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먼즈로서의 도시에 대한 새로운 작업의 물결



 

커먼즈로서의 도시에 대한 새로운 작업의 물결

최근에 커먼즈로서의 도시에 대한 새로운 관심의 물결이 일었다. 새로운 책들이 출판되고 공개행사들과 현장 활동들이 있었다. 각각의 노력은 다소 상이하지만, 모두가 도시 거버넌스의 우선권과 논리를 커머닝의 원리를 향하는 방향으로 다시 정의하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통한다.

나는 특히 『예일 법과 정책 평론』(Yale Law and Policy Review)에 실린 새 학술논문 「커먼즈로서의 도시」(“The City as a Commons”)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포드햄 로스쿨(Fordham Law School) 교수 포스터(Sheila R. Foster)와 이탈리아의 법학자 이아이오네(Christian Iaione)가 공동으로 쓴 이 논문은 탐구와 행동주의라는 새로 출현하는 분야에서 획기적인 종합을 이룬 글이다. 68쪽에 해당하는 이 논문은 도시를 커먼즈로서 개념화하는 데서 맞닥뜨리는 주된 철학적·정치적 과제들을 배열하고 271개의 각주에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포스터와 이아이오네는 “커먼즈가 더 포괄적이고 공정한 형태의 ‘도시 만들기’의 가능성을 여는 프레임이자 일단의 도구들로서의 역할을 할 잠재성”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도시들이 시민들이 공통재로서 요구할 수 있는 자원을 사유화하거나 독점적 공적 규제로써 통제하지 않으면서 그 자원을 다스리거나 관리하는 문제를 부각시킬 잠재력을 커먼즈는 가지고 있다.”

저자들은 도시에 있는 커먼즈 자원의 역사와 현재 상태를, 그리고 공원보존위원회(park conservancies)(([옮긴이] 공원의 보존을 담당하는 공적 기구이다.)), 공동체 토지 신탁(community land trusts), 지분제한형 조합주택(limited equity cooperative housing)과 같은 거버넌스의 대안적 양태들의 부상을 탐구하는 데로 나아간다. 포스터와 이아이오네는 “도시 커먼즈의 비극”에 대해서 (더 정확하게는 커먼즈를 자원으로만 보는 데서 발생하는 유한한 자원의 과도한 착취에 대해서) 쓰면서도, 도시 환경에서의 “커먼즈의 산출”에 대해 말하는 데 있어서 새로운 장을 연다. 이들은 핵심 문제가 단지 재산의 소유만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적극적 협동과 관계를 양성하는 것임을 이해하고 있다.

“집단적으로 생산되는 자원의 가치는 인간의 활동의 결과이며 사람들이 자원에 접근하고 그 자원을 사용하는 능력에 달려있다”고 이들은 쓴다. “많을수록 즐겁다”는 원리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이해된 커먼즈는 도시를 위한 가치의 풍요로운 발생처로 간주될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이 사실을 인식하기고 적절한 정책과 지원책을 만들어내기만 한다면 말이다.

최근에 출판된 또 하나의 중요한 저작은 라모스(Jose Ramos)가 편집한 선집 『커먼즈로서의 도시: 정책모음집』(The City as Commons: A Policy Reader)이다. pdf 파일로 무상으로 다운받을 수 있는 이 책은 도시를 커먼즈로서 창출하기 위한 정책 옵션들과 전략들에 초점을 맞춘 34개의 기고문들을 담고 있다. 다루는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 도시계획, 공공도서관, 공동체 통화, 시간은행, 플랫폼 협동조합, “코즈모-로컬리즘”(cosmo-localism)(([옮긴이]전지구적으로 분산된 지식 및 디자인 커먼즈들과 지역화된 가치생산의 결합이 가진 잠재력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http://actionforesight.net/cosmo-localism-and-the-futures-of-material-production 참조)), “시민조합토지”(civic union land), 오픈 데이터, 도시 커먼즈 보호 갱생을 위한 볼로냐 조례, 커머닝, ‘조세체납 사유재산'(([옮긴이] 재산을 소유한 시민이 세금을 내지 못한 경우 그 부채를 이윤을 노리는 민간투기업자에게 조세선취특권(tax lien)의 형태로 팔지 않고 시의 관리 아래 두어 공공재로서 사용하는 등 도시 커먼즈를 보호하는 것과 연관되는 주제이다)) 등이다.

바로 지난주에 커먼즈에 대한 책이 또 한 권 나왔다. 브리턴(Tessy Britton)이 쓰고 앤더슨(Amber Anderson)이 삽화를 넣은 『그림이 있는 참여도시 가이드』(The Illustrated Guide to Participatory City)이다. 접근하기 쉽고 재미있는 이 책은 ‘참여 문화’가 어떻게 도시를 되살리고 더 탄력 있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이 책은 소규모 참여 기획들의 가치를 부각시키며, 이 기획들이 다 합쳐지면 많은 더 크고 서로 얽힌 사회 문제들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낸 영국의 프로젝트인 <참여 도시>(Participatory City)는, 실질적인 참여의 규모를 (연구가 가리키는 대로) 변형에 유익함을 가져오는 데 필요한 수준으로 확대하기 위해서 현재 큰 “시범 지구”(demonstration neighborhood)를 개발하는 중이라고 설명한다. <참여 도시>는 현재 5년 동안의 프로젝트에 참여할 20만 내지 30만의 시민들로 이루어진 도시를 찾고 있다.

최근에는 나 자신도 커먼즈로서의 도시 전선에서 활동해왔다. 9월 1일에는 암스테르담의 문화시민센터인 빠크회스 데 즈베이헤르(Pakhuis de Zwijger)에서 이 주제로 강연을 했다. 강연 이후에 이 분야의 전문가들 네 명―랩겁(LabGov)의 이아이오네(Chris Iaione), 커먼즈 네트워크의 해머스틴(David Hammerstein), 바흐 쏘사이어티(Waag Society)의 스티커(Marleen Stikker), HvA의 마요어(Stan Majoor) ―으로 이루어진 토론단이 활발한 토론을 했다. 2시간 15분짜리 비디오를 여기서 볼 수 있다.

도시를 다르게 보는 방법론적 도구들을 제공하는 <도시 르네상스 연습>이라고 불리는 프로젝트는 커먼즈로서의 도시를 다음과 같이 멋지게 정의한다.

도시는 공통체(commonwealth)(([옮긴이] ‘commonwealth’는 ‘common’과 ‘wealth’가 조합된 단어로서, 말 그대로 직역하면 ‘같이 잘 살고 있음’의 의미인데, 실제로는 ‘공공복지’(public welfare)라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국가’(state)라는 의미로도 사용되며 ‘공동체’(community)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 이외에도 여러 의미가 있으나 현재의 맥락에서는 논외로 해도 무방하다.) 옥스퍼드영어사전의 다음 예문에서 로크는 자신이 ‘commonwealth’를 ‘공동체 일반’이라는 의미로 사용함을 말하고 있다.

1690 J. Locke Two Treat. Govt. ii. x. §133 By Commonwealth, I..mean, not a Democracy, or any Form of Government, but any independent Community which the Latins signified by the word Civitas.

다음 예문에서는 더 구체화된 의미의 공동체, 즉 민주적 원리에 의해 구성된 공동체라는 의미가 제시된다.

1583 Sir T. Smith’s De Republica Anglorum i. x. 10 A common wealth is called a society..of a multitude of free men collected together and vnited by common accord & couenauntes among themselues. (* ‘u’와 ‘v’를 바꾸어 읽으면 된다.)

네그리와 하트의 저서 Commonwealth 에서 ‘commonwealth’는 그저 일반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공통적인 것’(the common)에 확연하게 기반을 둔 공동체로서 ‘커먼즈’(commons)와 거의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공통적인 것’은 ‘사적인 것’(the private)과는 당연히 다르고 ‘공적인 것’(the public)과도 다르다. 그래서 이 Commonwealth의 한국어 역자들은 이 점을 감안하여 ‘공통체’라는 번역어를 사용했다. 여기서도 이 번역어를 사용했다.)) 이며 공유된 자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지식과 집단적 실천에 기반을 둔 협동적 환경이다. ‘커머닝’은 도시 조직화의 구성적 과정으로서, 공동체들을 수립하고 재생산하며 경계들·프로토콜들·분배원칙들을 확정한다. 도시 커먼즈는 소진되고 노후화되고 강탈될 수 있는 물질자원과 관계자원(relational resources)을 공히 관리하는 잡종제도(hybrid institutions)이다. 커먼즈는 언제나 보호되고 되찾아지고 갱생되어야 한다.

나는 이 주제가 다음번에는 어떻게 달라질지 정말로 보고 싶다. 나는 11월 17일에 내가 기조연설을 하는 바르셀로나의 ‘스마트 시티 엑스포’(Smart City Expo)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기를 희망한다.

[정리자 주석] 




클린에너지가 우리를 구할 수 있는가?



 

클린에너지가 우리를 구하지는 못한다

―새로운 경체체제만이 할 수 있다

 

올해 초 세계의 미디어들은 2월에 지구 전체의 기온 기록이 충격적일 정도의 차이로 깨졌다고 보도했다. 3월 또한 모든 기록을 깼다. 6월에 텔레비전 스크린들은 파리의 홍수, 센 강이 둑을 넘어 도로로 범람하는 모습으로 뒤덮였다. 런던에서 난 홍수로 인해 물이 지하수로 시스템을 통해 코번트 가든(([정리자]코번트 가든(Covent Garden)은 영국 런던 시티오브웨스트민스터에 위치한 지역으로서 쇼핑 및 관광 명소이다. ))의 심장부까지 흘러들었다. 런던 남동부의 도로들은 2미터 깊이의 강이 되었다.

이런 극심한 사건들이 다반사가 되면서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이제 거의 없게 되었다. 마침내, 화석 연료가 우리들을 죽이고 있다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둘러싸고 합의가 굳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클린에너지로의 신속한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화석 연료의 위험에 대한 이러한 점증하는 깨달음은 우리의 의식에 결정전인 전환이 일어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요점을 놓치고 있다는 우려를 가질 수밖에 없다. 클린에너지도 중요하겠지만, 그것이 기후변화를 막아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과학은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화석 연료에서 벗어나서 100% 클린에너지를 사용한다고 가정해보자. 이것이 올바른 방향으로의 힘찬 발걸음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최선의 경우를 가정하는 이 시나리오조차도 기후 재난을 피해가는 데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고? 화석 연료를 태우는 것은 모든 인간이 만들어내는 온실 가스 방출의 약 70%에 해당할 뿐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30%는 여러 원인에서 온다. 삼림파괴가 큰 원인이다. 산업화된 농업도 역시 큰 원인인데, 이는 이산화탄소를 용해시킬 정도로 토양의 질을 퇴화시킨다. 그 다음으로 가축사육이 큰 원인이다. 이는 매해 9천만 톤의 메탄가스와 인간이 만들어내는 이산화질소의 세계 총량의 대부분을 배출한다. 이 가스들 둘 다 지구온난화에 미치는 영향이 이산화탄소보다 훨씬 더 크다. 세계의 모든 자동차, 열차, 비행기, 배를 합친 것보다 가축사육 하나가 지구온난화에 더 큰 영향을 준다. 시멘트, 강철, 플라스틱의 생산이 온실 가스의 또 다른 주된 원인이며, 그 다음으로는 쓰레기 매립이다. 쓰레기 매립은 세계 총량의 16%라는 엄청난 양의 메탄을 대기 중에 뿜어낸다.

기후변화에 관한 한 문제는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가 무슨 종류냐가 아니라 우리가 그 에너지로 무엇을 하느냐이다. 100% 클린에너지로 우리가 하는 일은 바로 우리가 화석 연료로 하던 그 일일 것이다. 더 많은 숲을 제거하고, 더 많은 가축사육을 하고 농업 산업을 확장하고 더 많은 시멘트를 생산하고 더 많은 매립지를 쓰레기로 채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끔찍한 양의 온실 가스를 대기 중으로 펌프질해 올릴 것이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우리의 경제 체제가 부단한 성장을 요구하기 때문인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우리는 이것을 문제삼을 생각은 해 본적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비(非)화석 연료에서 오는 30%의 온실 가스는 고정적이지 않다. 매해 대기 중에 더 많은 온실 가스를 추가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우리의 열대 삼림이 2050년이면 완전히 파괴되어 2000억 톤의 탄소 폭탄을 대기 중에 방출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세계의 상층토(topsoil)는 60년 이내에 영양분이 고갈되어 더 많은 온실 가스를 방출할 것이다. 시멘트 산업이 방출하는 양은 매해 9% 이상 늘고 있다. 쓰레기 매립은 눈이 아릴 정도로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2100년 쯤이면 하루에 1100만 톤의 쓰레기를 만들어낼 것인데, 이는 현재의 3배이다. 클린에너지의 사용은 이런 일을 늦추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다.

기후운동은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주의력을 화석연료에 집중했던 것이다. 더 심층에 있는 것, 즉 우리의 경제적 체계가 작동하는 기본 논리를 지적했어야 하는 데 말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GDP 성장이라는 광범한 과제에 연료를 대기 위해서 화석연료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근본 문제는 우리의 경제 체계가 추출, 생산, 소비의 수준이 점점 더 증가하기를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정치가들은 지구 경제가 매해 3% 이상 성장하도록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말한다. 큰 회사들이 총이익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최소치이다. [개별 회사들의 이익은 이 총이익을 능력대로 나눈 몫이 될 것이다.―정리자] 이는 20년 마다 세계 경제의 크기를 두 배로 늘려야 함을 의미한다. 차들도 두 배, 어업도 두 배, 탄광업도 두 배, 아이패드도 두 배. 그 다음 20년에는 이미 도달한 두 배에서 또 다시 두 배로 늘려야 하고.

우리의 낙관적인 전문가들은 기술 혁신이 경제 성장을 물질적 스루풋(material throughput)(([정리자]기업 경영에서 스루풋(throughput)은 ‘투입’(input)에서 ‘산출’(output)까지의 과정을 가리킨다. 현대 경제는 생산지와 소비지(판매지점 근처)가 다르므로 상품을 판매하는 것은 상품을 구성하는 물질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물질적 스루풋’이 된다. 현대 경제에서는 이동하는 거리가 지구적 규모이다.))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도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려주는 중거는 없다. 지구상의 물질 추출과 소비는 1980년 이해 94% 증가했으며 여전히 증가하고 있다. 최근의 추산으로는, 2040년이 되면 세계의 선박·비행기·트럭을 사용한 수송거리가―그리고 수송되는 물질이―거의 정확하게 GDP의 성장률에 보조를 맞추어 지금의 두 배 이상이 된다고 한다.

클린에너지는 중요하지만 우리를 이 악몽에서 구해주는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제 시스템을 바꾸면 가능하다. 사람들은 GDP 성장이 더 나은 세상을 창출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주지 않고 빈곤을 줄이지 않으며 그 ‘외부성’(externalities)(([정리자]‘외부성’(externalities)은 상품생산이 시장의 외부에서 영향을 받거나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긍정적 외부성과 부정적 외부성이 있는데, 여기서 저자는 맥락상 외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에 국한되어 말하고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학교 근처에 있는 화상경마장은 학교의 아이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이 모든 종류의 사회적 폐해―부채, 과다노동, 불평등, 기후변화―를 낳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고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GDP 성장을 진보의 주된 척도로 삼지 말아야 하며, 이는 올해 말에 모로코에서 비준될 기후변화협약의 일환으로 즉각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우리의 창조적 능력을 새로운 지구 경제를 상상하는 데 쏟을 때이다. 생태 발자국을 적극적으로 축소하면서 인간의 복지를 최대화하는 경제를. 이는 불가능한 과제가 아니다. 여러 나라들이 매우 낮은 소비 수준을 가진 높은 수준의 인간 발전을 이루는 데 이미 성공했다. 사실 리즈 대학 경제학자인 대니얼 오닐(Daniel O’Neill)이 물질적 탈성장(degrowth)이 높은 수준의 인간 복지의 발전과 양립 불가능하지 않음을 입증한 바 있다.

우리는 화석 연료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클린에너지로 전환하는 한에서는 현재의 상태대로 지속할 수 있다고 안심하게 되었으나, 이는 위험하게 단순화된 생각이다. 만일 우리가 다가오는 위기를 물리치려면 심층에 있는 원인과 대면해야 하는 것이다.

* 저자 제이슨 히켈은 <더 룰즈>(The Rules)에 속해 있다 <더 룰즈>는 활동가들, 예술가들, 농업가들, 농민들, 학생들, 노동자들, 디자이너들, 해커들, 몽상가들 등의 세계적 네트워크로서 지구의 내러티브를 새로운 방향으로 몰아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도시를 구축하라’―예술, 문화, 커머닝의 중대한 역할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2015년 12월 23일 게시글 ““Build the City”: The Critical Role of Art, Culture & Commoning”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몇몇 고유명사의 옮김은 실제 발음과 다를 수 있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도시를 구축하라’―예술, 문화, 커머닝의 중대한 역할

 

 

새로운 글모음집 『도시를 구축하라―커먼즈와 문화를 보는 관점들』(Build the City: Perspectives on Commons and Culture)은 ‘커먼즈로서의 도시’가 부상하고 있음을 강력하게 확인시켜준다. 38개의 글이 담겨있는, 이 세심하게 편집되었고 아름답게 디자인된 모음집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생각의 깊이와 범위를 보여준다. 이 책은 <크리티카 폴리티츠나>(Krytyka Polityczna)와 유럽문화재단(the European Cultural Foundation)에 의해서 유럽문화재단의 아이디어캠프 모임의 일환으로서 9월에 출판되었다.

 

내가 보기에 도시를 커먼즈로서 생각하는 것은 매우 강력한 것이다. 도시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정치적 요구들을 말하는 구조화된 틀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 틀은 종획의 재앙만이 아니라 우리가 커머너로서 가진 권리들을 가시화하는 것을 돕는다. 이 둘은 점잖은 정계(政界)에서는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 주제들이다.

 

이 책의 글들은 보통 사람들―세입자들, 가족들, 예술가들, 프리캐리아트, 이주자들, 공동체 집단들, 활동가들―이 자신의 도시에 참여하는 데서 정당한 역할을 가진다는 생각을 찬양한다. 메트로폴리스는 부유층, 산업가들, 투자자들, 지주들의 특권화된 보호구역이 아니다. 그곳은 커머너들이 의미있는 힘을 가지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에 접근하는 장소이다. 이 책은 이러한 주제를 발전시키면서 9월에 볼로냐에서 열린 ‘커먼즈로서의 도시’ 컨퍼런스를 적시에 보완한다.

 

이 책의 pdf 파일은 여기서 다운받을 수 있다. 인쇄본은 여기서 구입할 수 있다. 이 책은 유럽문화재단 및 <크리티카 폴리티츠나>나 이외에도 스위덴의 <썹토피아>(Subtopia), 프랑스의 <레 떼뜨 드 라르>(Les Tetes de l’Art), 몰도바의 <오베를리트>(Oberliht), 크로아티아의 <컬처2커먼즈>(Culture2Commons), 스페인의 <플라토니크>(Platoniq)와의 협동의 산물인데, 이 단체들은 모두가 행동연구 네트워크인 <커먼즈를 위한 연대행동>(Connected Action for the Commons)에 참여하고 있다.

 

이 책에서 자주 반복되는 하나의 주제가 있다면 그것은, 더욱 개방되어 있고 수용적이며 참여적인 도시 민주주의 모델을 위한 수단을 커머너들이 고안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예술 및 문화 프로젝트들이 이 길에 앞장설 수 있다는 것이다.

 

“극히 개인화된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모델에 도전하는 문화적 기획들을 더 자세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라고 <커먼즈를 위한 연대행동>의 비스니에브스카(Agnieszka Wiśniewska)는 쓰고 있다. “이 기획들은 사회적 유대와 타인에 대한 신뢰를 다시 수립하는 것을 촉진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질적 과제는, 거버넌스를 증진시키고 사회적 연대를 구축하며 권력을 민주화하는 데서 커머너들에게 힘을 실어줄 효과적인 새 구조들을 어떻게 고안할 것인가이다.

 

이 책은 이 이슈를 여러 상이한 각도―예술, 문화, 경제, 정치, 테크놀로지―에서 탐구한다. 그 다양한 기고자들 가운데에는 P2P재단의 미셸 보웬스, 런던 정치경제학교와 뉴욕대학교에서 강의하는 유명한 사회학자 리처드 쎄네트(Richard Sennett), 유럽의회의 의원인 줄리 워드(Julie Ward)가 있으며, 기타 유럽 전역의 많은 예술가들, 비평가들, 문화활동가들이 기고했다.

 

몇몇 글들은 공적 공간들이 민주주의 자체의 기능에 중요하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민주주의는 이스탄불에서 바르셀로나까지, 프라하에서 부다페스트까지, 사유화 및 ‘발전’을 주도하는 세력이 도시로부터 생명력을 짜내고 있는 많은 도시들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실린 글 가운데 하나에서 몰도바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이며 활동가인 비탈리 스프린세아나(Vitalie Sprinceana)는 2012년 치시나우(Chisinau)에서 시민들이 시정부가 시민들이 사랑하는 유럽광장(Europe Square)―공원과 국립 기념물들이 있는 장소이다―을 다시 만들려는 비밀계획에 반대하여 들고 일어난 일이 미치고 있는 지속적인 영향을 평가하고 있다. 시민들의 노력으로 공적 공간들은 실질적으로 공중에게 속해야 하며 정치인들과 관료들이 그 공간들의 운명을 정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다른 많은 글들은 시민이 이끄는 예술과 문화가 어떻게 도시의 공간들을 살리고 있는지, 그리고 이 활동들이 유럽에서 민주적 과정들을 증진하는 데 어떻게 필수적인지를 탐구한다. 폴란드의 예술가이지 활동가인 이고르 스톡피제브스키(Igor Stokfiszewski)는, “전문 예술가가 아닌 사람들의 예술을 통해 풀뿌리 자기표현을 장려하는 목적을 가진 예술 활동에 특별히 주목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했다. “공동체에 맞추어진 실천들이 장려되며, 공감과 상호성을 발전시킴으로써 말 이외의 수단으로 유대를 창조하는 방식을 고안해낸다.” 사람들이 도시에 바치는 예술은 그 장소를 정의하는 공유된 내러티브들과 형상들을 고안해내는 것을 촉진한다.

 

이 책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들 가운데 하나는 <트랜지션 타운> 네트워크의 창립자인 롭 홉킨스(Rob Hopkins)가 <반란의 상상력 실험실>(Laboratory of Insurrectionary Imagination)의 공동창립자들과 한 인터뷰이다. <실험실>은 도시의 삶에서 상상의 새로운 공간들을 열기 위해서 활동가들과 함께 작업하는 예술가들의 단체이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의 G8 정상회담에서 있었던 시위에서 이 단체는 “반란 광대 부대”를 만든 적이 있는데, 이 부대는 립스틱을 바르고 경찰의 방패에 계속해서 입을 맞추었다. 이 단체는 또한 ‘은행가들에게 눈을 뭉쳐 던지기’를 조직했으며 수백 개의 버려진 자전거들을 시민불복종의 기계들로 개조했다. .

 

<실험실>의 구성원인 이사벨 프레모(Isabelle Frémeaux)는 그런 전술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좌파는 욕망과 신체를 사용하기를 매우 두려워합니다. 자본주의와 우파는 영특하게 잘 하지요.” 그녀의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많은 활동가들이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에 행동하지 않는다”라는 전제 위에서 정신을 바꿀 사실들과 통계들을 정리하려고 하지만, 사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합리적 사고가 아니라 가능한 것’(what could be)에 대한 욕망과 환상인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그녀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삶의 구조를 이루었던 사물들과 가치들을 고수합니다”라고 말한다. 예술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진실을 다시 깨닫게 해줄 수 있으며 우리에게 새 방향을 가리켜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실험실>은 예술과 공공 극장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합리적인 ‘왼쪽’ 뇌에만이 아니라 정서적 삶에도 다다르고자 한다. “어떤 의미에서 예술은 마법입니다”라고 <실험실>의 존 조던(John Jordan)은 말한다. “그것은 마법의 한 형태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그 힘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면 실제로 바라는 일들이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예술은 이 순간 우리가 필요로 하는 마법을 직조해내는 일을 매우 잘 합니다.”

 




인류학자 워커, 아마존 커먼즈의 교훈을 말해주다

* 아래는 2015년 7월 25일자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 게시글 “Anthropologist Harry Walker on the Lessons of Amazonian Commons”를 옮긴 것이다. 볼리어가 소개하는 인류학자 워커는 개념어들을 자주 구사하기 때문에, 이런 어휘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읽는 데 조금 불편할 수도 있으나, 끈기 있게 읽으면 전체 취지를 아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으리라고 본다. 몇몇 어휘들은 우리말로 옮기면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서 그냥 영어로 두고 주석을 달았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인류학자 워커, 아마존 커먼즈의 교훈을 말해주다

옮긴이 : 정백수

 

정말로 깊이 있는 물음들을 묻고 또 우리가 다른 세계를 상상하도록 돕는 데에는 때로 인류학자들이 필요하다. 이는 런던 정치경제대학교(London School of Economics)의 인류학자인 해리 워커 박사가 지난 5월 말 말리노프스키 기념홀에서 한 유명한 강연을 들은 이후 나에게 분명해졌다.

 

워커는 오랫동안 페루령 아마존(Peruvian-Amazonia)의 사람들을 연구하였는데, “자아의 성격과 자아가 개인들 사이에서 진행되는 정치적 과정들과 맺는 관계”에 특별한 관심을 두었다. 그의 도발적이고 깊은 통찰이 가득한 강연인 「등치 없는 평등 : 공통적인 것의 인류학」(Equality Without Equivalence: an anthropology of the common)은, 자유주의적 평등과 사적 소유라는 우리의 근대적이고 서구적인 생각들과 커먼즈에서 양성되는 그와는 다른 양태의 존재 및 앎 사이에 존재하는 심대한 상충을 다루고 있다.

 

 

이 강연에서 워커는, 원주민 커먼즈에 대해 자신이 내린 결론들을 대의제에 기반을 둔 통치(정부) 및 시장경제의 맥락과 대비시키면서, 자유주의적 정치체제에 끼워 넣어져 있는 독특한 인간성의 이상(理想)들이 드러나도록 한다. (이 강연의 팟캐스트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 미겔 비에이라Miguel Vieira에게 감사를!)

 

배경을 좀 알아보자. 워커는 Under a Watchful Eye: Self, Power and Intimacy in Amazonia 1의 저자인데, 이 책은 저자의 웹싸이트에 “아마존 사회들 어디에나 있는, 한편으로는 개인의 자율·고유함을 우선으로 하는 문화와 다른 한편으로는 만족과 자기실현은 타자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에 대한 마찬가지로 강한 인식 사이의 긴장”을 탐구한 책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 책은, 인간 경험이 가지는 본래적으로 공유되거나 타자를 ‘동반하는’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 아이 돌봄과 사회화에 대한 고려들,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의 관계, 그리고 힘 개념을 한데 모으며, 그리하여 행위(agency)와 자아 인식이 어떻게 일상적인 관행들―여기에는 친밀하지만 비대칭적인 양육과 의존의 관계들의 양성이 포함된다―을 통해 출현하는가를 보여준다.

 

한 시간 동안 진행되는 워커의 강연은 너무 길고 복잡해서 여기에 요약할 수가 없다. 따라서 나는 그의 결론적 통찰들 몇몇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는 아마존 커먼즈의 중심적 테마는 “잘 살기”(living well)라는 생각이라고 말한다. 즉 “삶이 의미, 목적, 방향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으로 가득 차도록” 자신의 삶과 생산적 노력들을 조직화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 목표는 필연적으로 공유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우리는 그저 혼자서 평안할 수는 없다. 언어나 좋은 아이디어가 그렇듯이, 집단적 자원으로서의 평안함(tranquility)도 더 많은 사람이 거기에 참여하면 실질적으로 더 향상된다. 소진되거나 배분되지 않는 것이다..”

워커는 아마존에서 커먼즈의 “신체적·생태적·정동적 차원들”이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음에 주목한다. 각 차원은 “생산과정의 산물이자 그 선행조건이다.” 그래서 사냥으로 잡은 동물들이 떨어지면 새로 보충하는 활동들, 기후를 보존하는 활동들, 사람들의 안녕을 돌보는 활동들은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커먼즈에 의해 창출되는 것은 “대상들이나 주체들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관계들이거나 심지어는 주체성 자체인” 이유를 설명한다고 워커는 말한다. “우리는 커먼즈를 단지 제도적이거나 재산과 관련된 일단의 권리들의 배열로 보기보다는, 상상된 공동체로서의 국민국가와는 판이하게 다른, 일종의 사회적 상상계로 볼 수 있다······커먼즈는 동일한 척도에 종속되는 것, 등치, 상호교체성, 교환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커먼즈는 자연과 인공, 물질과 비물질, 생산과 재생산, 노동과 삶의 구분을 부순다.”

 

워커는 아마존 커먼즈들이 ‘libertarian’2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의 근본적인 개인성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그러나 아마존 커먼즈들이 ‘egalitarian’3하다고 하는 것, 즉 모든 사람이 일정한 경계를 가진 정치체제에의 참여자로서 형식적으로 평등한 세계라고 하는 것은 오해를 나을 수 있다고 한다.

 

자원의 균등한 분배라는 의미에서 ‘egalitarian’하다고 해도 오해를 낳는다고 워커는 말한다. 이 생각은 “희소성의 경제에 기반을 두는데” 커먼즈는 공유를 강조함으로써 이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물질적 평등을 강조하는 것은 사람들이 공통의 사업의 일원이 되는 관계보다 서로 이익이 배치(背馳)되는 방식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끝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4

 

희소성에 대한 거부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아마존에서는 가장 욕망의 대상이 되는 많은 재화―예를 들면 안녕 혹은 우애 혹은 소속되어 있음―들이 경합재(rival goods)가 아니다. 경합재는 경제학자들이 연구하는 재화로서, 한 사람이 향유하면 다른 사람에 의해 소유되거나 향유될 수 없는 재화이다.” 문화가 존재의 “공유 가능한” 상태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관심이 “사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것보다 공유될 수 있는 것의 향유를 향하게” 된다.

 

공통적인 것(the common)5의 논리는 권리와 본질들6의 형식화를 거부함으로써 근대 자유주의 국가의 존재론에 도전한다. 커먼즈는 산출되는 어떤 것으로 간주된다. “열려있고 다면적이며 대체로 외적이고 개인의 물질적·역사적 위치에 기반을 둔” 어떤 것이다. 커먼즈에서 사람들의 실제적인 이질적 다양성은 “등치의 연쇄”7로 결코 환원되지 않는다. 공동체가 다소 열려있어서 계속 진화하고 결코 완전히 구성되지는 않기 때문에, 커먼즈는 “결코 개인의 자유에 대립되게 되지 않는다.”

 

개인들을 근본적으로 특이성들로―“불투명하고 무한하며 궁극적으로 알 수 없는” 존재들로―파악하는 것이 아마존 커먼즈들의 전제라고 워커는 말한다. “공통의 인간성”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은 없다. “인간성은 거의 가능성으로만, 잠재력으로만 남으며, 결코 완전하게 실현되지는 않기” 때문일 뿐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인간성”은 (애니미즘이 입증하듯이)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포함한 누구에게나 계속 열려있다. 서양의 재산권 체제를 특징짓는 주체와 객체,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확고한 구분은 아마존 커먼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서양의 평등관이 종획 및 사적 소유의 발생과 일치함은 우연이 아닐 수 있다”고 워커는 말한다. “이는 개인 주체들을 형식적으로 평등한 것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산출하기 위해서 사적 소유와 법이 서로 손을 잡고 움직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터전―땅, 물―이 사유화되고 종획되었기 때문에, 이로 인해 공통적인 것이 보편적 인간성으로 위장하여 내화되고8 본질화되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사회적 관계에 기반을 둔 집단적으로 생산된 재화로서 공통적인 것을 향유하는 것이 특이한 차이들의 다양성을 포함한다면, 이와 반대로 공통적인 것이 부식되고 사유화되면 사람들은 그 공통적 존재의 원천을 다른 곳에서 찾을 수밖에 없게 된다.” 사람들은 “서로간의 점점 더 넓어지는 틈을 극복할 것으로서 등가물들 혹은 본질들을” 정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개별성과 특이성은 상실된다.

 

워커는 앞으로 나아가는 길로서 커먼즈를 강하게 역설하며 마무리를 한다. “고대 서양인들이 생각한 커먼즈는 매우 단순한 것으로서, 국가에 의해서도 시장에 의해서도 운영되지 않는 경제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절실하게 필요로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전 세계의 많은 산발적인 투쟁들을 연결하는 강력한 개념”이다. 그는 더 나아간다. “커먼즈를 복원·확장하며 자본에 의한 커먼즈 포획을 저지하려는 시도는 지금 그 어떤 급진적인 정치기획에서도 실제로 필요한 요소이다.”

 

워커는 레비스트로스를 원용하면서, 인류학이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것을 돕는 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함을 부각시킨다. “현재의 세계에서 인류학자들은 우리가 사는 방식이나 우리가 믿는 가치들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다른 삶의 양태들과 다른 가치체계들이 다른 인간 공동체들로 하여금 행복을 발견하도록 허용해왔고 또 계속 허용할 수 있다는 사실의 증인들이다.”

 

아쉽게도 워커의 강연을 웹에서 텍스트 형태로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공식적인 팟캐스트를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풍요로운 강연이다! ♣

 

* 볼리어가 강연에서 인용한 부분들 가운데에는 실제 강연과 조금씩 다른 곳들이 있다. 그러나 내용전달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고 워커의 강연은 (현재로서는) 텍스트가 없고 음성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완전한 확인도 불가능해서, 볼리어의 텍스트를 그대로 따라도 무방할 듯하다. ―옮긴이

 

  1. 책의 내용을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책의 제목을 옮기기는 어렵다. 일단 직역하여 『주의 깊은 시선 아래에서 : 아마존에서의 자아, 힘, 친밀함』이라고 옮겨놓기로 한다. “주의 깊은 시선”이란 피조물을 늘 보살피는 창조주의 시선, 또한 아기를 보살피는 어머니, 공동체의 일원들을 보살펴야 하는 지도자의 시선을 말하는 듯하다 [본문으로]
  2. libertarian : 옥스퍼드 사전에 등록된 의미는 셋이다 : ① 자유의지론적인 ② 자유를 옹호하는 ③ 자유방임론적인/자유주의적인. 여기서의 의미는 이어지는 설명대로 ‘개인주의적인,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에 가깝다. [본문으로]
  3. egalitarian : 프랑스어 ‘égalitaire’(equal)에 접미사 ‘-ary’를 붙인 것으로서 가장 평범한 옮김으로는 ‘평등주의적인’이라는 말이다. 여기서는 이어지는 설명대로 ‘인간이 형식적으로 평등하다고 보는’과 ‘자원을 균등하게 분배하는’의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본문으로]
  4. 물질적 이익이 평등하게 분배되더라도 그 이익들 사이에는 배치의 관계, 즉 한 사람에게 귀속되면 다른 사람에게는 귀속될 수 없는 배제의 관계가 존재하는 대에는 변함이 없다는 말이다. [본문으로]
  5. 이 글에서 ‘the commons’는 ‘커먼즈’로, ‘the common’은 ‘공통적인 것’으로 옮긴다. 볼리어가 명확하게 하지 않은 점이 있는데, 예의 강연에서 워커는 학술적으로나 대중적으로 관심을 많이 두는 ‘커먼즈’보다는―한국과는 참으로 다르다!―하트와 네그리의 ‘공통적인 것’(the common)을 자신의 작업의 단서로 삼겠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필시 볼리어에게는 ‘공통적인 것’도 커먼즈 패러다임 핵심적 구성요소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6. 워커가 ‘본질’을 말할 때에는,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본질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7. A = B = C = ······ = Z [본문으로]
  8. 워커는 머릿속에서만 추상적인 생각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을 ‘내화된다’고 표현하는 듯하다. 그런데 예를 들어 ‘인권’이 이렇게 내화되는 것은 그것이 법형식이라는 추상적(객관적?) 형태로 존재하는 것과 상응할 터이므로, ‘내화’는 ‘형식화’와 병행하여 진행된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 나온, 워커가 커먼즈를 형용한 “대체로 외적인”(largely external)이라는 어구는, 이렇게 머릿속에서만 혹은 추상적으로 법전 같은 데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실천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본문으로]

 




커머너들, 이탈리아의 키에리에서 축제를 벌이다

* 아래는 2015년 7월 14일자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 게시글 “Commoners Descend on Chieri, Italy, for Major Festival”를 옮긴 것이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커머너들, 이탈리아의 키에리에서 축제를 벌이다

 

옮긴이 : 정백수

 

다시 한 번 이탈리아인들이 키에리(Chieri)에서 열린 3일 동안의 축제를 주최함으로써 커먼즈 패러다임을 전진시키는 데서 전위를 맡았다. 키에리는 이탈리아 토리노의 외곽에 위치한, 인구 6만 명의 소도시이다. 이 <커먼즈 국제 축제>(the International Festival of the Commons)에서는 영화들, 음악공연들, 비디오 상영물들, 강연들, 패널 토론들, 음식과 음료, 그리고 많은 즐거운 대화들이 그 특색을 이루었다.

 

내 생각에 축제란, 정치와 교육이 약간 가미된 재미있는 시간을 찾아서 온 일반 시민들과 매우 헌신적인 커머너들을 한데 모으는 환상적인 방법인 듯하다. 이 축제는 수백 명의 시민들을 끌어모았으며, 이들은 콘서트 공간으로 변한 주차장들을 거닐면서 커먼즈에 관한 공개강연과 토론을 열중해서 들었다.

 

축제일 가운데 어느 날 저녁에는, ‘공통적 자산’(누구나 필요로 하는 것들)에 대한 인간의 권리라는 생각을 선구적으로 내놓은 저명한 이탈리아의 법률가이자 정치가인 스테파노 로도타(Stefano Rodota)가 빽빽이 모인 청중에게 “유대와 우애 사이의 커먼즈”에 대하여 강연했다.

 

다른 날 저녁에는 종자보호 운동가(seed activist)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가―시바는 밀란의 식품전시회에서 벌어진 유전자재조합식품에 반대하는 일련의 시위에 막 참여하고 왔다―상품화되거나 판매되어서는 안 되는 살아있는 체계로서의 커먼즈에 대하여 강연했다. 그녀는 이탈리아가 즙이 많고 맛있는 토마토를 여전히 생산하는 몇 안 되는 곳들 가운데 하나임을 언급하여 약 600명의 청중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나머지 토마토들은 기업식 농업(agribusiness)에 의해 전지구적 상업에 적합하도록 조작되어서 생물학적 마분지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시바는, 커먼즈가 학술적인 추상이 아님을, 커먼즈는 일상생활의 매우 많은 측면들이 어떻게 퇴행되고 있으며 종획이 어떻게 우리의 것들을 박탈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언어임을 훌륭하게 보여주었다.

 

이탈리아어로 이루어진 일련의 공개강연과 토론에 (아쉽게도, 영어로의 번역은 없었다) 커먼즈에 관한 이탈리아의 주도적인 이론가들 가운에 몇 명이 참여했다. 이미 언급한 로도타, 문화이론가인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1, 법학자인 우고 맛떼이(Ugo Mattei), 법률가인 구스따보 자그레벨스끼(Gustavo Zagrebelsky) 등이다. 프랑스 철학자이며 프랑스어로 된 주요 이론서의 저자인 삐에르 다르도(Pierre Dardot)도 참여했다. 특별한 저녁 여흥을 위해서 브라질 음악가들인 길베르투 길(Gilberto Gil)과 까에타노 벨로소(Caetano Veloso)가 약 2,500명의 청중을 놓고 공연을 했다. 길은 예술가 재야인사로서 이력을 가지고 있으며, 크리에이티브커먼즈 라이선스의 초기 지지자이고 룰라 정권에서 문화상을 맡은 바 있다.

 

나도 시간을 얻어 디지털 미래에 관한 토론 자리에서 블록체인 원장과 ‘디지털 자율조직들’의 미래에 관해서 발제했다. 나는 또한 커먼즈의 정치적 함축에 관심이 있는 일군의 사람들에게 나의 『커머너처럼 생각하라』(Think Like a Commoner)의 이탈리아어본―스탐파알테르나티바(Stampa Alternativa)2에서 출간한 La Rinascita dei Commons3―을 소개했다. 또한 나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커먼즈 활동가인 프레데릭 술탄(Frédéric Sultan)이 주도한, 무성하게 늘어나는 도시 커먼즈 헌장들에 관한 워크숍에 참여했는데, 이 헌장들은 시민들에게 자치권을 더 많이 부여하고 시의 관료제를 비켜가려는 시도들이다.

 

나는 이탈리아어를 모르기 때문에 축제의 많은 요소들을 놓치긴 했지만, 축제의 많은 부분이 말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어느 저녁에는 ‘100개의 첼로들 가운데 10%’라고 불리는 첼로 연주자단이 본회의장에서 연주를 했다. 공연자들은 로마의 테아트로발레(Teatro Valle)에서 2001년부터 2014년에 이르는 긴 점거 기간 동안 잊지 못할 공연을 했던 100명의 젊은 음악가들로 구성된 더 큰 집단의 일부였다. 청중은 그들의 열정적 헌신을 사랑했다. 음악에 대한 헌신, 종획에 맞선 사회적 유대에 대한 헌신. 이런 축제들은 그러한 역사를 기념하고 새로운 가능성들을 여는 측면을 가진다. ♣

 

  1. 네그리를 ‘문화이론가’(cultural theorist)라고 소개하는 경우는 여기서 처음 보았다.^^ 네그리를 ‘정치철학자’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영어 위키피디아에서는 “맑스주의 사회학자이자 정치철학자”(an Italian Marxist sociologist and political philosopher)라고 부르고 있는데, 여기서는 ‘사회학자’라는 이름이 다소 생소하다. [본문으로]
  2. ‘대안출판’이라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3. ‘커먼즈의 부활’이라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장벽에 맞선 도시들

* 아래는 본래 블로그 <Culture Shapes Bones>에 실린 글로서 스페인 도시자치주의 지방정부들의 지난 2년을 돌아보는 Carlos Delclós의 글 Cities Against the Wall을 상세히 정리한 것이다. 엄밀한 의미의 번역이 아니므로 인용이 필요한 경우는 원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정리자는 윤영광이다. (이 블로그의 다른 글에서는 ‘municipalism’이  ‘자치도시주의’로 옮겨졌는데, 이 글에서는 ‘도시자치주의’로 옮겨져 있다. 번역어는 달라도 둘은 같은 것이다.)

스페인의 도시자치주의 운동이 통치권한을 부여 받은지 2년이 지났다. 이 운동은 지금 전지구적 자본의 강압들에 맞서 어떻게 싸우고 있는가?

이제 좌파 진영에서는 잘 알려진 이야기가 되었다. 2년 전 소수의 시민 플랫폼들이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사라고사, 카디스, 산티아고 등을 비롯한 스페인 주요 도시들의 지방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지역 사회운동 출신의 저명한 인물들을 필두로 해서, 그들은 포데모스를 비롯한 다양한 좌파 조직들을 결합하여 민주주의적 혁명과 진배없는 것을 약속하는 선거운동을 벌였다. 참혹한 경제 붕괴와 부패 스캔들의 여파 속에서, 그들은 스페인에 악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정당성의 위기에 급진적인 도시자치주의(municipalism) 프로그램으로 대응했다. 그것은 2011년에 그 심장과 머리를 획득한 인디그나도스(indignados, 분노한 사람들) 운동의 상향식(bottom-up) 정치가 흐를 수 있는 수로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들이 처음으로 부여받은 통치기한의 중간지점에 다다른 지금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기에 알맞은 때인 것 같다. 거리에서 제도로의 도약이, 이들이 선거에 참여하는 일의 정당성의 뿌리인 사회운동들의 요구를 진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는가? 그랬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이 시기에 해방적인 체제변화의 가능성들이 성장하고 증식했는가, 아니면 신자유주의적 획일성이 그것에 반대하는 이들의 한 세대 전체를 전향시켜서 자신의 구조 속으로 흡수해버렸는가? 복잡한 질문들이다. 답을 시작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현 단계에서 이 도시들이 직면한 어려움들의 크기를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먼저 정치인이 된 많은 활동가들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인장(印章)과도 같은 이슈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것은 어엿한 주거에 대한 권리다.

거대한 화폐의 장벽

바르셀로나에서 산츠(Sants)나 그와 유사한 노동계급 거주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아파트 구입을 제안하는 광고 전단을 많이 보게 될 것이다. 어떤 것은 손으로 쓴 것이고, 또 어떤 것은 프린트된 것이다. 이 전단들은 이름과 전화번호 외에는 담고 있는 정보가 거의 없다. 어떤 것은 아예 익명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처럼 전단지들의 외양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동일한 전화번호들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

독립주간지 <La Directa>가 발간한 탐사 보고서에 따르면, 이 전단지들의 출처는, 많은 경우 세입자들이 여전히 거주하고 있는 주거지역들을 통째로 사들이고 있는 소수의 기업들이다. 이 기업들은 세입자들로 하여금 집을 떠나도록 설득하고는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더 높은 가격에 팔거나 임대한다. 기업들이 세입자들을 설득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현금을 제공하기도 하고, 집세를 엄청나게 올리기도 하며, 단순히 임대차계약 갱신을 거부하기도 한다. 세입자들이 저항하면, <Desokupa(“점거해산”)> 같은 회사들을 고용해서 강제로 추방해버린다. 파시스트 덩치들에게 돈벌이가 되는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종종 법을 어기기도 한다. 이런 관행은 미디어에서 소수의 부도덕한 기업이 이익을 내기 위해 법망의 구멍과 모호한 부분을 이용하는 지역적인 문제로 그려지곤 한다. 그러나 문제는 바르셀로나를 훨씬 넘어선다. 위와 같은 기업들은 모든 스페인 대도시들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엄청난 임대료 거품의 특공대들이다. 스페인의 유력 부동산 사이트인 <Idealista>에 따르면 스페인 전역에 걸쳐 2016년 한해에만 임대료가 15.9% 상승했으며, 2017년의 첫 3분기 동안 바르셀로나, 산 세바스티안, 카나리아 및 발레아레스 제도 등지에서는 전년 대비 상승률이 20%에 육박하고 있다. 소규모 지구 단위에서의 상승률은 믿기 어려울 정도다. 바르셀로나 산트 마르티(Sant Martí) 지구와 산트 안드레우(Sant Andreu) 지구에서는 임대료가 전년 동월 대비 30% 넘게 상승했다.

이러한 가파른 임대료 상승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결과적으로 장기 거주민들이 자신들의 동네로부터 쫓겨나고 있는데, 이는 부동산 서비스 회사인 <Cushman & Wakefield>가 “거대한 화폐의 장벽”이라 이름붙인 것, 즉 대략 4,350억 달러에 달하는 전지구적 부동산 투기 자본에 의한 것이다. 전(前) UN 주거권 특별보고관 Raquel Rolnik이 묘사한 바대로, ‘거대한 화폐의 장벽’은 식민화를 떠올리게 하는 방식으로 물질화되기 위해 이곳저곳을 떠도는 금융자본의 구름이다. 그녀는 <바르셀로나 현대문화센터(the Center for Contemporary Culture of Barcelona)>에서 한 최근의 강연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일부러 ‘식민화’라는 용어를 씁니다. 그것이 영토 점령과 문화적 지배를 수반하기 때문이지요. 이 식민화는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갖습니다. 금융자본에게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새로운 미개척지를 열어젖힘으로써 임대료를 추출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식민화의 비유가 노예제와 대량학살의 폭력을 삭제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긴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해외투자에 목마른 정부들이 이 자본을 자신들의 나라에 유치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자본은 주민들의 삶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데도 말이다. 스페인은 최근 리츠(REITs), 즉 부동산투자신탁(real estate investment trusts)의 신흥시장으로 떠오름으로써 ‘화폐의 장벽’을 끌어들였다. 리츠는 수입을 발생시키는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기업들인데, 이때 부동산은 주거용일 수도 있고 상업용일 수도 있다. 그렇게 발생하는 수입의 대부분은 임대료에서 발생하며 투자자들에게 배당금으로 지불된다.

스페인에서 리츠는 2009년 사회주의 정권 하에서 합법적 형식으로 도입되었다. 처음에 리츠는 19%의 법인세율 때문에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2012년에 마리아노 라호이(Mariano Rajoy)가 이끄는 우파 정부가 리츠에게 이 세금을 면제시켜주었다. 나라 전체에 걸쳐 임대료가 상승한 것은 바로 이러한 조치가 이루어진 이후였다. 에어비앤비(Airbnb) 같이 임대료를 추출해내는 플랫폼들의 부상 ― 이것은 주거용 부동산과 상업용 부동산 사이의 구분, 혹은 공식적 경제와 비공식적 경제 사이의 구분을 흐린다 ― 을 비롯한 여러 발전들과 더불어, 중앙정부의 조치는 무엇보다 스페인 경제위기를 불러일으킨 바로 그 부문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어주었다. 그것의 끔찍한 결과들을 관리하는 일은 지방 정부들에게 남겨지게 되었다.

국가와 시장에 의해 궁지에 몰리다

스페인에서 영토와 임대료를 찾아다니는 ‘거대한 화폐의 장벽’인 금융자본과 시(市)정부 간의 갈등이 가장 심한 곳은 바르셀로나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닌데, 스페인의 주거운동과 도시자치주의의 물결이 태어난 곳이 바로 바르셀로나이기 때문이다. 또한 바르셀로나는 사회운동과 선거 플랫폼 간의 연결이 가장 튼튼하고, 활동가들과 시의원들 사이의 구분이 가장 흐릿한 곳이기도 하다. 바르셀로나 지역에서 이것은 화젯거리도 되지 않는 흔한 이야기다. 그러나 외부의 관찰자들에게는 평상시에 이것이 어떤 모습을 띨 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최근 <바르셀로나 엔 꼬무(Barcelona En Comú)> 소속 시의원인 갈라 핀(Gala Pin)은 정책의제를 다루는 카탈루니아 지방의 아침방송 <Els matins>에 나가서 <La Directa>의 조사보고서가 확인한 부동산 불량배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MK Premium>의 공동 설립자를 상대했다. 열띤 토론의 와중에 그녀는 <MK Premium>이 하는 일을 violencia inmobiliaria, 즉 ‘부동산 폭력’으로 규정했다. 그녀의 단어 선택은, 그녀가 시의원이 되기 전에 참여했던 주거 플랫폼인 <주택담보대출 피해자 플랫폼(Plataforma de Afectados por la Hipoteca)>(PAH)의 화법과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러한 단어 선택으로 인해 그녀는 우파 야당으로부터 선동가라는 비난을 받았고 <MK Premium>에 의해 명예훼손으로 고소되었다.

주거운동을 향한 핀의 우호적인 태도는 단순한 표현의 문제를 넘어선다. 그녀는 종종 강제퇴거를 가시화하고 그것을 막기 위한 노력을 북돋기 위해 그녀의 많은 소셜미디어 팔로워들을 활용한다. 전형적인 게시글은 이런 식이다. “내일 5건의 강제퇴거가 있습니다. 우리는 노력하고 있지만, 저지하기 위해서는 협력이 필요합니다. 오전 9:30, Arc del Teatre가(街)입니다.”

이러한 게시글들은 선동적이라는 이유로, 혹은 다름 아닌 <바르셀로나 엔 꼬무>의 감시 하에 이루어지는 강제퇴거들에 대한 비난을 선제적으로 모면하려 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일부 급진좌파 서클들로부터 비판받아왔다. 핀을 비롯한 이러한 접근법을 사용하는 다른 시의원들은 단지 제도적 힘의 한계에 대해 솔직하고, 그 한계가 부당할 때 그것을 넘어서도록 사람들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러한 접근법이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많은 강제퇴거를 저지했고, 세입자와 건물주를 중재하기 위해 시정부가 혁신한 주택사무소들의 네트워크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퇴거들을 중단시켰다.

“Occupy and Resist.” A squat in Barcelona. Photo by Oriol Salvador.

이것은 사회운동, 지방의회, 공공행정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이, 상위 국가기관과 경제세력들의 강압에 맞선 저항을 강화하기 위해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그리고 지방정부가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더 많이 열려있게 된 도시로 바르셀로나가 유일한 것도 아니다. 가령 마누엘라 카르메나(Manuela Carmena)가 이끄는 <아오라 마드리드(Ahora Madrid)>는 도시의 참여제도를 시민발의 제안들에 개방했으며,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시의 재원 중 일부를 참여예산에 할당했다. 진보적 녹색연합인 <Compromís>가 <발렌시아 엔 꼬무>와 <스페인 사회당>의 지원을 받아 시를 운영하고 있는 발렌시아는 보행자와 자전거를 중심으로 하는 지속가능한 도시 이동성 모델로의 대규모 이행을 시작하는 중이다. 사라고사에서는 현재 전력망을 통해 공급되는 전기의 100%가 재생에너지를 통해 생산되며, 전력소비량은 15% 가까이 감소되었다.

이 도시들은 사회복지지출을 늘리고 공공주택을 확대하면서도 균형예산을 유지하고 일부의 경우에는 심지어 적자를 감소시킴으로써, 긴축에 대해 “대안이 없다”는 EU의 도그마가 틀렸음을 입증했다. 또한 이들은 더 많은 난민을 받아들이도록 중앙정부를 압박하는 중이며, 일부는 서류상 지위와 상관없이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 의료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라호이의 인종주의적인 ‘2012 의료개혁’에 저항하고 있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의 시정부들은 인권침해를 지적하고 그에 맞선 상징적·법률적 조치들을 취함으로써 이민자구금시설을 폐쇄하고자 하는 의사를 반복적으로 표현해왔다.

물론 이것은 혁명적인 조치들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고려할 때 이 조치들은 녹색 도시계획 및 참여적 거버넌스와 결합된 사회민주주의 프로그램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테크노크러시와 초민족주의적(ultra-nationalist) 극우로 양극화된 유럽의 현재 정치 상황에서 이것은 결코 가볍게 볼만한 것이 아니다. 지난 수십 년간 이루어진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진보들에 대한 이러한 방어를 더욱 눈여겨보도록 하는 것은, 그것이 매우 파편화되어 있는 정치체제에서 소수파 지방정부들에 의해 수행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국가권력과 시장의 변덕 앞에 취약하다. 좌파 정부가 있는 도시들에 내핍을 강제하는 데는,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의 자율성을 크게 감소시키기 위해 2013년에 통과시킨 법안을 시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재무부 장관 크리스토발 몬토로(Cristóbal Montoro)는 이미 그렇게 하고자 하는 의도를 매우 분명히 나타냈다. 한편, 임대료 거품은 계속해서 팽창하여 주민들을 집으로부터, 나아가 도시 중심으로부터 밀어내고 있다. 이러한 위협들에 의해 궁지에 몰린 도시들은 요새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제한할 여유가 없다. 그들은 또한 경계를 넓히기도 해야 한다.

갈등과 협력의 역학

2017년 6월초, 몇몇 구역의 시위대들이 바르셀로나 중심에 있는 대학광장(Plaça Universitat)에서 합류했다. 3,000명의 시위대는 거기서 출발하여 “거대한 화폐의 장벽”의 표적이 된 지역들인 산트 안토니(Sant Antoni), 포블레 세크(Poble Sec), 라발 지구(Raval)를 느릿느릿 행진했다. 몇몇 지점에서 시위대는 특정한 주택블록 앞에 멈춰 섰는데, 그곳들은 세입자들이 그들을 쫓아내려 하는 투기꾼들에게 저항하고 있는 곳이었다. 행진의 끝에서 시위대는 8년 동안 버려져 있었던 아파트를 열고 들어가서 점거해버렸다.

시위행진은 새로운 부동산 거품에 맞서 점점 성장하고 있는 투쟁 서클에서 가장 최근에 등장한 행동 방식이었다. 이 투쟁 서클은 <“바르셀로나는 판매용이 아니다”(Barcelona No Està en Venda)>라는 플랫폼이 조직했는데, 불법적인 관광객용 아파트와 상승하는 임대료로 인한 추방과 싸우기 위해 지난 2년 사이에 출현한 여러 지역의 모임들을 결합한 것이다. 그것은 아나코-생디칼리즘적인 <노동총동맹(CGT)>, <바르셀로나 주민협의회 연합(Barcelona Federation of Neighborhood Associations)>, <지속가능한 관광을 위한 주민회의(Neighborhood Assemblies for Sustainable Tourism)>, <주택담보대출 피해자 플랫폼(PAH)> 뿐만 아니라 2017년 초에 만들어진 <지역 임차인 연합(Sindicat de Llogaters)>까지 포함했다.

이러한 행동들은 공적 토론의 의제를 설정하여 정부와 정당들로 하여금 그 의제 가운데 우선적인 것들을 실행하도록 압박했다. 이들은 기성 언론으로부터 발언권을 빼앗아 왔는데, 언론들은 바르셀로나시와 에어비엔비 그리고 관광업 로비세력 사이에서 최근에 벌어진 갈등에 “관광공포증(touristophobia)” ― 스페인 신문 <El País>가 도입한 용어 ― 이라는 프레임을 덮어씌우려 했다. 사회운동들은 반(反)관광이라는 프레임 ― 이 프레임은 인종주의, 계급차별주의, 외국인혐오의 함의를 갖고 있다 ― 에 말려들지 않고, 갈등의 초점을 부동산 거품과 젠트리피케이션에 맞춰 왔다. <바르셀로나 엔 꼬무>도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프레임을 채택해 왔다. 투기꾼들을 어떻게 겨냥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운동의 일부 부문들과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운동과 좌파 정당들 사이의 이러한 갈등과 협력의 역학은 바르셀로나에서 특히 뚜렷하게 관찰된다. 도시의 오랜 상향식 조직화의 역사가 두터운 사회 구조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 엔 꼬무>에게 길을 열어준 제도적 전회(institutional turn)에 있어서 가장 큰 위험요소는 저명한 활동가들이 거리에서 제도로 이동함으로써 “두뇌유출”과 같은 현상이 발생하여 사회운동이 약화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도적 전회 이후 일어난 사회적 갈등들을 살펴보면 그러한 우려와는 다소 다른 시나리오가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르셀로나 엔 꼬무>는 그것의 구성원들이 속했던 사회운동의 요구들을 공공정책제안으로 번역하는 데 상대적으로 효과적이었다. 노점상이나 공공운수 노동자들의 운동과 같이 그들이 이전에 거의 경험하지 못했던 운동의 요구들을 다루는 데는 그보다 덜 효과적이었다. 그 결과 이러한 운동들이 현재 바르셀로나의 사회적 적대 구조에서 주도세력으로 등장했다. 그들이 생산해내는 긴장이 어떻게 해소될지는 지켜봐야 할 문제로 남아있다.

반면 마드리드의 사회운동과 지방자치 플랫폼 사이에서는 협력이 훨씬 덜하고 대립은 훨씬 더하다. <아오라 마드리드>의 예비선거 제도가 <바르셀로나 엔 꼬무>보다 더 개방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오라 마드리드>를 낳았던 조직들의 연합은 <바르셀로나 엔 꼬무>의 경우보다 훨씬 더 분열되어 있다. 게다가 그들이 합의추대한 후보인 현(現)시장이자 전(前)판사 마누엘라 카르메나는 다른 도시의 지방자치 플랫폼을 이끄는 이들보다 한층 더 제도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

카르메나는 여러 경우들에서 당의 프로그램에 반대해왔다. 그러는 가운데 그녀는 <가네모스(Ganemos)>나 <포데모스(Podemos)>의 반자본주의 분파와 같은 <아오라 마드리드> 내(內) 급진 조직들이 제기하는 비판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개인적인 열성지지자들과 스페인 지방자치 거버넌스의 “대통령중심제적” 모델을 활용했다. 이러한 분열의 가장 충격적인 징후는, <아오라 마드리드>가 잉태된 점거건물이었던 <El Patio Maravillas>가 관광객용 아파트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경우 운동과 제도의 분열은 “화폐의 장벽”을 위해 길을 닦아준 셈이다.

목적이 있는 도시자치주의

스페인의 도시자치주의 플랫폼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도시자치주의가 그 자체만으로는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거버넌스의 한 형식이다. 그것의 내용은 자본주의적일 수도 있고 코뮤니즘적일 수도 있다. 전체주의적일 수도 있고 자유주의적일 수도 있다. 민족주의적일 수도 있고 국제주의적일 수도 있다. 개방된 채로 남겨지면 그것은 단순히 자본으로 가득 찬 하나의 브랜드이거나 다른 행정적 권력에게 비난을 전가하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더욱이, 도시자치주의에 대한 과도하게 단순한 이해는 상이한 유형의 지방자치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과, 수십 년간의 도시화와 지구화가 만들어낸 권력 불균형들을 무시해버릴 위험을 품고 있다. 도시의 추출주의(extractivism)의 결과로 전지구적 북(Global North)에서 출현한 심대한 문화적·정치적 균열 ― 이것은 진보적인 성장하는 도시들을 인구가 감소하고 있는 원주민중심적인 촌락들과 대립시킨다 ― 을 고려할 때 특히 더 그렇다.

신자유주의적인 현상황의 협소한 한계 및 유독한 관계들과 결별하고 단순히 행정적·영토적 자기이익의 재생산을 위한 수단이 되는 일을 피하기 위해, 해방적 도시자치주의는 앞을 보고 걸어갈 수 있게 해줄 전망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다름 아닌 사회운동들이 이것을 제공한다. 온갖 부정의들에 대한 사회운동의 비판에, 세계가 되어야 할 모습과 현(現)사회질서가 억압하는 가치와 실천들이 있다. 좌파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이것들은 상호부조와 연대에 다름 아니다.

가치들을 실천들로 물질화하는 것은 기술적인 과제라기보다는 문화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과제이다. 반대로 거버넌스의 논리는 대개 기술적이다. 거버넌스 자체는 통제와 예측가능성을 중심으로 한다. 저 통제와 예측가능성의 논리에 포섭되지 않기 위해서는, 새로운 대표자들이 자신에게 권력을 가져다 준 운동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도시자치주의 대표자들은 자신들이 인계받은 제도적 구조의 틈들에서 성장하는 모든 운동들을 양성해야 한다. “화폐의 장벽”이 콘크리트로 메우려 하는 것이 바로 이 틈들이기 때문이다.

2년 전 스페인 도시자치주의 플랫폼들의 선거 승리에서 아름다운 점은, 바로 그 승리가 거버넌스의 기술적 논리에 의해 예측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지방자치제도의 문지기들이 저 승리를 민주주의의 오류로 여기는 것은 그 때문이다. 도시자치주의 플랫폼들은 현재 저 구조를 해체하여, 지금까지 억압되거나 지워지거나 착취되거나 무시되어 왔던 사람들, 운동들, 기억들에게 그것을 개방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다. 장차 그들의 과제는 투기꾼들에게는 더 큰 불확실성을 만들어내고, 도시에 거주할 것을 희망하는 이들에게는 더 작은 불확실성을 만들어내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