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는 민중의 의지를 침식한다

 


  • 저자  :  Tim Dunlop

  • 원문 : Voting undermines the will of the people – it’s time to replace it with sortition (책 Voting undermines the will of the people it’s time to replace it with sortition에서 저자 자신이 발췌한 대목들임) (2018.08.28)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가디언』지 편집자 설명] 자신의 새 책 『모든 것의 미래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크고 대담한 생각들』(The Future of Everything: Big audacious ideas for a better world)에서 저자 팀 던롭(Tim Dunlop)은 우리의 세계를 다시 새롭게 형태짓는 방대한 기술적 전환을 살펴보면서 모두를 위해 더 나은 삶의 질을 창출하는 데 이 전환을 활용하는 방법을 고찰한다. 그는 미디어, 부의 창출, 노동, 교육, 그리고 통치방식이 어떻게 변형되어야 하는지를 탐구한다.

선거가 민중의 의지를 침식한다

 

정부의 활동방식을 고치려면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선거(투표에 의한 선출)을 임의선출(sortition)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법정의 배심원들을 뽑을 때 쓰는 것과 같은 방법이다. 의회의 구성원을 선거로 뽑지 말고 적어도 그 일부는 임의적으로 뽑아야 한다. 이것이 일반 시민들이 나랏일의 운영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곧장 나아가는 가장 간단한 길이다. 그 효과로 정치와 통치가 변할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선거가 진정한 민주주의의 초석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도 선거권을 우리의 근본적 권리의 하나로 제시한다. 민중(국민)의 의지가 선거로 표현되리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선거가 오히려 민중의 의지를 침식해버렸다. 이제 민중의 의지를 회복할 제도가 필요한데, 임의선출이 바로 그 제도이다.

 

선거의 기원은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시기인 18세기로 소급한다. 이 혁명들의 지도자들은 틀림없이 선거를 엘리트 세력이 정치적 과정에 통제력을 발휘하는 수단으로 보았을 것이다. 사실 비교적 최근까지도 땅을 소유하고 있는 백인 성인들만이 선거권을 가졌다. 이런 제한을 싸워서 제거했다고 하더라도 대의제에 기반을 둔 통치는 엘리트들이 ‘민주적’ 과정에 통제력을 행사하는 방법으로 퇴보했다. 선거에서 뽑힐 시간과 자원을 가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은 엘리트들이기 때문이다. 의심이 된다면 다음 선거에 한번 출마해 보라.

 

그런데 이런 과정을 일국의 수준으로 확대할 때 제기되는 첫 물음은 ‘우리 일반 시민들이 진짜 그 일을 할 수 있는가?’이다.

 

엘리트들은 일반인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무식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권력을 쥐는 데 가까이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의 『공화국』에서부터 엘리트들은 ‘군중의 지배’를 우려했다. 이런 우려와 비슷한 것이 오늘날 소셜 미디어에 대해 표현된다. 소셜 미디어는 민주적 군중의 무질서함의 증거라는 것이다.

 

‘너무 많은’ 민주주의는 문제라는 견해도 있다. ‘민중의 의지’가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적 저널리스트인 썰리번(Andrew Sullivan)은 미국의 헌법 제정자들이 민중의 의지와 권력의 행사 사이에 거대한 장벽을 설치해놓은 것을 찬양한다.

 

민중의 의지를 이렇게 얕보는 세력은 시민참여를 배제하는, 아니면 시민참여가 극히 어렵거나 불편한 제도를 만들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 이런 참여결핍을 시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 증거로 제시할 것이다. 주류 제도에서 배제되고 통치과정에 대한 직접적 통제로부터 배제된 시민들은 소셜 미디어의 새 플랫폼들을 사용해서 자신들의 좌절감을 표현한다. 이 상대적으로 덜 규제되는 형태의 공적 표현은 분명 내용 없는 교류로 퇴락할 수 있다. 이것이 다시 일반인들의 참여의 부적절함에 대한 결정적 증거로 제시된다. 이렇듯 엘리트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한 실제적 참여를 배제의 핑계로 삼는 것이다. 이는 운전을 배울 기회도 없었던 사람에게 운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정부의 문제해결 능력이 신뢰를 잃게 된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정치 체제가 ‘보통 사람들’을 배제하도록 설계된 데 있다. 물론 선거에는 참여하기 때문에 발언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가들은 정당의 통제 아래 있고 정당은 고유의 관심사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들은 다시 다른 주체들, 특히 부유하고 권력 있는 자들의 영향력 아래 놓인다. 정치가들은 일단 당선되면 말로는 국민의 의지를 반영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 국민이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정치가들이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은 미리 결정되어 있으며 앵무새처럼 반복된다. 이로 인해 과정 전체가 시민의 관점에서는 소극(笑劇)이 된다.

 

『더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에 실린 「제안된 상원 선거방식 변화가 호주의 민주주의를 해칠 것이다」(“The proposed Senate voting change will hurt Australian democracy”)라는 글에서 정치학자 드라이젝(John Dryzek)은 이렇게 말했다. “호주의 연방 의회는 오늘날 ··· 안건을 숙의하는 곳이 아니라 여러 당에 속하는 정치가들이 대부분 의례적으로 자신의 말만 해대는 극장이다. 당 정치가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성찰하지 않고 자신들의 견해를 바꾸지 않는다.” 드라이젝이 보기에 훌륭한 숙의의 본질은 참여한 사람들이 견해를 바꿀 의지와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진정한 숙의는 민중이 동등한 주체로 모여서 어려운 결정을 하는 데 관여되는 모든 사실적·정서적 요소들을 터놓고 다룰 때에만 생긴다. 당 정치로 인해 정치가들은 이러한 숙의의 능력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다.

 

나는 ‘시민의회’(People’s House, 민중의회)라 불리는 새로운 의회를 창출할 것을 제안한다. 이곳이 상원이나 하원과 다른 것은 그 의원들이 임의로 선출된다는 점이다. 성인 시민이라면 누구라도 생애의 어떤 단계에서 배심원에서 봉사하도록 요청을 받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시민의회에서 봉사하도록 요청받을 수 있다. 배심원들이 범죄 재판의 결과를 결정하듯이, 시민의회의 의원들은 입법과 관련하여 숙의하고 투표하게 될 것이며 따라 나라를 운영하는 방식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지금 전 세계의 정치체들에서는 시민 배심단, 공론조사(deliberative poll), 혹은 기타 형태의 엘리트-대중 논의와 관련된 작업이 상당히 많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임의로 선출된 평범한 시민들로 구성된 의회가 잘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공론조사는 정보에 기반을 둔 대중의 견해를 얻기 위해서 선출된 참여자들끼리 광범한 논의를 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를 위해 여론조사 회사에서 임의로 선출한 참여자들을 이틀 동안 한 장소에 모아놓고 소집단을 이루어 서로 토론을 하거나 여러 견해들을 대표하는 전문가들에게 질문을 할 수 있게 한다.

 

1998년에 ‘호주가 공화국이 되어야 하는가 아닌가’라는 주제에 대한 공론조사가 행해졌다. 이 조사를 행한 기관―Issues Deliberation Australia―에 따르면 “호주인들은 참여할 기회를 잡으려고 달려들었다 ··· 원래의 목표보다 47명 많은 347명이 최종 선출되어 10월 22일 캔버라(Canberra)에 도착했다.”

 

이 숫자는 참여자들이 자신들이 다룰 문제가 중요하며 논의의 자리가 믿을 만하다고 인식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일반 시민들은 그들을 위해 모인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질문할 기회를 가진 것에 기뻐했으며 확신이 커지면서 자신들이 받는 정보에 기꺼이 도전하려고 했다.

 

이런 포럼들이 있다고 해서 일반인들이 갑자기 전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문가들과 비전문가들 사이의 토론을 더 평등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포럼들은 대중의 지식을 향상시키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 참여자들 사이에 신뢰와 존중의 생성을 촉진하는 협동과 숙의의 자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시민들을 그저 무식하기만 한 존재로 보고, 시민들은 전문가들을 우월한 지식에서 나오는 힘을 주장하기만 하는 엘리트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포럼은 서로 적대적으로 보는 이런 경향을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이런 환경에서 전문가로서 움직이는 사람들은 단지 일반인 청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견해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식을 일반인 청중이 어떤 문제에 관해 자신의 결론에 도달하는 데 쓰일 수 있도록 만든다.

 

우리가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를 경험하면서 배우는 교훈은, 이것을 우리의 거버넌스 과정의 더 공식적이고 영속적인 부분으로 확대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할 가치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반인들이 유리되어 있거나 무관심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은 결코 현실화될 수 없다는 식의 주장은 경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정치 제도를 상향식으로 바꾸고자 한다면 이렇게 일반인들을 권력의 중심부에 위치시키는 것이 핵심적이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경제와 대의제는 우리를 분할하고 서로 싸우게 만들기 위해 온갖 짓을 하고 있다. 시민의회는 이런 분할을 넘어서 한데 모이기 위한 것이다. 임의선출은 기본 개념상 매우 직접적인 것이며, 그것을 가령 호주 상원에 다른 힘들을 그냥 둔 채로 도입하여 선거를 대체하는 것은 적어도 행정적으로는 극히 미미한 변화만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모든 다른 수준에서는 그 잠재적 효과가 폭발적이다. 정당들과 그 많은 로비스트들의 힘이 일거에 삭감될 것이다. 미디어가 정치를 취재하는 방식도 변형될 것이다. 입법과정의 적어도 일부에 대한 통제력이 인구 전체를 진정으로 대표하는 사람들에게 쥐어질 것이다. 현재의 체제에서는 바랄 수도 없는 방식으로 민중에게 힘이 부여될 것이며 우리의 정치 제도가 공통적인 삶과 다시 연결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적 힘의 주된 원천이 사회 전체를 진정으로 대표하는 사람들로 채워지기 전에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선거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머리에 못이 박히게 배웠지만 이는 완전히 틀렸다. 배운 것을 빨리 토해낼수록 더 좋다. 진정으로 대표적인,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정부’를 원하면 그 정부를 선거가 아니라 임의선출을 통해 구성해야한다.




활동가 네트워크에서 연결된 다중까지


  • 저자  :  Amador Fernández-Savater, Guiomar Rovira
  • 원문 : “No Future: From Punk to Zapatismo and Connected Multitudes (2018.08.07) /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
  • 스페인어 원문 : https://www.eldiario.es/interferencias/punk-zapatismo-multitudes_conectadas-red-accion_colectiva_6_748285172.html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이 텍스트는 기오마르 로비라(Guiomar Rovira)의 책 『네트워크화된 행동주의와 연결된 다중들 ―인터넷 시대의 소통과 행동』(Activismo en red y multitudes conectadas: Comunicación y acción en la era de Internet)(([정리자] 영어로 ‘Networked Activism and Connected Multitudes’라고 옮겨져 있지만, 영어본은 아직 없는 듯하다.))의 출판기념회에서 있었던, 아마도르 페르난데스-싸바떼르(Amador Fernández-Savater)와 로비라의 인터뷰(2017년 9월 19일 UAM-Xochimilco에서 행해짐)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원래 스페인어로 된 인터뷰를 후아레스(Gerardo Juárez)가 영어로 옮겼고 페르난데스-싸바떼르가 편집했다. 영어본을 옮기다보니 의미가 잘 안 통하는 부분들이 있어서 스페인어 원본을 보고 영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의미의 손실이 다소 생긴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고 스페인어본만으로 옮기자니 능력도 시간도 부족해서 결국 영어본을 우선으로 하고 스페인어본으로 확인하는 방식을 취하다보니 분류상 ‘번역’보다는 ‘정리’의 형태로 귀착되게 되었다. 물론 정리로서는 매우 상세한 것에 해당한다.

 

[스페인어 편집자의 설명]

90년대 일어난 소련의 몰락 이후 ‘단일한 사유’(([영역자주1] ‘단일한 사유’(Pensée unique)는 프랑스 저널리스트 칸(Jean-François Kahn)이 만들어낸 말로서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에의 순응을 가리킨다.))에 대한 말이 많이 돌았다. 이는 시장 민주주의를 공통적 삶의 상상 가능하고 식별 가능한 유일한 틀로 제시하는 담론이다. 촘스키(Noam Chomsky)가 말했듯이, 이 내러티브가 침투하는 유일한 방식은 정보와 미디어의 집중, 즉 발언권과 가능한 것의 상상의 집중이었다. 이는 바로 신자유주의의 번성기였다.

로비라는 『네트워크화된 행동주의와 연결된 다중들 ―인터넷 시대의 소통과 행동』에서 어떻게 이 신자유주의라는 독백에 물음을 던지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힐지에 대해서 말한다. 책은 인터넷의 개방적이고 탈중심화된 구조를 활용한 활동가 네트워크들의 출현에서 시작한다. 이 네트워크들은 공식적 내러티브와 구분되는 이미지·단어·감정을 보급할 새로운 테크놀로지 도구들을 창출했다. 이는 사빠띠스모와 반지구화운동의 시기였다. 나중에 웹2.0과 함께 네트워크들의 정치화된 활용이 사회화되어 누구에게나 접근이 가능해진다. 이는 연결된 다중의 시대이며 여기에는 15-M을 비롯한 운동들이 포함된다.

기오마르의 서술은 일반적인 학술적 글들과 두 가지 점에서 다르다. 우선 이 책은 비판적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긍정적이다. 일단 사람들이 전유했을 경우의 테크놀로지가 가진 정치적 활력이 긍정된다. 저자는 권력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지 않는다. 우리의 활력부재에 대해서 말하지도 않고 우리가 지배당하고 조작당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으며 우리가 희생당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행해진 것, 행해지고 있는 것, 행해질 수 있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녀는 세상을 활력의 관점에서 본다.

둘째, 이 책에는 몸으로 겪은 체험이 담겨 있다. 저자의 개인적 경험 ―펑크, 사빠띠스모(Zapatismo) 혹은 멕시코의 ‘나는 132번째다’(#Yosoy132) 운동을 거쳐간다― 이 성찰의 바탕을 이룬다. 로비라는 까딸루냐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서 1994년 이래 멕시코에 와서 살고 있다. 그녀는 여러 글들의 저자이며 멕시코시티의 우암-호치밀꼬 대학(UAM-Xochimilco University)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아마도르

당신의 책에서 말하는 최초의 역사적 시기는 ‘활동가 네트워크들’의 시기입니다. 그 근본적인 구성요소들 가운데 하나가 당신이 80년대에 바르셀로나에 살면서 개인적으로 경험한 펑크(punk)입니다. 펑크는 어떻게 이 네트워크들의 창출에 영향을 미쳤나요?

 

기오마르

거기서 출발하시니 좋군요. 펑크가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들 가운데 하나는 ‘미래는 없다’입니다. ‘미래는 없다’에 집중하는 것은 새로운 정치를, 훨씬 더 예시적인 정치를 열어젖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토피아를 기다리며 꿈꾸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을 하는 것, 그것을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원하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시작하기 위해서 지시나 승인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음악과 공간을 전유했습니다. 펑크에서는 누구나 기타 등을 들고 노래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든 가까이 놓인 것을 가지고 하는 DIY 정신을 발견합니다. 문화적인 것이 정치적이 됩니다.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약속을 위해 늘 지체시키고 희생시키는 체제의 정해진 경계를 떠나는 하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팬진(fanzine)(([정리자] ‘팬진’(fanzine = fan a+ magazine/-zine)은 특정의 문화현상(문학 장르나 음악 장르)의 열광자들이 관심을 공유하는 다른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비전문적이고 비공식적으로 발행하는 잡지이다. 이 용어는 1940년 10월에 쇼브네(Russ Chauvenet)가 발행한 과학소설 팬진에서 처음 사용되어 과학소설 열광자들 사이에 널리 퍼졌으며 다른 공동체들이 이를 채택했다. (영어위키피디아)))에서 건물점거(squatting)까지 펑크는 매우 풍요롭습니다. 미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살아야 합니다. 집이 없기 때문에 건물을 점거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이 운동은 초국적이 되었습니다. 국가적이거나 국민적인 것이 아니라 도시의 공간들에, 네트워크들의 창출에 각인되었습니다. 확장된 의미의 공동체인 것이죠. 지역을 전유하는 전지구적 운동이며, 누구나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는 정치이고, 문화 및 소통형태를 허가를 구할 것도 없이 구축하는 운동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펑크는 해커 정신을 미리 구현합니다. 그 당시 저는 레트라 아(Lletra A)라고 불리는 잡지에서 활동했는데, 우리는 전부 손으로 자르고 붙여서 이 잡지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또 바르셀로나에 점거활동을 위한 매우 중요한 공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수수한 자기조직된 사회센터 엘 안티(el Anti)를 열었는데, ‘미래가 없으니 우리의 삶을 지금 구축하자’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우리의 활동은 대항정보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변부에 생태계를 창출하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사빠띠스모와 ‘희망 인터내셔널’(the Hope International)

 

아마도르

활동가 네트워크들을 창출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는 둘째 계기가 있는데요, 바로 사빠띠스모(Zapatismo)입니다. 사빠띠스모는 펑크와 달리 ‘어두운’ 운동이 아닐 것입니다. 사빠띠스모는 메트로폴리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희망의 지평을 엽니다. 사빠띠스모와 테크놀로지 그리고 소통의 관계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해주실 수 있나요?

 

기오마르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우리는 ‘역사의 종언’을 특징으로 하는 일극 세계에서 살았음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가장 놀랍고 뜻밖의 장소에서 반란이, 희망이,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운동이 일었고 저는 이 운동에 완전히 빨려들었습니다.

사빠띠스모의 의의는 전지구적인 공통의 틀을 가능하게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당시는 투쟁 전체에 의기소침의 분위기가 팽배할 때입니다. 전지구적으로 좌파가 기가 꺾이고 남미의 게릴라들이 침체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고립된 저항의 과정들로부터 우리를 구하는, 물음을 던지는 틀이 탄생한 것입니다. 많은 상이한 투쟁들로 하여금 공유된 하나됨의 감각과 공동의 적을 두고 있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능동적 기동의 틀입니다. ‘인류 대 신자유주의’가 바로 그 틀이라고 사빠띠스따는 말했습니다. 누가 이 틀을 제안했나요? 토착민 공동체나 저항이 혹은 투쟁의 가능성이 있으리라고 생각도 못하는 세상의 저 구석 치아파스에 있는 가장 망각되어 있고 가장 규모가 작은 토착민들입니다.

이 일은 전지구적으로 미디어의 관심을 받은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전통적인 매스미디어(신문, 라디오, 텔레비전)들이 보도를 했지요. (월드와이드웹은 태어난 지 갓 1년 되어서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신문과 라디오는 이 기사를 더 이상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반란을 세상을 위한 희망의 장소로 지지하면서 치아파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함께하고 그것에 개입하는 방법들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아마도르

이때 인터넷의 활용이 일어났지요? 당시 인터넷은 새로운 소통 수단이었습니다. 어떻게 된 것인가요?

 

기오마르

인터넷의 활용은 거의 자연스럽고 자연발생적인 일이죠. 전통적인 미디어로부터의 정보가 없기 때문에 대안 미디어가 그 공백을 메우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주류 미디어에, 주도적인 신문들에 참여하면서 기사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대안적 라디오 방송국들, 대안 미디어, 팬진들에도 많은 정보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이 미국인들이 (미국인들도 때로는 좋은 일을 합니다!) 우리에게 ‘인터넷을 사용해야 한다’고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이들은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돌아다니면서 컴퓨터에 모뎀과 이상한 장치들을 설치하는 최초의 해커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매니아들이 뭐 때문에 야단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3개월이 안 되어서 우리 모두 인터넷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모두’라고 말했을 때 이는 저널리스트들, NGO들, 활동가들을 지칭합니다. 치아파스에서 일어난 혁명을 다루는 최초의 웹사이트들이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했습니다. 몇몇 미국 학생들은 상황을 좇으면서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의 성명서들을 알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성명서들은 팩스에 의해서 보내졌으며 그 다음에 ‘Ya Basta’라고 불리는 웹사이트에 공표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해서 성명서들을 영어로, 프랑스어로 그리고 또 다른 언어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렇게 정보가 공유되기 시작하고 정보의 비계가 치아파스의 상황을 중심으로 구축되었습니다. 이는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멕시코 정부는 국제적으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밀어붙이는 데 열중했는데 이제 상황이 달라진 거죠. 그런데 정보만이 유통되는 유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치아파스로 갔고 공동체들을 방문했으며 더 많은 정보를 생성했습니다. 주고받기가 이루어졌습니다. 정보를 받은 사람들이 토착민 반란을 지지했고 토착민 반란은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제안했습니다. 이는 세계의 많은 곳에서 반향을 찾고 차이들을 넘어 공통의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호소였습니다.

 

발터 벤야민 : 무엇보다도 활력

 

아마도르

활동가 네트워크에서 연결된 다중으로 넘어가기 전에 고전적인 저자 벤야민에게서 당신이 발견한 것에 대해서 잠깐 질문을 하고 싶군요. 벤야민의 어떤 점이 그를 일종의 우군으로 보게 만들었나요?

 

기오마르

제가 벤야민에게서 발견한 것은 매우 은유적이고 시적이며 정치적 영감입니다. 그는 암흑과도 같은 자신의 시대에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그 어떤 사람보다 뛰어나게 빛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벤야민은 저로 하여금 매 순간, 매 장소에서 활력을 발견하고자 하는 저의 욕구를 이해하게 해주었습니다.

기술은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 기술은 자연과 우리의 관계가 적대적이지 않은, 더 충만한 세계에서 살 가능성을 나타냅니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생사를 가르는 폭력에 처하도록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기술의 활력을 왜곡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창출된 고통과 희소성에 기반을 둔 약탈적 자본주의입니다. 삶을 축출하고 강탈을 통해 축적을 한다는 비난은 인터넷에 가해질 것이 아니라, 기술이 인류에 복무하지 않고 희소성을 약탈적으로 산출하는 자본주의에 복무하는 전지구적 체제에 가해져야 합니다. 벤야민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다른 가능한 근대를 구상하라고 우리에게 권유합니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벤야민은, 우리 모두가 기술을 전유해서 능동적 주체가 되어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더 충만한 삶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민주화 가능성이 생성되는 것을 봅니다. 「역사철학에 관한 테제」에 나오는 ‘지금 시간’(jetztzeit)―모든 것이 열리는 일종의 현현이 ‘지금 이곳’에 성좌처럼 빛나는 순간―이라는 생각도 주목할 만합니다. 성좌라는 생각은 제 책에서 계속 나옵니다. 우리보다 앞서간 사람들은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하라고 우리에게 청합니다. 그런데 운동에 단일한 하나의 계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운동이 제각각 고유한 역사를 구축하고 그 빛나는 순간들을 창출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의 운명을 구체화합니다. 이는 정치적인 것의 바탕에는 과거에의 열림도 존재한다는 점을 매우 창조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됩니다.

벤야민은 영감의 원천입니다. 그는 나의 할아버지의 고향인 뽀르보우(Portbou)에서 죽었습니다. 올해 여름 나는 그의 무덤을 보러갔습니다. 그는 끔찍한 삶을 살았고 그가 응당 받아야 하는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러면서도 당대의 가장 낙관적인, 가장 창조적인 지식인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고통을 겪는 사람이 열림을, 가능성을, 활력을 가장 잘 볼 수 있습니다.

 

연결된 다중 : 모든 사람의 손에 쥐어진 테크놀로지

 

아마도르

처음에는 활동가들의 네트워크가 있었고요 활동가들이 테크놀로지를 전유했습니다(펑크, 사빠띠스모, 반지구화 운동). 그 다음 운동은 활동가들의 네트워크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킨 것으로서 ‘연결된 다중들’(connected multitudes)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이행에 대해서 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오마르

활동가들의 네트워크의 소통 환경은 주로 전투적 활동가들, 즉 정치적 의식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채워져 있습니다. 연결된 다중들로의 이동은 주된 목소리가 더 이상 활동가들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로 크게 특징지어집니다. 사회적 네트워크를 사용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정치화를 거치거나 어떤 특정한 활동가 공간에 속하지 않고 발언권을 가집니다. 이는 이윤을 추출하는 네트워크들인 트위터, 페이스북, 유튜브처럼 ‘정치적 올바름’에서 벗어난 공간들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멕시코의 ‘나는 132번째다’(#Yosoy132) 운동을 예로 들어봅시다. 시위를 시작했던 모든 이베로아메리카 대학의 학생들이 이전에 이미 정치화되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느꼈고 뻬냐 니에또(Peña Nieto) 대통령의 대학 방문에 대한 말이 나온 후에 불만을 표현해서 미디어에서 들리게 할 도구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이 유튜브에 업로드한 비디오가 인상적인 영향을 미쳐서 사람들의 분노를 고조시켰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공감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중요한 운동이 UNAM(([영역자주2] 멕시코 자율대학(Universidad Nacional Autónoma de México or National Autonomous University of Mexico)은 연구개발에서 세계 최고의 대학 가운데 하나이다. 더 자세한 것은 위키피디아 참조.))에서 혹은 오랫동안 부당한 상황을 비판하며 이를 갈던 사람들에게서 나오지 않고 전혀 뜻밖의 예측할 수 없던 집단에서 나올 수 있었는지, 모든 사람들이 의아해 합니다.

그 투쟁에서 마누엘 까스뗄스(Manuel Castells)가 ‘대량자주소통’(Mass Self Communication)이라고 부른 현상이 산출됩니다. 누구나가 정보 생산자, 리믹스하는 사람, 리트윗하는 사람이 되고, 누구나가 대화에 참여하고 가령 그래픽 아트 같은 자신의 능력으로 운동을 강화합니다. 내보내는 과정과 받아들이는 과정의 구분이 흐려지며, 기원, 권위, 원(原)저자 같은 오래된 관념들의 견고성이 감쇠됩니다.

 

아마도르

당신의 책은 대안적 소통의 단계들에서 일어난 이 이행의 긍정적 성격을 부각시킵니다. 이는 민주화 과정입니다. 만일 이전에 네트워크들이 활동가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면, 이제 테크놀로지의 정치적 사용은 모든 사람의 손에 쥐어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우리는 그 사이에 해커 정신에서 결정적인 요소들인 테크놀로지 기반시설과 테크놀로지 주권의 중요성을 시야에서 놓치고, 시스템을 우리가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네트워크들 덕분에 얻게 되는 내용의 보급에서의 ‘편의’만을 보는 것은 아닐까요?

 

기오마르

당신이 언급한 것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우리가 놓치는 것에 대해 당신이 말한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군요. 내 생각에 스노우든과 위키리크스의 폭로 덕분에 우리는 네트워크를 별 의식없이 자동적으로 사용하는 데서 더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데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내 생각에 우리는 사회적 네트워크에서의 감시, 통제 및 데이터 전유에 대해 훨씬 더 잘 알고 있는 새로운 운동의 출현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높은 의식은 이전에는 없던 것이며 우리가 이에 도달한 것은 일부 해커들의 활동 덕분입니다. 나는 스노우든, 첼시 매닝, 줄리언 어산지를 해커들로 봅니다. 그들은 왜 우리가 조심해야 하고 토르(Thor)를 사용하고 프리소프트웨어를 사용해야 하는지를, 왜 우리가 안전한 비밀번호를 가질 필요가 있는지를, 그리고 웹을 책임감 있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결과가 어떨지 보기로 하죠.

 

함께 하기

 

아마도르

지식인들이 손가락을 올리면서 우리에게 ‘잘못 되고 있으니 조심하세요’라고 말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테크놀로지의 더 많은 사회적 전유, 더 많은 학습, 더 많은 테크놀로지 리터러시(technology literacy), 더 많은 핵랩들(hacklabs)입니다. 내 생각에 이는 당신의 책이 전하는 핵심 메시지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당신은 인터넷 외부에서는 해결책이 발견되지 않으리라고 주장하면서도 인터넷이 안 좋아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기오마르

테크놀로지에 대한 담론 차원의 비판은 결코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 합니다. 우리는 공간들을 전유하고 협동형태들을 구축하며 우리가 아는 것을 공유함으로써,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우리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하고 전과는 다른 방식들을 생성함으로써 네트워크에서의 사회성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내 책에서 ‘해커 되기’라고 불렀습니다. 해킹은 단순히 테크놀로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에게 해킹은 테크놀로지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해커는 무언가를 해체하고 그 다음에 새로운 것을 구축합니다. 블랙박스처럼 주어진 것을 해체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것이죠. 이는 테크놀로지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어디에서든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대학에서든 인간관계에서든,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잠재력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해커페미니즘 전문가인 브리오네스(Fernanda Briones)는 ‘함께 해요’라고 말합니다.(([영역자주3] 원어로는 “Hagámoslo juntas”이다. 스페인어 어휘에는 성(젠더)에 따른 변화가 있다. “juntas”는 “함께”(together)의 여성형[복수]이다. 15M운동 이후에 기본형인 남성형(‘juntos’)보다 여성형이 더 자주 사용되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젠더의 사람이든 젠더가 혼합된 집단을 서술하는 경우에는 여성형을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아마도르

테크놀로지와 신체들의 관계, 즉 바이트의 세계와 원자의 세계의 관계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기오마르

온라인 세계와 오프라인 세계의 구분을 넘어서 모든 것이 온-라이프(on-life)로, 즉 삶에서 일어난다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이런 식으로 보면, 조우라는 신체적 경험이 열쇠입니다. 나가서 서로 바라보고 신체와 신체의 연결을 경험하는 것, 신체적 조우, 나타남의 공간들을 열고 신체의 민감함을 실험하는 것―이것이 내가 보기에 열쇠입니다. 이렇게 네트워크를 이루게 되면 수탈적인 자본주의와 접하고 있는 조건에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두가 공통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신체들의 조우가 탁월한 정치적 계기인 거죠.

내 생각에 신체의 민감성과 연관된 이 차원이 주의주의적 행동주의를 무언가 더 살아있고 덜 계획된 것으로 변형시켰습니다. 신체는 가시화되고 상호작용하며, 공락·정동·돌봄의 공간들을 창출하는 동시에 사적인 것을 정치화합니다. 현재 내 생각으로는 연결된 다중의 페미니즘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페미니즘의, 불가피해지는 페미니즘의 자유로운 전유와도 같은 것이죠. 그 어떤 해방운동도 여성들의, 페미니스트들의 오랜 투쟁에서 나오는 폭넓게 다양한 제안들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신체를 통해 일어납니다.

나는 거리에서 조우하는 신체들과 네트워크를 통한 소통을 서로 분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일종의 사이보그입니다. 우리는 테크놀로지로 된 우리 자신의 연장부분을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정치와 연관해서 말하자면, 테크놀로지는 집단적 행동의 일부가 됩니다. 부가적이거나 상이한 어떤 것이 아닙니다. 잘 생각해보면, 가장 중요한 사이버공간 및 네트워크 행동은 항상 거리에서의 집회라는 맥락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동하기는 소통하기이며 소통하기는 행동하기입니다. 모든 것이 라이프 차원에서 일어납니다. 우리의 두뇌들이 궁극적인 플랫폼입니다. 신체적인 것의 외부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네트워크들이 신체적인 것의 외부에 있다는 생각이 매우 강한데요, 나는 이와 반대로 생각하고자 합니다.

 




페미니즘과 혁명: 과거를 되돌아보고, 앞날을 내다보며


  • 저자  :  Julie Matthaei(([옮긴이] 줄리 매사이(Julie Matthaei) : 웰즐리 대학(Wellesley College) 경제학 교수. 페미니즘 경제학과 젠더•인종•계급에 관련된 정치경제학을 가르친다. 그녀는 <미국연대경제네트워크>(U.S. Solidarity Economy Network)의 공동 설립자이자 이사이며, 근간 도서 『불평등에서 연대로: 21세기를 위한 새로운 경제를 공동으로 창출하기』(From Inequality to Solidarity: Co-Creating a New Economics for the Twenty-First Century)의 저자이다.))
  • 원문 : “Feminism and Revolution: Looking Back, Looking Ahead (2018.06) / CC BY-NC_ND 4.0
  • 분류 : 번역
  • 옮긴이 : 민서

 

반세기 전에 ‘제2물결’ 페미니즘이 퍼지고 난 후 페미니즘 운동은 점차 더 포괄적이고 조직적으로 되었다. 초기에 맑스주의-페미니스트들은 진정한 여성해방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것이 필요하며 따라서 한때 페미니스트와 반계급주의자의 입장에서 정치는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곧 그들 역시 인종•민족성•성적 지향성 및 여타 정체성과 사회적 위치의 원천들에서 발생하는 억압을 인정하는 이론과 실천을 확장하라는 도전에 직면했다. 이 도전에 응하는 것이,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에 뿌리를 두고 있고 페미니즘 운동 내부에서 그리고 여타 운동들과의 관계에서 발현되는 연대정치를 낳았다. 중요하게도 이 새로운 정치는 연대경제에서 새로운 실천과 사회제도를 창출함으로써 개인들이 급진적인 사회변화에 참여하는 방식을 제공한다. 확고하고 포괄적인 페미니즘은 모든 종류의 억압을 없애는 ‘거대한 이행’에 필요한 더 큰 연대정치와 연대경제를 구축하는데 여전히 필수적이다.

 

1. 서론

누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싸움을 이끌 것인가? <거대한 이행 기획>(The Great Transition Initiative, GTI)은 세상을 공정하고 지속가능하게 바꿀 수 있는 “전지구적 시민운동”의 출현을 10년이 넘도록 확인했다. 이 운동이 하나의 온전한 운동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인데, 과거 50년에 걸친 페미니즘의 진화가 귀중한 교훈을 제공한다.

미국 맑스주의-페미니스트이자, 반인종차별주의자 및 생태경제학자로서 나는 이론과 실천 측면에서 이 진화의 일부분이었다. 1970년대 초 제2물결 페미니즘에 꼭 필요한 부분으로서 우리 맑스주의-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억압적인 시스템과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할 것을, 다시 말해 이 두 가지를 극복하지 않고는 해방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단지 여성다움이라는 정체성에 기반을 둔 정치나 노동계급 혁명을 중심으로 하는 맑스주의적 계급정치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었다.

곧 우리와 여타 페미니스트들은 우리의 렌즈를 더 확장해야 할 필요성에 맞닥뜨렸다. 젠더•계급•인종•섹슈얼리티•민족성 등등의 정체성들은 상호간에 결정하고 있다는 통찰력이 새로운 개념인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을 낳았다. 일부 사람들은 정체성과 억압의 형태들이 상호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분열을 초래하는 것으로 판명되리라고 우려했지만 분열에서 시작한 것이 새로운 형태의 정치 즉 연대정치를 낳았다. 연대정치는 운동들을 가로질러 그리고 운동들 내부에서 사람들을 결속시킬 수 있고 어떤 성공적인 전지구적 시민운동에라도 기본적인 틀을 제공한다. 사실 이 동학은 현장의 다양한 사회 운동들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고 연대경제에 기반을 둔 새로운 실천과 제도의 발전에 영감을 주고 있다.

 

2. 페미니즘, 맑스주의와 만나다

1970년대 초에 제2물결 페미니즘(참정권 획득에 초점을 맞춘 제1물결과 대조해서 이름 붙여진 것)이 미국과 그외 지역에서 폭발적으로 일었다. 의식을 고양하는 집단에서 만난 여성들은 풀뿌리 조직들을 형성하여 사무직 조직화에서부터 미디어 개혁에 이르는 광범위한 페미니즘 투쟁에 참여했다. 주류 페미니즘 조직들은 재생산권을 보장하는 데, 그리고 유급노동자로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 및 기회를 획득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에는 또한 활동적인 좌파인 맑스주의/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포함되었으며 그들은 자본주의와 혁명에 대한 맑스주의 이론을 발판으로 삼으면서도 이를 비판했다. 맑스주의/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맑스주의의 이론적 틀이 자본가들이 여성을 노동자로서 억압하는 것을 분석하지만 가정과 일터에서 남성들이 여성을 억압하는 문제를 간과하고 있는 것에 주목했다. 이상적으로는 노동계급 운동을 혁명적으로 표현하는 노동조합이 여성들의 평등과 관련하여 복잡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19세기에 노동조합들은 여성을 고임금직에서 배제하고 가정에 묶어두는 것을 옹호했다. 전통적인 남성들처럼 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은 페미니스트들이 맑스주의와 연결될 때에는—전통적인 아내들처럼—그들의 정체성을 잃는다고 생각했다.((원주1. 미국에서 나온 두 주목할 만한 선집들로는 Zillah Eisenstein, Capitalist Patriarchy and the Case for Socialist Feminism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79)와 Lydia Sargent, Women and Revolution: A Discussion of the Unhappy Marriage of Marxism and Feminism (Boston: South End Press, 1981) 참조. 영국에서는 Annette Kuhn and AnnMarie Wolpe, Feminism and Materialism: Women and Modes of Production (London: Routledge, 1978)가 유사한 주제들을 탐구했다.))

맑스주의-페미니스트들은 또한 맑스주의의 혁명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맑스주의 이론은 노동자들을 혁명적인 사회 변화의 주체로 보고, 계급투쟁을 그 발동기로 보았으며, 사회주의 계획 경제를 목표로 여겼다. 이 변화의 비전이 너무 강력해서 소련에서 민주주의의 개탄스러운 부재가 분명해진 이후에도 초기의 맑스주의/사회주의-페미니스트들은 억압에 저항하는 여성들과 함께 조직화하는 것을 계급을 기반으로 하는 노동자 주도의 혁명을 쟁취한 이후로 연기하라는 말을 들었다. 남성 좌파들에 따르면 페미니스트들의 조직화는 노동계급을 갈라놓을 것이고 그로 인해 자본주의를 영속시킬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 맑스주의-페미니스트들은 혁명 이후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으며 맑스주의나 더 나은 사회주의 미래와 연결되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는 페미니즘이 고조되자 근본적인 변화를 느꼈고 사회주의자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로 작정했다. 우리는 두 가지 진실을 보았다. 다시 말해 여성해방은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우리의 해방을 위한 싸움을 사회주의 혁명 이후로 미룰 수도 없었다. 가정주부들은 유급노동자로 등장하면서 전통적인 결혼에서 겪던 젠더 억압에서 풀려나와 고용주에 의한 계급 및 젠더 억압을 겪게 되었다. 젠더 불평등과 지배구조가 페미니즘 운동으로 어떻게든 없어지더라도 여성들은 계속해서 노동자로서 억압받게 될 것이다.

동시에 맑스주의-페미니스트들은 적어도 지금까지 실행된 바의 사회주의 혁명으로는 여성의 억압이 없어지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소련과 유고슬라비아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여성들의 경험에 기초해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겪은 경험은 미국의 좌파남성들도 마찬가지로 성차별주의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사회주의-페미니스트로서 우리는 페미니즘적·반(反)계급주의적 조직화에 몰두했고 탈자본주의적, 사회주의-페미니즘적 체제라는 한층 폭넓은 비전 쪽으로 나아가는 데 몰두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버클리•시카고•뉴헤이븐에서의 사회주의-페미니즘적 여성들의 연합을 창출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가했는데 학자들과 활동가들은 자본주의를 페미니즘적•반계급주의적 입장에서 체계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지지하기 위해 그곳에 한데 모였다.((원주2.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여성을 다룬 것으로는 Hilda Scott, Does Socialism Liberate Women?: Experiences from Eastern Europe (Boston: Beacon Press, 1974) 참조. 사회주의-페미니즘 조합의 발생에 대해서는 “The Berkeley-Oakland Women’s Union Statement,” in Capitalist Patriarchy and the Case for Socialist Feminism , ed. Zillah Eisenstein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1979) 참조.))

우리는 맑스주의 이론을 좀 고쳐서 여성의 경제적 위치를 분석하고 해명하는 데 더 잘 사용될 수 있도록 했다. ‘가사노동 논쟁’에서 우리는 집안일이 생산적 노동이 되어 자본가를 위해 잉여가치를 만들어내는지 아닌지를 검토했다(논쟁에 대한 명확한 결론은 내리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맑스의 유물론 분석—‘생산과 재생산의 양식’을 구체화하는 분석—을 사용하여 가정관리와 육아라는 여성의 무급 노동을 자본주의의 물질적 토대의 일부로서, 따라서 혁명적인 조직화에 핵심이 되는 것으로서 분석했다. 이 논의들은 ‘가사노동에 임금’을 요구하는 운동을 활성화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 논쟁이 하나의 이론적 틀을 중심으로 한 합의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을지라도 여성의 무급 돌봄 노동을 경제적·사회적 삶의 핵심적인, 그러나 저평가된 측면으로서 부각시키고 확증했다.((원주3. Julie Matthaei, “Marxist-Feminist Contributions to Radical Economics,” in Radical Economics , eds. Susan Feiner and Bruce Roberts (Norwell, MA: Kluwer-Nijhoff, 1992), 117–144. 이 생각들은 가령 Nancy Folbre, The Invisible Heart: Economics and Family Values (New York: New Press, 2001)에서 더 발전된다.))

맑스주의-페미니스트들은 사회 전반적인 계급 억압 및 젠더 억압이 현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어떤 때는 두 가지가 일제히 작동하고 다른 때에는 자본주의 발전이 결혼한 여성들을 유급노동자로 끌어들일 때처럼 그 둘이 서로를 침식한다.((원주4. Heidi Hartmann, “The Unhappy Marriage of Marxism and Feminism: Towards a More Progressive Union,” in Women and Revolution , 1–42와 Ann Ferguson and Nancy Folbre, “The Unhappy Marriage of Patriarchy and Capitalism,” Women and Revolution , 313–338 참조.)) 두 억압 모두 맑스주의와 페미니즘이라는 두 갈래 운동에 의해 분석되고 극복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남성지배에 저항하는 여성을 조직화하고 계급지배에 저항하는 노동자를 조직화함으로써 서로 엮여있는 두 가지 경제 시스템인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이중의 투쟁을 주장했다. 이런 유형의 분석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둘 다를 공존하면서 서로 얽혀있고 억압적인 시스템으로 인정하는 분석—이 ‘이중체계이론’(dual systems theory)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중체계이론을 채택하면서 맑스주의-페미니스트들은 혁명이나 체계 변화에 대한 맑스의 기본적인 분석을 받아들여 확장했다. 우리는 경제적 변형을 억압받는 집단에 의한 투쟁으로 추동되는 혁명 과정으로 바라보는 맑스의 견해에 찬성했다.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들이 혁명의 주체인 노동자를 여성으로 대체했지만 맑스주의-페미니스트들은 계급투쟁을 혁명의 핵심적 측면으로 받아들였고 여성을 두 번째 피억압 집단으로 노동자에 포함시켰다. 우리는 여성들이 해방되기 위해 급진적인 변형을 필요로 하는 두 개의 억압 시스템—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을 개념화했다.

 

3. 상호교차성과 정체성에 기반을 둔 혁명적 정치의 붕괴

이중체계이론이 맑스주의와 페미니즘 사이의 ‘하이픈을 녹여버리는’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맑스주의-페미니스트들(그리고 모든 페미니스트들)은 곧 유색인 반(反)인종주의 여성들의 분명한 도전에 직면했다. 유색인 페미니스트들은 ‘자매애’ 내지 여성에 기반을 둔 정체성 정치라는 백인 페미니스트들의 개념들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들은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의 인종주의를, 특히 백인 여성들이 지도자 지위를 독점하는 것과 백인 여성들의 관점에서 ‘여성의 문제들’을 정의하는 것을 지적했다.((원주5. 선구적인 책들에는 Cherie Moraga and Gloria Anzaldua, This Bridge Called My Back (London: Persephone Press, 1981)과 bel hooks, Feminist Theory: From Margin to Center (Cambridge, MA: South End Press, 1984)가 포함된다.))

설상가상으로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도 페미니즘 운동에서 동성애 공포증에 항의하고 있었다. 두 집단은 백인과 이성애 페미니스트들에게 인종차별주의와 동성애 혐오에 반대한다고 솔직하게 자기입장을 밝힐 것과 그들의 실천, 강령 및 이론에 이러한 입장을 포함시킬 것을 요구했다.

여성의 억압을 자연에 대한 지배와 연결시키는 에코페미니즘은 맑스주의-페미니즘적 담론에 또 다른 차원의 복잡성을 추가했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여성되기의 확장으로서 생태운동에 참가할 것을 여성들에게 호소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요청에 따랐다. 풍부한 내용의 좌파 에코페미니즘적 분석이 발전했다. 캐롤린 머천트(Carolyn Merchant)는 『자연의 죽음』(The Death of Nature)에서 자연의 지배는 서구 과학이 출현할 때 여성의 대상화 및 여성에 대한 지배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7 뛰어난 저서인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에서 마리아 미스(Maria Mies)와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는 기본적인 생활필수품들을 공급하는 것을 중심으로 운동들의 연합을 제안하면서 계급, 젠더, 남/북, 흑인/백인 그리고 인간/자연 사이에 일어나는 지배와 폭력을 상호연결된 현 세계체제의 부분들로서 종합적으로 분석해냈다.((원주7. Maria Mies and Vandana Shiva, Ecofeminism (London: Zed Books, 1993).))

지구상의 선진지역(Global North)과 지구상의 후진지역(Global South) 사이의 분할 또한 대두되었다. 유엔이 정한 ‘여성을 위한 10년’(United Nations Decade for Women, 1975–1985) 동안 전 세계 페미니스트들이 세 번의 전 세계 회의에서 함께 모였다. 우선사항에서의 엄청난 차이들이, 특히 노동력과 재생산권에서의 평등권에 중점을 두는 선진지역 여성들과 신식민주의와 가난을 우려하는 후진지역 여성들 사이의 차이가 표면화되었다. 이런 차이들로 인해 페미니스트들은 초국적 페미니즘 네트워크를 구축하려고 노력할 때 여성 문제에 관한 그들의 관점을 확장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계급지배(남북 문제)를 포함시킬 수밖에 없었다.((원주8. Valentine Moghadem, Globalizing Women: Transnational Feminist Networks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05).))

관점을 넓히는 이런 과정에서 새로운 중요한 페미니즘 개념인 상호교차성이, 즉 인종•젠더•계급•민족 및 우리의 ‘자연’관조차 상호적으로 결정된다는 생각이 생겨났던 것이다. 페미니즘 및 반인종주의 활동가이자 법학자인 킴벌리 크렌쇼(Kimberlee Crenshaw)가 이 용어와 가장 관련이 있지만, 이 개념의 배후에 있는 사고는 인종•계급•민족•섹슈얼리티 등의 차이를 가로질러 함께 페미니즘을 조직하고자 하는 다양한 여성 집단들의 경험에서 나왔다. 그들은 여성다움에 대한 공통의 경험― 가시적으로 명백하거나 조직화의 중심 원리가 될 수 있거나 요구 창출의 기반이 될 수 있는 그러한 공통적 경험―이 없다는 것을 알아냈다. 다시 말해 여성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인종•계급•섹슈얼리티•국가 등을 가로지르면서 달라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흑인이나 노동계급이 겪는 경험에 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각 경험은 독특한 차원의 억압에서 나오지만 다른 차원들과 별개로 이해될 수 없다. 엘리자베스 스펠먼(Elizabeth Spelman)이 언급하듯이 젠더•인종•계급은 정체성이라는 목걸이의 ‘팝비즈’(([옮긴이] pop beads : 각기 다른 모양을 한 장난감용의 구슬들로서 자유롭게 꿰었다 분리했다 할 수 있다.))가 아니다.((원주9. Elizabeth Spelman, Inessential Woman: Problems of Exclusion in Feminist Thought (Boston: Beacon Press, 1988).))

상호교차성의 인식은 맑스주의-페미니즘과 페미니즘적 조직화 일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주류 페미니즘 및 맑스주의-페미니즘의 기반이었던 정체성 정치—여성은 남성에 의해 그리고 남성과 비교해서 억압받고 있다는 사고—는 여성의 경험을 분할하고 계층화하는 다른 형태의 억압들을 넘어서려는 시도를 했었다. 하지만 이 기획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억압 체계들을 간과하는 것은, 백인이며 이성애자이고 선진지역에 사는 중산층의 전문직 여성의 경험과 욕구에 특권을 부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페미니즘 운동이 계급, 인종-민족, 남-북 및 여타 형태의 불평등을 어떻게 재생산하고 있었는지를 보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젠더뿐만 아니라 인종•민족•계급•성정체성이 그리고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사고방식이 여성을 억압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페미니스트로서 함께 만날 때에 이 차이들이 드러나고 여성들을 계층화하고 분열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들에게 재계에서 성공하는 법을 조언하는 페이스북 최고 경영자 셰릴 샌드버그(Sheryl Sandberg)의 책 『린 인』(Lean In)에 관한 페미니즘 논쟁을 생각해 보라. 이 책은 많은 교육을 받고 경제적 지위가 향상된 여성들에게 두려움을 떨쳐내고 더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유리 천장을 깨는’ 법에 대해 알려주지만 이 성공 공식은 피부색과 무관하게 노동계급과 가난한 여성들에게는 애초에 가능성이 없는 공식이다. 한 좌파 페미니스트 블로거가 말했듯이, 페미니즘적 노력에서 우선해야 할 것은 유리 천장(([옮긴이] 유리 천장(琉璃 天障, glass ceiling)은 충분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직장 내 성 차별이나 인종 차별등의 이유로 고위직을 맡지 못하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경제학 용어이다. [한국어 위키피디아]))을 깨는 것이 아니라 ‘집의 지하실이 물에 잠기고 있는’ 가난한 여성들을 옹호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원주10. Laurie Penny, “Don’t Worry about the Glass Ceiling—the Basement is Flooding,” New Statesman , July 27, 2011, https://www.newstatesman.com/blogs/laurie-penny/2011/07/women-business-finance-power.))

상호교차성을 인식하는 것으로 단순한 정체성 정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여성다움에 대한 보편적인 경험이 없다면 (이는 분명히 사실이다) 여성들은 조직화를 통해 가부장제를 전복시킬 수 있는,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동질적 계급을 구성할 수 없다. 노동자들이 조직화를 통해 자본주의를 전복시킬 수 있는,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젠더와 인종을 가로지르는) 동질적 계급을 구성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으로, 젠더 억압의 경험은 변화를 위한 투쟁에서 다른 차이의 선들을 가로질러 여성들을 한데 모으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여성들은 다른 불평등들이 존재하는 정반대되는 양극단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정체성 정치는 다양하게 억압받고 있는 여성들을 정체성에 기반을 둔 별개의 집단으로 분열시킨다. 이 집단들 각각의 내부에서 갈등이 더 일면서 더 심화된 분열을 조장한다. 페미니즘의 갈래들 사이에서 일어난 이와 같은 정체성에 기반을 둔 분열이 바로 페미니즘의 새로운 ‘제3물결’을 정의하는 특징이 되었다. 백인남성 좌파들의 악몽—페미니즘이 사회주의 운동을 갈라놓고 파괴할 것이라는 생각—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사회운동과 혁명적인 체계 변화에 대한 비전의 토대인 정체성 정치가 와해된 것은 사회주의 혁명의 전망을 어둡게 하는 다른 역사적 변화들과 동시에 일어났다. 마가렛 새처(Margaret Thatcher)와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은 1979년과 1980년에 각각 반혁명을 시작했다. 노동계급과 환경을 파괴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새처가 보인 반응은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였다. 레이건이 대통령으로서 한 첫 행동은, 오늘날에도 미국 노동역사에서 그 파문들이 계속되는 악명 높은 사건인 항공 교통 관제사 조합의 파업을 중지시킨 것이었다. 1990년대가 되면 찰스 코크(Charles Koch)와 다른 우파 기부자들—이들은 케인스 학설과 정부규제를 거부했고 ‘자유시장’을 수용했다—이 자금 지원을 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힘을 얻어 자본이 의기양양하게 지배하게 되었다.((원주11. Nancy MacLean, Democracy in Chains: The Deep History of the Radical Right’s Stealth Plan for America (New York: Viking, 2017).))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혁명의 불꽃은 사그라들었다. 노조조직률은 조립라인의 해외 이전과 하향경쟁에 굴복하여 급속하게 하락했다. 소련의 민주주의 실패 및 해체 그리고 가차 없는 정치적 공격에 직면한 노동운동의 쇠퇴와 함께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널리 인용되는 자신의 책 『역사의 종언』(The End of History, 1992)에서 공산주의와 맑스주의가 죽었다고 선언했다. 맑스주의, 사회주의 및 맑스주의(사회주의)-페미니즘이 모두 구식이 된 것이었다.

 

4. 연대정치의 부상

제3물결을 특징짓는 페미니즘의 분열로 많은 사람들은 페미니즘이 죽어가고 있거나 죽었다고 믿게 되었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정체성에 기반을 둔 다른 사회 운동과의 연계를 통해 좀 더 복잡한 새로운 형태의 정치, 즉 정체성 정치를 기반으로 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연대정치’가 부상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페미니스트들, 특히 맑스주의-페미니스트들에게 상호교차성이 제기하는 과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페미니즘의 실천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페미니스트들인 우리는, 우리의 운동 내부와 사회에서 여성들이 직면하고 있는 다른 형태의 억압들 또한 인정하지 않거나 뿌리 뽑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여성들을 한데 모아 여성해방을 위해 싸우는 데 나설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페미니즘을 남성들의 억압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투쟁으로 바라보는 정치를 넘어서, 우리의 운동들로부터 그리고 우리의 경제와 사회로부터 모든 억압의 형태들—가부장제, 인종주의, 계급 차별주의, 동성애 혐오증, 장애자차별, 신식민주의, 종(種)차별주의 등—을 끝내고자 하는 연대정치를 향할 필요가 있다. 이 부상하는 연대정치는 모든 불평등의 형태를 해체하고자 하는 공유된 목적을 갖고 모든 불평등을 가로질러 사람들을 한데 모으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연대정치는 페미니즘 운동만이 아니라 일차원적 견해의 부적절성에 부딪혀 상호교차성의 문제와 씨름하는 다른 사회운동들 안에서도 발전해왔다.

페미니즘 내부에서의 이 핵심적 전환은 또 다른 형태의 연대정치가 각 사회운동 내부가 아니라 사회운동들 사이에 유대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바로 그 때에 발생했다. 전 세계 사회운동과 NGO 단체들은 노동자•여성•환경 그리고 지구상의 후진지역을 사정없이 파괴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싸우기 위해 ‘운동들의 운동’(movement of movements)에서 한데 모이기 시작했다. 이 ‘운동들의 운동’은 1999년 세계무역기구(WTO)에 반대하는 ‘시애틀 전투’에서 전지구적으로 이목을 모았고 세계무역기구,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의 다른 회의들에 대한 항의로 계속 이어졌다. 2001년에 여성운동, 노동자운동, 환경운동, LGBTQ 운동, 평화운동, 농민운동, 토착민운동 및 여타 사회운동들이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모토 아래 제1차 세계사회포럼(World Social Forum)에서 모여서,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전지구적이고 지역적인 조직화의 물결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세계사회포럼 운동의 핵심 원리는 모든 형태의 착취와 억압을 거부하는 것, 다시 말해 연대정치였다.((원주12. “World Social Forum Charter of Principles” 2002, http://www.universidadepopular.org/site/media/documentos/WSF_-_charter_of_Principles.pdf의 제10 원칙 참조.))

이런 식으로 연대정치는 페미니즘 (그리고 다른 사회 운동) 내부에서 그리고 이 운동들을 한데 모으는 ‘운동들의 운동’ 내부에서 발전해오고 있다. 개인과 조직들이 계속해서 구체적인 초점—특정 억압 유형(젠더, 인종, 계급 등) 내지 특정 쟁점(식량, 의료서비스, 재생산의 자유, 기후변화)—을 가지면서도 점점 더 이 초점을 모든 억압형태에 저항하는 공통의 투쟁 양상들 가운데 하나로 이해한다. 따라서 맑스가 사회주의의 건설자로서 마음에 그렸던 동질적인 산업 노동계급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포괄적인 혁명의 주체, 즉 서로 연결되고 상호적으로 결정하는 일단의 사회 운동들이 등장했다. 이 변혁 주체는 어떤 쟁점을—그저 특권계급에 속하는 소집단이 아니라—억압받는 모든 사람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그 쟁점을 현재의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를 특징짓는 다수의, 상호의존적인 불평등 및 억압형태들을 해체하고 변형하는 과제에 부합시킨다.

여기서 연대정치의 세 가지 양상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연대정치는 여성 운동 같은 정체성 정치에 기반을 둔 운동들로 하여금 그 리더십과 정책형성에서 억압받는 하위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손을 뻗쳐 그들을 끌어들이도록 만든다. 이것이 체면치레처럼 보일지라도 성심으로 실천한다면 그것은 다양한 형태의 억압을 받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그들을 향상시킬 수 있으며 지배적인 소집단(예를 들어, 이성애자인 전문직 백인 여성들) 사이에서 그리고 조직의 이론들 및 강령에서 특권 때문에 발생하는 편견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

둘째, 목표대상이 지배집단—즉 “남성들(혹은 1% 혹은 백인들)은 적이다”—에서 특정한 구조적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영속시키는 사회적 개념들, 관행들 및 제도들로 바뀐다. 이것은 정체성 정치 집단들이 상호교차성과 씨름할 때 이 집단들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예를 들어, 동성애 혐오증과 인종차별주의를 적극적으로 다루는 페미니스트 집단에서 레즈비언들은 동성애 혐오증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이성애적 여성들을 보게 되고 유색인 여성들은 인종차별주의를 반대하는 백인여성들을 목격한다. 미국에서 경찰의 만행에 대응하여 등장했고 인종의 정체성 정치에 기초를 두고 있는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BLM) 운동(([옮긴이] BLM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향한 폭력과 제도적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운동이다. BLM은 경찰에 의한 흑인의 죽음, 인종 프로파일링, 경찰의 가혹행위, 미국의 형사 사법제도 안의 인종간 불평등 같은 광범위한 사안들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항의집회를 연다. [위키피디아] ))은 구성원들의 상당 부분이 백인 ‘동지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과정의 훌륭한 예에 해당한다.

셋째, 연대정치는 서로 다른 운동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한 운동 내부의 서로 다른 갈래들 사이에서도 연합을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억압들의 상호교차성은 불가피하게 정체성 정치 집단, 예를 들어 ‘여성들’ 내부에서 불평등한 관계를 되풀이한다. 억압받는 소집단들이 내부에서 세계와 자신들에 관한 해방적인 인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공간들, 위원회들 및 조직들을 스스로 창출하고, 그 다음에 여타의 섞여 있지만 대부분 백인/중산층/이성애적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집단과 함께 연합하여 공유된 페미니즘적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일이다.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에는, 그 문제가 풀리려면 전체론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다양한 층의 시민들에 의해 접근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구조적인 뿌리가 있다는 것을 주요 사회운동들이 점차 알게 되면서 이 사회운동들 사이에서의 연합 또한 발전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취임한 다음 날 열린 <여성 행진>(The Women’s March)은 정체성 정치와 연대정치 사이의 이런 관계를 보여주는 완벽한 예였다. ‘여성들의’ 행진으로서 그것은 명백히 정체성 정치에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또한 연대정치의 전형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여성 행진’의 조직화를 시작한 것은 백인여성들이지만 그들은 ‘전국 공동 의장들’(National Co-Chairs) 및 ‘조직가들’(Organizers)로 이루어진 다양한 집단을 구성했다. 결과적으로, “우리 사이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을 지키는 것이 우리 모두를 지키는 것임을 알기에 우리는 함께 서 있다”라고 주장한 ‘여성 행진’의 선언문에서 상호교차성에 기반을 둔 페미니즘이 가장 주목 받는 위치를 차지했다. 그 통합원리는 “젠더정의는 인종정의이자 경제정의이다”였고, 이민자의 권리, 시민권, LGBTQ의 권리, 장애자 및 노동자들의 권리뿐만 아니라 여성의 권리와 환경정의에의 헌신이 전면에 부각되었다. 시민권, 노동, 기후행동 조직들을 포함하여 300명이 넘는 ‘여성 행진’의 후원자들은 페미니즘을 서로 연결되고 상호간에 힘을 주는 ‘운동들의 운동’의 일부로서, 즉 연대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그러한 종류의 운동으로서 자리매김했다.((원주13. “Women’s March 2017,” accessed August 30, 2017, https://www.womensmarch.com.))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딛은 <여성 행진>은 미국에만 국한되지 않고 영감을 고취하며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전 대륙에 있는 60개국에서 이루어진 600개가 넘는 후속 여성 행진들에서 행진한 여성들의 수는 총 50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원주14.Together We Rise: The Women’s March: Behind the Scenes at the Protest Heard Around the World (New York: Dey Street Books, 2018), 215 –216.))

 

5. 연대정치에서 연대경제로

상호교차성과 씨름함으로써 페미니즘과 여타 진보적인 사회 운동들은 사회 전반에 걸친 모든 불평등과 억압에 저항하는 정치에 이르게 되었다. 연대정치가 경제적•사회적 변형을 위한 강력한 도구인 것은 모든 사회적 실천과 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모든 유형의 불평등을 인지•거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적 시선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상호교차성의 관점에 기반을 두고 특정 사회문제를 중심으로 모일 수 있다.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 운동은 페미니즘 연대정치의 훌륭한 한 예로, 세 명의 흑인여성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흑인들에게 가해지는 국가 폭력을 끝내려는 데 집중하면서도 우머니즘적,(([옮긴이] ‘우머니즘’(womanism)은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이 흑인여성들 및 여타 주변화된 집단의 여성들의 역사와 경험에 관해서 보여준 한계의 발견에 기반을 둔 사회이론이다. 앨리스 워커(Alice Walker)가 『어머니의 정원을 찾아서』(In Search of our Mother’s Gardens: Womanist Prose)에서 ‘womanist’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 퀴어/트랜스적 관점 또한 긍정했다.((원주15. www.Blacklivesmatter.com/about/ 참조.))

연대정치는 자연스럽게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억압이 한 사람의 경험에서 또는 어떤 특정한 사회적 관행 내지 제도에서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에 대한 인식은, 억압적인 관습과 제도가 경제적•사회적 총체 내부에서 결합하고 상호작용하는 체계적인 방식에 대한 이해로 진화한다.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 운동의 경우, 경찰의 만행에 대한 비판적 저항이 학교 시스템과 감옥산업복합체(the prison industrial complex)에 대한 비판으로 진화했다.

페미니즘(과 여타) 연대정치의 발전에서 다음 단계로 취해야 할 중요한 행동은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비전과 그곳에 도달하는 방식을 중심으로 단결하는 것이다. 그런 비전에는 연대정치를 실천하는 페미니스트들 및 여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지금 여기서 구체적으로 사회구조의 변화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방식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포괄적인 사회체계 변형의 비전이 없던 미국의 페미니즘 운동은 지배적인 시스템 내부에서 동등한 기회요구― 가령 남성들이 독점한 경제적 위계의 상부에 여성들이 진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 그로 인해 페미니즘은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적인 규칙을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는 운동으로 축소되고, 노동력에서의 차별과 재생산권의 결여로만 여성의 억압을 규정한다. 최악의 경우에 이 접근법은 페미니즘을 ‘유리 천장을 깨는 것’, 즉 소수의 여성들이 남성들이 하는 대로 일을 함으로써, 거의 항상 이런 방식으로 최고의 자리에 접근하는 것으로 축소시킨다. 여성의 상호교차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성차별에 인종 및 계급차별을 추가해서, 가령 유색인 여성이 높은 급여를 받는 기술직에 진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때조차 우리는 아직도 경제의 기본적인 구조를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구조는 여성과 그 가족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긴 하지만 ① 경제 위계의 밑바닥에서 여성이 받는 부족한 임금 ② 가족을 돌보는 무보수 노동의 착취와 예속 ③ 소수의 소유자들의 이익을 중심으로 한 전반적인 생산 시스템 조직화 ④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생태계 파괴라는 여러 중요한 면에서 여성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기회의 균등’을 비판하고 뛰어넘으며 체계 차원의 경제적 변형을 추구하는 페미니즘적 변형의 다른 비전, 즉 연대경제 운동이 출현했으며 현재 탄력을 받고 있다. 성장세를 타고 있는 이 운동은 1990년대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에서 출현했고 특히 ‘새로운 경제’(New Economy) 운동, ‘쑤막 까우쎄이’/‘부엔 비비르’(Sumak Kawsay/Buen Vivir)(([옮긴이] ‘쑤막 까우세이’(Sumak Kawsay)는 스페인어 ‘buen vivir’에 해당하는 케추아어이다. 영어로는 ‘good living’, ‘well living’의 의미이다.)) 및 ‘공동체 경제’ (Community Economy) 운동과 겹쳐지는 세계사회포럼 운동을 통해 전 세계로 퍼지고 있다.((원주16. 연대경제에 대한 개관들로는 Allard, Jenna, Carl Davidson, and Julie Matthaei, Solidarity Economy: Building Alternatives for People and Planet (Chicago: Changemaker, 2008), Emily Kawano, Thomas Neal Masterson, and Jonathan Teller-Elsberg, Solidarity Economy I: Building Alternatives for People and Planet (Amherst, MA: Center for Popular Economics, 2010) 그리고 Peter Utting’s edited collection, Social and Solidarity Economy: Beyond the Fringe (London: Zed Books/UNRISD, 2015) 참조. <사회적 연대경제 증진을 위한 대륙간 네트워크>(the Transcontinental Network for the Promotion of the Social Solidarity Economy, RIPESS, www.ripess.org)와 <미국 연대경제 네트워크>(the US Solidarity Economy Network, www.ussen.org)도 훌륭한 참조처이다.))

연대경제의 틀은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시장경제 내부에 이미 현존하는 해방적인 경제활동과 제도들을 포착하고 그것을 통합적인 신흥 ‘연대경제’의 일부분으로 간주한다. 연대경제에서 기본적인 통합 기준은 경제적 실천이나 제도에 의해 구체화된 가치들이다. 연대적 가치의 목록에는 협력, 모든 차원에서의 공평, 정치적•경제적 참여 민주주의, 지속 가능성 및 다양성/다원주의가 포함된다. 이 틀은 어떤 특정한 관습이나 제도가 모든 가치 혹은 어떤 특정한 가치에 완전히 들어맞지는 않을 것임을 인정한다. 연대경제에 기반을 둔 이 차원들 각각은 스펙트럼 상의 특정한 위치에 놓여 있다. 체계변형을 위한 투쟁에는 우리의 경제활동과 제도들이 이 스펙트럼 위에서 불평등에서 연대의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포함된다.

모든 부류의 협동조합들(노동자•소비자•생산자 협동조합)이 연대경제의 핵심적 구성요소를 포괄하듯이, 사회적으로 책임감 있는 소비패턴을 촉진하도록 노력한다면 사회적이고 환경적인 목표 쪽으로 투자가 이동할 것이며 기업도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방향으로 재설계될 것이다. 공동체 텃밭에서부터 버려진 공장이나 땅의 인수 및 공동체 통화 창출에 이르기까지 많은 대표적 실천들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적인 경제제도의 실패에 대응하여 한데 모이면서 생긴 것이다. 본질적으로 연대경제는 경제에서의 연대정치를 표현한다.

전통적인 맑스주의의 혁명관과는 대조적으로 연대경제의 틀은 자본주의의 혁명적인 전복을 기다리기보다 지금 당장에 사회 전반에 걸친 경제적 변형에 참여하도록 사람들을 북돋운다. 연대경제는 자본주의적인 제도와 나란히 시장 내부에서 심지어 그 제도 내부에서도 번성하고 있다. 긍정적인 체계적 변화에 참여하여 그런 변화를 만들어내는 방식들은 넘치도록 많다. 이런 유형의 변화에 적절한 용어가 혁명/진화(r/evolution)인데, 체계 수준에서 작동한다는 면에서 혁명적이지만 점진적으로 일어날 필요가 있다는 의미에서 진화적이다. 이 변화가 다차원적이고, 다부문적이며 다층적(미시적이고 거시적)이기 때문이다.

 

6. 페미니즘과 연대경제

연대경제의 틀은 심층적으로 페미니즘적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백인 남성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구축되어 있으며 전통적으로 남성적인 특성을 가지는 경쟁―이기기 위한, 다시 말해 다른 남자들을 ‘능가하’거나 지배하기 위한 투쟁―에 의해 규정된다. 남성은 기업가•농부•노동자로서 돈을 추구하는 경제에서 서로 경쟁함으로써 가족을 부양했다. ‘자수성가한 사람’이라는 (백인) 남성의 이상형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부와 권력을 가진 꼭대기의 경제적 계층이 되는 데 성공한 사람이었다. 기업은 노동자, 소비자 및 생태계의 요구를 냉담하게 무시하면서 이익을 추구하는 생산의 형태로 이 편협한 물질주의적인 이기심이라는 에토스/정신을 구현했다.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은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여성의 무급노동과 평가 절하된 노동으로, 또는 여성들이 주를 이루는 저임금 서비스 일로 한정되었다.

연대경제는 남성이 지배하는 경제의 핵심구조에 전통적으로 다른 사람을 돌보는 여성의 일을 투입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자본주의적 시스템에서 경제활동은 자본가의 부를 증가시키도록 구조화된다. 기업의 소유주와 경영자들은 그들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에 사실상 관심을 갖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해고되어 생계를 빼앗기고, 소비자들은 조종당하고 잘못된 정보에 휘둘리게 되며 환경은 파괴된다. 이 모두가 사업의 정상적인 일부분인 것처럼 이루어진다. 많은 페미니즘 경제학자들이 공언한 것처럼 경제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또한 경제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고 사람과 비인간 생물 사이에서 상호간에 배려하는 유익한 관계를 촉진해야 한다. 연대라는 용어를 부각시키는 연대경제의 틀은 연대정치가 향하고 있는 새로운 시스템의 이런 핵심적인 측면을 긍정한다.

이와 연관하여 경제의 주체가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검토하는 것이 연대경제를 페미니즘 프로젝트로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자본주의는 중상류층 백인들 가운데 남편/가장으로서 남성 경제인과 아내/어머니/주부로서 여성 경제인으로 경제의 주체를 양극화한 것에 기반을 두었다. 전형적인 남성 경제인의 노동은 생계비를 버는 일이었다. 즉 적어도 가족 임금을 벌고 경제적 지위가 높아지며 경쟁력 있는 소비에 지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시장’에서의 유급노동이었다. 전형적인 여성 경제인의 노동은 육아를 포함해서 가정에서 무급 노동을 직접 하거나 감독함으로써 남편과 가족을 돌보고 그들에게 봉사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연대경제의 주체에게는 남성 주체와 여성 주체의 최고의 측면들이 혼합되어 있다. 일과 사업활동은 생계 수단, 자기표현 및 자기 개발(초개인주의와 경쟁으로 구성되는 자본주의적인 남성성을 뛰어넘는 긍정적인 형태의 남성성)의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사회 및 세상에 봉사하고 도움이 되는(자기 예속을 수반하지 않는 긍정적인 형태의 여성성) 길이 된다.

결과적으로 돌봄 노동 자체의 관행을 변형시키는 것은 연대경제와 ‘거대한 이행’을 깨닫는 데 필수적이다.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전통적으로 권위적인 자녀양육을 통해 지배와 종속의 두 역할이 산출되며 이는 다시 전통적인 학교 교육을 통해서, 그 다음에는 자본주의적이고 권위적인 회사에서 재생산된다. 불평등한 지배와 복종 관계는 아내 위에 남편 그리고 아이들 위에 부모로 이루어진 가족에서 시작된다. 아이들은 교사가 지도하고 평가하는 학교에 다니고 그 후에는 상관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직장에 다닌다. 우리가 경제를 상호적으로 유익하고 평등한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시스템으로 바꾸려면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남을 지배하라거나 종속되라고 가르치기보다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긍정하는 법, 자립하는 법 및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돌보는 법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부모들은 위세를 부리는 존재(전통적인 아버지)이거나 굴종적인 존재(전통적인 어머니)이기보다 그들 자신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긍정적인 상호관계를 모형화함으로써 가르칠 필요가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의 전통적인 돌봄 노동과 저임금의 돌봄 일에 재정적 지원을 해 줄 것을 주장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보살피기•양육•돌봄을 사회를 변형시키는 페미니즘의 렌즈 밑에 둘 필요가 있으며 체계 차원의 변화를 꾀하는 우리 일의 일부로서 우리 모두가 그 일을 더 잘하도록 도와줄 혁신적인 방식을 찾을 필요가 있다.

 

7. 결론

진정한 페미니즘—모든 여성을 해방하고자 하는 페미니즘—은 연대정치, 연대경제 및 혁명/진화로, <거대한 이행 기획>에서 설명된 것처럼 전지구적 시민운동으로 거침없이 이어진다. 여성과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계속해서 이것을 긍정하고 연대정치를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다. 페미니즘이 온전히 페미니즘적이고자 한다면 혁명적/진화적이어야 한다. 더군다나 모든 진보적인 운동은 반드시 눈을 크게 뜨고 상호교차성의 문제와 씨름해야 하며 조직 내부에서 그리고 조직화과정에서 마주치는 모든 형태의 불평등—남성 지배 및 젠더 억압을 포함해서—을 뿌리 뽑는데 전념해야 한다.

‘운동들의 운동’은 새로운 세계 극장에서 주연배우이지만 아직 대다수 사람들은 이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저항에서 구성으로, 우리가 반대하고 있는 것에서 우리가 찬성하는 것으로 렌즈를 계속해서 바꾸어야 하며 전 세계 많은 연대경제의 사례들로 우리 스스로를 격려해야 한다. 역사상 이 시기의 페미니스트들과 모든 진보주의자들에게 중요한 임무는, 진보적인 활동가들이 함께 모여 시너지 효과를 가진 연계된 대열에 동참하도록 고무하기 위해서 혁명적/진화적인 전진방식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

 




오스트롬 계약



 

오스트롬의 8대 설계원칙에서

→ ‘오스트롬 계약’ 설계로

 

1. 집단의 경계를 명확히 확정한다.

→ 토큰을 기반으로 구성원 자격이 부여된다.

[설명] 디지털 집단의 명확한 경계는 단지 ‘코인’을 소유하는 것으로 결정될 수 있다. 이는 착취된다는 우려를 낮춤으로써 (코인을 팔고 나가면 된다) 서로 협동할 수 있게 만든다. 코인이 있으면 자원과 혜택에 접근할 수 있으므로 집단에 남아있게 하는 인센티브가 존재한다.

2. 공통재 사용을 다스리는 규칙들을 지역의 욕구와 조건에 맞춘다.

→ 블록체인 거버넌스를 통해 규칙을 결정한다.

[설명 : 아래 3에도 해당] 스마트 계약은 낮은 간접경비로 빠른 결정을 가능하게 한다. 구성원들은 상호작용을 통해 지침과 행동을 제안할 수 있고 모든 제안에 대해 투표할 수 있다. 그래서 재빠르게 자신들의 규칙을 결정하고 상황에 맞출 수 있다. [아래 3으로 설명 계속]

3. 규칙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규칙을 변경하는 데 참여할 수 있게 보장한다.

→ 구성원들이 제안하는 시스템

[설명 계속] 단순한 과반수 투표를 넘어서는 새로운 멋진 투표방법들이 있다. 그 하나가 제곱 (코인 락투표’(Quadratic (Coin Lock) Voting)이다. 이는 ‘제곱 투표 방식’(quadratic voting) 가운데 토큰에 기반을 둔 변형이다. 참여자들은 코인의 수(N)와 그 코인들이 ‘잠겨있는’(locked), 즉 사용되지 않는 시간의 제곱(K2)을 곱한 만큼 (N*K) 투표력을 가진다. 그래서 만일 당신이 무언가를 원한다면 원하는 만큼 코인을 오래 걸어놓으면 된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예측 시장’(prediction market)이 있다.

4. 공동체 구성원들에 의해 수행되는, 구성원들의 행동을 모니터하는 시스템을 개발한다.

→ 기계 학습 및 모니터링

[설명] 오스트롬은 모니터링 시스템이 공동체 구성원들에 의해서 (보통 순찰이나 확인에 의해) 실행되면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아마존의 우림(雨林)이나 아프리카 사헬(Sahel) 지역의 방대한 풍경처럼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을 생각해보자. 이런 넓은 영역은 사람들로서는 항상 모니터링하기가 불가능하다. 여기에 규모를 키울 수 있는 자동화가 큰 잠재력을 가진다. 다음은 야생 생물을 모니터링하고 순찰을 계획하며 유망하게 예측하는 데 잠재력을 가진 연구기획들의 사례 몇 개다.

[정태적 자원에 대한 감시 : 삼림파괴]

위성 이미지는 입목밀도(tree density)를 분류하는 데 크게 쓰이는 데이터 소스이다. 그런데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다. 블레어(BLAIR)의 연구 기획인 게인포레스트(GainForest)는 일정 시간 동안 삼림파괴의 확대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전산모델을 개발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예측 치안과 유사한 예측 모델로 삼림 파괴의 위험을 가진 곳에 순찰을 배치할 수 있다.

[동적 자원에 대한 감시 : 야생생물 보존]

<코끼리 지도>(Elephant Atlas) 기획과 <야생생물 보존을 위한 인공지능>(AI for Wildlife Conservation, AIWC) 기획은 드론이나 비행기를 사용해서 코끼리, 악어 및 기타 위험에 처한 종을 추적한다. 이러한 관찰들로부터 매우 근접한 밀도를 추산하는 것이 가능하다. 모니터링의 규모를 키우는 또 다른 방법은 인간에 의한 순찰의 효율을 개선하는 것이다. 카네기멜론 대학에 있는 페이 팽(Fei Fang)의 실험실에서는 불법적 밀렵행동을 모델로 해서 덫을 발견하거나 밀렵꾼들을 잡을 확률을 극대화하는 게임이론 형태의 제안을 개발했다.

5. 규칙을 어긴 사람들을 등급별로 제재한다.

→ 규칙 위반에 대해 등급별로 지분을 조정한다.

[설명] 스마트 계약의 경우에는 만일 규칙위반이 포착되면 그 개인의 비축된 지분에서 일정액을 감하는 계약이 자동으로 실행될 수 있다. 이러한 제재는 투표 이후에 실행될 수도 있고 자동적으로 실행될 수도 있다.

6. 분쟁의 해결에 접근 가능한 저비용 수단을 제공한다.

→ 분쟁 해결에 도전-응전 게임을 한다.

[설명] 복잡한 분쟁의 경우, 스마트 계약이 판사 역할을 하거나 아니면 도전-응전 게임을 실행할 수 있다. 도전-응전 개임의 경우 한 집단의 행위자들에게 X가 거짓이라는 증거를 제출할 기회를 주고 만일 아무도 정해진 기한 내에 증거를 제출하지 못하면 X는 참으로 간주된다.

7. 공동체 구성원들의 규칙 제정권이 외부의 권위에 의해 존중받도록 보장한다. 즉 외부의 권위가 개입하여 집단의 규칙 제정권을 침해하지 않는다.

→ 프로그램 가능한 탈중심화를 통해 검열을 막는다.

[설명] 블록체인 기반 스마트 계약은 탈중심화되어 있고 자동으로 실행되기 때문에 결정사항은 중앙으로부터의 검열이 없이 실행된다.

 

8. 가장 낮은 수준에서부터 전체가 연관된 체계에 이르기까지 공동자원을 다스리는 책임을 중첩된 여러 층으로 구축한다.

→ 수직으로 중첩된 계약

[설명] 스마트 계약 구조는 임의적으로 복잡하게 만들어질 수 있어서 세밀도(granularity)(([정리자] 어떤 모델이나 의사결정 과정에서 고려되는 세부의 수준. 세밀도가 높을수록 세부의 수준이 깊어진다. 세밀도는 보통 일단의 데이터에서 세부의 규모 혹은 수준을 특징짓는데 사용된다.))에 제한이 없는 서로 얽힌 거버넌스 구조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

 

[단단히 결합된 오스트롬 계약과 느슨하게 결합된 오스트롬 계약]

오스트롬 계약은 협력과 자치를 장려하는 것이 목적이다. 스마트계약은 사람들이 스스로 조직하고 투표하기 위한, 거래와 거버넌스의 매체 역할을 한다. 그런데 두 개의 옵션이 있다. 느슨하게 결합된 오스트롬 계약에서는 스마트 계약의 힘이 투표에서 끝난다. 투표의 결과를 실행하고 규칙 위반을 벌하는 것은 공동체의 몫이다. 단단히 결합된 오스트롬 계약에서는 실행도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것은 자동으로 이루어지고 인간적 요소는 끼어들지 않는다. 완전한 자동화는 신뢰 받는 제3자에 대한 필요를 제거하면서도 신뢰를 완전히 보장하기 때문에 매우 유망하다. 그런데 이런 시스템은 매우 위험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들어오는 데이터 흐름과 AI(오라클)가 오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가면 오용의 사례들의 리스트를 볼 수 있다.]

 

[결론]

분명 매우 많은 난제들이 앞에 놓여있다. 모든 행동주체들이 인터넷/블록체인에 연결할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어떻게 코인들을 법정 화폐로 지불할 수 있을까? 계약이 공격당하고 기만당할 위험은 없는가?

그러나 많은 획기적인 잠재력이 있다.

첫째, 복잡한 정치적·경제적 아이디어들을 코드로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1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스마트 계약은 디지털 형태로 송금하면서도 컴퓨터 기능을 실행할 수 있게 해준다. 이 말은, 우리가 경제 체계를 마치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어디서든 설치하고 실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둘째, 상이한 시스템들을 재빨리 실행하고 시험해보는 능력은 또한 실험과 과학적 방법(경험적 크립토경제)을 사용하여 상이한 형태의 경제들을 평가하고 반복하고 아마도 개선할 수 있게 해준다.

셋째, 이제 많은 우리의 일상적 삶에 인공지능이 적용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미래에는 우리가 스마트 계약의 힘을 증가시킬 지능형 에이전트들(intelligent agents)((정리자] 인공지능(AI)에서 지능형 에이전트(intelligent agent, IA)는 감지기를 통해 관찰하고 작동장치를 통해 환경에 작용하며 그 활동이 목표달성을 향하는 자율적 주체이다. 지능형 에이전트는 또한 목표달성을 위해 지식을 배우거나 사용할 수 있다. 지능형 에이전트는 추상적으로 보면 컴퓨터 프로그램과 유사한 서술된다. 인터넷상에서, 지능형 에이전트 (또는 그냥 “에이전트”)라고 부르는 것은 사용자의 개입 없이 주기적으로 정보를 모으거나 또는 일부 다른 서비스를 수행하는 프로그램이다. [영어 위키피디아 및 한국어 위키피디아에서]))을 사용할 수 있다는/사용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지능을 인센티브와 결합시키면 앞으로 인간의 개인적 이익을 사회적 이익과 일치시키는 것이 가능해진다. 오스트롬 계약은 지능과 인센티브의 결합이 사회를 위해서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블록체인 세계에서의 주권의 미래



 

블록체인 세계에서의 주권의 미래

 

[초록]

강력한 탈중심화 기술인 블록체인의 구축은 현재의 주권적 질서의 종말을 불러오리라고 예측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더 나아가 블록체인이 세계 자본주의의 계속적인 작동에 도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일리가 있는가? 이 논문에서 우리는 주권과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를 이론적으로 살펴보면서 블록체인 세계에서 미래에 어떤 주권이 가능할지를 제시할 것이다. 미래의 가능한 주권 형태로서 개인, 민중, 기술, 기업, 기술-전체주의적 국가의 다섯 형태가 제시될 것이다. 우리는 블록체인 테크놀로지의 7개의 구조적 경향들을 포착해낼 것이며 이 경향들이 새로운 형태의 주권을 구축하는 데서 어떻게 발현되어왔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을 제시할 것이다. 우리는 블록체인 세계에서의 주권의 미래가 사회적 투쟁과 테크놀로지의 작용력의 결합으로서 구체화되리라고 결론지을 것이며 테크놀로지 분야의 기술자들과 민주주의자들 사이의 더 강한 연대를 요청할 것이다.

 

[블록체인 테크놀로지의 7개의 경향과 그 경향들을 산출하는 구조적 특질들]

 경향 설명
 1. 확증 가능성 거래들이 암호화된 네트워크 합의 메커니즘을 통해서 보장된다. 모든 거래들은 처음부터 가장 최근의 것까지 개방된 원장에 기록되어 정보 비대칭성을 줄인다.
 2. 전지구성 디지털 거래들과 문화적 정보의 흐름들은 지리적 공간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간다.
 3. 유동성(Liquidity) 가치저장 장소가 주권적 주체(중앙은행 혹은 민간기업)에 의존하지 않거나 그 직접적 통제 아래 있지 않기에 가치 유동성이 높아진다.
 4. 영속성 거래 원장은 애초의 설계상 변경할 수 없다.
 5. 비물질성 거래들은 디지털 매체에서 이루어진다.
 6. 탈중심화 원장이 많은 이해관계자들 및 유지자들 사이에 널리 분산된다.
 7. 미래 지향 이더리움 같은 더 최근에 개발된 블록체인에서 발견되는 것으로서, 미래 거래들의 예시적 기록을 가능하게 하는 스마트 계약의 사용을 통해 작동이 시간적으로 전위(轉位)되는 가운데 ‘저장된 자율적 자기강화 작용체’(a stored autonomous self-reinforcing agency, SASRA)가 형성된다.

 

[5개의 가능한 블록체인 주권]

 

① 개인 주권

블록체인 테크놀로지의 구축자들은 암호화 전문가들과 코드작성 전문가들의 사이버펑크 운동에서 출현했다. 사토시 나카모토도 그 구성원 가운데 하나이다. 나카모토 : “만일 우리가 그것을 적절히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유의지주의’(libertarianism)의 관점에서 매우 매력적일 것이다.” 사토시는 이 소프트웨어가 출시된 지 몇 주 이후에는 기술적 측면보다 넓은 이데올로기적 동기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자유의지주의자들은 진보적 기술 결정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새로운 기술적 도구들의 사용을 통해 사회가 개선되고 사회적 관계와 제도들이 더 효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본다. 블록체인은 개인 재산 소유자들 사이의 직접 교환을 가능하게 한다. 유포트 아이디(uPort ID) 같은 응용프로그램들은 주요 기업들과 정부들로부터 개인 데이터에 대한 통제력을 제거하고 개인들에게 사생활보호를 제공하려고 한다.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를 사용하여 기존의 위계적 제도들에 P2P 네트워크들로 도전하는 노력을 보여주는 증거는 광범하고 점점 더 늘어난다. 그러나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규제를 통한 감시의 사회로부터 자율적 개인들의 분산된 사회로의 총체적인 이행을 수용할지는 의문이다.

 

② 민중 주권

두 세기 이상 자본주의적 논리를 넘어선 세계를 구축해온 협동체 운동은 블록체인이 가진 전지구성, 유동성, 영속성, 탈중심화, 미래 지향 경향을 최대한 활용하기에 좋은 조건에 있다. 이 경향들을 통해 블록체인은 민중의 ‘협동적 공통체’(cooperative commonwealth)라는 장기적 비전을 현실화하여 발전된 교환, 소통, 거버넌스 테크놀로지의 사용을 통해 실행되는 ‘전지구적 테크놀로지 공통체’를 구축하고 있다. 민중 주권의 탈중심화된 전지구적 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많은 응용프로그램들이 현재 존재한다. 블록체인 퍼 체인지(Blockchain for Change)는 블록체인의 변경 불가능성과 전지구성을 사용하여 집 없는 사람들에게 디지털 신분을 제공하는 응용프로그램인 푸미(Fummi)를 개발했다. 계약 행정과 관리를 다루는 SASRA를 통해 블록체인의 미래 지향 경향을 사용하는 응용프로그램들이 농업 협동조합들을 위한 애그리레저(AgriLedger)의 개발에서, 그리고 에너지 협동조합들을 위한 파일론 네트워크(Pylon Network)의 개발에서 발견될 수 있다. 두니터(Duniter)와 페어코인(Faircoin) 같은 탈중심화된 커먼즈 기반 통화들이 현재 사용되고 있다. 이 통화들은 (기본소득이라고도 알려진) 보편적 배당 등의 마련을 통해 불평등을 감소시키도록 코드화되어 있다. 또한 현재의 블록체인 구조에 담긴 병목현상과 불평등을 피해가도록 설계된 일련의 차세대 테크놀로지 플랫폼들이 출현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할 것이 홀로체인이다.

우리는 블록체인이 경제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협동체 운동에 강력한 도구다 된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말한 블록체인의 여러 경향들이 현재 진행되는 협동체 기획들과 병행하여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덧붙이자면, 블록체인의 분산되고 안전한 구조 안에는 자본주의적 국가들이 블록체인 기반의 친민주적 기획들과 상충할 경우 있을 수 있는 억압에 대한 제한된 보호막이 들어있다. 사회운동의 맥락에서 블록체인 응용프로그램들에 접근하는 데 가상사설망(VPN)이나 프록시 시스템을 사용하기만 해도 국가의 공격에 대한 취약성이 많은 중앙집중화되고 수면 위에 노출된 사회운동조직들이 경험한 것보다 훨씬 덜해진다. 전지구적 테크놀로지 공통체의 구축에 장애물에 존재한다면, 이 장애물들은 블록체인 테크놀로지의 경향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협동체 운동 자체의 다소 협소한 경로 의존성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블록체인이 제공하는 가능성들을 극대화하기에 충분한 개방적이고 사용자-친화적이며 확장적인, 그리고 정치적으로 유망한 문화를 창출할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스스로 입증할지 아닐지에 대해서는 확답하지 못한다.

 

③ 테크놀로지 주권

테크노크라시(기술지배)의 특징은 기술 지식의 사용과 통제를 통해 불평등한 힘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블록체인은 우월한 테크놀로지 지식과 위치를 가진 사람들에게 유리하다. 블록체인 코드 작성자들은 장기간 지속되는 준거틀을 세우고 이 틀을 통해 대안들을 사고하고 설계상의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일반 사용자들에 비해서 이점을 누린다. 이런 이점은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지만 개인적 이윤을 획득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권력의 확립으로 가는 경로가 될 수도 있다.

블록체인 초기에는 오픈소스 코드가 협동적 방식으로 공동창조되었으며 블록체인의 핵심적 발전을 지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아마도 블록체인 코드작성이 다른 유형의 프로그래밍보다 더 힘들고 블록체인 기반 응용프로그램들을 창조하는 데 집단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개인의 참여보다 더 분명한 목적의식을 동반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런데 블록체인 응용프로그램들의 수익성이 점점 더 좋아지자 기업에 속한 블록체인 개발자들과 블록체인 개발자 억만장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블록체인 테크놀로지의 적어도 하나의 경향, 즉 미래 지향성은 테크놀로지 전문가들의 주권이 아니라 테크놀로지 자체의 주권으로 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SASRA의 개발은 이윤, 관리 및 서비스를 분산시키고 탈중심화하면서 스스로 돌아가는 블록체인 사업체들의 창출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 이 독립적인 DAO(decentralized autonomous organization, 탈중심화된 자율조직들)들은 다양한 스마트 계약들을 자동적으로 실행하고 그럼으로써 지금까지 계약의 신뢰성과 법적 지위를 확증하는 일을 해온 법률가들, 회계사들, 기술 관료들을 제거할 것이다. 그 하나의 사례는 작업협동을 위한 탈중심화된 플랫폼을 시험하고 있는 콜로니(Colony)이다. 테크놀로지든 테크놀로지 전문가들이든, 민주주의에 복무하든 자본에 복무하든 개인에 복무하든, 블록체인 테크놀로지가 테크놀로지와 관련된 주권 형태를 향하여 가고 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거의 없다.

 

④ 기업 주권

따라갈 수 없는 금융동원능력을 가진 주요 기업들은 블록체인의 다섯 경향을 자신들의 목적에 강제로 맞추고 있다. 예를 들어 코닥, 아마존, 페이스북 및 기타 기업들은 자신들의 플랫폼 암호통화를 창조하는 것이 가져다주는 잠재적 혜택을 포착했다. 블록체인 암호통화들은 회사의 플랫폼 위에서 돌아갈 앱을 구축하는 개발자들이나 바람직한 행동을 하는 사용자들에게 회사의 통화를 상금으로 자동으로 나누어주는 스마트 계약을 포함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기업 ‘토큰 경제’는 전통적인 기업도시(company town)처럼 다가온다. 이 경우에 온라인 공간의 소유자가 주권자가 된다. 그런데 기업들은 터무니없이 나쁜 주권자들이다.

구글 같은 이미 기능하고 있는 기업 주권체들은 기존의 공간들을 흡수함으로써 그들의 배타적인 주권 영토를 주장하고 확장한다. 블록체인의 확증 가능성과 영속성의 도입이 이 기업플랫폼들이 포획하여 화폐화하는 데이터의 세밀도(granularity)((어떤 모델이나 의사결정 과정에서 고려되는 세부의 수준. 세밀도가 높을수록 세부의 수준이 깊어진다. 세밀도는 보통 일단의 데이터에서 세부의 규모 혹은 수준을 특징짓는데 사용된다. ))를 높일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위계를 강화하고 힘을 중앙집중화하며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민주주의를 전반적으로 약화시키는 직접적 효과를 낳는다. 더 나아가 기업들은 세계 체제에서 가장 많은 이점을 가진 조직들이기에 그들의 논리를 주류 블록체인 응용프로그램들에 짜넣는 경쟁에서 기선을 크게 제압할 수 있으며 앞으로 중개자제거(disintermediation)((중개자제거(disintermediation) : 일반적으로 공급망으로부터 중개자를 제거하는 것을 가리킨다. 가령 농산물을 소비자에게 직접 공급하는 것이 여기 해당한다. 플랫폼의 경우에는 제3자인 ‘중앙’을 제거하여 P2P방식의 상호작용이 가능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를 촉진할 가능성이 있는 새로운 응용프로그램들을 봉쇄할 국가정책들을 실행시킬 능력도 가지고 있다. 환경경제학 문헌에서 ‘테크놀로지 강제’(‘technology forcing’)((‘테크놀로지 강제’(technology forcing)는 현재는 성취될 수 없고 비경제적이지만 미래의 어떤 시점에서 충족될 수행표준을 수립하는 규제 전략이다. 입법이나 규제규칙들은 종종 이 표준을 달성하는 시점도 정한다. 만일 이 시점에서 표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벌금을 물리거나 허가증을 구입하게 한다. http://www.choicesmagazine.org/choices-magazine/theme-articles/economic-and-policy-analysis-of-advanced-biofuels/technology-forcing-and-associated-costs-and-benefits-of-cellulosic-ethanol 참조))를 규제 압박에 의해 추동되는 테크놀로지 발전이라고 설명한다면, 우리는 블록체인이 기업화되면서 기업 주권으로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와 유사한 것을 본다.

 

⑤ 테크놀로지전체주의적 국가 주권

많은 사람들이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는 필연적으로 국민국가를 약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궁극적으로 그럴 수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국민국가 제도들과 초국적 제도들이 활발하게 작용하면서 그들이 선호하는 유형의 블록체인 활동은 밀어주고 선호하지 않는 블록체인 응용프로그램들은 ‘규제를 통해 제거하고’ 있다. 이 제도들은 ‘초기코인공개’를 마치 범죄인 듯이 형사적으로 수사하거나, 통화거래소들에게 사용자 정보의 제출을 요구하거나, 암호화폐 트레이드에 자본이득세를 부과하거나, 비국가 암호화폐들을 범죄로 규정한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이 일을 하고 있다. 동시에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같은 주요 강대국들과 또한 우루과이, 에스토니아, 슬로베니아, 케냐 같은 특정 지역 테크놀로지 주도국들( 및 여러 군소 국가들)은 모두 새로운 블록체인 테크놀로지의 개발과 활용에서 전략적 비교우위를 점하려고 서로 다투고 있다.

이런 개입들이 국가가 자신들의 장악범위를 확대할 가능성을 알려주는 신호이다. 국가들은 블록체인의 확증 가능성, 전지구성, 영속성, 미래 지향 경향에서 전지구적으로 개인들의 일상적 삶에 개입할 더 큰 능력을 찾고 있다. 이 확대된 능력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전체주의적 형태의 국가주권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우선 국가는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쉽게 통제할 수 없는데, 블록체인에 의해 가능해지고 인공지능에 의해 증폭된 사물인터넷(IoT)이 국가가 물질계와 사회를 감시할 수 있는 정도를 높여준다. 급속히 확장하고 있는 사물인터넷은 2020년쯤에는 크기가 세 배 이상으로 증가하여 거의 210억 개의 장치들이 연결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가 상호작용하는 물체마다 블록체인에 연결된 작은 칩이 삽입되면 국가 기관들이 틀림없이 많은 사람들의 개인적·정치적·경제적 활동들을 감시하고 훈육시키려 할 것이다.

이 예상은 논란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권력을 잡은 정당들은 예외 없이 자기 당에게 유리하도록 ‘표적 유권자층 투표방해’ 테크놀로지(targeted voter suppression technologies)를 사용한다. 경찰은 테크놀로지를 사용하여 유색인 공동체들에 더 치중하는 ‘예측 치안’을 실행한다. 국가의 복지 부서들은 테크놀로지를 사용하여 식량보조금의 쓰임새나 연금사기 등을 추적한다. 중국 정부는 개인들을 그 경제적·사회적 지위에 따라 등급을 매기는 국민평판시스템을 만들어서 전적으로 새로운 수준의 국가통제로 이동하고 있다. 요컨대 최근의 역사는 블록체인 테크놀로지의 개발에 대한 국가의 관심이 민주화 방향보다는 전체주의의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더 크다고 예상할 이유를 제공해준다.

 

[결론]

블록체인 테크놀로지의 구조는 분산되고 민주화되고 기술화된 주권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기업 자본과 국가가 이 경향을 포획하거나 재편할 수 있다. 특히 기업은 여러 유리한 점들을 가진다. 초기부터 움직였고, 기술자들을 고용하고 공무원들을 움직일 자원을 가지고 있다. 이 유리한 점들에 대항해서 개인 주권의 주창자들의 분산된 저항이 효율적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반면에 민중 주권은 미래를 가질 수 있다. 협동체들과 민주주의 활동가들은 테크놀로지와 대중의 연합을 구축함으로써 초기의 구조적으로 불리한 점들을 극복할 수 있다. 블록체인 코드 작성자들의 사고방식과 일상적 실천의 많은 부분은 이상적, 유토피아적, 탈중심적, 협동적이다. 더 나아가 많은 블록체인 전문가들은 암호화폐에의 초기 투자를 통해 부유해져서 임금노예상태로부터 자유롭다. 이들이 잠재적으로 결정적 위치에 있으며 이들의 친화성이 중요성을 가진다. 여기에 2008-2014년의 전지구적 민주주의 운동의 고조에서 표현되었고 협동체들이 그들의 블록체인 응용프로그램들에 프로그램해 넣고 있는 종류의 전지구적 사회에 대한 강한 욕망을 더한다면, 전지구적 민중 주권의 출현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본다.




어떻게 나는 30년 동안 나도 모르게 커먼즈 연구를 해왔는가? (1/2)



 

어떻게 나는 30년 동안 나도 모르게 커먼즈 연구를 해왔는가? 

 

무엇이 커먼즈를 보지 못하게 내 눈을 가로막았는가

 

나는 학문공동체(이 자체가 최근에 비로소 형성된 것이다)의 일원으로서 커먼즈에 대해 글을 쓰면서 몇 가지 문제들에 부딪혔다.

 

첫째, 커먼즈라는 복잡한 문제가 처음 우리의 주의를 끌기까지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다. 왜 50년 전에 우리의 주의를 끌지 않았을까? 사회적 현상을 커먼즈 현상으로 인식하고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극복하는 데 왜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나는 많은 문제들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고 이미 공유 패러다임 내에서 글을 쓰고 있었지만, 커먼즈 용어를 사용하여 물음을 묻는 능력은 아직 없었다.

 

둘째, 커먼즈에 대한 논의를 개시하는 것은 일종의 도미노 효과를 촉발한다는 사실이다. 커먼즈를 거론함으로써 첫 번째 도미노가 쓰러지자마자 근대 서양문명이 토대를 두고 있는 많은 개념들이 균형을 잃으며 토대가 잘 잡혀있다고 생각되었던 구조물 전체가 무너져 내린다. 국가, 법, 시장, 민족, 노동, 계약, 부채, 증여, 법인, 사유재산, 친족제도, 결혼관계법, 상속법 등이 갑자기 문제로 삼아지게 된다. 우리는 종종 이 개념들이 보편적으로 타당하다고 믿지만, 상이한 문화를 비교해보면 이 개념들은 근대 서양의 법 전통에 깊은 영향을 미친 관습이요 민속일 뿐임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 법 전통은 하나의 민속법인 것으로 판명된다.)

 

셋째, 프랑스에서 라발(Pierre Laval)과 다르도(Christian Dardot)가 그들의 책 Commun에서 최근에 표현했듯이, 현재의 커먼즈 논의가 고도로 정치적이며 심지어는 논쟁적인 성격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 책의 부제도 ‘21세기의 혁명에 관한 시론’이다. 라발과 다르도는 맑스가 19세기 중반에 자본의 의미와 역할에 대하여 성찰하면서 제기했던 중요한 문제들을 학술적 논쟁으로 다시 끌어들였다.

 

오늘날 커먼즈에 보내지는 관심은 이 문제들에 하나씩하나씩 접근할 것을 제안한다. 우선 ‘커먼즈의 문제’를 이해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이고 그 다음으로는 커먼즈와 현재의 법과의 관계를 검토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한 가지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커먼즈는 이론적으로는 시장과 국가에 대한 대안이지만, 이것을 실현하기에는 아직 요원하다는 점이다. 오스트롬에 따르면, 21세기의 사회적 난제는(([저자주] 다르도와 라발(2014)처럼 사회적 문제들보다는 혁명적 문제들에 대해서 말하는 저자들이 보기에는 커먼즈가 새로운 사회모형에 기여하는 바가 주변적이거나 보완적인 것이 아니라 중심적이다.)) 어떻게 커먼즈와 사적 소유가 공존하고 서로 보완할 수 있는지에 집중된다.

 

나는 1964년 인류학과 공법 분야에서 학위를 받고 대학을 졸업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석사과정에 해당하는 논문을 준비하던 중 아프리카에서 온 젊은 교수 앨리옷(Michel Alliot)을 발견했고 법 인류학 분야 및 아프리카(특히 세네갈)의 토지 문제를 발견했다. 이 세 가지로 인해 나의 삶은 바뀌게 된다.

 

앨리옷을 지도교수로 선택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썼는데, 이 논문은 프랑스에서 법인류학 분야의 최초의 논문 가운데 하나로서(Le Roy 1970) 세네갈의 토지개혁과 <64-46호 법>을 다루었다. 나는 이 개혁의 기원과 뿌리에 대해서 언급할 뿐만 아니라 그 개혁이 실제로 포괄하고 규제하려고 했던 것― 즉 관습법(consuetudinary law) 혹은 비공식적 유형의 법― 을 설명하고자 하는 포부를 가졌었다.(([저자주] 프랑스에서 이런 유형의 탈식민적 연구는 식민지 시기의 끝에 시작되었다. 발랑디에(Georges Balandier) 같은 인류학자들은 이미 1950년대에 그런 연구를 행하고 있었다.)) 나는 사하라 사막 이남의 사회에서 토지 점유의 역사를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파고들어 커먼즈 들판을 발견했으나 그것에 해당하는 개념, 용어를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나중에 이것이 ① 식민주의의 민족중심적 이데올로기와 ② 근대의 사고방식과 그 당시의 개발 관념의 토대를 이루는 것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른바 관습법은 미확인과학물체(an Unidentified Scientific Object, USO)였다. 소수의 학자들만이 그 깊은 특징들을 실제로 이해하려고 시도했었다. 학문공동체(학자 집단)는 아프리카의 법 현상을 그것이 마치 지난 수세기에 걸쳐 발전해온 서구의 법적 개념들의 대립물인 듯이 취급했다. 원시주의(([저자주] 19세기 식민화가 개발이 항상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며 서양 사회들이 이 진보과정의 선두에 선다는 관념에 기반을 둔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미국인으로서 민속학의 창립자들 가운데 하나인 모건(Lewis H. Morgan)이 이런 생각을 가진 전형적 인물이다. 이런 사고는 그의 책 Ancient Society; Or, Researches in the Lines of Human Progress from Savagery through Barbarism to Civilization (1877)에 잘 드러나 있다.))와 과학적 오만은 결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관습법이 미확인과학물체가 된 것은 그 규칙들이 근대 법의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표준들 혹은 비인격적 기준들에 따라 정식화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었다. 그 규칙들은 그 자체가 지속되는 행동패턴들로서, 특정의 안정적인 형태의 행동에 기꺼이 참여하려는 사람들의 태도로서 발현되었다. 이 규칙들은 특수한 모형들을 사용해서만 포착되고 연구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관습을 법적 행동으로 제시하는 매트릭스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성문법적 의미에서의 법적 행동이 아니라 (여러 공동체들에서 발견될 수 있는) 행동 규칙들로 표현되는 패턴들이라는 의미에서의 법적 행동이다.

 

이런 식으로 법 다원주의(legal pluralism)(([정리자] 한국어 위키피디아에서는 ‘일국수법’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하는데, 이 번역어 자체가 모든 것을 ‘국(가)’과 연관짓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듯하다. ‘legal pluralism’은 하나의 인구 혹은 지역에 여러 개의 법체계가 공존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인구’ 혹은 ‘지역’은 당연히 ‘국(國)’이 아닐 수도 있다. 여기서는 일단 ‘법 다원주의’로 옮기기로 한다.))를 통해 나는 막 발견된, 기존의 연구 결과들에 도전하는 현상에 대응하는 데 성공했다. 매트릭스 분석의 원칙에 따라 나의 연구를 조직함으로써 내가 이미 커먼즈 서술의 기본적 요소들― 모두가 지위를 가지고 있는 공동체,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그 가치가 인정되는 활동, 관여된 모든 이들의 의도와 성향이 서로 연결되도록 (상징적으로) 허용하는 자원―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발견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요컨대 ‘법’에 버금가는 제재 가능한 체계였다.

 

나는 토지에 대한 인간의 관계의 인류학적 모델들을 발전시켰던 초기 저작들(Le Roy 2011)과 1970년대의 저작들에서 공동체의 문제에 초점을 두었다. 나는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근본적으로 공동체에 기반을 둔 생각들을 식별해낼 수 있었다. 나의 논의는 또한 공통재(common goods)라는 민법적 개념을 포함했다. 그런데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놀라울지 모르지만, 커먼즈라는 용어가 나의 저작에서 나온 적은 없다. 비록 서아프리카의 ‘볼로프’(Wolof)의 ‘음복’(mbock) 사고방식은 이미 나의 분석에 표시를 남겼지만 말이다.

 

‘음복’은 볼로프 언어로 친족관계를 의미하며, 그 핵심에서는 공유를 의미하기도 한다. 때로는 공동의 선조들을 가리키고 또 때로는 특정의 들판(특정의 경계를 가진 특정의 지역), 가축 떼, 숲 지역 등을 가리킨다. 공유가 교환보다 선호된다는 발견이 인류학이 확실하다고 느꼈던 저 모든 통찰들—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의 이론,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의 선물(膳物) 개념, 모리스 고델리에(Maurice Godelier)의 재산 개념 등—에 갑자기 도전장을 내밀었다. 커먼즈에서는 공유가 우세한 조직원칙이다. 그런데 나는 1980년과 1990년 사이에 과일 경작을 위한 토지 및 지역 관리를 위한 새 모형을 다듬어내면서 비로소 그것을 이해하게 되었다.(Le Roy 1996). 그 모형에서 나는 아프리카인들이 (그리고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재산의 다양한 법적 형태와 복잡하게 실행되는 자원이용을 (우리가 결정적이라고 생각하는 문화적 경계들을 넘어서) 어떻게 결합하는지를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근대 학문은 그러한 결합들이란 대체로 양립 불가능하거나 심지어는 어긋날 것이 뻔하다고 생각한다.

 

예상치 않은 결과를 낳은 개혁

 

나는 이 모든 지적 모험들을 세네갈의 토지정책에 대한 나의 종합적 논문에서 이론적 관점에서 서술했다(Le Roy 2011). 달리 말하자면, 나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두 범주를 각각 혹은 둘을 합해서 외적인 것, 내적인 것과 관련지었다. 커먼즈 개념은 이러한 관계를 다음의 논리에 따라 정렬하는 데 유용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 공적인public = 누구에게나 속하는

· 외적인 = n개의 집단에 속하는

· 연대(alliance) = 둘 이상의 집단에 속하는

· 내적인 = 하나의 집단에 속하는

· 사적인 = 법인, 자연인, 그외 법 주체(legal entity)(([정리자] ‘legal entity’는 다른 맥락에서는 ‘법인’으로 옮겨질 수도 있는데, 여기서는 ‘juridical individual’이라는 말이 이미 나와서 차별을 두어 옮겼다. ‘person’이 아닌’legal entity’도 있기 때문이다.))에 속하는

 

물론 이 모든 집단적 조직화의 가능성들은 오늘날의 커먼즈 이론(Bollier 2014; Dardot & Laval 2014)이 ‘커먼즈’로 간주하는 것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1996년 이래 줄곧 적어도 이런 커먼즈 개념이 토지정책에 대한 나의 분석의 중심부에 놓여있었다. 30년이라는 시간의 지연!

 

이런 잘못된 출발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인류학의 패러다임 자체에 있다. 인류학은 ‘법’에 관심을 가진다. 내 경우에는 세네갈의 토지사용과 관련된 법이다. 따라서 관습법의 영역에서 생각된 바 없고 또 생각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개념적·방법론적 도구들은 법률가의 범주들로만, 즉 규범들과 법조항들로만 표현될 수 있다. 반면에 인류학자들의 관점에서 “법은 텍스트로 된 조항이 말하는 바라기보다는 행동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행하는 바이다”(Le Roy 1999). 텍스트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해석되고 적용되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 프랑스 속담을 들자면, ‘컵과 입 사이의 거리는 멀다.’ 그런데 아프리카의 토착적·구비적 맥락에서는 해석될 텍스트가 없으며 법적 논평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명시적인 규범들이 없다. 실제로 실행되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 행동하는 사람들의 위치와 역할, 그들의 지위, 그들의 행동, 그들의 상호관계에 주목함으로써 인류학자들은 서양 법체계들을 근본적으로 구조짓는 (그러나 볼로프나 인류학자들이 연구하는 다른 사회들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추상들을 피할 수 있다.

 

커먼즈 개념은 무엇보다 경제학 분야에 의해서 유통된 추상물이다. 개럿 하딘(Garrett Hardin)의 유명한 ‘공유지의 비극’ 우화가 1968년에 발표된 이후 널리 유통된 것도 경제학에서이다. 양치기들이 방목지를 함께 이용할 수 없다는 이 거짓된 생각이 적어도 한 세대 동안 집단적 자원관리에 대한 연구를 침식했고 주변화했다. 말이 나온 김에 고백하자면, 나는 이 우스운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다가 198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이 사이비 이론이 가져오는 피해와 그 엉성한 일반화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커먼즈에 대한 논의가 잘못 출발된 둘째 이유는 그 당시 ‘저개발’ 국가들에 적용된 ‘개발’ 이론들과 연관된다. 세네갈은 영토관련법(the Law Concerning the Territory of the Country)을 통과시킴으로써 시장 및 사유재산과 근본적으로 연관된 개발모델로부터 최종적으로 해방되었다. 이는 시인 대통령 쎙고르(Léopold Senghor)의 ‘네그리뛰드’(Négritude)— 아프리카의 뿌리의 시적 발견—에도 열려있고 자본주의와의 단절에도 열려있는 아프리카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일어났다.(([편집자주] 쎙고르(Léopold Sédar Senghor, 1906-2001)는 세네갈의 시인이며 첫 대통령으로서 1960년부터 1980년까지 재임했다.)) 그러나 핵심은 자본주의와의 단절이 아니라 식민지 시기의 유산인 사적 소유 규범들의 노골적인 지배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64-46호 법>은 사적 소유를 폐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토지등록과정에서 해결을 기다리고 있는 사적 권리들에 관한 중지된 모든 절차들을 완결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후 이것 이상의 적용(사적인 부동산을 토지대장에 등록하는 것)은 그 이후에 행정부의 통제를 받게 될 것이었다. 이 입법은 쎙고르 대통령이 1964년 연설에서 “이기적”이라고 부른 사적 소유가 사회적 관계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을 방지하도록 의도되었다.

 

이 개혁에 따르면, 지역의 토착적 소유권을 국가소유로 바꾸는 것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시장 거래를 활성화하고(13조) 그 다음에 국가가 권리를 사적 개인들에게 이전시키는 것을 승인하는 것이다. 이 접근법은 세네갈의 공적 기관들이 자유주의 국가의 모든 기관들처럼 중립적이며 공정하다는 전제에 기반을 둔다. 이 전제는 불행하게도 나중에 사실에 의해서 틀린 것으로 판명된다. 우리는 이러한 국유화가 어떻게 사회주의를 농락하는지를 볼 것이다. 그러기 위해 먼저 법의 문구들을 검토하고 그 다음에 실제적 적용을 검토할 것이다.

 

법의 문구로부터···

 

공식적으로는 세네갈 영토의 96%가 국가에 속한다. 나머지는 공적으로 관리되는 땅들이거나 개인들이 소유한 토지등기소에 이미 등록된 땅들이다. 이 ‘국가에 속하는 영토’는 법 인격이 없으며 법 주체가 아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세네갈 국가에 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속한다”의 해석이 법적·정치적 의미에서 중요하다. 2조는 그것을 관습법(common-law) 맥락에 대한 신뢰의 의미에서 해석한다.

 

달리 말하자면, <64-46호 법>은 세네갈의 미래를 지향하는 것으로 판명되는 방식으로 땅의 소유에 관한 규정을 바꾼다. 식민법이 이 땅들을 국가의 사유재산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이 땅들은 사용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행정부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주인 없는’ 땅으로 간주되었다. 이와 달리 오늘날에는 이 땅들이 특수한 지역 관리자들에게 맡겨지고 서로 다른 규정이 적용되는 4개의 지역으로 나뉜다. ① 도시 토지 ② 개발지대(zones classées) ③ 농촌지대(zones de terroirs) ④ 개척지.

 

겨우 17조로 된 이 간략한 법의 실질적 부분은 농촌 공동체들(communautés rurales)이 관리하는 농촌지대들과 관련된다. 이곳이 바로 커먼즈적 성격이 가장 많이 발견되는 곳이다. 법은 “농촌지대의 토지는 지역자치체들의 구성원들에 의해 사용되며, 이 지자체들은 그 관리를 보장하고 국가의 통제 아래에서 그것을 실행한다(···)”(8조)라고 정하고 있고 토지의 특수한 사용이나(9조) 사용에서의 면제(15조)와 관련된 의사결정력은 해당 농촌공동체 지자체의 유효한 평의회들에 있다고 정하고 있다. 이 조항들로 인해서 실제로 사람들 사이의 자기조직화가 커먼즈 문화를 창출하고 형성하도록 승인되었을 것이다. 정당정치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바로 이런 데서 현실이 끼어들어 작동한다.

 

실제 현실로···

 

나는 1969년의 첫 현지조사에 기반을 두고 농촌개발장관인 씨세(Ben Mady Cissé)와의 접촉을 활용하면서, <64-46호 법>의 실험적 실행이 제기한 토지정책 문제들의 밑바닥까지 들어가 보고 싶었다. 1970년에 박사학위논문 심사를 받은 이후 실제로 나는 연구에서 발견한 것을 쎙고르 대통령에게 보냈으며 그는 불행히도 그것을 내무장관 콜린(Jean Colin)에게 맡겼다. 식민지의 관료였던 콜린은 결혼을 해서 세네갈인이 된 사람이다. 그는 나의 연구를 자신의 계획― 농촌공동체들을 정부의 감독 아래 두고 지역 풀뿌리 집단들(collectivités territoriales de base)로서 관리하려는 계획―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 자기조직화의 원칙에서 중앙행정부 네트워크에의 통합으로의 이행은 1972년 정부권력의 탈중심화에도 불구하고 농촌공동체들의 역할을 바꾸었다.

 

커먼즈 이론은 보통 커먼즈의 시장과 국가로부터의 독립을 강조한다. 세네갈에서 시장은 커먼즈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지만, 국가는 국지적 수준에서 농촌 공동체들의 자율성을 삭감시키면서 토지사용에 깊이 관여한다. 커먼즈가 법적 개념으로서 존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커먼즈에 관한 그 어떤 의견 불일치도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해결되었다.

 

그런데 현장의 세네갈 사람들은 계속적으로 원래의 개혁적 사고를 취했다. 충분한 행정적 절차의 부족과 담당 부처에 의한 지나치게 세밀한 개입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자원을 관리할 책임을 졌으며 사유재산권의 확대를 억제하는 윤리 뒤에 모였다. 심지어는 강력한 이슬람교도들도 협력했다. 국내와 해외의 투자자들은 제외된다. 그들은 <64-46호 법>의 폐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많은 논란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이 법은 2014년에 50주년을 맞았다. 놀랍게도 정치적·경제적·절차적 애매성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때로는 세네갈의 최상류층에서 보이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커먼즈의 논리가 실제로 승리했다. 유일무이하게 승리한 경우였나?

 

기관 논리가 아니라 기능 논리

 

2012년에 나는 파리8 대학에서 열린, 「커먼즈의 부활—환상과 필요 사이」라는 주제의 컨퍼런스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서의 논의들은 나중에 출판되었다.(Parance and Saint Victor 2014) 이 컨퍼런스는 처음 초대받을 당시에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긍정적인 커먼즈 상을 그렸다. 나는 내 발표에서 세 가지 논점을 제시했다.

 

· 우리의 근대 사회는 커먼즈와 커머닝에 대한 경험을 상실했다.

· 커먼즈의 재발견은 공유의 패러다임이 교환의 패러다임보다 더 매력적임을 시사한다.

· 커먼즈의 부상은 필연적으로 법 다원주의와 관련하여 물음을 던진다.

 

나는 이에 대한 증거를 제공하고자 두 상이한 경험들을 참조했다. ① 아프리카와 인도양 섬국가들에서의 토지개혁 ② 프랑스 도시 및 농촌 지역 사회에 대한 관찰들.

<계속>

남은 부분 소제목들

– 토지개혁과 사유재산의 한계

– 커먼즈, 프랑스에서도 다시 출현하다

– 커먼즈와 법

– 법에서 통제로 — 새로운 법적 질서를 탐구하기 위해 익혀야 하는 것

– 결론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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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식량 위기



 

10년이 채 안되어 전지구적 식량 위기가 올 수 있다.

 

2009년 이래 세계는 다가오는 전지구적 식량위기와 이 위기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중심으로 하는 ‘2050년 내러티브’에 집착하고 있었다. 이 내러티브는 2008년에 전지구적 식량가격이 사상 최고를 기록한 직후 전개되기 시작했다. 2008년 당시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고 각 정부와 전 세계 지도자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세계 식량안보를 중심주제로 다루는 컨퍼런스, 팟캐스트 및 대담들이 우리가 어떻게 2050년쯤에 90억 명의 사람들을 먹여 살릴 것인가 하는 질문을 통해 식량위기 문제를 식량 증산으로 해결하는 방안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2050년이 우리와 무관할 수 있는 먼 미래라고 하더라도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대로 계속한다면 위기는 2050년보다 훨씬 이전에 우리에게 닥치리라는 점이다. 멘커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고 현재의 우리와 관계지을 수 있는 숫자를 사용하여 그 내러티브를 다시 틀 짓는다면 위기를 피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멘커는 폭발적인 수요가 농업 시스템의 구조적인 식량생산능력을 초과할 경우 전지구적 식량과 농업이 도달할 수 있는 티핑 포인트(([정리자]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란 변화가 아주 순식간에 일어나서 그것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상황이 영원히 바뀌는 지점이다.))에 주목한다. 우리가 어떤 구조적 변화를 도모하지 않은 채로 이 지점에 도달하면, 가격이 급등하는데도 불구하고 공급이 더 이상 수요를 쫓아갈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이 그녀의 우려이다. 멘커는 사람들이 굶주릴 수 있고 정부들이 붕괴될지도 모를 이런 일이 발생할 경우 이 일은 지난 금융위기나 닷컴 붕괴처럼 주식시장과 돈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멘커는 원래 월스트리트에서 상품거래 일을 했는데 그 일을 하면서, 공급이 폭발적인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는 시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시스템이 어떻게 무너졌고 그런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데이터는 정작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녀의 그 관심은 집착으로 바뀌었다. 바로 그때 멘커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그로 인텔리전스>(Gro Intelligence)를 설립하여 기업가로서의 여정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로 인텔리전스>는 관련 데이터를 마련하여 그것을 모든 수준에서 실행가능하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멘커는 다가오는 전지구적 식량 위기를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행 가능한 길잡이를 마련하기 위해 <그로 인텔리전스>가 보유한 페타바이트 단위(([정리자] 1페타바이트(petabyte) =10의 15제곱 바이트))의 데이터를 활용해서 모형을 구축했다.  <그로 인텔리전스>는 티핑 포인트가 실제로 지금부터 10년 후라는 것을, 세계는 2027년쯤 214조 칼로리가 부족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지금까지는 쉽다는 이유로 식량 문제를 무게로 환산하여 이야기해 왔다면 멘커는 식량문제를 칼로리로 바꾸어 이야기한다. 식량에서 핵심은 식량의 무게가 아니라 그 영양학적 가치이며 모든 식품은 무게가 동일하더라도 ‘평등하게 태어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칼로리이다.

 

멘커는 214조칼로리라는 큰 숫자를 빅맥(Big Mac) 칼로리로 분해해서 설명한다. 빅맥 하나가 563칼로리이므로 2027년에는 3790억 개의 빅맥이 전 세계적으로 부족하게 될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 개수는 맥도널드가 이제껏 생산해온 빅맥의 수보다 많다. 그리고 멘커는 40년 전 칼로리 순격차 데이터와 40년 후인 오늘날의 칼로리 순격차 데이터를 비교해서 이 숫자가 지어낸 것이 아님을 설명한다.(([정리자] 칼로리 순격차(net calorie gaps)란 간단히 말해서 한 나라에서 소비된 칼로리에서 바로 그 나라에서 생산된 칼로리를 뺀 것이다.))

 

40년 전에는 몇 안 되는 나라들이 칼로리 순수출국이었고 아프리카 대륙의 대부분, 유럽 대륙, 아시아 대륙의 대부분, 아르헨티나를 제외한 남미대륙이 모두 칼로리 순수입국들이었다. 중국은 한때 실제로 식량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나라이며, 인도는 칼로리 순수입대국이었다. 40년 후인 오늘날, 브라질이 농업의 최강자로서 등장했고 유럽은 전지구적 농업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인도는 실제로 순수입국에서 순수출국으로 바뀌어 식량을 자급자족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은 칼로리 수입대국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일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아주 비슷하게 출발했던 인도와 아프리카는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인도는 녹색혁명을 실행했고 아프리카에서는 단 한 나라도 녹색혁명을 실행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인도는 현재 자급자족이 가능하고 지난 10년 동안 실제로 칼로리를 수출해온 반면에 현재 아프리카 대륙은 연간 300조 이상의 칼로리를 수입하고 있다. 중국은 인도와 매우 비슷한 길을 가고 있었는데 21세기가 시작되면서 상황이 갑자기 뒤집혔다. 중국에서 경제성장과 인구증가가 합쳐져서 빅뱅과도 같은 큰 변화를 일으켰지만 아무도 이것을 미리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중국의 이러한 변화는 전지구적 농업시장에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다행히도 남미가 같은 시기에 급속히 수출국으로 발전하기 시작하고 있어서 수요와 공급은 아직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멘커가 보기에 문제의 본질은 우리가 여기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이다. 멘커의 예측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현재 상태가 계속 이어질 것이고 칼로리 수입국인 아프리카는 상황이 더 심화될 것이며, 인도에서는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날 것이다. 또한 아프리카의 인구가 인도와 중국의 인구를 따라잡을 것으로 예상되는 2023년쯤에 이들 세 지역을 합친 인구는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된다. 따라서 멘커의 관점에서 이 지점은 세계 식량안보와 관련하여 정말로 흥미로운 난제들을 제시하는 지점이 되며 그렇게 될 경우 그 몇 년 후에 우리는 그로 인해 심한 타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10년 후에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식량 자급자족이 가능한 인도를 보며 현재의 상황이 계속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멘커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멘커는 경제성장과 아울러 발생하는 인구증가로 인해서 식량수요가 증가할 것이기 때문에 인도가 곧 칼로리 순수입국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설령 생산 증가를 중심으로 낙관적인 가정들을 하더라도 약간의 뒤집힘은 일어날 것이고 그런 약간의 뒤집힘이야말로 잠재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 멘커의 생각이다. 멘커의 이러한 생각은 아프리카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멘커는 아프리카에서 이루어질 생산 증가라는 가설을 낙관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역시 인구증가와 경제성장으로 인해서 아프리카가 계속해서 칼로리 순수입국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중국의 경우에는 인구의 증가세가 꺾이고 있지만 고칼로리 함유량 식품이 소비되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에 칼로리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한다. 멘커가 고민하는 것은 이들 세 지역—인도, 아프리카, 중국—이 합쳐지는 지점에서 발생하게 될 문제이다. 

 

지금까지는 칼로리가 부족한 나라들이 잉여지역—북미•남미•유럽—에서 수입함으로써 이 부족분을 채울 수 있었다. 북미•남미•유럽에서 향후 10년에 걸쳐 생산(량) 증가가 예상되지만 이 증가의 대부분이 실제로는 남미에서 심림 파괴라는 커다란 희생을 치러야 가능해질 일이다. 멘커가 주장하는 부족분 214조 칼로리는 인도•중국•아프리카에서 일어날 수요증가에서 인도•중국•아프리카•북미•남미•유럽에서 일어날 생산증가를 뺀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실제로 북미•남미•유럽에서 생산된 모든 여분의 칼로리를 가져와서 그것을 오로지 인도•중국•아프리카에 수출한다는 가정 하에 나온 수치이다.

 

멘커가 스스로 인정하듯이 그녀가 여기서 제시한 상은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까’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상이다. 그러면서 이를 바꾸기 위한 방안들로 소비패턴을 바꿀 수도 있고, 음식 쓰레기를 줄이거나 기하급수적으로 산출량을 증가시키는데 과감하게 집중할 수도 있다고 하면서도 정작 멘커 자신은 소비패턴을 바꾸거나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는 것에 대한 언급은 피하고자 한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그런 말들은 잉여 지역의 사람들에게 부족한 지역을 위하여 행동을 바꿔줄 것을 요구하는 식이라는 것이다. 그 대신에 멘커는 중국•인도•아프리카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한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중국은 실제로 농업에 사용할 수 있는 경작지를 확보하는 데 제약을 받고 있고 대규모 수자원 가용성 문제도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인도와 아프리카에 사실상 해답이 있다고 보는 게 멘커의 입장이다. 인도는 잠재적인 산출량 증가라는 긍정적인 면이 있을 뿐 아니라 놀고 있는 경작지가 많지는 않지만 좀 있는 편이다. 반면에 아프리카 대륙에는 엄청난 양의 경작지가 남아있어서 산출량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일례로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의 오늘날 옥수수 산출량은 1940년에 북미의 산출량과 같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는 70년의 시간이 주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새로운 것을 시도할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멘커가 제시하는 해법은 아프리카와 인도에서 농업 산업을 개혁하고 상업화화는 것이다.

 

멘커가 주장하는 상업화는 일반적인 의미의 상업화와 다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① 상업화의 관건은 상업적인 영농이 아니다. 더 나은 정책을 공들여 만들고 기반시설을 개선하고 운송비를 낮추고 은행 및 보험업을 완전히 개혁하기 위해 데이터를 활용하는 것이 관건이다.

② 상업화의 핵심은 농업을 매우 위험한 사업에서 부를 만들 수 있는 사업으로 바꾸는 것이다.

③ 상업화는 오직 농민들하고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전체 농업 시스템의 문제이다.

④ 상업화는 또한 우리가 더 이상 소농들에게만 성장의 짐을 지울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과, 상업적인 농장을 도입함으로써 소농들도 활용할 수 있는 규모의 경제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⑤ 상업화의 핵심은 소규모냐, 상업적이냐, 대규모냐가 아니다. 우리는 상업적인 농업과 나란히 소규모 농업이 공존하여 성공하는 첫 모형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산업에서 가장 결정적인 성공 도구인 데이터와 지식/정보가 사상 처음으로 그날그날 값이 저렴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멘커는 머지않아 사람들이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내지 최적의 결정을 내리고 의도한 목표에 성공적으로 도달할 확률을 최대화하는 데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멘커는 우리가 이 새롭고 과감한 변화에 집중할 수 있다면 자신이 이야기했던 214조의 격차를 해결하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를 전적으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도는 식량 자급자족이 가능한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고 아프리카는 세계에서 또 하나의 거대한 식량수출지역으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어떻게 2027년쯤에 83억 명의 사람들이 먹고 살 214조 칼로리를 생산할 것인가’가 멘커가 생각하는 새로운 물음이고, 멘커는 이에 대해 자신이 제시한 해법을 사람들이 행동으로 옮겨주기를 바라고 있다.




프랑스 커먼즈 의회들의 출현과 그 미래


  • 저자  :  마이아 데레바(Maïa Dereva)
  • 원문 : “100 women who are co-creating the P2P society: Maïa Dereva” (2016.5.30) /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
  • 분류 : 번역
  • 옮긴이 : 민서
  • 설명 : 아래는 P2P재단의 블로그에 올라있는 마이아 데레바(Maïa Dereva)와의 인터뷰인 100 women who are co-creating the P2P society: Maïa Dereva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옮긴이는 민서이다. 마이아 데레바는 생물학•인류학•심리학•커뮤니케이션(학)을 공부하고 커뮤니티 매니저, 웹 기획 매니저로서 일한 바 있다. 그녀는 “공통선(共通善)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자신의 소망에 따라 협력적이고 구성적인 실천들의 관측소인 웹사이트 semeoz.info를 만들었고 P2P 재단 같은 많은 프로젝트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P2P 사회를 함께 창출하고 있는 100인의 여성들

 

P2P 여성들에 관한 시리즈를 계속 이어가고 있는 바우엔스(Michel Bauwens)와 라모스(José M. Ramos)는 프랑스에서의 커먼즈 의회들의 출현과 그 미래에 대하여 마이아 데레바(Maïa Dereva)와 인터뷰한다.

 

프랑스 커먼즈 의회들의 출현

 

프랑스에서 가능한 하나의 사회구조로서의 ‘커먼즈’라는 주제는 1990년대 후반 이후로 점진적으로 재등장했고 이 주제에 대한 프랑스어 책들이 2000년대 이후부터 출판되고 있습니다.

 

이 주제는 오랫동안 디지털 커먼즈 분야에 국한되어 있다가 최근 몇 년 사이에 공동체 정원들이나 푸드 협동조합 같은 영역으로 점점 더 확대되었습니다.

 

커먼즈와의 관련성이 명확한 행사들이 2009년에 조직되기 시작했고(<브레스트 인 커먼즈, Brest in commons>) 2013년에 30개 지역으로 퍼집니다. 같은 해 미셸 바우엔스는 ‘커먼즈 회의소’(Chamber of Commons)—그 이전 해인 2012년에 데이비드 론펠트(David Ronfeldt)가 이 개념을 제안했죠—라는 개념을 대중화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상하는 P2P와 커먼즈 네트워크를 위한 다음 단계를 제안하며」(Proposed Next Steps for the emerging P2P and Commons networks)에서 ‘커먼즈 의회’(Assembly of Commons)라는 개념으로 ‘커먼즈 회의소’ 개념을 재빨리 보완했고요.

 

2014년의 <협동적 사용 포럼>(Forum of Cooperative uses, Forum des Usages Coopératifs)과 (<VECAM> 연합의 물자지원으로 344개의 행사를 원조했던 자기조직화된 페스티벌인) <커먼즈의 시간>(The Commons’ time, Le temps des communs, 2015년 10월 개최)에서 이 주제가 다시 부각되고 난 후에 커먼즈를 영속적인 의회로 연합하는 아이디어가 무르익었습니다.

 

이 페스티발 이후로 몇몇 커먼즈 의회들이 릴(Lille), 툴루즈(Toulouse), 브레스트(Brest)와 몇몇 다른 프랑스 대도시에 명시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의회들이 모두 ‘인큐베이션’ 단계에 있다는 것과 각각 비공식적인 조직으로서 스스로 운영해나가는 법을 터득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대체로 그들은 한두 번 정도만 만났습니다.

 

이 의회들은 실천사항들을 기록하고 주고받는 프랑스어로 된 <위키> 및 외부와 소통하기 위한 웹사이트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 의회들의 주요 목적은 경험을 나누고 커머너들을 한데 모으는 포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의회들은 또한 커먼즈를 중심으로 생계를 창출할 수 있는 윤리적 경제를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이 의회들은 매핑(mapping)과 만남들을 통해 커먼즈를 포착하고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지리적 경계를 가로질러 연결하기

 

우리가 처음부터 웹상에서 <위키> 같은 소통 도구를 창출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 말해주듯이, 프랑스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도 유사한 기획들이 존재했고, 실제로 다른 프랑스어권 커먼즈 의회들(툴루즈, 브레스트, 렌 의회뿐만 아니라 벨기에의 리에주 의회 등등)이 여기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프로젝트들은 <위키>와 <페이스북 그룹>을 통해 접속되고 서로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현재로서 우리는 그 밖의 다른 의회들과 연결 관계가 없지만 이는 그 의회들에 대해서 우리가 아직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프랑스어권 의회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동시에 수 년 동안 이미 커먼즈에 헌신했던 지역연합들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릴 의회

 

가장 활동적인 의회들 중 하나가 2015년 10월 이후로 한 달에 한번 씩 모임을 개최하는 릴(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시)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참석자들이 조직한 자영 워크숍 형태로 그 지역의 다양한 커먼즈에서 온 소식들뿐만 아니라 역량들, 아이디어들 및 지식/정보가 공유됩니다. 의회의 구성원들 전체에게 워크숍을 제안할 기회가 있고 여타 회원들은 그들이 원하는 워크숍에 참여합니다.

 

릴의 커먼즈 의회는 디지털 통합과 디지털 권리에 중점을 둔 행사인 ‘루믹스’(Roumics)의 공동 조직자들이자 참여자들이었던 일단의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루믹스’는 2015년 10월에 <커먼즈의 시간>과 같이 시작되었는데, <커먼즈의 시간>은 프랑스 사회와 프랑스어권 사회에서 연계된 행사들이 며칠 동안 동시에 진행되는 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의회는 ‘커먼즈를 포착하고 커먼즈로의 합류를 촉진하자’는 주제의 워크숍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워크숍은 <인터파즈>(Interphaz) 연합의 회원들을 포함해서 그 주제에 관심이 있는 최초의 그룹을 모았습니다. <인터파즈>는 대중교육 조직으로서 그 목적은 매개점이 된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시민들을 모으는 것입니다.

‘루믹스’ 이후에 비공식적인 두 개의 모임이 커먼즈 의회에 관해 논의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페이스북에 공지된 ‘행동하며 커먼즈 의회를 구축하기’라는 제목의 셋째 모임을 중심으로 아이디어가 구성되었고 그 모임에서 워크숍의 첫 조직화 능력이 테스트를 받았습니다.

 

제가 세계 전역에서 일어나는 협력적이고 구성적인 행동을 관찰하기 위해 2015년 9월에 www.semeoz.info 만들었을 때 저는 곧 커먼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릴 지역에서의 셋째 모임에 참석하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참석하는 것이 몇 달 전 툴루즈 지역에서 온 저에게는 제 윤리적 가치에 따라 새로운 소셜 네트워크를 창출할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의회에는 모든 시민들이 참석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배경의 시민들이 오시는 데 예를 들어 단체에서 오신 분들, 선출된 지역 공무원들, 커머너들 등입니다. 결속력을 창출하는 순서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이거나 기타 자신들이 참여하고 있는 조직들을 소개하고 설명합니다. 그 누구도 조직을 대표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개인으로서 의회에 참석하죠.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종종 말합니다.)

 

광범위한 차이가 다양한 집단들 사이에 존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몇 년 동안 커먼즈 개념을 알고 있었고 다른 어떤 사람들은 그 개념을 막 발견하고는 입문 워크숍에 참석하고자 한 것이죠. 워크숍은 모임이 있는 날 현장에서 열릴 수도 있고 원격 방식으로 열릴 수도 있습니다. 각 워크숍은 기록됩니다.

 

현재 채택한 운영 형태는 P2P 방식이고 탈중심적입니다. 하지만 의회 구성원들은 그들이 한 작업을 서면 흔적으로 (주로 <위키>에) 많이 남기고자 합니다. 간접적 연계의 메커니즘인 스티그머지 전략(stigmergic strategy, 흔적 전략)(([옮긴이] 이 전략의 원리는, 어떤 행동에 의해서 환경에 남겨진 흔적이 동일한 혹은 다른 행위자가 다음 행동을 수행하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행동들은 서로를 강화하고 구축하는 경향이 있으며,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활동으로 이어진다. [영어 위키피디아에서]))을 따르기 때문이죠. 이는 일부 사람들을 두렵게 할 수도 있고, 그 일이 비공식적이기 때문에 비효율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워크숍은 차례차례 진행되었고 표결이 필요하지도 않고 모임이 무한정 계속될 필요도 없이 집단의 목표가 이루어졌습니다.

 

운영은 일반적으로 합의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타당한 반대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한 모임의 진행상황은 기록됩니다. 일곱 개의 의회를 6개월간 운영한 후에도 큰 반대들은 제기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모임은 표결보다 대화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기여하려는 충동에서 나온 것이라면 반갑게 맞이하고 모든 것의 출발점인 사람을 신뢰하는 것에 강조를 두는 것이죠. 의회 구성원들은 ‘맞서 싸우는 것’보다 함께 구축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지금까지 의회는 회의실 임대료를 지불하는 지역 단체에게 재정적으로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 단체는 의회를 지원하는 일을 앞으로 맡게 될 <커먼즈 회의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몇 사람이 (역시 릴에서) 관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커먼즈 회의소>는 아직은 하나의 개념입니다. 지역의 정치적·행정적 제도에 종종 의존하는 기성의 조직을 연합하는 것이 개인을 연합하는 것보다 더 어렵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웹사이트에서 이 제안을 보다 잘 홍보하는 설명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과 툴루즈에서는 ‘사회헌장’을 작성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헌장은 의회의 기본적인 목표(윤리, 공유가치, 지역 ‘생태계’에의 통합), 운영, 도구들, 방식들, 구성원들 등을 규정할 것입니다.

 

의회를 설립하기 위한 기본 전략들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가 커먼즈 의회를 설립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커머너들을 위해 몇 가지 조언을 드릴 수 있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씀드리겠습니다.

 

– 몇 가지 간단한 목표를 설정하고, 일을 해나가며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상세히 기록하지 말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서술하라.

 

– 사람들을 개인으로서 자유롭게 해주어라. 그러면 그들의 창의성이 당신을 놀라게 할 것이다.

 

– 운영방식이 탈중심화되어 있다고 해도 집단의 동학을 창출하기 위해 친분을 쌓고 교류할 시간을 계획하는 것은 중요하다.

 

– 사회적 삶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놓기 시작하기 위해서 커먼즈를 알지 못하는 선출된 지역 공무원들과 단체 대표자들을 초대하는 것을 고려하라. (대개의 경우 그들은 새로운 실천을 발견해서 매우 기뻐할 것이다).

 

– 당신이 속한 의회 내부에서 그리고 의회들 사이에서 에뮬레이션(emulation)을 창출하기 위해서 디지털 도구를 처음부터 사용하라.

 

의회의 앞날

 

의회의 앞날은 알 수가 없습니다. 저에게는 커먼즈 운동의 전망에 관하여 어떤 예측도 할 능력이 없습니다. P2P 동학이 사회에 우세해지는 때가 온다면 커먼즈 운동이 당연히 부상할 것입니다. 제 관점에서 보면 이 부상은 개인들의 한 사람으로서의 발전에 주로 의존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스스로 깨닫는 것이 평등과 균등주의(egalitarianism)를 구별하는 최선의 방식이면서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전체주의 형태의 체제에서 무의식적으로 일하는 것을 피하는 최선의 방식입니다.

 

따라서 저는, ‘피어’(peer)는 ‘나와 동일한’ 것(동질성으로서의 정체성)의 동의어가 아니라 오히려 근본적 타자성/다름(이질성으로서의 P2P)을 연결시키고 사랑하는 것과 관련된다는 것을 개인들이 깊이 이해하는 조건에서만 커먼즈가 조화롭게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찾는 것은 우리의 특이성을 지우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공통으로 어떤 것을 창출하기 위해 특이성들로서 함께 일하는 법을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이루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사실, 평생의 작업이죠!).

 

커먼즈 의회들이 이런 방향으로 발전해간다면 네트워크 모임들이 기존의 커먼즈 네트워크에 기반을 두어 그 영역을 더욱더 넓혀나가리라고 예상됩니다. 원칙적으로 의회는 너무 큰 지리적 영역을 합쳐서는 안 되며 소규모 공동체들이 서로서로 연결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세 얼굴의 디오니소스와 공통적인 것의 화폐


  • 저자  :  Antonio Negri, 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Antonio Negri, Michael Hardt, Assmebly의 15장 2절, 3절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A three-faced Dionysus to govern the common

 

군주의 역할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삶의 조직화에 대한 결정을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새로운 군주는 왕좌 위에 앉아있는 존재일 수 없다. 우리가 할 일은 지배의 구조를 변형하고 완전히 뿌리를 뽑은 후 새로운 사회조직 형태들을 개발하는 것이다. 다중은 새로운 군주를 민주적 구조로서 구성해야 한다.

 

각자 가능성과 함정을 지닌, 세 개의 경로가 새로운 거버넌스로 향한다.

 

① 엑서더스 : 기존의 제도들로부터 빠져나와 작은 규모로 새로운 민주적인 사회적 관계를 수립한다.

② 적대적 개혁주의 : 기존의 제도를 그 내부로부터 변형.

③ 헤게모니 전략 : 사회 전체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여(“taking power, but differently”) 새로운 사회의 제도들을 창출하는 것. 전체를 직접 변형시키는 것.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옳으냐를 놓고 논쟁할 것이 아니라 이 경로들을 교직하는 방식을 발견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것을 ‘세 얼굴을 가진 디오니소스’(“three-faced Dionysus”)라고 부른다.

 

[① 엑서더스]

이 전략은 유토피아 공동체 전략의 계승자이다. 기존의 사회관계의 외부에 새로운 행동방식, 새로운 삶형태, 새로운 주체성을 창출하는 것이다. 유토피아적 공동체들과 푸리에에서 과학소설 작가들에 이르는 이론적 탐구들의 풍요로운 역사가 대안적 외부를 창출하는 힘을 입증한다.

 

오늘날 가장 영감을 주는 엑서더스 실천은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지배적 사회구조의 내부에 새로운 외부를 창출하는 정치—의 형태를 띤다. 비민주적 조직형태를 통해서 민주적 사회를 향해 노력하는 것은 위선적이고 자기패배적이라는 논리. 활동가들 자체가 변해야 한다는 생각. 사회운동 내부에 창출된 축소된 사회는 미래의 더 나은 사회를 미리 구현하는 것으로 의도되었을 뿐 아니라 그 현실적 가능성과 바람직함의 입증으로서 의도된 것이기도 하다.

 

예시적 정치가 특히 번성한 곳은 신좌파 여러 부문들, 특히 페미니즘과 학생운동에서이다. 여기서 참여민주주의는 운동 자체의 내적 조직화의 으뜸가는 기준으로 제시되었다. 1970년대부터 유럽 전역에서, 특히 이탈리아에서 발전된 점령된 사회센터들에서는 자율적 거버넌스 구조와 지배적 사회 내부에서 그 사회에 반하는 공동체를 창출하는 실험이 행해졌다. 예시정치는 최근에 들어와서 확장되었다. 2011-2013년에 타흐리르 광장, 뿌에르타 델 쏠 광장에서 주코티 공원 및 게지 공원에 이르는 다양한 점령 캠프들은 무상 도서관, 음식, 의료서비스의 체계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대규모로 민주적 의사결정의 실험을 한 감격적인 사례들이다. 예시적 정치의 가장 위대한 성취 가운데 하나는 민주주의와 평등에 관한 광범한 사회적 논쟁을 개시하는 능력이었다.

 

 

예시적 정치의 단점은 그 내적 동학과 사회적 효과에서 명백하다. 지배적인 사회의 일부이면서 예시적 공동체에서 사는 것은 힘들다. 자본주의에 포위된 사회주의 사회와 같다. 공동체에서 남과 다르게 살라는 것은 대체로 도덕의 수준에서 작동하며 지배적인 사회에서 주체성을 생산하는 것을 거스르기도 한다. 그 결과 도덕주의와 내적 치안이 그런 활동가적 공동체에서의 삶의 경험을 망치는 경우가 잦다.

 

더 중요한 것은 예시적 경험이 외부에 영향을 미치는 힘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욕망을 생성하고 그 하나의 사례를 제시하는 것은 큰 성취이이지만, 예시적 경험은 그 자체로는 지배적 제도들에 관여할 수단을 결여하고 있으며 지배적 질서를 전복하고 새로운 사회적 대안을 생성하는 것에 크게 못 미침은 말할 것도 없다.

 

[② 적대적 개혁주의]

기존의 제도들에 관여하여 안으로부터 개혁하기. 적대적 개혁주의는 단지 현 체제의 병폐를 보정하고 그 피해를 개선하는 데 복무하는 협조적 개혁주의와는 다르다. 적대적 개혁주의는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조준한다.

 

두치케(Rudi Dutschke)의 어구 “제도들을 거쳐 가는 대장정” (Der lange Marsch durch die Institutionen, long march through the institutions)은 마오의 항일 유격전 이미지를 지배 질서에 대한 내부 투쟁으로 전환시킨다. 기존의 제도 내부에서의 유격전이다. 또한 두치케의 어구는 그람시의 진지전의 핵심— 문화, 사상의 영역 그리고 현재의 권력구조의 영역에서의 정치투쟁 수행—을 표현한다. 두치케에게 목표는 운동의 자율을, 그 전략적 힘을 긍정하고 운동이 대항권력의 구축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똘리아띠(Palmiro Togliatti)도 그람시를 해석하여 “long march through the institutions”를 제안하지만 반대경로를 생각한다. 운동을 당의 명령에 종속시킨다.

 

적대적 개혁주의와 사민주의적 개혁주의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강한 개혁주의와 약한 개혁주의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전략적 자율성의 정도를 가늠해야 한다. 두치케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최고이고 똘리아띠의 경우에는 최소이다.

 

선거과정이 적대적 개혁주의의 장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뽑아준 사람이 권력구조를 실질적으로, 심지어는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이다. 최근에 오바마, 꼴라우(Ada Colau) 등 여러 진보적 정치가들이 실질적 변화를 약속하며 선출되었고 이들의 성공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공직의 타성이 변화를 위한 정치적 기획보다 더 강력했던 경우도 있고 반면에 실질적인 변화들이 성취된 경우도 있다.

 

적대적 개혁주의의 또 다른 장은, 소유의 틀 내에서 자본주의적 위계의 힘을 상쇄시키고 가난과 배제를 완화시키는 법 기획들이다. 빈자를 위한 주택 기획, 노동자의 권리 등.

 

이 이외에도 적대적 개혁주의가 발휘될 수 있는 다른 법적·제도적 장들이 있다 — 환경 문제, 성폭력 방지, 노동자권리 긍정, 이주민 돕기 등등. 적대적 개혁주의를 가늠하는 기준은 실행되는 개혁이 기존의 체제를 뒷받침하는가 아니면 권력구조의 실질적 변형을 가동시키는가이다.

 

적대적 개혁주의의 일부 기획들이 중요한 기여를 한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단기적으로는 실패로 끝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길게 보면 의미심장한 효과를 낼 수 있다. 대장정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한계도 명백하다. 대장정은 종종 기존의 제도들 속에서 길을 잃으며 바라는 사회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제도를 바꾸겠다고 제도 속에 들어가지만, 제도가 당신을 바꾸는 경우가 잦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적대적 개혁주의의 기획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 한계를 부각할 뿐이다.

 

[③ 헤게모니 잡기]

예시적 전략과 달리 이 전략은 지배적 사회로부터 상대적으로 분리된 소규모 공동체들의 구축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 목표는 사회 전체를 직접 변형하는 것이다. 이제 기존의 제도들은 행동의 장이 아니라 ‘해체적’(destituent) 사업의 대상이다. 기존의 제도를 전복하고 새로운 제도를 창출하는 것이 주된 과제이다.

 

이 세 경로들 각각은 상이한 시간성을 함축한다.

①은 사회변형을 미래—소규모가 대규모로 달성되는 날— 로 미룬다.

②는 점진적 변화라는 느린 시간성을 산다. “한 번에 벽돌 하나씩”

③은 ‘사건의 시간성’(the temporality of event)에서 살며 사회적 수준에서의 신속한 변형을 가져온다.

 

③에도 분명 많은 함정들이 있다.

1) 새 체제는 낡은 체제의 주된 특징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③이 현재 그대로의 권력을 잡는 것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③은 권력을 변형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맑스의 말을 빌자면, “국가를 분쇄하는 것”(smashing the state)이 필요하다. 우리는 비국가적인 공적 힘을 창출해야 한다.

2) ③은 (가령 일국 수준에서는) 환경에 의해 극히 제한된다. 전지구적 자본의 압박, 주도적 국민국가들의 반응, 다양한 비국가적 외부세력들이 가하는 제한 등. 그리스 시리자 정부의 경험, 지난 20년 동안 라틴아메리카의 진보적 정부들의 경험이 이 제한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해도 결국 이루는 것은 거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1) 첫 응답 (부분적이지만 중요하다)

이 세 전략들을 (잠재적으로) 보완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관점만 달리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변형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거를 통해서든 다른 수단을 통해서든 권력을 잡는 것은 자율적이고 예시적인 실천들이 더 큰 규모로 이루어질 공간을 여는 데 복무하고, 장기적으로 계속될 제도들의 변형을 천천히 양성하는 데 힘써야 한다. 이와 유사하게 엑서더스의 실천들도 다른 두 기획들을 보완하고 촉진하는 방식들을 발견해야 한다. 세 얼굴의 디오니소스는 연계를 통해 대항권력을 형성하며 기존의 지배체제 내에서 그 체제에 거슬러 권력의 이원주의(a dualism of power, 두 정치적 힘의 공존)를 실질적으로 창조한다. 이것이 마키아벨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리얼리즘(현실주의)이다.

 

2) 둘째 응답 (더 심층적이다)

시야를 정치에서 사회적 지형으로 확대한다. 우리[네그리·하트]는 이 책에서 줄곧 정치를 자율적인 지형으로 보는 것은 재난을 낳는다고 주장했다. 민주적 거버넌스의 퍼즐은 사회적 관계의 변형을 통해서만 풀릴 수 있다. 사회적 불평등을 유지하고 사회적 삶에의 평등한 참여를 방지하는 주된 메커니즘은 바로 사적 소유의 지배이다. 공통적인 것의 수립은 사적 소유의 장벽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새로운 민주적인 사회적 관계를 창출·제도화한다. 사회적 지형으로 초점을 확대하면 사회적 협력을 조직하는 광범하게 퍼진 능력을 포착하게 된다. 다중의 기업가 정신/활동이 이 확대된 능력의 한 얼굴이다. 생산하는 삶을 조직하고 협동의 미래 형태들을 계획하고 실현하는 민중의 능력이 바로 필요한 정치적 능력이다. 그리고 삶정치적 맥락에서 사회적 조직화는 항상 흘러넘쳐서 정치적 조직화로 확대된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이 여기서 우리가 서술하는 경로와 같은 것을 규정한다. 그람시의 헤게모니는 순전한 정치적 범주(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번역)도 아니고 순전한 사회학적 범주(헤겔의 ‘시민 사회’)도 아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는 당 측면(더 정확하게는 주체성의 생산과 그것에 살을 부여하는 구성적 힘)과 사회를 변형하는 사회 투쟁의 측면을 다 포함한다. 그람시가 그의 글 「미국주의와 포디즘」(“Americanism and Fordism”)에서 합리화가 새로운 유형의 노동과 새로운 생산과정에 상응하여 새로운 인간 유형을 창출할 필요를 낳았다고 썼을 때, 우리는 이로부터 이 새로운 유형 즉 포디즘 노동자는 경제적 위기와 기술의 변형에서 그가 배운 것을 되돌려 위기에 배치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저항과 투쟁의 존재론적 축적은 그것이 공통적인 것의 사회적 형상에 접근하여 ‘일반지성’의 패러다임을 해석하게 될수록 혁명적 실천에 더 본질적인 것이 된다.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이 중첩, 적대적 개혁과 헤게모니 잡기의 이 중첩에서 우리는 어떻게 오늘날 공통적인 것에 기반을 둔 다중적 민주주의의 구축이 이해될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상을 얻는다.

 

여기서 우리는 (2장에서 옹호한) 전략과 전술의 전도—예전과는 다르게 지금은 다중이 전략을 담당하고 운동의 지도부가 전술을 담당한다—가능성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 결정적인 것은 다중의 전략능력의 수립이다. 전략능력이란 억압의 구조들을 샅샅이 해석하고 효과적인 대항권력을 형성하며, 신중하게 미래를 위해 계획하고,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조직화하는 능력이다. 다중은 정치적 기업가가 될 능력을 획득하고 있다. 지도부의 행동의 유용성과 필요성은 특히 긴급한 상황에서는 분명하다. 수립되어야 할 것은 지도부가 자신들이 환영받는 시간 이상을 남아있지 않게 할 방비책이다. 다중의 전략적 힘이 유일한 보증자이다.

 

 

A Hermes to forge the coin of the common

 

금융의 지배 하에서 화폐가 발휘하는 힘과 폭력의 비판자들 다수는 화폐의 힘을 제한하는 것을 주된 과제라고 주장한다. 선거에서 돈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고 부유층의 금융권력을 제한하고 은행의 권력을 감소시키고 심지어는 화폐를 더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이 모든 것은 물론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는 첫 걸음일 뿐이다.

 

화폐를 폐지하자는 더 발본적인 주장은 자본주의적 화폐를 화폐 자체와 혼동하고 있다. 화폐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11장에서 말했듯이, 화폐는 사회적 관계를 제도화한다. 화폐는 강력한 사회적 테크놀로지이다. 다른 테크놀로지의 경우처럼 문제는 화폐가 아니라 그것이 지탱하는 사회적 관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통적인 것에서의 평등과 자유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그 사회적 관계를 공고히 하고 제도화하기 위해 새로운 화폐가 창출될 수 있다. 지역 화폐가 분명 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우리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관계만큼이나 일반적이고 강력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원한다. 어떻게 우리는 소유관계에 기반을 두지 않고 공통적인 것에 기반을 둔 화폐를 상상할 수 있는가? 이 화폐는 재산에 대한 익명화된 권리증서(자본주의적 화폐)가 되지 않고, 공통적인 것에서의 다원적이고 특이한 사회적 유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화폐의 창출은 사유재산에서 공통적인 것으로의 이행과 병행되어야 한다.

 

화폐정책 및 사회정책의 구체적 전환을 통해 공통적인 것의 화폐(a money of the common)를 상상하기 시작할 수 있다.

 

1) 온건한 제안은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 for the people”)이다.((이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글 http://commonstrans.net/?p=889 참조)) 전통적으로 양적 완화란 중앙은행이 여러 수단을 써서 화폐공급을 증가시켜서 소비와 생산을 자극하고자 하는 화폐정책이다. 프리드먼이 ‘헬리콥터가 뿌리는 돈’이라고 부른 이 돈은 소비의 욕구에 따라 분배되지만 결국 재계로 돌아간다. 마라치(Christian Marazzi)나 바루파키스(Yanis Varoufakis) 같은 몇몇 급진적 경제학자들은 새로운 목적으로 화폐를 공급하는 것을 제안하였는데 이것이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이다. 화폐를 찍어내되 민중에게 공급하자는 것이다. 가장 급진적인 경우에는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자율적 기획들과 실험들(규모가 작든 크든)에 제공하자는 것이다. 이 제안은 진정한 대항권력의 구축을 정치적으로 훈련하고 운영하는 유용한 플랫폼을 창출하지만, 작은 걸음일 뿐이다.

 

2) 보장된 기본소득에 대한 제안이 우리를 공통적인 것의 화폐에 더 가까이 데려간다. 베르첼로네(Carlo Vercellone)는 보장된 기본소득을 소득의 일차적 원천으로 만든다면 소득을 임금노동으로부터 분리하고 공유된 부를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협력적 회로들과 연결시킴으로써 공통적인 것의 화폐를 주조하는 데 초석이 될 것이라고 한다. 베르첼로네는 자본주의적 명령으로부터의 (일정한) 자율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이것을 공통적인 것의 화폐라고 부른다. 기본소득이 사회적 삶을 생산·재생산할 수 있는 자유와 시간을 주는 것이다. 노동과 소득의 연결을 약화시키면 부와 사유재산의 관계가 무너지고 공유된 부를 위한 공간이 열린다. 더 나아가 기본소득은 임금체제 외부에 사회적 협동의 새로운 형태들을 열며 자본을 넘어선 사회적 삶을 상상하기를 촉진한다.

위크스(Kathi Weeks)는 기본소득의 반(反)금욕적 효과를 강조한다. 검소, 저축, 양보, 희생의 윤리를 설교하기보다 욕구와 욕망의 확장을 촉진하고 노동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은 삶을 지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기본소득도 그 자체로는 자본주의적 화폐를 변형하고 사유재산을 제거하며 공통적인 것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수립하는 데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그것은 그 방향을 향한 강한 몸짓이다.

 

이런 정책 제안들을 공통적인 것의 화폐 쪽으로 끌고 가려면 11장에서 이루어진 화폐의 성격에 대한 연구를 더 업데이트해야 한다. 이는 생산과 재생산의 새로운 관계들을 역동적으로 포착하고, 그것을 관통하는 욕구를 해석하고(스피노자라면 이를 윤리학이라고 부를 것이다) 자본주의적 발전의 경향에 대한 분석을 그것을 가로지르고 변조시키는 힘들에 대한 인식과 결합시키는 화폐의 정치를 구축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포착해 낼 것은 ① 금융 자본과 사회적 생산의 체제에서 일어나는, 생산자들 및 재생산자들 사이의 관계의 화폐적 형태 ② 이 생산양식의 발전에 상응하는 (상응해야 하는) 소득의 다양한 형태들 ③ 각 화폐적 형태에 상응하는 “미덕의 체제”이다. 우리의 문제틀은 산업자본의 명령에서 금융자본의 명령으로의 이행을 포착하면서 사유재산을 공통적인 것으로 변형하는 것이다.

 

현재 자본주의적 생산과 그 추출 양태들은 사회적 협동에 의존한다. 잉여 가치는 사회적 가치의 추출을 조직하는 금융 테크놀로지를 통해 전유된다. 어떤 면에서는 “총자본”(collective capital) 자신이 역설적이게도 사유재산의 해체와 공통적인 것의 인정을 현재의 생산양식의 토대로 인식한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적 투쟁의 직접적 목표는 불평등을 줄이고 긴축의 체제와 단절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는 특히 극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자본의 권력에 저항하는 다중에게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해체중인 정치적 구성과 새로이 출현하는 기술적 구성―이 일종의 공위상태를 이루며 공존하기 때문이다. 노조 운동과 사회운동의 전통들을 결합하는 사회 파업(Social strike)이 이 지형에서 투쟁의 특권적 형태이다. 궁극적으로 긴축과 불평등의 거부는 협동의 화폐(a money of cooperation)에 대한 요구를 표현해야 하며 따라서 사회적 협동의 생산성에 상응하는 소득―임금의 요소와 복지의 요소를 모두 가진 소득―의 형태들에 대한 요구를 표현해야 한다. 협동의 화폐는 보장된 기본소득을 넘어서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새로운 연합이 ‘정치적 소득’―자본주의적 발전 및 계급관계들과 양립 불가능하게 되는 소득―을 부과할 수 있는 지형을 창출해야 한다. 여기서 긍정되는 미덕은 사회적 생산자들 및 재생산자들의 투쟁의 관점에서는 평등이다. ‘모두에게는 그 욕구에 따라서’(맑스의 슬로건)는 모두가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에 관여하고 배치된다는 사실에 상응한다.

 

공통의 생산은 또한 다중적이기 때문에 즉 일단의 특이성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력의 재생산은 대중화(massification)의 형태로는 성취될 수 없다. 사회적 차이들과 그 혁신의 힘이 사회적 생산 및 재생산에 필수적이 되었다. 따라서 협동의 화폐에 특이화의 화폐(a money of singularization) 및 특이화의 소득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는 차이에 대한 권리를 지원하며 아래로부터의 다원적 표현을 뒷받침한다. ‘모두로부터는 그 능력에 따라’(From all according to their abilities)는 따라서 특이성의 덕을 긍정하는 ‘모두로부터는 그 차이에 따라’(from all according to their differences)로 옮길 수 있다. 특이화의 소득은 사회적 생산자들과 재생산자들의 자기자치화를 증진해야 할 것이다.

 

신케인즈적 거버넌스 구조와 ‘위로부터의’ 유효수요 창출을 다시 제안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파열을 향하는 사회적 힘들을 주체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지형에서 우리는 스트라(Pascal Nicolas-Le Strat)가 ‘공통적인 것의 노동’(le travaille du commun)이라고 부르는 것의 전선(front)을 창출할 수 있다. 이는 생산과 서비스의 협동적·민주적 플랫폼들을 가리킨다. 또한 지역 공동체들을 위한 실험적 통화들을 창출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출현하는 다중이 가진, 사회적 관계를 자율적으로 창조하는 능력은 그 자체가 바로 정치적 능력이다. 자기가치화는 정치적 자율과 자치의 능력을 함축한다.

 

근대 부르주아 체제는 사적 소유의 관계에 토대를 두고 그 관계를 보장하는 반면에 자율적인 사회적 생산의 체제는 공통적인 것에 토대를 두며 공통적인 것을 보장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6장에서 말한 심연 너머로의 도약, 사적 소유의 지배 너머로의 도약이다.

 

화폐의 첫 두 형상(협동의 화폐와 특이화의 화폐)은 사회적 생산과 일반 지성의 시대에 (새로 출현하는) 기업가적 다중이 가진 자질과 능력을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또한 사회 및 지구에의 투자의 화폐(a money of social and planetary investment)를 필요로 한다. 점증하는 자율의 과정에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교육·연구·수송·건강·통신을 통해 사회의 확대를 보장할 화폐와 다른 한편으로는 지구와 모든 생명체들 및 생태계들에 대한 돌봄의 관계들을 통해 삶을 보존할 화폐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 문제는 소득이 아니라 사회 자원을 미래를 위한 민주적 계획에 바치는 것이다. 자본은 지구에서의 사회적 삶의 번영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생존을 위한 계획을 짤 능력이 없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국가도 더 나은 점이 없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은 실패했다. 사려의 미덕을 표현하는 공통적인 것이 지속 가능한 미래로 가는 유일한 경로이다.

 

11장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적 화폐가 제도화하는 사회적 관계의 특징들 가운데 일부를 세 개의 국면―① 시초 축적 ② 매뉴팩처와 대규모 산업 ③ 사회적 생산―으로 나누어 스케치했다.((이 블로그의 글 http://commonstrans.net/?p=1081의 맨 뒤에 달린 부록 참조)) 공통적인 것의 화폐가 산출할 잠재적 사회적 관계에 살을 붙이기 위해서 우리의 표에 넷째 단을 추가하여 공통적인 것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사회에서 시간성, 가치형태들, 거버넌스 구조 등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서술하는 것이 논리적일 듯하다. 공통적인 것의 화폐는 비자본주의적 화폐이기 때문에, 또한 그 사회적 관계가 비소유적 관계이기 때문에, 그 표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는 한에서는 이것이 도움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공통적인 것의 화폐에 실질적 역사적 파열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이해하려면 새로운 분석틀이 필요할 것이다.

 

평등, 차이, 사려를 증진하는 공통적인 것의 화폐를 제안하는 것이 유토피아적인가? 협동, 특이화, 사회 및 지구에의 투자의 화폐를?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적 리얼리즘은 현대 사회의 운동들에 의해 활성화되는 성향을 인식하는 데, 그 안에 담겨있는 욕망을 조명하는 데, 그런 다음에는 미래를 현재로 가지고 오는 데 있다. 결국 공통적인 것의 화폐는 공통적인 것의 사회적 관계―공통적인 것의 화폐는 이 관계를 수립하는 데 복무한다―가 실제로 온전하게 구현될 때에만 대세가 될 것이다.




크라우드법과 입법의 미래


  • 저자  :  겁랩 (GovLab)
  • 원문 : “Legislature 2.0: CrowdLaw and the Future of Lawmaking” (2018.5.21) /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
  • 분류 : 번역
  • 옮긴이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P2P재단의 블로그에 올라있는 겁랩(GovLab)의 2018년 5월 21일 자 글 Legislature 2.0: CrowdLaw and the Future of Lawmaking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는 재게시된 일자이고 원래 작성일은 작년으로 추정된다.) 겁랩은 거버넌스 방식을 바꿈으로써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뉴욕대학교 소속의 연구소이다. 이탈리아에 있는 랩겁(LabGov, Laboratory for the Governance of Commons)과는 다른 곳이다.

 

입법2.0 — 크라우드법과 입법의 미래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역대 최저인 상황에서, 주로 정당의 아젠다에 의해 지배되고 대체로 닫힌 방 안에서 작업하는 전문가들과 정치인들에 의해 실행되는 전통적인 대의제 입법 모델들의 정당성과 효율성에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 입법 기관들의 작동방식에 전문지식과 견해의 새로운 원천을 도입하고 입법자들을 선거 당일보다 더 많은 날에 국민에게 더욱 책임을 지게 만들 가능성을 테크놀로지가 제공해준다. 지역 입법기관과 국회가 대중을 참여시키기 위해서 인터넷에 시선을 돌리는 사례들이 이미 세계 전역에 24건 이상 존재한다. 우리는 그러한 공개적이고 참여적인 입법을 ‘크라우드법’(crowdlaw)이라고 부른다.

 

웹싸이트 Crowd.Law

입법기관들이 대학에서 행하는 연구에 돈을 대지만, 자신들이 작업을 하는 방식을 연구하고 재발명하는 데에는 거의 투자하지 않는다. 그래서 뉴욕대학교(New York University)에 있는 거버넌스랩(Governance Lab, 겁랩)은 테크놀로지가—특히 개인들과 집단들의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테크놀로지가—입법과정에 앞으로 미칠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서 크라우드법 연구 기획(CrowdLaw Research Initiative)과 웹사이트(“CrowdLaw”)를 시작하고 있다. 우리가 더 높은 입법 투명성을 가능하게 하는 테크놀로지와 구분되는 것으로서 집단지성 도구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이 도구들이 점점 더 다양해지는 견해들과 전문지식을 입법과정으로 돌릴 수 있고 그럼으로써 입법의 질과 효율성을 더 높일 수 있는 쌍방 대화의 잠재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초점은 단지 더 직접적이기만 할 뿐이 아니라 더 많은 정보를 가진 민주주의를 창출하는 것에 두어진다. 우리의 작업은 모든 종류의 전문지식이 사회에 널리 분산되어 있다는 가설, 그리고 더 많은 정보를 입법과정에 도입하여 그 과정을 항상 진행되는 대화와 협동의 과정을 만드는 데 테크놀로지를 사용할 수 있다는 가설에서 출발한다.

 

Crowd.Law 웹사이트는 다음의 것들을 포함한다.

 

1. 크라우드법의 심층 분석과 설명

2. 세계전역에 존재하는 크라우드법 기획의 25개 사례들에 대한 짧은 사례연구

3. 크라우드법의 주도적인 이론가들 및 실무자들의 트위터 목록

4. 크라우드법에 관한 정선된 참고문헌 목록

5. 크라우드법 과정 및 플랫폼 설계안들의 심층적 추천

6. 시민의 입법참여를 입법하기 위한 모델 언어

 

이 작업은 12개 이상의 나라에 속한 크라우드법 실무자들이 가진 3번의 온라인 회의((원주1 “Toward More Inclusive Lawmaking: What We Know & Still Most Need to Know About Crowdlaw,” The Governance Lab, June 4, 2014, http://thegovlab.org/toward-more-inclusive-lawmaking-what-we-know-still-most-need-to-know-about-crowdlaw/. “Expanding Insights — #Crowdlaw Session 2 Highlights Need for Experimentation & Collaboration,” The Governance Lab, June 24, 2014, http://thegovlab.org/expanding-insights-crowdlaw-session-2-highlights-need-for-experimentation-collaboration/. “#CrowdLaw — On the Verge of Disruptive Change… Designing to Scale Impact,” The Governance Lab, December 4, 2015, http://thegovlab.org/expanding-insights-crowdlaw-session-2-highlights-need-for-experimentation-collaboration/ ))와 예일로스쿨의 <거버넌스 혁신 클리닉>(Clinic on Governance Innovation)에서 한 학기 지속된 대학원 연구프로젝트에 의해 이루어졌다.

 

2018년에 예상되는 크라우드법 활동

Crowd.Law의 개설은 시작일 뿐이다. 이를 필두로, 크라우드법 시행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깊게 하고 입법혁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공동체를 구성하며 추가적인 크라우드법 실험을 시범적으로 행하고 그 작동을 연구하기 위한 일련의 활동들이 올해에 이루어질 것이다.

 

이 목적으로 11월 17일 마드리드 자치지방의회와 마드리드 시의회가 크라우드법에 관한 워크숍을 뉴욕대학교의 겁랩 및 하버드 스터디그룹인 <테크놀로지상의 아고라 설계에의 도전>과 함께 가질 것이다. (이 스터디그룹은 스페인의 지자체 및 자치지방 수준에서 크라우드법에 관한 잠재적 파일럿 프로젝트들을 조사할 목적으로 구성되었다.)(([옮긴이]스페인의 의회제도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744의 글 각주 2번을 참조))

 

오는 봄, 겁랩과 뉴욕대 탠던공대에서 ‘도시를 다스리기’(Governing the City) 세미나에 참여하는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공적인 일에의 더 많은 참여가 가지는 혜택과 리스크를 포착하려는 노력의 표현으로서 어떻게 법안이 법이 되고 다시 그 법이 시행령으로 실행되는지를 맵핑하기 위해서 거대 메트로폴리스의 시의회와 관련된 연구에 착수할 것이다.

 

겁랩은 록펠러 재단의 지원으로 전 세계에서 정치 및 법 이론가들, 국회의원들, 의회법 학자들, 플랫폼 설계자들, 입법 실무자들을 3월에 이탈리아에 있는 록펠러 벨라지오 컨퍼런스 센터에 모아서 입법에의 시민참여에 관한 이론과 실천을 탐구하고 증거에 입각한 연구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크라우드법을 실행하는 의회들에 의한 데이터 수집과 공유를 위한 기준을 마련할 것이다.

 

왜 크라우드법인가?

오늘날 시민은 이익집단 로비스트들을 제외하고는 거버넌스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한다. 입법과정의 취약성에 관한 방대한 문헌들이 존재하는데, 이 문헌들은 법의 낮은 질의 원인들을 설명한다. 해커(Jacob Hacker)와 피어슨(Paul Pierson)이 『승자 독식형 정치』(Winner Take All Politics)(2011)(([옮긴이] 『부자들은 왜 우리를 힘들게 하는가?』라는 다소 초점이 다른 제목의 한국어본이 있다. 영어 원본의 부제—‘어떻게 워싱턴은 부자를 더 부유하게 만들고 중산층에 등을 돌렸는가?’(How Washington Made the Rich Richer–and Turned Its Back on the Middle Class)—이다.))에서 결론짓듯이, 1970년대에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프로그램들(([옮긴이] 1964년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가난의 제거와 인종 정의를 위해서 미국에서 행한 일련의 사회 정책들))과 싸우기 위해서 출현한 재계의 수십억 달러 로비 기계가 정치적 과정을 장악하고 중산층보다 최상층을 우선시하는 입법 아젠다를 계속적으로 밀어붙였다. 해커와 피어슨의 책은 미국 사회에서 정치로부터 ‘모든 사람’을 배제시킨 것과 그 결과로 나타난 불평등을 기록하고 있다. 쇤브로드(David Schoenbrod)는 그의 『DC 컨피덴셜』(DC Confidential)(([옮긴이] 이런 제목은 LA Confidential(소설이 원작이고 이것을 영화로 만든 것이 더 유명하다)이 효시인 셈인데, 이 제목의 “Confidential”은 당시 스캔들을 다루는 잡지 Confidential에서 따왔다. 따라서 DC Confidential은 워싱턴의 알려지지 않은 추악한 이면을 다루겠다는 의미가 된다.))에서 정치가들이 잘못된 입법에 대한 비난과 책임을 미래세대에 전가하면서 자신의 신망을 얻기 위해 사용하는 ‘다섯 가지 속임수’를 지적한다. 다른 연구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평균적인 미국인들의 선호는 공공정책에 아주 작은, 영에 가까운, 통계적으로 사소한 영향만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원주[2] Gilens, M., & Page, B. (2014). Testing Theories of American Politics: Elites, Interest Groups, and Average Citizens. Perspectives on Politics, 12(3), 564–581. doi:10.1017/S1537592714001595.))

 

아직 모르는 것은, 투표함 너머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형태의 참여가 실제로 입법과정의 정당성((원주[3] Sidney Verba, Kay Lehman Schlozman and Henry Brady, Voice and Equality: Civic Voluntarism in American Politics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1995).))과 질((원주[4] Nam, “Suggesting frameworks of citizen-sourcing via Government 2.0,” 18.))을 높이고 그 병폐를 고칠 수 있는가이다. 이 두 목표는 하나는 모든 목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데 초점을 두고 다른 하나는 전문지식을 제고하는 데 초점을 두기 때문에 종종 상충한다는 것을 주목할 가치가 있다.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에 대해서 정답은 없는데, 입법 및 정책입안과 관련된 대부분의 시민참여 실험은 지금까지 전자에 초점을 두고 후자를 배제해왔다. 그 결과로 입법결과에서의 중요한 향상을 낳은 바는 없다. 실험할 새로운 파일럿 기획들을 세울 때는 두 목표 모두를 입법과정의 여러 상이한 단계들에서 달성하는 식으로 플랫폼과 과정을 설계해보는 것이 결정적인 점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의회가 어떤 이슈를 잡을지를 결정하는 단계(아젠다 설정)에서는 공동체의 관심사들과 문제들을 제기할 기회, 그리고 다룰 문제들을 시민들이 제안하고 우선순위를 매기고 비판할 기회가 생길 수 있다. 핀란드의 <시민 이니셔티브 행동>(Citizen’s Initiative Act)이 그러한 사례인데, 여기서는 시민이 새로운 입법을 제안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시민참여는 시민이 전문지식을 기여함으로써 정보를 제고하고 입법과정에 경험을 도입할 잠재력을 가진다.

 

입법기관들과 규제기관들이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의 내용에 도달한 단계(제안 작성)에서는, 분산된 전문지식을 입법자들과 실무자들 및 간헐적인 청문회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수준 너머로 끌어올림으로써 혁신적 접근법을 포착할 기회가((원주[5] John Wilkerson, David Smith and Nicholas Stramp, “Tracing the Flow of Policy Ideas in Legislatures: A Text Reuse Approach,” American Journal of Political Science 59:4 (January 2015): 943–956.)), 그리고 동시에 제안된 해결책들에 대한 시민의 선호와 견해를 재는 과정을 창출할 기회가 생길 수 있다. 프랑스의 <의회와 시민>(Parlement & Citoyens)은 시민들이 의원이 제안한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에 대한 제안을 제출할 수 있게 한다. 시민들의 제안은 그 다음에 종합되고 토론을 거쳐서 법안 작성에 통합된다.

 

스페인의 뽀데모스에서부터 덴마크의 대안당에 이르는 새로운 정당들 다수는 지지자들의 견해를 평가하고 지자들의 요구에 더 잘 응하려는 노력의 표현으로 유권자들에게 정당 강령을 작성하도록 권유하는 데 새 테크놀로지를 사용했다.

 

만일 의회가 모니터링 업무를 예를 들어 카메라폰을 가진 시민들에게 분산시킨다면 이는 입법의 후속비용과 입법이 시민들의 삶에 주는 이익을 평가하고 더 큰 경험적 엄밀함(바로 이것이 보통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을 입법에 도입하는 능력을 극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다.((원주[6] “Initial Findings from Pará,” MIT Center for Civic Media, last modified May 2017, http://promisetracker.org/2017/05/23/initial-findings-from-para/. 원주[7] Janet Tappin Coelho, “Rio de Janeiro Citizens to Receive New App to Record Police Violence in City’s Favelas,” Independent, March 5 2016, http://www.independent.co.uk/news/world/americas/rio-de-janeiro-citizens-to-receive-new-app-to-record-police-violence-in-citys-favelas-a6914716.html 원주[8] Martina Björkman Nyqvist, Damien de Walque and Jakob Svensson, “The Power of Information in Community Monitoring,” J-PAL Policy Briefcase (2015). Available at: https://www.povertyactionlab.org/sites/default/files/publications/Community%20Monitoring_2.pdf 원주[9] Dennis Linders, “From e-Government to We-Government: Defining a Typology for Citizen Coproduction in the Age of Social Media,” Government Information Quarterly 29:4 (October 2012): 446–454. Available at: http://www.academia.edu/27417288/From_e-government_to_we-government_Defining_a_typology_for_citizen_coproduction_in_the_age_of_social_media 원주[10] Tiago Piexoto and Jonathan Fox, “When Does ICT-Enabled Citizen Voice Lead to Government Responsiveness?” Institute of Development Studies Bulletin 41:1 (January 2016): 28. Available at: http://pubdocs.worldbank.org/en/835741452530215528/WDR16-BP-When-Does-ICT-Enabled-Citizen-Voice-Peixoto-Fox.pdf))

 

그런데 시민참여가 더 많아지는 바로 그만큼 더 현명한 혹은 더 정의로운 법이 만들어지는지는 자명하지 않다. 이와 반대되는 방향을 가리키는 수많은 사례들이 있는데, 여기에는 최근의 유명한 국민투표들이 포함된다. 입법과 관련된 정보의 질을 개선하지 않고 의사결정을 개방하는 것은 일부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많은 힘을 부여하는 결과로 끝날 수 있고 특수한 이익 세력이 부당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더 많은 직접적인 참여는 시민들의 자유에 부정적인 결과를 미치는 포퓰리즘적 지배를 낳을 수도 있다. 시민참여가 아무리 해도 유용한 것이 되기 어렵고 최악의 경우에는 번거로운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입법기관들이 시민참여의 실행을 느리게 진행시키는 데는 일리가 있다.

 

이러한 리스크에 맞서고 좋은 점들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입법기관이 어떻게 시민과 함께하면서 입법과정의 일부로서 정보를 수집·분석·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정보와 가이드를 줄 체계적인 실험과 평가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더 나아가 만일 우리가 통상적인 대의민주주의 모델 혹은 국민투표 너머로 입법방식을 진화시키고자 한다면, 더 많은 참여가 입법의 정당성과 효율성을 개선하는 일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