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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케이디아 그리고 전지구적으로 재개된 생물지역 행동주의

 



가장 고무적인 최근 발전들 가운데 하나가 생물지역주의(bioregionalism)가 재개된 것이었다. 40년쯤 전 1970년대와 1980년대 말에 경제, 생태 파수, 그리고 자연 생물지역들을 중심으로 하는 생활방식을 다시 상상하려는 대중의 엄청난 욕구가 있었지만 이것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발전으로 점차 약해졌다. 이제 생물지역주의는 훨씬 더 영향력 있고 훨씬 더 세련되게 다시 부상하고 있다.

많은 선구적 지도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퍼시픽 노스웨스트(Pacific Northwest)(주석1)에 있는 활동가들, 학자들 및 사회 혁신가들이었다. 그들은 캐스케이디아라는 용어와 종종 관련되어 있는데, 이 용어는 그들이 브리시티 콜롬비아(British Columbia)(주석2)와 알래스카 남동부에서 워싱턴 주, 오레곤, 아이호아 및 북부 캘리포니아까지 이어지는 생물지역에 붙인 명칭이다. 이 지역은 75만 평방 마일이 넘는 곳으로 천연 열대우림, 화산들 그리고 연어•늑대들•곰•고래•범고래를 위한 야생 서식지 및 1600만 명의 사람들이 사는 야생 거주지를 아우른다.

캐스케이디아 행동주의는 시장들, 문화들, 정체성들을 지역 생태계들과 조화되도록 재발명하기를 원하는 대규모 전지구적 운동의 일부이다. 캐스케이디아 행동주의는 현대 사회들을 설득해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생태계의 선물들을 존중하도록 그리고 자신이 살고 있는 특유의 장소를 배려하며 거주하도록 하는, 장기간에 걸친 당찬 활동이다. 또한 캐스케이디아 행동주의는 자의적인 정치적 경계들과 전지구적 시장들을 초월하고자 하는 것이 핵심이며, 한 지역의 물의 성질·현상 및 분포, 날씨, 식물과 야생 동물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고, 경제들, 문화들, 그리고 그 환경과 보완적 관계를 맺는 존재 방식들을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다.

생물지역주의의 르네상스가 활기를 얻자 나는 특히 가장 장래성이 있는 전략들과 과제들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싶었다. 나는 공동체 중심의 풀뿌리 프로젝트들의 인큐베이터인 <캐스케이디아나우!>(CascadiaNow!) 설립자이고 최근 들어서 <생물지역운동 캐스케이디아 본부>(Cascadia Department of Bioregion)의 공동 책임자인 시애틀의 조직가 브랜든 렛싱어(Brandon Letsinger)에게 도움을 청했다. 우리의 대화는 팟캐스트 <커머닝의 프론티어>의 가장 최근 에피소드(에피소드 54)에 실려 있다.

렛싱어는 자신의 일은 “생물지역주의가 자본주의와 국민국가에 대한 실현 가능한 대안으로서 주류사상에 진입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실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지역경제를 다시 생각하고 물, 땅, 야생 동물 및 그 밖의 다른 살아있는 힘들을 파수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발전시킴으로써 캐스케이디아의 생태적 자립을 증가시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또한 더 책임이 있는 민주적인 정부를 조성하는 것을, 그리고 토착 주권, 시민/부족 파트너십 및 ‘토지 되찾기’ 운동을 촉진하는 것을 뜻한다.

렛싱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사고방식이 거주자들, 장소 또는 생태계를 나타내지 못하는 지도들 위의 선에 기반을 두는 한, 일정 수준의 분할이 항상 존재할 것이다. 미국 정치 구조는 대의제를 훼손하는 개리맨더링과 선들을 재정의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생물지역주의는 그것을 체계 전체를 보는 렌즈에 맞추어 다시 해석한다,

렛싱어에 따르면 [캐스케이디아를 가로질러 흐르는] 콜롬비아 강에 대한 권한을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다양한 자의적인 관할 구역에 할당하는 것은 기능장애이다. “새롭게 시작하여 강 전체를 바라보며 모든 목소리가 포함되는지를 확인함으로써 여러분은 그 사고방식을 긍정적이고 협력적인 구조로 바꾸기 시작할 수 있다.”

생태지역이란 정확히 무엇이며 여기에 기반을 두는 사고가 왜 중요한가?

렛싱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생물지역을 말하는 것은 어떤 장소를 (맨 아래에서부터 시작해서) 그곳의 물질적•문화적•생태적 현실을 통해 정의된 대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생물지역주의는 모든 것을 마치 그것들이 이 세상의 체계들로부터 어쨌든 분리된 양 정치경제와 문명의 렌즈를 통해 보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들이 모든 것을 위한 기본 토대로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을 제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렛싱어는 “생물지역주의는 사람들을 다시 장소에 연결하는 것이 핵심”이며 “지질학으로 시작된다”라고 말한다. 캐스케이디아의 경우에 이것은 수백억 년에 걸쳐 영토—분수령, 토양, 식물, 동물, 해양 생물—를 형성해온 땅과 화산들의 판들(plates)로 이루어진 거대한 ‘캐스케이디아 섭입대(沈入帶)’(Cascadia subduction zone)(주석3)를 뜻한다.

또한 생물지역주의는 “어떻게 인간이 어떤 장소 내부에서 가장 잘 살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렛싱어는 말한다. 토착민들이 어떻게 수천 년 동안 환경과 지속가능한 조화를 이루며 살아왔는지를 연구하는 것은 많은 의미가 있다. 이 전체론적인, 장기적 관점은 우리가 식량 생산, 전력 생산, 운송 및 도시설계의 현대적 시스템들뿐만 아니라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주석4) 경제활동들 및 문화규범들을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삶에] 어떻게 맞출지에 관하여 생각하도록 도와준다.

나는 콜롬비아의 바리차라 지역에서 활동하는 조 브루어(Joe Brewer)와 함께 한 이전 팟캐스트(에피소드 33)에서 생물지역 행동주의를 살펴보았다. 그는 북미에서 일련의 생물지역 상담과 협동 학습 세션들을 최근에 시작했다. 또 한명의 중요한 생물지역 활동가이자 교육자는 <영국 생물지역 학습 센터>(Bioregional Learning Centre UK)의 이저벨 칼라일(Isabel Carlisle)이다. 그녀의 조직은 수많은 주요 온라인 이벤트들을 주관했고 교육 자료들을 만들었으며 한편으로는 자신의 생물지역인 영국의 사우스 데번(South Devon)에서 과제들과 씨름하고 있다.

브랜든 렛싱어는 생물지역주의 활동가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가 새로운 유형의 지도를 만드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지도는 중립적이지 않다. 지도는 과제와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다. 지도는 국가 해당관청이나 경제 주체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매우 많다. 지도의 궁극적 목적은 기업을 위해서 수익을 내고 그 [정치적] 이해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될 것이다.”

생물지역의 지도제작은 “구글 지도 및 다른 전통적인 지도가 방치한 모든 것”을 지도에 담는다. 야생 동물의 존재, 이동 패턴, 물의 흐름, 그리고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생태적 현상들이 인간 공동체 및 문화와 교차하는 모습을 지도로 제작함으로써 땅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이 지도제작의 기본 발상이다.

캐나다에 있는 다양한 원주민 부족들이 캐나다 정부를 상대로 한 법적 투쟁에서 이런 종류의 지도제작이 그들에게 중요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부족들은 캐나다 국가와 협정을 체결한 적이 결코 없었으며 소송 목적을 위한 원주민의 상황에 대한 증빙자료가 빈약했었다. 토착민 지도제작자들과 후원자들은 부족 원로들을 인터뷰함으로써 식민지 정복으로 그들이 대량 살상되기 전에 토착 본토의 역사적 범위와 성격이 어땠는지를 보여줄 수 있었다. 쎄일리시해(주석5) 17개 섬에 거주하는 약 3천명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생물지역 지도제작 워크숍을 통해 30개의 지도가 포함된 각기 다른 생물지역 지도책자 14개가 만들어졌다.

지도는 2005년 『쎄일리시해 섬들』(Islands in the Salish Sea: A Community Atlas)이라는 한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지도에는 섬들의 사랑받는 보물들, 예를 들어 대대로 물려받은 과수원, 낚시터, 위험에 처한 야생 산호의 위치, 새들의 서식지 그리고 아주 오래된 캐나다 원주민들의 유적지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각 경우에 섬 공동체가 지도에 포함되어야 할 것을 결정했고 다른 지역의 것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서 지역 예술가들이 작업에 참여하도록 했다.

‘쎄일리시해’는 캐나다계 미국인 생물학자 버트 웨버(Bert Webber)에 의해 1970년대에 생물지역 용어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퓨젓 싸운드(Puget Sound)에 연결된 조지아 해협과 그 주위에 사는 워싱턴 주의 쎄일리시어 사용자를 예우하고, 이 수역에 속하는 석유, 물고기, 해양 포유동물들에게 정치적 정체성이 없음을 인정하고 싶어 했다. ‘쎄일리시해’라는 용어가 인기를 끌었고 지금은 이 수역을 관례적으로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브랜든과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생물지역주의에 대해 배워야 할 것이 많고 각각의 생물지역들 안에 따라해 볼 것이 많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 주제에 대한 훌륭한 소개를 접하려면 우리가 나눈 대화를 여기서 들어 보는 것이 좋겠다.

주석1 : [옮긴이] 퍼시픽 노스웨스트 서쪽으로 태평양과 동쪽으로 로키산맥을 둘러싼 북아메리카의 북서부 지역을 가리키며 캐스케이디아라고도 불린다.
주석2 : [옮긴이] 브리시티 콜롬비아는 캐나다의 최서단(最西端) 주로 태평양과 로키산맥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주석3 : [옮긴이] 섭입대(攝入帶)란 지구의 표층을 이루는 판이 서로 충돌하여 지각판 하나가 다른 지각판 밑으로 밀려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주석4 : [옮긴이] 적정기술이란 기술이 사용되는 사회 공동체의 정치적, 문화적, 환경적 조건을 고려해 해당 지역에서 지속적인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기술이다.
주석5 : [옮긴이] 쎄일리시해(Salish Sea)는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와 미국 워싱턴주에 걸친 태평양의 해역이다. 조지아 해협(Strait of Georgia), 후안 데 푸카 해협(Strait of Juan de Fuca), 퓨젓 싸운드(Puget Sound)로 이루어지며 복잡한 해협(channel)과 수로망을 포함한다.


By Department of Bioregion – Own work, CC BY-SA 4.0,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05581724




건축에 상상력이 미치는 영향력

 


  • 저자  : 존 러스킨(John Ruskin)
  • 원문 :  “Influence of Imagination on Architecture”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남영
  • 설명 : 아래는 존 러스킨의 『두 개의 길』(Two Paths, 1859)의 4강 ‘상상력이 건축에 미치는 영향력’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는 앞서 그 일부가 올라간 「『건축의 일곱 등불』해설」에서 상상력을 다룬 부분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다.  ‘상상력이 건축에 미치는 영향력’은 러스킨이 1857년 1월 23일 라이언즈인 홀(Lyon’s Inn Hall)[주석1]에서 건축협회 회원들에게 한 연설이다. (번역이 아니라 정리이므로 강조와 주석은 모두 정리자의 것이다.)

만일 누가 ‘위대한 예술가들이 군소 예술가들과 어떤 자질에서 다르냐’고 물어보면서 간단히 답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첫째 감수성과 다감함, 둘째 상상력, 셋째 근면이라고 답할 것이다. 근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게으른 똑똑이들이나 근면한 우둔이들을 봤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게으른 똑똑이들을 본 적은 있어도 게으른 위대한 사람은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고결한 작품들을 만들어낸 예술가들은 모두 위대한 일꾼들이다. 그들이 성취한 일의 양보다 더 놀라운 것은 없다. 그래서 나는 어떤 젊은이가 전도가 유망하다는 말을 들으면 그에 관한 첫 물음이 ‘일에 열심인가?’이다.

그러나 근면함이나 감수성이 예술가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별로 가치가 없으며, 많은 사람들이 강렬하고 고결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예술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예술가의 변별적 재능은 공감과 상상력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상상력을 새로운 것들을 우리의 사유 속에 상상하거나 그리는 능력으로 이해하며, 이 힘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존중심을 보이고, 기계조작·계산·관찰 등의 다른 능력보다 더 큰 힘으로 인정한다. 어떤 할머니가 난로가에서 물레를 능숙하게 잣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 기계조작 능력을 존경할 수 있고, 그 할머니가 그 일로 일 년에 얼마 벌지를 재빠르게 계산하는 것을 보고 그 계산능력을 존경할 수 있으며, 그러는 동안 손주들 가운데 난로불에 닿는 아이가 없도록 지켜보는 것을 보고는 그 관찰력을 존경할 수 있지만, 그 할머니는 여전히 평범한 할머니이다. 그러나 만일 그 할머니가 스스로 꾸며낸 동화를 내내 손주들에게 이야기해주는 모습을 본다면 우리는 그 상상력을 칭찬하면서 그 할머니가 상당히 남다른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바로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건축가가 시공도((施工圖)를 잘 그리면 우리는 그의 능숙함을 칭찬하고 계약한도를 잘 지키면 그의 정직한 산수능력을 칭찬하며 들보 놓는 일을 잘 지켜보아서 아무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면 그의 관찰력을 칭찬하지만, 그가 상상력으로 칭찬을 받고 남다른 건축가라고 평가를 받으려면 이 모든 것 이외에 그 자신의 머리로 창작한 동화를 우리에게 들려주어야 한다. 따라서 어떤 동화가 건축에 의해 창작되고 건축에서 들리는지를, 즉 건축이라는 엄밀한 예술에서 건축가 여러분의 손만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같이 생각해보자.

‘머리’로 작업을 하는 문제로서 젊은 건축가에게 처음 떠오르는 생각은 아마도 넓게는 근대 문명, 좁게는 영국에 값하는 ‘새로운 양식’을 발명할 책임이리라.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이런 책임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분들이 있다면, 다음과 같이 묻고 싶다. 모든 발명력 있는 건축가들이 각자 새로운 양식을 발명하도록 군(郡) 하나를 할당하고 실제 작업을 위해 주(州) 하나를 할당하는 것이 여러분의 계획인가? 모든 건축가가 새로운 양식의 작은 한 조각을 발명하고 마지막에 모든 조각들을 모아야 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양식은 언제 발명하고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런 상상의 엘도라도가 허용되었다고 치면, 한 명 이상의 콜럼부스가 있을 수 있는가? 우리가 욕망하는 양식이 발명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단지 그 양식 아래에서 짓는 것 아닌가? 나는 지금 다른 경우에는 내가 인정하지 않는,[주석2] 새 양식의 발명이 가능하다고 치고 말하고 있다. 심지어 이전에 사용하던 것과 전적으로 다른 새 양식을 발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치자. 주두를 기둥의 아래쪽에 놓는다고 치자. 버트레스를 피너클의 아래가 아니라 꼭대기에 놓는다고 치자. 개구부를 아치도 아니고 수평도 아닌 모양으로 씌운다고 치자. 곡선도 아니고 직선도 아닌 선들로 장식을 구성한다고 치자. 용광로와 대장간을 마음대로 사용하여 유리판을 뽑아내고 쇠막대를 뽑아내어 우리 주위를 온통 검은 골격과 눈부신 사각형의 광대한 풍경으로 둘러쌌다고 치자. 거리를 연성(延性)의 잎장식으로 장식하고 지붕을 다채로운 수정으로 씌운다고 치자. 런던 전체에 얼룩덜룩한 돔을 씌운다고 치자. 그 다음에는? 여러분의 상상력은 쇠 잎장식들의 그림자 아래에서 혹은 놀라운 돔의 다양한 빛 안에서 잠자고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여러분의 영혼과 상상과 야망은 전적으로 무한하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여러분은 여전히 스스로 무언가를 하고 싶을 것이다. 여러분은 팔라디오(Palladio)[주석3]나 팩스턴(Paxton)[주석4]에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녹인 모든 금속과 유리를 다 합해도 우리 인간 정신의 야망의 날개를 방해할 만큼의 무게가 되지 못한다.

어떤 양식의 본질은 그것이 오랜 세월 동안 실행되며 모든 목적에 적용된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어떤 양식이 실행 중인 한에서는 개인의 상상력이 달성할 수 있는 것이 그 양식의 범위 내에 있지 새로운 양식의 발명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솔즈베리 대성당을 지은 사람은 고딕 양식을 발명하지 않았어도 명성을 누렸으며 티치아노는 유화를 발명하지 않았어도 베네치아에서 명성을 누렸다. 그러면 일정한 양식 안에서 상상력이 발휘될 여지가 어떤 것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첫째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건축가의 발명력이 발휘되는 주요 분야가 선들, 몰딩들, 덩어리들을 보는 이의 기분을 좋게 하는 비율로 배치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특정의 양식을 선택했을 때, 이와 다른 식으로 발명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 이것을 제대로 하는 데에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다. 우아하게 비율이 잡힌 디자인의 재능은 규칙이나 연구로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건물 정면의 한 층일이지라도 타고난 직관에 의해서만 아름답게 배치될 수 있다. 싼미켈리(Michele Sanmicheli)[주석5], 이니고 존스(Inigo Jones)[주석6], 혹은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주석7]의 설계에서 보이는, 부분들의 가장 단순한 배치와 맞먹는 설계를 자신의 설계에서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를 자랑할 정당한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발명력과 재능을 전제로 하고 묻는 것인데) 특정 건물의 선들을 아름답게 배치했을 때 무엇이 성취된 것인가?

우선, 여러분은 그 성취된 아름다움이 감동적이거나 감상적인 종류라는 점을 말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음악은 여러분을 때로 울게 만들고 때로 웃게 만들 것이다. 음악은 병사에게 용기를 줄 수 있고 사랑에 빠진 연인에게 언어를 줄 수 있으며 애도자에게 위안을 줄 수 있고 즐거운 사람에게 더 많은 즐거움을 줄 수 있으며 독실한 사람에게 더 많은 겸허함을 줄 수 있다. 일군의 선들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그렇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건축물에서 보는 비율이 여러분을 감동시키거나 영감을 주거나 위안을 주지 못하더라도 즐겁게는 해주는가? 음악에서 음표들 사이의 비율은 여러분을 즐겁게 하는 데 필수적이다. 머리에 꽃을 꽂거나 옷에 리본을 두르는 것도 여러분을 감탄시키며 여러분의 행복에 필수적이다. 케익에 박힌 건포도들의 비율이나 과자에 박힌 설탕의 비율에 예민한 관심을 보이는 젊은이들이 있는데, 문의 아키트레이브[주두 위에 놓이는 상인방이나 들보]에 즐거움을 느끼는 젊은이를 본 적이 있는가? 혹은 몇 명을 수용할 수 있느냐와는 다른 각도에서 방의 비율에 관심을 가진 젊은이들은 본 적이 있는가? 만일 런던에서 최고의 비율을 가진 건축물이 줄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하룻저녁에 집중시킬 수 있고 여러분이 이 즐거운 엔터테인먼트 행사에 참가할 티켓을 무료로 발행한다면, 사람들은 이 행사에 참가할 것인가 아니면 드루리 레인[주석8] 팬터마임을 보러 갈 것인가?

여러분은 재능이 뛰어나고 자신의 예술에 매진하더라도 즐거움을 주거나 위안을 주거나 용기를 북돋거나 하지 못할 것이다. 과학도 즐거움을 주거나 위안을 주거나 용기를 북돋거나 하지 못한다. 그러나 과학은 여러분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줄 수 있다. 고결한 사실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고 땅과 공기의 비밀을 열어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건축물에서의 비율은 이런 일을 못 한다. 그저 2 더하기 2는 4이고, 1:2=3:6이라는 것을 가르칠 뿐이다.

그렇다면 건축가인 여러분은 위안을 주지도 못하고 즐겁게 해주지도 못하고 가르쳐주지도 못한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누구에게든 쓸모가 있는가?’라고 물으면 여러분은 ‘항상 비가 내리는 이런 기후에서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이 쓸모는 건물을 짓는 사람으로서의 쓸모이지 선들의 비율과는 무관하다. 우리는 우리를 보호해주는 것으로서의 건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재능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작업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다시 묻는다. 여러분이 설계한 정면에서의 선들의 비율이 병자를 낫게 하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는가? 여러분의 노년에 건축가로서의 성취라는 것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을까? 건축가로서의 여러분에게 누가 고마워할 것인가? 어쩌면 (걱정되는 일이지만) 건축물의 선들의 유령들이 노년의 여러분의 침대 옆에 아무 말 없이 흐릿하게 앉아있을 것이며, 여러분은 자신의 높은 재능의 모든 발현들을 목마른 사람에 준 찬물 한 잔에 대한 기억이 주는 즐거움보다 덜한 즐거움으로 되돌아볼지도 모른다.

여러분 위대한 작품들과 거기에 투입된 건축노동자들에게 준 큰 보상의 경우에는 즐거움을 갖고 뒤돌아보리라고 대답하지도 말고 대답하려고 생각하지도 말라. 나는 여러분이 건축자로서 그렇게 하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반복하건대 나는 여러분의 건물 짓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나는 여러분의 발명력과 상상력이 가진 이점(利點)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건물 짓기를 통해 행하는 좋은 일은 여러분이 고용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 여러분이 하는 일이 아니다. 여러분은 그 혜택주기에 동참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행해야 할 좋은 일은 여러분의 설계 작업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나는 여러분을,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들을 고용함으로써 좋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보다 감정을 표현하는 작곡에 의해서 좋은 일을 하는 음악가들에 비견한다. 바이올린 연주자들을 고용하는 것은 사실은 음악가들이 아니라 대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건축가들은 우리의 재능으로 어떤 좋은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이 하나의 물음을 명확하게 고수하면서 그리고 우리의 비율 시스템에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할 수는 없다는 점을 알게 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가를 말해주시겠는가?

법률가, 의사, 성직자, 과학자, 예술가, 일용노동자, 소상공인―무슨 분야든 그 유용함과 별개로 그와 연관된 어떤 강렬한 즐거움이 있다. 그런데 건축설계에는 그런 즐거움의 여정이 없다. 결론적으로 여러분은 누군가를/여러분 자신을 즐겁게 하거나, 누군가에게/여러분 자신에게 정보를 주거나 누군가를/여러분 자신을 돕거나 하지 못할 것이다. 그저 1:2=3:6이라는 것 말고는 보여주지도 느끼지도 보지도 못하는 상태로 빠진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는 우리를 뭐라 부를 것인가? 인간들? 내 생각에는 아니다. 우리를 부르는 올바른 이름은 분자와 분모이다. 속된 분수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건축의 영혼이 일정한 비율을 이루는 선들에 있다고 보는 이 이론보다 더 나은 것이 있는가?

정신도 건강하려면 모든 면에서 계발되어야 한다는 원칙에서 출발하자. 호기심, 공감력, 감탄하는 능력, 기지(機智) 등 정신에도 많은 능력들이 있다. 작업방식을 선택할 때에는 가능한 한 이 모든 능력들을 한껏 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발현하는 방식이란 각 능력의 대상에 주의깊게 관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공감력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존재들 사이에 있으면서 그들에 대해 생각해야 하고, 감탄 능력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것들 사이에 있으면서 그것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뻔한 것처럼 들린다. 나는 적어도 그러기를 바란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 원칙에 기반을 두어 행동하기를 거부하지 않고 더 나아가 살아있는 존재들과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어떻게 계속 생각할지를 숙고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미앵 대성당 포치의 사진들을 청중에게 보여준다.] 이 단 하나의 입구를 채우는 데 얼마나 많은 공감과 발휘되어 있는가? 주교가 되고 싶지 않았던 성 오노레(St. Honoré)가 한 구석에 샐쭉하게 앉아 있다. 그는 책을 손으로 꽉 껴안고 있으며 주교장을 잡으러 일어나려고 하지도 않는다. 아미앵의 시 장로들이 성오노레를 독려하고 읍의 모든 수도사들이 성오노레가 주교직에 앉지 않으면 어쩔지 난감해한다. 반대쪽에 있는 수도사들 가운데 하나는 성오노레 없이도 잘 될 것라고 태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마침내 성오노레는 주교가 되는 데 동의하고, 주교좌에 앉는다. 그의 무릎에 있던 책은 이제 당당하게 탁자 위에 있으며 그의 마을 부목사 가운데 하나에게 숲에서 유물을 찾는 방법을 알려준다. [손으로 가리키며] 여기가 숲이고 여기가 마을 부목사이며, 여기가 성 빅토리쿠스와 성 겐티아누스의 유해가 있는 무덤들이다.

[주교가 된 이후 성오노레의 일생, 생략]

이 하나의 얕은돋을새김에 담긴 인간에 대한 공감과 관찰의 양을 생각해보라. 이 다양한 형상들을 표현할 수 있기 위해서는 건축가에게 많은 지적 힘과 자연의 관찰이 필요했다.

여러분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이것은 조각이지 건축이 아니라고. 그럼 조각과 건축의 구분 지점이 어디인지 말해주기 바란다. 처음부터 시작해보자. 순수한 건축 작품으로 확실하게 인정되는 것을 보여주겠다. 여러분이 아마도 순수하지 않다고 할, 노트르담 대성당의 팀파눔들 중 하나의 사진 뒤에 그려져 있다. 이 사진을 보라. 웃지 마시라. 이것은 고전적 건축이므로 이를 보고 웃으면 무례한 것이다. 이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의 한 항목에서 가져온 것이다.

‘순수’하지만 별로 좋게 느껴지지 않으므로 여기에 몰딩 몇 개를 넣어보는 게 어떨까? 모두 찬성인 듯하다. 몰딩의 단면도를 설계할 것인가 베낄 것인가? 설계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몰딩의 단면도를 그리는 것보다 그것을 깎아서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그런데 ‘건축은 쉬운 것을 하고 조각은 어려운 것을 한다’는 점이 건축과 조각 사이의 차이의 정의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깎아 만든 몰딩은 아무 것도 재현하지 않으며, 깎아 만든 드레이퍼리는 무언가를 재현한다. 그러나 이것도 또한 건축과 조각 사이의 차이에 대한 설명으로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조각은 의미를 가지는 예술이지만 건축은 의미를 갖지 않는 예술이다‘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양자의 차이를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면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여러분은 아마 우리가 직접 지시하고 정확하게 주문한 대로 깎아내게 하는 모든 장식을 ‘건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세공인의 의지나 어떤 다른 설계자의 감독에 맡길 수밖에 없는 장식들은―특히 건물의 필수적 부분이 아니고 다소 외적이거나 외장형인 경우―‘조각적’인 것으로 간주한다고 답할지 모르겠다.

나는 이 정의를 받아들이면서, 이것은 사실 맨 처음 나온 정의―쉬운 것은 모두 건축이고 어려운 것은 모두 조각이다―의 증폭일 뿐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조각이 놓일 자리의 배치는 설계에서 조각 자체만큼이나 어렵거나 큰 부분은 아니기 때문이다. 피사 대성당 세례당에 있는 니콜로 피사노의 설교단의 사례를 보자. 대리석 기둥몸체에 의해 받쳐진, 패널 몰딩으로 둘러싼 일곱 개의 풍성한 돋을새김. 니콜로의 높은 평판은 패널 몰딩 때문인가 돋을새김 때문인가? 패널 몰딩은 니콜로가 직접 제작한 것이다. 그는 이것조차 보통의 세공인에게 맡기기를 싫어했을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거나 그 안에 어떤 명예가 있어서는 아닐 것이다. 일단 조각을 했으니 그것을 감싸는 윤곽선들은 그에게는 아이들 장난과 같았을 것이다. 기둥몸체의 지름과 주두의 높이의 결정은 몇 분이면 되는 문제였다. 그의 일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Crucifixion)와 <세례>(Baptism)을 조각하는 것이었다.

피렌체의 오르싼미켈레 성당에 있는 오르카냐의 감실(龕室). 풍성하고 다채로운 얕은돋을새김이 패널 몰딩에 감싸여있고 모자이크된 기둥몸체들이 그것을 받치고 있으며 잎장식이 있는 아치들이 캐노피를 받치고 있다. 오르카냐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가 그의 명성을 잎장식에 맡긴다고 했을까, 아니면 자신의 영혼의 자부심을 패널링에 둔다고 했을까? 아니다, 그는 죽어가는 성모의 침상 주위에 고개를 숙이고 둘러서 있는 형상들에 있다고 말할 것이다.

[마지막 사례] 아미앵 대성당의 입구에 설계된 행렬은 대가의 손에 의한 것이다. 여기가 대가의 사유의 중심이다. 이 중심에 맞추어 아치가 굴곡을 이루고 피너클이 솟아오른다. 이 일을 했고 돌에 인간의 표정과 행동을 부여할 수 있으면 나머지 모두―늑재, 벽감, 잎장식, 기둥―는 단지 그의 손 장난감들이요 그의 구상의 액세서리들일 뿐이리라. 여러분이 이것을 하는 재능을 일단 얻게 되 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발명력이 가능하게 하는 한) 여름 비가 내린 이후 시냇물들에서 구름이 솟아오르듯 영국 전역에 성당들을 흩뿌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조각가들은 현재 성당을 설계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고 여러분은 아마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는 단지, 우리가 건축을 너무나도 지루하게 만들어서 사람들이 흥미를 느낄 수가 없고 따라서 우리가 조각가들의 높은 지식에 건물 짓기의 초라하고 평범한 지식을 추가하려고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여러분은 조각을 건물 짓기로부터 분리했고 양자의 힘을 박탈한 셈이다. 조각가가 연속적인 작업을 펼칠 공간이 없으면, 건축가인 여러분이 여러분의 작업을 기계적 작업의 연속으로 환원함으로써 잃게 되는 만큼 많은 것을 잃기 때문이다. 건축가와 조각가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집단에 속하고 또 그렇게 속해야 한다. 화가의 경우에 보이는, 때로는 작은 그림을 그리고 때로는 궁전 회랑의 프레스코화를 그리는 작업상의 차이와 같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결론은 이렇다. 상상력을 비롯한 영혼의 능력들을 온전하게 발휘하게 하려면 여러분은 과거의 위대한 건축가들이 했던 것처럼 해야 한다. 즉 여러분 자신이 조각가가 되어야 한다. 페이디아스, 미켈란젤로, 오르카냐, 피사노, 조토—이 가운데 누가 정을 사용할 수 없는 사람이던가? 여러분은 ‘어려운 일이다, 불가능하다’라고 말할 것이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위대한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여러분은 조각 없이 건물 짓기를 연구하는 한 위대한 것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위대한 것을 만나도록 해주고 싶고, 여러분이 그 만나는 길을 찾았으면 한다. 완전한 조각의 세련된 예술이 항상 여러분에게 요구된다는 마음으로, 행해야 할 과제에서 움츠러들지 말라. 건축과 조각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지만, 건축적 방식의 조각이 따로 있다. 이는 대부분의 경우 비교적 쉬운 것이다. 적어도 돌을 다루는 데서 현재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큰 잘못은, 모든 작품이 과도하게 세련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책의 모든 삽화를 라파엘로의 삽화처럼 세련되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여러분은 존 리치(John Leech)[주석9]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만큼 드로잉을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로 직선을 긋거나 콤파스로 원을 그리는 일만 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각을 디자인하는 여러분의 힘과 관련해서도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은 페이디아스처럼 조각할 수 없다고 느낄 것이다. 그래서 조각은 아예 하지 않고 몰딩만 도안할 것이다. 이렇게 현대에 특히 가치 있는 모든 중급의 힘이, 수천 명이 획득할 수 있고 수만 명이 도전해 볼 수 있는 저 대중적인 표현의 힘이 돌과 관련해서는 사라진 상태이다. 비록 잉크와 펜으로 글을 쓰는 데서는 중급의 힘이 가장 중요한 엔진들이 되었고 현대 문명의 가장 바람직한 호사 가운데 하나가 되었지만 말이다.

건축적 방식의 조각은 한편으로 완벽한 조각과 구별되고 다른 한편으로 단순한 기하학적 장식과 구분된다.

멀리서 보는 세공품은 매우 정밀하게 조각할 수 있어도 저 위에 놓이는 순간 소용이 없게 된다. 그런데 아름다움이 멀리 물러남으로써 사라지는 반면에 흠들도 사라진다. 거리(距離)의 자연적 귀결인 이 신비와 혼란은 최고의 솜씨를 헛되게 만들기도 하지만 종종은 최악의 오류를 별 것 아닌 것으로 만들기도 할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깊은 절개나 거친 모서리가 어떤 곳들에서는 결코 바라지 못했던 놀랍고도 진실한 표현 효과를 낳을 것이다. 작품에 무언가가 없는데도 거리만으로 이렇게 된다는 말이 아니다. 만일 그 안에 생명력(life)이 있다면, 거리가 처리과정의 결함들을 완화시킴으로써 그 생명력을 더 지각 가능하고 더 강력하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특이한 이점을 얻게 된다. 즉 상상이 마음껏 발휘되게 할 수 있고 원하는 표현을 위해―혹시 잘못 두드리더라도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는 알기에―세게 두드릴 수 있는 것이다. 손을 대기만 하면 자연이 도울 것이며, 그림자와 햇빛이 변할 때마다 여러분의 상상의 새로운 국면들이 드러날 것이다.

런데 건축적 방식의 조각에 속하는 것은 이러한 불완전함의 특권만이 아니다. 상상력이라는 진정한 특권이 있다. 이는 더 완성된 작품―이것을 나는 구분을 위해서 ‘가구 조각’(furniture sculpture)이라고 부르겠다―에 부여되는 모든 것을 훨씬 능가한다. (가구 조각이란 방들을 장식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이동할 수 있는 조각을 말한다.)

가구 조각은 보는 이가 보통 조용하거나 평범한 상태에서 접하게 된다. 그는 그것을 고결한 것과 연관된 것으로 보기보다 사치스러운 것과 연관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의 호기심보다는 안락함에 호소하는 상황에서 본다. 식탁 주변에서 하인들이 들락날락 하는 가운데 보았을 때 애처로운 느낌을 주게 되는 조각상은 그 안에 강한 파토스를 가졌음에 틀림없으리라. 그리고 응접실의 대화 가운데 경외스러운 느낌을 주어야 할 조각상은 전적으로 그 안에 경외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으리라. 그러나 건축물의 조각을 보는 이는 이미 흥분되고 상상력에 찬 상태에서 작품을 접하게 된다. 그는 포치의 조각을 보기 전에 낮은 거리를 저 위에서 내려다보는 성당 벽에 큰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신비에 대한 그의 사랑이 클로이스터의 고요함과 음영에 의해 발동된 상황에서 볼팅(vaulting, 아치형 천장) 위의 양각들을 판독하게 된다. 그래서 그가 여러분이 한 것들을 일단 관찰하기 시작하면, 그는 여러분이 그의 이 상상력에 찬 기분에 맞추는 것보다 더 나은 것, 더 친절한 것을 여러분에게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즉 여러분이 (주변 장면의 신비와 장엄함이 유발한) 공포감을 더 촉진하거나 희한한 것들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것보다 더 나은 것, 더 친절한 것을 여러분에게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이 형태들을 덜 선명한 채로 남겨두거나 기이한 공상을 그로테스크한 형태나 음영으로 구현하거나 한 것이 대체로 관찰자의 기분에 상응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여러분의 결함들을 발견하는 데 자신의 판단력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기꺼이 여러분이 의미한 바를 돕는 데 자신의 상상을 사용할 것이다.

상상력과 감정이 강하게 촉발되면 기이한 것들을 동반할 뿐만 아니라 고요한 시간에 그야말로 미지의 즐거움을 갖고 미세한 것들도 들여다보게 할 것이다. 감정이 강하게 촉발되면 가시적인 대상들의 모든 세부들이 여러분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기묘한 강렬함과 집요함을 가지고 제시될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정신을 재촉하고 눈을 압박할 것이다. 상상력이 강하게 자극될 때마다 감각이 이 상태에 어느정도 들어선다. 다른 때에는 사소한 것들이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위엄 혹은 의미심장성을 띠는 것이다. 열띤 자극에 의해 활성화된 주의력은 세부의 가장 미세한 상황들과 작품에 구현된 의도의 가장 희미한 흔적들에 집중된다. 그래서 다른 경우라면 조각 작품에서 다소 저급하고 외적인 것으로 느껴질 것, 그리고 완벽한 취향이나 비판적 판단에는 틀림없이 불쾌하게 느껴질 것이 이 각성된 상상력의 탐구성, 주의력과 만나게 되면 기분 좋은 것이 되고 심지어 고결해진다. 이는 모두 여러분에게 유리한 것이다. 여러분의 조각 작업의 시초에는 단순한 형태들의 해부학적 구조나 고결한 덩어리들의 흐름을 완벽하게 하는 것보다 의상이나 성격의 세밀한 상황들을 모방하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세 가지 점, 즉 ① 여러분이 완벽하게 할 수 없는 미점(美點), 여러분이 획득할 수 없는 단순성은 혹시 그것을 성취할 수 있더라도 열정적인 상상의 성급한 호기심에 호소하는 데에서는 대체로 소용이 없다는 점, 그러나 ② 여러분의 앎에는 주어지지 않을 공감이 여러분의 순진함에는 부여되리라는 점, 그리고 ③ 일반적인 관찰자의 정신은 해부학적 구조의 정확함이나 제스처의 올바름에 의해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지라도 여러분이 머리카락을 조각하고 의상의 패턴을 조각할 때 즐겁게 공명하여 여러분을 좇을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격려가 될 것이다.

더 나아가보자. 큰 규모의 건축물의 특성들이 연합하여 상상의 힘을 촉발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장식이 종속되어야 할 건축적 법칙들이 그 장식의 창의력을 자극한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조각 작품을 그 꼭대기에 새길 모든 크로켓, 장식해넣을 모든 잎장식들이 보는 이의 상상에 예쁜 사물들로서만이 아니라 문제적 사물로서도 제시된다. 거기에는 여러분이 보여주고 싶은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여러분이 충족해야 했던 필요도 담겨 있음을 여러분은 즉각적으로 안다. 이러저러한 공간을 어떤 가능한 방식으로 유기적 형태로 채울 것인가, 아니면 이러저러한 돋을새김이나 이랑진 부분을 어떻게 생명력(활력)의 이해 가능한 이미지로 전환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즉시 즐거움의 문제인 동시에 감탄의 문제가 된다. 추한 난쟁이와 못생긴 도깨비가 구석에 모이기만 하면 되거나 웅크려 가치발을 지탱하기만 하면 된다면 형태•제스처•특성에서의 완벽함이라는 통상적인 조건들은 기꺼이 생략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종류의 작업에서라면 부분들의 완성에 필요할 기술이 건축 조각에서는 결핍되더라도 즉시 용서받을 것이다. 여러분이 거칠게 구현한 것을 창의력 있게 배열해서 손의 투박함을 기지의 명민함으로 보완했다면 말이다.

지금까지는 상상력이 펼쳐지기에 유리한 건축의 상황만을 고찰했다. 더 중요한 점은 상상의 모든 대상들이 차지하는 위치인 듯하다.

상상력은 그것이 다루는 재료의 양에 비례하여 왕성할 것이 틀림없으므로 우리가 보는 것의 범위를 넓히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의 풍부함도 그에 비례하여 증가한다. 그렇다면, 건축이 허용하는 소재에서 여러분의 상상에 열릴 장이 어떨지 생각해보라. 거의 모든 다른 예술은 그 소재가 엄하게 한정되어 있다. 가령 풍경화가는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들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하고, 역사화가는 야생의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들로부터 도움을 이보다 덜 얻으며, 순수 조각가는 일상적인 삶으로부터의 도움을 이보다 훨씬 덜 얻는다. 눈으로 보는 것이든 구상하는 것이든 건축에 유용하지 않을 것 혹은 그에 대한 관심이 건축에 이점이 되도록 자극되지 않을 것이 있는가? 천사들에 대한 비전에서부터 중요성이 가장 덜한 노는 아이의 제스처에 이르기까지, 신성(神性)의 어떤 측면이든 인간성의 어떤 측면이든 건축가에 의해 과감하게 채택될 수 있다. 너무 방대하거나 미세해서 다루지 못하거나 이용하지 못할 동물은 동물계 어디에도 없다. 사자와 악어가 기둥몸체에서 웅크리고 있을 수 있고, 나방과 꿀벌이 꽃들 위에서 햇볕을 쬘 수 있으며 새끼사슴이 뛰고 달팽이가 기어가며 비둘기가 가슴털을 고르고 솔개가 남쪽을 향해 날개를 펼 것이다. 식물계도 건축가를 위해 개화하고 덩굴손을 뻗어간다. 잎들이 몸을 떨어 여러분은 대리석의 눈[雪] 아래에서 조용히 있기를 잎들에게 명하며, 땅이 악처럼 내보내는 가시와 엉겅퀴도 여러분에게는 가장 친절한 하인들이다. 죽어가는 꽃잎이나 시들어가는 덩굴손 가운데 너무나도 나약해서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은 없다. 개화의 오만도 왕의 지위를 내려놓고 여러분의 손에서 희미한 불멸성을 받아들인다. 보통의 삶에서 여러분의 손길에 의해 고결해지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저열한 것이 있는가? 보통의 사물에서 여러분의 손길에 의해 고결해지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사소한 것이 있는가? 생명이 있는 것 가운데 여러분에게 가르침 혹은 선물을 주지 않는 것이 없듯이, 생명이 없는 것 가운데에도 여러분에게 가르침 혹은 선물을 주지 않는 것은 없다. 깃털의 힘이나 잎의 연함을 지켜보는 데 싫증이 나면 거친 강변이나 거리의 가장 붐비는 시장들로 걸어가 볼 수도 있다. 잘린 끈조각이라도 꼬아서 완벽한 몰딩으로 만들지 못할 것은 없으며, 내다 버린 돗자리 조각이나 부서진 바구니 가운데 줄무늬나 주두로 만들지 못할 것도 없다. 그렇다. 모래를 모으고 밟고 있는 돌을 깬다면 그 조각들 가운데 거의 보이지 않는 것들에서도 여러분의 볼팅의 별모양 트레이서리들에서 어엿하게 한 자리 차지할 형태들을 발견할 것이다. 산 정상에 요새를 세우고 도시에 탑을 지을 수 있는 여러분은 이렇듯 타고 남은 재에도 아름다움을 부여할 수 있고 먼지도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다.

이렇게 여러분의 예술이 이 모든 재료를 여러분에게 제시한다는 점에서 여러분은 이미 즐거워할 것이 많다. 그러나 즐거워할 것이 더 있다. 이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제공되기는 하지만 해부되거나 분석될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공감의 대상으로서, 따라서 상상력의 도덕적 부분을 발현하기 위해서 제공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線)에만 국한한다면 우리는 자연 연구자를 부러워할 이유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는 사실들에 능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의 사실들로부터 생기는 감정들에 능통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부러워할 것이 거의 없게 된다. 가령 대리석 덩어리를 보고 자연 연구자는 그 덩어리의 자주색이 어느 정도로 철분으로 인한 것이고 그 흰색이 어느 정도로 산화 마그네슘으로 인한 것인지 즉각적으로 숙고하는 데 돌입해야 한다. 그는 대리석 조각을 부수며 하루가 저물 때에는 그의 도가니에 돌가루 조금과 원소들에 대한 이론에 추가된 일정한 데이터 말고는 남는 것이 없게 된다. 그러나 여러분은 공감하기 위해서 대리석에 접근하며 그 아름다움에 즐거워한다. 절개를 좀 하지만 그 맥을 더 완전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하루의 일이 끝날 때 여러분은 기쁨과 만족감을 갖고 대리석 기둥을 대리석으로서 완벽한 상태에 둔다. 돌 대신에 동물들을 지켜볼 때에도 여러분은 마찬가지 방식으로 자연 연구자와 다르다. 그는 아마도 (만일 그가 상냥한 사람이라면) 그의 주위에 살아있는 동물들이 많은 것에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업의 주된 부분은 깃털을 세고 조직을 분리하고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의 작업은 항상 살아있는 존재와 관련된다. 그 존재의 삶에서 여러분이 포착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의 생명력과 행동방식들이다. 그것의 뼈에 세포가 몇 개 있는지, 그것의 깃털에 가는 끈들이 몇 개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그것의 도덕적 성격과 그것이 행동하는 방식이다. 이는 여러분의 상상력이 건강하면 맨 먼저 포착하게 될 바로 그것이며 여러분의 정(chisel)이 강건하다면 맨 먼저 깎아 만들 바로 그것이다. 여러분은 폭풍의 기세를 독수리들에 담아 넣고 영주의 위엄을 사자들에게 담아넣으며 경계하는 두려움을 새끼사슴들에게 담아 넣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새끼사슴들과 계속적으로 공감해야 하고 사자와 손과 장갑의 관계가 되어야 하며, 모든 솔개들과 손과 발톱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하등동물들과 공감한다고 해서 여러분을 낮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등동물들과 공감하지 못하면 고등한 존재들과도 제대로 공감하지 못한다. 여러분은 여왕들, 왕들, 순교자들, 천사들 등 고등한 존재들과도 공감해야 한다.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박한 인류의 모든 욕구 및 방식들과 공감해야 한다. 거리에서 여러분을 서둘러 지나치는 얼굴 가운데 인상적이지 않은 얼굴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그 인상의 깊이를 측량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모든 역사가 여러분에게 열려있고, 인간의 과거의 운명들이 시사하는 모든 높은 사상들과 꿈들이 여러분에게 열려 있다. 모든 요정의 땅이 여러분에게 열려 있다. 숲에 출몰했거나 언덕 위에 힐긋 나타났던 비전 가운데 어떻게 그것이 인간들의 마음에 들어왔고 여전히 그 마음을 건들 수 있는지를 이해하도록 권하지 않는 비전은 없다. 그리고 모든 낙원이 여러분에게 열려 있다. 그리고 낙원의 작업도 여러분에게 열려있다. 이 모든 것을 영속적이고 매력적인 진실의 형태로 여러분의 동포들의 눈앞에 가져올 때 여러분은 천사들의 무리를 상상할 뿐만이 아니라 천사들의 일에 합류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측면에서 여러분의 작업에 얼마나 독특한 중요성과 책임이 주어져 있는지를 명심하라. 그 영속성과 그것이 향해져 있는 다중을 생각해볼 때 말이다. 우리는 종종 현명한 사람들 덕분에, 소수가 듣고 듣자마자 잊힐 단어들에 때로 부여될 수 있는 책임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여러분의 단어들[건축물들]은 여러분이 잘 짓는다면 그 어떤 것도 소수가 듣지 않을 것이며, 500-600년 동안은 잊히지도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지나가는 모든 이에게 말할 것이며, 저 모든 조그만 공감들, 기발한 공상, 돌로 하는 농담들, 변덕 속에서의 문제 해결은 여러분이 사라진 후에도 수많은 다중의 정신을 차례차례로 사로잡을 것이다. 여러분은 책의 저자들처럼 듣기를 청할 필요가 없으며 망각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그저 충분히 크게 짓고, 충분히 대담하게 깎으라. 그러면 모든 세상이 여러분의 말을 들을 것이다. 그들은 볼 수밖에 없다.

내 의도는 이런 생각으로 여러분을 두렵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에게 아주 많은 목격자들과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결코 익살을 부리지 않을 것이고 어떤 것을 즐겁게 하지 않거나 경쾌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반대로 나는 처음부터 여러분의 이러한 예술을, 특히 그것이 여러분의 성격의 전체를 담을 여지가 있기 때문에, 청했다. 만일 익살이 여러분 속에 있다면 익살을 부리라. 수학적 재능이 여러분에게 있다면 문제를 설정하고 원하는 만큼 진지하게 해를 찾으라.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작품이 쉽고 행복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라. 그렇지 않다면 다른 누구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여러분의 충동들에 몸을 맡길 때 하나의 고결한 충동이 중심이 되어 그 충동들을 이끌도록 하라. 3중의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① 여러분이 행하는 예술을 사랑하라. ② 여러분의 창작활동을 사랑하라. ③ 여러분이 자신의 작업을 바치는 존재들을 사랑하라.

첫째로 자신이 행하는 예술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 말고 다른 동기가 여러분의 머리에서 주된 것이 되면 그 순간 여러분의 예술은 끝난 것이다. 돈. 명성, 지위를 욕망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여러분은 이 셋을 욕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러분은 이 셋을 사랑할 수 있고, 열정적으로 탐할 수 있다. 그러나 맨 앞에 내세워서 탐하고 사랑해서는 안 된다. 강한 열정과 상상력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무언가를 좋아하면 많이 좋아하게 마련이다. 문제는 첫째냐, 둘째냐이다. 예술이 여러분을 이끄는가, 이득이 여러분을 이끄는가? 여러분은 돈 버는 것을 극히 좋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일로 500 파운드를 덜 벌 것이냐 아니면 여러분의 건물 짓기를 망칠 것이냐라는 물음에 이르게 되고, 건물 짓기를 망치는 쪽을 택하게 되면, 여러분은 끝난 것이다. 여러분은 귀뚜라미가 크림을 갈망하듯이 명성을 갈망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을 즐겁게 할 것인가 아니면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대로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이르고 둘 다 할 수는 없어서 대중을 즐겁게 하는 쪽을 택하면 여러분은 끝난 것이다. 여러분에게 희망은 없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지나가는 사람의 일별을 받을 가치가 없을 것이다. 이 시금석은 절대적이고 불가피하다. 예술이 여러분에게 첫째가는 것인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술가이다. 여러분은 돈을 번 후에 구두쇠가 될 수도 있고 고리대금업자가 될 수도 있다. 명성을 얻은 후에 시기심을 갖게 되고 오만함을 갖게 되고 저열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도 그런 여러분이 여러분의 작업을 망치려하지 않는 한 여러분은 예술가이다. 반면에 돈이나 명성이 여러분에게 첫째가는 것이라면, 여러분이 돈으로 관대하게 베풀고 돈을 근사하게 쓰며 자신의 평판을 매우 우아하게 누리는 사람일지라도, 또한 여러분의 아랫사람들에게 매우 공손하며 여러분의 윗사람들에게 매우 마음에 드는 사람일지라도, 여러분은 예술가가 아니다. 여러분은 기계공이고 허드렛일 하는 사람이다.

둘째로 자신의 창작활동을 사랑해야 한다. 여러분이 선택한 주제에 여러분이 투여하는 감정의 강렬함에 그 주제의 성격에 대한 여러분의 인식의 깊이와 정당함이 전적으로 비례할 것이기 때문이다. 감정의 이 깊이는 여러분이 그 감정을 이러저러한 것에 관련시킬 때 즉각적으로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올바르게 느끼려고 노력하는 전반적 습관의 결과이다. 이것을 하도록 돕는 수천 개의 다양한 수단 가운데 내가 특별하게 여러분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은 ‘사소하게 신경 쓰이는 것들을 멀리 하라’이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안달하지 말고 머리를 사소한 분함들과 욕망들로 채우지 말라. 나는 막, 여러분이 위대한 예술가이면서도 구두쇠이고 시기심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일들에 골치가 아플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골치 아픈 것들이 하루 종일 여러분의 머릿속에 있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이 돈을 모으는 습관이 생겼을 수도 있고 경쟁자에 대해서 부당하게 말하고 싶은 유혹에 굴복할 수도 있다. 이런 것으로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힘을 감소시키고 여러분의 시야를 흐릴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무의식적 습관들이나 일시적인 실추보다 훨씬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은 사소한 감정들의 항상성이다. 아무개가 여러분의 작품을 과연 좋아할 것인지 걱정하는 것, 조수에게 시킨 일을 조수가 잘 할지에 대한 걱정 등. 그 자체로 잘못된 감정이나 걱정이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의 상상력의 온전한 발휘에 부적절하고 그것과 전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감정이나 걱정이 문제이다.

따라서 눈을 뜨고 마음의 평정을 가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아무개가 여러분의 작품을 좋아할까가 아니다. 저기 저 새가 둥지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혹은 저 방랑아 아이가 거리의 구석에서 어떻게 공기놀이를 하고 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여러분이 여러분의 관심사에서 새들과 아이들의 관심사로 이동하려면 새들과 아이들을 사랑하고 지켜보는 습관을 오래 전부터 들였어야 한다. 그래서 마침내 여러분 자신을 잊고 여러분 자신을 벗어나서 세상의 평온 속에서, 혹은 세상의 떠들석함 속에서 살고 있어야 한다. 여러분에게 어떤 고결한 감정을 가져다줄 수 있는 영향력에 자신을 맡기는 것을 시간낭비라고 생각하지 말라. 일찍 일어나서 항상 일출을 보고 여명에 구름들이 부서지는 모습을 보라. 구름의 움직임과 아침이 입는 자줏빛 옷에 대한 기억이 여러분에게 남아있으면 여러분은 자신의 조각상의 드레이퍼리들을 보통 때와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구현할 것이다. 항상 나라의 봄철에 살라. 잎눈들이 트고 어린잎들이 햇빛에 낮게 숨쉬고 첫 비에 경이로워하는 모습을 보기 전에는 잎 형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분은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 형태에 들어있는 제스처의 모든 고결함과 특징을 찾는 습관을 들이라. 그리고 기억하라. 최고의 고결함은 보통 나이든 이들,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에게 있다는 점을. 여러분은 마침내, 여러분에게 최고의 연구 대상은 군인의 강한 팔이 아니요 젊은 미인의 웃음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들을 보라. 그들을 경건하게 보라. 그러나 감내가 힘보다 고결하며, 인내가 아름다움보다 고결함을 확신하라. 교회 입구에서 천사들의 날개 사이에 있기에 가장 알맞은 얼굴들을 여러분은 화려한 옷들이 있는 고교회(the high church) 신도석들이 아니라 과부의 상복이 있는 교회의 자유석들에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러분이 자신의 작업을 바치는 존재들을, 여러분의 동포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들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게 될 뿐만이 아니라. 인간을 바라볼 때마다 표정이 아니라 외관에만 주의를 기울이기 쉬울 것이다. 우느라고 움푹 들어간 검은 눈과 세상의 역경이 에워싼 저 굳은 얼굴들의 창백함에 들어있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해줄 것은, 그 얼굴들이 인내 속에서 황혼 속에 죽어가는 횃불처럼 빛나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줄 것은 오직 친절함과 다정함이다. 그러나 친절하기도 해야 할 필요가 있게 만드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여러분의 예술의 본성 바로 그것에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이유가 들어있다. 크게 짓고, 고결한 조각(sculpture)을 추가하고자 하면 협동적 작업이 되어야 한다. 여러분은 혼자서 성당 전체를 지을 수 없다. 그 몇 안 되는 단순한 부분들만을 조각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럴 경우 여러분 자신의 작업이 주변의 열등한 작업과 한데 엮여 창피를 당하지 않으려면 동료 설계자들의 힘을 서로 상응할 정도로 높여야 한다. 여러분에게 재능이 있다면 여러분 자신이 설계한 건물 짓기에서 앞장서는 위치에 설 것이다. 여러분은 그 포치의 장식들을 조각하고 그 배치를 이끌 것이다. 그러나 그 세부의 차후의 모든 진행에 대해서는 다른 이들의 실행력과 발명력에 맡겨야 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꾼들이 가진 모든 능력들을 억눌러서 여러분에게 종속시킬 수도 있고, 여러분과 경합할 수 있는 힘들을 발견하는 것을 즐거워하며 한 사람, 두 사람 여러분의 상상과의 동료관계로 그리고 여러분의 명성과의 연합관계로 이끄는 것을 즐거워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냐는 여러분에게 달려있다.

여러분이 전자를 행한다면, 여러분은 망한다. 자신의 예술과 창작 작업을 여러분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신의 번영만을 추구하고 자신의 솜씨만을 생각하고 싶어한다는 것이, 불길하게도 그리고 분명히 거기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질투심이 전혀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질투심이 전혀 없는 것은 인간에게는 드문 일이다. 여러분이 어느 날 아직 경험도 없고 입증도 안 된 어떤 젊은이가 여러분으로서는 몇 년 동안 훈련을 해도 도달하지 못한 손놀림을 그의 작품에 가하는 것을 보고 안 좋은 마음으로 귀가하더라도 여러분은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의 질투심이 여러분을 정복해서는 안 된다. 건물 짓기에 대한 사랑이 여러분의 친절한 마음의 도움을 받아서 정복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높거나 어려운 기준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여러분이 단지 이타적인 관용의 마음에서 여러분의 탁월함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친절함의 도움을 받아서 건물 짓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여러분의 탁월함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보다 건물을 더 잘 장식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라도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리고 첫째로 그의 정 아래에서 건물이 더 아름답게 올라가는 것을 보는 데서 느끼는 기쁨에서, 둘째로 친절하고 정당하게 행동했다는 생각에서 위안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여러분이 친절함과 정당함을 첫째 동기로 삼을 만큼 충분히 도덕적으로 강하다면 더 좋을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그것을 아예 친절함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저 엄격한 정당함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그런 도움이 서로에게 빚이며 아랫사람에게서 우월성이나 능력을 알아보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거나 돕지 않는 사람은 친절을 베풀지 않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해를 입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 동기가 무엇이든 그 일을 하도록 하라. 그리고 여러분의 예술이 ① 다른 예술들보다 더 넓은 영역을 포함하고 ② 다른 예술보다 더 방대한 다중에게로 향한다는 생각, 그리하여 모든 다른 것들과 더 심오하고 거룩한 동지관계를 맺는다는 생각에서 기쁨을 취하라. 예술가는 자신의 학생이 완벽할 때 자신의 곁을 떠나서 그의 고유한 (아마도 자신과 맞서는) 솜씨를 천명하도록 해야 한다. 과학자들은 발견의 우선성을 두고 서로 씨름하며 질투 어린 조급함의 고통에서 자신의 고독한 연구를 수행한다. 여러분만이 친절함, 필요, 동등함에 의해서 노고의 우애관계로 초청받는다. 그리하여 우리의 고대의 도시들의 주택 지붕들 위로 솟은 저 아득하고 거대한 대건축물들에는 우리가 상상을 통해 그토록 흔하게 부여해왔던 것보다 더 심오하고 진실한 의미가 들어있었다(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 사람들은 피너클들이 하늘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물론 돋아나는 모든 나무도 그렇고. 노래하며 솟아오르는 모든 새도 그렇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아일이 경배하기에 좋다고 말한다. 물론 산 속의 모든 골짜기도 그렇고 거친 해변도 그렇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점이 뚜렷하게 다르고 논박 불가능한 영광으로서 사람들에게 존재한다. 그들의 강력한 벽들은 약한 가운데 서로 사랑하고 돕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지어졌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이다. 볼팅을 이루는 돌처럼 서로 엮이는 그들의 힘은 인간의 협력이라는 더 강한 아치들 위에 세워져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낮은 혹은 높은 피너클들처럼 서로 다른 그들의 품위는 인간 영혼의 더 달콤한 대칭관계에 그 리듬과 완벽함을 빚지고 있다는 점이다.

[주석]

  1. 라이언즈인(Lyon’s Inn)은 영국의 4대 법조원(Inns of Court) 가운데 하나인 이너 템플(Inner Temple)에 딸린 기관인 ‘Inns of Chancery’ 가운데 하나로서, 1863년에 해체되고 그 건물이 철거되었다. ‘Inns of Chancery’는 원래 법조원들에 딸린 건물들과 기관들로서 형평법원(chancery)의 서기들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는데, 나중에 성격이 변하여 사무변호사들(solicitors)의 사무실과 편의시설인 동시에 소송변호사들(barristers)을 양성하는 연수원이 되었다. 이 소송변호사 연수 업무는 1642년 사라졌으며 사무변호사들을 위한 협회와 사무실들로 전용(專用)되었다.
  2. 러스킨은 일반적으로 새로운 양식의 발명을 추천하지 않는다. 한 개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3. 팔라디오(Andrea Palladio, 1508–1580)는 이탈리아 르네쌍스 시대에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활동한 건축가이다.
  4. 존 팩스턴(Sir Joseph Paxton, 1803–1865)는 영국의 원예가, 건축가, 엔지니어이자 의회 의원으로서 수정궁(the Crystal Palace)을 설계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수정궁은 1851년 만국박람회가 열린 곳이다.
  5. 싼미켈리(1484-1559)는 이탈리아의 건축가이자 도시계획가로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시민이었다.
  6. 이니고 존스(1573–1652)는 영국의 건축가로서 비르투비우스[고대 로마의 건축가]의 비율 및 대칭 규칙들을 처음으로 자신의 건물들에 도입했다.
  7. 크리스토퍼 렌(1632-1723)은 영국의 건축가, 천문학자, 수학자이다. 바로크 양식의 건축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의 대표작은 세인트 폴 대성당이다.
  8. 런던의 드루리 레인(Drury lane)에는 유명한 극장들이 있다.
  9. 존 리치(1817–1864)는 영국의 희화화가이자 삽화가이다.

 




건축의 일곱 등불

 


  • 저자  :  정남영
  • 분류 :  번역서 해설
  • 설명 : 최근에 부북스에서 출간된 번역서 『건축의 일곱 등불』(존 러스킨 지음)에 붙인 해설 가운데 1절과 4절을 여기 올린다. 여기서 해설자는 번역서의 내용을 직접 다룬 부분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틀을 제시한다.  주석 번호는 책에서의 주석번호이며, 2절과 3절의 주석들인 21번부터 71번이 비어 있다. 해설 전체는 총 5절로 되어 있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을 한겨레신문(2024년 9월 20일자)에서 볼 수 있다.

I. 러스킨과 근대

나의 러스킨 공부는 크게 내세울 것이 없다. 영국 소설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가르친 나는 문학 연구보다는 예술 연구로 알려져 있는 러스킨에게 처음에는 큰 관심을 갖지 못했다. 그러다 톰슨(E. P. Thompson)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01를 읽으면서 모리스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인 그의 존재를 새삼 인지하게 되어 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2000년대 후반에는 『베네치아의 돌들』(The Stones of Venice) 중 고딕 건축의 성격을 다룬 부분—러스킨이 모리스에게 영감을 준 바로 그 부분—을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으나 더 나아간 공부를 할 시간을 좀처럼 내지 못하다가, 본서의 번역이 시작되고 해설을 맡으면서 비로소 좀더 공부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러스킨을 잘 안다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공부이지만 말이다. 나는 영국의 소설가 디킨즈(Charles Dickens)와 로런스(D. H. Lawrence)에 공부를 집중했고, 영문학 연구와 아울러 한국 문학작품들에 대한 평론 활동을 했으며, 이와 함께 철학 분야로 공부를 확대하여 맑스, 들뢰즈·과타리, 네그리, 스피노자, 니체, 푸코 등을 읽었다. 비교적 최근에 들어와서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운동인 커먼즈(Commons) 운동의 진전과 확대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이 과정에서 ‘커먼즈와 집’이라는 주제를 중요한 문제의식으로서 가지게 되었다. 이 모든 초점은 근대 극복 혹은 대안근대로의 이행에 맞추어져 있었다. 나는 러스킨의 저작들을 시간이 허용하는 만큼 읽으면서 나의 이러한 공부나 관심사가 러스킨에게 들어있는 어떤 핵심적인 사상과 연결되는 것을 느꼈다. 이 ‘핵심적인 사상’이 바로 내가 이 해설에서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바이다.

이 해설은 당연히 건축 분야의 전문가들(건축가들이나 건축비평가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일반 대중을 향한 것이다. 예술 및 건축 비평가로서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러스킨의,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책에 대한 해설이 건축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새삼 필요할 리가 별로 없을 터이고, 더군다나 나는 건축 분야의 비전문가이므로 건축 전문가들을 위해 그럴듯한 해설을 쓴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러스킨 자신이 당시 영국 건축계의 주류와 서로 맞지 않았다.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많은 건축가들과 건축 작가들은 러스킨을 경멸하거나 러스킨에게 분노하거나 아니면 둘 다였다. 러스킨은 실제적이지 않거나 미친 것으로 간주되었다.02

건축가들은 일반적으로 이 책에 매우 경탄하는 사람들 축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책의 범위를 종종 오해했다. 러스킨의 부수적 의견들 가운데 다수는 공상적이거나 의심스러웠다. 그는 건축가들의 견해를 무마하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고 그가 건축계 앞에 세우는 이상들은 준엄했다.03

물론 결과적으로 러스킨의 작업이 건축예술의 품격을 천명하고 평판을 높이는 데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건축계의 주류와의 차이가 좁혀진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당대 건축계와 러스킨의 차이는 특정 전문분야에서 일어나게 마련인 견해의 차이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한 태도의 근본적인 차이이기도 했던 것이다.

「삶과 그 예술의 신비」(“Mystery of Life and its Arts”)에서 러스킨은 자신의 삶을 실망과 좌절의 연속으로 개관한다. 그는 스무 살에서 서른 살까지 그의 “삶의 가장 강렬한 10년” 동안, 레이놀즈(Joshua Reynolds) 이후 영국에서 가장 훌륭한 화가라고 생각하는 터너(J. M. W. Turner)의 예술가로서의 우수성을 보여주려고 노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더군다나 터너는 이 노력의 “피상적 효과가 가시화되기도 전”에 사망했다.04 러스킨은 탁월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가 헛되이 창작하다 헛되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터너는 러스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중으로부터 외면을 받았던 것이다.

러스킨은 회화 연구를 하면서 건축 연구를 병행했다. 자신의 말로는 회화 연구에서보다 “덜 열심일지는 몰라도 더 신중한 노력”을 투여했다고 한다.05 러스킨은 건축의 경우에는 회화의 경우와 달리 공감해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이들과 함께한 러스킨의 노력도 (이미 당대의 건축계 주류와의 관계를 언급한 데서 추측할 수 있듯이) 대세에 밀려서 좌절되었다. “우리가 도입하려고 한 건축은 현대 도시들의 분별 없는 사치, 형태를 왜곡하는 기계적 구조, 지저분한 비참함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 나는 나의 힘의 이 새로운 부분 또한 헛되이 쓰였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철로 된 거리들과 수정으로 된 궁전들에서 물러나 지질학과 식물학 연구로 관심을 돌렸다”.06

그 이후에도 영국의 주류 사회는 러스킨에게 도통 맞지 않는 곳이었다. 러스킨은 당대의 현실로 관심을 돌리면서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나아갔는데, 이 비판 또한 당시 영국의 자본주의 추진 세력에게는 당연히 못마땅한 것이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1860년에 일련의 정치경제학 비판 글들이 『콘힐 매거진Cornhill Magazine』에 연속으로 실리다가 (편집자의 우호적인 태도와 과감함에도 불구하고) 독자들과 출판사의 반대로 네 편에서 중단된 일이다. (이 글들은 나중에 Unto This Last라는 책으로 출판된다.)07 사실 앞에서 말한 “근본적인 차이”―즉 삶을 바라보는 시각의 근본적인 차이―는 건축계 주류와의 사이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당대 영국 자본주의를 추진하는 세력들 전체와의 사이에도 존재했었다. 당대의 자본주의 추진 세력의 사고는 근본적으로 공리주의적이다. 즉 인간의 모든 능력과 힘을 물질적 효용을 생산하는 수단으로만 본다. 이들은 “고기가 삶(생명)보다 가치 있고 옷이 몸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며, 땅을 마구간으로 보고 땅의 결실들을 말 사료로 보는” 자들이다.08 이들의 궁극적 목적은 상품화된 물질적 효용 즉 교환가치의 재현자인 자본의 축적이다.

이와 반대로 러스킨은 물질적 효용을 삶에 도움을 주는 도구로 본다. 그리고 예술처럼 그 자체로는 물질적 효용이 없는 ‘무용함’이 삶의 목적이다. ‘무용함’ 자체가 목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무용함’은 공리주의와의 근본적인 차이를 나타낼 뿐이고, 러스킨이 깊은 의미에서 말하는 것은 예술을 비롯해서 삶의 목적이 되는 어떤 대상을 신의 활력을 분유(分有)한 것으로 보는 태도이다. 여기서 ‘신’이라는 단어에 우리가 종교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09 철학적 의미의 ‘신’으로 읽으면 된다. 사실 러스킨의 철학은 그것이 활력의 철학이라는 점에서 스피노자와 통하는데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신’은 ‘무한한 활력’에 다름 아니며, 러스킨에게 있어서도 그렇다. 러스킨은 이 무한한 활력이 만물에 나뉘어 부여되어 있고 만물은 이 활력으로 인해서 그 나름대로 신성하고 아름답다고 본다. 물론 아무나 이 신성함과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아니다. 이 신성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공감하고 경탄하고 기뻐하는 활력이 필요하다. (이것 역시 신이 부여한 활력이다.) 그래서 러스킨이 “인간의 효용과 기능은 … 신의 영광의 목격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10 그는 특정의 종교적 교리를 설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진정한 의미의 ‘인간’에게서 활력이 가진 핵심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활력은 개인마다, 집단마다 그 정도가 다르게 나타나며, 역사적으로 상승과 하강을 겪는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와서 유럽 거의 전체에 걸쳐서 이 활력의 상태에 전에 없이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된다. 바로 이로 인해서 예술적 능력은 쇠퇴하고 이 쇠퇴에 대한 감이나 인식이 없는 근대 추진자들과 이들을 비판하는 러스킨 사이에 근본적인 어긋남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제 활력의 상태에 생긴 이 문제를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삶과 그 예술의 신비」에서 러스킨은 ‘인간의 일’, 즉 인간이 자신의 삶을 위해 “인간의 형태를 띠고 사는 동안”11 해야 하는 일로 ① 먹을 것을 생산하기, ② 입을 것을 생산하기, ③ 거처를 만들기, ④ 예술이나 과학 등 사유와 관련된 것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를 든다.12 ①, ②, ③은 물질적 효용의 차원인데, 앞으로는 ‘유용성의 차원’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④는 삶이 단순한 물질적 욕구의 충족을 넘어서 꽃처럼 피어나는 차원인데, 이는 ‘활력의 차원’이라고 부르기로 하자.13 ①, ②, ③, ④ 모두 인간의 힘이 자연력과 결합하는 방식을 나타내는데, 이 방식은 이 두 차원을 따라 둘로 나뉜다. 유용성의 차원은 물질의 법칙이 적용되는 차원으로서 자연력이 인간에게 이전되고 다시 자연으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가령 자연력이 인간으로 이전되어 있는 동안에는 이전된 양만큼 자연에서는 감소된다. 활력의 차원에서는 자연력이 감소되지 않고 거기에 각인된 인간의 힘과 함께 결합된 상태로 보존되며, 이 과정에서 양자 모두가 새로운 차원의 힘으로 상승한다.

이제 인간의 삶의 역사의 정상적 진전은 유용성의 차원에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킨 후 활력의 차원에서 각 집단(민족 등)이 가진 능력에 따라서 가능한 만큼 최대로 상승하는 것이다. 이것을 ‘인간 되기’라고 부르기로 하자. 두 차원 모두를 놓고 볼 때 둘째 차원이 이 과정을 비로소 ‘인간 되기’로서 결정한다. 만일 둘째 차원으로 도약하지 못하고 첫째 차원을 충족하는 데서 끝난다면, 그것은 ‘만족한 동물’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14 둘째 차원이 이런 의미에서 결정적이지만, 사실 두 차원이 모두 필수적이다. 의·식·주는 인간의 생존의 기본 조건으로서 생존 없이는 활력적인 삶도 없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유용성의 차원에서 예술성이 자라나온다는 점이다. 사물을 인간에게 유용한 형태로 바꾸는 능력인 기술(특히 손기술)이 고도화되고 다양화되면서 예술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러스킨은 “모든 건축예술은 컵과 받침대의 모양을 짓는 데서 시작해서 멋진 지붕에서 끝난다”고 한다.15

러스킨에게 근대는 이러한 ‘인간 되기’의 경로에서 이탈한 시대이다. 러스킨의 시선에 먼저 들어온 것은 예술적 능력의 전반적인 쇠퇴이며, 그 다음에 그가 주의를 돌린 곳에서 본 것은 자본주의적 번성이라는 외양에도 불구하고 생존의 기본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처참한 민중의 모습이다. 러스킨은 이 모습을 서양의 긴 역사적 과정에 놓고 한탄한다. 6천 년 동안 농업이 이어져 왔음에도 50만 명이 굶어죽는 일이 발생하고16 6천 년 동안 직조를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수도들의 거리는 내다버린 누더기와 썩은 넝마의 판매로 악취가 나며, 6천 년 동안 집짓기를 해왔음에도 그 모든 기술과 힘의 대부분이 흔적도 남아 있지 않고 떨어져 나온 돌들만 들판에 거추장스럽게 나뒹굴거나 시냇물에서 물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17

유용성의 차원이 피폐해질 뿐만 아니라 유용성의 차원과 활력의 차원 사이의 건강한 연결이 단절된다. 인구의 다수가 유용성의 차원에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한편, 이 욕구를 충족시킨 소수는 물질적 이익의 차원에서 더 많은 축적(수익, 이윤, 지대 등)을 원할 뿐 자연력과의 결합을 활력으로 상승시키는 일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리하여 활력의 양성과 발휘는 현저하게 쇠퇴하게 되는 것이다. 러스킨은 수익을 우선으로 하는 조건에서는 진정한 건축이 이루어지기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만일 어떤 사회가 스스로를 조직해서 가장 아름답고 가능한 한 가장 강한 집들을 예술을 위해서든 사랑을 위해서든 짓고자 한다면—궁전을 그 자체를 위해서 짓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집을 짓고자 한다면―그런 사회는 볼 만한 어떤 건물을 지을 것이지 수익을 가져올 건물을 짓지는 않을 것이다. 진정한 건축물은 자신을 위해 집을 원하는 사람이 지으며 자신의 비용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식으로 짓는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이 좋아하는 식으로 짓는 것이 아니다.18

바로 이것이 근대에 와서 활력의 상태에 일어난 심각한 문제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 되기’는 정체 혹은 후퇴를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러스킨에게 이러한 ‘인간 되기’의 실패가 절망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삶이 [그]를 실망시킬수록 삶은 [그]에게 더 근엄하고 놀라운 것이 되었”으며,19 그는 “예술 혹은 다른 분야에서의 모든 지속적인 성공은 … 인간의 전진하는 힘에 대한 근엄한 믿음에 의해서, 혹은 인간의 유한한 부분이 언젠가는 불멸성에 함입되리라는 약속에 대한 근엄한 믿음에 의해서 하위의 목적들을 다스리는 데서 온다는 것을 점점 더 명확하게 보았고, 예술 자체는 이 불멸성을 천명하려는 노력에서만 … 힘찬 활력이나 명예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점점 더 명확하게 보았다.”20

러스킨이 『건축의 일곱 등불』을 썼던 때(1849년)는 그에게 아직 희망이 있던 때였다. 그가 나중에 건축에 대해 말하기를 포기했지만, 이는 자신의 한 말이 틀려서가 아니라 말해도 소용이 없어서였다. 아무리 말해도 귀에 ‘돈’못이 박혀있는 근대의 주류 세력을 꿰뚫고 현실에 영향력을 발휘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

IV 러스킨과 근대 너머

건축의 이러한 두 가지 특권은 예술 일반에 구현되는 모든 활력이 그렇듯 잠재적으로는 영원히 존재하지만, 실제 현실화는 늘 불투명하다. 우리가 보았듯이 그 현실화는 적어도 러스킨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사실 지금 우리에게도 그렇다. 몇몇 정치인들이나 관료들이 사회를 대표하듯이 소수의 큰 건물들이 건축을 대표하며, 건축가는 일반적으로 사회에 대한 공동체적 책임감이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특화된 일을 하는 전문가가 된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러스킨에게 예술은 삶의 기본 조건이 충족된 후에 시작된다. “모든 예술은 손으로 하는 동작과 당신의 민중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미덕과 친절함에 토대를 둔다.”72 민중이 기본적으로 어엿한 삶을 누릴 때, 민중의 생활에 유용한 물건들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며, 이 물건들의 형태가 필요에 따라 변경되고 새로운 형태들이 고안되는 과정(가령 컵, 손잡이 달린 컵, 컵에 물을 따를 주전자, 손을 들고 다니기 더 좋은 손잡이 두 개 달린 주전자, 물을 대량으로 마실 컵, 섬세하게 마실 컵, 물 따르기 쉬운 주전자, 향수 보관하기 좋은 용기, 지하실에 저장하기 좋은 용기 등)의 연속선상에서 “지금까지 예술이 성취한 가장 아름다운 선들과 가장 완벽한 유형의 엄밀한 구성이 발전해나온다.”73

더 나아가 건축은 민중의 주거의 필요에 따른 건물에서 시작해서 더 큰 건축물로 확대된다. 각자 자신의 지붕을 가지는 것이 우선적이다. “모든 읍에 큰 지붕을 짓기 전에 작은 지붕들을 짓고, 원하는 누구나가 자신의 지붕을 가지도록 하라.”74 그 다음에 이 각자의 작은 집들이 모여서 도시를 형성한다. “그리고 집들이 도시에 한데 모여있을 때, 사람들은 자신들의 건축을 공통의 법칙에 종속시킬 정도로 시민적 우애를 가지게 될 것이고 인간의 주거지들이 한데 모인 전체가 대지 위에서 끔찍한 것이 아니라 예쁜 것이 되기를 욕망할 만큼의 시민적 자긍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75 러스킨은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가상의 청중들(현실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청중들)을 향해 당당하게 이렇게 말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것의 가능성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그것의 불가결성에만 관심이 있다.”76

이 말을 좁게 이해하는 사람은 러스킨이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일에는 별로 공을 들이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실은 전혀 다르다. 러스킨은 당대의 정치경제학을 비판하는 단계 이후에 ‘인간’이 사는 곳을 실제로 만드는 일을 자신의 삶의 당연한 행로로서 추구했다. 그는 1871년 ‘영국의 노동자들과 근로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들’(Letters to the Workmen and Labourers of Great Britain)이라는 부제가 붙은 『포르스 클라비게라』(Fors Clavigera)77의 집필을 시작하면서 <성 조지 길드>(St. George’s Guild)라는, 무엇보다도 토지와 동지 관계를 이루는 삶형태를 직접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드는 준비를 시작한다.78

1878년에 『포르스 클라비게라』의 집필이 완료되고 <성 조지 길드>의 설립도 완료된다. 이로써 러스킨의 삶의 단계는 넷으로 나눠볼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을 『포르스 클라비게라』 ‘Library Edition’의 편집자는 이 책에 대한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쉽고도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다.

회화비평가로 시작한 그는 예술이 정말로 훌륭한 것이 되려면 아름다운 현실의 재현이어야 하고 즐거움의 정신으로 추구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건축비평가로서 활동하면서 그는 예술이 민족적 성격의 반영이며 고딕의 비밀은 건축공의 행복한 삶에 있음을 발견했다. 다음 단계는 그와 같이 열렬한 기질을 가진 사람에게는 명확하고 단순했다. 그는 상상의 세계에서 사는 데 만족하지 않고, 좋고 아름다운 것의 조건을 실제 세계에서 현실화하려고, 인간들 사이에 신의 성전을 지으려고 노력했다.79

여기서 우리는 그의 삶의 진행 과정 자체가 앞에서 말한 유용성의 차원과 활력의 차원의 연속성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두 차원의 이러한 연속성 혹은 달리 말하자면 삶의 통합성이 바로 그가 우리의 시대에 가지는 의미의 핵심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삶의 통합성의 ‘불가결성’은 기후 변화로 인한 위기가 심각해진 우리의 시대에는 러스킨의 시대와 비할 바 없이 절실한 것이 되었다는 점이 러스킨의 현재적 의미를 배가시킨다. 유용성의 차원과 활력의 차원의 분리야말로 지금 인류를 크나큰 위기에 몰아넣고 있는 기후 변화의 근본적 원인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점에서 인류사에서의 큰 진전으로 꼽을 근대화(산업화)가 바로 지구 전체를 장악하게 될 이 분리의 시작이었다. 근대화는 안타깝게도 자연의 힘과 인간의 힘의 결합에 왜곡이 가해지는 형태로 일어났다. (그 이전에는 결합의 정도가 낮고 범위가 좁았을지언정 왜곡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맑스가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소외’라고 부른

이 왜곡의 핵심은 현실에서의 인간이 앞에서 말한 진정한 의미의 ‘인간’에서 벗어난 데 있다.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란, 맑스의 표현으로는 자연력과의 결합에서 자신의 본질을 구현하는 인간, 자연과 본질상의 공통체를 이루는 인간이다. 소외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은 인간의 제2의 몸이었다. (이것을 맑스는 ‘비유기적 몸’이라고 부른다.) 이제 이 두 몸은 분리되며 자연은 몸의 지위를 잃고 그저 인간의 외부에 있는 ‘객체’가 된다. 그리고 인간은 이 ‘객체’에서 분리되었다는 의미에서 ‘주체’가 되는데, 이 ‘주체’로서의 인간을 ‘객체’와 다시 연결시켜주는 것이 자본이다. (사실 자본의 왕국에서는 개인들도 서로에게는 ‘객체’이며, 자본만이 실효적인 ‘주체’이다.)

이제 인간에게 내재하는 활력은 자연의 힘과의 연결을 매개하는 자본(화폐80)의 활력으로 오인되어 자본이 인간의 삶 위에 군림하게 되고, 인간과 자연 모두가 자본의 증식을 위한 수단이 된다. 자본은 신이 된다. 그런데 이 신은 인간에게 별로 호의를 갖지 않은 신이라서 이 신이 주도하는 생산은 러스킨이 ‘복종의 등불’ 장에서 말한 ‘복종’과 ‘절제’의 능력을 쇠퇴시킨다.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는 ‘복종’과 ‘절제’의 능력이란 맑스의 말로는 ‘아름다움의 법칙에 맞춘 생산’을 할 줄 아는 능력이다.

동물은 자신이 속한 종의 척도와 욕구에 맞추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반면에 인간은 모든 종의 척도에 맞추어 생산할 줄 알며, 일반적으로 대상에 내재하는 척도를 적용할 줄 안다. 따라서 인간은 아름다움의 법칙에 맞추어 만들어낸다.81

‘인간’은 자신의 척도를 내세우지 말고 “일반적으로 대상에 내재하는 척도”를 알아내야 하며 그렇게 알아낸 척도를 따라야 한다(복종).82 그리고 인간의 힘을 여기에 맞추어 양성해야 하는 것이다(절제). 자본은 ‘아름다움의 법칙’이 아니라 ‘이윤 증식의 법칙’을 자연과 인간 모두에게 부과한다. 이러한 자본주의적인 생산이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를 발생시키는지를 다시 맑스의 말로 설명해볼 수 있다. 『자본론』 1권 15장 10절에서 맑스는 이렇게 말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인구를 대중심지로 집결시키며, 도시 인구의 비중을 끊임없이 증가시킨다. 이것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한편으로는 사회의 역사적 동력을 집중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과 토지 사이의 물질대사 즉 인간이 옷과 식량으로서 소비한 토지의 성분들이 토지로 복귀하는 것을 교란하고, 따라서 토지의 비옥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교란한다.83(인용자의 강조)

다시 말해서 자본이 주도하는 생산은 물질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순환하는 데 (즉 두 ‘몸’ 사이의 질료 교환에) 장애를 일으킨다(‘물질대사의 교란’).84 그렇기에 “자본주의적 농업의 진보는 그 어느 것이나 노동자를 약탈하는 기술의 진보일 뿐만 아니라 또한 토지를 약탈하는 기술의 진보이며, 일정한 기간에 토지의 비옥도를 높이는 그 어느 것이나 이 비옥도의 항구적 원천을 파괴하는 진보이다. (…)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의 원천인 토지와 노동자를 파멸시킴으로써만 기술을 그리고 사회적 생산과정의 결합을 발전시킨다.”(인용자의 강조)85 이렇게 “모든 부의 원천인 토지와 노동자를 파멸시”키는 과정의 연장선상에 환경 파괴가 있다.

기후 변화를 아마도 영국에서 최초로 (과학자들보다 먼저) 간파한 사람이 러스킨일 것이다. 즐거움의 원천인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것이 습관이 된 러스킨은 1871년 어느 날 50년 동안 관찰해오던 하늘에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이상한 폭풍 구름(storm-cloud)이 있는 것을 목격하고 계속해서 관찰하게 된다. 러스킨은 이러한 관찰을 근거로 날씨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주장을 그의 『19세기의 폭풍 구름』(The Storm-cloud of the Nineteenth Century)에 실린 두 개의 강연86에서 하는데, 당시 언론은 러스킨의 주장이 “상상해냈거나 제 정신에서 나온 것이 아닌” 것이라고 조롱했다.87 과학자들도 처음에는 이 현상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러스킨의 관찰이 정확하고 그 원인도 명확하다는 것이 확인되게 된다. 산업 통계에 따르면, 러스킨이 문제가 되는 현상이 증가한 것으로 잡은 날짜는 영국에서나 중앙 유럽의 산업화된 나라들에서나 석탄의 소비가 비약적으로 올라간 때였다고 한다.88

러스킨은 당시에 자신이 관찰한 현상을 이론적으로 정식화하지는 않았다. 성경에서 가져온 구절이나 용어로 제시할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러스킨이 이 현상의 근본적 원인—산업화가 ‘인간’의 길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진행된 것—을 충분히 말해왔음을 안다.

이와 관련하여 기계에 대한 러스킨의 견해가 흥미롭다. 독자들이 가령 본서 4장에서 철도를 비판하는 대목을 보고 러스킨을 기계의 사용 자체에 반대하는 사람으로 본다면, 이는 성급하고 섣부른 판단이다. <성 조지 길드> 설립 취지문에 단 주석에서 러스킨은 이렇게 말한다.

길드에서 기계류는 그것이 건강한 육체적 활동을 대체하거나 장식 일에서 손노동의 기술과 정밀함을 대체하는 경우에만 금지된다는 점을 세심히 유의해야 한다.89

고딕 건축물에 대한 그의 견해에서 보듯이,90 그리고 위에서 인용한, 아래로부터의 도시 구축에 대한 그의 견해에서 보듯이, 러스킨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있는 활력을 서로 합하여 거대한 것을 세워 올릴 수 있다고 믿는다. 기계도 그렇게 쓰일 수 있다면 러스킨이 반대할 리 없고 심지어는 그러기를 바란다. 실제로 러스킨은 영문학 사상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기계 예찬을 쓰기도 했다.91 맑스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러스킨이 반대하는 것은 기계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기계에 예속되는 것이다. 기계는 인간의 일정한 활력의 결과물이지만, 기계에 인간이 예속되면 자연과의 동지 관계를 통해 증가되어야 할 활력이 오히려 감소되게 된다. “영국 다중의 활기가 연료처럼 공장의 연기의 먹이로 보내진다.”9293

자연력과의 관계에서도 러스킨이 반대하는 것은 자연력을 감소시키는 경우이다. 이는 기계를 움직이는 동력에 대한 그의 견해에서 잘 드러난다. “… 기계류의 유일하게 허용되는 동력은 바람이나 물의 자연력이다. 미래에는 전기력도 거부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냇물과 바람이라면 비용을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연료를 사정없이 맹렬하게 낭비하는 증기력은 절대적으로 거부된다.”94

이렇듯 ‘착취된’ 인간의 힘(노동력)과 ‘착취된’ 자연력이 바로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계의 동력이었기에 ‘인간’의 길을 다시 가는 것, 즉 자연과의 동지 관계를 회복하는 것—여기에 인간들 사이의 동지 관계의 회복이 필수적으로 포함된다—이 오늘날의 삶을 틀짓는 자본의 논리로부터의 해방의 주된 내용이 될 것이다. 다만 ‘인간’의 길을 간다는 것은 미리 정해진 어떤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인간’으로 만드는 과정이며 이때 ‘인간’이란 언제나 아직은 구현되지 않은 미지의 존재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다. 스스로를 ‘인간’으로 만드는 방식에 대해 러스킨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릇된 일을 함으로써 더 현명해지거나 더 강해지는 일은 없다. 당신은 올바른 일을 함으로써만 더 현명해지고 강해진다. 가장 으뜸가는 것, 필요한 단 하나는 강압 아래서일지라도 올바른 일을 하고 마침내 강압 없이 올바른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인간’이다.95

“올바른 일”이란 러스킨의 말로는 ‘복종’과 ‘절제’의 일이고, 맑스의 말로는 ‘아름다움의 법칙’에 맞추는 일이다. “강압 없이 올바른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자유로움’으로의 상승을 의미한다. ‘자유로움’으로의 상승은 활력의 증가를 낳고 활력의 증가에서 기쁨, 행복, 사랑이 나온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 사회는 ‘자유로움’으로의 상승을 말하기에 턱없이 부족한데다 기후 변화로 인해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지만, 인류사에서 드문드문 성취되었고 지금도 그렇게 성취되고 있는 ‘자유로움’으로의 상승의 사례들이 우리에게 유산으로 맡겨져 있다. 훌륭한 예술작품들은 이러한 성취의 강력한 일부이다.96 예술작품의 뛰어남은 예술가의 ‘사적’ 성취에 국한되지 않는다.97 예술가의 능력은 공동체 전체에 의해 여러 세대에 걸쳐 양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사유의 노력으로 성취되는 것도 아니고 말하기의 정확성에 의해 설명되는 것도 아니다. 예술은 어떤 힘의 본능적이고 필연적인 결과인데, 이 힘은 정신이 여러 세대를 거침으로써만 발전될 수 있으며 특정의 사회적 조건들—이 조건들은 그것들이 규제하는 능력이 느리게 성장하는 만큼이나 느리게 성장한다—에서 마침내 살아나게 된다. 고결한 예술이 존재하려면 강력한 역사의 전 시기가 집약되고 수많은 죽은 이들의 열정들이 응축되어야 한다.98

그래서 “러스킨에게는 예술을 가르치는 것이 모든 것을 가르치는 것이었다.”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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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01 이 책의 한국어본은 영미문학연구회의 (나를 포함한) 여러 영문학자들에 의해 번역되어 2012년에 출판되었다.

02 Introduction to The Seven Lamps of Architecture, The Complete Works of John Ruskin, Library Edition 1903, Volume VIII, xxxix쪽. ‘Library Edition’은 쿡(E. T. Cook)과 웨더번(Alexander Wedderburn)이 편집한 러스킨 전집의 표준판이다. 앞으로 러스킨의 저작의 특정 대목을 인용할 경우 저서명이나 글 제목은 따로 밝히지만 출처로는 ‘Library Edition’의 몇 권, 몇 쪽인지만 다음과 같이 표시하기로 한다. 예) 전집 9권 69쪽의 경우: LE V9, 69쪽.

03 같은 책 xli쪽.

04 이상 LE, V18, 148쪽. 『현대 화가론』(Modern Painters)은 1843년에 1권이 나왔고 3년 후인 1846년에 2권이 나왔다. 그 이후 10년이 지난 1856년에 3권과 4권이 나왔고 다시 4년이 지난 1860년에 마지막 권인 5권이 나왔다. 2권과 3권 사이의 10년 동안 러스킨은『 건축의 일곱 등불』(1849)과『 베네치아의 돌들』(총 3권, 1851-53)을 썼다.

05 같은 책 149쪽.

06 같은 책 150쪽. “수정으로 된 궁전들”은 1851년 영국에서 만국박람회(Great Exhibition)가 열린 건물인 수정궁(Crystal Palace)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수정궁은 원래 세워진 하이드 파크에서 1854년 런던 남부의 시더넘 힐(Sydenham Hill)로 옮겨졌다가 1936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러스킨은 수정궁이 기술적 재능은 빛날지라도 예술적 의미는 없는 것으로 보았다.

07 한국어 번역본으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김석희 옮김)가 있다.

08 Modern Painters, vol. 2, LE V4, 29쪽.

09 러스킨이 종교와 관련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러스킨은 복음주의적 프로테스탄티즘의 문화에서 성장했으며, 그의 글에는 성경에서의 인용이 빈번하게 나온다. 그런데 그는 시간이 가면서 협소한 종교적 틀을 벗어났다. 본서의 1880년판 서문에도 나와있듯이 러스킨은 이 책을 쓸 당시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복음주의적 프로테스탄티즘’을 담은 대목들을 1880년판에서는 삭제한다. “…극단적이고 전적으로 거짓된 프로테스탄티즘을 담은 몇몇 부분은 본문과 부록에서 똑같이 빼버렸[다].”(본서 7쪽) 그는 나중에는 기독교를 떠날(‘탈개종’할) 생각까지 하게 된다. 물론 그는 ‘탈개종’을 하지는 않고 기독교도의 범위 내에 머물게 되지만, 이때 그의 기독교는 기독교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관용적인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10 LE V4, 28-29쪽.

11 LE V18, 180쪽.

12 “확실하게 좋은 것은, 첫째는 사람들을 먹이는 데, 그 다음에는 사람들을 입히는 데, 그 다음에는 사람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는 데, 마지막으로는 예술이나 과학이나 기타 어떤 사유의 주제로 사람들을 올바르게 즐겁게 하는 데 있다”. 같은 책 182쪽.

13 ‘삶의 가능성의 차원’이라고 좀 길게 부를 수도 있다.

14 러스킨이 생각하는 ‘인간 되기’는 맑스가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말하는 ‘자연의 인간으로의 생성’, 그리고 니체의 다음 대목에 나타난 ‘자연의 인간으로의 도약’과 크게 통하는 바가 있다. “진정한 인간들, 더 이상 동물이 아닌 존재들, 즉 철학자들, 예술가들, 성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이 등장하면서, 그리고 이들의 등장을 통해 결코 도약을 않는 자연이 유일한 도약을 했다. 그것도 기쁨의 도약이다.” Friedrich Nietzsche, Untimely Meditations, ed. Daniel Breazeale, trans. R. J. Hollingdale (Cambridge University, 1997) 159쪽.

15 LE V20, 96쪽. “최고의 건축물은 멋지게 만들어진 지붕일 뿐”인데 “바티칸 대성당의 돔, 랭스 대성당이나 샤르트르 대성당의 포치, 이 성당들의 아일의 볼트 천장과 아치, 묘의 캐노피, 종탑의 스파이어” 같은 장엄하게 만들어진 지붕들은 “모두 어떤 공간을 열기와 비로부터 튼튼하게 보호할 단순한 필요로부터 나온 형태들”이다. 같은 책 111쪽.

16 1866년 인도의 오리싸(Orissa)에서 발생한 기근을 놓고 한 말이다.

17 “The Mystery of Life and its Arts”, LE V18, 177-78쪽 참조.

18 Fors Clavigera vol 2, LE V28, 360쪽.

19 LE V18, 151쪽.

20 같은 책 152쪽.

(···)

72 Lectures on Art, LE V 20, 108쪽.

73 같은 책 109쪽.

74 같은 책 112쪽.

75 같은 책 같은 쪽.

76 같은 책 113쪽.

77 제목 ‘Fors Clavigera’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어원 풀이를 생략하고 쉽게 말하자면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① 훌륭하게 행동하는 힘 ② 인내하는 힘 ③ 운명을 최고의 목적에 맞추는 힘.

78 <성 조지 길드>의 기획에는 토지와의 관계 이외에도 교육을 비롯한 많은 것들이 포함되는데, 이 해설에서 이것들을 다 거론할 수는 없다.

79 Introduction to Fors Clavigera vol. 1, LE V27, xviii-xix쪽.

80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으로서의 화폐이다. 화폐는 자본으로서의 기능 이외에 다른 기능도 가진다.

81 Karl Marx, 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aus dem Jahre 1844, MEW band 4, Dietz Verlag, 517쪽.

82 러스킨의 경우에 이 “대상에 내재하는 척도”는 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이를 따르는 것이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경우에도 자연의 고유한 법칙은 ‘신의 명령’이다.

83 Karl Marx, Das Kapital I, MEW band 23, Dietz Verlag, 528쪽.

84 아마도 당시의 맑스는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이 순환을 극복하리라고 믿었을 터인데, 안타깝게도 맑스가 생각하는 사회주의 사회는 현재 지구상에 없다. 사회주의의 이름을 단 국가들은 모두 맑스가 생각한 바와는 다른, 군사주의적·관료주의적·국가주의적 체제들이다.

85 같은 책 529-30쪽.

86 런던 인스티투션(London Institution)에서 1884년 2월 4일과 11일에 한 두 개의 강연이다.

87 The Storm-cloud of the Nineteenth Century, LE V34, 7쪽,

88 같은 책 xxvi쪽,

 89 “General Statement of St. George’s Guild,” Guild and Museum, LE V30, 48쪽.

90 : “그렇게 열등한 정신들의 노동의 결과들을 수용하고, 불완전함이 가득하며 모든 터치마다 그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단편들로부터 장엄하고 나무랄 데 없는 전체를 세워 올리는 것이 고딕 건축 유파의 주된 감탄할 만한 점일 것이다.” The Stones of Venice vol 2, LE V10, 190쪽

91 Cestus of Aglaia, LE V19, 60-61쪽 참조.

92 The Stones of Venice vol. 2, LE V10, 193쪽.

93 이는 현대의 발전된 첨단 기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첨단 기술은 인간의 발전된 힘의 결과물이지만 거기에 인간이 예속되면 (이 예속은 러스킨의 시대에서나 우리의 시대에서나 자본주의적 관계에 의해 발생한다) 역시 인간의 활력은 감소된다.

94 LE V30, 48쪽.

95 Cestus of Agalia, LE V19, 125쪽.

96 자본주의의 토대가 되는 사적 소유는 이러한 예술작품들이 인류의 활력을 증가시킬 유산이 되는 데 방해가 된다. 예컨대 피카소의 어떤 그림이 스위스의 제네바에 있는 제네바 프리포트(Geneva Freeport)의 보관함 같은 곳에 넣어서 보관되고 있다면, 이 그림은 그렇게 보관되는 동안은 그저 한 개인의 사유재산일 뿐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제네바 프리포트는 예술품 및 기타 귀중품을 보관하는 보관소로서 보관품 가운데 40%가 예술품이고 그 총 가치는 미화 1천억 달러(한화 100조원)로 추산된다. 2103년 현재 이곳에는 120만 점의 예술작품이 보관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피카소의 작품도 약 1천 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97 ‘사적’은 ‘개인적’과 그 의미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적인 것’들은 아무리 잘 모여도, 아무리 많이 모여도 ‘사적인 것’이지만, ‘개인적인 것’은 협동의 방식으로 모여서 공통체(commons)를 이룰 수 있고 이를 통해 개인들의 활력을 증가시킬 수 있다. ‘사적인 것’의 축적은 활력이 아니라 권력의 축적이며 권력의 본질은 활력을 제한하는 데 있다.

98 : 98 “The Mystery of Life and its Arts”, LE V18, 169-170쪽.

99 : 99 Introduction to Fors Clavigera vol. 1, LE V27, xvii쪽.





공생공락 보전을 통해 분리된 인간과 자연 사이에 다리를 놓기

 



보전운동(conservation movement)은 자본주의 정치경제의 제한에 항상 맞추어왔다. 보전운동의 많은 부분이 전지구적 시스템의 시장 증가, 사유재산 및 수익 내기를 축하한다. 보전운동이 자연보호 지역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이 시스템이 가진 끔찍한 생태 파괴를 (비정상적인 PR 주도의 방식으로) 보상하고자 노력은 하지만 말이다.

좀더 최근에 와서는 보전 기관이 시장에 기반을 두는 보전 형태들, 예를 들어 생태관광, 사냥, 외래종 식물 유전자의 특허 출원을 대놓고 용인하기에 이르렀다. 땅이 ‘자연 자본’으로 재규정되었으며 땅 자체의 보호를 다짐하는 시장(市場)들에게 땅에서 나는 것들이 바쳐졌다.

보전에 대한 이 두 가지 접근법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이 접근법들이 인간을 자연과 전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여기는 데—이는 생물학적으로 불합리한 전제이다—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여기는 대신에 인간이 자신을 자연에 통합된 일부라고, 즉 존중하는 마음으로 인간 이외의 생물과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심지어는 그 삶을 회복시키고 재생시키는 힘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

네덜란드 출신의 활동가이자 학자인 브람 뷔셔(Bram Büscher)가 보전을 재발명하기 위해 가지고 있는 비전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바헤닝언(Wageningen) 대학의 개발 및 변화의 사회학 그룹(Sociology of Development and Change Group)의 교수로서 땅이 보전되는 방식과 관련된 전제들 자체를 바꾸는, 한층 더 커먼즈에 기반을 두는 접근법을 발전시키기 위해 자본주의 자체가 가진 추출 논리를 넘어서고자 한다.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뷔셔의 수단은 새로이 시작된 야심찬 국제적인 프로젝트인 <공생공락 보전 센터>(Convivial Conservation Centre)이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는 사고를 가진 점점 더 많은 수의 보전주의자들, 생태주의자들, 농부들, 활동가들 및 학자들이 야생 보호구역을 통해서 땅을 ‘요새처럼 보호한다’는 생각뿐만 아니라 주변 풍광들을 돈 버는 ‘자연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생각을 거부하는 일에 그와 뜻을 함께 했다. 공생공락 보전은 자본주의 자체의 생태적 병리현상들을 다루면서도 사람들을 건설적인 방식으로 자연에 재통합하여 그 통합된 전체의 온전함을 양성할 수 있는 새로운 실천들과 정책들을 원한다.

나는 성장하고 있는 이 운동에 대해 더 알아보려고 팟캐스트 <커머닝의 프론티어> (에피소드 53)에서 뷔셔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뷔셔는 2020년에 출간된 책 『보전 혁명: 인류세 너머로 자연을 보존하기 위한 발본적인 생각들』(The Conservation Revolution: Radical Ideas for Saving Nature Beyond the Anthropocene)을 쓰는 과정에서 공동저자인 플레처(Robert Fletcher)와 함께 자신의 비전의 많은 부분을 발전시켰다. 책에서 저자들은 근대 보전운동의 바로 그 전제들이 재검토되고 극복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보전의 핵심은 ‘보호에서 연결까지’ 나아가는 데 있다는 것이다. ‘공생공락(적)’이라는 단어는, 보전이 지구를 대상으로 즉 상품이나 자본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지구와 “함께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야생상태 보전 지대(wilderness zones)를 정하여 보호하는 경우의 문제점은 그것이 핵심적인 문제를 즉 자본주의적인 ‘개발’을 방관하는 데 있다고 뷔셔와 플레처는 주장한다. 또한 그런 지대들을 정한다고 해서 땅이 어떤 토착적 원시 상태로 회복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회복된다고 보는 것 자체가 근대주의적 환상이다. 역사를 통틀어, 특히 토착 문화들을 통틀어 인간은 땅과 공생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왔다. 인간 그 자체가 혹은 야생상태 보전 지대의 부족이 문제가 아니다. 자본가 주도의 추출과 환경파괴가 문제다. 보전 운동이 진지한 방식으로 그 문제를 다루기 시작할 수 있는가?

 

그 첫 단계는 현대의 보전 노력들을 향해 한층 비판적인 입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뷔셔와 플레처는 ‘신보호주의자들’(neoprotectionists)이 인구증가, 개발에 제한을 두고 심지어 소비 및 경제성장에도 제한을 두려고 한다고 점에 주목한다. 그러나 신보호주의자들의 세계관에서는 인간이 자연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가 된다. 이는 모든 인간을 프레임에서 배제하는 자연 촬영술에서 이상화되는 사고방식이다. 또한 이 사고방식은 생물학자 윌슨(E.O. Wilson)이 주창하는 <자연은 절반을 필요로 한다>(Nature Needs Half) 캠페인에 나타난다. 이 캠페인은 지구의 나머지 절반을 파괴하는 자본주의적인 자연착취 경쟁을 말하지 않은 채 인간을 세상의 땅의 절반에서 추방하자고 제안한다.

또 하나의 그룹 즉 자칭 ‘신보전주의자들’(new conservationists)이 있는데 그들은 자본주의적인 개발과 보전을 혼합하길 원한다. 그들의 전략은 ‘자연을 구하기 위해 자연을 팔기’라고 일컬어져 왔다. 그것은 시장을 중심적인 역할로 끌어올리고 더 많은 생태관광, 사냥터들 그리고 의약품 물질특허를 위한 생물 탐사를 제안한다. 또한 ‘신보전주의자들’은 예를 들어 기업들에게 ‘생태계 서비스’에 돈을 지불하도록 요구하는 시장 주도의 정책안들을 좋아한다.

그러나 “문제의 논리를 해법을 위한 논리로 사용하는 것은 결코 효과가 없다”라고 뷔셔는 경고한다. “자연을 단순히 상품이나 자연 자본으로 바꾸는 것은 자연을 오염시키는 것 혹은 종들을 살상함으로써 자연으로부터 추출하는 것만큼 많은 돈을 결코 벌지 못한다.” 식물과 동물의 생명 그리고 자원들을 자연으로부터 뺏는 것은 보통은 공짜이거나, 종들을 생존시키고 그것들 대신에 다른 지속가능한 수입원을 찾는 것보다 비용이 훨씬 적게 든다. 아무튼 시장에 기반을 두는 보전의 규모는 무한히 작다고 뷔셔는 말한다. 그것은 “지속 불가능한 실제적 [자본주의] 경제의 극히 작은 일부”에 해당한다.

보전주의자들에게 요구되는 과제는 자연/인간의 이분법과 자본주의 시장에 대한 믿음 둘 다를 뛰어 넘는 것이다. 사회비평가 이반 일리치(Ivan Illich) 등으로부터 힌트를 얻은 뷔셔와 플레처는 ‘공생공락 보전’을 제안한다. 그들은 이 접근법을 커먼즈에서 영감을 받은, 비자본주의적이고 비이원론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자연과 인간은 깊이 서로 얽혀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공생공락 보전의 목표는 시장에 내다팔기 위해 자연을 착취하거나 자연을 보호구역으로 가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외의 존재들 및 생태환경과 서로 맞물려 있으며 경계가 없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관계를 영속적으로 구축하는 것이다. 이 관계가 생기도록 뷔셔는 지역의 평범한 사람들이 주위 풍광을 돌보는 동안 어엿한 삶을 살 수 있는 ‘보전 기본소득’을 제안했다. 또한 그는 한층 확대된 ‘민주적인 자연관리’를 요구하며 우리가 “‘자본으로서의 자연’보다 오히려 ‘커먼즈로서의 자연’ 그리고 ‘관계 속에 놓인 자연’”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불행히도 요즘에는 시대에 역행하는 보전 추세들이 많다. 기후변화, 생물다양성 상실 그리고 한층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실천들을 다룬다고 주장하는 크립토 시스템 및 기타 첨단 기술 시스템들이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다. 드론과 원격 기술 그리고 감시와 인공지능의 현대적 형태들을 갖추고 있는 우리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으로부터의 소외를 심화시키고 있다. “별안간 동물들이 컴퓨터 화면 상에서 숫자와 픽셀과 모형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들을 어떤 식으로든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 기술들은 나머지 자연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능력으로부터 크게 한 발짝 벗어나 있다. 나머지 자연과의 의미 있는 관계는 이 기술들로는 불가능하며 모든 사람들, 특히 이 기술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알고 있다.”

뷔셔는 나의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다른 많은 주제들을, 특히 커먼즈의 중요성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역동적인 상호관계와 관련한 주제를 다룬다.

“보전 정치, 정책 및 실천을 체제 차원의 변화를 옹호하는 쪽으로 다시 돌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공생공락 보전 센터>는 그 작업의 열 가지 핵심 원칙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공생공락 보전 선언문’을 최근에 출판했다. 그 선언문에는 “인간과 인간 이외의 종들이 서로를 침해함이 없이 공평하게 공존하는 통합된 공간을 조성하라”와 “보전을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 의해 그리고 모든 생명체를 위해 공통으로 소유되고 관리되는 전(全) 지구적 커먼즈의 파수로 이해하라”와 같은 원칙들이 포함되어 있다. 브람 뷔셔와의 인터뷰 내용은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인터네상에서 민주적인 거버넌스 구축하기

 



슈나이더(Nathan Schneider)는 인터넷 플랫폼상에서 거버넌스의 기본 형태는 ‘함축된 봉건제’라고 자신의 신작 『거버넌스 가능한 공간들』(Governable Spaces: Democratic Design for Online Life)에서 도발적으로 선언한다. 그는 함축된 봉건제는 “공동체를 봉건적 영지로서 구축하려는 문화적이고도 기술적인 편향”인데 여기서 창립자들은 “평생 자애로운 독재자”가 된다고 주장한다.

불행히도 권위주의적인 거버넌스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 국한되지 않는다. 동일한 경향들이 “현실 세계“로도 번지고 있는데 이는 온라인과 “현실 세계” 사이의 경계가 요즈음에 상당히 모호해졌다는 오직 그 점 때문이기는 하다. 놀랄 것 없이, 우리가 전제 군주 같은 IT 대기업 최고경영자들에 순응하다보면 독재적인 정치인들도 더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다. 민주주의의 실천을 담금질하는 장이 선진 자본주의하에서 위축된 것이다.

슈나이더는 ”온라인 공간이 창조적이고 급진적이며 민주적인 르네상스의 현장일 수 있다“는 대담한 생각을 해볼 것을 우리에게 권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인터넷을 반응하고 발명하는 유례없는 능력을 가진 더 민주적인 매체로 만들기 위해 과거의 거버넌스 유산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고 한다

이 돌풍과도 같은 참신한 선언에 흥미를 느낀 나는 팟캐스트 <커머닝의 프론티어> (에피소드 49)에 슈나이더를 초대했다. 우리의 대화는 온라인 문화의 몇몇 불쾌한 구역을 둘러보는 사뭇 진지한 여행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는 이상하리만치 고무적이기도 했다. 부상하는 새로운 플랫폼 기술들은 진실로 흥미진진한 몇몇 가능성들을 제공한다. 진보적인 행동주의가 상상력을 발견하여 그 가능성들의 현실화에 기여하기로 결심한다면 말이다.

슈나이더는 콜로라도 볼더(Colorado Boulder) 대학에 재직하는 미디어학 교수이다. 대학에서 그는 크립토 경제와 디지털 자율 조직들(digital autonomous organizations, DAOs)에서부터 다양한 형태의 디지털 커머닝과 그 너머까지 인터넷 문화를 연구하는 학술센터인 <미디어 경제 디자인 랩>(Media Economies Design Lab)을 이끌고 있다. 슈나이더의 연구를 아주 흥미롭게 만드는 점은 그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사와 탈식민 역사, 사회운동 전략들, 페미니즘 경제, 문화이론 그리고 초기 인터넷 역사의 유토피아적 비전들에 깊은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슈나이더는 이렇게 질문한다. “사회운동들이 인터넷의 레일 위를 그토록 자주 달리고 있는 시대에 어떻게 우리는 튼실한 힘을 창출하는가? 우리는 사회운동이 자신이 약속하고 널리 퍼뜨린 것들을 실행할 수 있게 하는 비판적인 관계들을 어떻게 창출하는가? 내 생각에는 디지털 공간에서 스스로를 다스리는 능력이이 가장 핵심적일 듯하다. 그러나 사회 운동은 튼실한 힘을 구축하도록 설계되지는 않은 네트워크들에 의존하고 있다. 이 네트워크들은 광고를 하고 사람들을 흥분시킬 목적으로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슈나이더는 소셜 미디어는 수동성과 기업들에의 의존을 조장하며 사용자가 주권을 갖고 통제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공간을 남겨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짚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이 새로운 온라인 공간을 작동시키거나 디스코드(Discord)에서 또는 여러분이 사용중인 어떤 플랫폼에서든 채팅을 하는 경우 그것은 바로 그 하향식 구조 안으로 여러분을 유인한다. 공간을 창출하는 사람은 누구나 본질적으로 그 공간에 대해 절대적인 힘을 갖는다. 갈등을 처리하는 여러분의 유일한 도구는 검열과 추방이다. 이것이 함축된 봉건제의 논리이고 나는 그것이 한층 민주적인 온라인 공간들을 구축하는 데 유리하지 않은 교육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스토돈(Mastadon)―사용자들이 협력적으로 서버를 운영하는 오픈소스 트위터 같은 마이크로 블로그 사이트―을 언급하며 이와 같은 많은 대안들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새로운 유형의 민주적 거버넌스 온라인을 구축하기 위해 슈나이더는 진보적인 사람들이 일련의 ‘거버넌스 스택들’—서로 다른 기술 수준에서 작동하는 일련의 상호운영성이 있는 프로토콜을 가리키는 소프트웨어 용어—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믿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크립토—블록체인 같은 분산된 원장(元帳) 기술—가 설계 가능성의 파열을 제공한다고 믿고 있다.

분산된, P2P 소통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크립토는 기업들이 일반적으로 통제하는 중앙 집중식 서버에 의존하는 웹사이트들의 구조보다 참여자들의 힘이 더 평등한 구조의 가능성을 연다. 적어도 실제적인 상상계로서 크립토는 “다른 상징적이고 신화적인 참조점들이 있는 다른 세상과 다른 정치에 이르게 하는 매체이자 통로”라고 슈나이더는 쓰고 있다.

사실 주목할 만한 거버넌스 혁신들이 크립토 공간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다고 슈나이더는 말한다. 이 혁신들에는 다음의 것들이 포함된다. 선호하는 것들을 거의 실시간으로 평가하는 의사결정 과정들, 알고리즘을 통한 분쟁 해결, 널리 공유되고 있는 책임(성)과 이익 분배, 쉬운 탈퇴 및 시스템 분기 능력, 스스로 시행하는 보안과 검열 저항성, 외부로부터 통제나 규제를 받지 않는 주권, 온체인 활동의 투명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버넌스 활동을 위한 참신한 인터페이스들.

이 실험들 모두가 장기간에 걸쳐 일반적 목적들을 위해 그 가치를 입증하지는 않을 것이다. 크립토 세계의 많은 부분이 사기, 도박 그리고 투기적인 통화 거품으로 넘쳐나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디지털 자율 조직들은 네트워크화된 조직화를 훨씬 더 쉽게 만들지만 조직화가 곧 민주적 거버넌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더 큰 ‘사용자 통제’는 상대적으로 더 직접적이며 마찰이 없는 시장들, 이를 테면 주식 교환 또는 새로운 유형의 비즈니스 파트너십 및 투자 시장들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민주적인 돌파구가 전혀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슈나이더가 역사 및 탈식민을 다룬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들을 활용한 것이 매우 도움이 되는 것으로 판명된다. 듀보이스(W.E.B. Du Bois)와 앤젤라 데이비스(Angela Davis) 같은 사상가들은 억압적인 제도들을—노예제도든, 짐크로 법이든 감옥이든—폐지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슈나이더는 말한다.

시민권, 소속감 및 참여를 실제로 산출하는 대안적인 민주적 구조들을 구축해야 한다. 듀보이스에게 이 일의 큰 부분은 협동조합이었다. 그는 흑인 해방의 한 가지 본질적인 실천으로서 일상의 민주주의를 깊이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평균적인 진보적 단체의 웹사이트에 가면 참여하는 버튼이 없”고 기부하는 버튼만 있다고 슈나이더는 불평한다. 웹사이트는 보통 상향식 회원 자격을 구축하거나 집단행동을 동원하는 것을 돕기 위해 설계되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봉사활동에서 리더십에 이르기까지 참여의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는 온라인 도구들을 우리가 디자인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사이트들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냥 의견만 교환하기보다는 힘을 발전시키도록 육성하고 북돋을 필요가 있다.”

슈나이더와 한 인터뷰에는 훨씬 더 흥미로운 것이 많다. 그 내용을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슈나이더의 책 『거버넌스 가능한 공간들』은 오픈 액세스 포맷으로 여기서 구할 수 있다. 또한 2020년 10월 슈나이더와 한 인터뷰를 이 팟캐스트 에피소드 7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에피소드는 이 블로그 게시글 http://commonstrans.net/?p=2258 번역되어 있다. 본문의 ‘에피소드 8’은 원문에 잘못 표기된 것을 옮긴 것이며, 실제로는 에피소드 7이다. — 역자]

 




자본에서 커먼즈로

 



1990년대와 2000년대 초에 인터넷 문화에는 희망에 찬 실험과 정치적 해방의 꿈이 넘쳤다. 통찰력 있는 디지털 활동가인 존 페리 발로우(John Perry Barlow)가 다음과 같이 웅대한 문장을 특징으로 한 유명한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Declaration of Independence of Cyberspace)을 발표했다.

산업계의 정부들, 살과 강철의 지루한 거인들이여, 나는 정신의 새로운 집인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왔노라. 나는 미래를 대표해서 과거에 속한 당신들에게 우리를 내버려두라고 요구하노라. 당신들은 우리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우리가 모이는 곳에서는 당신들에게 주권이 없다.

인터넷에 접속한 새내기들—그 당시에 우리 대부분이 새내기였다—에게 이 문장들은 인터넷을 통한 해방을 감동적으로 일별하게 해주었다. 그 당시의 파열적인 사회-기술적 혁신의 아찔한 속도를 생각한다면 이 문장들은 꽤 신뢰할 만하다. 여러분이 30세 미만이라면 프리 소프트웨어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의 급증을 둘러싼 흥분, 특히 레니게이드 운영체제[주석1]로서 리눅스 그리고 블로고스피어(blogosphere)와 위키(들)의 등장을 어쩌면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비트토렌트(BitTorrent) 및 P2P 파일 공유의 가능성이 따분하고 착취적인 음악 산업을 뛰어넘어 도약하자 어디에서나 정치적 반란자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를 통한 저작권법의 재창조로 일반 사람들이 컨텐츠를 공유할 권한을 합법적으로 인가할 수 있었고 동시에 무수한 여타 기술 혁신들이 협력 및 공유의 새로운 형태들을 촉진했다.
[옮긴이 주석: ‘레니게이드 운영체제’(renegade operating system)는 기존의 규범 혹은 표준에서 벗어난 운영체제(OS)를 가리킨다. 영어 명사 ‘renegade’는 ‘배반자’ 혹은 ‘배교자’를 의미한다. 블로고스피어(Blogosphere)는 커뮤니티나 소셜 네트워크 역할을 하는 모든 블로그들의 집합이다.]

자본주의와 국민국가들이 인터넷을 상업적인 시장으로서 철저히 길들였고 식민화했으므로 발로우의 선언문은 끔찍할 정도로 순진한 것이 된다. (그의 동시대 동료들―크립토 세계―이 비슷한 비현실적인 유토피아주의를 내놓았을지라도 말이다.)

자본가/국가 동맹은 인터넷에서의 사용자 주권을 효율적으로 억제하고 길들였다는 사실을 직시하자. 우리의 온라인 삶의 지리적 위치 감시를, 온라인 피드 및 여론에 대한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듬 조작을, 대안우파•러시아 및 여타 불량 집단들이 행하는 허위정보 공작과 해킹하기라는 조직적 활동을, 그리고 한때 단일했던 웹을 소규모 웹으로 분할하고 있는 기업의 페이월 및 국가의 방화벽을 생각해보라.

따라서 미국 웨스트조지아 대학의 지리학 교수인 하네스 게르하르트(Hannes Gerhardt)의 신간인 『자본에서 커먼즈까지: 자본 너머의 세상에 대한 전망을 탐색하기』(From Capital to Commons: Exploring the Promise of a World Beyond Capitalism)를 접하는 것은 기분이 상쾌해지는 일이었다. 빅테크의 독점, 순응적인 입법부, 그리고 정보기관들이 인터넷과 해커문화에 널리 퍼진 증가 일로에 있는 아이디어들을 분쇄했을지라도 게르하르트는 커머닝과 테크놀로지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이행을 실제로 실현하는 길들이 있다고 용감하게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어젠다를 ‘동료주의’라고 부른다. 이 동료주의는 이데올로기도 전략적 구상도 아니며 오히려 탈자본주의적 가능성들을 현실화하기 위한, 커먼즈로부터 영감을 받은 전망이다. 그는 책 첫 줄에서 자신의 임무를 요약한다. “커먼즈 중심의 협력적 생산형식이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데는 무엇이 필요한가?”

나는 디지털 공간들에서 그리고 생물물리학계에서 커먼즈를 추진하려는 게르하르트의 전략에 관하여 더 많기 알기 위해 팟캐스트 <커머닝의 프론티어>(에피소드 47)에서 그와 인터뷰를 했다.

게르하르트는 지난 50년간 인터넷 문화에 관한 광범위한 문헌—비평들, 역사들, 기술적 논쟁들—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의 책을 인터넷에 관한 많은 다른 책들과 구별 짓는 것은 과제들의 가치를 평가하는 그의 정치적 날카로움이다. 그는 “전지구적으로 디자인하고 지역에서 제조하는” 생산을 지원하는 방법에 관한 장들, 그리고 배전망 및 인터넷 자체와 같은 “기반시설을 민주화하기”에 관한 장들을 제시한다. 많은 기술 전문가들과 다르게 게르하르트는 자연세계의 경계선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래서 그는 재생자원으로서의 지역적 특성, 도시 폐기물 그리고 농업에 공간을 할애한다.

게르하르트는 “화폐와 가치”에 관한 두 개의 장에서 국가가 화폐 창출을 독점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데 시간을 또한 할애한다. 근대적 화폐 창출이 대출을 통해 무(無)에서 돈을 창출하는 개인은행에 아웃소싱되었으므로, 게르하르트는 기본소득 요소를 좀 가지고 있는 탈중심화된 지역 크립토 통화(예를 들어 써클즈Circles, 매너베이스Mannabase, 및 스위프트디맨드SwiftDemand)에 주목하고 한편으로는 비트코인 같은 자본주의적인 모험적 투기를 피한다.
[옮긴이 주석: 써클즈(Circles)는 공동체가 기본소득을 제공할 수 있는 대안 통화이다. 써클즈와 화폐에 대해서 http://commonstrans.net/?p=2306 참조. 매너베이스(Mannabase)는 전 세계 최초 기본소득 암호화폐용 온라인 플랫폼이다. 스위프트디메드(SwiftDemand)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보편적인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데 집중하는 새로운 디지털 통화이다.]

디지털 삶을 ‘공통화’하기 위한 전략적 기회들은 게르하르트가 논의할 수 있던 것보다 더 많이 있다. 저작권과 특허권의 독점적인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것, 반트러스트적 개입을 확대하는 것—이 주제와 관련하여 레베카 기블린(Rebecca Giblin)과 코리 닥터로우(Cory Doctorow)의 『관문 자본주의』(Chokepoint Capitalism)를 참조하라—그리고 홀로체인 같은, 커먼즈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프로토콜과 플랫폼들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것이 이 기회들에 포함된다. 어떻든 디지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너머로 나아가고자 하는 진지한 전략적 기획들을 숙고하는 것은 활기를 북돋우는 일이다.

하네스 게르하르트와 함께 한 팟캐스트 인터뷰를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인터뷰의 녹취록은 여기서 PDF 형태로 다운받을 수 있다.




인류세라고? 아니다, 우리는 생태세에 들어서고 있다

 



우리 근대인들은 아주 오만해서 지질학적 시기를 심지어 우리 자신의 이름을 따서 ‘인류세’라고 명명했다. 확실히 인간 문명은 지구의 생태계를 크게 변형시켰고 불안정하게 했다. 그러나 ‘인류세’는 지구상에서 우리 인간이 추진력임을 의미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명칭이다.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가! 지구의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산불, 홍수, 가뭄 및 극심한 더위가 보여주듯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가이아(Gaia)이다. 가이아는 자신의 맹렬한, 협상 불가능한 요구를 우리에게 하고 있다. 가이아는 인간이 문명, 자본주의, 국가 그리고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오랫동안 사용해온 질서의 틀을 파열시키고 있다. 이것이 바로 루마니아 태생이며 벨기에에 기반을 둔 훌륭한 연구자인 미흐네아 타나세스쿠(Mihnea Tănăsescu)가 지구의 지질학적인 시대를 ‘생태세’(Ecocene)로 인식할 것을 우리에게 촉구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인간중심주의의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있어서 우리 인간이 자연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깊게 얽혀있으며 자연보다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인류는 살아남으려면 자연계와 문화적•경제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고 지구 체계와 인간 체계를 함께 꽃피우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래서 2022년 출판된 타나세스쿠의 저서에 『생태세 정치』(Ecocene Politics)라는 제목이 붙은 것이다. 책에서 설명하듯이 “생태적 과정이 정치적 삶에 점점 더 빈번하게 개입하는 특징을 띄는 것”이 우리의 시대이다. 사람들이 이 현실을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의 정치•경제•문화가 새로운 탈근대적 방식의 존재하기와 행하기를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것과 적절하게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바로 이것이 앞으로의 과업이다. 붕괴하고 있는 근대 체계를 지탱하거나 복구하고자 하는 것은 헛수고이다.

타나세스쿠가 이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정확성과 열정에 감명을 받아서 나는 팟캐스트 커머닝의 프론티어(Frontiers of Commoning)(에피소드#43)에서 타나세스쿠와 그의 책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타나세스쿠는 벨기에 몽스(Mons) 대학교 과학연구기금 연구교수이다. 그곳에서 그는 인류학•사회학•정치학 및 법에 깊이 기반을 두면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관하여 왕성하게 글을 쓰고 있다.

타나세스쿠가 『생태세 정치』에서 씨름하는 중요한 과제는 자본주의적 근대의 덫―근대적으로 사고하고 근대적으로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들―을 어떻게 넘어서는가 하는 것이다. 그의 기본적인 대답은 “사회적 상호성, 책임감 및 취약성에 의거한 “상호주의의 회복윤리”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타나세스쿠가 말하는 ‘취약성’(vulnerability)이란 환경의 변화―이 변화는 기후위기가 진행중인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필연적이며 근본적으로 위협적이다―에 자신을 열어놓고, (해체가 아니라) 새로운 구성을 향해서 변화하는 힘을 가리킨다. 따라서 ‘취약성’이라고 옮기기는 했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상처를 견뎌낼 수 있음’이다.– 옮긴이]

프랑스 사회철학자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에게서 영감을 얻은 타나세스쿠는 관계성에 기초를 둔 정치를 주장한다. 이는 커머닝이 분명하게 진전시키는 테마이다. 그가 주장하는 핵심은 개인주의, 합리성, 자연에서의 분리, 자본축적이라는 근대적 관념들을 넘어서 상호주의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방향으로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가? 타나세스쿠는 “혁신하는 실천들”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것은 “근본적인 변화의 필요성과 어떤 이상화된 과거로의 회귀의 불가능성 둘 다를 표현하는” 용어이다. 인간이 만들어낼 필요가 있는 관점전환을 환기시키기 위해 그는 이탈리아 폴리아 지역에서 올리브 나무를 가지치기하는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한다.

올리브 나무의 성공적인 재배는 매우 특별한 장소에 있는 사람과 올리브 나무들 사이의 공동-창조와 사랑이 구현된 복잡한 행위이다. 인간의 문화가 살아있는 식물 자체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과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역의 “풍경들과 미기후(微氣候)들의” 더 큰 “모자이크”에의 집중을 필요로 한다. “어떤 작은 지역이든 그것을 생성적인 상호작용의 역사의 외부에서 그리고 그 장소와의 친밀감의 외부에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올리브 나무의 건강에 영양을 제공하는 대단히 복잡한 집합체가 있기 때문에 가지치기의 행위”(나무가지를 신중하게 선택적으로 잘라내는 것)는 “매우 의식(儀式)화되어 있다”고 타나세스쿠는 말한다. 그것은 가지치기를 신성한 예술형태로서 이해하는, 신임을 얻은 연장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어떤 것이다.

사람들은 올리브를 얻기 위해 가지를 치지만 또한 자식들을 위해서, 땅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흙의 건강함을 위해서, 겨울 동안의 난방을 위해서, 좋은 식품을 만들기 위해서, 나무의 수명과 아름다움을 위해서, 대대로 공동으로 사용해온 땅에 대한 의무감에서 가지를 친다. 인간과 올리브 나무의 관계에서 가지치기의 핵심적 역할을 고려해 볼 때 가지치기를 도구적인 합리성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지치기는 단순한 합리성에 저항하고 그 합리성을 벗어나고 넘쳐흐르며 가지치기를 중심으로 이어져 있을 수 있는 상호관계의 풍성한 태피스트리를 향하고 있다.

근대 시기의 우화? 올리브 나무 가지치기라는 전통 문화에서 타나세스쿠는 인간-자연 관계가 어떻게 근대 시기에 잘못되었는지를 보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전통적인 관습들을 통해 상호성과 삶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한 관계적 윤리가 어떻게 개인의 수준과 문화의 수준 둘 다에서 계발될 수 있는지를 보았다.

타나세스쿠에게 이 책은 개인적인 오디세이였다. 연구자로서 불안정하게 살고 있으면서 그는 자신이 하나의 직장과 미래의 불확실성 사이에서 실업급여로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결국 그를 창조적으로 자유롭게 했다. 그는 몰개성적인 학술적 글쓰기 방식을 버리고 자신의 개인적인 열망을 표현할 수 있었으며,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책은 단지 어떤 아이디어들의 제시만을 핵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관계성을 유지하는 것의 어려움과 전력으로 씨름하는 것을 핵심으로 합니다. 독자는 항상 기존의 사고방식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타나세스쿠에게 ‘생태세 정치’는 끔찍한 생태적 현실 특히 기후변화 앞에서 인간의 실존, 경제, 문화 그리고 정치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려는 대담한 시도를 나타낸다.

상호주의에 관한 마지막 장에서 그는 커머너들을 위한 몇몇 실천적이고 유용한 조언과 많은 풍부한 통찰과 지혜들을 제시한다. 가려 뽑은 몇몇 구절들을 소개해본다.

“근대는… 상호성과 책임감의 유대로서 항상 존재했던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추방한다. 실천으로서의 상호관계는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고 사회 기반시설이 사라짐으로 인해서 급격히 주변으로 밀려났을 뿐이다.”

“생명이 근본적으로 협력적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은 자연과학을 통해 많은 다양한 형태로 확산되었다.”

“마굴리스(Margulis)와 세이건(Sagan)이 표현했듯이 ‘생명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으며 생명 자신의 진화에 뜻밖에 큰 역할을 했다.’ 이 상대적 자유가 협력적인 방식으로 종종 발현된다.”

“상호간의 베풂이 세상에서 조직화하는 역할을 한다…. 상호주의가 베풂을 받는 쪽의 완전한 목록을 미리 결정할 수 없는 정치윤리에 붙일 이름일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보존은 환경을 모조리 화폐화하는 것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화폐화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관계들을 창출해내야 한다.”

“우리는 상호성을 위한 기반 시설을 살아있는 세계에 헌신하는 정치과정을 통해 구축할 필요가 있다”

타나세스쿠와 함께 한 전체 인터뷰를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생태세 정치』는 Open Book Publishers로부터 무상의 오픈액세스 버전으로 구할 수도 있고 인쇄본을 구입할 수도 있다.




평행폴리스로서의 커먼즈버스

 



[볼리어의 설명]

아래의 글은 내가 2023년 5월 31일 베를린에서 열린 워크숍 「자유주의를 넘어: 커먼즈, 입헌정치 그리고 공동선」에서 발표한 것을 약간 손본 것이다. 이 워크숍은 <막스 플랑크 비교 공법 및 국제법 인스티튜트>, 뷔르츠부르크 대학 법학과 그리고 <뉴 인스티튜트>(독일, 함부르크)가 주관했다.

발표 비디오는 여기서 불 수 있다. 내 발표는 타임코드 5:32에 시작한다.

 

평행폴리스로서의 커먼즈버스: 기회와 도전

이 워크숍에 의해 촉발된 대화는 시기적절하고 필수적이다. 이는 정치경제 및 문화와 관련하여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그 많은 것들이 우리 눈앞에서 서서히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그토록 많은 거대 서사들—시민권•자유•재산권•경제성장•가치이론—이 요즈음에 문제시되었다고 말해야 온당할 것이다. 기존 사회제도와 사고 범주들이 그다지 잘 작동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한편으로 구조변화 및 필요한 대안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이는 그런 이야기가 괴물들과 카오스가 든 판도라의 상자를 열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기후변화, 권위주의적 민족주의, 야만스런 불안정성 및 불평등 그리고 사회제도 붕괴라는 위험지대들로 더 깊이 들어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선택할 것이 거의 없다. 우리는 몇몇 고착된 습관들을 버릴 필요가 있다. 우리는 새로운 북극성과 한층 안정적이고 유익한 질서를 필사적으로 찾을 필요가 있다.

오늘 나는 커먼즈라는 생각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아주 많은 것들—자본주의적 정치경제, 국가권력, 사회적 관계 및 위계들, 지구와의 관계, 우리의 내적인 삶들—을 다시 상상할 엄청난 가능성이 이 생각에 담겨있다는 제안을 하고 싶다. 확실히 이것은 당찬 제안이고 장기적인 기획이다. 문제가 있는 시스템에 고착되어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기존의 것과는 매우 다른 사회적 논리들 및 제도적 형태들을 개발해야 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식민주의, 그리고 우리가 내면화했거나 억제한 규범들을 가진 중앙집권화된 국가권력이라는 해결되지 않은 트라우마들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발표문에서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커먼즈와 커머닝이 우리에게 공동선의 비전을 재발명할 발판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비전은 우리가 세포 수준에서 한층 인간적인 사회관습들과 윤리적 행동들을 발전시키는 것을 촉진할 수 있으며, 이 관습들과 행동들이 확장하면서 우리는 자본축적, 소비주의, 성장을 통한 진보의 세계 너머로 이동할 수 있게 된다.

확실히 오늘날 대다수의 커먼즈는 중요한 의미를 갖기에는 너무 소규모이고, 지역적이며, 캐시푸어(cash‐poor)인 것으로 일축된다. 주류에게 커먼즈는 군내나는 괴짜다. 주류들의 ‘점잖은’ 의견에 따르면 “일을 해내기” 위한 본격적인 체제로 시장과 국가가 유일한 것으로 가정된다. 사적부문과 공적부문이 있고 그 밖에 것은 실제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허울만 좋은 주장이거나 적어도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매우 편협한 프레임을 씌운 것이다. 시장과 국가는 둘 다 경제성장을 찬양하고, (서로 다른 역할을 가지고 있더라도) 자유주의적인 정치적•경제적 질서를 촉진하는 데 있어서 긴밀하게 동맹한다. 국가는 속박되지 않은 시장들이 성장, 세수(稅收), 시민들의 사회적 이동성을 발생시키기를 원한다. 반면에 기업들과 투자자들은 국가가 안정된 통치, 법적 특권들과 기업활동을 위한 보조금을 제공해주고, 금융위기, 생태적 재난, 시장 악용 및 기타 ‘시장 외부효과들’ 이후 상황정리를 해주기를 원한다. 국가와 시장은 우선사항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공생한다. 시장국가 체제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말이 될 만큼 충분히 말이다.

커먼즈는 국가와 시장이라는 바로 이 체제에 대안이 되는 비전이다. 정치가들과 경제 전문가들은 커먼즈를 손짓으로 간단하게 묵살할 수 있지만 커머너들은 더 심오한 진실을 즉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전제들이 비록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더라도 뿌리 깊숙이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2008년 금융 위기는 전 세계 금융세력과 자본주의의 오만한 힘을, 그리고 그 힘의 남용을 영속시키는 일에 자유주의 국가가 공모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브렉시트의 도래,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COVID, 긴축재정 정치, 도널드 트럼프, 보수적 민족주의 그리고 인종적•민족적 타자화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강화할 뿐이었다.

나는 경제성장이 유토피아적 환상임을 폭로하고 있는 기후변화의 잔혹한 현실—홍수, 가뭄, 산불/들불, 기상이변—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경제성장을 위한 자원 추출 및 탄소 에너지 자원에의 의존은 지속될 수 없다. 전 세계 비(非)백인들—식민주의와 강제적인 자본주의적 개발의 희생자들—이 배상금, 생태복원 및 기후정의를 요구하므로 자본주의적 개발을 이 세계에 강요하려는 충동은 지속될 수 없다.

새로운 정치가들, 정책들 또는 법들이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그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구조적인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자전거가 우리를 달로 데려갈 수 없듯이 시장‑국가 체제는 그 문제들을 극복할 어포던스(affordance, 행동가능성)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정치공백기에 빠졌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오래된 질서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며 새로운 질서는 아직 태어날 준비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체코 극작자인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에게서 영감을 얻고 그를 길잡이 삼는다. 1970년대에 그를 비롯한 문화계의 반정부 인사들이 전체주의적인 억압 시스템—그의 경우에 체코 정부—에 직면했을 때 하벨의 전략적 반응은 그가 평행폴리스(parallel polis)라 부른 것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평행폴리스는 공동체가 만든 안전 공간으로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로 지원하고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직접 생산하며 일종의 그림자 사회(shadow society)를 구축한다.

평행폴리스라는 발상은 여러 목적에 복무한다. 사람들은 공식적인 선전의 허위를 폭로하고 가능한 것에 관한 자신들의 상상력을 확장할 공간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은 예시(豫示)적인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면서 수평적이고 공락(共樂)적인 상호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그들은 진실을 말할 수 있고 건전한 가치들을 표현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엄성, 사회적 유대 및 희망을 다시 주장할 수 있다.

나는 커먼즈버스(Commonsverse)를 일종의 평행폴리스로 본다. 커먼즈버스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시스템 변화를 가져오는 방법으로서의 커머닝에 복무하는 무수한 기획들, 조직들, 사회운동들이다. 나는 이미 존재하는 엄청나게 다양한 커먼즈들을 소개하기 위해 『커머너의 변화만들기 목록』(The Commoner’s Catalog for Changemaking)을 2년 전에 출간했다. 여러분이 몇몇 참조점을 확인할 수 있도록 간략한 개요를 제시할까 한다.

커먼즈로서의 토지. 토지를 탈상품화하는 것은 토지를 지역의 농사용, 주택용 및 보존용으로 접근가능하고 제공가능도록 만드는 중요한 하나의 방법이다. 이 점에 있어서 한 가지 중요한 수단은 시장에서 토지를 빼내어 그것을 영구히 커먼즈로 만드는 공동체 토지 신탁(community land trusts)이다.[주석1] 토지 신탁은 풍경을 보존하고 부의 불평등을 줄이며 영양이 풍부한 식량을 지역별로 키우는 것을 더 적합하게 만드는 일을 촉진한다. 공동주택, 주택 협동조합 또는 독일 신디케이트(Mietshäuser Syndikat) 같은 연합체의 ‘피어(동료) 주도 프로젝트들’(Peer-directed projects)은 국가나 지역 공동체에 의한 기획들과 나란히 사회적 주택을 제공할 수 있다.

서양에서의 지역 식량 주권. 유럽과 북미에는 지역농업과 식량 공급망을 재발명하는 운동들이 많다. 유기농 지역경작이 50년 전에 처음 이 운동을 시작했고 이는 지금은 퍼머컬처, 농업생태학, 슬로우푸드 운동 및 심지어 슬로우피쉬 운동에서 나타난다. 푸드 협동조합들은 농부들과 소비자들을 한데 모아 상호적으로 부양하는 관계를 맺도록 하기 위한 — 가격을 낮추고 한층 안정적인 지역 식량 공급을 보장하며 친환경 농경을 보증하는 것을 돕는 — 긴 시간에 걸쳐 입증된 모형이다.

커먼즈로서의 도시. 바로셀로나, 암스테르담, 서울, 볼로냐, 그리고 수십 개의 주요 도시 및 소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협력적인 거버넌스의 새로운 형태들을 실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커먼즈-공공부문 파트너십은 메이커스페이스(makerspace)[주석2], 도시농업 시스템, 시민 정보 커먼즈 그리고 근린지역 개선 및 서비스를 창출하고 있다. 이 파트너십은 시민들에게 권한을 주고 사회 기본구조를 다시 짜며 부유한 개발자들과 투자자들로부터 도시에 대한 시민대중의 통제권을 되찾는 길이다. 또한 도시에는 많은 독립적인 커먼즈 기획들, 예를 들어 공동체 텃밭(community garden), 에너지 생산 커먼즈, (카탈로니아의 Guifi.net 같은) 지역 와이파이 시스템 등이 있다.

전통적이고 토착적인 커먼즈. 어림잡아 전 세계 20억 명의 사람들이 어장농지목초지야생 사냥감의 파수를 통해 일상 생계를 커먼즈에 의존하고 있다. 전통적인 공동체와 토착민들에 의해 수행되는 커머닝은 그것이 산업형 농업에 대한, 지역에 기초를 두는 친환경적인 대안임을 입증하고 있다. 전 세계 생물 다양성의 대략 70%가 토착민들이 운영하는 땅에 존재한다.

대안적인 지역 통화. 전 세계 많은 공동체들이 그들 고유의 지역 통화를 만들었다. 그 목적은 금융가치가 주요 금융기관들로 빨려 들어가도록 두지 않고 그 가치를 지역에 잡아두는 것이며 그래서 지역 시장, 일자리 창출,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을 활성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태어난 서부 메사추세츠에서 버크셰어즈(BerkShares) 통화는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대안 통화가 되었다. 타임뱅킹(Timebanking)은 또 하나의 가치 있는 통화혁신—많은 돈 없이 나이 든 사람들과 일반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하는 서비스‑교환 시스템—이다.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와 피어 생산. 프리 소프트웨어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의 지난 25년간의 폭발적 증가는 커머닝의 강력한 상징이다. 프리 소프트웨어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는 코드를 탈상품화하고 스스로 조직된 개방적인 공동체의 창조성을 고양시킴으로써 리눅스, 인터넷을 위한 필수적인 하부구조, 위키피디아 그리고 (그룹 심의, 그룹 예산안 작성 및 클라우드에의 파일저장을 위한) 많은 세계 규모의 소프트웨어 시스템들을 구축했다.

코즈모로컬 생산. 한 가지 강력한 오픈소스 파생물은 코즈모로컬 생산 즉 전지구적으로는 디자인과 지식의 공유를, 지역적으로는 사물들의 물질적 생산을 관장하는 시스템이다. 이 과정은 자동차•가구•주택•전자기기•농장시설에 이미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는, 상업적인 의료용 제품보다 더 싸고 더 정교한 자동인슐린주입 장치를 생산한, 당뇨병환자로 이루어진 전지구적인 공동체도 있다. 농업기계의 코즈모로컬 생산은 <팜핵>(Farm Hack)과 <오픈소스 에콜로지>(Open Source Ecology)에서 볼 수 있듯이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세계 일류 디자인을 갖춘 저가의 농장 장비를 생산하는 것을 돕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와 공유 가능한 콘텐츠. 20년 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의 발명은 돈을 지불하거나 허가없이 글쓰기, 음악, 이미지 및 기타 창조적인 장르들을 법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자유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자율적인 공공 라이선스는 이제 전 세계 170개가 넘는 법시행 관할구역에서 인정을 받고 있으며 다른 상황에서라면 저작권법 하에서 ‘저작권 침해’로 여겨질 방식으로 엄청난 양의 콘텐츠가 공유될 수 있다.

* * *

이 커먼즈들 각각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것들이 항상 그 맥락의 특이성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나는 비상업적인 극장에, 오픈소스 테크놀로지로 구축되는 최고 품질의 과학 현미경에, 인도주의적인 구조를 돕는 온라인 지도에, 그리고 난민들과 이주자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일에 주력하는 커먼즈를 발견해서 깜짝 놀랐었다. 각각의 경우에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독특한 재능, 지리, 역사, 전통, 자급활동, 가치 그리고 상호주체성을 통해 자본주의적인 시장이나 국가의 통제 없이 욕구를 만족시키고자 한다.

‘내부에서 볼 때’ 각 커먼즈는 독특할 뿐 아니라 ‘세상 만들기’를 위한 학습이기도 하다. 그것은 상호주체적인 일련의 감정들•경험들•가치들•전망들이다. 우리가 겪는 상호주체적 경험들의 생생한 실재는 우리에게 세계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고착된 단일문화로서가 아니라 탄탄한 ‘다원적’ 세계로서 더 잘 이해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러나··· 각 커먼즈가 독특하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그 커먼즈에 관하여 일반화하기 시작하는가? 최소한도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기존 공동체가 일정 유형의 공유된 부를 집단적으로 운영할 때마다 공평한 접근법, 사용법, 장기간에 걸친 지속가능성이 강조되면서 하나의 커먼즈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다양한 맥락에 있는 매우 다양한 커먼즈들에 공통된 규칙성들을 실제로 설명하지 못한다.

작고한 나의 동료 질케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나는 이 문제가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현재 우세한 근대적 세계관은 커먼즈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그야말로 너무 환원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이다. 그것은 전체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들에게 너무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리의 근대적 세계관은 커머너들이 여전히 경제적 개인―합리적이고 자기주권적이며 자신의 물질적 이익을 최대화하는 데 전념하는 개인―이라고, 다만 시장을 통해서보다 그저 협동을 통해서 이 목표를 추구할 뿐인 그러한 경제적 개인이라고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커머닝을 그 나름의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조건에 기반해서, 그리고 진화사 및 생물학의 맥락에서 이해하고자 한다면 나는 우리가 커먼즈를 철저히 관계적이고 사회적인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전 세계 커먼즈에 대한 나의 아마추어적인 민족지학 연구로부터 증명할 수 있다. 커먼즈는 경제학자들이 보고자 하는 것처럼 단순히 자원들이 아니다. 커먼즈는 살아있는 사회 유기체들이다. 최근의 생물학 연구는 선구적인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가 보여준 것처럼, 어떻게 식물과 나무와 균류들 모두가 상호의존적이며 연결되어 있는지, 어떻게 세포 수준에서조차 생명이 심층적으로 공생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간 커머너들의 경우에도 그렇다. 우리는 서로와의 관계 속에서, 지구 그리고 지구에 존재하는 인간보다 큰 생명계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과거 및 미래 세대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커먼즈는 단지 사람들의 타산적인 합리성이 아니라 그들의 충만한 감정적, 윤리적 그리고 영적 힘에 의해 활기를 띤다. 질케와 나는 커머닝이 사실상 사회적이고 생태적인 관계맺음을 통해 창출되고 지속되는 역동적인 살아있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감수성은 문화 역사가 토마스 베리(Thomas Berry)의 다음 말에 의해 잘 표현된다. “우주는 객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주체들의 교감이다.” 나는 또한 생물학자이자 생태철학자인 안드레아스 베버(Andreas Weber)의 다음 문장을 좋아한다. “과학과 경제학은 창조적인 살아있음을 현실의 존재론적인 토대로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질케와 나는 공동 출간한 책 『자유롭고 공정하며 살아있는』(Free, Fair and Alive)[주석3]에서 커먼즈 안에서 살아있음이 어떻게 실제로 작동하는지 설명해보려 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에 답하고 싶었다. 관계성이 핵심이라면 다양한 개성들과 선호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조율이 되어 일관성 있는 커먼즈가 되는가? 화폐교환 없이 어떻게 중요한 것들이 이루어지고 돌봄이 제공되는가? 어떻게 피어(동료)가 주도하는 협동 시스템들이 생성되고 스스로를 유지하는가?

운 좋게도 우리는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 교수의 앞선 성취들과 그녀가 선구적으로 포착한 성공적인 커먼즈의 ‘설계원칙들’을 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오스트롬은 명확하게 명시한 경계들의 필요성과 자체적으로 만들어 낸 거버넌스 규칙들의 필요성을 확인했다. 그녀는 어떻게 커머너들이 규칙을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어야 하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규칙들이 시행되는 방식을 감시하는 데 참여해야 하는지를 알아냈다. 분쟁이 있다면 커먼즈는 그것을 저비용으로 신속하게 해결할 자체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커먼즈는 국가 당국으로부터 자립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커먼즈에 관한 이 전통적인 사고방식은 경제의 표준적인 틀과 그 방법론인 개인주의 내부에 대체로 머물러 있다. 그것은 커머너들의 내적인 삶 또는 정치경제[즉, 집단적 공동체의 경제]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커먼즈의 실제적 작동방식을 우리가 보다 명확하고 깊이 있게 보도록 돕는 ‘관계틀’을 개발했다. 우리는 ‘패턴언어’라는 아이디어를 개발한 급진적 도시계획자이자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의 작업에서 길잡이를 찾았다.

알렉산더는 빈발하는 문제들에 대한 특정의 해결책들이 긴 시간 동안의 역사와 문화를 가로질러서 소소하게 변동하면서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것을 자신의 분야에서 관찰했다. 그는 이 해결책들을 ‘패턴’이라 불렀다. 패턴들은 사회적 관행에서 나타나는 디자인이고 행동이다. 패턴들의 유효성은 그 패턴들이 반복적으로 사용됨으로써 승인된다.

패턴언어 방법론을 활용하면서 질케와 나는 15년간 우리가 목격했던 많고 많은 수의 커먼즈 형태에서 관계를 나타내는 수십 개의 패턴들을 포착해냈다. 우리는 이 패턴들을 ‘사회적 삶’, ‘피어 거버넌스’ 그리고 ‘자급’이라는 세 영역—이는 각각 사회적, 제도적, 경제적 영역이라 할 수 있다—으로 나누었다. 이 세 영역들을 합치면 우리가 ‘커머닝의 3인조’라 부르는 바의 것이 구성된다. 이 3인조는 ‘어떤 사회적 실천들과 윤리적 행동들이 커머닝의 성공적인 관계들을 창출하고 유지하도록 돕는가?’라는 물음에 우리가 답할 수 있게 한다. 나는 우리가 찾은 25개 이상의 패턴들을 다 살펴볼 수는 없고 여러분에게 패턴에 대한 감각을 전하는 데 집중하고자 한다.

커먼즈의 ‘사회적 삶’에서 한 가지 중요한 패턴은 공유된 목적과 가치들을 계발하는 것이다. 이 실천이 없다면 커먼즈는 붕괴된다. 사람들이 긴밀히 연결된 활력 있는 집단으로 남아있으려면 그들은 경험을 공유할 필요가 있고 집단적으로 그들의 커머닝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된 패턴은 함께함을 의례(儀禮)화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만나야 하고 서로 공유해야하며 하나의 집단으로서 그들의 성취와 친연성을 축하해야 한다. 함께 어울리는 것이 중요하며, 의식(儀式)들, 전통들, 축제행사들을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커먼즈의 사회적 삶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기여하는 것—똑같은 가치를 직접적 혹은 즉시 되돌려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고 주는 것—을 필요로 한다. 커먼즈가 시간을 두고 실제 혜택을 내줄지라도 말이다.

커머닝 3인조 중 둘째인 피어 거버넌스의 핵심은 타자들을 동등한 존재로 보는 것이자 집단적인 의사결정의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것이다. 커머너들은 피어 거버넌스로 위계와 중앙집권화된 권력시스템을 피하고자 한다. 그 시스템이 권력 남용과 책무성 문제를 낳을 배치일 수 있기 때문이다. 피어 거버넌스는 무엇보다도 ‘지식을 아낌없이 공유하기’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집단지성을 생성하는 결정적인 방식이다. 지식은 공유될 때 늘어나지만 이런 일은 정보가 자유롭게 유통되고 쉽게 접근 가능할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패턴은 ‘투명성을 신뢰의 영역에서 존중하기’이다. 투명성은 명령될 수 없다. 사람들이 어렵거나 난처한 정보를 공유할 만큼 충분히 서로 신뢰하지 않는다면, 투명성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커머닝의 세 번째 영역인 ‘자급’은 커머너들이 어떻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생산하는가가 그 핵심이다. 시장경제에서처럼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는 일은 없다. 기본 목표는 사람들의 경제적 욕구를 개인적인 삶의 여타의 부분들과 통합하는 것이다. 커머너들은 시장에서 팔 것을 생산하지 않는다. 사실 커머너들도 자신들의 커먼즈의 온전함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시장과의 상호작용이 조금이라도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그 상호작용의 방식을 구조화하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급의 한 가지 기본 패턴은 ‘함께 제작하고 함께 사용하라’이다. 참여하고 책임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함께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자신들의 능력•재능•욕구에 따라 기여한다. 함께 생산하기는 ‘함께 하라’(‘Do It Together,’ DIT)라고 불릴 수도 있는 것의 핵심과정이다. 커먼즈에서 일반적으로 자급이 확실하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방식을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이 되는 많은 다른 패턴들이 있다.

일단 커머닝의 패턴들로 들어가기 시작하면—일단 관계성이 어떻게 지구에서 삶의 근본적인 현실인지를 보기 시작하면—근대적 세계관과는 다른 세계관, 즉 내가 존재론적 전환 또는 ‘OntoShift’(존재전환)이라 부르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지금 당장 철학적 차원을 논의할 필요는 없다. 다만 세계관을 전환하는 것은 우리의 내적 삶과 관점을 바꾸게 될 새로운 사회적 실천들과 커머닝의 경험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한다라고만 말해두자. 우리는 시장문화의 핵심요소들인 이기적인 개인주의와 장사꾼 사고방식을 버리고 가기 시작하는 것이며 세상을 촘촘한 망으로 이루어진 공생 및 협력관계로 움직이는 통합된 전체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커먼즈버스에서 ‘공동선’은 어떤 고정된 이상화나 눈에 잡히지 않는 목표점이 아니다. 이 공동선은 수평으로 그리고 아래에서부터 확장하고 출현하는 협동 윤리로서 발현되는 역동적인 살아있음이다. 이 공동선은 유기적 연결성과 온전성으로 발현되며 이는 사실 살아있는 유기체들의 생물학적 충동이다. 우리의 내적 삶에서 이 공동선은 배려하는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 안전하고 공정하다는 느낌, 그리고 소속감으로 발현된다. 이 공동선은 체계 차원의 다양성과 회복탄력성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것에서 나는 공동선에 대한 프란치스 교황의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Praise Be to You)의 비전이 생각나는데, 이 비전은 우리의 영적 삶, 인간보다 큰 세상, 그리고 우리의 (하나의 종으로서의) 공통의 부와 운명 사이의 상호연결에 관하여 많은 비슷한 점들을 강조한다.

* * *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문턱에 서있고 사태는 흥미로운 방식으로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커먼즈와 커머닝은 지난 10년간 급증하면서 국가권력, 자본주의 기업 및 신자유주의와 점점 더 충돌하게 되었다. 시장‑국가 체제는 그 나름의 우선사항들과 비전에 공격적으로 전념하는데 이 우선사항들과 비전은 커먼즈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영국에서 벌어진 종획 운, 몇 백 년에 걸친 식민지 정복 그리고 인공적인 나노물질과 유전자에서부터 수학 알고리즘과 (금융증권으로 전환되는) 물의 흐름까지, 가치가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사유화하고 화폐화하고자 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발전’에서 나타나듯이, 역사는 성장경제가 일반적으로 공동자산을 전유하고 사유화하며 커머너들을 그 공동자산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시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커머너들에게 긴급한 실질적인 물음은 어떻게 그들이 공유된 부의 종획을 막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커머닝을 보호하기 위해 법을 사용할 수 있는가이다. 이것이 실제로 가능한가? 자유주의 헌법 질서가 긍정적으로 커머닝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비자본주의적인 사회 형태로서 커머닝의 온전함을 존중할 수 있는가? 그 질서가 커머닝을 보호하기를 원하는가? 커먼즈의 토착적인 법과 서구의 법을 미봉적인 긴장완화로서만이라도 영리하게 섞는 것이 가능한가? 또는 자유주의 철학은 너무 경직되고 공격적이며 정치적으로 고루해서 커먼즈와 커먼즈가 만들어 내는 살아있는 가치를 지지하지 못하는 것인가?

분명히 해두자. 커먼즈는 시장가격과는 매우 다른 가치 이론을 구현하는데, 우리 시대에 시장가격은 가치의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측정규준으로 간주된다. 이와 달리 커먼즈는 살아있는 시스템을 생성적인 것으로서, 즉 일반적으로 사유화되지도 않고 사유화될 수도 없으며, 화폐화되지도 않고 화폐화될 수도 없고, 상업적으로 거래되지도 않고 거래될 수도 없는 가치로서 인식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시장‑국가 체제는 재산법, 계약법 및 통상법의 매개를 통해 삶을 객관화한다. 국가권력으로서는 자본과의 동맹을 통해 그 힘을 공고히 할 기회를 환영한다. 일반적으로 국가권력은 사람, 자연, 여타 생명체들에 대한 행정적인 통제를 중앙집권화하고 규칙화하기를 원한다. 정치 과학자 제임스 스콧(James Scott)이 다음과 같이 분명히 했듯이 말이다.

근대국가는 … 감시하고 수를 세고 평가하고 관리하기에 가장 쉬울 바로 그러한 표준화된 특징을 지닌 지형과 인구를 창출하는 것을 시도하는데 성공의 정도는 경우에 따라 다르다. 근대국가의 허망하고 근시안적이며 끊임없이 좌절되는 목표는, 그 밑에 있는 무질서하고 혼란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현실을, 그 현실을 관찰하는 행정망을 더 많이 닮아있는 어떤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국가들이 디지털 감시 테크놀로지와 빅테크와의 연합으로 무장하고 있으므로 이 동향의 논리적인 종점은 권위주의적인 통제이다. 국가법과 자유주의가 얼마만큼 이 방향을 향할지 불분명하다.

결국 자유주의는 국가권력에 깊이 예속되어 있고 커머너들의 관습에 따른 관행의 역할이나 그들의 집단적인 정체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시장처럼 자유주의 국가는 개인주의, 재산권, 계약의 자유, 및 물질적 ‘진보’에 깊이 전념한다. 이것은 분리―인간이 서로 분리되고 지구로부터 분리되며 역사적 기억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의 사고방식을 조장한다.

세르게이 거트워스(Serge Gutwirth)가 설명했듯이, 자유주의 국가에는 법인격 없는 역동적인 공동체에 권리를 부여할 수단이 없다. 물론 경제성장—주주들의 집단적 의무—이 자유주의 국가에 크게 잘 들어맞기 때문에 기업들은 예외다. 대략 800년 전에 커머너들의 많은 특정한 권리들이 획기적인 <삼림헌장>[주석4]—마그나카르타와 연결되어 있는 법적 선언문—에서 존중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것은 대부분 잊혀졌다. 민족(국민)국가의 발생과 심지어 자유주의로 인해 커머닝에 대한—생존에 필수적인 것들에 접근할 사람들의 권리에 대한—법적인 인정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이것이 나에게 시사하는 바는 현재 실행되는 바의 자유주의는 철학적으로 커먼즈에 적대적이거나 최소한 커먼즈의 실제 가치와 역동성을 모른다는 것이다. 국가는 권력 행사의 합법성을 한시도 늦추지 않고 주장한다. 그것이 법과 국가 기관을 통해 공식적으로 수행되는 바대로 말이다. 그러나 국가는 커먼즈에 기반을 두는 체제에 의해 주장되는 사회적, 윤리적 정당성에는 일시적인 관심만을 보인다. 권력은 자신이 선택한 인식 체계를 떠받침으로써 스스로를 유지한다.

자유주의와 커머닝을 논할 때 우리는 합법성과 정당성 사이의 단절에 직면한다. 시장‑국가 체제는 그 행정질서의 합법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형식적 법체계와 관료조직에 의지한다. 그 체제는 커머너들—커머너들은 그들 고유의 인식론적 질서, 법과 정당성에 대한 그들 고유의 비전을 가지고 있다—의 역동적인 거버넌스와 일상적인 관행 및 경험에 별 관심이 없다.

나는 이것을 우리가 기획한 「자유주의를 넘어」라는 제목의 워크숍이 탐색해야 하는 영역으로 여긴다. 국가의 합법성과 커먼즈의 정당성 사이의 차이는 취약성, 위험성 및 가능성의 차이이다. 이 차이를 메우려고 했던 몇몇 인상적인 혁신들이 있고 현재로서 최선의 효과를 내는 혼합안을 개발하려고 했던 몇몇 흥미진진한 실험들이 있다. 그것들 중 세 가지만 간략하게 언급해보자.

1) 새로운 사회적 규범들 및 관행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법적 해킹 활용
2) 커머닝을 지원하는 새로운 조직형태들의 개발
3) 일반적으로 보통 지자체 수준에서 커머너들과 국가 공무원들을 협력에 이르게 하는 커먼즈‑공공부문 파트너십

법적 해킹은 국가법을 원래 입법자에 의해 상상되거나 의도되지 않은 방식으로 개편하는 것이다. 법적 해킹의 핵심은 현행법 내부에서부터 합법성의 새로운 구역을 개척하는 것이고 그런 다음 새로운 사회적 규범과 정치 활동으로 이 구역을 채우는 것이다. 핵심은 ‘새로운 합법성’을 수립하기 위해 민중에 기반을 둔 정당성과 공동체 실천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법적 해킹은 국가법 하에서 불법일 수 있는 커머닝(예를 들어 씨앗공유하기 및 인도적인 구조救助)을 탈범죄화하거나 커머닝이 번성할 보호받는 적법한 공간들을 만들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사례들로는 창조적인 작업을 합법적으로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듦으로써 저작권법을 해킹하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Creative Commons licenses)가 있다. 이와 유사하게 강•산•풍경을 보호하는 한 방식으로서 이것들에 공식적인 법인격을 부여하고자 하는 다양한 ‘자연권’ 법들도 법적 해킹이다.

기업들, 협동조합들, 비영리단체들에 권한을 부여하는 지배적인 법구조가 커머닝이 작동하는 방식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적어도 서구 나라들에서는 새로운 조직 형태들을 만드는 것이 종종 필요하다. <지속가능한 경제법 센터>(Sustainable Economies Law Center), <민주 및 환경 권리 센터> 같은 몇몇 법 옹호단체들은 풀뿌리에서부터 성장할 수 있는 탈중심화된 구조를 설계하기 위해서 혁신적인 정관(定款)과 금융구조를 개발하고 있다. 그들은 커먼즈로서 운영되는 자율적인 운영자공동체 그리고 법인격을 가지고 있는 ‘스스로를 소유하는’ 토지를 창출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커먼즈‑공공부문 파트너십(실제적인 것이든 제안된 것이든)은 바로셀로나, 암스테르담, 볼로냐, 방콕, 서울 같은 도시들에서 그리고 공동도시들(Co-Cities) 운동[주석5]과 연관된 도시들에서 불쑥불쑥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지자체 공무원들과 커머너들 사이에 새로운 유형의 유연하고 비관료적인 협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노인 돌봄, 아이 돌봄, 근린지역 개선, 공공 장소와 공공 건물들, 디지털 정보 커먼즈, 그리고 오픈소스 테크놀로지가 이 파트너십에 포함된다. 오픈소스 참여가 공무원식 사고방식과 얼마나 성공적으로 잘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는 열린 문제로 남아있다.

바라건대 나의 발표가 분명히 하듯이 자유주의적 입헌주의의 세계에서 ‘공동선’에 대한 생각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정의되어야하고 이해되어야 하는지 전적으로 분명하지는 않다. 공동선을 발생시키기 위해 어떤 사회적 관계가 요구되는지, 공동선을 보호하기 위해 법을 포함해서 어떤 종류의 정치제도들과 절차들이 요구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국가권력이 다시 만들어질 필요가 있는지 전적으로 분명하지는 않은 것이다.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논점은 공동선에 대한 일정한 비전 뒤에 인간의 번성하는 영적 삶에 대한 무슨 암묵적인 비전이 자리 잡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당연하게도, 커먼즈와 커머닝을 지향하는 활동이 자본주의적인 근대성의 한계를 비판하고 조직화된 협력과 공유하기의 근대 이전 전통—그리고 전적으로 현대적인 전통—을 탐색함으로써 공동선 논의에 공헌할 여지가 많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또한 체제 변화에 복무하는 다양한 국제적인 사회운동들—탈성장, 협동조합 운동들, 피어 생산, 코즈모로컬 생산, 농업생태학, 슬로우푸드를 비롯한 농업 및 식량 운동들, 토착적이며 전통적인 공동체들, 탈식민과 인종 정의 운동들, 재지역화 기획들, 도넛 경제학[주석6], 페미니스트 경제학, 그리고 기타 많은 것들—에도 이 더 큰 프로젝트에 기여하는 그 나름의 중요하고 보완적인 관점들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재의 긴급한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연계된 집중적인 대응을 개시할 수 있는가? 이것은 아쉽게도 여전히 열린 문제로 남아있다. 

==== 주석

 [주석1] 토지 신탁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1574 참조.
[주석2] 메이커스페이스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1369 참조.
[주석3] 이 책과 관련해서 http://commonstrans.net/?p=2418http://commonstrans.net/?p=2095참조. 
[주석4] <삼림헌장>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974, http://commonstrans.net/?p=478 참조.
[주석5] 공동도시들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2560 참조.
[주석6] 도넛 경제학(Doughnut Economics)은 영국의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Kate Raworth)가 창안한 21세기 경제학 이론이다.

 

 




공동도시들–도시에서의 커머닝

 


  • 저자  : David Boiler
  • 원문 : Foster & Iaione Probe Commoning in the City
  • 분류 :  번역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 글은 데이빗 볼리어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2023년 3월 21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어떻게 커먼즈 패러다임이 한층 더 초점이 맞추어진 효과적인 방식으로 도시에 적용될 수 있을까? 몇 가지 답을 찾기 위해 최근에 나는 선도적 사상가이자 도시 커먼즈 옹호자인 두 사람, 셰일라 포스터(Sheila R. Foster)와 크리스천 이아이오네(Christian Iaione)를 <커머닝의 프런티어> 팟캐스트(에피소드 37)에서 인터뷰했다. 그들은 『공동‐도시들—공정하고 자립적인 공동체를 향하는 혁신적인 이행들』(Co-Cities: Innovative Transitions Toward Just and Self-Sustaining Communities)이라는 책을 막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들은 이 주제를 연구하면서 수년이 흘러 알게 된 많은 것을 분석한다.

포스터는 조지아타운 대학에 근무하는 도시법과 (도시)정책 교수로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복지, 기후정의 및 더 나은 거버넌스를 촉진하고 인종 불평등을 다루는 데 있어서 도시의 역할을 연구한다. 이아이오네는 로마 소재 루이스 귀도 깔리 대학교(Luiss Guido Carli University)에서 도시법과 도시정책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대학에서 그는 시 정부들이 도시 커머너들 및 다른 이해당사자들과 함께 일하기 위한 창조적인 방식들을 개척한다.

나는 10년 전에 처음 이아이오네를 만났는데 그때 그는 도시 커먼즈의 돌봄과 회생을 위한 볼로냐 조례—시민의 협력을 시정부와 연계시키기 위한 공식적인 법적 체계이자 행정적인 체계—를 개발하고 있었다. 그 조례는 수백 개의 ‘협력 협약들’을 낳았으며 자율적으로 조직된 시민 단체들에게는 이것을 통해 버려진 건물들을 재건하고 유치원과 노인요양소를 관리하며 도시 녹지공간과 다른 많은 것들을 돌볼 수 있는 권한 및 시의 지원이 주어졌다.

시민의 에너지를 최대로 이용하고 정부, 기업, 시민 참가자들 그리고 지식 기관들의 지식 및 자원과 그것을 어우러지게 하는 이 영향력 있는 아이디어가 이탈리아의 다수의 다른 도시들과 전 세계로 퍼졌다.

포스터와 이아이오네가 작업을 하기 위한 주요 수단은 <랩겁>(LaGov)커먼즈로서 도시 거버넌스를 위한 실험실—이라 불리는 학제간 실험실이다. <랩겁>은 많은 대학과 전세계 다른 지식 기관들과 함께 작업을 하면서 도시들에서 공동제작 프로젝트의 새로운 유형들을 개발한다.

포스터와 이아이오네가 훌륭한 커먼즈 학자인 엘리너 오스트롬에 의해 확인된 설계원칙들로 시작할지라도 그들은 “그녀의 작업틀 및 도시환경에의 응용가능성의 한계”를 인정한다. 포스터와 이아이오네는 농지, 물 또는 어장이라는 전통적인 커먼즈—이곳에서는 그 자체의 관리규칙을 고안하는 많은 자유가 사용권에 있다—에 기반을 둔 “오스트롬의 작업틀은, 으레 붐비고 밀집하고 다양하고 경제적으로 복잡하며 심하게 규제받는 도시환경의 현실에 맞추어 변경될 필요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우리의 논의는 도시커먼즈가 매우 다양한 도시환경들, 대립하는 정치, 지역의 특성들, 그리고 더 넓은 개념적 접근법을 필요로 하는 역사들 안에서 구축되는 다양한 형태의 방식들에 중점을 두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업틀을 ‘공동‐도시 프로토콜’이라고 부르며 그것은 여섯 개의 뚜렷히 구분되는 단계들—알기, 맵핑하기, 실천하기, 원형만들기, 실험하기 그리고 모델화하기—에 의존한다. 이것은 보통 말하는 정확한 청사진이 아니라 특정한 도시의 독특한 환경에 적합한 템플릿에 더 가깝다.

<랩겁>은 루이지애나 주의 배턴루지에서 도시 재개발을 담당하는 기관으로부터 수십 년 동안 기반시설—예를 들어 노면 부족, 부족한 가로등, 충분치 않은 좋은 주택—이 방치되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역을 개선하도록 요청받았다. 포스터는 “우리는 사용되지 않는 땅을 지킬 수 있는 공동체 토지은행과 토지신탁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그곳을 예를 들어 생태공원, 푸드 인큐베이터 및 주택으로 재개발하기 위해 많은 다른 관련자들을 참여시켰다.”라고 설명한다.

공동‐도시 추진은 해법들을 찾아내기 위하여 전체 공동체의 많은 논의 및 심사숙고가 필요하며, 방치된 어려운 일과 솔직하게 맞서 싸우는 것이 필요하다. 이아이오네는 이런 노력을 하는 동안에 “실패는 항상 바로 가까이에” 있지만 이것이 그 과정을 비난하는 것으로서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시장과 정부는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종종 실패하는데 “왜 공동체가 실패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다른 인간현상처럼 커머닝도 실패에 이를 수 있다고 이아이오네는 언급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이탈리아와 유럽 어딘가 다른 곳에서 지역에 기반한 에너지 협동조합 같은 몇몇 매우 보람있는 결과에 도달한다. 이아이오네는 “우리는 7~8년전 이 작업의 선두에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수도 없이 실패했다. 이제 에너지를 지닌 공동체의 생산은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심지어 유럽연합의 규제틀과, 규제당국에 함입되어 있고 공공시설이 지역 공동체의 조건을 형성하기도 하는데, 공공시설이 지금은 에너지 생산과 분배에 있어서 중요한 지점인 지역 공동체의 조건을 형성하기도 한다.

포스터와 이아이오네와의 팟캐스트 대화는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커머닝을 통해 예술을 큐레이팅하기―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의 최빛나

 


  • 저자  : David Boiler
  • 원문 :  Binna Choi of the Casco Art Institute: Curating Art through Commoning
  • 분류 :  번역
  • 옮긴이 : 루케아
  • 설명 :  아래 글은 데이빗 볼리어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2023년 2월 1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여러 해 전에 나는 네덜란드에 있는 한 예술기관을 알게 되었는데, 이 기관은 “커먼즈를 지향하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해서 나로서는 매우 흥미로웠다. 위트레흐트 소재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Casco Art Institute)가 바로 이렇게 선언한 기관이다.  ‘커먼즈를 지향한다’는 그들의 슬로건은 예술과 커머닝이 정확히 어떻게 관련이 있는 것인지, 그리고 예술기관이 어떻게 커머닝의 세계에 진입할 것인지에 관한 물음들을 즉각 제기한다.

나는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의 디렉터인 최빛나씨를 팟캐스트 시리즈 <커머닝의 프런티어>(Frontiers of Commoning)의 35회 대담에 초대해서 좀 더 알아보기로 했다. 2008년부터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를 이끌어 온 한국인 최빛나는 비중 있는 전시회를 위해 예술작품을 큐레이팅하고 있으며 더치 아트 인스티튜트(Dutch Art Institute)의 교수를 역임했다. 그녀는 2022년 싱가포르 비엔날레, 2016년 광주 비엔날레의 큐레이터(예술감독)였으며 다가오는 2025년 하와이 트리엔날레의 예술감독으로 선정되었다.

최빛나는 예술창작과 작품 전시회에 커머닝의 윤리와 실천들을 도입했다. 그녀와 동료들은 커머닝을 다양한 예술가들로 구성된 팀이 예술을 함께 창작하고 함께 활동할 수 있도록 조직하는 원리로서 받아들였다.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측은 다음과 같이 자신들의 커먼즈 철학을 설명한다.

예술은 상상력에 기반을 둔 행동하기와 존재하기의 양태로서, 사람들을 이어주고 치유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사람들을 새로운 사회비전으로 이동시킨다. 커먼즈는 공동체 문화가 살아있도록 유지하는 공유된 자원들이기에 예술은 사실상 커먼즈에 내재해 있으며, 커먼즈는 예술을 존재하게 할 것이다. 예술과 커먼즈 때문에 우리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이분법 너머에 있는 세계관을 그릴 수 있으며 ‘우리가’ 욕망하는 대로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패러다임―탈식민적, 포스트자본주의적, 모권중심적, 혹은 연대 경제 등 뭐라 불리던―을 함께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가 거기에 이름을 부여한다.

실제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카스코 인스티튜트가 눈길을 끄는 전시회들과 마케팅을 통해서 그 평판을 높이는 데 열중하는 브랜드화된 기관이기보다는 예술가 중심의 기관임을 의미한다. 최빛나와 카스코 인스티튜트 소속 예술가들은 참여적이고 비위계적이며 평등주의적인 팀으로서 일한다. 모든 사람들이 작업실 공간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다음 프로젝트나 전시회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그리고 카스코 인스티튜트가 지역 공동체와 관계를 맺기 위하여 어떻게 그 예술적 상상력을 사용할지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러한 한 가지 프로젝트는 <잊혀진 기술을 간직한 농장 박물관 여행하기>(Traveling Farm Museum of Forgotten Skills)라는 전시회로 위트레흐트 근처 현대적인 교외지역 개발지에 둘러싸인 오래된 농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저지대 교외의 스프롤 현상이 이전에 그곳에 있었던 많은 농지를 잡아먹었고, 한 농부가 여전히 소유하고 있었지만 낡아빠지고 아무도 살지 않는, 허름한 농가만 남게 되었다.

최빛나와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예술가들은 공동체가 가령 다음과 같이 묻는 방식으로 그 공간의 역사를 탐색하게끔 하는 예술 프로젝트를 개발하기로 했다. 농장이 왜 비어있는가? 농장은 어디로 옮겨갔는가? 거의 모든 농업농장과 목축농장이 이 지역에서 사라진 상황에서 레이드슈 라인(Leidsche Rijn) 지역주민들의 식량은 실제로 어디서 오는가?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는 한때 그 지역을 위해 식량을 생산한 옛날 식 농사 관행을 소개하기 위한 전시회를 열기 위해 (위트레흐트 공무원들이 성가신 것으로 여기는) 그 농장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카스코 예술가들은 열 달 동안 농가에서 함께 살았고 경작하고 식량을 모으면서 그 역사와 현재 상황을 통해서 땅과 다시 관계를 맺었다. 이 프로젝트는 지역 주민들에게 농장의 잊혀진 과거를 숙고하고 앞으로 땅을 사용하는 것에 관하여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도록 했다.

안타깝게도 이 프로젝트는 소유주가 집과 땅을 팔기로 결정하면서 너무 일찍 폐기되었다. 현재 그 장소는 팬케익 식당과 쇼핑센터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래도 한동안은 전시회가 공동체에 중요한 주제들—공동체의 역사, 식량자원 및 땅의 미래—에 예술적인 자극을 주었다.

곧 시작될 1년에 걸친 프로그램 <배운 것을 버리기 센터>(Unlearning Center)는 사람들이 예술과 문화에 관한 낡은 전통적 관념을 버리고 다음과 같이 묻게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문화적 기관들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는가? 어떻게 예술과 문화는 우리가 커먼즈를 상상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가? 곧 열릴 또 하나의 전시회인 <커먼즈 예술>(Commons Art)은 커먼즈 문화에 기여하는 사회참여적인 예술 프로젝트들의 돌봄과 유지과정을 지원하는 디지털 플랫폼을 제공할 것이다.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프로젝트에 의해 생산된 예술을 종래의 예술기관들이 나타내고 싶어하는 ‘고급예술’보다 다소 못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간혹 예술관과 예술계에 있는지를 최빛나에게 물었다. 여기서 ‘고급예술’이란 비평가들과 문화적 규범에 의해 알려진 회화와 조각이나 황량한 하얀 전시회장에서의 공식적인 전시들 혹은 예술과 일상을 분리하는 시나리오들 등을 의미한다.

최빛나는 주안점을 두는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의 구축이라고 대답했다.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우리와 예술가들의 관계는 가족관계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 관계의 망 안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초점을 맞추어야하는 것은 이 관계를 더 잘 돌보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좋은 생산물 만들기’보다는 관계의 실천을 토대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은 훨씬 더 나아질 것입니다.

대화를 통해 어떻게 커머닝이 다양한 형태의 예술제작, 예술작품 전시회들 및 기관의 파수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멋진 경험을 했다. 내가 최빛나와 나눈 이야기는 여기서 들을 수 있다.

* [옮긴이]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홈페이지의 설명에 따르면, ‘카스코’(casco)는 네덜란드어로 변화를 위한 기본 구조, 집단적 예술프로젝트 및 조직적 실험으로 공동으로 탐구하고 연구하기 위한 기본 구조가 존재하는 장소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