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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머닝을 통해 예술을 큐레이팅하기―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의 최빛나

 


  • 저자  : David Boiler
  • 원문 :  Binna Choi of the Casco Art Institute: Curating Art through Commoning
  • 분류 :  번역
  • 옮긴이 : 루케아
  • 설명 :  아래 글은 데이빗 볼리어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2023년 2월 1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여러 해 전에 나는 네덜란드에 있는 한 예술기관을 알게 되었는데, 이 기관은 “커먼즈를 지향하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해서 나로서는 매우 흥미로웠다. 위트레흐트 소재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Casco Art Institute)가 바로 이렇게 선언한 기관이다.  ‘커먼즈를 지향한다’는 그들의 슬로건은 예술과 커머닝이 정확히 어떻게 관련이 있는 것인지, 그리고 예술기관이 어떻게 커머닝의 세계에 진입할 것인지에 관한 물음들을 즉각 제기한다.

나는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의 디렉터인 최빛나씨를 팟캐스트 시리즈 <커머닝의 프런티어>(Frontiers of Commoning)의 35회 대담에 초대해서 좀 더 알아보기로 했다. 2008년부터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를 이끌어 온 한국인 최빛나는 비중 있는 전시회를 위해 예술작품을 큐레이팅하고 있으며 더치 아트 인스티튜트(Dutch Art Institute)의 교수를 역임했다. 그녀는 2022년 싱가포르 비엔날레, 2016년 광주 비엔날레의 큐레이터(예술감독)였으며 다가오는 2025년 하와이 트리엔날레의 예술감독으로 선정되었다.

최빛나는 예술창작과 작품 전시회에 커머닝의 윤리와 실천들을 도입했다. 그녀와 동료들은 커머닝을 다양한 예술가들로 구성된 팀이 예술을 함께 창작하고 함께 활동할 수 있도록 조직하는 원리로서 받아들였다.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측은 다음과 같이 자신들의 커먼즈 철학을 설명한다.

예술은 상상력에 기반을 둔 행동하기와 존재하기의 양태로서, 사람들을 이어주고 치유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사람들을 새로운 사회비전으로 이동시킨다. 커먼즈는 공동체 문화가 살아있도록 유지하는 공유된 자원들이기에 예술은 사실상 커먼즈에 내재해 있으며, 커먼즈는 예술을 존재하게 할 것이다. 예술과 커먼즈 때문에 우리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이분법 너머에 있는 세계관을 그릴 수 있으며 ‘우리가’ 욕망하는 대로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패러다임―탈식민적, 포스트자본주의적, 모권중심적, 혹은 연대 경제 등 뭐라 불리던―을 함께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가 거기에 이름을 부여한다.

실제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카스코 인스티튜트가 눈길을 끄는 전시회들과 마케팅을 통해서 그 평판을 높이는 데 열중하는 브랜드화된 기관이기보다는 예술가 중심의 기관임을 의미한다. 최빛나와 카스코 인스티튜트 소속 예술가들은 참여적이고 비위계적이며 평등주의적인 팀으로서 일한다. 모든 사람들이 작업실 공간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다음 프로젝트나 전시회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그리고 카스코 인스티튜트가 지역 공동체와 관계를 맺기 위하여 어떻게 그 예술적 상상력을 사용할지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러한 한 가지 프로젝트는 <잊혀진 기술을 간직한 농장 박물관 여행하기>(Traveling Farm Museum of Forgotten Skills)라는 전시회로 위트레흐트 근처 현대적인 교외지역 개발지에 둘러싸인 오래된 농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저지대 교외의 스프롤 현상이 이전에 그곳에 있었던 많은 농지를 잡아먹었고, 한 농부가 여전히 소유하고 있었지만 낡아빠지고 아무도 살지 않는, 허름한 농가만 남게 되었다.

최빛나와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예술가들은 공동체가 가령 다음과 같이 묻는 방식으로 그 공간의 역사를 탐색하게끔 하는 예술 프로젝트를 개발하기로 했다. 농장이 왜 비어있는가? 농장은 어디로 옮겨갔는가? 거의 모든 농업농장과 목축농장이 이 지역에서 사라진 상황에서 레이드슈 라인(Leidsche Rijn) 지역주민들의 식량은 실제로 어디서 오는가?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는 한때 그 지역을 위해 식량을 생산한 옛날 식 농사 관행을 소개하기 위한 전시회를 열기 위해 (위트레흐트 공무원들이 성가신 것으로 여기는) 그 농장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카스코 예술가들은 열 달 동안 농가에서 함께 살았고 경작하고 식량을 모으면서 그 역사와 현재 상황을 통해서 땅과 다시 관계를 맺었다. 이 프로젝트는 지역 주민들에게 농장의 잊혀진 과거를 숙고하고 앞으로 땅을 사용하는 것에 관하여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도록 했다.

안타깝게도 이 프로젝트는 소유주가 집과 땅을 팔기로 결정하면서 너무 일찍 폐기되었다. 현재 그 장소는 팬케익 식당과 쇼핑센터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래도 한동안은 전시회가 공동체에 중요한 주제들—공동체의 역사, 식량자원 및 땅의 미래—에 예술적인 자극을 주었다.

곧 시작될 1년에 걸친 프로그램 <배운 것을 버리기 센터>(Unlearning Center)는 사람들이 예술과 문화에 관한 낡은 전통적 관념을 버리고 다음과 같이 묻게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문화적 기관들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는가? 어떻게 예술과 문화는 우리가 커먼즈를 상상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가? 곧 열릴 또 하나의 전시회인 <커먼즈 예술>(Commons Art)은 커먼즈 문화에 기여하는 사회참여적인 예술 프로젝트들의 돌봄과 유지과정을 지원하는 디지털 플랫폼을 제공할 것이다.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프로젝트에 의해 생산된 예술을 종래의 예술기관들이 나타내고 싶어하는 ‘고급예술’보다 다소 못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간혹 예술관과 예술계에 있는지를 최빛나에게 물었다. 여기서 ‘고급예술’이란 비평가들과 문화적 규범에 의해 알려진 회화와 조각이나 황량한 하얀 전시회장에서의 공식적인 전시들 혹은 예술과 일상을 분리하는 시나리오들 등을 의미한다.

최빛나는 주안점을 두는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의 구축이라고 대답했다.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우리와 예술가들의 관계는 가족관계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 관계의 망 안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초점을 맞추어야하는 것은 이 관계를 더 잘 돌보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좋은 생산물 만들기’보다는 관계의 실천을 토대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은 훨씬 더 나아질 것입니다.

대화를 통해 어떻게 커머닝이 다양한 형태의 예술제작, 예술작품 전시회들 및 기관의 파수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멋진 경험을 했다. 내가 최빛나와 나눈 이야기는 여기서 들을 수 있다.

* [옮긴이]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홈페이지의 설명에 따르면, ‘카스코’(casco)는 네덜란드어로 변화를 위한 기본 구조, 집단적 예술프로젝트 및 조직적 실험으로 공동으로 탐구하고 연구하기 위한 기본 구조가 존재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커먼즈를 위한 건축–2008년 이후 건축의 과제

 


  • 저자  : Jose Sanchez
  • 원문 :  “Introduction : A Call for a Post-2008 Architectur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호세 산체스의 Architecture for the Commons : Participatory Systems in the Age of Platforms(Routledge, 2021)의 “Introduction”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저자 호세 산체스는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활동하는 건축가이자 게임디자이너이며 이론가이다. 그는 건축디자인 지식의 증식을 추구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Plethora Project(www.plethora-project.com)를 이끌고 있다. 그는 동네를 만드는 시뮬레이션 비디오 게임 Block’hood의 제작자이며 공동체를 건설하고 경제를 관리하는 비디오게임 Common’hood의 제작자이고, 대중들이 참가하여 동일한 유닛들로 설치물을 짓는 Bloom의 공동제작자이다. 글의 뒤에 필요할 듯 해서 보충설명을 달았다. 

 

우리의 건축은 항상 패러메트릭 건축이었다

20세기 말 건축분야에서는 우리가 건물들을 이해하고 짓는 방식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전환을 제안하는 혁신들이 일었다. 소프트웨어, 재료과학(material science), 디지털 패브리케이션(digital fabrication)(([정리자] 디지털 패브리케이션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제품을 제작하는 기술뿐만 아니라 형태를 만들고 재료 가공 및 시공까지 모든 과정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총칭하는 말이다. 일례로 3D 프린팅 기술이 여기에 속한다.)) 및 자동화 영역에서 일어난 기술혁신은 무한한 가변성과 주문제작이라는 비전을 제공했다. 인간의 인식과 맞물려있는 이 비전은 몰입환경으로서 주문제작되는 정동적 건축(affective architecture)을 나타낸다.(([정리자] ‘affective architecture’에 대해서는 가령 https://aalab.org/ 같은 사이트를 참조해보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 ‘새로운’ 건축—모든 디자인이 일회적인 건축—은 젊은 세대의 건축가들이 오늘날 실행하고 있는 방식의 핵심적인 부분이 되었다. 테크놀로지를 중심으로 하는 서사들이 이것을 입증했다. CNC(computer numerical control, 컴퓨터 수치제어장치) 테크놀로지에 의해 작동하는 디지털 패브리케이션이 대량생산 제품을 생산하는 동일한 비용으로 맞춤제작 형태들을 만들 수 있다는 전망은 젊은 세대의 건축가들이 이 새로운 건축을 채택하는 것을 완벽하게 찬성할 논리를 제공했다. CNC 테크놀로지는 대량 생산이 여러 해 동안 여타 산업들을 규정해온 상황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줄 한 가지 대안을, 다시 말해 의뢰인들이 항상 색다른 새로운 디자인을 찾을 것이기에 수요가 계속될 것이고 그럼으로써 디자인이 번성하게 될 그러한 대안을 약속하고 있었다.

‘일회적인’ 건축이라는 패러다임—건물을 지을 때마다 스스로를 재창조해야 하는 패러다임—에는 지어지는 환경의 구조적 구성에서부터 사업모델과 관례상의 수수료 배분에까지 세분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지속적으로 지원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 패러다임은 무상으로 일하거나 또는 충분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착취적인 업무에 고용되는 것이 일상인 경쟁적인 시장에 학생들이 참여하도록 준비시킴으로써 건축분야의 교육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것이 의뢰인들의 투기적인 산업관행으로, 또는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거나 전무한 건축공모 참가로 낭비되는 큰 규모의 디자인 노동의 결과이다.

이 맥락에서 패러매트릭 패러다임의 등장은 건축분야에서의 핵심적인 비능률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될 수 있다. 어떤 제안이 개발될 경우 그 과정 내내 디자인 베리에이션(([정리자] 베리에이션(variation)은 하나의 기본적인 형태를 변화시키는 작업이나 그 변화된 상태를 지칭한다.))을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에 패러메트릭 패러다임은 한 건축가가 건물 하나를 디자인 하는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데이터로 통제되는 다수의 가상의 건물들을 디자인하는 기술적인 작업흐름을 건축가에게 제공했다. 패러메트릭 소프트웨어는 건물을 물체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비율을 가지고 공존하면서 전반적인 일관성을 유지하는 요소들의 네크워크로 정의하며, 건축가들은 이것을 기반으로 예산이나 규정의 변화 및 의뢰인의 심경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고 수백 개의 가능한 디자인들을 설계할 수 있다.

패러메트릭 방법론으로 가능해진 다수의 가상 건물들은 자본주의의 생산성의 승리로 보일 수 있으며, 이 경우 디자이너 한 명의 노동이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어, 건물 하나하나가 유일할 수 있는 도시 전체를 설계할 수 있게 된다. 이 기술적이고 개념적인 기획은 건축협회와 인스부르크 대학 소속이자, <자하 하디드 아키텍쳐>(Zaha Hadid Architects) 소속 패트릭 슈마허(Patrik Schumacher)가 낸 ‘패러메트릭 어버니즘’(parametric urbanism)이라는 아이디어로 탐구되었다. 패러메트릭 어버니즘이라는 유토피아적 비전은 건물들을 지역 부지 조건에 조화시키면서 모든 건물과 도시 내지 지역의 세부 베리에이션을 제어할 수 있는 통합된 알고리즘적 스타일을 제안했다. 슈마허가 주장했듯이 이 제안 이면에 있는 유토피아주의는 건물들 사이의 시각적이거나 양식적인 유사성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디자이너가 넓은 영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디자이너 한 명의 노동과 비전의 규모를 키우는 능력의 잠재적인 승리에도 존재한다.

패러메트릭 모델이 대량 주문제작을 가능하게 하고 수백 혹은 수천 개의 건물들을 서로 다르게 짓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모델은 한 명의 디자이너가 끼치는 영향력을 키우지는 못했다. 패러메트릭 정의 안에 존재하는 가상의 다양성으로 인해 서로 상충하는 제안들이 생겨나는데 이 제안들 가운데 하나만이 실행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결국 다양한 가상적인 것들 가운데 단 하나만 현실화된다.

의뢰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패러메트릭 방법론 때문에 자신들의 요구에 근본적으로 상이하게 접근하는 제안들을 받아 볼 수 있고, 잠재력이 있는 디자인 분야를 탐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대하게 되었다. 어쨌든 건축을 발전시키는 데 상당량의 자본이 요구된다는 점으로 인해, 민간부문이든 공공부문이든 둘 다 건축환경의 영구적인 부분이 될 것에 관하여 최종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많은 양의 디자인 제안들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상식화되었다. 하지만 패러메트릭 모델은 그런 과제를 수행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패러메트릭 방법론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제안들이 아니라 한 가지 제안의 변형들을 제공하기에 더 적합하다는 것을 입증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베리에이션은 본질의 변화가 아니라 정도의 변화인 것이다.

그런데도 수년 동안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은 건축공모라는 형식을 통해 근본적으로 상이한 다수의 제안들—건물의 제약들을 제각각 주의 깊게 고려하는 제안들—을 즉각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건축가들과 협력했다. 건축공모는 궁극적인 패러메트릭 모델화 방법론으로 간주될 수 있다. 디자인 참여자들에게는 큰 비용을 치르게 하면서 의뢰인에게는 상당한 디자인 베리에이션을 거의 무료로 주어서 광범한 가상의 다양성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축공모는 디자인 베리에이션을 제공하는 패러메트릭 디자인 방법론의 모든 원칙을 따른다. 패러메트릭 디자인이 디지털적으로 창조되는 건물들 중 99%를 폐기하듯이 건축공모 역시 적합한 해결책에 도달하기 위해 경합하는 노동인력 풀로서 편성된 건축가들이 무보수 노동으로 만들어낸 디자인들 가운데 99%를 폐기한다. 이렇듯 건축공모들은 우리가 기꺼이 제공하는 노동이 보상을 받지 못하는 투기성 노동의 관행들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건축공모가 건축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오래된 관습이라는 사실은, 패러메트릭 건축이 실제로 출현하기 이전부터 항상 우리가 패러메트릭 패러다임 속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패러메트릭 어젠다가 획기적인 스타일이라고 한 패트릭 슈마허의 주장을 건축공모들이 입증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건축분야의 진보에 기여하고 보수를 받는 주문을 받으려는 수많은 건축가들의 열망 덕분에 그들에게서 공짜나 다름없는 가치를 뽑아낼 수 있는 조달 기술을 전지구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그렇게 된 것이지 자유로운 시장참여자들 사이에서 새로 출현하는, 서로 연결 짓는 것의 미학이라는 슈마허의 주장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건축분야의 오랜 관습인 건축공모와 달리 패러메트릭 디자인을 규정하는 시대는 ‘승자독식’ 이데올로기와 지식이 ‘낙수’ 형태로 증식된다는 사고방식 아래에서 작동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시대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 시대에 전위적 기획들을 위해 개발된 혁신이 점차 사회적으로 채택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항상 새로운 ‘일회성’ 건물을 추구하는 것은 문화적 채택이 이루어질 여지를 거의 남기지 못한다. 오히려 신자유시대의 승자독식 모델이 권력, 자본 및 부의 대규모 불균형을 만들어냈다.

 

건축의 양극화

상업적 수단을 통한 건축술의 혁신 추구는 자본의 대규모 축적에 의존한다. 수 세기 동안 건축가들은 자신들의 건축 비전을 발전시킬 후원자로서 활약할 수 있는 의뢰인을 찾고자 했다. 한 가지 상징적 사례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피터 루이스(Peter Lewis) 및 <루이스 레지던스>(Lewis Residence)와 맺은 관계이다.(([정리자] <루이스 레지던스>(Lewis Residence)는 실현되지는 않은 주택개발 기획이다.)) 게리는 자신의 의뢰인들 중 보험업에서 수십억을 번 피터 루이스로부터 8200만 달러 주택—루이스가 결국은 짓지 않기로 한 주택—의 다양한 버전들을 디자인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고 의뢰자인 루이스는 이 의뢰건에 대해 6년의 시간과 600만 달러 이상의 비용을 썼다. 게리는 루이스로부터 받은 돈이, 자신이 받은 ‘맥아서(MacArthur) 영재상’의 상금처럼, 아무런 제약 없이 자신의 가장 진보적인 생각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 돈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인정했다.

피터 루이스 같은 의뢰인들은 별로 없으며, 건축교육에서 그러한 기대감을 조장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양의 건축연구와 교육이 그러한 비현실적인 의뢰인에게서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뿐인 주문에 바쳐지고 있다. 건축분야는 이러한 불균형적인 과도함을 알게 되었고 이런 건축 관행들을 비판하는 시도들이 건축학 내부에서 이루어졌다. 일례로 건축계는 생태적 재난 내지 금융재앙 이후 집을 박탈당한 사람들과 그 이후 살 곳을 잃을 버린 사람들과 함께 하는 건축으로 시선을 돌려 인도주의적인 저소득 프로젝트들을 강조함으로써 건축의 윤리성을 재발견하고자 했다. 칠레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Alejandro Aravena)가 조직한 2016년 베네치아 건축 비엔날레는 차별적으로 격리되거나 대표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해결방안을 만들어낸 건축가들을 부각시켰는데, 여기서 전 세계 부동산 투기, 집단지식 풀의 강탈 그리고 우버 및 에어엔비처럼 이른바 ‘공유경제’로 공통적인 공간들에서 수익을 추출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두 가지 태도들 즉 한편으로는 엘리트 의뢰인들을 위한 디자인의 낭비와,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낭비의 비윤리성에 필연적으로 반발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불가피한 측면이다.

이 체제에서 승자독식이라는 사고방식은 종형곡선의 양끝에서 작동하며 곡선의 가운데 혹은 볼록한 부분—도시 건축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간계층이 이 부분에 위치한다—은 줄어들거나 사라졌으며 심지어 건축을 위한 기획으로서 관심을 끌지 않게 되었다. 전문가들은 자본의 비대칭성에 좌우되지 않는, 노동이 가진 가치를 분명히 할 권한을 긴급하게 되찾을 필요가 있다. 무임금 노동이나 충분한 임금을 받지 않는 노동을 통해 엘리트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전통을 거부하는 것이 그 첫 걸음이다. 진보적인 건축은 퇴행적인 사회 관행들과 동의어가 되었다. 이것은 다른 분야들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되는 구조적인 문제들이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건축물 건립에서 양극화가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무자비한 경쟁하에서 작동하는 연구와 실천으로 번성하는 분야가 있으며 여기서는 많은 관계자들이 성공해서 유명인 반열에 오르기 위해 기꺼이 공짜로 일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결과인 착취와 박탈을 바로잡으려고 건축의 엄격함과 건축의 핵심가치들로 전환하는 흐름이 있다.

 

‘가운데 부분’을 다시 활용하기

1914년 헨리 포드(Henry Ford)는 노동자들의 하루 최저임금을 그 당시 자동차 회사들의 평균 임금의 두 배에 맞먹는 5달러까지 올리기로 결심했다. 포드는 노동자들의 소비력이 그가 키우고자 시도하고 있는 산업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포드는 노동자들이 그들이 만들고 있는 자동차를 살 수 있게 하고자 했다. 오늘날 미국 건축가들은 상당한 금액의 학자금 대출금이 쌓인 후인지라 디자인하도록 요청받는 유형의 건축물을 살 여유가 없다. ‘스타 건축가’ 시스템에 의해 육성되는 오늘날의 건축문화는 충분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인턴 노동과 착취적인 관행들로부터 나오는 상당한 양의 보조를 필요로 한다. 사회적 어젠다에 맞물려있는 관행들조차도 무임금 인턴십의 보조에 의존하게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중산층을 위한 건축은 상업적 명령에 의해 추진되는 것처럼 보인다. 종형곡선의 가운데 부분은 건축가들의 수중에 없는 시장, 즉 렘 콜하스(Rem Koolhaas)가 ‘정크스페이스’(Junkspace)라 부른 것과 종종 관련되어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줄어들거나 사라진 이 종형 곡선의 가운데 부분을 다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가운데 부분은 맞춤 제작한 것의 매력이나 인도주의적인 원조라는 영웅적 면모가 없기에 더 이상은 건축분야에 중요한 것이 되지 못했다. 건축분야는 근대 건축 운동을 연상시키는 큰 서사에 참여하기를 여전히 두려워한다. 어쩌면 시장 바깥 혹은 시장 주위에서 작동하지 않는 비판적 담론과 실천을 발전시키는 방안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어젠다의 추출 명령에 의해 생겨나는 경제적인 교착상태 때문에 자율이라는 기획이 자급에 기반을 두어 나타나게 되었다. 이제 건축가들은 스스로를 그들이 생각하는 건축의 사용자이자 생산자로서 재설정할 수 있으며, 그들이 속하는 문화에 재접속하고 그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의 디자인 기여를 재조정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가운데 부분을 다시 활용하는 것이 금욕이나 긴축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긴축은, 정부가 애초에 문제를 발생시킨 금융기관들이 낼 세금을 인상하지 않고, 그 반대로 금융기관들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서 공공서비스를 대폭 줄이는 것이다. 주택위기가 의미하는 바는 점점 더 많은 수의 시민들이 자신들이 일하는 장소에서 살 만한 경제적 여유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공공부문과 커먼즈가 시장투기의 반대쪽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필요하다. 공동체주의에 기초한 운동들의 출현은 전통적으로 공적인 것/사적인 것의 이두체제였던 것에 세 번째 부분을 추가할 수 있게 한다.

 

2008년 이후 전망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해서 사람들은 자유주의 정부와 보수주의 정부 공히 신자유주의 경제를 얼마나 깊이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시스템이 다수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서서히 갖게 되었다. 모든 건축가들이 중간에서 꼭대기로 가치를 뽑아 올리는 경제모델을 받아들이는 쪽에 서있다는 것이 건축학계의 현실인 만큼 건축가들에게 2008년은 건축가들이 사용하는 도구가 사실상 어떻게 경제적 어젠다를 내포하고 있는 사회-기술적 시스템인지를 숙고하도록 경종을 울린 한 해였다. 건축물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자본 뒤에 있는 경제적인 충동들과 동기들에서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사회-기술적 관점에서 보면 현 경제 관행이 선택한 최고의 무기는 디지털 플랫폼이다. 자본이 이것을 사용자들의 표준화와 자본 추출을 위한 도구로서 사용하게 된 것이다. 플랫폼은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전지구적 조직체들이며 사용자들끼리 소통하는 규칙들을 부과하고 플랫폼에서의 거래를 모니터링해서 획득한 지식에서 이윤을 추출한다. 플랫폼들은 시장 규제를 우회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두드러진 형태의 경제 불평등을 수반한다.

건축분야에서 건축공모는 초기의 플랫폼이자 어쩌면 훨씬 더 원시적이고 악의적인 플랫폼일 것이며 또한 보수를 지불할 가치가 있는 노동과 그렇지 않은 노동을 결정한다. 공모에 지원하는 경쟁은 투기적인 노동형태로 되어 있으며, 이는 트레버 숄츠(Trebor Scholz)가 주장한대로 고용, 노동시간 및 최저임금과 관련된 시장규제를 우회하는 메커니즘이 되었다. 우버의 경우처럼, 공모에 지원하는 건축가들의 경쟁으로 인해 자기 자신이 결정권자이고 주어진 요청에 참여하기 위해 보상받지 못할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건축가 기업가’라는 상이 극찬을 받는다.

2008년 금융위기는 건축계 자체의 투기 시장 내부에서 활약하는 건축가들 세대에게 깨달음을 주는 경험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건축가들은 자신들이 디자인 작업에서 승자독식 경제 시스템을 받아들였고 공모나 다른 플랫폼 제공자들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라며 매우 자주 무료로 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적인 예로 부상하는 <노!스펙 운동>(No!Spec movement)은 우리 건축가들이 비윤리적인 사업 관행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과 대안적인 모델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예기치 못한 깨달음을 나타낸다. 금융위기는 저항운동의 급증을 촉진했으며 이는 시장이 규제받지 않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알려준다. 규제받지 않는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투기성 노동은 구조적인 분할을 낳고 불평등을 증가시키므로 권력 불균형을 촉진하는 것이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는 대안들의 생산을 촉진하기도 했다. 우리가 참여하는 노동의 주권을 강조하는 공동체 번영의 모델들을 제작하려는 하부구조와 이데올로기를 연결시키는 사회-기술적 인식을 촉진한 것이다. 리차드 스톨먼(Richard Stallman)의 일반공중사용허가서(General Purpose License) 및 카피레프트 운동에서처럼 사용자들 간의 지식 증식을 보장하는 라이선스 계약 창출, 블록체인 기술의 출현에서처럼 분산된 방식으로 신뢰를 보증할 수 있는 분산원장들의 창출 그리고 알라스테어 파빈(Alastair Parvin)의 위키하우스 작업의 경우처럼 적정 가격으로 사용자들이 빌딩 솔루션을 스스로 마련할 수 있게 하는 건축의 오픈소스 형태 디자인이 이 모델들에 속한다.

 

건축 커먼즈의 틀 형성하기

이 책은 다섯 개의 장으로 나뉜다. 1장 「건축술의 발달」에서는 신자유주의의 명령 아래 작동하는 건축을 비판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한다. 먼저 건축술의 진보라는 생각이 과연 시민들의 번영에 이바지했는지를 묻고 인풋 당 아웃풋 효율의 증가(ephemeralization)라는 약속이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검토한다. 첫째 물음에 대해서는 건출술의 진보가 혁신을 일반대중에게로 ‘내려 보내지’ 못했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다음으로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시장 인클로저를 통해 작동하는지를 살펴본다. 신자유주의는 공적 도메인의 힘을 정의하는 규정들을 무너뜨리는 시스템으로서, 저자는 그러한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가치는 커먼즈로부터 추출된다고 주장한다.(([여기서 저자는 커먼즈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인다―정리자] 커먼즈는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저술을 통해 정식화되었을 뿐 아니라 데이비드 볼리어(David Bollier)와 마시모 데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의 관점—공동체적인 부의 창출에 참여하는 사회구조들 뿐 아니라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공유재 둘 다를 포함하는 정의를 모으고자 시도하는 관점—을 통해서도 정식화되었다.))

2장 「부분들의 융합」에서는 어떻게 추출적인 관행들이 건축에 분명히 나타났는지를 더 깊이 파고든다. 시장 다양성을 파괴하면서 수직적 통합을 이루는 대규모 제조활동이 자본 축적의 논리에 의해서 발생하게 되는 경향을 소개한다. 수직적 통합의 발생은 기술적인 어셈블리에 필요한 부분들의 수를 줄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제조에 명확한 혁신들을 제공했다. 3D 프린팅 같은 최근 과학기술들은 이전에 표준화된 구성요소들을 해체하는 식으로 수행적인 이점들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수직적 통합으로의 경향은 패러메트릭 디자인 패러다임과 명확한 상관관계가 있다. 이 장에서 저자는 패러메트릭 모델이 적은 수의 인구에 복무하고 시장 다양성에 충격을 주었다는 것을 짚어보고자 한다.

3장 「부분들을 옹호하여」에서는 디자인과 제조 분야에서 부분들의 사회적 어포던스(([정리자] 어포던스란 주체가 특정의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객체가 ‘제공’하는 관계를 가리킨다.))를 이해함으로써 대안적인 디자인에 필요한 제안들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다양한 다수의 행위자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건축 디자인의 분야가 공급자들 간의 협동 및 연계의 효율적인 형태들을 찾을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러한 노력이 1950년대의 <모듈협회>’(Modular Society) (([정리자] ‘Modular Society’는 책의 한 장으로서 크리스틴 월이 쓴 장 이름이기도 하지만, 원래 그 당시 영국의 협회 이름이다. 현재 희의록 등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https://discovery.nationalarchives.gov.uk/details/r/C2327371))같은 기관들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대의 시도들은 디지털 네트워크의 출현을 통해 동질화되지 않는 차원 연계의 구조들을 제공하고자 한다.(([정리자] 과거 <모됼협회>는 동질화와 표준화에 기반을 두었다.))

이와 관련해서 제시되는 틀은 연속적인 패러메트릭 모델에 의해 제시되는 ‘일회성의’ 모델과는 대립적인 위치에 있는 ‘이산(離散) 건축’(Discrete Architecture)이라는 패러다임이다. 이는 재조합 능력의 측면에서 부분들이 디자인되고 연구되며 다양한 생산물을 산출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다. 디자인은 이산 건축을 통해 다원적이고 비독점적인 생산 접근법을 유지할 필요성을 받아들인다. ‘디자인 커먼즈’의 산출을 위해 부분들의 ‘조합에 의한 잉여’(combinatorial surplus)의 연구 및 이 부분들이 가진 어포던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산(적) 건축의 이점들이 검토되며, 재사용가능한 패턴들이 정보 네트워크를 통해 전파될 수 있도록 하는 조합 디자인을 채택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4장 「비물질적 건축」에서는 네트워크 기반 시설이 감시 자본주의의 실행에 활용되었을지라도 사용자들에게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는 디지털 네트워크를 디자인하고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제시한다. 플랫폼이 추출 도구가 되는 것에서 협력 도구가 되는 것으로 이행하기 위해 플랫폼이 극복해야 하는 과제들에 대한 지도그리기를 한다. 트레버 숄츠(Trebor Scholz)가 옹호한 바의 ‘플랫폼 협동조합주의’(Platform Cooperativism) 같은 아이디어들을 여기서 살펴본다. 더 나아가 커먼즈에 복무하는 오픈소스 건축모델들의 저장소를 잠재적으로 생성시키면서 사용자들 간의 협동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건축용 플랫폼을 개발할 가능성을 이곳 4장에서 고찰한다. 비디오게임 기술이 플레이어들 사이의 협동 모델과 디지털 공동체에 참여하는 전통을 제공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5장 「자급을 통한 재구축」에서는 커먼즈가 다양성이라는 아이디어에 기초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자유를 확립하리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감시 자본주의에 의해 발전되는 기반시설에서는 특정 형태의 지성, 즉 사용자들의 정보를 모아놓은 집적 데이터(aggregate data)에서 생성되지만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얻어지는 지성이 효율적으로 배치되어왔지만, 이와는 다르게 커먼즈는 위계로서 작동하지 않는, 서로 합의하는 형태의 공동의 기반시설을 재구축할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5장에서는 어떻게 우리가 기울어지지 않은 운동장을 유지하고 진입장벽을 낮추어 설계하면서 민주주의와 관리를 테크놀로지에 함입할 수 있는지를 짚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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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설명]

건축술은 모두가 배워야 할 것이다. 모두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 존 러스킨

근대에 일어난 커먼즈의 대대적인 상실은 무엇보다도, 삶을 재생산하는 터인 ‘집’(home)의 상실이었다. 이 상실의 상황은 자본주의가 매우 발전한 탈근대에 들어와서도 호전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집의 상실이라는 상황이 거의 자연 상태에 해당하는 기본 설정이 되었다. 다수의 사람들의 경우 집을 구성하는 하드웨어인 주택(house)이란 것이 노동하는 사회생활을 매우 오랫동안 하고 나서야 간신히 확보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사실 주택을 안정되게 확보하는 일은 어떤 이들에게는 거의 평생이 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에게는 ‘평생’으로도 부족하다. 노동력은 재생산되어야 쓰일 수 있는데, 그 재생산의 터가 노동력이 한참 동안 쓰인 후에야 확보될 수 있다니! 아니, 평생을 노동해도 불가능하다니! 자본은 이런 모순적 상황 위에서, 즉 삶의 재생산 터의 ‘기본적’ 결핍을 기반으로 해서 자신을 증식한다.

그래서 커먼즈 되찾기는 집 되찾기를 필수적으로 포함한다. 그리고 집 되찾기에는 집을 구성하는 하드웨어를 박탈하는 메커니즘인 투기적 주택시장의 극복이 필수적으로 포함된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하자면 커먼즈 특유의 방식으로 주택을 확보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이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인 5장 「자급을 통한 재구축」“Reconstruction through Self-provision”의 내용의 일부를 포함한다.)

우선 자급을 원칙으로 한다. “자급의 실천이 공통적인 것의 현실화이다.” 자신의 집을 자기가 짓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인이 아무런 지식도 (아직은?) 없는 상태에서 DIY로 자신의 집을 짓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저자는 우선 건축가들이 자신들의 집을 짓는 데서 출발하는 것을 제안한다. 여기서 집의 디자인과 관련된 전문적인 지식이 생산되는데, 그 다음으로 이 지식을 일반 대중에게 전달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이것을 저자는 ‘해득력 사다리를 채우기’(to populate a literacy ladder)라고 부른다. 해득력 사다리는 전문가들이 생산한 지식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시스템으로서, 전문가들의 수준에서 가장 초보자 대중의 수준에 이르는 지식의 스펙트럼을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 사다리는 지식의 스펙트럼이 어떻게 새로운 미경험 사용자들과 전문가들 사이에 배치되는가에 의해 규정된다.”

이 해득력 사다리에서 지식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순환되는 데 그칠 경우에는 이것을 ‘약한 사다리’라고 부르고 초보적 수준에서 전문가 수준으로 점차적으로 올라가는 로드맵이 잘 되어 있으면 이것을 ‘강한 사다리’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서 해득력 사다리의 핵심은 가장 높은 수준과 가장 낮은 수준을 원활히 연결하여 초보자도 이 사다리를 타고 자신의 능력과 노력이 허용하는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저자는 이것이 단순히 테크놀로지(지식 생산)의 민주화라기보다는 민주주의를 테크놀로지(지식 생산)에 함입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내 식으로 풀자면, 테크놀로지의 민주화는 (대체로 사용자의 고정된 능력을 전제로 한) 테크놀로지 사용의 평등한 분배이고, 민주주의를 테크놀로지에 함입하는 것은 모두가 테크놀로지 사용자로서만이 아니라 테크놀로지 생산자로서의 능력을 자유롭게 배양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강한 사다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문턱을 낮추어 디자인하기’가 필요하다. 진입장벽이 낮아야 많은 사람들이 사다리 안에 들어올 수 있고 사다리 안이 더 열린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해득력 사다리를 만드는 것 자체가 자원의 집합소로서만이 아니라 ‘사회체계로서의 커먼즈’(마시모 데 안젤리스)의 생산으로 이어진다. 실제 집을 만드는 실천이 집짓기와 관련된 지식의 생산과 연결되므로, 저자가 제안하는 방안은 위키피디아, 리눅스 같은 비물질적 생산의 프로젝트를 물질적 생산으로 확대하는 방안이기도 하고, 단순한 참여―상부에서의 의사결정에 사용하기 위한 데이터 수집을 대중이 일시적으로 거드는 것―에서 자급으로 이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 자급은 아직은 국가로부터의 조달을 대체한다기보다는 보완하여 국가 및 시장 양자와 협상할 수 있는 시민조직들을 생성하는 것이 주된 일이다.

건축 분야에서 참여에서 자급으로 움직인 대표적 사례로 파빈(Alastair Parvin) 등의 위키하우스(Whikihouse)가 있으며, 건축가들이 자신들의 집만 짓는 것을 넘어서서 이룩한, 자급의 한 형태로서의 커먼즈를 위한, 그리고 커먼즈에 의한 건축의 기획으로는 Open City(1971)가 있다.((이 기획에 대한 사례연구로 Rodrigo Pérez de Arce and Fernando Pérez Oyarzún, Valparaiso Schoo /Open City Group, ed. by Raul Rispa (Birkhauser, 2003) 참조.))

[정백수]




퍼더필드 — 예술과 게임이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다

 



공상적이지만 거의 현실적인 시나리오가 여기 있다. 여러분의 지역사회 공원에 있는 꿀벌들, 다람쥐들, 거위들, 곤충들, 나무들 등등의 종(種)들이 인간의 침범과 학대를 충분히 겪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들은 더 이상 참지 않고 들고 일어나 인간이 가진 것과 동일한 권리를 요구할 작정이다. 종들 간의 일련의 회합을 통해 지역 생태계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번성을 보장하는 협정/협약이 타결된다.

이 시나리오는 <퍼더필드>(Furtherfield, 런던에 기반을 둔 예술공동체)가 빅토리아 시대 핀즈베리 파크의 일부 지역에 대한 파수의 일환으로서 고안한 ‘라이브 액션 롤플레잉’(live action role-playing, LARP)게임이다. 앞으로 3년에 걸쳐 <퍼더필드>는 프로젝트의 이름인 <핀즈베리 파크 2025 협정/협약>(The Treaty of Finsbury Park 2025)을 진행해나갈 때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각각 일곱 가지 종들의 역할을 하도록 요청할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풍뎅이와 다람쥐 종의 대표자들로서 <종(種)간 회의>에 참석하도록 함으로써 LARP게임이 목표로 하는 것은 사람들이 “놀이를 통해 인간이 아닌 생명체들에 공감하는 경로들”을 발전시키도록 돕는 것이다. 서로 다른 종들이 소통하도록 돕는 직감 다이얼(Sentience Dial)도 있다. 누가 알겠는가? 이 과정이 실제로 핀즈베리 파크를 더 무성하고 활기 넘치는 장소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 진기한 애니미즘 경험은 <퍼더필드>가 지난 25년 동안 주최해온 프로젝트들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이 프로젝트들 대부분은 예술, 디지털 기술 및 사회적 행동을 일정한 창조적인 방식으로 섞는다. 최근 『커머닝의 프런티어』(Frontiers of Commoning) 팟캐스트(에피소드 #24)에서 나는 세상에 대해 새로이 생각하는 방식으로서 참여예술에 대한 <퍼더필드>의 독특한 접근법에 관하여 루스 캐틀로우(Ruth Catlow)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술가, 큐레이터이자 <퍼더필드>의 공동대표인 캐틀로우는 1996년에 <퍼더필드>를 시작한 이래로 많은 예술 프로젝트들을 이끌어 온 비전을 가진 사람이다. 그녀는 지역적, 일국적 및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다양한 파트너들과의, 특히나 평범한 사람들과의 협동작업을 조직하는 것을 돕는다. <퍼더필드>의 많은 예술작업과 테크놀로지 기획들의 핵심은 우리가 세상을 다르게 보도록 하려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위해 새로운 미래를 그리는 경우 예술이 하는 역할을 존중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퍼더필드>의 프로젝트들 대부분은 런던 소재 핀즈베리 파크에 있는 녹지 공간 및 미술관에서 그리고 예술가들•기술자들•활동가들을 불러 모으는 다양한 디지털 공간에서 열린다. 지역 공무원들이 <퍼더필드>의 예술 프로젝트들을 펼칠 참여적인 무대로서 공원을 사용하도록 <퍼더필드>측에 청했다. 전통주의자들은 이 단체를 예술의 센터라고 부르겠지만 <퍼더필드>측은 자신들의 활동이 외부 지향적이고 네트워크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재미있게도 ‘디-센터’(de-center, 탈-중심)라고 부른다.

<퍼더필드>는 흥미를 유발시키며 장난기가 다분한 기발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예술적 실험들의 주최자라고 자임한다. 이 탐구적 실험들은 오픈소스 테크놀로지와 철학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퍼더필드> 자신들의 말로는) “현존하는 권력들을 파열시키고 민주화”하며 “지형을 새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일례로 <흑인의 삶도 중요하다> 시위들이 무수히 일어나 미국과 전 세계 도시를 흔들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노예소유자 사업가들과 군장성들이 공원에 청동 조각상으로 세워지는 영광을 입은 이유를 문제삼기 시작했다. <퍼더필드>는 공원에 있는 받침대 위에 지금 있는 것 대신에 누가 또는 무엇이 놓여서 기념되어야 할지에 대하여 공개 토론을 열기로 결정했다.

예술가들은 ‘시민 공원 받침대’ 프로젝트(The People’s Park Plinth project)측으로부터 공원에서 기념하게 될 새로운 사람들이나 물건을 제안하도록 요청을 받았다. 이 과정의 매개체는 스마트폰이었다. 공원에서 산책하는 사람들이 나무나 동상 받침대에 부착된 QR코드를 스캔하면 공원 내의 해당 장소에 관한 영상을 즉각 볼 수 있었다. 사실상, 이 프로젝트가 스스로를 설명했듯이, 이 프로젝트는 “공원 전체를, 여러분이 여러분의 공원에 원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하는, 디지털 예술작품을 위한 공공 플랫폼으로” 바꾸었다.

누구나 제안된 예술품 몇 개에 투표할 수 있었다. 1위를 차지한 작품—에이샤 탄 존스(Ayesha Tan Jones)가 제작한 <나무 이야기에 바탕을 두어>(Based on a Tree Story)—은 나무에 있는 QR코드를 사용하여 그곳에 사는 나무 요정의 영상을 호출하는 예술작품이었다. (“장소 특유의, 청각적 증강현실을 통해 나무의 과거•현재•미래의 이야기를 하는 디지털 나무 요정과 조우하기”)

예술작품을 선정하기 위한 공개적인 투표는 그 자체로 상당히 새로웠다. 각 참가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하나의 예술작품에 투표권을 한 번 행사하는 식이 아니었다. 그들이 원하는 만큼 많은 예술작품들 각각에 투표할 수 있는 다수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제곱 투표”(quadratic voting)라 불리는 이 방식은 어떤 프로젝트가 과반수를 얻는지를 그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떤 것에 가장 열광하는지를 보여주는 쪽이다. 이 시스템은 소수의 목소리를 무효화하는 “다수의 횡포”라는 문제점과 파당성이 강한 집단들이 방해물로 작용하는 상황을 극복할 목적으로 구상되었다.

<퍼더필드>의 더 흥미로운 역할들 중 하나는 어떻게 블록체인 소프트웨어가 네트워크 시대에 예술을 재발명하는 것을 도울 수 있는지에 관하여 실험실을 열고 예술가들과 기술전문가들 간 일련의 토론들을 주최한 것이었다. 핵심은 문화 부문이 어떻게 “피어 생산방식으로 생산된, 예술•문화•사회를 위한 탈중심화된 디지털 인프라에 이르는 길”을—특히 탈중심화된 자율조직들(Decentralised Autonomous Organisations, DAOs)을 통해서—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퍼더필드>는 “예술계에서 게이트키핑과 엘리트주의를 끝내”고 “규모에 제한이 없는 상호의존과 상호협력을 위한, 회복력 있고 변화도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한 가지 길로서 이 깊고 근본적인 우애의 정신을 가져오기”를 원했다. <퍼더필드>는 또한 기술 부문에서 아주 많은 탈중심화된 자율조직들을 활기 띠게 하는 자유의지적인 개인주의를 넘어가기를 원했다.

<퍼더필드>의 회합들의 결과로 두 권의 책이 나왔다. 하나는 『블록체인을 다시 생각하는 예술가들』(Artists RE:thinking the Blockchain, 2017)—예술가들이 블록체인에 비판적으로 참여하는 활동에 관한 책—이고 다른 하나는 2022년 5월에 출간되는 『급진적인 친구들』(Radical Friends)—예술계에서의 디지털 자율조직들(DAOs)의 위험 및 이 조직들에 대안이 되는 커먼즈 기반 디지털 자율조직들에 관한 선집—이다. “<퍼더필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안적 조직들에 “DAOs with Others”를 나타내는 두문자어 ‘DAOW’라는 이름을 붙인다.”

루스 캐틀로우와 나눈 팟캐스트 대화는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전 세계 LGBT들은 ‘백인 구원자’가 자신들을 구하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다

 

  • 저자 : 루 페레이라(Lou Ferreira). 루는 ‘2020~2021 백래시 추적(2020-2021 Tracking the Backlash)’의 국제 조사 연구원이다.
  • 원문 : LGBT people globally are not waiting for ‘white saviours’ to rescue them (2021. 6. 8) https://www.opendemocracy.net/en/5050/lgbt-people-globally-are-not-waiting-for-white-saviours-to-rescue-them/(This article is published under a Creative Commons Attribution-NonCommercial 4.0 International licence.)
  • 분류 :  번역
  • 옮긴이 : 채희숙
  • 설명 : 이 글은 넷플릭스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를 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피터 태철: 세상이 미워한 남자Hating Peter Tatchell>(크리스토퍼 에이모스Christopher Amos, 호주, 2021)에 관한 짧은 비평글을 번역한 것이다.

전 세계 LGBT들은 피터 태철 덕분에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지만, 넷플릭스의 신규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렇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엘튼 존(Elton John)의 후원으로 지난달에 개봉된 <피터 태철: 세상이 미워한 남자>는 유명하고 논란이 많은 영국의 LGBT 인권 활동가와 그의 반세기 넘는 캠페인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다양한 목소리와 결정적인 맥락을 제외함으로써 이 시기의 더 넓은 이야기를 반영하는 데 실패한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태철을 모든 곳에서 퀴어를 구하는 ‘백인 구원자’와 같은 인물로 보여준다.

이것은 훨씬 더 풍부하고 힘있는 작품일 수 있었다. 그러나 도리어 이 영화를 보면서 세 가지 주요한 이유로 나는 좌절했다.

1. 사라진 목소리들

유명한 게이 배우들인 스티븐 프라이(Stephen Fry)와 이안 맥켈런(Ian McKellen)을 포함에서 거의 전부 백인 남성 영국인인 인터뷰 출연자들은 영국 안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태철의 LGBT 권리를 위한 50년 넘는 캠페인과 시민불복종 활동을 돌아본다.

우리는 태철이 10개국 넘는 곳에서 벌인 시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그가 2018년 축구 월드컵을 앞두고 푸틴의 반LGBT 정책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러시아 여행을 준비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옹호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거의 듣지 못한다. 풀뿌리의 승리들은 당사자가 아닌 영국 유명인들의 이야기들에 가려진다.  

누가 푸틴의 러시아에서 성적 권리에 반대하는 백래시에 따르는 인적 희생을 설명하는가? 스티븐 프라이다. 러시아 LGBT는 체포와 동성애혐오 폭행을 담은 푸티지에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태철 이야기의 소품에 불과한 것처럼 배경에 있다. 우리에게 직접 이야기를 하는 유일한 러시아 활동가에게서 우리가 듣는 것은 태철의 도움에 감사하는 말뿐이다.

2. 사라진 맥락

태철은 영국의 LGBT에게 1980년대는 “악몽과도 같은 시기”[인용은 영화 자막을 따름-옮긴이]였다고 회상한다. 대처의 보수당 정부가 학교에서 동성애를 소위 ‘조장’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 28절을 내놓은 한편 에이즈바이러스(HIV,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의 확산은 반동성애 차별을 악화시켰다. 태철은 동성애자 및 양성애자 체포의 급증을 언급하면서 “경찰은 우릴 보호하지 않고 오히려 박해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사라진 것은 당시의 반인종주의 투쟁을 어떻게든 반영하는 것이다. 1980년대에 경찰의 보호를 기대하는 것은 모두가 누리지는 못하는 특권이었다. 흑인 시민권 운동은 태철이 그 운동에서 자신이 영감을 받았고 “그들의 이상, 가치, 방법을 [배워서] 나의 인권 운동에 적용했습니다”라고 말할 때 잠시 거론된다. 

반LGBT 차별이 어떻게 인종 또는 젠더에 기반을 둔 억압과 교차하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는데, 이는 특히 흑인 트랜스 여성을 폭력의 위험에 처하도록 계속 내버려둔다. 또 스크린에서 밀려나있는 것은 바로, 장애인의 권리에서 광부들의 노동쟁의에 이르기까지 1980년대에 떠오른 영국의 다른 시민권 투쟁들이다.

3. 백인 구원주의?

2001년 태철은 호텔로비에 매복했다가 짐바브웨의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Robert Mugabe)에 대해 고문‘죄’를 근거로 한 시민체포를 극적으로 시도했다. 그는 영화에서 “짐바브웨의 인권 운동가는 제가 국제적으로 무가베 정권의 만행을 알릴 행동을 취해줄 수 있겠냐는 부탁을 해왔습니다”라고 설명한다.

러시아에서 태철에 관해 보도된 바처럼 이 다큐멘터리는 짐바브웨 활동가들에게서 직접적으로 듣는 장면을 오직 하나만 제공한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것은 지역 운동원들이 백인 영국인에게 감사하고 있는 클립이다. 그들이 수년 동안 자국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싸워온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또 다른 장면에서 우리는 태철이 런던의 이슬람사원 바깥에서 캠페인하는 것을 본다. “[우리는] 무슬림 공동체와의 결속력을 다지고자 합니다”라고 그는 설명한다. 런던에는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서 그런 연대를 형성하고 있는, 유색인종이 이끄는 수많은 단체들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점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피터 태철: 세상이 미워한 남자>은 LGBT 권리운동의 전체 역사를 제시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이들의 목소리와 역할을 무시하고, 태철이 세계의 퀴어를 구하는 1인 시위 기계인 것처럼 그를 위치지은 것에 변명이 되지는 않는다.

전 세계 LGBT는 백인 영국 남성이 나서서 자신들을 구해주는 것을 기다리고 있지 않다. LGBT가 그러한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암시하는 것은 그릇된 이해를 낳으며 모욕적이다.  




지상(地上)의 소금: 공통주의에 대하여 ― 네그리 인터뷰 (2)

 


  • 저자  : Antonio Negri, Pascal Gielen, Sonja Lavaert
  • 원문 : “The Salt of the Earth. On Commonism: An Interview with Antonio Negri,” in Commonism: A New Aesthetics of the Real, ed. Nico Dockx, Pascal Gielen, Valiz, 2018, pp. 91-116.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윤영광
  • 설명 : 『공통주의: 실재적인 것의 새로운 미학』(2018)의 저자들인 벨기에의 사회학자 Pascal Gielen과 철학자 Sonja Lavaert가 네그리를 상대로 2018년 8월 18일에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정리자의 판단에 따라 생략한 부분이 있으며 나머지도 엄밀한 의미의 번역은 아닌 내용 정리지만, 가독성을 위해 인터뷰의 형식과 어투는 유지했다. 분량을 고려해서 세 차례에 걸쳐 나누어 게재한다. 
  • 1편 : http://commonstrans.net/?p=1817
  • 3편 : http://commonstrans.net/?p=1853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커먼즈의 리더쉽이 다중의 전략과 리더의 전술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리더는 다중의 일반적 전략 내에서 자신의 전문성에 따라서 오직 일시적으로만 일정한 전술적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죠. 이러한 리더쉽은 어떻게 조직될 수 있습니까? 또한 다중에게 전략을, 리더에게 전술을 할당하는 당신의 이러한 전도(顚倒), 마찬가지로 지도자들이 단지 일시적으로만 임명되는 대의민주주의와 얼마나 다른 것입니까?

답 : 나는 우리가 운동과 지도자 사이에서 작동하는 정치적 리더쉽이 제거되거나 약화되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결정 권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정당들의 공식은 무엇이었습니까? 당은 일정한 정치적 노선을 따라 다수의 사람들을 결집합니다. 이때 정치적 노선은 리더나 지도부에 의해 결정되어 하향식으로 사람들에게 말 그대로 부과되거나 교육되는 것이지요. 오늘날 운동들은 기존의 제도들을 거부하고 있으며, 『어셈블리』에서 마이클과 나는 운동들의 이러한 비판을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리더쉽은 거부하되, 제도 그 자체를 반드시 거부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현재 우리는 제도의 문제를 마주하고 있고, 함께 연구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더 정확히 바꿔 말하자면, 리더쉽을 운동으로 다시 가져오되, 리더쉽의 헤게모니적 전략은 반드시 운동 내부에서 발전되어야 합니다. 리더로부터 결정 권한을 분리해야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리더로부터 결정의 추상성과 초월성을 제거해야 합니다.

 

: 하지만 리더는 어떻게 선택되는 것입니까? 커먼즈는 대의민주주의와 어떤 점에서 다릅니까?

문제는 어떻게 선택하느냐가 아닙니다. 선택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진짜 문제는 리더에게 주어지는 힘의 성격입니다. 오늘날 운동들에서 리더는 꽤 자주 다중으로부터 자발적으로 나타납니다.

리더의 힘은 전술적 차원에 국한되어야 하며, 이는 보통 제안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합니다.

근래의 운동에서 활동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군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리더가 되는 현상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현상은 운동이 직면한 현실적 필요 및 문제에 대해 리더로 나선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통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떻게 한 리더의 힘이 일정한 시점에 인정되고, 개시되며, 잘 작동하고, 결과적으로 하나의 현실이 되는지를 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죠. 1917년 혁명 때 레닌은 당시 제기되었던 두 가지 문제에 대한 답 ― 지금 당장 평화를, 그리고 농장노동자들에게 토지를 ― 을 즉각, 직접적인 방식으로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술적 리더가 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군대와 농민을 대표하던 권력들은 병사들도, 농장노동자들도 이러한 변화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때문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역설적인 상황이었죠. 레닌은 리더로서 저 지배제도들을 향해 ‘아니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힘이 되는 전술의 사례입니다.

리더는 언제나 일시적이고 전술적입니다. 그는 요구와 필요를 갖고 있는 사람들, 주체들의 투쟁에 자신의 능력을 보태기 위해 나서는 사람입니다.

 

: 그렇다면 리더는 사람들의 요구와 필요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게 되는 것입니까? 그가 사람들로부터, 그들 가운데서 나왔기 때문인가요?

바로 그렇습니다. 리더는 그 자신이 사람들이 제기하는 요구와 필요의 일부이고, 그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는 것입니다. 공식적인 역사에 따르면, 레닌은 민중과 게임을 벌인 정치선동가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정반대가 진실이라는 것을 압니다. 혁명이 성공했던 것은, 레닌이 평화와 토지가 민중의 진정한 요구이자 필요임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리고 의회 시스템이 만들어낸 온갖 타협들, 문제를 망가뜨릴 뿐인 우회로와 제도들 없이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답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많은 지도자들의 경우에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가령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독일과 맞서 싸우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다수/공통적인 것의 욕구 및 필요와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리더, 바로 이것이 요점입니다.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제도 혹은 리더가 반드시 중앙집중적인 지배구조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며, 다중에 의해 민주적인 방식으로 현실화될 수 있다는 가설을 옹호합니다. 당신이 운동들의 미래로 제시하는 사례들 가령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은 이러한 가정의 연장선에 있지요. 하지만 이러한 관념과 사례들은 수평적 리더 부재’(horizontal leaderless)에 대한 당신의 비판에 잘 들어맞지 않거나 심지어 그것에 반대되지 않습니까?

답 : 많은 운동들이 리더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적인 것, 혹은 이 운동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제도입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운동들이 리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제도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운동들이 제도를 가지지 않는다면, 제도적 틀을 채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수일 것입니다. 그러나 마이클과 나는 운동들 내부에서 제도를 형성하고 그로써 수평적 헤게모니를 현실화하는 경향이 존재한다고 확신합니다. 우리의 작업은 주권적이지 않고 소유와 연결되지 않는 유형의 제도를 물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형의 제도가 실천에서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가 바로 우리가 토론하고 고민하고 시험해야 하는 바일 겁니다.

 

: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연결되는군요. 당신은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 적대적 개혁주의(antagonistic reformism) 그리고 헤게모니라는 세 가지 정치전략들의 상호보완성을 이야기합니다. 기존 제도들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비()주권적 제도들이 만들어질 때, 기존 제도에서 폐기되어야 할 것은 정확히 무엇입니까?

답 : 우리는 현재 19세기와 20세기에 정치적 사유와 실천을 지배했던 개념들이 죽음을 앞두고 벌이는 마지막 싸움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 죽어가는 개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국가주권과 소유(공적 소유와 사적 소유 모두를 포함하는 소유)입니다. 민족국가주권은 지구화된 자본주의에 의해 약화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적 자본주의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상호 지지하는, 저 근근히 생존을 유지하고 있는 두 개념들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민족국가주권이 기초하는 개념 혹은 원리, 특히 ‘국경’은 현재 정말 부조리한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끊임없이 국경을 초월하고 넘나듭니다. 우리의 두뇌는 이미 지구화되어 있고 더 이상 국경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국경과 같이 빈사 상태의 원리와 개념들을 가차없이 다루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이론적 작업입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모두 아우르는 소유의 문제 역시 마찬가집니다. 소유는 국경과 동일한 논리에 기초해 있으며, 그것만큼이나 현실에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개념입니다.

반대로 공통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소유의 개념이 아닙니다. ‘공유재(common goods, beni comuni)’와 ‘공통체(commonwealth)’에 있는 것으로서의 ‘공통적인 것(the common, il comune)’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전자는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후자는 하나의 생산, 내부로부터 공통적인 것 자체에 의해 늘 새롭게 형성되는 무언가이며 따라서 결코 소유될 수 없는 것입니다.

 

: 새로운 비주권적제도들이 어떤 모습을 갖게 될지에 대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무언가를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세 가지 정치적 전략들, 즉 예시적 정치, 적대적 개혁주의, 제도들에 대한 헤게모니는 정확히 어떻게 함께 작동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세 가지 전략들이 따라야 하는 순서가 있습니까, 아니면 나란히 진행되어야 합니까?

답 : 나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 세 가지 정치적 전략은 정치적 실천에 관한 문제입니다. 책상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닙니다. 그건 불가능한 동시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나의 작업은 연구하고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것, 일반적 틀들을 비판적 방식으로 제공하는 것, 담론의 토대를 탐사하는 것, 원칙과 개념들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것입니다. 투쟁의 실천은 이것과 다른 문제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토론과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바로 그 투쟁 내부에서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하고자 하는 야심을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미래가 스스로를 알리고 발생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나에게는 이것이 핵심적인 이슈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미래는 실천 속에서 만들어질 것입니다. 반면 나는 나의 작업이 방향을 가리키고, 아이디어와 구조의 원칙들에 대한 비판을 정식화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다음과 같은 헤겔의 말을 인용합니다. “모든 것은 참()을 실체로서뿐만 아니라 동일하게 주체로서도 파악하고 표현하는 것에 달려 있다.” 주체성이란 당신에게 정확히 무엇입니까? 오늘날 주체성은 다른 형태를 띨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입니까?

답 : 헤겔에게 주체성은 종합과 극복을 의미했습니다. 주인-노예 변증법에 대한 알렉상드르 코제브(Alexandre Kojève)의 해석을 생각해보세요. 노예는, 주인을 섬기는 동시에 주인을 주인으로 구성하는 한에서 주인을 극복합니다. 젊은 시기 맑스의 작업에서 자본주의와의 관계에서 규정되는 프롤레타리아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 사회에 완전히 통합된 부분이 되는 한에서만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로 형성하고 자신의 기획을 실현합니다. 그러나 『자본』에는 더 이상 이런 해석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늘날 노동자들의 현실에 대한 우리의 분석 또한 그러한 해석을 따르지 않습니다.

현 시기 노동자의 주체성은 특이성입니다. 특이성은 공통적인 것이 구성되는 가운데 생산됩니다. 역으로 특이성은 공통적인 것의 구성에 참여합니다. 오늘날 주체성은 혁신이자 초과라는 의미에서, ‘존재’의 생산입니다. 그것은 자유의 실천이며, 따라서 주체성의 생산은 어떠한 동일성-정체성도 넘어서는 무언가입니다. 주체는 동일성-정체성이 아니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제시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주체는 협력 속에서, 사회적 존재 속에서 형성되며, 그러한 한에서 역사적인 것입니다.

 

: 어셈블리의 조직화에서 예술과 예술계의 역할을 어떻게 보십니까? 한편으로 우리는, 오늘날 예술계가 전시회와 비엔날레 등에서 주류 미디어가 제공하지 못하는 교류와 토론의 공간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역할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계가 결코 한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전시회와 비엔날레들은 종종 홍보 수단으로 쓰이며 토론을 상품으로 바꿀 뿐이라고 결론 짓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정을 염두에 둘 때, 당신이 보기에 예술계 혹은 예술 그 자체는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커먼즈를 형성하고 강화하는 데 그것이 담당할 수 있는 역할이 있기는 한 걸까요?

답 : 『예술과 다중』(1989)에서 이야기한 바 있듯이, 예술은 언제나 그것이 생산하는 방식과 연결되어 논의될 수 있습니다. 예술은 생산입니다. 예술의 존엄성은 그것이 ‘존재’의 생산, 의미있는 이미지들의 생산이라는 사실로부터 나옵니다. 여기서 이미지는 ‘존재’를 형성하는 이미지, 숨겨진 조건으로부터 ‘존재’를 끄집어내서 그것을 개방된 조건으로 변형하는 이미지를 말합니다. 이런 일은 언제나 생산의 과정에서 발생합니다. 일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재화 일반이 생산되는 방식과 예술이 생산되는 방식 사이에 유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예술에서는 언제나 무언가를 구축한다는 의미의 ‘만듦(making)’이 이루어집니다. 예술은 언제나 일정한 형태의 짓기, 조립하기, 생산적 제스처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일정한 구분이 존재한다는 것은 명확합니다. 자신을 상품으로 마케팅하는 예술이 있는가 하면, 생산적인 예술적 만듦의 형태도 있는 것이지요.

언어와 마찬가지로 예술은 소통을 생산하고 연결을 만들어냅니다. 특히 오늘날 예술은, 연결을 구성하고 사건이 된다는 점에서 언어의 실천과 유사합니다. 예술은 점점 더 물질성을 제거하고 비물질적 생산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예술은 비물질적 생산과 동일한 흐름을 따르며, 유동적이고 불안정하며 새로운 이미지들과 예기치 못한 형태와 형상들 속에서 연결들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방식으로 예술은 스스로를 현재의 생산양식과 결합하며, 이 생산양식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사건 및 정념들과 관련된 행위들을 해석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술의 변신(metamorphosis)을 목격하는 국면에 있습니다. 노동이 스스로를 완전히 변형하는 생산양식의 국면에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예술과 관련하여 나는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첫째, 예술은 ‘만듦’의 한 형식이며, 따라서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의 생산양식과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둘째, 예술은 ‘존재’를 생산하는 능력을 갖습니다. 물론 모든 예술이 언제나 진정한 ‘존재’를 생산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이 존재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시장에 복무하며 시장 내에서 생산되고 유통되는 예술과 ‘존재’를 생산한다는 의미에서 절대적 생산으로서의 예술은 분명히 구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1년 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사람들은 맑스를 읽었습니다. 아테네에서 열린 <documenta 14>에서는 매우 강한 의미의 정치적 예술이 선보여져서 네덜란드의 전국신문인 <NRC Handelsblad>혁명을 위한 무대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죠. 그러나 동시에 이 혁명적 플랫폼들은 비엔날레와 도큐멘타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으며, 이는 발터 벤야민이 정치의 미학화라고 칭했던 것 벤야민에 따르면 이것은 파시즘의 징후이기도 하지요 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습니다. 예술이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파시즘 그 자체를 긍정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분명 신자유주의를 강화하며 예술을 상품으로 전환하는 제도들로부터 예술이 벗어날 수 있을까요?

 

답 : 탈출의 길은 언제나 있습니다! 말씀하신 공간들은 명확히 전장(戰場)으로, 대결과 충돌, 갈등과 균열의 장소로 간주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엔날레와 도큐멘타가 대표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국가 혹은 시장의 이 거대한 예술제도들은 통제 메커니즘으로 기능하는데, 이러한 통제기능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늘 가능하며 또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예술가들은 노동자들과 정확히 같은 조건에 있습니다.

내 생각에 예술제도들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것들은 경기장,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진리를 위한 싸움이 벌어지는 경기장, 이데올로기 비판과 생산의 경기장입니다. 권력의 담론이 드러나는 곳인 동시에 또한 언제나 시장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국가와 시장에 의한 이 통제의 우리(cage)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며, 이러한 탈출은 언제나 예술의 발전의 일부를 이루어 왔습니다. 예술은 매번 다른 방식으로, 다수의 상이한 형태로 스스로를 드러내 왔습니다. 가령 한때는 오늘날 예술제도들과 동일한 역할을 담지했던 예술의 후원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도 문제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조건들에 맞서 예술이 수행해온 끊임없는 저항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나는 예술이 어떤 식으로든 권력의 편에 선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대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화가들과 조각가들이 그랬고, 네덜란드 ‘황금기’의 화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술에는 그 예술적 생산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단절의 지점들이 언제나 존재해 왔습니다. 저 화가와 예술가들이 그들의 특정한 사회적 맥락의 분리불가능한 부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이 단절의 지점들 때문에 우리는 예술을 진리를 밝히는 하나의 방법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절의 지점들이 예술에 진리의 양식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죠.

나는 종종 예술가 친구들-동지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들은 점점 더 시장에 대해 비판적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시절 계급투쟁을 강하게 신뢰하거나 그것에 공감하는 동지들의 행위에는 시장에 대한 일반적인 저항이 존재합니다. 시장에 대한 거부는 점점 더 근본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부와 항의는 타협 없는 근본적인 비판을 낳습니다.

물론 종종 ‘무(nothing)’의 강한 유혹, 행위하지 않고 만들지 않으려는 유혹, 혹은 ‘하지-않음(not-doing)’/‘만들지-않음(not-making)’을 표현하는 예술작품을 제시하려는 유혹 또한 존재합니다. 나는 이러한 이슈들에 대해서 신중한 편이며, 모든 행위에는 ― 따라서 예술 행위에도 ― 물질적 구성이 요구되고, 그러므로 현실과 관련을 갖는 구성 역시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순수성을 추구하거나 힘을 악마화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지상(地上)의 소금: 공통주의에 대하여 ― 네그리 인터뷰 (1)


  • 저자  : Antonio Negri, Pascal Gielen, Sonja Lavaert
  • 원문 : “The Salt of the Earth. On Commonism: An Interview with Antonio Negri,” in Commonism: A New Aesthetics of the Real, ed. Nico Dockx, Pascal Gielen, Valiz, 2018, pp. 91-116.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윤영광
  • 설명 : 『공통주의: 실재적인 것의 새로운 미학』(2018)의 저자들인 벨기에의 사회학자 Pascal Gielen과 철학자 Sonja Lavaert가 네그리를 상대로 2018년 8월 18일에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정리자의 판단에 따라 생략한 부분이 있으며 나머지도 엄밀한 의미의 번역은 아닌 내용 정리지만, 가독성을 위해 인터뷰의 형식과 어투는 유지했다. 분량을 고려해서 세 차례에 걸쳐 나누어 게재한다. 이미지는 인터뷰 중에 언급되는 이탈리아 나폴리 <Ex Asilo Filangieri>의 홈페이지(http://www.exasilofilangieri.it/)에서 가져온 것으로, 나폴리에 있는 ‘해방공간’들의 연결을 나타낸다.
  • 2편 : http://commonstrans.net/?p=1832
  • 3편 : http://commonstrans.net/?p=1853

 

마이틀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는 『어셈블리』(Assembly, 2017)를 통해 『제국』(2000), 『다중』(2004>, 『공통체』(2009) 3부작을 다시 새로운 10년으로, 4부작으로 확장시켰다. 네 번째 책에서 이 공통주의(commonism)의 옹호자들은 다시 한번 사회 발전에 있어서 가장 문제적 지점들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제공한다. 이번에 중심 이슈는, 그토록 많은 이들의 요구와 소망을 표현하고 공통적인 것이 하나의 사실임을 보여주는 사회운동들이 어째서 새롭고 진정으로 민주적이며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실패해왔는가이다. 『어셈블리』에서 저자들이 제시하는 많은 명제와 개념들이 그렇듯이, 문제제기의 노선 자체가 이미 논쟁적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리더쉽과 제도의 문제를 대면해야 하며, 과감히 다중의 기업가성(the entrepreneurship of the multitude)을 상상하고 낡은 말들을 전유해서 그 의미를 역전시켜야 한다. 우리는 파리에 있는 네그리의 집에서 그를 만났으며, 역전을 위한 방법을 검토하고, 전략과 전술, 이데올로기와 미학, 예술과 언어에 대해 토론했다.

― Pascal Gielen, Sonja Lavaert

 

: 우리의 책 공통주의는 이데올로기, 미학, 커먼즈가 이루는 삼각형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잠정적인 생각은, 공통주의가 신자유주의 이후의 후속 메타이데올로기(meta-ideology)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뿐만 아니라, 픽션과 현실을 연결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삶의 더 나은 형태를 갈망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도록 할 수 있는 믿음의 논리라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셈블리에서 당신과 마이클은 기업가성’, ‘제도’, ‘리더쉽등과 같은 개념들로 우리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이데올로기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당신은 그것이 긍정적인 내러티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 내 경험상 이데올로기는 대개 부정적인 함축을 갖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이데올로기’를 주로 부정적인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현실적인 사실입니다. 더욱이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구현하고 형성하며 구성하는 현실적인 무언가입니다. 이러한 현실의 구현에서 내가 긍정적으로 여기는 것은 비판 ―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고 현실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습니다 ― 과 (사유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의 이행으로 이해되는) 장치(dispositive)입니다. 이데올로기들이 현실을 구성하는 것은 맞지만, 나는 그 용어를 주로 그것의 부정적 측면을 이야기할 때 쓰는 쪽을 선호하며, 긍정적인 측면을 이야기할 때는 비판이나 장치라는 용어를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현실에 대해 생각할 때 그리고 현실을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할 때 이데올로기적 차원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반복하건대, 이데올로기는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그람시가 이데올로기를 이런 식으로 보았습니다. 한편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람시가 반대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우리가 지지하는) 코뮤니스트 이데올로기가 있습니다. 나는 오늘날 코뮤니스트 이데올로기를 비판이나 장치 ― 비판은 지식과 지성의 영역에 관한 것이고, 장치는 지식에서 행위로의 이행이라는 푸코적 의미에서의 장치입니다 ― 로 부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메타-이데올로기’라는 말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메타’, ‘포스트’, ‘이후(after)’와 같은 말들을 쓰는 것을 매우 꺼립니다. 그 말들은 초재적인(transcendent) 무언가 혹은 초재성의 공간과 같은 무언가가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메타이데올로기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좌파와 우파 사이의 전통적인 정당정치적 차이들을 초월하는 경향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공통적인 것이라는 테마가 취해지는 곳이면 어디서나, 공통적인 것의 이니셔티브가 전개되고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경향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신자유주의적 정치인들이 기본소득의 중요성에 대한 책을 쓰고, 신민족주의(neonationalism)가 스스로를 사회적 화합을 갈망하는 것으로 제시하며, 종교적 영감에 기반한 정당들이 공유와 공동체를 강조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답 : 공통적인 것은 좌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를 보면, 자본주의가 이윤을 낳는 것으로 변형한 것이 다름 아닌 커먼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커먼즈에 대한 자본주의의 태도는 수탈, 개발, 잉여가치 창출, 그리고 이것들에 기반한 지배입니다. 공통적인 것은 크게 두 가지 형태, 즉 자연적 커먼즈와 사회적 커먼즈로 존재합니다. 마이클과 내가 『어셈블리』에서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다시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1) 지구와 생태계, 2) 아이디어, 코드, 이미지, 문화적 생산물과 같은 비물질적 커먼즈, 3) 노동의 협력을 통해 생산되는 물질적 재화, 4) 소통, 문화적 상호작용, 협력이 이루어지는 영역으로서의 메트로폴리스와 지방들, 5) 주거, 복지, 의료, 교육 등을 제공하는 사회적 제도와 서비스들. 오늘날 경제와 사회의 본질적 특징은, 자본이 커먼즈의 사회적 생산을 착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커먼즈의 투쟁은, 노동하는 사람들이 자본에게 강탈당한 것을 재전유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빼앗긴 것을 재전유해서 그것이 공통적인 것에 이로운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해방의 의미입니다. 이는 또한 ‘포스트’ 혹은 ‘메타’와 같은 허구의 정체가 폭로되고 제거됨을 의미합니다. ‘메타’라는 것은 없습니다. 커먼즈의 투쟁은 ‘외부’(위[메타], 이후[포스트])를 제거할 가능성입니다. 이 투쟁은 전적으로 내재성의 지평, 즉 여기와 지금,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현실의 한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외부’란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일반적이고 일원적이며 정확히 정의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의 공통적인 것 혹은 커먼즈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단지 추상적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에서 그것은 언제나 이중적이기 때문입니다. 노동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오늘날 공통적인 것 혹은 커먼즈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연구들이 이루어졌으며, 다양한 운동과 학파들이 커먼즈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출현했습니다. 가령 여기 프랑스에는 『공통적인 것들의 귀환』(Le retour des communs, 2015)의 편집자 Benjamin Coriat의 학파가 있습니다. 『공통적인 것』(Commun, 2014)에서 공통적인 것을 하나의 요구이자 대안으로 정립하는 Pierre Dardot와 Christian Laval도 있습니다. 공통적인 것을 존재론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무언가로 간주하며 투쟁을 공통적인 것을 재전유하는 문제로 이해하는 Carlo Vercellone를 비롯한 다른 동지들 ― 마이클과 나도 이에 속합니다 ― 도 있지요. 이러한 우리의 입장은 또한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독해와도 연결됩니다. 『어셈블리』에서 우리는 매우 상세하게 그의 분석을 논의했고 또 대부분 그에 동의합니다. 다만, 하비가 끊임없는 원시적 축적으로서의 자본주의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우리는 자본주의가 발전적 국면들을 갖는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형식적 포섭과 실질적 포섭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점이 다르긴 합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메타’라는 용어를 선호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좌파와 우파 사이에 더 이상 차이나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좌파와 우파는 정확하지 않은 개념들이긴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보죠. ‘메타’라는 말은 자본주의가 더 이상 문제되지 않음을, 자본주의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 쉽게 일어날 수 있는 무언가 혹은 심지어 이미 우리가 승리한 전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선호하지 않는 것입니다.]

 

: 벨기에 플랑드르(Flandre)의 자유주의 정당인 <Open VLD>(Open Vlaamse Liberalen en Democraten)가 커먼즈에 관한 컨퍼런스를 조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반드시 커먼즈를 자본화하기를 원하지는 않으며, 커먼즈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자유주의 시스템에 결여되어 있는 무언가를 알아보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답 : 오늘날 우리가 엄청난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생산 시스템의 일반적 변형을 보고 있습니다. 자동화되고 로봇화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40여년 전 <이탈리아 오페라이스모(노동자주의, operaismo)> 운동에서 이러한 것들을 주제화하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1969년 『노동자의 힘』(Potere Operaio) 창간호에서 우리는 ‘시민소득’(reddito di cittadinanza)을 요구했는데, 이는 그때 이미 노동이 생산에서 완전히 부차적인 요소로 축소되는 이러한 경향을 예견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혁명과 현실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이며, 나는 대안적 이니셔티브를 발전시키기 위한 자본주의 외부의 공간들을 만들어내야 할 매우 긴급한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벨기에에는 많은 흥미로운 대안적 움직임들이 있습니다. <P2P 재단>의 창립자인 미셸 바우웬스와 많은 스타트업들을 생각해볼 수 있겠죠.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커먼즈는 ‘우파’의 구미를 강하게 자극하는 영역입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전적으로, 무엇이 대안일 수 있는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며, 사실 이것이야말로 다름 아닌 자율의 문제입니다.

 

: 우리는 연구와 책에서 미학(감성학, aesthetics)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예술과 관련해서뿐만 아니라 사회와 관련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미학을, 물질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것들을, 사람들을 만들거나 디자인하는 일에 관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당신의 책 어셈블리에서 우리는 비슷한 아이디어를 봅니다. 어셈블리는 커먼즈의 미학적 스타일과 전략을 특징짓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통주의에서 우리는, 우리가 교환가치, 금융자본주의, 신자유주의와 연결시키는 추상(abstraction)과 관련된 미학적 형상에 반대합니다. 당신에 보기에 이상적인 어셈블리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의 현실화를 위한 조건들은 무엇입니까? 인간들(사물, 자연)은 어떻게 어셈블리에 함께 할 수 있습니까? 어떤 도구 혹은 전략이 필요합니까? 요컨대 당신이 보기에 어셈블리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실천적으로 어떻게 조직되어야 합니까?

답 : 우리는 어셈블리가 이미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어셈블리는 노동이 언어 속에서, 그리고 자율적인 협력 속에서 스스로를 변형하는 현재의 경제구조 안에 이미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미 어셈블리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주체성을 생산하는 이 노동력 혹은 주체/사람들이 어떻게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정치적 주체화는 공통적인 것의 인식에 의해, 공통적인 것과 함께-함으로의 이행에 의해, 함께-함을 단순히 발견하는 것에서 명확히 이해하는 것으로의 이행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협력과 ‘공통적으로 존재함’(being-in-common)에서 공통적 주체성의 생산으로의 이행이 어셈블리의 중심적 요소입니다.

월스트리트점거운동에서 마드리드의 ‘분노한 사람들’(Idignados) 운동에까지 이르는 싸움에 참여했던 동지들과 활동가들은 바로 그러한 이행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특히, 자본주의적 통제하에서 생산하고 있으며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이 그저 우연히 그들에게 주어진 것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조건에서, 공통적인 것이 건설되고 형성되는 자유로운 조건으로의 이행을 위해서 말이죠. 이러한 이행은 근본적인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노동자들이 자본에 의해 한데 모아지고 조직되었던 예전보다 오늘날 훨씬 더 공통주의가 실현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과거에, 노동자들은 자율적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불러 모아졌습니다. 오늘날 상황은 달라졌으며, 바로 이것이 가능성들에 엄청난 힘을 부여합니다. 이처럼 함께-함이라는 하나의 존재론적 사실이 출발점으로 주어져있기 때문에, 오늘날 해방의 가능성은 이전보다 훨씬 더 크고 넓습니다.

요는, 어셈블리는 정치적으로 되어야 하는 존재론적 사실이라는 것이며, 이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맑스는 노동계급에 대해 말하기를, 노동계급은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며, 따라서 노동계급이 정치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정당, 외부조직, 이데올로기 등등을 통해 자신들의 상황을 인식하게 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노동과 사회에서 일어난 변화 덕분에, 성숙과 독창적인 조직의 출현을 봅니다. 오늘날 노동은 더 이상 명령에 종속된 노동이 아닙니다. 명령은 주체적으로 함께 일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점점 더 소외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에 의해 형성되는 언어가 명령에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의 중요성은, 이러한 자율적 언어 사용이 뒤집어질 수 있고 그리하여 자본에 의해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날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작업은, 이러한 주체적이고 특별한 언어의 사용을 인식하고,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뒤집어놓은 것을 다시 뒤집어서 해방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 여전히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어셈블리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말이죠. 사회학자로서 말해보자면, 우리는 나폴리의 <Ex Asilo Filangieri>와 같은 어셈블리의 사례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셈블리는 조직하고, 자율적인 결정들을 내리고, 자기통치를 달성하는 하나의 도구, 모임 방법, 보다 민주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답 : 마이클과 내가 생각한 것이 바로 <Ex Asilo Filangieri>와 같은 유형의 현상입니다. 거기서 주권은 공통적인 것 쪽으로,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모두를 포함하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공유 재화들(공통선, beni communi)의 공간 쪽으로 뒤집어져 있습니다. 공통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일련의 주목할만한 이니셔티브들이 취해지는 것이지요. 공통적인 것의 개념은 생산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공통적인 것은 창안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입니다. 어셈블리는, (물질적이거나 비물질적인) 공유재화들을 잘 관리하고 그리하여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는 다중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어셈블리의 근본적인 측면은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다시 결합된다는 데 있으며, 오늘날 우리는 이 일을 해낼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러시아혁명 당시 레닌은 오직 기아와 전쟁, 파국만이 존재하며 새로운 힘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파괴되어야 했던 예외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레닌과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어셈블리를 하나의 정치적 힘으로 변형할 기회가 있습니다. 힘을 부여하는 것, 그것이 정치입니다. 혹은, 미학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면, 형태와 힘을 부여하는 것을 미학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힘 없이는 형태도 없습니다. 정치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폭력의 측면을 포함합니다. 정치에서 평화의 구축은 힘(때로는 폭력)에 관한 것입니다.

 




극장 커먼즈의 탄생: 하울라운드 2009-2017


  • 저자  : Alexis Frasz / Holly Sidford
  • 원문 :  The Birth of a Theatre Commons: HowlRound from 2009-2017
    (2018.10.03) /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4.0 International License (CC BY 4.0)
  • 분류 : 번역
  • 옮긴이 : 채희숙
  • 설명 : 이 글의 공동저자인 알렉시스 프라즈(Alexis Frasz)와 홀리 시드포드(Holly Sidford)는 헬리콘 협력체(Helicon Collaborative)의 공동디렉터다. 헬리콘 협력체는 창의성, 형평성, 그리고 환경의 지속가능성을 우리가 원하는 세계의 핵심적이고 상호관련된 요소들로 본다. 그들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창의적으로 표현하고 자신의 문화를 유지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문화적 평등은 건강한 사회에 필수라고 보며, 사람들이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고 한계를 넘는 아이디어를 개발 및 실현하는 것을 돕는다. 알렉시스 프라즈는 환경 문제를 해결하고 보다 공정하고 재생 가능한 사회로 전환하는 데 문화가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를 포함하여 문화, 환경 및 사회정의의 교차점에서 헬리콘의 연구를 이끌고 있다. 그녀는 문화 부문에 깊게 뿌리박힌 불공평성에 대항하기 위해 헬리콘의 작업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현재 그녀는 예술가 및 문화 지도자들이 사회경제적 정의를 위한 보다 광범위한 운동에 연대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홀리 시드포드는 관계들을 보고 부분들의 합보다 더 많은 것을 만드는 숙련된 시스템 사상가다. 그녀의 끝없는 호기심, 통찰력 있는 지성, 탁월함에 대한 의지는 헬리콘의 모든 작업을 떠받친다. 그녀는 역사가로서의 교육과 프로그램 개발자 및 자금 제공자로서의 경험을 이용해서 예술가의 역할을 증가시키고, 창의적 표현의 완전한 다양성을 인식하고, 예술 및 문화를 공동체의 생활에 좀 더 중심적인 부분으로 만들기 위한 헬리콘의 노력에 정보를 제공한다.

헬리콘 협력체에서 우리는 하울라운드가 그들의 이야기를 하는 우리를 도우려고 왔을 때 들떴다. 우리가 하울라운드를 사랑하긴 하지만 그것만이 들뜬 이유는 아니다. 마치 침술에서 침이 혈자리에 제대로 꽂힌 것처럼, 적절한 시기에 전해진 적절한 이야기는 시스템을 재등록하거나 바꾸는 것을 도울 수 있다. 우리는 하울라운드의 이야기가 특히 지금 이 순간과 공명하며, 극장 부문에서 그리고 그 외부에서 사고에 영향을 미치고 관행을 변화시킬 잠재력이 있다고 믿는다. 이 글은 왜 우리가 하울라운드의 이야기가 오늘날의 정치·경제적 맥락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에 관한 몇 가지 생각을 나눈다. (사례 연구 전문 읽기).

하울라운드는 비영리 극장 부문에서 형평성, 지속가능성, 타당성의 위기에 대응하여 2009년에 설립되었다. 그 해에 발표된 두 개의 연구조사인 토드 런던(Todd London)의 『충격적인 성쇠: 새로운 미국 연극의 삶과 그 시대』(Outrageous Fortune: The Life and Times of the New American Play)과 데이비드 다우어(David Dower)의 「기회의 문」(“The Gates of Opportunity”)은 아래의 것들을 찾아냈다.

* 거의 대부분의 지원금이 가장 크고 부유한 극장들로 가고 있었다. 그 극장의 관객들이 미국 인구 구성을 반영하고 있지 않음에도 말이다. (즉 그들은 나이 든 백인 부유층이었다.)

* 이러한 기관들은 최고 티켓값을 부과할 수 있도록 스타 출연자들로 블록버스터를 기획하는 식으로 그 기능이 상업적인 극장과 점점 더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 한편 엄청난 양의 활기찬 예술 창작 및 참여가 이런 기관들 바깥의 소규모 비영리 극장 또는 전국각지의 커뮤니티 환경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 전반적으로 연극은 예술적으로 성공적일 때조차도 자신의 작업으로 거의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던 예술가들의 ‘땀의 지분’에 힘입어 굴러갔다. 많은 곳에서 생활비가 증가하자 이런 메커니즘은 특히 다른 재산이나 수입원이 없는 예술가들에게 점점 더 유지될 수 없었다.

* 작품의 창작과 공유를 위한 재원, 정보, 플랫폼에 대한 접근은 주요 기관의 소수 ‘문지기’에 의해 엄중히 감시되었고, 다수의 예술가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이 보고서들은 몇몇 유용한 자료를 제공했지만 솔직히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이 부문의 사람들은 그러한 극장 모델이 예술적 가능성이나 공공이익을 실현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정치조직가이자 작가, 그리고 활동가인 조너선 매슈 스먹커(Jonathan Matthew Smucker)가 지적하듯이 “사회 시스템에 무슨 잘못이 있는지와 어떻게 시스템을 바꿀지에 대한 지식은 전혀 다른 범주의 지식이다.” 같은 해에 설립된 하울라운드는 바로 연극 분야의 문제에 대한 진단뿐만 아니라 가능성 있는 대안도 제공했기 때문에 중요하다.

하울라운드의 설립자들―칼(P. Carl), 다우어(David Dower), 가흐론(Jamie Gahlon), 매슈(Vijay Mathew)―은 비영리 극장이 직면한 문제가 단지 ‘연극 문제’가 아님을 알았다. 우리의 현 시대는 권력과 부의 소수에의 집중, 저임금을 통한 노동자 착취, 기회와 자원에의 접근을 막는 구조적 장벽이 계급 및 인종의 선을 따라 확대되는 것, 재정이 부족한 공적·사회적 재화 및 서비스, 그리고 기업이익을 위한 모든 것의 상품화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정치철학자이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의 저자 마이클 샌델은 “우리는 거의 모든 것을 사고 팔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난 30년 이상 시장(시장가치)은 전에 없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라고 쓴다. 비영리 극장 부문은 이 추세를 받아들였지만 극장은 문제의 근원이 아니었다. 극장 부문에서 잘못된 점은 자본주의가 미친 듯이 날뛰는 우리 사회가 가진 훨씬 더 큰 기능장애의 증상이었다.

자본주의가 고장났다고 주장하는 것, 적어도 다른 무엇보다 이익과 자유시장을 우선시하는 가장 공격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형태의 자본주의는 고장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더 이상 급진적인 입장이 아니다. 교황이 그렇게 말했다. 미국 및 전 세계의 많은 저명한 경제 및 정치 지도자도 그랬다. 국제통화기금조차 지난 수십 년간 신자유주의 정책들이 득보다 해를 끼쳤으며,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동시에 지난 10년 동안 부자들 사이에서도 행복 및 웰빙의 감소가 있었다. 자본주의의 신조에 따라 우리는 하나의 종으로서 생존이 위협받을 정도로 우리의 자연 생태계를 파괴했다. 젊은 사람들이 특히 현 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 최근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2008년 대불황 시기에 성년이 된) 18세에서 29세 사이 미국인은 자본주의(45%)보다 사회주의(51%)에 더 긍정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고장’이라고 부르는 것 역시 오해의 소지가 있다. 자본주의는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안된 대로 정확하게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번영, 예술적 창조성, 생태적 건강, 문화적 전통, 또는 대부분의 다른 사회적 결과와 관련해서라면 자본주의 시스템은 중대한 설계 결함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하울라운드 팀 (왼쪽부터): 비제이 매슈, 베이미 가흐론, 라모나 오스트로우스키(Ramona Ostrowski), 아비게일 베가(Abigail Vega), 제이디 스토클리(JD Stokely). (사진: 안야 프루덴테(Anya Prudente))

체제를 개혁하는 데에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자본주의의 가치와 실천이 매우 일반화되어 있어서 종종 그것들이 ‘바로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으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고인이 된 훌륭한 어슐러 르 귄(Ursula Le Guin)은 이 역학에서 우리 자신이 하는 역할에 대한 중대한 오해를 일깨워주었다. “우리는 자본주의 안에 살고 있다. 그 힘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왕들의 신성한 권리도 그랬다. 어떤 인간의 권력도 인간에 의해 저항을 받고 변화될 수 있다.” 우리가 더 나은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우리의 현재 체제가 우리 외부에 본질적인 실재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인식해야만 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과거에 여러 번 해왔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체제에 변화를 일으킬까? 하울라운드의 설립자들은 버크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결코 기존의 현실과 싸워서는 상황을 바꿀 수 없다. 무언가를 변화시키려면 기존의 모델을 더 이상 쓸모없게 만드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그들은 연극 현장의 모든 문제들을 적어도 한꺼번에 전부는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모든 종류의 연극관계자들이 소통하고, 일을 공유하고, 생각을 교환할 수 있는 민주적인 플랫폼을 만들려고 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풀뿌리들의 목소리의 ‘소방호스를 열어서 우리 분야에서의 99%의 문제를 수렴함’으로써 분야 전체를 가시화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들은 그것이 연극계에서 새로운 종류의 민주적 조직화를 위한 기초이며, 다른 더 큰 변화를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믿을 수 없게 단순한 개입은 다음을 포함한다.

* 어떤 연극인이든 기고할 수 있는 저널

* 누구나 자신의 연극 관련 콘텐츠를 공유할 수 있는 무료 라이브스트리밍 TV 채널

* 미국 전역에서 공연되는 모든 새로운 연극들의 지도(地圖)

* 현장에 영향을 미치는 이슈와 아이디어들을 논의하기 위한 연극인 직접 회의

그것은 연극 분야를 위한 새로운 기반시설 실험이었다. 이는 이익·위계·경쟁을 극대화하는 것을 강화하도록 설계된 제도적 극장 구조와 달리 개방성·협업·공동체의 가치를 의도적으로 뒷받침하려 한 실험이었다.

혁명은 종종 자기 시대의 기술적 진보에 도움을 받는다. 2009년 하울라운드의 출현은 새로운 기술 도구 및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의 가능성에 의해 촉진되었고, 이는 제도 바깥에서 사람들이 조직하고 소통하고 규모 있게 일을 할 수 있게 했다. 이런 기술은 이미 언론에서 정치까지 정보와 콘텐츠에 대한 접근이 엄격하게 통제되던 많은 다른 장을 파열하고 있었다. 기술은 또한 점거운동 같은 일에 동력을 공급해서 개인들의 분산된 네트워크를 조직하고 집단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하울라운드는 무엇보다도 연극 분야에 유용한 도구세트가 되고자 했으며 그 목적을 실현했다. 수천 개의 글과 영상을 올렸고, 매달 45,000명 이상의 순방문자가 들어온다. 그러나 철학적인 차원에서 설립자들은 ‘커먼즈’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받았고, 그 생각을 발전시키려 했다. ‘커먼즈’란 다 소모되거나 열화(劣化)되지 않고 모두에게 사용되고 유익할 수 있도록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조차도 사적소유나 시장의 힘으로부터 반드시 보호되어야 하는 특정한 종류의 자원이 있다는 생각이다. 현재 우리의 맥락에서 보면 이 생각이 예스럽거나 대단히 이상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이는 우리가 이미 공기, 토양, 물과 같은 천연자원과 공원, 도로와 같은 공공재, 그리고 공익사업들을 관리하는 방법이다. (비록 이들 중 많은 것들 역시 사유화되고 있긴 하지만.) 커먼즈는 항상 사적소유와 시장을 합리적으로 점검하고 공공자원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하울라운드의 설립자들은 문화자원 역시 상업화와 사유화로부터 보호되는 커먼즈에 속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연극 분야의 기존 기반시설은 자원을 공유하거나 협업하거나 공동선 편에서 행동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하울라운드는 연극인들이 자원·작업·정보를 공유하고, 공유된 관심사와 목표를 중심으로 협력하는 것을 장려하며 가능케 하는 다른 종류의 기반시설이 되기를 추구했다.

하울라운드의 개입 결과로 연극 분야가 달라졌는가? 우리가 함께 이야기한 현장 리더들은 하울라운드가 짧은 활동기간 동안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고, 현장이 스스로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방식을 많이 변화시켰다는 데에 동의한다. 주류 극장의 문 바깥에 있는 목소리들의 ‘소방호스를 열’면서 하울라운드는 이전에 주변화되었거나 보이지 않았던 문제들과 관점들을 드러내는 것을 도왔고,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연결하고 조직하도록 해주었다. 하울라운드는 지식에 대한 접근을 민주화하여 인터넷에 접속하는 누구라도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연극 관련 자료의 국내 최대 아카이브 중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연극이 어떻게 그리고 어디서 가르침 받고 연구되는가에 영향을 미쳐서 전통적인 ‘연극 센터’ 바깥의 예술가들에게 가능성을 열었다. 장기적인 영향은 아직 모르지만 시스템 전문가들은 정보에 대한 접근권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변화시키고 사람들이 자기조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떤 체제에서든 변형을 창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두 지렛점이라고 말한다.

초기 하울라운드 회의: <교차로에서: 새로운 연극 부문에서 비영리 제작자와 상업적 제작자>(In the Intersection: Non-Profit & Commercial Producers in the New Play Sector), 워싱턴DC, 2011년 11월 4~5일

그러나 우리가 전반적으로 경쟁과 이익을 넘어 다양성·협력·참여를 중요시하고 지원하는 비영리 극장 시스템을 구현하기에는 아직 멀었다. 10~15년 전보다 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인식이 훨씬 커졌지만 이것은 아직 돈과 권력의 주목할 만한 재분배로 이어지지 않았는데, 돈과 권력이 여전히 극소수 기관과 개인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고 제한된 범위의 콘텐츠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향해 있다. 어떤 이들은 우리의 비영리 구조가 커먼즈의 가치와 실천을 규모 있게 지원할 수 있는지 의심한다. 커먼즈 이론가 데이빗 볼리어(David Bollier)는 우리가 이 가치들에 기반을 둔 ‘전혀 다른 일련의 기관, 법 체제, 사회적 실천’을 고안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다른 이들은 우애가 사회부문들에서 커먼즈 지향의 행위와 구조를 장려하고 지원하는 데 더 강한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우리에게는 제도화된 인종차별주의, 구조적인 부의 불평등, 추출적 경제 모델들, 커먼즈 자원의 광범위한 사유화 및 착취 등 극장을 둘러싸고 있는 더 큰 사회경제 체제의 불평등과 장애를 다루지 않고 연극 현장에서 상황을 바꾸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남았다. 이는 지난한 과제이지만 우리는 연극 및 문화 제작자들이 이러한 목적을 위해 일하는 많은 다른 새로운 경제 변화가들과 협력하여 좀 더 공정하고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미래 사회에 가까워지는 데에서 하나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벅찬 과제들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하울라운드가 지금까지 작업에서 충분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현장의 많은 이들이 하울라운드가 연극계와 전체 사회에 더 큰 구조적 변화들을 야기할 필요가 있는 어려운 대화를 위한 촉매제이자 조직자, 그리고 진행자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하울라운드가 미친 심대한 영향 때문이다.

하울라운드는 이미 다음 작업 단계를 논의하기 위해 현장의 이해관계자들을 모으기 시작하고 있다. 적절하게도 커먼즈의 다음 단계는 커먼즈 그 자체에 의해 정의될 것이다.♣




패션을 커먼즈의 생태계로서 다시 상상하기



 

패션계에 글로벌 패션 시장을 개조하길 원하는 디자이너들, 패션하우스들, 학자들, 그리고 활동가들의 꽤 큰 집단이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놀랍게도 옷을 디자인하고 생산하고 유통하는 새로운 방식을 발명하려는 상당한 움직임이 진행 중이다. 낮은 급여, 남용되는 노동력, 막대한 양의 폐기물, 혐오스러운 마케팅 전략에 의존하는 글로벌 시스템에 염증을 느낀 많은 패션 활동가들이 실용적인 대안들을 개발하고자 한다.

나는 최근 이 주제에 관해 한 주요 패션 콜로키움에 강연을 요청받았다. 네덜란드의 아른헴에서 열린, 약 500명의 사람들이 참여한 이 행사는 <스테이트 오브 패션>(State of Fashion)이라 불리는 연례 전시회와 아트이지 예술대학교(the ArtEZ University of the Arts)의 후원을 받았다. 이 콜로키움은 그 임무를 이렇게 말했다. “패션 시스템을 철저히 탐구하고 파열시키고 재규정하고 변형시키기 위해서는 디자인에 의해 추동되는 연구뿐만 아니라 가치에 더욱 기반을 둔 비판적인 사고가 절실히 필요하다.” “윤리, 포용력, 그리고 책임 있는 소비자주의를 더욱 적극적인 방식으로 반영하는 패션 현실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을 공동으로 조사하는 것”이 목적이다.

[나는 ‘새로운 럭셔리를 위한 연구’라는 콜로키움 제목에 조금 혼란스러웠다. 이 행사는 사회 혁신을 귀하거나 고급스러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열망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럭셔리’라는 개념이 패셔니스타들의 열정적 DNA에 너무 각인되어서 쉽게 바꾸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패션 산업을 개조하기 위한 접근들의 광범위함에 감명 받았다. 가장 강력한 노력이 <패션 혁명>(Fashion Revolution)이라고 불리는 한 집단에 의해 행해지고 있었다. 전지구적 시민단체인 이 집단은 12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사망한, 방글라데시에 있는 라나플라자 의류공장 붕괴 참사 이후 활동을 시작했다. <패션 혁명>은 영화 <트루 코스트>(The True Cost)가 보여주는, 실제의 (높은) 의류 비용과 관련된 폐해가 앞으로 일어나는 것을 막고자 패션 공급망을 더욱 투명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패션 혁명>은 또한 2000년부터 2014년까지 세계적으로 의류 생산을 두 배나 증가시키는 데 기여한 패션 산업의 한 부문인 ‘패스트 패션’(fast fashion)을 비판했다. 패스트 패션 산업은 엄청난 양의 폐기물을 배출했다. 구매한 옷 중 약 40%의 옷들은 거의 혹은 전혀 입지 않는다.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옷을 3.3번 입는다. 그리고 소매 의류의 약 삼분의 일은 팔리지 않아 결국 태워지거나 폐기된다. 매년 약 4000억 제곱미터 규모의 직물 폐기물이 나오고 있다.

‘지속가능한 패션’은 많은 연설자들에 의해, 소중히 간직할 수 있고 오래 입을 수 있도록 디자인된 옷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는 말이다. 옷에 대한 감정적인 애착을 탐색하고 어떻게 지속가능한 디자인과 오래가는 미학을 개선시킬 수 있는지를 연구하는 크리스틴 하퍼(Kristine Harper)는 옷의 ‘심미적인 지속가능성’(aesthetic sustainability)을 언급했다. ‘리커버링 디자이너’(recovering designer)인 오르쏠라 데 까스트로(Orsola de Castro)는 어떻게 “사랑받는 옷들이 오래가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속 가능한 패션의 또 다른 선구자는 오스클렌(Osklen)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브라질의 인스티뚜또-E(Instituto-E)의 설립자인 멧사바트(Oskar Metsavaht)이다. 그는 옷에 쓰일 수 있는 지속가능하고 재활용 가능한 새로운 종류의 소재를 개발하려는 회사의 적극적인 노력을 그린 단편 영화를 보여줬다. 오스클렌은 또한 새로운 종류의 공급망과 ‘의식있는 소비’(conscious consumption)를 창출했다.

네덜란드 아른헴의 아트이지 예술대학교로 옮기기 이전에 뉴욕의 파슨스 디자인 학교(Parsons School of Design)에서 패션 분야의 대안적 교과과정을 개발한 가첸(Pascale Gatzen) 교수와 같은 사람들 덕분에 이런 종류의 아이디어들이 오늘날 패션 교육에 스며들고 있다. 가첸은 패션에 대한 그녀의 철학을 이렇게 설명한다. “더 아름답다거나 아니면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하기 때문에 선택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큰 이윤을 내기 위해 이루어집니다. 당신이 옷을 입는 방식이 곧 당신이 이 세상에서 스스로를 위치시키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패션을 되찾아 사회 변화를 위한 촉매제로 만들 수 있을까요?”

가첸은 옷만들기 기술을 회복시키기를 열망한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옷을 디자인하는 것과 만드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나는 학생들이 만들기를 통해 디자인할 것을 장려합니다. 재료, 아이디어, 그리고 우리의 손과 몸에서 나오는 감각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를 조절하는 과정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생각을 확대하기 위해 가첸은 허드슨 벨리에 손으로 직접 짠 재킷을 생산하는 <빛의 친구들>(the Friends of Light)이라 불리는 직물 협동조합을 설립했다. 근처 농장의 양으로부터 자란 양모를 사용하기 때문에 모든 재료들이 그 지역의 것이고 생산 과정은 세심하고 통합적이다. 그만큼 공을 들이므로 각 재킷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이 160시간이다.

문제가 없지는 않다. 옷이 노동집약적이고 독창적일수록 더 비싸지기 마련이다. 이는 하이패션윤리나 상업 모델로 변질될 위험성이 있다. 친환경 패션은 ‘럭셔리’가 돼서는 안 된다. 비록 비용이 더 많이 들더라도, 혁신적인 생산 방법들을 시도하고 의류 디자인과 생산의 기술적 감각을 복원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을 저가, 저품질의 ‘패스트 패션’ 중독으로부터 떼어낼 가치가 있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사회를 생각하는 패션이 감당해야 할 진짜 과제는 초자본주의에 의해 추동되는 현재의 지배적인 시장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병행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것만이 글로벌 패션 기업들의 무자비한 포섭과 럭셔리의 무자비한 우상화를 피할 수 있는 대안적인 운영 논리와 윤리를 개발하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그러한 계획들이―무엇이 되었든 처음에는 가장 기본적인 규모로―개발될 수 없다면 사회 혁신은 수제 의류와 같은 작은 시장에 갇히거나 럭셔리 시장에 국한될 것이다. 그리고 진짜 사회 혁신은 얄팍한 마케팅을 위해 징발되고 말 것이다.

대안 패션 활동가들이 그들의 비전, 생산 방법, 유통 장치, 재정, 그리고 마케팅을 충분한 규모로 발전시킬 수 있을까? 나는 이러한 구조적 시스템 문제에 진지하게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보고 싶다. 부분적인 혁신은 부분적인 효과만 낳을 것이다.

나는 강연에서 “패션을 커먼즈의 한 생태계”로 상상하려고 했다. 나는 커먼즈의 기본적인 생각을 소개하고 패션을 커먼즈의 연합체로서 다시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여러 일반적인 전략들을 제안했다. 알트-패셔니스타들(Alt-fashionistas)은 그들의 협력, 공급망, 문화적 비전과 같은 공유된 부와 커머닝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를 표시하는” 새로운 방식을 발전시키면서 시작할 수도 있다. 그들은 이데올로기가 아닌 실질적 실험을 바탕으로 그들 자신의 재정 시스템과 유통 및 마케팅 기반시설을 구축해야 한다. 그들은 낡은 어휘들을 버리고 커먼즈의 언어를 배우려고 해야 한다. 콜로키움 기조 강연의 비디오를 보려면 여기로 가면 된다. 나의 강연은 20:43부터 41:14까지 진행된다.




반란적 상상력의 부상

* 아래는 지난 글 「’도시를 구축하라’―예술, 문화, 커머닝의 중대한 역할」(http://minamjah.tistory.com/111)에서 소개한 글모음집 『도시를 구축하라―커먼즈와 문화를 보는 관점들』(Build the City: Perspectives on Commons and Culture)에서 이자벨 프레모(Isabelle Fremeaux)와 존 조던(John Jordan)의 롭 홉킨스(Rob Hopkins)와의 대담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대담은 원래 https://www.transitionnetwork.org/blogs/rob-hopkins/2015-04/isabelle-fr-meaux-john-jordan-and-rise-insurrectionary-imagination에 올려져있다. 이 웹사이트의 텍스트들은 일부를 제외하면 (이 글은 이 ‘일부’에 속하지 않는다) Creative Commons Attribution-Share Alike 2.0 UK: England & Wales License의 적용을 받는다. (Terms and Conditions 참조.) 롭 홉킨스는 활동가이자 작가이며 트랜지션 타운즈 네트워크의 창립자이다. 이자벨 프레모와 존 조단은 반란적 상상력 실험실의 공동창립자이다. 이 실험실은 이자벨에 따르면 “현실적 혹은 잠재적 공간들을 열고 예술가들과 활동가들을 한데 모아 작업하여 더 창조적인 형태의 저항과 시민불복종을 창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이다.

 

 

반란적 상상력의 부상

 

 

 

 

이자벨 프레모

우리가 하는 일은 여러 차원으로 구성됩니다. 우리는 많은 실험을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실험기획들 혹은 실험꼭지들이라고 즐겨 부릅니다. 집단적으로 실험한다는 생각, 때로 실패할 수도 있고 실패의 능력을 수용함으로써 더 창조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생각을 우리는 좋아합니다. 나는 학자(an academic)로, 훈련가로 훈련받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하는 일이 가진 훈련의 차원으로 더 들어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술가들 및 활동가들과 하루에서 2주일까지 많은 워크숍들과 훈련을 가집니다. 그리하여 예술과 행동주의 그리고 종종은 퍼머컬처(permaculture) 원칙 사이의 상승효과를 보고자하며 이 세 도메인이 융합할 때 우리가 어떻게 더 창조적이고 더 효과적이며 더 생산적이고 더 탄력 있는 기획들을 창출할 수 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 기획들을 저항과 시민불복종의 형식들을 향한 것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존 조던

우리가 하지 않는 것은 ‘정치적 예술’입니다. 우리는 정치적 예술이라는 생각을 매우 비판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정치적 예술은 정치적 문제들을 다루는 예술을 말합니다. 우리는 때로 영화도 만들고 책도 냅니다만, 이를 우리는 ‘재현으로의 휴가’(holidays in representation)라고 부릅니다. 우리 작업의 대부분은 영화나 책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재현―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기후 변화에 대해서 공연을 하고 생물다양성의 상실에 대해 조각상을 설치하거나 기후 정의에 관한 영화를 만들 것이라는 생각―을 진정으로 비판하는 실험들을 실제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우 명확하게 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것 그리고 우리 생각에 매우 중요한 것은 실제로 예술가들과 활동가들을 한데 모으는 것이며, 세상에 무언가를 보여주기보다 세상을 직접 변형시키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정치의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예술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두 세계와 함께 작업을 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술가들은 풍부한 창조성, 고정된 틀 외부에서 사유를 하는 많은 능력, 사물을 시학으로 변형시키는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종종 에고가 강하고 사회참여에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

 

반면에 활동가들은―물론 이는 일반화입니다―사회비판을 많이 하고 집단적으로 작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상상력에서 실패하는 일이 잦습니다. 똑같은 행사를 치르고, 똑같은 종류의 시위를 하며, 똑같은 사회변형 도구를 사용하는 일이 흔합니다. 이 두 세계를 한데 모음으로써 우리는 무언가 다른 것을 실제로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우리는 항상 사회운동 내에 몰입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기후캠프>(the Climate Camp) 내에서 조직가로서 5년을 보냈으며 그 캠프를 조직하는 동시에 예술가들과 활동가들을 모으는 워크숍들과 행동들을 조직했습니다. 예를 들어, ‘대반란 뗏목경주’(the Great Rebel Raft Regatta)라고 불린 것을 만들어내는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우리는 <기후캠프>가 켄트의 킹스노스(Kingsnorth)에서 열리기 일주일 전에 한 숲에 보트들을 잔뜩 숨겨놓았습니다.

 

<기후캠프>는 기후재난에 대한 교육과 대안을 창출하기 위해 구성된, 자주관리되는 캠프였습니다. 그런데 캠프의 마지막에는 늘 행동을 했습니다. 킹스노스에서의 이 캠프[각주:1]는 실제로 이미 존재하는 발전소에 추가될 새 화력발전소의 건설을 중지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우리가 한 프로젝트인 ‘대반란 뗏목경주’는 이렇게 진행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친연그룹들로 모았습니다. 숲에 배를 숨겨놓으면서 럼 주 한 병도 숨겨놓았으며, 보물지도도 함께 놓았습니다.

 

사람들을 친연그룹별로 보물지도가 있는 숨겨놓은 보트를 찾으러 보냈습니다. 사람들은 보트를 찾아내고 숲에서 하룻밤을 자고는 오전 7시에 숲을 빠져나와 보트를 강에 띄우고 발전소를 찾아 봉쇄하러 갑니다. 우리는 모두 약 150명인데 보트 하나가 어찌어찌해서 발전소의 3분의 1을 봉쇄하고 약 3분의 1을 폐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각주:2] 우리에게 그것은 정말이지 실제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면서 재미있고 모험적인 행동 형태들을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보물지도와 럼주 병, 그리고 해적처럼 차려입은 사람들의 미학 전체가 행동주의에 유희의 요소를 도입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근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롭 홉킨스

당신들은 ‘반란적 상상력’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 조금 더 말해주실 수 있나요?

 

프레모

상상력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반란의 근본적 성분입니다. 우리는 예술에 종종 결여된 공격과 저항의 요소를 되찾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실험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상력이라는 단어에 대한 매우 부드러운 이해와 그 단어의 부드러운 함축과 무관하게 상상력을 생각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됩니다. 상상력은 매우 예쁘고 창조적이고 아이 같은 어떤 것으로 간주되는 일이 매우 잦잖아요. 우리의 요구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바인 저항의 실존을 실질적으로 되찾음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반란적’이라는 단어를 우리 단체의 이름 안에 넣은 것입니다.

 

조던

우리의 웹사이트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반란적 상상력 실험실>(ii랩)은 예술과 삶, 창조성과 저항, 제안과 반대를 융합합니다. 우리는 광대반란군(a rebel clown army)을 모집하며 영국을 돌아다니고 탈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강좌들을 운영하며 은행가들에게 눈뭉치를 던지고 수백 개의 버려진 자전거들을 불복종의 기계들로 바꾸며 석탄을 사용하는 발전소를 폐쇄시키기 위해서 반란 뗏목경주를 주최한 것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우리는 반란을 예술로 보며, 예술을 다가오는 반란을 위한 준비의 수단으로 봅니다. <ii랩>은 지금 브리트니(Brittany)에 있는 퍼머컬처 농장에 국제적인 유토피아적 예술/삶 학교를 세우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는 예술가들과 활동가들의 분리를 믿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두 용어를 믿지도 않습니다. 우리 생각에 예술을 일상생활에서 분리된 행동으로 보는 것은 서양 전통에서 매우 최근의 현상입니다. 대부분의 문화들에는 예술과 일상생활의 분리가 없습니다.

 

우리 생각에 행동주의, 즉 활동가들이 사회 변화를 독점한다는 생각은 예술이 창조를 독점한다는 생각과 똑같습니다. 사실은 모두가 능력을 가지고 있고 세상을 언제나 나름의 방식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변증법적 관계입니다. 우리는 두 생각을 모두 제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반란을 창조하거나 아니면 특정 종류의 혁명적 변화를 창조하려면 (이는 우리 생각에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자본주의와 기후재난에 대안을 제시하고 일어나고 있는 문제에 저항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 둘은 분리될 없습니다.

 

우리는 사회변형의 DNA가 두 가닥인 것을 압니다. <트랜지션 타운즈>처럼 대안들의 창조라는 가닥이 있고, 저항, 즉 화석연료 산업과 거기에 돈을 대는 은행들 등에의 저항이라는 가닥이 있습니다. 둘 가운데 하나만 있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저항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적이 누구인지를 잊을 것이고 우리의 기획들이 그저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인 녹색 자본주의를 위한 실험들이 되는 데 그치는 위험이 생길 것입니다. 한편 대안들을 창출하지 않는다면 저항의 문화만이, 그리고 항상 ‘아니오’라고 말하는 문화만이 존재할 것입니다. 이런 문화는 정신적 건강과 개인적 지속 가능성의 관점에서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타서 없어지듯이 소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두 운동들의 분리가 확연한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1970년대가 고전적 사례입니다. 우리의 모든 기획들에서 우리는 대안적인 삶형태의 모델을 만들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비행기를 타보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행기에서 인생을 보내는 국제적 예술계의 이력을 우리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생태적으로 삽니다. 우리는 우리가 세운 유기농 농장의 이동식 원형 텐트에서 삽니다. 그 농장에서 우리는 땅을 생산에 투입합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반드시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통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저항 작업은 항상 위계 없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기획들의 초기에 합의를 가르치며 일이 성사되게 만들기 위해서 퍼머컬처 원칙들을 사용합니다.

 

한 사례를 예로 들죠. 이 사례는 우리의 가장 최근의 기획이 이산화탄소 방출과 기후변화에의 적응 등에 개한 보편적 동의를 이루기 위해서 2015년 12월에 파리에서 열린 ‘COP 21’ 컨퍼런스(유엔 기후 정상회담)에 맞추어진 것이기 때문에 적절합니다. 2009년에 우리는 덴마크 코펜하겐의 ‘COP 15’ 무렵 두 미술관으로부터 프로젝트들을 해달라는 의뢰를 받았습니다. 브리스틀의 <아놀피니 화랑>(the Arnolfini Gallery)과 코펜하겐의 <현대예술센터>(the Centre for Contemporary Art)입니다.

 

우리는 이미 코펜하겐에서 얼마 동안을 보낸 후였습니다. 우리는 대안들에 관해 쓴『유토피아를 통과하는 경로들』(Paths Through Utopias)이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불행하게도 프랑스어, 한국어, 독일어로 말고는 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코펜하겐의 자주관리 공동체 크리스티아니아(Christiania)에서 얼마 동안을 보냈습니다. 그때 우리는 코펜하겐 전역에 버려진 수천 개의 자전거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저걸 재료로 쓰자고요. ‘쓰레기를 만들지 말라’라는 퍼머컬처 원칙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자전거들을 이용하여 코펜하겐의 쓰레기를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그것들을 시민 불복종의 도구들로 바꿔놓자고요,

 

전통적으로 간디, 소로우(Thoreau)의 전통에서 시민 불복종은 몸을 통한 것이며, 우리는 몸과 자전거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두 미술관에 제안했고, 둘 다 동의 했습니다. 그 프로젝트에서 우리는 <기후캠프>와 함께 작업을 했으며, <아놀피니 화랑>에서 모형을 만들자는 것이 우리 생각이었습니다. 이 화랑에서 우리는 50명의 사람들을 자유롭게 개방된 워크숍으로 모아서 퍼머컬처 원칙들의 기초 등을 가르치곤 했는데, 모형을 거기서 디자인한 다음에 코펜하겐으로 가져와 크기를 키우자는 것이었죠.

 

두 미술관 모두가 “미술관에서 용접을 하면 안 된다”고 말했을 때가 재미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아, 바깥에 컨테이너를 설치하고 그 안에 모형을 넣을 수 있으며 그곳이 어쨌든 더 공적일 테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문제가 바로 해결책인 것이었죠, 그런 후 코펜하겐의 큐레이터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이 큐레이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컨테이너가 있는데, 다만 작은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덴마크의 경찰하고 이야기를 막 했는데, 자전거의 정의에 관해서 일정한 규칙들이 있다고 합니다.”

 

자전거는 바퀴를 세 개 이상 가질 수 없다, 3미터를 넘으면 안 된다 등등. 만일 이 규칙에서 벗어나면 경찰에 알려야 하고, 디자인을 보여주어야 하며, 경찰이 다시 와서 도로에 나갈 권리가 있다고 말할 때까지 3주일이 걸릴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했습니다. “그거 매우 흥미롭군요. 그런데 우리는 시민 불복종을 실행합니다. 우리는 자전거들이 합법적이든 아니든 별로 개의치 않아요.” 여기서 잠시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 큐레이터는 마치 “그래서 당신들은 정말로 그 일을 하려는 거군요······”라고 말하는 듯 했습니다.

 

우리는 예술 세계에서 이런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예술 세계의 많은 부분이 정치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매우 급진적인 텍스트들과 급진적인 제안들을 합니다. 아마 그 큐레이터는 우리가 이런 물건들을 만들어서 미술관에 세우고 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이 요점이 아닙니다. 요점은 실제로 행동을 취하는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다음에 미술관은 몸을 뺐지만, 우리는 코펜하겐에서 예전 스퀏 점유지였던 곳을 찾았습니다. 캔디 공장(the Candy Factory)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예술 및 문화 센터로서 우리는 거기서 프로젝트를 진행시켰습니다. 마지막에는 약 200명의 사람들이 동참하여 유엔 기후회담을 기업이 좌우하는 데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우리가 이른바 지금 유행을 크게 타고 있는 정치적 예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정치적’, ‘급진적’, ‘사회참여적인’ 등의 단어를 사용하는 수많은 2년 주기의 행사들, 미술관 전시회들, 극장 축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생각에는 이 가운데 많은 부분이 “정치를 재현한 그림들”(pictures of politics)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입니다.

 

홉킨스

당신들은 “좌파는 욕망과 신체를 사용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고 자본주의와 우파는 그것을 매우 잘 한다”라고 썼습니다. 이 말이 함축하는 것을, ‘트랜지션’(이행)에 대해 함축하는 바를 포함하여, 이야기해 주실 수 있죠?

 

프레모

좌파에는 어떤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이는 크게 일반화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태를 모르는 것이 문제이고 따라서 더 많은 사실들, 숫자들, 정보, 보고서들을 산출하여 사람들이 무엇이 진행되는지를 알게 하면 된다고 느끼는 경향입니다. 수치를 보여줄 수 있으면, 멸종되고 있는 몇몇 종에 대한, 혹은 영향을 받고 있는 몇몇 사람들에 대한 더 좋은 그림을 보여줄 수 있으면, 실업률 등의 수치를 보여줄 수 있으면, 그러면 사람들이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생각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그런 생각입니다.

 

이와 달리 우리 생각에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바가 매우 자주 문제가 됩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들의 삶의 구조였던 사물들과 가치들을 고수하는 거죠.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합리적인 생각이 아니라 욕망과 있을 수 있는 일에 대한 환상인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이 우리 생각입니다.

 

미국 작가인 스티븐 던컨(Stephen Duncan)의 멋진 말이 있습니다. “있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꿈”에 관해 아주 아름답게 한 말이지요. 있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꿈은 좌뇌에 있다기보다 정서에, 신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양자를 결합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목욕물과 함께 아이를 내다버리는 식으로 “모든 보고서를 멈추어라, 모든 연구를 멈추어라, 모든 과학을 멈추어라”라고 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자는 것이지요.

 

숫자는 뒷받침으로서, 목발로서 사용되어야 하며, 우리들 대부분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더 정의롭고 건강하고 편하며 즐거운 삶을 정서와 신체를 통해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전히 합리적이기만 한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풀기에 매우 복잡한 매듭들 가운데 하나와 관련이 있습니다. 더 많으면 반드시 더 좋은 삶이 온다는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큰 거짓말이 바로 이 매듭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진실이 아님을 압니다. 그러나 이는 풀기가 어려운 어떤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가치를 말하고 그것에 호소해서 그 매듭을 풀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트랜지션 타운즈’ 같은 프로젝트에 새로운 가르침이 될 수 있는 생각 가운데 하나는 이 정서들은 있을 수 있는 것에 대한 긍정적 정서들이지만, 또한 우리가 알기에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의 잘못된 점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들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균형을 찾는 것, 그리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먹이면서도 그 다른 사람을 압도하지는 않는 것이 관건입니다. 때로 불의와 파괴가 낳는 분노와 좌절을 부정하고 가리고 싶은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정서들은 인정되어야 하며 저항의 연료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한편 있을 수 있는 것과 관련된 정서들은 대안을 향해 움직이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 두 정서들의 결합이 바로 사회운동들을 매혹적이고 파괴될 수 없는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매우 종종 운동들은 이 정서들 가운데 하나에 호소할 때에만 파괴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앞에서 말한 ‘네’와 ‘아니오’의 DNA 이야기로 되돌아갑니다만, 내 생각에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호소하는 종류의 정서와 관련하여 매우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홉킨스

퍼머컬처가 당신들의 작업의 큰 부분입니다. 이것에 대해 좀 이야기해주실 수 없나요? 왜 퍼머컬처는 당신들이 하는 일에 왜 중요한가요?

 

프레모

퍼머컬처는 매우 고무적이고 안정적인 틀을, 매우 안정된 가치틀을 제공해줍니다.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할 수 있기 위해 우리가 생각한 것은, 퍼머컬처의 세 주된 기둥이 사정이 실제로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이 이해하게 만드는 매우 효과적인 방식이라는 점입니다. 그 원칙들은 그 시스템을 향하여 작업해나아가는 정말로 좋은 로드맵이며 생산적이고 탄력적이며 자연을 존중하는 디자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우리는 자연을 선생으로 삼는다는 생각, 그럴수록 자연을 외부에 있는 사물로 덜 보게 된다는 생각에 매우 감동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퍼머컬처를, 우리가 줄곧 사물로 보도록 배웠던 자연에 우리 자신을 통합하는 도구로 점점 더 보게 됩니다······ 우리가 환경에 대해서 매우 자주 말한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명백하게도 우리는 우리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이 환경의 일부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퍼머컬처는 우리의 유일하게 실질적으로 일관적인 존재인 자연에 우리 자신을 다시 통합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원칙들을 우리의 실험들의 틀로서 사용하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퍼머컬처의 정신이 우리의 영감(靈感)입니다.

 

조던

우리에게는 ‘숲처럼 생각하라’라고 불리는 10일 훈련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지난 수년 동안 네다섯 번 했습니다. 이는 매우 영감에 찬 훈련입니다. 이는 예술, 행동주의, 퍼머컬처의 훈련입니다. 예술이 행동주의에 무엇을 가져오는지, 행동주의가 예술에 무엇을 가져오는지, 예술이 퍼머컬처에 무엇을 가져오는지, 퍼머컬처가 예술과 행동주의에 무엇을 가져오는지 등등을 보는 훈련, 세 세계로 이루어진 하나의 시스템을 보는 훈련입니다. 이 훈련은 실제로 아나코-페미니스트 마녀인 스타호크(Starhawk)가 행한 훈련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80년대에 평화운동과 대안지구화 운동에 깊게 관여했으며 우리 모두가 거친 ‘땅 활동가 훈련 코스’(Earth Activist Training Course)라 불리는 프로그램을 운영했습니다. 오래 전에 있었던 이 일이 우리에게 큰 영감을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퍼머컬처 요소가 있다는 점에서 그 코스를 우리의 훈련코스의 모델로 삼았다고 할 수 있지만, 마법의 요소는 예술로 대체했습니다. 스타호크의 것이 땅에 기반을 둔 정신성, 행동주의, 그리고 퍼머컬처였다면, 우리 것은 예술, 행동주의, 그리고 퍼머컬처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예술은 마법입니다. 마법의 한 형태입니다.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믿을 때 그 믿는 것이 실현된다는 것, 그것이 그 힘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술은 우리가 이 순간 필요로 하는 마법을 엮어내는 일을 매우 잘 합니다. ♣

  1. 조직명으로서 <기후캠프>(대문자로 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조직이 모이는 모임으로서의 캠프(소문자로 씀)를 말함. 단체 가운데 ‘회의’자가 들어간 단체가 가령 운영을 위한 정규적인 ‘회의’를 가지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됨.
  2. ‘봉쇄’와 ‘폐쇄’가 정확하게 무엇이고 서로 어떻게 다른지는 현재 번역자로서 알 수 없다. 전자에는 ‘block’이라는 단어를 후자에는 ‘shut dow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곧 해방될 노래 <해피 버스데이>

* 다음은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에 게시된 2015년 8월 12일자 글 “The Impending Liberation of “Happy Birthday””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곧 해방될 노래 <해피 버스데이>

 

만일 문화산업체들이 사람들이 왜 저작권법을 별로 존중하지 않는지 궁금해 한다면, 그들은 워너뮤직그룹(Warner Music Group)이 노래 <해비 버스데이>에 대해 저작권을 주장한 일을 보기만 하면 된다. 이는 저작권법의 공언된 원칙들에 대한 기괴한 장난질이며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온, 대중에 대한 사기이다. 그러나 하루 5천 달러, 한 해 2백만 달러의 수입이 흘러들어오는 까닭에 워너뮤직은 ‘그들 소유의’ 노래를 부를 권리에 요금을 부과하기를 중단하지 않을 작정이다.

 

그러나 한 용감한 영화제작자 덕분에 이 희화(戲畫)는 곧 종말을 고할 듯하다. 제니퍼 넬슨(Jennifer Nelson)은 노래 <해피 버스데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었는데, 그때 워너뮤직이 영화에서 이 노래를 사용하는데 1500불을 내야할 것이라고 했다. 넬슨이 이에 반발하여 2년 전에 소송을 낸 것이다. 이는 그 자체로 저작권 소유자들에 의한 통상적인 법적 으름장에 대한 주목할 만한 도전이었다. 많은 보수를 받는 법률가들을 거느린 거대한 기업과 전투를 하거나 음악, 영화, 출판회사들로부터 받은 지원금 때문에 이미 그 생각이 정해진 의원들에게 로비를 할 돈과 배짱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대부분의 텔레비전 프로들은 사회자들이나 공연자들에게 <해피버스데이>를 부르지 말도록 금지했으며 여러 레스토랑들은 라이선스 비용이 들지 않도록 다른 노래를 대신 사용했다.

 

지금 넬슨의 법률 팀이 <해피 버스데이>의 저작권의 효력이 정지된 지 몇 년 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아낸 것 같다. 법률가들이 피츠버그 대학이 사용하는 저장시설에서 <해피 버스데이>의 가사가 <굿모닝과 생일 노래>(“Good Morning and Birthday Song”)라는 제목의 노래에 들어있는 1922년의 노래책을 발견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그 노래에 저작권 표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표시는 그 당시의 법으로는 저작권 보호의 필수요건이었다. 그리고 1923년 이전에 출판된 것은 모두 공적 도메인에 진입하여 누구나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다.

 

물론 워너뮤직의 법률가들은 극히 전문적인 법적 대응들을 한다. 이것이 이런 경우에 보통 일어나는 일이다. 역사적 기록과 법 규칙들은 비싼 법률가들만이 빠져나오는 어두운 동굴을 닮았다. 이런 경우에, 판사는 이 건을 지금 결정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있는지 아니면 공판이 필요한 것인지를 판정해야 한다. 이것이 어떻든, 많은 이들이 1922년 노래책을 ‘명백한 증거’(“smoking gun”)로 간주하고 있다.

 

불가해한 법 문서들이 어떻게 작용하든, 흑인 민속문화에서 나왔으며 힐 자매(Patty and Mildred Hill)가 1858년에 ‘쓴’ 노래가 ‘원작’이 창작된 지 172년 후인 2030년까지 공적 도메인에 진입하지 못한다는 것은 명백히 불합리한 일이다. 이 긴 저작권 독점이 힐 자매가 그 노래를 ‘창작하기’ 위해 필요로 한 ‘인센티브’라는 식이다.1

 

넬슨과 넬슨의 소송에 참여한 다른 예술가들 덕분에 <해피 버스데이>라는 이름과 연관된 값비싼 저작권 장난질은 곧 종말을 고할 듯하다. 그런데 저작권법이 사회적 커먼즈의 실제적 생성력과 ‘원작자로서의 존재’를 고려하기 시작하는 것은 언제일까? 내 생각에 이를 위해서는 법 분야에서의 훨씬 더 큰 혁명이 필요할 듯하다.

 

[<해피 버스데이>의 저작권을 다룬 로버트 브로니스(Robert Brauneis)의 2010년 글이 이 주제를 가장 엄밀하고 포괄적으로 다룬 글이다. 이는 여기서 구할 수 있다. 글렌 플라이시먼(Flenn Fleishman)의 이보다는 짧지만 여전히 광범한 설명이 최근에 보잉보잉(Boing Boing)에 실렸다.]

 

  1. 저작권은 원래 창작자에게 인센티브를 준다는 취지에서 생겼다. 창작자가 아닌 자들이 저작권을 오래 독점하는 우스꽝스러운 현실을 볼리어가 풍자적으로 표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