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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케이디아 그리고 전지구적으로 재개된 생물지역 행동주의

 



가장 고무적인 최근 발전들 가운데 하나가 생물지역주의(bioregionalism)가 재개된 것이었다. 40년쯤 전 1970년대와 1980년대 말에 경제, 생태 파수, 그리고 자연 생물지역들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방식을 다시 상상하려는 대중의 엄청난 욕구가 있었지만 이것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발전으로 점차 약해졌다. 이제 생물지역주의는 훨씬 더 영향력 있고 훨씬 더 세련되게 다시 부상하고 있다.

많은 선구적 지도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퍼시픽 노스웨스트(Pacific Northwest)(주석1)에 있는 활동가들, 학자들 및 사회 혁신가들이었다. 그들은 캐스케이디아라는 용어와 종종 관련되어 있는데, 이 용어는 그들이 브리시티 콜롬비아(British Columbia)(주석2)와 알래스카 남동부에서 워싱턴 주, 오레곤, 아이호아 및 북부 캘리포니아까지 이어지는 생물지역에 붙인 명칭이다. 이 지역은 75만 평방 마일이 넘는 곳으로 천연 열대우림, 화산들 그리고 연어•늑대들•곰•고래•범고래를 위한 야생 서식지 및 1600만 명의 사람들이 사는 야생 거주지를 아우른다.

캐스케이디아 행동주의는 시장들, 문화들, 정체성들을 지역 생태계들과 조화되도록 재발명하기를 원하는 대규모 전지구적 운동의 일부이다. 캐스케이디아 행동주의는 현대 사회들을 설득해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생태계의 선물들을 존중하도록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특유의 장소를 배려하며 거주하도록 하는, 장기간에 걸친 당찬 활동이다. 또한 캐스케이디아 행동주의는 자의적인 정치적 경계들과 전지구적 시장들을 초월하고자 하는 것이 핵심이며, 한 지역의 물의 성질·현상 및 분포, 날씨, 식물과 야생 동물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고, 경제들, 문화들, 그리고 그 환경과 보완적 관계를 맺는 존재 방식들을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다.

생물지역주의의 르네상스가 활기를 얻자 나는 특히 가장 장래성이 있는 전략들과 과제들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싶었다. 나는 공동체 중심의 풀뿌리 프로젝트들의 인큐베이터인 <캐스케이디아나우!>(CascadiaNow!) 설립자이고 최근 들어서 <생물지역운동 캐스케이디아 본부>(Cascadia Department of Bioregion)의 공동 책임자인 시애틀의 조직가 브랜든 렛싱어(Brandon Letsinger)에게 도움을 청했다. 우리의 대화는 팟캐스트 <커머닝의 프론티어>의 가장 최근 에피소드(에피소드 54)에 실려 있다.

렛싱어는 자신의 일은 “생물지역주의가 자본주의와 국민국가에 대한 실현 가능한 대안으로서 주류사상에 진입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실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지역경제를 다시 생각하고 물, 땅, 야생 동물 및 그 밖의 다른 살아있는 힘들을 파수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발전시킴으로써 캐스케이디아의 생태적 자립을 증가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또한 더 책임이 있는 민주적인 정부를 조성하는 것을, 그리고 토착 주권, 시민/부족 파트너십 및 ‘토지 되찾기’ 운동을 촉진하는 것을 뜻한다.

렛싱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사고방식이 거주자들, 장소 또는 생태계를 나타내지 못하는 지도들 위의 선에 기반을 두는 한, 일정 수준의 분할이 항상 존재할 것이다. 미국 정치 구조는 대의제를 훼손하는 개리맨더링과 선들을 재정의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생물지역주의는 그것을 체계 전체를 보는 렌즈에 맞추어 다시 해석한다,

렛싱어에 따르면 [캐스케이디아를 가로질러 흐르는] 콜롬비아 강에 대한 권한을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다양한 자의적인 관할 구역에 할당하는 것은 기능장애이다. “새롭게 시작하여 강 전체를 바라보며 모든 목소리가 포함되는지를 확인함으로써 여러분은 그 사고방식을 긍정적이고 협력적인 구조로 바꾸기 시작할 수 있다.”

생태지역이란 정확히 무엇이며 여기에 기반을 두는 사고가 왜 중요한가?

렛싱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생물지역을 말하는 것은 어떤 장소를 (맨 아래에서부터 시작해서) 그곳의 물질적•문화적•생태적 현실을 통해 정의된 대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생물지역주의는 모든 것을 마치 그것들이 이 세상의 체계들로부터 어쨌든 분리된 양 정치경제와 문명의 렌즈를 통해 보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들이 모든 것을 위한 기본 토대로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제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렛싱어는 “생물지역주의는 사람들을 다시 장소에 연결하는 것이 핵심”이며 “지질학으로 시작된다”라고 말한다. 캐스케이디아의 경우에 이것은 수백억 년에 걸쳐 영토—분수령, 토양, 식물, 동물, 해양 생물—를 형성해온 땅과 화산들의 판들(plates)로 이루어진 거대한 ‘캐스케이디아 섭입대(沈入帶)’(Cascadia subduction zone)(주석3)를 뜻한다.

또한 생물지역주의는 “어떻게 인간이 어떤 장소 내부에서 가장 잘 살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렛싱어는 말한다. 토착민들이 어떻게 수천 년 동안 환경과 지속가능한 조화를 이루며 살아왔는지를 연구하는 것은 많은 의미가 있다. 이 전체론적인, 장기적 관점은 우리가 식량 생산, 전력 생산, 운송 및 도시설계의 현대적 시스템들뿐만 아니라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주석4) 경제활동들 및 문화규범들을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삶에] 어떻게 맞출지에 관하여 생각하도록 도와준다.

나는 콜롬비아의 바리차라 지역에서 활동하는 조 브루어(Joe Brewer)와 함께 한 이전 팟캐스트(에피소드 33)에서 생물지역 행동주의를 살펴보았다. 그는 북미에서 일련의 생물지역 상담과 협동 학습 세션들을 최근에 시작했다. 또 한명의 중요한 생물지역 활동가이자 교육자는 <영국 생물지역 학습 센터>(Bioregional Learning Centre UK)의 이저벨 칼라일(Isabel Carlisle)이다. 그녀의 조직은 수많은 주요 온라인 이벤트들을 주관했고 교육 자료들을 만들었으며 한편으로는 자신의 생물지역인 영국의 사우스 데번(South Devon)에서 과제들과 씨름하고 있다.

브랜든 렛싱어는 생물지역주의 활동가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가 새로운 유형의 지도를 만드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지도는 중립적이지 않다. 지도는 과제와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다. 지도는 국가 해당관청이나 경제 주체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매우 많다. 지도의 궁극적 목적은 기업을 위해서 수익을 내고 그 [정치적] 이해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될 것이다.”

생물지역의 지도제작은 “구글 지도 및 다른 전통적인 지도가 방치한 모든 것”을 지도에 담는다. 야생 동물의 존재, 이동 패턴, 물의 흐름, 그리고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생태적 현상들이 인간 공동체 및 문화와 교차하는 모습을 지도로 제작함으로써 땅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이 지도제작의 기본 발상이다.

캐나다에 있는 다양한 원주민 부족들이 캐나다 정부를 상대로 한 법적 투쟁에서 이런 종류의 지도제작이 그들에게 중요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부족들은 캐나다 국가와 협정을 체결한 적이 결코 없었으며 소송 목적을 위한 원주민의 상황에 대한 증빙자료가 빈약했었다. 토착민 지도제작자들과 후원자들은 부족 원로들을 인터뷰함으로써 식민지 정복으로 그들이 대량 살상되기 전에 토착 본토의 역사적 범위와 성격이 어땠는지를 보여줄 수 있었다. 쎄일리시해(주석5) 17개 섬에 거주하는 약 3천명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생물지역 지도제작 워크숍을 통해 30개의 지도가 포함된 각기 다른 생물지역 지도책자 14개가 만들어졌다.

지도는 2005년 『쎄일리시해 섬들』(Islands in the Salish Sea: A Community Atlas)이라는 한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지도에는 섬들의 사랑받는 보물들, 예를 들어 대대로 물려받은 과수원, 낚시터, 위험에 처한 야생 산호의 위치, 새들의 서식지 그리고 아주 오래된 캐나다 원주민들의 유적지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각 경우에 섬 공동체가 지도에 포함되어야 할 것을 결정했고 다른 지역의 것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서 지역 예술가들이 작업에 참여하도록 했다.

‘쎄일리시해’는 캐나다계 미국인 생물학자 버트 웨버(Bert Webber)에 의해 1970년대에 생물지역 용어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퓨젓 싸운드(Puget Sound)에 연결된 조지아 해협과 그 주위에 사는 워싱턴 주의 쎄일리시어 사용자를 예우하고, 이 수역에 속하는 석유, 물고기, 해양 포유동물들에게 정치적 정체성이 없음을 인정하고 싶어 했다. ‘쎄일리시해’라는 용어가 인기를 끌었고 지금은 이 수역을 관례적으로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브랜든과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생물지역주의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 많고 각각의 생물지역들 안에 따라해 볼 것이 많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 주제에 대한 훌륭한 소개를 접하려면 우리가 나눈 대화를 여기서 들어 보는 것이 좋겠다.

주석1 : [옮긴이] 퍼시픽 노스웨스트 서쪽으로 태평양과 동쪽으로 로키산맥을 둘러싼 북아메리카의 북서부 지역을 가리키며 캐스케이디아라고도 불린다.
주석2 : [옮긴이] 브리시티 콜롬비아는 캐나다의 최서단(最西端) 주로 태평양과 로키산맥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주석3 : [옮긴이] 섭입대(攝入帶)란 지구의 표층을 이루는 판이 서로 충돌하여 지각판 하나가 다른 지각판 밑으로 밀려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주석4 : [옮긴이] 적정기술이란 기술이 사용되는 사회 공동체의 정치적, 문화적, 환경적 조건을 고려해 해당 지역에서 지속적인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기술이다.
주석5 : [옮긴이] 쎄일리시해(Salish Sea)는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와 미국 워싱턴주에 걸친 태평양의 해역이다. 조지아 해협(Strait of Georgia), 후안 데 푸카 해협(Strait of Juan de Fuca), 퓨젓 싸운드(Puget Sound)로 이루어지며 복잡한 해협(channel)과 수로망을 포함한다.


By Department of Bioregion – Own work,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05581724




건축에 상상력이 미치는 영향력

 


  • 저자  : 존 러스킨(John Ruskin)
  • 원문 :  “Influence of Imagination on Architecture”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남영
  • 설명 : 아래는 존 러스킨의 『두 개의 길』(Two Paths, 1859)의 4강 ‘상상력이 건축에 미치는 영향력’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는 앞서 그 일부가 올라간 「『건축의 일곱 등불』해설」에서 상상력을 다룬 부분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다.  ‘상상력이 건축에 미치는 영향력’은 러스킨이 1857년 1월 23일 라이언즈인 홀(Lyon’s Inn Hall)[주석1]에서 건축협회 회원들에게 한 연설이다. (번역이 아니라 정리이므로 강조와 주석은 모두 정리자의 것이다.)

만일 누가 ‘위대한 예술가들이 군소 예술가들과 어떤 자질에서 다르냐’고 물어보면서 간단히 답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첫째 감수성과 다감함, 둘째 상상력, 셋째 근면이라고 답할 것이다. 근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게으른 똑똑이들이나 근면한 우둔이들을 봤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게으른 똑똑이들을 본 적은 있어도 게으른 위대한 사람은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고결한 작품들을 만들어낸 예술가들은 모두 위대한 일꾼들이다. 그들이 성취한 일의 양보다 더 놀라운 것은 없다. 그래서 나는 어떤 젊은이가 전도가 유망하다는 말을 들으면 그에 관한 첫 물음이 ‘일에 열심인가?’이다.

그러나 근면함이나 감수성이 예술가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별로 가치가 없으며, 많은 사람들이 강렬하고 고결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예술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예술가의 변별적 재능은 공감과 상상력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상상력을 새로운 것들을 우리의 사유 속에 상상하거나 그리는 능력으로 이해하며, 이 힘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존중심을 보이고, 기계조작·계산·관찰 등의 다른 능력보다 더 큰 힘으로 인정한다. 어떤 할머니가 난로가에서 물레를 능숙하게 잣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 기계조작 능력을 존경할 수 있고, 그 할머니가 그 일로 일 년에 얼마 벌지를 재빠르게 계산하는 것을 보고 그 계산능력을 존경할 수 있으며, 그러는 동안 손주들 가운데 난로불에 닿는 아이가 없도록 지켜보는 것을 보고는 그 관찰력을 존경할 수 있지만, 그 할머니는 여전히 평범한 할머니이다. 그러나 만일 그 할머니가 스스로 꾸며낸 동화를 내내 손주들에게 이야기해주는 모습을 본다면 우리는 그 상상력을 칭찬하면서 그 할머니가 상당히 남다른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바로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건축가가 시공도((施工圖)를 잘 그리면 우리는 그의 능숙함을 칭찬하고 계약한도를 잘 지키면 그의 정직한 산수능력을 칭찬하며 들보 놓는 일을 잘 지켜보아서 아무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면 그의 관찰력을 칭찬하지만, 그가 상상력으로 칭찬을 받고 남다른 건축가라고 평가를 받으려면 이 모든 것 이외에 그 자신의 머리로 창작한 동화를 우리에게 들려주어야 한다. 따라서 어떤 동화가 건축에 의해 창작되고 건축에서 들리는지를, 즉 건축이라는 엄밀한 예술에서 건축가 여러분의 손만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같이 생각해보자.

‘머리’로 작업을 하는 문제로서 젊은 건축가에게 처음 떠오르는 생각은 아마도 넓게는 근대 문명, 좁게는 영국에 값하는 ‘새로운 양식’을 발명할 책임이리라.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이런 책임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분들이 있다면, 다음과 같이 묻고 싶다. 모든 발명력 있는 건축가들이 각자 새로운 양식을 발명하도록 군(郡) 하나를 할당하고 실제 작업을 위해 주(州) 하나를 할당하는 것이 여러분의 계획인가? 모든 건축가가 새로운 양식의 작은 한 조각을 발명하고 마지막에 모든 조각들을 모아야 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양식은 언제 발명하고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런 상상의 엘도라도가 허용되었다고 치면, 한 명 이상의 콜럼부스가 있을 수 있는가? 우리가 욕망하는 양식이 발명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단지 그 양식 아래에서 짓는 것 아닌가? 나는 지금 다른 경우에는 내가 인정하지 않는,[주석2] 새 양식의 발명이 가능하다고 치고 말하고 있다. 심지어 이전에 사용하던 것과 전적으로 다른 새 양식을 발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치자. 주두를 기둥의 아래쪽에 놓는다고 치자. 버트레스를 피너클의 아래가 아니라 꼭대기에 놓는다고 치자. 개구부를 아치도 아니고 수평도 아닌 모양으로 씌운다고 치자. 곡선도 아니고 직선도 아닌 선들로 장식을 구성한다고 치자. 용광로와 대장간을 마음대로 사용하여 유리판을 뽑아내고 쇠막대를 뽑아내어 우리 주위를 온통 검은 골격과 눈부신 사각형의 광대한 풍경으로 둘러쌌다고 치자. 거리를 연성(延性)의 잎장식으로 장식하고 지붕을 다채로운 수정으로 씌운다고 치자. 런던 전체에 얼룩덜룩한 돔을 씌운다고 치자. 그 다음에는? 여러분의 상상력은 쇠 잎장식들의 그림자 아래에서 혹은 놀라운 돔의 다양한 빛 안에서 잠자고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여러분의 영혼과 상상과 야망은 전적으로 무한하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여러분은 여전히 스스로 무언가를 하고 싶을 것이다. 여러분은 팔라디오(Palladio)[주석3]나 팩스턴(Paxton)[주석4]에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녹인 모든 금속과 유리를 다 합해도 우리 인간 정신의 야망의 날개를 방해할 만큼의 무게가 되지 못한다.

어떤 양식의 본질은 그것이 오랜 세월 동안 실행되며 모든 목적에 적용된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어떤 양식이 실행 중인 한에서는 개인의 상상력이 달성할 수 있는 것이 그 양식의 범위 내에 있지 새로운 양식의 발명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솔즈베리 대성당을 지은 사람은 고딕 양식을 발명하지 않았어도 명성을 누렸으며 티치아노는 유화를 발명하지 않았어도 베네치아에서 명성을 누렸다. 그러면 일정한 양식 안에서 상상력이 발휘될 여지가 어떤 것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첫째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건축가의 발명력이 발휘되는 주요 분야가 선들, 몰딩들, 덩어리들을 보는 이의 기분을 좋게 하는 비율로 배치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특정의 양식을 선택했을 때, 이와 다른 식으로 발명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 이것을 제대로 하는 데에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다. 우아하게 비율이 잡힌 디자인의 재능은 규칙이나 연구로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건물 정면의 한 층일이지라도 타고난 직관에 의해서만 아름답게 배치될 수 있다. 싼미켈리(Michele Sanmicheli)[주석5], 이니고 존스(Inigo Jones)[주석6], 혹은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주석7]의 설계에서 보이는, 부분들의 가장 단순한 배치와 맞먹는 설계를 자신의 설계에서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를 자랑할 정당한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발명력과 재능을 전제로 하고 묻는 것인데) 특정 건물의 선들을 아름답게 배치했을 때 무엇이 성취된 것인가?

우선, 여러분은 그 성취된 아름다움이 감동적이거나 감상적인 종류라는 점을 말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음악은 여러분을 때로 울게 만들고 때로 웃게 만들 것이다. 음악은 병사에게 용기를 줄 수 있고 사랑에 빠진 연인에게 언어를 줄 수 있으며 애도자에게 위안을 줄 수 있고 즐거운 사람에게 더 많은 즐거움을 줄 수 있으며 독실한 사람에게 더 많은 겸허함을 줄 수 있다. 일군의 선들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그렇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건축물에서 보는 비율이 여러분을 감동시키거나 영감을 주거나 위안을 주지 못하더라도 즐겁게는 해주는가? 음악에서 음표들 사이의 비율은 여러분을 즐겁게 하는 데 필수적이다. 머리에 꽃을 꽂거나 옷에 리본을 두르는 것도 여러분을 감탄시키며 여러분의 행복에 필수적이다. 케익에 박힌 건포도들의 비율이나 과자에 박힌 설탕의 비율에 예민한 관심을 보이는 젊은이들이 있는데, 문의 아키트레이브[주두 위에 놓이는 상인방이나 들보]에 즐거움을 느끼는 젊은이를 본 적이 있는가? 혹은 몇 명을 수용할 수 있느냐와는 다른 각도에서 방의 비율에 관심을 가진 젊은이들은 본 적이 있는가? 만일 런던에서 최고의 비율을 가진 건축물이 줄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하룻저녁에 집중시킬 수 있고 여러분이 이 즐거운 엔터테인먼트 행사에 참가할 티켓을 무료로 발행한다면, 사람들은 이 행사에 참가할 것인가 아니면 드루리 레인[주석8] 팬터마임을 보러 갈 것인가?

여러분은 재능이 뛰어나고 자신의 예술에 매진하더라도 즐거움을 주거나 위안을 주거나 용기를 북돋거나 하지 못할 것이다. 과학도 즐거움을 주거나 위안을 주거나 용기를 북돋거나 하지 못한다. 그러나 과학은 여러분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줄 수 있다. 고결한 사실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고 땅과 공기의 비밀을 열어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건축물에서의 비율은 이런 일을 못 한다. 그저 2 더하기 2는 4이고, 1:2=3:6이라는 것을 가르칠 뿐이다.

그렇다면 건축가인 여러분은 위안을 주지도 못하고 즐겁게 해주지도 못하고 가르쳐주지도 못한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누구에게든 쓸모가 있는가?’라고 물으면 여러분은 ‘항상 비가 내리는 이런 기후에서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이 쓸모는 건물을 짓는 사람으로서의 쓸모이지 선들의 비율과는 무관하다. 우리는 우리를 보호해주는 것으로서의 건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재능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작업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다시 묻는다. 여러분이 설계한 정면에서의 선들의 비율이 병자를 낫게 하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는가? 여러분의 노년에 건축가로서의 성취라는 것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을까? 건축가로서의 여러분에게 누가 고마워할 것인가? 어쩌면 (걱정되는 일이지만) 건축물의 선들의 유령들이 노년의 여러분의 침대 옆에 아무 말 없이 흐릿하게 앉아있을 것이며, 여러분은 자신의 높은 재능의 모든 발현들을 목마른 사람에 준 찬물 한 잔에 대한 기억이 주는 즐거움보다 덜한 즐거움으로 되돌아볼지도 모른다.

여러분 위대한 작품들과 거기에 투입된 건축노동자들에게 준 큰 보상의 경우에는 즐거움을 갖고 뒤돌아보리라고 대답하지도 말고 대답하려고 생각하지도 말라. 나는 여러분이 건축자로서 그렇게 하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반복하건대 나는 여러분의 건물 짓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나는 여러분의 발명력과 상상력이 가진 이점(利點)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건물 짓기를 통해 행하는 좋은 일은 여러분이 고용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 여러분이 하는 일이 아니다. 여러분은 그 혜택주기에 동참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행해야 할 좋은 일은 여러분의 설계 작업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나는 여러분을,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들을 고용함으로써 좋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보다 감정을 표현하는 작곡에 의해서 좋은 일을 하는 음악가들에 비견한다. 바이올린 연주자들을 고용하는 것은 사실은 음악가들이 아니라 대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건축가들은 우리의 재능으로 어떤 좋은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이 하나의 물음을 명확하게 고수하면서 그리고 우리의 비율 시스템에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할 수는 없다는 점을 알게 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가를 말해주시겠는가?

법률가, 의사, 성직자, 과학자, 예술가, 일용노동자, 소상공인―무슨 분야든 그 유용함과 별개로 그와 연관된 어떤 강렬한 즐거움이 있다. 그런데 건축설계에는 그런 즐거움의 여정이 없다. 결론적으로 여러분은 누군가를/여러분 자신을 즐겁게 하거나, 누군가에게/여러분 자신에게 정보를 주거나 누군가를/여러분 자신을 돕거나 하지 못할 것이다. 그저 1:2=3:6이라는 것 말고는 보여주지도 느끼지도 보지도 못하는 상태로 빠진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는 우리를 뭐라 부를 것인가? 인간들? 내 생각에는 아니다. 우리를 부르는 올바른 이름은 분자와 분모이다. 속된 분수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건축의 영혼이 일정한 비율을 이루는 선들에 있다고 보는 이 이론보다 더 나은 것이 있는가?

정신도 건강하려면 모든 면에서 계발되어야 한다는 원칙에서 출발하자. 호기심, 공감력, 감탄하는 능력, 기지(機智) 등 정신에도 많은 능력들이 있다. 작업방식을 선택할 때에는 가능한 한 이 모든 능력들을 한껏 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발현하는 방식이란 각 능력의 대상에 주의깊게 관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공감력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존재들 사이에 있으면서 그들에 대해 생각해야 하고, 감탄 능력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것들 사이에 있으면서 그것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뻔한 것처럼 들린다. 나는 적어도 그러기를 바란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 원칙에 기반을 두어 행동하기를 거부하지 않고 더 나아가 살아있는 존재들과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어떻게 계속 생각할지를 숙고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미앵 대성당 포치의 사진들을 청중에게 보여준다.] 이 단 하나의 입구를 채우는 데 얼마나 많은 공감과 발휘되어 있는가? 주교가 되고 싶지 않았던 성 오노레(St. Honoré)가 한 구석에 샐쭉하게 앉아 있다. 그는 책을 손으로 꽉 껴안고 있으며 주교장을 잡으러 일어나려고 하지도 않는다. 아미앵의 시 장로들이 성오노레를 독려하고 읍의 모든 수도사들이 성오노레가 주교직에 앉지 않으면 어쩔지 난감해한다. 반대쪽에 있는 수도사들 가운데 하나는 성오노레 없이도 잘 될 것라고 태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마침내 성오노레는 주교가 되는 데 동의하고, 주교좌에 앉는다. 그의 무릎에 있던 책은 이제 당당하게 탁자 위에 있으며 그의 마을 부목사 가운데 하나에게 숲에서 유물을 찾는 방법을 알려준다. [손으로 가리키며] 여기가 숲이고 여기가 마을 부목사이며, 여기가 성 빅토리쿠스와 성 겐티아누스의 유해가 있는 무덤들이다.

[주교가 된 이후 성오노레의 일생, 생략]

이 하나의 얕은돋을새김에 담긴 인간에 대한 공감과 관찰의 양을 생각해보라. 이 다양한 형상들을 표현할 수 있기 위해서는 건축가에게 많은 지적 힘과 자연의 관찰이 필요했다.

여러분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이것은 조각이지 건축이 아니라고. 그럼 조각과 건축의 구분 지점이 어디인지 말해주기 바란다. 처음부터 시작해보자. 순수한 건축 작품으로 확실하게 인정되는 것을 보여주겠다. 여러분이 아마도 순수하지 않다고 할, 노트르담 대성당의 팀파눔들 중 하나의 사진 뒤에 그려져 있다. 이 사진을 보라. 웃지 마시라. 이것은 고전적 건축이므로 이를 보고 웃으면 무례한 것이다. 이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의 한 항목에서 가져온 것이다.

‘순수’하지만 별로 좋게 느껴지지 않으므로 여기에 몰딩 몇 개를 넣어보는 게 어떨까? 모두 찬성인 듯하다. 몰딩의 단면도를 설계할 것인가 베낄 것인가? 설계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몰딩의 단면도를 그리는 것보다 그것을 깎아서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그런데 ‘건축은 쉬운 것을 하고 조각은 어려운 것을 한다’는 점이 건축과 조각 사이의 차이의 정의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깎아 만든 몰딩은 아무 것도 재현하지 않으며, 깎아 만든 드레이퍼리는 무언가를 재현한다. 그러나 이것도 또한 건축과 조각 사이의 차이에 대한 설명으로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조각은 의미를 가지는 예술이지만 건축은 의미를 갖지 않는 예술이다‘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양자의 차이를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면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여러분은 아마 우리가 직접 지시하고 정확하게 주문한 대로 깎아내게 하는 모든 장식을 ‘건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세공인의 의지나 어떤 다른 설계자의 감독에 맡길 수밖에 없는 장식들은―특히 건물의 필수적 부분이 아니고 다소 외적이거나 외장형인 경우―‘조각적’인 것으로 간주한다고 답할지 모르겠다.

나는 이 정의를 받아들이면서, 이것은 사실 맨 처음 나온 정의―쉬운 것은 모두 건축이고 어려운 것은 모두 조각이다―의 증폭일 뿐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조각이 놓일 자리의 배치는 설계에서 조각 자체만큼이나 어렵거나 큰 부분은 아니기 때문이다. 피사 대성당 세례당에 있는 니콜로 피사노의 설교단의 사례를 보자. 대리석 기둥몸체에 의해 받쳐진, 패널 몰딩으로 둘러싼 일곱 개의 풍성한 돋을새김. 니콜로의 높은 평판은 패널 몰딩 때문인가 돋을새김 때문인가? 패널 몰딩은 니콜로가 직접 제작한 것이다. 그는 이것조차 보통의 세공인에게 맡기기를 싫어했을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거나 그 안에 어떤 명예가 있어서는 아닐 것이다. 일단 조각을 했으니 그것을 감싸는 윤곽선들은 그에게는 아이들 장난과 같았을 것이다. 기둥몸체의 지름과 주두의 높이의 결정은 몇 분이면 되는 문제였다. 그의 일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Crucifixion)와 <세례>(Baptism)을 조각하는 것이었다.

피렌체의 오르싼미켈레 성당에 있는 오르카냐의 감실(龕室). 풍성하고 다채로운 얕은돋을새김이 패널 몰딩에 감싸여있고 모자이크된 기둥몸체들이 그것을 받치고 있으며 잎장식이 있는 아치들이 캐노피를 받치고 있다. 오르카냐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가 그의 명성을 잎장식에 맡긴다고 했을까, 아니면 자신의 영혼의 자부심을 패널링에 둔다고 했을까? 아니다, 그는 죽어가는 성모의 침상 주위에 고개를 숙이고 둘러서 있는 형상들에 있다고 말할 것이다.

[마지막 사례] 아미앵 대성당의 입구에 설계된 행렬은 대가의 손에 의한 것이다. 여기가 대가의 사유의 중심이다. 이 중심에 맞추어 아치가 굴곡을 이루고 피너클이 솟아오른다. 이 일을 했고 돌에 인간의 표정과 행동을 부여할 수 있으면 나머지 모두―늑재, 벽감, 잎장식, 기둥―는 단지 그의 손 장난감들이요 그의 구상의 액세서리들일 뿐이리라. 여러분이 이것을 하는 재능을 일단 얻게 되 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발명력이 가능하게 하는 한) 여름 비가 내린 이후 시냇물들에서 구름이 솟아오르듯 영국 전역에 성당들을 흩뿌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조각가들은 현재 성당을 설계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고 여러분은 아마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는 단지, 우리가 건축을 너무나도 지루하게 만들어서 사람들이 흥미를 느낄 수가 없고 따라서 우리가 조각가들의 높은 지식에 건물 짓기의 초라하고 평범한 지식을 추가하려고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여러분은 조각을 건물 짓기로부터 분리했고 양자의 힘을 박탈한 셈이다. 조각가가 연속적인 작업을 펼칠 공간이 없으면, 건축가인 여러분이 여러분의 작업을 기계적 작업의 연속으로 환원함으로써 잃게 되는 만큼 많은 것을 잃기 때문이다. 건축가와 조각가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집단에 속하고 또 그렇게 속해야 한다. 화가의 경우에 보이는, 때로는 작은 그림을 그리고 때로는 궁전 회랑의 프레스코화를 그리는 작업상의 차이와 같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결론은 이렇다. 상상력을 비롯한 영혼의 능력들을 온전하게 발휘하게 하려면 여러분은 과거의 위대한 건축가들이 했던 것처럼 해야 한다. 즉 여러분 자신이 조각가가 되어야 한다. 페이디아스, 미켈란젤로, 오르카냐, 피사노, 조토—이 가운데 누가 정을 사용할 수 없는 사람이던가? 여러분은 ‘어려운 일이다, 불가능하다’라고 말할 것이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위대한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여러분은 조각 없이 건물 짓기를 연구하는 한 위대한 것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위대한 것을 만나도록 해주고 싶고, 여러분이 그 만나는 길을 찾았으면 한다. 완전한 조각의 세련된 예술이 항상 여러분에게 요구된다는 마음으로, 행해야 할 과제에서 움츠러들지 말라. 건축과 조각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지만, 건축적 방식의 조각이 따로 있다. 이는 대부분의 경우 비교적 쉬운 것이다. 적어도 돌을 다루는 데서 현재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큰 잘못은, 모든 작품이 과도하게 세련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책의 모든 삽화를 라파엘로의 삽화처럼 세련되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여러분은 존 리치(John Leech)[주석9]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만큼 드로잉을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로 직선을 긋거나 콤파스로 원을 그리는 일만 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각을 디자인하는 여러분의 힘과 관련해서도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은 페이디아스처럼 조각할 수 없다고 느낄 것이다. 그래서 조각은 아예 하지 않고 몰딩만 도안할 것이다. 이렇게 현대에 특히 가치 있는 모든 중급의 힘이, 수천 명이 획득할 수 있고 수만 명이 도전해 볼 수 있는 저 대중적인 표현의 힘이 돌과 관련해서는 사라진 상태이다. 비록 잉크와 펜으로 글을 쓰는 데서는 중급의 힘이 가장 중요한 엔진들이 되었고 현대 문명의 가장 바람직한 호사 가운데 하나가 되었지만 말이다.

건축적 방식의 조각은 한편으로 완벽한 조각과 구별되고 다른 한편으로 단순한 기하학적 장식과 구분된다.

멀리서 보는 세공품은 매우 정밀하게 조각할 수 있어도 저 위에 놓이는 순간 소용이 없게 된다. 그런데 아름다움이 멀리 물러남으로써 사라지는 반면에 흠들도 사라진다. 거리(距離)의 자연적 귀결인 이 신비와 혼란은 최고의 솜씨를 헛되게 만들기도 하지만 종종은 최악의 오류를 별 것 아닌 것으로 만들기도 할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깊은 절개나 거친 모서리가 어떤 곳들에서는 결코 바라지 못했던 놀랍고도 진실한 표현 효과를 낳을 것이다. 작품에 무언가가 없는데도 거리만으로 이렇게 된다는 말이 아니다. 만일 그 안에 생명력(life)이 있다면, 거리가 처리과정의 결함들을 완화시킴으로써 그 생명력을 더 지각 가능하고 더 강력하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특이한 이점을 얻게 된다. 즉 상상이 마음껏 발휘되게 할 수 있고 원하는 표현을 위해―혹시 잘못 두드리더라도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는 알기에―세게 두드릴 수 있는 것이다. 손을 대기만 하면 자연이 도울 것이며, 그림자와 햇빛이 변할 때마다 여러분의 상상의 새로운 국면들이 드러날 것이다.

런데 건축적 방식의 조각에 속하는 것은 이러한 불완전함의 특권만이 아니다. 상상력이라는 진정한 특권이 있다. 이는 더 완성된 작품―이것을 나는 구분을 위해서 ‘가구 조각’(furniture sculpture)이라고 부르겠다―에 부여되는 모든 것을 훨씬 능가한다. (가구 조각이란 방들을 장식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이동할 수 있는 조각을 말한다.)

가구 조각은 보는 이가 보통 조용하거나 평범한 상태에서 접하게 된다. 그는 그것을 고결한 것과 연관된 것으로 보기보다 사치스러운 것과 연관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의 호기심보다는 안락함에 호소하는 상황에서 본다. 식탁 주변에서 하인들이 들락날락 하는 가운데 보았을 때 애처로운 느낌을 주게 되는 조각상은 그 안에 강한 파토스를 가졌음에 틀림없으리라. 그리고 응접실의 대화 가운데 경외스러운 느낌을 주어야 할 조각상은 전적으로 그 안에 경외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으리라. 그러나 건축물의 조각을 보는 이는 이미 흥분되고 상상력에 찬 상태에서 작품을 접하게 된다. 그는 포치의 조각을 보기 전에 낮은 거리를 저 위에서 내려다보는 성당 벽에 큰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신비에 대한 그의 사랑이 클로이스터의 고요함과 음영에 의해 발동된 상황에서 볼팅(vaulting, 아치형 천장) 위의 양각들을 판독하게 된다. 그래서 그가 여러분이 한 것들을 일단 관찰하기 시작하면, 그는 여러분이 그의 이 상상력에 찬 기분에 맞추는 것보다 더 나은 것, 더 친절한 것을 여러분에게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즉 여러분이 (주변 장면의 신비와 장엄함이 유발한) 공포감을 더 촉진하거나 희한한 것들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것보다 더 나은 것, 더 친절한 것을 여러분에게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이 형태들을 덜 선명한 채로 남겨두거나 기이한 공상을 그로테스크한 형태나 음영으로 구현하거나 한 것이 대체로 관찰자의 기분에 상응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여러분의 결함들을 발견하는 데 자신의 판단력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기꺼이 여러분이 의미한 바를 돕는 데 자신의 상상을 사용할 것이다.

상상력과 감정이 강하게 촉발되면 기이한 것들을 동반할 뿐만 아니라 고요한 시간에 그야말로 미지의 즐거움을 갖고 미세한 것들도 들여다보게 할 것이다. 감정이 강하게 촉발되면 가시적인 대상들의 모든 세부들이 여러분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기묘한 강렬함과 집요함을 가지고 제시될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정신을 재촉하고 눈을 압박할 것이다. 상상력이 강하게 자극될 때마다 감각이 이 상태에 어느정도 들어선다. 다른 때에는 사소한 것들이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위엄 혹은 의미심장성을 띠는 것이다. 열띤 자극에 의해 활성화된 주의력은 세부의 가장 미세한 상황들과 작품에 구현된 의도의 가장 희미한 흔적들에 집중된다. 그래서 다른 경우라면 조각 작품에서 다소 저급하고 외적인 것으로 느껴질 것, 그리고 완벽한 취향이나 비판적 판단에는 틀림없이 불쾌하게 느껴질 것이 이 각성된 상상력의 탐구성, 주의력과 만나게 되면 기분 좋은 것이 되고 심지어 고결해진다. 이는 모두 여러분에게 유리한 것이다. 여러분의 조각 작업의 시초에는 단순한 형태들의 해부학적 구조나 고결한 덩어리들의 흐름을 완벽하게 하는 것보다 의상이나 성격의 세밀한 상황들을 모방하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세 가지 점, 즉 ① 여러분이 완벽하게 할 수 없는 미점(美點), 여러분이 획득할 수 없는 단순성은 혹시 그것을 성취할 수 있더라도 열정적인 상상의 성급한 호기심에 호소하는 데에서는 대체로 소용이 없다는 점, 그러나 ② 여러분의 앎에는 주어지지 않을 공감이 여러분의 순진함에는 부여되리라는 점, 그리고 ③ 일반적인 관찰자의 정신은 해부학적 구조의 정확함이나 제스처의 올바름에 의해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지라도 여러분이 머리카락을 조각하고 의상의 패턴을 조각할 때 즐겁게 공명하여 여러분을 좇을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격려가 될 것이다.

더 나아가보자. 큰 규모의 건축물의 특성들이 연합하여 상상의 힘을 촉발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장식이 종속되어야 할 건축적 법칙들이 그 장식의 창의력을 자극한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조각 작품을 그 꼭대기에 새길 모든 크로켓, 장식해넣을 모든 잎장식들이 보는 이의 상상에 예쁜 사물들로서만이 아니라 문제적 사물로서도 제시된다. 거기에는 여러분이 보여주고 싶은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여러분이 충족해야 했던 필요도 담겨 있음을 여러분은 즉각적으로 안다. 이러저러한 공간을 어떤 가능한 방식으로 유기적 형태로 채울 것인가, 아니면 이러저러한 돋을새김이나 이랑진 부분을 어떻게 생명력(활력)의 이해 가능한 이미지로 전환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즉시 즐거움의 문제인 동시에 감탄의 문제가 된다. 추한 난쟁이와 못생긴 도깨비가 구석에 모이기만 하면 되거나 웅크려 가치발을 지탱하기만 하면 된다면 형태•제스처•특성에서의 완벽함이라는 통상적인 조건들은 기꺼이 생략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종류의 작업에서라면 부분들의 완성에 필요할 기술이 건축 조각에서는 결핍되더라도 즉시 용서받을 것이다. 여러분이 거칠게 구현한 것을 창의력 있게 배열해서 손의 투박함을 기지의 명민함으로 보완했다면 말이다.

지금까지는 상상력이 펼쳐지기에 유리한 건축의 상황만을 고찰했다. 더 중요한 점은 상상의 모든 대상들이 차지하는 위치인 듯하다.

상상력은 그것이 다루는 재료의 양에 비례하여 왕성할 것이 틀림없으므로 우리가 보는 것의 범위를 넓히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의 풍부함도 그에 비례하여 증가한다. 그렇다면, 건축이 허용하는 소재에서 여러분의 상상에 열릴 장이 어떨지 생각해보라. 거의 모든 다른 예술은 그 소재가 엄하게 한정되어 있다. 가령 풍경화가는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들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하고, 역사화가는 야생의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들로부터 도움을 이보다 덜 얻으며, 순수 조각가는 일상적인 삶으로부터의 도움을 이보다 훨씬 덜 얻는다. 눈으로 보는 것이든 구상하는 것이든 건축에 유용하지 않을 것 혹은 그에 대한 관심이 건축에 이점이 되도록 자극되지 않을 것이 있는가? 천사들에 대한 비전에서부터 중요성이 가장 덜한 노는 아이의 제스처에 이르기까지, 신성(神性)의 어떤 측면이든 인간성의 어떤 측면이든 건축가에 의해 과감하게 채택될 수 있다. 너무 방대하거나 미세해서 다루지 못하거나 이용하지 못할 동물은 동물계 어디에도 없다. 사자와 악어가 기둥몸체에서 웅크리고 있을 수 있고, 나방과 꿀벌이 꽃들 위에서 햇볕을 쬘 수 있으며 새끼사슴이 뛰고 달팽이가 기어가며 비둘기가 가슴털을 고르고 솔개가 남쪽을 향해 날개를 펼 것이다. 식물계도 건축가를 위해 개화하고 덩굴손을 뻗어간다. 잎들이 몸을 떨어 여러분은 대리석의 눈[雪] 아래에서 조용히 있기를 잎들에게 명하며, 땅이 악처럼 내보내는 가시와 엉겅퀴도 여러분에게는 가장 친절한 하인들이다. 죽어가는 꽃잎이나 시들어가는 덩굴손 가운데 너무나도 나약해서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은 없다. 개화의 오만도 왕의 지위를 내려놓고 여러분의 손에서 희미한 불멸성을 받아들인다. 보통의 삶에서 여러분의 손길에 의해 고결해지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저열한 것이 있는가? 보통의 사물에서 여러분의 손길에 의해 고결해지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사소한 것이 있는가? 생명이 있는 것 가운데 여러분에게 가르침 혹은 선물을 주지 않는 것이 없듯이, 생명이 없는 것 가운데에도 여러분에게 가르침 혹은 선물을 주지 않는 것은 없다. 깃털의 힘이나 잎의 연함을 지켜보는 데 싫증이 나면 거친 강변이나 거리의 가장 붐비는 시장들로 걸어가 볼 수도 있다. 잘린 끈조각이라도 꼬아서 완벽한 몰딩으로 만들지 못할 것은 없으며, 내다 버린 돗자리 조각이나 부서진 바구니 가운데 줄무늬나 주두로 만들지 못할 것도 없다. 그렇다. 모래를 모으고 밟고 있는 돌을 깬다면 그 조각들 가운데 거의 보이지 않는 것들에서도 여러분의 볼팅의 별모양 트레이서리들에서 어엿하게 한 자리 차지할 형태들을 발견할 것이다. 산 정상에 요새를 세우고 도시에 탑을 지을 수 있는 여러분은 이렇듯 타고 남은 재에도 아름다움을 부여할 수 있고 먼지도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다.

이렇게 여러분의 예술이 이 모든 재료를 여러분에게 제시한다는 점에서 여러분은 이미 즐거워할 것이 많다. 그러나 즐거워할 것이 더 있다. 이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제공되기는 하지만 해부되거나 분석될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공감의 대상으로서, 따라서 상상력의 도덕적 부분을 발현하기 위해서 제공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線)에만 국한한다면 우리는 자연 연구자를 부러워할 이유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는 사실들에 능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의 사실들로부터 생기는 감정들에 능통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부러워할 것이 거의 없게 된다. 가령 대리석 덩어리를 보고 자연 연구자는 그 덩어리의 자주색이 어느 정도로 철분으로 인한 것이고 그 흰색이 어느 정도로 산화 마그네슘으로 인한 것인지 즉각적으로 숙고하는 데 돌입해야 한다. 그는 대리석 조각을 부수며 하루가 저물 때에는 그의 도가니에 돌가루 조금과 원소들에 대한 이론에 추가된 일정한 데이터 말고는 남는 것이 없게 된다. 그러나 여러분은 공감하기 위해서 대리석에 접근하며 그 아름다움에 즐거워한다. 절개를 좀 하지만 그 맥을 더 완전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하루의 일이 끝날 때 여러분은 기쁨과 만족감을 갖고 대리석 기둥을 대리석으로서 완벽한 상태에 둔다. 돌 대신에 동물들을 지켜볼 때에도 여러분은 마찬가지 방식으로 자연 연구자와 다르다. 그는 아마도 (만일 그가 상냥한 사람이라면) 그의 주위에 살아있는 동물들이 많은 것에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업의 주된 부분은 깃털을 세고 조직을 분리하고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의 작업은 항상 살아있는 존재와 관련된다. 그 존재의 삶에서 여러분이 포착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의 생명력과 행동방식들이다. 그것의 뼈에 세포가 몇 개 있는지, 그것의 깃털에 가는 끈들이 몇 개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그것의 도덕적 성격과 그것이 행동하는 방식이다. 이는 여러분의 상상력이 건강하면 맨 먼저 포착하게 될 바로 그것이며 여러분의 정(chisel)이 강건하다면 맨 먼저 깎아 만들 바로 그것이다. 여러분은 폭풍의 기세를 독수리들에 담아 넣고 영주의 위엄을 사자들에게 담아넣으며 경계하는 두려움을 새끼사슴들에게 담아 넣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새끼사슴들과 계속적으로 공감해야 하고 사자와 손과 장갑의 관계가 되어야 하며, 모든 솔개들과 손과 발톱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하등동물들과 공감한다고 해서 여러분을 낮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등동물들과 공감하지 못하면 고등한 존재들과도 제대로 공감하지 못한다. 여러분은 여왕들, 왕들, 순교자들, 천사들 등 고등한 존재들과도 공감해야 한다.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박한 인류의 모든 욕구 및 방식들과 공감해야 한다. 거리에서 여러분을 서둘러 지나치는 얼굴 가운데 인상적이지 않은 얼굴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그 인상의 깊이를 측량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모든 역사가 여러분에게 열려있고, 인간의 과거의 운명들이 시사하는 모든 높은 사상들과 꿈들이 여러분에게 열려 있다. 모든 요정의 땅이 여러분에게 열려 있다. 숲에 출몰했거나 언덕 위에 힐긋 나타났던 비전 가운데 어떻게 그것이 인간들의 마음에 들어왔고 여전히 그 마음을 건들 수 있는지를 이해하도록 권하지 않는 비전은 없다. 그리고 모든 낙원이 여러분에게 열려 있다. 그리고 낙원의 작업도 여러분에게 열려있다. 이 모든 것을 영속적이고 매력적인 진실의 형태로 여러분의 동포들의 눈앞에 가져올 때 여러분은 천사들의 무리를 상상할 뿐만이 아니라 천사들의 일에 합류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측면에서 여러분의 작업에 얼마나 독특한 중요성과 책임이 주어져 있는지를 명심하라. 그 영속성과 그것이 향해져 있는 다중을 생각해볼 때 말이다. 우리는 종종 현명한 사람들 덕분에, 소수가 듣고 듣자마자 잊힐 단어들에 때로 부여될 수 있는 책임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여러분의 단어들[건축물들]은 여러분이 잘 짓는다면 그 어떤 것도 소수가 듣지 않을 것이며, 500-600년 동안은 잊히지도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지나가는 모든 이에게 말할 것이며, 저 모든 조그만 공감들, 기발한 공상, 돌로 하는 농담들, 변덕 속에서의 문제 해결은 여러분이 사라진 후에도 수많은 다중의 정신을 차례차례로 사로잡을 것이다. 여러분은 책의 저자들처럼 듣기를 청할 필요가 없으며 망각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그저 충분히 크게 짓고, 충분히 대담하게 깎으라. 그러면 모든 세상이 여러분의 말을 들을 것이다. 그들은 볼 수밖에 없다.

내 의도는 이런 생각으로 여러분을 두렵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에게 아주 많은 목격자들과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결코 익살을 부리지 않을 것이고 어떤 것을 즐겁게 하지 않거나 경쾌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반대로 나는 처음부터 여러분의 이러한 예술을, 특히 그것이 여러분의 성격의 전체를 담을 여지가 있기 때문에, 청했다. 만일 익살이 여러분 속에 있다면 익살을 부리라. 수학적 재능이 여러분에게 있다면 문제를 설정하고 원하는 만큼 진지하게 해를 찾으라.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작품이 쉽고 행복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라. 그렇지 않다면 다른 누구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여러분의 충동들에 몸을 맡길 때 하나의 고결한 충동이 중심이 되어 그 충동들을 이끌도록 하라. 3중의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① 여러분이 행하는 예술을 사랑하라. ② 여러분의 창작활동을 사랑하라. ③ 여러분이 자신의 작업을 바치는 존재들을 사랑하라.

첫째로 자신이 행하는 예술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 말고 다른 동기가 여러분의 머리에서 주된 것이 되면 그 순간 여러분의 예술은 끝난 것이다. 돈. 명성, 지위를 욕망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여러분은 이 셋을 욕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러분은 이 셋을 사랑할 수 있고, 열정적으로 탐할 수 있다. 그러나 맨 앞에 내세워서 탐하고 사랑해서는 안 된다. 강한 열정과 상상력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무언가를 좋아하면 많이 좋아하게 마련이다. 문제는 첫째냐, 둘째냐이다. 예술이 여러분을 이끄는가, 이득이 여러분을 이끄는가? 여러분은 돈 버는 것을 극히 좋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일로 500 파운드를 덜 벌 것이냐 아니면 여러분의 건물 짓기를 망칠 것이냐라는 물음에 이르게 되고, 건물 짓기를 망치는 쪽을 택하게 되면, 여러분은 끝난 것이다. 여러분은 귀뚜라미가 크림을 갈망하듯이 명성을 갈망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을 즐겁게 할 것인가 아니면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대로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이르고 둘 다 할 수는 없어서 대중을 즐겁게 하는 쪽을 택하면 여러분은 끝난 것이다. 여러분에게 희망은 없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지나가는 사람의 일별을 받을 가치가 없을 것이다. 이 시금석은 절대적이고 불가피하다. 예술이 여러분에게 첫째가는 것인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술가이다. 여러분은 돈을 번 후에 구두쇠가 될 수도 있고 고리대금업자가 될 수도 있다. 명성을 얻은 후에 시기심을 갖게 되고 오만함을 갖게 되고 저열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도 그런 여러분이 여러분의 작업을 망치려하지 않는 한 여러분은 예술가이다. 반면에 돈이나 명성이 여러분에게 첫째가는 것이라면, 여러분이 돈으로 관대하게 베풀고 돈을 근사하게 쓰며 자신의 평판을 매우 우아하게 누리는 사람일지라도, 또한 여러분의 아랫사람들에게 매우 공손하며 여러분의 윗사람들에게 매우 마음에 드는 사람일지라도, 여러분은 예술가가 아니다. 여러분은 기계공이고 허드렛일 하는 사람이다.

둘째로 자신의 창작활동을 사랑해야 한다. 여러분이 선택한 주제에 여러분이 투여하는 감정의 강렬함에 그 주제의 성격에 대한 여러분의 인식의 깊이와 정당함이 전적으로 비례할 것이기 때문이다. 감정의 이 깊이는 여러분이 그 감정을 이러저러한 것에 관련시킬 때 즉각적으로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올바르게 느끼려고 노력하는 전반적 습관의 결과이다. 이것을 하도록 돕는 수천 개의 다양한 수단 가운데 내가 특별하게 여러분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은 ‘사소하게 신경 쓰이는 것들을 멀리 하라’이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안달하지 말고 머리를 사소한 분함들과 욕망들로 채우지 말라. 나는 막, 여러분이 위대한 예술가이면서도 구두쇠이고 시기심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일들에 골치가 아플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골치 아픈 것들이 하루 종일 여러분의 머릿속에 있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이 돈을 모으는 습관이 생겼을 수도 있고 경쟁자에 대해서 부당하게 말하고 싶은 유혹에 굴복할 수도 있다. 이런 것으로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힘을 감소시키고 여러분의 시야를 흐릴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무의식적 습관들이나 일시적인 실추보다 훨씬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은 사소한 감정들의 항상성이다. 아무개가 여러분의 작품을 과연 좋아할 것인지 걱정하는 것, 조수에게 시킨 일을 조수가 잘 할지에 대한 걱정 등. 그 자체로 잘못된 감정이나 걱정이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의 상상력의 온전한 발휘에 부적절하고 그것과 전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감정이나 걱정이 문제이다.

따라서 눈을 뜨고 마음의 평정을 가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아무개가 여러분의 작품을 좋아할까가 아니다. 저기 저 새가 둥지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혹은 저 방랑아 아이가 거리의 구석에서 어떻게 공기놀이를 하고 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여러분이 여러분의 관심사에서 새들과 아이들의 관심사로 이동하려면 새들과 아이들을 사랑하고 지켜보는 습관을 오래 전부터 들였어야 한다. 그래서 마침내 여러분 자신을 잊고 여러분 자신을 벗어나서 세상의 평온 속에서, 혹은 세상의 떠들석함 속에서 살고 있어야 한다. 여러분에게 어떤 고결한 감정을 가져다줄 수 있는 영향력에 자신을 맡기는 것을 시간낭비라고 생각하지 말라. 일찍 일어나서 항상 일출을 보고 여명에 구름들이 부서지는 모습을 보라. 구름의 움직임과 아침이 입는 자줏빛 옷에 대한 기억이 여러분에게 남아있으면 여러분은 자신의 조각상의 드레이퍼리들을 보통 때와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구현할 것이다. 항상 나라의 봄철에 살라. 잎눈들이 트고 어린잎들이 햇빛에 낮게 숨쉬고 첫 비에 경이로워하는 모습을 보기 전에는 잎 형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분은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 형태에 들어있는 제스처의 모든 고결함과 특징을 찾는 습관을 들이라. 그리고 기억하라. 최고의 고결함은 보통 나이든 이들,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에게 있다는 점을. 여러분은 마침내, 여러분에게 최고의 연구 대상은 군인의 강한 팔이 아니요 젊은 미인의 웃음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들을 보라. 그들을 경건하게 보라. 그러나 감내가 힘보다 고결하며, 인내가 아름다움보다 고결함을 확신하라. 교회 입구에서 천사들의 날개 사이에 있기에 가장 알맞은 얼굴들을 여러분은 화려한 옷들이 있는 고교회(the high church) 신도석들이 아니라 과부의 상복이 있는 교회의 자유석들에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러분이 자신의 작업을 바치는 존재들을, 여러분의 동포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들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게 될 뿐만이 아니라. 인간을 바라볼 때마다 표정이 아니라 외관에만 주의를 기울이기 쉬울 것이다. 우느라고 움푹 들어간 검은 눈과 세상의 역경이 에워싼 저 굳은 얼굴들의 창백함에 들어있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해줄 것은, 그 얼굴들이 인내 속에서 황혼 속에 죽어가는 횃불처럼 빛나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줄 것은 오직 친절함과 다정함이다. 그러나 친절하기도 해야 할 필요가 있게 만드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여러분의 예술의 본성 바로 그것에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이유가 들어있다. 크게 짓고, 고결한 조각(sculpture)을 추가하고자 하면 협동적 작업이 되어야 한다. 여러분은 혼자서 성당 전체를 지을 수 없다. 그 몇 안 되는 단순한 부분들만을 조각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럴 경우 여러분 자신의 작업이 주변의 열등한 작업과 한데 엮여 창피를 당하지 않으려면 동료 설계자들의 힘을 서로 상응할 정도로 높여야 한다. 여러분에게 재능이 있다면 여러분 자신이 설계한 건물 짓기에서 앞장서는 위치에 설 것이다. 여러분은 그 포치의 장식들을 조각하고 그 배치를 이끌 것이다. 그러나 그 세부의 차후의 모든 진행에 대해서는 다른 이들의 실행력과 발명력에 맡겨야 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꾼들이 가진 모든 능력들을 억눌러서 여러분에게 종속시킬 수도 있고, 여러분과 경합할 수 있는 힘들을 발견하는 것을 즐거워하며 한 사람, 두 사람 여러분의 상상과의 동료관계로 그리고 여러분의 명성과의 연합관계로 이끄는 것을 즐거워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냐는 여러분에게 달려있다.

여러분이 전자를 행한다면, 여러분은 망한다. 자신의 예술과 창작 작업을 여러분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신의 번영만을 추구하고 자신의 솜씨만을 생각하고 싶어한다는 것이, 불길하게도 그리고 분명히 거기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질투심이 전혀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질투심이 전혀 없는 것은 인간에게는 드문 일이다. 여러분이 어느 날 아직 경험도 없고 입증도 안 된 어떤 젊은이가 여러분으로서는 몇 년 동안 훈련을 해도 도달하지 못한 손놀림을 그의 작품에 가하는 것을 보고 안 좋은 마음으로 귀가하더라도 여러분은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의 질투심이 여러분을 정복해서는 안 된다. 건물 짓기에 대한 사랑이 여러분의 친절한 마음의 도움을 받아서 정복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높거나 어려운 기준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여러분이 단지 이타적인 관용의 마음에서 여러분의 탁월함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친절함의 도움을 받아서 건물 짓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여러분의 탁월함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보다 건물을 더 잘 장식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라도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리고 첫째로 그의 정 아래에서 건물이 더 아름답게 올라가는 것을 보는 데서 느끼는 기쁨에서, 둘째로 친절하고 정당하게 행동했다는 생각에서 위안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여러분이 친절함과 정당함을 첫째 동기로 삼을 만큼 충분히 도덕적으로 강하다면 더 좋을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그것을 아예 친절함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저 엄격한 정당함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그런 도움이 서로에게 빚이며 아랫사람에게서 우월성이나 능력을 알아보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거나 돕지 않는 사람은 친절을 베풀지 않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해를 입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 동기가 무엇이든 그 일을 하도록 하라. 그리고 여러분의 예술이 ① 다른 예술들보다 더 넓은 영역을 포함하고 ② 다른 예술보다 더 방대한 다중에게로 향한다는 생각, 그리하여 모든 다른 것들과 더 심오하고 거룩한 동지관계를 맺는다는 생각에서 기쁨을 취하라. 예술가는 자신의 학생이 완벽할 때 자신의 곁을 떠나서 그의 고유한 (아마도 자신과 맞서는) 솜씨를 천명하도록 해야 한다. 과학자들은 발견의 우선성을 두고 서로 씨름하며 질투 어린 조급함의 고통에서 자신의 고독한 연구를 수행한다. 여러분만이 친절함, 필요, 동등함에 의해서 노고의 우애관계로 초청받는다. 그리하여 우리의 고대의 도시들의 주택 지붕들 위로 솟은 저 아득하고 거대한 대건축물들에는 우리가 상상을 통해 그토록 흔하게 부여해왔던 것보다 더 심오하고 진실한 의미가 들어있었다(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 사람들은 피너클들이 하늘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물론 돋아나는 모든 나무도 그렇고. 노래하며 솟아오르는 모든 새도 그렇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아일이 경배하기에 좋다고 말한다. 물론 산 속의 모든 골짜기도 그렇고 거친 해변도 그렇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점이 뚜렷하게 다르고 논박 불가능한 영광으로서 사람들에게 존재한다. 그들의 강력한 벽들은 약한 가운데 서로 사랑하고 돕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지어졌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이다. 볼팅을 이루는 돌처럼 서로 엮이는 그들의 힘은 인간의 협력이라는 더 강한 아치들 위에 세워져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낮은 혹은 높은 피너클들처럼 서로 다른 그들의 품위는 인간 영혼의 더 달콤한 대칭관계에 그 리듬과 완벽함을 빚지고 있다는 점이다.

[주석]

  1. 라이언즈인(Lyon’s Inn)은 영국의 4대 법조원(Inns of Court) 가운데 하나인 이너 템플(Inner Temple)에 딸린 기관인 ‘Inns of Chancery’ 가운데 하나로서, 1863년에 해체되고 그 건물이 철거되었다. ‘Inns of Chancery’는 원래 법조원들에 딸린 건물들과 기관들로서 형평법원(chancery)의 서기들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는데, 나중에 성격이 변하여 사무변호사들(solicitors)의 사무실과 편의시설인 동시에 소송변호사들(barristers)을 양성하는 연수원이 되었다. 이 소송변호사 연수 업무는 1642년 사라졌으며 사무변호사들을 위한 협회와 사무실들로 전용(專用)되었다.
  2. 러스킨은 일반적으로 새로운 양식의 발명을 추천하지 않는다. 한 개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3. 팔라디오(Andrea Palladio, 1508–1580)는 이탈리아 르네쌍스 시대에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활동한 건축가이다.
  4. 존 팩스턴(Sir Joseph Paxton, 1803–1865)는 영국의 원예가, 건축가, 엔지니어이자 의회 의원으로서 수정궁(the Crystal Palace)을 설계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수정궁은 1851년 만국박람회가 열린 곳이다.
  5. 싼미켈리(1484-1559)는 이탈리아의 건축가이자 도시계획가로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시민이었다.
  6. 이니고 존스(1573–1652)는 영국의 건축가로서 비르투비우스[고대 로마의 건축가]의 비율 및 대칭 규칙들을 처음으로 자신의 건물들에 도입했다.
  7. 크리스토퍼 렌(1632-1723)은 영국의 건축가, 천문학자, 수학자이다. 바로크 양식의 건축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의 대표작은 세인트 폴 대성당이다.
  8. 런던의 드루리 레인(Drury lane)에는 유명한 극장들이 있다.
  9. 존 리치(1817–1864)는 영국의 희화화가이자 삽화가이다.

 




건축의 일곱 등불

 


  • 저자  :  정남영
  • 분류 :  번역서 해설
  • 설명 : 최근에 부북스에서 출간된 번역서 『건축의 일곱 등불』(존 러스킨 지음)에 붙인 해설 가운데 1절과 4절을 여기 올린다. 여기서 해설자는 번역서의 내용을 직접 다룬 부분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틀을 제시한다.  주석 번호는 책에서의 주석번호이며, 2절과 3절의 주석들인 21번부터 71번이 비어 있다. 해설 전체는 총 5절로 되어 있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을 한겨레신문(2024년 9월 20일자)에서 볼 수 있다.

I. 러스킨과 근대

나의 러스킨 공부는 크게 내세울 것이 없다. 영국 소설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가르친 나는 문학 연구보다는 예술 연구로 알려져 있는 러스킨에게 처음에는 큰 관심을 갖지 못했다. 그러다 톰슨(E. P. Thompson)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01를 읽으면서 모리스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인 그의 존재를 새삼 인지하게 되어 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2000년대 후반에는 『베네치아의 돌들』(The Stones of Venice) 중 고딕 건축의 성격을 다룬 부분—러스킨이 모리스에게 영감을 준 바로 그 부분—을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으나 더 나아간 공부를 할 시간을 좀처럼 내지 못하다가, 본서의 번역이 시작되고 해설을 맡으면서 비로소 좀더 공부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러스킨을 잘 안다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공부이지만 말이다. 나는 영국의 소설가 디킨즈(Charles Dickens)와 로런스(D. H. Lawrence)에 공부를 집중했고, 영문학 연구와 아울러 한국 문학작품들에 대한 평론 활동을 했으며, 이와 함께 철학 분야로 공부를 확대하여 맑스, 들뢰즈·과타리, 네그리, 스피노자, 니체, 푸코 등을 읽었다. 비교적 최근에 들어와서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운동인 커먼즈(Commons) 운동의 진전과 확대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이 과정에서 ‘커먼즈와 집’이라는 주제를 중요한 문제의식으로서 가지게 되었다. 이 모든 초점은 근대 극복 혹은 대안근대로의 이행에 맞추어져 있었다. 나는 러스킨의 저작들을 시간이 허용하는 만큼 읽으면서 나의 이러한 공부나 관심사가 러스킨에게 들어있는 어떤 핵심적인 사상과 연결되는 것을 느꼈다. 이 ‘핵심적인 사상’이 바로 내가 이 해설에서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바이다.

이 해설은 당연히 건축 분야의 전문가들(건축가들이나 건축비평가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일반 대중을 향한 것이다. 예술 및 건축 비평가로서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러스킨의,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책에 대한 해설이 건축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새삼 필요할 리가 별로 없을 터이고, 더군다나 나는 건축 분야의 비전문가이므로 건축 전문가들을 위해 그럴듯한 해설을 쓴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러스킨 자신이 당시 영국 건축계의 주류와 서로 맞지 않았다.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많은 건축가들과 건축 작가들은 러스킨을 경멸하거나 러스킨에게 분노하거나 아니면 둘 다였다. 러스킨은 실제적이지 않거나 미친 것으로 간주되었다.02

건축가들은 일반적으로 이 책에 매우 경탄하는 사람들 축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책의 범위를 종종 오해했다. 러스킨의 부수적 의견들 가운데 다수는 공상적이거나 의심스러웠다. 그는 건축가들의 견해를 무마하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고 그가 건축계 앞에 세우는 이상들은 준엄했다.03

물론 결과적으로 러스킨의 작업이 건축예술의 품격을 천명하고 평판을 높이는 데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건축계의 주류와의 차이가 좁혀진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당대 건축계와 러스킨의 차이는 특정 전문분야에서 일어나게 마련인 견해의 차이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한 태도의 근본적인 차이이기도 했던 것이다.

「삶과 그 예술의 신비」(“Mystery of Life and its Arts”)에서 러스킨은 자신의 삶을 실망과 좌절의 연속으로 개관한다. 그는 스무 살에서 서른 살까지 그의 “삶의 가장 강렬한 10년” 동안, 레이놀즈(Joshua Reynolds) 이후 영국에서 가장 훌륭한 화가라고 생각하는 터너(J. M. W. Turner)의 예술가로서의 우수성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더군다나 터너는 이 노력의 “피상적 효과가 가시화되기도 전”에 사망했다.04 러스킨은 탁월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가 헛되이 창작하다 헛되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터너는 러스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받았던 것이다.

러스킨은 회화 연구를 하면서 건축 연구를 병행했다. 자신의 말로는 회화 연구에서보다 “덜 열심일지는 몰라도 더 신중한 노력”을 투여했다고 한다.05 러스킨은 건축의 경우에는 회화의 경우와 달리 공감해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이들과 함께한 러스킨의 노력도 (이미 당대의 건축계 주류와의 관계를 언급한 데서 추측할 수 있듯이) 대세에 밀려서 좌절되었다. “우리가 도입하려고 한 건축은 현대 도시들의 분별 없는 사치, 형태를 왜곡하는 기계적 구조, 지저분한 비참함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 나는 나의 힘의 이 새로운 부분 또한 헛되이 쓰였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철로 된 거리들과 수정으로 된 궁전들에서 물러나 지질학과 식물학 연구로 관심을 돌렸다”.06

그 이후에도 영국의 주류 사회는 러스킨에게 도통 맞지 않는 곳이었다. 러스킨은 당대의 현실로 관심을 돌리면서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나아갔는데, 이 비판 또한 당시 영국의 자본주의 추진 세력에게는 당연히 못마땅한 것이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1860년에 일련의 정치경제학 비판 글들이 『콘힐 매거진Cornhill Magazine』에 연속으로 실리다가 (편집자의 우호적인 태도와 과감함에도 불구하고) 독자들과 출판사의 반대로 네 편에서 중단된 일이다. (이 글들은 나중에 Unto This Last라는 책으로 출판된다.)07 사실 앞에서 말한 “근본적인 차이”―즉 삶을 바라보는 시각의 근본적인 차이―는 건축계 주류와의 사이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당대 영국 자본주의를 추진하는 세력들 전체와의 사이에도 존재했었다. 당대의 자본주의 추진 세력의 사고는 근본적으로 공리주의적이다. 즉 인간의 모든 능력과 힘을 물질적 효용을 생산하는 수단으로만 본다. 이들은 “고기가 삶(생명)보다 가치 있고 옷이 몸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며, 땅을 마구간으로 보고 땅의 결실들을 말 사료로 보는” 자들이다.08 이들의 궁극적 목적은 상품화된 물질적 효용 즉 교환가치의 재현자인 자본의 축적이다.

이와 반대로 러스킨은 물질적 효용을 삶에 도움을 주는 도구로 본다. 그리고 예술처럼 그 자체로는 물질적 효용이 없는 ‘무용함’이 삶의 목적이다. ‘무용함’ 자체가 목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무용함’은 공리주의와의 근본적인 차이를 나타낼 뿐이고, 러스킨이 깊은 의미에서 말하는 것은 예술을 비롯해서 삶의 목적이 되는 어떤 대상을 신의 활력을 분유(分有)한 것으로 보는 태도이다. 여기서 ‘신’이라는 단어에 우리가 종교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09 철학적 의미의 ‘신’으로 읽으면 된다. 사실 러스킨의 철학은 그것이 활력의 철학이라는 점에서 스피노자와 통하는데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신’은 ‘무한한 활력’에 다름 아니며, 러스킨에게 있어서도 그렇다. 러스킨은 이 무한한 활력이 만물에 나뉘어 부여되어 있고 만물은 이 활력으로 인해서 그 나름대로 신성하고 아름답다고 본다. 물론 아무나 이 신성함과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아니다. 이 신성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공감하고 경탄하고 기뻐하는 활력이 필요하다. (이것 역시 신이 부여한 활력이다.) 그래서 러스킨이 “인간의 효용과 기능은 … 신의 영광의 목격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10 그는 특정의 종교적 교리를 설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진정한 의미의 ‘인간’에게서 활력이 가진 핵심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활력은 개인마다, 집단마다 그 정도가 다르게 나타나며, 역사적으로 상승과 하강을 겪는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와서 유럽 거의 전체에 걸쳐서 이 활력의 상태에 전에 없이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된다. 바로 이로 인해서 예술적 능력은 쇠퇴하고 이 쇠퇴에 대한 감이나 인식이 없는 근대 추진자들과 이들을 비판하는 러스킨 사이에 근본적인 어긋남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제 활력의 상태에 생긴 이 문제를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삶과 그 예술의 신비」에서 러스킨은 ‘인간의 일’, 즉 인간이 자신의 삶을 위해 “인간의 형태를 띠고 사는 동안”11 해야 하는 일로 ① 먹을 것을 생산하기, ② 입을 것을 생산하기, ③ 거처를 만들기, ④ 예술이나 과학 등 사유와 관련된 것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를 든다.12 ①, ②, ③은 물질적 효용의 차원인데, 앞으로는 ‘유용성의 차원’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④는 삶이 단순한 물질적 욕구의 충족을 넘어서 꽃처럼 피어나는 차원인데, 이는 ‘활력의 차원’이라고 부르기로 하자.13 ①, ②, ③, ④ 모두 인간의 힘이 자연력과 결합하는 방식을 나타내는데, 이 방식은 이 두 차원을 따라 둘로 나뉜다. 유용성의 차원은 물질의 법칙이 적용되는 차원으로서 자연력이 인간에게 이전되고 다시 자연으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가령 자연력이 인간으로 이전되어 있는 동안에는 이전된 양만큼 자연에서는 감소된다. 활력의 차원에서는 자연력이 감소되지 않고 거기에 각인된 인간의 힘과 함께 결합된 상태로 보존되며, 이 과정에서 양자 모두가 새로운 차원의 힘으로 상승한다.

이제 인간의 삶의 역사의 정상적 진전은 유용성의 차원에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킨 후 활력의 차원에서 각 집단(민족 등)이 가진 능력에 따라서 가능한 만큼 최대로 상승하는 것이다. 이것을 ‘인간 되기’라고 부르기로 하자. 두 차원 모두를 놓고 볼 때 둘째 차원이 이 과정을 비로소 ‘인간 되기’로서 결정한다. 만일 둘째 차원으로 도약하지 못하고 첫째 차원을 충족하는 데서 끝난다면, 그것은 ‘만족한 동물’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14 둘째 차원이 이런 의미에서 결정적이지만, 사실 두 차원이 모두 필수적이다. 의·식·주는 인간의 생존의 기본 조건으로서 생존 없이는 활력적인 삶도 없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유용성의 차원에서 예술성이 자라나온다는 점이다. 사물을 인간에게 유용한 형태로 바꾸는 능력인 기술(특히 손기술)이 고도화되고 다양화되면서 예술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러스킨은 “모든 건축예술은 컵과 받침대의 모양을 짓는 데서 시작해서 멋진 지붕에서 끝난다”고 한다.15

러스킨에게 근대는 이러한 ‘인간 되기’의 경로에서 이탈한 시대이다. 러스킨의 시선에 먼저 들어온 것은 예술적 능력의 전반적인 쇠퇴이며, 그 다음에 그가 주의를 돌린 곳에서 본 것은 자본주의적 번성이라는 외양에도 불구하고 생존의 기본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처참한 민중의 모습이다. 러스킨은 이 모습을 서양의 긴 역사적 과정에 놓고 한탄한다. 6천 년 동안 농업이 이어져 왔음에도 50만 명이 굶어죽는 일이 발생하고16 6천 년 동안 직조를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수도들의 거리는 내다버린 누더기와 썩은 넝마의 판매로 악취가 나며, 6천 년 동안 집짓기를 해왔음에도 그 모든 기술과 힘의 대부분이 흔적도 남아 있지 않고 떨어져 나온 돌들만 들판에 거추장스럽게 나뒹굴거나 시냇물에서 물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17

유용성의 차원이 피폐해질 뿐만 아니라 유용성의 차원과 활력의 차원 사이의 건강한 연결이 단절된다. 인구의 다수가 유용성의 차원에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한편, 이 욕구를 충족시킨 소수는 물질적 이익의 차원에서 더 많은 축적(수익, 이윤, 지대 등)을 원할 뿐 자연력과의 결합을 활력으로 상승시키는 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리하여 활력의 양성과 발휘는 현저하게 쇠퇴하게 되는 것이다. 러스킨은 수익을 우선으로 하는 조건에서는 진정한 건축이 이루어지기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만일 어떤 사회가 스스로를 조직해서 가장 아름답고 가능한 한 가장 강한 집들을 예술을 위해서든 사랑을 위해서든 짓고자 한다면—궁전을 그 자체를 위해서 짓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집을 짓고자 한다면―그런 사회는 볼 만한 어떤 건물을 지을 것이지 수익을 가져올 건물을 짓지는 않을 것이다. 진정한 건축물은 자신을 위해 집을 원하는 사람이 지으며 자신의 비용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식으로 짓는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이 좋아하는 식으로 짓는 것이 아니다.18

바로 이것이 근대에 와서 활력의 상태에 일어난 심각한 문제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 되기’는 정체 혹은 후퇴를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러스킨에게 이러한 ‘인간 되기’의 실패가 절망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삶이 [그]를 실망시킬수록 삶은 [그]에게 더 근엄하고 놀라운 것이 되었”으며,19 그는 “예술 혹은 다른 분야에서의 모든 지속적인 성공은 … 인간의 전진하는 힘에 대한 근엄한 믿음에 의해서, 혹은 인간의 유한한 부분이 언젠가는 불멸성에 함입되리라는 약속에 대한 근엄한 믿음에 의해서 하위의 목적들을 다스리는 데서 온다는 것을 점점 더 명확하게 보았고, 예술 자체는 이 불멸성을 천명하려는 노력에서만 … 힘찬 활력이나 명예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점점 더 명확하게 보았다.”20

러스킨이 『건축의 일곱 등불』을 썼던 때(1849년)는 그에게 아직 희망이 있던 때였다. 그가 나중에 건축에 대해 말하기를 포기했지만, 이는 자신의 한 말이 틀려서가 아니라 말해도 소용이 없어서였다. 아무리 말해도 귀에 ‘돈’못이 박혀있는 근대의 주류 세력을 꿰뚫고 현실에 영향력을 발휘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

IV 러스킨과 근대 너머

건축의 이러한 두 가지 특권은 예술 일반에 구현되는 모든 활력이 그렇듯 잠재적으로는 영원히 존재하지만, 실제 현실화는 늘 불투명하다. 우리가 보았듯이 그 현실화는 적어도 러스킨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사실 지금 우리에게도 그렇다. 몇몇 정치인들이나 관료들이 사회를 대표하듯이 소수의 큰 건물들이 건축을 대표하며, 건축가는 일반적으로 사회에 대한 공동체적 책임감이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특화된 일을 하는 전문가가 된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러스킨에게 예술은 삶의 기본 조건이 충족된 후에 시작된다. “모든 예술은 손으로 하는 동작과 당신의 민중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미덕과 친절함에 토대를 둔다.”72 민중이 기본적으로 어엿한 삶을 누릴 때, 민중의 생활에 유용한 물건들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며, 이 물건들의 형태가 필요에 따라 변경되고 새로운 형태들이 고안되는 과정(가령 컵, 손잡이 달린 컵, 컵에 물을 따를 주전자, 손을 들고 다니기 더 좋은 손잡이 두 개 달린 주전자, 물을 대량으로 마실 컵, 섬세하게 마실 컵, 물 따르기 쉬운 주전자, 향수 보관하기 좋은 용기, 지하실에 저장하기 좋은 용기 등)의 연속선상에서 “지금까지 예술이 성취한 가장 아름다운 선들과 가장 완벽한 유형의 엄밀한 구성이 발전해나온다.”73

더 나아가 건축은 민중의 주거의 필요에 따른 건물에서 시작해서 더 큰 건축물로 확대된다. 각자 자신의 지붕을 가지는 것이 우선적이다. “모든 읍에 큰 지붕을 짓기 전에 작은 지붕들을 짓고, 원하는 누구나가 자신의 지붕을 가지도록 하라.”74 그 다음에 이 각자의 작은 집들이 모여서 도시를 형성한다. “그리고 집들이 도시에 한데 모여있을 때, 사람들은 자신들의 건축을 공통의 법칙에 종속시킬 정도로 시민적 우애를 가지게 될 것이고 인간의 주거지들이 한데 모인 전체가 대지 위에서 끔찍한 것이 아니라 예쁜 것이 되기를 욕망할 만큼의 시민적 자긍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75 러스킨은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가상의 청중들(현실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청중들)을 향해 당당하게 이렇게 말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것의 가능성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그것의 불가결성에만 관심이 있다.”76

이 말을 좁게 이해하는 사람은 러스킨이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일에는 별로 공을 들이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실은 전혀 다르다. 러스킨은 당대의 정치경제학을 비판하는 단계 이후에 ‘인간’이 사는 곳을 실제로 만드는 일을 자신의 삶의 당연한 행로로서 추구했다. 그는 1871년 ‘영국의 노동자들과 근로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들’(Letters to the Workmen and Labourers of Great Britain)이라는 부제가 붙은 『포르스 클라비게라』(Fors Clavigera)77의 집필을 시작하면서 <성 조지 길드>(St. George’s Guild)라는, 무엇보다도 토지와 동지 관계를 이루는 삶형태를 직접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드는 준비를 시작한다.78

1878년에 『포르스 클라비게라』의 집필이 완료되고 <성 조지 길드>의 설립도 완료된다. 이로써 러스킨의 삶의 단계는 넷으로 나눠볼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을 『포르스 클라비게라』 ‘Library Edition’의 편집자는 이 책에 대한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쉽고도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

회화비평가로 시작한 그는 예술이 정말로 훌륭한 것이 되려면 아름다운 현실의 재현이어야 하고 즐거움의 정신으로 추구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건축비평가로서 활동하면서 그는 예술이 민족적 성격의 반영이며 고딕의 비밀은 건축공의 행복한 삶에 있음을 발견했다. 다음 단계는 그와 같이 열렬한 기질을 가진 사람에게는 명확하고 단순했다. 그는 상상의 세계에서 사는 데 만족하지 않고, 좋고 아름다운 것의 조건을 실제 세계에서 현실화하려고, 인간들 사이에 신의 성전을 지으려고 노력했다.79

여기서 우리는 그의 삶의 진행 과정 자체가 앞에서 말한 유용성의 차원과 활력의 차원의 연속성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두 차원의 이러한 연속성 혹은 달리 말하자면 삶의 통합성이 바로 그가 우리의 시대에 가지는 의미의 핵심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삶의 통합성의 ‘불가결성’은 기후 변화로 인한 위기가 심각해진 우리의 시대에는 러스킨의 시대와 비할 바 없이 절실한 것이 되었다는 점이 러스킨의 현재적 의미를 배가시킨다. 유용성의 차원과 활력의 차원의 분리야말로 지금 인류를 크나큰 위기에 몰아넣고 있는 기후 변화의 근본적 원인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점에서 인류사에서의 큰 진전으로 꼽을 근대화(산업화)가 바로 지구 전체를 장악하게 될 이 분리의 시작이었다. 근대화는 안타깝게도 자연의 힘과 인간의 힘의 결합에 왜곡이 가해지는 형태로 일어났다. (그 이전에는 결합의 정도가 낮고 범위가 좁았을지언정 왜곡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맑스가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소외’라고 부른

이 왜곡의 핵심은 현실에서의 인간이 앞에서 말한 진정한 의미의 ‘인간’에서 벗어난 데 있다.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란, 맑스의 표현으로는 자연력과의 결합에서 자신의 본질을 구현하는 인간, 자연과 본질상의 공통체를 이루는 인간이다. 소외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은 인간의 제2의 몸이었다. (이것을 맑스는 ‘비유기적 몸’이라고 부른다.) 이제 이 두 몸은 분리되며 자연은 몸의 지위를 잃고 그저 인간의 외부에 있는 ‘객체’가 된다. 그리고 인간은 이 ‘객체’에서 분리되었다는 의미에서 ‘주체’가 되는데, 이 ‘주체’로서의 인간을 ‘객체’와 다시 연결시켜주는 것이 자본이다. (사실 자본의 왕국에서는 개인들도 서로에게는 ‘객체’이며, 자본만이 실효적인 ‘주체’이다.)

이제 인간에게 내재하는 활력은 자연의 힘과의 연결을 매개하는 자본(화폐80)의 활력으로 오인되어 자본이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하게 되고, 인간과 자연 모두가 자본의 증식을 위한 수단이 된다. 자본은 신이 된다. 그런데 이 신은 인간에게 별로 호의를 갖지 않은 신이라서 이 신이 주도하는 생산은 러스킨이 ‘복종의 등불’ 장에서 말한 ‘복종’과 ‘절제’의 능력을 쇠퇴시킨다.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는 ‘복종’과 ‘절제’의 능력이란 맑스의 말로는 ‘아름다움의 법칙에 맞춘 생산’을 할 줄 아는 능력이다.

동물은 자신이 속한 종의 척도와 욕구에 맞추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반면에 인간은 모든 종의 척도에 맞추어 생산할 줄 알며, 일반적으로 대상에 내재하는 척도를 적용할 줄 안다. 따라서 인간은 아름다움의 법칙에 맞추어 만들어낸다.81

‘인간’은 자신의 척도를 내세우지 말고 “일반적으로 대상에 내재하는 척도”를 알아내야 하며 그렇게 알아낸 척도를 따라야 한다(복종).82 그리고 인간의 힘을 여기에 맞추어 양성해야 하는 것이다(절제). 자본은 ‘아름다움의 법칙’이 아니라 ‘이윤 증식의 법칙’을 자연과 인간 모두에게 부과한다. 이러한 자본주의적인 생산이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를 발생시키는지를 다시 맑스의 말로 설명해볼 수 있다. 『자본론』 1권 15장 10절에서 맑스는 이렇게 말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인구를 대중심지로 집결시키며, 도시 인구의 비중을 끊임없이 증가시킨다. 이것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한편으로는 사회의 역사적 동력을 집중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과 토지 사이의 물질대사 즉 인간이 옷과 식량으로서 소비한 토지의 성분들이 토지로 복귀하는 것을 교란하고, 따라서 토지의 비옥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교란한다.83(인용자의 강조)

다시 말해서 자본이 주도하는 생산은 물질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순환하는 데 (즉 두 ‘몸’ 사이의 질료 교환에) 장애를 일으킨다(‘물질대사의 교란’).84 그렇기에 “자본주의적 농업의 진보는 그 어느 것이나 노동자를 약탈하는 기술의 진보일 뿐만 아니라 또한 토지를 약탈하는 기술의 진보이며, 일정한 기간에 토지의 비옥도를 높이는 그 어느 것이나 이 비옥도의 항구적 원천을 파괴하는 진보이다. (…)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의 원천인 토지와 노동자를 파멸시킴으로써만 기술을 그리고 사회적 생산과정의 결합을 발전시킨다.”(인용자의 강조)85 이렇게 “모든 부의 원천인 토지와 노동자를 파멸시”키는 과정의 연장선상에 환경 파괴가 있다.

기후 변화를 아마도 영국에서 최초로 (과학자들보다 먼저) 간파한 사람이 러스킨일 것이다. 즐거움의 원천인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것이 습관이 된 러스킨은 1871년 어느 날 50년 동안 관찰해오던 하늘에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이상한 폭풍 구름(storm-cloud)이 있는 것을 목격하고 계속해서 관찰하게 된다. 러스킨은 이러한 관찰을 근거로 날씨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주장을 그의 『19세기의 폭풍 구름』(The Storm-cloud of the Nineteenth Century)에 실린 두 개의 강연86에서 하는데, 당시 언론은 러스킨의 주장이 “상상해냈거나 제 정신에서 나온 것이 아닌” 것이라고 조롱했다.87 과학자들도 처음에는 이 현상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러스킨의 관찰이 정확하고 그 원인도 명확하다는 것이 확인되게 된다. 산업 통계에 따르면, 러스킨이 문제가 되는 현상이 증가한 것으로 잡은 날짜는 영국에서나 중앙 유럽의 산업화된 나라들에서나 석탄의 소비가 비약적으로 올라간 때였다고 한다.88

러스킨은 당시에 자신이 관찰한 현상을 이론적으로 정식화하지는 않았다. 성경에서 가져온 구절이나 용어로 제시할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러스킨이 이 현상의 근본적 원인—산업화가 ‘인간’의 길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진행된 것—을 충분히 말해왔음을 안다.

이와 관련하여 기계에 대한 러스킨의 견해가 흥미롭다. 독자들이 가령 본서 4장에서 철도를 비판하는 대목을 보고 러스킨을 기계의 사용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으로 본다면, 이는 성급하고 섣부른 판단이다. <성 조지 길드> 설립 취지문에 단 주석에서 러스킨은 이렇게 말한다.

길드에서 기계류는 그것이 건강한 육체적 활동을 대체하거나 장식 일에서 손노동의 기술과 정밀함을 대체하는 경우에만 금지된다는 점을 세심히 유의해야 한다.89

고딕 건축물에 대한 그의 견해에서 보듯이,90 그리고 위에서 인용한, 아래로부터의 도시 구축에 대한 그의 견해에서 보듯이, 러스킨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있는 활력을 서로 합하여 거대한 것을 세워 올릴 수 있다고 믿는다. 기계도 그렇게 쓰일 수 있다면 러스킨이 반대할 리 없고 심지어는 그러기를 바란다. 실제로 러스킨은 영문학 사상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기계 예찬을 쓰기도 했다.91 맑스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러스킨이 반대하는 것은 기계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기계에 예속되는 것이다. 기계는 인간의 일정한 활력의 결과물이지만, 기계에 인간이 예속되면 자연과의 동지 관계를 통해 증가되어야 할 활력이 오히려 감소되게 된다. “영국 다중의 활기가 연료처럼 공장의 연기의 먹이로 보내진다.”9293

자연력과의 관계에서도 러스킨이 반대하는 것은 자연력을 감소시키는 경우이다. 이는 기계를 움직이는 동력에 대한 그의 견해에서 잘 드러난다. “… 기계류의 유일하게 허용되는 동력은 바람이나 물의 자연력이다. 미래에는 전기력도 거부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냇물과 바람이라면 비용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연료를 사정없이 맹렬하게 낭비하는 증기력은 절대적으로 거부된다.”94

이렇듯 ‘착취된’ 인간의 힘(노동력)과 ‘착취된’ 자연력이 바로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계의 동력이었기에 ‘인간’의 길을 다시 가는 것, 즉 자연과의 동지 관계를 회복하는 것—여기에 인간들 사이의 동지 관계의 회복이 필수적으로 포함된다—이 오늘날의 삶을 틀짓는 자본의 논리로부터의 해방의 주된 내용이 될 것이다. 다만 ‘인간’의 길을 간다는 것은 미리 정해진 어떤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인간’으로 만드는 과정이며 이때 ‘인간’이란 언제나 아직은 구현되지 않은 미지의 존재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다. 스스로를 ‘인간’으로 만드는 방식에 대해 러스킨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릇된 일을 함으로써 더 현명해지거나 더 강해지는 일은 없다. 당신은 올바른 일을 함으로써만 더 현명해지고 강해진다. 가장 으뜸가는 것, 필요한 단 하나는 강압 아래서일지라도 올바른 일을 하고 마침내 강압 없이 올바른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인간’이다.95

“올바른 일”이란 러스킨의 말로는 ‘복종’과 ‘절제’의 일이고, 맑스의 말로는 ‘아름다움의 법칙’에 맞추는 일이다. “강압 없이 올바른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자유로움’으로의 상승을 의미한다. ‘자유로움’으로의 상승은 활력의 증가를 낳고 활력의 증가에서 기쁨, 행복, 사랑이 나온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 사회는 ‘자유로움’으로의 상승을 말하기에 턱없이 부족한데다 기후 변화로 인해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지만, 인류사에서 드문드문 성취되었고 지금도 그렇게 성취되고 있는 ‘자유로움’으로의 상승의 사례들이 우리에게 유산으로 맡겨져 있다. 훌륭한 예술작품들은 이러한 성취의 강력한 일부이다.96 예술작품의 뛰어남은 예술가의 ‘사적’ 성취에 국한되지 않는다.97 예술가의 능력은 공동체 전체에 의해 여러 세대에 걸쳐 양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사유의 노력으로 성취되는 것도 아니고 말하기의 정확성에 의해 설명되는 것도 아니다. 예술은 어떤 힘의 본능적이고 필연적인 결과인데, 이 힘은 정신이 여러 세대를 거침으로써만 발전될 수 있으며 특정의 사회적 조건들—이 조건들은 그것들이 규제하는 능력이 느리게 성장하는 만큼이나 느리게 성장한다—에서 마침내 살아나게 된다. 고결한 예술이 존재하려면 강력한 역사의 전 시기가 집약되고 수많은 죽은 이들의 열정들이 응축되어야 한다.98

그래서 “러스킨에게는 예술을 가르치는 것이 모든 것을 가르치는 것이었다.”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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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01 이 책의 한국어본은 영미문학연구회의 (나를 포함한) 여러 영문학자들에 의해 번역되어 2012년에 출판되었다.

02 Introduction to The Seven Lamps of Architecture, The Complete Works of John Ruskin, Library Edition 1903, Volume VIII, xxxix쪽. ‘Library Edition’은 쿡(E. T. Cook)과 웨더번(Alexander Wedderburn)이 편집한 러스킨 전집의 표준판이다. 앞으로 러스킨의 저작의 특정 대목을 인용할 경우 저서명이나 글 제목은 따로 밝히지만 출처로는 ‘Library Edition’의 몇 권, 몇 쪽인지만 다음과 같이 표시하기로 한다. 예) 전집 9권 69쪽의 경우: LE V9, 69쪽.

03 같은 책 xli쪽.

04 이상 LE, V18, 148쪽. 『현대 화가론』(Modern Painters)은 1843년에 1권이 나왔고 3년 후인 1846년에 2권이 나왔다. 그 이후 10년이 지난 1856년에 3권과 4권이 나왔고 다시 4년이 지난 1860년에 마지막 권인 5권이 나왔다. 2권과 3권 사이의 10년 동안 러스킨은『 건축의 일곱 등불』(1849)과『 베네치아의 돌들』(총 3권, 1851-53)을 썼다.

05 같은 책 149쪽.

06 같은 책 150쪽. “수정으로 된 궁전들”은 1851년 영국에서 만국박람회(Great Exhibition)가 열린 건물인 수정궁(Crystal Palace)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수정궁은 원래 세워진 하이드 파크에서 1854년 런던 남부의 시더넘 힐(Sydenham Hill)로 옮겨졌다가 1936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러스킨은 수정궁이 기술적 재능은 빛날지라도 예술적 의미는 없는 것으로 보았다.

07 한국어 번역본으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김석희 옮김)가 있다.

08 Modern Painters, vol. 2, LE V4, 29쪽.

09 러스킨이 종교와 관련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러스킨은 복음주의적 프로테스탄티즘의 문화에서 성장했으며, 그의 글에는 성경에서의 인용이 빈번하게 나온다. 그런데 그는 시간이 가면서 협소한 종교적 틀을 벗어났다. 본서의 1880년판 서문에도 나와있듯이 러스킨은 이 책을 쓸 당시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복음주의적 프로테스탄티즘’을 담은 대목들을 1880년판에서는 삭제한다. “…극단적이고 전적으로 거짓된 프로테스탄티즘을 담은 몇몇 부분은 본문과 부록에서 똑같이 빼버렸[다].”(본서 7쪽) 그는 나중에는 기독교를 떠날(‘탈개종’할) 생각까지 하게 된다. 물론 그는 ‘탈개종’을 하지는 않고 기독교도의 범위 내에 머물게 되지만, 이때 그의 기독교는 기독교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관용적인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10 LE V4, 28-29쪽.

11 LE V18, 180쪽.

12 “확실하게 좋은 것은, 첫째는 사람들을 먹이는 데, 그 다음에는 사람들을 입히는 데, 그 다음에는 사람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는 데, 마지막으로는 예술이나 과학이나 기타 어떤 사유의 주제로 사람들을 올바르게 즐겁게 하는 데 있다”. 같은 책 182쪽.

13 ‘삶의 가능성의 차원’이라고 좀 길게 부를 수도 있다.

14 러스킨이 생각하는 ‘인간 되기’는 맑스가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말하는 ‘자연의 인간으로의 생성’, 그리고 니체의 다음 대목에 나타난 ‘자연의 인간으로의 도약’과 크게 통하는 바가 있다. “진정한 인간들, 더 이상 동물이 아닌 존재들, 즉 철학자들, 예술가들, 성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이 등장하면서, 그리고 이들의 등장을 통해 결코 도약을 않는 자연이 유일한 도약을 했다. 그것도 기쁨의 도약이다.” Friedrich Nietzsche, Untimely Meditations, ed. Daniel Breazeale, trans. R. J. Hollingdale (Cambridge University, 1997) 159쪽.

15 LE V20, 96쪽. “최고의 건축물은 멋지게 만들어진 지붕일 뿐”인데 “바티칸 대성당의 돔, 랭스 대성당이나 샤르트르 대성당의 포치, 이 성당들의 아일의 볼트 천장과 아치, 묘의 캐노피, 종탑의 스파이어” 같은 장엄하게 만들어진 지붕들은 “모두 어떤 공간을 열기와 비로부터 튼튼하게 보호할 단순한 필요로부터 나온 형태들”이다. 같은 책 111쪽.

16 1866년 인도의 오리싸(Orissa)에서 발생한 기근을 놓고 한 말이다.

17 “The Mystery of Life and its Arts”, LE V18, 177-78쪽 참조.

18 Fors Clavigera vol 2, LE V28, 360쪽.

19 LE V18, 151쪽.

20 같은 책 152쪽.

(···)

72 Lectures on Art, LE V 20, 108쪽.

73 같은 책 109쪽.

74 같은 책 112쪽.

75 같은 책 같은 쪽.

76 같은 책 113쪽.

77 제목 ‘Fors Clavigera’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어원 풀이를 생략하고 쉽게 말하자면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① 훌륭하게 행동하는 힘 ② 인내하는 힘 ③ 운명을 최고의 목적에 맞추는 힘.

78 <성 조지 길드>의 기획에는 토지와의 관계 이외에도 교육을 비롯한 많은 것들이 포함되는데, 이 해설에서 이것들을 다 거론할 수는 없다.

79 Introduction to Fors Clavigera vol. 1, LE V27, xviii-xix쪽.

80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으로서의 화폐이다. 화폐는 자본으로서의 기능 이외에 다른 기능도 가진다.

81 Karl Marx, 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aus dem Jahre 1844, MEW band 4, Dietz Verlag, 517쪽.

82 러스킨의 경우에 이 “대상에 내재하는 척도”는 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이를 따르는 것이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경우에도 자연의 고유한 법칙은 ‘신의 명령’이다.

83 Karl Marx, Das Kapital I, MEW band 23, Dietz Verlag, 528쪽.

84 아마도 당시의 맑스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이 순환을 극복하리라고 믿었을 터인데, 안타깝게도 맑스가 생각하는 사회주의 사회는 현재 지구상에 없다. 사회주의의 이름을 단 국가들은 모두 맑스가 생각한 바와는 다른, 군사주의적·관료주의적·국가주의적 체제들이다.

85 같은 책 529-30쪽.

86 런던 인스티투션(London Institution)에서 1884년 2월 4일과 11일에 한 두 개의 강연이다.

87 The Storm-cloud of the Nineteenth Century, LE V34, 7쪽,

88 같은 책 xxvi쪽,

 89 “General Statement of St. George’s Guild,” Guild and Museum, LE V30, 48쪽.

90 : “그렇게 열등한 정신들의 노동의 결과들을 수용하고, 불완전함이 가득하며 모든 터치마다 그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단편들로부터 장엄하고 나무랄 데 없는 전체를 세워 올리는 것이 고딕 건축 유파의 주된 감탄할 만한 점일 것이다.” The Stones of Venice vol 2, LE V10, 190쪽

91 Cestus of Aglaia, LE V19, 60-61쪽 참조.

92 The Stones of Venice vol. 2, LE V10, 193쪽.

93 이는 현대의 발전된 첨단 기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첨단 기술은 인간의 발전된 힘의 결과물이지만 거기에 인간이 예속되면 (이 예속은 러스킨의 시대에서나 우리의 시대에서나 자본주의적 관계에 의해 발생한다) 역시 인간의 활력은 감소된다.

94 LE V30, 48쪽.

95 Cestus of Agalia, LE V19, 125쪽.

96 자본주의의 토대가 되는 사적 소유는 이러한 예술작품들이 인류의 활력을 증가시킬 유산이 되는 데 방해가 된다. 예컨대 피카소의 어떤 그림이 스위스의 제네바에 있는 제네바 프리포트(Geneva Freeport)의 보관함 같은 곳에 넣어서 보관되고 있다면, 이 그림은 그렇게 보관되는 동안은 그저 한 개인의 사유재산일 뿐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제네바 프리포트는 예술품 및 기타 귀중품을 보관하는 보관소로서 보관품 가운데 40%가 예술품이고 그 총 가치는 미화 1천억 달러(한화 100조원)로 추산된다. 2103년 현재 이곳에는 120만 점의 예술작품이 보관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피카소의 작품도 약 1천 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97 ‘사적’은 ‘개인적’과 그 의미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적인 것’들은 아무리 잘 모여도, 아무리 많이 모여도 ‘사적인 것’이지만, ‘개인적인 것’은 협동의 방식으로 모여서 공통체(commons)를 이룰 수 있고 이를 통해 개인들의 활력을 증가시킬 수 있다. ‘사적인 것’의 축적은 활력이 아니라 권력의 축적이며 권력의 본질은 활력을 제한하는 데 있다.

98 : 98 “The Mystery of Life and its Arts”, LE V18, 169-170쪽.

99 : 99 Introduction to Fors Clavigera vol. 1, LE V27, xvii쪽.





평행폴리스로서의 커먼즈버스

 



[볼리어의 설명]

아래의 글은 내가 2023년 5월 31일 베를린에서 열린 워크숍 「자유주의를 넘어: 커먼즈, 입헌정치 그리고 공동선」에서 발표한 것을 약간 손본 것이다. 이 워크숍은 <막스 플랑크 비교 공법 및 국제법 인스티튜트>, 뷔르츠부르크 대학 법학과 그리고 <뉴 인스티튜트>(독일, 함부르크)가 주관했다.

발표 비디오는 여기서 불 수 있다. 내 발표는 타임코드 5:32에 시작한다.

 

평행폴리스로서의 커먼즈버스: 기회와 도전

이 워크숍에 의해 촉발된 대화는 시기적절하고 필수적이다. 이는 정치경제 및 문화와 관련하여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그 많은 것들이 우리 눈앞에서 서서히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그토록 많은 거대 서사들—시민권•자유•재산권•경제성장•가치이론—이 요즈음에 문제시되었다고 말해야 온당할 것이다. 기존 사회제도와 사고 범주들이 그다지 잘 작동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한편으로 구조변화 및 필요한 대안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이는 그런 이야기가 괴물들과 카오스가 든 판도라의 상자를 열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기후변화, 권위주의적 민족주의, 야만스런 불안정성 및 불평등 그리고 사회제도 붕괴라는 위험지대들로 더 깊이 들어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선택할 것이 거의 없다. 우리는 몇몇 고착된 습관들을 버릴 필요가 있다. 우리는 새로운 북극성과 한층 안정적이고 유익한 질서를 필사적으로 찾을 필요가 있다.

오늘 나는 커먼즈라는 생각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아주 많은 것들—자본주의적 정치경제, 국가권력, 사회적 관계 및 위계들, 지구와의 관계, 우리의 내적인 삶들—을 다시 상상할 엄청난 가능성이 이 생각에 담겨있다는 제안을 하고 싶다. 확실히 이것은 당찬 제안이고 장기적인 기획이다. 문제가 있는 시스템에 고착되어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기존의 것과는 매우 다른 사회적 논리들 및 제도적 형태들을 개발해야 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식민주의, 그리고 우리가 내면화했거나 억제한 규범들을 가진 중앙집권화된 국가권력이라는 해결되지 않은 트라우마들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발표문에서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커먼즈와 커머닝이 우리에게 공동선의 비전을 재발명할 발판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비전은 우리가 세포 수준에서 한층 인간적인 사회관습들과 윤리적 행동들을 발전시키는 것을 촉진할 수 있으며, 이 관습들과 행동들이 확장하면서 우리는 자본축적, 소비주의, 성장을 통한 진보의 세계 너머로 이동할 수 있게 된다.

확실히 오늘날 대다수의 커먼즈는 중요한 의미를 갖기에는 너무 소규모이고, 지역적이며, 캐시푸어(cash‐poor)인 것으로 일축된다. 주류에게 커먼즈는 군내나는 괴짜다. 주류들의 ‘점잖은’ 의견에 따르면 “일을 해내기” 위한 본격적인 체제로 시장과 국가가 유일한 것으로 가정된다. 사적부문과 공적부문이 있고 그 밖에 것은 실제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허울만 좋은 주장이거나 적어도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매우 편협한 프레임을 씌운 것이다. 시장과 국가는 둘 다 경제성장을 찬양하고, (서로 다른 역할을 가지고 있더라도) 자유주의적인 정치적•경제적 질서를 촉진하는 데 있어서 긴밀하게 동맹한다. 국가는 속박되지 않은 시장들이 성장, 세수(稅收), 시민들의 사회적 이동성을 발생시키기를 원한다. 반면에 기업들과 투자자들은 국가가 안정된 통치, 법적 특권들과 기업활동을 위한 보조금을 제공해주고, 금융위기, 생태적 재난, 시장 악용 및 기타 ‘시장 외부효과들’ 이후 상황정리를 해주기를 원한다. 국가와 시장은 우선사항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공생한다. 시장국가 체제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말이 될 만큼 충분히 말이다.

커먼즈는 국가와 시장이라는 바로 이 체제에 대안이 되는 비전이다. 정치가들과 경제 전문가들은 커먼즈를 손짓으로 간단하게 묵살할 수 있지만 커머너들은 더 심오한 진실을 즉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전제들이 비록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더라도 뿌리 깊숙이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2008년 금융 위기는 전 세계 금융세력과 자본주의의 오만한 힘을, 그리고 그 힘의 남용을 영속시키는 일에 자유주의 국가가 공모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브렉시트의 도래,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COVID, 긴축재정 정치, 도널드 트럼프, 보수적 민족주의 그리고 인종적•민족적 타자화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강화할 뿐이었다.

나는 경제성장이 유토피아적 환상임을 폭로하고 있는 기후변화의 잔혹한 현실—홍수, 가뭄, 산불/들불, 기상이변—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경제성장을 위한 자원 추출 및 탄소 에너지 자원에의 의존은 지속될 수 없다. 전 세계 비(非)백인들—식민주의와 강제적인 자본주의적 개발의 희생자들—이 배상금, 생태복원 및 기후정의를 요구하므로 자본주의적 개발을 이 세계에 강요하려는 충동은 지속될 수 없다.

새로운 정치가들, 정책들 또는 법들이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그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구조적인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자전거가 우리를 달로 데려갈 수 없듯이 시장‑국가 체제는 그 문제들을 극복할 어포던스(affordance, 행동가능성)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정치공백기에 빠졌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오래된 질서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며 새로운 질서는 아직 태어날 준비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체코 극작자인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에게서 영감을 얻고 그를 길잡이 삼는다. 1970년대에 그를 비롯한 문화계의 반정부 인사들이 전체주의적인 억압 시스템—그의 경우에 체코 정부—에 직면했을 때 하벨의 전략적 반응은 그가 평행폴리스(parallel polis)라 부른 것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평행폴리스는 공동체가 만든 안전 공간으로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로 지원하고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직접 생산하며 일종의 그림자 사회(shadow society)를 구축한다.

평행폴리스라는 발상은 여러 목적에 복무한다. 사람들은 공식적인 선전의 허위를 폭로하고 가능한 것에 관한 자신들의 상상력을 확장할 공간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은 예시(豫示)적인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면서 수평적이고 공락(共樂)적인 상호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그들은 진실을 말할 수 있고 건전한 가치들을 표현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엄성, 사회적 유대 및 희망을 다시 주장할 수 있다.

나는 커먼즈버스(Commonsverse)를 일종의 평행폴리스로 본다. 커먼즈버스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시스템 변화를 가져오는 방법으로서의 커머닝에 복무하는 무수한 기획들, 조직들, 사회운동들이다. 나는 이미 존재하는 엄청나게 다양한 커먼즈들을 소개하기 위해 『커머너의 변화만들기 목록』(The Commoner’s Catalog for Changemaking)을 2년 전에 출간했다. 여러분이 몇몇 참조점을 확인할 수 있도록 간략한 개요를 제시할까 한다.

커먼즈로서의 토지. 토지를 탈상품화하는 것은 토지를 지역의 농사용, 주택용 및 보존용으로 접근가능하고 제공가능도록 만드는 중요한 하나의 방법이다. 이 점에 있어서 한 가지 중요한 수단은 시장에서 토지를 빼내어 그것을 영구히 커먼즈로 만드는 공동체 토지 신탁(community land trusts)이다.[주석1] 토지 신탁은 풍경을 보존하고 부의 불평등을 줄이며 영양이 풍부한 식량을 지역별로 키우는 것을 더 적합하게 만드는 일을 촉진한다. 공동주택, 주택 협동조합 또는 독일 신디케이트(Mietshäuser Syndikat) 같은 연합체의 ‘피어(동료) 주도 프로젝트들’(Peer-directed projects)은 국가나 지역 공동체에 의한 기획들과 나란히 사회적 주택을 제공할 수 있다.

서양에서의 지역 식량 주권. 유럽과 북미에는 지역농업과 식량 공급망을 재발명하는 운동들이 많다. 유기농 지역경작이 50년 전에 처음 이 운동을 시작했고 이는 지금은 퍼머컬처, 농업생태학, 슬로우푸드 운동 및 심지어 슬로우피쉬 운동에서 나타난다. 푸드 협동조합들은 농부들과 소비자들을 한데 모아 상호적으로 부양하는 관계를 맺도록 하기 위한 — 가격을 낮추고 한층 안정적인 지역 식량 공급을 보장하며 친환경 농경을 보증하는 것을 돕는 — 긴 시간에 걸쳐 입증된 모형이다.

커먼즈로서의 도시. 바로셀로나, 암스테르담, 서울, 볼로냐, 그리고 수십 개의 주요 도시 및 소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협력적인 거버넌스의 새로운 형태들을 실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커먼즈-공공부문 파트너십은 메이커스페이스(makerspace)[주석2], 도시농업 시스템, 시민 정보 커먼즈 그리고 근린지역 개선 및 서비스를 창출하고 있다. 이 파트너십은 시민들에게 권한을 주고 사회 기본구조를 다시 짜며 부유한 개발자들과 투자자들로부터 도시에 대한 시민대중의 통제권을 되찾는 길이다. 또한 도시에는 많은 독립적인 커먼즈 기획들, 예를 들어 공동체 텃밭(community garden), 에너지 생산 커먼즈, (카탈로니아의 Guifi.net 같은) 지역 와이파이 시스템 등이 있다.

전통적이고 토착적인 커먼즈. 어림잡아 전 세계 20억 명의 사람들이 어장농지목초지야생 사냥감의 파수를 통해 일상 생계를 커먼즈에 의존하고 있다. 전통적인 공동체와 토착민들에 의해 수행되는 커머닝은 그것이 산업형 농업에 대한, 지역에 기초를 두는 친환경적인 대안임을 입증하고 있다. 전 세계 생물 다양성의 대략 70%가 토착민들이 운영하는 땅에 존재한다.

대안적인 지역 통화. 전 세계 많은 공동체들이 그들 고유의 지역 통화를 만들었다. 그 목적은 금융가치가 주요 금융기관들로 빨려 들어가도록 두지 않고 그 가치를 지역에 잡아두는 것이며 그래서 지역 시장, 일자리 창출,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을 활성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태어난 서부 메사추세츠에서 버크셰어즈(BerkShares) 통화는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대안 통화가 되었다. 타임뱅킹(Timebanking)은 또 하나의 가치 있는 통화혁신—많은 돈 없이 나이 든 사람들과 일반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하는 서비스‑교환 시스템—이다.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와 피어 생산. 프리 소프트웨어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의 지난 25년간의 폭발적 증가는 커머닝의 강력한 상징이다. 프리 소프트웨어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는 코드를 탈상품화하고 스스로 조직된 개방적인 공동체의 창조성을 고양시킴으로써 리눅스, 인터넷을 위한 필수적인 하부구조, 위키피디아 그리고 (그룹 심의, 그룹 예산안 작성 및 클라우드에의 파일저장을 위한) 많은 세계 규모의 소프트웨어 시스템들을 구축했다.

코즈모로컬 생산. 한 가지 강력한 오픈소스 파생물은 코즈모로컬 생산 즉 전지구적으로는 디자인과 지식의 공유를, 지역적으로는 사물들의 물질적 생산을 관장하는 시스템이다. 이 과정은 자동차•가구•주택•전자기기•농장시설에 이미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는, 상업적인 의료용 제품보다 더 싸고 더 정교한 자동인슐린주입 장치를 생산한, 당뇨병환자로 이루어진 전지구적인 공동체도 있다. 농업기계의 코즈모로컬 생산은 <팜핵>(Farm Hack)과 <오픈소스 에콜로지>(Open Source Ecology)에서 볼 수 있듯이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세계 일류 디자인을 갖춘 저가의 농장 장비를 생산하는 것을 돕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와 공유 가능한 콘텐츠. 20년 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의 발명은 돈을 지불하거나 허가없이 글쓰기, 음악, 이미지 및 기타 창조적인 장르들을 법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자유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자율적인 공공 라이선스는 이제 전 세계 170개가 넘는 법시행 관할구역에서 인정을 받고 있으며 다른 상황에서라면 저작권법 하에서 ‘저작권 침해’로 여겨질 방식으로 엄청난 양의 콘텐츠가 공유될 수 있다.

* * *

이 커먼즈들 각각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것들이 항상 그 맥락의 특이성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나는 비상업적인 극장에, 오픈소스 테크놀로지로 구축되는 최고 품질의 과학 현미경에, 인도주의적인 구조를 돕는 온라인 지도에, 그리고 난민들과 이주자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일에 주력하는 커먼즈를 발견해서 깜짝 놀랐었다. 각각의 경우에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독특한 재능, 지리, 역사, 전통, 자급활동, 가치 그리고 상호주체성을 통해 자본주의적인 시장이나 국가의 통제 없이 욕구를 만족시키고자 한다.

‘내부에서 볼 때’ 각 커먼즈는 독특할 뿐 아니라 ‘세상 만들기’를 위한 학습이기도 하다. 그것은 상호주체적인 일련의 감정들•경험들•가치들•전망들이다. 우리가 겪는 상호주체적 경험들의 생생한 실재는 우리에게 세계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고착된 단일문화로서가 아니라 탄탄한 ‘다원적’ 세계로서 더 잘 이해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러나··· 각 커먼즈가 독특하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그 커먼즈에 관하여 일반화하기 시작하는가? 최소한도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기존 공동체가 일정 유형의 공유된 부를 집단적으로 운영할 때마다 공평한 접근법, 사용법, 장기간에 걸친 지속가능성이 강조되면서 하나의 커먼즈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다양한 맥락에 있는 매우 다양한 커먼즈들에 공통된 규칙성들을 실제로 설명하지 못한다.

작고한 나의 동료 질케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나는 이 문제가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현재 우세한 근대적 세계관은 커먼즈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그야말로 너무 환원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이다. 그것은 전체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들에게 너무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리의 근대적 세계관은 커머너들이 여전히 경제적 개인―합리적이고 자기주권적이며 자신의 물질적 이익을 최대화하는 데 전념하는 개인―이라고, 다만 시장을 통해서보다 그저 협동을 통해서 이 목표를 추구할 뿐인 그러한 경제적 개인이라고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커머닝을 그 나름의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조건에 기반해서, 그리고 진화사 및 생물학의 맥락에서 이해하고자 한다면 나는 우리가 커먼즈를 철저히 관계적이고 사회적인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전 세계 커먼즈에 대한 나의 아마추어적인 민족지학 연구로부터 증명할 수 있다. 커먼즈는 경제학자들이 보고자 하는 것처럼 단순히 자원들이 아니다. 커먼즈는 살아있는 사회 유기체들이다. 최근의 생물학 연구는 선구적인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가 보여준 것처럼, 어떻게 식물과 나무와 균류들 모두가 상호의존적이며 연결되어 있는지, 어떻게 세포 수준에서조차 생명이 심층적으로 공생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간 커머너들의 경우에도 그렇다. 우리는 서로와의 관계 속에서, 지구 그리고 지구에 존재하는 인간보다 큰 생명계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과거 및 미래 세대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커먼즈는 단지 사람들의 타산적인 합리성이 아니라 그들의 충만한 감정적, 윤리적 그리고 영적 힘에 의해 활기를 띤다. 질케와 나는 커머닝이 사실상 사회적이고 생태적인 관계맺음을 통해 창출되고 지속되는 역동적인 살아있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감수성은 문화 역사가 토마스 베리(Thomas Berry)의 다음 말에 의해 잘 표현된다. “우주는 객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주체들의 교감이다.” 나는 또한 생물학자이자 생태철학자인 안드레아스 베버(Andreas Weber)의 다음 문장을 좋아한다. “과학과 경제학은 창조적인 살아있음을 현실의 존재론적인 토대로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질케와 나는 공동 출간한 책 『자유롭고 공정하며 살아있는』(Free, Fair and Alive)[주석3]에서 커먼즈 안에서 살아있음이 어떻게 실제로 작동하는지 설명해보려 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에 답하고 싶었다. 관계성이 핵심이라면 다양한 개성들과 선호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조율이 되어 일관성 있는 커먼즈가 되는가? 화폐교환 없이 어떻게 중요한 것들이 이루어지고 돌봄이 제공되는가? 어떻게 피어(동료)가 주도하는 협동 시스템들이 생성되고 스스로를 유지하는가?

운 좋게도 우리는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 교수의 앞선 성취들과 그녀가 선구적으로 포착한 성공적인 커먼즈의 ‘설계원칙들’을 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오스트롬은 명확하게 명시한 경계들의 필요성과 자체적으로 만들어 낸 거버넌스 규칙들의 필요성을 확인했다. 그녀는 어떻게 커머너들이 규칙을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어야 하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규칙들이 시행되는 방식을 감시하는 데 참여해야 하는지를 알아냈다. 분쟁이 있다면 커먼즈는 그것을 저비용으로 신속하게 해결할 자체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커먼즈는 국가 당국으로부터 자립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커먼즈에 관한 이 전통적인 사고방식은 경제의 표준적인 틀과 그 방법론인 개인주의 내부에 대체로 머물러 있다. 그것은 커머너들의 내적인 삶 또는 정치경제[즉, 집단적 공동체의 경제]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커먼즈의 실제적 작동방식을 우리가 보다 명확하고 깊이 있게 보도록 돕는 ‘관계틀’을 개발했다. 우리는 ‘패턴언어’라는 아이디어를 개발한 급진적 도시계획자이자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의 작업에서 길잡이를 찾았다.

알렉산더는 빈발하는 문제들에 대한 특정의 해결책들이 긴 시간 동안의 역사와 문화를 가로질러서 소소하게 변동하면서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것을 자신의 분야에서 관찰했다. 그는 이 해결책들을 ‘패턴’이라 불렀다. 패턴들은 사회적 관행에서 나타나는 디자인이고 행동이다. 패턴들의 유효성은 그 패턴들이 반복적으로 사용됨으로써 승인된다.

패턴언어 방법론을 활용하면서 질케와 나는 15년간 우리가 목격했던 많고 많은 수의 커먼즈 형태에서 관계를 나타내는 수십 개의 패턴들을 포착해냈다. 우리는 이 패턴들을 ‘사회적 삶’, ‘피어 거버넌스’ 그리고 ‘자급’이라는 세 영역—이는 각각 사회적, 제도적, 경제적 영역이라 할 수 있다—으로 나누었다. 이 세 영역들을 합치면 우리가 ‘커머닝의 3인조’라 부르는 바의 것이 구성된다. 이 3인조는 ‘어떤 사회적 실천들과 윤리적 행동들이 커머닝의 성공적인 관계들을 창출하고 유지하도록 돕는가?’라는 물음에 우리가 답할 수 있게 한다. 나는 우리가 찾은 25개 이상의 패턴들을 다 살펴볼 수는 없고 여러분에게 패턴에 대한 감각을 전하는 데 집중하고자 한다.

커먼즈의 ‘사회적 삶’에서 한 가지 중요한 패턴은 공유된 목적과 가치들을 계발하는 것이다. 이 실천이 없다면 커먼즈는 붕괴된다. 사람들이 긴밀히 연결된 활력 있는 집단으로 남아있으려면 그들은 경험을 공유할 필요가 있고 집단적으로 그들의 커머닝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된 패턴은 함께함을 의례(儀禮)화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만나야 하고 서로 공유해야하며 하나의 집단으로서 그들의 성취와 친연성을 축하해야 한다. 함께 어울리는 것이 중요하며, 의식(儀式)들, 전통들, 축제행사들을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커먼즈의 사회적 삶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기여하는 것—똑같은 가치를 직접적 혹은 즉시 되돌려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고 주는 것—을 필요로 한다. 커먼즈가 시간을 두고 실제 혜택을 내줄지라도 말이다.

커머닝 3인조 중 둘째인 피어 거버넌스의 핵심은 타자들을 동등한 존재로 보는 것이자 집단적인 의사결정의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것이다. 커머너들은 피어 거버넌스로 위계와 중앙집권화된 권력시스템을 피하고자 한다. 그 시스템이 권력 남용과 책무성 문제를 낳을 배치일 수 있기 때문이다. 피어 거버넌스는 무엇보다도 ‘지식을 아낌없이 공유하기’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집단지성을 생성하는 결정적인 방식이다. 지식은 공유될 때 늘어나지만 이런 일은 정보가 자유롭게 유통되고 쉽게 접근 가능할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패턴은 ‘투명성을 신뢰의 영역에서 존중하기’이다. 투명성은 명령될 수 없다. 사람들이 어렵거나 난처한 정보를 공유할 만큼 충분히 서로 신뢰하지 않는다면, 투명성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커머닝의 세 번째 영역인 ‘자급’은 커머너들이 어떻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생산하는가가 그 핵심이다. 시장경제에서처럼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는 일은 없다. 기본 목표는 사람들의 경제적 욕구를 개인적인 삶의 여타의 부분들과 통합하는 것이다. 커머너들은 시장에서 팔 것을 생산하지 않는다. 사실 커머너들도 자신들의 커먼즈의 온전함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시장과의 상호작용이 조금이라도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그 상호작용의 방식을 구조화하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급의 한 가지 기본 패턴은 ‘함께 제작하고 함께 사용하라’이다. 참여하고 책임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함께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자신들의 능력•재능•욕구에 따라 기여한다. 함께 생산하기는 ‘함께 하라’(‘Do It Together,’ DIT)라고 불릴 수도 있는 것의 핵심과정이다. 커먼즈에서 일반적으로 자급이 확실하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방식을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이 되는 많은 다른 패턴들이 있다.

일단 커머닝의 패턴들로 들어가기 시작하면—일단 관계성이 어떻게 지구에서 삶의 근본적인 현실인지를 보기 시작하면—근대적 세계관과는 다른 세계관, 즉 내가 존재론적 전환 또는 ‘OntoShift’(존재전환)이라 부르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지금 당장 철학적 차원을 논의할 필요는 없다. 다만 세계관을 전환하는 것은 우리의 내적 삶과 관점을 바꾸게 될 새로운 사회적 실천들과 커머닝의 경험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한다라고만 말해두자. 우리는 시장문화의 핵심요소들인 이기적인 개인주의와 장사꾼 사고방식을 버리고 가기 시작하는 것이며 세상을 촘촘한 망으로 이루어진 공생 및 협력관계로 움직이는 통합된 전체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커먼즈버스에서 ‘공동선’은 어떤 고정된 이상화나 눈에 잡히지 않는 목표점이 아니다. 이 공동선은 수평으로 그리고 아래에서부터 확장하고 출현하는 협동 윤리로서 발현되는 역동적인 살아있음이다. 이 공동선은 유기적 연결성과 온전성으로 발현되며 이는 사실 살아있는 유기체들의 생물학적 충동이다. 우리의 내적 삶에서 이 공동선은 배려하는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 안전하고 공정하다는 느낌, 그리고 소속감으로 발현된다. 이 공동선은 체계 차원의 다양성과 회복탄력성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것에서 나는 공동선에 대한 프란치스 교황의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Praise Be to You)의 비전이 생각나는데, 이 비전은 우리의 영적 삶, 인간보다 큰 세상, 그리고 우리의 (하나의 종으로서의) 공통의 부와 운명 사이의 상호연결에 관하여 많은 비슷한 점들을 강조한다.

* * *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문턱에 서있고 사태는 흥미로운 방식으로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커먼즈와 커머닝은 지난 10년간 급증하면서 국가권력, 자본주의 기업 및 신자유주의와 점점 더 충돌하게 되었다. 시장‑국가 체제는 그 나름의 우선사항들과 비전에 공격적으로 전념하는데 이 우선사항들과 비전은 커먼즈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영국에서 벌어진 종획 운, 몇 백 년에 걸친 식민지 정복 그리고 인공적인 나노물질과 유전자에서부터 수학 알고리즘과 (금융증권으로 전환되는) 물의 흐름까지, 가치가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사유화하고 화폐화하고자 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발전’에서 나타나듯이, 역사는 성장경제가 일반적으로 공동자산을 전유하고 사유화하며 커머너들을 그 공동자산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시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커머너들에게 긴급한 실질적인 물음은 어떻게 그들이 공유된 부의 종획을 막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커머닝을 보호하기 위해 법을 사용할 수 있는가이다. 이것이 실제로 가능한가? 자유주의 헌법 질서가 긍정적으로 커머닝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비자본주의적인 사회 형태로서 커머닝의 온전함을 존중할 수 있는가? 그 질서가 커머닝을 보호하기를 원하는가? 커먼즈의 토착적인 법과 서구의 법을 미봉적인 긴장완화로서만이라도 영리하게 섞는 것이 가능한가? 또는 자유주의 철학은 너무 경직되고 공격적이며 정치적으로 고루해서 커먼즈와 커먼즈가 만들어 내는 살아있는 가치를 지지하지 못하는 것인가?

분명히 해두자. 커먼즈는 시장가격과는 매우 다른 가치 이론을 구현하는데, 우리 시대에 시장가격은 가치의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측정규준으로 간주된다. 이와 달리 커먼즈는 살아있는 시스템을 생성적인 것으로서, 즉 일반적으로 사유화되지도 않고 사유화될 수도 없으며, 화폐화되지도 않고 화폐화될 수도 없고, 상업적으로 거래되지도 않고 거래될 수도 없는 가치로서 인식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시장‑국가 체제는 재산법, 계약법 및 통상법의 매개를 통해 삶을 객관화한다. 국가권력으로서는 자본과의 동맹을 통해 그 힘을 공고히 할 기회를 환영한다. 일반적으로 국가권력은 사람, 자연, 여타 생명체들에 대한 행정적인 통제를 중앙집권화하고 규칙화하기를 원한다. 정치 과학자 제임스 스콧(James Scott)이 다음과 같이 분명히 했듯이 말이다.

근대국가는 … 감시하고 수를 세고 평가하고 관리하기에 가장 쉬울 바로 그러한 표준화된 특징을 지닌 지형과 인구를 창출하는 것을 시도하는데 성공의 정도는 경우에 따라 다르다. 근대국가의 허망하고 근시안적이며 끊임없이 좌절되는 목표는, 그 밑에 있는 무질서하고 혼란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현실을, 그 현실을 관찰하는 행정망을 더 많이 닮아있는 어떤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국가들이 디지털 감시 테크놀로지와 빅테크와의 연합으로 무장하고 있으므로 이 동향의 논리적인 종점은 권위주의적인 통제이다. 국가법과 자유주의가 얼마만큼 이 방향을 향할지 불분명하다.

결국 자유주의는 국가권력에 깊이 예속되어 있고 커머너들의 관습에 따른 관행의 역할이나 그들의 집단적인 정체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시장처럼 자유주의 국가는 개인주의, 재산권, 계약의 자유, 및 물질적 ‘진보’에 깊이 전념한다. 이것은 분리―인간이 서로 분리되고 지구로부터 분리되며 역사적 기억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의 사고방식을 조장한다.

세르게이 거트워스(Serge Gutwirth)가 설명했듯이, 자유주의 국가에는 법인격 없는 역동적인 공동체에 권리를 부여할 수단이 없다. 물론 경제성장—주주들의 집단적 의무—이 자유주의 국가에 크게 잘 들어맞기 때문에 기업들은 예외다. 대략 800년 전에 커머너들의 많은 특정한 권리들이 획기적인 <삼림헌장>[주석4]—마그나카르타와 연결되어 있는 법적 선언문—에서 존중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것은 대부분 잊혀졌다. 민족(국민)국가의 발생과 심지어 자유주의로 인해 커머닝에 대한—생존에 필수적인 것들에 접근할 사람들의 권리에 대한—법적인 인정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이것이 나에게 시사하는 바는 현재 실행되는 바의 자유주의는 철학적으로 커먼즈에 적대적이거나 최소한 커먼즈의 실제 가치와 역동성을 모른다는 것이다. 국가는 권력 행사의 합법성을 한시도 늦추지 않고 주장한다. 그것이 법과 국가 기관을 통해 공식적으로 수행되는 바대로 말이다. 그러나 국가는 커먼즈에 기반을 두는 체제에 의해 주장되는 사회적, 윤리적 정당성에는 일시적인 관심만을 보인다. 권력은 자신이 선택한 인식 체계를 떠받침으로써 스스로를 유지한다.

자유주의와 커머닝을 논할 때 우리는 합법성과 정당성 사이의 단절에 직면한다. 시장‑국가 체제는 그 행정질서의 합법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형식적 법체계와 관료조직에 의지한다. 그 체제는 커머너들—커머너들은 그들 고유의 인식론적 질서, 법과 정당성에 대한 그들 고유의 비전을 가지고 있다—의 역동적인 거버넌스와 일상적인 관행 및 경험에 별 관심이 없다.

나는 이것을 우리가 기획한 「자유주의를 넘어」라는 제목의 워크숍이 탐색해야 하는 영역으로 여긴다. 국가의 합법성과 커먼즈의 정당성 사이의 차이는 취약성, 위험성 및 가능성의 차이이다. 이 차이를 메우려고 했던 몇몇 인상적인 혁신들이 있고 현재로서 최선의 효과를 내는 혼합안을 개발하려고 했던 몇몇 흥미진진한 실험들이 있다. 그것들 중 세 가지만 간략하게 언급해보자.

1) 새로운 사회적 규범들 및 관행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법적 해킹 활용
2) 커머닝을 지원하는 새로운 조직형태들의 개발
3) 일반적으로 보통 지자체 수준에서 커머너들과 국가 공무원들을 협력에 이르게 하는 커먼즈‑공공부문 파트너십

법적 해킹은 국가법을 원래 입법자에 의해 상상되거나 의도되지 않은 방식으로 개편하는 것이다. 법적 해킹의 핵심은 현행법 내부에서부터 합법성의 새로운 구역을 개척하는 것이고 그런 다음 새로운 사회적 규범과 정치 활동으로 이 구역을 채우는 것이다. 핵심은 ‘새로운 합법성’을 수립하기 위해 민중에 기반을 둔 정당성과 공동체 실천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법적 해킹은 국가법 하에서 불법일 수 있는 커머닝(예를 들어 씨앗공유하기 및 인도적인 구조救助)을 탈범죄화하거나 커머닝이 번성할 보호받는 적법한 공간들을 만들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사례들로는 창조적인 작업을 합법적으로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듦으로써 저작권법을 해킹하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Creative Commons licenses)가 있다. 이와 유사하게 강•산•풍경을 보호하는 한 방식으로서 이것들에 공식적인 법인격을 부여하고자 하는 다양한 ‘자연권’ 법들도 법적 해킹이다.

기업들, 협동조합들, 비영리단체들에 권한을 부여하는 지배적인 법구조가 커머닝이 작동하는 방식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적어도 서구 나라들에서는 새로운 조직 형태들을 만드는 것이 종종 필요하다. <지속가능한 경제법 센터>(Sustainable Economies Law Center), <민주 및 환경 권리 센터> 같은 몇몇 법 옹호단체들은 풀뿌리에서부터 성장할 수 있는 탈중심화된 구조를 설계하기 위해서 혁신적인 정관(定款)과 금융구조를 개발하고 있다. 그들은 커먼즈로서 운영되는 자율적인 운영자공동체 그리고 법인격을 가지고 있는 ‘스스로를 소유하는’ 토지를 창출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커먼즈‑공공부문 파트너십(실제적인 것이든 제안된 것이든)은 바로셀로나, 암스테르담, 볼로냐, 방콕, 서울 같은 도시들에서 그리고 공동도시들(Co-Cities) 운동[주석5]과 연관된 도시들에서 불쑥불쑥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지자체 공무원들과 커머너들 사이에 새로운 유형의 유연하고 비관료적인 협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노인 돌봄, 아이 돌봄, 근린지역 개선, 공공 장소와 공공 건물들, 디지털 정보 커먼즈, 그리고 오픈소스 테크놀로지가 이 파트너십에 포함된다. 오픈소스 참여가 공무원식 사고방식과 얼마나 성공적으로 잘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는 열린 문제로 남아있다.

바라건대 나의 발표가 분명히 하듯이 자유주의적 입헌주의의 세계에서 ‘공동선’에 대한 생각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정의되어야하고 이해되어야 하는지 전적으로 분명하지는 않다. 공동선을 발생시키기 위해 어떤 사회적 관계가 요구되는지, 공동선을 보호하기 위해 법을 포함해서 어떤 종류의 정치제도들과 절차들이 요구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국가권력이 다시 만들어질 필요가 있는지 전적으로 분명하지는 않은 것이다.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논점은 공동선에 대한 일정한 비전 뒤에 인간의 번성하는 영적 삶에 대한 무슨 암묵적인 비전이 자리 잡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당연하게도, 커먼즈와 커머닝을 지향하는 활동이 자본주의적인 근대성의 한계를 비판하고 조직화된 협력과 공유하기의 근대 이전 전통—그리고 전적으로 현대적인 전통—을 탐색함으로써 공동선 논의에 공헌할 여지가 많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또한 체제 변화에 복무하는 다양한 국제적인 사회운동들—탈성장, 협동조합 운동들, 피어 생산, 코즈모로컬 생산, 농업생태학, 슬로우푸드를 비롯한 농업 및 식량 운동들, 토착적이며 전통적인 공동체들, 탈식민과 인종 정의 운동들, 재지역화 기획들, 도넛 경제학[주석6], 페미니스트 경제학, 그리고 기타 많은 것들—에도 이 더 큰 프로젝트에 기여하는 그 나름의 중요하고 보완적인 관점들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재의 긴급한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연계된 집중적인 대응을 개시할 수 있는가? 이것은 아쉽게도 여전히 열린 문제로 남아있다. 

==== 주석

 [주석1] 토지 신탁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1574 참조.
[주석2] 메이커스페이스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1369 참조.
[주석3] 이 책과 관련해서 http://commonstrans.net/?p=2418http://commonstrans.net/?p=2095참조. 
[주석4] <삼림헌장>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974, http://commonstrans.net/?p=478 참조.
[주석5] 공동도시들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2560 참조.
[주석6] 도넛 경제학(Doughnut Economics)은 영국의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Kate Raworth)가 창안한 21세기 경제학 이론이다.

 

 




공동도시들–도시에서의 커머닝

 


  • 저자  : David Boiler
  • 원문 : Foster & Iaione Probe Commoning in the City
  • 분류 :  번역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 글은 데이빗 볼리어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2023년 3월 21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어떻게 커먼즈 패러다임이 한층 더 초점이 맞추어진 효과적인 방식으로 도시에 적용될 수 있을까? 몇 가지 답을 찾기 위해 최근에 나는 선도적 사상가이자 도시 커먼즈 옹호자인 두 사람, 셰일라 포스터(Sheila R. Foster)와 크리스천 이아이오네(Christian Iaione)를 <커머닝의 프런티어> 팟캐스트(에피소드 37)에서 인터뷰했다. 그들은 『공동‐도시들—공정하고 자립적인 공동체를 향하는 혁신적인 이행들』(Co-Cities: Innovative Transitions Toward Just and Self-Sustaining Communities)이라는 책을 막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들은 이 주제를 연구하면서 수년이 흘러 알게 된 많은 것을 분석한다.

포스터는 조지아타운 대학에 근무하는 도시법과 (도시)정책 교수로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복지, 기후정의 및 더 나은 거버넌스를 촉진하고 인종 불평등을 다루는 데 있어서 도시의 역할을 연구한다. 이아이오네는 로마 소재 루이스 귀도 깔리 대학교(Luiss Guido Carli University)에서 도시법과 도시정책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대학에서 그는 시 정부들이 도시 커머너들 및 다른 이해당사자들과 함께 일하기 위한 창조적인 방식들을 개척한다.

나는 10년 전에 처음 이아이오네를 만났는데 그때 그는 도시 커먼즈의 돌봄과 회생을 위한 볼로냐 조례—시민의 협력을 시정부와 연계시키기 위한 공식적인 법적 체계이자 행정적인 체계—를 개발하고 있었다. 그 조례는 수백 개의 ‘협력 협약들’을 낳았으며 자율적으로 조직된 시민 단체들에게는 이것을 통해 버려진 건물들을 재건하고 유치원과 노인요양소를 관리하며 도시 녹지공간과 다른 많은 것들을 돌볼 수 있는 권한 및 시의 지원이 주어졌다.

시민의 에너지를 최대로 이용하고 정부, 기업, 시민 참가자들 그리고 지식 기관들의 지식 및 자원과 그것을 어우러지게 하는 이 영향력 있는 아이디어가 이탈리아의 다수의 다른 도시들과 전 세계로 퍼졌다.

포스터와 이아이오네가 작업을 하기 위한 주요 수단은 <랩겁>(LaGov)커먼즈로서 도시 거버넌스를 위한 실험실—이라 불리는 학제간 실험실이다. <랩겁>은 많은 대학과 전세계 다른 지식 기관들과 함께 작업을 하면서 도시들에서 공동제작 프로젝트의 새로운 유형들을 개발한다.

포스터와 이아이오네가 훌륭한 커먼즈 학자인 엘리너 오스트롬에 의해 확인된 설계원칙들로 시작할지라도 그들은 “그녀의 작업틀 및 도시환경에의 응용가능성의 한계”를 인정한다. 포스터와 이아이오네는 농지, 물 또는 어장이라는 전통적인 커먼즈—이곳에서는 그 자체의 관리규칙을 고안하는 많은 자유가 사용권에 있다—에 기반을 둔 “오스트롬의 작업틀은, 으레 붐비고 밀집하고 다양하고 경제적으로 복잡하며 심하게 규제받는 도시환경의 현실에 맞추어 변경될 필요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우리의 논의는 도시커먼즈가 매우 다양한 도시환경들, 대립하는 정치, 지역의 특성들, 그리고 더 넓은 개념적 접근법을 필요로 하는 역사들 안에서 구축되는 다양한 형태의 방식들에 중점을 두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업틀을 ‘공동‐도시 프로토콜’이라고 부르며 그것은 여섯 개의 뚜렷히 구분되는 단계들—알기, 맵핑하기, 실천하기, 원형만들기, 실험하기 그리고 모델화하기—에 의존한다. 이것은 보통 말하는 정확한 청사진이 아니라 특정한 도시의 독특한 환경에 적합한 템플릿에 더 가깝다.

<랩겁>은 루이지애나 주의 배턴루지에서 도시 재개발을 담당하는 기관으로부터 수십 년 동안 기반시설—예를 들어 노면 부족, 부족한 가로등, 충분치 않은 좋은 주택—이 방치되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역을 개선하도록 요청받았다. 포스터는 “우리는 사용되지 않는 땅을 지킬 수 있는 공동체 토지은행과 토지신탁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그곳을 예를 들어 생태공원, 푸드 인큐베이터 및 주택으로 재개발하기 위해 많은 다른 관련자들을 참여시켰다.”라고 설명한다.

공동‐도시 추진은 해법들을 찾아내기 위하여 전체 공동체의 많은 논의 및 심사숙고가 필요하며, 방치된 어려운 일과 솔직하게 맞서 싸우는 것이 필요하다. 이아이오네는 이런 노력을 하는 동안에 “실패는 항상 바로 가까이에” 있지만 이것이 그 과정을 비난하는 것으로서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시장과 정부는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종종 실패하는데 “왜 공동체가 실패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다른 인간현상처럼 커머닝도 실패에 이를 수 있다고 이아이오네는 언급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이탈리아와 유럽 어딘가 다른 곳에서 지역에 기반한 에너지 협동조합 같은 몇몇 매우 보람있는 결과에 도달한다. 이아이오네는 “우리는 7~8년전 이 작업의 선두에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수도 없이 실패했다. 이제 에너지를 지닌 공동체의 생산은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심지어 유럽연합의 규제틀과, 규제당국에 함입되어 있고 공공시설이 지역 공동체의 조건을 형성하기도 하는데, 공공시설이 지금은 에너지 생산과 분배에 있어서 중요한 지점인 지역 공동체의 조건을 형성하기도 한다.

포스터와 이아이오네와의 팟캐스트 대화는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커머닝을 통해 예술을 큐레이팅하기―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의 최빛나

 


  • 저자  : David Boiler
  • 원문 :  Binna Choi of the Casco Art Institute: Curating Art through Commoning
  • 분류 :  번역
  • 옮긴이 : 루케아
  • 설명 :  아래 글은 데이빗 볼리어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2023년 2월 1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여러 해 전에 나는 네덜란드에 있는 한 예술기관을 알게 되었는데, 이 기관은 “커먼즈를 지향하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해서 나로서는 매우 흥미로웠다. 위트레흐트 소재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Casco Art Institute)가 바로 이렇게 선언한 기관이다.  ‘커먼즈를 지향한다’는 그들의 슬로건은 예술과 커머닝이 정확히 어떻게 관련이 있는 것인지, 그리고 예술기관이 어떻게 커머닝의 세계에 진입할 것인지에 관한 물음들을 즉각 제기한다.

나는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의 디렉터인 최빛나씨를 팟캐스트 시리즈 <커머닝의 프런티어>(Frontiers of Commoning)의 35회 대담에 초대해서 좀 더 알아보기로 했다. 2008년부터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를 이끌어 온 한국인 최빛나는 비중 있는 전시회를 위해 예술작품을 큐레이팅하고 있으며 더치 아트 인스티튜트(Dutch Art Institute)의 교수를 역임했다. 그녀는 2022년 싱가포르 비엔날레, 2016년 광주 비엔날레의 큐레이터(예술감독)였으며 다가오는 2025년 하와이 트리엔날레의 예술감독으로 선정되었다.

최빛나는 예술창작과 작품 전시회에 커머닝의 윤리와 실천들을 도입했다. 그녀와 동료들은 커머닝을 다양한 예술가들로 구성된 팀이 예술을 함께 창작하고 함께 활동할 수 있도록 조직하는 원리로서 받아들였다.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측은 다음과 같이 자신들의 커먼즈 철학을 설명한다.

예술은 상상력에 기반을 둔 행동하기와 존재하기의 양태로서, 사람들을 이어주고 치유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사람들을 새로운 사회비전으로 이동시킨다. 커먼즈는 공동체 문화가 살아있도록 유지하는 공유된 자원들이기에 예술은 사실상 커먼즈에 내재해 있으며, 커먼즈는 예술을 존재하게 할 것이다. 예술과 커먼즈 때문에 우리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이분법 너머에 있는 세계관을 그릴 수 있으며 ‘우리가’ 욕망하는 대로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패러다임―탈식민적, 포스트자본주의적, 모권중심적, 혹은 연대 경제 등 뭐라 불리던―을 함께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가 거기에 이름을 부여한다.

실제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카스코 인스티튜트가 눈길을 끄는 전시회들과 마케팅을 통해서 그 평판을 높이는 데 열중하는 브랜드화된 기관이기보다는 예술가 중심의 기관임을 의미한다. 최빛나와 카스코 인스티튜트 소속 예술가들은 참여적이고 비위계적이며 평등주의적인 팀으로서 일한다. 모든 사람들이 작업실 공간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다음 프로젝트나 전시회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그리고 카스코 인스티튜트가 지역 공동체와 관계를 맺기 위하여 어떻게 그 예술적 상상력을 사용할지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러한 한 가지 프로젝트는 <잊혀진 기술을 간직한 농장 박물관 여행하기>(Traveling Farm Museum of Forgotten Skills)라는 전시회로 위트레흐트 근처 현대적인 교외지역 개발지에 둘러싸인 오래된 농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저지대 교외의 스프롤 현상이 이전에 그곳에 있었던 많은 농지를 잡아먹었고, 한 농부가 여전히 소유하고 있었지만 낡아빠지고 아무도 살지 않는, 허름한 농가만 남게 되었다.

최빛나와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예술가들은 공동체가 가령 다음과 같이 묻는 방식으로 그 공간의 역사를 탐색하게끔 하는 예술 프로젝트를 개발하기로 했다. 농장이 왜 비어있는가? 농장은 어디로 옮겨갔는가? 거의 모든 농업농장과 목축농장이 이 지역에서 사라진 상황에서 레이드슈 라인(Leidsche Rijn) 지역주민들의 식량은 실제로 어디서 오는가?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는 한때 그 지역을 위해 식량을 생산한 옛날 식 농사 관행을 소개하기 위한 전시회를 열기 위해 (위트레흐트 공무원들이 성가신 것으로 여기는) 그 농장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카스코 예술가들은 열 달 동안 농가에서 함께 살았고 경작하고 식량을 모으면서 그 역사와 현재 상황을 통해서 땅과 다시 관계를 맺었다. 이 프로젝트는 지역 주민들에게 농장의 잊혀진 과거를 숙고하고 앞으로 땅을 사용하는 것에 관하여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도록 했다.

안타깝게도 이 프로젝트는 소유주가 집과 땅을 팔기로 결정하면서 너무 일찍 폐기되었다. 현재 그 장소는 팬케익 식당과 쇼핑센터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래도 한동안은 전시회가 공동체에 중요한 주제들—공동체의 역사, 식량자원 및 땅의 미래—에 예술적인 자극을 주었다.

곧 시작될 1년에 걸친 프로그램 <배운 것을 버리기 센터>(Unlearning Center)는 사람들이 예술과 문화에 관한 낡은 전통적 관념을 버리고 다음과 같이 묻게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문화적 기관들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는가? 어떻게 예술과 문화는 우리가 커먼즈를 상상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가? 곧 열릴 또 하나의 전시회인 <커먼즈 예술>(Commons Art)은 커먼즈 문화에 기여하는 사회참여적인 예술 프로젝트들의 돌봄과 유지과정을 지원하는 디지털 플랫폼을 제공할 것이다.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프로젝트에 의해 생산된 예술을 종래의 예술기관들이 나타내고 싶어하는 ‘고급예술’보다 다소 못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간혹 예술관과 예술계에 있는지를 최빛나에게 물었다. 여기서 ‘고급예술’이란 비평가들과 문화적 규범에 의해 알려진 회화와 조각이나 황량한 하얀 전시회장에서의 공식적인 전시들 혹은 예술과 일상을 분리하는 시나리오들 등을 의미한다.

최빛나는 주안점을 두는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의 구축이라고 대답했다.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우리와 예술가들의 관계는 가족관계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 관계의 망 안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초점을 맞추어야하는 것은 이 관계를 더 잘 돌보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좋은 생산물 만들기’보다는 관계의 실천을 토대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은 훨씬 더 나아질 것입니다.

대화를 통해 어떻게 커머닝이 다양한 형태의 예술제작, 예술작품 전시회들 및 기관의 파수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멋진 경험을 했다. 내가 최빛나와 나눈 이야기는 여기서 들을 수 있다.

* [옮긴이]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홈페이지의 설명에 따르면, ‘카스코’(casco)는 네덜란드어로 변화를 위한 기본 구조, 집단적 예술프로젝트 및 조직적 실험으로 공동으로 탐구하고 연구하기 위한 기본 구조가 존재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커먼즈를 위한 건축–2008년 이후 건축의 과제

 


  • 저자  : Jose Sanchez
  • 원문 :  “Introduction : A Call for a Post-2008 Architectur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호세 산체스의 Architecture for the Commons : Participatory Systems in the Age of Platforms(Routledge, 2021)의 “Introduction”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저자 호세 산체스는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활동하는 건축가이자 게임디자이너이며 이론가이다. 그는 건축디자인 지식의 증식을 추구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Plethora Project(www.plethora-project.com)를 이끌고 있다. 그는 동네를 만드는 시뮬레이션 비디오 게임 Block’hood의 제작자이며 공동체를 건설하고 경제를 관리하는 비디오게임 Common’hood의 제작자이고, 대중들이 참가하여 동일한 유닛들로 설치물을 짓는 Bloom의 공동제작자이다. 글의 뒤에 필요할 듯 해서 보충설명을 달았다. 

 

우리의 건축은 항상 패러메트릭 건축이었다

20세기 말 건축분야에서는 우리가 건물들을 이해하고 짓는 방식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전환을 제안하는 혁신들이 일었다. 소프트웨어, 재료과학(material science), 디지털 패브리케이션(digital fabrication)(([정리자] 디지털 패브리케이션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제품을 제작하는 기술뿐만 아니라 형태를 만들고 재료 가공 및 시공까지 모든 과정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총칭하는 말이다. 일례로 3D 프린팅 기술이 여기에 속한다.)) 및 자동화 영역에서 일어난 기술혁신은 무한한 가변성과 주문제작이라는 비전을 제공했다. 인간의 인식과 맞물려있는 이 비전은 몰입환경으로서 주문제작되는 정동적 건축(affective architecture)을 나타낸다.(([정리자] ‘affective architecture’에 대해서는 가령 https://aalab.org/ 같은 사이트를 참조해보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 ‘새로운’ 건축—모든 디자인이 일회적인 건축—은 젊은 세대의 건축가들이 오늘날 실행하고 있는 방식의 핵심적인 부분이 되었다. 테크놀로지를 중심으로 하는 서사들이 이것을 입증했다. CNC(computer numerical control, 컴퓨터 수치제어장치) 테크놀로지에 의해 작동하는 디지털 패브리케이션이 대량생산 제품을 생산하는 동일한 비용으로 맞춤제작 형태들을 만들 수 있다는 전망은 젊은 세대의 건축가들이 이 새로운 건축을 채택하는 것을 완벽하게 찬성할 논리를 제공했다. CNC 테크놀로지는 대량 생산이 여러 해 동안 여타 산업들을 규정해온 상황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줄 한 가지 대안을, 다시 말해 의뢰인들이 항상 색다른 새로운 디자인을 찾을 것이기에 수요가 계속될 것이고 그럼으로써 디자인이 번성하게 될 그러한 대안을 약속하고 있었다.

‘일회적인’ 건축이라는 패러다임—건물을 지을 때마다 스스로를 재창조해야 하는 패러다임—에는 지어지는 환경의 구조적 구성에서부터 사업모델과 관례상의 수수료 배분에까지 세분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지속적으로 지원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 패러다임은 무상으로 일하거나 또는 충분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착취적인 업무에 고용되는 것이 일상인 경쟁적인 시장에 학생들이 참여하도록 준비시킴으로써 건축분야의 교육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것이 의뢰인들의 투기적인 산업관행으로, 또는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거나 전무한 건축공모 참가로 낭비되는 큰 규모의 디자인 노동의 결과이다.

이 맥락에서 패러매트릭 패러다임의 등장은 건축분야에서의 핵심적인 비능률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될 수 있다. 어떤 제안이 개발될 경우 그 과정 내내 디자인 베리에이션(([정리자] 베리에이션(variation)은 하나의 기본적인 형태를 변화시키는 작업이나 그 변화된 상태를 지칭한다.))을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에 패러메트릭 패러다임은 한 건축가가 건물 하나를 디자인 하는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데이터로 통제되는 다수의 가상의 건물들을 디자인하는 기술적인 작업흐름을 건축가에게 제공했다. 패러메트릭 소프트웨어는 건물을 물체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비율을 가지고 공존하면서 전반적인 일관성을 유지하는 요소들의 네크워크로 정의하며, 건축가들은 이것을 기반으로 예산이나 규정의 변화 및 의뢰인의 심경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고 수백 개의 가능한 디자인들을 설계할 수 있다.

패러메트릭 방법론으로 가능해진 다수의 가상 건물들은 자본주의의 생산성의 승리로 보일 수 있으며, 이 경우 디자이너 한 명의 노동이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어, 건물 하나하나가 유일할 수 있는 도시 전체를 설계할 수 있게 된다. 이 기술적이고 개념적인 기획은 건축협회와 인스부르크 대학 소속이자, <자하 하디드 아키텍쳐>(Zaha Hadid Architects) 소속 패트릭 슈마허(Patrik Schumacher)가 낸 ‘패러메트릭 어버니즘’(parametric urbanism)이라는 아이디어로 탐구되었다. 패러메트릭 어버니즘이라는 유토피아적 비전은 건물들을 지역 부지 조건에 조화시키면서 모든 건물과 도시 내지 지역의 세부 베리에이션을 제어할 수 있는 통합된 알고리즘적 스타일을 제안했다. 슈마허가 주장했듯이 이 제안 이면에 있는 유토피아주의는 건물들 사이의 시각적이거나 양식적인 유사성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디자이너가 넓은 영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디자이너 한 명의 노동과 비전의 규모를 키우는 능력의 잠재적인 승리에도 존재한다.

패러메트릭 모델이 대량 주문제작을 가능하게 하고 수백 혹은 수천 개의 건물들을 서로 다르게 짓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모델은 한 명의 디자이너가 끼치는 영향력을 키우지는 못했다. 패러메트릭 정의 안에 존재하는 가상의 다양성으로 인해 서로 상충하는 제안들이 생겨나는데 이 제안들 가운데 하나만이 실행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결국 다양한 가상적인 것들 가운데 단 하나만 현실화된다.

의뢰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패러메트릭 방법론 때문에 자신들의 요구에 근본적으로 상이하게 접근하는 제안들을 받아 볼 수 있고, 잠재력이 있는 디자인 분야를 탐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대하게 되었다. 어쨌든 건축을 발전시키는 데 상당량의 자본이 요구된다는 점으로 인해, 민간부문이든 공공부문이든 둘 다 건축환경의 영구적인 부분이 될 것에 관하여 최종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많은 양의 디자인 제안들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상식화되었다. 하지만 패러메트릭 모델은 그런 과제를 수행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패러메트릭 방법론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제안들이 아니라 한 가지 제안의 변형들을 제공하기에 더 적합하다는 것을 입증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베리에이션은 본질의 변화가 아니라 정도의 변화인 것이다.

그런데도 수년 동안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은 건축공모라는 형식을 통해 근본적으로 상이한 다수의 제안들—건물의 제약들을 제각각 주의 깊게 고려하는 제안들—을 즉각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건축가들과 협력했다. 건축공모는 궁극적인 패러메트릭 모델화 방법론으로 간주될 수 있다. 디자인 참여자들에게는 큰 비용을 치르게 하면서 의뢰인에게는 상당한 디자인 베리에이션을 거의 무료로 주어서 광범한 가상의 다양성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축공모는 디자인 베리에이션을 제공하는 패러메트릭 디자인 방법론의 모든 원칙을 따른다. 패러메트릭 디자인이 디지털적으로 창조되는 건물들 중 99%를 폐기하듯이 건축공모 역시 적합한 해결책에 도달하기 위해 경합하는 노동인력 풀로서 편성된 건축가들이 무보수 노동으로 만들어낸 디자인들 가운데 99%를 폐기한다. 이렇듯 건축공모들은 우리가 기꺼이 제공하는 노동이 보상을 받지 못하는 투기성 노동의 관행들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건축공모가 건축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오래된 관습이라는 사실은, 패러메트릭 건축이 실제로 출현하기 이전부터 항상 우리가 패러메트릭 패러다임 속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패러메트릭 어젠다가 획기적인 스타일이라고 한 패트릭 슈마허의 주장을 건축공모들이 입증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건축분야의 진보에 기여하고 보수를 받는 주문을 받으려는 수많은 건축가들의 열망 덕분에 그들에게서 공짜나 다름없는 가치를 뽑아낼 수 있는 조달 기술을 전지구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그렇게 된 것이지 자유로운 시장참여자들 사이에서 새로 출현하는, 서로 연결 짓는 것의 미학이라는 슈마허의 주장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건축분야의 오랜 관습인 건축공모와 달리 패러메트릭 디자인을 규정하는 시대는 ‘승자독식’ 이데올로기와 지식이 ‘낙수’ 형태로 증식된다는 사고방식 아래에서 작동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시대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 시대에 전위적 기획들을 위해 개발된 혁신이 점차 사회적으로 채택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항상 새로운 ‘일회성’ 건물을 추구하는 것은 문화적 채택이 이루어질 여지를 거의 남기지 못한다. 오히려 신자유시대의 승자독식 모델이 권력, 자본 및 부의 대규모 불균형을 만들어냈다.

 

건축의 양극화

상업적 수단을 통한 건축술의 혁신 추구는 자본의 대규모 축적에 의존한다. 수 세기 동안 건축가들은 자신들의 건축 비전을 발전시킬 후원자로서 활약할 수 있는 의뢰인을 찾고자 했다. 한 가지 상징적 사례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피터 루이스(Peter Lewis) 및 <루이스 레지던스>(Lewis Residence)와 맺은 관계이다.(([정리자] <루이스 레지던스>(Lewis Residence)는 실현되지는 않은 주택개발 기획이다.)) 게리는 자신의 의뢰인들 중 보험업에서 수십억을 번 피터 루이스로부터 8200만 달러 주택—루이스가 결국은 짓지 않기로 한 주택—의 다양한 버전들을 디자인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고 의뢰자인 루이스는 이 의뢰건에 대해 6년의 시간과 600만 달러 이상의 비용을 썼다. 게리는 루이스로부터 받은 돈이, 자신이 받은 ‘맥아서(MacArthur) 영재상’의 상금처럼, 아무런 제약 없이 자신의 가장 진보적인 생각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 돈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인정했다.

피터 루이스 같은 의뢰인들은 별로 없으며, 건축교육에서 그러한 기대감을 조장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양의 건축연구와 교육이 그러한 비현실적인 의뢰인에게서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뿐인 주문에 바쳐지고 있다. 건축분야는 이러한 불균형적인 과도함을 알게 되었고 이런 건축 관행들을 비판하는 시도들이 건축학 내부에서 이루어졌다. 일례로 건축계는 생태적 재난 내지 금융재앙 이후 집을 박탈당한 사람들과 그 이후 살 곳을 잃을 버린 사람들과 함께 하는 건축으로 시선을 돌려 인도주의적인 저소득 프로젝트들을 강조함으로써 건축의 윤리성을 재발견하고자 했다. 칠레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Alejandro Aravena)가 조직한 2016년 베네치아 건축 비엔날레는 차별적으로 격리되거나 대표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해결방안을 만들어낸 건축가들을 부각시켰는데, 여기서 전 세계 부동산 투기, 집단지식 풀의 강탈 그리고 우버 및 에어엔비처럼 이른바 ‘공유경제’로 공통적인 공간들에서 수익을 추출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두 가지 태도들 즉 한편으로는 엘리트 의뢰인들을 위한 디자인의 낭비와,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낭비의 비윤리성에 필연적으로 반발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불가피한 측면이다.

이 체제에서 승자독식이라는 사고방식은 종형곡선의 양끝에서 작동하며 곡선의 가운데 혹은 볼록한 부분—도시 건축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간계층이 이 부분에 위치한다—은 줄어들거나 사라졌으며 심지어 건축을 위한 기획으로서 관심을 끌지 않게 되었다. 전문가들은 자본의 비대칭성에 좌우되지 않는, 노동이 가진 가치를 분명히 할 권한을 긴급하게 되찾을 필요가 있다. 무임금 노동이나 충분한 임금을 받지 않는 노동을 통해 엘리트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전통을 거부하는 것이 그 첫 걸음이다. 진보적인 건축은 퇴행적인 사회 관행들과 동의어가 되었다. 이것은 다른 분야들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되는 구조적인 문제들이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건축물 건립에서 양극화가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무자비한 경쟁하에서 작동하는 연구와 실천으로 번성하는 분야가 있으며 여기서는 많은 관계자들이 성공해서 유명인 반열에 오르기 위해 기꺼이 공짜로 일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결과인 착취와 박탈을 바로잡으려고 건축의 엄격함과 건축의 핵심가치들로 전환하는 흐름이 있다.

 

‘가운데 부분’을 다시 활용하기

1914년 헨리 포드(Henry Ford)는 노동자들의 하루 최저임금을 그 당시 자동차 회사들의 평균 임금의 두 배에 맞먹는 5달러까지 올리기로 결심했다. 포드는 노동자들의 소비력이 그가 키우고자 시도하고 있는 산업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포드는 노동자들이 그들이 만들고 있는 자동차를 살 수 있게 하고자 했다. 오늘날 미국 건축가들은 상당한 금액의 학자금 대출금이 쌓인 후인지라 디자인하도록 요청받는 유형의 건축물을 살 여유가 없다. ‘스타 건축가’ 시스템에 의해 육성되는 오늘날의 건축문화는 충분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인턴 노동과 착취적인 관행들로부터 나오는 상당한 양의 보조를 필요로 한다. 사회적 어젠다에 맞물려있는 관행들조차도 무임금 인턴십의 보조에 의존하게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중산층을 위한 건축은 상업적 명령에 의해 추진되는 것처럼 보인다. 종형곡선의 가운데 부분은 건축가들의 수중에 없는 시장, 즉 렘 콜하스(Rem Koolhaas)가 ‘정크스페이스’(Junkspace)라 부른 것과 종종 관련되어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줄어들거나 사라진 이 종형 곡선의 가운데 부분을 다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가운데 부분은 맞춤 제작한 것의 매력이나 인도주의적인 원조라는 영웅적 면모가 없기에 더 이상은 건축분야에 중요한 것이 되지 못했다. 건축분야는 근대 건축 운동을 연상시키는 큰 서사에 참여하기를 여전히 두려워한다. 어쩌면 시장 바깥 혹은 시장 주위에서 작동하지 않는 비판적 담론과 실천을 발전시키는 방안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어젠다의 추출 명령에 의해 생겨나는 경제적인 교착상태 때문에 자율이라는 기획이 자급에 기반을 두어 나타나게 되었다. 이제 건축가들은 스스로를 그들이 생각하는 건축의 사용자이자 생산자로서 재설정할 수 있으며, 그들이 속하는 문화에 재접속하고 그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의 디자인 기여를 재조정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가운데 부분을 다시 활용하는 것이 금욕이나 긴축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긴축은, 정부가 애초에 문제를 발생시킨 금융기관들이 낼 세금을 인상하지 않고, 그 반대로 금융기관들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서 공공서비스를 대폭 줄이는 것이다. 주택위기가 의미하는 바는 점점 더 많은 수의 시민들이 자신들이 일하는 장소에서 살 만한 경제적 여유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공공부문과 커먼즈가 시장투기의 반대쪽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필요하다. 공동체주의에 기초한 운동들의 출현은 전통적으로 공적인 것/사적인 것의 이두체제였던 것에 세 번째 부분을 추가할 수 있게 한다.

 

2008년 이후 전망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해서 사람들은 자유주의 정부와 보수주의 정부 공히 신자유주의 경제를 얼마나 깊이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시스템이 다수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서서히 갖게 되었다. 모든 건축가들이 중간에서 꼭대기로 가치를 뽑아 올리는 경제모델을 받아들이는 쪽에 서있다는 것이 건축학계의 현실인 만큼 건축가들에게 2008년은 건축가들이 사용하는 도구가 사실상 어떻게 경제적 어젠다를 내포하고 있는 사회-기술적 시스템인지를 숙고하도록 경종을 울린 한 해였다. 건축물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자본 뒤에 있는 경제적인 충동들과 동기들에서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사회-기술적 관점에서 보면 현 경제 관행이 선택한 최고의 무기는 디지털 플랫폼이다. 자본이 이것을 사용자들의 표준화와 자본 추출을 위한 도구로서 사용하게 된 것이다. 플랫폼은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전지구적 조직체들이며 사용자들끼리 소통하는 규칙들을 부과하고 플랫폼에서의 거래를 모니터링해서 획득한 지식에서 이윤을 추출한다. 플랫폼들은 시장 규제를 우회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두드러진 형태의 경제 불평등을 수반한다.

건축분야에서 건축공모는 초기의 플랫폼이자 어쩌면 훨씬 더 원시적이고 악의적인 플랫폼일 것이며 또한 보수를 지불할 가치가 있는 노동과 그렇지 않은 노동을 결정한다. 공모에 지원하는 경쟁은 투기적인 노동형태로 되어 있으며, 이는 트레버 숄츠(Trebor Scholz)가 주장한대로 고용, 노동시간 및 최저임금과 관련된 시장규제를 우회하는 메커니즘이 되었다. 우버의 경우처럼, 공모에 지원하는 건축가들의 경쟁으로 인해 자기 자신이 결정권자이고 주어진 요청에 참여하기 위해 보상받지 못할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건축가 기업가’라는 상이 극찬을 받는다.

2008년 금융위기는 건축계 자체의 투기 시장 내부에서 활약하는 건축가들 세대에게 깨달음을 주는 경험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건축가들은 자신들이 디자인 작업에서 승자독식 경제 시스템을 받아들였고 공모나 다른 플랫폼 제공자들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라며 매우 자주 무료로 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적인 예로 부상하는 <노!스펙 운동>(No!Spec movement)은 우리 건축가들이 비윤리적인 사업 관행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과 대안적인 모델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예기치 못한 깨달음을 나타낸다. 금융위기는 저항운동의 급증을 촉진했으며 이는 시장이 규제받지 않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알려준다. 규제받지 않는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투기성 노동은 구조적인 분할을 낳고 불평등을 증가시키므로 권력 불균형을 촉진하는 것이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는 대안들의 생산을 촉진하기도 했다. 우리가 참여하는 노동의 주권을 강조하는 공동체 번영의 모델들을 제작하려는 하부구조와 이데올로기를 연결시키는 사회-기술적 인식을 촉진한 것이다. 리차드 스톨먼(Richard Stallman)의 일반공중사용허가서(General Purpose License) 및 카피레프트 운동에서처럼 사용자들 간의 지식 증식을 보장하는 라이선스 계약 창출, 블록체인 기술의 출현에서처럼 분산된 방식으로 신뢰를 보증할 수 있는 분산원장들의 창출 그리고 알라스테어 파빈(Alastair Parvin)의 위키하우스 작업의 경우처럼 적정 가격으로 사용자들이 빌딩 솔루션을 스스로 마련할 수 있게 하는 건축의 오픈소스 형태 디자인이 이 모델들에 속한다.

 

건축 커먼즈의 틀 형성하기

이 책은 다섯 개의 장으로 나뉜다. 1장 「건축술의 발달」에서는 신자유주의의 명령 아래 작동하는 건축을 비판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한다. 먼저 건축술의 진보라는 생각이 과연 시민들의 번영에 이바지했는지를 묻고 인풋 당 아웃풋 효율의 증가(ephemeralization)라는 약속이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검토한다. 첫째 물음에 대해서는 건출술의 진보가 혁신을 일반대중에게로 ‘내려 보내지’ 못했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다음으로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시장 인클로저를 통해 작동하는지를 살펴본다. 신자유주의는 공적 도메인의 힘을 정의하는 규정들을 무너뜨리는 시스템으로서, 저자는 그러한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가치는 커먼즈로부터 추출된다고 주장한다.(([여기서 저자는 커먼즈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인다―정리자] 커먼즈는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저술을 통해 정식화되었을 뿐 아니라 데이비드 볼리어(David Bollier)와 마시모 데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의 관점—공동체적인 부의 창출에 참여하는 사회구조들 뿐 아니라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공유재 둘 다를 포함하는 정의를 모으고자 시도하는 관점—을 통해서도 정식화되었다.))

2장 「부분들의 융합」에서는 어떻게 추출적인 관행들이 건축에 분명히 나타났는지를 더 깊이 파고든다. 시장 다양성을 파괴하면서 수직적 통합을 이루는 대규모 제조활동이 자본 축적의 논리에 의해서 발생하게 되는 경향을 소개한다. 수직적 통합의 발생은 기술적인 어셈블리에 필요한 부분들의 수를 줄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제조에 명확한 혁신들을 제공했다. 3D 프린팅 같은 최근 과학기술들은 이전에 표준화된 구성요소들을 해체하는 식으로 수행적인 이점들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수직적 통합으로의 경향은 패러메트릭 디자인 패러다임과 명확한 상관관계가 있다. 이 장에서 저자는 패러메트릭 모델이 적은 수의 인구에 복무하고 시장 다양성에 충격을 주었다는 것을 짚어보고자 한다.

3장 「부분들을 옹호하여」에서는 디자인과 제조 분야에서 부분들의 사회적 어포던스(([정리자] 어포던스란 주체가 특정의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객체가 ‘제공’하는 관계를 가리킨다.))를 이해함으로써 대안적인 디자인에 필요한 제안들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다양한 다수의 행위자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건축 디자인의 분야가 공급자들 간의 협동 및 연계의 효율적인 형태들을 찾을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러한 노력이 1950년대의 <모듈협회>’(Modular Society) (([정리자] ‘Modular Society’는 책의 한 장으로서 크리스틴 월이 쓴 장 이름이기도 하지만, 원래 그 당시 영국의 협회 이름이다. 현재 희의록 등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https://discovery.nationalarchives.gov.uk/details/r/C2327371))같은 기관들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대의 시도들은 디지털 네트워크의 출현을 통해 동질화되지 않는 차원 연계의 구조들을 제공하고자 한다.(([정리자] 과거 <모됼협회>는 동질화와 표준화에 기반을 두었다.))

이와 관련해서 제시되는 틀은 연속적인 패러메트릭 모델에 의해 제시되는 ‘일회성의’ 모델과는 대립적인 위치에 있는 ‘이산(離散) 건축’(Discrete Architecture)이라는 패러다임이다. 이는 재조합 능력의 측면에서 부분들이 디자인되고 연구되며 다양한 생산물을 산출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다. 디자인은 이산 건축을 통해 다원적이고 비독점적인 생산 접근법을 유지할 필요성을 받아들인다. ‘디자인 커먼즈’의 산출을 위해 부분들의 ‘조합에 의한 잉여’(combinatorial surplus)의 연구 및 이 부분들이 가진 어포던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산(적) 건축의 이점들이 검토되며, 재사용가능한 패턴들이 정보 네트워크를 통해 전파될 수 있도록 하는 조합 디자인을 채택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4장 「비물질적 건축」에서는 네트워크 기반 시설이 감시 자본주의의 실행에 활용되었을지라도 사용자들에게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는 디지털 네트워크를 디자인하고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제시한다. 플랫폼이 추출 도구가 되는 것에서 협력 도구가 되는 것으로 이행하기 위해 플랫폼이 극복해야 하는 과제들에 대한 지도그리기를 한다. 트레버 숄츠(Trebor Scholz)가 옹호한 바의 ‘플랫폼 협동조합주의’(Platform Cooperativism) 같은 아이디어들을 여기서 살펴본다. 더 나아가 커먼즈에 복무하는 오픈소스 건축모델들의 저장소를 잠재적으로 생성시키면서 사용자들 간의 협동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건축용 플랫폼을 개발할 가능성을 이곳 4장에서 고찰한다. 비디오게임 기술이 플레이어들 사이의 협동 모델과 디지털 공동체에 참여하는 전통을 제공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5장 「자급을 통한 재구축」에서는 커먼즈가 다양성이라는 아이디어에 기초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자유를 확립하리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감시 자본주의에 의해 발전되는 기반시설에서는 특정 형태의 지성, 즉 사용자들의 정보를 모아놓은 집적 데이터(aggregate data)에서 생성되지만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얻어지는 지성이 효율적으로 배치되어왔지만, 이와는 다르게 커먼즈는 위계로서 작동하지 않는, 서로 합의하는 형태의 공동의 기반시설을 재구축할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5장에서는 어떻게 우리가 기울어지지 않은 운동장을 유지하고 진입장벽을 낮추어 설계하면서 민주주의와 관리를 테크놀로지에 함입할 수 있는지를 짚어보려고 한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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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boff, Shoshana, The Age of Surveillance Capitalism:The Fight for a Human Future at the New Frontier of Power (PublicAffairs, New York, 2019)

 

[보충설명]

건축술은 모두가 배워야 할 것이다. 모두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 존 러스킨

근대에 일어난 커먼즈의 대대적인 상실은 무엇보다도, 삶을 재생산하는 터인 ‘집’(home)의 상실이었다. 이 상실의 상황은 자본주의가 매우 발전한 탈근대에 들어와서도 호전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집의 상실이라는 상황이 거의 자연 상태에 해당하는 기본 설정이 되었다. 다수의 사람들의 경우 집을 구성하는 하드웨어인 주택(house)이란 것이 노동하는 사회생활을 매우 오랫동안 하고 나서야 간신히 확보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사실 주택을 안정되게 확보하는 일은 어떤 이들에게는 거의 평생이 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에게는 ‘평생’으로도 부족하다. 노동력은 재생산되어야 쓰일 수 있는데, 그 재생산의 터가 노동력이 한참 동안 쓰인 후에야 확보될 수 있다니! 아니, 평생을 노동해도 불가능하다니! 자본은 이런 모순적 상황 위에서, 즉 삶의 재생산 터의 ‘기본적’ 결핍을 기반으로 해서 자신을 증식한다.

그래서 커먼즈 되찾기는 집 되찾기를 필수적으로 포함한다. 그리고 집 되찾기에는 집을 구성하는 하드웨어를 박탈하는 메커니즘인 투기적 주택시장의 극복이 필수적으로 포함된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하자면 커먼즈 특유의 방식으로 주택을 확보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이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인 5장 「자급을 통한 재구축」“Reconstruction through Self-provision”의 내용의 일부를 포함한다.)

우선 자급을 원칙으로 한다. “자급의 실천이 공통적인 것의 현실화이다.” 자신의 집을 자기가 짓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인이 아무런 지식도 (아직은?) 없는 상태에서 DIY로 자신의 집을 짓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저자는 우선 건축가들이 자신들의 집을 짓는 데서 출발하는 것을 제안한다. 여기서 집의 디자인과 관련된 전문적인 지식이 생산되는데, 그 다음으로 이 지식을 일반 대중에게 전달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이것을 저자는 ‘해득력 사다리를 채우기’(to populate a literacy ladder)라고 부른다. 해득력 사다리는 전문가들이 생산한 지식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시스템으로서, 전문가들의 수준에서 가장 초보자 대중의 수준에 이르는 지식의 스펙트럼을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 사다리는 지식의 스펙트럼이 어떻게 새로운 미경험 사용자들과 전문가들 사이에 배치되는가에 의해 규정된다.”

이 해득력 사다리에서 지식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순환되는 데 그칠 경우에는 이것을 ‘약한 사다리’라고 부르고 초보적 수준에서 전문가 수준으로 점차적으로 올라가는 로드맵이 잘 되어 있으면 이것을 ‘강한 사다리’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서 해득력 사다리의 핵심은 가장 높은 수준과 가장 낮은 수준을 원활히 연결하여 초보자도 이 사다리를 타고 자신의 능력과 노력이 허용하는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저자는 이것이 단순히 테크놀로지(지식 생산)의 민주화라기보다는 민주주의를 테크놀로지(지식 생산)에 함입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내 식으로 풀자면, 테크놀로지의 민주화는 (대체로 사용자의 고정된 능력을 전제로 한) 테크놀로지 사용의 평등한 분배이고, 민주주의를 테크놀로지에 함입하는 것은 모두가 테크놀로지 사용자로서만이 아니라 테크놀로지 생산자로서의 능력을 자유롭게 배양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강한 사다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문턱을 낮추어 디자인하기’가 필요하다. 진입장벽이 낮아야 많은 사람들이 사다리 안에 들어올 수 있고 사다리 안이 더 열린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해득력 사다리를 만드는 것 자체가 자원의 집합소로서만이 아니라 ‘사회체계로서의 커먼즈’(마시모 데 안젤리스)의 생산으로 이어진다. 실제 집을 만드는 실천이 집짓기와 관련된 지식의 생산과 연결되므로, 저자가 제안하는 방안은 위키피디아, 리눅스 같은 비물질적 생산의 프로젝트를 물질적 생산으로 확대하는 방안이기도 하고, 단순한 참여―상부에서의 의사결정에 사용하기 위한 데이터 수집을 대중이 일시적으로 거드는 것―에서 자급으로 이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 자급은 아직은 국가로부터의 조달을 대체한다기보다는 보완하여 국가 및 시장 양자와 협상할 수 있는 시민조직들을 생성하는 것이 주된 일이다.

건축 분야에서 참여에서 자급으로 움직인 대표적 사례로 파빈(Alastair Parvin) 등의 위키하우스(Whikihouse)가 있으며, 건축가들이 자신들의 집만 짓는 것을 넘어서서 이룩한, 자급의 한 형태로서의 커먼즈를 위한, 그리고 커먼즈에 의한 건축의 기획으로는 Open City(1971)가 있다.((이 기획에 대한 사례연구로 Rodrigo Pérez de Arce and Fernando Pérez Oyarzún, Valparaiso Schoo /Open City Group, ed. by Raul Rispa (Birkhauser, 2003) 참조.))

[정백수]




지구의 지혜와 함께 하기

 


  • 저자  :  Daniel Christian Wahl
  • 원문 : Indigenous to Life: Being as Expression of Plac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KOSMOS에 실린 크리스천 월의 글 “Indigenous to Life: Being as Expression of Place”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의 주제는 ‘지구의 지혜와 다시 함께하기’(Realignment with Earth Wisdom)이다. 저자 대니얼 크리스천 월(Daniel Christian Wahl)은 서구의 분리 서사가 파괴와 불평등을 초래했지만 이에 대응하여 재생성적인 개발과 재생성적인 문화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으며 이 시점에서 재생성(regeneration)이 생명 자체의 고유 패턴이라는 것과 우리의 공통의 먼 조상들 모두는 생명을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 구성원으로 있는 재생성적인 공동체로서 이해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말한다.

인간으로서 생명을 영위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우리가 집이라고 부르는 장소들과 바이오지역들 안에서 서로 돌보며 살았다. 콜롬비아와 페루의 숲에서부터 태평양 연안 북서부와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르기까지 인간 거주자들이 수천 년에 걸쳐서 더 높은 다양성, 풍요로움, 생물‐생산성에 이르는 최고치의 생태계들을 함께 창조했고 양성했다는 증거가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모두 행성 차원의 과정으로서의 생명()에 토착하고 있다. 지구의 지혜 전통들 다수의 핵심적인 교훈은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생명의 재생성적 패턴들이 우리를 통해 흐르도록 하는 과정으로서의 생명과 함께하는 것이다. 크리스천 월은 이런 식으로 존재할 경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장소의 소유자가 아니라 표현자로서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땅이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땅에 속해 있는 것이며 땅과 바다는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위한 거름으로 돌아간 후에도 오랫동안 그곳에 있으리라는 것이다.

첫째, 지구의 지혜와 함께 하기란 무엇인가? 크리스천 월은 올바른 관계로 살아가는 것이 지구의 지혜와 함께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관계적인 존재들로 우리 각자는 특이하며 생명의 재생성적인 공동체 내부에 있는 친밀한 상호관계의 결합체이다. 따라서 지구의 지혜와 함께하기 위해 우리는 자연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서 배워야 한다. 우리가 자연으로서 배워야 할 것은, 예를 들어 재닌 베니어스(Janine Benyus)가 바이오미미크리(biomimicry, 생태모방)의 핵심적인 교훈으로 제시한 “생명은 생명에 도움이 되는 조건들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인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위해서 도움이 되는 조건들을 창출하기 위해 나서는 경우 생명체로서 우리는 지구의 지혜가 어떻게 우리를 통해 흐르게 하는가?

크리스천 월은 인류가 한 종으로서 살아온 최근의 기록을 살펴보면 우리가 이 물음의 핵심적인 중요성을 망각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우리가 한 행동들—더 정직하게 말해서 인간의 비교적 작은 부분에 속하는 행동들—이 모든 인류에게 종 차원의 ‘통과의례’를 강요했고 그 결과 우리는 현재 대량 멸종 사건의 일환으로서 우리 종의 이른 종말이라는 실질적이고 당면한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크리스천 월은 다시 물음을 제기한다. 우리는 생명의 공동체에서 성숙한 회원이 되어, 그리고 퇴행적이기보다 재생성적인 존재가 되어 적시에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발현하게 될 것인가?

인간이 사는 장소들에는 생명‐문화적 고유성이 있고 이 고유성을 멋들어지게 표현한 것이 다양한 재생성적인 문화들이다. 그는 우리가 이 문화들을 기초로 한 재생성적인 미래를 함께 창출하기 위해서 행동하기, 존재하기 그리고 사고하기에서의 변화는 물론이고 새롭고도 매우 오래된 세계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세상을 조직하는 데 투여되는 기존의 생각들과 문화적으로 지배적인 내러티브들은 생명의 과정을 개체들, 종들로 잘라놓았고 이런 식의 관점은 우리로 하여금 경쟁, 결핍, 죽을 운명에 초점을 맞추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가 내리는 판단이다. 크리스천 월은 이를 극복하고 생명을 다른 식으로 이해하기 위한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는 고대의 토착적인 지혜뿐만 아니라 최첨단 과학에 의지해서 생명을 우주에 존재하는 동향적(動向的) 힘—협동적 풍요를 통해 생명에 도움이 되는 조건들을 창출하는 힘—으로 이해할 것을 권하고 있다. 생명이 행성 차원의 과정임을 크게 강조하는 그는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의 1970년 논문 「형태, 물질 및 차이」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자신의 환경을 파괴하는 유기체는 그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생존의 단위는 환경 속에 있는 유동적인 유기체이다.”

그는 우리가 생명을 우주에 존재하는 동향적 힘으로 이해하기 위해 생명의 진화과정에 의식적으로 참여하는 경우, 존재는 부분인 동시에 전체라는 표면상의 역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관계적인 참여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독립적 존재’와 ‘전체의 상호적 표현으로서의 존재’사이의 양극성에서 발생하지만 우리는 둘 다이며 틱낫한(Thích Nhất Hạnh)이 소개한 사이존재(interbeing)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나바호족(Navajo)이 가진 지구의 지혜인 ‘아름답게 걷기’(‘Hózhóogo Naasháa Doo’)도 바로 이 점을 가리킨다. 그들은 이렇게 조언한다. ‘미래로 걷는다면 아름답게 걸어라.’ 아름답게 걷는 방법은 ‘전부 속의 하나와 하나 속의 전부(the One-in-All and the All-in-One)를 눈앞에 보는 것’이다.

크리스천 월은 재생성적으로 사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이를 설명한다. 재생성적으로 사는 것은 지역과 나라와 전 세계가 역동적으로 공존하는 중첩된 복잡성의 의식적인 표현자로서 그리고 이 복잡성에의 참여자로서 사는 것이다. 이 중첩된 규모들(그림참조)은 더 이상 쓸모가 없는 구조들 및 패턴들의 빠르거나 느린 붕괴 주기, 변형적인 혁신 그리고 새로운 패턴들을 일시적으로 공고히 하여 역동적이고 지속적으로 변형하는 온전체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통합된다. 그는 이러한 과정으로서의 재생성이 생명 자체의 진화적이고 발전적인 충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재생성적으로 행동하기의 핵심은 환경적 변화나 사회적 변화를 예측하고 변형할 수 있는 체계 차원의 치유와 복원력있는 공동체의 구축이다. 하지만 이를 위한 전제조건은 건강(성)과 복원력을 ‘되돌아갈’ 정적인 상태로서가 아니라 변화하는 맥락에도 불구하고 변형하고 활력을 표현하는 역동적인 능력으로서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재생성의 핵심은 ‘순(順)긍정적 영향’(net positive impact)이나 ‘좋은 일하기’ 그 이상이며 모든 개인, 공동체 및 장소의 특유하고 대체 불가능한 본래적 역능을 발현하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이 능력을 발전시켜야 하는가?

크리스천 월의 정의에 따르면 생명은 여러 규모들이 중첩된 재생성적인 공동체이다. 생명은 모든 유핵 세포들을 형성하는 세포기관들의 공동체에서부터 당신과 내가 ‘우리의 몸’이라고 부르는 재생성적인 공동체를 이루는 인간•박테리아•균류세포들의 생태계를 거쳐, 그리고 풍부하고 대단히 바이오 생성적인 생태계들의 기능적 다양성을 창출하는 종들의 공동체를 거쳐 바다 및 육지 생태계가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생명지원 시스템—이것이 지구의 기후패턴과 대기 구성성분을 조절하여 생명에 도움이 되도록 만든다—에 기여하는 살아있는 지구의 생리학까지 걸쳐 있다.

따라서 크리스천 월이 이 글의 주제로 삼은 지구의 지혜와 다시 함께하는 것의 핵심적인 의미는 이 재생성적인 공동체에 더 의식적으로 다시 거주하는 것이며, 중첩된 재생성적인 생명 공동체 내부에서의 우리의 역할로 즉 치유자로서의 역할로 겸허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미래는 우리 각자가 이 공동체에 다시 거주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바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는 어떻게 이 공동체에 다시 거주할 수 있는 것인가? 그는 시인인 스나이더(Gary Snyder)가 1976년에 제기한 발언을 인용해서 그 방법을 제시한다. “우리가 삶을 이어갈 수 있고 [···] 우리가 풀과 태양에 기대 살 수 있는 미래 행성을 상상하는 사람들은 거주하는 사람들(전 세계 토착민들과 농부들)을 지원하기 위해 과학이든, 상상력이든, 힘이든, 정치적 수완이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져오는 수밖에 없다. 그들과 함께 공동의 대의를 만들 때 우리는 ‘다시 거주하게’ 된다.”

크리스천 월이 주장하는 재거주(Re‐inhabitation)는 우리가 거주하는 장소들과 바이오지역들의 맥락에서는 행하기에서의 변화를 그리고 바이오지역들과 맺는 관계방식에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장소장소마다 건강한 생태계 기능들을, 번성하는 공동체들 및 활기찬 경제들을 재생성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재거주는 또한 존재의 변화를 의미하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생성의 과정들—우리를 산출하는 장소들, 공동체들 및 생태계들의 그 자체로 역동적인 표현들인 과정들—로서 다시 인식하는 법을 배울 때 의식의 지형에서 재거주가 활발해지기 때문이다. 현재의 순간에 담겨 있는 미래를 향한 잠재력은 (긴 ‘이행’이나 어떤 ‘거대한 전환’ 이후의 어떤 때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의 몸, 우리의 공동체, 우리의 장소와 바이오지역들을 집으로 삼아 거기에 거주하는 데 있다.

그러나 크리스천 월이 보기에 변화에 대한 우리의 현재 이론은 추상 쪽으로 그리고 문제들을 서로 분리하고 ‘해결책’을 실행할 장소로부터 분리하여 ‘해결하는’ 습관 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우리는 이런 사고방식 안에서 전략을 논의하는 것에 고착되어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제안하며 글을 맺는다.

우리가 바로 지금 다르게 존재하기에 초점을 맞춘다면 어떨까? 우리가 누구인지 재인식하고 사이존재의 행성적 과정으로서의 삶과 좀더 동일시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자신, 공동체 및 생명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어떨까? 우리가 개별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장소를 치유하고 육성하는 표현자들로서 존재할 또는 그런 표현자들이 될 잠재력에 초점을 맞추면 어떨까? 우리가 추상적인 전지구적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고 해결책들의 규모를 키우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습관을 떨쳐버린다면 어떨까? 우리의 존재의 터전인 장소들과 공동체들과의 (함께 진화하는) 상호성 속에서 생명에 도움이 되는 조건들을 창출할 잠재력에 초점을 둔다면 어떨까?




커먼즈와 미래

 


  • 저자  :  Leila Dawney, Samuel Kirwan, Julian Brigstocke
  • 원문 :  Introduction : The Promise of the Commons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Leila Dawney, Samuel Kirwan, Julian Brigstocke가 편집한 책  Space, Power and the Commons : The Struggle for Alternative Future (Routledge 2016)의 “Introduction: The Promise of the Commons”에서 책 전체의 내용을 대략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우리의 일은 태양에 의해 신성화된다. 가령 겨울날이나 땅 파는 날에 비하면 이날[추수하는 날]은 만족스러운 날이다. 같이 일하는 친구들 때문에 더 그렇다. 그런 날이면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모든 얼굴들이 (내가 알지만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 사람들도 함께) 한 공간에 모여서 공동의 도랑과 집단적 희망에 의해 한데 묶여 있기 때문이다. 사슴이 덫에 걸려 탕으로 만들어 달라고 울어대는 소리를 듣거나 딱따구리가 파이로 장사를 지내 달라고 졸라대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들고 숲을 쳐다본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기라도 하면 우리는 일제히 몸을 곧추세우고 꾸짖는 듯이 태양을 쳐다본다. 우리의 낫과 손 연장은 합창하듯 소리를 낸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은 누구나 듣는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모두가 듣는다. 우리에게는 개방성과 즐거움이 있다.

Jim Crace, Harvest (2013)

1968년에 봉기에 참여하고 있던 활동가가 시간 여행을 하게 되어 2015년 급진적인 좌파의 집회 현장에 뚝 떨어지게 되었다면 그녀는 거기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그녀는 아마도 계급·노동·저항의 언어가 강화되었으리라고 기대할 것이지만, 이런 기대와는 달리 그녀가 실제로 발견하는 것은 제사(題詞)에 나온 목가적 장면과 유사한 토론 즉 토지에의 공통의 접근과 사유(思惟)의 개방성 및 그것에 수반되는 삶의 양태를 놓고 벌어지는 토론일 것이다. 그녀는 이전에는 신맬서스주의자들(neo-Malthusians), 토지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운동들 그리고 사회사가들 및 법역사가들의 도메인이었던 것, 즉 커먼즈의 언어를 발견할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커먼즈에 관한 관심은 주로 제한된 자원, 늘어나는 인구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새로운 형태의 물질적 가난 등의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었다. 커먼즈는 경제학, 인류학, 환경과학에서 중요한 관심 영역이 되었다. 인구 과잉에 대한 맬서스의 저작과 함께 자원과 토지의 사적 소유에 대한 조지(Henry George)의 비판, 경쟁하는 행위자들이 제한된 자연자원에 접근할 때 생성되는 긴장들에 관한 하딘(Garret Hardin)의 저작들이 그 준거점들이 된다. 커먼즈 관련 문헌들이 다루는 문제들은, 왜 이러한 위기들이 출현하고 있는가, 이런 상황은 언제 위기점에 도달할 것인가, 개별 국민 국가들이 어떻게 이것을 막기 위해 대응해야 하는가이다. 이 문제들은 커먼즈에서 실제로 행해지는 일, 커먼즈를 구축하는 일, 커먼즈가 의미하는 바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정책 변화와 거시경제적 자원관리를 지향하는 추상적 논의들이었다.

이 텍스트에서 (그리고 커먼즈 연구분야를 발전시키고 있는 정치학자들·지리학자들·사회학자들 사이에서) 말하는 커먼즈는 이 문제들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을 다르게 표현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 책의 글들은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식민화나 불로소득자들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규제와 보호를 필요로 하는 자원의 관점에서 정의되기를 거부하는 커먼즈를 표현한다. 이 글들이 말하는 커먼즈는 공간일 수도 있고 경험일 수도 있고 자원일 수도 있으며 기억이거나 혹은 ‘희소성의 관리’ 외부에 있는 공유하기와 살아가기의 형태들일 수도 있다. 저자들의 전문분야는 도시계획학, 지리학, 정치학, 사회학, 문화이론 등을 포함하는 사회과학과 인문학 전반에 걸쳐 있다. 이는 새로이 일기 시작한 커먼즈 연구가 여러 분야들을 망라하고 있으며, 학계를 가로지르는 동시에 학계를 넘어서는 논의들에 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커먼즈를 신자유주의적 시장에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 삶의 사유화와 개인주의화에 저항하는 함께 살기의 방식들을 핵심으로 하는 시공간적이고 윤리적인 형성체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커먼즈의 언어·이념·상상계의 출현을 고찰할 때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신자유주의적 힘들과 연관되어 있고 그 힘들을 통해 작동되는 방식을 인식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힘들은 공통의 삶을 위한 가능성들을 제한하는 동시에 산출한다. 급진적으로 사유를 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확장의 논리 및 과정과 이 확장에 대한 저항을 점점 더 종획과 커머닝의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다름 아닌 자본주의적 축적의 논리를 통해 커머닝이라는 특수한 저항 형태의 가능성이 출현하는 것이다. 자본이 세계의 더 많은 지역을 상품화 과정으로 끌어들이면서 새로운 종획이 일어난다. 자본은 신자유주의적 소유와 가족 관계를 통해 삶을 사유화하는 동시에 인구에 기반을 둔 통치[푸꼬가 분석한 바의 새로운 형태의 권력의 특성이다―정리자]를 구사한다. 이것이 대안권력인 커머닝으로 향할 가능성의 조건들을 생성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비(David Harvey)의 작업이 매우 중요한데, 특히 후기 자본주의가 계속적인 종획 과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 중요하다. 자본은 이전에는 상호책임이라는 사회적 관계에서 관리되고 조직되고 산출되었던 자원·인구·활동·토지를 통합하면서 확장한다. 하비는 이를 ‘강탈(dispossession)에 의한 축적’이라고 정의한다. 여러 분야를 가로지르는 연구들은 종획의 여러 형태들을 통해서 자원의 사유화가 일어나고 있는 많은 공간들을 보여주었다. 지구상의 후진 지역에서의 토지강탈, 금융자본의 자산거품, 유전자·물·토착지식 등의 사유화―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종획들은 그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세상이 폐쇄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커먼즈가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의 중요한 자원이 된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전통적인 대의민주주의의 방식을 통한 변화의 가능성들은 감소하고 있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의 주요 정당들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은 유럽연합의 트로이카가 장악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활동가들은 집회·조합·투표소의 공간들을 넘어서 정치를 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탐구하고 있다. 아나키스트들의 DIY 전통에서 나온 새로운 형태의 집단적 행동은 거주와 점령이라는 형태를 집회와 시위라는 형태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며, 저항의 예시적 공간들의 출현을 향하는 새로운 길을 닦고 있다. 그 주목할 만한 사례는 오큐파이 운동, 15M 그리고 인디그나도스이다. 이렇게 커먼즈의 정치는 종획에 대한 공간적 대응으로서 일어난다. 커먼즈 이념은 개념적·물리적 공간을 집단적으로 생산하고 주장하기를 촉발하는 정치적 어법을 제공한다. 저항과 항의의 새로운 형태들―관리와 의사결정에서의 플랫시스템들[누구에게나 접근이 허용된 시스템을 말한다―정리자], 요구 없는 정치[원주 : 낭씨Jean-Luc Nancy가 정치의 이러한 재구상에 대한 더 나아간  논의를 제공하고 그것을 더 정교화한다(James, 2006; Nancy, 1991, 2000)],((James I, 2006, The fragmentary demand: An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Jean-Luc Nancy (Stanford University Press, Stanford, CA). / Nancy J-L, 1991, The inoperative communit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Minneapolis, MN and London / Nancy J-L, 2000, Being singular plural (Stanford University Press, Stanford, CA). ).)) 대안적 세계의 구축에 초점두기―이 출현함으로써 공통적으로 살기, 공통적으로 만들기, 공통적으로 존재하기라는 새로운 활동들이 종획과 강탈에 대한 직접적 대응으로서 일어나고 있다.

커먼즈의 언어는 무엇보다, 투쟁과 무력함 너머 희망과 약속을 부각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언어와 성향을 제공한다. 이 언어는 능동적인 정치를 환경에 대한 관심과 결합시키고 도시 운동을 시골에서의 저항과 결합시키며 지역에서의 투쟁을 전지구적 정치와 결합시킨다. 그 역사적 문화적 반향들이 때로 문제점을 보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다르게 살고 다르게 존재할 것인가를 생각할 자원을 제공해 준다. 지금과는 다른 세계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미래들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커먼즈의 이념은 낭만적 서사를 제공하며 이 서사를 통해 앞으로 나아갈 길(실망스런 정치적 내러티브들, 생태계 파괴, 양극화와 강탈―이것들의 외부에서 사유하는 길)을 제공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내러티브에 대안이 되는 대항내러티브를 제공한다. 무엇보다도 커먼즈 이념은 변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날 수 있으며 조그만 행동들도 중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희미하게나마 제공한다.

그러나 이 책의 글들이 분명히 하듯이 이 낭만적 서사를 넘어서 사유할 필요, 커먼즈가 출현하는 곳, 커먼즈에 담겨 있는 긴장들, 커먼즈가 행할 수도 있는 새로운 사물화들을 평가할 필요 또한 존재한다. 특히 블렌코우(Claire Blencowe)의 글은 공통적 삶의 유혹적인 상태들이 해방적 충동들을 덫에 가두고 그런 움직임들을 자본축적의 관계들로 재영토화시킬 위험을 일깨워준다. 커먼즈 이념의 매력과 미래의 가능성을 이해할 때 우리는 우리가 ‘종획 이야기들’라고 부르는 우울한 장르를 고려에 넣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이야기들은 영국 의회의 종획 역사들과 이 역사들을 문학이나 구비 전통에서 다시 이야기하는 민속 관행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볼리어 같은 커먼즈 옹호자들이 제시하는 커먼즈 이야기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상실감, 그리고 비록 파열되었으나 폐쇄되지는 않았던 그리고 어느정도는 가난했던, 종획 이전의 삶의 환기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특정 지역에 속하면서도 이리저리 퍼져서 운동들과 지역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데, 흩어진 사건들과 행동들을 한데 모으는데 도움이 된다. 커먼즈의 이러한 다양한 갈래들에 대한 주목이 이 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자본주의 이전의 목가적 사회의 낭만적 상상태들과 테크놀로지·소통·사회성의 가없는 가능성들을 결합하는 ‘커먼즈’라는 용어의 가능성들만이 아니라 문제점도 또한 주목하는 것이다.

이 책의 3부에 실린 글들이 분명히 하듯이, 커먼즈 이념이 정치적·학술적 담론에서 널리 퍼지고 있다면 이는 커먼즈를 구성하는 것이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책은 도시 커먼즈,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디지털 커먼즈가 일상 언어에 진입한 상황에서 커먼즈의 더욱 새로운 유형들을 탐구한다. 어떤 저자는 비인간 존재의 참여를 다루고 또 어떤 저자는 공유된 기억의 전지구적 커먼즈를 다루며 다른 어떤 저자는 공통적인 것의 법 공간을 다루고 또 다른 저자는 시간의 측면에서 커먼즈를 다룬다. 3부에서 서술된 집단들과 행동들의 공통적 특징은 (박탈에 대한 저항 말고도) 물리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커먼즈를 다루기보다 공통적인 것을 실천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다루는 태도이다 이런 식으로 정치적 커머닝의 새로운 실천들은 신자유주의적 풍경 내부에 ‘다른 세계’를 실행하고 있으며 그렇게 하면서 주체성들·관계들·공간들을 바꾸고 있다.

실로 2000년대 초에 심대한 전환이 일어났다 커먼즈를 어떤 장소나 자원으로 생각하는 데서 실천의 한 형태로서의 커머닝을 생각하는 데로 전환한 것이다. 집단화를 지역적 규모로 생각하는 수단으로서 그리고 비자본주의적 형태의 사회조직과 경제조직을 실현하는 방식으로서 커머닝 이념이 번성했다. 라인보(Peter Linebaugh)의 작업이 이 전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커머닝과 종획의 역사에 대한 그의 서술들은 이 책에서 논의되는 바의 커먼즈 이념을 우리의 관심사로 만드는 데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커먼즈의 이념과 커머닝의 정치를 이해하고 활성화하는 몇 가지 방식들로 하여금 서로 대화하게 하려고 한다. 이것들은 개념적 작업과 경험적 사례들 사이에서 움직이는데, 법, 역사, 그리고 일상적 활동에서 이 개념을 고찰함으로써 이 개념이 정치적·이론적 설득력을 획득하는 여러 가지 방식들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주고자 한다. 이 책의 글들은 특히 실제로 존재하는 바의 커먼스와 커머닝에 초점을 둔다. 여기서 커먼즈는 법, 정치적 행동주의, 그리고 일상적 활동의 테크놀로지들을 통해 엄연한 객체들로서 출현한다. 이런 서술들은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를 방해하거나 그것들을 우연한 것으로서 폭로하는 능력을 공유한다. 그리하여 커먼즈는 대안들이 직접 탐색되고 실험되며 희망의 정치에 되먹여지는 개념적 공간이 된다. 희망의 정치는 이미 실제로 존재하는 비자본주의적 삶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역사의 종식’(이는 자본주의 이후의 미래를 개념화하는 데 있어서 막다른 골목에 해당한다)을 돌파할 가능한 미래들을 제안한다.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는 이러한 움직임을 ‘역사의 시작’이라는 주제로 논의했다. 이렇듯 커먼즈의 이념은 현재의 경제적 구조의 우연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성장과 사적 소유의 필연성이라는 담론을 무너뜨린다. 에스떼바(Esteva)가 지적하듯이 커머닝과 커먼즈 운동은 ‘대안적 경제’가 아니라 ‘경제에 대한 대안’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커먼즈에 대해서 쓰고 사유하고 커먼즈를 실행하는 것은 이러한 ‘세계 만들기’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며, 우리는 커먼즈를 중심으로 하는 문헌들에서 커먼즈 고유의 수행성―경험과 주체성을 사적 소유와 자본의 불가피성에 맞세워 재구조화하는 데서의 수행성―을 감지한다.

이어지는 절에서는 커먼즈 연구의 다섯 분야를 살펴본다. 첫째로 우리는 커먼즈가 환경자원의 한계에 대하여 사유하는 수단으로서 이해되는 방식을 고찰한다. 둘째로 우리는 도시 커먼즈에 대한 그리고 도시에서의 공간적 커머닝과 전유의 실천들에 대한 더 최근의 연구들을 살펴본다. 셋째로 우리는 비판적 법연구 분야에서의 작업에 기대어 커먼즈와 법과의 관계를 이해한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신맑스주의의 성취에 시선을 돌려 커먼즈 이념이 현재의 급진적인 정치사상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왔는가를 개괄하고, 마지막으로 커먼즈 논의의 틀을 커머닝 개념을 중심으로 다시 짜고자하는 저자들에 주목한다.

[참고]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Introduction: the promise of the commons
     LEILA DAWNEY, SAMUEL KIRWAN AND JULIAN BRIGSTOCKE

PART I
Materialising the commons
1 Building the commons in eco-communities
     JENNY PICKERILL
2 A politics of the common: revisiting the late nineteenth-century Open Spaces movement through Rancière’s aesthetic lens
     NAOMI MILLNER
3 A spirit of the common: reimagining ‘the common law’ with Jean-Luc Nancy
     DANIEL MATTHEWS

PART II
Commoning
4 The more-than-human commons: from commons to commoning
     PATRICK BRESNIHAN
5 ‘Where’s the trick?’: practices of commoning across a reclaimed shop front
     MARA FERRERI

PART III
An expanded commons
6 Expanding the subject of planning: enacting the relational complexities of more-than-human urban common(er)s
     JONATHAN METZGER
7 Occupy the future
     JULIAN BRIGSTOCKE
8 Imaginaries of a global commons: memories of violence and social justice
     TRACEY SKILLINGTON

PART IV
The capture of the commons
9 The matter of spirituality and the commons
     CLAIRE BLENCOWE
10 Controlled natures: disorder and dissensus in the urban park
     SAMUEL KIRWAN




지역화폐, 사회적 자본 및 기본소득에 관한 토론

 


  • 저자  : Valentin Seehausen, Julio Linares, Inte Gloerich
  • 원문 :  Discussion on Community Currencies, Social Capital & Basic Income https://networkcultures.org/moneylab/2021/04/16/moneylab-11-discussion-on-community-currencies-social-capital-basic-incom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대선의 열기가 서서히 오르는 모양이다. 대의민주주의가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흡수하는 시즌이 오고 있는 것이다. 대의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삶의 문제가 아닌 권력의 문제로서, 삶의 외부에서 삶을 제한하는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배어들도록 만드는 무대이다. 이 무대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 ‘할 일’은 시야가 이 무대 안에 갇힌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시야는 민주주의가 다시 삶 전체로 돌아온 세상을 향해있다. 우리가 보기에 민주주의의 문제는 단지 좁은 의미의 정치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영역들 전체와 관련된다. 화폐의 영역도 여기에 포함된다. 화폐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의 표현일 뿐인데, 이것이 사회적 삶에 외부에 존재하며 사회적 삶을 제한하는 것이 됨으로써 곧 권력이 되었고 더 나아가 물신(物神)이 되었다. 대안근대를 지향하는 우리로서는 화폐를 권력이 아니라 다시 삶의 힘으로 되돌려놓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바로 이것이 화폐의 민주화의 핵심이다. 이번 글에서는 다른 곳에서 이 화폐의 민주화를 어떻게 고민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기본소득이나 지역화폐는 이미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것이기에 내용이 새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실제적 노력의 사례들을 들어보는 것도 우리에게 좋은 경험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소개하려는 텍스트는 2021년 3월 27일 있었던, 머니랩(MoneyLab)의 11차 워크숍 ‘지역화폐, 사회 자본 및 기본소득에 관한 토론’(Discussion on Community Currencies, Social Capital & Basic Income)을 녹취한 것이다. 실제 토론의 동영상은 이곳에 가면 볼 수 있다. 토론자인 훌리오는 <써클즈> 소속이고 발렌틴은 <쏘셜코인> 소속이며 진행을 본 인테는 <머니랩> 소속이다. 내용정리이지만 대화체를 유지했으며, 녹취록에서 발견한 몇 개의 오류는 동영상을 보고 수정했다. [정백수]

인테
우리가 왜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까요? 지역화폐(공동체화폐)와 기본소득은 초창기부터 <머니랩>(Moneylab)의 주제였습니다. 지금 시기(팬데믹 기간)에 적절한 것은 무엇일까요? 제가 여러분 둘 다의 프로젝트에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동체에의 헌신입니다.

홀리오
저는 과테말라 출신 경제인류학자이며 사회활동으로서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기본소득을 어떻게 실현할지, 그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지에 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저를 인류학으로 이끌었습니다. 화폐를 다시 생각하는 방식으로서 화폐의 인류학, 가치의 인류학으로 말이죠.

<써클즈>가 가지고 있는 주요 아이디어들 중 하나가, 국가가 기본소득을 제공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기본소득의 창출과 관련된 패러다임 전환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민주적 화폐 이론’(DMT)이라 부릅니다. 이에 따르면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약속의 징표를 발행하여 은행 또는 국가와의 관계와 무관하게 상호적으로 빚을 지고 빚에서 벗어납니다.

제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힘의 느낌, 돈을 창출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느낌을 갖게 해주는 것이고, 돈을 창출하는 힘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화폐 취득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을 화폐발행자로서 느끼게 만들고 경제가 어떻게 조직되는지에 대한 통제력과 발언권을 갖도록 만드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발렌틴
당신의 말이 이해가 됩니다. 저에게는 지역화폐(공동체화폐)가 사회/경제 이론에서 실천성을 얻는 한 가지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화폐시스템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시작했고 정치에 입문할까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나름의 소규모 대안적인 금융시스템을 시작하는 것은 어떤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종종 지역화폐를 추동하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하는 요인입니다. 우리, 즉 민중을 위한 세상이죠. 물론 이것은 제 주관적인 견해이지만요.

우리는 지역화폐를 아래로부터 창출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에 지역화폐들이 있고 그 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만약 우리가 화폐시스템(monetary system)을 아래로부터 창출한다면 어떻게 될까를 보여주는 본보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써클즈>(Circles)와 <쏘셜코인>(Social Coin)은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로 실험을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지역화폐들이 화폐를 실험하는 작은 실험실인지도 모르죠.

인테
우리는 야심찬 생각들에서 출발하지만 지역화폐가 그 생각들을 실천에 옮기는 한 가지 방식입니다. 그런데 또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가령 제가 ‘쏘셜 코인’을 사용하기 위해 <써클즈> 커뮤니티에 참여할 기회가 있다면 그 동기는 무엇일까요? 제가 무엇을 살 수 있을까요?

발렌틴
이것이 지역화폐가 답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 모두 호모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이론(집안 살림의 효용을 극대화하기)을 알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 이론은 전적으로 결함이 있지만 여전히 그 안에 진실이 좀 들어있습니다. 공동체에 기여하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돌아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이익이 공동체에 기여한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경제적 이익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이 공정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근(Siegen)에서 경제적 이익은 전기차나 전기자전거를 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홀리오
저는 거시적인 문제에 대한 논의, 화폐, 테크놀로지는 다 하나라고 항상 말합니다. 화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회기반시설, 즉 다른 모든 생산자들, 다른 모든 물류 제공자들, 서비스 제공자들, 돌봄 노동 제공자들, 경제의 일부인 모든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사회구조입니다. 경제는 집안 살림, 즉 오이코스(Oikos)입니다만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집만이 아니라 지역입니다. 그래서 이곳 베를린에서 우리는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맥주 제조업자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농부와 함께할 수도 있고 자전거 공유 협동조합과 함께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그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잉여를, 그리고 코로나/위기시기에 충분히 이용되지 않은 자원을 추가적인 유동성(liquidity)으로 변형시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술집들이 문을 닫았기에 팔 수 없는 50리터 맥주통을 가지고 있는 맥주회사 소유주와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써클즈>에 그것을 팔아서 행복한 상태이며, 맥주를 더 많이 팔기 위해 지역 라디오에 홍보를 하는 데 그 돈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발렌틴이 말하고 있는 바입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서로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그들을 연결시키는 방식을 생각해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 자신만이 아니라 더 큰 어떤 것을 실제로 부양하고 있는 셈입니다. 잉여가 더 큰 지역사회로 갈수 있도록 하는 방법론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자원들의 흐름을 창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테
지역공동체 건설이 핵심 작업이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지역공동체의 신뢰와 네트워크가 없다면 그것은 작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진공상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국가의 맥락에서 법정화폐 시스템 및 세금 시스템과 함께 존재합니다. 당신의 프로젝트는 더 광범위한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존재합니까? 이 프로젝트는 고립된 지역들로서 존재하나요? 아니면 전체시스템이 바뀌는 것을 보고 싶은 건가요?

홀리오
독일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은 화폐란 사회에 대한 일정한 요구의 표현이라는 점에 관해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사회에서 사용하는 화폐의 유형들이 다양한 차원들―상상력, 무급노동, 유급노동―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요소들이 화폐형태로 반영됩니다. 그래서 저에게 중요한 것은, 화폐를 다루고 정치적인 싸움에 뛰어듦으로써 우리는 바로 화폐시스템 전체의 헤게모니에 도전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발렌틴과 함께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시민들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할 수 있는 시장(市長)들의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창출하려는 노력입니다. 우리는 일군의 다양한 시스템들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써클즈>는 그것들 중 하나일 뿐이고 우리는 지역의 조건과 욕구가 무엇인지를 보고 사용될 수 있는 일단의 도구들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존재하는 일국의 국가시스템과 함께 공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미국의 사례가 항상 적절한데, 미국에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의 통제를 받는 국가시스템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광범위한 수준에서 공존하는, 국가보다 하위의 시스템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지자체들이 폭넓은 스펙트럼의 이익을 보완하고 조율하는 방식으로서 지역의 기본소득을 지역화폐로 발행하여 잠재적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지급할 수 있습니다.

저로 말하자면, 저는 아나키스트입니다. 국민국가를 믿지 않고 자본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폐지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순간 어떤 상황에 있는지에 대하여 실질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이 구조들이 몰락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며, 제가 하고 있는 것은 그것들이 더 잘 몰락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좌중의 웃음]

발렌틴
토론이 시작된지 20분이 지나서 당신이 스스로 아나키스트임을 이렇게 폭로하는 것이 정말 좋군요. 저는 동조하는 편입니다. 시스템을 바꾸는 방식이고 힘을 지방자치제 수준으로 되돌려주는 방식이니까요. 국가들이 있고 국제적인 기구들이 있습니다. 아나키스트가 아닌 저는 그것들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또한 저는 금융시스템이 사회의 소수에게 복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0%나 1%의 사람들은 실질적인 혜택을 많이 받지만, 50%의 사람들은  실질적인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전 세계에서 극빈 상태에 있는 사람이 (잘은 모르지만) 아마 50%일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충분한 식량이 없고 그것이 제 관점에서는 재앙입니다.

신자유주의자로 유명한 하이에크는 탈국가화된 화폐라는 생각을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해 하는 것은, 화폐가 탈국가화되어 모든 사람이 화폐를 발행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봐요, 이것이 발렌틴-코인입니다, 사용해보세요’라고 말할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요? 무슨 일로 그러시죠?’라고 말할 거구요. 그러나 예를 들어 베를린 시장이 베를린-코인을 발행한다면 사람들은 실제로 그것을 사용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베를린 시에 힘이 있음을 의미할 것이고 화폐 주조로 얻는 이익은 실제로 베를린으로, 지방자치단체로, 작은 마을들과 가난한 시골로 돌아갈 것입니다. 지역의 화폐로 실험하기 시작할 경우 이것은 그 지역사회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 멋진 프로젝트가 더 광범위한 맥락에 가져올 수 있는 전환과 관련하여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입니다. 지역화폐들이 수백 년 동안은 아니더라도 수십 년 동안 존재했지만 그것은 지금까지도 대부분 불법이었는데, 그러다가 블록체인이 등장했습니다. 블록체인은 효력을 정지시키기 불가능한 화폐를 발행했는데, 이는 블록체인이 매우 탈중심화되어 있어서 어떤 정부나 권력도 거기에 실제로 개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가들이 바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암호화폐를 합법화하고 규제하는 것입니다. 국가들은 이것이 없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렸고 그래서 그것을 시험하고 통제하는 규칙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암호화폐는 합법적이 되고 우리가 실제로 그것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이것이 올해 들어와서 제가 흥미롭다고 느낀 점입니다. 규제자들과 국가들이 지역화폐가 실제로 존재하기 위한 법적 틀을 만들고 있다니 말입니다. 저는 지역화폐를 관철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로비스트입니다. 지역화폐의 관철이 제가 이곳에 있는 이유이고, 제가 보고 싶은 정책 변화입니다.

인테
하지만 지근에서 <쏘셜코인>은 블록체인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렇죠? 그래서 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당신은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위한 특수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발렌틴
공동체는 그때그때 사용가능한 테크놀로지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가령 뵈어글(Wörgl)—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유명한 사례죠—의 기술은 ‘우리가 지폐를 발행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스탬프를 찍는다’였습니다.[정리자―1932년 오스트리아의 도시 뵈어글에서 대공황에 대응하여 지역화폐(지폐)를 발행했다. 이 지폐는 화폐소지자들이 빨리 사용하도록 자극하기 위해 매달 1%의 가치가 상실되도록 고안되었다. 이 지역화폐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오스트리아의 다른 도시들도 유사한 실험들을 계획했다. 이 지역화폐는 1933년 말 행정법원에 의해 금지되었다. 텍스트에서 “스탬프”는 지폐에 찍는 도장을 가리킨다. (첨부한 사진 참조) 첨부한 사진은 자유이용저작물이며 그 출처는 https://en.wikipedia.org/wiki/W%C3%B6rgl#/media/File:Freigeld1.jpg이다.] 그때 서비스 제공은 중앙집권화되어 있었고 그 핵심은 당신이 서비스 제공자에게 가서 지폐를 원장에서 삭제하면 화폐의 효력이 정지된다는 것입니다. 블록체인은 추적하기가 불가능하고 효력을 정지시키기 불가능하게 만든 테크놀로지일 뿐입니다. 탈중심화된 화폐가 이렇듯 기술로 작동하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저는 블록체인 자체의 힘을 믿지 않습니다. 많은 지역화폐들과 다양한 토큰들이 있는 세상이 오면 우리는 열광하겠지만, 여기에 블록체인이 반드시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역화폐를 금지해온 규칙을 깨기 위해서는 블록체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우리를 신뢰하고 우리의 파트너들을 신뢰하며 얼굴을 아는 사람들을 신뢰하고 인간을 신뢰한다면, 블록체인이 필요 없습니다.

인테
그러면 당신은 블록체인의 유무와 무관하게 열린 공간이 창출된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우리는 지금까지 실질적인 혜택을, 사회적인 맥락을 다루었는데요, 이제는 당신들의 가장 유토피아적인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워크숍에서 당신들은 당신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무엇이 당신들을 걱정스럽게 만드는지에 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미래에 무엇이 가능할지,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원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미래의 지평 위에 있는 이 지점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이겠죠.

발렌틴
유토피아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문제에 아주 많은 측면들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좋아합니다. 일국적 수준에서 저는 부유세와 보편적 기본소득의 광팬입니다. 국제적인 수준에서 세계정부가 있다면, 그리고 보편적 기본소득으로서 재분배되는 전지구적인 부유세가 생긴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 될 것입니다. 점점 더 불평등해지는 금융 시스템의 추세가 부유세와 보편적 기본소득 덕분에 평등 쪽으로 역전될 수 있습니다. 인간 사회가 그것으로부터 전적으로 혜택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역화폐 로비스트의 관점에서 저는 안전한 법적 환경을 갖고 싶습니다. 저는 법 문제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만, 이 문제는 여전히 매우 복잡하군요. 우리는 테크놀로지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제 생각에 법적 문제가 지역화폐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크게 미흡한 사안입니다. ‘당신에게 지역화폐가 있고 그것이 백만 파운드 미만이면 우리는 그것을 규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넘으면 우리가 규제할 것이다’와 같은 구조가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정치로부터 요구하는 어떤 것입니다.

인테
홀리오는 미래 정부에 관해 이와는 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겠죠?

홀리오
어려운 문제죠. 이것은 정치경제와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블록체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고 법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테크놀로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의 실제적인 핵심은 힘, 즉 경제적 힘과 정치적 힘(권력)과 관련된 문제들입니다.  법 문제는 매우 재미있는데, 이는 오늘날 법적으로는 국가들 말고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체가 민간은행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은행 면허를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신이 그들의 자산을 처리할 권리가, 그들의 노동을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럼으로써 이 불평등한 권력구조들을 창출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저는 국제적인 수준에서 부유세와 보편적 기본소득은 놀라운 것이라는 발렌틴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제가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직접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실천적으로 생각할 때 그곳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화폐를 민주화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화폐를 영토로 본다면, 우리가 화폐를 민주화한다고 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은, 지역적으로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다양한 생산자들 사이에서 경제적 관계, 정치적 관계, 생태적 관계를 재(再)지역화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서 당신은 권력의 실제적인 탈중심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 즉 권력의 탈중심화가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써클즈>에서 우리는 다음의 네 가지 원칙에 관해 이야기 합니다. 로컬리즘(전지구적 문제의 지역적 해결), 권력의 탈중심화, 지속가능성(관계들을 더 지역적으로 묶고 더 상호의존적인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 방법들을 찾는 것) 그리고 민주적인 연합주의가 그것입니다. 민주적인 의회들이 서로 연합할 수 있지만 정치적 힘은 항상 국민들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그 규모를 확대해야 할 매우 실천적인 메커니즘이며, 이렇게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가장 실천적인 유토피아일 것입니다.  화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관련됩니다. 화폐를 넘어서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삶의 민주화입니다. 이것은 권력의 문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권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가 권력으로 변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부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 많은 재앙을 일으킨 사람들이 많은 권력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치적 힘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조직화된 대중들을 통해서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축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인테
제가 채팅을 읽어봤는데 여기에 사회적 재생산에 관한 질문이 있습니다. 지역화폐와 보편적 기본소득이 어떻게 우리가 창출하고자 하는 사회에서 자리를 잡나요? 어떤 가치들이 시스템에서 작동하는 토큰 형태로 재현됩니까? 그 기획은 어떻게 공동체와 공존합니까? 그것이 어때야 할지에 관한 생각들이 달라서 서로 경쟁한다면 어떻게 되죠? 그 과정은 어떻게 진행됩니까? 그리고 토큰 같은 아주 실질적이고 코드에 기반을 둔 어떤 것과 창출하고자 하는 사회와 같은 추상적인 문제를 어떻게 연결시키는지요?

홀리오
사회적 재생산의 측면에서 우리는 가족, 특히 여성들에게 많은 돌봄의 부담이 부과됨으로써 지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폭력이 또한 증가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기본소득은 많은 착취적인 관계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길입니다. 혹은 사람들이 자신을 돌보고 다른 사람을 돌보며 그들을 둘러싼 사회의 환경을 돌볼 수 있는 소득 기반을 갖게 해주는 것입니다. ‘온전한’ 기본소득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시간을 팔지 않고, 임금을 위해 자신을 임대하지 않고 삶을 살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어떤 것입니다.

오늘날 화폐 시스템은 생산영역에서 비롯합니다. 고용주가 노동자를 고용하고 그들은 일하러 갑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있기 위해 그리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사기 위해 임금을 가정으로 가져갑니다. 커먼즈에는 화폐가 없습니다. 사회적 재생산이 번성할 수 있게 해주는 화폐-커먼즈, 바로 이것이 우리가 구축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커먼즈도 성장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적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우리의 돌봄 실천들, 사회적 재생산의 실천들이 번성할 수 있는 가치체계를 창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마존>과 대규모 식품기업들 같은 거대 기업들에의 의존을 통해 더욱더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에서부터 우리의 땅까지, 우리가 서로에게 하는 약속까지 우리가 지켜야 할 영토를 창출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인테
발렌틴 씨, <쏘셜코인>은 어떻습니까?

발렌틴
사회가 어떻게 실제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화폐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핵심인, 홀리오가 내 마음에 그려준 큰 그림에 대해 생각하는 중입니다. 그러나 가치들의 문제로 한정하자면··· 저는 우리가 지근에서 사용하는 이 화폐—‘쏘셜 코인’—에 붙일 명칭을 찾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공통 화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전기차(앞으로 세 대를 구비할 예정입니다)와 전기자전거라는 공통재(커먼즈)가 있습니다. 제가 일하는 단체는 이 공통재를, 이 전기 차량들을 지역민들에게 보급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급할 도구로서 화폐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실험중입니다. 첫 번째 아이디어는 자원봉사를 한 사람들에게 전기차에 사용할 수 있는 코인을 나눠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보편적 기본소득을 시행할 계획인데 이는 모든 인간이 이 공유자원을 소비할 권리를 동등하게 가짐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런데 커먼즈와 연관된 가치들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재산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유재산과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커먼즈의 가치를 어떻게 정의할 것입니까? 이것은 정말로 재미있는 질문입니다.

인테
커먼즈로서의 화폐라는 생각, 저는 이것을 좀 더 설명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홀리오, 몇 분이면 설명할 수 있겠죠? 돈은 보통 개인의 소유이기 때문인데···

홀리오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노동•토지•화폐라는 세 가지 가짜 상품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가짜 상품들로 생각하는 점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이는 이 세 가지가 항상 상품으로 존재한 것이 아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노동시간, 노동, 몸이 항상 상품으로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토지가 항상 개인소유의 상품으로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가령 텃밭이 언제나 상품으로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화폐도 마찬가지입니다. 화폐는 부채이며 신용관계이고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입니다. 서로에게 하는 약속과 같은 유형의 사회적 관계입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 상품화되었고 개인 소유의 상품이 되었습니다. 맑스의 정의를 따른다면, 자본주의를 M-C-M′으로 정의할 것입니다. 화폐가 더 많은 화폐를 만드는 것, 화폐를 팔아 상품을 사서 그것으로 화폐를 더 많이 버는 것이죠.

가치를 나타내는 징표(토큰)의 사물화 또는 물신화가 발생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것을 화폐라고 부르는데, 화폐는 이자를 낳는 부채 등의 과정을 통해서 확장하고 우리는 이것을 성장 등등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로 지구를 망치는 것입니다. 커먼즈를 희생하면서, 토지를 희생하면서, 우리의 몸을 희생하면서, 지구의 가치를 희생하면서 일어나는 이 물신의 증가, 화폐라는 신의 증가가 지구를 망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화폐의 상품화가 아니라 공통화(commonification)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민주주의의 문제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전부 공동소유자인 곳에서 어떻게 화폐를 창출할까요? 사유재산이 없는 곳에서, 화폐가 민간은행에 의해 소유되지 않는 곳에서, 화폐가 국가에 의해 소유되지 않는 곳에서, 화폐가 우리가 발행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 실제로 공유자원인 곳에서, 자원의 유형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곳에서, 우리는 어떻게 화폐를 창출할까요?

오늘날 우리는 이런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기다리면서 우리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지대(자산소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현재로서는 이것을 어떻게 할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화폐의 공통화가 기본소득으로 주어질 때 우리 몸은 임금노동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고 상품으로서의 화폐 또한 해방시킬 수 있으며, 이 과정을 통해 토지를 탈상품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화폐를 개인소유의 상품으로부터 공통재로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현 자본주의적인 위기에 대안을 제공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오고 있는 주된 이론적 핵심입니다. 우리는 근원으로 가야 합니다. 화폐는 수메르의 지구라트[정리자―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전] 이후로 줄곧 지난 5천년 이상 동안 문제가 있었습니다. 모든 성직자들이 사람들을 채무자로 만들어서 속박상태에 묶어두었던 것입니다. 그 기나긴 역사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군산복합체로 죽 이어집니다. 미국 군대는 세계에서 오염을 제일 많이 발생시키며 미국 달러로 자금을 마련합니다. 민중이 화폐를 창출하는 힘을 되찾지 못하면 우리는 문제의 근원으로 가지 못할 것입니다.

인테
마무리할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만 사람들이 녹화된 토론을 보고자 할 경우에 대비해서 앞으로 워크숍에서 여러분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발언할 시간을 각각 드리고 싶습니다.

발렌틴
워크숍의 제목은 ‘비정부기구(NGO)로서 지역화폐를 시작하는 법’입니다. 우리가 NGO로서 이 화폐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직접해보는 워크숍이 될 것입니다. 워크숍에서 저는 제가 지역화폐를 시작하면서 겪었던 모든 경험을 공유할 것입니다. 그리고 미리 알려드리는 바이지만 우리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멉니다. ‘이 발걸음을 뒤따르시면 지역화폐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가 아닙니다. 저는 다만 제 경험을 공유할 것입니다. 저는 실천적 경험을 가지고 있는 워크숍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과 실제로 토론을 하고 싶고 배우고 싶습니다. 그들이 어떤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지, 그들의 프로젝트가 어떤 것인지 토론을 통해 알고 싶습니다.

홀리오
우선 저는 정치적 힘(권력)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고 <써클즈>가 교환과 상호의무의 측면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감을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화폐의 두 가지 측면에 대해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저는 최근에 출판된 안내서를 죽 훑어볼 것입니다. 이 안내서는 <써클즈>가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고 또한 오늘 제가 말한 몇 가지 원칙들을 설명하며 기본적으로 지역에서의 조직방법론을 제시합니다. 조직화는 생산자들과 상인들의 회로에서 시작해서 그들이 고용하는 노동자들로, 거기서 다시 공동체 전체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매우 실천적인 작업이며 우리가 매달 마지막 일요일에 가지는 회의에서 하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든 이 토론을 듣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함께하는 것을 환영합니다. 시작하는 법에 대한 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