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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폴리스로서의 커먼즈버스

 



[볼리어의 설명]

아래의 글은 내가 2023년 5월 31일 베를린에서 열린 워크숍 「자유주의를 넘어: 커먼즈, 입헌정치 그리고 공동선」에서 발표한 것을 약간 손본 것이다. 이 워크숍은 <막스 플랑크 비교 공법 및 국제법 인스티튜트>, 뷔르츠부르크 대학 법학과 그리고 <뉴 인스티튜트>(독일, 함부르크)가 주관했다.

발표 비디오는 여기서 불 수 있다. 내 발표는 타임코드 5:32에 시작한다.

 

평행폴리스로서의 커먼즈버스: 기회와 도전

이 워크숍에 의해 촉발된 대화는 시기적절하고 필수적이다. 이는 정치경제 및 문화와 관련하여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그 많은 것들이 우리 눈앞에서 서서히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그토록 많은 거대 서사들—시민권•자유•재산권•경제성장•가치이론—이 요즈음에 문제시되었다고 말해야 온당할 것이다. 기존 사회제도와 사고 범주들이 그다지 잘 작동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한편으로 구조변화 및 필요한 대안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이는 그런 이야기가 괴물들과 카오스가 든 판도라의 상자를 열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기후변화, 권위주의적 민족주의, 야만스런 불안정성 및 불평등 그리고 사회제도 붕괴라는 위험지대들로 더 깊이 들어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선택할 것이 거의 없다. 우리는 몇몇 고착된 습관들을 버릴 필요가 있다. 우리는 새로운 북극성과 한층 안정적이고 유익한 질서를 필사적으로 찾을 필요가 있다.

오늘 나는 커먼즈라는 생각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아주 많은 것들—자본주의적 정치경제, 국가권력, 사회적 관계 및 위계들, 지구와의 관계, 우리의 내적인 삶들—을 다시 상상할 엄청난 가능성이 이 생각에 담겨있다는 제안을 하고 싶다. 확실히 이것은 당찬 제안이고 장기적인 기획이다. 문제가 있는 시스템에 고착되어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기존의 것과는 매우 다른 사회적 논리들 및 제도적 형태들을 개발해야 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식민주의, 그리고 우리가 내면화했거나 억제한 규범들을 가진 중앙집권화된 국가권력이라는 해결되지 않은 트라우마들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발표문에서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커먼즈와 커머닝이 우리에게 공동선의 비전을 재발명할 발판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비전은 우리가 세포 수준에서 한층 인간적인 사회관습들과 윤리적 행동들을 발전시키는 것을 촉진할 수 있으며, 이 관습들과 행동들이 확장하면서 우리는 자본축적, 소비주의, 성장을 통한 진보의 세계 너머로 이동할 수 있게 된다.

확실히 오늘날 대다수의 커먼즈는 중요한 의미를 갖기에는 너무 소규모이고, 지역적이며, 캐시푸어(cash‐poor)인 것으로 일축된다. 주류에게 커먼즈는 군내나는 괴짜다. 주류들의 ‘점잖은’ 의견에 따르면 “일을 해내기” 위한 본격적인 체제로 시장과 국가가 유일한 것으로 가정된다. 사적부문과 공적부문이 있고 그 밖에 것은 실제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허울만 좋은 주장이거나 적어도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매우 편협한 프레임을 씌운 것이다. 시장과 국가는 둘 다 경제성장을 찬양하고, (서로 다른 역할을 가지고 있더라도) 자유주의적인 정치적•경제적 질서를 촉진하는 데 있어서 긴밀하게 동맹한다. 국가는 속박되지 않은 시장들이 성장, 세수(稅收), 시민들의 사회적 이동성을 발생시키기를 원한다. 반면에 기업들과 투자자들은 국가가 안정된 통치, 법적 특권들과 기업활동을 위한 보조금을 제공해주고, 금융위기, 생태적 재난, 시장 악용 및 기타 ‘시장 외부효과들’ 이후 상황정리를 해주기를 원한다. 국가와 시장은 우선사항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공생한다. 시장국가 체제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말이 될 만큼 충분히 말이다.

커먼즈는 국가와 시장이라는 바로 이 체제에 대안이 되는 비전이다. 정치가들과 경제 전문가들은 커먼즈를 손짓으로 간단하게 묵살할 수 있지만 커머너들은 더 심오한 진실을 즉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전제들이 비록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더라도 뿌리 깊숙이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2008년 금융 위기는 전 세계 금융세력과 자본주의의 오만한 힘을, 그리고 그 힘의 남용을 영속시키는 일에 자유주의 국가가 공모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브렉시트의 도래,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COVID, 긴축재정 정치, 도널드 트럼프, 보수적 민족주의 그리고 인종적•민족적 타자화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강화할 뿐이었다.

나는 경제성장이 유토피아적 환상임을 폭로하고 있는 기후변화의 잔혹한 현실—홍수, 가뭄, 산불/들불, 기상이변—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경제성장을 위한 자원 추출 및 탄소 에너지 자원에의 의존은 지속될 수 없다. 전 세계 비(非)백인들—식민주의와 강제적인 자본주의적 개발의 희생자들—이 배상금, 생태복원 및 기후정의를 요구하므로 자본주의적 개발을 이 세계에 강요하려는 충동은 지속될 수 없다.

새로운 정치가들, 정책들 또는 법들이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그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구조적인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자전거가 우리를 달로 데려갈 수 없듯이 시장‑국가 체제는 그 문제들을 극복할 어포던스(affordance, 행동가능성)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정치공백기에 빠졌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오래된 질서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며 새로운 질서는 아직 태어날 준비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체코 극작자인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에게서 영감을 얻고 그를 길잡이 삼는다. 1970년대에 그를 비롯한 문화계의 반정부 인사들이 전체주의적인 억압 시스템—그의 경우에 체코 정부—에 직면했을 때 하벨의 전략적 반응은 그가 평행폴리스(parallel polis)라 부른 것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평행폴리스는 공동체가 만든 안전 공간으로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로 지원하고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직접 생산하며 일종의 그림자 사회(shadow society)를 구축한다.

평행폴리스라는 발상은 여러 목적에 복무한다. 사람들은 공식적인 선전의 허위를 폭로하고 가능한 것에 관한 자신들의 상상력을 확장할 공간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은 예시(豫示)적인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면서 수평적이고 공락(共樂)적인 상호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그들은 진실을 말할 수 있고 건전한 가치들을 표현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엄성, 사회적 유대 및 희망을 다시 주장할 수 있다.

나는 커먼즈버스(Commonsverse)를 일종의 평행폴리스로 본다. 커먼즈버스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시스템 변화를 가져오는 방법으로서의 커머닝에 복무하는 무수한 기획들, 조직들, 사회운동들이다. 나는 이미 존재하는 엄청나게 다양한 커먼즈들을 소개하기 위해 『커머너의 변화만들기 목록』(The Commoner’s Catalog for Changemaking)을 2년 전에 출간했다. 여러분이 몇몇 참조점을 확인할 수 있도록 간략한 개요를 제시할까 한다.

커먼즈로서의 토지. 토지를 탈상품화하는 것은 토지를 지역의 농사용, 주택용 및 보존용으로 접근가능하고 제공가능도록 만드는 중요한 하나의 방법이다. 이 점에 있어서 한 가지 중요한 수단은 시장에서 토지를 빼내어 그것을 영구히 커먼즈로 만드는 공동체 토지 신탁(community land trusts)이다.[주석1] 토지 신탁은 풍경을 보존하고 부의 불평등을 줄이며 영양이 풍부한 식량을 지역별로 키우는 것을 더 적합하게 만드는 일을 촉진한다. 공동주택, 주택 협동조합 또는 독일 신디케이트(Mietshäuser Syndikat) 같은 연합체의 ‘피어(동료) 주도 프로젝트들’(Peer-directed projects)은 국가나 지역 공동체에 의한 기획들과 나란히 사회적 주택을 제공할 수 있다.

서양에서의 지역 식량 주권. 유럽과 북미에는 지역농업과 식량 공급망을 재발명하는 운동들이 많다. 유기농 지역경작이 50년 전에 처음 이 운동을 시작했고 이는 지금은 퍼머컬처, 농업생태학, 슬로우푸드 운동 및 심지어 슬로우피쉬 운동에서 나타난다. 푸드 협동조합들은 농부들과 소비자들을 한데 모아 상호적으로 부양하는 관계를 맺도록 하기 위한 — 가격을 낮추고 한층 안정적인 지역 식량 공급을 보장하며 친환경 농경을 보증하는 것을 돕는 — 긴 시간에 걸쳐 입증된 모형이다.

커먼즈로서의 도시. 바로셀로나, 암스테르담, 서울, 볼로냐, 그리고 수십 개의 주요 도시 및 소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협력적인 거버넌스의 새로운 형태들을 실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커먼즈-공공부문 파트너십은 메이커스페이스(makerspace)[주석2], 도시농업 시스템, 시민 정보 커먼즈 그리고 근린지역 개선 및 서비스를 창출하고 있다. 이 파트너십은 시민들에게 권한을 주고 사회 기본구조를 다시 짜며 부유한 개발자들과 투자자들로부터 도시에 대한 시민대중의 통제권을 되찾는 길이다. 또한 도시에는 많은 독립적인 커먼즈 기획들, 예를 들어 공동체 텃밭(community garden), 에너지 생산 커먼즈, (카탈로니아의 Guifi.net 같은) 지역 와이파이 시스템 등이 있다.

전통적이고 토착적인 커먼즈. 어림잡아 전 세계 20억 명의 사람들이 어장농지목초지야생 사냥감의 파수를 통해 일상 생계를 커먼즈에 의존하고 있다. 전통적인 공동체와 토착민들에 의해 수행되는 커머닝은 그것이 산업형 농업에 대한, 지역에 기초를 두는 친환경적인 대안임을 입증하고 있다. 전 세계 생물 다양성의 대략 70%가 토착민들이 운영하는 땅에 존재한다.

대안적인 지역 통화. 전 세계 많은 공동체들이 그들 고유의 지역 통화를 만들었다. 그 목적은 금융가치가 주요 금융기관들로 빨려 들어가도록 두지 않고 그 가치를 지역에 잡아두는 것이며 그래서 지역 시장, 일자리 창출,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을 활성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태어난 서부 메사추세츠에서 버크셰어즈(BerkShares) 통화는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대안 통화가 되었다. 타임뱅킹(Timebanking)은 또 하나의 가치 있는 통화혁신—많은 돈 없이 나이 든 사람들과 일반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하는 서비스‑교환 시스템—이다.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와 피어 생산. 프리 소프트웨어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의 지난 25년간의 폭발적 증가는 커머닝의 강력한 상징이다. 프리 소프트웨어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는 코드를 탈상품화하고 스스로 조직된 개방적인 공동체의 창조성을 고양시킴으로써 리눅스, 인터넷을 위한 필수적인 하부구조, 위키피디아 그리고 (그룹 심의, 그룹 예산안 작성 및 클라우드에의 파일저장을 위한) 많은 세계 규모의 소프트웨어 시스템들을 구축했다.

코즈모로컬 생산. 한 가지 강력한 오픈소스 파생물은 코즈모로컬 생산 즉 전지구적으로는 디자인과 지식의 공유를, 지역적으로는 사물들의 물질적 생산을 관장하는 시스템이다. 이 과정은 자동차•가구•주택•전자기기•농장시설에 이미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는, 상업적인 의료용 제품보다 더 싸고 더 정교한 자동인슐린주입 장치를 생산한, 당뇨병환자로 이루어진 전지구적인 공동체도 있다. 농업기계의 코즈모로컬 생산은 <팜핵>(Farm Hack)과 <오픈소스 에콜로지>(Open Source Ecology)에서 볼 수 있듯이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세계 일류 디자인을 갖춘 저가의 농장 장비를 생산하는 것을 돕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와 공유 가능한 콘텐츠. 20년 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의 발명은 돈을 지불하거나 허가없이 글쓰기, 음악, 이미지 및 기타 창조적인 장르들을 법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자유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자율적인 공공 라이선스는 이제 전 세계 170개가 넘는 법시행 관할구역에서 인정을 받고 있으며 다른 상황에서라면 저작권법 하에서 ‘저작권 침해’로 여겨질 방식으로 엄청난 양의 콘텐츠가 공유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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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커먼즈들 각각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것들이 항상 그 맥락의 특이성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나는 비상업적인 극장에, 오픈소스 테크놀로지로 구축되는 최고 품질의 과학 현미경에, 인도주의적인 구조를 돕는 온라인 지도에, 그리고 난민들과 이주자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일에 주력하는 커먼즈를 발견해서 깜짝 놀랐었다. 각각의 경우에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독특한 재능, 지리, 역사, 전통, 자급활동, 가치 그리고 상호주체성을 통해 자본주의적인 시장이나 국가의 통제 없이 욕구를 만족시키고자 한다.

‘내부에서 볼 때’ 각 커먼즈는 독특할 뿐 아니라 ‘세상 만들기’를 위한 학습이기도 하다. 그것은 상호주체적인 일련의 감정들•경험들•가치들•전망들이다. 우리가 겪는 상호주체적 경험들의 생생한 실재는 우리에게 세계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고착된 단일문화로서가 아니라 탄탄한 ‘다원적’ 세계로서 더 잘 이해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러나··· 각 커먼즈가 독특하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그 커먼즈에 관하여 일반화하기 시작하는가? 최소한도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기존 공동체가 일정 유형의 공유된 부를 집단적으로 운영할 때마다 공평한 접근법, 사용법, 장기간에 걸친 지속가능성이 강조되면서 하나의 커먼즈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다양한 맥락에 있는 매우 다양한 커먼즈들에 공통된 규칙성들을 실제로 설명하지 못한다.

작고한 나의 동료 질케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나는 이 문제가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현재 우세한 근대적 세계관은 커먼즈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그야말로 너무 환원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이다. 그것은 전체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들에게 너무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리의 근대적 세계관은 커머너들이 여전히 경제적 개인―합리적이고 자기주권적이며 자신의 물질적 이익을 최대화하는 데 전념하는 개인―이라고, 다만 시장을 통해서보다 그저 협동을 통해서 이 목표를 추구할 뿐인 그러한 경제적 개인이라고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커머닝을 그 나름의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조건에 기반해서, 그리고 진화사 및 생물학의 맥락에서 이해하고자 한다면 나는 우리가 커먼즈를 철저히 관계적이고 사회적인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전 세계 커먼즈에 대한 나의 아마추어적인 민족지학 연구로부터 증명할 수 있다. 커먼즈는 경제학자들이 보고자 하는 것처럼 단순히 자원들이 아니다. 커먼즈는 살아있는 사회 유기체들이다. 최근의 생물학 연구는 선구적인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가 보여준 것처럼, 어떻게 식물과 나무와 균류들 모두가 상호의존적이며 연결되어 있는지, 어떻게 세포 수준에서조차 생명이 심층적으로 공생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간 커머너들의 경우에도 그렇다. 우리는 서로와의 관계 속에서, 지구 그리고 지구에 존재하는 인간보다 큰 생명계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과거 및 미래 세대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커먼즈는 단지 사람들의 타산적인 합리성이 아니라 그들의 충만한 감정적, 윤리적 그리고 영적 힘에 의해 활기를 띤다. 질케와 나는 커머닝이 사실상 사회적이고 생태적인 관계맺음을 통해 창출되고 지속되는 역동적인 살아있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감수성은 문화 역사가 토마스 베리(Thomas Berry)의 다음 말에 의해 잘 표현된다. “우주는 객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주체들의 교감이다.” 나는 또한 생물학자이자 생태철학자인 안드레아스 베버(Andreas Weber)의 다음 문장을 좋아한다. “과학과 경제학은 창조적인 살아있음을 현실의 존재론적인 토대로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질케와 나는 공동 출간한 책 『자유롭고 공정하며 살아있는』(Free, Fair and Alive)[주석3]에서 커먼즈 안에서 살아있음이 어떻게 실제로 작동하는지 설명해보려 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에 답하고 싶었다. 관계성이 핵심이라면 다양한 개성들과 선호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조율이 되어 일관성 있는 커먼즈가 되는가? 화폐교환 없이 어떻게 중요한 것들이 이루어지고 돌봄이 제공되는가? 어떻게 피어(동료)가 주도하는 협동 시스템들이 생성되고 스스로를 유지하는가?

운 좋게도 우리는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 교수의 앞선 성취들과 그녀가 선구적으로 포착한 성공적인 커먼즈의 ‘설계원칙들’을 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오스트롬은 명확하게 명시한 경계들의 필요성과 자체적으로 만들어 낸 거버넌스 규칙들의 필요성을 확인했다. 그녀는 어떻게 커머너들이 규칙을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어야 하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규칙들이 시행되는 방식을 감시하는 데 참여해야 하는지를 알아냈다. 분쟁이 있다면 커먼즈는 그것을 저비용으로 신속하게 해결할 자체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커먼즈는 국가 당국으로부터 자립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커먼즈에 관한 이 전통적인 사고방식은 경제의 표준적인 틀과 그 방법론인 개인주의 내부에 대체로 머물러 있다. 그것은 커머너들의 내적인 삶 또는 정치경제[즉, 집단적 공동체의 경제]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커먼즈의 실제적 작동방식을 우리가 보다 명확하고 깊이 있게 보도록 돕는 ‘관계틀’을 개발했다. 우리는 ‘패턴언어’라는 아이디어를 개발한 급진적 도시계획자이자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의 작업에서 길잡이를 찾았다.

알렉산더는 빈발하는 문제들에 대한 특정의 해결책들이 긴 시간 동안의 역사와 문화를 가로질러서 소소하게 변동하면서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것을 자신의 분야에서 관찰했다. 그는 이 해결책들을 ‘패턴’이라 불렀다. 패턴들은 사회적 관행에서 나타나는 디자인이고 행동이다. 패턴들의 유효성은 그 패턴들이 반복적으로 사용됨으로써 승인된다.

패턴언어 방법론을 활용하면서 질케와 나는 15년간 우리가 목격했던 많고 많은 수의 커먼즈 형태에서 관계를 나타내는 수십 개의 패턴들을 포착해냈다. 우리는 이 패턴들을 ‘사회적 삶’, ‘피어 거버넌스’ 그리고 ‘자급’이라는 세 영역—이는 각각 사회적, 제도적, 경제적 영역이라 할 수 있다—으로 나누었다. 이 세 영역들을 합치면 우리가 ‘커머닝의 3인조’라 부르는 바의 것이 구성된다. 이 3인조는 ‘어떤 사회적 실천들과 윤리적 행동들이 커머닝의 성공적인 관계들을 창출하고 유지하도록 돕는가?’라는 물음에 우리가 답할 수 있게 한다. 나는 우리가 찾은 25개 이상의 패턴들을 다 살펴볼 수는 없고 여러분에게 패턴에 대한 감각을 전하는 데 집중하고자 한다.

커먼즈의 ‘사회적 삶’에서 한 가지 중요한 패턴은 공유된 목적과 가치들을 계발하는 것이다. 이 실천이 없다면 커먼즈는 붕괴된다. 사람들이 긴밀히 연결된 활력 있는 집단으로 남아있으려면 그들은 경험을 공유할 필요가 있고 집단적으로 그들의 커머닝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된 패턴은 함께함을 의례(儀禮)화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만나야 하고 서로 공유해야하며 하나의 집단으로서 그들의 성취와 친연성을 축하해야 한다. 함께 어울리는 것이 중요하며, 의식(儀式)들, 전통들, 축제행사들을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커먼즈의 사회적 삶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기여하는 것—똑같은 가치를 직접적 혹은 즉시 되돌려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고 주는 것—을 필요로 한다. 커먼즈가 시간을 두고 실제 혜택을 내줄지라도 말이다.

커머닝 3인조 중 둘째인 피어 거버넌스의 핵심은 타자들을 동등한 존재로 보는 것이자 집단적인 의사결정의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것이다. 커머너들은 피어 거버넌스로 위계와 중앙집권화된 권력시스템을 피하고자 한다. 그 시스템이 권력 남용과 책무성 문제를 낳을 배치일 수 있기 때문이다. 피어 거버넌스는 무엇보다도 ‘지식을 아낌없이 공유하기’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집단지성을 생성하는 결정적인 방식이다. 지식은 공유될 때 늘어나지만 이런 일은 정보가 자유롭게 유통되고 쉽게 접근 가능할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패턴은 ‘투명성을 신뢰의 영역에서 존중하기’이다. 투명성은 명령될 수 없다. 사람들이 어렵거나 난처한 정보를 공유할 만큼 충분히 서로 신뢰하지 않는다면, 투명성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커머닝의 세 번째 영역인 ‘자급’은 커머너들이 어떻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생산하는가가 그 핵심이다. 시장경제에서처럼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는 일은 없다. 기본 목표는 사람들의 경제적 욕구를 개인적인 삶의 여타의 부분들과 통합하는 것이다. 커머너들은 시장에서 팔 것을 생산하지 않는다. 사실 커머너들도 자신들의 커먼즈의 온전함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시장과의 상호작용이 조금이라도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그 상호작용의 방식을 구조화하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급의 한 가지 기본 패턴은 ‘함께 제작하고 함께 사용하라’이다. 참여하고 책임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함께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자신들의 능력•재능•욕구에 따라 기여한다. 함께 생산하기는 ‘함께 하라’(‘Do It Together,’ DIT)라고 불릴 수도 있는 것의 핵심과정이다. 커먼즈에서 일반적으로 자급이 확실하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방식을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이 되는 많은 다른 패턴들이 있다.

일단 커머닝의 패턴들로 들어가기 시작하면—일단 관계성이 어떻게 지구에서 삶의 근본적인 현실인지를 보기 시작하면—근대적 세계관과는 다른 세계관, 즉 내가 존재론적 전환 또는 ‘OntoShift’(존재전환)이라 부르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지금 당장 철학적 차원을 논의할 필요는 없다. 다만 세계관을 전환하는 것은 우리의 내적 삶과 관점을 바꾸게 될 새로운 사회적 실천들과 커머닝의 경험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한다라고만 말해두자. 우리는 시장문화의 핵심요소들인 이기적인 개인주의와 장사꾼 사고방식을 버리고 가기 시작하는 것이며 세상을 촘촘한 망으로 이루어진 공생 및 협력관계로 움직이는 통합된 전체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커먼즈버스에서 ‘공동선’은 어떤 고정된 이상화나 눈에 잡히지 않는 목표점이 아니다. 이 공동선은 수평으로 그리고 아래에서부터 확장하고 출현하는 협동 윤리로서 발현되는 역동적인 살아있음이다. 이 공동선은 유기적 연결성과 온전성으로 발현되며 이는 사실 살아있는 유기체들의 생물학적 충동이다. 우리의 내적 삶에서 이 공동선은 배려하는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 안전하고 공정하다는 느낌, 그리고 소속감으로 발현된다. 이 공동선은 체계 차원의 다양성과 회복탄력성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것에서 나는 공동선에 대한 프란치스 교황의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Praise Be to You)의 비전이 생각나는데, 이 비전은 우리의 영적 삶, 인간보다 큰 세상, 그리고 우리의 (하나의 종으로서의) 공통의 부와 운명 사이의 상호연결에 관하여 많은 비슷한 점들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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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문턱에 서있고 사태는 흥미로운 방식으로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커먼즈와 커머닝은 지난 10년간 급증하면서 국가권력, 자본주의 기업 및 신자유주의와 점점 더 충돌하게 되었다. 시장‑국가 체제는 그 나름의 우선사항들과 비전에 공격적으로 전념하는데 이 우선사항들과 비전은 커먼즈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영국에서 벌어진 종획 운, 몇 백 년에 걸친 식민지 정복 그리고 인공적인 나노물질과 유전자에서부터 수학 알고리즘과 (금융증권으로 전환되는) 물의 흐름까지, 가치가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사유화하고 화폐화하고자 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발전’에서 나타나듯이, 역사는 성장경제가 일반적으로 공동자산을 전유하고 사유화하며 커머너들을 그 공동자산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시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커머너들에게 긴급한 실질적인 물음은 어떻게 그들이 공유된 부의 종획을 막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커머닝을 보호하기 위해 법을 사용할 수 있는가이다. 이것이 실제로 가능한가? 자유주의 헌법 질서가 긍정적으로 커머닝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비자본주의적인 사회 형태로서 커머닝의 온전함을 존중할 수 있는가? 그 질서가 커머닝을 보호하기를 원하는가? 커먼즈의 토착적인 법과 서구의 법을 미봉적인 긴장완화로서만이라도 영리하게 섞는 것이 가능한가? 또는 자유주의 철학은 너무 경직되고 공격적이며 정치적으로 고루해서 커먼즈와 커먼즈가 만들어 내는 살아있는 가치를 지지하지 못하는 것인가?

분명히 해두자. 커먼즈는 시장가격과는 매우 다른 가치 이론을 구현하는데, 우리 시대에 시장가격은 가치의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측정규준으로 간주된다. 이와 달리 커먼즈는 살아있는 시스템을 생성적인 것으로서, 즉 일반적으로 사유화되지도 않고 사유화될 수도 없으며, 화폐화되지도 않고 화폐화될 수도 없고, 상업적으로 거래되지도 않고 거래될 수도 없는 가치로서 인식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시장‑국가 체제는 재산법, 계약법 및 통상법의 매개를 통해 삶을 객관화한다. 국가권력으로서는 자본과의 동맹을 통해 그 힘을 공고히 할 기회를 환영한다. 일반적으로 국가권력은 사람, 자연, 여타 생명체들에 대한 행정적인 통제를 중앙집권화하고 규칙화하기를 원한다. 정치 과학자 제임스 스콧(James Scott)이 다음과 같이 분명히 했듯이 말이다.

근대국가는 … 감시하고 수를 세고 평가하고 관리하기에 가장 쉬울 바로 그러한 표준화된 특징을 지닌 지형과 인구를 창출하는 것을 시도하는데 성공의 정도는 경우에 따라 다르다. 근대국가의 허망하고 근시안적이며 끊임없이 좌절되는 목표는, 그 밑에 있는 무질서하고 혼란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현실을, 그 현실을 관찰하는 행정망을 더 많이 닮아있는 어떤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국가들이 디지털 감시 테크놀로지와 빅테크와의 연합으로 무장하고 있으므로 이 동향의 논리적인 종점은 권위주의적인 통제이다. 국가법과 자유주의가 얼마만큼 이 방향을 향할지 불분명하다.

결국 자유주의는 국가권력에 깊이 예속되어 있고 커머너들의 관습에 따른 관행의 역할이나 그들의 집단적인 정체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시장처럼 자유주의 국가는 개인주의, 재산권, 계약의 자유, 및 물질적 ‘진보’에 깊이 전념한다. 이것은 분리―인간이 서로 분리되고 지구로부터 분리되며 역사적 기억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의 사고방식을 조장한다.

세르게이 거트워스(Serge Gutwirth)가 설명했듯이, 자유주의 국가에는 법인격 없는 역동적인 공동체에 권리를 부여할 수단이 없다. 물론 경제성장—주주들의 집단적 의무—이 자유주의 국가에 크게 잘 들어맞기 때문에 기업들은 예외다. 대략 800년 전에 커머너들의 많은 특정한 권리들이 획기적인 <삼림헌장>[주석4]—마그나카르타와 연결되어 있는 법적 선언문—에서 존중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것은 대부분 잊혀졌다. 민족(국민)국가의 발생과 심지어 자유주의로 인해 커머닝에 대한—생존에 필수적인 것들에 접근할 사람들의 권리에 대한—법적인 인정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이것이 나에게 시사하는 바는 현재 실행되는 바의 자유주의는 철학적으로 커먼즈에 적대적이거나 최소한 커먼즈의 실제 가치와 역동성을 모른다는 것이다. 국가는 권력 행사의 합법성을 한시도 늦추지 않고 주장한다. 그것이 법과 국가 기관을 통해 공식적으로 수행되는 바대로 말이다. 그러나 국가는 커먼즈에 기반을 두는 체제에 의해 주장되는 사회적, 윤리적 정당성에는 일시적인 관심만을 보인다. 권력은 자신이 선택한 인식 체계를 떠받침으로써 스스로를 유지한다.

자유주의와 커머닝을 논할 때 우리는 합법성과 정당성 사이의 단절에 직면한다. 시장‑국가 체제는 그 행정질서의 합법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형식적 법체계와 관료조직에 의지한다. 그 체제는 커머너들—커머너들은 그들 고유의 인식론적 질서, 법과 정당성에 대한 그들 고유의 비전을 가지고 있다—의 역동적인 거버넌스와 일상적인 관행 및 경험에 별 관심이 없다.

나는 이것을 우리가 기획한 「자유주의를 넘어」라는 제목의 워크숍이 탐색해야 하는 영역으로 여긴다. 국가의 합법성과 커먼즈의 정당성 사이의 차이는 취약성, 위험성 및 가능성의 차이이다. 이 차이를 메우려고 했던 몇몇 인상적인 혁신들이 있고 현재로서 최선의 효과를 내는 혼합안을 개발하려고 했던 몇몇 흥미진진한 실험들이 있다. 그것들 중 세 가지만 간략하게 언급해보자.

1) 새로운 사회적 규범들 및 관행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법적 해킹 활용
2) 커머닝을 지원하는 새로운 조직형태들의 개발
3) 일반적으로 보통 지자체 수준에서 커머너들과 국가 공무원들을 협력에 이르게 하는 커먼즈‑공공부문 파트너십

법적 해킹은 국가법을 원래 입법자에 의해 상상되거나 의도되지 않은 방식으로 개편하는 것이다. 법적 해킹의 핵심은 현행법 내부에서부터 합법성의 새로운 구역을 개척하는 것이고 그런 다음 새로운 사회적 규범과 정치 활동으로 이 구역을 채우는 것이다. 핵심은 ‘새로운 합법성’을 수립하기 위해 민중에 기반을 둔 정당성과 공동체 실천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법적 해킹은 국가법 하에서 불법일 수 있는 커머닝(예를 들어 씨앗공유하기 및 인도적인 구조救助)을 탈범죄화하거나 커머닝이 번성할 보호받는 적법한 공간들을 만들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사례들로는 창조적인 작업을 합법적으로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듦으로써 저작권법을 해킹하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Creative Commons licenses)가 있다. 이와 유사하게 강•산•풍경을 보호하는 한 방식으로서 이것들에 공식적인 법인격을 부여하고자 하는 다양한 ‘자연권’ 법들도 법적 해킹이다.

기업들, 협동조합들, 비영리단체들에 권한을 부여하는 지배적인 법구조가 커머닝이 작동하는 방식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적어도 서구 나라들에서는 새로운 조직 형태들을 만드는 것이 종종 필요하다. <지속가능한 경제법 센터>(Sustainable Economies Law Center), <민주 및 환경 권리 센터> 같은 몇몇 법 옹호단체들은 풀뿌리에서부터 성장할 수 있는 탈중심화된 구조를 설계하기 위해서 혁신적인 정관(定款)과 금융구조를 개발하고 있다. 그들은 커먼즈로서 운영되는 자율적인 운영자공동체 그리고 법인격을 가지고 있는 ‘스스로를 소유하는’ 토지를 창출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커먼즈‑공공부문 파트너십(실제적인 것이든 제안된 것이든)은 바로셀로나, 암스테르담, 볼로냐, 방콕, 서울 같은 도시들에서 그리고 공동도시들(Co-Cities) 운동[주석5]과 연관된 도시들에서 불쑥불쑥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지자체 공무원들과 커머너들 사이에 새로운 유형의 유연하고 비관료적인 협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노인 돌봄, 아이 돌봄, 근린지역 개선, 공공 장소와 공공 건물들, 디지털 정보 커먼즈, 그리고 오픈소스 테크놀로지가 이 파트너십에 포함된다. 오픈소스 참여가 공무원식 사고방식과 얼마나 성공적으로 잘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는 열린 문제로 남아있다.

바라건대 나의 발표가 분명히 하듯이 자유주의적 입헌주의의 세계에서 ‘공동선’에 대한 생각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정의되어야하고 이해되어야 하는지 전적으로 분명하지는 않다. 공동선을 발생시키기 위해 어떤 사회적 관계가 요구되는지, 공동선을 보호하기 위해 법을 포함해서 어떤 종류의 정치제도들과 절차들이 요구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국가권력이 다시 만들어질 필요가 있는지 전적으로 분명하지는 않은 것이다.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논점은 공동선에 대한 일정한 비전 뒤에 인간의 번성하는 영적 삶에 대한 무슨 암묵적인 비전이 자리 잡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당연하게도, 커먼즈와 커머닝을 지향하는 활동이 자본주의적인 근대성의 한계를 비판하고 조직화된 협력과 공유하기의 근대 이전 전통—그리고 전적으로 현대적인 전통—을 탐색함으로써 공동선 논의에 공헌할 여지가 많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또한 체제 변화에 복무하는 다양한 국제적인 사회운동들—탈성장, 협동조합 운동들, 피어 생산, 코즈모로컬 생산, 농업생태학, 슬로우푸드를 비롯한 농업 및 식량 운동들, 토착적이며 전통적인 공동체들, 탈식민과 인종 정의 운동들, 재지역화 기획들, 도넛 경제학[주석6], 페미니스트 경제학, 그리고 기타 많은 것들—에도 이 더 큰 프로젝트에 기여하는 그 나름의 중요하고 보완적인 관점들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재의 긴급한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연계된 집중적인 대응을 개시할 수 있는가? 이것은 아쉽게도 여전히 열린 문제로 남아있다. 

==== 주석

 [주석1] 토지 신탁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1574 참조.
[주석2] 메이커스페이스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1369 참조.
[주석3] 이 책과 관련해서 http://commonstrans.net/?p=2418http://commonstrans.net/?p=2095참조. 
[주석4] <삼림헌장>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974, http://commonstrans.net/?p=478 참조.
[주석5] 공동도시들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2560 참조.
[주석6] 도넛 경제학(Doughnut Economics)은 영국의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Kate Raworth)가 창안한 21세기 경제학 이론이다.

 

 




커먼즈를 위한 건축–2008년 이후 건축의 과제

 


  • 저자  : Jose Sanchez
  • 원문 :  “Introduction : A Call for a Post-2008 Architectur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호세 산체스의 Architecture for the Commons : Participatory Systems in the Age of Platforms(Routledge, 2021)의 “Introduction”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저자 호세 산체스는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활동하는 건축가이자 게임디자이너이며 이론가이다. 그는 건축디자인 지식의 증식을 추구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Plethora Project(www.plethora-project.com)를 이끌고 있다. 그는 동네를 만드는 시뮬레이션 비디오 게임 Block’hood의 제작자이며 공동체를 건설하고 경제를 관리하는 비디오게임 Common’hood의 제작자이고, 대중들이 참가하여 동일한 유닛들로 설치물을 짓는 Bloom의 공동제작자이다. 글의 뒤에 필요할 듯 해서 보충설명을 달았다. 

 

우리의 건축은 항상 패러메트릭 건축이었다

20세기 말 건축분야에서는 우리가 건물들을 이해하고 짓는 방식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전환을 제안하는 혁신들이 일었다. 소프트웨어, 재료과학(material science), 디지털 패브리케이션(digital fabrication)(([정리자] 디지털 패브리케이션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제품을 제작하는 기술뿐만 아니라 형태를 만들고 재료 가공 및 시공까지 모든 과정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총칭하는 말이다. 일례로 3D 프린팅 기술이 여기에 속한다.)) 및 자동화 영역에서 일어난 기술혁신은 무한한 가변성과 주문제작이라는 비전을 제공했다. 인간의 인식과 맞물려있는 이 비전은 몰입환경으로서 주문제작되는 정동적 건축(affective architecture)을 나타낸다.(([정리자] ‘affective architecture’에 대해서는 가령 https://aalab.org/ 같은 사이트를 참조해보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 ‘새로운’ 건축—모든 디자인이 일회적인 건축—은 젊은 세대의 건축가들이 오늘날 실행하고 있는 방식의 핵심적인 부분이 되었다. 테크놀로지를 중심으로 하는 서사들이 이것을 입증했다. CNC(computer numerical control, 컴퓨터 수치제어장치) 테크놀로지에 의해 작동하는 디지털 패브리케이션이 대량생산 제품을 생산하는 동일한 비용으로 맞춤제작 형태들을 만들 수 있다는 전망은 젊은 세대의 건축가들이 이 새로운 건축을 채택하는 것을 완벽하게 찬성할 논리를 제공했다. CNC 테크놀로지는 대량 생산이 여러 해 동안 여타 산업들을 규정해온 상황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줄 한 가지 대안을, 다시 말해 의뢰인들이 항상 색다른 새로운 디자인을 찾을 것이기에 수요가 계속될 것이고 그럼으로써 디자인이 번성하게 될 그러한 대안을 약속하고 있었다.

‘일회적인’ 건축이라는 패러다임—건물을 지을 때마다 스스로를 재창조해야 하는 패러다임—에는 지어지는 환경의 구조적 구성에서부터 사업모델과 관례상의 수수료 배분에까지 세분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지속적으로 지원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 패러다임은 무상으로 일하거나 또는 충분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착취적인 업무에 고용되는 것이 일상인 경쟁적인 시장에 학생들이 참여하도록 준비시킴으로써 건축분야의 교육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것이 의뢰인들의 투기적인 산업관행으로, 또는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거나 전무한 건축공모 참가로 낭비되는 큰 규모의 디자인 노동의 결과이다.

이 맥락에서 패러매트릭 패러다임의 등장은 건축분야에서의 핵심적인 비능률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될 수 있다. 어떤 제안이 개발될 경우 그 과정 내내 디자인 베리에이션(([정리자] 베리에이션(variation)은 하나의 기본적인 형태를 변화시키는 작업이나 그 변화된 상태를 지칭한다.))을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에 패러메트릭 패러다임은 한 건축가가 건물 하나를 디자인 하는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데이터로 통제되는 다수의 가상의 건물들을 디자인하는 기술적인 작업흐름을 건축가에게 제공했다. 패러메트릭 소프트웨어는 건물을 물체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비율을 가지고 공존하면서 전반적인 일관성을 유지하는 요소들의 네크워크로 정의하며, 건축가들은 이것을 기반으로 예산이나 규정의 변화 및 의뢰인의 심경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고 수백 개의 가능한 디자인들을 설계할 수 있다.

패러메트릭 방법론으로 가능해진 다수의 가상 건물들은 자본주의의 생산성의 승리로 보일 수 있으며, 이 경우 디자이너 한 명의 노동이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어, 건물 하나하나가 유일할 수 있는 도시 전체를 설계할 수 있게 된다. 이 기술적이고 개념적인 기획은 건축협회와 인스부르크 대학 소속이자, <자하 하디드 아키텍쳐>(Zaha Hadid Architects) 소속 패트릭 슈마허(Patrik Schumacher)가 낸 ‘패러메트릭 어버니즘’(parametric urbanism)이라는 아이디어로 탐구되었다. 패러메트릭 어버니즘이라는 유토피아적 비전은 건물들을 지역 부지 조건에 조화시키면서 모든 건물과 도시 내지 지역의 세부 베리에이션을 제어할 수 있는 통합된 알고리즘적 스타일을 제안했다. 슈마허가 주장했듯이 이 제안 이면에 있는 유토피아주의는 건물들 사이의 시각적이거나 양식적인 유사성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디자이너가 넓은 영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디자이너 한 명의 노동과 비전의 규모를 키우는 능력의 잠재적인 승리에도 존재한다.

패러메트릭 모델이 대량 주문제작을 가능하게 하고 수백 혹은 수천 개의 건물들을 서로 다르게 짓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모델은 한 명의 디자이너가 끼치는 영향력을 키우지는 못했다. 패러메트릭 정의 안에 존재하는 가상의 다양성으로 인해 서로 상충하는 제안들이 생겨나는데 이 제안들 가운데 하나만이 실행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결국 다양한 가상적인 것들 가운데 단 하나만 현실화된다.

의뢰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패러메트릭 방법론 때문에 자신들의 요구에 근본적으로 상이하게 접근하는 제안들을 받아 볼 수 있고, 잠재력이 있는 디자인 분야를 탐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대하게 되었다. 어쨌든 건축을 발전시키는 데 상당량의 자본이 요구된다는 점으로 인해, 민간부문이든 공공부문이든 둘 다 건축환경의 영구적인 부분이 될 것에 관하여 최종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많은 양의 디자인 제안들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상식화되었다. 하지만 패러메트릭 모델은 그런 과제를 수행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패러메트릭 방법론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제안들이 아니라 한 가지 제안의 변형들을 제공하기에 더 적합하다는 것을 입증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베리에이션은 본질의 변화가 아니라 정도의 변화인 것이다.

그런데도 수년 동안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은 건축공모라는 형식을 통해 근본적으로 상이한 다수의 제안들—건물의 제약들을 제각각 주의 깊게 고려하는 제안들—을 즉각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건축가들과 협력했다. 건축공모는 궁극적인 패러메트릭 모델화 방법론으로 간주될 수 있다. 디자인 참여자들에게는 큰 비용을 치르게 하면서 의뢰인에게는 상당한 디자인 베리에이션을 거의 무료로 주어서 광범한 가상의 다양성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축공모는 디자인 베리에이션을 제공하는 패러메트릭 디자인 방법론의 모든 원칙을 따른다. 패러메트릭 디자인이 디지털적으로 창조되는 건물들 중 99%를 폐기하듯이 건축공모 역시 적합한 해결책에 도달하기 위해 경합하는 노동인력 풀로서 편성된 건축가들이 무보수 노동으로 만들어낸 디자인들 가운데 99%를 폐기한다. 이렇듯 건축공모들은 우리가 기꺼이 제공하는 노동이 보상을 받지 못하는 투기성 노동의 관행들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건축공모가 건축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오래된 관습이라는 사실은, 패러메트릭 건축이 실제로 출현하기 이전부터 항상 우리가 패러메트릭 패러다임 속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패러메트릭 어젠다가 획기적인 스타일이라고 한 패트릭 슈마허의 주장을 건축공모들이 입증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건축분야의 진보에 기여하고 보수를 받는 주문을 받으려는 수많은 건축가들의 열망 덕분에 그들에게서 공짜나 다름없는 가치를 뽑아낼 수 있는 조달 기술을 전지구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그렇게 된 것이지 자유로운 시장참여자들 사이에서 새로 출현하는, 서로 연결 짓는 것의 미학이라는 슈마허의 주장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건축분야의 오랜 관습인 건축공모와 달리 패러메트릭 디자인을 규정하는 시대는 ‘승자독식’ 이데올로기와 지식이 ‘낙수’ 형태로 증식된다는 사고방식 아래에서 작동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시대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 시대에 전위적 기획들을 위해 개발된 혁신이 점차 사회적으로 채택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항상 새로운 ‘일회성’ 건물을 추구하는 것은 문화적 채택이 이루어질 여지를 거의 남기지 못한다. 오히려 신자유시대의 승자독식 모델이 권력, 자본 및 부의 대규모 불균형을 만들어냈다.

 

건축의 양극화

상업적 수단을 통한 건축술의 혁신 추구는 자본의 대규모 축적에 의존한다. 수 세기 동안 건축가들은 자신들의 건축 비전을 발전시킬 후원자로서 활약할 수 있는 의뢰인을 찾고자 했다. 한 가지 상징적 사례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피터 루이스(Peter Lewis) 및 <루이스 레지던스>(Lewis Residence)와 맺은 관계이다.(([정리자] <루이스 레지던스>(Lewis Residence)는 실현되지는 않은 주택개발 기획이다.)) 게리는 자신의 의뢰인들 중 보험업에서 수십억을 번 피터 루이스로부터 8200만 달러 주택—루이스가 결국은 짓지 않기로 한 주택—의 다양한 버전들을 디자인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고 의뢰자인 루이스는 이 의뢰건에 대해 6년의 시간과 600만 달러 이상의 비용을 썼다. 게리는 루이스로부터 받은 돈이, 자신이 받은 ‘맥아서(MacArthur) 영재상’의 상금처럼, 아무런 제약 없이 자신의 가장 진보적인 생각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 돈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인정했다.

피터 루이스 같은 의뢰인들은 별로 없으며, 건축교육에서 그러한 기대감을 조장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양의 건축연구와 교육이 그러한 비현실적인 의뢰인에게서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뿐인 주문에 바쳐지고 있다. 건축분야는 이러한 불균형적인 과도함을 알게 되었고 이런 건축 관행들을 비판하는 시도들이 건축학 내부에서 이루어졌다. 일례로 건축계는 생태적 재난 내지 금융재앙 이후 집을 박탈당한 사람들과 그 이후 살 곳을 잃을 버린 사람들과 함께 하는 건축으로 시선을 돌려 인도주의적인 저소득 프로젝트들을 강조함으로써 건축의 윤리성을 재발견하고자 했다. 칠레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Alejandro Aravena)가 조직한 2016년 베네치아 건축 비엔날레는 차별적으로 격리되거나 대표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해결방안을 만들어낸 건축가들을 부각시켰는데, 여기서 전 세계 부동산 투기, 집단지식 풀의 강탈 그리고 우버 및 에어엔비처럼 이른바 ‘공유경제’로 공통적인 공간들에서 수익을 추출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두 가지 태도들 즉 한편으로는 엘리트 의뢰인들을 위한 디자인의 낭비와,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낭비의 비윤리성에 필연적으로 반발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불가피한 측면이다.

이 체제에서 승자독식이라는 사고방식은 종형곡선의 양끝에서 작동하며 곡선의 가운데 혹은 볼록한 부분—도시 건축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간계층이 이 부분에 위치한다—은 줄어들거나 사라졌으며 심지어 건축을 위한 기획으로서 관심을 끌지 않게 되었다. 전문가들은 자본의 비대칭성에 좌우되지 않는, 노동이 가진 가치를 분명히 할 권한을 긴급하게 되찾을 필요가 있다. 무임금 노동이나 충분한 임금을 받지 않는 노동을 통해 엘리트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전통을 거부하는 것이 그 첫 걸음이다. 진보적인 건축은 퇴행적인 사회 관행들과 동의어가 되었다. 이것은 다른 분야들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되는 구조적인 문제들이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건축물 건립에서 양극화가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무자비한 경쟁하에서 작동하는 연구와 실천으로 번성하는 분야가 있으며 여기서는 많은 관계자들이 성공해서 유명인 반열에 오르기 위해 기꺼이 공짜로 일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결과인 착취와 박탈을 바로잡으려고 건축의 엄격함과 건축의 핵심가치들로 전환하는 흐름이 있다.

 

‘가운데 부분’을 다시 활용하기

1914년 헨리 포드(Henry Ford)는 노동자들의 하루 최저임금을 그 당시 자동차 회사들의 평균 임금의 두 배에 맞먹는 5달러까지 올리기로 결심했다. 포드는 노동자들의 소비력이 그가 키우고자 시도하고 있는 산업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포드는 노동자들이 그들이 만들고 있는 자동차를 살 수 있게 하고자 했다. 오늘날 미국 건축가들은 상당한 금액의 학자금 대출금이 쌓인 후인지라 디자인하도록 요청받는 유형의 건축물을 살 여유가 없다. ‘스타 건축가’ 시스템에 의해 육성되는 오늘날의 건축문화는 충분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인턴 노동과 착취적인 관행들로부터 나오는 상당한 양의 보조를 필요로 한다. 사회적 어젠다에 맞물려있는 관행들조차도 무임금 인턴십의 보조에 의존하게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중산층을 위한 건축은 상업적 명령에 의해 추진되는 것처럼 보인다. 종형곡선의 가운데 부분은 건축가들의 수중에 없는 시장, 즉 렘 콜하스(Rem Koolhaas)가 ‘정크스페이스’(Junkspace)라 부른 것과 종종 관련되어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줄어들거나 사라진 이 종형 곡선의 가운데 부분을 다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가운데 부분은 맞춤 제작한 것의 매력이나 인도주의적인 원조라는 영웅적 면모가 없기에 더 이상은 건축분야에 중요한 것이 되지 못했다. 건축분야는 근대 건축 운동을 연상시키는 큰 서사에 참여하기를 여전히 두려워한다. 어쩌면 시장 바깥 혹은 시장 주위에서 작동하지 않는 비판적 담론과 실천을 발전시키는 방안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어젠다의 추출 명령에 의해 생겨나는 경제적인 교착상태 때문에 자율이라는 기획이 자급에 기반을 두어 나타나게 되었다. 이제 건축가들은 스스로를 그들이 생각하는 건축의 사용자이자 생산자로서 재설정할 수 있으며, 그들이 속하는 문화에 재접속하고 그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의 디자인 기여를 재조정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가운데 부분을 다시 활용하는 것이 금욕이나 긴축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긴축은, 정부가 애초에 문제를 발생시킨 금융기관들이 낼 세금을 인상하지 않고, 그 반대로 금융기관들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서 공공서비스를 대폭 줄이는 것이다. 주택위기가 의미하는 바는 점점 더 많은 수의 시민들이 자신들이 일하는 장소에서 살 만한 경제적 여유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공공부문과 커먼즈가 시장투기의 반대쪽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필요하다. 공동체주의에 기초한 운동들의 출현은 전통적으로 공적인 것/사적인 것의 이두체제였던 것에 세 번째 부분을 추가할 수 있게 한다.

 

2008년 이후 전망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해서 사람들은 자유주의 정부와 보수주의 정부 공히 신자유주의 경제를 얼마나 깊이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시스템이 다수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서서히 갖게 되었다. 모든 건축가들이 중간에서 꼭대기로 가치를 뽑아 올리는 경제모델을 받아들이는 쪽에 서있다는 것이 건축학계의 현실인 만큼 건축가들에게 2008년은 건축가들이 사용하는 도구가 사실상 어떻게 경제적 어젠다를 내포하고 있는 사회-기술적 시스템인지를 숙고하도록 경종을 울린 한 해였다. 건축물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자본 뒤에 있는 경제적인 충동들과 동기들에서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사회-기술적 관점에서 보면 현 경제 관행이 선택한 최고의 무기는 디지털 플랫폼이다. 자본이 이것을 사용자들의 표준화와 자본 추출을 위한 도구로서 사용하게 된 것이다. 플랫폼은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전지구적 조직체들이며 사용자들끼리 소통하는 규칙들을 부과하고 플랫폼에서의 거래를 모니터링해서 획득한 지식에서 이윤을 추출한다. 플랫폼들은 시장 규제를 우회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두드러진 형태의 경제 불평등을 수반한다.

건축분야에서 건축공모는 초기의 플랫폼이자 어쩌면 훨씬 더 원시적이고 악의적인 플랫폼일 것이며 또한 보수를 지불할 가치가 있는 노동과 그렇지 않은 노동을 결정한다. 공모에 지원하는 경쟁은 투기적인 노동형태로 되어 있으며, 이는 트레버 숄츠(Trebor Scholz)가 주장한대로 고용, 노동시간 및 최저임금과 관련된 시장규제를 우회하는 메커니즘이 되었다. 우버의 경우처럼, 공모에 지원하는 건축가들의 경쟁으로 인해 자기 자신이 결정권자이고 주어진 요청에 참여하기 위해 보상받지 못할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건축가 기업가’라는 상이 극찬을 받는다.

2008년 금융위기는 건축계 자체의 투기 시장 내부에서 활약하는 건축가들 세대에게 깨달음을 주는 경험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건축가들은 자신들이 디자인 작업에서 승자독식 경제 시스템을 받아들였고 공모나 다른 플랫폼 제공자들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라며 매우 자주 무료로 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적인 예로 부상하는 <노!스펙 운동>(No!Spec movement)은 우리 건축가들이 비윤리적인 사업 관행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과 대안적인 모델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예기치 못한 깨달음을 나타낸다. 금융위기는 저항운동의 급증을 촉진했으며 이는 시장이 규제받지 않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알려준다. 규제받지 않는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투기성 노동은 구조적인 분할을 낳고 불평등을 증가시키므로 권력 불균형을 촉진하는 것이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는 대안들의 생산을 촉진하기도 했다. 우리가 참여하는 노동의 주권을 강조하는 공동체 번영의 모델들을 제작하려는 하부구조와 이데올로기를 연결시키는 사회-기술적 인식을 촉진한 것이다. 리차드 스톨먼(Richard Stallman)의 일반공중사용허가서(General Purpose License) 및 카피레프트 운동에서처럼 사용자들 간의 지식 증식을 보장하는 라이선스 계약 창출, 블록체인 기술의 출현에서처럼 분산된 방식으로 신뢰를 보증할 수 있는 분산원장들의 창출 그리고 알라스테어 파빈(Alastair Parvin)의 위키하우스 작업의 경우처럼 적정 가격으로 사용자들이 빌딩 솔루션을 스스로 마련할 수 있게 하는 건축의 오픈소스 형태 디자인이 이 모델들에 속한다.

 

건축 커먼즈의 틀 형성하기

이 책은 다섯 개의 장으로 나뉜다. 1장 「건축술의 발달」에서는 신자유주의의 명령 아래 작동하는 건축을 비판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한다. 먼저 건축술의 진보라는 생각이 과연 시민들의 번영에 이바지했는지를 묻고 인풋 당 아웃풋 효율의 증가(ephemeralization)라는 약속이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검토한다. 첫째 물음에 대해서는 건출술의 진보가 혁신을 일반대중에게로 ‘내려 보내지’ 못했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다음으로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시장 인클로저를 통해 작동하는지를 살펴본다. 신자유주의는 공적 도메인의 힘을 정의하는 규정들을 무너뜨리는 시스템으로서, 저자는 그러한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가치는 커먼즈로부터 추출된다고 주장한다.(([여기서 저자는 커먼즈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인다―정리자] 커먼즈는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저술을 통해 정식화되었을 뿐 아니라 데이비드 볼리어(David Bollier)와 마시모 데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의 관점—공동체적인 부의 창출에 참여하는 사회구조들 뿐 아니라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공유재 둘 다를 포함하는 정의를 모으고자 시도하는 관점—을 통해서도 정식화되었다.))

2장 「부분들의 융합」에서는 어떻게 추출적인 관행들이 건축에 분명히 나타났는지를 더 깊이 파고든다. 시장 다양성을 파괴하면서 수직적 통합을 이루는 대규모 제조활동이 자본 축적의 논리에 의해서 발생하게 되는 경향을 소개한다. 수직적 통합의 발생은 기술적인 어셈블리에 필요한 부분들의 수를 줄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제조에 명확한 혁신들을 제공했다. 3D 프린팅 같은 최근 과학기술들은 이전에 표준화된 구성요소들을 해체하는 식으로 수행적인 이점들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수직적 통합으로의 경향은 패러메트릭 디자인 패러다임과 명확한 상관관계가 있다. 이 장에서 저자는 패러메트릭 모델이 적은 수의 인구에 복무하고 시장 다양성에 충격을 주었다는 것을 짚어보고자 한다.

3장 「부분들을 옹호하여」에서는 디자인과 제조 분야에서 부분들의 사회적 어포던스(([정리자] 어포던스란 주체가 특정의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객체가 ‘제공’하는 관계를 가리킨다.))를 이해함으로써 대안적인 디자인에 필요한 제안들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다양한 다수의 행위자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건축 디자인의 분야가 공급자들 간의 협동 및 연계의 효율적인 형태들을 찾을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러한 노력이 1950년대의 <모듈협회>’(Modular Society) (([정리자] ‘Modular Society’는 책의 한 장으로서 크리스틴 월이 쓴 장 이름이기도 하지만, 원래 그 당시 영국의 협회 이름이다. 현재 희의록 등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https://discovery.nationalarchives.gov.uk/details/r/C2327371))같은 기관들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대의 시도들은 디지털 네트워크의 출현을 통해 동질화되지 않는 차원 연계의 구조들을 제공하고자 한다.(([정리자] 과거 <모됼협회>는 동질화와 표준화에 기반을 두었다.))

이와 관련해서 제시되는 틀은 연속적인 패러메트릭 모델에 의해 제시되는 ‘일회성의’ 모델과는 대립적인 위치에 있는 ‘이산(離散) 건축’(Discrete Architecture)이라는 패러다임이다. 이는 재조합 능력의 측면에서 부분들이 디자인되고 연구되며 다양한 생산물을 산출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다. 디자인은 이산 건축을 통해 다원적이고 비독점적인 생산 접근법을 유지할 필요성을 받아들인다. ‘디자인 커먼즈’의 산출을 위해 부분들의 ‘조합에 의한 잉여’(combinatorial surplus)의 연구 및 이 부분들이 가진 어포던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산(적) 건축의 이점들이 검토되며, 재사용가능한 패턴들이 정보 네트워크를 통해 전파될 수 있도록 하는 조합 디자인을 채택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4장 「비물질적 건축」에서는 네트워크 기반 시설이 감시 자본주의의 실행에 활용되었을지라도 사용자들에게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는 디지털 네트워크를 디자인하고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제시한다. 플랫폼이 추출 도구가 되는 것에서 협력 도구가 되는 것으로 이행하기 위해 플랫폼이 극복해야 하는 과제들에 대한 지도그리기를 한다. 트레버 숄츠(Trebor Scholz)가 옹호한 바의 ‘플랫폼 협동조합주의’(Platform Cooperativism) 같은 아이디어들을 여기서 살펴본다. 더 나아가 커먼즈에 복무하는 오픈소스 건축모델들의 저장소를 잠재적으로 생성시키면서 사용자들 간의 협동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건축용 플랫폼을 개발할 가능성을 이곳 4장에서 고찰한다. 비디오게임 기술이 플레이어들 사이의 협동 모델과 디지털 공동체에 참여하는 전통을 제공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5장 「자급을 통한 재구축」에서는 커먼즈가 다양성이라는 아이디어에 기초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자유를 확립하리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감시 자본주의에 의해 발전되는 기반시설에서는 특정 형태의 지성, 즉 사용자들의 정보를 모아놓은 집적 데이터(aggregate data)에서 생성되지만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얻어지는 지성이 효율적으로 배치되어왔지만, 이와는 다르게 커먼즈는 위계로서 작동하지 않는, 서로 합의하는 형태의 공동의 기반시설을 재구축할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5장에서는 어떻게 우리가 기울어지지 않은 운동장을 유지하고 진입장벽을 낮추어 설계하면서 민주주의와 관리를 테크놀로지에 함입할 수 있는지를 짚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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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설명]

건축술은 모두가 배워야 할 것이다. 모두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 존 러스킨

근대에 일어난 커먼즈의 대대적인 상실은 무엇보다도, 삶을 재생산하는 터인 ‘집’(home)의 상실이었다. 이 상실의 상황은 자본주의가 매우 발전한 탈근대에 들어와서도 호전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집의 상실이라는 상황이 거의 자연 상태에 해당하는 기본 설정이 되었다. 다수의 사람들의 경우 집을 구성하는 하드웨어인 주택(house)이란 것이 노동하는 사회생활을 매우 오랫동안 하고 나서야 간신히 확보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사실 주택을 안정되게 확보하는 일은 어떤 이들에게는 거의 평생이 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에게는 ‘평생’으로도 부족하다. 노동력은 재생산되어야 쓰일 수 있는데, 그 재생산의 터가 노동력이 한참 동안 쓰인 후에야 확보될 수 있다니! 아니, 평생을 노동해도 불가능하다니! 자본은 이런 모순적 상황 위에서, 즉 삶의 재생산 터의 ‘기본적’ 결핍을 기반으로 해서 자신을 증식한다.

그래서 커먼즈 되찾기는 집 되찾기를 필수적으로 포함한다. 그리고 집 되찾기에는 집을 구성하는 하드웨어를 박탈하는 메커니즘인 투기적 주택시장의 극복이 필수적으로 포함된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하자면 커먼즈 특유의 방식으로 주택을 확보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이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인 5장 「자급을 통한 재구축」“Reconstruction through Self-provision”의 내용의 일부를 포함한다.)

우선 자급을 원칙으로 한다. “자급의 실천이 공통적인 것의 현실화이다.” 자신의 집을 자기가 짓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인이 아무런 지식도 (아직은?) 없는 상태에서 DIY로 자신의 집을 짓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저자는 우선 건축가들이 자신들의 집을 짓는 데서 출발하는 것을 제안한다. 여기서 집의 디자인과 관련된 전문적인 지식이 생산되는데, 그 다음으로 이 지식을 일반 대중에게 전달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이것을 저자는 ‘해득력 사다리를 채우기’(to populate a literacy ladder)라고 부른다. 해득력 사다리는 전문가들이 생산한 지식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시스템으로서, 전문가들의 수준에서 가장 초보자 대중의 수준에 이르는 지식의 스펙트럼을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 사다리는 지식의 스펙트럼이 어떻게 새로운 미경험 사용자들과 전문가들 사이에 배치되는가에 의해 규정된다.”

이 해득력 사다리에서 지식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순환되는 데 그칠 경우에는 이것을 ‘약한 사다리’라고 부르고 초보적 수준에서 전문가 수준으로 점차적으로 올라가는 로드맵이 잘 되어 있으면 이것을 ‘강한 사다리’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서 해득력 사다리의 핵심은 가장 높은 수준과 가장 낮은 수준을 원활히 연결하여 초보자도 이 사다리를 타고 자신의 능력과 노력이 허용하는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저자는 이것이 단순히 테크놀로지(지식 생산)의 민주화라기보다는 민주주의를 테크놀로지(지식 생산)에 함입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내 식으로 풀자면, 테크놀로지의 민주화는 (대체로 사용자의 고정된 능력을 전제로 한) 테크놀로지 사용의 평등한 분배이고, 민주주의를 테크놀로지에 함입하는 것은 모두가 테크놀로지 사용자로서만이 아니라 테크놀로지 생산자로서의 능력을 자유롭게 배양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강한 사다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문턱을 낮추어 디자인하기’가 필요하다. 진입장벽이 낮아야 많은 사람들이 사다리 안에 들어올 수 있고 사다리 안이 더 열린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해득력 사다리를 만드는 것 자체가 자원의 집합소로서만이 아니라 ‘사회체계로서의 커먼즈’(마시모 데 안젤리스)의 생산으로 이어진다. 실제 집을 만드는 실천이 집짓기와 관련된 지식의 생산과 연결되므로, 저자가 제안하는 방안은 위키피디아, 리눅스 같은 비물질적 생산의 프로젝트를 물질적 생산으로 확대하는 방안이기도 하고, 단순한 참여―상부에서의 의사결정에 사용하기 위한 데이터 수집을 대중이 일시적으로 거드는 것―에서 자급으로 이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 자급은 아직은 국가로부터의 조달을 대체한다기보다는 보완하여 국가 및 시장 양자와 협상할 수 있는 시민조직들을 생성하는 것이 주된 일이다.

건축 분야에서 참여에서 자급으로 움직인 대표적 사례로 파빈(Alastair Parvin) 등의 위키하우스(Whikihouse)가 있으며, 건축가들이 자신들의 집만 짓는 것을 넘어서서 이룩한, 자급의 한 형태로서의 커먼즈를 위한, 그리고 커먼즈에 의한 건축의 기획으로는 Open City(1971)가 있다.((이 기획에 대한 사례연구로 Rodrigo Pérez de Arce and Fernando Pérez Oyarzún, Valparaiso Schoo /Open City Group, ed. by Raul Rispa (Birkhauser, 2003) 참조.))

[정백수]




페미니즘과 커먼즈의 정치

 


  • 저자  :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
  • 원문 :  “Feminism and the Politics of the Commons”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나는 2023년 1월 26일 목요일에 에코페미니즘연구센터 달과나무에서 기획한 심화강의 제2강에서 커먼즈 운동을 대안근대로의 이행의 관점에서 소개했는데, 여기서 페미니즘과 커먼즈 운동의 연관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런데 강의자료를 다 작성하고 나서 강의를 기다리는 하루 정도의 시간에 아래 소개된 페더리치의 글―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커먼즈의 정치를 살펴보는 글―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강의 후 토론시간에 이 글을 거론하기도 했다. 물론 미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번역까지는 아니더라도 상세히 내용을 정리해서 이 블로그에 올리기로 마음 먹고 당장 실행에 옮겼다. 아래 글은 마치 번역처럼 보이는 어투를 사용했지만, 원주 혹은 본문의 어떤 디테일들을 생략하기도 했고 또 어떤 부분은 비교적 자유롭게 내용을 풀었기 때문에 완성된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고 그저 매우 상세한 내용정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원문은 The Wealth of the Commons: A World Beyond Market and State (Levellers Press)의 9장이며 https://wealthofthecommons.org/essay/feminism-and-politics-commons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사이트의 글들은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의 적용을 받는다. (※ 이 글은 원래 『더커머너』(The Commoner, 2011년 1월 4일)에 발표된 에쎄이를 조금 고친 것이다.) [정백수]


재생산이 사회적 생산보다 앞선다. 여성을 건드리는 것은 반석을 건드리는 것이다.
– 피터 라인보((Linebaugh, Peter. 2008. The Magna Carta Manifesto: Liberty and Commons for All.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년 12월 31일 사파티스타들이 에히도(ejido)[공동체가 땅의 소유권이 아닌 용익물권을 갖는, 농업에 사용되는 공동 토지]를 해체하는 입법에 반대하는 투쟁을 한 이후 커먼즈라는 개념이 널리 퍼지고 있다. 이 고물처럼 보이는 생각이 현재의 사회운동에서 정치적 논의의 중심에 오게된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다음의 둘이 두드러진다. 첫째,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구축하는 급진적 운동들의 노력을 수십 년 동안 흡수했던 국가주의 혁명모델이 종식되었다. 다른 한편, 종획에 맞서  커먼즈를 방어하려는 투쟁들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사라졌다고 믿었거나 사유화로 위협받기 전에는 가치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던 공동체적 재산들 및 관계들의 세계가 가시화되었다. 커먼즈가 사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 인터넷 같은 예전에는 없던 삶의 영역에서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협력이 항상 산출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종획으로 인해서 드러났다. 커먼즈라는 생각은 많은 사람들이 창출하려고 하는 협력적 사회를 예시하는 통일적 개념으로서 이념적 기능에 복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을 해석하는 데서는 애매함들과 의미심장한 차이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커먼즈의 원리를 일관성있는 정치적 기획으로 옮겨놓으려면 이것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가령 무엇이 커먼즈를 구성하는가의 문제가 있다. 땅, 물, 공기 커먼즈(공통재), 디지털 커먼즈가 있다. 사회보장연금과 같이 우리가 획득한 권리도 종종 커먼즈로 지칭되며 언어, 도서관, 과거 문화의 집단적 산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모든 커먼즈가 그 정치적 잠재력의 관점에서 볼 때 동등한가? 모두 호환 가능한가? 그리고 그것들이 구축되어야 할 통일성[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향하는 데 모두가 함께하는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정리자]을 기획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우리는 ‘commons’(커먼즈)라고 복수형으로 말해야 할까, 아니면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자들이 제안하는 것처럼 ‘the common’(공통적인 것)이라고 말해야 할까? (‘공통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포스트포디즘 시대에 우세한 생산형태의 특징을 이루는 사회적 관계들을 지칭한다.)

이 글에서 나는 이 물음들을 염두에 두면서 커먼즈의 정치를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 페미니즘적 관점이란 성차별에 대항하고 재생산 노동을 둘러싼 투쟁에 의해 형성된 관점을 가리킨다. 재생산 노동은 라인보의 말처럼 사회의 반석이며 이것을 시금석으로 하여 모든 사회조직화 모델이 평가되어야 한다. 재생산 노동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커먼즈의 정치를 더 잘 규정하고 커먼즈 원칙이 반자본주의 프로그램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조건들을 분명히 하는 데 필요하다. 두 가지 문제가 이 과제들을 특히 중요하게 만든다.

첫째, 적어도 1990년대 초부터 커먼즈 담론이 예를 들어 세계은행 같은 기관에 의해 전유되어 사유화를 위해 사용되었다. 세계은행은 생물다양성을 보호하고 전지구적 커먼즈를 보존한다는 핑계로 열대우림을 생태보호구역으로 바꾸어 수세기 동안 열대우림에서 생계를 유지해 온 주민들을 추방하는 한편, 예를 들어 생태관광(eco-tourism) 같은 것을 통해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접근을 보장했다. 이밖에도 다양한 동기에 따른 커먼즈의 재가치화가 주류 경제학자와 자본주의 계획가들 사이에서 유행이 되었다. 커먼즈에 대한, 그리고 그와 유사한 사회적 자본, 선물 경제, 이타주의와 같은 주제들에 대한 학술 문헌이 증가하는 것을 보라.

사회적 공장[사회 전체가 공장이 된 것]의 구석구석까지 상품형태를 확장하는 것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에게는 이상적인 일이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장기적 재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실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은 기획이다. 자본주의적 축적은 시장에 외부성(externalities)으로 나타나게 마련인 엄청난 양의 노동(예를 들어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하며 여성들이 제공하는 무보수 가사노동)과 자원의 자유로운 전유에 구조적으로 의존한다. 따라서 월스트리트 붕괴 훨씬 이전에 다양한 경제학자 및 사회이론가들이 삶의 모든 영역의 시장화가 시장의 원활한 기능에 해롭다고 경고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장도 신뢰, 선물 제공처럼 화폐가 매개하지 않는 관계의 존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자본이 공통적 이익(공동선)의 미덕에 대해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위기에 처한 자본가 계급이 지구 환경의 수호자인 척하면서 되살아나는 것을 돕는 방식으로 커먼즈에 대한 담론을 만들어내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두 번째 문제는 ‘커먼즈가 어떻게 비(非)자본주의 경제의 기초가 될 수 있는가’라는, 아직은 답이 없는 물음이다. 라인보(Peter Linebaugh)의 저작, 특히 『마그나카르타 선언』(The Magna Carta Manifesto, 2008)에서 우리는 커먼즈가 계급투쟁의 역사를 우리 시대로 연결하는 끈이었으며 실제로 커먼즈를 위한 투쟁이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을 배웠다. 메인 주(州)의 주민들은 기업 함대의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어장에 대한 접근을 유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애팔래치아 주민들은 노천 채굴로 위협받는 산을 구하기 위해 조직화하고 있다. 오픈소스와 프리소프트웨어 운동은 지식의 상품화에 반대하고 소통과 협력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열고 있다. 또한 칼슨(Chris Carlsson)이 그의 『나우토피아』(Nowtopia, 2007)에서 설명한 것처럼 북미에서 많은 보이지 않는 커머닝 활동과 공동체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칼슨이 보여주듯, ‘버추얼 커먼즈’의 창출, 그리고 화폐/시장 경제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에서 번창하는 형태의 사회적 관계들의 창출에 많은 창조성이 담겨 있다.

아프리카, 카리브해 지역, 또는 미국 남부에서 이주해온 공동체들 덕분에 나라 전역에 퍼진 도시 텃밭 가꾸기 운동이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어왔다. 이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도시 텃밭은 우리가 식량 생산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고 우리의 환경을 재생성하며 생계를 위해 자급하려면 없어서는 안 될 러바니제이션(rurbanization)((rurbanization : rural + urban +-ization)) 과정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텃밭은 식량 안보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것을 훨씬 넘어서 사회성, 지식 생산, 문화 및 세대 간 교류의 센터들이다.

도시 텃밭은 그것이 상업적 목적보다는 동네에서의 소비를 위해 생산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점으로 인해서 도시 텃밭들은 다른 재생산 커먼즈들―메인 주의 ‘가재 해안’(Lobster Coast)((“Lobster Coast”는  지명이 아니라 가재를 잡는 해안을 말한다. 메인 주의 어업 공동체들의 역사를 다룬, 콜린 우다드(Colin Woodard)의 The Lobster Coast: Rebels, Rusticators, and the Struggle for a Forgotten Frontier 라는 책이 있다.))의 어장들처럼 시장을 위해 생산하거나 열린 공간을 보존하는 토지 신탁처럼 시장에서 구입되는 것들―과 구분된다. 그러나 문제는 도시 텃밭이 자생적인 풀뿌리 운동으로 남아 있으며 미국에서 벌어지는 운동에서 텃밭들의 존재를 확장하고 토지에 대한 접근을 투쟁의 핵심 영역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여성과 커먼즈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방어되고 있고 발전되고 있으며 투쟁으로 지켜지고 있는 많은 번성하는 커먼즈들을 어떻게 한데 모아서 결집력 있는 총체를 형성하여 새로운 생산방식의 토대를 제공할 것인가의 문제를 좌파는 제기한 적이 없다. 커먼즈에 대한 페미니즘적 관점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과거의 역사에서나 우리 시대에서나 여성들은 재생산 노동의 주요 주체로서 공동체의 자연자원에의 접근에 남성보다 의존해왔고 이 자원의 사유화 과정에서 가장 많은 불이익을 당했으며 이 자원의 방어에 가장 헌신적이었다는 깨달음과 함께 이 페미니즘적 관점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내가 『캘리번과 마녀』(Caliban and the Witch, 2004)에서 썼듯이,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 국면에서 여성들은 영국과 남북아메리카에서 공히 토지 종획에 맞서는 투쟁의 최전선에 섰으며 유럽 식민화가 파괴하려고 했던 공동체적 문화의 가장 완강한 방어자들이었다. 페루에서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마을을 장악했을 때 여성들이 높은 산으로 도망쳐 집단적 삶형태들을 다시 창출했고, 이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여성에 대한 세계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공격이 행해졌다. 여성을 마녀로 몰아 박해한 것이다. 오늘날 새로운 형태의 시초 축적 과정에 직면한 여성들은 자연의 완전한 상업화를 가로막고 비자본주의적 토지 사용과 생계자급 지향적인 농업을 지탱하는 주요한 사회적 힘이다. 여성들은 세계의 자급농부들이다. 아프리카에서는 세계은행 및 기타 기관들이 여성들의 활동을 환금경작으로 전환하도록 설득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사람들이 소비하는 식량의 80%를 생산한다. 1990년대에는 많은 아프리카 도시에서 식량 가격 상승에 직면하여 공유지(公有地)의 땅뙈기들을 전유하였고 길가를 따라, 공원에, 철로를 따라 옥수수, 콩, 카사바를 심었으며, 아프리카 도시들의 경관을 바꾸고 그 과정에서 도시와 농촌 사이의 분리를 허물었다. 인도, 필리핀에서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여성들은 황폐해진 숲에 나무를 다시 심고, 힘을 합해 벌목꾼을 쫓아냈으며, 광산 작업과 댐 건설을 봉쇄하고, 물 사유화에 반대하는 투쟁을 이끌었다.

재생산 수단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을 위한 여성들의 투쟁의 다른 유형은 캄보디아에서 세네갈에 이르기까지 제3세계 전역에서 화폐커먼즈로 기능하는 신용연합의 형성이다.(Podlashuc 2009)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톤틴’(the tontines)이라고 불리는 이 신용연합은 여성들이 만든 자율적이고 자주적으로 관리되는 뱅킹시스템으로, 은행에 접근할 수 없는 개인이나 집단에 현금을 제공하며 순전히 신뢰를 바탕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신용연합은 세계은행이 장려하는 소액융자 시스템과 완전히 다르다. 이 소액융자 시스템은 상호감시와 수치심을 바탕으로 작동되는데, 예를 들어 니제르에서 이러한 방식이 융자금을 상환하지 못한 여성들의 사진을 공공장소에 게시할 정도로 극에 달해서 몇몇 여성들을 자살로 몰아가기도 했다.

여성들은 또한 재생산 비용을 절약하고 서로를 가난·국가폭력·남성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재생산노동을 집단화하려는 노력을 주도해왔다. 두드러진 사례는 1980년대에 칠레와 페루에서 여성들이 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더 이상 혼자서는 물건을 살 경제적 여유가 없었을 때 세운 ‘올라스 코무네스’(ollas communes, 공동밥솥)이다.(Fisher 1993; Andreas 1985) 토지 재전유나 톤틴의 형성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실천은 공동체적 유대가 아직 강한 세계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정치 이전의 것으로, ‘자연적인’ 것으로, 혹은 단순히 ‘전통’의 산물로 보면 잘못이다. 식민화 국면들이 거듭되고 난 지금, 자연과 관습은 민중이 투쟁하여 보존하고 재발명한 곳에서 말고는 그 어디에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레오 포들라슈크(Leo Podlashuc)가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날 풀뿌리 여성들의 공동체주의는 새로운 현실을 창출하며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집과 공동체에서 대항권력을 구성하며 자기가치화와 자기결정의 과정을 연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많다.

이 투쟁들에서 우리가 얻는 첫 번째 가르침은, 물질적인 재생산 수단의 커머닝이 집단적 이해와 상호유대가 창출되는 주된 메커니즘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또한 노예화된 삶에 대한 저항의 최전선이며 우리의 삶에 대한 자본의 장악력을 안으로부터 무너뜨리는 자율적 공간을 구축하기 위한 조건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내가 설명한 경험은 이식할 수 없는 모델이다. 북미에 사는 우리에게 재생산 수단의 탈환과 공통화(commoning)는 필연적으로 다른 형태를 취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자원들을 한데 모으고 우리가 생산한 부를 재전유함으로써 우리의 재생산을 상품의 흐름들―이 흐름들이 세계 시장을 통해 세계 전역을 흘러다니면서 수백만 명이 삶의 터전을 박탈당하게 하고 있다―로부터 떼어내기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살림을 세계시장으로부터만이 아니라 (현재 미국 경제가 의존하고 있는) 전쟁기계와 감옥시스템으로부터도 떼어내기 시작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운동에서 그토록 자주 보이는 특징인 추상적 연대―이는 우리의 헌신, 견딜 수 있는 우리의 능력, 우리가 기꺼이 감수할 위험을 제한한다―를 넘어설 수 있다.

사유재산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무기로 보호되고 3세기에 걸친 노예제도가 사회에 심오한 분열을 낳은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커먼즈/공통적인 것을 재창출한다는 것이 장기적인 실험, 연대구축 및 피해회복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엄청난 과제인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제가 지금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워보일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자율의 공간을 넓힐, 그리고 우리의 재생산이 세계의 다른 커머너들과 커먼즈들을 희생시키면서 일어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유일한 가능성이다.

 

페미니즘적 재구축

마리아 미스(Maria Mies)가 이 과제를 강력하게 표현한 바 있다. 그녀는 공통적인 것의 창출이 첫째로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분업이 분리한 것들을 재결합하기 위해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심대한 변형이 일어나는 것을 필요로 함을 지적했다. 생산이 재생산 및 소비와 분리됨으로써 우리는 ① 먹는 것, 입는 것, 일하는 도구가 생산되는 조건들을, ② 그 사회적·환경적 비용을, 그리고 ③ 우리가 산출하는 폐기물을 떠안게되는 사람들의 운명을 무시하게 되기 때문이다.(Mies 1999) 우리는 우리의 행동의 결과에 대해 무책임한 상태―이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분업이 조직되는 파괴적인 방식들의 결과이다―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만일 이에 미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의 생산은 불가피하게 다른 이들에게는 죽음의 생산이 될 것이다. 지구화는 이 위기를 악화시켜서 생산되는 것과 소비되는 것 사이의 거리를 벌렸으며 그럼으로써 (전지구적 연결성이 증가되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먹는 음식, 우리가 사용하는 석유, 우리가 입는 옷, 우리가 서로 소통하는 데 쓰이는 컴퓨터들이 피의 희생을 치르고 생산된 것임을 보지 못한다.

페미니즘적 관점은 우리에게 이러한 망각의 상태를 극복하는 데서 커먼즈를 재구축하는 일을 시작하라고 가르쳐준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기초해서 우리의 삶과 우리의 재생산을 이루기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그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기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공통적인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커머닝은 우리 자신을 공통적 주체로 산출하는 활동이 되어야 의미를 가진다. ‘공동체 없이 커먼즈 없다’라는 슬로건은 바로 이런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공동체는 종교나 민족을 기반으로 형성된 폐쇄적인 곳이 아니라 관계의 질, 협력의 원칙, 서로에 대한 그리고 지구·숲·바다·동물에 대한 책임의 원칙을 의미한다.

물론 그러한 공동체의 달성은 우리의 일상적인 재생산 노동의 집단화와 마찬가지로 시작일 뿐이다. 그것이 더 광범한 반(反)사유화운동 및 공통의 부를 되찾기를 대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집단적 통치(자치)에 대한 우리의 교육과 역사를 집단적 기획으로 인식하는 일의 필수적 부분이다.

그래서 가사의 공동체화를 우리의 정치적 의제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의 풍부한 페미니즘 전통을 다시 살려야 한다. 이 전통은 ①19세기 중반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실험들에서부터 ②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초까지 ‘유물론적 페미니스트들’이 보인, 집단적 살림을 통해 가사노동을 재조직하고 사회화하려는, 그럼으로써 집과 동네를 재조직하고 사회화하려는 시도들―이 시도들은 안타깝게도 1920년대에 ‘적색공포’로 종식되었다―까지에 걸쳐있다.(Hayden 1981 and 1986) 이러한 실천들에서 보이는, 재생산 노동을 인간 활동의 중요한 영역으로, 부정될 것이 아니라 혁명적으로 변혁되어야 할 영역으로 볼 수 있는 과거 페미니스트들의 능력이 다시 논의되고 다시 가치를 부여받아야 할 것이다.

집단적 삶형태를 창출하는 결정적 이유 하나는 인간의 재생산이 지구상에서 가장 노동 집약적인 일이며, 대체로 기계화로 환원될 수 없는 일이라는 데 있다. 육아, 환자 돌보기 또는 신체적·정서적 균형을 재통합하는 데 필요한 심리적 작업은 기계화할 수 없다. 미래주의 산업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서는 돌봄을 로봇화할 수 없다. 특히 어린이와 환자를 돌보는 사람 가운데 간호사봇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서비스 제공자의 건강을 희생하지 않고 책임을 분담하고 협력하는 것이 적절한 치료를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수세기 동안 인간의 재생산은 집단적 과정이었다. 그것은 확대된 가족과 신뢰할만한 공동체들의 일이었다. 특히 프롤레타리아 동네에서 그랬으며, 사람들이 혼자 살았을 때에도 그랬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오늘날의 노인들처럼 외롭거나 의존적이지 않았다. 재생산이 완전히 사유화된 것은 자본주의에 와서의 일이다. 이 사유화 과정은 지금 우리의 삶을 파괴할 정도로 심해졌다. 이러한 추세는 역전되어야 하며 지금이 그러한 기획에 유리한 때이다.

자본주의 위기가 미국을 포함하여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재생산의 기본 요소들을 파괴함에 따라 우리의 일상 생활의 재건이 가능한 일이자 긴요한 일이 된다. 파업과 마찬가지로 사회적/경제적 위기가 임금 노동의 규율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성을 우리에게 강요한다. 바로 이런 일이 대공황 중에 일어났는데, 그때 화물열차를 커먼즈로 전환하여 이동성과 유목 생활에서 자유를 추구한 호보들(hobos, 떠돌이 일꾼들)의 운동이 일었다.(Caffentzis 2006) 그들은 철로가 교차하는 곳들에서 자치 규칙과 연대에 기반을 둔 호보 정글들을 조직했는데, 이는 많은 호보들이 믿었던 공산주의 세계의 예시였다.(Anderson 1998, Depastino 2003 and Caffentzis 2006) 그러나 소수의 박스카 베르타(Boxcar Bertha)들을 제외하면((<박스카 베르타>(Boxcar Bertha, 1972)는 마틴 스코세시(Martin Scorsese)가 벤 라이트먼(Ben Reitman)의 『도로의 누이―박스카 베르타의 자서전』(Sister of the Road: Sister of The Road: The Autobiography of Boxcar Bertha )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이것은 주로 남성들의 세계였고 남성들의 형제애였으며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없었다. 경제 위기와 전쟁이 끝나자 호보들은 노동자들을 고착시키는 두 개의 큰 엔진인 가족과 집에 길들여졌다. 대공황 동안 보여진 노동계급 재구성의 위협을 유념한 미국 자본은 ‘생산 지점에서의 협력, 재생산 지점에서의 분리 및 원자화’라는 원칙을 경제 생활을 조직하는 데 탁월하게 적용했다. 레비타운(Levittown)((‘Levittown’은 윌리엄 레빗(William J. Levitt)과 그의 회사(Levitt & Sons)가 만든 거대한 주택개발사업의 이름이다.))이 제공한 원자화되고 직렬화된 가족 주택은 탯줄로 연결된 부속물인 자동차와 결합하여 노동자를 정주하는 삶에 고착시켰을 뿐만 아니라 호보 정글들이 나타냈던 유형의 자율적 노동자 커먼즈를 종식시켰다.(Hayden 1986) 오늘날 수백만 명의 미국인의 집과 자동차가 회수되고 압류·철거·대량실직이 다시 자본주의 노동 규율의 기둥을 무너뜨리고 있음에 따라 해안에서 해안으로 뻗어 있는 천막 도시들 같은 새로운 공통 기반이 다시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시적인 공간, 일시적인 자율지대들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재생산의 토대가 될 커먼즈들을 구축해야 하는 주체가 바로 여성들이다.

집이 경제의 기반이 되는 오이코스(oikos)라면, 역사적으로 가사노동자이며 가옥 수감자들인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집을 (다양한 사람들과 협력형태들이 가로지르는) 집단적 삶의 중심지로 되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고립과 고착이 없는 안전함을 제공하고 공동체 소유물의 공동사용 및 순환을 가능하게 하며, 무엇보다도 재생산의 집단적 형태들의 토대를 제공해야 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19세기의 유물론적 페미니스트들의 프로그램으로부터 이 기획에 대한 영감을 끌어올 수 있다. 이들은 집(home)이 ‘여성 억압의 중요한 공간적 구성 요소’라고 확신하고 공동 부엌을 조직하고 노동자들이 재생산을 통제하기를 요구하는 협동적 가구들을 조직했던 것이다.(Hayden 1981)

이러한 목표는 현재 매우 중요하다. 삶이 가정에 고립되는 상태를 분쇄하는 것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고 고용주 및 국가와의 관계에서 우리의 힘을 강화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생태적 재앙으로부터의 보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집이라고 부르는 재생산 자산과 폐쇄된 거주지의 ‘비(非)경제적’ 증가가 가져오는 파괴적인 결과, 즉 겨울에는 온기를 대기로 발산하고 여름에는 가차 없는 더위에 우리를 노출시키는 파괴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De Angelis 2007) 가장 중요한 것은, 재생산을 보다 협력적인 방식으로 재규정하지 않는 한,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분리 및 정치적 행동주의와 일상적 삶의 재생산 사이의 분리를 끝내지 않는 한 대안 사회와 강력한 ‘스스로 재생산하기 운동(a self-reproducing movement)을 구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성에게 재생산을 커머닝/집단화하는 임무를 이렇게 할당하는 것은 여성성을 자연주의적으로 보는 사고방식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당연히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굴복을 죽음보다 더 나쁜 운명으로 본다. 자본가들에 의해 전유된 자연의 부처럼, 여성이 남성들이 공유하는 부로서, 남성들이 자유롭게 전유할 부와 서비스의 자연적 원천으로 지정되었다는 생각이 우리의 집단의식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돌로레스 헤이든(Dolores Hayden)의 말을 풀어보자면, 재생산 노동의 재조직, 따라서 주택과 공적 공간의 재조직은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노동의 문제이며, (더 추가하자면) 권력과 안전의 문제이다(Hayden 1986). 여기서 브라질의 무토지 농민운동(MST)에 참여한 여성들의 경험이 떠오른다. 이들은, 공동체가 자신이 점유한 땅을 유지할 권리를 획득한 후, 새 주택들을 하나의 복합체를 형성하도록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투쟁의 과정에서 그랬던 것처럼 계속해서 (설거지와 요리를 함께 하는 등) 집안일을 공동으로 하고, 남자들에게 학대당할 때 서로를 도와주기 위해 달려갈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여성이 재생산 노동과 주거의 집단화에 앞장서야 한다는 주장은 가사노동을 여성의 천직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의 저항의 역사에서 본질적인 부분이었던 재생산 노동에 관해 여성들이 축적한 집단적 경험, 지식 및 투쟁을 지우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역사와 다시 연결되는 것은 오늘날 여성과 남성 모두가 우리 삶의 젠더화된 구조를 허물고 우리의 집과 삶을 커먼즈로 재건하는 데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단계이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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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 돌봄’ 강의요목

 


  • 저자  :  David Bollier
  • 원문 :  Pirate Care, a Syllabus
  • 분류 :  번역
  • 옮긴이 :  루케아
  • 설명 : 

    아래 글은 데이빗 볼리어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2022년 9월 14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다음의 글은 데이빗 볼리어의 저서인 『변화만들기를 위한 커머너의 목록 — 앞으로 나아가는 이행들을 위한 도구들』(The Commoner’s Catalog for Changemaking: Tools for the Transitions Ahead)에서 발췌한 일련의 특집들 중 하나이다. 다수의 선구적인 커먼즈 프로젝트들과 운동들의 개요서인 『커머너의 목록』은 서점에서 구할 수 있고 온라인(https://commonerscatalog.org)을 통해 무료로 볼 수 있다.

사람들을 보살피는 돌봄의 특정 유형들이 불법화되었다는 것에 놀란 많은 유럽인들이 2019년 그들이 해적 돌봄”(Pirate Care)이라 부르는 것에 관한 교과목의 강의요목을 만들어냈다. 프로젝트 담당자들이 설명했듯이, “우리는 선장들이 바다에서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고 체포되는 세상에 살고 있고, 과학논문을 다운로드한 사람이 35년을 감옥에서 지내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다른 방법으로는 피임약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피임약을 가져다 준 사람들이 기소를 각오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아픈 사람들에게 약을, 목마른 사람들에게 물을, 집 없는 사람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준 것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여성 영웅들은 돌보고 있고 불복종하고 있다. 그들은 해적이다.”

여기서 ‘해적 돌봄’이라는 생각이, 그리고 인도주의적인 돌봄 내지 인명을 구조하는 돌봄을 제공할 필요—국가가 이것을 범죄로 간주하기로 작정하더라도 말이다—가 있다는 생각이 나왔다. 발레리아 그라찌아노(Valeria Graziano), 마셀 마스(Marcell Mars) 그리고 토미슬라브 메닥(Tomislav Medak)에 의해 개발된 해적 돌봄 강의요목은 “증가일로에 있는 행동주의의 오늘날의 형태들을 ‘돌봄’과 ‘해적행위’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지도그리기하는—초국적인 유럽 공간에 주로 기반을 두고 있는—하나의 연구과정으로” 작성되어 있다. 그 강의요목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 중 하나 즉 그 모든 다각적이고 서로 연결된 측면들에서의 ‘돌봄의 위기’”에 개입하는 새롭고 흥미로운 방식들을 제안한다.

우리 시대의 돌봄의 결여는 극도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시장/국가의 다양한 제도들—건강의료보험, 주택, 식량, 사회적 지원—의 실패로서 보일 수 있다.

시장은 명백한 ‘소비자 수요’가 없다면 돌봄에 가치를 두지 않는 경우가 잦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돌봄은 종종 가장 취약한 인적 서비스이다. 국가 관료들은 국민들에게 마치 기계인 양 규격화된 단위의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한다. 규칙들이 주도하는 대규모 제도들은 결코 ‘돌봄’을 실행할 수가 없다.

그래서 돌봄은 대체로 무급노동이거나 보수가 형편없는 유급노동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여성들의 노동’ 또는 비(非)백인들을 위한 노동으로서 종종 젠더화되고 주변화된다.

해적 돌봄 강의요목은 돌봄을 커머닝을 통해 발생하고 유지되는 중요한 것으로서 고양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돌봄은 국가권력과 시장에 저항하는 것이, 그리고 그렇게 저항하면서 사회 안에서의 권력관계들이 어떻게 극심하게 불평등한지를 드러내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이것은 돌봄을 제공하는 것이 왜 정치적 행위인지를, 이를테면 착한 사마리아인이 ‘적’을 도와주는 것과 같은 정치적 행위와 종종 유사한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해적 돌봄 강의요목은 이주자들과 난민들에게 인도주의적인 원조를 제공하는 것이 어떻게 연대와 공감에 바탕을 둔 기본적인 인간행동을 나타내는지를 탐구한다. 강의요목은 ‘해적 돌봄’에 관한 읽기 자료들을 제공하고 ‘해적 돌봄’을 이해하기 위한 실천적인 대응들을 조직된 성찰, 직접행동, 그리고 ‘집단적 기억 글쓰기’를 통하여 제안한다. 후자는 집단적이고 개인적인 마음의 상처들을, 특히 폭력적인 역사적 과거의 여파로 생겨난 상처들을 치료하는 한 방법으로서, 기억들을 회상하야 글로 쓰는 과정이다.

해적 돌봄의 실행자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자기조직화,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대안적 접근법들, 그리고 도구들•과학기술들•지식들의 커머닝을 실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시민불복종을 의미할 수 있으며, “가장 착취받고 차별받으며 소모품으로 격하된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인 유대”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박해받을 위험이 있음을 의미할 수 있다. 해적 돌봄 강의요목은 열려있으며 점차 발전하는 “도구”로 즉 “이 실천들로부터 배우는 집단적인 과정들을 지원하고 활성화시키기 위한 도구”로 제시된다.

나는 이 강의요목이 돌봄의 정치적 동학과 힘의 동학을 설명하는 방식이 좋았다.

1. 돌봄은 본래적으로 ‘친절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항상 권력관계를 함축한다. 기율•배제•위해의 과정들이 돌봄의 모태 안에서 작동할 수 있다.

2. 돌봄노동은 권력에 불복종하고 우리의 집단적 자유를 증가시키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것이 돌봄노동이 자본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이며 인종주의적인 방식으로 조직될 때에는 대다수의 살아있는 존재들을 위해 작동하지 않는 이유이다. 우리는 전지구적으로 돌봄의 위기에 처해있다.

3. ‘잘못된’ 사람들은 없다. 그런데 ‘잘못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 점점 더 사회적으로 좌절되고 있으며 어려워지고 범죄화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돌봄의 위기는 아주 오랜 시간동안 있어왔다.

4. 돌봄은 노동이다. 그것은 필요한 노동이며 숙련노동이다.

5. 돌봄노동은 젠더•지역•인종•계급•능력•나이의 구분에 따라 대부분의 사회에서 불공평하게 그리고 폭력적으로 공유된다. 어떤 이들은 강제로 돌보고 또 어떤 이들은 서비스를 기대하는 자신들의 특권을 옹호한다. 이런 상황은 바뀌어야 한다.

6. 돌봄노동은 자원•지식•도구•기술에 대한 전면적인 접근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것들을 빼앗겼다면 우리는 되돌려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바다 약탈을 막을 ‘블루커먼즈’ 어젠다

 



바다는 지표면의 70%를 덮고 있고 우리가 숨 쉬는 산소의 절반을 제공할지라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특히 육지로 둘러싸인 나라들이나 지역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시장/국가 시스템이 자연계의 이 영역을 파괴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업형 트롤선들이 어장에서 과잉어획을 하여 많은 어장들을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가고 있으며, 광산기업들은 석유, 가스, 니켈, 코발트, 망간 및 희토류 광물들을 찾아서 해저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

커먼즈의 관점에서 우리는 이 끔직한 시장 인클로저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인가? 최근 커머닝의 프런티어(Frontiers of Commoning) 팟캐스트(에피소드 #28)에서 소아스런던대학교(SOAS University of London)에 재직하는 경제학자이자 커먼즈 연구자인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은 몇 가지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해결책들을 제안한다. 스탠딩은 『블루커먼즈—바다경제를 변형하기』(The Blue Commons: Transforming the Economy of the Sea)를 막 출간했다. 이 책에서는 시장/국가가 바다를 무책임하고 생명을 파괴하는 식으로 취급하는 것을 커머닝이 어떻게 억제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방대한 양의 복잡한 해양역사들, 국제법 및 생태과학을 종합적으로 다룬다.

스탠딩은 바다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을 ‘자산소득자 자본주의’(rentier capitalism)((‘자산소득자 자본주의’(rentier capitalism)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972 참조.))의 예측 가능한 결과로 본다. 이것은 광범위한 재산권, 금융화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산업화된 자원의 착취에 특혜를 주는 경제시스템이다. 정부와 함께 하는 기업측은 이 시스템이 행하는 ‘빼내서 달아나는’ 관행을 ‘푸른성장’(blue growth)이라 부르길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은 실로 시장의 비극에 관한 이야기이다.

기업들은 조직적으로 연안어업 공동체를 ‘탈커먼즈화’하려고 하고, 심해 생명체들에 대한 특허권을 주장하려고 하며, 해저 광상(鑛床)을 수탈하려고 시도한다. 일례로 남아프리카 기업인 드비어스 그룹(De Beers Group)은 다이아몬드를 찾아서 해저를 긁어내기 위하여 전문화된 선박들로 이루어진 선단을 이용하는데 이것은 해양생태계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해양생태계를 붕괴시킨다.

스탠딩은 불법적인 어업관행에서의 국가와 기업들 간의 결탁 그리고 유럽 연합의 파괴적인 공동어업정책 및 브렉시트에 관하여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장들을 제공한다. 그는 어떻게 양식기술이 건설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는지를, 그러나 기업들의 손에 맡겨지면 어떻게 양식어업이 블루커먼즈 공동체에 도움이 되기보다 블루커먼즈를 상품화하고 사유화하는지를 설명한다.

이 책에서 스탠딩이 하고 있는 가장 큰 기여는 그가 커먼즈에 바탕을 둔 해결책들—어장과 연안 공동체에게 권한을 주기, 새로운 합법적인 원칙들을 제정하기 그리고 커머너들을 이롭게 할 신탁자금을 도입하기—을 제안한 것일 것이다.

스탠딩은 “협동주의와 페미니즘의 원칙에 바탕을 둔, 고무적인 특징을 지닌 몇몇 새로운 조직 형태들이 구체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런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국가, 금융, 국제적인 자선단체들에 포섭될 위험들을 인식”하고 있고 따라서 비열하고 약탈을 일삼는 정책들에 씌운 진보적인 겉면에 속지 않을 것이다.

스탠딩은 연안 공동체 소속 어부들을 위한 ‘생계권’ 같은, 기업들의 어업권보다 우선해야 하며 널리 시행되어야 할 많은 법적인 원칙들을 거론한다. 또한 그러한 공동체들 사이에서 존중되어야 할 ‘서식지 권리,’ ‘사회적 기억에 대한 권리’ 그리고 ‘세대 간 동등 지분’ 원칙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스탠딩이 주장하는 블루커먼즈 어젠다는 또한 ‘커먼즈 자금’이라는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기업이 항구를 사용하고, 가스를 추출하며, 어장에 들어오고, ‘혼획'(생태적 위해를 야기하는 해양 종들을 의도치 않게 잡는 것)을 하는 일련의 활동들에 세금을 부과하자는 발상이다.

과세로 거둬들인 돈은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이해당사자 신탁으로 관리되는 커먼즈 펀드로 투입될 것이다. 펀드는 모든 사람에게 지불되는 정기적 배당금을 산출할 것인데, 이는 <알래스카 퍼머넌트 펀드>(Alaska Permanent Fund)가 주 소유의 땅에서 시추가 이루어지는 경우 거기서 발생하는 수입을 모두가 지분을 가지는 자금으로 사용하여 알래스카에 사는 모든 가구에게 돌아가는 배당금을 발생시키는 경우와 매우 유사하다.

스탠딩은 말한다. “회사가 커머너들로서 우리 모두에게 속하는 땅이나 해저를 사용하고 그 과정에서 수익을 낸다면 그때 커머너들로서 우리는 보상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원칙이다.”

이런 취지에서 스탠딩은 엄청나게 큰 유람선들은 정상운영만 해도 높은 세금을 부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유람선들은 항구에 정박할 때 바다로 엄청난 양의 오염물질과 디젤기관의 유해배출물질을 방출한다. 스탠딩은 거대한 연안 항구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도 커머너들에게 마찬가지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 세계에 485개의 대규모 항구가 있고 우리의 항구들에서 놀랄 만큼의 돈을 버는 기업들과 기업체인들이 그 항구들을 모두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다.”

우리의 공통의 부에 대한 이런 방식의 약탈이 바다에서는 통상적인 절차라고 그는 말한다. “영국 여왕은 해저의 상당부분을 이른바 재생 가능한 풍력발전 지역용으로 다국적 기업들에게 경매로 팔았다. 이는 앞으로 계속해서 왕실사람들에게 수십 억 파운드가 흘러들어오는 것을 보증해줄 것이다.” 하지만 여왕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 “해저는 왕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커먼즈의 것이다. 나는 ‘멈춰’라고 말하고 보상을 요구하고자 한다.”

블루커먼즈에 관하여 가이 스탠딩과 한 전체 인터뷰를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커먼즈의 구성을 위한 9개의 정치적 명제

 



앞서 올린 글(([옮긴이] 현재는 원문의 링크가 깨져있다.))에서 나는 우리가 공통적인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다도와 라발의 입장을 요약했다. 이제 나는 공통적인 것―그들의 사유가 그들을 공통적인 것으로 인도한다―을 구축하는 방법에 관한 9개의 핵심적인 정치적 명제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불가피하게 나는 그들의 글을 압축하고 다수의 주요 참고문헌을 생략해야했으나 그들 제안의 골수를 충실히 전달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명제 1 : 공통적인 것의 정치를 건설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통적인 것의 정치가 19세기 사회주의적 연합주의, 20세기 노동자평의회 전통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해도 더 이상 단순히 장인(匠人)의 맥락이나 산업현장의 맥락에서 사유될 수는 없다. 자본주의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어떤 포위로부터, 또는 자본주의로부터의 어떤 집단적 이탈로부터 공통적인 것의 정치가 출현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토지와 자본 및 지적 재산권과 연관된 소유권을 재고하지 않는다면 공통적인 것의 정치는 존재할 수 없다. 소유권이 아닌 사용권이 사회변형을 위한 법적 핵심이 되어야 한다.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자치제도를 창안함으로써 사회의 공통적 생산에 적합한 형태를 찾아야 한다. (자치제도의 역할은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공통적 원리가 존재한다고 해서 상이한 사회경제적 영역들, 공적 또는 사적인 영역들, 혹은 정치적 영역들 사이의 구분이 철폐될 것이라 생각하면 결코 안 된다. 공적 숙의가 어떤 하나의 사회적·전문적 범주에 속하는 이해집단들에 의해 포획되는 것을 막으려면, 생산 교환의 영역이 커먼즈의 자치를 중심으로 완전히 재조직돼야 한다. 또한 각각의 커먼즈는 그 활동의 모든 ‘외부성’을 고려해야 하는데, 이는 커먼즈의 거버넌스가 그 활동과 관련을 가지는 사용자들, 시민들을 포함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사회경제적 영역은 공통의 의사결정 능력을 단련하는 학교가 된다.

명제 2 : 소유권에 도전하기 위해 사용권을 가동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사회경제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의 절합은 로마법에서 연원하는 도미니움(배타적인 사적 소유)과 임페리움(주권의 포괄적 권력)의 이중원리로 구성되어왔다. 공통적인 것의 정치는 이러한 이중적 절대주의에 도전해야 한다. 전통적 재산권은 재산에 대한 완전히 자유로운 사용을 소유자들에게 허락하며 그리하여 소유자가 타인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공통적인 것의 사용자는 공통적 사용을 관장하는 규칙을 공동생산하는 식으로 다른 사용자들과 결부되어 있다.

자본주의 자체가 물질적 사물과 결부되어 있는 전통적 소유모델에서 벗어나 점점 더―재화의 판매가 아닌―써비스의 제공으로 변해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써비스 사용자들은 점점 더 자산 대신 접근권을 구매하는데, 접근권은 새로운 공동사용 모델을, 권리유형의 다각화(사용권, 임대수익권, 상이한 권리들에 대한 구매권과 판매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공간보다는 시간과 관련되는 새로운 형태의 인클로저로 향해가고 있다. 사용자가 무언가를 계속 사용하는 한 지불해야만 하는 것이다. 동시에 기업은 개인들이 상호작용하는 네트워크를 계속해서 소유하며 통제한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사용권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유일하게 가지는 상위기관의 의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공허한 권리이다. 진정으로 공통적이려면 사용에 대한 결정이 집단적 심의로 이뤄져야 한다. 이는 공통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과 동등한 것이며 그래서 가령 한 뙈기의 땅을 모두가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단순히 공유된 사물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이 존재하려면, 공동활동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두를 포함하기 위하여 재산권을 확장한 형태의 소유권을 개발하는 대신, 소유권에 반하여 가동될 수 있는 사용권이 있어야 한다. 공통적인 것에 대한 관리는 국가가 아니라, 공통적인 것을 공동 사용하는 이들에게만 위임될 수 있다.

명제 3 : 공통적인 것이 노동해방으로 가는 길이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과 함께 일을 한다. 또한 우리는 타인을 위해 일을 한다. 언제나 일을 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문화적이며 때로는 미학적 차원을 가지는, 공유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일은 공동체나 동료 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긍정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노동자가 노동에 계속해서 의미를 부여한다면, 이는 단순히 소외나 자발적 굴종, 경제적 제약 때문이 아니다. 이는 일이 개인들이 자신들을 집단적으로 사회화하는, 타인과의 유대를 유지하는 활동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노동자를 모아놓음으로써 진정으로 협력적인 현장의 자연발생적 출현을 어떤 식으로든 허용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자유주의적 기업은 강제된 협력을 실행한다. 노동자를 단순직공으로 축소시키면서 기업이 요구하는 것은 노동자의 적극적 동원이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등한시된 현장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우리 활동의 핵심에 다시 놓여야한다. 노동자의 과업의 질을 ‘고양하거나’ 현장의 조건에 대해 이따금씩 ‘조언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노동자들은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규칙과 결정을 다듬어내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진정으로 협력적인 공간이 되기 위해 기업은 자본의 지배에서 해방된 민주적 기관이 되어야 한다.

명제 4: 공통의 기업을 수립해야 한다. 

자본주의적 통제로부터의 노동의 해방은 기업이 경영독재, 주주독재가 지배하는 섬이기를 그치고 민주적 사회의 기관이 될 때에만 가능할 수 있다. 마크 샹니예(Marc Sagnier)의 유명한 말처럼, “기업에 군주제가 존재하는 한 사회에 공화국은 있을 수 없다.” 어떤 현장민주주의도 자본주의가 자신의 배타적 소유물로 보는 것을 통제하는 체제와 양립할 수 없다. 그렇다고 국가통제가 더 나은 것은 아니다. 국가통제는 역사적으로 사회주의를 고꾸라뜨린 장애물이다. 소위 사회적 혹은 집단적 소유는 중앙집권화되고 관료적이며 비효율적인 경영형태 말고는 실행할 수 없는 국가소유로 환원되어왔다. 이런 맥락에서 전통적 노동자 협동조합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경영자를 선택하고 회사가 취할 방향을 투표에 부치며―회사의 자본이 그들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회사의 자본을 그들의 결정에 종속시키는 흥미로운 대안적 모델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모델은 대안적 모델을 위한 중요한 시험대였음에도 전통적으로 자본주의적 경쟁과 국영기업 사이에 줄곧 갇혀있던 사소한 대안이었다. 어떻든 현장에 공통적인 것을 자율의 섬으로서 제도화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회적인 것 안에 경제를 재통합하고 민주적인 현장거버넌스 내에 관점의 복수성(노동자, 소비자)을 도입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시장 자체에 대한 이해가 재고될 필요가 있는데 이는 개별적 소비자의 결정의 자유를―특히 지역 수준에서의―집단적 결정의 틀 안에 다시 새기기 위함이다. 이로써 오늘날처럼 소비자와 노동자가 서로 맞서는 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명제 5 : 경제영역 내의 연대가 공통적인 것의 사회로 가는 길을 닦아야 한다. 

제3부문 또는 비수익경제가 때로 대안 경제로 혹은 심지어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제3부문은 그것을 정의하는 용어와 실제 모두 나라마다 다양하고, 서로 다른 논리를 가지는 제도를 보통 포함한다. 제3부문은 특정 직업이나 사회집단의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지원을 제공하는 조합적인 것일 수도 있고, 종교적 전통을 바탕으로 하는 자선단체적인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이러한 다양한 집합체를 제시하기는 어려운데 이는 특히 이 집합체의 활동이 자본주의기업과 국가기관 양자로부터의 상당한 압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현재 조합부문은 대안경제를 촉진하기는커녕, 보호를 거의 받지 못하는 저임금노동자 수가 증가하면서 복지국가를 위한 저비용 하도급 역할을 맡는 경향이 있는 반면 국가고용주는 이 수가 정체 혹은 감소되어왔다고 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상황에서 사회적 경제는 총익의 정의를 국가가 독점하고 가치의 정의를 시장이 독점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촌락·마을·이웃 수준에서의 새로운 연대를 포함하는, 앙드레 고르(André Gorz)와 이반 일리치(Ivan Illich)가 설교한, 일종의 지역에 기반을 둔 공생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하면 결코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이 공통적인 것의 정치를 그 자체만으로 창출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명제6 : 공통적인 것은 사회민주주의(([옮긴이] 사회민주주의 : 우리에게 이미 알려진 그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로 사용된 용어이다.))를 수립해야 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진보정치의 목표가 근본적으로 복지국가의 재건일 것이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이 국가에 의해 왜곡되고, 이제 국가가 다른 무엇보다 더 복지의 범위를 줄이고 복지를 경쟁력이라는 제약 아래 두려한다는 것을 결코 잊으면 안 된다. 사회(복지)국가는 사회구성원의 공동활동인 공통적인 것을 부정한다. 기업 안에서의 모든 실질적인 경제적 시민권을 포기하고 새로운 노동조직 형태의 가장 가혹한 규범에 복종하는 대가로 복지국가의 사회적 보호와 경제적 재분배를 받는 것이다. 따라서 공통적인 것의 정치가 먼저 추구해야 하는 것은 호혜와 연대의 제도에 대한 통제권을 사회로 되돌리는 것이다.

명제 7 : 공공써비스가 공통적인 것의 제도가 되어야 한다. 

19세기 조합사회주의와 20세기 노동자평의회는 사회주의가 취해야하는 제도형태가 국가관료에 의한 경제경영과는 달라야한다고 봤다. 그러나 이 운동은 공공써비스의 미래 규모를 예측하는 데에는 일반적으로 실패했다. 공공써비스는 갈등과 투쟁의 장이기 때문에 부르주아 지배에 복무하는 ‘국가장치’로 보아서도 안 되고 사회에 완전히 복무하는 제도로 보아서도 안 된다. 따라서 제기되는 물음은 어떻게 공공써비스를 공통적 사용권을 중심으로 조직되며 민주적으로 통치되는 공통적인 것의 제도로 만들 것인가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가 더 이상 중앙집권화된 거대한 행정체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집단적으로 필수적이라고 판단되는 욕구들을 충족시키는 것을 궁극적으로 보장하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써비스 행정은 국가의, 노동자의 그리고 시민사용자의 대표가 포함된 기관에 위임돼야 한다. 써비스는 지역적으로 시행되어야 하지만 국가는 헌법이나 기타 기본법을 통해서 공통적인 것에 대한 접근을 권리로 만들어야한다. 이러한 종류의 해결책은 국가중심주의의 위험에 맞서기 위해서도 지역주의·지방주의의 반동적 활용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명제 8 : 전지구적 커먼즈를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매우 다양한 형태·크기를 가지는 ‘커먼즈’의 환원불가능한 복수성을 보존한다는 조건하에서 공통적인 것을 지역 커먼즈부터 전지구적 커먼즈로 이어지는 전체 사회의 재조직을 위한 정치적 원리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각각의 커먼즈가 없으면 의미 있는 공통의무가 없으며 그리하여 진정으로 공통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각각의 커먼즈의 자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커먼즈들의 연계를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양한 유형의 해결책이 제안되어왔다. 몇몇 해결책은 ‘반인도적 범죄’나 ‘세계유산’이 ‘인류’가 권리를 가진 주체로 점진적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보고, 인권을 새로운 세계의 법적 질서의 기초로 긍정하는 데서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았다. 하지만 우리는 국가가 무력을 계속해서 독점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그러한 권리체계의 발전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협력의 원리나 사회정의의 원리가 아닌 경쟁, 약탈적 전략, 호전적 논리의 규범에 따라서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조직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관행이 어떻게 세법·상법·고용법 영역에서 ‘법률쇼핑’(가장 유리한 조건을 위한 쇼핑)을 낳았는지를 주목한다. 이 관행은 법 자체를 자본주의적 경쟁의 영역이자 상업의 대상으로 만든다. 건강에 관한, 문화에 관한, 물에의 접근에 관한, 오염에 관한 문제에 있어 강요된 논리는 자유교환의 논리이며 (사적) 소유권에 대한 절대적 존중의 논리이다. 자본에 의하여 그리고 자본을 위하여 만들어진, 지구화되었으며 지구화를 행하고 있는 전체 법률장치가 ‘지구자본’(cosmocapital) 제도를 생산하고자 가동되고 있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국제법의 본격적인 사유화이다.

또 다른 담론은 ‘전지구적 공공재’를 촉진하고자 고전경제학적 수단을 사용하려한다. 1990년대 초에 지배적인 신자유주의적 경로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였던, 마부브 울 하크(Mahbub ul Haq), 아마티아 센(Amartya Sen) 같은 인물에 영향받은 UN은 기대수명, 문해력 같은 기준이 포함되도록 발전에 대한 정의(定義)를 확장했다. ‘좋은 전지구적 거버넌스(global good governance)’라는 생각이 등장하여 ‘전지구적 공공재’(global public goods)의 생산과 연결됐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UN개발프로그램(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me, UNDP) 경제학자들은 전지구적 공공재를 다음과 같이 세 범주로 분류했다. 전지구적으로 분리불가능한 (과다사용된) 재화(오존증·기후), 인간이 만든 (과소사용된) 전지구적 공공재(과학지식·인터넷), 통합된 전지구적 정책이 낳은 재화(평화·건강·안정성). 이러한 재화의 정의가 가지는 한 가지 문제는 그 정의가 시장이 ‘자생적으로’ 생산할 수 없는 것에 적용된다는 점에서 부정적이고 주변적인 성격의 것이라는 점이다. 또 다른 문제는 누가 혹은 무엇이 이 재화의 생산을 보장하는가이다. 전지구적 국가가 보장하는 것일까?

UNDP가 제시하는 한 가지 대답은 전지구적 CO2 배출거래 사례처럼 필요할 경우 시장메커니즘, 소유권 강화를 통해 사적 행위자들이 저 재화에 책임지도록 동기부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적 결과는 주요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존하는 전지구적 질서에 대한 모든 실질적 도전을 무력하게 만들 것이다. 한편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진보적 색채를 띠는 자본주의는 사실 정부·자선단체·NGO가 자본주의에 처분을 맡기는 모든 ‘외부성’에서 이윤을 끌어내야 한다. 기업은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환경을 누리기 위해 정치적 안정, 도시기반시설, ‘잘 기능하는’ 대학체계, 심지어 저임금노동자를 위한 자선지원, 범죄자를 위한 감옥을 필요로 한다.

분명한 것은 지배적인 신자유주의 논리는 전지구적 공공재를 방어하라는 요구가 반드시 물화된 공통재 경제영역으로 향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인데, 이는 공통재에 대한 장악을 제한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달리 진보적 정치투쟁은 공통재를 기본권에 결합시킴으로써 그 범위를 확장하려 하는데 이는 단순히 재화만이 아닌 써비스와 제도에 대한 접근을 공통재에 포함하기 위함이다. 신자유주의 국가들이 탈민주화를 적극적으로 유발해온 상황에서 지구화 반대론자 같은 정치적 진보주의자가 시민에 기반을 둔 복지권이었던 것을 보편적 인권으로 변형하고 그럼으로써 옛 복지국가의 보편주의적 폭넓음을 전지구적 커먼즈의 문제틀에 접목하려는 것은 이해할만한 일이다.

허나 심히 인위적이라는 점과는 별도로 이런 움직임은 낡은 서구사회 모델을 발본적으로 변화한 맥락에 이식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논리가 지배하는 현존국가들이 전지구적 커먼즈에 힘을 보탠다거나 공통재를 배분하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반면 시민권은 쟁취할 가치가 있다. 시민권은 근대적인 정치적 주체성의 핵심 요소를 형성한다. 그러나 시민권이 의미가 있으려면 시민이 복지에 대한 권리만 들먹이는 사회적 시민, 써비스 소비자여서는 안 된다. 시민은 정치적으로나 시민으로서나 능동적인 시민, 공통적인 것을 의식적으로 공동생산하게 해주는 제도를 발명할 수 있는 그런 시민이어야 한다.

어떤 큰 변화가 없는 한 미래가 질서 잡힌 다원주의의 그것일 것 같지는 않다. 미래는 알랭 수피오(Alain Supiot)가 거론한 일종의 재봉건화일 가능성이 더 높다. 국가의 사회적 기능이 줄어들고 억압적 기능이 커지며 국민국가가 지역국가로 분열될지 모르는, 다면적 분열의 논리를 따라 지역권력과 초국가권력이 증식하는 재봉건화 말이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낡은 베스트팔렌 국민국가 체계가 어디서나 성장할 위험이 있는 광범위한 반동적·민족주의적·외국인혐오적 운동에 삼켜지지 않은 채 여전히 고쳐 쓸 수 있는 것일 수 있을까? 물어야 하는 것은 아마도 중앙집권적인 국가조직 방식과 이와 연관된 종속화의 형태는 이제 끝난 것이 아닌가일 것이다. 그 다음 자문해야 하는 것은 어떤 형태의 정치적 조직이 전지구적 커먼즈의 공동 생산에 제도 형태를 부여할 수 있는가이다.  

명제 9 : 커먼즈들의 연합(a federation of commons)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방정부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유일한 정치적 원리는 연합원리이다. 연합은 하나의 꼬뮌이나 몇몇 꼬뮌 혹은 꼬뮌집단이 하나의 목적이나 몇몇 목적을 위해 상호 책임지는 관계를 맺는 계약이나 협약 혹은 협정이다. 그 본질적 특징은 국가가 행사하는 종류의 주권과는 직접적으로 대조되는 방식으로, 어떤 집단에 대한 다른 집단의 일체의 종속을 배제하는 상호 책임이다. 

여러 상이한 연합주의 모델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과제는 어떤 특정 모델이 사회적 삶의 모든 수준에서 공유되는 사용 관행에 적합한지를 식별해내는 것이다. 여기서는 맑스주의 전통보다는 프루동 사상이 앞으로 나아가는 최선의 방안을 제공한다. 맑스가 국가권력을 정복해야 하는 프롤레타리아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프루동은 이중적인 연합모델―한편으로는 생산단위의 연합, 다른 한편으로는 꼬뮌 단위의 연합―을 설파했다.(([옮긴이] 생산단위는 헌재로서는 주로 자본주의적 기업에 속하는 것이고 꼬뮌은 지역공동체 혹은 커먼즈에 해당할 것이다.)) 이 모델은 꼬뮌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어떻게 현장의 산업민주주의와 결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프루동이 보기에 이 두 유형의 공통적인 것을 연계시킬 수 있는 공유된 원리는 계약조항들에 간직된 상호성과 상호적 책임이었다. 하지만 상호성의 이러한 확장은 법을 계약으로 대체하려는 프루동의 기획과 조화를 이루더라도 본질적으로 경제적 개념을 정치영역에 적용하는 것을 함축했다. 더 적합한 통합원리는 사회경제적 영역과 공적·정치적 영역의 거버넌스에 공히 적합한 정치원리인 공통적인 것임이 분명하다. 이 여러 커먼즈들의 연계와 관련해서는, 심급이 높아질수록 더 큰 권력을 행사하는 피라미드적 위계가 없을 것이다. 특히 국가나 초국가기관도 그저 다른 기관들과 같은 지위를 차지하며 특권이나 우선권이 없을 것이다. 

더 낮은 수준은 공유된 활동에 기초를 두고서 수평적 방식으로 서로 상호작용할 수 있을 것이며, 더 높은 수준을 통해 작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회경제적 커먼즈(생산·소비·종자은행 등)는 어떤 영토논리와도 무관하게 구성될 것이며, 그 구성목적에 해당하는 활동을 책임져야할 필요에 따라서만 구성될 것이다. 가령 예컨대 강 커먼즈(a river common)는 몇몇 지역경계나 심지어는 국가경계를 가로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달리 정치적 커먼즈는 전지구적 수준까지 규모가 확장되는 영토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상승논리에 따라 구성될 것이다. 

전지구적 커먼즈 연합에 대한 이러한 제안에 조응할 수 있는 시민권의 유형은 무엇일까? 국민국가 모델을 따라 사고된 어떤 ‘전지구적 시민권’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것은 복수적(複數的)이고 탈중심화된 시민권이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시민권이 영토적 범위가 더 확대될수록 그 정치적 밀도를 더 소실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 그리하여 결국 일종의 공허한 세계시민주의적인 인간으로서의 자질과 일치해버리고 만다는 점이다. 우리는 단순히 ‘도덕적’인 것, ‘상업적’인 것 혹은 ‘문화적’인 것으로 후퇴하지 않으면서 국가적이지도 민족적이지도 않은 시민권을 개발해야 한다. 비국가적·초국가적 시민권은 매우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모든 소속관계로부터, 소속에 들러붙은 권리로부터 분리된 시민권은 형식적 권리의 승인이 아니라 실천과 관련하여, 공유된 활동과 관련하여 사유되어야만 할 것이다.

주로 현장민주주의와 관련된 일단의 유사한 제안은 여기(([옮긴이] 현재는 원문 링크의 자료가 삭제되어 있다.))를 참조하라. 공통적인 것에 관한 다도와 라발의 인터뷰는 여기를 참조하라.




상품이 아니라 커먼즈로서의 식량

 



오늘날 극심한 기아와 넘쳐나는 식량이 공존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글로벌 식량시스템이 정말 많이 생산하고 정말 많이 낭비할지라도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인 필수품들 중 하나인 식량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그토록 부족한 것인가? 이 질문들은 반(反)기아 활동가, 농업 지도자이자 식량을 커먼즈로 여길 것을 주창하는 호세 루이스 비베로 폴(Jose Luis Vivero Pol)을 오랫동안 괴롭혔다.

식량이 넉넉한 가운데 끊임없이 계속되는 기아의 이유를 연구하면서 비베로는 실질적인 문제는 우리 사회가 식량을 상품 즉 시장 가격으로 가치를 평가받고 전세계 시장에서 거래되는 물건으로 취급하는 데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식량이 상품이라는 생각은 사회들이 식량을 공유하는 방법을 그리고 먹을 것이 충분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확신시킬 방법을 찾은 수천 년의 인간역사를 벗어난다. 식량을 상품으로 여기는 것은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식량을 가질 여유가 없게 됨을 따라서 굶주리거나 영양학상으로 품질이 떨어지는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어야함을 필연적으로 의미한다.

나는 비베로 폴과의 인터뷰—커머닝의 한계(Frontiers of Commoning)에 관한 나의 최근 팟캐스트(에피소드 22)—에서 이 주제들을 살펴보았다.

비베로 폴은 벨기에에 있는 루뱅 가톨릭 대학교에서 식량이행 학술연구교수로 일한다. 그는 식량을 탈상품화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식량 시스템을 구조적으로 다시 생각하는 것을 필요로 하는 장기간에 걸친 기획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상품으로서의 식량은 생명체의 자연스런 질서가 아니라 인위적인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강조한다.

실로 식량 커먼즈는 인간 역사 내내 규범이었고 오늘날 과도하게 시장화된 세계에서조차 널리 퍼져있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 식량을 재배하기 위한 커먼즈로 여전히 관리되는 땅(토지)의 양은 20~30% 가량이다. 아이슬란드에서는 땅의 40%가 아직도 커먼즈로 관리되고 있다.

비베로 폴이 커먼즈로서의 식량이라는 바로 그 아이디어를 농업, 기아 및 생태지역의 생태학적 이슈들에 관여하는 활동 지향적인 많은 활동가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특히 학자들 사이에서 부각시킨 것은 선구적인 작업이었다. 그의 기본적인 목표는 대규모 농업기업(Big Ag)에 대한 실천적이고 실제적인 기능을 하는 대안으로서 많은 다양한 식량커먼즈를 가시화하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 획기적인 성과는 이 주제를 다루는 29명의 저자들과 39장으로 이루어진 2020년에 출판된 주요한 선집인 『커먼즈로서의 식량에 관한 루틀리지 안내서』(Routledge Handbook of Food as a Commons)이다. 비베로 폴, 토마소 페란도(Tomaso Ferrando), 올리비에 드 슈떼(Olivier De Schutter) 우고 마떼이(Ugo Mattei)가 이 책을 공동 편집했다.

비베로 폴이 공동 조직한 최근 웨비나에서 버몬트 대학의 건드 연구소(Gund Institute) 소속 쌤 블리스(Sam Bliss) 교수는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시장 외부의 활동들”이 비록 크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을지라도 널리 퍼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사에 의하면 정원가꾸기, 물고기 잡기, 식량모으기, 사냥하기, 물물교환하기, 공유하기, 선물하기, 쓰레기통 버려진 음식 수거하기가 버몬트 주에서 널리 실천되고 있다.

블리스는 시장에 포함되지 않는 식량원이 추출적인 상품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공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식량 커먼즈를 통해 사람들은 (종종 값비싼) 시장에 의존하는 것을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연의 한계를 고려할 수 있다. 이는 예를 들어 식량모으기나 사냥하기로부터 거둬들인 수확물은 가정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시장판매는 금지된다.

반대로 대부분의 국가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대규모 농업의 집중 시스템은 대기업들에 대한 대규모 정부보조금에 기초를 두고 있다. 미국,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 러시아, 중국, 인도는 모두 자유시장이 식량을 재배하고 분배하는 가장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방법이라는 이론에 따라 식량을 상품으로 취급하고 있다.

하지만 이 서사는 사회적 신화이다. 위에서 언급된 나라들의 농업은 아주 많은 보조금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 보조금은 공적 부를 기존의 부자들에게 거저 주는 현실을, 토양•서식지•물에 생태학적인 피해를 입히는 것을, 그리고 돈이 거의 없는 이들에게 생기는 굶주림을 고려하지 않는다.

대규모 농업기업들은 동등하지 않은 경쟁조건에서 게임을 하고 있다고 비베로 폴은 지적한다. 그들은 자유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식량시장은 화석연료 다음으로 가장 많이 보조금을 지원받는 시장이다. 기본적으로 이 기업들은 공적자금을 통해 보조금을 아주 많이 지원받기 때문에 이익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정치가들이 “항상 시장, 시장, 시장을 이야기하고 있을지라도 비밀리에 농업 시장들은 보조금을 받아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시장들은 완전한 재앙이 될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비베로 폴은 공적자금이 영세농가 농부들, 농업 커먼즈, 푸드뱅크, 학교 점심 프로그램 및 생태지역 프로젝트들을 돕는 데 더 유익하게 쓰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단 우리가 식량에 관한 서사를 바꾸면 국가 정책과 법적인 틀들은 긴밀히 협력하여 다른 방식으로 식량과 관련된 법규화를 실행할 것이다. 물론 식량을 분배하는 시장들이 여전히 있을 것이지만 건강한 식량이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가격으로 제공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새로운 형태의 시장 규제와 공적 개입 그리고 커머닝의 새로운 공간도 있을 것이다.




자본을 넘어선 미래와 크립토 커먼즈

 


  • 저자  : Sarah Manski
  • 원문 :  crypto-commoners only want the earth crypto commons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https://www.shareable.net/에 실린 글 “A post-capitalist guide to the future: crypto-commoners only want the earth”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의 저자인 맨스키(Sarah Manski)는 정치경제학자, 윤리학자, 세계적인 테크놀로지스트이자 조지메이슨 대학교 교수이다. 맨스키는 또한 <VERSES.io>와 씨바나 재단(Civana Foundation)의 고문이며, P2P재단과 조지메이슨 대학교의 사회과학연구 센터의 연구자이고, 미국 국립과학재단의 SBIR 프로그램의 전문 검토위원이다. 그녀는 지난 25년 동안 활동가, 노동조직가, 저널리스트, 연구자 및 ‘비즈니스/글로벌 어페어즈’ 교수로서 노동자들에게 자율권을 주는 프로젝트에 참여해왔다.

크립토 커먼즈의 확대를 위해 일하고 있는 테크놀로지스트들이 2021년 8월 28일부터 9월 3일까지의 일정으로 오스트리아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작은 시골 호텔에서 <크립토 커먼즈 개더링 2021>(Crypto Commons Gathering 2021, CCG21)을 개최하고 여기서 크립토 커먼즈의 확대를 위한 테크놀로지 설계 및 개발 방향을 논의했다. 이 글은 저자가 <크립토 커먼즈 개더링 2021>에 발표자로 참여하여 행사의 개최 취지와 크립토 커먼즈의 확대를 위해 일하고 있는 몇몇 참석자들의 아이디어 및 그들의 활동을 소개하는 일종의 기행일기이다.

저자는 암호화가 본격적으로 미국인의 삶속으로 진입해 들어가고 있고 도처에 만연될 날이 머지않은 것으로 진단한다.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를 주류로 끌어들이는 새로운 응용프로그램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지만 암호화폐의 일종인 비트코인을 매입하고 사용하는 것은 여전히 까다로운 과정이다. 하지만 처음으로 수백 개의 미국은행의 지점들이 곧 기존 계좌를 통해 암호화폐를 구입하고 보유하며 팔 수 있을 것이므로 변화가 생길 것으로 보고 있다. 비트코인이란 다음의 것을 포함하는 다양한 테크놀로지들을 중심으로 하는 대규모 전지구적인 움직임을 응용한 것들 가운데 가장 가시적인 것일 뿐이다.

  • 분산원장들
  • 열린 혁신 생태계들
  • 사회적 기업들
  • 플랫폼 협동조합들
  • 탈중심화된 데이터 관리 인프라들
  • 지역 혁신가들과 P2P 네트워크들
  • 마켓스페이스와 지방 연구소들
  • 바이오핵랩들(bio-hacklabs)
  • 커먼즈 기반의 글로벌 정치경제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토큰 경제와 새로운 가치 시스템들

생산•관계•소유권의 대안적인 형태를 창출하기 위하여 다채로운 창발적인 커뮤니티들이 테크놀로지의 사용을 실험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적인 추출•착취•시장경쟁 및 사적 소유를 넘어서는 근본적으로 새롭고 다른 논리―공통의 선, 글로벌 커먼즈에 기반을 둔 공유, 탈중심화 및 협력―를 실험하고 있다.

<크립토 커먼즈 개더링 2021>의 장소는 오스트리아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작은 시골 호텔이다. 이곳에 모인, 스스로를 크립토커머너들(CryptoCommoners)이라 부르는 테크놀로지스트들의 임무는 크립토 커먼즈(Crypto Commons)의 확대를 위해 일하는 실무자들과 교수들을 모아서 전지구적인 운동을 하기 위한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다. <크립토 커먼즈 개더링 2021>은 탐구적인 활동과 학문적인 연구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상호적으로 유익하도록 설계되었다. 이 글의 저자인 맨스키를 포함해서 대략 30여 명의 남녀 테크놀로지스트들이 <크립토 커먼즈 개더링 2021>에 참석했다. 맨스키는 이 글에서 5명의 테크놀로지스트들 소개하고 있으며 아울러 바우엔스의 기조발제(“Commoning as a mode of production”)의 내용을 전해준다.

맨스키 자신의 연구는 인류에게 미치는 테크놀로지의 영향력과 결부되어 새로이 등장하는 윤리적 문제들 그리고 가치•소유•생산•공평함•노동과정•사회적 역동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가진 커먼즈 기반 경제 모델이 구축될 수 있는 방법에 초점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해 맨스키는 “시장에서 긍정적인 행동을 촉진하고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줄이기 위해 사람들에게 자율권을 주는 경제 모델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는가?” 그리고 “새롭고 지속가능한 커먼즈 기반 경제를 창출하는데 블록체인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를 연구한다.

조쉬(Josh, ‘블록체인 사회주의자’로도 알려져 있다)는 블랙체인 세계의 커먼즈 운동 부문에 있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주간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고 <브레드체인 프로젝트>(BreadChain Project)에서 일한다. <브레드체인>은 탈중심화된 협력기획들을 위한 공동의 소유권 분야에서 자원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크립토 커먼즈 개더링 2021>이 열린 회의장소와 숙소를 제공한 펠릭스(Felix)는 <크립토 커먼즈 개더링>의 주요 조직자이다.

스콧 모리스(Scott Morris, ‘토큰 제디’라고도 알려져 있다)는 <QOIN> 재단의 공동 설립자로 지역화폐 분야에서 협력적인 토큰 생태계를 설계하는 데 힘쓰고 있다. 그는 또한 뱅코르 백서(Bancor whitepaper)의 공인되지 않은 저자이다. 뱅코르는 스마트 토큰이라 불리는 새로운 종류의 디지털 자산을 확립하기 위한 첫 기획이었다. 스마트 계약은 디지털 자산을 운영하는 한 방법으로 하나 이상의 기존의 토큰이 준비금으로 유지되는 것을 요구한다. 스마트 계약에 교환 가능한 토큰을 준비금으로 보유함으로써 사람들은 누구나 쉽게 아무 때나 스마트 토큰을 매입하거나 현금화할 수 있다.

자감(Michael Zargham)은 <블록싸이언스>(BlockScience)―복잡계를 전문으로 다루는 엔지니어링, R&D 및 분석회사이다―의 설립자이자 CEO이며 혁신적인 아이디어나 테크놀로지의 힘을 활용하는 모델링 프레임워크와 강력한 시뮬레이션 도구인 소프트웨어 ‘복잡적응역동계 컴퓨터지원설계’(Complex Adaptive Dynamics Computer-Aided Design, cadCAD)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또한 그는 <메타거버넌스 프로젝트>(Metagovernance Project)에서 일하고 있다. ‘복잡적응역동계 컴퓨터지원설계’는 시스템의 복잡성을 인지하면서도 시스템 디자인을 단순하고 통찰력 있는 어떤 것으로 전환시킬 목적으로 설계되었다. 자감의 설명에 따르면 인터넷 상에서 자치는 자연권이 아니다. 인터넷 상에서의 자치는 사람들이 상호작용하는 플랫폼의 아키텍처에 의해 가능해지거나 제한되며, 같은 아키텍처는 사용자들이 생성하는 별개의 기관들의 상호작용을 제어한다. 메타거버넌스가 이 자치의 두 가지 관련 역할들—사용자들이 자신의 기관을 창출하는 그들의 능력을 가능하게 하기/제약하기, 개별 기관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치하기—을 의미한다.

에멧(Jeff Emmett)은 <오그먼티드 본딩 커브즈>(Augmented Bonding Curves)에서 활동 중이다. 그는 <블록싸이언스>에서 자감을 위해 커뮤니케이션 관련 일을 하며 <더 커먼즈 스택>(The Commons Stack) 소속 핵심 조직자이다. ‘오그먼티드 본딩 커브’는 지역사회가 운영하는 지속적인 조직체들을 위한 새로운 펀딩 모델을 창출할 경우, 내재 가치를 가진 암호화된 토큰을 보유한 초기 사용자들을 보상하도록 설계된다. ‘오그먼티드 본딩 커브’에는 자금 풀(funding pool), 토큰 잠금/수령권 메커니즘 및 시스템간 피드백 회로가 포함되어 있다.

<더 커먼즈 스택>의 임무는 오픈소스 도서관, 상호운영적인 웹3 부품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인센티브 일치, 지속적인 자금지원, 지역사회 거버넌스를 통해 공공재를 지속시키는 커먼즈 기반 미시 경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더 커먼즈 스택>은 효과적인 새로운 도구들을 지역사회에 맡기게 될 것인데 이 도구들 때문에 지역사회는 공유자금을 늘리고 분배할 수 있으며 투명한 결정을 하고 커먼즈 지원사업의 진행사항을 추적•관찰할 수 있다. 그들은 ‘최소한의 자립 커먼즈’(Minimum Viable Commons)를 창출할 구성요소로서 다음 네 가지를 구축했다.

  • ‘오그먼티드 본딩 커브’가 지속가능한 자금을 지역사회에 제공한다.
  • ‘기베스 댑’(Giveth Dapp)은 제안과 에스크로 서버스를 제공한다.
  • 연속적인 의사결정 거버넌스 과정인 ‘확신 투표’(Conviction Voting)((확신투표는 특정 시점에서 구성원 전체의 다수결로 어떤 제안의 채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제안에 대한 구성원들의 선호도를 일정 기간 축적하여 가장 선호도가 큰 제안을 확인하는 결정방식이다.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토큰을 자신이 선호하는 제안에 걸며, 이런 식으로 각 제안에 걸린 토큰의 양과 이 토큰들이 걸려있는 시간의 양을 토대로 제안에 대한 구성원들의 선호도가 계산된다.)) 플랫폼
  • 커먼즈 분석 대시보드 (이것은 cadCAD로 움직인다)

바우엔스는 커먼즈의 내부 경제와 외부 세계 사이의 인터페이스로서 작동할 무언가의 필요성을 오랫동안 강조해왔는데 바로 ‘오그먼티드 본딩 커브’가 이 역할을 한다. 바우엔스는 <커먼즈 트랜지션>(Commons Transition, 커먼즈 사회로 향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책 개발 플랫폼)의 연구 책임자이자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볼리어(David Bollier)와 함께 <커먼즈 전략 그룹>(Commons Strategies Group)의 창립 멤버로, 동료 생산, 거버넌스, 재산권을 탐구하는 분야에서 전 세계 연구자 집단과 공동연구를 한다. 바우엔스는 영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로 된 몇 권의 책과 보고서들을 공동 출간했는데 주요 작품들에 속하는 것으로 『협력 경제를 위한 네트워크 사회와 미래 시나리오』(Network Society and Future Scenarios for a Collaborative Economy)가 있으며, 보다 최근에 나온 『P2P: 커먼즈 선언』 (P2P: A Commons Manifesto)이 있다.

늘 그렇듯이 바우엔스는 커먼즈 경제가 인간 상호작용의 첫 형태였고 자본주의의 종획이 소수의 이익을 위해 공통의 부를 해체한다고 언급하며 발표를 시작한다. 바우엔스의 주장에 따르면 1993년, 인터넷이 커먼즈 역사에서 새로운 국면의 도래를 알렸다. 인터넷을 사용하여 국가의 외부에서 조직화를 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비트코인 프로토콜이 세상에 등장한 2008년 이후로 전지구적인 규모의 커먼즈가 발전하고 엄청나게 성장했으며 그것은 모든 개인들이 다른 어떤 개인에게 연결될 수 있는 P2P방식의 관계 역학, 즉 새로운 유형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자유를 탄생시켰다.

허가가 필요 없는 블록체인들(신뢰와 무관한 블록체인 또는 퍼블릭 블록체인으로도 알려져 있다)은 합의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이용 가능한 열린 네트워크이다. 블록체인은 이 과정을 거래와 데이터를 인증하기 위해 사용한다. 이 블록체인들은 알려지지 않은 거래당사자들 전체를 가로질러 완전히 탈중심화된 형태로 존재한다. 바우엔스는 이러한 블록체인들의 특징이 커먼즈 실천에 참여한 전통적인 인간 소그룹들의 특징이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즉 글로벌 오프소스 시민네트워크들의 가능성 그리고 국가 위계구조 및 자본주의 시장의 동학 둘 다의 역량을 능가하는 생성적인 경제 연합체들의 가능성을 창출한다.

물론 이 상상적인 유토피아에 대한 몇 가지 경고 사항들이 있다. 바우엔스는 모든 서버가 자율적이라는 P2P개념은 지속적인 커머닝(자원들을 공동 출자하고 상호화하며 공유하는 자유로운 연합) 능력과 갈등관계에 놓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기존의 권력 불균형과 불평등을 강화할 수도 있다(사회를 개별 기업가들의 집합으로 보는 무정부주의적자본주의적, 자유방임적소유주의적 비전). 커먼즈 관점과 하이퍼마켓 관점 사이의 차이가 심대하다. 이것을 크립토커머너들과 비트코인브로들(BitcoinBros)이 서로 공존하며 경쟁하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라고 생각해보자. 누구든지 이기는 쪽이 미래를 차지할 것이다.

<크립토 커먼즈 개더링 2021>에 모인 참석자들은 미래를 위한 장기적인 시스템 설계는 다음의 공유된 원칙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 이해관계자 인센티브 일치는 꼭 해야 하는 일이다.
  •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오픈소스여야 하며, 강력한 공학적인 실천들을 통합하는 반복적인 개발을 보장하는,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고 의미론적으로 호환이 되는 프로토콜을 가능케 해야 할 것이다.
  • 다중심적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 시스템은 ‘지구 위험 한계선’(planetary boundary) 개념에 기반을 둔 생태경제학을 포함해야 한다.
  • 그것은 설계상으로 생체 모방이어야 한다.

맨스키는 다음 단락으로 글을 맺는다.

우리의 목표는 크립토 커먼즈와 전 세계 협동조합 운동을 연결하는 방법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관건은 자본주의에 투여되던 자금 가운데 수조 달러를 더 순환적인 경제로 돌리는 데 어떤 종류의 도구와 생태계가 가장 잘 활용될 것인가였다. 우리가 공유한 합의는 다음과 같다. 정확한 계획과 절차가 정해지는 데 수년이 걸릴지라도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은 이 새롭고 재생성적인 시스템 하에서 모든 인류를 연합시키는 데에는 함께 나눌 이야기가 필요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공들여 만드는데 전념하고 있다. 함께 말이다.

 




지역화폐, 사회적 자본 및 기본소득에 관한 토론

 


  • 저자  : Valentin Seehausen, Julio Linares, Inte Gloerich
  • 원문 :  Discussion on Community Currencies, Social Capital & Basic Income https://networkcultures.org/moneylab/2021/04/16/moneylab-11-discussion-on-community-currencies-social-capital-basic-incom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대선의 열기가 서서히 오르는 모양이다. 대의민주주의가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흡수하는 시즌이 오고 있는 것이다. 대의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삶의 문제가 아닌 권력의 문제로서, 삶의 외부에서 삶을 제한하는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배어들도록 만드는 무대이다. 이 무대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 ‘할 일’은 시야가 이 무대 안에 갇힌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시야는 민주주의가 다시 삶 전체로 돌아온 세상을 향해있다. 우리가 보기에 민주주의의 문제는 단지 좁은 의미의 정치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영역들 전체와 관련된다. 화폐의 영역도 여기에 포함된다. 화폐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의 표현일 뿐인데, 이것이 사회적 삶에 외부에 존재하며 사회적 삶을 제한하는 것이 됨으로써 곧 권력이 되었고 더 나아가 물신(物神)이 되었다. 대안근대를 지향하는 우리로서는 화폐를 권력이 아니라 다시 삶의 힘으로 되돌려놓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바로 이것이 화폐의 민주화의 핵심이다. 이번 글에서는 다른 곳에서 이 화폐의 민주화를 어떻게 고민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기본소득이나 지역화폐는 이미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것이기에 내용이 새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실제적 노력의 사례들을 들어보는 것도 우리에게 좋은 경험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소개하려는 텍스트는 2021년 3월 27일 있었던, 머니랩(MoneyLab)의 11차 워크숍 ‘지역화폐, 사회 자본 및 기본소득에 관한 토론’(Discussion on Community Currencies, Social Capital & Basic Income)을 녹취한 것이다. 실제 토론의 동영상은 이곳에 가면 볼 수 있다. 토론자인 훌리오는 <써클즈> 소속이고 발렌틴은 <쏘셜코인> 소속이며 진행을 본 인테는 <머니랩> 소속이다. 내용정리이지만 대화체를 유지했으며, 녹취록에서 발견한 몇 개의 오류는 동영상을 보고 수정했다. [정백수]

인테
우리가 왜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까요? 지역화폐(공동체화폐)와 기본소득은 초창기부터 <머니랩>(Moneylab)의 주제였습니다. 지금 시기(팬데믹 기간)에 적절한 것은 무엇일까요? 제가 여러분 둘 다의 프로젝트에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동체에의 헌신입니다.

홀리오
저는 과테말라 출신 경제인류학자이며 사회활동으로서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기본소득을 어떻게 실현할지, 그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지에 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저를 인류학으로 이끌었습니다. 화폐를 다시 생각하는 방식으로서 화폐의 인류학, 가치의 인류학으로 말이죠.

<써클즈>가 가지고 있는 주요 아이디어들 중 하나가, 국가가 기본소득을 제공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기본소득의 창출과 관련된 패러다임 전환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민주적 화폐 이론’(DMT)이라 부릅니다. 이에 따르면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약속의 징표를 발행하여 은행 또는 국가와의 관계와 무관하게 상호적으로 빚을 지고 빚에서 벗어납니다.

제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힘의 느낌, 돈을 창출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느낌을 갖게 해주는 것이고, 돈을 창출하는 힘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화폐 취득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을 화폐발행자로서 느끼게 만들고 경제가 어떻게 조직되는지에 대한 통제력과 발언권을 갖도록 만드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발렌틴
당신의 말이 이해가 됩니다. 저에게는 지역화폐(공동체화폐)가 사회/경제 이론에서 실천성을 얻는 한 가지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화폐시스템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시작했고 정치에 입문할까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나름의 소규모 대안적인 금융시스템을 시작하는 것은 어떤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종종 지역화폐를 추동하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하는 요인입니다. 우리, 즉 민중을 위한 세상이죠. 물론 이것은 제 주관적인 견해이지만요.

우리는 지역화폐를 아래로부터 창출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에 지역화폐들이 있고 그 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만약 우리가 화폐시스템(monetary system)을 아래로부터 창출한다면 어떻게 될까를 보여주는 본보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써클즈>(Circles)와 <쏘셜코인>(Social Coin)은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로 실험을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지역화폐들이 화폐를 실험하는 작은 실험실인지도 모르죠.

인테
우리는 야심찬 생각들에서 출발하지만 지역화폐가 그 생각들을 실천에 옮기는 한 가지 방식입니다. 그런데 또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가령 제가 ‘쏘셜 코인’을 사용하기 위해 <써클즈> 커뮤니티에 참여할 기회가 있다면 그 동기는 무엇일까요? 제가 무엇을 살 수 있을까요?

발렌틴
이것이 지역화폐가 답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 모두 호모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이론(집안 살림의 효용을 극대화하기)을 알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 이론은 전적으로 결함이 있지만 여전히 그 안에 진실이 좀 들어있습니다. 공동체에 기여하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돌아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이익이 공동체에 기여한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경제적 이익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이 공정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근(Siegen)에서 경제적 이익은 전기차나 전기자전거를 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홀리오
저는 거시적인 문제에 대한 논의, 화폐, 테크놀로지는 다 하나라고 항상 말합니다. 화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회기반시설, 즉 다른 모든 생산자들, 다른 모든 물류 제공자들, 서비스 제공자들, 돌봄 노동 제공자들, 경제의 일부인 모든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사회구조입니다. 경제는 집안 살림, 즉 오이코스(Oikos)입니다만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집만이 아니라 지역입니다. 그래서 이곳 베를린에서 우리는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맥주 제조업자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농부와 함께할 수도 있고 자전거 공유 협동조합과 함께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그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잉여를, 그리고 코로나/위기시기에 충분히 이용되지 않은 자원을 추가적인 유동성(liquidity)으로 변형시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술집들이 문을 닫았기에 팔 수 없는 50리터 맥주통을 가지고 있는 맥주회사 소유주와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써클즈>에 그것을 팔아서 행복한 상태이며, 맥주를 더 많이 팔기 위해 지역 라디오에 홍보를 하는 데 그 돈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발렌틴이 말하고 있는 바입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서로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그들을 연결시키는 방식을 생각해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 자신만이 아니라 더 큰 어떤 것을 실제로 부양하고 있는 셈입니다. 잉여가 더 큰 지역사회로 갈수 있도록 하는 방법론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자원들의 흐름을 창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테
지역공동체 건설이 핵심 작업이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지역공동체의 신뢰와 네트워크가 없다면 그것은 작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진공상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국가의 맥락에서 법정화폐 시스템 및 세금 시스템과 함께 존재합니다. 당신의 프로젝트는 더 광범위한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존재합니까? 이 프로젝트는 고립된 지역들로서 존재하나요? 아니면 전체시스템이 바뀌는 것을 보고 싶은 건가요?

홀리오
독일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은 화폐란 사회에 대한 일정한 요구의 표현이라는 점에 관해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사회에서 사용하는 화폐의 유형들이 다양한 차원들―상상력, 무급노동, 유급노동―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요소들이 화폐형태로 반영됩니다. 그래서 저에게 중요한 것은, 화폐를 다루고 정치적인 싸움에 뛰어듦으로써 우리는 바로 화폐시스템 전체의 헤게모니에 도전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발렌틴과 함께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시민들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할 수 있는 시장(市長)들의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창출하려는 노력입니다. 우리는 일군의 다양한 시스템들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써클즈>는 그것들 중 하나일 뿐이고 우리는 지역의 조건과 욕구가 무엇인지를 보고 사용될 수 있는 일단의 도구들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존재하는 일국의 국가시스템과 함께 공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미국의 사례가 항상 적절한데, 미국에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의 통제를 받는 국가시스템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광범위한 수준에서 공존하는, 국가보다 하위의 시스템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지자체들이 폭넓은 스펙트럼의 이익을 보완하고 조율하는 방식으로서 지역의 기본소득을 지역화폐로 발행하여 잠재적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지급할 수 있습니다.

저로 말하자면, 저는 아나키스트입니다. 국민국가를 믿지 않고 자본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폐지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순간 어떤 상황에 있는지에 대하여 실질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이 구조들이 몰락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며, 제가 하고 있는 것은 그것들이 더 잘 몰락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좌중의 웃음]

발렌틴
토론이 시작된지 20분이 지나서 당신이 스스로 아나키스트임을 이렇게 폭로하는 것이 정말 좋군요. 저는 동조하는 편입니다. 시스템을 바꾸는 방식이고 힘을 지방자치제 수준으로 되돌려주는 방식이니까요. 국가들이 있고 국제적인 기구들이 있습니다. 아나키스트가 아닌 저는 그것들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또한 저는 금융시스템이 사회의 소수에게 복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0%나 1%의 사람들은 실질적인 혜택을 많이 받지만, 50%의 사람들은  실질적인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전 세계에서 극빈 상태에 있는 사람이 (잘은 모르지만) 아마 50%일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충분한 식량이 없고 그것이 제 관점에서는 재앙입니다.

신자유주의자로 유명한 하이에크는 탈국가화된 화폐라는 생각을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해 하는 것은, 화폐가 탈국가화되어 모든 사람이 화폐를 발행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봐요, 이것이 발렌틴-코인입니다, 사용해보세요’라고 말할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요? 무슨 일로 그러시죠?’라고 말할 거구요. 그러나 예를 들어 베를린 시장이 베를린-코인을 발행한다면 사람들은 실제로 그것을 사용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베를린 시에 힘이 있음을 의미할 것이고 화폐 주조로 얻는 이익은 실제로 베를린으로, 지방자치단체로, 작은 마을들과 가난한 시골로 돌아갈 것입니다. 지역의 화폐로 실험하기 시작할 경우 이것은 그 지역사회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 멋진 프로젝트가 더 광범위한 맥락에 가져올 수 있는 전환과 관련하여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입니다. 지역화폐들이 수백 년 동안은 아니더라도 수십 년 동안 존재했지만 그것은 지금까지도 대부분 불법이었는데, 그러다가 블록체인이 등장했습니다. 블록체인은 효력을 정지시키기 불가능한 화폐를 발행했는데, 이는 블록체인이 매우 탈중심화되어 있어서 어떤 정부나 권력도 거기에 실제로 개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가들이 바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암호화폐를 합법화하고 규제하는 것입니다. 국가들은 이것이 없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렸고 그래서 그것을 시험하고 통제하는 규칙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암호화폐는 합법적이 되고 우리가 실제로 그것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이것이 올해 들어와서 제가 흥미롭다고 느낀 점입니다. 규제자들과 국가들이 지역화폐가 실제로 존재하기 위한 법적 틀을 만들고 있다니 말입니다. 저는 지역화폐를 관철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로비스트입니다. 지역화폐의 관철이 제가 이곳에 있는 이유이고, 제가 보고 싶은 정책 변화입니다.

인테
하지만 지근에서 <쏘셜코인>은 블록체인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렇죠? 그래서 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당신은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위한 특수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발렌틴
공동체는 그때그때 사용가능한 테크놀로지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가령 뵈어글(Wörgl)—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유명한 사례죠—의 기술은 ‘우리가 지폐를 발행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스탬프를 찍는다’였습니다.[정리자―1932년 오스트리아의 도시 뵈어글에서 대공황에 대응하여 지역화폐(지폐)를 발행했다. 이 지폐는 화폐소지자들이 빨리 사용하도록 자극하기 위해 매달 1%의 가치가 상실되도록 고안되었다. 이 지역화폐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오스트리아의 다른 도시들도 유사한 실험들을 계획했다. 이 지역화폐는 1933년 말 행정법원에 의해 금지되었다. 텍스트에서 “스탬프”는 지폐에 찍는 도장을 가리킨다. (첨부한 사진 참조) 첨부한 사진은 자유이용저작물이며 그 출처는 https://en.wikipedia.org/wiki/W%C3%B6rgl#/media/File:Freigeld1.jpg이다.] 그때 서비스 제공은 중앙집권화되어 있었고 그 핵심은 당신이 서비스 제공자에게 가서 지폐를 원장에서 삭제하면 화폐의 효력이 정지된다는 것입니다. 블록체인은 추적하기가 불가능하고 효력을 정지시키기 불가능하게 만든 테크놀로지일 뿐입니다. 탈중심화된 화폐가 이렇듯 기술로 작동하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저는 블록체인 자체의 힘을 믿지 않습니다. 많은 지역화폐들과 다양한 토큰들이 있는 세상이 오면 우리는 열광하겠지만, 여기에 블록체인이 반드시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역화폐를 금지해온 규칙을 깨기 위해서는 블록체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우리를 신뢰하고 우리의 파트너들을 신뢰하며 얼굴을 아는 사람들을 신뢰하고 인간을 신뢰한다면, 블록체인이 필요 없습니다.

인테
그러면 당신은 블록체인의 유무와 무관하게 열린 공간이 창출된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우리는 지금까지 실질적인 혜택을, 사회적인 맥락을 다루었는데요, 이제는 당신들의 가장 유토피아적인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워크숍에서 당신들은 당신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무엇이 당신들을 걱정스럽게 만드는지에 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미래에 무엇이 가능할지,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원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미래의 지평 위에 있는 이 지점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이겠죠.

발렌틴
유토피아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문제에 아주 많은 측면들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좋아합니다. 일국적 수준에서 저는 부유세와 보편적 기본소득의 광팬입니다. 국제적인 수준에서 세계정부가 있다면, 그리고 보편적 기본소득으로서 재분배되는 전지구적인 부유세가 생긴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 될 것입니다. 점점 더 불평등해지는 금융 시스템의 추세가 부유세와 보편적 기본소득 덕분에 평등 쪽으로 역전될 수 있습니다. 인간 사회가 그것으로부터 전적으로 혜택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역화폐 로비스트의 관점에서 저는 안전한 법적 환경을 갖고 싶습니다. 저는 법 문제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만, 이 문제는 여전히 매우 복잡하군요. 우리는 테크놀로지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제 생각에 법적 문제가 지역화폐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크게 미흡한 사안입니다. ‘당신에게 지역화폐가 있고 그것이 백만 파운드 미만이면 우리는 그것을 규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넘으면 우리가 규제할 것이다’와 같은 구조가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정치로부터 요구하는 어떤 것입니다.

인테
홀리오는 미래 정부에 관해 이와는 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겠죠?

홀리오
어려운 문제죠. 이것은 정치경제와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블록체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고 법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테크놀로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의 실제적인 핵심은 힘, 즉 경제적 힘과 정치적 힘(권력)과 관련된 문제들입니다.  법 문제는 매우 재미있는데, 이는 오늘날 법적으로는 국가들 말고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체가 민간은행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은행 면허를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신이 그들의 자산을 처리할 권리가, 그들의 노동을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럼으로써 이 불평등한 권력구조들을 창출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저는 국제적인 수준에서 부유세와 보편적 기본소득은 놀라운 것이라는 발렌틴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제가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직접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실천적으로 생각할 때 그곳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화폐를 민주화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화폐를 영토로 본다면, 우리가 화폐를 민주화한다고 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은, 지역적으로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다양한 생산자들 사이에서 경제적 관계, 정치적 관계, 생태적 관계를 재(再)지역화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서 당신은 권력의 실제적인 탈중심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 즉 권력의 탈중심화가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써클즈>에서 우리는 다음의 네 가지 원칙에 관해 이야기 합니다. 로컬리즘(전지구적 문제의 지역적 해결), 권력의 탈중심화, 지속가능성(관계들을 더 지역적으로 묶고 더 상호의존적인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 방법들을 찾는 것) 그리고 민주적인 연합주의가 그것입니다. 민주적인 의회들이 서로 연합할 수 있지만 정치적 힘은 항상 국민들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그 규모를 확대해야 할 매우 실천적인 메커니즘이며, 이렇게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가장 실천적인 유토피아일 것입니다.  화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관련됩니다. 화폐를 넘어서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삶의 민주화입니다. 이것은 권력의 문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권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가 권력으로 변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부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 많은 재앙을 일으킨 사람들이 많은 권력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치적 힘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조직화된 대중들을 통해서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축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인테
제가 채팅을 읽어봤는데 여기에 사회적 재생산에 관한 질문이 있습니다. 지역화폐와 보편적 기본소득이 어떻게 우리가 창출하고자 하는 사회에서 자리를 잡나요? 어떤 가치들이 시스템에서 작동하는 토큰 형태로 재현됩니까? 그 기획은 어떻게 공동체와 공존합니까? 그것이 어때야 할지에 관한 생각들이 달라서 서로 경쟁한다면 어떻게 되죠? 그 과정은 어떻게 진행됩니까? 그리고 토큰 같은 아주 실질적이고 코드에 기반을 둔 어떤 것과 창출하고자 하는 사회와 같은 추상적인 문제를 어떻게 연결시키는지요?

홀리오
사회적 재생산의 측면에서 우리는 가족, 특히 여성들에게 많은 돌봄의 부담이 부과됨으로써 지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폭력이 또한 증가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기본소득은 많은 착취적인 관계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길입니다. 혹은 사람들이 자신을 돌보고 다른 사람을 돌보며 그들을 둘러싼 사회의 환경을 돌볼 수 있는 소득 기반을 갖게 해주는 것입니다. ‘온전한’ 기본소득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시간을 팔지 않고, 임금을 위해 자신을 임대하지 않고 삶을 살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어떤 것입니다.

오늘날 화폐 시스템은 생산영역에서 비롯합니다. 고용주가 노동자를 고용하고 그들은 일하러 갑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있기 위해 그리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사기 위해 임금을 가정으로 가져갑니다. 커먼즈에는 화폐가 없습니다. 사회적 재생산이 번성할 수 있게 해주는 화폐-커먼즈, 바로 이것이 우리가 구축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커먼즈도 성장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적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우리의 돌봄 실천들, 사회적 재생산의 실천들이 번성할 수 있는 가치체계를 창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마존>과 대규모 식품기업들 같은 거대 기업들에의 의존을 통해 더욱더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에서부터 우리의 땅까지, 우리가 서로에게 하는 약속까지 우리가 지켜야 할 영토를 창출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인테
발렌틴 씨, <쏘셜코인>은 어떻습니까?

발렌틴
사회가 어떻게 실제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화폐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핵심인, 홀리오가 내 마음에 그려준 큰 그림에 대해 생각하는 중입니다. 그러나 가치들의 문제로 한정하자면··· 저는 우리가 지근에서 사용하는 이 화폐—‘쏘셜 코인’—에 붙일 명칭을 찾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공통 화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전기차(앞으로 세 대를 구비할 예정입니다)와 전기자전거라는 공통재(커먼즈)가 있습니다. 제가 일하는 단체는 이 공통재를, 이 전기 차량들을 지역민들에게 보급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급할 도구로서 화폐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실험중입니다. 첫 번째 아이디어는 자원봉사를 한 사람들에게 전기차에 사용할 수 있는 코인을 나눠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보편적 기본소득을 시행할 계획인데 이는 모든 인간이 이 공유자원을 소비할 권리를 동등하게 가짐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런데 커먼즈와 연관된 가치들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재산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유재산과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커먼즈의 가치를 어떻게 정의할 것입니까? 이것은 정말로 재미있는 질문입니다.

인테
커먼즈로서의 화폐라는 생각, 저는 이것을 좀 더 설명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홀리오, 몇 분이면 설명할 수 있겠죠? 돈은 보통 개인의 소유이기 때문인데···

홀리오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노동•토지•화폐라는 세 가지 가짜 상품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가짜 상품들로 생각하는 점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이는 이 세 가지가 항상 상품으로 존재한 것이 아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노동시간, 노동, 몸이 항상 상품으로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토지가 항상 개인소유의 상품으로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가령 텃밭이 언제나 상품으로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화폐도 마찬가지입니다. 화폐는 부채이며 신용관계이고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입니다. 서로에게 하는 약속과 같은 유형의 사회적 관계입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 상품화되었고 개인 소유의 상품이 되었습니다. 맑스의 정의를 따른다면, 자본주의를 M-C-M′으로 정의할 것입니다. 화폐가 더 많은 화폐를 만드는 것, 화폐를 팔아 상품을 사서 그것으로 화폐를 더 많이 버는 것이죠.

가치를 나타내는 징표(토큰)의 사물화 또는 물신화가 발생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것을 화폐라고 부르는데, 화폐는 이자를 낳는 부채 등의 과정을 통해서 확장하고 우리는 이것을 성장 등등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로 지구를 망치는 것입니다. 커먼즈를 희생하면서, 토지를 희생하면서, 우리의 몸을 희생하면서, 지구의 가치를 희생하면서 일어나는 이 물신의 증가, 화폐라는 신의 증가가 지구를 망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화폐의 상품화가 아니라 공통화(commonification)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민주주의의 문제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전부 공동소유자인 곳에서 어떻게 화폐를 창출할까요? 사유재산이 없는 곳에서, 화폐가 민간은행에 의해 소유되지 않는 곳에서, 화폐가 국가에 의해 소유되지 않는 곳에서, 화폐가 우리가 발행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 실제로 공유자원인 곳에서, 자원의 유형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곳에서, 우리는 어떻게 화폐를 창출할까요?

오늘날 우리는 이런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기다리면서 우리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지대(자산소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현재로서는 이것을 어떻게 할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화폐의 공통화가 기본소득으로 주어질 때 우리 몸은 임금노동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고 상품으로서의 화폐 또한 해방시킬 수 있으며, 이 과정을 통해 토지를 탈상품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화폐를 개인소유의 상품으로부터 공통재로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현 자본주의적인 위기에 대안을 제공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오고 있는 주된 이론적 핵심입니다. 우리는 근원으로 가야 합니다. 화폐는 수메르의 지구라트[정리자―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전] 이후로 줄곧 지난 5천년 이상 동안 문제가 있었습니다. 모든 성직자들이 사람들을 채무자로 만들어서 속박상태에 묶어두었던 것입니다. 그 기나긴 역사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군산복합체로 죽 이어집니다. 미국 군대는 세계에서 오염을 제일 많이 발생시키며 미국 달러로 자금을 마련합니다. 민중이 화폐를 창출하는 힘을 되찾지 못하면 우리는 문제의 근원으로 가지 못할 것입니다.

인테
마무리할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만 사람들이 녹화된 토론을 보고자 할 경우에 대비해서 앞으로 워크숍에서 여러분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발언할 시간을 각각 드리고 싶습니다.

발렌틴
워크숍의 제목은 ‘비정부기구(NGO)로서 지역화폐를 시작하는 법’입니다. 우리가 NGO로서 이 화폐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직접해보는 워크숍이 될 것입니다. 워크숍에서 저는 제가 지역화폐를 시작하면서 겪었던 모든 경험을 공유할 것입니다. 그리고 미리 알려드리는 바이지만 우리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멉니다. ‘이 발걸음을 뒤따르시면 지역화폐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가 아닙니다. 저는 다만 제 경험을 공유할 것입니다. 저는 실천적 경험을 가지고 있는 워크숍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과 실제로 토론을 하고 싶고 배우고 싶습니다. 그들이 어떤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지, 그들의 프로젝트가 어떤 것인지 토론을 통해 알고 싶습니다.

홀리오
우선 저는 정치적 힘(권력)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고 <써클즈>가 교환과 상호의무의 측면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감을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화폐의 두 가지 측면에 대해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저는 최근에 출판된 안내서를 죽 훑어볼 것입니다. 이 안내서는 <써클즈>가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고 또한 오늘 제가 말한 몇 가지 원칙들을 설명하며 기본적으로 지역에서의 조직방법론을 제시합니다. 조직화는 생산자들과 상인들의 회로에서 시작해서 그들이 고용하는 노동자들로, 거기서 다시 공동체 전체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매우 실천적인 작업이며 우리가 매달 마지막 일요일에 가지는 회의에서 하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든 이 토론을 듣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함께하는 것을 환영합니다. 시작하는 법에 대한 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커머닝을 위한 다섯 가지 자율주의 원리

 


  • 저자  : Guido Ruivenkamp, Andy Hilton
  • 원문 :  Introduction to Perspectives on Commoning : Autonomist Principles and Practices
  • 분류 : 일부 내용 번역
  • 번역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커머닝’에 관한 여러 저자들의 글 모음집인 Perspectives on Commoning : Autonomist Principles and Practices(2017)의 “Introduction”(책 편집자인 Guido Ruivenkamp, Andy Hilton 집필) 가운데 한 절(‘Five autonomist principles for commoning’)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책에는 저작자표시비영리 4.0 국제(CC BY-NC 4.0)이 적용된다.

    키워드 : 커머닝(commoning), 커먼즈(commons), 커머니즘(commonism), 공통적인 것(the common), 자율주의(autonomism), 관점주의(perspectivism), 다중(multitude), 일반지성(general intellect), 대중지성(mass intellectuality)


우리는, 이 책에 모아 놓은 글들이 때로는 명시적으로 또 때로는 행간에서 제기하는 공동의 관심사들로서 다섯 개의 이슈 혹은 테마들을 뽑아볼 수 있다. 이 다섯은 자율주의적 관점에서 커먼즈(commons)에 접근하는 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 다섯으로 충분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 목록은 커머닝(commoning)을 위한 다섯 가지 자율주의 원리를 짚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현재의 거시적 사회경제의 광범한 맥락을 부각시킨다. 이들 가운데 몇 명은 인지자본주의와 비물질노동으로 특징지어지는 현 시기에 구체적으로 상응하는 이론들과 실천들에 주목한다(Boutang, 2002; Hardt & Negri, 2004: 109; Gorz, 2010). 각 저자들은 비록 상이한 이론적·실제적 수준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주제들에 상이하게 접근하지만 모두 자본의 작동을 나름으로 일정하게 비판하며 지배적인 신자유주의적 패러다임을 명시적 혹은 묵시적으로 거부한다. 저자들은 현 시대의 종획 현상들이 보이는 개인주의적인 삶의 양태와 그에 수반되는 일반화된 상품화를 넘어서는 생각들과 기획들을 짚어내고 설명한다. 아주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에 실린 다양한 글들은 모두 내재적 접근법을 따르는데 이 접근법에서는 커머닝의 이론과 실천이 내부로부터 그리고 현 시기의 투쟁과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 탐구된다.

둘째, 일반적으로 저자들은 공유된 자원으로서의 커먼즈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피한다. 저자들은 오히려 커먼즈를 사회성의 새로운 형태의 창출로 인식한다. 커먼즈를 살기·일하기·사유하기·느끼기·상상하기의 새로운 집단적 실천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 실천은 현재의 자본주의가 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다양하게 종획하는) 형태를 거스르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커먼즈를 사적 혹은 공적 통치체제에 의한 규제와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물(재화)로 간주하지 않으려 한다. 실로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라는 현재의 고전적인 대립이 가지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이분법은 거의 사용되지 않으며 심지어 참조되지도 않는다. 커먼즈는 오히려 사회변형으로서 그리고 심지어는 사회변형의 지렛대로서, 인지자본주의의 협동적이고 소통적인 생산형태들 내에 서로 연결되어 있는 기회들로서 인식 된다. 이것들은 다시 실제적 사회적 관계들의 파열을 (균열을)(Holloway, 2010) 통해 드러나거나 가능하게 되며 자본주의적 생산 및 소비의 관행들에 대한 대안들의 발전을 통해 실현된다.

셋째, 커머닝의 실천을 통한 사회변형을 이렇게 탐색하는 것은 커머닝에 대한 이론적 개념화가 객관주의적 접근법이 아니라 관점주의적 접근법을 통해 정식화되는 비전과 제시 방식을 함축한다. 관점주의적 접근법이란 지식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정치적인 것이 구축되는 사회적 맥락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킬 가능성들과 기획들의 탐색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접근법이다. 실제적인 것을 넘어서 가능한 것을 찾기에 집중한다는 이러한 생각은 관점주의적 지식의 탐색자들로 하여금 실제적 효력을 가진 진실들을 추구하도록 이끈다(Negri, 1991; Virno, 2004). 말하자면 가능한 사회변형을 위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실천들에 대한 통찰을 발전시키도록 이끈다. 따라서 경험적 서술은 추상적으로 분리된 것(객관적 추상으로 관념화된 것)으로 상상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관점에 의해 결정되는 의도와 직결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특히 다중의 주체적 관점에서 사회변형의 실천과 커머닝의 투쟁 및 실천을 본다. 다중은 서로 상호작용하며 행동능력을 발휘하는 개인들(특이성들)의 집단적 주체성으로서 인식된다. 다중은 특히, 확장하는 인지자본주의가 행하는 종획과 강탈에 맞서며 실질적인 대안들을 구축할 기회를 추구하는 집단적 주체성으로서 인식된다. 이 다중 개념이 자율주의적 관점주의의 준거로서 사용된다. 이 관점주의에서 공통적인 것은 자본에 대한 대안으로서 발전된다. 정말이지 우리는 이 책에 제시된 여러 생각들이 우리의 일상적 생활 조건에서 커머니즘적 실천이 이루어지는 사회로의 이행을 실현할 가능성들을 성찰하고 일궈내는 일을 촉발할 수 있었으면 한다.

더 커머니즘적인 미래를 위해 사회를 변형하는 다중의 힘을 이렇게 추구하는 것과 연관되어 이 책에 실린 글들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넷째 테마는 삶정치적 생산으로 특징지어지는 현 시기에 대안적인 삶의 상황과 일하기의 상황을 창출하고 자율과 저항을 유지할 수 있는가?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이해하려는, 저자들 전체에 걸쳐서 보이는 노력이다. 그러한 변형을 실현하는 다중의 구성적 힘에 관하여 두 가지 대립되는 입장을 짚어낼 수 있다. 물론 그 중간에 해당하는 많은 입장들이 출현하고 있지만 말이다.

하트와 네그리가 표명했고 이 책에 글을 실은 다양한 기고자들이 참조하는 더 낙관적인 첫째 비전에 따르면, 지식 생산의 증가된 공통성과 자율적 노동의 내재성으로 인하여 비물질노동과 다중이 자본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조건들이 출현한다. 우리가 자동화·정보·소통(이는 삶정치적 생산의 토대로서 점점 더 네트워크들 안에서 네트워크들을 통하여 협동적으로 발전하고 비물질노동에 의하여 형성되고 관리되며, 그 내에서 노동자 자신들이 생산수단의 담지자가 되었다)으로 특징지어지는 새 시기에 진입함에 따라 이 네트워크들 및 그에 따른 생산 수단들은 더 이상 자본에 의해 제공되지 않고 노동 내에 머물러 있게 된다. 이 비전에서는 이제 바로 산 노동과 그 속성들이 가장 중요한 발전의 힘이 된다. 이 힘은  일반지성이 아니라 포스트포디즘 시기 노동자들의 대중지성을 나타낸다. 이는 실제적으로 지식·아이디어·소통의 생산이 노동의 내부에 있고 자본의 외부에 있는 협동 형태들을 통해 일어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종획을 조직화하고 노동이 생산한 부를 전유하려는 시도들을 내적으로 붕괴시킨다. 따라서 커머니즘적 미래가 노동의 자율성과 협동성의 내재성을 통해서 천천히 실현되고 있다는 결론을 낼 수 있다. 이는 더 이상 자본의 통제기술과 전략에 귀속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다중의 해방을 위한 조건을 제공하기도 하는 것이다.

둘째 비전은, 인지노동이 점점 더 자율적이 되어 더 이상 자본의 지배를 돕지도 않고 자본의 지배 아래 놓이지도 않게 되는 해방의 궤적이 임박해 있다는 이러한 생각을 거부한다. 생산이 점점 더 협동적이고 소통적인 형태를 띠기 때문에 인지노동의 자율성이 점점 증가한다는 이런 생각 대신에 이 둘째 비전은 반대되는 궤적에 주목한다. 즉 특히 인지노동의 정신과 욕망을 통제하는, 그 영혼을 통제하는 새로운 정보 및 소통 테크놀로지 덕분에 자본측이 인지노동 시대의 삶, 일, 사회적 심리를 통제하는 힘이 증가한다고 보는 것이다(Berardi, 2009). 따라서 자본이 인지노동에서 가치를 추출하는 것은 포디즘적 생산에서처럼 특정의 착취 영역에 더 이상 국한되지 않으며 천천히 우리의 삶 전체를 포괄하고 채우고 이끌고 식민화한다. 기술-사회적 지배의 대상이 된 것은 인간자본으로서의 노동만이 아니라 욕망으로서의 인간 전체라는 것이다. 포획된 것은 바로 이것, 즉 사회적 리비도 그 자체와 그것이 표현되는 모든 방식(지성·상상·사회성 등)이다. 이 비전에서 자본이 인간의 욕망을 형성하는 정보 및 소통 테크놀로지를 통해 인지노동에 발휘하는 힘은 불가역적으로 보이며, 제국의 권력망을 돌파하는 다중에 기반을 둔 낙관적 비전의 실현을 막는다(지금은 간헐적인 승리만이 가능하며 이 승리들은 안전밸브 메커니즘처럼 작동할 수 있을 뿐이다).

비록 명백하게도 훨씬 더 황량하지만 이 둘째 비전이 모든 행동을 부정하거나 인간활동의 자율성과 창조력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필요는 없고 그렇게 해석되어서도 안 된다. 이 둘째 비전은 오히려, 욕망의 맥락을 더 잘 짚어내고 그럼으로써 정동·아이디어·상상의 영역들과 같은 다양한 심리 영역들을 지배하는 타율적인 기술 권역들(정보·소통·바이오테크놀로지의 영역들)이라는 실제적 맥락 속에서 이 자율성이 형성되는 방식들을 더 잘 구분할 수 있도록 적절한 깊이를 가진 반응을 끌어내고자 하는, 힘이 좀 많이 들어간 호소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다중의 저항 및 자율성과 이에 대한 분석을 재혁신할 수 있는 의식을 최소한 가지자는 호소이다. 따라서 이 둘째 비전은 새로운 대중지성이 다시 발전하여 (현금의 지식 경제의 하이테크 영역들의 일반지성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재창출 할 수 있는 길들을 찾아보자는 호소로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비전들과 해석들 그리고 적극적인 결과들을 낳을 잠재력을 이렇게 선택하는 것은 몇몇 기본적인 문제들을 함축한다. 다중은 새로운 공통성들이 수립될 사회적 공간들을 생성할 수 있는가? 인지자본은 그러한 기획들을 어느 정도로 흡수할 수 있고 대중지성을 자신의 구조들 안에 어느 정도로 봉쇄해 놓을 수 있는가? 이 책에 실린 글들 전체에 걸쳐서 보이는 것은 비결정론적 테제일 것이다. (인지노동의 힘의 내재적인 강화와 함께, 그러나 또한 자본에 의한 그리고 자본을 위한 전복 및 조작과 함께) 자본에 기반을 두지 않은 대안적인 발전의 기회들이 생겨나리라는 것이다. 이 기회들을 잡을 수도 있고 놓칠 수도 있다. 사실 이는 자율을 정치적 힘으로 구현하는 것에 발맞추어 선택과 가능성 즉 미래의 다수성을 강조한다. 이른바 후기 자본주의 시기에 인지노동이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해보는 두 입장인 유토피아론과 디스토피아론은 이렇듯 현재의 그리고 앞을 내다보는 참조점들의 두 극단을 제공할 수 있다.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우리는 커머닝을 위한 가능성들을 탐색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섯째 테마로 이어진다. 자본(인지자본의 모순)과 (이후에는 변이될) 국가 내에서 혹은 상품의 세계 외부(커먼즈 내에 실현될 것)에서 혹은 양쪽 모두 다(안과 밖)에서 전개되는, 다중에 의한 다양한 커머닝 실천과 사회적 공간의 창출에 대한 관심이 그것이다. 다중의 커머닝 실천의 관점에서 이 세 위치들을 주목하고 전략적으로 고찰할 때 그 전체적 효과는 공통적인 것의 결합된 비전의 출현(또한 개방된 다원성의 출현)이며 여기서 그 축적된 효과는 그저 전적인 파열이나 탈출이 아니라 파열을 포괄하면서 자유로운 공간들을 확대하는 지속적인 전개과정으로 나타난다.

이는 점진적으로 세상을 바꿔나가면서도 혁명적 계기를 요구하는, 특정의 단기적 성공을 가치화하면서도 거기에 의존하지는 않는 그러한 과정이다. 이는 과정으로서의 진보이며, 자본에 적대적이고 자본과 양립 불가능하지만 또한 자본 안에서 발전하고 그래서 자본에 의해 조건지어진다. 여기서 커머닝은, 특수한 맥락에서 설계되고 사람들이 커먼즈를 드나들고 자본주의/국가주의의 맥락들(환경, 회로)을 드나들면서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새로운 실천으로서 나타난다. 이러한 실천이 이 책의 글들이 고찰하는 커머닝 활동과 분석들의 범위를 나타낸다.

 

References [위에 번역된 부분에 해당하는 것만 발췌함—정리자]

Berardi, F. (Bifo) (2009). The Soul at Work: from Aleination to Autonomy. Los Angeles, CA: Semiotext(e).
Boutang, Y. M. (2002). L’eta del Capitalism Cognitive. Innovazione, proprieta e Cooperazione delle Moltitudine. Verona: Ombre Corte.
Gorz, A. (2010). The Immaterial. Knowledge, Value and Capital. Calcutta: Seagull Books.
Hardt, M. and Negri, A. (2004). Multitude. War and Democracy in the Age of Empire. New York: Penguin Press.
Holloway, J. (2010). Crack Capitalism. London: Pluto Press.
Negri, A. (1991). Marx beyond Marx. Lessons on the Grundrisse. Brooklyn, NY: Autonomedia/Pluto.
Virno, P. (2004). A Grammar of the Multitude. Los Angeles/New York: Semiotext(e).

 

[참고]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Introduction 
Guido Ruivenkamp and Andy Hilton

1 The Prefigurative Power of the Common(s)
  Mathijs van de Sande
2 Realising the Common: The Assembly as an Organising Structure
  Elise Thorburn
3 Instituting the Common: The Perspective of the Multitude
  Sonja Lavaert
4 Insolvency/Autonomy: What is the Meaning of Autonomy in the Semiocapitalist Age?
  Franco Bifo Berardi
5 The Conditions of the Common: A Stieglerian Critique of Hardt and Negri’s Thesis on Cognitive Capitalism as a Prefiguration of Communism
  Pieter Lemmens
6 Grounding Social Revolution: Elements for a Systems Theory of Commoning
  Massimo De Angelis
7 Commodification and the Social Commons: Smallholder Autonomy and ‘Rurban’ Relations in Turkey
  Murat Ozturk, Joost Jongerden, Andy Hilton
8 The Square as the Place of the Commons
  Ruud Kaulingfreks and Femke Kaulingfreks
9 Transition towards a Food Commons Regime: Re-commoning Food to Crowd-feed the World
  Jose Luis Vivero-Pol
10 Seeds: From Commodities towards Commons
  Guido Ruivenkamp
11 Peer-commonist Produced Livelihoods
  Stefan Meret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