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새커러의 밀착여행 ― 새로 출현하는 경제



 

존 새커러의 밀착여행 ― 새로 출현하는 경제

 

새롭고 우애로운 세계 질서의 건설―이는 무엇보다 ‘새로운 경제’, ‘대(大) 이행’, ‘대(大) 전환’ 등의 용어들로 알려져 있는 과제이다―에 초점을 둔, 새롭게 싹이 트는 장르의 책들 가운데 존 새커러(John Thackara)의 새 책이 두드러진다. 그의 『다음 경제에서 어떻게 번영할 것인가―내일의 세계를 오늘 설계하기』(How to Thrive in the Next Economy: Designing Tomorrow’s World Today)는 견고한 연구에 바탕을 두었고 실용성에 초점을 두며 양식 있는 차분한 음조의 책이다. 친절한 개인적 어조로 쓰인 이 책은 설득력 있고 영감을 준다. ‘찾아서 읽으시오!’라는 말 이외에 다른 추천사가 필요 없다.

탈자본주의 세계를 상상하는 그토록 많은 대담한 책들이 화려한 이론화와 도덕적 충고에 빠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병적인 근대의 형이상학적·역사적 뿌리를 찾아내려는 (이는 이해할만하다) 분야의 직업상의 위험이다. 비판은 비판이고, 새로운 세계의 창조적 건설은 이와는 별개의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나에게 새커러의 책은 매운 신선하게 다가온다. 영국의 디자인 전문가이며 프랑스 남서부에 사는 이 사람은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미래의 설계(디자인)와 작동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를 밀착해서 보고 싶어 한다. 그는 또한 “일을 다르게 하려면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라는 자신의 모토에 따라서 심층적인 관점을 제공할 만큼 충분히 사색적이기도 하다.

『다음 경제에서 어떻게 번영할 것인가』는 ‘부단한 성장의 이름으로 자연을 먹어치우는 경제로부터의 탈출구는 없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는다. 짧은 대답은 ‘있다!’이다. 탈출구는 존재한다. 새커러가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더 책임감 있고 공정하며 활기를 북돋는 방식으로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법을 입증하는 수십 개의 빛나는 실험적 사례들이 세계 전역에 존재한다.

그는 우리의 손을 잡고 진행 중인 매우 다양한 모범적 사례들을 보여준다. 우리는 토양을 마치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취급함으로써 치유하는 법을 발견하고 있는 과학자들과 농업가들을 소개받는다. 도시 수문학(水文學)을 다시 사고하면서 저수지나 하수도 같은 고(高)엔트로피 해결책들에서 더 작은 규모의 지역화된 해결책들로 옮겨가고 있는 도시계획가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도로의 포장을 벗기고 퍼머컬처, 정원들, ‘꽃가루 나르미 길’(pollinator pathways), 그리고 비공식적인 식품체계를 도시에 도입하려고 시도하는 바이오지역주의자들(bioregionalists)도 있다. (([옮긴이]
▷ 수문학(水文學, hydrology)이란 지구상의 물의 순환을 대상으로 하는 지구과학의 한 분야로 주로 육지에 있는 물의 순환 과정보다 지역적인 물의 방향·분포·이동·물균형 등에 주목적을 두고 연구하는 과학이다.― 한글 위키피디아 참조
▷ 바이오지역주의(Bioregionalism)는 생태지역(ecoregion)과 유사한 ‘바이오지역’(bioregion)이라고 불리는 지역에 기반을 둔 일단의 정치적·문화적·생태적 견해들을 가리킨다. 바이오지역은 물리적·환경적 특징들을 통해 정의되는데, 이 특징들에는 분수령 경계들, 토양, 지형이 포함된다. ― 영어 위키피디아
▷ ‘꽃가루 나르미 길’(pollinator pathways)은 미국 시애틀에서 새러 버그먼(Sarah Bergmann)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꽃가루를 나르는 곤충이나 새가 좋아할 3미터60센티 넓이의 정원을 주택 앞의 길을 따라 1마일 길이로 만든 것이다. 이런 곳이 60개나 기획되었다. 이는 ‘인류세’라고 불리는 시대에 생태계 및 도시와 우리의 관계를 다시 상상하고 다시 디자인하는 기획이다. http://www.pollinatorpathway.com/
‘나르미’는 우리말 사전에 없는 단어를 옮김의 편리를 위해 사용한 것이다.))

우리는 또한 ‘사회적 농업’의 멋진 실험들에 대해 알게 된다. 이 실험들은 지혜로운 새로운 사회적 체계들, 생산 가치사슬(production value-chains) 그리고 조직 디자인을 통해 식품을 커먼즈(공통재)로 취급하려는 시도들이다. (([옮긴이] 가치 사슬(value chain)은 특수한 산업에 종사하는 한 회사가 시장에 가치 있는 생산물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일련의 활동들을 가리킨다.))

캘리포니아 프레즈노의 푸드커먼즈(Food Commons)는 한 지역에서 농장을 식품점 및 음식점과 연결시키는 방법을 다시 상상하려는 대담한 시도이다. 식량을 경제적 상품 이상의 것으로 보는, 체계 전체를 고려하는 접근법(whole-system approach)을 고안하겠다는 것이 그 아이디어이다. 그럴려면 농업 공동체들, 지역 주민들, 토지, 분수령, 생물다양성의 이익을 하나의 상호연관된 네트워크 안에 정렬하는 통합된 사회체계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경우에 관건은 모두의 이익을 위해 쓰일 토지, 물리적 기반시설 및 기타 공동으로 소유하는 자산의 소유자이자 지킴이 역할을 할 <푸드 커먼즈 트러스트>(Food Commons Trust)의 설립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수익은, 이윤이 추동하는 회사의 주주들에 의해 모든 잉여가치가 전유되는 경우와는 달리,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데 사용될 수 있다.(더 나은 노동조건, 더 적은 농약 사용, 낮은 소득의 사람들에게는 더 값싼 식품을 공급하기)

심지어는 커머닝에 관한 장(章)도 있는데, 여기서는 사회적 화폐, 라틴아메리카의 부엔비비르(buen vivir) 윤리, 그리고 ‘야생의 법’(wild law)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옮긴이]
▷ ‘잘 살기’(good living)라는 의미의 ‘buen vivir’는 전통적 의미의 자본주의적 발전에 대한 대안 개념으로서 자연을 포함하는 공동체 내에서만 이룰 수 있는 넓은 의미의 ‘잘 사는 삶’에 초점을 둔다.
▷ ‘wild law’는 코막 컬리넌( Cormac Cullinan)이 처음 만들어낸 말로서, 인간이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법이지만 인간을 비롯한 그 어떤 종에게도 특권을 부여하지 않는, 지구 공동체 전체를 관할구역으로 하는 법이다.))

새커러의 설명에 따르면 이러한 이야기들에서 ‘그린 스레드’(green thread)는 “재배지, 재배자들, 재배조건들 등 다양한 맥락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식품과 재연결되려는 노력이다. 이 실천적이고도 지역적이며 인체 규모의(human-scaled) 활동들이 산업화된 식품 체계에 대한 대안의 묘목들이다. 산업화된 식품 체계는 (자원)추출 산업으로서 동물들이나 땅이나 사람들에게 모두 잔인하다.”(([옮긴이]
▷ 영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green thread’는 운영체제에 의해 관리되지 않고 런타임 라이브러리나 가상머신에 의해 관리되는 스레드이다. 스레드는 어떠한 프로그램 내에서, 특히 프로세스 내에서 실행되는 흐름의 단위를 말한다고 한다. 옮긴이는 이 설명이 무슨 말인지를 잘 모르겠고, 그냥 중앙에 속하지 않고 지역에 속한 움직임이나 활동을 ‘그린 스레드’라고 부르는 모양이구나라고 추측한다.
▷ ‘인체 규모’(human-scale)는 인간의 신체, 운동, 감각, 정신, 사회적 제도에 부합하는 규모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지역 규모’와 거의 유사한 의미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새커러의 어조는 내내 친절한 집주인의 어조이다. “자, 우리의 경제와 사회를 다시 만들, 영감을 주는 기획을 또 하나 보여주겠다.” 그는 자신이 보여주는 사례들을 과대평가하지 않으며 문제점들과 복잡한 점들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그는 가벼운 터치로 기획들 사이의 친화성을 시사하면서 테마상의 유사성을 짚어준다.

나는 새커러가 자신이 소개하는 사례들을 얼마나 지적이고 깊이 있게 보는지를 알아보았다. 예를 들어 그는 고속철도(high-speed trains, HST)의 진정한 문제는 시간을 실제로는 절약해주지 않으면서 많은 다른 문제들을 낳는 데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문제는 이전의 주간고속도로(州間高速道路) 시스템이 그랬듯이 고속철도도 우리가 사는 방식 전체를 지탱할 수 없게 만드는 그러한 패턴의 토지사용, 운송강도(transport intensity), 기능들의 시공간상의 분리를 영속화한다는 것이다.” 고속철도는 도시 스프롤 현상을 낳고 전체 차원에서는 소외를 유발하고 값비싼 ‘시공간 지리’(space-time geography)를 낳는다. (([옮긴이] ‘시간지리학’(time geography) 혹은 ‘시공간 지리학’은 사회적 상호작용, 생태적 상호작용, 사회 및 환경 변화, 개인들의 일대기와 같은 공간적·시간적 과정들과 사건들을 다루는, 여러 학문분야를 가로지르는 관점이다.[영어 위키피디아 참조] 위에서는 학문분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관점에서 본 지리를 의미하므로 그냥 ‘시공간 지리’라고 옮겼다.)) 

나는 새커러가, 새로이 출현하는 새로운 모델들을 어떻게 널리 알릴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였으면 한다. 소규모의 지역 실험들을 거대한 전지구적 운동으로 번성시키는 것을 가속화할 필요가 우리에게 절실하다. 우리는, 경제적·정치적 변화에 대한 우리의 탐색이 어떻게 늘 전개되고 있는 내적 자기변형과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활력 있게 살아있음’을 양성할 것인가―이것이 정말로 핵심이다. 모든 것이 이윤의 추출을 위한 허가된 사냥감일 때에는 삶을 자립적으로 갱생시킬 수 있는 새로운 사회경제적 유기체들을 발전시킬 필요가 절실하다. 삶은 상품교환의 이차적 혜택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우선적인 것으로서 존중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변형이 어떻게 올 것인지를 새커러가 이해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는 이렇게 쓴다. “변화는 사람들이 서로서로 그리고 생물권과 다시 연결되어 내가 이 책에서 쓴 종류의 풍요로운 현실 세계 맥락들을 이룰 때에 올 가능성이 더 크다. 이는 일부 독자들에게는 나이브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들릴 것이다. [새커러가 더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들은 정부와 정책이 변화를 추동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볼리어] 그러나 (신념 체계를 포함한) 복잡한 체계들이 변하는 방식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를 놓고 볼 때, 작은 것이 큰 것을 형성하는 힘에 대한 나의 확신은 전혀 흐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




약탈 기업



 

약탈 기업

 

국민국가는 쇠퇴하고 있다. 전지구적 수준에서 활동하는 약탈 기업들이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서고 있다.

여기에 길리드 사이언시스(Gilead Sciences)라고 불리는 회사를 운영하는 매우 성공적인 “지구 시민들” 몇 명이 있다.(([정리자] 원문에서는 이 자리에 이 회사 중역 4명의 사진과 이름, 직책이 나와 있다. 화사의 이름은 ‘길레드’로 발음될 수도 있고 또 다르게 발음될 수도 있다.))

길리드는 미국 정부의 의료보험 프로그램의 기금을 먹어치움으로써 1년에 150억 달러의 이윤을 남긴다.

길리드는 C형 간염에 대한 항바이러스 치료제를 판매함으로써 돈을 번다. 이 회사는 이 약을 개발하지 않았고 그 특허를 사서 제조만 하고 있다.

이 약을 제조하는 비용은 1 달러이다. 회사는 이 약을 1천 달러에 판다.

이렇게 비싼 값을 매길 수 있는 것은, 기업의 로비스트들이 미국 정부가 제약회사와 가격을 협상하지 못하게 막는 조항을 <저가의료법>(Affordable Care Act)에 삽입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제약회사는 자기들 마음대로 가격을 책정할 수 있다. 비록 (재향군인보훈국의 환자들처럼) 비용 때문에 치료가 지체되어 환자들이 죽더라도 말이다.

약탈자가 되는 것은 길리드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많은 수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물론 길리드는 이 이윤 전체에 대해서 미국에서 세금을 내지 않는다. 이 약의 대부분을 미국에 있는 환자들에게 팔면서도 회사는 이윤의 전부를 아일랜드에 있는 유령회사에 보내며 거기서 수십억 달러가 과세된다.

길리드는 혼자가 아니다. 금융, 제약 등의 분야에서 수만 개의 약탈 기업들이 같은 짓을 하고 있다.




하늘의 한계


  • 저자  :  Oil Change International
  • 원문 : “The SKy’s Limit” (2016.9) 
  • 정리자 : 정백수
  • 아래는 Oil Change International에서 낸 “The SKy’s Limit”라는 제목의 보고서의 ‘핵심 요약’(Executive Summary) 부분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Oil Change International은 화석연료의 진정한 비용을 폭로하고 클린 에너지로의 이행을 촉진하는 데 초점을 맞춰 연구·소통·창도를 행하는 기관이다.

 

핵심요약

 

2015년 12월에 세계의 정부들은 지구의 평균 기온 상승을 2°C보다 훌쩍 낮춘 1.5°C에 묶어놓는 데 동의했다. 이 보고서는 에너지의 생산과 사용을 위한 이러한 경계설정이 가지는 함축을 최초로 검토한 것이다. 우리가 발견한 핵심사항들은 아래와 같다.

◎ 현재 세계에서 가동하고 있는 유전, 가스전(gas fields), 탄광에서 생산되는 원유, 가스, 석탄에서 나오는 잠재적 탄소 방출은 2°C 이상의 온난화를 낳을 것이다.
◎ 석탄은 제외하고 현재 가동하고 있는 유전과 가스전의 매장량만으로도 세계는 1.5°C 이상 올라간다.
◎앞으로 수십 년에 걸쳐 기후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생산을 감소시키는 한편, 그에 상응하여 클린 에너지의 규모가 커지면서 에너지 관련 일자리의 총수가 확대될 수 있다.

가장 강력한 기후정책방침 가운데 하나는 가장 간단한 것이다―더 이상 화석연료를 파내지 말자.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천한다.

◎ 화석연료 추출과 수송을 위한 새로운 기반 시설을 짓지 말아야 하며, 정부들은 새로운 허가를 내주지 않아야 한다.
◎ 주로 선진국들에서 일부 유전, 가스전과 탄광을 그 자원을 완전히 개발하기 전에 폐쇄해야 하며, 후진국들에서의 비(非)탄소 개발에 재정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 모든 화석연료의 사용을 하루아침에 멈추자는 말이 아니다. 정부들과 회사들은 화석연료 산업의 관리된 감소를 행해야 하며, 그 산업에 의존하는 노동자들과 공동체들에게 공정한 이행을 보장해야 한다.

2015년 8월, 파리 기후회의가 있기 바로 몇 달 전에 태평양 섬나라인 키리바티(Kiribati)의 아노테 통(Anote Tong) 대통령은 새로운 탄광의 개발과 탄광의 확대를 중지하기를 요구했다. 이 보고서는 그의 요구를 모든 화석연료로 확대한다.

 

이미 충분하다

 

파리 협정은 세계로 하여금 기후변화의 가장 나쁜 결과를 피하는 것을 돕고 이미 상당해진 영향에 대응하는 것이 목표이다. 여기 관련된 기초적인 기후과학은 단순하다. 방출된 이산화탄소의 시간에 따른 축적량이 지구온난화가 어느 정도로 일어나는지를 결정하는 핵심요인이다. 이는 얼마나 많은 양의 탄소가 위험한 기온 한도를 넘지 않고서 방출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탄소예산(carbon budget)을 작성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는 극히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 한도인 2°C 아래로 지구온난화를 제한할 상당한 가능성(66%) 혹은 1.5°C 목표를 달성할 절반의 가능성(50%)을 제시할 탄소 예산을 검토하고 있다. 화석연료 매장량―이미 알려진 추출 가능한 화석연료의 지하 비축량―은 이 예산을 확연하게 초과한다. 2°C 나 1.5°C의 한도가 가능하려면 각각 68%나 85%의 매장량이 지하에 남아있어야 한다.

이 보고서는 이미 가동 중이거나 건설 중에 있는 유전, 가스전, 탄광의 대략 30%의 매장량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필요한 유전 등이 이미 천공이 된 (혹은 천공 중인) 곳, 탄갱을 굴착한 곳, 송유관, 처리시설, 철로, 수출 터미널들이 건설된 곳들이다. 이러한 개발된 매장량은 두 주된 비에너지 탄소방출원인 토지사용 및 시멘트 제조로부터의 미래의 방출량과 함께 그림에 상세히 나와 있다.

‘탄소포집 및 저장’(carbon capture and storage, CCS)의 전망에 주된 변화가 없을 시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 이미 가동되고 있는 유전, 가스전 및 탄광에 있는 원유, 가스, 석탄의 양은 온난화를 2°C 아래로 묶어놓으면서 태울 수 있는 양보다 많다.
◎ 원유와 가스만 잡아도 그 양이 1.5°C에 묶어놓을 수 있는 절반의 가능성에 해당하는 양보다 많다.

 

구덩이에 빠지면 더 이상 파지 말아야 한다

 

전통적인 기후 정책은 대체로 방출 지점에서의 규제에 집중했고 화석연료의 공급은 시장에 맡겼다. 이러한 접근법은 이제 더 이상 지탱 가능하지 않다. 추출의 증가는 낮은 가격, 기반 시설 잠금효과(lock-in), 왜곡된 정치적 인센티브를 통해 바로 방출의 증가를 낳는다. 우리의 분석은 화석연료를 추출할 수 있는 양에 엄밀한 한도를 부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오직 정부들에 의해서만 시행될 수 있다.

◎ 화석연료 추출과 수송을 위한 새로운 기반 시설을 짓지 말아야 하며, 정부들은 새로운 허가를 내주지 않아야 한다.

계속 건설하게 되면 2°C 상승을 초과하게 만들고/만들거나 화석연료 생산을 갑자기 중단했다가 나중에 다시 사용해야 하게 만들 것이다. 그런데 현재 다음 20년 동안 새로운 유전, 가스전, 탄광, 수송용기반 시설에 투자할 것으로 계획된 액수는 14조 달러이다. 이는 화폐의 대대적인 낭비이거나 자본의 치명적인 투입이다. 논리는 간단하다. 지금 관리된 감소를 시작하는 데 실패하게 되면 기후 변화를 통해서든 좌초자산(stranded assets)(([정리자] 좌초자산(stranded assets)은 뜻밖에 혹은 때 이르게 평가절하, 가치하락을 겪거나 부채로 전환되는 자산을 가리킨다.))을 통해서든 커다란 경제적 비용 및 사회적 비용이 불가피하게 수반될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소식은, 화석연료 개발의 중지를 향한 발걸음이 이미 내디뎌졌다는 것이다. 중국과 인도네시아는 새로운 탄광개발의 일시중지를 선언했으며 미국도 연방 정부 소속의 토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했다. 이 세 나라가 현재 세계의 석탄생산의 대략 3분의 2를 담당한다. 2015년에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화석연료 중에 일부는 땅 속에 놔두어야 한다며 키스톤 송유관(Keystone XL tar sands pipeline)을 거부했다. 그리고 새로운 화석연료 기반 시설과 관련한 의사결정들에서 기후 테스트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석탄 생산의 일시중지를 영속적이고 전세계적인 것으로 만들고 새로운 원유 및 가스의 개발도 중단시키는 것이 긴급하게 필요하다.

화석연료의 개발을 위한 새로운 건설을 종식시키면 우리는 탄소 예산 내에 머무는 데 더 근접하게 된다. 그러나 파리 협정의 목표를 달성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가동시설들 일부가 조기에 폐쇄될 필요가 있다. 이 일에서 모든 나라가 기후변화를 일으킨데 대한 역사적 책임과 함께 자신의 행동능력에 맞게 자신의 몫을 다해야 한다. 산업화된 국가들(선진국들)은 그 인구가 세계 인구의 18%이면서도 오늘날 탄소방출의 60%를 차지하며 기후문제 해결을 위한 재정자원을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조기폐쇄는 산업화된 국가들에서 일어나야 하며 석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새로운 건설을 멈추는 접근법은 정치적으로 실용적이지만, 발전된 화석연료 산업들을 가진 나라들에게 유리한 경향이 있다. 따라서 그 나라들이 감당해야 할 정당한 몫에는 화석연료 없이 발전하는 길을 가야 하는 다른 나라들을 지원하는 것이 포함되어야 한다. 특히 에너지에의 보편적 접근을 제공해야 한다. 따라서,

◎ 일부 유전, 가스전, 탄광들이 (특히 부유한 나라들에서) 그 매장량을 다 꺼내 쓰기 전에 폐쇄되어야 하며, 후진국들의 비탄소 에너지 개발에 재정적 지원이 제공되어 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생산은 토착민족들을 포함한 지역민들의 권리를 해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그리고 생물다양성을 심각하게 손상시키는 곳에서는 중단되어야 한다.

 

관리된 감소와 공정한 이행

 

새로운 건설을 멈추는 것이 하룻밤사이에 꼭지를 잠그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존의 유전들, 가스전들, 탄광들에는 추출 가능한 화석연료의 일정한 비축량이 포함되어 있다. 이 비축량이 소진되는 사이에 (조기 폐쇄도 포함하여) 추출률이 수십 년에 걸쳐 감소하는 점진적 이행이 병행될 것이다. 이는 기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가능한 클린 에너지의 확장율과 부합할 것이다.

우리는 세계 에너지원을 2035년까지 재생 가능한 에너지 50%, 그리고 2045년까지 80%라는 두 시나리오 아래서 단순하게 모델링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어느 경우든 석탄 사용은 강철 생산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계적으로 줄여서 완전히 없애는 것으로 한다. 재생 가능한 에너지의 증가는 기존의 유전·가스전들에서 추출이 계획되어 있는 원유와 가스의 양의 감소에 대략 상응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 기존의 유전, 가스전, 탄광들이 앞으로 수십 년 사이에 고갈되는 동안, 클린 에너지가 그에 상응하는 속도로 증가될 수 있다.

재생 가능한 에너지가 이런 속도로 확대되려면 정책의 뒷받침이 필요한 한편, 이는 기존의 경향들을 이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많은 나라들에서―크든 작든, 부유하든 가난하든―클린 에너지가 이미 일정한 규모로 사용되고 있다. 덴마크는 그 전기의 40% 이상을 재생 가능한 원천에서 만들어내고 있으며, 독일은 30% 이상, 니카라과는 36% 이상이다. 중국은 현재 재생 가능한 원천으로부터의 발전의 절대량이 가장 큰 나라이며 그 발전량을 재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풍력과 태양력의 비용이 현재 가스나 석탄의 비용에 접근하고 있다. 몇몇 나라들에서는 재생 가능한 에너지의 비용이 이미 더 낮다. 재생 가능한 에너지의 확대는 취약한 전력공급망(weak grids)(([정리자]웹을 검색해보니 전문가들은 이를 일본을 따라 ‘약한 계통’이라고 옮긴다. 정리자는 알기 쉽게 그냥 ‘취약한 전력공급망’이라고 옮겼다.))을 가진 후진국들에서 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비탄소로의 이행을 지원해줄 기후재정이 중요하다.

수송의 경우, 전기 자동차들이 현재 주류로 진입하고 있으며 곧 휘발유나 경유를 쓰는 차들보다 값이 싸질 전망이다. 충분한 정책지원과 투자가 있다면, 클린 에너지의 성장은 화석연료 추출과 사용에서 필요로 되는 감소에 상응할 수 있을 것이다.

클린 에너지가 확실한 장점들―낮은 비용, 더 많은 고용, 지역 오염의 감소, 더 많은 재정적 수익―을 가지기는 하지만, 이행에는 고통이 따를 것이다. 에너지 노동자들의 숙련과 주거 위치는 새로운 에너지 경제에 잘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공동체 전체가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경우들도 있다. 그래서 기후행동의 부정적 영향들을 최소화하면서 그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조심스럽고 공정한 이행이 필요하다.

정부들은 영향을 받는 에너지 노동자들과 공동체들을 위해 훈련과 사회적 보호를 제공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정부들은 에너지 노동자들에게 비(非)탄소 영역들에서 일할 기회를 주도록 에너지 회사들에게 요구해야 한다. 정부들 또한 탄소에 의존하던 지역들이 새로운 경제적 삶을 찾을 수 있게 하는 새로운 투자를 시작하는 것을 공동체들과 협의해야 한다. 기다리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계획과 실행이 지금 시작되어야 한다.

◎ 정부들과 회사들은 화석연료 산업의 관리된 감소를 솔선해서 시행해야 하며 그것에 의존하는 노동자들과 공동체들에게 공정한 이행을 보장해야 한다.




중앙은행 디지털 통화 – 은행업의 혁명인가?



 

중앙은행 디지털 통화 ― 은행업의 혁명인가?

 

영국은행, 중국인민은행, 캐나다은행, 연방준비제도(미국)를 포함한 여러 중앙은행들이 비트코인을 위해 개발된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디지털 통화를 발행하는 구상을 하고 있다. 이 일에 회의적인 논평자들은 그 주된 목표가 현금을 추방하여 음의 이자율(negative interest rates, 마이너스 금리)을 내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국은행(([정리자]영국의 중앙은행인 ‘Bank of England’는 영국은행이라고도 불리고 영란은행이라고도 불린다.))의 부총재인 벤 브로트벤트(Ben Broadbent)는 이것을 더 적극적인 것으로 제시한다. (([정리자]현재 영국은행에는 네 명의 부총재―Sir Jon Cunliffe, Ben Broadbent, Andrew Bailey and Nemat Shafik―가 있다.)) 그는 중앙은행 디지털통화(Central Bank Digital Currencies →CBDC)가 현재 부분지급 준비제도(“fractional reserve” lending)를 통해 민영은행들이 만들어내는 화폐―이는 유통되는 화폐량의 97%이다―를 대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은행 개혁자들이 오랫동안 주장했던 대로 은행이 만들어내는 화폐를 불법화하기보다는 고객의 마음을 끄는 더 나은 제품을 통해 부분지급 준비제도가 자동적으로 손모(損耗)되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음의 이자율의 필요 또한, 중앙은행에 경제를 자극하는 더 직접적인 도구들을 부여함으로써 제거될 수 있다.

 

블록체인 혁명

 

블록체인의 작동방식이 마틴 히스뵉(Martin Hiesboeck)의 2016년 글 “Blockchain Is the Most Disruptive Invention Since the Internet Itself“(「블록체인은 인터넷 자체 이후로 가장 파열적인 발명품이다」)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된 바 있다.

블록체인은 정보를 A에게서 B에게로 완전히 자동화되고 안전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단순하지만 정교한 방식이다. 거래의 한 당사자가 블록을 하나 만듦으로써 과정을 개시한다. 이 블록은 수천의, 아니 아마도 넷에 분산된 수백만의 컴퓨터들에 의해서 확증된다. 확증된 블록은 체인에 추가회고 이 체인이 넷 전체에 저장된다. 이 과정에서 단지 고유의 기록이 아니라 고유의 역사를 가진 고유의 기록이 만들어진다. 어떤 하나의 기록을 허위로 만드는 것은 전체 체인을 허위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2016년 3월 런던정치경제학대학교에서 한 연설에서 벤 브로드벤트는 CBDC가 물리적인 현금을 제거하지는 않을 것임을 지적했다. 이는 법을 통해서만 가능한데, 블록체인 테크놀로지가 여기에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화폐는 이미 디지털 상태이기 때문이다. 일국의 블록체인 통화가 가진 특이하고 잠재적으로 혁명적인 면은, 그것이 지불체계에서 은행의 필요성을 제거하리라는 점이다. CBDC를 제안하는, 『월스트리트저널』의 2016년 7월의 기사에 따르면,

화폐는 마치 물리적 지폐가 지갑에 들어있듯이, 은행계좌의 외부에 있는 디지털 지갑에 전자적으로 존재할 것이다. 이는 가구들과 사업체들이 서로 결제를 할 때 은행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결제 체계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화폐 창출을 민영은행들이 이끈다. 영국은행이 2014년의 폭탄 보고서에서 인정한 바대로, 화폐공급량의 거의 97%가 은행들이 대출을 해줄 때 만들어진다. 우리가 수표, 신용카드, 데빗카드에 의해 전송하는 디지털 화폐는 단지 은행의 차용증이나 지불약속일 뿐이다. CBDC는 이 사적인 은행에의 채무를 중앙은행에의 채무로 대체할 수 있다. CBDC는 현금의 디지털 등가물이다.

블록체인에 기록된 화폐는 물리적 지갑에 들어있는 현금만큼이나 안전한 상태로 소유자의 ‘디지털 지갑’에 저장된다. 물리적인 지폐의 경우처럼 제3자가 그것을 빌리거나 조작하거나 투기에 동원할 수 없다. 화폐는 다른 사람에게 이전되기 전까지 소유자만의 통제 아래 있으며 이전은 익명으로 이루어진다.

‘디지털 화폐’라고 부르기보다는 그 아래 놓여있는 테크놀로지를 ‘탈중심화된 가상 어음교환소 및 자산 등기소’라는 부르는 것이 낫다고 브로트벤트는 말한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 테크놀로지가 새롭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앞으로의 전망을 보건대, 이 테크놀로지는 화폐를 포함한 자산을 교환하고 점유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방식을 제공할 것이다.

 

 

클라우드 속의 은행업(([정리자] ‘클라우드’는 ‘클라우드 컴퓨팅’을 가리킨다.))

 

그가 제안하는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은, 모든 사람이 중앙은행에 계좌 하나씩을 개설하는 것이다. 이는 뱅크런과 베일인(채권자 손실부담제도)의 공포를 제거하는 동시에 예금보험의 필요를 제거할 것이다. 중앙은행은 화폐가 바닥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소액예금자들만이 아니라 거대 기관투자자들도 민영 환매조건부채권 시장(repo market)의 필요를 제거하고 자금을 넣어둘 안전한 곳을 확보하기 위해서 중앙은행에 계좌를 가질 수 있다. 2008년 리만 브라더스의 붕괴 이후의 은행업 위기를 촉발한 것도 일반적인 은행시스템이 아니라 환매조건부채권 시장에의 예금인출쇄도였다.

민영은행은 지금처럼 자유롭게 업무를 계속할 수 있다. 다만 예금이 실제로 줄어들 것이다. 엄청나게 안전한 중앙은행이라는 옵션을 가진 예금자들이 돈을 중앙은행으로 옮길 것이기 때문이다.

예금자들이 돈을 빼서 옮길 때 은행들에서 대대적인 인출사태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이 보르도벤트가 보기에 모두에게 중앙은행에의 접근을 허용할 때 발생하는 문제이다. 만일 그렇다면 은행대출을 뒷받침하는 유동성(돈)은 어디에서 올 것인가? 그는 대출업이 심하게 손상을 입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 다른 생각이 있다. 만일 중앙은행이 민영은행의 예금업무만이 아니라 대출업도 대체한다면 어떨까? 공적 기반 시설로서 고안된 보편적으로 분산된 원장이 지금 은행이 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대출자의 차용증서를 ‘화폐’로 전환할 수 있다. 은행이라는 중개자를 통하는 것보다 더 싸고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할 수 있다.

 

부분지급 준비제도를 노후화시키기

 

영국은행은 은행들이 실제로 예금자들의 돈을 대출하는 것은 아님을 확인해준 바 있다. 은행은 ‘저축자들’의 돈을 재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를 할 때 예금액을 실제로 창출한다. 은행은 빌리는 사람의 차용증서를 ‘요구불 화폐’(checkable money)로 전환시킨 다음 그것을 빌리는 사람에게 이자를 붙여다시 빌려주는 것이다. 블록체인의 공적이고 분산된 원장도 이 일을 ‘클라우드’에서 ‘스마트 계약’에 의해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돈을 빌릴 ‘저축자’를 찾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빌리는 사람은 단지 갚겠다는 자신의 약속을 ‘화폐화’할 뿐이다. 민영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때와 똑같다. 그는 중앙은행의 바닥 모를 우물에서 돈을 빌려가는 것이기 때문에 공황상태에서 은행에 현금이 바닥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다음날 단기대부가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차변과 대변을 맞추기 위해서 밤사이에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에 처할 일도 없을 것이다.

은행들은 예금을 받고 그것을 다시 빌려주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은행이 저당을 잡고 대출을 내줄 때, 은행은 그저 그 액수를 빌리는 사람의 계좌에 적어 넣으면 된다. 빌리는 사람은 그의 판매자에게 수표를 써준다. 이 수표가 판매자의 은행에 저금되며, 거기서 그 수표는 ‘새’ 예금이 되어 그 은행의 ‘잉여 준비금’에 추가된다. 대출을 내준 은행이 그 다음에 만일 결산에 필요하다면 밤사이에 이 돈을 은행시스템으로부터 빌려와서 다음날 아침 되돌려준다. 이러한 데데한 이야기가 다음 날 밤에도 그 다음 날 밥에도 또 그 다음날 밤에도 계속 반복된다.

공적인 블록체인 시스템에서는 이런 야바위를 제거할 수 있다. 빌리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은행가가 되어 상환하겠다는 자신의 약속을 화폐로 전환시킨다. 블록체인 안에 코드로 넣어진 ‘스마트 계약’이 이 거래들로 하여금 현재의 대출에서 적용되는 계약조건들(terms and conditions)과 유사한 조건들을 준수하도록 만들 수 있다. 현재의 온라인 신용신청에서처럼 신용도(Creditworthiness)가 온라인으로 확립될 수 있다. 지금처럼 비(非)상환에 대해서는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 돈을 빌리는 사람은 공공 신용기관에서 대출을 받을 자격이 없더라도 여전히 사채시장에서, 민영은행에서 혹은 벤처 자본가들에게서 혹은 뮤추얼 펀드에서 돈을 빌릴 수 있다. 공공 신용기계의 문지기 역할을 하는 은행이라는 중개인의 필요성을 제거함으로써 정실과 부패를 제거할 수 있다. 수많은 서비스 제공자들이 가져가는 수수료 또한 제거될 수 있다. 블록체인에는 거래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은행 직원을 위한 블로그에 게시된 「중앙은행 디지털 통화―우리가 아는 바의 화폐정책의 종말인가?」(“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The End of Monetary Policy As We Know It?”)라는 글에서 마릴린 톨(Marilyne Tolle)은 이자율을 조작할 필요 또한 제거될 수 있다고 보았다. 중앙은행은 화폐공급을 직접적으로 통제하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을 관리하기 위한 이러한 간접적 도구를 필요로 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분산된 원장에 존재하는 CBDC는 다른 방식으로 즉 보편적인 국민배당금의 지급을 촉진함으로써 직접적 경제적 자극을 주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수백만 장의 배당금 수표를 발송하지 않고도,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를 통해 자판을 몇 번 두드림으로써 화폐를 소비자의 은행계좌에 추가할 수 있는 것이다.

 

초인플레이션 유발? 결코 아니다!

 

만일 모두가 중앙은행의 신용기관에 접근한다면 신용거품이 발생할 것이라는 이의제기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현재의 체제에서보다는 실제로 가능성이 덜하다. 중앙은행은 현재 민영은행들이 그러듯이 빌리는 사람들의 요구에 응하여 그 장부에 화폐를 창출할 것이다. 그러나 투기를 위한 돈을 얻기는 지금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환매조건부채권 시장에서 ‘재담보’(“rehypothecation”, 담보물의 재활용)를 통한 신용 레버리지(([정리자] 레버리지(Leverage)란 기업이 자본의 수익을 올리고자 할 때, 자기자본에 차입자본을 이용하여 자기지분에 대한 수익을 증대시키는 것을 말한다.–한글 위키피디아))가 대체로 제거될 것이기 때문이다. 블록체인 소프트웨어 기술자인 캐이틀린 롱(Caitlin Long)은 이렇게 설명한다.

재담보는 개념상으로 부분지급 준비제도와 유사하다. 본원통화(base money) 1달러가 그것을 바탕으로 대출해준 돈 수 달러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환매조건부채권 시장에서는 담보물(가령 미국 재무부의 국채들)이 본원통화로서 기능한다······

재담보를 통해서 다수당사자는 자신들이 동일한 자산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사실 그들 가운데 하나만이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 여하튼 오직 하나의 자산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규제자들에게 블록체인이 주는 가장 중요한 이득 가운데 하나는 이로써 규제자들이 얼마나 많은 이중계상(double-counting)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특히 “담보물의 연쇄‘가 실제로 얼마가 긴 지를) 볼 도구를 얻게 되는 것이다.

블록체인은 거래들 사이의 청산 시간을 제거함으로써 이러한 야바위를 제거한다. 볼록체인 거래는 실시간으로 일어난다. 담보물이 특정 시간에 한 장소에만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은행업에 밀려오는 거대한 변화

히스뵉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블록체인은 은행들, 중개인들, 신용카드 회사들을 죽일 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아는 모든 거래과정을 변화시킬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블록체인은 어음교환소의 성격을 가진 것이면 그 어떤 것이든 그 필요성을 제거한다. 이는 혁명이 다가오고 있음을, 우리가 사업을 하는 방식에 거대한 근본적인 변화의 파도가 밀려오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규모의 변화는 보통 수십 년에 걸쳐 일어난다. 그런데 영국은 유럽연합을 떠나겠다는 혁명적인 브렉시트 국민투표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아마 영국은행에 있는 새로운 종류의 경제학자들이 혁명적인 은행업 및 신용 모델로 우리를 또 한 번 놀라게 할지도 모른다. ♣

 


글쓴이 엘렌 브라운(Ellen Brown)은 공공은행업연구소(Public Banking Institute)의 창립자이며 여러 권의 책과 수백 편의 논문의 저자이다. 그녀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민사소송을 담당하는 변호사로서 연구 능력을 발전시켰다. 저서 『부채의 그물』(Web of Debt)에서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연방준비제도와 ‘화폐 트러스트’를 분석하는 데 발휘했다. 엘렌은 이 사적인 카르텔이 어떻게 돈을 창조하는 힘을 민중으로부터 찬탈했는지를, 그리고 우리 민중이 어떻게 그것을 되찾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클린에너지가 우리를 구할 수 있는가?



 

클린에너지가 우리를 구하지는 못한다

―새로운 경체체제만이 할 수 있다

 

올해 초 세계의 미디어들은 2월에 지구 전체의 기온 기록이 충격적일 정도의 차이로 깨졌다고 보도했다. 3월 또한 모든 기록을 깼다. 6월에 텔레비전 스크린들은 파리의 홍수, 센 강이 둑을 넘어 도로로 범람하는 모습으로 뒤덮였다. 런던에서 난 홍수로 인해 물이 지하수로 시스템을 통해 코번트 가든(([정리자]코번트 가든(Covent Garden)은 영국 런던 시티오브웨스트민스터에 위치한 지역으로서 쇼핑 및 관광 명소이다. ))의 심장부까지 흘러들었다. 런던 남동부의 도로들은 2미터 깊이의 강이 되었다.

이런 극심한 사건들이 다반사가 되면서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이제 거의 없게 되었다. 마침내, 화석 연료가 우리들을 죽이고 있다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둘러싸고 합의가 굳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클린에너지로의 신속한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화석 연료의 위험에 대한 이러한 점증하는 깨달음은 우리의 의식에 결정전인 전환이 일어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요점을 놓치고 있다는 우려를 가질 수밖에 없다. 클린에너지도 중요하겠지만, 그것이 기후변화를 막아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과학은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화석 연료에서 벗어나서 100% 클린에너지를 사용한다고 가정해보자. 이것이 올바른 방향으로의 힘찬 발걸음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최선의 경우를 가정하는 이 시나리오조차도 기후 재난을 피해가는 데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고? 화석 연료를 태우는 것은 모든 인간이 만들어내는 온실 가스 방출의 약 70%에 해당할 뿐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30%는 여러 원인에서 온다. 삼림파괴가 큰 원인이다. 산업화된 농업도 역시 큰 원인인데, 이는 이산화탄소를 용해시킬 정도로 토양의 질을 퇴화시킨다. 그 다음으로 가축사육이 큰 원인이다. 이는 매해 9천만 톤의 메탄가스와 인간이 만들어내는 이산화질소의 세계 총량의 대부분을 배출한다. 이 가스들 둘 다 지구온난화에 미치는 영향이 이산화탄소보다 훨씬 더 크다. 세계의 모든 자동차, 열차, 비행기, 배를 합친 것보다 가축사육 하나가 지구온난화에 더 큰 영향을 준다. 시멘트, 강철, 플라스틱의 생산이 온실 가스의 또 다른 주된 원인이며, 그 다음으로는 쓰레기 매립이다. 쓰레기 매립은 세계 총량의 16%라는 엄청난 양의 메탄을 대기 중에 뿜어낸다.

기후변화에 관한 한 문제는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가 무슨 종류냐가 아니라 우리가 그 에너지로 무엇을 하느냐이다. 100% 클린에너지로 우리가 하는 일은 바로 우리가 화석 연료로 하던 그 일일 것이다. 더 많은 숲을 제거하고, 더 많은 가축사육을 하고 농업 산업을 확장하고 더 많은 시멘트를 생산하고 더 많은 매립지를 쓰레기로 채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끔찍한 양의 온실 가스를 대기 중으로 펌프질해 올릴 것이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우리의 경제 체제가 부단한 성장을 요구하기 때문인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우리는 이것을 문제삼을 생각은 해 본적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비(非)화석 연료에서 오는 30%의 온실 가스는 고정적이지 않다. 매해 대기 중에 더 많은 온실 가스를 추가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우리의 열대 삼림이 2050년이면 완전히 파괴되어 2000억 톤의 탄소 폭탄을 대기 중에 방출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세계의 상층토(topsoil)는 60년 이내에 영양분이 고갈되어 더 많은 온실 가스를 방출할 것이다. 시멘트 산업이 방출하는 양은 매해 9% 이상 늘고 있다. 쓰레기 매립은 눈이 아릴 정도로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2100년 쯤이면 하루에 1100만 톤의 쓰레기를 만들어낼 것인데, 이는 현재의 3배이다. 클린에너지의 사용은 이런 일을 늦추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다.

기후운동은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주의력을 화석연료에 집중했던 것이다. 더 심층에 있는 것, 즉 우리의 경제적 체계가 작동하는 기본 논리를 지적했어야 하는 데 말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GDP 성장이라는 광범한 과제에 연료를 대기 위해서 화석연료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근본 문제는 우리의 경제 체계가 추출, 생산, 소비의 수준이 점점 더 증가하기를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정치가들은 지구 경제가 매해 3% 이상 성장하도록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말한다. 큰 회사들이 총이익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최소치이다. [개별 회사들의 이익은 이 총이익을 능력대로 나눈 몫이 될 것이다.―정리자] 이는 20년 마다 세계 경제의 크기를 두 배로 늘려야 함을 의미한다. 차들도 두 배, 어업도 두 배, 탄광업도 두 배, 아이패드도 두 배. 그 다음 20년에는 이미 도달한 두 배에서 또 다시 두 배로 늘려야 하고.

우리의 낙관적인 전문가들은 기술 혁신이 경제 성장을 물질적 스루풋(material throughput)(([정리자]기업 경영에서 스루풋(throughput)은 ‘투입’(input)에서 ‘산출’(output)까지의 과정을 가리킨다. 현대 경제는 생산지와 소비지(판매지점 근처)가 다르므로 상품을 판매하는 것은 상품을 구성하는 물질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물질적 스루풋’이 된다. 현대 경제에서는 이동하는 거리가 지구적 규모이다.))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도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려주는 중거는 없다. 지구상의 물질 추출과 소비는 1980년 이해 94% 증가했으며 여전히 증가하고 있다. 최근의 추산으로는, 2040년이 되면 세계의 선박·비행기·트럭을 사용한 수송거리가―그리고 수송되는 물질이―거의 정확하게 GDP의 성장률에 보조를 맞추어 지금의 두 배 이상이 된다고 한다.

클린에너지는 중요하지만 우리를 이 악몽에서 구해주는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제 시스템을 바꾸면 가능하다. 사람들은 GDP 성장이 더 나은 세상을 창출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주지 않고 빈곤을 줄이지 않으며 그 ‘외부성’(externalities)(([정리자]‘외부성’(externalities)은 상품생산이 시장의 외부에서 영향을 받거나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긍정적 외부성과 부정적 외부성이 있는데, 여기서 저자는 맥락상 외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에 국한되어 말하고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학교 근처에 있는 화상경마장은 학교의 아이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이 모든 종류의 사회적 폐해―부채, 과다노동, 불평등, 기후변화―를 낳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고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GDP 성장을 진보의 주된 척도로 삼지 말아야 하며, 이는 올해 말에 모로코에서 비준될 기후변화협약의 일환으로 즉각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우리의 창조적 능력을 새로운 지구 경제를 상상하는 데 쏟을 때이다. 생태 발자국을 적극적으로 축소하면서 인간의 복지를 최대화하는 경제를. 이는 불가능한 과제가 아니다. 여러 나라들이 매우 낮은 소비 수준을 가진 높은 수준의 인간 발전을 이루는 데 이미 성공했다. 사실 리즈 대학 경제학자인 대니얼 오닐(Daniel O’Neill)이 물질적 탈성장(degrowth)이 높은 수준의 인간 복지의 발전과 양립 불가능하지 않음을 입증한 바 있다.

우리는 화석 연료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클린에너지로 전환하는 한에서는 현재의 상태대로 지속할 수 있다고 안심하게 되었으나, 이는 위험하게 단순화된 생각이다. 만일 우리가 다가오는 위기를 물리치려면 심층에 있는 원인과 대면해야 하는 것이다.

* 저자 제이슨 히켈은 <더 룰즈>(The Rules)에 속해 있다 <더 룰즈>는 활동가들, 예술가들, 농업가들, 농민들, 학생들, 노동자들, 디자이너들, 해커들, 몽상가들 등의 세계적 네트워크로서 지구의 내러티브를 새로운 방향으로 몰아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민주적 화폐와 커먼즈를 위한 자본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2016년 1월 15일 게시글 “Democratic Money and Capital for the Commons”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일반적인 금융 용어나 새로운 금융제도 및 기관을 지칭하는 용어는 전문적으로 사용되는 것과 다르게 옮겨졌을 수 있다.

 

민주적 화폐와 커먼즈를 위한 자본

 

 

대부분의 커먼즈들이 직면하는 가장 복잡하고 가장 해결하기 힘든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금융, 은행, 화폐의 지배적인 체제가 커머닝에 그토록 적대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커먼즈의 독립을 확보하는가이다. 커머너들은 지배적인 화폐체제의 구조적 문제를 반복하지 않고 (어쩌면 반복하더라도 해로움이 웬만큼 덜한 방식으로 반복하면서) 어떻게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가?

 

다행히도 이 문제에 대한 대답들을 조명해줄 수 있는 여러 매력적이고 창조적인 기획들이 세계 전역에 존재하고 있다. 협동적 금, 크라우드에쿼티[각주:1], 대안 통화(通貨), 비트코인에서 사용되는 블록체인 장부, 화폐창출에 대한 공적 통제를 되찾아 (은행만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양적 완화’를 가능하게 하기 등등.

 

이 문제들에 대해 새로운 대화가 개시되는 것을 돕기 위해서 <커먼즈전략그룹>(the Commons Strategies Group)은 하인리히뵐재단과 협동하여 지난 9월 베를린에서 ‘심층 잠수’(Deep Dive) 전략워크숍을 조직했다. 우리는 공적 화폐, 보완 통화, 지역발전 금융기관(community development finance institutions), 공공은행들(public banks), 사회적 및 윤리적 대출, 커먼즈 기반의 가상은행업, 그리고 “협동형 축적”(co-operative accumulation)―집단들이 자신들에게 중요한 자산에 대한 공정한 소유와 통제력을 확보하는 능력―을 가능하게 할 새로운 조직형태들과 같은 주제들과 관련하여 24명의 활동가들과 전문가들을 모았다.

 

나는 그 워크숍에서 다루어진 대화의 주요 테마들과 상충점들을 종합하는 보고서가 지금 나와있다는 소식을 기쁘게 알린다. 그 보고서는 「민주적 화폐와 커먼즈를 위한 자본―커먼즈 기반의 대안들을 통해서 신자유주의 금융을 변형하기 위한 전략들」(“Democratic Money and Capital for the Commons: Strategies for Transforming Neoliberal Finance Through Commons-Based Alternatives,”)(데이빗 볼리어, 팻 코너티Pat Conaty 작성)이라고 불린다.

 

이 54쪽짜리 보고서는 커머너들이 화폐, 은행업, 금융이 어떻게 커머너들의 이익에 복무할 수 있는지를 토론하기 위한 첫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빠르고 쉬운 해답은 없다. 기존의 화폐체제의 아주 많은 부분이 재래의 자본주의 경제에 복무하는 데로 향해져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일지라도 말이다. 기본적인 금융 용어들조차도 무자비한 경제성장, 자원추출 경제 및 그 병적 측면들 그리고 화폐 그 자체가 부(富)라는 생각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빗나가는 논리를 종종 그 안에 품고 있다.

 

그래도 커머너들이 이 주제를 가지고 씨름해야 할 많은 중요한 이유들이 있다. 보고서의 서론 부분에서 말했듯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논리는 적어도 즉각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세 가지의 상호 연관된 체계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 ① 생태계의 파괴, ② 시장을 통한 커먼즈의 종획, ③ 평등, 사회정의, 사회가 시민들에게 사회적 돌봄을 제공하는 능력에 대한 공격이다. 이 세 문제를 통합된 방식으로 다룰 수 있는 혁신적인 협동형 금융(co-operative finance) 및 화폐체제를 발전시킬 방법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 문제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극복될 수 없을 것이다.”

 

서론을 더 보기로 하자.

 

이 병적 측면들을 추동하는 주된 요소는 부채가 이끄는 성장과 규제가 완화된 금융이다. 이는 케인즈 패러다임의 후임자로서 대처와 레이건이 1980년대 초에 도입한 신자유주의 경제의 중심적 요소들이다. 신자유주의로의 이동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법정 금리 한도의 폐지 혹은 완화에 의해 특징지어지는데, 이것의 결과로 많은 기존의 대출이 고리대금업이 되었고 금리가 페이데이론(payday loan)[각주:2]의 경우에는 5,000%로 치솟기도 했다. 이런 약탈은 한때 주로 빈민층, 불안정 노동자들 및 지구상의 후진지역에 대해 실행되었지만, 1990년대와 200년대에는 다른 형태로 중간층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에게로 확대되었다. 이제 과도한 부채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조건이 되었으며 이는 2008년 이후 심화되어 세계 전역에서 경제를 질식시키고 있고 거대한 사회적 불의를 낳고 있다. 그러나 사업은 이전처럼 계속되고 주류 정치는 근본적인 개혁에 관심이 없다.

 

다행스럽게 체제 차원의 변화를 추구할 새로운 기회들이 생기고 있다. 자본주의적 금융의 내적 모순들이 더 명백해지고 더 해로워짐에 따라, 화폐체제에 대한 급진적 비판들이 실천적 대안들의 발전과 함께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협동형 금융의 거의 잊혀진 역사적 모델들이 DIY 신용시스템, 대안 통화들, 협동형 조직모델들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로서 다시 발견되고 있다. 우리는 금융과 화폐에 대한 포스트자본주의적 비전이 간헐적으로나마 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하나 조금씩 바꿔나가는 해결책들―대안적인 은행들, 통화들, 대출제도들, 협동적 디지털 플랫폼들, 정책제안들 등―을 대충 모아놓는다고 해서 일관된 새로운 비전으로 종합될 수 있는가? 이 산만한 영역에서 다양한 기획들과 행위자들이 서로를 발견하고 더 심층적인 협동을 개시하고 더 넓은 지원을 끌어낼 수 있는가?

 

이것이 ‘심층 잠수’의 목적이었다. 54쪽의 보고서는 pdf파일로 여기서 다운받을 수 있다. 그리고 7쪽짜리 핵심요약(Executive Summary)도 여기서 볼 수 있다.

 

공저자인 코너티와 나는 많은 중요한 주제들에 대하여 깊은 지혜를 공유하게 해 준 데 대해, 그리고 최종보고서의 텍스트를 다듬는 것을 도와준 데 대해 ‘심층 잠수’의 참여자들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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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가 다루는 내용이 더 잘 이해될 수 있도록 핵심요약의 나머지 부분을 여기 올린다.

 

  1. 왜 화폐, 은행업, 금융의 변형이 필수적인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특히 2008년 금융 위기 이후에 사회적으로 공정하고 생태적으로 책임 있는 방식으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능력을 명백하게 상실했다. 경제성장과 부의 사적 축적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집착은 약탈적이고 사회적으로 기생적이 될 정도에 이르렀고 전체 체제는 파국적으로 호황과 불황을 반복하는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화폐와 화폐체제가 사회공학과 질서의 보이지 않는 도구로서 작동하는 사회적 창조물이라는 점은 널리 인식되고 있지는 않다. 많은 사람들에게 화폐와 화폐체제는 일종의 자연적인 경제질서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화폐를 창출하는 능력에 대한 공적 (정부에 의한) 통제력을 민간부문으로부터 다시 되찾아서 화폐가 민영은행들 및 금융기관들의 협소한 이윤창출 목표에 복무하기보다는 민주적으로 결정된 공적 욕구에 복무하는 데 사용될 수 있게 하는 것이 전적으로 가능하다.

 

일반 대중은 화폐가 민영은행들에 의해서 새로운 부채―정부들이나 가구들에 의해 이자를 더해 상환될 수 있는 부채―의 창출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각주:3] 그런데 화폐를 정부가 은행으로부터 빌려야 할 어떤 것으로 보지 않고 공통재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세금을 통해서 세입을 늘리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통화를 공적으로 공급하여 (민간경제에의 투자를 포함한) 사회적으로 필요한 지출에 더 우선적으로 투입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공공기관이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는 데서 생기는 ‘적자’가 애초에 발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화폐는 단순히 새로운 통화의 공적 원천을 나타낼 뿐인 것이 될 것인데, 이는 민영은행들이 이미 화폐를 부채의 형태로 만들어내면서 수행하는 기능이다. 그러나 공적 통화는 이자가 없고 민주적으로 결정되는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민영은행들이 부채 형태로 만들어내는 화폐와 다르다. 이제 민영 대출업자의 상업적이고 이윤에 의해 추동되는 욕구를 우선적으로 충족시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공통의 이익을 위한 화폐가 공적 서비스로서 민주적으로 창출될 수 있으며, 공적 이익을 위해 할당될 수 있다.

 

  1. 커먼즈와 커머닝에 어떻게 재정을 지원할 수 있는가?

 

기존의 금융제도는 착취와 추출의 경제에 바쳐져 있다. 이 경제는 성장이라는 명령이 내장된 다단계 사기에 해당한다. 일반 대중은 이자―은행이 창출한 액수의 화폐에 추가로 붙는 것―를 상환하기 위해서 점점 더 많은 부채를, 경제가 성장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져야 하기 때문이다. 복리로 추동되는 이 부채의 수레바퀴는 반드시 투기와 경제적 위기들을 낳는다. 미국에서 케인즈주의적 개혁과 뉴딜을 낳았고 근대적 복지국가가 출현했던 1929년과는 달리 2008년 이후의 전지구적 은행업과 화폐체제는 그 어떤 근본적인 개혁도 없이 유지되고 있다. 현재 우리의 화폐 및 은행업 체제는 잉여를 창출하기 위해서 사유화, 분업, 공통의 자원의 종획을 이용하는 임대소득 추출(rent extraction)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과정은 사유화된 자원과 노동을 제한하고 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다양한 금융 도구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이러한 금융도구들은 공적이고 공통적인 사용을 위해 새로운 자본을 창출하는 것을 금지하며, 커머너들이 공통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고유한 가치와 자본을 창출하는 능력을 좌절시킨다. 기존의 생산 및 금융 체제는 모든 창출된 가치를 개인의 호주머니로 흡수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커머너들과 금융을 공적 이익을 증진하는 도구로 삼는 데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기존의 임대소득 체제(rentier system)[각주:4]를 부수고 자연과 사회적 가치의 영역을 새롭게 개념화된 총체―여기서 자본은 사회의 집단적 목적에 복무하게 된다―로 재통합하는 데 있다.

 

요컨대 우리는 커먼즈 기반의 민주적이고 공평한 사회를 창출하려면 화폐와 신용의 역할을 다시 상상하고 다시 구축해야 한다. 이는 사람들이 공유된 자원을 공통재로 상상하고 표현하고 창출하는 과정을 통해 커머닝에 그리고 경제적·사회적 협동을 증진하는 데 참여할 수 있도록 금융을 사용함을 의미한다. 이는 기존의 대출의 주된 목적인 개인 자산의 열띤 구매 및 창출과는 매우 다른 정신적 태도이다. 그 핵심은 상호적으로 행하는 과정에 돈을 대는 것이다. 이는 화폐·신용·리스크를 관리하는 (그리고 상호적인 것으로 만드는) 지금과는 전적으로 다른 제도들, 법체계들, 사회적 관행들을 필요로 한다.

 

III. 금융을 변형시키는 아홉 가지의 혁신적 제도형태들

 

그런데 제로에서 시작할 필요는 없다. 좋은 소식은 신용과 리스크가 커먼즈에 복무하도록 새롭게 개념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이전에는 여러 제한된 방식으로 행해졌다. 이미 이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출현한, 매우 다양한 역사적으로 입증된 유망한 사례들이 있다. ‘심층 잠수’는 아홉 개의 금융혁신모델들을 탐구했다.

 

  1. 사회적·윤리적 대출

스페인의 피아레(Fiare)와 이탈리아의 방카 에티카(Banca Etica)와 같은 윤리적 사회적 은행들은 그들의 대부(貸付)가 사회와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활발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은행들은 공정무역운동, 기업의 사회적 책임, 지역에서 어엿한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지역사업들, 기타 협동적·사회적 관심사들과 연관된 대출자들에 집중한다. 방카 에티카는 400개 이상의 지방 정부들과 연결되어 있어 공적 부문 및 공동체 요소를 강력하게 가지고 있다. 이 협동적 은행의 자기자본은 현재 5천2백만 유로인데 3만5천 명의 주주들과 90개의 지역 그룹들이 소유하고 있으며, 이들은 은행의 생산물들과 서비스들을 개발하는 것을 활발하게 도우며 그 사회적 의무에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다.

 

  1. 지역발전 금융기관들

지역발전 금융기관들(Community Development Finance Institutions, CDFIs)[각주:5]은 협동적이고 상호적인 대출을 하는 기관들의 한 종류로서 미국에서 특히 인종차별에 맞서 신용에의 접근을 민주화하는 방법으로서 번성해왔다. 클린턴과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강력한 지원을 받은 덕택에 현재는 1천 개 이상의 사회적 임무에 의해 추동되는 기관들이 공식적으로 지역발전 금융기관들로서 인정되고 있으며, 2-3배가 되는 또 다른 기관들이 공인은 받지 못했으나 유사한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의 자산을 다 합하면 수백억 미국 달러에 달한다. 지역발전 금융기관들은 영국에서도 발전되어 유사한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다.

 

  1. 공공은행들

상업적 은행체제에 의해 가속되는, 호경기와 불경기를 반복하는 경제에 대한 매력적인 대안은 공공은행이다. 공공은행들은 공적 대출 경비를 즉각적으로 내릴 수 있고 이윤을 추출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적 욕구에 부응할 수 있는 자본을 제공할 수 있으며 그런 기획의 이자경비를 줄임으로써 기반시설 투자의 경비를 낮출 수 있다. 그 한 사례가 노스다코타 은행(the Bank of North Dakota)이다. 이 은행은 노스다코타의 60만 명의 주민들에게 10년에 걸쳐 3억 달러 이상의 배당금을 산출하면서도 소기업, 학생들, 농민들에게 낮은 이자의 대부를 제공한다. 1938년과 1974년 사이에 캐나다 은행(the Bank of Canada)도 공공 은행업을 담당하는 지부를 통해 전국 규모로 이런 식으로 영업을 했다. 캐나다에서 가장 큰 기반시설 프로젝트 가운데 일부―예를 들어 쎄인트 로렌스 씨웨이(St. Lawrence Seaway)[각주:6]―도 이런 식으로 재정을 확보했다. 시립은행들을 포함하여 세계 전역에 공공은행업의 좋은 사례들이 많이 있다.

 

  1. 이행지향적 신용

전통적 은행들이 가진 핵심적 문제는 성장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나 시장 금리가 낮을 때에는 허우적거린다는 점이다. 따라서 생태에 대한 의식을 가진 몇몇 공동체들은 성장과 무관한 상황에서도 잘 작동할 수 있으며 탄력 있는 지역 경제를 뒷밭침할 수 있는 신용 및 금융모델을 고안하려고 애쓰고 있다. 스웨덴의 쌈브루켓(Sambruket) 공동체는 자연자원 커먼즈와 이를 보완하는, 지속 가능하게 작동할 금융 커먼즈를 모두 수립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협동조합인 이 공동체는 지역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뒷받침하는 한 방식으로서 크라우드에쿼티 비영리 시스템을 실험하고 있다.

 

  1. 공동체의 기반시설로서의 블록체인 장부

비트코인이 투기에서 하는 역할에 대해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트코인은 그 혁신적인 ‘분산된 원장’ 혹은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로 인해서 금융상의 중요한 전진이다. 이러한 획기적인 시스템은 개방된 네트워크들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개인의 비트코인(혹은 디지털 증명서나 문서)의 진정성을 은행이나 정부기관 같은 제3자 보증인이 없이 확증할 수 있게 한다. 이는 널리 확산될 수 있다.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는 네트워크 플랫폼들에서 사회적 관계를 관리하는 데―예를 들어 디지털 네트워크들에 기반을 둔 ‘분산된 협동조직들’이나 한 집단의 공동 거버넌스를 위한 틀들을 수립하는 데―신뢰할만하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사용자들이 다른 사용자들의 신뢰성이나 신빙성을 확증할 일상적 수고를 덜 수 있다면, 개방된 네트워크 시스템들에서의 교류관계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에 제한이 없게 될 것이다.

 

  1. 보완통화들

<공동체 대장간>(Community Forge, communityforge.net)은 공동체들로 하여금 자신의 지역통화를 창출하게 하고 거래와 구성원들의 계좌를 관리하게 하며 개인 및 집단의 욕구를 선전할 수 있게 하는 소셜 네트워킹 플랫폼이다. 400개 이상의 공동체들이 드루팔(Drupal) 기반의 플랫폼을 사용하여 보완통화들(complementary currencies)을 관리한다. 2014년 말에 <공동체 대장간>은 프랑스에서 550개, 벨기에에서 113개, 스위스에서 63개의 LETS 프로젝트들[각주:7]과 150개의 시간은행들을 지원했다. 흥미로운 대안통화 가운데 하나는 유코인(uCoin)이다. 이는 프랑스에서 암호화폐(cryptocurrency)를 사용하여 기본소득을 시행하려고 하는 기획이다

 

  1. 커먼즈를 위한 크라우드펀딩

가장 혁신적인 크라우드펀딩 기획은 고테오(Goteo)이다. 이는 스페인에 기반을 둔 오픈소스 플랫폼으로서 커먼즈 기획과 원칙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코테오가 일반적인 크라우드펀딩 사이트들과 다른 점은, 프로젝트들을 개선하는 데 대중의 참여를 권유하고 기부자들에게 더 큰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고테오는 400개 이상의 프로젝트들에 재정을 지원했으며 기금마련 목표들을 충족시키는 데 있어서 60-70%의 성공률을 기록했다. 5만 명 이상의 사용자들이 있으며 2011년 창립한 이래 2백만 유로 이상을 모았다.

 

  1. 엔스피랄과 커먼즈 기반의 가상 은행업

엔스피랄(Enspiral)은 뉴질랜드에 본부를 둔, “비즈니스와 테크놀로지의 도구들을 사용하여 긍정적인 사회변화를 만드는” 기업가들·전문가들·해커들의 네트워크이다. 이 기업은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이용하여 새로운 유형의 자원의 집단적 자급(self-provisioning)과 금융을 주관할 새로운 조직구조를 창출한다. 그런 플랫폼 가운데 하나인 ‘my.enspiral’은 엔스피랄 서비스(Enspiral Services)의 프리랜서와 계약자 집단에게 자율성과 유연성을 가진 ‘월드 가든’(walled garden)[각주:8] 내에서 내부 은행업시스템의 사용을 허용한다. 엔스피랄은 또한 공동예산(Cobudget) 플랫폼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참여자들이 기여한 액수에 비례하여 집단적 예산책정에서 돈을 할당할 수 있게 해준다.

 

  1. 협동형 축적을 위한 새로운 조직형태들

몇몇 조직형태들은 ‘협동형 축적’―즉 상호이익을 위한 금융자원의 집단적 축적―의 새로운 형태들을 양성하는 데서 큰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 두드러진 사례가 특히 이탈리아, 캐나다의 퀘벡, 그리고 더 최근에는 뉴욕시에서 발전된(Solidarity NYC) ‘연대(連帶) 경제’(solidarity economy)와 다중이해관계자 협동조합(multi-stakeholder cooperative) 모델이다. 1990년대 영국의 공정무역 운동에서 발전된 협동조합 주식의 발행이 2008년 이래 매우 다양한 지역 및 공동체의 욕구―재생 가능한 에너지의 개발, 지역 상점들의 구제, 공동체에 의한 주점 구입, 지역 식품생산을 위한 토지 획득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를 위한 자본을 모으기 위해 부활되었다. 캐나다까지 확산된 영국의 공동체 주식운동은 어떻게 협동조합 형태의 자기자본(equity capital)이 공통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조달될 수 있는지를 부각시켜 준다.

 

  1. 전진을 위한 전략들

 

참여자들은 전진하기 위한 핵심 전략들 다섯을 아래와 같이 확정했다.

 

  1. 화폐를 민주화하라.

커머너들은 화폐창출체제를 포획하여 공적 목적을 위한 것으로 바꾸고 부채에 기반을 둔 화폐를 대체해야 한다. 아이슬란드 정부는 이 일을 하는 법을 보여주는 2015년 보고서를 낸 바 있다.

 

  1. 현행의 화폐를 넘어서라.

화폐는 (재화의 구매를 위한 가격에 기반을 두어 합의되는) 등가물들의 교환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관계를 증진하고 돈이 없는 사람들을 배제하는 행위들을 증진하는 경향을 가지므로, 많은 커머너들은 커먼즈의 간접적인 상호성을 존중함으로써 ‘화폐 너머’로 나아가고 싶어 하며, 공동체에 더 큰 자결능력을 줄 방법이 될, 상이한 맥락을 가진 상이한 유형의 화폐를 반갑게 맞이하고 싶어 한다.

 

  1. 미래로 돌아가라. (옛 것과 새 것의 혼합)

노동운동 및 좌파 정치와 연관된 옛 협동조합 모델들의 역사적 경험들과 지혜가 젊은 세대들이 발전시키고 있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기반을 둔 새로운 모델들과 혼합되어야 한다. JAK 수수료 기반 은행[각주:9], ‘음의 이자’(negative interest)가 적용되는 감가(減價)화폐(demurrage currency), 대공황 시기에 지역 경제를 촉발하기 위해서 개발한 WIR 통화 같은, 시간의 검증을 받은 많은 모델들이 화폐형태를 혁신하는 데 영감을 주고 있다.

 

  1. 협동형 축적을 위한 시스템을 설계하라.

‘협동형 축적’―즉 상호적으로 사용되고 민주적으로 관리·가동되어 공통의 부를 창출하는 자본 형태들을 발전시키고 유지할 수 있는 금융예비금이나 자산을 축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능력을 가진 새로운 조직 형태들을 (단지 금융제도만이 아니다) 고안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탈리아, 퀘벡, 일본 등지의 다중이해관계자 협동조합들은 커머너들, 협동하는 사람들, 그리고 지속 가능한 공동체 발전을 위해 공생(共生)적 법적 구조들을 발전시키는 방법에 관한 가이드를 제공할 수 있다.

 

  1. 새로운 화폐체제를 커먼즈로 구상하는 거시적 지도를 그려라.

우리는 사람들의 일상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실물 경제’와 기생적 ‘임대소득-금융’이 지배하는 ‘비실물 경제’를 구분해야 한다. 커먼즈 기반의 신용 및 금융 체제의 지도를 거시적으로 그리는 것이 새로운 경제를 구조짓고 작동 가능하게 만드는 관계들을 그려보는 것을 도울 수 있다.

 

다음 단계들

 

위의 목표를 넘어서 더 나아가기 위한 몇몇의 특수한 행동조치들이 확정되었다. 여기에는 다음의 것들이 포함된다 : 이론적·개념적 연구, 정책개발과 확대, 금융 및 커먼즈에 대한 더 풍부하고 광범한 담론의 개발, 협동과 행동주의를 위한 새로운 장(場)의 창출, 새로운 통화들에 대한 실험의 심화, 프로젝트 개발과 커먼즈 제도들을 위한 펀딩. 즉각적인 제안 하나는 나라를 황폐화하는 사회적·경제적 위기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법을 개발해내려고 몸부림치는 시리자와 그리스 민중에게 조언을 해주고 지원하자는 것이었다.

 

결론

 

‘심층 잠수’ 토론은 커먼즈 기반의 화폐체제와 민주적이고 공평한 원칙에 기반을 둔 자본이 전적으로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많은 기존의 혹은 새로 출현하는 모델들이 지배적인 부채 및 이자 체제를 극복할 수 있으며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변형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었다. 어려움은, 그토록 많은 복잡하고 겉보기에 분리된 측면들을 가진 체제 내에서 뿌리와 가지가 모두 바뀌는 근본적인 변화와 이행 제도들의 창출을 실제로 달성하는 데 있다. 현재의 체제를 변형하여 그것을 수용적이고 민주적으로 책임감이 있으며 사회적으로 건설적이고 생태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실제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 토론으로부터 마찬가지로 분명해진 것은, 많은 선택항들이 있으며 이는 양자택일적인 선택이 아니라 공존 가능한 과제들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자 없는 화폐, 부채에 기반을 두지 않는 공공부문 화폐, 여러 공적·사회적·협동적 은행업 형태들의 많은 역사적 사례들 및 현행의 사례들로부터 영감과 지침을 얻을 수 있다. 이 혁신들 각각은 서로 다른 욕구와 기능에 복무한다. 그러나 모두가 서로 보완적이며, 커머너들과 그 공동체들에 공평한 자본 및 기타 윤리적이고 유용한 금융서비스들을 제공할 수 있는 공생적 화폐체제로 통합될 수 있다. 오늘날 가능한 선택항들을 발전시키는 데서 명백하게 존재하는 문제는 기존의 개혁 기획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고 약하게 조직되어 있다는 점이다. 민주적인 동시에 지속 가능하고 인간적인 형태의 발전에 바쳐지는 화폐개혁운동에 활기와 통일성을 부여할 공유된 메타내러티브가 아직은 없다.

 

커먼즈의 원칙과 실제는 변화를 위한 역동적이고 통합된 과제를 수립하는 것을 도울 수 있으며, 많은 튼실한 도구들과 정책 제안들을 활용할 수 있다. 통일성을 부여하는 내러티브 또한 무책임한 민영은행들이 가진, 허공에서 부채 기반의 화폐를 창출하는 힘에 저항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 필수적이다. 국가와 국민은 은행가들로부터 이 주권적 힘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 협동적이고 민주적으로 책임감이 있는 형태의 조직들이 공통의 이익에 복무하는 실천들을 보호·유지하고 파수(把守)할 수 있는 가능한 대안적 사회구조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들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엄청난 압력행사가 필요하다. 화폐는 민주화되어야 한다. 부채의 구속은 폐지되어야 한다. 협동적 금융, 은행업, 그리고 공적으로 생성되는 통화의 새로운 체제들이 수립되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만 커먼즈는―특권을 가진 소수의 이익을 위해 종획되고 수탈되는 것이 아니라― 보호되고 증진되며 모두에게 복무하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 ‘Equity crowdfunding’(지분투자형 크라우드 펀딩)과 같은 말이다. ‘equity’(지분)를 크라우드펀딩 방식으로 투자자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 월급을 기반으로 한 소액의 대출을 가리킨다.
  • 조폐공사에서 지폐를 찍어내기 때문에 화폐를 조폐공사에서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지폐는 개념상으로 화폐가 아니라 화폐가 존재하는 한 양태이다. 은행에서 누군가에게 대출을 할 때, 대출자의 저금통장에 찍히는 대출금만큼 은행은 화폐를 만들어낸 것이 된다. 대출자는 이 화폐를 지폐로 교환할 수도 있고 다른 계좌로 이체할 수도 있다.
  • ‘rentier’(임대소득자)는 영어 위키피디아는 “특허, 저작권, 이자 등에서 파생되는 소득을 받는 사람 혹은 법인”(a person or entity receiving income derived from patents, copyrights, interest, etc)이라고 설명하고 옥스퍼드 사전은 “재산이나 소득으로부터 소득을 끌어내는 사람”( A person who derives his or her income from property or investment)이라고 설명한다. 어떻든 생산에 직접 참가하는 기업가 유형의 자본가는 여기에서 배제된다. 여기서는 뒤에 ‘체제’라는 말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임대소득’까지만 썼다.
  • 웹을 검색해보니 ‘지역개발 금융기관’, ‘지역사회발전 금융기관’, ‘커뮤니티개발 금융기관’ 등 여러 가지가 번역어로 쓰이고 있다(띄어쓰기는 고려에서 배제하고). 나는 길이를 좀 줄이고 ‘개발’이 주는 어감이 싫어서 ‘발전’을 택했다.
  • ‘St. Lawrence Seaway’는 캐나다와 미국에서 바다를 오가는 배들이 오대호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갑문, 운하, 수로들로 이루어진 시스템이다. ‘쎄인트 로렌스’는 온타리오 호수에서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가는 강의 이름이다.
  • LETS : 지역교역시스템(local exchange trading system)은 지역 주도로 민주적으로 조직된 비영리 공동체 기업이다. 공동체 정보서비스를 제공하며 지역에서 만들어낸 통화를 사용하여 재화 및 서비스 거래를 기록한다. (Wikipedia)
  • 이는 클로즈드 플랫폼(closed platform)의 다른 이름이다.
  • 스웨덴의 협동조합형 은행이다. ‘JAK’은 고전 경제학에서 세 개의 생산요인인 토지, 노동, 자본을 의미하는 스웨덴어 ‘Jord Arbete Kapital’의 앞 자를 딴 것이다. 관리 및 개발 비용은 회비와 대여 수수료로 지불한다.

 




부채냐 민주주의냐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2016년 4월 1일 게시글 “Mary Mellor’s “Debt or Democracy”: Why Not Quantitative Easing for People?”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금융 용어는 전문적으로 사용되는 것과 다르게 옮겨졌을 수 있다. 밑줄과 글자 배경색은 옮긴이의 것이다.

 

메리 멜러의 “부채냐 민주주의냐”―왜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는 없는가?

 

“화폐를 찍어내는” 정부들이 모든 새로운 화폐의 원천이라고 널리 생각되고 있지만 사실은 이른바 민영부문이 유통되는 대부분의 새로운 화폐의 원천이다. 우리 시대에 커먼즈를 종획한 가장 성공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는, 상업적 금융기관들이 자신들의 재량으로 행하는 대출을 통해서 대부분의 새로운 화폐를 창출하는 힘을 장악한 것이다. 이 힘은 매우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일반화되어서 거의 아무도 상업적 대출이 창출되는 ‘새로운 화폐’의 95% 이상을 차지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공적 이익을 위해서 화폐를 창출하는 권한을 발휘하는 엄청난 힘을 사실상 포기해버린 것이다.

 

아마도 현재의 화폐체제를 개혁하는 데 주도적인 주창자는 영국 노섬브리아 대학(Northumbria University)의 명예 교수이며 최근에 출판된, 우리의 눈을 열어주는 책 『부채냐 민주주의냐―지속 가능성과 사회적 정의를 위한 공적 화폐』(Debt or Democracy: Public Money for Sustainability and Social Justice, Pluto Press, 2015)의 저자인 메리 멜러(Mary Mellor)일 것이다.

 

멜러는 최근에 영국 신문인『더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의 특집면에 글을 기고하여 그녀의 책의 핵심 테마들 가운데 일부를 요약했다. 그녀의 글은 “핸드백 경제의 신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 신화는 정부 예산이 가구의 예산에 비견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반을 둔다. 이 생각이 화폐공급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왜곡시키며 불가피하게 정부들로 하여금 재정긴축정책을 채택하도록 한다고 멜러는 말한다.

 

지난 해 9월 열린 한 정책워크숍에서 멜러는, 사람들이 잘 묻지 않는 중요한 정치적 물음은 ‘누가 화폐의 창출과 유통을 통제하는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녀는 정부가 주권자로서 새로운 화폐를 발행할 권한을 가진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권한은 ‘화폐주조세’(seigniorage)라고 알려진 오래된 권한이다. 그러나 실제로 정부들은 이 권한을 상업적 은행업 부문에 양도해버렸으며 이 부문에서 이루어지는 대출이 부채로서 유통되는 거의 모든 화폐를 창출하게 된 것이다.

 

은행들은 새로운 대여를 행함으로써 허공에서 화폐를 창출한다. 은행들은 대여하는 특정 액수의 화폐를 수중에, 금고실에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단지 ‘준비제도’(reserve banking)[각주:1] 기준이 요구하는 대로 대여되는 돈의 총 액수의 일부만을 가지고 있으면 된다. 이런 식으로 은행대출은 엄밀하게 사적이고 상업적인 기준―즉 대출받는 사람의 부채 상환능력에 대한 은행의 평가―에 기반을 두어 경제에 새로운 화폐를 말 그대로 공급한다.

 

멜러는 공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공적 통화의 힘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공적 통화’라는 말로 그녀가 의미하는 것은 “중앙은행과 정부지출에서 기원하는 공적 화폐 회로를 통해 창출되는,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승인된 공적 통화”이다. 사적으로 창출된 통화는 공적 통화라고 불리지만 은행 부문을 통해 대여의 형태로 발행되는 화폐이다. 은행가들이 대출을 할 때 공적 통화를 창출하며, 이로 인해서 국가는 은행들이 위기에 빠질 때 그 화폐의 유효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의 실정이다.

 

멜러는 화폐에 대한 이러한 단순하고 이기적인 이해를 ‘핸드백 경제’라고 부르는데, 이는 영국의 신자유주의자 수상인 마가렛 대처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유명한 핸드백을 빗댄 것이다. “핸드백 경제에 따르면 공적 화폐란 것은 없으며, 공적 화폐란 것이 있다 해도 그것은 사립은행들을 통해서 말고는 창출될 수 없다”고 멜러는 말한다.

 

화폐를 창출하는 정부들의 어리석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은행가들은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이 “화폐를 찍어냈던” 때 그 결과로 일어난 파멸적 인플레이션을 반사적으로 거론한다. 정부들은 정당하게 화폐를 발행하거나 부를 창출할 수 없으며 이는 은행 신용 혹은 대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 등등이 이들의 생각이다. 따라서 애초에 조세를 통해서 화폐를 모으지 않고 일어나는 공적 지출은 모두 무모한 ‘적자 지출’이라는 지탄을 받는다. 멜러는 사실 정부들은 항상 세수(稅收)에 앞서 미리 지출을 한다고 말한다. 국가들은 먼저 지출하고 나중에 세금을 거둔다는 것이다. 만일 국가들이 먼저 세금을 거둔다면, 적자는 결코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은행과 화폐에 대하여 시중에 퍼져 있는 일반적인 이야기 또한, 민영은행들이 계속 움직일 수 있도록 정부들이 으레 민영은행들에 ‘기본 화폐’를 공급한다는 사실을 편리하게 무시한다고 멜러는 말한다. 우리는 이것을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시기에 매우 극적인 형태로 목격했다. 미국 정부는 수천 억 달러의 돈을 허공에서―‘공적 화폐’로서―창출하여 은행들에 구제금융을 제공하여 은행들이 (그리고 전지구적 경제가) 붕괴되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민영은행 시스템의 배후에 있는 것은 부채로부터 자유로운 공적 통화를 창출하는 공적 능력이다. 이는 부채 거품이 터지고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 사태)이 경제를 멸망시킬 위험을 보일 때마다 계속해서 입증되고 있다. 국가가 항상 최후 수단의 제공자로서 개입하게 된다. “모든 형식적 화폐체제들은 본질적으로 공적이며 공적 신뢰와 공적권한에 의존한다”고 멜러는 말한다.

 

이것이 멜러에게 흥미로운 점을 불러일으킨다. 왜 상업적 은행 부문이 공적 부문에 기생하도록 허용되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시민으로서 그리고 납세자로서 민영금융체제로 하여금 공적 부문을 통제하도록 허용하는가? 멜러는 민영은행들에 납세자들의 돈으로 구제금융과 보조금을 제공하는 것에 대한 명백한 응답은 “화폐를 창출하는 민주적 권리를 행사하고” 그것을 공적 목적에 부응하도록 사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매우 이단적인 생각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목을 컥컥대고 커피를 쏟으며 말도 안 된다고 외칠 것이다. (『인디펜던트』지의 멜러 글에 달린 댓글들을 보라.) 그러나 멜러는 위에서 언급한 워크숍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화폐를 창출하는 힘은 주권자들에게서 상업 부문으로, 지배계급에서 상인계급으로 이동했다. 필요한 것은 이 힘을 공공으로 이전시키는 것이다. 중앙은행은 부채로부터 자유로운 화폐창출이라는 주권적 특권을 국민의 이익을 위해 공적 자원으로서 국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화폐가 민주화되어야 한다. 특히 만일 우리가 사회적으로 정의롭고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자원조달체계(socially just and ecologically sustainable provisioning systems)―‘경제’보다 훨씬 더 나은 개념이다―를 창출하기를 원한다면 더욱 그렇다.

 

민주화된 화폐’라는 이 새로운 방향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화폐를 창출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바꾸어야 한다. 이는 현재 이해되고 있는 바처럼 ‘적자 지출’―즉 은행들에 상환되어야 하는 화폐―로 구성되지 않는다. 다 따지고 보면 정부의 화폐 창출은 공적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한 주권자의 특권이다. 중앙은행들이 문제가 많은 상업적 은행들을 구하기 위해서 이용하는 ‘양적 완화’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명목상으로는 공적 목적을 위한다는 의도를 가진 공적 통화의 발행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민영사업에 제공하는 보조금이었던 것이다.

 

재미있게도 우리는 그런 경우에는 정부가 “화폐를 찍어낼” 위험에 대하여 많은 은행가들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만일 상업적 민영금융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공적 화폐를 창출하는 것(‘양적 완화’)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 (그리고 환경, 기반 시설 등등을 위한 양적 완화) 또한 가능하고 책임 있는 정책의 하나로서 선택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왜 정부가 부채를 지지 않는 공적 통화가 모든 종류의 공적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창출될 수는 없는가?

 

멜러는 문제가 주로 이데올로기적 프레임 씌우기의 문제라고 설명한다. ‘핸드백 경제’의 옹호자들은 우리가 화폐를 순전히 상업적 자산으로서 간주하고 공적 자산으로서 간주하지는 말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화폐창출이 주로 민영은행들의 사적인 이윤생성(대여)을 통해 이루어지고 공적 목적에 복무하는 방식으로 정부를 통해 이루어지지는 말 것을 요구한다.

 

멜러는 “좌우를 막론하고 논평자들은 대체로 화폐의 민주적 잠재력을 무시한다”고 탄식한다. “그들은 ‘실물 경제’에 초점을 두는데, 이것이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적으로 생산적인 부문으로 간주된다. 화폐는 능동적이고 정치적으로 건설적인 동인으로서 간주되어야 하는데도 이차적 측면으로 간주된다. 모든 화폐는 그 보유자에게 권리를 나타내는 신용이다. 그러나 모든 화폐가 부채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선진국의 국민경제에서 화폐의 95% 이상은 은행계좌에 들어있고 소량만이 현금(동전, 지폐)으로 유통되기 때문에, 민영 부문의 부채 기반 화폐가 의문의 여지가 없는 규범인 듯이 인식된다. 그러나 멜러는 화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다시 개념화하는 것이 전적으로 필요하다고 한다. 화폐를 정부가 은행으로부터 빌려야 하는 어떤 것으로 보지 말고, 사회적으로 필요한 지출을 우선시하는, 조세수입이 선행되지 않는, 부채로부터 자유로운 통화의 공급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적자’가 날 필요가 없다. 화폐는 단순히 새로운 화폐의 공적 원천을 재현할 뿐이다. 이는 민영은행들이 이미 수행하는 기능이다. 차이는, 공적 통화들은 이자가 없고―민영 대출자들의 상업적 우선권이 아니라―민주적으로 결정되는 욕구를 지원한다는 점이다.

 

멜러는 현재의 화폐 체제와는 다른 논리에 따라 작동하는 ‘공적 화폐 회로’(public money circuit)의 존재에 대한 인정을 요구했다. 상업적인 금융 회로―여기서는 화폐가 상환되어야 할부채로서 창출된다―에 의하여 창출되는 화폐와는 달리, 공적 화폐 회로는 부채가 없는 화폐를 창출할 수 있다. 상환에의 유인(誘因])은 없다. 요구되는 것은, 그 화폐를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서―과세를 통해서,[각주:2] 정부 서비스에 경비를 지불하게 함으로써, 혹은 대중에게 투자기회를 제공함으로써―공적 회로로 충분하게 되돌려보내는 것이다.

 

이 목표를 위해 적절한 정책들을 수립하는 것은 공적 토론의 문제가 되리라는 데 멜러는 동의한다. 그녀는 “인플레이션의 압박을 피하면서도 모든 상업적이고 공적인 지불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기에 충분한 양을 남기기 위해” 회수되어야 하는 화폐의 전반적인 양을 평가하는 권한을 가진 독립적인 기관을 상상한다.

 

멜러의 생각은 오늘날 거대한 호소력을 가지지만, 우선 널리 이해되어야 하며 충분한 견인력을 가지는 정치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이 생각이 가진 큰 미덕 가운데 하나는, 이윤을 추구하는 상업적 금융이 고이윤·고부채 기준에 우선적으로 맞을 때에만 황송하게도 새로운 화폐를 창출해주시는 이런 시대에, ‘민주적 화폐’가 모든 종류의 공적 욕구를―특히 생태적·사회적 욕구를―충족시키는 자금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는 블로그의 글로는 감당할 수 없는 매우 긴 이야기이다. 그래서 나는 메리 멜러의 매력적인 책 『부채냐 민주주의냐』를 독자들이 추적하기를 추천하는 것이다. [이 글의 일부 내용은 워크숍 보고서인 「민주적 화폐와 커먼즈를 위한 자본」(“Democratic Money and Capital for the Commons”)에서 따왔다.] ♣

 

  • 부분지급 준비제도(fractional reserve banking) 
  • 멜러는 자신의 저서 『부채냐 민주주의냐』 3장에서 이 경우 세금이란 상업적 화폐 회로에서와 같은 금융도구(개인, 가구, 회사로부터 공공부문이 지출할 돈을 세금으로 거두는 것)가 아니라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화폐를 유통에서 회수하는 도구라고 한다. 납세자에게도 상황이 달라지는데, 이제는 어렵게 일하는 가구들이 어렵게 번 돈을 세금으로 내는 것이 아니라, 공적 혜택(의료비, 교량 건설, 환경사업 등)을 창출하는 일을 마친 화폐가 귀환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 왕의 삼림을 사용할 수 있는가

* [옮긴이]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에 게시된 2015년 9월 14일자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내용전달 위주로 서둘러 옮겨야 했기 때문에 정밀하게 옮기지 못한 부분들이 있을 수 있다. 주석은 모두 옮긴이의 것이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누가 왕의 삼림 사용할 수 있는가?

–우리 시대에  마그나카르타가 가진 의미, 커먼즈 그리고 법

옮긴이 : 정백수

 

나는 요즘 법과 커먼즈의 관계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에 전략 메모 「커먼즈를 위한 법을 재발명하기」를 4회에 걸쳐 게시하기도 했다. 다음 강연은 9월 8일 베를린의 하인리히 뵐 재단에서 한 것으로서 예의 메모와 짝을 이룬다. 테마는 ‘마그나카르타 800주년 축하와 그것이 오늘날 커머너들에게 가지는 의미’이다.

 

이 강연의 비디오 판은 여기서 볼 수 있다. 더불어 나의 동료 미셸 보웬스의 P2P개발에 대한 강연도 볼 수 있으며, 질케 헬프리히가 사회를 본 청중과의 토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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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나카르타 800주년과 커먼즈에서 법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오늘밤 강연을 할 수 있도록 초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8세기 전에 일어난 일을 누군가가 아직도 경축한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 사건에 대한 우리의 기억 이외에도 매우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이 역사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잊은 것에 대해서 기억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점입니다.

 

마그나카르타 800주년에 우리가 경축하는 것은 1215년 잉글랜드 러니미드(Runnymede) 들판에서 있었던 평화협정의 조인입니다. 이 협정으로 많은 경멸을 받은 존 왕과 왕에게 반란을 일으킨 국왕봉신들(barons)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종식되었습니다. 휴전으로 의도되었던 것은 곧 거버넌스의 적합한 구조에 대한 더 큰 공식적 진술로 간주되었습니다. 마그나카르타는 중세인들의 생활방식을 많은 고어 단어들로 서술하는 가운데서도 이제 왕의 제한된 권력과 보통 사람들의 권리 및 자유권들에 대한 획기적인 진술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긴 내전 이후에 존 왕이 마그나카르타를 받아들인 것은 믿을 수 없이 아득한 옛날 일이기에 쉽사리 망각될 일로 보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우리 현대인들과 관련이 있을 수 있을까요? 마그나카르타의 지속성과 반향은 집중된 힘에 대한, 특히 왕권에 대한 우리의 경계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왕의 권위가 법의 지배에 의해 제한되고 이것이 인간의 역사에서 문명이 더 높아지는 새로운 순간을 나타냄을 상기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억눌린 사람들과 동일시하기를 좋아하고, 개인들의 권리와 자유권들을 보호한다고들 말하는, ‘법’이라고 불리는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왕들조차도 존중해야 한다고 선언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정신으로 미국 법조협회는 1957년에 “법 아래에서의 자유”라는 말이 새겨진 화강암 대좌(臺座)를 러니미드에 세움으로써 마그나카르타를 경축했습니다. 거대한 공적 행사들에―특히 올해에―판사들, 정치인들, 법학자들 및 저명한 비공식적 유력 인사들이 모여서 헌법에 기반을 둔 통치와 대의민주주의가 마그나카르타의 원칙들을 어떻게 계속해서 떠받치고 있는지를 공언하기를 좋아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이따가 말하겠습니다.

 

오늘 저는 마그나카르타와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더 풍부하고 더 복잡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사실 서로 연결되어있지만 구분되는 두 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1번 이야기는―이것을 ‘근대 시장/국가의 승리’라고 부릅시다―지금 제가 막 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보통 유명한 엘리트들이 입헌민주주의, 이른바 자유로운 시장과 마그나카르타의 긴밀한 연관, “법 아래에서의 자유”라는 이념을 경축하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1번 이야기는 입헌민주주의와 대의제가 마그나카르타에 담긴 권리들을 방어해줌으로써 실제로 자유와 법의 용감한 성채로서 기능한다고 우리를 안심시켜 줍니다. 물론 대헌장은 왕정, 부족 제도, 그리고 홉스가 말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것들은 세계의 많은 지역들에서 한때 우세했던 것들입니다―너머로의 주목할 만한 전진을 나타냅니다.

저 자신은 마그나카르타 이야기의 무시된 측면, 그다지 이야기되지 않는 이야기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을 2번 이야기라고, 아니면 ‘커먼즈를 위한 법’(Law for the Commons)이라고 부릅시다.1 이 무시된 두 번째 이야기는 800년 전에 일어난 마그나카르타의 조인을 핵심으로 한다기보다 그 원칙들을 민중의 삶 속에 현실화하는 지속적이고도 끝나지 않는 투쟁을 핵심으로 합니다. 2번 이야기에는 공직적인 주류 이야기가 가진 지적인 화려함이나 성스러움이 없습니다. 그것은 더 세속적이고 보통 사람들에게, 즉 커머너들에게 더 집중되어 있습니다.

2번 이야기의 본질적 핵심은 민중의 일상적 생존욕구를 충족시키고 인간의 권리를 실현하는 데서 마그나카르타가 가진 기능적인 법적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서 물려받은 공통의 부에 모두가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그 핵심입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2번 이야기는 ‘누가 왕의 삼림2을 사용할 수 있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1200년대 초의 커머너들은 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의 삼림’이 무슨 말이냐? 삼림은 우리 것이다! 수 세기에 걸쳐 우리 것이었다.‘ 커머너들도 권리를 가지고 있었음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 바로 이것이 마그나카르타의 망각된 유산입니다. 삼림을 사용할 권리, 자치 규칙들을 스스로 조직할 권리, 왕의 자의적인 권력 남용에 맞서서 스스로를 보호할 자유권들3과 권리들.

이 모든 것이 성문법이라는 생각보다 앞서 존재했습니다. 이 권리들은 근본적인 욕구와 기나긴 전통에 기반을 둔 권리들로 간주되었습니다.

우리는 13세기의 커머너들이 거의 모든 것을 숲에 의존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요리와 난방을 위한 나무를 숲에서 해왔습니다. 식탁에 올려놓을 고기를 숲에서 잡았고 물고기를 강에서 잡았습니다. 소나 돼지에게 먹이기 위해 숲에서 도토리와 여러 식물들을 채취해왔습니다. 숲이 곧 우주였습니다. 봉건 영주들이 소유한 장소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사용 관습에 의해서 커머너들에게도 권리가 부여된 장소였습니다. 숲은 또한 그들의 상상력, 문화 그리고 그들의 존재 자체에 형태를 부여한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존 왕이 삼림에 대한 통제권을 점점 더 많이 전유하기 시작하자, 이것이 봉건 귀족들에게만 심각한 압박을 준 것이 아니라―물론 봉건 귀족들은 곧 반발하여 반격했습니다―커머너들의 생존도 위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왕이 숲을 탈취한 것은―이는 왕의 주장관들(sheriffs)에 의해 무자비하게 시행되었습니다―가축들이 숲에서 방목될 수 없음을 의미했습니다. 돼지들이 도토리를 먹을 수 없었고, 커머너들이 나무를 해와서 집을 고칠 수도 없었으며, 과일과 물고기도 채취하고 잡을 수 없었습니다. 댐이나 개인이 만든 방죽길 때문에 배들이 강을 오갈 수도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고 다른 많은 것이) 잉글랜드에서 길고 격렬한 내전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마그나카르타라고 알려진 휴전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평화의 조건은 왕의 절대 권력에 일련의 법적 제한을 가하고 커머너들을 포함한 민중에게 일련의 정해진 법적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마그나카르타의 이야기에서 보통 잊혀지는 것이 2년 뒤에 마그나카르타에 통합된 자매 문서인 삼림헌장(the Charter of the Forest)입니다. 이 문서는 커머너들의 관습적 권리들을 명시적으로 보호하고 있습니다. 삼림헌장은 커머너들에게 숲의 특수한 사용을 보장하는 일종의 인권 협정입니다. 돼지방목권, 에스토버4로서 땔감을 채취할 권리, 개방된 숲 사용권, 토탄채굴권 등 다수의 권리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요컨대, 삼림헌장은 사유화에 가해진 최초의 법적 제한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그나카르타를 공식적으로 경축하는 자리에서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실로 커머너들을 이렇게 인정한 것이 마그나카르타의 위대한 성취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삼림헌장은 커머너들에게 인간의 생존에 근본적인 집단적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공식적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이 헌장은 왕의 주장관들이 왕의 자의적인 종획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체포, 상해, 고문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함으로써 오늘날 ‘국가의 테러’라고 부를 수 있는 행동들로부터 커머너들을 보호했습니다.

 

불행하게도 마그나카르타는 당시 그 원칙들을 스스로 시행할 수단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왕은 초월적 법5을 자기 마음대로 정지시킬 수 있었으며 정지시킨 결과로 나올 사회적·정치적 항의에 의해서만 제한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지난 수 세기에 걸쳐 일어났고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1536년에 헨리 8세는 잉글랜드의 수도원들을 없앴습니다. 라인보에 따르면 이는 “국가가 후원한 대대적인 사유화 행동”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계급 즉 종획을 수단으로 하여 땅을 취하고 땅을 수익을 내는 데 사용할 젠트리6가 들어설 문을 열어주었다”라고 라인보는 쓰고 있습니다. 수도원들의 해체는 잉글랜드의 토지를 상품으로 전환시킨 “국가가 후원한 대대적인 사유화 행동”이었습니다. 당시의 한 저널리스트에 따르면 “토지가 마법적 성격을 상실한 것”이었습니다. 

17, 18세기에 의회는 출현하는 젠트리 계급을 위해서 4천 건 이상의 종획을 승인했으며, 그리하여 젠트리들에게 잉글랜드의 공유지 가운데 약 15%를 사적으로 강탈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 종획들은 많은 커머너들이 토지와 맺고 있는 깊은 연관을 파괴했으며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파괴하고 산업화로 가는 길을 닦았습니다. 임금노동자들, 소비자들, 거지들로 구성된 새로운 민중 계급도 창출되었습니다. 커먼즈를 박탈당한 민중은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기 위해서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 새로운 세계에서 마그나카르타의 원칙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문서화된 법의 지고함은 법에 더 큰 지속성과 존엄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진전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우리는 성문법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성문화된 형식적 법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거버넌스 규칙들이 더 영속적이고 심지어는 영원한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분명 왕을 포함한 마그나 카르타의 옹호자들은 이런 생각을 장려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법이 그 법에 의해 통치되는 사회적 공동체로부터 분리될 때―능동적 합의가 전문적 법률가들, 정치가들, 판사들에 의해 유린될 수 있을 때― 이는 새로운 종류의 폭정으로 향하는 첫 걸음이 됩니다. 성문법은 이러한 문제점으로 항하는 문을 열어줍니다. 합법성(legality)과 정당성(legitimacy)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자가 다르다는 것은, 프랑스의 법인류학 교수 에띠엔느 르 로이Étienne Le Roy가 주장한 바입니다.) 성문법은 법을 인쇄된 단어들로 이루어진 인공물―이는 전문적 법률가들과 법학자들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일단의 규칙들로 간주할 수 있는 어떤 것입니다―로 만듦으로써 합법성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통치 영역을 창출했습니다. 법 자체가 해석과 조작이 가능한 외적 대상, 민중들로부터 분리된 어떤 것이 되었습니다. 법은 절대적이고 자립적인 것으로 떠받들어지는 우상, 엄격한 준수를 의무화하는 어떤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문화된 법은 법률가들과 판사들이 법을 해석하는 성직자들이 되면서 문구들의 조작과 속임수가 훨씬 더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왕은 단지 합법성이라는 외피를 주장하면 되었습니다. 그 외피가 형식적이고 문서화된 법과 일정한 그럴듯한 관련이 있는 한에서 말입니다. 다른 식으로 얻어지는 ‘정당성’은 축출되었습니다. 왕이 선언하는 바의 ‘법’은 자기충족적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법’을 마음대로 시행할 강제력에 대한 독점권을 왕 개인이 (정말로 “개인”입니다) 편리하게 보유하게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왜 마그나카르타의 거대한 원칙들이 인권의 보증자로서 줄곧 신뢰할 수 없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저는 이미 잉글랜드에서 왕이 카톨릭 수도원들을 종획한 것과 17, 18세기의 종획운동을 언급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 시대에 와서는 입헌 민주주의가 특히 9/11 이후에 법의 적정 절차, 공정성, 인권과 커머닝7의 용감한 방어자가 아님을 목도해왔습니다. 

우리 시대의 주권자―초국적 기업들과 손을 잡은 국민국가―는 입헌 민주주의와 사법 심사제의 제한장치로 간주되는 것들을 회피하는 많은 길들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미국 정부의 자칭 국가안보가 어떻게 인신보호영장의 권리를 압도해왔는지를 보았습니다. 마그나카르타에도 불구하고 미국 군대와 CIA는 수많은 개인들에게 고문을 가했고 수인들로 하여금 적정 법절차를 거치게 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많은 중동 지역에 수천 번의 드론 공격을 가했는데, 이는 사법 심리를 거치지 않은 무법의 사살행위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말고도 더 나열할 수 있습니다. 요점은, 이미 수립된 입헌 통치와 민주주의의 제도들이 이를 말없이 방조했으며 마그나카르타의 원칙들을 능욕하는 극악무도한 행동들을 찾아내고 처벌하는 데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현대의 주권자들인 국민국가들과 기업들―시장/국가―이 마그나카르타를 경축하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에는 거대한 양의 불협화음이 일고 있습니다. 국민국가들과 기업들은 우리의 계몽된 근대적 질서를 관리하는 데서 수행하는 인정 많은 역할로 인해서 머리 위에 광륜(光輪)이라도 얹어놓을 필요가 있는 모양입니다. 올해 초에 영국의 웨스트민스터에 유력한 정치인들과 골드만삭스, 바릭골드8 및 기업화된 로펌들에서 온 기업계 고위 인사들이 모여서 한 일이···다름 아닌 ‘법의 지배’(the rule of law, 법치)를 경축한 것은 바로 그러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읍니다.9 수 세기에 걸쳐서 우리가 마그나카르타에 매료된 것은 주로 염원의 표현이었다고 혹은 더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유용한 표지기사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권력이 정말로 길들여져 있으며 인류에게 복무한다고 우리를 안심시키고―혹은 그렇게 다른 이들을 납득시키고―싶어 합니다.

 

물론 사실 국가에 의해 도움을 받는 신자유주의적 시장질서는 커먼즈를 종획하는 데 있어서 존 왕만큼이나 무자비하고 맹렬하다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국가와 기업계는 우리의 공통의 부를 ‘합법적으로’ 사유하는 데 법을 사용하기 위해 공모하기 일쑤입니다. 이는 전지구적 금융부문의 약탈행위에서 가장 두드러집니다. 지구의 대기가 주요 산업들, 특히 화석연료를 파는 산업들에 의해 무상의 쓰레기 처리장으로 사용되며 이에 대해 국가는 거의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바이오테크 회사 및 제약회사들은 유전자에서 박테리아를 거쳐 양(羊)에 이르는 생명체들을 특허법을 통해 사적인 상품으로 전환시키도록 허용받습니다. 투자자들과 국부펀드들10이 전지구적 토지수탈의 일환으로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거대한 넓이의 땅을 사들여서 커머너들을 축출하고 미래의 기근(飢饉)을 위한 기초를 다지고 있습니다. 회사들은 바다에서 생선과 광물들을 약탈하고 있습니다. 광산회사들과 임업회사들은 야만스런 자국 자원추출11의 기획들을 통해 라틴아메리카의 풍경들을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단어, 색깔에서 냄새까지 모든 것이 상표로 등록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2초 지속되는 소리 조각들도 저작권으로 보호될 수 있습니다.

존 왕의 시대에는 종획이 거의 숲에 대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에는 생명 자체를 포함한 모든 것이 종획의 대상입니다.

 

앞에서 제기한 ‘누가 왕의 숲을 사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오늘날 법은, 헌법·선거·법정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커머너들이 스스로를 다스리거나 주권자에 맞서서 자신들의 권리를 옹호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을 정도로 현대의 주권자들에 의해 포획되고 부패되었습니다. 주권자의 위치에 있는 시장/국가는 시장교환의 논리에 의해 거의 모든 것을 집요하게 통제하고자 합니다. 

이로 인해서 커머너들이 자신들의 공통의 부를 사용하거나 자신들의 관리규칙들을 고안할 여지가―법적·문화적·경제적으로―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정계와 재계의 엘리트들과 그들 산하의 공복들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도덕적·사회적 정당성을 참칭하는 형식화된 합법성의 체계를 관리합니다. 내가 ‘토착법’(vernacular law)이라고 부르는 것―보통 사람들의 도덕적·정치적 권위, 거리의 규범들과 가치들―을 압도하기 위해서 합법성이 종종 사용됩니다. 한때 마그나카르타에 의해서 선언된 ‘커먼즈의 법’은 시장/국가의 권력의 도구가 되었으며 인간들의 전(前)정치적 주권의 표현이 되지 못했습니다. 시장/국가가 커머너들에게 속하며 국가에 선행하는 인간의 권리를 가로채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미국에서 기업들은 법적으로 인격으로 인정되어 실제의 개인들처럼 모든 시민권과 자유를 부여받습니다. 그러나 커머너들과 지구는 감정이 없고 존엄이나 권리도 없는 자원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마그나카르타를 경축하나요? 마그나카르타에 포함된 삼림헌장이 커머닝의 정당성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삼림헌장은 커머닝을 범죄의 범주에서 떼어내어 합법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역사적 사실은 그 자체로 중요합니다. 사실 민중이 마침내 스스로를 다스릴 자유를, 공정하고 정당하며 그들의 상황에 효과적으로 보이는 규칙들을 고안할 자유를 형식적 법의 형태로 현저한 정도로 인정받은 것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커머닝 덕분에, 그리고 그것이 삼림헌장에 의해서 형식적으로 인정 받은 덕분에 왕은 절대적 권위를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형식적 성문법 아래에서 커머너들은 주요한 도덕적 권리, 인간적 권리, 경제적 권리를 보유했습니다. 영원한 관습적 권리가 ‘보장된’ 것입니다. 혹은 적어도 왕이 커머너들의 권리를 인정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거버넌스에서 이루어진 주요한 전진이었습니다.

  

 

커먼즈를 위한 법을 재발명하기 

그런데 여기서 마그나카르타가 우리에게 다음의 과제를 남기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합법성을 정당성과 다시 통합할까요? 어떻게 우리 시대의 주권자인 시장/국가로 하여금 커머너들의 권리를 인정하도록 만들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내 생각에 성문법을 커머너들의 살아있는 공동체의 토착법과 다시 통합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마그나카르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법적 구조를 다시 발명하고 그럼으로써 마그나카르타를 현대에 실현하려고 할 필요가 있습니다.

 

커먼즈를 위한 새로운 법을 다시 발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우리는 마그나카르타와 국가법의 전통에 의존해야 하면서도 민중이 자신들의 고유한 규칙들을―민중이 보기에 공정하고 적절하면서도 정치체의 더 큰 원칙들을 따르는 규칙들을―만들 공간들을 의도적으로 분배해줘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민중이 커머닝에 참여하도록 허용되어야 합니다. 민중은 “자신들의 숲”을 스스로 관리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하면서 그 숲의 헌신적인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민중은 자신들의 통찰과 상상력에, 그리고 관습적인 사회적 관행에 의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민중은 공유된 공동체에 대한 감각을 개발하고 사물을 관리하는 고유한 관습들과 전통들을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법은 지리학자 니러 씽(Neera Singh)이 민중의 ‘정동 노동’(affective labor)이라고 부른 것을 존중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는 자신의 커먼즈를 관리하는 일과 병행하여 생기는 주관적 감정들, 정서들, 자긍심, 즐거움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물론 우리로 하여금, 인간을 항상 자신의 공리주의적 자기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계산하는 합리적 물질주의자들로만 보는 기존의 주류 경제학의 세계관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커머닝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형식적 합법주의를 넘어서는 유형의 법이라는 점입니다. 커머닝은 자신들의 계속 변하는 지역 상황들과 씨름하는 커머너들로부터 출현합니다. 커먼즈 기반의 법은 내재적인 실천적 현실이지 고정되고 영원한 초월적 이상이 아닙니다. 라인보가 쓰듯이,

 

커머너들은 먼저 권리증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 땅을 어떻게 경작할 것인가? 거름을 줄 필요가 있는가? 거기에 무엇이 자라는가? 그들은 탐구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자연적 태도라고 불러도 좋다. 둘째, 커머닝은 노동과정에 심어져있다. 그것은 밭, 고지, 숲, 습지, 연안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실천 속에 내재한다. 공통권은 노동에 의해서 가지게 된다.12 

이는 법 자체에 대한 매우 상이한 존재론적 이해입니다. 커먼즈를 위한 법은 번쩍이는 추상들이나 문자로 된 문서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커머너들이 경험하는 바의 껄끄러운 개별적 현실들에서 시작하며, 커먼즈들이 자치의 체계를 고안하는 경험에서 나옵니다. 마그나카르타는 형식적 성문법으로 도약하면서 어떤 원리들을 문명의 기억에 소중히 안치했을 수도 있으며, 이는 작은 성취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도약은 대가를 치르고 이루어졌습니다. 기억과 커머닝의 점진적 상실이라는 대가를.

마그나카르타를 채택한 이후 여러 해 동안 존 왕은 종종 의구심을 가진 커머너들과 국왕봉신들에게 자신이 계약을 실제로 지킬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수고를 들여야 했다는 점은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가 많습니다. 존 왕은 민중의 우려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종종 마그나카르타를 화려하게 재공표하여 마그나카르타가 여전히 나라의 법이라고 모두를 안심시켰습니다. 물론 종이 한 장으로 된 마그나 카르타는 사회의 문화와 정치가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만큼만 강했습니다. 그리고 추상으로서의 마그나카르타는 지배자의 권력남용(abuses)을 중지시키는 데서 제한된 가치만을 가진다는 것을 역사는 계속해서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마그나카르타의 원칙들을, 특히 삼림헌장을 우리 시대에 부활시키는 데서 진정으로 중요한 과제는 커머닝을 인정하고 보호하는 새로운 법체제를 고안하는 것입니다. 커머닝을 위한 공간들을 뒷받침하는 법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커머닝은 중세에 사라졌으며 지금은 단지 골동품과도 같은 것으로 남아있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커머닝은 늘 갱신되고 있으며 점점 더 풍요롭고 튼실해지고 있는, 오래된 사회활동입니다. 지금 세계 전역에서 커머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사실 커머닝이 얼마나 널리 퍼져있는가를 기록하기 위해서 제 동료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저는 최근에 새로운 선집 『커머닝의 패턴』(Patterns of Commoning)을 같이 엮는 작업을 완료했습니다. 이 책은 10월에 영어와 독일어로 동시에 출판될 것입니다. 50편 이상의 독창적인 에세이들로 구성된 이 책은, 일상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서 협동하고 공유하려는 억누를 수 없는 민중의 욕망을 탐구합니다.

이 책은 토착 농업 커먼즈들과 공동체 숲들, 하이테크 팹랩들(FabLabs, fabrication laboratories)13과 케냐의 대안통화들, 오픈소스 농장설비 커먼즈들과 커먼즈들의 공동 맵핑(mapping), 기타 많은 것들을 서술합니다. 이 책은 또한 주류 경제학의 존재론적 전제들에 대한 대안으로서 커머닝이 가진 내적 동학에 초점을 맞춥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인간은 단순히 이러저런 형태의 ‘경제인’(homo economicus)이 아니라 매우 특수한 지리, 역사, 문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복합적이고 진화하는 존재입니다. 이 선집은 2012년에 출판된 선집 『커먼즈의 부』(The Wealth of the Commons)의 자매편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지난 2년에 걸쳐 『커머닝의 패턴』을 엮는 작업을 하면서 저는 이런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만일 커머너들이 국가법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커먼즈를 믿음직하게 보호할 고유한 법을 발명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더 엄밀한 형태의 ‘커먼즈를 위한 법’이 있다면 어떨까요? 물론 저는 마그나카르타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 커머너들이 과연 오늘날에 맞는 새로운 형태의 커먼즈 기반 법들을 발명할 수 있을까요?

 

커먼즈 세계의 많은 부분들에서 실제로 법 혁신이 지금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릴 수 있어서 기쁩니다. 국가법 안으로 들어가서 커먼즈 법을 일구어낸14 초기의 사례들 가운데에는, 소프트웨어 관련으로는 GPL(General Public License)이 있고 내용 관련으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가 있습니다. 양자 모두 공유된 부를 보호하는 법으로서 기가 막힌 묘수들입니다. 이 라이선스들은 누구라도 공유된 코드, 글, 이미지 혹은 음악을 탈취하는 것을 방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구를 해나가면서 저는 커머너들의 권리를 보호하도록 의도된, 말 그대로 수십 가지의 매력적이고 영리한 법의 묘수들을 만났습니다. 예를 들어 토착민들의 농경제적 지식과 전통을 보호하도록 의도된 ‘바이오문화 프로토콜들’(biocultural protocols)이 있습니다. 협동의 원칙들에 제정을 대어 사회적으로 쓰이도록 하기 위한 협동조합법의 새로운 형태들도 존재합니다. 수압균열법(hydro-fracking)15, 유전자조작 농산물들 및 기타 기업에 의한 종획들에 반대하는 지역 공동체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있는 새로운 법적 기획들도 있습니다. 이해관계자 트러스트들(stakeholder trusts)로 하여금 대기에서 광물을 거쳐 지하수에 이르는 공통재를 보호하도록 하는 제안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기업 활동, 이윤을 목적으로 하거나 관료적 성격의 활동에 맞서는 것으로서16 커머닝을 후원하는 목적으로 발명되고 있는 새로운 조직형태들도 있습니다.

 

바로 지난주에 저는 하인리히 뵐 재단의 지원을 받아서 커먼즈를 위한 법적 혁신의 사례들 60개 이상을 개관하는 긴 전략메모를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P2P 재단>의 보웬스(Michel Bauwens)와 트론코소(Stacco Troncoso) 덕분에, 사람들로 하여금 커먼즈 기반 법의 수십 개의 사례들에 접근하게 해주는 온라인 위키도 존재합니다. 이 자료들은 ‘커먼즈를 위한 법’에 관한 새로운 대화를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마련되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대화는 마그나카르타의 역사에서 적집 나오며, 인권과 커머너들의 욕구를 깊이 존중하는 마그나카르타의 원칙들에 의존합니다. 

그런데 마그나카르타처럼 이 원칙들도 정치적 투쟁을 통해서만 현실화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커먼즈를 위한 법’을 단지 선언하기만 하면 된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커먼즈를 위한 법’이라는 발상 및 그 발상의 변주된 형태들이 우선 우리 시대의 맥락에 맞게 정식화되어야 하며, 그 다음에는 그것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기존의 법과 거버넌스의 체제들이 엉망인―대중의 존중을 받지 못하며, 민중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지구를 파괴하고 있는―때에 커머닝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법은 밝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커먼즈는 공정하고 개방적이며 효율적인 방식으로 민중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으며, 시장/국가 질서가 제대로 성취하지 못하고 있는 존엄·존중·평등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커먼즈는 또한 민중과 더 밀착된 관계를 만들어내고 민중으로 하여금 책임감을 갖도록 요구함으로써 앞으로 생태계를 지키는 데서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존 왕이 강압에 의해 커머너들의 권리를 인정하게 되었다는 점을 상기합시다. 우리시대의 지배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권리를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 시대의 진정한 과제는 창조적인 법적 묘수, 새로운 사회적 실천들과 정치적 투쟁을 통해 커먼즈를 위한 법을 다시 발명하는 일입니다. 법 형태의 장대한 언표만이 우리를 거기로 데려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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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특별히 유망한 법 기반의 커머닝의 한 영역은 디지털 영역입니다. 이는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오픈 디자인과 제작, 팹랩스 및 해커공간들, 비트코인의 블록체인 원장, 그리고 도시들을 바꾸고 있는 개방된 데이터 네트워크들의 세계입니다. 이는 커먼즈 기반의 수평적 자율생산(peer production)의 세계입니다. 여기서는 코드 자체가 법의 한 형식이 되며, 커머너들은 (종종은 국가의 법에 항의하며) 자신들의 주권을 주장하게 됩니다. 이를 더 논의하기 위해서, 저는 연단(演壇)을, <P2P 재단>의 창립자이자 <커먼즈 전략그룹>(the Commons Strategies Group)의 일원인 동료 보웬스에게 기쁜 마음으로 넘기겠습니다. ♣

 

 

 

 

 

 

  1. ‘law for the commons’를 어색함을 감수하면서 굳이 “위한”을 넣어 “커먼즈를 위한 법”이라고 옮긴 것은 볼리어가 서두에서 말한 전략 메모에서 ‘law of the commons’라고 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볼리어는 법은 커머닝(common)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말한다. [본문으로]
  2. ‘삼림’은 ‘forest’를 옮긴 것이다. 볼리어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당시 ‘forest’는 ‘woods’와 의미가 다르게 사용되었다. ‘woods’는 말 그대로 자연적 숲을 가리키며, ‘forest’는 법적 개념으로서 ‘woods’ 이외에 목초지, 연못 등이 더해진, 울타리 친 소유지를 가리킨다. 이렇게 어떤 숲을 법적으로 소유지를 만드는 것 ‘forestation’이라고 하며, 반대로 소유지를 푸는 것, 그리하여 커머너들의 접근을 허용하는 것은 ‘deforestation’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피터 라인보 지음, 『마그나카르타 선언』, 갈무리, 2012 참조. [본문으로]
  3. ‘자유권들’은 ‘liberties’를 옮긴 것이다. 당시 ‘liberty’는 주상적인 ‘자유’가 아니라 실제로 실행되는 구체적인 권리들을 가리켰다. 그래서 복수형으로도 사용되었다. [본문으로]
  4. 『마그나카르타 선언』에서 라인보는 ‘에스토버스’(estovers)―복수형이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정확하게 말해서 에스토버스란 관습에 따라 숲에서 채취하는 것을 가리키며 종종은 생계자급 일반을 가리킨다.”(69쪽) [본문으로]
  5. ‘초월적’이란 말은 커머너들 자신에 의해 만들어져 시행되지 않고 국가의 법으로 커먼즈의 외부에서 만들어져 커먼즈에 부과됨을 나타낸다. [본문으로]
  6. ‘젠트리’는 일반적으로 작위를 갖지 않은 지주들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7. ‘커머닝’(comnoning)은 동사 ‘common’의 동명사이다. 동사 ‘common’은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커머닝’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 강연 내에서 설명이 될 것이다. [본문으로]
  8. 바릭골드(Barrick Gold Corporation)는 금광을 채굴하는 미국의 광산기업이다. [본문으로]
  9. 지금 볼리어는, 웨스트민스터에 모인 자들은 마그나카르타의 원칙들을 어기는 자들인데 이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마그나카르타의 원칙 가운데 하나인 ‘법의 지배’를 경축하고 있다는 점을 꼬집고 있다. [본문으로]
  10. 국부펀드(Sovereign Wealth fund, SWF)는 정부 자산을 운영하며 정부에 의해 직접적으로 소유되는 기관을 말한다. 사실 데이빗 볼리어는 “sovereign investment funds”라고 했는데 이는 국부펀드의 발전된 형태이다. 양자의 차이는 이 맥락에서는 무시할 만하고, “sovereign investment funds”는 아직 번역어가 정착되지 않았기에 이미 정착된 ‘국부펀드’를 사용하여 옮겼다. [본문으로]
  11. ‘자국 자원추출’은 ‘neo-extractivism’을 옮긴 것이다. ‘extractivism’에는 ‘채굴주의’라는 번역어가 쓰이는데, 문제가 있다. 영어의 접미사 ‘-ism’은 우리말로 ‘-주의’ 혹은 ‘-론’로 옮겨지는 의미만 가지지 않는다. 우리말 ‘-주의’나 ‘-론’은 이론, 학설, 주장, 견해 등에 쓰인다. 영어 ‘-ism’에는 이런 의미도 있지만 이 이외에도 여러 다른 의미가 있으며 이는 ‘-주의’나 ‘-론’으로 옮길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비판’ 혹은 ‘비평’으로 옮기는 ‘criticism은 완료된 행동이나 결과를 나타낸다. ‘exorcism’도 이 범주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야만’으로 옮기는 ‘barbarism’은 특정 집단의 행동이나 행위를 나타낸다. 산업화 혹은 자본주의와 연관된 ‘extractivism’은 자연자원을 대량을 추출하여 가공하지 않은 채 혹은 제한된 정도로만 가공하여 수출하는 활동을 가리킨다. 이는 식민주의 및 신식민주의적 약탈과 연관된다. ‘neo-extractivism’은 기본적인 성격은 그대로 유지한 채 자원추출 및 수출의 주체만 후진국 자국의 정부(라틴아메리카의 진보적 정부들)로 바뀐 것이다. ‘extractivism’이나 ‘neo-extractivism’의 번역어는 이런 활동을 나타내는 말이어야 한다. 여기서는 ‘-주의’를 빼고 전자는 ‘해외 자원추출’로, 후자는 ‘자국 자원추출’로 옮긴다. 만족스런 번역어는 아니지만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을 찾기 전까지는 임시로 여기에 만족하기로 한다. ‘채굴’은 광물에만 국한되는 말인데, ‘extraction’은 광물자원에만 국한되지 않으므로 (원래는 사탕수수에 쓰였던 말이라고 한다) ‘채굴’을 쓰지 않고 더 넓은 ‘추출’을 택하기로 한다. [본문으로]
  12. 『마그나카르타 선언』 75쪽. [본문으로]
  13. 디지털 장치들을 제작하는 소규모 작업실들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14. 볼리어는 사실 “Some of the earliest legal hacks of state law”라는 말을 썼다. 이는 만일 직역한다면 ‘국가법의 법적 해킹의 초기 사례들 가운데 일부’ 정도가 된다. 이를 이해하려면 여기서 “hack”이란 단어가 맥켄지 워크가 그의 『해커 선언󰡕에서 제시한 ‘해킹’ 개념을 (‘hack’을 ‘hacking’과 같은 의미의 명사로 사용한다) 받아서 쓴 말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는 일단 직역하지 않고 맥락에 따라 의역해놓기로 한다. 워크의 ‘hack’에 대해서는 http://trustsun.net/xe/bookreading/100965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15. 이는 압축된 액체를 바위에 나있는 구멍에 주입하여 바위에 균열이 가게 함으로써 생성되는 틈들을 통해 가스나 석유 등이 더 잘 흘러나오게 하는 기술이다. 일본 위키피디아에서는 ‘수압파쇄법’이라 옮겼는데, 바위를 부순다기보다는 균열을 내는 것이기에 일단 ‘수압균열법’으로 옮기기로 한다. ‘htdro-fracking’ 말고 ‘Hydraulic fracturing’, ‘hydrofracturing’, ‘fracking’, ‘fraccing’으로 적기도 한다. [본문으로]
  16. 원문에는 “as opposed to business, bureaucratic or nonprofit activities”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nonprofit”은 “for-profit”의 오기인듯 하다. [본문으로]

 




국가의 사멸 3.0

 


* 아래는 P2P 재단 블로그에 2018년 1월 25일 자로 게시된 미셸 보웬스(Michel Bauwens)의 글 “Withering Away of the State 3.0.”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은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 Share Alike 3.0 Unported License를 따른다.


 

며칠 전에 우리는 프랭크 파스콸레(Frank Paquale)의 주목할 만한 발표를 소개했다. 그는 구글, 페이스북, 우버 혹은 에어비앤비와 같은 새로 등장한 ‘넷지배’(netarchical) 기업들이 이전에 ‘국가’와 ‘정부’가 담당했던 기능들을 점점 더 많이 가지게 되어 민주적으로 책임성 있는 공적 권력—그 책임성이 때로는 매우 미미했을지라도—을 그가 ‘기능적 거버넌스’(Functional Governance)라고 부르는 것으로 대체함을 보여주었다. 이 효과는 토큰화된 경제(the tokenized economy)의 출현 및 성장에 의해 강화되는데, 이 경제는 앞의 경우와는 다르지만 동일한 결과에 도달하려는 시도이다. 토큰 경제를 잘 이해하는 방법은 개발자들과 창조계급이 시장 가치를 주식보유자들로부터 재포획하고 분산된 플랫폼들을 통해서 일종의 신(新)길드 체제를 창출하려는 시도로 보는 것이다. 토큰들은 실로 플랫폼들에서 디자인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직접 시장가치를 포획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대부분의 토큰 기반 기획들은 시장 경제의 추출적 기능에 결코 도전하지 않으며 그 분산된 다자인에도 불구하고 멱함수 법칙(power law)의 동학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있고 있는 것은, 순전히 동등하기만 한 구조들은 희소한 자원을 위한 경쟁으로서 디자인된다면 실제로는 당연하게도 과두제를 향해 진화한다(멱함수 법칙에 의한 집중, 즉 반복될 때마다 더 강한 사람이 더 많은 이익을 얻는다)는 점이다. 이 점은 ‘모노폴리’라는 게임을 해본 사람이면 금세 이해할 것이다. 그래서 중앙집중화된 넷지배 플랫폼들과 비트코인 및 기타 많은 (모두는 아니다!) 토큰 기반 블록체인 응용태들과 같은 이른바 ‘분산된’ 아나키즘적-자본주의적 구조들은 동일한 효과를 낳는다. 책임성 없고 비민주적인 사적 ‘화폐’ 권력이 강화되는 것이다.

이 권력은 진보적 도시들과 쇠퇴하는 국민국가들의 힘을 축소시키는 초국적 권력을 가진 ‘기업 주권체들’(corporate sovereigns)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새로 출현하는 국민 포퓰리즘[우익 포퓰리즘]의 권위적인 해결책들은 이에 대한 올바른 대응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더 복지 지향적인 국민국가를 부활시키고자 할 뿐인 좌익 포퓰리즘의 시도도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올바른 대응이 아니다. 특히 전지구적 환경위기의 맥락에서 그렇다.

어떤 역설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이 문제의 안쪽에는 밝은 희망이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현실이 국가의 ‘사멸’을 둘러싸고 좌파의 해방론적 전통들 사이에 벌어진 오래된 논쟁에 새 빛을 비추어주기 때문이다.

이미 19세기에 아나키스트들은 국가가 곧바로 철폐되고 자유로운 생산자들을 대표하는 집단들의 ‘자유로운 연합’이 그것 대신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맑스주의자들은 불평등한 사회에서 체계의 평형을 유지하는 국가의 역할을 철폐하는 것은 공적 권력을 사적으로 군사화된 지배계급의 거친 권력(준군사적 군대 등)으로 대체하자는 처방일 뿐이라고, 내 생각에는 옳게, 주장했다. 아나키스트들이 상상한 것이, 노숙자들이 경찰의 저지가 없이 빈 집을 점유하는 것이었다면, 실제 현실에서 그들은 소유자 계급이 고용한 준군사적 군대에 의해 살해될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래서 국가의 사멸이라는 생각이 나왔다. 이 시나리오에서는 노동계급 운동이 점진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거나(사회민주주의 버전) 더 강력하고 직접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지만, 국가기능을 점차적으로 대체한다는 명확한 목적으로 가지고 그렇게 한다. (이는 맑스가 그의 2단계론에서 표현한 바이다. 이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교환논리와 국가의 역할에 의해 공히 특징지어지면, 둘째 단계만이 별도의 국가기능의 완전한 소멸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역설은 이 더 근본적인 시나리오의 메아리가 기업 주권체들과 자유방임주의적 정신을 가진 토큰 경제의 전술에서 울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사유화된 상호화’ 모델이 가진 우월한 효율(즉 공급과 수요를 효과적으로 서로 맞추는 사적인 플랫폼들), 사용자 데이터에 대한 통제력과 인간의 행위를 은근히 자극하는 능력, 그리고 이 플랫폼들에서 ‘잉여 가치’를 직접 빨아들이는 능력을 통해 이전에 공적 부문이 담당했던 기능들을 수행하고 있다. (라이드셰어링이 대중교통과 경쟁한다든지 아니면 규제를 받지 않는 주택공유가 규제를 받는 호텔 등을 대체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세계 전체가 쇼핑몰이 되어가고 있으며 언론의 자유나 기타 권리들은 사유재산의 절대적 권리를 통해 부식되고 있다.

‘국가의 사멸’은 이제 더 이상 유토피아적 시나리오에만 속하지 않는다. 사실 넷지배 플랫폼들의 침탈적이고 규제 받지 않는 관행들은 국가의 디스토피아적 해체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이와 달리 P2P재단의 우리들은 더 나은 미래, 해방적 힘들이 환경 및 평등 문제를 풀어가면서 관료화된 국가 기능들을 점차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미래를 향하도록 이 과정을 해킹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주장한다. 실로 도시 삶의 사회적·환경적 평형에 관심을 가진 시민들이 주도하는 기획들에서 이미 기능적 거버넌스가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거버넌스와 소유의 협력적 형태들은 잉여를 스스로의 발전에 할당할 수 있고 기여자들의 생계를 창출하는 데 할당할 수 있기 때문에 (특히 협력적 생태계들을 형성할 수 있다면) 넷지배 플랫폼들을 협력 능력에서 앞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런 시나리오를 우리의 최근의 보고서 『어번 커먼즈 이행을 통해 사회를 바꾸기』(Changing Societies through Urban Commons Transitions)에서 개괄한 바 있다.

우리의 지도그리기와 플랑드르의 헨트(Ghent) 시의 500개의 어번 커먼즈들에 대한 연구에서 발견했듯이, 거의 모든 자급체계들(이동성, 주택 등)이 현재 아직은 주변적이지만 점증하는 새로운 커먼즈 중심적 대안들에 의해 담당되고 있다.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 지역들처럼 헨트와 플랑드르에서도 커먼즈 기반 기획들이 지난 10년 동안 10배 증가했다. 그러나 사유화된 플랫폼들과 달리 이 기획들은 자본이 충분하지 않으며 종종은 단편화되어 있다. 어떻게 이 단편화를 해결할 것인가? 다음은 이에 대한 우리의 제안이다.

· 모든 자급체계에 대해서 그런 자급을 조직하는 데 필요한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저장소가—무니라이드(MuniRide)와 페어비앤비(FairBnB) 유형의 해결책을 위한 일종의 깃허브(github)가—있다고 상상하자.

· 이 해결책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그 규모를 키우기 위해서 우리는 도시들, 협동조합들, 심지어는 노동조합들이 연합을 이루어 P2P 혹은 커먼즈 기반의 해결책들을 전지구적 규모로 키우는 물질적 조건을 창출하기를 제안한다.

· 지역적으로, 가령 도시나 바이조이역의 수준에서 구성되는 이러한 연합들은 다중이해관계자들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플랫폼 협동조합들을 창출한다. 이 플랫폼들은 전지구적 소프트웨어 저장소들을 사용하지만 이 저장소들을 지역의 맥락과 필요에 맞추며 또한 시간이 가면서 더 많은 기능들을 추가함으로써 공통의 코드 베이스(code base)를 더 낫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플랫폼의 모든 잉여는 원거리 소유자들의 배당금으로서가 아니라 기반시설의 공동개발과 모든 기여자들의 생활을 더 낫게 만드는 데 재투자될 수 있다.

· 그렇다면 넷째 층은 교환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 생산이다. 실로 이 단계에서 어번 커먼즈들은 재화를 다양하게 분배하지만 재화 자체를 생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서술한 전지구적 커먼즈가 마이크로팩토리들(microfactories, 초소형 공장들)을 통해 재분포된 지역에서의 생산과 부합하는, 코스모-지역적(cosmo-local) 생산체계를 그려볼 수 있다. 여기서 마이크로팩토리들은 열린 협동조합들이기도 하다. 즉 자신들의 구성원들로부터 가치를 포획할 뿐만 아니라 더 넓은 공동체에 혜택을 주는 커먼즈를 창출하는 데 전념하는 협동조합들이다.

우리가 이렇게 노력하는 가운데 사유화된 플랫폼과 추출적 토큰 경제의 발전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자연에 남기는 인간의 발자국을 줄이는 것을 의식하면서 토큰을 기여상의 정의를 위해 다시 디자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소식은, 협력적 상호화가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리적 기반시설의 상호화가 인간의 발자국을 줄이는 최선의 길이며, 이는 지식의 완전한 공유를 보장하면서도 보상의 더 정당한 분배와 결합될 수 있다.

우리 생각에 성공의 열쇠는 초지역적으로 그리고 초국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우리의 접근법의 공간적 혹은 지리적 논리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지역(local), 도시, 바이오지역의(bioregional) 기획들은 그 사용자 기층에 가까운 사회적 필요를 위해 생산하고 교환한다.

· 그러나 초-지역적, 초-국가적 지식 베이스들을 사용한다.

· 참여자들은 지역의 수준에서 생산하지만 초-국가적이고 평등한 지식-길드들과 전지구적 이고 초국적인 덕행적(entredonneurial)(([옮긴이] ‘entredonneurial’은 ‘중간으로부터 취하는’(‘taking from in between’)이라는 의미를 가진 ‘entrepreneur’에 대응시키기 위해서 만든 개념으로서 ‘중간에 주는’(‘giving to the in between’)이라는 의미이다. 좋은 번역어를 찾기 전까지 일단 ‘덕행적’이라고 옮긴다.))연합들을 조직할 수 있다.

국민국가 수준에서 진보적 다수의 역할은 이 지역적, 초-국가적 기반시설을 강화하고 사회적으로 정당하고 환경적으로 균형을 갖춘 지속적인 자급체계들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 자급체계들은 그—이 경우에는 민주적이기도 한—기능적커먼즈 거버넌스 덕택에 사유화되고 추출적인 초국적 권력구조들을 수행의 측면에서 능가할 수 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영토의 수준에서 메타거버넌스를 보장하는 파트너국가로 변형되어야 한다. ‘파트너국가’는 현재의 국가장치를 하루아침에 마법적으로 변형할 것을 필요로 하는 이행이 아니다. 이는 공적 영역과 커먼즈의 연계를 통해 관리되는 참여적이고 민주적인 기능적 거버넌스 배치를 진보적 연합들이 승인하고 촉진하는 데 점점 더 많이 참여하는 형태를 띨 수 있다. 파트너국가는 또한 커먼즈 지향적 대안에 공감하고 그것을 지원할 공무원들과 정치가들이 발견될 수 있는 곳에서라면 행정 구조의 모든 틈새 영역에 모든 수준에서 적용될 수 있다. 파트너 타운들, 도시들, 바이오지역들, 혹은 더 광범한 초국적 구조들을 생각해보라. 공적 영역과 커먼즈가 연계한 협력적 형태의 자급이 개시되고 성장하는 정도로, 우리는 시민사회의 참여에 뿌리를 둔 더 민주적인 형태들에 의해 관료적이고 권위적인 국가 기능들을 사멸시키는 데 성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형의 과정에서 우리가 국민국가보다는 새로운 초-국가적 구조들의 역할과 기능을 강조한다는 점을 주목하라.

실로

1. 고전적인 산업자본주의는 자본-국가-국민이 하나로 통합된 구조로 간주될 수 있으며, 여기에 칼 폴라니(Karl Polanyi)가 발굴한 이중 운동의 논리가 적용된다.

2. 시장 기능이 국가와 시민의 규제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 때면 언제나 사회가 불안정해졌고 이것이 시장을 다시 사회에 함입시키려는 민중의 움직임을 낳았다는 것이다.

3. 그러나 초-국가화된 자본의 경우에 국민국가의 규제는 미미해졌으며 우익의 국민 포퓰리즘과 좌익의 사회적 포퓰리즘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

4.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균형을 실질적으로 다시 잡으려면 초-국가적, 초-지역적 수준에서의 대항-헤게모니적 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좋은 소식은 이 힘이 실제로 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 P2P 동학과 커먼즈에 기반을 둔 전지구적 오픈소스 공동체들과 기타 전지구적 생산공동체들이 부상하고 있다.

· 전지구적 기업가 연합이 이 오픈소스 지식 베이스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이들 가운데 점점 더 많은 수가 의식적으로 생성적인 연합이 되어 커먼즈에 대한 그리고 커머너들의 생계에 대한 지원을 생성하고자 한다.

· 도시들의 (그리고 협동조합들, 노동조합들, 윤리적 자본의) 전지구적 연합은 이 초-국가적 수준에서 공통의 훌륭한 기능을 수행하여 이 새로운 커먼즈 기반 전지구적 기반시설들을 떠맡는 전지구적 트러스트들을 창출할 수 있다.

이것이 국가의 사멸 3.0이다. 즉 국민국가 수준 너머에서 수립된 민주적으로 책임성 있는 기능적 거버넌스이다.




탈성장운동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가 그의 블로그에 올린 2014년 12월 13일자 글 “Degrowth, the Book”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나’는 볼리어이다. 

 

『탈성장』(Degrowth)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경제성장을 인간 진보의 본질로 보는 산업사회에서는 성장을 고의적으로 거부한다는 것이 미친 짓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지금 지구의 생태계는 세계 경제에 대하여 이와 같은 거부의 말을 던지고 있다. 그것은 또한 확대되는 ‘탈성장’(Degrowth) 운동―이는 특히 유럽과 지구상의 후진 지역에서 강하다―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몇 달 전에 나는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열려서 세계 전역에서 3천 명이 참가한 대대적인 탈성장 컨퍼런스에 대해 볼르그에 글을 올린 바 있다. (유튜브에 있습니다―정리자) 거기서 이루어진 논의의 기본적 요점은, 어떻게 성장이라는 물신(物神)을 이론적·실천적으로 넘어서느냐, 그리고 어떻게 ‘경제’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변형시켜서 그것이 민주주의, 사회적 복지, 생태적 한계와 같은 중요한 가치들을 포함하도록 만드느냐였다.

 

운동의 지도적 인물들 가운데 몇몇이 글모음집인 『탈성장―새로운 시대를 위한 어휘』(Degrowth: A Vocabulary for a New Era, Routledge)라는 책을 펴냈다. 이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에 있는, 탈성장에 관한 모색의 결과를 포괄적으로 개관하는, 영어로 된 첫 번째 책이다. 이 책에 대해서 더 알아보려면 책의 웹사이트로 가서 재미있는 3분짜리 비디오를 보면 된다.(클릭)

 

편자(編者)들―자코모 달리사(Giacomo D’Alisa), 페데리꼬 데마리아(Federico Demaria), 히오르고스 칼리스(Giorgos Kallis)―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자율대학의 학자들이며 <연구 및 탈성장>(Research & Degrowth) 그룹의 구성원들이다. 편자들은 탈성장을 “성장이라는 환상을 거부하고 경제주의의 상투적 어구에 의해 식민화된 공적 논쟁을 다시 정치화하자는 요구”라고 설명한다. 그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사회 정의와 생태의 지속 가능성을 이루기 위해서 민주적인 방식으로 생산과 소비를 줄이는 것”을 달성하는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다. 

 

책 표지에는 이 책이 이렇게 소개되고 있다.

 

우리는 경기침체, 급속한 빈곤화, 상승하는 불평등과 사회-생태적 재난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회에서 우세한 담론에 따르면 이것들은 경제적 위기의 결과, 성장의 결핍이나 저개발의 결과이다. 이와 달리 이 책은 바로 성장이 이 문제들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며, 성장이 비경제적이 되었고 생태적으로 지속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내적으로 정의롭지 못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사용되는 언어가 간절하게 표현되어야 할 것을 표현하기에 부적절하다면, 새로운 어휘가 필요한 때이다. 프랑스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세계 전역으로 퍼진 활동가들과 지식인들의 한 운동은 공적 토론이 경제주의의 상투적 어구로부터의 해방되고 경제성장을 사회적 목적으로 삼던 관행을 폐지할 것을 요구한다. ‘탈성장’(Degrowth, [프]‘décroissance’)이 그들에게는 자연자원을 더 적게 사용하고 발본적으로 다르게 살기 위해 스스로를 조직하는 사회가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을 의미하게 되었다. ‘소박’(Simplicity), ‘공락(共樂)’(conviviality)1, ‘자율’, ‘돌봄’(care), ‘커먼즈’, ‘데빵스’(dépense)2가 탈성장 사회가 어떤지를 표현할 단어들 가운데 일부이다.

 

이 책은 성장과 관련된 기본 용어들의 ‘사전’으로 조직되었으며, 4부로 나뉜다. 1부는 발전, 환경 정의, 삶경제학(bioeconomics) 그리고 반(反)공리주의와 같은 사고의 방향과 관련된 주제들을 다룬다. 2부는 자본주의, 상품화, 엔트로피, 돌봄노동 등과 같은 중심적 용어들을 다룬다. 3부는 도시 정원(urban gardens)과 협동조합에서부터 생태공동체와 노동공유(work sharing)에 이르는 현장의 포스트성장적 대안들을 개관한다. 4부는 ‘연대’가 주제로서 탈성장 프로젝트와 함께할 수 있는 사상조류들, 활동가들, 개념들로서 부엔비비르(Buen Vivir), 영구 경제학(Economy of Permanence), 페미니즘 경제학, 우분투(Ubuntu)를 다룬다.

 

팀 잭슨(Tim Jackson), 크리스 칼슨(Chris Carlsson), 줄리엣 쇼(Juliet Schor), 조수아 팔리(Joshua Farley), 아르투로 에스꼬바르(Arturo Escobar), 쌔뮤얼 알렉산더(Samuel Alexander), 호안 마르티네즈-알리에(Joan Martinez-Alier)가 책의 기고자들에 포함되어 있다. 나와 질케 헬프리히(Silke Helfrich)도 커먼즈에 관한 글 하나를 기고했다. ♣

12월 16일 볼리어의 업데이트 : 편집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부터 책이 매진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한편 2015년에는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번역본이 나올 것이다. 

*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됩니다. 

  1. 이반 일리치(Ivan Illich)의 개념으로서, 단순히 즐거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구들을 그 도구들을 통제하는 전문가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모두가 공유하며 사용하는 사회(“a society in which modern tools are used by everyone in an integrated and shared manner, without reliance on a body of specialists who control said instruments”)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2. 삶의 재생산과 보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를 넘어서 지출되는 과잉 에너지를 가리킨다. 인간을 동물의 수준(보존을 위한 자원획득의 지평)을 넘어서 비로소 인간으로 만드는 에너지. [본문으로]

출처: http://minamjah.tistory.com/81?category=452913 [百手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