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권력과 커머닝



 

새 보고서 ― 국가권력과 커머닝

 

커머닝이 자급과 거버넌스의 합법적 형태로서 번성하려면 국가권력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가? 커먼즈의 성공이 거버넌스의 한 형태로서의 국가의 미래에 대해 함축하는 바는 무엇인가?

나는 지난해에 <커먼즈전략그룹>에서 동료들과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궁구하면서 이 문제들을 조명하는 것을 도울 진지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모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인리히 뵐 재단>의 지원으로 우리는 2016년 2월 28일에서 3월 2일까지 「국가권력과 커머닝―문제적 관계를 넘어서」라는 주제로 ‘심층잠수’ 워크숍을 열었다.

이제 우리의 대화를 종합하고 압축한 보고서가 나왔다. 이 보고서의 핵심 요약이 아래 실려 있다. (여기서도 볼 수 있다.) 50쪽의 전체 보고서는 여기서 pdf 파일로 다운받을 수 있다.

워크숍 참가자들이 다룬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커먼즈와 국가는 생산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커머너들이 ‘국가’를 커먼즈의 관점에서 다시 상상하여 그 권력이 커머닝을 지원하고 탈자본주의적·탈성장적 자급 및 거버넌스 수단을 지원하는 데 긍정적으로 사용되도록 할 수 있는가? 정치학자 스캇(James C. Scott)이 한 유명한 말을 빌자면, ‘국가처럼 보기’가 ‘커머너처럼 보기’와 결합될 수 있는가? 커머너들의 앎의 방식, 삶의 방식, 존재방식과 결합될 수 있는가? 그러한 혼종은 어떤 모습을 띨 것인가?

신자유주의가 ‘자유 시장’ 도그마의 이데올로기적 우위를 다시 천명하려고 하면서 이런 문제들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그 실행 가능하고 생태친화적인 대안인 커머닝은 종종 상징적인 심지어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위협을 가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보고서가 이 문제들에 대한 더 광범한 토론이 시작되게 하는 촉진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다.

보웬스(Michel Bauwens)의 도움을 받아 이 행사를 조직하는 것을 도운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뢰쉬만(Heike Loeschmann)에게 큰 감사를 해야 할 것이다. 내가 보고서를 썼으며, 트론코소(Stacco Troncoso)와 우트라텔(Ann Marie Utratel)이 멋진 출판 및 웹페이지 제작을 담당했다. 명민한 통찰들을 공유하게 해준 워크숍 참가자에게 또한 감사한다.

 

핵심요약

 

국가권력과 커머닝

커머닝은 종종, 억압적이고 자원을 추출·고갈시키는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대한 도전의 한 방식―욕구를 충족시키는 더 인간적이고 생태친화적인 방식을 발전시킴으로써 행하는 도전―으로 간주된다. 커머닝은 우리 시대의 문제들―경제성장, 불평등, 불안정노동, 이주, 기후변화, 대의민주주의의 실패―에 대한 많은 유망하고 실천적인 해결책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다양한 커먼즈들이 성장하고 더 큰 중요성을 띠게 됨에 따라 국가와의 관계에서의 애매한 위치가 점점 더 심각한 이슈가 되고 있다. 직절적으로 말하자면, 민족국가라는 생각 자체가 커먼즈라는 개념과 상충하는 듯 보이는 것이다. 커먼즈 기반의 해결책들은 종종 범죄화되고 주변화된다. 권력체제로서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일국 주권과 서양의 법적 규범들이라는 지배적 조건에 암묵적으로 도전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들 그리고 이와 연관된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서 <커먼즈전략그룹>은 <하인리히 뵐 재단>과 함께 커먼즈 지향적 활동가들, 학자들, 정책전문가들, 프로젝트 선도자들로 다양하게 구성된 인원을 2016년 2월 28일부터 3월 1일까지((앞에서는 ‘3월 2일까지’라고 했는데, 2016년 2월은 29일까지 있으므로 3월 1일이 맞는 것 같다.)) 독일의 레닌(Lehnin)―베를린 외곽에 있다―에 3일 동안 초대했다. 목표는 커먼즈를 중심에 놓고 국가를 다시 상상하는 것에 대한 개방적이고 탐구적인 토론을 하고 가능하다면 새로운 비전을 발전시킬 창조적 행동기획들을 생각해내는 것이었다.

참여자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다루었다. 커먼즈와 국가는 생산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커머너들이 ‘국가’를 커먼즈의 관점에서 다시 상상하여 그 권력이 커머닝을 지원하고 탈자본주의적·탈성장적 자급 및 거버넌스 수단을 지원하는 데 긍정적으로 사용되도록 할 수 있는가? 정치학자 스캇(James C. Scott)이 한 유명한 말을 빌자면, ‘국가처럼 보기’가 ‘커머너처럼 보기’와 결합될 수 있는가? 커머너들의 앎의 방식, 삶의 방식, 존재방식과 결합될 수 있는가? 그러한 혼종은 어떤 모습을 띨 것인가?

 

1.국가권력을 이해하기

헬프리히가 국가에 대한 적절한 이론들 일부를 종합하는 발제문을 준비했다. 그녀의 발제문에는 우리가 ‘국가’에 대해 말하기 시작할 때 제기되는 핵심 이슈들이 제시되어 있었다. 그 첫 통찰들 가운데 하나는 “국가에 대한 이론적으로 타당한 일반적 정의”는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국가는 사회 속에 있는 권력관계들을 공고히 하고 그 관계들을 변화시킬 능력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복잡한 제도 체계로서 나타난다”고 헬프리히는 썼다. “따라서 실제로 행동하는 것은 ‘국가’ 그 자체가 아니다. 각 경우마다 구체적인 이해관계와 권력의 위치들을 가진 특수한 집단들이 행동한다.” 물론 이 집단들과 이해관계들은 경우마다 엄청나게 다를 것이다.

‘국가’의 이러한 가변성에도 불구하고, 각 경우마다 적용되는 것처럼 보이는 국가성(statehood)의 기본적 측면들이 넷 있다. ① 영토에 대한 정치적 통제 ② 규칙들을 세우고 시행하는 데서 기능하는 힘 ③ 관료제와 조직된 권력이 가진 제도적 능력들 ④ 국민을 국가권위에 종속시키는 사회적 통제력. 국가와 ‘국가성’의 이러한 기준들은 제솝(Bob Jessop) 교수가 그의 2013년 책 『국가 ―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The State: Past, Present and Future )에서 정식화한 것이다. 이러한 이해에 기반을 두어 헬프리히가 주목하는 것은, 국가가 “규칙들과 규범들에 기반들 둘 뿐만이 아니라 절차들, 관행들, 관습화된 사고방식들―이것들의 사회적으로 구축된 기능들은 국민들에 의해서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에 의해 사회에 대하여 행사되는 영토화된 정치권력”으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국가권력은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고 이해하는 방법을 형성하는, 뚜렷한 질서 원칙들을 도입한다고 헬프리히는 말한다. 근대 국가들에서 인간 사회는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으로 분리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국가는 후자에 대한 통제력을 주장한다. 국가권력은 또한 생산의 세계와 재생산의 세계를 분리하며 이원론적 젠더 구분과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다(남성은 생산/노동에 관여하며 여성은 재생산/가족에 관여한다). 마지막으로, 국가권력은 공적 삶을 ‘경제’와 ‘정치’로 분리하며 ‘자유 시장’을 자연적이고 규범적인 것으로 제시하고 정치를 의견의 불일치와 (추정컨대 불법적인) 사회적 개입을 위한 영역으로 제시한다.

영원하거나 선험적인 국가 규칙들과 제도들이란 없다. 규칙들과 제도들은 항상 사회적 투쟁과 논쟁의 결과이다. 그래서 하나의 국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주체 혹은 존재물이라기보다는 정치권력(국가권력)의 항상적인 표현인데, 무엇을 표현하느냐 하면 변화하는 사회적 관계들의 문화적으로 결정되는 그물망을 표현한다고 헬프리히는 썼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정말이지 사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국가와 국가성은 항상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워크숍 참여자이자 영국 랑카스터 대학의 사회학 공로교수(Distinguished Professor of Sociology)인 제솝 교수는 ‘국가’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는 국가권력에 대해 말하는 것이 더 유용하고 ‘커먼즈’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는 커머닝에 대해 말하는 것이 더 유용하다고 제안했다. 어휘 사용에서의 이러한 이동은 ‘국가’가 역동적인 사회적 권력관계에 의해 구성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되며 ‘국가’와 ‘커먼즈’를 고정된 실제적인 존재물로 사물화하는 것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국가권력을 사회적 관계들로 보는 이러한 관점과 강력하게 연관된 것이 푸꼬의 권력 연구이다. 푸꼬는 본질로서의 국가(국가 그 자체)와 전통적으로 연관된 ‘권력’(Power)에 집중하던 기존의 연구에 힘들의 관계(relation of forces)로서의 권력 연구를 맞세웠다. 이에 대해서는 꼴레즈 드 프랑스에서의 푸꼬의 강의를 책으로 낸 것들 가운데 『사회는 방어되어야 한다』, 『안전, 영토, 인구』,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을 참조하라.))

 

왜 국가이론이 커머너들에게 중요한가

국가이론에 관한 첫 발제에서 제솝 교수는 그의 전략적-관계적 접근법을 개관했는데, 이는 단일하고 고정된 국가라는 생각을 거부하며 주어진 국가의 엘리트들 사이의 사회적 권력관계에 초점을 둔다. 그는 이렇게 썼다. “국가는 정치 세력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목표를 추구할 동등한 기회를 가지고, 그리고 자신들의 목표를 (그게 무엇이든) 실현할 동등한 기회를((원문에는 “changes”라고 되어있는데 맥락으로 보아 ‘chances’의 오식일 듯하다.)) 가지고 싸우는 중립적 지형이 아니다. 국가 장치들의 조직, 국가의 역량 및 자원은 [···] 특정 세력에게, 특정의 이익에, 특정의 정체성들에게, 행동의 특정의 시공간적 지평에, 특정의 기획들에게 유리하다.”

제솝은 계급, 인종, 젠더와 같은 고전적인 ‘타자들’까지 가기도 전에 국가의 사법적 언어 자체가 구조적 적대를 낳는 구분들을 창출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커먼즈를 예로 들어보자. “커먼즈는 국가 내에서 정의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국가 자체를 넘어서는가?”라고 제솝은 묻는다.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극히 복잡한 일이다. “국가와 커먼즈에 관한 일반 이론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양자 사이에는 대체로 공식적인 사법적 관계가 거의 혹은 전혀 없다. “국가권력과 커머닝”은 이렇게 복잡한 관계를 갖기 때문에 제솝은 이 관계를 파악하는 데서 단지 하나의 분석 방법에 의존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 주제는 상이한 목적을 가진 다수의 진입점을 권유한다. 하나의 진입점을 택한다면 다른 진입점들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다수의 관점들이 대상을 더 입체적으로 보게 해준다.”

국가가 사회적 권력관계의 도구라는 점, 그리고 국가권력이란 스스로를 영속화하는 이기적인 힘이라는 점을 분명하다. 국가는 특정의 분파들에게는, 특히 자본(재계)에게는 그들의 이익을 촉진시켜줄 수 있는 메커니즘이다. 커머닝으로 더 나은 세계―생태에 대해 더 큰 책임감을 가지고 있고 사회적으로나 젠더와 관련하여 더 정의로우며 개인들이 더 안전한 세계―를 일구어내려는 커머너들에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커머너들이 어떻게 국가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과 자유를 진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국가권력의 다양한 양태들

국가권력의 반복되는 패턴들은 세계 전역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현실화된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농업 국가들의 경우 국가권력은 라틴아메리카, 유럽 혹은 미국에서의 국가권력과는 전혀 다른 식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이는 대체로 나라들 사이의 기본적인 지리적 및 자원과 관련된 차이에서 나오지만, 국가권력과 시장들을 혼합하는 다양한 정책들, 문화들, 사회적 규범들에서 나오기도 한다. 국가권력의 가장 두드러진 양태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① 라틴아메리카의 권위주의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국가권력, ② 아프리카의 농업 국가들, ② 긴축재정·종획·위기로 특징지어지는 유럽연합, ④ 신자유주의 국가를 공격적으로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는 미국.

 

2.국가권력에 대항하는 힘으로서의 커머닝

‘심층잠수’에서 계속 나오는 주제는 ‘어떻게 커머닝이 국가권력을 견제하고 가능하다면 재편할 수 있는 대항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가’였다. “국가와 관련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볼리비아 다민족국(Plurinational State of Bolivia)((‘볼리비아 다민족국’(Plurinational State of Bolivia)은 볼리비아의 공식 명칭이다.))의 전(前) 유엔 대사인 쏠론(Pablo Solón)은 물었다. 분명히 국가권력을 바꾸는 데서 먼저 달성할 목표들 가운데 하나는 커머닝 행동들을 탈범죄화하고 합법화하는 것이리라. 이는 적어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들을 출현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들을 열어줄 것이다. 더 장기적 목표는 국가권력을 활용해서 커머닝과 커머닝이 창출하는 가치(들)을 창조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는, 좌파가 볼리비아를 장악한 일이 보여주듯이, 그 전체가 불안정하고 방심할 수 없는 지형이다. 권력은 그것을 휘두르기 시작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국가들은 자신들의 국민들보다 다른 민족국가들에게 더 많이 응답하는 경향이 있다. 종국에는 국가와 기존의 법이 커머닝을 과연 도울 수 있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존재한다. 사무적으로 관리되는 민족국가의 거대한 체계들이 커먼즈 기반의 거버넌스와 인간적 규모의 커머닝을 실제로 양성할 수 있는가? 기존의 관료체제들을 바꾸어서 커머닝을 인정하고 지원하도록 만드는 것이 가능한가?

크로아티아의 정치생태연구소(Institute for Political Ecology)의 토마세비치(Tomislav Tomašsević)는 “국가는 다양한 유형의 행위자들이 움직이는 장”이며 커머너들이 그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래서 커먼즈운동과 그 참여자들로서는 국가를 재전유하고 재정의하여 권력관계를 변화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이 논리적이라고 한다. 그 다음 이 과제는 초국적 무대로 옮겨갈 필요가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단 국가를 재정의하는 일을 해내면 다른 국가들의 경우에는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커먼즈 기반 사회의 규모를 다른 나라들로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 어떻게 지역 차원에 머물지 않고 전지구적 차원으로 나아갈 것인가? 국가를 통해 커먼즈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보편성 개념들을 무엇인가?” 우리가 국가와 국가성을 다시 상상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위기’는 계속해서 존속하리라는 그 점 하나 때문일지라도 “커먼즈 운동은 이런 과제들을 무시할 수 없다.”

워크숍 참가자들은 국가권력을 변형시키는 데서 다루어야 할, 국가권력과 커머닝에 관한 세 기본 물음들을 가려냈다. ① 일국의 맥락에서 무엇이 커머닝을 막고 있는가? ② 커머닝이 존재할 수 있고 확대될 수 있게 하기 위해 우리가 변화시키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③ 오늘날 국가들과 정부들은 어떻게 커머닝을 방해하고 있는가?

커머너들은 구조적 분석, 전략 및 전술을 하나의 패키지로 통합할 설득력 있는 비전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나 정치적 물음들을 우리의 진입점으로 삼아야 한다. 커머너들은 또한 정치적 좌파와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자신들의 시민개념을 분명히 하며, 그리하여 커머너들이 어떻게 국가와 관계를 맺을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커머닝을 탈범죄화하고 지원하기 위해서 법을 재발명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통(通)개인적(transpersonal) 합리성과 연계―개인들의 다른 개인들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새로운 범주―의 중요한 형태”로서의 커먼즈라는 생각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커먼즈전략그룹>의 헬프리히는 말했다.

 

3.국가권력을 커머닝을 지원하도록 다시 개념화하기

국가권력의 성격, 그 유형들, 그리고 커먼즈와 커머닝의 성격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는 우리를 ‘심층잠수’의 중심 문제에 이르게 한다. 어떻게 국가권력을 다시 상상할 수 있고 커머닝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가? 국가의 ‘공통화’(commonification)((원문에 명사를 썼기 때문에 “국가의 ‘공통화”라고 옮겼으나 ‘국가를 공통적인 것으로 만들기’라고 풀어 쓸 수 있을 것이다.))를 위한 전략들은 무엇인가? 커먼즈 기반의 국가는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

헬프리히가 이 문제에 답하는 데서 출발점을 제공했다. “커머닝 없는 커먼즈는 없다‘는 것이 맞을지 모르지만, 커머닝 없이 커먼즈에 기여하기는 가능하다. 여기가 국가가 관련되는 지점이다. 국가는 커머닝에 반드시 참여할 필요 없이 커먼즈에 기여할 수 있다. 또한 국가는 커머너들의 권리만이 아니라 모든 시민들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으며 커머너들 사이의 건설적 관계들을 지원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사람이 국가가 돕는 커먼즈를 상상하는 방식과 커머너가 국가가 돕는 커먼즈를 상상하는 방식은 즉각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헬프리히는 말했다. 커머너는 커머닝을 병원에서 수도 시스템, 사회적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형의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는 방식으로 본다. 원칙적으로 커머닝은 사람들에게 힘을 부여하고 새로운 창출 능력에 접속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제공한다. 이와 달리 자유주의자는 커머닝을 진보적 가치들과 복지국가에 가해지는 위협으로 간주할 수 있다. 커머닝은 국가를 그 책임과 지출을 회피하도록 장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이론가 제솝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우리가 커머닝에 관심이 있다면, 문제는―마치 국가가 우리의 활동들의 외부에 있는 양―어떻게 국가장치가 커먼즈를 돕도록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전략이 국가 시스템 내외의 힘들의 균형을 바꿈으로써 국가권력을 변형시킬 수 있는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권력과 커머닝을 다시 살펴보기―전략적 행동을 위한 상호 학습’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다.” 쏠론(Pablo Solón)은 이렇게 말했다. “문제의 핵심은 권력과 대항권력(counterpower)이다. 어떻게 커머닝이 대항권력을 구축할 것인가? 우리는 다른 식으로는 국가권력을 변형시킬 수 없다.”

대의민주주의가 정치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여전히 가동될 수 있는 틀인지 아닌지, 혹은 정치권력의 집성이 ‘체제’의 외부에서 일어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열린 문제라고 P2P재단의 전략담당자이자 <게릴라 번역>의 공동창립자인 트론코소는 말했다. 시리자의 전(前) 당원인 카리치스(Andreas Karitzis)는 최근에 다음과 같은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한 바 있다. “민중의 힘은 다양한 민주적 제도들에 일단 각인되면 소진된다. 우리는 긴요한 결정들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을 엘리트들이 받아들이고 관용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던 것을 더 한다고 해서 일이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전투가 일어나는 터가 변해서 우리의 전략을 무력하게 한다면, 이런 불안정한 전쟁터에서 더 능력을 갖추어봐야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전투의 지형을 다시 형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사항들을 대의정치에서 경제적·사회적 힘을 생산하는 자율적인 네트워크의 수립으로 이동시킴으로써 해결공간을 확대해야 한다.”

 

공공 서비스와 커먼즈

풀지 못한 문제는 어떻게 커먼즈가 공공 서비스, 공공재(public goods), 공적 도메인(public domain) 개념들과 관계를 맺을 것인가이다. 프랑스 경제학자인 코리아(Benjamin Coriat)는 이렇게 말했다. “국가가 이런 기능들을 감독한다. 국가는 접근권을 결정하거나 민영 회사들에 소유권을 넘길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공통 자산(common asset) 개념은 국가가 자원이나 서비스를 사유화(私有化)할 수 없다는 생각을 도입한다. 오늘날 국가가 사유화 기계가 되었기 때문에, 커머너들에게 필요한 새로운 보호장치들을 도입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공공 서비스들이나 공공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공통화’할 수 있는가이다. 그는 공통재(common goods) 개념은 단지 자산과 서비스의 ‘재(再)시유화(市有化)’(re-municipalization)가 그 관건이 아니라 ‘공공재를 공통재로 변형시키는 것’이 그 관건임을 강조한다. ‘공통재’는 새로운 개념적 범주이다. 이는 커머너들을 보호할 새로운 권리들을 창출한다.

 

거버넌스와 법에서의 패러다임 전환을 상상하기

커머닝과의 관계에서의 국가권력의 패러다임 전환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런 패러다임 전환은 권력의 다른 새로운 회로들을, 새로운 유형의 거버넌스를 필요로 할 것이며, 더 넓은 의미에서는 제솝이 언급했던 국가 이념―Staatsidee((Staatsidee : ‘국가 이념’을 의미하는 독일어이다.))―에 대한 대위(代位)로서 기능할 수 있는, 널리 인정되는 커먼즈 이념을 필요로 할 것이다. 상이한 권력회로들을 발전시키려면 커먼즈의 내부 거버넌스가 어떻게 작동할 수 있고 국가와 커먼즈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구조지어질 수 있는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커먼즈는 거버넌스의 형태로서 효율적이고 정당한 것이어야 한다. 여기에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 포용적인 윤리와 공유되는 목표들을 개발함.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배제하거나 심지어 추방하는 특정의 권리들은 계속 유지한다.)
  • 책임을 지는 제도를 갖춤.
  • 커머너들이 규칙 작성을 발기(發起)하고 거기에 참여할 수 있음.
  • 집단의 이익이 상호적으로 만족스럽고 존중하는 방식으로 발생함.
  • 모든 구성원들이 현행의 규칙들과 관행들의 전제들에 도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짐.

 

결론

신자유주의 정책의 옹호자들이 저항을 누르려고 함에 따라, 그리고 커머닝 자체가 더 널리 퍼지고 강해짐에 따라 국가권력과 커머너들과의 복잡한 관계들은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 분명하다. 이 주제에 관한 진전이 있으려면 반드시 커머너들 사이에 토론이 더 진행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가까운 장래에는 여러 나라들이 자국의 국경 안에 나름의 합법적으로 승인된 커먼즈들을 가지려고 시도하는 모습을 알게 되는 것이 매우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의 ‘플랜 C’이든, 부엔비비르(buen vivir)를 증진하려는 라틴아메리카의 구체적 정책들이든, 자연자원 커먼즈를 보호하는 인도에서의 법정 판결이든, 국가와 병행하는 탈자본주의 경제인 커먼즈가 어디에서나 확대되는 것이든 말이다.

앞으로 이루어질 그런 전개들을 평가하려면 지역의 고유성을 고려한 ‘더 심층으로의 잠수’가 필요할 것이며 전통적인 좌파 및 노동계와 새로운 대화를 하여 생계, 기본소득, 공공 서비스, 경제정책의 문제들에 대해 일종의 임시 연대(working rapprochement)를 구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커먼즈가 전통적인 자유주의 및 국가 권위와 정치적이고 합법적으로 통합될 수 있는가? 어떤 구체적인 조처를 취해야 할지를 알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가권력의 지형학에 심대한 변화가 생기지 않고서는 우리 시대의 위기가 해결될 수 없음은 분명한 듯하다. ♣




사회변형 패러다임으로서의 커머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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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변형 패러다임으로서의 커머닝


데이빗 볼리어


 

우리는 우리 시대의 여러 심대한 위기들에 대처하면서 해결이 쉽지 않은 난제에 직면한다. 변혁에 공격적으로 저항하는 현 체제가 부과하는 제한 내에서 살면서 어떻게 이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체제를 상상하고 구축할 것인가? 우리의 과제는 매력적인 대안들을 다듬어내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들을 실현할 믿을만한 전략들을 포착하는 것도 포함한다.

나는 패러다임이자 담론이고 윤리이며 일단의 사회적 실천들인 커먼즈(the commons)가 이 난제를 극복하는 일에서 매우 유망하다고 생각한다. 커먼즈는 정치철학이나 정책 과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살아있는 과정이다. 그것은 명사라기보다 동사이다. 커머닝(commoning)―공유된 자원을 관리하는 체제들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상호지원, 갈등, 협상, 소통 그리고 실험의 행동들―이라는 사회적 실천을 주된 핵심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는 생산(자급), 거버넌스, 문화 그리고 개인들의 관심이 혼합되어 통합된 하나의 체제로 된다.




나사회변형 패러다임으로서의 커머닝는 이 글에서 커먼즈와 커머닝에 대한, 그리고 새로운 사회의 구축에 기여하는 데서 커먼즈와 커머닝이 가지는 거대한 잠재력에 대한 생생한 개관을 제공하려 한다. 나는 많은 커머너들(commoners)에게 활력을 부여하는 변화이론을 설명할 것이다. 특히 커머너들이 자본주의 시장들을 순화하고 자연의 파수꾼들이 되며 공유된 자원이 주는 혜택을 상호화하려고((‘상호화하다’는 ‘mutualize’의 번역어이다. 사실 좀 어색하다. 이 동사는 맥락에 따라 맞추어 옮기면 어색함이 사라진다. 현재의 맥락에서라면 ‘골고루 나누다’로 옮기면 무난하다. 다른 경우에는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 아래아 한글의 사전에는 ‘상호적으로 하다’라는, 마찬가지로 어색한 번역어가 등록되어 있다. OED사전을 보면 ‘서로 주고받다/ 교환하다,’ ‘똑같이 나누다,’ ‘평등하게 하다,’ ‘상호적 원칙에 따라 조직하다,’ ‘(회사를) 상호적 원칙에 따라 재편하다’의 의미들이 등록되어 있다. 실제로는 정밀하게 보면 사전에 등록된 것보다 더 많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 단어는 거의 하나의 개념의 위치에 오른 것이라서 명사로 사용되는 경우 번역하기가 난감하다. 명사는 그 개념만을 추출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맥락은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맥락이 없는데 어느 맥락에 맞추어 옮길 것인가?····· 따라서 명사를 ‘상호화’로, 동사를 ‘상호화하다’로 일관되게 옮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어색함이 있지만, 이 어색함을 극복하면 우리말 ‘상호화(하다)’가 이전보다 더 풍부한 의미를 가진 말이 된다. ‘상호화하다’에 위에서 거론한 모든 의미가 포괄되기 때문이다. 사실 언어의 의미는 이런 식으로 확대된다. 여기서 길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비극적이게도 대한민국은 한국어의 의미의 확대에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해왔다. 의미가 확대되지 않는 언어는 죽은 언어이다.)) 시도하는 측면에 초점을 둘 것이다. 그 다음에는 커먼즈에 기반을 두어 신자유주의 경제와 정치체를 비판할 것이며, 커먼즈가 어떻게 생태적으로 더 지속가능한 인간적인 사회를 가져올 수 있는지의 비전을 제시할 것이며, 커머너들이 추구하는 주된 경제적·정치적 변화들을 서술하고 그러한 변화들을 추구할 주된 수단을 서술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커먼즈 중심 사회가 현 ‘체제’를 구성하는 시장/국가 동맹체에 관하여 함축하는 바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커먼즈를 통한 자급과 거버넌스의 세계는 정치구조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이러한 커먼즈의 세계는 무자비한 경제성장, 집중된 기업권력, 소비주의, 지속 불가능한 부채, 폭포수 쏟아지듯이 일어나는 생태파괴의 상호연관된 병리현상들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가?

 


커먼즈 운동의 목표들

 



커먼즈를 체계적으로 소개하기 이전에, 커먼즈 운동이 성취하려고 추구하는 바를 명확하게 진술해놓고자 한다. 커머너들은 물질적 의미에서나 정치적 의미에서나 그들의 ‘commonwealth’(공통의 부/공통체)를 되찾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옮긴이] ‘commonwealth’는 ‘공통의 부’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커머너들의 민주적인 공유자원관리 공동체―이것을 ‘공통체’로 옮긴 바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네그리·하트 지음 『공통체』를 참조하라―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국가가 자본과 함께 근대를 장악한 이후에 ‘commonwealth’는 ‘state’(국가)와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공통체’로서의 ‘commonwealth’를 되찾는 것이 정치적인 의미에서 ‘commonwealth’를 되찾는 것이다.)) 커머너들을 그들의 공유 자원―토지와 물에서 지식과 도시 공간들까지―을 사유화하고 시장화하는 만연된 행태들을 철회시키고 그 자원 및 공동체의 삶을 다스리는 데 더 많이 직접 참여할 것을 다시 주장하고자 한다. 커머너들은 어떤 자원들은 양도 불가능하게―시장에서 판매되지 못하게 하여 미래의 세대를 위해 보존되게― 만들기를 바란다. 시장 종획을 역전시키고 커먼즈를 재발명하는 이 기획은 국가규제가 일반적으로 성취하지 못한 것을, 즉 자원을 남용하고 지속 불가능하게 만드는 시장 행위에 대한 효과적인 사회적 통제를 성취하고자 한다.


참여의 조건은 각자 다르지만, 세계 전역의 수많은 활동가 공동체들은 신자유주의 경제에 저항하고 커먼즈 기반의 대안들을 창출하는 드라마를 펼치고 있다. 저항과 커머닝의 본질적 유사성이 항상 명백한 것은 아니다. 갈등이 여러 수준에서(지방적, 지역적, 일국적, 초국적 수준에서), 그리고 다양한 자원 도메인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자신들이 하는 일을 커먼즈의 언어를 사용하여 서술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에 반대하고 이 이데올로기가 가진 ‘자수성가’형 개인주의, 확장적인 사유재산권, 항상적인 경제성장, 정부의 규제완화(탈규제), 자본에 의해 추동되는 기술혁신, 소비주의에 대한 거의 신학적인 믿음에 반대한다는 점은 공통된다. 커머너들이 보기에 이 신념체계는 자원을 소진하는 시장경제의 엔진, 즉 생태계를 파괴하고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며 공동체들을 약화시키고 개인들(특히 빈자와 약자들)을 수탈하는 체계의 엔진이다.


그러나 커머너들은, 체제 차원의 변화에 구조적으로 막혀있는 경향을 보이는 기존의 정치적 장소들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자신들의 고유한 대안적 제도들을 시장과 국가의 외부에서 창출하는 데 초점을 둔다. 종래의 정치와 규제를 자기방어 혹은 전진적 변화의 도구로 더 이상 활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선거정치와 정책에 의해 추동되는 해결책들은 이 방면에 부패가 엄연히 존재하는 때에는 내적 한계를 가진다는 점을 커머너들이 인식했다는 것이다. 최선의 상황에서도 종래의 정치제도들은 법에 얽매어 있고 비용이 많이 들며 전문가들에 의해 추동되고 관료주의로 인해 유연하지 못하며 정치적으로 부패될 수 있는데, 이런 점들로 인해 이 제도들은 ‘아래로부터의’ 진지한 변화에 적대적인 도구가 된다.


커머너들은 정책에는 정치적으로 필요하거나 실행 가능한 만큼만 관여하고 자신들의 기획을 위해 보호받는 별도의 공간들을 확보하는 데 초점을 두어왔다. 일반적으로 커머너들은 국가 당국에 자신들의 이익을 보증하거나 관리해달라고 의지하기보다는 자신들에게 중요한 삶의 영역들―도시들, 마을공동체들, 음식, 물, 땅, 정보, 기반시설, 신용과 화폐, 사회적 서비스 기타 등등―에 대한 직접적인 주권과 통제권을 추구하기를 더 원했다. 독립적인 커머닝의 과정 자체에 여러 혜택들이 들어있다. 커머닝은 커먼즈 기반의 제도들의 우월성을 보여줌으로써―예를 들어 프리 혹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개발, 지역식량자급, 협동조합들, 대안적 통화들―자본이 추동하는 시장에 대한 준독립적이고 사회적으로 만족스러운 대안들을 창출한다.


커먼즈의 더 심대한 영향력은 문화적인 것일 수 있다. 커머닝은 사람들의 상호 연관 및 ‘자연’과의 연관을 다시 살린다. 커머닝은 새로운 열망들과 정체성들의 구축을 돕는다. 커먼즈는 사람들에게 소비자·시민·유권자의 역할을 훌쩍 뛰어넘는 개인적 행동을 할 수 있는 의미심장한 새로운 기회들을 부여함으로써, 사람들이 건전한 문화적 가치들을 구현하고 책임과 권리를 모두 동반하는 새로운 사회적 역할을 접하게 해준다. 시장 문화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나 침투하는 때에는 커머닝이 새로운 문화적 공간들을 가꾸고 내적·주체적 경험들을 양성한다. 시장 문화의 조작적인 브랜드 만들기 그리고 활력을 앗아가는 스펙터클들과 관계가 있기보다는 인간의 조건 및 사회적 변화와 훨씬 더 관계가 있는 공간들이요 경험들이다. 결국 커머닝의 실질적 의의는, 고정된 철학적 비전이나 정치적 과제가 핵심이 아니라 성공적인 커먼즈를 구축한데 참여하는 행동이 핵심이라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커머너들은 “행동이 말보다 더 많은 문제를 낳는다”라는 개념예술가 제니 홀저(Jenny Holzer)의 말에 동의할 것이다.

 


‘커먼즈’가 의미하는 것

 


커먼즈라는 것이 많은 현대인들에게 혼란스럽게 다가가는 것은 ‘커먼즈’라는 용어가 매우 많은 의미들을 가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용어는 다양한 의미를 가진 용어의 정당한 용법에서 파생된 만큼이나 역사적 오점―‘커먼즈(공유지)의 비극’―에서도 파생되었다. 그래서 논의를 더 진전시키기 전에 커먼즈 언어를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그저 기술(記述)적인 것이 아니라 환기적이고 수행적이다. 즉 그 단어들은 정체성, 정서를 표현하는 방식의 표식들이며 한 무리의 사람들을 문화적으로 구성하는 도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커먼즈의 전복적이고 전략적인 힘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커먼즈’라는 단어의 뒤얽힌 현대적 용법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사십여 년 동안 교육받은 대중의 대다수는 커먼즈를 정부의 강제와 연관하여 실패한 관리체제로 간주해왔다. 이런 생각은 생물학자 하딘(Garrett Hardin)이 1968년에 쓴 유명한 글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으로 소급될 수 있다. 학술지 『과학』(Science)에 실린 짧은 이 글에서 하딘은 자신의 가축의 방목을 제한하는 ‘합리적’ 인센티브를 가진 목부(牧夫)가 단 한 명도 없는 공유된 방목지의 우화를 제시했다.((Garrett Hardin, “The Tragedy of the Commons,” Science 162, no. 3859 (December 1968): 1243.)) 그 불가피한 결과로 각 목부가 이기적으로 가능한 한 많은 공통의 자원을 사용할 것이고, 이것이 불가피하게 과다사용과 파멸로 이를 것이라고, 이른바 ‘공유지의 비극’을 낳을 것이라고 하딘은 말한다. 그가 주장는 최선의 해결책은 해당 자원에 사적 소유권을 할당하는 것이다.



사실 하딘은 커먼즈(공유지)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픈액세스 체제 혹은 모든 것이 공짜인 무료입장의 체제를 서술하고 있다. 커먼즈에는 자원과 그 사용을 다스리는 뚜렷한 공동체가 존재한다. 커먼즈의 커머너들은 나름의 접근 및 사용 규칙들을 협상하고 책임과 권리를 할당하며 불로소득자들을 찾아서 벌을 주는 감시체제를 세우는 등 커먼즈를 유지하는 행동을 한다. 커먼즈 학자 하이드(Lewis Hyde)는 하딘의 “비극” 테제를 “소통하지 않는 이기적인 개인들이 자유롭게 접근하는, 관리되지 않은 자유방임적 공유재의 비극”이라고 재치 있게 규정했다.((Lewis Hyde, Common as Air: Revolution, Art and Ownership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2010), 44.))



인디애나 대학의 정치학자인 오스트롬 교수(Elinor Ostrom)는 주류경제학이 망각 상태에 처박아놓았던 커먼즈를 다시 구해내는 데 기여했다. 1970년대에서 2012년 사망하기까지에 걸친 그녀의 활동 기간 동안 오스트롬은 주로 빈민국의 시골에 자리 잡은 수백 개의 공동체들이 사실상 자연자원을 지속 가능하게 관리할 수 있었던 여러 방식들을 기록했다. 경험적 관점에서 보아 커먼즈는 작동할 수 있었으며, 그것도 보통이 아니라 잘 작동할 수 있었다. 오스트롬이 다루려고 한 중심적 논제는 “독립적인 상황에 있는 일군의 사람들이 불로소득, 회피 혹은 기회주의적 행동의 유혹에 직면해서도 스스로를 조직하고 다스려서 지속적인 공동의 혜택을 획득할 수 있는가”였다.((Elinor Ostrom, Governing the Commons: The Evolution of Institutions for Collective Action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42.))



오스트롬의 획기적인 1990년 책 『공유지의 비극을 넘어서』(Governing the Commons)는 성공적인 커먼즈의 8개 핵심 “설계원칙들”을 포착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의 다른 책들은 무엇보다도 아래로부터의 기획과 의사결정에 힘을 주기 위해서 거버넌스(다스림)를 다양화하고 중첩화하는 방식들(즉 그녀가 “다원정치”polyarchy라고 부른 것)을 탐구했다.((Elinor Ostrom, Understanding Institutional Diversity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5); Joanna Burber, Elinor Ostrom et al., Protecting the Commons: A Framework for Resource Management in the Americas (Washington, DC: Island Press, 2001))) 이 작업으로 오스트롬은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2009년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2008년 금융위기 직후에 구성된 노벨상 위원회는 현행의 사회적 관계들이 사물화된 시장 거래들만큼이나 경제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오스트롬의 연구는 경제적 분석과 거기서 커먼즈가 하는 역할의 재개념화를 위한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이는 그 다음 단계인 정치적 참여를 취하지 않고 이루어진 일이었다.


지금까지 커먼즈에 관한 두 대비되는 수준의 담론, 즉 관리되지 않는 자원으로서의 커먼즈(하딘)와 사회적 제도로서의 커먼즈(오스트롬)를 살펴보았다. 오늘날까지 대부분의 주류 정치가들과 경제학자들은 커먼즈를 하딘의 의미로, 즉 소유되지 않은 비활성 자원으로서 이해하는 경향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프레임 설정은 커먼즈가 역동적이고 진화하는 사회적 활동임을, 즉 커머닝임을 인정하는 데 실패한다. 실제로 커먼즈는 자원으로만 구성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규칙들, 전통들, 가치들을 고안함으로써 자원을 관리하는 공동체로도 구성된다. 셋 모두가 필요하다.


요컨대, 커먼즈는 창조적 행위자들의 살아있는 사회적 체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셋째 수준의 담론은 인습적인 학계를 심란하게 하는데, 이는 이 담론이 논의 전체를 ‘경제인’(homo economicus)에 기반을 둔 익숙한 경제주의적 틀 바깥으로 몰고 가서 그들이 인류학, 심리학, 사회학, 지리학 및 기타 ‘부드러운’ 인문과학들의 기발한 발상들로 간주하는 것으로 가는 문을 열기 때문이다. 이는 경제학자들과 정책입안자들이 그토록 높이 평가하는 단정한 양적, 기계론적 모델들을 구축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든다. 그토록 많은 특이한 지역적·역사적·문화적·간주체적(intersubjective)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다면 커먼즈에 대한 표준적·보편적 유형론을 주장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커먼즈 담론은 인간 실존과 사회적 조직의 엉망진창인 현실을 표준적인 경제학, 관료체제, 그리고 근대 자체의 가짜 도리(道理)와 세계관으로부터 구하고자 한다. 어떤 공동체가 어떤 자원을 공정한 접근·사용 및 장기적 지속 가능성을 강조하면서 집단적으로 관리하기로 결정할 때 커먼즈가 발생한다는 점에 현실의 복잡성이 있다. 이는 수많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나는 예를 들어 공동체 극장, 오픈소스 현미경 사용법, 인도주의적 구조를 돕기 위한 오픈소스 맵핑, 그리고 이주민들에게 호의 베풀기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커먼즈들을 발견하고 놀란 적이 있다. 이러한 ‘세계를 만드는’ 공동체들 각각은 자신들의 고유한 가치들, 전통들, 역사, 간주체성에 의해 활성화된다. ‘안에서 보면’ 커먼즈는 그 하나하나가 다 사회적으로 고유하다.



일단 우리가 공통적인 문제의 존재론적 전제들을 인정하고 그 전제들이 크게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 우리는 사회적 현상의 새로운 우주론으로 진입하게 된다. 커먼즈와 환경 사이의 경계가 (사회생태론적 체계에서 예측할 수 있듯이) 흐려진다. 사회과학자들은 어떤 요인들이 일정한 커먼즈를 정의하고 어떤 요인들이 우연한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서 골치 아픈 방법론적 난점들에 직면하고 있다. 내 생각에 우리는 커먼즈를 총합적인 살아있는 체계로서만 이해할 수 있으며, 여기에 필요한 것은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의 ‘패턴 언어’라는 발상과 같은 새로운 발견법들과 템플릿들이다.((David Bollier and Silke Helfrich, Patterns of Commoning (Amherst, MA: The Commons Strategies Group, 2015).))


커먼즈의 존재론적 가변성은 경제학자들과 근대주의 세계관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불쾌하고 불가해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이들 대부분은 커먼즈를 단지 자원으로서만 간주하기를 고집하는 것이다. 마치 그들은 모든 것이 표준적이고 보편적인 범주들―신자유주의적 시장 문화의 필수적 조건―로 산뜻하게 분류될 수는 없다는 생각을 참을 수 없는 듯하다.



그런데 커먼즈의 세계에서는 지역적이고 변별적이며 역사적인 것이 중요성을 가지는 인간적 공간을 구축하는 것이 바로 핵심이다. 고유한 경험들, 토속적 전통들, 문화적 가치들, 지리가 인정되어야 하고 특권을 부여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커먼즈는 몸으로 겪은 경험의 특수성을 존중하는, 더 나아가 그러한 특수성의 발생적이고 본래적인 인간적 가치를 존중하는 언어인 동시에 사회·정치·경제적 기획이다. 토착민 커먼즈는 도시 커먼즈와는 매우 다를 것이며, 이 둘 모두 가령 위키하우스 디자인 공동체와 매우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커먼즈들이다. 에스코바(Arturo Escobar)의 말을 빌자면, 커먼즈는 우리에게 “다원적 우주’(pluriverse)가 무엇인지 알려준다.((Arturo Escobar, “Commons in the Pluriverse,” in Bollier and Helfrich, Patterns of Commoning, 348–360.)) 새로운 세대의 진화 과학자들이 발견하고 있듯이, 많은 극히 다양한 국지적 사례로 발현하는 공유된 DNA, 이것이 인간 종의 기저 현실이다. 신자유주의에게는 실례가 되는 말이겠지만, 왜 우리의 경제적·정치적 제도들은 이 사실을 반영할 수 없는가?


커먼즈 패러다임은 중요한 존재론적 문턱을 넘을 것을 우리에게 청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양의 산업사회들에 사는 주류 정치와 경제의 행위자들은 문턱을 넘기를 완강히 거부한다. 우리는 이것을 ‘자연의 권리’, ‘바이오문화적 프로토콜’, 지역 공동체들의 자결(무역협정들이 시장 투자에 대한 민주적 제약을 약화시키려고 하므로, 여기에 민족자결도 포함될 수 있다) 같은 생각에 대한 서양의 경멸에서 본다. 커먼즈는 시장가격과 사유재산화 너머에 있는 일련의 사회적 가치들에 이름을 붙인다. 커먼즈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정신을 이루는 경제학의 합리적 행동자 이론이나 신다윈주의적 적자생존 내러티브가 파악할 수 없는, 비공식적이고 암묵적이며 경험적이고 간(間)세대적(intergenerational)이며 생태적이고 심지어는 우주적인 실재들을 존중한다.


이런 의미에서 커머너들은 생태계와 인간을 이러저러한 정도로 대체 가능하고 상품화될 수 있는 자원으로 보는 자유주의적인 관료제 국가와 재래식 과학의 세계관에 도전한다. 이 세계관에서는 우리의 노동이 구매·관리되는 ‘인간 자원’으로 취급되며, 꿀벌에 의한 가루받이는 가격이 매겨질 수 있는 ‘자연의 서비스’로 간주되고, 심지어 생명체들도 특허를 낼 수 있고 소유될 수 있는 대상이다. 살아있는 체계들의 양도 불가능성과 그 본래적 (교역될 수 없고 공유되는)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커먼즈는 체제 차원의 변화, 그저 정치적이고 경제적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이고 존재론적인 변화를 발본적으로 요구한다.

 


왜 커먼즈 담론이 중요한가

 


이렇게 커먼즈 담론의 현대사를 살펴본 것은 그것이 커먼즈 운동이 현실화하고자 하는 ‘변화의 이론’을 이해하는 것을 돕기 때문이다. 커먼즈의 언어는 우선 사람들의 인식과 이해의 방향을 다시 잡아주기 위한 도구이다. 그것은 시장 종획의 현실과 커머닝의 가치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조명하는 것을 돕는다. 커먼즈 언어가 없다면, 이 두 사회적 현실은 문화적으로 비가시적인 것으로, 적어도 주변화된 것으로 남아있을 것이며, 따라서 정치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커먼즈 담론은 종래의 정책담론이 무시하거나 숨기고 싶어 하는 도덕적·정치적 주장을 하는 길을 제공한다. 커먼즈의 개념들과 논리를 사용하면 자신들의 친화성과 공유된 과제목록을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무리의 커머너들을 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이들은 그들 자신의 지고의 가치들과 우선적 관심사들을 체계의 상이함의 관점에서 더 쉽게 천명할 수 있다. 커먼즈의 일관된 철학적 내러티브는 지적 섬세함 이상의 것으로서, 자본이 자연 대 노동, 노동자들 대 소비자들, 소비자들 대 공동체와 같은 식으로 이익들을 서로 상충시키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 커머닝의 언어와 경험들을 통해 사람들은 ‘피고용인’과 ‘소비자’라는 제한적인 사회적 역할을 넘어가서 전인적 인간들로서 더 통합된 삶을 살기 시작할 수 있다. 커먼즈의 언어는, 변화에 대한 욕구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자본이 구사하는 ‘분할하여 정복하기’ 전술에 굴복하지 않고, 시장 오용의 다양한 희생자들이 그들의 공통된 처지를 인식하고 새로운 내러티브를 개발하며 새로운 유대관계를 가꾸고 (바라건대) 자본의 논리와는 다른 논리에 의해 추동되는 효율적 대안들을 밤하늘의 별처럼 많이 건설하는 일에 도움이 되는 통합적 비전을 제공한다.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데서 커먼즈 담론이 가진 잠재력은 낮게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비용편익 분석 담론이 음침하게 빛나는 반대사례인데, 1980년대에 미국 산업은 이 분석 담론을 환경, 건강, 안전 규제를 위한 기본 방법론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첫 수는 일단의 사회적·윤리적·환경적 정책들에 시장경제와 수량화의 언어를 이식함으로써 그 정책들을 무력화시켰다. 이 담론은 제정법의 많은 요소들을 효과적으로 흐렸으며 규제에 대한 전반적 인식을 변화시켰다. 나는 커먼즈 담론을 이에 버금가는 종류의 인식론적 개입으로 본다. 우리의 공유된 부를 관리하기 위한 사회적·생태적·윤리적 가치들을 되찾는 체제 차원의 방법인 것이다.

 


경제학과 커먼즈

 



앞에서의 논의가 함축하듯이, 커먼즈 운동은 ‘경제’에 대한 우리의 생각 자체를 변화시키려 한다. 커머너들은 ‘시장’을 지구의 자연 체계 및 우리의 사회적 욕구와 어떻게든 동떨어져 있는 자립적인 ‘자연적’ 사회영역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사회적인 것, 생태적인 것, 경제적인 것을 통합하고자 한다. 폴라니(Karl Polanyi)는 그의 획기적인 책 『거대한 변환』(The Great Transformation)에서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시장 문화가 어떻게 점진적으로 친족관계, 관습, 종교, 도덕, 그리고 공동체를 밀어내고 사회의 주된 질서구축 원칙이 되었는지를 설명했다.((Karl Polyani, The Great Transformation: the Political and Economic Origins of our Time (Boston, MA: Beacon Press, (1944) 2014).)) 이러한 변형은 이제 역전되어야 한다. 그 동안 족쇄가 풀려있었던 자본과 시장은 사회 속에 다시 함입되어야 하며, 사회에 책임을 지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자본 투자, 금융, 생산, 기업권력, 국제무역 등이 사회적 욕구에 종속되어야 한다.



커먼즈 운동은 연대하는 운동들과 함께 탈자본주의적이고 탈성장적인 질서를 위한 제도들과 규범들을 발전시키고자 한다. 이는 시장 기반의 선택들로 이루어진 단색의 주류 문화(monoculture)에, 인간의 가능성들에 대한 (생산자/소비자 쌍이 제공하는 것보다 더) 풍부하고 활력이 넘치는 감각으로 맞서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에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같이 편집한 책 『커머닝의 패턴들』에서 우리는 상이한 인간 능력들과 사회적 형태들에 기반을 두는 수십 개의 매력적이고 성공적인 커먼즈들의 윤곽을 그렸다. 공동체 숲들, 지역 통화들, 팹랩들(Fab Labs), 자치체 수자원 위원회들, 국지적 가족경작을 지원하기 위한 경작지 트러스트들, 생물다양성을 파수(把守)하기 위한 토착민 ‘바이오문화 유산’ 지역들, 퍼머컬처 경작, 커먼즈 기반 기획들에 행정적·법적 지원을 해주는 ‘범(汎)커먼즈’(omni-commons) 조직들 등등이 속한다.((Bollier and Helfrich, Patterns of Commoning.))



그러한 상호화된 자급체계들이 개발되고 확대되어야 한다. 이 체계들은 만족을 모르는 시장의 요구에 복무하는, 부채에 의해 추동되는 경제에 대한 사회적으로나 생태적으로나 유리한 대안들이 된다. (짧은 방주 : 법적·조직적 형태들이 있다고 해서 그것들이 자본주의의 논리의 파쇄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많은 협동조합들이 사이비 조합주의와 관리주의(managerialism)로 타락한 사례들을 보기만 하면 안다. 그렇더라도 그런 형태들은 더 나은 소비 형태들로 이동해갈 잠재력을 제공할 수는 있다. 비록 소비주의를 넘어선 사회적 문화에는 못 미치더라도 말이다.) 또한 퀘벡, 이탈리아, 일본에서 사회적 서비스를 성공적으로 제공하는 다중이해관계자 협동조합 모델에도 희망이 있다. 협동조합 형태들이 사유재산화된 디지털 플랫폼들을 대체할 필요도 있다. 이 플랫폼들은 현재 페이스북, 우버, 리프트(Lyft), 에어비앤비, 태스크 래빗(Task Rabbit), 미캐니컬 터크(Mechanical Turk) 및 기타 ‘공유경제’ 벤처기업들(즉 미시대여와 즉석노동 시장들spot-labor markets)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데, 이들은 사회적 협동의 과실을 사유화·화폐화하고 있다. 온라인 플랫폼들을 위해 협동조합 모델들을 발명하려는 대대적인 새로운 노력이 2015년 11월 9일 뉴욕시에서 열린 ‘플랫폼 협동조합주의’ 컨퍼런스에서 개시되었다.((Platform Cooperativism conference website, http://platformcoop.net.))


세계 전역의 커머너들은 착취적인 사유재산화된 마켓 플랫폼들과 기업 구조들을 대체하려는 여러 중요한 제도 혁신을 선도하고 있다. 이 혁신들에는 다음의 것들이 포함된다.


◉ 쎈소리카(Sensorica)나 엔스피랄(Enspiral)과 같은 오픈밸류 네트워크들(open value networks). 이들은 기업가들과 사회적 성향을 가진 커머너들의 협동적 디지털 ‘길드’로서 기능한다.


◉ 상호혜택을 위한 구매클럽과 재편된 생산/공급망. 이탈리아에서 연대경제(Solidarity Economy)에 의해 개발된 의류생산체계와 커먼즈 기반의 트러스트를 통한 지역 식량공급망을 재발명하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프레즈노 커먼즈(he Fresno Commons).


◉ 국가가 소유한 자원에서 발생하는 수입을 상호화하는, 국가의 면허를 받은 이해관계자 트러스트들. (알래스카 영구 펀드Alaska Permanent Fund 및 피터 반즈Peter Barnes가 제안하는 새로운 모델들.)


◉ 코드를 자유롭게 공유하고 때로는 공동체의 존경 받는 원로들이 이끄는 제휴 재단들에 의해 운영되는 오픈소스 프로그래밍 공동체들.


◉ 모듈 방식의 저예산 자동차, 농기구, 가구 및 기타 유형의 생산물들을 만들어내는 글로벌 자율생산(peer production) 디자인 및 지역 제조 공동체들.



미래에는 ‘블록체인 원장’―이는 비트코인을 가능하게 만든 소프트웨어 혁신의 산물이다―덕분에 열린 네트워크에서 움직이는 분산된 자율적인 조직들이 가능하게 되리라고 많은 첨단기술 종사자들이 예측하고 있다.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는 개개의 디지털 파일(비트코인, 문서, 디지털 신분)의 진정성을 은행이나 정부 기관 같은 제3의 보증인 없이 확인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자기조직된 집단들이 디지털 신분을 확증하는 능력이 민주화됨으로써 (그러면 예를 들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커머너들은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를 그 구성원들에게 특정의 권리를 할당하는 데 사용할 수 있으며 그 결과로 새로운 종류의 분산된 자치 조직이 생기게 된다. 블록체인은 네트워크 기반의 ‘스마트 계약’(smart contracts)을 위한 초보적인 (궁극적으로는 세련된) 틀을 제공할 수 있는데, ‘스마트 계약’은 집단 거버넌스의 다능한 형태들을 가능하게 하며, 또한 디지털 커먼즈의 참여자들 사이에 가치를 공유하기 위한 회계 기반시설(an accounting infrastructure)로서 쓰일 수도 있다.((비트코인에 대해서 더 알고 싶으면 http://p2pfoundation.net/Bitcoin; http://bollier.org/blog/blockchain-promising-and http://www.nytimes.com/2015/03/02/ business/dealbook/data-security-is-becoming-the-sparkle-in-bitcoin.html?_r=1 참조.))



그러나 이 커먼즈 기반 제도들의 다수가 풀지 못한 중요한 문제는 신용과 소득에의 접근이다. 재래의 은행들과 금융기관들은, 심지어는 사회적 및 윤리적 은행들조차도, 이윤을 추구하는 상업적 기업이 아닌 커먼즈에 대출을 해주는 것을 난감해 한다. 예를 들어, 오픈소스 디자인 및 제조 생태계(open source design and manufacturing ecosystem)는 은행에 담보물로 내놓을 지적 재산이 없다. 그래서 이곳의 생산물들―연비가 좋은 오픈소스 차량들, 값싸고 지역에서 부품을 구할 수 있는 농기구들―은 확대를 위한 자본을 구할 수 없다. 다행히도 거의 잊혀진 협동적 금융의 역사적 모델들이 많이 재발견되어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결합하여 커먼즈를 지원하고 있다. 여기에는 새로운 DIY 신용제도들, 대안 통화들, 스페인의 고테오(Goteo) 같은 크라우드펀딩 플랫폼들이 포함된다. 스웨덴의 JAK은행에 의해 개발된 것과 같은 이자 없는 신용이 지역 이행경제들에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준비되고 있는 한편, 다른 이들은 커먼즈를 위한 새로운 유형의 크라우드에쿼티(crowdequity scheme) 제도를 탐구하고 있다.((David Bollier and Pat Conaty, “Capital for the Commons: Strategies for Transforming Neoliberal Finance Through Commons-based Alternatives” (Berlin, Germany: The Commons Strategies Group, 2015).))


기본적인 요점은, 금융 및 화폐와 관련된 탈자본주의적 비전이 일정치 않게나마 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조직된 커먼즈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가치회계와 교환체계들(통화, 신용 포함)을 창출할 태세이다. 이것들이 그들로 하여금 재래의 부채에 의해 추동되는 대출과 시장 기반의 생산이 낳는 병리현상들의 다수를 피해가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병행하여 많은 기존의 금융기관들이 이 부상하는 부문을 보완하고 지원하도록 확대될 수 있다. 노스다코타 주가 설립한 것과 같은 공공은행들은 매우 다양한 사회적·생태적 욕구에 낮은 비용의 신용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개발 금융기관들과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있는 방카 포풀라레 에티가(Banca Populare Etica)와 같은 사회적 및 윤리적 은행들 또한 커먼즈 경제에 필요한 금융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마구 섞여있는 기획들을 한데 엮어서 커먼즈 지향적 금융의 더 통합적이고 발전된 기반시설로 만들기 위해서는 아직 많은 할 일이 남아있다. 그러나 재래의 은행과 금융제도가 자본주의의 모순의 무게 아래에서 내파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새로운 디지털 테크놀로지들과 커먼즈 기반의 공동체들이 새로운 협동적 선택들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세대의 상호적 금융이 큰 전망을 가지게 되었다.((Bollier and Conaty, “Capital for the Commons.”)) 별도로 진행되지만 연관이 있는 것으로서, 커머너들은 화폐를 창출하는 능력에 대한 (정부의) 공적 통제력을 다시 회복하여 화폐가 상업적 대출업자들의 협소한 이윤창출 목표에 복무하지 않고 공적이고 민주적으로 결정된 욕구에 복무하도록 사용될 수 있게 만들 필요를 느끼고 있다.((Mary Mellor, Debt or Democracy (London: Pluto Press, 2015); Mary Mellor, The Future of Money: From Financial Crisis to Public Resource (London: Pluto Press, 2010); Frances Hutchinson, Mary Mellor and Wendy Olsen, The Politics of Money: Towards Sustainability and Economic Democracy (London: Pluto Press, 2003).))



시장과는 다른 간접적 호혜성에 기반을 둔, 커먼즈 기반 생산이라는 크고 다양한 영역이 하는 역할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시간은행들, 오픈소스 네트워크들, 함께 학습하는 공동체들, 예술가 커먼즈(이렇게 몇 개만 들겠다)에의 참여는 일반적으로 일대일 교환에 기반을 두지 않고 공동체 전체에 대한 개인적 헌신에 기반을 둔다. ‘같이 내고 공유하기’(pool and share) 접근법이다. 종종 ‘자발적 부문’ 혹은 ‘선행’으로 치부되는 이 (이반 일리치가 말한 의미의) 공생 공동체들은 사실 부지런히 일하면서 생산하는 곳이다.((Ivan Illich, Tools for Conviviality (New York: Harper & Row, 1973).)) 이 공동체들은 인간적이고 저비용의 방식으로 돌봄과 연관된 많은 서비스들을 수행한다. 이는 정부의 프로그램들이나 시장은 누가 보아도 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커머너들이 구축하고자 하는 ‘새로운 경제’는 경제라기보다는 사회적인 것, 경제적인 것 그리고 자치가 혼합된 혼종이다. 그 결과로 나오는 체계는 수십 개의 사례들에서 보듯이 더욱 투명하고 공동체에 의해 통제 가능하며 더욱 유연하고 지역의 특수한 욕구에 잘 부응하며 신뢰할 만하고 사회적으로 책임감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커먼즈들은 또한 시장이 늘 창출하는 부정적 외부성들(the negative externalities)을 창출할 가능성이 낮다.



커머너들의 큰 과제는 그 모델들을 연합시켜 더 크고 협동적인 사회적 생태계들로 만드는 것이다. 또한 커머너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부를 파트너로 삼아서 커머닝을 위한 법적 틀들, 기술적 지원, 더 나아가 간접적 보조금을 제공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기존의 일국 정부들은 (기업 엘리트들과의 역사적 동맹관계로 인해서) 이 길에 감히 나서기를 꺼려할 수 있기 때문에 도시들이 커먼즈 기반의 혁신들을 배양하는 데 핵심적 발동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최근에 열린 국제 컨퍼런스인 「커먼즈로서의 도시」에 참여한 도시 커머너들의 튼실한 다양성에 의해 충분히 확인된 점이다.((David Bollier Website, “The City as Commons: The Conference,” http://www.bollier.org/blog/city-commons-conference.))


여기서 절차와 관련된, 전략적 함축을 가진 단상을 끼워 넣겠다. 많은 진보적인 사람들은 국가의 법과 공공정책(하향식 체계들)이 ‘체제 차원의 변화’를 성취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이 도구들은 종종 필요하지만, 오늘날 네트워크화된 세상에서는 그 효율성이 점점 감소하고 있다. 현재 당파심에 기인한 정체(停滯)현상과 높은 법률 장벽에 의해 마비되어 있는 재래의 정치제도들을 통해서 변혁을 성취하기란 극히 어렵다.




이 현실을 넘어서, 정부들의 도구성 자체가 종종 비효율적이며 느리고 부당하다. 2014년 책 『규칙들의 유토피아』(The Utopia of Rules)에서 인류학자이자 활동가인 그레이버(David Graeber)는 네트워크화된 시대에 중앙집중화된 명령 및 통제를 행하는 관료체제들이 가지는 구조적 한계들을 열거하고 있다.((David Graeber, The Utopia of Rules (Brooklyn, NY: Melville House, 2015).)) 좌파의 독특한 실패는 인간에게 가능한 규모의 실제로 기능하는 대안들―시민 주도성, 참여, 혁신능력을 긍정적으로 양성할 수 있는 대안들―을 제안하지 못한 것이다. 요컨대, 일상적으로도 의미와 영향을 가지는 ‘강한 민주주의’를 제안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매우 날카로운 통찰이다.(([옮긴이] 이것이 누구의 통찰이라는 것인지 원문에 나와 있지 않다. “strong democracy”는 Benjamin R. Barber의 저서 Strong Democracy: Participatory Politics for a New Age(2003)의 핵심 개념이다.))



전진하는 길 하나 : ‘다음 체제’는 관료제가 잘 수행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서 분산된 네트워크들에서의 수평적 협동을 수용해야 한다. 이는 ‘정부를 재발명하기’의 문제가 아니라 생산, 거버넌스, 상향식 참여를 통합하여 새로운 종류의 커먼즈 제도들을 만드는 문제이다. 경제적·기술적 트렌드들은 명백히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이는 벤클러(Yochai Benkler)가 『네트워크의 부『(The Wealth of Networks)에서, 리프킨(Jeremy Rifkin)이 그의 『한계비용 제로 사회』(Zero Marginal Cost Society)에서, 그리고 보웬스(Michel Bauwens)가 P2P재단의 위키와 블로그에 올린 많은 글들에서 기록하고 있는 현실이다.((Yochai Benkler, The Wealth of Networks: how Social Production Transforms Markets and Freedom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2005), http://public.eblib.com/choice/publicfullrecord. aspx?p=3419996; Jeremy Rifkin, The Zero Marginal Cost Society: The Internet of Things, the Collaborative Commons, and the Eclipse of Capitalism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14); See P2P Foundation, “Michael Bauwens,” http://p2pfoundation.net/Michel_Bauwens/Full_Bio.)) 네트워크 기반의, 혹은 네트워크로부터 도움을 받는 커먼즈는 참여를 통한 통제 및 이익의 상호화를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적 경제를 구축하는 데 매우 필요한 기반시설을 제공할 수 있다. 관료제를 네트워크 기반의 커먼즈와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는 어려운 과제로 남아있다. 그러나 많은 ‘정부 2.0’ 실험들이 이미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여기 서술된 많은 커먼즈 기반 혁신들이 가진 큰 미덕은 전진하기 위해서 반드시 정부나 정책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이 혁신들은 재래의 정치적 장소들을 우회할 수 있다. 물론 법, 정책, 정부조달이 커먼즈 부문의 성장을 촉진시킬 수도 있을 것이며, 시장 기득권자들을 특권화하고 커머닝을 범죄화하는 몇몇 기존의 정부 정책들은 말할 것도 없이 폐지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커먼즈에 대한 재정 지원은 중요하고도 아직 충족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있다. 그렇더라도 커먼즈 기반의 자급 및 서비스 체제들은 혁신적인 방식으로 욕구를 충족시킬 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거대한 위계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비교적 소규모의 복제 및 연합(smaller-scale replication-and-federation)을 통해서 성장한다.

 


사회, 환경, 정치체에의 파급효과

 


위에서 스케치된 경제/자급의 비전은 명백히 불평등, 생태계, 젠더 및 인종 관계, 그리고 정치체에 미칠 광범한 영향을 함축한다. 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서 필자는 커먼즈 중심 사회가 이 문제들을 어떻게 다룰지를 제안할 것이다.


부와 소득 불평등. 사람들의 기본적 욕구가 부채와 이윤추구에 의해 추동되는 시스템에 의해 충족되지 않고 시장의 외부에서 움직이는 커먼즈를 통해 충족될 수 있을 때, 신자유주의가 낳는 부와 소득의 기괴한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 가능하다. 커머닝의 요점은 결국 욕구를 위한 물자조달을 탈상품화하거나 상호화하여 모두의 향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대안화폐 전문가인 고 마그릿 케네디(Margrit Kennedy)는, 시장에서 팔리는 필수적인 재화와 서비스의 비용 가운데 무려 50%가 부채에 해당한다고 추산한 바 있다. 만일 어떤 가족이 재래의 시장과 신용에의 의존성을 줄일 수 있다면 그 생활비용이 극적으로 감소할 수 있으며 약탈적 기업에 의해 피해를 볼 수 있는 가능성 또한 극적으로 감소할 수 있다.


일상생활의 탈상품화와 상호화가 다음과 같은 많은 커먼즈 기반의 제도들을 통해 일어날 수 있다. ① 토지를 시장에서 빼내서 주택비용을 줄이는 공동체 토지 트러스트, ② 고이율과 부채에의 노출을 감소시키는 협동적 금융 대안들, ③ 비용을 줄이고 질을 높이기 위해 협동적으로 생산되는 재화와 서비스, ④ 공유된 기반 시설(에너지, 수송, 인터넷 접근, 소셜 미디어 플랫폼들), ④ 소프트웨어 코드, 데이터, 정보, 과학연구, 창작물들을 위한 커먼즈 기반의 개방된 제도들.



사회적 정의와 인종 및 젠더 평등. 커먼즈 패러다임은 다양한 인종, 민족, 혹은 젠더 문제들을 직접 다루지는 않는다. 그 틀이 거버넌스, 자급, 사회적 협력에 더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커먼즈 패러다임은 포용성과 사회적 유대에 예리하게 집중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제공하는 (그러나 반드시 실현시켜 주지는 않는) 형식적인 법적 권리들을 넘어설 수 있다. 시장은 인간의 욕구에 진정하게 관심을 쏟지 않는다. 시장에게 중요한 것은 소비 수요이다. 돈이 없는 누군가가 소비 수요를 표현하면, 그것은 주변적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커먼즈는 민중의 기본적인 물질적 욕구를 우선적으로 충족시키는 데 바쳐져 있으며, 사회적으로 참여적이고 포용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공동체들이 협동조합을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존엄과 존중을 구축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듯이,((Jessica Gordon Nembhard, Collective Courage: A History of African American Cooperative Economic Thought and Practice (State College, PA: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2014).)) 커먼즈도 사회적 제도로서 사회적 욕구, 공정, 존중에 핵심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커먼즈 역사가(歷史家)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가 주목한 바에 따르면, 여성들, 아이들, 가족들의 경우 “탄생, 양육, 이웃 그리고 사랑이 사회적 삶의 시작이다. 과거의 커먼즈는 전적으로 남성들만의 장소가 아니었다. 사실 커먼즈는 매우 종종 여성들과 아이들의 욕구가 우선시되는 곳이었다. 그리고 산업 ‘슬럼가들’에서부터 이러쿼이 연맹(the Iroquois confederation), 그리고 아프리카의 마을에 이르기까지 ‘욕구’만이 아니라 의사결정과 책임성도 여성들에게 속했다.”((Peter Linebaugh, “Stop, Thief!” Onthecommons.org, April 14, 2014, http://www.onthecommons.org/magazine/stop-thief.))


커먼즈에서 ‘돌봄 노동’―이를 지리학자 니러 씽(Neera Singh)은 ‘정동 노동’(affective labor)이라고 불렀다―이 주된 위치를 차지한다. 이와 달리 자본주의 시장과 경제는 보통 ‘돌봄 경제’―안정되고 건전하며 보람이 있는 삶에 필수적인 가족의 삶과 사회적 공생의 세계―를 무시한다. 시장경제는 이를 시장 영역의 외부에서 어떻게든 스스로 채워지는 본질적으로 무상의 자원으로 간주한다. 아무런 지위가 없으며 따라서 무시되거나 마음대로 착취될 수 있는 ‘전(前)경제적인’ 혹은 ‘비(非)경제적인’ 자원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돌봄 노동을 하면서 여성들이 희생되는 것은 커머너들, 식민화된 사람들 그리고 자연이 겪는 희생과 주목할 만하게 유사하다. 이들 모두가 자본가들이 의존하는 중요한 비(非)시장 가치를 창출한다. 그런데 시장은 일반적으로 이 가치를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1980년 유엔 보고서는 상황을 강렬한 간결함으로 이렇게 진술했다. “여성은 세계 성인 인구의 50%를, 공식적 노동력의 3분의 1을 차지하며 모든 노동시간의 거의 3분의 2를 담당하지만 세계 소득의 10분의 1만을 받으며 세계 재산의 1% 미만을 소유하고 있다.”



독일 작가인 프라에토리우스(Ina Praetorius)는 최근에 그녀의 글 「돌봄 중심 경제―당연시 되던 것을 새롭게 재발견하기」(“The Care-Centered Economy: Rediscovering What Has Been Taken for Granted”)에서 ‘돌봄 노동’이라는 페미니즘적 테마를 훨씬 더 큰 철학적 화판에 투사하여 새롭게 다루고 있다.((Ina Praetorius, “The Care-Centered Economy: Rediscovering What Has Been Taken for Granted,” Heinrich-Boll-Stiftung 7 (April 2015), https://www.boell.de/en/2015/04/07/carecentered-economy.)) 프라에토리우스는, 새로운 구조적 우선사항들을 상상하여 경제제도들과 행위들의 방향을 재조정하는 데 ‘돌봄’의 중요성이 사용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 커먼즈는 시장 외부에 있는 돌봄을 가치창출의 필수적 범주로서 존중하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들을 발전시키는 데 명백하게 기여할 수 있다.


생태계 파수. 개별 자연자원 커먼즈의 단점들이 무엇이든, 그 참여자들은 그 단점들을 거스르지 말고 그것들을 안고 일해야 함을 깨닫고 있다. 시장과 달리 커머너들은 ‘환경’을 대상이나 상품으로 취급하지 않고 그들의 삶의 틀을 이루는, 살아있는 역동적인 체계로 본다. 커머너들은 그들이 의존하는 자연 체계들을 과도하게 착취하게 하는 인센티브를 일반적으로 기업들보다 훨씬 덜 가지고 있으며, 집단적 이익을 위해서 자연의 파수꾼으로 행동할 인센티브를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숲, 어장, 방목지, 지하수, 야생동물을 중심으로 하는 소규모 자연자원 커먼즈들은 주변적 위치에 있는 나라들의 시골지역에서 엄청난 중요성을 가진다.((예를 들어 <커먼즈 디지털 도서관>(the Digital Library of the Commons, http://dlc.dlib.indiana.edu/dlc)의 자료들 참조.)) 이 커먼즈들은 또한 ‘선진’ 세계에서 실행되는 에너지 집약적인 산업화된 농업보다 훨씬 더 생태적으로 친화적이다. 그런데 세계 전역에서 20억 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커먼즈에 의존하여 일상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는데도, 주도적인 경제학 교과서들은 이들을 무시하고 있다. 시장 활동이나 자본축적이 일어나지 않고 단지 가족 용도의 생산만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Paul A. Samuelson and William D. Nordhaus, Economics, 17th edition (New York: McGraw-Hill, 2001); Joseph E. Stiglitz and Carl. E. Walsh, Economics, 3rd edition (New York: W. W. Norton, 2002); “Securing the Commons: Securing Property, Securing Livelihoods,” International Land Alliance website, http://www.landcoalition.org/global-initiatives/securing-commons.))



이 커먼즈들에서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화폐 형태의 보상이 아니라 ‘정동 노동’이다. 인도의 지리학자 니러 씽은 이 용어로 커먼즈 기반의 숲 관리를 지칭했다. 여기서 자기와 주체성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생물리학적(biophysical) 환경과 서로 엮여있다. 사람들은 그들과 그들의 공동체에 중요한 자원의 파수꾼이 되는 것에 긍지와 즐거움을 느낀다. 바로 이 때문에 커먼즈에서 정동 노동은 중요하다. 정동 노동은 우리 자신을 인식하는 방법을 변화시키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변화시키며 환경과의 연관을 변화시킨다. 씽의 말로 하자면, “정동 노동은 지역 주체성들을 변형시킨다.”((Neera Singh, “The Affective Labor of Growing Forests and the Becoming of Environmental Subjects: Rethinking Environmentality in Odisha, India,” Geoforum 47 (2013): 189–198.)) 이것이 새로운, 생태를 더 배려하는 유형의 경제를 구축하는 기반이다.



정치체와 거버넌스. 어떤 유형의 정치체가 커먼즈들의 드넓은 우주를 관장하고 ‘다스릴’ 수 있을까? 이 물음에는 국가의 성격과 역할의 발본적인 변화가 함축되어 있다.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서 국가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 극명해지고 그것이 공중의 불신을 낳은 까닭에, 국가는 더 상향적인 커먼즈 기반의 기획들이 번영하도록 허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힘을 이전할 필요가 있다. 나의 동료인 보웬스(Michel Bauwens)는 커먼즈의 형성과 발전을 도울 ‘파트너 국가’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한 바 있다.((David Bollier Website, “Michael Bauwens: Here’s What a Commons-Based Economy Looks Like,” http://bollier.org/blog/michel-bauwens-heres-what-commons-based-economy-looks)) 커먼즈 친화적인 정치체는 ‘메타경제적인 네트워크들’을 개발하여 여러 행동분야들에 다리를 놓아줄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테크놀로지, 디자인, 소프트웨어, 제조업 분야의) 열린 지식 네트워크들은 농업 및 생태 지속 가능성을 다루는 사람들과 건설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다. 이는 단지 국가가 열린 네트워크들에 관하여 계몽된 의식을 가지는 문제가 아니다. 국가들은 점점 더 네트워크화된 지성과 정치적 정당성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디지털 네트워크들을 통해 움직이는 커머너들은 자신들의 기여를 존중하고 지원해줄 것을 국가에 요구하게 될 것이다.


대규모의 자기조직된 거버넌스는 단지 추측될 뿐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오픈 네트워크 플랫폼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상향식의 자기조직된 거버넌스가 중요하고 복잡한 대상을 실시간으로 관리하는 많은 사례들을 보았다. 2011년의 아랍의 봄 투쟁과 오큐파이 및 M15운동과 같은 몇몇 사례들은 매우 일시적이었다.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공동체들, 위키피디아(8만 명 이상의 편집자들) 그리고 라 비아 캄페씨나(La Via Campesina)―농민들을 국제적으로 조직하였다―와 같은 거버넌스 기획들은 더 지속적이다. 종종 새로운 종류의 ‘미시적 행위자들’이 필요한 ‘거시적 제도들’을 탄생시켜서 새로운 종류의 거버넌스를 발전시키는 데 추동력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렇게 전개되는 모습들은 진화 과학에서 이루어진 몇몇 심오한 발견들과 지난 세대에 일어난 복잡계 과학의 부상에 상응한다. 양자 모두 상향식 사회조직 형태들 및 거버넌스 형태들의 실재가 정당함을 확인해준다. 분산되고 자기조직되어 있으며 협동적인 거버넌스 형태가 가장 안정되고 탄력적인 거버넌스 형태들 가운데 속함을 광범한 경험적 연구들이 확인해준다. 이 주제는 웨스턴(Burns H. Weston)과 같이 쓴 나의 책 『녹색 거버넌스』(Green Governance, pp. 112–130)에서 더 상세하게 탐구하고 있다. 그러나 강조해야 할 기본적인 요점은, 인간의 공동체들이 중앙의 최고 권위나 관료층의 직접적 통제 없이도 상위의 더 복합적인 형태의 조직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거버넌스의 상향식 이론으로서의 ‘창발’(emergence)인 것이다.((Weston Burns and David Bollier, Green Governance: Ecological Survival, Human Rights and the Law of the Commons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3).)) 창발은 만일 충분히 정의되고 유리한 일단의 매개변수들과 조건들이 주어진다면 국지적 상황들에 기반을 둔 안정된 형태의 자기조직화가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반을 둔다. 이는 생물학적·화학적 체계들이 줄곧 보여주는 것이다. 자기촉매적 특징들이 “무상의 질서”(order for free)를 발생시키는 것이다.(([옮긴이] ‘order for free’는 카우프만(Stuart Kaufmann)이 자신의 책 At Home in the Universe: The Search for Laws of Self-Organization and Complexity (Oxford University Press 1995)에서 제시한 아이디어이다. 한국어 번역본에는 ‘저절로 생기는 질서’라고 옮겨져 있다. 한국어본 : 국형태 옮김, 『혼돈의 가장자리』(사이언스북스, 2002).)) 복잡계 과학이 낳은 이러한 통찰은 수많은 자기조직된 커먼즈들에 관한 오스트롬의 발견과 부합한다. 효과적인 거버넌스는 형식적인 국가법에 구현되고 입법자들, 규제자들, 법원들을 통해 관리되는 획일적인 일반 규칙들의 포괄적 그리드를 통해 부과될 필요가 없다. 제대로 된 ‘적응 조건’(fitness conditions)이 존재한다면 거버넌스는 적절한 규모의 능동적 참여 및 동의와 함께 자연적으로 저절로 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보충(subsidiarity)의 원칙(([옮긴이] ‘보충의 원칙’(the principle of subsidiarity)은 가톨릭교회에서 발생한 사회조직 원칙이다. OED에 따르면 이 원칙은 “중앙 권위는 보조적 기능만을 해야 하며 더 직접적인 혹은 국지적인 수준에서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없는 과제들만을 수행한다”(a central authority should have a subsidiary function, performing only those tasks which cannot be performed effectively at a more immediate or local level). 대한민국 헌법의 기본 원칙이기도 하다. 비록 요즘 목격하다시피 현실에서 지켜지기보다는 헌법 조문에만 존재하는 것 같지만 말이다.))과 규모를 연결시키는 체계들(scale-linking systems)(([옮긴이] ‘규모를 연결시키는 체계들’(scale-linking systems)이란 모든 것들이 규모의 차이에 관계없이 다른 모든 것들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과 연관된다. 이해를 돕기 위해 Sim Van der Ryn, Stuart Cowan, Ecological Design, Tenth Anniversary Edition의 한 대목을 옮겨본다. “자연의 과정들은 본래적으로 규모 연결적(scale linking)이다. 에너지와 물질이 규모를 가로질러 흐르는 데 밀접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청록조류(blue-green algae)에서 배설된 산소는 흰긴수염고래에 의해 흡수되며 다시 이 고래에 의해 배설된 이산화탄소를 참나무가 먹는다. 전체적 사이클들이 유기체들을 극히 효율적인 재생 체계로 연결시키는데, 이 체계는 1억분의 1 미터(광합성의 규모)에서 1만 킬로미터(지구 자체의 규모)까지, 규모가 10배 커지는 도약을 17번을 행한다.”(p. 51)))이 중요하다.







물론 네트워크 기반의 거버넌스 체제와 정치체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의 민족국가 거버넌스의 역기능을 넘어가려면 정치체라는 생각 자체가 진화할 필요가 있다. 비록 기업들이 표면상으로 공익에 복무할 허가장을 국가에게 받아왔지만, 앞으로 커머너들의 테크놀로지 플랫폼들이 국가의 권위를 보완하거나 부분적으로 대체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커먼즈가 더 우세해지고 성숙해져서 새로운 유형의 국가의 지원과 협조를 필요로 하게 되면 새로운 거버넌스 형태들이 출현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구축될 새로운 정치체는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구질서의 관점에서는 불가피하게도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결론

 


커먼즈 운동은 커머너들의 살아있는 박동치는 네트워크이기 때문에, 명확한 청사진을 펼치거나 그 미래를 예측하기란 어렵다. 미래의 패러다임은 전진적인 공동창조를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이미 커먼즈 이념의 확장력과 자기복제력을 볼 수 있다. 그것이 극히 다양한 집단들에 의해서 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8개의 나라에 있는 프랑스어를 말하는 커머너들이 2015년 10월에 300개 이상의 행사로 구성된 2주 동안의 커먼즈 축제를 주최했다. ‘커먼즈로서의 도시’를 재개념화하고 있는 도시 활동가들도 있다. 공적 공간들과 해안 토지들의 종획에 맞서 싸우는 크로아티아인들도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커먼즈의 ‘지중해 상상계’(Mediterranean imaginary)를 발전시키는 그리스인들도 있고, 민족식물학적이고 바이오문화적 전통들을 방어하는 토착민들도 있으며, ‘플랫폼 협동조합주의’의 새로운 형태들을 고안하기 위해 움직이는 디지털 활동가들도 있다. 커먼즈 언어와 틀이 뜻밖의 새로운 협력작용과 연대 형태들의 발전을 돕고 있는 것이다.


커먼즈는 핵심 원칙들을 가지고 있지만 투과성 경계를 가진 메타담론으로서 정치의 세계, 거버넌스의 세계, 경제의 세계, 문화의 세계에 동시에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중요하게도 커먼즈는 또한 근대와 연결된 소외에 대해, 그리고 인간적 관계와 의미에 대한 사람들의 본능적 욕구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는 국가도 시장도 현재의 상태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커먼즈 패러다임은 점점 더 합류하고 있는 수백 개의 현재 기능하는 사례들로써 신자유주의 경제학에 대한 깊은 철학적 비판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패러다임은 체제 변화에 대한 행동지향적 접근법인 만큼, 모든 것은 현실적 및 잠재적 커머너들이 지속적인 에너지와 상상으로 전지구적으로 연결된 살아있는 체계를 발전시키는 데 달려있게 될 것이다.


프랑스에 있는 익명의 <비가시 위원회>(Invisible Committee)는 “반란은 역병이나 산불처럼 불씨가 처음 타오른 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선형으로 번지는 과정이 아니다. 반란은 음악의 형태를 띤다. 그 초점들은 시간과 공간상으로 분산되어 있지만 자신의 고유한 떨림의 리듬을 부과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바로 이것이 그 리듬이 많은 공명을 산출하고 있는 커먼즈 운동이 움직이는 거대한 여정을 묘사해준다.



2015년 11월((http://thenextsystem.org/에 발표된 것은 2016년 4월 28일이다.))




공통적인 것, 민주주의 그리고 기본소득

* 다음은 7월 8일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완결된 글은 아니고 단상 형태로 되어있습니다. 실제 발표는 (시간이 15분 정도밖에 없어서) 앞의 그림 한 장을 설명하는 것으로 끝나서 많은 내용이 누락되었습니다. 그 당시 들으러 오신 분들은 이 발표문을 통해 누락된 내용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한글본을 먼저 작성하고 나중에 영어본을 작성했는데, 영어본은 정확히 일대일 대응되는 번역이 아니라 내용상으로 조금 더 다듬어진 번역입니다. 그래서 영어본을 앞에 놓습니다. 한글본은 손을 더 보는 게 좋은데, 이미 잔치가 끝나니 손이 안 가네요;;;; 한글본은 주석 위치가 미주로 되어있는데,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주석을 반드시 읽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완결된 논문이라면 본문에서 상세히 다루었을 대목들을 주석에 자료처럼 배치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대회-정남영-발표문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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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지구대회-정남영-발표문한글본>

Download (기본소득지구대회-정남영-발표문한글본.pdf, PDF)




민주적 화폐와 커먼즈를 위한 자본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2016년 1월 15일 게시글 “Democratic Money and Capital for the Commons”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일반적인 금융 용어나 새로운 금융제도 및 기관을 지칭하는 용어는 전문적으로 사용되는 것과 다르게 옮겨졌을 수 있다.

 

민주적 화폐와 커먼즈를 위한 자본

 

 

대부분의 커먼즈들이 직면하는 가장 복잡하고 가장 해결하기 힘든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금융, 은행, 화폐의 지배적인 체제가 커머닝에 그토록 적대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커먼즈의 독립을 확보하는가이다. 커머너들은 지배적인 화폐체제의 구조적 문제를 반복하지 않고 (어쩌면 반복하더라도 해로움이 웬만큼 덜한 방식으로 반복하면서) 어떻게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가?

 

다행히도 이 문제에 대한 대답들을 조명해줄 수 있는 여러 매력적이고 창조적인 기획들이 세계 전역에 존재하고 있다. 협동적 금, 크라우드에쿼티[각주:1], 대안 통화(通貨), 비트코인에서 사용되는 블록체인 장부, 화폐창출에 대한 공적 통제를 되찾아 (은행만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양적 완화’를 가능하게 하기 등등.

 

이 문제들에 대해 새로운 대화가 개시되는 것을 돕기 위해서 <커먼즈전략그룹>(the Commons Strategies Group)은 하인리히뵐재단과 협동하여 지난 9월 베를린에서 ‘심층 잠수’(Deep Dive) 전략워크숍을 조직했다. 우리는 공적 화폐, 보완 통화, 지역발전 금융기관(community development finance institutions), 공공은행들(public banks), 사회적 및 윤리적 대출, 커먼즈 기반의 가상은행업, 그리고 “협동형 축적”(co-operative accumulation)―집단들이 자신들에게 중요한 자산에 대한 공정한 소유와 통제력을 확보하는 능력―을 가능하게 할 새로운 조직형태들과 같은 주제들과 관련하여 24명의 활동가들과 전문가들을 모았다.

 

나는 그 워크숍에서 다루어진 대화의 주요 테마들과 상충점들을 종합하는 보고서가 지금 나와있다는 소식을 기쁘게 알린다. 그 보고서는 「민주적 화폐와 커먼즈를 위한 자본―커먼즈 기반의 대안들을 통해서 신자유주의 금융을 변형하기 위한 전략들」(“Democratic Money and Capital for the Commons: Strategies for Transforming Neoliberal Finance Through Commons-Based Alternatives,”)(데이빗 볼리어, 팻 코너티Pat Conaty 작성)이라고 불린다.

 

이 54쪽짜리 보고서는 커머너들이 화폐, 은행업, 금융이 어떻게 커머너들의 이익에 복무할 수 있는지를 토론하기 위한 첫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빠르고 쉬운 해답은 없다. 기존의 화폐체제의 아주 많은 부분이 재래의 자본주의 경제에 복무하는 데로 향해져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일지라도 말이다. 기본적인 금융 용어들조차도 무자비한 경제성장, 자원추출 경제 및 그 병적 측면들 그리고 화폐 그 자체가 부(富)라는 생각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빗나가는 논리를 종종 그 안에 품고 있다.

 

그래도 커머너들이 이 주제를 가지고 씨름해야 할 많은 중요한 이유들이 있다. 보고서의 서론 부분에서 말했듯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논리는 적어도 즉각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세 가지의 상호 연관된 체계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 ① 생태계의 파괴, ② 시장을 통한 커먼즈의 종획, ③ 평등, 사회정의, 사회가 시민들에게 사회적 돌봄을 제공하는 능력에 대한 공격이다. 이 세 문제를 통합된 방식으로 다룰 수 있는 혁신적인 협동형 금융(co-operative finance) 및 화폐체제를 발전시킬 방법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 문제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극복될 수 없을 것이다.”

 

서론을 더 보기로 하자.

 

이 병적 측면들을 추동하는 주된 요소는 부채가 이끄는 성장과 규제가 완화된 금융이다. 이는 케인즈 패러다임의 후임자로서 대처와 레이건이 1980년대 초에 도입한 신자유주의 경제의 중심적 요소들이다. 신자유주의로의 이동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법정 금리 한도의 폐지 혹은 완화에 의해 특징지어지는데, 이것의 결과로 많은 기존의 대출이 고리대금업이 되었고 금리가 페이데이론(payday loan)[각주:2]의 경우에는 5,000%로 치솟기도 했다. 이런 약탈은 한때 주로 빈민층, 불안정 노동자들 및 지구상의 후진지역에 대해 실행되었지만, 1990년대와 200년대에는 다른 형태로 중간층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에게로 확대되었다. 이제 과도한 부채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조건이 되었으며 이는 2008년 이후 심화되어 세계 전역에서 경제를 질식시키고 있고 거대한 사회적 불의를 낳고 있다. 그러나 사업은 이전처럼 계속되고 주류 정치는 근본적인 개혁에 관심이 없다.

 

다행스럽게 체제 차원의 변화를 추구할 새로운 기회들이 생기고 있다. 자본주의적 금융의 내적 모순들이 더 명백해지고 더 해로워짐에 따라, 화폐체제에 대한 급진적 비판들이 실천적 대안들의 발전과 함께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협동형 금융의 거의 잊혀진 역사적 모델들이 DIY 신용시스템, 대안 통화들, 협동형 조직모델들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로서 다시 발견되고 있다. 우리는 금융과 화폐에 대한 포스트자본주의적 비전이 간헐적으로나마 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하나 조금씩 바꿔나가는 해결책들―대안적인 은행들, 통화들, 대출제도들, 협동적 디지털 플랫폼들, 정책제안들 등―을 대충 모아놓는다고 해서 일관된 새로운 비전으로 종합될 수 있는가? 이 산만한 영역에서 다양한 기획들과 행위자들이 서로를 발견하고 더 심층적인 협동을 개시하고 더 넓은 지원을 끌어낼 수 있는가?

 

이것이 ‘심층 잠수’의 목적이었다. 54쪽의 보고서는 pdf파일로 여기서 다운받을 수 있다. 그리고 7쪽짜리 핵심요약(Executive Summary)도 여기서 볼 수 있다.

 

공저자인 코너티와 나는 많은 중요한 주제들에 대하여 깊은 지혜를 공유하게 해 준 데 대해, 그리고 최종보고서의 텍스트를 다듬는 것을 도와준 데 대해 ‘심층 잠수’의 참여자들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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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가 다루는 내용이 더 잘 이해될 수 있도록 핵심요약의 나머지 부분을 여기 올린다.

 

  1. 왜 화폐, 은행업, 금융의 변형이 필수적인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특히 2008년 금융 위기 이후에 사회적으로 공정하고 생태적으로 책임 있는 방식으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능력을 명백하게 상실했다. 경제성장과 부의 사적 축적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집착은 약탈적이고 사회적으로 기생적이 될 정도에 이르렀고 전체 체제는 파국적으로 호황과 불황을 반복하는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화폐와 화폐체제가 사회공학과 질서의 보이지 않는 도구로서 작동하는 사회적 창조물이라는 점은 널리 인식되고 있지는 않다. 많은 사람들에게 화폐와 화폐체제는 일종의 자연적인 경제질서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화폐를 창출하는 능력에 대한 공적 (정부에 의한) 통제력을 민간부문으로부터 다시 되찾아서 화폐가 민영은행들 및 금융기관들의 협소한 이윤창출 목표에 복무하기보다는 민주적으로 결정된 공적 욕구에 복무하는 데 사용될 수 있게 하는 것이 전적으로 가능하다.

 

일반 대중은 화폐가 민영은행들에 의해서 새로운 부채―정부들이나 가구들에 의해 이자를 더해 상환될 수 있는 부채―의 창출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각주:3] 그런데 화폐를 정부가 은행으로부터 빌려야 할 어떤 것으로 보지 않고 공통재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 세금을 통해서 세입을 늘리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통화를 공적으로 공급하여 (민간경제에의 투자를 포함한) 사회적으로 필요한 지출에 더 우선적으로 투입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공공기관이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는 데서 생기는 ‘적자’가 애초에 발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화폐는 단순히 새로운 통화의 공적 원천을 나타낼 뿐인 것이 될 것인데, 이는 민영은행들이 이미 화폐를 부채의 형태로 만들어내면서 수행하는 기능이다. 그러나 공적 통화는 이자가 없고 민주적으로 결정되는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민영은행들이 부채 형태로 만들어내는 화폐와 다르다. 이제 민영 대출업자의 상업적이고 이윤에 의해 추동되는 욕구를 우선적으로 충족시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공통의 이익을 위한 화폐가 공적 서비스로서 민주적으로 창출될 수 있으며, 공적 이익을 위해 할당될 수 있다.

 

  1. 커먼즈와 커머닝에 어떻게 재정을 지원할 수 있는가?

 

기존의 금융제도는 착취와 추출의 경제에 바쳐져 있다. 이 경제는 성장이라는 명령이 내장된 다단계 사기에 해당한다. 일반 대중은 이자―은행이 창출한 액수의 화폐에 추가로 붙는 것―를 상환하기 위해서 점점 더 많은 부채를, 경제가 성장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져야 하기 때문이다. 복리로 추동되는 이 부채의 수레바퀴는 반드시 투기와 경제적 위기들을 낳는다. 미국에서 케인즈주의적 개혁과 뉴딜을 낳았고 근대적 복지국가가 출현했던 1929년과는 달리 2008년 이후의 전지구적 은행업과 화폐체제는 그 어떤 근본적인 개혁도 없이 유지되고 있다. 현재 우리의 화폐 및 은행업 체제는 잉여를 창출하기 위해서 사유화, 분업, 공통의 자원의 종획을 이용하는 임대소득 추출(rent extraction)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과정은 사유화된 자원과 노동을 제한하고 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다양한 금융 도구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이러한 금융도구들은 공적이고 공통적인 사용을 위해 새로운 자본을 창출하는 것을 금지하며, 커머너들이 공통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고유한 가치와 자본을 창출하는 능력을 좌절시킨다. 기존의 생산 및 금융 체제는 모든 창출된 가치를 개인의 호주머니로 흡수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커머너들과 금융을 공적 이익을 증진하는 도구로 삼는 데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기존의 임대소득 체제(rentier system)[각주:4]를 부수고 자연과 사회적 가치의 영역을 새롭게 개념화된 총체―여기서 자본은 사회의 집단적 목적에 복무하게 된다―로 재통합하는 데 있다.

 

요컨대 우리는 커먼즈 기반의 민주적이고 공평한 사회를 창출하려면 화폐와 신용의 역할을 다시 상상하고 다시 구축해야 한다. 이는 사람들이 공유된 자원을 공통재로 상상하고 표현하고 창출하는 과정을 통해 커머닝에 그리고 경제적·사회적 협동을 증진하는 데 참여할 수 있도록 금융을 사용함을 의미한다. 이는 기존의 대출의 주된 목적인 개인 자산의 열띤 구매 및 창출과는 매우 다른 정신적 태도이다. 그 핵심은 상호적으로 행하는 과정에 돈을 대는 것이다. 이는 화폐·신용·리스크를 관리하는 (그리고 상호적인 것으로 만드는) 지금과는 전적으로 다른 제도들, 법체계들, 사회적 관행들을 필요로 한다.

 

III. 금융을 변형시키는 아홉 가지의 혁신적 제도형태들

 

그런데 제로에서 시작할 필요는 없다. 좋은 소식은 신용과 리스크가 커먼즈에 복무하도록 새롭게 개념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이전에는 여러 제한된 방식으로 행해졌다. 이미 이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출현한, 매우 다양한 역사적으로 입증된 유망한 사례들이 있다. ‘심층 잠수’는 아홉 개의 금융혁신모델들을 탐구했다.

 

  1. 사회적·윤리적 대출

스페인의 피아레(Fiare)와 이탈리아의 방카 에티카(Banca Etica)와 같은 윤리적 사회적 은행들은 그들의 대부(貸付)가 사회와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활발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은행들은 공정무역운동, 기업의 사회적 책임, 지역에서 어엿한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지역사업들, 기타 협동적·사회적 관심사들과 연관된 대출자들에 집중한다. 방카 에티카는 400개 이상의 지방 정부들과 연결되어 있어 공적 부문 및 공동체 요소를 강력하게 가지고 있다. 이 협동적 은행의 자기자본은 현재 5천2백만 유로인데 3만5천 명의 주주들과 90개의 지역 그룹들이 소유하고 있으며, 이들은 은행의 생산물들과 서비스들을 개발하는 것을 활발하게 도우며 그 사회적 의무에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다.

 

  1. 지역발전 금융기관들

지역발전 금융기관들(Community Development Finance Institutions, CDFIs)[각주:5]은 협동적이고 상호적인 대출을 하는 기관들의 한 종류로서 미국에서 특히 인종차별에 맞서 신용에의 접근을 민주화하는 방법으로서 번성해왔다. 클린턴과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강력한 지원을 받은 덕택에 현재는 1천 개 이상의 사회적 임무에 의해 추동되는 기관들이 공식적으로 지역발전 금융기관들로서 인정되고 있으며, 2-3배가 되는 또 다른 기관들이 공인은 받지 못했으나 유사한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의 자산을 다 합하면 수백억 미국 달러에 달한다. 지역발전 금융기관들은 영국에서도 발전되어 유사한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다.

 

  1. 공공은행들

상업적 은행체제에 의해 가속되는, 호경기와 불경기를 반복하는 경제에 대한 매력적인 대안은 공공은행이다. 공공은행들은 공적 대출 경비를 즉각적으로 내릴 수 있고 이윤을 추출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적 욕구에 부응할 수 있는 자본을 제공할 수 있으며 그런 기획의 이자경비를 줄임으로써 기반시설 투자의 경비를 낮출 수 있다. 그 한 사례가 노스다코타 은행(the Bank of North Dakota)이다. 이 은행은 노스다코타의 60만 명의 주민들에게 10년에 걸쳐 3억 달러 이상의 배당금을 산출하면서도 소기업, 학생들, 농민들에게 낮은 이자의 대부를 제공한다. 1938년과 1974년 사이에 캐나다 은행(the Bank of Canada)도 공공 은행업을 담당하는 지부를 통해 전국 규모로 이런 식으로 영업을 했다. 캐나다에서 가장 큰 기반시설 프로젝트 가운데 일부―예를 들어 쎄인트 로렌스 씨웨이(St. Lawrence Seaway)[각주:6]―도 이런 식으로 재정을 확보했다. 시립은행들을 포함하여 세계 전역에 공공은행업의 좋은 사례들이 많이 있다.

 

  1. 이행지향적 신용

전통적 은행들이 가진 핵심적 문제는 성장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나 시장 금리가 낮을 때에는 허우적거린다는 점이다. 따라서 생태에 대한 의식을 가진 몇몇 공동체들은 성장과 무관한 상황에서도 잘 작동할 수 있으며 탄력 있는 지역 경제를 뒷밭침할 수 있는 신용 및 금융모델을 고안하려고 애쓰고 있다. 스웨덴의 쌈브루켓(Sambruket) 공동체는 자연자원 커먼즈와 이를 보완하는, 지속 가능하게 작동할 금융 커먼즈를 모두 수립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협동조합인 이 공동체는 지역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뒷받침하는 한 방식으로서 크라우드에쿼티 비영리 시스템을 실험하고 있다.

 

  1. 공동체의 기반시설로서의 블록체인 장부

비트코인이 투기에서 하는 역할에 대해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트코인은 그 혁신적인 ‘분산된 원장’ 혹은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로 인해서 금융상의 중요한 전진이다. 이러한 획기적인 시스템은 개방된 네트워크들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개인의 비트코인(혹은 디지털 증명서나 문서)의 진정성을 은행이나 정부기관 같은 제3자 보증인이 없이 확증할 수 있게 한다. 이는 널리 확산될 수 있다.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는 네트워크 플랫폼들에서 사회적 관계를 관리하는 데―예를 들어 디지털 네트워크들에 기반을 둔 ‘분산된 협동조직들’이나 한 집단의 공동 거버넌스를 위한 틀들을 수립하는 데―신뢰할만하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사용자들이 다른 사용자들의 신뢰성이나 신빙성을 확증할 일상적 수고를 덜 수 있다면, 개방된 네트워크 시스템들에서의 교류관계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에 제한이 없게 될 것이다.

 

  1. 보완통화들

<공동체 대장간>(Community Forge, communityforge.net)은 공동체들로 하여금 자신의 지역통화를 창출하게 하고 거래와 구성원들의 계좌를 관리하게 하며 개인 및 집단의 욕구를 선전할 수 있게 하는 소셜 네트워킹 플랫폼이다. 400개 이상의 공동체들이 드루팔(Drupal) 기반의 플랫폼을 사용하여 보완통화들(complementary currencies)을 관리한다. 2014년 말에 <공동체 대장간>은 프랑스에서 550개, 벨기에에서 113개, 스위스에서 63개의 LETS 프로젝트들[각주:7]과 150개의 시간은행들을 지원했다. 흥미로운 대안통화 가운데 하나는 유코인(uCoin)이다. 이는 프랑스에서 암호화폐(cryptocurrency)를 사용하여 기본소득을 시행하려고 하는 기획이다

 

  1. 커먼즈를 위한 크라우드펀딩

가장 혁신적인 크라우드펀딩 기획은 고테오(Goteo)이다. 이는 스페인에 기반을 둔 오픈소스 플랫폼으로서 커먼즈 기획과 원칙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코테오가 일반적인 크라우드펀딩 사이트들과 다른 점은, 프로젝트들을 개선하는 데 대중의 참여를 권유하고 기부자들에게 더 큰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고테오는 400개 이상의 프로젝트들에 재정을 지원했으며 기금마련 목표들을 충족시키는 데 있어서 60-70%의 성공률을 기록했다. 5만 명 이상의 사용자들이 있으며 2011년 창립한 이래 2백만 유로 이상을 모았다.

 

  1. 엔스피랄과 커먼즈 기반의 가상 은행업

엔스피랄(Enspiral)은 뉴질랜드에 본부를 둔, “비즈니스와 테크놀로지의 도구들을 사용하여 긍정적인 사회변화를 만드는” 기업가들·전문가들·해커들의 네트워크이다. 이 기업은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이용하여 새로운 유형의 자원의 집단적 자급(self-provisioning)과 금융을 주관할 새로운 조직구조를 창출한다. 그런 플랫폼 가운데 하나인 ‘my.enspiral’은 엔스피랄 서비스(Enspiral Services)의 프리랜서와 계약자 집단에게 자율성과 유연성을 가진 ‘월드 가든’(walled garden)[각주:8] 내에서 내부 은행업시스템의 사용을 허용한다. 엔스피랄은 또한 공동예산(Cobudget) 플랫폼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참여자들이 기여한 액수에 비례하여 집단적 예산책정에서 돈을 할당할 수 있게 해준다.

 

  1. 협동형 축적을 위한 새로운 조직형태들

몇몇 조직형태들은 ‘협동형 축적’―즉 상호이익을 위한 금융자원의 집단적 축적―의 새로운 형태들을 양성하는 데서 큰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 두드러진 사례가 특히 이탈리아, 캐나다의 퀘벡, 그리고 더 최근에는 뉴욕시에서 발전된(Solidarity NYC) ‘연대(連帶) 경제’(solidarity economy)와 다중이해관계자 협동조합(multi-stakeholder cooperative) 모델이다. 1990년대 영국의 공정무역 운동에서 발전된 협동조합 주식의 발행이 2008년 이래 매우 다양한 지역 및 공동체의 욕구―재생 가능한 에너지의 개발, 지역 상점들의 구제, 공동체에 의한 주점 구입, 지역 식품생산을 위한 토지 획득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를 위한 자본을 모으기 위해 부활되었다. 캐나다까지 확산된 영국의 공동체 주식운동은 어떻게 협동조합 형태의 자기자본(equity capital)이 공통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조달될 수 있는지를 부각시켜 준다.

 

  1. 전진을 위한 전략들

 

참여자들은 전진하기 위한 핵심 전략들 다섯을 아래와 같이 확정했다.

 

  1. 화폐를 민주화하라.

커머너들은 화폐창출체제를 포획하여 공적 목적을 위한 것으로 바꾸고 부채에 기반을 둔 화폐를 대체해야 한다. 아이슬란드 정부는 이 일을 하는 법을 보여주는 2015년 보고서를 낸 바 있다.

 

  1. 현행의 화폐를 넘어서라.

화폐는 (재화의 구매를 위한 가격에 기반을 두어 합의되는) 등가물들의 교환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관계를 증진하고 돈이 없는 사람들을 배제하는 행위들을 증진하는 경향을 가지므로, 많은 커머너들은 커먼즈의 간접적인 상호성을 존중함으로써 ‘화폐 너머’로 나아가고 싶어 하며, 공동체에 더 큰 자결능력을 줄 방법이 될, 상이한 맥락을 가진 상이한 유형의 화폐를 반갑게 맞이하고 싶어 한다.

 

  1. 미래로 돌아가라. (옛 것과 새 것의 혼합)

노동운동 및 좌파 정치와 연관된 옛 협동조합 모델들의 역사적 경험들과 지혜가 젊은 세대들이 발전시키고 있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기반을 둔 새로운 모델들과 혼합되어야 한다. JAK 수수료 기반 은행[각주:9], ‘음의 이자’(negative interest)가 적용되는 감가(減價)화폐(demurrage currency), 대공황 시기에 지역 경제를 촉발하기 위해서 개발한 WIR 통화 같은, 시간의 검증을 받은 많은 모델들이 화폐형태를 혁신하는 데 영감을 주고 있다.

 

  1. 협동형 축적을 위한 시스템을 설계하라.

‘협동형 축적’―즉 상호적으로 사용되고 민주적으로 관리·가동되어 공통의 부를 창출하는 자본 형태들을 발전시키고 유지할 수 있는 금융예비금이나 자산을 축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능력을 가진 새로운 조직 형태들을 (단지 금융제도만이 아니다) 고안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탈리아, 퀘벡, 일본 등지의 다중이해관계자 협동조합들은 커머너들, 협동하는 사람들, 그리고 지속 가능한 공동체 발전을 위해 공생(共生)적 법적 구조들을 발전시키는 방법에 관한 가이드를 제공할 수 있다.

 

  1. 새로운 화폐체제를 커먼즈로 구상하는 거시적 지도를 그려라.

우리는 사람들의 일상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실물 경제’와 기생적 ‘임대소득-금융’이 지배하는 ‘비실물 경제’를 구분해야 한다. 커먼즈 기반의 신용 및 금융 체제의 지도를 거시적으로 그리는 것이 새로운 경제를 구조짓고 작동 가능하게 만드는 관계들을 그려보는 것을 도울 수 있다.

 

다음 단계들

 

위의 목표를 넘어서 더 나아가기 위한 몇몇의 특수한 행동조치들이 확정되었다. 여기에는 다음의 것들이 포함된다 : 이론적·개념적 연구, 정책개발과 확대, 금융 및 커먼즈에 대한 더 풍부하고 광범한 담론의 개발, 협동과 행동주의를 위한 새로운 장(場)의 창출, 새로운 통화들에 대한 실험의 심화, 프로젝트 개발과 커먼즈 제도들을 위한 펀딩. 즉각적인 제안 하나는 나라를 황폐화하는 사회적·경제적 위기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법을 개발해내려고 몸부림치는 시리자와 그리스 민중에게 조언을 해주고 지원하자는 것이었다.

 

결론

 

‘심층 잠수’ 토론은 커먼즈 기반의 화폐체제와 민주적이고 공평한 원칙에 기반을 둔 자본이 전적으로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많은 기존의 혹은 새로 출현하는 모델들이 지배적인 부채 및 이자 체제를 극복할 수 있으며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변형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었다. 어려움은, 그토록 많은 복잡하고 겉보기에 분리된 측면들을 가진 체제 내에서 뿌리와 가지가 모두 바뀌는 근본적인 변화와 이행 제도들의 창출을 실제로 달성하는 데 있다. 현재의 체제를 변형하여 그것을 수용적이고 민주적으로 책임감이 있으며 사회적으로 건설적이고 생태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실제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 토론으로부터 마찬가지로 분명해진 것은, 많은 선택항들이 있으며 이는 양자택일적인 선택이 아니라 공존 가능한 과제들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자 없는 화폐, 부채에 기반을 두지 않는 공공부문 화폐, 여러 공적·사회적·협동적 은행업 형태들의 많은 역사적 사례들 및 현행의 사례들로부터 영감과 지침을 얻을 수 있다. 이 혁신들 각각은 서로 다른 욕구와 기능에 복무한다. 그러나 모두가 서로 보완적이며, 커머너들과 그 공동체들에 공평한 자본 및 기타 윤리적이고 유용한 금융서비스들을 제공할 수 있는 공생적 화폐체제로 통합될 수 있다. 오늘날 가능한 선택항들을 발전시키는 데서 명백하게 존재하는 문제는 기존의 개혁 기획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고 약하게 조직되어 있다는 점이다. 민주적인 동시에 지속 가능하고 인간적인 형태의 발전에 바쳐지는 화폐개혁운동에 활기와 통일성을 부여할 공유된 메타내러티브가 아직은 없다.

 

커먼즈의 원칙과 실제는 변화를 위한 역동적이고 통합된 과제를 수립하는 것을 도울 수 있으며, 많은 튼실한 도구들과 정책 제안들을 활용할 수 있다. 통일성을 부여하는 내러티브 또한 무책임한 민영은행들이 가진, 허공에서 부채 기반의 화폐를 창출하는 힘에 저항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 필수적이다. 국가와 국민은 은행가들로부터 이 주권적 힘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 협동적이고 민주적으로 책임감이 있는 형태의 조직들이 공통의 이익에 복무하는 실천들을 보호·유지하고 파수(把守)할 수 있는 가능한 대안적 사회구조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들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엄청난 압력행사가 필요하다. 화폐는 민주화되어야 한다. 부채의 구속은 폐지되어야 한다. 협동적 금융, 은행업, 그리고 공적으로 생성되는 통화의 새로운 체제들이 수립되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만 커먼즈는―특권을 가진 소수의 이익을 위해 종획되고 수탈되는 것이 아니라― 보호되고 증진되며 모두에게 복무하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 ‘Equity crowdfunding’(지분투자형 크라우드 펀딩)과 같은 말이다. ‘equity’(지분)를 크라우드펀딩 방식으로 투자자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 월급을 기반으로 한 소액의 대출을 가리킨다.
  • 조폐공사에서 지폐를 찍어내기 때문에 화폐를 조폐공사에서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지폐는 개념상으로 화폐가 아니라 화폐가 존재하는 한 양태이다. 은행에서 누군가에게 대출을 할 때, 대출자의 저금통장에 찍히는 대출금만큼 은행은 화폐를 만들어낸 것이 된다. 대출자는 이 화폐를 지폐로 교환할 수도 있고 다른 계좌로 이체할 수도 있다.
  • ‘rentier’(임대소득자)는 영어 위키피디아는 “특허, 저작권, 이자 등에서 파생되는 소득을 받는 사람 혹은 법인”(a person or entity receiving income derived from patents, copyrights, interest, etc)이라고 설명하고 옥스퍼드 사전은 “재산이나 소득으로부터 소득을 끌어내는 사람”( A person who derives his or her income from property or investment)이라고 설명한다. 어떻든 생산에 직접 참가하는 기업가 유형의 자본가는 여기에서 배제된다. 여기서는 뒤에 ‘체제’라는 말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임대소득’까지만 썼다.
  • 웹을 검색해보니 ‘지역개발 금융기관’, ‘지역사회발전 금융기관’, ‘커뮤니티개발 금융기관’ 등 여러 가지가 번역어로 쓰이고 있다(띄어쓰기는 고려에서 배제하고). 나는 길이를 좀 줄이고 ‘개발’이 주는 어감이 싫어서 ‘발전’을 택했다.
  • ‘St. Lawrence Seaway’는 캐나다와 미국에서 바다를 오가는 배들이 오대호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갑문, 운하, 수로들로 이루어진 시스템이다. ‘쎄인트 로렌스’는 온타리오 호수에서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가는 강의 이름이다.
  • LETS : 지역교역시스템(local exchange trading system)은 지역 주도로 민주적으로 조직된 비영리 공동체 기업이다. 공동체 정보서비스를 제공하며 지역에서 만들어낸 통화를 사용하여 재화 및 서비스 거래를 기록한다. (Wikipedia)
  • 이는 클로즈드 플랫폼(closed platform)의 다른 이름이다.
  • 스웨덴의 협동조합형 은행이다. ‘JAK’은 고전 경제학에서 세 개의 생산요인인 토지, 노동, 자본을 의미하는 스웨덴어 ‘Jord Arbete Kapital’의 앞 자를 딴 것이다. 관리 및 개발 비용은 회비와 대여 수수료로 지불한다.

 




안드레아스 베버의 “경이의 생물학” ― 진화와 커먼스의 힘으로서의 생동성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2016년 2월 25일 게시글 “Andreas Weber’s “Biology of Wonder”: Aliveness as a Force of Evolution and the Commons”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안드레아스 베버의 “경이의 생물학” ― 진화와 커먼스의 힘으로서의 생동성

 

사오년 전에 안드레아스 베버를 만났을 때, 나는 다윈주의의 정통 견해들에 도전하는 그의 대담함에 놀랐다. 그는 매우 근본적이지만 아직 설명되지 않고 있는 현상인 ‘살아있음’(aliveness)을 과학이 연구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삶(생명)이 세련된 진화하는 기계들의 집합이며 각자의 기계들은 자연이라는 자유방임적 시장에서 우위를 획득하기 위해 최대의 효율성을 가지고 무정하게 경쟁하고 있다는 신다윈주의적 설명을 거부한다. (이 주제에 관해서 더 알고 싶으면 ‘살림’Enlivenment에 대한 베버의 환상적인 에세이를 참고하라.)[각주:1]

 

베버는 풍성한 과학적 연구 자료를 활용하여 진화에 대한 기존의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개략적으로 제시하는데, 이 이야기에서는 살아있는 유기체들이 (경쟁과 협동을 공히 행하는 투쟁의 과정에서) 본래적으로 표현적이고 창조적이다. 베버의 주장에 따르면, 진화의 드라마의 핵심은 모든 살아있는 체계들이 자신들의 개별성을 펼쳐가면서 자신들이 느끼고 경험하는 것을 표현하고 세계에 적응하려는, 그리고 세계를 바꾸려는 탐구적 노력이다.

 

몇 개의 에세이들과 대중강연들을 제외하면, 베버의 글들의 대부분은 그의 모국어인 독일어로만 접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핵심적 아이디어들의 일부가 이제 영어로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짜릿한 기쁨을 준다. 뉴쏘싸이어티 출판사에서 막 출판된, 그의 서정적이면서도 과학적으로 엄밀한 책인 『경이(驚異)의 생물학―생동성, 의식, 그리고 과학의 변신』(Biology of Wonder: Aliveness, Consciousness and the Metamorophosis of Science)을 읽어보기 바란다. (사실을 말하자면,[각주:2] 원래의 독일어 글을 베버가 직접 번역한 ‘원산 영어’를 개선하도록 베버를 돕는 데서 나도 좀 역할을 했다.)

 

미래의 역사가들은 나중에 이 책을 생물과학에서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온 이론과 연구를 공고히 하고 설명하는 획기적 성취로서 돌아볼 것이다. 『경이의 생물학』은 로크, 홉스, 아담 스미스 같은 정치사상가들이 제공한 문화적 틀이 어떻게 생물학 연구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설명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표준적인 다윈주의 생물학 서사가 어떻게 자연선택 및 기계로서의 유기체에 대한 생각들을 인간 사회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투사했는지를 설명한다. 다윈주의와 ‘자유 시장’은 함께 성장했던 것이다.

 

베버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상황이 이제는 바뀌고 있다.

 

19세기 이래 자연에서 정서를 축출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노력을 했던 생물학은 이제 감정을 삶의 토대로서 재발견하고 있다. 지금까지 연구자들은 유기체들의 구조와 행동을 발견하고 싶은 열의로 인해 유기체의 내적 실재라는 문제를 얼버무려왔다. 그러나 오늘날 생물학자들은, 유기체가 어떻게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산출하며 발달경로들을 해부하려 할 뿐만 아니라 다시 상상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수많은 새로운 세부적 사실들을 배우고 있다. 생물학자들은, 테크놀로지가 미시적 수준에서 삶을 연구할 수 있게 하면 할수록 삶의 복잡성과 지성의 증거가 더 강해진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유기체들은 여기저기서 기계적 조각들을 모아 조립한 시계들이 아니다. 유기체들은 강력한 힘에 의해 통합되어 있으며 무엇이 자신들에게 좋고 나쁜지를 느끼는 통합체들이다.

 

진화의 거대 서사에서 감정, 정서, 도덕성, 심지어는 영성(靈性)(spirituality, 정신성)도 중요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랫동안 내버려져 있었다. 그런 경험들은 일반적으로 우주에서 벌어지는 주된 행위―진화를 진전시키는 냉혹한 수단인 추잡하고 무자비한 경쟁―에 비해 사소한 여흥 정도로 치부되어져 왔다. 실로 근대에 들어와서 ‘적자생존’이라는 생각은 ‘자유 시장 경제’에 대한 우리의 문화적 사고와 실질적으로 결합되었다.

 

베버의 과학자로서의 놀라운 주장은, 생물학이 살아있는 체계들을 마치 그것들이 유전적 청사진에 의해 (이러저러한 정도로) 추동되는 ‘작은 기계들’인 양 연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생물학은 감정 자체의 연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베버는 말한다. 그러나 이 증거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생물학이 먼저 계몽적 사고의 핵심적 전제들을 벗어던지고 살아있는 체계들을 다른 렌즈를 통해 보기 시작해야 한다.

 

현재 생물학은 분석의 주된 단위로서 개체에 특권을 부여하며, 명확한 인과관계 패턴을 찾는다. 생물학은 매우 짧은 시간 동안만 존재하는 우리의 소용돌이치는 내적 감정들, 의식, 의미 감각을 망각되어도 좋은 현상으로 본다. 비합리적이고 비가시적이며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그런 감정들은 측정될 수 없고 합리성과 무관하기 때문에, 우주의 거대한 지리-물리학적이고 생-물리학적인 힘들에 비해 사소한 것으로 상정된다.

 

이 책에서 베버는 “세포 수준에서 복잡한 인간 유기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에서 주관적 감정이 근본적인 동력”임을 균형 잡힌 확신을 가지고 논증한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인간을, 다소 설명 불가능하게 정신, 영혼 등으로 알려진 어떤 주체적 ‘x 인자’를 동반하는 생물학적 기계로서 이해해왔다. 그러나 이제 생물학은 주체성을 자연 전체에 걸친 근본적인 원리로서 발견하고 있다. 생물학은 박테리아 세포, 수정란, 저습지의 선충류(線蟲類)와 같은 가장 단순한 생명체들도 가치에 따라 행동함을 발견한다. 유기체들은 그들이 마주치는 모든 것을 그것이 그들의 육화된 자아의 더 나아간 정합성에 대해 가지는 의미에 따라 평가한다. 고도로 구조화된 질서를 연속적으로 유지하는 세포의 자기생식조차도 우리가 세포를 목표를 지속적으로 좇는 행위자로서 인식할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새로운 시점(視點)을 ‘시적 생태론’(poetic ecology)이라고 부른다. 감정과 표현을 유기체들의 실존적 실재의 필연적 차원들로 간주하기 때문에, 즉 단순한 부수 현상이라거나 인간 관찰자의 편견이라거나 아니면 기계 안의 유령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들의 실재에서 우리에게 필수적인 측면들로 보기 때문에, ‘시적’이라고 부른 것이다.

 

삶에 접근하는 방식을―과학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다시 짜면서 이 책은 계시의 힘을 얻기 시작한다. 그는 접근 가능한 생물학 연구 보고들을 그 자신이 일인칭으로 풀어내는 통쾌한 이야기들과 결합시킨다. 늑대들, 깊은 숲 및 기타 자연현상들과 마주치는 이야기들이다. 독자는 깨닫기 시작한다. 당연하게도 근대정신의 이원론은 환원적이고 방향이 잘못 되었음을. 당연하게도 우리는 모두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서로 그리고 인간 외부의 세계와도 또한 경험적이고 주체적인 방식으로 소통한다는 것을.

 

베버는 자연 세계가 생물학적 기계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을―과학적 사실로서―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우리에게 청한다. 자연 세계는 살아있는 창조적 행위자들의 감각적이고 맥동치는 망(網)이라는 것이다. 우리를 ‘자연’으로부터 떼어놓고 자연을 타자로서 따로 분리하는 정신적 경계들을 우리가 일단 녹여버릴 수 있으면, 우리는 다른 살아있는 존재들과, 그리고 살아있는 지구와 항상적이고 역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보기 시작할 수 있다.

 

철학자 토머스 베리(Thomas Berry)는 이 점을 “우주는 객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주체들의 친교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잘 표현했다. 환경 윤리를 발전시키는 것은 새로운 정책들을 입안하는 것 이상의 것이다. 그 핵심은 세상에 살고 있는 인류 자체를 다시 상상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관적 감정과 경험이 중요하다는 생각, 그것들이 생태론적으로 의미심장하다는 생각은 몇 가지 놀라운 결론들에 이르게 한다. 베버는 이렇게 쓴다.

 

만일 감정이 물리적 힘이고, 이 감정의 표현이 물리적 실재이며 이 실재의 의미가 유기체에게 행동의 동기를 부여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바이오영역(biosphere)에서 일어나는 일이 어떤 점에서는 예술적 표현을 닮은 것으로 상상할 때 살아있는 존재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또 다른 흥미로운 귀결이 나온다. 예술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더 이상 아니며, 오히려 예술은 우리 안에 가득한 삶의 목소리인 것이다. 아름다움이 아무런 기능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 메시지가 아니다. 아름다움은 오히려 실재의 본질이다······ 감정은 결코 비가시적이지 않다. 그것은 특정의 모습을 띠며 자연 어디에서나 형태로서 발현한다. 따라서 자연은 아직 펼쳐지지 않은 감정으로서, 우리 앞에 그리고 우리 사이에 있는 살아있는 실재로서 간주될 수 있다.

 

이 논리는 우리를, 합리적 개인을 지고의 존재로 간주하는 계몽주의 윤리의 한계를 보게 해준다. 이제 우리는, 감정을 가진 신체들이 다른 마찬가지로 감정을 가진 신체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 그리고 살아있는 유기체들의 주관적 감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새로운 생태론적 윤리의 토대이다. “느끼는 신체가 모든 도덕성의 그라운드 제로이며, 모든 좋고 나쁜 것의 기원이다”라고 베버는 말한다.

 

『경이의 생물학』은 커먼즈에 대한 이해와 깊은 함축된 연관을 가진다. 만일 감정이 결코 비가시적인 것이 아니며, 자연 어디에서나 형태를 띠고 발현된다면, 그렇다면 커먼즈가 우리의 생동성(살아있음)을 재발견하기에 가장 좋은 길일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상호관계를 더 해독 가능하게 만드는 길이며 전체(the whole)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길이다. 베버는 이렇게 말한다.

 

생태론적 커먼즈에서는 상이한 개인들과 다양한 종들로 이루어진 다중이 서로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경쟁과 협동, 동업관계와 약탈, 생산과 파괴. 그런데 이 모든 관계들은 하나의 상위법을 따른다. 길게 보면 전체 생태계의 생산성을 허용하며 그 자기생산을 차단하지 않는 행위만이 증폭된다는 법이다. 개체는 전체가 스스로를 실현하는 조건에서만 스스로를 실현할 수 있다. 생태적 자유는 이런 형태의 필연성을 따른다. 체계 안의 연관들이 깊어질수록, 그 체계는 거기 속한 개체들에게 더 많은 창조적인 생태적 지위들을 제공할 것이다.

 

이런 윤리는 이미 다양한 커먼즈들 내에서 작동하고 있다. 오픈소스 프로그램 GNU/리눅스의 한 버전인 우분투(Ubuntu)의 이름은 말 그대로 보면 ‘인간-됨’(human-ness)을 의미하는 반투(Bantu)어 단어에서 왔다. 그 정신은 또한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짧은 블로그 글로는 이 중요한 책의 풍요롭고 자극적인 통찰들을 제대로 다룰 수 없다. 『경이의 생물학』에는 매력적인 과학적 발견들과 베버 자신의 ‘바이오시적인’(biopoetic) 감성들이 가득하지만, 그는 자신의 학식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축축한 감상성으로 빠지지도 않는다. 그는 새로운 유형의 과학의 옹호자이다. 일인칭 주체성의 중요성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과학이다.[각주:3] 진지한 경험주의는 적어도 이만큼을 요구하는 것이다.

 

삶의 본성 자체에 대한 이 지극히 창의적인 명상은 시적인 동시에 과학적이다. 이것이 바로 요점이다. 앞으로『경이의 생물학』이 우리의 육화된 자아들 내에 세워진 오해의 벽들을 허무는 일을 돕기를 바란다. ♣

  1. 이 블로그에 번역되어 있다. http://minamjah.tistory.com/86 그런데 베버의 에세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볼리어의 소개글이다. 베버의 에세이는 다음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http://www.boell.de/en/2013/02/01/enlivenment-towards-fundamental-shift-concepts-nature-culture-and-politics
  2. 볼리어는 사실 “full disclosure”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는 소프트웨어의 취약점 분석을 가능한 한 빨리 발표하는 것을 가리키는 컴퓨터 용어인데, 왠지 이런 맥락에서는 ‘깔때기를 대자면’으로 옮기고 싶은 충동이 든다^^ 볼리어가 자신의 기여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3. 볼리어나 베버가 어느 정도 이것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푸꼬가 말년에 한 철학 작업의 주요 테마 가운데 하나가 ‘주체성의 일인칭 형태의 진실 말하기’이다



플랫폼 협동조합주의에 대한 트레버 숄츠의 새 보고서


저자: David Bollier 

원글: “Trebor Scholz’s New Report on Platform Cooperativism” (2016.2.15) /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 

옮긴이:  정백수


 

기업의 ‘공유경제’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고 있는데 거기서 주된 작용을 하는 것 하나는 ‘플랫폼 협동조합주의’(platform cooperativism)를 발전시키는 운동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의 뉴욕사무소는 ‘공유경제’를 비판하고 그 대안들을 서술하는 보고서를 냈다. 그 제목은 「플랫폼 협동조합주의―기업의 공유경제에 도전하며」(“Platform Cooperativism: Challenging the Corporate Sharing Economy”)이며, 뉴스쿨(The New School)((뉴욕 시티 소재의 진보적인 대학이다.))의 부교수인 트레버 숄츠(Trebor Scholz)가 작성했다.

 

숄츠는 이 주제에 대한 역사적 발화점 역할을 한 2015년 11월 컨퍼런스를 저널리스트 나탄 슈나이더(Nathan Schneider)와 공동으로 조직했다. 사람들은 우버(Uber), 에어비앤비(Airbnb), 태스크래빗(TaskRabbit), 미캐니컬터크(Mechanical Turk)가 나타내는 ‘긱 경제’(gig economy)의 많은 반사회적 효과들을 깨닫기 시작했으나 가동 가능한 대안들의 발전이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이 보고서의 전반부는 이른바 공유경제의 많은 결점들을 다룬다. 우선, 공유경제의 핵심은 공유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온디맨드식 서비스 경제’(on-demand service economy)로서 종래의 자본주의에서 사용된 것과 같은 착취 기술에 여전히 의존하면서 여기에 향상된 강력한 테크놀로지가 추가된다.

 

공유경제 시스템은 놀라운 편의와 효율을 제공하지만, 보수가 좋은 안정된 직업을 획득할 수 없는 사람들을 잡아먹기도 한다. 이 시스템은 삯일을 대대적인 규모로 다시 도입하는데, 이번에는 세련된 컴퓨터 알고리즘을 사용하여 임금을 서서히 최소로 내리면서 그렇게 한다. 모두가 명목상으로는 독립된 계약자로 간주되기에, 기업 플랫폼들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작업환경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밀턴 프리드먼의 고전적인 말을 어깨를 으쓱하고 되풀이하며 자신들에게 책임이 없음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임금이 낮고 노동자보호가 잘 되어있지 않은 나라로 일자리가 많이 이동하게 되면 그 자리를 채운 노동자들은 많은 경우 철저한 전지구적 경쟁의 제물이 된다. 기업 플랫폼들은 일반 기업이 지출하는 경비―자본 기반 시설, 규칙적 보수지급, 피고용자에게 주는 혜택―를 지출할필요가 없는 수지맞는 중개인 역할을 한다.

 

이 보고서에서 숄츠는 긱 경제가 이전에는 시장 외부에 있던 자원들을 금융화하는 것에 주목한다. 우리의 차들, 아파트들, 개인 시간 등 모든 것이 이제 기업 플랫폼들을 통해서 화폐화될 수 있으며 시장의 힘에 종속될 수 있다. 실상 이 새로운 시스템은 “사회적 상호작용에 (이윤)추출과정을 끼워넣고” 있으며 “규제완화된 자유로운 시장을 이전에는 사적이었던 삶의 영역들로 확대하고” 있다고 숄츠는 쓴다.

 

법을 전복하지는 않지만 우회하는 것이 긱 경제의 핵심 요소라는 점이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비합법성이 우버 같은 회사들의 사업모델의 핵심 요소라고 숄츠는 설명한다. 우선 그들은 ‘피고용인들’이 아니라 ‘독립 계약자들’에 의존하는 새로운 종류의 네트워크기반 시장을 창출함으로써 노동자 및 소비자 보호를 위한 연방법 및 주(州)법을 무시한다. 그런 다음 그들은 점증하는 고객을 거론하며 일자리를 창출하는 자신들이 ’낡은‘ 규제들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입법자들을 설득한다. 실상 그러한 (노동자 및 소비자) 보호를 좌절시키거나 철회시키기 위해 로비활동을 하는 것이 우버, 에어비앤비, 아마존의 사업전략의 핵심요소이다.

 

숄츠는 긱 경제에 대한 인간적 대안인 플랫폼 협동조합주의가 다음의 세 가지 전략에 의존한다고 설명한다.

 

1. 우버, 에어비앤비 등의 테크놀로지의 핵심을 복제하는 것.

2. 플랫폼들의 소유와 관리에서 사회적 유대를 발전시키는 것.

3. 혁신과 효율이라는 아이디어를 소수에게 이윤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관점에서 다시 짜는 것.

 

나아가 숄츠는 여러 유형의 협동적 플랫폼들과 이 플랫폼들이 돌아갈 수 있는 혹은 실제로 돌아가는 방식들을 도입한다. 여기에는 지금 대한민국 서울에서 발전되고 있는 무니비앤비(Munibnb) 같은 도시 소유의 플랫폼들이 포함된다. 무니비앤비는 에어비앤비 같은 플랫폼이지만 돈을 흡수해서 투자자에게 바치거나 관광객들에게 ‘유령 동네’를 임대하는 것을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 서비스의 재원을 마련하고 아파트 소유자들에게 더 나은 임대료를 주는 데 이윤을 이용한다.

 

또한 숄츠는 사용자들(users)이 생산자들(producers)이 되는 (따라서 프로듀저‘produser’이다) ‘프로듀저 소유의 플랫폼들’을 서술한다. 예를 들어 스톡 사진(stock photography) 사이트들 혹은 스트리밍 음악을 제공하는 사이트들은 협동조합으로서 소유되고 관리될 수 있다. 또 다른 사례로서, 노동조합들이 자신들이 통제하는 가상의 고용실2을 두어서 이윤을 사회적 혜택으로 바꿀 수 있다.

 

숄츠는 플랫폼 협동조합들을 위한 10개의 기본 원칙들을 제안한다. 이 원칙들은 소유, 어엿한 보수와 소득 안정, 투명성과 데이터 관리, 노동의 진가의 인정, 보호를 위한 법적 틀, 이동 가능한 노동자 보호 및 혜택3에 초점을 둔다. 이 비전은 그것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분명히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서 협동조합에 재정을 대는 새로운 형식들―크라우드에쿼티4와 소액 투자자들 등―이 필요한 것이다.

 

이 플랫폼 협동조합주의 보고서는 민주적으로 소유되는 가동 가능한 대안들로 ‘공유경제’에 반격을 가하는 절실한 과제를 개괄하는 중요한 일을 한다. 물론 남아있는 큰 과제는 실제로 이 협동적 사회적 경제를 건설하는 일이다. ♣

  1. 뉴욕 시티 소재의 진보적인 대학이다. [본문으로]
  2. hiring hall : 이는 보통 노동조합의 후원 하에 노동조합과 집단교섭을 하는 새로운 사용자 인력을 조달하는 일을 담당하는 조직이다. 일단 ‘고용실’로 옮긴다. [본문으로]
  3. 이동 가능한 노동자 보호 및 혜택 : 노동자 보호 및 혜택이 하나의 사업장에 국한되어서는 안 되고 어떤 노동자가 사업장을 바꾸더라도 연속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취지이다. [본문으로]
  4. crowdequity : ‘Equity crowdfunding’(지분투자형 크라우드 펀딩)과 같은 말이다. ‘equity’(지분)를 크라우드펀딩 방식으로 투자자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데이빗 볼리어와의 인터뷰

  • 다음은 데이빗 볼리어가 최근에 나온 책 『커머닝의 패턴들』(Patterns of Commoning)에 관하여 웹진 ≪셰어러블≫(Sharable)의 캣 존슨(Cat Johnson)과 인터뷰한 기사를 옮긴 것이다. 다소 모호한 부분들이 있어서 세부의 정확성보다는 내용전달의 손쉬움에 초점을 두었다. 정확하고 세밀한 이해를 원하는 사람은 아래 원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셰어러블≫의 기사에는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Unported 라이선스가 적용된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www.bollier.org)에도 일부가 올려져있다.

 

 

(문) 셰어러블 : 이 책에서 당신과 질케(Silke)는 커머너로서 생각하고 배우고 행동하는 것을 커먼즈 운동의 핵심으로 보고 그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요?

 

(답) 볼리어 : 그것은 우리가 당연시해왔던 몇몇 이분법들을 무너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집단과 개인, 합리와 비합리 등등의 이분법들이죠. 커먼즈에서는 이것들의 경계가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유기적 온전체로서의 커먼즈에 대해 말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커먼즈를 부품들로 해체하거나 해부할 수 있는 기계인 것처럼 보면 안 됩니다. 커먼즈는 살아있는 유기체이며 바로 이것, 즉 그 살아있음이 우리가 연구할 바인 것입니다.

 

전통적인 근대 과학은 살아있음을 탐구하기를 거부합니다. 근대 과학은 살아있는 인간이 되는 것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대지에서 살아있는 인간이 되는 것의 본질에 도달하지 못하는 많은 환원론적 범주들을 만들어 냅니다. 내 생각에 커먼즈는 살아있는 종류의 관심사들에 응하고 싶어하며, 특히 진부한 학술계 사람들이 사용하고 싶어하는 많은 전통적인 지식의 상자들에는 부합하지 않습니다.

 

(문) 이 책에서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되는 점 하나는 하향식으로 움직이는 정책입안자들과 전문가들은 커먼즈를 디자인하고 구축하지 못하며 커먼즈가 번성하리라고 기대하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유기적 커먼즈는 하향식으로 제조된 커먼즈와 어떻게 구분되나요?

 

(답) 기성 제도의 후원을 받는 커먼즈들에서는 아래로부터의 헌신·공유·공동창조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 만큼 이런 커먼즈들은 외부에서 연출되는 다른 누군가의 드라마에 출연할 뿐이며, 사람들 스스로에게서 나오며 사람들의 이익, 욕구, 내적 삶에 복무하는 창조적 분출의 표현과는 반대됩니다.

 

제도들은 민중의 내적 욕구와 열망에 응하지도 못하고 그것을 표현하지도 못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지만, 커먼즈는 그럴 수 있고 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말한 살아있음의 본질입니다. 커먼즈는 스스로를 복제하는 고유한 에너지와 열망을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섬광처럼 매력을 발휘합니다. 이는 매우 특별합니다. 이는 커먼즈가 민중의 실질적 욕구를 표현하는 그 순간에 살아있는 특유한 사회적·역사적·문화적 현상이라는 사실에 담겨 있습니다.

 

이는 몇몇 사람들이 커먼즈를 이해하기 위해서 행하는 자원할당 유형의 분석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자원분석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문) 이  책에는, 삶 혹은 생산에서 커먼즈로서 작동하도록 구축될 수 없는 부분은 거의 없다는 흥미로운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당신은 지난 두 책1을 통해 커먼즈 기획의 놀라운 스펙트럼을 제시해왔습니다. 커먼즈 기반의 경제 혹은 세계는 당신이 보기에 어떤 것입니까?

 

(답) 이건 어떤 면에서는 3살짜리 아이가 50살이나 80살이 되면 어떻게 보일지를 묻는 것과 같군요.

 

삶의 경험 가운데에는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우발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이런 것을 예측하려면 긴 전개과정이 펼쳐져야 합니다.

 

 

일단 이 말을 해두고요. 내 생각에 이것은 어떤 중앙의 권위가 그것을 디자인하고 그런 다음에 예산을 얻고, 그 다음에 구축하기 시작하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내 생각에 이는 생물학적인, 혹은 진화적인 전개과정에 더 가깝습니다. 많은 소규모의 원칙들과 동학이 이 과정을 활성화할 것입니다.

 

이 과정은 거대한 펼쳐짐이자 드라마입니다. 혹자는 커먼즈의 규모를 키워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규모’라는 단어는 실제로 위계구조를 표현하는 용어임이 지적된 바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복제하고 연합하는 것이 더 핵심이 되고 있습니다. 이는 전과는 다른 구조인데,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지역에 헌신하면서도 더 넓은 유대와 지원을 천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상이한 디지털 부족들이 있는 인터넷에서 이런 것을 봅니다. 거기에는 중앙 권위가 없습니다. 비록 때로는 다음 수준으로 가는 것을 돕는 기반시설을 필요로 하지만 말입니다.

 

많은 부분을 한데 묶어줄 것은 새로 출현하여 서로를 발견하기 시작한 특정의 윤리와 문화일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많은 활동가들, 커머너들의 모임에 참가하면 서로를 발견하고 서로를 아는 데서 오는 쾌활함과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상이한 영역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윤리적 원칙들과 문화적 관심사들을 공유합니다.

 

(문) 패턴의 관점에서 커먼즈를 보는 접근법은, 커먼즈들이 복합적이고 살아있는 시스템들임을 인정하며, 커먼즈들이 생겨나고 성장한다는 사실을 존중합니다. 이 접근법은 또한 이 패턴들이 우리의 문화적 유산이라는 사실을 수용합니다. 이런 각도에서 커먼즈를 연구하는 것이 주는 이익은 무엇일까요?

 

(답) 이 접근법은 커먼즈의 실질적인 인간적 복합성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힘에 도달하지 못하는 환원론적인 범주들이나 모델들로 분해하지 않고 포착하게 해줍니다. 나는 양자택일적 태도를 취하고 싶지 않습니다. 커먼즈에 관한 많은 학술적 연구가 필요하긴 합니다. 하지만 모델구축이 포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풍부한 실재가 존재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원래 그대로의 일화(逸話)와 과도하게 추상적인 모델들 사이에 스윗스팟이 있습니다. 패터닝(patterning)은 이 반복되는 형식들 가운에 일부를 포착하는 한 방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적 작업의 결과를 위에서 아래로 실재에 부과하는 것과 정반대의 것으로서, 아래로부터 위로 작동합니다.

 

(문) 이 책은 커머닝과 커먼즈의 더 풍요로운 패턴 언어의 발전이 개시되기를 바라면서, 커머닝의 패턴들을 서술하는 첫 걸음으로서 짜여 있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며, 커먼즈의 패턴 언어는 과연 어떤 것인가요?

 

(답) 질케는 이 책에서 자신이 집필한 부분에서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에서 툭 튀어나와서 반복될 수 있는 특정 테마들을 얻는 것이라는 식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떻게 커먼즈를 보호하는가?’, ‘커먼즈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떻게 특정의 법적 혹은 사회적 시스템들을 창조할 것인가?’와 같은 테마들이 있죠.

 

또 다른 패턴으로는 ‘당신은 어떻게 그야말로 커먼즈를 스스로 깨닫게 되는가?’, ‘비가시적인 커머닝의 차원들을 어떻게 가시화하는가?’가 있습니다. 질케는 우리 책의 많은 이야기들을 관통하며 반복해서 튀어나오는 황금의 실들과 같은 테마 패턴들 가운데 일부를 포착하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기존의 경제적 분석틀의 일부인 경합과 배제2

에 갇히지 말고 이 패턴들을 보고 커먼즈의 내적 기능을 더 세련되고 더 리얼리스틱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문) 이 책은 계획된 3부작 가운데 둘째 권입니다. 셋째 권은 어떤 책이 될까요?

 

(답) 아직 극히 초기 단계에 있는 다음 책은, 거시적 차원에서의 커먼즈가 가지는 의미, 즉 정책, 경제, 국가에 대해서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게 될 것입니다.

 

이번 책은 커머닝의 내적 차원과 몸으로 겪는 실재에 소규모로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다음에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 거시적인 차원에서 함축되는 것들을 보고자 합니다. 법이 어떻게 변하여 커먼즈를 포용하게 될 것인가? 국가가 커먼즈 중심의 사회를 허용하려면 그 역할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이것은 국제관계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것들이 우리의 셋째 권의 내용이 될 것입니다. ♣

  1. The Wealth of the Commons와 Patterns of Commons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2. 경합과 배제 : 이는 이른바 전통적 경제학의 근본적 원칙인 ‘희소성’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희소성을 전제하면 한 사람이 어떤 재화를 차지할 때 다른 사람은 그 재화를 차지할 수 없게 된다. 이 희소성의 원칙은 무한히 복제할 수 있는 디지털 생산물이 등장하면서 근본적인 위기에 봉착하는데, 자본은 지적 재산권으로 재화에의 접근을 막음으로써 (‘제2의 종획’) 가상의 희소성을 창출하는 식으로 위기를 넘겨가고 있다. [본문으로]

출처: http://minamjah.tistory.com/108?category=452913 [百手의 블로그]




오픈 플랫폼에서 디지털 커먼즈로의 이동

* 아래는 카탈로니아 개방대학(Universitat de Oberta Catalunya)의 블로그에 「열린 사유」 시리즈의 일부로 게시되었으며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에 2015년 11월 5일자로 게시되기도 한 볼리어의 글 “The Shift from Open Platforms to Digital Commons”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카탈로니아 개방대학의 블로그는 여러 형태의 자율생산(peer production)의 장점과 한계를 탐구하는 곳이다. 전문 용어의 옮김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의 옮김과 다를 수 있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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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플랫폼에서 디지털 커먼즈로의 이동

옮긴이 : 정백수

오픈액세스 플랫폼에서 관리되는 디지털 커먼즈로―이는 네트워크 기반의 자율생산1이 자신에게 잠재한 엄청난 가치를 실제로 창출하려면 감당해야 하는 주된 과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오픈 플랫폼이 가져다주는 미망

 

우리는 오픈 플랫폼을 더 많은 자유 및 혁신과 동의어로 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구글, 페이스북 등 첨단 거대기업들의 부상에서 보았듯이 대기업들이 지배하는 오픈 플랫폼은 시장 규범들과 일정한 사업모델들의 경계 내에서만 ‘무상이다’(free). 그렇다, 오픈 플랫폼은 사용자들에게 그 어떤 (화폐 형태의) 경비도 지출하지 않게 하면서 많은 가치 있는 서비스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어떤 재화나 서비스가 무상으로 제공될 때, 그것은 실제로 사용자가 바로 생산물임을 의미한다. 이런 경우 우리의 개인 관련 데이터, 관심, 사회적 태도, 삶의 스타일, 행동방식, 심지어 우리의 디지털 신원까지도 플랫폼의 소유자들이 ‘소유’하려고 하는 상품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많은 플랫폼들은 그렇게 자애롭지 않다. 다수가 멱법칙(power law)2의 구조적 동학에 의해 강화되어 있는 기술-경제적 요새들로서, 지배적인 기업들로 하여금 온라인 활동의 일정한 부문을 독점하고 화폐화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 플랫폼에 기반을 둔 시장력(market power)3은 그 다음에 사용자의 삶을 감시하는 데, 때로는 개방된 상호운용성(interoperability)과 공유에 반(反)경쟁적 방식으로 장벽을 치는 데, 그리고 사용자들이 그러한 플랫폼에서 가질 수 있는 내용과 ‘경험’을 소리 없이 조작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4

 

‘오픈 플랫폼’이 가져오는 그런 결과가 전적으로 놀랍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결과는 우리가 자본주의 시장들에서 익히 보아온, 배타적 자산의 획득을 도모하여 그 자산을 화폐화하려는 노력들을 나타낸다. 이 경우에 자산의 원천은 우리의 의식, 창조성, 그리고 문화이다. 앞을 더 길게 내다보는 자본가들은 (정해진 참여조건으로) ‘플랫폼을 소유하는 것’이 내용에 대한 배타적 지적 재산권을 소유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 시장들이 제공하는 협소한 상업주의적 ‘자유’를 넘어서) 기본적인 인간적·시민적 의미에서의 자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물음은, 양도될 수 없는 인간의 자유와 공유된 문화적 공간들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이다. 만일 네트워크의 지배적 장소들이 투자자들, 기업 중역진, 시장연구기관의 요구를 우선적으로 충족시켜야 한다면, 우리의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서로 연결하고 혁신할 자유가 번성할 수 있는가?

 

우리가 시장 너머의 삶과 연관된 인간의 자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표준적인 형태의 ‘사적인’ 기업통제를 넘어서는 ‘플랫폼 협동조합주의’의 새로운 양태들을 개발하는 데 나서야 할 것이다. 우리는 사용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온라인 공유의 혜택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게 하는 기술적·조직적·재정적 형식들을 개척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개인정보와 디지털 신원을 그런 정보의 신뢰할 만한 지킴이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제3자에게 강압에 의해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양도하는 것을 피할 수 있어야 한다.

 

커먼즈 기반의 플랫폼으로 이동해야 하는 다른 이유들도 있다. 리드(David P. Reed)가 1999년에 발표된 독창적인 글5에서 보여주었듯이, 네트워크에 의해 창출된 가치는 ‘최고의 콘텐츠’에 기반을 둔 방송모델에서 P2P거래 네트워크로 이동하면서 상호작용이 증가함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방송모델에서는 가치가 시청자들의 수인 n이지만, P2P거래 네트워크에서는 가치가 ‘최대 회원수’에 기반을 두며 수학적으로 n2으로 표시된다.

 

그러나 가장 가치 있는 네트워크들은 공유된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집단으로의 결집을 촉진하는 네트워크들이다. (나는 그런 집단들을 커먼즈라고 부른다.) 리드는 “집단 형성 네트워크들”(group forming networks)―여기서 사람들은 “공통의 목적을 위한 자유롭고 책임 있는 결사(結社)”에 쓰일 도구들을 갖추고 있다―의 가치는 2n임을 발견했는데 이는 환상적으로 큰 숫자이다. 그의 분석이 시사하는 바는, 페이스북, 트위터 등의 사유(私有) 네트워크 플랫폼들이 창출하는 가치는 참여자들이 서로에 대한 신뢰와 확신을 발전시키는 데서 제한된 도구들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픈소스 도구들을 사용하면 사업 모델을 전복시킬 것이다) 극히 초보적인 것으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커먼즈의 잠재적 가치가 고의적으로 억눌려 온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이유로 우리의 상상력과 포부는 그 초점을 오픈 플랫폼에서 디지털 커먼즈로 이동해야 한다. 자율적으로 조직된 커머너들이 자신들의 상호작용과 거버넌스의 조건들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들의 협동과 공유의 결실들을 수확할 수 있어야 한다.

 

 

카피페어 라이선스(CopyFair license)를 향하여

 

커머닝의 수단으로서 오픈 플랫폼이 가진 구조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다양한 법적·기술적 혁신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기획들은 아직 초기 단계에 있지만, 매우 유망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기획들은 디지털 커머너들에게 시장의 포획에 저항하고 집단적으로 창출된 내용, 공동체 규범, 그리고 신원의 종획에 저항하는 힘을 부여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 기업의 플랫폼들은 생산자/소비자 관계로만 이루어진 단일한 사회적 문화(social monoculture)6에, 그리고 플랫폼 소유 회사의 사업모델(혹은 더 일반적으로는 시장 관계들)에 맞춘 사회적 행동에 특권을 부여한다. 이와 달리, 자율적으로 조직된 커먼즈는 더 풍요롭고 더 다양하며 의미 있는 유형의 자유와 문화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기본적 문제는, 디지털 커먼즈들이 성장하고 유지되기가 힘든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이 커먼즈들은 적절힌 조직적 구조와 거버넌스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적절한 재정지원을 받지도 못한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의 혁신들이 이 문제의 해결을 도울 수 있다.

 

현재 탐구되고 있는 하나의 가능한 기획은 예를 들어 때로는 ‘카피페어’(CopyFair)라고 알려진 ‘커먼즈 기반의 상호 라이선스’이다. 저작권 소유에 기반을 둔 이 라이선스는 커먼즈의 구성원들 사이에는 무상의 공유를 허용하지만, 공동체의 작업의 결과를 상업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용료의 지불을 요구한다. 이 아이디어는 현재 P2P 재단의 보웬스(Michel Bauwens)와 개방-농업 하드웨어 개발자들 등에 의해 계속 다듬어지고 있다. 일정 계열의 정보나 창조적 작품의 상업적 발전을 완전히 정지시키는 비상업적인 크리에이티브커먼즈 라이선스와 달리, 카피페어 라이선스는 상업화를 허용하지만, 필수적인 (화폐화된) 상호성을 기반으로 해서 허용한다.

 

 

블록체인의 잠재력

 

오픈 플랫폼들을 디지털 커먼즈로 전환시키는 또 하나의 도구는 비트코인의 중심부에 놓여있는 소프트웨어 혁신의 사례인 블록체인 원장(元帳)이다. 비록 비트코인 자체는 익숙한 자본주의적 기능들(세금회피, 투기를 통한 사적 축적)에 복무하도록 고안되었지만, 블록체인 원장은 개방된 네트워크들에서 극히 다양하고 신뢰할만한 집단행동이 가능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이는 디지털 객체(digital object)(현재로서는 비트코인이다)의 진정(眞正)성을 은행이나 정부와 같은 제3의 보증자 없이 확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는 특히 어려운 집단행동 문제를 개방된 네트워크의 맥락에서 해결한다. 당신은 일정한 디지털 객체―비트코인, 법문서, 디지털 증명서, 데이터군, 투표한 표, 혹은 어떤 개인이 주장하는 디지털 신원―가 위조된 가짜가 아니라 ‘진짜’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블록체인 기술은 모든 거래들(즉, 비트코인들)을 계속적으로 추적하는 검색 가능한 온라인 ‘원장’을 사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한다. 이 원장은 방대하게 분산된 수평적 네트워크에 의해 유지되는 일종의 영속적인 기록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기록은 중앙집중화된 장소에 보관되는 데이터보다 훨씬 더 안전해진다. 네트워크의 수많은 접속점들에 등록되는 특정 비트코인의 진정성을 부패시킨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능력 때문에 최근에 발표된 한 보고서는, 블록체인 기술이 ‘분산된 협동 조직들’(distributed collaborative organizations, DCO, 때로는 ‘분산된 자율적 조직들’이라고도 불린다)이라고 불리는 것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기반시설을 제공해줄 수 있으리라고 보고 있다.7 이 조직들은 본질적으로 자율적으로 조직된 온라인 커먼즈이다. DOC는 블록체인 기술을 사용하여 그 구성원들에게 조직 내에서의 명시된 권리를 부여할 수 있는데, 이는 블록체인에 의해서 관리되고 보장될 수 있다. 이 권리들은 다시 기성의 법체계에 연결되어 그 권리들을 법적으로 인지되고 시행될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블록체인이 어떻게 커먼즈를 촉진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본적 사례 하나를 들어보자. 미국 전 연방소통위원회(Federal Communications Commission) 의장인 헌트(Reed Hundt)는 블록체인 기술을 사용하여 태양광 발전을 사용하는 주택들을 커먼즈로서 연계시킨 분산된 네트워크들을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 블록체인 원장이 특정의 주민이 얼마만큼의 에너지를 생성하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며 소비하는지를 추적하게 된다. 사실 이 체계는 탈중심화된 태양광 그리드들8의 조직화를 가능하게 하고 태양광 미시그리드들 혹은 네트워크들 내에서 교환 매체 역할을 할 ‘녹색 통화’(green currency)를 가능하게 한다.9 그러면서 태양전지판의 채택을 추진하게 되는 것이다. 블록체인은 커먼즈 기반의 거버넌스를 가능하게 하는, 네트워크 기반의 아키텍처(architecture)10에 해당하는 것이다.

 

 

스마트거래(Smart transactions)

 

이러한 실험의 장은 디지털 커먼즈를 만드는 데 사용될 또 하나의 획기적 도구를 산출할 수 있다. 바로 스마트계약(smart contracts)이다. 이는 (TCP/IP or http 같은) 공유된 프로토콜의 아키텍처에서 작동하는 동적 소프트웨어 모듈들로서, 오픈 네트워크 플랫폼들에서 새로운 유형의 집단 거버넌스, 의사결정, 규칙 시행이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이미 이런 생각의 초보적―이며 기업지향적인―형태에 익숙하다. 예를 들어 디지털 권리 관리(Digital Rights Management, DRM)가 그 하나인데, 이는 사용자들이 합법적으로 구매한 테크놀로지(DVD, CD 등)를 사용하는 방법을 제한하는 능력을 회사에 부여하는 암호화/인증 시스템이다. 그러나 네트워크 협동의 힘이 분명해지자, 이제 진정한 과제는 디지털 인공물들을 잠그고 사유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오픈 플랫폼들에서 (특정의 기여자 집단이나 모두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서) 합법적으로 시행 가능한 방식으로 신뢰할만하게 공유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임을 많은 기술 혁신자들이 인식하고 있다.

 

기존의 법 아래에서도 시행 가능한 법 업무를 보는 ‘스마트한’ 법무 대리인을 배치하는 기술 시스템들을 고안하려는 많은 활발한 노력들이 현재 진행 중이다. 물론 이 ‘업무’는 새로운 유형의 시장들을 발명하는 데 사용될 수 있지만, 새로운 유형의 커먼즈를 창출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두 영역은 서로 혼합되어 공동체를 위한 일과 시장 활동을 결합하는 사회적 혼종들을 창출할 수도 있다.

 

이와 연관된 소프트웨어 혁신 영역에서는 잘 알려진 협동 구조들을 오픈 네트워크 플랫폼들과 혼합하여 온라인 시스템을 통한 집단적 협의와 거버넌스―‘커머닝’―를 가능하게 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목할 만한 실험들로는 루미오(Loomio), 민주주의OS(DemocracyOS), 리퀴드피드백(LiquidFeedback)이 있다. 이들 각각은 온라인 네트워크들의 구성원들이 직접적이고 지속적이며 다소 복잡한 논의를 수행할 수 있게 하고 그 다음에는 집단이 생각하는 바를 드러내서 참여자들이 구속력 있고 정당하며 의미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결정들에 도달할 수 있게 한다.

 

 

자율생산자들의 네트워크들

 

그런 능력의 자연스러운 확대인 ‘열린 가치 네트워크들’(open value networks, OVN)은 경계가 확연히 지워진 네트워크들의 참여자들로 하여금 크라우드펀딩, 지식의 크라우드소싱, 공동예산마련을 신원 확인이 가능한 구성원들 사이에서 실행할 수 있게 하려는 시도들이다. 엔스피랄(Enspiral), 센소리카(Sensorica)와 같은 ‘열린 가치 네트워크들’은 “새로운 종류의 조직을 위한 운영체제”이며 “새로운 경제를 위한 파일럿 프로젝트”라고 불려왔다. 경계가 뚜렷한 공동체들의 구성원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탈중심화되고 자율적으로 조직된 사회적 거버넌스, 생산 및 생계의 새로운 양태들을 촉진하는 디지털 플랫폼들이 OVN들을 구성한다. 누구든 기획에 기여하고 그 기여에 기반을 두어 보상을 받도록 허용하는 방식으로 네트워크들이 조직된다. 보상은 실질적 기여, 경험 및 기타 집단적으로 결정되는 기준에 의해 측정된다.

 

시장 기반의 활동을 피하는 ‘전형적 커먼즈’와는 달리 열린 가치 네트워크들은 시장에 관여하는 데 단서를 두지 않는다. OVN들은 커먼즈 기반의 자율생산자들로서의 조직적·문화적 온전성을 유지하고 싶을 뿐이다. 여기서는 개방적이고 수평적인 대규모의 협동과 연계가 이루어지고, 개인이 자원에 접근하고 자원을 사용하고 저자로서의 지위와 소유권을 가지도록 허용되면서도 공유된 부와 자산의 책임 있는 파수(把守)가 이루어지며, 공통의 원장 체계를 통한 개인적 ‘투입과 산출’의 세심한 계산이 이루어지고, 개인적 기여에 기반을 둔 공정한 보상의 분배가 이루어진다. OVN들의 특징을 나타내는 몇몇 주목할 만한 키워드들은 ‘잠재력의 동등성’(equipotentiality)11, ‘반(反)자격증주의’(anti-credentialism)12, ‘자기선택’(self-selection), ‘공동의 확인’(communal validation), ‘홀옵티즘’(holoptism)13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플랫폼 협동조합주의를 위한 새로운 기술적·조직적·재정적 형식들을 창출하고자 하는 이 기획들은 아직 출현 단계에 있으며 곧 뉴욕에서 열릴 예정인 것과 같은 모임들에서 토론되고 있다. 이 기획들은 그 기능의 온전함과 규모의 확대를 기하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실험들과 발전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기획들은, 기업들에 의해 추동되는 플랫폼들―이것들은 참여의 조건을 정하며, 커머너들 사이에서 혜택을 주고받는 것을 촉진하지 않는다―에 대한 매력적이고 잠재적으로 획기적인 대안들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전망된다. 이 새로운 형식들은, 진정한 커머닝과 사용자 주권 및 통제권을 위한 더 신뢰할 만한 시스템을 제공함으로써 디지털 커먼즈―그리고 사용자가 추동하는 혼종화된 형태의 시장들―가 기존의 오픈 플랫폼들의 가치창출 능력을 곧 능가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1. 이 글에서는 ‘peer production’을 ‘자율생산’으로 옮기기로 한다. 이에 대해서는 http://minamjah.tistory.com/53#footnote_53_25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2. [한글 위키피디아] 멱법칙(冪法則, power law)은 한 수(數)가 다른 수의 거듭제곱으로 표현되는 두 수의 함수적 관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특정 인구수를 가지는 도시들의 숫자는 인구수의 거듭제곱에 반비례하여 나타난다. 경험적인 멱법칙 분포는 근사적으로만, 또는 제한된 범위에서만 적용된다. [본문으로]
  3. 시장력(market power)은 경제학적으로 엄밀하게는 “한 기업이 재화 혹은 서비스의 시장가격을 한계비용 이상으로 올려 이윤을 남길 수 있는 능력”(위키피디아)이다. 여기서는 그냥 어떤 기업이 시장에서 가지는 힘으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본문으로]
  4. 네이버를 보라!! [본문으로]
  5. [원주1] 또한 David Bollier and John H. Clippinger, The Next Great Internet Disruption: Authority and Governance 참조. [본문으로]
  6. ‘monoculture’는 원래 농업에서 한 가지 작물만을 재배하는 ‘단작’(單作)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확대되어 지금처럼 사회적 관계에도 사용되고 컴퓨터에도 사용된다. 컴퓨터의 경우에는 일정한 공동체를 이루는 컴퓨터들이 모두 동일한 소프트웨어를 돌리는 것을 말한다. 컴퓨터 보안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컴퓨터 공동체는 공격에 취약해진다. 공격이 성공하면 한꺼번에 다 무너진다. [본문으로]
  7. [원주2] 스웜 펀드(Swarm.fund), 하바드 버크먼센터(the Berkman Center for Internet and Society), 뉴욕 로스쿨(New York Law School), MIT 미디어랩(the MIT Media Lab)과 관련된 사람들이 낸 보고서 『분산된 협동 조직들― 분산된 네트워크들과 규제틀들』(Distributed Collaborative Organizations: Distributed Networks & Regulatory Frameworks) 참조. 또한 Rachel O’Dwyer, The Revolution Will (Not) Be Decentralized 및 Morgen E. Peck, The Future of the Web Looks a Lot Like Bitcoin 참조. 블록체인 및 이와 연관된 법적 문제들은 필리피(Primavera De Filippi), 최(Constance Choi), 클리핑거(John Clippinger)가 주최하는 일련의 워크숍 「블록체인 혁명/진화」(“Blockchain (R)evolution”)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이 일반적인 주제에 대한 더 광범한 해설로는 John H. Clippinger and David Bollier, From Bitcoin to Burning Man and Beyond: The Quest for Identity and Autonomy in a Digital Society (ID3, 2014) 참조. [본문으로]
  8. grid : 여기서는 전기를 공급자에게서 소비자에게 전달하기 위한 상호연결된 네트워크를 가리킨다. 발전, 변전, 송전, 배전으로 구성된다. 이 방면의 전문가들은 일본에서처럼 ‘(전력)계통’으로 옮기는 것 같다. 여기서는 그냥 음역한다. ‘grid’는 원래 우리나라의 석쇠처럼 금속선(금속막대)이 격자모양을 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이 나중에 전기 분야에서 축전지 안의 활성물질의 지지물·도선으로서 쓰이는 금속판을 가리키게 된다. 여기에 다시 추가된 것이 위에서와 같은 전기 흐름의 네트워크라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9. 자신이 소비한 양보다 많은 태양광 에너지를 생성한 사람이 그 차이만큼을 코인의 형태로 가지게 된다. 태양광 에너지 발전에서 생기는 코인을 ‘SolarCoin’이라고도 부른다. [본문으로]
  10. 컴퓨터나 네트워크에서 말하는 아키텍처란 “컴퓨터 시스템의 기능성, 조직, 실행을 서술하는 일단의 규칙들과 방법들”을 말한다. 특정의 실행이 아니라 컴퓨터의 능력과 프로그래밍 모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정의도 있다. (영어 위키피디아). “정보기술에서, 특히 컴퓨터나 최근의 네트웍에서 말하는 아키텍처란, 프로세스와 전체적인 구조나 논리적 요소들 그리고 컴퓨터와 운영체계, 네트웍 및 기타 다른 개념들 간의 논리적 상호관계 등을 생각해내고 정의하는 등, 모든 곳에 적용되는 용어이다.”(http://www.terms.co.kr/architecture.htm) [본문으로]
  11. 이는 원래 심리학자이자 행동주의 과학자인 래슐리(Karl Spencer Lashley)의 개념으로서, 뇌의 한 부분이 손상을 입으면 다른 부분이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12. ‘자격증주의’(credentialism)는 실제 능력이 아니라 자격증을, 즉 ‘대한민국’식으로 말하자면 ‘스펙’을 중요시하는 사고방식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13. 이는 ‘팬옵티즘’(panoptism)과 대립된다. 팬옵티즘은 지식이 위계적으로 분산되어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만 조직에서 진행되는 일의 전체를 보는 것을 가리킨다. 이에 반해 홀옵티즘은 구성원들 누구나 수평적으로 다른 구성원들 모두가 하고 있는 일을 볼 수 있고 수직적으로도 기획의 목적과 연관된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pan’이나 ‘hol’이나 ‘전체’(whole)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원의 접두사이며, ‘opt’는 눈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op’(ὀπ), ‘보이는’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optos’(ὀπτός)에서 왔다. [본문으로]

 




강추!! 카프라와 마테이의 『법의 생태론』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에 2015년 10월 9일자로 게시된 글 “Highly Recommended: Capra & Mattei’s The Ecology of Law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강추!! 카프라와 마테이의 『법의 생태론』 

옮긴이 : 정백수

커먼즈 기반의 법에 관한 비전을 제시하는 중요한 새 책이 막 나왔다! 『법의 생태론―자연 및 공동체와 조화되는 법체계를 위하여』(The Ecology of Law: Toward a Legal System in Tune with Nature and Community)』는, 앞으로 많은 환경 문제들을 풀려면 법 자체를 다시 개념화해야 하며 커머닝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과학과 법 분야에서 각각 모험적 정신이 돋보이는 카프라(Fritjof Capra)와 마테이(Ugo Mattei)의 작업의 결과이다. 카프라는 물리학자이자 체계이론가(systems thinker)로서 1975년에 그의 책 『물리학의 도』(The Tao of Physics)로 처음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는데, 이 책은 근대 물리학과 동양 신비주의를 연결하고 있다. 마테이는 이탈리아의 잘 알려진 커먼즈 법이론가이자 국제적인 법학자이며 커먼즈 활동가로서, 샌프란시스코의 헤이스팅스 법과대학과 투린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그는 또한 이탈리아 북부지역에 있는 키에리(Chieri) 타운의 부시장이다.

 

『법의 생태론』은 법의 역사를 과학적·기계론적 세계관의 산물―만일 우리가 생태적 재난을 비롯한 많은 현대의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극복해야 하는 유산―로서 야심차고 거시적으로 서술한다. 이 책은, 근대적 사고방식(사유의 템플릿) 자체가 오늘날의 세계에서 심각한 근본적 문제라고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근대적 사고는 개인들이 집단의 안녕과 생태적 안정에 가하는 해악에도 불구하고 개인에게 지고의 행위자라는 특권을 부여한다. 근대는 또한 세계를 관찰 가능한 인과관계에 의해 지배되는 단순화된 기계론적 관계들에 의해 지배되는 것으로 보며, 주체성·돌봄·의미와 같은 더 섬세한 삶의 차원들을 무시한다.

 

카프라와 마테이는 이에 대한 교정으로서 법에 의해 인정되는 일단의 새로운 커먼즈 기반 제도들을 제안한다. (이때 법은 그 자체로 전통적인 국가법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될 것이다.)

 

두 세련된 재야 이론가들이, 커머닝에 기반을 두며 새로운 종류의 ‘생태법’(ecolaw)에 의해 보호받는 세계에 대한 비전을 개관하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멋진 경험이다. 카프라와 마테이는 자연과학과 법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유사점들을 스케치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예를 들어 과학과 법 모두 인간과 자연에 대한 공유된 개념들을 반영하고. 우리는 여전히 로크, 베이컨, 데카르트, 그로우셔스(Hugo Grotius)1, 홉스가 그려낸 우주론적 세계에 살고 있는데, 이들 모두는 세계를 원자론적 개인들과 기계론적 원리들이 지배하는 합리적이고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질서로 보았다. 이런 세계관이 경제학, 사회과학, 공공정책, 그리고 법에서 계속적으로 우세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법의 생태론』이 가진 대담함은 근대의 병리학이 어떻게 오늘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설명하겠다고 주장한 데 있다. 이 세계관이 많은 생태적 재난들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어떻게 막고 있으며, 현재 사람들이 생각하는 법학이 어떻게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의 핵심 요소인가를 설명하겠다는 것이다. 카프라와 마테이에 따르면, 근대는 사유재산과 국가 주권의 신성함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실재의 ‘객관적인’ 자연적 재현으로 간주되는 질서이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구분, ‘개인’과 ‘집단’의 구분 또한 실재의 자명한 서술인 것으로 간주된다.

 

물론 커먼즈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것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서 극히 환원론적이며 우리를 오도한다는 것을 안다. 커머닝은 인간들이 세계에서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이해하는 데 더 통합된 범주들을 적용할 것을 제안한다. 실제 경험상으로 개인들은 집단 내에 삶의 자리를 잡고 있으며 다른 개인들과 협력함으로써만 발전하고 번영한다. 마찬가지로 주관적 경험과 객관적 사실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서로 혼합되어 있어서 그것을 가르는 경계가 모호하다. 근대에 전형적인 양자택일의 구도(‘이것이냐 저것이냐’)는 일종의 합의된 사회적 허구이다.

 

근대 사회에서 법은 사유의 (오도하는) 범주들을 긍정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들 가운데 하나이다. 예를 들어 법은 개별 시민에게 부과되는 외적 한계는 없으며, 개인 각각은 ‘합리적 행위자’로서 자연으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추출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이는 자연을 향상시키며 가치를 창조하고 인간의 진보를 더 진척시키는 것으로 가정된다. 이는 미친 듯 날뛰어 지구를 파괴하기에 이른 사회적 DNA이다. 근대의 세계관에서는 역사도 없고 사회적 참여도 맥락도 없는 고립된 행위자들인 개인들이 변화의 주된 동인으로 간주된다. 이것이 개인들에게 마음껏 자신만을 생각하고 쾌락을 즐길 허가증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는 계속적으로 깊은 영향력을 미치는, 위험한 자본주의적·자유방임적 망상이다.

 

그렇다면 탈자본주의적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단지 새로운 법을 통과시키거나 새로운 일단의 정책을 입안하는 문제가 아니다. 세계관에 대한 우리의 심층적 전제들과 대면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과 법에서 전과 다른 자연관과 인간관을 반영하는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카프라와 마테이는 주장한다. 우리는 세계를 기계로 보는 패러다임에서 세계를 상호의존의 네트워크로 보는 체계론적이고 생태론적인 패러다임으로 옮겨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법은 ‘저 외부에’ 객관적 실재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법은 사회적으로 구축된 질서이며, 우리가 되찾아야 할 힘이다. 카프라와 마테이는 법은 항상 커머닝의 과정이다라고 쓰면서 법이 커머너들의 공동체들에서 출현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이 통찰이 우리가, ① 법을 권력과 폭력(국가)으로부터 분리할 것, ② 공동체들을 주권자로 만들 것, ③ 소유권을 생성적인(generative) 것으로 만들 것이라는 세 가지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새로운 ‘생태적 질서’를 구축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법의 생태론』을 관통하는 풍성한 통찰의 가닥들을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여기서는 저자들이 한 주장의 풍미를 같이 맛보는 데 머물기로 하자.

최종적인 무질서로 달려가는 데 대한 가장 중요한 구조적 해결책은 법을 공동체들의 네트워크들에 되돌려줌으로써 인간의 법과 자연의 법 사이에 일정한 조화를 복원하는 것이다. 만일 법의 본성이 지역의 조건들과 근본적 욕구들을 반영하면서 진화하는 공통적인 것임을 사람들이 이해한다면,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관심을 쏟을 것이다. 사람들은 법이 너무나도 중요하기에 조직된 유관 집단의 손에 계속해서 쥐어져 있을 수가 없다는 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바로 법을 만들고 사용하는 주체들인 것이다.

 

문화와 진정한 시민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한 혁명인 법에 대한 생태론적 이해는 위계와 경쟁을 법적 질서의 ‘올바른’ 내러티브로 보는 사고를 극복한다. 이 생태론적 이해에서는 네트워크라는 은유, 하나의 목적을 공유하는 개방된 공동체라는 은유를 통해 부분들과 전체 사이의―개별적인 권리들·의무들·권한들·힘과 법 사이의―복합적인 관계들을 포착하려고 한다.

 

커먼즈의 참여자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법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지 않고 자신들의 법을 입법하고 시행한다. 그들은 모든 집중된 권력으로부터 초연해 있으며/있거나 폭력을 독점하고 있다는 모든 주장으로부터 초연해 있다. 그들은 삶의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 사이의 인위적 구분을 극복한다. 여기서 법의 해석은 전문가들이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집단적 의미를 공유하는 일로서 수행한다. 법은 권력과 폭력에의 의존으로부터 분리되면 언어, 문화 혹은 기예와 같은 것이 된다. 법은 집단이 서로 소통하고 스스로에 대해 결정하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1. Hugo Grotius : 네덜란드의 법학자로서 국제법의 기초를 마련했다. [본문으로]

 




누가 왕의 삼림을 사용할 수 있는가

* [옮긴이]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에 게시된 2015년 9월 14일자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내용전달 위주로 서둘러 옮겨야 했기 때문에 정밀하게 옮기지 못한 부분들이 있을 수 있다. 주석은 모두 옮긴이의 것이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누가 왕의 삼림 사용할 수 있는가?

–우리 시대에  마그나카르타가 가진 의미, 커먼즈 그리고 법

옮긴이 : 정백수

 

나는 요즘 법과 커먼즈의 관계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에 전략 메모 「커먼즈를 위한 법을 재발명하기」를 4회에 걸쳐 게시하기도 했다. 다음 강연은 9월 8일 베를린의 하인리히 뵐 재단에서 한 것으로서 예의 메모와 짝을 이룬다. 테마는 ‘마그나카르타 800주년 축하와 그것이 오늘날 커머너들에게 가지는 의미’이다.

 

이 강연의 비디오 판은 여기서 볼 수 있다. 더불어 나의 동료 미셸 보웬스의 P2P개발에 대한 강연도 볼 수 있으며, 질케 헬프리히가 사회를 본 청중과의 토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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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나카르타 800주년과 커먼즈에서 법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오늘밤 강연을 할 수 있도록 초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8세기 전에 일어난 일을 누군가가 아직도 경축한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 사건에 대한 우리의 기억 이외에도 매우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이 역사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잊은 것에 대해서 기억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점입니다.

 

마그나카르타 800주년에 우리가 경축하는 것은 1215년 잉글랜드 러니미드(Runnymede) 들판에서 있었던 평화협정의 조인입니다. 이 협정으로 많은 경멸을 받은 존 왕과 왕에게 반란을 일으킨 국왕봉신들(barons)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종식되었습니다. 휴전으로 의도되었던 것은 곧 거버넌스의 적합한 구조에 대한 더 큰 공식적 진술로 간주되었습니다. 마그나카르타는 중세인들의 생활방식을 많은 고어 단어들로 서술하는 가운데서도 이제 왕의 제한된 권력과 보통 사람들의 권리 및 자유권들에 대한 획기적인 진술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긴 내전 이후에 존 왕이 마그나카르타를 받아들인 것은 믿을 수 없이 아득한 옛날 일이기에 쉽사리 망각될 일로 보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우리 현대인들과 관련이 있을 수 있을까요? 마그나카르타의 지속성과 반향은 집중된 힘에 대한, 특히 왕권에 대한 우리의 경계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왕의 권위가 법의 지배에 의해 제한되고 이것이 인간의 역사에서 문명이 더 높아지는 새로운 순간을 나타냄을 상기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억눌린 사람들과 동일시하기를 좋아하고, 개인들의 권리와 자유권들을 보호한다고들 말하는, ‘법’이라고 불리는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왕들조차도 존중해야 한다고 선언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정신으로 미국 법조협회는 1957년에 “법 아래에서의 자유”라는 말이 새겨진 화강암 대좌(臺座)를 러니미드에 세움으로써 마그나카르타를 경축했습니다. 거대한 공적 행사들에―특히 올해에―판사들, 정치인들, 법학자들 및 저명한 비공식적 유력 인사들이 모여서 헌법에 기반을 둔 통치와 대의민주주의가 마그나카르타의 원칙들을 어떻게 계속해서 떠받치고 있는지를 공언하기를 좋아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이따가 말하겠습니다.

 

오늘 저는 마그나카르타와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더 풍부하고 더 복잡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사실 서로 연결되어있지만 구분되는 두 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1번 이야기는―이것을 ‘근대 시장/국가의 승리’라고 부릅시다―지금 제가 막 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보통 유명한 엘리트들이 입헌민주주의, 이른바 자유로운 시장과 마그나카르타의 긴밀한 연관, “법 아래에서의 자유”라는 이념을 경축하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1번 이야기는 입헌민주주의와 대의제가 마그나카르타에 담긴 권리들을 방어해줌으로써 실제로 자유와 법의 용감한 성채로서 기능한다고 우리를 안심시켜 줍니다. 물론 대헌장은 왕정, 부족 제도, 그리고 홉스가 말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것들은 세계의 많은 지역들에서 한때 우세했던 것들입니다―너머로의 주목할 만한 전진을 나타냅니다.

저 자신은 마그나카르타 이야기의 무시된 측면, 그다지 이야기되지 않는 이야기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을 2번 이야기라고, 아니면 ‘커먼즈를 위한 법’(Law for the Commons)이라고 부릅시다.1 이 무시된 두 번째 이야기는 800년 전에 일어난 마그나카르타의 조인을 핵심으로 한다기보다 그 원칙들을 민중의 삶 속에 현실화하는 지속적이고도 끝나지 않는 투쟁을 핵심으로 합니다. 2번 이야기에는 공직적인 주류 이야기가 가진 지적인 화려함이나 성스러움이 없습니다. 그것은 더 세속적이고 보통 사람들에게, 즉 커머너들에게 더 집중되어 있습니다.

2번 이야기의 본질적 핵심은 민중의 일상적 생존욕구를 충족시키고 인간의 권리를 실현하는 데서 마그나카르타가 가진 기능적인 법적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서 물려받은 공통의 부에 모두가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그 핵심입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2번 이야기는 ‘누가 왕의 삼림2을 사용할 수 있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1200년대 초의 커머너들은 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의 삼림’이 무슨 말이냐? 삼림은 우리 것이다! 수 세기에 걸쳐 우리 것이었다.‘ 커머너들도 권리를 가지고 있었음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 바로 이것이 마그나카르타의 망각된 유산입니다. 삼림을 사용할 권리, 자치 규칙들을 스스로 조직할 권리, 왕의 자의적인 권력 남용에 맞서서 스스로를 보호할 자유권들3과 권리들.

이 모든 것이 성문법이라는 생각보다 앞서 존재했습니다. 이 권리들은 근본적인 욕구와 기나긴 전통에 기반을 둔 권리들로 간주되었습니다.

우리는 13세기의 커머너들이 거의 모든 것을 숲에 의존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요리와 난방을 위한 나무를 숲에서 해왔습니다. 식탁에 올려놓을 고기를 숲에서 잡았고 물고기를 강에서 잡았습니다. 소나 돼지에게 먹이기 위해 숲에서 도토리와 여러 식물들을 채취해왔습니다. 숲이 곧 우주였습니다. 봉건 영주들이 소유한 장소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사용 관습에 의해서 커머너들에게도 권리가 부여된 장소였습니다. 숲은 또한 그들의 상상력, 문화 그리고 그들의 존재 자체에 형태를 부여한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존 왕이 삼림에 대한 통제권을 점점 더 많이 전유하기 시작하자, 이것이 봉건 귀족들에게만 심각한 압박을 준 것이 아니라―물론 봉건 귀족들은 곧 반발하여 반격했습니다―커머너들의 생존도 위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왕이 숲을 탈취한 것은―이는 왕의 주장관들(sheriffs)에 의해 무자비하게 시행되었습니다―가축들이 숲에서 방목될 수 없음을 의미했습니다. 돼지들이 도토리를 먹을 수 없었고, 커머너들이 나무를 해와서 집을 고칠 수도 없었으며, 과일과 물고기도 채취하고 잡을 수 없었습니다. 댐이나 개인이 만든 방죽길 때문에 배들이 강을 오갈 수도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고 다른 많은 것이) 잉글랜드에서 길고 격렬한 내전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마그나카르타라고 알려진 휴전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평화의 조건은 왕의 절대 권력에 일련의 법적 제한을 가하고 커머너들을 포함한 민중에게 일련의 정해진 법적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었습니다.

마그나카르타의 이야기에서 보통 잊혀지는 것이 2년 뒤에 마그나카르타에 통합된 자매 문서인 삼림헌장(the Charter of the Forest)입니다. 이 문서는 커머너들의 관습적 권리들을 명시적으로 보호하고 있습니다. 삼림헌장은 커머너들에게 숲의 특수한 사용을 보장하는 일종의 인권 협정입니다. 돼지방목권, 에스토버4로서 땔감을 채취할 권리, 개방된 숲 사용권, 토탄채굴권 등 다수의 권리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요컨대, 삼림헌장은 사유화에 가해진 최초의 법적 제한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그나카르타를 공식적으로 경축하는 자리에서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실로 커머너들을 이렇게 인정한 것이 마그나카르타의 위대한 성취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삼림헌장은 커머너들에게 인간의 생존에 근본적인 집단적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공식적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이 헌장은 왕의 주장관들이 왕의 자의적인 종획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체포, 상해, 고문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함으로써 오늘날 ‘국가의 테러’라고 부를 수 있는 행동들로부터 커머너들을 보호했습니다.

 

불행하게도 마그나카르타는 당시 그 원칙들을 스스로 시행할 수단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왕은 초월적 법5을 자기 마음대로 정지시킬 수 있었으며 정지시킨 결과로 나올 사회적·정치적 항의에 의해서만 제한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지난 수 세기에 걸쳐 일어났고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1536년에 헨리 8세는 잉글랜드의 수도원들을 없앴습니다. 라인보에 따르면 이는 “국가가 후원한 대대적인 사유화 행동”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계급 즉 종획을 수단으로 하여 땅을 취하고 땅을 수익을 내는 데 사용할 젠트리6가 들어설 문을 열어주었다”라고 라인보는 쓰고 있습니다. 수도원들의 해체는 잉글랜드의 토지를 상품으로 전환시킨 “국가가 후원한 대대적인 사유화 행동”이었습니다. 당시의 한 저널리스트에 따르면 “토지가 마법적 성격을 상실한 것”이었습니다. 

17, 18세기에 의회는 출현하는 젠트리 계급을 위해서 4천 건 이상의 종획을 승인했으며, 그리하여 젠트리들에게 잉글랜드의 공유지 가운데 약 15%를 사적으로 강탈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 종획들은 많은 커머너들이 토지와 맺고 있는 깊은 연관을 파괴했으며 그들의 문화와 전통을 파괴하고 산업화로 가는 길을 닦았습니다. 임금노동자들, 소비자들, 거지들로 구성된 새로운 민중 계급도 창출되었습니다. 커먼즈를 박탈당한 민중은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기 위해서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 새로운 세계에서 마그나카르타의 원칙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문서화된 법의 지고함은 법에 더 큰 지속성과 존엄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진전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우리는 성문법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성문화된 형식적 법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거버넌스 규칙들이 더 영속적이고 심지어는 영원한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분명 왕을 포함한 마그나 카르타의 옹호자들은 이런 생각을 장려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법이 그 법에 의해 통치되는 사회적 공동체로부터 분리될 때―능동적 합의가 전문적 법률가들, 정치가들, 판사들에 의해 유린될 수 있을 때― 이는 새로운 종류의 폭정으로 향하는 첫 걸음이 됩니다. 성문법은 이러한 문제점으로 항하는 문을 열어줍니다. 합법성(legality)과 정당성(legitimacy)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자가 다르다는 것은, 프랑스의 법인류학 교수 에띠엔느 르 로이Étienne Le Roy가 주장한 바입니다.) 성문법은 법을 인쇄된 단어들로 이루어진 인공물―이는 전문적 법률가들과 법학자들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일단의 규칙들로 간주할 수 있는 어떤 것입니다―로 만듦으로써 합법성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통치 영역을 창출했습니다. 법 자체가 해석과 조작이 가능한 외적 대상, 민중들로부터 분리된 어떤 것이 되었습니다. 법은 절대적이고 자립적인 것으로 떠받들어지는 우상, 엄격한 준수를 의무화하는 어떤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문화된 법은 법률가들과 판사들이 법을 해석하는 성직자들이 되면서 문구들의 조작과 속임수가 훨씬 더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왕은 단지 합법성이라는 외피를 주장하면 되었습니다. 그 외피가 형식적이고 문서화된 법과 일정한 그럴듯한 관련이 있는 한에서 말입니다. 다른 식으로 얻어지는 ‘정당성’은 축출되었습니다. 왕이 선언하는 바의 ‘법’은 자기충족적이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법’을 마음대로 시행할 강제력에 대한 독점권을 왕 개인이 (정말로 “개인”입니다) 편리하게 보유하게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왜 마그나카르타의 거대한 원칙들이 인권의 보증자로서 줄곧 신뢰할 수 없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저는 이미 잉글랜드에서 왕이 카톨릭 수도원들을 종획한 것과 17, 18세기의 종획운동을 언급했습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 시대에 와서는 입헌 민주주의가 특히 9/11 이후에 법의 적정 절차, 공정성, 인권과 커머닝7의 용감한 방어자가 아님을 목도해왔습니다. 

우리 시대의 주권자―초국적 기업들과 손을 잡은 국민국가―는 입헌 민주주의와 사법 심사제의 제한장치로 간주되는 것들을 회피하는 많은 길들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미국 정부의 자칭 국가안보가 어떻게 인신보호영장의 권리를 압도해왔는지를 보았습니다. 마그나카르타에도 불구하고 미국 군대와 CIA는 수많은 개인들에게 고문을 가했고 수인들로 하여금 적정 법절차를 거치게 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많은 중동 지역에 수천 번의 드론 공격을 가했는데, 이는 사법 심리를 거치지 않은 무법의 사살행위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말고도 더 나열할 수 있습니다. 요점은, 이미 수립된 입헌 통치와 민주주의의 제도들이 이를 말없이 방조했으며 마그나카르타의 원칙들을 능욕하는 극악무도한 행동들을 찾아내고 처벌하는 데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현대의 주권자들인 국민국가들과 기업들―시장/국가―이 마그나카르타를 경축하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에는 거대한 양의 불협화음이 일고 있습니다. 국민국가들과 기업들은 우리의 계몽된 근대적 질서를 관리하는 데서 수행하는 인정 많은 역할로 인해서 머리 위에 광륜(光輪)이라도 얹어놓을 필요가 있는 모양입니다. 올해 초에 영국의 웨스트민스터에 유력한 정치인들과 골드만삭스, 바릭골드8 및 기업화된 로펌들에서 온 기업계 고위 인사들이 모여서 한 일이···다름 아닌 ‘법의 지배’(the rule of law, 법치)를 경축한 것은 바로 그러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읍니다.9 수 세기에 걸쳐서 우리가 마그나카르타에 매료된 것은 주로 염원의 표현이었다고 혹은 더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유용한 표지기사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권력이 정말로 길들여져 있으며 인류에게 복무한다고 우리를 안심시키고―혹은 그렇게 다른 이들을 납득시키고―싶어 합니다.

 

물론 사실 국가에 의해 도움을 받는 신자유주의적 시장질서는 커먼즈를 종획하는 데 있어서 존 왕만큼이나 무자비하고 맹렬하다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국가와 기업계는 우리의 공통의 부를 ‘합법적으로’ 사유하는 데 법을 사용하기 위해 공모하기 일쑤입니다. 이는 전지구적 금융부문의 약탈행위에서 가장 두드러집니다. 지구의 대기가 주요 산업들, 특히 화석연료를 파는 산업들에 의해 무상의 쓰레기 처리장으로 사용되며 이에 대해 국가는 거의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바이오테크 회사 및 제약회사들은 유전자에서 박테리아를 거쳐 양(羊)에 이르는 생명체들을 특허법을 통해 사적인 상품으로 전환시키도록 허용받습니다. 투자자들과 국부펀드들10이 전지구적 토지수탈의 일환으로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거대한 넓이의 땅을 사들여서 커머너들을 축출하고 미래의 기근(飢饉)을 위한 기초를 다지고 있습니다. 회사들은 바다에서 생선과 광물들을 약탈하고 있습니다. 광산회사들과 임업회사들은 야만스런 자국 자원추출11의 기획들을 통해 라틴아메리카의 풍경들을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단어, 색깔에서 냄새까지 모든 것이 상표로 등록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2초 지속되는 소리 조각들도 저작권으로 보호될 수 있습니다.

존 왕의 시대에는 종획이 거의 숲에 대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에는 생명 자체를 포함한 모든 것이 종획의 대상입니다.

 

앞에서 제기한 ‘누가 왕의 숲을 사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오늘날 법은, 헌법·선거·법정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커머너들이 스스로를 다스리거나 주권자에 맞서서 자신들의 권리를 옹호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을 정도로 현대의 주권자들에 의해 포획되고 부패되었습니다. 주권자의 위치에 있는 시장/국가는 시장교환의 논리에 의해 거의 모든 것을 집요하게 통제하고자 합니다. 

이로 인해서 커머너들이 자신들의 공통의 부를 사용하거나 자신들의 관리규칙들을 고안할 여지가―법적·문화적·경제적으로―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정계와 재계의 엘리트들과 그들 산하의 공복들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도덕적·사회적 정당성을 참칭하는 형식화된 합법성의 체계를 관리합니다. 내가 ‘토착법’(vernacular law)이라고 부르는 것―보통 사람들의 도덕적·정치적 권위, 거리의 규범들과 가치들―을 압도하기 위해서 합법성이 종종 사용됩니다. 한때 마그나카르타에 의해서 선언된 ‘커먼즈의 법’은 시장/국가의 권력의 도구가 되었으며 인간들의 전(前)정치적 주권의 표현이 되지 못했습니다. 시장/국가가 커머너들에게 속하며 국가에 선행하는 인간의 권리를 가로채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미국에서 기업들은 법적으로 인격으로 인정되어 실제의 개인들처럼 모든 시민권과 자유를 부여받습니다. 그러나 커머너들과 지구는 감정이 없고 존엄이나 권리도 없는 자원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마그나카르타를 경축하나요? 마그나카르타에 포함된 삼림헌장이 커머닝의 정당성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삼림헌장은 커머닝을 범죄의 범주에서 떼어내어 합법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역사적 사실은 그 자체로 중요합니다. 사실 민중이 마침내 스스로를 다스릴 자유를, 공정하고 정당하며 그들의 상황에 효과적으로 보이는 규칙들을 고안할 자유를 형식적 법의 형태로 현저한 정도로 인정받은 것이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커머닝 덕분에, 그리고 그것이 삼림헌장에 의해서 형식적으로 인정 받은 덕분에 왕은 절대적 권위를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형식적 성문법 아래에서 커머너들은 주요한 도덕적 권리, 인간적 권리, 경제적 권리를 보유했습니다. 영원한 관습적 권리가 ‘보장된’ 것입니다. 혹은 적어도 왕이 커머너들의 권리를 인정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거버넌스에서 이루어진 주요한 전진이었습니다.

  

 

커먼즈를 위한 법을 재발명하기 

그런데 여기서 마그나카르타가 우리에게 다음의 과제를 남기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합법성을 정당성과 다시 통합할까요? 어떻게 우리 시대의 주권자인 시장/국가로 하여금 커머너들의 권리를 인정하도록 만들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내 생각에 성문법을 커머너들의 살아있는 공동체의 토착법과 다시 통합하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마그나카르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 법적 구조를 다시 발명하고 그럼으로써 마그나카르타를 현대에 실현하려고 할 필요가 있습니다.

 

커먼즈를 위한 새로운 법을 다시 발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우리는 마그나카르타와 국가법의 전통에 의존해야 하면서도 민중이 자신들의 고유한 규칙들을―민중이 보기에 공정하고 적절하면서도 정치체의 더 큰 원칙들을 따르는 규칙들을―만들 공간들을 의도적으로 분배해줘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민중이 커머닝에 참여하도록 허용되어야 합니다. 민중은 “자신들의 숲”을 스스로 관리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하면서 그 숲의 헌신적인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민중은 자신들의 통찰과 상상력에, 그리고 관습적인 사회적 관행에 의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민중은 공유된 공동체에 대한 감각을 개발하고 사물을 관리하는 고유한 관습들과 전통들을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법은 지리학자 니러 씽(Neera Singh)이 민중의 ‘정동 노동’(affective labor)이라고 부른 것을 존중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이는 자신의 커먼즈를 관리하는 일과 병행하여 생기는 주관적 감정들, 정서들, 자긍심, 즐거움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물론 우리로 하여금, 인간을 항상 자신의 공리주의적 자기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계산하는 합리적 물질주의자들로만 보는 기존의 주류 경제학의 세계관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커머닝의 아름다움은, 그것이 형식적 합법주의를 넘어서는 유형의 법이라는 점입니다. 커머닝은 자신들의 계속 변하는 지역 상황들과 씨름하는 커머너들로부터 출현합니다. 커먼즈 기반의 법은 내재적인 실천적 현실이지 고정되고 영원한 초월적 이상이 아닙니다. 라인보가 쓰듯이,

 

커머너들은 먼저 권리증서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 땅을 어떻게 경작할 것인가? 거름을 줄 필요가 있는가? 거기에 무엇이 자라는가? 그들은 탐구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자연적 태도라고 불러도 좋다. 둘째, 커머닝은 노동과정에 심어져있다. 그것은 밭, 고지, 숲, 습지, 연안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실천 속에 내재한다. 공통권은 노동에 의해서 가지게 된다.12 

이는 법 자체에 대한 매우 상이한 존재론적 이해입니다. 커먼즈를 위한 법은 번쩍이는 추상들이나 문자로 된 문서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커머너들이 경험하는 바의 껄끄러운 개별적 현실들에서 시작하며, 커먼즈들이 자치의 체계를 고안하는 경험에서 나옵니다. 마그나카르타는 형식적 성문법으로 도약하면서 어떤 원리들을 문명의 기억에 소중히 안치했을 수도 있으며, 이는 작은 성취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도약은 대가를 치르고 이루어졌습니다. 기억과 커머닝의 점진적 상실이라는 대가를.

마그나카르타를 채택한 이후 여러 해 동안 존 왕은 종종 의구심을 가진 커머너들과 국왕봉신들에게 자신이 계약을 실제로 지킬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수고를 들여야 했다는 점은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가 많습니다. 존 왕은 민중의 우려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종종 마그나카르타를 화려하게 재공표하여 마그나카르타가 여전히 나라의 법이라고 모두를 안심시켰습니다. 물론 종이 한 장으로 된 마그나 카르타는 사회의 문화와 정치가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만큼만 강했습니다. 그리고 추상으로서의 마그나카르타는 지배자의 권력남용(abuses)을 중지시키는 데서 제한된 가치만을 가진다는 것을 역사는 계속해서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마그나카르타의 원칙들을, 특히 삼림헌장을 우리 시대에 부활시키는 데서 진정으로 중요한 과제는 커머닝을 인정하고 보호하는 새로운 법체제를 고안하는 것입니다. 커머닝을 위한 공간들을 뒷받침하는 법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커머닝은 중세에 사라졌으며 지금은 단지 골동품과도 같은 것으로 남아있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커머닝은 늘 갱신되고 있으며 점점 더 풍요롭고 튼실해지고 있는, 오래된 사회활동입니다. 지금 세계 전역에서 커머닝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사실 커머닝이 얼마나 널리 퍼져있는가를 기록하기 위해서 제 동료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저는 최근에 새로운 선집 『커머닝의 패턴』(Patterns of Commoning)을 같이 엮는 작업을 완료했습니다. 이 책은 10월에 영어와 독일어로 동시에 출판될 것입니다. 50편 이상의 독창적인 에세이들로 구성된 이 책은, 일상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서 협동하고 공유하려는 억누를 수 없는 민중의 욕망을 탐구합니다.

이 책은 토착 농업 커먼즈들과 공동체 숲들, 하이테크 팹랩들(FabLabs, fabrication laboratories)13과 케냐의 대안통화들, 오픈소스 농장설비 커먼즈들과 커먼즈들의 공동 맵핑(mapping), 기타 많은 것들을 서술합니다. 이 책은 또한 주류 경제학의 존재론적 전제들에 대한 대안으로서 커머닝이 가진 내적 동학에 초점을 맞춥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인간은 단순히 이러저런 형태의 ‘경제인’(homo economicus)이 아니라 매우 특수한 지리, 역사, 문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복합적이고 진화하는 존재입니다. 이 선집은 2012년에 출판된 선집 『커먼즈의 부』(The Wealth of the Commons)의 자매편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지난 2년에 걸쳐 『커머닝의 패턴』을 엮는 작업을 하면서 저는 이런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만일 커머너들이 국가법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커먼즈를 믿음직하게 보호할 고유한 법을 발명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더 엄밀한 형태의 ‘커먼즈를 위한 법’이 있다면 어떨까요? 물론 저는 마그나카르타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 커머너들이 과연 오늘날에 맞는 새로운 형태의 커먼즈 기반 법들을 발명할 수 있을까요?

 

커먼즈 세계의 많은 부분들에서 실제로 법 혁신이 지금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릴 수 있어서 기쁩니다. 국가법 안으로 들어가서 커먼즈 법을 일구어낸14 초기의 사례들 가운데에는, 소프트웨어 관련으로는 GPL(General Public License)이 있고 내용 관련으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가 있습니다. 양자 모두 공유된 부를 보호하는 법으로서 기가 막힌 묘수들입니다. 이 라이선스들은 누구라도 공유된 코드, 글, 이미지 혹은 음악을 탈취하는 것을 방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구를 해나가면서 저는 커머너들의 권리를 보호하도록 의도된, 말 그대로 수십 가지의 매력적이고 영리한 법의 묘수들을 만났습니다. 예를 들어 토착민들의 농경제적 지식과 전통을 보호하도록 의도된 ‘바이오문화 프로토콜들’(biocultural protocols)이 있습니다. 협동의 원칙들에 제정을 대어 사회적으로 쓰이도록 하기 위한 협동조합법의 새로운 형태들도 존재합니다. 수압균열법(hydro-fracking)15, 유전자조작 농산물들 및 기타 기업에 의한 종획들에 반대하는 지역 공동체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있는 새로운 법적 기획들도 있습니다. 이해관계자 트러스트들(stakeholder trusts)로 하여금 대기에서 광물을 거쳐 지하수에 이르는 공통재를 보호하도록 하는 제안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기업 활동, 이윤을 목적으로 하거나 관료적 성격의 활동에 맞서는 것으로서16 커머닝을 후원하는 목적으로 발명되고 있는 새로운 조직형태들도 있습니다.

 

바로 지난주에 저는 하인리히 뵐 재단의 지원을 받아서 커먼즈를 위한 법적 혁신의 사례들 60개 이상을 개관하는 긴 전략메모를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P2P 재단>의 보웬스(Michel Bauwens)와 트론코소(Stacco Troncoso) 덕분에, 사람들로 하여금 커먼즈 기반 법의 수십 개의 사례들에 접근하게 해주는 온라인 위키도 존재합니다. 이 자료들은 ‘커먼즈를 위한 법’에 관한 새로운 대화를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마련되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대화는 마그나카르타의 역사에서 적집 나오며, 인권과 커머너들의 욕구를 깊이 존중하는 마그나카르타의 원칙들에 의존합니다. 

그런데 마그나카르타처럼 이 원칙들도 정치적 투쟁을 통해서만 현실화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커먼즈를 위한 법’을 단지 선언하기만 하면 된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커먼즈를 위한 법’이라는 발상 및 그 발상의 변주된 형태들이 우선 우리 시대의 맥락에 맞게 정식화되어야 하며, 그 다음에는 그것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기존의 법과 거버넌스의 체제들이 엉망인―대중의 존중을 받지 못하며, 민중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지구를 파괴하고 있는―때에 커머닝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법은 밝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커먼즈는 공정하고 개방적이며 효율적인 방식으로 민중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으며, 시장/국가 질서가 제대로 성취하지 못하고 있는 존엄·존중·평등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커먼즈는 또한 민중과 더 밀착된 관계를 만들어내고 민중으로 하여금 책임감을 갖도록 요구함으로써 앞으로 생태계를 지키는 데서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존 왕이 강압에 의해 커머너들의 권리를 인정하게 되었다는 점을 상기합시다. 우리시대의 지배자들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권리를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 시대의 진정한 과제는 창조적인 법적 묘수, 새로운 사회적 실천들과 정치적 투쟁을 통해 커먼즈를 위한 법을 다시 발명하는 일입니다. 법 형태의 장대한 언표만이 우리를 거기로 데려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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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특별히 유망한 법 기반의 커머닝의 한 영역은 디지털 영역입니다. 이는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오픈 디자인과 제작, 팹랩스 및 해커공간들, 비트코인의 블록체인 원장, 그리고 도시들을 바꾸고 있는 개방된 데이터 네트워크들의 세계입니다. 이는 커먼즈 기반의 수평적 자율생산(peer production)의 세계입니다. 여기서는 코드 자체가 법의 한 형식이 되며, 커머너들은 (종종은 국가의 법에 항의하며) 자신들의 주권을 주장하게 됩니다. 이를 더 논의하기 위해서, 저는 연단(演壇)을, <P2P 재단>의 창립자이자 <커먼즈 전략그룹>(the Commons Strategies Group)의 일원인 동료 보웬스에게 기쁜 마음으로 넘기겠습니다. ♣

 

 

 

 

 

 

  1. ‘law for the commons’를 어색함을 감수하면서 굳이 “위한”을 넣어 “커먼즈를 위한 법”이라고 옮긴 것은 볼리어가 서두에서 말한 전략 메모에서 ‘law of the commons’라고 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볼리어는 법은 커머닝(common)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말한다. [본문으로]
  2. ‘삼림’은 ‘forest’를 옮긴 것이다. 볼리어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당시 ‘forest’는 ‘woods’와 의미가 다르게 사용되었다. ‘woods’는 말 그대로 자연적 숲을 가리키며, ‘forest’는 법적 개념으로서 ‘woods’ 이외에 목초지, 연못 등이 더해진, 울타리 친 소유지를 가리킨다. 이렇게 어떤 숲을 법적으로 소유지를 만드는 것 ‘forestation’이라고 하며, 반대로 소유지를 푸는 것, 그리하여 커머너들의 접근을 허용하는 것은 ‘deforestation’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피터 라인보 지음, 『마그나카르타 선언』, 갈무리, 2012 참조. [본문으로]
  3. ‘자유권들’은 ‘liberties’를 옮긴 것이다. 당시 ‘liberty’는 주상적인 ‘자유’가 아니라 실제로 실행되는 구체적인 권리들을 가리켰다. 그래서 복수형으로도 사용되었다. [본문으로]
  4. 『마그나카르타 선언』에서 라인보는 ‘에스토버스’(estovers)―복수형이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정확하게 말해서 에스토버스란 관습에 따라 숲에서 채취하는 것을 가리키며 종종은 생계자급 일반을 가리킨다.”(69쪽) [본문으로]
  5. ‘초월적’이란 말은 커머너들 자신에 의해 만들어져 시행되지 않고 국가의 법으로 커먼즈의 외부에서 만들어져 커먼즈에 부과됨을 나타낸다. [본문으로]
  6. ‘젠트리’는 일반적으로 작위를 갖지 않은 지주들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7. ‘커머닝’(comnoning)은 동사 ‘common’의 동명사이다. 동사 ‘common’은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커머닝’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 강연 내에서 설명이 될 것이다. [본문으로]
  8. 바릭골드(Barrick Gold Corporation)는 금광을 채굴하는 미국의 광산기업이다. [본문으로]
  9. 지금 볼리어는, 웨스트민스터에 모인 자들은 마그나카르타의 원칙들을 어기는 자들인데 이들이 아이러니하게도 마그나카르타의 원칙 가운데 하나인 ‘법의 지배’를 경축하고 있다는 점을 꼬집고 있다. [본문으로]
  10. 국부펀드(Sovereign Wealth fund, SWF)는 정부 자산을 운영하며 정부에 의해 직접적으로 소유되는 기관을 말한다. 사실 데이빗 볼리어는 “sovereign investment funds”라고 했는데 이는 국부펀드의 발전된 형태이다. 양자의 차이는 이 맥락에서는 무시할 만하고, “sovereign investment funds”는 아직 번역어가 정착되지 않았기에 이미 정착된 ‘국부펀드’를 사용하여 옮겼다. [본문으로]
  11. ‘자국 자원추출’은 ‘neo-extractivism’을 옮긴 것이다. ‘extractivism’에는 ‘채굴주의’라는 번역어가 쓰이는데, 문제가 있다. 영어의 접미사 ‘-ism’은 우리말로 ‘-주의’ 혹은 ‘-론’로 옮겨지는 의미만 가지지 않는다. 우리말 ‘-주의’나 ‘-론’은 이론, 학설, 주장, 견해 등에 쓰인다. 영어 ‘-ism’에는 이런 의미도 있지만 이 이외에도 여러 다른 의미가 있으며 이는 ‘-주의’나 ‘-론’으로 옮길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비판’ 혹은 ‘비평’으로 옮기는 ‘criticism은 완료된 행동이나 결과를 나타낸다. ‘exorcism’도 이 범주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야만’으로 옮기는 ‘barbarism’은 특정 집단의 행동이나 행위를 나타낸다. 산업화 혹은 자본주의와 연관된 ‘extractivism’은 자연자원을 대량을 추출하여 가공하지 않은 채 혹은 제한된 정도로만 가공하여 수출하는 활동을 가리킨다. 이는 식민주의 및 신식민주의적 약탈과 연관된다. ‘neo-extractivism’은 기본적인 성격은 그대로 유지한 채 자원추출 및 수출의 주체만 후진국 자국의 정부(라틴아메리카의 진보적 정부들)로 바뀐 것이다. ‘extractivism’이나 ‘neo-extractivism’의 번역어는 이런 활동을 나타내는 말이어야 한다. 여기서는 ‘-주의’를 빼고 전자는 ‘해외 자원추출’로, 후자는 ‘자국 자원추출’로 옮긴다. 만족스런 번역어는 아니지만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을 찾기 전까지는 임시로 여기에 만족하기로 한다. ‘채굴’은 광물에만 국한되는 말인데, ‘extraction’은 광물자원에만 국한되지 않으므로 (원래는 사탕수수에 쓰였던 말이라고 한다) ‘채굴’을 쓰지 않고 더 넓은 ‘추출’을 택하기로 한다. [본문으로]
  12. 『마그나카르타 선언』 75쪽. [본문으로]
  13. 디지털 장치들을 제작하는 소규모 작업실들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14. 볼리어는 사실 “Some of the earliest legal hacks of state law”라는 말을 썼다. 이는 만일 직역한다면 ‘국가법의 법적 해킹의 초기 사례들 가운데 일부’ 정도가 된다. 이를 이해하려면 여기서 “hack”이란 단어가 맥켄지 워크가 그의 『해커 선언󰡕에서 제시한 ‘해킹’ 개념을 (‘hack’을 ‘hacking’과 같은 의미의 명사로 사용한다) 받아서 쓴 말임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는 일단 직역하지 않고 맥락에 따라 의역해놓기로 한다. 워크의 ‘hack’에 대해서는 http://trustsun.net/xe/bookreading/100965를 참조하라. [본문으로]
  15. 이는 압축된 액체를 바위에 나있는 구멍에 주입하여 바위에 균열이 가게 함으로써 생성되는 틈들을 통해 가스나 석유 등이 더 잘 흘러나오게 하는 기술이다. 일본 위키피디아에서는 ‘수압파쇄법’이라 옮겼는데, 바위를 부순다기보다는 균열을 내는 것이기에 일단 ‘수압균열법’으로 옮기기로 한다. ‘htdro-fracking’ 말고 ‘Hydraulic fracturing’, ‘hydrofracturing’, ‘fracking’, ‘fraccing’으로 적기도 한다. [본문으로]
  16. 원문에는 “as opposed to business, bureaucratic or nonprofit activities”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nonprofit”은 “for-profit”의 오기인듯 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