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는 민중의 의지를 침식한다

 


  • 저자  :  Tim Dunlop

  • 원문 : Voting undermines the will of the people – it’s time to replace it with sortition (책 Voting undermines the will of the people it’s time to replace it with sortition에서 저자 자신이 발췌한 대목들임) (2018.08.28)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가디언』지 편집자 설명] 자신의 새 책 『모든 것의 미래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크고 대담한 생각들』(The Future of Everything: Big audacious ideas for a better world)에서 저자 팀 던롭(Tim Dunlop)은 우리의 세계를 다시 새롭게 형태짓는 방대한 기술적 전환을 살펴보면서 모두를 위해 더 나은 삶의 질을 창출하는 데 이 전환을 활용하는 방법을 고찰한다. 그는 미디어, 부의 창출, 노동, 교육, 그리고 통치방식이 어떻게 변형되어야 하는지를 탐구한다.

선거는 민중의 의지를 침식한다

 

정부의 활동방식을 고치려면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선거(투표에 의한 선출)를 임의선출(sortition)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법정의 배심원들을 뽑을 때 쓰는 것과 같은 방법이다. 의회의 구성원을 선거로 뽑지 말고 적어도 그 일부는 임의적으로 뽑아야 한다. 이것이 일반 시민들이 나랏일의 운영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곧장 나아가는 가장 간단한 길이다. 그 효과로 정치와 통치가 변할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선거가 진정한 민주주의의 초석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도 선거권을 우리의 근본적 권리의 하나로 제시한다. 민중(국민)의 의지가 선거로 표현되리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선거가 오히려 민중의 의지를 침식해버렸다. 이제 민중의 의지를 회복할 제도가 필요한데, 임의선출이 바로 그 제도이다.

 

선거의 기원은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시기인 18세기로 소급한다. 이 혁명들의 지도자들은 틀림없이 선거를 엘리트 세력이 정치적 과정에 통제력을 발휘하는 수단으로 보았을 것이다. 사실 비교적 최근까지도 땅을 소유하고 있는 백인 성인들만이 선거권을 가졌다. 이런 제한을 싸워서 제거했다고 하더라도 대의제에 기반을 둔 통치는 엘리트들이 ‘민주적’ 과정에 통제력을 행사하는 방법으로 퇴보해버렸다. 선거에서 뽑힐 시간과 자원을 가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은 엘리트들이기 때문이다. 의심이 된다면 다음 선거에 한번 출마해 보라.

 

그런데 이런 과정을 일국의 수준으로 확대할 때 제기되는 첫 물음은 ‘우리 일반 시민들이 진짜 그 일을 할 수 있는가?’이다.

 

엘리트들은 일반인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무식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권력을 쥐는 데 가까이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의 『국가(정체)』에서부터 엘리트들은 ‘군중의 지배’를 우려했다. 이런 우려와 비슷한 것이 오늘날 소셜 미디어에 대해 표현된다. 소셜 미디어는 민주적 군중의 무질서함의 증거라는 것이다.

 

‘너무 많은’ 민주주의는 문제라는 견해도 있다. ‘민중의 의지’가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적 저널리스트인 썰리번(Andrew Sullivan)은 미국의 헌법 제정자들이 민중의 의지와 권력의 행사 사이에 거대한 장벽을 설치해놓은 것을 찬양한다.

 

민중의 의지를 이렇게 얕보는 세력은 시민참여를 배제하는, 아니면 시민참여가 극히 어렵거나 불편한 제도를 만들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 이런 참여결핍을 시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 증거로 제시할 것이다. 주류 제도에서 배제되고 통치과정에 대한 직접적 통제로부터 배제된 시민들은 소셜 미디어의 새 플랫폼들을 사용해서 자신들의 좌절감을 표현한다. 이 상대적으로 덜 규제되는 형태의 공적 표현은 분명 내용 없는 교류로 퇴락할 수 있다. 이것이 다시 일반인들의 참여의 부적절함에 대한 결정적 증거로 제시된다. 이렇듯 엘리트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한 실제적 참여를 배제의 핑계로 삼는 것이다. 이는 운전을 배울 기회도 없었던 사람에게 운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정부의 문제해결 능력이 신뢰를 잃게 된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정치 체제가 ‘보통 사람들’을 배제하도록 설계된 데 있다. 물론 선거에는 참여하기 때문에 발언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가들은 정당의 통제 아래 있고 정당은 고유의 관심사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들은 다시 다른 주체들, 특히 부유하고 권력 있는 자들의 영향력 아래 놓인다. 정치가들은 일단 당선되면 말로는 국민의 의지를 반영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 국민이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정치가들이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은 미리 결정되어 있으며 앵무새처럼 반복된다. 이로 인해 과정 전체가 시민의 관점에서는 소극(笑劇)이 된다.

 

『더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에 실린 「제안된 상원 선거방식 변화가 호주의 민주주의를 해칠 것이다」(“The proposed Senate voting change will hurt Australian democracy”)라는 글에서 정치학자 드라이젝(John Dryzek)은 이렇게 말했다. “호주의 연방 의회는 오늘날 ··· 안건을 숙의하는 곳이 아니라 여러 당에 속하는 정치가들이 대부분 의례적으로 자신의 말만 해대는 극장이다. 당 정치가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성찰하지 않고 자신들의 견해를 바꾸지 않는다.” 드라이젝이 보기에 훌륭한 숙의의 본질은 참여한 사람들이 견해를 바꿀 의지와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진정한 숙의는 민중이 동등한 주체로 모여서 어려운 결정을 하는 데 관여되는 모든 사실적·정서적 요소들을 터놓고 다룰 때에만 생긴다. 당 정치로 인해 정치가들은 이러한 숙의의 능력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다.

 

나는 ‘시민의회’(People’s House, 민중의회)라 불리는 새로운 의회를 창출할 것을 제안한다. 이곳이 상원이나 하원과 다른 것은 그 의원들이 임의로 선출된다는 점이다. 성인 시민이라면 누구라도 생애의 어떤 단계에서 배심원으로 봉사하도록 요청을 받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시민의회에서 봉사하도록 요청받을 수 있다. 배심원들이 범죄 재판의 결과를 결정하듯이, 시민의회의 의원들은 입법과 관련하여 숙의하고 투표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나라를 운영하는 방식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지금 전 세계의 정치체들에서는 시민 배심단, 공론조사(deliberative poll), 혹은 기타 형태의 엘리트-대중 논의와 관련된 작업이 상당히 많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임의로 선출된 평범한 시민들로 구성된 의회가 잘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공론조사는 정보에 기반을 둔 대중의 견해를 얻기 위해서 선출된 참여자들끼리 광범한 논의를 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를 위해 여론조사 회사에서 임의로 선출한 참여자들을 이틀 동안 한 장소에 모아놓고 소집단을 이루어 서로 토론을 하거나 여러 견해들을 대표하는 전문가들에게 질문을 할 수 있게 한다.

 

1998년에 ‘호주가 공화국이 되어야 하는가 아닌가’라는 주제에 대한 공론조사가 행해졌다. 이 조사를 행한 기관―Issues Deliberation Australia―에 따르면 “호주인들은 참여할 기회를 잡으려고 달려들었다 ··· 원래의 목표보다 47명 많은 347명이 최종 선출되어 10월 22일 캔버라(Canberra)에 도착했다.”

 

이 숫자는 참여자들이 자신들이 다룰 문제가 중요하며 논의의 자리가 믿을 만하다고 인식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일반 시민들은 그들을 위해 모인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질문할 기회를 가진 것에 기뻐했으며 확신이 커지면서 자신들이 받는 정보에 기꺼이 도전하려고 했다.

 

이런 포럼들이 있다고 해서 일반인들이 갑자기 전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문가들과 비전문가들 사이의 토론을 더 평등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포럼들은 대중의 지식을 향상시키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 참여자들 사이에 신뢰와 존중의 생성을 촉진하는 협동과 숙의의 자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시민들을 그저 무식하기만 한 존재로 보고, 시민들은 전문가들을 우월한 지식에서 나오는 힘을 주장하기만 하는 엘리트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포럼은 서로 적대적으로 보는 이런 경향을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이런 환경에서 전문가로서 움직이는 사람들은 단지 일반인 청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견해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식을 일반인 청중이 어떤 문제에 관해 자신의 결론에 도달하는 데 쓰일 수 있도록 만든다.

 

우리가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를 경험하면서 배우는 교훈은, 이것을 우리의 거버넌스 과정의 더 공식적이고 영속적인 부분으로 확대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할 가치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반인들이 유리되어 있거나 무관심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은 결코 현실화될 수 없다는 식의 주장은 경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정치 제도를 상향식으로 바꾸고자 한다면 이렇게 일반인들을 권력의 중심부에 위치시키는 것이 핵심적이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경제와 대의제는 우리를 분할하고 서로 싸우게 만들기 위해 온갖 짓을 하고 있다. 시민의회는 이런 분할을 넘어서 한데 모이기 위한 것이다. 임의선출은 기본 개념상 매우 직접적인 것이며, 그것을 가령 호주 상원에 다른 힘들을 그냥 둔 채로 도입하여 선거를 대체하는 것은 적어도 행정적으로는 극히 미미한 변화만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모든 다른 수준에서는 그 잠재적 효과가 폭발적이다. 정당들과 그 많은 로비스트들의 힘이 일거에 삭감될 것이다. 미디어가 정치를 취재하는 방식도 변형될 것이다. 입법과정의 적어도 일부에 대한 통제력이 인구 전체를 진정으로 대표하는 사람들에게 쥐어질 것이다. 현재의 체제에서는 바랄 수도 없는 방식으로 민중에게 힘이 부여될 것이며 우리의 정치 제도가 공통적인 삶과 다시 연결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적 힘의 주된 원천이 사회 전체를 진정으로 대표하는 사람들로 채워지기 전에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선거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머리에 못이 박히게 배웠지만 이는 완전히 틀렸다. 배운 것을 빨리 토해낼수록 더 좋다. 진정으로 대표적인,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정부’를 원하면 그 정부를 선거가 아니라 임의선출을 통해 구성해야한다.




P2P 시대의 개방형 협동주의


  • 저자  :  Michel Bauwens
  • 원문 : “Open Cooperativism for the P2P Age (2014.06.16) / Attribution-ShareAlike 3.0 Unported
  • 분류 : 번역
  • 옮긴이 : 정백수
  • 설명 : 4년 전의 글이라서 더 정밀해졌을 현재의 바우엔스에는 못 미칠 수 있지만 협동조합이 나아갈 기본적 방향을 P2P 관점에서 잘 제시하고 있다고 판단되어 옮겨서 소개한다.

 

오래 버텨온 협동조합 기업들 가운데 일부가 실패하는 중인데도 협동조합 운동과 협동조합 기업들은 부활을 맞고 있는 중이다. 이 부활은 협동조합의 흥망성쇠의 한 국면인데, 이 흥망성쇠는 주류 자본주의 경제의 흥망성쇠와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다. 2008년도의 금융위기 같은 체제 차원의 위기 이후에 많은 사람들은 대안들을 찾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옛 모형들을 찾아서 부활시키는 식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가능성들과 요건들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디지털 네트워크들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어포던스들(affordance)((어포던스란 주체가 특정의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객체가 ‘제공’하는 관계를 가리킨다― 옮긴이))을 고려해야 한다.

‘P2P’ 관점에서 몇 가지 생각을 제시해본다. P2P재단의 맥락에서 발전시켜온 것들이다.

첫째, 옛 협동조합 모형들의 비판에서 시작해보자.

협동조합들이 임금에 의존하고 내적인 위계에 기반을 두는 자본주의 기업들보다 더 민주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에서 움직이는 협동조합들은 경쟁적 태도를 점점 더 가지게 되며 그렇지 않더라도 공동선이 아니라 회원들만을 위해서 움직인다.

둘째, 협동조합들은 일반적으로 커먼즈(공통재)를 창출하거나 보호하지 않는다. 영리 기업들처럼 특허와 저작권을 따가지고 커먼즈를 종획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 일쑤다.

셋째, 협동조합들은 회원 자격을 지역 혹은 일국에 국한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전지구적 무대는 영리를 추구하는 다국적 기업들이 지배하도록 열어놓는다.

이러한 특징들은 바뀌어야 하고 또 오늘날 바뀔 수 있다.

 

우리의 제안은 다음과 같다.

1. 영리 기업들과 달리 새로운 협동조합들은 공동선을 위해 움직여야 한다. 이는 협동조합들의 정관과 거버넌스 문서에 포함되어야 하는 요건이다. 이는 협동조합들이 영리를 추구할 수는 없음을, 사회적 이익을 위해 움직여야 함을 의미하며, 이것이 그 정관에 기입되어야 한다. 북부 이탈리아나 퀘벡 같은 지역들에서 사회적 돌봄과 관련하여 이미 활동 중인 연대 협동조합들(solidarity cooperatives)은 올바른 방향으로 내딛는 중요한 발걸음에 해당한다. 현재의 자본주의 시장 모형에서 사회적·환경적 외부성(externalities)((여기서 ‘외부성’은 기업이 기업 외부 즉 사회와 환경에 끼치는 영향을 가리킨다―옮긴이))은 무시되고 외부에 있는 국가가 가하는 규제에 맡겨진다. 새로운 협동조합 시장 모델에서는 외부성이 정관에 통합되며 법적 의무가 된다.

2. 단일한 계층의 이해관계자들에서 회원을 끌어오는 협동조합들과 달리 새로운 협동조합들은 모든 이해관계자들을 운영에 포함시켜야 한다. 협동조합들은 다중 이해관계자들(multi-stakeholders)의 거버넌스에 맡겨져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현재의 회원제가 다른 유형의 회원제를 포함하도록 확대되어야 하거나 현재의 회원제 모형에 대한 대안― 가령 새로 제안된 페어셰어즈(FairShares) 모형―을 찾아야 함을 의미한다.

3. 사실 우리 시대의 결정적 혁신은, 협동조합이 커먼즈를 (공동으로) 생산하는 것이다. 이 커먼즈는 두 유형이 있다.

a. 첫째 유형은 비물질적 커먼즈이다. 열려있고 공유 가능한 라이선스를 사용하여 전지구적 인류 공동체가 협동적 혁신을 구축하고 다시 그것을 풍요롭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P2P재단에서는 커먼즈 기반 상호성 라이선스(Commons-Based Reciprocity Licenses) 개념을 도입했다. 이 라이선스는 윤리적 기업 및 협동조합 기업이 공동으로 산출하는 커먼즈를 중심으로 윤리적 기업 및 협동조합 기업의 연합을 창출하도록 설계되어있다. 이런 라이선스의 핵심 규칙은 이렇다 : ① 커먼즈를 비상업적 사용에 열어놓는다 ② 커먼즈를 공동선을 추구하는 단체들에 열어놓는다 ③ 커먼즈를 커먼즈에 기여하는 영리 기업들에 열어놓는다. 여기서 예외 조항은, 커먼즈에 기여하지 않는 영리 회사들은 라이선스의 사용료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 주된 목적이 소득을 생성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시장 경제에 상호성 개념을 도입하기 위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윤리적 경제, 비자본주의적 시장 동학을 창출하는 것이 목적이다.

b. 둘째 유형은 물질적 커먼즈의 창출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예를 들어 장비를 제조하는 데 기금을 댈 커먼즈의 창출이다. 클라이너(Dmytri Kleiner)의 제안을 따라서, 협동조합들이 증권을 발행하고 여기에 모든 조합원들(체계 내에 있는 모든 협동조합의 조합원들)이 기여하여 제조를 위한 커먼즈 기금을 창출할 수 있다. 기금을 구하는 협동조합은 조건 없이 기계를 얻을 수 있지만, 협동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소유자가 될 것이며, 이런 식으로 기금에 의해 생성된 소득으로 점차적으로 기본 소득을 구축하게 될 것이다.

4. 마지막으로 우리는 전지구적인 사회·경제적 힘의 문제와 씨름해야 한다. 초국적인 인도전자 협동조합(Sociedad Cooperativa de las Indias Electrónicas)의 선도적 사례를 따라서 우리는 전지구적 부족(풀레, phyle)의 창출을 제안한다. 부족이란 커먼즈와 기여자들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전지구적 사업 생태계를 말한다. 부족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움직인다. 개방형 농업기계들(혹은 다른 생산물이나 서비스)을 설계하는 전지구적인 오픈디자인 공동체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이 기계들은 욕구가 있는 곳 가까이 존재하는, 일련의 개방되어있고 분산된 미시공장들(microfactories)에서 효율적으로 제조되고 생산된다. 그런데 이 모든 미시적 협동조합들이 고립된 방식으로 존재하면서 ‘비물질적 생산에 초점을 두는’ 전지구적인 오픈디자인 공동체를 통해서만 연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은 미시공장들을 통합하는 전지구적 협동조합을 통해서도 서로 연결될 것이다. 그런 전지구적 부족들의 결합이 새로운 형태의 전지구적인 사회·정치적 힘― 전지구적인 윤리적 경제를 대표하는 힘―의 씨앗이 될 것이다. 윤리적 기업가 연합과 부족들은 개방형 회계와 열린 공급망 제도를 향해 나아감으로써 자본주의적 시장 이후의 시장(post-market)에서 물리적 생산의 조정에 관여할 수 있다.

요약하면, 전통적인 협동조합들이 인류의 역사에서 중요한 진보적인 역할을 해왔지만 그 형태는 네트워크 시대에 맞추어 P2P와 커먼즈 생산의 측면을 도입함으로써 업데이트되어야 한다.

 

새 시대의 개방형 협동주의에 대해 우리가 권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협동조합들은 정관의 차원에서 (내적으로) 공동선을 지향해야 한다.

2. 협동조합들은 모든 이해관계자들을 포함하는 거버넌스 모형을 가져야 한다.

3. 협동조합들은 비물질적·물질적 커먼즈를 공동으로 산출해야 한다.

4. 협동조합들은 비록 지역에서 생산활동을 하더라도 그 사회적·정치적 조직화는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멕시코시티 : 변형의 씨앗들



 

2018년 6월 말에 나는 <도시랩>(Laboratorio Para La Ciudad, City Lab)을 통해 미래연구와 관련된 여러 가지 과제로 시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멕시코시티(CDMX)에서 1주일을 보냈다.

가브리엘라 고메즈-몬트(Gabriella Gómez-Mont)가 설립해 지금도 운영하고 있는 <도시랩>은 시장에게 업무보고를 하는 멕시코시티 정부의 실험적인 부서/창조적인 싱크탱크이다. <도시랩>은 도시개발을 위한 기술과 전략 면에서 매우 혁신적이다.

<도시랩>은 도시의 모든 것에 대해 성찰하고 서반구에 위치한 가장 큰 메갈로폴리스에 어울리는 사회적 대본(social scripts) 및 도시로서의 미래를 연구하는 곳으로 도시의 창조성, 이동성, 거버넌스, 씨빅 테크(civic tech, 시민을 위한 기술), 공적 공간 등과 같은 다양한 영역에 걸쳐서 연구하고 있다. 또한 <도시랩>은 다학제간 협동을 수용하기 위해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고 있으며, 이 실험을 실행할 때 정치적•공적인 상상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시민사회와 정부 간의 연결고리를 창출하려고 하고 있다.(([옮긴이] http://directorsfellows.media.mit.edu/fellow-profiles/gabriella-gomez-mont/))

나는 1주일 동안 <도시랩>의 <오픈시티> 팀인 란다(Gabriela Rios Landa), 델가도(Valentina Delgado), 무뇨스까노(Bernardo Rivera Muñozcano) 그리고 메이(Nicole Mey)와 함께 작업했다. 그들이 하는 일, 헌신 및 창조성에 굉장히 감동을 받고 돌아왔다. 내가 요청받은 일은 매우 다양했으며 내가 전문으로 하는 다음과 같은 일과 관련되어 있었다.

1. ‘열린 도시로서의 멕시코시티’라는 비전을 개발하기 위해 연구소 사람들 및 주요 이해관계자들과 함께 비전만들기 워크숍을 운영하기. 이것은 포괄적이고 참여적인 방식으로 도시개발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2. ‘설계를 민주화하기’에 관하여 강연하기. 이 강연에서 나는 P2P 재단의 관점으로 설계와 코스모지역화(cosmo-localization)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혁명들’을 논의했다.

3. 멕시코시티의 인공지능에 적용하기 위한 예측 거버넌스 전략을 개발하는 설계 세션을 운영하기

4. 또한 나는 커먼즈로서 도시와 공동-거버넌스, 비전 매핑 및 예측실험/브리지 방법에 관하여 <오픈 시티> 팀을 대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대단한 한 주였다!

 

비전만들기

비전만들기 워크숍과 관련해서, 우리는 ‘비전 사이클’(vision cycles)이라 불리는 기술을 사용해서 워크숍을 시작했다. 이 기술은 발전의 토대가 된 이전의 비전들(‘사용된 미래들’로 간주될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현재의 비전과 그 효과들 그리고 새로 출현하고 있는, 미래를 위한 모든 아이디어들을 발견하는 방식으로 어떤 쟁점의 역사를 맵핑한다. 비전 사이클을 사용한 이후에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미래도시를 그려보는 데 도움이 되는 짧은 시각화 과정을 진행했다. 다음으로 우리는 소헤일 인나야툴라(Sohail Inayatullah)가 처음 개발한 통합적인 비전만들기 방법을 사용하여 선호되는 미래와 버려진 미래를 보고나서 그 다음에 통합된 미래를 개발했다.

세션에서 도출된 한 가지 통찰은 도시에는 많은 자아들이 있다는 것이며 무엇이 도시의 지배적인 자아들이고 어떤 자아들이 버림받았는지를 따져 물어 볼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자아가 버림을 받고 표현할 길이 없을 때 자아의 행위는 침식적이고 파열적이며 선동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도시의 지배적인 자아와 버림받은 자아 사이의 모순들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갈등이 뒤따를 수 있다. 통합적인 비전 제시 방법은 도시의 지배적인 자아와 버려진 자아의 통합이 어떻게 더 전체론적이거나 더 현명한 개발을 낳을 수 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한다.

 

예측 거버넌스

인공지능 같은 쟁점의 경우, 그것이 사회에 미치는 잠재적인 영향은 크게 불확실할 뿐만 아니라 인공지능이 경계가 확연한 여러 영역들(기계 학습•신경망•알고리즘•로봇•자동화 등)을 가로지르기 때문에 정의상의 모호성이 존재하며, 쟁점의 속도도 가속화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도시랩>은 이 다면적인 쟁점이 관리되고 통제되는 방법에 대한 일단의 정책들을 개발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와 관련해서 그들은 나에게 인나야툴라의 다층적 요인 분석(Causal Layered Analysis, CLA) 방법을 적용하고 나서 그 다음으로 (인공지능에 적합한 예측 거버넌스 틀을 만들 수 있는 구성요소를 제공하기 위해 내가 개발한) 예측 거버넌스 설계 틀(Anticipatory Governance Design Framework)을 사용해달라고 요청했다. 워크숍은 말할 필요도 없이 풍성했는데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이끌어 가는 몇몇 핵심 전제, 세계관 및 태도, 그리고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힘을 부여하는 길을 제공하는 새로운 신화 및 비유를 탐구했다.

 

발표들

이것 말고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몇 가지 주제에 대해 발표했다.

커먼즈로서의 도시와 공동-거버넌스. 이것은 발표라기보다 대화였고 솔직히 말하면 내가 그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내가 훨씬 더 많이 배웠다. 이 대화는 내가 가장 크게 배운 사례들 가운데 하나였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도시 커먼즈에 관한 크리스티안 이아이오네(Christian Iaione)와 셰일라 포스터(Sheila Foster) 등의 연구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도시 커먼즈 관점을 인정하긴 하지만, 그 관점이 볼로냐/바르셀로나/헨트(유럽에서 정치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는 인구가 사는 중소도시들)의 맥락에서 멕시코시티(부자들/권한을 가진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소외된 사람들로 계층이 크게 나뉜 2천4백만 명의 사람들)의 맥락으로 옮겨질 가능성에는 의문을 가졌다. 그들은 또한 단일한/획일적인 도시 비전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멕시코시티의 정신이 획일적인 방안을 거부한다고 느꼈고 헤테로토피아적 미래들(heterotopic futures), 즉 도시 내부에 있는 복수(複數)의 미래들을 위하여 어떤 기회들이 어디에 존재할지를 궁금해 했다. 무수히 많은 집단들, 콜로니아 지역들(colonias),(([옮긴이] 콜로니아(colonia)는 멕시코-미국 국경 지역을 따라 위치해 있는, 미국에도 멕시코에도 속하지 않은 저소득 주택지역이다. [위키피디아])) 공간들로 이루어진 도시로서 멕시코시티는 공간적 다양성과 함께 시간적 다양성도 나타내는데, 이곳에서 콜롬비아 이전 문명은 콜롬비아 이후의 것 그리고 전지구적/신자유주의적인 것과 중첩되고 맞물려 있다. 그래서 멕시코시티는 선형의 시간에 기반을 둔 단일 문화를 거부한다. 미래는 근대주의적인 용어들로 틀지어질 수 없으며 여러 비전들의 생태계를 필요로 한다.

이 비전들의 생태계와 긴밀히 연결되는 것은 다소 유행에 따르는 스마트/디지털 도시 전략의 개시에 대한 우려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 전략이 도시를 개방적•참여적으로 만들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멕시코시티 같은 장소에서 이미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힘을 더해주는 역효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했다. 진정으로 ‘열린 도시’는 핵심적인 불평등이 다루어지는 도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대화에서 분명해졌다. 생존경쟁을 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생활임금보다 적은 돈을 벌기 위해 힘들게 일해야 하는 한 도시를 결코 ‘열린’ 것으로 경험하지 못할 것이며 도시에서 교외는 교외 분리 정책에 의거하여 부유층의 주거지로서 거의 제도화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멕시코시티가 그 정치적 구성에 대한 역사적인 크라우드소싱(CDMX’s historic crowdsourcing of their constitution)을 한 것은 중요한 선례가 되었고 거기서 보편적인 기본소득이 제기되었다(하지만 아무래도 입법과정을 통과할 수는 없을 듯하다).

내재된 커먼즈-거버넌스의 핵심 원리 ―이를 미셸 바우엔스(Michel Bauwens)와 함께 한 논문에서 최근에 발전시킨 바 있다―도 발표했는데 나는 삶의 모든 측면의 민주화에 대해 단순하지만 근본적인 영향이 이 원리에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출판 전의 것은 여기서 볼 수 있다).

‘공통 관심사’라는 이 생각은 커먼즈와 커머너의 범위를 확대하는 데 기여한다. 지구의 생명유지 체계의 경우, 커먼즈로서 이 체계가 가지고 있는 가치는 맥락 전환에 의해 활성화되어야 비로소 이 체계가 공동체에 가치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 함축되어 있다. 기후변화 같은 기본적인 쟁점과 관련해서 개인들이 각성하는 바는, 우리 모두가 관심사의 커먼즈(commons of concern)로서 70억의 다른 인간들(및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종들)과 대기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환경에 일어난 일을 통해 우리 각자는 21세기의 이 공유된 관심사에 관여하게 되었다. 지구의 대기는 함축된 커먼즈에서 명시적인 커먼즈로 바뀌었다. 우리의 대기가 모두에게 생존문제가 되었고 갑자기 사람들은, 행동에 뒤따르는 책임감을 갖고서 자신들이 어떻게 이 공유된 관심사에 얽혀있는지를 보는 만큼은 커머너들이 되었다. 이것은 지구 거버넌스의 근본적인 민주화를 암시한다.

내재된 커먼즈-거버넌스의 이런 원리가 그들에게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우리는 이것을 멕시코시티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장시간 토론했다.

비전 매핑과 예측 실험/브리지 방법. 나는 또한 비전 매핑—오픈스트리트맵(OSM)과 지도 인터페이스에 기반을 두고 있는 온라인상에서 편집 가능한 매핑과 비전만들기 과정을 결합시킨 것—에 관한 나의 연구도 발표했다. 연구소의 어떤 팀은 오픈스트리트맵을 이미 어떤 프로젝트에 사용하고 있었으며, 도시 지리와 상상계를 맵핑하기 위해 참여에 기반을 둔 방법을 활용하는 경우와 상당히 겹쳤다. 또한 나는 예측 실험/브리지 방법에 대해 발표했는데, 이 방법은 연구소에서 이루어지는 전반적인 접근법과 매우 일치했다. 이것은 명시적으로 이 연구소가 멕시코시티의 도시 미래를 위하여 새로운 길을 계획하는 과업을 맡은 시 정부 소속의 실험적인 부서이기 때문이다.

 

코스모지역화

나는 코워킹스페이스(coworking space, 개방형 사무실)인 ‘위워크’(wework)에서 코스모지역화에 대해 발표했다. <펩시티 멕시코시티>(FabCity CDMX)와 <미래학>(Futurologi)이 행사를 주관했으며 나는 이 행사에서 벨라스께스(Oscar Velasquez)와 또바르(Inga Tovar)를 만나게 되었다. 대략 50~60명의 사람들과 어울려 형편없는 내 스페인어와 완벽한 스페인식 영어를 자랑할 기회를 가졌다. 내가 P2P 재단에서 동료들과 함께 발전시켜 오고 있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코스모지역화를 “지역화된 생산을 할 수 있는 하이텍 및 로우텍 능력을 공히 갖추고 있는, 전지구적으로 분산되어 있는 ‘지식 및 설계’ 커먼즈들을 한데 모으는 과정”으로 설명했다.

코스모지역화는 세계시민주의에서 끌어 낸 윤리적 전제–좀 더 효율적으로 생계를 창출하고 지역 환경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해주는 인간 지혜의 유산이 사람들과 공동체에 의해 보편적으로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과, 지역 생산 및 혁신이 서로 지구 커먼즈의 웰빙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것—에 기초합니다.

나는 인류세(anthropocene) 맥락에서 심층적인 상호화라는 주제에 대해 말했다. 슬라이드는 여기 참조. 오디오는 여기 참조.

그 주 후반에 나는 또바르와 팟캐스트를 했는데 여기서 우리는 <쎈뜨로 유니>(Centro Uni)와 <미래학> 간의 협업인 코스모지역화 즉 ‘설계는 전지구적으로, 제조는 지역에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해당 주제에 관하여 한층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는 식의 팟캐스트였으며 오로지 스페인식 영어로만 진행했다(나는 청중들을 위해 스페인어로 말하려고 했으나 자꾸 영어로 되돌아가서 또바르에게 통역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오디오는 여기 참조.

 

인상과 회상

전반적으로 말해서 나는 멕시코시티 전체에 매우 깊은 감명을 받고 돌아왔다. 멕시코시티는 많은 사회적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정치적 구성을 크라우드소싱하는 것에서부터 (이런 종류로는 아마 지금까지 최대 규모의 실험일 것이다) LGBT 친화적인 최초의 라틴아메리카 지역이 된 것, 보편적인 기본소득 창출을 시도하는 것, 그리고 물론 <도시랩>의 연구에 이르기까지 지성과 진보적 정치의 오아시스이다. 나는 이 도시가 부활과 잠재적인 변형으로 나아가는 변곡점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생존을 위해 매일매일 투쟁하는 대부분 사람들, 즉 도시에 사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내가 희망하는 것이기도 하다.

멕시코시티의 경우, 커먼즈 거버넌스와 코스모지역화의 전망은 멕시코시티의 가난한 사람들이 여러 수준에서 주변화되지 않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이 사실상 그 관건이다. 공동-거버넌스와 도시 커먼즈의 측면에서 보면, 멕시코시티의 개발에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자신들이 사는 도시에 대해 결정을 내릴 능력과 도구를 부여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은 원칙에 해당한다. 코스모지역화의 측면에서 원칙은 사업을 하는 모든 공동체가 자신들의 웰빙과 생계를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을 생산할 수 있도록 그 잠재력을 해방시켜주는 것이다.

내가 멕시코시티와의 작업에 관심을 가진 것은 가족사에서 연원한다. 어머니는 콜로니아 지역인 로마(Roma)에서 태어나서 외할머니와 이모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첫 12년 동안을 그곳에서 보냈다.

나는 멕시코시티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했다. 모두가 아름다운 이야기들은 아니었다. 어머니와 그녀의 가족에게 삶은 힘겨웠고 그들은 아주 아주 가난했으며 생존을 위해 밤낮 없이 싸워야 했다. 이것은 내 정체성에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멕시코시티를 위해 외국에서 자문하러 온 미래학자라는 상대적인 특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극심한 빈민층 출신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것을, 그래서 다른 면에서 보면 내가 ‘하층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머니와 그녀의 가족에게 ‘출세’란 멕시코시티 중심부에서 부자들을 위해 하녀로 일하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가 불평등과 가난의 흔적으로부터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도시의 전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어떤 것을 다루어야 할 것처럼 느껴진다. 모두가 번성할 도시의 미래에는 버려진 사람들도 통합되어야 한다.

 




긱 경제에 저항하기: 협동형 음식배달 플랫폼의 출현



 

영국의 노동 가구 중에서 7백만 명의 사람들은 빈곤하며 실질 임금은 지난 10년 동안 10.4%가 하락했다(유럽의 다른 어떤 곳보다 더 하락했다). 그런데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1,000명의 사람들은 브렉시트 이후 수십억씩 돈을 더 벌었다.

플랫폼 기업들이 빈곤임금(poverty wage)을 지불함으로써 빈부 격차를 벌리는 데 일조하고 있고 부당하게 높은 자산 가격과 낮은 생산성으로 거품을 산출하고 있다. 영국에서 다섯 번째 부자인 알리셰르 우시마노프(Alisher Usmanov)는 처음에 철강과 철광석으로 돈을 벌었지만 지금은 <스포티파이>(Spotify,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와 <에어비앤비> 같은 회사에 투자함으로써 재산을 늘린다. <딜리버루>(Deliveroo, 영국의 온라인 음식배달 회사)는 자체 식당을 소유하지도 않고 배달원을 고용하지도 않지만 영국에서 두 번째로 큰 푸드 체인점인 <웨더스푼>(Wetherspoon) 이상의 가치가 있다.

2017년에 <딜리버루>의 회사 손실액은 300% 이상 증가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회사 창업주는 450만 파운드를 이사들에게 주식보너스로 지급하고 자신의 봉급도 넉넉하게 22.5% 인상했다. 이와 달리 <딜리버루>의 배달원들은 최저임금, 병가 및 공휴일 추가근무수당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주식 소유권에서 오는 이윤이 소수에게로 가고 임금은 정체되는 상황에서, 노동자와 자본 소유주들 간의 빈부 격차는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 이제 소득의 공정한 몫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소유권의 공정한 분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때인데, 이 후자의 문제에서 주도적인 사례가 될 수 있는 것이 협동형 음식배달 플랫폼이다.

 

유럽의 배달원들

2016년에 일어난 영국 <딜리버루> 배달원들의 첫 번째 파업 이후 그 물결이 프랑스, 스페인과 독일, 이탈리아, 벨기에와 네덜란드로 퍼졌으며, 바로 2주전(([옮긴이] 이 글의 게재 날짜가 2018년 3월 22일이므로 3월 초에 해당한다.))에는 볼로냐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독일에서 배달원들은 작년에 무정부주의적-생디칼리슴적인 <자유노동자연합>(Free Workers Union, FAU)과 함께 조직화를 시작했다.

FAU는 ‘배달연합’(Deliverunion) 캠페인의 활성화에 기여할 수평적인 열린 공간으로서 기능했으며 직접행동에 100명이 넘는 배달원들을 모으고 킬로미터 당 보너스급여를 쟁취했다. 유급 간부나 조직자들이 없는 상태이므로 초등학교 교사들 및 간병인들 같은 다른 부문의 구성원들이 지원을 해 주었는데, 이는 노동조합이 자체적으로 행동하거나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그들의 이름과 그들의 자원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FAU는 그 나름의 온라인 플랫폼을 창출하기 위해 일단의 개발자들을 끌어 모았는데 배달원들은 이 플랫폼에 접속해서 그들의 단체협약에 포함시킬 내용을 토론하고 그와 관련된 투표를 할 수 있다. 플랫폼이라는 도구로 인해 배달원들은 노동조합 모임에 물리적으로 참석하지 않고도 요구 사항을 표현하고 결정을 내리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이 도구는 또한 인원을 모아서 파업에 관한 투표를 하고 노동자 전체에게 메시지를 재빨리 퍼뜨릴 수 있게 해준다. 디지털 플랫폼이 고객의 요구가 있을 때 즉시 고객을 배달원과 연결시킬 수 있다는 것은 이 플랫폼들이 ‘파편화된’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촉진하는 데 훌륭하게 사용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협동형 디지털 플랫폼들의 잠재력

조직화된 배달원들 사이에 이러한 협력적인 문화를 조성하는 것이 그들 나름의 음식배달 플랫폼을 공동 개발할 수 있는 첫 걸음이다. 이것이 P2P재단에게서 사용 허가를 받고 앱 개발자들과 앱을 사용하고자 하는 모든 배달원이 협력하여 관리하는 오픈소스 음식배달 앱인 ‘coopcycle.org’에 깔려 있는 생각이다. 유럽 전역에서 모인 음식배달원들로 구성된 포럼에서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이 앱을 실행할 계획을 세우고 있고 스페인의 배달원들은 바르셀로나에서 그들 나름의 협동형 버전의 <딜리버루> 앱을 만들어 내놓기 직전이다.

회사의 이익이 회사를 실제로 ‘이끌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돌아가게 하고 노동자들이 더 나은 근로조건, 안전한 계약, 병가 중 급여, 그리고 무엇보다 존중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공동으로 소유되는 이 배달 플랫폼들은 <푸도라>(Foodora), <딜리버루>, <우버 잇츠>(Uber Eats) 등에 대한 의미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 공동소유권은 이익을 나누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민주적인 거버넌스와 책무는 물론 노동자들의 데이터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의 투명성 및 배달원들의 일상 업무를 지시하는 알고리즘 기능의 투명성을 의미할 것이다.

협동형 사업은 또한 경쟁력 있는 가격을 제시할 수 있다. <딜리버루>가 각 주문에 대해 터무니없이 높은 30% 수수료를 레스토랑에 청구하는 반면에 협동형 모형에서는 일단 핵심비용이 충당되면 이 요금을 줄일 수 있다. 예를 들어 협동형 모형에서는 주문이 15파운드를 초과하기만 하면 배달원의 임금과 다른 지출을 부담할 정도가 되고 이는 그 액수를 넘어서는 주문들은 더 저렴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협동적으로 운영되는 이들 음식배달 플랫폼들은 실리콘밸리와는 다른 비전—소수의 부자들에게 단기간의 투기 이익을 내줄 벤처 자금을 끌어들이려는 집착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제시할 것이다. 플랫폼 경제가 곧 사라질 리는 없을 터이며 독점적인 디지털 플랫폼들은 노동자들의 몫을 더 한층 줄일 것이다. 하지만 스페인•프랑스•독일에서 출현하는 사례들은 긱 사업체 고용주들에게 반격을 가하고 배달 플랫폼 활동의 미래에 희망의 빛을 제공하기 위해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의 힘이 어떻게 연합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블록체인 경제 : 초보자를 위한 제도적 크립토경제 안내


  • 저자  :  Chris Berg, Sinclair Davidson, Jason Potts(([정리자] 저자들은 블록체인 테크놀로지가 사회, 경제, 정치, 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세계 최초의 사회과학연구센터인 RMIT Blockchain Innovation Hub에 속해 있다.))
  • 원문 : “The Blockchain Economy: A beginner’s guide to institutional cryptoeconomics (2017.09.27)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블록체인의 중요성에 대한 대부분의 설명이 비트코인과 화폐의 역사에서 시작하는데 화폐는 블록체인의 최초의 사용사례일 뿐이며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될 가능성은 낮다. 블록체인은 무엇보다 탈중심화된, 분산된, 디지털 형태의 원장이다. 회계와 연관된 원장이 혁명적 테크놀로지로 서술되는 것은 희한한 일일 수 있지만, 블록체인이 중요한 것은 원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늘 원장이 중심이다

규칙들에 의해 구조화된 데이터로 단순하게 구성되는 원장은 회계거래 기록 이상의 일을 한다. 우리는 사실에 관한 합의가 필요할 때마다 원장을 사용한다. 원장이 근대 경제를 뒷받침하는 사실들을 기록한다.

원장은 소유권을 확인해준다. 쏘토(Hernando de Soto)((Hernandde Sotto, The Mystery of Capital: Why Capitalism Triumphs in the West and Fails Everywhere Else, Basic Books, 2007.))는 가난한 사람들이 원장에서 확인되지 않은 재산을 소유할 때 어떻게 고생하는지를 서술했다. 회사(firm)는 단일한 목적을 가진, 소유권·고용·생산관계의 네트워크로서 하나의 원장이다.

원장은 신분을 확인해준다. 사업체들은 정부 원장에 등록된 신분이 있어서 그 존재와 조세법 아래에서의 지위가 추적될 수 있다. 탄생·사망·결혼의 등록이 개인들의 삶의 주요한 순간들을 기록하며 이 정보를 신분을 확인하는 데 사용한다.

원장은 지위를 확인해준다. 시민권은 누가 국민으로서 권리를 가지고 있고 의무를 지는지를 기록하는 원장이다. 선거인명부도 투표권을 부여하는 (혹은 의무화하는) 원장이다. 고용도 고용된 사람들에게이 노동의 보수에 대한 청구권을 부여하는 원장이다.

원장은 권위를 확인해준다. 원장은 누가 국회의원석에 앉을 수 있고 누가 은행계좌에 접근할 수 있으며 누가 아이들과 함께 일할 수 있고 누가 제한구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확인해준다.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원장들은 경제적·사회적 관계들을 맵핑한다.

사실에 관한 합의, 즉 무엇이 원장에 있는지에 대한 합의와 원장이 정확하다는 믿음은 시장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토대들 가운데 하나이다.

소유, 점유, 원장

결정적이지만 놓치기 쉬운 것이 소유(ownership)와 점유(possession)의 구분이다. 점유는 소유를 함축하지만 소유 자체는 아니다. 여권의 예를 들면, 디지털 이전의 세계에서 여행자가 소지한(점유한) 여권은 그의 여행할 권리의 소유가 원장에 등록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요즘의 여권은 당국이 소유를 직접 확인하도록 해준다. 관련 당국이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서 어떤 여행객이 여행의 자유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비트코인이 보여주었듯이 화폐도 원장이다.

은행권이라는 토큰의 점유는 곧 소유를 의미한다. 19세기에 은행권의 소지자는 그 은행권이 나타내는 가치를 인출할 권리가 있었다. 은행권들은 그것을 발행한 은행에게 직접적 채무였으며 은행 원장에 기록되어 있었다. 점유가 곧 소유를 가리키는 체제는 은행권들이 절도되거나 위조될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 시대의 법정 통화는 중앙은행에서 금으로 교환받을 수 없다. 그러나 그 관계는 남아있어서, 지폐의 가치는 통화의 안정성과 그것을 발행한 정부의 안정성에 대한 합의에 의존한다. 은행권들은 부가 아니다. 지폐는 원장에 있는 관계에 대한 요구이며 그 관계가 붕괴하면 지폐의 가치도 붕괴한다. 짐바브웨, 유고슬라비아,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례를 보라.

원장의 진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원장 테크놀로지는 지금까지 별로 변화를 겪지 않았다. 원장은 문자 소통의 여명기에 등장한다. 원장과 글쓰기는 고대 근동(近東)에서 생산·교역·부채를 기록하기 위해서 동시에 발전했다. 설형문자를 넣어 구운 진흙판이 식량, 세금, 노동자들 등의 단위를 세세히 기록했다. 분산된 원장처럼 기능하는 동맹들의 구조화된 네트워크를 통해 최초의 국제적 공동체가 마련되었다.

14세기에 복식부기(double entry bookkeeping)의 발명과 함께 원장에 최초의 주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복식부기는 차변과 대변을 모두 기록함으로써 다수의 (분산된) 원장들을 가로질러 데이터를 보존했고 원장들 사이의 정보의 조정을 허용했다.

원장 테크놀로지의 다음 단계는 19세기 대기업들과 거대 관료제의 발생과 함께 이루어졌다. 이 중앙집중화된 원장들이 조직의 규모와 범위의 극적인 증가를 가능하게 했으나 중앙집중화된 기관들에 대한 신뢰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20세기 후반에 원장은 아날로그 형태에서 디지털 형태로 이동했다. 호주의 여권은 1970년대에 디지털화되었으며 중앙집중화되었다. 전산 가능하며 검색 가능한 데이터베이스가 더 복잡한 분산, 계산, 분석 및 추적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데이터베이스 역시 여전히 신뢰에 의존한다. 디지털화된 원장은 그것을 유지하는 조직의 신뢰 가능성만큼만 신뢰 가능하다. 블록체인이 해결한 것을 바로 이 문제이다. 블록체인은 원장을 유지하고 확증하는 신뢰받는 권위 있는 중앙에 의존하지 않는 분산된 원장이다.

블록체인과 자본주의의 경제적 기관들

근대 자본주의의 경제적 구조는 원장들에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발전했다.

2009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윌리엄슨(Oliver Williamson)은, 사람들이 시장, 회사 혹은 정부들에서 해당 조직의 상대적 거래비용에 의거하여 생산하고 교환한다고 주장했다. 윌리엄슨의 거래비용 접근법은 어떤 기관이 원장을 관리하고 왜 그러는지를 이해하는 데 열쇠를 제공한다.

정부들은 권위·특권·책임·접근의 원장들을 유지한다. 정부들은 시민권, 여행의 자유, 납세의무, 사회안전권, 재산소유의 데이터베이스를 유지하는 신뢰받는 주체이다. 원장이 시행되기 위해서 강압이 요구되는 경우 정부가 필요하다.

회사들 또한 원장들을 유지한다. 고용과 책임, 물리적 자본과 인간 자본의 소유와 배치, 공급자들과 고객들, 지적 재산과 기업 특권을 기록하는 사유화된 원장들이다. 회사는 종종 ‘계약들의 연계’라고 불린다. 그러나 회사의 가치는 그 연계가 질서와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나온다. 회사는 사실상 계약과 자본의 원장이다.

회사 및 정부들은 자신들의 업무를 더 효율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데 블록체인을 사용할 수 있다. 다국적 회사들 그리고 회사들의 네트워크들은 거래를 전지구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으며 블록체인이 이를 거의 즉각적으로 가능하게 한다. 정부들은 블록체인의 변경 불가능성을 사용해서 재산권이나 신분기록의 정확성과 조작 불가능성을 보장할 수 있다. 블록체인 응용프로그램들을 바탕으로 잘 설계된 허가 규칙들은 시민들과 소비자들에게 자신들의 데이터에 대한 더 많은 통제력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블록체인은 또한 회사들 및 정부들과 경쟁하는 위치에 있는 제도 차원의 테크놀로지이다. 그래서 블록체인은 회사들을 대체할 수도 있다. 계약과 자본의 원장은 이전에 없던 방식으로 탈중심화되고 분산될 수 있다. 신분, 허가, 특권, 권리의 원장들이 정부의 지원 없이 시행될 수 있는 것이다.

제도적 크립토경제학

제도적 크립토경제학(institutional cryptoeconomics)은 암호기술에 의해 안전해지고 신뢰와 무관해진 원장들이 제도의 차원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한다. 고전주의 및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은 경제학의 목적이 희소한 자원의 생산과 분배를 연구하고 그 생산과 분배를 받쳐주는 요인들을 연구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제도적 경제학은 경제를 규칙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규칙들(법, 언어, 재산권, 규제, 사회적 규범, 이데올로기)이 흩어져 있는 기회주의적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활동을 서로 연계하도록 해준다. 규칙들이 교환을 (경제적 교환만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교환/교류도) 촉진한다.

크립토경제학이라 불리게 된 것은 블록체인을 받쳐주는 경제적 원칙들과 이론 그리고 대안적인 블록체인 실행에 초점을 둔다. 블록체인 메커니즘 설계의 경우에는 게임이론과 인센티브 설계를 고려한다.

이와 달리 제도적 크립토경제학은 블록체인과 크립토경제가 결합하여 가져올 제도적 경제학에 초점을 둔다. 그 사촌격인 제도적 경제학에서처럼 경제는 교환을 연계하는 시스템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제도적 크립토경제학은 규칙을 보기보다는 규칙들에 의해 구조화된 데이터인 원장을 본다.

제도적 크립토경제학은 원장들을 지배하는 규칙들, 그 원장들을 서비스하기 위해서 발전한 사회·정치·경제적 제도들, 그리고 블록체인의 발명이 어떻게 전 사회에 걸쳐서 원장들의 패턴을 변화시킬지에 관심이 있다.

블록체인의 경제적 귀결

제도적 크립토경제학은 블록체인 혁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우리가 예측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도구를 우리에게 갖춰준다.

블록체인은 실험적 테크놀로지이다. 블록체인이 어디에 사용될 수 있는가는 기업가의 관점에서의 질문이다. 일부 원장들이 블록체인 위로 이동할 것이다. 일부 기업가들은 원장들을 블록체인 위로 이동하려고 시도하지만 실패할 것이다. 모든 것이 블록체인의 사용 사례가 되지는 못한다. 블록체인의 킬러 앱은 아직 없다. 원장들, 암호기술, P2P네트워킹의 결합이 미래에 어떤 것을 낳을지 예측할 수 없다.

이런 과정은 극히 파열적이 될 것이다. 추측컨대 전지구적 경제는 블록체인을 받쳐주는 사실들의 재구조화·해체·재조직과 관련된 긴 불확실성의 시기를 맞게 될 것이다.

블록체인의 최선의 사용이 ‘발견’되어 이미 원장에 대한 서비스를 하는 기관들이 깊이 자리를 잡고 있는 현실 세계의 정치적·경제적 체계에서 실행되어야 한다. 이 둘째 부분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원장들은 파급력이 크고 블록체인의 가능한 응용프로그램들도 매우 포괄적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를 제어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칙들의 일부가 손에 잡힐 듯이 드러날 것이다.

제도의 창조적 파괴

우리는 이전에 이런 혁명들을 겪어 보았다. 보통 비트코인의 발명과 블록체인을 인터넷과 비교한다. 블록체인을 인터넷 2.0이라고 부르거나 인터넷4.0이라고 부른다. 인터넷은 우리가 상호작용하고 사업을 행하는 방식을 혁신한 강력한 도구이다. 그러나 이 비교는 블록체인을 덜 쳐준 편이다. 인터넷은 우리로 하여금 더 잘,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소통하고 교환하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블록체인은 전과 다르게 교환하도록 해준다. 블록체인에 합당한 더 좋은 은유는 기계적 시간의 발명이다.

기계적 시간 이전에 인간의 활동은 자연의 시간―아침에 들리는 닭의 울음과 저녁에 천천히 땅거미가 지는 것―에 의해 규제되었다. 경제사가 앨런(Douglas W. Allen)이 주장하듯이 문제는 가변성이었다. “시간의 측정에 너무나도 많은 가변성이 존재해서 많은 일상적인 활동들이 유용한 의미를 가지기 힘들었다.” “시간 측정의 가변성의 감소가 가져다주는 효과는 모든 곳에서 감지되었다”라고 앨런은 쓴다. 기계적 시간은 그 이전에는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상상조차 못했던 경제적 조직화의 전적으로 새로운 범주들을 열어젖혔다. 교역과 교환이 먼 거리를 가로질러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가능해졌다. 하루를 구조화할 수 있게 되었고 노동한 시간의 양에 따라 보수가 주어질 수 있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공정하게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용주나 피고용인이나 어떤 계약이 수행되는 것을 확증하는 독립적 도구인 표준을 볼 수 있었다.

완결된 스마트 계약과 미완결된 스마트 계약

윌슨과 (그와 마찬가지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코스(Ronald Coase)는 계약을 경제적 조직화의 핵심적 위치에 놓는다. 계약이 제도적 크립토경제학의 중심부에 놓여있다. 바로 여기서 블록체인은 가장 혁명적인 함축을 가진다. 블록체인 위에서 이루어지는 스마트 계약은 계약에 의한 합의가 자동적·자율적으로 그리고 안전하게 실행되도록 한다. 스마트 계약은 계약의 실행을 유지하고 시행하고 확인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 전체―회계사들, 감사들, 법률가들, 그리고 많은 법 제도들―를 제거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스마트 계약은 알고리즘의 세부에 의해서 제한된다. 경제학자들은 완결된(complete) 계약과 미완결(incomplete) 계약 사이의 구분에 초점을 두어왔다. 완결된 계약은 모든 가능한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적시한다. 미완결 계약은 뜻밖의 일이 일어나는 경우 계약조건의 재협상을 허용한다. 완결된 계약들은 실행하기가 불가능하며 미완결 계약들은 돈이 많이 든다. 블록체인은 스마트 계약을 통해서 많은 미완결 계약과 연관된 정보비용과 거래비용을 낮춤으로써 경제활동의 규모와 범위를 확대시킨다.

이 일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의 정확한 세부는 기업가들이 풀어야 할 문제이다. 현재 오라클들―정보를 스마트 계약이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로 변환해주는 신뢰할만한 주체들―이 블록체인의 알고리즘 세계와 현실 세계를 연결해준다. 블록체인 혁명에서 실질적으로 얻을 이득은, 미완결 계약들을 블록체인 위에서 실행되기에 충분히 완결된 계약으로 전환시킬 더 낫고 더 강력한 오라클들을 발전시키는 데 있다고 본다. 중세의 상인혁명은 상인 법정들[국제상관습법Lex mercatoria, merchant law을 집행한다―정리자]의 발전에 의해 가능해졌다. 실질적으로 신뢰를 받는 오라클들에 해당하는 이 법정들이 교역자들로 하여금 사적으로 계약을 실행할 수 있게 했다. 블록체인의 경우에 이런 혁명은 아직 오지 않은 듯하다.

정부는 어디로?

블록체인 경제는 세금, 규제, 서비스 제공 등 많은 면에서 정부의 통치과정에 압박을 가한다. 대중과 상호작용하는 금융기관들의 경우 그 안전성과 건전성을 보장하기 위해 건전성 통제(prudential control)가 발전했다. 보통 이 통제(예를 들어 유동성과 자본 요건들)는 예금주들과 출자자들이 은행의 원장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해 정당화된다. 예금주들과 출자자들은 회사의 관리에 기율을 부과할 수 없는 것이다. 블록체인의 쓰임새 가운데 하나는 예금주들과 출자자들이 은행의 지불준비금과 대출을 계속 모니터하여 자신들과 은행 경영진 사이의 정보비대칭을 실질적으로 제거하게 해주는 것이다.

블록체인의 변경 불가능성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근거 없는 뱅크런이 일어나지 않도록 보장한다. 규제자의 역할은 블록체인이 정확하고 안전하게 구축되어 있다는 것을 공인하는 데 국한된다.

블록체인의 더 나아간 쓰임새는 크립토뱅크―빌리는 사람과 빌려주는 사람을 직접 연결함으로써 단기로 빌리고 장기로 빌려주는 자율적인 블록체인 응용프로그램―이다. 스마트 계약 알고리즘으로 구축된 크립토뱅크는 공적 블록체인 원장을 가진 은행만큼이나 투명한 속성을 가지면서도 규제자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크립토뱅크는 스스로 청산할 수 있다. 크립토뱅크가 지급불능이 되면 그 바탕에 있는 자산이 자동적으로 출자자들과 예금주들에게 지급된다.

카우언(Tyler Cowen)가 타바록(Alex Tabarrok)은 많은 정부 규제가 정보비대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설계된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이는 정보가 어디에나 두루 퍼져있는 세계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문제이다. 블록체인 응용프로그램들은 이 정보의 편재(遍在) 경향을 주목할 만하게 증가시키며 그 정보를 더 투명하고 영속적이며 접근 가능하게 만든다.

블록체인은 ’렉텍‘(regtech)이라고 불리는 것에서 효용을 가지고 있다. 이는 감사, 준법감시, 시장 감시라는 전통적인 규제 기능들에 테크놀로지를 적용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블록체인 세계에서 새로운 소비자 보호나 시장 통제를 요구하는 새로운 경제적 문제들이 생길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행 같은 기본적인 경제적 형태들의 재구조화와 재창출은 규제의 시행 방식만이 아니라 규제가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도 압박을 가할 것이다.

대기업들은 어디로?

블록체인 경제가 대기업에 미칠 영향도 마찬가지로 크다. 기업의 사이즈는 종종 기업 위계의 비용을 감당할 필요에 의해 추동된다. 이 비용은 미완결 계약과 대규모 투자의 기술적 필요에 기인한다. 이런 모델은 출자자 자본주의가 기업 조직의 지배적인 형태임을 의미한다. 블록체인 위에서 더 복잡한 계약을 할 능력은 기업가들과 혁신가들이 자신들의 인간 자본 및 이윤에 대한 소유권과 통제를 동시에 유지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성공적인 사업을 하는 것과 금융자본에의 접근 사이의 관계는 시간이 갈수록 약해졌는데, 이제는 단절될 수도 있다. 인간 자본주의의 시대가 동터오고 있다.

기업가들은 가치 있는 앱을 만들 수 있고 그것을 그 기능을 필요로 하는 누구라도 쓸 수 있게 개방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가는 이에 대한 대가로 지갑에 마이크로페이먼트가 축적되는 것을 지켜볼 뿐이다. 설계자는 설계한 것을 개방하고 최종 소비자들이 3D 프린터에 그 설계를 다운받아서 거의 즉각적으로 생산물을 만들 수 있다. 이런 사업모델을 채택하면 현재보다 더 (많은) 지역화된 제조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소비자들이 생산자들이나 설계자들과 직접 상호작용할 수 있는 능력이 중개인이 경제에서 하던 역할을 제한할 것이다. 물류회사들은 계속 번성할 것이지만, 운전자 없는 수송의 출현이 이 산업에도 파열을 가져올 것이다.

사업이 파열되면 회사의 조세 기반 또한 파열된다. 정부가 사업체에게 세금을 물리는 것이 어려워질 수 있다. 판매(소비)세에 그리고 심지어는 인두세[한국의 경우에는 주민세가 이에 해당된다―정리자]에 큰 압박이 가해질 수도 있다.

결론

블록체인 및 그와 연관된 테크놀로지 변화는 현재의 경제적 조건을 대대적으로 파열시킬 것이다. 산업혁명은 사업모델이 위계와 금융 자본주의에 기반을 두는 세계를 도입했다. 블록체인 혁명은 인간 자본주의 및 개인의 더 큰 자율성에 의해 지배되는 경제를 보게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현재로서는 불확실하다. 기업가들과 혁신가들이 언제나 그랬듯이 시행착오를 통해 불확실성을 해소할 것이다. 우리가 기여하는 바는 파열이 일어날 때 그것을 분명하게 하는 데 활용될 수 있는 모델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

[정리자의 덧글]

이 글의 저자들은 예를 들어 ’인간 자본주의‘라는 어휘를 사용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블록체인의 혁명성을 제도 차원에서 보면서도 그 관점이 확연히 탈자본주의적이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어떤 글이든 중요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면 어휘나 관점을 문제로 삼을 필요는 없다. 이 글의 저자들이 블록체인을 ’국제상관습법‘의 새로운 버전으로 본 부분은 네그리와 하트가 『다중』(2004)과 『공통체』(2009)에서 ’국제상관습법‘(lex mercatoria)을 언급한 대목을 참조하면서 읽으면 유익할 듯하다. 『공통체』의 해당 대목은 이렇다.

아무도 가게를 돌보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전지구적 자본이 정치적·법적·제도적 규제와 지원 없이 기능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전지구적인 자본주의적 권력구조는 실제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시스템의 서로 다른 층위들을 가로질러 기워 연결된 잠정적이고 임시변통적인 성격의 것이다. 다른 곳에서 우리는 전지구적 경제의 관리와 규제의 지형에서 발전되고 있는 특수한 메커니즘들의 일부—예를 들어 일국적 법체계가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계약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옛 국제상관습법lex mercatoria을 재해석한 새로운 법적 관례—를 탐구한 바 있다. (382-383)

그리고 『다중』에서 네그리와 하트는 자신들이 포착해낸 이 “옛 국제상관습법을 재해석한 새로운 법적 관례”를 “자본의 자기지배”라고 부른 바 있다. 그런데 네그리와 하트는 블록체인의 존재조차 알 수 없었던 이 시점에서 (최초의 블록체인이 구상된 것은 2008년도이다) 다른 요인들을 고려한 것만으로 이미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새로운 ‘국제상관습법’ 안에서 발전된 이 ‘계약을 통한 법률’의 일반성과 기업화된 법률회사들의 관리 역량이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상 자본의 자기지배(self-rule)라는 꿈은 매우 제한적이다. (『다중』, 233)

이제 위 게시글의 저자들에 따르면 블록체인 혁명은 국가를 불필요하게 만듦으로써 “자본의 자기지배(self-rule)라는 꿈”을 한편으로는 돕고 다른 한편으로는 회사들을 대체함으로써 이 꿈을 물거품으로 만들 잠재력을 가진 어떤 것이다. 이 상반되는 두 경향의 공존이 어떤 귀결을 낳을 것인가에 대해서 위 게시글의 저자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현재로서는 불확실하”며 “기업가들과 혁신가들이 언제나 그랬듯이 시행착오를 통해 불확실성을 해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나라면 여기에 걸려있는 매우 중요한 싸움의 결과는 다중/커머너들의 투쟁에 달려있다고 말할 것이다. 블록체인의 등장은 자본과 국가의 홈그라운드였던 법, 관례, 규제, 계약의 영역이 계급투쟁의 지형으로 편입되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계급투쟁이란 이익의 분배(이윤 대 임금/복지의 비율의 결정)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싸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상이한 두 삶형태― 사적인 것(자본)과 공적인 것(국가)을 중심으로 구축되는 삶와 공통적인 것(커먼즈)과 특이성(자율적이고 자유로운 다중)을 중심으로 구축되는 삶,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노동력으로서의 삶과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삶―사이의 싸움을 가리킨다. 이 싸움은 앞으로 인류 전체의 운명을 결정할 중요한 싸움이며 그 싸움의 의미에 걸맞은 자기인식이 긴요한 싸움이다. 따라서 돈을 더 많이 번다든가 생활수준이 더 높아진다든가 복지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데 국한될 수 없는 싸움이다. 위 게시글의 저자들이 말한 “기업가들과 혁신가들”을 다중 혹은 커머너에서 배제하자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이들의 행동은 만일 그것이 자본과 국가를 대체하고 자율과 협동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면 당연히 다중 혹은 커머너로서의 행동으로 간주될 것이다. 다중 혹은 커머너는 일단의 개인들(개별자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포괄하는 보편자가 아니라 개인들의 집단적 행동의 특정 성격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사실 네그리와 하트는 『집회』(Assembly, 2017)에서 생산의 지형에서 계급투쟁을 전개할 주체들로 ‘다중의 기업가’를 제시해놓고 있고(http://commonstrans.net/?p=982) 커먼즈 활동가 바우엔스 등도 이윤의 축적이 아니라 커먼즈의 축적을 목적으로 하는 가치창출의 새로운 생태계를 제시하고 있다(http://commonstrans.net/?p=732).

 




블록체인이 커먼즈를 어떻게 촉진하는가?



 

하싼은 이 슬라이드의 뒷부분에서 블록체인의 여섯 가지 특징을 말한 후 이 특징들 각각이 오스트롬의 여덟 가지 커먼즈 설계원칙 가운데 어떤 것을 촉진하는지를 표로 보여준다.

 

이미 다른 게시글에서 소개한 여덟 가지 커먼즈 설계원칙은 다음과 같다.

① 경계의 명확한 설정

② 지역 조건에 맞춘 규칙들

③ 참여에 기반을 둔 의사결정

④ 모니터링

⑤ 등급별 제재

⑥ 갈등해소 메커니즘

⑦ 상위 권위로부터의 인정

⑧ 여러 층으로 중첩된 거버넌스

 

블록체인의 여섯 가지 특징

① 토큰 사용

② 자기구속적 시행(self-enforcement) 및 형식화

※자기구속적 시행 : 계약을 한 당사자들에 의해서만 시행됨

③ 자율적 자동화

④ 기반시설에 대한 권력의 탈중심화

⑤ 투명화

⑥ 신뢰의 코드화

 

커먼즈를 촉진하는 블록체인

 

토큰 사용

자기구속적 시행

자동화

탈중심화

투명성

신뢰의 코드화

확연한 경계

 

 

 

 

 

지역에 맞춘 규칙

 

 

 

 

참여적 의사결정

 

 

 

 

모니터링

 

 

등급별 제재

 

 

 

 

갈등 해결 메커니즘

 

 

 

 

상위 당국으로부터의 인정

 

 

 

중첩 구조

 

 

 

 

 




열린 거버넌스를 위한 도구로서의 크라우드법



[편집자 설명]

2018년 3월 13–17일 거버넌스랩(겁랩)은 24명의 크라우드법 전문가들을 세계 전역에서 초청하여 입법과 정책입안 과정의 모든 단계에서 더 많은 다양한 견해와 전문지식을 도입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발전시키는 작업을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모임은 이탈리아의 벨라지오에 있는 록펠러 재단의 유명한 벨라지오 센터에서 열렸다. 아래 글은 크라우드법 컨퍼런스 참여자들이 작성하는 일련의 블로그 게시글들 가운데 첫째 글이다.

꼬모(Como) 호숫가에 있는 벨라지오의 아름다운 경치는 모든 자연 풍경을 넘어선다. 그곳은 기온이 내려가 흰 눈이 알프스 꼭대기를 덮고 고요한 호수와 산 사이에 안개가 멈추어 있을 때 아름답다. 그곳은 라리아노 삼각지대(Larian triangle) 전체를 덮은 따스한 햇살이 불러낸 청둥오리들이 호수 위에서 장난칠 때에도 아름답다. 벨라지오의 경치가 데이터 과학자들, 정치이론가들, 학자들, 열린 거버넌스 실무자들이 크라우드법의 리스크, 혜택, 기회를 숙고하는 지난주의 모임에 배경을 제공해주었다(야외에서 모임을 가질 때에는 말 그대로 배경이 되었다.) 크라우드법은 테크놀로지를 사용하여 도시의 입법에 시민의 참여를 증진시킨다는 첨단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한다. 크라우드법은 시민에게 정보와 자문을 제공하기, 시민을 참여시키기, 시민과 협동하기, 시민으로 하여금 지역자치 수준에서 입법 작업을 할 수 있게 하기를 핵심으로 한다. 이는 테크놀로지에 의해 가능하게 되는 입법참여 메커니즘이다.

민주주의는 벨라지오와 무척 닮았다. 민주주의 제도의 변천, 그 흥망성쇠의 과정 전체를 통해서 민주주의는 거버넌스의 (처칠의 말을 풀자면, 지금까지 시험해본 모든 것들 가운데) 최고 형태로 남아있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4, 5년마다 공적 대표자들을 뽑는 선거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훨씬 더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민중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대한 의사결정에 민중이 참여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참여가 민주주의의 혜택을 향유하기 위해 우리가 지불하는 통화(通貨)이다. 참여 없이는 민주주의가 상실된다.

그런데 환경의 변화에 맞추어 바뀌지 않는 것은 멸종되게 마련이다. 이는 유기체들이나 사고방식들 모두에 공히 적용된다. 우리가 주위의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하는 방식에서부터 일하는 방식, 노는 방식, 세상과 주위의 사건들을 인식하는 방식에 이르는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테크놀로지의 진전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테크놀로지의 진전은 산업, 전문업, 지식 분야들 전체를 변형시키고 있다. 그런데 테크놀로지 혁신이 가져오는 변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해 여전히 불확실해하는 영역이 거버넌스 분야이다.

나는 ‘거버넌스 분야’(governance field)라는 용어를 민주적 제도, 정책형성, 입법 같은 분야들을 포괄하는 넓은 말로 사용한다. 모바일 뱅킹, 인공지능이 뒷받침하는 기반시설 설계, 의료에서의 가상현실의 사용이 우리의 삶의 표준적인 특징이 되었지만, 가령 선거에서 전자 혹은 온라인 투표의 활용은 극히 미미하다. 정부가 온라인·오프라인 메커니즘들을 사용하여 정책 형성에의 참여를 증진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수백 개의 사례들이 있고 최상의 방법(best practice)으로 기록된 것도 있지만, 지역 자치 행정의 수준에서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입법과정 전체(문제 포착, 방안 포착, 초안 작성, 결정, 실행 및 평가)에 통합하는 경우는 적고 그나마 지속적이지 않다. (이는 이 시리즈의 다른 게시글들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기존의 법적 틀이 빠르고 갑작스러운 테크놀로지 변화에 느리게 반응해서 규제 대상으로 의도된 분야들을 온전히 포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다.

테크놀로지가 대중의 입법 참여를 증진하는 유일한 (혹은 심지어는 선호되는) 매체는 아니라는 주장이 강하게 존재한다. 그런데 대중 참여를 위한 전통적인 메커니즘들(대부분 오프라인)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자신들의 입장을 입법 당국에 보낼 수 있게 하거나 자치정부의 소재지에 직접 가서 입법인들과 만날 수 있게 하는 정보와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한 경향이 있다. 모바일폰 보급률의 전지구적으로 급속한 성장(([원주1] 통계 포털인 스터티스타(Statista)에 따르면 지구 전체에서 모바일폰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는 2017년에 47억7천만 명이며 2019년에는 5십억 명에 이를 것으로 예측된다. 이는 67%의 모바일폰 보급률에 해당한다. 모든 모바일폰 사용자들의 50%는 현재 스마트폰을 사용한다. 데이터는 https://www.statista.com/statistics/274774/forecast-of-mobile-phone-users-worldwide에서 얻을 수 있다.))은 테크놀로지를 사용하여 입법과정에 광범하게 참여할 수 있게 하는 더 큰 기회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불평등이 존재할 때 테크놀로지는 그 해소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으며 민주화하는 효과를 낼 수 있어서 더 포용적인 입법을 가능하게 한다.

만일 거버넌스 영역이 테크놀로지의 변화를 활용하는 데 실패한다면 이 영역은 닳고 시들어서 멸종될 것인가? 거버넌스라는 개념 자체는 멸종된다고 할 수 없지만, 거버넌스에 대한 여러 접근법들은 만일 현대화되지 않는다면 시간이 갈수록 부적절해질 것이다. 내 생각에 이는 민주주의 제도에도 해당된다.

다행히도 민주주의 제도의 증진을 위해서 어떻게 테크놀로지를 사용할 것인가를 함께 실험하는 많은 개인들, 조직들, 정부들이 있다. 이 실험은 정부들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가 전 세계적으로 급속히 하락하는 시기에 이루어지고 있다. 정부들, 시민사회 그룹들, 시민테크놀로지 주창자들과 함께 일하는 <열린 정부 파트너십>(the Open Government Partnership, OGP) 같은 다중이해관계자 기획들이 공사(公事)의 실행과 줄어드는 공적 자원의 관리를 위해 시민들과 정부 사이의 더 깊고 더 임팩트 있는 협동을 추구하는 놀라운 새로운 플랫폼들을 창조하고 있다. 전 세계의 정부들은 가령 온라인 자문을 통해서든 공동체 채점카드(community score cards)(([옮긴이] 서비스를 받는 사람들이 그 서비스에 대해 점수를 매기는 제도))나 e서비스를 통해서든 시민들의 욕구를 더 잘 이해하고 충족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형태의 참여 및 피드백 메커니즘들을 실험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거버넌스랩의 의장인 노벡(Beth Noveck) 교수의 요청으로 벨라지오에 모인 그룹은 전지구적 프로젝트 맵핑에서, 기획들의 효율성 연구 그리고 크라우드법 실행의 규범들과 표준들의 개발에 이르는 과정 전체에서 이 중요한 작업을 추동할 운동을 양성하는 방법들을 숙고했다. 노벡 교수에 따르면

테크놀로지는 입법 조직들이 작동하는 방식을 공개하고 입법자들이 선거일만이 아니라 다른 날에도 시민들에게 책임감을 가지게 만들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대체로 닫힌 방 안에서 작업하는 전문가들과 정치인들에 의해 실행되며 입법의 영향을 받는 시민들의 견해의 직접적인 수용이 거의 없는 전통적인 입법방법에 대한 대안을 크라우드법이 제공해줍니다. 이는 전통적 방식과 달리, 산출된 결과물의 질을 증진시키는 목적으로 올바르게 설계된다면 매 단계―문제설정, 해결책 포착, 연구 및 초안 작성, 규제 실행, 결과 모니터링―마다 더 많은 전문지식을 입법과정에 효율적으로 도입할 기회들이 존재한다는 가설에서 출발합니다. 동시에 잘못 설계되면 결과에 관계없이 참여가 의사결정을 불구로 만들고 정부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원주2] Beth Simone Noveck, Director, The Governance Lab, e-mail communication with author, 13 November 2017.))

크라우드법의 몇 개의 잠재적인 함정들에 대한 노벡 교수의 경고가 중요하다. 크라우드법을 실행하는 것은 시간과 자원을 비용으로 치르며 더 중요하게는 보통 사람들의 소원과 기대를 비용으로 치른다. 크라우드법 기획의 실행 및 이 기획에의 참여와 관련하여 정부들에게나 시민들에게 하는 가치제안(value proposition)은 잘 구체화되어야 하고 실험적 기획들에서 얻는 증거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크라우드법이 시민들에게 주는 혜택은 쉽게 주장할 수 있는 반면에 크라우드법이 어떻게 기존의 시민참여과정을 강화할 수 있으며 어떻게 정부들이 시민참여의 연속성(정보 제공에서 자문 및 시민의 참여를 거쳐 시민과의 협동 및 시민에의 권리부여로 움직이는 과정)을 제고하는 것을 도울 수 있는가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작업이 필요하다. 거버넌스를 증진하는 아이디어들―가령 참여예산, 입법의 개방성 등―의 광범한 생태계 내에서 크라우드법이 차지하는 위치 또한 더 분석될 필요가 있다. 크라우드법 옹호자들은 (정보 및 참여에의) 접근의 제한이 공법에서 인정되는 문제와 더 씨름할 필요가 있다. 시민들을 입법과정의 절차 전체에 위치시키는 것이 크라우드법의 이상이지만, [현재로서는?] 시민 참여의 제한의 윤곽이 구체화되고 정부 측의 크라우드법 실행자들에게 지침이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가입한 76개국과 준국가적 주체들(자치도시, 자치지역, 주정부 혹은 위임정부)이 현재 활동계획들을 작성하고 있는 OGP는 크라우드법을 위한 이상적인 인큐베이터이다. 특히 “테크놀로지가 시에서의 더 많은 입법참여를 촉진하는 방법, 혜택, 잠재적 리스크, 측정기준”(노벡 교수)에 대한 지식과 초기의 교훈들을 잘 보관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크라우드법과 의회/입법의 개방성의 증진이라는 OGP의 과제 사이에는 분명한 시너지 관계가 있다. 크라우드법 개념은 OGP에 참여하는 나라들과 준국가적 주체들에게 입법과정을 더 개방적이고 협동적으로 만들 혁신의 가능성을 시험할 도구를 제공한다.

꼬모 호수의 한 구석에 있는 작고 조용한 곳에서 부화된 아이디어가 세계에 울려 퍼져 입법과정을 영원히 근본적으로 변형시킬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는 좋은 일이다. 아마도 근본적인 재편성이야말로 민주주의와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믿음을 복구하는 데 필요한 것이리라. ♣

 




커먼즈로서의 도시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에 2015년 11월 14일자로 게시된 글 “The City as Commons: The Conference”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커먼즈로서의 도시

옮긴이 : 정백수

 

지난 주 이탈리아의 볼로냐에 매력적인 200여 명의 커머너들이 모인 걸로 미루어 판단하건대, 커먼즈 옹호의 새로운 주된 전선이 도시라는 집중점에 모였다고 선언해도 무방하다. 개최된 행사는 “커먼즈로서의 도시: 도시 공간, 공통재, 시 거버넌스를 다시 생각하기”(The City as a Commons: Reconceiving Urban Space, Common Goods and City Governance)라는 제목의 컨퍼런스(학술대회)였으며, 이 컨퍼런스는 랩겁(LabGov, LABoratory for the GOVernance of the Commons), 국제커먼즈연구협회(IASC, 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the Study of the Commons, ), 포드햄로스쿨 도시법 센터(Fordham Law School’s Urban Law Center), LUISS 로마법학교1에 의해 개최되었다.

 

여러 해에 걸쳐 여러 주목할 만한 도시커먼즈(urban commons) 기획들이 있었지만, 이 행사는 창조적 에너지, 사람들과 생각들의 다양성, 열정과 목적의식이 돋보였다.

 

볼로냐 시는 이 행사의 완벽한 주최자였다. 이 시는 오랫동안 이 분야에서 개척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 역할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도시커먼즈를 위한 협동에 관한 조례>(Regulation on Collaboration for the Urban Commons)인데, 이 조례는 동네들과 시민들로 하여금 도시 공간들―텃밭(정원), 공원, 유치원, 낙서 청소―을 위한 자신들의 기획을 제안하도록 권유하고 있다.

 

이 컨퍼런스를 매우 생동감 있는 것으로 만든 것은 세계 전역에서 온 커먼즈 혁신가들의 다양성 그 자체이다. 도시 퍼머컬처 농업가, 오래된 공항들을 메트로폴리스 커먼스로 전환시키는 것을 연구해온 연구자, 도시 개발의 모델인 ‘작은 가정 생태 마을’(tiny home eco-villages) 전문가, 한국의 협동적 도시 서울에서 온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활동가들, 시리아의 이주자들이 피난처가 될 가정들을 이탈리아에서 찾는 것을 소셜미디어를 사용하여 돕는 ‘유목적 커먼즈’를 서술하는 전문가 등등.

 

우리는 바르셀로나의 한 시 공무원으로부터 ‘바르셀로나 엔 꼬무’(Barcelona en Comú)에 대한 발제를 들었다. 이는 시 정부가 움직이는 방식을 다시 만들려고 시도하는 시민 플랫폼으로서 사회 정의와 시민 참여에 강조를 두고 있다. 바르셀로나 시 정부는 도시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비전의 일부로서, 에어비앤비(Airbnb)가 임대료를 올리고 튼실한 동네들을 공동(空洞)화시켜 밤을 새우는 관광객들을 위한 죽은 지대로 만든 이후에 에어비앤비를 금지시켰다.

 

브룩클린에 터를 둔 기획인 ‘596 에이커즈’(596 Acres)는 비어 있는 공공지의 거대한 목록을 만들어서 동네들이 일정한 땅을 공동체 텃밭, 오락, 학습을 위해 기능하는 커먼즈로 만드는 것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유비쿼터스 커먼즈’ 기획은 사람들이 수많은 장치들로부터 자신들이 생성하는 개인 데이터들이 특히 도시 맥락에서 사용되는 방식을 통제하는 것을 돕도록 고안된 본보기적인 법적/기술적 툴킷이다.

 

이 컨퍼런스가 국제커먼즈연구협회가 도시커먼즈를 다룬 제1회 주제 컨퍼런스였기 때문에, 꽤 많은 학자들, 특히 젊은 학자들이 참석했다. 따라서 자원으로서의 커먼즈와 관련된 전통적인 원칙을 적용하는 많은 학술논문들이 발표되었다.

 

커먼즈 활동가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이탈리아의 디자인 전략가인 에지오 만지니(Ezio Manzini)가 주목할 만한 기조발제를 했다. 헬프리히는 자신의 「2040년의 도시(골) 커먼즈를 상상하기」(“Imagining the (R)Urban Commons in 2040”)에서 커먼즈로서의 도시가 2040년에는 어떤 모습일까에 대해 자신의 전망을 피력했다.

 

대학 기반의 디자인 랩들의 네트워크인 ‘지속 가능성을 위한 사회적 혁신 디자인’(Design for Social Innovation for Sustainability, DESIS)의 창립자 만지니는 또 하나의 생각 깊은 기조발제에서 도시들이 관계들의 세계로 간주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도시커먼즈는 “유동적인 형태들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커먼즈들을 실제로 가동시키기 위해서는 고정된 디자인들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법, 이론, 도시 거버넌스에 대해 진지한 독서를 일정하게 하고 싶은 사람은 『예일 법 및 정책 평론』(Yale Law and Policy Review)에 곧 실릴 포스터(Sheila Foster)와 이아이오네(Christian Iaione) 공저의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 글은 커먼즈로서의 도시라는 생각을 체계적이고 상세하게 개괄하고 있으며, 도시들을 위한 일련의 협동적·다중심적 거버넌스 전략들을 제안하고 있다.

 

바우엔스(Michel Bauwens)와 나는 ‘개방적 협동조합주의’와 특히 우버(Uber), 에어비엔비와 같은, 사회 공동체들을 착취만 하지 거기에 재투자하거나 혜택을 공유하지는 않는 ‘죽음의 별’ 플랫폼들2에 대항하는 ‘플랫폼 협동조합주의’ 모델들을 고안하려는 새로운 노력에 대해 단상에서 대담을 했다.

 

이 컨퍼런스가 아주 많은 에너지를 뿜어냈기에, 나는 미래에 도시커먼즈에 대해서 더 많은 기획들이 나올 것을 기대하고, 도시를 커먼즈로서 관리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새롭고 더 집중된 대화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해본다. 다행히도, 도시커먼즈를 다루는 국제커먼즈연구협회의 제2회 주제 컨퍼런스가 2017년으로 이미 계획되어 있다.

 

  1. http://www.luiss.edu/university [본문으로]
  2. ‘죽음의 별’(Death Star)은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조그만 행성 정도의 크기를 가진 거대한 이동 구조물이다. ‘Structure3C’(http://www.structure3c.com/phone/index.html)의 빌 존스턴(Bill Johnston)이 우버, 에어비앤비 등을 이 ‘죽음의 별’에 빗대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유럽 의회, 커먼즈에 주목하다

* 아래는 2015년 6월 26일자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 게시글 “The European Parliament Focuses on Commons”를 옮긴 것이다. 사람 이름과 기관 이름의 옮김은 다소 부정확할 수 있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유럽 의회, 커먼즈에 주목하다

옮긴이 : 정백수

유럽 의회1가 공통재와 관련된 새로운 인터그룹을 통하여 커먼즈에 공식적으로 주목하고 있다. 이 인터그룹은 <공통재 및 공공 서비스에 관한 유럽 의회 인터그룹>이라고 알려진 더 큰 그룹의 산하 그룹이다. 이 그룹은 5월 25일 브뤼셀 유럽 의회에서 처음 회의를 가졌다. 이 초기 단계에서는 이 그룹이 유럽 의회에서나 대중에게나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인지를 말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것이 커먼즈 행동주의가 의미심장한 새로운 문턱을 넘어가고 있음을 나타냄은 분명하다.

 

인터그룹들이란 의회의 공식적 포럼들로서, 여기서 의원들·정치조직들·운동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널리 알리고 일정한 주제에 주의를 집중시키려는 시도를 할 수 있다. 커먼즈 네트워크의 소피 블로먼(Sophie Bloeman)2은 이렇게 쓴다. 

 

인터그룹들은 비록 입법권은 없지만, 유럽 의회에서 대표될 수 있기에 가치가 있을 수 있다. 최소한 그것은 여러 당이 참여하는 포럼으로서 거기서 참여자는 견해를 교환하고 특정 주제들에 관한 아이디어를 비공식적으로 제안할 수 있다. 그러한 인터그룹에 참여하기를 선택한 사람들, 의원들, 시민사회 혹은 로비스트들은 어떤 주제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공유하며, 어떻게 일을 이루어낼 것인가에 뜻을 모을 수 있다.

 이제 커먼즈 인터그룹도 생길 것이다. 이 그룹은 공유된 관점에서 정책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이다. ‘커먼즈’가 현 시대의 중요한 테마들을 구상하는 데 중요하고 유용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바로 이 공유된 관점이다. 아주 많은 인터그룹들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그룹이 정치적 타협의 결과임은 불가피한 일이다. 이 그룹은 녹색당, 좌파그룹 GUE,3 거대한 사민당(S&D), 지금 베페 그릴로(Beppe Grillo)가 자신의 <오성당>4과 함께 속해있는 EFDD 그룹5 소속의 유럽 의회 의원들로 구성되었다. 물을 공통재로 확보하려는 운동(the movement on water as a commons)이 이 인터그룹이 가동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정치적인 이유로 <커먼즈 인터그룹>은 <공통재 및 공공 서비스에 관한 유럽 의회 인터그룹> 산하의 두 하위그룹 중 하나이다. GUE 소속의 유럽 의회 의원 마리사 마티아스(Marisa Matias)가 <커먼즈 인터그룹>의 의장이다.

 

블로먼은 이 인터그룹의 구성 자체를 “커먼즈가 정치세력이 되었으면 하는 열망과 그러한 정치세력화의 담론을 확인해주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녀는 또한 이렇게 물음을 던진다. “커먼즈 혹은 공통재라는 넓은 범위를 가진 인터그룹이 어떻게 유용할 수 있는가? 유럽 의회의 일상적 활동은 결국 구체적인 정책들, 정책제안에 대한 수정, 투표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psyCommons에서 블로그 활동을 하는 영국인 데니스 포슬(Denis Postle)은 이 모임에 대하여 그리고 그 전망에 대하여 그가 염려하는 바를 이렇게 썼다. 

“토론이 필요하다”고 여러 번 요구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토론은 주로 연단에서의 카리스마적이고 종종 시끄러운 일련의 프리젠테이션들에 압도적으로 종속되었다. 커먼즈나 공통재는 “좋은 아이디어였다,” “우리는···해야 한다,” “우리는···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해야 한다” 등등의 권고들이 여러 번 양념처럼 추가되었다. 커먼즈에 대한 말은 많았지만, 커먼즈에서 온 말은 분명 그다지 많지 않았다. 내가 다른 참여자들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그리고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이 커머닝을 직접 경험했는지를 묻기 위해 발언을 했을 때, 청중의 3분의 일 가량이 손을 들었다. 이것으로 보아 아마도 청중에게 설교를 덜 하는 것이 적절했을 것 같다. 

 

이는 첫 모임이었으므로, 불확실성이나 서투름은 너그러이 봐줄 수 있다. 그러나 다 고려해볼 때, 프리젠테이션은 공통재 자원(common goods resources)―즉 도시의 물 공급―에 대하여 할 말이 많았고 커머닝(commoning)에 대해서는 그다지 할 말이 없었다. p2p 거버넌스, 헌신, 정서적 표현력에서 자라나오는 야릿한 꽃이 바로 커머닝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이 모임은 (그렇게 보였긴 한데) 구좌파가 정치적 구미에 맞는 새롭고 유망한 풍미와 친구가 되려고 시도하는 모임이었는가? 커피 브레이크도 없었고 모임 이전의 잡담 말고는 모인 참여자들 사이의 상호작용도 없었다. 대의제 정당의 낡은 패러다임 아닌가?

 

그러나······ 의장 마리사 마티아스는 회의 서두의 발언에서 두 개의 과제를 개괄했다. “어떻게 국가의 논리 바깥에서 생각할 것인가”와 “어떻게 커먼즈의 관리 문제를 다룰 것인가”이다. 이 둘 모두 신자유주의가 선호하는 바를 근본적으로 반박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 <공통재 인터그룹> 회의는, 뜻밖에 그리고 거짓말 같게 성공적인 것으로 판명되고 있는 정치적 혁신의 소식을 구 정치에 도입하는 하나의 방식인지도 모른다. 

<커먼즈 인터그룹>의 등장은 유럽에서 일고 있는 다른 커먼즈 기획들의 물결에 대한 성찰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최근 바르셀로나에서 명시적으로 커먼즈 과제를 가진 선거들이 있었다. 볼로냐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의 시정부들이 공적 부문과 커먼즈의 새로운 제휴를 촉발시켰다. 그리스,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커먼즈 축제가 열렸다. 파리의 물 공급은 다시 시의 통제 아래 두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특히 사회당의 활동이 쇠퇴함에 따라서 프랑스의 학계와 대학원생들 사이에서는 커먼즈 패러다임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커먼즈 인터그룹>은, 유럽 의회 소속의 기관이기에, 커먼즈 의제를 진전시키는 데서 심각한 도전들에 직면할 수 있다. 커먼즈의 다양한 정의(定義)들, 목소리들의 다양성, 수십 개의 적절한 주제들에 집중될 수 있는 방대하게 열린 의제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그렇더라도, 신임을 얻은 유럽 정치정당들 사이에 커먼즈에 대해 논의하고 커먼즈에 정치적 존재감을 부여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관심이 존재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엄청난 발전인 것이다.

 

이렇듯, 커먼즈에 관한 상충하는 견해들을 논파해 들어가고 유럽 공공정책이 소홀히 한 영역을 가시화하는 포럼이 현재 존재하고 있다. 커먼즈가 그저 자원일 뿐인지 아니면 사회적 활동이기도 한 것인지, 무엇이 커먼즈로 간주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커먼즈들을 종획으로부터 가장 잘 방어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도록 하자. 또한 커먼즈를 지원하고 보호할 수 있는 많은 혁신적인 정책 기획들에 대해서 들어보기로 하자.

 

중요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스페인 15M 운동 : 민주주의 헌장

* 이 글은 커먼즈 활동가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http://www.bollier.org/)에 올라있는, 2014년 6월 26일자 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스페인의 15-M 운동 : 「민주주의 헌장」

마드리드에 자리한 <게릴라 번역>에서 활동하는 스타꼬 트론꼬소(Stacco Troncoso)와 그의 동료들은 스페인에서 나온 중요한 성명서인 「민주주의 헌장」(“Carta por la Democracia”)을 영어로 옮겼는데, 이 성명서는 세계 전역에 있는, 소문자 ‘d’의 민주주의자들(democrats)에게 큰 관심을 끌 것으로 본다. 트론꼬소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성명서 뒤에 있는 그룹인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Movimiento por la Democracia)은 스페인의 15-M 운동이 전개되고 발전된 흐름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이 그룹은 스스로 당이 되기를 욕망하지 않으면서 명확하게 정치적 무대를 표적으로 한다. 그들의 「민주주의 헌장」은 정치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감동적이고 면밀한 텍스트이다. 이 헌장은 민중을 위한 정치를 제안한다. 환경 현실과 사회 정의에 확실하게 근거를 두고 있으며, 커먼즈에 기반을 두고 있고, 기업의 이익과 신자유주의적 명령들로부터 방어되는 정치를.”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은 다음과 같이 스스로를 소개한다. “우리는 그 부패로 인하여 우리를 더 가난하게 만들고 도시와 마을로부터 쫓아낸 경제적·정치적 모델이 파괴되던 시기에 등장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우리의 손에 쥐고자, 체제가 우리에게 가하는, 민주주의를 탈취하려는 항상적인 위협에 맞서 그것을 지키고자 여기에 섰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이다. 우리는 ‘그렇다, 우리는 할 수 있다!’라고 수천 번이라도 말하고자 탄생했다.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해낼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진실로서 확신하기에,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우리에게 말하는 그 누구에게나 도전할 것이다.”

「민주주의 헌장」은 “공공 정책과 대의민주주의의 변형을 목적으로 하며 대중의 도전과 참여에 열려있는 매우 상세한 계획”이라고 트론꼬소는 말한다. 트론꼬소가 속한 번역자 네트워크는 영어로 번역하는 가운데 “자발적 그룹들이 생산한 저작을 모으고 편집하는 사람들”로서 행동한다. 번역자들인 하론 로완(Jaron Rowan), 하이메 빨로메라(Jaime Palomera), 루시아 라라(Lucía Lara), 로따(Lotta), 디에고(Diego) 및 트론꼬소와 편집자인 제인 로스 립턴(Jane Loes Lipton)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나는 이 헌장에 끌리스몬(Clismón)이 직접 그린 삽화들이 들어가 있는 점이 마음에 들며, 여기에 그 가운데 하나를 올려놓는다.

이 감동적인 문서의 서두 몇 단락을 여기 소개한다.

이 헌장은 전망의 결핍, 대량 실업, 사회적 권리와 혜택의 감소, 철거, 정치적·금융적 부패, 공공 서비스의 붕괴로 이루어진 깊은 병에서 탄생했다. 이 헌장은 정당성과 듣는 능력을 결핍한 정치 체제가 내놓은 약속에 대해 사회적 대다수가 확신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반응으로 작성되었다.

양당제도, 널리 퍼진 부패, 긴축정책이 부과하는 금융독재, 공공재의 파괴가 자신의 고유한 한계로 인해 오랫동안 고통을 겪어온 민주주의에 마지막 타격을 가했다. 이 한계는 1978년 헌법에 이미 존재했었다. 이는 사회를 권력의 집중으로부터 보호하지도 않고 비(非)대의적 정치계급의 공고화로부터 보호하지도 않는 정치적 틀로서 요약될 수 있다. 이 정치적 틀은 시민의 참여를 거의 허용하지 않으며 우리의 보호와 공동의 발전을 위한 집단적 권리의 새로운 체계를 구축할 수 없는 체제를 수립했다. 이는 몇몇 매우 중요한 대중 시위들에도 불구하고 방대한 다수의 요구가 계속해서 무시되었다는 사실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제도적 방해와 지배자-피지배자 사이의 점증하는 분리라는 상황에서 출구는 하나밖에 없는 듯하다. 바로 정치적·경제적 권력에 대한 시민의 통제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의 심오한 확장이다. 물론 그나만 남은 민주주의마저 계속 위축되고 있으며 내적 개혁의 시도들은 동일한 잘못을 반복함을 의미할 뿐이므로, 우리는 게임의 규칙을 변화시킬 기회를 잡아야 한다. 모든 관심사에 대한 효과적인 의사결정 능력을 사회에 돌려주기 위한 민주적 변화이다.

현재의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이 카오스와 독재 사이의 양자택일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민중 사이에서 창출된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단순히 투표로 환원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참여, 시민의 통제, 평등한 권리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이다.

이 헌장은 이러한 민주화 과정에 기여하려는 욕망으로부터 출현했다. 이런 의미에서 이 헌장의 기여는 기쁨의 장소로부터, 시민을 움직이는 에너지로부터, 정당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정치로부터 이루어진다. 이 헌장은 1인칭 복수로 말하며, 모든 사람에게 살 가치가 있는 삶의 구축이 그 목적이다. 물론 추동력은 민주주의 자체이다. 민중은 지금과는 다르게 스스로를 다스리고 같이 살아가는 형태를 발명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헌장은 오늘날의 투쟁들이 장차 올 민주주의의 기반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이 헌장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토론과정의 개시를 요구하며 그것이 삶, 존엄,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정체적·경제적 재구조화를 낳기를 요구한다. 이 헌장은 새로운 사회적 계약의 수립에의 기여로서, 민중이―‘누구나’가―진정한 주인공이 되는 정치개혁 과정에의 기여로서 여기 제시된다.

이제 시민들이 공적 제도들과 자원들을 전유하여 그것의 보호, 통제, 공정한 분배를 보장할 때이다. 광장들에서 그리고 네트워크들에서 우리는 세상에서 존재하는 방식을 영원히 바꿀 단순하고 결론적인 무언가를 배웠다. 우리는 ‘그렇다, 우리는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헌장 전문은 여기서 읽을 수 있다. 이 헌장이 민주주의의 부활을 가져오기 위해 싸우는 많은 세력들이 모이고 협동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