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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 상상력이 미치는 영향력

 


  • 저자  : 존 러스킨(John Ruskin)
  • 원문 :  “Influence of Imagination on Architecture”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남영
  • 설명 : 아래는 존 러스킨의 『두 개의 길』(Two Paths, 1859)의 4강 ‘상상력이 건축에 미치는 영향력’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는 앞서 그 일부가 올라간 「『건축의 일곱 등불』해설」에서 상상력을 다룬 부분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다.  ‘상상력이 건축에 미치는 영향력’은 러스킨이 1857년 1월 23일 라이언즈인 홀(Lyon’s Inn Hall)[주석1]에서 건축협회 회원들에게 한 연설이다. (번역이 아니라 정리이므로 강조와 주석은 모두 정리자의 것이다.)

만일 누가 ‘위대한 예술가들이 군소 예술가들과 어떤 자질에서 다르냐’고 물어보면서 간단히 답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첫째 감수성과 다감함, 둘째 상상력, 셋째 근면이라고 답할 것이다. 근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게으른 똑똑이들이나 근면한 우둔이들을 봤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게으른 똑똑이들을 본 적은 있어도 게으른 위대한 사람은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고결한 작품들을 만들어낸 예술가들은 모두 위대한 일꾼들이다. 그들이 성취한 일의 양보다 더 놀라운 것은 없다. 그래서 나는 어떤 젊은이가 전도가 유망하다는 말을 들으면 그에 관한 첫 물음이 ‘일에 열심인가?’이다.

그러나 근면함이나 감수성이 예술가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별로 가치가 없으며, 많은 사람들이 강렬하고 고결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예술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예술가의 변별적 재능은 공감과 상상력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상상력을 새로운 것들을 우리의 사유 속에 상상하거나 그리는 능력으로 이해하며, 이 힘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존중심을 보이고, 기계조작·계산·관찰 등의 다른 능력보다 더 큰 힘으로 인정한다. 어떤 할머니가 난로가에서 물레를 능숙하게 잣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 기계조작 능력을 존경할 수 있고, 그 할머니가 그 일로 일 년에 얼마 벌지를 재빠르게 계산하는 것을 보고 그 계산능력을 존경할 수 있으며, 그러는 동안 손주들 가운데 난로불에 닿는 아이가 없도록 지켜보는 것을 보고는 그 관찰력을 존경할 수 있지만, 그 할머니는 여전히 평범한 할머니이다. 그러나 만일 그 할머니가 스스로 꾸며낸 동화를 내내 손주들에게 이야기해주는 모습을 본다면 우리는 그 상상력을 칭찬하면서 그 할머니가 상당히 남다른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바로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건축가가 시공도((施工圖)를 잘 그리면 우리는 그의 능숙함을 칭찬하고 계약한도를 잘 지키면 그의 정직한 산수능력을 칭찬하며 들보 놓는 일을 잘 지켜보아서 아무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면 그의 관찰력을 칭찬하지만, 그가 상상력으로 칭찬을 받고 남다른 건축가라고 평가를 받으려면 이 모든 것 이외에 그 자신의 머리로 창작한 동화를 우리에게 들려주어야 한다. 따라서 어떤 동화가 건축에 의해 창작되고 건축에서 들리는지를, 즉 건축이라는 엄밀한 예술에서 건축가 여러분의 손만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같이 생각해보자.

‘머리’로 작업을 하는 문제로서 젊은 건축가에게 처음 떠오르는 생각은 아마도 넓게는 근대 문명, 좁게는 영국에 값하는 ‘새로운 양식’을 발명할 책임이리라.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이런 책임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분들이 있다면, 다음과 같이 묻고 싶다. 모든 발명력 있는 건축가들이 각자 새로운 양식을 발명하도록 군(郡) 하나를 할당하고 실제 작업을 위해 주(州) 하나를 할당하는 것이 여러분의 계획인가? 모든 건축가가 새로운 양식의 작은 한 조각을 발명하고 마지막에 모든 조각들을 모아야 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양식은 언제 발명하고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런 상상의 엘도라도가 허용되었다고 치면, 한 명 이상의 콜럼부스가 있을 수 있는가? 우리가 욕망하는 양식이 발명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단지 그 양식 아래에서 짓는 것 아닌가? 나는 지금 다른 경우에는 내가 인정하지 않는,[주석2] 새 양식의 발명이 가능하다고 치고 말하고 있다. 심지어 이전에 사용하던 것과 전적으로 다른 새 양식을 발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치자. 주두를 기둥의 아래쪽에 놓는다고 치자. 버트레스를 피너클의 아래가 아니라 꼭대기에 놓는다고 치자. 개구부를 아치도 아니고 수평도 아닌 모양으로 씌운다고 치자. 곡선도 아니고 직선도 아닌 선들로 장식을 구성한다고 치자. 용광로와 대장간을 마음대로 사용하여 유리판을 뽑아내고 쇠막대를 뽑아내어 우리 주위를 온통 검은 골격과 눈부신 사각형의 광대한 풍경으로 둘러쌌다고 치자. 거리를 연성(延性)의 잎장식으로 장식하고 지붕을 다채로운 수정으로 씌운다고 치자. 런던 전체에 얼룩덜룩한 돔을 씌운다고 치자. 그 다음에는? 여러분의 상상력은 쇠 잎장식들의 그림자 아래에서 혹은 놀라운 돔의 다양한 빛 안에서 잠자고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여러분의 영혼과 상상과 야망은 전적으로 무한하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여러분은 여전히 스스로 무언가를 하고 싶을 것이다. 여러분은 팔라디오(Palladio)[주석3]나 팩스턴(Paxton)[주석4]에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녹인 모든 금속과 유리를 다 합해도 우리 인간 정신의 야망의 날개를 방해할 만큼의 무게가 되지 못한다.

어떤 양식의 본질은 그것이 오랜 세월 동안 실행되며 모든 목적에 적용된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어떤 양식이 실행 중인 한에서는 개인의 상상력이 달성할 수 있는 것이 그 양식의 범위 내에 있지 새로운 양식의 발명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솔즈베리 대성당을 지은 사람은 고딕 양식을 발명하지 않았어도 명성을 누렸으며 티치아노는 유화를 발명하지 않았어도 베네치아에서 명성을 누렸다. 그러면 일정한 양식 안에서 상상력이 발휘될 여지가 어떤 것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첫째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건축가의 발명력이 발휘되는 주요 분야가 선들, 몰딩들, 덩어리들을 보는 이의 기분을 좋게 하는 비율로 배치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특정의 양식을 선택했을 때, 이와 다른 식으로 발명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 이것을 제대로 하는 데에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다. 우아하게 비율이 잡힌 디자인의 재능은 규칙이나 연구로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건물 정면의 한 층일이지라도 타고난 직관에 의해서만 아름답게 배치될 수 있다. 싼미켈리(Michele Sanmicheli)[주석5], 이니고 존스(Inigo Jones)[주석6], 혹은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주석7]의 설계에서 보이는, 부분들의 가장 단순한 배치와 맞먹는 설계를 자신의 설계에서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를 자랑할 정당한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발명력과 재능을 전제로 하고 묻는 것인데) 특정 건물의 선들을 아름답게 배치했을 때 무엇이 성취된 것인가?

우선, 여러분은 그 성취된 아름다움이 감동적이거나 감상적인 종류라는 점을 말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음악은 여러분을 때로 울게 만들고 때로 웃게 만들 것이다. 음악은 병사에게 용기를 줄 수 있고 사랑에 빠진 연인에게 언어를 줄 수 있으며 애도자에게 위안을 줄 수 있고 즐거운 사람에게 더 많은 즐거움을 줄 수 있으며 독실한 사람에게 더 많은 겸허함을 줄 수 있다. 일군의 선들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그렇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건축물에서 보는 비율이 여러분을 감동시키거나 영감을 주거나 위안을 주지 못하더라도 즐겁게는 해주는가? 음악에서 음표들 사이의 비율은 여러분을 즐겁게 하는 데 필수적이다. 머리에 꽃을 꽂거나 옷에 리본을 두르는 것도 여러분을 감탄시키며 여러분의 행복에 필수적이다. 케익에 박힌 건포도들의 비율이나 과자에 박힌 설탕의 비율에 예민한 관심을 보이는 젊은이들이 있는데, 문의 아키트레이브[주두 위에 놓이는 상인방이나 들보]에 즐거움을 느끼는 젊은이를 본 적이 있는가? 혹은 몇 명을 수용할 수 있느냐와는 다른 각도에서 방의 비율에 관심을 가진 젊은이들은 본 적이 있는가? 만일 런던에서 최고의 비율을 가진 건축물이 줄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하룻저녁에 집중시킬 수 있고 여러분이 이 즐거운 엔터테인먼트 행사에 참가할 티켓을 무료로 발행한다면, 사람들은 이 행사에 참가할 것인가 아니면 드루리 레인[주석8] 팬터마임을 보러 갈 것인가?

여러분은 재능이 뛰어나고 자신의 예술에 매진하더라도 즐거움을 주거나 위안을 주거나 용기를 북돋거나 하지 못할 것이다. 과학도 즐거움을 주거나 위안을 주거나 용기를 북돋거나 하지 못한다. 그러나 과학은 여러분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줄 수 있다. 고결한 사실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고 땅과 공기의 비밀을 열어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건축물에서의 비율은 이런 일을 못 한다. 그저 2 더하기 2는 4이고, 1:2=3:6이라는 것을 가르칠 뿐이다.

그렇다면 건축가인 여러분은 위안을 주지도 못하고 즐겁게 해주지도 못하고 가르쳐주지도 못한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누구에게든 쓸모가 있는가?’라고 물으면 여러분은 ‘항상 비가 내리는 이런 기후에서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이 쓸모는 건물을 짓는 사람으로서의 쓸모이지 선들의 비율과는 무관하다. 우리는 우리를 보호해주는 것으로서의 건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재능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작업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다시 묻는다. 여러분이 설계한 정면에서의 선들의 비율이 병자를 낫게 하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는가? 여러분의 노년에 건축가로서의 성취라는 것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을까? 건축가로서의 여러분에게 누가 고마워할 것인가? 어쩌면 (걱정되는 일이지만) 건축물의 선들의 유령들이 노년의 여러분의 침대 옆에 아무 말 없이 흐릿하게 앉아있을 것이며, 여러분은 자신의 높은 재능의 모든 발현들을 목마른 사람에 준 찬물 한 잔에 대한 기억이 주는 즐거움보다 덜한 즐거움으로 되돌아볼지도 모른다.

여러분 위대한 작품들과 거기에 투입된 건축노동자들에게 준 큰 보상의 경우에는 즐거움을 갖고 뒤돌아보리라고 대답하지도 말고 대답하려고 생각하지도 말라. 나는 여러분이 건축자로서 그렇게 하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반복하건대 나는 여러분의 건물 짓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나는 여러분의 발명력과 상상력이 가진 이점(利點)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건물 짓기를 통해 행하는 좋은 일은 여러분이 고용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 여러분이 하는 일이 아니다. 여러분은 그 혜택주기에 동참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행해야 할 좋은 일은 여러분의 설계 작업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나는 여러분을,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들을 고용함으로써 좋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보다 감정을 표현하는 작곡에 의해서 좋은 일을 하는 음악가들에 비견한다. 바이올린 연주자들을 고용하는 것은 사실은 음악가들이 아니라 대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건축가들은 우리의 재능으로 어떤 좋은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이 하나의 물음을 명확하게 고수하면서 그리고 우리의 비율 시스템에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할 수는 없다는 점을 알게 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가를 말해주시겠는가?

법률가, 의사, 성직자, 과학자, 예술가, 일용노동자, 소상공인―무슨 분야든 그 유용함과 별개로 그와 연관된 어떤 강렬한 즐거움이 있다. 그런데 건축설계에는 그런 즐거움의 여정이 없다. 결론적으로 여러분은 누군가를/여러분 자신을 즐겁게 하거나, 누군가에게/여러분 자신에게 정보를 주거나 누군가를/여러분 자신을 돕거나 하지 못할 것이다. 그저 1:2=3:6이라는 것 말고는 보여주지도 느끼지도 보지도 못하는 상태로 빠진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는 우리를 뭐라 부를 것인가? 인간들? 내 생각에는 아니다. 우리를 부르는 올바른 이름은 분자와 분모이다. 속된 분수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건축의 영혼이 일정한 비율을 이루는 선들에 있다고 보는 이 이론보다 더 나은 것이 있는가?

정신도 건강하려면 모든 면에서 계발되어야 한다는 원칙에서 출발하자. 호기심, 공감력, 감탄하는 능력, 기지(機智) 등 정신에도 많은 능력들이 있다. 작업방식을 선택할 때에는 가능한 한 이 모든 능력들을 한껏 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발현하는 방식이란 각 능력의 대상에 주의깊게 관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공감력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존재들 사이에 있으면서 그들에 대해 생각해야 하고, 감탄 능력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것들 사이에 있으면서 그것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뻔한 것처럼 들린다. 나는 적어도 그러기를 바란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 원칙에 기반을 두어 행동하기를 거부하지 않고 더 나아가 살아있는 존재들과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어떻게 계속 생각할지를 숙고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미앵 대성당 포치의 사진들을 청중에게 보여준다.] 이 단 하나의 입구를 채우는 데 얼마나 많은 공감과 발휘되어 있는가? 주교가 되고 싶지 않았던 성 오노레(St. Honoré)가 한 구석에 샐쭉하게 앉아 있다. 그는 책을 손으로 꽉 껴안고 있으며 주교장을 잡으러 일어나려고 하지도 않는다. 아미앵의 시 장로들이 성오노레를 독려하고 읍의 모든 수도사들이 성오노레가 주교직에 앉지 않으면 어쩔지 난감해한다. 반대쪽에 있는 수도사들 가운데 하나는 성오노레 없이도 잘 될 것라고 태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마침내 성오노레는 주교가 되는 데 동의하고, 주교좌에 앉는다. 그의 무릎에 있던 책은 이제 당당하게 탁자 위에 있으며 그의 마을 부목사 가운데 하나에게 숲에서 유물을 찾는 방법을 알려준다. [손으로 가리키며] 여기가 숲이고 여기가 마을 부목사이며, 여기가 성 빅토리쿠스와 성 겐티아누스의 유해가 있는 무덤들이다.

[주교가 된 이후 성오노레의 일생, 생략]

이 하나의 얕은돋을새김에 담긴 인간에 대한 공감과 관찰의 양을 생각해보라. 이 다양한 형상들을 표현할 수 있기 위해서는 건축가에게 많은 지적 힘과 자연의 관찰이 필요했다.

여러분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이것은 조각이지 건축이 아니라고. 그럼 조각과 건축의 구분 지점이 어디인지 말해주기 바란다. 처음부터 시작해보자. 순수한 건축 작품으로 확실하게 인정되는 것을 보여주겠다. 여러분이 아마도 순수하지 않다고 할, 노트르담 대성당의 팀파눔들 중 하나의 사진 뒤에 그려져 있다. 이 사진을 보라. 웃지 마시라. 이것은 고전적 건축이므로 이를 보고 웃으면 무례한 것이다. 이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의 한 항목에서 가져온 것이다.

‘순수’하지만 별로 좋게 느껴지지 않으므로 여기에 몰딩 몇 개를 넣어보는 게 어떨까? 모두 찬성인 듯하다. 몰딩의 단면도를 설계할 것인가 베낄 것인가? 설계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몰딩의 단면도를 그리는 것보다 그것을 깎아서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그런데 ‘건축은 쉬운 것을 하고 조각은 어려운 것을 한다’는 점이 건축과 조각 사이의 차이의 정의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깎아 만든 몰딩은 아무 것도 재현하지 않으며, 깎아 만든 드레이퍼리는 무언가를 재현한다. 그러나 이것도 또한 건축과 조각 사이의 차이에 대한 설명으로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조각은 의미를 가지는 예술이지만 건축은 의미를 갖지 않는 예술이다‘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양자의 차이를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면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여러분은 아마 우리가 직접 지시하고 정확하게 주문한 대로 깎아내게 하는 모든 장식을 ‘건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세공인의 의지나 어떤 다른 설계자의 감독에 맡길 수밖에 없는 장식들은―특히 건물의 필수적 부분이 아니고 다소 외적이거나 외장형인 경우―‘조각적’인 것으로 간주한다고 답할지 모르겠다.

나는 이 정의를 받아들이면서, 이것은 사실 맨 처음 나온 정의―쉬운 것은 모두 건축이고 어려운 것은 모두 조각이다―의 증폭일 뿐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조각이 놓일 자리의 배치는 설계에서 조각 자체만큼이나 어렵거나 큰 부분은 아니기 때문이다. 피사 대성당 세례당에 있는 니콜로 피사노의 설교단의 사례를 보자. 대리석 기둥몸체에 의해 받쳐진, 패널 몰딩으로 둘러싼 일곱 개의 풍성한 돋을새김. 니콜로의 높은 평판은 패널 몰딩 때문인가 돋을새김 때문인가? 패널 몰딩은 니콜로가 직접 제작한 것이다. 그는 이것조차 보통의 세공인에게 맡기기를 싫어했을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거나 그 안에 어떤 명예가 있어서는 아닐 것이다. 일단 조각을 했으니 그것을 감싸는 윤곽선들은 그에게는 아이들 장난과 같았을 것이다. 기둥몸체의 지름과 주두의 높이의 결정은 몇 분이면 되는 문제였다. 그의 일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Crucifixion)와 <세례>(Baptism)을 조각하는 것이었다.

피렌체의 오르싼미켈레 성당에 있는 오르카냐의 감실(龕室). 풍성하고 다채로운 얕은돋을새김이 패널 몰딩에 감싸여있고 모자이크된 기둥몸체들이 그것을 받치고 있으며 잎장식이 있는 아치들이 캐노피를 받치고 있다. 오르카냐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가 그의 명성을 잎장식에 맡긴다고 했을까, 아니면 자신의 영혼의 자부심을 패널링에 둔다고 했을까? 아니다, 그는 죽어가는 성모의 침상 주위에 고개를 숙이고 둘러서 있는 형상들에 있다고 말할 것이다.

[마지막 사례] 아미앵 대성당의 입구에 설계된 행렬은 대가의 손에 의한 것이다. 여기가 대가의 사유의 중심이다. 이 중심에 맞추어 아치가 굴곡을 이루고 피너클이 솟아오른다. 이 일을 했고 돌에 인간의 표정과 행동을 부여할 수 있으면 나머지 모두―늑재, 벽감, 잎장식, 기둥―는 단지 그의 손 장난감들이요 그의 구상의 액세서리들일 뿐이리라. 여러분이 이것을 하는 재능을 일단 얻게 되 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발명력이 가능하게 하는 한) 여름 비가 내린 이후 시냇물들에서 구름이 솟아오르듯 영국 전역에 성당들을 흩뿌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조각가들은 현재 성당을 설계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고 여러분은 아마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는 단지, 우리가 건축을 너무나도 지루하게 만들어서 사람들이 흥미를 느낄 수가 없고 따라서 우리가 조각가들의 높은 지식에 건물 짓기의 초라하고 평범한 지식을 추가하려고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여러분은 조각을 건물 짓기로부터 분리했고 양자의 힘을 박탈한 셈이다. 조각가가 연속적인 작업을 펼칠 공간이 없으면, 건축가인 여러분이 여러분의 작업을 기계적 작업의 연속으로 환원함으로써 잃게 되는 만큼 많은 것을 잃기 때문이다. 건축가와 조각가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집단에 속하고 또 그렇게 속해야 한다. 화가의 경우에 보이는, 때로는 작은 그림을 그리고 때로는 궁전 회랑의 프레스코화를 그리는 작업상의 차이와 같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결론은 이렇다. 상상력을 비롯한 영혼의 능력들을 온전하게 발휘하게 하려면 여러분은 과거의 위대한 건축가들이 했던 것처럼 해야 한다. 즉 여러분 자신이 조각가가 되어야 한다. 페이디아스, 미켈란젤로, 오르카냐, 피사노, 조토—이 가운데 누가 정을 사용할 수 없는 사람이던가? 여러분은 ‘어려운 일이다, 불가능하다’라고 말할 것이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위대한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여러분은 조각 없이 건물 짓기를 연구하는 한 위대한 것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위대한 것을 만나도록 해주고 싶고, 여러분이 그 만나는 길을 찾았으면 한다. 완전한 조각의 세련된 예술이 항상 여러분에게 요구된다는 마음으로, 행해야 할 과제에서 움츠러들지 말라. 건축과 조각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지만, 건축적 방식의 조각이 따로 있다. 이는 대부분의 경우 비교적 쉬운 것이다. 적어도 돌을 다루는 데서 현재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큰 잘못은, 모든 작품이 과도하게 세련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책의 모든 삽화를 라파엘로의 삽화처럼 세련되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여러분은 존 리치(John Leech)[주석9]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만큼 드로잉을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로 직선을 긋거나 콤파스로 원을 그리는 일만 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각을 디자인하는 여러분의 힘과 관련해서도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은 페이디아스처럼 조각할 수 없다고 느낄 것이다. 그래서 조각은 아예 하지 않고 몰딩만 도안할 것이다. 이렇게 현대에 특히 가치 있는 모든 중급의 힘이, 수천 명이 획득할 수 있고 수만 명이 도전해 볼 수 있는 저 대중적인 표현의 힘이 돌과 관련해서는 사라진 상태이다. 비록 잉크와 펜으로 글을 쓰는 데서는 중급의 힘이 가장 중요한 엔진들이 되었고 현대 문명의 가장 바람직한 호사 가운데 하나가 되었지만 말이다.

건축적 방식의 조각은 한편으로 완벽한 조각과 구별되고 다른 한편으로 단순한 기하학적 장식과 구분된다.

멀리서 보는 세공품은 매우 정밀하게 조각할 수 있어도 저 위에 놓이는 순간 소용이 없게 된다. 그런데 아름다움이 멀리 물러남으로써 사라지는 반면에 흠들도 사라진다. 거리(距離)의 자연적 귀결인 이 신비와 혼란은 최고의 솜씨를 헛되게 만들기도 하지만 종종은 최악의 오류를 별 것 아닌 것으로 만들기도 할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깊은 절개나 거친 모서리가 어떤 곳들에서는 결코 바라지 못했던 놀랍고도 진실한 표현 효과를 낳을 것이다. 작품에 무언가가 없는데도 거리만으로 이렇게 된다는 말이 아니다. 만일 그 안에 생명력(life)이 있다면, 거리가 처리과정의 결함들을 완화시킴으로써 그 생명력을 더 지각 가능하고 더 강력하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특이한 이점을 얻게 된다. 즉 상상이 마음껏 발휘되게 할 수 있고 원하는 표현을 위해―혹시 잘못 두드리더라도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는 알기에―세게 두드릴 수 있는 것이다. 손을 대기만 하면 자연이 도울 것이며, 그림자와 햇빛이 변할 때마다 여러분의 상상의 새로운 국면들이 드러날 것이다.

런데 건축적 방식의 조각에 속하는 것은 이러한 불완전함의 특권만이 아니다. 상상력이라는 진정한 특권이 있다. 이는 더 완성된 작품―이것을 나는 구분을 위해서 ‘가구 조각’(furniture sculpture)이라고 부르겠다―에 부여되는 모든 것을 훨씬 능가한다. (가구 조각이란 방들을 장식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이동할 수 있는 조각을 말한다.)

가구 조각은 보는 이가 보통 조용하거나 평범한 상태에서 접하게 된다. 그는 그것을 고결한 것과 연관된 것으로 보기보다 사치스러운 것과 연관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의 호기심보다는 안락함에 호소하는 상황에서 본다. 식탁 주변에서 하인들이 들락날락 하는 가운데 보았을 때 애처로운 느낌을 주게 되는 조각상은 그 안에 강한 파토스를 가졌음에 틀림없으리라. 그리고 응접실의 대화 가운데 경외스러운 느낌을 주어야 할 조각상은 전적으로 그 안에 경외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으리라. 그러나 건축물의 조각을 보는 이는 이미 흥분되고 상상력에 찬 상태에서 작품을 접하게 된다. 그는 포치의 조각을 보기 전에 낮은 거리를 저 위에서 내려다보는 성당 벽에 큰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신비에 대한 그의 사랑이 클로이스터의 고요함과 음영에 의해 발동된 상황에서 볼팅(vaulting, 아치형 천장) 위의 양각들을 판독하게 된다. 그래서 그가 여러분이 한 것들을 일단 관찰하기 시작하면, 그는 여러분이 그의 이 상상력에 찬 기분에 맞추는 것보다 더 나은 것, 더 친절한 것을 여러분에게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즉 여러분이 (주변 장면의 신비와 장엄함이 유발한) 공포감을 더 촉진하거나 희한한 것들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것보다 더 나은 것, 더 친절한 것을 여러분에게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이 형태들을 덜 선명한 채로 남겨두거나 기이한 공상을 그로테스크한 형태나 음영으로 구현하거나 한 것이 대체로 관찰자의 기분에 상응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여러분의 결함들을 발견하는 데 자신의 판단력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기꺼이 여러분이 의미한 바를 돕는 데 자신의 상상을 사용할 것이다.

상상력과 감정이 강하게 촉발되면 기이한 것들을 동반할 뿐만 아니라 고요한 시간에 그야말로 미지의 즐거움을 갖고 미세한 것들도 들여다보게 할 것이다. 감정이 강하게 촉발되면 가시적인 대상들의 모든 세부들이 여러분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기묘한 강렬함과 집요함을 가지고 제시될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정신을 재촉하고 눈을 압박할 것이다. 상상력이 강하게 자극될 때마다 감각이 이 상태에 어느정도 들어선다. 다른 때에는 사소한 것들이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위엄 혹은 의미심장성을 띠는 것이다. 열띤 자극에 의해 활성화된 주의력은 세부의 가장 미세한 상황들과 작품에 구현된 의도의 가장 희미한 흔적들에 집중된다. 그래서 다른 경우라면 조각 작품에서 다소 저급하고 외적인 것으로 느껴질 것, 그리고 완벽한 취향이나 비판적 판단에는 틀림없이 불쾌하게 느껴질 것이 이 각성된 상상력의 탐구성, 주의력과 만나게 되면 기분 좋은 것이 되고 심지어 고결해진다. 이는 모두 여러분에게 유리한 것이다. 여러분의 조각 작업의 시초에는 단순한 형태들의 해부학적 구조나 고결한 덩어리들의 흐름을 완벽하게 하는 것보다 의상이나 성격의 세밀한 상황들을 모방하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세 가지 점, 즉 ① 여러분이 완벽하게 할 수 없는 미점(美點), 여러분이 획득할 수 없는 단순성은 혹시 그것을 성취할 수 있더라도 열정적인 상상의 성급한 호기심에 호소하는 데에서는 대체로 소용이 없다는 점, 그러나 ② 여러분의 앎에는 주어지지 않을 공감이 여러분의 순진함에는 부여되리라는 점, 그리고 ③ 일반적인 관찰자의 정신은 해부학적 구조의 정확함이나 제스처의 올바름에 의해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지라도 여러분이 머리카락을 조각하고 의상의 패턴을 조각할 때 즐겁게 공명하여 여러분을 좇을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격려가 될 것이다.

더 나아가보자. 큰 규모의 건축물의 특성들이 연합하여 상상의 힘을 촉발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장식이 종속되어야 할 건축적 법칙들이 그 장식의 창의력을 자극한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조각 작품을 그 꼭대기에 새길 모든 크로켓, 장식해넣을 모든 잎장식들이 보는 이의 상상에 예쁜 사물들로서만이 아니라 문제적 사물로서도 제시된다. 거기에는 여러분이 보여주고 싶은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여러분이 충족해야 했던 필요도 담겨 있음을 여러분은 즉각적으로 안다. 이러저러한 공간을 어떤 가능한 방식으로 유기적 형태로 채울 것인가, 아니면 이러저러한 돋을새김이나 이랑진 부분을 어떻게 생명력(활력)의 이해 가능한 이미지로 전환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즉시 즐거움의 문제인 동시에 감탄의 문제가 된다. 추한 난쟁이와 못생긴 도깨비가 구석에 모이기만 하면 되거나 웅크려 가치발을 지탱하기만 하면 된다면 형태•제스처•특성에서의 완벽함이라는 통상적인 조건들은 기꺼이 생략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종류의 작업에서라면 부분들의 완성에 필요할 기술이 건축 조각에서는 결핍되더라도 즉시 용서받을 것이다. 여러분이 거칠게 구현한 것을 창의력 있게 배열해서 손의 투박함을 기지의 명민함으로 보완했다면 말이다.

지금까지는 상상력이 펼쳐지기에 유리한 건축의 상황만을 고찰했다. 더 중요한 점은 상상의 모든 대상들이 차지하는 위치인 듯하다.

상상력은 그것이 다루는 재료의 양에 비례하여 왕성할 것이 틀림없으므로 우리가 보는 것의 범위를 넓히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의 풍부함도 그에 비례하여 증가한다. 그렇다면, 건축이 허용하는 소재에서 여러분의 상상에 열릴 장이 어떨지 생각해보라. 거의 모든 다른 예술은 그 소재가 엄하게 한정되어 있다. 가령 풍경화가는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들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하고, 역사화가는 야생의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들로부터 도움을 이보다 덜 얻으며, 순수 조각가는 일상적인 삶으로부터의 도움을 이보다 훨씬 덜 얻는다. 눈으로 보는 것이든 구상하는 것이든 건축에 유용하지 않을 것 혹은 그에 대한 관심이 건축에 이점이 되도록 자극되지 않을 것이 있는가? 천사들에 대한 비전에서부터 중요성이 가장 덜한 노는 아이의 제스처에 이르기까지, 신성(神性)의 어떤 측면이든 인간성의 어떤 측면이든 건축가에 의해 과감하게 채택될 수 있다. 너무 방대하거나 미세해서 다루지 못하거나 이용하지 못할 동물은 동물계 어디에도 없다. 사자와 악어가 기둥몸체에서 웅크리고 있을 수 있고, 나방과 꿀벌이 꽃들 위에서 햇볕을 쬘 수 있으며 새끼사슴이 뛰고 달팽이가 기어가며 비둘기가 가슴털을 고르고 솔개가 남쪽을 향해 날개를 펼 것이다. 식물계도 건축가를 위해 개화하고 덩굴손을 뻗어간다. 잎들이 몸을 떨어 여러분은 대리석의 눈[雪] 아래에서 조용히 있기를 잎들에게 명하며, 땅이 악처럼 내보내는 가시와 엉겅퀴도 여러분에게는 가장 친절한 하인들이다. 죽어가는 꽃잎이나 시들어가는 덩굴손 가운데 너무나도 나약해서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은 없다. 개화의 오만도 왕의 지위를 내려놓고 여러분의 손에서 희미한 불멸성을 받아들인다. 보통의 삶에서 여러분의 손길에 의해 고결해지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저열한 것이 있는가? 보통의 사물에서 여러분의 손길에 의해 고결해지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사소한 것이 있는가? 생명이 있는 것 가운데 여러분에게 가르침 혹은 선물을 주지 않는 것이 없듯이, 생명이 없는 것 가운데에도 여러분에게 가르침 혹은 선물을 주지 않는 것은 없다. 깃털의 힘이나 잎의 연함을 지켜보는 데 싫증이 나면 거친 강변이나 거리의 가장 붐비는 시장들로 걸어가 볼 수도 있다. 잘린 끈조각이라도 꼬아서 완벽한 몰딩으로 만들지 못할 것은 없으며, 내다 버린 돗자리 조각이나 부서진 바구니 가운데 줄무늬나 주두로 만들지 못할 것도 없다. 그렇다. 모래를 모으고 밟고 있는 돌을 깬다면 그 조각들 가운데 거의 보이지 않는 것들에서도 여러분의 볼팅의 별모양 트레이서리들에서 어엿하게 한 자리 차지할 형태들을 발견할 것이다. 산 정상에 요새를 세우고 도시에 탑을 지을 수 있는 여러분은 이렇듯 타고 남은 재에도 아름다움을 부여할 수 있고 먼지도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다.

이렇게 여러분의 예술이 이 모든 재료를 여러분에게 제시한다는 점에서 여러분은 이미 즐거워할 것이 많다. 그러나 즐거워할 것이 더 있다. 이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제공되기는 하지만 해부되거나 분석될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공감의 대상으로서, 따라서 상상력의 도덕적 부분을 발현하기 위해서 제공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線)에만 국한한다면 우리는 자연 연구자를 부러워할 이유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는 사실들에 능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의 사실들로부터 생기는 감정들에 능통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부러워할 것이 거의 없게 된다. 가령 대리석 덩어리를 보고 자연 연구자는 그 덩어리의 자주색이 어느 정도로 철분으로 인한 것이고 그 흰색이 어느 정도로 산화 마그네슘으로 인한 것인지 즉각적으로 숙고하는 데 돌입해야 한다. 그는 대리석 조각을 부수며 하루가 저물 때에는 그의 도가니에 돌가루 조금과 원소들에 대한 이론에 추가된 일정한 데이터 말고는 남는 것이 없게 된다. 그러나 여러분은 공감하기 위해서 대리석에 접근하며 그 아름다움에 즐거워한다. 절개를 좀 하지만 그 맥을 더 완전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하루의 일이 끝날 때 여러분은 기쁨과 만족감을 갖고 대리석 기둥을 대리석으로서 완벽한 상태에 둔다. 돌 대신에 동물들을 지켜볼 때에도 여러분은 마찬가지 방식으로 자연 연구자와 다르다. 그는 아마도 (만일 그가 상냥한 사람이라면) 그의 주위에 살아있는 동물들이 많은 것에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업의 주된 부분은 깃털을 세고 조직을 분리하고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의 작업은 항상 살아있는 존재와 관련된다. 그 존재의 삶에서 여러분이 포착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의 생명력과 행동방식들이다. 그것의 뼈에 세포가 몇 개 있는지, 그것의 깃털에 가는 끈들이 몇 개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그것의 도덕적 성격과 그것이 행동하는 방식이다. 이는 여러분의 상상력이 건강하면 맨 먼저 포착하게 될 바로 그것이며 여러분의 정(chisel)이 강건하다면 맨 먼저 깎아 만들 바로 그것이다. 여러분은 폭풍의 기세를 독수리들에 담아 넣고 영주의 위엄을 사자들에게 담아넣으며 경계하는 두려움을 새끼사슴들에게 담아 넣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새끼사슴들과 계속적으로 공감해야 하고 사자와 손과 장갑의 관계가 되어야 하며, 모든 솔개들과 손과 발톱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하등동물들과 공감한다고 해서 여러분을 낮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등동물들과 공감하지 못하면 고등한 존재들과도 제대로 공감하지 못한다. 여러분은 여왕들, 왕들, 순교자들, 천사들 등 고등한 존재들과도 공감해야 한다.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박한 인류의 모든 욕구 및 방식들과 공감해야 한다. 거리에서 여러분을 서둘러 지나치는 얼굴 가운데 인상적이지 않은 얼굴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그 인상의 깊이를 측량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모든 역사가 여러분에게 열려있고, 인간의 과거의 운명들이 시사하는 모든 높은 사상들과 꿈들이 여러분에게 열려 있다. 모든 요정의 땅이 여러분에게 열려 있다. 숲에 출몰했거나 언덕 위에 힐긋 나타났던 비전 가운데 어떻게 그것이 인간들의 마음에 들어왔고 여전히 그 마음을 건들 수 있는지를 이해하도록 권하지 않는 비전은 없다. 그리고 모든 낙원이 여러분에게 열려 있다. 그리고 낙원의 작업도 여러분에게 열려있다. 이 모든 것을 영속적이고 매력적인 진실의 형태로 여러분의 동포들의 눈앞에 가져올 때 여러분은 천사들의 무리를 상상할 뿐만이 아니라 천사들의 일에 합류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측면에서 여러분의 작업에 얼마나 독특한 중요성과 책임이 주어져 있는지를 명심하라. 그 영속성과 그것이 향해져 있는 다중을 생각해볼 때 말이다. 우리는 종종 현명한 사람들 덕분에, 소수가 듣고 듣자마자 잊힐 단어들에 때로 부여될 수 있는 책임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여러분의 단어들[건축물들]은 여러분이 잘 짓는다면 그 어떤 것도 소수가 듣지 않을 것이며, 500-600년 동안은 잊히지도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지나가는 모든 이에게 말할 것이며, 저 모든 조그만 공감들, 기발한 공상, 돌로 하는 농담들, 변덕 속에서의 문제 해결은 여러분이 사라진 후에도 수많은 다중의 정신을 차례차례로 사로잡을 것이다. 여러분은 책의 저자들처럼 듣기를 청할 필요가 없으며 망각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그저 충분히 크게 짓고, 충분히 대담하게 깎으라. 그러면 모든 세상이 여러분의 말을 들을 것이다. 그들은 볼 수밖에 없다.

내 의도는 이런 생각으로 여러분을 두렵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에게 아주 많은 목격자들과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결코 익살을 부리지 않을 것이고 어떤 것을 즐겁게 하지 않거나 경쾌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반대로 나는 처음부터 여러분의 이러한 예술을, 특히 그것이 여러분의 성격의 전체를 담을 여지가 있기 때문에, 청했다. 만일 익살이 여러분 속에 있다면 익살을 부리라. 수학적 재능이 여러분에게 있다면 문제를 설정하고 원하는 만큼 진지하게 해를 찾으라.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작품이 쉽고 행복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라. 그렇지 않다면 다른 누구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여러분의 충동들에 몸을 맡길 때 하나의 고결한 충동이 중심이 되어 그 충동들을 이끌도록 하라. 3중의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① 여러분이 행하는 예술을 사랑하라. ② 여러분의 창작활동을 사랑하라. ③ 여러분이 자신의 작업을 바치는 존재들을 사랑하라.

첫째로 자신이 행하는 예술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 말고 다른 동기가 여러분의 머리에서 주된 것이 되면 그 순간 여러분의 예술은 끝난 것이다. 돈. 명성, 지위를 욕망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여러분은 이 셋을 욕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러분은 이 셋을 사랑할 수 있고, 열정적으로 탐할 수 있다. 그러나 맨 앞에 내세워서 탐하고 사랑해서는 안 된다. 강한 열정과 상상력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무언가를 좋아하면 많이 좋아하게 마련이다. 문제는 첫째냐, 둘째냐이다. 예술이 여러분을 이끄는가, 이득이 여러분을 이끄는가? 여러분은 돈 버는 것을 극히 좋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일로 500 파운드를 덜 벌 것이냐 아니면 여러분의 건물 짓기를 망칠 것이냐라는 물음에 이르게 되고, 건물 짓기를 망치는 쪽을 택하게 되면, 여러분은 끝난 것이다. 여러분은 귀뚜라미가 크림을 갈망하듯이 명성을 갈망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을 즐겁게 할 것인가 아니면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대로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이르고 둘 다 할 수는 없어서 대중을 즐겁게 하는 쪽을 택하면 여러분은 끝난 것이다. 여러분에게 희망은 없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지나가는 사람의 일별을 받을 가치가 없을 것이다. 이 시금석은 절대적이고 불가피하다. 예술이 여러분에게 첫째가는 것인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술가이다. 여러분은 돈을 번 후에 구두쇠가 될 수도 있고 고리대금업자가 될 수도 있다. 명성을 얻은 후에 시기심을 갖게 되고 오만함을 갖게 되고 저열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도 그런 여러분이 여러분의 작업을 망치려하지 않는 한 여러분은 예술가이다. 반면에 돈이나 명성이 여러분에게 첫째가는 것이라면, 여러분이 돈으로 관대하게 베풀고 돈을 근사하게 쓰며 자신의 평판을 매우 우아하게 누리는 사람일지라도, 또한 여러분의 아랫사람들에게 매우 공손하며 여러분의 윗사람들에게 매우 마음에 드는 사람일지라도, 여러분은 예술가가 아니다. 여러분은 기계공이고 허드렛일 하는 사람이다.

둘째로 자신의 창작활동을 사랑해야 한다. 여러분이 선택한 주제에 여러분이 투여하는 감정의 강렬함에 그 주제의 성격에 대한 여러분의 인식의 깊이와 정당함이 전적으로 비례할 것이기 때문이다. 감정의 이 깊이는 여러분이 그 감정을 이러저러한 것에 관련시킬 때 즉각적으로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올바르게 느끼려고 노력하는 전반적 습관의 결과이다. 이것을 하도록 돕는 수천 개의 다양한 수단 가운데 내가 특별하게 여러분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은 ‘사소하게 신경 쓰이는 것들을 멀리 하라’이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안달하지 말고 머리를 사소한 분함들과 욕망들로 채우지 말라. 나는 막, 여러분이 위대한 예술가이면서도 구두쇠이고 시기심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일들에 골치가 아플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골치 아픈 것들이 하루 종일 여러분의 머릿속에 있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이 돈을 모으는 습관이 생겼을 수도 있고 경쟁자에 대해서 부당하게 말하고 싶은 유혹에 굴복할 수도 있다. 이런 것으로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힘을 감소시키고 여러분의 시야를 흐릴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무의식적 습관들이나 일시적인 실추보다 훨씬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은 사소한 감정들의 항상성이다. 아무개가 여러분의 작품을 과연 좋아할 것인지 걱정하는 것, 조수에게 시킨 일을 조수가 잘 할지에 대한 걱정 등. 그 자체로 잘못된 감정이나 걱정이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의 상상력의 온전한 발휘에 부적절하고 그것과 전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감정이나 걱정이 문제이다.

따라서 눈을 뜨고 마음의 평정을 가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아무개가 여러분의 작품을 좋아할까가 아니다. 저기 저 새가 둥지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혹은 저 방랑아 아이가 거리의 구석에서 어떻게 공기놀이를 하고 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여러분이 여러분의 관심사에서 새들과 아이들의 관심사로 이동하려면 새들과 아이들을 사랑하고 지켜보는 습관을 오래 전부터 들였어야 한다. 그래서 마침내 여러분 자신을 잊고 여러분 자신을 벗어나서 세상의 평온 속에서, 혹은 세상의 떠들석함 속에서 살고 있어야 한다. 여러분에게 어떤 고결한 감정을 가져다줄 수 있는 영향력에 자신을 맡기는 것을 시간낭비라고 생각하지 말라. 일찍 일어나서 항상 일출을 보고 여명에 구름들이 부서지는 모습을 보라. 구름의 움직임과 아침이 입는 자줏빛 옷에 대한 기억이 여러분에게 남아있으면 여러분은 자신의 조각상의 드레이퍼리들을 보통 때와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구현할 것이다. 항상 나라의 봄철에 살라. 잎눈들이 트고 어린잎들이 햇빛에 낮게 숨쉬고 첫 비에 경이로워하는 모습을 보기 전에는 잎 형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분은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 형태에 들어있는 제스처의 모든 고결함과 특징을 찾는 습관을 들이라. 그리고 기억하라. 최고의 고결함은 보통 나이든 이들,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에게 있다는 점을. 여러분은 마침내, 여러분에게 최고의 연구 대상은 군인의 강한 팔이 아니요 젊은 미인의 웃음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들을 보라. 그들을 경건하게 보라. 그러나 감내가 힘보다 고결하며, 인내가 아름다움보다 고결함을 확신하라. 교회 입구에서 천사들의 날개 사이에 있기에 가장 알맞은 얼굴들을 여러분은 화려한 옷들이 있는 고교회(the high church) 신도석들이 아니라 과부의 상복이 있는 교회의 자유석들에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러분이 자신의 작업을 바치는 존재들을, 여러분의 동포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들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게 될 뿐만이 아니라. 인간을 바라볼 때마다 표정이 아니라 외관에만 주의를 기울이기 쉬울 것이다. 우느라고 움푹 들어간 검은 눈과 세상의 역경이 에워싼 저 굳은 얼굴들의 창백함에 들어있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해줄 것은, 그 얼굴들이 인내 속에서 황혼 속에 죽어가는 횃불처럼 빛나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줄 것은 오직 친절함과 다정함이다. 그러나 친절하기도 해야 할 필요가 있게 만드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여러분의 예술의 본성 바로 그것에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이유가 들어있다. 크게 짓고, 고결한 조각(sculpture)을 추가하고자 하면 협동적 작업이 되어야 한다. 여러분은 혼자서 성당 전체를 지을 수 없다. 그 몇 안 되는 단순한 부분들만을 조각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럴 경우 여러분 자신의 작업이 주변의 열등한 작업과 한데 엮여 창피를 당하지 않으려면 동료 설계자들의 힘을 서로 상응할 정도로 높여야 한다. 여러분에게 재능이 있다면 여러분 자신이 설계한 건물 짓기에서 앞장서는 위치에 설 것이다. 여러분은 그 포치의 장식들을 조각하고 그 배치를 이끌 것이다. 그러나 그 세부의 차후의 모든 진행에 대해서는 다른 이들의 실행력과 발명력에 맡겨야 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꾼들이 가진 모든 능력들을 억눌러서 여러분에게 종속시킬 수도 있고, 여러분과 경합할 수 있는 힘들을 발견하는 것을 즐거워하며 한 사람, 두 사람 여러분의 상상과의 동료관계로 그리고 여러분의 명성과의 연합관계로 이끄는 것을 즐거워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냐는 여러분에게 달려있다.

여러분이 전자를 행한다면, 여러분은 망한다. 자신의 예술과 창작 작업을 여러분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신의 번영만을 추구하고 자신의 솜씨만을 생각하고 싶어한다는 것이, 불길하게도 그리고 분명히 거기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질투심이 전혀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질투심이 전혀 없는 것은 인간에게는 드문 일이다. 여러분이 어느 날 아직 경험도 없고 입증도 안 된 어떤 젊은이가 여러분으로서는 몇 년 동안 훈련을 해도 도달하지 못한 손놀림을 그의 작품에 가하는 것을 보고 안 좋은 마음으로 귀가하더라도 여러분은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의 질투심이 여러분을 정복해서는 안 된다. 건물 짓기에 대한 사랑이 여러분의 친절한 마음의 도움을 받아서 정복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높거나 어려운 기준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여러분이 단지 이타적인 관용의 마음에서 여러분의 탁월함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친절함의 도움을 받아서 건물 짓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여러분의 탁월함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보다 건물을 더 잘 장식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라도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리고 첫째로 그의 정 아래에서 건물이 더 아름답게 올라가는 것을 보는 데서 느끼는 기쁨에서, 둘째로 친절하고 정당하게 행동했다는 생각에서 위안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여러분이 친절함과 정당함을 첫째 동기로 삼을 만큼 충분히 도덕적으로 강하다면 더 좋을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그것을 아예 친절함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저 엄격한 정당함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그런 도움이 서로에게 빚이며 아랫사람에게서 우월성이나 능력을 알아보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거나 돕지 않는 사람은 친절을 베풀지 않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해를 입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 동기가 무엇이든 그 일을 하도록 하라. 그리고 여러분의 예술이 ① 다른 예술들보다 더 넓은 영역을 포함하고 ② 다른 예술보다 더 방대한 다중에게로 향한다는 생각, 그리하여 모든 다른 것들과 더 심오하고 거룩한 동지관계를 맺는다는 생각에서 기쁨을 취하라. 예술가는 자신의 학생이 완벽할 때 자신의 곁을 떠나서 그의 고유한 (아마도 자신과 맞서는) 솜씨를 천명하도록 해야 한다. 과학자들은 발견의 우선성을 두고 서로 씨름하며 질투 어린 조급함의 고통에서 자신의 고독한 연구를 수행한다. 여러분만이 친절함, 필요, 동등함에 의해서 노고의 우애관계로 초청받는다. 그리하여 우리의 고대의 도시들의 주택 지붕들 위로 솟은 저 아득하고 거대한 대건축물들에는 우리가 상상을 통해 그토록 흔하게 부여해왔던 것보다 더 심오하고 진실한 의미가 들어있었다(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 사람들은 피너클들이 하늘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물론 돋아나는 모든 나무도 그렇고. 노래하며 솟아오르는 모든 새도 그렇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아일이 경배하기에 좋다고 말한다. 물론 산 속의 모든 골짜기도 그렇고 거친 해변도 그렇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점이 뚜렷하게 다르고 논박 불가능한 영광으로서 사람들에게 존재한다. 그들의 강력한 벽들은 약한 가운데 서로 사랑하고 돕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지어졌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이다. 볼팅을 이루는 돌처럼 서로 엮이는 그들의 힘은 인간의 협력이라는 더 강한 아치들 위에 세워져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낮은 혹은 높은 피너클들처럼 서로 다른 그들의 품위는 인간 영혼의 더 달콤한 대칭관계에 그 리듬과 완벽함을 빚지고 있다는 점이다.

[주석]

  1. 라이언즈인(Lyon’s Inn)은 영국의 4대 법조원(Inns of Court) 가운데 하나인 이너 템플(Inner Temple)에 딸린 기관인 ‘Inns of Chancery’ 가운데 하나로서, 1863년에 해체되고 그 건물이 철거되었다. ‘Inns of Chancery’는 원래 법조원들에 딸린 건물들과 기관들로서 형평법원(chancery)의 서기들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는데, 나중에 성격이 변하여 사무변호사들(solicitors)의 사무실과 편의시설인 동시에 소송변호사들(barristers)을 양성하는 연수원이 되었다. 이 소송변호사 연수 업무는 1642년 사라졌으며 사무변호사들을 위한 협회와 사무실들로 전용(專用)되었다.
  2. 러스킨은 일반적으로 새로운 양식의 발명을 추천하지 않는다. 한 개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3. 팔라디오(Andrea Palladio, 1508–1580)는 이탈리아 르네쌍스 시대에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활동한 건축가이다.
  4. 존 팩스턴(Sir Joseph Paxton, 1803–1865)는 영국의 원예가, 건축가, 엔지니어이자 의회 의원으로서 수정궁(the Crystal Palace)을 설계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수정궁은 1851년 만국박람회가 열린 곳이다.
  5. 싼미켈리(1484-1559)는 이탈리아의 건축가이자 도시계획가로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시민이었다.
  6. 이니고 존스(1573–1652)는 영국의 건축가로서 비르투비우스[고대 로마의 건축가]의 비율 및 대칭 규칙들을 처음으로 자신의 건물들에 도입했다.
  7. 크리스토퍼 렌(1632-1723)은 영국의 건축가, 천문학자, 수학자이다. 바로크 양식의 건축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의 대표작은 세인트 폴 대성당이다.
  8. 런던의 드루리 레인(Drury lane)에는 유명한 극장들이 있다.
  9. 존 리치(1817–1864)는 영국의 희화화가이자 삽화가이다.

 




건축의 일곱 등불

 


  • 저자  :  정남영
  • 분류 :  번역서 해설
  • 설명 : 최근에 부북스에서 출간된 번역서 『건축의 일곱 등불』(존 러스킨 지음)에 붙인 해설 가운데 1절과 4절을 여기 올린다. 여기서 해설자는 번역서의 내용을 직접 다룬 부분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틀을 제시한다.  주석 번호는 책에서의 주석번호이며, 2절과 3절의 주석들인 21번부터 71번이 비어 있다. 해설 전체는 총 5절로 되어 있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을 한겨레신문(2024년 9월 20일자)에서 볼 수 있다.

I. 러스킨과 근대

나의 러스킨 공부는 크게 내세울 것이 없다. 영국 소설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가르친 나는 문학 연구보다는 예술 연구로 알려져 있는 러스킨에게 처음에는 큰 관심을 갖지 못했다. 그러다 톰슨(E. P. Thompson)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01를 읽으면서 모리스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인 그의 존재를 새삼 인지하게 되어 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2000년대 후반에는 『베네치아의 돌들』(The Stones of Venice) 중 고딕 건축의 성격을 다룬 부분—러스킨이 모리스에게 영감을 준 바로 그 부분—을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으나 더 나아간 공부를 할 시간을 좀처럼 내지 못하다가, 본서의 번역이 시작되고 해설을 맡으면서 비로소 좀더 공부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러스킨을 잘 안다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공부이지만 말이다. 나는 영국의 소설가 디킨즈(Charles Dickens)와 로런스(D. H. Lawrence)에 공부를 집중했고, 영문학 연구와 아울러 한국 문학작품들에 대한 평론 활동을 했으며, 이와 함께 철학 분야로 공부를 확대하여 맑스, 들뢰즈·과타리, 네그리, 스피노자, 니체, 푸코 등을 읽었다. 비교적 최근에 들어와서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운동인 커먼즈(Commons) 운동의 진전과 확대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이 과정에서 ‘커먼즈와 집’이라는 주제를 중요한 문제의식으로서 가지게 되었다. 이 모든 초점은 근대 극복 혹은 대안근대로의 이행에 맞추어져 있었다. 나는 러스킨의 저작들을 시간이 허용하는 만큼 읽으면서 나의 이러한 공부나 관심사가 러스킨에게 들어있는 어떤 핵심적인 사상과 연결되는 것을 느꼈다. 이 ‘핵심적인 사상’이 바로 내가 이 해설에서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바이다.

이 해설은 당연히 건축 분야의 전문가들(건축가들이나 건축비평가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일반 대중을 향한 것이다. 예술 및 건축 비평가로서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러스킨의,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책에 대한 해설이 건축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새삼 필요할 리가 별로 없을 터이고, 더군다나 나는 건축 분야의 비전문가이므로 건축 전문가들을 위해 그럴듯한 해설을 쓴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러스킨 자신이 당시 영국 건축계의 주류와 서로 맞지 않았다.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많은 건축가들과 건축 작가들은 러스킨을 경멸하거나 러스킨에게 분노하거나 아니면 둘 다였다. 러스킨은 실제적이지 않거나 미친 것으로 간주되었다.02

건축가들은 일반적으로 이 책에 매우 경탄하는 사람들 축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책의 범위를 종종 오해했다. 러스킨의 부수적 의견들 가운데 다수는 공상적이거나 의심스러웠다. 그는 건축가들의 견해를 무마하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고 그가 건축계 앞에 세우는 이상들은 준엄했다.03

물론 결과적으로 러스킨의 작업이 건축예술의 품격을 천명하고 평판을 높이는 데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건축계의 주류와의 차이가 좁혀진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당대 건축계와 러스킨의 차이는 특정 전문분야에서 일어나게 마련인 견해의 차이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한 태도의 근본적인 차이이기도 했던 것이다.

「삶과 그 예술의 신비」(“Mystery of Life and its Arts”)에서 러스킨은 자신의 삶을 실망과 좌절의 연속으로 개관한다. 그는 스무 살에서 서른 살까지 그의 “삶의 가장 강렬한 10년” 동안, 레이놀즈(Joshua Reynolds) 이후 영국에서 가장 훌륭한 화가라고 생각하는 터너(J. M. W. Turner)의 예술가로서의 우수성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더군다나 터너는 이 노력의 “피상적 효과가 가시화되기도 전”에 사망했다.04 러스킨은 탁월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가 헛되이 창작하다 헛되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터너는 러스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받았던 것이다.

러스킨은 회화 연구를 하면서 건축 연구를 병행했다. 자신의 말로는 회화 연구에서보다 “덜 열심일지는 몰라도 더 신중한 노력”을 투여했다고 한다.05 러스킨은 건축의 경우에는 회화의 경우와 달리 공감해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이들과 함께한 러스킨의 노력도 (이미 당대의 건축계 주류와의 관계를 언급한 데서 추측할 수 있듯이) 대세에 밀려서 좌절되었다. “우리가 도입하려고 한 건축은 현대 도시들의 분별 없는 사치, 형태를 왜곡하는 기계적 구조, 지저분한 비참함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 나는 나의 힘의 이 새로운 부분 또한 헛되이 쓰였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철로 된 거리들과 수정으로 된 궁전들에서 물러나 지질학과 식물학 연구로 관심을 돌렸다”.06

그 이후에도 영국의 주류 사회는 러스킨에게 도통 맞지 않는 곳이었다. 러스킨은 당대의 현실로 관심을 돌리면서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나아갔는데, 이 비판 또한 당시 영국의 자본주의 추진 세력에게는 당연히 못마땅한 것이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1860년에 일련의 정치경제학 비판 글들이 『콘힐 매거진Cornhill Magazine』에 연속으로 실리다가 (편집자의 우호적인 태도와 과감함에도 불구하고) 독자들과 출판사의 반대로 네 편에서 중단된 일이다. (이 글들은 나중에 Unto This Last라는 책으로 출판된다.)07 사실 앞에서 말한 “근본적인 차이”―즉 삶을 바라보는 시각의 근본적인 차이―는 건축계 주류와의 사이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당대 영국 자본주의를 추진하는 세력들 전체와의 사이에도 존재했었다. 당대의 자본주의 추진 세력의 사고는 근본적으로 공리주의적이다. 즉 인간의 모든 능력과 힘을 물질적 효용을 생산하는 수단으로만 본다. 이들은 “고기가 삶(생명)보다 가치 있고 옷이 몸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며, 땅을 마구간으로 보고 땅의 결실들을 말 사료로 보는” 자들이다.08 이들의 궁극적 목적은 상품화된 물질적 효용 즉 교환가치의 재현자인 자본의 축적이다.

이와 반대로 러스킨은 물질적 효용을 삶에 도움을 주는 도구로 본다. 그리고 예술처럼 그 자체로는 물질적 효용이 없는 ‘무용함’이 삶의 목적이다. ‘무용함’ 자체가 목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무용함’은 공리주의와의 근본적인 차이를 나타낼 뿐이고, 러스킨이 깊은 의미에서 말하는 것은 예술을 비롯해서 삶의 목적이 되는 어떤 대상을 신의 활력을 분유(分有)한 것으로 보는 태도이다. 여기서 ‘신’이라는 단어에 우리가 종교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09 철학적 의미의 ‘신’으로 읽으면 된다. 사실 러스킨의 철학은 그것이 활력의 철학이라는 점에서 스피노자와 통하는데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신’은 ‘무한한 활력’에 다름 아니며, 러스킨에게 있어서도 그렇다. 러스킨은 이 무한한 활력이 만물에 나뉘어 부여되어 있고 만물은 이 활력으로 인해서 그 나름대로 신성하고 아름답다고 본다. 물론 아무나 이 신성함과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아니다. 이 신성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공감하고 경탄하고 기뻐하는 활력이 필요하다. (이것 역시 신이 부여한 활력이다.) 그래서 러스킨이 “인간의 효용과 기능은 … 신의 영광의 목격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10 그는 특정의 종교적 교리를 설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진정한 의미의 ‘인간’에게서 활력이 가진 핵심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활력은 개인마다, 집단마다 그 정도가 다르게 나타나며, 역사적으로 상승과 하강을 겪는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와서 유럽 거의 전체에 걸쳐서 이 활력의 상태에 전에 없이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된다. 바로 이로 인해서 예술적 능력은 쇠퇴하고 이 쇠퇴에 대한 감이나 인식이 없는 근대 추진자들과 이들을 비판하는 러스킨 사이에 근본적인 어긋남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제 활력의 상태에 생긴 이 문제를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삶과 그 예술의 신비」에서 러스킨은 ‘인간의 일’, 즉 인간이 자신의 삶을 위해 “인간의 형태를 띠고 사는 동안”11 해야 하는 일로 ① 먹을 것을 생산하기, ② 입을 것을 생산하기, ③ 거처를 만들기, ④ 예술이나 과학 등 사유와 관련된 것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를 든다.12 ①, ②, ③은 물질적 효용의 차원인데, 앞으로는 ‘유용성의 차원’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④는 삶이 단순한 물질적 욕구의 충족을 넘어서 꽃처럼 피어나는 차원인데, 이는 ‘활력의 차원’이라고 부르기로 하자.13 ①, ②, ③, ④ 모두 인간의 힘이 자연력과 결합하는 방식을 나타내는데, 이 방식은 이 두 차원을 따라 둘로 나뉜다. 유용성의 차원은 물질의 법칙이 적용되는 차원으로서 자연력이 인간에게 이전되고 다시 자연으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가령 자연력이 인간으로 이전되어 있는 동안에는 이전된 양만큼 자연에서는 감소된다. 활력의 차원에서는 자연력이 감소되지 않고 거기에 각인된 인간의 힘과 함께 결합된 상태로 보존되며, 이 과정에서 양자 모두가 새로운 차원의 힘으로 상승한다.

이제 인간의 삶의 역사의 정상적 진전은 유용성의 차원에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킨 후 활력의 차원에서 각 집단(민족 등)이 가진 능력에 따라서 가능한 만큼 최대로 상승하는 것이다. 이것을 ‘인간 되기’라고 부르기로 하자. 두 차원 모두를 놓고 볼 때 둘째 차원이 이 과정을 비로소 ‘인간 되기’로서 결정한다. 만일 둘째 차원으로 도약하지 못하고 첫째 차원을 충족하는 데서 끝난다면, 그것은 ‘만족한 동물’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14 둘째 차원이 이런 의미에서 결정적이지만, 사실 두 차원이 모두 필수적이다. 의·식·주는 인간의 생존의 기본 조건으로서 생존 없이는 활력적인 삶도 없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유용성의 차원에서 예술성이 자라나온다는 점이다. 사물을 인간에게 유용한 형태로 바꾸는 능력인 기술(특히 손기술)이 고도화되고 다양화되면서 예술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러스킨은 “모든 건축예술은 컵과 받침대의 모양을 짓는 데서 시작해서 멋진 지붕에서 끝난다”고 한다.15

러스킨에게 근대는 이러한 ‘인간 되기’의 경로에서 이탈한 시대이다. 러스킨의 시선에 먼저 들어온 것은 예술적 능력의 전반적인 쇠퇴이며, 그 다음에 그가 주의를 돌린 곳에서 본 것은 자본주의적 번성이라는 외양에도 불구하고 생존의 기본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처참한 민중의 모습이다. 러스킨은 이 모습을 서양의 긴 역사적 과정에 놓고 한탄한다. 6천 년 동안 농업이 이어져 왔음에도 50만 명이 굶어죽는 일이 발생하고16 6천 년 동안 직조를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수도들의 거리는 내다버린 누더기와 썩은 넝마의 판매로 악취가 나며, 6천 년 동안 집짓기를 해왔음에도 그 모든 기술과 힘의 대부분이 흔적도 남아 있지 않고 떨어져 나온 돌들만 들판에 거추장스럽게 나뒹굴거나 시냇물에서 물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17

유용성의 차원이 피폐해질 뿐만 아니라 유용성의 차원과 활력의 차원 사이의 건강한 연결이 단절된다. 인구의 다수가 유용성의 차원에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한편, 이 욕구를 충족시킨 소수는 물질적 이익의 차원에서 더 많은 축적(수익, 이윤, 지대 등)을 원할 뿐 자연력과의 결합을 활력으로 상승시키는 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리하여 활력의 양성과 발휘는 현저하게 쇠퇴하게 되는 것이다. 러스킨은 수익을 우선으로 하는 조건에서는 진정한 건축이 이루어지기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만일 어떤 사회가 스스로를 조직해서 가장 아름답고 가능한 한 가장 강한 집들을 예술을 위해서든 사랑을 위해서든 짓고자 한다면—궁전을 그 자체를 위해서 짓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집을 짓고자 한다면―그런 사회는 볼 만한 어떤 건물을 지을 것이지 수익을 가져올 건물을 짓지는 않을 것이다. 진정한 건축물은 자신을 위해 집을 원하는 사람이 지으며 자신의 비용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식으로 짓는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이 좋아하는 식으로 짓는 것이 아니다.18

바로 이것이 근대에 와서 활력의 상태에 일어난 심각한 문제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 되기’는 정체 혹은 후퇴를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러스킨에게 이러한 ‘인간 되기’의 실패가 절망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삶이 [그]를 실망시킬수록 삶은 [그]에게 더 근엄하고 놀라운 것이 되었”으며,19 그는 “예술 혹은 다른 분야에서의 모든 지속적인 성공은 … 인간의 전진하는 힘에 대한 근엄한 믿음에 의해서, 혹은 인간의 유한한 부분이 언젠가는 불멸성에 함입되리라는 약속에 대한 근엄한 믿음에 의해서 하위의 목적들을 다스리는 데서 온다는 것을 점점 더 명확하게 보았고, 예술 자체는 이 불멸성을 천명하려는 노력에서만 … 힘찬 활력이나 명예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점점 더 명확하게 보았다.”20

러스킨이 『건축의 일곱 등불』을 썼던 때(1849년)는 그에게 아직 희망이 있던 때였다. 그가 나중에 건축에 대해 말하기를 포기했지만, 이는 자신의 한 말이 틀려서가 아니라 말해도 소용이 없어서였다. 아무리 말해도 귀에 ‘돈’못이 박혀있는 근대의 주류 세력을 꿰뚫고 현실에 영향력을 발휘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

IV 러스킨과 근대 너머

건축의 이러한 두 가지 특권은 예술 일반에 구현되는 모든 활력이 그렇듯 잠재적으로는 영원히 존재하지만, 실제 현실화는 늘 불투명하다. 우리가 보았듯이 그 현실화는 적어도 러스킨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사실 지금 우리에게도 그렇다. 몇몇 정치인들이나 관료들이 사회를 대표하듯이 소수의 큰 건물들이 건축을 대표하며, 건축가는 일반적으로 사회에 대한 공동체적 책임감이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특화된 일을 하는 전문가가 된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러스킨에게 예술은 삶의 기본 조건이 충족된 후에 시작된다. “모든 예술은 손으로 하는 동작과 당신의 민중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미덕과 친절함에 토대를 둔다.”72 민중이 기본적으로 어엿한 삶을 누릴 때, 민중의 생활에 유용한 물건들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며, 이 물건들의 형태가 필요에 따라 변경되고 새로운 형태들이 고안되는 과정(가령 컵, 손잡이 달린 컵, 컵에 물을 따를 주전자, 손을 들고 다니기 더 좋은 손잡이 두 개 달린 주전자, 물을 대량으로 마실 컵, 섬세하게 마실 컵, 물 따르기 쉬운 주전자, 향수 보관하기 좋은 용기, 지하실에 저장하기 좋은 용기 등)의 연속선상에서 “지금까지 예술이 성취한 가장 아름다운 선들과 가장 완벽한 유형의 엄밀한 구성이 발전해나온다.”73

더 나아가 건축은 민중의 주거의 필요에 따른 건물에서 시작해서 더 큰 건축물로 확대된다. 각자 자신의 지붕을 가지는 것이 우선적이다. “모든 읍에 큰 지붕을 짓기 전에 작은 지붕들을 짓고, 원하는 누구나가 자신의 지붕을 가지도록 하라.”74 그 다음에 이 각자의 작은 집들이 모여서 도시를 형성한다. “그리고 집들이 도시에 한데 모여있을 때, 사람들은 자신들의 건축을 공통의 법칙에 종속시킬 정도로 시민적 우애를 가지게 될 것이고 인간의 주거지들이 한데 모인 전체가 대지 위에서 끔찍한 것이 아니라 예쁜 것이 되기를 욕망할 만큼의 시민적 자긍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75 러스킨은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가상의 청중들(현실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청중들)을 향해 당당하게 이렇게 말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것의 가능성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그것의 불가결성에만 관심이 있다.”76

이 말을 좁게 이해하는 사람은 러스킨이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일에는 별로 공을 들이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실은 전혀 다르다. 러스킨은 당대의 정치경제학을 비판하는 단계 이후에 ‘인간’이 사는 곳을 실제로 만드는 일을 자신의 삶의 당연한 행로로서 추구했다. 그는 1871년 ‘영국의 노동자들과 근로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들’(Letters to the Workmen and Labourers of Great Britain)이라는 부제가 붙은 『포르스 클라비게라』(Fors Clavigera)77의 집필을 시작하면서 <성 조지 길드>(St. George’s Guild)라는, 무엇보다도 토지와 동지 관계를 이루는 삶형태를 직접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드는 준비를 시작한다.78

1878년에 『포르스 클라비게라』의 집필이 완료되고 <성 조지 길드>의 설립도 완료된다. 이로써 러스킨의 삶의 단계는 넷으로 나눠볼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을 『포르스 클라비게라』 ‘Library Edition’의 편집자는 이 책에 대한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쉽고도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

회화비평가로 시작한 그는 예술이 정말로 훌륭한 것이 되려면 아름다운 현실의 재현이어야 하고 즐거움의 정신으로 추구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건축비평가로서 활동하면서 그는 예술이 민족적 성격의 반영이며 고딕의 비밀은 건축공의 행복한 삶에 있음을 발견했다. 다음 단계는 그와 같이 열렬한 기질을 가진 사람에게는 명확하고 단순했다. 그는 상상의 세계에서 사는 데 만족하지 않고, 좋고 아름다운 것의 조건을 실제 세계에서 현실화하려고, 인간들 사이에 신의 성전을 지으려고 노력했다.79

여기서 우리는 그의 삶의 진행 과정 자체가 앞에서 말한 유용성의 차원과 활력의 차원의 연속성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두 차원의 이러한 연속성 혹은 달리 말하자면 삶의 통합성이 바로 그가 우리의 시대에 가지는 의미의 핵심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삶의 통합성의 ‘불가결성’은 기후 변화로 인한 위기가 심각해진 우리의 시대에는 러스킨의 시대와 비할 바 없이 절실한 것이 되었다는 점이 러스킨의 현재적 의미를 배가시킨다. 유용성의 차원과 활력의 차원의 분리야말로 지금 인류를 크나큰 위기에 몰아넣고 있는 기후 변화의 근본적 원인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점에서 인류사에서의 큰 진전으로 꼽을 근대화(산업화)가 바로 지구 전체를 장악하게 될 이 분리의 시작이었다. 근대화는 안타깝게도 자연의 힘과 인간의 힘의 결합에 왜곡이 가해지는 형태로 일어났다. (그 이전에는 결합의 정도가 낮고 범위가 좁았을지언정 왜곡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맑스가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소외’라고 부른

이 왜곡의 핵심은 현실에서의 인간이 앞에서 말한 진정한 의미의 ‘인간’에서 벗어난 데 있다.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란, 맑스의 표현으로는 자연력과의 결합에서 자신의 본질을 구현하는 인간, 자연과 본질상의 공통체를 이루는 인간이다. 소외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은 인간의 제2의 몸이었다. (이것을 맑스는 ‘비유기적 몸’이라고 부른다.) 이제 이 두 몸은 분리되며 자연은 몸의 지위를 잃고 그저 인간의 외부에 있는 ‘객체’가 된다. 그리고 인간은 이 ‘객체’에서 분리되었다는 의미에서 ‘주체’가 되는데, 이 ‘주체’로서의 인간을 ‘객체’와 다시 연결시켜주는 것이 자본이다. (사실 자본의 왕국에서는 개인들도 서로에게는 ‘객체’이며, 자본만이 실효적인 ‘주체’이다.)

이제 인간에게 내재하는 활력은 자연의 힘과의 연결을 매개하는 자본(화폐80)의 활력으로 오인되어 자본이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하게 되고, 인간과 자연 모두가 자본의 증식을 위한 수단이 된다. 자본은 신이 된다. 그런데 이 신은 인간에게 별로 호의를 갖지 않은 신이라서 이 신이 주도하는 생산은 러스킨이 ‘복종의 등불’ 장에서 말한 ‘복종’과 ‘절제’의 능력을 쇠퇴시킨다.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는 ‘복종’과 ‘절제’의 능력이란 맑스의 말로는 ‘아름다움의 법칙에 맞춘 생산’을 할 줄 아는 능력이다.

동물은 자신이 속한 종의 척도와 욕구에 맞추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반면에 인간은 모든 종의 척도에 맞추어 생산할 줄 알며, 일반적으로 대상에 내재하는 척도를 적용할 줄 안다. 따라서 인간은 아름다움의 법칙에 맞추어 만들어낸다.81

‘인간’은 자신의 척도를 내세우지 말고 “일반적으로 대상에 내재하는 척도”를 알아내야 하며 그렇게 알아낸 척도를 따라야 한다(복종).82 그리고 인간의 힘을 여기에 맞추어 양성해야 하는 것이다(절제). 자본은 ‘아름다움의 법칙’이 아니라 ‘이윤 증식의 법칙’을 자연과 인간 모두에게 부과한다. 이러한 자본주의적인 생산이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를 발생시키는지를 다시 맑스의 말로 설명해볼 수 있다. 『자본론』 1권 15장 10절에서 맑스는 이렇게 말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인구를 대중심지로 집결시키며, 도시 인구의 비중을 끊임없이 증가시킨다. 이것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한편으로는 사회의 역사적 동력을 집중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과 토지 사이의 물질대사 즉 인간이 옷과 식량으로서 소비한 토지의 성분들이 토지로 복귀하는 것을 교란하고, 따라서 토지의 비옥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교란한다.83(인용자의 강조)

다시 말해서 자본이 주도하는 생산은 물질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순환하는 데 (즉 두 ‘몸’ 사이의 질료 교환에) 장애를 일으킨다(‘물질대사의 교란’).84 그렇기에 “자본주의적 농업의 진보는 그 어느 것이나 노동자를 약탈하는 기술의 진보일 뿐만 아니라 또한 토지를 약탈하는 기술의 진보이며, 일정한 기간에 토지의 비옥도를 높이는 그 어느 것이나 이 비옥도의 항구적 원천을 파괴하는 진보이다. (…)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의 원천인 토지와 노동자를 파멸시킴으로써만 기술을 그리고 사회적 생산과정의 결합을 발전시킨다.”(인용자의 강조)85 이렇게 “모든 부의 원천인 토지와 노동자를 파멸시”키는 과정의 연장선상에 환경 파괴가 있다.

기후 변화를 아마도 영국에서 최초로 (과학자들보다 먼저) 간파한 사람이 러스킨일 것이다. 즐거움의 원천인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것이 습관이 된 러스킨은 1871년 어느 날 50년 동안 관찰해오던 하늘에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이상한 폭풍 구름(storm-cloud)이 있는 것을 목격하고 계속해서 관찰하게 된다. 러스킨은 이러한 관찰을 근거로 날씨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주장을 그의 『19세기의 폭풍 구름』(The Storm-cloud of the Nineteenth Century)에 실린 두 개의 강연86에서 하는데, 당시 언론은 러스킨의 주장이 “상상해냈거나 제 정신에서 나온 것이 아닌” 것이라고 조롱했다.87 과학자들도 처음에는 이 현상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러스킨의 관찰이 정확하고 그 원인도 명확하다는 것이 확인되게 된다. 산업 통계에 따르면, 러스킨이 문제가 되는 현상이 증가한 것으로 잡은 날짜는 영국에서나 중앙 유럽의 산업화된 나라들에서나 석탄의 소비가 비약적으로 올라간 때였다고 한다.88

러스킨은 당시에 자신이 관찰한 현상을 이론적으로 정식화하지는 않았다. 성경에서 가져온 구절이나 용어로 제시할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러스킨이 이 현상의 근본적 원인—산업화가 ‘인간’의 길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진행된 것—을 충분히 말해왔음을 안다.

이와 관련하여 기계에 대한 러스킨의 견해가 흥미롭다. 독자들이 가령 본서 4장에서 철도를 비판하는 대목을 보고 러스킨을 기계의 사용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으로 본다면, 이는 성급하고 섣부른 판단이다. <성 조지 길드> 설립 취지문에 단 주석에서 러스킨은 이렇게 말한다.

길드에서 기계류는 그것이 건강한 육체적 활동을 대체하거나 장식 일에서 손노동의 기술과 정밀함을 대체하는 경우에만 금지된다는 점을 세심히 유의해야 한다.89

고딕 건축물에 대한 그의 견해에서 보듯이,90 그리고 위에서 인용한, 아래로부터의 도시 구축에 대한 그의 견해에서 보듯이, 러스킨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있는 활력을 서로 합하여 거대한 것을 세워 올릴 수 있다고 믿는다. 기계도 그렇게 쓰일 수 있다면 러스킨이 반대할 리 없고 심지어는 그러기를 바란다. 실제로 러스킨은 영문학 사상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기계 예찬을 쓰기도 했다.91 맑스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러스킨이 반대하는 것은 기계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기계에 예속되는 것이다. 기계는 인간의 일정한 활력의 결과물이지만, 기계에 인간이 예속되면 자연과의 동지 관계를 통해 증가되어야 할 활력이 오히려 감소되게 된다. “영국 다중의 활기가 연료처럼 공장의 연기의 먹이로 보내진다.”9293

자연력과의 관계에서도 러스킨이 반대하는 것은 자연력을 감소시키는 경우이다. 이는 기계를 움직이는 동력에 대한 그의 견해에서 잘 드러난다. “… 기계류의 유일하게 허용되는 동력은 바람이나 물의 자연력이다. 미래에는 전기력도 거부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냇물과 바람이라면 비용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연료를 사정없이 맹렬하게 낭비하는 증기력은 절대적으로 거부된다.”94

이렇듯 ‘착취된’ 인간의 힘(노동력)과 ‘착취된’ 자연력이 바로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계의 동력이었기에 ‘인간’의 길을 다시 가는 것, 즉 자연과의 동지 관계를 회복하는 것—여기에 인간들 사이의 동지 관계의 회복이 필수적으로 포함된다—이 오늘날의 삶을 틀짓는 자본의 논리로부터의 해방의 주된 내용이 될 것이다. 다만 ‘인간’의 길을 간다는 것은 미리 정해진 어떤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인간’으로 만드는 과정이며 이때 ‘인간’이란 언제나 아직은 구현되지 않은 미지의 존재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다. 스스로를 ‘인간’으로 만드는 방식에 대해 러스킨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릇된 일을 함으로써 더 현명해지거나 더 강해지는 일은 없다. 당신은 올바른 일을 함으로써만 더 현명해지고 강해진다. 가장 으뜸가는 것, 필요한 단 하나는 강압 아래서일지라도 올바른 일을 하고 마침내 강압 없이 올바른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인간’이다.95

“올바른 일”이란 러스킨의 말로는 ‘복종’과 ‘절제’의 일이고, 맑스의 말로는 ‘아름다움의 법칙’에 맞추는 일이다. “강압 없이 올바른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자유로움’으로의 상승을 의미한다. ‘자유로움’으로의 상승은 활력의 증가를 낳고 활력의 증가에서 기쁨, 행복, 사랑이 나온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 사회는 ‘자유로움’으로의 상승을 말하기에 턱없이 부족한데다 기후 변화로 인해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지만, 인류사에서 드문드문 성취되었고 지금도 그렇게 성취되고 있는 ‘자유로움’으로의 상승의 사례들이 우리에게 유산으로 맡겨져 있다. 훌륭한 예술작품들은 이러한 성취의 강력한 일부이다.96 예술작품의 뛰어남은 예술가의 ‘사적’ 성취에 국한되지 않는다.97 예술가의 능력은 공동체 전체에 의해 여러 세대에 걸쳐 양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사유의 노력으로 성취되는 것도 아니고 말하기의 정확성에 의해 설명되는 것도 아니다. 예술은 어떤 힘의 본능적이고 필연적인 결과인데, 이 힘은 정신이 여러 세대를 거침으로써만 발전될 수 있으며 특정의 사회적 조건들—이 조건들은 그것들이 규제하는 능력이 느리게 성장하는 만큼이나 느리게 성장한다—에서 마침내 살아나게 된다. 고결한 예술이 존재하려면 강력한 역사의 전 시기가 집약되고 수많은 죽은 이들의 열정들이 응축되어야 한다.98

그래서 “러스킨에게는 예술을 가르치는 것이 모든 것을 가르치는 것이었다.”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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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01 이 책의 한국어본은 영미문학연구회의 (나를 포함한) 여러 영문학자들에 의해 번역되어 2012년에 출판되었다.

02 Introduction to The Seven Lamps of Architecture, The Complete Works of John Ruskin, Library Edition 1903, Volume VIII, xxxix쪽. ‘Library Edition’은 쿡(E. T. Cook)과 웨더번(Alexander Wedderburn)이 편집한 러스킨 전집의 표준판이다. 앞으로 러스킨의 저작의 특정 대목을 인용할 경우 저서명이나 글 제목은 따로 밝히지만 출처로는 ‘Library Edition’의 몇 권, 몇 쪽인지만 다음과 같이 표시하기로 한다. 예) 전집 9권 69쪽의 경우: LE V9, 69쪽.

03 같은 책 xli쪽.

04 이상 LE, V18, 148쪽. 『현대 화가론』(Modern Painters)은 1843년에 1권이 나왔고 3년 후인 1846년에 2권이 나왔다. 그 이후 10년이 지난 1856년에 3권과 4권이 나왔고 다시 4년이 지난 1860년에 마지막 권인 5권이 나왔다. 2권과 3권 사이의 10년 동안 러스킨은『 건축의 일곱 등불』(1849)과『 베네치아의 돌들』(총 3권, 1851-53)을 썼다.

05 같은 책 149쪽.

06 같은 책 150쪽. “수정으로 된 궁전들”은 1851년 영국에서 만국박람회(Great Exhibition)가 열린 건물인 수정궁(Crystal Palace)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수정궁은 원래 세워진 하이드 파크에서 1854년 런던 남부의 시더넘 힐(Sydenham Hill)로 옮겨졌다가 1936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러스킨은 수정궁이 기술적 재능은 빛날지라도 예술적 의미는 없는 것으로 보았다.

07 한국어 번역본으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김석희 옮김)가 있다.

08 Modern Painters, vol. 2, LE V4, 29쪽.

09 러스킨이 종교와 관련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러스킨은 복음주의적 프로테스탄티즘의 문화에서 성장했으며, 그의 글에는 성경에서의 인용이 빈번하게 나온다. 그런데 그는 시간이 가면서 협소한 종교적 틀을 벗어났다. 본서의 1880년판 서문에도 나와있듯이 러스킨은 이 책을 쓸 당시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복음주의적 프로테스탄티즘’을 담은 대목들을 1880년판에서는 삭제한다. “…극단적이고 전적으로 거짓된 프로테스탄티즘을 담은 몇몇 부분은 본문과 부록에서 똑같이 빼버렸[다].”(본서 7쪽) 그는 나중에는 기독교를 떠날(‘탈개종’할) 생각까지 하게 된다. 물론 그는 ‘탈개종’을 하지는 않고 기독교도의 범위 내에 머물게 되지만, 이때 그의 기독교는 기독교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관용적인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10 LE V4, 28-29쪽.

11 LE V18, 180쪽.

12 “확실하게 좋은 것은, 첫째는 사람들을 먹이는 데, 그 다음에는 사람들을 입히는 데, 그 다음에는 사람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는 데, 마지막으로는 예술이나 과학이나 기타 어떤 사유의 주제로 사람들을 올바르게 즐겁게 하는 데 있다”. 같은 책 182쪽.

13 ‘삶의 가능성의 차원’이라고 좀 길게 부를 수도 있다.

14 러스킨이 생각하는 ‘인간 되기’는 맑스가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말하는 ‘자연의 인간으로의 생성’, 그리고 니체의 다음 대목에 나타난 ‘자연의 인간으로의 도약’과 크게 통하는 바가 있다. “진정한 인간들, 더 이상 동물이 아닌 존재들, 즉 철학자들, 예술가들, 성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이 등장하면서, 그리고 이들의 등장을 통해 결코 도약을 않는 자연이 유일한 도약을 했다. 그것도 기쁨의 도약이다.” Friedrich Nietzsche, Untimely Meditations, ed. Daniel Breazeale, trans. R. J. Hollingdale (Cambridge University, 1997) 159쪽.

15 LE V20, 96쪽. “최고의 건축물은 멋지게 만들어진 지붕일 뿐”인데 “바티칸 대성당의 돔, 랭스 대성당이나 샤르트르 대성당의 포치, 이 성당들의 아일의 볼트 천장과 아치, 묘의 캐노피, 종탑의 스파이어” 같은 장엄하게 만들어진 지붕들은 “모두 어떤 공간을 열기와 비로부터 튼튼하게 보호할 단순한 필요로부터 나온 형태들”이다. 같은 책 111쪽.

16 1866년 인도의 오리싸(Orissa)에서 발생한 기근을 놓고 한 말이다.

17 “The Mystery of Life and its Arts”, LE V18, 177-78쪽 참조.

18 Fors Clavigera vol 2, LE V28, 360쪽.

19 LE V18, 151쪽.

20 같은 책 152쪽.

(···)

72 Lectures on Art, LE V 20, 108쪽.

73 같은 책 109쪽.

74 같은 책 112쪽.

75 같은 책 같은 쪽.

76 같은 책 113쪽.

77 제목 ‘Fors Clavigera’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어원 풀이를 생략하고 쉽게 말하자면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① 훌륭하게 행동하는 힘 ② 인내하는 힘 ③ 운명을 최고의 목적에 맞추는 힘.

78 <성 조지 길드>의 기획에는 토지와의 관계 이외에도 교육을 비롯한 많은 것들이 포함되는데, 이 해설에서 이것들을 다 거론할 수는 없다.

79 Introduction to Fors Clavigera vol. 1, LE V27, xviii-xix쪽.

80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으로서의 화폐이다. 화폐는 자본으로서의 기능 이외에 다른 기능도 가진다.

81 Karl Marx, 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aus dem Jahre 1844, MEW band 4, Dietz Verlag, 517쪽.

82 러스킨의 경우에 이 “대상에 내재하는 척도”는 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이를 따르는 것이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경우에도 자연의 고유한 법칙은 ‘신의 명령’이다.

83 Karl Marx, Das Kapital I, MEW band 23, Dietz Verlag, 528쪽.

84 아마도 당시의 맑스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이 순환을 극복하리라고 믿었을 터인데, 안타깝게도 맑스가 생각하는 사회주의 사회는 현재 지구상에 없다. 사회주의의 이름을 단 국가들은 모두 맑스가 생각한 바와는 다른, 군사주의적·관료주의적·국가주의적 체제들이다.

85 같은 책 529-30쪽.

86 런던 인스티투션(London Institution)에서 1884년 2월 4일과 11일에 한 두 개의 강연이다.

87 The Storm-cloud of the Nineteenth Century, LE V34, 7쪽,

88 같은 책 xxvi쪽,

 89 “General Statement of St. George’s Guild,” Guild and Museum, LE V30, 48쪽.

90 : “그렇게 열등한 정신들의 노동의 결과들을 수용하고, 불완전함이 가득하며 모든 터치마다 그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단편들로부터 장엄하고 나무랄 데 없는 전체를 세워 올리는 것이 고딕 건축 유파의 주된 감탄할 만한 점일 것이다.” The Stones of Venice vol 2, LE V10, 190쪽

91 Cestus of Aglaia, LE V19, 60-61쪽 참조.

92 The Stones of Venice vol. 2, LE V10, 193쪽.

93 이는 현대의 발전된 첨단 기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첨단 기술은 인간의 발전된 힘의 결과물이지만 거기에 인간이 예속되면 (이 예속은 러스킨의 시대에서나 우리의 시대에서나 자본주의적 관계에 의해 발생한다) 역시 인간의 활력은 감소된다.

94 LE V30, 48쪽.

95 Cestus of Agalia, LE V19, 125쪽.

96 자본주의의 토대가 되는 사적 소유는 이러한 예술작품들이 인류의 활력을 증가시킬 유산이 되는 데 방해가 된다. 예컨대 피카소의 어떤 그림이 스위스의 제네바에 있는 제네바 프리포트(Geneva Freeport)의 보관함 같은 곳에 넣어서 보관되고 있다면, 이 그림은 그렇게 보관되는 동안은 그저 한 개인의 사유재산일 뿐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제네바 프리포트는 예술품 및 기타 귀중품을 보관하는 보관소로서 보관품 가운데 40%가 예술품이고 그 총 가치는 미화 1천억 달러(한화 100조원)로 추산된다. 2103년 현재 이곳에는 120만 점의 예술작품이 보관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피카소의 작품도 약 1천 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97 ‘사적’은 ‘개인적’과 그 의미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적인 것’들은 아무리 잘 모여도, 아무리 많이 모여도 ‘사적인 것’이지만, ‘개인적인 것’은 협동의 방식으로 모여서 공통체(commons)를 이룰 수 있고 이를 통해 개인들의 활력을 증가시킬 수 있다. ‘사적인 것’의 축적은 활력이 아니라 권력의 축적이며 권력의 본질은 활력을 제한하는 데 있다.

98 : 98 “The Mystery of Life and its Arts”, LE V18, 169-170쪽.

99 : 99 Introduction to Fors Clavigera vol. 1, LE V27, xvii쪽.





커머닝을 통해 예술을 큐레이팅하기―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의 최빛나

 


  • 저자  : David Boiler
  • 원문 :  Binna Choi of the Casco Art Institute: Curating Art through Commoning
  • 분류 :  번역
  • 옮긴이 : 루케아
  • 설명 :  아래 글은 데이빗 볼리어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2023년 2월 1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여러 해 전에 나는 네덜란드에 있는 한 예술기관을 알게 되었는데, 이 기관은 “커먼즈를 지향하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해서 나로서는 매우 흥미로웠다. 위트레흐트 소재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Casco Art Institute)가 바로 이렇게 선언한 기관이다.  ‘커먼즈를 지향한다’는 그들의 슬로건은 예술과 커머닝이 정확히 어떻게 관련이 있는 것인지, 그리고 예술기관이 어떻게 커머닝의 세계에 진입할 것인지에 관한 물음들을 즉각 제기한다.

나는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의 디렉터인 최빛나씨를 팟캐스트 시리즈 <커머닝의 프런티어>(Frontiers of Commoning)의 35회 대담에 초대해서 좀 더 알아보기로 했다. 2008년부터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를 이끌어 온 한국인 최빛나는 비중 있는 전시회를 위해 예술작품을 큐레이팅하고 있으며 더치 아트 인스티튜트(Dutch Art Institute)의 교수를 역임했다. 그녀는 2022년 싱가포르 비엔날레, 2016년 광주 비엔날레의 큐레이터(예술감독)였으며 다가오는 2025년 하와이 트리엔날레의 예술감독으로 선정되었다.

최빛나는 예술창작과 작품 전시회에 커머닝의 윤리와 실천들을 도입했다. 그녀와 동료들은 커머닝을 다양한 예술가들로 구성된 팀이 예술을 함께 창작하고 함께 활동할 수 있도록 조직하는 원리로서 받아들였다.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측은 다음과 같이 자신들의 커먼즈 철학을 설명한다.

예술은 상상력에 기반을 둔 행동하기와 존재하기의 양태로서, 사람들을 이어주고 치유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사람들을 새로운 사회비전으로 이동시킨다. 커먼즈는 공동체 문화가 살아있도록 유지하는 공유된 자원들이기에 예술은 사실상 커먼즈에 내재해 있으며, 커먼즈는 예술을 존재하게 할 것이다. 예술과 커먼즈 때문에 우리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이분법 너머에 있는 세계관을 그릴 수 있으며 ‘우리가’ 욕망하는 대로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패러다임―탈식민적, 포스트자본주의적, 모권중심적, 혹은 연대 경제 등 뭐라 불리던―을 함께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가 거기에 이름을 부여한다.

실제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카스코 인스티튜트가 눈길을 끄는 전시회들과 마케팅을 통해서 그 평판을 높이는 데 열중하는 브랜드화된 기관이기보다는 예술가 중심의 기관임을 의미한다. 최빛나와 카스코 인스티튜트 소속 예술가들은 참여적이고 비위계적이며 평등주의적인 팀으로서 일한다. 모든 사람들이 작업실 공간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다음 프로젝트나 전시회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그리고 카스코 인스티튜트가 지역 공동체와 관계를 맺기 위하여 어떻게 그 예술적 상상력을 사용할지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러한 한 가지 프로젝트는 <잊혀진 기술을 간직한 농장 박물관 여행하기>(Traveling Farm Museum of Forgotten Skills)라는 전시회로 위트레흐트 근처 현대적인 교외지역 개발지에 둘러싸인 오래된 농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저지대 교외의 스프롤 현상이 이전에 그곳에 있었던 많은 농지를 잡아먹었고, 한 농부가 여전히 소유하고 있었지만 낡아빠지고 아무도 살지 않는, 허름한 농가만 남게 되었다.

최빛나와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예술가들은 공동체가 가령 다음과 같이 묻는 방식으로 그 공간의 역사를 탐색하게끔 하는 예술 프로젝트를 개발하기로 했다. 농장이 왜 비어있는가? 농장은 어디로 옮겨갔는가? 거의 모든 농업농장과 목축농장이 이 지역에서 사라진 상황에서 레이드슈 라인(Leidsche Rijn) 지역주민들의 식량은 실제로 어디서 오는가?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는 한때 그 지역을 위해 식량을 생산한 옛날 식 농사 관행을 소개하기 위한 전시회를 열기 위해 (위트레흐트 공무원들이 성가신 것으로 여기는) 그 농장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카스코 예술가들은 열 달 동안 농가에서 함께 살았고 경작하고 식량을 모으면서 그 역사와 현재 상황을 통해서 땅과 다시 관계를 맺었다. 이 프로젝트는 지역 주민들에게 농장의 잊혀진 과거를 숙고하고 앞으로 땅을 사용하는 것에 관하여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도록 했다.

안타깝게도 이 프로젝트는 소유주가 집과 땅을 팔기로 결정하면서 너무 일찍 폐기되었다. 현재 그 장소는 팬케익 식당과 쇼핑센터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래도 한동안은 전시회가 공동체에 중요한 주제들—공동체의 역사, 식량자원 및 땅의 미래—에 예술적인 자극을 주었다.

곧 시작될 1년에 걸친 프로그램 <배운 것을 버리기 센터>(Unlearning Center)는 사람들이 예술과 문화에 관한 낡은 전통적 관념을 버리고 다음과 같이 묻게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문화적 기관들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는가? 어떻게 예술과 문화는 우리가 커먼즈를 상상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가? 곧 열릴 또 하나의 전시회인 <커먼즈 예술>(Commons Art)은 커먼즈 문화에 기여하는 사회참여적인 예술 프로젝트들의 돌봄과 유지과정을 지원하는 디지털 플랫폼을 제공할 것이다.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프로젝트에 의해 생산된 예술을 종래의 예술기관들이 나타내고 싶어하는 ‘고급예술’보다 다소 못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간혹 예술관과 예술계에 있는지를 최빛나에게 물었다. 여기서 ‘고급예술’이란 비평가들과 문화적 규범에 의해 알려진 회화와 조각이나 황량한 하얀 전시회장에서의 공식적인 전시들 혹은 예술과 일상을 분리하는 시나리오들 등을 의미한다.

최빛나는 주안점을 두는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의 구축이라고 대답했다.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우리와 예술가들의 관계는 가족관계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 관계의 망 안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초점을 맞추어야하는 것은 이 관계를 더 잘 돌보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좋은 생산물 만들기’보다는 관계의 실천을 토대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은 훨씬 더 나아질 것입니다.

대화를 통해 어떻게 커머닝이 다양한 형태의 예술제작, 예술작품 전시회들 및 기관의 파수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멋진 경험을 했다. 내가 최빛나와 나눈 이야기는 여기서 들을 수 있다.

* [옮긴이]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홈페이지의 설명에 따르면, ‘카스코’(casco)는 네덜란드어로 변화를 위한 기본 구조, 집단적 예술프로젝트 및 조직적 실험으로 공동으로 탐구하고 연구하기 위한 기본 구조가 존재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커먼즈를 위한 건축–2008년 이후 건축의 과제

 


  • 저자  : Jose Sanchez
  • 원문 :  “Introduction : A Call for a Post-2008 Architectur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호세 산체스의 Architecture for the Commons : Participatory Systems in the Age of Platforms(Routledge, 2021)의 “Introduction”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저자 호세 산체스는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활동하는 건축가이자 게임디자이너이며 이론가이다. 그는 건축디자인 지식의 증식을 추구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Plethora Project(www.plethora-project.com)를 이끌고 있다. 그는 동네를 만드는 시뮬레이션 비디오 게임 Block’hood의 제작자이며 공동체를 건설하고 경제를 관리하는 비디오게임 Common’hood의 제작자이고, 대중들이 참가하여 동일한 유닛들로 설치물을 짓는 Bloom의 공동제작자이다. 글의 뒤에 필요할 듯 해서 보충설명을 달았다. 

 

우리의 건축은 항상 패러메트릭 건축이었다

20세기 말 건축분야에서는 우리가 건물들을 이해하고 짓는 방식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전환을 제안하는 혁신들이 일었다. 소프트웨어, 재료과학(material science), 디지털 패브리케이션(digital fabrication)(([정리자] 디지털 패브리케이션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제품을 제작하는 기술뿐만 아니라 형태를 만들고 재료 가공 및 시공까지 모든 과정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총칭하는 말이다. 일례로 3D 프린팅 기술이 여기에 속한다.)) 및 자동화 영역에서 일어난 기술혁신은 무한한 가변성과 주문제작이라는 비전을 제공했다. 인간의 인식과 맞물려있는 이 비전은 몰입환경으로서 주문제작되는 정동적 건축(affective architecture)을 나타낸다.(([정리자] ‘affective architecture’에 대해서는 가령 https://aalab.org/ 같은 사이트를 참조해보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 ‘새로운’ 건축—모든 디자인이 일회적인 건축—은 젊은 세대의 건축가들이 오늘날 실행하고 있는 방식의 핵심적인 부분이 되었다. 테크놀로지를 중심으로 하는 서사들이 이것을 입증했다. CNC(computer numerical control, 컴퓨터 수치제어장치) 테크놀로지에 의해 작동하는 디지털 패브리케이션이 대량생산 제품을 생산하는 동일한 비용으로 맞춤제작 형태들을 만들 수 있다는 전망은 젊은 세대의 건축가들이 이 새로운 건축을 채택하는 것을 완벽하게 찬성할 논리를 제공했다. CNC 테크놀로지는 대량 생산이 여러 해 동안 여타 산업들을 규정해온 상황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줄 한 가지 대안을, 다시 말해 의뢰인들이 항상 색다른 새로운 디자인을 찾을 것이기에 수요가 계속될 것이고 그럼으로써 디자인이 번성하게 될 그러한 대안을 약속하고 있었다.

‘일회적인’ 건축이라는 패러다임—건물을 지을 때마다 스스로를 재창조해야 하는 패러다임—에는 지어지는 환경의 구조적 구성에서부터 사업모델과 관례상의 수수료 배분에까지 세분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지속적으로 지원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 패러다임은 무상으로 일하거나 또는 충분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착취적인 업무에 고용되는 것이 일상인 경쟁적인 시장에 학생들이 참여하도록 준비시킴으로써 건축분야의 교육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것이 의뢰인들의 투기적인 산업관행으로, 또는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거나 전무한 건축공모 참가로 낭비되는 큰 규모의 디자인 노동의 결과이다.

이 맥락에서 패러매트릭 패러다임의 등장은 건축분야에서의 핵심적인 비능률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될 수 있다. 어떤 제안이 개발될 경우 그 과정 내내 디자인 베리에이션(([정리자] 베리에이션(variation)은 하나의 기본적인 형태를 변화시키는 작업이나 그 변화된 상태를 지칭한다.))을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에 패러메트릭 패러다임은 한 건축가가 건물 하나를 디자인 하는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데이터로 통제되는 다수의 가상의 건물들을 디자인하는 기술적인 작업흐름을 건축가에게 제공했다. 패러메트릭 소프트웨어는 건물을 물체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비율을 가지고 공존하면서 전반적인 일관성을 유지하는 요소들의 네크워크로 정의하며, 건축가들은 이것을 기반으로 예산이나 규정의 변화 및 의뢰인의 심경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고 수백 개의 가능한 디자인들을 설계할 수 있다.

패러메트릭 방법론으로 가능해진 다수의 가상 건물들은 자본주의의 생산성의 승리로 보일 수 있으며, 이 경우 디자이너 한 명의 노동이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어, 건물 하나하나가 유일할 수 있는 도시 전체를 설계할 수 있게 된다. 이 기술적이고 개념적인 기획은 건축협회와 인스부르크 대학 소속이자, <자하 하디드 아키텍쳐>(Zaha Hadid Architects) 소속 패트릭 슈마허(Patrik Schumacher)가 낸 ‘패러메트릭 어버니즘’(parametric urbanism)이라는 아이디어로 탐구되었다. 패러메트릭 어버니즘이라는 유토피아적 비전은 건물들을 지역 부지 조건에 조화시키면서 모든 건물과 도시 내지 지역의 세부 베리에이션을 제어할 수 있는 통합된 알고리즘적 스타일을 제안했다. 슈마허가 주장했듯이 이 제안 이면에 있는 유토피아주의는 건물들 사이의 시각적이거나 양식적인 유사성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디자이너가 넓은 영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디자이너 한 명의 노동과 비전의 규모를 키우는 능력의 잠재적인 승리에도 존재한다.

패러메트릭 모델이 대량 주문제작을 가능하게 하고 수백 혹은 수천 개의 건물들을 서로 다르게 짓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모델은 한 명의 디자이너가 끼치는 영향력을 키우지는 못했다. 패러메트릭 정의 안에 존재하는 가상의 다양성으로 인해 서로 상충하는 제안들이 생겨나는데 이 제안들 가운데 하나만이 실행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결국 다양한 가상적인 것들 가운데 단 하나만 현실화된다.

의뢰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패러메트릭 방법론 때문에 자신들의 요구에 근본적으로 상이하게 접근하는 제안들을 받아 볼 수 있고, 잠재력이 있는 디자인 분야를 탐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대하게 되었다. 어쨌든 건축을 발전시키는 데 상당량의 자본이 요구된다는 점으로 인해, 민간부문이든 공공부문이든 둘 다 건축환경의 영구적인 부분이 될 것에 관하여 최종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많은 양의 디자인 제안들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상식화되었다. 하지만 패러메트릭 모델은 그런 과제를 수행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패러메트릭 방법론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제안들이 아니라 한 가지 제안의 변형들을 제공하기에 더 적합하다는 것을 입증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베리에이션은 본질의 변화가 아니라 정도의 변화인 것이다.

그런데도 수년 동안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은 건축공모라는 형식을 통해 근본적으로 상이한 다수의 제안들—건물의 제약들을 제각각 주의 깊게 고려하는 제안들—을 즉각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건축가들과 협력했다. 건축공모는 궁극적인 패러메트릭 모델화 방법론으로 간주될 수 있다. 디자인 참여자들에게는 큰 비용을 치르게 하면서 의뢰인에게는 상당한 디자인 베리에이션을 거의 무료로 주어서 광범한 가상의 다양성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축공모는 디자인 베리에이션을 제공하는 패러메트릭 디자인 방법론의 모든 원칙을 따른다. 패러메트릭 디자인이 디지털적으로 창조되는 건물들 중 99%를 폐기하듯이 건축공모 역시 적합한 해결책에 도달하기 위해 경합하는 노동인력 풀로서 편성된 건축가들이 무보수 노동으로 만들어낸 디자인들 가운데 99%를 폐기한다. 이렇듯 건축공모들은 우리가 기꺼이 제공하는 노동이 보상을 받지 못하는 투기성 노동의 관행들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건축공모가 건축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오래된 관습이라는 사실은, 패러메트릭 건축이 실제로 출현하기 이전부터 항상 우리가 패러메트릭 패러다임 속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패러메트릭 어젠다가 획기적인 스타일이라고 한 패트릭 슈마허의 주장을 건축공모들이 입증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건축분야의 진보에 기여하고 보수를 받는 주문을 받으려는 수많은 건축가들의 열망 덕분에 그들에게서 공짜나 다름없는 가치를 뽑아낼 수 있는 조달 기술을 전지구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그렇게 된 것이지 자유로운 시장참여자들 사이에서 새로 출현하는, 서로 연결 짓는 것의 미학이라는 슈마허의 주장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건축분야의 오랜 관습인 건축공모와 달리 패러메트릭 디자인을 규정하는 시대는 ‘승자독식’ 이데올로기와 지식이 ‘낙수’ 형태로 증식된다는 사고방식 아래에서 작동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시대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 시대에 전위적 기획들을 위해 개발된 혁신이 점차 사회적으로 채택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항상 새로운 ‘일회성’ 건물을 추구하는 것은 문화적 채택이 이루어질 여지를 거의 남기지 못한다. 오히려 신자유시대의 승자독식 모델이 권력, 자본 및 부의 대규모 불균형을 만들어냈다.

 

건축의 양극화

상업적 수단을 통한 건축술의 혁신 추구는 자본의 대규모 축적에 의존한다. 수 세기 동안 건축가들은 자신들의 건축 비전을 발전시킬 후원자로서 활약할 수 있는 의뢰인을 찾고자 했다. 한 가지 상징적 사례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피터 루이스(Peter Lewis) 및 <루이스 레지던스>(Lewis Residence)와 맺은 관계이다.(([정리자] <루이스 레지던스>(Lewis Residence)는 실현되지는 않은 주택개발 기획이다.)) 게리는 자신의 의뢰인들 중 보험업에서 수십억을 번 피터 루이스로부터 8200만 달러 주택—루이스가 결국은 짓지 않기로 한 주택—의 다양한 버전들을 디자인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고 의뢰자인 루이스는 이 의뢰건에 대해 6년의 시간과 600만 달러 이상의 비용을 썼다. 게리는 루이스로부터 받은 돈이, 자신이 받은 ‘맥아서(MacArthur) 영재상’의 상금처럼, 아무런 제약 없이 자신의 가장 진보적인 생각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 돈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인정했다.

피터 루이스 같은 의뢰인들은 별로 없으며, 건축교육에서 그러한 기대감을 조장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양의 건축연구와 교육이 그러한 비현실적인 의뢰인에게서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뿐인 주문에 바쳐지고 있다. 건축분야는 이러한 불균형적인 과도함을 알게 되었고 이런 건축 관행들을 비판하는 시도들이 건축학 내부에서 이루어졌다. 일례로 건축계는 생태적 재난 내지 금융재앙 이후 집을 박탈당한 사람들과 그 이후 살 곳을 잃을 버린 사람들과 함께 하는 건축으로 시선을 돌려 인도주의적인 저소득 프로젝트들을 강조함으로써 건축의 윤리성을 재발견하고자 했다. 칠레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Alejandro Aravena)가 조직한 2016년 베네치아 건축 비엔날레는 차별적으로 격리되거나 대표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해결방안을 만들어낸 건축가들을 부각시켰는데, 여기서 전 세계 부동산 투기, 집단지식 풀의 강탈 그리고 우버 및 에어엔비처럼 이른바 ‘공유경제’로 공통적인 공간들에서 수익을 추출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두 가지 태도들 즉 한편으로는 엘리트 의뢰인들을 위한 디자인의 낭비와,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낭비의 비윤리성에 필연적으로 반발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불가피한 측면이다.

이 체제에서 승자독식이라는 사고방식은 종형곡선의 양끝에서 작동하며 곡선의 가운데 혹은 볼록한 부분—도시 건축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간계층이 이 부분에 위치한다—은 줄어들거나 사라졌으며 심지어 건축을 위한 기획으로서 관심을 끌지 않게 되었다. 전문가들은 자본의 비대칭성에 좌우되지 않는, 노동이 가진 가치를 분명히 할 권한을 긴급하게 되찾을 필요가 있다. 무임금 노동이나 충분한 임금을 받지 않는 노동을 통해 엘리트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전통을 거부하는 것이 그 첫 걸음이다. 진보적인 건축은 퇴행적인 사회 관행들과 동의어가 되었다. 이것은 다른 분야들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되는 구조적인 문제들이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건축물 건립에서 양극화가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무자비한 경쟁하에서 작동하는 연구와 실천으로 번성하는 분야가 있으며 여기서는 많은 관계자들이 성공해서 유명인 반열에 오르기 위해 기꺼이 공짜로 일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결과인 착취와 박탈을 바로잡으려고 건축의 엄격함과 건축의 핵심가치들로 전환하는 흐름이 있다.

 

‘가운데 부분’을 다시 활용하기

1914년 헨리 포드(Henry Ford)는 노동자들의 하루 최저임금을 그 당시 자동차 회사들의 평균 임금의 두 배에 맞먹는 5달러까지 올리기로 결심했다. 포드는 노동자들의 소비력이 그가 키우고자 시도하고 있는 산업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포드는 노동자들이 그들이 만들고 있는 자동차를 살 수 있게 하고자 했다. 오늘날 미국 건축가들은 상당한 금액의 학자금 대출금이 쌓인 후인지라 디자인하도록 요청받는 유형의 건축물을 살 여유가 없다. ‘스타 건축가’ 시스템에 의해 육성되는 오늘날의 건축문화는 충분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인턴 노동과 착취적인 관행들로부터 나오는 상당한 양의 보조를 필요로 한다. 사회적 어젠다에 맞물려있는 관행들조차도 무임금 인턴십의 보조에 의존하게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중산층을 위한 건축은 상업적 명령에 의해 추진되는 것처럼 보인다. 종형곡선의 가운데 부분은 건축가들의 수중에 없는 시장, 즉 렘 콜하스(Rem Koolhaas)가 ‘정크스페이스’(Junkspace)라 부른 것과 종종 관련되어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줄어들거나 사라진 이 종형 곡선의 가운데 부분을 다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가운데 부분은 맞춤 제작한 것의 매력이나 인도주의적인 원조라는 영웅적 면모가 없기에 더 이상은 건축분야에 중요한 것이 되지 못했다. 건축분야는 근대 건축 운동을 연상시키는 큰 서사에 참여하기를 여전히 두려워한다. 어쩌면 시장 바깥 혹은 시장 주위에서 작동하지 않는 비판적 담론과 실천을 발전시키는 방안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어젠다의 추출 명령에 의해 생겨나는 경제적인 교착상태 때문에 자율이라는 기획이 자급에 기반을 두어 나타나게 되었다. 이제 건축가들은 스스로를 그들이 생각하는 건축의 사용자이자 생산자로서 재설정할 수 있으며, 그들이 속하는 문화에 재접속하고 그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의 디자인 기여를 재조정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가운데 부분을 다시 활용하는 것이 금욕이나 긴축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긴축은, 정부가 애초에 문제를 발생시킨 금융기관들이 낼 세금을 인상하지 않고, 그 반대로 금융기관들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서 공공서비스를 대폭 줄이는 것이다. 주택위기가 의미하는 바는 점점 더 많은 수의 시민들이 자신들이 일하는 장소에서 살 만한 경제적 여유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공공부문과 커먼즈가 시장투기의 반대쪽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필요하다. 공동체주의에 기초한 운동들의 출현은 전통적으로 공적인 것/사적인 것의 이두체제였던 것에 세 번째 부분을 추가할 수 있게 한다.

 

2008년 이후 전망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해서 사람들은 자유주의 정부와 보수주의 정부 공히 신자유주의 경제를 얼마나 깊이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시스템이 다수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서서히 갖게 되었다. 모든 건축가들이 중간에서 꼭대기로 가치를 뽑아 올리는 경제모델을 받아들이는 쪽에 서있다는 것이 건축학계의 현실인 만큼 건축가들에게 2008년은 건축가들이 사용하는 도구가 사실상 어떻게 경제적 어젠다를 내포하고 있는 사회-기술적 시스템인지를 숙고하도록 경종을 울린 한 해였다. 건축물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자본 뒤에 있는 경제적인 충동들과 동기들에서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사회-기술적 관점에서 보면 현 경제 관행이 선택한 최고의 무기는 디지털 플랫폼이다. 자본이 이것을 사용자들의 표준화와 자본 추출을 위한 도구로서 사용하게 된 것이다. 플랫폼은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전지구적 조직체들이며 사용자들끼리 소통하는 규칙들을 부과하고 플랫폼에서의 거래를 모니터링해서 획득한 지식에서 이윤을 추출한다. 플랫폼들은 시장 규제를 우회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두드러진 형태의 경제 불평등을 수반한다.

건축분야에서 건축공모는 초기의 플랫폼이자 어쩌면 훨씬 더 원시적이고 악의적인 플랫폼일 것이며 또한 보수를 지불할 가치가 있는 노동과 그렇지 않은 노동을 결정한다. 공모에 지원하는 경쟁은 투기적인 노동형태로 되어 있으며, 이는 트레버 숄츠(Trebor Scholz)가 주장한대로 고용, 노동시간 및 최저임금과 관련된 시장규제를 우회하는 메커니즘이 되었다. 우버의 경우처럼, 공모에 지원하는 건축가들의 경쟁으로 인해 자기 자신이 결정권자이고 주어진 요청에 참여하기 위해 보상받지 못할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건축가 기업가’라는 상이 극찬을 받는다.

2008년 금융위기는 건축계 자체의 투기 시장 내부에서 활약하는 건축가들 세대에게 깨달음을 주는 경험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건축가들은 자신들이 디자인 작업에서 승자독식 경제 시스템을 받아들였고 공모나 다른 플랫폼 제공자들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라며 매우 자주 무료로 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적인 예로 부상하는 <노!스펙 운동>(No!Spec movement)은 우리 건축가들이 비윤리적인 사업 관행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과 대안적인 모델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예기치 못한 깨달음을 나타낸다. 금융위기는 저항운동의 급증을 촉진했으며 이는 시장이 규제받지 않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알려준다. 규제받지 않는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투기성 노동은 구조적인 분할을 낳고 불평등을 증가시키므로 권력 불균형을 촉진하는 것이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는 대안들의 생산을 촉진하기도 했다. 우리가 참여하는 노동의 주권을 강조하는 공동체 번영의 모델들을 제작하려는 하부구조와 이데올로기를 연결시키는 사회-기술적 인식을 촉진한 것이다. 리차드 스톨먼(Richard Stallman)의 일반공중사용허가서(General Purpose License) 및 카피레프트 운동에서처럼 사용자들 간의 지식 증식을 보장하는 라이선스 계약 창출, 블록체인 기술의 출현에서처럼 분산된 방식으로 신뢰를 보증할 수 있는 분산원장들의 창출 그리고 알라스테어 파빈(Alastair Parvin)의 위키하우스 작업의 경우처럼 적정 가격으로 사용자들이 빌딩 솔루션을 스스로 마련할 수 있게 하는 건축의 오픈소스 형태 디자인이 이 모델들에 속한다.

 

건축 커먼즈의 틀 형성하기

이 책은 다섯 개의 장으로 나뉜다. 1장 「건축술의 발달」에서는 신자유주의의 명령 아래 작동하는 건축을 비판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한다. 먼저 건축술의 진보라는 생각이 과연 시민들의 번영에 이바지했는지를 묻고 인풋 당 아웃풋 효율의 증가(ephemeralization)라는 약속이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검토한다. 첫째 물음에 대해서는 건출술의 진보가 혁신을 일반대중에게로 ‘내려 보내지’ 못했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다음으로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시장 인클로저를 통해 작동하는지를 살펴본다. 신자유주의는 공적 도메인의 힘을 정의하는 규정들을 무너뜨리는 시스템으로서, 저자는 그러한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가치는 커먼즈로부터 추출된다고 주장한다.(([여기서 저자는 커먼즈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인다―정리자] 커먼즈는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저술을 통해 정식화되었을 뿐 아니라 데이비드 볼리어(David Bollier)와 마시모 데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의 관점—공동체적인 부의 창출에 참여하는 사회구조들 뿐 아니라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공유재 둘 다를 포함하는 정의를 모으고자 시도하는 관점—을 통해서도 정식화되었다.))

2장 「부분들의 융합」에서는 어떻게 추출적인 관행들이 건축에 분명히 나타났는지를 더 깊이 파고든다. 시장 다양성을 파괴하면서 수직적 통합을 이루는 대규모 제조활동이 자본 축적의 논리에 의해서 발생하게 되는 경향을 소개한다. 수직적 통합의 발생은 기술적인 어셈블리에 필요한 부분들의 수를 줄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제조에 명확한 혁신들을 제공했다. 3D 프린팅 같은 최근 과학기술들은 이전에 표준화된 구성요소들을 해체하는 식으로 수행적인 이점들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수직적 통합으로의 경향은 패러메트릭 디자인 패러다임과 명확한 상관관계가 있다. 이 장에서 저자는 패러메트릭 모델이 적은 수의 인구에 복무하고 시장 다양성에 충격을 주었다는 것을 짚어보고자 한다.

3장 「부분들을 옹호하여」에서는 디자인과 제조 분야에서 부분들의 사회적 어포던스(([정리자] 어포던스란 주체가 특정의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객체가 ‘제공’하는 관계를 가리킨다.))를 이해함으로써 대안적인 디자인에 필요한 제안들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다양한 다수의 행위자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건축 디자인의 분야가 공급자들 간의 협동 및 연계의 효율적인 형태들을 찾을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러한 노력이 1950년대의 <모듈협회>’(Modular Society) (([정리자] ‘Modular Society’는 책의 한 장으로서 크리스틴 월이 쓴 장 이름이기도 하지만, 원래 그 당시 영국의 협회 이름이다. 현재 희의록 등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https://discovery.nationalarchives.gov.uk/details/r/C2327371))같은 기관들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대의 시도들은 디지털 네트워크의 출현을 통해 동질화되지 않는 차원 연계의 구조들을 제공하고자 한다.(([정리자] 과거 <모됼협회>는 동질화와 표준화에 기반을 두었다.))

이와 관련해서 제시되는 틀은 연속적인 패러메트릭 모델에 의해 제시되는 ‘일회성의’ 모델과는 대립적인 위치에 있는 ‘이산(離散) 건축’(Discrete Architecture)이라는 패러다임이다. 이는 재조합 능력의 측면에서 부분들이 디자인되고 연구되며 다양한 생산물을 산출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다. 디자인은 이산 건축을 통해 다원적이고 비독점적인 생산 접근법을 유지할 필요성을 받아들인다. ‘디자인 커먼즈’의 산출을 위해 부분들의 ‘조합에 의한 잉여’(combinatorial surplus)의 연구 및 이 부분들이 가진 어포던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산(적) 건축의 이점들이 검토되며, 재사용가능한 패턴들이 정보 네트워크를 통해 전파될 수 있도록 하는 조합 디자인을 채택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4장 「비물질적 건축」에서는 네트워크 기반 시설이 감시 자본주의의 실행에 활용되었을지라도 사용자들에게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는 디지털 네트워크를 디자인하고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제시한다. 플랫폼이 추출 도구가 되는 것에서 협력 도구가 되는 것으로 이행하기 위해 플랫폼이 극복해야 하는 과제들에 대한 지도그리기를 한다. 트레버 숄츠(Trebor Scholz)가 옹호한 바의 ‘플랫폼 협동조합주의’(Platform Cooperativism) 같은 아이디어들을 여기서 살펴본다. 더 나아가 커먼즈에 복무하는 오픈소스 건축모델들의 저장소를 잠재적으로 생성시키면서 사용자들 간의 협동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건축용 플랫폼을 개발할 가능성을 이곳 4장에서 고찰한다. 비디오게임 기술이 플레이어들 사이의 협동 모델과 디지털 공동체에 참여하는 전통을 제공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5장 「자급을 통한 재구축」에서는 커먼즈가 다양성이라는 아이디어에 기초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자유를 확립하리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감시 자본주의에 의해 발전되는 기반시설에서는 특정 형태의 지성, 즉 사용자들의 정보를 모아놓은 집적 데이터(aggregate data)에서 생성되지만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얻어지는 지성이 효율적으로 배치되어왔지만, 이와는 다르게 커먼즈는 위계로서 작동하지 않는, 서로 합의하는 형태의 공동의 기반시설을 재구축할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5장에서는 어떻게 우리가 기울어지지 않은 운동장을 유지하고 진입장벽을 낮추어 설계하면서 민주주의와 관리를 테크놀로지에 함입할 수 있는지를 짚어보려고 한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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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olz,Trebor,‘Digital Labor: New Opportunities, Old Inequalities,’ Re:Publica 201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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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ncer, Douglas, The Architecture of Neoliberalism: How Contemporary Architecture Became an Instrument of Control and Compliance (Bloomsbury Academic, London and New York, 2016)
Srnicek, Nick, Platform Capitalism (Polity Press, Cambridge, 2017)
Zuboff, Shoshana, The Age of Surveillance Capitalism:The Fight for a Human Future at the New Frontier of Power (PublicAffairs, New York, 2019)

 

[보충설명]

건축술은 모두가 배워야 할 것이다. 모두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 존 러스킨

근대에 일어난 커먼즈의 대대적인 상실은 무엇보다도, 삶을 재생산하는 터인 ‘집’(home)의 상실이었다. 이 상실의 상황은 자본주의가 매우 발전한 탈근대에 들어와서도 호전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집의 상실이라는 상황이 거의 자연 상태에 해당하는 기본 설정이 되었다. 다수의 사람들의 경우 집을 구성하는 하드웨어인 주택(house)이란 것이 노동하는 사회생활을 매우 오랫동안 하고 나서야 간신히 확보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사실 주택을 안정되게 확보하는 일은 어떤 이들에게는 거의 평생이 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에게는 ‘평생’으로도 부족하다. 노동력은 재생산되어야 쓰일 수 있는데, 그 재생산의 터가 노동력이 한참 동안 쓰인 후에야 확보될 수 있다니! 아니, 평생을 노동해도 불가능하다니! 자본은 이런 모순적 상황 위에서, 즉 삶의 재생산 터의 ‘기본적’ 결핍을 기반으로 해서 자신을 증식한다.

그래서 커먼즈 되찾기는 집 되찾기를 필수적으로 포함한다. 그리고 집 되찾기에는 집을 구성하는 하드웨어를 박탈하는 메커니즘인 투기적 주택시장의 극복이 필수적으로 포함된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하자면 커먼즈 특유의 방식으로 주택을 확보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이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인 5장 「자급을 통한 재구축」“Reconstruction through Self-provision”의 내용의 일부를 포함한다.)

우선 자급을 원칙으로 한다. “자급의 실천이 공통적인 것의 현실화이다.” 자신의 집을 자기가 짓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인이 아무런 지식도 (아직은?) 없는 상태에서 DIY로 자신의 집을 짓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저자는 우선 건축가들이 자신들의 집을 짓는 데서 출발하는 것을 제안한다. 여기서 집의 디자인과 관련된 전문적인 지식이 생산되는데, 그 다음으로 이 지식을 일반 대중에게 전달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이것을 저자는 ‘해득력 사다리를 채우기’(to populate a literacy ladder)라고 부른다. 해득력 사다리는 전문가들이 생산한 지식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시스템으로서, 전문가들의 수준에서 가장 초보자 대중의 수준에 이르는 지식의 스펙트럼을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 사다리는 지식의 스펙트럼이 어떻게 새로운 미경험 사용자들과 전문가들 사이에 배치되는가에 의해 규정된다.”

이 해득력 사다리에서 지식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순환되는 데 그칠 경우에는 이것을 ‘약한 사다리’라고 부르고 초보적 수준에서 전문가 수준으로 점차적으로 올라가는 로드맵이 잘 되어 있으면 이것을 ‘강한 사다리’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서 해득력 사다리의 핵심은 가장 높은 수준과 가장 낮은 수준을 원활히 연결하여 초보자도 이 사다리를 타고 자신의 능력과 노력이 허용하는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저자는 이것이 단순히 테크놀로지(지식 생산)의 민주화라기보다는 민주주의를 테크놀로지(지식 생산)에 함입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내 식으로 풀자면, 테크놀로지의 민주화는 (대체로 사용자의 고정된 능력을 전제로 한) 테크놀로지 사용의 평등한 분배이고, 민주주의를 테크놀로지에 함입하는 것은 모두가 테크놀로지 사용자로서만이 아니라 테크놀로지 생산자로서의 능력을 자유롭게 배양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강한 사다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문턱을 낮추어 디자인하기’가 필요하다. 진입장벽이 낮아야 많은 사람들이 사다리 안에 들어올 수 있고 사다리 안이 더 열린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해득력 사다리를 만드는 것 자체가 자원의 집합소로서만이 아니라 ‘사회체계로서의 커먼즈’(마시모 데 안젤리스)의 생산으로 이어진다. 실제 집을 만드는 실천이 집짓기와 관련된 지식의 생산과 연결되므로, 저자가 제안하는 방안은 위키피디아, 리눅스 같은 비물질적 생산의 프로젝트를 물질적 생산으로 확대하는 방안이기도 하고, 단순한 참여―상부에서의 의사결정에 사용하기 위한 데이터 수집을 대중이 일시적으로 거드는 것―에서 자급으로 이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 자급은 아직은 국가로부터의 조달을 대체한다기보다는 보완하여 국가 및 시장 양자와 협상할 수 있는 시민조직들을 생성하는 것이 주된 일이다.

건축 분야에서 참여에서 자급으로 움직인 대표적 사례로 파빈(Alastair Parvin) 등의 위키하우스(Whikihouse)가 있으며, 건축가들이 자신들의 집만 짓는 것을 넘어서서 이룩한, 자급의 한 형태로서의 커먼즈를 위한, 그리고 커먼즈에 의한 건축의 기획으로는 Open City(1971)가 있다.((이 기획에 대한 사례연구로 Rodrigo Pérez de Arce and Fernando Pérez Oyarzún, Valparaiso Schoo /Open City Group, ed. by Raul Rispa (Birkhauser, 2003) 참조.))

[정백수]




퍼더필드 — 예술과 게임이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다

 



공상적이지만 거의 현실적인 시나리오가 여기 있다. 여러분의 지역사회 공원에 있는 꿀벌들, 다람쥐들, 거위들, 곤충들, 나무들 등등의 종(種)들이 인간의 침범과 학대를 충분히 겪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들은 더 이상 참지 않고 들고 일어나 인간이 가진 것과 동일한 권리를 요구할 작정이다. 종들 간의 일련의 회합을 통해 지역 생태계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번성을 보장하는 협정/협약이 타결된다.

이 시나리오는 <퍼더필드>(Furtherfield, 런던에 기반을 둔 예술공동체)가 빅토리아 시대 핀즈베리 파크의 일부 지역에 대한 파수의 일환으로서 고안한 ‘라이브 액션 롤플레잉’(live action role-playing, LARP)게임이다. 앞으로 3년에 걸쳐 <퍼더필드>는 프로젝트의 이름인 <핀즈베리 파크 2025 협정/협약>(The Treaty of Finsbury Park 2025)을 진행해나갈 때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각각 일곱 가지 종들의 역할을 하도록 요청할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풍뎅이와 다람쥐 종의 대표자들로서 <종(種)간 회의>에 참석하도록 함으로써 LARP게임이 목표로 하는 것은 사람들이 “놀이를 통해 인간이 아닌 생명체들에 공감하는 경로들”을 발전시키도록 돕는 것이다. 서로 다른 종들이 소통하도록 돕는 직감 다이얼(Sentience Dial)도 있다. 누가 알겠는가? 이 과정이 실제로 핀즈베리 파크를 더 무성하고 활기 넘치는 장소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 진기한 애니미즘 경험은 <퍼더필드>가 지난 25년 동안 주최해온 프로젝트들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이 프로젝트들 대부분은 예술, 디지털 기술 및 사회적 행동을 일정한 창조적인 방식으로 섞는다. 최근 『커머닝의 프런티어』(Frontiers of Commoning) 팟캐스트(에피소드 #24)에서 나는 세상에 대해 새로이 생각하는 방식으로서 참여예술에 대한 <퍼더필드>의 독특한 접근법에 관하여 루스 캐틀로우(Ruth Catlow)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술가, 큐레이터이자 <퍼더필드>의 공동대표인 캐틀로우는 1996년에 <퍼더필드>를 시작한 이래로 많은 예술 프로젝트들을 이끌어 온 비전을 가진 사람이다. 그녀는 지역적, 일국적 및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다양한 파트너들과의, 특히나 평범한 사람들과의 협동작업을 조직하는 것을 돕는다. <퍼더필드>의 많은 예술작업과 테크놀로지 기획들의 핵심은 우리가 세상을 다르게 보도록 하려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위해 새로운 미래를 그리는 경우 예술이 하는 역할을 존중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퍼더필드>의 프로젝트들 대부분은 런던 소재 핀즈베리 파크에 있는 녹지 공간 및 미술관에서 그리고 예술가들•기술자들•활동가들을 불러 모으는 다양한 디지털 공간에서 열린다. 지역 공무원들이 <퍼더필드>의 예술 프로젝트들을 펼칠 참여적인 무대로서 공원을 사용하도록 <퍼더필드>측에 청했다. 전통주의자들은 이 단체를 예술의 센터라고 부르겠지만 <퍼더필드>측은 자신들의 활동이 외부 지향적이고 네트워크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재미있게도 ‘디-센터’(de-center, 탈-중심)라고 부른다.

<퍼더필드>는 흥미를 유발시키며 장난기가 다분한 기발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예술적 실험들의 주최자라고 자임한다. 이 탐구적 실험들은 오픈소스 테크놀로지와 철학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퍼더필드> 자신들의 말로는) “현존하는 권력들을 파열시키고 민주화”하며 “지형을 새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일례로 <흑인의 삶도 중요하다> 시위들이 무수히 일어나 미국과 전 세계 도시를 흔들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노예소유자 사업가들과 군장성들이 공원에 청동 조각상으로 세워지는 영광을 입은 이유를 문제삼기 시작했다. <퍼더필드>는 공원에 있는 받침대 위에 지금 있는 것 대신에 누가 또는 무엇이 놓여서 기념되어야 할지에 대하여 공개 토론을 열기로 결정했다.

예술가들은 ‘시민 공원 받침대’ 프로젝트(The People’s Park Plinth project)측으로부터 공원에서 기념하게 될 새로운 사람들이나 물건을 제안하도록 요청을 받았다. 이 과정의 매개체는 스마트폰이었다. 공원에서 산책하는 사람들이 나무나 동상 받침대에 부착된 QR코드를 스캔하면 공원 내의 해당 장소에 관한 영상을 즉각 볼 수 있었다. 사실상, 이 프로젝트가 스스로를 설명했듯이, 이 프로젝트는 “공원 전체를, 여러분이 여러분의 공원에 원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하는, 디지털 예술작품을 위한 공공 플랫폼으로” 바꾸었다.

누구나 제안된 예술품 몇 개에 투표할 수 있었다. 1위를 차지한 작품—에이샤 탄 존스(Ayesha Tan Jones)가 제작한 <나무 이야기에 바탕을 두어>(Based on a Tree Story)—은 나무에 있는 QR코드를 사용하여 그곳에 사는 나무 요정의 영상을 호출하는 예술작품이었다. (“장소 특유의, 청각적 증강현실을 통해 나무의 과거•현재•미래의 이야기를 하는 디지털 나무 요정과 조우하기”)

예술작품을 선정하기 위한 공개적인 투표는 그 자체로 상당히 새로웠다. 각 참가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하나의 예술작품에 투표권을 한 번 행사하는 식이 아니었다. 그들이 원하는 만큼 많은 예술작품들 각각에 투표할 수 있는 다수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제곱 투표”(quadratic voting)라 불리는 이 방식은 어떤 프로젝트가 과반수를 얻는지를 그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떤 것에 가장 열광하는지를 보여주는 쪽이다. 이 시스템은 소수의 목소리를 무효화하는 “다수의 횡포”라는 문제점과 파당성이 강한 집단들이 방해물로 작용하는 상황을 극복할 목적으로 구상되었다.

<퍼더필드>의 더 흥미로운 역할들 중 하나는 어떻게 블록체인 소프트웨어가 네트워크 시대에 예술을 재발명하는 것을 도울 수 있는지에 관하여 실험실을 열고 예술가들과 기술전문가들 간 일련의 토론들을 주최한 것이었다. 핵심은 문화 부문이 어떻게 “피어 생산방식으로 생산된, 예술•문화•사회를 위한 탈중심화된 디지털 인프라에 이르는 길”을—특히 탈중심화된 자율조직들(Decentralised Autonomous Organisations, DAOs)을 통해서—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퍼더필드>는 “예술계에서 게이트키핑과 엘리트주의를 끝내”고 “규모에 제한이 없는 상호의존과 상호협력을 위한, 회복력 있고 변화도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한 가지 길로서 이 깊고 근본적인 우애의 정신을 가져오기”를 원했다. <퍼더필드>는 또한 기술 부문에서 아주 많은 탈중심화된 자율조직들을 활기 띠게 하는 자유의지적인 개인주의를 넘어가기를 원했다.

<퍼더필드>의 회합들의 결과로 두 권의 책이 나왔다. 하나는 『블록체인을 다시 생각하는 예술가들』(Artists RE:thinking the Blockchain, 2017)—예술가들이 블록체인에 비판적으로 참여하는 활동에 관한 책—이고 다른 하나는 2022년 5월에 출간되는 『급진적인 친구들』(Radical Friends)—예술계에서의 디지털 자율조직들(DAOs)의 위험 및 이 조직들에 대안이 되는 커먼즈 기반 디지털 자율조직들에 관한 선집—이다. “<퍼더필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안적 조직들에 “DAOs with Others”를 나타내는 두문자어 ‘DAOW’라는 이름을 붙인다.”

루스 캐틀로우와 나눈 팟캐스트 대화는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전 세계 LGBT들은 ‘백인 구원자’가 자신들을 구하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다

 

  • 저자 : 루 페레이라(Lou Ferreira). 루는 ‘2020~2021 백래시 추적(2020-2021 Tracking the Backlash)’의 국제 조사 연구원이다.
  • 원문 : LGBT people globally are not waiting for ‘white saviours’ to rescue them (2021. 6. 8) https://www.opendemocracy.net/en/5050/lgbt-people-globally-are-not-waiting-for-white-saviours-to-rescue-them/(This article is published under a Creative Commons Attribution-NonCommercial 4.0 International licence.)
  • 분류 :  번역
  • 옮긴이 : 채희숙
  • 설명 : 이 글은 넷플릭스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를 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피터 태철: 세상이 미워한 남자Hating Peter Tatchell>(크리스토퍼 에이모스Christopher Amos, 호주, 2021)에 관한 짧은 비평글을 번역한 것이다.

전 세계 LGBT들은 피터 태철 덕분에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지만, 넷플릭스의 신규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렇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엘튼 존(Elton John)의 후원으로 지난달에 개봉된 <피터 태철: 세상이 미워한 남자>는 유명하고 논란이 많은 영국의 LGBT 인권 활동가와 그의 반세기 넘는 캠페인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다양한 목소리와 결정적인 맥락을 제외함으로써 이 시기의 더 넓은 이야기를 반영하는 데 실패한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태철을 모든 곳에서 퀴어를 구하는 ‘백인 구원자’와 같은 인물로 보여준다.

이것은 훨씬 더 풍부하고 힘있는 작품일 수 있었다. 그러나 도리어 이 영화를 보면서 세 가지 주요한 이유로 나는 좌절했다.

1. 사라진 목소리들

유명한 게이 배우들인 스티븐 프라이(Stephen Fry)와 이안 맥켈런(Ian McKellen)을 포함에서 거의 전부 백인 남성 영국인인 인터뷰 출연자들은 영국 안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태철의 LGBT 권리를 위한 50년 넘는 캠페인과 시민불복종 활동을 돌아본다.

우리는 태철이 10개국 넘는 곳에서 벌인 시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그가 2018년 축구 월드컵을 앞두고 푸틴의 반LGBT 정책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러시아 여행을 준비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옹호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거의 듣지 못한다. 풀뿌리의 승리들은 당사자가 아닌 영국 유명인들의 이야기들에 가려진다.  

누가 푸틴의 러시아에서 성적 권리에 반대하는 백래시에 따르는 인적 희생을 설명하는가? 스티븐 프라이다. 러시아 LGBT는 체포와 동성애혐오 폭행을 담은 푸티지에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태철 이야기의 소품에 불과한 것처럼 배경에 있다. 우리에게 직접 이야기를 하는 유일한 러시아 활동가에게서 우리가 듣는 것은 태철의 도움에 감사하는 말뿐이다.

2. 사라진 맥락

태철은 영국의 LGBT에게 1980년대는 “악몽과도 같은 시기”[인용은 영화 자막을 따름-옮긴이]였다고 회상한다. 대처의 보수당 정부가 학교에서 동성애를 소위 ‘조장’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 28절을 내놓은 한편 에이즈바이러스(HIV,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의 확산은 반동성애 차별을 악화시켰다. 태철은 동성애자 및 양성애자 체포의 급증을 언급하면서 “경찰은 우릴 보호하지 않고 오히려 박해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사라진 것은 당시의 반인종주의 투쟁을 어떻게든 반영하는 것이다. 1980년대에 경찰의 보호를 기대하는 것은 모두가 누리지는 못하는 특권이었다. 흑인 시민권 운동은 태철이 그 운동에서 자신이 영감을 받았고 “그들의 이상, 가치, 방법을 [배워서] 나의 인권 운동에 적용했습니다”라고 말할 때 잠시 거론된다. 

반LGBT 차별이 어떻게 인종 또는 젠더에 기반을 둔 억압과 교차하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는데, 이는 특히 흑인 트랜스 여성을 폭력의 위험에 처하도록 계속 내버려둔다. 또 스크린에서 밀려나있는 것은 바로, 장애인의 권리에서 광부들의 노동쟁의에 이르기까지 1980년대에 떠오른 영국의 다른 시민권 투쟁들이다.

3. 백인 구원주의?

2001년 태철은 호텔로비에 매복했다가 짐바브웨의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Robert Mugabe)에 대해 고문‘죄’를 근거로 한 시민체포를 극적으로 시도했다. 그는 영화에서 “짐바브웨의 인권 운동가는 제가 국제적으로 무가베 정권의 만행을 알릴 행동을 취해줄 수 있겠냐는 부탁을 해왔습니다”라고 설명한다.

러시아에서 태철에 관해 보도된 바처럼 이 다큐멘터리는 짐바브웨 활동가들에게서 직접적으로 듣는 장면을 오직 하나만 제공한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것은 지역 운동원들이 백인 영국인에게 감사하고 있는 클립이다. 그들이 수년 동안 자국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싸워온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또 다른 장면에서 우리는 태철이 런던의 이슬람사원 바깥에서 캠페인하는 것을 본다. “[우리는] 무슬림 공동체와의 결속력을 다지고자 합니다”라고 그는 설명한다. 런던에는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서 그런 연대를 형성하고 있는, 유색인종이 이끄는 수많은 단체들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점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피터 태철: 세상이 미워한 남자>은 LGBT 권리운동의 전체 역사를 제시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이들의 목소리와 역할을 무시하고, 태철이 세계의 퀴어를 구하는 1인 시위 기계인 것처럼 그를 위치지은 것에 변명이 되지는 않는다.

전 세계 LGBT는 백인 영국 남성이 나서서 자신들을 구해주는 것을 기다리고 있지 않다. LGBT가 그러한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암시하는 것은 그릇된 이해를 낳으며 모욕적이다.  




지상(地上)의 소금: 공통주의에 대하여 ― 네그리 인터뷰 (2)

 


  • 저자  : Antonio Negri, Pascal Gielen, Sonja Lavaert
  • 원문 : “The Salt of the Earth. On Commonism: An Interview with Antonio Negri,” in Commonism: A New Aesthetics of the Real, ed. Nico Dockx, Pascal Gielen, Valiz, 2018, pp. 91-116.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윤영광
  • 설명 : 『공통주의: 실재적인 것의 새로운 미학』(2018)의 저자들인 벨기에의 사회학자 Pascal Gielen과 철학자 Sonja Lavaert가 네그리를 상대로 2018년 8월 18일에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정리자의 판단에 따라 생략한 부분이 있으며 나머지도 엄밀한 의미의 번역은 아닌 내용 정리지만, 가독성을 위해 인터뷰의 형식과 어투는 유지했다. 분량을 고려해서 세 차례에 걸쳐 나누어 게재한다. 
  • 1편 : http://commonstrans.net/?p=1817
  • 3편 : http://commonstrans.net/?p=1853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커먼즈의 리더쉽이 다중의 전략과 리더의 전술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리더는 다중의 일반적 전략 내에서 자신의 전문성에 따라서 오직 일시적으로만 일정한 전술적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죠. 이러한 리더쉽은 어떻게 조직될 수 있습니까? 또한 다중에게 전략을, 리더에게 전술을 할당하는 당신의 이러한 전도(顚倒), 마찬가지로 지도자들이 단지 일시적으로만 임명되는 대의민주주의와 얼마나 다른 것입니까?

답 : 나는 우리가 운동과 지도자 사이에서 작동하는 정치적 리더쉽이 제거되거나 약화되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결정 권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정당들의 공식은 무엇이었습니까? 당은 일정한 정치적 노선을 따라 다수의 사람들을 결집합니다. 이때 정치적 노선은 리더나 지도부에 의해 결정되어 하향식으로 사람들에게 말 그대로 부과되거나 교육되는 것이지요. 오늘날 운동들은 기존의 제도들을 거부하고 있으며, 『어셈블리』에서 마이클과 나는 운동들의 이러한 비판을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리더쉽은 거부하되, 제도 그 자체를 반드시 거부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현재 우리는 제도의 문제를 마주하고 있고, 함께 연구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더 정확히 바꿔 말하자면, 리더쉽을 운동으로 다시 가져오되, 리더쉽의 헤게모니적 전략은 반드시 운동 내부에서 발전되어야 합니다. 리더로부터 결정 권한을 분리해야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리더로부터 결정의 추상성과 초월성을 제거해야 합니다.

 

: 하지만 리더는 어떻게 선택되는 것입니까? 커먼즈는 대의민주주의와 어떤 점에서 다릅니까?

문제는 어떻게 선택하느냐가 아닙니다. 선택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진짜 문제는 리더에게 주어지는 힘의 성격입니다. 오늘날 운동들에서 리더는 꽤 자주 다중으로부터 자발적으로 나타납니다.

리더의 힘은 전술적 차원에 국한되어야 하며, 이는 보통 제안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합니다.

근래의 운동에서 활동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군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리더가 되는 현상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현상은 운동이 직면한 현실적 필요 및 문제에 대해 리더로 나선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통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떻게 한 리더의 힘이 일정한 시점에 인정되고, 개시되며, 잘 작동하고, 결과적으로 하나의 현실이 되는지를 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죠. 1917년 혁명 때 레닌은 당시 제기되었던 두 가지 문제에 대한 답 ― 지금 당장 평화를, 그리고 농장노동자들에게 토지를 ― 을 즉각, 직접적인 방식으로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술적 리더가 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군대와 농민을 대표하던 권력들은 병사들도, 농장노동자들도 이러한 변화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때문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역설적인 상황이었죠. 레닌은 리더로서 저 지배제도들을 향해 ‘아니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힘이 되는 전술의 사례입니다.

리더는 언제나 일시적이고 전술적입니다. 그는 요구와 필요를 갖고 있는 사람들, 주체들의 투쟁에 자신의 능력을 보태기 위해 나서는 사람입니다.

 

: 그렇다면 리더는 사람들의 요구와 필요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게 되는 것입니까? 그가 사람들로부터, 그들 가운데서 나왔기 때문인가요?

바로 그렇습니다. 리더는 그 자신이 사람들이 제기하는 요구와 필요의 일부이고, 그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는 것입니다. 공식적인 역사에 따르면, 레닌은 민중과 게임을 벌인 정치선동가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정반대가 진실이라는 것을 압니다. 혁명이 성공했던 것은, 레닌이 평화와 토지가 민중의 진정한 요구이자 필요임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리고 의회 시스템이 만들어낸 온갖 타협들, 문제를 망가뜨릴 뿐인 우회로와 제도들 없이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답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많은 지도자들의 경우에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가령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독일과 맞서 싸우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다수/공통적인 것의 욕구 및 필요와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리더, 바로 이것이 요점입니다.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제도 혹은 리더가 반드시 중앙집중적인 지배구조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며, 다중에 의해 민주적인 방식으로 현실화될 수 있다는 가설을 옹호합니다. 당신이 운동들의 미래로 제시하는 사례들 가령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은 이러한 가정의 연장선에 있지요. 하지만 이러한 관념과 사례들은 수평적 리더 부재’(horizontal leaderless)에 대한 당신의 비판에 잘 들어맞지 않거나 심지어 그것에 반대되지 않습니까?

답 : 많은 운동들이 리더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적인 것, 혹은 이 운동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제도입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운동들이 리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제도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운동들이 제도를 가지지 않는다면, 제도적 틀을 채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수일 것입니다. 그러나 마이클과 나는 운동들 내부에서 제도를 형성하고 그로써 수평적 헤게모니를 현실화하는 경향이 존재한다고 확신합니다. 우리의 작업은 주권적이지 않고 소유와 연결되지 않는 유형의 제도를 물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형의 제도가 실천에서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가 바로 우리가 토론하고 고민하고 시험해야 하는 바일 겁니다.

 

: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연결되는군요. 당신은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 적대적 개혁주의(antagonistic reformism) 그리고 헤게모니라는 세 가지 정치전략들의 상호보완성을 이야기합니다. 기존 제도들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비()주권적 제도들이 만들어질 때, 기존 제도에서 폐기되어야 할 것은 정확히 무엇입니까?

답 : 우리는 현재 19세기와 20세기에 정치적 사유와 실천을 지배했던 개념들이 죽음을 앞두고 벌이는 마지막 싸움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 죽어가는 개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국가주권과 소유(공적 소유와 사적 소유 모두를 포함하는 소유)입니다. 민족국가주권은 지구화된 자본주의에 의해 약화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적 자본주의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상호 지지하는, 저 근근히 생존을 유지하고 있는 두 개념들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민족국가주권이 기초하는 개념 혹은 원리, 특히 ‘국경’은 현재 정말 부조리한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끊임없이 국경을 초월하고 넘나듭니다. 우리의 두뇌는 이미 지구화되어 있고 더 이상 국경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국경과 같이 빈사 상태의 원리와 개념들을 가차없이 다루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이론적 작업입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모두 아우르는 소유의 문제 역시 마찬가집니다. 소유는 국경과 동일한 논리에 기초해 있으며, 그것만큼이나 현실에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개념입니다.

반대로 공통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소유의 개념이 아닙니다. ‘공유재(common goods, beni comuni)’와 ‘공통체(commonwealth)’에 있는 것으로서의 ‘공통적인 것(the common, il comune)’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전자는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후자는 하나의 생산, 내부로부터 공통적인 것 자체에 의해 늘 새롭게 형성되는 무언가이며 따라서 결코 소유될 수 없는 것입니다.

 

: 새로운 비주권적제도들이 어떤 모습을 갖게 될지에 대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무언가를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세 가지 정치적 전략들, 즉 예시적 정치, 적대적 개혁주의, 제도들에 대한 헤게모니는 정확히 어떻게 함께 작동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세 가지 전략들이 따라야 하는 순서가 있습니까, 아니면 나란히 진행되어야 합니까?

답 : 나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 세 가지 정치적 전략은 정치적 실천에 관한 문제입니다. 책상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닙니다. 그건 불가능한 동시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나의 작업은 연구하고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것, 일반적 틀들을 비판적 방식으로 제공하는 것, 담론의 토대를 탐사하는 것, 원칙과 개념들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것입니다. 투쟁의 실천은 이것과 다른 문제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토론과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바로 그 투쟁 내부에서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하고자 하는 야심을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미래가 스스로를 알리고 발생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나에게는 이것이 핵심적인 이슈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미래는 실천 속에서 만들어질 것입니다. 반면 나는 나의 작업이 방향을 가리키고, 아이디어와 구조의 원칙들에 대한 비판을 정식화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다음과 같은 헤겔의 말을 인용합니다. “모든 것은 참()을 실체로서뿐만 아니라 동일하게 주체로서도 파악하고 표현하는 것에 달려 있다.” 주체성이란 당신에게 정확히 무엇입니까? 오늘날 주체성은 다른 형태를 띨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입니까?

답 : 헤겔에게 주체성은 종합과 극복을 의미했습니다. 주인-노예 변증법에 대한 알렉상드르 코제브(Alexandre Kojève)의 해석을 생각해보세요. 노예는, 주인을 섬기는 동시에 주인을 주인으로 구성하는 한에서 주인을 극복합니다. 젊은 시기 맑스의 작업에서 자본주의와의 관계에서 규정되는 프롤레타리아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 사회에 완전히 통합된 부분이 되는 한에서만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로 형성하고 자신의 기획을 실현합니다. 그러나 『자본』에는 더 이상 이런 해석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늘날 노동자들의 현실에 대한 우리의 분석 또한 그러한 해석을 따르지 않습니다.

현 시기 노동자의 주체성은 특이성입니다. 특이성은 공통적인 것이 구성되는 가운데 생산됩니다. 역으로 특이성은 공통적인 것의 구성에 참여합니다. 오늘날 주체성은 혁신이자 초과라는 의미에서, ‘존재’의 생산입니다. 그것은 자유의 실천이며, 따라서 주체성의 생산은 어떠한 동일성-정체성도 넘어서는 무언가입니다. 주체는 동일성-정체성이 아니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제시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주체는 협력 속에서, 사회적 존재 속에서 형성되며, 그러한 한에서 역사적인 것입니다.

 

: 어셈블리의 조직화에서 예술과 예술계의 역할을 어떻게 보십니까? 한편으로 우리는, 오늘날 예술계가 전시회와 비엔날레 등에서 주류 미디어가 제공하지 못하는 교류와 토론의 공간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역할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계가 결코 한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전시회와 비엔날레들은 종종 홍보 수단으로 쓰이며 토론을 상품으로 바꿀 뿐이라고 결론 짓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정을 염두에 둘 때, 당신이 보기에 예술계 혹은 예술 그 자체는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커먼즈를 형성하고 강화하는 데 그것이 담당할 수 있는 역할이 있기는 한 걸까요?

답 : 『예술과 다중』(1989)에서 이야기한 바 있듯이, 예술은 언제나 그것이 생산하는 방식과 연결되어 논의될 수 있습니다. 예술은 생산입니다. 예술의 존엄성은 그것이 ‘존재’의 생산, 의미있는 이미지들의 생산이라는 사실로부터 나옵니다. 여기서 이미지는 ‘존재’를 형성하는 이미지, 숨겨진 조건으로부터 ‘존재’를 끄집어내서 그것을 개방된 조건으로 변형하는 이미지를 말합니다. 이런 일은 언제나 생산의 과정에서 발생합니다. 일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재화 일반이 생산되는 방식과 예술이 생산되는 방식 사이에 유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예술에서는 언제나 무언가를 구축한다는 의미의 ‘만듦(making)’이 이루어집니다. 예술은 언제나 일정한 형태의 짓기, 조립하기, 생산적 제스처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일정한 구분이 존재한다는 것은 명확합니다. 자신을 상품으로 마케팅하는 예술이 있는가 하면, 생산적인 예술적 만듦의 형태도 있는 것이지요.

언어와 마찬가지로 예술은 소통을 생산하고 연결을 만들어냅니다. 특히 오늘날 예술은, 연결을 구성하고 사건이 된다는 점에서 언어의 실천과 유사합니다. 예술은 점점 더 물질성을 제거하고 비물질적 생산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예술은 비물질적 생산과 동일한 흐름을 따르며, 유동적이고 불안정하며 새로운 이미지들과 예기치 못한 형태와 형상들 속에서 연결들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방식으로 예술은 스스로를 현재의 생산양식과 결합하며, 이 생산양식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사건 및 정념들과 관련된 행위들을 해석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술의 변신(metamorphosis)을 목격하는 국면에 있습니다. 노동이 스스로를 완전히 변형하는 생산양식의 국면에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예술과 관련하여 나는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첫째, 예술은 ‘만듦’의 한 형식이며, 따라서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의 생산양식과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둘째, 예술은 ‘존재’를 생산하는 능력을 갖습니다. 물론 모든 예술이 언제나 진정한 ‘존재’를 생산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이 존재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시장에 복무하며 시장 내에서 생산되고 유통되는 예술과 ‘존재’를 생산한다는 의미에서 절대적 생산으로서의 예술은 분명히 구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1년 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사람들은 맑스를 읽었습니다. 아테네에서 열린 <documenta 14>에서는 매우 강한 의미의 정치적 예술이 선보여져서 네덜란드의 전국신문인 <NRC Handelsblad>혁명을 위한 무대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죠. 그러나 동시에 이 혁명적 플랫폼들은 비엔날레와 도큐멘타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으며, 이는 발터 벤야민이 정치의 미학화라고 칭했던 것 벤야민에 따르면 이것은 파시즘의 징후이기도 하지요 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습니다. 예술이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파시즘 그 자체를 긍정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분명 신자유주의를 강화하며 예술을 상품으로 전환하는 제도들로부터 예술이 벗어날 수 있을까요?

 

답 : 탈출의 길은 언제나 있습니다! 말씀하신 공간들은 명확히 전장(戰場)으로, 대결과 충돌, 갈등과 균열의 장소로 간주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엔날레와 도큐멘타가 대표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국가 혹은 시장의 이 거대한 예술제도들은 통제 메커니즘으로 기능하는데, 이러한 통제기능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늘 가능하며 또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예술가들은 노동자들과 정확히 같은 조건에 있습니다.

내 생각에 예술제도들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것들은 경기장,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진리를 위한 싸움이 벌어지는 경기장, 이데올로기 비판과 생산의 경기장입니다. 권력의 담론이 드러나는 곳인 동시에 또한 언제나 시장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국가와 시장에 의한 이 통제의 우리(cage)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며, 이러한 탈출은 언제나 예술의 발전의 일부를 이루어 왔습니다. 예술은 매번 다른 방식으로, 다수의 상이한 형태로 스스로를 드러내 왔습니다. 가령 한때는 오늘날 예술제도들과 동일한 역할을 담지했던 예술의 후원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도 문제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조건들에 맞서 예술이 수행해온 끊임없는 저항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나는 예술이 어떤 식으로든 권력의 편에 선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대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화가들과 조각가들이 그랬고, 네덜란드 ‘황금기’의 화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술에는 그 예술적 생산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단절의 지점들이 언제나 존재해 왔습니다. 저 화가와 예술가들이 그들의 특정한 사회적 맥락의 분리불가능한 부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이 단절의 지점들 때문에 우리는 예술을 진리를 밝히는 하나의 방법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절의 지점들이 예술에 진리의 양식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죠.

나는 종종 예술가 친구들-동지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들은 점점 더 시장에 대해 비판적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시절 계급투쟁을 강하게 신뢰하거나 그것에 공감하는 동지들의 행위에는 시장에 대한 일반적인 저항이 존재합니다. 시장에 대한 거부는 점점 더 근본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부와 항의는 타협 없는 근본적인 비판을 낳습니다.

물론 종종 ‘무(nothing)’의 강한 유혹, 행위하지 않고 만들지 않으려는 유혹, 혹은 ‘하지-않음(not-doing)’/‘만들지-않음(not-making)’을 표현하는 예술작품을 제시하려는 유혹 또한 존재합니다. 나는 이러한 이슈들에 대해서 신중한 편이며, 모든 행위에는 ― 따라서 예술 행위에도 ― 물질적 구성이 요구되고, 그러므로 현실과 관련을 갖는 구성 역시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순수성을 추구하거나 힘을 악마화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지상(地上)의 소금: 공통주의에 대하여 ― 네그리 인터뷰 (1)


  • 저자  : Antonio Negri, Pascal Gielen, Sonja Lavaert
  • 원문 : “The Salt of the Earth. On Commonism: An Interview with Antonio Negri,” in Commonism: A New Aesthetics of the Real, ed. Nico Dockx, Pascal Gielen, Valiz, 2018, pp. 91-116.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윤영광
  • 설명 : 『공통주의: 실재적인 것의 새로운 미학』(2018)의 저자들인 벨기에의 사회학자 Pascal Gielen과 철학자 Sonja Lavaert가 네그리를 상대로 2018년 8월 18일에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정리자의 판단에 따라 생략한 부분이 있으며 나머지도 엄밀한 의미의 번역은 아닌 내용 정리지만, 가독성을 위해 인터뷰의 형식과 어투는 유지했다. 분량을 고려해서 세 차례에 걸쳐 나누어 게재한다. 이미지는 인터뷰 중에 언급되는 이탈리아 나폴리 <Ex Asilo Filangieri>의 홈페이지(http://www.exasilofilangieri.it/)에서 가져온 것으로, 나폴리에 있는 ‘해방공간’들의 연결을 나타낸다.
  • 2편 : http://commonstrans.net/?p=1832
  • 3편 : http://commonstrans.net/?p=1853

 

마이틀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는 『어셈블리』(Assembly, 2017)를 통해 『제국』(2000), 『다중』(2004>, 『공통체』(2009) 3부작을 다시 새로운 10년으로, 4부작으로 확장시켰다. 네 번째 책에서 이 공통주의(commonism)의 옹호자들은 다시 한번 사회 발전에 있어서 가장 문제적 지점들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제공한다. 이번에 중심 이슈는, 그토록 많은 이들의 요구와 소망을 표현하고 공통적인 것이 하나의 사실임을 보여주는 사회운동들이 어째서 새롭고 진정으로 민주적이며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실패해왔는가이다. 『어셈블리』에서 저자들이 제시하는 많은 명제와 개념들이 그렇듯이, 문제제기의 노선 자체가 이미 논쟁적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리더쉽과 제도의 문제를 대면해야 하며, 과감히 다중의 기업가성(the entrepreneurship of the multitude)을 상상하고 낡은 말들을 전유해서 그 의미를 역전시켜야 한다. 우리는 파리에 있는 네그리의 집에서 그를 만났으며, 역전을 위한 방법을 검토하고, 전략과 전술, 이데올로기와 미학, 예술과 언어에 대해 토론했다.

― Pascal Gielen, Sonja Lavaert

 

: 우리의 책 공통주의는 이데올로기, 미학, 커먼즈가 이루는 삼각형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잠정적인 생각은, 공통주의가 신자유주의 이후의 후속 메타이데올로기(meta-ideology)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뿐만 아니라, 픽션과 현실을 연결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삶의 더 나은 형태를 갈망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도록 할 수 있는 믿음의 논리라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셈블리에서 당신과 마이클은 기업가성’, ‘제도’, ‘리더쉽등과 같은 개념들로 우리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이데올로기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당신은 그것이 긍정적인 내러티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 내 경험상 이데올로기는 대개 부정적인 함축을 갖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이데올로기’를 주로 부정적인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현실적인 사실입니다. 더욱이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구현하고 형성하며 구성하는 현실적인 무언가입니다. 이러한 현실의 구현에서 내가 긍정적으로 여기는 것은 비판 ―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고 현실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습니다 ― 과 (사유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의 이행으로 이해되는) 장치(dispositive)입니다. 이데올로기들이 현실을 구성하는 것은 맞지만, 나는 그 용어를 주로 그것의 부정적 측면을 이야기할 때 쓰는 쪽을 선호하며, 긍정적인 측면을 이야기할 때는 비판이나 장치라는 용어를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현실에 대해 생각할 때 그리고 현실을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할 때 이데올로기적 차원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반복하건대, 이데올로기는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그람시가 이데올로기를 이런 식으로 보았습니다. 한편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람시가 반대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우리가 지지하는) 코뮤니스트 이데올로기가 있습니다. 나는 오늘날 코뮤니스트 이데올로기를 비판이나 장치 ― 비판은 지식과 지성의 영역에 관한 것이고, 장치는 지식에서 행위로의 이행이라는 푸코적 의미에서의 장치입니다 ― 로 부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메타-이데올로기’라는 말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메타’, ‘포스트’, ‘이후(after)’와 같은 말들을 쓰는 것을 매우 꺼립니다. 그 말들은 초재적인(transcendent) 무언가 혹은 초재성의 공간과 같은 무언가가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메타이데올로기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좌파와 우파 사이의 전통적인 정당정치적 차이들을 초월하는 경향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공통적인 것이라는 테마가 취해지는 곳이면 어디서나, 공통적인 것의 이니셔티브가 전개되고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경향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신자유주의적 정치인들이 기본소득의 중요성에 대한 책을 쓰고, 신민족주의(neonationalism)가 스스로를 사회적 화합을 갈망하는 것으로 제시하며, 종교적 영감에 기반한 정당들이 공유와 공동체를 강조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답 : 공통적인 것은 좌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를 보면, 자본주의가 이윤을 낳는 것으로 변형한 것이 다름 아닌 커먼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커먼즈에 대한 자본주의의 태도는 수탈, 개발, 잉여가치 창출, 그리고 이것들에 기반한 지배입니다. 공통적인 것은 크게 두 가지 형태, 즉 자연적 커먼즈와 사회적 커먼즈로 존재합니다. 마이클과 내가 『어셈블리』에서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다시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1) 지구와 생태계, 2) 아이디어, 코드, 이미지, 문화적 생산물과 같은 비물질적 커먼즈, 3) 노동의 협력을 통해 생산되는 물질적 재화, 4) 소통, 문화적 상호작용, 협력이 이루어지는 영역으로서의 메트로폴리스와 지방들, 5) 주거, 복지, 의료, 교육 등을 제공하는 사회적 제도와 서비스들. 오늘날 경제와 사회의 본질적 특징은, 자본이 커먼즈의 사회적 생산을 착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커먼즈의 투쟁은, 노동하는 사람들이 자본에게 강탈당한 것을 재전유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빼앗긴 것을 재전유해서 그것이 공통적인 것에 이로운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해방의 의미입니다. 이는 또한 ‘포스트’ 혹은 ‘메타’와 같은 허구의 정체가 폭로되고 제거됨을 의미합니다. ‘메타’라는 것은 없습니다. 커먼즈의 투쟁은 ‘외부’(위[메타], 이후[포스트])를 제거할 가능성입니다. 이 투쟁은 전적으로 내재성의 지평, 즉 여기와 지금,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현실의 한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외부’란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일반적이고 일원적이며 정확히 정의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의 공통적인 것 혹은 커먼즈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단지 추상적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에서 그것은 언제나 이중적이기 때문입니다. 노동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오늘날 공통적인 것 혹은 커먼즈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연구들이 이루어졌으며, 다양한 운동과 학파들이 커먼즈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출현했습니다. 가령 여기 프랑스에는 『공통적인 것들의 귀환』(Le retour des communs, 2015)의 편집자 Benjamin Coriat의 학파가 있습니다. 『공통적인 것』(Commun, 2014)에서 공통적인 것을 하나의 요구이자 대안으로 정립하는 Pierre Dardot와 Christian Laval도 있습니다. 공통적인 것을 존재론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무언가로 간주하며 투쟁을 공통적인 것을 재전유하는 문제로 이해하는 Carlo Vercellone를 비롯한 다른 동지들 ― 마이클과 나도 이에 속합니다 ― 도 있지요. 이러한 우리의 입장은 또한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독해와도 연결됩니다. 『어셈블리』에서 우리는 매우 상세하게 그의 분석을 논의했고 또 대부분 그에 동의합니다. 다만, 하비가 끊임없는 원시적 축적으로서의 자본주의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우리는 자본주의가 발전적 국면들을 갖는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형식적 포섭과 실질적 포섭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점이 다르긴 합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메타’라는 용어를 선호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좌파와 우파 사이에 더 이상 차이나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좌파와 우파는 정확하지 않은 개념들이긴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보죠. ‘메타’라는 말은 자본주의가 더 이상 문제되지 않음을, 자본주의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 쉽게 일어날 수 있는 무언가 혹은 심지어 이미 우리가 승리한 전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선호하지 않는 것입니다.]

 

: 벨기에 플랑드르(Flandre)의 자유주의 정당인 <Open VLD>(Open Vlaamse Liberalen en Democraten)가 커먼즈에 관한 컨퍼런스를 조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반드시 커먼즈를 자본화하기를 원하지는 않으며, 커먼즈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자유주의 시스템에 결여되어 있는 무언가를 알아보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답 : 오늘날 우리가 엄청난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생산 시스템의 일반적 변형을 보고 있습니다. 자동화되고 로봇화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40여년 전 <이탈리아 오페라이스모(노동자주의, operaismo)> 운동에서 이러한 것들을 주제화하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1969년 『노동자의 힘』(Potere Operaio) 창간호에서 우리는 ‘시민소득’(reddito di cittadinanza)을 요구했는데, 이는 그때 이미 노동이 생산에서 완전히 부차적인 요소로 축소되는 이러한 경향을 예견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혁명과 현실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이며, 나는 대안적 이니셔티브를 발전시키기 위한 자본주의 외부의 공간들을 만들어내야 할 매우 긴급한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벨기에에는 많은 흥미로운 대안적 움직임들이 있습니다. <P2P 재단>의 창립자인 미셸 바우웬스와 많은 스타트업들을 생각해볼 수 있겠죠.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커먼즈는 ‘우파’의 구미를 강하게 자극하는 영역입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전적으로, 무엇이 대안일 수 있는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며, 사실 이것이야말로 다름 아닌 자율의 문제입니다.

 

: 우리는 연구와 책에서 미학(감성학, aesthetics)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예술과 관련해서뿐만 아니라 사회와 관련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미학을, 물질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것들을, 사람들을 만들거나 디자인하는 일에 관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당신의 책 어셈블리에서 우리는 비슷한 아이디어를 봅니다. 어셈블리는 커먼즈의 미학적 스타일과 전략을 특징짓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통주의에서 우리는, 우리가 교환가치, 금융자본주의, 신자유주의와 연결시키는 추상(abstraction)과 관련된 미학적 형상에 반대합니다. 당신에 보기에 이상적인 어셈블리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의 현실화를 위한 조건들은 무엇입니까? 인간들(사물, 자연)은 어떻게 어셈블리에 함께 할 수 있습니까? 어떤 도구 혹은 전략이 필요합니까? 요컨대 당신이 보기에 어셈블리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실천적으로 어떻게 조직되어야 합니까?

답 : 우리는 어셈블리가 이미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어셈블리는 노동이 언어 속에서, 그리고 자율적인 협력 속에서 스스로를 변형하는 현재의 경제구조 안에 이미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미 어셈블리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주체성을 생산하는 이 노동력 혹은 주체/사람들이 어떻게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정치적 주체화는 공통적인 것의 인식에 의해, 공통적인 것과 함께-함으로의 이행에 의해, 함께-함을 단순히 발견하는 것에서 명확히 이해하는 것으로의 이행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협력과 ‘공통적으로 존재함’(being-in-common)에서 공통적 주체성의 생산으로의 이행이 어셈블리의 중심적 요소입니다.

월스트리트점거운동에서 마드리드의 ‘분노한 사람들’(Idignados) 운동에까지 이르는 싸움에 참여했던 동지들과 활동가들은 바로 그러한 이행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특히, 자본주의적 통제하에서 생산하고 있으며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이 그저 우연히 그들에게 주어진 것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조건에서, 공통적인 것이 건설되고 형성되는 자유로운 조건으로의 이행을 위해서 말이죠. 이러한 이행은 근본적인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노동자들이 자본에 의해 한데 모아지고 조직되었던 예전보다 오늘날 훨씬 더 공통주의가 실현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과거에, 노동자들은 자율적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불러 모아졌습니다. 오늘날 상황은 달라졌으며, 바로 이것이 가능성들에 엄청난 힘을 부여합니다. 이처럼 함께-함이라는 하나의 존재론적 사실이 출발점으로 주어져있기 때문에, 오늘날 해방의 가능성은 이전보다 훨씬 더 크고 넓습니다.

요는, 어셈블리는 정치적으로 되어야 하는 존재론적 사실이라는 것이며, 이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맑스는 노동계급에 대해 말하기를, 노동계급은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며, 따라서 노동계급이 정치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정당, 외부조직, 이데올로기 등등을 통해 자신들의 상황을 인식하게 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노동과 사회에서 일어난 변화 덕분에, 성숙과 독창적인 조직의 출현을 봅니다. 오늘날 노동은 더 이상 명령에 종속된 노동이 아닙니다. 명령은 주체적으로 함께 일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점점 더 소외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에 의해 형성되는 언어가 명령에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의 중요성은, 이러한 자율적 언어 사용이 뒤집어질 수 있고 그리하여 자본에 의해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날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작업은, 이러한 주체적이고 특별한 언어의 사용을 인식하고,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뒤집어놓은 것을 다시 뒤집어서 해방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 여전히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어셈블리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말이죠. 사회학자로서 말해보자면, 우리는 나폴리의 <Ex Asilo Filangieri>와 같은 어셈블리의 사례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셈블리는 조직하고, 자율적인 결정들을 내리고, 자기통치를 달성하는 하나의 도구, 모임 방법, 보다 민주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답 : 마이클과 내가 생각한 것이 바로 <Ex Asilo Filangieri>와 같은 유형의 현상입니다. 거기서 주권은 공통적인 것 쪽으로,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모두를 포함하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공유 재화들(공통선, beni communi)의 공간 쪽으로 뒤집어져 있습니다. 공통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일련의 주목할만한 이니셔티브들이 취해지는 것이지요. 공통적인 것의 개념은 생산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공통적인 것은 창안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입니다. 어셈블리는, (물질적이거나 비물질적인) 공유재화들을 잘 관리하고 그리하여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는 다중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어셈블리의 근본적인 측면은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다시 결합된다는 데 있으며, 오늘날 우리는 이 일을 해낼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러시아혁명 당시 레닌은 오직 기아와 전쟁, 파국만이 존재하며 새로운 힘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파괴되어야 했던 예외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레닌과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어셈블리를 하나의 정치적 힘으로 변형할 기회가 있습니다. 힘을 부여하는 것, 그것이 정치입니다. 혹은, 미학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면, 형태와 힘을 부여하는 것을 미학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힘 없이는 형태도 없습니다. 정치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폭력의 측면을 포함합니다. 정치에서 평화의 구축은 힘(때로는 폭력)에 관한 것입니다.

 




극장 커먼즈의 탄생: 하울라운드 2009-2017


  • 저자  : Alexis Frasz / Holly Sidford
  • 원문 :  The Birth of a Theatre Commons: HowlRound from 2009-2017
    (2018.10.03) /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4.0 International License (CC BY 4.0)
  • 분류 : 번역
  • 옮긴이 : 채희숙
  • 설명 : 이 글의 공동저자인 알렉시스 프라즈(Alexis Frasz)와 홀리 시드포드(Holly Sidford)는 헬리콘 협력체(Helicon Collaborative)의 공동디렉터다. 헬리콘 협력체는 창의성, 형평성, 그리고 환경의 지속가능성을 우리가 원하는 세계의 핵심적이고 상호관련된 요소들로 본다. 그들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창의적으로 표현하고 자신의 문화를 유지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문화적 평등은 건강한 사회에 필수라고 보며, 사람들이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고 한계를 넘는 아이디어를 개발 및 실현하는 것을 돕는다. 알렉시스 프라즈는 환경 문제를 해결하고 보다 공정하고 재생 가능한 사회로 전환하는 데 문화가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를 포함하여 문화, 환경 및 사회정의의 교차점에서 헬리콘의 연구를 이끌고 있다. 그녀는 문화 부문에 깊게 뿌리박힌 불공평성에 대항하기 위해 헬리콘의 작업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현재 그녀는 예술가 및 문화 지도자들이 사회경제적 정의를 위한 보다 광범위한 운동에 연대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홀리 시드포드는 관계들을 보고 부분들의 합보다 더 많은 것을 만드는 숙련된 시스템 사상가다. 그녀의 끝없는 호기심, 통찰력 있는 지성, 탁월함에 대한 의지는 헬리콘의 모든 작업을 떠받친다. 그녀는 역사가로서의 교육과 프로그램 개발자 및 자금 제공자로서의 경험을 이용해서 예술가의 역할을 증가시키고, 창의적 표현의 완전한 다양성을 인식하고, 예술 및 문화를 공동체의 생활에 좀 더 중심적인 부분으로 만들기 위한 헬리콘의 노력에 정보를 제공한다.

헬리콘 협력체에서 우리는 하울라운드가 그들의 이야기를 하는 우리를 도우려고 왔을 때 들떴다. 우리가 하울라운드를 사랑하긴 하지만 그것만이 들뜬 이유는 아니다. 마치 침술에서 침이 혈자리에 제대로 꽂힌 것처럼, 적절한 시기에 전해진 적절한 이야기는 시스템을 재등록하거나 바꾸는 것을 도울 수 있다. 우리는 하울라운드의 이야기가 특히 지금 이 순간과 공명하며, 극장 부문에서 그리고 그 외부에서 사고에 영향을 미치고 관행을 변화시킬 잠재력이 있다고 믿는다. 이 글은 왜 우리가 하울라운드의 이야기가 오늘날의 정치·경제적 맥락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에 관한 몇 가지 생각을 나눈다. (사례 연구 전문 읽기).

하울라운드는 비영리 극장 부문에서 형평성, 지속가능성, 타당성의 위기에 대응하여 2009년에 설립되었다. 그 해에 발표된 두 개의 연구조사인 토드 런던(Todd London)의 『충격적인 성쇠: 새로운 미국 연극의 삶과 그 시대』(Outrageous Fortune: The Life and Times of the New American Play)과 데이비드 다우어(David Dower)의 「기회의 문」(“The Gates of Opportunity”)은 아래의 것들을 찾아냈다.

* 거의 대부분의 지원금이 가장 크고 부유한 극장들로 가고 있었다. 그 극장의 관객들이 미국 인구 구성을 반영하고 있지 않음에도 말이다. (즉 그들은 나이 든 백인 부유층이었다.)

* 이러한 기관들은 최고 티켓값을 부과할 수 있도록 스타 출연자들로 블록버스터를 기획하는 식으로 그 기능이 상업적인 극장과 점점 더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 한편 엄청난 양의 활기찬 예술 창작 및 참여가 이런 기관들 바깥의 소규모 비영리 극장 또는 전국각지의 커뮤니티 환경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 전반적으로 연극은 예술적으로 성공적일 때조차도 자신의 작업으로 거의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던 예술가들의 ‘땀의 지분’에 힘입어 굴러갔다. 많은 곳에서 생활비가 증가하자 이런 메커니즘은 특히 다른 재산이나 수입원이 없는 예술가들에게 점점 더 유지될 수 없었다.

* 작품의 창작과 공유를 위한 재원, 정보, 플랫폼에 대한 접근은 주요 기관의 소수 ‘문지기’에 의해 엄중히 감시되었고, 다수의 예술가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이 보고서들은 몇몇 유용한 자료를 제공했지만 솔직히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이 부문의 사람들은 그러한 극장 모델이 예술적 가능성이나 공공이익을 실현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정치조직가이자 작가, 그리고 활동가인 조너선 매슈 스먹커(Jonathan Matthew Smucker)가 지적하듯이 “사회 시스템에 무슨 잘못이 있는지와 어떻게 시스템을 바꿀지에 대한 지식은 전혀 다른 범주의 지식이다.” 같은 해에 설립된 하울라운드는 바로 연극 분야의 문제에 대한 진단뿐만 아니라 가능성 있는 대안도 제공했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울라운드의 설립자들―칼(P. Carl), 다우어(David Dower), 가흐론(Jamie Gahlon), 매슈(Vijay Mathew)―은 비영리 극장이 직면한 문제가 단지 ‘연극 문제’가 아님을 알았다. 우리의 현 시대는 권력과 부의 소수에의 집중, 저임금을 통한 노동자 착취, 기회와 자원에의 접근을 막는 구조적 장벽이 계급 및 인종의 선을 따라 확대되는 것, 재정이 부족한 공적·사회적 재화 및 서비스, 그리고 기업이익을 위한 모든 것의 상품화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정치철학자이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의 저자 마이클 샌델은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사고 팔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난 30년 이상 시장(시장가치)은 전에 없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라고 쓴다. 비영리 극장 부문은 이 추세를 받아들였지만 극장은 문제의 근원이 아니었다. 극장 부문에서 잘못된 점은 자본주의가 미친 듯이 날뛰는 우리 사회가 가진 훨씬 더 큰 기능장애의 증상이었다.

자본주의가 고장났다고 주장하는 것, 적어도 다른 무엇보다 이익과 자유시장을 우선시하는 가장 공격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형태의 자본주의는 고장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 이상 급진적인 입장이 아니다. 교황이 그렇게 말했다. 미국 및 전 세계의 많은 저명한 경제 및 정치 지도자도 그랬다. 국제통화기금조차 지난 수십 년간 신자유주의 정책들이 득보다 해를 끼쳤으며,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동시에 지난 10년 동안 부자들 사이에서도 행복 및 웰빙의 감소가 있었다. 자본주의의 신조에 따라 우리는 하나의 종으로서 생존이 위협받을 정도로 우리의 자연 생태계를 파괴했다. 젊은 사람들이 특히 현 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 최근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2008년 대불황 시기에 성년이 된) 18세에서 29세 사이 미국인은 자본주의(45%)보다 사회주의(51%)에 더 긍정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고장’이라고 부르는 것 역시 오해의 소지가 있다. 자본주의는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안된 대로 정확하게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번영, 예술적 창조성, 생태적 건강, 문화적 전통, 또는 대부분의 다른 사회적 결과와 관련해서라면 자본주의 시스템은 중대한 설계 결함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하울라운드 팀 (왼쪽부터): 비제이 매슈, 베이미 가흐론, 라모나 오스트로우스키(Ramona Ostrowski), 아비게일 베가(Abigail Vega), 제이디 스토클리(JD Stokely). (사진: 안야 프루덴테(Anya Prudente))

체제를 개혁하는 데에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자본주의의 가치와 실천이 매우 일반화되어 있어서 종종 그것들이 ‘바로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으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고인이 된 훌륭한 어슐러 르 귄(Ursula Le Guin)은 이 역학에서 우리 자신이 하는 역할에 대한 중대한 오해를 일깨워주었다. “우리는 자본주의 안에 살고 있다. 그 힘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왕들의 신성한 권리도 그랬다. 어떤 인간의 권력도 인간에 의해 저항을 받고 변화될 수 있다.” 우리가 더 나은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우리의 현재 체제가 우리 외부에 본질적인 실재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인식해야만 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과거에 여러 번 해왔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체제에 변화를 일으킬까? 하울라운드의 설립자들은 버크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결코 기존의 현실과 싸워서는 상황을 바꿀 수 없다. 무언가를 변화시키려면 기존의 모델을 더 이상 쓸모없게 만드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그들은 연극 현장의 모든 문제들을 적어도 한꺼번에 전부는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모든 종류의 연극관계자들이 소통하고, 일을 공유하고, 생각을 교환할 수 있는 민주적인 플랫폼을 만들려고 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풀뿌리들의 목소리의 ‘소방호스를 열어서 우리 분야에서의 99%의 문제를 수렴함’으로써 분야 전체를 가시화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들은 그것이 연극계에서 새로운 종류의 민주적 조직화를 위한 기초이며, 다른 더 큰 변화를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믿을 수 없게 단순한 개입은 다음을 포함한다.

* 어떤 연극인이든 기고할 수 있는 저널

* 누구나 자신의 연극 관련 콘텐츠를 공유할 수 있는 무료 라이브스트리밍 TV 채널

* 미국 전역에서 공연되는 모든 새로운 연극들의 지도(地圖)

* 현장에 영향을 미치는 이슈와 아이디어들을 논의하기 위한 연극인 직접 회의

그것은 연극 분야를 위한 새로운 기반시설 실험이었다. 이는 이익·위계·경쟁을 극대화하는 것을 강화하도록 설계된 제도적 극장 구조와 달리 개방성·협업·공동체의 가치를 의도적으로 뒷받침하려 한 실험이었다.

혁명은 종종 자기 시대의 기술적 진보에 도움을 받는다. 2009년 하울라운드의 출현은 새로운 기술 도구 및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의 가능성에 의해 촉진되었고, 이는 제도 바깥에서 사람들이 조직하고 소통하고 규모 있게 일을 할 수 있게 했다. 이런 기술은 이미 언론에서 정치까지 정보와 콘텐츠에 대한 접근이 엄격하게 통제되던 많은 다른 장을 파열하고 있었다. 기술은 또한 점거운동 같은 일에 동력을 공급해서 개인들의 분산된 네트워크를 조직하고 집단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하울라운드는 무엇보다도 연극 분야에 유용한 도구세트가 되고자 했으며 그 목적을 실현했다. 수천 개의 글과 영상을 올렸고, 매달 45,000명 이상의 순방문자가 들어온다. 그러나 철학적인 차원에서 설립자들은 ‘커먼즈’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받았고, 그 생각을 발전시키려 했다. ‘커먼즈’란 다 소모되거나 열화(劣化)되지 않고 모두에게 사용되고 유익할 수 있도록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조차도 사적소유나 시장의 힘으로부터 반드시 보호되어야 하는 특정한 종류의 자원이 있다는 생각이다. 현재 우리의 맥락에서 보면 이 생각이 예스럽거나 대단히 이상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이는 우리가 이미 공기, 토양, 물과 같은 천연자원과 공원, 도로와 같은 공공재, 그리고 공익사업들을 관리하는 방법이다. (비록 이들 중 많은 것들 역시 사유화되고 있긴 하지만.) 커먼즈는 항상 사적소유와 시장을 합리적으로 점검하고 공공자원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하울라운드의 설립자들은 문화자원 역시 상업화와 사유화로부터 보호되는 커먼즈에 속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연극 분야의 기존 기반시설은 자원을 공유하거나 협업하거나 공동선 편에서 행동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하울라운드는 연극인들이 자원·작업·정보를 공유하고, 공유된 관심사와 목표를 중심으로 협력하는 것을 장려하며 가능케 하는 다른 종류의 기반시설이 되기를 추구했다.

하울라운드의 개입 결과로 연극 분야가 달라졌는가? 우리가 함께 이야기한 현장 리더들은 하울라운드가 짧은 활동기간 동안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고, 현장이 스스로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방식을 많이 변화시켰다는 데에 동의한다. 주류 극장의 문 바깥에 있는 목소리들의 ‘소방호스를 열’면서 하울라운드는 이전에 주변화되었거나 보이지 않았던 문제들과 관점들을 드러내는 것을 도왔고,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연결하고 조직하도록 해주었다. 하울라운드는 지식에 대한 접근을 민주화하여 인터넷에 접속하는 누구라도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연극 관련 자료의 국내 최대 아카이브 중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연극이 어떻게 그리고 어디서 가르침 받고 연구되는가에 영향을 미쳐서 전통적인 ‘연극 센터’ 바깥의 예술가들에게 가능성을 열었다. 장기적인 영향은 아직 모르지만 시스템 전문가들은 정보에 대한 접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변화시키고 사람들이 자기조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떤 체제에서든 변형을 창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두 지렛점이라고 말한다.

초기 하울라운드 회의: <교차로에서: 새로운 연극 부문에서 비영리 제작자와 상업적 제작자>(In the Intersection: Non-Profit & Commercial Producers in the New Play Sector), 워싱턴DC, 2011년 11월 4~5일

그러나 우리가 전반적으로 경쟁과 이익을 넘어 다양성·협력·참여를 중요시하고 지원하는 비영리 극장 시스템을 구현하기에는 아직 멀었다. 10~15년 전보다 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인식이 훨씬 커졌지만 이것은 아직 돈과 권력의 주목할 만한 재분배로 이어지지 않았는데, 돈과 권력이 여전히 극소수 기관과 개인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고 제한된 범위의 콘텐츠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향해 있다. 어떤 이들은 우리의 비영리 구조가 커먼즈의 가치와 실천을 규모 있게 지원할 수 있는지 의심한다. 커먼즈 이론가 데이빗 볼리어(David Bollier)는 우리가 이 가치들에 기반을 둔 ‘전혀 다른 일련의 기관, 법 체제, 사회적 실천’을 고안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다른 이들은 우애가 사회부문들에서 커먼즈 지향의 행위와 구조를 장려하고 지원하는 데 더 강한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우리에게는 제도화된 인종차별주의, 구조적인 부의 불평등, 추출적 경제 모델들, 커먼즈 자원의 광범위한 사유화 및 착취 등 극장을 둘러싸고 있는 더 큰 사회경제 체제의 불평등과 장애를 다루지 않고 연극 현장에서 상황을 바꾸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남았다. 이는 지난한 과제이지만 우리는 연극 및 문화 제작자들이 이러한 목적을 위해 일하는 많은 다른 새로운 경제 변화가들과 협력하여 좀 더 공정하고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미래 사회에 가까워지는 데에서 하나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벅찬 과제들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하울라운드가 지금까지 작업에서 충분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현장의 많은 이들이 하울라운드가 연극계와 전체 사회에 더 큰 구조적 변화들을 야기할 필요가 있는 어려운 대화를 위한 촉매제이자 조직자, 그리고 진행자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하울라운드가 미친 심대한 영향 때문이다.

하울라운드는 이미 다음 작업 단계를 논의하기 위해 현장의 이해관계자들을 모으기 시작하고 있다. 적절하게도 커먼즈의 다음 단계는 커먼즈 그 자체에 의해 정의될 것이다.♣




패션을 커먼즈의 생태계로서 다시 상상하기



 

패션계에 글로벌 패션 시장을 개조하길 원하는 디자이너들, 패션하우스들, 학자들, 그리고 활동가들의 꽤 큰 집단이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놀랍게도 옷을 디자인하고 생산하고 유통하는 새로운 방식을 발명하려는 상당한 움직임이 진행 중이다. 낮은 급여, 남용되는 노동력, 막대한 양의 폐기물, 혐오스러운 마케팅 전략에 의존하는 글로벌 시스템에 염증을 느낀 많은 패션 활동가들이 실용적인 대안들을 개발하고자 한다.

나는 최근 이 주제에 관해 한 주요 패션 콜로키움에 강연을 요청받았다. 네덜란드의 아른헴에서 열린, 약 500명의 사람들이 참여한 이 행사는 <스테이트 오브 패션>(State of Fashion)이라 불리는 연례 전시회와 아트이지 예술대학교(the ArtEZ University of the Arts)의 후원을 받았다. 이 콜로키움은 그 임무를 이렇게 말했다. “패션 시스템을 철저히 탐구하고 파열시키고 재규정하고 변형시키기 위해서는 디자인에 의해 추동되는 연구뿐만 아니라 가치에 더욱 기반을 둔 비판적인 사고가 절실히 필요하다.” “윤리, 포용력, 그리고 책임 있는 소비자주의를 더욱 적극적인 방식으로 반영하는 패션 현실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을 공동으로 조사하는 것”이 목적이다.

[나는 ‘새로운 럭셔리를 위한 연구’라는 콜로키움 제목에 조금 혼란스러웠다. 이 행사는 사회 혁신을 귀하거나 고급스러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열망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럭셔리’라는 개념이 패셔니스타들의 열정적 DNA에 너무 각인되어서 쉽게 바꾸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패션 산업을 개조하기 위한 접근들의 광범위함에 감명 받았다. 가장 강력한 노력이 <패션 혁명>(Fashion Revolution)이라고 불리는 한 집단에 의해 행해지고 있었다. 전지구적 시민단체인 이 집단은 12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사망한, 방글라데시에 있는 라나플라자 의류공장 붕괴 참사 이후 활동을 시작했다. <패션 혁명>은 영화 <트루 코스트>(The True Cost)가 보여주는, 실제의 (높은) 의류 비용과 관련된 폐해가 앞으로 일어나는 것을 막고자 패션 공급망을 더욱 투명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패션 혁명>은 또한 2000년부터 2014년까지 세계적으로 의류 생산을 두 배나 증가시키는 데 기여한 패션 산업의 한 부문인 ‘패스트 패션’(fast fashion)을 비판했다. 패스트 패션 산업은 엄청난 양의 폐기물을 배출했다. 구매한 옷 중 약 40%의 옷들은 거의 혹은 전혀 입지 않는다.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옷을 3.3번 입는다. 그리고 소매 의류의 약 삼분의 일은 팔리지 않아 결국 태워지거나 폐기된다. 매년 약 4000억 제곱미터 규모의 직물 폐기물이 나오고 있다.

‘지속가능한 패션’은 많은 연설자들에 의해, 소중히 간직할 수 있고 오래 입을 수 있도록 디자인된 옷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는 말이다. 옷에 대한 감정적인 애착을 탐색하고 어떻게 지속가능한 디자인과 오래가는 미학을 개선시킬 수 있는지를 연구하는 크리스틴 하퍼(Kristine Harper)는 옷의 ‘심미적인 지속가능성’(aesthetic sustainability)을 언급했다. ‘리커버링 디자이너’(recovering designer)인 오르쏠라 데 까스트로(Orsola de Castro)는 어떻게 “사랑받는 옷들이 오래가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속 가능한 패션의 또 다른 선구자는 오스클렌(Osklen)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브라질의 인스티뚜또-E(Instituto-E)의 설립자인 멧사바트(Oskar Metsavaht)이다. 그는 옷에 쓰일 수 있는 지속가능하고 재활용 가능한 새로운 종류의 소재를 개발하려는 회사의 적극적인 노력을 그린 단편 영화를 보여줬다. 오스클렌은 또한 새로운 종류의 공급망과 ‘의식있는 소비’(conscious consumption)를 창출했다.

네덜란드 아른헴의 아트이지 예술대학교로 옮기기 이전에 뉴욕의 파슨스 디자인 학교(Parsons School of Design)에서 패션 분야의 대안적 교과과정을 개발한 가첸(Pascale Gatzen) 교수와 같은 사람들 덕분에 이런 종류의 아이디어들이 오늘날 패션 교육에 스며들고 있다. 가첸은 패션에 대한 그녀의 철학을 이렇게 설명한다. “더 아름답다거나 아니면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하기 때문에 선택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큰 이윤을 내기 위해 이루어집니다. 당신이 옷을 입는 방식이 곧 당신이 이 세상에서 스스로를 위치시키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패션을 되찾아 사회 변화를 위한 촉매제로 만들 수 있을까요?”

가첸은 옷만들기 기술을 회복시키기를 열망한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옷을 디자인하는 것과 만드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나는 학생들이 만들기를 통해 디자인할 것을 장려합니다. 재료, 아이디어, 그리고 우리의 손과 몸에서 나오는 감각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를 조절하는 과정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생각을 확대하기 위해 가첸은 허드슨 벨리에 손으로 직접 짠 재킷을 생산하는 <빛의 친구들>(the Friends of Light)이라 불리는 직물 협동조합을 설립했다. 근처 농장의 양으로부터 자란 양모를 사용하기 때문에 모든 재료들이 그 지역의 것이고 생산 과정은 세심하고 통합적이다. 그만큼 공을 들이므로 각 재킷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이 160시간이다.

문제가 없지는 않다. 옷이 노동집약적이고 독창적일수록 더 비싸지기 마련이다. 이는 하이패션윤리나 상업 모델로 변질될 위험성이 있다. 친환경 패션은 ‘럭셔리’가 돼서는 안 된다. 비록 비용이 더 많이 들더라도, 혁신적인 생산 방법들을 시도하고 의류 디자인과 생산의 기술적 감각을 복원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을 저가, 저품질의 ‘패스트 패션’ 중독으로부터 떼어낼 가치가 있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사회를 생각하는 패션이 감당해야 할 진짜 과제는 초자본주의에 의해 추동되는 현재의 지배적인 시장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병행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것만이 글로벌 패션 기업들의 무자비한 포섭과 럭셔리의 무자비한 우상화를 피할 수 있는 대안적인 운영 논리와 윤리를 개발하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그러한 계획들이―무엇이 되었든 처음에는 가장 기본적인 규모로―개발될 수 없다면 사회 혁신은 수제 의류와 같은 작은 시장에 갇히거나 럭셔리 시장에 국한될 것이다. 그리고 진짜 사회 혁신은 얄팍한 마케팅을 위해 징발되고 말 것이다.

대안 패션 활동가들이 그들의 비전, 생산 방법, 유통 장치, 재정, 그리고 마케팅을 충분한 규모로 발전시킬 수 있을까? 나는 이러한 구조적 시스템 문제에 진지하게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보고 싶다. 부분적인 혁신은 부분적인 효과만 낳을 것이다.

나는 강연에서 “패션을 커먼즈의 한 생태계”로 상상하려고 했다. 나는 커먼즈의 기본적인 생각을 소개하고 패션을 커먼즈의 연합체로서 다시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여러 일반적인 전략들을 제안했다. 알트-패셔니스타들(Alt-fashionistas)은 그들의 협력, 공급망, 문화적 비전과 같은 공유된 부와 커머닝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를 표시하는” 새로운 방식을 발전시키면서 시작할 수도 있다. 그들은 이데올로기가 아닌 실질적 실험을 바탕으로 그들 자신의 재정 시스템과 유통 및 마케팅 기반시설을 구축해야 한다. 그들은 낡은 어휘들을 버리고 커먼즈의 언어를 배우려고 해야 한다. 콜로키움 기조 강연의 비디오를 보려면 여기로 가면 된다. 나의 강연은 20:43부터 41:14까지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