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 결과에 대한 데이빗 볼리어의 논평



 

구조 변혁의 과제를 밝혀주는 순간

 

적어도 좀 분명해진 것은 있다. 신비화와 합리화가 증발하고 있는 것이다. 도날드 트럼프의 당선은,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가 정면으로 직시해야 할 심층적인 구조적 문제들 다수를 밝혀준다.

대부분의 대선 이후 논평이 트럼프와 워싱턴의 정계개편에 집중되었지만, 나는 더 큰 이야기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와 대의민주주의 자체로부터의 구조적 전환이라고 생각한다. 양자 모두 거버넌스와 삶의 개선을 위한 도구로서 신뢰를 잃고 있다. 그러나 아직 새로운 질서―주류 정치에는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사회 혁신의 튼실한 영역―의 윤곽은 초점이 선명하게 잡혀있지 않다.

정치에 경험이 없으며 나라의 문제를 푸는 방법에 대해 아무런 진지한 생각이 없는, 자기중심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편협한 자의 당선은 미국 헌정제도 및 그 두 주요 정당의 역기능을 드러내준다. 까불어대고 욕설을 퍼붓는 선거운동이 엄청난 TV시청률에 기여를 했지만, 이는 민주적 협의와 거버넌스의 관점에서는 소극이었다.

어떻게 이와 다를 수 있었겠는가? 18세기 후반에 분가루 바른 가발을 쓴 엘리트들이 고안한 이 훌륭한 제도는 21세기의 현실에 의해 빛을 잃어가고 있다. 정치는 이제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스펙터클과 소셜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자기지시적 거품이다. 정치는 오락계의 한 분야로서 합리적인 토의와 의미 있는 인간적 대화에 복무하기보다는 정서적 자극이나 편견에 복무하는 극도로 조작된 가상공간이다.

정당들은 이 기괴하고 모더니즘적인 도깨비 집을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 현실적 장소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실제적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진정한 민주적 참여를 양성하는 일은 향수 어린 환상인 것이다. 이제 뒤돌아 볼 때, 터무니없는 이전의 리얼리티 쇼 스타가 이 무대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논리적인 일이다. 이는 헐리웃에서의 오랜 경험이 로널드 레이건의 정치가로서의 성공에 필수적이었던 것과 같다. 그런데 이것이 ‘민주주의’인 체 하지는 말자. 이는 로마의 서커스이다.

힐러리 클린턴은 자신의 한계 이외에도 버락 오바마의 뒤를 이으려고 한 것이 불운이었다. 오바마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믿을 수 있는 변화를 약속하며 대통령직에 올랐는데, 일단 당선되자 그의 전임자인 부시의 낡은 신자유주의 교리로 재빨리 개종했다. 부시의 추악한 군사 및 반(反)테러 정책들도 이어받았다.

물론 오바마는 인종주의적인 공화당원들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공화당원들은 그의 대통령직 자체를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려고 했고 그의 지도력을 제한했다. 그렇더라도 오바마가 소득불평등, 기후변화, 금융업계의 부패, 사회 및 환경에 해로운 무역협정들과 싸우는 데서 그다지 지도력을 보여주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가 일단 신자유주의 경제 패러다임을 받아들이자 케이크는 거의 다 구워져 있는 상태이고 그가 제공할 효과적이고 실제적인 해결책이란 거의 없었다.

8년 후 힐러리는 사실상 동일한 것의 연장인 점진적/점증적 개혁(incremental reforms)을 약속했다. 그녀는 버니 샌더스의 반란을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 나이브한 것으로 보고 거부했다. 그러는 동안 힐러리와 긴밀하게 협조하는 민주당전국위원회는 버니의 놀라운 선거운동을 무대 뒤에서의 온갖 종류의 개입을 통해 은밀히 방해했다. 힐러리는 샌더스의 선거운동을 무로부터 솟아오르게 한, 체제변화에 대한 욕구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샌더스가 사라지자, 트럼프는 대통령 선거운동에서의 포퓰리즘적 진공을 노련하게 이용했다. “미국을 다시 한 번 위대하게 만들기” 위한 세부사항들을 결핍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공화당원들이 워싱턴 정치를 지배하게 되겠지만, 양 정당은 이제 박살난 상태이다. 트럼프는 일인 정당으로서 일관된 정치철학도 없고 자기 이외에는 신뢰할 만한 충성을 보이는 대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공화당은 그 분파들(재계, 복음주의자들, 노동계급) 사이에 여전히 많은 깊고 해결되지 못한 분열을 안고 있다. 민주당은 더 진보적이거나 포퓰리즘적인 이념들을 포용하기를 거부하는 보수적 사고방식에 여전히 얽매여있다. 민주당이 신자유주의 이후의 정치와 탈성장의 가능성들을 탐구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힐러리의 패배는 딸린 짐이 너무 많은 역전(歷戰)의 정치인의 패배 이상의 것이다. 이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긴 계보(카터, 듀카키스, 고어, 케리, 클린턴)가 팔아보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인간적 자본주의’라는 신자유주의적 비전의 거부이다.

트럼프가 해고된 노동자들의 문제, 산업이 버린 중서부 도시들의 문제를 개선할 진지한 아이디어들을 제공하지는 못하지만, 그의 단순화된 헛소리들조차도 오바마와 힐러리가 한 겉만 번드르르한 공허한 약속들―번영을 다시 찾을 방식들로서의 경제성장, 무역협정, 첨단 테크놀로지, 교육 및 직업 재훈련―보다 더 진심으로 들렸던 것이다.

이런 방식들로는 번영을 다시 찾을 수도 없고 다시 찾은 적도 없다. 자본의 구조적 요구가 사람들에게 어엿하고 안정된 삶을 가져다주는 경제적·사회적 정책의 능력을 줄곧 압도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낙수효과에 의존하는 경제의 실패를 경험했다. 그런데도 이것이 민주당의 경제 비전의 핵심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 신물 나는 상투적인 약속들이 도대체 어떻게 신뢰할 만할 것일 수 있겠는가? 트럼프와 샌더스 (그리고 그 외곽에서는 엘리자벳 워런) 모두가 체제가 변질되었다는 점을 외침으로써 인기가 높아졌다. 오바마는 월가를 기소하는 데 실패하여 그 거대한 범죄를 용인함으로써 체제가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그는 금융부문의 온건한 입법개혁만을 간신히 해냈으며 소비자 금융감시에 대한 요구에 저항했다. 매회 25만 달러를 받고 월가의 회사들에게 수십 번의 연설을 한 힐러리는 변화의 신뢰할 만한 옹호자가 되기 힘들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미지의 영토에 들어서는 셈이다. 미국의 두 정당들은 파열되어 혼란 상태에 처했다. 선거과정은 불평등한 인종문제에서 기후변화 및 환경에 이르는 긴급한 요구들에 진지하게 응할 수 없다. 거버넌스 과정은 이데올로기적 교착, 불신, 그리고 적에게 유리한 것은 다 없애버리는 식의 당파심에 의해 포위되어 있다. 뉴스매체는 진지한 저널리즘이나 민주적 제도의 방어보다 시청률을 높여주는 스펙터클을 더 좋아한다. 신자유주의는 더 이상 인간의 삶을 개선하는 합의된 틀로서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미국에서만이 아니라 유럽과 그 이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새로운 사회경제적 틀과 우리 스스로를 다스리는 새로운 정치제도에 대한 더 큰 논의로 가는 문턱에 우리가 서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새로운 양태의 민주적 거버넌스와 자기조직화를 제공하는―진정한 참여와 권한과 책임을 허용하는 이러저러한 규모의― 커먼즈가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커먼즈와 국가의 관계를 조정하는 것이 적어도 처음에는 가장 어려운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특히 도시 수준에서는 풍요로운 결실을 낳는 혁신노선이다.

이러한 논의는 불가피하다. ① 세계 전역에서 온갖 종류의 자기조직된 커먼즈들이 시장(市場)이나 정부보다 더 효과적으로 많은 욕구들을 충족시킨다는 바로 그 이유로 그 규모와 정교함의 측면에서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며 ② 기존의 정치구조―거대 정당들, 국민국가와 관료제, 많은 틀에 박힌 시장들, 국가와 손을 잡고 있는 금융산업―는 우리가 직면한 구조적 과제를 달성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기존의 정치제도는 일을 처리하는 낡고 역기능적인 방식에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투여하고 있다.

인터넷으로 인해 기존의 제도들 외부에서 스스로를 자기조직할 수 있는 힘을 사람들이 가지게 되면서 낡은 것과 새 것 사이의 긴장은 더 심화될 것이다. 망가진 경제/정치 제도를 지원하는 쪽으로 납세자들의 돈과 법적 특권을 맹목적으로 퍼붓는 정부가 커먼즈와 파트너가 되어 커먼즈를 지원하기 시작할 날은 언제일까? 우리는 자원추출적·약탈적·생태파괴적이며 이익의 할당에서 불공정하도록 애초에 구조화된 정치경제를 넘어가는 방법을 논의해야 한다.

트럼프의 선거운동에서 사용된 말들로 보아서 우리는 앞으로 4년 동안 괴물 같고 분열적인 사회적 격동을 견뎌야 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우리는 소중한 민주적 제도와 전통에 대한 유례없는 공격으로 고통을 받을 수 있다. 이미 당선 후 둘째 날에 백인우월주의적이고 반(反)이주민적이며 반(反)유태인적인 위협행동들이 트럼프를 외치며 일고 있다. 추방을 두려워하는 이주민들과 소수민족들은 항의하기 위해서 거리로 나서고 있다.

나는 곧 다가 올 격동의 시대가 커머너들로 하여금 많은 기획들을 가속하도록 자극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하나씩하나씩, 이 지역에서 다음 지역으로, 그리고 그물 같이 연결된 동맹관계를 통해서. 우리에게는 우리가 그토록 절실하게 원하는 구조 변혁을 펼쳐나갈 용기, 지혜, 결단, 상호지원이 필요할 것이다.




국가권력과 커머닝



 

새 보고서 ― 국가권력과 커머닝

 

커머닝이 자급과 거버넌스의 합법적 형태로서 번성하려면 국가권력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가? 커먼즈의 성공이 거버넌스의 한 형태로서의 국가의 미래에 대해 함축하는 바는 무엇인가?

나는 지난해에 <커먼즈전략그룹>에서 동료들과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궁구하면서 이 문제들을 조명하는 것을 도울 진지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모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인리히 뵐 재단>의 지원으로 우리는 2016년 2월 28일에서 3월 2일까지 「국가권력과 커머닝―문제적 관계를 넘어서」라는 주제로 ‘심층잠수’ 워크숍을 열었다.

이제 우리의 대화를 종합하고 압축한 보고서가 나왔다. 이 보고서의 핵심 요약이 아래 실려 있다. (여기서도 볼 수 있다.) 50쪽의 전체 보고서는 여기서 pdf 파일로 다운받을 수 있다.

워크숍 참가자들이 다룬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커먼즈와 국가는 생산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커머너들이 ‘국가’를 커먼즈의 관점에서 다시 상상하여 그 권력이 커머닝을 지원하고 탈자본주의적·탈성장적 자급 및 거버넌스 수단을 지원하는 데 긍정적으로 사용되도록 할 수 있는가? 정치학자 스캇(James C. Scott)이 한 유명한 말을 빌자면, ‘국가처럼 보기’가 ‘커머너처럼 보기’와 결합될 수 있는가? 커머너들의 앎의 방식, 삶의 방식, 존재방식과 결합될 수 있는가? 그러한 혼종은 어떤 모습을 띨 것인가?

신자유주의가 ‘자유 시장’ 도그마의 이데올로기적 우위를 다시 천명하려고 하면서 이런 문제들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그 실행 가능하고 생태친화적인 대안인 커머닝은 종종 상징적인 심지어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위협을 가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보고서가 이 문제들에 대한 더 광범한 토론이 시작되게 하는 촉진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다.

보웬스(Michel Bauwens)의 도움을 받아 이 행사를 조직하는 것을 도운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뢰쉬만(Heike Loeschmann)에게 큰 감사를 해야 할 것이다. 내가 보고서를 썼으며, 트론코소(Stacco Troncoso)와 우트라텔(Ann Marie Utratel)이 멋진 출판 및 웹페이지 제작을 담당했다. 명민한 통찰들을 공유하게 해준 워크숍 참가자에게 또한 감사한다.

 

핵심요약

 

국가권력과 커머닝

커머닝은 종종, 억압적이고 자원을 추출·고갈시키는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대한 도전의 한 방식―욕구를 충족시키는 더 인간적이고 생태친화적인 방식을 발전시킴으로써 행하는 도전―으로 간주된다. 커머닝은 우리 시대의 문제들―경제성장, 불평등, 불안정노동, 이주, 기후변화, 대의민주주의의 실패―에 대한 많은 유망하고 실천적인 해결책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다양한 커먼즈들이 성장하고 더 큰 중요성을 띠게 됨에 따라 국가와의 관계에서의 애매한 위치가 점점 더 심각한 이슈가 되고 있다. 직절적으로 말하자면, 민족국가라는 생각 자체가 커먼즈라는 개념과 상충하는 듯 보이는 것이다. 커먼즈 기반의 해결책들은 종종 범죄화되고 주변화된다. 권력체제로서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일국 주권과 서양의 법적 규범들이라는 지배적 조건에 암묵적으로 도전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들 그리고 이와 연관된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서 <커먼즈전략그룹>은 <하인리히 뵐 재단>과 함께 커먼즈 지향적 활동가들, 학자들, 정책전문가들, 프로젝트 선도자들로 다양하게 구성된 인원을 2016년 2월 28일부터 3월 1일까지((앞에서는 ‘3월 2일까지’라고 했는데, 2016년 2월은 29일까지 있으므로 3월 1일이 맞는 것 같다.)) 독일의 레닌(Lehnin)―베를린 외곽에 있다―에 3일 동안 초대했다. 목표는 커먼즈를 중심에 놓고 국가를 다시 상상하는 것에 대한 개방적이고 탐구적인 토론을 하고 가능하다면 새로운 비전을 발전시킬 창조적 행동기획들을 생각해내는 것이었다.

참여자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다루었다. 커먼즈와 국가는 생산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커머너들이 ‘국가’를 커먼즈의 관점에서 다시 상상하여 그 권력이 커머닝을 지원하고 탈자본주의적·탈성장적 자급 및 거버넌스 수단을 지원하는 데 긍정적으로 사용되도록 할 수 있는가? 정치학자 스캇(James C. Scott)이 한 유명한 말을 빌자면, ‘국가처럼 보기’가 ‘커머너처럼 보기’와 결합될 수 있는가? 커머너들의 앎의 방식, 삶의 방식, 존재방식과 결합될 수 있는가? 그러한 혼종은 어떤 모습을 띨 것인가?

 

1.국가권력을 이해하기

헬프리히가 국가에 대한 적절한 이론들 일부를 종합하는 발제문을 준비했다. 그녀의 발제문에는 우리가 ‘국가’에 대해 말하기 시작할 때 제기되는 핵심 이슈들이 제시되어 있었다. 그 첫 통찰들 가운데 하나는 “국가에 대한 이론적으로 타당한 일반적 정의”는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국가는 사회 속에 있는 권력관계들을 공고히 하고 그 관계들을 변화시킬 능력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복잡한 제도 체계로서 나타난다”고 헬프리히는 썼다. “따라서 실제로 행동하는 것은 ‘국가’ 그 자체가 아니다. 각 경우마다 구체적인 이해관계와 권력의 위치들을 가진 특수한 집단들이 행동한다.” 물론 이 집단들과 이해관계들은 경우마다 엄청나게 다를 것이다.

‘국가’의 이러한 가변성에도 불구하고, 각 경우마다 적용되는 것처럼 보이는 국가성(statehood)의 기본적 측면들이 넷 있다. ① 영토에 대한 정치적 통제 ② 규칙들을 세우고 시행하는 데서 기능하는 힘 ③ 관료제와 조직된 권력이 가진 제도적 능력들 ④ 국민을 국가권위에 종속시키는 사회적 통제력. 국가와 ‘국가성’의 이러한 기준들은 제솝(Bob Jessop) 교수가 그의 2013년 책 『국가 ―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The State: Past, Present and Future )에서 정식화한 것이다. 이러한 이해에 기반을 두어 헬프리히가 주목하는 것은, 국가가 “규칙들과 규범들에 기반들 둘 뿐만이 아니라 절차들, 관행들, 관습화된 사고방식들―이것들의 사회적으로 구축된 기능들은 국민들에 의해서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에 의해 사회에 대하여 행사되는 영토화된 정치권력”으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국가권력은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고 이해하는 방법을 형성하는, 뚜렷한 질서 원칙들을 도입한다고 헬프리히는 말한다. 근대 국가들에서 인간 사회는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으로 분리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국가는 후자에 대한 통제력을 주장한다. 국가권력은 또한 생산의 세계와 재생산의 세계를 분리하며 이원론적 젠더 구분과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다(남성은 생산/노동에 관여하며 여성은 재생산/가족에 관여한다). 마지막으로, 국가권력은 공적 삶을 ‘경제’와 ‘정치’로 분리하며 ‘자유 시장’을 자연적이고 규범적인 것으로 제시하고 정치를 의견의 불일치와 (추정컨대 불법적인) 사회적 개입을 위한 영역으로 제시한다.

영원하거나 선험적인 국가 규칙들과 제도들이란 없다. 규칙들과 제도들은 항상 사회적 투쟁과 논쟁의 결과이다. 그래서 하나의 국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주체 혹은 존재물이라기보다는 정치권력(국가권력)의 항상적인 표현인데, 무엇을 표현하느냐 하면 변화하는 사회적 관계들의 문화적으로 결정되는 그물망을 표현한다고 헬프리히는 썼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정말이지 사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국가와 국가성은 항상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워크숍 참여자이자 영국 랑카스터 대학의 사회학 공로교수(Distinguished Professor of Sociology)인 제솝 교수는 ‘국가’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는 국가권력에 대해 말하는 것이 더 유용하고 ‘커먼즈’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는 커머닝에 대해 말하는 것이 더 유용하다고 제안했다. 어휘 사용에서의 이러한 이동은 ‘국가’가 역동적인 사회적 권력관계에 의해 구성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되며 ‘국가’와 ‘커먼즈’를 고정된 실제적인 존재물로 사물화하는 것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국가권력을 사회적 관계들로 보는 이러한 관점과 강력하게 연관된 것이 푸꼬의 권력 연구이다. 푸꼬는 본질로서의 국가(국가 그 자체)와 전통적으로 연관된 ‘권력’(Power)에 집중하던 기존의 연구에 힘들의 관계(relation of forces)로서의 권력 연구를 맞세웠다. 이에 대해서는 꼴레즈 드 프랑스에서의 푸꼬의 강의를 책으로 낸 것들 가운데 『사회는 방어되어야 한다』, 『안전, 영토, 인구』,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을 참조하라.))

 

왜 국가이론이 커머너들에게 중요한가

국가이론에 관한 첫 발제에서 제솝 교수는 그의 전략적-관계적 접근법을 개관했는데, 이는 단일하고 고정된 국가라는 생각을 거부하며 주어진 국가의 엘리트들 사이의 사회적 권력관계에 초점을 둔다. 그는 이렇게 썼다. “국가는 정치 세력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목표를 추구할 동등한 기회를 가지고, 그리고 자신들의 목표를 (그게 무엇이든) 실현할 동등한 기회를((원문에는 “changes”라고 되어있는데 맥락으로 보아 ‘chances’의 오식일 듯하다.)) 가지고 싸우는 중립적 지형이 아니다. 국가 장치들의 조직, 국가의 역량 및 자원은 [···] 특정 세력에게, 특정의 이익에, 특정의 정체성들에게, 행동의 특정의 시공간적 지평에, 특정의 기획들에게 유리하다.”

제솝은 계급, 인종, 젠더와 같은 고전적인 ‘타자들’까지 가기도 전에 국가의 사법적 언어 자체가 구조적 적대를 낳는 구분들을 창출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커먼즈를 예로 들어보자. “커먼즈는 국가 내에서 정의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국가 자체를 넘어서는가?”라고 제솝은 묻는다.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극히 복잡한 일이다. “국가와 커먼즈에 관한 일반 이론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양자 사이에는 대체로 공식적인 사법적 관계가 거의 혹은 전혀 없다. “국가권력과 커머닝”은 이렇게 복잡한 관계를 갖기 때문에 제솝은 이 관계를 파악하는 데서 단지 하나의 분석 방법에 의존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 주제는 상이한 목적을 가진 다수의 진입점을 권유한다. 하나의 진입점을 택한다면 다른 진입점들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다수의 관점들이 대상을 더 입체적으로 보게 해준다.”

국가가 사회적 권력관계의 도구라는 점, 그리고 국가권력이란 스스로를 영속화하는 이기적인 힘이라는 점을 분명하다. 국가는 특정의 분파들에게는, 특히 자본(재계)에게는 그들의 이익을 촉진시켜줄 수 있는 메커니즘이다. 커머닝으로 더 나은 세계―생태에 대해 더 큰 책임감을 가지고 있고 사회적으로나 젠더와 관련하여 더 정의로우며 개인들이 더 안전한 세계―를 일구어내려는 커머너들에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커머너들이 어떻게 국가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과 자유를 진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국가권력의 다양한 양태들

국가권력의 반복되는 패턴들은 세계 전역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현실화된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농업 국가들의 경우 국가권력은 라틴아메리카, 유럽 혹은 미국에서의 국가권력과는 전혀 다른 식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이는 대체로 나라들 사이의 기본적인 지리적 및 자원과 관련된 차이에서 나오지만, 국가권력과 시장들을 혼합하는 다양한 정책들, 문화들, 사회적 규범들에서 나오기도 한다. 국가권력의 가장 두드러진 양태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① 라틴아메리카의 권위주의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국가권력, ② 아프리카의 농업 국가들, ② 긴축재정·종획·위기로 특징지어지는 유럽연합, ④ 신자유주의 국가를 공격적으로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는 미국.

 

2.국가권력에 대항하는 힘으로서의 커머닝

‘심층잠수’에서 계속 나오는 주제는 ‘어떻게 커머닝이 국가권력을 견제하고 가능하다면 재편할 수 있는 대항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가’였다. “국가와 관련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볼리비아 다민족국(Plurinational State of Bolivia)((‘볼리비아 다민족국’(Plurinational State of Bolivia)은 볼리비아의 공식 명칭이다.))의 전(前) 유엔 대사인 쏠론(Pablo Solón)은 물었다. 분명히 국가권력을 바꾸는 데서 먼저 달성할 목표들 가운데 하나는 커머닝 행동들을 탈범죄화하고 합법화하는 것이리라. 이는 적어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들을 출현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들을 열어줄 것이다. 더 장기적 목표는 국가권력을 활용해서 커머닝과 커머닝이 창출하는 가치(들)을 창조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는, 좌파가 볼리비아를 장악한 일이 보여주듯이, 그 전체가 불안정하고 방심할 수 없는 지형이다. 권력은 그것을 휘두르기 시작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국가들은 자신들의 국민들보다 다른 민족국가들에게 더 많이 응답하는 경향이 있다. 종국에는 국가와 기존의 법이 커머닝을 과연 도울 수 있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존재한다. 사무적으로 관리되는 민족국가의 거대한 체계들이 커먼즈 기반의 거버넌스와 인간적 규모의 커머닝을 실제로 양성할 수 있는가? 기존의 관료체제들을 바꾸어서 커머닝을 인정하고 지원하도록 만드는 것이 가능한가?

크로아티아의 정치생태연구소(Institute for Political Ecology)의 토마세비치(Tomislav Tomašsević)는 “국가는 다양한 유형의 행위자들이 움직이는 장”이며 커머너들이 그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래서 커먼즈운동과 그 참여자들로서는 국가를 재전유하고 재정의하여 권력관계를 변화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이 논리적이라고 한다. 그 다음 이 과제는 초국적 무대로 옮겨갈 필요가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단 국가를 재정의하는 일을 해내면 다른 국가들의 경우에는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커먼즈 기반 사회의 규모를 다른 나라들로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 어떻게 지역 차원에 머물지 않고 전지구적 차원으로 나아갈 것인가? 국가를 통해 커먼즈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보편성 개념들을 무엇인가?” 우리가 국가와 국가성을 다시 상상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위기’는 계속해서 존속하리라는 그 점 하나 때문일지라도 “커먼즈 운동은 이런 과제들을 무시할 수 없다.”

워크숍 참가자들은 국가권력을 변형시키는 데서 다루어야 할, 국가권력과 커머닝에 관한 세 기본 물음들을 가려냈다. ① 일국의 맥락에서 무엇이 커머닝을 막고 있는가? ② 커머닝이 존재할 수 있고 확대될 수 있게 하기 위해 우리가 변화시키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③ 오늘날 국가들과 정부들은 어떻게 커머닝을 방해하고 있는가?

커머너들은 구조적 분석, 전략 및 전술을 하나의 패키지로 통합할 설득력 있는 비전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나 정치적 물음들을 우리의 진입점으로 삼아야 한다. 커머너들은 또한 정치적 좌파와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자신들의 시민개념을 분명히 하며, 그리하여 커머너들이 어떻게 국가와 관계를 맺을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커머닝을 탈범죄화하고 지원하기 위해서 법을 재발명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통(通)개인적(transpersonal) 합리성과 연계―개인들의 다른 개인들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새로운 범주―의 중요한 형태”로서의 커먼즈라는 생각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커먼즈전략그룹>의 헬프리히는 말했다.

 

3.국가권력을 커머닝을 지원하도록 다시 개념화하기

국가권력의 성격, 그 유형들, 그리고 커먼즈와 커머닝의 성격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는 우리를 ‘심층잠수’의 중심 문제에 이르게 한다. 어떻게 국가권력을 다시 상상할 수 있고 커머닝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가? 국가의 ‘공통화’(commonification)((원문에 명사를 썼기 때문에 “국가의 ‘공통화”라고 옮겼으나 ‘국가를 공통적인 것으로 만들기’라고 풀어 쓸 수 있을 것이다.))를 위한 전략들은 무엇인가? 커먼즈 기반의 국가는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

헬프리히가 이 문제에 답하는 데서 출발점을 제공했다. “커머닝 없는 커먼즈는 없다‘는 것이 맞을지 모르지만, 커머닝 없이 커먼즈에 기여하기는 가능하다. 여기가 국가가 관련되는 지점이다. 국가는 커머닝에 반드시 참여할 필요 없이 커먼즈에 기여할 수 있다. 또한 국가는 커머너들의 권리만이 아니라 모든 시민들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으며 커머너들 사이의 건설적 관계들을 지원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사람이 국가가 돕는 커먼즈를 상상하는 방식과 커머너가 국가가 돕는 커먼즈를 상상하는 방식은 즉각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헬프리히는 말했다. 커머너는 커머닝을 병원에서 수도 시스템, 사회적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형의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는 방식으로 본다. 원칙적으로 커머닝은 사람들에게 힘을 부여하고 새로운 창출 능력에 접속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제공한다. 이와 달리 자유주의자는 커머닝을 진보적 가치들과 복지국가에 가해지는 위협으로 간주할 수 있다. 커머닝은 국가를 그 책임과 지출을 회피하도록 장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이론가 제솝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우리가 커머닝에 관심이 있다면, 문제는―마치 국가가 우리의 활동들의 외부에 있는 양―어떻게 국가장치가 커먼즈를 돕도록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전략이 국가 시스템 내외의 힘들의 균형을 바꿈으로써 국가권력을 변형시킬 수 있는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권력과 커머닝을 다시 살펴보기―전략적 행동을 위한 상호 학습’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다.” 쏠론(Pablo Solón)은 이렇게 말했다. “문제의 핵심은 권력과 대항권력(counterpower)이다. 어떻게 커머닝이 대항권력을 구축할 것인가? 우리는 다른 식으로는 국가권력을 변형시킬 수 없다.”

대의민주주의가 정치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여전히 가동될 수 있는 틀인지 아닌지, 혹은 정치권력의 집성이 ‘체제’의 외부에서 일어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열린 문제라고 P2P재단의 전략담당자이자 <게릴라 번역>의 공동창립자인 트론코소는 말했다. 시리자의 전(前) 당원인 카리치스(Andreas Karitzis)는 최근에 다음과 같은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한 바 있다. “민중의 힘은 다양한 민주적 제도들에 일단 각인되면 소진된다. 우리는 긴요한 결정들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을 엘리트들이 받아들이고 관용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던 것을 더 한다고 해서 일이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전투가 일어나는 터가 변해서 우리의 전략을 무력하게 한다면, 이런 불안정한 전쟁터에서 더 능력을 갖추어봐야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전투의 지형을 다시 형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사항들을 대의정치에서 경제적·사회적 힘을 생산하는 자율적인 네트워크의 수립으로 이동시킴으로써 해결공간을 확대해야 한다.”

 

공공 서비스와 커먼즈

풀지 못한 문제는 어떻게 커먼즈가 공공 서비스, 공공재(public goods), 공적 도메인(public domain) 개념들과 관계를 맺을 것인가이다. 프랑스 경제학자인 코리아(Benjamin Coriat)는 이렇게 말했다. “국가가 이런 기능들을 감독한다. 국가는 접근권을 결정하거나 민영 회사들에 소유권을 넘길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공통 자산(common asset) 개념은 국가가 자원이나 서비스를 사유화(私有化)할 수 없다는 생각을 도입한다. 오늘날 국가가 사유화 기계가 되었기 때문에, 커머너들에게 필요한 새로운 보호장치들을 도입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공공 서비스들이나 공공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공통화’할 수 있는가이다. 그는 공통재(common goods) 개념은 단지 자산과 서비스의 ‘재(再)시유화(市有化)’(re-municipalization)가 그 관건이 아니라 ‘공공재를 공통재로 변형시키는 것’이 그 관건임을 강조한다. ‘공통재’는 새로운 개념적 범주이다. 이는 커머너들을 보호할 새로운 권리들을 창출한다.

 

거버넌스와 법에서의 패러다임 전환을 상상하기

커머닝과의 관계에서의 국가권력의 패러다임 전환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런 패러다임 전환은 권력의 다른 새로운 회로들을, 새로운 유형의 거버넌스를 필요로 할 것이며, 더 넓은 의미에서는 제솝이 언급했던 국가 이념―Staatsidee((Staatsidee : ‘국가 이념’을 의미하는 독일어이다.))―에 대한 대위(代位)로서 기능할 수 있는, 널리 인정되는 커먼즈 이념을 필요로 할 것이다. 상이한 권력회로들을 발전시키려면 커먼즈의 내부 거버넌스가 어떻게 작동할 수 있고 국가와 커먼즈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구조지어질 수 있는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커먼즈는 거버넌스의 형태로서 효율적이고 정당한 것이어야 한다. 여기에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 포용적인 윤리와 공유되는 목표들을 개발함.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배제하거나 심지어 추방하는 특정의 권리들은 계속 유지한다.)
  • 책임을 지는 제도를 갖춤.
  • 커머너들이 규칙 작성을 발기(發起)하고 거기에 참여할 수 있음.
  • 집단의 이익이 상호적으로 만족스럽고 존중하는 방식으로 발생함.
  • 모든 구성원들이 현행의 규칙들과 관행들의 전제들에 도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짐.

 

결론

신자유주의 정책의 옹호자들이 저항을 누르려고 함에 따라, 그리고 커머닝 자체가 더 널리 퍼지고 강해짐에 따라 국가권력과 커머너들과의 복잡한 관계들은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 분명하다. 이 주제에 관한 진전이 있으려면 반드시 커머너들 사이에 토론이 더 진행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가까운 장래에는 여러 나라들이 자국의 국경 안에 나름의 합법적으로 승인된 커먼즈들을 가지려고 시도하는 모습을 알게 되는 것이 매우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의 ‘플랜 C’이든, 부엔비비르(buen vivir)를 증진하려는 라틴아메리카의 구체적 정책들이든, 자연자원 커먼즈를 보호하는 인도에서의 법정 판결이든, 국가와 병행하는 탈자본주의 경제인 커먼즈가 어디에서나 확대되는 것이든 말이다.

앞으로 이루어질 그런 전개들을 평가하려면 지역의 고유성을 고려한 ‘더 심층으로의 잠수’가 필요할 것이며 전통적인 좌파 및 노동계와 새로운 대화를 하여 생계, 기본소득, 공공 서비스, 경제정책의 문제들에 대해 일종의 임시 연대(working rapprochement)를 구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커먼즈가 전통적인 자유주의 및 국가 권위와 정치적이고 합법적으로 통합될 수 있는가? 어떤 구체적인 조처를 취해야 할지를 알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가권력의 지형학에 심대한 변화가 생기지 않고서는 우리 시대의 위기가 해결될 수 없음은 분명한 듯하다. ♣




시리자의 실패가 주는 교훈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2016년 4월 6일 게시글 “Lessons from SYRIZA’s Failure: Build a New Economy & Polity”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시리자의 실패가 주는 교훈 ― 새로운 경제와 정치체의 구축

 

지난 해 그리스 정부를 이끌어 채권자들 및 유럽의 거대 세력과 맞서는 일에 선출된 좌파연합당 시리자(SYRIZA)는 신자유주의와의 큰 대결에서 패배했다. 그리스는 사기를 저하시키는 더 깊고 위험한 사회적·경제적 위기에 빠졌으며 이는 시리아 난민들의 유입으로 더 악화되었다.

 

그렇다면 시리자의 경험이 경제적·사회적 변형을 가져올 민주적 정치의 잠재력에 관하여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시리자의 당원이었으며 그 중앙위원회와 정무비서실에 속했던 안드레아스 카리치스(Andreas Karitzis)는 OpenDemocracy.net에 올린 글 「‘시리자의 경험’―교훈과 응용」(“‘The SYRIZA experience’: lessons and adaptations”)에서 풍부하고 예리한 분석을 제공한다. 이 글은 왜 시리자가 실패했는지를 설명하는 명민하고 힘들게 얻은 정치적 통찰들과 사회변형에 필요한 미래의 전략들을 활기 있게 제시하고 있다.

 

시리자는 기존의 정치구조들과 절차들 내에서 움직이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적을 중지시키는 데 실패했다고 카리치스는 주장한다. 시리자의 생각과 달리 단장(斷腸)의 드라마가 보여준 것은, 국가 주권이 국제적 금융 세력에 의해 압도당하면 기존의 정치는 무용하다는 점이었다. 시리자가 결국 트로이카[각주:1]와의 협상을 받아들인 것은 “금융독재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과 민중계층의 희망과 열망을 드러냈다는 주장도 가능하지만”[각주:2] 이제 카리치스는 좌파에게 새로운 ‘운영 체제’ 혹은 몇몇 사람들이 ‘플랜 C’라고 부른 것을 개발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우리는 여러 민주적 제도들에 한때 깃들어있던 민중의 힘이 소진되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엘리트들로 하여금 결정적 의사결정들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용인하게 만들 충분한 힘이 없다. 똑같은 일을 계속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전투의 지형이 이동하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전략이 붕괴했다면 위태위태한 전투지형에서 더 능력을 갖추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지형을 다시 형성해야 한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적 관심을 대의정치에서 경제적·사회적 힘을 생산하는 자율적 네트워크의 수립으로 이동함으로써 해결공간(solution space)을 확대해야 한다.

 

이 새로운 해결공간은 어떤 것이 될 것인가? 카리치스는 우리가 “‘커먼즈’와 같은 개념들을 평가하고 탐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회적 경제와 협동적 생산활동의 역동적이고 탄력적인 네트워크들, 대안적 금융 도구들, 지방자치 중심지들, 민주적으로 기능하는 디지털 공동체들, 기반시설·에너지체계·분배네트워크들과 같은 기능들에 대한 공동체의 통제를 위한 강한 중추의 형성”을 그린다. “이것이 엘리트들이 우리 사회의 기본적 기능들을 통제하는 데 맞서기 위해 필요한 정도의 자율을 획득하는 방법이다.”

 

카리치스의 분석은, 명목적으로만 민주적인 제도들에 대한 신뢰가 곤두박질치고 있으며, 엘리트들이 자유롭게 법의 지배(법치)를 농락하고 (파나마 문건을 보라[각주:3]) 관료들이 약탈적이거나 무능한, 세계의 다른 모든 곳에 대해서도 명백한 연관을 함축한다.

 

이제 그리스의 (그리고 다른 곳의) ‘좌파’는 신자유주의적 긴축 정치의 실행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 대가로 도덕적 신망을 잃고 있기 때문에, 극우가 기꺼이 채우고자 하는 빈 공간이 열린다. “민족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이 민중의 분노와 원망의 유일한 ‘자연 숙주’(natural hosts)로서 남았다”라고 카리치스는 쓴다. 서구 민주주의를 가로질러 불어오는 메마른 바람은, 민주적 거버넌스를 억압하면서 사회적 비참을 유발하는 데 대해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는 무자비한 신자유주의적 과두세력으로부터 온다.

 

카리치스에 따르면, 이것이 사실상 민중의 절망의 핵심 원인이며, 좌파가 철저하게 새로운 전략적 접근법을 채택해야 하는 이유이다. “신자유주의적인 유럽연합과 유로존은 한때는 민족국가에게 속했던 것처럼 보이는 일련의 중요한 정책들과 힘을 민중의 힘이 미치는 범위 바깥으로 옮겨놓았다······선출된 정부는 더 이상 정치권력의 주된 담지자가 아니다. 그리스의 경우 민주적으로 선출하여 어떤 정부를 구성한다는 것은 금융 대부자들이 대(大)파트너들인 더 큰 규모의 정부에서 소(小)파트너들을 선출하는 것과 같다.”

 

시리자는 “엘리트들이 촉발한 싸움의 확대를 고려할 수 있는 우리의 힘을 다시 결집하고―미래에 신자유주의의 지배에 도전할 수 있는 자원을 구축할 더 효과적이며 탄력적인 ‘민중전선’을 형성”하려고 시도하기 위해서 ‘전술적 후퇴’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고 카리치스는 주장한다. 아쉽게도 시리자는 트로이카와의 협상을 시도하였고 실패했다.[각주:4] 이것이 주는 명확한 교훈은 “금융 독재와 민주주의 및 존엄 사이에는 그 어떤 절충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라고 카리치스는 결론짓는다.

 

선거정치를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기만하여 선거정치가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을 전복하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 때문에 전진하기 위한 전략적으로 가장 뛰어난 방법은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안적인 사회적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서 나올 것이다. 커먼즈 운동, 사회연대경제, 피어 생산 운동, 이행 운동, 탈성장 운동 및 기타 탈자본주의 운동들의 공동의 기획을 통해서.

 

카리치스의 글은 현재 진행되는 그리스의 트라우마에 대한 우울한 분석이다. 그러나 명민하고 분별력 있으며 전략적인 글이다. 좌파에게는 미래의 엄한 선택이 남겨지는 듯하다. “21세기의 불길한 전장으로 진입하면서, 좌파는 인간 사회를 방어하는 데 적절하거고 유용하게 되거나 아니면 노후하게 될 것이다.” ♣

 

  • the European Commission, the European Central Bank (ECB) and the 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
  • 볼리어가 이 대목을 부각시키고 그 직후의 대목을 생략한 것이 다소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시리자가 “민중계층의 희망과 열망을 드러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고 한 것은 일종의 양보절이다. 카리치스가 진정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다음에 한 말로서―볼리어는 이것을 생략하고 그 다음으로 넘어간다―시리자가 권좌에 남아있음으로써 자신들이 행한 반란을 ‘정상화’하였으며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이것이 곧 시리자의 패배인데, 이로써 시리자는 민중으로부터 대의정치라는 도구를 박탈했고 (볼리어도 나중에 언급한) ‘전술적 후퇴’의 가능성을 박탈했다는 것이 카리치스의 생각이다.
  • 파나마 문건(영어: Panama Papers 파나마 페이퍼스)이란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폭로한 파나마 최대 로펌 모색 폰세카의 돈세탁 관련 자료이다. (위키피디아)
  • 신자유주의를 실행하는 좌파 정당이 된 것이 바로 실패의 핵심 내용이다. 



시민의 힘과 파트너 국가

[글 설명―옮긴이]

아래는 이 블로그에서도 그 을 소개한 바 있는 존 레스터키스(John Restakis)의 “Civil Power and the Partner State”를 옮긴 것이다. 이 글은 자그레브에서 2015년 3월 19-21일에 열린 <좋은 경제 컨퍼런스>(Good Economy Conference)의 기조발제로서 레스터키스의 블로그에 2015년 3월 25일자로 올려져있다. 이미 이 블로그에서 소개한 글과 내용이 상당히 중복되지만, 더 확장된 판이다.

 

그리스에 대해 일반 언론이 자신들의 무지와 비인간성 말고는 거의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이러한 글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하다. 이 글에서 제시된 입장을 굳이 따를 필요는 없다. 다만 이런 관점이 존재하며 점점 더 힘을 얻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신문과 방송이 한 말만을 눈가리개 한 경주마들처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레스터키스는 둘째 날(20일) 발제를 했는데, 컨퍼런스 홈페이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둘째 날, 캐나다에서 20년 이상을 보낸 후 그리스 경제의 재구조화에 대한 자문에 깊게 관여하고 있는 존 레스터키스는 경제체제 및 국가와 관련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 대하여 최면술과도 같은 발제를 했다. 적절하게 지속 가능한 틀과 시민 사회의 힘을 받은 협동조합 및 사회적 기업들의 결합이 그 길이다. 우리는 식사를 하면서 다소 이견도 보였고 깊은 대화도 나누었는데, 그가 제시한 전반적 상을 흠잡을 수는 결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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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힘과 파트너 국가

 

옮긴이 : 정백수

 

저는 오늘 지난 30년에 걸쳐 유럽에 닥친 위기와 서유럽 민주주의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저는 우리의 정부들이 시민들의 이익을 보호하지 못한 무능력에서 위기가 왔다고 규정합니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의 토대를 침식하고 있는, 정당성의 위기입니다. 이 무능력은 가장 최근에는 긴축 정책과 시민의 민주적 삶의 급속한 파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즉 긴축의 부과, 일국 주권의 종말, 민주적 책무의 파괴는 35년도 더 전에 대처주의와 함께 시작된 신자유주의의 불가피한 귀결입니다. 신자유주의는 19세기 말에 경제사상을 지배했던 자유시장 이데올로기가 귀환한 것입니다. 이와 함께, 그 당시의 경제적 태도들, 사회적 불의들, 불평등들도 돌아왔습니다. 특히 빈자에 대한 계급적 증오가 돌아왔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중심부에 놓여있는 것은, 정부가 시장으로부터 손을 떼라는 요구입니다. 정부가 경제를 규제하는 역할에서 손을 떼는 것은 케인즈적 실험의 종말이며 세계대전 이전의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로의 귀환을 의미합니다. 이제 우리는, 만일 우리가 시간을 길게 잡아 본다면, 복지국가가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기업 자본주의로 가는 길에서 일시적 우회였으며 예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채를 통한 사회 통제―긴축의 부과, 공적 부의 사유화, 민주적 제도들의 파괴,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범죄자화―는 유럽 전역에 퍼졌고 점점 더 세계 전역으로 퍼지고 있는 새로운 질서의 본질적 측면들입니다.

 

이에 대한 도전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 도전들은 얼마나 효과적이었을까요?

 

저는 지난 여름부터 살고 있는 그리스에서 오늘 여기로 왔는데요, 제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에 대한 대안으로서 ‘사회연대경제’(the social and solidarity economy)를 강화하는 전략을 개발하는 것을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아서 그리스에 갔습니다.

 

‘부채정치’(debtocracy)는 그리스에서 일어난 부채위기의 기원을 다룬 다큐멘터리의 제목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만이 아닙니다.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그리고 폴투갈, 아일랜드, 스페인 같은 모든 유럽연합의 주변 국가들이 이것에 감염되어 있습니다. 부채정치는 강력한 권력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그것은 한 국가가 그 채권자들에게 주권을 잃은 상황을 나타냅니다.

 

그리스가 부채정치의 고전적 사례입니다. 그리스의 부채 위기와 이 부채의 뿌리와 근거에 도전하려는 그리스의 시도는 유럽 무대에서 상연되고 있는 매우 눈에 띄는 한편의 극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함축하는 바는 전지구적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 투쟁의 결과들은 정치경제에 대한 대안적 비전들을 창출하는 데서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사회연대경제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국가와 시민사회는 공통된 대의(大義)를 가질 수 있을까요? 아니면 늘 서로 싸워야 할까요? 오늘날 유럽의 현실로 보아 전자의 가능성은 없을까요?

 

저는 이 시기에 그리스에 있으면서 유럽의 사회변화에 대해 이 위기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물음을 스스로 계속 던져왔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날 진보적인 사회변화는 가능할까, 이 변화는 어떤 모습을 띨 것인가, 이 변화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하는 물음입니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경제와 시민사회의 기동(mobilization)이 중심적 위치에 있습니다. 국가를 보는 새로운 관점도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이 둘은 단일한 과정의 필연적이고도 본질적인 측면들입니다. 이 둘은 또한 좌파 운동이 오늘날 일정한 의미와 적합성을 가지는 데서도 결정적입니다. 저는 그리스를 예로 들어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시리자의 집권 후 모든 이가 그리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합니다. 그 결과가 재난이든 구원이든, 시리자 정부로부터 게임을 변화시키는 반발이 나올 잠재성을 무시하기는 어렵습니다.

 

세계 언론은 상투적으로 시리자를 극좌급진당이라로 부릅니다. 이는 틀렸습니다. 경제적·사회적 개혁에 대한 시리자의 대안들은 이전의 그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온건하고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그려지는지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선전 목적의 고의적 왜곡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시리자 당을 불신하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정치적 담론이 급격하게 우파 쪽으로 이동했기에 시리자 같은 온건한 중도좌파 당도 급진적인 당으로 묘사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적 스펙트럼이 협소해진 것입니다. 자유시장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의미있는 방식으로 도전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급진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습니다.

 

유럽의 다른 좌파 및 우파 정당들처럼, 시리자도 ‘사회연대경제’가 현재의 위기에서 할 수 있는 역할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는 조세 및 공공 투자 같은 전통적인 정책들과 자원들이 더 이상 가용하지 않을 때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영국의 보수적인 캐머런 정부조차도 사회적 경제를 일자리 창출, 공공 서비스의 증진, 정부 역할의 개혁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는 부문으로서 장려한 바 있습니다.

 

사회적 경제가 무엇이고 어떻게 기능하는가에 대한 우파 정부의 이해력 혹은 관심이 얼마나 협소한가를 알기 전에는 이런 것들이 다 좋게 들립니다. 캐머런 정부에게는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경제가 공공부문의 사유화를 촉진하는 간판과 방법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일자리의 안정성을 취약하게 하고 정부의 역할을 축소시켰습니다.

 

공공 부문의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일자리 때문에 가짜 협동조합에 강압적으로 들어갔습니다. 지난 그리스 정권에서도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Social Enterprise Co-operatives)을 통해서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자발적으로 가입해야 하고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며, 정부의 이데올로기적 목표들에 복무해서는 안 되고 그 구성원들과 공동체들의 공통의 이익에 복무해야 하는 협동조합의 본령과 취지를 희화화한 것입니다. 이것이 주는 교훈을 이해하는 정부들은 거의 없습니다.

 

우파에게 사회적 경제는 종종 사회에서 버림받은 자들과 자본주의 경제의 희생자들의 피난처로 보입니다. 이것이 우파가 항상 자선을 빈자에 대한 적절한 대응으로 선택하는 이유입니다. 유대나 정의를 선택하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자선은 의존과 불평등을 영속화합니다. 이에 반해 유대는 시민들에게 힘을 주고 평등을 증진합니다.

 

더 최근에는 사회적 경제의 수사가 자본의 장악력을 시민사회의 공간들로 확대시키기 위해 사용되어왔습니다. 이런 이유로 영국 등지의 협동조합들과 사회적 경제 조직들은 사회적 경제의 원리들이 정치적 기득권을 위해 왜곡되는 행태들을 비판해왔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사회적 경제의 원리들일까요?

 

사회적 경제는 시민의 조직들과 네트워크들로 조직됩니다. 이 조직들은 공동의 이익에 복무하는 상호성의 원리들에 의해 추동됩니다. 보통은 자본의 사회적 통제에 의해 추동됩니다. 사회적 경제는 (많은 성공적 협동조합들처럼) 시장 안에서 작동하는 동시에 재화나 서비스들이 제공되는 비시장 영역에서도 작동하는 광범한 영역에 걸쳐있는 단체들(협동조합들, 비영리 단체들, 재단들, 자원봉사 단체들 등)로 구성됩니다. 여기에는 문화생산, 건강 및 사회적 돌봄의 제공, 필요한 사람들에게 식량 및 기타 필수품들을 제공하는 일이 포함됩니다.

 

‘사회연대경제’는 본질상 경제가 사회적 목적에 복무하는 공간이며 실천이지, 사회가 경제적 목적에 복무하는 공간 혹은 실천이 아닙니다.

 

오늘날 그리스가 그 사회적 경제의 크기나 다양성에서 전례 없는 성장을 하고 있는 이유를 보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다른 데서처럼 여기서도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이익 기업들(social benefit enterprises)이 경제 불황과 긴축에 대한 사회적 자기방어의 한 형태로서 등장했습니다.

 

오늘날의 협동조합들과 사회적 유대를 지향하는 단체들은 자본주의가 공동체들을 종획하고 사람들을 땅에서 쫓아내고 착취하던 산업혁명의 초기에 협동조합과 상호부조조합들이 했던 역할을 그대로 맡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적 경제의 발생은 부분적으로는 새로운 종획에 대한 자기방어로서 이루어집니다. 이 새로운 종획에는 공적 재화 및 서비스의 사유화, 땅·물·광물 등 자연자원의 절도가 포함됩니다.

 

오늘날 지구화의 확산과 함께 18세기에 자본주의의 토대를 이루었던 종획, 축출, 착취의 논리가 기업 자본주의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 전역의 사회들은 마찬가지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즉 협동조합과 기타 형태의 사회적 유대를 지향하는 경제를 창출하여 종획과정에 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처럼 그리스에서도 사회적 경제가 성장하고 있지만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교하면 뒤쳐져 있습니다. 이러한 취약성의 요인들은 많습니다. 그 하나는 제도적 지원의 부재인데, 이 지원에는 사회적 투자, 전문가 계발과 훈련, 단결하고 발전하여 해당 부문에 목소리를 부여할 조직(단체)들이 속합니다. 부적절한 입법도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더 복잡한 셋째 이유는 그리스에서 시민사회와 국가가 발전한 방식과 관계가 있습니다. 다른 서유럽 국가와는 달리 그리스는 오토만의 지배 아래에 있는 동안 근대적 계몽과 산업혁명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는, 오토만 시대 이후 정치체제를 특징지은 독재적 은고주의(clientelism)1를 넘어선 정치 문화를 수립하기 위해서 아직도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독재는 위계·개인주의·의존관계를 낳지, 상호성과 사회적 유대를 낳지 않습니다. 건강한 시민사회, 민주적 시민 제도들, 민주적 문화의 출현은 바로 이 사실에 의해서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리스에서 은고주의는 치명적이었습니다. 협동조합의 사례에서 보여지듯이, 그것은 사회적 경제의 건강한 발전에 엄청난 장애가 되어왔습니다. 우파가 사회적 경제를 자본과 시장의 증진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듯이, 좌파도 줄곧 사회적 경제를 국가의 목적을 진전시키는 수단으로 보았습니다.

 

은고주의가 지배하는 문화가 존재한다면, 이는 대규모 실패를 낳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협동조합의 국가지원 및 보조가 부패를 낳았던 80년대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이 부패는 정당한 경제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협동조합이 대중에게 가지는 이미지와 평판을 망쳐버렸습니다.

 

오늘날 협동조합을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위한 실행 가능한 전략으로서 장려하려면 협동조합이 본래 부패한 것이라는 이러한 잘못된 부정적인 이미지와 싸워야 합니다.

 

그리스만 이런 것은 아닙니다. ‘좌파’ 정부들이 협동조합 자체의 목적과 성격을―협동조합은 조합원들과 그들의 공동체에 복무하는 것이 그 주된 역할인 자율적 시민 단체입니다―고려하지 않고 정부의 목적만을 추구하기 위해서 협동조합 모델을 사용하려고 했던 모든 곳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스에서처럼 이전의 소련이나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협동조합 모델은 그 망가진 평판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나라들의 정부들이 협동조합들을, 더 넓게는 사회적 경제를, 정부 권력의 도구이자 부속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협동조합 모델을 조작의 차원에서 ‘지원함으로써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협동조합의 이미지와 평판을 망치는 데 가장 큰 일을 한 것은 좌파와 ‘사회주의’ 정부들입니다.

 

이는 좌파가 종종 국가를 사회적·경제적 개혁의 유일하게 정당한 엔진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는 경제적·사회적 발전의 정당성을 시장에서만 보는 우파의 거울 이미지입니다. 두 관점 모두, 대안적 패러다임의 성공에 필요한 발본적인 변화를 실현하는 데 필수적인 시민 사회의 재도들을 무시하거나 조작하는 잘못을 동일하게 범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권력을 잡은 시리자의 성격을 가늠하는 진정한 척도가 될 것입니다. 시리자는 그리스의 경제와 정치를 재구축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광범한 시민 사회와, 그리고 사회적 경제의 조직들 및 제도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까요? 구좌파의 국가주의로 돌아갈까요? 아니면 시민 사회와 사회적 경제의 제도들을 나라 건설의 의미 있는 동업자로서 가동시키는, 새로운 종류의 좌파 개혁프로그램을 다시 상상하고 확대하려고 할까요?

 

시리자는 경제와 사회를 다시 건설하는 데서 협동의 사회경제적 원리, 상호성과 공동 이익의 원리를 이해하고 활용할까요? 그리스 정부는 새로운 비전을 실현하는 데서 시민들이 가진 방대한 잠재력을 알아보고 그것을 가동할까요? 만일 그렇게 한다면, 유럽에서는 최초로 그렇게 한 정부가 될 것입니다.

 

 

2부

 

다른 모든 곳에서처럼 그리스에서도 정당들을 구분하는 한 가지는 사회적 경제와 맺는 관계입니다. 정부가 사회적 경제를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이는 좋은 징조입니다. 사회적 경제는 그리스에서 매우 밝은 지점들 몇 개 가운데 하나에 해당합니다. 수백 개의 새로운 단체들이 전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형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단체들은 종종 조직상의 위계를 거부하며 배제하지 않고 수용하는 태도와 민주적 의사결정을 장려하고 이윤보다 서비스에 초점을 두면서 자신을 새로운 경제적·정치적 질서의 모델로 설정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단체들 중 다수는 정당들이나 국가와 거의 혹은 전혀 관계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는 그리스에서든 유럽 전역에서든 진보적인 정당들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이 단체들은 새로운 정치경제를 위한 비전과 방법을 구체화하려고 노력합니다. 이 단체들이 국가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시대를 위한 진보적 비전을 그려내려 한다면 여기에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합니다. 정당과 국가 통제를 중심으로 하는 낡은 방식은 불신·거부되어 왔습니다.

 

많은 사회 활동가들이 대의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제도권 정당들에서 떠나는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비극적인 실수요 미망입니다. 이러한 태도로 인해 이익을 볼 사람들은 현재의 상태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세력뿐이며, 만일 사태가 매우 악화된다면 극우 정당들이 이익을 볼 것입니다.

 

진보적인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파시스트들이 정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리스의 황금새벽(Golden Dawn), 프랑스의 국민전선(Le Front Nationale), 영국의 영국독립당(UK Independence Party, UKIP) 등등이 권력을 잡을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만일 이들이 권력을 얻는다면, 이는 탱크와 경찰봉을 통해서가 아니라 투표소를 통해서일 것입니다.

 

우리의 과제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그 경쟁이데올로기와 자유시장과 자본의 우선성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응답에 해당하는 정치적 비전과 정치적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협동의, 유대의, 상호이익의 정치경제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시아와의 경쟁 및 바닥을 향하는 전지구적 경쟁에 직면하여 계속 퇴락하고 있는 유럽을 구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협동과 이익공유의 경제학임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유럽 대 세계의 기타 지역’과 같은 식의 지역 간의 대립을 상정하지 않는 비전이어야 합니다. 협동의, 지속 가능성의, 지방자치의, 전지구적 협동과 책임의 경제학이어야 합니다. 인정사정없는 경쟁과 기업의 탐욕이 우리의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면, 이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의 공동운명에 대한 상호 책임감과 협동뿐입니다.

 

오늘날 진정으로 효력을 발하는 좌파 정당에게는, 사회적 경제가 결정적인 자원이자 동맹군에 해당합니다. 공동의 이익에 복무하는 경제적 민주주의의 원리들이 여기서 실행됩니다. 가장 혁신적이고 기업가적이며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젊은 지도자들이 여기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부 서비스의 폐쇄적이고 관료적인 역기능을 개혁할 잠재력을 가진 조직형태들과 실천들이 또한 여기서 발전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경제에서 공동체들은 지난 세월 동안 상실한 것을 되찾기 위해 함께하는 법을 배웁니다. 공동체 진료소, 농민들과 소비자 사이에 형성되는 식량 시장과 상호부조, 주민들이 이웃에 전기와 물 공급이 차단되는 것을 집단적으로 막는 행동 등이 그런 사례들입니다. 그리고 이는 위기의 한가운데에 뜻밖의 불빛이 존재함을 나타냅니다. 이 어려운 시대가 공동체의 부활, 사람들 사이의 진정으로 인간적인 관계의 부활에 불을 붙였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바로 사회적 경제에서 번성합니다.

 

그러면, 진보적 정부는 사회적 경제와 관련하여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째, 전통적인 국가주의를 넘어서 권력을 민주화하여 시민들과 나누는 정부의 역할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이는 새로운 모델에서 정부의 주된 역할이 사회적 가치의 생산―사적 이윤보다 사회적 욕구를 우선시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창출―을 위해 시민 사회에 힘을 실어주고 지원을 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활력이 넘치는 활동적인 시민 사회가 이 일에 필수적입니다. 우리는, 시민 사회의 급진화 및 가동을 통해 권력을 획득하였으나 일단 정치권력을 쥐자 시민사회의 지도자들과 조직들을 권력에 충원하고 파괴했을 뿐인, 이른바 진보적 정부들의 경험에서 배워야 합니다. 이는 에콰도르, 브라질, 베네수엘라 등지에서 일어난 정치 사건들의 친숙한 패턴입니다. 사실 대의 민주주의가 스스로의 힘으로 권력의 패턴을 바꾸기를 시민들이 기대하는 어디서나 그랬습니다.

 

이것을 피하려면 (권력을 잡은 당이 어떤 당이든) 사회적 경제와 시민 사회의 발전과 성장을 지속시킬 수 있는 법적·사회적 제도들의 창출이 필요합니다.

 

이는 협동조합 및 사회적 경제와 관련된 입법의 개혁, 사회적 경제의 조직들을 사회적·윤리적으로 지원하는 재정도구들의 창출, (새로운 정치경제와 사회적 계약의 진전에 근본적인) 협동·상호성 및 공동이익에의 복무에 대한 이론과 그 실천을 연구하기 위한 교육 및 훈련기관들이 수립이 필요함을 의미합니다.

 

셋째, 이 원리들을 비영리 부문을 넘어서 더 광범한 경제를 지원하고 발전시키는 데로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대부분의 국민경제들의 기반을 이루는 중소기업들로 확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적 경제를 활성화하는 원리들은 경제 전체를 회복하고 개혁하는 작업틀이 됩니다.

 

넷째, 공공서비스의 개혁이 필요합니다. 통제권과 의사결정권을 이 서비스의 사용자들인 시민들에게 부여하여 투명하고 책임있는 공공서비스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

 

우리는 지금 ‘파트너 국가’라는 새로운 생각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파트너 국가는 그 본질상 무언가를 할 수 있게 하는 국가입니다. 파트너 국가는 시민사회가 공동의 욕구의 충족을 위해서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어낼 최대의 공간과 기회를 촉진하고 제공합니다.

 

이는 사적 이득이 아니라 공동의 이익의 증진을 그 주된 방향으로 하는 국가입니다. 그리고 파트너 국가는 시민을 공공서비스의 수동적 수취자로서 보지 않고 생산적 존재로 보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필요로 합니다. 명사로서 이해된 시민이 아니라 동사로서 이해된 시민입니다.

 

필요한 것은 계속 생성되는 민주주의입니다. 이는, 진정으로 시민적인 삶을 건설하고 살기 위해서 시민들이 필요로 하는 재화와 서비스들의 고안, 생산, 감시, 평가에 들어가는 일상적인 메커니즘들과 결정들을 통해 늘 재창조되는 민주주의를 말합니다. 여기서는 사회적 경제의 조직모델들―관계들과 결정들의 협동적·상호적·민주적 조직화―이 새로운 정치경제의 원형들이 됩니다.

 

다른 채무국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그 사회적·정치적·경제적 문제들을 풀기 위해서 새로운 접근법들을 시도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거시적 수준에서 정부는 채무조정, 무역관계 및 수출정책, 자본에의 과제, 인도주의와 관련된 위기라는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사회적 경제가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 그 자체로는 온전한 회복의 엔진이 될 수 없습니다. 그 강점을, 그리고 한계를 이해하는 정부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위험한 것은 사회적 경제에 대한 잘못된 기대입니다. 이것이 실패와 실망을 낳을 수 있습니다.

 

과거에, 사회적 경제 조직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 목적은 무엇인지에 대한 무지에서 나오는 비현실적인 기대들이, 협동조합들과 사회적 경제가 원래 의도한 바 없는 것을 하지 못했을 때, 그 ‘비효율성’과 ‘유토피아주의’를 비판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탄약을 제공한 바 있습니다. (이 비판자들은 협동조합의 생존율이 사기업들의 생존율의 두 배 이상이라는 사실을 편리하게 무시합니다.)

 

사회적 경제가 제공하는 것은 대안적 패러다임이 건설될 수 있는 아이디어들, 방법들, 모델들입니다. 사회적 경제는 새로운 정치경제의 실험터이며, 그 조직들은 더 인간적인 가능한 미래를 탐지하는 사회적 안테나들입니다. 오늘날 지금과는 다른 패러다임의 형상을 이렇게 미리 그려보는 것이 아마도 사회적 경제가 그리스 및 다른 곳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여일 것입니다.

 

‘사회연대경제’의 제도들을 건설하는 것이 결정적입니다. 이는 새 정부가 부채를 재협상하는 데 성공하든 아니든 그러하며, 성공하지 못한다면 더욱 그러합니다.

 

그리스가 더 인간적이며 사회적으로 책임성 있는 경제를 향하여 나아가기 위해 이루어야 하는 변화들이 현재와 같은 구조를 가진 유럽 내에서 가능한지에 대한 심각한 불신들이 존재합니다.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제도적 독단주의가 개혁을 위한 그 어떤 전망도 질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겋더라도 그리스는 사회적 경제가 (특히 위기의 시기에)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추동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다른 나라들에 이미 축적된 풍부한 경험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른 나라의 경험에서 배울 수 있기에 그리스는 이 분야에서 후발주자이면서도 장점을 누립니다.

 

이탈리아의 에밀리아 로마냐(Emilia Romagna) 지역에서는 바로 협동과 상호부조의 원칙들 덕분에 중소기업들이 전지구적 시장에서 번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유럽에서 상위 10개의 우수한 경제지역에 속합니다. 이탈리아의 4만 개의 사회적 협동조합들은 지방자치체들과의 긴밀한 파트너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사회적 돌봄을 재편하고 확장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여기에 28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고용되어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그리스가 지금 겪고 있는 것과 거의 동일한 2001년의 경제위기 이후에 300개 이상의 버려진 공장들이 그곳의 노동자들에 의해 인수되어 생산을 재개했습니다. 거의 모든 공장들이 아직 가동 중입니다. 학교들, 어린이집들, 진료소들, 도서관들, 커뮤니티센터들 또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인수되어 운영되었습니다. 국가 사회주의의 원형인 쿠바에서도 정부가 자율적인 협동조합들의 성장을 지원하여 농업부문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새로운 기업과 새로운 서비스들의 성장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정부 개혁이 이 운동에서 중심적 테마입니다. 브라질, 콜롬비아, 스페인,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그 숫자가 점점 늘고 있는 세계 전역에 걸친 나라들과 도시들에서 시민이 참여하는 예산작성, 공유된 정책입안, 시민에 의한 예산 및 공공프로그램 감시가 정부들의 작동방식을 개혁하는 데서 사회적 경제가 맡은 핵심적 역할의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정부들을 더 투명하고, 더 책임성 있고, 더 민주적이며, 시민들의 실질적 욕구에 더 잘 반응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다음이 핵심적 요점입니다. 사회적 경제는 경제적 민주주의가 자본을 사회에 봉사하도록 만드는 정치경제의 모델입니다.

 

그리스 채무위기의 기원에 대해 많은 글들이 쓰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가 유로존에 진입하면서 싼 돈을 쓸 수 있게 되고 비윤리적인 대여가 발생한 것을 지적합니다. 다른 어떤 이들은 감시의 결여와 느슨한 규제를 지적합니다. 또 다른 어떤 이들은 부패와 공적 기금의 엄청난 낭비를 지적합니다. 모두가 그리스를 절벽으로 몰아가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유럽 변방 국가들 등 다른 부채정치 체제들에서도 이와 동일한 패턴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민주주의 및 공적 책임성의 근본적 결여를 지적한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오늘날 가장 필요한 것은 정치, 사회,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제의 영역에서 민주적 문화를 건설하는 것, 그리고 민주주의를 생성하고 확장할 시민 제도들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계몽된 국가가 시민들과 손을 잡고 해야 할 역할은 바로 이것입니다. 무언가를 바로잡는 것은 민감하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이 일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이는 과거에 보았던 소홀함과 비행(非行)을 영속화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리스의 지배자들, 그들에게 봉사하는 정치계급들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유럽 열강들의 정책들은 매우 비극적이고 근시안적입니다. 이 정책들은 그리스를 개혁하고 다시 만드는 데 가장 필요한 바로 그 제도들을, 즉 그 공적·시민적 제도들을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긴축이 남긴 안타까운 상처가 아닙니다. 이러한 파괴가 바로 긴축의 목적입니다.

 

요점은, 저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공적 제도들과 시민의 힘이 파괴되는 것은 우리의 엘리트들에게는 매우 잘 맞는 일입니다. 사회적 가치들이나 민중의 복지를 자본의 이익보다 우위에 놓는 것은 저들의 도식에 맞지 않습니다. 저들의 도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자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는 방대한 수의 시민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일부 세력을 위해서 잘 작동하는 체제의 영속화입니다.

 

오늘날 서양 자본주의의 역기능과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의 근시안적 성격은 더 이상 자본주의가 자신을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릅니다. 제3세계 식민지의 자원과 노동을 자유롭게 착취할 능력을 잃었기에, 점점 더 경쟁적인 위치로 성장하는 아시아 국가자본주의와 대면해야 하기에, 서양 자본주의는 지금 그 자신의 토대를 먹어치우고 있으며 우리가 이제는 과거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시대의 이념과 행동으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제3세계가 유럽의 심장부에서 재창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식인 자본주의의 한 형태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자본이 단기 수익을 갈구하고 싸고 저항 못하는 노동력을 필요로 하며 자연자원에의 무제한적 접근에 의존하기에, 공적 이익은―그리고 이 공적 이익을 보호하는 정부의 역할은―파괴되기 마련입니다. 결국 이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최종적 결과입니다. 다시 말해서 정치의 민주화를 성취하면서도 경제의 민주화를 승인하기를 꺼려했던 과정의 최종적 결과인 것입니다.

 

경제에서의 민주주의의 결핍은 항상 정치에서의 민주주의를 파괴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가, 그리고 근대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교훈입니다. 오늘날 민주적 제도들을 무너뜨리는 과업은 거의 완수 단계에 이르고 있습니다. 권력에 맞서는 세력의 범죄자화와 국가안보와 반테러로 위장한 전면적 감시(pervasive surveillance)의 도입은 이 과정에 필수적인 도구들입니다. 시장경제가 가져다주는 이익이 쇠퇴하면, 공적 경제의 종획·병합·식민화가 논리적으로 다음 단계입니다. 자본의 보수를 받는 정부들은 이 과정에서 자본의 시녀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멈춰지지 않는다면, 자본주의의 자연적·사회적·정치적 토대 자체가 소실될 것입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는 바와는 달리, 자본주의의 사망을 뒤잇는 것은, 인간적인 대안이 부재한 상태에서는, 훨씬 더 나쁜 상황일 수 있습니다. 다행히도, 실행 가능한 대안을 위한, 즉 자본이 사적 이익이 아니라 공동의 이익에 복무하는 협동적 정치경제를 위한 모델들과 아이디어들이 이미 존재합니다.

 

공동의 이익에 복무하는 정치경제를 건설하는 공동의 과제를 중심으로 운동들이 서로 모여 단결할 때가 왔습니다.

 

그러한 운동의 동학이 시리자의 부상(浮上)에서, 포데모스(Podemos)의 성공에서, 폴투갈·이탈리아·아일랜드, 그리고 네,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독일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점증하는 저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긴축은 새로운 급진주의를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긴축과 그것을 추동하는 반(反)사회적 이데올로기는 민주적 제도와 시민으로서의 삶―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아온 자유민주주의입니다―의 파괴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의 파괴를 낳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우리의 급진주의가 필요로 하는 것은 새로운 정치경제에 대한 비전과 그것을 실행할 새로운 정치운동입니다. 이윤이 아니라 민중과 그 공동체들에 복무할 수 있는 정치경제 이외에, 시민의 힘의 상승이 또한 자본주의를 구출하는 데 필요합니다. 이는 우리 시대의 희한한 아이러니입니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제 발제를 끝맺고자 합니다.

 

민주주의가 그리스에서 발명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그러나 부채가 민주주의의 발생과 맺는 관계는 모두 알지는 못합니다. 기원전 6세기에 많은 아테네의 빈자들이 부채 노예 상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생존하는 데, 그리고 자신들의 소규모 농장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신용에 대한 담보로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이용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 갚을 수 없는 빚의 채권자는 부유한 지주들과 아테네를 지배하는 소수의 독재자들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서 자신의 빚을 갚을 수 없던 소규모 농장의 농민들은 자신들과 자식들을 팔아서 부채 노예가 되었습니다 .

 

그러나 그때 민중이 봉기했습니다. 아테네에서 일어난 일련의 채무자 반란들이 혁명으로 시를 위협했습니다. 소수의 독재자들은 그들의 부와 권력이 걱정되어 솔론을 임명하여 아테네를 위해 새로운 정치체제를 고안하도록 했습니다. 솔론은 귀족주의자였지만 그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첫째, 그는 모든 부채를 탕감했으며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의 노예가 되는 관행을 폐지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아테네의 가장 가난한 시민들에게 참정권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시작이었습니다.

 

어떤 것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신용통제를 통해서, 갚을 수 없는 빚의 창출을 통해서, 그리고 정치권력의 독점을 통해서 다수를 노예화하는 힘을 소수가 가지는 것이 과두제와 금권주의의 영원한 패턴입니다.

 

6세기 고대 아테네에서 그랬고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고대 아테네에서처럼 오늘날 민주주의의 재탄생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새로운 형태의 채무자 반란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국내에 그리고 해외 자본 중심지들의 회의실과 정부 청사들에 도사리고 있는 소수의 과두제적 지배자들 및 금권주의자들(부호들)에 대항하여, 오늘날 그리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채무자 반란과 민주주의의 봉기가 널리 퍼져 사람을 돈보다 더 중요하게 보는 새로운 정치관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시민의 힘이 정치권력의 토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같은 일이 오늘날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

 




삶문화권의 부상

* 아래는 2015년 4월 14일자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 게시글 “The Rise of Biocultural Rights”를 옮긴 것이다. 

 삶문화권의 부상

법이 커먼즈를 보호하고 전진시키는 데 사용될 수 있는가? 이 맥락에서 가장 유망한 새로운 발전들 가운데 하나는 ‘삶문화권’(biocultural rights)이라는 새로운 권리의 법제화이다. 삶문화권은 공동체가 그 땅과 물을 파수(把守)하는 일(stewardship)이 가지는 중요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인권 관련법에서 시작된 대담한 새로운 출발을 나타낸다. 삶문화권은 개인들의 권리와 사유재산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공동체의 정체성, 문화, 거버넌스 체계, 정신 그리고 삶의 방식을 특수한 지역의 풍경에 불가분하게 깃들여 있는 것으로서 명시적으로 인정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커먼즈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삶문화권의 역사와 성격은 『인권 및 환경 저널』(Journal of Human Rights and the Environment)에 실린 최근의 법 평론문인 「공동체 파수 : 삶문화권의 수립」(“Community Stewardship: The Foundation of Biocultural Rights”)에 훌륭하게 설명되어 있다.(Vol. 6, No. 1, March 2015, pp. 7-29) 이 글의 저자는 환경 법률가들의 국제단체인 <자연의 정의>(Natural Justice)의 공동창립자인 바비카테(Kabir Sanjay Bavikatte)와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 대학의 교수인 베넷(Thomas Bennett)이다.

 

다음은 이 글의 초록이다. 

‘삶문화권’이라는 용어는 공동체가 그 관습법에 따라 자신의 땅. 물, 자원을 파수할 오랜 권리를 나타낸다. 이 권리는 국제 환경법에서 점점 더 많이 인정받고 있다. 삶문화권은 단지 전형적인 시장경제적 의미의 재산에 대한 권리 주장이 아니다. (전형적인 시장경제적 의미의 재산이란 보편적으로 측정될 수 있고 상품화될 수 있으며 양도될 수 있는 자원을 말한다.) 이 글에서 논의될 내용으로부터 명백해지겠지만, 삶문화권은 자연과 관련하여 공동체가 토착적 존재론이 파악하는 바의 전통적인 파수꾼 역할을 수행할 집단적 권리이다.

일부 핵심 원칙들이 삶문화권의 중심부에 놓여있다고 바비카테와 베넷은 말한다. 여기에는 “비(非)차별, 문화적 온전성의 보호, 자치, 땅과 자연자원에 대한 권리, 그리고 경제적 행복을 위한 사회적 복지”가 포함된다.

 

저자들은 “국제 법률가들이 삶문화권의 발전에 대한 연구를 거의 안 했거나 아예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 글은 바로 이것을 바로잡으려고 한다. 저자들은 이 권리가 여러 국제 협약들, 선언들, 협정들, 행동규범들에서 명확하게 부상해왔음을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법의 새로운 분야인 삶문화권은 마법에 의한 듯이 자동으로 출현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윤리적 원칙들, 법 개념들, 정치적 주장을 제공해온 서로 연관된 네 운동의 합류를 통해 출현했다. 이 운동들이 힘을 합해서 삶문화권이라는 아이디어를 뚜렷하게 구체화한 것이다.

 

네 운동은 다음과 같다.

 

1) 신용을 잃은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을 넘어선 인간 사회에 대한 비전을 구체화하는 발전’(post-development) 주창자들.

 

2) 공유지의 비극 신화를 거부하고 지역 자치의 효율성을 경험적으로 입증하는 커먼즈 운동.

 

3) 자율적 결정권, 문화적 유산에 대한 권리, 땅에 대한 파수권을 주장하는 토착민들의 운동.

 

4) 1세대 인권인 기본적 시민권과 정치권, 2세대 인권인 사회경제적·문화적 권리를 넘어서는 ‘3세대인권인 환경권(environmental rights)을 추진하여, 자율적 결정, 경제적·사회적 발전, 문화유산 그리고 깨끗하고 건강한 환경에 대한 공동체의 권리를 인정하도록 하는 움직임. 

 

삶문화권은 기술관료적 거버넌스에 도전하는 강력한 길을 제공한다. “전문가들이 지배하는 체제(expertocracy)는 협의 없는 하향식 해결책들을 부과하며 지역의 지식과 의사결정을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배제하게 된다”라고 바비카테와 베넷은 말한다. 그러한 기술관료적 접근들은 일단의 생소한 규칙들과 테크놀로지들을 ‘고정시켜 두고,’ 사람들이 자신의 고유한, 지역에 더 적절하고 효율적인 규칙들을 발전시키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삶문화권은 표준적인 ‘발전’ 모델 및 그것이 가하는 모든 민족중심적(ethno-centric), 하향식 제한에 도전하는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또한 삶문화권은, 지역의 생태계에 적응해왔고 세상에서의 특수한 존재방식을 반영하는 전통적인 문화적 관행들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을 돕는다. 그리고 자유주의적 경제 및 정책의 문화적 단일성을 넘어가는 새로운 일단의 해결책들을 열어젖히는 것을 돕는다.

 

커먼즈 학자들은 인도의 야생 보호구역에서 “지역 공동체들을 배제하는 보호 위주의 접근법은 정부가 그 기획에 크게 투자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음을 확인했다. “이 연구는 또한, 어떤 공동체의 자원사용에 외부인들(혹은 지배적인 내부인들)이 규칙들을 부과한다면 보존이 실패할 가능성이 크며, 반면에 공동체 구성원들이 의사결정과 자원사용을 위한 규칙의 개발에 실질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면 숲 자원이 더 효율적으로 관리됨을 보여주었다.”

 

물론 관료들은 지역적으로 특수한 규칙들이 아니라 보편적 규칙들을 내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또한 사유재산권을 선호하는 “시장 기반 해결책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신자유주의적 법제도는 가장 의미있는 ‘법 주체’로서 개인에게 초점을 두며, 공동체와 그 삶문화적 관계들은 보통 무시한다. 그래서 만만찮은 장벽들이 상당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삶문화권이라는 생각은 땅, 문화, 전통적 지식, 자치를 되찾기 위한 강력한 법적 틀을 제공한다. 이것들은 시장에 의해 추동되어서는 안 되며, 생태적 의무사항들을 포함하는 더 심층적인 가치들에 의해서 추동되어야 한다. 삶문화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많은 아래로부터의 정치적·법적 행동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것은 앞으로 커먼즈 기반의 거버넌스에 새로운 법적 토대를 부여하리라는 큰 기대를 가지게 한다. ♣

*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됩니다.

 

출처: http://minamjah.tistory.com/92?category=452913 [百手의 블로그]




그리스의 새 정부, 커먼즈 기반의 수평적 네트워크 생산을 해결책으로 승인하다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에 2015년 2월 12일자로 올라온 글의 내용을 번역에 가깝게 정리한 것이다. 인명과 지명의 발음이나 기타 세부에 완벽을 기하지는 못한 상태이나 내용의 공유를 위해 서둘러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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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새 정부, 커먼즈 기반의 수평적 네트워크 생산을 해결책으로 승인하다

 이해할 수 있는 바이지만, 그리스와 전지구적 금융계에서는 모든 시선이 새 그리스 정부와 무자비한 유럽 채권자들 사이에 벌어질 맹렬한 대립에 모아져 있다. 그보다는 덜하지만, 커먼즈와 수평적 네트워크 생산(peer production)1에 기반을 둔 새로운 탈자본주의적 질서를 낳는 것을 도울 새 정부의 계획에도 시선이 던져지고 있다.

 

커먼즈 동지인 존 레스타키스가 1월 25일의 선거 약 일주일 전에 이 가능성에 대해서 쓴 바 있다. 이제 새 부수상 드라가사키스(Gianni Dragasakis)가 지난주에 그리스 의회에서 연설을 하면서, 그리스는 민중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종류의, 커먼즈에 기반을 둔 아래로부터의 수평적 네트워크 모델을 발전시킬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밝혔다.

 

그리스 이오아니나(Ioannina)에 본부를 둔, P2P재단 소속 P2P랩의 코스타키스(Vasilis Kostakis) 박사는 그리스의 상황을 면밀하게 추적해왔다. 에스토니아 탈린(Tallin)의 <락나르 누크세 혁신 및 거버넌스 학교>(the Ragnar Nurkse School of Innovation and Governance)의 연구교수인 코스타키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시리자는 교육, 거버넌스 및 연구개발과 관련하여 ‘파트너국가 접근법’(the Partner State Approach)을 닮은 방식으로 정책을 선택하고 특정의 법들을 개혁하려는 듯하다. 몇 가지를 거론해보면,

 

· 공적 데이터의 개방

· 납세자의 돈으로 생산된 지식을 개방하여 활용할 수 있게 하기

· 중소기업가들과 협동조합들을 위한 협동 환경을 창출하는 한편 오픈소스 테크놀로지와 그 실행들에 기반을 둔 기획들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해주기

· 정책입안에의 시민참여를 위해 참여과정을 개발하기 (그리고 기존의 과정들을 강화하기)

· 공적 행정과 교육을 위해 개방적인 기준과 패턴을 채택하기

 

이 계획들/기획들은 새로운 경제발전모델의 씨앗들로서 그리고 기존의 정치-경제적 혹은 ‘구조적’ 문제(부패, 느슨한 징세 등)들에 대한 해결책들로서 간주될 수 있다. 프로그램에서 실행까지 여러 단계들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첫 단계는 이미 밟은 듯하다. 시리자는 프리/오픈소스 테크놀로지들의 유리한 점들에 대해서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새로 출현하는 생산 원형의 잠재력과 그것이 낳을 새로운 정치경제도 깨닫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시리자가 온전한 양태의 커먼즈 기반 수평적 네트워크 생산을 향해 이행할 수 있는 조건들을 창출할 (그리고 창출하도록 허용 받을) 것인가?’이다. 

코스타키스는, 시리자의 디지털 정책 분야 싱크탱크 구성원이며 의원 후보였던 (당선되진 못했다) 카리치스(Andreas Karitzis)가 선거 전에 <허핑턴 포스트>의 그리스판에 글 하나를 기고한 것을 거론한다. 카리치스는 자신의 당이 프리/오픈소스 테크놀로지, 투명성, 참여민주주의에 헌신하고 있음을 언급했다. 시리자는 또한 오픈 하드웨어를 위한 새로운 카피페어(CopyFair) 라이선스들을 개발하고 분산된 마이크로-공장들―fablabs/makerspaces―의 네트워크의 창출을 지원할 의도를 분명하게 가지고 있다.

 

‘hackerspace.gr’와 같은 커먼즈 기반 집단의 구성원이며 커먼즈의 강력한 지지자인 아마추어 번역가 코스마스(Eleftherios Kosmas)는 부수상 드라가사키스의 연설문을 번역하여 제공했으며 다음 대목을 가장 관심이 가는 것으로 꼽았다.2

저는 대통령의 허락을 얻어서 일반적인 발언으로 연설을 마치고 싶습니다. 종종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모두 그 중요성이 나중에 생각해봐야 분명히 알 수 있는 일들을 겪습니다. 현재 우리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위기와 낡은 모델들의 붕괴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역사적 시기에서 살 뿐만 아니라,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궁극적으로 새로운 모델들을, 새로운 사회조직 모델들을 낳을 위기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은 과거의 결손을 처리할, 이 근대화의 결손을 마감할 기회입니다. 다만 실업, 사회보장, 사회적 배제라는 현재의 사회적 문제를 다룸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진전된 형태의 민주주의, 능동적인 사회적 행동, 공통의 이익이라는 강한 토대에 기반을 둔 사회 정의를 결합함으로써 그리스와 기타 유럽의 후진 지역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회에 존엄과 자신감을 심어주고, 민중에게 희망을 주며, 새로운 세대에게 낙관적 사고를 부여할 사회중심적 모델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는 긴축과 파괴의 모르모트가 되지 않고 선구적 아이디어들과 정책들의 터가 될 수 있으며 그 혜택은 단순히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세계는 비보장의 지역에서 보장의 중심을 얻게 될 것이며 ‘나이든’ 유럽은 내부의 상이한 발전 모델들의 공생을 통해 다시 활력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들이 유토피아적이라고 성급하게 말하지 맙시다. 리얼리스틱한 유토피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초자연적인 힘들에 의존하여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그리스의 그리고 전 세계의 보통 사람들의 단결과 집단적 행동에 의한 유토피아가 있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코스마스는 고맙게도 그리스어 연설원문의 링크를 제공하고 있다. 클릭.

 

시리자의 임원들과 접촉을 해온 많은 식견 있고 헌신적인 커머너들이 국제적으로 존재한다. 여기에는 일련의 그리스 커머너들과 P2P 활동가들이 포함된다. 가장 두드러진 두 명은 P2P재단 그리스 지부의 담당자들인 코스타키스와 파파니콜라오우(George Papanikolaou)이다. 그리스 정부는 원하면 <커먼즈 이행 계획>(Commons Transition Plan)에 제시된 많은 구체적인 커먼즈/P2P 접근법들을 도움의 받을 수도 있다.

 

커먼즈와 수평적 네트워크 생산에 대한 공식적인 관심이 증가하면서, 많은 그리스인들은 (그리고 국제적 지원자들은) 2015년 5월 15-17일에 아테네에서 열릴 세 번째 연례 <커먼즈페스트>(CommonsFest)를 고대하고 있다.

*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됩니다.

출처: http://minamjah.tistory.com/88?category=452913 [百手의 블로그]




시민의 힘과 그리스가 나아갈 길

* 다음은 데이빗 볼리어가 지난 1월 24일에 자신의 블로그에 약간의 설명과 함께 올린 존 레스타키스(John Restakis)의 글 “Civil Power and the Path Forward for Greece”를 세부에서의 완벽은 기하지 못하고 내용을 전달하는 수준에서 옮긴 것이다. 볼리어는 그리스 선거 하루 전날에 이 글을 소개했으나 이 글은 그보다 열흘 전인 1월 14일에 쓰였다. 이 글이 선거의 결과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쓰였다는 것은 이 글의 효용에 아무런 흠집도 내지 못한다. 글을 읽어보면 알지만 레스타키스는 한국에서 많이 보는 ‘기술자’ 정치평론가들처럼 누가 선거에서 이기느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에서의 사회적 삶의 흐름에 관심이 있고 바로 그것이 글에 표현되어 있어서 우리가 그리스를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볼리어가 이 글은 “그리스 위기의 평가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커먼즈 기반의 수평네트워크 생산과 사회적 대안들을 주류로 만드는 거대한 과제를 위해서도 읽을 가치가 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볼리어가 자신의 게시글에서 밝혔지만 이 글은 원래 Commons Transition에 실렸다. 존 레스타키스는 (볼리어의 소개에 따르면) 밴쿠버의 <브리티시 콜롬비아 협동조합 연합>(BC Co-operative Association)의 전 이사장이며 여러 해 동안 공동체 조직화, 성인 및 대중교육, 협동조합의 발전에 힘 써왔고, 지구화, 지역발전, 대안경제에 대해서 강연활동을 널리 행해왔다.–전달자

 

시민의 힘과 그리스가 나아갈 길

 

 

존 레스타키스

 

시리자(Syriza)가 정권을 잡을 가능성이 생기면서, 그리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두 궁금해 하고 있다. 재난이든 구원이든 아니면 그냥 정상적인 혼란이든, 시리자 정부가 게임을 바꿀 반발을 할 잠재성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거리에는 과거의 정부들이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체제를 바꾸지 못한 데 낙담하여 시리자로부터 큰 것을 기대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냉소주의와 숙명론의 분위기가 짙게 깔려있다. 시리자는 얼마나 다를 것인가?

 

한 가지는 분명하다. 만일 시리자가 말한 것을 행한다면 이는 유럽에서 절실하게 요구되는 용기 있는 길을 닦는 것이 된다. 나라를 황폐하게 하고 있는 긴축정책에 대한 반대로서만이 아니라 이 정책들의 원천이자 자양분인 신자유주의적 사고, 제도들, 그리고 자본 세력에 대한 반대로서 그렇다. 그런 길이 성공하려면 경제발전, 시장의 역할, 그리고 국가와 시민의 관계에 대한 전적으로 다른 견해가 필요하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사회적 경제가 ‘경제 다시 만들기’를 위한 시리자의 계획의 중요한 측면이 되었다. 유럽의 모든 좌우를 포함하는 정당들처럼 시리자도 사회적 경제가 현재의 위기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알고 있다. 유럽 신자유주의의 진앙지인 영국의 캐머런 정부조차도 사회적 경제를 일자리를 창출하고 공공서비스를 증진시키며 정부의 역할을 개혁하는 데서 전략적 역할을 할 부문으로서 장려해왔다. 지난 선거에서 상호주의(Mutualism)와 ‘큰 사회’가 그 슬로건들이었다.

 

이 슬로건들은 멋지게 들린다. 사회적 경제가 어떤 것이고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우파 정부들이 거의 모르거나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캐머런 정부에게 협동조합들 혹은 더 일반적으로 사회적 경제는 공적 부분의 사유화, 직업안정성의 약화, 정부 역할의 축소를 실행하는 수단이요 위장막이 되었다. 수천 명의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직업을 구하기 위해서 사이비 협동조합들에 가입하도록 강압되었다. 그리스에서도 똑같은 일이 새롭게 구성된 KOINSEP1들과 함께 시작되고 있다. 이는 협동조합의 성격과 본성에 대한 희화(戱畵)이다. 협동조합의 조합원 가입은 항상 자발적인 것이어야 하며 그 운영은 민주적이어야 하고 그 목적은―정부의 이데올로기적 목적들이 아니라―조합원과 공동체의 공통의 이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 점을 거의 모든 정부들이 배우지 못하고 있다.

 

우파는 사회적 경제를 사회의 버려진 층과 자본주의 경제의 희생자들이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피난처로 종종 간주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파는 자선을 빈민에 대한 적적할 대응책으로서 옹호한다. 유대라거나 평등은 끼어들지 못한다. 더 최근에는 사회적 경제의 수사(修辭)와 원칙들이 자본이 시민적 공간으로 손을 뻗치는 데 사용되어왔다. 이런 이유로 영국 및 기타 지역에서 협동조합들과 사회적 경제 단체들이 사회적 경제의 원칙들이 지배세력의 이익을 위해 왜곡되고 있음을 비난해왔다. 그런데 이 원칙들이란 무엇인가?

 

사회적 경제는 공통의 이익에 복무하는 상호주의와 호혜주의 원칙들에 의해 추동되는 시민 조직들과 네트워크들로 구성되며, 일반적으로 사회가 자본을 통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사회적 경제를 구성하는 것은 사회적 협동조합들, 비영리단체들, 재단들, 자원봉사그룹들 등으로서, 시장 내에서만이 아니라 (많은 성공적인 협동조합들과 공정무역 단체들이 여기 속한다) 재화와 서비스가 생산되는 비(非)시장 영역에서도 작동하는 제반 조직들이다. 여기에는 문화생산물, 건강 혹은 사회적 돌봄의 제공, 그리고 궁핍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식량·주거 및 기타 필수품들을 제공하기가 포함된다. 사회적 경제란 그 본질상 사회가 경제적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가 사회적 목적에 봉사하는 영역이요 실천이다.

 

 

오늘날 그리스가 그 사회적 경제의 규모나 다양성에서 전례 없는 성장을 하고 있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다른 곳처럼 여기서도 협동조합들과 사회적 이익 기업들(social benefit enterprises)이 경제 불황과 긴축에 대한 사회적 자기방어의 형태로 생겼다. 많은 젊은이들에게는 협동조합 혹은 사회적 기업의 설립이 일정한 자율성과 존엄을 지닌 직업을 확보하는 유일한 길이다. 식당에서 관광객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보다 더 보람 있는 일인 것이다.

 

사회적 경제가 성장하고는 있지만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그리스는 멀리 뒤쳐져 있다. 그 원인은 많다. 사회적 투자의 재원 마련과 같은 제도적 뒷받침의 미비, 전문가를 계발시키고 훈련시키지 못한 것, 대표 조직들이 단결하여 발전하고 해당 부문의 목소리를 내는 데 이르지 못한 것이 그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노후하고 단편적이며 부적절한 입법이 또 하나의 원인이다.

 

더 복합적인 셋째 이유는 그리스에서 시민사회와 국가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와 관계가 있다. 근대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제도들의 싹을 심은 계몽 및 산업혁명의 과정들을 겪은 다른 서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그리스는 오스만 지배 동안 이러한 전개과정에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아왔다. 오늘날 그리스는 오스만 시대 직후부터 지배해온 정치체제를 특징짓는 독재적 은고주의(clientelism)를 넘어서는 정치문화를 수립하기 위해 여전히 발버둥치고 있다.2 독재는 위계, 개인주의, 의존관계를 낳지 상호주의와 사회적 유대를 낳지 않는다. 건강한 시민사회, 민주적 제도들, 그리고 민주적 문화의 출현이 이로 인해서 장애를 만나게 된다.

 

은고주의의 유산은 그리스에서 치명적이었다. 협동조합의 경우에서 드러난 것처럼, 그것은 사회적 경제의 건강한 발전에 재난급의 악영향을 미쳐왔다. 우파가 사회적 경제를 자본과 시장의 증진을 위한 매개물로 삼듯이 좌파도 늘 사회적 경제를 국가의 목적을 진전시키는 도구로 본다. 여기에 은고주의 문화가 추가되면 대규모의 실패를 낳는 처방이 된다. 이것이 협동조합에 대한 국가지원이 부패를 낳았던 PASOK3 시기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이로 인해서 정당한 경제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쁜 결과로서 협동조합의 이미지와 평판이 훼손되었다.

 

오늘날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위한 실행 가능한 전략으로서 협동조합을 장려하는 일을 하려면 협동조합이 본래 부패한 것이라는 이 잘못되고 부정적인 대중적 이미지와 맞서야 한다. 그리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이는 ‘좌파’ 정부들이 협동조합 모델을 정부의 목적을 추구하는 데 사용하려 한 모든 곳에서 일어난 일이다. 협동조합이 그 목적과 본성상 자율적인 시민 연합조직이며 그 주된 역할은 그 구성원들과 공동체들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점은 내팽개친 채 말이다. 그리스에서처럼 과거에 정부들이 협동조합을 그리고 더 넓게는 사회적 경제를 정부의 권력을 확장시키는 도구들로 보았던 나라들―이전에 소련에 속했던 모든 나라들,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전역― 에서는 협동조합 모델이 그 만신창이가 된 평판으로부터 복구되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협동조합의 이미지와 평판을 훼손하는 데 가장 기여한 것은 협동조합 모델을 조작적으로 ‘지원한’ 좌파이다.

 

그 이유는, 좌파가 전통적으로 국가를 사회적·경제적 개혁의 유일하게 정당한 엔진으로 보아온 데 있다. 이런 점에서 좌파는 경제적·사회적 발전의 정당성을 시장에서만 보는 우파의 거울이미지이다. 양자 모두, 현재의 패러다임에 대한 어떤 대안이 성공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발본적인 변화를 실현하는 데 필수적인 바로 그 시민사회 제도들을 무시하거나 조작하는 비극적 실수를 똑같이 저지른다.

 

이것이 (만일 시리자가 권력을 잡는다면) 시리자의 성격이 어떤지를 가늠할 진정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시리자는 그리스의 경제적·정치적 체질을 재편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광범한 시민사회와 그리고 사회적 경제의 햇병아리 같은 조직들 및 제도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좌파의 전통적 국가주의, 즉 명령과 통제에 기반을 둔 통치로 되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좌파의 변화프로그램을 확장하고 다시 상상하여 시민사회 제도들과 사회적 경제를 나라 건설의 의미심장한 파트너로 가동시킬 것인가? 더 나아가, 협동, 상호주의, 공통의 이익이라는 사회적·경제적 원칙들을 경제 및 사회 재건에 핵심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활용할 것인가? 요컨대, 시리자 당은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시민사회의 힘의 방대한 잠재력을 인정하고 가동시킬 것인가? 만일 그런다면 이는 유럽에서 최초로 그렇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시리자가 사회적 경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좋은 신호다. 사회적 경제는 그리스에서 매우 적은 밝은 지점들 가운데 하나이다. 수백의 새로운 집단들이 형성되어 전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위계구조를 거부하고 포용성과 민주적 의사결정을 증진하며 서비스를 이윤보다 중시하는 이 조직들은 자신들을 새로운 경제적·정치적 질서를 위한 모델로 본다. 실제로 그렇다. 그러나 또한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이 집단들 가운데 다수가 정당이나 국가와는 거의 혹은 전혀 관계를 갖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는 새로운 정치 경제를 향하는 비전과 방법을 구체화해 내려고 노력하는 좌파 정당들에게 좋은 소식이 아니다. 만일 새로운 시대를 구축하는 좌파적 비전이 건설되려면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 정당과 국가통제라는 낡은 방식은 신뢰를 잃었고 거부당했다.

 

오늘날 정말로 효율적인 좌파 정당에게는 사회적 경제가 결정적인 자원이자 동맹군으로서 나타난다. 여기서는 공통의 이익에 봉사하는 경제적 민주주의의 원칙들이 실행된다. 가장 혁신적이고 기업가적이며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젊은 지도자들이 여기서 활동하고 있다. 또한 폐쇄적이고 관료적인 정부의 역기능을 개혁할 잠재력을 가진 조직화 형태들과 실천들 또한 여기서 개발되고 있다. 이곳에서 공동체들은 지난 세월 동안 상실했던 것의 일부를 회복하기 위해 함께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공동체 진료소들, 식품 시장 및 농민들과 소비자들 사이의 상호부조, 이웃의 전기나 물이 차단되는 것을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막기 등. 이는 이 위기의 와중에도 뜻하지 않은 인정이 존재함을 가리킨다. 이 어려운 시절이 공동체와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인간관계의 부활에 불을 댕겼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들은 사회적 경제에서 번성한다.

 

진보적인 정부라면 사회적 경제와 관련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좌파의 전통적인 국가주의를 넘어서서, 민주화하는 법, 시민들과 권력을 공유하는 법을 이해하는 정부의 역할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는, 비(非)온정주의적이고 비(非)은고주의적인 패러다임에서 정부의 주된 역할이 사회적 가치의 생산―사적 이윤보다 사회적 필요를 우선시하여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것―을 위해 시민사회를 힘있게 만들고 지원하는 것임을 이해함을 의미한다.

 

둘째, 권력을 잡은 그 어떤 정당과도 무관하게 사회적 경제의 발전과 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법적·사회적 제도들을 창출해야 한다. 이는 협동조합 및 사회적 경제와 관련된 입법을 개혁하는 것, 사회적 경제 조직들을 사회적·윤리적으로 재정지원하는 재정도구들의 창출, 새로운 정치경제의 근본을 이루는 협동·상호주의 및 공통의 이익에의 봉사와 관련된 이론과 실제를 연구하고 교육시키는 기관들의 설립을 의미한다.

 

셋째, 이 원리들을 비영리 및 공동체 서비스 부문을 넘어서 더 넓은 경제로 특히 국민경제의 기반을 이루는 중소기업들로 확대·적용해야 한다. 사회적 경제를 활성화하는 원칙들은 경제 전체의 회복과 개혁을 위한 틀이다.

 

넷째, 통제권, 투명성, 책임성, 의사결정권을 공공서비스의 사용자들에게 부여함으로써 공공서비스를 개혁해야 한다. 관료층의 고립되고 독재적인 권력은 분쇄되어야 한다.

 

그리스는 그 사회적·경제적·정치적 문제들을 풀기 위해서는 새로운 접근법들을 시도하는 수밖에 없다. 거시적 수준에서 시리자 정부는 채무구조조정, 무역관계 및 수출정책, 자본을 표적으로 한 조세정책을 통한 세입증가, 농업 및 산업 생산의 부활,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된 위기와 같은 근본적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 경제가 이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는 그 자체로는 회복의 엔진으로서 작동할 수 없을 것이 명백하며, 자신의 강점과 한계를 동시에 이해하는 기민한 정부의 지원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 경제에 대한 잘못된 기대가 실패와 실망의 무대를 마련할 위험이 존재한다. 과거에 사회적 경제 조직들이 어떻게 어떤 목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모르는 데서 나오는 비현실적인 기대들이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의 ‘비효율’과 ‘유토피아주의’를 비판하고 싶어 하는 자들에게 엉뚱하게 탄약을 제공해준 일이 있다. (이 자들은 협동조합의 생존비율이 사적인 기업들의 생존비율의 두 배 이상이라는 사실을 편리하게 무시한다.)

 

사회적 경제가 제공하는 것은 대안적 패러다임이 구축될 수 있는 생각들, 방법들 및 모델들이다. 사회적 경제는 새로운 정치경제의 실험장이며, 그 조직들은 더 인간적인 미래를 탐지하는 사회적 안테나이다. 오늘날 다른 패러다임을 이렇게 미리 그려보는 것이 아마도 사회적 경제가 그리스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여일 것이다. 그리스에는 기본적인 제도적 뒷받침이 여전히 결여되어있기 특히 그렇다.

 

이 제도들을 건설하는 것이 결정적이다. 이는, 새로운 정부가 채무와 유럽 정부들과의 관계를 재협상하는 데 성공하든 아니든 사실이며, 성공을 못하면 더욱 긴요해진다. 그리스가 더 인간적이고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경제를 향하여 나아가기 위해 취해야 하는 변화들이 현재의 유로존 내부에서 과연 전개될 수 있는가에 대해 심각한 의문들이 던져진다.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제도적 타성이 개혁의 전망들을 질식시키고 있다. 그렇더라도 그리스는 사회적 경제가― 특히 위기의 시기에―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촉진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다른 나라에서 이미 축적된 풍요로운 경험에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는 이 분야에서는 후발주자이다. 그러나 그래도 장점이 없지 않다. 다른 나라들의 경험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이탈리아의 에밀리아 로마냐(Emilia Romagna) 지역에서는 바로 협동과 상호부조의 원칙들에 입각한 중소기업들이 전지구적 시장에서 번성하고 있다. 이 지역은 유럽에서 상위 10개의 우수한 경제지역에 속한다. 이탈리아의 4만 개의 사회적 협동조합들은 지방자치체들과의 긴밀한 파트너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사회적 돌봄을 재편하고 확장하는 데 성공하였다. 여기에 28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고용되어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그리스가 지금 겪고 있는 것과 거의 동일한 2001년의 경제위기 이후에 300개 이상의 버려진 공장들이 그곳의 노동자들에 의해 인수되어 생산을 재개했다. 거의 모든 공장들이 아직 가동 중이다. 학교들, 어린이집들, 진료소들, 도서관들, 커뮤니티센터들 또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인수되어 운영되었다. 국가 사회주의의 원형인 쿠바에서도 정부가 자율적인 협동조합들의 성장을 지원하여 농업부문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새로운 기업과 새로운 서비스들의 성장을 자극하고 있다.

 

정부 개혁이 이 운동에서 중심적 테마이다. 브라질, 콜롬비아, 스페인.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그 숫자가 점점 늘고 있는 세계 전역에 걸친 나라들과 도시들에서 시민이 참여하는 예산작성, 공유된 정책입안, 시민에 의한 예산 및 공공프로그램 감시가 정부들의 작동방식을 개혁하는 데서 사회적 경제가 맡은 핵심적 역할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를 통해 정부들을 더 투명하고, 더 책임성 있고, 더 민주적이며, 시민들의 실질적 욕구에 더 잘 반응하도록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다음이 핵심적 요점이다. 사회적 경제는 경제적 민주주의를 통해 자본을 사회에 봉사하도록 만드는 정치경제의 모델이다. 그리스 채무위기의 기원에 대해 많은 글들이 쓰였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가 유로존에 진입하면서 싼 돈을 쓸 수 있게 되고 비윤리적인 대여가 발생한 것을 지적한다. 다른 어떤 이들은 감시의 결여와 느슨한 규제를 지적한다. 또 다른 어떤 이들은 부패와 공적 기금의 엄청난 낭비를 지적한다. 물론 모두가 그리스를 절벽으로 몰아가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민주주의와 공적 책임성의 근본적 결여를 지적한 이는 거의 없다.

 

오늘날 가장 필요한 것은 정치, 사회,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제의 영역에서 민주적 문화를 건설하는 것, 그리고 민주주의를 생성하고 확장할 시민 제도들을 강화하는 것이다. 계몽된 국가가 시민들과 손을 잡고 해야 할 역할은 바로 이것이다. 특히 그리스와 같은 정치문화를 가진 곳에서는 무언가를 바로잡는 것은 미묘하고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이 일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는 과거에 보았던 범죄적 소홀함과 비행을 영속화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그리스의 지배자들, 그들에게 봉사하는 정치계급들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유럽 열강들의 정치와 처방이 그리스를 개혁하고 다시 만드는 데 가장 필요한 바로 그 제도들을, 즉 그 공적·시민적 제도들을 파괴하고 있으니 참으로 비극적이고 근시안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저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공적 제도들과 시민의 힘이 파괴되는 것이 저들에게는 맞는 일이다. 사회적 가치들이나 민중의 복지를 자본의 이익보다 우선시하는 것은 저들의 도식에 맞지 않는다. 저들의 도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자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는 인구의 방대한 대다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일부 세력을 위해서 잘 작동하는 체계의 영속화이다.

 

2014년 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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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he Social Enterprise’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Κοιν.Σ.Επ’을 영어알파벳으로 이라고 표기한 것이다(‘Koin.S.Ep’ → ‘KOINSEP’). [본문으로]
  2. 히로세 준(廣瀬純)은 그와 <꼴렉띠보 씨뚜아씨오네스>와 대화를 엮어 낸 책 『투쟁의 아쌈블레아』(闘争のアサンブレア)의 해설에서 은고주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삐께떼로운동의 조직화 단위인 ‘바리오’와 관련하여, 대다수의 삐께떼로 조직은 이른바 은고주의(恩顧主義, clientelismo)를 거부한다는 점을 중요하게 지적해 두고 싶습니다. 은고주의란 한마디로 말하면 선거인에 대한 정당의 일상적인 매수공작입니다. 아르헨티나에는 은고주의의 오랜 역사가 있고, 특히 빈민지역은 항상 은고주의 공작의 주된 영역이었습니다. 은고주의는 공적 부조와 공공사업을 남발함으로써 정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한 여당뿐만 아니라, 좌파 정당들도 포함하여 모든 정당에게 매우 중요한 선거전술이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은고주의에는 선거전술이라는 측면과 더불어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능동적으로 되는 일을 저지하는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각 정당은 은고주의 공작을 통해서 자신들과 사람들 사이에 후원자(patron)-수혜자(client) 관계 혹은 배우/관객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사람들이 정치적 행위자로 될 가능성의 싹을 잘라내려고 시도해 왔습니다. 은고주의는 사람들을 정치적 수혜자 또는 정치적 관객으로 환원하고 각 정당이 ‘정치 무대’을 독점하기 위한 중요한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표를 모으기 위한 전술임과 동시에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수동적으로 만드는 장치이기도 한 이중적 기능을 통해서, 은고주의는 각 정당의 ‘대표’로서의 정당성을 지탱해 왔습니다./ 이러한 ‘은고주의’에서 바리오를 해방시키는 것은, 각 정당이 가지는 ‘대표’로서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일임과 동시에 각각의 바리오를 ‘정치 무대’ 그 자체로 삼는 일이기도 합니다. 즉 각 정당의 은고주의적 기획에 저항하는 투쟁이란 각각의 바리오에서 자율적인 정치공간을 구축하는 투쟁 바로 그것입니다.” [본문으로]
  3. PASOK는 그리스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다. The Panhellenic Socialist Movement (Greek: Πανελλήνιο Σοσιαλιστικό Κίνημα에서 첫 알파벳을 따서 만든 말이다. [본문으로]

출처: http://minamjah.tistory.com/85?category=452913 [百手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