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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폴리스로서의 커먼즈버스

 



[볼리어의 설명]

아래의 글은 내가 2023년 5월 31일 베를린에서 열린 워크숍 「자유주의를 넘어: 커먼즈, 입헌정치 그리고 공동선」에서 발표한 것을 약간 손본 것이다. 이 워크숍은 <막스 플랑크 비교 공법 및 국제법 인스티튜트>, 뷔르츠부르크 대학 법학과 그리고 <뉴 인스티튜트>(독일, 함부르크)가 주관했다.

발표 비디오는 여기서 불 수 있다. 내 발표는 타임코드 5:32에 시작한다.

 

평행폴리스로서의 커먼즈버스: 기회와 도전

이 워크숍에 의해 촉발된 대화는 시기적절하고 필수적이다. 이는 정치경제 및 문화와 관련하여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그 많은 것들이 우리 눈앞에서 서서히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그토록 많은 거대 서사들—시민권•자유•재산권•경제성장•가치이론—이 요즈음에 문제시되었다고 말해야 온당할 것이다. 기존 사회제도와 사고 범주들이 그다지 잘 작동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한편으로 구조변화 및 필요한 대안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이는 그런 이야기가 괴물들과 카오스가 든 판도라의 상자를 열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기후변화, 권위주의적 민족주의, 야만스런 불안정성 및 불평등 그리고 사회제도 붕괴라는 위험지대들로 더 깊이 들어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선택할 것이 거의 없다. 우리는 몇몇 고착된 습관들을 버릴 필요가 있다. 우리는 새로운 북극성과 한층 안정적이고 유익한 질서를 필사적으로 찾을 필요가 있다.

오늘 나는 커먼즈라는 생각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아주 많은 것들—자본주의적 정치경제, 국가권력, 사회적 관계 및 위계들, 지구와의 관계, 우리의 내적인 삶들—을 다시 상상할 엄청난 가능성이 이 생각에 담겨있다는 제안을 하고 싶다. 확실히 이것은 당찬 제안이고 장기적인 기획이다. 문제가 있는 시스템에 고착되어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기존의 것과는 매우 다른 사회적 논리들 및 제도적 형태들을 개발해야 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식민주의, 그리고 우리가 내면화했거나 억제한 규범들을 가진 중앙집권화된 국가권력이라는 해결되지 않은 트라우마들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발표문에서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커먼즈와 커머닝이 우리에게 공동선의 비전을 재발명할 발판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비전은 우리가 세포 수준에서 한층 인간적인 사회관습들과 윤리적 행동들을 발전시키는 것을 촉진할 수 있으며, 이 관습들과 행동들이 확장하면서 우리는 자본축적, 소비주의, 성장을 통한 진보의 세계 너머로 이동할 수 있게 된다.

확실히 오늘날 대다수의 커먼즈는 중요한 의미를 갖기에는 너무 소규모이고, 지역적이며, 캐시푸어(cash‐poor)인 것으로 일축된다. 주류에게 커먼즈는 군내나는 괴짜다. 주류들의 ‘점잖은’ 의견에 따르면 “일을 해내기” 위한 본격적인 체제로 시장과 국가가 유일한 것으로 가정된다. 사적부문과 공적부문이 있고 그 밖에 것은 실제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허울만 좋은 주장이거나 적어도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매우 편협한 프레임을 씌운 것이다. 시장과 국가는 둘 다 경제성장을 찬양하고, (서로 다른 역할을 가지고 있더라도) 자유주의적인 정치적•경제적 질서를 촉진하는 데 있어서 긴밀하게 동맹한다. 국가는 속박되지 않은 시장들이 성장, 세수(稅收), 시민들의 사회적 이동성을 발생시키기를 원한다. 반면에 기업들과 투자자들은 국가가 안정된 통치, 법적 특권들과 기업활동을 위한 보조금을 제공해주고, 금융위기, 생태적 재난, 시장 악용 및 기타 ‘시장 외부효과들’ 이후 상황정리를 해주기를 원한다. 국가와 시장은 우선사항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공생한다. 시장국가 체제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말이 될 만큼 충분히 말이다.

커먼즈는 국가와 시장이라는 바로 이 체제에 대안이 되는 비전이다. 정치가들과 경제 전문가들은 커먼즈를 손짓으로 간단하게 묵살할 수 있지만 커머너들은 더 심오한 진실을 즉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전제들이 비록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더라도 뿌리 깊숙이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2008년 금융 위기는 전 세계 금융세력과 자본주의의 오만한 힘을, 그리고 그 힘의 남용을 영속시키는 일에 자유주의 국가가 공모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브렉시트의 도래,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COVID, 긴축재정 정치, 도널드 트럼프, 보수적 민족주의 그리고 인종적•민족적 타자화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강화할 뿐이었다.

나는 경제성장이 유토피아적 환상임을 폭로하고 있는 기후변화의 잔혹한 현실—홍수, 가뭄, 산불/들불, 기상이변—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경제성장을 위한 자원 추출 및 탄소 에너지 자원에의 의존은 지속될 수 없다. 전 세계 비(非)백인들—식민주의와 강제적인 자본주의적 개발의 희생자들—이 배상금, 생태복원 및 기후정의를 요구하므로 자본주의적 개발을 이 세계에 강요하려는 충동은 지속될 수 없다.

새로운 정치가들, 정책들 또는 법들이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그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구조적인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자전거가 우리를 달로 데려갈 수 없듯이 시장‑국가 체제는 그 문제들을 극복할 어포던스(affordance, 행동가능성)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정치공백기에 빠졌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오래된 질서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며 새로운 질서는 아직 태어날 준비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체코 극작자인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에게서 영감을 얻고 그를 길잡이 삼는다. 1970년대에 그를 비롯한 문화계의 반정부 인사들이 전체주의적인 억압 시스템—그의 경우에 체코 정부—에 직면했을 때 하벨의 전략적 반응은 그가 평행폴리스(parallel polis)라 부른 것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평행폴리스는 공동체가 만든 안전 공간으로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로 지원하고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직접 생산하며 일종의 그림자 사회(shadow society)를 구축한다.

평행폴리스라는 발상은 여러 목적에 복무한다. 사람들은 공식적인 선전의 허위를 폭로하고 가능한 것에 관한 자신들의 상상력을 확장할 공간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은 예시(豫示)적인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면서 수평적이고 공락(共樂)적인 상호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그들은 진실을 말할 수 있고 건전한 가치들을 표현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엄성, 사회적 유대 및 희망을 다시 주장할 수 있다.

나는 커먼즈버스(Commonsverse)를 일종의 평행폴리스로 본다. 커먼즈버스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시스템 변화를 가져오는 방법으로서의 커머닝에 복무하는 무수한 기획들, 조직들, 사회운동들이다. 나는 이미 존재하는 엄청나게 다양한 커먼즈들을 소개하기 위해 『커머너의 변화만들기 목록』(The Commoner’s Catalog for Changemaking)을 2년 전에 출간했다. 여러분이 몇몇 참조점을 확인할 수 있도록 간략한 개요를 제시할까 한다.

커먼즈로서의 토지. 토지를 탈상품화하는 것은 토지를 지역의 농사용, 주택용 및 보존용으로 접근가능하고 제공가능도록 만드는 중요한 하나의 방법이다. 이 점에 있어서 한 가지 중요한 수단은 시장에서 토지를 빼내어 그것을 영구히 커먼즈로 만드는 공동체 토지 신탁(community land trusts)이다.[주석1] 토지 신탁은 풍경을 보존하고 부의 불평등을 줄이며 영양이 풍부한 식량을 지역별로 키우는 것을 더 적합하게 만드는 일을 촉진한다. 공동주택, 주택 협동조합 또는 독일 신디케이트(Mietshäuser Syndikat) 같은 연합체의 ‘피어(동료) 주도 프로젝트들’(Peer-directed projects)은 국가나 지역 공동체에 의한 기획들과 나란히 사회적 주택을 제공할 수 있다.

서양에서의 지역 식량 주권. 유럽과 북미에는 지역농업과 식량 공급망을 재발명하는 운동들이 많다. 유기농 지역경작이 50년 전에 처음 이 운동을 시작했고 이는 지금은 퍼머컬처, 농업생태학, 슬로우푸드 운동 및 심지어 슬로우피쉬 운동에서 나타난다. 푸드 협동조합들은 농부들과 소비자들을 한데 모아 상호적으로 부양하는 관계를 맺도록 하기 위한 — 가격을 낮추고 한층 안정적인 지역 식량 공급을 보장하며 친환경 농경을 보증하는 것을 돕는 — 긴 시간에 걸쳐 입증된 모형이다.

커먼즈로서의 도시. 바로셀로나, 암스테르담, 서울, 볼로냐, 그리고 수십 개의 주요 도시 및 소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협력적인 거버넌스의 새로운 형태들을 실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커먼즈-공공부문 파트너십은 메이커스페이스(makerspace)[주석2], 도시농업 시스템, 시민 정보 커먼즈 그리고 근린지역 개선 및 서비스를 창출하고 있다. 이 파트너십은 시민들에게 권한을 주고 사회 기본구조를 다시 짜며 부유한 개발자들과 투자자들로부터 도시에 대한 시민대중의 통제권을 되찾는 길이다. 또한 도시에는 많은 독립적인 커먼즈 기획들, 예를 들어 공동체 텃밭(community garden), 에너지 생산 커먼즈, (카탈로니아의 Guifi.net 같은) 지역 와이파이 시스템 등이 있다.

전통적이고 토착적인 커먼즈. 어림잡아 전 세계 20억 명의 사람들이 어장농지목초지야생 사냥감의 파수를 통해 일상 생계를 커먼즈에 의존하고 있다. 전통적인 공동체와 토착민들에 의해 수행되는 커머닝은 그것이 산업형 농업에 대한, 지역에 기초를 두는 친환경적인 대안임을 입증하고 있다. 전 세계 생물 다양성의 대략 70%가 토착민들이 운영하는 땅에 존재한다.

대안적인 지역 통화. 전 세계 많은 공동체들이 그들 고유의 지역 통화를 만들었다. 그 목적은 금융가치가 주요 금융기관들로 빨려 들어가도록 두지 않고 그 가치를 지역에 잡아두는 것이며 그래서 지역 시장, 일자리 창출,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을 활성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태어난 서부 메사추세츠에서 버크셰어즈(BerkShares) 통화는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대안 통화가 되었다. 타임뱅킹(Timebanking)은 또 하나의 가치 있는 통화혁신—많은 돈 없이 나이 든 사람들과 일반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하는 서비스‑교환 시스템—이다.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와 피어 생산. 프리 소프트웨어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의 지난 25년간의 폭발적 증가는 커머닝의 강력한 상징이다. 프리 소프트웨어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는 코드를 탈상품화하고 스스로 조직된 개방적인 공동체의 창조성을 고양시킴으로써 리눅스, 인터넷을 위한 필수적인 하부구조, 위키피디아 그리고 (그룹 심의, 그룹 예산안 작성 및 클라우드에의 파일저장을 위한) 많은 세계 규모의 소프트웨어 시스템들을 구축했다.

코즈모로컬 생산. 한 가지 강력한 오픈소스 파생물은 코즈모로컬 생산 즉 전지구적으로는 디자인과 지식의 공유를, 지역적으로는 사물들의 물질적 생산을 관장하는 시스템이다. 이 과정은 자동차•가구•주택•전자기기•농장시설에 이미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는, 상업적인 의료용 제품보다 더 싸고 더 정교한 자동인슐린주입 장치를 생산한, 당뇨병환자로 이루어진 전지구적인 공동체도 있다. 농업기계의 코즈모로컬 생산은 <팜핵>(Farm Hack)과 <오픈소스 에콜로지>(Open Source Ecology)에서 볼 수 있듯이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세계 일류 디자인을 갖춘 저가의 농장 장비를 생산하는 것을 돕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와 공유 가능한 콘텐츠. 20년 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의 발명은 돈을 지불하거나 허가없이 글쓰기, 음악, 이미지 및 기타 창조적인 장르들을 법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자유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자율적인 공공 라이선스는 이제 전 세계 170개가 넘는 법시행 관할구역에서 인정을 받고 있으며 다른 상황에서라면 저작권법 하에서 ‘저작권 침해’로 여겨질 방식으로 엄청난 양의 콘텐츠가 공유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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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커먼즈들 각각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것들이 항상 그 맥락의 특이성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나는 비상업적인 극장에, 오픈소스 테크놀로지로 구축되는 최고 품질의 과학 현미경에, 인도주의적인 구조를 돕는 온라인 지도에, 그리고 난민들과 이주자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일에 주력하는 커먼즈를 발견해서 깜짝 놀랐었다. 각각의 경우에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독특한 재능, 지리, 역사, 전통, 자급활동, 가치 그리고 상호주체성을 통해 자본주의적인 시장이나 국가의 통제 없이 욕구를 만족시키고자 한다.

‘내부에서 볼 때’ 각 커먼즈는 독특할 뿐 아니라 ‘세상 만들기’를 위한 학습이기도 하다. 그것은 상호주체적인 일련의 감정들•경험들•가치들•전망들이다. 우리가 겪는 상호주체적 경험들의 생생한 실재는 우리에게 세계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고착된 단일문화로서가 아니라 탄탄한 ‘다원적’ 세계로서 더 잘 이해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러나··· 각 커먼즈가 독특하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그 커먼즈에 관하여 일반화하기 시작하는가? 최소한도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기존 공동체가 일정 유형의 공유된 부를 집단적으로 운영할 때마다 공평한 접근법, 사용법, 장기간에 걸친 지속가능성이 강조되면서 하나의 커먼즈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다양한 맥락에 있는 매우 다양한 커먼즈들에 공통된 규칙성들을 실제로 설명하지 못한다.

작고한 나의 동료 질케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나는 이 문제가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현재 우세한 근대적 세계관은 커먼즈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그야말로 너무 환원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이다. 그것은 전체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들에게 너무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리의 근대적 세계관은 커머너들이 여전히 경제적 개인―합리적이고 자기주권적이며 자신의 물질적 이익을 최대화하는 데 전념하는 개인―이라고, 다만 시장을 통해서보다 그저 협동을 통해서 이 목표를 추구할 뿐인 그러한 경제적 개인이라고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커머닝을 그 나름의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조건에 기반해서, 그리고 진화사 및 생물학의 맥락에서 이해하고자 한다면 나는 우리가 커먼즈를 철저히 관계적이고 사회적인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전 세계 커먼즈에 대한 나의 아마추어적인 민족지학 연구로부터 증명할 수 있다. 커먼즈는 경제학자들이 보고자 하는 것처럼 단순히 자원들이 아니다. 커먼즈는 살아있는 사회 유기체들이다. 최근의 생물학 연구는 선구적인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가 보여준 것처럼, 어떻게 식물과 나무와 균류들 모두가 상호의존적이며 연결되어 있는지, 어떻게 세포 수준에서조차 생명이 심층적으로 공생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간 커머너들의 경우에도 그렇다. 우리는 서로와의 관계 속에서, 지구 그리고 지구에 존재하는 인간보다 큰 생명계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과거 및 미래 세대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커먼즈는 단지 사람들의 타산적인 합리성이 아니라 그들의 충만한 감정적, 윤리적 그리고 영적 힘에 의해 활기를 띤다. 질케와 나는 커머닝이 사실상 사회적이고 생태적인 관계맺음을 통해 창출되고 지속되는 역동적인 살아있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감수성은 문화 역사가 토마스 베리(Thomas Berry)의 다음 말에 의해 잘 표현된다. “우주는 객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주체들의 교감이다.” 나는 또한 생물학자이자 생태철학자인 안드레아스 베버(Andreas Weber)의 다음 문장을 좋아한다. “과학과 경제학은 창조적인 살아있음을 현실의 존재론적인 토대로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질케와 나는 공동 출간한 책 『자유롭고 공정하며 살아있는』(Free, Fair and Alive)[주석3]에서 커먼즈 안에서 살아있음이 어떻게 실제로 작동하는지 설명해보려 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에 답하고 싶었다. 관계성이 핵심이라면 다양한 개성들과 선호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조율이 되어 일관성 있는 커먼즈가 되는가? 화폐교환 없이 어떻게 중요한 것들이 이루어지고 돌봄이 제공되는가? 어떻게 피어(동료)가 주도하는 협동 시스템들이 생성되고 스스로를 유지하는가?

운 좋게도 우리는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 교수의 앞선 성취들과 그녀가 선구적으로 포착한 성공적인 커먼즈의 ‘설계원칙들’을 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오스트롬은 명확하게 명시한 경계들의 필요성과 자체적으로 만들어 낸 거버넌스 규칙들의 필요성을 확인했다. 그녀는 어떻게 커머너들이 규칙을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어야 하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규칙들이 시행되는 방식을 감시하는 데 참여해야 하는지를 알아냈다. 분쟁이 있다면 커먼즈는 그것을 저비용으로 신속하게 해결할 자체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커먼즈는 국가 당국으로부터 자립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커먼즈에 관한 이 전통적인 사고방식은 경제의 표준적인 틀과 그 방법론인 개인주의 내부에 대체로 머물러 있다. 그것은 커머너들의 내적인 삶 또는 정치경제[즉, 집단적 공동체의 경제]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커먼즈의 실제적 작동방식을 우리가 보다 명확하고 깊이 있게 보도록 돕는 ‘관계틀’을 개발했다. 우리는 ‘패턴언어’라는 아이디어를 개발한 급진적 도시계획자이자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의 작업에서 길잡이를 찾았다.

알렉산더는 빈발하는 문제들에 대한 특정의 해결책들이 긴 시간 동안의 역사와 문화를 가로질러서 소소하게 변동하면서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것을 자신의 분야에서 관찰했다. 그는 이 해결책들을 ‘패턴’이라 불렀다. 패턴들은 사회적 관행에서 나타나는 디자인이고 행동이다. 패턴들의 유효성은 그 패턴들이 반복적으로 사용됨으로써 승인된다.

패턴언어 방법론을 활용하면서 질케와 나는 15년간 우리가 목격했던 많고 많은 수의 커먼즈 형태에서 관계를 나타내는 수십 개의 패턴들을 포착해냈다. 우리는 이 패턴들을 ‘사회적 삶’, ‘피어 거버넌스’ 그리고 ‘자급’이라는 세 영역—이는 각각 사회적, 제도적, 경제적 영역이라 할 수 있다—으로 나누었다. 이 세 영역들을 합치면 우리가 ‘커머닝의 3인조’라 부르는 바의 것이 구성된다. 이 3인조는 ‘어떤 사회적 실천들과 윤리적 행동들이 커머닝의 성공적인 관계들을 창출하고 유지하도록 돕는가?’라는 물음에 우리가 답할 수 있게 한다. 나는 우리가 찾은 25개 이상의 패턴들을 다 살펴볼 수는 없고 여러분에게 패턴에 대한 감각을 전하는 데 집중하고자 한다.

커먼즈의 ‘사회적 삶’에서 한 가지 중요한 패턴은 공유된 목적과 가치들을 계발하는 것이다. 이 실천이 없다면 커먼즈는 붕괴된다. 사람들이 긴밀히 연결된 활력 있는 집단으로 남아있으려면 그들은 경험을 공유할 필요가 있고 집단적으로 그들의 커머닝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된 패턴은 함께함을 의례(儀禮)화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만나야 하고 서로 공유해야하며 하나의 집단으로서 그들의 성취와 친연성을 축하해야 한다. 함께 어울리는 것이 중요하며, 의식(儀式)들, 전통들, 축제행사들을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커먼즈의 사회적 삶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기여하는 것—똑같은 가치를 직접적 혹은 즉시 되돌려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고 주는 것—을 필요로 한다. 커먼즈가 시간을 두고 실제 혜택을 내줄지라도 말이다.

커머닝 3인조 중 둘째인 피어 거버넌스의 핵심은 타자들을 동등한 존재로 보는 것이자 집단적인 의사결정의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것이다. 커머너들은 피어 거버넌스로 위계와 중앙집권화된 권력시스템을 피하고자 한다. 그 시스템이 권력 남용과 책무성 문제를 낳을 배치일 수 있기 때문이다. 피어 거버넌스는 무엇보다도 ‘지식을 아낌없이 공유하기’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집단지성을 생성하는 결정적인 방식이다. 지식은 공유될 때 늘어나지만 이런 일은 정보가 자유롭게 유통되고 쉽게 접근 가능할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패턴은 ‘투명성을 신뢰의 영역에서 존중하기’이다. 투명성은 명령될 수 없다. 사람들이 어렵거나 난처한 정보를 공유할 만큼 충분히 서로 신뢰하지 않는다면, 투명성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커머닝의 세 번째 영역인 ‘자급’은 커머너들이 어떻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생산하는가가 그 핵심이다. 시장경제에서처럼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는 일은 없다. 기본 목표는 사람들의 경제적 욕구를 개인적인 삶의 여타의 부분들과 통합하는 것이다. 커머너들은 시장에서 팔 것을 생산하지 않는다. 사실 커머너들도 자신들의 커먼즈의 온전함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시장과의 상호작용이 조금이라도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그 상호작용의 방식을 구조화하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급의 한 가지 기본 패턴은 ‘함께 제작하고 함께 사용하라’이다. 참여하고 책임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함께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자신들의 능력•재능•욕구에 따라 기여한다. 함께 생산하기는 ‘함께 하라’(‘Do It Together,’ DIT)라고 불릴 수도 있는 것의 핵심과정이다. 커먼즈에서 일반적으로 자급이 확실하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방식을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이 되는 많은 다른 패턴들이 있다.

일단 커머닝의 패턴들로 들어가기 시작하면—일단 관계성이 어떻게 지구에서 삶의 근본적인 현실인지를 보기 시작하면—근대적 세계관과는 다른 세계관, 즉 내가 존재론적 전환 또는 ‘OntoShift’(존재전환)이라 부르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지금 당장 철학적 차원을 논의할 필요는 없다. 다만 세계관을 전환하는 것은 우리의 내적 삶과 관점을 바꾸게 될 새로운 사회적 실천들과 커머닝의 경험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한다라고만 말해두자. 우리는 시장문화의 핵심요소들인 이기적인 개인주의와 장사꾼 사고방식을 버리고 가기 시작하는 것이며 세상을 촘촘한 망으로 이루어진 공생 및 협력관계로 움직이는 통합된 전체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커먼즈버스에서 ‘공동선’은 어떤 고정된 이상화나 눈에 잡히지 않는 목표점이 아니다. 이 공동선은 수평으로 그리고 아래에서부터 확장하고 출현하는 협동 윤리로서 발현되는 역동적인 살아있음이다. 이 공동선은 유기적 연결성과 온전성으로 발현되며 이는 사실 살아있는 유기체들의 생물학적 충동이다. 우리의 내적 삶에서 이 공동선은 배려하는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 안전하고 공정하다는 느낌, 그리고 소속감으로 발현된다. 이 공동선은 체계 차원의 다양성과 회복탄력성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것에서 나는 공동선에 대한 프란치스 교황의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Praise Be to You)의 비전이 생각나는데, 이 비전은 우리의 영적 삶, 인간보다 큰 세상, 그리고 우리의 (하나의 종으로서의) 공통의 부와 운명 사이의 상호연결에 관하여 많은 비슷한 점들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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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문턱에 서있고 사태는 흥미로운 방식으로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커먼즈와 커머닝은 지난 10년간 급증하면서 국가권력, 자본주의 기업 및 신자유주의와 점점 더 충돌하게 되었다. 시장‑국가 체제는 그 나름의 우선사항들과 비전에 공격적으로 전념하는데 이 우선사항들과 비전은 커먼즈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영국에서 벌어진 종획 운, 몇 백 년에 걸친 식민지 정복 그리고 인공적인 나노물질과 유전자에서부터 수학 알고리즘과 (금융증권으로 전환되는) 물의 흐름까지, 가치가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사유화하고 화폐화하고자 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발전’에서 나타나듯이, 역사는 성장경제가 일반적으로 공동자산을 전유하고 사유화하며 커머너들을 그 공동자산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시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커머너들에게 긴급한 실질적인 물음은 어떻게 그들이 공유된 부의 종획을 막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커머닝을 보호하기 위해 법을 사용할 수 있는가이다. 이것이 실제로 가능한가? 자유주의 헌법 질서가 긍정적으로 커머닝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비자본주의적인 사회 형태로서 커머닝의 온전함을 존중할 수 있는가? 그 질서가 커머닝을 보호하기를 원하는가? 커먼즈의 토착적인 법과 서구의 법을 미봉적인 긴장완화로서만이라도 영리하게 섞는 것이 가능한가? 또는 자유주의 철학은 너무 경직되고 공격적이며 정치적으로 고루해서 커먼즈와 커먼즈가 만들어 내는 살아있는 가치를 지지하지 못하는 것인가?

분명히 해두자. 커먼즈는 시장가격과는 매우 다른 가치 이론을 구현하는데, 우리 시대에 시장가격은 가치의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측정규준으로 간주된다. 이와 달리 커먼즈는 살아있는 시스템을 생성적인 것으로서, 즉 일반적으로 사유화되지도 않고 사유화될 수도 없으며, 화폐화되지도 않고 화폐화될 수도 없고, 상업적으로 거래되지도 않고 거래될 수도 없는 가치로서 인식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시장‑국가 체제는 재산법, 계약법 및 통상법의 매개를 통해 삶을 객관화한다. 국가권력으로서는 자본과의 동맹을 통해 그 힘을 공고히 할 기회를 환영한다. 일반적으로 국가권력은 사람, 자연, 여타 생명체들에 대한 행정적인 통제를 중앙집권화하고 규칙화하기를 원한다. 정치 과학자 제임스 스콧(James Scott)이 다음과 같이 분명히 했듯이 말이다.

근대국가는 … 감시하고 수를 세고 평가하고 관리하기에 가장 쉬울 바로 그러한 표준화된 특징을 지닌 지형과 인구를 창출하는 것을 시도하는데 성공의 정도는 경우에 따라 다르다. 근대국가의 허망하고 근시안적이며 끊임없이 좌절되는 목표는, 그 밑에 있는 무질서하고 혼란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현실을, 그 현실을 관찰하는 행정망을 더 많이 닮아있는 어떤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국가들이 디지털 감시 테크놀로지와 빅테크와의 연합으로 무장하고 있으므로 이 동향의 논리적인 종점은 권위주의적인 통제이다. 국가법과 자유주의가 얼마만큼 이 방향을 향할지 불분명하다.

결국 자유주의는 국가권력에 깊이 예속되어 있고 커머너들의 관습에 따른 관행의 역할이나 그들의 집단적인 정체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시장처럼 자유주의 국가는 개인주의, 재산권, 계약의 자유, 및 물질적 ‘진보’에 깊이 전념한다. 이것은 분리―인간이 서로 분리되고 지구로부터 분리되며 역사적 기억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의 사고방식을 조장한다.

세르게이 거트워스(Serge Gutwirth)가 설명했듯이, 자유주의 국가에는 법인격 없는 역동적인 공동체에 권리를 부여할 수단이 없다. 물론 경제성장—주주들의 집단적 의무—이 자유주의 국가에 크게 잘 들어맞기 때문에 기업들은 예외다. 대략 800년 전에 커머너들의 많은 특정한 권리들이 획기적인 <삼림헌장>[주석4]—마그나카르타와 연결되어 있는 법적 선언문—에서 존중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것은 대부분 잊혀졌다. 민족(국민)국가의 발생과 심지어 자유주의로 인해 커머닝에 대한—생존에 필수적인 것들에 접근할 사람들의 권리에 대한—법적인 인정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이것이 나에게 시사하는 바는 현재 실행되는 바의 자유주의는 철학적으로 커먼즈에 적대적이거나 최소한 커먼즈의 실제 가치와 역동성을 모른다는 것이다. 국가는 권력 행사의 합법성을 한시도 늦추지 않고 주장한다. 그것이 법과 국가 기관을 통해 공식적으로 수행되는 바대로 말이다. 그러나 국가는 커먼즈에 기반을 두는 체제에 의해 주장되는 사회적, 윤리적 정당성에는 일시적인 관심만을 보인다. 권력은 자신이 선택한 인식 체계를 떠받침으로써 스스로를 유지한다.

자유주의와 커머닝을 논할 때 우리는 합법성과 정당성 사이의 단절에 직면한다. 시장‑국가 체제는 그 행정질서의 합법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형식적 법체계와 관료조직에 의지한다. 그 체제는 커머너들—커머너들은 그들 고유의 인식론적 질서, 법과 정당성에 대한 그들 고유의 비전을 가지고 있다—의 역동적인 거버넌스와 일상적인 관행 및 경험에 별 관심이 없다.

나는 이것을 우리가 기획한 「자유주의를 넘어」라는 제목의 워크숍이 탐색해야 하는 영역으로 여긴다. 국가의 합법성과 커먼즈의 정당성 사이의 차이는 취약성, 위험성 및 가능성의 차이이다. 이 차이를 메우려고 했던 몇몇 인상적인 혁신들이 있고 현재로서 최선의 효과를 내는 혼합안을 개발하려고 했던 몇몇 흥미진진한 실험들이 있다. 그것들 중 세 가지만 간략하게 언급해보자.

1) 새로운 사회적 규범들 및 관행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법적 해킹 활용
2) 커머닝을 지원하는 새로운 조직형태들의 개발
3) 일반적으로 보통 지자체 수준에서 커머너들과 국가 공무원들을 협력에 이르게 하는 커먼즈‑공공부문 파트너십

법적 해킹은 국가법을 원래 입법자에 의해 상상되거나 의도되지 않은 방식으로 개편하는 것이다. 법적 해킹의 핵심은 현행법 내부에서부터 합법성의 새로운 구역을 개척하는 것이고 그런 다음 새로운 사회적 규범과 정치 활동으로 이 구역을 채우는 것이다. 핵심은 ‘새로운 합법성’을 수립하기 위해 민중에 기반을 둔 정당성과 공동체 실천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법적 해킹은 국가법 하에서 불법일 수 있는 커머닝(예를 들어 씨앗공유하기 및 인도적인 구조救助)을 탈범죄화하거나 커머닝이 번성할 보호받는 적법한 공간들을 만들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사례들로는 창조적인 작업을 합법적으로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듦으로써 저작권법을 해킹하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Creative Commons licenses)가 있다. 이와 유사하게 강•산•풍경을 보호하는 한 방식으로서 이것들에 공식적인 법인격을 부여하고자 하는 다양한 ‘자연권’ 법들도 법적 해킹이다.

기업들, 협동조합들, 비영리단체들에 권한을 부여하는 지배적인 법구조가 커머닝이 작동하는 방식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적어도 서구 나라들에서는 새로운 조직 형태들을 만드는 것이 종종 필요하다. <지속가능한 경제법 센터>(Sustainable Economies Law Center), <민주 및 환경 권리 센터> 같은 몇몇 법 옹호단체들은 풀뿌리에서부터 성장할 수 있는 탈중심화된 구조를 설계하기 위해서 혁신적인 정관(定款)과 금융구조를 개발하고 있다. 그들은 커먼즈로서 운영되는 자율적인 운영자공동체 그리고 법인격을 가지고 있는 ‘스스로를 소유하는’ 토지를 창출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커먼즈‑공공부문 파트너십(실제적인 것이든 제안된 것이든)은 바로셀로나, 암스테르담, 볼로냐, 방콕, 서울 같은 도시들에서 그리고 공동도시들(Co-Cities) 운동[주석5]과 연관된 도시들에서 불쑥불쑥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지자체 공무원들과 커머너들 사이에 새로운 유형의 유연하고 비관료적인 협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노인 돌봄, 아이 돌봄, 근린지역 개선, 공공 장소와 공공 건물들, 디지털 정보 커먼즈, 그리고 오픈소스 테크놀로지가 이 파트너십에 포함된다. 오픈소스 참여가 공무원식 사고방식과 얼마나 성공적으로 잘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는 열린 문제로 남아있다.

바라건대 나의 발표가 분명히 하듯이 자유주의적 입헌주의의 세계에서 ‘공동선’에 대한 생각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정의되어야하고 이해되어야 하는지 전적으로 분명하지는 않다. 공동선을 발생시키기 위해 어떤 사회적 관계가 요구되는지, 공동선을 보호하기 위해 법을 포함해서 어떤 종류의 정치제도들과 절차들이 요구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국가권력이 다시 만들어질 필요가 있는지 전적으로 분명하지는 않은 것이다.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논점은 공동선에 대한 일정한 비전 뒤에 인간의 번성하는 영적 삶에 대한 무슨 암묵적인 비전이 자리 잡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당연하게도, 커먼즈와 커머닝을 지향하는 활동이 자본주의적인 근대성의 한계를 비판하고 조직화된 협력과 공유하기의 근대 이전 전통—그리고 전적으로 현대적인 전통—을 탐색함으로써 공동선 논의에 공헌할 여지가 많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또한 체제 변화에 복무하는 다양한 국제적인 사회운동들—탈성장, 협동조합 운동들, 피어 생산, 코즈모로컬 생산, 농업생태학, 슬로우푸드를 비롯한 농업 및 식량 운동들, 토착적이며 전통적인 공동체들, 탈식민과 인종 정의 운동들, 재지역화 기획들, 도넛 경제학[주석6], 페미니스트 경제학, 그리고 기타 많은 것들—에도 이 더 큰 프로젝트에 기여하는 그 나름의 중요하고 보완적인 관점들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재의 긴급한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연계된 집중적인 대응을 개시할 수 있는가? 이것은 아쉽게도 여전히 열린 문제로 남아있다. 

==== 주석

 [주석1] 토지 신탁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1574 참조.
[주석2] 메이커스페이스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1369 참조.
[주석3] 이 책과 관련해서 http://commonstrans.net/?p=2418http://commonstrans.net/?p=2095참조. 
[주석4] <삼림헌장>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974, http://commonstrans.net/?p=478 참조.
[주석5] 공동도시들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2560 참조.
[주석6] 도넛 경제학(Doughnut Economics)은 영국의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Kate Raworth)가 창안한 21세기 경제학 이론이다.

 

 




공동도시들–도시에서의 커머닝

 


  • 저자  : David Boiler
  • 원문 : Foster & Iaione Probe Commoning in the City
  • 분류 :  번역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 글은 데이빗 볼리어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2023년 3월 21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어떻게 커먼즈 패러다임이 한층 더 초점이 맞추어진 효과적인 방식으로 도시에 적용될 수 있을까? 몇 가지 답을 찾기 위해 최근에 나는 선도적 사상가이자 도시 커먼즈 옹호자인 두 사람, 셰일라 포스터(Sheila R. Foster)와 크리스천 이아이오네(Christian Iaione)를 <커머닝의 프런티어> 팟캐스트(에피소드 37)에서 인터뷰했다. 그들은 『공동‐도시들—공정하고 자립적인 공동체를 향하는 혁신적인 이행들』(Co-Cities: Innovative Transitions Toward Just and Self-Sustaining Communities)이라는 책을 막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들은 이 주제를 연구하면서 수년이 흘러 알게 된 많은 것을 분석한다.

포스터는 조지아타운 대학에 근무하는 도시법과 (도시)정책 교수로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복지, 기후정의 및 더 나은 거버넌스를 촉진하고 인종 불평등을 다루는 데 있어서 도시의 역할을 연구한다. 이아이오네는 로마 소재 루이스 귀도 깔리 대학교(Luiss Guido Carli University)에서 도시법과 도시정책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대학에서 그는 시 정부들이 도시 커머너들 및 다른 이해당사자들과 함께 일하기 위한 창조적인 방식들을 개척한다.

나는 10년 전에 처음 이아이오네를 만났는데 그때 그는 도시 커먼즈의 돌봄과 회생을 위한 볼로냐 조례—시민의 협력을 시정부와 연계시키기 위한 공식적인 법적 체계이자 행정적인 체계—를 개발하고 있었다. 그 조례는 수백 개의 ‘협력 협약들’을 낳았으며 자율적으로 조직된 시민 단체들에게는 이것을 통해 버려진 건물들을 재건하고 유치원과 노인요양소를 관리하며 도시 녹지공간과 다른 많은 것들을 돌볼 수 있는 권한 및 시의 지원이 주어졌다.

시민의 에너지를 최대로 이용하고 정부, 기업, 시민 참가자들 그리고 지식 기관들의 지식 및 자원과 그것을 어우러지게 하는 이 영향력 있는 아이디어가 이탈리아의 다수의 다른 도시들과 전 세계로 퍼졌다.

포스터와 이아이오네가 작업을 하기 위한 주요 수단은 <랩겁>(LaGov)커먼즈로서 도시 거버넌스를 위한 실험실—이라 불리는 학제간 실험실이다. <랩겁>은 많은 대학과 전세계 다른 지식 기관들과 함께 작업을 하면서 도시들에서 공동제작 프로젝트의 새로운 유형들을 개발한다.

포스터와 이아이오네가 훌륭한 커먼즈 학자인 엘리너 오스트롬에 의해 확인된 설계원칙들로 시작할지라도 그들은 “그녀의 작업틀 및 도시환경에의 응용가능성의 한계”를 인정한다. 포스터와 이아이오네는 농지, 물 또는 어장이라는 전통적인 커먼즈—이곳에서는 그 자체의 관리규칙을 고안하는 많은 자유가 사용권에 있다—에 기반을 둔 “오스트롬의 작업틀은, 으레 붐비고 밀집하고 다양하고 경제적으로 복잡하며 심하게 규제받는 도시환경의 현실에 맞추어 변경될 필요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우리의 논의는 도시커먼즈가 매우 다양한 도시환경들, 대립하는 정치, 지역의 특성들, 그리고 더 넓은 개념적 접근법을 필요로 하는 역사들 안에서 구축되는 다양한 형태의 방식들에 중점을 두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업틀을 ‘공동‐도시 프로토콜’이라고 부르며 그것은 여섯 개의 뚜렷히 구분되는 단계들—알기, 맵핑하기, 실천하기, 원형만들기, 실험하기 그리고 모델화하기—에 의존한다. 이것은 보통 말하는 정확한 청사진이 아니라 특정한 도시의 독특한 환경에 적합한 템플릿에 더 가깝다.

<랩겁>은 루이지애나 주의 배턴루지에서 도시 재개발을 담당하는 기관으로부터 수십 년 동안 기반시설—예를 들어 노면 부족, 부족한 가로등, 충분치 않은 좋은 주택—이 방치되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역을 개선하도록 요청받았다. 포스터는 “우리는 사용되지 않는 땅을 지킬 수 있는 공동체 토지은행과 토지신탁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그곳을 예를 들어 생태공원, 푸드 인큐베이터 및 주택으로 재개발하기 위해 많은 다른 관련자들을 참여시켰다.”라고 설명한다.

공동‐도시 추진은 해법들을 찾아내기 위하여 전체 공동체의 많은 논의 및 심사숙고가 필요하며, 방치된 어려운 일과 솔직하게 맞서 싸우는 것이 필요하다. 이아이오네는 이런 노력을 하는 동안에 “실패는 항상 바로 가까이에” 있지만 이것이 그 과정을 비난하는 것으로서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시장과 정부는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종종 실패하는데 “왜 공동체가 실패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다른 인간현상처럼 커머닝도 실패에 이를 수 있다고 이아이오네는 언급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이탈리아와 유럽 어딘가 다른 곳에서 지역에 기반한 에너지 협동조합 같은 몇몇 매우 보람있는 결과에 도달한다. 이아이오네는 “우리는 7~8년전 이 작업의 선두에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수도 없이 실패했다. 이제 에너지를 지닌 공동체의 생산은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심지어 유럽연합의 규제틀과, 규제당국에 함입되어 있고 공공시설이 지역 공동체의 조건을 형성하기도 하는데, 공공시설이 지금은 에너지 생산과 분배에 있어서 중요한 지점인 지역 공동체의 조건을 형성하기도 한다.

포스터와 이아이오네와의 팟캐스트 대화는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커머닝을 통해 예술을 큐레이팅하기―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의 최빛나

 


  • 저자  : David Boiler
  • 원문 :  Binna Choi of the Casco Art Institute: Curating Art through Commoning
  • 분류 :  번역
  • 옮긴이 : 루케아
  • 설명 :  아래 글은 데이빗 볼리어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2023년 2월 1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여러 해 전에 나는 네덜란드에 있는 한 예술기관을 알게 되었는데, 이 기관은 “커먼즈를 지향하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해서 나로서는 매우 흥미로웠다. 위트레흐트 소재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Casco Art Institute)가 바로 이렇게 선언한 기관이다.  ‘커먼즈를 지향한다’는 그들의 슬로건은 예술과 커머닝이 정확히 어떻게 관련이 있는 것인지, 그리고 예술기관이 어떻게 커머닝의 세계에 진입할 것인지에 관한 물음들을 즉각 제기한다.

나는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의 디렉터인 최빛나씨를 팟캐스트 시리즈 <커머닝의 프런티어>(Frontiers of Commoning)의 35회 대담에 초대해서 좀 더 알아보기로 했다. 2008년부터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를 이끌어 온 한국인 최빛나는 비중 있는 전시회를 위해 예술작품을 큐레이팅하고 있으며 더치 아트 인스티튜트(Dutch Art Institute)의 교수를 역임했다. 그녀는 2022년 싱가포르 비엔날레, 2016년 광주 비엔날레의 큐레이터(예술감독)였으며 다가오는 2025년 하와이 트리엔날레의 예술감독으로 선정되었다.

최빛나는 예술창작과 작품 전시회에 커머닝의 윤리와 실천들을 도입했다. 그녀와 동료들은 커머닝을 다양한 예술가들로 구성된 팀이 예술을 함께 창작하고 함께 활동할 수 있도록 조직하는 원리로서 받아들였다.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측은 다음과 같이 자신들의 커먼즈 철학을 설명한다.

예술은 상상력에 기반을 둔 행동하기와 존재하기의 양태로서, 사람들을 이어주고 치유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사람들을 새로운 사회비전으로 이동시킨다. 커먼즈는 공동체 문화가 살아있도록 유지하는 공유된 자원들이기에 예술은 사실상 커먼즈에 내재해 있으며, 커먼즈는 예술을 존재하게 할 것이다. 예술과 커먼즈 때문에 우리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이분법 너머에 있는 세계관을 그릴 수 있으며 ‘우리가’ 욕망하는 대로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패러다임―탈식민적, 포스트자본주의적, 모권중심적, 혹은 연대 경제 등 뭐라 불리던―을 함께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가 거기에 이름을 부여한다.

실제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카스코 인스티튜트가 눈길을 끄는 전시회들과 마케팅을 통해서 그 평판을 높이는 데 열중하는 브랜드화된 기관이기보다는 예술가 중심의 기관임을 의미한다. 최빛나와 카스코 인스티튜트 소속 예술가들은 참여적이고 비위계적이며 평등주의적인 팀으로서 일한다. 모든 사람들이 작업실 공간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다음 프로젝트나 전시회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그리고 카스코 인스티튜트가 지역 공동체와 관계를 맺기 위하여 어떻게 그 예술적 상상력을 사용할지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러한 한 가지 프로젝트는 <잊혀진 기술을 간직한 농장 박물관 여행하기>(Traveling Farm Museum of Forgotten Skills)라는 전시회로 위트레흐트 근처 현대적인 교외지역 개발지에 둘러싸인 오래된 농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저지대 교외의 스프롤 현상이 이전에 그곳에 있었던 많은 농지를 잡아먹었고, 한 농부가 여전히 소유하고 있었지만 낡아빠지고 아무도 살지 않는, 허름한 농가만 남게 되었다.

최빛나와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예술가들은 공동체가 가령 다음과 같이 묻는 방식으로 그 공간의 역사를 탐색하게끔 하는 예술 프로젝트를 개발하기로 했다. 농장이 왜 비어있는가? 농장은 어디로 옮겨갔는가? 거의 모든 농업농장과 목축농장이 이 지역에서 사라진 상황에서 레이드슈 라인(Leidsche Rijn) 지역주민들의 식량은 실제로 어디서 오는가?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는 한때 그 지역을 위해 식량을 생산한 옛날 식 농사 관행을 소개하기 위한 전시회를 열기 위해 (위트레흐트 공무원들이 성가신 것으로 여기는) 그 농장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카스코 예술가들은 열 달 동안 농가에서 함께 살았고 경작하고 식량을 모으면서 그 역사와 현재 상황을 통해서 땅과 다시 관계를 맺었다. 이 프로젝트는 지역 주민들에게 농장의 잊혀진 과거를 숙고하고 앞으로 땅을 사용하는 것에 관하여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도록 했다.

안타깝게도 이 프로젝트는 소유주가 집과 땅을 팔기로 결정하면서 너무 일찍 폐기되었다. 현재 그 장소는 팬케익 식당과 쇼핑센터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래도 한동안은 전시회가 공동체에 중요한 주제들—공동체의 역사, 식량자원 및 땅의 미래—에 예술적인 자극을 주었다.

곧 시작될 1년에 걸친 프로그램 <배운 것을 버리기 센터>(Unlearning Center)는 사람들이 예술과 문화에 관한 낡은 전통적 관념을 버리고 다음과 같이 묻게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문화적 기관들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는가? 어떻게 예술과 문화는 우리가 커먼즈를 상상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가? 곧 열릴 또 하나의 전시회인 <커먼즈 예술>(Commons Art)은 커먼즈 문화에 기여하는 사회참여적인 예술 프로젝트들의 돌봄과 유지과정을 지원하는 디지털 플랫폼을 제공할 것이다.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프로젝트에 의해 생산된 예술을 종래의 예술기관들이 나타내고 싶어하는 ‘고급예술’보다 다소 못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간혹 예술관과 예술계에 있는지를 최빛나에게 물었다. 여기서 ‘고급예술’이란 비평가들과 문화적 규범에 의해 알려진 회화와 조각이나 황량한 하얀 전시회장에서의 공식적인 전시들 혹은 예술과 일상을 분리하는 시나리오들 등을 의미한다.

최빛나는 주안점을 두는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의 구축이라고 대답했다.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우리와 예술가들의 관계는 가족관계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 관계의 망 안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초점을 맞추어야하는 것은 이 관계를 더 잘 돌보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좋은 생산물 만들기’보다는 관계의 실천을 토대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은 훨씬 더 나아질 것입니다.

대화를 통해 어떻게 커머닝이 다양한 형태의 예술제작, 예술작품 전시회들 및 기관의 파수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멋진 경험을 했다. 내가 최빛나와 나눈 이야기는 여기서 들을 수 있다.

* [옮긴이]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홈페이지의 설명에 따르면, ‘카스코’(casco)는 네덜란드어로 변화를 위한 기본 구조, 집단적 예술프로젝트 및 조직적 실험으로 공동으로 탐구하고 연구하기 위한 기본 구조가 존재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커먼즈를 위한 건축–2008년 이후 건축의 과제

 


  • 저자  : Jose Sanchez
  • 원문 :  “Introduction : A Call for a Post-2008 Architectur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호세 산체스의 Architecture for the Commons : Participatory Systems in the Age of Platforms(Routledge, 2021)의 “Introduction”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저자 호세 산체스는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활동하는 건축가이자 게임디자이너이며 이론가이다. 그는 건축디자인 지식의 증식을 추구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Plethora Project(www.plethora-project.com)를 이끌고 있다. 그는 동네를 만드는 시뮬레이션 비디오 게임 Block’hood의 제작자이며 공동체를 건설하고 경제를 관리하는 비디오게임 Common’hood의 제작자이고, 대중들이 참가하여 동일한 유닛들로 설치물을 짓는 Bloom의 공동제작자이다. 글의 뒤에 필요할 듯 해서 보충설명을 달았다. 

 

우리의 건축은 항상 패러메트릭 건축이었다

20세기 말 건축분야에서는 우리가 건물들을 이해하고 짓는 방식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전환을 제안하는 혁신들이 일었다. 소프트웨어, 재료과학(material science), 디지털 패브리케이션(digital fabrication)(([정리자] 디지털 패브리케이션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제품을 제작하는 기술뿐만 아니라 형태를 만들고 재료 가공 및 시공까지 모든 과정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총칭하는 말이다. 일례로 3D 프린팅 기술이 여기에 속한다.)) 및 자동화 영역에서 일어난 기술혁신은 무한한 가변성과 주문제작이라는 비전을 제공했다. 인간의 인식과 맞물려있는 이 비전은 몰입환경으로서 주문제작되는 정동적 건축(affective architecture)을 나타낸다.(([정리자] ‘affective architecture’에 대해서는 가령 https://aalab.org/ 같은 사이트를 참조해보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 ‘새로운’ 건축—모든 디자인이 일회적인 건축—은 젊은 세대의 건축가들이 오늘날 실행하고 있는 방식의 핵심적인 부분이 되었다. 테크놀로지를 중심으로 하는 서사들이 이것을 입증했다. CNC(computer numerical control, 컴퓨터 수치제어장치) 테크놀로지에 의해 작동하는 디지털 패브리케이션이 대량생산 제품을 생산하는 동일한 비용으로 맞춤제작 형태들을 만들 수 있다는 전망은 젊은 세대의 건축가들이 이 새로운 건축을 채택하는 것을 완벽하게 찬성할 논리를 제공했다. CNC 테크놀로지는 대량 생산이 여러 해 동안 여타 산업들을 규정해온 상황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줄 한 가지 대안을, 다시 말해 의뢰인들이 항상 색다른 새로운 디자인을 찾을 것이기에 수요가 계속될 것이고 그럼으로써 디자인이 번성하게 될 그러한 대안을 약속하고 있었다.

‘일회적인’ 건축이라는 패러다임—건물을 지을 때마다 스스로를 재창조해야 하는 패러다임—에는 지어지는 환경의 구조적 구성에서부터 사업모델과 관례상의 수수료 배분에까지 세분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지속적으로 지원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 패러다임은 무상으로 일하거나 또는 충분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착취적인 업무에 고용되는 것이 일상인 경쟁적인 시장에 학생들이 참여하도록 준비시킴으로써 건축분야의 교육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것이 의뢰인들의 투기적인 산업관행으로, 또는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거나 전무한 건축공모 참가로 낭비되는 큰 규모의 디자인 노동의 결과이다.

이 맥락에서 패러매트릭 패러다임의 등장은 건축분야에서의 핵심적인 비능률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될 수 있다. 어떤 제안이 개발될 경우 그 과정 내내 디자인 베리에이션(([정리자] 베리에이션(variation)은 하나의 기본적인 형태를 변화시키는 작업이나 그 변화된 상태를 지칭한다.))을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에 패러메트릭 패러다임은 한 건축가가 건물 하나를 디자인 하는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데이터로 통제되는 다수의 가상의 건물들을 디자인하는 기술적인 작업흐름을 건축가에게 제공했다. 패러메트릭 소프트웨어는 건물을 물체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비율을 가지고 공존하면서 전반적인 일관성을 유지하는 요소들의 네크워크로 정의하며, 건축가들은 이것을 기반으로 예산이나 규정의 변화 및 의뢰인의 심경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고 수백 개의 가능한 디자인들을 설계할 수 있다.

패러메트릭 방법론으로 가능해진 다수의 가상 건물들은 자본주의의 생산성의 승리로 보일 수 있으며, 이 경우 디자이너 한 명의 노동이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어, 건물 하나하나가 유일할 수 있는 도시 전체를 설계할 수 있게 된다. 이 기술적이고 개념적인 기획은 건축협회와 인스부르크 대학 소속이자, <자하 하디드 아키텍쳐>(Zaha Hadid Architects) 소속 패트릭 슈마허(Patrik Schumacher)가 낸 ‘패러메트릭 어버니즘’(parametric urbanism)이라는 아이디어로 탐구되었다. 패러메트릭 어버니즘이라는 유토피아적 비전은 건물들을 지역 부지 조건에 조화시키면서 모든 건물과 도시 내지 지역의 세부 베리에이션을 제어할 수 있는 통합된 알고리즘적 스타일을 제안했다. 슈마허가 주장했듯이 이 제안 이면에 있는 유토피아주의는 건물들 사이의 시각적이거나 양식적인 유사성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디자이너가 넓은 영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디자이너 한 명의 노동과 비전의 규모를 키우는 능력의 잠재적인 승리에도 존재한다.

패러메트릭 모델이 대량 주문제작을 가능하게 하고 수백 혹은 수천 개의 건물들을 서로 다르게 짓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모델은 한 명의 디자이너가 끼치는 영향력을 키우지는 못했다. 패러메트릭 정의 안에 존재하는 가상의 다양성으로 인해 서로 상충하는 제안들이 생겨나는데 이 제안들 가운데 하나만이 실행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결국 다양한 가상적인 것들 가운데 단 하나만 현실화된다.

의뢰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패러메트릭 방법론 때문에 자신들의 요구에 근본적으로 상이하게 접근하는 제안들을 받아 볼 수 있고, 잠재력이 있는 디자인 분야를 탐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대하게 되었다. 어쨌든 건축을 발전시키는 데 상당량의 자본이 요구된다는 점으로 인해, 민간부문이든 공공부문이든 둘 다 건축환경의 영구적인 부분이 될 것에 관하여 최종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많은 양의 디자인 제안들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상식화되었다. 하지만 패러메트릭 모델은 그런 과제를 수행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패러메트릭 방법론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제안들이 아니라 한 가지 제안의 변형들을 제공하기에 더 적합하다는 것을 입증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베리에이션은 본질의 변화가 아니라 정도의 변화인 것이다.

그런데도 수년 동안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은 건축공모라는 형식을 통해 근본적으로 상이한 다수의 제안들—건물의 제약들을 제각각 주의 깊게 고려하는 제안들—을 즉각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건축가들과 협력했다. 건축공모는 궁극적인 패러메트릭 모델화 방법론으로 간주될 수 있다. 디자인 참여자들에게는 큰 비용을 치르게 하면서 의뢰인에게는 상당한 디자인 베리에이션을 거의 무료로 주어서 광범한 가상의 다양성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축공모는 디자인 베리에이션을 제공하는 패러메트릭 디자인 방법론의 모든 원칙을 따른다. 패러메트릭 디자인이 디지털적으로 창조되는 건물들 중 99%를 폐기하듯이 건축공모 역시 적합한 해결책에 도달하기 위해 경합하는 노동인력 풀로서 편성된 건축가들이 무보수 노동으로 만들어낸 디자인들 가운데 99%를 폐기한다. 이렇듯 건축공모들은 우리가 기꺼이 제공하는 노동이 보상을 받지 못하는 투기성 노동의 관행들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건축공모가 건축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오래된 관습이라는 사실은, 패러메트릭 건축이 실제로 출현하기 이전부터 항상 우리가 패러메트릭 패러다임 속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패러메트릭 어젠다가 획기적인 스타일이라고 한 패트릭 슈마허의 주장을 건축공모들이 입증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건축분야의 진보에 기여하고 보수를 받는 주문을 받으려는 수많은 건축가들의 열망 덕분에 그들에게서 공짜나 다름없는 가치를 뽑아낼 수 있는 조달 기술을 전지구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그렇게 된 것이지 자유로운 시장참여자들 사이에서 새로 출현하는, 서로 연결 짓는 것의 미학이라는 슈마허의 주장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건축분야의 오랜 관습인 건축공모와 달리 패러메트릭 디자인을 규정하는 시대는 ‘승자독식’ 이데올로기와 지식이 ‘낙수’ 형태로 증식된다는 사고방식 아래에서 작동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시대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 시대에 전위적 기획들을 위해 개발된 혁신이 점차 사회적으로 채택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항상 새로운 ‘일회성’ 건물을 추구하는 것은 문화적 채택이 이루어질 여지를 거의 남기지 못한다. 오히려 신자유시대의 승자독식 모델이 권력, 자본 및 부의 대규모 불균형을 만들어냈다.

 

건축의 양극화

상업적 수단을 통한 건축술의 혁신 추구는 자본의 대규모 축적에 의존한다. 수 세기 동안 건축가들은 자신들의 건축 비전을 발전시킬 후원자로서 활약할 수 있는 의뢰인을 찾고자 했다. 한 가지 상징적 사례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피터 루이스(Peter Lewis) 및 <루이스 레지던스>(Lewis Residence)와 맺은 관계이다.(([정리자] <루이스 레지던스>(Lewis Residence)는 실현되지는 않은 주택개발 기획이다.)) 게리는 자신의 의뢰인들 중 보험업에서 수십억을 번 피터 루이스로부터 8200만 달러 주택—루이스가 결국은 짓지 않기로 한 주택—의 다양한 버전들을 디자인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고 의뢰자인 루이스는 이 의뢰건에 대해 6년의 시간과 600만 달러 이상의 비용을 썼다. 게리는 루이스로부터 받은 돈이, 자신이 받은 ‘맥아서(MacArthur) 영재상’의 상금처럼, 아무런 제약 없이 자신의 가장 진보적인 생각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 돈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인정했다.

피터 루이스 같은 의뢰인들은 별로 없으며, 건축교육에서 그러한 기대감을 조장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양의 건축연구와 교육이 그러한 비현실적인 의뢰인에게서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뿐인 주문에 바쳐지고 있다. 건축분야는 이러한 불균형적인 과도함을 알게 되었고 이런 건축 관행들을 비판하는 시도들이 건축학 내부에서 이루어졌다. 일례로 건축계는 생태적 재난 내지 금융재앙 이후 집을 박탈당한 사람들과 그 이후 살 곳을 잃을 버린 사람들과 함께 하는 건축으로 시선을 돌려 인도주의적인 저소득 프로젝트들을 강조함으로써 건축의 윤리성을 재발견하고자 했다. 칠레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Alejandro Aravena)가 조직한 2016년 베네치아 건축 비엔날레는 차별적으로 격리되거나 대표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해결방안을 만들어낸 건축가들을 부각시켰는데, 여기서 전 세계 부동산 투기, 집단지식 풀의 강탈 그리고 우버 및 에어엔비처럼 이른바 ‘공유경제’로 공통적인 공간들에서 수익을 추출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두 가지 태도들 즉 한편으로는 엘리트 의뢰인들을 위한 디자인의 낭비와,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낭비의 비윤리성에 필연적으로 반발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불가피한 측면이다.

이 체제에서 승자독식이라는 사고방식은 종형곡선의 양끝에서 작동하며 곡선의 가운데 혹은 볼록한 부분—도시 건축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간계층이 이 부분에 위치한다—은 줄어들거나 사라졌으며 심지어 건축을 위한 기획으로서 관심을 끌지 않게 되었다. 전문가들은 자본의 비대칭성에 좌우되지 않는, 노동이 가진 가치를 분명히 할 권한을 긴급하게 되찾을 필요가 있다. 무임금 노동이나 충분한 임금을 받지 않는 노동을 통해 엘리트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전통을 거부하는 것이 그 첫 걸음이다. 진보적인 건축은 퇴행적인 사회 관행들과 동의어가 되었다. 이것은 다른 분야들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되는 구조적인 문제들이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건축물 건립에서 양극화가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무자비한 경쟁하에서 작동하는 연구와 실천으로 번성하는 분야가 있으며 여기서는 많은 관계자들이 성공해서 유명인 반열에 오르기 위해 기꺼이 공짜로 일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결과인 착취와 박탈을 바로잡으려고 건축의 엄격함과 건축의 핵심가치들로 전환하는 흐름이 있다.

 

‘가운데 부분’을 다시 활용하기

1914년 헨리 포드(Henry Ford)는 노동자들의 하루 최저임금을 그 당시 자동차 회사들의 평균 임금의 두 배에 맞먹는 5달러까지 올리기로 결심했다. 포드는 노동자들의 소비력이 그가 키우고자 시도하고 있는 산업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포드는 노동자들이 그들이 만들고 있는 자동차를 살 수 있게 하고자 했다. 오늘날 미국 건축가들은 상당한 금액의 학자금 대출금이 쌓인 후인지라 디자인하도록 요청받는 유형의 건축물을 살 여유가 없다. ‘스타 건축가’ 시스템에 의해 육성되는 오늘날의 건축문화는 충분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인턴 노동과 착취적인 관행들로부터 나오는 상당한 양의 보조를 필요로 한다. 사회적 어젠다에 맞물려있는 관행들조차도 무임금 인턴십의 보조에 의존하게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중산층을 위한 건축은 상업적 명령에 의해 추진되는 것처럼 보인다. 종형곡선의 가운데 부분은 건축가들의 수중에 없는 시장, 즉 렘 콜하스(Rem Koolhaas)가 ‘정크스페이스’(Junkspace)라 부른 것과 종종 관련되어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줄어들거나 사라진 이 종형 곡선의 가운데 부분을 다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가운데 부분은 맞춤 제작한 것의 매력이나 인도주의적인 원조라는 영웅적 면모가 없기에 더 이상은 건축분야에 중요한 것이 되지 못했다. 건축분야는 근대 건축 운동을 연상시키는 큰 서사에 참여하기를 여전히 두려워한다. 어쩌면 시장 바깥 혹은 시장 주위에서 작동하지 않는 비판적 담론과 실천을 발전시키는 방안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어젠다의 추출 명령에 의해 생겨나는 경제적인 교착상태 때문에 자율이라는 기획이 자급에 기반을 두어 나타나게 되었다. 이제 건축가들은 스스로를 그들이 생각하는 건축의 사용자이자 생산자로서 재설정할 수 있으며, 그들이 속하는 문화에 재접속하고 그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의 디자인 기여를 재조정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가운데 부분을 다시 활용하는 것이 금욕이나 긴축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긴축은, 정부가 애초에 문제를 발생시킨 금융기관들이 낼 세금을 인상하지 않고, 그 반대로 금융기관들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서 공공서비스를 대폭 줄이는 것이다. 주택위기가 의미하는 바는 점점 더 많은 수의 시민들이 자신들이 일하는 장소에서 살 만한 경제적 여유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공공부문과 커먼즈가 시장투기의 반대쪽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필요하다. 공동체주의에 기초한 운동들의 출현은 전통적으로 공적인 것/사적인 것의 이두체제였던 것에 세 번째 부분을 추가할 수 있게 한다.

 

2008년 이후 전망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해서 사람들은 자유주의 정부와 보수주의 정부 공히 신자유주의 경제를 얼마나 깊이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시스템이 다수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서서히 갖게 되었다. 모든 건축가들이 중간에서 꼭대기로 가치를 뽑아 올리는 경제모델을 받아들이는 쪽에 서있다는 것이 건축학계의 현실인 만큼 건축가들에게 2008년은 건축가들이 사용하는 도구가 사실상 어떻게 경제적 어젠다를 내포하고 있는 사회-기술적 시스템인지를 숙고하도록 경종을 울린 한 해였다. 건축물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자본 뒤에 있는 경제적인 충동들과 동기들에서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사회-기술적 관점에서 보면 현 경제 관행이 선택한 최고의 무기는 디지털 플랫폼이다. 자본이 이것을 사용자들의 표준화와 자본 추출을 위한 도구로서 사용하게 된 것이다. 플랫폼은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전지구적 조직체들이며 사용자들끼리 소통하는 규칙들을 부과하고 플랫폼에서의 거래를 모니터링해서 획득한 지식에서 이윤을 추출한다. 플랫폼들은 시장 규제를 우회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두드러진 형태의 경제 불평등을 수반한다.

건축분야에서 건축공모는 초기의 플랫폼이자 어쩌면 훨씬 더 원시적이고 악의적인 플랫폼일 것이며 또한 보수를 지불할 가치가 있는 노동과 그렇지 않은 노동을 결정한다. 공모에 지원하는 경쟁은 투기적인 노동형태로 되어 있으며, 이는 트레버 숄츠(Trebor Scholz)가 주장한대로 고용, 노동시간 및 최저임금과 관련된 시장규제를 우회하는 메커니즘이 되었다. 우버의 경우처럼, 공모에 지원하는 건축가들의 경쟁으로 인해 자기 자신이 결정권자이고 주어진 요청에 참여하기 위해 보상받지 못할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건축가 기업가’라는 상이 극찬을 받는다.

2008년 금융위기는 건축계 자체의 투기 시장 내부에서 활약하는 건축가들 세대에게 깨달음을 주는 경험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건축가들은 자신들이 디자인 작업에서 승자독식 경제 시스템을 받아들였고 공모나 다른 플랫폼 제공자들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라며 매우 자주 무료로 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적인 예로 부상하는 <노!스펙 운동>(No!Spec movement)은 우리 건축가들이 비윤리적인 사업 관행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과 대안적인 모델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예기치 못한 깨달음을 나타낸다. 금융위기는 저항운동의 급증을 촉진했으며 이는 시장이 규제받지 않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알려준다. 규제받지 않는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투기성 노동은 구조적인 분할을 낳고 불평등을 증가시키므로 권력 불균형을 촉진하는 것이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는 대안들의 생산을 촉진하기도 했다. 우리가 참여하는 노동의 주권을 강조하는 공동체 번영의 모델들을 제작하려는 하부구조와 이데올로기를 연결시키는 사회-기술적 인식을 촉진한 것이다. 리차드 스톨먼(Richard Stallman)의 일반공중사용허가서(General Purpose License) 및 카피레프트 운동에서처럼 사용자들 간의 지식 증식을 보장하는 라이선스 계약 창출, 블록체인 기술의 출현에서처럼 분산된 방식으로 신뢰를 보증할 수 있는 분산원장들의 창출 그리고 알라스테어 파빈(Alastair Parvin)의 위키하우스 작업의 경우처럼 적정 가격으로 사용자들이 빌딩 솔루션을 스스로 마련할 수 있게 하는 건축의 오픈소스 형태 디자인이 이 모델들에 속한다.

 

건축 커먼즈의 틀 형성하기

이 책은 다섯 개의 장으로 나뉜다. 1장 「건축술의 발달」에서는 신자유주의의 명령 아래 작동하는 건축을 비판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한다. 먼저 건축술의 진보라는 생각이 과연 시민들의 번영에 이바지했는지를 묻고 인풋 당 아웃풋 효율의 증가(ephemeralization)라는 약속이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검토한다. 첫째 물음에 대해서는 건출술의 진보가 혁신을 일반대중에게로 ‘내려 보내지’ 못했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다음으로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시장 인클로저를 통해 작동하는지를 살펴본다. 신자유주의는 공적 도메인의 힘을 정의하는 규정들을 무너뜨리는 시스템으로서, 저자는 그러한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가치는 커먼즈로부터 추출된다고 주장한다.(([여기서 저자는 커먼즈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인다―정리자] 커먼즈는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저술을 통해 정식화되었을 뿐 아니라 데이비드 볼리어(David Bollier)와 마시모 데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의 관점—공동체적인 부의 창출에 참여하는 사회구조들 뿐 아니라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공유재 둘 다를 포함하는 정의를 모으고자 시도하는 관점—을 통해서도 정식화되었다.))

2장 「부분들의 융합」에서는 어떻게 추출적인 관행들이 건축에 분명히 나타났는지를 더 깊이 파고든다. 시장 다양성을 파괴하면서 수직적 통합을 이루는 대규모 제조활동이 자본 축적의 논리에 의해서 발생하게 되는 경향을 소개한다. 수직적 통합의 발생은 기술적인 어셈블리에 필요한 부분들의 수를 줄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제조에 명확한 혁신들을 제공했다. 3D 프린팅 같은 최근 과학기술들은 이전에 표준화된 구성요소들을 해체하는 식으로 수행적인 이점들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수직적 통합으로의 경향은 패러메트릭 디자인 패러다임과 명확한 상관관계가 있다. 이 장에서 저자는 패러메트릭 모델이 적은 수의 인구에 복무하고 시장 다양성에 충격을 주었다는 것을 짚어보고자 한다.

3장 「부분들을 옹호하여」에서는 디자인과 제조 분야에서 부분들의 사회적 어포던스(([정리자] 어포던스란 주체가 특정의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객체가 ‘제공’하는 관계를 가리킨다.))를 이해함으로써 대안적인 디자인에 필요한 제안들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다양한 다수의 행위자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건축 디자인의 분야가 공급자들 간의 협동 및 연계의 효율적인 형태들을 찾을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러한 노력이 1950년대의 <모듈협회>’(Modular Society) (([정리자] ‘Modular Society’는 책의 한 장으로서 크리스틴 월이 쓴 장 이름이기도 하지만, 원래 그 당시 영국의 협회 이름이다. 현재 희의록 등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https://discovery.nationalarchives.gov.uk/details/r/C2327371))같은 기관들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대의 시도들은 디지털 네트워크의 출현을 통해 동질화되지 않는 차원 연계의 구조들을 제공하고자 한다.(([정리자] 과거 <모됼협회>는 동질화와 표준화에 기반을 두었다.))

이와 관련해서 제시되는 틀은 연속적인 패러메트릭 모델에 의해 제시되는 ‘일회성의’ 모델과는 대립적인 위치에 있는 ‘이산(離散) 건축’(Discrete Architecture)이라는 패러다임이다. 이는 재조합 능력의 측면에서 부분들이 디자인되고 연구되며 다양한 생산물을 산출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다. 디자인은 이산 건축을 통해 다원적이고 비독점적인 생산 접근법을 유지할 필요성을 받아들인다. ‘디자인 커먼즈’의 산출을 위해 부분들의 ‘조합에 의한 잉여’(combinatorial surplus)의 연구 및 이 부분들이 가진 어포던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산(적) 건축의 이점들이 검토되며, 재사용가능한 패턴들이 정보 네트워크를 통해 전파될 수 있도록 하는 조합 디자인을 채택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4장 「비물질적 건축」에서는 네트워크 기반 시설이 감시 자본주의의 실행에 활용되었을지라도 사용자들에게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는 디지털 네트워크를 디자인하고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제시한다. 플랫폼이 추출 도구가 되는 것에서 협력 도구가 되는 것으로 이행하기 위해 플랫폼이 극복해야 하는 과제들에 대한 지도그리기를 한다. 트레버 숄츠(Trebor Scholz)가 옹호한 바의 ‘플랫폼 협동조합주의’(Platform Cooperativism) 같은 아이디어들을 여기서 살펴본다. 더 나아가 커먼즈에 복무하는 오픈소스 건축모델들의 저장소를 잠재적으로 생성시키면서 사용자들 간의 협동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건축용 플랫폼을 개발할 가능성을 이곳 4장에서 고찰한다. 비디오게임 기술이 플레이어들 사이의 협동 모델과 디지털 공동체에 참여하는 전통을 제공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5장 「자급을 통한 재구축」에서는 커먼즈가 다양성이라는 아이디어에 기초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자유를 확립하리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감시 자본주의에 의해 발전되는 기반시설에서는 특정 형태의 지성, 즉 사용자들의 정보를 모아놓은 집적 데이터(aggregate data)에서 생성되지만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얻어지는 지성이 효율적으로 배치되어왔지만, 이와는 다르게 커먼즈는 위계로서 작동하지 않는, 서로 합의하는 형태의 공동의 기반시설을 재구축할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5장에서는 어떻게 우리가 기울어지지 않은 운동장을 유지하고 진입장벽을 낮추어 설계하면서 민주주의와 관리를 테크놀로지에 함입할 수 있는지를 짚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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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설명]

건축술은 모두가 배워야 할 것이다. 모두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 존 러스킨

근대에 일어난 커먼즈의 대대적인 상실은 무엇보다도, 삶을 재생산하는 터인 ‘집’(home)의 상실이었다. 이 상실의 상황은 자본주의가 매우 발전한 탈근대에 들어와서도 호전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집의 상실이라는 상황이 거의 자연 상태에 해당하는 기본 설정이 되었다. 다수의 사람들의 경우 집을 구성하는 하드웨어인 주택(house)이란 것이 노동하는 사회생활을 매우 오랫동안 하고 나서야 간신히 확보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사실 주택을 안정되게 확보하는 일은 어떤 이들에게는 거의 평생이 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에게는 ‘평생’으로도 부족하다. 노동력은 재생산되어야 쓰일 수 있는데, 그 재생산의 터가 노동력이 한참 동안 쓰인 후에야 확보될 수 있다니! 아니, 평생을 노동해도 불가능하다니! 자본은 이런 모순적 상황 위에서, 즉 삶의 재생산 터의 ‘기본적’ 결핍을 기반으로 해서 자신을 증식한다.

그래서 커먼즈 되찾기는 집 되찾기를 필수적으로 포함한다. 그리고 집 되찾기에는 집을 구성하는 하드웨어를 박탈하는 메커니즘인 투기적 주택시장의 극복이 필수적으로 포함된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하자면 커먼즈 특유의 방식으로 주택을 확보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이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인 5장 「자급을 통한 재구축」“Reconstruction through Self-provision”의 내용의 일부를 포함한다.)

우선 자급을 원칙으로 한다. “자급의 실천이 공통적인 것의 현실화이다.” 자신의 집을 자기가 짓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인이 아무런 지식도 (아직은?) 없는 상태에서 DIY로 자신의 집을 짓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저자는 우선 건축가들이 자신들의 집을 짓는 데서 출발하는 것을 제안한다. 여기서 집의 디자인과 관련된 전문적인 지식이 생산되는데, 그 다음으로 이 지식을 일반 대중에게 전달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이것을 저자는 ‘해득력 사다리를 채우기’(to populate a literacy ladder)라고 부른다. 해득력 사다리는 전문가들이 생산한 지식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시스템으로서, 전문가들의 수준에서 가장 초보자 대중의 수준에 이르는 지식의 스펙트럼을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 사다리는 지식의 스펙트럼이 어떻게 새로운 미경험 사용자들과 전문가들 사이에 배치되는가에 의해 규정된다.”

이 해득력 사다리에서 지식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순환되는 데 그칠 경우에는 이것을 ‘약한 사다리’라고 부르고 초보적 수준에서 전문가 수준으로 점차적으로 올라가는 로드맵이 잘 되어 있으면 이것을 ‘강한 사다리’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서 해득력 사다리의 핵심은 가장 높은 수준과 가장 낮은 수준을 원활히 연결하여 초보자도 이 사다리를 타고 자신의 능력과 노력이 허용하는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저자는 이것이 단순히 테크놀로지(지식 생산)의 민주화라기보다는 민주주의를 테크놀로지(지식 생산)에 함입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내 식으로 풀자면, 테크놀로지의 민주화는 (대체로 사용자의 고정된 능력을 전제로 한) 테크놀로지 사용의 평등한 분배이고, 민주주의를 테크놀로지에 함입하는 것은 모두가 테크놀로지 사용자로서만이 아니라 테크놀로지 생산자로서의 능력을 자유롭게 배양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강한 사다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문턱을 낮추어 디자인하기’가 필요하다. 진입장벽이 낮아야 많은 사람들이 사다리 안에 들어올 수 있고 사다리 안이 더 열린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해득력 사다리를 만드는 것 자체가 자원의 집합소로서만이 아니라 ‘사회체계로서의 커먼즈’(마시모 데 안젤리스)의 생산으로 이어진다. 실제 집을 만드는 실천이 집짓기와 관련된 지식의 생산과 연결되므로, 저자가 제안하는 방안은 위키피디아, 리눅스 같은 비물질적 생산의 프로젝트를 물질적 생산으로 확대하는 방안이기도 하고, 단순한 참여―상부에서의 의사결정에 사용하기 위한 데이터 수집을 대중이 일시적으로 거드는 것―에서 자급으로 이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 자급은 아직은 국가로부터의 조달을 대체한다기보다는 보완하여 국가 및 시장 양자와 협상할 수 있는 시민조직들을 생성하는 것이 주된 일이다.

건축 분야에서 참여에서 자급으로 움직인 대표적 사례로 파빈(Alastair Parvin) 등의 위키하우스(Whikihouse)가 있으며, 건축가들이 자신들의 집만 짓는 것을 넘어서서 이룩한, 자급의 한 형태로서의 커먼즈를 위한, 그리고 커먼즈에 의한 건축의 기획으로는 Open City(1971)가 있다.((이 기획에 대한 사례연구로 Rodrigo Pérez de Arce and Fernando Pérez Oyarzún, Valparaiso Schoo /Open City Group, ed. by Raul Rispa (Birkhauser, 2003) 참조.))

[정백수]




지구의 지혜와 함께 하기

 


  • 저자  :  Daniel Christian Wahl
  • 원문 : Indigenous to Life: Being as Expression of Plac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KOSMOS에 실린 크리스천 월의 글 “Indigenous to Life: Being as Expression of Place”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의 주제는 ‘지구의 지혜와 다시 함께하기’(Realignment with Earth Wisdom)이다. 저자 대니얼 크리스천 월(Daniel Christian Wahl)은 서구의 분리 서사가 파괴와 불평등을 초래했지만 이에 대응하여 재생성적인 개발과 재생성적인 문화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으며 이 시점에서 재생성(regeneration)이 생명 자체의 고유 패턴이라는 것과 우리의 공통의 먼 조상들 모두는 생명을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 구성원으로 있는 재생성적인 공동체로서 이해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말한다.

인간으로서 생명을 영위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우리가 집이라고 부르는 장소들과 바이오지역들 안에서 서로 돌보며 살았다. 콜롬비아와 페루의 숲에서부터 태평양 연안 북서부와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르기까지 인간 거주자들이 수천 년에 걸쳐서 더 높은 다양성, 풍요로움, 생물‐생산성에 이르는 최고치의 생태계들을 함께 창조했고 양성했다는 증거가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모두 행성 차원의 과정으로서의 생명()에 토착하고 있다. 지구의 지혜 전통들 다수의 핵심적인 교훈은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생명의 재생성적 패턴들이 우리를 통해 흐르도록 하는 과정으로서의 생명과 함께하는 것이다. 크리스천 월은 이런 식으로 존재할 경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장소의 소유자가 아니라 표현자로서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땅이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땅에 속해 있는 것이며 땅과 바다는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위한 거름으로 돌아간 후에도 오랫동안 그곳에 있으리라는 것이다.

첫째, 지구의 지혜와 함께 하기란 무엇인가? 크리스천 월은 올바른 관계로 살아가는 것이 지구의 지혜와 함께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관계적인 존재들로 우리 각자는 특이하며 생명의 재생성적인 공동체 내부에 있는 친밀한 상호관계의 결합체이다. 따라서 지구의 지혜와 함께하기 위해 우리는 자연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서 배워야 한다. 우리가 자연으로서 배워야 할 것은, 예를 들어 재닌 베니어스(Janine Benyus)가 바이오미미크리(biomimicry, 생태모방)의 핵심적인 교훈으로 제시한 “생명은 생명에 도움이 되는 조건들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인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위해서 도움이 되는 조건들을 창출하기 위해 나서는 경우 생명체로서 우리는 지구의 지혜가 어떻게 우리를 통해 흐르게 하는가?

크리스천 월은 인류가 한 종으로서 살아온 최근의 기록을 살펴보면 우리가 이 물음의 핵심적인 중요성을 망각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우리가 한 행동들—더 정직하게 말해서 인간의 비교적 작은 부분에 속하는 행동들—이 모든 인류에게 종 차원의 ‘통과의례’를 강요했고 그 결과 우리는 현재 대량 멸종 사건의 일환으로서 우리 종의 이른 종말이라는 실질적이고 당면한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크리스천 월은 다시 물음을 제기한다. 우리는 생명의 공동체에서 성숙한 회원이 되어, 그리고 퇴행적이기보다 재생성적인 존재가 되어 적시에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발현하게 될 것인가?

인간이 사는 장소들에는 생명‐문화적 고유성이 있고 이 고유성을 멋들어지게 표현한 것이 다양한 재생성적인 문화들이다. 그는 우리가 이 문화들을 기초로 한 재생성적인 미래를 함께 창출하기 위해서 행동하기, 존재하기 그리고 사고하기에서의 변화는 물론이고 새롭고도 매우 오래된 세계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세상을 조직하는 데 투여되는 기존의 생각들과 문화적으로 지배적인 내러티브들은 생명의 과정을 개체들, 종들로 잘라놓았고 이런 식의 관점은 우리로 하여금 경쟁, 결핍, 죽을 운명에 초점을 맞추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가 내리는 판단이다. 크리스천 월은 이를 극복하고 생명을 다른 식으로 이해하기 위한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는 고대의 토착적인 지혜뿐만 아니라 최첨단 과학에 의지해서 생명을 우주에 존재하는 동향적(動向的) 힘—협동적 풍요를 통해 생명에 도움이 되는 조건들을 창출하는 힘—으로 이해할 것을 권하고 있다. 생명이 행성 차원의 과정임을 크게 강조하는 그는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의 1970년 논문 「형태, 물질 및 차이」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자신의 환경을 파괴하는 유기체는 그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생존의 단위는 환경 속에 있는 유동적인 유기체이다.”

그는 우리가 생명을 우주에 존재하는 동향적 힘으로 이해하기 위해 생명의 진화과정에 의식적으로 참여하는 경우, 존재는 부분인 동시에 전체라는 표면상의 역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관계적인 참여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독립적 존재’와 ‘전체의 상호적 표현으로서의 존재’사이의 양극성에서 발생하지만 우리는 둘 다이며 틱낫한(Thích Nhất Hạnh)이 소개한 사이존재(interbeing)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나바호족(Navajo)이 가진 지구의 지혜인 ‘아름답게 걷기’(‘Hózhóogo Naasháa Doo’)도 바로 이 점을 가리킨다. 그들은 이렇게 조언한다. ‘미래로 걷는다면 아름답게 걸어라.’ 아름답게 걷는 방법은 ‘전부 속의 하나와 하나 속의 전부(the One-in-All and the All-in-One)를 눈앞에 보는 것’이다.

크리스천 월은 재생성적으로 사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이를 설명한다. 재생성적으로 사는 것은 지역과 나라와 전 세계가 역동적으로 공존하는 중첩된 복잡성의 의식적인 표현자로서 그리고 이 복잡성에의 참여자로서 사는 것이다. 이 중첩된 규모들(그림참조)은 더 이상 쓸모가 없는 구조들 및 패턴들의 빠르거나 느린 붕괴 주기, 변형적인 혁신 그리고 새로운 패턴들을 일시적으로 공고히 하여 역동적이고 지속적으로 변형하는 온전체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통합된다. 그는 이러한 과정으로서의 재생성이 생명 자체의 진화적이고 발전적인 충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재생성적으로 행동하기의 핵심은 환경적 변화나 사회적 변화를 예측하고 변형할 수 있는 체계 차원의 치유와 복원력있는 공동체의 구축이다. 하지만 이를 위한 전제조건은 건강(성)과 복원력을 ‘되돌아갈’ 정적인 상태로서가 아니라 변화하는 맥락에도 불구하고 변형하고 활력을 표현하는 역동적인 능력으로서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재생성의 핵심은 ‘순(順)긍정적 영향’(net positive impact)이나 ‘좋은 일하기’ 그 이상이며 모든 개인, 공동체 및 장소의 특유하고 대체 불가능한 본래적 역능을 발현하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이 능력을 발전시켜야 하는가?

크리스천 월의 정의에 따르면 생명은 여러 규모들이 중첩된 재생성적인 공동체이다. 생명은 모든 유핵 세포들을 형성하는 세포기관들의 공동체에서부터 당신과 내가 ‘우리의 몸’이라고 부르는 재생성적인 공동체를 이루는 인간•박테리아•균류세포들의 생태계를 거쳐, 그리고 풍부하고 대단히 바이오 생성적인 생태계들의 기능적 다양성을 창출하는 종들의 공동체를 거쳐 바다 및 육지 생태계가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생명지원 시스템—이것이 지구의 기후패턴과 대기 구성성분을 조절하여 생명에 도움이 되도록 만든다—에 기여하는 살아있는 지구의 생리학까지 걸쳐 있다.

따라서 크리스천 월이 이 글의 주제로 삼은 지구의 지혜와 다시 함께하는 것의 핵심적인 의미는 이 재생성적인 공동체에 더 의식적으로 다시 거주하는 것이며, 중첩된 재생성적인 생명 공동체 내부에서의 우리의 역할로 즉 치유자로서의 역할로 겸허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미래는 우리 각자가 이 공동체에 다시 거주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바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는 어떻게 이 공동체에 다시 거주할 수 있는 것인가? 그는 시인인 스나이더(Gary Snyder)가 1976년에 제기한 발언을 인용해서 그 방법을 제시한다. “우리가 삶을 이어갈 수 있고 [···] 우리가 풀과 태양에 기대 살 수 있는 미래 행성을 상상하는 사람들은 거주하는 사람들(전 세계 토착민들과 농부들)을 지원하기 위해 과학이든, 상상력이든, 힘이든, 정치적 수완이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져오는 수밖에 없다. 그들과 함께 공동의 대의를 만들 때 우리는 ‘다시 거주하게’ 된다.”

크리스천 월이 주장하는 재거주(Re‐inhabitation)는 우리가 거주하는 장소들과 바이오지역들의 맥락에서는 행하기에서의 변화를 그리고 바이오지역들과 맺는 관계방식에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장소장소마다 건강한 생태계 기능들을, 번성하는 공동체들 및 활기찬 경제들을 재생성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재거주는 또한 존재의 변화를 의미하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생성의 과정들—우리를 산출하는 장소들, 공동체들 및 생태계들의 그 자체로 역동적인 표현들인 과정들—로서 다시 인식하는 법을 배울 때 의식의 지형에서 재거주가 활발해지기 때문이다. 현재의 순간에 담겨 있는 미래를 향한 잠재력은 (긴 ‘이행’이나 어떤 ‘거대한 전환’ 이후의 어떤 때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의 몸, 우리의 공동체, 우리의 장소와 바이오지역들을 집으로 삼아 거기에 거주하는 데 있다.

그러나 크리스천 월이 보기에 변화에 대한 우리의 현재 이론은 추상 쪽으로 그리고 문제들을 서로 분리하고 ‘해결책’을 실행할 장소로부터 분리하여 ‘해결하는’ 습관 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우리는 이런 사고방식 안에서 전략을 논의하는 것에 고착되어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제안하며 글을 맺는다.

우리가 바로 지금 다르게 존재하기에 초점을 맞춘다면 어떨까? 우리가 누구인지 재인식하고 사이존재의 행성적 과정으로서의 삶과 좀더 동일시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자신, 공동체 및 생명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어떨까? 우리가 개별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장소를 치유하고 육성하는 표현자들로서 존재할 또는 그런 표현자들이 될 잠재력에 초점을 맞추면 어떨까? 우리가 추상적인 전지구적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고 해결책들의 규모를 키우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습관을 떨쳐버린다면 어떨까? 우리의 존재의 터전인 장소들과 공동체들과의 (함께 진화하는) 상호성 속에서 생명에 도움이 되는 조건들을 창출할 잠재력에 초점을 둔다면 어떨까?




커먼즈와 미래

 


  • 저자  :  Leila Dawney, Samuel Kirwan, Julian Brigstocke
  • 원문 :  Introduction : The Promise of the Commons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Leila Dawney, Samuel Kirwan, Julian Brigstocke가 편집한 책  Space, Power and the Commons : The Struggle for Alternative Future (Routledge 2016)의 “Introduction: The Promise of the Commons”에서 책 전체의 내용을 대략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우리의 일은 태양에 의해 신성화된다. 가령 겨울날이나 땅 파는 날에 비하면 이날[추수하는 날]은 만족스러운 날이다. 같이 일하는 친구들 때문에 더 그렇다. 그런 날이면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모든 얼굴들이 (내가 알지만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 사람들도 함께) 한 공간에 모여서 공동의 도랑과 집단적 희망에 의해 한데 묶여 있기 때문이다. 사슴이 덫에 걸려 탕으로 만들어 달라고 울어대는 소리를 듣거나 딱따구리가 파이로 장사를 지내 달라고 졸라대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들고 숲을 쳐다본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기라도 하면 우리는 일제히 몸을 곧추세우고 꾸짖는 듯이 태양을 쳐다본다. 우리의 낫과 손 연장은 합창하듯 소리를 낸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은 누구나 듣는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모두가 듣는다. 우리에게는 개방성과 즐거움이 있다.

Jim Crace, Harvest (2013)

1968년에 봉기에 참여하고 있던 활동가가 시간 여행을 하게 되어 2015년 급진적인 좌파의 집회 현장에 뚝 떨어지게 되었다면 그녀는 거기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그녀는 아마도 계급·노동·저항의 언어가 강화되었으리라고 기대할 것이지만, 이런 기대와는 달리 그녀가 실제로 발견하는 것은 제사(題詞)에 나온 목가적 장면과 유사한 토론 즉 토지에의 공통의 접근과 사유(思惟)의 개방성 및 그것에 수반되는 삶의 양태를 놓고 벌어지는 토론일 것이다. 그녀는 이전에는 신맬서스주의자들(neo-Malthusians), 토지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운동들 그리고 사회사가들 및 법역사가들의 도메인이었던 것, 즉 커먼즈의 언어를 발견할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커먼즈에 관한 관심은 주로 제한된 자원, 늘어나는 인구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새로운 형태의 물질적 가난 등의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었다. 커먼즈는 경제학, 인류학, 환경과학에서 중요한 관심 영역이 되었다. 인구 과잉에 대한 맬서스의 저작과 함께 자원과 토지의 사적 소유에 대한 조지(Henry George)의 비판, 경쟁하는 행위자들이 제한된 자연자원에 접근할 때 생성되는 긴장들에 관한 하딘(Garret Hardin)의 저작들이 그 준거점들이 된다. 커먼즈 관련 문헌들이 다루는 문제들은, 왜 이러한 위기들이 출현하고 있는가, 이런 상황은 언제 위기점에 도달할 것인가, 개별 국민 국가들이 어떻게 이것을 막기 위해 대응해야 하는가이다. 이 문제들은 커먼즈에서 실제로 행해지는 일, 커먼즈를 구축하는 일, 커먼즈가 의미하는 바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정책 변화와 거시경제적 자원관리를 지향하는 추상적 논의들이었다.

이 텍스트에서 (그리고 커먼즈 연구분야를 발전시키고 있는 정치학자들·지리학자들·사회학자들 사이에서) 말하는 커먼즈는 이 문제들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을 다르게 표현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 책의 글들은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식민화나 불로소득자들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규제와 보호를 필요로 하는 자원의 관점에서 정의되기를 거부하는 커먼즈를 표현한다. 이 글들이 말하는 커먼즈는 공간일 수도 있고 경험일 수도 있고 자원일 수도 있으며 기억이거나 혹은 ‘희소성의 관리’ 외부에 있는 공유하기와 살아가기의 형태들일 수도 있다. 저자들의 전문분야는 도시계획학, 지리학, 정치학, 사회학, 문화이론 등을 포함하는 사회과학과 인문학 전반에 걸쳐 있다. 이는 새로이 일기 시작한 커먼즈 연구가 여러 분야들을 망라하고 있으며, 학계를 가로지르는 동시에 학계를 넘어서는 논의들에 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커먼즈를 신자유주의적 시장에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 삶의 사유화와 개인주의화에 저항하는 함께 살기의 방식들을 핵심으로 하는 시공간적이고 윤리적인 형성체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커먼즈의 언어·이념·상상계의 출현을 고찰할 때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신자유주의적 힘들과 연관되어 있고 그 힘들을 통해 작동되는 방식을 인식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힘들은 공통의 삶을 위한 가능성들을 제한하는 동시에 산출한다. 급진적으로 사유를 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확장의 논리 및 과정과 이 확장에 대한 저항을 점점 더 종획과 커머닝의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다름 아닌 자본주의적 축적의 논리를 통해 커머닝이라는 특수한 저항 형태의 가능성이 출현하는 것이다. 자본이 세계의 더 많은 지역을 상품화 과정으로 끌어들이면서 새로운 종획이 일어난다. 자본은 신자유주의적 소유와 가족 관계를 통해 삶을 사유화하는 동시에 인구에 기반을 둔 통치[푸꼬가 분석한 바의 새로운 형태의 권력의 특성이다―정리자]를 구사한다. 이것이 대안권력인 커머닝으로 향할 가능성의 조건들을 생성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비(David Harvey)의 작업이 매우 중요한데, 특히 후기 자본주의가 계속적인 종획 과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 중요하다. 자본은 이전에는 상호책임이라는 사회적 관계에서 관리되고 조직되고 산출되었던 자원·인구·활동·토지를 통합하면서 확장한다. 하비는 이를 ‘강탈(dispossession)에 의한 축적’이라고 정의한다. 여러 분야를 가로지르는 연구들은 종획의 여러 형태들을 통해서 자원의 사유화가 일어나고 있는 많은 공간들을 보여주었다. 지구상의 후진 지역에서의 토지강탈, 금융자본의 자산거품, 유전자·물·토착지식 등의 사유화―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종획들은 그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세상이 폐쇄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커먼즈가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의 중요한 자원이 된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전통적인 대의민주주의의 방식을 통한 변화의 가능성들은 감소하고 있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의 주요 정당들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은 유럽연합의 트로이카가 장악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활동가들은 집회·조합·투표소의 공간들을 넘어서 정치를 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탐구하고 있다. 아나키스트들의 DIY 전통에서 나온 새로운 형태의 집단적 행동은 거주와 점령이라는 형태를 집회와 시위라는 형태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며, 저항의 예시적 공간들의 출현을 향하는 새로운 길을 닦고 있다. 그 주목할 만한 사례는 오큐파이 운동, 15M 그리고 인디그나도스이다. 이렇게 커먼즈의 정치는 종획에 대한 공간적 대응으로서 일어난다. 커먼즈 이념은 개념적·물리적 공간을 집단적으로 생산하고 주장하기를 촉발하는 정치적 어법을 제공한다. 저항과 항의의 새로운 형태들―관리와 의사결정에서의 플랫시스템들[누구에게나 접근이 허용된 시스템을 말한다―정리자], 요구 없는 정치[원주 : 낭씨Jean-Luc Nancy가 정치의 이러한 재구상에 대한 더 나아간  논의를 제공하고 그것을 더 정교화한다(James, 2006; Nancy, 1991, 2000)],((James I, 2006, The fragmentary demand: An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Jean-Luc Nancy (Stanford University Press, Stanford, CA). / Nancy J-L, 1991, The inoperative communit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Minneapolis, MN and London / Nancy J-L, 2000, Being singular plural (Stanford University Press, Stanford, CA). ).)) 대안적 세계의 구축에 초점두기―이 출현함으로써 공통적으로 살기, 공통적으로 만들기, 공통적으로 존재하기라는 새로운 활동들이 종획과 강탈에 대한 직접적 대응으로서 일어나고 있다.

커먼즈의 언어는 무엇보다, 투쟁과 무력함 너머 희망과 약속을 부각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언어와 성향을 제공한다. 이 언어는 능동적인 정치를 환경에 대한 관심과 결합시키고 도시 운동을 시골에서의 저항과 결합시키며 지역에서의 투쟁을 전지구적 정치와 결합시킨다. 그 역사적 문화적 반향들이 때로 문제점을 보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다르게 살고 다르게 존재할 것인가를 생각할 자원을 제공해 준다. 지금과는 다른 세계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미래들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커먼즈의 이념은 낭만적 서사를 제공하며 이 서사를 통해 앞으로 나아갈 길(실망스런 정치적 내러티브들, 생태계 파괴, 양극화와 강탈―이것들의 외부에서 사유하는 길)을 제공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내러티브에 대안이 되는 대항내러티브를 제공한다. 무엇보다도 커먼즈 이념은 변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날 수 있으며 조그만 행동들도 중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희미하게나마 제공한다.

그러나 이 책의 글들이 분명히 하듯이 이 낭만적 서사를 넘어서 사유할 필요, 커먼즈가 출현하는 곳, 커먼즈에 담겨 있는 긴장들, 커먼즈가 행할 수도 있는 새로운 사물화들을 평가할 필요 또한 존재한다. 특히 블렌코우(Claire Blencowe)의 글은 공통적 삶의 유혹적인 상태들이 해방적 충동들을 덫에 가두고 그런 움직임들을 자본축적의 관계들로 재영토화시킬 위험을 일깨워준다. 커먼즈 이념의 매력과 미래의 가능성을 이해할 때 우리는 우리가 ‘종획 이야기들’라고 부르는 우울한 장르를 고려에 넣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이야기들은 영국 의회의 종획 역사들과 이 역사들을 문학이나 구비 전통에서 다시 이야기하는 민속 관행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볼리어 같은 커먼즈 옹호자들이 제시하는 커먼즈 이야기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상실감, 그리고 비록 파열되었으나 폐쇄되지는 않았던 그리고 어느정도는 가난했던, 종획 이전의 삶의 환기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특정 지역에 속하면서도 이리저리 퍼져서 운동들과 지역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데, 흩어진 사건들과 행동들을 한데 모으는데 도움이 된다. 커먼즈의 이러한 다양한 갈래들에 대한 주목이 이 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자본주의 이전의 목가적 사회의 낭만적 상상태들과 테크놀로지·소통·사회성의 가없는 가능성들을 결합하는 ‘커먼즈’라는 용어의 가능성들만이 아니라 문제점도 또한 주목하는 것이다.

이 책의 3부에 실린 글들이 분명히 하듯이, 커먼즈 이념이 정치적·학술적 담론에서 널리 퍼지고 있다면 이는 커먼즈를 구성하는 것이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책은 도시 커먼즈,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디지털 커먼즈가 일상 언어에 진입한 상황에서 커먼즈의 더욱 새로운 유형들을 탐구한다. 어떤 저자는 비인간 존재의 참여를 다루고 또 어떤 저자는 공유된 기억의 전지구적 커먼즈를 다루며 다른 어떤 저자는 공통적인 것의 법 공간을 다루고 또 다른 저자는 시간의 측면에서 커먼즈를 다룬다. 3부에서 서술된 집단들과 행동들의 공통적 특징은 (박탈에 대한 저항 말고도) 물리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커먼즈를 다루기보다 공통적인 것을 실천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다루는 태도이다 이런 식으로 정치적 커머닝의 새로운 실천들은 신자유주의적 풍경 내부에 ‘다른 세계’를 실행하고 있으며 그렇게 하면서 주체성들·관계들·공간들을 바꾸고 있다.

실로 2000년대 초에 심대한 전환이 일어났다 커먼즈를 어떤 장소나 자원으로 생각하는 데서 실천의 한 형태로서의 커머닝을 생각하는 데로 전환한 것이다. 집단화를 지역적 규모로 생각하는 수단으로서 그리고 비자본주의적 형태의 사회조직과 경제조직을 실현하는 방식으로서 커머닝 이념이 번성했다. 라인보(Peter Linebaugh)의 작업이 이 전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커머닝과 종획의 역사에 대한 그의 서술들은 이 책에서 논의되는 바의 커먼즈 이념을 우리의 관심사로 만드는 데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커먼즈의 이념과 커머닝의 정치를 이해하고 활성화하는 몇 가지 방식들로 하여금 서로 대화하게 하려고 한다. 이것들은 개념적 작업과 경험적 사례들 사이에서 움직이는데, 법, 역사, 그리고 일상적 활동에서 이 개념을 고찰함으로써 이 개념이 정치적·이론적 설득력을 획득하는 여러 가지 방식들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주고자 한다. 이 책의 글들은 특히 실제로 존재하는 바의 커먼스와 커머닝에 초점을 둔다. 여기서 커먼즈는 법, 정치적 행동주의, 그리고 일상적 활동의 테크놀로지들을 통해 엄연한 객체들로서 출현한다. 이런 서술들은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를 방해하거나 그것들을 우연한 것으로서 폭로하는 능력을 공유한다. 그리하여 커먼즈는 대안들이 직접 탐색되고 실험되며 희망의 정치에 되먹여지는 개념적 공간이 된다. 희망의 정치는 이미 실제로 존재하는 비자본주의적 삶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역사의 종식’(이는 자본주의 이후의 미래를 개념화하는 데 있어서 막다른 골목에 해당한다)을 돌파할 가능한 미래들을 제안한다.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는 이러한 움직임을 ‘역사의 시작’이라는 주제로 논의했다. 이렇듯 커먼즈의 이념은 현재의 경제적 구조의 우연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성장과 사적 소유의 필연성이라는 담론을 무너뜨린다. 에스떼바(Esteva)가 지적하듯이 커머닝과 커먼즈 운동은 ‘대안적 경제’가 아니라 ‘경제에 대한 대안’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커먼즈에 대해서 쓰고 사유하고 커먼즈를 실행하는 것은 이러한 ‘세계 만들기’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며, 우리는 커먼즈를 중심으로 하는 문헌들에서 커먼즈 고유의 수행성―경험과 주체성을 사적 소유와 자본의 불가피성에 맞세워 재구조화하는 데서의 수행성―을 감지한다.

이어지는 절에서는 커먼즈 연구의 다섯 분야를 살펴본다. 첫째로 우리는 커먼즈가 환경자원의 한계에 대하여 사유하는 수단으로서 이해되는 방식을 고찰한다. 둘째로 우리는 도시 커먼즈에 대한 그리고 도시에서의 공간적 커머닝과 전유의 실천들에 대한 더 최근의 연구들을 살펴본다. 셋째로 우리는 비판적 법연구 분야에서의 작업에 기대어 커먼즈와 법과의 관계를 이해한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신맑스주의의 성취에 시선을 돌려 커먼즈 이념이 현재의 급진적인 정치사상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왔는가를 개괄하고, 마지막으로 커먼즈 논의의 틀을 커머닝 개념을 중심으로 다시 짜고자하는 저자들에 주목한다.

[참고]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Introduction: the promise of the commons
     LEILA DAWNEY, SAMUEL KIRWAN AND JULIAN BRIGSTOCKE

PART I
Materialising the commons
1 Building the commons in eco-communities
     JENNY PICKERILL
2 A politics of the common: revisiting the late nineteenth-century Open Spaces movement through Rancière’s aesthetic lens
     NAOMI MILLNER
3 A spirit of the common: reimagining ‘the common law’ with Jean-Luc Nancy
     DANIEL MATTHEWS

PART II
Commoning
4 The more-than-human commons: from commons to commoning
     PATRICK BRESNIHAN
5 ‘Where’s the trick?’: practices of commoning across a reclaimed shop front
     MARA FERRERI

PART III
An expanded commons
6 Expanding the subject of planning: enacting the relational complexities of more-than-human urban common(er)s
     JONATHAN METZGER
7 Occupy the future
     JULIAN BRIGSTOCKE
8 Imaginaries of a global commons: memories of violence and social justice
     TRACEY SKILLINGTON

PART IV
The capture of the commons
9 The matter of spirituality and the commons
     CLAIRE BLENCOWE
10 Controlled natures: disorder and dissensus in the urban park
     SAMUEL KIRWAN




지역화폐, 사회적 자본 및 기본소득에 관한 토론

 


  • 저자  : Valentin Seehausen, Julio Linares, Inte Gloerich
  • 원문 :  Discussion on Community Currencies, Social Capital & Basic Income https://networkcultures.org/moneylab/2021/04/16/moneylab-11-discussion-on-community-currencies-social-capital-basic-incom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대선의 열기가 서서히 오르는 모양이다. 대의민주주의가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흡수하는 시즌이 오고 있는 것이다. 대의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삶의 문제가 아닌 권력의 문제로서, 삶의 외부에서 삶을 제한하는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배어들도록 만드는 무대이다. 이 무대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 ‘할 일’은 시야가 이 무대 안에 갇힌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시야는 민주주의가 다시 삶 전체로 돌아온 세상을 향해있다. 우리가 보기에 민주주의의 문제는 단지 좁은 의미의 정치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영역들 전체와 관련된다. 화폐의 영역도 여기에 포함된다. 화폐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의 표현일 뿐인데, 이것이 사회적 삶에 외부에 존재하며 사회적 삶을 제한하는 것이 됨으로써 곧 권력이 되었고 더 나아가 물신(物神)이 되었다. 대안근대를 지향하는 우리로서는 화폐를 권력이 아니라 다시 삶의 힘으로 되돌려놓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바로 이것이 화폐의 민주화의 핵심이다. 이번 글에서는 다른 곳에서 이 화폐의 민주화를 어떻게 고민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기본소득이나 지역화폐는 이미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것이기에 내용이 새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실제적 노력의 사례들을 들어보는 것도 우리에게 좋은 경험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소개하려는 텍스트는 2021년 3월 27일 있었던, 머니랩(MoneyLab)의 11차 워크숍 ‘지역화폐, 사회 자본 및 기본소득에 관한 토론’(Discussion on Community Currencies, Social Capital & Basic Income)을 녹취한 것이다. 실제 토론의 동영상은 이곳에 가면 볼 수 있다. 토론자인 훌리오는 <써클즈> 소속이고 발렌틴은 <쏘셜코인> 소속이며 진행을 본 인테는 <머니랩> 소속이다. 내용정리이지만 대화체를 유지했으며, 녹취록에서 발견한 몇 개의 오류는 동영상을 보고 수정했다. [정백수]

인테
우리가 왜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까요? 지역화폐(공동체화폐)와 기본소득은 초창기부터 <머니랩>(Moneylab)의 주제였습니다. 지금 시기(팬데믹 기간)에 적절한 것은 무엇일까요? 제가 여러분 둘 다의 프로젝트에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동체에의 헌신입니다.

홀리오
저는 과테말라 출신 경제인류학자이며 사회활동으로서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기본소득을 어떻게 실현할지, 그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지에 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저를 인류학으로 이끌었습니다. 화폐를 다시 생각하는 방식으로서 화폐의 인류학, 가치의 인류학으로 말이죠.

<써클즈>가 가지고 있는 주요 아이디어들 중 하나가, 국가가 기본소득을 제공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기본소득의 창출과 관련된 패러다임 전환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민주적 화폐 이론’(DMT)이라 부릅니다. 이에 따르면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약속의 징표를 발행하여 은행 또는 국가와의 관계와 무관하게 상호적으로 빚을 지고 빚에서 벗어납니다.

제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힘의 느낌, 돈을 창출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느낌을 갖게 해주는 것이고, 돈을 창출하는 힘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화폐 취득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을 화폐발행자로서 느끼게 만들고 경제가 어떻게 조직되는지에 대한 통제력과 발언권을 갖도록 만드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발렌틴
당신의 말이 이해가 됩니다. 저에게는 지역화폐(공동체화폐)가 사회/경제 이론에서 실천성을 얻는 한 가지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화폐시스템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시작했고 정치에 입문할까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나름의 소규모 대안적인 금융시스템을 시작하는 것은 어떤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종종 지역화폐를 추동하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하는 요인입니다. 우리, 즉 민중을 위한 세상이죠. 물론 이것은 제 주관적인 견해이지만요.

우리는 지역화폐를 아래로부터 창출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에 지역화폐들이 있고 그 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만약 우리가 화폐시스템(monetary system)을 아래로부터 창출한다면 어떻게 될까를 보여주는 본보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써클즈>(Circles)와 <쏘셜코인>(Social Coin)은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로 실험을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지역화폐들이 화폐를 실험하는 작은 실험실인지도 모르죠.

인테
우리는 야심찬 생각들에서 출발하지만 지역화폐가 그 생각들을 실천에 옮기는 한 가지 방식입니다. 그런데 또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가령 제가 ‘쏘셜 코인’을 사용하기 위해 <써클즈> 커뮤니티에 참여할 기회가 있다면 그 동기는 무엇일까요? 제가 무엇을 살 수 있을까요?

발렌틴
이것이 지역화폐가 답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 모두 호모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이론(집안 살림의 효용을 극대화하기)을 알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 이론은 전적으로 결함이 있지만 여전히 그 안에 진실이 좀 들어있습니다. 공동체에 기여하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돌아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이익이 공동체에 기여한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경제적 이익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이 공정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근(Siegen)에서 경제적 이익은 전기차나 전기자전거를 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홀리오
저는 거시적인 문제에 대한 논의, 화폐, 테크놀로지는 다 하나라고 항상 말합니다. 화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회기반시설, 즉 다른 모든 생산자들, 다른 모든 물류 제공자들, 서비스 제공자들, 돌봄 노동 제공자들, 경제의 일부인 모든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사회구조입니다. 경제는 집안 살림, 즉 오이코스(Oikos)입니다만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집만이 아니라 지역입니다. 그래서 이곳 베를린에서 우리는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맥주 제조업자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농부와 함께할 수도 있고 자전거 공유 협동조합과 함께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그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잉여를, 그리고 코로나/위기시기에 충분히 이용되지 않은 자원을 추가적인 유동성(liquidity)으로 변형시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술집들이 문을 닫았기에 팔 수 없는 50리터 맥주통을 가지고 있는 맥주회사 소유주와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써클즈>에 그것을 팔아서 행복한 상태이며, 맥주를 더 많이 팔기 위해 지역 라디오에 홍보를 하는 데 그 돈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발렌틴이 말하고 있는 바입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서로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그들을 연결시키는 방식을 생각해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 자신만이 아니라 더 큰 어떤 것을 실제로 부양하고 있는 셈입니다. 잉여가 더 큰 지역사회로 갈수 있도록 하는 방법론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자원들의 흐름을 창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테
지역공동체 건설이 핵심 작업이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지역공동체의 신뢰와 네트워크가 없다면 그것은 작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진공상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국가의 맥락에서 법정화폐 시스템 및 세금 시스템과 함께 존재합니다. 당신의 프로젝트는 더 광범위한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존재합니까? 이 프로젝트는 고립된 지역들로서 존재하나요? 아니면 전체시스템이 바뀌는 것을 보고 싶은 건가요?

홀리오
독일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은 화폐란 사회에 대한 일정한 요구의 표현이라는 점에 관해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사회에서 사용하는 화폐의 유형들이 다양한 차원들―상상력, 무급노동, 유급노동―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요소들이 화폐형태로 반영됩니다. 그래서 저에게 중요한 것은, 화폐를 다루고 정치적인 싸움에 뛰어듦으로써 우리는 바로 화폐시스템 전체의 헤게모니에 도전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발렌틴과 함께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시민들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할 수 있는 시장(市長)들의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창출하려는 노력입니다. 우리는 일군의 다양한 시스템들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써클즈>는 그것들 중 하나일 뿐이고 우리는 지역의 조건과 욕구가 무엇인지를 보고 사용될 수 있는 일단의 도구들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존재하는 일국의 국가시스템과 함께 공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미국의 사례가 항상 적절한데, 미국에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의 통제를 받는 국가시스템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광범위한 수준에서 공존하는, 국가보다 하위의 시스템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지자체들이 폭넓은 스펙트럼의 이익을 보완하고 조율하는 방식으로서 지역의 기본소득을 지역화폐로 발행하여 잠재적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지급할 수 있습니다.

저로 말하자면, 저는 아나키스트입니다. 국민국가를 믿지 않고 자본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폐지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순간 어떤 상황에 있는지에 대하여 실질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이 구조들이 몰락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며, 제가 하고 있는 것은 그것들이 더 잘 몰락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좌중의 웃음]

발렌틴
토론이 시작된지 20분이 지나서 당신이 스스로 아나키스트임을 이렇게 폭로하는 것이 정말 좋군요. 저는 동조하는 편입니다. 시스템을 바꾸는 방식이고 힘을 지방자치제 수준으로 되돌려주는 방식이니까요. 국가들이 있고 국제적인 기구들이 있습니다. 아나키스트가 아닌 저는 그것들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또한 저는 금융시스템이 사회의 소수에게 복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0%나 1%의 사람들은 실질적인 혜택을 많이 받지만, 50%의 사람들은  실질적인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전 세계에서 극빈 상태에 있는 사람이 (잘은 모르지만) 아마 50%일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충분한 식량이 없고 그것이 제 관점에서는 재앙입니다.

신자유주의자로 유명한 하이에크는 탈국가화된 화폐라는 생각을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해 하는 것은, 화폐가 탈국가화되어 모든 사람이 화폐를 발행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봐요, 이것이 발렌틴-코인입니다, 사용해보세요’라고 말할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요? 무슨 일로 그러시죠?’라고 말할 거구요. 그러나 예를 들어 베를린 시장이 베를린-코인을 발행한다면 사람들은 실제로 그것을 사용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베를린 시에 힘이 있음을 의미할 것이고 화폐 주조로 얻는 이익은 실제로 베를린으로, 지방자치단체로, 작은 마을들과 가난한 시골로 돌아갈 것입니다. 지역의 화폐로 실험하기 시작할 경우 이것은 그 지역사회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 멋진 프로젝트가 더 광범위한 맥락에 가져올 수 있는 전환과 관련하여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입니다. 지역화폐들이 수백 년 동안은 아니더라도 수십 년 동안 존재했지만 그것은 지금까지도 대부분 불법이었는데, 그러다가 블록체인이 등장했습니다. 블록체인은 효력을 정지시키기 불가능한 화폐를 발행했는데, 이는 블록체인이 매우 탈중심화되어 있어서 어떤 정부나 권력도 거기에 실제로 개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가들이 바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암호화폐를 합법화하고 규제하는 것입니다. 국가들은 이것이 없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렸고 그래서 그것을 시험하고 통제하는 규칙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암호화폐는 합법적이 되고 우리가 실제로 그것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이것이 올해 들어와서 제가 흥미롭다고 느낀 점입니다. 규제자들과 국가들이 지역화폐가 실제로 존재하기 위한 법적 틀을 만들고 있다니 말입니다. 저는 지역화폐를 관철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로비스트입니다. 지역화폐의 관철이 제가 이곳에 있는 이유이고, 제가 보고 싶은 정책 변화입니다.

인테
하지만 지근에서 <쏘셜코인>은 블록체인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렇죠? 그래서 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당신은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위한 특수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발렌틴
공동체는 그때그때 사용가능한 테크놀로지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가령 뵈어글(Wörgl)—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유명한 사례죠—의 기술은 ‘우리가 지폐를 발행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스탬프를 찍는다’였습니다.[정리자―1932년 오스트리아의 도시 뵈어글에서 대공황에 대응하여 지역화폐(지폐)를 발행했다. 이 지폐는 화폐소지자들이 빨리 사용하도록 자극하기 위해 매달 1%의 가치가 상실되도록 고안되었다. 이 지역화폐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오스트리아의 다른 도시들도 유사한 실험들을 계획했다. 이 지역화폐는 1933년 말 행정법원에 의해 금지되었다. 텍스트에서 “스탬프”는 지폐에 찍는 도장을 가리킨다. (첨부한 사진 참조) 첨부한 사진은 자유이용저작물이며 그 출처는 https://en.wikipedia.org/wiki/W%C3%B6rgl#/media/File:Freigeld1.jpg이다.] 그때 서비스 제공은 중앙집권화되어 있었고 그 핵심은 당신이 서비스 제공자에게 가서 지폐를 원장에서 삭제하면 화폐의 효력이 정지된다는 것입니다. 블록체인은 추적하기가 불가능하고 효력을 정지시키기 불가능하게 만든 테크놀로지일 뿐입니다. 탈중심화된 화폐가 이렇듯 기술로 작동하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저는 블록체인 자체의 힘을 믿지 않습니다. 많은 지역화폐들과 다양한 토큰들이 있는 세상이 오면 우리는 열광하겠지만, 여기에 블록체인이 반드시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역화폐를 금지해온 규칙을 깨기 위해서는 블록체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우리를 신뢰하고 우리의 파트너들을 신뢰하며 얼굴을 아는 사람들을 신뢰하고 인간을 신뢰한다면, 블록체인이 필요 없습니다.

인테
그러면 당신은 블록체인의 유무와 무관하게 열린 공간이 창출된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우리는 지금까지 실질적인 혜택을, 사회적인 맥락을 다루었는데요, 이제는 당신들의 가장 유토피아적인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워크숍에서 당신들은 당신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무엇이 당신들을 걱정스럽게 만드는지에 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미래에 무엇이 가능할지,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원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미래의 지평 위에 있는 이 지점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이겠죠.

발렌틴
유토피아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문제에 아주 많은 측면들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좋아합니다. 일국적 수준에서 저는 부유세와 보편적 기본소득의 광팬입니다. 국제적인 수준에서 세계정부가 있다면, 그리고 보편적 기본소득으로서 재분배되는 전지구적인 부유세가 생긴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 될 것입니다. 점점 더 불평등해지는 금융 시스템의 추세가 부유세와 보편적 기본소득 덕분에 평등 쪽으로 역전될 수 있습니다. 인간 사회가 그것으로부터 전적으로 혜택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역화폐 로비스트의 관점에서 저는 안전한 법적 환경을 갖고 싶습니다. 저는 법 문제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만, 이 문제는 여전히 매우 복잡하군요. 우리는 테크놀로지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제 생각에 법적 문제가 지역화폐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크게 미흡한 사안입니다. ‘당신에게 지역화폐가 있고 그것이 백만 파운드 미만이면 우리는 그것을 규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넘으면 우리가 규제할 것이다’와 같은 구조가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정치로부터 요구하는 어떤 것입니다.

인테
홀리오는 미래 정부에 관해 이와는 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겠죠?

홀리오
어려운 문제죠. 이것은 정치경제와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블록체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고 법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테크놀로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의 실제적인 핵심은 힘, 즉 경제적 힘과 정치적 힘(권력)과 관련된 문제들입니다.  법 문제는 매우 재미있는데, 이는 오늘날 법적으로는 국가들 말고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체가 민간은행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은행 면허를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신이 그들의 자산을 처리할 권리가, 그들의 노동을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럼으로써 이 불평등한 권력구조들을 창출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저는 국제적인 수준에서 부유세와 보편적 기본소득은 놀라운 것이라는 발렌틴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제가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직접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실천적으로 생각할 때 그곳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화폐를 민주화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화폐를 영토로 본다면, 우리가 화폐를 민주화한다고 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은, 지역적으로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다양한 생산자들 사이에서 경제적 관계, 정치적 관계, 생태적 관계를 재(再)지역화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서 당신은 권력의 실제적인 탈중심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 즉 권력의 탈중심화가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써클즈>에서 우리는 다음의 네 가지 원칙에 관해 이야기 합니다. 로컬리즘(전지구적 문제의 지역적 해결), 권력의 탈중심화, 지속가능성(관계들을 더 지역적으로 묶고 더 상호의존적인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 방법들을 찾는 것) 그리고 민주적인 연합주의가 그것입니다. 민주적인 의회들이 서로 연합할 수 있지만 정치적 힘은 항상 국민들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그 규모를 확대해야 할 매우 실천적인 메커니즘이며, 이렇게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가장 실천적인 유토피아일 것입니다.  화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관련됩니다. 화폐를 넘어서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삶의 민주화입니다. 이것은 권력의 문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권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가 권력으로 변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부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 많은 재앙을 일으킨 사람들이 많은 권력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치적 힘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조직화된 대중들을 통해서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축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인테
제가 채팅을 읽어봤는데 여기에 사회적 재생산에 관한 질문이 있습니다. 지역화폐와 보편적 기본소득이 어떻게 우리가 창출하고자 하는 사회에서 자리를 잡나요? 어떤 가치들이 시스템에서 작동하는 토큰 형태로 재현됩니까? 그 기획은 어떻게 공동체와 공존합니까? 그것이 어때야 할지에 관한 생각들이 달라서 서로 경쟁한다면 어떻게 되죠? 그 과정은 어떻게 진행됩니까? 그리고 토큰 같은 아주 실질적이고 코드에 기반을 둔 어떤 것과 창출하고자 하는 사회와 같은 추상적인 문제를 어떻게 연결시키는지요?

홀리오
사회적 재생산의 측면에서 우리는 가족, 특히 여성들에게 많은 돌봄의 부담이 부과됨으로써 지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폭력이 또한 증가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기본소득은 많은 착취적인 관계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길입니다. 혹은 사람들이 자신을 돌보고 다른 사람을 돌보며 그들을 둘러싼 사회의 환경을 돌볼 수 있는 소득 기반을 갖게 해주는 것입니다. ‘온전한’ 기본소득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시간을 팔지 않고, 임금을 위해 자신을 임대하지 않고 삶을 살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어떤 것입니다.

오늘날 화폐 시스템은 생산영역에서 비롯합니다. 고용주가 노동자를 고용하고 그들은 일하러 갑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있기 위해 그리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사기 위해 임금을 가정으로 가져갑니다. 커먼즈에는 화폐가 없습니다. 사회적 재생산이 번성할 수 있게 해주는 화폐-커먼즈, 바로 이것이 우리가 구축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커먼즈도 성장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적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우리의 돌봄 실천들, 사회적 재생산의 실천들이 번성할 수 있는 가치체계를 창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마존>과 대규모 식품기업들 같은 거대 기업들에의 의존을 통해 더욱더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에서부터 우리의 땅까지, 우리가 서로에게 하는 약속까지 우리가 지켜야 할 영토를 창출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인테
발렌틴 씨, <쏘셜코인>은 어떻습니까?

발렌틴
사회가 어떻게 실제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화폐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핵심인, 홀리오가 내 마음에 그려준 큰 그림에 대해 생각하는 중입니다. 그러나 가치들의 문제로 한정하자면··· 저는 우리가 지근에서 사용하는 이 화폐—‘쏘셜 코인’—에 붙일 명칭을 찾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공통 화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전기차(앞으로 세 대를 구비할 예정입니다)와 전기자전거라는 공통재(커먼즈)가 있습니다. 제가 일하는 단체는 이 공통재를, 이 전기 차량들을 지역민들에게 보급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급할 도구로서 화폐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실험중입니다. 첫 번째 아이디어는 자원봉사를 한 사람들에게 전기차에 사용할 수 있는 코인을 나눠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보편적 기본소득을 시행할 계획인데 이는 모든 인간이 이 공유자원을 소비할 권리를 동등하게 가짐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런데 커먼즈와 연관된 가치들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재산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유재산과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커먼즈의 가치를 어떻게 정의할 것입니까? 이것은 정말로 재미있는 질문입니다.

인테
커먼즈로서의 화폐라는 생각, 저는 이것을 좀 더 설명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홀리오, 몇 분이면 설명할 수 있겠죠? 돈은 보통 개인의 소유이기 때문인데···

홀리오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노동•토지•화폐라는 세 가지 가짜 상품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가짜 상품들로 생각하는 점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이는 이 세 가지가 항상 상품으로 존재한 것이 아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노동시간, 노동, 몸이 항상 상품으로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토지가 항상 개인소유의 상품으로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가령 텃밭이 언제나 상품으로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화폐도 마찬가지입니다. 화폐는 부채이며 신용관계이고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입니다. 서로에게 하는 약속과 같은 유형의 사회적 관계입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 상품화되었고 개인 소유의 상품이 되었습니다. 맑스의 정의를 따른다면, 자본주의를 M-C-M′으로 정의할 것입니다. 화폐가 더 많은 화폐를 만드는 것, 화폐를 팔아 상품을 사서 그것으로 화폐를 더 많이 버는 것이죠.

가치를 나타내는 징표(토큰)의 사물화 또는 물신화가 발생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것을 화폐라고 부르는데, 화폐는 이자를 낳는 부채 등의 과정을 통해서 확장하고 우리는 이것을 성장 등등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로 지구를 망치는 것입니다. 커먼즈를 희생하면서, 토지를 희생하면서, 우리의 몸을 희생하면서, 지구의 가치를 희생하면서 일어나는 이 물신의 증가, 화폐라는 신의 증가가 지구를 망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화폐의 상품화가 아니라 공통화(commonification)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민주주의의 문제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전부 공동소유자인 곳에서 어떻게 화폐를 창출할까요? 사유재산이 없는 곳에서, 화폐가 민간은행에 의해 소유되지 않는 곳에서, 화폐가 국가에 의해 소유되지 않는 곳에서, 화폐가 우리가 발행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 실제로 공유자원인 곳에서, 자원의 유형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곳에서, 우리는 어떻게 화폐를 창출할까요?

오늘날 우리는 이런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기다리면서 우리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지대(자산소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현재로서는 이것을 어떻게 할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화폐의 공통화가 기본소득으로 주어질 때 우리 몸은 임금노동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고 상품으로서의 화폐 또한 해방시킬 수 있으며, 이 과정을 통해 토지를 탈상품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화폐를 개인소유의 상품으로부터 공통재로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현 자본주의적인 위기에 대안을 제공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오고 있는 주된 이론적 핵심입니다. 우리는 근원으로 가야 합니다. 화폐는 수메르의 지구라트[정리자―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전] 이후로 줄곧 지난 5천년 이상 동안 문제가 있었습니다. 모든 성직자들이 사람들을 채무자로 만들어서 속박상태에 묶어두었던 것입니다. 그 기나긴 역사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군산복합체로 죽 이어집니다. 미국 군대는 세계에서 오염을 제일 많이 발생시키며 미국 달러로 자금을 마련합니다. 민중이 화폐를 창출하는 힘을 되찾지 못하면 우리는 문제의 근원으로 가지 못할 것입니다.

인테
마무리할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만 사람들이 녹화된 토론을 보고자 할 경우에 대비해서 앞으로 워크숍에서 여러분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발언할 시간을 각각 드리고 싶습니다.

발렌틴
워크숍의 제목은 ‘비정부기구(NGO)로서 지역화폐를 시작하는 법’입니다. 우리가 NGO로서 이 화폐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직접해보는 워크숍이 될 것입니다. 워크숍에서 저는 제가 지역화폐를 시작하면서 겪었던 모든 경험을 공유할 것입니다. 그리고 미리 알려드리는 바이지만 우리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멉니다. ‘이 발걸음을 뒤따르시면 지역화폐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가 아닙니다. 저는 다만 제 경험을 공유할 것입니다. 저는 실천적 경험을 가지고 있는 워크숍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과 실제로 토론을 하고 싶고 배우고 싶습니다. 그들이 어떤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지, 그들의 프로젝트가 어떤 것인지 토론을 통해 알고 싶습니다.

홀리오
우선 저는 정치적 힘(권력)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고 <써클즈>가 교환과 상호의무의 측면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감을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화폐의 두 가지 측면에 대해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저는 최근에 출판된 안내서를 죽 훑어볼 것입니다. 이 안내서는 <써클즈>가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고 또한 오늘 제가 말한 몇 가지 원칙들을 설명하며 기본적으로 지역에서의 조직방법론을 제시합니다. 조직화는 생산자들과 상인들의 회로에서 시작해서 그들이 고용하는 노동자들로, 거기서 다시 공동체 전체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매우 실천적인 작업이며 우리가 매달 마지막 일요일에 가지는 회의에서 하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든 이 토론을 듣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함께하는 것을 환영합니다. 시작하는 법에 대한 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네이선 슈나이더와 협동조합 운동의 미래

 



어떻게 하면 협동조합이 사회 변화를 위한 수단으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특히 온라인 공간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떠한 실질적 개입이 IT 대기업들의 반사회적 행동을 저지할 수 있을까? 이 두 질문은 내가 콜로라도 볼더 대학교(the University of Colorado Boulder)의 미디어학 교수인 네이선 슈나이더(Nathan Schneider)와 함께 나의 팟캐스트 「커머닝의 새로운 영역들」(“Frontiers of Commoning”)의 에피소드 8편에서 최근 탐구한 것들이다.

네이선은 저항운동·비폭력운동·체제변화운동에 초점을 맞춰 오랫동안 활동해 온 언론인 겸 학자이다. 그의 연구 중 많은 부분은 협동조합과 디지털 기술이 오늘날의 세상에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특히 플랫폼 협동조합을 우버, 에어비엔비 그리고 태스크래빗과 같은 착취적인 사업 모델을 뛰어넘는 수단으로 만들기 위해 활동해 왔다.

슈나이더에게 협동조합의 역사는 큰 영감과 실질적인 가르침의 원천이다. 그는 영국인으로부터 인도인들을 해방하기 위한 전략적 도구로서 협동조합을 수용한 간디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협동조합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세상을 형성해왔지만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일을 하는 한 형태입니다. 가령, 사람들은 협동조합이 시민권 운동의 큰 요소였다는 것을 종종 잘 알지 못하죠.”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신용조합을 시작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열심히 도왔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협동적인 은행업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로 하여금 억압적인 지역 상황으로부터 더 독립적이 되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네이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미시시피 지역의 한 원로 시민+권+운동가를 인터뷰했고 그에게 협동조합이 1960년대에 있었는지 여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죠. ‘당신은 누가 사람들에게 유권자 등록을 하라고 했다고 생각하세요?’”

소작인들은 감히 시민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정치적인 활동을 하면 언제든지 땅에서 쫓겨날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협동조합의 구성원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운동에 참여하기에 충분할 만큼 안전했다. 그는 말했다. “이것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우리 세상의 지형(地形)이다.”

슈나이더는 이 지형을 전면에 내세우려고 노력하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이윤보다 사람을 우선하는 것, 지역 사업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 그리고 공동체에 의한 통제를 강화하는 것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합니다.” 협동조합은 당연한 대응인 것이다.

네이선은 협동조합을 미국의 대세에 진입시키기 위해 두 가지 주요한 전략을 본다. 하나는 1880년대와 1890년대 정치체제의 기반을 흔들기 위해 협동조합을 이용했던 민중주의자들의 방식으로 알려진 솔직하게 정치적인 접근이다. 다른 하나는 소유권과 같은 전 국민이 공유하는 신화를 바탕으로 하는, 덜 적대적이며 합의에 의해 추동되는 접근이다. 그는 루이스 켈소(Louis Kelso)의 ‘우리사주신탁제도(ESOP:Employee Stock Ownership Plan)’의 창안을 사례로 인용했다. 우리사주신탁제도는 직원들이 직장에서 개인의 지분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합법적이고 구조적인 혁신이었으며 동시에 전반적인 노동 문화를 개선하기도 했다.

슈나이더는 협동조합이 자본의 힘을 위협할 수 있을 경우에만 궁극적으로 강력한 운동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은행들에게 경쟁 도전장을 내민 신용협동조합들과 공익사업으로부터 사업을 인수한 지방전기협동조합은 고전적 사례들이다. 네이선에게 다른 협동 기획들보다 플랫폼 협동조합의 미래 힘에 대한 낙관론을 심어준 것은 견고한 대항을 극복한 바로 이러한 풍부한 협동조합의 역사인 것이다.

그러한 목표를 밀고 나가기 위해 슈나이더는 여러 핵심적인 운용기획을 만들어 오고 있으며, 그 기획 중 일부는 미디어 조직에서의 공동체 소유권과 거버넌스를 위한 실천 지향적인 연구 센터인 <미디어 기업 디자인 랩>(Media Enterprise Design Lab)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 <미디어 기업 디자인 랩>은 새로운 금융 제도, 소프트웨어 도구, 교육 전술을 찾아내기 위해 기업가들, 스타트업 프로젝트 그리고 활동가들과 협동한다.

슈나이더는 온라인 프로젝트에서 민주적인 소유권과 거버넌스를 확장시키는 새로운 방법들을 찾는 데 개인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한 노력 중 한 가지는 그렉(Greg)과 하워드 브로드스키(Howard Brodsky)를 포함하는 여러 협동조합 리더들에 의해 만들어진, 협동조합 ‘가속장치’인 <스타트.코업>(Start.Coop)이다. 이 프로젝트는 스타트업 회사들이 투자자들을 찾고 프로젝트 개발에 관한 도움을 얻으며 협동조합 관행과 문화를 더 많이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젝트이다.

네이선은 ‘공동체로 가는 출구’(Exit to Community)라고 알려진 새로운 금융 전략을 개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보통 전통적인 스타트업의 성공한 창립자들은 회사를 월가(Wall Street)나 IT 대기업에 매도하지 않을 수 없다. ‘공동체로 가는 출구’는 실질적인 대안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더 나아가길 원하거나 더 많은 돈을 마련하기를 원하는 기업가들이 그들의 회사를 지역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매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사업을 더욱 목적 지향적이고 사회 지향적이며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으로 유지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슈나이더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커뮤니티 내의 거버넌스 상태를 보고 실망한 바 있는데, 그는 그 상태를 참여 거버넌스가 형식적인 형태로라도 거의 없는, ‘봉건제를 내포한’ 체제라고 부른다. 그는 이런 상황의 개선을 돕기 위해 디지털 커뮤니티들에 기본적인 ‘거버넌스 도구모음’을 제공하는 <커뮤니티룰>(CommunityRule)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통제가 중앙에 집중되고 설립자들이 ‘영원한 독재자들’처럼 행동하는 함정을 피하는 한편 자치를 위한 더 공정하고, 더욱 계몽된 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돕자는 것이 그 취지이다.

 




COVID-19와 자본의 회로

 


  • 저자  : Rob Wallace, Alex Liebman, Luis Fernando Chaves and Rodrick Wallace
  • 원문 : COVID-19 and Circuits of Capital https://monthlyreview.org/2020/04/01/covid-19-and-circuits-of-capital/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먼슬리리뷰』(Monthly Review) 2020년 5월호에 실린 글 “COVID-19 and Circuits of Capital”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5월호라고 하지만 3월 27일에 업로드되었다. (편집자의 말에 따르면 이런 일은 전례가 없다고 한다.) 본 블로그에 직전에 올린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와 싸샤 릴리(Sasha Liley)의 인터뷰에서 라인보는 이 글을 자신에게 생산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로 든다.  “COVID-19 and Circuits of Capital”의 저자들은 모두 네 명이다. 롭 왈리스(Rob Wallace)는 유엔 <식량농업기구>(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와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CDC)의 자문역을 한 바 있는 진화전염병학자(evolutionary epidemiologist)이다. 리브먼(Alex Liebman)은 럿거스대학교(Rutgers University)의 인문지리학 박사과정 학생이다. 차베스(Luis Fernando Chaves)는 질병생태학자이며, 코스타리카의 트레스리오스(Tres Rios)에 있는 <코스타리카 영양 및 건강에 관한 연구교육원>(Costa Rican Institute for Research and Education on Nutrition and Health)에서 상임연구원을 한 바 있다. 로드릭 왈리스(Rodrick Wallace)는 컬럼비아 대학교의 <뉴욕주립 정신의학연구소>(New York State Psychiatric Institute)의 전염병학과의 연구과학자이다. * 정리자의 논평이나 설명은 대괄호 안에 삽입하기로 한다. 

COVID-19와 자본의 회로

 

계산

2002년 이후 가장 독한 호흡기증상 바이러스인 COVID-19는 이제 공식적으로 팬데믹이 되었다. 3월말 현재 도시들이 봉쇄되었고 환자들의 폭증으로 병원들은 응급실과밀화를 겪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의 상황 생략]

임페리얼 컬리지(Imperial College)의 전염병학 팀은 최선의 완화(발견된 환자의 격리와 연장자들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누적환자수의 상승하는 그래프 곡선을 꺾어서 수평에 가깝게 만드는 것)를 이루는 캠페인을 하더라도 미국은 110만 명이 사망할 것이고 환자의 수는 미국에서 가능한 전체 중환자병상 수의 8배가 될 것이라고 추산했다. 질병을 진압하려면 환자격리와 (기관들의 업무정지를 포함한) 공동체 전체의 거리두기 쪽으로 더 나아갈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흥미롭게도 중국을 이런 조치의 대표로 들고 있다.] 이렇게 되면 미국 내의 사망자는 약 20만 명이 될 것이다.[5월 2일 현재 미국의 사망자는 65,711명이다.]

임페리얼 컬리지 팀은 성공적인 캠페인을 적어도 18개월 동안 해야 할 것으로 추산한다. 그 동안 경제가 수축되고 공동체 서비스들이 쇠퇴할 것이다. 이 팀은 가용한 중환자병상의 수에 따라 공동체 격리의 시행을 탄력적으로 운용함으로써 질병통제와 경제 사이의 균형을 맞출 것을 제안한다.

탈렙(Nassim Taleb)이 이끄는 팀은 임페리얼 컬리지의 모델이 접촉자 추적과 호별 모니터링을 포함시키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 모델은, 많은 정부들이 그런 식의 지역봉쇄를 기꺼이 행할 태도이지만 COVID-19는 그러한 태도를 가진 정부들을 제치고 발발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염병의 확산 기세가 쇠퇴하기 시작하고 나서야 많은 나라들이 그런 조치들을 적절한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누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듯이, “코로나바이러스는 너무 과격하다. 미국은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대응할 수 있는 더 온건한 바이러스가 필요하다.”

탈렙 팀은 임페리얼 팀이 어떤 조건에서 바이러스가 절멸(extinction)에 이르는지를 연구하기를 거부하는 점에 주목한다. 여기서 절멸이란 환자수 0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환자들이 새로운 감염의 연쇄를 산출하지 않도록 충분한 고립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에서 감염자와 접촉한 감염 가능자들 가운데 5%만이 나중에 감염되었다. 탈렙 팀은 장기적으로 질병통제와 노동력공급의 보장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마라톤에 들어가지 않고 전면적으로 신속하게 질병을 절멸하는 중국의 프로그램을 선호한다.

이 글의 공저자 가운데 한 사람인 월러스(Rodrick Wallace)는 모델링 전체를 뒤집어엎는다. 비상상태의 모델링은 그것이 아무리 필요하더라도 어디서 언제 시작할지를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구조적인 원인들도 마찬가지로 비상상태의 일부이다. 이 구조적 원인들을 포함해야 경제를 단지 재가동하는 것을 넘어서 나아가는 최선의 대응책을 생각해낼 수 있다고 한다.

전염병 발발에 대비하고 대응하는 데 있어서의 실패는 12월 우한에서 COVID-19가 유출되었을 때 시작된 것이 아니다. 가령 미국에서 실패는 트럼프가 팬데믹 준비팀을 해체하거나 CDC의 7백 개의 자리들을 채우지 않고 두었을 때 시작된 것이 아니다. 연방정부가 2017년의 팬데믹 씨뮬레이션의 결과에 기반을 두고 행동하는 데 실패했을 때 시작된 것도 아니다. 미국이 바이러스 발발 몇 개월 전에 중국에 있는 CDC 전문가의 수를 삭감했을 때 시작된 것도 아니다. (물론 중국 현장에 있는 미국 전문가와의 직접적 접촉을 상실한 것이 미국의 대응을 약화시킨 것은 사실이다.) 또한 이미 사용 가능한, WHO가 제공하는 진단키트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 데서 시작한 것도 아니다. (물론 초기 정보의 지체와 검사의 총체적 결여로 인해 많은 사람들, 필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생명을 잃을 것이다.)[42일 현재 미국 내의 사망자는 65,776명이다.]

실패는 수십 년 전 ‘공공보건의 공유된 커먼즈’가 소홀히되고 화폐의 논리에 종속되면서 [즉 신자유주의의 시작과 함께] 실제로 프로그램되었다. 병상과 정상적 의료활동을 위한 장비가 충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때그때 발생하는 사례에 대응하는 개별화된 전염병학적 치료법에 의해 포획된 나라는 정의상 중국식 통제를 실행하는 데 필요한 자원들을 집결시킬 수가 없다.

이 글의 공저자 가운데 또 한 사람인 차베스(Luis Fernando Chaves)는 ‘숫자가 말하게 하기’는 이미 안에 함축된 모든 전제들을 가릴 뿐이라고 한다. 임페리얼 팀의 것과 같은 모델들은 분석의 범위를 지배적인 사회질서의 틀 안에서 협소하게 재단된 문제들에 명시적으로 국한된다는 것이다. 이 모델들은 그 의도상 전염병의 발발과 정치적 결정들을 추동하는 더 광범한 시장 세력들을 포착하는 데 실패한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그 결과로 나오는 기획들―여기에는 질병 통제와 경제를 위한 통제해제가 교대로 일어나는 동안 죽음을 당할 감염에 취약한 수천 명의 사람들이 포함된다―은 모두의 건강의 확보를 부차적인 것으로 제쳐놓는다. 푸꼬가 말한, 국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인구에 작용을 가하는 것은 영국의 토리 정부와 네덜란드가 제안한 집단면역(herd immunity)이라는 맬서스적인 정책―인구 전체에 바이러스가 퍼지는 것을 방치하는 것―의 (비록 더 자애롭지만) 갱신판일 뿐이다. 집단면역이 전염병의 발생의 중지를 보장하리라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희망일 뿐, 그 증거는 거의 없다. 바이러스는 인구의 면역장막(immune blanket) 아래로부터 쉽게 진화해 나올 수 있다.

 

개입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하나?

종합병원을 국립화한다. 검사의 양을 늘리고 소요시간을 줄인다. 약을 사회화한다. 의료종사자들의 보호를 극대화한다. 인공호흡기 등을 수리할 권리를 확보한다. 렘데시비르와 클로로콰인의 대량생산을 시작하고 임상시험을 수행한다. 인공호흡기와 보건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개인보호장비를 생산하도록 회사들을 강제하고 가장 필요한 곳에 우선적으로 할당한다.

연구에서 돌봄까지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대적인 팬데믹 인력을 바이러스로 인한 수요의 수준에 근접하도록 확충한다. 증가된 환자의 수에 병상과 의료진, 그리고 필요한 장비의 수를 맞춘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COVID-19의 계속적인 공격에서 그저 살아남았다가 나중에 접촉자 추적과 환자격리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지금 당장 충분한 인력을 동원해서 가가호호 COVID-19를 포착해내고 마스크와 같은 필요한 보호장구를 갖추게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수탈을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를 정지시킬 필요가 있다. 질병에서 살아남으려면 말이다.

그런데 그런 프로그램이 실행될 수 있기까지 대다수의 인구가 대체로 방치될 것이다. 정부들로 하여금 하기 싫어도 하도록 지속적인 압박을 가해야 하므로 여건이 되는 사람들은 매일 새로 출현하는 상호부조단체들과 동네단체들에 참여해야 한다. 자원자들이 봉사활동을 하다가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일이 없도록 여력이 되는 전문적인 공공보건요원들이 이들을 훈련시켜야 한다.

바이러스의 구조적 기원을 비상상태 시의 계획과 연계시키는 것은 모든 발걸음이 이윤에 앞서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로 나아가게 하는 데 있어서 핵심이 된다.

많은 위험 가운데 하나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어리석은 생각을 규범화하는 데 있다. 우리는 또 하나의 사스(SARS) 바이러스가 야생의 은신처로부터 나와서 8주 만에 인간이 사는 곳에 전역에 퍼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가 받은 충격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바이러스는 특이식품(exotic food)의 지역 공급라인의 한 쪽 끝에서 출현했으며 다른 쪽 끝인 중국 우한에서 인간에서 인간으로의 감염연쇄를 성공적으로 개시했다. 거기서부터 전염병은 지역으로 확산되기도 하고 비행기나 기차에 올라타기도 하면서 여행에 의해 구조화된 연결망을 통해 그리고 큰 도시에서 작은 도시로 내려오면서 지구 전체에 퍼졌던 것이다.

야생식품시장을 전형적 오리엔탈리즘의 관점에서 보지 말라. ‘특이식품이 어떻게 더 전통적인 가축과 함께 우한에서 가장 큰 시장에서 팔릴 수 있게 되는가?’라는 명백한 질문을 생각해보자. 동물들은 트럭에서 혹은 골목에서 팔리는 것이 아니다. 관련되는 허가증과 대금지불(그리고 그 규제의 완화)을 생각해보라. 전 세계의 야생식품에 투여되는 자본과 산업생산에 투여되는 자본은 동일한 원천에서 나온다. 비록 산출량의 크기는 어디에서도 비슷하지 않지만, 그 구분은 지금 더욱 불투명하다.

중첩되는 경제적 지리는 우한 시장에서부터 특이식품들과 전통적인 식품들이 재배되는 후배지들로 뻗어있다. 산업생산이 가장자리의 숲을 침범할 때, 야생식품업은 더 깊이 들어가거나 가장자리 지역을 공략해야 한다. 그 결과 가장 특이한 병원체들이, 가령 이번 경우에는 박쥐를 숙주로 삼는 SARS-2가, 식용동물들을 통해 혹은 그것을 다루는 노동자들을 통해 트럭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침투

어떤 병원체들은 바로 생산의 중심지들에서 발생한다. 살모넬라(Salmonella)와 캄필로박터균(Campylobacter)처럼 식품을 통해 감염되는 박테리아가 그렇다. 그러나 COVID-19를 비롯한 다수의 병원체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프런티어에서 발생한다. 새로운 인간 병원체의 적어도 60%가 야생동물에서 해당 지역의 인간 공동체들로의 유출(spillover)에 의해 발생한다. 그 다음에 세계의 다른 곳으로 전파된다.

콜게이트-팜올리브(Colgate-Palmolive)와 존슨 앤 존슨(Johnson & Johnson)―이들은 기업식 농업이 주도하는 삼림파괴의 유혈 낭자한 가장자리를 밀어붙이는 회사들이다―으로부터 일부 재정을 지원받는 이들을 포함한 에코헬스(ecohealth) 분야의 여러 전문가들이 이전의 전염병 발발에 기반을 두어 새로운 병원체들이 출현할 법한 곳이 앞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세계지도를 만들어냈다. 색깔이 붉은 색에 가까울수록 새로운 병원체가 출현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었다. 이 지도에서는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와 라틴아메리카 및 아프리카의 일부가 붉다. 그런데 이 지도는 절대적 지리(absolute geographies)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중대한 점을 놓쳤다. 발발 지역에 초점을 두는 것은 전염병학을 형성하는 전지구적인 경제적 요인들이 공유하는 관계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저개발 국가들에서 개발과 생산에 의해 토지사용과 질병출현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후원하는 자본가 세력은 발발의 책임을 토착민들과 그들의 ‘더럽다’고 추정되는 문화적 관행들에 지우는 노력에 보상을 해준다. 야생동물고기를 먹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과 집에서의 시신의 매장이 새로운 병원체의 출현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두 가지 관행이다. 이와 달리 관계적 지리(relational geographies)의 관점에서 보면 갑자기 전지구적 자본의 핵심 원천인 뉴욕, 런던, 홍콩이 세계의 최악의 핫스팟 가운데 세 곳이 된다.

발발지역들은 심지어 전통적인 정치체들에 의해 조직되어 있지도 않다. 불평등한 생태교환이 (이는 산업화된 농업으로부터 온 최악의 피해를 글로벌 사우스에 돌린다) 이제는 국가가 주도하는 제국주의에 의한 지역 자원 약탈의 방식이 아니라 다양한 규모와 상품이 관련되는 새로운 복합체의 형태로 일어난다. 기업식 농업은 그 추출주의적 작업을 상이한 규모의 영토들을 가로지르는 공간적으로 불연속적인 네트워크들로 전환시켰다. 가령 일련의 다국적기업 기반의 ‘콩 공화국들’(Soybean Republics)은 현재 볼리비아,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에 걸쳐있다. 이 새로운 지리는 회사관리구조, 자본조달, 하청, 공급체인대체, 임대 그리고 초국적 토지공동이용(land pooling)에서의 변화에 의해 구체화된다. 이 ‘상품 공화국들’은 여러 국경 사이에서 여러 생태들과 정치적 경계들을 가로지르면서 새로운 전염병학적 현상들을 산출하고 있다.

전염병의 발발과 관련하여 도시와 시골을 나누는 이분법은 시골이 도시 주변의 ‘desakotas’(city villages, 도시 마을들)나 ‘zwischenstadt’(in-between cities, 사이 도시들)로 전환되었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그 결과 병원체의 원초적 원천인 숲질병 동학은 이제 후배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와 연관된 전염병학적 현상들도 관계적이 되었으며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사스(SARS) 같은 것이 박쥐 동굴에서 나온 지 며칠 만에 대도시의 인간들에게로 전파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야생’ 바이러스들이 열대림의 복잡성들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통제되었던 생태계들은 자본이 주도하는 삼림파괴와 공공보건 및 환경위생의 결핍에 의해 철저하게 간소화되고 있다. 많은 야생 조수(鳥獸)에서 발생하는 병원체들은 숙주와 함께 죽지만, 숲에서 상대적으로 빠르게 퍼졌던 일부 병원체들이 이제는 감염에 취약한 인간집단(이들의 취약성은 종종 도시들에서 긴축정책과 부패에 의해 부실해진 규제에 의해 심화되고 있다)을 가로질러 증식하고 있다. 효과가 있는 백신이 있어도 발발한 전염병은 이전보다 더 큰 범위, 더 긴 지속기간, 더 큰 동력을 가진다. 한때 지역에 국한된 유출(spillover)이 지금은 전 지구를 가로지르는 유행병이 된 것이다.

이렇게 환경이 변한 것만으로 에볼라(Ebola), 지카(Zika), 말라리아(malaria), 황열병(yellow fever) 같은 예전의 전형적 병들이 (이는 비교적 진화를 적게 한다) 위협적이 되었다. 이 병들은 먼 마을들로 유출되고 다시 큰 도시들로 퍼져 수천 명을 감염시켰다. 오랜 동안 질병의 저장소였던 야생동물들도 블로우백(blowback)을 겪고 있다. 적어도 100년 동안 노출되어온 야생유형의 황열병에 걸리기 쉬운 토착 신세계원숭이들(New World monkeys)은 삼림파괴에 의해 뿔뿔이 흩어져서 그들의 집단면역 능력을 잃고 있으며 수십만 마리씩 죽어가고 있다.

 

확산

기업화된 농업은 여러 기원을 가진 병원체들을 가장 멀리 있는 저장소로부터 가장 국제적인 인구 중심지들까지 이동하게 하는 동력이자 그러한 이동의 연결망으로서 기능한다. 이를 통해 새로운 병원체들이 농업 공동체들로 침투한다. 연관된 공급체인이 길수록, 그리고 연관된 삼림파괴의 범위가 클수록 푸드체인에 진입하는 동물원성 병원체들이 더 다양해진다. 최근에 (재)발생한 식품에 의해 전달되며 인간의 활동에 의해 유발되는 범주에 속하는 병원체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속한다. African swine fever, Campylobacter, Cryptosporidium, Cyclospora, Ebola Reston, E. coli O157:H7, foot-and-mouth disease, hepatitis E, Listeria, Nipah virus, Q fever, Salmonella, Vibrio, Yersinia ( 그리고 H1N1 (2009), H1N2v, H3N2v, H5N1, H5N2, H5Nx, H6N1, H7N1, H7N3, H7N7, H7N9, H9N2를 포함하는 다양한 신종들).

아무리 의도치 않았다고 해도 생산의 전체가 병원체의 유독성의 진화와 전염을 가속화하는 관행들을 중심으로 조직되고 있다. 점증하는 유전자 단작(monoculture)―거의 동일한 게놈을 가진 식품용 동물과 식물―이 전염속도를 늦추는 방역 방화벽을 제거한다. 지금 병원체들은 평상적인 숙주 면역형질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진화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인구밀집이라는 조건이 면역반응을 억제한다. 농장의 동물 개체수의 크기와 밀집도가 더 신속한 전염과 반복적인 감염을 촉진한다. 산업생산의 특징인 큰 처리량은 취약개체들의 공급을 계속 갱신하여 병원체의 치명성의 상한선을 제거한다. 동물들을 한 건물에 몰아넣는 것은 가장 잘 퍼질 수 있는 변종에게 유리한 조건이다. 점점 더 빨라지는 도살 시기―닭의 경우에는 6주―는 병원체들이 더 튼실한 면역체계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데 유리할 가능성이 높다. 산 동물의 교역의 범위가 넓어짐으로써 게놈의 다양성이 증가되고 연관된 병원체들이 교환되어 그 진화 가능성의 탐색 속도가 빨라진다.

병원체의 진화가 이런 식으로 빠르게 이루어지지만 개입은 심지어는 산업 자체가 요구하는 경우일지라도 (전염병이 발발한 비상상태에서 한 분기의 재정수익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것 말고는) 거의 없거나 하나도 없다. 전체적인 경향은 농장들과 가공공장들에 대한 정부의 감시가 점점 더 줄어들고 정부의 감시와 활동가의 폭로에 반대하는 입법이 이루어지며 치명적인 전염병 발발의 세부에 관해 미디어를 통해 보도하는 것을 금지하는 입법이 이루어지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농약과 식용돼지의 오염에 맞선 법정 싸움에서 최근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민간기업의 생산은 여전히 전적으로 이윤에 초점을 맞춘다. 전염병의 발발로 야기된 피해는 가축, 농작물, 야생, 노동자들, 지역 및 일국 정부들, 공공보건 시스템들에 외화되며, 자국의 우선성이라는 태도로 인해 해외의 대체 농업시스템들(agrosystems)로 외화된다. 미국에서 CDC는 식품에 의해 전달되는 전염병 발발이 여러 주들과 감염된 사람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즉, 자본이 초래하는 소외는 병원체에게 유리하게 작동한다. 공공 이익은 농장 및 식품공장의 문에서 걸러내어지는 한편, 병원체들은 산업이 기꺼이 돈을 지불하려는 바이오안전을 지나쳐 퍼지고 공중에게로 되돌아간다. 매일 이루어지는 생산은 우리의 공유된 건강 커먼즈(health commons)를 갉아먹는 수지맞는 도덕적 해이를 내장하고 있다.

 

해방

바이러스의 발생지에서 지구의 반만큼 떨어져 있는 뉴욕, COVID-19 때문에 이동제한이 걸려있는 뉴욕에 아이러니가 있다. 3년 전 골드만삭스(Goldman Sachs), 제이피모건(JPMorgan), 아메리카은행(Bank of America), 시티그룹(Citigroup), 웰스파고(Wells Fargo & Co). 그리고 모건스탠리(Morgan Stanley)는 연방정부의 비상대출금의 63%를 취했다. 골드만삭스는 중국의 거대한 기업식 농업의 일부를 차지하는 Shuanghui Investment and Development의 주식 60%를 취했다. Shuanghui Investment and Development는 미국에 본사를 둔 Smithfield Foods―세계에서 가장 큰 식용 돼지고기 생산회사―를 샀다. 또한 골드만삭스는 3억 달러로 푸젠성과 후난성―우한의 바로 아래 지역이며 도시의 야생식품 조달권 내에 있다―에 있는 10개의 가금농장의 소유권을 얻어냈다. 또한 도이체방크(Deutsche Bank)와 함께 같은 지역의 식용 돼지사육에 3억 달러를 투자했다. 이렇듯 COVID-19의 발발의 원인들의 고리의 일부는 애초에 뉴욕에서 뻗어나가고 있다. 중국의 농업의 크기에 비해 골드만삭스의 투자가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말이다.

트럼프가 인종주의적으로 ‘중국 바이러스’ 운운하는 것과 같은 민족주의적인 손가락질은 국가와 자본이 서로 전지구적으로 엮여있는 상황을 가린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발생하며 국가가 관리하는 것으로 되어있는 팬데믹은 체제의 관리자들과 수혜자들이 번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2월 중순에 5명의 미국 상원의원들과 20명의 하원의원들은 팬데믹이 오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은 산업분야들에서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수백만 달러의 주식을 싼 값에 팔았다. 정치꾼들은 팬데믹이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다는 공적인 메시지가 계속적으로 나오는 가운데 대중에게는 발표되지 않은 정보를 기반으로 내부자거래를 했다. 미국의 부패는 이런 이기적인 탈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에 걸친 것으로서 자본이 빠져나갈 때 미국의 자본축적 사이클이 종말을 맞음을 알리는 표시이다.

생태학(그리고 그와 연관된 전염병학)의 현실보다 금융을 더 우위의 놓는 사물화된 태도를 중심으로 자본의 물줄기가 계속 분출되도록 하려는 노력은 무언가 좀 시대착오적이다. 이런 노력의 관점에서 보면 팬데믹은 가령 골드만삭스에게도 성장의 여지를 제공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살육에 섬뜩해진 전 세계의 사람들은 이와 다른 결론들을 낸다. 병원체들이 방사성 꼬리표(radioactive tags)[‘방사성 꼬리표달기’는 어떤 원소의 정상적인 동위원소를 방사성 동위원소로 대치하여 그 원소를 추적하는 것을 가리킨다]처럼 차례차례 표시하는 자본과 생산의 회로들은 터무니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우리 그룹은 치명적인 질병의 출현을 낳은 삼림파괴를 항상 토착민들과 지역 소자작농들 탓으로 돌리는―에코헬스(ecohealth)[Ecohealth Alliance를 말하는 듯하다]와 <원 헬스>(One Health)에서 발견되는―근대의 식민 의료를 넘어서는 모델을 도출하는 중이다. [주석으로 달린 “The dawn of Structural One Health: a new science tracking disease emergence along circuits of capital”의 저자들―일부 저자들이 이 글의 저자들과 겹치는 것으로 보아서 두 글의 입장은 동일한 듯하다―은 ‘One Health’가 가축유행병 유출의 사회적 규정요인들을 통합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 이 결핍을 메운 자신들의 모델을 ‘구조적 원 헬스Structural One Health’라고 부르고 있다.]

신자유주의적인 질병 출현에 대한 우리의 일반이론은 아래와 같다.

자본의 전지구적 회로가 근본적인 문제다. 더 구체적으로는 유독한 병원체들의 개체수의 성장을 억제하는 환경복합성을 파괴하는 식의 자본 배치가 문제다. 그 결과로 병원체가 유출되는, 즉 원래의 야생동물 숙주에서 나와 인간 공동체로 진입하는 사건들의 속도와 분류학상의 폭이 증가한다. 도시 주위의 확장된 상품회로들이 이 유출된 병원체들을 가축과 노동력을 매개로 후미진 지역에서 해당 지역의 도시들로 옮긴다. 증가하는 전지구적 여행(및 가축 교역) 네트워크가 병원체들을 이 도시들에서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재빠르게 배달한다. 이 네트워크들이 전염과정에서의 마찰을 낮추어 가축과 인간 모두에서 더 치명도가 높은 병원체의 진화를 가능하게 한다. 가축의 생식이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즉석에서 (그리고 거의 무상으로) 질병으로부터의 보호를 제공하는 생태계 서비스인 자연선택이 제거된다.

심층에 있는 전제는, COVID-19와 그와 같은 기타 병원체들의 원인은 어떤 한 감염원이나 그 임상과정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 및 기타 구조적 원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고정시켜 놓은 생태계 관계들의 장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탈소외(disalienation)가 다음의 거대한 인간의 이행방향이다. 정착자 이데올로기를 버리는 것, 인류를 재생성의 순환으로 되돌리는 것, 자본과 국가를 넘어서 다중들 속에서 개인화의 의미를 다시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원인을 경제에서만 보는 것은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머리가 여럿인 히드라로서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전유하고 내화하고 질서짓는다. 자본주의는 인종, 계급, 젠더가 복잡하게 서로 연결되어있는 지형을 가로질러 작동한다.

우리는 탈소외를 통해 이 다양한 억압의 위계들과 이 위계들이 지역마다 특수하게 축적과 상호작용하는 방식들을 해체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본의 확대되는 재전유의 반경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일종의 전체주의로 귀결되는 것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화한다. 심지어는 지속 가능성 자체도 상품화된다. 그리고 이는 공장과 농장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어디서나 온갖 방식으로 시장에 종속되어 있다.

자본 및 자본의 지역 대표자들과의 전지구적 규모의 충돌이라는 문을 통과해야 한다. 기업식 농업은 공공보건과 전쟁을 하고 있으며, 공공보건이 지고 있다. 이 싸움에서 이긴다면, 우리의 생태를 경제와 다시 연결하는 전지구적 물질대사로 되돌아갈 수 있다. 이는 유토피아적인 문제 이상의 것이다. 우리는 직접적인 해결책들에 집중한다. 병원체의 성장을 억제하는 숲의 복잡성을 보호한다. 가축 및 농작물의 다양성을 다시 도입하며, 병원체의 유독성의 증가와 범위 확대를 막는 범위의 동물사육 및 농작물 재배를 재도입한다. 동물들의 현장에서의 자연생식을 허용하여 병원체를 실시간으로 추적하게 하는 자연선택을 재개한다. 크게 보면,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으로 가득한 자연과 공동체를 시장에 의해서 제압되어야 할 또 하나의 경쟁자로 취급하기를 그친다.

하나의 세계를 탄생시키는 것―바로 이것이 우리의 출구이다. 지구로 되돌아간다고 말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또한 현재의 절박한 문제들의 다수를 해결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뉴욕에서 베이징까지 이동제한이 걸려 집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그런 발발을 다시 겪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전염병은 그간의 역사 대부분을 볼 때 때이른 죽음의 가장 큰 원천이었기에 언제나 위협이 된다. 우리는 1918년부터 지금까지의 100년의 시간보다 더 짧은 시간 내에 또 하나의 치명적인 팬데믹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자연을 전유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조정하여 이 전염병과의 더 나은 휴전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라인보가 말하는 팬데믹의 긴 역사

 


  • 저자  : Peter Linebaugh, Sasha Liley
  • 원문 : Peter Linebaugh on the Long History of Pandemics (https://kpfa.org/episode/against-the-grain-april-8-2020/)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Pacifica radio>의 프로그램 ‘Against the Grain’에서 2020년 4월 8일에 있었던 싸샤 릴리(Sasha Liley)와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의 인터뷰 내용을 (약속한 대로^^) 정리한 것이다. 이 인터뷰는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의 상황에서 라인보가 30년 전인 1989년에 쓴 팸플릿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의 메시지를 다시 살펴보고 있다. 인터뷰 당사자들에 의해 읽기 좋게 편집된 텍스트는 정리자가 알기에 현재로서 없으며, 정리자가 직접 팟캐스트를 듣고 핵심적인 내용을 정리했다. 내용 정리이지만, 잘 읽힐 수 있도록 인터뷰의 형식과 어투는 유지했다.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의 내용을 이미 정리해서 옮겼으니 서로 교차해서 참조할 수 있다.

라인보가 말하는 팬데믹의 긴 역사

싸샤 릴리(Sasha Liley)
인간의 역사 전체에 걸쳐서 바이러스들과 기생체들이 인간을 괴롭혀왔습니다. 계급사회의 출현 이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노동과 고통에서 이익을 취하는 엘리트 집단이라는 기생체들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역사가 피터 라인보(Perter Linebaugh)는 HIV 에이즈라는 유행병이 도는 와중에 이 역사를 추적한 바 있습니다. 라인보는 『마그나카르타 선언』(The Magna Carta Manifesto), 『메이데이의 완결되지 않은, 진실하고 진정하며 놀라운 역사』(The Incomplete, True, Authentic, and Wonderful History of May Day) 등의 저자입니다. 가장 최근의 저서로는 『뜨겁게 불타는 붉고 둥근 지구』(Red Round Globe Hot Burning)가 있습니다. 라인보, 당신은 1989년에 <ACT UP>(the Aids Coalition To Unleash Power, 민중의 힘을 촉발하기 위한 에이즈연합)에 관여하는 사람들에게 연대의 메시지를 전한 바 있는데요, 당신이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Lizard Talk”)라고 이름을 정한 팸플릿을 쓰게 된 맥락에 대해서 말씀 좀 해주시겠어요?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
저는 보스턴에서 <ACT UP>이 한창 투쟁을 하는 가운데 이 팸플릿을 썼습니다. 저는 역병에 맞서는 인간의 투쟁에 대한 우리의 기억 자체가 우리의 힘을 고양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전의 세계사에 일어났던 10개의 역병들을 간단히 알아보는 일이, [COVID-19 팬데믹을 겪고 있는] 지금 우리는 오래 전부터 해온 싸움의 와중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줄 수 있으며, 그로써 이 질병을 인종주의적 방식으로, 동성애혐오증적 방식으로 그리고 타자에 대한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식으로 활용하려는 시도에 맞서는 데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조성되는 공포가 불안정과 공포의 조건에서 번성하는 신자유주의와의 연결고리입니다.

릴리
당신은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에서, 역병이 도는 때는 민중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는 때이지만 동시에 사회 질서를 전복할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고대 그리스, 이집트로 가서 이 점에 대해 고찰합니다. 역사가의 눈으로 이러한 사회 질서의 전복 가능성에 대해 좀 말씀해 주시겠어요? 민중이 겪는 공포, 혼란 그리고 가난의 심화라는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또한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이라는 측면에서요.

라인보
우선적으로 말해야 할 핵심은 전염병, 역병, 팬데믹이 치명적이라는 점, 즉 인간 개인들, 가족들, 공동체들을 파괴하며 때로는 인간의 생존 자체를 파괴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역병들은 사회적 삶의 재생산이라는 기획 일체와 필수적인 연관을 가집니다. 그래서 전염병들은 적어도 과거에는 역사적인 힘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전염병들에 대한 여러 대응들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가령 대략 2000년 전인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인간의 질병 유전자풀이 지중해 지역에서 형성되었습니다.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 최초로 혼합된 것이지요. 아마도 이는 대륙간 통상의 한 측면일 겁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강력한 종교들이 (일신론적 종교들입니다) 형성되었습니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가 ‘기축시대’(axial age)를 말할 때 그는 이 종교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Achsenzeit(Axial Age)’라는 말은 1949년 출간된 야스퍼스의 저서 『역사의 기원과 목표』(Vom Ursprung und Ziel der Geschichte, The Origin and Goal of History)에 처음 등장하며, 기원전 800년에서 300년 사이에 페르시아, 인도, 중국, 그리스-로마의 종교와 철학에서 병렬적으로 새로운 사고방식들이 등장한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당시에는 도시국가라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도 형성되고 있었지요. 이때에는 사람들이 전염병들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신들이 이 질병들을 발생시킨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박테리아도 알지 못했고 바이러스도 알지 못했으며 세포생물학도 없었습니다. 수천 년을 지나 바로 우리 시대에 들어와서야 이런 것들을 알게 된 것이지요.

도시 전체가 지워져버릴 수도 있는 그러한 위기에서 그에 대한 여러 계급적 반응이 있었습니다. 저를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로 이끈 허스턴(Zola Neale Hurston)은 파라오와 맞선, 지팡이를 든 모세를 이야기합니다. 허스턴이 말하고 싶은 것은 역병·기근·기아를 마음대로 부리는 파라오를 물리치는 모세의 힘, 그의 대항마법(counter-magic)입니다. 이 대항마법은, 흑인 민속지식에 대한 허스턴의 지식에 따르면, 모세가 파라오의 마구간지기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이 마구간지기는 이 마법을 말들 사이에서 일하면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 지식을 모세에게 공짜로 준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멘투(Mentu)가 해주는 ‘도마뱀 이야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독자들에게 전염병들을 아래로부터 보기를 권하기 위해, 파라오나 벼락을 던져대는 야훼를 제시하는 위로부터의 역사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역사로서 보기를 권하기 위해 ‘lizard talk’라는 어구를 사용했습니다. [‘lizard talk’는 허스턴의 소설에서 다음 세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①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크게는 세상의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역사, 작게는 인간의 여러 행동들에 대한 논평). ② 멘투가 도마뱀이 해주듯이 해주는 이야기(이야기의 내용은 ①과 같다). ③ 멘투가 해준, 도마뱀(및 기타 동물들)도 이러저러한 말을 한다는 이야기. 나중에 (멘투는 이미 죽고 없는 때이다) 모세는 ‘기억들의 보관자’(keeper of memories)인 ‘수염난 도마뱀’을 찾아간다. (이때 모세는 예전의 멘투처럼 도마뱀과 대화를 할 수 있다.) 소설의 말미에서 모세는 우연히 만난 늙은 도마뱀에게 ‘수염난 도마뱀’이 시나이 산에 있다는 말을 듣고 시나이 산을 찾아가는데 아마도 거기서 그가 ‘수염난 도마맴’에게 들을 ‘liard-talk’는 기독교의 정사에 나오는 야훼에게서 받은 십계명과 대조될 터이다. 전자는 아래로부터의(from below) 지식을 나타내고 후자는 위로부터의(from above) 지식을 나타낸다.]

이것이 아래로부터의 역사의 시작입니다. 그 마구간지기의 이름인 ‘멘투’를 다시 언급하게 되니 반갑군요. 제 의도는 지상의 힘, 우리 인간의 힘, 우리의 공통적인 힘이 지배자들의 손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힘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종종 우리도 잘 모르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작동하지만 말입니다. 이는 팬데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물론 팬데믹에 대한 지식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여러 모습의 멘투들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과학에서도, 경험에서도 오지요. 어떻든 저의 주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죽음의 문턱에서 고통을 겪는 다중과 지배계급을 대조시키는 것, 힘의 두 형태를 대조시키는 것. 그것이 역사적인 역병들의 경우에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파라오를 다룬 다음, 투키디데스와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의 역병들을 다루고, 로마 시대의 역병들을 다루며 물론 중세의 중앙 유럽을 강타한 큰 역병들을 다룹니다. 이런 식으로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가 계속됩니다.[라인보=도마뱀=멘투]

제가 <ACT UP>에 그런 메시지를 전한 것은 <ACT UP>이 우리에게 새로운 모델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ACT UP>의 현장 활동가들은 발견·조사를 하도록 촉구할 수 있었으며, 그 자신들이 깊이 고통을 겪은 사람들로서 치료를 낳을 수 있는 지식을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해결책이 질병을 겪는 사람들에게 남아있게 됩니다. 이것이 ‘공공보건의 커먼즈’(the commons of public health)의 주된 원리입니다.

릴리
우리가 사회적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집단적으로 함께 모여야 하는데, 무심코 행한 사회적 상호작용조차도 바이러스를 퍼지게 할 수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 같은) 팬데믹의 시기에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과 같은 시기에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모순입니다.

라인보
네, 정말 큰 모순입니다. 에이즈위기에서 우리가 배운 것, 그리고 이전의 전염병들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조금 전에 말했듯이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서 치료법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도시봉쇄(lock-down)는 아니지만―집에 있으면서 외출을 자제해야 하고 공동체적 관계들이 정지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간호, 배고픈 사람들을 돌보기, 죽은 사람들을 묻기와 같은 일들은 아무리 끔찍한 인간의 위기상황에서도 남아있습니다. 자애를 베푸는 인간의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픈 사람들과 관련하여 일하는 것. 죽은 사람들과 관련하여 일하는 것은 대중모임의 금지나 기타 형태의 공동체적 활동들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인간애의 엄청난 재천명인 것입니다. 그리고 알다시피 상업활동은 종종 가장 최소로, 혹은 가장 나중에 정지되지요.

릴리
정말 그렇습니다. 또한 팬데믹의 시기에 특징적인 것은, 당신이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에서 고대 역사를 되돌아보며 말했듯이 상이한 이념들과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점입니다. 당신이 말했던 아래로부터의 지식과 같은 것도 있고 반대로 우리를 일종의 숙명론이나 현실수용적 태도로 몰고 가는 것도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어요? 제가 뜻하는 것은 가령 당신이 언급한, 옛날의 종교들이 팬데믹 시기에 한 복합적인 역할들 같은 것입니다.

라인보
네, 그러죠. 계급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문제를 두 방향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배계급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피억압계급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입니다. 이는 종교에도 적용되고 전염병들에도 적용됩니다. 제 생각에는 거의 모든 것에 적용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위로부터 사고하는 데만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뉴스에서 들은 것, 학교에서 배운 것을 그냥 받아들입니다.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의 요지는 멘투를 다시 도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팸플릿은 종교의 사회학이 아니며 분명 포괄적이지도 않습니다. 저는 <ACT UP>의 활동에 고취되고 역병의 역사를 다룬 맥닐(William McNeill)의 책[Plagues and Peoples, 1976]에 촉발되어 이 팸플릿을 썼습니다.

아시겠지만, 최근 『네이션』(The Nation)지에서 『뉴요커』(The New Yorker)지에 이르기까지 작가들이 우리가 읽을 책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각자 집에 있는 동안 책을 읽으라는 거지요. 학자인 저도 책을 읽습니다만, 생각해보면 보카치오의 『데카메론』(Decameron)은 도시를 도망칠 여유가 있던 부유한 층을 위해서 그리고 그 부유한 층에 대해서 쓴 작품입니다. 『데카메론』에 담긴 이야기들은 모든 각본작가들의 책꽂이의 사전 옆 자리에 놓여있습니다. 100개의 플롯들을 엔터테인먼트산업을 위해 다시 다듬기 위해서죠. 이 이야기들은 선페트스(bubonic plague)가 돌고 있던 1340년대에 동포 인간들을 놔두고 피렌체를 도망친 사람들이 스스로를 즐겁게 할 수단으로서 한 것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죽었는데 말이죠. 이렇게 오락으로 의도된 형태의 작품이 지금까지 남아있게 된 것이에요. 물론 이 이야기들 자체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당연히 대단한 이야기들이죠.

릴리
당신은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에서 유행병의 문학은 도피의 문학이라고 썼습니다. 문학창작가들이 지배계급으로부터 보수를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지배계급의 대응은 그것이 존재할 경우에는 언제나 매우 위험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바로 이런 동학을 거론했습니다. 바로 지금 사람들이 생산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상상의 세계로 도피하는 현상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라인보
물론이죠, 저도 넷플릭스(Netflix) 앞에 딱 붙어 있습니다만, 이는 저에게 특별히 생산적이지 않습니다. 공공보건 전문가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생산적입니다. 저는 가령 핫스팟이 되고 있는 여기 미시건주의 디트로이트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도 계속 알려줄 수 있는 공공보건 간호사에게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알싸이드 박사(Dr. Abdullah Al Said)가 COVID-19와 연관된 더 심층적인 하부구조 차원의 광범한 유행병에 대해서 하는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물 공급의 거부, 삶에서의 안전의 거부, 주택의 거부가 바로 이 하부구조 차원의 유행병입니다. 지구에서 가장 큰 담수저장소(fresh water reserve)가 있는 미시건 주인데 디트로이트에서는 물공급이 끊겼고 플린트에서는 물에 납이 섞여 들어갔습니다. [디트로이트 시 당국은 2014년부터 수도료를 내지 못하는 가구들에 수돗물의 공급을 끊었고 시민들은 이에 맞서 투쟁을 조직해왔다. 한 미시건 지역 뉴스잡지의 2020년 3월 26일자 기사에 따르면 2019년에만 23,000 가구에 수돗물 공급이 차단되었다. 시당국은 COVID-19 국면에서도 처음에는 이 물공급차단(water shutoffs) 정책을 유지하려 했는데, 손을 씻는 것이 COVID-19의 확산을 막는데 필수적이라는 여러 전문가들의 확정된 견해로 인해서 정책을 바꾸어 3월 9일에 수돗물 서비스를 재개했다. 월 25달러를 내면 수돗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데, 수도료 지불은 팬데믹 국면 이후로 연기된다. 디트로이트 시장은 팬데믹이 끝나면 다시 공급중지가 재개된다고 말했다. 한편 2014년 플린트 시는 수원을 디트로이트의 물(휴런Huron호)에서 플린트강물로 바꾸었는데, 물에 부식방지제를 넣지 못하여 오래된 관의 납이 침출되어 공급되는 물로 섞여 들어가는 일이 벌어졌다. 그 결과 높은 수준의 중금속 신경독을 발생시켰고 10만 명 이상이 주민들이 납에 노출되었다. 이와 관련된 본 블로그의 글로 http://commonstrans.net/?p=859 참조.]

이는 그저 악행이거나 사고가 아니라 범죄입니다.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물에 대한 요구를 짓밟은 의도적 범죄입니다. 물을 마시지 못하는 것. 신선한 식품을 먹지 못하는 것, 지붕으로 비바람을 막지 못하는 것―이것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일으킨 COVID-19의 가속적인 확산의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알싸이드 박사는 (그는 디트로이트보건국의 국장을 지낸 바 있으며 존경받는 전염병학자입니다) 바로 이 점을 분명히 하며, 저도 과거의 역병들을 훑어보면서 각 역병이 그 당시에 인간이 창출한 사회·경제적 구조들과 특수한 연관을 가진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도시의 거주지이든 상업자본주의든 심지어는 미국과 같은 거대한 부르주아 공화국이든 말이죠.

아시다시피 미국은 인종주의 및 강도질[무엇보다 백인 정부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땅을 강탈한 것을 가리킨다]과 긴밀한 연관을 가진 곳입니다. 인종주의와 강도질은 흑인들이 당시 수도인 필라델피아 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했던 1793년 황열병이 돌던 때에 생겨나서 매우 빠르게 퍼졌습니다. 이때 흑인들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았고 아픈 사람들을 간호했으며 시체들을 매장해주었습니다. 이들은 면역력을 얻거나 황열병에서 살아남아서 목숨을 걸고 이런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이런 착한 사마리아인들이 아이티에서 온 사람들로 악마화되었습니다. [‘아이티에서 온 사람들’은 1950년대에 오면 매카시즘의 ‘빨갱이’로 대체된다.] 이때 아이티에서는 세계사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들 가운데 하나가 한창이었죠.

릴리
막 언급하신 시기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18세기 말에 그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황열병의 발발이 그 때의 정치를 아래로부터 그리고 위로부터 어떻게 형성했나요?

라인보
먼저 위로부터 일어난 일을 보면.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은 도시에서 도망쳤고요, 해밀턴(Alexander Hamilton)도 도망갔습니다. 대부분이 일신의 안전을 위해서 수도를 떠났어요. 이런 식으로 그들은 군사 공화국을 보존하여 오하이오강 계곡(the Ohio river valley)을 포위하고 애팔래치아산맥을 넘고 포타와토미족(Potawatomi)[미시시피강 상부와 오대호 서부에 살았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쇼니족(Shawnee)[오하이오 계곡 지역에 살았던 북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및 기타 그곳에 사는 많은 부족들로부터 땅을 훔치는 데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황열병은 그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흑인들을 악마화했던 것입니다.

이때는 세계사에서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진 두 일이 일어났던 때입니다. 그 하나는 황열병이 강타하기 몇 달 전인 1793년 2월, 도망노예법(fugitive slave act)[특정 주에서 다른 주 또는 영토로 도망간 노예의 반환을 규정한 법]이 조지 워싱턴의 서명으로 통과된 일입니다. 이로써 백인우월주의(white supremacy), 미국 전체의 노예들에 대한 백인의 지배가 확대되었습니다. 둘째는, 1793년 봄에 일어난 일인데요, 조면기(the cotton gin)의 발명입니다.[발명가 휘트니Eli Whitney가 발명했으며 1794년에 특허를 획득했다.] 이 기술이 면화체제의 남부로의 확대, 인도의 면화생산의 파괴, 이집트와 오토만 제국의 면화생산의 파괴를 가능하게 하고 영국에서의 공장체제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제 아래로부터 일어난 일을 봅시다. 우리 모두 1793년 황열병 발발 시 멘투가 누군지 알 것입니다. 한때 노예였던 압살롬 존스(Absalom Jones)와 리처드 앨런(Richard Allen)입니다. 앨런은 아프리카감리교감독교회(AME Church, African Methodist Episcopal Church)를 만들었고 이 교회는 그 이후 일종의 공동체가 유지되는 한 형태로서 존속했습니다. [존스와 앨런은 감리교에서 설교를 하도록 승인받은 흑인 목사 가운데 속했다. 존스와 앨런은 Free African Society (FAS)를 창립했으나, 1794년 이후 일의 방향이 달라서 각기 다른 길을 갔다. 둘은 평생 친구로서, 협력자로서 남아있었다.] 이는 백인우월주의가 가진 인종주의의 직접적 결과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교회에서 [인종차별로 인해] 배격당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분명 황열병의 결과로 아래로부터 일어난 다른 움직임들도 있을 것입니다.

릴리
남·북아메리카에서 일어난 이런 일들은 유럽인들이 남·북아메리카에 가져온 전염병이 끼친 엄청난 영향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 점에 대해 말해주시겠습니까? 이른바 신세계의 발견과 남·북아메리카를 재형성하는 데서 질병과 정복이 교차하는 모습에 대해서요?

라인보
1420년과 1600년 사이에 14개의 유행병이 멕시코를 유린했고 17개가 페루를 강타했습니다. 대부분 천연두였습니다. 정복된 지 10년 만에 멕시코의 인구는 2500만 명에서 1700만 명으로 감소했으며 1620년쯤에는 200만 명으로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천연두 및 다른 두 전염병이 저지른 집단학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배운 것은, 유럽인들이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아 광산에 가두고 과도하게 노동을 시킨 것이 이러한 거대한 말살을 거들었다는 점, 그래서 천연두의 확산과 착취의 형태들은 쉽게 분리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매더(Cotton Mather)는 뉴잉글랜드에서 1616-1617년에 돈 전염병이 “저 해로운 자들을” 숲에서 몰아냈다고 했습니다. 집단학살에 전염병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이죠. 이런 일은 한 세기 후인 1760년대에 앰허스트(Amherst) 장군에 의해서도 벌어졌는데, 그는 지금은 펜실베이니아인 곳의 원주민들을 해치기 위해 의도적으로 천연두 바이러스로 잔뜩 감염시킨 자선 담요들을 원주민들 사이에 배포했습니다.

이렇듯 이제 전염병은 전쟁의 도구, 지배계급의 도구, 집단학살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의 이런 부분을 보면 끔찍하고 극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계급파괴에 다시 한 번 굴복하지 않으려면 이것을 꼭 붙잡아 기억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제가 ‘계급파괴’라고 할 때 이는, 온갖 형태의 지배계급이 그 힘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지배를 받는 피억압자의 일부를 파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일이 이른바 유럽과 아메리카의 최초의 조우 시기에 일어났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릴리
그것은 또한, 당신이 말한, 황열병에 의한 죽음과 노예상태와 광산에서의 과도한 노동으로 인한 죽음을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상기시켜줍니다. 사회가 일종의 환경결정론[전염병은 자연적 환경에 의한 것이지 인재가 아니라는 생각]의 관점에서 전염병들을 받아들이도록 형성되어온 것으로 고대부터의 역사를 그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적 결정들)의 역할을, 사태의 사회적 맥락을 잊을 수 있고, 이른바 자연적 재해의 결과를 이해하는 데서 사회·정치적 맥락이 결정적임을 잊을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라인보
물론입니다.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의 요점은 거시기생체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미시기생체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사회·경제적 역사는 바이러스 같은 미생물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릴리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에서 당신이 상기시켜주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유행병들이 지배층의 정치와 지배층의 대응들을 형성해온 역사를 기억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것. 즉 당신이 “우리 자신의 코뮤니즘의 상실된 역사”라고 부른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나요?

라인보
그것은 우리의 공통적 삶을 지속하고 유지하는 인간의 생존능력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보건커먼즈에의 접근, 공기·물·주택의 커먼즈(공통재)에의 접근을 유지하는 능력이지요. 이는 지배계급이 준 선물이 아닙니다. 지구에서의 우리의 삶을 위해 모두가 향유해온 커먼즈입니다. 그리고 수천 년 동안 지배체제 아래에서, 최근에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수 세기 동안, 더 최근에는 우리의 생애 동안 강탈된 것입니다. 이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이해하는 데 전적으로 필수적입니다. 자본주의가 물, 주택, 신선한 공기를 뺏어가는 것만이 아니라 코로나 바이러스 자체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긴 공급사슬로부터 생기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이 공급사슬에서는 동력사슬톱에 굴복하고 자본주의적 농업에 굴복하는 숲으로부터 새로운 식품이 요구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생태지대들이 파괴되면서 가장 복잡한 생명체들의 일부가 파괴됩니다. 이와 함께 예전의 숙주를 잃은 미시기생체들이 생기는데, 코로나 바이러스도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듯합니다. 저는 지금 최근에 『먼슬리리뷰』(Monthly Review)에 글을 실은 네 명의 과학자들을 원용하고 있습니다. [“COVID-19 and Circuits of Capital” by Rob Wallace, Alex Liebman, Luis Fernando Chaves and Rodrick Wallace, https://monthlyreview.org/2020/04/01/covid-19-and-circuits-of-capital/ ] 이들은 “공공보건의 공유된 커먼즈”에 대해 말합니다. 이들은 또한 우리, 즉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질병 방어능력이 수십 년 동안의 신자유주의로 인해서 심각하게 약화되어 있음을 지적합니다. 공립학교들, 공립병원들, 공공주택, 물에 대한 권리, 공기에 대한 권리가 갑자기, 혹은 단계적으로, 혹은 부채라는 교활한 형태로 강탈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미시기생체들에 취약해진 것입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지난주만 해도 공기가 좀 신선해진 틈을 타서 트럼프가 자동차에 대한, 내연기관에 대한 오염통제와 관련된 규제를 완화했습니다. 공기가, 우리의 폐가 깨끗해지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을 틈타서 몰래 해치운 것이죠. 이는 정말로 사악하고 파괴적인 행동입니다. 이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지구의 파괴를 심화시킬 뿐입니다. 폐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요, 이 네 명의 저자들, 이 전염병학자들 썼듯이 삼림과 그 생태의 파괴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출현과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인간의 폐만큼이나 삼림이라는 지구의 폐도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 아마존의 파괴와 볼쏘나로(Bolsonaro)[브라질의 현 대통령]의 무지한 권력은 서로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릴리
이 팬데믹이 전지구적 위기가 되면서 일시적으로든 어떻든 다른 전지구적 위기, 즉 기후위기를 우리의 관심에서 좀 멀어지게 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물론 사회적 거리두기나 재택근무 등의 조치들이 자동차의 사용을 크게 막고 탄소방출 수준을 낮추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당신은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불리는 것의 시작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오신 것으로 압니다만.

라인보
현 국면은 아이러니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뉴욕에서는 정치가들이 많은 수의 홈리스들에 눈물을 흘리는 반면 많은 호텔들이 손님이 없어서 연방정부의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공기와 관련해서 아이러니가 있고 폐와 관련해서 아이러니가 있으며 탄소방출과 관련해서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제 생각에 현 국면은 기회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집으로부터 쫓아내는 일의 중지를 원하며 부채의 탕감을 원합니다. 우리는 단일건강보험자체제(single payer health system)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주자들을 억류 상태에서 풀어주기를 원합니다. 이미 일부 수감자들은 석방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학자금 대출금의 탕감을 원합니다. 이 모든 것은 세상이 전반적으로 속도를 늦추는 맥락에서의 일입니다. 바삐 서두르는 시간은 끝났습니다. 내 친구 중 하나는 하늘에 비행기가 없고 거리에 차가 없다고 썼습니다. 물론 이는 비상조치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다지 많은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이런 상태가 새로운 세계의 토대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선한 공기의 세계, 더 차분한 세계, 바삐 서두르는 조급함이 없는 세계, 모든 시간이 사업의 시간이 되는 일이 없는 세계,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세계, 수감이 없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할 수 있을 만큼 부유합니다. 이런 가능성들을 우리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가능성들은 바로 우리의 창문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릴리
팬데믹을 겪으면서야 이런 상태에 도달한 것이 좀 놀랍습니다. 세상의 종말,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기란 쉽다고 종종 (필시 너무 많이) 말해졌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의 종말이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자본주의는 느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상상력의 위기를 느끼면서) 우리는 공포와 불안의 와중에서 (이 측면을 과소평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우리의 삶이 일상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기 시작했고 어떤 일이 중요하고 어떤 일이 중요하지 않은지를, 어떤 일이 사용가치들을 창출하는지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돌봄노동, 쓰레기처리, 식량을 재배하고 공급하기―이런 일들은 중요한 반면 다른 일들은 불필요했습니다. 상위 10%로의 부의 대대적인 집중이 지금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은 매력적인 가능성의 순간입니다. 몇 달 만에, 불안과 불평등의 상황에서 이런 순간이 온 것이죠.

라인보
물론입니다. 완전히 동의합니다. 아시다시피, 메이데이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달 말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저는 1886년 시카고에서 전염병이 했던 역할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그 당시는 8시간 노동을 위한 투쟁의 때였지요. 참, 이제는 옛날 일이네요. 요즘 누가 8시간 이상 노동을 하나요. 그런데 이제 우리는 갑자기 0시간 노동을 강제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0시간 노동을 하는 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앞에서 저는 독서에 대해서 말했는데요··· 우리는 정말로 속도를 늦추고 더 생각하기 시작할 수, 더 잘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트럼프나 연방정부를 비웃고 조롱하는 것과 우리 자신과 우리의 이웃들을 돌보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이 돌보는 일을 하려고 하며 저도 그런 쪽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우리의 간호사들과 의사들은 이것을 요구하기 위해서 노동을 중단하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개인을 보호하는 도구로서 무기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총기판매점이 필수적이라고 말하는 바보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항상적인 공포 속에서 사는 자들의 삶의 한 편린일 뿐입니다. 다른 가능성들이 있음을 보는 것이 이토록 쉬운 때에 공포 속에서 살 필요가 없습니다.

릴리
물론 지금과 같은 순간에 우리가 맞서 투쟁해야 할 것들 가운데 하나는 전염병을 인종화하는 경향, 질병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와서 우리에게 퍼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입니다. 트럼프가 이런 경향에 부채질을 한 것은 분명합니다. 아래로부터의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라인보
18세기 말에 개발된 이데올로기적 억압의 체제인 백인우월주의의 중심 개념인 인종 개념의 큰 부분은 인간들 사이의 차이를 생물학적으로 환원하는 것입니다. 그 차이가 상이한 기생체들, 질병들과 연결되면 이것이 더 나아가 인종 개념을 구성할 요소들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나니 언급해야 할 것이 있는데, 저의 저작이나 다른 이들의 저작이 보여준 바지만, 이런 과정들 가운데 ‘타자의 악마화’를 포함한 다수가 전통적으로 프롤레타리아라고 불리는 집단에 대하여 일어났습니다. 프롤레타리아는 항상 냄새와 연관되고 때(dirt)와 연관되고 불결함과 연관되었습니다. 이렇듯 지배계급의 차별적 순결 코드가 모든 지배받는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바로 이로부터 인종과 백인우월주의라는 변종이 생겨나는 것이죠. 이제 이것이 그 추한 고개를 다시 쳐들려고 합니다. 제 생각에는 시간문제일 뿐이에요. 그러나 아직까지는 제가 알기로···[‘없는 듯합니다라는 말을 하려다 생략한 것으로 추정됨] 이런 이야기를 할 때에는 매우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지식을 얻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입니다. 디트로이트에서 멘투들과 민중에 의해서 아래로부터 일어난, 신선한 물을 요구하는 엄청난 투쟁을 보세요. 디트로이트는 큰 흑인도시입니다. 뉴올리언스도 큰 흑인도시입니다. 뉴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도시들은 흑인 문명의 수도들이며, 이로부터 모두가 혜택을 받습니다. 그런데 현재로서는 간접적인 것 말고는 지배계급[백인들]의 반발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흑인 친구들과 동지들은 매우 옳게도 다소 걱정하고 조심하며 지냅니다.

릴리
당신이 언급한, 그리고 책에서 많이 다룬 메이데이에 대한 물음으로 오늘 인터뷰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몇 주 후면 메이데이가 오는데요, 우리가 억압받지 않는 세상, 지배자들이 우리의 삶을 통제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비전과 관련하여 메이데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요?

라인보
메이데이는 위대한 재생산의 순간, 지구의 재생산의 순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위의 생명체들에서, 식물들이나 동물들에서 봅니다. 메이데이는 5월이고 봄이요 삶의 부활입니다. 또한 근대 세계의 역사에서, 끝없는 노동과 고역에 맞서 투쟁해야 했던 사람들의 역사에서 놀이와 투쟁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의 메이데이는 1886년 5월 시카고에서 시작되어 빠르게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군사주의나 전체주의의 행사로서 퍼진 것이 아니라 집단성의 행사로서 퍼졌습니다. 올해의 메이데이는 우리에게 특별한 도전이 될 듯합니다. 확신컨대, 이 도전으로부터 우리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메이데이를 축하하는 새로운 방식을 발견할 것입니다. 되풀이하건대, 메이데이는 지구상의 기쁨의 순간이요 재생산의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는 출산이 고통을 동반하듯이 투쟁과 함께 옵니다. 그리고 우리의 투쟁은 우리의 고통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거시기생체들에 맞서는 것입니다.((메이데이에 대한 라인보의 상세한 설명을 보려면 도서출판 갈무리의 신간 『메이데이』(2020)를 참조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