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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네상에서 민주적인 거버넌스 구축하기

 



슈나이더(Nathan Schneider)는 인터넷 플랫폼상에서 거버넌스의 기본 형태는 ‘함축된 봉건제’라고 자신의 신작 『거버넌스 가능한 공간들』(Governable Spaces: Democratic Design for Online Life)에서 도발적으로 선언한다. 그는 함축된 봉건제는 “공동체를 봉건적 영지로서 구축하려는 문화적이고도 기술적인 편향”인데 여기서 창립자들은 “평생 자애로운 독재자”가 된다고 주장한다.

불행히도 권위주의적인 거버넌스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 국한되지 않는다. 동일한 경향들이 “현실 세계“로도 번지고 있는데 이는 온라인과 “현실 세계” 사이의 경계가 요즈음에 상당히 모호해졌다는 오직 그 점 때문이기는 하다. 놀랄 것 없이, 우리가 전제 군주 같은 IT 대기업 최고경영자들에 순응하다보면 독재적인 정치인들도 더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다. 민주주의의 실천을 담금질하는 장이 선진 자본주의하에서 위축된 것이다.

슈나이더는 ”온라인 공간이 창조적이고 급진적이며 민주적인 르네상스의 현장일 수 있다“는 대담한 생각을 해볼 것을 우리에게 권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인터넷을 반응하고 발명하는 유례없는 능력을 가진 더 민주적인 매체로 만들기 위해 과거의 거버넌스 유산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고 한다

이 돌풍과도 같은 참신한 선언에 흥미를 느낀 나는 팟캐스트 <커머닝의 프론티어> (에피소드 49)에 슈나이더를 초대했다. 우리의 대화는 온라인 문화의 몇몇 불쾌한 구역을 둘러보는 사뭇 진지한 여행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는 이상하리만치 고무적이기도 했다. 부상하는 새로운 플랫폼 기술들은 진실로 흥미진진한 몇몇 가능성들을 제공한다. 진보적인 행동주의가 상상력을 발견하여 그 가능성들의 현실화에 기여하기로 결심한다면 말이다.

슈나이더는 콜로라도 볼더(Colorado Boulder) 대학에 재직하는 미디어학 교수이다. 대학에서 그는 크립토 경제와 디지털 자율 조직들(digital autonomous organizations, DAOs)에서부터 다양한 형태의 디지털 커머닝과 그 너머까지 인터넷 문화를 연구하는 학술센터인 <미디어 경제 디자인 랩>(Media Economies Design Lab)을 이끌고 있다. 슈나이더의 연구를 아주 흥미롭게 만드는 점은 그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사와 탈식민 역사, 사회운동 전략들, 페미니즘 경제, 문화이론 그리고 초기 인터넷 역사의 유토피아적 비전들에 깊은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슈나이더는 이렇게 질문한다. “사회운동들이 인터넷의 레일 위를 그토록 자주 달리고 있는 시대에 어떻게 우리는 튼실한 힘을 창출하는가? 우리는 사회운동이 자신이 약속하고 널리 퍼뜨린 것들을 실행할 수 있게 하는 비판적인 관계들을 어떻게 창출하는가? 내 생각에는 디지털 공간에서 스스로를 다스리는 능력이이 가장 핵심적일 듯하다. 그러나 사회 운동은 튼실한 힘을 구축하도록 설계되지는 않은 네트워크들에 의존하고 있다. 이 네트워크들은 광고를 하고 사람들을 흥분시킬 목적으로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슈나이더는 소셜 미디어는 수동성과 기업들에의 의존을 조장하며 사용자가 주권을 갖고 통제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공간을 남겨두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짚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이 새로운 온라인 공간을 작동시키거나 디스코드(Discord)에서 또는 여러분이 사용중인 어떤 플랫폼에서든 채팅을 하는 경우 그것은 바로 그 하향식 구조 안으로 여러분을 유인한다. 공간을 창출하는 사람은 누구나 본질적으로 그 공간에 대해 절대적인 힘을 갖는다. 갈등을 처리하는 여러분의 유일한 도구는 검열과 추방이다. 이것이 함축된 봉건제의 논리이고 나는 그것이 한층 민주적인 온라인 공간들을 구축하는 데 유리하지 않은 교육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스토돈(Mastadon)―사용자들이 협력적으로 서버를 운영하는 오픈소스 트위터 같은 마이크로 블로그 사이트―을 언급하며 이와 같은 많은 대안들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새로운 유형의 민주적 거버넌스 온라인을 구축하기 위해 슈나이더는 진보적인 사람들이 일련의 ‘거버넌스 스택들’—서로 다른 기술 수준에서 작동하는 일련의 상호운영성이 있는 프로토콜을 가리키는 소프트웨어 용어—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믿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크립토—블록체인 같은 분산된 원장(元帳) 기술—가 설계 가능성의 파열을 제공한다고 믿고 있다.

분산된, P2P 소통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크립토는 기업들이 일반적으로 통제하는 중앙 집중식 서버에 의존하는 웹사이트들의 구조보다 참여자들의 힘이 더 평등한 구조의 가능성을 연다. 적어도 실제적인 상상계로서 크립토는 “다른 상징적이고 신화적인 참조점들이 있는 다른 세상과 다른 정치에 이르게 하는 매체이자 통로”라고 슈나이더는 쓰고 있다.

사실 주목할 만한 거버넌스 혁신들이 크립토 공간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다고 슈나이더는 말한다. 이 혁신들에는 다음의 것들이 포함된다. 선호하는 것들을 거의 실시간으로 평가하는 의사결정 과정들, 알고리즘을 통한 분쟁 해결, 널리 공유되고 있는 책임(성)과 이익 분배, 쉬운 탈퇴 및 시스템 분기 능력, 스스로 시행하는 보안과 검열 저항성, 외부로부터 통제나 규제를 받지 않는 주권, 온체인 활동의 투명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버넌스 활동을 위한 참신한 인터페이스들.

이 실험들 모두가 장기간에 걸쳐 일반적 목적들을 위해 그 가치를 입증하지는 않을 것이다. 크립토 세계의 많은 부분이 사기, 도박 그리고 투기적인 통화 거품으로 넘쳐나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디지털 자율 조직들은 네트워크화된 조직화를 훨씬 더 쉽게 만들지만 조직화가 곧 민주적 거버넌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더 큰 ‘사용자 통제’는 상대적으로 더 직접적이며 마찰이 없는 시장들, 이를 테면 주식 교환 또는 새로운 유형의 비즈니스 파트너십 및 투자 시장들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민주적인 돌파구가 전혀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슈나이더가 역사 및 탈식민을 다룬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들을 활용한 것이 매우 도움이 되는 것으로 판명된다. 듀보이스(W.E.B. Du Bois)와 앤젤라 데이비스(Angela Davis) 같은 사상가들은 억압적인 제도들을—노예제도든, 짐크로 법이든 감옥이든—폐지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슈나이더는 말한다.

시민권, 소속감 및 참여를 실제로 산출하는 대안적인 민주적 구조들을 구축해야 한다. 듀보이스에게 이 일의 큰 부분은 협동조합이었다. 그는 흑인 해방의 한 가지 본질적인 실천으로서 일상의 민주주의를 깊이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평균적인 진보적 단체의 웹사이트에 가면 참여하는 버튼이 없”고 기부하는 버튼만 있다고 슈나이더는 불평한다. 웹사이트는 보통 상향식 회원 자격을 구축하거나 집단행동을 동원하는 것을 돕기 위해 설계되지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봉사활동에서 리더십에 이르기까지 참여의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는 온라인 도구들을 우리가 디자인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사이트들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냥 의견만 교환하기보다는 힘을 발전시키도록 육성하고 북돋을 필요가 있다.”

슈나이더와 한 인터뷰에는 훨씬 더 흥미로운 것이 많다. 그 내용을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슈나이더의 책 『거버넌스 가능한 공간들』은 오픈 액세스 포맷으로 여기서 구할 수 있다. 또한 2020년 10월 슈나이더와 한 인터뷰를 이 팟캐스트 에피소드 7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에피소드는 이 블로그 게시글 http://commonstrans.net/?p=2258 번역되어 있다. 본문의 ‘에피소드 8’은 원문에 잘못 표기된 것을 옮긴 것이며, 실제로는 에피소드 7이다. — 역자]

 




자본에서 커먼즈로

 



1990년대와 2000년대 초에 인터넷 문화에는 희망에 찬 실험과 정치적 해방의 꿈이 넘쳤다. 통찰력 있는 디지털 활동가인 존 페리 발로우(John Perry Barlow)가 다음과 같이 웅대한 문장을 특징으로 한 유명한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Declaration of Independence of Cyberspace)을 발표했다.

산업계의 정부들, 살과 강철의 지루한 거인들이여, 나는 정신의 새로운 집인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왔노라. 나는 미래를 대표해서 과거에 속한 당신들에게 우리를 내버려두라고 요구하노라. 당신들은 우리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우리가 모이는 곳에서는 당신들에게 주권이 없다.

인터넷에 접속한 새내기들—그 당시에 우리 대부분이 새내기였다—에게 이 문장들은 인터넷을 통한 해방을 감동적으로 일별하게 해주었다. 그 당시의 파열적인 사회-기술적 혁신의 아찔한 속도를 생각한다면 이 문장들은 꽤 신뢰할 만하다. 여러분이 30세 미만이라면 프리 소프트웨어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의 급증을 둘러싼 흥분, 특히 레니게이드 운영체제[주석1]로서 리눅스 그리고 블로고스피어(blogosphere)와 위키(들)의 등장을 어쩌면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비트토렌트(BitTorrent) 및 P2P 파일 공유의 가능성이 따분하고 착취적인 음악 산업을 뛰어넘어 도약하자 어디에서나 정치적 반란자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를 통한 저작권법의 재창조로 일반 사람들이 컨텐츠를 공유할 권한을 합법적으로 인가할 수 있었고 동시에 무수한 여타 기술 혁신들이 협력 및 공유의 새로운 형태들을 촉진했다.
[옮긴이 주석: ‘레니게이드 운영체제’(renegade operating system)는 기존의 규범 혹은 표준에서 벗어난 운영체제(OS)를 가리킨다. 영어 명사 ‘renegade’는 ‘배반자’ 혹은 ‘배교자’를 의미한다. 블로고스피어(Blogosphere)는 커뮤니티나 소셜 네트워크 역할을 하는 모든 블로그들의 집합이다.]

자본주의와 국민국가들이 인터넷을 상업적인 시장으로서 철저히 길들였고 식민화했으므로 발로우의 선언문은 끔찍할 정도로 순진한 것이 된다. (그의 동시대 동료들―크립토 세계―이 비슷한 비현실적인 유토피아주의를 내놓았을지라도 말이다.)

자본가/국가 동맹은 인터넷에서의 사용자 주권을 효율적으로 억제하고 길들였다는 사실을 직시하자. 우리의 온라인 삶의 지리적 위치 감시를, 온라인 피드 및 여론에 대한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듬 조작을, 대안우파•러시아 및 여타 불량 집단들이 행하는 허위정보 공작과 해킹하기라는 조직적 활동을, 그리고 한때 단일했던 웹을 소규모 웹으로 분할하고 있는 기업의 페이월 및 국가의 방화벽을 생각해보라.

따라서 미국 웨스트조지아 대학의 지리학 교수인 하네스 게르하르트(Hannes Gerhardt)의 신간인 『자본에서 커먼즈까지: 자본 너머의 세상에 대한 전망을 탐색하기』(From Capital to Commons: Exploring the Promise of a World Beyond Capitalism)를 접하는 것은 기분이 상쾌해지는 일이었다. 빅테크의 독점, 순응적인 입법부, 그리고 정보기관들이 인터넷과 해커문화에 널리 퍼진 증가 일로에 있는 아이디어들을 분쇄했을지라도 게르하르트는 커머닝과 테크놀로지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이행을 실제로 실현하는 길들이 있다고 용감하게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어젠다를 ‘동료주의’라고 부른다. 이 동료주의는 이데올로기도 전략적 구상도 아니며 오히려 탈자본주의적 가능성들을 현실화하기 위한, 커먼즈로부터 영감을 받은 전망이다. 그는 책 첫 줄에서 자신의 임무를 요약한다. “커먼즈 중심의 협력적 생산형식이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데는 무엇이 필요한가?”

나는 디지털 공간들에서 그리고 생물물리학계에서 커먼즈를 추진하려는 게르하르트의 전략에 관하여 더 많기 알기 위해 팟캐스트 <커머닝의 프론티어>(에피소드 47)에서 그와 인터뷰를 했다.

게르하르트는 지난 50년간 인터넷 문화에 관한 광범위한 문헌—비평들, 역사들, 기술적 논쟁들—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의 책을 인터넷에 관한 많은 다른 책들과 구별 짓는 것은 과제들의 가치를 평가하는 그의 정치적 날카로움이다. 그는 “전지구적으로 디자인하고 지역에서 제조하는” 생산을 지원하는 방법에 관한 장들, 그리고 배전망 및 인터넷 자체와 같은 “기반시설을 민주화하기”에 관한 장들을 제시한다. 많은 기술 전문가들과 다르게 게르하르트는 자연세계의 경계선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래서 그는 재생자원으로서의 지역적 특성, 도시 폐기물 그리고 농업에 공간을 할애한다.

게르하르트는 “화폐와 가치”에 관한 두 개의 장에서 국가가 화폐 창출을 독점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데 시간을 또한 할애한다. 근대적 화폐 창출이 대출을 통해 무(無)에서 돈을 창출하는 개인은행에 아웃소싱되었으므로, 게르하르트는 기본소득 요소를 좀 가지고 있는 탈중심화된 지역 크립토 통화(예를 들어 써클즈Circles, 매너베이스Mannabase, 및 스위프트디맨드SwiftDemand)에 주목하고 한편으로는 비트코인 같은 자본주의적인 모험적 투기를 피한다.
[옮긴이 주석: 써클즈(Circles)는 공동체가 기본소득을 제공할 수 있는 대안 통화이다. 써클즈와 화폐에 대해서 http://commonstrans.net/?p=2306 참조. 매너베이스(Mannabase)는 전 세계 최초 기본소득 암호화폐용 온라인 플랫폼이다. 스위프트디메드(SwiftDemand)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보편적인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데 집중하는 새로운 디지털 통화이다.]

디지털 삶을 ‘공통화’하기 위한 전략적 기회들은 게르하르트가 논의할 수 있던 것보다 더 많이 있다. 저작권과 특허권의 독점적인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것, 반트러스트적 개입을 확대하는 것—이 주제와 관련하여 레베카 기블린(Rebecca Giblin)과 코리 닥터로우(Cory Doctorow)의 『관문 자본주의』(Chokepoint Capitalism)를 참조하라—그리고 홀로체인 같은, 커먼즈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프로토콜과 플랫폼들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것이 이 기회들에 포함된다. 어떻든 디지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너머로 나아가고자 하는 진지한 전략적 기획들을 숙고하는 것은 활기를 북돋우는 일이다.

하네스 게르하르트와 함께 한 팟캐스트 인터뷰를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인터뷰의 녹취록은 여기서 PDF 형태로 다운받을 수 있다.




커먼즈를 위한 건축–2008년 이후 건축의 과제

 


  • 저자  : Jose Sanchez
  • 원문 :  “Introduction : A Call for a Post-2008 Architectur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호세 산체스의 Architecture for the Commons : Participatory Systems in the Age of Platforms(Routledge, 2021)의 “Introduction”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저자 호세 산체스는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활동하는 건축가이자 게임디자이너이며 이론가이다. 그는 건축디자인 지식의 증식을 추구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Plethora Project(www.plethora-project.com)를 이끌고 있다. 그는 동네를 만드는 시뮬레이션 비디오 게임 Block’hood의 제작자이며 공동체를 건설하고 경제를 관리하는 비디오게임 Common’hood의 제작자이고, 대중들이 참가하여 동일한 유닛들로 설치물을 짓는 Bloom의 공동제작자이다. 글의 뒤에 필요할 듯 해서 보충설명을 달았다. 

 

우리의 건축은 항상 패러메트릭 건축이었다

20세기 말 건축분야에서는 우리가 건물들을 이해하고 짓는 방식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전환을 제안하는 혁신들이 일었다. 소프트웨어, 재료과학(material science), 디지털 패브리케이션(digital fabrication)(([정리자] 디지털 패브리케이션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제품을 제작하는 기술뿐만 아니라 형태를 만들고 재료 가공 및 시공까지 모든 과정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총칭하는 말이다. 일례로 3D 프린팅 기술이 여기에 속한다.)) 및 자동화 영역에서 일어난 기술혁신은 무한한 가변성과 주문제작이라는 비전을 제공했다. 인간의 인식과 맞물려있는 이 비전은 몰입환경으로서 주문제작되는 정동적 건축(affective architecture)을 나타낸다.(([정리자] ‘affective architecture’에 대해서는 가령 https://aalab.org/ 같은 사이트를 참조해보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 ‘새로운’ 건축—모든 디자인이 일회적인 건축—은 젊은 세대의 건축가들이 오늘날 실행하고 있는 방식의 핵심적인 부분이 되었다. 테크놀로지를 중심으로 하는 서사들이 이것을 입증했다. CNC(computer numerical control, 컴퓨터 수치제어장치) 테크놀로지에 의해 작동하는 디지털 패브리케이션이 대량생산 제품을 생산하는 동일한 비용으로 맞춤제작 형태들을 만들 수 있다는 전망은 젊은 세대의 건축가들이 이 새로운 건축을 채택하는 것을 완벽하게 찬성할 논리를 제공했다. CNC 테크놀로지는 대량 생산이 여러 해 동안 여타 산업들을 규정해온 상황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줄 한 가지 대안을, 다시 말해 의뢰인들이 항상 색다른 새로운 디자인을 찾을 것이기에 수요가 계속될 것이고 그럼으로써 디자인이 번성하게 될 그러한 대안을 약속하고 있었다.

‘일회적인’ 건축이라는 패러다임—건물을 지을 때마다 스스로를 재창조해야 하는 패러다임—에는 지어지는 환경의 구조적 구성에서부터 사업모델과 관례상의 수수료 배분에까지 세분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지속적으로 지원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 패러다임은 무상으로 일하거나 또는 충분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착취적인 업무에 고용되는 것이 일상인 경쟁적인 시장에 학생들이 참여하도록 준비시킴으로써 건축분야의 교육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것이 의뢰인들의 투기적인 산업관행으로, 또는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거나 전무한 건축공모 참가로 낭비되는 큰 규모의 디자인 노동의 결과이다.

이 맥락에서 패러매트릭 패러다임의 등장은 건축분야에서의 핵심적인 비능률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될 수 있다. 어떤 제안이 개발될 경우 그 과정 내내 디자인 베리에이션(([정리자] 베리에이션(variation)은 하나의 기본적인 형태를 변화시키는 작업이나 그 변화된 상태를 지칭한다.))을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에 패러메트릭 패러다임은 한 건축가가 건물 하나를 디자인 하는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데이터로 통제되는 다수의 가상의 건물들을 디자인하는 기술적인 작업흐름을 건축가에게 제공했다. 패러메트릭 소프트웨어는 건물을 물체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비율을 가지고 공존하면서 전반적인 일관성을 유지하는 요소들의 네크워크로 정의하며, 건축가들은 이것을 기반으로 예산이나 규정의 변화 및 의뢰인의 심경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고 수백 개의 가능한 디자인들을 설계할 수 있다.

패러메트릭 방법론으로 가능해진 다수의 가상 건물들은 자본주의의 생산성의 승리로 보일 수 있으며, 이 경우 디자이너 한 명의 노동이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어, 건물 하나하나가 유일할 수 있는 도시 전체를 설계할 수 있게 된다. 이 기술적이고 개념적인 기획은 건축협회와 인스부르크 대학 소속이자, <자하 하디드 아키텍쳐>(Zaha Hadid Architects) 소속 패트릭 슈마허(Patrik Schumacher)가 낸 ‘패러메트릭 어버니즘’(parametric urbanism)이라는 아이디어로 탐구되었다. 패러메트릭 어버니즘이라는 유토피아적 비전은 건물들을 지역 부지 조건에 조화시키면서 모든 건물과 도시 내지 지역의 세부 베리에이션을 제어할 수 있는 통합된 알고리즘적 스타일을 제안했다. 슈마허가 주장했듯이 이 제안 이면에 있는 유토피아주의는 건물들 사이의 시각적이거나 양식적인 유사성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디자이너가 넓은 영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디자이너 한 명의 노동과 비전의 규모를 키우는 능력의 잠재적인 승리에도 존재한다.

패러메트릭 모델이 대량 주문제작을 가능하게 하고 수백 혹은 수천 개의 건물들을 서로 다르게 짓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모델은 한 명의 디자이너가 끼치는 영향력을 키우지는 못했다. 패러메트릭 정의 안에 존재하는 가상의 다양성으로 인해 서로 상충하는 제안들이 생겨나는데 이 제안들 가운데 하나만이 실행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결국 다양한 가상적인 것들 가운데 단 하나만 현실화된다.

의뢰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패러메트릭 방법론 때문에 자신들의 요구에 근본적으로 상이하게 접근하는 제안들을 받아 볼 수 있고, 잠재력이 있는 디자인 분야를 탐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대하게 되었다. 어쨌든 건축을 발전시키는 데 상당량의 자본이 요구된다는 점으로 인해, 민간부문이든 공공부문이든 둘 다 건축환경의 영구적인 부분이 될 것에 관하여 최종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많은 양의 디자인 제안들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상식화되었다. 하지만 패러메트릭 모델은 그런 과제를 수행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패러메트릭 방법론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제안들이 아니라 한 가지 제안의 변형들을 제공하기에 더 적합하다는 것을 입증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베리에이션은 본질의 변화가 아니라 정도의 변화인 것이다.

그런데도 수년 동안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은 건축공모라는 형식을 통해 근본적으로 상이한 다수의 제안들—건물의 제약들을 제각각 주의 깊게 고려하는 제안들—을 즉각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건축가들과 협력했다. 건축공모는 궁극적인 패러메트릭 모델화 방법론으로 간주될 수 있다. 디자인 참여자들에게는 큰 비용을 치르게 하면서 의뢰인에게는 상당한 디자인 베리에이션을 거의 무료로 주어서 광범한 가상의 다양성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축공모는 디자인 베리에이션을 제공하는 패러메트릭 디자인 방법론의 모든 원칙을 따른다. 패러메트릭 디자인이 디지털적으로 창조되는 건물들 중 99%를 폐기하듯이 건축공모 역시 적합한 해결책에 도달하기 위해 경합하는 노동인력 풀로서 편성된 건축가들이 무보수 노동으로 만들어낸 디자인들 가운데 99%를 폐기한다. 이렇듯 건축공모들은 우리가 기꺼이 제공하는 노동이 보상을 받지 못하는 투기성 노동의 관행들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건축공모가 건축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오래된 관습이라는 사실은, 패러메트릭 건축이 실제로 출현하기 이전부터 항상 우리가 패러메트릭 패러다임 속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패러메트릭 어젠다가 획기적인 스타일이라고 한 패트릭 슈마허의 주장을 건축공모들이 입증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건축분야의 진보에 기여하고 보수를 받는 주문을 받으려는 수많은 건축가들의 열망 덕분에 그들에게서 공짜나 다름없는 가치를 뽑아낼 수 있는 조달 기술을 전지구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그렇게 된 것이지 자유로운 시장참여자들 사이에서 새로 출현하는, 서로 연결 짓는 것의 미학이라는 슈마허의 주장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건축분야의 오랜 관습인 건축공모와 달리 패러메트릭 디자인을 규정하는 시대는 ‘승자독식’ 이데올로기와 지식이 ‘낙수’ 형태로 증식된다는 사고방식 아래에서 작동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시대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 시대에 전위적 기획들을 위해 개발된 혁신이 점차 사회적으로 채택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항상 새로운 ‘일회성’ 건물을 추구하는 것은 문화적 채택이 이루어질 여지를 거의 남기지 못한다. 오히려 신자유시대의 승자독식 모델이 권력, 자본 및 부의 대규모 불균형을 만들어냈다.

 

건축의 양극화

상업적 수단을 통한 건축술의 혁신 추구는 자본의 대규모 축적에 의존한다. 수 세기 동안 건축가들은 자신들의 건축 비전을 발전시킬 후원자로서 활약할 수 있는 의뢰인을 찾고자 했다. 한 가지 상징적 사례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피터 루이스(Peter Lewis) 및 <루이스 레지던스>(Lewis Residence)와 맺은 관계이다.(([정리자] <루이스 레지던스>(Lewis Residence)는 실현되지는 않은 주택개발 기획이다.)) 게리는 자신의 의뢰인들 중 보험업에서 수십억을 번 피터 루이스로부터 8200만 달러 주택—루이스가 결국은 짓지 않기로 한 주택—의 다양한 버전들을 디자인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고 의뢰자인 루이스는 이 의뢰건에 대해 6년의 시간과 600만 달러 이상의 비용을 썼다. 게리는 루이스로부터 받은 돈이, 자신이 받은 ‘맥아서(MacArthur) 영재상’의 상금처럼, 아무런 제약 없이 자신의 가장 진보적인 생각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 돈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인정했다.

피터 루이스 같은 의뢰인들은 별로 없으며, 건축교육에서 그러한 기대감을 조장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양의 건축연구와 교육이 그러한 비현실적인 의뢰인에게서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뿐인 주문에 바쳐지고 있다. 건축분야는 이러한 불균형적인 과도함을 알게 되었고 이런 건축 관행들을 비판하는 시도들이 건축학 내부에서 이루어졌다. 일례로 건축계는 생태적 재난 내지 금융재앙 이후 집을 박탈당한 사람들과 그 이후 살 곳을 잃을 버린 사람들과 함께 하는 건축으로 시선을 돌려 인도주의적인 저소득 프로젝트들을 강조함으로써 건축의 윤리성을 재발견하고자 했다. 칠레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Alejandro Aravena)가 조직한 2016년 베네치아 건축 비엔날레는 차별적으로 격리되거나 대표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해결방안을 만들어낸 건축가들을 부각시켰는데, 여기서 전 세계 부동산 투기, 집단지식 풀의 강탈 그리고 우버 및 에어엔비처럼 이른바 ‘공유경제’로 공통적인 공간들에서 수익을 추출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두 가지 태도들 즉 한편으로는 엘리트 의뢰인들을 위한 디자인의 낭비와,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낭비의 비윤리성에 필연적으로 반발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불가피한 측면이다.

이 체제에서 승자독식이라는 사고방식은 종형곡선의 양끝에서 작동하며 곡선의 가운데 혹은 볼록한 부분—도시 건축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간계층이 이 부분에 위치한다—은 줄어들거나 사라졌으며 심지어 건축을 위한 기획으로서 관심을 끌지 않게 되었다. 전문가들은 자본의 비대칭성에 좌우되지 않는, 노동이 가진 가치를 분명히 할 권한을 긴급하게 되찾을 필요가 있다. 무임금 노동이나 충분한 임금을 받지 않는 노동을 통해 엘리트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전통을 거부하는 것이 그 첫 걸음이다. 진보적인 건축은 퇴행적인 사회 관행들과 동의어가 되었다. 이것은 다른 분야들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되는 구조적인 문제들이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건축물 건립에서 양극화가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무자비한 경쟁하에서 작동하는 연구와 실천으로 번성하는 분야가 있으며 여기서는 많은 관계자들이 성공해서 유명인 반열에 오르기 위해 기꺼이 공짜로 일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결과인 착취와 박탈을 바로잡으려고 건축의 엄격함과 건축의 핵심가치들로 전환하는 흐름이 있다.

 

‘가운데 부분’을 다시 활용하기

1914년 헨리 포드(Henry Ford)는 노동자들의 하루 최저임금을 그 당시 자동차 회사들의 평균 임금의 두 배에 맞먹는 5달러까지 올리기로 결심했다. 포드는 노동자들의 소비력이 그가 키우고자 시도하고 있는 산업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포드는 노동자들이 그들이 만들고 있는 자동차를 살 수 있게 하고자 했다. 오늘날 미국 건축가들은 상당한 금액의 학자금 대출금이 쌓인 후인지라 디자인하도록 요청받는 유형의 건축물을 살 여유가 없다. ‘스타 건축가’ 시스템에 의해 육성되는 오늘날의 건축문화는 충분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인턴 노동과 착취적인 관행들로부터 나오는 상당한 양의 보조를 필요로 한다. 사회적 어젠다에 맞물려있는 관행들조차도 무임금 인턴십의 보조에 의존하게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중산층을 위한 건축은 상업적 명령에 의해 추진되는 것처럼 보인다. 종형곡선의 가운데 부분은 건축가들의 수중에 없는 시장, 즉 렘 콜하스(Rem Koolhaas)가 ‘정크스페이스’(Junkspace)라 부른 것과 종종 관련되어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줄어들거나 사라진 이 종형 곡선의 가운데 부분을 다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가운데 부분은 맞춤 제작한 것의 매력이나 인도주의적인 원조라는 영웅적 면모가 없기에 더 이상은 건축분야에 중요한 것이 되지 못했다. 건축분야는 근대 건축 운동을 연상시키는 큰 서사에 참여하기를 여전히 두려워한다. 어쩌면 시장 바깥 혹은 시장 주위에서 작동하지 않는 비판적 담론과 실천을 발전시키는 방안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어젠다의 추출 명령에 의해 생겨나는 경제적인 교착상태 때문에 자율이라는 기획이 자급에 기반을 두어 나타나게 되었다. 이제 건축가들은 스스로를 그들이 생각하는 건축의 사용자이자 생산자로서 재설정할 수 있으며, 그들이 속하는 문화에 재접속하고 그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의 디자인 기여를 재조정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가운데 부분을 다시 활용하는 것이 금욕이나 긴축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긴축은, 정부가 애초에 문제를 발생시킨 금융기관들이 낼 세금을 인상하지 않고, 그 반대로 금융기관들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서 공공서비스를 대폭 줄이는 것이다. 주택위기가 의미하는 바는 점점 더 많은 수의 시민들이 자신들이 일하는 장소에서 살 만한 경제적 여유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공공부문과 커먼즈가 시장투기의 반대쪽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필요하다. 공동체주의에 기초한 운동들의 출현은 전통적으로 공적인 것/사적인 것의 이두체제였던 것에 세 번째 부분을 추가할 수 있게 한다.

 

2008년 이후 전망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해서 사람들은 자유주의 정부와 보수주의 정부 공히 신자유주의 경제를 얼마나 깊이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시스템이 다수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서서히 갖게 되었다. 모든 건축가들이 중간에서 꼭대기로 가치를 뽑아 올리는 경제모델을 받아들이는 쪽에 서있다는 것이 건축학계의 현실인 만큼 건축가들에게 2008년은 건축가들이 사용하는 도구가 사실상 어떻게 경제적 어젠다를 내포하고 있는 사회-기술적 시스템인지를 숙고하도록 경종을 울린 한 해였다. 건축물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자본 뒤에 있는 경제적인 충동들과 동기들에서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사회-기술적 관점에서 보면 현 경제 관행이 선택한 최고의 무기는 디지털 플랫폼이다. 자본이 이것을 사용자들의 표준화와 자본 추출을 위한 도구로서 사용하게 된 것이다. 플랫폼은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전지구적 조직체들이며 사용자들끼리 소통하는 규칙들을 부과하고 플랫폼에서의 거래를 모니터링해서 획득한 지식에서 이윤을 추출한다. 플랫폼들은 시장 규제를 우회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두드러진 형태의 경제 불평등을 수반한다.

건축분야에서 건축공모는 초기의 플랫폼이자 어쩌면 훨씬 더 원시적이고 악의적인 플랫폼일 것이며 또한 보수를 지불할 가치가 있는 노동과 그렇지 않은 노동을 결정한다. 공모에 지원하는 경쟁은 투기적인 노동형태로 되어 있으며, 이는 트레버 숄츠(Trebor Scholz)가 주장한대로 고용, 노동시간 및 최저임금과 관련된 시장규제를 우회하는 메커니즘이 되었다. 우버의 경우처럼, 공모에 지원하는 건축가들의 경쟁으로 인해 자기 자신이 결정권자이고 주어진 요청에 참여하기 위해 보상받지 못할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건축가 기업가’라는 상이 극찬을 받는다.

2008년 금융위기는 건축계 자체의 투기 시장 내부에서 활약하는 건축가들 세대에게 깨달음을 주는 경험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건축가들은 자신들이 디자인 작업에서 승자독식 경제 시스템을 받아들였고 공모나 다른 플랫폼 제공자들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라며 매우 자주 무료로 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적인 예로 부상하는 <노!스펙 운동>(No!Spec movement)은 우리 건축가들이 비윤리적인 사업 관행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과 대안적인 모델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예기치 못한 깨달음을 나타낸다. 금융위기는 저항운동의 급증을 촉진했으며 이는 시장이 규제받지 않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알려준다. 규제받지 않는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투기성 노동은 구조적인 분할을 낳고 불평등을 증가시키므로 권력 불균형을 촉진하는 것이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는 대안들의 생산을 촉진하기도 했다. 우리가 참여하는 노동의 주권을 강조하는 공동체 번영의 모델들을 제작하려는 하부구조와 이데올로기를 연결시키는 사회-기술적 인식을 촉진한 것이다. 리차드 스톨먼(Richard Stallman)의 일반공중사용허가서(General Purpose License) 및 카피레프트 운동에서처럼 사용자들 간의 지식 증식을 보장하는 라이선스 계약 창출, 블록체인 기술의 출현에서처럼 분산된 방식으로 신뢰를 보증할 수 있는 분산원장들의 창출 그리고 알라스테어 파빈(Alastair Parvin)의 위키하우스 작업의 경우처럼 적정 가격으로 사용자들이 빌딩 솔루션을 스스로 마련할 수 있게 하는 건축의 오픈소스 형태 디자인이 이 모델들에 속한다.

 

건축 커먼즈의 틀 형성하기

이 책은 다섯 개의 장으로 나뉜다. 1장 「건축술의 발달」에서는 신자유주의의 명령 아래 작동하는 건축을 비판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한다. 먼저 건축술의 진보라는 생각이 과연 시민들의 번영에 이바지했는지를 묻고 인풋 당 아웃풋 효율의 증가(ephemeralization)라는 약속이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검토한다. 첫째 물음에 대해서는 건출술의 진보가 혁신을 일반대중에게로 ‘내려 보내지’ 못했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다음으로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시장 인클로저를 통해 작동하는지를 살펴본다. 신자유주의는 공적 도메인의 힘을 정의하는 규정들을 무너뜨리는 시스템으로서, 저자는 그러한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가치는 커먼즈로부터 추출된다고 주장한다.(([여기서 저자는 커먼즈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인다―정리자] 커먼즈는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저술을 통해 정식화되었을 뿐 아니라 데이비드 볼리어(David Bollier)와 마시모 데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의 관점—공동체적인 부의 창출에 참여하는 사회구조들 뿐 아니라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공유재 둘 다를 포함하는 정의를 모으고자 시도하는 관점—을 통해서도 정식화되었다.))

2장 「부분들의 융합」에서는 어떻게 추출적인 관행들이 건축에 분명히 나타났는지를 더 깊이 파고든다. 시장 다양성을 파괴하면서 수직적 통합을 이루는 대규모 제조활동이 자본 축적의 논리에 의해서 발생하게 되는 경향을 소개한다. 수직적 통합의 발생은 기술적인 어셈블리에 필요한 부분들의 수를 줄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제조에 명확한 혁신들을 제공했다. 3D 프린팅 같은 최근 과학기술들은 이전에 표준화된 구성요소들을 해체하는 식으로 수행적인 이점들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수직적 통합으로의 경향은 패러메트릭 디자인 패러다임과 명확한 상관관계가 있다. 이 장에서 저자는 패러메트릭 모델이 적은 수의 인구에 복무하고 시장 다양성에 충격을 주었다는 것을 짚어보고자 한다.

3장 「부분들을 옹호하여」에서는 디자인과 제조 분야에서 부분들의 사회적 어포던스(([정리자] 어포던스란 주체가 특정의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객체가 ‘제공’하는 관계를 가리킨다.))를 이해함으로써 대안적인 디자인에 필요한 제안들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다양한 다수의 행위자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건축 디자인의 분야가 공급자들 간의 협동 및 연계의 효율적인 형태들을 찾을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러한 노력이 1950년대의 <모듈협회>’(Modular Society) (([정리자] ‘Modular Society’는 책의 한 장으로서 크리스틴 월이 쓴 장 이름이기도 하지만, 원래 그 당시 영국의 협회 이름이다. 현재 희의록 등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https://discovery.nationalarchives.gov.uk/details/r/C2327371))같은 기관들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대의 시도들은 디지털 네트워크의 출현을 통해 동질화되지 않는 차원 연계의 구조들을 제공하고자 한다.(([정리자] 과거 <모됼협회>는 동질화와 표준화에 기반을 두었다.))

이와 관련해서 제시되는 틀은 연속적인 패러메트릭 모델에 의해 제시되는 ‘일회성의’ 모델과는 대립적인 위치에 있는 ‘이산(離散) 건축’(Discrete Architecture)이라는 패러다임이다. 이는 재조합 능력의 측면에서 부분들이 디자인되고 연구되며 다양한 생산물을 산출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다. 디자인은 이산 건축을 통해 다원적이고 비독점적인 생산 접근법을 유지할 필요성을 받아들인다. ‘디자인 커먼즈’의 산출을 위해 부분들의 ‘조합에 의한 잉여’(combinatorial surplus)의 연구 및 이 부분들이 가진 어포던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산(적) 건축의 이점들이 검토되며, 재사용가능한 패턴들이 정보 네트워크를 통해 전파될 수 있도록 하는 조합 디자인을 채택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4장 「비물질적 건축」에서는 네트워크 기반 시설이 감시 자본주의의 실행에 활용되었을지라도 사용자들에게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는 디지털 네트워크를 디자인하고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제시한다. 플랫폼이 추출 도구가 되는 것에서 협력 도구가 되는 것으로 이행하기 위해 플랫폼이 극복해야 하는 과제들에 대한 지도그리기를 한다. 트레버 숄츠(Trebor Scholz)가 옹호한 바의 ‘플랫폼 협동조합주의’(Platform Cooperativism) 같은 아이디어들을 여기서 살펴본다. 더 나아가 커먼즈에 복무하는 오픈소스 건축모델들의 저장소를 잠재적으로 생성시키면서 사용자들 간의 협동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건축용 플랫폼을 개발할 가능성을 이곳 4장에서 고찰한다. 비디오게임 기술이 플레이어들 사이의 협동 모델과 디지털 공동체에 참여하는 전통을 제공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5장 「자급을 통한 재구축」에서는 커먼즈가 다양성이라는 아이디어에 기초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자유를 확립하리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감시 자본주의에 의해 발전되는 기반시설에서는 특정 형태의 지성, 즉 사용자들의 정보를 모아놓은 집적 데이터(aggregate data)에서 생성되지만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얻어지는 지성이 효율적으로 배치되어왔지만, 이와는 다르게 커먼즈는 위계로서 작동하지 않는, 서로 합의하는 형태의 공동의 기반시설을 재구축할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5장에서는 어떻게 우리가 기울어지지 않은 운동장을 유지하고 진입장벽을 낮추어 설계하면서 민주주의와 관리를 테크놀로지에 함입할 수 있는지를 짚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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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설명]

건축술은 모두가 배워야 할 것이다. 모두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 존 러스킨

근대에 일어난 커먼즈의 대대적인 상실은 무엇보다도, 삶을 재생산하는 터인 ‘집’(home)의 상실이었다. 이 상실의 상황은 자본주의가 매우 발전한 탈근대에 들어와서도 호전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집의 상실이라는 상황이 거의 자연 상태에 해당하는 기본 설정이 되었다. 다수의 사람들의 경우 집을 구성하는 하드웨어인 주택(house)이란 것이 노동하는 사회생활을 매우 오랫동안 하고 나서야 간신히 확보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사실 주택을 안정되게 확보하는 일은 어떤 이들에게는 거의 평생이 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에게는 ‘평생’으로도 부족하다. 노동력은 재생산되어야 쓰일 수 있는데, 그 재생산의 터가 노동력이 한참 동안 쓰인 후에야 확보될 수 있다니! 아니, 평생을 노동해도 불가능하다니! 자본은 이런 모순적 상황 위에서, 즉 삶의 재생산 터의 ‘기본적’ 결핍을 기반으로 해서 자신을 증식한다.

그래서 커먼즈 되찾기는 집 되찾기를 필수적으로 포함한다. 그리고 집 되찾기에는 집을 구성하는 하드웨어를 박탈하는 메커니즘인 투기적 주택시장의 극복이 필수적으로 포함된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하자면 커먼즈 특유의 방식으로 주택을 확보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이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인 5장 「자급을 통한 재구축」“Reconstruction through Self-provision”의 내용의 일부를 포함한다.)

우선 자급을 원칙으로 한다. “자급의 실천이 공통적인 것의 현실화이다.” 자신의 집을 자기가 짓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인이 아무런 지식도 (아직은?) 없는 상태에서 DIY로 자신의 집을 짓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저자는 우선 건축가들이 자신들의 집을 짓는 데서 출발하는 것을 제안한다. 여기서 집의 디자인과 관련된 전문적인 지식이 생산되는데, 그 다음으로 이 지식을 일반 대중에게 전달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이것을 저자는 ‘해득력 사다리를 채우기’(to populate a literacy ladder)라고 부른다. 해득력 사다리는 전문가들이 생산한 지식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시스템으로서, 전문가들의 수준에서 가장 초보자 대중의 수준에 이르는 지식의 스펙트럼을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 사다리는 지식의 스펙트럼이 어떻게 새로운 미경험 사용자들과 전문가들 사이에 배치되는가에 의해 규정된다.”

이 해득력 사다리에서 지식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순환되는 데 그칠 경우에는 이것을 ‘약한 사다리’라고 부르고 초보적 수준에서 전문가 수준으로 점차적으로 올라가는 로드맵이 잘 되어 있으면 이것을 ‘강한 사다리’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서 해득력 사다리의 핵심은 가장 높은 수준과 가장 낮은 수준을 원활히 연결하여 초보자도 이 사다리를 타고 자신의 능력과 노력이 허용하는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저자는 이것이 단순히 테크놀로지(지식 생산)의 민주화라기보다는 민주주의를 테크놀로지(지식 생산)에 함입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내 식으로 풀자면, 테크놀로지의 민주화는 (대체로 사용자의 고정된 능력을 전제로 한) 테크놀로지 사용의 평등한 분배이고, 민주주의를 테크놀로지에 함입하는 것은 모두가 테크놀로지 사용자로서만이 아니라 테크놀로지 생산자로서의 능력을 자유롭게 배양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강한 사다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문턱을 낮추어 디자인하기’가 필요하다. 진입장벽이 낮아야 많은 사람들이 사다리 안에 들어올 수 있고 사다리 안이 더 열린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해득력 사다리를 만드는 것 자체가 자원의 집합소로서만이 아니라 ‘사회체계로서의 커먼즈’(마시모 데 안젤리스)의 생산으로 이어진다. 실제 집을 만드는 실천이 집짓기와 관련된 지식의 생산과 연결되므로, 저자가 제안하는 방안은 위키피디아, 리눅스 같은 비물질적 생산의 프로젝트를 물질적 생산으로 확대하는 방안이기도 하고, 단순한 참여―상부에서의 의사결정에 사용하기 위한 데이터 수집을 대중이 일시적으로 거드는 것―에서 자급으로 이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 자급은 아직은 국가로부터의 조달을 대체한다기보다는 보완하여 국가 및 시장 양자와 협상할 수 있는 시민조직들을 생성하는 것이 주된 일이다.

건축 분야에서 참여에서 자급으로 움직인 대표적 사례로 파빈(Alastair Parvin) 등의 위키하우스(Whikihouse)가 있으며, 건축가들이 자신들의 집만 짓는 것을 넘어서서 이룩한, 자급의 한 형태로서의 커먼즈를 위한, 그리고 커먼즈에 의한 건축의 기획으로는 Open City(1971)가 있다.((이 기획에 대한 사례연구로 Rodrigo Pérez de Arce and Fernando Pérez Oyarzún, Valparaiso Schoo /Open City Group, ed. by Raul Rispa (Birkhauser, 2003) 참조.))

[정백수]




퍼더필드 — 예술과 게임이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다

 



공상적이지만 거의 현실적인 시나리오가 여기 있다. 여러분의 지역사회 공원에 있는 꿀벌들, 다람쥐들, 거위들, 곤충들, 나무들 등등의 종(種)들이 인간의 침범과 학대를 충분히 겪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들은 더 이상 참지 않고 들고 일어나 인간이 가진 것과 동일한 권리를 요구할 작정이다. 종들 간의 일련의 회합을 통해 지역 생태계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번성을 보장하는 협정/협약이 타결된다.

이 시나리오는 <퍼더필드>(Furtherfield, 런던에 기반을 둔 예술공동체)가 빅토리아 시대 핀즈베리 파크의 일부 지역에 대한 파수의 일환으로서 고안한 ‘라이브 액션 롤플레잉’(live action role-playing, LARP)게임이다. 앞으로 3년에 걸쳐 <퍼더필드>는 프로젝트의 이름인 <핀즈베리 파크 2025 협정/협약>(The Treaty of Finsbury Park 2025)을 진행해나갈 때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각각 일곱 가지 종들의 역할을 하도록 요청할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풍뎅이와 다람쥐 종의 대표자들로서 <종(種)간 회의>에 참석하도록 함으로써 LARP게임이 목표로 하는 것은 사람들이 “놀이를 통해 인간이 아닌 생명체들에 공감하는 경로들”을 발전시키도록 돕는 것이다. 서로 다른 종들이 소통하도록 돕는 직감 다이얼(Sentience Dial)도 있다. 누가 알겠는가? 이 과정이 실제로 핀즈베리 파크를 더 무성하고 활기 넘치는 장소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 진기한 애니미즘 경험은 <퍼더필드>가 지난 25년 동안 주최해온 프로젝트들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이 프로젝트들 대부분은 예술, 디지털 기술 및 사회적 행동을 일정한 창조적인 방식으로 섞는다. 최근 『커머닝의 프런티어』(Frontiers of Commoning) 팟캐스트(에피소드 #24)에서 나는 세상에 대해 새로이 생각하는 방식으로서 참여예술에 대한 <퍼더필드>의 독특한 접근법에 관하여 루스 캐틀로우(Ruth Catlow)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술가, 큐레이터이자 <퍼더필드>의 공동대표인 캐틀로우는 1996년에 <퍼더필드>를 시작한 이래로 많은 예술 프로젝트들을 이끌어 온 비전을 가진 사람이다. 그녀는 지역적, 일국적 및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다양한 파트너들과의, 특히나 평범한 사람들과의 협동작업을 조직하는 것을 돕는다. <퍼더필드>의 많은 예술작업과 테크놀로지 기획들의 핵심은 우리가 세상을 다르게 보도록 하려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위해 새로운 미래를 그리는 경우 예술이 하는 역할을 존중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퍼더필드>의 프로젝트들 대부분은 런던 소재 핀즈베리 파크에 있는 녹지 공간 및 미술관에서 그리고 예술가들•기술자들•활동가들을 불러 모으는 다양한 디지털 공간에서 열린다. 지역 공무원들이 <퍼더필드>의 예술 프로젝트들을 펼칠 참여적인 무대로서 공원을 사용하도록 <퍼더필드>측에 청했다. 전통주의자들은 이 단체를 예술의 센터라고 부르겠지만 <퍼더필드>측은 자신들의 활동이 외부 지향적이고 네트워크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재미있게도 ‘디-센터’(de-center, 탈-중심)라고 부른다.

<퍼더필드>는 흥미를 유발시키며 장난기가 다분한 기발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예술적 실험들의 주최자라고 자임한다. 이 탐구적 실험들은 오픈소스 테크놀로지와 철학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퍼더필드> 자신들의 말로는) “현존하는 권력들을 파열시키고 민주화”하며 “지형을 새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일례로 <흑인의 삶도 중요하다> 시위들이 무수히 일어나 미국과 전 세계 도시를 흔들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노예소유자 사업가들과 군장성들이 공원에 청동 조각상으로 세워지는 영광을 입은 이유를 문제삼기 시작했다. <퍼더필드>는 공원에 있는 받침대 위에 지금 있는 것 대신에 누가 또는 무엇이 놓여서 기념되어야 할지에 대하여 공개 토론을 열기로 결정했다.

예술가들은 ‘시민 공원 받침대’ 프로젝트(The People’s Park Plinth project)측으로부터 공원에서 기념하게 될 새로운 사람들이나 물건을 제안하도록 요청을 받았다. 이 과정의 매개체는 스마트폰이었다. 공원에서 산책하는 사람들이 나무나 동상 받침대에 부착된 QR코드를 스캔하면 공원 내의 해당 장소에 관한 영상을 즉각 볼 수 있었다. 사실상, 이 프로젝트가 스스로를 설명했듯이, 이 프로젝트는 “공원 전체를, 여러분이 여러분의 공원에 원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하는, 디지털 예술작품을 위한 공공 플랫폼으로” 바꾸었다.

누구나 제안된 예술품 몇 개에 투표할 수 있었다. 1위를 차지한 작품—에이샤 탄 존스(Ayesha Tan Jones)가 제작한 <나무 이야기에 바탕을 두어>(Based on a Tree Story)—은 나무에 있는 QR코드를 사용하여 그곳에 사는 나무 요정의 영상을 호출하는 예술작품이었다. (“장소 특유의, 청각적 증강현실을 통해 나무의 과거•현재•미래의 이야기를 하는 디지털 나무 요정과 조우하기”)

예술작품을 선정하기 위한 공개적인 투표는 그 자체로 상당히 새로웠다. 각 참가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하나의 예술작품에 투표권을 한 번 행사하는 식이 아니었다. 그들이 원하는 만큼 많은 예술작품들 각각에 투표할 수 있는 다수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제곱 투표”(quadratic voting)라 불리는 이 방식은 어떤 프로젝트가 과반수를 얻는지를 그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떤 것에 가장 열광하는지를 보여주는 쪽이다. 이 시스템은 소수의 목소리를 무효화하는 “다수의 횡포”라는 문제점과 파당성이 강한 집단들이 방해물로 작용하는 상황을 극복할 목적으로 구상되었다.

<퍼더필드>의 더 흥미로운 역할들 중 하나는 어떻게 블록체인 소프트웨어가 네트워크 시대에 예술을 재발명하는 것을 도울 수 있는지에 관하여 실험실을 열고 예술가들과 기술전문가들 간 일련의 토론들을 주최한 것이었다. 핵심은 문화 부문이 어떻게 “피어 생산방식으로 생산된, 예술•문화•사회를 위한 탈중심화된 디지털 인프라에 이르는 길”을—특히 탈중심화된 자율조직들(Decentralised Autonomous Organisations, DAOs)을 통해서—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퍼더필드>는 “예술계에서 게이트키핑과 엘리트주의를 끝내”고 “규모에 제한이 없는 상호의존과 상호협력을 위한, 회복력 있고 변화도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한 가지 길로서 이 깊고 근본적인 우애의 정신을 가져오기”를 원했다. <퍼더필드>는 또한 기술 부문에서 아주 많은 탈중심화된 자율조직들을 활기 띠게 하는 자유의지적인 개인주의를 넘어가기를 원했다.

<퍼더필드>의 회합들의 결과로 두 권의 책이 나왔다. 하나는 『블록체인을 다시 생각하는 예술가들』(Artists RE:thinking the Blockchain, 2017)—예술가들이 블록체인에 비판적으로 참여하는 활동에 관한 책—이고 다른 하나는 2022년 5월에 출간되는 『급진적인 친구들』(Radical Friends)—예술계에서의 디지털 자율조직들(DAOs)의 위험 및 이 조직들에 대안이 되는 커먼즈 기반 디지털 자율조직들에 관한 선집—이다. “<퍼더필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안적 조직들에 “DAOs with Others”를 나타내는 두문자어 ‘DAOW’라는 이름을 붙인다.”

루스 캐틀로우와 나눈 팟캐스트 대화는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자본을 넘어선 미래와 크립토 커먼즈

 


  • 저자  : Sarah Manski
  • 원문 :  crypto-commoners only want the earth crypto commons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https://www.shareable.net/에 실린 글 “A post-capitalist guide to the future: crypto-commoners only want the earth”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의 저자인 맨스키(Sarah Manski)는 정치경제학자, 윤리학자, 세계적인 테크놀로지스트이자 조지메이슨 대학교 교수이다. 맨스키는 또한 <VERSES.io>와 씨바나 재단(Civana Foundation)의 고문이며, P2P재단과 조지메이슨 대학교의 사회과학연구 센터의 연구자이고, 미국 국립과학재단의 SBIR 프로그램의 전문 검토위원이다. 그녀는 지난 25년 동안 활동가, 노동조직가, 저널리스트, 연구자 및 ‘비즈니스/글로벌 어페어즈’ 교수로서 노동자들에게 자율권을 주는 프로젝트에 참여해왔다.

크립토 커먼즈의 확대를 위해 일하고 있는 테크놀로지스트들이 2021년 8월 28일부터 9월 3일까지의 일정으로 오스트리아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작은 시골 호텔에서 <크립토 커먼즈 개더링 2021>(Crypto Commons Gathering 2021, CCG21)을 개최하고 여기서 크립토 커먼즈의 확대를 위한 테크놀로지 설계 및 개발 방향을 논의했다. 이 글은 저자가 <크립토 커먼즈 개더링 2021>에 발표자로 참여하여 행사의 개최 취지와 크립토 커먼즈의 확대를 위해 일하고 있는 몇몇 참석자들의 아이디어 및 그들의 활동을 소개하는 일종의 기행일기이다.

저자는 암호화가 본격적으로 미국인의 삶속으로 진입해 들어가고 있고 도처에 만연될 날이 머지않은 것으로 진단한다.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를 주류로 끌어들이는 새로운 응용프로그램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지만 암호화폐의 일종인 비트코인을 매입하고 사용하는 것은 여전히 까다로운 과정이다. 하지만 처음으로 수백 개의 미국은행의 지점들이 곧 기존 계좌를 통해 암호화폐를 구입하고 보유하며 팔 수 있을 것이므로 변화가 생길 것으로 보고 있다. 비트코인이란 다음의 것을 포함하는 다양한 테크놀로지들을 중심으로 하는 대규모 전지구적인 움직임을 응용한 것들 가운데 가장 가시적인 것일 뿐이다.

  • 분산원장들
  • 열린 혁신 생태계들
  • 사회적 기업들
  • 플랫폼 협동조합들
  • 탈중심화된 데이터 관리 인프라들
  • 지역 혁신가들과 P2P 네트워크들
  • 마켓스페이스와 지방 연구소들
  • 바이오핵랩들(bio-hacklabs)
  • 커먼즈 기반의 글로벌 정치경제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토큰 경제와 새로운 가치 시스템들

생산•관계•소유권의 대안적인 형태를 창출하기 위하여 다채로운 창발적인 커뮤니티들이 테크놀로지의 사용을 실험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적인 추출•착취•시장경쟁 및 사적 소유를 넘어서는 근본적으로 새롭고 다른 논리―공통의 선, 글로벌 커먼즈에 기반을 둔 공유, 탈중심화 및 협력―를 실험하고 있다.

<크립토 커먼즈 개더링 2021>의 장소는 오스트리아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작은 시골 호텔이다. 이곳에 모인, 스스로를 크립토커머너들(CryptoCommoners)이라 부르는 테크놀로지스트들의 임무는 크립토 커먼즈(Crypto Commons)의 확대를 위해 일하는 실무자들과 교수들을 모아서 전지구적인 운동을 하기 위한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다. <크립토 커먼즈 개더링 2021>은 탐구적인 활동과 학문적인 연구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상호적으로 유익하도록 설계되었다. 이 글의 저자인 맨스키를 포함해서 대략 30여 명의 남녀 테크놀로지스트들이 <크립토 커먼즈 개더링 2021>에 참석했다. 맨스키는 이 글에서 5명의 테크놀로지스트들 소개하고 있으며 아울러 바우엔스의 기조발제(“Commoning as a mode of production”)의 내용을 전해준다.

맨스키 자신의 연구는 인류에게 미치는 테크놀로지의 영향력과 결부되어 새로이 등장하는 윤리적 문제들 그리고 가치•소유•생산•공평함•노동과정•사회적 역동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가진 커먼즈 기반 경제 모델이 구축될 수 있는 방법에 초점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해 맨스키는 “시장에서 긍정적인 행동을 촉진하고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줄이기 위해 사람들에게 자율권을 주는 경제 모델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는가?” 그리고 “새롭고 지속가능한 커먼즈 기반 경제를 창출하는데 블록체인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를 연구한다.

조쉬(Josh, ‘블록체인 사회주의자’로도 알려져 있다)는 블랙체인 세계의 커먼즈 운동 부문에 있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주간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고 <브레드체인 프로젝트>(BreadChain Project)에서 일한다. <브레드체인>은 탈중심화된 협력기획들을 위한 공동의 소유권 분야에서 자원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크립토 커먼즈 개더링 2021>이 열린 회의장소와 숙소를 제공한 펠릭스(Felix)는 <크립토 커먼즈 개더링>의 주요 조직자이다.

스콧 모리스(Scott Morris, ‘토큰 제디’라고도 알려져 있다)는 <QOIN> 재단의 공동 설립자로 지역화폐 분야에서 협력적인 토큰 생태계를 설계하는 데 힘쓰고 있다. 그는 또한 뱅코르 백서(Bancor whitepaper)의 공인되지 않은 저자이다. 뱅코르는 스마트 토큰이라 불리는 새로운 종류의 디지털 자산을 확립하기 위한 첫 기획이었다. 스마트 계약은 디지털 자산을 운영하는 한 방법으로 하나 이상의 기존의 토큰이 준비금으로 유지되는 것을 요구한다. 스마트 계약에 교환 가능한 토큰을 준비금으로 보유함으로써 사람들은 누구나 쉽게 아무 때나 스마트 토큰을 매입하거나 현금화할 수 있다.

자감(Michael Zargham)은 <블록싸이언스>(BlockScience)―복잡계를 전문으로 다루는 엔지니어링, R&D 및 분석회사이다―의 설립자이자 CEO이며 혁신적인 아이디어나 테크놀로지의 힘을 활용하는 모델링 프레임워크와 강력한 시뮬레이션 도구인 소프트웨어 ‘복잡적응역동계 컴퓨터지원설계’(Complex Adaptive Dynamics Computer-Aided Design, cadCAD)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또한 그는 <메타거버넌스 프로젝트>(Metagovernance Project)에서 일하고 있다. ‘복잡적응역동계 컴퓨터지원설계’는 시스템의 복잡성을 인지하면서도 시스템 디자인을 단순하고 통찰력 있는 어떤 것으로 전환시킬 목적으로 설계되었다. 자감의 설명에 따르면 인터넷 상에서 자치는 자연권이 아니다. 인터넷 상에서의 자치는 사람들이 상호작용하는 플랫폼의 아키텍처에 의해 가능해지거나 제한되며, 같은 아키텍처는 사용자들이 생성하는 별개의 기관들의 상호작용을 제어한다. 메타거버넌스가 이 자치의 두 가지 관련 역할들—사용자들이 자신의 기관을 창출하는 그들의 능력을 가능하게 하기/제약하기, 개별 기관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치하기—을 의미한다.

에멧(Jeff Emmett)은 <오그먼티드 본딩 커브즈>(Augmented Bonding Curves)에서 활동 중이다. 그는 <블록싸이언스>에서 자감을 위해 커뮤니케이션 관련 일을 하며 <더 커먼즈 스택>(The Commons Stack) 소속 핵심 조직자이다. ‘오그먼티드 본딩 커브’는 지역사회가 운영하는 지속적인 조직체들을 위한 새로운 펀딩 모델을 창출할 경우, 내재 가치를 가진 암호화된 토큰을 보유한 초기 사용자들을 보상하도록 설계된다. ‘오그먼티드 본딩 커브’에는 자금 풀(funding pool), 토큰 잠금/수령권 메커니즘 및 시스템간 피드백 회로가 포함되어 있다.

<더 커먼즈 스택>의 임무는 오픈소스 도서관, 상호운영적인 웹3 부품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인센티브 일치, 지속적인 자금지원, 지역사회 거버넌스를 통해 공공재를 지속시키는 커먼즈 기반 미시 경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더 커먼즈 스택>은 효과적인 새로운 도구들을 지역사회에 맡기게 될 것인데 이 도구들 때문에 지역사회는 공유자금을 늘리고 분배할 수 있으며 투명한 결정을 하고 커먼즈 지원사업의 진행사항을 추적•관찰할 수 있다. 그들은 ‘최소한의 자립 커먼즈’(Minimum Viable Commons)를 창출할 구성요소로서 다음 네 가지를 구축했다.

  • ‘오그먼티드 본딩 커브’가 지속가능한 자금을 지역사회에 제공한다.
  • ‘기베스 댑’(Giveth Dapp)은 제안과 에스크로 서버스를 제공한다.
  • 연속적인 의사결정 거버넌스 과정인 ‘확신 투표’(Conviction Voting)((확신투표는 특정 시점에서 구성원 전체의 다수결로 어떤 제안의 채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제안에 대한 구성원들의 선호도를 일정 기간 축적하여 가장 선호도가 큰 제안을 확인하는 결정방식이다.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토큰을 자신이 선호하는 제안에 걸며, 이런 식으로 각 제안에 걸린 토큰의 양과 이 토큰들이 걸려있는 시간의 양을 토대로 제안에 대한 구성원들의 선호도가 계산된다.)) 플랫폼
  • 커먼즈 분석 대시보드 (이것은 cadCAD로 움직인다)

바우엔스는 커먼즈의 내부 경제와 외부 세계 사이의 인터페이스로서 작동할 무언가의 필요성을 오랫동안 강조해왔는데 바로 ‘오그먼티드 본딩 커브’가 이 역할을 한다. 바우엔스는 <커먼즈 트랜지션>(Commons Transition, 커먼즈 사회로 향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책 개발 플랫폼)의 연구 책임자이자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볼리어(David Bollier)와 함께 <커먼즈 전략 그룹>(Commons Strategies Group)의 창립 멤버로, 동료 생산, 거버넌스, 재산권을 탐구하는 분야에서 전 세계 연구자 집단과 공동연구를 한다. 바우엔스는 영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로 된 몇 권의 책과 보고서들을 공동 출간했는데 주요 작품들에 속하는 것으로 『협력 경제를 위한 네트워크 사회와 미래 시나리오』(Network Society and Future Scenarios for a Collaborative Economy)가 있으며, 보다 최근에 나온 『P2P: 커먼즈 선언』 (P2P: A Commons Manifesto)이 있다.

늘 그렇듯이 바우엔스는 커먼즈 경제가 인간 상호작용의 첫 형태였고 자본주의의 종획이 소수의 이익을 위해 공통의 부를 해체한다고 언급하며 발표를 시작한다. 바우엔스의 주장에 따르면 1993년, 인터넷이 커먼즈 역사에서 새로운 국면의 도래를 알렸다. 인터넷을 사용하여 국가의 외부에서 조직화를 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비트코인 프로토콜이 세상에 등장한 2008년 이후로 전지구적인 규모의 커먼즈가 발전하고 엄청나게 성장했으며 그것은 모든 개인들이 다른 어떤 개인에게 연결될 수 있는 P2P방식의 관계 역학, 즉 새로운 유형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자유를 탄생시켰다.

허가가 필요 없는 블록체인들(신뢰와 무관한 블록체인 또는 퍼블릭 블록체인으로도 알려져 있다)은 합의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이용 가능한 열린 네트워크이다. 블록체인은 이 과정을 거래와 데이터를 인증하기 위해 사용한다. 이 블록체인들은 알려지지 않은 거래당사자들 전체를 가로질러 완전히 탈중심화된 형태로 존재한다. 바우엔스는 이러한 블록체인들의 특징이 커먼즈 실천에 참여한 전통적인 인간 소그룹들의 특징이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즉 글로벌 오프소스 시민네트워크들의 가능성 그리고 국가 위계구조 및 자본주의 시장의 동학 둘 다의 역량을 능가하는 생성적인 경제 연합체들의 가능성을 창출한다.

물론 이 상상적인 유토피아에 대한 몇 가지 경고 사항들이 있다. 바우엔스는 모든 서버가 자율적이라는 P2P개념은 지속적인 커머닝(자원들을 공동 출자하고 상호화하며 공유하는 자유로운 연합) 능력과 갈등관계에 놓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기존의 권력 불균형과 불평등을 강화할 수도 있다(사회를 개별 기업가들의 집합으로 보는 무정부주의적자본주의적, 자유방임적소유주의적 비전). 커먼즈 관점과 하이퍼마켓 관점 사이의 차이가 심대하다. 이것을 크립토커머너들과 비트코인브로들(BitcoinBros)이 서로 공존하며 경쟁하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라고 생각해보자. 누구든지 이기는 쪽이 미래를 차지할 것이다.

<크립토 커먼즈 개더링 2021>에 모인 참석자들은 미래를 위한 장기적인 시스템 설계는 다음의 공유된 원칙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 이해관계자 인센티브 일치는 꼭 해야 하는 일이다.
  •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오픈소스여야 하며, 강력한 공학적인 실천들을 통합하는 반복적인 개발을 보장하는,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고 의미론적으로 호환이 되는 프로토콜을 가능케 해야 할 것이다.
  • 다중심적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 시스템은 ‘지구 위험 한계선’(planetary boundary) 개념에 기반을 둔 생태경제학을 포함해야 한다.
  • 그것은 설계상으로 생체 모방이어야 한다.

맨스키는 다음 단락으로 글을 맺는다.

우리의 목표는 크립토 커먼즈와 전 세계 협동조합 운동을 연결하는 방법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관건은 자본주의에 투여되던 자금 가운데 수조 달러를 더 순환적인 경제로 돌리는 데 어떤 종류의 도구와 생태계가 가장 잘 활용될 것인가였다. 우리가 공유한 합의는 다음과 같다. 정확한 계획과 절차가 정해지는 데 수년이 걸릴지라도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은 이 새롭고 재생성적인 시스템 하에서 모든 인류를 연합시키는 데에는 함께 나눌 이야기가 필요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공들여 만드는데 전념하고 있다. 함께 말이다.

 




지역화폐, 사회적 자본 및 기본소득에 관한 토론

 


  • 저자  : Valentin Seehausen, Julio Linares, Inte Gloerich
  • 원문 :  Discussion on Community Currencies, Social Capital & Basic Income https://networkcultures.org/moneylab/2021/04/16/moneylab-11-discussion-on-community-currencies-social-capital-basic-incom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대선의 열기가 서서히 오르는 모양이다. 대의민주주의가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흡수하는 시즌이 오고 있는 것이다. 대의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삶의 문제가 아닌 권력의 문제로서, 삶의 외부에서 삶을 제한하는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배어들도록 만드는 무대이다. 이 무대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 ‘할 일’은 시야가 이 무대 안에 갇힌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시야는 민주주의가 다시 삶 전체로 돌아온 세상을 향해있다. 우리가 보기에 민주주의의 문제는 단지 좁은 의미의 정치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영역들 전체와 관련된다. 화폐의 영역도 여기에 포함된다. 화폐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의 표현일 뿐인데, 이것이 사회적 삶에 외부에 존재하며 사회적 삶을 제한하는 것이 됨으로써 곧 권력이 되었고 더 나아가 물신(物神)이 되었다. 대안근대를 지향하는 우리로서는 화폐를 권력이 아니라 다시 삶의 힘으로 되돌려놓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바로 이것이 화폐의 민주화의 핵심이다. 이번 글에서는 다른 곳에서 이 화폐의 민주화를 어떻게 고민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기본소득이나 지역화폐는 이미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것이기에 내용이 새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실제적 노력의 사례들을 들어보는 것도 우리에게 좋은 경험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소개하려는 텍스트는 2021년 3월 27일 있었던, 머니랩(MoneyLab)의 11차 워크숍 ‘지역화폐, 사회 자본 및 기본소득에 관한 토론’(Discussion on Community Currencies, Social Capital & Basic Income)을 녹취한 것이다. 실제 토론의 동영상은 이곳에 가면 볼 수 있다. 토론자인 훌리오는 <써클즈> 소속이고 발렌틴은 <쏘셜코인> 소속이며 진행을 본 인테는 <머니랩> 소속이다. 내용정리이지만 대화체를 유지했으며, 녹취록에서 발견한 몇 개의 오류는 동영상을 보고 수정했다. [정백수]

인테
우리가 왜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까요? 지역화폐(공동체화폐)와 기본소득은 초창기부터 <머니랩>(Moneylab)의 주제였습니다. 지금 시기(팬데믹 기간)에 적절한 것은 무엇일까요? 제가 여러분 둘 다의 프로젝트에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동체에의 헌신입니다.

홀리오
저는 과테말라 출신 경제인류학자이며 사회활동으로서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기본소득을 어떻게 실현할지, 그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지에 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저를 인류학으로 이끌었습니다. 화폐를 다시 생각하는 방식으로서 화폐의 인류학, 가치의 인류학으로 말이죠.

<써클즈>가 가지고 있는 주요 아이디어들 중 하나가, 국가가 기본소득을 제공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기본소득의 창출과 관련된 패러다임 전환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민주적 화폐 이론’(DMT)이라 부릅니다. 이에 따르면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약속의 징표를 발행하여 은행 또는 국가와의 관계와 무관하게 상호적으로 빚을 지고 빚에서 벗어납니다.

제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힘의 느낌, 돈을 창출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느낌을 갖게 해주는 것이고, 돈을 창출하는 힘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화폐 취득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을 화폐발행자로서 느끼게 만들고 경제가 어떻게 조직되는지에 대한 통제력과 발언권을 갖도록 만드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발렌틴
당신의 말이 이해가 됩니다. 저에게는 지역화폐(공동체화폐)가 사회/경제 이론에서 실천성을 얻는 한 가지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화폐시스템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시작했고 정치에 입문할까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나름의 소규모 대안적인 금융시스템을 시작하는 것은 어떤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종종 지역화폐를 추동하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하는 요인입니다. 우리, 즉 민중을 위한 세상이죠. 물론 이것은 제 주관적인 견해이지만요.

우리는 지역화폐를 아래로부터 창출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에 지역화폐들이 있고 그 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만약 우리가 화폐시스템(monetary system)을 아래로부터 창출한다면 어떻게 될까를 보여주는 본보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써클즈>(Circles)와 <쏘셜코인>(Social Coin)은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로 실험을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지역화폐들이 화폐를 실험하는 작은 실험실인지도 모르죠.

인테
우리는 야심찬 생각들에서 출발하지만 지역화폐가 그 생각들을 실천에 옮기는 한 가지 방식입니다. 그런데 또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가령 제가 ‘쏘셜 코인’을 사용하기 위해 <써클즈> 커뮤니티에 참여할 기회가 있다면 그 동기는 무엇일까요? 제가 무엇을 살 수 있을까요?

발렌틴
이것이 지역화폐가 답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 모두 호모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이론(집안 살림의 효용을 극대화하기)을 알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 이론은 전적으로 결함이 있지만 여전히 그 안에 진실이 좀 들어있습니다. 공동체에 기여하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돌아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이익이 공동체에 기여한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경제적 이익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이 공정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근(Siegen)에서 경제적 이익은 전기차나 전기자전거를 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홀리오
저는 거시적인 문제에 대한 논의, 화폐, 테크놀로지는 다 하나라고 항상 말합니다. 화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회기반시설, 즉 다른 모든 생산자들, 다른 모든 물류 제공자들, 서비스 제공자들, 돌봄 노동 제공자들, 경제의 일부인 모든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사회구조입니다. 경제는 집안 살림, 즉 오이코스(Oikos)입니다만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집만이 아니라 지역입니다. 그래서 이곳 베를린에서 우리는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맥주 제조업자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농부와 함께할 수도 있고 자전거 공유 협동조합과 함께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그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잉여를, 그리고 코로나/위기시기에 충분히 이용되지 않은 자원을 추가적인 유동성(liquidity)으로 변형시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술집들이 문을 닫았기에 팔 수 없는 50리터 맥주통을 가지고 있는 맥주회사 소유주와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써클즈>에 그것을 팔아서 행복한 상태이며, 맥주를 더 많이 팔기 위해 지역 라디오에 홍보를 하는 데 그 돈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발렌틴이 말하고 있는 바입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서로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그들을 연결시키는 방식을 생각해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 자신만이 아니라 더 큰 어떤 것을 실제로 부양하고 있는 셈입니다. 잉여가 더 큰 지역사회로 갈수 있도록 하는 방법론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자원들의 흐름을 창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테
지역공동체 건설이 핵심 작업이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지역공동체의 신뢰와 네트워크가 없다면 그것은 작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진공상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국가의 맥락에서 법정화폐 시스템 및 세금 시스템과 함께 존재합니다. 당신의 프로젝트는 더 광범위한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존재합니까? 이 프로젝트는 고립된 지역들로서 존재하나요? 아니면 전체시스템이 바뀌는 것을 보고 싶은 건가요?

홀리오
독일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은 화폐란 사회에 대한 일정한 요구의 표현이라는 점에 관해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사회에서 사용하는 화폐의 유형들이 다양한 차원들―상상력, 무급노동, 유급노동―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요소들이 화폐형태로 반영됩니다. 그래서 저에게 중요한 것은, 화폐를 다루고 정치적인 싸움에 뛰어듦으로써 우리는 바로 화폐시스템 전체의 헤게모니에 도전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발렌틴과 함께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시민들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할 수 있는 시장(市長)들의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창출하려는 노력입니다. 우리는 일군의 다양한 시스템들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써클즈>는 그것들 중 하나일 뿐이고 우리는 지역의 조건과 욕구가 무엇인지를 보고 사용될 수 있는 일단의 도구들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존재하는 일국의 국가시스템과 함께 공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미국의 사례가 항상 적절한데, 미국에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의 통제를 받는 국가시스템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광범위한 수준에서 공존하는, 국가보다 하위의 시스템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지자체들이 폭넓은 스펙트럼의 이익을 보완하고 조율하는 방식으로서 지역의 기본소득을 지역화폐로 발행하여 잠재적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지급할 수 있습니다.

저로 말하자면, 저는 아나키스트입니다. 국민국가를 믿지 않고 자본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폐지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순간 어떤 상황에 있는지에 대하여 실질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이 구조들이 몰락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며, 제가 하고 있는 것은 그것들이 더 잘 몰락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좌중의 웃음]

발렌틴
토론이 시작된지 20분이 지나서 당신이 스스로 아나키스트임을 이렇게 폭로하는 것이 정말 좋군요. 저는 동조하는 편입니다. 시스템을 바꾸는 방식이고 힘을 지방자치제 수준으로 되돌려주는 방식이니까요. 국가들이 있고 국제적인 기구들이 있습니다. 아나키스트가 아닌 저는 그것들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또한 저는 금융시스템이 사회의 소수에게 복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0%나 1%의 사람들은 실질적인 혜택을 많이 받지만, 50%의 사람들은  실질적인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전 세계에서 극빈 상태에 있는 사람이 (잘은 모르지만) 아마 50%일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충분한 식량이 없고 그것이 제 관점에서는 재앙입니다.

신자유주의자로 유명한 하이에크는 탈국가화된 화폐라는 생각을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해 하는 것은, 화폐가 탈국가화되어 모든 사람이 화폐를 발행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봐요, 이것이 발렌틴-코인입니다, 사용해보세요’라고 말할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요? 무슨 일로 그러시죠?’라고 말할 거구요. 그러나 예를 들어 베를린 시장이 베를린-코인을 발행한다면 사람들은 실제로 그것을 사용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베를린 시에 힘이 있음을 의미할 것이고 화폐 주조로 얻는 이익은 실제로 베를린으로, 지방자치단체로, 작은 마을들과 가난한 시골로 돌아갈 것입니다. 지역의 화폐로 실험하기 시작할 경우 이것은 그 지역사회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 멋진 프로젝트가 더 광범위한 맥락에 가져올 수 있는 전환과 관련하여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입니다. 지역화폐들이 수백 년 동안은 아니더라도 수십 년 동안 존재했지만 그것은 지금까지도 대부분 불법이었는데, 그러다가 블록체인이 등장했습니다. 블록체인은 효력을 정지시키기 불가능한 화폐를 발행했는데, 이는 블록체인이 매우 탈중심화되어 있어서 어떤 정부나 권력도 거기에 실제로 개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가들이 바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암호화폐를 합법화하고 규제하는 것입니다. 국가들은 이것이 없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렸고 그래서 그것을 시험하고 통제하는 규칙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암호화폐는 합법적이 되고 우리가 실제로 그것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이것이 올해 들어와서 제가 흥미롭다고 느낀 점입니다. 규제자들과 국가들이 지역화폐가 실제로 존재하기 위한 법적 틀을 만들고 있다니 말입니다. 저는 지역화폐를 관철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로비스트입니다. 지역화폐의 관철이 제가 이곳에 있는 이유이고, 제가 보고 싶은 정책 변화입니다.

인테
하지만 지근에서 <쏘셜코인>은 블록체인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렇죠? 그래서 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당신은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위한 특수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발렌틴
공동체는 그때그때 사용가능한 테크놀로지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가령 뵈어글(Wörgl)—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유명한 사례죠—의 기술은 ‘우리가 지폐를 발행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스탬프를 찍는다’였습니다.[정리자―1932년 오스트리아의 도시 뵈어글에서 대공황에 대응하여 지역화폐(지폐)를 발행했다. 이 지폐는 화폐소지자들이 빨리 사용하도록 자극하기 위해 매달 1%의 가치가 상실되도록 고안되었다. 이 지역화폐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오스트리아의 다른 도시들도 유사한 실험들을 계획했다. 이 지역화폐는 1933년 말 행정법원에 의해 금지되었다. 텍스트에서 “스탬프”는 지폐에 찍는 도장을 가리킨다. (첨부한 사진 참조) 첨부한 사진은 자유이용저작물이며 그 출처는 https://en.wikipedia.org/wiki/W%C3%B6rgl#/media/File:Freigeld1.jpg이다.] 그때 서비스 제공은 중앙집권화되어 있었고 그 핵심은 당신이 서비스 제공자에게 가서 지폐를 원장에서 삭제하면 화폐의 효력이 정지된다는 것입니다. 블록체인은 추적하기가 불가능하고 효력을 정지시키기 불가능하게 만든 테크놀로지일 뿐입니다. 탈중심화된 화폐가 이렇듯 기술로 작동하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저는 블록체인 자체의 힘을 믿지 않습니다. 많은 지역화폐들과 다양한 토큰들이 있는 세상이 오면 우리는 열광하겠지만, 여기에 블록체인이 반드시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역화폐를 금지해온 규칙을 깨기 위해서는 블록체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우리를 신뢰하고 우리의 파트너들을 신뢰하며 얼굴을 아는 사람들을 신뢰하고 인간을 신뢰한다면, 블록체인이 필요 없습니다.

인테
그러면 당신은 블록체인의 유무와 무관하게 열린 공간이 창출된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우리는 지금까지 실질적인 혜택을, 사회적인 맥락을 다루었는데요, 이제는 당신들의 가장 유토피아적인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워크숍에서 당신들은 당신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무엇이 당신들을 걱정스럽게 만드는지에 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미래에 무엇이 가능할지,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원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미래의 지평 위에 있는 이 지점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이겠죠.

발렌틴
유토피아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문제에 아주 많은 측면들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좋아합니다. 일국적 수준에서 저는 부유세와 보편적 기본소득의 광팬입니다. 국제적인 수준에서 세계정부가 있다면, 그리고 보편적 기본소득으로서 재분배되는 전지구적인 부유세가 생긴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 될 것입니다. 점점 더 불평등해지는 금융 시스템의 추세가 부유세와 보편적 기본소득 덕분에 평등 쪽으로 역전될 수 있습니다. 인간 사회가 그것으로부터 전적으로 혜택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역화폐 로비스트의 관점에서 저는 안전한 법적 환경을 갖고 싶습니다. 저는 법 문제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만, 이 문제는 여전히 매우 복잡하군요. 우리는 테크놀로지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제 생각에 법적 문제가 지역화폐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크게 미흡한 사안입니다. ‘당신에게 지역화폐가 있고 그것이 백만 파운드 미만이면 우리는 그것을 규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넘으면 우리가 규제할 것이다’와 같은 구조가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정치로부터 요구하는 어떤 것입니다.

인테
홀리오는 미래 정부에 관해 이와는 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겠죠?

홀리오
어려운 문제죠. 이것은 정치경제와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블록체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고 법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테크놀로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의 실제적인 핵심은 힘, 즉 경제적 힘과 정치적 힘(권력)과 관련된 문제들입니다.  법 문제는 매우 재미있는데, 이는 오늘날 법적으로는 국가들 말고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체가 민간은행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은행 면허를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신이 그들의 자산을 처리할 권리가, 그들의 노동을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럼으로써 이 불평등한 권력구조들을 창출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저는 국제적인 수준에서 부유세와 보편적 기본소득은 놀라운 것이라는 발렌틴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제가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직접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실천적으로 생각할 때 그곳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화폐를 민주화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화폐를 영토로 본다면, 우리가 화폐를 민주화한다고 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은, 지역적으로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다양한 생산자들 사이에서 경제적 관계, 정치적 관계, 생태적 관계를 재(再)지역화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서 당신은 권력의 실제적인 탈중심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 즉 권력의 탈중심화가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써클즈>에서 우리는 다음의 네 가지 원칙에 관해 이야기 합니다. 로컬리즘(전지구적 문제의 지역적 해결), 권력의 탈중심화, 지속가능성(관계들을 더 지역적으로 묶고 더 상호의존적인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 방법들을 찾는 것) 그리고 민주적인 연합주의가 그것입니다. 민주적인 의회들이 서로 연합할 수 있지만 정치적 힘은 항상 국민들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그 규모를 확대해야 할 매우 실천적인 메커니즘이며, 이렇게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가장 실천적인 유토피아일 것입니다.  화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관련됩니다. 화폐를 넘어서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삶의 민주화입니다. 이것은 권력의 문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권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가 권력으로 변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부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 많은 재앙을 일으킨 사람들이 많은 권력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치적 힘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조직화된 대중들을 통해서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축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인테
제가 채팅을 읽어봤는데 여기에 사회적 재생산에 관한 질문이 있습니다. 지역화폐와 보편적 기본소득이 어떻게 우리가 창출하고자 하는 사회에서 자리를 잡나요? 어떤 가치들이 시스템에서 작동하는 토큰 형태로 재현됩니까? 그 기획은 어떻게 공동체와 공존합니까? 그것이 어때야 할지에 관한 생각들이 달라서 서로 경쟁한다면 어떻게 되죠? 그 과정은 어떻게 진행됩니까? 그리고 토큰 같은 아주 실질적이고 코드에 기반을 둔 어떤 것과 창출하고자 하는 사회와 같은 추상적인 문제를 어떻게 연결시키는지요?

홀리오
사회적 재생산의 측면에서 우리는 가족, 특히 여성들에게 많은 돌봄의 부담이 부과됨으로써 지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폭력이 또한 증가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기본소득은 많은 착취적인 관계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길입니다. 혹은 사람들이 자신을 돌보고 다른 사람을 돌보며 그들을 둘러싼 사회의 환경을 돌볼 수 있는 소득 기반을 갖게 해주는 것입니다. ‘온전한’ 기본소득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시간을 팔지 않고, 임금을 위해 자신을 임대하지 않고 삶을 살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어떤 것입니다.

오늘날 화폐 시스템은 생산영역에서 비롯합니다. 고용주가 노동자를 고용하고 그들은 일하러 갑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있기 위해 그리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사기 위해 임금을 가정으로 가져갑니다. 커먼즈에는 화폐가 없습니다. 사회적 재생산이 번성할 수 있게 해주는 화폐-커먼즈, 바로 이것이 우리가 구축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커먼즈도 성장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적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우리의 돌봄 실천들, 사회적 재생산의 실천들이 번성할 수 있는 가치체계를 창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마존>과 대규모 식품기업들 같은 거대 기업들에의 의존을 통해 더욱더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에서부터 우리의 땅까지, 우리가 서로에게 하는 약속까지 우리가 지켜야 할 영토를 창출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인테
발렌틴 씨, <쏘셜코인>은 어떻습니까?

발렌틴
사회가 어떻게 실제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화폐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핵심인, 홀리오가 내 마음에 그려준 큰 그림에 대해 생각하는 중입니다. 그러나 가치들의 문제로 한정하자면··· 저는 우리가 지근에서 사용하는 이 화폐—‘쏘셜 코인’—에 붙일 명칭을 찾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공통 화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전기차(앞으로 세 대를 구비할 예정입니다)와 전기자전거라는 공통재(커먼즈)가 있습니다. 제가 일하는 단체는 이 공통재를, 이 전기 차량들을 지역민들에게 보급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급할 도구로서 화폐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실험중입니다. 첫 번째 아이디어는 자원봉사를 한 사람들에게 전기차에 사용할 수 있는 코인을 나눠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보편적 기본소득을 시행할 계획인데 이는 모든 인간이 이 공유자원을 소비할 권리를 동등하게 가짐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런데 커먼즈와 연관된 가치들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재산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유재산과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커먼즈의 가치를 어떻게 정의할 것입니까? 이것은 정말로 재미있는 질문입니다.

인테
커먼즈로서의 화폐라는 생각, 저는 이것을 좀 더 설명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홀리오, 몇 분이면 설명할 수 있겠죠? 돈은 보통 개인의 소유이기 때문인데···

홀리오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노동•토지•화폐라는 세 가지 가짜 상품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가짜 상품들로 생각하는 점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이는 이 세 가지가 항상 상품으로 존재한 것이 아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노동시간, 노동, 몸이 항상 상품으로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토지가 항상 개인소유의 상품으로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가령 텃밭이 언제나 상품으로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화폐도 마찬가지입니다. 화폐는 부채이며 신용관계이고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입니다. 서로에게 하는 약속과 같은 유형의 사회적 관계입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 상품화되었고 개인 소유의 상품이 되었습니다. 맑스의 정의를 따른다면, 자본주의를 M-C-M′으로 정의할 것입니다. 화폐가 더 많은 화폐를 만드는 것, 화폐를 팔아 상품을 사서 그것으로 화폐를 더 많이 버는 것이죠.

가치를 나타내는 징표(토큰)의 사물화 또는 물신화가 발생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것을 화폐라고 부르는데, 화폐는 이자를 낳는 부채 등의 과정을 통해서 확장하고 우리는 이것을 성장 등등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로 지구를 망치는 것입니다. 커먼즈를 희생하면서, 토지를 희생하면서, 우리의 몸을 희생하면서, 지구의 가치를 희생하면서 일어나는 이 물신의 증가, 화폐라는 신의 증가가 지구를 망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화폐의 상품화가 아니라 공통화(commonification)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민주주의의 문제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전부 공동소유자인 곳에서 어떻게 화폐를 창출할까요? 사유재산이 없는 곳에서, 화폐가 민간은행에 의해 소유되지 않는 곳에서, 화폐가 국가에 의해 소유되지 않는 곳에서, 화폐가 우리가 발행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 실제로 공유자원인 곳에서, 자원의 유형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곳에서, 우리는 어떻게 화폐를 창출할까요?

오늘날 우리는 이런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기다리면서 우리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지대(자산소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현재로서는 이것을 어떻게 할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화폐의 공통화가 기본소득으로 주어질 때 우리 몸은 임금노동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고 상품으로서의 화폐 또한 해방시킬 수 있으며, 이 과정을 통해 토지를 탈상품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화폐를 개인소유의 상품으로부터 공통재로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현 자본주의적인 위기에 대안을 제공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오고 있는 주된 이론적 핵심입니다. 우리는 근원으로 가야 합니다. 화폐는 수메르의 지구라트[정리자―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전] 이후로 줄곧 지난 5천년 이상 동안 문제가 있었습니다. 모든 성직자들이 사람들을 채무자로 만들어서 속박상태에 묶어두었던 것입니다. 그 기나긴 역사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군산복합체로 죽 이어집니다. 미국 군대는 세계에서 오염을 제일 많이 발생시키며 미국 달러로 자금을 마련합니다. 민중이 화폐를 창출하는 힘을 되찾지 못하면 우리는 문제의 근원으로 가지 못할 것입니다.

인테
마무리할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만 사람들이 녹화된 토론을 보고자 할 경우에 대비해서 앞으로 워크숍에서 여러분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발언할 시간을 각각 드리고 싶습니다.

발렌틴
워크숍의 제목은 ‘비정부기구(NGO)로서 지역화폐를 시작하는 법’입니다. 우리가 NGO로서 이 화폐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직접해보는 워크숍이 될 것입니다. 워크숍에서 저는 제가 지역화폐를 시작하면서 겪었던 모든 경험을 공유할 것입니다. 그리고 미리 알려드리는 바이지만 우리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멉니다. ‘이 발걸음을 뒤따르시면 지역화폐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가 아닙니다. 저는 다만 제 경험을 공유할 것입니다. 저는 실천적 경험을 가지고 있는 워크숍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과 실제로 토론을 하고 싶고 배우고 싶습니다. 그들이 어떤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지, 그들의 프로젝트가 어떤 것인지 토론을 통해 알고 싶습니다.

홀리오
우선 저는 정치적 힘(권력)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고 <써클즈>가 교환과 상호의무의 측면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감을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화폐의 두 가지 측면에 대해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저는 최근에 출판된 안내서를 죽 훑어볼 것입니다. 이 안내서는 <써클즈>가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고 또한 오늘 제가 말한 몇 가지 원칙들을 설명하며 기본적으로 지역에서의 조직방법론을 제시합니다. 조직화는 생산자들과 상인들의 회로에서 시작해서 그들이 고용하는 노동자들로, 거기서 다시 공동체 전체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매우 실천적인 작업이며 우리가 매달 마지막 일요일에 가지는 회의에서 하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든 이 토론을 듣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함께하는 것을 환영합니다. 시작하는 법에 대한 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축의 전환―트럼프의 쇠퇴, 녹색당의 부상 및 사회적 변화의 새로운 좌표

 


  • 저자  :  Otto Scharmer
  • 원문 : Axial Shift: The Decline of Trump, the Rise of the Greens, and the New Coordinates of Societal Change (2018년 9월 8일)
  • 분류 : 내용 정리
  • 옮긴이 : 민서

2018년 9월 7일에 있었던 미국 중간 선거가 미국이 좌파와 우파라는 양극단으로 치닫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결과라는 평가가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공유되고 있다. 하지만 오토 샤르머(Otto Scharmer)는 이 평가가 20세기 렌즈(즉 좌파냐 우파냐)로 21세기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와는 다른 시각으로 근본적인 축의 전환(axial shift)을 다루면서 정치적•경제적•문화적 공간의 좌표를 재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축의 전환은 지적 담론을 형성하는 좌표의 새로운 체계이다. 그에 설명에 따르면 미국의 중간선거는 물론 브라질•독일•이탈리아에서의 최근 선거 결과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갈등의 축은 더 이상 좌파와 우파 사이가 아니라 열린 쪽과 닫힌 쪽 사이에 있다. 그런데 이러한 축의 환은 정치에 국한해서 일어나는 일은 아니며 경제 및 교육 체계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샤르머는 정치•경제•교육체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축의 전환—① 정치적 전환 ② 경제적 전환 ③ 교육의 전환—이 20세기의 전통적인 공적담론을 새로운 담론으로 대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정치적 전환>


그림 1 새로운 정치의 축

 

그림 1에서 가로축 방향은 20세기의 낡은 갈등선을, 세로축 방향은 부상하는 21세기의 양극성을 나타낸다. 가로축의 기초가 되는 차이는, 예를 들어 ‘좌파’는 정부 서비스를 늘림으로써 문제에 대응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우파’는 개인들의 주도권을 촉진함으로써 같은 쟁점에 대응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세로축의 기초가 되는 차이는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가 열림(개방) 대 닫힘(폐쇄)라고 부른 것으로, 도널드 트럼프와 새로이 선출된 브라질 대통령 자이르 볼소나루(Jair Bolsonaro)를 통해 이 ‘닫힘’(Closed)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다. 닫힘은 두려움•혐오•무지라는 세 요소를 증폭시키고 다섯 가지 행동 형태―① 맹목적임blinding(현실을 보지 않음) ② 감지하지 못함de-sensing(다른 사람들과 공감하지 못함) ③ 결여됨absencing(자신의 최고의 미래와의 관련성을 상실함) ④ 다른 사람들을 비난함blaming others(반성할 능력이 없음) ⑤ 파괴함destroying(자연파괴, 관계 파괴 및 자기파괴)―로 나타나는 심리상태를 의미한다. 샤르머는 이 다섯 가지 행동 형태들이 각본이 되어 지난 2년에 걸쳐 정치를 다시 만들었으며, 이는 이 행동 형태들이 마이크로 타기팅(micro-targeting)과 다크 포스트(dark post) 같은 소셜미디어 메커니즘들로 무기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이 메커니즘들이 디지털 공명실(digital echo chamber)에서처럼 우리의 고립을 증가시키고 전례없는 수준에서 이런 치명적인 행동들을 증폭시킨 것인데 ① 미 연방 대법원에서의 브렛 캐버노(Brett Kavanaugh)의 인준 ② 학교, 종교기관 및 공공장소에서의 대량 총기 발사 ③ 기후변화가 이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최근 사례들에 해당한다. 한 가지 사례(기후변화)만 예를 들어보자.

 

과학적인 증거를 수용하지 않음(맹목적임). 특히 지구상의 후진 지역에서 희생자들의 수가 증가하는 것에 공감하지 못함(감지하지 못함). 환경보호국(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을 해체함(결여됨). 기후과학과 기후 과학자들의 신뢰성을 적극적으로 약화시킴(다른 사람들을 비난함). 그리고 파리협약(Paris Agreement)에서 탈퇴함(문명을 자기파괴로 향하는 길로 몰아넣음).

 

그리고 샤르머는 이 사례들이 트럼프주의(Trumpism)의 각본이기도 해서 브라질의 트럼프로 평가되는 볼소나루가 선거운동에서 이 각본의 대부분을 따라할 만큼 정치적으로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그에게 투표했는가? 샤르머는 이 물음에 낡은 체제가 유권자인 그들을 실망시켰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현 체제를 파열시키고 ‘적폐를 청산’하겠다고 약속하는 후보자에게 표를 던진 것이라고 답한다.

그림2: 두 개의 사회적 장: 함께 창조하기(현재화)의 주기 및 파괴하기(결여됨)의 주기

 

샤르머는 실제적인 정치적•경제적•문화적 대안의 부재가 오히려 세로축의 위쪽 부분(그림 1, 2)에 있는 엄청난 잠재성을 활성화시킬 징후로 본다. 예를 들어 그는 그림1과 그림2에서 좌우 축의 바깥쪽과 위쪽에 위치한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의 2/3 가량이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 투표했고, 독일에서 최근에 치러진 두 번의 선거에서도 중도좌파인 사회민주당(SPD)과 중도보수당(CDU)이 연립정부를 구성하는데 실패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한편 선거에서 부상한 두 주요 당선자는 세로축의 끝에 놓이는데 아래쪽 끝에는 난민에 반대하는 <독일을 위한 대안> 소속의 당선자가 놓이고 위쪽 끝에는 녹색당 소속의 당선자가 놓인다. 샤르머는 극보수주의적인 성향의 남부 바이에른에서의 독일 녹색당의 부상과 텍사스에서의 미국 민주당의 부상—민주당 소속의 베토 오르크(Beto O’Rourke)는 텍사스에서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테드 크루즈(Ted Cruz)와의 대결에서 선전했다—은 세로축의 위쪽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총체적인 잠재성이 오늘날 드러나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샤르머는 정치부문에서의 축의 전환과 관련한 몇 가지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자이르 볼소나루(Jair Bolsonaro, 브라질), 빅토르 오반(Viktor Orban, 헝가리), 야로슬라브 카친스키(Jaroslaw Kaczynski, 폴란드), 마테오 솔비니(Matteo Salvini, 이탈리아), 레제프 에르도간(Recep Erdogan, 터키), 블라지미르 푸틴(Vladimir Putin, 러시아) 그리고 로드리고 두테르테(Rodrigo Duterte, 필리핀)의 부상은 (a) 세로축에서 아래쪽 끝에 위치하는 것으로 정의된 트럼프주의가 미국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과 (b) 트럼프주의가 두려움•증오•무지의 확대를 가능케 한 소셜미디어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음을 나타낸다(그림 2).

 

– 독일에서의 녹색당의 부상, 미의회에서 새로운 세대의 다양한 여성 대표자들의 부상뿐만 아니라 동성혼 합법화를 주장한 코스타리카의 대통령 알바라도(Alvarado)와 다수 일반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당선된 인도네시아의 대통령 조코위(Jokowi)의 승리도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무지•증오•두려움을 통해 호기심•연민•용기를 폐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호기심•연민•용기를 통해 정신•마음•의지를 열어젖힘으로써 현 정치 체제에 대한 그들의 불만을 드러낼 수 있음을 입증한다(그림 2).

 

– 역사적으로 살펴보더라도 세로축 주변에서 일어나는 열림과 닫힘 사이의 갈등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오늘날 새로운 것은 다음의 3가지 조건들이다. ① 열림이냐 닫힘이냐라는 쟁점이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것 ② 우리에게는 지구가 가진 지속가능한 발전의 한계에 맞추어 우리의 경제와 사회를 변형시키기 위한 시간이 10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③ 소셜미디어가 전례 없는 수준에서 치명적인 행동들(결여됨의 순환)을 확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 트럼프하에서 미공화당(GOP)이 전통적으로 보수 성향의 중심부에서 세로 스펙트럼의 아래쪽 끝에 있는 신민족주의적인 포퓰리즘(그리고 백인우월주의)적 견해를 충분히 수용하는 으로 움직였는데도 민주당은 더 좌파로 움직일 건지, 더 중도로 갈 건지, 더 포퓰리즘적이 될 건지 아니면 세로 스펙트럼에서 더 위쪽으로 움직일 건지를 논쟁하면서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있다. 대부분의 선거운동은 미국 문명을 위한 더 대담한 새로운 내러티브(세로축의 위쪽 끝)를 제안할 기회를 놓치면서 전통적으로 진보적인 주제(가령 헬스케어 서비스)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민주당의 선거 전략은 낡은 렌즈를 통해 새로운 상황을 바라봄으로써 역사적 기회를 놓친 명확한 사례에 해당한다.

 

<경제적 전환>

 

경제적 좌표의 전환은 경제를 운영하는 방법에 관한 담론—어떻게 경제성장의 주기에 불을 가장 잘 점화할 것인지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에 초점을 맞추는 담론—을 재형성하고 있다. 한 학파가 시장 메커니즘(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을 찬성했고 다른 학파는 정부 개입과 더 적극적인 거시경제적 운영(케인즈학파와 신케인즈학파)을 찬성했지만, 금세기 새로운 담론은 문제가 있는 성장패러다임이 모두를 위한 웰빙에 초점을 맞추는 탈성장 패러다임으로 대체될 것인지의 여부를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림3: 새로운 경제의 축

 

샤르머는 그림 3에서처럼 낡은 담론과 낡은 패러다임은 그냥 사라지지 않고 현재의 공적인 경제 담론의 새로운 좌표에서도 그대로 등장하는 것으로 분석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가로축은 경제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정부중심적인 방식이냐 시장중심적인 방식이냐에 기초하지만 세로축은 더 많은 국내총생산이 더 많은 복지로 옮아가는 경향이 없다는 선진 경제의 경험적 발견에 기초한다. 그는 이것이야 말로 국내총생산이 경제적 발전의 유익한 지표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므로 바로 이곳에서 새로운 대화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논의되는 대안 지표들로는 ⑴ 부탄의 국민총행복지수(Gross National Happiness, GNH) ⑵ 유엔개발계획(UNDP)의 인간개발지수(Human Development Index, HDI) ⑶ 2015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한 17대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SDGs)가 있다.

 

샤르머는 이러한 새로운 경제 좌표의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① 대부분의 낡은 패러다임들이 2008년도에 완전히 실패를 했지만 그 사고방식은 자본과 제도 속에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에 주류경제 담론은 여전히 20세기 경제사상인 가로축에 지배를 받고 있다.

② 세로축과 관련해서는 세로축의 아래쪽(즉 경제 민족주의)에서 그 사상이 더 역설되고 표현되는 반면에 세로축의 위쪽에서는 표현되더라도 규칙이 아닌 예외로 남는다(사례: 부탄, 코스타리카(([옮긴이] 코스타리카는 동성 결혼 합법화를 지지하는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부탄은 국민행복지수가 1위인 나라이다.))).

③ 세로축의 윗부분의 특성은 많은 지역공동체들에서 발견되며 도시나 일국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지역 규모의 다부문 기획에서도 종종 드러난다.

④ 2030년까지 17개 지속가능한발전목표(SDGs)를 실제로 실행할 유일한 가능성은 공동작업과 민주적 참여를 위한 새로운 기반시설들을 지역 수준에서부터 창출하는 데 있으며, 그 목적은 모두를 위한 웰빙을 창출하기 위하여 즉 에고체계(ego-system) 인식에서 생태계(eco-system) 인식으로 (세로축의 아래쪽에서 세로축의 위쪽까지) 우리 경제의 운영체제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것이다.

 

<교육의 전환>

 

교육의 새로운 좌표는 정보격차의 의미가 바뀌었음을 깨닫는 것을 통해서 포착할 수 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네이오미 셰이퍼 라일리(Naomi Schaefer Riley)에 따르면 실제 정보격차는 “스크린 타임을 제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부모를 둔 아이들과 더 많은 스크린이 성공의 열쇠라고 말하는 학교와 정치가들에게 속은 부모를 둔 아이들 사이에” 존재한다. 잡지『와이어드』(Wired)의 전 편집인인 크리스 앤더슨(Chris Anderson)도 “과거 정보격차의 핵심은 테크놀로지에의 접근이었지만 이제 모든 사람이 테크놀로지에 접근하므로 테크놀로지에의 접근을 제한하는 것이 새로운 정보격차의 핵심이다”라고 말했다.

 

교육부문에서 대부분의 낡은 담론이 ‘공교육 대 사교육’—즉 좌파와 우파—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반면에 새로운 담론은 학습 유형에 더 중점을 둔다. 그림 4에서 보듯이 교육의 전환은 숫자•공식•사실을 외우기냐 아니면 전인교육의 관점에서 학습과 창의성에 접근하느냐(후자의 접근법은 생성적인 사회적 장들을 중심으로 하면서 머리•가슴•손을 통합한다)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샤르머는 이러한 새로운 교육 좌표(그림 4)의 렌즈를 통해 드러나는 현 교육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림 4 새로운 교육의 축

 

① 현재 활동과 담론의 대부분은 낡은 사고방식의 축(공교육이냐 사교육이냐 등)의 손아귀에 아직 꽉 잡혀있다.

② 인공지능 혁명은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을 재형성하면서 우리가 스펙트럼의 아래쪽(숫자•공식•사실 기억하기)에서 익히는 숙련도에 토대를 둔 일자리들을 대체할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우리는 인간 활동과 가치창출이 스펙트럼의 위쪽(인간적인 연민, 공감하는 인적서비스, 집단 창의성, 깊이 경청하기, 생성적인 대화, 집단적 공존, 공간 확보해주기, 내려놓기, 맞이하기(([옮긴이] 여기서 ‘공간을 확보해주기’(‘holding the space’)는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부과하지 않으면서 타인을 돕는 것이다. ‘내려놓기’(letting-go)는 기존의 자아를 내려놓는 것이고 ‘맞이하기’(letting-come)는 미래의 잠재적 자아를 맞이하는 것이다. 샤르머는 기존의 자아를 ‘내려놓기’와 미래의 잠재적 자아를 맞는 ‘맞이하기’의 공존을 ‘presencing’(현재화)이라고 표현한다.)))을 향하도록 방향을 다시 잡아야 할 것이다.

③ 좋은 사립학교들이 학습 스펙트럼의 위쪽으로 도전을 해보기도 하지만 핀란드와 북유럽 국가의 교육 체계들을 제외하고 그런 시도를 해온 더 큰 학교 시스템의 사례들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맹점>

 

샤르머는 시스템 변화에 기반을 둔 인식방법과 인식 도구를 제공하는 기반시설 및 현 세대의 변화 메이커들이 여러 시스템들·부문들·지형들에 걸쳐 있는 그들의 동료들과 연결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힘을 주고 뒷받침을 하는 기반시설의 부족이야말로 우리시대의 가장 중요한 맹점이라고 진단한다,

 

정치와 경제에서의 축의 전환은 교육과 학습에서의 전환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는 이 물음에 모든 것이 관계되어 있다고 답한다. 20세기 담론에서는 이데올로기의 차이가 핵심이었지만 2018년에는 이데올로기는 없고 나-나-나···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세로축에서의 차이—열림이냐 닫힘이냐—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샤르머에 따르면 세로축에서의 차이는 의식, 다시 말해 우리가 연결되는 방식의 질의 차이이다. 이렇게 본다면 아래쪽 두 개의 사분면에서 위쪽 두 개의 사분면으로의 전환은 자아체계 인식에서 생태계 인식으로의, 즉 나에서 우리로의 의식상의 전환인 것이다.

 

트럼프, 포퓰리즘 및 에고체계 인식에서 좋은 점은 현실화되고 있는 에너지와 주도권이며 나쁜 점(또는 그 한계)은 편협성이다. 이러한 ‘자잘한’ 자아는 상호의존으로 이루어진 우리 시대의 실질적인 복잡함을 감당하지 못한다. 복잡함과 상호의존은 정신의 개방, 마음의 개방, 의지의 개방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우리가 계속 이런 개방과정에 참여할 때—심판의 소리, 냉소의 소리, 두려움의 소리에 둘러싸인 그 모든 것에 도전할 때—우리는 근본적으로 에고에서 생태로의 사고방식의 전환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부터 뿐만 아니라 생태계에 속한 다른 모든 존재들의 관점에서부터 상황들을 바라보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샤르머는 셀 수 없이 많은 개인들, 집단들 및 조직체들이 에고체계 운영방식에서 생태계 운영 방식으로 옮겨가도록, 즉 세로축의 위쪽으로 옮겨가도록 요구하는 과제들과 직면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이 여정에서 그들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고 종종 혼자라고 느끼고 있는 이 시점이야말로 우리가 열림(개방)과정을 이야기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이 열림(개방)과정—그리고 이 과정을 규모있게 촉진하기 위한 새로운 인식에 바탕을 둔 방법들과 도구들—은 아마도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하지만 지원을 잘 받지 못하는 과정이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소음들 때문에 종종 놓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최고로 집중할 만한, 형성중인 운동을 포함하고 있는 과정인 것이다.

 

<당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것: 사회변형랩>

 

실제로 샤르머는 동료들과 <프레즌싱 인스티튜드>(Presencing Institute)를 운영하며 세로축의 위쪽 부분을 규모있게 활성화하기 위해 일하고 있고, 부문들을 가로지르고 있는 다수 글로벌 네트워크들 및 조직체들과 협력하고 있다. 그는 <사회변형랩>(Societal Transformation Lab)이라 불리는 새로운 기획과 기반시설을 2019년 초에 출범시켰으며, 이 랩은 각자가 속한 조직체 및 생태계에서 지대한 혁신을 위해 일하는 팀들과 조직체들에게 필요한 다지역 혁신 플랫폼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 글을 올라간 2018년 9월 8일은 이 기획의 파트너들을 모집하기 위해 새로운 웹사이트를 시작하는 날이기도 해서 샤르머는 랩을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다. 랩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으며 이 랩을 통해 세계 전역에서 변화 메이커들이 모일 수 있다. 팀들과 조직체들은 s.lab의 온라인 플랫폼에 접근할 수 있으며 이 플랫폼은 부문들, 시스템들 및 지형들에 걸쳐 있는 변화 메이커들이 서로의 학습, 리더십 및 프로토타이핑(prototyping)을 지원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홀로체인―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을 넘어서


  • 저자  :  Hank Sohota
  • 원문 : Beyond Bitcoin and Ethereum — a fairer and more just post-monetary sociopolitical economy (2019. 1. 28)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화폐는 사회적 구축물로서 사람들의 신뢰에 의존한다. 그 기능은 ① 가치저장 ② 교환수단 ③ 회계단위, 이 셋이다. 그런데 화폐가 큰 규모로 작동하려면 표준화가 필요하고, 이는 불가피하게 중앙집중화를 낳는다. 불행하게도 중앙집중화는 ‘화폐의 경화적 성격’(hardness of money)[가치의 안정성(‘uninflatability’)]과 사람들의 신뢰를 침식한다. 의사결정이 소수의 손에 맡겨지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 소수는 그들의 책임을 오용해온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화폐의 경화적 성격과 신뢰의 수준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앙집중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 문제의식은, ‘중개자들·대표자들·경영자들·조직소유자들 없이 어떻게 시공간을 가로질러 연계하고 협동하고 협력하는가?’이다.

이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나키’라는 성배(聖杯)를 나타낼 수도 있다. (여기서 ‘아나키’는 단순한 무법, 혼란, 무질서와 동의어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비트코인의 한계]

비트코인은 ‘경화( 硬貨)의 중앙집중화’ 문제를 풀기 위한 시도이다. 이는 더 큰 그림에 넣고 보면 좋은 출발점이다. 비트코인은 이 일을 위해 해시체인(hashchain) 블록들의 분산된 원장을 사용해서 변경 불가능성을 부여하고, ‘하드 코딩’을 통해 가치의 안정성을 확보하며 탈중심화된, 그러나 온전히 분산되지는 않은 작업증명(Proof of Work, PoW)을 사용하여 단 하나의 네트워크 전체에 걸친 타임라인을 구축하고, 합의 메커니즘을 통해 검열 불가능성을 확보한다. 이렇듯 개별 주체나 행위자보다는 네트워크를 신뢰함으로써 ‘신뢰 부재’(trustlessness)의 한 형태가 형성된다.

그런데 실용상의 한계 및 철학적 한계로 인해서 이 접근법은 부분적이고 비실용적인 해결책만을 제시한다. 충분히 분산되어 있지 않다는 것, 충분히 빠르지 않다는 것, 비용 효율이 충분히 높지 않다는 것, 충분히 규모를 키우지 못하다는 것이 그 한계이다. 더군다나 비트코인은 앞으로 재생 가능한 에너지의 생성에 재정적으로 큰 혜택을 주지 못하는 한, 아니 더 나아가 녹색에너지 기반시설의 구축에 재정적으로 기여하지 못하는 한, 코인 채굴에 들어간 전력 소비 때문에 기후변화를 잘못된 방향으로 너무 많이 밀어붙였다는 비난을 들을 수밖에 없다. 비트코인의 모든 중기 개선책들이 의도된 효과를 발휘한다고 하더라도 앞에서 말한 결점들은 여전히 남는다. 그렇더라도 비트코인의 네 핵심 특성들―변경 불가능성, 가치 안정성, 검열 불가능성, 몰수 불가능성(unconfiscatability)―은 역사적 성취로 남아있다.

[이더리움의 한계]

이더리움은 반드시 비트코인이 해결하려는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비트코인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원장 기술을 바탕에 깔고 있으며 따라서 동일한 한계를 가진다. 여기에 더 추가할 것으로서, 권력의 중앙집중화 문제, 비트코인에 비한 암호화페로서의 단점들, 스마트계약의 문제점들, 지분증명(Proof of Stake, PoS)이라는 합의 메커니즘으로의 이동 시도 등이 있다.

이더리움이 한 일은 수 천 개의 대안코인들을 출시한 것인데, 그 가운데 어느 것도 말이 되는 것 같지 않다. 또한 이 코인들이 주장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도 주지 않는다. 이것이 새로운 자산계층과 규제되지 않는 시장에서 일어난 일임을 감안하다면, FOMO-FUD라는 ‘서부’가 출현하더라도 놀랄 것은 없다. [FOMO (Fear Of Missing Out) : 코인이 막 상승 중일 때 지금 사지 않으면 돈을 못 번다는 일종의 강박감에 추격매수하는 것을 이르는 말; FUD (fear, uncertainty and doubt) : 하락장에 막연한 두려움으로 팔아버리는 것을 이르는 말.― 정리자]

[상호적 자기주권(mutual self-sovereignty)―공정하고 정당한 사회정치적 경제의 토대가 되는 핵심 구축물]

경제는 인간의 사회 시스템의 번영 가능성(thrivability)에 강하게 집중해야 한다. 다소 단순화하자면, 번영 가능성의 핵심부에는 집단의 유대(solidarity)와 개인의 주권 사이의 변증법이 존재한다. 그런데 유대와 주권은 사실 동일한 동전의 양면이다. 이 둘은 서로를 구성하며 공생적으로 함께 진화한다. 이 둘은 ‘변증법적 특이성’을 구성하는데, 이는 상호적 자기주권을 통하여 조화에 도달한다. (음양의 상호작용과 같다.) 이 동학에서는 사회적 결속과 개인의 주권이 둘 다 강한 동시에 유동적이다. 이는 도교 철학에서 종종 물의 은유를 사용하여 나타내는 개념이다. 저자의 생각에 이 영속적인 동학을 통하여 인간의 사회 시스템의 ‘안티프래질 특성’(anti-fragility)이 높아진다. 그리고 자아에 대한 인식과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영속적으로 출현/창발한다. [‘anti-fragility’ 개념을 만들어낸 탈렙(Nassim Nicholas Taleb)에 따르면 ‘resiliency’(복원력)는 실패로부터 회복하는 능력이고, ‘robustness’(튼실함)는 실패에 저항하는 능력이며, ‘안티프래질 특성’(anti-fragility)은 스트레스, 휘발성, 소음, 실수, 외부로부터의 공격, 실패의 결과로 번영할 수 있는 능력이 증가하는 속성을 가리킨다.―정리자]

더 나아가, 그리고 더 중요한 점으로서, 그런 모든 게임에서 규칙들은 창발적이고 자기조직적인 방식으로 참여자들에 의해서 시행되고 운용된다.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민중의 거버넌스이다. 규칙들의 상대성이 존중되어야 하며, 전체적 합의는 필요하지 않다. 만일 이런 합의가 필요하다면 우리는 다시 중앙집중화의 문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은,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은 (특히 이들을 지탱하는 블록체인 기술은) 우리를 우리가 가야 할 곳에 데려다주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들은 비판적이고 중요한 촉매가 될 수는 있지만, 그 실제 작동에 있어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 비트코인의 분산된 원장 테크놀로지가 근본적으로 새로운 P2P 경제를 가능하게 하는 과제를 담당할 수단이 되리라는 생각에 고무된 사람들조차 지금은 그 한계를 인식하고 또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더리움 관련 개발자들 가운데 돈이 목적이 아닌 사람들은 환멸감을 느끼고 있다.

[홀로체인]

이와 달리 홀로체인(Holochain)은 우리를 우리가 가야 할 곳에 데려다 줄 것이다. 홀로체인은 인류의 역사에서 상호적 자기주권의 문제와 진정으로 씨름한 최초의 테크놀로지이다. 홀로체인의 효율과 효능은 네트워크의 사이즈가 커질수록 향상된다. 사실 홀로체인은 이더리움과 비트코인 이전에 이미 메타커런시(MetaCurrency)와 쎕터(Ceptr) 프로젝트의 필수적 구성부분으로서 등장했다.

홀로체인은 아나키를 출현시킬 수 있는 사회적 기술―생체모방(bio-mimicry)에서 영감을 얻고 소프트웨어에 기반을 둔 기술―을 제공한다. (여기서 아나키란 대규모의 중개/매개intermediation를 필요로 하지 않은 삶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홀로체인은 우리가 자산에 기반을 둔 수많은 상호신용 (암호)화폐―이들은 홀로체인에서 상호 운용 가능하다―를 통해 기존의 화폐가 지배하는 시기를 넘어서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서 사용되는 통화(通貨) 정의는 훨씬 더 광범한 것이다. 통화는 가치·약속·평판의 흐름들을 형성하고 가능하게 하며 측정하는 형식적인 상징체계로서 정의된다. 저자 생각에 이는 하이에크의 사유에 대한 해석으로서 신자유주의적 해석보다 훨씬 더 계몽된 것이다.

모든 종류의 가치 흐름이 더 나은 방향으로 관리되기 전에 먼저 인정되어야 한다. (GDP 관련 흐름만을 가시화한 것은 인류와 지구에 재앙이 되었다.) 그렇게 인정될 때에만 우리는 상호연관된 긍정적 흐름들은 강화시키거나 증폭시키고 상호연관된 부정적 흐름들은 완화시키거나 제거하는 작업을 창발적이고 자기조직적인 방식으로 시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다수를 위해, 심지어는 모두를 위해, 더 의미 있고 더 인간적인 부와 번영을 창출할 기반을 만들 수 있다.

[대규모 탈매개(Disintermediation)]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홀로체인이 가져올 경제적 및 사회정치적 혁명은 그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는 그것이 디지털화된 세계에서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를 통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홀로체인은 어떤 규모로든 빠른 속도로, 제로의 한계비용으로 이용될 수 있다. 그것은 라즈베리 파이(Raspberry Pi)에서 스마트폰, 태블릿, 노트북, 심지어는 서버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컴퓨팅 장치에도 설치될 수 있다.

제일 처음 만들어진 h앱(hApp, Holochain dApp)은 홀로(Holo)이다. 이는 h앱들을 호스팅하기 위한 h앱으로서 홀로퓨얼(Holo Fuel)이라고 불리는 최초의 상호신용 암호화폐를 포함하고 있다. 이 화폐는 h앱들에 여벌의 컴퓨터나 아니면 현재 쓰는 장치의 저장 공간을 제공해주는 홀로 호스트들에게 보상해주는 데 사용된다. 이로 인해 모질라(Mozilla)의 파이어폭스(Firefox) 같은 표준적인 브라우저를 사용하여 웹에서 h앱들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식의 호스팅을 피할 수도 있다. 홀로체인을 돌리는 장치는 모두 사용자인 동시에 호스트이기 때문이다. 홀로의 목적은 현재의 서버 기반 웹과 미래의 (P2P이기에) 서버 없는 대안적 홀로체인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메시 네트워킹(mesh networking)[각각의 노드가 직접, 수평적으로 네트워크에 데이터를 중개하는 네트워크 토폴로지. 모든 노드가 다른 모든 노드에 연결되는, 뿌리줄기적 연결방식이다―정리자]이 가능할 것이며, 이는 진정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분산된 인터넷과 웹을 의미할 것이다.

더 나아가 홀로체인의 데이터 무결성 모델은 데이터 중심적(data-centric)이기보다는 행위자 중심적((agent-centric))이기를 지향함으로써 상호적 자기주권을 지원한다. 홀로체인은 소스체인(행위자가 소유하는 해시체인hashchains을 생각해보라)과 디지털 서명을 사용하고 분산된 해시 테이블을 확증한다(비트토렌트BitTorrent와 깃허브GitHub를 생각해보라). 이렇게 해서 프라이버시와 기밀성이 보장될 뿐만 아니라 가치실현과 가치소유가 가치를 추출하여 화폐화하려는 중개자들·대표자들·경영자들·조직소유자들이 아니라 현장에서 실제로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들에게 완전히 귀속된다.

[궁극적 물음]

상호적 자기주권은 일단 작동 가능하고 실용적이며 어디에나 존재하게 되면 우리 삶의 모든 측면(사회적·정치적·경제적·예술적·문화적 측면)을 다시 규정하게 될 것이다. 가장 심층적 차원에서는 우리가 우리의 삶의 방향과 관련하여 스스로에게나 서로에게, 같은 세대 내에서나 서로 다른 세대 간에 하는 이야기들의 성격이 완전히 변할 것이다. 여기에 쎕터와 쎕터에 기반을 둔 인공지능은 말할 것도 없고 발전된 심층 및 강화 학습 인공지능이 가세하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21세기에 인간이 된다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시 파악하고 다시 정의하게 될 것이다.




팹아카데미


  • 저자  :  Neil Gershenfeld, Alan Gershenfeld, and Joel Cutcher-Gershenfeld
  • 원문 :  Designing Reality : How to Survive and Thrive in the Third Digital Revolution (2017)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위 책의 1장의 일부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책의 서설의 내용은 이 블로그의 게시글 http://commonstrans.net/?p=1233와 http://commonstrans.net/?p=1246에 정리되어 있다. 이번 정리글의 핵심은 팹랩의 확산과 연계되어 발전된 ‘팹아카데미’라는 이름의 학습모델이다. 한국에서의 일만은 아니겠지만 정리자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제도권 교육모델(대학 포함)이 형편없이 망가지고 시대에 뒤쳐졌음이 확실하며, 제도권이 스스로 이것을 고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와는 전혀 다른 학습모델의 탐색이 절실하게 필요한데, 정리자 자신은 개인블로그의 글 「‘십오 소년 표류기’ 7」에서 리눅스 같은 프로그램을 함께 만드는 공동체들에서 파생된 학습모델인 ‘넷아카데미’를 간략히 소개한 바 있다. 이번 글에서 소개할 ‘팹아카데미’는 이 ‘넷아카데미’의 새로운 형태라고 보면 될 듯하다. 다만 대학과 무관한 ‘넷아카데미’와 달리 ‘팹아카데미’는 대학과 대학 외부(지구 전역)에 걸쳐서, 양자를 가로질러 존재한다는 점에서 앞으로 한국의 대학들―물론 정신을 차린 대학들―이 본받을 만한 사례일 듯하다.

[팹랩이란?]

팹랩(Fab lab)은 제작(fabrication)을 위한 실험실로서 MIT의 <비트와 원자 센터>(Center for Bits and Atoms, CBA)의 지역사회봉사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다. CBA는 컴퓨터과학(‘Bits’)과 물리과학(‘Atoms’) 사이의 경계를 연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CBA에는 낮게는 천 달러에서 높게는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여러 가지 도구들이 있다. 팹랩은 만일 CBA의 도구들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것들이 외부로 널리 쓰일 수 있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보려고 했다. 2002년 칼박(S. S. Kalbag)이 학교에서 낙오한 아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를 일부러 인도의 작은 마을 파발(Pabal)에 세웠다. CBA는 비싼 특수목적 랩 장비에 투자하기보다 농업테스트 같은 목적을 위한 랩 기구들을 이 학교에 만들어 주는 협동을 시작했다. 이것을 팹랩 제0호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서 영감을 얻어서 보스턴의 공동체 활동가 킹(Mel KIng)의 <사우스엔드 테크놀로지 센터>(South End Technology Center, SETC)에 설치되어 2005년 온전한 공동체 팹랩으로 성장한 것이 제1호이다. 제2호는 보스턴의 가나인 공동체가 킹의 랩을 본 후 협동하여 가나의 해안에 있는 쎄스코디-타코라디(Sekondi-Takoradi)에 세운 팹랩이다. 새 팹랩을 열 때마다 또 필요한 누군가가 생겼으며, 이렇게 해서 팹랩은 10년 동안 매해 2.5배씩 늘어났다.

 

팹랩의 수가 두 배씩 몇 번에 걸쳐 증가한 2005년에 닐 거션펠드는 『랩』이라는 책을 썼다. 도어티(Dale Dougherty)는 ‘maker’(제작자)라는 용어를 만들어서 새로이 출현하는, 팹랩에 있는 종류의 도구들을 사용하여 컴퓨팅을 제작과 연결시키는 덕후들의 공동체를 지칭했다. 그는 2006년에 ‘메이커 페어’(Maker Faire)라고 불리는 모임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는데, 이 가운데 가장 큰 것인 2015년의 것에는 145,000명이 방문했다.

 

2006년에는 뉴턴(Jim Newton)이 대부분의 개인들이 구할 수 없는 디지털 제작 도구들에의 접근을 제공하는 텍샵(TechShop)을 창립했다. 텍샵들은 회원제로 운영되었으며 2016년 현재 10개가 있다. 좀 덜 본격적인 것으로서 메이커스페이스들(maker space)이나 해커스페이스들(hacker spaces)이 확대되기 시작하여 동호인들에게 장소를 제공했다. 이 공간들은 제공하는 것은 공간마다 매우 다르지만 현재 수천 개가 있다.

 

2007에는 버닝맨 모임으로 가져간 이동형 팹랩이 처음 선을 보였다. (버닝맨 모임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글 「커먼즈로서의 버닝맨」 참조.) 이동형 랩은 나중에 시골 지역들을 이리저리 다니며 네트워크 내에 네트워크를 심는 팹랩들이 되었다.

 

이 모든 팹랩들은 3차 디지털 혁명의 초기 발현형태들이다. 이러한 성장기의 생태계에서 팹랩들은 두 가지 변별적 특징을 가진다. ① 팹랩들은 각기 다르다기보다는 모두가 진화하는 일단의 핵심 능력들을 공유하여 팹랩들 사이에서 사람들과 기획들이 공유될 수 있게 해준다. 멧 칼프의 법칙(Metcalfe’s Law):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의 가치는 그 네트워크에 있는 컴퓨터들의 제곱에 비례한다. 피트니스센터에서 운동하면 다른 사람들이 같이 운동한다고 해서 큰 차이가 없지만, 인터넷에 접속하면, 혹은 팹랩에서 작업하면, 다른 컴퓨터들이 접속할 때, 혹은 다른 사람들이 팹랩에서 같이 작업할 때 가치가 증가한다. 팹랩 네트워크에서는 사람도 기획도 모두 이동적이며, 개별적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집단적으로 성취할 수 있도록 한다.

 

② 다른 변별적 특징은 그 콘텐츠의 연계된 진화이다. 공동사용하는 기계들, 재료들, 부품들, 프로그램들로 시작했다가 지금은 팹랩들에 의해서 그리고 팹랩들을 위해서 개발된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를 위한 오픈 디자인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팹랩이 또 하나의 팹랩을 만들 수 있는 지점을 목표로 잡아서 가고 있다. 팹랩에서 사용하는 각 유형의 기계의 비용은 그동안 저렴해져왔지만, 팹랩에서 만들 수 있는 것에 대한 포부 또한 그에 비례해서 올라가서 전체적인 비용은 거의 비슷하게 공동체의 자원의 규모 정도에 머물러있다.

 

이 두 특징들로 인해서 팹랩들의 모음은 네트워크로서 기능할 수 있게 된다. 각 사이트는 개별적으로는 별 것이 없지만, 이 사이트들을 모아놓으면 중요한 덩치가 된다. 아무도 팹랩을 시작하라고 밀어붙이지 않는데, 사이트들이 계속해서 네트워크에 합류한다. 더 큰 것의 일부가 됨으로써 혜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놀라움은 팹랩의 사용방식이 세계 전역에서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멜 킹이 이 점을 포착했다. 는 북극에 몇 시간 있더라도 거기서 도시의 랩에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희망과 두려움을 인식하리라는 것이었다.

 

팹랩들에 공통적인 것은 노소가 혼합되어 있고 응용분야가 교육, 오락, 사업에 걸쳐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다양한 가운데 팹랩들은 도서관과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1900년 무렵 카네기가 투자하여 공동체 도서관들을 세웠는데, 사업이 완료되었을 때 전국에 걸쳐 약 2500개가 세워졌다. 도서관의 전반적인 사명은 리터러시, 즉 지식에의 접근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도서관들은 이 사명의 달성에서 여러 목적들(사설보육소, 학교 수업, 연구, 시정市政)을 위해 사용되었다. 도서관들은 처음에는 새로운 것이었으나 이제는 문명화된 공동체의 당연한 구성요소가 되었다. 팹랩들 또한 그와 같은 궤적을 그릴 것이다. 다만 이제 팹랩들은 비트에서 원자로의 이동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리터러시를 목적으로 한다.

 

 

[팹아카데미]

 

CBA가 디지털 제작 연구시설을 일단 갖추고 나자 생긴 문제가, 이 도구들이 여러 분야에 걸쳐있고 또 그 작동 규모로 인해서 학생들이 그 사용법을 모두 배우기 위해서는 평생 MIT 수업을 들어야 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2001년에 편법으로서 ‘(거의) 모든 것을 만드는 법’(How to Make (almost) Anything)이라는 제목의 새로운 강의를 개설했다. 디지털제작을 연구하는 소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이 강의에 뜻밖에 매해 수백 명의 학생들이 들으러 왔다. 그저 어떻게 물건을 만드는지 배우고 싶다는 이유로 말이다.

 

학생들은 개별적인 기술을 마스터함과 아울러 이 기술들을 통합하는 프로젝트들을 했다. 첫 해의 스타 가운데 하나는 켈리 돕슨(Kelly Dobson, 나중에 Rhode Island School of Design의 Digital+Media학과의 학과장이 된다)인데 그녀는 비명(screams)을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내보내는 착용장치를 만들었다. 윤미진(Meejin Yoon, 나중에 MIT 건축학과장이 된다)은 센서들과 등뼈 모양의 구조물들로 가득하여 개인 공간을 방어할 수 있는 드레스를 만들었다. 이런 종류의 기획들이 계속 이어졌다. 저자는 여기서 자신이 묻지 않았던 질문, 즉 디지털 제작이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학생들이 답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저자는 제작 방법을 묻고 있었지 이유를 묻고 있지는 않았는데, 학생들이 디지털 컴퓨팅의 킬러앱은 퍼스털 컴퓨팅이듯이, 디지털 제작의 킬러앱은 퍼스널 제작임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핵심은 상점에서 살 수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살 수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이었다.

 

CBA의 연구도구 사용법 수업이 필요했듯이 팹랩들의 확산도 전지구적으로 사용법을 훈련시키는 문제를 낳았다. 똑똑한 아이들은 지역 교육이 주는 기회를 훨씬 앞서는 기술을 팹랩들에서 배우고는 그 다음에 급격히 능력이 하강하곤 했다.

 

브루볼트(Hans-Kristian Bruvold)는 노르웨이 북쪽의 한 지역학군에서 일종의 문제아였다. 이미 선생들이 가르치는 모든 것을 마스터해서 주의집중을 잘 안하는 학생이었다. 그는 한 팹랩에 나가기 시작했고 거기서 저자를 만났으며 저자는 그에게 ‘(거의) 모든 것을 만드는 법’의 몇 가지 데모 프로젝트를 보여주었다. 다시 만났을 때 저자는 그가 장난감 로봇 트럭에 여러 기술을 통합해 넣은 것을 보고 놀랐다. 몸체를 디자인했을 뿐만 아니라 모터와 제어장치를 통합해 넣고 방풍유리 디스플레이를 추가했다.

 

남아프리카에서도 인종차별시기의 한 흑인거주구인 쏘샹구베(Soshanguve)에 팹랩을 열었을 때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 한 지역 소녀인 모나헹(Tshepiso Monaheng)이 놀랍게도 랩을 이용하여 원격으로 MIT 수업 내용을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통상적인 관점에서라면 브루볼트나 모나헹 같은 똑똑한 아이들은 멀리 떠나서 더 나아간 곳에서 공부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동은 유용한 사람들을 그들이 가장 필요로 되는 곳에서 떠나보낸다. 우리는 처음에 세계 전역의 지역 학교들과 짝이 되어 이 진공을 채우려고 했는데, 기술적 숙련보다 훨씬 더 큰 한계는 학교의 엄밀히 통제되는 교육 접근법이 창조성을 질식시킬 수 있다는 것을 늘 발견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팹아카데미(Fab Academy)라고 불리는 것을 시작했다.

 

팹아카데미는 원래 팹랩들이 원격으로 MIT의 ‘(거의) 모든 것을 만드는 법’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마련한 비디오 링크에서 자라나왔다. 직접 듣는 학생들보다 팹랩들이 더 많아지면, 원격 세션을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분리했다. 원래 원격 학생들이었던 지역 멘토들의 존재가 필수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새 학생들은 지역 팹랩에 있는 작업그룹에 합류해서 멘토들, 동료들, 기계들과 함께 작업했다. 그 다음에 우리는 비디오를 사용한 대화식 강의와 협동적 내용공유를 통해 모두를 전지구적으로 연결했다.

 

MIT를 컴퓨터 메인프레임으로 보면 된다. 잘 작동하지만 소수에게만 유용하다. 대형공개온라인 강의(massive open online classes, MOOCs)는 사용자들이 중앙메인프레임에 연결된 터미널 앞에 앉아 있는 시분할 시스템(time-sharing, 각 사용자들에게 컴퓨터 자원을 시간적으로 분할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시스템으로서 출력이 사용자에게 표시되고 입력을 키보드에서 읽어 들이는 대화식 인터페이스를 제공할 수 있다) 시기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팹아카데미 모델은 학습네트워크상의 노드들을 연결하는 인터넷에 더 가까우며, 이 노드들은 중앙이 아니라 가장자리에서 확대된다.

 

처음에는 저자가 직접 모든 학생들을 지도했다. 그러다가 팹아카데미 모델이 성장하면서 저자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멘토들을 지도했다. 모델이 더 성장하면서 저자는 지역 랩들을 지도하기 위해 출현한 상위노드들(supernodes)을 지도했다. 이런 식으로 이 모델은 인터넷과 유사해졌다. 나무처럼 줄기, 가지, 잎으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인터넷처럼 모든 노드는 다른 모든 노드와 대화할 수 있었다. 팹아카데미의 일주일 생활의 중심은 거대한 화상회의였다. 여기서 누구나 다른 모든 사람을 보고 다른 모든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다. 이 회의에는 이전 주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포함되고 다음 주의 새로운 일감에 대한 대화식 소개가 포함된다. 이 모든 협동과정은 중앙사무실보다는 아씨나리(Luciana Asinari)가 이끄는 분산된 작업그룹에 의해서 뒷받침된다.

 

이 구조에서는 품질 통제를 위해 관계들의 망에서 직접 추적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edu’ 도메인을 얻어내는 것이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로 하여금 포트폴리오를 만들게 했다. 우리는 미래의 입학, 취업, 투자를 위해서는 미지의 단체로부터의 증명서보다는 포트폴리오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콘텐츠를 만들고 평가를 하는 하나의 주기가 도는 데 약 8개월 걸리지만, 학생들의 진전은 수업을 들은 시간보다는 기술의 숙달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학생들은 모든 것을 완료하는 데 몇 년 걸렸다. 학생들의 수준은 홈스쿨링한 천재들, 대학생들, 대학에 가는 대신 이것을 배우는 사람들, 중견 전문가들, 말년에 재훈련하는 사람들, 퇴직 후 취미로 하는 사람들 등 다양하다. 지역 학습 워크그룹들의 전지구적 연결은 팹랩들의 분산된 성격과 멘토링의 필요 사이의 균형을 맞추어 준다.

 

좋은 멘토링이 부재하면 형편없는 생각들이 번성한다. ‘maker’라는 이름은 ‘열정적’이라는 긍정적 의미와 ‘잘 모른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모두 가진다. 메이커운동의 기본 요소는 아두이노(20달러짜리 작은 컴퓨터 보드로서 센서 해독, 출력장치 통제, 네트워크와의 소통이 가능하다)이다. 팹아카데미는 아두이노를 소개한 다음에, 팹랩에서 몇 달러로 부품들을 조립하여 그런 보드를 만드는 법을 보여준다. 그 다음에 학생들은 쌀알만 한 크기에서 데스크탑을 돌릴 수 있는 사이즈의 다른 컴퓨터 칩들을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 제작자운동의 또 다른 기본요소는 3D프린터이다. 팹랩은 학생들에게 3D프린터 사용법을 보여준 다음에 더 빨리 작동하고 더 크고 강한 것들 혹은 더 정밀한 것들을 만드는 모든 다른 디지털 제작도구들을 사용하는 법을 보여준다. 그런 다음 학생들은 3D프린터를 만드는 법을 배운다. 이런 사례들 각각이 쉬운 기술을 배우는 데서 어려운 기술을 마스터하는 데로 나아가는 경로를 제공한다.

 

‘스스로 하기’(Do-it-yourself)는 앞서 간 사람들의 어깨 위에 서기보다 자신의 발끝으로 서게 하는 방법이다. ‘같이 하기(do-it-together) 혹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기‘(do-it-with-others)는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뜻밖에도 팹아카데미가 선순환의 심장부에 있음을 발견했다. 각 주기는 최고의 수행 사례들을 팹랩 네트워크 전체에 전파하면서 지역 멘토들로 이루어진 핵심 협동 공동체를 구축하고 나중에 새로운 랩들과 프로그램들을 돕게 될 훈련된 학생 무대를 제공했던 것이다.

 

팹아카데미는 디지털 제작을 가르치기 위해 개발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조합한 것의 많은 부분은 거기에만 맞추어진 것이 아니었다. 기반시설은 원거리학습(distance learning)이 아니라 어떤 종류든 분산된 학습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처음에는 놓쳤지만 소통, 컴퓨팅, 제작, 학습 사이의 깊은 관계를 알게 되었다. 디지털 소통이 전지구적으로 상호작용하게 해주고 디지털 컴퓨팅이 지식을 공유하게 해주는 한편 여기에 추가되는 디지털 제작은 아이디어들만이 아니라 사물들을 교환할 수 있게 해준다. 팹랩의 핵심적 도구들이 있으면, 필요한 다른 모든 것을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해서 캠퍼스를 효과적으로 학생들에게 가져가게 되는 것이다.

 

세계의 유력한 유전학자 가운데 하나인 조지 처치(George Church)는 하버드 너머의 학생들과 만나는 데 관심을 가져서 ‘(거의) 모든 것을 키우는 법’(How to Grow (almost) Anything)이라는 이름의 분산된 학급을 팹랩 네트워크에 추가했다. 디지털 제작과 생물학적 제작을 결합시킨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바이오랩에서 필요한 도구들을 만드는 데 팹랩을 사용할 수 있다. (생물학 장치들은 종종 가격이 센 편인 동시에 거추장스럽다.) 팹랩에서 기계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기술이 DNA 증폭을 위한 열순환기나 액체를 다루는 로봇 같은 것들을 만드는 데 사용되어왔다. 더 깊은 수준에서는 생물학 자체가 제작에 사용될 수 있다. 생물학적 과정들은 근본적으로 디지털 방식이며 우리는 팹랩들과 바이오랩들이 합류하면서 이 과정들을 프로그램하는 법을 점점 더 배우고 있다.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은 세계의 주요 예술가들 가운데 하나이다. 처치처럼 그도 그의 영향력을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직접 가르칠 수 있는 학생들 너머로 확대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의 관심은 ‘어떻게’ 물건을 만드는가에 있지 않고 ‘왜’ 만드는가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만드는 과정에 미치는 영향력과 그 과정이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기 위해서 ‘왜 (거의) 모든 것을 만드는가’라는 이름의 다른 분산된 학급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저자의 학생 피크(Nadya Peek)가 이 점증하는 프로그램들을 ‘(거의) 모든 것의 아카데미’(the Academy of (almost) Anything)라고 불렀고 이 이름 혹은 그것을 줄인 ‘아카뎀애니’(Academany)라는 이름이 고정되었다. 현재 이 아카데미는 그레노블 팹랩(the Grenoble fab lab)을 시작한 몰레나르(Jean-Michel Molenaar)가 관리하고 있다. 제공하는 학습 각각은 지역 워크그룹의 모델을 따르고 멘토들은 대화식 강의를 위해 전지구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내용을 협동적으로 공유한다.

 

팹랩들이 전 세계에 확산되고 있는 동안 저자는 MIT에 새 건물이 짓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시작에서 끝까지 10년 걸렸고 1억 달러가 들었으며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시설이 제공된다. 지난 10년에 걸쳐 출현한 수 천 개의 팹랩들 각각은 약 100명의 사용자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가지고 있다. 이 숫자는 명백한 문제를 제기한다. 1억 달러 투자 대 10만 달러 투자의 차이를 정당화는 활동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인가? 기존의 MIT 조직은 희소성의 전제에 기반을 둔다. ① MIT는 랩에 있는 도구, 도서관의 책, 교수들의 시간에 대한 접근을 관리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지원자들을 거절하고 캠브리지의 한 구석에 틀어박혀 있다. 다들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다툰다. ② 온라인 학습플랫폼에 연결된 컴퓨터 앞에 학생이 홀로이 앉아있는 것을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이분법이다. ③ 팹아카데미에서 지속적으로 발견하는 것은, 학생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학습공동체들 속에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대안은 원격교육이 아니라 팹랩 아카데미가 보여주는 분산된 교육이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물음은, MIT 같은 곳에서 행해지는 활동의 어느 만큼이 이런 식으로 분산될 수 있으며 어느 정도의 욕구가 중앙집중화될 수 있느냐이다.

 

저자는 ‘반’이라고 말한다. 팹랩을 열 때마다 MIT에서 같이 작업을 하는 사람들과 동일한 종류의, 놀라운 창의성을 가진 사람들을 발견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으며 동료들, 멘토들, 도구들을 다른 데서는 찾을 수가 없기 때문에 팹랩에 그렇게 꾸준하게 나온다. 그래서 MIT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의 반 정도는 팹랩 환경에서 행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반은 더 많은 비싼 도구들(가령 분자 규모의 분자어셈블러를 개발하는 데 사용하는 나노과학 도구들)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 비싼 도구들을 사용하는 기술과 지식은 너무나도 전문화되어 있어서 모두 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활동이 이루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두 유형의 공간은 대립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만 달러 제작 공간, 십만 달러 팹랩, 백만 달러 수퍼 팹랩, 천만 달러 연구랩들을 가진 하나의 나무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나무를 위로 키우기보다 바깥으로 키워야 지구 전체의 브레인파워를 가져다 쓸 정도로 규모를 키울 수 있다.

 

페이퍼트(Seymour Papert)는 컴퓨터와 교육의 아버지이다. 그는 스위스에서 선구적 아동심리학자 삐아제(Jean Piaget)와 함께 연구했는데, 삐아제는 어린아이들이 과학자처럼, 즉 실험을 하고 이론을 테스트하면서 배운다고 주장했다. 그후 페이퍼트는 MIT에 와서 초기의 리얼타임 디지털 컴퓨터들에 접근하여 어린아이들에게 가능한 실험의 범위를 확대하고 싶었다. 이는 그 당시에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 컴퓨터들이 너무 비싸고 너무 컸던 것이다. 그 대신에 페이퍼트는 컴퓨터에 연결된 로봇 거북이와 어린아이들이 그 거북이들에게 명령할 수 있게 하는 언어(로고, Logo) 개발했다.

 

페이퍼트와 함께 연구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하나는 케이(Alan Kay)인데, 케이는 GUI와 랩탑의 컴퓨팅 패러다임들을 개발했다. 이 디자인 원칙들은 원래 사업가들로 하여금 스프레트시트를 작성하게 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었고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발견하게 하려고 의도된 것이었다. 페이퍼트와 함께 연구한 또 한 사람은 레스닉(Mitch Resnick)인데, 레스닉은 레고 마인드스톰(Lego Mindstorms, 로봇을 만들고 프로그래밍까지 할 수 있는 레고 모델)을 개발했다. 레스닉은 또한 아이들이 프로그램할 수 있는 인기 있는 소프트웨어 스크래치(Scratch, 아이들에게 그래픽 환경을 통해 컴퓨터 코딩에 관한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계된 교육용 프로그래밍 언어 및 환경)의 창출을 이끌었다.

 

팹랩이 두 배씩 증가하기 시작하고 팹아카데미도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페이퍼트는 저자를 찾아와서 팹랩에 대해 대화했다. 저자는 팹랩 전체를 역사상의 우연한 사건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페이퍼트는 자신의 옆구리를 찌르는 제스처를 했다. 그는 아이들이 거북이의 움직임을 프로그램할 수는 있으나 막상 거북이 자체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 그에게 늘 골칫거리였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거북이를 만드는 것이 늘 그의 목표였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팹랩에서의 학습은 그가 수십 년 전에 시작한 작업과 직선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앙컴퓨터를 가지고 놀러 MIT에 가는 것에서 컴퓨터를 탑재한 장난감을 상점에서 사서 노는 것으로, 거기서 다시 팹랩에 가서 컴퓨터를 만들며 노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진행과정이다.

 

[참고] 팹랩 및 팹아카데미 관련 동영상

fablab
https://youtu.be/aPKH60sW_CM

https://youtu.be/sHb2YU0NyvQ




영토 주권에서 기능적 주권으로의 전환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권력이 바뀌고 있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과정에서 경제가 금융화되고 난 후 우리에게는 플랫폼 경제에서 출현하는 새로운 기업권력 층이 생겼다. 프랭크 패스콸레(Frank Pascuale)는 우리가 추천하는 아래 발췌한 글에서 이 과정을 ‘기능적 거버넌스’(Functional Governance) 개념에 입각하여 아주 잘 설명하고 있다. 녹화된 발표뿐만 아니라 전문(全文)을 꼼꼼히 읽어보길 바란다. 패스콸레가 설명하듯이, 넷지배 플랫폼(netarchical platform)들 즉 P2P 교환에서 가치를 추출하는 개인 소유 플랫폼들은 우리의 데이터를 소유하고 우리의 행동을 부추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공공부문이 이전에 제공했던 여러 기능들을 제공할 수 있음으로 인하여 커먼즈에 기초한 공동생산•공동거버넌스•공동소유권의 민주적인 책무와 가능성들도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무력하다는 의미는 아니며 다음 편에서 우리는 플랫폼 자본주의의 혁신에서 무언가를 배워서 수립되는 전략을 제안할 것이다. 아래 발췌는 Open Democracy에서 가져왔다.

(미셸 바우엔스)

디지털 기업들이 방 임대에서 수송(운송) 및 상거래에 이르기까지 그 동안 정부가 하던 역할들을 더 많이 대체하게 되면서 시민들은 민주적인 통제보다는 점점 더 기업의 통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경제학자들은 규제범위를 국가권력을 확장하거나 축소하는 단순한 문제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는 사회적 관계가 권력 공백을 싫어한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국가 권한이 축소될 경우 민간 주체들이 그 공백을 메웁니다. 이들의 권력도 행정기관에 의한 흔해 빠진 민법 집행만큼이나 억압적으로 느껴질 수 있으며 곳곳에 스며드는 효과를 가집니다. 로버트 리 헤일(Robert Lee Hale)이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에게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며 그들이 언제 복종하거나 벌을 받아야 하는지를 말할 때는 언제나 통치가 존재한다”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죠.

우리는 고용관계에서 그리고 대규모 회사가 공급자들로부터 양보를 얻어낼 때 작동하는 이 권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업이 분쟁의 당사자로서가 아니라 그 분쟁을 결정하는 당국으로서 감히 사법 권력을 행사할 경우는 어떤가요? 대규모 디지털 플랫폼들이 상거래와 관련된 우리의 삶에 더 많은 권력을 휘두르게 되면서 이러한 시나리오들이 훨씬 더 일반화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주요 디지털 기업의 정체성과 야망에 대해 말해보죠. 그들은 더 이상 시장에 참여하는 주체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분야에서 시장을 만드는 주체들로서 다른 사람들이 재화와 서비스를 팔 수 있는 조건에 대해서 규제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그 동안 정부가 하던 역할들을 더 많이 대체하길 열망하며 영토 주권의 논리를 기능적 주권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방 임대에서부터 운송(수송) 및 상거래에 이르는 기능적 장(場)들에서 사람들은 민주적인 통제보다는 기업의 통제를 점점 더 받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죠. 에어비앤비가 방 임대, 그 다음에 주택 임대, 최종적으로는 도시계획 일반을 효과적으로 규제하기 위해 데이터에 기반을 둔 방법들을 사용할 수 있을 때, 누가 도시 주택 규제기관을 필요로 할까요? 아마존이 그 자체의 관할구역이나 차터시티(charter city, 특별자치도시)를 갖도록, 또는 폭스콘(Foxconn)을 위한 특별 사법 절차를 제정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어떤가요? 기능적 주권의 선봉에 선 일부 사람들은 온라인 등급제 평가가 국가의 직업관련 면허제도를 대신할 수 있고, 가령 정부 위원회에서 노동자들에게 자격증을 주도록 하기 보다는 링크트인(LinkedIn) 같은 플랫폼이 그들에 대한 별점을 수집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영토 주권에서 기능적 주권으로의 바로 이 전환이 새로운 디지털 정치경제를 창출하고 있습니다.

앞날을 내다보는 법률 사상가들이 우리가 이 동학을 포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로리 밴 루(Rory van Loo)는 아마존 같은 플랫폼들이 구매자와 판매자들 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분쟁해결절차를 실행할 때 그 지위를 ‘법원으로서 기업’(corporation as courthouse)이라고 불렀습니다. 밴 루는 아마존의 분쟁 해결 과정이 소액사건 법원에 비해서 얻을 수 있는 효율상의 이득과 소비자들이 놓일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들(예를 들어 불투명한 판결기준들 같은)을 모두 설명합니다. 저는 우리가 그와 같은 경제적인 고려사항들에 덧붙여 전자상거래 봉건주의의 정치경제학적 기원도 고려하고 싶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소비자 권리가 위축되면서 구매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역설하기 위해 (과도한 업무에 짓눌려있는 소액사건 법원보다는) 아마존에 맡기는 게 합리적입니다. 집단소송이 실질적 효력을 잃고, 중재(조정)와 표준문안계약(boilerplate contract)이 증가하는 등, 이 모든 것이 소비자 분쟁에서 사법제도를 점점 더 흔적기관으로 만듭니다. 자유의지론적인 법적 교리가 국가로부터 질서를 부과하는 힘을 박탈했기에 개인들로서는 온라인 거인들에게서 이 힘을 찾는 것이 합리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이럴 때 이 거인들은 애초에 국가의 쇠퇴를 낳았던 바로 그 동학을 강화합니다.

이 약점은 최근에 아마존이 제2본사의 입찰 경쟁을 조장하기로 결정한 데서 농담과 같은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시장들은 자신들의 시에 일자리가 생기도록 해달라고 비굴하게 간청했습니다. 리처드 세일러(Richard Thaler)의 『승자의 저주』(The Winner’s Curs)의 독자라면 예측했듯이 경쟁으로 결정되는 동학은 너무 많은 사람들을 인센티브로서 너무 많이 제안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저널리스트 대니 웨스트니트(Danny Westneat)가 최근에 다음과 같은 것을 입증했습니다.

∙시카고 시에서는 아마존에게 노동자들이 내는 소득세에서 13억 2천만 달러를 벌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프레즈노 시는 아마존에게 아마존이 내는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한 특별 권한을 줄 새로운 계획을 갖고 있다.

∙보스턴 시에서는 시 공무원들로 ‘아마존 태스크포스’를 구성하여 아마존을 위해 일하도록 하겠다고 제안했다.

∙조지아주의 스톤크레스트(Stonecrest) 시에서는 심지어 땅의 일부를 떼 내어서 베조스에게 ‘조지아주 아마존’으로 알려지게 될 345에이커의 부지의 시장이 될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아마존의 예

아마존이 부상한 것은 교훈적입니다. 리나 칸(Lina Khan)이 “아마존이 전자상거래 중심에 자리를 잡았고 지금은 아마존에 의존하는 다수의 다른 기업들에게 꼭 필요한 기반시설로서 역할을 한다”라고 설명했듯이 말이죠. ‘모든 것을 파는 상점’(everything store)은 경제에서 그저 또 하나의 서비스처럼 보일 것입니다. 즉 가상 쇼핑몰이죠. 하지만 한 회사가 수천만 명의 고객들과 ‘마케팅 플랫폼, 배달 및 물류 네트워크, 지불 서비스, 신용 대출 기관, 경매 회사…하드웨어 제조업자, 그리고 클라우드 서버 공간을 제공하는 선도적인 호스트’를 결합시킬 때 이것은 칸이 말하듯이 단지 또 하나의 쇼핑 선택권이 아닙니다.

디지털 정치경제학은 플랫폼들이 어떻게 권력을 축적하는지를 우리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온라인 플랫폼의 경우에는 ‘최상의 서비스가 이긴다’라는 단순한 이야기가 통하지 않습니다.

네트워크 효과(Network effects)는 20여 년 동안 사이버법(및 디지털 경제학)의 의제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아마존의 지배는 네트워크 효과가 어떻게 자기강화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죠. 상인들이 아마존에서 (또는 아마존에게) 팔고 있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쇼핑객들은 가능한 모든 판매자들을 검색하고 있다고 그만큼 더 잘 확신할 수 있습니다. 쇼핑객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판매자들이 아마존을 ‘꼭 필요한’ 장소로 여깁니다. 플랫폼 양쪽에 사람이 늘게 되면 가운데 있는 중개자가 점점 더 필수 불가결해집니다. 물론 새 플랫폼이 시장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만, 그 플랫폼이 아마존처럼 4억 8천만 개 품목을 (종종 대폭할인으로) 판매하는 데 도달할 때까지는 일반 소비자가 새 플랫폼으로 갈 이유가 없습니다. 쓰레기봉투가 필요하다고 해서 제가 실제로 Target.com으로 옮겨가서 신용카드 정보를 다시 입력하여 새로운 계정을 만들고 쇼핑에 관한 세부 약관을 읽고 이 유통업체가 글래드(Glad)와 더 나은 거래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등, 이런 과정을 거치고 싶어 할까요? 또는 제가 썬스타인(Cass Sunstein) 식으로 제 과거 구매 습관을 상세하게 알아서 한번 클릭으로 만족하게 해주는 예측전문 조달업자를 원할까요?

인공지능이 향상되면서 아마존에서 습관화된 쇼핑 이력을 추적하는 것은 구매자들에게나 판매자들에게나 합리적으로 보이는 경향이 있을 것입니다. 밟아서 점점 뚜렷해지는 숲속의 오솔길처럼 그것은 자연스럽게 디폴트가 됩니다. 온라인 거대기업 속으로 돈, 데이터 및 상거래를 빨아들이는 여러 구심력들 가운데 하나를 살펴보려면 온라인 분쟁이 일어날 경우 그것이 어떻게 아마존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지를 게임이론의 방식으로 생각해보세요. 온라인에서 한 상인과 문제가 있다면 당신은 일회성 구매자로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수십 또는 수백 번이 넘는 거래를 통해 평판이 선 누군가로서, 또한 아마존에게 매년 수백 또는 수천 달러의 수익을 주지 않겠다고 확실히 위협할 수 있는 누군가로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으십니까? 상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그들이 아마존에게 바치는 것이 많을수록 분쟁이 발생할 때 검색결과와 주목(그리고 어쩌면 선호도)에서 가시성을 획득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브루스 슈나이어(Bruce Schneier)가 보안에 대해 말한 것이 온라인 상거래에도 점차적으로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은 무법의 영역에 질서를 가져오는 신봉건적인 한 거인들 가운데 하나에게 은총을 얻기를 원하는 것이죠.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디지털 영주들이 외관상으로는 보호하는 것으로 되어있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가진 데이터상의 이점들을 불리하게 사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금세 할 것입니다.