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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케이디아 그리고 전지구적으로 재개된 생물지역 행동주의

 



가장 고무적인 최근 발전들 가운데 하나가 생물지역주의(bioregionalism)가 재개된 것이었다. 40년쯤 전 1970년대와 1980년대 말에 경제, 생태 파수, 그리고 자연 생물지역들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방식을 다시 상상하려는 대중의 엄청난 욕구가 있었지만 이것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발전으로 점차 약해졌다. 이제 생물지역주의는 훨씬 더 영향력 있고 훨씬 더 세련되게 다시 부상하고 있다.

많은 선구적 지도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퍼시픽 노스웨스트(Pacific Northwest)(주석1)에 있는 활동가들, 학자들 및 사회 혁신가들이었다. 그들은 캐스케이디아라는 용어와 종종 관련되어 있는데, 이 용어는 그들이 브리시티 콜롬비아(British Columbia)(주석2)와 알래스카 남동부에서 워싱턴 주, 오레곤, 아이호아 및 북부 캘리포니아까지 이어지는 생물지역에 붙인 명칭이다. 이 지역은 75만 평방 마일이 넘는 곳으로 천연 열대우림, 화산들 그리고 연어•늑대들•곰•고래•범고래를 위한 야생 서식지 및 1600만 명의 사람들이 사는 야생 거주지를 아우른다.

캐스케이디아 행동주의는 시장들, 문화들, 정체성들을 지역 생태계들과 조화되도록 재발명하기를 원하는 대규모 전지구적 운동의 일부이다. 캐스케이디아 행동주의는 현대 사회들을 설득해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생태계의 선물들을 존중하도록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특유의 장소를 배려하며 거주하도록 하는, 장기간에 걸친 당찬 활동이다. 또한 캐스케이디아 행동주의는 자의적인 정치적 경계들과 전지구적 시장들을 초월하고자 하는 것이 핵심이며, 한 지역의 물의 성질·현상 및 분포, 날씨, 식물과 야생 동물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고, 경제들, 문화들, 그리고 그 환경과 보완적 관계를 맺는 존재 방식들을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다.

생물지역주의의 르네상스가 활기를 얻자 나는 특히 가장 장래성이 있는 전략들과 과제들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싶었다. 나는 공동체 중심의 풀뿌리 프로젝트들의 인큐베이터인 <캐스케이디아나우!>(CascadiaNow!) 설립자이고 최근 들어서 <생물지역운동 캐스케이디아 본부>(Cascadia Department of Bioregion)의 공동 책임자인 시애틀의 조직가 브랜든 렛싱어(Brandon Letsinger)에게 도움을 청했다. 우리의 대화는 팟캐스트 <커머닝의 프론티어>의 가장 최근 에피소드(에피소드 54)에 실려 있다.

렛싱어는 자신의 일은 “생물지역주의가 자본주의와 국민국가에 대한 실현 가능한 대안으로서 주류사상에 진입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실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지역경제를 다시 생각하고 물, 땅, 야생 동물 및 그 밖의 다른 살아있는 힘들을 파수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발전시킴으로써 캐스케이디아의 생태적 자립을 증가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또한 더 책임이 있는 민주적인 정부를 조성하는 것을, 그리고 토착 주권, 시민/부족 파트너십 및 ‘토지 되찾기’ 운동을 촉진하는 것을 뜻한다.

렛싱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사고방식이 거주자들, 장소 또는 생태계를 나타내지 못하는 지도들 위의 선에 기반을 두는 한, 일정 수준의 분할이 항상 존재할 것이다. 미국 정치 구조는 대의제를 훼손하는 개리맨더링과 선들을 재정의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생물지역주의는 그것을 체계 전체를 보는 렌즈에 맞추어 다시 해석한다,

렛싱어에 따르면 [캐스케이디아를 가로질러 흐르는] 콜롬비아 강에 대한 권한을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다양한 자의적인 관할 구역에 할당하는 것은 기능장애이다. “새롭게 시작하여 강 전체를 바라보며 모든 목소리가 포함되는지를 확인함으로써 여러분은 그 사고방식을 긍정적이고 협력적인 구조로 바꾸기 시작할 수 있다.”

생태지역이란 정확히 무엇이며 여기에 기반을 두는 사고가 왜 중요한가?

렛싱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생물지역을 말하는 것은 어떤 장소를 (맨 아래에서부터 시작해서) 그곳의 물질적•문화적•생태적 현실을 통해 정의된 대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생물지역주의는 모든 것을 마치 그것들이 이 세상의 체계들로부터 어쨌든 분리된 양 정치경제와 문명의 렌즈를 통해 보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들이 모든 것을 위한 기본 토대로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제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렛싱어는 “생물지역주의는 사람들을 다시 장소에 연결하는 것이 핵심”이며 “지질학으로 시작된다”라고 말한다. 캐스케이디아의 경우에 이것은 수백억 년에 걸쳐 영토—분수령, 토양, 식물, 동물, 해양 생물—를 형성해온 땅과 화산들의 판들(plates)로 이루어진 거대한 ‘캐스케이디아 섭입대(沈入帶)’(Cascadia subduction zone)(주석3)를 뜻한다.

또한 생물지역주의는 “어떻게 인간이 어떤 장소 내부에서 가장 잘 살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렛싱어는 말한다. 토착민들이 어떻게 수천 년 동안 환경과 지속가능한 조화를 이루며 살아왔는지를 연구하는 것은 많은 의미가 있다. 이 전체론적인, 장기적 관점은 우리가 식량 생산, 전력 생산, 운송 및 도시설계의 현대적 시스템들뿐만 아니라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주석4) 경제활동들 및 문화규범들을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삶에] 어떻게 맞출지에 관하여 생각하도록 도와준다.

나는 콜롬비아의 바리차라 지역에서 활동하는 조 브루어(Joe Brewer)와 함께 한 이전 팟캐스트(에피소드 33)에서 생물지역 행동주의를 살펴보았다. 그는 북미에서 일련의 생물지역 상담과 협동 학습 세션들을 최근에 시작했다. 또 한명의 중요한 생물지역 활동가이자 교육자는 <영국 생물지역 학습 센터>(Bioregional Learning Centre UK)의 이저벨 칼라일(Isabel Carlisle)이다. 그녀의 조직은 수많은 주요 온라인 이벤트들을 주관했고 교육 자료들을 만들었으며 한편으로는 자신의 생물지역인 영국의 사우스 데번(South Devon)에서 과제들과 씨름하고 있다.

브랜든 렛싱어는 생물지역주의 활동가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가 새로운 유형의 지도를 만드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지도는 중립적이지 않다. 지도는 과제와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다. 지도는 국가 해당관청이나 경제 주체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매우 많다. 지도의 궁극적 목적은 기업을 위해서 수익을 내고 그 [정치적] 이해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될 것이다.”

생물지역의 지도제작은 “구글 지도 및 다른 전통적인 지도가 방치한 모든 것”을 지도에 담는다. 야생 동물의 존재, 이동 패턴, 물의 흐름, 그리고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생태적 현상들이 인간 공동체 및 문화와 교차하는 모습을 지도로 제작함으로써 땅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이 지도제작의 기본 발상이다.

캐나다에 있는 다양한 원주민 부족들이 캐나다 정부를 상대로 한 법적 투쟁에서 이런 종류의 지도제작이 그들에게 중요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부족들은 캐나다 국가와 협정을 체결한 적이 결코 없었으며 소송 목적을 위한 원주민의 상황에 대한 증빙자료가 빈약했었다. 토착민 지도제작자들과 후원자들은 부족 원로들을 인터뷰함으로써 식민지 정복으로 그들이 대량 살상되기 전에 토착 본토의 역사적 범위와 성격이 어땠는지를 보여줄 수 있었다. 쎄일리시해(주석5) 17개 섬에 거주하는 약 3천명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생물지역 지도제작 워크숍을 통해 30개의 지도가 포함된 각기 다른 생물지역 지도책자 14개가 만들어졌다.

지도는 2005년 『쎄일리시해 섬들』(Islands in the Salish Sea: A Community Atlas)이라는 한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지도에는 섬들의 사랑받는 보물들, 예를 들어 대대로 물려받은 과수원, 낚시터, 위험에 처한 야생 산호의 위치, 새들의 서식지 그리고 아주 오래된 캐나다 원주민들의 유적지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각 경우에 섬 공동체가 지도에 포함되어야 할 것을 결정했고 다른 지역의 것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서 지역 예술가들이 작업에 참여하도록 했다.

‘쎄일리시해’는 캐나다계 미국인 생물학자 버트 웨버(Bert Webber)에 의해 1970년대에 생물지역 용어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퓨젓 싸운드(Puget Sound)에 연결된 조지아 해협과 그 주위에 사는 워싱턴 주의 쎄일리시어 사용자를 예우하고, 이 수역에 속하는 석유, 물고기, 해양 포유동물들에게 정치적 정체성이 없음을 인정하고 싶어 했다. ‘쎄일리시해’라는 용어가 인기를 끌었고 지금은 이 수역을 관례적으로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브랜든과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생물지역주의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 많고 각각의 생물지역들 안에 따라해 볼 것이 많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 주제에 대한 훌륭한 소개를 접하려면 우리가 나눈 대화를 여기서 들어 보는 것이 좋겠다.

주석1 : [옮긴이] 퍼시픽 노스웨스트 서쪽으로 태평양과 동쪽으로 로키산맥을 둘러싼 북아메리카의 북서부 지역을 가리키며 캐스케이디아라고도 불린다.
주석2 : [옮긴이] 브리시티 콜롬비아는 캐나다의 최서단(最西端) 주로 태평양과 로키산맥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주석3 : [옮긴이] 섭입대(攝入帶)란 지구의 표층을 이루는 판이 서로 충돌하여 지각판 하나가 다른 지각판 밑으로 밀려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주석4 : [옮긴이] 적정기술이란 기술이 사용되는 사회 공동체의 정치적, 문화적, 환경적 조건을 고려해 해당 지역에서 지속적인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기술이다.
주석5 : [옮긴이] 쎄일리시해(Salish Sea)는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와 미국 워싱턴주에 걸친 태평양의 해역이다. 조지아 해협(Strait of Georgia), 후안 데 푸카 해협(Strait of Juan de Fuca), 퓨젓 싸운드(Puget Sound)로 이루어지며 복잡한 해협(channel)과 수로망을 포함한다.


By Department of Bioregion – Own work,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05581724




건축의 일곱 등불

 


  • 저자  :  정남영
  • 분류 :  번역서 해설
  • 설명 : 최근에 부북스에서 출간된 번역서 『건축의 일곱 등불』(존 러스킨 지음)에 붙인 해설 가운데 1절과 4절을 여기 올린다. 여기서 해설자는 번역서의 내용을 직접 다룬 부분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틀을 제시한다.  주석 번호는 책에서의 주석번호이며, 2절과 3절의 주석들인 21번부터 71번이 비어 있다. 해설 전체는 총 5절로 되어 있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을 한겨레신문(2024년 9월 20일자)에서 볼 수 있다.

I. 러스킨과 근대

나의 러스킨 공부는 크게 내세울 것이 없다. 영국 소설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가르친 나는 문학 연구보다는 예술 연구로 알려져 있는 러스킨에게 처음에는 큰 관심을 갖지 못했다. 그러다 톰슨(E. P. Thompson)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01를 읽으면서 모리스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인 그의 존재를 새삼 인지하게 되어 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2000년대 후반에는 『베네치아의 돌들』(The Stones of Venice) 중 고딕 건축의 성격을 다룬 부분—러스킨이 모리스에게 영감을 준 바로 그 부분—을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으나 더 나아간 공부를 할 시간을 좀처럼 내지 못하다가, 본서의 번역이 시작되고 해설을 맡으면서 비로소 좀더 공부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러스킨을 잘 안다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공부이지만 말이다. 나는 영국의 소설가 디킨즈(Charles Dickens)와 로런스(D. H. Lawrence)에 공부를 집중했고, 영문학 연구와 아울러 한국 문학작품들에 대한 평론 활동을 했으며, 이와 함께 철학 분야로 공부를 확대하여 맑스, 들뢰즈·과타리, 네그리, 스피노자, 니체, 푸코 등을 읽었다. 비교적 최근에 들어와서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운동인 커먼즈(Commons) 운동의 진전과 확대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이 과정에서 ‘커먼즈와 집’이라는 주제를 중요한 문제의식으로서 가지게 되었다. 이 모든 초점은 근대 극복 혹은 대안근대로의 이행에 맞추어져 있었다. 나는 러스킨의 저작들을 시간이 허용하는 만큼 읽으면서 나의 이러한 공부나 관심사가 러스킨에게 들어있는 어떤 핵심적인 사상과 연결되는 것을 느꼈다. 이 ‘핵심적인 사상’이 바로 내가 이 해설에서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바이다.

이 해설은 당연히 건축 분야의 전문가들(건축가들이나 건축비평가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일반 대중을 향한 것이다. 예술 및 건축 비평가로서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러스킨의,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책에 대한 해설이 건축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새삼 필요할 리가 별로 없을 터이고, 더군다나 나는 건축 분야의 비전문가이므로 건축 전문가들을 위해 그럴듯한 해설을 쓴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러스킨 자신이 당시 영국 건축계의 주류와 서로 맞지 않았다.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많은 건축가들과 건축 작가들은 러스킨을 경멸하거나 러스킨에게 분노하거나 아니면 둘 다였다. 러스킨은 실제적이지 않거나 미친 것으로 간주되었다.02

건축가들은 일반적으로 이 책에 매우 경탄하는 사람들 축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책의 범위를 종종 오해했다. 러스킨의 부수적 의견들 가운데 다수는 공상적이거나 의심스러웠다. 그는 건축가들의 견해를 무마하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고 그가 건축계 앞에 세우는 이상들은 준엄했다.03

물론 결과적으로 러스킨의 작업이 건축예술의 품격을 천명하고 평판을 높이는 데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건축계의 주류와의 차이가 좁혀진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당대 건축계와 러스킨의 차이는 특정 전문분야에서 일어나게 마련인 견해의 차이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한 태도의 근본적인 차이이기도 했던 것이다.

「삶과 그 예술의 신비」(“Mystery of Life and its Arts”)에서 러스킨은 자신의 삶을 실망과 좌절의 연속으로 개관한다. 그는 스무 살에서 서른 살까지 그의 “삶의 가장 강렬한 10년” 동안, 레이놀즈(Joshua Reynolds) 이후 영국에서 가장 훌륭한 화가라고 생각하는 터너(J. M. W. Turner)의 예술가로서의 우수성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더군다나 터너는 이 노력의 “피상적 효과가 가시화되기도 전”에 사망했다.04 러스킨은 탁월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가 헛되이 창작하다 헛되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터너는 러스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받았던 것이다.

러스킨은 회화 연구를 하면서 건축 연구를 병행했다. 자신의 말로는 회화 연구에서보다 “덜 열심일지는 몰라도 더 신중한 노력”을 투여했다고 한다.05 러스킨은 건축의 경우에는 회화의 경우와 달리 공감해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이들과 함께한 러스킨의 노력도 (이미 당대의 건축계 주류와의 관계를 언급한 데서 추측할 수 있듯이) 대세에 밀려서 좌절되었다. “우리가 도입하려고 한 건축은 현대 도시들의 분별 없는 사치, 형태를 왜곡하는 기계적 구조, 지저분한 비참함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 나는 나의 힘의 이 새로운 부분 또한 헛되이 쓰였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철로 된 거리들과 수정으로 된 궁전들에서 물러나 지질학과 식물학 연구로 관심을 돌렸다”.06

그 이후에도 영국의 주류 사회는 러스킨에게 도통 맞지 않는 곳이었다. 러스킨은 당대의 현실로 관심을 돌리면서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나아갔는데, 이 비판 또한 당시 영국의 자본주의 추진 세력에게는 당연히 못마땅한 것이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1860년에 일련의 정치경제학 비판 글들이 『콘힐 매거진Cornhill Magazine』에 연속으로 실리다가 (편집자의 우호적인 태도와 과감함에도 불구하고) 독자들과 출판사의 반대로 네 편에서 중단된 일이다. (이 글들은 나중에 Unto This Last라는 책으로 출판된다.)07 사실 앞에서 말한 “근본적인 차이”―즉 삶을 바라보는 시각의 근본적인 차이―는 건축계 주류와의 사이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당대 영국 자본주의를 추진하는 세력들 전체와의 사이에도 존재했었다. 당대의 자본주의 추진 세력의 사고는 근본적으로 공리주의적이다. 즉 인간의 모든 능력과 힘을 물질적 효용을 생산하는 수단으로만 본다. 이들은 “고기가 삶(생명)보다 가치 있고 옷이 몸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며, 땅을 마구간으로 보고 땅의 결실들을 말 사료로 보는” 자들이다.08 이들의 궁극적 목적은 상품화된 물질적 효용 즉 교환가치의 재현자인 자본의 축적이다.

이와 반대로 러스킨은 물질적 효용을 삶에 도움을 주는 도구로 본다. 그리고 예술처럼 그 자체로는 물질적 효용이 없는 ‘무용함’이 삶의 목적이다. ‘무용함’ 자체가 목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무용함’은 공리주의와의 근본적인 차이를 나타낼 뿐이고, 러스킨이 깊은 의미에서 말하는 것은 예술을 비롯해서 삶의 목적이 되는 어떤 대상을 신의 활력을 분유(分有)한 것으로 보는 태도이다. 여기서 ‘신’이라는 단어에 우리가 종교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09 철학적 의미의 ‘신’으로 읽으면 된다. 사실 러스킨의 철학은 그것이 활력의 철학이라는 점에서 스피노자와 통하는데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신’은 ‘무한한 활력’에 다름 아니며, 러스킨에게 있어서도 그렇다. 러스킨은 이 무한한 활력이 만물에 나뉘어 부여되어 있고 만물은 이 활력으로 인해서 그 나름대로 신성하고 아름답다고 본다. 물론 아무나 이 신성함과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아니다. 이 신성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공감하고 경탄하고 기뻐하는 활력이 필요하다. (이것 역시 신이 부여한 활력이다.) 그래서 러스킨이 “인간의 효용과 기능은 … 신의 영광의 목격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10 그는 특정의 종교적 교리를 설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진정한 의미의 ‘인간’에게서 활력이 가진 핵심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활력은 개인마다, 집단마다 그 정도가 다르게 나타나며, 역사적으로 상승과 하강을 겪는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와서 유럽 거의 전체에 걸쳐서 이 활력의 상태에 전에 없이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된다. 바로 이로 인해서 예술적 능력은 쇠퇴하고 이 쇠퇴에 대한 감이나 인식이 없는 근대 추진자들과 이들을 비판하는 러스킨 사이에 근본적인 어긋남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제 활력의 상태에 생긴 이 문제를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삶과 그 예술의 신비」에서 러스킨은 ‘인간의 일’, 즉 인간이 자신의 삶을 위해 “인간의 형태를 띠고 사는 동안”11 해야 하는 일로 ① 먹을 것을 생산하기, ② 입을 것을 생산하기, ③ 거처를 만들기, ④ 예술이나 과학 등 사유와 관련된 것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를 든다.12 ①, ②, ③은 물질적 효용의 차원인데, 앞으로는 ‘유용성의 차원’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④는 삶이 단순한 물질적 욕구의 충족을 넘어서 꽃처럼 피어나는 차원인데, 이는 ‘활력의 차원’이라고 부르기로 하자.13 ①, ②, ③, ④ 모두 인간의 힘이 자연력과 결합하는 방식을 나타내는데, 이 방식은 이 두 차원을 따라 둘로 나뉜다. 유용성의 차원은 물질의 법칙이 적용되는 차원으로서 자연력이 인간에게 이전되고 다시 자연으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가령 자연력이 인간으로 이전되어 있는 동안에는 이전된 양만큼 자연에서는 감소된다. 활력의 차원에서는 자연력이 감소되지 않고 거기에 각인된 인간의 힘과 함께 결합된 상태로 보존되며, 이 과정에서 양자 모두가 새로운 차원의 힘으로 상승한다.

이제 인간의 삶의 역사의 정상적 진전은 유용성의 차원에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킨 후 활력의 차원에서 각 집단(민족 등)이 가진 능력에 따라서 가능한 만큼 최대로 상승하는 것이다. 이것을 ‘인간 되기’라고 부르기로 하자. 두 차원 모두를 놓고 볼 때 둘째 차원이 이 과정을 비로소 ‘인간 되기’로서 결정한다. 만일 둘째 차원으로 도약하지 못하고 첫째 차원을 충족하는 데서 끝난다면, 그것은 ‘만족한 동물’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14 둘째 차원이 이런 의미에서 결정적이지만, 사실 두 차원이 모두 필수적이다. 의·식·주는 인간의 생존의 기본 조건으로서 생존 없이는 활력적인 삶도 없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유용성의 차원에서 예술성이 자라나온다는 점이다. 사물을 인간에게 유용한 형태로 바꾸는 능력인 기술(특히 손기술)이 고도화되고 다양화되면서 예술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러스킨은 “모든 건축예술은 컵과 받침대의 모양을 짓는 데서 시작해서 멋진 지붕에서 끝난다”고 한다.15

러스킨에게 근대는 이러한 ‘인간 되기’의 경로에서 이탈한 시대이다. 러스킨의 시선에 먼저 들어온 것은 예술적 능력의 전반적인 쇠퇴이며, 그 다음에 그가 주의를 돌린 곳에서 본 것은 자본주의적 번성이라는 외양에도 불구하고 생존의 기본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처참한 민중의 모습이다. 러스킨은 이 모습을 서양의 긴 역사적 과정에 놓고 한탄한다. 6천 년 동안 농업이 이어져 왔음에도 50만 명이 굶어죽는 일이 발생하고16 6천 년 동안 직조를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수도들의 거리는 내다버린 누더기와 썩은 넝마의 판매로 악취가 나며, 6천 년 동안 집짓기를 해왔음에도 그 모든 기술과 힘의 대부분이 흔적도 남아 있지 않고 떨어져 나온 돌들만 들판에 거추장스럽게 나뒹굴거나 시냇물에서 물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17

유용성의 차원이 피폐해질 뿐만 아니라 유용성의 차원과 활력의 차원 사이의 건강한 연결이 단절된다. 인구의 다수가 유용성의 차원에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한편, 이 욕구를 충족시킨 소수는 물질적 이익의 차원에서 더 많은 축적(수익, 이윤, 지대 등)을 원할 뿐 자연력과의 결합을 활력으로 상승시키는 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리하여 활력의 양성과 발휘는 현저하게 쇠퇴하게 되는 것이다. 러스킨은 수익을 우선으로 하는 조건에서는 진정한 건축이 이루어지기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만일 어떤 사회가 스스로를 조직해서 가장 아름답고 가능한 한 가장 강한 집들을 예술을 위해서든 사랑을 위해서든 짓고자 한다면—궁전을 그 자체를 위해서 짓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집을 짓고자 한다면―그런 사회는 볼 만한 어떤 건물을 지을 것이지 수익을 가져올 건물을 짓지는 않을 것이다. 진정한 건축물은 자신을 위해 집을 원하는 사람이 지으며 자신의 비용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식으로 짓는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이 좋아하는 식으로 짓는 것이 아니다.18

바로 이것이 근대에 와서 활력의 상태에 일어난 심각한 문제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 되기’는 정체 혹은 후퇴를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러스킨에게 이러한 ‘인간 되기’의 실패가 절망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삶이 [그]를 실망시킬수록 삶은 [그]에게 더 근엄하고 놀라운 것이 되었”으며,19 그는 “예술 혹은 다른 분야에서의 모든 지속적인 성공은 … 인간의 전진하는 힘에 대한 근엄한 믿음에 의해서, 혹은 인간의 유한한 부분이 언젠가는 불멸성에 함입되리라는 약속에 대한 근엄한 믿음에 의해서 하위의 목적들을 다스리는 데서 온다는 것을 점점 더 명확하게 보았고, 예술 자체는 이 불멸성을 천명하려는 노력에서만 … 힘찬 활력이나 명예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점점 더 명확하게 보았다.”20

러스킨이 『건축의 일곱 등불』을 썼던 때(1849년)는 그에게 아직 희망이 있던 때였다. 그가 나중에 건축에 대해 말하기를 포기했지만, 이는 자신의 한 말이 틀려서가 아니라 말해도 소용이 없어서였다. 아무리 말해도 귀에 ‘돈’못이 박혀있는 근대의 주류 세력을 꿰뚫고 현실에 영향력을 발휘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

IV 러스킨과 근대 너머

건축의 이러한 두 가지 특권은 예술 일반에 구현되는 모든 활력이 그렇듯 잠재적으로는 영원히 존재하지만, 실제 현실화는 늘 불투명하다. 우리가 보았듯이 그 현실화는 적어도 러스킨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사실 지금 우리에게도 그렇다. 몇몇 정치인들이나 관료들이 사회를 대표하듯이 소수의 큰 건물들이 건축을 대표하며, 건축가는 일반적으로 사회에 대한 공동체적 책임감이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특화된 일을 하는 전문가가 된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러스킨에게 예술은 삶의 기본 조건이 충족된 후에 시작된다. “모든 예술은 손으로 하는 동작과 당신의 민중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미덕과 친절함에 토대를 둔다.”72 민중이 기본적으로 어엿한 삶을 누릴 때, 민중의 생활에 유용한 물건들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며, 이 물건들의 형태가 필요에 따라 변경되고 새로운 형태들이 고안되는 과정(가령 컵, 손잡이 달린 컵, 컵에 물을 따를 주전자, 손을 들고 다니기 더 좋은 손잡이 두 개 달린 주전자, 물을 대량으로 마실 컵, 섬세하게 마실 컵, 물 따르기 쉬운 주전자, 향수 보관하기 좋은 용기, 지하실에 저장하기 좋은 용기 등)의 연속선상에서 “지금까지 예술이 성취한 가장 아름다운 선들과 가장 완벽한 유형의 엄밀한 구성이 발전해나온다.”73

더 나아가 건축은 민중의 주거의 필요에 따른 건물에서 시작해서 더 큰 건축물로 확대된다. 각자 자신의 지붕을 가지는 것이 우선적이다. “모든 읍에 큰 지붕을 짓기 전에 작은 지붕들을 짓고, 원하는 누구나가 자신의 지붕을 가지도록 하라.”74 그 다음에 이 각자의 작은 집들이 모여서 도시를 형성한다. “그리고 집들이 도시에 한데 모여있을 때, 사람들은 자신들의 건축을 공통의 법칙에 종속시킬 정도로 시민적 우애를 가지게 될 것이고 인간의 주거지들이 한데 모인 전체가 대지 위에서 끔찍한 것이 아니라 예쁜 것이 되기를 욕망할 만큼의 시민적 자긍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75 러스킨은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가상의 청중들(현실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청중들)을 향해 당당하게 이렇게 말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것의 가능성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그것의 불가결성에만 관심이 있다.”76

이 말을 좁게 이해하는 사람은 러스킨이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일에는 별로 공을 들이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실은 전혀 다르다. 러스킨은 당대의 정치경제학을 비판하는 단계 이후에 ‘인간’이 사는 곳을 실제로 만드는 일을 자신의 삶의 당연한 행로로서 추구했다. 그는 1871년 ‘영국의 노동자들과 근로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들’(Letters to the Workmen and Labourers of Great Britain)이라는 부제가 붙은 『포르스 클라비게라』(Fors Clavigera)77의 집필을 시작하면서 <성 조지 길드>(St. George’s Guild)라는, 무엇보다도 토지와 동지 관계를 이루는 삶형태를 직접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드는 준비를 시작한다.78

1878년에 『포르스 클라비게라』의 집필이 완료되고 <성 조지 길드>의 설립도 완료된다. 이로써 러스킨의 삶의 단계는 넷으로 나눠볼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을 『포르스 클라비게라』 ‘Library Edition’의 편집자는 이 책에 대한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쉽고도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

회화비평가로 시작한 그는 예술이 정말로 훌륭한 것이 되려면 아름다운 현실의 재현이어야 하고 즐거움의 정신으로 추구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건축비평가로서 활동하면서 그는 예술이 민족적 성격의 반영이며 고딕의 비밀은 건축공의 행복한 삶에 있음을 발견했다. 다음 단계는 그와 같이 열렬한 기질을 가진 사람에게는 명확하고 단순했다. 그는 상상의 세계에서 사는 데 만족하지 않고, 좋고 아름다운 것의 조건을 실제 세계에서 현실화하려고, 인간들 사이에 신의 성전을 지으려고 노력했다.79

여기서 우리는 그의 삶의 진행 과정 자체가 앞에서 말한 유용성의 차원과 활력의 차원의 연속성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두 차원의 이러한 연속성 혹은 달리 말하자면 삶의 통합성이 바로 그가 우리의 시대에 가지는 의미의 핵심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삶의 통합성의 ‘불가결성’은 기후 변화로 인한 위기가 심각해진 우리의 시대에는 러스킨의 시대와 비할 바 없이 절실한 것이 되었다는 점이 러스킨의 현재적 의미를 배가시킨다. 유용성의 차원과 활력의 차원의 분리야말로 지금 인류를 크나큰 위기에 몰아넣고 있는 기후 변화의 근본적 원인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점에서 인류사에서의 큰 진전으로 꼽을 근대화(산업화)가 바로 지구 전체를 장악하게 될 이 분리의 시작이었다. 근대화는 안타깝게도 자연의 힘과 인간의 힘의 결합에 왜곡이 가해지는 형태로 일어났다. (그 이전에는 결합의 정도가 낮고 범위가 좁았을지언정 왜곡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맑스가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소외’라고 부른

이 왜곡의 핵심은 현실에서의 인간이 앞에서 말한 진정한 의미의 ‘인간’에서 벗어난 데 있다.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란, 맑스의 표현으로는 자연력과의 결합에서 자신의 본질을 구현하는 인간, 자연과 본질상의 공통체를 이루는 인간이다. 소외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은 인간의 제2의 몸이었다. (이것을 맑스는 ‘비유기적 몸’이라고 부른다.) 이제 이 두 몸은 분리되며 자연은 몸의 지위를 잃고 그저 인간의 외부에 있는 ‘객체’가 된다. 그리고 인간은 이 ‘객체’에서 분리되었다는 의미에서 ‘주체’가 되는데, 이 ‘주체’로서의 인간을 ‘객체’와 다시 연결시켜주는 것이 자본이다. (사실 자본의 왕국에서는 개인들도 서로에게는 ‘객체’이며, 자본만이 실효적인 ‘주체’이다.)

이제 인간에게 내재하는 활력은 자연의 힘과의 연결을 매개하는 자본(화폐80)의 활력으로 오인되어 자본이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하게 되고, 인간과 자연 모두가 자본의 증식을 위한 수단이 된다. 자본은 신이 된다. 그런데 이 신은 인간에게 별로 호의를 갖지 않은 신이라서 이 신이 주도하는 생산은 러스킨이 ‘복종의 등불’ 장에서 말한 ‘복종’과 ‘절제’의 능력을 쇠퇴시킨다.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는 ‘복종’과 ‘절제’의 능력이란 맑스의 말로는 ‘아름다움의 법칙에 맞춘 생산’을 할 줄 아는 능력이다.

동물은 자신이 속한 종의 척도와 욕구에 맞추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반면에 인간은 모든 종의 척도에 맞추어 생산할 줄 알며, 일반적으로 대상에 내재하는 척도를 적용할 줄 안다. 따라서 인간은 아름다움의 법칙에 맞추어 만들어낸다.81

‘인간’은 자신의 척도를 내세우지 말고 “일반적으로 대상에 내재하는 척도”를 알아내야 하며 그렇게 알아낸 척도를 따라야 한다(복종).82 그리고 인간의 힘을 여기에 맞추어 양성해야 하는 것이다(절제). 자본은 ‘아름다움의 법칙’이 아니라 ‘이윤 증식의 법칙’을 자연과 인간 모두에게 부과한다. 이러한 자본주의적인 생산이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를 발생시키는지를 다시 맑스의 말로 설명해볼 수 있다. 『자본론』 1권 15장 10절에서 맑스는 이렇게 말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인구를 대중심지로 집결시키며, 도시 인구의 비중을 끊임없이 증가시킨다. 이것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한편으로는 사회의 역사적 동력을 집중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과 토지 사이의 물질대사 즉 인간이 옷과 식량으로서 소비한 토지의 성분들이 토지로 복귀하는 것을 교란하고, 따라서 토지의 비옥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교란한다.83(인용자의 강조)

다시 말해서 자본이 주도하는 생산은 물질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순환하는 데 (즉 두 ‘몸’ 사이의 질료 교환에) 장애를 일으킨다(‘물질대사의 교란’).84 그렇기에 “자본주의적 농업의 진보는 그 어느 것이나 노동자를 약탈하는 기술의 진보일 뿐만 아니라 또한 토지를 약탈하는 기술의 진보이며, 일정한 기간에 토지의 비옥도를 높이는 그 어느 것이나 이 비옥도의 항구적 원천을 파괴하는 진보이다. (…)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의 원천인 토지와 노동자를 파멸시킴으로써만 기술을 그리고 사회적 생산과정의 결합을 발전시킨다.”(인용자의 강조)85 이렇게 “모든 부의 원천인 토지와 노동자를 파멸시”키는 과정의 연장선상에 환경 파괴가 있다.

기후 변화를 아마도 영국에서 최초로 (과학자들보다 먼저) 간파한 사람이 러스킨일 것이다. 즐거움의 원천인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것이 습관이 된 러스킨은 1871년 어느 날 50년 동안 관찰해오던 하늘에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이상한 폭풍 구름(storm-cloud)이 있는 것을 목격하고 계속해서 관찰하게 된다. 러스킨은 이러한 관찰을 근거로 날씨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주장을 그의 『19세기의 폭풍 구름』(The Storm-cloud of the Nineteenth Century)에 실린 두 개의 강연86에서 하는데, 당시 언론은 러스킨의 주장이 “상상해냈거나 제 정신에서 나온 것이 아닌” 것이라고 조롱했다.87 과학자들도 처음에는 이 현상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러스킨의 관찰이 정확하고 그 원인도 명확하다는 것이 확인되게 된다. 산업 통계에 따르면, 러스킨이 문제가 되는 현상이 증가한 것으로 잡은 날짜는 영국에서나 중앙 유럽의 산업화된 나라들에서나 석탄의 소비가 비약적으로 올라간 때였다고 한다.88

러스킨은 당시에 자신이 관찰한 현상을 이론적으로 정식화하지는 않았다. 성경에서 가져온 구절이나 용어로 제시할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러스킨이 이 현상의 근본적 원인—산업화가 ‘인간’의 길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진행된 것—을 충분히 말해왔음을 안다.

이와 관련하여 기계에 대한 러스킨의 견해가 흥미롭다. 독자들이 가령 본서 4장에서 철도를 비판하는 대목을 보고 러스킨을 기계의 사용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으로 본다면, 이는 성급하고 섣부른 판단이다. <성 조지 길드> 설립 취지문에 단 주석에서 러스킨은 이렇게 말한다.

길드에서 기계류는 그것이 건강한 육체적 활동을 대체하거나 장식 일에서 손노동의 기술과 정밀함을 대체하는 경우에만 금지된다는 점을 세심히 유의해야 한다.89

고딕 건축물에 대한 그의 견해에서 보듯이,90 그리고 위에서 인용한, 아래로부터의 도시 구축에 대한 그의 견해에서 보듯이, 러스킨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있는 활력을 서로 합하여 거대한 것을 세워 올릴 수 있다고 믿는다. 기계도 그렇게 쓰일 수 있다면 러스킨이 반대할 리 없고 심지어는 그러기를 바란다. 실제로 러스킨은 영문학 사상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기계 예찬을 쓰기도 했다.91 맑스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러스킨이 반대하는 것은 기계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기계에 예속되는 것이다. 기계는 인간의 일정한 활력의 결과물이지만, 기계에 인간이 예속되면 자연과의 동지 관계를 통해 증가되어야 할 활력이 오히려 감소되게 된다. “영국 다중의 활기가 연료처럼 공장의 연기의 먹이로 보내진다.”9293

자연력과의 관계에서도 러스킨이 반대하는 것은 자연력을 감소시키는 경우이다. 이는 기계를 움직이는 동력에 대한 그의 견해에서 잘 드러난다. “… 기계류의 유일하게 허용되는 동력은 바람이나 물의 자연력이다. 미래에는 전기력도 거부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냇물과 바람이라면 비용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연료를 사정없이 맹렬하게 낭비하는 증기력은 절대적으로 거부된다.”94

이렇듯 ‘착취된’ 인간의 힘(노동력)과 ‘착취된’ 자연력이 바로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계의 동력이었기에 ‘인간’의 길을 다시 가는 것, 즉 자연과의 동지 관계를 회복하는 것—여기에 인간들 사이의 동지 관계의 회복이 필수적으로 포함된다—이 오늘날의 삶을 틀짓는 자본의 논리로부터의 해방의 주된 내용이 될 것이다. 다만 ‘인간’의 길을 간다는 것은 미리 정해진 어떤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인간’으로 만드는 과정이며 이때 ‘인간’이란 언제나 아직은 구현되지 않은 미지의 존재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다. 스스로를 ‘인간’으로 만드는 방식에 대해 러스킨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릇된 일을 함으로써 더 현명해지거나 더 강해지는 일은 없다. 당신은 올바른 일을 함으로써만 더 현명해지고 강해진다. 가장 으뜸가는 것, 필요한 단 하나는 강압 아래서일지라도 올바른 일을 하고 마침내 강압 없이 올바른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인간’이다.95

“올바른 일”이란 러스킨의 말로는 ‘복종’과 ‘절제’의 일이고, 맑스의 말로는 ‘아름다움의 법칙’에 맞추는 일이다. “강압 없이 올바른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자유로움’으로의 상승을 의미한다. ‘자유로움’으로의 상승은 활력의 증가를 낳고 활력의 증가에서 기쁨, 행복, 사랑이 나온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 사회는 ‘자유로움’으로의 상승을 말하기에 턱없이 부족한데다 기후 변화로 인해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지만, 인류사에서 드문드문 성취되었고 지금도 그렇게 성취되고 있는 ‘자유로움’으로의 상승의 사례들이 우리에게 유산으로 맡겨져 있다. 훌륭한 예술작품들은 이러한 성취의 강력한 일부이다.96 예술작품의 뛰어남은 예술가의 ‘사적’ 성취에 국한되지 않는다.97 예술가의 능력은 공동체 전체에 의해 여러 세대에 걸쳐 양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사유의 노력으로 성취되는 것도 아니고 말하기의 정확성에 의해 설명되는 것도 아니다. 예술은 어떤 힘의 본능적이고 필연적인 결과인데, 이 힘은 정신이 여러 세대를 거침으로써만 발전될 수 있으며 특정의 사회적 조건들—이 조건들은 그것들이 규제하는 능력이 느리게 성장하는 만큼이나 느리게 성장한다—에서 마침내 살아나게 된다. 고결한 예술이 존재하려면 강력한 역사의 전 시기가 집약되고 수많은 죽은 이들의 열정들이 응축되어야 한다.98

그래서 “러스킨에게는 예술을 가르치는 것이 모든 것을 가르치는 것이었다.”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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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01 이 책의 한국어본은 영미문학연구회의 (나를 포함한) 여러 영문학자들에 의해 번역되어 2012년에 출판되었다.

02 Introduction to The Seven Lamps of Architecture, The Complete Works of John Ruskin, Library Edition 1903, Volume VIII, xxxix쪽. ‘Library Edition’은 쿡(E. T. Cook)과 웨더번(Alexander Wedderburn)이 편집한 러스킨 전집의 표준판이다. 앞으로 러스킨의 저작의 특정 대목을 인용할 경우 저서명이나 글 제목은 따로 밝히지만 출처로는 ‘Library Edition’의 몇 권, 몇 쪽인지만 다음과 같이 표시하기로 한다. 예) 전집 9권 69쪽의 경우: LE V9, 69쪽.

03 같은 책 xli쪽.

04 이상 LE, V18, 148쪽. 『현대 화가론』(Modern Painters)은 1843년에 1권이 나왔고 3년 후인 1846년에 2권이 나왔다. 그 이후 10년이 지난 1856년에 3권과 4권이 나왔고 다시 4년이 지난 1860년에 마지막 권인 5권이 나왔다. 2권과 3권 사이의 10년 동안 러스킨은『 건축의 일곱 등불』(1849)과『 베네치아의 돌들』(총 3권, 1851-53)을 썼다.

05 같은 책 149쪽.

06 같은 책 150쪽. “수정으로 된 궁전들”은 1851년 영국에서 만국박람회(Great Exhibition)가 열린 건물인 수정궁(Crystal Palace)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수정궁은 원래 세워진 하이드 파크에서 1854년 런던 남부의 시더넘 힐(Sydenham Hill)로 옮겨졌다가 1936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러스킨은 수정궁이 기술적 재능은 빛날지라도 예술적 의미는 없는 것으로 보았다.

07 한국어 번역본으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김석희 옮김)가 있다.

08 Modern Painters, vol. 2, LE V4, 29쪽.

09 러스킨이 종교와 관련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러스킨은 복음주의적 프로테스탄티즘의 문화에서 성장했으며, 그의 글에는 성경에서의 인용이 빈번하게 나온다. 그런데 그는 시간이 가면서 협소한 종교적 틀을 벗어났다. 본서의 1880년판 서문에도 나와있듯이 러스킨은 이 책을 쓸 당시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복음주의적 프로테스탄티즘’을 담은 대목들을 1880년판에서는 삭제한다. “…극단적이고 전적으로 거짓된 프로테스탄티즘을 담은 몇몇 부분은 본문과 부록에서 똑같이 빼버렸[다].”(본서 7쪽) 그는 나중에는 기독교를 떠날(‘탈개종’할) 생각까지 하게 된다. 물론 그는 ‘탈개종’을 하지는 않고 기독교도의 범위 내에 머물게 되지만, 이때 그의 기독교는 기독교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관용적인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10 LE V4, 28-29쪽.

11 LE V18, 180쪽.

12 “확실하게 좋은 것은, 첫째는 사람들을 먹이는 데, 그 다음에는 사람들을 입히는 데, 그 다음에는 사람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는 데, 마지막으로는 예술이나 과학이나 기타 어떤 사유의 주제로 사람들을 올바르게 즐겁게 하는 데 있다”. 같은 책 182쪽.

13 ‘삶의 가능성의 차원’이라고 좀 길게 부를 수도 있다.

14 러스킨이 생각하는 ‘인간 되기’는 맑스가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말하는 ‘자연의 인간으로의 생성’, 그리고 니체의 다음 대목에 나타난 ‘자연의 인간으로의 도약’과 크게 통하는 바가 있다. “진정한 인간들, 더 이상 동물이 아닌 존재들, 즉 철학자들, 예술가들, 성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이 등장하면서, 그리고 이들의 등장을 통해 결코 도약을 않는 자연이 유일한 도약을 했다. 그것도 기쁨의 도약이다.” Friedrich Nietzsche, Untimely Meditations, ed. Daniel Breazeale, trans. R. J. Hollingdale (Cambridge University, 1997) 159쪽.

15 LE V20, 96쪽. “최고의 건축물은 멋지게 만들어진 지붕일 뿐”인데 “바티칸 대성당의 돔, 랭스 대성당이나 샤르트르 대성당의 포치, 이 성당들의 아일의 볼트 천장과 아치, 묘의 캐노피, 종탑의 스파이어” 같은 장엄하게 만들어진 지붕들은 “모두 어떤 공간을 열기와 비로부터 튼튼하게 보호할 단순한 필요로부터 나온 형태들”이다. 같은 책 111쪽.

16 1866년 인도의 오리싸(Orissa)에서 발생한 기근을 놓고 한 말이다.

17 “The Mystery of Life and its Arts”, LE V18, 177-78쪽 참조.

18 Fors Clavigera vol 2, LE V28, 360쪽.

19 LE V18, 151쪽.

20 같은 책 152쪽.

(···)

72 Lectures on Art, LE V 20, 108쪽.

73 같은 책 109쪽.

74 같은 책 112쪽.

75 같은 책 같은 쪽.

76 같은 책 113쪽.

77 제목 ‘Fors Clavigera’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어원 풀이를 생략하고 쉽게 말하자면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① 훌륭하게 행동하는 힘 ② 인내하는 힘 ③ 운명을 최고의 목적에 맞추는 힘.

78 <성 조지 길드>의 기획에는 토지와의 관계 이외에도 교육을 비롯한 많은 것들이 포함되는데, 이 해설에서 이것들을 다 거론할 수는 없다.

79 Introduction to Fors Clavigera vol. 1, LE V27, xviii-xix쪽.

80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으로서의 화폐이다. 화폐는 자본으로서의 기능 이외에 다른 기능도 가진다.

81 Karl Marx, 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aus dem Jahre 1844, MEW band 4, Dietz Verlag, 517쪽.

82 러스킨의 경우에 이 “대상에 내재하는 척도”는 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이를 따르는 것이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경우에도 자연의 고유한 법칙은 ‘신의 명령’이다.

83 Karl Marx, Das Kapital I, MEW band 23, Dietz Verlag, 528쪽.

84 아마도 당시의 맑스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이 순환을 극복하리라고 믿었을 터인데, 안타깝게도 맑스가 생각하는 사회주의 사회는 현재 지구상에 없다. 사회주의의 이름을 단 국가들은 모두 맑스가 생각한 바와는 다른, 군사주의적·관료주의적·국가주의적 체제들이다.

85 같은 책 529-30쪽.

86 런던 인스티투션(London Institution)에서 1884년 2월 4일과 11일에 한 두 개의 강연이다.

87 The Storm-cloud of the Nineteenth Century, LE V34, 7쪽,

88 같은 책 xxvi쪽,

 89 “General Statement of St. George’s Guild,” Guild and Museum, LE V30, 48쪽.

90 : “그렇게 열등한 정신들의 노동의 결과들을 수용하고, 불완전함이 가득하며 모든 터치마다 그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단편들로부터 장엄하고 나무랄 데 없는 전체를 세워 올리는 것이 고딕 건축 유파의 주된 감탄할 만한 점일 것이다.” The Stones of Venice vol 2, LE V10, 190쪽

91 Cestus of Aglaia, LE V19, 60-61쪽 참조.

92 The Stones of Venice vol. 2, LE V10, 193쪽.

93 이는 현대의 발전된 첨단 기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첨단 기술은 인간의 발전된 힘의 결과물이지만 거기에 인간이 예속되면 (이 예속은 러스킨의 시대에서나 우리의 시대에서나 자본주의적 관계에 의해 발생한다) 역시 인간의 활력은 감소된다.

94 LE V30, 48쪽.

95 Cestus of Agalia, LE V19, 125쪽.

96 자본주의의 토대가 되는 사적 소유는 이러한 예술작품들이 인류의 활력을 증가시킬 유산이 되는 데 방해가 된다. 예컨대 피카소의 어떤 그림이 스위스의 제네바에 있는 제네바 프리포트(Geneva Freeport)의 보관함 같은 곳에 넣어서 보관되고 있다면, 이 그림은 그렇게 보관되는 동안은 그저 한 개인의 사유재산일 뿐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제네바 프리포트는 예술품 및 기타 귀중품을 보관하는 보관소로서 보관품 가운데 40%가 예술품이고 그 총 가치는 미화 1천억 달러(한화 100조원)로 추산된다. 2103년 현재 이곳에는 120만 점의 예술작품이 보관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피카소의 작품도 약 1천 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97 ‘사적’은 ‘개인적’과 그 의미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적인 것’들은 아무리 잘 모여도, 아무리 많이 모여도 ‘사적인 것’이지만, ‘개인적인 것’은 협동의 방식으로 모여서 공통체(commons)를 이룰 수 있고 이를 통해 개인들의 활력을 증가시킬 수 있다. ‘사적인 것’의 축적은 활력이 아니라 권력의 축적이며 권력의 본질은 활력을 제한하는 데 있다.

98 : 98 “The Mystery of Life and its Arts”, LE V18, 169-170쪽.

99 : 99 Introduction to Fors Clavigera vol. 1, LE V27, xvii쪽.





공생공락 보전을 통해 분리된 인간과 자연 사이에 다리를 놓기

 



보전운동(conservation movement)은 자본주의 정치경제의 제한에 항상 맞추어왔다. 보전운동의 많은 부분이 전지구적 시스템의 시장 증가, 사유재산 및 수익 내기를 축하한다. 보전운동이 자연보호 지역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이 시스템이 가진 끔찍한 생태 파괴를 (비정상적인 PR 주도의 방식으로) 보상하고자 노력은 하지만 말이다.

좀더 최근에 와서는 보전 기관이 시장에 기반을 두는 보전 형태들, 예를 들어 생태관광, 사냥, 외래종 식물 유전자의 특허 출원을 대놓고 용인하기에 이르렀다. 땅이 ‘자연 자본’으로 재규정되었으며 땅 자체의 보호를 다짐하는 시장(市場)들에게 땅에서 나는 것들이 바쳐졌다.

보전에 대한 이 두 가지 접근법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이 접근법들이 인간을 자연과 전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여기는 데—이는 생물학적으로 불합리한 전제이다—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여기는 대신에 인간이 자신을 자연에 통합된 일부라고, 즉 존중하는 마음으로 인간 이외의 생물과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심지어는 그 삶을 회복시키고 재생시키는 힘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

네덜란드 출신의 활동가이자 학자인 브람 뷔셔(Bram Büscher)가 보전을 재발명하기 위해 가지고 있는 비전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바헤닝언(Wageningen) 대학의 개발 및 변화의 사회학 그룹(Sociology of Development and Change Group)의 교수로서 땅이 보전되는 방식과 관련된 전제들 자체를 바꾸는, 한층 더 커먼즈에 기반을 두는 접근법을 발전시키기 위해 자본주의 자체가 가진 추출 논리를 넘어서고자 한다.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뷔셔의 수단은 새로이 시작된 야심찬 국제적인 프로젝트인 <공생공락 보전 센터>(Convivial Conservation Centre)이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는 사고를 가진 점점 더 많은 수의 보전주의자들, 생태주의자들, 농부들, 활동가들 및 학자들이 야생 보호구역을 통해서 땅을 ‘요새처럼 보호한다’는 생각뿐만 아니라 주변 풍광들을 돈 버는 ‘자연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생각을 거부하는 일에 그와 뜻을 함께 했다. 공생공락 보전은 자본주의 자체의 생태적 병리현상들을 다루면서도 사람들을 건설적인 방식으로 자연에 재통합하여 그 통합된 전체의 온전함을 양성할 수 있는 새로운 실천들과 정책들을 원한다.

나는 성장하고 있는 이 운동에 대해 더 알아보려고 팟캐스트 <커머닝의 프론티어> (에피소드 53)에서 뷔셔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뷔셔는 2020년에 출간된 책 『보전 혁명: 인류세 너머로 자연을 보존하기 위한 발본적인 생각들』(The Conservation Revolution: Radical Ideas for Saving Nature Beyond the Anthropocene)을 쓰는 과정에서 공동저자인 플레처(Robert Fletcher)와 함께 자신의 비전의 많은 부분을 발전시켰다. 책에서 저자들은 근대 보전운동의 바로 그 전제들이 재검토되고 극복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보전의 핵심은 ‘보호에서 연결까지’ 나아가는 데 있다는 것이다. ‘공생공락(적)’이라는 단어는, 보전이 지구를 대상으로 즉 상품이나 자본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지구와 “함께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야생상태 보전 지대(wilderness zones)를 정하여 보호하는 경우의 문제점은 그것이 핵심적인 문제를 즉 자본주의적인 ‘개발’을 방관하는 데 있다고 뷔셔와 플레처는 주장한다. 또한 그런 지대들을 정한다고 해서 땅이 어떤 토착적 원시 상태로 회복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회복된다고 보는 것 자체가 근대주의적 환상이다. 역사를 통틀어, 특히 토착 문화들을 통틀어 인간은 땅과 공생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왔다. 인간 그 자체가 혹은 야생상태 보전 지대의 부족이 문제가 아니다. 자본가 주도의 추출과 환경파괴가 문제다. 보전 운동이 진지한 방식으로 그 문제를 다루기 시작할 수 있는가?

 

그 첫 단계는 현대의 보전 노력들을 향해 한층 비판적인 입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뷔셔와 플레처는 ‘신보호주의자들’(neoprotectionists)이 인구증가, 개발에 제한을 두고 심지어 소비 및 경제성장에도 제한을 두려고 한다고 점에 주목한다. 그러나 신보호주의자들의 세계관에서는 인간이 자연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가 된다. 이는 모든 인간을 프레임에서 배제하는 자연 촬영술에서 이상화되는 사고방식이다. 또한 이 사고방식은 생물학자 윌슨(E.O. Wilson)이 주창하는 <자연은 절반을 필요로 한다>(Nature Needs Half) 캠페인에 나타난다. 이 캠페인은 지구의 나머지 절반을 파괴하는 자본주의적인 자연착취 경쟁을 말하지 않은 채 인간을 세상의 땅의 절반에서 추방하자고 제안한다.

또 하나의 그룹 즉 자칭 ‘신보전주의자들’(new conservationists)이 있는데 그들은 자본주의적인 개발과 보전을 혼합하길 원한다. 그들의 전략은 ‘자연을 구하기 위해 자연을 팔기’라고 일컬어져 왔다. 그것은 시장을 중심적인 역할로 끌어올리고 더 많은 생태관광, 사냥터들 그리고 의약품 물질특허를 위한 생물 탐사를 제안한다. 또한 ‘신보전주의자들’은 예를 들어 기업들에게 ‘생태계 서비스’에 돈을 지불하도록 요구하는 시장 주도의 정책안들을 좋아한다.

그러나 “문제의 논리를 해법을 위한 논리로 사용하는 것은 결코 효과가 없다”라고 뷔셔는 경고한다. “자연을 단순히 상품이나 자연 자본으로 바꾸는 것은 자연을 오염시키는 것 혹은 종들을 살상함으로써 자연으로부터 추출하는 것만큼 많은 돈을 결코 벌지 못한다.” 식물과 동물의 생명 그리고 자원들을 자연으로부터 뺏는 것은 보통은 공짜이거나, 종들을 생존시키고 그것들 대신에 다른 지속가능한 수입원을 찾는 것보다 비용이 훨씬 적게 든다. 아무튼 시장에 기반을 두는 보전의 규모는 무한히 작다고 뷔셔는 말한다. 그것은 “지속 불가능한 실제적 [자본주의] 경제의 극히 작은 일부”에 해당한다.

보전주의자들에게 요구되는 과제는 자연/인간의 이분법과 자본주의 시장에 대한 믿음 둘 다를 뛰어 넘는 것이다. 사회비평가 이반 일리치(Ivan Illich) 등으로부터 힌트를 얻은 뷔셔와 플레처는 ‘공생공락 보전’을 제안한다. 그들은 이 접근법을 커먼즈에서 영감을 받은, 비자본주의적이고 비이원론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자연과 인간은 깊이 서로 얽혀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공생공락 보전의 목표는 시장에 내다팔기 위해 자연을 착취하거나 자연을 보호구역으로 가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외의 존재들 및 생태환경과 서로 맞물려 있으며 경계가 없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관계를 영속적으로 구축하는 것이다. 이 관계가 생기도록 뷔셔는 지역의 평범한 사람들이 주위 풍광을 돌보는 동안 어엿한 삶을 살 수 있는 ‘보전 기본소득’을 제안했다. 또한 그는 한층 확대된 ‘민주적인 자연관리’를 요구하며 우리가 “‘자본으로서의 자연’보다 오히려 ‘커먼즈로서의 자연’ 그리고 ‘관계 속에 놓인 자연’”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불행히도 요즘에는 시대에 역행하는 보전 추세들이 많다. 기후변화, 생물다양성 상실 그리고 한층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실천들을 다룬다고 주장하는 크립토 시스템 및 기타 첨단 기술 시스템들이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다. 드론과 원격 기술 그리고 감시와 인공지능의 현대적 형태들을 갖추고 있는 우리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으로부터의 소외를 심화시키고 있다. “별안간 동물들이 컴퓨터 화면 상에서 숫자와 픽셀과 모형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들을 어떤 식으로든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 기술들은 나머지 자연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능력으로부터 크게 한 발짝 벗어나 있다. 나머지 자연과의 의미 있는 관계는 이 기술들로는 불가능하며 모든 사람들, 특히 이 기술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알고 있다.”

뷔셔는 나의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다른 많은 주제들을, 특히 커먼즈의 중요성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역동적인 상호관계와 관련한 주제를 다룬다.

“보전 정치, 정책 및 실천을 체제 차원의 변화를 옹호하는 쪽으로 다시 돌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공생공락 보전 센터>는 그 작업의 열 가지 핵심 원칙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공생공락 보전 선언문’을 최근에 출판했다. 그 선언문에는 “인간과 인간 이외의 종들이 서로를 침해함이 없이 공평하게 공존하는 통합된 공간을 조성하라”와 “보전을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 의해 그리고 모든 생명체를 위해 공통으로 소유되고 관리되는 전(全) 지구적 커먼즈의 파수로 이해하라”와 같은 원칙들이 포함되어 있다. 브람 뷔셔와의 인터뷰 내용은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인류세라고? 아니다, 우리는 생태세에 들어서고 있다

 



우리 근대인들은 아주 오만해서 지질학적 시기를 심지어 우리 자신의 이름을 따서 ‘인류세’라고 명명했다. 확실히 인간 문명은 지구의 생태계를 크게 변형시켰고 불안정하게 했다. 그러나 ‘인류세’는 지구상에서 우리 인간이 추진력임을 의미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명칭이다.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가! 지구의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산불, 홍수, 가뭄 및 극심한 더위가 보여주듯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가이아(Gaia)이다. 가이아는 자신의 맹렬한, 협상 불가능한 요구를 우리에게 하고 있다. 가이아는 인간이 문명, 자본주의, 국가 그리고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오랫동안 사용해온 질서의 틀을 파열시키고 있다. 이것이 바로 루마니아 태생이며 벨기에에 기반을 둔 훌륭한 연구자인 미흐네아 타나세스쿠(Mihnea Tănăsescu)가 지구의 지질학적인 시대를 ‘생태세’(Ecocene)로 인식할 것을 우리에게 촉구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인간중심주의의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있어서 우리 인간이 자연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깊게 얽혀있으며 자연보다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인류는 살아남으려면 자연계와 문화적•경제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고 지구 체계와 인간 체계를 함께 꽃피우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래서 2022년 출판된 타나세스쿠의 저서에 『생태세 정치』(Ecocene Politics)라는 제목이 붙은 것이다. 책에서 설명하듯이 “생태적 과정이 정치적 삶에 점점 더 빈번하게 개입하는 특징을 띄는 것”이 우리의 시대이다. 사람들이 이 현실을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의 정치•경제•문화가 새로운 탈근대적 방식의 존재하기와 행하기를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것과 적절하게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바로 이것이 앞으로의 과업이다. 붕괴하고 있는 근대 체계를 지탱하거나 복구하고자 하는 것은 헛수고이다.

타나세스쿠가 이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정확성과 열정에 감명을 받아서 나는 팟캐스트 커머닝의 프론티어(Frontiers of Commoning)(에피소드#43)에서 타나세스쿠와 그의 책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타나세스쿠는 벨기에 몽스(Mons) 대학교 과학연구기금 연구교수이다. 그곳에서 그는 인류학•사회학•정치학 및 법에 깊이 기반을 두면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관하여 왕성하게 글을 쓰고 있다.

타나세스쿠가 『생태세 정치』에서 씨름하는 중요한 과제는 자본주의적 근대의 덫―근대적으로 사고하고 근대적으로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들―을 어떻게 넘어서는가 하는 것이다. 그의 기본적인 대답은 “사회적 상호성, 책임감 및 취약성에 의거한 “상호주의의 회복윤리”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타나세스쿠가 말하는 ‘취약성’(vulnerability)이란 환경의 변화―이 변화는 기후위기가 진행중인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필연적이며 근본적으로 위협적이다―에 자신을 열어놓고, (해체가 아니라) 새로운 구성을 향해서 변화하는 힘을 가리킨다. 따라서 ‘취약성’이라고 옮기기는 했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상처를 견뎌낼 수 있음’이다.– 옮긴이]

프랑스 사회철학자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에게서 영감을 얻은 타나세스쿠는 관계성에 기초를 둔 정치를 주장한다. 이는 커머닝이 분명하게 진전시키는 테마이다. 그가 주장하는 핵심은 개인주의, 합리성, 자연에서의 분리, 자본축적이라는 근대적 관념들을 넘어서 상호주의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방향으로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가? 타나세스쿠는 “혁신하는 실천들”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것은 “근본적인 변화의 필요성과 어떤 이상화된 과거로의 회귀의 불가능성 둘 다를 표현하는” 용어이다. 인간이 만들어낼 필요가 있는 관점전환을 환기시키기 위해 그는 이탈리아 폴리아 지역에서 올리브 나무를 가지치기하는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한다.

올리브 나무의 성공적인 재배는 매우 특별한 장소에 있는 사람과 올리브 나무들 사이의 공동-창조와 사랑이 구현된 복잡한 행위이다. 인간의 문화가 살아있는 식물 자체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과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역의 “풍경들과 미기후(微氣候)들의” 더 큰 “모자이크”에의 집중을 필요로 한다. “어떤 작은 지역이든 그것을 생성적인 상호작용의 역사의 외부에서 그리고 그 장소와의 친밀감의 외부에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올리브 나무의 건강에 영양을 제공하는 대단히 복잡한 집합체가 있기 때문에 가지치기의 행위”(나무가지를 신중하게 선택적으로 잘라내는 것)는 “매우 의식(儀式)화되어 있다”고 타나세스쿠는 말한다. 그것은 가지치기를 신성한 예술형태로서 이해하는, 신임을 얻은 연장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어떤 것이다.

사람들은 올리브를 얻기 위해 가지를 치지만 또한 자식들을 위해서, 땅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흙의 건강함을 위해서, 겨울 동안의 난방을 위해서, 좋은 식품을 만들기 위해서, 나무의 수명과 아름다움을 위해서, 대대로 공동으로 사용해온 땅에 대한 의무감에서 가지를 친다. 인간과 올리브 나무의 관계에서 가지치기의 핵심적 역할을 고려해 볼 때 가지치기를 도구적인 합리성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지치기는 단순한 합리성에 저항하고 그 합리성을 벗어나고 넘쳐흐르며 가지치기를 중심으로 이어져 있을 수 있는 상호관계의 풍성한 태피스트리를 향하고 있다.

근대 시기의 우화? 올리브 나무 가지치기라는 전통 문화에서 타나세스쿠는 인간-자연 관계가 어떻게 근대 시기에 잘못되었는지를 보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전통적인 관습들을 통해 상호성과 삶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한 관계적 윤리가 어떻게 개인의 수준과 문화의 수준 둘 다에서 계발될 수 있는지를 보았다.

타나세스쿠에게 이 책은 개인적인 오디세이였다. 연구자로서 불안정하게 살고 있으면서 그는 자신이 하나의 직장과 미래의 불확실성 사이에서 실업급여로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결국 그를 창조적으로 자유롭게 했다. 그는 몰개성적인 학술적 글쓰기 방식을 버리고 자신의 개인적인 열망을 표현할 수 있었으며,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책은 단지 어떤 아이디어들의 제시만을 핵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관계성을 유지하는 것의 어려움과 전력으로 씨름하는 것을 핵심으로 합니다. 독자는 항상 기존의 사고방식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타나세스쿠에게 ‘생태세 정치’는 끔찍한 생태적 현실 특히 기후변화 앞에서 인간의 실존, 경제, 문화 그리고 정치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려는 대담한 시도를 나타낸다.

상호주의에 관한 마지막 장에서 그는 커머너들을 위한 몇몇 실천적이고 유용한 조언과 많은 풍부한 통찰과 지혜들을 제시한다. 가려 뽑은 몇몇 구절들을 소개해본다.

“근대는… 상호성과 책임감의 유대로서 항상 존재했던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추방한다. 실천으로서의 상호관계는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고 사회 기반시설이 사라짐으로 인해서 급격히 주변으로 밀려났을 뿐이다.”

“생명이 근본적으로 협력적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은 자연과학을 통해 많은 다양한 형태로 확산되었다.”

“마굴리스(Margulis)와 세이건(Sagan)이 표현했듯이 ‘생명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으며 생명 자신의 진화에 뜻밖에 큰 역할을 했다.’ 이 상대적 자유가 협력적인 방식으로 종종 발현된다.”

“상호간의 베풂이 세상에서 조직화하는 역할을 한다…. 상호주의가 베풂을 받는 쪽의 완전한 목록을 미리 결정할 수 없는 정치윤리에 붙일 이름일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보존은 환경을 모조리 화폐화하는 것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화폐화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관계들을 창출해내야 한다.”

“우리는 상호성을 위한 기반 시설을 살아있는 세계에 헌신하는 정치과정을 통해 구축할 필요가 있다”

타나세스쿠와 함께 한 전체 인터뷰를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생태세 정치』는 Open Book Publishers로부터 무상의 오픈액세스 버전으로 구할 수도 있고 인쇄본을 구입할 수도 있다.




페미니즘과 커먼즈의 정치

 


  • 저자  :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
  • 원문 :  “Feminism and the Politics of the Commons”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나는 2023년 1월 26일 목요일에 에코페미니즘연구센터 달과나무에서 기획한 심화강의 제2강에서 커먼즈 운동을 대안근대로의 이행의 관점에서 소개했는데, 여기서 페미니즘과 커먼즈 운동의 연관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런데 강의자료를 다 작성하고 나서 강의를 기다리는 하루 정도의 시간에 아래 소개된 페더리치의 글―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커먼즈의 정치를 살펴보는 글―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강의 후 토론시간에 이 글을 거론하기도 했다. 물론 미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번역까지는 아니더라도 상세히 내용을 정리해서 이 블로그에 올리기로 마음 먹고 당장 실행에 옮겼다. 아래 글은 마치 번역처럼 보이는 어투를 사용했지만, 원주 혹은 본문의 어떤 디테일들을 생략하기도 했고 또 어떤 부분은 비교적 자유롭게 내용을 풀었기 때문에 완성된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고 그저 매우 상세한 내용정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원문은 The Wealth of the Commons: A World Beyond Market and State (Levellers Press)의 9장이며 https://wealthofthecommons.org/essay/feminism-and-politics-commons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사이트의 글들은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의 적용을 받는다. (※ 이 글은 원래 『더커머너』(The Commoner, 2011년 1월 4일)에 발표된 에쎄이를 조금 고친 것이다.) [정백수]


재생산이 사회적 생산보다 앞선다. 여성을 건드리는 것은 반석을 건드리는 것이다.
– 피터 라인보((Linebaugh, Peter. 2008. The Magna Carta Manifesto: Liberty and Commons for All.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년 12월 31일 사파티스타들이 에히도(ejido)[공동체가 땅의 소유권이 아닌 용익물권을 갖는, 농업에 사용되는 공동 토지]를 해체하는 입법에 반대하는 투쟁을 한 이후 커먼즈라는 개념이 널리 퍼지고 있다. 이 고물처럼 보이는 생각이 현재의 사회운동에서 정치적 논의의 중심에 오게된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다음의 둘이 두드러진다. 첫째,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구축하는 급진적 운동들의 노력을 수십 년 동안 흡수했던 국가주의 혁명모델이 종식되었다. 다른 한편, 종획에 맞서  커먼즈를 방어하려는 투쟁들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사라졌다고 믿었거나 사유화로 위협받기 전에는 가치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던 공동체적 재산들 및 관계들의 세계가 가시화되었다. 커먼즈가 사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 인터넷 같은 예전에는 없던 삶의 영역에서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협력이 항상 산출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종획으로 인해서 드러났다. 커먼즈라는 생각은 많은 사람들이 창출하려고 하는 협력적 사회를 예시하는 통일적 개념으로서 이념적 기능에 복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을 해석하는 데서는 애매함들과 의미심장한 차이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커먼즈의 원리를 일관성있는 정치적 기획으로 옮겨놓으려면 이것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가령 무엇이 커먼즈를 구성하는가의 문제가 있다. 땅, 물, 공기 커먼즈(공통재), 디지털 커먼즈가 있다. 사회보장연금과 같이 우리가 획득한 권리도 종종 커먼즈로 지칭되며 언어, 도서관, 과거 문화의 집단적 산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모든 커먼즈가 그 정치적 잠재력의 관점에서 볼 때 동등한가? 모두 호환 가능한가? 그리고 그것들이 구축되어야 할 통일성[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향하는 데 모두가 함께하는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정리자]을 기획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우리는 ‘commons’(커먼즈)라고 복수형으로 말해야 할까, 아니면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자들이 제안하는 것처럼 ‘the common’(공통적인 것)이라고 말해야 할까? (‘공통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포스트포디즘 시대에 우세한 생산형태의 특징을 이루는 사회적 관계들을 지칭한다.)

이 글에서 나는 이 물음들을 염두에 두면서 커먼즈의 정치를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 페미니즘적 관점이란 성차별에 대항하고 재생산 노동을 둘러싼 투쟁에 의해 형성된 관점을 가리킨다. 재생산 노동은 라인보의 말처럼 사회의 반석이며 이것을 시금석으로 하여 모든 사회조직화 모델이 평가되어야 한다. 재생산 노동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커먼즈의 정치를 더 잘 규정하고 커먼즈 원칙이 반자본주의 프로그램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조건들을 분명히 하는 데 필요하다. 두 가지 문제가 이 과제들을 특히 중요하게 만든다.

첫째, 적어도 1990년대 초부터 커먼즈 담론이 예를 들어 세계은행 같은 기관에 의해 전유되어 사유화를 위해 사용되었다. 세계은행은 생물다양성을 보호하고 전지구적 커먼즈를 보존한다는 핑계로 열대우림을 생태보호구역으로 바꾸어 수세기 동안 열대우림에서 생계를 유지해 온 주민들을 추방하는 한편, 예를 들어 생태관광(eco-tourism) 같은 것을 통해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접근을 보장했다. 이밖에도 다양한 동기에 따른 커먼즈의 재가치화가 주류 경제학자와 자본주의 계획가들 사이에서 유행이 되었다. 커먼즈에 대한, 그리고 그와 유사한 사회적 자본, 선물 경제, 이타주의와 같은 주제들에 대한 학술 문헌이 증가하는 것을 보라.

사회적 공장[사회 전체가 공장이 된 것]의 구석구석까지 상품형태를 확장하는 것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에게는 이상적인 일이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장기적 재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실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은 기획이다. 자본주의적 축적은 시장에 외부성(externalities)으로 나타나게 마련인 엄청난 양의 노동(예를 들어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하며 여성들이 제공하는 무보수 가사노동)과 자원의 자유로운 전유에 구조적으로 의존한다. 따라서 월스트리트 붕괴 훨씬 이전에 다양한 경제학자 및 사회이론가들이 삶의 모든 영역의 시장화가 시장의 원활한 기능에 해롭다고 경고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장도 신뢰, 선물 제공처럼 화폐가 매개하지 않는 관계의 존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자본이 공통적 이익(공동선)의 미덕에 대해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위기에 처한 자본가 계급이 지구 환경의 수호자인 척하면서 되살아나는 것을 돕는 방식으로 커먼즈에 대한 담론을 만들어내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두 번째 문제는 ‘커먼즈가 어떻게 비(非)자본주의 경제의 기초가 될 수 있는가’라는, 아직은 답이 없는 물음이다. 라인보(Peter Linebaugh)의 저작, 특히 『마그나카르타 선언』(The Magna Carta Manifesto, 2008)에서 우리는 커먼즈가 계급투쟁의 역사를 우리 시대로 연결하는 끈이었으며 실제로 커먼즈를 위한 투쟁이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을 배웠다. 메인 주(州)의 주민들은 기업 함대의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어장에 대한 접근을 유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애팔래치아 주민들은 노천 채굴로 위협받는 산을 구하기 위해 조직화하고 있다. 오픈소스와 프리소프트웨어 운동은 지식의 상품화에 반대하고 소통과 협력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열고 있다. 또한 칼슨(Chris Carlsson)이 그의 『나우토피아』(Nowtopia, 2007)에서 설명한 것처럼 북미에서 많은 보이지 않는 커머닝 활동과 공동체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칼슨이 보여주듯, ‘버추얼 커먼즈’의 창출, 그리고 화폐/시장 경제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에서 번창하는 형태의 사회적 관계들의 창출에 많은 창조성이 담겨 있다.

아프리카, 카리브해 지역, 또는 미국 남부에서 이주해온 공동체들 덕분에 나라 전역에 퍼진 도시 텃밭 가꾸기 운동이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어왔다. 이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도시 텃밭은 우리가 식량 생산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고 우리의 환경을 재생성하며 생계를 위해 자급하려면 없어서는 안 될 러바니제이션(rurbanization)((rurbanization : rural + urban +-ization)) 과정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텃밭은 식량 안보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것을 훨씬 넘어서 사회성, 지식 생산, 문화 및 세대 간 교류의 센터들이다.

도시 텃밭은 그것이 상업적 목적보다는 동네에서의 소비를 위해 생산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점으로 인해서 도시 텃밭들은 다른 재생산 커먼즈들―메인 주의 ‘가재 해안’(Lobster Coast)((“Lobster Coast”는  지명이 아니라 가재를 잡는 해안을 말한다. 메인 주의 어업 공동체들의 역사를 다룬, 콜린 우다드(Colin Woodard)의 The Lobster Coast: Rebels, Rusticators, and the Struggle for a Forgotten Frontier 라는 책이 있다.))의 어장들처럼 시장을 위해 생산하거나 열린 공간을 보존하는 토지 신탁처럼 시장에서 구입되는 것들―과 구분된다. 그러나 문제는 도시 텃밭이 자생적인 풀뿌리 운동으로 남아 있으며 미국에서 벌어지는 운동에서 텃밭들의 존재를 확장하고 토지에 대한 접근을 투쟁의 핵심 영역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여성과 커먼즈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방어되고 있고 발전되고 있으며 투쟁으로 지켜지고 있는 많은 번성하는 커먼즈들을 어떻게 한데 모아서 결집력 있는 총체를 형성하여 새로운 생산방식의 토대를 제공할 것인가의 문제를 좌파는 제기한 적이 없다. 커먼즈에 대한 페미니즘적 관점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과거의 역사에서나 우리 시대에서나 여성들은 재생산 노동의 주요 주체로서 공동체의 자연자원에의 접근에 남성보다 의존해왔고 이 자원의 사유화 과정에서 가장 많은 불이익을 당했으며 이 자원의 방어에 가장 헌신적이었다는 깨달음과 함께 이 페미니즘적 관점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내가 『캘리번과 마녀』(Caliban and the Witch, 2004)에서 썼듯이,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 국면에서 여성들은 영국과 남북아메리카에서 공히 토지 종획에 맞서는 투쟁의 최전선에 섰으며 유럽 식민화가 파괴하려고 했던 공동체적 문화의 가장 완강한 방어자들이었다. 페루에서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마을을 장악했을 때 여성들이 높은 산으로 도망쳐 집단적 삶형태들을 다시 창출했고, 이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여성에 대한 세계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공격이 행해졌다. 여성을 마녀로 몰아 박해한 것이다. 오늘날 새로운 형태의 시초 축적 과정에 직면한 여성들은 자연의 완전한 상업화를 가로막고 비자본주의적 토지 사용과 생계자급 지향적인 농업을 지탱하는 주요한 사회적 힘이다. 여성들은 세계의 자급농부들이다. 아프리카에서는 세계은행 및 기타 기관들이 여성들의 활동을 환금경작으로 전환하도록 설득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사람들이 소비하는 식량의 80%를 생산한다. 1990년대에는 많은 아프리카 도시에서 식량 가격 상승에 직면하여 공유지(公有地)의 땅뙈기들을 전유하였고 길가를 따라, 공원에, 철로를 따라 옥수수, 콩, 카사바를 심었으며, 아프리카 도시들의 경관을 바꾸고 그 과정에서 도시와 농촌 사이의 분리를 허물었다. 인도, 필리핀에서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여성들은 황폐해진 숲에 나무를 다시 심고, 힘을 합해 벌목꾼을 쫓아냈으며, 광산 작업과 댐 건설을 봉쇄하고, 물 사유화에 반대하는 투쟁을 이끌었다.

재생산 수단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을 위한 여성들의 투쟁의 다른 유형은 캄보디아에서 세네갈에 이르기까지 제3세계 전역에서 화폐커먼즈로 기능하는 신용연합의 형성이다.(Podlashuc 2009)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톤틴’(the tontines)이라고 불리는 이 신용연합은 여성들이 만든 자율적이고 자주적으로 관리되는 뱅킹시스템으로, 은행에 접근할 수 없는 개인이나 집단에 현금을 제공하며 순전히 신뢰를 바탕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신용연합은 세계은행이 장려하는 소액융자 시스템과 완전히 다르다. 이 소액융자 시스템은 상호감시와 수치심을 바탕으로 작동되는데, 예를 들어 니제르에서 이러한 방식이 융자금을 상환하지 못한 여성들의 사진을 공공장소에 게시할 정도로 극에 달해서 몇몇 여성들을 자살로 몰아가기도 했다.

여성들은 또한 재생산 비용을 절약하고 서로를 가난·국가폭력·남성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재생산노동을 집단화하려는 노력을 주도해왔다. 두드러진 사례는 1980년대에 칠레와 페루에서 여성들이 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더 이상 혼자서는 물건을 살 경제적 여유가 없었을 때 세운 ‘올라스 코무네스’(ollas communes, 공동밥솥)이다.(Fisher 1993; Andreas 1985) 토지 재전유나 톤틴의 형성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실천은 공동체적 유대가 아직 강한 세계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정치 이전의 것으로, ‘자연적인’ 것으로, 혹은 단순히 ‘전통’의 산물로 보면 잘못이다. 식민화 국면들이 거듭되고 난 지금, 자연과 관습은 민중이 투쟁하여 보존하고 재발명한 곳에서 말고는 그 어디에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레오 포들라슈크(Leo Podlashuc)가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날 풀뿌리 여성들의 공동체주의는 새로운 현실을 창출하며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집과 공동체에서 대항권력을 구성하며 자기가치화와 자기결정의 과정을 연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많다.

이 투쟁들에서 우리가 얻는 첫 번째 가르침은, 물질적인 재생산 수단의 커머닝이 집단적 이해와 상호유대가 창출되는 주된 메커니즘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또한 노예화된 삶에 대한 저항의 최전선이며 우리의 삶에 대한 자본의 장악력을 안으로부터 무너뜨리는 자율적 공간을 구축하기 위한 조건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내가 설명한 경험은 이식할 수 없는 모델이다. 북미에 사는 우리에게 재생산 수단의 탈환과 공통화(commoning)는 필연적으로 다른 형태를 취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자원들을 한데 모으고 우리가 생산한 부를 재전유함으로써 우리의 재생산을 상품의 흐름들―이 흐름들이 세계 시장을 통해 세계 전역을 흘러다니면서 수백만 명이 삶의 터전을 박탈당하게 하고 있다―로부터 떼어내기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살림을 세계시장으로부터만이 아니라 (현재 미국 경제가 의존하고 있는) 전쟁기계와 감옥시스템으로부터도 떼어내기 시작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운동에서 그토록 자주 보이는 특징인 추상적 연대―이는 우리의 헌신, 견딜 수 있는 우리의 능력, 우리가 기꺼이 감수할 위험을 제한한다―를 넘어설 수 있다.

사유재산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무기로 보호되고 3세기에 걸친 노예제도가 사회에 심오한 분열을 낳은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커먼즈/공통적인 것을 재창출한다는 것이 장기적인 실험, 연대구축 및 피해회복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엄청난 과제인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제가 지금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워보일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자율의 공간을 넓힐, 그리고 우리의 재생산이 세계의 다른 커머너들과 커먼즈들을 희생시키면서 일어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유일한 가능성이다.

 

페미니즘적 재구축

마리아 미스(Maria Mies)가 이 과제를 강력하게 표현한 바 있다. 그녀는 공통적인 것의 창출이 첫째로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분업이 분리한 것들을 재결합하기 위해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심대한 변형이 일어나는 것을 필요로 함을 지적했다. 생산이 재생산 및 소비와 분리됨으로써 우리는 ① 먹는 것, 입는 것, 일하는 도구가 생산되는 조건들을, ② 그 사회적·환경적 비용을, 그리고 ③ 우리가 산출하는 폐기물을 떠안게되는 사람들의 운명을 무시하게 되기 때문이다.(Mies 1999) 우리는 우리의 행동의 결과에 대해 무책임한 상태―이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분업이 조직되는 파괴적인 방식들의 결과이다―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만일 이에 미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의 생산은 불가피하게 다른 이들에게는 죽음의 생산이 될 것이다. 지구화는 이 위기를 악화시켜서 생산되는 것과 소비되는 것 사이의 거리를 벌렸으며 그럼으로써 (전지구적 연결성이 증가되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먹는 음식, 우리가 사용하는 석유, 우리가 입는 옷, 우리가 서로 소통하는 데 쓰이는 컴퓨터들이 피의 희생을 치르고 생산된 것임을 보지 못한다.

페미니즘적 관점은 우리에게 이러한 망각의 상태를 극복하는 데서 커먼즈를 재구축하는 일을 시작하라고 가르쳐준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기초해서 우리의 삶과 우리의 재생산을 이루기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그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기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공통적인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커머닝은 우리 자신을 공통적 주체로 산출하는 활동이 되어야 의미를 가진다. ‘공동체 없이 커먼즈 없다’라는 슬로건은 바로 이런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공동체는 종교나 민족을 기반으로 형성된 폐쇄적인 곳이 아니라 관계의 질, 협력의 원칙, 서로에 대한 그리고 지구·숲·바다·동물에 대한 책임의 원칙을 의미한다.

물론 그러한 공동체의 달성은 우리의 일상적인 재생산 노동의 집단화와 마찬가지로 시작일 뿐이다. 그것이 더 광범한 반(反)사유화운동 및 공통의 부를 되찾기를 대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집단적 통치(자치)에 대한 우리의 교육과 역사를 집단적 기획으로 인식하는 일의 필수적 부분이다.

그래서 가사의 공동체화를 우리의 정치적 의제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의 풍부한 페미니즘 전통을 다시 살려야 한다. 이 전통은 ①19세기 중반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실험들에서부터 ②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초까지 ‘유물론적 페미니스트들’이 보인, 집단적 살림을 통해 가사노동을 재조직하고 사회화하려는, 그럼으로써 집과 동네를 재조직하고 사회화하려는 시도들―이 시도들은 안타깝게도 1920년대에 ‘적색공포’로 종식되었다―까지에 걸쳐있다.(Hayden 1981 and 1986) 이러한 실천들에서 보이는, 재생산 노동을 인간 활동의 중요한 영역으로, 부정될 것이 아니라 혁명적으로 변혁되어야 할 영역으로 볼 수 있는 과거 페미니스트들의 능력이 다시 논의되고 다시 가치를 부여받아야 할 것이다.

집단적 삶형태를 창출하는 결정적 이유 하나는 인간의 재생산이 지구상에서 가장 노동 집약적인 일이며, 대체로 기계화로 환원될 수 없는 일이라는 데 있다. 육아, 환자 돌보기 또는 신체적·정서적 균형을 재통합하는 데 필요한 심리적 작업은 기계화할 수 없다. 미래주의 산업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서는 돌봄을 로봇화할 수 없다. 특히 어린이와 환자를 돌보는 사람 가운데 간호사봇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서비스 제공자의 건강을 희생하지 않고 책임을 분담하고 협력하는 것이 적절한 치료를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수세기 동안 인간의 재생산은 집단적 과정이었다. 그것은 확대된 가족과 신뢰할만한 공동체들의 일이었다. 특히 프롤레타리아 동네에서 그랬으며, 사람들이 혼자 살았을 때에도 그랬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오늘날의 노인들처럼 외롭거나 의존적이지 않았다. 재생산이 완전히 사유화된 것은 자본주의에 와서의 일이다. 이 사유화 과정은 지금 우리의 삶을 파괴할 정도로 심해졌다. 이러한 추세는 역전되어야 하며 지금이 그러한 기획에 유리한 때이다.

자본주의 위기가 미국을 포함하여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재생산의 기본 요소들을 파괴함에 따라 우리의 일상 생활의 재건이 가능한 일이자 긴요한 일이 된다. 파업과 마찬가지로 사회적/경제적 위기가 임금 노동의 규율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성을 우리에게 강요한다. 바로 이런 일이 대공황 중에 일어났는데, 그때 화물열차를 커먼즈로 전환하여 이동성과 유목 생활에서 자유를 추구한 호보들(hobos, 떠돌이 일꾼들)의 운동이 일었다.(Caffentzis 2006) 그들은 철로가 교차하는 곳들에서 자치 규칙과 연대에 기반을 둔 호보 정글들을 조직했는데, 이는 많은 호보들이 믿었던 공산주의 세계의 예시였다.(Anderson 1998, Depastino 2003 and Caffentzis 2006) 그러나 소수의 박스카 베르타(Boxcar Bertha)들을 제외하면((<박스카 베르타>(Boxcar Bertha, 1972)는 마틴 스코세시(Martin Scorsese)가 벤 라이트먼(Ben Reitman)의 『도로의 누이―박스카 베르타의 자서전』(Sister of the Road: Sister of The Road: The Autobiography of Boxcar Bertha )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이것은 주로 남성들의 세계였고 남성들의 형제애였으며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없었다. 경제 위기와 전쟁이 끝나자 호보들은 노동자들을 고착시키는 두 개의 큰 엔진인 가족과 집에 길들여졌다. 대공황 동안 보여진 노동계급 재구성의 위협을 유념한 미국 자본은 ‘생산 지점에서의 협력, 재생산 지점에서의 분리 및 원자화’라는 원칙을 경제 생활을 조직하는 데 탁월하게 적용했다. 레비타운(Levittown)((‘Levittown’은 윌리엄 레빗(William J. Levitt)과 그의 회사(Levitt & Sons)가 만든 거대한 주택개발사업의 이름이다.))이 제공한 원자화되고 직렬화된 가족 주택은 탯줄로 연결된 부속물인 자동차와 결합하여 노동자를 정주하는 삶에 고착시켰을 뿐만 아니라 호보 정글들이 나타냈던 유형의 자율적 노동자 커먼즈를 종식시켰다.(Hayden 1986) 오늘날 수백만 명의 미국인의 집과 자동차가 회수되고 압류·철거·대량실직이 다시 자본주의 노동 규율의 기둥을 무너뜨리고 있음에 따라 해안에서 해안으로 뻗어 있는 천막 도시들 같은 새로운 공통 기반이 다시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시적인 공간, 일시적인 자율지대들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재생산의 토대가 될 커먼즈들을 구축해야 하는 주체가 바로 여성들이다.

집이 경제의 기반이 되는 오이코스(oikos)라면, 역사적으로 가사노동자이며 가옥 수감자들인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집을 (다양한 사람들과 협력형태들이 가로지르는) 집단적 삶의 중심지로 되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고립과 고착이 없는 안전함을 제공하고 공동체 소유물의 공동사용 및 순환을 가능하게 하며, 무엇보다도 재생산의 집단적 형태들의 토대를 제공해야 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19세기의 유물론적 페미니스트들의 프로그램으로부터 이 기획에 대한 영감을 끌어올 수 있다. 이들은 집(home)이 ‘여성 억압의 중요한 공간적 구성 요소’라고 확신하고 공동 부엌을 조직하고 노동자들이 재생산을 통제하기를 요구하는 협동적 가구들을 조직했던 것이다.(Hayden 1981)

이러한 목표는 현재 매우 중요하다. 삶이 가정에 고립되는 상태를 분쇄하는 것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고 고용주 및 국가와의 관계에서 우리의 힘을 강화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생태적 재앙으로부터의 보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집이라고 부르는 재생산 자산과 폐쇄된 거주지의 ‘비(非)경제적’ 증가가 가져오는 파괴적인 결과, 즉 겨울에는 온기를 대기로 발산하고 여름에는 가차 없는 더위에 우리를 노출시키는 파괴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De Angelis 2007) 가장 중요한 것은, 재생산을 보다 협력적인 방식으로 재규정하지 않는 한,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분리 및 정치적 행동주의와 일상적 삶의 재생산 사이의 분리를 끝내지 않는 한 대안 사회와 강력한 ‘스스로 재생산하기 운동(a self-reproducing movement)을 구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성에게 재생산을 커머닝/집단화하는 임무를 이렇게 할당하는 것은 여성성을 자연주의적으로 보는 사고방식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당연히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굴복을 죽음보다 더 나쁜 운명으로 본다. 자본가들에 의해 전유된 자연의 부처럼, 여성이 남성들이 공유하는 부로서, 남성들이 자유롭게 전유할 부와 서비스의 자연적 원천으로 지정되었다는 생각이 우리의 집단의식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돌로레스 헤이든(Dolores Hayden)의 말을 풀어보자면, 재생산 노동의 재조직, 따라서 주택과 공적 공간의 재조직은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노동의 문제이며, (더 추가하자면) 권력과 안전의 문제이다(Hayden 1986). 여기서 브라질의 무토지 농민운동(MST)에 참여한 여성들의 경험이 떠오른다. 이들은, 공동체가 자신이 점유한 땅을 유지할 권리를 획득한 후, 새 주택들을 하나의 복합체를 형성하도록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투쟁의 과정에서 그랬던 것처럼 계속해서 (설거지와 요리를 함께 하는 등) 집안일을 공동으로 하고, 남자들에게 학대당할 때 서로를 도와주기 위해 달려갈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여성이 재생산 노동과 주거의 집단화에 앞장서야 한다는 주장은 가사노동을 여성의 천직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의 저항의 역사에서 본질적인 부분이었던 재생산 노동에 관해 여성들이 축적한 집단적 경험, 지식 및 투쟁을 지우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역사와 다시 연결되는 것은 오늘날 여성과 남성 모두가 우리 삶의 젠더화된 구조를 허물고 우리의 집과 삶을 커먼즈로 재건하는 데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단계이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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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약탈을 막을 ‘블루커먼즈’ 어젠다

 



바다는 지표면의 70%를 덮고 있고 우리가 숨 쉬는 산소의 절반을 제공할지라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특히 육지로 둘러싸인 나라들이나 지역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시장/국가 시스템이 자연계의 이 영역을 파괴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업형 트롤선들이 어장에서 과잉어획을 하여 많은 어장들을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가고 있으며, 광산기업들은 석유, 가스, 니켈, 코발트, 망간 및 희토류 광물들을 찾아서 해저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

커먼즈의 관점에서 우리는 이 끔직한 시장 인클로저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인가? 최근 커머닝의 프런티어(Frontiers of Commoning) 팟캐스트(에피소드 #28)에서 소아스런던대학교(SOAS University of London)에 재직하는 경제학자이자 커먼즈 연구자인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은 몇 가지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해결책들을 제안한다. 스탠딩은 『블루커먼즈—바다경제를 변형하기』(The Blue Commons: Transforming the Economy of the Sea)를 막 출간했다. 이 책에서는 시장/국가가 바다를 무책임하고 생명을 파괴하는 식으로 취급하는 것을 커머닝이 어떻게 억제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방대한 양의 복잡한 해양역사들, 국제법 및 생태과학을 종합적으로 다룬다.

스탠딩은 바다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을 ‘자산소득자 자본주의’(rentier capitalism)((‘자산소득자 자본주의’(rentier capitalism)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972 참조.))의 예측 가능한 결과로 본다. 이것은 광범위한 재산권, 금융화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산업화된 자원의 착취에 특혜를 주는 경제시스템이다. 정부와 함께 하는 기업측은 이 시스템이 행하는 ‘빼내서 달아나는’ 관행을 ‘푸른성장’(blue growth)이라 부르길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은 실로 시장의 비극에 관한 이야기이다.

기업들은 조직적으로 연안어업 공동체를 ‘탈커먼즈화’하려고 하고, 심해 생명체들에 대한 특허권을 주장하려고 하며, 해저 광상(鑛床)을 수탈하려고 시도한다. 일례로 남아프리카 기업인 드비어스 그룹(De Beers Group)은 다이아몬드를 찾아서 해저를 긁어내기 위하여 전문화된 선박들로 이루어진 선단을 이용하는데 이것은 해양생태계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해양생태계를 붕괴시킨다.

스탠딩은 불법적인 어업관행에서의 국가와 기업들 간의 결탁 그리고 유럽 연합의 파괴적인 공동어업정책 및 브렉시트에 관하여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장들을 제공한다. 그는 어떻게 양식기술이 건설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는지를, 그러나 기업들의 손에 맡겨지면 어떻게 양식어업이 블루커먼즈 공동체에 도움이 되기보다 블루커먼즈를 상품화하고 사유화하는지를 설명한다.

이 책에서 스탠딩이 하고 있는 가장 큰 기여는 그가 커먼즈에 바탕을 둔 해결책들—어장과 연안 공동체에게 권한을 주기, 새로운 합법적인 원칙들을 제정하기 그리고 커머너들을 이롭게 할 신탁자금을 도입하기—을 제안한 것일 것이다.

스탠딩은 “협동주의와 페미니즘의 원칙에 바탕을 둔, 고무적인 특징을 지닌 몇몇 새로운 조직 형태들이 구체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런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국가, 금융, 국제적인 자선단체들에 포섭될 위험들을 인식”하고 있고 따라서 비열하고 약탈을 일삼는 정책들에 씌운 진보적인 겉면에 속지 않을 것이다.

스탠딩은 연안 공동체 소속 어부들을 위한 ‘생계권’ 같은, 기업들의 어업권보다 우선해야 하며 널리 시행되어야 할 많은 법적인 원칙들을 거론한다. 또한 그러한 공동체들 사이에서 존중되어야 할 ‘서식지 권리,’ ‘사회적 기억에 대한 권리’ 그리고 ‘세대 간 동등 지분’ 원칙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스탠딩이 주장하는 블루커먼즈 어젠다는 또한 ‘커먼즈 자금’이라는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기업이 항구를 사용하고, 가스를 추출하며, 어장에 들어오고, ‘혼획'(생태적 위해를 야기하는 해양 종들을 의도치 않게 잡는 것)을 하는 일련의 활동들에 세금을 부과하자는 발상이다.

과세로 거둬들인 돈은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이해당사자 신탁으로 관리되는 커먼즈 펀드로 투입될 것이다. 펀드는 모든 사람에게 지불되는 정기적 배당금을 산출할 것인데, 이는 <알래스카 퍼머넌트 펀드>(Alaska Permanent Fund)가 주 소유의 땅에서 시추가 이루어지는 경우 거기서 발생하는 수입을 모두가 지분을 가지는 자금으로 사용하여 알래스카에 사는 모든 가구에게 돌아가는 배당금을 발생시키는 경우와 매우 유사하다.

스탠딩은 말한다. “회사가 커머너들로서 우리 모두에게 속하는 땅이나 해저를 사용하고 그 과정에서 수익을 낸다면 그때 커머너들로서 우리는 보상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원칙이다.”

이런 취지에서 스탠딩은 엄청나게 큰 유람선들은 정상운영만 해도 높은 세금을 부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유람선들은 항구에 정박할 때 바다로 엄청난 양의 오염물질과 디젤기관의 유해배출물질을 방출한다. 스탠딩은 거대한 연안 항구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도 커머너들에게 마찬가지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 세계에 485개의 대규모 항구가 있고 우리의 항구들에서 놀랄 만큼의 돈을 버는 기업들과 기업체인들이 그 항구들을 모두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다.”

우리의 공통의 부에 대한 이런 방식의 약탈이 바다에서는 통상적인 절차라고 그는 말한다. “영국 여왕은 해저의 상당부분을 이른바 재생 가능한 풍력발전 지역용으로 다국적 기업들에게 경매로 팔았다. 이는 앞으로 계속해서 왕실사람들에게 수십 억 파운드가 흘러들어오는 것을 보증해줄 것이다.” 하지만 여왕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 “해저는 왕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커먼즈의 것이다. 나는 ‘멈춰’라고 말하고 보상을 요구하고자 한다.”

블루커먼즈에 관하여 가이 스탠딩과 한 전체 인터뷰를 여기서 들을 수 있다.




퍼더필드 — 예술과 게임이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다

 



공상적이지만 거의 현실적인 시나리오가 여기 있다. 여러분의 지역사회 공원에 있는 꿀벌들, 다람쥐들, 거위들, 곤충들, 나무들 등등의 종(種)들이 인간의 침범과 학대를 충분히 겪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들은 더 이상 참지 않고 들고 일어나 인간이 가진 것과 동일한 권리를 요구할 작정이다. 종들 간의 일련의 회합을 통해 지역 생태계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번성을 보장하는 협정/협약이 타결된다.

이 시나리오는 <퍼더필드>(Furtherfield, 런던에 기반을 둔 예술공동체)가 빅토리아 시대 핀즈베리 파크의 일부 지역에 대한 파수의 일환으로서 고안한 ‘라이브 액션 롤플레잉’(live action role-playing, LARP)게임이다. 앞으로 3년에 걸쳐 <퍼더필드>는 프로젝트의 이름인 <핀즈베리 파크 2025 협정/협약>(The Treaty of Finsbury Park 2025)을 진행해나갈 때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각각 일곱 가지 종들의 역할을 하도록 요청할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풍뎅이와 다람쥐 종의 대표자들로서 <종(種)간 회의>에 참석하도록 함으로써 LARP게임이 목표로 하는 것은 사람들이 “놀이를 통해 인간이 아닌 생명체들에 공감하는 경로들”을 발전시키도록 돕는 것이다. 서로 다른 종들이 소통하도록 돕는 직감 다이얼(Sentience Dial)도 있다. 누가 알겠는가? 이 과정이 실제로 핀즈베리 파크를 더 무성하고 활기 넘치는 장소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 진기한 애니미즘 경험은 <퍼더필드>가 지난 25년 동안 주최해온 프로젝트들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이 프로젝트들 대부분은 예술, 디지털 기술 및 사회적 행동을 일정한 창조적인 방식으로 섞는다. 최근 『커머닝의 프런티어』(Frontiers of Commoning) 팟캐스트(에피소드 #24)에서 나는 세상에 대해 새로이 생각하는 방식으로서 참여예술에 대한 <퍼더필드>의 독특한 접근법에 관하여 루스 캐틀로우(Ruth Catlow)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술가, 큐레이터이자 <퍼더필드>의 공동대표인 캐틀로우는 1996년에 <퍼더필드>를 시작한 이래로 많은 예술 프로젝트들을 이끌어 온 비전을 가진 사람이다. 그녀는 지역적, 일국적 및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다양한 파트너들과의, 특히나 평범한 사람들과의 협동작업을 조직하는 것을 돕는다. <퍼더필드>의 많은 예술작업과 테크놀로지 기획들의 핵심은 우리가 세상을 다르게 보도록 하려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위해 새로운 미래를 그리는 경우 예술이 하는 역할을 존중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퍼더필드>의 프로젝트들 대부분은 런던 소재 핀즈베리 파크에 있는 녹지 공간 및 미술관에서 그리고 예술가들•기술자들•활동가들을 불러 모으는 다양한 디지털 공간에서 열린다. 지역 공무원들이 <퍼더필드>의 예술 프로젝트들을 펼칠 참여적인 무대로서 공원을 사용하도록 <퍼더필드>측에 청했다. 전통주의자들은 이 단체를 예술의 센터라고 부르겠지만 <퍼더필드>측은 자신들의 활동이 외부 지향적이고 네트워크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재미있게도 ‘디-센터’(de-center, 탈-중심)라고 부른다.

<퍼더필드>는 흥미를 유발시키며 장난기가 다분한 기발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예술적 실험들의 주최자라고 자임한다. 이 탐구적 실험들은 오픈소스 테크놀로지와 철학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퍼더필드> 자신들의 말로는) “현존하는 권력들을 파열시키고 민주화”하며 “지형을 새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일례로 <흑인의 삶도 중요하다> 시위들이 무수히 일어나 미국과 전 세계 도시를 흔들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노예소유자 사업가들과 군장성들이 공원에 청동 조각상으로 세워지는 영광을 입은 이유를 문제삼기 시작했다. <퍼더필드>는 공원에 있는 받침대 위에 지금 있는 것 대신에 누가 또는 무엇이 놓여서 기념되어야 할지에 대하여 공개 토론을 열기로 결정했다.

예술가들은 ‘시민 공원 받침대’ 프로젝트(The People’s Park Plinth project)측으로부터 공원에서 기념하게 될 새로운 사람들이나 물건을 제안하도록 요청을 받았다. 이 과정의 매개체는 스마트폰이었다. 공원에서 산책하는 사람들이 나무나 동상 받침대에 부착된 QR코드를 스캔하면 공원 내의 해당 장소에 관한 영상을 즉각 볼 수 있었다. 사실상, 이 프로젝트가 스스로를 설명했듯이, 이 프로젝트는 “공원 전체를, 여러분이 여러분의 공원에 원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하는, 디지털 예술작품을 위한 공공 플랫폼으로” 바꾸었다.

누구나 제안된 예술품 몇 개에 투표할 수 있었다. 1위를 차지한 작품—에이샤 탄 존스(Ayesha Tan Jones)가 제작한 <나무 이야기에 바탕을 두어>(Based on a Tree Story)—은 나무에 있는 QR코드를 사용하여 그곳에 사는 나무 요정의 영상을 호출하는 예술작품이었다. (“장소 특유의, 청각적 증강현실을 통해 나무의 과거•현재•미래의 이야기를 하는 디지털 나무 요정과 조우하기”)

예술작품을 선정하기 위한 공개적인 투표는 그 자체로 상당히 새로웠다. 각 참가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하나의 예술작품에 투표권을 한 번 행사하는 식이 아니었다. 그들이 원하는 만큼 많은 예술작품들 각각에 투표할 수 있는 다수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제곱 투표”(quadratic voting)라 불리는 이 방식은 어떤 프로젝트가 과반수를 얻는지를 그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떤 것에 가장 열광하는지를 보여주는 쪽이다. 이 시스템은 소수의 목소리를 무효화하는 “다수의 횡포”라는 문제점과 파당성이 강한 집단들이 방해물로 작용하는 상황을 극복할 목적으로 구상되었다.

<퍼더필드>의 더 흥미로운 역할들 중 하나는 어떻게 블록체인 소프트웨어가 네트워크 시대에 예술을 재발명하는 것을 도울 수 있는지에 관하여 실험실을 열고 예술가들과 기술전문가들 간 일련의 토론들을 주최한 것이었다. 핵심은 문화 부문이 어떻게 “피어 생산방식으로 생산된, 예술•문화•사회를 위한 탈중심화된 디지털 인프라에 이르는 길”을—특히 탈중심화된 자율조직들(Decentralised Autonomous Organisations, DAOs)을 통해서—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퍼더필드>는 “예술계에서 게이트키핑과 엘리트주의를 끝내”고 “규모에 제한이 없는 상호의존과 상호협력을 위한, 회복력 있고 변화도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한 가지 길로서 이 깊고 근본적인 우애의 정신을 가져오기”를 원했다. <퍼더필드>는 또한 기술 부문에서 아주 많은 탈중심화된 자율조직들을 활기 띠게 하는 자유의지적인 개인주의를 넘어가기를 원했다.

<퍼더필드>의 회합들의 결과로 두 권의 책이 나왔다. 하나는 『블록체인을 다시 생각하는 예술가들』(Artists RE:thinking the Blockchain, 2017)—예술가들이 블록체인에 비판적으로 참여하는 활동에 관한 책—이고 다른 하나는 2022년 5월에 출간되는 『급진적인 친구들』(Radical Friends)—예술계에서의 디지털 자율조직들(DAOs)의 위험 및 이 조직들에 대안이 되는 커먼즈 기반 디지털 자율조직들에 관한 선집—이다. “<퍼더필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안적 조직들에 “DAOs with Others”를 나타내는 두문자어 ‘DAOW’라는 이름을 붙인다.”

루스 캐틀로우와 나눈 팟캐스트 대화는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지구의 지혜와 함께 하기

 


  • 저자  :  Daniel Christian Wahl
  • 원문 : Indigenous to Life: Being as Expression of Plac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KOSMOS에 실린 크리스천 월의 글 “Indigenous to Life: Being as Expression of Place”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의 주제는 ‘지구의 지혜와 다시 함께하기’(Realignment with Earth Wisdom)이다. 저자 대니얼 크리스천 월(Daniel Christian Wahl)은 서구의 분리 서사가 파괴와 불평등을 초래했지만 이에 대응하여 재생성적인 개발과 재생성적인 문화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으며 이 시점에서 재생성(regeneration)이 생명 자체의 고유 패턴이라는 것과 우리의 공통의 먼 조상들 모두는 생명을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 구성원으로 있는 재생성적인 공동체로서 이해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말한다.

인간으로서 생명을 영위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우리가 집이라고 부르는 장소들과 바이오지역들 안에서 서로 돌보며 살았다. 콜롬비아와 페루의 숲에서부터 태평양 연안 북서부와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르기까지 인간 거주자들이 수천 년에 걸쳐서 더 높은 다양성, 풍요로움, 생물‐생산성에 이르는 최고치의 생태계들을 함께 창조했고 양성했다는 증거가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모두 행성 차원의 과정으로서의 생명()에 토착하고 있다. 지구의 지혜 전통들 다수의 핵심적인 교훈은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생명의 재생성적 패턴들이 우리를 통해 흐르도록 하는 과정으로서의 생명과 함께하는 것이다. 크리스천 월은 이런 식으로 존재할 경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장소의 소유자가 아니라 표현자로서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땅이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땅에 속해 있는 것이며 땅과 바다는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위한 거름으로 돌아간 후에도 오랫동안 그곳에 있으리라는 것이다.

첫째, 지구의 지혜와 함께 하기란 무엇인가? 크리스천 월은 올바른 관계로 살아가는 것이 지구의 지혜와 함께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관계적인 존재들로 우리 각자는 특이하며 생명의 재생성적인 공동체 내부에 있는 친밀한 상호관계의 결합체이다. 따라서 지구의 지혜와 함께하기 위해 우리는 자연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서 배워야 한다. 우리가 자연으로서 배워야 할 것은, 예를 들어 재닌 베니어스(Janine Benyus)가 바이오미미크리(biomimicry, 생태모방)의 핵심적인 교훈으로 제시한 “생명은 생명에 도움이 되는 조건들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인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위해서 도움이 되는 조건들을 창출하기 위해 나서는 경우 생명체로서 우리는 지구의 지혜가 어떻게 우리를 통해 흐르게 하는가?

크리스천 월은 인류가 한 종으로서 살아온 최근의 기록을 살펴보면 우리가 이 물음의 핵심적인 중요성을 망각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우리가 한 행동들—더 정직하게 말해서 인간의 비교적 작은 부분에 속하는 행동들—이 모든 인류에게 종 차원의 ‘통과의례’를 강요했고 그 결과 우리는 현재 대량 멸종 사건의 일환으로서 우리 종의 이른 종말이라는 실질적이고 당면한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크리스천 월은 다시 물음을 제기한다. 우리는 생명의 공동체에서 성숙한 회원이 되어, 그리고 퇴행적이기보다 재생성적인 존재가 되어 적시에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발현하게 될 것인가?

인간이 사는 장소들에는 생명‐문화적 고유성이 있고 이 고유성을 멋들어지게 표현한 것이 다양한 재생성적인 문화들이다. 그는 우리가 이 문화들을 기초로 한 재생성적인 미래를 함께 창출하기 위해서 행동하기, 존재하기 그리고 사고하기에서의 변화는 물론이고 새롭고도 매우 오래된 세계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세상을 조직하는 데 투여되는 기존의 생각들과 문화적으로 지배적인 내러티브들은 생명의 과정을 개체들, 종들로 잘라놓았고 이런 식의 관점은 우리로 하여금 경쟁, 결핍, 죽을 운명에 초점을 맞추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가 내리는 판단이다. 크리스천 월은 이를 극복하고 생명을 다른 식으로 이해하기 위한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는 고대의 토착적인 지혜뿐만 아니라 최첨단 과학에 의지해서 생명을 우주에 존재하는 동향적(動向的) 힘—협동적 풍요를 통해 생명에 도움이 되는 조건들을 창출하는 힘—으로 이해할 것을 권하고 있다. 생명이 행성 차원의 과정임을 크게 강조하는 그는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의 1970년 논문 「형태, 물질 및 차이」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자신의 환경을 파괴하는 유기체는 그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생존의 단위는 환경 속에 있는 유동적인 유기체이다.”

그는 우리가 생명을 우주에 존재하는 동향적 힘으로 이해하기 위해 생명의 진화과정에 의식적으로 참여하는 경우, 존재는 부분인 동시에 전체라는 표면상의 역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관계적인 참여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독립적 존재’와 ‘전체의 상호적 표현으로서의 존재’사이의 양극성에서 발생하지만 우리는 둘 다이며 틱낫한(Thích Nhất Hạnh)이 소개한 사이존재(interbeing)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나바호족(Navajo)이 가진 지구의 지혜인 ‘아름답게 걷기’(‘Hózhóogo Naasháa Doo’)도 바로 이 점을 가리킨다. 그들은 이렇게 조언한다. ‘미래로 걷는다면 아름답게 걸어라.’ 아름답게 걷는 방법은 ‘전부 속의 하나와 하나 속의 전부(the One-in-All and the All-in-One)를 눈앞에 보는 것’이다.

크리스천 월은 재생성적으로 사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이를 설명한다. 재생성적으로 사는 것은 지역과 나라와 전 세계가 역동적으로 공존하는 중첩된 복잡성의 의식적인 표현자로서 그리고 이 복잡성에의 참여자로서 사는 것이다. 이 중첩된 규모들(그림참조)은 더 이상 쓸모가 없는 구조들 및 패턴들의 빠르거나 느린 붕괴 주기, 변형적인 혁신 그리고 새로운 패턴들을 일시적으로 공고히 하여 역동적이고 지속적으로 변형하는 온전체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통합된다. 그는 이러한 과정으로서의 재생성이 생명 자체의 진화적이고 발전적인 충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재생성적으로 행동하기의 핵심은 환경적 변화나 사회적 변화를 예측하고 변형할 수 있는 체계 차원의 치유와 복원력있는 공동체의 구축이다. 하지만 이를 위한 전제조건은 건강(성)과 복원력을 ‘되돌아갈’ 정적인 상태로서가 아니라 변화하는 맥락에도 불구하고 변형하고 활력을 표현하는 역동적인 능력으로서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재생성의 핵심은 ‘순(順)긍정적 영향’(net positive impact)이나 ‘좋은 일하기’ 그 이상이며 모든 개인, 공동체 및 장소의 특유하고 대체 불가능한 본래적 역능을 발현하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이 능력을 발전시켜야 하는가?

크리스천 월의 정의에 따르면 생명은 여러 규모들이 중첩된 재생성적인 공동체이다. 생명은 모든 유핵 세포들을 형성하는 세포기관들의 공동체에서부터 당신과 내가 ‘우리의 몸’이라고 부르는 재생성적인 공동체를 이루는 인간•박테리아•균류세포들의 생태계를 거쳐, 그리고 풍부하고 대단히 바이오 생성적인 생태계들의 기능적 다양성을 창출하는 종들의 공동체를 거쳐 바다 및 육지 생태계가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생명지원 시스템—이것이 지구의 기후패턴과 대기 구성성분을 조절하여 생명에 도움이 되도록 만든다—에 기여하는 살아있는 지구의 생리학까지 걸쳐 있다.

따라서 크리스천 월이 이 글의 주제로 삼은 지구의 지혜와 다시 함께하는 것의 핵심적인 의미는 이 재생성적인 공동체에 더 의식적으로 다시 거주하는 것이며, 중첩된 재생성적인 생명 공동체 내부에서의 우리의 역할로 즉 치유자로서의 역할로 겸허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미래는 우리 각자가 이 공동체에 다시 거주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바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는 어떻게 이 공동체에 다시 거주할 수 있는 것인가? 그는 시인인 스나이더(Gary Snyder)가 1976년에 제기한 발언을 인용해서 그 방법을 제시한다. “우리가 삶을 이어갈 수 있고 [···] 우리가 풀과 태양에 기대 살 수 있는 미래 행성을 상상하는 사람들은 거주하는 사람들(전 세계 토착민들과 농부들)을 지원하기 위해 과학이든, 상상력이든, 힘이든, 정치적 수완이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져오는 수밖에 없다. 그들과 함께 공동의 대의를 만들 때 우리는 ‘다시 거주하게’ 된다.”

크리스천 월이 주장하는 재거주(Re‐inhabitation)는 우리가 거주하는 장소들과 바이오지역들의 맥락에서는 행하기에서의 변화를 그리고 바이오지역들과 맺는 관계방식에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장소장소마다 건강한 생태계 기능들을, 번성하는 공동체들 및 활기찬 경제들을 재생성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재거주는 또한 존재의 변화를 의미하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생성의 과정들—우리를 산출하는 장소들, 공동체들 및 생태계들의 그 자체로 역동적인 표현들인 과정들—로서 다시 인식하는 법을 배울 때 의식의 지형에서 재거주가 활발해지기 때문이다. 현재의 순간에 담겨 있는 미래를 향한 잠재력은 (긴 ‘이행’이나 어떤 ‘거대한 전환’ 이후의 어떤 때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의 몸, 우리의 공동체, 우리의 장소와 바이오지역들을 집으로 삼아 거기에 거주하는 데 있다.

그러나 크리스천 월이 보기에 변화에 대한 우리의 현재 이론은 추상 쪽으로 그리고 문제들을 서로 분리하고 ‘해결책’을 실행할 장소로부터 분리하여 ‘해결하는’ 습관 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우리는 이런 사고방식 안에서 전략을 논의하는 것에 고착되어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제안하며 글을 맺는다.

우리가 바로 지금 다르게 존재하기에 초점을 맞춘다면 어떨까? 우리가 누구인지 재인식하고 사이존재의 행성적 과정으로서의 삶과 좀더 동일시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자신, 공동체 및 생명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어떨까? 우리가 개별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장소를 치유하고 육성하는 표현자들로서 존재할 또는 그런 표현자들이 될 잠재력에 초점을 맞추면 어떨까? 우리가 추상적인 전지구적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고 해결책들의 규모를 키우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습관을 떨쳐버린다면 어떨까? 우리의 존재의 터전인 장소들과 공동체들과의 (함께 진화하는) 상호성 속에서 생명에 도움이 되는 조건들을 창출할 잠재력에 초점을 둔다면 어떨까?




생태적 전환의 길 – 생태사상과 전환운동 강좌 안내

생태적 전환의 길

– 생태사상과 전환운동

여기저기서 ‘생태적 전환’을 이야기합니다. 지구적으로, 지역적으로 다양한 ‘전환의 실천 사례’도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환의 철학, 비전, 전략에 대하여 깊이 이해하고, 자기 자리에서 그것들을 구체화해야 할 때입니다. 대전환의 길을 내고 있는 생태주의운동, 커먼즈운동, 탈성장운동 등을 깊이 이해하고, 실천적 함의를 찾는 배움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함께 전환의 길을 내실 분들을 초대합니다.

11월 11일 : 세계관의 전환 – 유기쁨(서울대학교 강사)

11월 18일 : 대안근대로의 이행과 커먼즈운동 – 정남영(독립연구자)

11월 25일 : 정의로운 전환과 기후정의 운동 – 김현우(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기획위원)

12월 2일 : 삶의 지향으로서의 탈성장 – 남미자(경기도교육연구원 연구위원)

12월 9일 : 돌봄과 살림의 정치 경제 – 이현재(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12월 16일 : 전환의 기지로서의 마을 – 박복선(전환교육연구소)

 

일시

11월 11일 ~ 12월 16일 매주 목요일 오후 8시~10시

 

참여 방법

줌(신청자에게 참여 주소를 보내드립니다) 

 

참가비

50,000원

국민 543001-01-341365(교육공동체 벗)으로 입금

 

문의

010-6231-3681 전환교육연구소

 




커먼즈와 미래

 


  • 저자  :  Leila Dawney, Samuel Kirwan, Julian Brigstocke
  • 원문 :  Introduction : The Promise of the Commons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Leila Dawney, Samuel Kirwan, Julian Brigstocke가 편집한 책  Space, Power and the Commons : The Struggle for Alternative Future (Routledge 2016)의 “Introduction: The Promise of the Commons”에서 책 전체의 내용을 대략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우리의 일은 태양에 의해 신성화된다. 가령 겨울날이나 땅 파는 날에 비하면 이날[추수하는 날]은 만족스러운 날이다. 같이 일하는 친구들 때문에 더 그렇다. 그런 날이면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모든 얼굴들이 (내가 알지만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 사람들도 함께) 한 공간에 모여서 공동의 도랑과 집단적 희망에 의해 한데 묶여 있기 때문이다. 사슴이 덫에 걸려 탕으로 만들어 달라고 울어대는 소리를 듣거나 딱따구리가 파이로 장사를 지내 달라고 졸라대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들고 숲을 쳐다본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기라도 하면 우리는 일제히 몸을 곧추세우고 꾸짖는 듯이 태양을 쳐다본다. 우리의 낫과 손 연장은 합창하듯 소리를 낸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은 누구나 듣는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모두가 듣는다. 우리에게는 개방성과 즐거움이 있다.

Jim Crace, Harvest (2013)

1968년에 봉기에 참여하고 있던 활동가가 시간 여행을 하게 되어 2015년 급진적인 좌파의 집회 현장에 뚝 떨어지게 되었다면 그녀는 거기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그녀는 아마도 계급·노동·저항의 언어가 강화되었으리라고 기대할 것이지만, 이런 기대와는 달리 그녀가 실제로 발견하는 것은 제사(題詞)에 나온 목가적 장면과 유사한 토론 즉 토지에의 공통의 접근과 사유(思惟)의 개방성 및 그것에 수반되는 삶의 양태를 놓고 벌어지는 토론일 것이다. 그녀는 이전에는 신맬서스주의자들(neo-Malthusians), 토지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운동들 그리고 사회사가들 및 법역사가들의 도메인이었던 것, 즉 커먼즈의 언어를 발견할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커먼즈에 관한 관심은 주로 제한된 자원, 늘어나는 인구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새로운 형태의 물질적 가난 등의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었다. 커먼즈는 경제학, 인류학, 환경과학에서 중요한 관심 영역이 되었다. 인구 과잉에 대한 맬서스의 저작과 함께 자원과 토지의 사적 소유에 대한 조지(Henry George)의 비판, 경쟁하는 행위자들이 제한된 자연자원에 접근할 때 생성되는 긴장들에 관한 하딘(Garret Hardin)의 저작들이 그 준거점들이 된다. 커먼즈 관련 문헌들이 다루는 문제들은, 왜 이러한 위기들이 출현하고 있는가, 이런 상황은 언제 위기점에 도달할 것인가, 개별 국민 국가들이 어떻게 이것을 막기 위해 대응해야 하는가이다. 이 문제들은 커먼즈에서 실제로 행해지는 일, 커먼즈를 구축하는 일, 커먼즈가 의미하는 바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정책 변화와 거시경제적 자원관리를 지향하는 추상적 논의들이었다.

이 텍스트에서 (그리고 커먼즈 연구분야를 발전시키고 있는 정치학자들·지리학자들·사회학자들 사이에서) 말하는 커먼즈는 이 문제들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을 다르게 표현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 책의 글들은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식민화나 불로소득자들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규제와 보호를 필요로 하는 자원의 관점에서 정의되기를 거부하는 커먼즈를 표현한다. 이 글들이 말하는 커먼즈는 공간일 수도 있고 경험일 수도 있고 자원일 수도 있으며 기억이거나 혹은 ‘희소성의 관리’ 외부에 있는 공유하기와 살아가기의 형태들일 수도 있다. 저자들의 전문분야는 도시계획학, 지리학, 정치학, 사회학, 문화이론 등을 포함하는 사회과학과 인문학 전반에 걸쳐 있다. 이는 새로이 일기 시작한 커먼즈 연구가 여러 분야들을 망라하고 있으며, 학계를 가로지르는 동시에 학계를 넘어서는 논의들에 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커먼즈를 신자유주의적 시장에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 삶의 사유화와 개인주의화에 저항하는 함께 살기의 방식들을 핵심으로 하는 시공간적이고 윤리적인 형성체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커먼즈의 언어·이념·상상계의 출현을 고찰할 때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신자유주의적 힘들과 연관되어 있고 그 힘들을 통해 작동되는 방식을 인식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힘들은 공통의 삶을 위한 가능성들을 제한하는 동시에 산출한다. 급진적으로 사유를 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확장의 논리 및 과정과 이 확장에 대한 저항을 점점 더 종획과 커머닝의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다름 아닌 자본주의적 축적의 논리를 통해 커머닝이라는 특수한 저항 형태의 가능성이 출현하는 것이다. 자본이 세계의 더 많은 지역을 상품화 과정으로 끌어들이면서 새로운 종획이 일어난다. 자본은 신자유주의적 소유와 가족 관계를 통해 삶을 사유화하는 동시에 인구에 기반을 둔 통치[푸꼬가 분석한 바의 새로운 형태의 권력의 특성이다―정리자]를 구사한다. 이것이 대안권력인 커머닝으로 향할 가능성의 조건들을 생성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비(David Harvey)의 작업이 매우 중요한데, 특히 후기 자본주의가 계속적인 종획 과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 중요하다. 자본은 이전에는 상호책임이라는 사회적 관계에서 관리되고 조직되고 산출되었던 자원·인구·활동·토지를 통합하면서 확장한다. 하비는 이를 ‘강탈(dispossession)에 의한 축적’이라고 정의한다. 여러 분야를 가로지르는 연구들은 종획의 여러 형태들을 통해서 자원의 사유화가 일어나고 있는 많은 공간들을 보여주었다. 지구상의 후진 지역에서의 토지강탈, 금융자본의 자산거품, 유전자·물·토착지식 등의 사유화―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종획들은 그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세상이 폐쇄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커먼즈가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의 중요한 자원이 된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전통적인 대의민주주의의 방식을 통한 변화의 가능성들은 감소하고 있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의 주요 정당들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은 유럽연합의 트로이카가 장악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활동가들은 집회·조합·투표소의 공간들을 넘어서 정치를 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탐구하고 있다. 아나키스트들의 DIY 전통에서 나온 새로운 형태의 집단적 행동은 거주와 점령이라는 형태를 집회와 시위라는 형태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며, 저항의 예시적 공간들의 출현을 향하는 새로운 길을 닦고 있다. 그 주목할 만한 사례는 오큐파이 운동, 15M 그리고 인디그나도스이다. 이렇게 커먼즈의 정치는 종획에 대한 공간적 대응으로서 일어난다. 커먼즈 이념은 개념적·물리적 공간을 집단적으로 생산하고 주장하기를 촉발하는 정치적 어법을 제공한다. 저항과 항의의 새로운 형태들―관리와 의사결정에서의 플랫시스템들[누구에게나 접근이 허용된 시스템을 말한다―정리자], 요구 없는 정치[원주 : 낭씨Jean-Luc Nancy가 정치의 이러한 재구상에 대한 더 나아간  논의를 제공하고 그것을 더 정교화한다(James, 2006; Nancy, 1991, 2000)],((James I, 2006, The fragmentary demand: An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Jean-Luc Nancy (Stanford University Press, Stanford, CA). / Nancy J-L, 1991, The inoperative communit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Minneapolis, MN and London / Nancy J-L, 2000, Being singular plural (Stanford University Press, Stanford, CA). ).)) 대안적 세계의 구축에 초점두기―이 출현함으로써 공통적으로 살기, 공통적으로 만들기, 공통적으로 존재하기라는 새로운 활동들이 종획과 강탈에 대한 직접적 대응으로서 일어나고 있다.

커먼즈의 언어는 무엇보다, 투쟁과 무력함 너머 희망과 약속을 부각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언어와 성향을 제공한다. 이 언어는 능동적인 정치를 환경에 대한 관심과 결합시키고 도시 운동을 시골에서의 저항과 결합시키며 지역에서의 투쟁을 전지구적 정치와 결합시킨다. 그 역사적 문화적 반향들이 때로 문제점을 보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다르게 살고 다르게 존재할 것인가를 생각할 자원을 제공해 준다. 지금과는 다른 세계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미래들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커먼즈의 이념은 낭만적 서사를 제공하며 이 서사를 통해 앞으로 나아갈 길(실망스런 정치적 내러티브들, 생태계 파괴, 양극화와 강탈―이것들의 외부에서 사유하는 길)을 제공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내러티브에 대안이 되는 대항내러티브를 제공한다. 무엇보다도 커먼즈 이념은 변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날 수 있으며 조그만 행동들도 중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희미하게나마 제공한다.

그러나 이 책의 글들이 분명히 하듯이 이 낭만적 서사를 넘어서 사유할 필요, 커먼즈가 출현하는 곳, 커먼즈에 담겨 있는 긴장들, 커먼즈가 행할 수도 있는 새로운 사물화들을 평가할 필요 또한 존재한다. 특히 블렌코우(Claire Blencowe)의 글은 공통적 삶의 유혹적인 상태들이 해방적 충동들을 덫에 가두고 그런 움직임들을 자본축적의 관계들로 재영토화시킬 위험을 일깨워준다. 커먼즈 이념의 매력과 미래의 가능성을 이해할 때 우리는 우리가 ‘종획 이야기들’라고 부르는 우울한 장르를 고려에 넣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이야기들은 영국 의회의 종획 역사들과 이 역사들을 문학이나 구비 전통에서 다시 이야기하는 민속 관행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볼리어 같은 커먼즈 옹호자들이 제시하는 커먼즈 이야기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상실감, 그리고 비록 파열되었으나 폐쇄되지는 않았던 그리고 어느정도는 가난했던, 종획 이전의 삶의 환기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특정 지역에 속하면서도 이리저리 퍼져서 운동들과 지역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데, 흩어진 사건들과 행동들을 한데 모으는데 도움이 된다. 커먼즈의 이러한 다양한 갈래들에 대한 주목이 이 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자본주의 이전의 목가적 사회의 낭만적 상상태들과 테크놀로지·소통·사회성의 가없는 가능성들을 결합하는 ‘커먼즈’라는 용어의 가능성들만이 아니라 문제점도 또한 주목하는 것이다.

이 책의 3부에 실린 글들이 분명히 하듯이, 커먼즈 이념이 정치적·학술적 담론에서 널리 퍼지고 있다면 이는 커먼즈를 구성하는 것이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책은 도시 커먼즈,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디지털 커먼즈가 일상 언어에 진입한 상황에서 커먼즈의 더욱 새로운 유형들을 탐구한다. 어떤 저자는 비인간 존재의 참여를 다루고 또 어떤 저자는 공유된 기억의 전지구적 커먼즈를 다루며 다른 어떤 저자는 공통적인 것의 법 공간을 다루고 또 다른 저자는 시간의 측면에서 커먼즈를 다룬다. 3부에서 서술된 집단들과 행동들의 공통적 특징은 (박탈에 대한 저항 말고도) 물리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커먼즈를 다루기보다 공통적인 것을 실천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다루는 태도이다 이런 식으로 정치적 커머닝의 새로운 실천들은 신자유주의적 풍경 내부에 ‘다른 세계’를 실행하고 있으며 그렇게 하면서 주체성들·관계들·공간들을 바꾸고 있다.

실로 2000년대 초에 심대한 전환이 일어났다 커먼즈를 어떤 장소나 자원으로 생각하는 데서 실천의 한 형태로서의 커머닝을 생각하는 데로 전환한 것이다. 집단화를 지역적 규모로 생각하는 수단으로서 그리고 비자본주의적 형태의 사회조직과 경제조직을 실현하는 방식으로서 커머닝 이념이 번성했다. 라인보(Peter Linebaugh)의 작업이 이 전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커머닝과 종획의 역사에 대한 그의 서술들은 이 책에서 논의되는 바의 커먼즈 이념을 우리의 관심사로 만드는 데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커먼즈의 이념과 커머닝의 정치를 이해하고 활성화하는 몇 가지 방식들로 하여금 서로 대화하게 하려고 한다. 이것들은 개념적 작업과 경험적 사례들 사이에서 움직이는데, 법, 역사, 그리고 일상적 활동에서 이 개념을 고찰함으로써 이 개념이 정치적·이론적 설득력을 획득하는 여러 가지 방식들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주고자 한다. 이 책의 글들은 특히 실제로 존재하는 바의 커먼스와 커머닝에 초점을 둔다. 여기서 커먼즈는 법, 정치적 행동주의, 그리고 일상적 활동의 테크놀로지들을 통해 엄연한 객체들로서 출현한다. 이런 서술들은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를 방해하거나 그것들을 우연한 것으로서 폭로하는 능력을 공유한다. 그리하여 커먼즈는 대안들이 직접 탐색되고 실험되며 희망의 정치에 되먹여지는 개념적 공간이 된다. 희망의 정치는 이미 실제로 존재하는 비자본주의적 삶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역사의 종식’(이는 자본주의 이후의 미래를 개념화하는 데 있어서 막다른 골목에 해당한다)을 돌파할 가능한 미래들을 제안한다.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는 이러한 움직임을 ‘역사의 시작’이라는 주제로 논의했다. 이렇듯 커먼즈의 이념은 현재의 경제적 구조의 우연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성장과 사적 소유의 필연성이라는 담론을 무너뜨린다. 에스떼바(Esteva)가 지적하듯이 커머닝과 커먼즈 운동은 ‘대안적 경제’가 아니라 ‘경제에 대한 대안’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커먼즈에 대해서 쓰고 사유하고 커먼즈를 실행하는 것은 이러한 ‘세계 만들기’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며, 우리는 커먼즈를 중심으로 하는 문헌들에서 커먼즈 고유의 수행성―경험과 주체성을 사적 소유와 자본의 불가피성에 맞세워 재구조화하는 데서의 수행성―을 감지한다.

이어지는 절에서는 커먼즈 연구의 다섯 분야를 살펴본다. 첫째로 우리는 커먼즈가 환경자원의 한계에 대하여 사유하는 수단으로서 이해되는 방식을 고찰한다. 둘째로 우리는 도시 커먼즈에 대한 그리고 도시에서의 공간적 커머닝과 전유의 실천들에 대한 더 최근의 연구들을 살펴본다. 셋째로 우리는 비판적 법연구 분야에서의 작업에 기대어 커먼즈와 법과의 관계를 이해한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신맑스주의의 성취에 시선을 돌려 커먼즈 이념이 현재의 급진적인 정치사상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왔는가를 개괄하고, 마지막으로 커먼즈 논의의 틀을 커머닝 개념을 중심으로 다시 짜고자하는 저자들에 주목한다.

[참고]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Introduction: the promise of the commons
     LEILA DAWNEY, SAMUEL KIRWAN AND JULIAN BRIGSTOCKE

PART I
Materialising the commons
1 Building the commons in eco-communities
     JENNY PICKERILL
2 A politics of the common: revisiting the late nineteenth-century Open Spaces movement through Rancière’s aesthetic lens
     NAOMI MILLNER
3 A spirit of the common: reimagining ‘the common law’ with Jean-Luc Nancy
     DANIEL MATTHEWS

PART II
Commoning
4 The more-than-human commons: from commons to commoning
     PATRICK BRESNIHAN
5 ‘Where’s the trick?’: practices of commoning across a reclaimed shop front
     MARA FERRERI

PART III
An expanded commons
6 Expanding the subject of planning: enacting the relational complexities of more-than-human urban common(er)s
     JONATHAN METZGER
7 Occupy the future
     JULIAN BRIGSTOCKE
8 Imaginaries of a global commons: memories of violence and social justice
     TRACEY SKILLINGTON

PART IV
The capture of the commons
9 The matter of spirituality and the commons
     CLAIRE BLENCOWE
10 Controlled natures: disorder and dissensus in the urban park
     SAMUEL KIRW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