있을까요?

발렌틴
이것이 지역화폐가 답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 모두 호모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이론(집안 살림의 효용을 극대화하기)을 알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 이론은 전적으로 결함이 있지만 여전히 그 안에 진실이 좀 들어있습니다. 공동체에 기여하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돌아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이익이 공동체에 기여한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경제적 이익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이 공정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근(Siegen)에서 경제적 이익은 전기차나 전기자전거를 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홀리오
저는 거시적인 문제에 대한 논의, 화폐, 테크놀로지는 다 하나라고 항상 말합니다. 화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회기반시설, 즉 다른 모든 생산자들, 다른 모든 물류 제공자들, 서비스 제공자들, 돌봄 노동 제공자들, 경제의 일부인 모든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사회구조입니다. 경제는 집안 살림, 즉 오이코스(Oikos)입니다만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집만이 아니라 지역입니다. 그래서 이곳 베를린에서 우리는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맥주 제조업자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농부와 함께할 수도 있고 자전거 공유 협동조합과 함께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그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잉여를, 그리고 코로나/위기시기에 충분히 이용되지 않은 자원을 추가적인 유동성(liquidity)으로 변형시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술집들이 문을 닫았기에 팔 수 없는 50리터 맥주통을 가지고 있는 맥주회사 소유주와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써클즈>에 그것을 팔아서 행복한 상태이며, 맥주를 더 많이 팔기 위해 지역 라디오에 홍보를 하는 데 그 돈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발렌틴이 말하고 있는 바입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서로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그들을 연결시키는 방식을 생각해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 자신만이 아니라 더 큰 어떤 것을 실제로 부양하고 있는 셈입니다. 잉여가 더 큰 지역사회로 갈수 있도록 하는 방법론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자원들의 흐름을 창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테
지역공동체 건설이 핵심 작업이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지역공동체의 신뢰와 네트워크가 없다면 그것은 작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진공상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국가의 맥락에서 법정화폐 시스템 및 세금 시스템과 함께 존재합니다. 당신의 프로젝트는 더 광범위한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존재합니까? 이 프로젝트는 고립된 지역들로서 존재하나요? 아니면 전체시스템이 바뀌는 것을 보고 싶은 건가요?

홀리오
독일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은 화폐란 사회에 대한 일정한 요구의 표현이라는 점에 관해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사회에서 사용하는 화폐의 유형들이 다양한 차원들―상상력, 무급노동, 유급노동―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요소들이 화폐형태로 반영됩니다. 그래서 저에게 중요한 것은, 화폐를 다루고 정치적인 싸움에 뛰어듦으로써 우리는 바로 화폐시스템 전체의 헤게모니에 도전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발렌틴과 함께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시민들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할 수 있는 시장(市長)들의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창출하려는 노력입니다. 우리는 일군의 다양한 시스템들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써클즈>는 그것들 중 하나일 뿐이고 우리는 지역의 조건과 욕구가 무엇인지를 보고 사용될 수 있는 일단의 도구들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존재하는 일국의 국가시스템과 함께 공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미국의 사례가 항상 적절한데, 미국에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의 통제를 받는 국가시스템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광범위한 수준에서 공존하는, 국가보다 하위의 시스템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지자체들이 폭넓은 스펙트럼의 이익을 보완하고 조율하는 방식으로서 지역의 기본소득을 지역화폐로 발행하여 잠재적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지급할 수 있습니다.

저로 말하자면, 저는 아나키스트입니다. 국민국가를 믿지 않고 자본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폐지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순간 어떤 상황에 있는지에 대하여 실질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이 구조들이 몰락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며, 제가 하고 있는 것은 그것들이 더 잘 몰락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좌중의 웃음]

발렌틴
토론이 시작된지 20분이 지나서 당신이 스스로 아나키스트임을 이렇게 폭로하는 것이 정말 좋군요. 저는 동조하는 편입니다. 시스템을 바꾸는 방식이고 힘을 지방자치제 수준으로 되돌려주는 방식이니까요. 국가들이 있고 국제적인 기구들이 있습니다. 아나키스트가 아닌 저는 그것들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또한 저는 금융시스템이 사회의 소수에게 복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0%나 1%의 사람들은 실질적인 혜택을 많이 받지만, 50%의 사람들은  실질적인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전 세계에서 극빈 상태에 있는 사람이 (잘은 모르지만) 아마 50%일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충분한 식량이 없고 그것이 제 관점에서는 재앙입니다.

신자유주의자로 유명한 하이에크는 탈국가화된 화폐라는 생각을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해 하는 것은, 화폐가 탈국가화되어 모든 사람이 화폐를 발행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봐요, 이것이 발렌틴-코인입니다, 사용해보세요’라고 말할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요? 무슨 일로 그러시죠?’라고 말할 거구요. 그러나 예를 들어 베를린 시장이 베를린-코인을 발행한다면 사람들은 실제로 그것을 사용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베를린 시에 힘이 있음을 의미할 것이고 화폐 주조로 얻는 이익은 실제로 베를린으로, 지방자치단체로, 작은 마을들과 가난한 시골로 돌아갈 것입니다. 지역의 화폐로 실험하기 시작할 경우 이것은 그 지역사회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 멋진 프로젝트가 더 광범위한 맥락에 가져올 수 있는 전환과 관련하여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입니다. 지역화폐들이 수백 년 동안은 아니더라도 수십 년 동안 존재했지만 그것은 지금까지도 대부분 불법이었는데, 그러다가 블록체인이 등장했습니다. 블록체인은 효력을 정지시키기 불가능한 화폐를 발행했는데, 이는 블록체인이 매우 탈중심화되어 있어서 어떤 정부나 권력도 거기에 실제로 개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가들이 바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암호화폐를 합법화하고 규제하는 것입니다. 국가들은 이것이 없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렸고 그래서 그것을 시험하고 통제하는 규칙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암호화폐는 합법적이 되고 우리가 실제로 그것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이것이 올해 들어와서 제가 흥미롭다고 느낀 점입니다. 규제자들과 국가들이 지역화폐가 실제로 존재하기 위한 법적 틀을 만들고 있다니 말입니다. 저는 지역화폐를 관철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로비스트입니다. 지역화폐의 관철이 제가 이곳에 있는 이유이고, 제가 보고 싶은 정책 변화입니다.

인테
하지만 지근에서 <쏘셜코인>은 블록체인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렇죠? 그래서 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당신은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위한 특수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발렌틴
공동체는 그때그때 사용가능한 테크놀로지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가령 뵈어글(Wörgl)—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유명한 사례죠—의 기술은 ‘우리가 지폐를 발행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스탬프를 찍는다’였습니다.[정리자―1932년 오스트리아의 도시 뵈어글에서 대공황에 대응하여 지역화폐(지폐)를 발행했다. 이 지폐는 화폐소지자들이 빨리 사용하도록 자극하기 위해 매달 1%의 가치가 상실되도록 고안되었다. 이 지역화폐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오스트리아의 다른 도시들도 유사한 실험들을 계획했다. 이 지역화폐는 1933년 말 행정법원에 의해 금지되었다. 텍스트에서 “스탬프”는 지폐에 찍는 도장을 가리킨다. (첨부한 사진 참조) 첨부한 사진은 자유이용저작물이며 그 출처는 https://en.wikipedia.org/wiki/W%C3%B6rgl#/media/File:Freigeld1.jpg이다.] 그때 서비스 제공은 중앙집권화되어 있었고 그 핵심은 당신이 서비스 제공자에게 가서 지폐를 원장에서 삭제하면 화폐의 효력이 정지된다는 것입니다. 블록체인은 추적하기가 불가능하고 효력을 정지시키기 불가능하게 만든 테크놀로지일 뿐입니다. 탈중심화된 화폐가 이렇듯 기술로 작동하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저는 블록체인 자체의 힘을 믿지 않습니다. 많은 지역화폐들과 다양한 토큰들이 있는 세상이 오면 우리는 열광하겠지만, 여기에 블록체인이 반드시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역화폐를 금지해온 규칙을 깨기 위해서는 블록체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우리를 신뢰하고 우리의 파트너들을 신뢰하며 얼굴을 아는 사람들을 신뢰하고 인간을 신뢰한다면, 블록체인이 필요 없습니다.

인테
그러면 당신은 블록체인의 유무와 무관하게 열린 공간이 창출된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우리는 지금까지 실질적인 혜택을, 사회적인 맥락을 다루었는데요, 이제는 당신들의 가장 유토피아적인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워크숍에서 당신들은 당신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무엇이 당신들을 걱정스럽게 만드는지에 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미래에 무엇이 가능할지,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원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미래의 지평 위에 있는 이 지점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이겠죠.

발렌틴
유토피아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문제에 아주 많은 측면들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좋아합니다. 일국적 수준에서 저는 부유세와 보편적 기본소득의 광팬입니다. 국제적인 수준에서 세계정부가 있다면, 그리고 보편적 기본소득으로서 재분배되는 전지구적인 부유세가 생긴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 될 것입니다. 점점 더 불평등해지는 금융 시스템의 추세가 부유세와 보편적 기본소득 덕분에 평등 쪽으로 역전될 수 있습니다. 인간 사회가 그것으로부터 전적으로 혜택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역화폐 로비스트의 관점에서 저는 안전한 법적 환경을 갖고 싶습니다. 저는 법 문제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만, 이 문제는 여전히 매우 복잡하군요. 우리는 테크놀로지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제 생각에 법적 문제가 지역화폐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크게 미흡한 사안입니다. ‘당신에게 지역화폐가 있고 그것이 백만 파운드 미만이면 우리는 그것을 규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넘으면 우리가 규제할 것이다’와 같은 구조가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정치로부터 요구하는 어떤 것입니다.

인테
홀리오는 미래 정부에 관해 이와는 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겠죠?

홀리오
어려운 문제죠. 이것은 정치경제와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블록체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고 법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테크놀로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의 실제적인 핵심은 힘, 즉 경제적 힘과 정치적 힘(권력)과 관련된 문제들입니다.  법 문제는 매우 재미있는데, 이는 오늘날 법적으로는 국가들 말고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체가 민간은행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은행 면허를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신이 그들의 자산을 처리할 권리가, 그들의 노동을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럼으로써 이 불평등한 권력구조들을 창출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저는 국제적인 수준에서 부유세와 보편적 기본소득은 놀라운 것이라는 발렌틴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제가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직접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실천적으로 생각할 때 그곳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화폐를 민주화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화폐를 영토로 본다면, 우리가 화폐를 민주화한다고 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은, 지역적으로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다양한 생산자들 사이에서 경제적 관계, 정치적 관계, 생태적 관계를 재(再)지역화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서 당신은 권력의 실제적인 탈중심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 즉 권력의 탈중심화가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써클즈>에서 우리는 다음의 네 가지 원칙에 관해 이야기 합니다. 로컬리즘(전지구적 문제의 지역적 해결), 권력의 탈중심화, 지속가능성(관계들을 더 지역적으로 묶고 더 상호의존적인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 방법들을 찾는 것) 그리고 민주적인 연합주의가 그것입니다. 민주적인 의회들이 서로 연합할 수 있지만 정치적 힘은 항상 국민들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그 규모를 확대해야 할 매우 실천적인 메커니즘이며, 이렇게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가장 실천적인 유토피아일 것입니다.  화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관련됩니다. 화폐를 넘어서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삶의 민주화입니다. 이것은 권력의 문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권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가 권력으로 변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부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 많은 재앙을 일으킨 사람들이 많은 권력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치적 힘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조직화된 대중들을 통해서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축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인테
제가 채팅을 읽어봤는데 여기에 사회적 재생산에 관한 질문이 있습니다. 지역화폐와 보편적 기본소득이 어떻게 우리가 창출하고자 하는 사회에서 자리를 잡나요? 어떤 가치들이 시스템에서 작동하는 토큰 형태로 재현됩니까? 그 기획은 어떻게 공동체와 공존합니까? 그것이 어때야 할지에 관한 생각들이 달라서 서로 경쟁한다면 어떻게 되죠? 그 과정은 어떻게 진행됩니까? 그리고 토큰 같은 아주 실질적이고 코드에 기반을 둔 어떤 것과 창출하고자 하는 사회와 같은 추상적인 문제를 어떻게 연결시키는지요?

홀리오
사회적 재생산의 측면에서 우리는 가족, 특히 여성들에게 많은 돌봄의 부담이 부과됨으로써 지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폭력이 또한 증가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기본소득은 많은 착취적인 관계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길입니다. 혹은 사람들이 자신을 돌보고 다른 사람을 돌보며 그들을 둘러싼 사회의 환경을 돌볼 수 있는 소득 기반을 갖게 해주는 것입니다. ‘온전한’ 기본소득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시간을 팔지 않고, 임금을 위해 자신을 임대하지 않고 삶을 살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어떤 것입니다.

오늘날 화폐 시스템은 생산영역에서 비롯합니다. 고용주가 노동자를 고용하고 그들은 일하러 갑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있기 위해 그리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사기 위해 임금을 가정으로 가져갑니다. 커먼즈에는 화폐가 없습니다. 사회적 재생산이 번성할 수 있게 해주는 화폐-커먼즈, 바로 이것이 우리가 구축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커먼즈도 성장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적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우리의 돌봄 실천들, 사회적 재생산의 실천들이 번성할 수 있는 가치체계를 창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마존>과 대규모 식품기업들 같은 거대 기업들에의 의존을 통해 더욱더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에서부터 우리의 땅까지, 우리가 서로에게 하는 약속까지 우리가 지켜야 할 영토를 창출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인테
발렌틴 씨, <쏘셜코인>은 어떻습니까?

발렌틴
사회가 어떻게 실제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화폐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핵심인, 홀리오가 내 마음에 그려준 큰 그림에 대해 생각하는 중입니다. 그러나 가치들의 문제로 한정하자면··· 저는 우리가 지근에서 사용하는 이 화폐—‘쏘셜 코인’—에 붙일 명칭을 찾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공통 화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전기차(앞으로 세 대를 구비할 예정입니다)와 전기자전거라는 공통재(커먼즈)가 있습니다. 제가 일하는 단체는 이 공통재를, 이 전기 차량들을 지역민들에게 보급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급할 도구로서 화폐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실험중입니다. 첫 번째 아이디어는 자원봉사를 한 사람들에게 전기차에 사용할 수 있는 코인을 나눠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보편적 기본소득을 시행할 계획인데 이는 모든 인간이 이 공유자원을 소비할 권리를 동등하게 가짐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런데 커먼즈와 연관된 가치들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재산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유재산과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커먼즈의 가치를 어떻게 정의할 것입니까? 이것은 정말로 재미있는 질문입니다.

인테
커먼즈로서의 화폐라는 생각, 저는 이것을 좀 더 설명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홀리오, 몇 분이면 설명할 수 있겠죠? 돈은 보통 개인의 소유이기 때문인데···

홀리오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노동•토지•화폐라는 세 가지 가짜 상품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가짜 상품들로 생각하는 점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이는 이 세 가지가 항상 상품으로 존재한 것이 아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노동시간, 노동, 몸이 항상 상품으로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토지가 항상 개인소유의 상품으로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가령 텃밭이 언제나 상품으로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화폐도 마찬가지입니다. 화폐는 부채이며 신용관계이고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입니다. 서로에게 하는 약속과 같은 유형의 사회적 관계입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 상품화되었고 개인 소유의 상품이 되었습니다. 맑스의 정의를 따른다면, 자본주의를 M-C-M′으로 정의할 것입니다. 화폐가 더 많은 화폐를 만드는 것, 화폐를 팔아 상품을 사서 그것으로 화폐를 더 많이 버는 것이죠.

가치를 나타내는 징표(토큰)의 사물화 또는 물신화가 발생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것을 화폐라고 부르는데, 화폐는 이자를 낳는 부채 등의 과정을 통해서 확장하고 우리는 이것을 성장 등등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로 지구를 망치는 것입니다. 커먼즈를 희생하면서, 토지를 희생하면서, 우리의 몸을 희생하면서, 지구의 가치를 희생하면서 일어나는 이 물신의 증가, 화폐라는 신의 증가가 지구를 망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화폐의 상품화가 아니라 공통화(commonification)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민주주의의 문제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전부 공동소유자인 곳에서 어떻게 화폐를 창출할까요? 사유재산이 없는 곳에서, 화폐가 민간은행에 의해 소유되지 않는 곳에서, 화폐가 국가에 의해 소유되지 않는 곳에서, 화폐가 우리가 발행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 실제로 공유자원인 곳에서, 자원의 유형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곳에서, 우리는 어떻게 화폐를 창출할까요?

오늘날 우리는 이런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기다리면서 우리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지대(자산소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현재로서는 이것을 어떻게 할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화폐의 공통화가 기본소득으로 주어질 때 우리 몸은 임금노동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고 상품으로서의 화폐 또한 해방시킬 수 있으며, 이 과정을 통해 토지를 탈상품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화폐를 개인소유의 상품으로부터 공통재로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현 자본주의적인 위기에 대안을 제공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오고 있는 주된 이론적 핵심입니다. 우리는 근원으로 가야 합니다. 화폐는 수메르의 지구라트[정리자―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전] 이후로 줄곧 지난 5천년 이상 동안 문제가 있었습니다. 모든 성직자들이 사람들을 채무자로 만들어서 속박상태에 묶어두었던 것입니다. 그 기나긴 역사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군산복합체로 죽 이어집니다. 미국 군대는 세계에서 오염을 제일 많이 발생시키며 미국 달러로 자금을 마련합니다. 민중이 화폐를 창출하는 힘을 되찾지 못하면 우리는 문제의 근원으로 가지 못할 것입니다.

인테
마무리할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만 사람들이 녹화된 토론을 보고자 할 경우에 대비해서 앞으로 워크숍에서 여러분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발언할 시간을 각각 드리고 싶습니다.

발렌틴
워크숍의 제목은 ‘비정부기구(NGO)로서 지역화폐를 시작하는 법’입니다. 우리가 NGO로서 이 화폐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직접해보는 워크숍이 될 것입니다. 워크숍에서 저는 제가 지역화폐를 시작하면서 겪었던 모든 경험을 공유할 것입니다. 그리고 미리 알려드리는 바이지만 우리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멉니다. ‘이 발걸음을 뒤따르시면 지역화폐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가 아닙니다. 저는 다만 제 경험을 공유할 것입니다. 저는 실천적 경험을 가지고 있는 워크숍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과 실제로 토론을 하고 싶고 배우고 싶습니다. 그들이 어떤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지, 그들의 프로젝트가 어떤 것인지 토론을 통해 알고 싶습니다.

홀리오
우선 저는 정치적 힘(권력)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고 <써클즈>가 교환과 상호의무의 측면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감을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화폐의 두 가지 측면에 대해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저는 최근에 출판된 안내서를 죽 훑어볼 것입니다. 이 안내서는 <써클즈>가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고 또한 오늘 제가 말한 몇 가지 원칙들을 설명하며 기본적으로 지역에서의 조직방법론을 제시합니다. 조직화는 생산자들과 상인들의 회로에서 시작해서 그들이 고용하는 노동자들로, 거기서 다시 공동체 전체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매우 실천적인 작업이며 우리가 매달 마지막 일요일에 가지는 회의에서 하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든 이 토론을 듣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함께하는 것을 환영합니다. 시작하는 법에 대한 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바이든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려 한다

 


  • 저자  : Jimmy Dore
  • 원문 :  “Biden Won’t Solve Your Problems, But Will ‘Understand Your Problems’(2020. 12. 10)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Jimmy Dore Show>의 한 에피소드(유튜브 동영상)의 내용을 우리말로 정리한 것이다. 내용 정리이지만 읽기 좋도록 간략한 자막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지미 도어는 미국의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자 정치평론가이다. 그는 현재 하원이 ‘모두를 위한 의료보험’(Medicare for All)을 채택하는 투표를 하도록 밀어붙이는 ‘#Force the Vote’ 운동을 하고 있으며 미국 민중당(People’s Party)―정확하게는 ‘민중당 건설운동’(Movement for a People’s Party)―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조 바이든이 꼭 뉴트 깅리치(Newt Gingrich)와 밥 돌(Bob Dole)처럼 말하며 다시 그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파이며 보수적인 공화당원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아는지 모르겠군요. 제가 그에게 투표하지 않은 이유가 이것인데 말입니다. 저는 전쟁장사꾼인 월가의 꼭두각시에게 투표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은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계속 그에게 표를 던지더라도 저는 하지 않겠습니다.

[바이든의 트윗을 보여주며] 조 바이든이 이렇게 트윗을 했군요.
<아버지가 말씀하시곤 했다. “아들아, 이 아버지는 정부가 내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단다. 아버지는 내 문제를 이해해주기를 기대한단다.”>
저는 정부가 제 문제를 이해하든 못하든 전혀 신경쓰지 않습니다. 저는 정부가 제 문제를 해결해주길 원합니다. 우리에게 정부가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죠. 우리는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무리의 사람들로 모입니다. 월가 사람들도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수조 달러를 얻어내려고 정부에게 가잖아요.

당신이 만일 누군가의 사업을 봉쇄하고 그래서 아무도 돈을 벌 수 없다면 그것은 바로 당신이 초래한 문제입니다. 당신이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알지 못했다면 대통령의 정책 제안자가 되려고 출마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놀랍군요. 다음 문단을 보세요. 그가 이렇게 썼군요.
<사람들은 구호금(handout)을 기대하지 않는다. 도움을 필요로 할 뿐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잘못 때문에 곤경에 빠진 것이 아니며 우리는 그들을 이해해 줄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당신의 이해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경기부양지원금(stimulus check)이 필요하고 모두를 위한 의료보험이 필요하며 보편적인 기본소득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당신은 죽기 직전의 정신이 나간 노인네이기 때문에 이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기업화된 미디어에는 정신 나간 자를, 그리고 당신을 규탄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봐요, 조, 정부가 당신에게서 도둑질하리라 예상하라고 당신 아버지가 당신에게 말해줬나요? 팬데믹 시기동안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나니 말이죠. 재난지원금 말이에요. 이봐요, 월가에 돈을 주기위해 우리가 매년 세금을 낸다고 당신 아버지가 당신에게 말해줬나요? 오늘날 우리 세금이 그리로 가니 말이죠. 당신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해줬나요, 조?

우파가 이것에 ‘국민은 구호금(handout)을 기대하지 않는다’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있는 것이 보입니까. 당신이 바로 전 세계 최고 부자들에게 5조 달러를 건네주었죠, 조. 그런데도 당신은 여전히 레이건의 용어인 ‘구호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군요.

[기사 헤드라인을 보여주며]
<취업난은 진정한 국가적 위기이다. 미국을 지배하는 무능한 범죄자들이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을 끔찍한 금융 절벽으로 밀어버리려고 하고 있다.>
이것은 <인터셉트>지에 실린 내용입니다. 미국을 지배하는 무능한 범죄자들이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을 벼랑으로 내몰고 있다는군요.

[CNN 웹페이지의 한 사진을 보여주며]
“텍사스에서는 음식을 가지러 가는 수천대의 자동차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저런 헤드라인을 보면 저는 조 바이든의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관해서는 신경을 끕니다.

[신문기사를 보여주며]
<“이렇게 계속 할 수는 없어요”―소상공인들이 포기하고 있다>
<의회는 코로나재난지원금 문제를 놓고 교착상태에 빠져 있지만 펜타곤에 7천4백억 달러의 자금을 대기 위해서는 한데 뭉쳤다>
이런 식이죠, 그리고 진보파는 그것에 반대투표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민주당원 37명만 반대투표를 했죠. 결과적으로 찬성투표한 진보파 의원들이 63명인 셈입니다.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조 바이든은 “도움이 곧 갈 것이다”에서 사흘 만에 “미국인들은 도움을 원치 않는다”로 바뀌었다.>
사흘 만이라···. 그래서 저는 1월까지 조 바이든이 바이든다운 짓을 다 한 후 원점으로 돌아올 것이고 사람들이 다시 트럼프에게 투표를 하겠다고 말하기 시작할 것이라 추측하는 중입니다.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짐 얼(Jim Earl)은 이렇게 트윗을 했네요.
<당신의 아버지는 멍청이었군요. 정부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의 노력 없이 이해만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요? 그리고 ‘복지여왕’과 함께 모욕적인 상투어를 담는 쓰레기통으로 들어갔어야 하는 구호금이라는 단어를 당신이 지금 꺼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멋진 조지 칼린(George Carlin)의 말을 빌자면요, “아빠가 말씀하셨지, 아빠를 욕하라고.”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사람들은 바이든의 취임에 찬성하고 소득공제를 받는 경우 말고는, 구호금을 바라지 않는다.>
누가 구호금을 바랄까요? 바로 조 바이든이죠!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조 바이든의 (인수위)팀은 취임식을 치르기 위해 개인들로부터는 50만 달러까지, 기업들로부터는 100만 달러까지 기부금을 받을 것이다.>
제 아버지가 항상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구호금을 원하니? 정계에 들어가거라.” 그래서 그들이 돈이 필요할 때 우리에게 돈을 조금씩 내달라고 말하는군요. 이것 말 그대로 그들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조 바이든입니다.

[바이든의 트윗을 보여주며]
<이렇게 합시다.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 패배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인수를 미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취임식에 자금을 대야 해서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바이든-해리스 인수위를 위해 돈을 기부해주시겠어요?”>
와우! ‘당신들은 도움이 필요할 때 무엇을 나눠주고 싶어요?’라고 바이든의 아빠가 말하는 군요. 놀랍지 않나요?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한때 아돌프 리드 주니어(Adolf Reed Jr.)는 자유주의자들이 더 이상 정치를 진정으로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통받는 것을 목격하는 것’을 믿을 뿐이다. 나도 그 생각을 많이 한다.>
그들은 ‘고통받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 샴페인과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군요.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이것 좀 보세요.
<내 새 셔츠가 도착했어요!>[트윗에는 이 셔츠에 인쇄된 사진이 첨부되어 있는데, 「바그다드 위로 폭탄을」이라는 노래가 실린 아웃캐스트(Outkast)의 앨범 사진과 똑같이 연출해서 찍은 바이든과 카말라의 사진이다.]
조 바이든과 카말라 해리스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는, 전쟁기업의 도구들인 이들이 악당처럼 굴려고 하네요. 그녀는 평범한 사람들을 감옥에 보냈고 그는 파산한 사람들을 쥐어짜면서 규칙적으로 수감자들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켰습니다. 이것이 이 사람들의 실체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보이는지 아십니까? 비밀경찰들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죠.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대대적으로 상품을 팔아보려는 헛된 생각에 이들이 ‘바그다드 위로 폭탄을’이라는 노래가 실린 앨범 사진에 한 점의 아이러니도 없이 등장한 것은 대단히 재밌다.>
와우!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이것은 트럼프 지지자들의 빨간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모자를 흉내 낸 파란색 ‘마가’ 모자군요. 사람들이 파란색 모자를 썼습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여러분들은 단지 트럼프를 해고하고 백악관에서 그를 쫓아냄으로써 이미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바이든의 파란색 모자를 쓰세요. 바이든이 트럼프를 감옥에 보낼 것이기 때문에 이미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모자는 아마존에서 판매중입니다.>
와우! 조 바이든에게 맞도록 정해진 훌륭한 기준입니다. 축하합니다, 승리하셨습니다. 이미 승리했으니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군요.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이 말은 매우 중요하다. 조 바이든이 자신의 행정부와 우리의 정치에 상호존중•존경•이해에 대한 그의 타고난 감각을 주입할 수 있다면 그는 이 나라를 위해 무언가 훌륭한 것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액슬로드(David Axelrod)의 트윗입니다. 맙소사, 그가 열정에 대해 말하고 있군요. 그가 그 동안 해온 나쁜 짓만큼이나 멋지게 트윗을 한다면, 또 한명의 백만장자인 놈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것은 겨우 그 트윗뿐일 것입니다.

[여기서 스탭이 끼어들어 한 마디 한다]
이 말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데, 입에 발린 말이기 때문에 중요하죠.

[다시 지미 도어]
맞아요.
이봐요, 조 바이든에게 투표한, 잘 속는 여러분들, 축하합니다. 저는 바이든 안 찍었습니다.

 

[덧붙임 :  미국 역사 속의 ‘민중당’―정백수] 

미국에 이미 1890년대에 ‘민중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정당이 있었다. <농민연합>(Farmers’ Alliance)에 뿌리를 둔 민중당(People’s Party, 혹은 Populist Party)이 1892년에 창립되어 당시의 금융세력에 맞서 싸웠다. 이 민중당은 189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과 함께 민주당의 브라이언(William Jenning Bryan)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브라이언이 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붕괴되었다. 다소 넓게 말하자면, 민중 자신의 힘보다도 대통령(및 그에 딸린 제도)의 힘을 더 믿었을 때, 아니 자신의 힘을 정당정치라는 제도에 맡겼을 때의 문제점, 활력이 권력으로 전환되었을 때의 문제점이 드러난 것이 아닐까 싶다.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 민중당이 이런 문제점을 얼마나 잘 극복할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공화당과 민주당의 ‘민낯’이 다 드러난 시기이니만큼 우려만이 아니라 기대도 섞인 시선으로 이 운동을 지켜보지 않을 수 없다.

엘런 브라운(Ellen Brown)에 따르면 1차 대전 전 미국에는 두 경제 세력이 미국의 지배를 놓고 경합하고 있었다. 하나는 월가에 기반을 두는 세력이다. 당시 월가에서 중요한 주소가 ‘월가 23’번지였는데 이는 ‘House of Morgan’으로 알려져 있다. J. P. Morgan은 강력한 영국 은행업 세력의 에이전트였다. 다른 하나는 필라델피아에 기반을 둔 세력으로서 이들은 벤저민 프랭클린에게로 소급하며 산업화와 토목공사에 중점을 두었다. 필라델피아파는 국가가 화폐를 관장하는, 펜실베이니아 지역에 수립된 시스템을 선호했다. 남북 전쟁 당시 링컨 대통령은 정부가 화폐를 발행하는 시스템으로 되돌아갔는데, 그는 암살되었고 은행가들이 화폐기계의 통제를 다시 요구했다. 월가파의 “조용한 쿠데타”는 1913년에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의 통과에서 정점에 달했다. 이 법의 통과는 1896년 대선 후보였던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을 비롯한 여러 “부주의한”(unwary) 의원들로 하여금 민간기업인 ‘Federal Reserve’(연방 준비제도, 연방준비은행)를 ‘연방적’ 성격을 가진 기관으로 잘못 알게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상 Ellen Brown, Web of Debt: The Shocking Truth About Our Money System and How We Can Break Free, Third Millennium Press, 2010)

민중당이 민주당과 함께 대통령 후보로 지명한 브라이언은 민중주의적 지향을 가진 민주당원이었다. 당시에는 월가의 금융세력과 공화당이 한 패였고, 그 반대편에 민주당이 있었으며, 민중당은 민주당과의 통합 대선후보지명을 주장하는 통합파(fusionists)와 독자성을 주장하는 제3당파(mid-roaders)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120여년이 지난 지금의 구도를 보면 민주당이 월가의 금융세력과 ‘공화당보다 더’ 한패가 되었으니(이는 오바마 때 그 정점에 이르렀으며 바이든은 그 연장선 위에 있다) 결국 월가가 공화당, 민주당을 ‘다 먹은’ 최고의 패자(霸者)가 된 셈이다. (지금 미국 민주당 내에 ‘진보파’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미국 민중을 위해서 싸우기보다 민중의 에너지를 저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이 탄생하고 있는 민중당은 단순히 양당 체제에 새 당 하나(그것이 아무리 진보적일지라도)를 추가시키는 식이 아니라, 민중들 자신들의 연합(coalition)이라는 형태로 미국 민중이 한데 모여 양당체제에 대한 실체적·삶정치적 대안으로서 구축되었으면 한다.

(이 외에 1971년에도 여러 개인들과 소정당들이 모여서 만든 민중당(People’s Party)이 있었으나 1972년과 1976년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낸 이후 느슨한 연합으로 변한 후 사라졌다.)




커먼즈의 비가시성

 


  • 저자  : Peter Linebaugh
  • 원문 : “The Invisibility of the Commons”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피터 라인보의 저서 『섯거라, 도둑아!』(Stop, Thief!, 2014)의 15장 「커먼즈의 비가시성」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에서 라인보는 세 개의 사례를 소개한다. 하나는 1930년대의 것이고, 또 하나는 1790년대의 것이며 마지막 하나는 1940년대의 것이다.

첫째 사례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에쎄이 「마라케시」(“Marrakech”, 1939)이다. (마라케시는 모로코 중앙부의 도시이다.) 갈색 피부를 가진 사람, ‘천한’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 그리고 여성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 이 글의 주요한 논지이다. 가령 장작단을 지고 앞을 지나가는 나이든 여성들의 대열을 보면 오웰 자신의 눈에는 장작단만 지나가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생산물만을 보는 제국주의자의 눈이라고 라인보가 정리해준다. (이렇게 정리해주기 이전에 라인보는 이 글에서 오웰이 인종주의와 비가시성을 주제로 다룬다고 말해놓은 바 있고, 여기에 여성혐오도 추가해야 한다고 덧붙인 바 있다.) 그렇다면 오웰은 제국주의 국가에 속하고 백인에 속하며 남성에 속한 자신의 ‘보지 못하는’ 눈을 스스로 고발한 셈이니 라인보는 오웰의 솔직함을 칭찬하고 말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는다. 그에게 빠져있는 것을 지적한다.

그런데 이 장작은 어디서 오는가? 오웰은 묻지 않는다. 무슨 권리로, 어떤 관습에 의해서 장작을 해오는가? 어떤 투쟁들이 이 관행을 보존했는가?

이어서 라인보는 마그나 카르타의 7장에 나오는 ‘상부한 여성의 에스토버스’(왕이 상부한 여성들에게 부여한, 나무에 대한 권리)((‘에스토버스’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478 참조.))를 언급하고 이는 수 세기에 걸친 투쟁으로 지켜낸 관습임을 지적한다. 오웰은 아마도 비가시성이 가장 높을, 갈색 피부에 육체노동을 하며 나이든 노파를 만난 에피소드를 말한다.

어느 날 키가 120센티가 넘지 않을 여성이 짐을 잔뜩 지고 내 앞을 기다시피해서 지나갔다. 나는 그녀를 세우고는 5수짜리 동전(1 파딩을 조금 넘는다)을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새된 울부짖음으로 대답했다. 고마움의 표현도 들어있었지만 주로 놀라움이었다. 내 생각에 그녀의 관점에서는 내가 그녀의 눈길을 끎으로써 거의 자연법칙을 위반하는 것 같았으리라. 그녀는 노파로서의, 다시 말해서 짐을 나르는 짐승으로서의 그녀의 지위를 받아들였다.

라인보는 오웰이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음을 지적한다. ‘고마움’도 들어있었다는 말이 얼마나 제국주의적인가도 지적한다. 라인보가 보기에 오웰은 인종주의, 여성혐오를 자신의 서술에 투사하지만, 커머너들과 대화할 기회를 갖지는 않는다. 나무는 어디서 해오냐고, 그 나무로 어떤 불을 피우냐고, 그 불이 어떤 어린아이나 나이든 부모를 따뜻하게 하냐고 묻지 않는다. 왜 오웰은 그녀와 대화하지 않은 것일까?라고 라인보는 묻는다.

라인보는 이 에피소드가 보여주는 것이 “제국주의 체제에서 써발턴 역할을 하는 다수에게 특징적인 태도, 자신은 원래 기본적으로 짐승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민중과 대화하기를 거부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고 덧붙이고, 마지막으로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눈을 가지고 볼 때에는(when we see with, not through, the eye) 거짓을 믿게 마련이다.”

둘째 사례는 워즈워스의 자서전적 장시 『서곡』(Prelude) 9권의 한 대목이다. (이 시는 시인의 정신이 혁명과 반혁명의 와중에서 성장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이 대목은 1792년 워즈워스가 프랑스의 보쀠(Michel de Beaupuy)라는 공화주의자를 방문했을 때의 일을 제시한다. 보쀠는 당시 블롸(Blois) 지역의 정치논의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 논의의 핵심은 제한된 제헌군주제에서 급진적인 공화주의 및 왕정의 몰락으로의 이행과 관련된 것이었다. (보쀠는 공화주의를 지지했으며 나중에 혁명을 방어하는 전투에서 죽어 영웅이 된다.)

라인보는 이 대목을 직접 인용한다. 여기 원문 그대로 소개하지만 옮기지는 않고 내용만 설명하도록 하겠다.

And when we chanced
One day to meet a hunger-bitten girl,
Who crept along fitting her languid self
Unto a heifer’s motion—by a cord
Tied to her arm, and picking thus from the lane
Its sustenance, while the girl with her two hands
Was busy knitting in a heartless mood
Of solitude—and at the sight my friend
In agitation said, ‘Tis against that
Which we are fighting! I with him believed
Devoutly that a spirit was abroad
Which could not be withstood; that poverty,
At least like this, would in a little time
Be found no more; that we should see the earth
Unthwarted in her wish to recompense
The industrious and the lowly child of toil
(All institutes for ever blotted out
That legalized exclusion, empty pomp
Abolished, sensual state and cruel power,
Whether by edict of the one or few);
And finally, as sum and crown of all,
Should see the people having a strong hand
In making their own laws. whence better days
To all mankind.

[단어 및 어구 설명]

    • chance + to부정사 : 우연히 ~하다 (= happen + to부정사)
    • hunger-bitten : bitten by hunger
    • languid : (움직임이) 힘없고 느릿느릿한
    • fitting her languid self Unto a heifer’s motion : fit A (un)to B
    • heifer : 어린 암소
    • its sustenance : ‘자기(어린 암소)가 먹을 것’
    • heartless : 낙담한, 풀이 죽은
    • in a little time : ‘시간이 조금 지나면’
    • withstand A : A의 끌림, 영향력, 설득력 등을 뿌리치다 [이 의미로는 주로 부정문으로 쓰인다.]
    • sensual : 세속적인, 물질적인
    • edict : 칙령, 포고령
    • as sum and crown of all, : 여기서 ‘sum’은 ‘최종결과’라는 의미고 ‘crown’은 어떤 과정의 정점을 의미한다.
    • whence : 그 원인으로 → 그 결과(as a result)

 

워즈워스를 포함한 젊은이들은 너도밤나무 숲을 말을 타고 지나던 중 어떤 굶주린 소녀를 만난다. 이 소녀는, 소녀의 팔에 줄로 묶인 상태에서 길에서 먹을 것을 집어먹고 있는 어린 암소의 몸짓에 맞추어 느릿느릿 지나가면서, 의기소침한 상태에서 바쁘게 뜨개질을 하고 있다. 이 모습을 보고 격동한 보쀠는 ‘바로 저런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싸우는 것이야’(‘Tis against that/ Which we are fighting!)라고 말하며, 이에 워즈워스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어떤 [혁명의] 기운이 퍼져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그리고 이런 가난은 이제 곧 볼 수 없게 될 것이며 대지가 노역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주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모든 억압적인 제도가 폐지될 것으로 믿으며 심지어 민중이 자신들의 법을 만드는 데 강한 힘을 발휘하여 인류에게 더 나은 날들이 오리라고 믿는다.

이렇듯 암소지기 소녀의 굶은 모습에서 시작한 워즈워스는 가난의 폐지와 민중의 자치정부의 달성에 대한 이상주의적 희망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오웰의 경우처럼 이 젊은 혁명가들도 그 소녀에게 말을 걸지 않음을 라인보는 지적한다. 동정심에 들떠서 거창한 결론들에 이를 뿐인 것이다. 라인보는 이렇게 쓴다.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 모두 땅에 대한 관습적인 권리를 공격했으며 이는 커머너들이라는 하나의 계급의 자원을 다른 계급, 즉 사유자들이 대대적으로 훔쳤음을 나타낸다. 워즈워스는 그 소녀를 가난하다고만 생각하지 커머너로 보지는 않는다. 그는 의존상태를 보는 것이다. 그 소녀와 대화를 했더라면 워즈워스는 그녀의 자립성을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왜 그러지 않았을까?

라인보가 지적하는 것은 부르주아 혁명이 왕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긍정적 측면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토지와 커머닝 관습의 대대적인 강탈이라는 부정적인 측면도 가진다는 점이다. 당시에 퍼진 ‘정신’에는 바로 이런 맹점이 들어있다. 그래서 라인보는 묻는다. 보쀠가 워즈워스한테 ‘바로 저런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싸우는 것이야’라고 말했을 때 ‘저런 일’은 무엇인가? 굶주림? 기계와 경쟁하기 위해서 맹렬히 뜨개질하는 것? 토지와 오래된 관계를 맺고 있는 커머너? 할스베리(Halsbury)의 『영국의 법』(Laws of England)에 따르면 “커머너가 공유지에서 가지고 있는 몫은 법적 표현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가축의 입으로 풀을 먹는 것이다.” 워즈워스는 바로 이 점을 탐구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제임스(C.L.R. James)의 사례이다. 그의 『변증법에 관한 단상』(Notes on Dialectics)은 1948년 디트로이트의 동지들에게 큰 의미를 가졌었다. 『단상』은 레닌과 트로츠끼가 시작한 것, 즉 헤겔의 변증법(특히 대립물의 통일)의 노동운동에의 적용을 완성하고자 한 저작이다. 노동운동은 역사의 매 단계에서 자신이 극복할 대립물을 만난다는 것이 그 핵심 취지이다. 『단상』은 유럽, 미국 등지에서 2차 대전 후에 발전한 맑스주의 혁명가들의 소그룹들에게 큰 중요성을 가졌으며, 1955년-68년 시기에 제3세계 해방운동과 제1세계 노동운동의 반란을 환영하는 저서였다. 그런데 여기에도 맹점이 있다. 1981년에 『단상』을 공부한 라이보가 보기에 이 책에서 해방적인 것은 164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의 노동운동의 개념의 통일성이었다. 제임스는 이 통일성을 부르주아 실증주의의 단계론적 범주들(봉건주의-자본주의-사회주의)에 대립시켜 파악했다. 이러한 강력한 사고에도 불구하고 커먼즈는 제임스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네바다의 레노에 주거지를 확립하기 위해 가 있을 때(주거지 확립의 목적은 이혼을 위한 것이었다) 레노 근처의 목장에서 지냈다. 이 목장은 원주민 부족에게 속해 있었으며 상업화되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잡역부로 일했는데, 그의 동료 노동자들은 선원들, 카우보이들, 필리핀인들, 멕시코인들, 중국인들, 중서부에서 온 유럽 출신의 백인들이었다. 그는 토착민들보다는 이들에게 끌렸다. 그가 본 중에 가장 잘 생긴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달리 이곳의 토착민들은 땅딸막했다. 그는 이 모든 사람들과 많이 사귀지는 않았다. 1948년 8월에서 11월까지 게링(Guerin)의 『프랑스 대혁명』을 번역했고 『단상』을 집필했다. 목장은 피라미드 호수(Pyramid Lake) 옆에 있었다.

그가 집필하고 있을 때 그의 주변에서는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전쟁, 파이우트족(the Paiutes)이 자신들의 공유지를 되찾기 위해 벌이는 게릴라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네바 다대학교의 사회역사가인 둬킨(Denis Dworkin)은 이렇게 썼다.

맑스주의자이자 대영제국의 백성으로서 제임스가 파이우트족을 그 자신이 속한 것과 같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라는 세계사적 과정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확실히 타당했다. 그러나 목장이 원주민보호구역에 있었다는 점을 그가 인정한다는 점은 제쳐놓고, 제임스가 토지분쟁은 말할 것도 없고 그곳의 주민들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증거가 한 조각도 없다.

이어서 라인보는 파이우트족의 삶을 그린 책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이곳의 토지가 종획된 역사(보호구역은 그 결과이다)를 이런저런 책들을 들며 말해준다. 그러는 가운데 일자리를 찾는 백인노동자와 먹을 것을 찾는 원주민의 차이를 짚어주기도 한다. “일자리를 찾는 사람은 사장에게서만 임금을 발견하지만, 파이우트족은 보존되는 한에서만 자원을 발견한다.”

제임스가 네바다를 떠난 후 1년 뒤에 뉴욕시민 작가인 리블링(A.J. Liebling)이 같은 목적으로 피라미드 호수 목장에 오는데, 음식 및 스포츠 담당 작가인 리블링은 제임스와 달리 파이우트족의 분쟁에 완전히 빠져들어서 여러 요구들의 합법성과 파이우트족과 관련된 제반 사항들에 관심을 갖고 뉴욕으로 돌아온다. 그는 파이우트족과 “미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는 원주민 전쟁”에 대한 일련의 글들을 써서 1955년에 출판한다.

파이우트족의 주된 적(敵)인 맥캐런(Pat McCarran) 상원의원은 조 매카시(Joe McCarthy)의 측근이었으며 1952년의 맥캐런법―코뮤니스트들, 체제전복자들, 동반자들[코뮤니즘에 공감하는 비코뮤니스트들]]이 미국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 법―의 후원자였다.

1985년에 미국대법원은 자신들이 천년 동안 살아온 토지에 대한 파이우트족의 모든 권리주장을 부인하는 판결을 내린다.

제임스는 1950년의 국가안보법(Internal Security Act)으로 엘리스 아일랜드에 투옥되었다. 그의 항소는 그가 코뮤니스트라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라인보는 제임스는 코뮤니스트가 아니라고 정중하게 바로잡는다. 그가 맑스주의 혁명가이기는 하지만, 코뮤니스트는 아니라는 말이다. 양자의 차이는 그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도 모르고 판사도 몰랐다고 하면서.

맥캐런 상원의원은 원주민 커먼즈를 파괴하고자 했으며 코뮤니스트들이 미국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했다. 제임스는 자신이 공산당의 당원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코뮤니스트가 아니라고 불만을 표할지 모르지만, 그는 분명 자본주의의 반대자였으며 노동자혁명의 옹호자였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파이우트족의 삶의 방식에 내재한 커머닝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 투쟁의 한가운데에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라인보는 이 세 사례를 한데 모아 정리한다. 그는 다른 면에서는 날카로운 이 세 사람의 눈을 방해한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 라인보는, 자신은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진정한 변증법인 대화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만 제시할 수 있다고 한다. [라인보 자신은 그런 말을 안 했지만, 정리자가 보기에는 여기서 헤겔의 변증법이 바흐친의 ‘대화적 상상력’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그러면 또한 물어야 할 것은 그들이 못 본 커먼즈를 우리는 어떻게 볼 수 있는가이다. 많은 연구가 숲의 나무를 땔감으로 취할 권리를 발굴해냈고 이것이 우리를 이른바 커머닝의 한 형태로서의 ‘나무 절도’에 민감하게 만든다. 토착민 커먼즈는 이제 국제법의 주제가 되었다.

[땔감 채취, 먹을 것 채취, 땅]을 커머닝으로 보는 것이 무슨 이득을 가져오는가? 강탈의 보편화(universality of expropriation)에서 그 답이 나오며, 이 범죄들을 바로잡는 방법은, 상실되고 박탈된 것에 대한 배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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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자 논평]

라인보는 여기서 글을 맺지만, 우리는 “강탈의 보편화에서 그 답이 나”온다는 말을 (그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라도) 좀더 숙고해야 할 듯하다. 우리가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자본주의적 관계는 지구 전역에서 일어나는 커먼즈의 강탈(사유화)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이른바 자본의 시초축적 단계나 노동의 자본에의 ‘형식적 포섭’의 시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 포섭’의 시기에도, 즉 지금도 계속된다. 자본은 끊임없이 공통적인 것을 (예전에는 주로 이윤의 형태로, 얼만 전부터는 주로 자산소득의 형태로) 사유화하여 자신을 불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너무나 익숙한 현실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를 세상의 법칙인 양 당연히 여기며 더 나아가 선망하고 욕망한다.

자본주의적 관계가 그 자체에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를 포함한다는 점을 정밀하게 분석한 사람은 역시 맑스이다. 맑스는 『자본론』 3권 15장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세 개의 주요한 사실”을 제시한다. 그 첫째와 둘째는 다음과 같다.

(1) 소수인의 수중에 생산수단이 집중된다. 이를 통하여 생산수단은 직접적 노동자의 소유로서 나타나지 않게 되며, 그 반대로 사회적 생산능력으로 전환된다. 비록 생산수단은 처음에는 자본가의 사유 재산이긴 하지만 말이다. 자본가들은 부르주아 사회의 수탁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수탁의 모든 과실을 혼자 취득한다.
(2) 노동 자체가 사회적 노동으로 조직된다. 협력, 분업, 노동과 자연과학의 결합을 통하여.
 이 두 가지 점에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사적 소유와 사적 노동 모두를―비록 대립적인 형태로이긴 하지만―지양한다.

(1)은 비록 자본가의 사유재산이 되었기는 하지만 생산수단이 사회적 생산능력으로 전환된 측면을 지칭하며, (2)는 노동이 비록 자본가의 처분에 맡겨진 것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노동으로 조직된 것을 지칭한다. “자본가는 부르주아 사회의 수탁자인데도 불구하고 이 수탁의 모든 과실을 혼자 취득한다”―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생산이 사회적이므로 그 과실은 잠재적으로는(virtually) 사회 전체의 것, 즉 공통적인 것인데 실제적으로는(actually) 자본가가 (이윤의 형태로) 사유화한다는 말이다. (‘과실’은 생산된 총 가치에서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과 투자된 자본의 재생산 비용은 뺀 것이다.) “사적 소유와 사적 노동 모두를”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과실은 잠재적으로는 자본가의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노동자의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사회 전체의 것이다. 이 잠재적인 측면에 바로 커먼즈가 숨어 있다. 그런데 자본가는 언제나, 혹은 상황이 안 좋아지면 과실(이윤)을 증가시키기 위해 임금을 삭감하여 그 일부를 자신의 이윤으로 취하려고 하고, 노동자들은 당연히 노조를 만드는 등의 방식으로 방어하려고 한다. 고정된 양의 과실을 놓고 이윤과 임금이 자신이 몫을 더 크게 하려는 싸움이 벌어진다. 여기서 커먼즈는 보이지 않는다.  자본가의 사유재산 증식 욕심이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침탈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약자인 노동자의 입장에서 방어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커먼즈가 숨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자본이 판을 그렇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공장을 떠나 생산과정 바깥에서 공통적인 것을 착취하는 금융자본(월가가 대표하는 유형의 자본)이 자본의 주된 세력이 되었을 때 그 변증법적 대립의 상대를 잃은 노동자는 더욱더 힘이 약화된다. 노동자의 힘의 약화는 그 자체로 공통적인 것의 약화이다. 인간의 생산능력이야말로 진정한 부의 핵심적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공통적인 것을 침탈하고 훼손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는 지금 인류를 강타하고 있는 팬데믹이 (특히 자본주의의 발달 정도가 높은 만큼이나 공통적인 것의 침탈 정도가 높은 미국의 경우에) 잘 보여주고 있으며, 앞으로 점점 더 악화될 기후위기는 이를 더욱더 높은 정도로 보여줄 것이다. 이제는 삶의 번성을 위해서는 물론이요 다가오는 위기를 잘 극복하기 위해서도 커먼즈(공통적인 것)의 가시화와 번성이 몹시 필요하다. [정백수]

 




돌봄과 번성: 커머닝으로 생겨나는 사회보장

 


  • 저자  : Silke Helfrich, David Bollier, Thomas de Groot
  • 원문 :  Caring and Thriving: The Social Security Engendered by Commoning
  • 분류 : 번역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볼리어(David Bollier)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2020년 10월 16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흔히 네덜란드인명의 성에 붙는 ‘de’―영어 정관사 ‘the’에 해당―를 ‘데’로 표기하지만, 실제 발음은 ‘더’에 더 가깝기 때문에 ‘Thomas de Groot’를 ‘토마스 더흐로트’라고 표기했다.)

     


암스테르담 소재 <커먼즈 네트워크> 프로그램 책임자인 토마스 더흐로트(Thomas de Groot)는 최근에 사회보장제도의 미래와 어떻게 커먼즈가 대안적인 이행경로들을 제시할 수 있을지에 관하여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볼리어(David Bollier)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터뷰는 내용을 분명히 하기 위해 줄인 것이다. 이 인터뷰의 본래 게시글은 <커먼즈 네트워크> 웹싸이트에 올라 있다.

* * *

더흐로트
우리의 사회보장 시스템에 대한 다른 비전이 필요하다는 것과 관련해서 여러분들의 생각을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헬프리히
좋습니다. 커먼즈 사유에 사회보장이라는 쟁점을 연결시키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해보죠. 우리는 시장기반 경제에 구조적으로 의존함으로써 부담을 떠안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보장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 Covid-19 팬데믹 국면에서 보고 있는 것도 이것입니다. 국가는 기업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수십억을 쓰고 있습니다. 국가 입장에서는 기업들을 활성화하는 것이 더 많은 돈을 산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국가도 자본 유입과 세수에 의존적입니다.

그래서 경제위기와 사회보장제도의 위기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것에 지레 겁을 집어먹습니다. 또 다른 위기가 있을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죠. 이런 이유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시장기반의 자본주의적 경제에서 보다 독립적이도록 만드는 그런 방식으로 경제의 미래와 사회보장의 미래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볼리어
저는 ‘재분배에서 선분배로’라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이 표현에는 국가가 어떤 방식으로든 부를 재분배하는 현 상황에서 사람들이 우선 부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상황으로 갈 필요가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지분소유권(equity ownership)과 같지 않습니다. 투자금에 대한 이윤이나 수익을 발생시키기 위해 자산을 사용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시장과 국가 밖에서 자급활동과 서비스들을 창출하기 위한 공유된 부와 사회기반시설을 갖추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헬프리히
관련된 다른 주제로 넘어가기에 딱 좋은 말씀이군요. 사회보장의 원천을 문제화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 이는 사회보장이 단지 화폐가치의 안전만을 의미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사회보장을 화폐가치의 안전으로 생각합니다. 이 생각에는 부의 모든 재분배가 설계상 시장변동에 필연적으로 의존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매우 불안정한 접근법입니다. (특히 부자들이 재분배의 불공평한 조건들을 정치적으로 지시할 때는 말이죠.)

그것은 또한, 사회보장을 구상하고 제공하기 전에 우선 메가머신(megamachine)이 계속해서 굴러가게 하도록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이것이 설계 결함이죠!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자본주의 경제의 (따라서 복지국가의) 또 하나의 기둥인 소유관계(시장을 통해 화폐가치를 발생시키기 위한 전제조건)에 이르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유권 모델들을 언급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재분배에 대해 말할 수는 있지만 선분배에 대해 말할 수는 없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습니다. 실질적인 선분배는 모든 사람이 어엿한 삶을 사는데 필요한 공유된 부의 기본 요소들(토지, 주택 등)에 법적으로 안전하게 접근하는 것을 보장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농업용 토지, 주택과 아파트가 지어지는 토지를 탈상품화하는 것은 사회보장을 보다 커먼즈 친화적으로 해석하는데 최대한 기여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일에는 1%의 축적된 부의 일부를 되찾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팬데믹 시기 동안 많은 사람들이 임대료를 지불할 수 없다는 것이 정부가 지금 수십억을 써야 하는 일부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견디기 힘든 상황입니다. 탈상품화된 주택에 대한 권리는 마땅히 사회보장제도의 일부가 되어야합니다. 그 권리는 시민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의 일부분인 최소한의 기본적인 것으로서 간주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전환이 생겨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소유(재산)를 다시 사유할 필요가 있습니다.

 

볼리어
우리 사회에서 소유권 모델은 항상 개인 소유와 기업 소유 그리고 국가 소유로 구성됩니다. 이는 다시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사이의 단순화된 논쟁을 초래합니다. 그리고 커먼즈에 기반한 생각들은 결코 고려조차 되지 않습니다. 이 생각들은 항상 주변화되고 간과되며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헬프리히
그것은 국가 기관들이 시장경제 및 추출적인 기업모델들을 재분배를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원천으로서 생각하도록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이 접근법은 정말로 나쁜 설계상의 선택사항임이 드러납니다. 위기가 닥쳐도 재분배할 충분한 돈이 없을 것임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죠.

 

볼리어
그것은 권력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국가는 추출 경제에 기반을 두고 있는 계급에 속하고 그 경제에 기반을 두고 있는 명성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운영됩니다. 그들의 일은 그 경제가 낳는 추출과 성장을 촉진하거나 관리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 일에는 이 패러다임으로부터의 전면적인 전환을 상상할 동기가 정말로 진짜 없습니다. 심지어 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이해하고 있지만 기꺼이 나서지 않거나 직업상 근본적인 해결책을 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헬프리히
그래서 우리가 사회보장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리고 현 시스템에 잘못된 것이 무엇이 있는지를 분석할 때 제대로 된 출발점은 국민국가들의 설계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국가들은 실제로 시장국가들인데, 모든 재분배 행위를 완전히 시장에 즉 투자자들에게 전적으로 의존적이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미래의 사회보장을 위한 모든 중대한 시나리오는 이 틀의 바깥에서 비롯되어야 할 것입니다.

 

볼리어
사람들은 시장이 사실상 모든 사람들에게 사회보장을 제공할 수는 없다는 현실을 항상 회피해왔습니다. 불평등이 시스템으로 구축되고 그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에 의해 ‘정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제 우리는 그 사실이 분명해진 결정적 시기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해결책들을 찾을 때 사람들은 시장과 사회적 연대 사이에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선의를 가진, 사회에 관심이 있는 정치가들을 곤경에 빠뜨리는데 그들이 탈성장이나 탈자본주의적 선택사항들을 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헬프리히
바로 그렇습니다. 미국처럼 유럽에도 존재하는 (아마도 진보적인) 노동조합의 전통이 떠오르는군요. 조직화된 연대에 관한 사유의 전통이죠. 하지만 그 전통조차도 우리가 결정하고자 하는 것에는 부적절합니다. 이는 그것이 노동시장에서의 일자리 창출은 복지국가에 의해 구상되는 모든 사회정책의 선결조건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훨씬 더 강하게 이것을 제시해보자면 대부분의 경우, 사회보장 정책은 모든 사람을 위한 일자리를 창출하고자 하는 것을 분명한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것이 말이 되는 안 되든 상관없이 말이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제가 계속해서 굴러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막 확인한 것처럼 그것이 재분배를 하기 위한 수단의 유일한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완벽한 원이나 동어반복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우리는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하여 시장 참여자들(기업들, 투자자들)을 유인하기 위한 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일자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사회보장을 유지하기 위해서 돈을 벌게 할 것이며 이것이 다시 경제가 계속해서 돌아가게끔 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바라듯이)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보장이 완전히 화폐화되었다는 결론만 내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 전체적인 사고방식을 없앨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함이 있는 시스템입니다.

저는 베네수엘라 소재 <쎄꼬쎄쏠라>(Cecosesola)라 불리는 협동조합들의 연합을 조사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커먼즈에 기반을 두는 사회보장에 관한 흥미로운 사례연구에 도움이 됩니다. 요즈음 베네수엘라 경제에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시장에 충분한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충분한 에너지가 제공되지 않고 자본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쎄꼬쎄쏠라>로부터 지급받는 물자들로 말이죠.

이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쎄꼬쎄쏠라>가 어떤 의미인지를 물었을 때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느낌, 즉 안도감이죠.”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것은 사회적 결속(유대)의 안정감에서, 살아있는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그들의 공동체가 관리(파수)하는 시장, 자기조직화, 절대화된 평균가격에 기반을 둔 거래,(([옮긴이] 쎄꼬쎼솔라의 한 활동가는 이렇게 말한다. “채소들의 경우에는 더 쉽습니다. 우리는 채소들의 가격을 우리가 그것들을 생산하는 데 투여한 시간과 노력으로부터 분리합니다. 우리는 킬로그램당 평균 가격을 사용합니다.” (http://patternsofcommoning.org/we-are-one-big-conversation-commoning-in-venezuela/))) 의식(儀式)화된 활동과 상호지원에 대한 사실상의 소유권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의사결정 과정들을 통제합니다. 모두가 지위가 동등한 동료(peer)로서 조직한 그들의 사회보장 제도는—그들은 심지어 원장도 없이 모든 장비를 갖춘 병원을 운영합니다—큰 규모의 경제를 가지고 있는 국가의 주변부에서 구성원들에게 소속감을 창출해줍니다. 그런데 소속감을 가진다는 이 기본적인 요소가 이곳 유럽에서는 사회보장에 관한 논의에 끼지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볼리어
<쎄꼬쎄쏠라> 같은 것이 미국에서 작동할 수 없는 이유들 중 하나는 두서없이 말해서 정치문화에 그것을 허용할 공간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헬프리히
이것으로 우리가 우리 시스템에 있는 다음 결함으로 넘어가는군요. 우리의 사회보장 및 경제와 관련된 새로운 통찰과 실험을 소개할 공간이 없을 정도로 사회보장 및 경제를 둘러싼 우리의 담론의 범위가 매우 좁습니다.

 

볼리어
그 범위의 많은 부분이 국가권력의 본질적인 부분인 관료체제와 관계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두루 적용되는 표준적인 모델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관료체제는 정치인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하는 정책을 능력중시적이고 공정한 것으로 정당화하는 것에 이바지합니다. 하지만 보편성과 관료체제를 고수함으로써 시스템은 지역의 독특함과 아래로부터의 창조성이 어떻게 가치를, 즉 오픈소스 스타일을 발생시키는지를 고려하지 못합니다. 커먼즈 접근법은 분명하게 이 요소를 참작합니다. 커먼즈가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고 열려있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커머너들로서 우리는 커머닝과 로컬리즘을 더 지원하도록 만들기 위해 국가의 관료체제와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가 또한 우리의 과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 가지 사례는 <도시 커먼즈의 돌봄과 회생을 위한 볼로냐 조례’>(([옮긴이] http://www.comune.bologna.it/media/files/bolognaregulation.pdf))입니다. 그리고 범위를 더 넓혀서 이아이오네(Christian Iaione)와 포스터(Sheila Foster)같은 사람들이 속해 있는 <공동-도시들> 운동(“Co-Cities” movement)이 해당이 됩니다. 이 접근법은 도시 관료체제와 (동네그룹들, 시민연합들 등등으로서 활동하는) 커머너들 사이의 실질적인 관계개선을 이루어내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 선의의 실험은 선거정치, 정치정당, 입법대표자들의 권력놀음에 취약하죠. 게다가 국가권력과 커머닝 사이에 철학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세계관의 충돌이 있습니다.

질케와 저는 이 과제, 즉 우리가 어떻게 커먼즈와 국가의 파트너십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와 어떻게 관료체제(국가)와 선거정치가 체질개선을 하고 스스로 문을 열어서 커머닝의 다원세계가 발생하는 것을 허용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과제와 씨름을 해왔습니다. 그 답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헬프리히
맞습니다. ‘국가’를 비난하는 것은 너무 간단한 일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국가주도의 기본소득을 제안하는 것은 이 맥락에서 이해할만합니다. 하지만 우리 정부시스템이 오늘날 그렇듯이 위계적으로 수립되어 있더라도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을 요구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상황과 욕구가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지라도 말입니다. 국가권력은 화폐 안전(monetary security)을 명백하게 선호하는 행정상의 단일문화들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것은 커다란 문제입니다. 우리가 오스트롬(Elinor Ostrom)으로부터 배운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만병통치약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죠. 사람들에게는 마찬가지로 다루어져야 하는 비화폐적인 안전욕구가 있습니다.

 

더흐로트
우리가 하는 연구에서 우리는 두 가지 이행 진로를 모색합니다. 그 중 하나의 핵심이 케어소득과 대안통화입니다. 케어소득은 우리가 탈성장 운동에서 페미니스트 사상가들로부터 배운 개념입니다. 이것은 시장에서는 아예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사회적 재생산노동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도록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동네통화(neighbourhood currency, 지역통화)로 이 케어소득 방식을 조직한다는 아이디어를 추가했습니다.

 

헬프리히
우리는 항상 경제 영역에서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즉 사람들이 자급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현재 시스템은 경제에서 돈이 유통되는 부분만 볼 뿐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지적하듯이 그 시스템은 많은 일들을 배제합니다. 많은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이 제시하는 답은 우리가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재생산노동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돈을 무조건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많은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가 이전에 이야기했던 화폐화의 함정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케어소득을 대안통화에 연결시키려는 충동을 이해합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왜냐면 연대경제의 일부를 수용하고 시장경제로부터 그것을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커머닝과 상업활동은 따로따로여야 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방식이 있습니다. 조금 뒤로 돌아가 보죠. 모든 국민국가는 모든 사람을 위한 규칙을 마련하는 관료체제에 의존합니다. 그것을 두루 적용되도록 만든 만병통치약인 ‘추상적인 평등’이라고 부릅시다. 국가는 항상 위에서부터 통치해야 할 것이고 따라서 많은 다양한 상황들을 무시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 이들 정부는 계속해서 도전을 받을 것인데 이는 법이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보편적인 기본소득, 케어소득이나 또는 그러한 어떤 계획의 다양한 형태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또 하나의 질문을 즉 ‘누가 그것을 운영(주관)합니까?’라는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동체에 기반을 두는 기본소득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이 시나리오에서 누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만큼 얻고 무슨 이유로 받는지를 결정하는 주체가 국가는 아닐 것입니다.

기본소득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지역공동체의 성공적인 모델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소속감•책임감•사명감을 높이는 데 이바지합니다. 달랑 서류와 법조항들만 줄줄이 붙어서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국가화폐기금과는 대조적으로 말이죠. 그리고 우리는 살아있는 사회적 구조 없이, 소속감 없이 사회보장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볼리어
그것에 덧붙여서 저는 커먼즈에 기반을 두는 자금조달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중입니다. 이 보고서는 어떻게 돈과 공동체가 양도 불가능한 상태로 있을 수 있는지를 즉 돈과 공동체가 어떻게 시장의 힘에 의해 상품화되지 않은 상태로 있을 수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돈(그리고 가치)이 공동체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시스템을, 공동체들과 사람들이 자본에 의해 신식민주의적인 추출 장소들(프랙킹, 식수, 광물들, 데이터 마이닝 등등을 생각보세요)로 취급되지 않는 시스템을 어떻게 설계할 수 있을까를 묻고 있습니다.

저는 대안통화가 해결책의 일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대안통화는 당연히 장소에 기반하고 있고 그래서 가령 동네통화는 전지구적 금융의 회로 속으로 휩쓸려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커먼즈 내부에서 발생된 가치가 더 큰 경제에서 화폐를 통한 단순한 거래와 투기에 종속되지 않도록 막는 완충장치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대안통화 사용자들이 자본주의적인 관계로 빠져드는 것을 막는 완충장치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대안통화를 설계하고 사용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지역 공동체들 스스로가 이 쟁점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입니다.

 

헬프리히
핵심은 우리가 사회보장을 탈상품화하는 방법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정보와 토지를 탈상품화하고, 상품으로서가 아니라 교환의 수단으로서 복무할 수 있는 무수한 대안통화들을 만들어 내는 식으로, 심지어는 돈 자체를 탈상품화하면서 시작해봅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이행의 작은 지대들을 획득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무엇이 그 지대들에 유리하게 작용하는지를 볼 수 있으며 그 지대들을 죄다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욕구에 토대를 두는, ‘동료’가 관리하는 사회보장을 개념화하기 위한 조건들이 그렇게 마련됩니다. 사람들의 욕구에서 시작하는 것이 항상 중요합니다. 주거지를 일례로 들어보죠. 국가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모든 사람을 위한 주거지 소유권을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공동체 토지 트러스트>(Community Land Trusts)(([옮긴이] http://commonstrans.net/?p=924http://commonstrans.net/?p=1574 참조.))처럼 기존의 것과는 다른 재산 모델들을 마련하는 것이며 공동체들이 주택 뿐 아니라 주택이 서 있는 토지를 탈상품화하는 것을 돕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장으로부터의 구조적인 독립을 창출하는 데 이바지할 것입니다. 현재 위기를 놓고 볼 때 우리는 스스로 조직화한, 공동체를 지원하는 기획들이 재난이 닥치면 더 복원력이 있음이 입증되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 기획들은 자본과 상품의 국제적인 흐름에 의존적이지 않습니다.

 

볼리어
시민권 운동 출신의 유명한 선거투표권 활동가인 헤이머(Fannie Lou Hamer)는 정치적인 활동으로 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협동조합 운동의 선구자로서도 유명합니다. 지역경제를 지배하는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의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녀는 흑인공동체의 경제적 독립을 구축하기 위한 <자유농장 협동조합>(Freedom Farm Co-operative)을 시작했습니다.

식량독립을 하기 위한 그녀의 싸움은 그 지역에 사는 흑인들이 더 이상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종속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이 또한 그들을 정치적으로 독립시켰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땅에서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유농장 협동조합>은 그들의 것이었고 그것이 그들에게는 그들을 위한 안전한 장소, 즉 그들이 새로운 무언가를 구축할 수 있는 장소이자 다른 사람들에게 정치적•사회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장소였습니다. 그들의 기본적인 욕구를 위해서 뿐 아니라 그들의 존엄을 위해서 말이죠.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도와서 국가가 할 수 있는 어떤 일입니다. <자유농장 협동조합>은 새로이 시작하기에 훌륭한 장소일 것입니다.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공동사회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애쓰는 것이야말로 근본적으로 ‘이행도시 윤리’(Transition Towns Ethic)입니다. 이것은 보통 정치적으로 추동되고 국가에 관련된 쟁점들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이데올로기들로는 시작되지 않습니다. 대신에 이 윤리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어떤 것을 의미하는)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것들—음식•거주지•공적인 삶—이 핵심입니다. 몬비오(George Monbiot)는 이것을 ‘소속의 정치’라고 부릅니다. 상호간의 지원과 실질적인 욕구에 기반을 두는, 양육되는 정체성이죠.

 

더흐로트
사회보장의 미래가 탈중심화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지방자치체들이 사회보장을 지역별 계획들로 조직하는 데 더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헬프리히
어떻게 중앙집중주의자들이 항상 모든 것이 다 괜찮다고 말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예를 들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사람들이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바이든이 선출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자유민주주의는 최고의 시스템이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의 제도가 강하다는 것을 입증할 것입니다.” 글쎄요, 아닙니다. 미국의 제도는 강력하지 않습니다. 또한 미국의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작동한다면 양쪽 다 문제가 있는 두 정당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제시해보자면, 우리의 도시들, 지방들, 나라들이 50.1%에 기반을 두고 있는 권한을 가진 정치 정당들의 경쟁논리에 따라서 통치되는 한 실질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볼리어
맞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탈중심화가 한 가지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지만 주요 도시들은 나라를 통치하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정치문화가 동일합니다. 실질적인 대안권력구조가 생겨나기 위해 우선적으로 이 정당들을 없애거나 대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장소에 기반을 두는 정치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정치문화를 구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헬프리히
사회보장이라는 아이디어를 다시 사유하는 것은 토지와 주거지의 선분배를 시작하는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고 나면 대안적인 정치문화들이 뒤따를 것입니다.

 

볼리어
하지만 그것은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장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으며 또한 참여•소속•기여•커머닝의 긍정적인 사회적 비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