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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에서 커먼즈로

 



1990년대와 2000년대 초에 인터넷 문화에는 희망에 찬 실험과 정치적 해방의 꿈이 넘쳤다. 통찰력 있는 디지털 활동가인 존 페리 발로우(John Perry Barlow)가 다음과 같이 웅대한 문장을 특징으로 한 유명한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Declaration of Independence of Cyberspace)을 발표했다.

산업계의 정부들, 살과 강철의 지루한 거인들이여, 나는 정신의 새로운 집인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왔노라. 나는 미래를 대표해서 과거에 속한 당신들에게 우리를 내버려두라고 요구하노라. 당신들은 우리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우리가 모이는 곳에서는 당신들에게 주권이 없다.

인터넷에 접속한 새내기들—그 당시에 우리 대부분이 새내기였다—에게 이 문장들은 인터넷을 통한 해방을 감동적으로 일별하게 해주었다. 그 당시의 파열적인 사회-기술적 혁신의 아찔한 속도를 생각한다면 이 문장들은 꽤 신뢰할 만하다. 여러분이 30세 미만이라면 프리 소프트웨어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의 급증을 둘러싼 흥분, 특히 레니게이드 운영체제[주석1]로서 리눅스 그리고 블로고스피어(blogosphere)와 위키(들)의 등장을 어쩌면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비트토렌트(BitTorrent) 및 P2P 파일 공유의 가능성이 따분하고 착취적인 음악 산업을 뛰어넘어 도약하자 어디에서나 정치적 반란자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를 통한 저작권법의 재창조로 일반 사람들이 컨텐츠를 공유할 권한을 합법적으로 인가할 수 있었고 동시에 무수한 여타 기술 혁신들이 협력 및 공유의 새로운 형태들을 촉진했다.
[옮긴이 주석: ‘레니게이드 운영체제’(renegade operating system)는 기존의 규범 혹은 표준에서 벗어난 운영체제(OS)를 가리킨다. 영어 명사 ‘renegade’는 ‘배반자’ 혹은 ‘배교자’를 의미한다. 블로고스피어(Blogosphere)는 커뮤니티나 소셜 네트워크 역할을 하는 모든 블로그들의 집합이다.]

자본주의와 국민국가들이 인터넷을 상업적인 시장으로서 철저히 길들였고 식민화했으므로 발로우의 선언문은 끔찍할 정도로 순진한 것이 된다. (그의 동시대 동료들―크립토 세계―이 비슷한 비현실적인 유토피아주의를 내놓았을지라도 말이다.)

자본가/국가 동맹은 인터넷에서의 사용자 주권을 효율적으로 억제하고 길들였다는 사실을 직시하자. 우리의 온라인 삶의 지리적 위치 감시를, 온라인 피드 및 여론에 대한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듬 조작을, 대안우파•러시아 및 여타 불량 집단들이 행하는 허위정보 공작과 해킹하기라는 조직적 활동을, 그리고 한때 단일했던 웹을 소규모 웹으로 분할하고 있는 기업의 페이월 및 국가의 방화벽을 생각해보라.

따라서 미국 웨스트조지아 대학의 지리학 교수인 하네스 게르하르트(Hannes Gerhardt)의 신간인 『자본에서 커먼즈까지: 자본 너머의 세상에 대한 전망을 탐색하기』(From Capital to Commons: Exploring the Promise of a World Beyond Capitalism)를 접하는 것은 기분이 상쾌해지는 일이었다. 빅테크의 독점, 순응적인 입법부, 그리고 정보기관들이 인터넷과 해커문화에 널리 퍼진 증가 일로에 있는 아이디어들을 분쇄했을지라도 게르하르트는 커머닝과 테크놀로지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이행을 실제로 실현하는 길들이 있다고 용감하게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어젠다를 ‘동료주의’라고 부른다. 이 동료주의는 이데올로기도 전략적 구상도 아니며 오히려 탈자본주의적 가능성들을 현실화하기 위한, 커먼즈로부터 영감을 받은 전망이다. 그는 책 첫 줄에서 자신의 임무를 요약한다. “커먼즈 중심의 협력적 생산형식이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데는 무엇이 필요한가?”

나는 디지털 공간들에서 그리고 생물물리학계에서 커먼즈를 추진하려는 게르하르트의 전략에 관하여 더 많기 알기 위해 팟캐스트 <커머닝의 프론티어>(에피소드 47)에서 그와 인터뷰를 했다.

게르하르트는 지난 50년간 인터넷 문화에 관한 광범위한 문헌—비평들, 역사들, 기술적 논쟁들—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의 책을 인터넷에 관한 많은 다른 책들과 구별 짓는 것은 과제들의 가치를 평가하는 그의 정치적 날카로움이다. 그는 “전지구적으로 디자인하고 지역에서 제조하는” 생산을 지원하는 방법에 관한 장들, 그리고 배전망 및 인터넷 자체와 같은 “기반시설을 민주화하기”에 관한 장들을 제시한다. 많은 기술 전문가들과 다르게 게르하르트는 자연세계의 경계선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래서 그는 재생자원으로서의 지역적 특성, 도시 폐기물 그리고 농업에 공간을 할애한다.

게르하르트는 “화폐와 가치”에 관한 두 개의 장에서 국가가 화폐 창출을 독점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데 시간을 또한 할애한다. 근대적 화폐 창출이 대출을 통해 무(無)에서 돈을 창출하는 개인은행에 아웃소싱되었으므로, 게르하르트는 기본소득 요소를 좀 가지고 있는 탈중심화된 지역 크립토 통화(예를 들어 써클즈Circles, 매너베이스Mannabase, 및 스위프트디맨드SwiftDemand)에 주목하고 한편으로는 비트코인 같은 자본주의적인 모험적 투기를 피한다.
[옮긴이 주석: 써클즈(Circles)는 공동체가 기본소득을 제공할 수 있는 대안 통화이다. 써클즈와 화폐에 대해서 http://commonstrans.net/?p=2306 참조. 매너베이스(Mannabase)는 전 세계 최초 기본소득 암호화폐용 온라인 플랫폼이다. 스위프트디메드(SwiftDemand)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보편적인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데 집중하는 새로운 디지털 통화이다.]

디지털 삶을 ‘공통화’하기 위한 전략적 기회들은 게르하르트가 논의할 수 있던 것보다 더 많이 있다. 저작권과 특허권의 독점적인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것, 반트러스트적 개입을 확대하는 것—이 주제와 관련하여 레베카 기블린(Rebecca Giblin)과 코리 닥터로우(Cory Doctorow)의 『관문 자본주의』(Chokepoint Capitalism)를 참조하라—그리고 홀로체인 같은, 커먼즈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프로토콜과 플랫폼들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것이 이 기회들에 포함된다. 어떻든 디지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너머로 나아가고자 하는 진지한 전략적 기획들을 숙고하는 것은 활기를 북돋우는 일이다.

하네스 게르하르트와 함께 한 팟캐스트 인터뷰를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인터뷰의 녹취록은 여기서 PDF 형태로 다운받을 수 있다.




인류세라고? 아니다, 우리는 생태세에 들어서고 있다

 



우리 근대인들은 아주 오만해서 지질학적 시기를 심지어 우리 자신의 이름을 따서 ‘인류세’라고 명명했다. 확실히 인간 문명은 지구의 생태계를 크게 변형시켰고 불안정하게 했다. 그러나 ‘인류세’는 지구상에서 우리 인간이 추진력임을 의미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명칭이다.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가! 지구의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산불, 홍수, 가뭄 및 극심한 더위가 보여주듯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가이아(Gaia)이다. 가이아는 자신의 맹렬한, 협상 불가능한 요구를 우리에게 하고 있다. 가이아는 인간이 문명, 자본주의, 국가 그리고 문화를 형성하기 위해 오랫동안 사용해온 질서의 틀을 파열시키고 있다. 이것이 바로 루마니아 태생이며 벨기에에 기반을 둔 훌륭한 연구자인 미흐네아 타나세스쿠(Mihnea Tănăsescu)가 지구의 지질학적인 시대를 ‘생태세’(Ecocene)로 인식할 것을 우리에게 촉구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인간중심주의의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있어서 우리 인간이 자연과 분리되어 있지 않고 깊게 얽혀있으며 자연보다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인류는 살아남으려면 자연계와 문화적•경제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고 지구 체계와 인간 체계를 함께 꽃피우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그래서 2022년 출판된 타나세스쿠의 저서에 『생태세 정치』(Ecocene Politics)라는 제목이 붙은 것이다. 책에서 설명하듯이 “생태적 과정이 정치적 삶에 점점 더 빈번하게 개입하는 특징을 띄는 것”이 우리의 시대이다. 사람들이 이 현실을 인식할 수 있다면 우리의 정치•경제•문화가 새로운 탈근대적 방식의 존재하기와 행하기를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것과 적절하게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바로 이것이 앞으로의 과업이다. 붕괴하고 있는 근대 체계를 지탱하거나 복구하고자 하는 것은 헛수고이다.

타나세스쿠가 이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정확성과 열정에 감명을 받아서 나는 팟캐스트 커머닝의 프론티어(Frontiers of Commoning)(에피소드#43)에서 타나세스쿠와 그의 책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타나세스쿠는 벨기에 몽스(Mons) 대학교 과학연구기금 연구교수이다. 그곳에서 그는 인류학•사회학•정치학 및 법에 깊이 기반을 두면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관하여 왕성하게 글을 쓰고 있다.

타나세스쿠가 『생태세 정치』에서 씨름하는 중요한 과제는 자본주의적 근대의 덫―근대적으로 사고하고 근대적으로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들―을 어떻게 넘어서는가 하는 것이다. 그의 기본적인 대답은 “사회적 상호성, 책임감 및 취약성에 의거한 “상호주의의 회복윤리”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타나세스쿠가 말하는 ‘취약성’(vulnerability)이란 환경의 변화―이 변화는 기후위기가 진행중인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필연적이며 근본적으로 위협적이다―에 자신을 열어놓고, (해체가 아니라) 새로운 구성을 향해서 변화하는 힘을 가리킨다. 따라서 ‘취약성’이라고 옮기기는 했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상처를 견뎌낼 수 있음’이다.– 옮긴이]

프랑스 사회철학자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에게서 영감을 얻은 타나세스쿠는 관계성에 기초를 둔 정치를 주장한다. 이는 커머닝이 분명하게 진전시키는 테마이다. 그가 주장하는 핵심은 개인주의, 합리성, 자연에서의 분리, 자본축적이라는 근대적 관념들을 넘어서 상호주의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방향으로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가? 타나세스쿠는 “혁신하는 실천들”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것은 “근본적인 변화의 필요성과 어떤 이상화된 과거로의 회귀의 불가능성 둘 다를 표현하는” 용어이다. 인간이 만들어낼 필요가 있는 관점전환을 환기시키기 위해 그는 이탈리아 폴리아 지역에서 올리브 나무를 가지치기하는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한다.

올리브 나무의 성공적인 재배는 매우 특별한 장소에 있는 사람과 올리브 나무들 사이의 공동-창조와 사랑이 구현된 복잡한 행위이다. 인간의 문화가 살아있는 식물 자체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과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역의 “풍경들과 미기후(微氣候)들의” 더 큰 “모자이크”에의 집중을 필요로 한다. “어떤 작은 지역이든 그것을 생성적인 상호작용의 역사의 외부에서 그리고 그 장소와의 친밀감의 외부에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올리브 나무의 건강에 영양을 제공하는 대단히 복잡한 집합체가 있기 때문에 가지치기의 행위”(나무가지를 신중하게 선택적으로 잘라내는 것)는 “매우 의식(儀式)화되어 있다”고 타나세스쿠는 말한다. 그것은 가지치기를 신성한 예술형태로서 이해하는, 신임을 얻은 연장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어떤 것이다.

사람들은 올리브를 얻기 위해 가지를 치지만 또한 자식들을 위해서, 땅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흙의 건강함을 위해서, 겨울 동안의 난방을 위해서, 좋은 식품을 만들기 위해서, 나무의 수명과 아름다움을 위해서, 대대로 공동으로 사용해온 땅에 대한 의무감에서 가지를 친다. 인간과 올리브 나무의 관계에서 가지치기의 핵심적 역할을 고려해 볼 때 가지치기를 도구적인 합리성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지치기는 단순한 합리성에 저항하고 그 합리성을 벗어나고 넘쳐흐르며 가지치기를 중심으로 이어져 있을 수 있는 상호관계의 풍성한 태피스트리를 향하고 있다.

근대 시기의 우화? 올리브 나무 가지치기라는 전통 문화에서 타나세스쿠는 인간-자연 관계가 어떻게 근대 시기에 잘못되었는지를 보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전통적인 관습들을 통해 상호성과 삶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한 관계적 윤리가 어떻게 개인의 수준과 문화의 수준 둘 다에서 계발될 수 있는지를 보았다.

타나세스쿠에게 이 책은 개인적인 오디세이였다. 연구자로서 불안정하게 살고 있으면서 그는 자신이 하나의 직장과 미래의 불확실성 사이에서 실업급여로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결국 그를 창조적으로 자유롭게 했다. 그는 몰개성적인 학술적 글쓰기 방식을 버리고 자신의 개인적인 열망을 표현할 수 있었으며,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책은 단지 어떤 아이디어들의 제시만을 핵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관계성을 유지하는 것의 어려움과 전력으로 씨름하는 것을 핵심으로 합니다. 독자는 항상 기존의 사고방식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타나세스쿠에게 ‘생태세 정치’는 끔찍한 생태적 현실 특히 기후변화 앞에서 인간의 실존, 경제, 문화 그리고 정치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려는 대담한 시도를 나타낸다.

상호주의에 관한 마지막 장에서 그는 커머너들을 위한 몇몇 실천적이고 유용한 조언과 많은 풍부한 통찰과 지혜들을 제시한다. 가려 뽑은 몇몇 구절들을 소개해본다.

“근대는… 상호성과 책임감의 유대로서 항상 존재했던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추방한다. 실천으로서의 상호관계는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고 사회 기반시설이 사라짐으로 인해서 급격히 주변으로 밀려났을 뿐이다.”

“생명이 근본적으로 협력적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은 자연과학을 통해 많은 다양한 형태로 확산되었다.”

“마굴리스(Margulis)와 세이건(Sagan)이 표현했듯이 ‘생명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으며 생명 자신의 진화에 뜻밖에 큰 역할을 했다.’ 이 상대적 자유가 협력적인 방식으로 종종 발현된다.”

“상호간의 베풂이 세상에서 조직화하는 역할을 한다…. 상호주의가 베풂을 받는 쪽의 완전한 목록을 미리 결정할 수 없는 정치윤리에 붙일 이름일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보존은 환경을 모조리 화폐화하는 것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 화폐화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관계들을 창출해내야 한다.”

“우리는 상호성을 위한 기반 시설을 살아있는 세계에 헌신하는 정치과정을 통해 구축할 필요가 있다”

타나세스쿠와 함께 한 전체 인터뷰를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생태세 정치』는 Open Book Publishers로부터 무상의 오픈액세스 버전으로 구할 수도 있고 인쇄본을 구입할 수도 있다.




평행폴리스로서의 커먼즈버스

 



[볼리어의 설명]

아래의 글은 내가 2023년 5월 31일 베를린에서 열린 워크숍 「자유주의를 넘어: 커먼즈, 입헌정치 그리고 공동선」에서 발표한 것을 약간 손본 것이다. 이 워크숍은 <막스 플랑크 비교 공법 및 국제법 인스티튜트>, 뷔르츠부르크 대학 법학과 그리고 <뉴 인스티튜트>(독일, 함부르크)가 주관했다.

발표 비디오는 여기서 불 수 있다. 내 발표는 타임코드 5:32에 시작한다.

 

평행폴리스로서의 커먼즈버스: 기회와 도전

이 워크숍에 의해 촉발된 대화는 시기적절하고 필수적이다. 이는 정치경제 및 문화와 관련하여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그 많은 것들이 우리 눈앞에서 서서히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그토록 많은 거대 서사들—시민권•자유•재산권•경제성장•가치이론—이 요즈음에 문제시되었다고 말해야 온당할 것이다. 기존 사회제도와 사고 범주들이 그다지 잘 작동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한편으로 구조변화 및 필요한 대안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이는 그런 이야기가 괴물들과 카오스가 든 판도라의 상자를 열까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기후변화, 권위주의적 민족주의, 야만스런 불안정성 및 불평등 그리고 사회제도 붕괴라는 위험지대들로 더 깊이 들어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선택할 것이 거의 없다. 우리는 몇몇 고착된 습관들을 버릴 필요가 있다. 우리는 새로운 북극성과 한층 안정적이고 유익한 질서를 필사적으로 찾을 필요가 있다.

오늘 나는 커먼즈라는 생각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아주 많은 것들—자본주의적 정치경제, 국가권력, 사회적 관계 및 위계들, 지구와의 관계, 우리의 내적인 삶들—을 다시 상상할 엄청난 가능성이 이 생각에 담겨있다는 제안을 하고 싶다. 확실히 이것은 당찬 제안이고 장기적인 기획이다. 문제가 있는 시스템에 고착되어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기존의 것과는 매우 다른 사회적 논리들 및 제도적 형태들을 개발해야 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식민주의, 그리고 우리가 내면화했거나 억제한 규범들을 가진 중앙집권화된 국가권력이라는 해결되지 않은 트라우마들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발표문에서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커먼즈와 커머닝이 우리에게 공동선의 비전을 재발명할 발판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비전은 우리가 세포 수준에서 한층 인간적인 사회관습들과 윤리적 행동들을 발전시키는 것을 촉진할 수 있으며, 이 관습들과 행동들이 확장하면서 우리는 자본축적, 소비주의, 성장을 통한 진보의 세계 너머로 이동할 수 있게 된다.

확실히 오늘날 대다수의 커먼즈는 중요한 의미를 갖기에는 너무 소규모이고, 지역적이며, 캐시푸어(cash‐poor)인 것으로 일축된다. 주류에게 커먼즈는 군내나는 괴짜다. 주류들의 ‘점잖은’ 의견에 따르면 “일을 해내기” 위한 본격적인 체제로 시장과 국가가 유일한 것으로 가정된다. 사적부문과 공적부문이 있고 그 밖에 것은 실제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허울만 좋은 주장이거나 적어도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매우 편협한 프레임을 씌운 것이다. 시장과 국가는 둘 다 경제성장을 찬양하고, (서로 다른 역할을 가지고 있더라도) 자유주의적인 정치적•경제적 질서를 촉진하는 데 있어서 긴밀하게 동맹한다. 국가는 속박되지 않은 시장들이 성장, 세수(稅收), 시민들의 사회적 이동성을 발생시키기를 원한다. 반면에 기업들과 투자자들은 국가가 안정된 통치, 법적 특권들과 기업활동을 위한 보조금을 제공해주고, 금융위기, 생태적 재난, 시장 악용 및 기타 ‘시장 외부효과들’ 이후 상황정리를 해주기를 원한다. 국가와 시장은 우선사항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공생한다. 시장국가 체제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말이 될 만큼 충분히 말이다.

커먼즈는 국가와 시장이라는 바로 이 체제에 대안이 되는 비전이다. 정치가들과 경제 전문가들은 커먼즈를 손짓으로 간단하게 묵살할 수 있지만 커머너들은 더 심오한 진실을 즉 자본주의적 근대성의 전제들이 비록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더라도 뿌리 깊숙이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2008년 금융 위기는 전 세계 금융세력과 자본주의의 오만한 힘을, 그리고 그 힘의 남용을 영속시키는 일에 자유주의 국가가 공모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브렉시트의 도래,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COVID, 긴축재정 정치, 도널드 트럼프, 보수적 민족주의 그리고 인종적•민족적 타자화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강화할 뿐이었다.

나는 경제성장이 유토피아적 환상임을 폭로하고 있는 기후변화의 잔혹한 현실—홍수, 가뭄, 산불/들불, 기상이변—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경제성장을 위한 자원 추출 및 탄소 에너지 자원에의 의존은 지속될 수 없다. 전 세계 비(非)백인들—식민주의와 강제적인 자본주의적 개발의 희생자들—이 배상금, 생태복원 및 기후정의를 요구하므로 자본주의적 개발을 이 세계에 강요하려는 충동은 지속될 수 없다.

새로운 정치가들, 정책들 또는 법들이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그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구조적인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자전거가 우리를 달로 데려갈 수 없듯이 시장‑국가 체제는 그 문제들을 극복할 어포던스(affordance, 행동가능성)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정치공백기에 빠졌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오래된 질서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며 새로운 질서는 아직 태어날 준비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나는 체코 극작자인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에게서 영감을 얻고 그를 길잡이 삼는다. 1970년대에 그를 비롯한 문화계의 반정부 인사들이 전체주의적인 억압 시스템—그의 경우에 체코 정부—에 직면했을 때 하벨의 전략적 반응은 그가 평행폴리스(parallel polis)라 부른 것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평행폴리스는 공동체가 만든 안전 공간으로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로 지원하고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직접 생산하며 일종의 그림자 사회(shadow society)를 구축한다.

평행폴리스라는 발상은 여러 목적에 복무한다. 사람들은 공식적인 선전의 허위를 폭로하고 가능한 것에 관한 자신들의 상상력을 확장할 공간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은 예시(豫示)적인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면서 수평적이고 공락(共樂)적인 상호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그들은 진실을 말할 수 있고 건전한 가치들을 표현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엄성, 사회적 유대 및 희망을 다시 주장할 수 있다.

나는 커먼즈버스(Commonsverse)를 일종의 평행폴리스로 본다. 커먼즈버스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시스템 변화를 가져오는 방법으로서의 커머닝에 복무하는 무수한 기획들, 조직들, 사회운동들이다. 나는 이미 존재하는 엄청나게 다양한 커먼즈들을 소개하기 위해 『커머너의 변화만들기 목록』(The Commoner’s Catalog for Changemaking)을 2년 전에 출간했다. 여러분이 몇몇 참조점을 확인할 수 있도록 간략한 개요를 제시할까 한다.

커먼즈로서의 토지. 토지를 탈상품화하는 것은 토지를 지역의 농사용, 주택용 및 보존용으로 접근가능하고 제공가능도록 만드는 중요한 하나의 방법이다. 이 점에 있어서 한 가지 중요한 수단은 시장에서 토지를 빼내어 그것을 영구히 커먼즈로 만드는 공동체 토지 신탁(community land trusts)이다.[주석1] 토지 신탁은 풍경을 보존하고 부의 불평등을 줄이며 영양이 풍부한 식량을 지역별로 키우는 것을 더 적합하게 만드는 일을 촉진한다. 공동주택, 주택 협동조합 또는 독일 신디케이트(Mietshäuser Syndikat) 같은 연합체의 ‘피어(동료) 주도 프로젝트들’(Peer-directed projects)은 국가나 지역 공동체에 의한 기획들과 나란히 사회적 주택을 제공할 수 있다.

서양에서의 지역 식량 주권. 유럽과 북미에는 지역농업과 식량 공급망을 재발명하는 운동들이 많다. 유기농 지역경작이 50년 전에 처음 이 운동을 시작했고 이는 지금은 퍼머컬처, 농업생태학, 슬로우푸드 운동 및 심지어 슬로우피쉬 운동에서 나타난다. 푸드 협동조합들은 농부들과 소비자들을 한데 모아 상호적으로 부양하는 관계를 맺도록 하기 위한 — 가격을 낮추고 한층 안정적인 지역 식량 공급을 보장하며 친환경 농경을 보증하는 것을 돕는 — 긴 시간에 걸쳐 입증된 모형이다.

커먼즈로서의 도시. 바로셀로나, 암스테르담, 서울, 볼로냐, 그리고 수십 개의 주요 도시 및 소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협력적인 거버넌스의 새로운 형태들을 실험하고 있다. 이와 같은 커먼즈-공공부문 파트너십은 메이커스페이스(makerspace)[주석2], 도시농업 시스템, 시민 정보 커먼즈 그리고 근린지역 개선 및 서비스를 창출하고 있다. 이 파트너십은 시민들에게 권한을 주고 사회 기본구조를 다시 짜며 부유한 개발자들과 투자자들로부터 도시에 대한 시민대중의 통제권을 되찾는 길이다. 또한 도시에는 많은 독립적인 커먼즈 기획들, 예를 들어 공동체 텃밭(community garden), 에너지 생산 커먼즈, (카탈로니아의 Guifi.net 같은) 지역 와이파이 시스템 등이 있다.

전통적이고 토착적인 커먼즈. 어림잡아 전 세계 20억 명의 사람들이 어장농지목초지야생 사냥감의 파수를 통해 일상 생계를 커먼즈에 의존하고 있다. 전통적인 공동체와 토착민들에 의해 수행되는 커머닝은 그것이 산업형 농업에 대한, 지역에 기초를 두는 친환경적인 대안임을 입증하고 있다. 전 세계 생물 다양성의 대략 70%가 토착민들이 운영하는 땅에 존재한다.

대안적인 지역 통화. 전 세계 많은 공동체들이 그들 고유의 지역 통화를 만들었다. 그 목적은 금융가치가 주요 금융기관들로 빨려 들어가도록 두지 않고 그 가치를 지역에 잡아두는 것이며 그래서 지역 시장, 일자리 창출, 그리고 문화적 정체성을 활성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내가 태어난 서부 메사추세츠에서 버크셰어즈(BerkShares) 통화는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대안 통화가 되었다. 타임뱅킹(Timebanking)은 또 하나의 가치 있는 통화혁신—많은 돈 없이 나이 든 사람들과 일반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하는 서비스‑교환 시스템—이다.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와 피어 생산. 프리 소프트웨어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의 지난 25년간의 폭발적 증가는 커머닝의 강력한 상징이다. 프리 소프트웨어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는 코드를 탈상품화하고 스스로 조직된 개방적인 공동체의 창조성을 고양시킴으로써 리눅스, 인터넷을 위한 필수적인 하부구조, 위키피디아 그리고 (그룹 심의, 그룹 예산안 작성 및 클라우드에의 파일저장을 위한) 많은 세계 규모의 소프트웨어 시스템들을 구축했다.

코즈모로컬 생산. 한 가지 강력한 오픈소스 파생물은 코즈모로컬 생산 즉 전지구적으로는 디자인과 지식의 공유를, 지역적으로는 사물들의 물질적 생산을 관장하는 시스템이다. 이 과정은 자동차•가구•주택•전자기기•농장시설에 이미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는, 상업적인 의료용 제품보다 더 싸고 더 정교한 자동인슐린주입 장치를 생산한, 당뇨병환자로 이루어진 전지구적인 공동체도 있다. 농업기계의 코즈모로컬 생산은 <팜핵>(Farm Hack)과 <오픈소스 에콜로지>(Open Source Ecology)에서 볼 수 있듯이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세계 일류 디자인을 갖춘 저가의 농장 장비를 생산하는 것을 돕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와 공유 가능한 콘텐츠. 20년 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의 발명은 돈을 지불하거나 허가없이 글쓰기, 음악, 이미지 및 기타 창조적인 장르들을 법적으로 공유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자유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자율적인 공공 라이선스는 이제 전 세계 170개가 넘는 법시행 관할구역에서 인정을 받고 있으며 다른 상황에서라면 저작권법 하에서 ‘저작권 침해’로 여겨질 방식으로 엄청난 양의 콘텐츠가 공유될 수 있다.

* * *

이 커먼즈들 각각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것들이 항상 그 맥락의 특이성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나는 비상업적인 극장에, 오픈소스 테크놀로지로 구축되는 최고 품질의 과학 현미경에, 인도주의적인 구조를 돕는 온라인 지도에, 그리고 난민들과 이주자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일에 주력하는 커먼즈를 발견해서 깜짝 놀랐었다. 각각의 경우에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독특한 재능, 지리, 역사, 전통, 자급활동, 가치 그리고 상호주체성을 통해 자본주의적인 시장이나 국가의 통제 없이 욕구를 만족시키고자 한다.

‘내부에서 볼 때’ 각 커먼즈는 독특할 뿐 아니라 ‘세상 만들기’를 위한 학습이기도 하다. 그것은 상호주체적인 일련의 감정들•경험들•가치들•전망들이다. 우리가 겪는 상호주체적 경험들의 생생한 실재는 우리에게 세계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고착된 단일문화로서가 아니라 탄탄한 ‘다원적’ 세계로서 더 잘 이해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러나··· 각 커먼즈가 독특하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그 커먼즈에 관하여 일반화하기 시작하는가? 최소한도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기존 공동체가 일정 유형의 공유된 부를 집단적으로 운영할 때마다 공평한 접근법, 사용법, 장기간에 걸친 지속가능성이 강조되면서 하나의 커먼즈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다양한 맥락에 있는 매우 다양한 커먼즈들에 공통된 규칙성들을 실제로 설명하지 못한다.

작고한 나의 동료 질케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나는 이 문제가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현재 우세한 근대적 세계관은 커먼즈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그야말로 너무 환원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이다. 그것은 전체 시스템이 아니라 개인들에게 너무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우리의 근대적 세계관은 커머너들이 여전히 경제적 개인―합리적이고 자기주권적이며 자신의 물질적 이익을 최대화하는 데 전념하는 개인―이라고, 다만 시장을 통해서보다 그저 협동을 통해서 이 목표를 추구할 뿐인 그러한 경제적 개인이라고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커머닝을 그 나름의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조건에 기반해서, 그리고 진화사 및 생물학의 맥락에서 이해하고자 한다면 나는 우리가 커먼즈를 철저히 관계적이고 사회적인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전 세계 커먼즈에 대한 나의 아마추어적인 민족지학 연구로부터 증명할 수 있다. 커먼즈는 경제학자들이 보고자 하는 것처럼 단순히 자원들이 아니다. 커먼즈는 살아있는 사회 유기체들이다. 최근의 생물학 연구는 선구적인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가 보여준 것처럼, 어떻게 식물과 나무와 균류들 모두가 상호의존적이며 연결되어 있는지, 어떻게 세포 수준에서조차 생명이 심층적으로 공생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간 커머너들의 경우에도 그렇다. 우리는 서로와의 관계 속에서, 지구 그리고 지구에 존재하는 인간보다 큰 생명계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과거 및 미래 세대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커먼즈는 단지 사람들의 타산적인 합리성이 아니라 그들의 충만한 감정적, 윤리적 그리고 영적 힘에 의해 활기를 띤다. 질케와 나는 커머닝이 사실상 사회적이고 생태적인 관계맺음을 통해 창출되고 지속되는 역동적인 살아있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감수성은 문화 역사가 토마스 베리(Thomas Berry)의 다음 말에 의해 잘 표현된다. “우주는 객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주체들의 교감이다.” 나는 또한 생물학자이자 생태철학자인 안드레아스 베버(Andreas Weber)의 다음 문장을 좋아한다. “과학과 경제학은 창조적인 살아있음을 현실의 존재론적인 토대로서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질케와 나는 공동 출간한 책 『자유롭고 공정하며 살아있는』(Free, Fair and Alive)[주석3]에서 커먼즈 안에서 살아있음이 어떻게 실제로 작동하는지 설명해보려 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에 답하고 싶었다. 관계성이 핵심이라면 다양한 개성들과 선호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조율이 되어 일관성 있는 커먼즈가 되는가? 화폐교환 없이 어떻게 중요한 것들이 이루어지고 돌봄이 제공되는가? 어떻게 피어(동료)가 주도하는 협동 시스템들이 생성되고 스스로를 유지하는가?

운 좋게도 우리는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 교수의 앞선 성취들과 그녀가 선구적으로 포착한 성공적인 커먼즈의 ‘설계원칙들’을 기반으로 삼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오스트롬은 명확하게 명시한 경계들의 필요성과 자체적으로 만들어 낸 거버넌스 규칙들의 필요성을 확인했다. 그녀는 어떻게 커머너들이 규칙을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어야 하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규칙들이 시행되는 방식을 감시하는 데 참여해야 하는지를 알아냈다. 분쟁이 있다면 커먼즈는 그것을 저비용으로 신속하게 해결할 자체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커먼즈는 국가 당국으로부터 자립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커먼즈에 관한 이 전통적인 사고방식은 경제의 표준적인 틀과 그 방법론인 개인주의 내부에 대체로 머물러 있다. 그것은 커머너들의 내적인 삶 또는 정치경제[즉, 집단적 공동체의 경제]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커먼즈의 실제적 작동방식을 우리가 보다 명확하고 깊이 있게 보도록 돕는 ‘관계틀’을 개발했다. 우리는 ‘패턴언어’라는 아이디어를 개발한 급진적 도시계획자이자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의 작업에서 길잡이를 찾았다.

알렉산더는 빈발하는 문제들에 대한 특정의 해결책들이 긴 시간 동안의 역사와 문화를 가로질러서 소소하게 변동하면서 반복해서 나타난다는 것을 자신의 분야에서 관찰했다. 그는 이 해결책들을 ‘패턴’이라 불렀다. 패턴들은 사회적 관행에서 나타나는 디자인이고 행동이다. 패턴들의 유효성은 그 패턴들이 반복적으로 사용됨으로써 승인된다.

패턴언어 방법론을 활용하면서 질케와 나는 15년간 우리가 목격했던 많고 많은 수의 커먼즈 형태에서 관계를 나타내는 수십 개의 패턴들을 포착해냈다. 우리는 이 패턴들을 ‘사회적 삶’, ‘피어 거버넌스’ 그리고 ‘자급’이라는 세 영역—이는 각각 사회적, 제도적, 경제적 영역이라 할 수 있다—으로 나누었다. 이 세 영역들을 합치면 우리가 ‘커머닝의 3인조’라 부르는 바의 것이 구성된다. 이 3인조는 ‘어떤 사회적 실천들과 윤리적 행동들이 커머닝의 성공적인 관계들을 창출하고 유지하도록 돕는가?’라는 물음에 우리가 답할 수 있게 한다. 나는 우리가 찾은 25개 이상의 패턴들을 다 살펴볼 수는 없고 여러분에게 패턴에 대한 감각을 전하는 데 집중하고자 한다.

커먼즈의 ‘사회적 삶’에서 한 가지 중요한 패턴은 공유된 목적과 가치들을 계발하는 것이다. 이 실천이 없다면 커먼즈는 붕괴된다. 사람들이 긴밀히 연결된 활력 있는 집단으로 남아있으려면 그들은 경험을 공유할 필요가 있고 집단적으로 그들의 커머닝에 대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된 패턴은 함께함을 의례(儀禮)화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만나야 하고 서로 공유해야하며 하나의 집단으로서 그들의 성취와 친연성을 축하해야 한다. 함께 어울리는 것이 중요하며, 의식(儀式)들, 전통들, 축제행사들을 조직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커먼즈의 사회적 삶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기여하는 것—똑같은 가치를 직접적 혹은 즉시 되돌려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고 주는 것—을 필요로 한다. 커먼즈가 시간을 두고 실제 혜택을 내줄지라도 말이다.

커머닝 3인조 중 둘째인 피어 거버넌스의 핵심은 타자들을 동등한 존재로 보는 것이자 집단적인 의사결정의 권리와 의무를 공유하는 것이다. 커머너들은 피어 거버넌스로 위계와 중앙집권화된 권력시스템을 피하고자 한다. 그 시스템이 권력 남용과 책무성 문제를 낳을 배치일 수 있기 때문이다. 피어 거버넌스는 무엇보다도 ‘지식을 아낌없이 공유하기’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집단지성을 생성하는 결정적인 방식이다. 지식은 공유될 때 늘어나지만 이런 일은 정보가 자유롭게 유통되고 쉽게 접근 가능할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패턴은 ‘투명성을 신뢰의 영역에서 존중하기’이다. 투명성은 명령될 수 없다. 사람들이 어렵거나 난처한 정보를 공유할 만큼 충분히 서로 신뢰하지 않는다면, 투명성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커머닝의 세 번째 영역인 ‘자급’은 커머너들이 어떻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생산하는가가 그 핵심이다. 시장경제에서처럼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는 일은 없다. 기본 목표는 사람들의 경제적 욕구를 개인적인 삶의 여타의 부분들과 통합하는 것이다. 커머너들은 시장에서 팔 것을 생산하지 않는다. 사실 커머너들도 자신들의 커먼즈의 온전함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시장과의 상호작용이 조금이라도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그 상호작용의 방식을 구조화하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급의 한 가지 기본 패턴은 ‘함께 제작하고 함께 사용하라’이다. 참여하고 책임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함께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자신들의 능력•재능•욕구에 따라 기여한다. 함께 생산하기는 ‘함께 하라’(‘Do It Together,’ DIT)라고 불릴 수도 있는 것의 핵심과정이다. 커먼즈에서 일반적으로 자급이 확실하고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방식을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이 되는 많은 다른 패턴들이 있다.

일단 커머닝의 패턴들로 들어가기 시작하면—일단 관계성이 어떻게 지구에서 삶의 근본적인 현실인지를 보기 시작하면—근대적 세계관과는 다른 세계관, 즉 내가 존재론적 전환 또는 ‘OntoShift’(존재전환)이라 부르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지금 당장 철학적 차원을 논의할 필요는 없다. 다만 세계관을 전환하는 것은 우리의 내적 삶과 관점을 바꾸게 될 새로운 사회적 실천들과 커머닝의 경험들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한다라고만 말해두자. 우리는 시장문화의 핵심요소들인 이기적인 개인주의와 장사꾼 사고방식을 버리고 가기 시작하는 것이며 세상을 촘촘한 망으로 이루어진 공생 및 협력관계로 움직이는 통합된 전체로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커먼즈버스에서 ‘공동선’은 어떤 고정된 이상화나 눈에 잡히지 않는 목표점이 아니다. 이 공동선은 수평으로 그리고 아래에서부터 확장하고 출현하는 협동 윤리로서 발현되는 역동적인 살아있음이다. 이 공동선은 유기적 연결성과 온전성으로 발현되며 이는 사실 살아있는 유기체들의 생물학적 충동이다. 우리의 내적 삶에서 이 공동선은 배려하는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 안전하고 공정하다는 느낌, 그리고 소속감으로 발현된다. 이 공동선은 체계 차원의 다양성과 회복탄력성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것에서 나는 공동선에 대한 프란치스 교황의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Praise Be to You)의 비전이 생각나는데, 이 비전은 우리의 영적 삶, 인간보다 큰 세상, 그리고 우리의 (하나의 종으로서의) 공통의 부와 운명 사이의 상호연결에 관하여 많은 비슷한 점들을 강조한다.

* * *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문턱에 서있고 사태는 흥미로운 방식으로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커먼즈와 커머닝은 지난 10년간 급증하면서 국가권력, 자본주의 기업 및 신자유주의와 점점 더 충돌하게 되었다. 시장‑국가 체제는 그 나름의 우선사항들과 비전에 공격적으로 전념하는데 이 우선사항들과 비전은 커먼즈를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영국에서 벌어진 종획 운, 몇 백 년에 걸친 식민지 정복 그리고 인공적인 나노물질과 유전자에서부터 수학 알고리즘과 (금융증권으로 전환되는) 물의 흐름까지, 가치가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사유화하고 화폐화하고자 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발전’에서 나타나듯이, 역사는 성장경제가 일반적으로 공동자산을 전유하고 사유화하며 커머너들을 그 공동자산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시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커머너들에게 긴급한 실질적인 물음은 어떻게 그들이 공유된 부의 종획을 막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커머닝을 보호하기 위해 법을 사용할 수 있는가이다. 이것이 실제로 가능한가? 자유주의 헌법 질서가 긍정적으로 커머닝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비자본주의적인 사회 형태로서 커머닝의 온전함을 존중할 수 있는가? 그 질서가 커머닝을 보호하기를 원하는가? 커먼즈의 토착적인 법과 서구의 법을 미봉적인 긴장완화로서만이라도 영리하게 섞는 것이 가능한가? 또는 자유주의 철학은 너무 경직되고 공격적이며 정치적으로 고루해서 커먼즈와 커먼즈가 만들어 내는 살아있는 가치를 지지하지 못하는 것인가?

분명히 해두자. 커먼즈는 시장가격과는 매우 다른 가치 이론을 구현하는데, 우리 시대에 시장가격은 가치의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측정규준으로 간주된다. 이와 달리 커먼즈는 살아있는 시스템을 생성적인 것으로서, 즉 일반적으로 사유화되지도 않고 사유화될 수도 없으며, 화폐화되지도 않고 화폐화될 수도 없고, 상업적으로 거래되지도 않고 거래될 수도 없는 가치로서 인식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시장‑국가 체제는 재산법, 계약법 및 통상법의 매개를 통해 삶을 객관화한다. 국가권력으로서는 자본과의 동맹을 통해 그 힘을 공고히 할 기회를 환영한다. 일반적으로 국가권력은 사람, 자연, 여타 생명체들에 대한 행정적인 통제를 중앙집권화하고 규칙화하기를 원한다. 정치 과학자 제임스 스콧(James Scott)이 다음과 같이 분명히 했듯이 말이다.

근대국가는 … 감시하고 수를 세고 평가하고 관리하기에 가장 쉬울 바로 그러한 표준화된 특징을 지닌 지형과 인구를 창출하는 것을 시도하는데 성공의 정도는 경우에 따라 다르다. 근대국가의 허망하고 근시안적이며 끊임없이 좌절되는 목표는, 그 밑에 있는 무질서하고 혼란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현실을, 그 현실을 관찰하는 행정망을 더 많이 닮아있는 어떤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국가들이 디지털 감시 테크놀로지와 빅테크와의 연합으로 무장하고 있으므로 이 동향의 논리적인 종점은 권위주의적인 통제이다. 국가법과 자유주의가 얼마만큼 이 방향을 향할지 불분명하다.

결국 자유주의는 국가권력에 깊이 예속되어 있고 커머너들의 관습에 따른 관행의 역할이나 그들의 집단적인 정체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시장처럼 자유주의 국가는 개인주의, 재산권, 계약의 자유, 및 물질적 ‘진보’에 깊이 전념한다. 이것은 분리―인간이 서로 분리되고 지구로부터 분리되며 역사적 기억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의 사고방식을 조장한다.

세르게이 거트워스(Serge Gutwirth)가 설명했듯이, 자유주의 국가에는 법인격 없는 역동적인 공동체에 권리를 부여할 수단이 없다. 물론 경제성장—주주들의 집단적 의무—이 자유주의 국가에 크게 잘 들어맞기 때문에 기업들은 예외다. 대략 800년 전에 커머너들의 많은 특정한 권리들이 획기적인 <삼림헌장>[주석4]—마그나카르타와 연결되어 있는 법적 선언문—에서 존중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것은 대부분 잊혀졌다. 민족(국민)국가의 발생과 심지어 자유주의로 인해 커머닝에 대한—생존에 필수적인 것들에 접근할 사람들의 권리에 대한—법적인 인정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이것이 나에게 시사하는 바는 현재 실행되는 바의 자유주의는 철학적으로 커먼즈에 적대적이거나 최소한 커먼즈의 실제 가치와 역동성을 모른다는 것이다. 국가는 권력 행사의 합법성을 한시도 늦추지 않고 주장한다. 그것이 법과 국가 기관을 통해 공식적으로 수행되는 바대로 말이다. 그러나 국가는 커먼즈에 기반을 두는 체제에 의해 주장되는 사회적, 윤리적 정당성에는 일시적인 관심만을 보인다. 권력은 자신이 선택한 인식 체계를 떠받침으로써 스스로를 유지한다.

자유주의와 커머닝을 논할 때 우리는 합법성과 정당성 사이의 단절에 직면한다. 시장‑국가 체제는 그 행정질서의 합법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형식적 법체계와 관료조직에 의지한다. 그 체제는 커머너들—커머너들은 그들 고유의 인식론적 질서, 법과 정당성에 대한 그들 고유의 비전을 가지고 있다—의 역동적인 거버넌스와 일상적인 관행 및 경험에 별 관심이 없다.

나는 이것을 우리가 기획한 「자유주의를 넘어」라는 제목의 워크숍이 탐색해야 하는 영역으로 여긴다. 국가의 합법성과 커먼즈의 정당성 사이의 차이는 취약성, 위험성 및 가능성의 차이이다. 이 차이를 메우려고 했던 몇몇 인상적인 혁신들이 있고 현재로서 최선의 효과를 내는 혼합안을 개발하려고 했던 몇몇 흥미진진한 실험들이 있다. 그것들 중 세 가지만 간략하게 언급해보자.

1) 새로운 사회적 규범들 및 관행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법적 해킹 활용
2) 커머닝을 지원하는 새로운 조직형태들의 개발
3) 일반적으로 보통 지자체 수준에서 커머너들과 국가 공무원들을 협력에 이르게 하는 커먼즈‑공공부문 파트너십

법적 해킹은 국가법을 원래 입법자에 의해 상상되거나 의도되지 않은 방식으로 개편하는 것이다. 법적 해킹의 핵심은 현행법 내부에서부터 합법성의 새로운 구역을 개척하는 것이고 그런 다음 새로운 사회적 규범과 정치 활동으로 이 구역을 채우는 것이다. 핵심은 ‘새로운 합법성’을 수립하기 위해 민중에 기반을 둔 정당성과 공동체 실천을 향상시키는 것이다.

법적 해킹은 국가법 하에서 불법일 수 있는 커머닝(예를 들어 씨앗공유하기 및 인도적인 구조救助)을 탈범죄화하거나 커머닝이 번성할 보호받는 적법한 공간들을 만들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사례들로는 창조적인 작업을 합법적으로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듦으로써 저작권법을 해킹하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Creative Commons licenses)가 있다. 이와 유사하게 강•산•풍경을 보호하는 한 방식으로서 이것들에 공식적인 법인격을 부여하고자 하는 다양한 ‘자연권’ 법들도 법적 해킹이다.

기업들, 협동조합들, 비영리단체들에 권한을 부여하는 지배적인 법구조가 커머닝이 작동하는 방식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적어도 서구 나라들에서는 새로운 조직 형태들을 만드는 것이 종종 필요하다. <지속가능한 경제법 센터>(Sustainable Economies Law Center), <민주 및 환경 권리 센터> 같은 몇몇 법 옹호단체들은 풀뿌리에서부터 성장할 수 있는 탈중심화된 구조를 설계하기 위해서 혁신적인 정관(定款)과 금융구조를 개발하고 있다. 그들은 커먼즈로서 운영되는 자율적인 운영자공동체 그리고 법인격을 가지고 있는 ‘스스로를 소유하는’ 토지를 창출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커먼즈‑공공부문 파트너십(실제적인 것이든 제안된 것이든)은 바로셀로나, 암스테르담, 볼로냐, 방콕, 서울 같은 도시들에서 그리고 공동도시들(Co-Cities) 운동[주석5]과 연관된 도시들에서 불쑥불쑥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지자체 공무원들과 커머너들 사이에 새로운 유형의 유연하고 비관료적인 협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노인 돌봄, 아이 돌봄, 근린지역 개선, 공공 장소와 공공 건물들, 디지털 정보 커먼즈, 그리고 오픈소스 테크놀로지가 이 파트너십에 포함된다. 오픈소스 참여가 공무원식 사고방식과 얼마나 성공적으로 잘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는 열린 문제로 남아있다.

바라건대 나의 발표가 분명히 하듯이 자유주의적 입헌주의의 세계에서 ‘공동선’에 대한 생각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정의되어야하고 이해되어야 하는지 전적으로 분명하지는 않다. 공동선을 발생시키기 위해 어떤 사회적 관계가 요구되는지, 공동선을 보호하기 위해 법을 포함해서 어떤 종류의 정치제도들과 절차들이 요구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국가권력이 다시 만들어질 필요가 있는지 전적으로 분명하지는 않은 것이다.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논점은 공동선에 대한 일정한 비전 뒤에 인간의 번성하는 영적 삶에 대한 무슨 암묵적인 비전이 자리 잡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당연하게도, 커먼즈와 커머닝을 지향하는 활동이 자본주의적인 근대성의 한계를 비판하고 조직화된 협력과 공유하기의 근대 이전 전통—그리고 전적으로 현대적인 전통—을 탐색함으로써 공동선 논의에 공헌할 여지가 많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또한 체제 변화에 복무하는 다양한 국제적인 사회운동들—탈성장, 협동조합 운동들, 피어 생산, 코즈모로컬 생산, 농업생태학, 슬로우푸드를 비롯한 농업 및 식량 운동들, 토착적이며 전통적인 공동체들, 탈식민과 인종 정의 운동들, 재지역화 기획들, 도넛 경제학[주석6], 페미니스트 경제학, 그리고 기타 많은 것들—에도 이 더 큰 프로젝트에 기여하는 그 나름의 중요하고 보완적인 관점들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재의 긴급한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연계된 집중적인 대응을 개시할 수 있는가? 이것은 아쉽게도 여전히 열린 문제로 남아있다. 

==== 주석

 [주석1] 토지 신탁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1574 참조.
[주석2] 메이커스페이스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1369 참조.
[주석3] 이 책과 관련해서 http://commonstrans.net/?p=2418http://commonstrans.net/?p=2095참조. 
[주석4] <삼림헌장>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974, http://commonstrans.net/?p=478 참조.
[주석5] 공동도시들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2560 참조.
[주석6] 도넛 경제학(Doughnut Economics)은 영국의 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Kate Raworth)가 창안한 21세기 경제학 이론이다.

 

 




공동도시들–도시에서의 커머닝

 


  • 저자  : David Boiler
  • 원문 : Foster & Iaione Probe Commoning in the City
  • 분류 :  번역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 글은 데이빗 볼리어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2023년 3월 21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어떻게 커먼즈 패러다임이 한층 더 초점이 맞추어진 효과적인 방식으로 도시에 적용될 수 있을까? 몇 가지 답을 찾기 위해 최근에 나는 선도적 사상가이자 도시 커먼즈 옹호자인 두 사람, 셰일라 포스터(Sheila R. Foster)와 크리스천 이아이오네(Christian Iaione)를 <커머닝의 프런티어> 팟캐스트(에피소드 37)에서 인터뷰했다. 그들은 『공동‐도시들—공정하고 자립적인 공동체를 향하는 혁신적인 이행들』(Co-Cities: Innovative Transitions Toward Just and Self-Sustaining Communities)이라는 책을 막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들은 이 주제를 연구하면서 수년이 흘러 알게 된 많은 것을 분석한다.

포스터는 조지아타운 대학에 근무하는 도시법과 (도시)정책 교수로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복지, 기후정의 및 더 나은 거버넌스를 촉진하고 인종 불평등을 다루는 데 있어서 도시의 역할을 연구한다. 이아이오네는 로마 소재 루이스 귀도 깔리 대학교(Luiss Guido Carli University)에서 도시법과 도시정책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대학에서 그는 시 정부들이 도시 커머너들 및 다른 이해당사자들과 함께 일하기 위한 창조적인 방식들을 개척한다.

나는 10년 전에 처음 이아이오네를 만났는데 그때 그는 도시 커먼즈의 돌봄과 회생을 위한 볼로냐 조례—시민의 협력을 시정부와 연계시키기 위한 공식적인 법적 체계이자 행정적인 체계—를 개발하고 있었다. 그 조례는 수백 개의 ‘협력 협약들’을 낳았으며 자율적으로 조직된 시민 단체들에게는 이것을 통해 버려진 건물들을 재건하고 유치원과 노인요양소를 관리하며 도시 녹지공간과 다른 많은 것들을 돌볼 수 있는 권한 및 시의 지원이 주어졌다.

시민의 에너지를 최대로 이용하고 정부, 기업, 시민 참가자들 그리고 지식 기관들의 지식 및 자원과 그것을 어우러지게 하는 이 영향력 있는 아이디어가 이탈리아의 다수의 다른 도시들과 전 세계로 퍼졌다.

포스터와 이아이오네가 작업을 하기 위한 주요 수단은 <랩겁>(LaGov)커먼즈로서 도시 거버넌스를 위한 실험실—이라 불리는 학제간 실험실이다. <랩겁>은 많은 대학과 전세계 다른 지식 기관들과 함께 작업을 하면서 도시들에서 공동제작 프로젝트의 새로운 유형들을 개발한다.

포스터와 이아이오네가 훌륭한 커먼즈 학자인 엘리너 오스트롬에 의해 확인된 설계원칙들로 시작할지라도 그들은 “그녀의 작업틀 및 도시환경에의 응용가능성의 한계”를 인정한다. 포스터와 이아이오네는 농지, 물 또는 어장이라는 전통적인 커먼즈—이곳에서는 그 자체의 관리규칙을 고안하는 많은 자유가 사용권에 있다—에 기반을 둔 “오스트롬의 작업틀은, 으레 붐비고 밀집하고 다양하고 경제적으로 복잡하며 심하게 규제받는 도시환경의 현실에 맞추어 변경될 필요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우리의 논의는 도시커먼즈가 매우 다양한 도시환경들, 대립하는 정치, 지역의 특성들, 그리고 더 넓은 개념적 접근법을 필요로 하는 역사들 안에서 구축되는 다양한 형태의 방식들에 중점을 두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업틀을 ‘공동‐도시 프로토콜’이라고 부르며 그것은 여섯 개의 뚜렷히 구분되는 단계들—알기, 맵핑하기, 실천하기, 원형만들기, 실험하기 그리고 모델화하기—에 의존한다. 이것은 보통 말하는 정확한 청사진이 아니라 특정한 도시의 독특한 환경에 적합한 템플릿에 더 가깝다.

<랩겁>은 루이지애나 주의 배턴루지에서 도시 재개발을 담당하는 기관으로부터 수십 년 동안 기반시설—예를 들어 노면 부족, 부족한 가로등, 충분치 않은 좋은 주택—이 방치되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역을 개선하도록 요청받았다. 포스터는 “우리는 사용되지 않는 땅을 지킬 수 있는 공동체 토지은행과 토지신탁을 만들기 위해, 그리고 그곳을 예를 들어 생태공원, 푸드 인큐베이터 및 주택으로 재개발하기 위해 많은 다른 관련자들을 참여시켰다.”라고 설명한다.

공동‐도시 추진은 해법들을 찾아내기 위하여 전체 공동체의 많은 논의 및 심사숙고가 필요하며, 방치된 어려운 일과 솔직하게 맞서 싸우는 것이 필요하다. 이아이오네는 이런 노력을 하는 동안에 “실패는 항상 바로 가까이에” 있지만 이것이 그 과정을 비난하는 것으로서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시장과 정부는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종종 실패하는데 “왜 공동체가 실패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다른 인간현상처럼 커머닝도 실패에 이를 수 있다고 이아이오네는 언급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이탈리아와 유럽 어딘가 다른 곳에서 지역에 기반한 에너지 협동조합 같은 몇몇 매우 보람있는 결과에 도달한다. 이아이오네는 “우리는 7~8년전 이 작업의 선두에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수도 없이 실패했다. 이제 에너지를 지닌 공동체의 생산은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심지어 유럽연합의 규제틀과, 규제당국에 함입되어 있고 공공시설이 지역 공동체의 조건을 형성하기도 하는데, 공공시설이 지금은 에너지 생산과 분배에 있어서 중요한 지점인 지역 공동체의 조건을 형성하기도 한다.

포스터와 이아이오네와의 팟캐스트 대화는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커머닝을 통해 예술을 큐레이팅하기―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의 최빛나

 


  • 저자  : David Boiler
  • 원문 :  Binna Choi of the Casco Art Institute: Curating Art through Commoning
  • 분류 :  번역
  • 옮긴이 : 루케아
  • 설명 :  아래 글은 데이빗 볼리어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2023년 2월 1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여러 해 전에 나는 네덜란드에 있는 한 예술기관을 알게 되었는데, 이 기관은 “커먼즈를 지향하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해서 나로서는 매우 흥미로웠다. 위트레흐트 소재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Casco Art Institute)가 바로 이렇게 선언한 기관이다.  ‘커먼즈를 지향한다’는 그들의 슬로건은 예술과 커머닝이 정확히 어떻게 관련이 있는 것인지, 그리고 예술기관이 어떻게 커머닝의 세계에 진입할 것인지에 관한 물음들을 즉각 제기한다.

나는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의 디렉터인 최빛나씨를 팟캐스트 시리즈 <커머닝의 프런티어>(Frontiers of Commoning)의 35회 대담에 초대해서 좀 더 알아보기로 했다. 2008년부터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를 이끌어 온 한국인 최빛나는 비중 있는 전시회를 위해 예술작품을 큐레이팅하고 있으며 더치 아트 인스티튜트(Dutch Art Institute)의 교수를 역임했다. 그녀는 2022년 싱가포르 비엔날레, 2016년 광주 비엔날레의 큐레이터(예술감독)였으며 다가오는 2025년 하와이 트리엔날레의 예술감독으로 선정되었다.

최빛나는 예술창작과 작품 전시회에 커머닝의 윤리와 실천들을 도입했다. 그녀와 동료들은 커머닝을 다양한 예술가들로 구성된 팀이 예술을 함께 창작하고 함께 활동할 수 있도록 조직하는 원리로서 받아들였다.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측은 다음과 같이 자신들의 커먼즈 철학을 설명한다.

예술은 상상력에 기반을 둔 행동하기와 존재하기의 양태로서, 사람들을 이어주고 치유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사람들을 새로운 사회비전으로 이동시킨다. 커먼즈는 공동체 문화가 살아있도록 유지하는 공유된 자원들이기에 예술은 사실상 커먼즈에 내재해 있으며, 커먼즈는 예술을 존재하게 할 것이다. 예술과 커먼즈 때문에 우리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이분법 너머에 있는 세계관을 그릴 수 있으며 ‘우리가’ 욕망하는 대로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패러다임―탈식민적, 포스트자본주의적, 모권중심적, 혹은 연대 경제 등 뭐라 불리던―을 함께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가 거기에 이름을 부여한다.

실제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카스코 인스티튜트가 눈길을 끄는 전시회들과 마케팅을 통해서 그 평판을 높이는 데 열중하는 브랜드화된 기관이기보다는 예술가 중심의 기관임을 의미한다. 최빛나와 카스코 인스티튜트 소속 예술가들은 참여적이고 비위계적이며 평등주의적인 팀으로서 일한다. 모든 사람들이 작업실 공간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다음 프로젝트나 전시회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그리고 카스코 인스티튜트가 지역 공동체와 관계를 맺기 위하여 어떻게 그 예술적 상상력을 사용할지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러한 한 가지 프로젝트는 <잊혀진 기술을 간직한 농장 박물관 여행하기>(Traveling Farm Museum of Forgotten Skills)라는 전시회로 위트레흐트 근처 현대적인 교외지역 개발지에 둘러싸인 오래된 농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저지대 교외의 스프롤 현상이 이전에 그곳에 있었던 많은 농지를 잡아먹었고, 한 농부가 여전히 소유하고 있었지만 낡아빠지고 아무도 살지 않는, 허름한 농가만 남게 되었다.

최빛나와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예술가들은 공동체가 가령 다음과 같이 묻는 방식으로 그 공간의 역사를 탐색하게끔 하는 예술 프로젝트를 개발하기로 했다. 농장이 왜 비어있는가? 농장은 어디로 옮겨갔는가? 거의 모든 농업농장과 목축농장이 이 지역에서 사라진 상황에서 레이드슈 라인(Leidsche Rijn) 지역주민들의 식량은 실제로 어디서 오는가?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는 한때 그 지역을 위해 식량을 생산한 옛날 식 농사 관행을 소개하기 위한 전시회를 열기 위해 (위트레흐트 공무원들이 성가신 것으로 여기는) 그 농장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카스코 예술가들은 열 달 동안 농가에서 함께 살았고 경작하고 식량을 모으면서 그 역사와 현재 상황을 통해서 땅과 다시 관계를 맺었다. 이 프로젝트는 지역 주민들에게 농장의 잊혀진 과거를 숙고하고 앞으로 땅을 사용하는 것에 관하여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도록 했다.

안타깝게도 이 프로젝트는 소유주가 집과 땅을 팔기로 결정하면서 너무 일찍 폐기되었다. 현재 그 장소는 팬케익 식당과 쇼핑센터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래도 한동안은 전시회가 공동체에 중요한 주제들—공동체의 역사, 식량자원 및 땅의 미래—에 예술적인 자극을 주었다.

곧 시작될 1년에 걸친 프로그램 <배운 것을 버리기 센터>(Unlearning Center)는 사람들이 예술과 문화에 관한 낡은 전통적 관념을 버리고 다음과 같이 묻게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문화적 기관들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는가? 어떻게 예술과 문화는 우리가 커먼즈를 상상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가? 곧 열릴 또 하나의 전시회인 <커먼즈 예술>(Commons Art)은 커먼즈 문화에 기여하는 사회참여적인 예술 프로젝트들의 돌봄과 유지과정을 지원하는 디지털 플랫폼을 제공할 것이다.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프로젝트에 의해 생산된 예술을 종래의 예술기관들이 나타내고 싶어하는 ‘고급예술’보다 다소 못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간혹 예술관과 예술계에 있는지를 최빛나에게 물었다. 여기서 ‘고급예술’이란 비평가들과 문화적 규범에 의해 알려진 회화와 조각이나 황량한 하얀 전시회장에서의 공식적인 전시들 혹은 예술과 일상을 분리하는 시나리오들 등을 의미한다.

최빛나는 주안점을 두는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의 구축이라고 대답했다.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우리와 예술가들의 관계는 가족관계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 관계의 망 안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초점을 맞추어야하는 것은 이 관계를 더 잘 돌보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좋은 생산물 만들기’보다는 관계의 실천을 토대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은 훨씬 더 나아질 것입니다.

대화를 통해 어떻게 커머닝이 다양한 형태의 예술제작, 예술작품 전시회들 및 기관의 파수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멋진 경험을 했다. 내가 최빛나와 나눈 이야기는 여기서 들을 수 있다.

* [옮긴이]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홈페이지의 설명에 따르면, ‘카스코’(casco)는 네덜란드어로 변화를 위한 기본 구조, 집단적 예술프로젝트 및 조직적 실험으로 공동으로 탐구하고 연구하기 위한 기본 구조가 존재하는 장소를 의미한다.




커먼즈를 위한 건축–2008년 이후 건축의 과제

 


  • 저자  : Jose Sanchez
  • 원문 :  “Introduction : A Call for a Post-2008 Architectur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호세 산체스의 Architecture for the Commons : Participatory Systems in the Age of Platforms(Routledge, 2021)의 “Introduction”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저자 호세 산체스는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활동하는 건축가이자 게임디자이너이며 이론가이다. 그는 건축디자인 지식의 증식을 추구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Plethora Project(www.plethora-project.com)를 이끌고 있다. 그는 동네를 만드는 시뮬레이션 비디오 게임 Block’hood의 제작자이며 공동체를 건설하고 경제를 관리하는 비디오게임 Common’hood의 제작자이고, 대중들이 참가하여 동일한 유닛들로 설치물을 짓는 Bloom의 공동제작자이다. 글의 뒤에 필요할 듯 해서 보충설명을 달았다. 

 

우리의 건축은 항상 패러메트릭 건축이었다

20세기 말 건축분야에서는 우리가 건물들을 이해하고 짓는 방식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전환을 제안하는 혁신들이 일었다. 소프트웨어, 재료과학(material science), 디지털 패브리케이션(digital fabrication)(([정리자] 디지털 패브리케이션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제품을 제작하는 기술뿐만 아니라 형태를 만들고 재료 가공 및 시공까지 모든 과정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총칭하는 말이다. 일례로 3D 프린팅 기술이 여기에 속한다.)) 및 자동화 영역에서 일어난 기술혁신은 무한한 가변성과 주문제작이라는 비전을 제공했다. 인간의 인식과 맞물려있는 이 비전은 몰입환경으로서 주문제작되는 정동적 건축(affective architecture)을 나타낸다.(([정리자] ‘affective architecture’에 대해서는 가령 https://aalab.org/ 같은 사이트를 참조해보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 ‘새로운’ 건축—모든 디자인이 일회적인 건축—은 젊은 세대의 건축가들이 오늘날 실행하고 있는 방식의 핵심적인 부분이 되었다. 테크놀로지를 중심으로 하는 서사들이 이것을 입증했다. CNC(computer numerical control, 컴퓨터 수치제어장치) 테크놀로지에 의해 작동하는 디지털 패브리케이션이 대량생산 제품을 생산하는 동일한 비용으로 맞춤제작 형태들을 만들 수 있다는 전망은 젊은 세대의 건축가들이 이 새로운 건축을 채택하는 것을 완벽하게 찬성할 논리를 제공했다. CNC 테크놀로지는 대량 생산이 여러 해 동안 여타 산업들을 규정해온 상황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줄 한 가지 대안을, 다시 말해 의뢰인들이 항상 색다른 새로운 디자인을 찾을 것이기에 수요가 계속될 것이고 그럼으로써 디자인이 번성하게 될 그러한 대안을 약속하고 있었다.

‘일회적인’ 건축이라는 패러다임—건물을 지을 때마다 스스로를 재창조해야 하는 패러다임—에는 지어지는 환경의 구조적 구성에서부터 사업모델과 관례상의 수수료 배분에까지 세분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지속적으로 지원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 패러다임은 무상으로 일하거나 또는 충분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착취적인 업무에 고용되는 것이 일상인 경쟁적인 시장에 학생들이 참여하도록 준비시킴으로써 건축분야의 교육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것이 의뢰인들의 투기적인 산업관행으로, 또는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거나 전무한 건축공모 참가로 낭비되는 큰 규모의 디자인 노동의 결과이다.

이 맥락에서 패러매트릭 패러다임의 등장은 건축분야에서의 핵심적인 비능률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될 수 있다. 어떤 제안이 개발될 경우 그 과정 내내 디자인 베리에이션(([정리자] 베리에이션(variation)은 하나의 기본적인 형태를 변화시키는 작업이나 그 변화된 상태를 지칭한다.))을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에 패러메트릭 패러다임은 한 건축가가 건물 하나를 디자인 하는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데이터로 통제되는 다수의 가상의 건물들을 디자인하는 기술적인 작업흐름을 건축가에게 제공했다. 패러메트릭 소프트웨어는 건물을 물체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비율을 가지고 공존하면서 전반적인 일관성을 유지하는 요소들의 네크워크로 정의하며, 건축가들은 이것을 기반으로 예산이나 규정의 변화 및 의뢰인의 심경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고 수백 개의 가능한 디자인들을 설계할 수 있다.

패러메트릭 방법론으로 가능해진 다수의 가상 건물들은 자본주의의 생산성의 승리로 보일 수 있으며, 이 경우 디자이너 한 명의 노동이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어, 건물 하나하나가 유일할 수 있는 도시 전체를 설계할 수 있게 된다. 이 기술적이고 개념적인 기획은 건축협회와 인스부르크 대학 소속이자, <자하 하디드 아키텍쳐>(Zaha Hadid Architects) 소속 패트릭 슈마허(Patrik Schumacher)가 낸 ‘패러메트릭 어버니즘’(parametric urbanism)이라는 아이디어로 탐구되었다. 패러메트릭 어버니즘이라는 유토피아적 비전은 건물들을 지역 부지 조건에 조화시키면서 모든 건물과 도시 내지 지역의 세부 베리에이션을 제어할 수 있는 통합된 알고리즘적 스타일을 제안했다. 슈마허가 주장했듯이 이 제안 이면에 있는 유토피아주의는 건물들 사이의 시각적이거나 양식적인 유사성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디자이너가 넓은 영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디자이너 한 명의 노동과 비전의 규모를 키우는 능력의 잠재적인 승리에도 존재한다.

패러메트릭 모델이 대량 주문제작을 가능하게 하고 수백 혹은 수천 개의 건물들을 서로 다르게 짓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모델은 한 명의 디자이너가 끼치는 영향력을 키우지는 못했다. 패러메트릭 정의 안에 존재하는 가상의 다양성으로 인해 서로 상충하는 제안들이 생겨나는데 이 제안들 가운데 하나만이 실행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결국 다양한 가상적인 것들 가운데 단 하나만 현실화된다.

의뢰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패러메트릭 방법론 때문에 자신들의 요구에 근본적으로 상이하게 접근하는 제안들을 받아 볼 수 있고, 잠재력이 있는 디자인 분야를 탐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대하게 되었다. 어쨌든 건축을 발전시키는 데 상당량의 자본이 요구된다는 점으로 인해, 민간부문이든 공공부문이든 둘 다 건축환경의 영구적인 부분이 될 것에 관하여 최종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많은 양의 디자인 제안들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상식화되었다. 하지만 패러메트릭 모델은 그런 과제를 수행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패러메트릭 방법론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제안들이 아니라 한 가지 제안의 변형들을 제공하기에 더 적합하다는 것을 입증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베리에이션은 본질의 변화가 아니라 정도의 변화인 것이다.

그런데도 수년 동안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은 건축공모라는 형식을 통해 근본적으로 상이한 다수의 제안들—건물의 제약들을 제각각 주의 깊게 고려하는 제안들—을 즉각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건축가들과 협력했다. 건축공모는 궁극적인 패러메트릭 모델화 방법론으로 간주될 수 있다. 디자인 참여자들에게는 큰 비용을 치르게 하면서 의뢰인에게는 상당한 디자인 베리에이션을 거의 무료로 주어서 광범한 가상의 다양성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축공모는 디자인 베리에이션을 제공하는 패러메트릭 디자인 방법론의 모든 원칙을 따른다. 패러메트릭 디자인이 디지털적으로 창조되는 건물들 중 99%를 폐기하듯이 건축공모 역시 적합한 해결책에 도달하기 위해 경합하는 노동인력 풀로서 편성된 건축가들이 무보수 노동으로 만들어낸 디자인들 가운데 99%를 폐기한다. 이렇듯 건축공모들은 우리가 기꺼이 제공하는 노동이 보상을 받지 못하는 투기성 노동의 관행들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건축공모가 건축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오래된 관습이라는 사실은, 패러메트릭 건축이 실제로 출현하기 이전부터 항상 우리가 패러메트릭 패러다임 속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패러메트릭 어젠다가 획기적인 스타일이라고 한 패트릭 슈마허의 주장을 건축공모들이 입증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건축분야의 진보에 기여하고 보수를 받는 주문을 받으려는 수많은 건축가들의 열망 덕분에 그들에게서 공짜나 다름없는 가치를 뽑아낼 수 있는 조달 기술을 전지구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그렇게 된 것이지 자유로운 시장참여자들 사이에서 새로 출현하는, 서로 연결 짓는 것의 미학이라는 슈마허의 주장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건축분야의 오랜 관습인 건축공모와 달리 패러메트릭 디자인을 규정하는 시대는 ‘승자독식’ 이데올로기와 지식이 ‘낙수’ 형태로 증식된다는 사고방식 아래에서 작동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시대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 시대에 전위적 기획들을 위해 개발된 혁신이 점차 사회적으로 채택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항상 새로운 ‘일회성’ 건물을 추구하는 것은 문화적 채택이 이루어질 여지를 거의 남기지 못한다. 오히려 신자유시대의 승자독식 모델이 권력, 자본 및 부의 대규모 불균형을 만들어냈다.

 

건축의 양극화

상업적 수단을 통한 건축술의 혁신 추구는 자본의 대규모 축적에 의존한다. 수 세기 동안 건축가들은 자신들의 건축 비전을 발전시킬 후원자로서 활약할 수 있는 의뢰인을 찾고자 했다. 한 가지 상징적 사례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피터 루이스(Peter Lewis) 및 <루이스 레지던스>(Lewis Residence)와 맺은 관계이다.(([정리자] <루이스 레지던스>(Lewis Residence)는 실현되지는 않은 주택개발 기획이다.)) 게리는 자신의 의뢰인들 중 보험업에서 수십억을 번 피터 루이스로부터 8200만 달러 주택—루이스가 결국은 짓지 않기로 한 주택—의 다양한 버전들을 디자인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고 의뢰자인 루이스는 이 의뢰건에 대해 6년의 시간과 600만 달러 이상의 비용을 썼다. 게리는 루이스로부터 받은 돈이, 자신이 받은 ‘맥아서(MacArthur) 영재상’의 상금처럼, 아무런 제약 없이 자신의 가장 진보적인 생각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 돈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인정했다.

피터 루이스 같은 의뢰인들은 별로 없으며, 건축교육에서 그러한 기대감을 조장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양의 건축연구와 교육이 그러한 비현실적인 의뢰인에게서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뿐인 주문에 바쳐지고 있다. 건축분야는 이러한 불균형적인 과도함을 알게 되었고 이런 건축 관행들을 비판하는 시도들이 건축학 내부에서 이루어졌다. 일례로 건축계는 생태적 재난 내지 금융재앙 이후 집을 박탈당한 사람들과 그 이후 살 곳을 잃을 버린 사람들과 함께 하는 건축으로 시선을 돌려 인도주의적인 저소득 프로젝트들을 강조함으로써 건축의 윤리성을 재발견하고자 했다. 칠레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Alejandro Aravena)가 조직한 2016년 베네치아 건축 비엔날레는 차별적으로 격리되거나 대표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해결방안을 만들어낸 건축가들을 부각시켰는데, 여기서 전 세계 부동산 투기, 집단지식 풀의 강탈 그리고 우버 및 에어엔비처럼 이른바 ‘공유경제’로 공통적인 공간들에서 수익을 추출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두 가지 태도들 즉 한편으로는 엘리트 의뢰인들을 위한 디자인의 낭비와,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낭비의 비윤리성에 필연적으로 반발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불가피한 측면이다.

이 체제에서 승자독식이라는 사고방식은 종형곡선의 양끝에서 작동하며 곡선의 가운데 혹은 볼록한 부분—도시 건축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간계층이 이 부분에 위치한다—은 줄어들거나 사라졌으며 심지어 건축을 위한 기획으로서 관심을 끌지 않게 되었다. 전문가들은 자본의 비대칭성에 좌우되지 않는, 노동이 가진 가치를 분명히 할 권한을 긴급하게 되찾을 필요가 있다. 무임금 노동이나 충분한 임금을 받지 않는 노동을 통해 엘리트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전통을 거부하는 것이 그 첫 걸음이다. 진보적인 건축은 퇴행적인 사회 관행들과 동의어가 되었다. 이것은 다른 분야들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되는 구조적인 문제들이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건축물 건립에서 양극화가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무자비한 경쟁하에서 작동하는 연구와 실천으로 번성하는 분야가 있으며 여기서는 많은 관계자들이 성공해서 유명인 반열에 오르기 위해 기꺼이 공짜로 일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결과인 착취와 박탈을 바로잡으려고 건축의 엄격함과 건축의 핵심가치들로 전환하는 흐름이 있다.

 

‘가운데 부분’을 다시 활용하기

1914년 헨리 포드(Henry Ford)는 노동자들의 하루 최저임금을 그 당시 자동차 회사들의 평균 임금의 두 배에 맞먹는 5달러까지 올리기로 결심했다. 포드는 노동자들의 소비력이 그가 키우고자 시도하고 있는 산업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포드는 노동자들이 그들이 만들고 있는 자동차를 살 수 있게 하고자 했다. 오늘날 미국 건축가들은 상당한 금액의 학자금 대출금이 쌓인 후인지라 디자인하도록 요청받는 유형의 건축물을 살 여유가 없다. ‘스타 건축가’ 시스템에 의해 육성되는 오늘날의 건축문화는 충분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인턴 노동과 착취적인 관행들로부터 나오는 상당한 양의 보조를 필요로 한다. 사회적 어젠다에 맞물려있는 관행들조차도 무임금 인턴십의 보조에 의존하게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중산층을 위한 건축은 상업적 명령에 의해 추진되는 것처럼 보인다. 종형곡선의 가운데 부분은 건축가들의 수중에 없는 시장, 즉 렘 콜하스(Rem Koolhaas)가 ‘정크스페이스’(Junkspace)라 부른 것과 종종 관련되어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줄어들거나 사라진 이 종형 곡선의 가운데 부분을 다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가운데 부분은 맞춤 제작한 것의 매력이나 인도주의적인 원조라는 영웅적 면모가 없기에 더 이상은 건축분야에 중요한 것이 되지 못했다. 건축분야는 근대 건축 운동을 연상시키는 큰 서사에 참여하기를 여전히 두려워한다. 어쩌면 시장 바깥 혹은 시장 주위에서 작동하지 않는 비판적 담론과 실천을 발전시키는 방안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어젠다의 추출 명령에 의해 생겨나는 경제적인 교착상태 때문에 자율이라는 기획이 자급에 기반을 두어 나타나게 되었다. 이제 건축가들은 스스로를 그들이 생각하는 건축의 사용자이자 생산자로서 재설정할 수 있으며, 그들이 속하는 문화에 재접속하고 그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의 디자인 기여를 재조정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가운데 부분을 다시 활용하는 것이 금욕이나 긴축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긴축은, 정부가 애초에 문제를 발생시킨 금융기관들이 낼 세금을 인상하지 않고, 그 반대로 금융기관들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서 공공서비스를 대폭 줄이는 것이다. 주택위기가 의미하는 바는 점점 더 많은 수의 시민들이 자신들이 일하는 장소에서 살 만한 경제적 여유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공공부문과 커먼즈가 시장투기의 반대쪽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필요하다. 공동체주의에 기초한 운동들의 출현은 전통적으로 공적인 것/사적인 것의 이두체제였던 것에 세 번째 부분을 추가할 수 있게 한다.

 

2008년 이후 전망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해서 사람들은 자유주의 정부와 보수주의 정부 공히 신자유주의 경제를 얼마나 깊이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시스템이 다수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서서히 갖게 되었다. 모든 건축가들이 중간에서 꼭대기로 가치를 뽑아 올리는 경제모델을 받아들이는 쪽에 서있다는 것이 건축학계의 현실인 만큼 건축가들에게 2008년은 건축가들이 사용하는 도구가 사실상 어떻게 경제적 어젠다를 내포하고 있는 사회-기술적 시스템인지를 숙고하도록 경종을 울린 한 해였다. 건축물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자본 뒤에 있는 경제적인 충동들과 동기들에서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사회-기술적 관점에서 보면 현 경제 관행이 선택한 최고의 무기는 디지털 플랫폼이다. 자본이 이것을 사용자들의 표준화와 자본 추출을 위한 도구로서 사용하게 된 것이다. 플랫폼은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전지구적 조직체들이며 사용자들끼리 소통하는 규칙들을 부과하고 플랫폼에서의 거래를 모니터링해서 획득한 지식에서 이윤을 추출한다. 플랫폼들은 시장 규제를 우회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두드러진 형태의 경제 불평등을 수반한다.

건축분야에서 건축공모는 초기의 플랫폼이자 어쩌면 훨씬 더 원시적이고 악의적인 플랫폼일 것이며 또한 보수를 지불할 가치가 있는 노동과 그렇지 않은 노동을 결정한다. 공모에 지원하는 경쟁은 투기적인 노동형태로 되어 있으며, 이는 트레버 숄츠(Trebor Scholz)가 주장한대로 고용, 노동시간 및 최저임금과 관련된 시장규제를 우회하는 메커니즘이 되었다. 우버의 경우처럼, 공모에 지원하는 건축가들의 경쟁으로 인해 자기 자신이 결정권자이고 주어진 요청에 참여하기 위해 보상받지 못할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건축가 기업가’라는 상이 극찬을 받는다.

2008년 금융위기는 건축계 자체의 투기 시장 내부에서 활약하는 건축가들 세대에게 깨달음을 주는 경험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건축가들은 자신들이 디자인 작업에서 승자독식 경제 시스템을 받아들였고 공모나 다른 플랫폼 제공자들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라며 매우 자주 무료로 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적인 예로 부상하는 <노!스펙 운동>(No!Spec movement)은 우리 건축가들이 비윤리적인 사업 관행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과 대안적인 모델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예기치 못한 깨달음을 나타낸다. 금융위기는 저항운동의 급증을 촉진했으며 이는 시장이 규제받지 않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알려준다. 규제받지 않는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투기성 노동은 구조적인 분할을 낳고 불평등을 증가시키므로 권력 불균형을 촉진하는 것이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는 대안들의 생산을 촉진하기도 했다. 우리가 참여하는 노동의 주권을 강조하는 공동체 번영의 모델들을 제작하려는 하부구조와 이데올로기를 연결시키는 사회-기술적 인식을 촉진한 것이다. 리차드 스톨먼(Richard Stallman)의 일반공중사용허가서(General Purpose License) 및 카피레프트 운동에서처럼 사용자들 간의 지식 증식을 보장하는 라이선스 계약 창출, 블록체인 기술의 출현에서처럼 분산된 방식으로 신뢰를 보증할 수 있는 분산원장들의 창출 그리고 알라스테어 파빈(Alastair Parvin)의 위키하우스 작업의 경우처럼 적정 가격으로 사용자들이 빌딩 솔루션을 스스로 마련할 수 있게 하는 건축의 오픈소스 형태 디자인이 이 모델들에 속한다.

 

건축 커먼즈의 틀 형성하기

이 책은 다섯 개의 장으로 나뉜다. 1장 「건축술의 발달」에서는 신자유주의의 명령 아래 작동하는 건축을 비판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한다. 먼저 건축술의 진보라는 생각이 과연 시민들의 번영에 이바지했는지를 묻고 인풋 당 아웃풋 효율의 증가(ephemeralization)라는 약속이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검토한다. 첫째 물음에 대해서는 건출술의 진보가 혁신을 일반대중에게로 ‘내려 보내지’ 못했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다음으로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시장 인클로저를 통해 작동하는지를 살펴본다. 신자유주의는 공적 도메인의 힘을 정의하는 규정들을 무너뜨리는 시스템으로서, 저자는 그러한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가치는 커먼즈로부터 추출된다고 주장한다.(([여기서 저자는 커먼즈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인다―정리자] 커먼즈는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저술을 통해 정식화되었을 뿐 아니라 데이비드 볼리어(David Bollier)와 마시모 데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의 관점—공동체적인 부의 창출에 참여하는 사회구조들 뿐 아니라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공유재 둘 다를 포함하는 정의를 모으고자 시도하는 관점—을 통해서도 정식화되었다.))

2장 「부분들의 융합」에서는 어떻게 추출적인 관행들이 건축에 분명히 나타났는지를 더 깊이 파고든다. 시장 다양성을 파괴하면서 수직적 통합을 이루는 대규모 제조활동이 자본 축적의 논리에 의해서 발생하게 되는 경향을 소개한다. 수직적 통합의 발생은 기술적인 어셈블리에 필요한 부분들의 수를 줄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제조에 명확한 혁신들을 제공했다. 3D 프린팅 같은 최근 과학기술들은 이전에 표준화된 구성요소들을 해체하는 식으로 수행적인 이점들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수직적 통합으로의 경향은 패러메트릭 디자인 패러다임과 명확한 상관관계가 있다. 이 장에서 저자는 패러메트릭 모델이 적은 수의 인구에 복무하고 시장 다양성에 충격을 주었다는 것을 짚어보고자 한다.

3장 「부분들을 옹호하여」에서는 디자인과 제조 분야에서 부분들의 사회적 어포던스(([정리자] 어포던스란 주체가 특정의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객체가 ‘제공’하는 관계를 가리킨다.))를 이해함으로써 대안적인 디자인에 필요한 제안들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다양한 다수의 행위자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건축 디자인의 분야가 공급자들 간의 협동 및 연계의 효율적인 형태들을 찾을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러한 노력이 1950년대의 <모듈협회>’(Modular Society) (([정리자] ‘Modular Society’는 책의 한 장으로서 크리스틴 월이 쓴 장 이름이기도 하지만, 원래 그 당시 영국의 협회 이름이다. 현재 희의록 등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https://discovery.nationalarchives.gov.uk/details/r/C2327371))같은 기관들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대의 시도들은 디지털 네트워크의 출현을 통해 동질화되지 않는 차원 연계의 구조들을 제공하고자 한다.(([정리자] 과거 <모됼협회>는 동질화와 표준화에 기반을 두었다.))

이와 관련해서 제시되는 틀은 연속적인 패러메트릭 모델에 의해 제시되는 ‘일회성의’ 모델과는 대립적인 위치에 있는 ‘이산(離散) 건축’(Discrete Architecture)이라는 패러다임이다. 이는 재조합 능력의 측면에서 부분들이 디자인되고 연구되며 다양한 생산물을 산출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다. 디자인은 이산 건축을 통해 다원적이고 비독점적인 생산 접근법을 유지할 필요성을 받아들인다. ‘디자인 커먼즈’의 산출을 위해 부분들의 ‘조합에 의한 잉여’(combinatorial surplus)의 연구 및 이 부분들이 가진 어포던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산(적) 건축의 이점들이 검토되며, 재사용가능한 패턴들이 정보 네트워크를 통해 전파될 수 있도록 하는 조합 디자인을 채택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4장 「비물질적 건축」에서는 네트워크 기반 시설이 감시 자본주의의 실행에 활용되었을지라도 사용자들에게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는 디지털 네트워크를 디자인하고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제시한다. 플랫폼이 추출 도구가 되는 것에서 협력 도구가 되는 것으로 이행하기 위해 플랫폼이 극복해야 하는 과제들에 대한 지도그리기를 한다. 트레버 숄츠(Trebor Scholz)가 옹호한 바의 ‘플랫폼 협동조합주의’(Platform Cooperativism) 같은 아이디어들을 여기서 살펴본다. 더 나아가 커먼즈에 복무하는 오픈소스 건축모델들의 저장소를 잠재적으로 생성시키면서 사용자들 간의 협동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건축용 플랫폼을 개발할 가능성을 이곳 4장에서 고찰한다. 비디오게임 기술이 플레이어들 사이의 협동 모델과 디지털 공동체에 참여하는 전통을 제공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5장 「자급을 통한 재구축」에서는 커먼즈가 다양성이라는 아이디어에 기초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자유를 확립하리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감시 자본주의에 의해 발전되는 기반시설에서는 특정 형태의 지성, 즉 사용자들의 정보를 모아놓은 집적 데이터(aggregate data)에서 생성되지만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얻어지는 지성이 효율적으로 배치되어왔지만, 이와는 다르게 커먼즈는 위계로서 작동하지 않는, 서로 합의하는 형태의 공동의 기반시설을 재구축할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5장에서는 어떻게 우리가 기울어지지 않은 운동장을 유지하고 진입장벽을 낮추어 설계하면서 민주주의와 관리를 테크놀로지에 함입할 수 있는지를 짚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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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설명]

건축술은 모두가 배워야 할 것이다. 모두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 존 러스킨

근대에 일어난 커먼즈의 대대적인 상실은 무엇보다도, 삶을 재생산하는 터인 ‘집’(home)의 상실이었다. 이 상실의 상황은 자본주의가 매우 발전한 탈근대에 들어와서도 호전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집의 상실이라는 상황이 거의 자연 상태에 해당하는 기본 설정이 되었다. 다수의 사람들의 경우 집을 구성하는 하드웨어인 주택(house)이란 것이 노동하는 사회생활을 매우 오랫동안 하고 나서야 간신히 확보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사실 주택을 안정되게 확보하는 일은 어떤 이들에게는 거의 평생이 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에게는 ‘평생’으로도 부족하다. 노동력은 재생산되어야 쓰일 수 있는데, 그 재생산의 터가 노동력이 한참 동안 쓰인 후에야 확보될 수 있다니! 아니, 평생을 노동해도 불가능하다니! 자본은 이런 모순적 상황 위에서, 즉 삶의 재생산 터의 ‘기본적’ 결핍을 기반으로 해서 자신을 증식한다.

그래서 커먼즈 되찾기는 집 되찾기를 필수적으로 포함한다. 그리고 집 되찾기에는 집을 구성하는 하드웨어를 박탈하는 메커니즘인 투기적 주택시장의 극복이 필수적으로 포함된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하자면 커먼즈 특유의 방식으로 주택을 확보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이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인 5장 「자급을 통한 재구축」“Reconstruction through Self-provision”의 내용의 일부를 포함한다.)

우선 자급을 원칙으로 한다. “자급의 실천이 공통적인 것의 현실화이다.” 자신의 집을 자기가 짓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인이 아무런 지식도 (아직은?) 없는 상태에서 DIY로 자신의 집을 짓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저자는 우선 건축가들이 자신들의 집을 짓는 데서 출발하는 것을 제안한다. 여기서 집의 디자인과 관련된 전문적인 지식이 생산되는데, 그 다음으로 이 지식을 일반 대중에게 전달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이것을 저자는 ‘해득력 사다리를 채우기’(to populate a literacy ladder)라고 부른다. 해득력 사다리는 전문가들이 생산한 지식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시스템으로서, 전문가들의 수준에서 가장 초보자 대중의 수준에 이르는 지식의 스펙트럼을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 사다리는 지식의 스펙트럼이 어떻게 새로운 미경험 사용자들과 전문가들 사이에 배치되는가에 의해 규정된다.”

이 해득력 사다리에서 지식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순환되는 데 그칠 경우에는 이것을 ‘약한 사다리’라고 부르고 초보적 수준에서 전문가 수준으로 점차적으로 올라가는 로드맵이 잘 되어 있으면 이것을 ‘강한 사다리’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서 해득력 사다리의 핵심은 가장 높은 수준과 가장 낮은 수준을 원활히 연결하여 초보자도 이 사다리를 타고 자신의 능력과 노력이 허용하는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저자는 이것이 단순히 테크놀로지(지식 생산)의 민주화라기보다는 민주주의를 테크놀로지(지식 생산)에 함입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내 식으로 풀자면, 테크놀로지의 민주화는 (대체로 사용자의 고정된 능력을 전제로 한) 테크놀로지 사용의 평등한 분배이고, 민주주의를 테크놀로지에 함입하는 것은 모두가 테크놀로지 사용자로서만이 아니라 테크놀로지 생산자로서의 능력을 자유롭게 배양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강한 사다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문턱을 낮추어 디자인하기’가 필요하다. 진입장벽이 낮아야 많은 사람들이 사다리 안에 들어올 수 있고 사다리 안이 더 열린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해득력 사다리를 만드는 것 자체가 자원의 집합소로서만이 아니라 ‘사회체계로서의 커먼즈’(마시모 데 안젤리스)의 생산으로 이어진다. 실제 집을 만드는 실천이 집짓기와 관련된 지식의 생산과 연결되므로, 저자가 제안하는 방안은 위키피디아, 리눅스 같은 비물질적 생산의 프로젝트를 물질적 생산으로 확대하는 방안이기도 하고, 단순한 참여―상부에서의 의사결정에 사용하기 위한 데이터 수집을 대중이 일시적으로 거드는 것―에서 자급으로 이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 자급은 아직은 국가로부터의 조달을 대체한다기보다는 보완하여 국가 및 시장 양자와 협상할 수 있는 시민조직들을 생성하는 것이 주된 일이다.

건축 분야에서 참여에서 자급으로 움직인 대표적 사례로 파빈(Alastair Parvin) 등의 위키하우스(Whikihouse)가 있으며, 건축가들이 자신들의 집만 짓는 것을 넘어서서 이룩한, 자급의 한 형태로서의 커먼즈를 위한, 그리고 커먼즈에 의한 건축의 기획으로는 Open City(1971)가 있다.((이 기획에 대한 사례연구로 Rodrigo Pérez de Arce and Fernando Pérez Oyarzún, Valparaiso Schoo /Open City Group, ed. by Raul Rispa (Birkhauser, 2003) 참조.))

[정백수]




페미니즘과 커먼즈의 정치

 


  • 저자  :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
  • 원문 :  “Feminism and the Politics of the Commons”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나는 2023년 1월 26일 목요일에 에코페미니즘연구센터 달과나무에서 기획한 심화강의 제2강에서 커먼즈 운동을 대안근대로의 이행의 관점에서 소개했는데, 여기서 페미니즘과 커먼즈 운동의 연관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런데 강의자료를 다 작성하고 나서 강의를 기다리는 하루 정도의 시간에 아래 소개된 페더리치의 글―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커먼즈의 정치를 살펴보는 글―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강의 후 토론시간에 이 글을 거론하기도 했다. 물론 미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번역까지는 아니더라도 상세히 내용을 정리해서 이 블로그에 올리기로 마음 먹고 당장 실행에 옮겼다. 아래 글은 마치 번역처럼 보이는 어투를 사용했지만, 원주 혹은 본문의 어떤 디테일들을 생략하기도 했고 또 어떤 부분은 비교적 자유롭게 내용을 풀었기 때문에 완성된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고 그저 매우 상세한 내용정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원문은 The Wealth of the Commons: A World Beyond Market and State (Levellers Press)의 9장이며 https://wealthofthecommons.org/essay/feminism-and-politics-commons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사이트의 글들은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의 적용을 받는다. (※ 이 글은 원래 『더커머너』(The Commoner, 2011년 1월 4일)에 발표된 에쎄이를 조금 고친 것이다.) [정백수]


재생산이 사회적 생산보다 앞선다. 여성을 건드리는 것은 반석을 건드리는 것이다.
– 피터 라인보((Linebaugh, Peter. 2008. The Magna Carta Manifesto: Liberty and Commons for All.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년 12월 31일 사파티스타들이 에히도(ejido)[공동체가 땅의 소유권이 아닌 용익물권을 갖는, 농업에 사용되는 공동 토지]를 해체하는 입법에 반대하는 투쟁을 한 이후 커먼즈라는 개념이 널리 퍼지고 있다. 이 고물처럼 보이는 생각이 현재의 사회운동에서 정치적 논의의 중심에 오게된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다음의 둘이 두드러진다. 첫째,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구축하는 급진적 운동들의 노력을 수십 년 동안 흡수했던 국가주의 혁명모델이 종식되었다. 다른 한편, 종획에 맞서  커먼즈를 방어하려는 투쟁들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사라졌다고 믿었거나 사유화로 위협받기 전에는 가치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던 공동체적 재산들 및 관계들의 세계가 가시화되었다. 커먼즈가 사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 인터넷 같은 예전에는 없던 삶의 영역에서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협력이 항상 산출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종획으로 인해서 드러났다. 커먼즈라는 생각은 많은 사람들이 창출하려고 하는 협력적 사회를 예시하는 통일적 개념으로서 이념적 기능에 복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을 해석하는 데서는 애매함들과 의미심장한 차이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커먼즈의 원리를 일관성있는 정치적 기획으로 옮겨놓으려면 이것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가령 무엇이 커먼즈를 구성하는가의 문제가 있다. 땅, 물, 공기 커먼즈(공통재), 디지털 커먼즈가 있다. 사회보장연금과 같이 우리가 획득한 권리도 종종 커먼즈로 지칭되며 언어, 도서관, 과거 문화의 집단적 산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모든 커먼즈가 그 정치적 잠재력의 관점에서 볼 때 동등한가? 모두 호환 가능한가? 그리고 그것들이 구축되어야 할 통일성[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향하는 데 모두가 함께하는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정리자]을 기획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우리는 ‘commons’(커먼즈)라고 복수형으로 말해야 할까, 아니면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자들이 제안하는 것처럼 ‘the common’(공통적인 것)이라고 말해야 할까? (‘공통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포스트포디즘 시대에 우세한 생산형태의 특징을 이루는 사회적 관계들을 지칭한다.)

이 글에서 나는 이 물음들을 염두에 두면서 커먼즈의 정치를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 페미니즘적 관점이란 성차별에 대항하고 재생산 노동을 둘러싼 투쟁에 의해 형성된 관점을 가리킨다. 재생산 노동은 라인보의 말처럼 사회의 반석이며 이것을 시금석으로 하여 모든 사회조직화 모델이 평가되어야 한다. 재생산 노동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커먼즈의 정치를 더 잘 규정하고 커먼즈 원칙이 반자본주의 프로그램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조건들을 분명히 하는 데 필요하다. 두 가지 문제가 이 과제들을 특히 중요하게 만든다.

첫째, 적어도 1990년대 초부터 커먼즈 담론이 예를 들어 세계은행 같은 기관에 의해 전유되어 사유화를 위해 사용되었다. 세계은행은 생물다양성을 보호하고 전지구적 커먼즈를 보존한다는 핑계로 열대우림을 생태보호구역으로 바꾸어 수세기 동안 열대우림에서 생계를 유지해 온 주민들을 추방하는 한편, 예를 들어 생태관광(eco-tourism) 같은 것을 통해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접근을 보장했다. 이밖에도 다양한 동기에 따른 커먼즈의 재가치화가 주류 경제학자와 자본주의 계획가들 사이에서 유행이 되었다. 커먼즈에 대한, 그리고 그와 유사한 사회적 자본, 선물 경제, 이타주의와 같은 주제들에 대한 학술 문헌이 증가하는 것을 보라.

사회적 공장[사회 전체가 공장이 된 것]의 구석구석까지 상품형태를 확장하는 것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에게는 이상적인 일이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장기적 재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실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은 기획이다. 자본주의적 축적은 시장에 외부성(externalities)으로 나타나게 마련인 엄청난 양의 노동(예를 들어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하며 여성들이 제공하는 무보수 가사노동)과 자원의 자유로운 전유에 구조적으로 의존한다. 따라서 월스트리트 붕괴 훨씬 이전에 다양한 경제학자 및 사회이론가들이 삶의 모든 영역의 시장화가 시장의 원활한 기능에 해롭다고 경고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장도 신뢰, 선물 제공처럼 화폐가 매개하지 않는 관계의 존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자본이 공통적 이익(공동선)의 미덕에 대해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위기에 처한 자본가 계급이 지구 환경의 수호자인 척하면서 되살아나는 것을 돕는 방식으로 커먼즈에 대한 담론을 만들어내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두 번째 문제는 ‘커먼즈가 어떻게 비(非)자본주의 경제의 기초가 될 수 있는가’라는, 아직은 답이 없는 물음이다. 라인보(Peter Linebaugh)의 저작, 특히 『마그나카르타 선언』(The Magna Carta Manifesto, 2008)에서 우리는 커먼즈가 계급투쟁의 역사를 우리 시대로 연결하는 끈이었으며 실제로 커먼즈를 위한 투쟁이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을 배웠다. 메인 주(州)의 주민들은 기업 함대의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어장에 대한 접근을 유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애팔래치아 주민들은 노천 채굴로 위협받는 산을 구하기 위해 조직화하고 있다. 오픈소스와 프리소프트웨어 운동은 지식의 상품화에 반대하고 소통과 협력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열고 있다. 또한 칼슨(Chris Carlsson)이 그의 『나우토피아』(Nowtopia, 2007)에서 설명한 것처럼 북미에서 많은 보이지 않는 커머닝 활동과 공동체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칼슨이 보여주듯, ‘버추얼 커먼즈’의 창출, 그리고 화폐/시장 경제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에서 번창하는 형태의 사회적 관계들의 창출에 많은 창조성이 담겨 있다.

아프리카, 카리브해 지역, 또는 미국 남부에서 이주해온 공동체들 덕분에 나라 전역에 퍼진 도시 텃밭 가꾸기 운동이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어왔다. 이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도시 텃밭은 우리가 식량 생산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고 우리의 환경을 재생성하며 생계를 위해 자급하려면 없어서는 안 될 러바니제이션(rurbanization)((rurbanization : rural + urban +-ization)) 과정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텃밭은 식량 안보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것을 훨씬 넘어서 사회성, 지식 생산, 문화 및 세대 간 교류의 센터들이다.

도시 텃밭은 그것이 상업적 목적보다는 동네에서의 소비를 위해 생산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점으로 인해서 도시 텃밭들은 다른 재생산 커먼즈들―메인 주의 ‘가재 해안’(Lobster Coast)((“Lobster Coast”는  지명이 아니라 가재를 잡는 해안을 말한다. 메인 주의 어업 공동체들의 역사를 다룬, 콜린 우다드(Colin Woodard)의 The Lobster Coast: Rebels, Rusticators, and the Struggle for a Forgotten Frontier 라는 책이 있다.))의 어장들처럼 시장을 위해 생산하거나 열린 공간을 보존하는 토지 신탁처럼 시장에서 구입되는 것들―과 구분된다. 그러나 문제는 도시 텃밭이 자생적인 풀뿌리 운동으로 남아 있으며 미국에서 벌어지는 운동에서 텃밭들의 존재를 확장하고 토지에 대한 접근을 투쟁의 핵심 영역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여성과 커먼즈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방어되고 있고 발전되고 있으며 투쟁으로 지켜지고 있는 많은 번성하는 커먼즈들을 어떻게 한데 모아서 결집력 있는 총체를 형성하여 새로운 생산방식의 토대를 제공할 것인가의 문제를 좌파는 제기한 적이 없다. 커먼즈에 대한 페미니즘적 관점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과거의 역사에서나 우리 시대에서나 여성들은 재생산 노동의 주요 주체로서 공동체의 자연자원에의 접근에 남성보다 의존해왔고 이 자원의 사유화 과정에서 가장 많은 불이익을 당했으며 이 자원의 방어에 가장 헌신적이었다는 깨달음과 함께 이 페미니즘적 관점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내가 『캘리번과 마녀』(Caliban and the Witch, 2004)에서 썼듯이,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 국면에서 여성들은 영국과 남북아메리카에서 공히 토지 종획에 맞서는 투쟁의 최전선에 섰으며 유럽 식민화가 파괴하려고 했던 공동체적 문화의 가장 완강한 방어자들이었다. 페루에서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마을을 장악했을 때 여성들이 높은 산으로 도망쳐 집단적 삶형태들을 다시 창출했고, 이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여성에 대한 세계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공격이 행해졌다. 여성을 마녀로 몰아 박해한 것이다. 오늘날 새로운 형태의 시초 축적 과정에 직면한 여성들은 자연의 완전한 상업화를 가로막고 비자본주의적 토지 사용과 생계자급 지향적인 농업을 지탱하는 주요한 사회적 힘이다. 여성들은 세계의 자급농부들이다. 아프리카에서는 세계은행 및 기타 기관들이 여성들의 활동을 환금경작으로 전환하도록 설득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사람들이 소비하는 식량의 80%를 생산한다. 1990년대에는 많은 아프리카 도시에서 식량 가격 상승에 직면하여 공유지(公有地)의 땅뙈기들을 전유하였고 길가를 따라, 공원에, 철로를 따라 옥수수, 콩, 카사바를 심었으며, 아프리카 도시들의 경관을 바꾸고 그 과정에서 도시와 농촌 사이의 분리를 허물었다. 인도, 필리핀에서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여성들은 황폐해진 숲에 나무를 다시 심고, 힘을 합해 벌목꾼을 쫓아냈으며, 광산 작업과 댐 건설을 봉쇄하고, 물 사유화에 반대하는 투쟁을 이끌었다.

재생산 수단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을 위한 여성들의 투쟁의 다른 유형은 캄보디아에서 세네갈에 이르기까지 제3세계 전역에서 화폐커먼즈로 기능하는 신용연합의 형성이다.(Podlashuc 2009)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톤틴’(the tontines)이라고 불리는 이 신용연합은 여성들이 만든 자율적이고 자주적으로 관리되는 뱅킹시스템으로, 은행에 접근할 수 없는 개인이나 집단에 현금을 제공하며 순전히 신뢰를 바탕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신용연합은 세계은행이 장려하는 소액융자 시스템과 완전히 다르다. 이 소액융자 시스템은 상호감시와 수치심을 바탕으로 작동되는데, 예를 들어 니제르에서 이러한 방식이 융자금을 상환하지 못한 여성들의 사진을 공공장소에 게시할 정도로 극에 달해서 몇몇 여성들을 자살로 몰아가기도 했다.

여성들은 또한 재생산 비용을 절약하고 서로를 가난·국가폭력·남성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재생산노동을 집단화하려는 노력을 주도해왔다. 두드러진 사례는 1980년대에 칠레와 페루에서 여성들이 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더 이상 혼자서는 물건을 살 경제적 여유가 없었을 때 세운 ‘올라스 코무네스’(ollas communes, 공동밥솥)이다.(Fisher 1993; Andreas 1985) 토지 재전유나 톤틴의 형성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실천은 공동체적 유대가 아직 강한 세계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정치 이전의 것으로, ‘자연적인’ 것으로, 혹은 단순히 ‘전통’의 산물로 보면 잘못이다. 식민화 국면들이 거듭되고 난 지금, 자연과 관습은 민중이 투쟁하여 보존하고 재발명한 곳에서 말고는 그 어디에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레오 포들라슈크(Leo Podlashuc)가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날 풀뿌리 여성들의 공동체주의는 새로운 현실을 창출하며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집과 공동체에서 대항권력을 구성하며 자기가치화와 자기결정의 과정을 연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많다.

이 투쟁들에서 우리가 얻는 첫 번째 가르침은, 물질적인 재생산 수단의 커머닝이 집단적 이해와 상호유대가 창출되는 주된 메커니즘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또한 노예화된 삶에 대한 저항의 최전선이며 우리의 삶에 대한 자본의 장악력을 안으로부터 무너뜨리는 자율적 공간을 구축하기 위한 조건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내가 설명한 경험은 이식할 수 없는 모델이다. 북미에 사는 우리에게 재생산 수단의 탈환과 공통화(commoning)는 필연적으로 다른 형태를 취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자원들을 한데 모으고 우리가 생산한 부를 재전유함으로써 우리의 재생산을 상품의 흐름들―이 흐름들이 세계 시장을 통해 세계 전역을 흘러다니면서 수백만 명이 삶의 터전을 박탈당하게 하고 있다―로부터 떼어내기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살림을 세계시장으로부터만이 아니라 (현재 미국 경제가 의존하고 있는) 전쟁기계와 감옥시스템으로부터도 떼어내기 시작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운동에서 그토록 자주 보이는 특징인 추상적 연대―이는 우리의 헌신, 견딜 수 있는 우리의 능력, 우리가 기꺼이 감수할 위험을 제한한다―를 넘어설 수 있다.

사유재산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무기로 보호되고 3세기에 걸친 노예제도가 사회에 심오한 분열을 낳은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커먼즈/공통적인 것을 재창출한다는 것이 장기적인 실험, 연대구축 및 피해회복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엄청난 과제인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제가 지금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워보일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자율의 공간을 넓힐, 그리고 우리의 재생산이 세계의 다른 커머너들과 커먼즈들을 희생시키면서 일어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유일한 가능성이다.

 

페미니즘적 재구축

마리아 미스(Maria Mies)가 이 과제를 강력하게 표현한 바 있다. 그녀는 공통적인 것의 창출이 첫째로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분업이 분리한 것들을 재결합하기 위해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심대한 변형이 일어나는 것을 필요로 함을 지적했다. 생산이 재생산 및 소비와 분리됨으로써 우리는 ① 먹는 것, 입는 것, 일하는 도구가 생산되는 조건들을, ② 그 사회적·환경적 비용을, 그리고 ③ 우리가 산출하는 폐기물을 떠안게되는 사람들의 운명을 무시하게 되기 때문이다.(Mies 1999) 우리는 우리의 행동의 결과에 대해 무책임한 상태―이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분업이 조직되는 파괴적인 방식들의 결과이다―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만일 이에 미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의 생산은 불가피하게 다른 이들에게는 죽음의 생산이 될 것이다. 지구화는 이 위기를 악화시켜서 생산되는 것과 소비되는 것 사이의 거리를 벌렸으며 그럼으로써 (전지구적 연결성이 증가되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먹는 음식, 우리가 사용하는 석유, 우리가 입는 옷, 우리가 서로 소통하는 데 쓰이는 컴퓨터들이 피의 희생을 치르고 생산된 것임을 보지 못한다.

페미니즘적 관점은 우리에게 이러한 망각의 상태를 극복하는 데서 커먼즈를 재구축하는 일을 시작하라고 가르쳐준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기초해서 우리의 삶과 우리의 재생산을 이루기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그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기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공통적인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커머닝은 우리 자신을 공통적 주체로 산출하는 활동이 되어야 의미를 가진다. ‘공동체 없이 커먼즈 없다’라는 슬로건은 바로 이런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공동체는 종교나 민족을 기반으로 형성된 폐쇄적인 곳이 아니라 관계의 질, 협력의 원칙, 서로에 대한 그리고 지구·숲·바다·동물에 대한 책임의 원칙을 의미한다.

물론 그러한 공동체의 달성은 우리의 일상적인 재생산 노동의 집단화와 마찬가지로 시작일 뿐이다. 그것이 더 광범한 반(反)사유화운동 및 공통의 부를 되찾기를 대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집단적 통치(자치)에 대한 우리의 교육과 역사를 집단적 기획으로 인식하는 일의 필수적 부분이다.

그래서 가사의 공동체화를 우리의 정치적 의제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의 풍부한 페미니즘 전통을 다시 살려야 한다. 이 전통은 ①19세기 중반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실험들에서부터 ②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초까지 ‘유물론적 페미니스트들’이 보인, 집단적 살림을 통해 가사노동을 재조직하고 사회화하려는, 그럼으로써 집과 동네를 재조직하고 사회화하려는 시도들―이 시도들은 안타깝게도 1920년대에 ‘적색공포’로 종식되었다―까지에 걸쳐있다.(Hayden 1981 and 1986) 이러한 실천들에서 보이는, 재생산 노동을 인간 활동의 중요한 영역으로, 부정될 것이 아니라 혁명적으로 변혁되어야 할 영역으로 볼 수 있는 과거 페미니스트들의 능력이 다시 논의되고 다시 가치를 부여받아야 할 것이다.

집단적 삶형태를 창출하는 결정적 이유 하나는 인간의 재생산이 지구상에서 가장 노동 집약적인 일이며, 대체로 기계화로 환원될 수 없는 일이라는 데 있다. 육아, 환자 돌보기 또는 신체적·정서적 균형을 재통합하는 데 필요한 심리적 작업은 기계화할 수 없다. 미래주의 산업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서는 돌봄을 로봇화할 수 없다. 특히 어린이와 환자를 돌보는 사람 가운데 간호사봇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서비스 제공자의 건강을 희생하지 않고 책임을 분담하고 협력하는 것이 적절한 치료를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수세기 동안 인간의 재생산은 집단적 과정이었다. 그것은 확대된 가족과 신뢰할만한 공동체들의 일이었다. 특히 프롤레타리아 동네에서 그랬으며, 사람들이 혼자 살았을 때에도 그랬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오늘날의 노인들처럼 외롭거나 의존적이지 않았다. 재생산이 완전히 사유화된 것은 자본주의에 와서의 일이다. 이 사유화 과정은 지금 우리의 삶을 파괴할 정도로 심해졌다. 이러한 추세는 역전되어야 하며 지금이 그러한 기획에 유리한 때이다.

자본주의 위기가 미국을 포함하여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재생산의 기본 요소들을 파괴함에 따라 우리의 일상 생활의 재건이 가능한 일이자 긴요한 일이 된다. 파업과 마찬가지로 사회적/경제적 위기가 임금 노동의 규율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성을 우리에게 강요한다. 바로 이런 일이 대공황 중에 일어났는데, 그때 화물열차를 커먼즈로 전환하여 이동성과 유목 생활에서 자유를 추구한 호보들(hobos, 떠돌이 일꾼들)의 운동이 일었다.(Caffentzis 2006) 그들은 철로가 교차하는 곳들에서 자치 규칙과 연대에 기반을 둔 호보 정글들을 조직했는데, 이는 많은 호보들이 믿었던 공산주의 세계의 예시였다.(Anderson 1998, Depastino 2003 and Caffentzis 2006) 그러나 소수의 박스카 베르타(Boxcar Bertha)들을 제외하면((<박스카 베르타>(Boxcar Bertha, 1972)는 마틴 스코세시(Martin Scorsese)가 벤 라이트먼(Ben Reitman)의 『도로의 누이―박스카 베르타의 자서전』(Sister of the Road: Sister of The Road: The Autobiography of Boxcar Bertha )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이것은 주로 남성들의 세계였고 남성들의 형제애였으며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없었다. 경제 위기와 전쟁이 끝나자 호보들은 노동자들을 고착시키는 두 개의 큰 엔진인 가족과 집에 길들여졌다. 대공황 동안 보여진 노동계급 재구성의 위협을 유념한 미국 자본은 ‘생산 지점에서의 협력, 재생산 지점에서의 분리 및 원자화’라는 원칙을 경제 생활을 조직하는 데 탁월하게 적용했다. 레비타운(Levittown)((‘Levittown’은 윌리엄 레빗(William J. Levitt)과 그의 회사(Levitt & Sons)가 만든 거대한 주택개발사업의 이름이다.))이 제공한 원자화되고 직렬화된 가족 주택은 탯줄로 연결된 부속물인 자동차와 결합하여 노동자를 정주하는 삶에 고착시켰을 뿐만 아니라 호보 정글들이 나타냈던 유형의 자율적 노동자 커먼즈를 종식시켰다.(Hayden 1986) 오늘날 수백만 명의 미국인의 집과 자동차가 회수되고 압류·철거·대량실직이 다시 자본주의 노동 규율의 기둥을 무너뜨리고 있음에 따라 해안에서 해안으로 뻗어 있는 천막 도시들 같은 새로운 공통 기반이 다시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시적인 공간, 일시적인 자율지대들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재생산의 토대가 될 커먼즈들을 구축해야 하는 주체가 바로 여성들이다.

집이 경제의 기반이 되는 오이코스(oikos)라면, 역사적으로 가사노동자이며 가옥 수감자들인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집을 (다양한 사람들과 협력형태들이 가로지르는) 집단적 삶의 중심지로 되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고립과 고착이 없는 안전함을 제공하고 공동체 소유물의 공동사용 및 순환을 가능하게 하며, 무엇보다도 재생산의 집단적 형태들의 토대를 제공해야 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19세기의 유물론적 페미니스트들의 프로그램으로부터 이 기획에 대한 영감을 끌어올 수 있다. 이들은 집(home)이 ‘여성 억압의 중요한 공간적 구성 요소’라고 확신하고 공동 부엌을 조직하고 노동자들이 재생산을 통제하기를 요구하는 협동적 가구들을 조직했던 것이다.(Hayden 1981)

이러한 목표는 현재 매우 중요하다. 삶이 가정에 고립되는 상태를 분쇄하는 것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고 고용주 및 국가와의 관계에서 우리의 힘을 강화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생태적 재앙으로부터의 보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집이라고 부르는 재생산 자산과 폐쇄된 거주지의 ‘비(非)경제적’ 증가가 가져오는 파괴적인 결과, 즉 겨울에는 온기를 대기로 발산하고 여름에는 가차 없는 더위에 우리를 노출시키는 파괴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De Angelis 2007) 가장 중요한 것은, 재생산을 보다 협력적인 방식으로 재규정하지 않는 한,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분리 및 정치적 행동주의와 일상적 삶의 재생산 사이의 분리를 끝내지 않는 한 대안 사회와 강력한 ‘스스로 재생산하기 운동(a self-reproducing movement)을 구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성에게 재생산을 커머닝/집단화하는 임무를 이렇게 할당하는 것은 여성성을 자연주의적으로 보는 사고방식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당연히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굴복을 죽음보다 더 나쁜 운명으로 본다. 자본가들에 의해 전유된 자연의 부처럼, 여성이 남성들이 공유하는 부로서, 남성들이 자유롭게 전유할 부와 서비스의 자연적 원천으로 지정되었다는 생각이 우리의 집단의식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돌로레스 헤이든(Dolores Hayden)의 말을 풀어보자면, 재생산 노동의 재조직, 따라서 주택과 공적 공간의 재조직은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노동의 문제이며, (더 추가하자면) 권력과 안전의 문제이다(Hayden 1986). 여기서 브라질의 무토지 농민운동(MST)에 참여한 여성들의 경험이 떠오른다. 이들은, 공동체가 자신이 점유한 땅을 유지할 권리를 획득한 후, 새 주택들을 하나의 복합체를 형성하도록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투쟁의 과정에서 그랬던 것처럼 계속해서 (설거지와 요리를 함께 하는 등) 집안일을 공동으로 하고, 남자들에게 학대당할 때 서로를 도와주기 위해 달려갈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여성이 재생산 노동과 주거의 집단화에 앞장서야 한다는 주장은 가사노동을 여성의 천직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의 저항의 역사에서 본질적인 부분이었던 재생산 노동에 관해 여성들이 축적한 집단적 경험, 지식 및 투쟁을 지우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역사와 다시 연결되는 것은 오늘날 여성과 남성 모두가 우리 삶의 젠더화된 구조를 허물고 우리의 집과 삶을 커먼즈로 재건하는 데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단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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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 돌봄’ 강의요목

 


  • 저자  :  David Bollier
  • 원문 :  Pirate Care, a Syllabus
  • 분류 :  번역
  • 옮긴이 :  루케아
  • 설명 : 

    아래 글은 데이빗 볼리어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2022년 9월 14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다음의 글은 데이빗 볼리어의 저서인 『변화만들기를 위한 커머너의 목록 — 앞으로 나아가는 이행들을 위한 도구들』(The Commoner’s Catalog for Changemaking: Tools for the Transitions Ahead)에서 발췌한 일련의 특집들 중 하나이다. 다수의 선구적인 커먼즈 프로젝트들과 운동들의 개요서인 『커머너의 목록』은 서점에서 구할 수 있고 온라인(https://commonerscatalog.org)을 통해 무료로 볼 수 있다.

사람들을 보살피는 돌봄의 특정 유형들이 불법화되었다는 것에 놀란 많은 유럽인들이 2019년 그들이 해적 돌봄”(Pirate Care)이라 부르는 것에 관한 교과목의 강의요목을 만들어냈다. 프로젝트 담당자들이 설명했듯이, “우리는 선장들이 바다에서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고 체포되는 세상에 살고 있고, 과학논문을 다운로드한 사람이 35년을 감옥에서 지내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다른 방법으로는 피임약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피임약을 가져다 준 사람들이 기소를 각오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아픈 사람들에게 약을, 목마른 사람들에게 물을, 집 없는 사람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준 것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여성 영웅들은 돌보고 있고 불복종하고 있다. 그들은 해적이다.”

여기서 ‘해적 돌봄’이라는 생각이, 그리고 인도주의적인 돌봄 내지 인명을 구조하는 돌봄을 제공할 필요—국가가 이것을 범죄로 간주하기로 작정하더라도 말이다—가 있다는 생각이 나왔다. 발레리아 그라찌아노(Valeria Graziano), 마셀 마스(Marcell Mars) 그리고 토미슬라브 메닥(Tomislav Medak)에 의해 개발된 해적 돌봄 강의요목은 “증가일로에 있는 행동주의의 오늘날의 형태들을 ‘돌봄’과 ‘해적행위’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지도그리기하는—초국적인 유럽 공간에 주로 기반을 두고 있는—하나의 연구과정으로” 작성되어 있다. 그 강의요목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 중 하나 즉 그 모든 다각적이고 서로 연결된 측면들에서의 ‘돌봄의 위기’”에 개입하는 새롭고 흥미로운 방식들을 제안한다.

우리 시대의 돌봄의 결여는 극도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시장/국가의 다양한 제도들—건강의료보험, 주택, 식량, 사회적 지원—의 실패로서 보일 수 있다.

시장은 명백한 ‘소비자 수요’가 없다면 돌봄에 가치를 두지 않는 경우가 잦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돌봄은 종종 가장 취약한 인적 서비스이다. 국가 관료들은 국민들에게 마치 기계인 양 규격화된 단위의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한다. 규칙들이 주도하는 대규모 제도들은 결코 ‘돌봄’을 실행할 수가 없다.

그래서 돌봄은 대체로 무급노동이거나 보수가 형편없는 유급노동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여성들의 노동’ 또는 비(非)백인들을 위한 노동으로서 종종 젠더화되고 주변화된다.

해적 돌봄 강의요목은 돌봄을 커머닝을 통해 발생하고 유지되는 중요한 것으로서 고양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돌봄은 국가권력과 시장에 저항하는 것이, 그리고 그렇게 저항하면서 사회 안에서의 권력관계들이 어떻게 극심하게 불평등한지를 드러내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이것은 돌봄을 제공하는 것이 왜 정치적 행위인지를, 이를테면 착한 사마리아인이 ‘적’을 도와주는 것과 같은 정치적 행위와 종종 유사한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해적 돌봄 강의요목은 이주자들과 난민들에게 인도주의적인 원조를 제공하는 것이 어떻게 연대와 공감에 바탕을 둔 기본적인 인간행동을 나타내는지를 탐구한다. 강의요목은 ‘해적 돌봄’에 관한 읽기 자료들을 제공하고 ‘해적 돌봄’을 이해하기 위한 실천적인 대응들을 조직된 성찰, 직접행동, 그리고 ‘집단적 기억 글쓰기’를 통하여 제안한다. 후자는 집단적이고 개인적인 마음의 상처들을, 특히 폭력적인 역사적 과거의 여파로 생겨난 상처들을 치료하는 한 방법으로서, 기억들을 회상하야 글로 쓰는 과정이다.

해적 돌봄의 실행자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자기조직화,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대안적 접근법들, 그리고 도구들•과학기술들•지식들의 커머닝을 실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시민불복종을 의미할 수 있으며, “가장 착취받고 차별받으며 소모품으로 격하된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인 유대”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박해받을 위험이 있음을 의미할 수 있다. 해적 돌봄 강의요목은 열려있으며 점차 발전하는 “도구”로 즉 “이 실천들로부터 배우는 집단적인 과정들을 지원하고 활성화시키기 위한 도구”로 제시된다.

나는 이 강의요목이 돌봄의 정치적 동학과 힘의 동학을 설명하는 방식이 좋았다.

1. 돌봄은 본래적으로 ‘친절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항상 권력관계를 함축한다. 기율•배제•위해의 과정들이 돌봄의 모태 안에서 작동할 수 있다.

2. 돌봄노동은 권력에 불복종하고 우리의 집단적 자유를 증가시키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것이 돌봄노동이 자본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이며 인종주의적인 방식으로 조직될 때에는 대다수의 살아있는 존재들을 위해 작동하지 않는 이유이다. 우리는 전지구적으로 돌봄의 위기에 처해있다.

3. ‘잘못된’ 사람들은 없다. 그런데 ‘잘못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 점점 더 사회적으로 좌절되고 있으며 어려워지고 범죄화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돌봄의 위기는 아주 오랜 시간동안 있어왔다.

4. 돌봄은 노동이다. 그것은 필요한 노동이며 숙련노동이다.

5. 돌봄노동은 젠더•지역•인종•계급•능력•나이의 구분에 따라 대부분의 사회에서 불공평하게 그리고 폭력적으로 공유된다. 어떤 이들은 강제로 돌보고 또 어떤 이들은 서비스를 기대하는 자신들의 특권을 옹호한다. 이런 상황은 바뀌어야 한다.

6. 돌봄노동은 자원•지식•도구•기술에 대한 전면적인 접근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것들을 빼앗겼다면 우리는 되돌려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커먼즈의 제헌권력 ― 공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의 관계에 대한 시론(試論)

 


  • 저자  : 윤영광
  • 설명 : 2022 커먼즈네트워크 포럼(10.28) 발표문이다.

 

제기되는, 제기되어야 하는 물음들

‘커먼즈’ 네트워크 포럼이 “공공성 회복을 위한 더 넓은 연대와 협력”이라는 제목하에 열리고 있다는 사실, 지금 이 세션의 제목이 “커먼즈와 공공성”이라는 사실은 즉각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는 왜 공공성이라는 익숙한 개념에 더해 커먼즈라는 새로운 개념을 필요로 하는가? 어째서 공공성이라는 개념이 이미 존재함에도 다시 커먼즈를 이야기하는가? 공공성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면 커먼즈라는 별도의 개념을 사용함에 따르는 잠재적 혼란을 감내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공공성의 어떤 문제, 한계 혹은 결여가 커먼즈라는 개념을 소환하는가? 그리고 커먼즈 개념을 소환토록 한 공공성의 그 모든 문제, 한계, 결여에도 불구하고 왜 간단히 공공성을 커먼즈로 대체하지 않고 ‘공공성 회복을 위한 더 넓은 연대와 협력’을 다름 아닌 커먼즈의 이름으로 논의하려 하는가?

요컨대 공공성과 커먼즈의 병치 자체가 이미 우리가 오늘 다루어야 하는 문제상황을 대략적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문제지형의 정확한 파악에는 아직 미치지 못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커먼즈와 공공성의 관계가 외적이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 관계의 양면성

모두 아시다시피 공공성은 두 가지 ‘공’을 품고 있습니다. 첫 번째 공(公)은 영어 ‘public’(공적인 것)에 해당하고 두 번째 공(共)은 ‘common’(공통적인 것)에 해당합니다. 공공성, 혹은 공공성과 커먼즈의 관계를 논하는 여러 연구자들이 이 두 가지 ‘공’에 대해 이미 많은 논의를 제출한 바 있습니다만, 오늘 제 이야기도 역시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숙고함으로써 시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공통적인 것 혹은 공통성(commonness)은 커먼즈의 구성적 속성 혹은 본질입니다. 커먼즈는 공통적인 것입니다(‘commons is common’). 이렇게 보면, 커먼즈는 공공성과 별도로 그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성을 구성하고 지탱하는 한 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커먼즈와 공공성의 관계는 내적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커먼즈와 공공성의 관계라는 애초의 문제는 공공성을 구성하는 두 축, 즉 공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의 관계라는 문제로 새롭게 제기됩니다.

발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공적’, ‘공통적’, ‘공공성’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봤습니다. 물론 지속적인 개념의 재규정을 요하는 이론적 작업에서 사전에 기대는 것은 일반적으로 부적절합니다. 사전의 본질이 한 단어의 침전된 의미, 그래서 가장 상투화된 의미를 전달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바로 그 때문에 사전적 의미는 개념을 둘러싼 ‘현실적인’ 사회·정치적 지형을 탐사하는 데 유용한 이정표가 되기도 합니다. 각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 공통적 : 둘 또는 그 이상의 것에 두루 통하고 관계된 것
  • 공적 : 국가나 사회에 관계된 것
  • 공공성 : 한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일반 사회 구성원 전체에 두루 관련되는 성질((국립국어연구원, 『표준국어대사전』, 두산동아, 1999.))

두 가지 점이 흥미롭습니다.

첫째, 공통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의미가 꽤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관적으로 구분됩니다. 공통적인 것의 정의는 ‘함께함’ 자체 ― 한국어 함께함은 being-together, living-together, doing-together를 모두 포괄할 수 있다는 강점을 갖습니다 ― 의 내용을 말하되 그 형식은 규정되지 않은 채로 남겨두고 있는 반면, 공적인 것의 정의는 현재 인류에게 함께함의 형식으로서 지배적인 ― 다른 정치적 상상이나 구상을 즉각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지배적인 ― 것으로 주어져 있는 ‘국가’와 ‘사회’를 소환합니다.((19세기 사회학이라는 분과학문의 출현, 국가와 시민사회의 역사적 분리에 대한 헤겔과 맑스의 분석, ‘사회적인 것’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 등이 서로 다른 맥락과 각도에서 방증하듯, ‘사회’, 적어도 한편으로는 국가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과 맞짝을 이루는 개념으로서의 ‘사회’는 국민국가와 마찬가지로 근대의 역사적 발명품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국가와 사회가 공통적인 것과 관련하여 동일한 논점을 제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는 국가보다 더 복잡하고 섬세한 논점들을 제기하며, 그래서 짧은 발표와 토론에서 다루기는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이후 논의는 국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닙니다만, 철학적으로 말해 이 맥락에서 공통적인 것은 질료에, 공적인 것은 형식에 해당한다고 해도 좋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문제는 저 형식과 질료의 관계가 필연적인가, 즉 공통적인 것은 필연적으로 공적인 것이라는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는가로 정식화될 수 있을 겁니다.

둘째, 공공성의 사전적 의미는 그것을 이루는 두 가지 ‘공’의 정의를 결합하고 있습니다. 공통적인 것의 정의에서 ‘(복수의 것에) 두루 관련됨’이라는 속성을 가져오고, 공적인 것의 정의에서 ‘사회’라는 요소를 가져오는 것이지요. 흥미로운 점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런 결합 자체라기보다, 공적인 것의 정의에서 맨 앞에 왔던 ‘국가’라는 요소가 이 정의에서는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한때 이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표현을 쓰자면 이는 ‘징후적’입니다. 이것은 공적인 것의 정의 속에 등장했던 함께함의 두 형식, 즉 국가와 사회가 그 성격과 위상에 있어서 같지 않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국가’의 누락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이한, 어떤 의미에서는 반대되는 설명이 가능해 보입니다. 하나는 “한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일반 사회 구성원 전체”가 당연히 국가를 함축한다는 사회적 무의식이 이런 누락을 초래했다는 설명입니다. 이렇게 보면 공적인 것 혹은 공공성에 대한 설명은 설령 그것이 ‘사회’라는 개념만을 동원하는 순간에도 잠재적으로는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국가로 수렴됩니다. 국가는 중요치 않거나 적절치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누락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두 가지 ‘공’이 공존 혹은 결합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삭제되거나 적어도 비가시적으로 되어야 함을 함축한다는 설명입니다. 아마도 사전편찬자의 본의, 나아가 사전편찬자가 기대고 있는 상식적인 언어/정치감각과는 거리가 있을 이 설명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정치적 상상과 사고를 자극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즉각 어려운 문제가 제기될 것입니다. 공적인 것에서 국가를 제거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때 공적인 것이란 무엇이 될 것인가?

물론 이는 단지 사전적 정의가 함축하는 바를 좀더 깊이 들여다보고 그 정의들 간의 관계를 따져본 것일 뿐입니다. 당연히도 이로부터 최종적인 이론적·실천적 입장을 도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가장 상식적인 언어와 사고의 수준에서도 공통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공존 내지 결합이 필연적인 것, 자연스러운 것, 평화로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 또 그런 한에서 공공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긴장과 갈등을 함축하는 문제적 개념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긴장과 갈등의 핵심엔 역시 국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커먼즈 운동이 국가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는 단순한 결론을 손쉽게 도입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국가가 공적인 것의 종합이자 최종심급이며, 그런 한에서 공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의 관계, 즉 공공성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국가라는 문제를 우회할 방법이 없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조금 추상적이고 거친 논의가 되겠지만 공통적인 것의 관점에서 본 국가의 성격을 짧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국가는 원리적으로 “둘 또는 그 이상의 것에 두루 통하고 관계된 것”을 전제하지만 그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 근대 국가와 주권의 본질은 공통적인 것의 내재적 지평을 초월하는 운동을 하면서도 다시 저 내재적 지평에 개입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때 초월성은 “둘 또는 그 이상”의 인간 존재들의 본성을 사적인 것으로 설정하는 데서 오는 필연적 귀결입니다. 사적 개인, 즉 사적인 것을 본질로 하는 인간은 원리상 자신들에게 “두루 통하고 관계된 것”을 그들 자신 간의 내재적 관계에서 오는 힘을 통해 다룰 수 없는 존재로 상정됩니다. 공통적인 것을 다룰 별도의 층위, 별도의 장치가 요구되는 것은 이 때문이며 그것이 바로 국가입니다. 국가는 공통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그것에 근거해야 하지만 결코 공통적인 것의 층위에 내재할 수는 없다는 역설을 본질로 합니다.

이렇게 보면, 국가를 정점으로 하는 공적인 것은 공통적인 것이 사적인 것의 지배하에 소외되고 왜곡된 방식으로 현상하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커먼즈의 관점에서 공적인 것은 양면성을 갖습니다. 한편으로 공적인 것은 사적인 것과 대립하는 외양에도 불구하고, 정확히는 바로 그 ‘대립’의 방식으로 사적인 것의 지배를 보완하는 한에서 공통적인 것과 갈등관계에 있습니다. 커먼즈가 공사 구분 혹은 대립을 넘어서며 또 마땅히 넘어서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공적인 것은, 비록 제한되고 훼손된 모습일지언정 ― “둘 또는 그 이상의 것에 두루 통하고 관계된 것”을 인간의 삶에서 완전히 제거하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 결코 완전히 소거될 수는 없는 공통적인 것이 사적인 것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형태입니다. 그런 한에서 커먼즈 운동은 공적인 것에 대해 단순히 거부나 외면의 태도로 일관할 수 없습니다. 공적인 것의 ‘합리적 핵심’인 공통적인 것을 만회하고 강화하려는 노력 역시 커먼즈 운동의 중요한 한 가지 벡터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커먼즈를 공적인 것 혹은 공공성을 재구성하는 계기로 보려는 활동가 및 연구자들의 노력은 이런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커먼즈가 공공성의 새로운 구성에 기여할 수 있다는 논의의 기저에는, 그 새로운 구성이 공공성의 양대 축인 두 가지 공 가운데 공통적인 것의 힘과 가치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커먼즈 운동은 공적인 것을 공통적인 것 쪽으로 견인함으로써 두 공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디어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공적인 것을 공통적인 것 쪽으로 끌어와야 한다는 사고뿐 아니라 반대로 공통적인 것을 공적인 것의 방향으로 유도해야 한다는 사고 또한 작동하고 있습니다. 공통적인 것은, 적어도 일정 규모 이상에서 현실성을 갖기 위해서는, 공적인 것의 수준으로 상승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적인 것에 의해 매개되거나 공적인 것의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인 것이지요. 다시 말해, 커먼즈에 의한 공공성의 재구성이라는 아이디어는 분명 커먼즈의 “구성적 힘”(홍덕화, 「커먼즈로 전환을 상상하기」, 2022)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 그 구성적 힘은 공적인 것에 의해 매개되지 않고는 제 발로 서서 확장할 수 없다는 진단이기도 한 것입니다. 커먼즈가 좁은 범위와 한계에서만 작동하는 ‘공동체 커먼즈(community commons)’를 넘어서 체제전환 ― 언젠가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혁명’이라는 말의 부드러운 대용품 ― 이라는 목표를 향하기 위해서는 ‘공적 커먼즈(public commons)’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런 진단의 불가피한 결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새삼 커먼즈와 공공성을 함께 논하는 것은, 커먼즈에 의한 공적인 것의 재구성이라는 아이디어에 분명 ‘현실적’ 설득력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현실성 자체가 곧바로 양자의 관계에 대한 만족할만한 답을 주지는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공적인 것을 공통적인 것 쪽으로 견인하는 일과 공통적인 것을 공적인 것 쪽으로 견인하는 일. 이 두 방향의 운동 사이에는, 단순히 “둘 중 하나에 치우칠 것이 아니라 양자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라는 식의 절충으로는 해결을 볼 수 없는 긴장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논의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저 긴장이 공공성을 이루는 두 가지 공 사이의 본질적 긴장에서 비롯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꽤 긴 이야기를 거쳐 우리는 다시 공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의 관계라는 문제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공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의 긴장이 해소되는 일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거나, 불가능하진 않더라도 오랜 역사적 과정을 필요로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논의해야 하는 것은 저 긴장을 당장 제거하기 위한 방안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고 다룰 것인가, 저 긴장을 적절히 ― 인식적 관점에서뿐 아니라 실천적 관점에서도 적절하다는 의미에서 ― 사고할 수 있도록 해줄 양자의 관계에 대한 관점은 무엇인가일 것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아직 시론 단계에 있는, 그래서 성숙과 정교화를 위해서는 많은 이론적 커머닝이 필요한 개념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커먼즈의 제헌권력이라는 개념이 그것입니다.

 

커먼즈의 제헌권력

앞서 언급했듯 여러 활동가·연구자들이 커먼즈에 의한 공공성의 재구성을 말하고 있으며 홍덕화 선생님은 이를 커먼즈의 ‘구성적 힘’이라는 표현으로 정식화하신 바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 표현을 직접 고안하셨는지 다른 맥락에서 가져오신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저에게 흥미로운 것은 ‘구성적 힘’이 헌법학, 법철학, 정치학에서 통상 제헌권력 혹은 헌법제정권력으로 번역되는 ‘Pouvoir Constituant/Constituent Power’의 번역어로 새겨질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단순한 우연 이상의 의미를 갖는데, 제헌권력이란 바로 국가와 헌법으로 표상되는 공적 질서를 창출하고 정초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공공성의 재구성을 가능케 하는 커먼즈의 ‘구성적 힘’이 법학과 정치학에서 제헌권력이라는 개념으로 논의되어 온 바와 내용상 본질적 연관을 보인다는 것, 바로 여기에 커먼즈의 제헌권력이라는 발상의 출발점이 있습니다.

커먼즈를 제헌 혹은 헌법의 문제와 연결한 것은 제가 처음이 아닙니다. 커먼즈 운동가이자 이론가인 우고 마테이(Ugo Mattei)는 한 공저 논문에서, 자신이 직접 참여한 이탈리아 커먼즈 운동을 주요 분석사례로 삼아 ‘제헌권력으로서의 사회운동’이라는 테제를 제출한 바 있습니다.(“Social Movements as Constituent Power: The Italian Struggle for the Commons”, 2013) 국내에서는 정영신 선생님이 우고 마테이의 논문 등을 주요 참조점으로 해서 커먼즈 정치의 제헌적 성격을 언급하는 논문을 쓰신 바 있습니다.(「이탈리아의 민법개정운동과 커먼즈 규약 그리고 커먼즈의 정치」, 2022) 저의 제안에 이런 논의와 다른 점이 있다면, 비단 커먼즈 운동·정치만이 아니라 커먼즈 혹은 공통적인 것 자체의 제헌적 역능을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제헌권력은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등장했으며 시에예스(E. J. Sieyès)가 처음 명시적인 형태로 사용한 이래 슈미트, 아렌트, 네그리 등의 재해석을 거치면서 그 성격과 본질을 두고 많은 논의와 논쟁이 있었던 헌법학·법철학·정치철학의 근본개념이자 한계개념입니다. 이 자리에서 세부적 논점과 맥락을 추적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또 우리의 관심사도 아닐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제헌권력이라는 개념의 핵심 아이디어, 그리고 그것과 커먼즈-공통적인 것 사이에 그려질 수 있는 연결고리입니다.

제헌권력은 말 그대로 헌법을 만드는 권력이며 헌법적 규범의 원천입니다. 헌법은 모든 실정법의 기초이자 국가의 기본적 짜임새를 규정하므로 제헌권력은 또한 국가를 정초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국가가 공적인 것의 종합이자 최종심급인 한에서, 국가를 정초한다는 것은 곧 공적 영역, 공적 가치, 공적 체계 등 온갖 공적인 것의 질서를 조직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커먼즈의 제헌권력을 말한다는 것은 커먼즈가 공적 가치·질서·영역·공간·재화 등을 재정의하고 재구성하고 재배치할 수 있는 역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헌권력의 상대개념은 ‘헌법적으로 조직된 권력(Pouvoir Constitué/Constituted Power)’인바, 말하자면 현재의 논의 맥락에서 공통적인 것이 제헌권력이라면 공적인 것은 그 제헌권력에 의해 조직된 권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적인 것은 공통적인 것의 제헌권력에 근거하며 그것의 표현형식입니다. 그러나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공통적인 것의 제헌권력에 의한 재구성과 재정의에 열려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합니다.(헌법개정권력/개헌권력은 제헌권력의 제한적 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커먼즈의 제헌권력은 아직 더 다듬어야 하는 아이디어인데다 불가피하게 상당한 추상성을 동반합니다. 때문에 보다 현실적인 논의를 위해서라면, 이 문제를, 커먼즈를 헌법적 원리와 가치로 사고하고 주장하는 일의 (특히 오늘의 주제인 공공성과 관련한) 유효성과 의의라는 문제로 바꾸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현재의 헌정질서를 가장 큰 틀에서 규정하는 것은 사적 소유의 논리입니다. 대한민국이 공화국(res publica=공적인 것)이라는 제1조 1항의 규정이 지금까지 저 사적 소유의 지배와 사유화의 진척을 막는 데 얼마나 무력했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커먼즈를, 즉 공적인 것이 아닌 공통적인 것(res communis)을 헌법에 틈입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사화(私化, privatization)에 맞서는 보다 강한 힘과 논리를 헌법 자체에서 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공공성을 방어하기 위한 개개의 투쟁에 개별적으로 커먼즈의 논리를 동원하는 것을 넘어 공공성을 바라보는 일반적이고 헌법적인 틀로 커먼즈를 전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요컨대, 자본이라는 사회적 관계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커먼즈 운동과 정치가 결국 계급투쟁의 성격일 띨 수밖에 없다면, 헌법 자체를 계급투쟁의 장(場)으로 만드는 것이 이 투쟁을 수행하는 한 가지 유력한 길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바다 약탈을 막을 ‘블루커먼즈’ 어젠다

 



바다는 지표면의 70%를 덮고 있고 우리가 숨 쉬는 산소의 절반을 제공할지라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특히 육지로 둘러싸인 나라들이나 지역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시장/국가 시스템이 자연계의 이 영역을 파괴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업형 트롤선들이 어장에서 과잉어획을 하여 많은 어장들을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가고 있으며, 광산기업들은 석유, 가스, 니켈, 코발트, 망간 및 희토류 광물들을 찾아서 해저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

커먼즈의 관점에서 우리는 이 끔직한 시장 인클로저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인가? 최근 커머닝의 프런티어(Frontiers of Commoning) 팟캐스트(에피소드 #28)에서 소아스런던대학교(SOAS University of London)에 재직하는 경제학자이자 커먼즈 연구자인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은 몇 가지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해결책들을 제안한다. 스탠딩은 『블루커먼즈—바다경제를 변형하기』(The Blue Commons: Transforming the Economy of the Sea)를 막 출간했다. 이 책에서는 시장/국가가 바다를 무책임하고 생명을 파괴하는 식으로 취급하는 것을 커머닝이 어떻게 억제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방대한 양의 복잡한 해양역사들, 국제법 및 생태과학을 종합적으로 다룬다.

스탠딩은 바다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을 ‘자산소득자 자본주의’(rentier capitalism)((‘자산소득자 자본주의’(rentier capitalism)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972 참조.))의 예측 가능한 결과로 본다. 이것은 광범위한 재산권, 금융화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산업화된 자원의 착취에 특혜를 주는 경제시스템이다. 정부와 함께 하는 기업측은 이 시스템이 행하는 ‘빼내서 달아나는’ 관행을 ‘푸른성장’(blue growth)이라 부르길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은 실로 시장의 비극에 관한 이야기이다.

기업들은 조직적으로 연안어업 공동체를 ‘탈커먼즈화’하려고 하고, 심해 생명체들에 대한 특허권을 주장하려고 하며, 해저 광상(鑛床)을 수탈하려고 시도한다. 일례로 남아프리카 기업인 드비어스 그룹(De Beers Group)은 다이아몬드를 찾아서 해저를 긁어내기 위하여 전문화된 선박들로 이루어진 선단을 이용하는데 이것은 해양생태계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해양생태계를 붕괴시킨다.

스탠딩은 불법적인 어업관행에서의 국가와 기업들 간의 결탁 그리고 유럽 연합의 파괴적인 공동어업정책 및 브렉시트에 관하여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장들을 제공한다. 그는 어떻게 양식기술이 건설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는지를, 그러나 기업들의 손에 맡겨지면 어떻게 양식어업이 블루커먼즈 공동체에 도움이 되기보다 블루커먼즈를 상품화하고 사유화하는지를 설명한다.

이 책에서 스탠딩이 하고 있는 가장 큰 기여는 그가 커먼즈에 바탕을 둔 해결책들—어장과 연안 공동체에게 권한을 주기, 새로운 합법적인 원칙들을 제정하기 그리고 커머너들을 이롭게 할 신탁자금을 도입하기—을 제안한 것일 것이다.

스탠딩은 “협동주의와 페미니즘의 원칙에 바탕을 둔, 고무적인 특징을 지닌 몇몇 새로운 조직 형태들이 구체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런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국가, 금융, 국제적인 자선단체들에 포섭될 위험들을 인식”하고 있고 따라서 비열하고 약탈을 일삼는 정책들에 씌운 진보적인 겉면에 속지 않을 것이다.

스탠딩은 연안 공동체 소속 어부들을 위한 ‘생계권’ 같은, 기업들의 어업권보다 우선해야 하며 널리 시행되어야 할 많은 법적인 원칙들을 거론한다. 또한 그러한 공동체들 사이에서 존중되어야 할 ‘서식지 권리,’ ‘사회적 기억에 대한 권리’ 그리고 ‘세대 간 동등 지분’ 원칙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스탠딩이 주장하는 블루커먼즈 어젠다는 또한 ‘커먼즈 자금’이라는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기업이 항구를 사용하고, 가스를 추출하며, 어장에 들어오고, ‘혼획'(생태적 위해를 야기하는 해양 종들을 의도치 않게 잡는 것)을 하는 일련의 활동들에 세금을 부과하자는 발상이다.

과세로 거둬들인 돈은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이해당사자 신탁으로 관리되는 커먼즈 펀드로 투입될 것이다. 펀드는 모든 사람에게 지불되는 정기적 배당금을 산출할 것인데, 이는 <알래스카 퍼머넌트 펀드>(Alaska Permanent Fund)가 주 소유의 땅에서 시추가 이루어지는 경우 거기서 발생하는 수입을 모두가 지분을 가지는 자금으로 사용하여 알래스카에 사는 모든 가구에게 돌아가는 배당금을 발생시키는 경우와 매우 유사하다.

스탠딩은 말한다. “회사가 커머너들로서 우리 모두에게 속하는 땅이나 해저를 사용하고 그 과정에서 수익을 낸다면 그때 커머너들로서 우리는 보상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원칙이다.”

이런 취지에서 스탠딩은 엄청나게 큰 유람선들은 정상운영만 해도 높은 세금을 부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유람선들은 항구에 정박할 때 바다로 엄청난 양의 오염물질과 디젤기관의 유해배출물질을 방출한다. 스탠딩은 거대한 연안 항구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도 커머너들에게 마찬가지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 세계에 485개의 대규모 항구가 있고 우리의 항구들에서 놀랄 만큼의 돈을 버는 기업들과 기업체인들이 그 항구들을 모두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다.”

우리의 공통의 부에 대한 이런 방식의 약탈이 바다에서는 통상적인 절차라고 그는 말한다. “영국 여왕은 해저의 상당부분을 이른바 재생 가능한 풍력발전 지역용으로 다국적 기업들에게 경매로 팔았다. 이는 앞으로 계속해서 왕실사람들에게 수십 억 파운드가 흘러들어오는 것을 보증해줄 것이다.” 하지만 여왕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 “해저는 왕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커먼즈의 것이다. 나는 ‘멈춰’라고 말하고 보상을 요구하고자 한다.”

블루커먼즈에 관하여 가이 스탠딩과 한 전체 인터뷰를 여기서 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