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 경쟁과 자본


  • 저자  :  Karl Marx
  • 원문 :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자본론』(Das Kapital)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10년 쯤 전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경쟁의 계보학’이라는 제목으로 8회에 걸쳐서 이루어진 일련의  강의(각각 다른 강사들이 담당했다)  가운데  3강 ‘맑스의 경쟁 비판’의 강의안을 조금 고쳐서 올린 것이다. 


  1. 오늘의 강의는 맑스의 다음의 저작들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실제로 거론이 안 될 수도 있다.)

『1844년 경제철학수고』(『수고』로 줄임)

『임금노동과 자본』(1849)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1857)(『요강』으로 줄임)

『가치, 가격, 이윤』(1865)

『자본론』1, 2, 3권 (1867, 1885, 1894)

 

  1. 경쟁과 시장

맑스가 비판대상으로 하는 경쟁은 시장에서 사적 이익의 추구를 위해 일어나는 행위, 즉 상품의 구매와 판매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행위이다. 경쟁의 토대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이다.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고유한 특징은 인간의 생산능력 즉 노동력이 사유재산으로 된 것이다. 사유재산이 상품의 형태로 시장에서 매매될 때 경쟁 행위가 일어나게 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력 역시 상품이므로 노동력이 소유자인 노동자들 역시 판매자로서 노동시장에 진입하게 되며, 따라서 경쟁의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경쟁은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① 판매자들 사이의 경쟁―이는 격화되면 물건의 가격을 낮추는 효과를 가진다. ② 구매자들 사이의 경쟁―이는 격화되면 물건의 가격을 높이는 효과를 가진다. ③ 판매자들과 구매자들 사이의 경쟁―여기서는 수요와 공급의 양적 차이에 따라 가격이 변동한다.

 

  1. 경쟁과 자본

개별 자본가들이나 ‘속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경쟁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시장의 자동조절기능’이라는 말에 이러한 환상이 담겨 있다. 맑스는 이러한 환상을 논파한다. 개별 자본가들이나 ‘속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경쟁이 자본의 외부에서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맑스는 경쟁이 자본과 내적인 연관을 맺는 것으로 본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에서 맑스는 “개념적으로 경쟁은 자본의 내적 본성, 그 본질적 성격이 다수의 개별 자본들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나고 실현된 것에 다름 아니다. 내적 경향이 외적 필연성으로서 나타나고 실현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같은 저작의 다른 곳에서는 이럴게 경쟁과 자본의 관계를 설명한다.

 자유로운 경쟁은 자본이 다른 자본 속에 있는 자신과 맺는 관계이다. 즉 자본이 진정으로 자본으로서 하는 행동이다. 이 시점에서만 자본의 내적 법칙들―이는 자본의 발전에서 역사적으로 초기에 해당하는 단계에서는 경향들로서 나타난다―은 처음 법칙으로서 정립된다. 자본에 기반을 둔 생산은 자유로운 경쟁이 발전하는 한에서 그만큼 그것에 적절한 형태로 스스로를 정립한다. 자유로운 경쟁이란 자본에 기반을 둔 생산방식의 자유로운 발전이기 때문이다. 즉 그 조건의 자유로운 발전이며, 이 조건을 항상 재생산하는 과정의 자유로운 발전이기 때문이다. 자유경쟁에 의하여 자유롭게 되는 것은 개인들이 아니라 자본이다. (…) 경쟁은 자본의 본성 안에 있는 것을 실재로서 표현하고 외적 필연성으로서 정립한다. 경쟁은 다수의 개별 자본들이 자본의 내적 규정요인들을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강제하는 방식에 불과하다.

 

『자본론』1권에서는 같은 취지로 (그러나 표현을 조금 바꾸어서) “자유경쟁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적 법칙들을 모든 자본가에게 힘을 미치는 외적인 강제적 법칙의 형태로 드러낸다”고 말한다. 여기서 내적 법칙은 무엇이고 강제적 법칙은 무엇인가?

 

  1. 가격의 변동과 경쟁

우리가 경험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경쟁의 효과는 가격을 계속적으로 변동시키는 것이다. (어떤 상품의, 시장에서 그때그때 변동하는 가격이 시장가격이다.) 그런데 이 변동은 아무렇게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가격을 구심점으로 변동한다. 바로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지점에서의 가격이다. 이 가격이 전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을 생산가격이라고 한다. 생산가격이란 상품을 생산하는 데 들인 비용의 가격(비용가격)에 평균 이윤을 더한 가격이다. 따라서 생산가격의 형성은 곧 평균 이윤의 형성을 의미한다. 평균 이윤을 산정하는 이윤율을 맑스는 일반 이윤율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경쟁이 하는 일은 바로 이 일반 이윤율의 형성이다. “이 상이한 이윤율들이 경쟁에 의하여 단일한 일반 이윤율로 평준화된는데, 이는 이 모든 상이한 이윤율들의 평균이다.”(『자본론』1권)

 

  1. 경쟁이 만들어내는 환상

그렇다면 경쟁이 이 일반 이윤율을 창조하는 것인가? ‘속류 부르주아 경제학자’ 혹은 시장의 조절 기능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맑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경쟁이 상이한 직종에서 이윤율의 차이를 평준화하거나 하나의 평균 수준으로 환원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경쟁이 그 수준 자체를 혹은 일반 이윤율을 결정하지는 못한다.”(󰡔가치, 가격, 이윤󰡕) 󰡔자본론󰡕 3권에서도 이와 거의 유사하게 설명하는 대목들이 있다. “경쟁은 기껏해야 일반적 이윤율을 특정의 수준으로 환원시킬 뿐이다. 그러나 이 수준 자체를 결정할 수 있는 요소를 담고 있지 않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더 큰 이윤은 (···) 경쟁에 의해 평균으로 낮추어진다. 그리고 다른 부문에서의 잉여가치의 부족은 그곳으로부터 자본이 빠져나옴으로써 (···) 평균 수준으로 회복된다. 경쟁은 이 수준 자체를 낮추지 못한다. 단지 그러한 수준을 창출하는 경향을 가질 뿐이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또 다른 대목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부르주아 경제의 본질적인 추동력인 경쟁은 그 법칙들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칙들의 실행자이다. 무한경쟁은 따라서 경제적 법칙들의 진실을 위한 전제조건이 아니라 결과이며, 그 필연성이 실현되는 외관이다. 리카도처럼 경제학자들이 무한경쟁이 존재한다고 전제하는 것은 부르주아적 생산관계가 그 특수하고 독특한 성격 속에 충만하게 실재하고 실현된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쟁은 이 법칙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가시화할 뿐 생산하지는 못한다.”

『자본론』3권에는 경쟁이 하지 못하는 일과 하는 일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은 대목이 있다.(12장) 여기서 맑스는 경쟁은 생산가격의 바탕에 있으면서 가격들을 최종 심급에서 결정하는 가치들을 보여주지는 않고,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준다고 한다.

1) 평균이윤

2) 임금수준의 변화가 야기하는 생산가격들의 상승과 하락(이는 처음 얼핏 보면 상품들의 가치관계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3) 시장가격들의 변동

이 모든 현상은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결정과 부불잉여노동으로 구성되는 잉여가치의 성격에 어긋나는 듯하다고 한다. 이렇듯 경쟁에서는 모든 것이 전도되어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맑스는 환상(전도되어서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한다.

이 환상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개별 자본들과 그것들이 생산하는 상품들의 실제적 운동에서는 상품들의 가치가 그 분할의 전제조건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분할된 결과의 구성부분들이 상품의 가치의 전제조건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자본론』 3권)

이것이 우리를 가치와 가격의 관계의 문제로 데려간다.

 

  1. 가격과 가치

맑스가 노동가치론을 창안한 것은 아니지만, 가치분석이야말로 맑스의 돋보이는 독창적 기여라고 할 수 있다. 그 스스로 “상품에 구현된 노동의 이중적 성격[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구성된 것을 말한다.―인용자]을 지적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한 것은 내가 처음이다”라고 하고 있다.(『자본론』 1권) 실제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가치를 모르거나 불충분하게 알고 가격의 관점에서만 사태를 이해하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환상이나 전도된 인식이 나온다. (이는 가령 만유인력의 법칙이 땅으로 떨어지는 사과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은 외관상으로 상반되는 현상에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맑스는 가치가 바로 가격의 변동에 구심력을 제공하여 변동이 일정한 한계 내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가치를 구성하는 실체는 어떤 물건의 재생산에 필요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다. 가치는 비물질적이고 잠재적인 실재이다. 따라서 양적인 속성(노동시간의 양)을 가지지만 그 자체로 가시화되지 않는다. 오로지 가격으로서만 가시화된다. 가격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양이다.

가치와 가격은 일치하지도 않고 양적으로 비례하지도 않는다. 양자가 일치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낮은 단계의 경제발달에서이다. “따라서 상품들이 가치대로 또는 거의 가치대로 교환되는 것은, 상품들이 생산가격에 따라 교환되는 것 ― 이를 위해서는 일정한 정도의 자본주의의 발전이 필요하다 ― 보다는 훨씬 낮은 단계의 발전에 대응하고 있다.”(『자본론』3권)

본격적인 자본주의 경제에서 가치는 (생산)가격의 진동의 중심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가격이 가치와 일치하는 경우는 맑스의 말대로 우연하다. 우리는 이것을 가격(생산가격)의 가치로부터의 괴리라는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상품들이 가치대로 또는 거의 가치대로 교환”되었던 단계의 경제에서와는 달리 그 이후의 단계에서 생성된 생산가격(비용가격 + 평균이윤율)은 가치로부터의 괴리를 품고 있는 것이다.

가치를 가격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바로 경쟁이다. 경쟁은 이윤율을 평준화함으로써 가치를 가격으로 전환시킨다. 사실상 경쟁이란 산출된 잉여가치의 총량을 개별 자본들이 나눠먹는 과정에 다름 아니며, 나눠먹을 대상은 이미 잉여가치의 형태로 정해져 있는 것이지 나눠먹는 과정인 경쟁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상품의 가치는 다음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이 대목에 대해서는 『자본론』3권 50장 참조]

① 불변자본을 대체하는 가치

② 가변자본으로 가는 가치(임금)

③ 잉여가치(이윤과 지대)

수입의 세 형태인 ②와 ③은 새로 추가된 가치라는 점에서 ①과 다르다. 그런데 임금, 이윤, 지대는 새로 추가된 가치―이는 투여된 노동시간으로 구성되므로 생산과정에서 이미 결정된다―를 분할하는 것이지 이것들로 그 가치가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임금, 이윤, 지대가 모여서 상품의 가치를 구성하는 듯이 보이게 만드는 것이 바로 경쟁이다.

 

  1. 사회적 필요와 생산―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변별적 특성

가치의 존재는 단순한 경험적인(가시적인) 차원에서는 파악될 수 없다. 상품의 가치로서의 객관성(대상성)에는 물질의 원자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이 객관성은 상품이 물리적 대상으로서 갖는 조야하게 감각적인 객관성의 정반대이다.(『자본론󰡕 1권 1장) 경험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의 실제적 과정은 바로 가치의 존재를 가린다. 그래서 “경쟁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은 자본의 내적 성격을 파악하고 난 후에 비로소 가능하다. 이는 마치 천체의 눈에 보이는 움직임은 그 실질적인 움직임―이는 감각에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을 파악하고서야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과 같다.”(『자본론』1권)

사실상 가치 즉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란 특정 시점의 특정 생산력 수준에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특정 재화의 양(즉 어떤 사회에서 1년에 필요로 하는 쌀의 양)을 생산할 수 있는 시간을 말한다. 만일 시간을 더 들이면 생산량이 높아져 공급 과다가 되고 시간을 덜 들이면 생산량이 낮아져 공급부족이 된다.

그런데 “자본의 목적은 어떤 필요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을 산출하는 것이므로, 그리고 생산의 덩어리를 생산의 규모에 맞추는 방법에 의해 이 목적을 달성하지 그 반대가 아니므로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소비의 한정된 크기와 이 내적 장벽을 초과하려는 경향을 언제나 가진 생산 사이에 간극이 계속적으로 발생하게 마련이다.”(『자본론』3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이 장벽을 돌파하고 그 목적을 계속적으로 달성하는 식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본의 축적 즉 자본의 크기의 증가이다.

 

  1. 자본의 축적과 집중

이렇듯 자본주의의 발전은 가치의 측면에서는 축적의 확대 즉 그 크기의 증가이다. 그러나 이는 다른 요인들을 동반하며 이는 경쟁에 의해서 가속화된다. 첫째는 자본의 집중이다. 자본들 사이의 경쟁은 소수 개별 자본의 손에 자본을 몰아주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나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은 자본의 축적량을 증가시키는데, 자본의 축적이란 소수의 손에 자본이 집중되는 것이다. 그것이 자본이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치는 한 불가피한 결과이다. 자본의 본성이 가는 길은 경쟁에 의해 트인다.”(『1844년 경제철학 수고』) 맑스가 자본 집중의 지레로서 경쟁과 함께 거론하는 것은 신용이다. “자본주의적 생산 및 축적에 비례하여 집중의 가장 강력한 지레들인 경쟁과 신용이 발전한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 경쟁의 심화가 가져오는 부정적 효과

다른 하나는 새로운 방법의 채택 즉 기계화이다. 기계화는 생산력의 증가를 낳으며 기계에 의한 인간노동의 대체는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심화시킨다. 그리고 이는 임금의 하락을 낳는다. 경쟁에서 탈락한 자본가들의 합류로 인해 노동자계급은 더욱 증가하고 경쟁은 더욱 심화된다. 단속적 혹은 지속적인 실업으로 인하여 노동자계급의 일부는 빈민화된다.

시장론자들은 경쟁(즉 시장)이 생산을 위한 매우 효율적인 메커니즘이라고 선전하지만, 맑스가 보기에는 반대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한편으로는 각 개별 사업에 절약을 강요하지만 다른 한편 그 무질서한 경쟁 체제에 의해 노동력과 사회적 생산수단의 가장 극악무도한 낭비를 낳는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유통의 과정 및 경쟁의 과도함과 분리시켜 놓고 보면 자본주의적 생산은 상품에 구현된 노동에 대해서는 매우 검약(儉約)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은 다른 어떤 생산방식보다도 인간의 삶 혹은 산 노동을 낭비한다. 피와 살만이 아니라 신경과 뇌도 낭비한다. 사회의 의식적 재조직화 직전의 역사 시기에 인류의 발전은 오로지 개인적 발전의 가장 터무니없는 낭비에 의해서만 확보되고 유지된다.”(『자본론』3권)

 

  1. 경쟁의 심화가 가져오는 긍정적 효과?

맑스는 자본주의적 발전(=경쟁의 심화)에서 부정적인 측면만 보지 않는다. 그 아래 숨어있는 긍정적 측면을 보는 것이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의 특이한 장점이다. 부정적인 측면을 제시하는 데 집중하는 『임금노동과 자본』을 끝맺을 때에도 맑스는, 자본이 급속히 성장하면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은 훨씬 더 급속히 증가하지만, 즉 일과 임금은 그에 비례하여 훨씬 더 급속히 감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급속한 성장은 임금노동에 가장 유리한 조건이라고 평한다. 이 측면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과 『자본론』에 더 상세히 개진되어 있다.

물론 맑스가 경쟁 자체를 긍정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생산력의 증가, 사회적 부의 확대 등으로 귀결하는 자본주의적 발전은 자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사회의 토대를 자본주의 안에 마련한다는 것이 맑스의 통찰의 핵심이다.

 

  1. 계급투쟁

경쟁이 자본의 본성이 발휘되는 방식이자 앞에서 말한 대로 인간의 창조적 힘의 가장 극악한 형태의 낭비이므로 자본과의 싸움의 핵심은 곧 경쟁과는 다른 원리에 입각하는 데 있다. 바로 협동 혹은 협력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의 견해와 반대로 맑스의 입장에서 협동(협력)이 바로 자유의 원천이다.

따라서 다른 한편으로 자유경쟁을 인간의 자유의 궁극적인 발전으로 보고 자유경쟁의 부정을 개인의 자유의 부정 그리고 그러한 자유에 기반한 사회적 생산의 부정에 상당하는 것으로 보는 일의 불합리성이 나온다. 그것은 단지 자본의 지배라는 한정된 기반 위에서 가능한 종류의 발전일 뿐이다. 따라서 동시에 이러한 유형의 개인의 자유는 모든 개인적 자유의 가장 철저한 폐지에 해당하며, 객체적인 힘의 형태를 띠는 , 아니 실로 위압적인 사물들―서로 연관된 개인들로부터 독립된 사물들―의 형태를 띠는 사회적 조건들에 개인들을 가장 완전히 종속시키는 것이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지금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는 맑스가 분석한 고전적 자본주의와는 분명 다르다. 따라서 맑스의 분석들 중 현대 자본주의에는 곧바로 적용되지 않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자들의 행태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경쟁의 원리가 아니라 협동의 원리가 자본주의의 극복에서 핵심적임은 변함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네트워크 모델이 주된 패러다임이 된 현대 자본주의에서 경쟁과의 싸움의 가능성은 어떠한가? 무한경쟁을 전면화하는 듯한 신자유주의의 지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고민해볼 문제들이다.

 

  1. 정리 : 세 차원의 구분

① 내적 법칙 : 잠재적, 비가시적

② 외적 현상(경쟁) : 가시적, 강제적 (* 법칙의 실행)

③ 결과 : 축적의 확대, 기계화에 따른 생산력의 증가, 자본가의 수의 감소(경쟁약화), 노동자들의 수가 증가(경쟁강화), 노동계급의 일부의 빈민화, 계급투쟁.

[맑스의 경쟁 비판 끝]

 

[부록]

1. “만일 임금노동자 계급 전체가 기계에 의해 말살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는가! 임금노동 없이 자본은 자본이기를 그치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임금노동과 자본』)

2. “그렇다면 경쟁은 모든 종류의 노동에서 노동할 수 있는 시간을 다 노동하도록, 즉 잉여노동시간을 노동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3. “자본들 사이의 경쟁은 총 이윤을 나누는 관계만을 바꿀 수 있다. 총 이윤과 총 임금의 관계는 바꾸지 못한다. 이윤의 일반적 수준은 총 이윤과 총 임금의 관계이며, 이는 경쟁을 통해 변하지 않는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4. “로마 황제들의 전제가 로마의 자유로운 ‘사법(私法)’의 전제이듯이, 자본의 지배가 자유경쟁의 전제이다. 자본이 약할 때는 이전 생산방식들 혹은 자본의 등장으로 사라질 생산방식들의 버팀목들에 의존한다. 자본이 자신이 강하다고 느끼면 이 버팀목들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법칙들에 상응하여 움직인다. 자신이 발전에 장벽이라고 느끼고 자신을 그렇게 의식하기 시작하자마자 자본은, 자유경쟁을 제한함으로써 자본의 지배를 더 완전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형식들에서 도피처를 찾으며 동시에 자신의 해체와 자본에 의존하는 생산방식의 해체를 알리는 전령이 된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5. “경쟁은 자본의 내적 법칙들을 실행하고 개별 자본에 대한 강제적 법칙으로 만들지만 법칙들을 창안하는 것은 아니다. 실현할 뿐이다. 그 법칙들을 단지 경쟁의 결과로서 설명하는 것은 자신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함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6.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규정의 법칙, 개별 자본가로 하여금 사회적 가치 아래로 자신의 재화를 팔도록 강제함으로써 새로운 생산방법을 적용하는 개별 자본가들을 지배하는 법칙, 바로 이 법칙이 강제적 경쟁의 법칙으로 작동하여 경쟁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방법을 채택하게 만든다.”(『자본론』1권)

7. “노동의 도구는 기계의 형태를 띠면 즉각적으로 노동자 자신의 경쟁자가 된다. 기계에 의한 자본의 자기확대는 그때부터 그 생계수단을 기계에 의해 파괴당한 노동자들의 수에 정비례한다.”(『자본론』 1권)

8. “따라서 성과급은 개별 임금들은 평균 이상으로 올리지만 이 평균 자체는 낮추는 경향을 가진다.”(『자본론』 1권)

9. “고용된 노동자들의 과잉노동이 산업예비군의 숫자를 불리며, 반대로 산업예비군의 존재가 고용된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더 큰 압박으로 인해 고용된 노동자들은 과잉노동에 굴복하고 자본의 명령에 종속되게 된다.”(『자본론』 1권)

10. “경쟁이 옛 노동도구들을 그 자연적 수명이 다하기도 전에 새로운 도구들로 갱신하도록 강제한다. 특히 결정적 위기가 일어날 때 그렇다.”(『자본론』 2권)

11. “개별적인 것들은 여기서 사회적 힘의 부분으로서만, 덩어리의 원자로서만 중요하다. 경쟁이 생산과 소비의 사회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형태로이다.”(『자본론』 3권)

<부록 끝>




[맑스] 신용과 자본의 한계


  • 저자  :  Karl Marx
  • 원문 :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자본론』(Das Kapital)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10년 쯤 전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자본과 그 한계 :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읽기’라는 제목으로 8회에 걸쳐서 한 일련의 강의 가운데 7강의 강의안을 조금 고쳐서 올린 것이다. 


이전 강의(6강)까지 논의된 자본의 장벽들

[생산]

  1. 잉여가치는 전체 노동일에서 필요노동을 뺀 부분이므로 필요노동이 그 장벽이다.
  2. 잉여가치가 증가하는 비율은 생산력이 높아질수록 낮아진다.

[유통(교환)]

  1. [사용가치의 측면] 생산물에 대한 욕구가 장벽이다. →유통영역의 확대, 시장의 개척.
  2. [교환가치의 측면] 교환되어야 할 잉여등가물이 필요하다. →생산부문의 확대가 필요.

[노동자]

  1. 이윤의 실현을 위해서는 임금으로부터 오는 소비능력 이상의 소비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없다.
  2. 생산력의 발전 등에 의한 필요노동의 감소는 노동자들의 교환능력(소비능력)을 떨어뜨린다.

[유통시간]

  1. 유통시간은 자본의 가치창출에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 시간에 의한 공간의 말살, 신용
  2. 유통시간을 없애려는 자본의 노력은 자본 자신의 기반인 교환을 제거하려는 노력이므로, 스스로를 지양하려는 노력이다.

신용과 자본의 한계

I.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신용에 관한 논의 (펭귄 영어본 659-660, 670-671, 한국어본 2권 후반부)

 

맑스는 이미 여러 군데에서 조금씩 신용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이 지점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논의한다.

 

  1. 신용과 유통시간

“따라서 유통 시간 없는 유통은 자본의 필연적 경향이다.” 지난번 강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유통시간(생산한 상품을 판매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제로에 가까워질수록 잉여가치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본의 경향이 신용을 발생시킨다. “이 경향이 신용 및 신용의 장치들을 근본적으로 규정한다.”

 

  1. 신용과 자본의 양적 한계 혹은 개별성의 극복

이와 동시에 맑스가 지적하는 것은 자본이 신용의 형식으로 “자신을 개별 자본들로부터 구분되는 것으로서 정립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맑스는 같은 말을 조금 바꾸어서 개별 자본이 신용의 형식으로 “자신을 그 양적 장벽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정립하려고” 한다고도 한다. (여기서 ‘자본’이란 ‘자본 일반’과 같은 말이다. 맑스는 자본 일반과 개별 자본을 개념적으로 구분한다. ‘자본에는 국적이 없다’라는 말은 전자에 해당하는 말이다.)

 

  1. 가공架空자본(의제擬製자본)과 자본의 집중

이어서 맑스는 이러한 경향의 최고의 결과로서

① 가공자본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는 영어로 그냥 ‘fictitious capital’라고 썼으나 자본론에서는 ‘Das fiktive Kapital’라고 되어 있다.]

② 자본의 집중, 즉 중앙집중화하는 개별 자본들에서 자본의 개별적 다수성이 부정되는 현상을 지적한다.

 

  1. ‘유통시간 없는 유통’의 두 형태

이어서 맑스는 ‘유통시간 없는 유통’의 두 형태를 설명한다.

① 신용은 화폐를 단순한 형식적 계기로 정립하려고 시도하며 그리하여 자본 즉 가치가 되지 않으면서 자본의 변태(형태변환)를 매개한다. 이렇듯 화폐 자체가 유통의 산물이듯이, 신용도 유통의 새로운 산물이다. [신용은 동시에 쌍방향으로 오고가는 교환이 아니다. 흔히들 하는 말로 ‘미리 당겨’ 쓰는 것이란 오고 감이 시간적으로 분리된 것을 말한다. 교환의 경우에는 화폐가 구매의 수단 즉 유통수단이지만 신용의 경우에 화폐는 지불수단으로서 기능한다.]

② 다른 한편, 자본은 유통시간 자체에 생산시간의 가치를 부여하려고 시도한다. 즉 유통(시간)을 매개하는 다양한 기관들이 생기게 된다. 이 모두가 화폐로서, 자본으로서 정립된다. [이는 상인자본(상품거래자본과 화폐거래자본)의 자립화를 낳게 된다. 그러나 상인자본은 잉여가치를 창출하지는 못하며, 다만 생산과정에서 창출된 잉여가치의 분할에는 참여한다. 이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는 분석되지 않고, 자본론 3권에서 논의되고 있다.]

 

  1. [정리] 생산시간과 유통시간

① 유통시간은 자본이 자본으로서 특수한 운동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유통시간 동안 자본은 형태의 변화(변태)를 거친다.

② 생산시간은 자본이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시간이다. 과정 중의 자본이며, “노동으로부터 그 산 영혼을 흡수하는 창조적 자본”이다.

 

  1. 자본의 분할운용

실제로 생산시간이 유통시간에 의하여 중단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데, 이는 자본이 분할되어 운용되기 때문이다. 한 부분이 생산국면에 있을 때, 다른 부분은 유통국면에 있게 된다. 결국 활동 중인 자본은 전체가 아니라 1/x이다. 혹은 특정의 자본이 예를 들어 신용에 의하여 두 배로 늘어나는 형태를 띨 수도 있다. 이 경우 (아마도 상품을 담보로) 돈을 빌린 원래의 자본에게는 유통시간이 마치 없는 듯이 보이지만, 대신 들어선 자본은 유통시간을 거쳐야 하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누가 소유주이냐를 별도로 한다면, 하나의 자본이 둘로 나뉜 것과 같다. a와 b가 각각 둘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a가 b를 흡수하고 나서 a와 b로 나뉜 것과 같다. “이러한 과정에 대한 망상들은 신용을 신비화하는 자들―이들이 채권자들인 경우는 드물고 오히려 채무자들이다―사이에 잦다.”

 

  1. 화폐, 유통시간 그리고 신용

우리가 자본과 그 유통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화폐의 도입이 발견이 아니라 전제인 사회적 발전단계에 있는 것이다. 화폐가 단순히 가치의 상징이 아니라 그 직접적인 형태 자체로 가치를 가지는 만큼, 그런 만큼 화폐는 자본의 유통을 가속화하기보다 지연한다. 화폐는 유통수단의 측면에서나 그리고 자본의 실현된 가치라는 측면에서나 공히 유통비용에 속하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유통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사용된 노동시간인 한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순환의 질적인 계기―자본의 자기자신으로의 복귀, 즉 독립적인 가치로의 복귀―를 나타내는 한에서 그렇다. 어떤 측면에서도 화폐는 가치를 증가시키지 않는다.

① 한 측면에서 화폐는 가치를 나타내는 귀금속 형태이다. 이는 노동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잉여가치의 공제를 나타낸다.

② 화폐는 유통시간을 절약해주는 기계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계가 노동을 들여야 되는 것 즉 노동의 산물인 한에서 화폐는 자본에 대하여 생산공비로 나타난다.

★ 여기서 맑스가 매우 정밀하게, 그러나 이해하기는 조금 어렵게 말하는 바의 골자는, 가치를 포함한 모든 물질의 흐름은 그것이 화폐와의 교환을 매개로 하는 한에서는 지연된다는 말이다. 신용은 바로 이 지연을 제거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신용과는 다른 맥락이지만, 가령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거래는 화폐와의 교환이라는 매개의 상당 부분을 제거한 것이다.

이렇듯 직접적인 형태의 화폐는 유통의 경비이기 때문에 자본의 노력은 화폐를 자신의 목적에 적합한 형태로 전환시키는 방향으로 향한다. 노동시간이 들지 않고, 그 자체로 가치가 없는 유통의 계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은 과거로부터 이월된 직접적 실재로서의 화폐를 지양하고 그것을 단지 자본에 의하여 정립된 것으로 그리고 마찬가지로 지양된 것으로, 순전히 잠재적인(rein Ideelles) 것으로 전환시키는 데로 향한다.” 직접적인 형태의 화폐가 자본의 유통에 장벽이었는데, 자본은 이를 신용을 통하여 지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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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자본론』에서의 신용에 관한 논의

[『자본론』 3권 27장, 30, 31, 32장 등에서 발췌 정리한 것이다. 직접 인용의 경우에는 김수행 번역본을 참고하되, 독어본을 기준으로 조금씩 고쳐서 옮겼다.]

 

1. 신용의 필연성  

이윤율균등화(운동)를 매개한다. 자본의 이동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자본들 사이의 경쟁을 일반화하고 따라서 이윤율의 균등화를 낳는 데 기여한다. 󰡔자본론󰡕 3권 10장 참조.

 

2. 유통비용 절감

1) 화폐는 그 자체가 가치인 한 유통비용의 하나가 된다. 화폐는 신용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3가지 방식으로 절약된다.

① 거래의 큰 부분에서 화폐가 전혀 사용되지 않음으로써.

②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가속화

ㄱ. 더 소량의 화폐 혹은 화폐상징이 동일한 역할을 하는 것(은행업의 기술)

ㄴ. 신용이 상품변태속도를 가속화하여 이에 따라 화폐유통속도가 가속화된다.

③ 지폐에 의한 금화의 대체

2) 신용은 유통(상품변태)의 개개의 국면을 가속시키며 그와 함께 자본변태 및 재생산과정 일반을 가속화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신용은 구매행위와 판매행위를 오랫동안 서로 분리시킬 수 있으며 이리하여 투기의 바탕이 된다.)

 

3. 주식회사의 형성

이로써 다음과 같이 된다.

1) 생산규모와 기업의 거대한 팽창

2) 자본 → “개인자본에 대립하는 사회자본(직접적으로 결합한 개인들의 자본)의 형태를 직접적으로 취”한다. 개인기업에 대립하는 사회기업으로서 등장.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자체의 한계 안에서 사적 소유로부터 자본을 지양하는 것이다.”

3) 기능자본가의 단순한 관리인으로의 전환. 그리고 자본소유자의 단순한 소유자―화폐자본가―로의 전환. 배당이 이자와 기업가이득을 포함하고 있다 할지라도 “이 총이윤은 오직 이자의 형태로서만, 즉 자본소유에 대한 단순한 보상으로서만 취득된다.” 자본소유는 이제 현실적인 재생산과정에서의 기능 및 관리기능으로부터 분리된다.

이리하여 이윤(···)은 오로지 타인의 잉여노동의 단순한 전유로서 나타나는데, 이는 생산수단의 자본으로의 전환으로부터 즉 생산수단이 현실적인 생산자들로부터 분리되는 것(소외)으로부터, 생산수단이 타인의 소유물로서 현실적으로 생산과정에서 활동하는 (관리인으로부터 최하의 일용노동자에까지 이르는) 개인에 대립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한다. 주식회사에서는 기능이 자본소유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고 그리하여 노동도 생산수단 및 잉여노동의 소유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최고의 발전이 낳는 이러한 결과는 자본을 생산자들의 소유그러나 이제는 개별 생산자들의 사적 소유로서가 아니라 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 또는 직접적인 사회적 소유로 재전환시키기 위한 필연적인 통과점이다. 더욱이 이러한 결과는 재생산과정에서 아직도 자본소유와 결부되어 있는 모든 기능들을 결합된 생산자들의 단순한 기능으로, 사회적 기능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통과점이다.

 

주식회사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안에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철폐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를 지양하는 모순인데 주식회사는 첫 눈에 명백하게도 새로운 생산형태로의 단순한 통과점으로서 나타난다. 주식회사는 현상에서도 그러한 모순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주식회사는 한편에서는 일정한 분야에서 독점을 낳고 이리하여 국가의 간섭을 불러일으킨다. 다른 한편에서 주식회사는 새로운 금융귀족을 재생산하고 발기인이나 창립자나 명목만의 임원의 형태로 새로운 종류의 기생층을 재생산하며 회사창립이나 주식발행이나 주식거래와 관련된 투기와 사기의 제도 전체를 재생산한다. 결국 주식회사는 사적 소유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사적 생산이다.

 

4. 주식회사 제도

이는 자본주의 체제의 바탕 위에서 자본주의적 사적 산업을 철폐하는 것이며, 이것이 확산되어 새로운 생산분야를 장악함에 따라 그만큼 더 사적 산업을 파괴하게 된다. 이와는 별도로 신용은 개별자본가에게 일정한 한계 안에서 타인의 자본과 소유, 그리하여 타인의 노동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제공한다. 자기자본이 아니라 사회자본에 대한 지배력은 자본가에게 사회적 노동에 대한 지배력을 준다.

어떤 사람이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자본―또는 세상 사람들이 그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본―은 신용이라는 상부구조를 위한 토대로 될 뿐이다. (···) 모든 척도들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안에서 다소간 인정되고 있었던 모든 해명근거들이 지금은 사라져 버린다. 투기상인이 도박에 걸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사회적 소유이다. 자본의 기원이 저축이라는 이야기도 역시 불합리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투기꾼은 바로 타인들이 자기를 위하여 저축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하나 절제라는 문구도 자본가의 사치―이것이 이제는 신용을 얻는 수단으로 되고 있다―에 의하여 완전히 반박되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상대적으로 덜 발달한 상태에서는 아직도 일정한 의미를 지녔던 관념들이 이제는 전혀 무의미한 것으로 된다. 성공이나 실패 모두가 자본의 집중을 야기하며 이리하여 최대의 규모에서의 수탈(Die Expropriation)을 야기한다. 수탈이 이제는 직접적 생산자들로부터 중소자본가들 자신에게까지도 미치고 있다. 수탈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출발점이며,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목표는 수탈을 완성단계까지 진행시켜 결국에는 모든 개인들로부터 생산수단을 수탈하는 것이다. 즉, 생산수단은 사회적 생산의 발달에 따라 사적 생산의 수단이나 생산물이기를 멈추며 결합된 생산자들의 사회적 생산물임과 동시에 그들의 수중에 있는 생산수단, 이리하여 그들의 사회적 소유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이러한 수탈이 대립적인 형상으로, 즉 소수가 사회적 재산을 전유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신용은 이 소수에게 순전한 사기꾼의 성격을 점점 더 부여하고 있다. 소유권은 이제 주식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소유권의 동향과 이전은 증권거래소의 투기의 결과일 따름인데, 증권거래소에서는 작은 고기들은 상어의 밥이 되고 양은 거래소 이리들의 밥이 된다. 주식회사제도에서는 낡은 형태즉 사회적 생산수단들이 개인적 소유로서 나타나는 낡은 형태와의 대립이 이미 존재한다. 그러나 주식이라는 형태로의 전환은 아직도 자본주의의 틀 안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전환은 사회적 부로서의 부의 성격과 사적 부로서의 부의 성격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기는커녕 이 대립을 새로운 형태로 전개시키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5. 협동조합공장(Die Kooperativfabriken, co-operative factories)

[이는 오늘날의 자주관리에 해당한다.]

“노동자들 자신에 의해 운영되는 협동조합공장은 ··· 기존제도의 모든 결함을 재생산하며 또 재생산하지 않을 수 없지만, 낡은 형태 내부에서 새로운 형태가 출현하는 최초의 실례”

“협동조합공장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부터 발생하는 공장제도 없이는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며,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부터 발생하는 신용제도 없이는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신용제도는 자본주의적 개인기업을 자본주의적 주식회사로 전환시키기 위한 주요한 바탕을 이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협동조합을 다소간 국민적 규모로 점차로 확장시키기 위한 수단을 제공한다. 자본주의적 주식회사는 협동조합공장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으로부터 연합에 기반을 둔 생산방식으로의 이행형태인데, 다만 전자에서는 그 대립이 소극적으로/음성적으로(negativ) 철폐되고 후자에서는 적극적으로(positiv) 철폐되고 있을 뿐이다.”

“신용의 발달―그리고 그것에 포함되어 있는 자본소유의 잠재적 지양”

 

6. 자본의 역사적 과제와 신용

이리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이 명백하게 된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의 대립적 성격에 바탕을 둔 자본의 가치화는 생산의 현실적인 자유로운 발전을 오직 일정한 정도까지만 허용하며 따라서 사실상 생산에 대한 내재적인 질곡과 장벽을 구성하고 있는데, 이 질곡과 장벽이 신용제도에 의하여 끊임없이 돌파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용제도는 생산력의 물질적 발전과 세계시장의 형성을 촉진하는데, 이러한 것들을 새로운 생산형태의 물질적 기초로서 일정한 수준에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역사적 과제이다. 동시에 신용은 이 모순의 격렬한 폭발즉 공황을 촉진하고 이리하여 낡은 생산양식을 해체하는 요소들을 강화한다.

 

7. 신용제도에 내재하는 이중적 성격

① 자본주의적 생산의 동기를 가장 순수하고 가장 거대한 도박과 사기의 제도로까지 발전시키고 사회적 부를 수탈하는 소수의 수를 점점 더 제한한다.

② 새로운 생산방식으로의 이행형태를 구성한다.

이를 맑스는 “사기꾼과 예언자를 잘 혼합시킨 성격”이라고 한다.

 

8. 생산과정의 발달, 신용, 투기

더욱이 최초의 거래가 상품가격의 등락을 노리는 투기에 의해 촉발되면 될수록 환류는 그만큼 더 불확실하게 된다. 그러나 노동생산성과 대규모 생산이 발달함에 따라 (1) 시장은 확대되고 생산지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며, (2) 따라서 신용이 장기화되지 않을 수 없으며, (3) 그 결과로 투기적 요소가 거래를 점점 더 지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은 명백하다. 멀리 떨어진 시장을 위한 대규모 생산은 생산물 전체를 상업의 수중에 맡긴다. 그러나 국민의 자본이 두 배가 되어 상업이 자기 자신의 자본으로 국민의 총생산물을 구매하여 그것을 다시 판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신용은 필수적이며, 신용의 규모는 생산의 가치량의 증대에 따라 증대하고, 신용의 기간은 판매시장이 멀어짐에 따라 연장된다. 여기에서 상호작용이 생긴다. 즉 생산과정의 발달은 신용을 확대하고, 신용은 또한 산업활동과 상업활동을 확대시키게 된다.

 

9. 공황의 궁극적 원인

실제로는 생산에 투하된 자본의 보충은 비생산적 계급의 소비능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소비능력은 부분적으로는 임금을 규제하는 법칙들에 의해 제한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그들은 자본가계급을 위해 이윤을 낳는 한에서만 고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 제한되고 있다. 언제나 모든 현실적 공황의 궁극적인 원인은, 생산력을 발달시키려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충동(마치 사회의 절대적 소비능력만이 생산력 발달의 한계를 설정하고 있는 것처럼 생산력을 발달시키려고 한다)에 대비한 대중의 궁핍과 제한된 소비에 있다.

 

10. 산업순환과 투기

불황국면에서 생산은 이전이 순환에서 도달하였던, 그리고 지금 그 기술적 토대가 마련되어 있는 수준 이하로 감소한다. 번영국면―중간단계―에서 생산은 그 기술적 토대 위에서 더욱 발전한다. 과잉생산과 투기의 국면에서 생산은 생산력을 그 최대한도로 긴장시키며 생산과정의 자본주의적 장벽을 넘어서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11. 모든 공황의 바탕

그리하여 첫눈에는 모든 공황은 단순히 신용․화폐공황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사실상 이 공황은 어음을 화폐로 전환시키는 문제일 따름이다. 그런데 이 어음들의 대부분은 현실의 매매를 대표하고 있으므로, 이 매매가 사회적 필요를 훨씬 능가하여 팽창하는 것이 결국 모든 공황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12. 진정한 축적과는 구별되는 화폐자본의 축적

그러나 화폐자본가는 모든 이윤(그가 얻어 자본으로 재전환시키는 모든 이윤)을 먼저 대부가능한 화폐자본으로 전환시킨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미 화폐자본의 축적―진정한 축적으로부터 파생된 것이지만 그것과는 구별되는 축적―을 보게 되며, 그것은 특수한 부류의 자본가들(화폐자본가․은행업자 등등)의 축적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화폐자본의 축적은 (재생산과정의 진정한 확대에 수반하는) 신용제도의 확장에 따라 증대할 수밖에 없다.

 

13. 화폐자본의 축적이 언제나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자본축적보다 클 수밖에 없는 이유

개인적 소비의 증대는, 화폐에 의해 매개된다는 이유로, 화폐자본의 축적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개인적 소비의 증대는 진정한 축적을 위한 화폐형태(새로운 자본투자를 개시하는 화폐)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정리]

자본의 분리, 분할, 특수화의 관점에서 본 자본주의의 전개 과정

① 시초 축적 : 생산수단의 생산자로부터의 분리(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주체와 객체의 분리)

② 생산적 자본(혹은 산업자본)의 내적 분할 :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③ 상품거래자본 혹은 상업자본(상인자본의 한 형태)의 분리 : 유통과정 중 상품의 화폐와의 교환(C-M)을 담당하는 기능이 특수화되어 산업자본으로부터 독립. 잉여가치를 창출하지는 않으나 잉여가치의 분할에 참여.

④ 화폐거래자본(상인자본의 한 형태)의 분리 : 유통과정 중 화폐의 지불과 수납, 차액의 결제, 당좌계정의 유지(부기), 화폐의 보관을 담당하는 기능이 특수화되어 산업자본으로부터 독립. 상품거래자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잉여가치를 창출하지는 않으나 잉여가치의 분할에 참여.

⑤ 화폐자본(이자 낳는 자본)의 분리 : 재생산과정(생산 +유통)으로부터의 분리.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잉여가치를 창출하지는 않으나 이자의 형태로 잉여가치의 분할에 참여. 은행.

⑥ 지대소득자 계층(rentiers) : 생산과정에 기여함이 없이 토지의 소유 자체를 근거로 잉여가치의 일부를 ‘지대’의 형태로 가져감. [현대에는 생산과정에 기여함이 없이 자산(부동산, 주식, 증권 등)의 소유 자체를 근거로 잉여가치의 일부를 가져가는 더 광범한 자산소득자(불로소득자) 층이 형성됨.]

⑦ 소유와 기능의 분리(주식회사) : 자본의 재생산과정에 기여함이 없이 자본의 소유 자체를 근거로 일종의 이자 같은 형태(배당금)로 잉여가치를 가져감.

→ 사회적 소유의 형성 :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한도 내에서 사적 소유를 철폐함.

⑧ 신용과 그 이중성 : 자본주의를 도박과 사기의 제도로 발전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생산방식으로의 이행형태를 구성함.




축의 전환―트럼프의 쇠퇴, 녹색당의 부상 및 사회적 변화의 새로운 좌표

 


  • 저자  :  Otto Scharmer
  • 원문 : Axial Shift: The Decline of Trump, the Rise of the Greens, and the New Coordinates of Societal Change (2018년 9월 8일)
  • 분류 : 내용 정리
  • 옮긴이 : 민서

2018년 9월 7일에 있었던 미국 중간 선거가 미국이 좌파와 우파라는 양극단으로 치닫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결과라는 평가가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공유되고 있다. 하지만 오토 샤르머(Otto Scharmer)는 이 평가가 20세기 렌즈(즉 좌파냐 우파냐)로 21세기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와는 다른 시각으로 근본적인 축의 전환(axial shift)을 다루면서 정치적•경제적•문화적 공간의 좌표를 재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축의 전환은 지적 담론을 형성하는 좌표의 새로운 체계이다. 그에 설명에 따르면 미국의 중간선거는 물론 브라질•독일•이탈리아에서의 최근 선거 결과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갈등의 축은 더 이상 좌파와 우파 사이가 아니라 열린 쪽과 닫힌 쪽 사이에 있다. 그런데 이러한 축의 환은 정치에 국한해서 일어나는 일은 아니며 경제 및 교육 체계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샤르머는 정치•경제•교육체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축의 전환—① 정치적 전환 ② 경제적 전환 ③ 교육의 전환—이 20세기의 전통적인 공적담론을 새로운 담론으로 대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정치적 전환>


그림 1 새로운 정치의 축

 

그림 1에서 가로축 방향은 20세기의 낡은 갈등선을, 세로축 방향은 부상하는 21세기의 양극성을 나타낸다. 가로축의 기초가 되는 차이는, 예를 들어 ‘좌파’는 정부 서비스를 늘림으로써 문제에 대응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우파’는 개인들의 주도권을 촉진함으로써 같은 쟁점에 대응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세로축의 기초가 되는 차이는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가 열림(개방) 대 닫힘(폐쇄)라고 부른 것으로, 도널드 트럼프와 새로이 선출된 브라질 대통령 자이르 볼소나루(Jair Bolsonaro)를 통해 이 ‘닫힘’(Closed)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다. 닫힘은 두려움•혐오•무지라는 세 요소를 증폭시키고 다섯 가지 행동 형태―① 맹목적임blinding(현실을 보지 않음) ② 감지하지 못함de-sensing(다른 사람들과 공감하지 못함) ③ 결여됨absencing(자신의 최고의 미래와의 관련성을 상실함) ④ 다른 사람들을 비난함blaming others(반성할 능력이 없음) ⑤ 파괴함destroying(자연파괴, 관계 파괴 및 자기파괴)―로 나타나는 심리상태를 의미한다. 샤르머는 이 다섯 가지 행동 형태들이 각본이 되어 지난 2년에 걸쳐 정치를 다시 만들었으며, 이는 이 행동 형태들이 마이크로 타기팅(micro-targeting)과 다크 포스트(dark post) 같은 소셜미디어 메커니즘들로 무기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이 메커니즘들이 디지털 공명실(digital echo chamber)에서처럼 우리의 고립을 증가시키고 전례없는 수준에서 이런 치명적인 행동들을 증폭시킨 것인데 ① 미 연방 대법원에서의 브렛 캐버노(Brett Kavanaugh)의 인준 ② 학교, 종교기관 및 공공장소에서의 대량 총기 발사 ③ 기후변화가 이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최근 사례들에 해당한다. 한 가지 사례(기후변화)만 예를 들어보자.

 

과학적인 증거를 수용하지 않음(맹목적임). 특히 지구상의 후진 지역에서 희생자들의 수가 증가하는 것에 공감하지 못함(감지하지 못함). 환경보호국(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을 해체함(결여됨). 기후과학과 기후 과학자들의 신뢰성을 적극적으로 약화시킴(다른 사람들을 비난함). 그리고 파리협약(Paris Agreement)에서 탈퇴함(문명을 자기파괴로 향하는 길로 몰아넣음).

 

그리고 샤르머는 이 사례들이 트럼프주의(Trumpism)의 각본이기도 해서 브라질의 트럼프로 평가되는 볼소나루가 선거운동에서 이 각본의 대부분을 따라할 만큼 정치적으로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그에게 투표했는가? 샤르머는 이 물음에 낡은 체제가 유권자인 그들을 실망시켰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현 체제를 파열시키고 ‘적폐를 청산’하겠다고 약속하는 후보자에게 표를 던진 것이라고 답한다.

그림2: 두 개의 사회적 장: 함께 창조하기(현재화)의 주기 및 파괴하기(결여됨)의 주기

 

샤르머는 실제적인 정치적•경제적•문화적 대안의 부재가 오히려 세로축의 위쪽 부분(그림 1, 2)에 있는 엄청난 잠재성을 활성화시킬 징후로 본다. 예를 들어 그는 그림1과 그림2에서 좌우 축의 바깥쪽과 위쪽에 위치한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의 2/3 가량이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 투표했고, 독일에서 최근에 치러진 두 번의 선거에서도 중도좌파인 사회민주당(SPD)과 중도보수당(CDU)이 연립정부를 구성하는데 실패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한편 선거에서 부상한 두 주요 당선자는 세로축의 끝에 놓이는데 아래쪽 끝에는 난민에 반대하는 <독일을 위한 대안> 소속의 당선자가 놓이고 위쪽 끝에는 녹색당 소속의 당선자가 놓인다. 샤르머는 극보수주의적인 성향의 남부 바이에른에서의 독일 녹색당의 부상과 텍사스에서의 미국 민주당의 부상—민주당 소속의 베토 오르크(Beto O’Rourke)는 텍사스에서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테드 크루즈(Ted Cruz)와의 대결에서 선전했다—은 세로축의 위쪽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총체적인 잠재성이 오늘날 드러나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샤르머는 정치부문에서의 축의 전환과 관련한 몇 가지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자이르 볼소나루(Jair Bolsonaro, 브라질), 빅토르 오반(Viktor Orban, 헝가리), 야로슬라브 카친스키(Jaroslaw Kaczynski, 폴란드), 마테오 솔비니(Matteo Salvini, 이탈리아), 레제프 에르도간(Recep Erdogan, 터키), 블라지미르 푸틴(Vladimir Putin, 러시아) 그리고 로드리고 두테르테(Rodrigo Duterte, 필리핀)의 부상은 (a) 세로축에서 아래쪽 끝에 위치하는 것으로 정의된 트럼프주의가 미국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과 (b) 트럼프주의가 두려움•증오•무지의 확대를 가능케 한 소셜미디어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음을 나타낸다(그림 2).

 

– 독일에서의 녹색당의 부상, 미의회에서 새로운 세대의 다양한 여성 대표자들의 부상뿐만 아니라 동성혼 합법화를 주장한 코스타리카의 대통령 알바라도(Alvarado)와 다수 일반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당선된 인도네시아의 대통령 조코위(Jokowi)의 승리도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무지•증오•두려움을 통해 호기심•연민•용기를 폐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호기심•연민•용기를 통해 정신•마음•의지를 열어젖힘으로써 현 정치 체제에 대한 그들의 불만을 드러낼 수 있음을 입증한다(그림 2).

 

– 역사적으로 살펴보더라도 세로축 주변에서 일어나는 열림과 닫힘 사이의 갈등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오늘날 새로운 것은 다음의 3가지 조건들이다. ① 열림이냐 닫힘이냐라는 쟁점이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것 ② 우리에게는 지구가 가진 지속가능한 발전의 한계에 맞추어 우리의 경제와 사회를 변형시키기 위한 시간이 10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③ 소셜미디어가 전례 없는 수준에서 치명적인 행동들(결여됨의 순환)을 확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 트럼프하에서 미공화당(GOP)이 전통적으로 보수 성향의 중심부에서 세로 스펙트럼의 아래쪽 끝에 있는 신민족주의적인 포퓰리즘(그리고 백인우월주의)적 견해를 충분히 수용하는 으로 움직였는데도 민주당은 더 좌파로 움직일 건지, 더 중도로 갈 건지, 더 포퓰리즘적이 될 건지 아니면 세로 스펙트럼에서 더 위쪽으로 움직일 건지를 논쟁하면서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있다. 대부분의 선거운동은 미국 문명을 위한 더 대담한 새로운 내러티브(세로축의 위쪽 끝)를 제안할 기회를 놓치면서 전통적으로 진보적인 주제(가령 헬스케어 서비스)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민주당의 선거 전략은 낡은 렌즈를 통해 새로운 상황을 바라봄으로써 역사적 기회를 놓친 명확한 사례에 해당한다.

 

<경제적 전환>

 

경제적 좌표의 전환은 경제를 운영하는 방법에 관한 담론—어떻게 경제성장의 주기에 불을 가장 잘 점화할 것인지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에 초점을 맞추는 담론—을 재형성하고 있다. 한 학파가 시장 메커니즘(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을 찬성했고 다른 학파는 정부 개입과 더 적극적인 거시경제적 운영(케인즈학파와 신케인즈학파)을 찬성했지만, 금세기 새로운 담론은 문제가 있는 성장패러다임이 모두를 위한 웰빙에 초점을 맞추는 탈성장 패러다임으로 대체될 것인지의 여부를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림3: 새로운 경제의 축

 

샤르머는 그림 3에서처럼 낡은 담론과 낡은 패러다임은 그냥 사라지지 않고 현재의 공적인 경제 담론의 새로운 좌표에서도 그대로 등장하는 것으로 분석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가로축은 경제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정부중심적인 방식이냐 시장중심적인 방식이냐에 기초하지만 세로축은 더 많은 국내총생산이 더 많은 복지로 옮아가는 경향이 없다는 선진 경제의 경험적 발견에 기초한다. 그는 이것이야 말로 국내총생산이 경제적 발전의 유익한 지표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므로 바로 이곳에서 새로운 대화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논의되는 대안 지표들로는 ⑴ 부탄의 국민총행복지수(Gross National Happiness, GNH) ⑵ 유엔개발계획(UNDP)의 인간개발지수(Human Development Index, HDI) ⑶ 2015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한 17대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SDGs)가 있다.

 

샤르머는 이러한 새로운 경제 좌표의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① 대부분의 낡은 패러다임들이 2008년도에 완전히 실패를 했지만 그 사고방식은 자본과 제도 속에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에 주류경제 담론은 여전히 20세기 경제사상인 가로축에 지배를 받고 있다.

② 세로축과 관련해서는 세로축의 아래쪽(즉 경제 민족주의)에서 그 사상이 더 역설되고 표현되는 반면에 세로축의 위쪽에서는 표현되더라도 규칙이 아닌 예외로 남는다(사례: 부탄, 코스타리카(([옮긴이] 코스타리카는 동성 결혼 합법화를 지지하는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부탄은 국민행복지수가 1위인 나라이다.))).

③ 세로축의 윗부분의 특성은 많은 지역공동체들에서 발견되며 도시나 일국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지역 규모의 다부문 기획에서도 종종 드러난다.

④ 2030년까지 17개 지속가능한발전목표(SDGs)를 실제로 실행할 유일한 가능성은 공동작업과 민주적 참여를 위한 새로운 기반시설들을 지역 수준에서부터 창출하는 데 있으며, 그 목적은 모두를 위한 웰빙을 창출하기 위하여 즉 에고체계(ego-system) 인식에서 생태계(eco-system) 인식으로 (세로축의 아래쪽에서 세로축의 위쪽까지) 우리 경제의 운영체제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것이다.

 

<교육의 전환>

 

교육의 새로운 좌표는 정보격차의 의미가 바뀌었음을 깨닫는 것을 통해서 포착할 수 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네이오미 셰이퍼 라일리(Naomi Schaefer Riley)에 따르면 실제 정보격차는 “스크린 타임을 제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부모를 둔 아이들과 더 많은 스크린이 성공의 열쇠라고 말하는 학교와 정치가들에게 속은 부모를 둔 아이들 사이에” 존재한다. 잡지『와이어드』(Wired)의 전 편집인인 크리스 앤더슨(Chris Anderson)도 “과거 정보격차의 핵심은 테크놀로지에의 접근이었지만 이제 모든 사람이 테크놀로지에 접근하므로 테크놀로지에의 접근을 제한하는 것이 새로운 정보격차의 핵심이다”라고 말했다.

 

교육부문에서 대부분의 낡은 담론이 ‘공교육 대 사교육’—즉 좌파와 우파—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반면에 새로운 담론은 학습 유형에 더 중점을 둔다. 그림 4에서 보듯이 교육의 전환은 숫자•공식•사실을 외우기냐 아니면 전인교육의 관점에서 학습과 창의성에 접근하느냐(후자의 접근법은 생성적인 사회적 장들을 중심으로 하면서 머리•가슴•손을 통합한다)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샤르머는 이러한 새로운 교육 좌표(그림 4)의 렌즈를 통해 드러나는 현 교육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림 4 새로운 교육의 축

 

① 현재 활동과 담론의 대부분은 낡은 사고방식의 축(공교육이냐 사교육이냐 등)의 손아귀에 아직 꽉 잡혀있다.

② 인공지능 혁명은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을 재형성하면서 우리가 스펙트럼의 아래쪽(숫자•공식•사실 기억하기)에서 익히는 숙련도에 토대를 둔 일자리들을 대체할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우리는 인간 활동과 가치창출이 스펙트럼의 위쪽(인간적인 연민, 공감하는 인적서비스, 집단 창의성, 깊이 경청하기, 생성적인 대화, 집단적 공존, 공간 확보해주기, 내려놓기, 맞이하기(([옮긴이] 여기서 ‘공간을 확보해주기’(‘holding the space’)는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부과하지 않으면서 타인을 돕는 것이다. ‘내려놓기’(letting-go)는 기존의 자아를 내려놓는 것이고 ‘맞이하기’(letting-come)는 미래의 잠재적 자아를 맞이하는 것이다. 샤르머는 기존의 자아를 ‘내려놓기’와 미래의 잠재적 자아를 맞는 ‘맞이하기’의 공존을 ‘presencing’(현재화)이라고 표현한다.)))을 향하도록 방향을 다시 잡아야 할 것이다.

③ 좋은 사립학교들이 학습 스펙트럼의 위쪽으로 도전을 해보기도 하지만 핀란드와 북유럽 국가의 교육 체계들을 제외하고 그런 시도를 해온 더 큰 학교 시스템의 사례들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맹점>

 

샤르머는 시스템 변화에 기반을 둔 인식방법과 인식 도구를 제공하는 기반시설 및 현 세대의 변화 메이커들이 여러 시스템들·부문들·지형들에 걸쳐 있는 그들의 동료들과 연결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힘을 주고 뒷받침을 하는 기반시설의 부족이야말로 우리시대의 가장 중요한 맹점이라고 진단한다,

 

정치와 경제에서의 축의 전환은 교육과 학습에서의 전환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는 이 물음에 모든 것이 관계되어 있다고 답한다. 20세기 담론에서는 이데올로기의 차이가 핵심이었지만 2018년에는 이데올로기는 없고 나-나-나···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세로축에서의 차이—열림이냐 닫힘이냐—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샤르머에 따르면 세로축에서의 차이는 의식, 다시 말해 우리가 연결되는 방식의 질의 차이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래쪽 두 개의 사분면에서 위쪽 두 개의 사분면으로의 전환은 자아체계 인식에서 생태계 인식으로의, 즉 나에서 우리로의 의식상의 전환인 것이다.

 

트럼프, 포퓰리즘 및 에고체계 인식에서 좋은 점은 현실화되고 있는 에너지와 주도권이며 나쁜 점(또는 그 한계)은 편협성이다. 이러한 ‘자잘한’ 자아는 상호의존으로 이루어진 우리 시대의 실질적인 복잡함을 감당하지 못한다. 복잡함과 상호의존은 정신의 개방, 마음의 개방, 의지의 개방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우리가 계속 이런 개방과정에 참여할 때—심판의 소리, 냉소의 소리, 두려움의 소리에 둘러싸인 그 모든 것에 도전할 때—우리는 근본적으로 에고에서 생태로의 사고방식의 전환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부터 뿐만 아니라 생태계에 속한 다른 모든 존재들의 관점에서부터 상황들을 바라보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샤르머는 셀 수 없이 많은 개인들, 집단들 및 조직체들이 에고체계 운영방식에서 생태계 운영 방식으로 옮겨가도록, 즉 세로축의 위쪽으로 옮겨가도록 요구하는 과제들과 직면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이 여정에서 그들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고 종종 혼자라고 느끼고 있는 이 시점이야말로 우리가 열림(개방)과정을 이야기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이 열림(개방)과정—그리고 이 과정을 규모있게 촉진하기 위한 새로운 인식에 바탕을 둔 방법들과 도구들—은 아마도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하지만 지원을 잘 받지 못하는 과정이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소음들 때문에 종종 놓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최고로 집중할 만한, 형성중인 운동을 포함하고 있는 과정인 것이다.

 

<당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것: 사회변형랩>

 

실제로 샤르머는 동료들과 <프레즌싱 인스티튜드>(Presencing Institute)를 운영하며 세로축의 위쪽 부분을 규모있게 활성화하기 위해 일하고 있고, 부문들을 가로지르고 있는 다수 글로벌 네트워크들 및 조직체들과 협력하고 있다. 그는 <사회변형랩>(Societal Transformation Lab)이라 불리는 새로운 기획과 기반시설을 2019년 초에 출범시켰으며, 이 랩은 각자가 속한 조직체 및 생태계에서 지대한 혁신을 위해 일하는 팀들과 조직체들에게 필요한 다지역 혁신 플랫폼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 글을 올라간 2018년 9월 8일은 이 기획의 파트너들을 모집하기 위해 새로운 웹사이트를 시작하는 날이기도 해서 샤르머는 랩을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다. 랩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으며 이 랩을 통해 세계 전역에서 변화 메이커들이 모일 수 있다. 팀들과 조직체들은 s.lab의 온라인 플랫폼에 접근할 수 있으며 이 플랫폼은 부문들, 시스템들 및 지형들에 걸쳐 있는 변화 메이커들이 서로의 학습, 리더십 및 프로토타이핑(prototyping)을 지원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경제위기와 중앙은행들


  • 저자  :  Eric Toussaint
  • 원문 : The Economic Crisis and the Central Banks (2019. 3. 25) Attribution-NonCommercial-NoDerivatives 4.0 International (CC BY-NC-ND 4.0)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제3세계 부당부채폐지위원회>(CADTM, Comité pour l’annulation de la dette du Tiers Monde, Committee for the Cancellation of the Third World Debt)의 웹사이트에 올라있는 에릭 뚜생(Eric Toussaint)의 글 “The Economic Crisis and the Central Banks”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뚜생은 역사가이자 정치학자로서 CADTM의 대변인이자 <프랑스 아탁>(ATTAC France)의 과학자문위원회의 위원이다. 또한 2015년 4월 4일부터 <공공부채에 관한 그리스 진실위원회>의 과학분야 조정자이다. 학술저서로는 Bankocracy (2015), The Life and Crimes of an Exemplary Man (2014), Glance in the Rear View Mirror. Neoliberal Ideology From its Origins to the Present (2012)가 있다.

새 국제 금융위기가 일어날 조건이 다 마련되어 있다. 언제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일어나게 되어 있고 그 영향은 지구 전체에 미칠 것이다.

이 위기 상황을 야기할 주된 요인들은 ① 기업 부채, ② 증가하는 투기거품―금용도구들(증권, 부채, 증권시장)과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나라들에서는 부동산 부문―이다. 이 두 요인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엄청난 양의 현금을 보유한 애플 같은 회사도 빚을 진다. 낮은 이자율을 이용해서 빌린 돈을 다시 빌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애플을 비롯한 다수 회사들은 생산에 투자하기 위해서보다는 빌려주기 위해서 빌린다. 또한 주식을 사기 위해서도 빌린다.((이에 대해서는 “The mountain of corporate debt will be the seed of the next financial crisis”(「산 같이 쌓인 기업부채가 다음 금융위기의 씨앗이 될 것이다」 (http://www.cadtm.org/The-mountain-of-corporate-debt, published 14 November 2017) 참조.))

투기거품은 거대 중앙은행들(지난 10년 동안은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유럽중앙은행, 영국은행, 1990년대 부동산거품 폭발 이후의 일본은행)이 시행하는 정책의 결과이다. 이 은행들이 수조의 달러, 유로, 파운드, 옌화를 민간은행들에 쏟아 부어 둥둥 떠다니게 하고 있다. 이런 정책은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라고 불렸다. 중앙은행들이 이렇게 풍부하게 배포한 금융자원들은 은행들 및 다른 부문의 주요 기업들에 의해서 생산적인 투자에 사용되지 않고 금융자산들(주식, 회사채, 정부 및 공공채권, 구조화 금융상품 및 파생상품들 등)을 획득하는 데 쓰였으며 이것이 주식시장, 증권시장, 부동산 부문 등에서 투기적 거품을 창출했다. 모든 주요 기업들은 과도한 빚을 지고 있다.

중앙은행 측의 이러한 정책은 그 경영자들의 의사결정이 주요 민간은행들 및 다른 부문의 거대 자본주의 기업들의 단기적 이익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즉 연쇄반응으로 이어지는 실패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상당한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이 정책은 또한 현재의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한 특징―창출되는 새로운 가치의 점점 더 작은 부분이 생산에 재투자된다―에서 나온다.((François Chesnais, “De nouveau sur l’impasse économique historique du capitalisme mondial” [“More on world capitalism’s historic economic dead end”]), http://alencontre.org/economie/de-nouveau-sur-limpasse-economique-historique-du-capitalisme-mondial.html, read 17 March 2019 [프랑스어 논문] 참조.)) 새로 창출되는 가치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이 주주의 배당금, 자사주 매입, 특히 구조화 상품과 파생상품에의 투기적 투자에 지출된다.

중앙은행들이 2007-2008년 위기에 취한 정책으로 돌아가 보자. 중앙은행들이 개입했다고 해서 체계가 말끔하게 청소된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가장 취약한 요소들이 유지되거나 증가되었는데 회사가 진 부채에 비한 자기자본의 비율이 너무 낮았던 것이다. 이 비율은 회사(은행이든 애플이나 제너럴일렉트릭 같은 회사든)가 보유한 주식, 증권 및 기타 금융자산들의 가격 하락에 의해 야기될 가치손실을 감당하기에 중분하지 않았다. 모든 회사들은 빚을 잔뜩 지고 있는데, 이는 이자율이 매우 낮아서(유로존 0%, 일본 –0.1%, 영국 0.75%, 미국 2.5%) 돈을 빌리는 비용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대한 양의 자본이 금융수익의 극대화를 추구하고 있다. 비록 그것이 금융문제를 안고 있는 회사들이 발행한 정크 회사채를 사는 것을 의미할지라도 그렇다. 그래서 금융건전성의 측면에서는 좋은 평판을 가진 애플 같은 회사들은 자금을 빌려서 그것으로 수익률이 높은 정크 증권들을 구입한다. 이 고수익률 정크증권[수익률은 높지만 원금상환이 극히 불확실한 회사채]을 발행하는 망해가는 회사들은 계속 빚을 지는 정책을 실행한다. 이전에 대부받은 돈을 갚기 위해 돈을 빌리는 것이다.

2018년 12월 말, 큰 증권시장 붕괴가 미국에서 일어날 뻔했으며, 그 전염효과[한 국가에서 발생한 금융위기가 다른 국가에 파급되는 현상]는 즉각적이었다. 거대한 붕괴가 임박해 있다는 또 하나의 표시였다.

미국의 부동산 시장은 또 다시 취약해졌다. 부동산 가격은 2012년 이래 50% 올랐으며 이는 2005-2006년에 시작되어 2008-2009년의 거대한 국제적 위기를 야기한 위기 직전보다 높은 수준이다. 우리가 새로운 부동산 위기를 눈 앞에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주택판매가 감소하고 있고 거래가 둔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의 지속적인 양적 완화와 미국에서의 양적 완화의 종료가 모두 위기의 요인들이다.

‘시스템 수준’(systemic)이라고 지칭되는 거대 민간은행들은 극히 취약하며 그 주식의 가치는 미국과 유럽에서 2018년 하반기에 급락했고 이 하락세는 2019년 1사분기에 계속되었다. 이 거대 민간은행들은 해당 국가의 중앙은행들의 지원으로 연명하고 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이하 ‘연준’)는 해로운 민간 회사채(저 유명한 주택저당증권Mortgage Backed Securities, MBS)를 팔아버리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연준은 2008-2009년에 구제금융을 위해 거대 은행들로부터 획득한 엄청난 양의 MBS(1조6천억 달러)를 2019년 3월에도 보유하고 있었다.((https://www.federalreserve.gov/releases/h41/current/h41.pdf, read 17 March 2019 참조.)) 이 MBS를 약속한 대로 대량으로 팔면 그 가격이 수직으로 하락하고 미국의 증권시장이 그와 함께 곤두박질 칠 것임을 연준은 매우 잘 알고 있다. 또한 연준은 이자율을 2.5% 이상으로 올리면 많은 부채를 진 회사들이 재융자를 통해 부채를 상환하기에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유럽중앙은행은 2020년까지 이자율 0%를 고수할 생각이다.((Martine Orange, “La BCE face à ses limites” (“The ECB up against its limitations” [in French]), https://www.mediapart.fr/journal/international/080319/la-bce-face-ses-limites?page_article=1, published 8 March 2019 and Delphine Cuny (La Tribune), “La BCE choque les marchés en repoussant la hausse des taux” (“The ECB shocks the markets by postponing rate increase” [in French]), https://www.latribune.fr/entreprises-finance/banques-finance/la-bce-choque-les-marches-en-repoussant-la-hausse-des-taux-809976.html#xtor=EPR-2-[l-actu-du-jour]-20190308, published 7 March 2019 참조.)) 또한 유럽중앙은행은 민간은행들에 TLTRO(장기대출프로그램, Targeted Longer-Term Refinancing Operation)라고 불리는 중장기 대부를 할 예정이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은행들이 이것을 가장 원한다. (JP모건에 따르면 이 은행들이 지난 번 TLTRO 때의 총 대출액의 55%를 가져간다.) 그러나 모든 은행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은행들이 직·간접적으로 TLTRO에 의존한다. 여기에 추가할 것은, 유럽 은행들은 자신들이 0% 이자율로 빌린 돈을 일반적으로 안전한 것으로 간주되는 국채(가능하면 자국의 국채)를 구입하는 데 대대적으로 지출한다는 점이다.

 

은행들이나 기타 금융시장 참여자들이 공공채권을 선호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유로존의 모든 국가들은 2018년에 그랬던 것처럼 2019년의 첫 3개월 동안에도 큰 액수의 돈을 빌리는 데 성공했다. 새로운 채권발행이 고지될 때마다 구입오퍼가 홍수처럼 밀려왔다. 일반적으로 어떤 국가가 10억 유로를 빌리고 싶으면 은행들은 40억 유로를 제안한다. 대체로 그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중앙은행들에서 오는 현금이 이렇게나 많은 것이다. 그래서 은행들은 수익성이 좋고 안전한 공채를 구입하는 데 열심이다. 더 나아가 정부채권을 사면 리스크에 의해 자산을 조작하는 것을 허용하는 시스템의 도움으로 은행들이 부채비율(debt-to-equity ratio)을 인위적으로 증가시키는 것이 가능해진다.((“Dancing on the Volcano” http://www.cadtm.org/Dancing-on-the-Volcano and Bankocracy, Chapter 12 참조.)) 그러나 위기가 재앙급이 되자마자 주류 미디어와 은행업자들은 과도한 공공지출을 하고 너무 많은 채권을 발행했다는 이유로 유로국가를 또다시 비난한다.

 

전체적으로는 매우 미약한 성장, 몇몇 경우에는 침체 혹은 심한 후퇴

산업화의 정도가 가장 높은 나라들에서의 경제성장은 계속 미약하며 몇몇 주요 나라들에서는 후퇴하고 있다. 특히 유럽에서 후퇴가 보이는데, 이곳에서는 2017년의 경미한 성장 이후 2018년은 침체로 끝맺었다. 독일의 경우 2018년 4사분기와 2019년 1사분기에 산업성장이 하락했다.((Financial Times, “German industrial production drops unexpectedly,” 11 March 2019, https://www.ft.com/content/2e93cb1a-43ca-11e9-a965-23d669740bfb.)) 독일 당국은 2019년 성장예측을 1%로 하향조정했다. (2016-2017년의 연간성장률은 2% 이상이었다.) 12년 동안 유렵연합에 투자한 결과 위기 발발 이전인 2007년의 수준으로 돌아간 것이다.((저자의 글 “The Challenges for the European Left regarding Debt and the Banks,” 23 January 2019, http://www.cadtm.org/The-Challenges-for-the-European-Left-regarding-Debt-and-the-Banks) 참조.))

유로존의 경우 2018년 3사분기의 성장은 겨우 0.2%로서 4년 사이에 최저치이다. 이탈리아는 경기후퇴 상태이다. 프랑스는 소비의 경미한 증가 덕분에 경미하게 상승했다. 이는 황색조끼(Gilets Jaunes, Yellow Vests) 운동의 결과인데, 이 운동은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을 재정규율(fiscal discipline, 정부지출이 세입을 초과하지 않는 것)과 단절하게 만들었다.

 

일본의 경우 2018년 3월에서 2019년 3월까지의 기간 동안 성장은 대략 0.9%로서 역시 2017년에 비해 하락했다. 미국 경제 또한 후퇴하는 국면에 있다. 국제통화기금은 2018년의 2.9%에 비해 2019년에는 2.5% 성장을 예측하고 있다. (다른 전문가들은 더 낮게 보기도 한다.) 이 때문에 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2016년부터 취해오던 이자율 인상을 일시적으로 중지했다.

중국이 세계의 기관차 역할을 계속적으로 하고 있지만 중국의 성장도 느려서 5% 정도 될 것으로 예측되는데, 이는 25년 만에 가장 낮은 것이다. 중국에서는 금융위기가 언제라도 발발하여 중국 및 전 세계의 성장이 급격히 하락하게 만들고 수억의 중국인들의 생활조건을 악화시킬 수 있다.

BRICS 나라들―브라질(Brazil), 러시아(Russia), 인도(India), 중국(China), 남아프리카공화국(South Africa)―의 경제 또한 둔화되고 있다. 다만 인도가 예외로서 7%를 좀 넘는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러시아의 성장률은 2018년에 1.2%였고 2019년에 1.3%로 예측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2018년 전반기 동안 후퇴했고 현재 약간 상승하고 있다. 2015-2016년에 크게 후퇴했던 브라질 경제는 성장세로 돌아왔으나 2018년에 겨우 1%를 간신히 넘는 낮은 성장률을 보였다.

심각한 위기들이 ‘신생’ 국가들이라고 불리는 나라들인 터키,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인도네시아 등에 이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나라들은 통화 평가절하를 겪고 있고, 대외 공공부채 및 민간부채의 상환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모잠비크 같은 가장 가난한 국가들 몇몇은 심대한 부채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나라들의 수는 계속 늘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그렇지만, 특히 환경을 크게 오염시키는 주요 산업국가들에서 경제성장의 수준이 매우 낮음에도 불구하고 기후변화를 가속화하는 데 기여하는 요인들은 약화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부들은 단지 말로만 서비스를 하는 데 그치고 있다. 다행히도 일반 대중, 특히 청년들이 이에 강하게 반응하고 있다.

유럽중앙은행의 업무 평가

2007-2008 위기가 시작된 이래 유럽중앙은행은 대형 민간은행들과 그 소유주들 및 경영자들을 구하는 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오면서 그들의 특권들의 연속성을 보장했다. 유럽중앙은행이 없었다면 대형 은행들은 분명 망했을 것이며 당국은 이들에게 엄격한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이 이외에 유럽중앙은행의 업무는 지배적인 역할을 하는 20개 정도의 주요 은행들의 이익을 위해 은행 부문들의 중앙집중성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유럽중앙은행은 너무 커서 망할 수 없는 괴물 은행들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해왔다. 유럽중앙은행은 이 주요 은행들의 대주주들을 구제하는 데 덧붙여서 인플레이션율을 2% 정도로 유지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유럽중앙은행은 실패했다. 유로존의 인플레이션율은 2018년에 1.6%였고 2019년의 1사분기에는 하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중앙은행에는 이 외에 다음의 세 가지 목표가 더 있다.

  • 취약한 유럽 경제와 모든 유럽인들에게 구속복인 유로를 방어하는 것. 유로는 대형 민간기업들과 유럽 엘리트들(부유한 1%)에게 봉사하는 도구이다. 유로존에 속한 나라들은 유로를 택했기 때문에 자국의 통화를 평가절하할 수 없다. 그런데 유로존에 있는 가장 약한 나라들은 독일, 프랑스, 베네룩스3국, 오스트리아 같은 경제대국들과 맞서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평가절하를 해야 한다. 그리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같은 나라들은 유로존 회원이 됨으로써 제한을 받는다. 그래서 유럽의 당국과 정부들은 ‘내적 평가절하’(internal devaluation)를 실행하는데, 이는 실상 노동자들의 임금삭감을 의미한다.
  • 유럽의 가장 강한 경제들(베네룩스3국, 프랑스 독일)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 것. 유럽의 거대 기업들이 여기에 토대를 두며, 따라서 유럽에서 강한 경제와 약한 경제의 차이를 유지하려 한다.
  • 사업 수익성을 높이고 유럽의 거대 기업들을 세계시장에서 (미국, 중국, 일본 한국 등과의 경쟁에서) 더 경쟁력 있게 만들기 위해서 노동에 대한 자본의 공격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 유럽중앙은행이 이 목표를 위해 이탈리아, 그리스, 사이프러스, 아일랜드, 스페인 등에 개입한 사례들이 많다.

박탈당한 사람들에 대한 계속적인 공격에 기여하겠다는 유럽중앙은행의 단호한 태도는 또다시 분명하게 표명되었다. 2019년 3월 유럽중앙은행과 유로체제 은행들은 그리스 민중을 희생하고 얻은 수익의 일부를 치프라스(Alexis Tsipras) 정부가 반(反)개혁(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충분히 이행하지 않았다는 구실로 그리스에 되돌려주기를 거부했다. 유럽중앙은행이 밀어붙인 이러한 개혁 가운데 하나가 주택 모기지 부채를 상환할 수 없는 그리스인들을 쫓아내는 데 걸리적거리는 기존의 장애물 가운데 마지막 것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유럽중앙은행의 입장에서는 그리스 민중에게 아무리 큰 희생이라도 요구할 수 있다. 이들은 유럽중앙은행이 핵심적 역할을 하는 트로이카―국제구제금융(IMF), 유럽중앙은행(ECB) 그리고 유럽연합(EU) 세 기구로 구성된 삼두체제―의 제물들인 것이다.

근본적 해결책의 필요

다가오는 새로운 금융위기는 이전보다 훨씬 광범위한,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시스템 차원의 위기가 될 것이며 경제·환경·사회·정치·도덕·제도에 영향을 미치는 다면적인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지도자들의 사고방식과 철저하게 단절하고 긴급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경제적 재난을 초래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기는커녕 황금 악수를 해주는 현재의 체제와는 반대로 은행 붕괴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구제를 위한 돈을 지불하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현재 은행을 규제한다고 고지된 조치들은 피상적이다. 유로존 은행들의 중앙집중화된 감시, 유럽저축보증계획의 수립, 전지구적 은행업의 2%만 관련되는 특정 업무들의 금지, 보너스에 상한선 두기, 투명한 은행업무, 그리고 심지어 새로운 은행규칙들마저도 단지 추천사항이거나 약속일 뿐이며 기껏해야 해결해야 할 문제에 완전히 부적절한 조치들이다. 이제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엄격한 규칙들이 부과되어야 한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금융세계와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조치들이 실행되어야 한다.

은행업은 민간 부문에 맡겨두기에는 너무 중요하므로 사회화되어야 한다. 즉 민중(은행직원, 고객들, 연관 단체들, 지역의 공공기관들의 대표자들)의 통제 아래 두어야 한다. 공공서비스로서 운영되어야 하고 그 업무 수익은 공동선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은행을 구하기 위해 진 공공부채는 분명 정당하지 못하기에 거부되어야 한다. 민중에 의한 감사가 이루어져 다른 정당하지 못한, 불법적인, 가증스럽거나 지속 불가능한 부채를 적발하고 신뢰할 만한 반(反)자본주의적 대안이 출현할 수 있는 부의 결집을 창출하는 것을 도와야 한다.

이 두 조치는 다른 곳에서 제시한 더 광범한 프로그램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Gilets Jaunes (Yellow Vests): Learning from history and acting now” (http://www.cadtm.org/Gilets-jaunes-yellow-vests-learning-from-history-and-acting-now) 참조.)) 중앙은행은 근본적으로 개혁되어야 하며, 그 임무가 재정의되어야 한다. 중앙은행은 화폐를 인쇄하는 역할을 다시 맡아야 하며 환경의 개선과 사회적 불의에 대한 투쟁에 재정을 대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해야 한다.

시민들의 결집과 사회적 자치(자기관리)는 다양한 해결책 제안들을 실천에 옮기는 데 필수적인 조건이다.




토지를 커먼즈로 다루기



토지소유권(land ownership)이라는 특권은 너무 크고 광범위해서 보통은 그 특권을 불변하는 삶의 사실─정치는 도저히 다룰 수 없는 어떤 것─로 받아들인다. 그렇기 때문에 『가디언』(The Guardian)지의 뛰어난 칼럼니스트인 조지 몬비오(George Monbiot)와 여섯 명의 전문가로 이루어진 팀이 발행한 멋진 새 연구보고서에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인사를 할 만하다. (로빈 그레이Robin Grey, 톰 케니Tom Kenny, 로리 맥팔레인Laurie Macfarlane, 아나 파월-스미스Anna Powell-Smith, 가이 슈럽솔Guy Shrubsole 그리고 베스 스트랫퍼드Beth Stratford가 연구보고서의 여섯 공동저자들이다.) 연구보고서인 『다수를 위한 토지: 우리의 근본 자산이 사용, 소유, 통치되는 방식을 바꾸기』(Land for the Many: Changing the Way our Fundamental Asset is Used, Owned and Governed)는 토지에의 접근과 토지 사용을 민주화하는 철저하고도 포괄적인 안을 마련하고 있다.

몬비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나라가 직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 속으로 충분히 깊이 파고들면 바로 토지에 닿을 것이다. 급증하는 불평등과 배제, 제대로 된 집을 빌리거나 구입하는 데 드는 엄청난 비용, 주택자산 거품으로 촉발되는 반복되는 금융위기, 야생생물과 생태계의 붕괴, 공공 편의시설 부족─이 모든 것들의 바탕에 토지가 소유되고 관리되는 방식이 깔려있다. 그러나 이 점은 정치 논의에서는 거의 부각되지 않는다.

연구보고서에는 영국노동당이 다음 총선에 대비하여 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참조할 만한 권고사항들이 담겨있다. 토지가 투기자산으로 다루어지는 것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보고서는 세계 전역에서 유사한 개혁들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템플릿으로 평가될 수 있다. (보고서를 요약한 몬비오의 칼럼은 여기서 볼 수 있다.)

토지가 어떻게 커먼즈로 발전•활용•보호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일련의 철저하고도 포괄적인 제안들이 담겨 있는 이 보고서가 나에게 꽤 인상적이었다.

몇몇 간결하고 강력한 절에서는 토지소유권 데이터를 더 개방하여 이 데이터를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공동체가 주도하는 토지 개발 및 소유를 촉진하는 방식(예를 들어 “공동체의 구입권”), 그리고 시민사회적 목적과 문화적 목적을 위해 시민이 토지에서 ‘만행(漫行)권’(right to roam)을 성문화하는 것을 다루고 있다. 투기개발을 제한하고 농업과 임업을 부활시키는 한 가지 효과적인 방식은 공동체 토지신탁(community land trusts)을 창출하고 세제 특혜와 보조금을 제한하는 것이다.

토지와 관련된 노골적인 금융 현실은 꽤 염려스럽다. 영국에서 “땅값은 1995년 이후로 544%가 상승했으며 이것은 실질소득에서의 성장을 훨씬 앞지른다”라고 보고서는 지적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주택은 엄두도 못 낼 정도로 비싸다. “20년 전에 노동에 종사하는 평균적인 가족은 주택 보증금을 지불하기 위해 3년 동안 저축을 해야 했다. 오늘날에는 19년 동안 저축을 해야 한다”라고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집을 금융자산으로 여기도록 조장하는 조세법들 및 기타 정책들이 대부분 비난을 살 수 있다. 이것이 주택에 대한 극심한 투기를 부채질해서 가격을 상승시키며 부자들(토지소유자들)에게 이익을 주고 세입자들을 빈곤하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투기와 조세혜택 때문에 부유한 토지 소유자들이 소유 토지를 늘리는 반면에 소규모 농부들은 농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적어도 영국 농장의 1/5이 지난 10년에 걸쳐 문을 닫았다.

정치가들은 일반적으로 너무 몸을 사려서 이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발의하지 못한다. 그들의 생각에 이 일은 주요한 핵심 유권자인 부자들을 격분하게 만들 뿐이고 부에 이르는 길로서 집으로 돈을 벌고자 열망하는 중산층의 일부를 떨어져나가게 할 뿐이다. 그러나 토지와 연관된 투기 광풍을 잠재우고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어떤 것을 만들기 위해 토지의 취득과 관리를 공동으로 하는 방식들은 사실상 많이 있다.

『다수를 위한 토지』(Land for the Many)는 ‘거시건전성 도구들’(macroprudential tools)─체계 수준의 위험(systemic risk)의 금융평가─의 변화를 권고하는데, 이는 은행이 부동산 구입용 대출은 횟수를 더 줄이고 경제의 생산부문들을 촉진하는 대출은 횟수를 더 많이 늘리도록 촉진하기 위한 것이다. 보고서는 또한 부동산을 임대할 의도가 있는 구입자들에게 대출을 해주는 것에 규제를 둘 것을 힘주어 권고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토지에 더 접근할 수 있고 구입 가능할 수 있도록 만드는 건강한 다른 방식들로는, 예를 들어 토지 누진 재산세 매기기, 토지소유주들을 대상으로 한 조세감면의 축소 그리고 허용될 수 있는 임대료 증가의 상한선을 임금 인상률이나 소비자 물가지수 가운데 더 낮은 쪽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로 정하는 것이 있다.

이윤을 추구하는 개발은 생태계, 야생생물 및 미래 세대들에게 장기적으로 대재앙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보고서는 <공공개발기업들>(Public Development Corporations)의 창출을 요구한다. 이 기업들은 공익을 위해 토지를 구입하고 개발하는 권한을 가질 것이다.

나는 앞으로 집을 살 사람들이 집을 구입하도록 돕는 비영리기관인 <공동토지신탁>(Common Ground Trust)을 창출하자는 아이디어가 특히 마음에 든다. <공동토지신탁>은 구입자의 요청에 따라 주택 부지를 구입해서 그 토지를 커먼즈를 위한 신탁형태로 보유할 것이다. 평균적으로 토지는 주택가격의 70%에 해당하므로 <공동토지신탁>에서 주택 부지를 취득할 경우에 주택 구입자들이 선불로 내는 금액은 크게 줄 것이다. 몬비오를 위시한 공동저자들은 “그 대신에 구입자들은 토지 임대료를 <공동토지신탁>에 지불한다”라고 쓰고 있다. 집 구입자들은 주택의 가격 상승분을 수익으로 거둘 수는 있지만 토지는 사실상 시장에서 빠져나갈 것이고 그 가치를 커먼즈에서 보유하게 될 것이다.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토지를 공동소유로 끌어들임으로써 토지 임대료가 개인 토지소유주들 및 은행으로 유입되지 않고 사회화될 수 있다. 부채에 의한 수요 및 투기수요는 통제되지 못하거나 불안정하게 가치가 하락할 위험 없이 억제될 수 있다.”

『다수를 위한 토지』는 주요한 성취이다. 『다수를 위한 토지』는 토지개혁을 위한 진보적인 사례를 공고히 하고 법과 정책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직설적인 언어로 설명한다. 물론 정치 영역에서 토지를 커먼즈로 다루도록 만드는 일은 어려운 과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불합리한 불평등들, 생태학적 해악들, 농업의 쇠퇴 그리고 토지소유의 현 체제와 연관된 너무 비싼 주택가격을 생각하면 이런 대화는 벌써 이루어졌어야 했다.




트럼프와 냉전 2.0



트럼프 대통령은, 만일 중국이 6월 29-30일에 일본에서 열리는 G20 회의에서 만나서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관세전쟁과 중국의 수출 및 기술에 대한 경제적 제재를 완화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시진핑 주석을 협박했다.

중국 지도자들과 미국 지도자들 사이의 만남이 실제로 일어나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실질적 협상 같은 것이 될 수는 없다. 그런 만남은 정상적인 경우 미리 계획된다. 전문화된 공무원들이 함께 작업을 해서 국가의 정상들에 의해 발표될 합의안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런 준비가 있어본 적도 없고 있을 수도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권한을 위임하지 않는다.

그는 협박으로 협상을 개시한다. 여기에는 아무런 비용이 들지 않으며 혹시 그에게 공짜로 생기는 것이 있을지 모른다(적어도 그는 모른다). 미국이 바라는 것을 충실하게 따르기로 동의하지 않는 나라가 있다면 미국은 그 나라를 해칠 수 있다는 것이 트럼프의 협박 내용이다. 그런데 현재의 경우에는 바라는 것이 매우 비현실적이어서 미디어도 그것에 대해 말하기를 곤란해 한다. 미국은 경제적으로 항복하라는, 그 어떤 나라도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능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표면에서는 무역전쟁인 듯이 보이는 것이 본격적인 냉전 2.0이다.

미국이 바라는 것: 다른 나라들의 신자유주의적 굴종

걸려있는 것은, 중국이 과연 러시아가 1990년대에 했던 것―즉 옐친 같은 신자유주의적 계획자 역할을 할 꼭두각시를 세워서 경제에 대한 통제력을 정부로부터 미국의 금융 부문과 그 계획자들에게로 이전시키는 것―을 하는 데 동의할 것인가 아닌가이다. 그래서 실제로 싸움은 중국과 세계의 나머지 나라들이 어떤 종류의 계획을 택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다. 더 제고된 번영을 가져올 정부들에 의한 계획인가 아니면 수익을 추출하고 긴축을 부과할 금융 부문에 의한 계획인가?

미국은 다른 나라들이 미국의 수출농산물, 미국의 석유(혹은 미국 대기업들과 그 연합세력이 통제하는 나라들의 석유), 정보, 군사기술에 의존하게 만들고자 한다. 이런 무역의존성으로 인해 미국 전략가들은 미국의 요구에 저항하는 나라들에게 제재를 부과하여 기본적인 식량, 에너지, 통신 그리고 교체용 부품들을 그 나라의 경제로부터 박탈할 수 있게 된다.

그 목적은 전지구적 자원에 대한 금융적 통제력을 획득하고, 무역 ‘파트너들’로 하여금 미국이 지적 재산에 대한 독점가격책정‘권’을 향유하는 생산품들에 대해 이자, 사용료 및 높은 가격을 지불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무역전쟁이 노리는 것은 미국이 통제하는 식량, 석유, 은행업 및 금융, 혹은 첨단기술 재화에 다른 나라들이 의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에 응하지 않으면 굴복할 때까지 긴축과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트럼프에게 승리를 기꺼이 양보할 중국

협박 자체에는 비용이 별로 들지 않지만, 만일 트럼프가 이 협박을 밀어붙여서 중국에 부과할 관세로 인해 생활비용과 사업비용이 증가한다면 그는 선거 시에 농업경영자들, 월가, 증권시장, 월마트 그리고 IT 부문의 많은 부분을 자신의 적으로 돌리게 될 것이다. 그의 외교적 협박은 실제로는 만일 중국이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면 미국의 수입업자들과 투자자들에게 제재를 부과함으로써 미국 자신의 경제의 목을 베게 되는 그러한 협박이다.

중국의 응답이 어떨지 쉽게 알 수 있다. 중국은 물러서서 미국이 자멸하도록 놔둘 것이다. 중국의 협상자들은 중국이 어떻든 계획했던 것을 매우 기꺼이 ‘제공할’ 것이며 트럼프가 그것이 자신이 얻은 ‘양보’라고 떠들어대도록 놔둘 것이다.

내 생각에는 시진핑이 제공할 큰 사탕이 중국에게 있다. 트럼프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지명할 수 있다. 우리는 오바마가 가진 것을 그도 원한다는 것을 안다. 그가 더 자격이 있는 것 아닌가? 어떻든 그는 유라시아를 결속시키는 것을 돕고 있고 중국과 러시아를 이웃 나라들과 연합하도록 밀어붙이고 있으며 유럽에 손을 뻗고 있다.

트럼프는 이 말에 들어있는 아이러니를 깨닫기에는 너무 자기도취적일지도 모른다. 아시아와 유럽이 무역·금융·식량·IT에서 미국의 제재 위협으로부터 독립하는 데 촉매가 되면 미국은 앞으로 출현할 다자주의 세계에서 고립되게 될 것이다.

미국이 중국의 신자유주의적 옐친에게 (그리고 러시아의 또 하나의 옐친에게) 바라는 것

좋은 외교관은 ‘No’가 대답일 수밖에 없는 요구를 하지 않는다. 중국이 그 혼합 경제를 해체하고 자국의 경제를 미국이나 기타 전지구적 투자자들에게 내놓을 가능성은 결코 없다. 미국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교육·도로·통신 및 기타 기본적인 기반시설에의 집중적 공공 부문 지원을 함으로써 세계 산업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하는 데 성공한 것은 비밀이 아니다. 오늘날의 사유화되고 금융화되었으며 ‘새처화’된 경제는 고비용 비효율 경제이다.

그런데 미국의 관리들은 중국의 어떤 신자유주의적 관리나 ‘자유시장’당을 밀어줘서 옐친과 그의 미국 조언자들이 러시아에 끼친 것과 같은 피해를 중국에 끼칠 꿈을 계속해서 꾸고 있다. 미국이 생각하는 ‘서로 이득을 보는’ 합의란, 중국이 독립적인 경쟁자가 아니라 미국의 금융 및 무역 위성국가가 되는 데 동의하는 한 성장을 허용받는 그런 합의이다.

트럼프는, 한때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었으나 지금은 미국과 유럽의 많은 곳에서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파괴된 바로 그 경제전략을 다른 나라들이 쫓는다는 이유로 떼를 쓰고 있다. 미국의 협상자들은 미국이 산업 경쟁에서의 우위를 잃고 고비용의 자산소득자(rentier) 경제가 되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미국의 GDP는 금융·보험·부동산 부문의 자산소득, 이윤 및 자본이득으로 주로 구성되는 ‘텅 빈’ 것이다. 미국의 기반시설은 쇠퇴하고 있고 노동은 시간제 ‘긱’ 경제로 축소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무역 협박이 발하는 효과는 경제적으로 자립적이 되려는 다른 나라들의 노력을 가속시키는 것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금융 대 경제


  • 저자  :  Michael Hudson
  • 원문 : 유튜브 동영상 Finances vs Economy, Credit vs Money (2012년 3월)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2012년 2월 이탈리아의 리미니(Rimini)에서 ‘현대 화폐 이론’(Modern Money Theory)를 주제로 열린 1회 이탈리아 풀뿌리 경제학 대회(the first Italian grassroots economic summit)에서 마이클 허드슨이 한 발제의 내용을 비교적 상세하게 정리한 것이다. 이 발제의 영어 스크립트는 https://neritam.com/2012/05/19/modern-money-theory/ 에서 볼 수 있다.

[마이클 허드슨]

저는 중앙은행과 상업은행(commercial bank)의 차이에 대해 말해보려고 합니다.[이에 앞서 Stephanie Kelton이 현대화폐이론의 기초를 설명하는 발제를 했다.―정리자] 중앙은행이 화폐를 창출하고 상업은행(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민간은행)은 신용을 창출한다고 합니다. 2008년 이후 3년 동안 우리는 미국 역사상 최대의 화폐창출과 신용창출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임금은 지난 30년 동안 하락했고 소비자 물가와 상품가격은 변동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있었습니다. 이자율이 20%에서 오늘날의 4분의 1%로 떨어지면서 역사상 최대의 증권시장 가격 상승이 일어났습니다. 부동산 가격, 증권가격, 주식 가격이 상승했습니다. 그 결과 부의 가치(대부분의 부는 인구의 1%가 소유하고 있습니다)가 임금에 비해 상승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종류의 계급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종래의 고용주(자본가)와 고용인(노동자) 사이의 전쟁이 아닙니다. 금융과 경제 사이의 전쟁입니다.

산업자본주의에서 신용은 노동을 고용하는 자본투자에 들어갑니다.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상업은행들이 신용을 창출할 때 이는 부에 대한 청구권의 창출이고 모기지 부채의 창출이며 기업 부채의 창출이고 개인적인 부채 및 학자금 융자의 창출, 신용카드 부채의 창출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상업은행 신용창출은 중앙은행의 화폐창출과 다릅니다. 중앙은행이 화폐를 창출할 때에는 장기적이고 공적인 목적에서 그렇게 합니다. 정부지출과 공적 기반시설에의 자본투자에 재정을 댑니다. 역사 전체에 걸쳐서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공적 기반시설―도로, 통신 시스템, 철로, 상수 및 하수 시스템 등―에의 자본투자는 모두 제조업에의 자본투자 전체보다 더 컸습니다.

미국에서 뉴욕시의 부동산 가치는 미국 제조업 전체의 설비의 가격보다 높습니다. 미국에서 사용되는 교과서는 이런 차이를 무시합니다. ‘MV = PT’[Money×Velocity = Price×Transaction]라는 공식이 있습니다. 화폐 공급이 증가하면 가격이 오른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교과서에서 말하는 가격 수준은 소비자 물가와 상품가격만을 포함합니다. 교과서 어디에도 신용공급과 자산(부동산, 주식 및 증권)의 가격 사이의 관계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 경제에서 신용의 99%는 이 금융 청구권들에 지출됩니다. 매일 국민총생산 전체와 맞먹는 양이 뉴욕 어음교환소와 시카고 상업거래소를 통과합니다. 지불의 방대한 양이 금융부문에 속합니다. 지난 10년여 동안 늘어난 은행대출 전체가 다른 금융기관에 대출한 것입니다.

교과서는 은행들이 산업에 대부하여 기계를 구입하고 공장을 지어 노동자를 고용하도록 하는 행복한 그림을 보여줍니다. 이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허구입니다. 미국 경제에서 모든 증가된 자본투자는 은행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이익잉여금(retained earnings)에서 옵니다. 은행들은 새로운 자본투자를 낳기 위해 대부하지 않습니다. 모기지, 자본금, 부동산, 이미 존재하는 자산을 담보로 대부하지 새로운 자산의 창출을 위해 대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부화폐를 말할 때 우리는 경제에 박차를 가하는, 경제성장과 새로운 투자를 촉진하는 정부지출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정부투자 및 중앙은행 화폐창출의 기능은 민간은행의 기능과는 매우 다릅니다. 정부의 화폐는 그야말로 부채입니다.[정부가 화폐를 발행하는 것은 정부가 빚을 지는 것과 같다고 본 것이다.―정리자] 당신의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리라[이탈리아의 통화―정리자]는 부채입니다. 지폐도 부채입니다. 그러나 이는 아무도 그 상환을 생각하지 않는 부채입니다. 이를 상환한다는 것은 호주머니에 통화가 남아있지 않게 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정부에 의한 화폐와 신용의 창출을 이렇게 공익서비스(public utility)로 보는 이론이 현대 화폐 이론(Modern Monetary Theory)이다.―정리자]

상업적 부채[공익이 아니라 사적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부채―정리자]는 상환을 전제로 하며 이자를 낳습니다. 이 상업적 부채가 늘어나자―모기지, 기업에의 은행대출, 기업사냥을 위한 부채 등―엄청난 부채 간접비용이 경제에 큰 부담으로 지워집니다. 상업은행들이 더 많이 대부하면 할수록 이 부채의 간접비용을 감당하기 위해서 더 많은 이자가 지불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부채를 갚는 데 지출되는 화폐는 재화와 서비스에 지출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상업은행들이 부채를 창출할 때에는 재화와 서비스에 지출되던 소득이 부채서비스 비용을 지불하는 데로 돌려집니다. 이것이 바로 부채디플레이션(debt deglation)입니다. 부채디플레이션이 오늘날처럼 오래 진행되면 금융자본주의의 후기 단계인 부채디플레이션 단계, 긴축 단계로 들어서는데, 바로 유럽이 오늘날 이 단계에 와 있습니다.

화폐에 대한 이 모든 전문적인 논의에는 정치적 측면이 있습니다. 정부가 화폐를 창출한다면, 혼합된 경제, 즉 사적 자본투자와 공적 자본투자가 혼합된 경제가 창출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럽의 모든 나라들과 미국을 부유하게 만든 경제입니다. 경제에 비용가격[이윤을 붙이지 않은 가격―정리자]으로 공급될 공적 기반시설에 정부가 투자하여 그 기반시설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부가 화폐를 창출할 수 없게 되면, 경제에 필요한 모든 신용이 상업은행들에 의해 창조되게 되면, 상업은행의 신용창조가 부채 디플레이션을 낳으며, 정부가 이자를 지불하기 위해 재정을 댈 수 없다면, 상업은행들은 ‘좋아, 그러면 파시오’하면서 기반시설을 사유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 아일랜드에서 보고 있고, 아이슬랜드에서 본 것입니다. 이렇게 금융이 기반시설을 가로채는 일은 상업적 은행업자들이 중앙은행이 신용을 창조하지 못하도록 하는 능력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대부분의 기반시설은 은행의 방대한 양의 새로운 대부를 통해 구매됩니다. 그래서 상업은행의 정치적 전략은 맨 먼저 중앙은행으로 하여금 화폐를 창출하지 못하게 하고 그 다음에 정부들이 (이자 없는 부채를 내지[화폐를 발행하는 것을 말한다―정리자]) 말고 상업은행들로부터 빌릴 필요가 있다고, 상업은행들에 이자를 지불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정부들은 이자를 지불하기 위해서 기반시설을 팔아넘겨야 하는데, 그 결과 오늘날 은행업자들이 과거에는 군사침략을 통해 이루었던 재산탈취를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새로운 종류의 전쟁입니다. 금융이 사회 전체에 대해서 벌이는 전쟁입니다. 노동뿐 아니라 산업에 대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부에 대해서 벌이는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도구는, 정부의 화폐창출이 인플레이션을 낳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지난 30년 동안 여기 이탈리아에서 물가가 그다지 오르지 않았고 임금이 그다지 오르지 않았으며 오른 것은 주택가격이고 살 곳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평생 갚을 빚을 져야 함을 보았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학생들은 교육을 받아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십년 갚을 빚을 져야 합니다. 100년 전에는 정부가 교육이 무상으로 이루어지도록 재정을 대는 것이 이상(理想)이었는데 말입니다.

교과서들은 마치 경제가 빚 없이 실질적 교환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제시합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서 논의하고 있는 것을 교과서들이 언급하지 않는 것은 상업은행의 신용창조와 권력 장악에 대한 대안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인 보들레르는 사회가 악마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그 지점에서 악마가 승리한다고 말했습니다.[“악마의 가장 교묘한 책략은 당신이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La plus belle des ruses du diable est de vous persuader qu’il n’existe pas.”)는 보들레르의 Spleen de Paris의 “Le Joueur généreux”(「관대한 도박꾼」)에 나온다.―정리자] 금융 부문은, 은행들이 부풀리고 있는 가격이 자산 가격, 부동산 가격, 증권 및 주식 가격임을 당신이 보지 못하고, 상업은행들의 역할은 사회 위에, 노동 위에, 산업 위에 군림하는 부의 권력을 증가시켜 은행업자들로 구성되는 새로운 지배계층―19세기 후반에 비판을 받은 지주들보다 훨씬 더 큰 부담을 사회에 지우는 지배계층―을 창출하는 것이라는 점을 당신이 보지 못하는 지점에서 승리합니다.

200년 동안 고전경제학은 산업자본주의로부터 봉건주의의 잔재를 제거하려고 했는데, 이 잔재란 세습 귀족계급의 사적 토지소유와 상업은행들이었습니다. 상업은행들은 정부로 하여금 빚을 지게 하고 그 다음에 담보권을 행사하여 부채를 독점과 교환했습니다. 영국에서는 바로 이런 식으로 무역회사들이 형성되었습니다. 동인도회사, 독점을 누린 영국은행 등. 미국에서도 철도를 통해 유사하게 독점이 창출되었는데, 철도 건설용 불하 토지의 사유화를 통해 최대의 토지소유자들이 나옵니다. 발자끄는 그의 소설에서 모든 가족 재산 뒤에는 종종은 발견되지 않는 거대한 절도가 존재한다고 쓴 바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 경제학은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모든 절도, 자본 이전(移轉), 이전 지불(transfer payments)을 마치 그것이 생산적인 양, 마치 모든 소득이 근로소득인 양 취급합니다. 세계의 모든 정부는 ‘국민소득 및 생산계정’(NIPA)을 발행하고 있는데, 여기서 지대(임대료)는 토지소유자들(집주인들)의 소득으로 되어있고 이자는 은행업자들의 소득으로 되어 있습니다. 미국에서 금융 부문은 모든 신고된 기업소득의 40%를 차지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설비에 투자되어 노동을 고용하는 산업자본으로부터 경제적 잉여가 빠져나와 금융자본으로 흘러들어가는 일이 일어납니다. 금융자본이 대출되어 이자를 받고 그 이자를 다시 대출하며 이것이 반복되어 미국인들이 복리의 마법이라고 부른 기하급수적인 증가가 이루어집니다. 복리의 증가는 너무 커서 그 어떤 정부의 지불 능력도 훨씬 넘어섭니다. 그 결과는 채무불이행이 될 수밖에 없는데, 오늘날 유럽과 미국은 금융 부문이 자산을 탈취하고 공적 도메인, 공기업, 도로, 방송 시스템, 항구 등을 사유화하는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자산을 사유화할 때에는, 가령 도로를 사유화할 때에는 ‘구매자들’이 이자를 지불해야 하며 배당금을 지불하고 회사 경영진에게 엄청난 액수의 봉급을 주며 증권인수업자에게 금융 수수료를 지불하고 경영진에게 스톡옵션을 제공하며, 그런 다음에는 이 공공서비스의 가격을 가능한 한 최고의 자산소득를 끌어내는 지점까지 올립니다. 경제는 통행료 징수로 전환됩니다. 통행료 징수소를 주택에 접근하는 곳, 도로에 접근하는 곳, 전화 시스템에 접근하는 곳, 신용카드에 의한 지불에 사용될 돈을 위한 신용에 접근하는 곳에 설치합니다. 갑자기 우리는, 경제를 작동시키는 비용에 돈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특권에, 금융 부문에, 그리고 자산소득자(rentiers)라고 불리던 층―이들은 단지 얻어낼 것을 청구할 뿐이며 부를 자신들의 수중으로 빨아들입니다―에 지불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미국에서 생산과 소비로 이루어지는 현실 경제는 지난 30년 동안 실제로 쇠퇴했습니다. 지금 경제에서 모든 성장은 자산소득자 부문으로, FIRE 부문(finance, insurance and real estate)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가는 간접비용에서 일어납니다. 지금은 이 부문에 법시스템과 독점시스템이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교과서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는 새에 예전에 산업자본주의로서 분석되던 것이 금융자본주의로 전환되었습니다. 이 금융자본주의는 100년 전에 생각했던 종류의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산업에 자금을 대는 것이 아니고 경제적 기생과 간접비용에 자금을 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마치 부자가 되는 길은 빚을 져서 그 돈으로 가격이 부풀어 오를 자산을 사는 것인 양 제시됩니다. 부동산이나 공기업의 가격이 오를 때, 이는 실제로 가치가 증가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택이나 재산은 은행이 대출해주는 만큼의 값을 가지며, 대출조건이 느슨해지면 경제의 지불능력을 훌쩍 넘어서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자산 가격에 생기게 됩니다. 마감 기한이 여지없이 옵니다. 금융 자본주의는 거품 경제로 전환됩니다. 은행들이 채무불이행을 그리고 연쇄적 지불의 단절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더 많은 돈을 빌려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은 ‘돈을 빌려서 부채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라고 설명됩니다. 갚을 수 없으면 은행에서 돈을 더 빌리고, 그저 그만큼 이자를 추가한다는 것입니다. 1970년대에 라틴아메리카가 바로 이런 식의 상황이었으며 그러다가 마침내 갚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부채는 삭감되어야 했습니다.

정부의 중앙은행 화폐창출로부터 상업은행 신용창출로의 이러한 전환의 필연적 결말은 파산, 부채의 삭감입니다. 나의 분석의 기저에 있는 기본 전제는 ‘갚을 수 없는 부채는 갚게 되지 않을 것이다’입니다. 내가 아는 월가의 모든 분석가들은 이 점을 알고 있습니다. 정치적 문제는 ‘어떻게 갚지 않는가?’입니다. 은행들로 하여금 담보권을 행사하게 함으로써 갚지 않는가? 오늘날 미국의 모든 부동산의 4분의 1에는 그 가치보다 더 많은 돈이 담보대출로 걸려있습니다. 이는 자택소유자의 4분의 1―거의 1천만 명입니다―이 자신의 재산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이 이익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날드 트럼프도 그럴 겁니다. 물론 골드만삭스도 나쁜 투자로부터 물러날 것입니다. 그런데 개인들은 빚을 갚아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부자들의 빚만이 갚을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99%가 부자에게 진 빚만 갚아야 한다는 겁니다. 경제의 작동방식에 대한 이해가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부자가 되는 길은 실제로는 돈을 빌려 가격이 오르기를 희망하는 재산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미국, 스페인, 아일랜드, 영국에서처럼 가격이 붕괴하게 되더라도 부채는 그대로이며 네거티브 에쿼티(negative equity) 상태[집값에서 부채를 제하면 마이너스가 되는 상태―정리자]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여기가 재산이 채무자에게서 채권자에게로 넘어가는 지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돈을 버는 길은 인구의 99%로 하여금 1%에게 빚을 지게 하는 것입니다. 빚을 지는 것이 돈을 버는 길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한 역사적 시기는 결코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가령 앨런 그린스팬(Alan Greenspan)이 미국의 자택소유자들에게 집의 가치를 담보로 돈을 빌리라고, 빚을 지라고, 집을 돼지저금통이라고 생각하고 임금이 더 이상 받쳐주지 못하는 생활수준을 유지하라고 말했을 때, 이런 쓰레기 경제학에 속아서 그렇게 합니다.

미국 노동자들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서 돈을 들여야 하고, 이전에는 공적으로 지원되던 것에 돈을 들여야 하는 사이에, 은행들은 갑자기 교육을 금융화하고 공적 부문을 금융화하며 심지어는 기업 부문과 산업 부문도 금융화했습니다. 교과서에서 증권시장은 산업에 자금을 대고 부채가 아닌 자기자본을 제공하는 수단으로서, 즉 산업투자를 해서 노동을 고용할 수단으로서 제시됩니다. 그러나 지난 30년 동안 일어난 일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증권시장은 기업사냥꾼들과 경영권 매수를 위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돈을 빌려 회사를 사고 그 회사가 얼마나 이윤을 만들어낼지 계산하여 그 이윤을 은행업자들에게 지불하는 것, 마치 부동산 투자자들이 건물을 사듯이 회사를 사는 것입니다.

미국의 도날드 트럼프든 이탈리아 혹은 유럽의 투자자든 부동산 투자자들이 상업적 재산을 구매하기를 원할 때, 그들은 얼마나 많은 임대료 수익이 생길지를 계산합니다. 그들은 서로 입찰하여 경합합니다. 담보를 얻기 위해, 그 재산을 구매하기 위해 가장 많은 임대료를 은행에 기꺼이 지불하는 사람이 낙찰을 받습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들의 돈을 사용하기’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다른 사람들의 저축을 사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은행들이 컴퓨터 키보드로 입력하여 새로 창출한 돈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은행들은 대출자를 위해 은행계좌에 대출액을 적어 넣음으로써 (대출자는 담보 부채든 아니면 개인 부채든 차용증서에 그 이자를 갚겠다고 서명을 합니다) 자유롭게 화폐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은행들은 이런 화폐창출이 인플레이션을 낳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정부의 화폐창출만이 인플레이션을 낳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부가 상업은행들이 신용을 창출하는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들의 컴퓨터에 가서 전자적으로 화폐를 창출하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이 보았듯이 상업은행들이 인플레이션을 낳는데도 왜 정부의 화폐창출은 인플레이션을 낳는다는 말을 듣고 상업은행들은 그렇지 않다는 말을 듣는가 하는 것입니다. 은행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본이득[capital gain, 사업에 의한 이득이 아니라 자산의 가격이 올라서 거둔 이득을 말한다.―정리자]을 거두기를 바라면서 모든 자산소득(rent)과 모든 기업 이윤을 은행에 내게 함으로써 돈을 법니다.

미국에서 기업사냥꾼들과 부채를 통해 기업을 매수하는 회사들은 비용절감, 임금삭감, 정리해고, 다른 나라로의 아웃소싱을 통해, 그리고 특히 연금기금을 탈취하여 그것으로 은행 빚을 상환하여 부채를 삭감하고 자기자본을 늘림으로써 자본이득을 거둡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자란 도시 시카고에서 부동산 투기자인 쌤 젤(Sam Zell)이 돈을 빌려 최대의 신문인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을 샀습니다. 그는 ‘사원 주식소유 플랜’을 약탈했습니다. 그는 그 돈으로 그에게 <시카고 트리뷴>을 살 돈을 빌려준 채권자들에게 진 빚을 갚았습니다. 그는 직원들을 해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시카고 트리뷴>이 소유한 야구팀인 <시카고 컵스>를 팔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회사를 매우 잘못 경영하여 회사가 파산했으며 그 바람에 사원 주주들이 쓸려나갔습니다. 사원들은 그가 그들의 돈을 훔쳤다고 주장하면서 그를 사기죄로 고소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최근에 한 연설에서 ‘사기는 없다, 모두 합법적이다, 그것이 바로 자유시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유시장의 ‘자유’는 금융 세력이 탈취할 자유, 분식회계를 할 자유, 빌 블랙(Bill Black) 교수가 말하는 일[블랙은 회사나 조직을 통제하는 자가 자신이 통제하는 회사나 조직을 사기를 치는 ‘무기’로 사용하는 행태를 가리키는 ‘통제 사기’(control fraud)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정리자]을 할 자유로 재정의되었습니다.

사기가 돈을 버는 데 본질적으로 토대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새로운 경제를 말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비록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부자가 되는 길을 돈을 훔치는 것이라고 말하는 교과서, 부자가 되는 길을 돈을 빌려서 가치가 상승할 재산을 사는 것이고 경제를 위축시키고 공적 도메인으로부터 재산을 탈취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교과서는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발자끄 같은 소설가나 보들레르 같은 시인이 교과서에 나오는 노벨상을 탄 경제학자들보다 경제를 더 잘 이해하는 것인가요? 왜 교과서를 보기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러가야 하는 것인가요?

오늘 우리가 이 모임에서 하려는 것은 실제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상을 제시하고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평행 우주 대신에 현실 경제학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쌔뮤얼슨(Paul Samuelson)은 미국에서 학생들을 세뇌하는 데 사용되는 자신의 교과서의 시작 부분에서 경제 이론의 기준은 그 공리들의 일관성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내가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했을 때 들은 말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에는 불신을 정지시켜야 합니다.[‘willing suspension of disbelief’(불신의 기꺼운 정지)라는 말의 출처는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콜리지(S. T. Coleridge)의 Biographia Literaria(1817)로서 시에서 초자연적이고 환상적인 요소를 포용적으로 대하는 태도로서 말한 것이다.―정리자] 공상과학소설을, 작가가 일관적이라고 생각하는 등장인물들을 믿어야 합니다. 스릴러나 미스터리 영화를 보러갔다 나올 때에는, ‘잠깐, 무언가 빠졌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쌔뮤얼슨이 하지 않은 말은 이 전제들이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배우지 않고 다른 행성에서 평행우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듣습니다. 정부도 없고, 사기도 없고, 전체 경제가 실질적 교환에 의해서 작동하고, 부채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을 도우려 하고, 아무도 돈을 상속받지 않으며, 모두가 자신들이 가진 소득과 부를 일해서 버는 그런 평행 우주 말입니다. 실제 현실은 이와 반대인데, 이는 오늘날 소설에서만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현실을 잘못 이해하는 일이 1년, 2년을 가고 10년, 20년을 가며 이제 한 세기가 지난다면, 그리하여 경제에 대한 거짓된 상이 그려진다면, 그 배후에 이익을 보는 특수한 세력이 있다고 확신을 해도 좋을 것입니다. 현실에 대한 거짓된 상은 자연스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는 지원을 받아 일어납니다. 은행업 부문이 대학들에서 가르쳐지고 신문에서 널리 전파되며 은행의 후원을 받는 정치가들이 말하는 쓰레기 경제학을 지원해 왔으며 이를 통해 사람들이 마치 화성에 살고 있는 것처럼, 실제와는 다른 종류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믿게 만들고자 했고 공중에 속하는 것을 탈취하려는 금융 계층은 없는 척 하고자 했습니다.

경제성장과 완전고용을 목적으로 하는 정부에 의한 중앙은행 화폐창출과 경제의 축소, 긴축, 낮은 임금, 낮은 산출량을 목적으로 하는 상업은행 신용창출 사이의 차이는 이렇게 귀결됩니다. 그리스가 당하는 것을 여러분도 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당신들의 항구와 땅과 관광지역들과 상·하수도 시스템을 주면, 우리는 당신들에게 사용료를 물리고 당신들이 연금으로 받아가기를 기대하는 돈의 규모를 줄여 우리가 쓸 것이다’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죠.

과거에는 이런 일을 하려면 군대가 필요했는데, 오늘날에는 군대 없이 행해집니다. 여러분들이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고, 은행들이 그리는, 세상에 대한 허구적인 상을 믿는 한에서는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재앙을 부르는 한국의 성장제일주의?



한국은 기술 및 상업 성장에 초점을 맞춘 경제전략을 밀어붙일 것인가 아니면 늘어나는 경제적 격차와 닥쳐오는 기후위기에 지구보존을 목표로 하는 포용적 정책들로 맞설 것인가?

이것이 <2019년 한국포럼>에서 한국의 미래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많은 외교전문가들, 정당지도자들, 학계인사들, 정부 고위 관리들 및 (노벨상 수상자 한 명을 포함한) 다른 참석자들이 당면하고 있는 핵심 질문이었다. [노벨상 수상자는 뉴욕대 교수 토마스 사전트(Thomas Sargent)로 201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옮긴이]

4월 25일에 열린 행사는《코리아타임즈》(The Korea Times)와 그 자매신문이며 한국 최대 일간지 가운데 하나인《한국일보》(Hankook Ilbo)가 공동주최하는 연례행사 중 가장 최근 것이었으며 이 신문사의 65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이 행사는 또한 한국경제의 현황, 그 과제들 그리고 그 지도자들이 나라를 위해 가지고 있는 포부들에 관한 매우 계몽적인 특강이기도 했다.

둔화되고 있는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어떻게 증가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핵심주제였다. 일부 강연자들은 성장의 성과들을 보다 잘 공유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해서 한국이 사회적ㆍ환경적 지표에서 처참한 성적을 기록한 것을 문제로 다루는 것은 의제로 상정되지 않았다. 기후변화도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

이런 성장 수사(修辭)는 선진국들 사이에서 자주 보이지만 한국전쟁동안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을 때 이미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에서 이 수사가 줄기차게 주목을 받고 있는 근원을 재검토 해보는 것도 가치는 있다. 한국은 잿더미에서 빠르게 일어서서 ‘아시아의 호랑이’(Asian Tiger)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선진경제국들 중 하나가 되었는데, 이는 종종 한강의 기적(한강은 서울이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으로 불린다. 이것이 경제성장을 고무적인 국가신화와 결부시킨다.

한국의 미래 비전을 놓고 씨름하기

환영사에서 한국일보 회장 승명호(Seung Myung-ho)는 한국이 경제성장이 둔화된 10년 동안 경쟁력을 잃고 있는 점에 관하여 우려를 표명함으로써 이 분위기를 조성했다. 30년간 연속적으로 일구어 낸, 한국의 믿기 힘든 경제성장은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면서 둔화되기 시작했다. 승명호는 성장을 촉진하고, 유례없는 파열을 약속하는 인공지능·자율주행자동차·양자컴퓨팅(quantum computing)을 포함한 강력한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물결인 4차산업혁명(4IR)에 적응하기 위한 구조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국회의장인 문희상(Moon Hee-sang)은 반론 같은 것을 제시했으나 성장 내러티브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는 사회안전망을 강화하고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며 성장경제의 성과를 더 잘 공유할 대통합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성장주의가 포럼에서 내러티브를 장악하긴 했지만, 일부 연사들은 성장이 치를 비용이 다뤄져야 한다고 미온적으로나마 주장했다.

예를 들어 한국은 OECD 행복지수(OECD’s Better Life Index, BLI)와 UN의 지속가능발전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SDGs)의 달성에서 거의 하위를 차지한다.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인 윤종원(Yun Jong-won)은 사회적•환경적 비용이 늘어나면서 실질소득이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떨어진다고 언급했고 성장이 공유되고 삶의 질이 향상되는 새로운 가능한 패러다임을 간략하게 제시했다.

게이오 대학교 교수인 이사오 야나기마치(Isao Yanagimachi)는 둘로 나뉜 한국의 노동시장을 간략하게 소개했다. 즉 한편으로 점차 쇠퇴하는 중심부에서는 한국의 대규모 다국적기업들(재벌들이라 불린다)에 소속된 노조가입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옹호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커지고 있는 주변부에서는 전례 없는 프리랜서들, 소규모 자영업자들, 그리고 플랫폼노동자들이 빈약한 임금, 열악한 노동조건, 형편없는 사회보장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익숙하게 들리는가?). 한국 노동시장의 한 가지 특이사항은 노동조합이 산업별이 아니라 기업별로 조직된다는 것인데 이로 인해 서로 다른 기업에서 일하는 동종의 노동자들 사이에 임금격차가 생긴다.

마지막 3부를 시작하는 두 개의 발제중 하나를 내가 했는데 그 발제에서 나는 한국인들 모두가 격변의 시대를 뚫고 나갈 준비가 되도록, 보다 공정하고 지속가능한 나라를 구축할 비전과 능력을 갖도록, 그리고 그들 스스로의 생계를 더 잘 창출할 수 있도록 사람에게 투자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국이 차량공유(ridesharing)를 허용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어서 나는 또한 한 가지 충고로서 미국에서의 차량공유의 부정적인 영향―주행거리의 증가, 정체의 심화, 더 많은 교통사고 등등―을 이야기했다.

차량공유는 국가 미래를 알아보는 리트머스시험지일 수 있다

차량공유를 둘러싼 갈등은 한국에서보다 더 높을 수는 없다. 택시기사들이 내가 전 세계에서 본 가장 격렬한 반대를 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비극적이게도 최소 세 명의 기사가 항의의 표시로 분신하는 일도 일어났다. 나는 또한 몇 가지 가능성 있는 방향들을 제시했는데 이를테면 노동을 지원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플랫폼 협동조합을, 4차 산업혁명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 운영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디지털 권리를 위한 도시 연합을 그리고 보다 지속가능한 공동체들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공유이웃들과 공유도시들을 각각 제시했다. 나는 한국이 한국전쟁으로 폐허된 상태를 극복하는 데 쏟은 바로 그 집중력을 기후변화 같은 세계적으로 가장 큰 문제들과 씨름하는데 쏟을 것을 제안하며 발제를 마무리했다.

카풀•택시 태스크포스 위원장인 전현희(Jeon Hyun-hee)는 나중에 택시회사와 차량공유 세력의 사이의 첨예한 갈등에 대해 내부자로서 설명을 했다. 택시운전사들이 그녀의 발언을 방해했고 물을 뿌렸다고 한다. 그녀는 택시운전사들이 자신들의 입장이 약화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녀와 이야기하는 것조차 거부했다고 말했다.

나 다음의 발제자는 서울대학교 교수인 이재열(Lee Jae-yeol)이었으며 그의 발제는 내 발제와 대조되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열정적인 테크놀로지 전도사인 그는 테크놀로지가 사회전반에 걸쳐서 과도하게 포화된 상태를 특징으로 하는 피할 수 없는 미래상을 그렸으며 한국이 이 움직임을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9한국포럼>에서 프로그램을 확인해 보니 3부의 두 번째 발제자는 성균관대 기계공학부 교수인 최재붕이었고 이재열은 3부의 사회를 맡았다.―옮긴이] 

이어지는 패널토론에서 이 주제가 강화되었다. 내가 그런 기술결정론(technological determinism)이 한국사회에서 권위적인 요소들을 강화할 수 있음을 경고하자 서로 치고 받는 논의가 활발해졌다.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대표인 토론자 최성진(Choi Sung-jin)은 테크놀로지스타트업 문화는 자유행위자들에 의한 문제해결이 핵심이라고 능숙하게 반박했다.

컨퍼런스가 끝날 때 가지게 된 느낌은, 한국의 경제적 과제들이 대체로 다른 선진국들의 상황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유사성은 한국의 성공의 표시이기는커녕 아주 위험하다는 인상을 내게 안겨주었다. 우리시대 특유의 과제들을 인정하지 않는 경제성장 가도에 한 나라가 강하게 집중하는 것은 기후변화의 심각성과 전 세계적으로 닥쳐오는 생태계 붕괴를 고려할 때 자멸을 초래할 것처럼 보인다.




상황은 삐께띠가 서술한 것보다 더 나쁘다

 



삐께띠의 통계의 문제는 그것이 세상이 얼마나 불평등한가를 매우 낮추어 말하고 있다는 데 있다. 소득에만 시야를 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부자들은 소득을 벌지 않는다. 그들은 자본 이득(capital gains)을 거두어들이며, 자본 이득은 소득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보고는 되는데, IRA가 10년 정도마다 자본 이득에 대한 연구를 할 뿐이다. 영국을 비롯한 많은 유럽 나라들은 아예 자본 이득에 대해 세금을 매기지 않으며 그래서 통계에 나타나지 않는다. 삐께띠의 작업의 중요한 결과들 가운데 하나는―이는 그의 책을 잘 읽는다면 알 수 있다―부의 격차가 소득의 격차보다 훨씬 더 크며 이는 부자들의 조세회피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는 기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에서, 아니 세계에서 제일 큰 기업들이 구글과 애플인데, 애플의 소득 전체가 미국이 아니라 아일랜드에서 이루어진다.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바로 이런 점이 삐께띠에게는 빠져있다. 소득 통계에서 빠져 있는 또 하나는 재산이 실제로 범죄와 사기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이다. 삐께띠에게 좋은 점은 그가 프랑스 소설가들이나 영국 소설가들이 경제학보다 부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이나 발자끄의 19세기 소설들이 재산을 버는 방법은 결혼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러나 발자끄는 모든 큰 재산의 뒤에는 큰 절도가 있다는 말도 했다. 『포브스』(Forbes)에 그 목록이 나온 러시아, 중국, 우크라이나의 최고 부자들은 장담컨대 소득을 저축해서 이런 부를 만들지 않았다. 더 높은 소득을 번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사기와 내부 뇌물수수로 재산을 훔쳤다. 미국에서 큰 재산이 형성되는 방식과 같은 방식이다. 마이어스(Gustavus Myers)가 쓴 『미국의 거대한 재산의 역사』(History of the Great American Fortunes)는 철도건설용으로 불하된 토지에서, 의회 의원에게 뇌물을 줌으로써 그리고 토지를 사유화함으로써 큰 재산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큰 재산은 자연자원, 토지, 공적 도메인을 사유화함으로써 형성된다. 부와 소득의 집중이 실제로 일어나기 시작한 1980년 이후의 시기, 삐께띠가 보여주는 이 시기는 바로 새처, 레이건, 옐친이 대표하는 사유화의 시기이다.

삐께띠는 격심한 불평등의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토론을 출발시켰다. 이제 필요한 것은 어떻게 이런 불평등이 생겼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나를 설명하는 것이다. 단지 재산 일반에 세금을 매기는 해결책은 (이것은 실행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인데) 치는 면이 너무 넓은 해머와 같다. 특정 종류의 부, 특정 종류의 재산 형성이 약탈적인데, ‘경제적 렌트’(economic rent)―지대(land rent), 자연자원 렌트(natural resources rent), 독점 렌트(monopoly rent), 혹은 금융부문이 벌어들이는 종류의 돈―가 바로 그것이다.[J is for Junk Economics에서의 허드슨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경제적 렌트’는 시장가격이 본래적 경비(가치)를 넘어서는 초과분이다. 비용을 들이지 않고 얻는 불로소득은 모두 경제적 렌트이다.―정리자] 삐께띠의 책은 이것을 논의하지 않고 마지막에 부에 과세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할 뿐이다. 맞지만, 어떻게 과세를 할 것인가, 무엇이 경제를 성장하게 만들기에 최고로 좋은 종류의 세금인가는 미래의 또 하나의 책의 주제로 남아 있다. 삐께띠가 논의하지 않은 것 가운데 하나는, 재산을 형성하는 데서 부채가 하는 역할이다. 1980년 이래 형성되기 시작된 부의 대부분은 1980년 이후 이자율이 낮아지면서 증가된 부채 레버리지 때문에 생겼다. 점점 더 많은 은행신용이 투입되어 부동산 가격, 주식 가격, 증권 가격, 모든 종류의 가격을 올렸다. (미술품 가격 상승도 이와 병행했다.) 소득에 대한 부의 비율의 증가와 함께 소득에 대한 부채의 비율의 증가가 일어났다. 이 부채상태와 순가치(net worth)는 매우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가구들이 가지고 있는 주된 자산은 집인데, 이 집 또한 큰 액수가 대출 담보로 잡혀 있으며, 기본적으로 99%가 1%에게 이자를 지불한다. 내가 보기에 금융 부문에서 가속화되어 온 것은 1%가 99%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빚지게 만드는 능력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보라, 집을 사고, 교육을 받고, 기타 기본적인 생활필수품을 사는 데로 접근하는 지점을 우리가 통제한다. 우리가 빌려주지 않으면 당신들은 집을 사지 못하고 교육을 받지 못하고 심지어 차도 사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들에게 충분한 이자를 매길 것이다. 당신들이 버는 돈을 사실상 다 우리에게 이자로 지불하게 될 것이다. 이와 동일한 논리로 기업사냥꾼들은 기업을 공격하여 더 많은 돈을 배당금으로 지불하라고 말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사실상 실질적 부가 해체되고 가공자본(fictitious capital) 혹은 가공적 부(fictitious wealth)라고 불리던 것―모두 기본적으로 부채 레버리지를 통한 부이다―이 증가한다.

도금시대(Gilded Age)[원래 미국의 1880년대와 1890년대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그 의미가 일반화되어 사업가들·은행가들(‘강도남작들’robber barons)이 경제를 망치면서 부를 축적하는 시대를 가리킨다.―정리자]가 막 시작되었다는 삐께띠의 결론은 맞지만 그의 논리는 내가 따르는 논리가 아니다. 그는 아담 스미스(Adam Smith)가 말한 것의 정반대를 말하고 있다. 스미스는 가장 빨리 망해가는 나라에서 이자율이 가장 높은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즉 높은 이자율로 망할 수도 있고 낮은 이자율로 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삐께띠는 수익률(rate of return)을 말하는데,[삐께띠가 말하는 자본수익률(rate of return on capital)은 이윤, 배당금, 이자, 지대 및 기타 자본에서 나오는 소득을 말한다.―정리자] 미국 및 여러 나라들에서 가장 큰 부문은 부동산 부문이다. 1945년부터 지금까지를 보면 부동산 부문은 소득을 올리지 않는다. 억만장자들이 부동산을 개인적 자선으로 운영한다는 식이다. 소득을 올린다면 소득세를 내야 할 것이고 신고를 해야 할 것인데, 그들은 소득을 올리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거두어들이는 렌트(임대료)가 거의 모두 이자로 지불되거나 감가상각 비용으로 책정된다. 그래서 삐께띠가 준거하는 것은 ‘이자, 세금, 감가상각비, 무형자산상각비 차감 전 이익’(Earnings Before Interest, Tax, Depreciation, and Amortization)이 아니라 그 한 부분, 즉 세금 빼고 이자 빼고 감가상각비와 무형자산상각비를 빼고 신고된 수입이다. 부동산 다음으로 부를 많이 축적한 곳은 석유산업이다. 이들도 소득을 신고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세금을 면하게 해주는 감모공제(depletion allowance)가 있거나, 아니면 이들의 모든 소득은 해외에서, ‘편의치적선’(flags of convenience)[상선의 소유주가 자신의 나라와는 다른 나라에 선박을 등록하는 것―정리자] 나라들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자본 이득을 포함한 실질적 총수입은 삐께띠가 보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둘째, 가령 미국의 국민소득계정(National Income and Product Account : NIPA)을 보면 1년 전 미국의 모든 기업이윤의 40%가 은행들, 즉 금융부문에서 거둔 것이다. 이 수익은 기본적으로 ‘이전 지불’(transfer payment)이다. 성장에 실질적으로 보탬이 되지 않는다. 금융서비스는 서비스가 아니다. 노상강도가 현금자동인출기 앞에 있는 당신에게 다가와서 ‘돈을 내놓거나 목숨을 내놓아라’라고 말하는 것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는 실제로 당신의 돈을 빼앗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금융 활동과 부동산 투기가, 월가에, 은행 경영자들 및 기업경영자들에게 지불되는 이 모든 돈이 정말로 성장인지 아니면 가공자본의 형성과 병행하는 일종의 가공적 성장인지의 문제가 있다. 지금 통계는 점점 더 허구적인 성격을 띠어가고 있는데, 자신들의 소득에 세금이 매겨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에 엄청난 액수의 돈을 지불하는 기업 세금담당 회계사들에 의해 통계가 작성되고 있을 정도이다. 호주의 탄광 부문에서는 호주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이 1년에 수십억을 거두어들이면서도 자신이 소득을 한 푼도 벌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만들기 의해 많은 돈을 지불한다.

크루그먼(Paul Krugman)은 신고전주의 경제학자이다. ‘신고전주의’는 ‘반(反)고전주의’를 의미한다. 그는 경제적 렌트 같은 것이 있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는 또한 은행들이 신용을 창출하지 않는다고 한다. 모든 은행들이 하는 일은 저축을 대출하는 것이라고 한다. 은행들이 신용을 창출하거나 자산가격을 부풀리는 일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고 한다. 그래서 크루그먼은 대체로 우파 쪽에 의해서 그들이 총애하는 자유주의 경제학자로 찬양된다. 그가 경제를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경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경제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했다면, 그는 노벨상을 타지 못했을 것이다. 노벨상은 경제적 렌트 같은 것이 없고 불로소득 같은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상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크루그먼은 회사의 경영자들이 훨씬 더 많이 받고 훨씬 더 많은 소득을 버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심지어 통계에 대해서도 틀렸다. 그가 전문적인 은행 로비스트임을 기억하라. 그는 은행에서 돈을 받는다. 그는 은행들을 규제하려는 정부에 대항하는 싸움에 은행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아이슬란드로 갔다. 은행들이 그를 좋아하는 것은 물론 그가 은행의 로비스트이기 때문이다. 그가 지적하는 월가의 소득을 보자. 미국의 조세법 아래에서는 월가의 소득은 실질적으로 일을 해서 벌어들인 소득이 아니다. 그들은 스톡옵션과 증권투기로 대부분의 돈을 번다. 이는 자본 이득으로 간주되며 정상적인 소득처럼 과세되지 않고 훨씬 더 낮게 과세된다. 이는 가공적인 관점, 무엇이 소득이고 무엇이 소득이 아닌가를 회계사의 눈으로 보는 관점이다. 세금담당 회계사들은 정부에 엄청난 돈을 먹여 납세(소득세)신고서의 범주들을 왜곡하고 마치 부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금융 형태의 부를 가시적인 부동산과 대조적으로 비가시적 부라고 부른다. 부유한 자들의 생각은 그들의 부를 비가시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만일 눈에 뜨인다면 세금이 매겨질 것이고 사람들의 원망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삐께띠가 한 것은 이 부를 가시화한 것이다. 적어도 그는 부 통계에 의해 ‘보라, 저기 부가 있고 우리는 그것을 측정할 수 있으며 우리가 얼마나 불평등한지를 볼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어떻게 이 부를 획득했는가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이 부에 대응하는 몫이 소득에서 발견되는 정도를 반영하는 소득세 명세서뿐이다. 이는 마치, 열쇠를 떨어뜨렸는데 떨어뜨린 곳을 보지 않고 빛이 있는 곳을 보는 것과 같다. 그가 작업할 통계자료는 소득세 기록뿐이며 그는 기술적으로 엄청난 작업을 해놓았다.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작업이다. 그러나 그 통계를 다시 처리하여 풀어내고 무엇이 그 뒤의 실제 현실인지를 찾아내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 이 월가와 금융 경영자들로 하여금 소득을 거두는 것을 가능하게 한 자본 이득이 무엇인지를 말해야 한다. 그들의 계약은 매우 분명하다. 기업경영자의 소득은 주식 가격에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보너스를 받거나 아니면 스톡옵션을 받는다. 만일 그들이 주식가격에 기반을 둔 보너스를 받는다면 그들은 기업의 수입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은 기업의 소득을 받고 새로운 장비와 설비에 투자하는 대신에, 새로운 시장을 개발하는 대신에, 더 많이 생산하는 대신에, 자본 투자 대신에 단지 자기 회사의 주식을 매입하는 데 돈을 사용할 것이다. 주식을 매입하면 주식 가격이 올라가고 그들은 ‘보라, 나의 회사 경영이 어떻게 주식가격을 올렸는지를, 그러니 나에게 더 높은 보수와 스톡옵션과 보너스를 달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자본 이득, 이 공짜 점심(불로소득)에 과세하지 못하는 것은 경제의 왜곡을 낳고, 이것이 삐께띠가 다룬 통계를 산출한다.

▷ [삐께띠의 책이 맑스의 『자본론』을 계승한 것(“a retake of Marx’s Das Kapital”)이라는 견해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홍보상으로는 그렇게 부를 수 있으나 이 책은 맑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맑스의 『자본론』은 감가상각(depreciation)에 기반을 둔다. 사유화와 사기를 의미하는 ‘시초 축적’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사람이 맑스이다. 삐께띠의 분석은 (그의 부모가 트로츠끼주의자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맑스와는 완전히 다르다.

[① 감가상각은 자본 투자, 건무, 장비 기술에 들어가는 비용을 다시 채우기 위해서 신고되는, 소득에서 공제하는 회계항목이다. 이는 원래 투자된 자본의 양을 다시 회수하는 것으로서 투자된 자본에 추가되는 이윤과는 다르다. 허드슨의 책 J is for Junk Economics의 ‘감가상각’ 항목의 한 대목은 이렇다. “감가상각은 칼 맑스에 의해 처음 가치이론에 추가되었다. 맑스는 께네Quenay의 경제표를 비판하면서 께네가 곡물 가운데 종자로 따로 떼어 자본비축고를 유지하고 다음 해 파종에 쓸 몫을 무시했음을 지적했다.” ② 흥미롭게도 허드슨의 아버지도 트로츠끼주의자이며, 허드슨이 태어난 미니애폴리스는 당시 미국 유일의 트로츠끼주의 도시였다.― 정리자]

▷ [맑스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적 법칙이 이윤율 저하 경향이라는 말에 대해서]

그보다 더 오해된 것은 없다. 맑스가 말한 것은 자본이 생산을 기계화함으로써 노동에 비해 증가할수록 이윤보다는 감가상각의 형태로 회수되는 자본이 양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맑스는 비용회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중농주의자들과 께네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께네의 경제표는 경제에서 소득의 순환, 지주들이 받은 지대의 순환을 말한다. 지주들은 일부는 소비하고 일부는 지출하는데, 여기서 빠진 것은 지대소득에서 새 종자 곡물을 사는 데 지출되어야 하는 양이다. 맑스는, 공장제 생산을 하는 산업자본주의에서는 기계가 있는 공장을 짓는 데 백만 달러를 쓰고 그것으로 이윤을 창출할 것이라면 투자된 백만 달러에 대한 이윤(5%, 즉 1년에 5만이라고 치자)만 얻는 것이 아니라 백만 달러도 회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공장과 장비가 마모되거나 노후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정되는 가격에는 이윤분만이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투자된 자본의 회수분도 포함된다. 그래서 맑스가 이윤율 저하를 설명하는 대목을 직접 읽지 않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잘못된 이해를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나의 책 『거품과 그 너머』(Bubble and Beyond, 2012)에서 설명했다. 그런데 맑스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맑스에 대해서, 그리고 이윤율 저하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그냥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것을 이해할 단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서 허드슨이 말하는 것은 경제학이라는 전문분야의 틀 내에서의 것이다. 여기에 추가되어야 할 것이 있다. 맑스는 『자본론』 3권 14장 「법칙 그 자체」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반적 이윤율의 점진적인 저하경향은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의 점진적 발달의 표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특유한 표현―에 불과하다.” 이윤율 저하 경향이란 생산자의 생산능력이 높아지는 과정의 자본주의적 표현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생산자의 생산능력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서는 소외의 형태로 즉 자본의 힘으로 나타나고, 이것이 자본(화폐자본)의 물신화를 낳는다. 자본주의 너머의 세계에서는 생산자의 생산능력이 높아지는 과정이 이와는 다른 식으로 표현될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아직 자본을 넘어가는 과정이 현실적 과제로서 주어져 있는데, 맑스가 늘 말한 대로 우리로 하여금 자본을 넘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게 할 조건도 생산자의 높아진 생산 능력 이외의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맑스는 ‘사회적 개인’과 ‘일반지성’을 말하는데, 전자는 생산능력이 높아진 주체성(생산자)의 특성을 가리키고 후자는 그 능력이 기계(맑스의 시대에는 컴퓨터가 없었지만, 지금이라면 디지털 장비들이 여기서 말하는 ‘기계’의 주된 구성부분이 될 것이다)를 통해 구현되는 측면을 가리킨다. 이에 관해서는 네그리와 하트가 『다중』, 『공통체』등의 저작에서 이미 충분히 말해놓았다.―정리자]

[감가상각에는 과세가 되지 않는 것에 대해]

부동산의 경우에는 더 기괴하다. 미국에서는 부동산의 가치가 상승하는 동안에도 건물이 실제로 가치를 상실하는 척할 수 있다. 건물에 수명이 있어서 건물주가 자본을 회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부동산(이는 실제로 토지를 의미한다)이 기계처럼 마모되거나 컴퓨터처럼 노후화되는 양 말이다. 이것은 말이 안 된다. 내가 사는 뉴욕시에는 건물이 오래될수록 더 가치가 있다. 닳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지관리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건물주들은 소득의 약 10%를 건물의 유지보수에 지출한다. 그런데 건물주들은 건물이 닳아 없어지는 양 감가상각을 적용하고 그 때문에 그들은 이윤을 버는 것이 아니라 자본을 회수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건물을 완전히 감가상각한 다음에 그것을 서로 팔거나 자신이 다시 사서 전체 과정을 다시 시작한다. 그래서 같은 건물이 계속해서 닳아 없어지는 양 계속해서 감각상각한다. 계속 교체되는 소유주들은 이에 대해 세금을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 [허드슨이 이윤율 저하 경향이 부의 격차에 대한 분석으로서 아직도 타당하다고 보는 것 같다는 말에 대해]

맑스는 캐시플로(cash flow) 일부의 구성에 대해서 말했다. (캐시플로는 ‘이자, 세금, 감가상각비, 무형자산상각비 차감 전 이익’이다.) 캐시플로 내에서는 자본이 기계를 사용하여 더 자본 집약적이 되는 정도로 감가상각의 역할이 이윤에 대비하여 상승한다고 맑스는 말했다. 따라서 핵심은 자본의 회수와 노동고용 등에 지출된 것의 수익의 관계이다.[여기서 끊겨서 다소 불명확한데, “자본의 회수”라고 했을 때에는 불변자본의 회수로 이해하고, 노동고용 등에 지출된 것의 수익은 가변자본이 낳은 이익인 이윤을 포함한다고 이해하면 될 듯하다―정리자]

 

① return of capital  자본의 회수  투자한 자본양이 회수되는 것. 부채의 경우라면 원금이 회수되는 것에 해당한다.
② return to capital  자본 수익 투자한 자본양보다 증가한 양. 부채의 경우라면 이자에 해당한다.
③ capital gains 자본 이득 ‘자본’(capital)이라는 말이 들어갔으나 사실은 생산에 자본으로서 관여하지 않은 자산의 가격이 오름으로써 얻은 이득을 가리킨다.
* 여기서 ‘자본’의 두 유형/두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생산과정에 투입되는 자본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과정에 개입하지 않고 증식되는 자본이다. 전자의 전형은 산업자본이고 후자의 전형은 대부자본이다. (산업자본도 화폐의 형태로 차입되므로 ‘화폐자본’이라는 말은 너무 넓다.) 흥미롭게도 위의 ‘자본 이득’의 경우처럼 ‘자본화’(capitalization)도 생산과는 무관한 과정을 나타낸다. 이는 이미 맑스의 『자본론』3권에 나온다. “가공자본의 형성은 자본화(capitalization)라고 불린다.(Die Bildung des fiktiven Kapitals nennt man kapitalisieren.) 모든 규칙적인 주기의 수입은, 평균이자율로 대출된 자본이 낳을 수입이라고 간주함으로써, 평균이자율을 기초로 자본화될 수 있다. (···) 이리하여 자본의 현실적인 가치증식 과정과의 모든 연관은 그 최후의 흔적까지 모두 없어지고, 자본은 자신의 힘에 의해 저절로 증식된다는 관념이 확고하게 된다.” 한 달에 2백만 원을 받는 노동자가 있고 당시 이자율이 5%라면 2백만 원을 이자로 계산했을 때 원금은 2백만 원에 20을 곱한 4천만 원이다. 이제 이 노동자는 4천만 원을 가진 자본가로 탈바꿈한다. 모든 개인을 기업가로 만드는 것은 오르도자유주의(독일에서 발생한 신자유주의적 경제사상)의 목표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우리 시대가 이런 ‘자본화’에 기반을 둔 사고가 만연되어 있고 ‘자본화’ 세력이 주된 정치적 권력을 가진 사회라면 이 점에 관한 한 우리 시대는 맑스가 본 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른 ‘자본’주의―가치증식(생산과정)으로부터 분리된 것―의 시대일 것이다. 허드슨이 일반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측면이다.

## 이 세상에 현재 존재하는 화폐들의 양을 직관적으로 가시화한 사이트를 보려면 http://money.visualcapitalist.com/worlds-money-markets-one-visualization-2017/로 가보라.




쓰레기 경제학


  • 저자 : Michael Hudson
  • 원문 : J is for Junk Economics : A Guide to Reality in an Age of Deception (2017)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마이클 허드슨의 저서 J is for Junk Economics : A Guide to Reality in an Age of Deception (2017)에서 ‘쓰레기 경제학’(Junk Economics)을 다룬 부분을 몇 개 발취하여 그 내용을 옮기거나 정리한 것이다.

[서언 : 갈림길에 선 경제와 경제이론]

우리는 2008년의 경제 위기 시에 미국과 유럽이 경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은행들과 증권소유자들을 구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정부들이 구제금융과 ‘양적 완화’에 수조 달러를 지출하여 거대 채권자들과 투기자들을 악성 대출과 도박으로 손해를 입을 처지에서 구해주었지만, 공공 및 민영 기반시설은 붕괴되도록 방치되었고 중위임금(median wage, 근로자 임금 중간값)은 하강하고 있다. 연금 저축은 거덜이 났고 사회보장을 삭감하는 압박이 일고 있다.

‘쓰레기 경제학’(Junk Economics)이 이 모든 것의 커버스토리이다. 이 쓰레기 경제학은 자신이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면서 금융세력의 후원을 받아 소득과 부를 상층부에 몰아주는 식으로 재분배하며 19세기 고전경제학자들과 진보 시대(Progressive Era, 1890-1920)의 개혁가들이 주장한 정책들을 전도시키고 있다. 이 이데올로기는 진보적 과세는커녕 1%가 아니라 99%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옹호한다.

그 효과는 중산층을 부채에 빠뜨리면서 경제로부터 화폐가 빨려나가 1%에 흡수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생기는 긴축 상태가 공공 자산과 자연자원을 사유화하는 데 구실로 사용된다. (고전경제학자들은 이 공공 자산과 자연자원이 정부의 제대로 된 기능들을 운영하기 위한 조세기반을 제공하기를 바랐다.) 부채에 묶인 지방 및 일국 정부들은 채권자들에게 공공 기반시설을 팔아넘길 수밖에 없다.

이런 사유화의 핑계는 이것이 기본 서비스의 경비를 낮추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팔아넘겨진 공공 기반시설은 새로운 소유주들이 독점 가격을 매길 기회를 제공했으며 이는 제공 가능한 기본 서비스의 감소를 낳았다. 미국에서 강제적으로 사유화된 오바마케어(Obamacare)는 가구들의 예산을 쥐어짜내고 있으며, 다른 한편 영국에서는 사유화된 철도와 물이 가장 심한 사례이다.

오늘날 사회는 봉건제의 유산과 귀족들·은행업자들·독점가들의 세습적 특권들로부터 해방되어 약속된 풍요로운 여가 경제로 나아가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늘날의 금융 엘리트들은 사회를 희생시키면서 그들의 유서 깊은 ‘공짜 점심’(불로소득)을 증가시키기 위해 ‘쓰레기 경제학’을 장려하고 있다. 그들이 경제 일반에 창출하는 부채 간접비용은 한 세기 전에는 피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금융 계층은 빚을 지는 것이 마치 자산 가격을 부풀림으로써 경제를 풍요롭게 하는 양 미화했다. 임금, 이윤, 지대(임대료)는 기하학적으로 늘고 있는 이자를 지불하는 데로 들어간다. 한편 국가 통계는 사람들의 주의를, 부채 서비스가 어떻게 가구 및 사업 소득을 빨아들이고 있는지로부터 다른 데로 돌린다.

그 결과 나오는 금융 긴축 상태가 야기하는 고통은 결코 자연법칙의 결과가 아니며, 피해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 시장’이라는 고전적인 이상의 이러한 전도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이중어(Doublespeak)의 새로운 어휘를 통해 장려된다.[오웰의 『1984년』에서 ‘Newspeak’(신어)는 가상의 초국가 오세아니아Oceania의 공식 언어이다. ‘doublethink’(이중사고)와 합하여 이렇게 표현한 듯하다. ‘이중사고’는 서로 모순되는 것을 동시에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고방식이다. ―정리자] 예를 들어 ‘개혁’이라는 말은 오늘날 사용되는 바로는 미국과 유럽의 부유한 중산층을 창출하는 것을 촉진했던 진보 시대의 개혁과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20세기를 위대하게 만들었던 것이 진보적 과세, (기본적인 경제적 서비스 비용을 낮추기 위한) 공공 기반시설 지출, 뉴딜 및 기타 (화폐와 금융을 약탈적 독점이 아니라 공공 유틸리티로 만드는) 입법이라는 점은 잊혀졌다.

더 현실에 기반을 둔 분석과 정책입안을 부활시키기 위해서 이 책은 경제학을 (그 어휘와 기본 개념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나의 온전한 학문분야로서 재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서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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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발췌 정리1]

「사기로서의 경제학」(“Economics as Fraud”)을 쓴 이래 나[허드슨]는 현실을 다루는 경제학과 ‘쓰레기 경제학’ 사이의 차이가 훨씬 광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새로운 글 「경제학 방법론은 이데올로기이며, 정책을 좌우한다」(“Economic Methodology is Ideology, and Dictates Policy”)는 어떻게 방법론이 내용을 결정하는지를 설명한다. 방법론이 오늘날의 주류가 규정하는 범위, 수학, 그리고 심지어는 통계조차도 만들어낸다. 쓰레기 경제학의 본질은 ‘경제’를 ‘시장’의 관점에서만 협소하게 개념화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현상유지를 의미할 뿐이다. 그 결과로 나오는 경제모델들은 오늘날의 자산소득자(rentier) 경제에서 부채가 가져오는 정치적·환경적·법적 파급효과들을 배제한다.

[기타 발췌 정리2]

쓰레기 경제학과 이 경제학이 사용하는 완곡어법 어휘들은 사람들의 주의를 원인으로부터 (따라서 필요한 치유책으로부터) 다른 데로 돌림으로써 사고의 도구들을 제한하는 것이 목적이다. 가령 낙수 이론은 현실을 숨기는 어휘로 짠 외투로 자산소득자의 기생적 존재를 가린다. 많은 채무자들의 삶은 그들의 피를 빨아먹는 드라큘라의 경제적 화신에 의해 장악되는 듯하다. 정치가들은 이주민들 또는 다른 소수민족들이 일자리를 뺏어간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로비스트들은 임금노동자들과 중산층에게 그들이 빚에 구속된 상태에 있는 것은 높은 주택비용, 모기지에 의해 금융을 제공받는 교육 및 생활, 학자금 융자, 신용카드 빚 때문이 아니라고 설득하려고 한다. 1%에게 높은 세금을 징수하고 사업체들을 ‘과도하게 규제한다’(특히 맑은 공기, 건강한 식품, 정직한 회계를 증진하기 위한 규제)는 비난이 정부에게 가해진다.

[기타 발췌 정리3]

기만을 핵심으로 하는 ‘쓰레기 경제학’은 진보 시대의 실질적인 개혁을 전도시켜 신자유주의적 협정을 법, 과제, 무역규칙에 대한 ‘개혁’으로서 내세운다. 이른바 ‘전문가들’(기업의 로비스트들)은 경제를 민주적 정부의 손으로부터 빼내서 세계의 금융 중심들에 안겨주는 것이 유일한 방안이고 그에 대한 합리적 대안은 없는 양 진보를 재정의한다. 이 이데올로기적인 신냉전(New Cold War)은 미국의 통제 아래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orld Bank) 그리고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에 의해 집행된다. 월가와 그 위성(외곽) 금융기관들을 위하지 않는 정책들을 시행하는 나라들은 비(非)자유로 가는 길을, ‘타자’의 길을 좇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1세기 전에는 진보로 생각되었던 것을 전도시킨 것은 자유의 희화화이며 저열한 거짓말이다.

[기타 발췌 정리4 : ‘쓰레기 경제학항목의 설명]

‘쓰레기 경제학’이란 기득권 세력이 자신들의 행위를 착취적인 제로섬 자산소득사냥 행위로서 서술하지 않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서술하기 위해서 증진시키는 홍보활동을 가리킨다. 쓰레기 경제학은 자산소득자들(rentiers)이 영웅으로 등장하는 유토피아적 평행우주에 적절한 전제들을 바탕으로 하는 일종의 공상과학소설이다. 좋은 소설이나 희곡에는 일관되게 행동하는 등장인물들이 나오지만, 이 유사과학의 기준은 단지 그 전제들의 내적 일관성이지 세계의 리얼리즘적 형상화가 아니다. 많은 가장 칭송받는 경제학자들은 가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세계에 관해 선험적인 공리들로 논리적으로 사고한다. 금융 포퓰리즘의 ‘낙수’ 전략은, 상위 1%에게 유리한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 나머지 99%에게 가장 좋다는 것을 대중에게 설득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려면 생산적 활동과 약탈 행동을 구분하는 자산소득(rent, 금리, 임대료, 지대)이라는 고전적 개념을 삭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카고학파의 ‘합리적 시장’ 이론이나 래퍼 곡선(Laffer Curve), 한계효용이론 같은 자유 시장 경제학은 단기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 장기적인 것을 무시하고 개인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 경제의 큰 그림을 무시한다. 부채는 나중보다는 지금 소비하고 싶어 하는 성급한 소비자들이, 또는 장기적인 자본투자를 위해 차입함으로서 이윤을 만들어내려는 사업가들이 맺는 계약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준거틀에는 하나의 경기 주기에서 다음 주기로 이전되는 부채의 상승하는 총액을 분석할 여지가 없다. 공공 기반시설 지출 또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 한다. 그래서 정부 차입은 단지 경제적 이익 없는 조세로서, 경제에 짐이 될 뿐인 것으로서 나타난다. 정부 지출은 단지 소비자물가를 상승시키는 것으로 간주된다. 고용을 증가시키거나 사업체와 가구들에게 기반시설 서비스의 경비를 낮추어 주는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건전한 화폐’는 정부가 아니라 은행들에 의해서만 창출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전제들의 목표는 화폐 정책과 주류 경제사상을 장악하여 그것을 계급 전쟁(99%와의 싸움)의 무기로 삼는 것이다.

오류가 반복되는데도 성공이 널리 이루어진다면 그 뒤에는 항상 특수한 이해관계가 도사리고 있게 마련이다. 가장 넓게 보면 (맑스가 말했듯이) “과학적인 부르주아 경제학은 ··· 이제 더 이상 이런 혹은 저런 정리(theorem)가 참인가 아닌가를 묻지 않고, 자본에 유리한가 해로운가, 편한가 불편한가, 정치적으로 위험한가 아닌가만을 묻는다···. 사심 없는 탐구자 대신에 고용된 논객들이 들어섰다. 진정한 과학적 연구 대신에 현재의 상태를 옹호하려는 흑심과 사악한 의도가 들어섰다. ”[원주: Marx, “Afterword” to the 2nd German edition of Capital (Vol. I, [1873], London, 1954), p.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