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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라고? 아니다, 우리는 생태세에 들어서고 있다

 



우리 근대인들은 아주 오만해서 지질학적 시기를 심지어 우리 자신의 이름을 따서 ‘인류세’라고 명명했다. 확실히 인간 문명은 지구의 생태계를 크게 변형시켰고 불안정하게 했다. 그러나 ‘인류세’는 지구상에서 우리 인간이 추진력임을 의미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명칭이다.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가! 지구의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산불, 홍수, 가뭄 및 극심한 더위가 보여주듯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가이아(Gaia)이다. 가이아는 자신의 맹렬한, 협상 불가능한 요구를 우리에게 하고 있다. 가이아는 인간이 문명, 자본주의, 국가 그리고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오랫동안 사용해온 질서의 틀을 파열시키고 있다. 이것이 바로 루마니아 태생이며 벨기에에 기반을 둔 훌륭한 연구자인 미흐네아 타나세스쿠(Mihnea Tănăsescu)가 지구의 지질학적인 시대를 ‘생태세’(Ecocene)로 인식할 것을 우리에게 촉구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인간중심주의의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있어서 우리 인간이 자연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깊게 얽혀있으며 자연보다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인류는 살아남으려면 자연계와 문화적•경제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고 지구 체계와 인간 체계를 함께 꽃피우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래서 2022년 출판된 타나세스쿠의 저서에 『생태세 정치』(Ecocene Politics)라는 제목이 붙은 것이다. 책에서 설명하듯이 “생태적 과정이 정치적 삶에 점점 더 빈번하게 개입하는 특징을 띄는 것”이 우리의 시대이다. 사람들이 이 현실을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의 정치•경제•문화가 새로운 탈근대적 방식의 존재하기와 행하기를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것과 적절하게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바로 이것이 앞으로의 과업이다. 붕괴하고 있는 근대 체계를 지탱하거나 복구하고자 하는 것은 헛수고이다.

타나세스쿠가 이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정확성과 열정에 감명을 받아서 나는 팟캐스트 커머닝의 프론티어(Frontiers of Commoning)(에피소드#43)에서 타나세스쿠와 그의 책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타나세스쿠는 벨기에 몽스(Mons) 대학교 과학연구기금 연구교수이다. 그곳에서 그는 인류학•사회학•정치학 및 법에 깊이 기반을 두면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관하여 왕성하게 글을 쓰고 있다.

타나세스쿠가 『생태세 정치』에서 씨름하는 중요한 과제는 자본주의적 근대의 덫―근대적으로 사고하고 근대적으로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들―을 어떻게 넘어서는가 하는 것이다. 그의 기본적인 대답은 “사회적 상호성, 책임감 및 취약성에 의거한 “상호주의의 회복윤리”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타나세스쿠가 말하는 ‘취약성’(vulnerability)이란 환경의 변화―이 변화는 기후위기가 진행중인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필연적이며 근본적으로 위협적이다―에 자신을 열어놓고, (해체가 아니라) 새로운 구성을 향해서 변화하는 힘을 가리킨다. 따라서 ‘취약성’이라고 옮기기는 했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상처를 견뎌낼 수 있음’이다.– 옮긴이]

프랑스 사회철학자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에게서 영감을 얻은 타나세스쿠는 관계성에 기초를 둔 정치를 주장한다. 이는 커머닝이 분명하게 진전시키는 테마이다. 그가 주장하는 핵심은 개인주의, 합리성, 자연에서의 분리, 자본축적이라는 근대적 관념들을 넘어서 상호주의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방향으로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가? 타나세스쿠는 “혁신하는 실천들”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것은 “근본적인 변화의 필요성과 어떤 이상화된 과거로의 회귀의 불가능성 둘 다를 표현하는” 용어이다. 인간이 만들어낼 필요가 있는 관점전환을 환기시키기 위해 그는 이탈리아 폴리아 지역에서 올리브 나무를 가지치기하는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한다.

올리브 나무의 성공적인 재배는 매우 특별한 장소에 있는 사람과 올리브 나무들 사이의 공동-창조와 사랑이 구현된 복잡한 행위이다. 인간의 문화가 살아있는 식물 자체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과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역의 “풍경들과 미기후(微氣候)들의” 더 큰 “모자이크”에의 집중을 필요로 한다. “어떤 작은 지역이든 그것을 생성적인 상호작용의 역사의 외부에서 그리고 그 장소와의 친밀감의 외부에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올리브 나무의 건강에 영양을 제공하는 대단히 복잡한 집합체가 있기 때문에 가지치기의 행위”(나무가지를 신중하게 선택적으로 잘라내는 것)는 “매우 의식(儀式)화되어 있다”고 타나세스쿠는 말한다. 그것은 가지치기를 신성한 예술형태로서 이해하는, 신임을 얻은 연장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어떤 것이다.

사람들은 올리브를 얻기 위해 가지를 치지만 또한 자식들을 위해서, 땅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흙의 건강함을 위해서, 겨울 동안의 난방을 위해서, 좋은 식품을 만들기 위해서, 나무의 수명과 아름다움을 위해서, 대대로 공동으로 사용해온 땅에 대한 의무감에서 가지를 친다. 인간과 올리브 나무의 관계에서 가지치기의 핵심적 역할을 고려해 볼 때 가지치기를 도구적인 합리성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지치기는 단순한 합리성에 저항하고 그 합리성을 벗어나고 넘쳐흐르며 가지치기를 중심으로 이어져 있을 수 있는 상호관계의 풍성한 태피스트리를 향하고 있다.

근대 시기의 우화? 올리브 나무 가지치기라는 전통 문화에서 타나세스쿠는 인간-자연 관계가 어떻게 근대 시기에 잘못되었는지를 보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전통적인 관습들을 통해 상호성과 삶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한 관계적 윤리가 어떻게 개인의 수준과 문화의 수준 둘 다에서 계발될 수 있는지를 보았다.

타나세스쿠에게 이 책은 개인적인 오디세이였다. 연구자로서 불안정하게 살고 있으면서 그는 자신이 하나의 직장과 미래의 불확실성 사이에서 실업급여로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결국 그를 창조적으로 자유롭게 했다. 그는 몰개성적인 학술적 글쓰기 방식을 버리고 자신의 개인적인 열망을 표현할 수 있었으며,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책은 단지 어떤 아이디어들의 제시만을 핵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관계성을 유지하는 것의 어려움과 전력으로 씨름하는 것을 핵심으로 합니다. 독자는 항상 기존의 사고방식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타나세스쿠에게 ‘생태세 정치’는 끔찍한 생태적 현실 특히 기후변화 앞에서 인간의 실존, 경제, 문화 그리고 정치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려는 대담한 시도를 나타낸다.

상호주의에 관한 마지막 장에서 그는 커머너들을 위한 몇몇 실천적이고 유용한 조언과 많은 풍부한 통찰과 지혜들을 제시한다. 가려 뽑은 몇몇 구절들을 소개해본다.

“근대는… 상호성과 책임감의 유대로서 항상 존재했던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추방한다. 실천으로서의 상호관계는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고 사회 기반시설이 사라짐으로 인해서 급격히 주변으로 밀려났을 뿐이다.”

“생명이 근본적으로 협력적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은 자연과학을 통해 많은 다양한 형태로 확산되었다.”

“마굴리스(Margulis)와 세이건(Sagan)이 표현했듯이 ‘생명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으며 생명 자신의 진화에 뜻밖에 큰 역할을 했다.’ 이 상대적 자유가 협력적인 방식으로 종종 발현된다.”

“상호간의 베풂이 세상에서 조직화하는 역할을 한다…. 상호주의가 베풂을 받는 쪽의 완전한 목록을 미리 결정할 수 없는 정치윤리에 붙일 이름일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보존은 환경을 모조리 화폐화하는 것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화폐화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관계들을 창출해내야 한다.”

“우리는 상호성을 위한 기반 시설을 살아있는 세계에 헌신하는 정치과정을 통해 구축할 필요가 있다”

타나세스쿠와 함께 한 전체 인터뷰를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생태세 정치』는 Open Book Publishers로부터 무상의 오픈액세스 버전으로 구할 수도 있고 인쇄본을 구입할 수도 있다.




페미니즘과 커먼즈의 정치

 


  • 저자  :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
  • 원문 :  “Feminism and the Politics of the Commons”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나는 2023년 1월 26일 목요일에 에코페미니즘연구센터 달과나무에서 기획한 심화강의 제2강에서 커먼즈 운동을 대안근대로의 이행의 관점에서 소개했는데, 여기서 페미니즘과 커먼즈 운동의 연관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런데 강의자료를 다 작성하고 나서 강의를 기다리는 하루 정도의 시간에 아래 소개된 페더리치의 글―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커먼즈의 정치를 살펴보는 글―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강의 후 토론시간에 이 글을 거론하기도 했다. 물론 미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번역까지는 아니더라도 상세히 내용을 정리해서 이 블로그에 올리기로 마음 먹고 당장 실행에 옮겼다. 아래 글은 마치 번역처럼 보이는 어투를 사용했지만, 원주 혹은 본문의 어떤 디테일들을 생략하기도 했고 또 어떤 부분은 비교적 자유롭게 내용을 풀었기 때문에 완성된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고 그저 매우 상세한 내용정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원문은 The Wealth of the Commons: A World Beyond Market and State (Levellers Press)의 9장이며 https://wealthofthecommons.org/essay/feminism-and-politics-commons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사이트의 글들은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의 적용을 받는다. (※ 이 글은 원래 『더커머너』(The Commoner, 2011년 1월 4일)에 발표된 에쎄이를 조금 고친 것이다.) [정백수]


재생산이 사회적 생산보다 앞선다. 여성을 건드리는 것은 반석을 건드리는 것이다.
– 피터 라인보((Linebaugh, Peter. 2008. The Magna Carta Manifesto: Liberty and Commons for All.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년 12월 31일 사파티스타들이 에히도(ejido)[공동체가 땅의 소유권이 아닌 용익물권을 갖는, 농업에 사용되는 공동 토지]를 해체하는 입법에 반대하는 투쟁을 한 이후 커먼즈라는 개념이 널리 퍼지고 있다. 이 고물처럼 보이는 생각이 현재의 사회운동에서 정치적 논의의 중심에 오게된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다음의 둘이 두드러진다. 첫째,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구축하는 급진적 운동들의 노력을 수십 년 동안 흡수했던 국가주의 혁명모델이 종식되었다. 다른 한편, 종획에 맞서  커먼즈를 방어하려는 투쟁들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사라졌다고 믿었거나 사유화로 위협받기 전에는 가치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던 공동체적 재산들 및 관계들의 세계가 가시화되었다. 커먼즈가 사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 인터넷 같은 예전에는 없던 삶의 영역에서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협력이 항상 산출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종획으로 인해서 드러났다. 커먼즈라는 생각은 많은 사람들이 창출하려고 하는 협력적 사회를 예시하는 통일적 개념으로서 이념적 기능에 복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을 해석하는 데서는 애매함들과 의미심장한 차이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커먼즈의 원리를 일관성있는 정치적 기획으로 옮겨놓으려면 이것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가령 무엇이 커먼즈를 구성하는가의 문제가 있다. 땅, 물, 공기 커먼즈(공통재), 디지털 커먼즈가 있다. 사회보장연금과 같이 우리가 획득한 권리도 종종 커먼즈로 지칭되며 언어, 도서관, 과거 문화의 집단적 산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모든 커먼즈가 그 정치적 잠재력의 관점에서 볼 때 동등한가? 모두 호환 가능한가? 그리고 그것들이 구축되어야 할 통일성[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향하는 데 모두가 함께하는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정리자]을 기획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우리는 ‘commons’(커먼즈)라고 복수형으로 말해야 할까, 아니면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자들이 제안하는 것처럼 ‘the common’(공통적인 것)이라고 말해야 할까? (‘공통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포스트포디즘 시대에 우세한 생산형태의 특징을 이루는 사회적 관계들을 지칭한다.)

이 글에서 나는 이 물음들을 염두에 두면서 커먼즈의 정치를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 페미니즘적 관점이란 성차별에 대항하고 재생산 노동을 둘러싼 투쟁에 의해 형성된 관점을 가리킨다. 재생산 노동은 라인보의 말처럼 사회의 반석이며 이것을 시금석으로 하여 모든 사회조직화 모델이 평가되어야 한다. 재생산 노동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커먼즈의 정치를 더 잘 규정하고 커먼즈 원칙이 반자본주의 프로그램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조건들을 분명히 하는 데 필요하다. 두 가지 문제가 이 과제들을 특히 중요하게 만든다.

첫째, 적어도 1990년대 초부터 커먼즈 담론이 예를 들어 세계은행 같은 기관에 의해 전유되어 사유화를 위해 사용되었다. 세계은행은 생물다양성을 보호하고 전지구적 커먼즈를 보존한다는 핑계로 열대우림을 생태보호구역으로 바꾸어 수세기 동안 열대우림에서 생계를 유지해 온 주민들을 추방하는 한편, 예를 들어 생태관광(eco-tourism) 같은 것을 통해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접근을 보장했다. 이밖에도 다양한 동기에 따른 커먼즈의 재가치화가 주류 경제학자와 자본주의 계획가들 사이에서 유행이 되었다. 커먼즈에 대한, 그리고 그와 유사한 사회적 자본, 선물 경제, 이타주의와 같은 주제들에 대한 학술 문헌이 증가하는 것을 보라.

사회적 공장[사회 전체가 공장이 된 것]의 구석구석까지 상품형태를 확장하는 것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에게는 이상적인 일이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장기적 재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실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은 기획이다. 자본주의적 축적은 시장에 외부성(externalities)으로 나타나게 마련인 엄청난 양의 노동(예를 들어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하며 여성들이 제공하는 무보수 가사노동)과 자원의 자유로운 전유에 구조적으로 의존한다. 따라서 월스트리트 붕괴 훨씬 이전에 다양한 경제학자 및 사회이론가들이 삶의 모든 영역의 시장화가 시장의 원활한 기능에 해롭다고 경고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장도 신뢰, 선물 제공처럼 화폐가 매개하지 않는 관계의 존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자본이 공통적 이익(공동선)의 미덕에 대해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위기에 처한 자본가 계급이 지구 환경의 수호자인 척하면서 되살아나는 것을 돕는 방식으로 커먼즈에 대한 담론을 만들어내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두 번째 문제는 ‘커먼즈가 어떻게 비(非)자본주의 경제의 기초가 될 수 있는가’라는, 아직은 답이 없는 물음이다. 라인보(Peter Linebaugh)의 저작, 특히 『마그나카르타 선언』(The Magna Carta Manifesto, 2008)에서 우리는 커먼즈가 계급투쟁의 역사를 우리 시대로 연결하는 끈이었으며 실제로 커먼즈를 위한 투쟁이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을 배웠다. 메인 주(州)의 주민들은 기업 함대의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어장에 대한 접근을 유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애팔래치아 주민들은 노천 채굴로 위협받는 산을 구하기 위해 조직화하고 있다. 오픈소스와 프리소프트웨어 운동은 지식의 상품화에 반대하고 소통과 협력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열고 있다. 또한 칼슨(Chris Carlsson)이 그의 『나우토피아』(Nowtopia, 2007)에서 설명한 것처럼 북미에서 많은 보이지 않는 커머닝 활동과 공동체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칼슨이 보여주듯, ‘버추얼 커먼즈’의 창출, 그리고 화폐/시장 경제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에서 번창하는 형태의 사회적 관계들의 창출에 많은 창조성이 담겨 있다.

아프리카, 카리브해 지역, 또는 미국 남부에서 이주해온 공동체들 덕분에 나라 전역에 퍼진 도시 텃밭 가꾸기 운동이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어왔다. 이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도시 텃밭은 우리가 식량 생산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고 우리의 환경을 재생성하며 생계를 위해 자급하려면 없어서는 안 될 러바니제이션(rurbanization)((rurbanization : rural + urban +-ization)) 과정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텃밭은 식량 안보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것을 훨씬 넘어서 사회성, 지식 생산, 문화 및 세대 간 교류의 센터들이다.

도시 텃밭은 그것이 상업적 목적보다는 동네에서의 소비를 위해 생산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점으로 인해서 도시 텃밭들은 다른 재생산 커먼즈들―메인 주의 ‘가재 해안’(Lobster Coast)((“Lobster Coast”는  지명이 아니라 가재를 잡는 해안을 말한다. 메인 주의 어업 공동체들의 역사를 다룬, 콜린 우다드(Colin Woodard)의 The Lobster Coast: Rebels, Rusticators, and the Struggle for a Forgotten Frontier 라는 책이 있다.))의 어장들처럼 시장을 위해 생산하거나 열린 공간을 보존하는 토지 신탁처럼 시장에서 구입되는 것들―과 구분된다. 그러나 문제는 도시 텃밭이 자생적인 풀뿌리 운동으로 남아 있으며 미국에서 벌어지는 운동에서 텃밭들의 존재를 확장하고 토지에 대한 접근을 투쟁의 핵심 영역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여성과 커먼즈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방어되고 있고 발전되고 있으며 투쟁으로 지켜지고 있는 많은 번성하는 커먼즈들을 어떻게 한데 모아서 결집력 있는 총체를 형성하여 새로운 생산방식의 토대를 제공할 것인가의 문제를 좌파는 제기한 적이 없다. 커먼즈에 대한 페미니즘적 관점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과거의 역사에서나 우리 시대에서나 여성들은 재생산 노동의 주요 주체로서 공동체의 자연자원에의 접근에 남성보다 의존해왔고 이 자원의 사유화 과정에서 가장 많은 불이익을 당했으며 이 자원의 방어에 가장 헌신적이었다는 깨달음과 함께 이 페미니즘적 관점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내가 『캘리번과 마녀』(Caliban and the Witch, 2004)에서 썼듯이,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 국면에서 여성들은 영국과 남북아메리카에서 공히 토지 종획에 맞서는 투쟁의 최전선에 섰으며 유럽 식민화가 파괴하려고 했던 공동체적 문화의 가장 완강한 방어자들이었다. 페루에서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마을을 장악했을 때 여성들이 높은 산으로 도망쳐 집단적 삶형태들을 다시 창출했고, 이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여성에 대한 세계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공격이 행해졌다. 여성을 마녀로 몰아 박해한 것이다. 오늘날 새로운 형태의 시초 축적 과정에 직면한 여성들은 자연의 완전한 상업화를 가로막고 비자본주의적 토지 사용과 생계자급 지향적인 농업을 지탱하는 주요한 사회적 힘이다. 여성들은 세계의 자급농부들이다. 아프리카에서는 세계은행 및 기타 기관들이 여성들의 활동을 환금경작으로 전환하도록 설득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사람들이 소비하는 식량의 80%를 생산한다. 1990년대에는 많은 아프리카 도시에서 식량 가격 상승에 직면하여 공유지(公有地)의 땅뙈기들을 전유하였고 길가를 따라, 공원에, 철로를 따라 옥수수, 콩, 카사바를 심었으며, 아프리카 도시들의 경관을 바꾸고 그 과정에서 도시와 농촌 사이의 분리를 허물었다. 인도, 필리핀에서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여성들은 황폐해진 숲에 나무를 다시 심고, 힘을 합해 벌목꾼을 쫓아냈으며, 광산 작업과 댐 건설을 봉쇄하고, 물 사유화에 반대하는 투쟁을 이끌었다.

재생산 수단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을 위한 여성들의 투쟁의 다른 유형은 캄보디아에서 세네갈에 이르기까지 제3세계 전역에서 화폐커먼즈로 기능하는 신용연합의 형성이다.(Podlashuc 2009)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톤틴’(the tontines)이라고 불리는 이 신용연합은 여성들이 만든 자율적이고 자주적으로 관리되는 뱅킹시스템으로, 은행에 접근할 수 없는 개인이나 집단에 현금을 제공하며 순전히 신뢰를 바탕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신용연합은 세계은행이 장려하는 소액융자 시스템과 완전히 다르다. 이 소액융자 시스템은 상호감시와 수치심을 바탕으로 작동되는데, 예를 들어 니제르에서 이러한 방식이 융자금을 상환하지 못한 여성들의 사진을 공공장소에 게시할 정도로 극에 달해서 몇몇 여성들을 자살로 몰아가기도 했다.

여성들은 또한 재생산 비용을 절약하고 서로를 가난·국가폭력·남성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재생산노동을 집단화하려는 노력을 주도해왔다. 두드러진 사례는 1980년대에 칠레와 페루에서 여성들이 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더 이상 혼자서는 물건을 살 경제적 여유가 없었을 때 세운 ‘올라스 코무네스’(ollas communes, 공동밥솥)이다.(Fisher 1993; Andreas 1985) 토지 재전유나 톤틴의 형성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실천은 공동체적 유대가 아직 강한 세계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정치 이전의 것으로, ‘자연적인’ 것으로, 혹은 단순히 ‘전통’의 산물로 보면 잘못이다. 식민화 국면들이 거듭되고 난 지금, 자연과 관습은 민중이 투쟁하여 보존하고 재발명한 곳에서 말고는 그 어디에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레오 포들라슈크(Leo Podlashuc)가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날 풀뿌리 여성들의 공동체주의는 새로운 현실을 창출하며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집과 공동체에서 대항권력을 구성하며 자기가치화와 자기결정의 과정을 연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많다.

이 투쟁들에서 우리가 얻는 첫 번째 가르침은, 물질적인 재생산 수단의 커머닝이 집단적 이해와 상호유대가 창출되는 주된 메커니즘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또한 노예화된 삶에 대한 저항의 최전선이며 우리의 삶에 대한 자본의 장악력을 안으로부터 무너뜨리는 자율적 공간을 구축하기 위한 조건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내가 설명한 경험은 이식할 수 없는 모델이다. 북미에 사는 우리에게 재생산 수단의 탈환과 공통화(commoning)는 필연적으로 다른 형태를 취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자원들을 한데 모으고 우리가 생산한 부를 재전유함으로써 우리의 재생산을 상품의 흐름들―이 흐름들이 세계 시장을 통해 세계 전역을 흘러다니면서 수백만 명이 삶의 터전을 박탈당하게 하고 있다―로부터 떼어내기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살림을 세계시장으로부터만이 아니라 (현재 미국 경제가 의존하고 있는) 전쟁기계와 감옥시스템으로부터도 떼어내기 시작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운동에서 그토록 자주 보이는 특징인 추상적 연대―이는 우리의 헌신, 견딜 수 있는 우리의 능력, 우리가 기꺼이 감수할 위험을 제한한다―를 넘어설 수 있다.

사유재산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무기로 보호되고 3세기에 걸친 노예제도가 사회에 심오한 분열을 낳은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커먼즈/공통적인 것을 재창출한다는 것이 장기적인 실험, 연대구축 및 피해회복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엄청난 과제인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제가 지금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워보일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자율의 공간을 넓힐, 그리고 우리의 재생산이 세계의 다른 커머너들과 커먼즈들을 희생시키면서 일어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유일한 가능성이다.

 

페미니즘적 재구축

마리아 미스(Maria Mies)가 이 과제를 강력하게 표현한 바 있다. 그녀는 공통적인 것의 창출이 첫째로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분업이 분리한 것들을 재결합하기 위해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심대한 변형이 일어나는 것을 필요로 함을 지적했다. 생산이 재생산 및 소비와 분리됨으로써 우리는 ① 먹는 것, 입는 것, 일하는 도구가 생산되는 조건들을, ② 그 사회적·환경적 비용을, 그리고 ③ 우리가 산출하는 폐기물을 떠안게되는 사람들의 운명을 무시하게 되기 때문이다.(Mies 1999) 우리는 우리의 행동의 결과에 대해 무책임한 상태―이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분업이 조직되는 파괴적인 방식들의 결과이다―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만일 이에 미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의 생산은 불가피하게 다른 이들에게는 죽음의 생산이 될 것이다. 지구화는 이 위기를 악화시켜서 생산되는 것과 소비되는 것 사이의 거리를 벌렸으며 그럼으로써 (전지구적 연결성이 증가되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먹는 음식, 우리가 사용하는 석유, 우리가 입는 옷, 우리가 서로 소통하는 데 쓰이는 컴퓨터들이 피의 희생을 치르고 생산된 것임을 보지 못한다.

페미니즘적 관점은 우리에게 이러한 망각의 상태를 극복하는 데서 커먼즈를 재구축하는 일을 시작하라고 가르쳐준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기초해서 우리의 삶과 우리의 재생산을 이루기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그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기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공통적인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커머닝은 우리 자신을 공통적 주체로 산출하는 활동이 되어야 의미를 가진다. ‘공동체 없이 커먼즈 없다’라는 슬로건은 바로 이런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공동체는 종교나 민족을 기반으로 형성된 폐쇄적인 곳이 아니라 관계의 질, 협력의 원칙, 서로에 대한 그리고 지구·숲·바다·동물에 대한 책임의 원칙을 의미한다.

물론 그러한 공동체의 달성은 우리의 일상적인 재생산 노동의 집단화와 마찬가지로 시작일 뿐이다. 그것이 더 광범한 반(反)사유화운동 및 공통의 부를 되찾기를 대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집단적 통치(자치)에 대한 우리의 교육과 역사를 집단적 기획으로 인식하는 일의 필수적 부분이다.

그래서 가사의 공동체화를 우리의 정치적 의제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의 풍부한 페미니즘 전통을 다시 살려야 한다. 이 전통은 ①19세기 중반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실험들에서부터 ②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초까지 ‘유물론적 페미니스트들’이 보인, 집단적 살림을 통해 가사노동을 재조직하고 사회화하려는, 그럼으로써 집과 동네를 재조직하고 사회화하려는 시도들―이 시도들은 안타깝게도 1920년대에 ‘적색공포’로 종식되었다―까지에 걸쳐있다.(Hayden 1981 and 1986) 이러한 실천들에서 보이는, 재생산 노동을 인간 활동의 중요한 영역으로, 부정될 것이 아니라 혁명적으로 변혁되어야 할 영역으로 볼 수 있는 과거 페미니스트들의 능력이 다시 논의되고 다시 가치를 부여받아야 할 것이다.

집단적 삶형태를 창출하는 결정적 이유 하나는 인간의 재생산이 지구상에서 가장 노동 집약적인 일이며, 대체로 기계화로 환원될 수 없는 일이라는 데 있다. 육아, 환자 돌보기 또는 신체적·정서적 균형을 재통합하는 데 필요한 심리적 작업은 기계화할 수 없다. 미래주의 산업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서는 돌봄을 로봇화할 수 없다. 특히 어린이와 환자를 돌보는 사람 가운데 간호사봇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서비스 제공자의 건강을 희생하지 않고 책임을 분담하고 협력하는 것이 적절한 치료를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수세기 동안 인간의 재생산은 집단적 과정이었다. 그것은 확대된 가족과 신뢰할만한 공동체들의 일이었다. 특히 프롤레타리아 동네에서 그랬으며, 사람들이 혼자 살았을 때에도 그랬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오늘날의 노인들처럼 외롭거나 의존적이지 않았다. 재생산이 완전히 사유화된 것은 자본주의에 와서의 일이다. 이 사유화 과정은 지금 우리의 삶을 파괴할 정도로 심해졌다. 이러한 추세는 역전되어야 하며 지금이 그러한 기획에 유리한 때이다.

자본주의 위기가 미국을 포함하여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재생산의 기본 요소들을 파괴함에 따라 우리의 일상 생활의 재건이 가능한 일이자 긴요한 일이 된다. 파업과 마찬가지로 사회적/경제적 위기가 임금 노동의 규율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성을 우리에게 강요한다. 바로 이런 일이 대공황 중에 일어났는데, 그때 화물열차를 커먼즈로 전환하여 이동성과 유목 생활에서 자유를 추구한 호보들(hobos, 떠돌이 일꾼들)의 운동이 일었다.(Caffentzis 2006) 그들은 철로가 교차하는 곳들에서 자치 규칙과 연대에 기반을 둔 호보 정글들을 조직했는데, 이는 많은 호보들이 믿었던 공산주의 세계의 예시였다.(Anderson 1998, Depastino 2003 and Caffentzis 2006) 그러나 소수의 박스카 베르타(Boxcar Bertha)들을 제외하면((<박스카 베르타>(Boxcar Bertha, 1972)는 마틴 스코세시(Martin Scorsese)가 벤 라이트먼(Ben Reitman)의 『도로의 누이―박스카 베르타의 자서전』(Sister of the Road: Sister of The Road: The Autobiography of Boxcar Bertha )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이것은 주로 남성들의 세계였고 남성들의 형제애였으며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없었다. 경제 위기와 전쟁이 끝나자 호보들은 노동자들을 고착시키는 두 개의 큰 엔진인 가족과 집에 길들여졌다. 대공황 동안 보여진 노동계급 재구성의 위협을 유념한 미국 자본은 ‘생산 지점에서의 협력, 재생산 지점에서의 분리 및 원자화’라는 원칙을 경제 생활을 조직하는 데 탁월하게 적용했다. 레비타운(Levittown)((‘Levittown’은 윌리엄 레빗(William J. Levitt)과 그의 회사(Levitt & Sons)가 만든 거대한 주택개발사업의 이름이다.))이 제공한 원자화되고 직렬화된 가족 주택은 탯줄로 연결된 부속물인 자동차와 결합하여 노동자를 정주하는 삶에 고착시켰을 뿐만 아니라 호보 정글들이 나타냈던 유형의 자율적 노동자 커먼즈를 종식시켰다.(Hayden 1986) 오늘날 수백만 명의 미국인의 집과 자동차가 회수되고 압류·철거·대량실직이 다시 자본주의 노동 규율의 기둥을 무너뜨리고 있음에 따라 해안에서 해안으로 뻗어 있는 천막 도시들 같은 새로운 공통 기반이 다시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시적인 공간, 일시적인 자율지대들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재생산의 토대가 될 커먼즈들을 구축해야 하는 주체가 바로 여성들이다.

집이 경제의 기반이 되는 오이코스(oikos)라면, 역사적으로 가사노동자이며 가옥 수감자들인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집을 (다양한 사람들과 협력형태들이 가로지르는) 집단적 삶의 중심지로 되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고립과 고착이 없는 안전함을 제공하고 공동체 소유물의 공동사용 및 순환을 가능하게 하며, 무엇보다도 재생산의 집단적 형태들의 토대를 제공해야 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19세기의 유물론적 페미니스트들의 프로그램으로부터 이 기획에 대한 영감을 끌어올 수 있다. 이들은 집(home)이 ‘여성 억압의 중요한 공간적 구성 요소’라고 확신하고 공동 부엌을 조직하고 노동자들이 재생산을 통제하기를 요구하는 협동적 가구들을 조직했던 것이다.(Hayden 1981)

이러한 목표는 현재 매우 중요하다. 삶이 가정에 고립되는 상태를 분쇄하는 것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고 고용주 및 국가와의 관계에서 우리의 힘을 강화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생태적 재앙으로부터의 보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집이라고 부르는 재생산 자산과 폐쇄된 거주지의 ‘비(非)경제적’ 증가가 가져오는 파괴적인 결과, 즉 겨울에는 온기를 대기로 발산하고 여름에는 가차 없는 더위에 우리를 노출시키는 파괴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De Angelis 2007) 가장 중요한 것은, 재생산을 보다 협력적인 방식으로 재규정하지 않는 한,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분리 및 정치적 행동주의와 일상적 삶의 재생산 사이의 분리를 끝내지 않는 한 대안 사회와 강력한 ‘스스로 재생산하기 운동(a self-reproducing movement)을 구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성에게 재생산을 커머닝/집단화하는 임무를 이렇게 할당하는 것은 여성성을 자연주의적으로 보는 사고방식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당연히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굴복을 죽음보다 더 나쁜 운명으로 본다. 자본가들에 의해 전유된 자연의 부처럼, 여성이 남성들이 공유하는 부로서, 남성들이 자유롭게 전유할 부와 서비스의 자연적 원천으로 지정되었다는 생각이 우리의 집단의식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돌로레스 헤이든(Dolores Hayden)의 말을 풀어보자면, 재생산 노동의 재조직, 따라서 주택과 공적 공간의 재조직은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노동의 문제이며, (더 추가하자면) 권력과 안전의 문제이다(Hayden 1986). 여기서 브라질의 무토지 농민운동(MST)에 참여한 여성들의 경험이 떠오른다. 이들은, 공동체가 자신이 점유한 땅을 유지할 권리를 획득한 후, 새 주택들을 하나의 복합체를 형성하도록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투쟁의 과정에서 그랬던 것처럼 계속해서 (설거지와 요리를 함께 하는 등) 집안일을 공동으로 하고, 남자들에게 학대당할 때 서로를 도와주기 위해 달려갈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여성이 재생산 노동과 주거의 집단화에 앞장서야 한다는 주장은 가사노동을 여성의 천직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의 저항의 역사에서 본질적인 부분이었던 재생산 노동에 관해 여성들이 축적한 집단적 경험, 지식 및 투쟁을 지우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역사와 다시 연결되는 것은 오늘날 여성과 남성 모두가 우리 삶의 젠더화된 구조를 허물고 우리의 집과 삶을 커먼즈로 재건하는 데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단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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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약탈을 막을 ‘블루커먼즈’ 어젠다

 



바다는 지표면의 70%를 덮고 있고 우리가 숨 쉬는 산소의 절반을 제공할지라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특히 육지로 둘러싸인 나라들이나 지역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시장/국가 시스템이 자연계의 이 영역을 파괴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업형 트롤선들이 어장에서 과잉어획을 하여 많은 어장들을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가고 있으며, 광산기업들은 석유, 가스, 니켈, 코발트, 망간 및 희토류 광물들을 찾아서 해저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

커먼즈의 관점에서 우리는 이 끔직한 시장 인클로저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인가? 최근 커머닝의 프런티어(Frontiers of Commoning) 팟캐스트(에피소드 #28)에서 소아스런던대학교(SOAS University of London)에 재직하는 경제학자이자 커먼즈 연구자인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은 몇 가지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해결책들을 제안한다. 스탠딩은 『블루커먼즈—바다경제를 변형하기』(The Blue Commons: Transforming the Economy of the Sea)를 막 출간했다. 이 책에서는 시장/국가가 바다를 무책임하고 생명을 파괴하는 식으로 취급하는 것을 커머닝이 어떻게 억제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방대한 양의 복잡한 해양역사들, 국제법 및 생태과학을 종합적으로 다룬다.

스탠딩은 바다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을 ‘자산소득자 자본주의’(rentier capitalism)((‘자산소득자 자본주의’(rentier capitalism)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972 참조.))의 예측 가능한 결과로 본다. 이것은 광범위한 재산권, 금융화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산업화된 자원의 착취에 특혜를 주는 경제시스템이다. 정부와 함께 하는 기업측은 이 시스템이 행하는 ‘빼내서 달아나는’ 관행을 ‘푸른성장’(blue growth)이라 부르길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은 실로 시장의 비극에 관한 이야기이다.

기업들은 조직적으로 연안어업 공동체를 ‘탈커먼즈화’하려고 하고, 심해 생명체들에 대한 특허권을 주장하려고 하며, 해저 광상(鑛床)을 수탈하려고 시도한다. 일례로 남아프리카 기업인 드비어스 그룹(De Beers Group)은 다이아몬드를 찾아서 해저를 긁어내기 위하여 전문화된 선박들로 이루어진 선단을 이용하는데 이것은 해양생태계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해양생태계를 붕괴시킨다.

스탠딩은 불법적인 어업관행에서의 국가와 기업들 간의 결탁 그리고 유럽 연합의 파괴적인 공동어업정책 및 브렉시트에 관하여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장들을 제공한다. 그는 어떻게 양식기술이 건설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는지를, 그러나 기업들의 손에 맡겨지면 어떻게 양식어업이 블루커먼즈 공동체에 도움이 되기보다 블루커먼즈를 상품화하고 사유화하는지를 설명한다.

이 책에서 스탠딩이 하고 있는 가장 큰 기여는 그가 커먼즈에 바탕을 둔 해결책들—어장과 연안 공동체에게 권한을 주기, 새로운 합법적인 원칙들을 제정하기 그리고 커머너들을 이롭게 할 신탁자금을 도입하기—을 제안한 것일 것이다.

스탠딩은 “협동주의와 페미니즘의 원칙에 바탕을 둔, 고무적인 특징을 지닌 몇몇 새로운 조직 형태들이 구체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런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국가, 금융, 국제적인 자선단체들에 포섭될 위험들을 인식”하고 있고 따라서 비열하고 약탈을 일삼는 정책들에 씌운 진보적인 겉면에 속지 않을 것이다.

스탠딩은 연안 공동체 소속 어부들을 위한 ‘생계권’ 같은, 기업들의 어업권보다 우선해야 하며 널리 시행되어야 할 많은 법적인 원칙들을 거론한다. 또한 그러한 공동체들 사이에서 존중되어야 할 ‘서식지 권리,’ ‘사회적 기억에 대한 권리’ 그리고 ‘세대 간 동등 지분’ 원칙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스탠딩이 주장하는 블루커먼즈 어젠다는 또한 ‘커먼즈 자금’이라는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기업이 항구를 사용하고, 가스를 추출하며, 어장에 들어오고, ‘혼획'(생태적 위해를 야기하는 해양 종들을 의도치 않게 잡는 것)을 하는 일련의 활동들에 세금을 부과하자는 발상이다.

과세로 거둬들인 돈은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이해당사자 신탁으로 관리되는 커먼즈 펀드로 투입될 것이다. 펀드는 모든 사람에게 지불되는 정기적 배당금을 산출할 것인데, 이는 <알래스카 퍼머넌트 펀드>(Alaska Permanent Fund)가 주 소유의 땅에서 시추가 이루어지는 경우 거기서 발생하는 수입을 모두가 지분을 가지는 자금으로 사용하여 알래스카에 사는 모든 가구에게 돌아가는 배당금을 발생시키는 경우와 매우 유사하다.

스탠딩은 말한다. “회사가 커머너들로서 우리 모두에게 속하는 땅이나 해저를 사용하고 그 과정에서 수익을 낸다면 그때 커머너들로서 우리는 보상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원칙이다.”

이런 취지에서 스탠딩은 엄청나게 큰 유람선들은 정상운영만 해도 높은 세금을 부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유람선들은 항구에 정박할 때 바다로 엄청난 양의 오염물질과 디젤기관의 유해배출물질을 방출한다. 스탠딩은 거대한 연안 항구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도 커머너들에게 마찬가지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 세계에 485개의 대규모 항구가 있고 우리의 항구들에서 놀랄 만큼의 돈을 버는 기업들과 기업체인들이 그 항구들을 모두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다.”

우리의 공통의 부에 대한 이런 방식의 약탈이 바다에서는 통상적인 절차라고 그는 말한다. “영국 여왕은 해저의 상당부분을 이른바 재생 가능한 풍력발전 지역용으로 다국적 기업들에게 경매로 팔았다. 이는 앞으로 계속해서 왕실사람들에게 수십 억 파운드가 흘러들어오는 것을 보증해줄 것이다.” 하지만 여왕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 “해저는 왕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커먼즈의 것이다. 나는 ‘멈춰’라고 말하고 보상을 요구하고자 한다.”

블루커먼즈에 관하여 가이 스탠딩과 한 전체 인터뷰를 여기서 들을 수 있다.




퍼더필드 — 예술과 게임이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다

 



공상적이지만 거의 현실적인 시나리오가 여기 있다. 여러분의 지역사회 공원에 있는 꿀벌들, 다람쥐들, 거위들, 곤충들, 나무들 등등의 종(種)들이 인간의 침범과 학대를 충분히 겪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들은 더 이상 참지 않고 들고 일어나 인간이 가진 것과 동일한 권리를 요구할 작정이다. 종들 간의 일련의 회합을 통해 지역 생태계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번성을 보장하는 협정/협약이 타결된다.

이 시나리오는 <퍼더필드>(Furtherfield, 런던에 기반을 둔 예술공동체)가 빅토리아 시대 핀즈베리 파크의 일부 지역에 대한 파수의 일환으로서 고안한 ‘라이브 액션 롤플레잉’(live action role-playing, LARP)게임이다. 앞으로 3년에 걸쳐 <퍼더필드>는 프로젝트의 이름인 <핀즈베리 파크 2025 협정/협약>(The Treaty of Finsbury Park 2025)을 진행해나갈 때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각각 일곱 가지 종들의 역할을 하도록 요청할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풍뎅이와 다람쥐 종의 대표자들로서 <종(種)간 회의>에 참석하도록 함으로써 LARP게임이 목표로 하는 것은 사람들이 “놀이를 통해 인간이 아닌 생명체들에 공감하는 경로들”을 발전시키도록 돕는 것이다. 서로 다른 종들이 소통하도록 돕는 직감 다이얼(Sentience Dial)도 있다. 누가 알겠는가? 이 과정이 실제로 핀즈베리 파크를 더 무성하고 활기 넘치는 장소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 진기한 애니미즘 경험은 <퍼더필드>가 지난 25년 동안 주최해온 프로젝트들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이 프로젝트들 대부분은 예술, 디지털 기술 및 사회적 행동을 일정한 창조적인 방식으로 섞는다. 최근 『커머닝의 프런티어』(Frontiers of Commoning) 팟캐스트(에피소드 #24)에서 나는 세상에 대해 새로이 생각하는 방식으로서 참여예술에 대한 <퍼더필드>의 독특한 접근법에 관하여 루스 캐틀로우(Ruth Catlow)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술가, 큐레이터이자 <퍼더필드>의 공동대표인 캐틀로우는 1996년에 <퍼더필드>를 시작한 이래로 많은 예술 프로젝트들을 이끌어 온 비전을 가진 사람이다. 그녀는 지역적, 일국적 및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다양한 파트너들과의, 특히나 평범한 사람들과의 협동작업을 조직하는 것을 돕는다. <퍼더필드>의 많은 예술작업과 테크놀로지 기획들의 핵심은 우리가 세상을 다르게 보도록 하려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위해 새로운 미래를 그리는 경우 예술이 하는 역할을 존중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퍼더필드>의 프로젝트들 대부분은 런던 소재 핀즈베리 파크에 있는 녹지 공간 및 미술관에서 그리고 예술가들•기술자들•활동가들을 불러 모으는 다양한 디지털 공간에서 열린다. 지역 공무원들이 <퍼더필드>의 예술 프로젝트들을 펼칠 참여적인 무대로서 공원을 사용하도록 <퍼더필드>측에 청했다. 전통주의자들은 이 단체를 예술의 센터라고 부르겠지만 <퍼더필드>측은 자신들의 활동이 외부 지향적이고 네트워크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재미있게도 ‘디-센터’(de-center, 탈-중심)라고 부른다.

<퍼더필드>는 흥미를 유발시키며 장난기가 다분한 기발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예술적 실험들의 주최자라고 자임한다. 이 탐구적 실험들은 오픈소스 테크놀로지와 철학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퍼더필드> 자신들의 말로는) “현존하는 권력들을 파열시키고 민주화”하며 “지형을 새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일례로 <흑인의 삶도 중요하다> 시위들이 무수히 일어나 미국과 전 세계 도시를 흔들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노예소유자 사업가들과 군장성들이 공원에 청동 조각상으로 세워지는 영광을 입은 이유를 문제삼기 시작했다. <퍼더필드>는 공원에 있는 받침대 위에 지금 있는 것 대신에 누가 또는 무엇이 놓여서 기념되어야 할지에 대하여 공개 토론을 열기로 결정했다.

예술가들은 ‘시민 공원 받침대’ 프로젝트(The People’s Park Plinth project)측으로부터 공원에서 기념하게 될 새로운 사람들이나 물건을 제안하도록 요청을 받았다. 이 과정의 매개체는 스마트폰이었다. 공원에서 산책하는 사람들이 나무나 동상 받침대에 부착된 QR코드를 스캔하면 공원 내의 해당 장소에 관한 영상을 즉각 볼 수 있었다. 사실상, 이 프로젝트가 스스로를 설명했듯이, 이 프로젝트는 “공원 전체를, 여러분이 여러분의 공원에 원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하는, 디지털 예술작품을 위한 공공 플랫폼으로” 바꾸었다.

누구나 제안된 예술품 몇 개에 투표할 수 있었다. 1위를 차지한 작품—에이샤 탄 존스(Ayesha Tan Jones)가 제작한 <나무 이야기에 바탕을 두어>(Based on a Tree Story)—은 나무에 있는 QR코드를 사용하여 그곳에 사는 나무 요정의 영상을 호출하는 예술작품이었다. (“장소 특유의, 청각적 증강현실을 통해 나무의 과거•현재•미래의 이야기를 하는 디지털 나무 요정과 조우하기”)

예술작품을 선정하기 위한 공개적인 투표는 그 자체로 상당히 새로웠다. 각 참가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하나의 예술작품에 투표권을 한 번 행사하는 식이 아니었다. 그들이 원하는 만큼 많은 예술작품들 각각에 투표할 수 있는 다수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제곱 투표”(quadratic voting)라 불리는 이 방식은 어떤 프로젝트가 과반수를 얻는지를 그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떤 것에 가장 열광하는지를 보여주는 쪽이다. 이 시스템은 소수의 목소리를 무효화하는 “다수의 횡포”라는 문제점과 파당성이 강한 집단들이 방해물로 작용하는 상황을 극복할 목적으로 구상되었다.

<퍼더필드>의 더 흥미로운 역할들 중 하나는 어떻게 블록체인 소프트웨어가 네트워크 시대에 예술을 재발명하는 것을 도울 수 있는지에 관하여 실험실을 열고 예술가들과 기술전문가들 간 일련의 토론들을 주최한 것이었다. 핵심은 문화 부문이 어떻게 “피어 생산방식으로 생산된, 예술•문화•사회를 위한 탈중심화된 디지털 인프라에 이르는 길”을—특히 탈중심화된 자율조직들(Decentralised Autonomous Organisations, DAOs)을 통해서—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퍼더필드>는 “예술계에서 게이트키핑과 엘리트주의를 끝내”고 “규모에 제한이 없는 상호의존과 상호협력을 위한, 회복력 있고 변화도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한 가지 길로서 이 깊고 근본적인 우애의 정신을 가져오기”를 원했다. <퍼더필드>는 또한 기술 부문에서 아주 많은 탈중심화된 자율조직들을 활기 띠게 하는 자유의지적인 개인주의를 넘어가기를 원했다.

<퍼더필드>의 회합들의 결과로 두 권의 책이 나왔다. 하나는 『블록체인을 다시 생각하는 예술가들』(Artists RE:thinking the Blockchain, 2017)—예술가들이 블록체인에 비판적으로 참여하는 활동에 관한 책—이고 다른 하나는 2022년 5월에 출간되는 『급진적인 친구들』(Radical Friends)—예술계에서의 디지털 자율조직들(DAOs)의 위험 및 이 조직들에 대안이 되는 커먼즈 기반 디지털 자율조직들에 관한 선집—이다. “<퍼더필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안적 조직들에 “DAOs with Others”를 나타내는 두문자어 ‘DAOW’라는 이름을 붙인다.”

루스 캐틀로우와 나눈 팟캐스트 대화는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지구의 지혜와 함께 하기

 


  • 저자  :  Daniel Christian Wahl
  • 원문 : Indigenous to Life: Being as Expression of Plac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KOSMOS에 실린 크리스천 월의 글 “Indigenous to Life: Being as Expression of Place”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의 주제는 ‘지구의 지혜와 다시 함께하기’(Realignment with Earth Wisdom)이다. 저자 대니얼 크리스천 월(Daniel Christian Wahl)은 서구의 분리 서사가 파괴와 불평등을 초래했지만 이에 대응하여 재생성적인 개발과 재생성적인 문화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으며 이 시점에서 재생성(regeneration)이 생명 자체의 고유 패턴이라는 것과 우리의 공통의 먼 조상들 모두는 생명을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 구성원으로 있는 재생성적인 공동체로서 이해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말한다.

인간으로서 생명을 영위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우리가 집이라고 부르는 장소들과 바이오지역들 안에서 서로 돌보며 살았다. 콜롬비아와 페루의 숲에서부터 태평양 연안 북서부와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르기까지 인간 거주자들이 수천 년에 걸쳐서 더 높은 다양성, 풍요로움, 생물‐생산성에 이르는 최고치의 생태계들을 함께 창조했고 양성했다는 증거가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모두 행성 차원의 과정으로서의 생명()에 토착하고 있다. 지구의 지혜 전통들 다수의 핵심적인 교훈은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생명의 재생성적 패턴들이 우리를 통해 흐르도록 하는 과정으로서의 생명과 함께하는 것이다. 크리스천 월은 이런 식으로 존재할 경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장소의 소유자가 아니라 표현자로서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땅이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땅에 속해 있는 것이며 땅과 바다는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위한 거름으로 돌아간 후에도 오랫동안 그곳에 있으리라는 것이다.

첫째, 지구의 지혜와 함께 하기란 무엇인가? 크리스천 월은 올바른 관계로 살아가는 것이 지구의 지혜와 함께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관계적인 존재들로 우리 각자는 특이하며 생명의 재생성적인 공동체 내부에 있는 친밀한 상호관계의 결합체이다. 따라서 지구의 지혜와 함께하기 위해 우리는 자연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서 배워야 한다. 우리가 자연으로서 배워야 할 것은, 예를 들어 재닌 베니어스(Janine Benyus)가 바이오미미크리(biomimicry, 생태모방)의 핵심적인 교훈으로 제시한 “생명은 생명에 도움이 되는 조건들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인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위해서 도움이 되는 조건들을 창출하기 위해 나서는 경우 생명체로서 우리는 지구의 지혜가 어떻게 우리를 통해 흐르게 하는가?

크리스천 월은 인류가 한 종으로서 살아온 최근의 기록을 살펴보면 우리가 이 물음의 핵심적인 중요성을 망각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우리가 한 행동들—더 정직하게 말해서 인간의 비교적 작은 부분에 속하는 행동들—이 모든 인류에게 종 차원의 ‘통과의례’를 강요했고 그 결과 우리는 현재 대량 멸종 사건의 일환으로서 우리 종의 이른 종말이라는 실질적이고 당면한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크리스천 월은 다시 물음을 제기한다. 우리는 생명의 공동체에서 성숙한 회원이 되어, 그리고 퇴행적이기보다 재생성적인 존재가 되어 적시에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발현하게 될 것인가?

인간이 사는 장소들에는 생명‐문화적 고유성이 있고 이 고유성을 멋들어지게 표현한 것이 다양한 재생성적인 문화들이다. 그는 우리가 이 문화들을 기초로 한 재생성적인 미래를 함께 창출하기 위해서 행동하기, 존재하기 그리고 사고하기에서의 변화는 물론이고 새롭고도 매우 오래된 세계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세상을 조직하는 데 투여되는 기존의 생각들과 문화적으로 지배적인 내러티브들은 생명의 과정을 개체들, 종들로 잘라놓았고 이런 식의 관점은 우리로 하여금 경쟁, 결핍, 죽을 운명에 초점을 맞추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가 내리는 판단이다. 크리스천 월은 이를 극복하고 생명을 다른 식으로 이해하기 위한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는 고대의 토착적인 지혜뿐만 아니라 최첨단 과학에 의지해서 생명을 우주에 존재하는 동향적(動向的) 힘—협동적 풍요를 통해 생명에 도움이 되는 조건들을 창출하는 힘—으로 이해할 것을 권하고 있다. 생명이 행성 차원의 과정임을 크게 강조하는 그는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의 1970년 논문 「형태, 물질 및 차이」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자신의 환경을 파괴하는 유기체는 그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생존의 단위는 환경 속에 있는 유동적인 유기체이다.”

그는 우리가 생명을 우주에 존재하는 동향적 힘으로 이해하기 위해 생명의 진화과정에 의식적으로 참여하는 경우, 존재는 부분인 동시에 전체라는 표면상의 역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관계적인 참여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독립적 존재’와 ‘전체의 상호적 표현으로서의 존재’사이의 양극성에서 발생하지만 우리는 둘 다이며 틱낫한(Thích Nhất Hạnh)이 소개한 사이존재(interbeing)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나바호족(Navajo)이 가진 지구의 지혜인 ‘아름답게 걷기’(‘Hózhóogo Naasháa Doo’)도 바로 이 점을 가리킨다. 그들은 이렇게 조언한다. ‘미래로 걷는다면 아름답게 걸어라.’ 아름답게 걷는 방법은 ‘전부 속의 하나와 하나 속의 전부(the One-in-All and the All-in-One)를 눈앞에 보는 것’이다.

크리스천 월은 재생성적으로 사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이를 설명한다. 재생성적으로 사는 것은 지역과 나라와 전 세계가 역동적으로 공존하는 중첩된 복잡성의 의식적인 표현자로서 그리고 이 복잡성에의 참여자로서 사는 것이다. 이 중첩된 규모들(그림참조)은 더 이상 쓸모가 없는 구조들 및 패턴들의 빠르거나 느린 붕괴 주기, 변형적인 혁신 그리고 새로운 패턴들을 일시적으로 공고히 하여 역동적이고 지속적으로 변형하는 온전체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통합된다. 그는 이러한 과정으로서의 재생성이 생명 자체의 진화적이고 발전적인 충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재생성적으로 행동하기의 핵심은 환경적 변화나 사회적 변화를 예측하고 변형할 수 있는 체계 차원의 치유와 복원력있는 공동체의 구축이다. 하지만 이를 위한 전제조건은 건강(성)과 복원력을 ‘되돌아갈’ 정적인 상태로서가 아니라 변화하는 맥락에도 불구하고 변형하고 활력을 표현하는 역동적인 능력으로서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재생성의 핵심은 ‘순(順)긍정적 영향’(net positive impact)이나 ‘좋은 일하기’ 그 이상이며 모든 개인, 공동체 및 장소의 특유하고 대체 불가능한 본래적 역능을 발현하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이 능력을 발전시켜야 하는가?

크리스천 월의 정의에 따르면 생명은 여러 규모들이 중첩된 재생성적인 공동체이다. 생명은 모든 유핵 세포들을 형성하는 세포기관들의 공동체에서부터 당신과 내가 ‘우리의 몸’이라고 부르는 재생성적인 공동체를 이루는 인간•박테리아•균류세포들의 생태계를 거쳐, 그리고 풍부하고 대단히 바이오 생성적인 생태계들의 기능적 다양성을 창출하는 종들의 공동체를 거쳐 바다 및 육지 생태계가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생명지원 시스템—이것이 지구의 기후패턴과 대기 구성성분을 조절하여 생명에 도움이 되도록 만든다—에 기여하는 살아있는 지구의 생리학까지 걸쳐 있다.

따라서 크리스천 월이 이 글의 주제로 삼은 지구의 지혜와 다시 함께하는 것의 핵심적인 의미는 이 재생성적인 공동체에 더 의식적으로 다시 거주하는 것이며, 중첩된 재생성적인 생명 공동체 내부에서의 우리의 역할로 즉 치유자로서의 역할로 겸허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미래는 우리 각자가 이 공동체에 다시 거주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바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는 어떻게 이 공동체에 다시 거주할 수 있는 것인가? 그는 시인인 스나이더(Gary Snyder)가 1976년에 제기한 발언을 인용해서 그 방법을 제시한다. “우리가 삶을 이어갈 수 있고 [···] 우리가 풀과 태양에 기대 살 수 있는 미래 행성을 상상하는 사람들은 거주하는 사람들(전 세계 토착민들과 농부들)을 지원하기 위해 과학이든, 상상력이든, 힘이든, 정치적 수완이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져오는 수밖에 없다. 그들과 함께 공동의 대의를 만들 때 우리는 ‘다시 거주하게’ 된다.”

크리스천 월이 주장하는 재거주(Re‐inhabitation)는 우리가 거주하는 장소들과 바이오지역들의 맥락에서는 행하기에서의 변화를 그리고 바이오지역들과 맺는 관계방식에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장소장소마다 건강한 생태계 기능들을, 번성하는 공동체들 및 활기찬 경제들을 재생성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재거주는 또한 존재의 변화를 의미하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생성의 과정들—우리를 산출하는 장소들, 공동체들 및 생태계들의 그 자체로 역동적인 표현들인 과정들—로서 다시 인식하는 법을 배울 때 의식의 지형에서 재거주가 활발해지기 때문이다. 현재의 순간에 담겨 있는 미래를 향한 잠재력은 (긴 ‘이행’이나 어떤 ‘거대한 전환’ 이후의 어떤 때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의 몸, 우리의 공동체, 우리의 장소와 바이오지역들을 집으로 삼아 거기에 거주하는 데 있다.

그러나 크리스천 월이 보기에 변화에 대한 우리의 현재 이론은 추상 쪽으로 그리고 문제들을 서로 분리하고 ‘해결책’을 실행할 장소로부터 분리하여 ‘해결하는’ 습관 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우리는 이런 사고방식 안에서 전략을 논의하는 것에 고착되어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제안하며 글을 맺는다.

우리가 바로 지금 다르게 존재하기에 초점을 맞춘다면 어떨까? 우리가 누구인지 재인식하고 사이존재의 행성적 과정으로서의 삶과 좀더 동일시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자신, 공동체 및 생명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어떨까? 우리가 개별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장소를 치유하고 육성하는 표현자들로서 존재할 또는 그런 표현자들이 될 잠재력에 초점을 맞추면 어떨까? 우리가 추상적인 전지구적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고 해결책들의 규모를 키우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습관을 떨쳐버린다면 어떨까? 우리의 존재의 터전인 장소들과 공동체들과의 (함께 진화하는) 상호성 속에서 생명에 도움이 되는 조건들을 창출할 잠재력에 초점을 둔다면 어떨까?




생태적 전환의 길 – 생태사상과 전환운동 강좌 안내

생태적 전환의 길

– 생태사상과 전환운동

여기저기서 ‘생태적 전환’을 이야기합니다. 지구적으로, 지역적으로 다양한 ‘전환의 실천 사례’도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환의 철학, 비전, 전략에 대하여 깊이 이해하고, 자기 자리에서 그것들을 구체화해야 할 때입니다. 대전환의 길을 내고 있는 생태주의운동, 커먼즈운동, 탈성장운동 등을 깊이 이해하고, 실천적 함의를 찾는 배움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함께 전환의 길을 내실 분들을 초대합니다.

11월 11일 : 세계관의 전환 – 유기쁨(서울대학교 강사)

11월 18일 : 대안근대로의 이행과 커먼즈운동 – 정남영(독립연구자)

11월 25일 : 정의로운 전환과 기후정의 운동 – 김현우(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기획위원)

12월 2일 : 삶의 지향으로서의 탈성장 – 남미자(경기도교육연구원 연구위원)

12월 9일 : 돌봄과 살림의 정치 경제 – 이현재(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12월 16일 : 전환의 기지로서의 마을 – 박복선(전환교육연구소)

 

일시

11월 11일 ~ 12월 16일 매주 목요일 오후 8시~10시

 

참여 방법

줌(신청자에게 참여 주소를 보내드립니다) 

 

참가비

50,000원

국민 543001-01-341365(교육공동체 벗)으로 입금

 

문의

010-6231-3681 전환교육연구소

 




커먼즈와 미래

 


  • 저자  :  Leila Dawney, Samuel Kirwan, Julian Brigstocke
  • 원문 :  Introduction : The Promise of the Commons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Leila Dawney, Samuel Kirwan, Julian Brigstocke가 편집한 책  Space, Power and the Commons : The Struggle for Alternative Future (Routledge 2016)의 “Introduction: The Promise of the Commons”에서 책 전체의 내용을 대략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우리의 일은 태양에 의해 신성화된다. 가령 겨울날이나 땅 파는 날에 비하면 이날[추수하는 날]은 만족스러운 날이다. 같이 일하는 친구들 때문에 더 그렇다. 그런 날이면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모든 얼굴들이 (내가 알지만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 사람들도 함께) 한 공간에 모여서 공동의 도랑과 집단적 희망에 의해 한데 묶여 있기 때문이다. 사슴이 덫에 걸려 탕으로 만들어 달라고 울어대는 소리를 듣거나 딱따구리가 파이로 장사를 지내 달라고 졸라대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들고 숲을 쳐다본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기라도 하면 우리는 일제히 몸을 곧추세우고 꾸짖는 듯이 태양을 쳐다본다. 우리의 낫과 손 연장은 합창하듯 소리를 낸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은 누구나 듣는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모두가 듣는다. 우리에게는 개방성과 즐거움이 있다.

Jim Crace, Harvest (2013)

1968년에 봉기에 참여하고 있던 활동가가 시간 여행을 하게 되어 2015년 급진적인 좌파의 집회 현장에 뚝 떨어지게 되었다면 그녀는 거기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그녀는 아마도 계급·노동·저항의 언어가 강화되었으리라고 기대할 것이지만, 이런 기대와는 달리 그녀가 실제로 발견하는 것은 제사(題詞)에 나온 목가적 장면과 유사한 토론 즉 토지에의 공통의 접근과 사유(思惟)의 개방성 및 그것에 수반되는 삶의 양태를 놓고 벌어지는 토론일 것이다. 그녀는 이전에는 신맬서스주의자들(neo-Malthusians), 토지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운동들 그리고 사회사가들 및 법역사가들의 도메인이었던 것, 즉 커먼즈의 언어를 발견할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커먼즈에 관한 관심은 주로 제한된 자원, 늘어나는 인구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새로운 형태의 물질적 가난 등의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었다. 커먼즈는 경제학, 인류학, 환경과학에서 중요한 관심 영역이 되었다. 인구 과잉에 대한 맬서스의 저작과 함께 자원과 토지의 사적 소유에 대한 조지(Henry George)의 비판, 경쟁하는 행위자들이 제한된 자연자원에 접근할 때 생성되는 긴장들에 관한 하딘(Garret Hardin)의 저작들이 그 준거점들이 된다. 커먼즈 관련 문헌들이 다루는 문제들은, 왜 이러한 위기들이 출현하고 있는가, 이런 상황은 언제 위기점에 도달할 것인가, 개별 국민 국가들이 어떻게 이것을 막기 위해 대응해야 하는가이다. 이 문제들은 커먼즈에서 실제로 행해지는 일, 커먼즈를 구축하는 일, 커먼즈가 의미하는 바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정책 변화와 거시경제적 자원관리를 지향하는 추상적 논의들이었다.

이 텍스트에서 (그리고 커먼즈 연구분야를 발전시키고 있는 정치학자들·지리학자들·사회학자들 사이에서) 말하는 커먼즈는 이 문제들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을 다르게 표현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 책의 글들은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식민화나 불로소득자들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규제와 보호를 필요로 하는 자원의 관점에서 정의되기를 거부하는 커먼즈를 표현한다. 이 글들이 말하는 커먼즈는 공간일 수도 있고 경험일 수도 있고 자원일 수도 있으며 기억이거나 혹은 ‘희소성의 관리’ 외부에 있는 공유하기와 살아가기의 형태들일 수도 있다. 저자들의 전문분야는 도시계획학, 지리학, 정치학, 사회학, 문화이론 등을 포함하는 사회과학과 인문학 전반에 걸쳐 있다. 이는 새로이 일기 시작한 커먼즈 연구가 여러 분야들을 망라하고 있으며, 학계를 가로지르는 동시에 학계를 넘어서는 논의들에 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커먼즈를 신자유주의적 시장에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 삶의 사유화와 개인주의화에 저항하는 함께 살기의 방식들을 핵심으로 하는 시공간적이고 윤리적인 형성체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커먼즈의 언어·이념·상상계의 출현을 고찰할 때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신자유주의적 힘들과 연관되어 있고 그 힘들을 통해 작동되는 방식을 인식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힘들은 공통의 삶을 위한 가능성들을 제한하는 동시에 산출한다. 급진적으로 사유를 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확장의 논리 및 과정과 이 확장에 대한 저항을 점점 더 종획과 커머닝의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다름 아닌 자본주의적 축적의 논리를 통해 커머닝이라는 특수한 저항 형태의 가능성이 출현하는 것이다. 자본이 세계의 더 많은 지역을 상품화 과정으로 끌어들이면서 새로운 종획이 일어난다. 자본은 신자유주의적 소유와 가족 관계를 통해 삶을 사유화하는 동시에 인구에 기반을 둔 통치[푸꼬가 분석한 바의 새로운 형태의 권력의 특성이다―정리자]를 구사한다. 이것이 대안권력인 커머닝으로 향할 가능성의 조건들을 생성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비(David Harvey)의 작업이 매우 중요한데, 특히 후기 자본주의가 계속적인 종획 과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 중요하다. 자본은 이전에는 상호책임이라는 사회적 관계에서 관리되고 조직되고 산출되었던 자원·인구·활동·토지를 통합하면서 확장한다. 하비는 이를 ‘강탈(dispossession)에 의한 축적’이라고 정의한다. 여러 분야를 가로지르는 연구들은 종획의 여러 형태들을 통해서 자원의 사유화가 일어나고 있는 많은 공간들을 보여주었다. 지구상의 후진 지역에서의 토지강탈, 금융자본의 자산거품, 유전자·물·토착지식 등의 사유화―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종획들은 그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세상이 폐쇄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커먼즈가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의 중요한 자원이 된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전통적인 대의민주주의의 방식을 통한 변화의 가능성들은 감소하고 있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의 주요 정당들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은 유럽연합의 트로이카가 장악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활동가들은 집회·조합·투표소의 공간들을 넘어서 정치를 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탐구하고 있다. 아나키스트들의 DIY 전통에서 나온 새로운 형태의 집단적 행동은 거주와 점령이라는 형태를 집회와 시위라는 형태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며, 저항의 예시적 공간들의 출현을 향하는 새로운 길을 닦고 있다. 그 주목할 만한 사례는 오큐파이 운동, 15M 그리고 인디그나도스이다. 이렇게 커먼즈의 정치는 종획에 대한 공간적 대응으로서 일어난다. 커먼즈 이념은 개념적·물리적 공간을 집단적으로 생산하고 주장하기를 촉발하는 정치적 어법을 제공한다. 저항과 항의의 새로운 형태들―관리와 의사결정에서의 플랫시스템들[누구에게나 접근이 허용된 시스템을 말한다―정리자], 요구 없는 정치[원주 : 낭씨Jean-Luc Nancy가 정치의 이러한 재구상에 대한 더 나아간  논의를 제공하고 그것을 더 정교화한다(James, 2006; Nancy, 1991, 2000)],((James I, 2006, The fragmentary demand: An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Jean-Luc Nancy (Stanford University Press, Stanford, CA). / Nancy J-L, 1991, The inoperative communit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Minneapolis, MN and London / Nancy J-L, 2000, Being singular plural (Stanford University Press, Stanford, CA). ).)) 대안적 세계의 구축에 초점두기―이 출현함으로써 공통적으로 살기, 공통적으로 만들기, 공통적으로 존재하기라는 새로운 활동들이 종획과 강탈에 대한 직접적 대응으로서 일어나고 있다.

커먼즈의 언어는 무엇보다, 투쟁과 무력함 너머 희망과 약속을 부각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언어와 성향을 제공한다. 이 언어는 능동적인 정치를 환경에 대한 관심과 결합시키고 도시 운동을 시골에서의 저항과 결합시키며 지역에서의 투쟁을 전지구적 정치와 결합시킨다. 그 역사적 문화적 반향들이 때로 문제점을 보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다르게 살고 다르게 존재할 것인가를 생각할 자원을 제공해 준다. 지금과는 다른 세계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미래들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커먼즈의 이념은 낭만적 서사를 제공하며 이 서사를 통해 앞으로 나아갈 길(실망스런 정치적 내러티브들, 생태계 파괴, 양극화와 강탈―이것들의 외부에서 사유하는 길)을 제공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내러티브에 대안이 되는 대항내러티브를 제공한다. 무엇보다도 커먼즈 이념은 변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날 수 있으며 조그만 행동들도 중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희미하게나마 제공한다.

그러나 이 책의 글들이 분명히 하듯이 이 낭만적 서사를 넘어서 사유할 필요, 커먼즈가 출현하는 곳, 커먼즈에 담겨 있는 긴장들, 커먼즈가 행할 수도 있는 새로운 사물화들을 평가할 필요 또한 존재한다. 특히 블렌코우(Claire Blencowe)의 글은 공통적 삶의 유혹적인 상태들이 해방적 충동들을 덫에 가두고 그런 움직임들을 자본축적의 관계들로 재영토화시킬 위험을 일깨워준다. 커먼즈 이념의 매력과 미래의 가능성을 이해할 때 우리는 우리가 ‘종획 이야기들’라고 부르는 우울한 장르를 고려에 넣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이야기들은 영국 의회의 종획 역사들과 이 역사들을 문학이나 구비 전통에서 다시 이야기하는 민속 관행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볼리어 같은 커먼즈 옹호자들이 제시하는 커먼즈 이야기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상실감, 그리고 비록 파열되었으나 폐쇄되지는 않았던 그리고 어느정도는 가난했던, 종획 이전의 삶의 환기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특정 지역에 속하면서도 이리저리 퍼져서 운동들과 지역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데, 흩어진 사건들과 행동들을 한데 모으는데 도움이 된다. 커먼즈의 이러한 다양한 갈래들에 대한 주목이 이 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자본주의 이전의 목가적 사회의 낭만적 상상태들과 테크놀로지·소통·사회성의 가없는 가능성들을 결합하는 ‘커먼즈’라는 용어의 가능성들만이 아니라 문제점도 또한 주목하는 것이다.

이 책의 3부에 실린 글들이 분명히 하듯이, 커먼즈 이념이 정치적·학술적 담론에서 널리 퍼지고 있다면 이는 커먼즈를 구성하는 것이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책은 도시 커먼즈,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디지털 커먼즈가 일상 언어에 진입한 상황에서 커먼즈의 더욱 새로운 유형들을 탐구한다. 어떤 저자는 비인간 존재의 참여를 다루고 또 어떤 저자는 공유된 기억의 전지구적 커먼즈를 다루며 다른 어떤 저자는 공통적인 것의 법 공간을 다루고 또 다른 저자는 시간의 측면에서 커먼즈를 다룬다. 3부에서 서술된 집단들과 행동들의 공통적 특징은 (박탈에 대한 저항 말고도) 물리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커먼즈를 다루기보다 공통적인 것을 실천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다루는 태도이다 이런 식으로 정치적 커머닝의 새로운 실천들은 신자유주의적 풍경 내부에 ‘다른 세계’를 실행하고 있으며 그렇게 하면서 주체성들·관계들·공간들을 바꾸고 있다.

실로 2000년대 초에 심대한 전환이 일어났다 커먼즈를 어떤 장소나 자원으로 생각하는 데서 실천의 한 형태로서의 커머닝을 생각하는 데로 전환한 것이다. 집단화를 지역적 규모로 생각하는 수단으로서 그리고 비자본주의적 형태의 사회조직과 경제조직을 실현하는 방식으로서 커머닝 이념이 번성했다. 라인보(Peter Linebaugh)의 작업이 이 전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커머닝과 종획의 역사에 대한 그의 서술들은 이 책에서 논의되는 바의 커먼즈 이념을 우리의 관심사로 만드는 데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커먼즈의 이념과 커머닝의 정치를 이해하고 활성화하는 몇 가지 방식들로 하여금 서로 대화하게 하려고 한다. 이것들은 개념적 작업과 경험적 사례들 사이에서 움직이는데, 법, 역사, 그리고 일상적 활동에서 이 개념을 고찰함으로써 이 개념이 정치적·이론적 설득력을 획득하는 여러 가지 방식들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주고자 한다. 이 책의 글들은 특히 실제로 존재하는 바의 커먼스와 커머닝에 초점을 둔다. 여기서 커먼즈는 법, 정치적 행동주의, 그리고 일상적 활동의 테크놀로지들을 통해 엄연한 객체들로서 출현한다. 이런 서술들은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를 방해하거나 그것들을 우연한 것으로서 폭로하는 능력을 공유한다. 그리하여 커먼즈는 대안들이 직접 탐색되고 실험되며 희망의 정치에 되먹여지는 개념적 공간이 된다. 희망의 정치는 이미 실제로 존재하는 비자본주의적 삶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역사의 종식’(이는 자본주의 이후의 미래를 개념화하는 데 있어서 막다른 골목에 해당한다)을 돌파할 가능한 미래들을 제안한다.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는 이러한 움직임을 ‘역사의 시작’이라는 주제로 논의했다. 이렇듯 커먼즈의 이념은 현재의 경제적 구조의 우연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성장과 사적 소유의 필연성이라는 담론을 무너뜨린다. 에스떼바(Esteva)가 지적하듯이 커머닝과 커먼즈 운동은 ‘대안적 경제’가 아니라 ‘경제에 대한 대안’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커먼즈에 대해서 쓰고 사유하고 커먼즈를 실행하는 것은 이러한 ‘세계 만들기’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며, 우리는 커먼즈를 중심으로 하는 문헌들에서 커먼즈 고유의 수행성―경험과 주체성을 사적 소유와 자본의 불가피성에 맞세워 재구조화하는 데서의 수행성―을 감지한다.

이어지는 절에서는 커먼즈 연구의 다섯 분야를 살펴본다. 첫째로 우리는 커먼즈가 환경자원의 한계에 대하여 사유하는 수단으로서 이해되는 방식을 고찰한다. 둘째로 우리는 도시 커먼즈에 대한 그리고 도시에서의 공간적 커머닝과 전유의 실천들에 대한 더 최근의 연구들을 살펴본다. 셋째로 우리는 비판적 법연구 분야에서의 작업에 기대어 커먼즈와 법과의 관계를 이해한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신맑스주의의 성취에 시선을 돌려 커먼즈 이념이 현재의 급진적인 정치사상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왔는가를 개괄하고, 마지막으로 커먼즈 논의의 틀을 커머닝 개념을 중심으로 다시 짜고자하는 저자들에 주목한다.

[참고]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Introduction: the promise of the commons
     LEILA DAWNEY, SAMUEL KIRWAN AND JULIAN BRIGSTOCKE

PART I
Materialising the commons
1 Building the commons in eco-communities
     JENNY PICKERILL
2 A politics of the common: revisiting the late nineteenth-century Open Spaces movement through Rancière’s aesthetic lens
     NAOMI MILLNER
3 A spirit of the common: reimagining ‘the common law’ with Jean-Luc Nancy
     DANIEL MATTHEWS

PART II
Commoning
4 The more-than-human commons: from commons to commoning
     PATRICK BRESNIHAN
5 ‘Where’s the trick?’: practices of commoning across a reclaimed shop front
     MARA FERRERI

PART III
An expanded commons
6 Expanding the subject of planning: enacting the relational complexities of more-than-human urban common(er)s
     JONATHAN METZGER
7 Occupy the future
     JULIAN BRIGSTOCKE
8 Imaginaries of a global commons: memories of violence and social justice
     TRACEY SKILLINGTON

PART IV
The capture of the commons
9 The matter of spirituality and the commons
     CLAIRE BLENCOWE
10 Controlled natures: disorder and dissensus in the urban park
     SAMUEL KIRWAN




팬데믹 시대에 공동체를 양육하기

 


  • 저자  : Andreas Weber
  • 원문 :  “Nourishing community in pandemic times” (2020. 4. 22) /https://in.boell.org/en/nourishing-community-pandemic-times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하인리히 뵐 재단>의 싸이트에 올라있는 베버의 글 “Nourishing community in pandemic times”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내용정리이지만 잘 읽힐 수 있게 베버를 1인칭 화자로서 유지했다.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가 애니미즘의 핵심이다.”(([원주] Tim Ingold, in Graham Harvey, ed., The Handbook of Contemporary Animism, London & New York, Routledge, 2013, p. 224))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지구가 커먼즈이며 우리가 우리의 삶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생각은 합리적인 개념에서보다는 정서적인 욕구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접촉을 제한함으로써 고생스러움을 받아들인다. 인류는 상호성을 우선하기로 했다. 상호성, 즉 상호간의 돌봄은 추상적인 개념도 경제정책도 아니며, 공유관계의 경험이자 궁극적으로 삶의 공동체를 온전하게 지키는 경험이다. 이 삶의 공동체는 인류만이 아니라 인간 이외의 존재들도 포함한다. 생명활동에 관여되는 물질대사 과정이 다른 존재들과 공유하는 공동체를 양육하는 과정임을 이해해야만 우리가 타자들—인간과 비인간 존재들(human and non-human beings)—을 효율적인 취급이 필요한 대상들(객체들)로 다루는 데서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정치는 공동체 내부에 풍성한 삶을 창출하는 경험을,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을 친족으로 생각하는 경험을, 그리고 타자의 안녕을 우선시하는 경험을 포함할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애니미즘적’이라고 불리는 사회들이 이 입장을 받아들인 바 있다. 우리는 삶의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이 애니미즘 사회들이 주는 교훈들이 존재의 거대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행동을 상호성의 에티켓에 입각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이 교훈들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1. 코로나와 공동선

전 세계적으로 팬데믹이 돌고 있는 2020년 4월, 세계가 이동을 멈추었고 분주한 세계 경제도 멈춰 섰다. 멈춘 것은 전형적으로 서구적인 방식의 활동들 가운데 일부—세계 여행, 항공 교통,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교역과 소비 그리고 다수의 개인적인 활동들—이다. 비행기들과 자동차들이 거의 없어져 조용하고 평소와는 다르게 대기가 깨끗하며, 이 속에서 도시 거주자들은 오랜만에 처음으로 자신들과 함께 사는 야생동물들이 내는 소리를, 새와 벌레들이 내는 소리들을 듣는다.

인류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멈춰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락다운 조치는 개별 경쟁을 통해서 경제를 밀어붙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내려졌다. 락다운이 가져온 고요 속에서 더 광범한 공동체가 느껴진다. 밤에 빛나는 별들의 고요, 윙윙거리는 호박벌들 그리고 인도 구관조의 울음소리가 느껴진다. 그런데 이것은 낭만적인 순간이 아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 수백 만 명의 사람들에게 자가격리 명령은 빈곤이자 심지어 굶주림이라는 실존적인 위협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이주 노동자들에게는 머물 집조차 없으며, 폐쇄된 공간에 앉아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우울증과 ‘수용소 유행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고 가족들 내의 폭력이 급증했다.

락다운 상황은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개인은 자신이 모든 타자들과 함께 구성하는 집단이 번성할 수 있을 때에만 살아 갈수 있음을—드러냈다. 이 사회적 본성은 신자유주의가 계속해서 감추는 사실이다. 바이러스는 인류가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도록 하는 데, 다시 말해 자리에 앉아 조용히 하고 공동체에 속한 다른 사람들이 보호받도록 행동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인류는 사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노동을 통한 생계확보조차 멈출 각오가 되어 있지만, 이런 상황이 전체주의 체제에 의해 이용될 매우 실질적인 위험이 전 세계 많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 락다운에 의한 자유의 축소가 유럽 나라들을 포함해서 몇몇 나라들의 영구적인 규칙으로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자유가 축소되더라도 지금 인류가 순전히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오히려 인류는 연결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각자가 공동체적인 것을 대표한다는 경험에 기반을 두고 행동하고 있다.

바이러스가 일시적으로 인간 생태계를 바꾸었다. 우리는 속도를 줄였고 타자들에게 공간을 내주며 앉아서 귀를 기울인다.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더 약한 사람들, 더 취약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그리고 생태론적 관점에서는 심지어 인간이 아닌 다른 살아있는 존재들(식물들, 동물들, 개울들, 숲들, 바위들, 산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반응하고 있다. 잠깐 사이에 신자유주의 세계의 핵심 기둥이 무너져 버렸다. 실존적인 위협 하에서는 삶을 보호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할지에 관한 일종의 합의—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함입되어 있는 살아있는 관계의 망을 보호하자는 합의—가 등장한다. 이것은 취약한 타자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대한 답이기도 한데, 우리의 순수하게 경제적인 관점으로는 찾을 수 없는 답이다.

그런데 이제 Covid-19 하에서 많은 숙고를 하지 않고도 그 답이 나온 것이다. 기술과 관련된 계획이나 긴 토론을 이어가지 않고도 그 답은 이미 우리 눈앞에서 현실로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그런 계획이나 토론에 동의하거나 반대할 더 많은 기회를 갖지 않고도 우리는 취약하고 전염되는 우리 자신의 몸을 가지고 그 답을 제시한다. 이 몸들이 호흡하면서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입자들을 풀어놓거나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락다운 조치는 정치적인 답이 아니라 오히려 생태학적인 답이며 생태학 개념들이 정치학 개념들을 대체한 것이다. 락다운 조치로 우리가 살아있는 공동체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났으며, 우리의 공동체는 인류 집단보다 더 크며 지구 전제를 포함한다.

 

  1. 생태학적 스트레스 테스트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인류의 전지구적 대응이 전적으로 생태학적 사건이라는 점은 아직 널리 인식되지 못하고 있지만, 코로나바이러스의 발생은 그 자체로 생태학적인 사건이자 그 발생의 원인도 생태학적이므로 팬데믹은 생태학적인 재앙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질병은 단지 공중위생에만 관련되는 인간만의 문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가령 SARS-CoV2는 의심할 여지없이 인간에게 전파된 동물 바이러스로, 이런 종류의 교차 유전자형들은 인간이 주로 식용고기로 사냥되고 팔리는 희귀한 야생동물들과 너무 가까이 접촉하기 때문에 발생하고 또한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도 발생한다. 따라서 코로나 바이러스의 발생은 서식지를 파괴하고, 희귀종 동물들을 대량 소비한 결과이며, 인간이 인간적이지 않은 것에 침입한 결과이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팬데믹은 인간 생태계에, 우리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즉각적인 변화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이상의 살아있는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에도 즉각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적어도 당장은 타자들—인간과 비인간—에게 공간을 허용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볼 때 코로나바이러스 발생은 타자들(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에게 상호성과 공간 허용하기를 거부한 결과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은 지구화주의자들의 사고방식에 내장된, 대상화하는 그들의 태도를 나타낸다. 지구화주의자들은 저 타자들은 단지 사물들이므로 그 사물들에게 공간을 허용할 필요가 없으며, 시장의 힘으로 사물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재배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은 지구화주의자들의 이 생각이 틀렸음을 ‘상호성’으로 입증한다. 팬데믹은 상호성—우리 자신이 살 공간을 지키기 위하여 타자들에게 살 공간을 허용하는 것—이 핵심적인 생태학적인 특질이자 우리가 생태학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핵심으로서 우리에게 요청되는 바의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팬데믹은 상호성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필연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우리는 생태학적 상호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생태권(biosphere)의 일부로 생태권에 의해 영양분을 공급받고 생태권의 바이러스들을 통해서 사망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있기 전까지 우리는 이것을 간과했고 팬데믹을 겪으면서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집단적인 삶의 일부이고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처럼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그리하여 탄생과 죽음의 순환에 참여하고 결국에는 우리도 삶에 풍성함을 제공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 미생물이 서양 인지 제국을 파괴하다

타자들에게 삶—자신의 존재를 조직하고 사회를 만들어내라는 핵심 명령—을 허용하는 것은 결코 시장주의적 사고의 관심사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시장주의적 사고는 이것을 장애물로 여겼다. 시장주의적 사고에서 현실은 (홉스가 자신의 책 『레비아탄』Leviathan에서 묘사한 ‘자연 상태’에서는)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세상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런 식의 사고에서는 살아있는 세상과의 상호성이 순진한 꿈으로 비난받는다.

홉스를 추종하는 사회경제적 사고의 지배적인 전통에서 ‘사회계약’은 개별 인간들이 국가의 힘에 굴복함으로써 안정적인 생계를 확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 안정성은 삶에 필요한 공간을 타자들에게 허용하는 인간의 능력을 통해서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사회계약은 권력을 쥔 소집단의 사람들이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순전한 경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물질적 교환을 감독하고 허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홉스의 구도에서는 자연과 인간 사회가 서로 적대적이다. 자연은 죽은 것들로 구성되는 세계이며, 인간사회는 자연과 싸우기 위한 협약을 기초로 해서 세워진다. 이 구도의 특징은 서구식 사고방식을 여전히 깊게 형성하고 있는 고전적인 ‘이원론적 분할’에, 즉 문화를 자연과 분리하고 비인간 존재들을 ‘사물들’로 보는 데 있다. 포르투갈의 사회학자 싼또스(Boaventura de Sousa Santos)는 이런 분할이 이루어지는 서양을 ‘서양 인지 제국’(Western Cognitive Empire)이라 칭했고, 프랑스 사회학자 라투르(Bruno Latour)는 서양 인지 제국의 관행을 ‘괴물들’의 창조라고 부른다. 괴물은 우리가 살아있는 세계(상호성을 제공받음으로써 삶을 창조하는 세계)를 자연과 사회로 분할할 때 생겨난다. 그러나 이 분할을 달성하겠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사회는 결코 실질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인간을 자연에서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팬데믹이 발생하자 그 물질적 과정(바이러스 확산, 인체의 감염)이 문화와 사회를 바꾸고, 사회적 조치들을 바꾼다. 자연 즉 야생동물에서 비롯한 바이러스가 사회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하고 바이러스가 활동할 공간을 어떻게 제공할지를 결정한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저 바깥에 있는 사물들을’ 사회가 바라는 대로 다룰 수 있다는 근대주의적 주장을 무너뜨린다. 심지어 코로나바이러스는, 더 높은 효율성에 도달한 사회가 지속가능한 행동들을 실행함으로써, 그리고 사회와 ‘자연’ 사이에 더 큰 보존영역들과 완충지대들을 창조함으로써 근대주의의 문제들을 처리할 수 있다는 생각도 무너뜨린다. 지속가능한 행동들은 여전히 현실의 비인간적 부분들—비인간 존재들과 자연력들—을 행위자들로서가 아니라 사물들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팬데믹 하에서 우리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세상은 대상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합당한 만큼의 상호성으로 대할 필요가 있는 타자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서양 인지 제국은 (모든 비인간 존재들과 종종은 일부 사람들을 포함하는) ‘대상들’과 상호간에 사회적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사회 구성원들 사이를 가르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따라서 세워졌다. 이러한 인지 제국은 계약으로 사회에 진입하지 못하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대상들로 구성된 죽은 자연의 일부로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식민주의를 낳을 수밖에 없는데, 식민주의는 사회 바깥의 타자들(사회적 규범들을 고수하지 않는 사람들, 다른 민족들, 다른 존재들, 다른 자연력들)을 폭력적으로 대하게 마련이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이런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임을 우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준다. Covid-19의 출현은 인류세 사건의 전형으로 규정될 수 있다. 우리의 현 시대인 인류세가 Covid-19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비인간 존재가 뒤섞여 있는 혼합구성으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의 활동에서 비롯된 방사능 흔적들이 3야드 깊이의 북극얼음 안에 있다는 데서 이 혼합구성을 발견할 수 있지만, 또한 기술문명을 중지시킨 바이러스에서 (이 상황은 역병이 창궐한 중세시대의 도시들의 격리체제를 닮았다) 그리고 우리가 삼림을 파괴하고 거의 멸종에 이른 동물들을 고기 소비를 위해 거래하는 것을 통해서 만들어낸 바이러스(다른 것이 아닌 바이러스!)에서도 이 혼합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인류세의 출현은 서구의 인지 지배권의 최후를 나타낸다. 인류세는 사회가 ‘자연’ 위에 설수 없다는 것을 경험하는 시대이며, 훨씬 더 중요하게는 ‘자연’ 내부에 (삶의 한 부분으로서) 위치하는 데 수반되는 일단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가 바로 이 삶에 참여할 수 없게 됨을 경험하는 시대이다.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는 RNA에 기반을 둔 행위자이면서 인류세의 전형적인 행위자이다.

점점 더 많이 발생하는 자연 재해로도 우리가 하나로 상호 연결된 전체의 일원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지만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생한 산불이나 전 세계 많은 곳에서 일어나는 교란된 강우 패턴들, 사이클론들, 가뭄을 생각해보라) 그 재해들은 Covid-19만큼 그렇게 위협적이지는 않다. 바이러스의 이러한 위협을 통해 우리는 공동체 윤리를 얻게 되고 올바른 방식으로, 즉 타자에게 삶의 공간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법을 알게 된다. 이는 유명한 스와힐리어 단어인 ‘우분투’(Ubuntu, ‘당신이 존재하고 따라서 나도 존재한다’의 의미)로 요약된다. 우분투는 상호성이라는 생각 즉 우리가 집단적으로 창조하는 삶에 참여한다는 생각, 우리가 우리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타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풍성한 삶 그 자체를 위해서 집단적으로 삶을 책임진다는 생각을 나타낸다.

이 우분투의 심층에 깔려 있는 것이 애니미즘이다. 애미니즘의 관점에서는 세계가 대상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관심과 욕구를 가지고 있는 행위자들인 개인들(persons)로 이루어져 있다. 애니미즘적 접근법이란 우리가 이 개인들과의 상호적 관계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부여받기 위해 그리고 훨씬 더 중요하게는 삶을 계속적으로 생산할 자리를 부여하기 위해 이 개인들과 함께할 필요가 있다. 팬데믹 상태에서 우리 눈앞에서 명백해지는 것은 이 세상을 구성하는 다른 모든 개인들(인간 개인들 및 비인간 개인들)과 이 세상의 살아있음을 함께할 필요성이다.

 

  1. 존재(자들)의 가족

토착부족들의 우주론인 애니미즘은 인간 개인들과 비인간 개인들 사이에서 상호성을 생각하고 실행하는 가장 급진적인 형태이다. 애니미즘이 갖고 있는 이 급진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애니미즘이 무엇인지를 다시 발견할 필요가 있다. 애니미즘은 서양 인지 제국 내부에서 오랫동안 잘못 재현되었다. 순진한 ‘토착’ 인간들이 나무들, 강들, 산들에 깃든 영과 악마들을 추종하며 홉스적인 자연 상태에 살고 있다는 생각은 거짓 신화이다. 이 거짓 신화는 가령 소위 ‘원시인들’이 제사의식을 통해 나무-존재에게 감사를 표할 때 그들이 하고 있는 행위에 서구적 사고방식을 투영한 데서 비롯한 것이자 애니미즘이 관여되어 있는 급진적인 상호성을 포착하지 못한 데서 생겨난 것이다.

식민주의적 지식을 최고로 간주하는 바람에 배우지 못한 생태학적인 지식의 중심 원리에서는 서구적 의미에서의 지식이 핵심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하는 것이 핵심이다. 애니미즘은 끊임없이 삶을 산출하고 있는 세상을, 그리고 이 우주적 풍요로움이 계속 유지되도록 할 책임이 있는 세상을 모든 존재가 함께 창조한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애니미즘은 우주를 사물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 행위자들 모두는 우리처럼 삶을 갈망하고 자신들의 욕구를 표현하며 서로 상호작용하도록 요청받는다는 사실에서 인간을 닮아 있다. 종교학자이자 인류학자인 하비(Graham Harvey)는 토착적이고 애니미즘적인 우주론들에 대한 가장 훌륭한 최신의 정의로서 “애니미스트들은 세상은 개인들로 가득 차 있고 그들 중 일부만이 인간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이며, 삶은 항상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하비가 정의한 관계들의 우주에서는 번성하기 위해서 다방면으로 상호성이 요구된다. 관계들의 세계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적대적인 원자적인 개인들이 아니며 하나의 일관성 있는 삶의 과정을 집단적으로 창조한다. 개인만큼 중요한 집단은 인간들로 구성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와 모든 실재적 힘으로 구성된다. 생태학적으로 보자면 삶을 생산하는 데 요구되는 태도를 사회성에 기반을 두어 규정하는 것이 정확하다. 형태의 관점에서 본다면 생태계는 상호성의 구현태이다. 생태계는 무한한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는 많은 존재들로 이루어지며 이기적인 행위자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모든 참여자들에 의해 공유되고 생산되는 커먼즈이다. 생태학적인 삶이란 항상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사는 삶을 의미한다.

서양 인지 제국을 대체하는 것이 상호성의 에티켓이다. 상호성의 에티켓은 생태계들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실행되고 있고 (오랜 시간동안 저 생태계들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삶을 영위했던) 사회들에서는 문화적으로 제도화되어 있다. 하지만 이 견해를 탐구하기 위해서 우선 전제되어야 할 것은, ‘서구의 합리성’이 결국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이고 그밖에 모든 것은 약하거나 강력한 미신들이라는 서구 고유의 전제 밖으로 발을 내디딜 필요성이다. 과학적 인류학이 ‘토착민들이 숲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 대신에 에두아르두 콘(Eduardo Kohn)과 함께 ‘숲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물으면서 이 겸손한 입장을 시도하기 시작한 것이 이를 실천에 옮긴 한 사례에 해당한다.

애니미즘적인 태도는 서양 인지 모델의 기본 원칙들과 대립된다(표를 참조하라). 애니미즘의 핵심은 상호성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를 구성하는 것, 그리고 풍성한 집단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그 우주론에 통합하는 것이다.

서구 문화의 핵심 신념들 토착적인 사유의 핵심 신념들

1. 당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

1. 나는 당신 때문에 존재한다

2. 우리 존재의 핵심에 에고이즘이 있다.

2. 상호성이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

3. 실재는 궁극적으로 죽은 물질로 구성된다.

3. 모든 것은 살아있다.

4. 우리 개인의 죽음을 피할 필요가 있다.

4. 세상을 풍성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다.

이 서로 대립되는 원칙들은 인류세에서 결정적인 갈등 영역들인 다양한 핵심 분야들에서 작동한다. 인류세의 대부분의 갈등의 밑바탕에는 우주를 공유함으로써 좋은 관계들을 유지하려는 데서 맞닥뜨리는 어려움들이 깔려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1. 친족을 위한 커머닝

어떻게 좋은 관계를, 즉 타자들과 우리 스스로를 번성하게 하는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하는 핵심적인 문제에 대한 애니미즘의 답은, 살아있는 우주에 우리가 속해있음을 존재자들로 구성되는 방대한 공동체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서 여기는 것이다. 이를 더 근본적으로 표현하자면, 애니미즘에 따르면 비인간 개인들을 포함한 모든 개인들이 친족을 구성한다.

다른 개인들(인간과 비인간 개인들)과의 상호성은 두 가지 형태로 발생한다. 이 상호성은 물자의 분배를 생물권의 생산성을 공유하는 것으로 여길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이 요구는 우리로 하여금 이 공유를 감정적인 참여로서 경험할 수 있게 한다. 이 경험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살아있음과 다시 이어지고 이 살아있음을 성공적인 관계들에 대한 최고의 직관적 앎으로서 향유하게 된다. 아 새로운 이중적인 입장은 ‘살림’(enlivenment)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살림으로부터 ‘인류세를 위한 시학’(poetics for the Anthropocene)을, 다시 말해 우주적 생산성을 지탱하는 상호간의 풍성한 관계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예술을 구축할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을 이 생산성의 수용자들로서만이 아니라 그 원천으로서 경험할 수 있다.

개별 행동은 이 공동의 세상 만들기에 참여하는 만큼 결실을 맺는다. 물질적인 재화의 분배는 우리가 ‘커먼즈 경제’라고 부르는 것을 따른다. 커먼즈 경제에서 교환과 분배는 자본주의에서처럼 희소성에 대한 대응이 아니고, 모든 사람의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커먼즈는 자원이 아니라 일단의 관계들이다. 커먼즈는 모든 참여자들을 양성하고 모든 사람에 의해 지탱되며 결국 우주의 생산성에 다시 반영되는 집단적인 협동과정이다.

커먼즈 철학자이자 활동가인 볼리어가 설명한 커먼즈(([옮긴이] 커먼즈는 “유기적 통합성과 관계성으로 규정되는 삶의 영역들이다. 커먼즈는 전형적으로 분리—인간의 ‘자연’으로부터의 분리, 개인들의 서로로부터의 분리 및 우리의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세계와는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http://commonstrans.net/?p=2095 참조.))가 팬데믹 시대에 꽃을 피우고 있다. 팬데믹이 닥치자 고령자들을 위해 장을 보는 마을네트워크 자원봉사활동에서부터 재봉사들이 마스크 생산으로 전환하고 자신들이 생산한 마스크를 공동체에 무료로 나누어주는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자발적인 커머닝이 부활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볼리어가 말하듯이 이 이타주의적인 행동들은 한바탕 일시적으로 일어나고 마는 행동들을 넘어선다. 이 행동들은 공동체를 위한 배려심에서 자발적으로 나온 것인데, 서구적인 사고방식으로 보자면 이것은 다소 당혹스러운 일이다.

서구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재난 상황 하에서는, 홉스가 자연 상태에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듯이, 무정한 이기주의가 만연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였다.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재난 시기에 발휘되는 상호 신뢰에 관한 그녀의 고전적 저서(([옮긴이] http://commonstrans.net/?p=1397 참조.))에서 말했듯이, 힘든 시기에 생겨나는 증가되는 상호성은 관여된 사람들에게 심층적이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안도감을 준다.

애니미즘적인 관점에서는 상호성이 규범이지만 서구인의 눈에는 이것이 정말 놀라워 보일 수 있다. 이 상호성은 사람들이 비인간 친족—정원에 있는 식물들, 가정에 있는 애완동물들, 위험에 처한 종들—을 돌볼 때 경험하는 감정에도 해당되는데 이 감정들을 서구식 용어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애니미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감정들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필요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주의 풍요로움을 키우는 것은 심층적으로 애니미즘적인 경험이다. 기술적인 태도가 그 핵심이 아니라 타자를 환영하는 것을 통해 느끼는 환영받는 느낌이 그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 두 차원—모든 존재와의 상호성을 통해 세상을 커먼즈로 실행하는 차원 그리고 함께 어울리는 이 관계를 내 자신의 살아있음과 타자들의 살아있음으로서 따라서 우주의 진정한 특징으로서 느끼는 차원—은 분리될 수 없다. 우리에게는 물질대사 과정이 지속적인 삶에 참여하는 수단이 되지만 이 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들에게는 정서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야 비로소 우리는 대상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려는 시도를 버리고 진정으로 친족과의 교류에 참여하려는 시도로 나아갈 수 있다. 오직 그때에만 우리는 하나의 가족에 속할 수 있다.

자신의 나라와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받은 한 원주민이 “이 돌이 나입니다”라고 답하듯이 정체성은 서로 속해있음에서 나온다. 이러한 속해있음 때문에, 아름다움에 대한 인류의 경험은 가족의 일원으로 사랑받는 존재자의 경험으로서, 그 가족이나 가족의 개별 구성원에 대한 자기 나름의 사랑의 경험으로서 그리고 가족을 부양하고 (사랑을) 돌려주려는 욕구의 경험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애니미즘적인 지속가능성은 수행적이다. 이 지속가능성은 항상 실질적인 타자, 나무 개인, 재규어 개인, 강 개인과의 대화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행동들은 관계의 에티켓 없이는 그리고 상호성의 단순한 의식절차들을 실행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는 자리를 구하기 전에 호의로 우리를 받아달라고, 우리가 접촉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고마움을 표현할 필요가 있다.

종(種)들 사이의 상호성의 실행이자 문화인 애니미즘은 ‘자연 대상들’을 더 잘 다루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칠 수는 없지만 우주에 속한 모든 구성원들에게 생명을 주는 우주를 어떻게 지속시키는지를 보여줄 수는 있다. 애니미즘은 지속가능성과 관련된 전통적인 관행들을 재고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할 것이다. 미국의 식물학자이며 작가이자 아메리카원주민인 로빈 월 키머러(Robin Wall Kimmerer)는 애니미즘이 요구하는 것을 ‘명예로운 수확'(The Honorable Harvest)을 구성하는 원칙들 가운데 하나로 다음과 같이 탁월하게 제시한다. “당신을 지속시키는 것들을 지속시킨다면 지구는 영원히 존속할 것이다.”




새로운 애니미즘과 커머닝

 



내가 군락을 이루는 나무들의 사회생활에 대해서 그리고 토착민들이 다양한 생물형태들 및 강들과 맺고 있는 밀접한 유대에 대해서—서양인들에게 살아있음(aliveness)을 설명하는 최근의 생태철학을 꼼꼼하게 살피면서—배우고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정말로 애니미즘과 커머닝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적 합리주의와 경제주의적 사고는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힘들이지만 사회적 목적과 사회적 의미를 창출하는 일에는 별로 능하지 못하다. 이는 세상을 다시 매력적으로 만드는 방식으로서 새로운 애니미즘의 흔적이 (종종은 커머닝을 통해 그 목소리를 찾으며) 계속해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생태철학자 안드레아스 베버(Andreas Weber)는 생명의 생물학이 현실 그 자체가 커먼즈임을 짚어주기 때문에 이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라고 주장한다.

커먼즈는 유기적 통합성과 관계성으로 규정되는 삶의 영역들이다. 커먼즈는 전형적으로 분리—인간의 ‘자연’으로부터의 분리, 개인들의 서로로부터의 분리 및 우리의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세계와는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물론 애니미즘의 역사는 문제적이다. 초기 인류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세계관을 부족들에게 투영하여 그 부족들이 낙후되어 있다고 폄하했다. 확고한 데카르트주의자들이자 근대인들로서 그들은 육체와 정신을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동물들•산들•자연력에 살아있는 영(靈)이 깃들어 있다고 여기는 모든 사람을 다만 ‘원시적’이고 ‘미신적인’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구인의 눈으로 본 오늘날의 애니미즘은 이와는 다르다. 이 애니미즘은 생명(삶)의 경험을 지구상의 생물들과 자연체계들 간의 역동적인 대화로 여긴다. 종교학자 그레이엄 하비(Graham Harvey)가 말하듯이, 이것은 인간중심의 비전을 버리고 세상을 “개별 존재들로 가득하고 그들 중 일부만이 인간”이며 그 속에서 “삶이란 항상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핵심이다. 애니미즘은 “다른 개별 존재들과의 존중에 기반을 둔 관계에서 훌륭한 개별 존재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가 제안한, 존중하는 현존에 기반을 둔 ‘나-너’의 관계와도 유사하다.

내 경우에는 최근에 읽은 두 개의 글 때문에 애니미즘에 더 분명하게 관심이 쏠렸다.

하나는 영국의 자연 작가 로버트 맥팔레인(Robert Macfarlane)이 <가디언>지에 기고한 글(2019112일자)로 이 글에서 그는 상승세를 타고 있는 ‘새로운 애니미즘’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전 세계에서 제정된 많은 ‘자연 권리’ 관련 법들을 언급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에콰도르와 볼리비아가 가장 유명한 사례에 해당한다. 하지만 오하이오주 털리도 시(市)가 위험에 처한 호수에 ‘법 인격(legal personhood)’을 부여하는 투표를 2019년에 승인한 것을 알고 있었는가? 이리 호(糊)는 이제 인도의 갠지스 강과 야무나(Yamuna) 강 그리고 뉴질랜드의 황가누이 강(Whanganui River)과 함께 해당 국가에서 법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다.

맥팔레인은 <이리 호 생태계 권리장전>(Lake Erie Ecosystem Bill of Rights)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리 호는 일단의 생태계서비스(ecosystem services)(([옮긴이] 생태계서비스는 인간 사회와 생태계가 연결되어 있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과 인간이 자연환경에 끼치는 영향이 증가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가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라는 당찬 존재론적인 주장이 권리장전에 삽입되었다. 이 권리장전은 사실상 ‘새로운 애니미즘’—애니미즘은 영(spirit), 기운(breath), 활기(life)를 의미하는 라틴어 ‘anima’에서 유래한다—이라 불릴 수 있는 성과이다. 이 권리장전은 이 호수에 살아있음(liveliness)과 취약성(vulnerability) 둘 다를 다시 부여함으로써 오수지(汚水地)와 수원(水原) 같은 도구화된 역할에서 이리 호를 빼낸다. 그렇기에 이 권리장전은 전 세계 사법계에서 (‘자연권’ 내지 ‘자연의 권리’ 운동으로 더불어 알려지게 된) 일련의 더 광범위한 최근의 유사한 법적조치들—모두 살아있는 세계에서 상호의존성과 살아있음/활동성(animacy)을 인식하고자 하며 종종 토착집단들에 의해 주창되는 것들—의 일부분을 형성한다.

맥팔레인은 이어서 “‘급진적으로 다시 이야기하기’는 “법뿐만 아니라 문화•이론•정치•문학을 가로질러 현재 진행 중”이며, 이는 “<멸종반란>의 창조적인 항의들에서, 이저벨 스텐저스(Isabelle Stengers), 데이빗 애브럼(David Abram) 그리고 에두아르두 콘(Eduardo Kohn)의 ‘새로운 애니미즘적’ 연구” 그리고 로빈 월 키머러(Robin Wall Kimmerer)의 작업에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베버—『경이의 생물학』(Biology of Wonder, 2016), 『물질과 욕망』(Matter and Desire, 2018)—와 하딩(Stephan Harding)—『살아있는 지구』(Animate Earth, 2006)—의 생태철학을 여기에 추가하고 싶다.

맥팔레인은, 이 모든 노력들은 “우리가 외면했던 무언가를, 다시 말해 인간이 아닌 대화 상대들의 존재와 그들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아미타브 고쉬(Amitav Ghosh)의 말을 빌려 말한다.

나는 또한 콘의 2013년 저서 『숲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간 너머의 인류학을 향하여』(How Forests Think: Toward an Anthropology beyond the Human, 2013)(([옮긴이] 『숲은 생각한다』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본이 나와 있다.))에 상당히 매료되었다. 콘은 대담하게도 근대인들에게 이 책이 ‘자연’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 및 ‘자연’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해 겸손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다. 이 책은 우리가 인간 이상의 세계를 “바이오기호학”(biosemiotics)(( [옮긴이]바이오기호학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5참조.))의 살아있는 거대한 체계—서로 상호작용하면서 끊임없이 의미를 창출하고 있는, 신체를 가지고 살아있는 유기체들의 체계—로 보려고 노력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콘은 우리 근대인들이 “관계성에 관하여 생각하는 특정의 방식들에 의해 식민화되어 있다”고 경고한다.

우리는 별 의식이 없이 우리 고유의 속성들을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 부여하며, 이에 더하여 자기도취에 빠져서 우리 자신을 바로잡는 생각들을 제공해 줄 것을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 요구한다.

그 결과 분리된 근대세계에서 우리는 모든 생물학적인 삶의 주요 부분인 심층적 공생과 협력을 무시한 채, ‘자연’이란 개체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시장경쟁을 이겨내려고 몸부림치는 곳이라고 전제한다. 우리는 또한 자연세계란 불활성이고 감정이 없으며 의미가 없다고, 인류 드라마를 위한 무언의 배경막이라고 전제한다.

콘은 에콰도르에 있는 아마존 상류의 루나(Runa) 지역에서 4년간 민족지학적 현장연구를 했는데, 이는 그가 “실재”의 의미를 재고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경험이었다. 그는 우리 지구가 말 그대로 살아있고 따라서 우리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들로서 그가 ‘자아들의 생태학’이라 부르는 “복잡한 관계망”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고 멋지게 주장한다.

유기체가 다른 것들에게 위협으로서 나타나든 한때의 협력자로 나타나든 또는 풍경 속 저 멀리 있는 지원자로 나타나든, 살아있는 생물들은 항상 ‘자아’를 창조할 것이다. 살아있는 자아들을 발생시키고 유지시키는 과정 전체는 유기체의 형태•행동•표현에 구현되는 ‘의미’를 창출한다. 또는 콘이 주장하듯이, “모든 생명은 기호적이며 모든 기호작용은 살아있다.” 삶(생명)과 의미는 서로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콘의 책 제목이 설명될 수 있다. 콘의 주장에 따르면, 숲은 숲을 구성하는 살아있는 유기체들이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깊숙이 침투하여 식물들이든 동물들이든 미생물들이든 자아들의 생태계를 발생시킬 때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근대인들이 지구에 널리 퍼져있는 살아있음과 관계성을 이해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점이다! 살아있으며 생각을 하고 있는 존재가 단지 인간만은 아닌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종류의 유기체들은 인간의 관찰 및 활동과는 별개로 자아와 의미를 창조하고 있다. “열대우림은 서로를 구성하며 살아있고 자라나는 생각들이 창발적으로 팽창하는 다층적이고 시끌벅적한 망이다”라고 콘은 쓰고 있다.

문제는 이렇다. 우리는 그 주파수에, 근대 인식론과 앎의 방식들로서는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자아들의 거대한 생태환경’에 맞출 수 있는가? 우리 근대인들은 숲들이 생각하는 방식의 논리에 스스로 진입할 수 있는가? 우리는 가령 식물들과 토양 사이의 관계 또는 인간과 재규어 사이의 관계를 살아있는 재현과 의미의 형태들로서 (설령 이 형태들이 언어가 닿지 않는 곳에 있더라도) 보는 법을 배울 수 있는가?

우리는 (원하는 대로 ‘자연’을 재형성할 수 있는 정점의 포식자로서) 우리 자신을 자연과 분리되고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는 데 익숙해서 살아있는 지구의 흐름들 및 제약들 내부에 우리 자신을 위치시키는 데 문제를 안고 있다. 주제넘게도 우리는 스스로를 ‘자연’의 지배자라고 생각한다. 이는 언어 자체에 의해 인가되는 생각이다. 서구 문화들이 총칭적이고 추상적인 명사를 사용하는 것을 강하게 선호하지만, 토착문화들은 살아있는 체계들과의 관계 및 상호작용을 지칭하는 정확한 동사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토착어들은 “인간을 넘어서는 다른 종류의 사고하는 자아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반영한다.

나는 새로운 애니미즘에 공명하며 이는 이 애니미즘이 커먼즈처럼 관계성을 삶의 핵심적인 현실로서 존중하기 때문이다. 질케(Silke)와 내가 우리의 신작인 『자유로운, 공정한 그리고 살아있는』(Free, Fair and Alive)에서 부각시키려는 아이디어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커먼즈를 단지 ‘자원을 관리하기’ 위한 경제적인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관계들의 살아있는 사회적 체계로서 재개념화하기를 원했다.

커머닝은 우리가 살고 있는 다수의 생태계들과의 관계를 포함하는 여러 관계들의 P2P적 구축을 핵심으로 한다. 다행히도 자연 관련 법들이 보장하는 새로운 권리들, 애니미즘에 대한 학문적 연구들 그리고 무수한 커먼즈의 확산이 필요한 거대한 ‘OntoShift’(존재전환)에 동력을 제공하고 있으며 그것이 필요로 하는 살아있음과 관계성이 마땅한 인정을 받고 있다.




COVID-19와 자본의 회로

 


  • 저자  : Rob Wallace, Alex Liebman, Luis Fernando Chaves and Rodrick Wallace
  • 원문 : COVID-19 and Circuits of Capital https://monthlyreview.org/2020/04/01/covid-19-and-circuits-of-capital/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먼슬리리뷰』(Monthly Review) 2020년 5월호에 실린 글 “COVID-19 and Circuits of Capital”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5월호라고 하지만 3월 27일에 업로드되었다. (편집자의 말에 따르면 이런 일은 전례가 없다고 한다.) 본 블로그에 직전에 올린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와 싸샤 릴리(Sasha Liley)의 인터뷰에서 라인보는 이 글을 자신에게 생산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로 든다.  “COVID-19 and Circuits of Capital”의 저자들은 모두 네 명이다. 롭 왈리스(Rob Wallace)는 유엔 <식량농업기구>(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와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CDC)의 자문역을 한 바 있는 진화전염병학자(evolutionary epidemiologist)이다. 리브먼(Alex Liebman)은 럿거스대학교(Rutgers University)의 인문지리학 박사과정 학생이다. 차베스(Luis Fernando Chaves)는 질병생태학자이며, 코스타리카의 트레스리오스(Tres Rios)에 있는 <코스타리카 영양 및 건강에 관한 연구교육원>(Costa Rican Institute for Research and Education on Nutrition and Health)에서 상임연구원을 한 바 있다. 로드릭 왈리스(Rodrick Wallace)는 컬럼비아 대학교의 <뉴욕주립 정신의학연구소>(New York State Psychiatric Institute)의 전염병학과의 연구과학자이다. * 정리자의 논평이나 설명은 대괄호 안에 삽입하기로 한다. 

COVID-19와 자본의 회로

 

계산

2002년 이후 가장 독한 호흡기증상 바이러스인 COVID-19는 이제 공식적으로 팬데믹이 되었다. 3월말 현재 도시들이 봉쇄되었고 환자들의 폭증으로 병원들은 응급실과밀화를 겪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의 상황 생략]

임페리얼 컬리지(Imperial College)의 전염병학 팀은 최선의 완화(발견된 환자의 격리와 연장자들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누적환자수의 상승하는 그래프 곡선을 꺾어서 수평에 가깝게 만드는 것)를 이루는 캠페인을 하더라도 미국은 110만 명이 사망할 것이고 환자의 수는 미국에서 가능한 전체 중환자병상 수의 8배가 될 것이라고 추산했다. 질병을 진압하려면 환자격리와 (기관들의 업무정지를 포함한) 공동체 전체의 거리두기 쪽으로 더 나아갈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흥미롭게도 중국을 이런 조치의 대표로 들고 있다.] 이렇게 되면 미국 내의 사망자는 약 20만 명이 될 것이다.[5월 2일 현재 미국의 사망자는 65,711명이다.]

임페리얼 컬리지 팀은 성공적인 캠페인을 적어도 18개월 동안 해야 할 것으로 추산한다. 그 동안 경제가 수축되고 공동체 서비스들이 쇠퇴할 것이다. 이 팀은 가용한 중환자병상의 수에 따라 공동체 격리의 시행을 탄력적으로 운용함으로써 질병통제와 경제 사이의 균형을 맞출 것을 제안한다.

탈렙(Nassim Taleb)이 이끄는 팀은 임페리얼 컬리지의 모델이 접촉자 추적과 호별 모니터링을 포함시키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 모델은, 많은 정부들이 그런 식의 지역봉쇄를 기꺼이 행할 태도이지만 COVID-19는 그러한 태도를 가진 정부들을 제치고 발발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염병의 확산 기세가 쇠퇴하기 시작하고 나서야 많은 나라들이 그런 조치들을 적절한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누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듯이, “코로나바이러스는 너무 과격하다. 미국은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대응할 수 있는 더 온건한 바이러스가 필요하다.”

탈렙 팀은 임페리얼 팀이 어떤 조건에서 바이러스가 절멸(extinction)에 이르는지를 연구하기를 거부하는 점에 주목한다. 여기서 절멸이란 환자수 0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환자들이 새로운 감염의 연쇄를 산출하지 않도록 충분한 고립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에서 감염자와 접촉한 감염 가능자들 가운데 5%만이 나중에 감염되었다. 탈렙 팀은 장기적으로 질병통제와 노동력공급의 보장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마라톤에 들어가지 않고 전면적으로 신속하게 질병을 절멸하는 중국의 프로그램을 선호한다.

이 글의 공저자 가운데 한 사람인 월러스(Rodrick Wallace)는 모델링 전체를 뒤집어엎는다. 비상상태의 모델링은 그것이 아무리 필요하더라도 어디서 언제 시작할지를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구조적인 원인들도 마찬가지로 비상상태의 일부이다. 이 구조적 원인들을 포함해야 경제를 단지 재가동하는 것을 넘어서 나아가는 최선의 대응책을 생각해낼 수 있다고 한다.

전염병 발발에 대비하고 대응하는 데 있어서의 실패는 12월 우한에서 COVID-19가 유출되었을 때 시작된 것이 아니다. 가령 미국에서 실패는 트럼프가 팬데믹 준비팀을 해체하거나 CDC의 7백 개의 자리들을 채우지 않고 두었을 때 시작된 것이 아니다. 연방정부가 2017년의 팬데믹 씨뮬레이션의 결과에 기반을 두고 행동하는 데 실패했을 때 시작된 것도 아니다. 미국이 바이러스 발발 몇 개월 전에 중국에 있는 CDC 전문가의 수를 삭감했을 때 시작된 것도 아니다. (물론 중국 현장에 있는 미국 전문가와의 직접적 접촉을 상실한 것이 미국의 대응을 약화시킨 것은 사실이다.) 또한 이미 사용 가능한, WHO가 제공하는 진단키트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 데서 시작한 것도 아니다. (물론 초기 정보의 지체와 검사의 총체적 결여로 인해 많은 사람들, 필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생명을 잃을 것이다.)[42일 현재 미국 내의 사망자는 65,776명이다.]

실패는 수십 년 전 ‘공공보건의 공유된 커먼즈’가 소홀히되고 화폐의 논리에 종속되면서 [즉 신자유주의의 시작과 함께] 실제로 프로그램되었다. 병상과 정상적 의료활동을 위한 장비가 충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때그때 발생하는 사례에 대응하는 개별화된 전염병학적 치료법에 의해 포획된 나라는 정의상 중국식 통제를 실행하는 데 필요한 자원들을 집결시킬 수가 없다.

이 글의 공저자 가운데 또 한 사람인 차베스(Luis Fernando Chaves)는 ‘숫자가 말하게 하기’는 이미 안에 함축된 모든 전제들을 가릴 뿐이라고 한다. 임페리얼 팀의 것과 같은 모델들은 분석의 범위를 지배적인 사회질서의 틀 안에서 협소하게 재단된 문제들에 명시적으로 국한된다는 것이다. 이 모델들은 그 의도상 전염병의 발발과 정치적 결정들을 추동하는 더 광범한 시장 세력들을 포착하는 데 실패한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그 결과로 나오는 기획들―여기에는 질병 통제와 경제를 위한 통제해제가 교대로 일어나는 동안 죽음을 당할 감염에 취약한 수천 명의 사람들이 포함된다―은 모두의 건강의 확보를 부차적인 것으로 제쳐놓는다. 푸꼬가 말한, 국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인구에 작용을 가하는 것은 영국의 토리 정부와 네덜란드가 제안한 집단면역(herd immunity)이라는 맬서스적인 정책―인구 전체에 바이러스가 퍼지는 것을 방치하는 것―의 (비록 더 자애롭지만) 갱신판일 뿐이다. 집단면역이 전염병의 발생의 중지를 보장하리라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희망일 뿐, 그 증거는 거의 없다. 바이러스는 인구의 면역장막(immune blanket) 아래로부터 쉽게 진화해 나올 수 있다.

 

개입

그러면 무엇을 해야 하나?

종합병원을 국립화한다. 검사의 양을 늘리고 소요시간을 줄인다. 약을 사회화한다. 의료종사자들의 보호를 극대화한다. 인공호흡기 등을 수리할 권리를 확보한다. 렘데시비르와 클로로콰인의 대량생산을 시작하고 임상시험을 수행한다. 인공호흡기와 보건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개인보호장비를 생산하도록 회사들을 강제하고 가장 필요한 곳에 우선적으로 할당한다.

연구에서 돌봄까지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대적인 팬데믹 인력을 바이러스로 인한 수요의 수준에 근접하도록 확충한다. 증가된 환자의 수에 병상과 의료진, 그리고 필요한 장비의 수를 맞춘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COVID-19의 계속적인 공격에서 그저 살아남았다가 나중에 접촉자 추적과 환자격리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지금 당장 충분한 인력을 동원해서 가가호호 COVID-19를 포착해내고 마스크와 같은 필요한 보호장구를 갖추게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수탈을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를 정지시킬 필요가 있다. 질병에서 살아남으려면 말이다.

그런데 그런 프로그램이 실행될 수 있기까지 대다수의 인구가 대체로 방치될 것이다. 정부들로 하여금 하기 싫어도 하도록 지속적인 압박을 가해야 하므로 여건이 되는 사람들은 매일 새로 출현하는 상호부조단체들과 동네단체들에 참여해야 한다. 자원자들이 봉사활동을 하다가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일이 없도록 여력이 되는 전문적인 공공보건요원들이 이들을 훈련시켜야 한다.

바이러스의 구조적 기원을 비상상태 시의 계획과 연계시키는 것은 모든 발걸음이 이윤에 앞서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로 나아가게 하는 데 있어서 핵심이 된다.

많은 위험 가운데 하나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어리석은 생각을 규범화하는 데 있다. 우리는 또 하나의 사스(SARS) 바이러스가 야생의 은신처로부터 나와서 8주 만에 인간이 사는 곳에 전역에 퍼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가 받은 충격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바이러스는 특이식품(exotic food)의 지역 공급라인의 한 쪽 끝에서 출현했으며 다른 쪽 끝인 중국 우한에서 인간에서 인간으로의 감염연쇄를 성공적으로 개시했다. 거기서부터 전염병은 지역으로 확산되기도 하고 비행기나 기차에 올라타기도 하면서 여행에 의해 구조화된 연결망을 통해 그리고 큰 도시에서 작은 도시로 내려오면서 지구 전체에 퍼졌던 것이다.

야생식품시장을 전형적 오리엔탈리즘의 관점에서 보지 말라. ‘특이식품이 어떻게 더 전통적인 가축과 함께 우한에서 가장 큰 시장에서 팔릴 수 있게 되는가?’라는 명백한 질문을 생각해보자. 동물들은 트럭에서 혹은 골목에서 팔리는 것이 아니다. 관련되는 허가증과 대금지불(그리고 그 규제의 완화)을 생각해보라. 전 세계의 야생식품에 투여되는 자본과 산업생산에 투여되는 자본은 동일한 원천에서 나온다. 비록 산출량의 크기는 어디에서도 비슷하지 않지만, 그 구분은 지금 더욱 불투명하다.

중첩되는 경제적 지리는 우한 시장에서부터 특이식품들과 전통적인 식품들이 재배되는 후배지들로 뻗어있다. 산업생산이 가장자리의 숲을 침범할 때, 야생식품업은 더 깊이 들어가거나 가장자리 지역을 공략해야 한다. 그 결과 가장 특이한 병원체들이, 가령 이번 경우에는 박쥐를 숙주로 삼는 SARS-2가, 식용동물들을 통해 혹은 그것을 다루는 노동자들을 통해 트럭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침투

어떤 병원체들은 바로 생산의 중심지들에서 발생한다. 살모넬라(Salmonella)와 캄필로박터균(Campylobacter)처럼 식품을 통해 감염되는 박테리아가 그렇다. 그러나 COVID-19를 비롯한 다수의 병원체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프런티어에서 발생한다. 새로운 인간 병원체의 적어도 60%가 야생동물에서 해당 지역의 인간 공동체들로의 유출(spillover)에 의해 발생한다. 그 다음에 세계의 다른 곳으로 전파된다.

콜게이트-팜올리브(Colgate-Palmolive)와 존슨 앤 존슨(Johnson & Johnson)―이들은 기업식 농업이 주도하는 삼림파괴의 유혈 낭자한 가장자리를 밀어붙이는 회사들이다―으로부터 일부 재정을 지원받는 이들을 포함한 에코헬스(ecohealth) 분야의 여러 전문가들이 이전의 전염병 발발에 기반을 두어 새로운 병원체들이 출현할 법한 곳이 앞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세계지도를 만들어냈다. 색깔이 붉은 색에 가까울수록 새로운 병원체가 출현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었다. 이 지도에서는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와 라틴아메리카 및 아프리카의 일부가 붉다. 그런데 이 지도는 절대적 지리(absolute geographies)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중대한 점을 놓쳤다. 발발 지역에 초점을 두는 것은 전염병학을 형성하는 전지구적인 경제적 요인들이 공유하는 관계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저개발 국가들에서 개발과 생산에 의해 토지사용과 질병출현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후원하는 자본가 세력은 발발의 책임을 토착민들과 그들의 ‘더럽다’고 추정되는 문화적 관행들에 지우는 노력에 보상을 해준다. 야생동물고기를 먹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과 집에서의 시신의 매장이 새로운 병원체의 출현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두 가지 관행이다. 이와 달리 관계적 지리(relational geographies)의 관점에서 보면 갑자기 전지구적 자본의 핵심 원천인 뉴욕, 런던, 홍콩이 세계의 최악의 핫스팟 가운데 세 곳이 된다.

발발지역들은 심지어 전통적인 정치체들에 의해 조직되어 있지도 않다. 불평등한 생태교환이 (이는 산업화된 농업으로부터 온 최악의 피해를 글로벌 사우스에 돌린다) 이제는 국가가 주도하는 제국주의에 의한 지역 자원 약탈의 방식이 아니라 다양한 규모와 상품이 관련되는 새로운 복합체의 형태로 일어난다. 기업식 농업은 그 추출주의적 작업을 상이한 규모의 영토들을 가로지르는 공간적으로 불연속적인 네트워크들로 전환시켰다. 가령 일련의 다국적기업 기반의 ‘콩 공화국들’(Soybean Republics)은 현재 볼리비아,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에 걸쳐있다. 이 새로운 지리는 회사관리구조, 자본조달, 하청, 공급체인대체, 임대 그리고 초국적 토지공동이용(land pooling)에서의 변화에 의해 구체화된다. 이 ‘상품 공화국들’은 여러 국경 사이에서 여러 생태들과 정치적 경계들을 가로지르면서 새로운 전염병학적 현상들을 산출하고 있다.

전염병의 발발과 관련하여 도시와 시골을 나누는 이분법은 시골이 도시 주변의 ‘desakotas’(city villages, 도시 마을들)나 ‘zwischenstadt’(in-between cities, 사이 도시들)로 전환되었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그 결과 병원체의 원초적 원천인 숲질병 동학은 이제 후배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와 연관된 전염병학적 현상들도 관계적이 되었으며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사스(SARS) 같은 것이 박쥐 동굴에서 나온 지 며칠 만에 대도시의 인간들에게로 전파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야생’ 바이러스들이 열대림의 복잡성들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통제되었던 생태계들은 자본이 주도하는 삼림파괴와 공공보건 및 환경위생의 결핍에 의해 철저하게 간소화되고 있다. 많은 야생 조수(鳥獸)에서 발생하는 병원체들은 숙주와 함께 죽지만, 숲에서 상대적으로 빠르게 퍼졌던 일부 병원체들이 이제는 감염에 취약한 인간집단(이들의 취약성은 종종 도시들에서 긴축정책과 부패에 의해 부실해진 규제에 의해 심화되고 있다)을 가로질러 증식하고 있다. 효과가 있는 백신이 있어도 발발한 전염병은 이전보다 더 큰 범위, 더 긴 지속기간, 더 큰 동력을 가진다. 한때 지역에 국한된 유출(spillover)이 지금은 전 지구를 가로지르는 유행병이 된 것이다.

이렇게 환경이 변한 것만으로 에볼라(Ebola), 지카(Zika), 말라리아(malaria), 황열병(yellow fever) 같은 예전의 전형적 병들이 (이는 비교적 진화를 적게 한다) 위협적이 되었다. 이 병들은 먼 마을들로 유출되고 다시 큰 도시들로 퍼져 수천 명을 감염시켰다. 오랜 동안 질병의 저장소였던 야생동물들도 블로우백(blowback)을 겪고 있다. 적어도 100년 동안 노출되어온 야생유형의 황열병에 걸리기 쉬운 토착 신세계원숭이들(New World monkeys)은 삼림파괴에 의해 뿔뿔이 흩어져서 그들의 집단면역 능력을 잃고 있으며 수십만 마리씩 죽어가고 있다.

 

확산

기업화된 농업은 여러 기원을 가진 병원체들을 가장 멀리 있는 저장소로부터 가장 국제적인 인구 중심지들까지 이동하게 하는 동력이자 그러한 이동의 연결망으로서 기능한다. 이를 통해 새로운 병원체들이 농업 공동체들로 침투한다. 연관된 공급체인이 길수록, 그리고 연관된 삼림파괴의 범위가 클수록 푸드체인에 진입하는 동물원성 병원체들이 더 다양해진다. 최근에 (재)발생한 식품에 의해 전달되며 인간의 활동에 의해 유발되는 범주에 속하는 병원체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속한다. African swine fever, Campylobacter, Cryptosporidium, Cyclospora, Ebola Reston, E. coli O157:H7, foot-and-mouth disease, hepatitis E, Listeria, Nipah virus, Q fever, Salmonella, Vibrio, Yersinia ( 그리고 H1N1 (2009), H1N2v, H3N2v, H5N1, H5N2, H5Nx, H6N1, H7N1, H7N3, H7N7, H7N9, H9N2를 포함하는 다양한 신종들).

아무리 의도치 않았다고 해도 생산의 전체가 병원체의 유독성의 진화와 전염을 가속화하는 관행들을 중심으로 조직되고 있다. 점증하는 유전자 단작(monoculture)―거의 동일한 게놈을 가진 식품용 동물과 식물―이 전염속도를 늦추는 방역 방화벽을 제거한다. 지금 병원체들은 평상적인 숙주 면역형질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진화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인구밀집이라는 조건이 면역반응을 억제한다. 농장의 동물 개체수의 크기와 밀집도가 더 신속한 전염과 반복적인 감염을 촉진한다. 산업생산의 특징인 큰 처리량은 취약개체들의 공급을 계속 갱신하여 병원체의 치명성의 상한선을 제거한다. 동물들을 한 건물에 몰아넣는 것은 가장 잘 퍼질 수 있는 변종에게 유리한 조건이다. 점점 더 빨라지는 도살 시기―닭의 경우에는 6주―는 병원체들이 더 튼실한 면역체계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데 유리할 가능성이 높다. 산 동물의 교역의 범위가 넓어짐으로써 게놈의 다양성이 증가되고 연관된 병원체들이 교환되어 그 진화 가능성의 탐색 속도가 빨라진다.

병원체의 진화가 이런 식으로 빠르게 이루어지지만 개입은 심지어는 산업 자체가 요구하는 경우일지라도 (전염병이 발발한 비상상태에서 한 분기의 재정수익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것 말고는) 거의 없거나 하나도 없다. 전체적인 경향은 농장들과 가공공장들에 대한 정부의 감시가 점점 더 줄어들고 정부의 감시와 활동가의 폭로에 반대하는 입법이 이루어지며 치명적인 전염병 발발의 세부에 관해 미디어를 통해 보도하는 것을 금지하는 입법이 이루어지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농약과 식용돼지의 오염에 맞선 법정 싸움에서 최근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민간기업의 생산은 여전히 전적으로 이윤에 초점을 맞춘다. 전염병의 발발로 야기된 피해는 가축, 농작물, 야생, 노동자들, 지역 및 일국 정부들, 공공보건 시스템들에 외화되며, 자국의 우선성이라는 태도로 인해 해외의 대체 농업시스템들(agrosystems)로 외화된다. 미국에서 CDC는 식품에 의해 전달되는 전염병 발발이 여러 주들과 감염된 사람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즉, 자본이 초래하는 소외는 병원체에게 유리하게 작동한다. 공공 이익은 농장 및 식품공장의 문에서 걸러내어지는 한편, 병원체들은 산업이 기꺼이 돈을 지불하려는 바이오안전을 지나쳐 퍼지고 공중에게로 되돌아간다. 매일 이루어지는 생산은 우리의 공유된 건강 커먼즈(health commons)를 갉아먹는 수지맞는 도덕적 해이를 내장하고 있다.

 

해방

바이러스의 발생지에서 지구의 반만큼 떨어져 있는 뉴욕, COVID-19 때문에 이동제한이 걸려있는 뉴욕에 아이러니가 있다. 3년 전 골드만삭스(Goldman Sachs), 제이피모건(JPMorgan), 아메리카은행(Bank of America), 시티그룹(Citigroup), 웰스파고(Wells Fargo & Co). 그리고 모건스탠리(Morgan Stanley)는 연방정부의 비상대출금의 63%를 취했다. 골드만삭스는 중국의 거대한 기업식 농업의 일부를 차지하는 Shuanghui Investment and Development의 주식 60%를 취했다. Shuanghui Investment and Development는 미국에 본사를 둔 Smithfield Foods―세계에서 가장 큰 식용 돼지고기 생산회사―를 샀다. 또한 골드만삭스는 3억 달러로 푸젠성과 후난성―우한의 바로 아래 지역이며 도시의 야생식품 조달권 내에 있다―에 있는 10개의 가금농장의 소유권을 얻어냈다. 또한 도이체방크(Deutsche Bank)와 함께 같은 지역의 식용 돼지사육에 3억 달러를 투자했다. 이렇듯 COVID-19의 발발의 원인들의 고리의 일부는 애초에 뉴욕에서 뻗어나가고 있다. 중국의 농업의 크기에 비해 골드만삭스의 투자가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말이다.

트럼프가 인종주의적으로 ‘중국 바이러스’ 운운하는 것과 같은 민족주의적인 손가락질은 국가와 자본이 서로 전지구적으로 엮여있는 상황을 가린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발생하며 국가가 관리하는 것으로 되어있는 팬데믹은 체제의 관리자들과 수혜자들이 번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2월 중순에 5명의 미국 상원의원들과 20명의 하원의원들은 팬데믹이 오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은 산업분야들에서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수백만 달러의 주식을 싼 값에 팔았다. 정치꾼들은 팬데믹이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다는 공적인 메시지가 계속적으로 나오는 가운데 대중에게는 발표되지 않은 정보를 기반으로 내부자거래를 했다. 미국의 부패는 이런 이기적인 탈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에 걸친 것으로서 자본이 빠져나갈 때 미국의 자본축적 사이클이 종말을 맞음을 알리는 표시이다.

생태학(그리고 그와 연관된 전염병학)의 현실보다 금융을 더 우위의 놓는 사물화된 태도를 중심으로 자본의 물줄기가 계속 분출되도록 하려는 노력은 무언가 좀 시대착오적이다. 이런 노력의 관점에서 보면 팬데믹은 가령 골드만삭스에게도 성장의 여지를 제공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살육에 섬뜩해진 전 세계의 사람들은 이와 다른 결론들을 낸다. 병원체들이 방사성 꼬리표(radioactive tags)[‘방사성 꼬리표달기’는 어떤 원소의 정상적인 동위원소를 방사성 동위원소로 대치하여 그 원소를 추적하는 것을 가리킨다]처럼 차례차례 표시하는 자본과 생산의 회로들은 터무니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우리 그룹은 치명적인 질병의 출현을 낳은 삼림파괴를 항상 토착민들과 지역 소자작농들 탓으로 돌리는―에코헬스(ecohealth)[Ecohealth Alliance를 말하는 듯하다]와 <원 헬스>(One Health)에서 발견되는―근대의 식민 의료를 넘어서는 모델을 도출하는 중이다. [주석으로 달린 “The dawn of Structural One Health: a new science tracking disease emergence along circuits of capital”의 저자들―일부 저자들이 이 글의 저자들과 겹치는 것으로 보아서 두 글의 입장은 동일한 듯하다―은 ‘One Health’가 가축유행병 유출의 사회적 규정요인들을 통합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 이 결핍을 메운 자신들의 모델을 ‘구조적 원 헬스Structural One Health’라고 부르고 있다.]

신자유주의적인 질병 출현에 대한 우리의 일반이론은 아래와 같다.

자본의 전지구적 회로가 근본적인 문제다. 더 구체적으로는 유독한 병원체들의 개체수의 성장을 억제하는 환경복합성을 파괴하는 식의 자본 배치가 문제다. 그 결과로 병원체가 유출되는, 즉 원래의 야생동물 숙주에서 나와 인간 공동체로 진입하는 사건들의 속도와 분류학상의 폭이 증가한다. 도시 주위의 확장된 상품회로들이 이 유출된 병원체들을 가축과 노동력을 매개로 후미진 지역에서 해당 지역의 도시들로 옮긴다. 증가하는 전지구적 여행(및 가축 교역) 네트워크가 병원체들을 이 도시들에서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재빠르게 배달한다. 이 네트워크들이 전염과정에서의 마찰을 낮추어 가축과 인간 모두에서 더 치명도가 높은 병원체의 진화를 가능하게 한다. 가축의 생식이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즉석에서 (그리고 거의 무상으로) 질병으로부터의 보호를 제공하는 생태계 서비스인 자연선택이 제거된다.

심층에 있는 전제는, COVID-19와 그와 같은 기타 병원체들의 원인은 어떤 한 감염원이나 그 임상과정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 및 기타 구조적 원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고정시켜 놓은 생태계 관계들의 장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탈소외(disalienation)가 다음의 거대한 인간의 이행방향이다. 정착자 이데올로기를 버리는 것, 인류를 재생성의 순환으로 되돌리는 것, 자본과 국가를 넘어서 다중들 속에서 개인화의 의미를 다시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원인을 경제에서만 보는 것은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머리가 여럿인 히드라로서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전유하고 내화하고 질서짓는다. 자본주의는 인종, 계급, 젠더가 복잡하게 서로 연결되어있는 지형을 가로질러 작동한다.

우리는 탈소외를 통해 이 다양한 억압의 위계들과 이 위계들이 지역마다 특수하게 축적과 상호작용하는 방식들을 해체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본의 확대되는 재전유의 반경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일종의 전체주의로 귀결되는 것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화한다. 심지어는 지속 가능성 자체도 상품화된다. 그리고 이는 공장과 농장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어디서나 온갖 방식으로 시장에 종속되어 있다.

자본 및 자본의 지역 대표자들과의 전지구적 규모의 충돌이라는 문을 통과해야 한다. 기업식 농업은 공공보건과 전쟁을 하고 있으며, 공공보건이 지고 있다. 이 싸움에서 이긴다면, 우리의 생태를 경제와 다시 연결하는 전지구적 물질대사로 되돌아갈 수 있다. 이는 유토피아적인 문제 이상의 것이다. 우리는 직접적인 해결책들에 집중한다. 병원체의 성장을 억제하는 숲의 복잡성을 보호한다. 가축 및 농작물의 다양성을 다시 도입하며, 병원체의 유독성의 증가와 범위 확대를 막는 범위의 동물사육 및 농작물 재배를 재도입한다. 동물들의 현장에서의 자연생식을 허용하여 병원체를 실시간으로 추적하게 하는 자연선택을 재개한다. 크게 보면,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으로 가득한 자연과 공동체를 시장에 의해서 제압되어야 할 또 하나의 경쟁자로 취급하기를 그친다.

하나의 세계를 탄생시키는 것―바로 이것이 우리의 출구이다. 지구로 되돌아간다고 말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또한 현재의 절박한 문제들의 다수를 해결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뉴욕에서 베이징까지 이동제한이 걸려 집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그런 발발을 다시 겪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전염병은 그간의 역사 대부분을 볼 때 때이른 죽음의 가장 큰 원천이었기에 언제나 위협이 된다. 우리는 1918년부터 지금까지의 100년의 시간보다 더 짧은 시간 내에 또 하나의 치명적인 팬데믹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자연을 전유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조정하여 이 전염병과의 더 나은 휴전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