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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케이디아 그리고 전지구적으로 재개된 생물지역 행동주의

 



가장 고무적인 최근 발전들 가운데 하나가 생물지역주의(bioregionalism)가 재개된 것이었다. 40년쯤 전 1970년대와 1980년대 말에 경제, 생태 파수, 그리고 자연 생물지역들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방식을 다시 상상하려는 대중의 엄청난 욕구가 있었지만 이것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발전으로 점차 약해졌다. 이제 생물지역주의는 훨씬 더 영향력 있고 훨씬 더 세련되게 다시 부상하고 있다.

많은 선구적 지도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퍼시픽 노스웨스트(Pacific Northwest)(주석1)에 있는 활동가들, 학자들 및 사회 혁신가들이었다. 그들은 캐스케이디아라는 용어와 종종 관련되어 있는데, 이 용어는 그들이 브리시티 콜롬비아(British Columbia)(주석2)와 알래스카 남동부에서 워싱턴 주, 오레곤, 아이호아 및 북부 캘리포니아까지 이어지는 생물지역에 붙인 명칭이다. 이 지역은 75만 평방 마일이 넘는 곳으로 천연 열대우림, 화산들 그리고 연어•늑대들•곰•고래•범고래를 위한 야생 서식지 및 1600만 명의 사람들이 사는 야생 거주지를 아우른다.

캐스케이디아 행동주의는 시장들, 문화들, 정체성들을 지역 생태계들과 조화되도록 재발명하기를 원하는 대규모 전지구적 운동의 일부이다. 캐스케이디아 행동주의는 현대 사회들을 설득해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생태계의 선물들을 존중하도록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특유의 장소를 배려하며 거주하도록 하는, 장기간에 걸친 당찬 활동이다. 또한 캐스케이디아 행동주의는 자의적인 정치적 경계들과 전지구적 시장들을 초월하고자 하는 것이 핵심이며, 한 지역의 물의 성질·현상 및 분포, 날씨, 식물과 야생 동물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고, 경제들, 문화들, 그리고 그 환경과 보완적 관계를 맺는 존재 방식들을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다.

생물지역주의의 르네상스가 활기를 얻자 나는 특히 가장 장래성이 있는 전략들과 과제들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싶었다. 나는 공동체 중심의 풀뿌리 프로젝트들의 인큐베이터인 <캐스케이디아나우!>(CascadiaNow!) 설립자이고 최근 들어서 <생물지역운동 캐스케이디아 본부>(Cascadia Department of Bioregion)의 공동 책임자인 시애틀의 조직가 브랜든 렛싱어(Brandon Letsinger)에게 도움을 청했다. 우리의 대화는 팟캐스트 <커머닝의 프론티어>의 가장 최근 에피소드(에피소드 54)에 실려 있다.

렛싱어는 자신의 일은 “생물지역주의가 자본주의와 국민국가에 대한 실현 가능한 대안으로서 주류사상에 진입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실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지역경제를 다시 생각하고 물, 땅, 야생 동물 및 그 밖의 다른 살아있는 힘들을 파수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발전시킴으로써 캐스케이디아의 생태적 자립을 증가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또한 더 책임이 있는 민주적인 정부를 조성하는 것을, 그리고 토착 주권, 시민/부족 파트너십 및 ‘토지 되찾기’ 운동을 촉진하는 것을 뜻한다.

렛싱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사고방식이 거주자들, 장소 또는 생태계를 나타내지 못하는 지도들 위의 선에 기반을 두는 한, 일정 수준의 분할이 항상 존재할 것이다. 미국 정치 구조는 대의제를 훼손하는 개리맨더링과 선들을 재정의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생물지역주의는 그것을 체계 전체를 보는 렌즈에 맞추어 다시 해석한다,

렛싱어에 따르면 [캐스케이디아를 가로질러 흐르는] 콜롬비아 강에 대한 권한을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다양한 자의적인 관할 구역에 할당하는 것은 기능장애이다. “새롭게 시작하여 강 전체를 바라보며 모든 목소리가 포함되는지를 확인함으로써 여러분은 그 사고방식을 긍정적이고 협력적인 구조로 바꾸기 시작할 수 있다.”

생태지역이란 정확히 무엇이며 여기에 기반을 두는 사고가 왜 중요한가?

렛싱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생물지역을 말하는 것은 어떤 장소를 (맨 아래에서부터 시작해서) 그곳의 물질적•문화적•생태적 현실을 통해 정의된 대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생물지역주의는 모든 것을 마치 그것들이 이 세상의 체계들로부터 어쨌든 분리된 양 정치경제와 문명의 렌즈를 통해 보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들이 모든 것을 위한 기본 토대로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제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렛싱어는 “생물지역주의는 사람들을 다시 장소에 연결하는 것이 핵심”이며 “지질학으로 시작된다”라고 말한다. 캐스케이디아의 경우에 이것은 수백억 년에 걸쳐 영토—분수령, 토양, 식물, 동물, 해양 생물—를 형성해온 땅과 화산들의 판들(plates)로 이루어진 거대한 ‘캐스케이디아 섭입대(沈入帶)’(Cascadia subduction zone)(주석3)를 뜻한다.

또한 생물지역주의는 “어떻게 인간이 어떤 장소 내부에서 가장 잘 살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렛싱어는 말한다. 토착민들이 어떻게 수천 년 동안 환경과 지속가능한 조화를 이루며 살아왔는지를 연구하는 것은 많은 의미가 있다. 이 전체론적인, 장기적 관점은 우리가 식량 생산, 전력 생산, 운송 및 도시설계의 현대적 시스템들뿐만 아니라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주석4) 경제활동들 및 문화규범들을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삶에] 어떻게 맞출지에 관하여 생각하도록 도와준다.

나는 콜롬비아의 바리차라 지역에서 활동하는 조 브루어(Joe Brewer)와 함께 한 이전 팟캐스트(에피소드 33)에서 생물지역 행동주의를 살펴보았다. 그는 북미에서 일련의 생물지역 상담과 협동 학습 세션들을 최근에 시작했다. 또 한명의 중요한 생물지역 활동가이자 교육자는 <영국 생물지역 학습 센터>(Bioregional Learning Centre UK)의 이저벨 칼라일(Isabel Carlisle)이다. 그녀의 조직은 수많은 주요 온라인 이벤트들을 주관했고 교육 자료들을 만들었으며 한편으로는 자신의 생물지역인 영국의 사우스 데번(South Devon)에서 과제들과 씨름하고 있다.

브랜든 렛싱어는 생물지역주의 활동가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가 새로운 유형의 지도를 만드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지도는 중립적이지 않다. 지도는 과제와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다. 지도는 국가 해당관청이나 경제 주체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매우 많다. 지도의 궁극적 목적은 기업을 위해서 수익을 내고 그 [정치적] 이해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될 것이다.”

생물지역의 지도제작은 “구글 지도 및 다른 전통적인 지도가 방치한 모든 것”을 지도에 담는다. 야생 동물의 존재, 이동 패턴, 물의 흐름, 그리고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생태적 현상들이 인간 공동체 및 문화와 교차하는 모습을 지도로 제작함으로써 땅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이 지도제작의 기본 발상이다.

캐나다에 있는 다양한 원주민 부족들이 캐나다 정부를 상대로 한 법적 투쟁에서 이런 종류의 지도제작이 그들에게 중요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부족들은 캐나다 국가와 협정을 체결한 적이 결코 없었으며 소송 목적을 위한 원주민의 상황에 대한 증빙자료가 빈약했었다. 토착민 지도제작자들과 후원자들은 부족 원로들을 인터뷰함으로써 식민지 정복으로 그들이 대량 살상되기 전에 토착 본토의 역사적 범위와 성격이 어땠는지를 보여줄 수 있었다. 쎄일리시해(주석5) 17개 섬에 거주하는 약 3천명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생물지역 지도제작 워크숍을 통해 30개의 지도가 포함된 각기 다른 생물지역 지도책자 14개가 만들어졌다.

지도는 2005년 『쎄일리시해 섬들』(Islands in the Salish Sea: A Community Atlas)이라는 한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지도에는 섬들의 사랑받는 보물들, 예를 들어 대대로 물려받은 과수원, 낚시터, 위험에 처한 야생 산호의 위치, 새들의 서식지 그리고 아주 오래된 캐나다 원주민들의 유적지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각 경우에 섬 공동체가 지도에 포함되어야 할 것을 결정했고 다른 지역의 것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서 지역 예술가들이 작업에 참여하도록 했다.

‘쎄일리시해’는 캐나다계 미국인 생물학자 버트 웨버(Bert Webber)에 의해 1970년대에 생물지역 용어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퓨젓 싸운드(Puget Sound)에 연결된 조지아 해협과 그 주위에 사는 워싱턴 주의 쎄일리시어 사용자를 예우하고, 이 수역에 속하는 석유, 물고기, 해양 포유동물들에게 정치적 정체성이 없음을 인정하고 싶어 했다. ‘쎄일리시해’라는 용어가 인기를 끌었고 지금은 이 수역을 관례적으로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브랜든과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생물지역주의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 많고 각각의 생물지역들 안에 따라해 볼 것이 많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 주제에 대한 훌륭한 소개를 접하려면 우리가 나눈 대화를 여기서 들어 보는 것이 좋겠다.

주석1 : [옮긴이] 퍼시픽 노스웨스트 서쪽으로 태평양과 동쪽으로 로키산맥을 둘러싼 북아메리카의 북서부 지역을 가리키며 캐스케이디아라고도 불린다.
주석2 : [옮긴이] 브리시티 콜롬비아는 캐나다의 최서단(最西端) 주로 태평양과 로키산맥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주석3 : [옮긴이] 섭입대(攝入帶)란 지구의 표층을 이루는 판이 서로 충돌하여 지각판 하나가 다른 지각판 밑으로 밀려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주석4 : [옮긴이] 적정기술이란 기술이 사용되는 사회 공동체의 정치적, 문화적, 환경적 조건을 고려해 해당 지역에서 지속적인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기술이다.
주석5 : [옮긴이] 쎄일리시해(Salish Sea)는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와 미국 워싱턴주에 걸친 태평양의 해역이다. 조지아 해협(Strait of Georgia), 후안 데 푸카 해협(Strait of Juan de Fuca), 퓨젓 싸운드(Puget Sound)로 이루어지며 복잡한 해협(channel)과 수로망을 포함한다.


By Department of Bioregion – Own work,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05581724




‘해적 돌봄’ 강의요목

 


  • 저자  :  David Bollier
  • 원문 :  Pirate Care, a Syllabus
  • 분류 :  번역
  • 옮긴이 :  루케아
  • 설명 : 

    아래 글은 데이빗 볼리어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2022년 9월 14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다음의 글은 데이빗 볼리어의 저서인 『변화만들기를 위한 커머너의 목록 — 앞으로 나아가는 이행들을 위한 도구들』(The Commoner’s Catalog for Changemaking: Tools for the Transitions Ahead)에서 발췌한 일련의 특집들 중 하나이다. 다수의 선구적인 커먼즈 프로젝트들과 운동들의 개요서인 『커머너의 목록』은 서점에서 구할 수 있고 온라인(https://commonerscatalog.org)을 통해 무료로 볼 수 있다.

사람들을 보살피는 돌봄의 특정 유형들이 불법화되었다는 것에 놀란 많은 유럽인들이 2019년 그들이 해적 돌봄”(Pirate Care)이라 부르는 것에 관한 교과목의 강의요목을 만들어냈다. 프로젝트 담당자들이 설명했듯이, “우리는 선장들이 바다에서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고 체포되는 세상에 살고 있고, 과학논문을 다운로드한 사람이 35년을 감옥에서 지내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다른 방법으로는 피임약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피임약을 가져다 준 사람들이 기소를 각오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아픈 사람들에게 약을, 목마른 사람들에게 물을, 집 없는 사람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준 것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여성 영웅들은 돌보고 있고 불복종하고 있다. 그들은 해적이다.”

여기서 ‘해적 돌봄’이라는 생각이, 그리고 인도주의적인 돌봄 내지 인명을 구조하는 돌봄을 제공할 필요—국가가 이것을 범죄로 간주하기로 작정하더라도 말이다—가 있다는 생각이 나왔다. 발레리아 그라찌아노(Valeria Graziano), 마셀 마스(Marcell Mars) 그리고 토미슬라브 메닥(Tomislav Medak)에 의해 개발된 해적 돌봄 강의요목은 “증가일로에 있는 행동주의의 오늘날의 형태들을 ‘돌봄’과 ‘해적행위’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지도그리기하는—초국적인 유럽 공간에 주로 기반을 두고 있는—하나의 연구과정으로” 작성되어 있다. 그 강의요목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 중 하나 즉 그 모든 다각적이고 서로 연결된 측면들에서의 ‘돌봄의 위기’”에 개입하는 새롭고 흥미로운 방식들을 제안한다.

우리 시대의 돌봄의 결여는 극도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시장/국가의 다양한 제도들—건강의료보험, 주택, 식량, 사회적 지원—의 실패로서 보일 수 있다.

시장은 명백한 ‘소비자 수요’가 없다면 돌봄에 가치를 두지 않는 경우가 잦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돌봄은 종종 가장 취약한 인적 서비스이다. 국가 관료들은 국민들에게 마치 기계인 양 규격화된 단위의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한다. 규칙들이 주도하는 대규모 제도들은 결코 ‘돌봄’을 실행할 수가 없다.

그래서 돌봄은 대체로 무급노동이거나 보수가 형편없는 유급노동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여성들의 노동’ 또는 비(非)백인들을 위한 노동으로서 종종 젠더화되고 주변화된다.

해적 돌봄 강의요목은 돌봄을 커머닝을 통해 발생하고 유지되는 중요한 것으로서 고양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돌봄은 국가권력과 시장에 저항하는 것이, 그리고 그렇게 저항하면서 사회 안에서의 권력관계들이 어떻게 극심하게 불평등한지를 드러내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이것은 돌봄을 제공하는 것이 왜 정치적 행위인지를, 이를테면 착한 사마리아인이 ‘적’을 도와주는 것과 같은 정치적 행위와 종종 유사한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해적 돌봄 강의요목은 이주자들과 난민들에게 인도주의적인 원조를 제공하는 것이 어떻게 연대와 공감에 바탕을 둔 기본적인 인간행동을 나타내는지를 탐구한다. 강의요목은 ‘해적 돌봄’에 관한 읽기 자료들을 제공하고 ‘해적 돌봄’을 이해하기 위한 실천적인 대응들을 조직된 성찰, 직접행동, 그리고 ‘집단적 기억 글쓰기’를 통하여 제안한다. 후자는 집단적이고 개인적인 마음의 상처들을, 특히 폭력적인 역사적 과거의 여파로 생겨난 상처들을 치료하는 한 방법으로서, 기억들을 회상하야 글로 쓰는 과정이다.

해적 돌봄의 실행자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자기조직화,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대안적 접근법들, 그리고 도구들•과학기술들•지식들의 커머닝을 실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시민불복종을 의미할 수 있으며, “가장 착취받고 차별받으며 소모품으로 격하된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인 유대”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박해받을 위험이 있음을 의미할 수 있다. 해적 돌봄 강의요목은 열려있으며 점차 발전하는 “도구”로 즉 “이 실천들로부터 배우는 집단적인 과정들을 지원하고 활성화시키기 위한 도구”로 제시된다.

나는 이 강의요목이 돌봄의 정치적 동학과 힘의 동학을 설명하는 방식이 좋았다.

1. 돌봄은 본래적으로 ‘친절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항상 권력관계를 함축한다. 기율•배제•위해의 과정들이 돌봄의 모태 안에서 작동할 수 있다.

2. 돌봄노동은 권력에 불복종하고 우리의 집단적 자유를 증가시키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것이 돌봄노동이 자본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이며 인종주의적인 방식으로 조직될 때에는 대다수의 살아있는 존재들을 위해 작동하지 않는 이유이다. 우리는 전지구적으로 돌봄의 위기에 처해있다.

3. ‘잘못된’ 사람들은 없다. 그런데 ‘잘못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 점점 더 사회적으로 좌절되고 있으며 어려워지고 범죄화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돌봄의 위기는 아주 오랜 시간동안 있어왔다.

4. 돌봄은 노동이다. 그것은 필요한 노동이며 숙련노동이다.

5. 돌봄노동은 젠더•지역•인종•계급•능력•나이의 구분에 따라 대부분의 사회에서 불공평하게 그리고 폭력적으로 공유된다. 어떤 이들은 강제로 돌보고 또 어떤 이들은 서비스를 기대하는 자신들의 특권을 옹호한다. 이런 상황은 바뀌어야 한다.

6. 돌봄노동은 자원•지식•도구•기술에 대한 전면적인 접근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것들을 빼앗겼다면 우리는 되돌려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커먼즈의 제헌권력 ― 공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의 관계에 대한 시론(試論)

 


  • 저자  : 윤영광
  • 설명 : 2022 커먼즈네트워크 포럼(10.28) 발표문이다.

 

제기되는, 제기되어야 하는 물음들

‘커먼즈’ 네트워크 포럼이 “공공성 회복을 위한 더 넓은 연대와 협력”이라는 제목하에 열리고 있다는 사실, 지금 이 세션의 제목이 “커먼즈와 공공성”이라는 사실은 즉각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는 왜 공공성이라는 익숙한 개념에 더해 커먼즈라는 새로운 개념을 필요로 하는가? 어째서 공공성이라는 개념이 이미 존재함에도 다시 커먼즈를 이야기하는가? 공공성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면 커먼즈라는 별도의 개념을 사용함에 따르는 잠재적 혼란을 감내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공공성의 어떤 문제, 한계 혹은 결여가 커먼즈라는 개념을 소환하는가? 그리고 커먼즈 개념을 소환토록 한 공공성의 그 모든 문제, 한계, 결여에도 불구하고 왜 간단히 공공성을 커먼즈로 대체하지 않고 ‘공공성 회복을 위한 더 넓은 연대와 협력’을 다름 아닌 커먼즈의 이름으로 논의하려 하는가?

요컨대 공공성과 커먼즈의 병치 자체가 이미 우리가 오늘 다루어야 하는 문제상황을 대략적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문제지형의 정확한 파악에는 아직 미치지 못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커먼즈와 공공성의 관계가 외적이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 관계의 양면성

모두 아시다시피 공공성은 두 가지 ‘공’을 품고 있습니다. 첫 번째 공(公)은 영어 ‘public’(공적인 것)에 해당하고 두 번째 공(共)은 ‘common’(공통적인 것)에 해당합니다. 공공성, 혹은 공공성과 커먼즈의 관계를 논하는 여러 연구자들이 이 두 가지 ‘공’에 대해 이미 많은 논의를 제출한 바 있습니다만, 오늘 제 이야기도 역시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숙고함으로써 시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공통적인 것 혹은 공통성(commonness)은 커먼즈의 구성적 속성 혹은 본질입니다. 커먼즈는 공통적인 것입니다(‘commons is common’). 이렇게 보면, 커먼즈는 공공성과 별도로 그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성을 구성하고 지탱하는 한 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커먼즈와 공공성의 관계는 내적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커먼즈와 공공성의 관계라는 애초의 문제는 공공성을 구성하는 두 축, 즉 공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의 관계라는 문제로 새롭게 제기됩니다.

발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공적’, ‘공통적’, ‘공공성’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봤습니다. 물론 지속적인 개념의 재규정을 요하는 이론적 작업에서 사전에 기대는 것은 일반적으로 부적절합니다. 사전의 본질이 한 단어의 침전된 의미, 그래서 가장 상투화된 의미를 전달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바로 그 때문에 사전적 의미는 개념을 둘러싼 ‘현실적인’ 사회·정치적 지형을 탐사하는 데 유용한 이정표가 되기도 합니다. 각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 공통적 : 둘 또는 그 이상의 것에 두루 통하고 관계된 것
  • 공적 : 국가나 사회에 관계된 것
  • 공공성 : 한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일반 사회 구성원 전체에 두루 관련되는 성질((국립국어연구원, 『표준국어대사전』, 두산동아, 1999.))

두 가지 점이 흥미롭습니다.

첫째, 공통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의미가 꽤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관적으로 구분됩니다. 공통적인 것의 정의는 ‘함께함’ 자체 ― 한국어 함께함은 being-together, living-together, doing-together를 모두 포괄할 수 있다는 강점을 갖습니다 ― 의 내용을 말하되 그 형식은 규정되지 않은 채로 남겨두고 있는 반면, 공적인 것의 정의는 현재 인류에게 함께함의 형식으로서 지배적인 ― 다른 정치적 상상이나 구상을 즉각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지배적인 ― 것으로 주어져 있는 ‘국가’와 ‘사회’를 소환합니다.((19세기 사회학이라는 분과학문의 출현, 국가와 시민사회의 역사적 분리에 대한 헤겔과 맑스의 분석, ‘사회적인 것’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 등이 서로 다른 맥락과 각도에서 방증하듯, ‘사회’, 적어도 한편으로는 국가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과 맞짝을 이루는 개념으로서의 ‘사회’는 국민국가와 마찬가지로 근대의 역사적 발명품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국가와 사회가 공통적인 것과 관련하여 동일한 논점을 제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는 국가보다 더 복잡하고 섬세한 논점들을 제기하며, 그래서 짧은 발표와 토론에서 다루기는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이후 논의는 국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닙니다만, 철학적으로 말해 이 맥락에서 공통적인 것은 질료에, 공적인 것은 형식에 해당한다고 해도 좋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문제는 저 형식과 질료의 관계가 필연적인가, 즉 공통적인 것은 필연적으로 공적인 것이라는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는가로 정식화될 수 있을 겁니다.

둘째, 공공성의 사전적 의미는 그것을 이루는 두 가지 ‘공’의 정의를 결합하고 있습니다. 공통적인 것의 정의에서 ‘(복수의 것에) 두루 관련됨’이라는 속성을 가져오고, 공적인 것의 정의에서 ‘사회’라는 요소를 가져오는 것이지요. 흥미로운 점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런 결합 자체라기보다, 공적인 것의 정의에서 맨 앞에 왔던 ‘국가’라는 요소가 이 정의에서는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한때 이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표현을 쓰자면 이는 ‘징후적’입니다. 이것은 공적인 것의 정의 속에 등장했던 함께함의 두 형식, 즉 국가와 사회가 그 성격과 위상에 있어서 같지 않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국가’의 누락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이한, 어떤 의미에서는 반대되는 설명이 가능해 보입니다. 하나는 “한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일반 사회 구성원 전체”가 당연히 국가를 함축한다는 사회적 무의식이 이런 누락을 초래했다는 설명입니다. 이렇게 보면 공적인 것 혹은 공공성에 대한 설명은 설령 그것이 ‘사회’라는 개념만을 동원하는 순간에도 잠재적으로는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국가로 수렴됩니다. 국가는 중요치 않거나 적절치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누락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두 가지 ‘공’이 공존 혹은 결합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삭제되거나 적어도 비가시적으로 되어야 함을 함축한다는 설명입니다. 아마도 사전편찬자의 본의, 나아가 사전편찬자가 기대고 있는 상식적인 언어/정치감각과는 거리가 있을 이 설명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정치적 상상과 사고를 자극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즉각 어려운 문제가 제기될 것입니다. 공적인 것에서 국가를 제거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때 공적인 것이란 무엇이 될 것인가?

물론 이는 단지 사전적 정의가 함축하는 바를 좀더 깊이 들여다보고 그 정의들 간의 관계를 따져본 것일 뿐입니다. 당연히도 이로부터 최종적인 이론적·실천적 입장을 도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가장 상식적인 언어와 사고의 수준에서도 공통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공존 내지 결합이 필연적인 것, 자연스러운 것, 평화로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 또 그런 한에서 공공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긴장과 갈등을 함축하는 문제적 개념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긴장과 갈등의 핵심엔 역시 국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커먼즈 운동이 국가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는 단순한 결론을 손쉽게 도입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국가가 공적인 것의 종합이자 최종심급이며, 그런 한에서 공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의 관계, 즉 공공성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국가라는 문제를 우회할 방법이 없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조금 추상적이고 거친 논의가 되겠지만 공통적인 것의 관점에서 본 국가의 성격을 짧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국가는 원리적으로 “둘 또는 그 이상의 것에 두루 통하고 관계된 것”을 전제하지만 그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 근대 국가와 주권의 본질은 공통적인 것의 내재적 지평을 초월하는 운동을 하면서도 다시 저 내재적 지평에 개입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때 초월성은 “둘 또는 그 이상”의 인간 존재들의 본성을 사적인 것으로 설정하는 데서 오는 필연적 귀결입니다. 사적 개인, 즉 사적인 것을 본질로 하는 인간은 원리상 자신들에게 “두루 통하고 관계된 것”을 그들 자신 간의 내재적 관계에서 오는 힘을 통해 다룰 수 없는 존재로 상정됩니다. 공통적인 것을 다룰 별도의 층위, 별도의 장치가 요구되는 것은 이 때문이며 그것이 바로 국가입니다. 국가는 공통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그것에 근거해야 하지만 결코 공통적인 것의 층위에 내재할 수는 없다는 역설을 본질로 합니다.

이렇게 보면, 국가를 정점으로 하는 공적인 것은 공통적인 것이 사적인 것의 지배하에 소외되고 왜곡된 방식으로 현상하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커먼즈의 관점에서 공적인 것은 양면성을 갖습니다. 한편으로 공적인 것은 사적인 것과 대립하는 외양에도 불구하고, 정확히는 바로 그 ‘대립’의 방식으로 사적인 것의 지배를 보완하는 한에서 공통적인 것과 갈등관계에 있습니다. 커먼즈가 공사 구분 혹은 대립을 넘어서며 또 마땅히 넘어서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공적인 것은, 비록 제한되고 훼손된 모습일지언정 ― “둘 또는 그 이상의 것에 두루 통하고 관계된 것”을 인간의 삶에서 완전히 제거하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 결코 완전히 소거될 수는 없는 공통적인 것이 사적인 것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형태입니다. 그런 한에서 커먼즈 운동은 공적인 것에 대해 단순히 거부나 외면의 태도로 일관할 수 없습니다. 공적인 것의 ‘합리적 핵심’인 공통적인 것을 만회하고 강화하려는 노력 역시 커먼즈 운동의 중요한 한 가지 벡터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커먼즈를 공적인 것 혹은 공공성을 재구성하는 계기로 보려는 활동가 및 연구자들의 노력은 이런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커먼즈가 공공성의 새로운 구성에 기여할 수 있다는 논의의 기저에는, 그 새로운 구성이 공공성의 양대 축인 두 가지 공 가운데 공통적인 것의 힘과 가치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커먼즈 운동은 공적인 것을 공통적인 것 쪽으로 견인함으로써 두 공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디어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공적인 것을 공통적인 것 쪽으로 끌어와야 한다는 사고뿐 아니라 반대로 공통적인 것을 공적인 것의 방향으로 유도해야 한다는 사고 또한 작동하고 있습니다. 공통적인 것은, 적어도 일정 규모 이상에서 현실성을 갖기 위해서는, 공적인 것의 수준으로 상승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적인 것에 의해 매개되거나 공적인 것의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인 것이지요. 다시 말해, 커먼즈에 의한 공공성의 재구성이라는 아이디어는 분명 커먼즈의 “구성적 힘”(홍덕화, 「커먼즈로 전환을 상상하기」, 2022)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 그 구성적 힘은 공적인 것에 의해 매개되지 않고는 제 발로 서서 확장할 수 없다는 진단이기도 한 것입니다. 커먼즈가 좁은 범위와 한계에서만 작동하는 ‘공동체 커먼즈(community commons)’를 넘어서 체제전환 ― 언젠가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혁명’이라는 말의 부드러운 대용품 ― 이라는 목표를 향하기 위해서는 ‘공적 커먼즈(public commons)’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런 진단의 불가피한 결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새삼 커먼즈와 공공성을 함께 논하는 것은, 커먼즈에 의한 공적인 것의 재구성이라는 아이디어에 분명 ‘현실적’ 설득력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현실성 자체가 곧바로 양자의 관계에 대한 만족할만한 답을 주지는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공적인 것을 공통적인 것 쪽으로 견인하는 일과 공통적인 것을 공적인 것 쪽으로 견인하는 일. 이 두 방향의 운동 사이에는, 단순히 “둘 중 하나에 치우칠 것이 아니라 양자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라는 식의 절충으로는 해결을 볼 수 없는 긴장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논의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저 긴장이 공공성을 이루는 두 가지 공 사이의 본질적 긴장에서 비롯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꽤 긴 이야기를 거쳐 우리는 다시 공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의 관계라는 문제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공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의 긴장이 해소되는 일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거나, 불가능하진 않더라도 오랜 역사적 과정을 필요로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논의해야 하는 것은 저 긴장을 당장 제거하기 위한 방안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고 다룰 것인가, 저 긴장을 적절히 ― 인식적 관점에서뿐 아니라 실천적 관점에서도 적절하다는 의미에서 ― 사고할 수 있도록 해줄 양자의 관계에 대한 관점은 무엇인가일 것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아직 시론 단계에 있는, 그래서 성숙과 정교화를 위해서는 많은 이론적 커머닝이 필요한 개념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커먼즈의 제헌권력이라는 개념이 그것입니다.

 

커먼즈의 제헌권력

앞서 언급했듯 여러 활동가·연구자들이 커먼즈에 의한 공공성의 재구성을 말하고 있으며 홍덕화 선생님은 이를 커먼즈의 ‘구성적 힘’이라는 표현으로 정식화하신 바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 표현을 직접 고안하셨는지 다른 맥락에서 가져오신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저에게 흥미로운 것은 ‘구성적 힘’이 헌법학, 법철학, 정치학에서 통상 제헌권력 혹은 헌법제정권력으로 번역되는 ‘Pouvoir Constituant/Constituent Power’의 번역어로 새겨질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단순한 우연 이상의 의미를 갖는데, 제헌권력이란 바로 국가와 헌법으로 표상되는 공적 질서를 창출하고 정초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공공성의 재구성을 가능케 하는 커먼즈의 ‘구성적 힘’이 법학과 정치학에서 제헌권력이라는 개념으로 논의되어 온 바와 내용상 본질적 연관을 보인다는 것, 바로 여기에 커먼즈의 제헌권력이라는 발상의 출발점이 있습니다.

커먼즈를 제헌 혹은 헌법의 문제와 연결한 것은 제가 처음이 아닙니다. 커먼즈 운동가이자 이론가인 우고 마테이(Ugo Mattei)는 한 공저 논문에서, 자신이 직접 참여한 이탈리아 커먼즈 운동을 주요 분석사례로 삼아 ‘제헌권력으로서의 사회운동’이라는 테제를 제출한 바 있습니다.(“Social Movements as Constituent Power: The Italian Struggle for the Commons”, 2013) 국내에서는 정영신 선생님이 우고 마테이의 논문 등을 주요 참조점으로 해서 커먼즈 정치의 제헌적 성격을 언급하는 논문을 쓰신 바 있습니다.(「이탈리아의 민법개정운동과 커먼즈 규약 그리고 커먼즈의 정치」, 2022) 저의 제안에 이런 논의와 다른 점이 있다면, 비단 커먼즈 운동·정치만이 아니라 커먼즈 혹은 공통적인 것 자체의 제헌적 역능을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제헌권력은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등장했으며 시에예스(E. J. Sieyès)가 처음 명시적인 형태로 사용한 이래 슈미트, 아렌트, 네그리 등의 재해석을 거치면서 그 성격과 본질을 두고 많은 논의와 논쟁이 있었던 헌법학·법철학·정치철학의 근본개념이자 한계개념입니다. 이 자리에서 세부적 논점과 맥락을 추적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또 우리의 관심사도 아닐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제헌권력이라는 개념의 핵심 아이디어, 그리고 그것과 커먼즈-공통적인 것 사이에 그려질 수 있는 연결고리입니다.

제헌권력은 말 그대로 헌법을 만드는 권력이며 헌법적 규범의 원천입니다. 헌법은 모든 실정법의 기초이자 국가의 기본적 짜임새를 규정하므로 제헌권력은 또한 국가를 정초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국가가 공적인 것의 종합이자 최종심급인 한에서, 국가를 정초한다는 것은 곧 공적 영역, 공적 가치, 공적 체계 등 온갖 공적인 것의 질서를 조직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커먼즈의 제헌권력을 말한다는 것은 커먼즈가 공적 가치·질서·영역·공간·재화 등을 재정의하고 재구성하고 재배치할 수 있는 역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헌권력의 상대개념은 ‘헌법적으로 조직된 권력(Pouvoir Constitué/Constituted Power)’인바, 말하자면 현재의 논의 맥락에서 공통적인 것이 제헌권력이라면 공적인 것은 그 제헌권력에 의해 조직된 권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적인 것은 공통적인 것의 제헌권력에 근거하며 그것의 표현형식입니다. 그러나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공통적인 것의 제헌권력에 의한 재구성과 재정의에 열려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합니다.(헌법개정권력/개헌권력은 제헌권력의 제한적 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커먼즈의 제헌권력은 아직 더 다듬어야 하는 아이디어인데다 불가피하게 상당한 추상성을 동반합니다. 때문에 보다 현실적인 논의를 위해서라면, 이 문제를, 커먼즈를 헌법적 원리와 가치로 사고하고 주장하는 일의 (특히 오늘의 주제인 공공성과 관련한) 유효성과 의의라는 문제로 바꾸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현재의 헌정질서를 가장 큰 틀에서 규정하는 것은 사적 소유의 논리입니다. 대한민국이 공화국(res publica=공적인 것)이라는 제1조 1항의 규정이 지금까지 저 사적 소유의 지배와 사유화의 진척을 막는 데 얼마나 무력했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커먼즈를, 즉 공적인 것이 아닌 공통적인 것(res communis)을 헌법에 틈입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사화(私化, privatization)에 맞서는 보다 강한 힘과 논리를 헌법 자체에서 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공공성을 방어하기 위한 개개의 투쟁에 개별적으로 커먼즈의 논리를 동원하는 것을 넘어 공공성을 바라보는 일반적이고 헌법적인 틀로 커먼즈를 전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요컨대, 자본이라는 사회적 관계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커먼즈 운동과 정치가 결국 계급투쟁의 성격일 띨 수밖에 없다면, 헌법 자체를 계급투쟁의 장(場)으로 만드는 것이 이 투쟁을 수행하는 한 가지 유력한 길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네그리와 함께 네 개의 손으로 쓰다

 


  • 저자 : Michael Hardt
  • 원문 : Vierhändig schreiben mit Toni Negri https://taz.de/80-Geburtstag-des-Theoretikers/!5062133/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네그리의 80세 생일을 맞아 마이클 하트가 둘의 공동작업에 대해 쓴 글이다. Genre, Volume 46, Nr 2, 2013에 처음 발표됐고 Thomas Atzert가 영어 텍스트를 독일어로 옮겼다. 아래의 정리에는 독일어본을 참고했다. 번역에 가까운 부분들이 있으나 엄밀한 의미의 번역은 아니니 인용이 필요한 경우 원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원문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표현에서 하트의 1인칭 관점을 유지했다.

 

나는 항상 네그리의 넓은 마음이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그는 나를 지적으로 진지하다고 보았으며 나의 눈높이에서 나를 만났다. 처음에는 그가 나를 동등하게 대하는 것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그런 태도를 바꾸지 않았으며 마침내 그것이 우리의 공동작업의 토대가 되었다.

나는 공동의 집필이라는 놀라운 경험은 동등한 사람들 사이의 그러한 특수한 관계를 필요로 한다고 확신한다. 우리의 만남과 공동작업에 관해 몇 가지 생각해 보는 것이 토니의 80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나는 1986년 여름 파리에서 토니를 만났다. 그가 파리로 망명해있던 14년 가운데 세 번째 해였다. 일주일 동안의 방문은 스피노자를 다룬 그의 책 『야만적 별종』을 번역하던 중에 생긴 몇 가지 물음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느 날인가 그는 나에게 나중에 오래 머물 생각으로 파리에 오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그러면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뤽상부르 공원을 산책하며 철학적 사유도 좀 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이었다.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고 있던 시애틀로 돌아와서 논문자격시험을 접었다.

다음 해 여름 나는 아무런 재정수단 없이, 장학금이든 직업이든 숙소든 아무것도 없이 파리로 갔다. 다행히 나는 네그리의 뒷받침과 일부 이탈리아 정치 망명자들의 도움으로 근근이 살아갈 수 있었다.

내가 파리로 간 지 얼마 안 돼서 새로운 잡지 『전미래』를 위한 계획들이 구체화되었다. 네그리와 장 마리 뱅상(Jean-Marie Vincent)이 주도했으며, 랏자라토(Maurizio Lazzarato)와 나도 편집진에 들어와서 같이 활동하자고 초청받았다. 잡지 편집 모임은 공동작업과 집단집필을 훈련하는 중요한 장이 되었다.

 

집단작업

네그리는 이미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는 내가 파리에 오기 전에 가타리와 함께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집필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집단작업 능력을 갈고 닦은 것은 무엇보다도 6-70년대 이탈리아의 여러 정치 잡지들과 관련된 활동에서였을 것이다.

그때부터 네그리와 나는 공동으로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이후 지속된 공동작업의 시작이었으며 우정의 토대가 될 것이었다. 『전미래』 같은 정치 잡지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듯이, 공동집필의 방법은 집단실천이라는 형태에 기초한다.

과제들의 분배가 작업의 기초를 이룬다. 본질적인 지적 분석이 집단의 정치적 논의에서 이루어지고, 주장들이 논의되며, 모든 기고들이 상세하게 스케치되고 공동으로 배치된다. 잡지의 계획된 출간 전체가 이렇게 일정한 방향으로 구체화된다. 그때 비로소 개별 구성원들 사이에 과제가 분배된다. 누구는 이것에 대해 쓰고, 누구는 저것에 대해 쓰고, 또 다른 누구는 제3의 주제에 대해 쓰고 등등.

이렇듯 집필은 정확하게 윤곽지어진 활동이 된다. 토론을 통해 이미 전개된 생각들과 주장들이 집단의 일부로서 지면에 오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집필이 전적으로 의미가 있다. 많은 정치 잡지들과 팸플릿에서 기고문들이 익명으로 남더라도 말이다. 집단적 논의로부터 과제를 끌어내는 방법이 공동의 집필과정을 창출하는 것이다.

네그리와 내가 함께 책을 집필할 때, 우리는 생각들을 모아서 오랫동안 논의한다.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집필과정이―이 단계에서 책의 체제와 개요가 그려지며 이는 다시 더욱 다듬어지고 세밀하게 전개되게 된다―논의를 더 진전시킬 기회를 제공한다.

윤곽이 더 뚜렷하게 드러나고 논의의 진행이 모든 본질적인 논점들에서 명확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 비로소 우리는 분업을 시작하여 실제로 글을 쓰는 단계로 넘어간다. 각자 맡은 부분들은 짧은 토막들이며 많은 경우 단지 몇 쪽 정도이다.

그 후에 우리는 그렇게 해서 초고를 놓고 토론하고 편집하며, 보완할 것은 보완하고 퇴고 작업으로 넘어간다. 최초의 원고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여러 번, 그리고 여러 단계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공동의 논의 이후에 집필에 착수하는 방식은, 본질적인 지적 노동이 논의 과정에서 이루어지고 나중의 집필은 기계적인 작업일 뿐이라는 느낌까지 준다. 마치 “당신은 무엇을 말할지를 정확히 알고 그것을 단순히 글로 적는다”는 모토처럼 말이다.

그러나 모든 글 쓰는 이들은 말해야 할 것의 대부분이 집필과정에서야 생성된다는 것을 안다. 하나의 주장을 글로 정식화해내려는 노력에 이르러서야만 예기치 못한 장애를 만나기도 하고 또한 새로운 접근법이 생겨나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테마가 미리 얼마나 뚜렷하게 설정되었는가와 무관하다. 글쓰기의 행복(과 고통)은 글쓰기가 늘 창조적 해결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나온다.

 

해방으로서의 글쓰기

우리가 함께 하나의 주장을 글로 다듬을 때 일종의 연금술이 일어난다. 협동하면서 (맑스가 말했듯이) 개인적인 한계들이 제거되고 새로운 것이 생성된다. 공동집필에서 개인적인 한계들의 제거는 해방으로서 일어나며, 개별적인 부분들의 총합을 넘어서는 새로운 것의 발견에는 마법적인 무엇인가가 깃들어있다.

협동의 생산력은 내용과 관련하여 인식되는데, 그것은 집필 내용의 어조와 스타일을 모두 특징짓는다. 다른 많은 집단집필의 저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공동 텍스트는 개인적으로 작성한 텍스트들과 미미한 정도로만 같은 울림을 가진다. 이는 단순한 어조의 변화가 아니며 융합도 아니다. 공동집필은 오히려 제3의 목소리를 발생시키며 이는 우리에게 속하는 만큼이나 그 자체로 자립적이다 .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게 하려면 많은 것과 결별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자신만의 단어나 특정 어구에 너무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상대가 사물을 정식화하는 방식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지고 더 다듬어야 한다. 종종 상대의 단어를 받아들이고 그런 상태에서 새로 생성되는 텍스트의 일관성과 정확성을 주시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아마도 네그리와 나에게 도움이 된 것은 우리가 여러 언어를 한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는 이탈리아어로 토론한다. 우리가 원고를 각자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로 쓰든 영어로 쓰든 말이다. 언어의 상이성은 어떤 열린 공간을 창출하고 일정한 자율을 제공한다.

퇴고 과정에서 이탈리아어로 쓰인 것과 영어로 쓰인 것이 혼합된다. 물론 둘 모두 텍스트를 편집할 때에는 가능한 한 전체가 통일되도록 노력하지만 말이다. 최종 단계에서 비로소 원고는 통일된 언어를 얻는다. 이는 보통 영어인데, 이 경우 내가 책임을 지게 된다.

내용의 차원은 더한 노력을 요구한다. 우리가 특정의 주장을 공유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는 일이 별로 없다. 현실적인 차이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물론 상대방의 생각을 나에게로 끌어들여 사유하고 그것을 더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볼 때 공동집필은 일종의 계속적인 상호표절 과정이다. 물론 이는 근본적으로는 맞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생각들이란 결코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동의 지적 작업은 무엇보다도 사이영역(Zwischenbereich)을, 즉 모두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생각들을 창출한다. 아마 이것이 때때로 그 영역에 마법적인 어떤 것이 깃드는 이유일 것이다. 생각들이 고유한 것이 되기를 멈추며 공통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상이한 사유방식의 상호작용

공동저술이 동등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필요로 한다고 할 때, 이는 각자의 몫이 같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실상 상이한 사유방식, 재능, 스타일, 기질이 공동의 과정에서 상호작용하는 바로 그 가운데에서 본질적으로 잉여가 산출된다.

각자가 집필한 부분들을 합하여 회계원처럼 면수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계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집필과정에서의 동등성이란 그러한 계산이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물론 함께 하는 작업이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다. 성패의 시금석은 엄밀한 의미에서 스피노자적이다. 즉 ‘다른 사람과 함께 작업을 하는 것이 자신의 고유한 사유능력을 촉진시키느냐 아니냐’이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심지어는 대부분의?) 만남들이 사유를 촉진하거나 세계를 더 잘 이해하게 하는 데, 또한 주장을 명확하게 정식화하고 개념을 창출하는 능력을 확대하는 데 기여하지 않는 것 같다.

자신의 능력을 성장시켜 주는 사람과의 만남은 놓치지 말아야 하고 소중히 해야 할 행운이요 선물이다. 공동집필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동등함이란 양자가 동등한 정도로 이 경험을 한다는 데 있다.

공동집필에 요구되는 특수한 상황과 노력을 고려하건대, 그러한 공동집필을 보기가 매우 드물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네그리와 함께 한 나의 경험은 모든 노력에 값하는,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혜택을 나에게 주었다.

 

 




네이선 슈나이더와 협동조합 운동의 미래

 



어떻게 하면 협동조합이 사회 변화를 위한 수단으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특히 온라인 공간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떠한 실질적 개입이 IT 대기업들의 반사회적 행동을 저지할 수 있을까? 이 두 질문은 내가 콜로라도 볼더 대학교(the University of Colorado Boulder)의 미디어학 교수인 네이선 슈나이더(Nathan Schneider)와 함께 나의 팟캐스트 「커머닝의 새로운 영역들」(“Frontiers of Commoning”)의 에피소드 8편에서 최근 탐구한 것들이다.

네이선은 저항운동·비폭력운동·체제변화운동에 초점을 맞춰 오랫동안 활동해 온 언론인 겸 학자이다. 그의 연구 중 많은 부분은 협동조합과 디지털 기술이 오늘날의 세상에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특히 플랫폼 협동조합을 우버, 에어비엔비 그리고 태스크래빗과 같은 착취적인 사업 모델을 뛰어넘는 수단으로 만들기 위해 활동해 왔다.

슈나이더에게 협동조합의 역사는 큰 영감과 실질적인 가르침의 원천이다. 그는 영국인으로부터 인도인들을 해방하기 위한 전략적 도구로서 협동조합을 수용한 간디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협동조합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세상을 형성해왔지만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일을 하는 한 형태입니다. 가령, 사람들은 협동조합이 시민권 운동의 큰 요소였다는 것을 종종 잘 알지 못하죠.”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신용조합을 시작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열심히 도왔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협동적인 은행업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로 하여금 억압적인 지역 상황으로부터 더 독립적이 되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네이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미시시피 지역의 한 원로 시민+권+운동가를 인터뷰했고 그에게 협동조합이 1960년대에 있었는지 여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죠. ‘당신은 누가 사람들에게 유권자 등록을 하라고 했다고 생각하세요?’”

소작인들은 감히 시민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정치적인 활동을 하면 언제든지 땅에서 쫓겨날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협동조합의 구성원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운동에 참여하기에 충분할 만큼 안전했다. 그는 말했다. “이것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우리 세상의 지형(地形)이다.”

슈나이더는 이 지형을 전면에 내세우려고 노력하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이윤보다 사람을 우선하는 것, 지역 사업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 그리고 공동체에 의한 통제를 강화하는 것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합니다.” 협동조합은 당연한 대응인 것이다.

네이선은 협동조합을 미국의 대세에 진입시키기 위해 두 가지 주요한 전략을 본다. 하나는 1880년대와 1890년대 정치체제의 기반을 흔들기 위해 협동조합을 이용했던 민중주의자들의 방식으로 알려진 솔직하게 정치적인 접근이다. 다른 하나는 소유권과 같은 전 국민이 공유하는 신화를 바탕으로 하는, 덜 적대적이며 합의에 의해 추동되는 접근이다. 그는 루이스 켈소(Louis Kelso)의 ‘우리사주신탁제도(ESOP:Employee Stock Ownership Plan)’의 창안을 사례로 인용했다. 우리사주신탁제도는 직원들이 직장에서 개인의 지분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합법적이고 구조적인 혁신이었으며 동시에 전반적인 노동 문화를 개선하기도 했다.

슈나이더는 협동조합이 자본의 힘을 위협할 수 있을 경우에만 궁극적으로 강력한 운동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은행들에게 경쟁 도전장을 내민 신용협동조합들과 공익사업으로부터 사업을 인수한 지방전기협동조합은 고전적 사례들이다. 네이선에게 다른 협동 기획들보다 플랫폼 협동조합의 미래 힘에 대한 낙관론을 심어준 것은 견고한 대항을 극복한 바로 이러한 풍부한 협동조합의 역사인 것이다.

그러한 목표를 밀고 나가기 위해 슈나이더는 여러 핵심적인 운용기획을 만들어 오고 있으며, 그 기획 중 일부는 미디어 조직에서의 공동체 소유권과 거버넌스를 위한 실천 지향적인 연구 센터인 <미디어 기업 디자인 랩>(Media Enterprise Design Lab)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 <미디어 기업 디자인 랩>은 새로운 금융 제도, 소프트웨어 도구, 교육 전술을 찾아내기 위해 기업가들, 스타트업 프로젝트 그리고 활동가들과 협동한다.

슈나이더는 온라인 프로젝트에서 민주적인 소유권과 거버넌스를 확장시키는 새로운 방법들을 찾는 데 개인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한 노력 중 한 가지는 그렉(Greg)과 하워드 브로드스키(Howard Brodsky)를 포함하는 여러 협동조합 리더들에 의해 만들어진, 협동조합 ‘가속장치’인 <스타트.코업>(Start.Coop)이다. 이 프로젝트는 스타트업 회사들이 투자자들을 찾고 프로젝트 개발에 관한 도움을 얻으며 협동조합 관행과 문화를 더 많이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젝트이다.

네이선은 ‘공동체로 가는 출구’(Exit to Community)라고 알려진 새로운 금융 전략을 개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보통 전통적인 스타트업의 성공한 창립자들은 회사를 월가(Wall Street)나 IT 대기업에 매도하지 않을 수 없다. ‘공동체로 가는 출구’는 실질적인 대안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더 나아가길 원하거나 더 많은 돈을 마련하기를 원하는 기업가들이 그들의 회사를 지역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매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사업을 더욱 목적 지향적이고 사회 지향적이며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으로 유지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슈나이더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커뮤니티 내의 거버넌스 상태를 보고 실망한 바 있는데, 그는 그 상태를 참여 거버넌스가 형식적인 형태로라도 거의 없는, ‘봉건제를 내포한’ 체제라고 부른다. 그는 이런 상황의 개선을 돕기 위해 디지털 커뮤니티들에 기본적인 ‘거버넌스 도구모음’을 제공하는 <커뮤니티룰>(CommunityRule)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통제가 중앙에 집중되고 설립자들이 ‘영원한 독재자들’처럼 행동하는 함정을 피하는 한편 자치를 위한 더 공정하고, 더욱 계몽된 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돕자는 것이 그 취지이다.

 




바이든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려 한다

 


  • 저자  : Jimmy Dore
  • 원문 :  “Biden Won’t Solve Your Problems, But Will ‘Understand Your Problems’(2020. 12. 10)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Jimmy Dore Show>의 한 에피소드(유튜브 동영상)의 내용을 우리말로 정리한 것이다. 내용 정리이지만 읽기 좋도록 간략한 자막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지미 도어는 미국의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자 정치평론가이다. 그는 현재 하원이 ‘모두를 위한 의료보험’(Medicare for All)을 채택하는 투표를 하도록 밀어붙이는 ‘#Force the Vote’ 운동을 하고 있으며 미국 민중당(People’s Party)―정확하게는 ‘민중당 건설운동’(Movement for a People’s Party)―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조 바이든이 꼭 뉴트 깅리치(Newt Gingrich)와 밥 돌(Bob Dole)처럼 말하며 다시 그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파이며 보수적인 공화당원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아는지 모르겠군요. 제가 그에게 투표하지 않은 이유가 이것인데 말입니다. 저는 전쟁장사꾼인 월가의 꼭두각시에게 투표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은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계속 그에게 표를 던지더라도 저는 하지 않겠습니다.

[바이든의 트윗을 보여주며] 조 바이든이 이렇게 트윗을 했군요.
<아버지가 말씀하시곤 했다. “아들아, 이 아버지는 정부가 내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단다. 아버지는 내 문제를 이해해주기를 기대한단다.”>
저는 정부가 제 문제를 이해하든 못하든 전혀 신경쓰지 않습니다. 저는 정부가 제 문제를 해결해주길 원합니다. 우리에게 정부가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죠. 우리는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무리의 사람들로 모입니다. 월가 사람들도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수조 달러를 얻어내려고 정부에게 가잖아요.

당신이 만일 누군가의 사업을 봉쇄하고 그래서 아무도 돈을 벌 수 없다면 그것은 바로 당신이 초래한 문제입니다. 당신이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알지 못했다면 대통령의 정책 제안자가 되려고 출마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놀랍군요. 다음 문단을 보세요. 그가 이렇게 썼군요.
<사람들은 구호금(handout)을 기대하지 않는다. 도움을 필요로 할 뿐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잘못 때문에 곤경에 빠진 것이 아니며 우리는 그들을 이해해 줄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당신의 이해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경기부양지원금(stimulus check)이 필요하고 모두를 위한 의료보험이 필요하며 보편적인 기본소득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당신은 죽기 직전의 정신이 나간 노인네이기 때문에 이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기업화된 미디어에는 정신 나간 자를, 그리고 당신을 규탄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봐요, 조, 정부가 당신에게서 도둑질하리라 예상하라고 당신 아버지가 당신에게 말해줬나요? 팬데믹 시기동안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나니 말이죠. 재난지원금 말이에요. 이봐요, 월가에 돈을 주기위해 우리가 매년 세금을 낸다고 당신 아버지가 당신에게 말해줬나요? 오늘날 우리 세금이 그리로 가니 말이죠. 당신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해줬나요, 조?

우파가 이것에 ‘국민은 구호금(handout)을 기대하지 않는다’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있는 것이 보입니까. 당신이 바로 전 세계 최고 부자들에게 5조 달러를 건네주었죠, 조. 그런데도 당신은 여전히 레이건의 용어인 ‘구호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군요.

[기사 헤드라인을 보여주며]
<취업난은 진정한 국가적 위기이다. 미국을 지배하는 무능한 범죄자들이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을 끔찍한 금융 절벽으로 밀어버리려고 하고 있다.>
이것은 <인터셉트>지에 실린 내용입니다. 미국을 지배하는 무능한 범죄자들이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을 벼랑으로 내몰고 있다는군요.

[CNN 웹페이지의 한 사진을 보여주며]
“텍사스에서는 음식을 가지러 가는 수천대의 자동차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저런 헤드라인을 보면 저는 조 바이든의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관해서는 신경을 끕니다.

[신문기사를 보여주며]
<“이렇게 계속 할 수는 없어요”―소상공인들이 포기하고 있다>
<의회는 코로나재난지원금 문제를 놓고 교착상태에 빠져 있지만 펜타곤에 7천4백억 달러의 자금을 대기 위해서는 한데 뭉쳤다>
이런 식이죠, 그리고 진보파는 그것에 반대투표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민주당원 37명만 반대투표를 했죠. 결과적으로 찬성투표한 진보파 의원들이 63명인 셈입니다.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조 바이든은 “도움이 곧 갈 것이다”에서 사흘 만에 “미국인들은 도움을 원치 않는다”로 바뀌었다.>
사흘 만이라···. 그래서 저는 1월까지 조 바이든이 바이든다운 짓을 다 한 후 원점으로 돌아올 것이고 사람들이 다시 트럼프에게 투표를 하겠다고 말하기 시작할 것이라 추측하는 중입니다.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짐 얼(Jim Earl)은 이렇게 트윗을 했네요.
<당신의 아버지는 멍청이었군요. 정부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의 노력 없이 이해만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요? 그리고 ‘복지여왕’과 함께 모욕적인 상투어를 담는 쓰레기통으로 들어갔어야 하는 구호금이라는 단어를 당신이 지금 꺼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멋진 조지 칼린(George Carlin)의 말을 빌자면요, “아빠가 말씀하셨지, 아빠를 욕하라고.”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사람들은 바이든의 취임에 찬성하고 소득공제를 받는 경우 말고는, 구호금을 바라지 않는다.>
누가 구호금을 바랄까요? 바로 조 바이든이죠!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조 바이든의 (인수위)팀은 취임식을 치르기 위해 개인들로부터는 50만 달러까지, 기업들로부터는 100만 달러까지 기부금을 받을 것이다.>
제 아버지가 항상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구호금을 원하니? 정계에 들어가거라.” 그래서 그들이 돈이 필요할 때 우리에게 돈을 조금씩 내달라고 말하는군요. 이것 말 그대로 그들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조 바이든입니다.

[바이든의 트윗을 보여주며]
<이렇게 합시다.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 패배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인수를 미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취임식에 자금을 대야 해서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바이든-해리스 인수위를 위해 돈을 기부해주시겠어요?”>
와우! ‘당신들은 도움이 필요할 때 무엇을 나눠주고 싶어요?’라고 바이든의 아빠가 말하는 군요. 놀랍지 않나요?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한때 아돌프 리드 주니어(Adolf Reed Jr.)는 자유주의자들이 더 이상 정치를 진정으로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통받는 것을 목격하는 것’을 믿을 뿐이다. 나도 그 생각을 많이 한다.>
그들은 ‘고통받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 샴페인과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군요.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이것 좀 보세요.
<내 새 셔츠가 도착했어요!>[트윗에는 이 셔츠에 인쇄된 사진이 첨부되어 있는데, 「바그다드 위로 폭탄을」이라는 노래가 실린 아웃캐스트(Outkast)의 앨범 사진과 똑같이 연출해서 찍은 바이든과 카말라의 사진이다.]
조 바이든과 카말라 해리스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는, 전쟁기업의 도구들인 이들이 악당처럼 굴려고 하네요. 그녀는 평범한 사람들을 감옥에 보냈고 그는 파산한 사람들을 쥐어짜면서 규칙적으로 수감자들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켰습니다. 이것이 이 사람들의 실체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보이는지 아십니까? 비밀경찰들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죠.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대대적으로 상품을 팔아보려는 헛된 생각에 이들이 ‘바그다드 위로 폭탄을’이라는 노래가 실린 앨범 사진에 한 점의 아이러니도 없이 등장한 것은 대단히 재밌다.>
와우!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이것은 트럼프 지지자들의 빨간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모자를 흉내 낸 파란색 ‘마가’ 모자군요. 사람들이 파란색 모자를 썼습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여러분들은 단지 트럼프를 해고하고 백악관에서 그를 쫓아냄으로써 이미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바이든의 파란색 모자를 쓰세요. 바이든이 트럼프를 감옥에 보낼 것이기 때문에 이미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모자는 아마존에서 판매중입니다.>
와우! 조 바이든에게 맞도록 정해진 훌륭한 기준입니다. 축하합니다, 승리하셨습니다. 이미 승리했으니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군요.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이 말은 매우 중요하다. 조 바이든이 자신의 행정부와 우리의 정치에 상호존중•존경•이해에 대한 그의 타고난 감각을 주입할 수 있다면 그는 이 나라를 위해 무언가 훌륭한 것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액슬로드(David Axelrod)의 트윗입니다. 맙소사, 그가 열정에 대해 말하고 있군요. 그가 그 동안 해온 나쁜 짓만큼이나 멋지게 트윗을 한다면, 또 한명의 백만장자인 놈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것은 겨우 그 트윗뿐일 것입니다.

[여기서 스탭이 끼어들어 한 마디 한다]
이 말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데, 입에 발린 말이기 때문에 중요하죠.

[다시 지미 도어]
맞아요.
이봐요, 조 바이든에게 투표한, 잘 속는 여러분들, 축하합니다. 저는 바이든 안 찍었습니다.

 

[덧붙임 :  미국 역사 속의 ‘민중당’―정백수] 

미국에 이미 1890년대에 ‘민중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정당이 있었다. <농민연합>(Farmers’ Alliance)에 뿌리를 둔 민중당(People’s Party, 혹은 Populist Party)이 1892년에 창립되어 당시의 금융세력에 맞서 싸웠다. 이 민중당은 189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과 함께 민주당의 브라이언(William Jenning Bryan)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브라이언이 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붕괴되었다. 다소 넓게 말하자면, 민중 자신의 힘보다도 대통령(및 그에 딸린 제도)의 힘을 더 믿었을 때, 아니 자신의 힘을 정당정치라는 제도에 맡겼을 때의 문제점, 활력이 권력으로 전환되었을 때의 문제점이 드러난 것이 아닐까 싶다.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 민중당이 이런 문제점을 얼마나 잘 극복할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공화당과 민주당의 ‘민낯’이 다 드러난 시기이니만큼 우려만이 아니라 기대도 섞인 시선으로 이 운동을 지켜보지 않을 수 없다.

엘런 브라운(Ellen Brown)에 따르면 1차 대전 전 미국에는 두 경제 세력이 미국의 지배를 놓고 경합하고 있었다. 하나는 월가에 기반을 두는 세력이다. 당시 월가에서 중요한 주소가 ‘월가 23’번지였는데 이는 ‘House of Morgan’으로 알려져 있다. J. P. Morgan은 강력한 영국 은행업 세력의 에이전트였다. 다른 하나는 필라델피아에 기반을 둔 세력으로서 이들은 벤저민 프랭클린에게로 소급하며 산업화와 토목공사에 중점을 두었다. 필라델피아파는 국가가 화폐를 관장하는, 펜실베이니아 지역에 수립된 시스템을 선호했다. 남북 전쟁 당시 링컨 대통령은 정부가 화폐를 발행하는 시스템으로 되돌아갔는데, 그는 암살되었고 은행가들이 화폐기계의 통제를 다시 요구했다. 월가파의 “조용한 쿠데타”는 1913년에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의 통과에서 정점에 달했다. 이 법의 통과는 1896년 대선 후보였던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을 비롯한 여러 “부주의한”(unwary) 의원들로 하여금 민간기업인 ‘Federal Reserve’(연방 준비제도, 연방준비은행)를 ‘연방적’ 성격을 가진 기관으로 잘못 알게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상 Ellen Brown, Web of Debt: The Shocking Truth About Our Money System and How We Can Break Free, Third Millennium Press, 2010)

민중당이 민주당과 함께 대통령 후보로 지명한 브라이언은 민중주의적 지향을 가진 민주당원이었다. 당시에는 월가의 금융세력과 공화당이 한 패였고, 그 반대편에 민주당이 있었으며, 민중당은 민주당과의 통합 대선후보지명을 주장하는 통합파(fusionists)와 독자성을 주장하는 제3당파(mid-roaders)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120여년이 지난 지금의 구도를 보면 민주당이 월가의 금융세력과 ‘공화당보다 더’ 한패가 되었으니(이는 오바마 때 그 정점에 이르렀으며 바이든은 그 연장선 위에 있다) 결국 월가가 공화당, 민주당을 ‘다 먹은’ 최고의 패자(霸者)가 된 셈이다. (지금 미국 민주당 내에 ‘진보파’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미국 민중을 위해서 싸우기보다 민중의 에너지를 저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이 탄생하고 있는 민중당은 단순히 양당 체제에 새 당 하나(그것이 아무리 진보적일지라도)를 추가시키는 식이 아니라, 민중들 자신들의 연합(coalition)이라는 형태로 미국 민중이 한데 모여 양당체제에 대한 실체적·삶정치적 대안으로서 구축되었으면 한다.

(이 외에 1971년에도 여러 개인들과 소정당들이 모여서 만든 민중당(People’s Party)이 있었으나 1972년과 1976년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낸 이후 느슨한 연합으로 변한 후 사라졌다.)




커먼즈의 비가시성

 


  • 저자  : Peter Linebaugh
  • 원문 : “The Invisibility of the Commons”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피터 라인보의 저서 『섯거라, 도둑아!』(Stop, Thief!, 2014)의 15장 「커먼즈의 비가시성」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에서 라인보는 세 개의 사례를 소개한다. 하나는 1930년대의 것이고, 또 하나는 1790년대의 것이며 마지막 하나는 1940년대의 것이다.

첫째 사례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에쎄이 「마라케시」(“Marrakech”, 1939)이다. (마라케시는 모로코 중앙부의 도시이다.) 갈색 피부를 가진 사람, ‘천한’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 그리고 여성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 이 글의 주요한 논지이다. 가령 장작단을 지고 앞을 지나가는 나이든 여성들의 대열을 보면 오웰 자신의 눈에는 장작단만 지나가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생산물만을 보는 제국주의자의 눈이라고 라인보가 정리해준다. (이렇게 정리해주기 이전에 라인보는 이 글에서 오웰이 인종주의와 비가시성을 주제로 다룬다고 말해놓은 바 있고, 여기에 여성혐오도 추가해야 한다고 덧붙인 바 있다.) 그렇다면 오웰은 제국주의 국가에 속하고 백인에 속하며 남성에 속한 자신의 ‘보지 못하는’ 눈을 스스로 고발한 셈이니 라인보는 오웰의 솔직함을 칭찬하고 말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는다. 그에게 빠져있는 것을 지적한다.

그런데 이 장작은 어디서 오는가? 오웰은 묻지 않는다. 무슨 권리로, 어떤 관습에 의해서 장작을 해오는가? 어떤 투쟁들이 이 관행을 보존했는가?

이어서 라인보는 마그나 카르타의 7장에 나오는 ‘상부한 여성의 에스토버스’(왕이 상부한 여성들에게 부여한, 나무에 대한 권리)((‘에스토버스’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478 참조.))를 언급하고 이는 수 세기에 걸친 투쟁으로 지켜낸 관습임을 지적한다. 오웰은 아마도 비가시성이 가장 높을, 갈색 피부에 육체노동을 하며 나이든 노파를 만난 에피소드를 말한다.

어느 날 키가 120센티가 넘지 않을 여성이 짐을 잔뜩 지고 내 앞을 기다시피해서 지나갔다. 나는 그녀를 세우고는 5수짜리 동전(1 파딩을 조금 넘는다)을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새된 울부짖음으로 대답했다. 고마움의 표현도 들어있었지만 주로 놀라움이었다. 내 생각에 그녀의 관점에서는 내가 그녀의 눈길을 끎으로써 거의 자연법칙을 위반하는 것 같았으리라. 그녀는 노파로서의, 다시 말해서 짐을 나르는 짐승으로서의 그녀의 지위를 받아들였다.

라인보는 오웰이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음을 지적한다. ‘고마움’도 들어있었다는 말이 얼마나 제국주의적인가도 지적한다. 라인보가 보기에 오웰은 인종주의, 여성혐오를 자신의 서술에 투사하지만, 커머너들과 대화할 기회를 갖지는 않는다. 나무는 어디서 해오냐고, 그 나무로 어떤 불을 피우냐고, 그 불이 어떤 어린아이나 나이든 부모를 따뜻하게 하냐고 묻지 않는다. 왜 오웰은 그녀와 대화하지 않은 것일까?라고 라인보는 묻는다.

라인보는 이 에피소드가 보여주는 것이 “제국주의 체제에서 써발턴 역할을 하는 다수에게 특징적인 태도, 자신은 원래 기본적으로 짐승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민중과 대화하기를 거부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고 덧붙이고, 마지막으로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눈을 가지고 볼 때에는(when we see with, not through, the eye) 거짓을 믿게 마련이다.”

둘째 사례는 워즈워스의 자서전적 장시 『서곡』(Prelude) 9권의 한 대목이다. (이 시는 시인의 정신이 혁명과 반혁명의 와중에서 성장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이 대목은 1792년 워즈워스가 프랑스의 보쀠(Michel de Beaupuy)라는 공화주의자를 방문했을 때의 일을 제시한다. 보쀠는 당시 블롸(Blois) 지역의 정치논의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 논의의 핵심은 제한된 제헌군주제에서 급진적인 공화주의 및 왕정의 몰락으로의 이행과 관련된 것이었다. (보쀠는 공화주의를 지지했으며 나중에 혁명을 방어하는 전투에서 죽어 영웅이 된다.)

라인보는 이 대목을 직접 인용한다. 여기 원문 그대로 소개하지만 옮기지는 않고 내용만 설명하도록 하겠다.

And when we chanced
One day to meet a hunger-bitten girl,
Who crept along fitting her languid self
Unto a heifer’s motion—by a cord
Tied to her arm, and picking thus from the lane
Its sustenance, while the girl with her two hands
Was busy knitting in a heartless mood
Of solitude—and at the sight my friend
In agitation said, ‘Tis against that
Which we are fighting! I with him believed
Devoutly that a spirit was abroad
Which could not be withstood; that poverty,
At least like this, would in a little time
Be found no more; that we should see the earth
Unthwarted in her wish to recompense
The industrious and the lowly child of toil
(All institutes for ever blotted out
That legalized exclusion, empty pomp
Abolished, sensual state and cruel power,
Whether by edict of the one or few);
And finally, as sum and crown of all,
Should see the people having a strong hand
In making their own laws. whence better days
To all mankind.

[단어 및 어구 설명]

    • chance + to부정사 : 우연히 ~하다 (= happen + to부정사)
    • hunger-bitten : bitten by hunger
    • languid : (움직임이) 힘없고 느릿느릿한
    • fitting her languid self Unto a heifer’s motion : fit A (un)to B
    • heifer : 어린 암소
    • its sustenance : ‘자기(어린 암소)가 먹을 것’
    • heartless : 낙담한, 풀이 죽은
    • in a little time : ‘시간이 조금 지나면’
    • withstand A : A의 끌림, 영향력, 설득력 등을 뿌리치다 [이 의미로는 주로 부정문으로 쓰인다.]
    • sensual : 세속적인, 물질적인
    • edict : 칙령, 포고령
    • as sum and crown of all, : 여기서 ‘sum’은 ‘최종결과’라는 의미고 ‘crown’은 어떤 과정의 정점을 의미한다.
    • whence : 그 원인으로 → 그 결과(as a result)

 

워즈워스를 포함한 젊은이들은 너도밤나무 숲을 말을 타고 지나던 중 어떤 굶주린 소녀를 만난다. 이 소녀는, 소녀의 팔에 줄로 묶인 상태에서 길에서 먹을 것을 집어먹고 있는 어린 암소의 몸짓에 맞추어 느릿느릿 지나가면서, 의기소침한 상태에서 바쁘게 뜨개질을 하고 있다. 이 모습을 보고 격동한 보쀠는 ‘바로 저런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싸우는 것이야’(‘Tis against that/ Which we are fighting!)라고 말하며, 이에 워즈워스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어떤 [혁명의] 기운이 퍼져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그리고 이런 가난은 이제 곧 볼 수 없게 될 것이며 대지가 노역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주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모든 억압적인 제도가 폐지될 것으로 믿으며 심지어 민중이 자신들의 법을 만드는 데 강한 힘을 발휘하여 인류에게 더 나은 날들이 오리라고 믿는다.

이렇듯 암소지기 소녀의 굶은 모습에서 시작한 워즈워스는 가난의 폐지와 민중의 자치정부의 달성에 대한 이상주의적 희망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오웰의 경우처럼 이 젊은 혁명가들도 그 소녀에게 말을 걸지 않음을 라인보는 지적한다. 동정심에 들떠서 거창한 결론들에 이를 뿐인 것이다. 라인보는 이렇게 쓴다.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 모두 땅에 대한 관습적인 권리를 공격했으며 이는 커머너들이라는 하나의 계급의 자원을 다른 계급, 즉 사유자들이 대대적으로 훔쳤음을 나타낸다. 워즈워스는 그 소녀를 가난하다고만 생각하지 커머너로 보지는 않는다. 그는 의존상태를 보는 것이다. 그 소녀와 대화를 했더라면 워즈워스는 그녀의 자립성을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왜 그러지 않았을까?

라인보가 지적하는 것은 부르주아 혁명이 왕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긍정적 측면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토지와 커머닝 관습의 대대적인 강탈이라는 부정적인 측면도 가진다는 점이다. 당시에 퍼진 ‘정신’에는 바로 이런 맹점이 들어있다. 그래서 라인보는 묻는다. 보쀠가 워즈워스한테 ‘바로 저런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싸우는 것이야’라고 말했을 때 ‘저런 일’은 무엇인가? 굶주림? 기계와 경쟁하기 위해서 맹렬히 뜨개질하는 것? 토지와 오래된 관계를 맺고 있는 커머너? 할스베리(Halsbury)의 『영국의 법』(Laws of England)에 따르면 “커머너가 공유지에서 가지고 있는 몫은 법적 표현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가축의 입으로 풀을 먹는 것이다.” 워즈워스는 바로 이 점을 탐구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제임스(C.L.R. James)의 사례이다. 그의 『변증법에 관한 단상』(Notes on Dialectics)은 1948년 디트로이트의 동지들에게 큰 의미를 가졌었다. 『단상』은 레닌과 트로츠끼가 시작한 것, 즉 헤겔의 변증법(특히 대립물의 통일)의 노동운동에의 적용을 완성하고자 한 저작이다. 노동운동은 역사의 매 단계에서 자신이 극복할 대립물을 만난다는 것이 그 핵심 취지이다. 『단상』은 유럽, 미국 등지에서 2차 대전 후에 발전한 맑스주의 혁명가들의 소그룹들에게 큰 중요성을 가졌으며, 1955년-68년 시기에 제3세계 해방운동과 제1세계 노동운동의 반란을 환영하는 저서였다. 그런데 여기에도 맹점이 있다. 1981년에 『단상』을 공부한 라이보가 보기에 이 책에서 해방적인 것은 164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의 노동운동의 개념의 통일성이었다. 제임스는 이 통일성을 부르주아 실증주의의 단계론적 범주들(봉건주의-자본주의-사회주의)에 대립시켜 파악했다. 이러한 강력한 사고에도 불구하고 커먼즈는 제임스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네바다의 레노에 주거지를 확립하기 위해 가 있을 때(주거지 확립의 목적은 이혼을 위한 것이었다) 레노 근처의 목장에서 지냈다. 이 목장은 원주민 부족에게 속해 있었으며 상업화되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잡역부로 일했는데, 그의 동료 노동자들은 선원들, 카우보이들, 필리핀인들, 멕시코인들, 중국인들, 중서부에서 온 유럽 출신의 백인들이었다. 그는 토착민들보다는 이들에게 끌렸다. 그가 본 중에 가장 잘 생긴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달리 이곳의 토착민들은 땅딸막했다. 그는 이 모든 사람들과 많이 사귀지는 않았다. 1948년 8월에서 11월까지 게링(Guerin)의 『프랑스 대혁명』을 번역했고 『단상』을 집필했다. 목장은 피라미드 호수(Pyramid Lake) 옆에 있었다.

그가 집필하고 있을 때 그의 주변에서는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전쟁, 파이우트족(the Paiutes)이 자신들의 공유지를 되찾기 위해 벌이는 게릴라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네바 다대학교의 사회역사가인 둬킨(Denis Dworkin)은 이렇게 썼다.

맑스주의자이자 대영제국의 백성으로서 제임스가 파이우트족을 그 자신이 속한 것과 같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라는 세계사적 과정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확실히 타당했다. 그러나 목장이 원주민보호구역에 있었다는 점을 그가 인정한다는 점은 제쳐놓고, 제임스가 토지분쟁은 말할 것도 없고 그곳의 주민들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증거가 한 조각도 없다.

이어서 라인보는 파이우트족의 삶을 그린 책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이곳의 토지가 종획된 역사(보호구역은 그 결과이다)를 이런저런 책들을 들며 말해준다. 그러는 가운데 일자리를 찾는 백인노동자와 먹을 것을 찾는 원주민의 차이를 짚어주기도 한다. “일자리를 찾는 사람은 사장에게서만 임금을 발견하지만, 파이우트족은 보존되는 한에서만 자원을 발견한다.”

제임스가 네바다를 떠난 후 1년 뒤에 뉴욕시민 작가인 리블링(A.J. Liebling)이 같은 목적으로 피라미드 호수 목장에 오는데, 음식 및 스포츠 담당 작가인 리블링은 제임스와 달리 파이우트족의 분쟁에 완전히 빠져들어서 여러 요구들의 합법성과 파이우트족과 관련된 제반 사항들에 관심을 갖고 뉴욕으로 돌아온다. 그는 파이우트족과 “미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는 원주민 전쟁”에 대한 일련의 글들을 써서 1955년에 출판한다.

파이우트족의 주된 적(敵)인 맥캐런(Pat McCarran) 상원의원은 조 매카시(Joe McCarthy)의 측근이었으며 1952년의 맥캐런법―코뮤니스트들, 체제전복자들, 동반자들[코뮤니즘에 공감하는 비코뮤니스트들]]이 미국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 법―의 후원자였다.

1985년에 미국대법원은 자신들이 천년 동안 살아온 토지에 대한 파이우트족의 모든 권리주장을 부인하는 판결을 내린다.

제임스는 1950년의 국가안보법(Internal Security Act)으로 엘리스 아일랜드에 투옥되었다. 그의 항소는 그가 코뮤니스트라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라인보는 제임스는 코뮤니스트가 아니라고 정중하게 바로잡는다. 그가 맑스주의 혁명가이기는 하지만, 코뮤니스트는 아니라는 말이다. 양자의 차이는 그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도 모르고 판사도 몰랐다고 하면서.

맥캐런 상원의원은 원주민 커먼즈를 파괴하고자 했으며 코뮤니스트들이 미국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했다. 제임스는 자신이 공산당의 당원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코뮤니스트가 아니라고 불만을 표할지 모르지만, 그는 분명 자본주의의 반대자였으며 노동자혁명의 옹호자였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파이우트족의 삶의 방식에 내재한 커머닝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 투쟁의 한가운데에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라인보는 이 세 사례를 한데 모아 정리한다. 그는 다른 면에서는 날카로운 이 세 사람의 눈을 방해한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 라인보는, 자신은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진정한 변증법인 대화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만 제시할 수 있다고 한다. [라인보 자신은 그런 말을 안 했지만, 정리자가 보기에는 여기서 헤겔의 변증법이 바흐친의 ‘대화적 상상력’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그러면 또한 물어야 할 것은 그들이 못 본 커먼즈를 우리는 어떻게 볼 수 있는가이다. 많은 연구가 숲의 나무를 땔감으로 취할 권리를 발굴해냈고 이것이 우리를 이른바 커머닝의 한 형태로서의 ‘나무 절도’에 민감하게 만든다. 토착민 커먼즈는 이제 국제법의 주제가 되었다.

[땔감 채취, 먹을 것 채취, 땅]을 커머닝으로 보는 것이 무슨 이득을 가져오는가? 강탈의 보편화(universality of expropriation)에서 그 답이 나오며, 이 범죄들을 바로잡는 방법은, 상실되고 박탈된 것에 대한 배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정리자 논평]

라인보는 여기서 글을 맺지만, 우리는 “강탈의 보편화에서 그 답이 나”온다는 말을 (그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라도) 좀더 숙고해야 할 듯하다. 우리가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자본주의적 관계는 지구 전역에서 일어나는 커먼즈의 강탈(사유화)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이른바 자본의 시초축적 단계나 노동의 자본에의 ‘형식적 포섭’의 시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 포섭’의 시기에도, 즉 지금도 계속된다. 자본은 끊임없이 공통적인 것을 (예전에는 주로 이윤의 형태로, 얼만 전부터는 주로 자산소득의 형태로) 사유화하여 자신을 불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너무나 익숙한 현실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를 세상의 법칙인 양 당연히 여기며 더 나아가 선망하고 욕망한다.

자본주의적 관계가 그 자체에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를 포함한다는 점을 정밀하게 분석한 사람은 역시 맑스이다. 맑스는 『자본론』 3권 15장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세 개의 주요한 사실”을 제시한다. 그 첫째와 둘째는 다음과 같다.

(1) 소수인의 수중에 생산수단이 집중된다. 이를 통하여 생산수단은 직접적 노동자의 소유로서 나타나지 않게 되며, 그 반대로 사회적 생산능력으로 전환된다. 비록 생산수단은 처음에는 자본가의 사유 재산이긴 하지만 말이다. 자본가들은 부르주아 사회의 수탁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수탁의 모든 과실을 혼자 취득한다.
(2) 노동 자체가 사회적 노동으로 조직된다. 협력, 분업, 노동과 자연과학의 결합을 통하여.
 이 두 가지 점에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사적 소유와 사적 노동 모두를―비록 대립적인 형태로이긴 하지만―지양한다.

(1)은 비록 자본가의 사유재산이 되었기는 하지만 생산수단이 사회적 생산능력으로 전환된 측면을 지칭하며, (2)는 노동이 비록 자본가의 처분에 맡겨진 것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노동으로 조직된 것을 지칭한다. “자본가는 부르주아 사회의 수탁자인데도 불구하고 이 수탁의 모든 과실을 혼자 취득한다”―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생산이 사회적이므로 그 과실은 잠재적으로는(virtually) 사회 전체의 것, 즉 공통적인 것인데 실제적으로는(actually) 자본가가 (이윤의 형태로) 사유화한다는 말이다. (‘과실’은 생산된 총 가치에서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과 투자된 자본의 재생산 비용은 뺀 것이다.) “사적 소유와 사적 노동 모두를”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과실은 잠재적으로는 자본가의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노동자의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사회 전체의 것이다. 이 잠재적인 측면에 바로 커먼즈가 숨어 있다. 그런데 자본가는 언제나, 혹은 상황이 안 좋아지면 과실(이윤)을 증가시키기 위해 임금을 삭감하여 그 일부를 자신의 이윤으로 취하려고 하고, 노동자들은 당연히 노조를 만드는 등의 방식으로 방어하려고 한다. 고정된 양의 과실을 놓고 이윤과 임금이 자신이 몫을 더 크게 하려는 싸움이 벌어진다. 여기서 커먼즈는 보이지 않는다.  자본가의 사유재산 증식 욕심이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침탈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약자인 노동자의 입장에서 방어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커먼즈가 숨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자본이 판을 그렇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공장을 떠나 생산과정 바깥에서 공통적인 것을 착취하는 금융자본(월가가 대표하는 유형의 자본)이 자본의 주된 세력이 되었을 때 그 변증법적 대립의 상대를 잃은 노동자는 더욱더 힘이 약화된다. 노동자의 힘의 약화는 그 자체로 공통적인 것의 약화이다. 인간의 생산능력이야말로 진정한 부의 핵심적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공통적인 것을 침탈하고 훼손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는 지금 인류를 강타하고 있는 팬데믹이 (특히 자본주의의 발달 정도가 높은 만큼이나 공통적인 것의 침탈 정도가 높은 미국의 경우에) 잘 보여주고 있으며, 앞으로 점점 더 악화될 기후위기는 이를 더욱더 높은 정도로 보여줄 것이다. 이제는 삶의 번성을 위해서는 물론이요 다가오는 위기를 잘 극복하기 위해서도 커먼즈(공통적인 것)의 가시화와 번성이 몹시 필요하다. [정백수]

 




미국 대통령의 전쟁범죄들

 


  • 저자  : Noam Chomsky
  • 원문 : Noam Chomsky – The Crimes of U.S. Presidents https://www.youtube.com/watch?v=5BXtgq0Nhsc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2003년 미국의 언어학자이자 정치평론가인 촘스키가 한 대담에서 2차 대전 후 미국 대통령들의 저지른, 전쟁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들을 죽 열거하는 부분(유튜브 동영상)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질문자가 누군지는 동영상의 정보에 들어있지 않다. 처음에 ‘뉘른베르크 원칙’을 언급하면서 시작하는데, 뉘른베르크 원칙은 전쟁범죄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결정하는 일단의 가이드라인들이다. 이 원칙들은 2차 대전 이후 뉘른베르크 정의궁에서 진행된 나치당원들의 재판의 기저에 깔려있는 법적 원칙들을 법제화하기 위해 유엔의 국제법위원회에 의해 작성되었다. ‘뉘른베르크 원칙’의 제6원칙은 다음과 같다. 

    제6원칙 : 아래의 범죄는 국제법상의 범죄로 처벌된다.

    (a) 평화에 반한 범죄
    (1) 침략전쟁(a war of aggression) 또는 국제조약, 합의 또는 확약에 위반되는 전쟁을 계획, 준비, 개시, 수해하는 행위
    (2) 앞의 (1)에 언급된 행위의 완성을 위하여 공동의 계획 또는 음모에 가담하는 행위
    (b) 전쟁 범죄
    목적을 불문하고 점령지의 민간인에 대한 살인, 학대 또는 노예노동을 위한 강제이주, 전쟁포로의 살인 또는 학대, 공해상에서의 민간인의 살인 또는 학대, 인질의 살해, 공공 재산 또는 사유재산의 약탈, 도시 또는 촌락의 무분별한 파괴 또는 군사적으로 불필요한 초토화 행위를 포함하여 전쟁법과 전쟁 관습을 위반하는 여타 행위
    (c) 인도에 반한 범죄
    평화에 반한 범죄 또는 여타 전쟁범죄의 일환으로 또는 그와 연결되어 민간인에게 저질러진 살인, 절멸, 노예화, 강제이주 및 여타 비인도적 행위 또는 정치적, 인종적, 종교적 이유에 기인한 박해
    이상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udfks7&logNo=220136045897&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참조.

 


문: 진행자) 
뉘른베르크 원칙에 따르면 2차 대전 후의 대통령들이 범죄자일 수 있다고 말하셨는데요?
답: 촘스키)
십중팔구 맞습니다.

문)
어떤 죄를 지었는지 빨리 살펴볼까요?
답)
아이젠하워는 이란의 보수적인 민족주의 정부를 군사쿠데타로 전복시켰습니다. 그는 과테말라의 처음이자 마지막 민주정부를 군사쿠테타와 침공으로 전복시켰습니다. 이란에서는 그 결과로 25년 동안의 잔인한 독재가 들어섰고 79년에 결국 전복되었습니다. 과테말라에서는 그 결과로 대대적인 악행이 저질러졌으며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알려진 일입니다만, 인도네시아에서 그는 쿠바와 니카라과 때까지 전후 시기의 주요 비밀테러공작을 실행했습니다. 이는 인도네시아를 분열시키고 대부분의 자원이 몰려있는 외곽의 섬들을 탈취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 당시에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인도네시아가 민주화될 가능성을 붕괴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매우 자유롭고 개방되어 있어서 빈자의 정당이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입지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아이젠하워는 외곽의 섬들에서 군사반란을 지원하고 부추겼습니다.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은 기소되어야 할 범법들입니다.

문)
케네디는 어떤가요?
답)
케네디는 최악의 대통령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장 먼저 거론할 것은 월남 침공입니다. 그 이전에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1954년에 정치적 화해를 봉쇄하고 라틴아메리카 스타일의 테러 국가를 수립한 바 있는데, 이 테러 국가가 아이젠하워 임기 말에 6만 혹은 7만 명쯤 되는 사람들을 살해했습니다. 이에 대한 반응이 일었는데 케네디가 이해하기로 이 반응은 내적으로 통제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래서 침공했던 것입니다. 1962년에 남부에서 수행된 폭격의 3분의 1이 미공군에 의한 것이었습니다.[정리자―공식 역사에서는 미군이 1964년 8월부터 개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월남 휘장을 단 미국 비행기들이고, 미국 조종사들이죠. 케네디는 네이팜탄을 승인했습니다. 그는 농작물을 파괴하는 데 화학무기들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강제수용소나 다름없는 곳에 몰아넣는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정당한 이유 없는 침략이죠. 쿠바의 경우 그것은 대대적인 국제테러리즘 작전이었습니다. 이는 세계의 파멸을 가져올 뻔했고, 미사일 위기를 낳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열거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기소되어야 할 범법들입니다.

문) 
존슨은요?
답)
존슨은 인도차이나에서의 전쟁을 확대하여 결국 3백만 혹은 4백만 명의 사람들이 죽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도미니카 공화국을 침략하여 그곳에서 잠재적인 민주적 혁명으로 보였던 것을 봉쇄했으며 초기 단계에 있던 이스라엘의 중동지역 점령을 지지했습니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 전 세계를 돌며 사례들을 열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카터를 보세요.

문)
닉슨이 다음 순서입니다.
답)
닉슨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네요. 건너뛰어도 되겠어요.

문)
좋습니다. 그러면 포드는요?
답) 
포드는 대통령 자리에 얼마 안 있었지만,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략을 승인할 만큼 오래 머물러 있기는 했습니다. 동티모르는 현대 시기에 그 어떤 것 못지않게 대량학살에 근접한 것이 되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동티모르 침략에 반대하는 척하면서도 비밀리에 지원했으며, 사실 그렇게 비밀스럽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침략 직후에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유엔 안보리에서 이 침략을 규탄하는 대열에 끼었지만, 모이니핸(Moynihan) 주 유엔 미국대사가 친절하게도 우리에게 설명해주기로는, 그가 받은 지시는 유엔이 침략에 반대하여 취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완전히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 일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으며 그 다음 문장에서는 “그 다음 몇 달 동안 약 6만 명의 사람들이 살해되었다”고 말하고는 그 다음 주제로 넘어갔습니다. 그가 말한 “몇 달”이란 처음 몇 달을 말합니다. 살해당한 사람은 나중에 필시 수십만 명에 이르렀을 겁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무기의 보이콧을 선언했지만 비밀리에 무기공급을 증가시켰으며 여기에는 대(對)반란용 장비가 포함됩니다. 이로써 인도네시아의 침략이 정점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으로 재직한 짧은 시기에 이런 일이 있어났으며 이는 사실 중대하게 기소되어야 할 큰 전쟁범죄입니다.

문)
카터는요?
답)
인도네시아의 악행들이 증가하면서(1978년에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카터는 인도네시아로 흘러들어가는 무기의 양을 증가시켰습니다. 의회에서 인권 관련 제한을 부과하여―그 당시 의회에 인권운동이 있었습니다― 고급 무기가 인도네시아로 유입되는 것을 봉쇄했을 때 카터는 부통령 먼데일을 통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미국의 스카이호크를 인도네시아에 보내서 대량학살에 가까운 사건으로 드러난 것(대략 인구의 4분의 1이 살해되었을 겁니다)을 완성하도록 했습니다.

중동에서 카터는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최고의 성과는 캠프데이비드 협정(Camp David agreements)[1978년 9월 17일]입니다. 이 협정은 미국의 외교적 승리로서 제시됩니다만 사실 이 협정은 외교적 재난입니다. 캠프데이비드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은 1971년에 이집트가 한 제안을 마침내 받아들입니다. 이 제안은 1971년 당시에는 미국이 거부했는데 이제 이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포함했기에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점에서는 더 나쁜 것이었습니다. 큰 전쟁들, 악행들 등이 벌어진 후에 이스라엘로 하여금 1971년의 이집트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카터는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 및 기타 원조를 세계 전체에 대한 원조의 50% 이상으로 올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즉시 그 원조를 정신이 제대로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을 바로 그 방식으로, 즉 북쪽의 이웃을 공격하고(처음에는 1978년, 그 다음에는 1982년) 점령 지역의 통합성을 증가시키는 데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며, 우리는 계속 열거할 수 있습니다.

문)
레이건은요?
답)
이 사람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레이건은 국제사법재판소(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에 의해서 무력의 불법적 사용(니카라과와의 전쟁에서 보인 국제테러리즘을 말합니다)으로 규탄을 받은 최초의 대통령입니다. 이것도 시작일 뿐입니다. 유엔 안보리도 두 개의 결의안에서 국제범죄의 규탄을 승인했는데, 둘 다에 대해 미국은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문)
부시 1세는요?
답)
파나마 침공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파마나인들에 따르면 파나마 침공으로 약 3천 명의 사람들이 살해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조사된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수치가 맞는지 아닌지 누가 알까요. 미국이 파나마를 침공한 것은 그 최악의 악행들에 걸쳐서까지 미국이 지원해준 바 있는, 말 안 듣는 폭력배 노리에가를 납치하기 위해서입니다. (노리에가는 플로리다로 데려와져서 대부분 CIA의 돈을 받고 저지른 범죄들에 대해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 일은 이유 없는 침략에 해당됩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해 상세하게 말할 수도 있는데, 현실화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외교적 타결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외교적 타결을 고려하기를 거부했으며 언론도 단 하나의 예외인 롱 아일랜드의 <뉴스데이>(Newsday) 말고는 보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뉴스데이>는 전체를 속속들이 정확하게 보도했으며 미국에서 그렇게 한 유일한 신문입니다.

그래서 부시 행정부는 공격했으며 이 공격은 전시법 상으로 범죄에 해당하는 방식으로 수행되었습니다. 그들은 기반시설을 공격했습니다. 가령 누가 뉴욕시를 공격하면서 전력시스템, 하수시스템 등을 파괴한다면, 이는 생물학전이나 다름없습니다. 바로 이런 공격을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경제제재 체제가 옵니다. 이는 대부분 클린턴 때의 일이지만, 부시 때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적게 잡아도 수십만 명을 살해했습니다. 한편으로 사담 후세인을 강화시키면서 말입니다. 여기서 클린턴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시작이지 결코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죽 열거할 수 있는데, 그 한 사례로 충분합니다. 다른 사례들이 많습니다만.

문)
부시 2세는요?
답)
클린턴 이야기를 더 합시다. 클린턴의 사소한, 아주 사소한 탈선 가운데 하나는 크루즈 미사일 두세 개를 수단에 보내서 의약공장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을 파괴한 일입니다. 첩보상의 실패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접한 유일한 것인, 독일 대사와 수단에서 현장연구를 하는 근동재단(Near East Foundation)의 지역 책임자의 추산에 따르면, 한 방의 미사일 공격으로 수만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이는 매우 심각합니다. 만일 누군가 우리에게 그런 일을 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나쁜 짓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열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동에서 클린턴은 지난 유엔 결의안들이 (그의 행정부의 말로는) “낡고 시대착오적인” 것임을 선언함으로써 시작했습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더 이상 국제법은 없는 것이죠. 그런 다음에 평화프로세스라고 불리는 시기가 옵니다만 이 평화프로세스 동안 이스라엘인들의 정착―이는 미국의 납세자들이 돈을 지불하고 미국의 군사적 원조와 외교가 돕는 정착입니다―이 계속 증가했습니다. 극에 달한 때는 클린턴의 임기 마지막 해였습니다. 정착이 1992년 이래 최고 수준에 이르죠. 그러는 동안 점령 지역은 기반시설 프로젝트와 새로운 정착민을 갖춘 작은 지역들로 구획되었습니다. 이것을 뭐라고 부르는지를 모르겠는데, 여하튼 군사점령 아래 놓여있죠. 만일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전쟁범죄라고 부를 겁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는 싶은데··· [정리자―맨 마지막 말이 거의 들리지 않는데 자막 파일에는 ‘I don’t think we have to discuss.’(논할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부록>

[가장 극적으로 미국 민중의 뒤통수를 오바마가 빠진 것이 아쉬웠던 차에(2003년의 대담이라서 2009년에 대통령이 된 오바마는 빠질 수밖에 없다), 비록 국제범죄의 맥락은 아니고 다른 맥락에서지만 촘스키가 오바마를 거론한 짧은 동영상 Noam Chomsky on Why ‘Obama Sold Out Working People Within Two Years’을 발견했기에 여기 그 내용을 정리해서 부록으로 달아본다.]

===

[촘스키]
시기마다 다릅니다. 많이들 언급하는 60년대를 예로 들어봅시다. 시민권 운동 이후 이슈들은 많지만 당시 큰 이슈는 인도차이나 전쟁이었습니다. 당시에 인도차이나 전쟁에 항의하는 대중운동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60년대 말 2-3년 동안에는 있었습니다. 내가 살던 (자유주의적 언론이 존재하는, 필시 미국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인 도시일) 보스턴에서는 1966년에도 공개적 시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보다도 학생들에 의해서 과격하게 해산되었기 때문입니다. 굉장하죠. 뭐라도 움직임을 일으키는 것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67에 돌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다음에 엄청 커졌습니다. 불행히도 이 움직임은 70년대 초에 너무 일찍 사그라졌습니다. 물러나자마자 곧 반동이 잔뜩 몰려듭니다.

오바마의 경우에도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좌파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좌파에 속해있다는 것을 잊고는 ‘좋아, 여기 언변이 뛰어나고 놀라운 마케팅 기술을 가진 멋진 친구가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필시 기억하겠지만, 첫 선거에서 그는 ‘베스트 마케팅 캠프’ 상을 받았습니다. 어떻든 좌파는 자신들이 그의 멋진 말에 귀를 기울이고는 ’좋아, 우리는 그를 믿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2년 내에 오바마가 노동자들을 너무나도 완전하게 배반하여 좌파는 오바마를 포기해버렸습니다. 이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 2년 동안에 일이 잘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의회는 오바마 편이었는데, 빠진 것 하나가 좌파의 행동이었습니다. 만일 좌파가 행동했더라면 오바마와 민주당으로 하여금 멋진 말들의 일부라도 실현하도록 압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압박을 거둬들이는 순간, 끝입니다. 이전의 상태로 바로 돌아갑니다. 이는 결코 해서는 안될 실수입니다.




‘트럼프 대 바이든’?

 


  • 저자  : Chris Hedges
  • 원문 :  The Politics of Cultural Despair (October 16, 2020)

    https://www.youtube.com/watch?v=GxSN4ip_F6M&list=TLPQMTcxMTIwMjDZLmYzc8ZbYQ&index=2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크리스 헤지스가 올해 10월 16일(대선 18일 전)에 The Sanctuary for Independent Media (in Troy, NY)에서 한 강연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주류미디어를 통해서는 접하기 힘든 미국의 현실이 강연 내용에 많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공유하고자 소개한다. 강연이 제법 길고 질의응답도 있어서 내용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몇 번으로 나누어서 소개하기로 한다. 오늘 올리는 것은 ‘트럼프 대 바이든’이라는 대립구도의 허구성이 제시되는 부분이다. 강연의 원고는 https://scheerpost.com/2020/10/19/chris-hedges-the-politics-of-cultural-despair/에서 볼 수 있다.

[유튜브 동영상 19:35 지점]

트럼프가 바이든보다 더 위험한가요? 네. 트럼프가 바이든보다 더 무능하고 더 부정직한가요? 네. 트럼프가 열린 사회에 더 위협이 되는가요? 네. 그러면 바이든이 해결책인가요? 아닙니다!

바이든은 변화를 제공할 수 없습니다. 그는 현재와 동일한 상태를 좀더 제공할 수 있을 뿐이며,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이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냉담과 혐오로 투표를 하지 않는 최대의 유권자층인 1억 명 이상의 시민들이 다시 한 번 투표장에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3일 실시된 미국 선거에서 전체 투표자가 1억 6천만 2천 명 정도라고 하니 전체 등록유권자 2억 3천 900만 명에서 이 수를 제하면 등록유권자 가운데 대략 7900만 명이 투표하지 않은 것이 된다. 헤지스가 예상한 것보다는 투표율이 높다.)) 이러한 유권자들의 사기저하는 의도된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증오의 대상의 반대쪽에 투표하는 것만이 허용됩니다. 지지하는 정당이 있는 미디어들은 한 집단을 다른 집단에 대립시키는데, 이는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나오는 ‘2분 증오’(the Two Minutes Hate)의 소비자 버전입니다. 미디어들은 우리의 선호와 습성에 관한 상세한 디지털 분석의 도움으로 우리의 견해들과 편견들의 구미에 능숙하게 맞추고 이것들을 강화하며, 다시 우리에게 되팝니다. 그 결과로 우리에게 ‘맞춤 분노 패키지’가 주어지게 됩니다. 대중은 조작된 분열을 가로질러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정치는 조작된 정치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는 싸구려 리얼리티 쇼가 됩니다. 시민들의 담론은 악담과 거짓으로 물듭니다. 그러는 사이에 권력은 문제 삼아지지 않고 도전받지 않은 채 그대로 놔두어집니다.

정치관련 보도는 스포츠 보도를 모델로 합니다. 세트는 일요일 미식축구 경기의 세트처럼 해놓았습니다. 앵커는 어느 한쪽 편이고, 각 팀에서 두 명씩, 4명의 해설자들이 나옵니다. 모니터에서는 득점이 계속 업데이트됩니다. 정치적 정체성들은 쉽게 소화될 수 있는 상투형들로 환원됩니다. 전술, 전략, 이미지, 선거기부금의 월별 누적기록, 여론조사가 끝없이 검토됩니다. 진정한 정치적 이슈들은 무시됩니다. 이는 전쟁의 언어, 전쟁의 이미지입니다.

이런 종류의 보도는 두 정당이 거의 모든 주된 이슈들에 대해서 완전히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립니다. 주요 이슈들은, 금융기업의 규제완화, 무역협상, 경찰의 군사화(1990년 이래 국방부는 74억 달러 이상을 8천 개에 달하는 연방 및 국가 법집행기관들에 이전하여 군사장비와 병기를 갖추도록 했습니다), 교도소 재소자들의 폭증, 탈산업화, 긴축, 프래킹(fracking) 및 화석연료 산업 지원, 중동에서의 중단 없는 전쟁, 부풀려진 군비예산, 기업들에 의한 선거 및 매스미디어 통제, 정부에 의한 대대적인 국민감시(정부가 하루 24시간 당신을 감시하면 당신은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으며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등입니다. 이 이슈들은 모두 양당 모두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거의 논의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인구의 일부분을 다른 일부분과 대립시키는 것입니다. 적대를 부추기는 것이 뉴스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저널리즘 정신에 의해서 추동되지 않고) 시청률을 높이고 기업의 후원을 증가시키기 위한 마케팅 전략에 의해서 추동되는 엔터테인먼트입니다. 뉴스가 구현하는 분할구도는 기업수입의 흐름들이 서로 경쟁하는 구도입니다. 뉴스에 사용되는 틀은 프로레슬링에서 사용되는 단순화된 도덕극입니다. 미국에는 트럼프를 좋아하느냐 증오하느냐라는 두 개의 실질적 정치적 입장만이 존재합니다. 이것이 프로레슬링의 각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이든과 민주당에게 표를 던지는 것은 [트럼프가 싫어서 바이든에게 표를 던졌더라도] 무언가를 지지하며 던지는 셈이 됩니다. 바이든에게 표를 던진다면 당신은

  • 자신을 학대한 자들에게 맞섰던 애니타 힐(Anita Hill) 같은 용기 있는 여성들의 굴욕을 승인하는 셈이 됩니다.
  • 중동에서 중단 없는 전쟁을 기획한 자들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인종분리적인 이스라엘 국가를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정부의 정보기관에 의한 대중의 대대적 감시를 그리고 적정절차(due process) 및 인신보호영장(habeas corpus)의 폐지를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복지의 파괴와 사회안전의 삭감을 포함한 긴축 프로그램들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나프타, 탈산업화, 임금의 실질적 감소, 제조업 분야 일자리들 수십만 개의 상실, 멕시코, 중국, 월남 등 낮은 보수를 받으며 착취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로의 일자리 이전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교사들 및 공공교육에 대한 공격과 연방기금의 영리적인 기독교 차터스쿨들(charter schools)로의 이전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교도소 재소자의 수가 두 배로 늘고 형의 선고가 세배, 네 배로 증가하는 데, 그리고 사형에 처해질 범죄들이 크게 확대하는 데 표를 던지는 셈이 됩니다.
  • 유색인이 대부분인 가난한 사람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도 처벌을 받지 않는, 군대화된 경찰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그린뉴딜과 이민법개혁에 반대하는 셈이 됩니다.
  • 프래킹[수압파쇄법] 산업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낙태와 재생산권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부유층이 교육의 기회를 받고 가난한 유색인들은 기회를 거부당하는, 차별적인 공립학교시스템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기혹한 수준의 학자금대출금과 파산을 하더라도 그 부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은행업의 규제완화와 글래스-스티칼(Glass-Steagall)법의 폐지를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정리자―글래스-스티갈 법은 1933년 제정된 미국의 은행법 중에서 4개 항목을 가리키는 것으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분리(은행업과 증권업의 분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 영리적인 보험업과 제약기업들을 찬성하고 보편적 건강보장을 반대하는 셈이 됩니다.
  • 모든 재량지출(discretionary spending)[정리자―행정부와 의회가 재량권을 가지고 예산을 편성․심사할 수 있는 지출]의 반 이상을 잡아먹는 국방예산을 찬성하는 셈이 됩니다.
  • 과두세력과 기업이 돈으로 우리의 선거를 사는 것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상원의원으로 활동할 때, 세계에서 가장 큰 독립 신용카드회사이며 바이든의 아들 헌터(Hunter)를 고용한 MBNA의 이익에 비열하게 복무했던 정치가에게 표를 던지는 것입니다.

바이든은 중동에서의 전쟁들을 기획한 주요 인물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전쟁에서 우리는 7조 달러 이상을 낭비했으며 수백만 명의 삶의 파괴하거나 멸절시켰습니다. 바이든은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트럼프의 경우보다 훨씬 더 많은 고통과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제대로 기능하는 사법 및 입법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면 바이든은 제국전쟁과 기업에 의한 나라의 약탈을 기획하고 미국 노동계급을 배반한 죄목으로 (다른 공범자들과 함께) 법정에 세워졌을 것이지 이렇게 정치적·경제적 붕괴의 해결자로서 내세워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민주당과 이 당을 옹호하는 지유주의자들은 인종, 종교, 이민, 여성의 권리, 성정체성과 관련된 이슈들에 대해 관용적인 입장을 취하며, 이것이 그들의 정치인 척합니다. 그런데 이 이슈들은 집단들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윤리적인 이슈들입니다. 이것들은 중요하지만, 사회 전체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슈들이 아닙니다. 빌 클린턴과 민주당이 가령 예전의 복지제도를 파괴했을 때 전지구적 투기자들과 기업들로 구성된 계급이 경제의 통제권을 장악하여 민주당이 응원하는 척하는 바로 그 집단들의 삶을 파멸시켰습니다. 그 복지제도의 수혜자의 70%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오른쪽에 있는 자들은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을 악마화하여 희생시킵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민주당은 그 입장대로라면 유럽에서는 극우당의 되리라는 점입니다.) 문화전쟁이 현실을 가립니다. 두 당은 우리의 민주적 제도들을 파괴하는 데서 완전히 한패입니다. 두 당은 미국 사회를 마피아 국가로 재편성했습니다.

낸시 펠로시(Nancy Pelosi, 민주당, 2019년부터 연방 하원의장), 척 슈머(Chuck Schumer, 2016년부터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미치 매코널(Mitch McConnell, 2007년부터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같은 정치가들의 힘은 기업의 돈을 선발된 후보자들에게 지원할 수 있는 데서 나옵니다. 제대로 기능하는 정치체제, 즉 기업의 돈이 퍼부어지지 않는 체제에서라면 이들은 권력을 잡지 못할 것입니다. 이들은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공통체’(commonwealth), ‘공공적인 것’(res publica)라고 부른 것, 혹은 민중의 재산을 전지구적 기업 과두세력을 위한 약탈과 억압의 도구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미국의 부를 약탈하고 세금은 한 푼도 내지 않으며 사법부, 미디어, 입법부를 왜곡시킨, 그리하여 시민의 자유를 박탈하고 금융 사기와 절도에 가담할 자유를 확보한, 부유하고 전능한 주인들에 의해 지배되는 노예들입니다.

팬데믹의 와중에서 우리의 도둑정치가들이 한 짓은 무엇일까요?

이들은 오바마와 바이든이 주관한 2008년 구제금융 이래 유례없는 규모인 4조 달러를 약탈했습니다. 이들은 우리를 희생시켜 실컷 먹고 배를 불리고는, 남은 부스러기들을 개인용 제트기, 요트, 고급아파트, 궁전 같은 저택의 창문 바깥으로 고통 받고 경멸 받는 대중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경기부양법안은 지원금이나 세금삭감의 형태로 석유회사들, 항공산업체들(이들만 500억 달러를 경기부양금으로 받았습니다), 유람선업체들에게 수조 달러를 건네주었으며, 부동산업체들에게 1700억 달러를 안겨주었습니다. 경기부양법안은 사모펀드, 로비그룹들(이들은 지난 20년 동안 정치가들에게 선거기부금으로 1억9100만 달러를 주었습니다), 정육업체들 그리고 미국에서 세금을 나내지 않기 위해서 해외로 이전한 기업들에게도 지원금을 주었습니다. 경기부양법안은 소기업들을 노동자들의 임금을 지불할 수 있는 상태로 유지시켜는 데 쓰여야 할 돈을 가장 큰 기업들이 집어삼키도록 허용했습니다. 이 법안은 경기부양 패키지 하에서 백만장자들에게 80%의 세금삭감 혜택을 주었으며 가장 부유한 자들이 평균 170만 달러에 해당하는 경기부양금을 받도록 허용했습니다. 경기부양법안은 또한 4540억 달러가 재무부의 환율안정기금에 할당했는데, 이는 트럼프 패거리들이 기업들에게 나누어준 막대한 비자금으로서 10대 1의 비율로 차입을 한다면 4조5천억 달러의 자산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이 법안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월가에 1조5천억 달러의 대출을 하는 것을 승인했습니다. 이 돈이 상환될 것이라고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억만장자들은 팬데믹 이후 4340억 달러만큼 더 부유해졌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부자인 제프 베조스(그의 기업인 아마존은 지난해에 연방소득세를 하나도 내지 않았습니다) 혼자만 팬데믹 이후 자신의 부에 거의 720억 달러를 추가했습니다. 동일한 기간에 5500만 명의 미국인들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정리자―강연 원고가 실린 사이트에 가보면 이 단락의 주요 항목마다 해당 자료로 가는 링크가 걸려있다.]

[34:00]




미국은 이제 시체다

 


  • 저자  : Chris Hedges
  • 원문 : America Is Now a Corpse (2020년 11월 5일)  https://www.commondreams.org/views/2020/11/05/america-now-corps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크리스 헤지스가 Common Dreams에 실은 2020년 11월 5일자 글 “America Is Now a Corpse”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어조를 살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 첫 단락만 번역이다.) 여기서도 헤지스는 미국이든 한국이든 주류 혹은 준주류 미디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급진적이고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그는 ‘미국 제국 몰락의 예언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미국 현실의 어두운 측면을 지적하는 데 집중한다. 그 이유는 미국의 제도화된 체제 그 어디에도 희망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희망이 어디에도 없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사회운동에 희망이 있다고 본다. (Chris Hedges: Revolutions Only Happen Through Movements 참조) 다만 미국이 새로운 주체성을 구성하는 시민들의 운동의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후진국이라는 점―달리 말하자면 그 동안 신자유주의가 사회에 파고든 정도가 미국에서 매우 높았다는 점―이 그로 하여금 부정적 현실(제도화된 기성 체제)의 비판에 치중하게 만든 듯하다. 긍정적인 움직임이 왕성한 곳에서라면 부정적인 측면의 비판에 과도하게 집중할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분단 상황에서 수십 년 동안 어둠 속을 기고 기어서 비로소 수많은 촛불들이 삶을 밝히는 곳에 도달한 우리로서는 헤지스가 대변하는, 미국 민중이 처한 상황이 잘 이해되고 또 그렇기에 안타깝다. 그러나 혹시 모른다. 이번 선거를 통해 제도 영역에서 일어날 변화를 짚어보느라고 바쁠 일반 미디어들로서는 도저히 보지 못하고 보려고도 않는 저 아래의 영역에서 이번 선거 기간 동안 미국 민중의 주체성 형성의 새로운 큰 흐름이, 그 큰 흐름의 맹아가 형성되기 시작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항상 그렇듯이 아래로부터 보는 것이 중요하며 길게 보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은 이제 시체다

 

“끝났다. 선거가 끝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민주주의(capitalist democracy)가 끝났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비록 부유층의 이익을 위하는 쪽으로 치우쳐 있고 빈자와 소수자에게 적대적이지만, 적어도 점진적이고 점증적인 개혁의 가능성을 제공하기는 했다. 이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시체가 되었다. 상징과 수사(修辭)는 동일하다. 그러나 그 실체는 소수의 과두세력이 자금을 지원하는 공들인, 그러나 공허한 ‘리얼리티 쇼’이다. (바이든은 선거운동에 15억1천만 달러를 들였고 트럼프는 15억7천만 달러를 들였다.) 그 목적은 미국인들에게 마치 선택지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선택지는 없다. 장광설을 늘어놓는 트럼프와 언어 능력에 손상을 입은 바이든 사이의 공허한 대결은 진실을 가리도록 계획된 것이다. 과두세력이 항상 이긴다. 민중은 항상 진다. 백악관에 누가 앉아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메리카는 실패한 국가이다.”

미국의 ‘열린사회’를 살해한 세력들은 다음과 같다.
① 선거과정, 법원, 미디어를 사들인 기업과두집단(corporate oligarchs). 이들은 로비스트들을 통해 입법을 하여 미국 민중을 빈곤하게 만들고 자신들은 부와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을 얻고 있다.
② 쓸모없는 부단한 전쟁을 위해 국고를 탕진한 군사주의자들과 전쟁산업체들. 이들은 약 7조 달러를 탕진했으며 미국인들을 국제적 천민으로 만들었다.
③ 상여금과 보상 패키지를 수억 달러씩 받으며 일자리들을 해외로 보내고 우리의 도시를 폐허로 만들며 노동자들을 (지속적인 소득과 희망이 없는) 비참과 절망의 상태에 빠뜨려 놓은 CEO들.
④ 과학과 전쟁을 벌이며 인류가 멸종하든 말든 이윤을 추구하는 화석연료 산업체들.
⑤ 뉴스를 생각 없는 오락과 우리 당 응원하기로 바꾼 언론.
⑥ 대학으로 물러나서 정체성 정치와 다문화주의의 도덕적 절대성을 설교하지만, 다른 한편 노동계급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경제전쟁과 시민들의 자유에 가해지는 무자비한 공격에는 등을 돌린 지식인들.
⑦ 아무 것도 안 하고 말, 말, 말만 해대는 무기력하고 위선적인 자유주의 계층(liberal class).

가장 큰 경멸의 대상은 자유주의 엘리트들이다. 이들은 사회의 도덕적 중재자를 자처하지만 자신들이 수호한다는 가치를 그것이 불편해지는 순간 저버린다. 또한 자유주의 계층은 유럽에서라면 극우로 간주될 후보자와 정당의 치어리더들이며 검열자 기능을 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바이든에 의해서 그리고 민주당 고위층에 의해서 조롱당하고 무시당하면서도, 바이든과 민주당을 비판한 글렌 그린월드(Glenn Greenwald) 같은 저널리스트들을 소외시키느라고 바빴다. 『인터셉트』(The Intercept)든 『뉴욕타임즈』든 자유주의자들은 민주당을 해칠 수 있는 정보를 무시하거나 그 신빙성을 떨어뜨렸다.

민주당과 그 자유주의적 지지자들은 미국을 휩쓸고 있는 절망을 염두에도 두지 않고 있다. 이들은 아무 것도 대표하지 않는다. 이들은 그 어느 것을 위해서도 싸우지 않는다. 법치의 복원, 보편적 건강보장, 프랙킹 금지, 그린뉴딜, 시민의 자유의 보호, 노조의 구축, 사회적 복지 프로그램의 보존 및 확장, 철거와 가압류의 금지, 학자금대출금의 탕감, 엄격한 환경통제, 정부일자리창출 프로그램 및 기본소득, 금융규제, 부단한 전쟁과 군사적 모험주의에의 반대―이 모든 것들이 다시 한 번 망각되었다. 이런 이슈들을 옹호했다면 민주당은 산사태를 겪었을 것이다. 민주당은 정치자금을 공급하는 기업들에게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공동선을 키우고 기업의 이윤을 감소시키며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것은 민주당으로서는 불가능하다. 바이든은 아이디어들과 정책 이슈들을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다. 마치 그와 민주당이 아메리카의 영혼을 구한다는 약속으로 선거를 휩쓸 수 있다는 듯이. 적어도 신파시스트들은 자신들의 정신착란적 확신들을 표현하는 용기라도 있다.

전통적 민주주의에서 자유주의 계층은 점진적 개혁을 가능하게 하고 자본주의의 최악의 과잉을 개선함으로써 안전밸브 역할을 한다. 그러나 또한 급진적 사회운동을 불신의 대상으로 만드는 공격견 역할도 한다. 자유주의 계층은 ‘파워 엘리트’의 강력한 구성요소이다. 변화의 희망과 가능성을 아니면 적어도 변화의 환상을 제공한다.

자유주의 엘리트들의 독재에의 투항이 권력 공백을 창출했고 그 공백을 투기자들, 전쟁으로 이익을 얻어내는 자들, 갱스터들, 킬러들이 채웠다. 이로 인해 파시스트 운동을 위한 문이 열렸고 이 운동은 자유주의 계층과 그들의 가치들의 불합리함을 조롱하면서 부각되었다. 파시스트들이 약속하는 바는 허황되고 비현실적이지만, 자유주의 계층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진실에 근거를 둔다. 자유주의 계층이 일단 기능하기를 그치면 억제하기 어려운 악들이 들어있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다.

트럼프주의의 질병은 트럼프가 있든 없든 정치체 안에 깊이 함입되어 있다. 트럼프주의는 자유주의자들이 ‘개탄스러운 자들’(deplorables)이라고 조롱하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가진 소외감과 분노의 표현이다. 이는 공화당과 민주당이 획책한 것인데 이들은 이제 이 문제를 다루기를 거부하고 있다. 트럼프주의는 또한 백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백인들의 트럼프 지지는 실제로 감소하였다.

19세기 말 도스또옙스끼는 러시아의 쓸모없는 자유주의 계층의 행위가 피와 테러의 시기를 예고한다고 보았다. 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이 지지한 이상들을 지키지 못하자 불가피하게 도덕적 허무주의의 시대가 왔다. 『지하 생활자의 수기』의 주인공은 파산한 자유주의 이념들을 그 논리적 극단까지 몰고 간다. 그는 열정과 도덕적 목적을 피한다. 그는 합리적이다. 그는 자유주의적 이념들의 이름으로 부패하고 죽어가는 권력구조를 수용한다. 지하생활자의 위선이 러시아로 하여금 파멸을 맞게 했다면, 이제 그 위선이 미국을 멸망케 한다. 신념과 행동 사이의 치명적 분리가 핵심이다.

자유주의 계층은 기업이 권력을 시민들의 손에서 탈취했음을, 헌법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보장이 법의 명령에 의해 철회되었음을, 선거는 엘리트 지배집단이 연출하는 공허한 스펙터클에 불과함을, 미국 민중이 계급전쟁에서 지고 있음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기에 더는 현실에 상응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한다.

대중은 지배자가 효과적으로 권력을 관리하고 발휘하는 한에서는 정치적 억압을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역사가 풍부한 사례로써 보여준 것은, 일단 권력자들이 잉여적이 되고 무능력한데도 권력의 치장물들과 특권들을 틀어쥐고 있다면 무자비하게 폐기된다는 사실이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도 그랬다. 내[헤지스]가 『뉴욕타임스』에서 취재한, 이전의 유고슬라비아의 갈등에서도 그랬다.

독일 역사가 슈테른(Fritz Stern)은 그의 책 『문화적 절망의 정치』(The Politics of Cultural Despair)에서 독일에서의 파시즘의 상승은 자유주의의 붕괴의 결과라고 썼다. 사회에서 주변화된 사람들이 폭력, 문화적 증오, 개인적 원한에 중심을 둔 정치에 동원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노의 많은 부분은 정당하게도 자유주의적 엘리트들을 향해 있다.

그들은 자유주의가 근대 사회―부르주아적 삶, 맨체스터주의[맨체스터에서 일어난,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사회정치적·경제적 운동=자유방임주의], 물질주의, 의회, 당. 정치적 지도력의 부재—의 주요 전제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공격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자유주의에서 그들의 모든 내적 고통의 원천을 본다. 그들은 자유주의가 그들을 상상적인 과거로부터, 그들의 신앙으로부터 뿌리뽑았기 때문에 자유주의를 증오했다.

미국이 지금 그런 상태이다. 이윤을 추구하는 건강관리제도는 국가적 보건위기를 다룰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건강관리 기업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종합병원들을 합병하고 폐쇄했으며 지역 공동체들에서 건강관리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했다. 일선 노동자들의 거의 반이 병가수당을 받지 못하고 있고 약 4천3백만 명의 미국인들이 고용주 제공 건강보험을 잃었다. 바이든과 민주당이 확립할 의도가 전혀 없는 ‘보편적 건강보장’이 없이는 팬데믹이 극성을 부릴 것이다. 12월까지 30만 명이 사망할 것이며 1월까지는 40만 명이 사망할 것이다. 팬데믹이 소진되거나 백신이 확보될 때쯤이면 어쩌면 수백만 명이 사망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팬데믹의 경제적 낙진인, 만성적 불완전고용과 실업—현재 직업을 구하기를 멈춘 사람, 일시해고되었으나 재고용될 전망이 없는 사람, 시간제로 일하지만 빈곤선 아래인 사람이 공식적 통계에 포함되면 20%에 가깝다—은 1930년대 이래 최악의 불황을 낳을 것이다. 기아자의 수는 지난 해 이후 이미 세 배로 증가했다. 충분히 먹지 못하는 아이들의  수는 지난해보다 14배 늘었다. 푸드뱅크들의 식사 제공 능력은 수요를 쫓아가지 못했으며 압류와 철거의 일시적 정지가 취소되어 3천만 명의 미국인들이 거리에 쫓겨나게 생겼다.

기업권력을 견제할 힘은 어디에도 없다. 불가피한 사회적 소요로 인해 국가는 그 주된 사회적 통제도구들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① 대대적 감시 ② 감옥 ③ 군대화된 경찰이 그 도구들이며 이것을 법체계가 지탱하고 있다. 법체계는 비판세력을 잔인하게 짓밟기 위해 인신보호영장과 적정 절차를 취소하기 일쑤다. 유색인들, 이주자들, 무슬림들은 토박이 파시스트들에 의해서 비난받고 공격의 표적이 될 것이다. 민주당에 대항하여 기업국가(corporate state)와 제국의 범죄들을 비판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침묵을 강요받을 것이다. 자신들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민주당의 이익에 복무하는 자유주의 계층의 무기력함은 널리 퍼진 배반감―바로 이 배반감으로 인해 투표자들의 거의 반수가 미국 역사에서 가장 저속하고 인종주의적이며 무능하고 부패한 대통령 가운데 하나를 지지하는 것이다ㅡ 에 땔감을 공급할 것이다. 기독교화된 파시즘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치장하고 있는 미국식 전제정치가 한 시기의 획을 긋는 미국 제국의 쇠퇴를 규정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정리 후기]

‘시체’의 이미지는 이미 로런스(D. H. Lawrence)가 『미국 고전문학 연구』(Studies in Classic American Literature, 1923)에서 사용한 바 있다. 로런스는 『모비 딕』(Moby Dick, 1851)의 피쿼드호가 침몰한 이후의 미국을 가설적으로 ‘사후효과’(post-mortem effect)로 본다. 피쿼드는 미국의 영혼의 배이므로 피쿼드호의 침몰은 영혼의 죽음을 상징한다고 보면 된다. 로런스에게서 사후효과란 사람들이 영혼이 없이도 에고(ego)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로런스는 ‘에고’를 ‘자아’(self)와는 달리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종획당한 자아, 즉 담이 둘러쳐진 자아라고 이해하면 된다. ‘종획된 자아’의 이미지는 소유적 개인주의의 본국인 미국에 매우 적절하다. 그러나 로런스는 미국의 부정적 측면만 보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가령 휘트먼에게서 ‘열린 길’(open road)이 제시되고 있음을 짚어낸다. ‘열린 길’은 미지(未知)로 향해있다. 영혼들이 미지로 향하는 이 ‘열린 길’을 함께 걸어가는 것이 삶이다. 삶에는 미리 정해진 성취될 목적이 따로 없고 여정(旅程)만이 있다. ‘열린 길’에서는 남녀관계든 동료관계든 사회적 관계든 오직 영혼의 인정에 기반을 둔다. 영혼들이 유일한 부(富)이다. 이러한 측면이 앞으로 미국에서 현실적으로 구현될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의 제도만을 보면 아니다. 일반적으로 제도란 끊임없이 개선되지 않는 한 사후효과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도의 바깥을 보고 제도의 아래를 봐야 한다. ‘열린 길’이라는 형태의 커먼즈가 어렴풋게나마 미국에서 형성되고 있는지를 포착하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